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2026/10/25)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9, ‘찬송하는 소리 있어’, 찬132, ‘주의 영광 빛나니’입니다.

 

오늘은 창5 절별 주석 그 세 번째, 15절로 20절, AC 글 번호로는 510번에서 515번입니다. 먼저 창세기 본문입니다.

 

 

15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16야렛을 낳은 후 팔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7그는 팔백구십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18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19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0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15-20)

 

 

제목은

 

마할랄렐, 야렛, 에녹

 

 

이며, 다음은 이 특별한 AC 본문 리딩 예배를 위한 ‘3분 요약’입니다.

 

오늘 리딩에 들어가기 전에, 지금까지의 큰 흐름을 잠깐 돌아보겠습니다. 우리는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라틴 Arcana Coelestia, 영어 Secrets of Heaven, 天界秘義, 1749–1756,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속뜻 주석, 총 10,837개 글)를 따라 창세기의 문자적 의미를 존중하면서 그 속뜻을 함께 읽고 있습니다.

 

창1에서는 천지창조를 인간의 거듭남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여섯 날의 과정을 통하여 사람을 영적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일곱째 날의 안식에 이르러 사랑으로 살아가는 천적 인간으로 이끄십니다.

 

창2에서는 에덴동산을 통하여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알아차리는 ‘퍼셉션’(perception)을 지녔으며, 신앙은 사랑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창3에서는 사람이 주님보다 자신의 감각과 ‘프로프리움’(proprium)을 신뢰하면서 이 질서가 무너졌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인간이 더 깊은 파멸에 이르지 않도록 보호하시며 구원의 길을 보존하셨습니다.

 

창4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charity)의 관계를 살펴보았습니다. 가인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가인의 계열은 라멕에 이르러 황폐해졌지만, 주님께서는 ‘가인의 표’를 통하여 신앙 자체가 완전히 소멸하지 않도록 보존하셨습니다. 또한 셋과 에노스를 통하여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가 다시 이어지게 하셨습니다.

 

창5에서는 아담에서 노아까지의 족보가 단순한 개인들의 출생과 죽음이 아니라,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진 여러 교회의 계승과 상태 변화를 나타낸다는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최초의 태고교회에서 셋과 에노스, 게난으로 이어지면서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알아차리던 퍼셉션은 점차 덜 명료하고 더욱 일반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지난주에는 이러한 쇠퇴가 단지 인식 능력의 약화가 아니라, 사랑과 선한 쓰임의 생명이 약해지는 것과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마할랄렐과 야렛, 그리고 에녹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읽습니다. 특히 마할랄렐 교회에서는 ‘쓰임에서 오는 기쁨보다 진리를 아는 기쁨을 더 좋아하는’ 변화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야렛을 거쳐 에녹에 이르러서는 이전 교회들이 퍼셉션했던 것들을 교리로 보존하여 후대에 전할 길이 준비됩니다.

 

오늘 특별히 기억할 것은 ‘진리를 아는 기쁨은 선을 행하는 기쁨을 섬겨야 하며, 인간의 내적 상태가 약해지는 가운데서도 주님께서는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고 다음 길을 준비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마음으로 오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다음은 오늘 리딩 범위인 AC.510-515 요약입니다.

 

지난주 우리는 창5:6-14, AC.496-509를 통하여 셋에서 에노스로, 에노스에서 게난으로, 다시 게난에서 마할랄렐로 이어지는 태고교회 후속 교회들의 계승을 살펴보았습니다. 최초의 태고교회는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직접 알아차리는 ‘퍼셉션’(perception)을 지닌 천적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후속 교회들에 이르면서 퍼셉션은 점차 덜 명료해지고 더욱 일반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변화를 열매나 씨앗의 가장 안쪽 알맹이에서 그것을 둘러싼 막으로 나아가는 것에 비유하였습니다. 그리고 AC.503에서는 퍼셉션의 생명이 단순히 선과 진리를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함으로써 생기는 행복과 기쁨’에 있다는 중요한 가르침을 배웠습니다.

 

오늘은 그다음 말씀인 창5:15-20, AC.510-515를 읽습니다. 여기에는 마할랄렐이 야렛을 낳고, 야렛이 다시 에녹을 낳는 계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름과 나이, 자녀들의 출생과 죽음이 반복됩니다. 그러나 속뜻으로는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쇠퇴하는 과정에서 사랑과 쓰임의 생명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으며, 주님께서 그 가운데서도 어떻게 선과 진리를 보존할 길을 마련하셨는지를 보여 줍니다.

 

먼저 15절은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라고 합니다. AC.510에 따르면 ‘마할랄렐’(Mahalalel)은 다섯 번째 교회를, ‘야렛’(Jared)은 여섯 번째 교회를 의미합니다. 최초의 ‘사람’ 교회로부터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을 거쳐 이제 야렛이라는 또 하나의 교회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낳았다’는 것은 단순히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이 태어났다는 뜻이 아니라, 한 교회로부터 다음 교회가 이어져 나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계승은 앞선 교회의 상태가 다음 교회에 그대로 반복되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앞선 교회로부터 선과 진리가 이어지는 가운데서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내적 상태는 점차 달라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AC.511에서 마할랄렐 교회의 상태를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설명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퍼셉션 능력이 더욱 개별적이고 명료한 것에서 더욱 일반적이고 흐릿한 것이 되어 감에 따라 ‘사랑의 생명 또는 쓰임의 생명’도 마찬가지로 감소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랑의 생명 또는 쓰임의 생명이 어떠한가에 따라 퍼셉션 능력도 그러하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지난주 AC.503에서 배운 가르침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합니다. 퍼셉션은 사랑이나 쓰임과 별도로 존재하는 특별한 지적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선을 행하는 생명으로 살아 있을 때, 그 사랑과 선으로부터 무엇이 진리인지를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선으로부터 진리를 아는 것은 천적인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짧은 문장은 태고교회가 지녔던 천적 질서를 잘 보여 줍니다. 천적 인간은 먼저 진리를 많이 배운 뒤 그 진리를 통하여 선에 이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선을 사랑하는 생명이 먼저 있었으며, 그 선으로부터 무엇이 진리인지를 퍼셉션했습니다. 다시 말해 사랑과 선이 중심이고 진리는 그 사랑과 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최초의 태고교회가 지녔던 천적 생명의 질서였습니다.

 

그런데 마할랄렐 교회에 이르러 이 질서에 매우 미묘하면서도 중요한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AC.511은 마할랄렐 교회를 이루었던 사람들이 ‘쓰임에서 오는 기쁨보다 진리들에서 오는 기쁨을 더 좋아하는 상태’였다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사실을 저세상에서 그들과 같은 사람들을 경험함으로써 알게 되었다고 밝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들이 진리를 버리거나 거짓을 사랑한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진리를 알고 이해하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기쁨이 선을 행하고 이웃에게 쓰임이 되는 기쁨보다 앞서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겉으로 보면 매우 작은 변화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진리를 사랑하고 알아 가는 일은 분명 좋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적 질서에서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본래 진리는 선을 섬기고, 선은 사랑으로부터 나오며, 사랑은 실제 쓰임 가운데 생명이 됩니다. 그런데 진리를 아는 것 자체에서 얻는 기쁨이 그 진리로 선을 행하는 기쁨보다 더 커지면, 진리와 사랑 사이의 질서가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진리는 여전히 진리이지만 그것을 사랑하는 사람의 내적 상태가 변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경계하는 것은 ‘진리를 아는 기쁨’ 자체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더 사랑하는가’입니다. 진리를 배우는 목적이 주님을 더 깊이 알고, 무엇이 선인지 더 분명하게 이해하며, 이웃에게 더 지혜롭게 쓰임이 되기 위한 것이라면 그 기쁨은 선한 질서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아는 것 자체가 더 큰 목적이 되고 실제로 선을 행하는 일이 그 뒤로 밀려난다면, 진리가 사랑과 쓰임을 섬기는 본래의 질서는 약해지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변화는 퍼셉션이 왜 점차 흐려졌는지도 설명해 줍니다. 퍼셉션은 단순히 특별한 영적 감각이나 신비한 인식 능력이 아니라, 사랑과 선으로부터 진리를 알아보는 능력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쓰임의 생명이 약해지면 그 선으로부터 진리를 보는 능력도 함께 약해집니다. 마할랄렐 교회의 퍼셉션이 쇠퇴한 것은 단지 오랜 세월이 흘렀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무엇을 더 사랑하고 무엇에서 더 큰 기쁨을 느끼는가 하는 내적 질서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성경과 교리를 공부하는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말씀의 속뜻을 배우고, 상응을 이해하며,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깊이 공부하는 데서 큰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전에는 몰랐던 진리를 깨닫고 말씀의 깊은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앎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고 있는지는 살펴야 합니다. 진리를 더 많이 알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에서 만족하고 있는지, 아니면 그 진리로 인해 주님을 더 사랑하고 이웃에게 더 선한 쓰임이 되는 사람으로 변화하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진리를 많이 안다고 해서 반드시 그만큼 사랑이 깊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상응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고 해서 반드시 이웃을 더 따뜻하게 대하는 것도 아닙니다. 심지어 말씀에 관한 지식이 자신을 높이거나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진리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 진리를 대하는 우리의 사랑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진리를 주시는 목적은 단지 많은 것을 알게 하시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진리를 통하여 선을 분별하고, 선을 사랑하며, 실제로 이웃에게 선한 쓰임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배우면서 끊임없이 돌아보아야 할 것은 ‘얼마나 많이 알게 되었는가?’뿐 아니라 ‘이 진리로 인해 나는 어떤 선을 더 사랑하게 되었으며, 누구에게 어떤 쓰임이 되고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이제 16절과 17절에서는 마할랄렐이 야렛을 낳은 뒤 팔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고, 팔백구십오 세를 살고 죽었다고 합니다. AC.512는 이 말씀들의 의미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고 간단히 밝힙니다. 우리는 이미 ‘날들’과 ‘연수’가 교회의 때와 상태들을, ‘아들들과 딸들’이 그 교회에 속한 진리들과 선들을, ‘죽었다’는 말씀이 그 교회의 고유한 상태가 끝났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다만 같은 표현이 사용되더라도 각 교회가 지닌 진리와 선의 구체적인 어떠함은 그 교회의 내적 상태에 따라 달라집니다. 따라서 마할랄렐의 자녀들과 죽음 역시 앞서 AC.511에서 설명한 그 교회의 고유한 상태와 관련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 마할랄렐이 죽었다는 것은 마할랄렐 교회를 특징짓던 상태가 끝났음을 의미하지만, 그것이 모든 선과 진리의 완전한 소멸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이미 마할랄렐로부터 야렛이라는 다음 교회가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창5에서 반복되는 ‘낳음’과 ‘죽음’은 한 교회의 상태가 다음 교회로 이어지는 과정과 그 고유한 상태가 끝나는 과정을 함께 보여 줍니다.

