아다’, 야발은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의 속뜻

 

20절,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And Adah bare Jabal; he was the father of the dweller in tents, and of cattle.

 

412

아다’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신앙의 천적(天的, the celestial), 영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야발은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cattle)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는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그로 말미암는 천적 선들에 관한 교리를 말합니다. By “Adah” is signified, as before, the mother of the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of faith; by “Jabal, the father of the dweller in tents, and of cattle,” is signified doctrine concerning the holy things of love, and the goods thence derived, which are celest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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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폐함의 두 종류, 알면서도, 그리고 보면서도 원치 않는 경우, 그리고 무지하여 뭘 알고, 뭘 봐야 하는지를 모르는 경우, 전자는 옛 유대인들과 오늘날 기독교인들, 후자는 고대와 현대의 이방인들

 

19절,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411

새 교회가 일어날 수 있으려면 반드시 그전에 먼저 황폐함이라는 마지막 때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주님은 예언서에서 자주 선언하시는데요, 신앙의 천적인 것들과 관련해서는 ‘황폐함(vastation), 혹은 ‘황폐하게 함(laying waste)으로, 그리고 신앙의 영적인 것들과 관련해서는 ‘황무함(desolation)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또는 종말(consummation), ‘끊음(cutting off)으로도 말씀하십니다. ( 다음 본문들 참조 : 6:9, 11-12, 23:8-끝절, 24, 42:15-18, 25, 8, 9:24-끝절, 1, 32, 15, 16 및 이어지는 장들) That the last time of vastation must exist before a new church can arise, is frequently declared by the Lord in the prophets, and is there called “vastation” or “laying waste,” in reference to the celestial things of faith; and “desolation,” in relation to the spiritual things of faith. It is also spoken of as “consummation” and “cutting off.” (See Isa. 6:9, 11–12; 23:8 to the end; 24; 42:15–18; Jer. 25; Dan. 8; 9:24 to the end; Zeph. 1; Deut. 32; Rev. 15; 16; and following chapters.)

 

 

사6:9, 11-12

9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1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였더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12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사6:9, 11-12)

 

사23:8-18

8면류관을 씌우던 자요 그 상인들은 고관들이요 그 무역상들은 세상에 존귀한 자들이었던 두로에 대하여 누가 이 일을 정하였느냐 9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것을 정하신 것이라 모든 누리던 영화를 욕되게 하시며 세상의 모든 교만하던 자가 멸시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10딸 다시스여 나일 같이 너희 땅에 넘칠지어다 너를 속박함이 다시는 없으리라 11여호와께서 바다 위에 그의 손을 펴사 열방을 흔드시며 여호와께서 가나안에 대하여 명령을 내려 그 견고한 성들을 무너뜨리게 하시고 12이르시되 너 학대 받은 처녀 딸 시돈아 네게 다시는 희락이 없으리니 일어나 깃딤으로 건너가라 거기에서도 네가 평안을 얻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13갈대아 사람의 땅을 보라 그 백성이 없어졌나니 곧 앗수르 사람이 그 곳을 들짐승이 사는 곳이 되게 하였으되 그들이 망대를 세우고 궁전을 헐어 황무하게 하였느니라 14다시스의 배들아 너희는 슬피 부르짖으라 너희의 견고한 성이 파괴되었느니라 15그 날부터 두로가 한 왕의 연한 같이 칠십 년 동안 잊어버린 바 되었다가 칠십 년이 찬 후에 두로는 기생의 노래 같이 될 것이라 16잊어버린 바 되었던 너 음녀여 수금을 가지고 성읍에 두루 다니며 기묘한 곡조로 많은 노래를 불러서 너를 다시 기억하게 하라 하였느니라 17칠십 년이 찬 후에 여호와께서 두로를 돌보시리니 그가 다시 값을 받고 지면에 있는 열방과 음란을 행할 것이며 18그 무역한 것과 이익을 거룩히 여호와께 돌리고 간직하거나 쌓아 두지 아니하리니 그 무역한 것이 여호와 앞에 사는 자가 배불리 먹을 양식, 잘 입을 옷감이 되리라 (사23:8-18)

 

