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14-215

 

7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les. (창3:7)

 

 

214. 그들을 ‘벌거벗겨진 사람들’이라고 부릅니다. 자신들의 오운만 남았기 때문입니다. They are called “naked” because left to their own;

 

자신들의 오운, 곧 자기 자신들만 남은 사람들은 지성과 지혜, 혹은 신앙의 그 어떤 것도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아 결과적으로, 진리와 선에 관하여 ‘벌거벗겨진 사람들’이며, 이런 이유로 악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for they who are left to their own, that is, to themselves, have no longer anything of intelligence and wisdom, or of faith, and consequently are “naked” as to truth and good, and are therefore in evil.

 

 

215. 인간의 오운은 악과 거짓 말고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저에게는 그동안 다음과 같은 사실로 분명해졌습니다. 그것은, 언제든지 영들 스스로가 하는 말은 그 말이 무슨 내용이든 모두 악하고 거짓이더라는 사실, 그들이 한 말을 내가 알게 될 때마다 나는 즉시 그것이 거짓임을, 심지어 그들이 자기들이 한 말은 전혀 의심할 필요가 없음을 자기들은 정말 완전 납득한 것이라고 말하더라도 말입니다. That man’s own is nothing but evil and falsity has been made evident to me from the fact that whatever spirits have at any time said from themselves has been so evil and false that whenever it was made known to me that they spoke from themselves I at once knew that it was false, even though while speaking they were themselves so thoroughly persuaded of the truth of what they said as to have no doubt about it.

 

자기 자신을 가지고 말하는 사람들의 경우도 똑같습니다. The case is the same with men who speak from themselves.

 

또 같은 식으로, 어떤 사람들이 영적, 천적 삶이나 신앙의 일들에 관하여 세상 이성으로 접근하기 시작할 때마다 저는 그들은 의심을 하고 있고, 심지어 부인까지 하고 있음을 지각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에 관하여 세상 이성으로 접근한다는 건 의심하고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And in the same way, whenever any persons have begun to reason concerning the things of spiritual and celestial life, or those of faith, I could perceive that they doubted, and even denied, for to reason concerning faith is to doubt and deny.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자아 또는 그들의 오운으로 말미암는 것이어서, 그들은 그저 거짓들 가운데로 가라앉으며, 결과적으로는 짙은 어둠, 곧 거짓들의 심연 속으로 가라앉습니다. 그들이 이 심연 가운데 있을 때는 아주 작은 것 하나로도 수천의 진리들을 압도할 수가 있는 것이, 마치 눈동자 표면에 내려앉은 먼지 한 조각만으로도 온 우주와 그 안에 담긴 모든 것에 대해 눈을 감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And as it is all from self or their own, they sink into mere falsities, consequently into an abyss of thick darkness, that is, of falsities, and when they are in this abyss the smallest objection prevails over a thousand truths, just as a minute particle of dust in contact with the pupil of the eye shuts out the universe and everything it contains.

 

그런 사람에 관해 주님은 이사야에서 Of such persons the Lord says in Isaiah: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Woe unto those who are wise in their own eyes, and intelligent before their own faces. (사5:21)

 

10...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라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였으므로 11재앙이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그 근원을 알지 못할 것이며 손해가 네게 이르리라 그러나 이를 물리칠 능력이 없을 것이며 파멸이 홀연히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알지 못할 것이니라 Thy wisdom and thy knowledge, it hath turned thee away, and thou hast said in thine heart, I, and none else besides me; and evil shall come upon thee, thou shalt not know from whence it riseth, and mischief shall fall upon thee, which thou shalt not be able to expiate, and vastation shall come upon thee suddenly, of which thou art not aware. (사47:10-11)

 

예레미야에서는 In Jeremiah:

 

사람마다 어리석고 무식하도다 금장색마다 자기가 만든 신상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나니 이는 그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 Every man is made stupid by knowledge [scientia], every founder is confounded by the graven image, for his molten image is falsehood, neither is there breath in them. (렘51:17)

 

만든 신상’은 거짓이요, ‘부어 만든 신상’은 악, 곧 인간의 오운 속 악입니다. A “graven image” is the falsity, and a “molten image” the evil, of man’s own.

 

2021-04-16(D6)-창세기(창3,7, AC.214-215), '벗은 상태가 된 사람들의 영적 비참'.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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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1-213

 

7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les. (창3:7)

 

 

211. 그들의 ‘눈이 밝아져’는 그들이 어떤 내적 직관을 통해, ‘자기들이 벗은 줄을’, 즉, 더 이상 전처럼 순진함이 아닌, 악 가운데 있음을 알게 되었고, 시인하게 되었음을 상징합니다. Their “eyes being opened” signifies their knowing and acknowledging, from an interior dictate, that they were “naked,” that is, no longer in innocence, as before, but in evil.