 

이제 18절은 ‘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라고 합니다. AC.513에 따르면 야렛은 여섯 번째 교회를, ‘에녹’(Enoch)은 일곱 번째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에녹은 지금까지의 교회 계승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앞선 교회들에서는 퍼셉션이 어떻게 점차 쇠퇴했는가가 중심이었다면, 에녹에 이르러서는 그 퍼셉션으로부터 나온 것들이 어떻게 후대를 위하여 보존되는가 하는 새로운 문제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미 창5의 개요인 AC.464에서 에녹의 역할을 미리 밝혔습니다. 태고교회와 그 뒤를 이은 교회들이 퍼셉션했던 것들을 모아 교리로 만들었던 이들이 있었으며, 이것이 ‘에녹’이라는 이름으로 의미되었다는 것입니다. 최초의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을 사랑하고 선을 사랑하는 생명 안에서 무엇이 진리인지를 직접 퍼셉션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자신들이 퍼셉션한 진리를 따로 모아 교리로 정리하고, 그것을 배워서 진리를 알아 가는 방식이 중심적인 역할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후속 교회들에서 퍼셉션이 점차 흐려지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이전처럼 선으로부터 진리를 직접 퍼셉션할 수 없는 상태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앞선 교회들이 퍼셉션했던 선과 진리는 어떻게 되어야 하겠습니까? 그것들이 함께 사라져 버린다면 후대의 사람들은 무엇을 통하여 진리를 배울 수 있겠습니까? 바로 이러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에녹의 역할이 나타납니다. 이전 교회들이 퍼셉션했던 것들을 모아 교리로 만들고 후대를 위하여 보존하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여전히 퍼셉션이 있었으므로 이러한 교리가 실제로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훗날 그것을 필요로 할 사람들을 위하여 보존되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을 보여 줍니다. 지금까지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과 선 안에서 진리를 직접 퍼셉션하는 것이 중심이었다면, 이제는 그 퍼셉션으로부터 나온 진리를 교리로 보존하여 전달할 필요가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다만 에녹을 곧바로 훗날 노아로 시작되는 영적 교회와 동일하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에녹 역시 태고교회 시대의 계승 안에 있는 교회입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퍼셉션이 쇠퇴하는 가운데 이전에 퍼셉션된 진리들이 후대를 위해 보존될 길이 마련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AC.514에서 스베덴보리는 야렛 교회에 관하여 매우 흥미로운 설명을 덧붙입니다. 야렛이라는 교회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그 교회의 어떠함은 앞선 마할랄렐과 뒤따르는 에녹을 통하여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야렛이 이 두 교회 사이의 ‘중간 상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창5의 교회들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마할랄렐에서는 쓰임에서 오는 기쁨보다 진리들에서 오는 기쁨을 더 좋아하는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에녹에서는 이전에 퍼셉션되었던 것들을 교리로 모아 보존하는 움직임이 나타납니다. 야렛은 바로 이 두 상태 사이에 놓여 있었습니다. 따라서 야렛을 이해하려면 그 이름만 따로 떼어 어떤 독립적인 특징을 찾으려 하기보다, 마할랄렐에서 에녹으로 이어지는 전체적인 변화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야렛 교회가 이미 교리를 만들기 시작했다거나 특정한 제도를 갖추고 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AC.514는 그런 구체적인 내용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야렛이 마할랄렐과 에녹 사이의 중간 상태에 있었으며,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쇠퇴하는 과정과 그것이 교리로 보존되는 과정 사이에서 하나의 연결 고리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변화가 단절된 사건들의 반복이 아니라 서로 연결된 상태들의 연속임을 보게 됩니다. 앞선 교회로부터 다음 교회가 이어지고, 그 과정에서 사랑과 퍼셉션의 상태가 달라지며, 마침내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진리가 보존되는 단계에 이릅니다. 이것은 인간의 내적 상태가 변화하는 동안에도 주님께서 다음 시대에 필요한 것을 준비하고 계셨음을 보여 줍니다. 인간이 처음의 퍼셉션을 유지하지 못하게 된다고 해서 주님께서 그들을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에 맞추어 선과 진리를 보존할 길을 마련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19절과 20절에서는 야렛이 에녹을 낳은 뒤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고, 구백육십이 세를 살고 죽었다고 합니다. AC.515는 여기서 앞서 설명한 ‘날들’과 ‘연수’의 의미를 다시 확인하면서, 홍수 이전 사람들의 매우 긴 수명이라는 문제를 직접 다룹니다. 스베덴보리는 홍수 이전 사람들의 나이가 야렛의 구백육십이 세나 므두셀라의 구백육십구 세처럼 그렇게 많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다음 장 3절에 나오는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는 말씀을 함께 제시합니다.

 

이것은 창5의 계보를 읽는 스베덴보리의 관점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그는 이 장에 나오는 이름들과 연수를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개인의 생애나 수명 기록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사람’,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은 각각 교회를 의미하며, 그들에게 연결된 ‘날들’과 ‘연수’ 역시 그 교회들의 때와 상태들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야렛이 구백육십이 세를 살았다는 말씀의 중심은 한 개인이 실제로 962년을 살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야렛으로 표현된 교회의 때와 상태가 말씀의 숫자를 통하여 나타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창6:3의 백이십 년을 함께 언급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창5에서는 구백 년이 넘는 수명이 반복되지만, 바로 다음 장에서는 인간의 날이 백이십 년이라고 기록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숫자들을 모두 단순한 생물학적 수명으로 읽지 않고, 교회의 때와 상태를 나타내는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다만 이것이 각 숫자에 어떤 구체적인 의미가 있는지를 우리가 임의로 계산하거나 추정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AC.515가 분명하게 밝히는 것은 이 연수들이 특정 개인의 실제 나이가 아니라 교회의 때와 상태들을 의미한다는 원칙입니다.

 

그렇다면 창5의 이름들이 각각 교회를 의미하고 연수도 실제 수명이 아니라면, 창세기 초반은 역사적 실재와 아무 관계가 없는 이야기라는 뜻일까요? 여기에는 신중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해석에서 창세기 초반의 계보는 현대적인 연대기나 전기 자료처럼 개인들의 생애를 기록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 안에 표현된 교회의 영적 상태와 변화까지 아무런 실재가 없는 허구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이러한 문자적 서술 안에서 태고교회와 그 뒤를 이은 교회들의 영적 역사를 읽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속뜻을 읽는다는 것은 성경의 문자를 무시하거나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문자 안에 담긴 내적 의미를 읽는 것입니다. ‘야렛이 구백육십이 세를 살았다’는 말씀에서 단순히 그 숫자가 실제 수명인지 아닌지를 논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주님께서 그 말씀을 통하여 어떤 교회의 상태를 계시하고 계시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이렇게 읽을 때 창5는 기이할 만큼 오래 살았던 사람들의 족보가 아니라,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진 여러 교회가 어떻게 서로 다른 내적 상태를 거치며 변화해 갔는지를 보여 주는 영적 역사가 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연수들이 자연적인 시간보다 교회의 때와 상태를 의미한다고 해서, 이 여러 교회가 실제 역사 속에서 얼마 동안 존속했는지, 또는 서로 어느 정도 같은 시대에 존재했는지까지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AC.515가 밝히는 것은 숫자의 속뜻이지 각 교회의 구체적인 역사적 존속 기간이나 공존 기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5의 숫자로 여러 교회의 역사적 연대표를 만들어 내기보다, 그 숫자들을 통하여 말씀께서 드러내시는 교회의 상태를 이해하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이렇게 오늘의 AC.510-515를 하나로 모아 보면, 창5의 계보에는 세 가지 중요한 흐름이 나타납니다.