사24

1보라 여호와께서 땅을 공허하게 하시며 황폐하게 하시며 지면을 뒤집어엎으시고 그 주민을 흩으시리니 2백성과 제사장이 같을 것이며 종과 상전이 같을 것이며 여종과 여주인이 같을 것이며 사는 자와 파는 자가 같을 것이며 빌려 주는 자와 빌리는 자가 같을 것이며 이자를 받는 자와 이자를 내는 자가 같을 것이라 3땅이 온전히 공허하게 되고 온전히 황무하게 되리라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하셨느니라 4땅이 슬퍼하고 쇠잔하며 세계가 쇠약하고 쇠잔하며 세상 백성 중에 높은 자가 쇠약하며 5땅이 또한 그 주민 아래서 더럽게 되었으니 이는 그들이 율법을 범하며 율례를 어기며 영원한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6그러므로 저주가 땅을 삼켰고 그 중에 사는 자들이 정죄함을 당하였고 땅의 주민이 불타서 남은 자가 적도다 7새 포도즙이 슬퍼하고 포도나무가 쇠잔하며 마음이 즐겁던 자가 다 탄식하며 8소고 치는 기쁨이 그치고 즐거워하는 자의 소리가 끊어지고 수금 타는 기쁨이 그쳤으며 9노래하면서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고 독주는 그 마시는 자에게 쓰게 될 것이라 10약탈을 당한 성읍이 허물어지고 집마다 닫혀서 들어가는 자가 없으며 11포도주가 없으므로 거리에서 부르짖으며 모든 즐거움이 사라졌으며 땅의 기쁨이 소멸되었도다 12성읍이 황무하고 성문이 파괴되었느니라 13세계 민족 중에 이러한 일이 있으리니 곧 감람나무를 흔듦 같고 포도를 거둔 후에 그 남은 것을 주움 같을 것이니라 14무리가 소리를 높여 부를 것이며 여호와의 위엄으로 말미암아 바다에서부터 크게 외치리니 15그러므로 너희가 동방에서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며 바다 모든 섬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것이라 16땅 끝에서부터 노래하는 소리가 우리에게 들리기를 의로우신 이에게 영광을 돌리세 하도다 그러나 나는 이르기를 나는 쇠잔하였고 나는 쇠잔하였으니 내게 화가 있도다 배신자들은 배신하고 배신자들이 크게 배신하였도다 17땅의 주민아 두려움과 함정과 올무가 네게 이르렀나니 18두려운 소리로 말미암아 도망하는 자는 함정에 빠지겠고 함정 속에서 올라오는 자는 올무에 걸리리니 이는 위에 있는 문이 열리고 땅의 기초가 진동함이라 19땅이 깨지고 깨지며 땅이 갈라지고 갈라지며 땅이 흔들리고 흔들리며 20땅이 취한 자 같이 비틀비틀하며 원두막 같이 흔들리며 그 위의 죄악이 중하므로 떨어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리라 21그 날에 여호와께서 높은 데에서 높은 군대를 벌하시며 땅에서 땅의 왕들을 벌하시리니 22그들이 죄수가 깊은 옥에 모임 같이 모이게 되고 옥에 갇혔다가 여러 날 후에 형벌을 받을 것이라 23그 때에 달이 수치를 당하고 해가 부끄러워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시고 그 장로들 앞에서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라 (사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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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폐함의 두 종류, 알면서도, 그리고 보면서도 원치 않는 경우, 그리고 무지하여 뭘 알고, 뭘 봐야 하는지를 모르는 경우, 전자는 옛 유대인들과 오늘날 기독교인들, 후자는 고대와 현대의 이방인들

 

19절,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410

황폐함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먼저, 알고 있으면서 알기를 원치 않거나, 보고 있으면서 보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입니다. 옛 유대인들과 오늘날 기독교인들처럼 말입니다. 두 번째는, 무지의 결과, 뭘 알지도 못하고, 볼 줄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고대와 현대의 이방인들처럼 말입니다. 알면서도 아는 걸 원치 않는, 즉 보면서도 보는 걸 원치 않는 사람들에게 황폐함의 마지막 때가 이르면 이때 하나의 교회가 새롭게 일어나는데요, 이들이 아니고, 이들이 이방인이라 부르는 사람들과 함께 일어납니다. 이런 일이 홍수 전 태고교회에 일어났고, 또 홍수 후 고대교회와, 그리고 유대교회에도 일어났습니다. Vastation is of two kinds; first, of those who know and do not wish to know, or who see and do not desire to see, like the Jews of old, and the Christians of the present day; and secondly, of those who, in consequence of their ignorance, neither know nor see anything, like both the ancient and modern gentiles. When the last time of vastation comes upon those who know and do not desire to know, that is, who see and do not desire to see, then a church arises anew, not among them, but with those whom they call gentiles. This occurred with the most ancient church that was before the flood, with the ancient church that was after that event, and also with the Jewish church.