 

 

212. ‘눈이 밝아져’가 일종의 내적 직관을 상징하는 것임은 말씀에 나오는 유사한 표현들, 가령, 발람이 자신을 가리켜 말하는 데를 보면 분명합니다. 그 구절에서 발람은 전능자의 환상을 보고 나서는 자신을 가리켜 ‘눈을 감았던 자’(민24:3, ※ 이 부분을 왜 ‘감았던’으로 번역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바른 번역은 ‘’입니다.)라고 합니다. That by having the “eyes opened” is signified an interior dictate is evident from similar expressions in the Word, as from what Balaam says of himself, who in consequence of having visions calls himself the “man whose eyes are opened. (Num. 24:3)

 

그가 예언을 전하여 말하되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며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 And he lifted up his enunciation, and said, Balaam the son of Beor has said, and the man whose eyes are opened has said; (민24:3)

 

그리고 요나단인데요, 그는 벌집의 꿀을 조금 맛본 후, 그것, 곧, 아버지 사울의 명령이 악함을 직관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내 눈이 이렇게 밝아졌거든’, 즉, 내적 시야가 열려 전엔 몰랐던 것을 이젠 보게 되었다.” 라고 말이지요. And from Jonathan, who when he tasted of the honeycomb and had a dictate from within that it was evil, said that his “eyes saw,” that is, were enlightened, so that he saw what he knew not. (1 Sam. 14:29)

 

요나단이 이르되 내 아버지께서 이 땅을 곤란하게 하셨도다 보라 내가 이 꿀 조금을 맛보고도 내 눈이 이렇게 밝아졌거든 And from Jonathan, who when he tasted of the honeycomb and had a dictate from within that it was evil, said that his “eyes saw,” that is, were enlightened, so that he saw what he knew not. (삼상14:29)

 

더욱이 말씀에서 ‘’은 종종 이해력과, 거기서 나오는 내적 직관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됩니다. 시편입니다. Moreover in the Word, the “eyes” are often used to denote the understanding, and thus an interior dictate therefrom, as in David: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Lighten mine eyes, lest I sleep the sleep of death (시13:3)

 

여기 ‘’은 이해력을 가리킵니다. where “eyes” denote the understanding.

 

에스겔에서는,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켜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겔12:2)라 하십니다. So in Ezekiel, speaking of those who are not willing to understand, who “have eyes to see, and see not.” (겔12:2)

 

인자야 네가 반역하는 족속 중에 거주하는도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라 Son of man, thou dwellest in the midst of a rebellious house, who have eyes to see, and see not; they have ears to hear, and hear not; for a rebellious house are they. (겔12:2)

 

이사야입니다. In Isaiah: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Shut their eyes, lest they see with their eyes, (사6:10)

 

위 말씀은, 그들로 소경이 되게 해야지 안 그러면 그들이 이해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denotes that they should be made blind, lest they should understand.

 

모세 또한 백성들에게 말했습니다. So Moses said to the people,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Jehovah hath not given you a heart to know, and eyes to see, and ears to hear, (신29:4)

 

여기서 ‘마음’은 의지를, ‘’은 이해력을 각각 가리킵니다. where “heart” denotes the will, and “eyes” denote the understanding.

 

이사야에서는 주님을 가리켜,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사42:7)라 하십니다. In Isaiah it is said of the Lord, that “he should open the blind eyes.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to open the blind eyes; to bring the bound out from the dungeon; and from the prison house those that dwell in darkness. (사42:7)

 

역시 같은 선지서에서,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사29:18)라 하셨습니다. And in the same prophet: “The eyes of the blind shall see out of thick darkness and out of darkness.

 

그 날에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 And in that day shall the deaf hear the words of the book; and the eyes of the blind shall see out of thick darkness, and out of darkness. (사29:18)

 

 

213.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는 그들이 더 이상 전처럼 순진함이 아닌, 악 가운데 있음을 알게 되었고, 시인하게 되었음을 상징하는데요, 이것은 앞장 마지막 구절,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창2:25)를 보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이걸 ‘그들이 벌거벗었으므로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로 읽고, 순진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By “knowing that they were naked” is signified their knowing and acknowledging themselves to be no longer in innocence as before, but in evil, as is evident from the last verse of the preceding chapter, where it is said, “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 and where it may be seen that “not to be ashamed because they were naked” signifies to be innocent.