 

첫째는 ‘사랑과 쓰임의 질서 변화’입니다. 마할랄렐 교회에 이르러 진리를 아는 기쁨이 쓰임에서 오는 기쁨보다 앞서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진리를 버린 상태가 아니라, 진리가 섬겨야 할 사랑과 쓰임보다 진리 자체에서 얻는 기쁨을 더 좋아하게 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내적 질서의 변화와 함께 퍼셉션도 더욱 일반적이고 흐릿한 것이 되어 갔습니다.

 

둘째는 ‘퍼셉션의 쇠퇴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교리적 보존’입니다. 마할랄렐에서 야렛으로, 야렛에서 에녹으로 이어지는 동안 교회의 상태는 계속 변화하였습니다. 특히 야렛은 마할랄렐과 에녹 사이의 중간 상태였으며, 에녹에 이르러서는 이전 교회들이 퍼셉션했던 것들을 교리로 만들어 후대를 위하여 보존하는 일이 나타납니다. 인간이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진리를 직접 퍼셉션할 수 없게 되는 가운데서도, 그 진리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도록 보존될 길이 준비된 것입니다.

 

셋째는 ‘교회의 때와 상태를 통하여 드러나는 영적 역사’입니다. 마할랄렐의 팔백구십오 세와 야렛의 구백육십이 세는 단순한 개인의 수명 기록이 아니라 각각의 교회가 지닌 때와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창5의 계보를 이해할 때 중요한 것은 누가 몇 년을 살았는가보다 각 교회가 어떤 선과 진리를 지니고 있었으며, 그 내적 상태가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흐름을 함께 바라보면 오늘 말씀을 통하여 주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도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인간은 처음의 천적 상태를 계속 유지하지 못했습니다. 사랑과 쓰임의 생명은 점차 감소하였고, 그 사랑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직접 알아차리는 퍼셉션도 약해졌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간의 상태가 달라졌다고 해서 선과 진리의 근원이기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달라진 것은 주님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바로 그 달라진 상태를 아시고 다음 길을 준비하셨습니다. 퍼셉션이 쇠퇴하는 가운데서도 이전 교회들이 받았던 선과 진리가 후대에 전달될 수 있도록 보존의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이것이 에녹의 등장을 통하여 드러나는 주님의 섭리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처음의 완전한 상태를 잃어버렸다고 해서 곧바로 버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인간이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없게 될 때에도, 변화된 상태에 맞추어 그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준비하시는 분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의 신앙에도 중요한 가르침을 줍니다. 우리는 태고교회와 같은 퍼셉션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오늘도 말씀과 진리를 통하여 우리를 인도하시며, 우리가 그 진리를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실제 삶에서 행하도록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특별한 영적 능력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미 주신 진리를 올바르게 사랑하고 그 진리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의 속뜻을 공부하고 교리를 배우는 목적도 여기에 있습니다. 더 많은 지식을 쌓는 것 자체가 마지막 목적이 아니라, 그 진리를 통하여 주님을 더욱 깊이 알고 이웃을 더욱 사랑하며 선한 쓰임을 이루는 것입니다. 진리를 아는 기쁨이 선을 행하는 기쁨으로 이어지고, 우리가 받은 사랑이 실제 삶에서 이웃을 위한 쓰임으로 나타날 때, 그 진리는 우리 안에서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자신의 신앙을 한 가지 질문 앞에 세워 보아야 합니다. ‘나는 진리를 아는 기쁨과 그 진리로 선을 행하는 기쁨 가운데 무엇을 더 사랑하고 있는가?’ 진리를 배우고 이해하는 기쁨은 귀합니다. 그러나 그 기쁨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마할랄렐 교회에서 나타난 질서의 변화를 자신의 안에서도 돌아보아야 합니다. 반대로 우리가 진리를 배울수록 더 겸손해지고, 더 자비로워지며, 작은 일에서도 이웃에게 선한 쓰임이 되기를 기뻐한다면 그 진리는 본래의 목적을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적 상태가 약해지는 때에도 주님을 향한 소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언제나 같은 열심과 명료함을 유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의 상태를 아시며, 그 상태에 맞추어 계속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이전처럼 분명하게 보지 못할 때에도 말씀을 통하여 진리를 주시고, 그 진리가 다시 사랑과 선한 쓰임으로 이어질 길을 열어 주십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쇠퇴하는 가운데서도 교리를 통하여 진리를 보존할 길을 준비하셨던 주님께서는 오늘도 인간의 연약함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창5:15-20은 단순히 마할랄렐과 야렛과 에녹이라는 이름이 이어지는 족보가 아닙니다. 그 속뜻으로는 인간의 사랑과 퍼셉션이 어떻게 변해 갔으며, 그 변화 속에서도 주님께서 어떻게 선과 진리를 보존하셨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참된 신앙의 생명이 어디에 있는지도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진리를 많이 아는 것 자체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그 진리와 결합되어 실제로 선한 쓰임을 이루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창5:15-20, AC.510-515를 통하여 우리가 배우는 말씀입니다. ‘진리를 아는 기쁨은 선을 행하는 기쁨을 섬겨야 하며, 인간의 내적 상태가 달라지고 약해지는 가운데서도 주님께서는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고 그 상태에 맞는 다음 길을 준비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주시는 진리를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그 사랑을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나타내며, 우리의 모든 변화 가운데서도 변함없이 역사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신뢰하며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이상 요약을 마치고, 아래는 AC 본문, 해설 및 심화입니다.

 

 

AC.510, 창5:15,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AC.510-511)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And Mahalalel lived sixty and five years, and begat Jared. (창5:15) AC.510 ‘마할랄렐’(Mahalalel)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다섯 번째 교회를 의미하고, ‘야렛’(Jared)은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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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1, 창5:15, ‘마할랄렐’(Mahalalel)이라 하는 교회의 상태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창5:15) AC.511 퍼셉션의 능력이 감소하여, 더 개별적이고 분명하던 상태에서 더 일반적이고 어두운 상태로 바뀌어 간 것처럼, 사랑의 생명 곧 쓰임새의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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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2, 창5:16-17, ‘같은 표현이 반복되는 이유’

16야렛을 낳은 후 팔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7그는 팔백구십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Mahalalel lived after he begat Jared eight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Mah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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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3, 창5:18, ‘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AC.513-514)

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And Jared lived a hundred sixty and two years, and begat Enoch. (창5:18) AC.513 ‘야렛’(Jared)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여섯 번째 교회를, ‘에녹’(Enoch)은 일곱 번째 교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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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4, 창5:18, ‘마할랄렐과 에녹 사이에 있는 야렛’

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And Jared lived a hundred sixty and two years, and begat Enoch. (창5:18) AC.514 ‘야렛’(Jared)이라 하는 교회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서술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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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5, 창5:19-20, ‘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

19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0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Jared lived after he begat Enoch eight hundred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Jared were nine hund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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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AC 리딩 본문 전체는 여기까지이고, 아래는 오늘 범위 창5:15-20, AC.510-515 중 리딩 필독 두 편 링크입니다. 혹시 몹시 바쁘신 분들은 꼭 이 링크들만이라도 읽으시기 바랍니다.

 

 

AC.511, 창5:15, ‘마할랄렐’(Mahalalel)이라 하는 교회의 상태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창5:15) AC.511 퍼셉션의 능력이 감소하여, 더 개별적이고 분명하던 상태에서 더 일반적이고 어두운 상태로 바뀌어 간 것처럼, 사랑의 생명 곧 쓰임새의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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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5, 창5:19-20, ‘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

19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0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Jared lived after he begat Enoch eight hundred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Jared were nine hund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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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이며, 다음은 다음 주(20261101, 성찬) 리딩 본문(창5:21-24, AC.516-522) 소개입니다.

 

다음 주에는 창5:21-24, AC.516-522를 통하여 ‘에녹’(Enoch) 교회의 특별한 역할을 살펴보겠습니다. 에녹은 태고교회와 그 뒤를 이은 교회들이 퍼셉션했던 것들을 모아 교리로 만들고, 후대를 위하여 보존하는 일을 나타냅니다. 특히 성경은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고 기록합니다. 다음 주에는 이 특별한 표현의 속뜻을 살펴보면서, 퍼셉션이 점차 사라져 가는 가운데 주님께서 어떻게 진리를 보존하셨는지, 그리고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네, 이상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10-25(D1)

 

2674, 3, 창5.3, 2026-10-25(D1)-주일예배(창5,15-20, AC.510-515), ‘마할랄렐, 야렛, 에녹’.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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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10/18, 창5:6-14, AC.496-509), ‘흐려지는 퍼셉션, 변함없는 주님의 섭리’

※ 오늘(2026/10/18)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8, ‘성도들아 찬양하자’, 찬131, ‘다 나와 찬송부르세’입니다. 오늘은 창5 절별 주석 그 두 번째, 6절로 14절, AC 글 번호로는 496번에서 509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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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64 심화

‘에녹이 보존한 교리는 후대의 고대 말씀과 모세의 창세기 기록에 어떻게 이어졌는가?’