 

새 빛이 그때 빛을 발하고, 그전에는 아닌 이유는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처럼, 그때 그들은 계시된 것들을 더이상 모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것들이 진리임을 시인하지도 않고 믿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The reason why new light shines forth then and not before is, as has been said, that then they can no longer profane the things revealed, because they do not acknowledge and believe that they are true.

 

※ 그렇다고 주님의 진리를 시인하지 않는 것, 믿지 않는 것이 잘 하는 것, 좋은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단지 비유하자면... 안 믿는데 정직하고 양심적인 사람과, 믿는다고 하면서 속이고, 비양심적인 사람과... 이 둘 중 전자는 그 영이 깨끗한 반면, 후자는 자기 영에 죄를 짓는 사람, 자기 영을 더럽게 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후 운명은 이 영의 어떠함으로 결정되는데... 이럴 경우, 이 후자의 운명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사랑의 주님은 ‘신성모독’을 금하신 것입니다. 신성모독으로 사람의 영은 망가지기 때문인데, 신성모독의 사람은 주님도 수습하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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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다와 씰라라는 이름을 가진, ‘라멕의 아내들이라는 새 교회가 만들어진 배경

 

19절,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409

세월이 흐르며 황폐해진 ‘가인’이라 하는 이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는데요, 이들은 사랑을 시인해 놓고는 사랑 아닌 신앙을 머리 삼으며, 사랑보다 앞세웠습니다. 이 이단에서 유래한 후대의 이단들은 점점 더 곁길로 빠지더니 순서상 여섯 번째인 라멕에 이르러서는 아예 신앙조차 부인했습니다. 상황이 이 지경이 되자 새 빛, 곧 아침이 빛을 발하며, 여기 아다와 씰라라는 이름을 가진, ‘라멕의 아내들이라는 새 교회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들을 일컬어 라멕의 아내들이라 하고 있습니다. 라멕이라는 교회는 아무 신앙도 갖고 있지 않았는데도 말입니다. 마치 유대인들의 내적(內的, the internal), 외적(外的, the external) 교회와 같은 경우인데요, 마찬가지로 신앙이라는 게 전혀 없었던 이들 유대인들의 두 교회를, 말씀에 보면 아내들’, 곧 야곱의 두 아내, 레아와 라헬이라 하고 있으며, 거기서 레아는 외적 교회, 라헬은 내적 교회를 말합니다. 이들 교회들은 겉으로는 둘로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입니다. 내적인 것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외적인 것, 곧 표상적인 것(表象, the representative)은 단지 무슨 우상을 숭배하는 것, 곧 죽은 것인 반면, 외적인 것과 함께하는 내적인 것은 하나의 교회, 여기 아다와 씰라가 그런 것처럼 심지어 하나 된, 같은 교회를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야곱과 그의 후손은 라멕처럼 신앙이라는 게 전혀 없었기 때문에, 교회는 그들 가운데 남아 있을 수가 없어 대신 이방인들에게로 옮겨졌습니다. 이들 이방인들은 부정(不貞, infidelity) 대신 무지(無知, ignorance) 가운데 살았지요. 교회가 황폐해졌을 때, 그 가운데 진리를 가진 사람들이 남아 있을 경우는,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극히 드물며, 교회는 그 경우, 진리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에게로 이동하는데요, 오히려 이 사람들이 저 사람들보다 더 쉽게 신앙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The case was the same with the heresy called “Cain,” which in process of time was vastated, for although it acknowledged love, yet it made faith the chief and set it before love, and the heresies derived from this one gradually wandered from it, and Lamech, who was the sixth in order, altogether denied even faith. When this time arrived, a new light, or morning, shone forth, and a new church was made which is here named “Adah and Zillah,” who are called the “wives of Lamech.” They are called the wives of Lamech, although he possessed no faith, just as the internal and external church of the Jews, who also had no faith, are also in the Word called “wives,” being represented by Leah and Rachel, the two wives of Jacob—Leah representing the external church and Rachel the internal. These churches, although they appear like two, are yet only one; for the external or representative, separate from the internal, is but as something idolatrous, or dead, whereas the internal together with the external constitute a church, and even one and the same church, as Adah and Zillah do here. As however Jacob and his posterity, like Lamech, had no faith, the church could not remain with them, but was transferred to the gentiles, who lived not in infidelity but in ignorance. The church rarely, if ever, remains with those who when vastated have truths among them [apud se] but is transferred to those who know nothing at all of truths, for these embrace the faith much more easily than the for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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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의 아침’, 새 빛은 왜 교회가 황폐해질 때까지는 발하지 않는가? 안 그러면 신앙과 체어리티에 관한 모독이 일어나기 때문

 