 

그들의 ‘부끄러워함’이 상징하는 것은 오히려 정반대인데요, 본문 7절에,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하는 부분 때문입니다. The contrary is signified by their “being ashamed,” as in this verse, where it is said that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hid themselves”;

 

순진함이 전혀 없는 곳에서는 벌거벗음은 일종의 부도덕함이요, 창피함입니다. 그것엔 악을 생각함이라는 의식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for where there is no innocence, nakedness is a scandal and disgrace, because it is attended with a consciousness of thinking evil.

 

이런 이유로, 말씀에서 ‘벌거벗음’은 수치스럽고 악한 그런 종류의 일에 사용되며, 전도된 교회를 서술할 때 사용됩니다. 에스겔입니다. For this reason “nakedness” is used in the Word as a type of disgrace and evil, and is predicated of a perverted church, as in Ezekiel:

 

네가 어렸을 때에 벌거벗은 몸이었으며 피투성이가 되어서 발짓하던 것을 Thou wast naked and bare, and trampled on in thy blood. (겔16:22)

 

그들이 너를 벌거벗은 몸으로 두어서 네 벗은 몸을 드러낼 것이라 They shall leave her naked and bare, and the nakedness shall be uncovered. (겔23:29)

 

계시록에서는 In John: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 I counsel thee to buy of me white raiment that thou mayest be clothed, and that the shame of thy nakedness do not appea. (계3:18)

 

그리고 마지막 날에 관하여는 And concerning the last day:

 

보라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Blessed is he who watcheth, and keepeth his garments, lest he walk naked and they see his shame. (계16:15)

 

신명기에서는 In Deuteronomy:

 

사람이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줄 것이요 If a man hath found some nakedness in his wife, let him write her a bill of divorcement. (신24:1)

 

같은 이유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제단에 나아가 봉사할 때, 베로 속바지를 입어 하체를 가리도록, 안 그러면 죄를 짊어진 채 죽는다는 명령을 받은 것입니다. For the same reason Aaron and his sons were commanded to have linen breeches when they came to the altar, and to minister, to “cover the flesh of their nakedness, lest they should bear iniquity, and die.

 

42또 그들을 위하여 베로 속바지를 만들어 허리에서부터 두 넓적다리까지 이르게 하여 하체를 가리게 하라 43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나 제단에 가까이 하여 거룩한 곳에서 섬길 때에 그것들을 입어야 죄를 짊어진 채 죽지 아니하리니 그와 그의 후손이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 42And thou shalt make for them breeches of linen to cover the flesh of nakedness; from the loins and even to the thighs they shall be. 43And they shall be upon Aaron, and upon his sons, when they come in to the Tabernacle of the congregation, or when they approach the altar to minister in the holiness; lest they bear iniquity, and die; it is a statute of an age for him and for his seed after him. (출28:42-43)

 

2021-04-15(D5)-창세기(창3,7, AC.211-213), '눈이 밝아져, 벗은 줄을 알고'.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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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7-210

 

6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And the woman saw that the tree was good for food, and that it was pleasant to the eyes, and a tree to be desired to give intelligence, and she took of the fruit thereof and did eat, and she gave also to her man [vir] with her, and he did eat. (창3:6)

 

 

207. ‘먹음직도 하고’는 탐욕을 상징합니다. Good for food” signifies cupidity;

 

보암직도 하고’는 판타지를, pleasant to the eyes,” fantasy;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은 쾌락을 상징합니다. and “desirable to give intelligence,” pleasure:

 

이것들은 다 오운, 곧 ‘여자’에 속한 것들입니다. these are of the own, or “woman”;

 

그도 먹은지라’는 래셔널의 동의를 상징합니다.(n. 265) by the “husband eating” is signified the consent of the rational (n. 265).

 

 

265. ‘남편’이 래셔널을 의미한다는 것이 이 장 6절에 보면 있는데요, 거기에 보면,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즉, 그의 동의를 의미합니다. That by “man” [vir] is signified the rational appears from verse 6 of this chapter, in that the woman gave to her man with her, and he did eat, by which is meant his consent;

 

같은 내용이 158번 글, 사람에 관한 내용을 보아도 분명한데요, 거기 보면, 사람은 지혜와 지성을 가진 존재입니다. and the same is also evident from what was said of the man in n. 158, where by him is meant one who is wise and intelligent.

 

하지만 여기 나오는 ‘사람’은 래셔널입니다. 지식의 나무를 먹음으로써 지혜와 지성이 파괴되었고, 그 결과, 더 이상 아무 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래셔널은 지성을 모방하는 것이요, 말하자면, 지성의 겉모습이기 때문입니다. Here however “man” denotes the rational, because in consequence of the destruction of wisdom and intelligence by eating of the tree of knowledge, nothing else was left, for the rational is imitative of intelligence, being as it were its semblance.