 

 

AC.464는 ‘에녹’이라 하는 교회가 태고교회에 계시되고 그 교회가 퍼셉션한 것들로부터 교리를 형성했으며, 그 교리가 당시에는 쓸모가 없었지만 ‘후대의 쓰임을 위해’ 보존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에녹이 정돈하여 보존한 교리가 훗날 고대교회에 전해지고, 더 나아가 모세가 창세기를 기록할 때 사용한 고대의 자료가 된 것일까요? 큰 흐름에서는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에녹의 교리 = 고대 말씀 = 모세오경’이라고 곧바로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에녹의 역할부터 정확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태고교회는 천적 교회였으며,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 안에서 선과 진리를 퍼셉션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후대처럼 체계적인 교리를 먼저 배우고 그것을 통해 무엇이 참인지를 판단하는 방식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상태가 변하면서 이러한 퍼셉션이 계속 유지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때 ‘에녹’이라 하는 교회가 태고교회에 계시되고 퍼셉션된 것들을 모아 교리의 형태로 정돈했습니다. 살아 있는 내적 퍼셉션으로 알고 있던 것이 후대에도 전달될 수 있는 형태로 보존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다’는 창5:24의 속뜻과 연결됩니다. 에녹의 교리가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즉시 필요한 것이어서 널리 사용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당시에는 쓰이지 않으면서도 훗날 필요할 때를 위하여 보존되었다는 것입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사라질 것을 주님께서 아셨기 때문에, 그 안에 있던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까지 함께 사라지도록 두지 않으시고 다른 형태로 보존하신 것입니다. AC.464의 에녹은 이런 의미에서 ‘퍼셉션에서 교리로’ 넘어가는 중요한 전환점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에녹이 정돈한 교리를 곧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고대 말씀’ 전체와 동일시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른 곳에서 고대교회에 하나의 ‘고대 말씀’(Ancient Word)이 있었으며, 그것이 후대에는 소실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민21:14의 ‘여호와의 전쟁기’와 수10:13 및 삼하1:18에 언급되는 ‘야살의 책’ 등을 그 고대 말씀과 관련하여 설명합니다. 이것은 태고교회로부터 내려온 상응과 표상의 지식이 고대교회에서 말씀과 교리의 형태로 발전하고 보존되었던 더 넓은 전승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에녹의 교리화는 이 긴 전승의 매우 초기적이고 중요한 단계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모세와의 관계에서도 같은 주의가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앞부분의 기록이 모세 시대에 처음 아무 자료도 없이 생겨난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는 태고교회와 고대교회에서 내려오던 고대의 기록과 전승이 있었으며, 모세가 그러한 자료를 사용했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창세기 원역사에 해당하는 부분에는 태고교회와 고대교회로부터 전해 내려온 매우 오래된 교회적 전승이 상응적 서술의 형태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고대의 말씀과 상응 지식 자체는 후대에 상당 부분 소실되었지만, 그 내용과 표현의 일부는 섭리 가운데 후대의 말씀 안에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기록한 창세기와 에녹의 교리 보존 사이에는 ‘고대의 계시와 퍼셉션이 후대를 위해 보존되고 전승되었다’는 큰 연속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연속성을 ‘에녹이 책을 한 권 써 두었고 그것이 그대로 전해져 모세오경이 되었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464는 그런 직접적인 문헌 계보를 말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모세오경 전체가 에녹의 교리에서 유래했다고 할 근거도 없습니다. 보다 정확한 그림은 ‘태고교회의 계시와 퍼셉션 → 에녹이라 하는 교회의 교리화와 보존 → 고대교회에서의 전승과 발전 → 고대의 말씀과 여러 기록 및 전승 → 모세가 사용한 고대 자료’라는 긴 흐름입니다. 이 과정에는 여러 시대와 여러 형태의 전승이 놓여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에녹의 의미가 더욱 깊어집니다. 주님은 한 시대의 사람들이 누리던 특별한 영적 상태가 사라질 때 그들과 함께 모든 진리가 사라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은 사라졌지만, 그 퍼셉션으로 알았던 것 가운데 후대에 필요한 것은 교리와 전승의 형태로 보존되었습니다. 그리고 훗날 사람들이 더 이상 태고교회처럼 직접 퍼셉션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보존된 진리는 다른 형태로 그들을 섬길 수 있었습니다. AC.464가 ‘후대의 쓰임’이라고 한 말에는 바로 이러한 주님의 섭리가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에녹에서 모세까지의 관계를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에녹이 정돈한 교리가 그대로 모세오경이 된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계시와 퍼셉션을 후대에 전달하기 위해 보존한 에녹의 사역이 고대교회의 오랜 전승을 거쳐 훗날 말씀의 기록으로 이어지는 큰 섭리적 흐름의 한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영적 상태가 변할 때마다 진리를 없애시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가 받을 수 있는 형태로 보존하고 전달하십니다. 에녹의 ‘들려감’은 바로 그 보존의 섭리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AC.464 심화)

 

 

 

AC.464, 창5, ‘에녹은 태고교회의 계시와 퍼셉션으로부터 교리를 형성한 교회이다’

개요 AC.464‘에녹’(Enoch)이라 하는 교회는 태고교회에 계시되고 그 교회가 퍼셉션한 것들로부터 교리를 형성한 것으로 묘사됩니다. 이 교리는 당시에는 쓸모가 없었지만 후대의 쓰임을 위해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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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2026/09/20)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4, ‘주 우리 하나님’, 찬94,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입니다.

 

오늘은 창4 절별 주석 그 다섯 번째, 16절로 18절, AC 글 번호로는 397번에서 404번입니다. 먼저 본문입니다.

 

16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17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18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창4:16-18)

 

제목은

 

보존된 신앙은 어디로 가는가, 가인의 성읍 에녹

 

이며, 다음은 ‘3분 요약’입니다. 새로 오신 분들, 그리고 그동안 함께해오신 분들 모두를 위한, 지난 2월부터 시작한 이 특별한 주일예배를 위한, 그 흐름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한 시간입니다.

 

 

 

 

오늘 리딩에 들어가기 전에 지금까지의 큰 흐름을 잠깐 돌아보겠습니다. 우리는 창세기의 문자적 의미를 존중하면서,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따라 그 속뜻을 함께 읽고 있습니다. 창1에서는 천지창조를 거듭남의 과정으로, 창2에서는 에덴동산을 주님의 사랑과 생명 안에 살아가는 천적 상태로, 창3에서는 사람이 주님보다 자기 감각과 proprium을 따르면서 그 질서가 무너지는 과정으로 읽었습니다.

 

창4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가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읽고 있습니다. 가인은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지난주에는 체어리티를 죽인 가인이 선과 진리의 방향을 잃고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었지만, 주님께서는 그런 가인을 완전히 없애지 않으시고 ‘가인의 표’를 주어 보존하시는 것을 읽었습니다. 가인의 잘못을 승인하신 것이 아니라, 장차 인간이 다시 체어리티로 돌아오는 데 쓰일 수 있도록 신앙 자체를 보존하신 것입니다.

 

오늘은 바로 그다음 장면입니다. 가인은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가 에덴 동쪽 놋 땅에 거하고, 에녹을 낳아 성읍을 세웁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이제 하나의 가르침이 되고, 그 가르침이 다시 하나의 교리적 세계를 이루며, 거기에서 또 다른 분리들이 이어지는 과정을 보게 됩니다. 특히 오늘은 ‘신앙이 먼저 온다’는 것과 ‘신앙이 지배한다’는 것이 전혀 다르다는 사실도 중요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오늘은 한 가지를 마음에 두고 읽겠습니다. ‘주님께서 신앙을 보존하신 목적은 신앙이 홀로 자기 성읍을 쌓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 신앙이 다시 체어리티와 결합하여 생명을 얻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오늘은 가인의 표로 보존된 신앙이 그 뒤 어디로 향하는지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다음은 오늘 리딩 범위인 AC.397-404 요약입니다.

 

AC.397-404는 지난주에 읽은 AC.370-396에서 주님께서 ‘가인의 표’를 주어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을 보존하신 바로 다음부터 시작합니다. 지난주 본문의 마지막에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역설을 보았습니다. 가인은 체어리티를 죽였고, 그 결과 선과 진리의 방향을 잃어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었지만, 주님께서는 그를 완전히 소멸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이 더 이상 태고교회처럼 사랑으로부터 직접 진리를 퍼셉션할 수 없게 된 뒤에는, 먼저 신앙의 지식을 배우고 그것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로 인도받는 길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인의 표’는 가인의 잘못을 승인하는 표가 아니라, 장차 인류의 쓰임을 위하여 신앙 자체를 구별하여 보존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의미했습니다. 이번 AC.397-404는 바로 그 보존된 신앙이 이후 어떤 상태에 놓이고, 또 어떻게 새로운 교리적 계보를 만들어 가는지를 보여 줍니다.