19절,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408

하나의 교회가 더이상 그 어떤 신앙도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황폐해지면 전과 다르게 새로움이 시작, 즉 새 빛이 발(發)하는데요, 말씀에서는 이걸 ‘아침’이라고 합니다. 이 새 빛,  아침이 왜 교회가 황폐해질 때까지는 발하지 않는지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동안 신앙과 체어리티의 일들은 모독의 일들과 뒤엉킨 상태로 지내왔는데요, 계속 이런 상태에 있는 한, 무슨 빛이나 체어리티의 일이 시작되기란 불가능합니다. ‘잡초들이 모든 좋은 씨를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When a church has been so vastated that there is no longer any faith, then and not before, it begins anew, that is, new light shines forth, which in the Word is called the “morning.” The reason why the new light or “morning” does not shine forth until the church is vastated, is that the things of faith and of charity have been commingled with things profane; and so long as they remain in this state it is impossible for anything of light or charity to be insinuated, since the “tares” destroy all the “good seed.”

 

※ 주님의 비유 한 말씀이 생각납니다.

 

24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25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26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27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28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29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30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마13:24-30)

 

그러나 신앙이라는 게 전혀 없으면, 신앙은 더이상 모독(冒瀆, profaned) 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선포된 걸 더이상 믿지 않기 때문이며, 시인도 안 하고 믿지도 않는, 대신 알기만 하는 사람들은 위에서 관찰한 것처럼, 모독이라는 걸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가 바로 오늘날 유대인들의 경우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살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시인하는 주님이 자기들이 그토록 자원하여 기다려 왔고, 지금도 여전히 기다리고 있는 바로 그 메시아이심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은 이 사실을 시인하지도, 믿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사실을 모독할 수 없습니다. But when there is no faith, faith can no longer be profaned, because men no longer believe what is declared unto them; and those who do not acknowledge and believe, but only know, cannot profane, as was observed above. This is the case with the Jews at the present day, who in consequence of living among Christians must be aware that the Lord is acknowledged by Christians to be the messiah whom they themselves have expected, and still continue to expect, but yet they cannot profane this because they do not acknowledge and believe it.

 

※ 이런 유대인들의 특성은 저들의 이런 성정을 잘 아시는 주님의, 저들을 향하신 배려라고 합니다. 저들은 조상들로부터 유전한 그 특성 상, 만일 주님을 시인하고 믿게 되면 반드시 돌이켜 부인, 결국 주님을 모독하게 되고, 그 결과, 그들의 영이 더럽혀져 영원히 멸망할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에 대하여 들은 모하메드인들과 이방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대 교회가 아무것도 시인도, 믿음도 없을 때까지는 주님이 세상에 오실 수 없으셨던 이유였습니다. And it is the same with the Mohammedans and gentiles who have heard about the Lord. It was for this reason that the Lord did not come into the world until the Jewish church acknowledged and believed no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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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는 곧 인류사인데, 점점 황폐해져 신앙이라는 것이 완전히 사라지는 때가 과거 몇 차례 있었음

 

19절,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407

보통 한 교회의 상태는 그래서 상황에 따라 달라집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교회는 참 신앙으로부터 멀어지다가 결국 신앙이라는 것이 완전히 사라지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는데, ‘황폐해졌다(vastated) 하는 것은 바로 그 지경, 그런 상태를 말합니다. 이런 일이 태고교회의 경우는 가인파(가인, Cainites)라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또 홍수 후 고대교회의 경우 및 유대 교회의 경우에서도 있었습니다. 주의 강림(降臨, the Lord’s advent)의 때 종말의 상태가 바로 이런 황폐한 상태였는데요, 그들은 자기들을 구원하러 오시기로 예정되어 있던 주님에 관하여 아무것도 몰랐으며, 그분을 향한 신앙에 대해서도 아는 게 거의 없었습니다. 초대 기독교회, 곧 주님 강림 직후 있었던 교회 역시 그랬으며, 오늘날( 1750년대 즈음 유럽) 교회의 경우도 그 안에 아무런 신앙이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철저하게 황폐해졌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얼마간 핵들은 늘 남아 있는데, 이것은 신앙에 관해 황폐해진 사람들은 인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태고교회의 경우가 그랬는데, 태고교회의 남은 자들은 홍수 때까지 있었고, 홍수 후에도 계속 있었습니다. 태고교회 내 이들 남은 자들을 노아라 하는 것입니다. The state of a church in general is thus circumstanced. In process of time it departs from the true faith until at last it comes to be entirely destitute of faith, when it is said to be “vastated.” This was the case with the most ancient church among those who were called Cainites, and also with the ancient church after the flood, as well as with the Jewish church. At the time of the Lord’s advent this last was in such a state of vastation that they knew nothing about the Lord, that he was to come into the world for their salvation, and they knew still less about faith in him. Such was also the case with the primitive Christian church, or that which existed after the Lord’s advent, and which at this day is so completely vastated that there is no faith remaining in it. Yet there always remains some nucleus of a church, which those who are vastated as to faith do not acknowledge; and thus it was with the most ancient church, of which a remnant remained until the time of the flood, and continued after that event. This remnant of the church is called “No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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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멕의 속뜻, 황폐함(vastation), 즉 어떤 신앙도 남아 있지 않음