 

 

158. 사람(man, 아담)이 내적 인간, 같은 말이지만, 지성과 지혜의 사람을 상징한다는 것은 이사야를 보면 분명합니다. That man signifies the internal man, or what is the same, one who is intelligent and wise, is plain from Isaiah:

 

내가 본즉 한 사람(vir)도 없으며 내가 물어도 그들 가운데에 한 말도 대답할 조언자가 없도다 I behold, and there is no man [vir], even among them, and there is no counselor (사41:28)

 

지혜와 지성을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뜻입니다. meaning none wise and intelligent.

 

※ 위 본문의 ‘사람’은 라틴어로 ‘비르(vir)’입니다. 라틴어에 ‘사람’이라는 뜻의 ‘호모(homo)’라는 말이 따로 있지만, ‘호모’에 비해 ‘비르’는 지혜와 지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예레미야도 보면은, Also in Jeremiah: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Run ye to and fro through the streets of Jerusalem, and see if ye can find a man, if there be any executing judgment, seeking the truth (렘5:1)

 

여기 ‘정의를 행하는 자’는 지혜로운 사람을, One who executes judgment” means a wise person;

 

진리를 구하는 자’는 지성인을 각각 의미합니다. and “one who seeks the truth,” an intelligent one.

 

 

208. 이것이 태고교회 네 번째 후손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아를 사랑함으로써 스스로를 유혹에 빠트려 고통을 겪게 했고, 감각과 기억-지식들을 가지고 자기들이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믿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This was the fourth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ho suffered themselves to be seduced by self-love [amore proprio] and were unwilling to believe what was revealed, unless they saw it confirmed by the things of sense and of memory-knowledge.

 

 

209. 여기 사용된 표현들, 즉,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같은 표현들은 저 태고 때 살던 사람들의 지니어스에 채택된 그런 표현들인데요, 특별히 그들의 의지를 레퍼런스해야 합니다. 그들의 악이 그 의지로부터 물줄기처럼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The expressions here employed, as that “the tree was good for food, pleasant to the eyes, and desirable for giving intelligence,” are such as were adapted to the genius of those who lived in that most ancient time, having especial reference to the will, because their evils streamed out from the will.

 

말씀에 홍수 후를 살았던 사람들이 나오는 데를 보면, 위 표현들은 의지보다는 이해력에 관련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Where the Word treats of the people who lived after the flood, such expressions are used as relate not so much to the will as to the understanding;

 

태고인들은 선에서 진리를 얻었지만, 홍수 후 사람들은 진리에서 선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for the most ancient people had truth from good, but those who lived after the flood had good from truth.

 

 

210. 사람의 오운이라는 게 무엇인지를 이런 식으로 설명할 수도 있겠습니다. What man’s own is may be stated in this way.

 

사람의 오운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부터, 그리고 주님과 말씀 대신 자기를 믿는 믿음으로부터, 또한 감각적으로, 그리고 기억-지식을 가지고 파악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으로부터 샘솟는 모든 악과 거짓입니다. Man’s own is all the evil and falsity that springs from the love of self and of the world, and from not believing in the Lord or the Word but in self, and from supposing that what cannot be apprehended sensuously and by means of memory-knowledge [sensualiter et scientifice] is nothing.

 

이런 식으로 사람들은 그저 악하고 거짓되어 갑니다. 그리고 그래서 모든 걸 거꾸로 봅니다. In this way men become mere evil and falsity, and therefore regard all things pervertedly;

 

악한 일을 그들은 선하다 하고, 선한 일을 악하다 합니다. things that are evil they see as good, and things that are good as evil;

 

거짓된 일을 그들은 참이라 하고, 참된 일을 거짓이라 합니다. things that are false they see as true, and things that are true as false;

 

분명히 있는 걸 그들은 없다 하고, 없는 걸 그들은 모든 것이라 합니다. things that really exist they suppose to be nothing, and things that are nothing they suppose to be everything.

 

증오를 사랑이라 하고, 어두움을 빛이라 하며, 죽음을 삶이라 합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They call hatred love, darkness light, death life, and the converse.

 

말씀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다리를 전다’, ‘앞을 못 본다’ 합니다. In the Word, such men are called the “lame” and the “blind.

 

이런 게 사람의 오운입니다. 그 자체로 지옥이요, 저주받은 것이지요. Such then is the own of man, which in itself is infernal and accursed.

 

2021-04-14(D4)-창세기(창3,6, AC.207-210), '먹음직, 보암직, 탐스러운, man’s own'.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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