 

AC.397-398에서 가인은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합니다.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갔다’는 것은 신앙이 사랑의 신앙에 속한 선에서 분리되었음을 의미하고, ‘놋 땅에 거하였다’는 것은 진리와 선 밖에 있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가인에게서 얼굴을 돌리셨다는 것이 아니라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자비와 사랑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인간 쪽에서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질서가 무너진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보존되었지만 더 이상 진리와 선의 살아 있는 질서 안에 거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매우 흥미롭게도 가인은 에덴에서 완전히 동떨어진 곳이 아니라 ‘에덴 동쪽’에 거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전에 사랑이 지배하던 이해의 마음 가까이’, 그리고 AC.398에서는 ‘전에 체어리티가 지배하던 합리적 마음 가까이’라고 설명합니다. ‘동쪽’은 주님을, ‘에덴’은 사랑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가인은 에덴 ‘안’에는 있지 않습니다. 사랑과 신앙이 하나였던 태고교회의 본래 질서에서 이미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에덴과 아무 관계도 없는 완전한 소멸 상태로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지난주에 본 ‘가인의 표’에 의해 신앙이 보존되었기 때문에, 사랑이 지배했던 마음 가까이에 여전히 남아 있는 것입니다.

 

AC.398은 여기서 태고교회에서 일어난 결정적인 변화를 설명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서는 의지와 이해가 하나였고, 사랑이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었으며 신앙은 그 사랑에 속해 있었습니다. 곧 ‘의지에서 이해로’, ‘사랑에서 신앙으로’ 흐르는 질서였습니다. 그러나 가인에게서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자 이 질서가 뒤집혔습니다. ‘의지 대신 이해가, 곧 사랑 대신 신앙이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가인의 문제는 단순히 신앙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본래 사랑을 섬겨야 할 신앙이 사랑에서 독립하여 오히려 사랑을 지배하려 했다는 데 있습니다. 진리가 선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선 위에 서려 한 것입니다.

 

여기서 지난주의 AC.393과 이번 AC.398을 반드시 구별해야 합니다. 홍수 후의 영적 인간에게서는 신앙의 지식이 먼저 주어지고, 그 신앙을 통하여 주님께서 체어리티를 주십니다. 그러나 ‘신앙이 먼저 온다’는 것과 ‘신앙이 지배한다’는 것은 전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전자는 거듭남의 순서에 관한 것이고, 후자는 질서의 전도에 관한 것입니다. 영적 인간은 먼저 진리를 배우지만 결국 그 진리는 체어리티와 결합되어야 하며 체어리티가 신앙에서 주된 것이 되어야 합니다. 가인은 바로 이 결합을 거부하고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여 독립시킨 상태입니다.

 

그런데 AC.399부터 이야기가 다시 한 단계 진행됩니다. 가인이 아내와 동침하여 ‘에녹’을 낳고, 성읍을 쌓아 그 이름을 에녹이라 합니다. 속뜻에서 이것은 가인이라는 하나의 분열 또는 이단이 자기 자신에게서 또 다른 분열 또는 이단을 산출한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의 잘못된 영적 원리는 그 상태에 그대로 머물지 않습니다. 그 원리 안에서 새로운 결론들이 나오고, 그 결론에서 다시 다른 교리들이 생겨납니다. 가인의 최초 원리가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는 것’이었다면, 이제 그 원리가 자기 논리를 따라 새로운 형태로 전개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AC.400은 창세기의 ‘족보’를 읽는 매우 중요한 원리를 제시합니다. 교회의 것이든 이단의 것이든 ‘잉태’와 ‘출생’은 앞의 영적 상태에서 뒤의 영적 상태가 산출되는 것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누가 누구를 낳았다는 것은 단순히 생물학적 세대가 이어졌다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의 교리나 상태가 자기에게서 다음 상태를 산출했다는 영적 계보를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아주 강한 문장으로 요약합니다. ‘하나의 이단이 잉태되면 거기에서 수많은 이단이 태어납니다.’ 하나의 근본적인 분리가 받아들여지면 그것은 자기 안에 들어 있는 논리를 따라 계속 새로운 분리를 낳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단’이라는 말을 오늘날 어떤 특정 교파나 사람에게 쉽게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이번 본문의 관심은 다른 사람에게 이단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데 있지 않고, 하나의 잘못된 영적 원리가 어떻게 자기 자신에게서 계속 새로운 오류를 산출하는지를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 자신의 마음을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옳다는 것이 사랑하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작은 원리 하나가 마음에 들어오면, 거기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생각이 나오고, 그 판단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생기며, 마침내 사랑하지 않는 행동까지도 옳다고 설명하는 하나의 내적 세계가 형성될 수 있습니다. 가인의 계보는 바로 이러한 영적 출생의 과정을 보여 줍니다.

 

AC.401에서는 왜 그 새로운 상태를 ‘에녹’이라고 불렀는지를 설명합니다. ‘에녹’이라는 이름은 ‘그렇게 시작되거나 형성되기 시작한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즉 가인에게서 일어난 분리는 이제 단순한 생각이나 주장으로 머물지 않고 ‘가르침’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합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다른 사람에게 설명되고 전해질 수 있는 교리적 형태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에녹은 ‘분리된 신앙’이 ‘가르쳐지는 분리된 신앙’으로 발전한 단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성읍’이 중요해집니다. AC.399와 AC.402에서 가인이 쌓은 성읍은 그 이단에서 나온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를 의미합니다. 처음에는 하나의 잘못된 원리였지만, 그것이 에녹이라는 가르침이 되고, 그 가르침에서 여러 교리적인 내용들이 생겨나 서로 연결되면서 하나의 전체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하나의 분리가 이제 하나의 교리적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교리가 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 교리가 어디에서 태어났느냐에 있습니다.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나온 진리인가, 아니면 사랑에서 분리되어 스스로 지배하려는 신앙에서 나온 진리인가가 중요합니다.

 

AC.402는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말씀 전체에서 ‘성읍’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길게 보여 줍니다. 거룩한 예루살렘, 시온, 하나님의 성, 진리의 성읍에서부터 혼돈의 성읍과 계시록의 큰 성읍에 이르기까지 많은 구절이 인용됩니다. 이 모든 인용의 중심은 하나입니다. 속뜻에서 ‘성읍’은 ‘교리적인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읍 자체가 선하거나 악한 것은 아닙니다. 거룩한 예루살렘은 주님의 나라와 참된 교리의 질서를 나타내지만, 가인이 세운 에녹 성읍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온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를 나타냅니다.

 

이 대조는 매우 중요합니다. ‘가인의 성읍’도 성읍이고 ‘거룩한 예루살렘’도 성읍입니다. 둘 다 교리적인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그 안에 거하는 사랑이 다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를 중심으로 진리들이 질서를 이루면 ‘거룩한 성’이 되지만,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원리를 중심으로 진리들이 조직되면 ‘가인의 성읍’이 됩니다. 따라서 교리의 규모가 크고 논리가 정교하며 성경 지식이 많다는 것 자체가 그 교리가 살아 있다는 보증은 아닙니다. 그 교리가 어떤 사랑에서 나오며, 사람을 어떤 삶으로 이끄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AC.402의 수많은 성경 인용 가운데 특히 스가랴의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는 말씀이 이 구별을 잘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진리의 성읍’인 예루살렘을 신앙의 영적인 것으로, ‘성산’인 시온산을 신앙의 천적인 것으로 설명합니다. 사랑과 선이라는 천적인 것이 중심이 되고 그로부터 진리와 교리라는 영적인 것이 질서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인의 질서와 정반대입니다. 가인은 사랑 대신 신앙이 지배하도록 했지만, 거룩한 성읍에서는 진리가 다시 사랑과 선의 질서 안에 놓입니다.

 

AC.403은 여기서 창세기 초반 전체를 읽는 매우 중요한 해석 원리를 제시합니다. 창세기의 이 부분은 ‘역사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태고인들은 영적인 실재를 ‘표상적 유형들’ 아래 역사 형식으로 배열하는 데 익숙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문자적으로는 가인이 아들을 낳고 성읍을 세우며 그 성읍에 이름을 붙이는 역사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서는 교회의 상태와 교리의 변화가 하나의 영적 연속으로 펼쳐집니다. 가인이 에녹을 낳고 성읍을 세우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에서 새로운 가르침이 나오고, 그 가르침에서 다시 하나의 교리적 세계가 형성되는 영적 과정을 살아 있는 이야기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인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모든 것을 표현하는 것을 ‘지극히 즐거워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것이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말씀의 상응을 공부하는 목적이 단어마다 뜻을 붙여 암호표를 만드는 데 있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가인은 신앙’, ‘아벨은 체어리티’, ‘성읍은 교리’라고 외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가고, 놋 땅에 거하며, 에녹을 낳고, 성읍을 쌓는 전체 흐름 속에서 신앙과 사랑의 관계가 어떻게 무너지고 또 그 결과가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살아 있는 영적 서사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AC.403을 근거로 창세기 초반의 문자적 의미를 무가치하게 여기거나 단순히 ‘꾸며 낸 이야기’라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초점은 역사 형식 자체를 버리는 데 있지 않고, 그 역사 형식 안에 담긴 속뜻을 보는 데 있습니다. 사건들의 순서와 관계가 바로 영적 상태들의 연속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누구를 낳고, 어디로 이동하며, 무엇을 세우고, 무엇이라 이름하는지가 모두 속뜻을 담는 외적 그릇입니다. 따라서 문자적 의미와 속뜻은 서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외적 형식과 그 안에 담긴 내적 생명의 관계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마지막 AC.404에서는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는 계보가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모든 이름이 ‘가인이라 불린 최초의 이단에서 파생된 이단들’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가인에서 시작된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가 에녹에서 가르침이 되고 성읍에서 교리적인 전체를 형성한 뒤, 이제 그 교리적 전체에서 다시 여러 후속적인 분리가 파생되는 것입니다. 하나의 근본 원리가 자기 안에서 계속 후손을 낳으며 하나의 계보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AC.404에서 눈여겨볼 것은 스베덴보리의 절제입니다. 그는 이랏이라는 이름이 ‘성읍에서 내려온다’는 뜻이므로 에녹이라는 이단에서 파생된 것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고 설명하지만, 므후야엘과 므드사엘 등의 구체적인 의미를 자세히 만들어 내지는 않습니다. ‘그것들에 관하여는 이름들 외에는 전해지는 것이 없으므로 그것들에 관하여 무엇인가 말하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멈춥니다. 속뜻이 있다고 해서 우리가 그 모든 세부를 안다는 뜻은 아닙니다. 말씀과 AC가 밝혀 주는 곳에서는 깊이 들어가되, 밝혀 주지 않은 곳에서는 멈추어야 합니다. 이것은 상응을 다루는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태도입니다.