 

19절,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406

라멕’의 의미가 황폐함, 즉 어떤 신앙도 남아 있지 않음이라는 것이 분명한 것은 이어지는 23, 24절을 보면 알 수 있는데요, 거기 보면,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 ‘사람’은 신앙, ‘어린아이’ 혹은 ‘소년’은 체어리티(charity, 이웃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That by “Lamech” is signified vastation, or that there was no faith, is evident from the following verses (23–24), in which it is said that he “slew a man to his wounding, and a little one to his hurt”; for there, by a “man” is meant faith, and by a “little one” or “little child,” .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24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창4:2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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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멕’, 두 아내’, 아다’, 씰라’의 속뜻

 

19절,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405

가인으로부터 순서상 여섯 번째인 ‘라멕’은 황폐함(vastation)을 상징합니다. 더이상 어떤 신앙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을 때의 상태이지요. 그의 ‘두 아내’는 일종의 새로운 교회의 도래를 의미하는데, ‘아다’는 그 교회의 천적 영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그리고 ‘씰라’는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합니다. By “Lamech,” who was the sixth in order from Cain, is signified vastation, in consequence of there being no longer any faith; by his “two wives” is signified the rise of a new church; by “Adah,” the mother of its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and by “Zillah,” the mother of its natural th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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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름들, 모두 가인이라 하는 첫 이단에서 유래된 이단들

 

18절,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404

이 이름들은 모두 ‘가인’이라 하는 첫 이단에서 유래된 이단들을 말합니다. 이들에 관해서는 이름들밖에는 현존하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이들에 대해 무슨 언급을 하는 건 적절치 않아 보입니다. 이 이름들의 기원들을 가지고 뭔가 건질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예를 들면, ‘이랏 성의 후손이라는 것, 그렇다면 에녹이라는 이단에서 비롯되었나? 뭐 그런 것입니다. All these names signify heresies derived from the first, which was called “Cain”; but as there is nothing extant respecting them, except the names, it is unnecessary to say anything about them. Something might be gathered from the derivations of the names; for example, “Irad” means that he “descends from a city,” thus from the heresy called “Enoch,” and so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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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을 쌓고의 속뜻, 그 이단에서 나오는 모든 교리적이고 이단적인 가르침

 

17절,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lled the name of the city after the name of his son, Eno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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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까지 ‘’(城, city)이 뭘 상징하는지 보았습니다. 하지만 창세기 이 부분들은 모두 일종의 역사서술식으로 되어 있어서 말씀을 겉 글자의 뜻, 곧 실제 역사, 실제 일어난 일로만 읽으시는 분들한테는 이 모든 게 틀림없이, 예를 들면, 가인이 성 하나를 건설하였고, 그 이름을 에녹이라 하였다는 식일 것입니다. 그럴 경우, 분명히 그 땅에는 이미 인구가 많았음을 가정해야 하는데... 가인이 단지 아담의 첫 번째 아들일 뿐임을 생각하면, 이 많은 사람들은 갑자기 다 어디서 나타난 걸까요? 또 가인의 아내는 누가 낳은 딸인가요? 역사서술식 기록들, 즉 창세기 12, 아브라함 전까지 기록들을 실제 일어난 역사로 읽을 경우는 다 그 안에 이런 문제점들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앞에서 관찰한 것처럼, 태곳적 사람들은 모든 걸 이렇게 일종의 역사적 형태를 띠는 이야기체, 일종의 스토리텔링식으로 정리하는 데 아주 익숙했는데요, 이런 일이 그들에게는 굉장히 고차원적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모든 걸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We have now seen what a “city” signifies. But as all this part of Genesis is put into a historical form, to those who are in the sense of the letter it must seem that a city was built by Cain, and was called Enoch, although from the sense of the letter they must also suppose that the land was already populous, notwithstanding that Cain was only the firstborn of Adam; the historical series has this in it. But as we observed above, the most ancient people were accustomed to arrange all things in the form of a history, under representative types, and this was to them delightful in the highest degree, for it made all things seem to be alive.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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