 

이렇게 보면 AC.397-404 전체에는 하나의 분명한 흐름이 있습니다. 지난주 마지막에서 주님께서는 가인의 신앙을 ‘인류의 쓰임을 위하여’ 보존하셨습니다. 그러나 보존되었다는 것이 곧 회복되었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가인은 여전히 ‘놋 땅’, 곧 진리와 선 밖에 있으며, 사랑 대신 신앙이, 의지 대신 이해가 지배하는 뒤집힌 질서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분리된 신앙은 에녹이라는 새로운 가르침을 낳고, 성읍이라는 교리적인 전체를 형성하며, 다시 그 안에서 여러 후속적인 분리들을 낳습니다. 주님께서 신앙을 보존하셨지만 인간은 그 보존된 신앙을 다시 체어리티와 결합시킬 수도 있고, 자기 지성과 proprium을 따라 더 많은 분리를 만들어 내는 데 사용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난주의 ‘가인의 표’를 더욱 깊이 이해하게 합니다. 주님의 보존 섭리는 인간의 자유를 없애는 강제적인 교정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신앙을 보존하시지만 그 신앙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하는 인간의 자유까지 제거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보존된 신앙이 한편으로는 훗날 영적 인간이 체어리티로 돌아가는 통로가 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인의 계열에서처럼 사랑에서 분리된 교리적 세계를 만들어 내는 데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가인의 표’는 가인을 자동으로 에덴으로 돌려보내는 표가 아니라, 인간이 다시 주님의 질서로 돌아올 수 있는 가능성을 보존하는 표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 본문은 AC를 읽고 교리를 공부하는 우리 자신에게 매우 직접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지금 ‘성읍’을 쌓고 있습니다. 말씀을 읽고, AC를 공부하고, 번역하고, 해설하며 수많은 진리를 서로 연결하여 하나의 교리적 이해를 만들어 갑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질문은 ‘우리의 성읍이 얼마나 크고 정교한가?’가 아닙니다. ‘그 성읍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가?’입니다. 더 많은 아르카나를 아는 것이 사랑과 체어리티를 더욱 깊게 하고, 다른 사람을 더 이해하고 섬기게 하며, 주님 앞에서 더 겸손하게 한다면 그 진리는 생명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많이 알수록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우리의 이해를 높이며, 사랑보다 교리적 옳음을 앞세우게 된다면 우리 안에서도 가인이 다시 에녹을 낳고 성읍을 쌓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이번 본문은 교리 자체를 경계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거룩한 예루살렘 역시 ‘성읍’입니다. 진리는 필요하고 교리는 필요하며, 특히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잃은 영적 인간에게 신앙의 지식은 주님께서 체어리티로 인도하시는 중요한 수단입니다. 문제는 교리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그 교리가 사랑에서 나왔는가, 사랑을 섬기는가, 그리고 사람을 다시 사랑으로 인도하는가입니다. 참된 교리는 사랑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지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리는 선을 섬기고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결국 AC.397-404는 지난주의 ‘가인의 표’ 이후에 남은 질문에 답합니다. ‘보존된 신앙은 이제 어떻게 되는가?’입니다. 그 신앙은 에덴 안에 있지는 않지만 에덴 가까이에 있습니다. 사랑과 분리되어 진리와 선 밖에 있지만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보존된 신앙 앞에는 두 방향이 놓입니다. 다시 사랑과 체어리티에 결합되어 주님께서 사용하시는 영적 신앙이 될 수도 있고, 사랑에서 계속 독립하여 자기 가르침과 자기 성읍과 자기 계보를 만들어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AC.397-404의 전체 흐름은 ‘가인의 보존 → 여호와의 얼굴에서 나감 → 진리와 선 밖의 놋 땅 → 에덴 가까이에 남아 있는 신앙 → 사랑 대신 신앙, 의지 대신 이해의 지배 → 가인에게서 에녹의 출생 → 분리된 신앙의 가르침 형성 → 성읍이라는 교리적 전체의 형성 → 하나의 분리에서 여러 분리가 파생되는 계보’로 읽을 수 있습니다. 지난주 본문이 인간의 실패보다 더 깊은 주님의 보존 섭리를 보여 주었다면, 이번 본문은 그 보존된 것을 인간이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신앙을 보존하십니다. 그러나 그 신앙의 참된 목적은 자기만의 성읍을 높이 쌓는 데 있지 않습니다. 보존된 신앙이 다시 사랑을 만나고, 진리가 다시 선과 결합하며, 이해가 다시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섬기게 하는 것, 바로 그것이 가인의 길을 넘어 주님께서 마련하신 영적 질서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이상 요약을 마치고, 아래는 AC 본문, 해설 및 심화입니다.

 

 

AC.397, 창4:16, ‘가인이 에덴 동쪽 놋 땅에 거하다 - 사랑이 지배하던 이해의 마음 가까이에 남은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And Cain went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 and dwelt in the land of Nod, toward the east of Eden. (창4:16) AC.397‘가인이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갔다’(Cain 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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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8, 창4:16, ‘의지 대신 이해가, 사랑 대신 신앙이 지배하다 - 에덴 동쪽에 거한 가인의 속뜻’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창4:16) AC.398‘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가는 것’(go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이 사랑의 신앙에 속한 선에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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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9, 창4:17, ‘가인이 에녹을 낳고 성을 쌓다 - 분리된 신앙이 새로운 교리 체계를 낳다’ (AC.399-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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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0, 창4:17, ‘하나의 이단이 잉태되면 수많은 이단이 태어납니다 - 잉태와 출생과 계보의 속뜻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창4:17) AC.400‘가인이 그의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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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1, 창4:17, ‘에녹이라는 이름은 무엇을 뜻하는가? - 시작되고 형성되기 시작한 교리적 가르침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창4:17) AC.401‘에녹’(Enoch)이라 불린 것은 그 모든 교리적 또는 이단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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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2, 창4:17, ‘성읍은 왜 교리를 의미하는가? - 거룩한 예루살렘에서 가인의 성읍까지’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창4:17) AC.402가인이 ‘쌓은 성읍’(city that was built)이 그 이단에서 나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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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3, 창4:17, ‘왜 창세기 초반은 역사 형식으로 기록되었는가? - 태고인들의 표상적 서술 방식’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창4:17) AC.403이제 우리는 ‘성읍’(city)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살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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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4, 창4:18, ‘가인의 계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 최초의 이단에서 파생된 여러 이단들’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창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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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AC 리딩 본문 전체는 여기까지이고, 이 가운데 필수 리딩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AC.398, 창4:16, ‘의지 대신 이해가, 사랑 대신 신앙이 지배하다 - 에덴 동쪽에 거한 가인의 속뜻’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창4:16) AC.398‘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가는 것’(go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이 사랑의 신앙에 속한 선에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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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2, 창4:17, ‘성읍은 왜 교리를 의미하는가? - 거룩한 예루살렘에서 가인의 성읍까지’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창4:17) AC.402가인이 ‘쌓은 성읍’(city that was built)이 그 이단에서 나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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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3, 창4:17, ‘왜 창세기 초반은 역사 형식으로 기록되었는가? - 태고인들의 표상적 서술 방식’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창4:17) AC.403이제 우리는 ‘성읍’(city)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살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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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9-20(D1)

 

2668, 6, 창4.6, 2026-09-20(D1)-주일예배(창4,16-18, AC.397-404), ‘보존된 신앙은 어디로 가는가, 가인의 성읍 에녹’.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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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9/27, 창4:19-24, AC.405-433), ‘황폐의 끝에서 다시 시작되는 새 교회’

※ 오늘(2026/09/27)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5, ‘하나님의 크신 사랑’, 찬95,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되시며’입니다. 오늘은 창4 절별 주석 그 여섯 번째, 19절로 24절, AC 글 번호로는 405번에서 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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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9/13, 창4:9-15, AC.370-396), ‘가인의 표, 인간의 실패보다 더 깊은 주님의 섭리’

※ 오늘(2026/09/13)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3, ‘영원한 하늘나라’, 찬93, ‘예수는 나의 힘이요’입니다. 오늘은 창4 절별 주석 그 네 번째, 9절로 15절, AC 글 번호로는 370번에서 396번입니다. 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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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창4:18)

 

AC.404

이 모든 이름은 ‘가인’(Cain)이라 불린 최초의 이단에서 파생된 이단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에 관하여는 이름들 외에는 전해지는 것이 없으므로, 그것들에 관하여 무엇인가 말하는 것은 불필요합니다. 그 이름들의 어원으로부터 어느 정도 알 수 있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랏’(Irad)은 그가 ‘성읍에서 내려온다’(descends from a city)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에녹’(Enoch)이라 불린 이단에서 내려왔음을 의미합니다. 다른 이름들도 이와 같습니다. All these names signify heresies derived from the first, which was called “Cain”; but as there is nothing extant respecting them, except the names, it is unnecessary to say anything about them. Something might be gathered from the derivations of the names; for example, “Irad” means that he “descends from a city,” thus from the heresy called “Enoch,” and so on.

 

해설

AC.404는 창4:18에 이어지는 가인의 계보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간결하게 밝혀 줍니다. 가인에게서 에녹이 나왔고, 에녹에게서 이라드가 나왔으며, 그 뒤로 므후야엘, 므드사엘, 라멕이 이어집니다. 문자적 의미에서는 한 가문의 족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이 모든 이름이 ‘가인’이라 불린 최초의 이단에서 파생된 여러 이단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제 가인의 계보는 단순히 여러 세대가 이어지는 혈통이 아니라, 최초의 영적 분리가 계속 다른 형태로 파생되어 가는 하나의 교리적 계보로 읽힙니다.

 

이 설명은 앞의 AC.399-400과 직접 연결됩니다. AC.399에서는 가인이라는 분열 또는 이단이 자기 자신에게서 또 다른 분열을 산출했고 그것이 에녹이라 불렸다고 했습니다. AC.400에서는 그 원리를 더욱 일반화하여 ‘하나의 이단이 잉태되면 거기에서 수많은 이단이 태어납니다’라고 했습니다. AC.404는 바로 그 말이 실제 가인의 계보에서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가인에서 시작된 최초의 분리가 에녹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후의 여러 이름으로 계속 파생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최초의 이단’이라는 표현은 가인의 본래 의미를 다시 기억하게 합니다. 가인은 단순히 어떤 잘못된 교리 하나를 표상한 것이 아니라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상태를 표상했습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이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었고 신앙은 사랑에 속해 있었지만,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에게서는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독립적인 위치를 차지하기 시작했습니다. AC.398의 표현대로 하면 ‘의지 대신 이해가, 사랑 대신 신앙이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최초의 분리에서 이후의 여러 이단이 파생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라드, 므후야엘, 므드사엘 등이 각각 정확히 어떤 교리를 주장했는지 알고 싶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스스로 멈춥니다. ‘그것들에 관하여는 이름들 외에는 전해지는 것이 없으므로, 그것들에 관하여 무엇인가 말하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합니다. 이것은 AC를 읽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해석 태도를 보여 줍니다. 속뜻이 있다고 해서 본문이 제공하지 않는 세부 내용까지 자유롭게 만들어 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스베덴보리는 이름의 의미에서 어느 정도 추론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 예로 ‘이라드’를 듭니다. 이라드라는 이름은 ‘성읍에서 내려온다’는 의미를 가지므로, 속뜻에서는 앞의 ‘성읍’, 곧 에녹이라 불린 이단에서 파생되어 내려온 것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AC.401에서 에녹은 시작되거나 형성되기 시작한 가르침과 연결되었고, AC.402에서 성읍은 교리적인 것 또는 이단적인 것을 의미했습니다. 따라서 이라드가 ‘성읍에서 내려온다’는 것은 앞서 형성된 에녹의 교리적·이단적 상태에서 또 다른 상태가 파생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이렇게 보면 가인의 계보에는 상당히 일관된 흐름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가인이라는 최초의 분리가 있습니다. 그 분리에서 에녹이라는 새로운 이단이 산출됩니다. 에녹은 가르침으로 시작되고 형성되는 상태와 관련되고, 그 이름을 따라 성읍이 세워지면서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가 하나의 형태를 갖춥니다. 그리고 이제 그 ‘성읍’에서 이라드가 내려옵니다. 하나의 분리된 신앙이 가르침이 되고, 그 가르침이 교리적인 전체를 이루며, 그 교리적 전체에서 다시 새로운 형태의 분리가 파생되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AC.404에서 말하는 ‘계보’는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앞의 상태가 뒤의 상태를 낳는 연속성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AC.400에서 이미 말한 ‘잉태와 출생’의 원리와 같습니다. 하나의 교리적 전제가 받아들여지면 그 안에서 다음 결론이 나오고, 그 결론에서 다시 다른 결론이 나옵니다. 처음의 근본 원리가 계속 후속적인 형태들을 산출하면서 하나의 계보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번호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의 절제입니다. 그는 ‘다른 이름들도 이와 같다’고 말할 뿐, 각각의 이름에 대해 상세한 교리적 내용을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이름의 어원에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을 뒷받침할 내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상응을 다룰 때도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상응은 무엇이든 마음대로 영적 의미를 붙이는 작업이 아니라, 말씀 자체와 AC의 설명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이 점은 앞의 AC.403과도 잘 연결됩니다. 태고인들은 영적인 것들을 ‘표상적 유형들’ 아래 ‘역사 형식’으로 배열했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계보에 등장하는 이름들도 영적인 상태들의 연속을 역사적 족보의 형태로 나타냅니다. 그러나 표상적 역사라고 해서 모든 이름의 세부 의미가 우리에게 자동으로 열리는 것은 아닙니다. 속뜻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우리가 그 속뜻의 모든 세부를 알고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AC.404는 한편으로는 매우 강하게 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조심스럽게 말합니다. 강하게 말하는 것은 ‘이 모든 이름은 가인이라는 최초의 이단에서 파생된 이단들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조심스럽게 말하는 것은 ‘각각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이름 외에는 자료가 없으므로 자세히 말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 두 태도를 함께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교리 이해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잘못된 근본 원리는 여러 후속적인 오류를 낳을 수 있습니다. 특히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진리를 선한 삶에서 분리하며, 이해를 사랑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시키는 원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교리적 형태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가 역사 속의 모든 교리나 교파를 임의로 가인의 어느 후손과 연결해서는 안 됩니다. AC.404 자체가 그런 과도한 추정을 경계하게 합니다.

 

오히려 가인의 계보를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면 더욱 유익합니다. 하나의 잘못된 원리를 받아들였을 때 그것이 어떤 후속적인 생각들을 낳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옳다는 것이 사랑하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원리가 마음에 자리 잡으면, 거기서 상대를 판단하는 생각이 나오고, 그 판단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생기며, 마침내 사랑하지 않는 행동까지도 옳다고 설명하는 하나의 내적 ‘성읍’이 세워질 수 있습니다. 하나의 분리가 그 자체에서 후손을 낳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거듭남의 역사에서는 그 반대도 가능합니다. 잘못된 근본 원리가 발견되고 그것을 악으로 인정하여 피할 때, 주님께서는 진리를 다시 선과 결합시키십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를 섬기게 되고, 이해는 자기 지성에서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표현하는 수단이 됩니다. 가인의 계보를 읽는 목적은 단순히 옛 이단의 역사를 분류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신앙과 사랑의 질서가 어떻게 유지되거나 무너지는지를 보는 데 있습니다.

 

결국 AC.404는 가인의 후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상세히 해독하려 하기보다 그 계보 전체의 성격을 먼저 붙들게 합니다. 그들은 모두 ‘가인’이라 불린 최초의 이단에서 파생된 이단들을 나타냅니다. 이라드가 ‘성읍에서 내려온다’는 이름으로 에녹의 이단에서 파생된 상태를 보여 주듯, 뒤의 이름들도 같은 계보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세부 내용이 주어지지 않은 곳에서는 멈추어야 합니다. 말씀의 속뜻을 깊이 읽는 것과 말씀보다 앞서 나가는 것은 다른 일이기 때문입니다. AC.404는 바로 그 두 가지를 함께 가르쳐 주는 번호입니다. (AC.404 해설)

 

 

 

AC.405, 창4:19, ‘라멕에게서 신앙이 소멸하고 새 교회가 일어나다 - 아다와 씰라의 속뜻’ (AC.405-41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창4:19) AC.405가인으로부터 순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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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3, 창4:17, ‘왜 창세기 초반은 역사 형식으로 기록되었는가? - 태고인들의 표상적 서술 방식’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창4:17) AC.403이제 우리는 ‘성읍’(city)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살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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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1 심화

1. 창4의 ‘에녹’과 창5의 ‘에녹’은 같은 의미인가?

 

AC를 처음 읽는 분에게는 여기서 매우 자연스러운 혼란이 생길 수 있습니다. 창4에도 ‘에녹’이 나오고 창5에도 ‘에녹’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창4의 에녹은 가인의 아들이고, 창5의 에녹은 야렛의 아들이며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고 기록된 인물입니다. 이름은 같지만 스베덴보리가 두 에녹에게 부여하는 속뜻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창4의 에녹은 AC.331에서 매우 간단하게 정의됩니다. ‘이 이단의 확장을 에녹이라 합니다.’ 여기서 ‘이 이단’은 가인으로 표상된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입니다. 따라서 창4의 에녹은 가인이라는 분리된 신앙의 교리적 상태가 더 전개되고 확장된 것을 나타냅니다.

 

반면 창5의 에녹은 전혀 다른 문맥에서 설명됩니다. 그곳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퍼셉션으로 알게 된 것들을 모아 교리적 지식으로 정리하고 보존한 상태와 에녹을 연결합니다. 그러므로 창4의 에녹과 창5의 에녹을 단지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같은 상응이나 같은 교회적 상태라고 볼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은 말씀의 속뜻을 읽을 때 매우 중요한 원리를 보여 줍니다. 상응은 단순한 암호표가 아닙니다. ‘에녹이라는 이름은 언제나 하나의 뜻’, ‘성은 언제나 하나의 뜻’, ‘물은 언제나 하나의 뜻’이라고 기계적으로 대입하여 해독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의 어떤 인물과 사물과 장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그것이 놓인 전체 문맥과 계열, 그리고 그 앞뒤에서 설명되는 영적 상태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따라서 같은 이름이 두 번 등장한다고 해서 반드시 같은 상태를 뜻하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이름이 다르다고 해서 전혀 관계없는 상태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각각의 문맥에서 그 이름을 어떤 교회적 또는 영적 상태와 연결하는가입니다. 창4의 에녹은 가인의 계열 안에서 읽어야 하고, 창5의 에녹은 그 장에서 전개되는 태고교회의 계승과 퍼셉션의 변화라는 문맥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이 점은 창4와 창5의 계보를 읽는 방식에도 중요한 도움을 줍니다. 두 장을 단순히 하나의 시간표로 이어 붙여 ‘누가 누구와 정확히 같은 시대에 살았는가’를 재구성하는 데 초점을 두기보다, 각 계보가 어떤 교회와 교리의 상태 변화를 보여 주는지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해설에서 중심은 생물학적 연대 계산이 아니라 교회적 상태의 계승과 변화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창4와 창5의 두 계열이 역사적으로 정확히 어떻게 병행되었는지를 AC.331만으로 확정할 수도 없습니다. 속뜻에서 서로 다른 교회적 계열과 상태를 읽을 수 있다는 것과, 각각의 세대가 시간적으로 정확히 일대일 대응하여 동시에 존재했다고 말하는 것은 서로 다른 주장입니다. 그러므로 ‘두 계열이 같은 태고교회 시대의 서로 다른 흐름을 보여 준다’는 큰 그림은 가능하지만, 그것을 세밀한 연대표처럼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두 에녹의 차이를 가장 간단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창4의 에녹은 ‘분리된 신앙의 교리가 더 확장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반면 창5의 에녹은 ‘태고교회의 퍼셉션으로 알려진 것들을 수집하여 교리적으로 보존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하나는 이미 일어난 분리가 더 전개되는 방향이고, 다른 하나는 사라져 가는 퍼셉션의 지혜를 보존하는 방향입니다.

 

그러므로 두 에녹에게 공통적으로 ‘교리적인 것’과 연결되는 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교리의 성격과 기능은 매우 다릅니다. 창4에서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더욱 발전하는 쪽이고, 창5에서는 퍼셉션으로 받은 것을 잃지 않도록 모아 보존하는 쪽입니다. 같은 이름이지만 서로 다른 교회적 상태를 표상하는 좋은 사례입니다.

 

이 차이는 오늘 우리가 교리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에도 의미 있는 통찰을 줍니다. 교리화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교리화하며 무엇을 위해 보존하는가입니다. 생명에서 분리된 진리를 체계화할 수도 있고, 반대로 주님께 받은 선과 진리를 다음 상태를 위해 충실하게 보존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교리가 있는가 없는가’가 아니라 그 교리가 어떤 사랑과 결합되어 있으며 어떤 쓰임을 위해 존재하는가입니다.

 

따라서 창4와 창5의 두 에녹은 오히려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하나는 분리가 굳어지고 확장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 주고, 다른 하나는 사라져 가는 퍼셉션의 지혜를 교리적으로 보존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말씀의 속뜻을 읽을 때 이름 자체보다 문맥과 계열, 그리고 그 교리가 생명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는 것을 잘 보여 줍니다.

 

 

 

AC.331, 창4:17, 에녹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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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lled the name of the city after the name of his son, Enoch. (창4:17)

 

AC.331

이 이단의 확장을 ‘에녹’(Enoch)이라 합니다. (17절) The amplification of this heresy is called “Enoch.” (verse 17)

 

해설

AC.331은 매우 짧은 한 문장이지만, 창4의 계보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중요한 글입니다. 창4:17에는 ‘가인이 그의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문자적으로는 가인의 아들 에녹의 출생을 말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속뜻에서 ‘에녹’을 앞에서 ‘가인’이라 한 이단이 더 확장된 상태로 봅니다. 그래서 AC.331은 단순히 ‘에녹은 누구인가?’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가인으로 표상된 분리된 신앙의 교리가 이후 어떻게 더 전개되는지를 보여 주는 첫 계보적 표지를 제시합니다.

 

여기서 ‘이 이단’은 앞의 AC.324-325에서 이미 설명된 것입니다. AC.324에서는 창4에서 교회로부터 분리된 교리들, 곧 이단들을 다룬다고 했고, AC.325에서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를 ‘가인’이라 했습니다. 따라서 AC.331의 ‘이 이단의 확장’은 새로운 종류의 이단이 갑자기 등장했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가인으로 시작된 분리된 신앙의 상태가 더 진행되고 전개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점은 창4의 계보를 단순한 생물학적 족보로만 읽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스베덴보리의 속뜻에서는 이러한 ‘낳음’과 계승이 교회와 교리의 상태가 어떻게 하나에서 다른 것으로 이어지는지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이 에녹을 낳았다’는 말씀은 속뜻에서 가인으로 표상된 교리적 상태로부터 또 하나의 발전된 상태가 생겨났다는 식으로 읽게 됩니다.

 

다만 ‘확장’이라는 말을 오늘날 어떤 이단 단체가 사람을 많이 모으고 조직을 넓혔다는 뜻으로 곧바로 옮겨서는 안 됩니다. AC.331 자체는 그런 외적 조직 확대를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리적 상태의 전개입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원리가 그대로 머물지 않고 더 펼쳐지고 형성되어 가는 과정이 ‘에녹’으로 불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의 흐름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AC.325에서는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었고, AC.326에서는 그 분리가 예배에 나타났으며, AC.327에서는 그 상태가 악해졌습니다. AC.328에서는 체어리티가 여전히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했지만, AC.329에서 결국 체어리티가 소멸되었습니다. 그리고 AC.330에서는 그 결과 교리가 왜곡되고 거짓과 악이 생겨났지만, 장차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다시 심어질 수 있도록 신앙 자체는 보존되었습니다. 이제 AC.331에서는 그 보존된 신앙이 당시의 분리된 상태 그대로 여러 형태로 더 전개되는 과정이 시작됩니다.

 

이 점에서 ‘보존’과 ‘승인’을 다시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AC.330에서 주님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어 신앙을 보존하셨다고 해서, 가인으로 표상되는 분리된 신앙의 상태 자체가 옳다고 인정된 것은 아닙니다. 신앙이 장차 체어리티를 다시 심는 통로가 되어야 했기 때문에 신앙에 속한 것이 소멸되지 않도록 보존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보존된 신앙은 곧바로 본래의 질서로 회복된 것이 아니라, 창4의 이어지는 계보에서 여러 교리적 상태로 더 전개됩니다. 그 첫 번째가 에녹입니다.

 

따라서 AC.331의 ‘에녹’은 가인과 전혀 별개의 새로운 시작이라기보다 가인 안에 있던 원리가 한 단계 더 확장된 상태라고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이것이 창4의 계보가 단순한 가족사가 아니라 교회와 교리의 상태 변화로 읽히는 이유입니다. 이후 등장하는 이름들도 각각 앞선 상태에서 파생된 또 다른 교리적 상태들을 나타내게 됩니다.

 

다만 여기서 ‘에녹’이라는 이름 자체가 언제나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창5에도 에녹이 등장하지만 그 에녹은 전혀 다른 문맥과 계열 안에서 설명됩니다. 말씀의 속뜻은 ‘에녹 = 언제나 이것’이라는 고정된 암호표를 적용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같은 이름이라도 그것이 놓인 문맥과 계열, 그리고 그 이름이 표상하는 교회적 상태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AC.331의 핵심은 단순합니다. 가인으로 표상된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는 그 자리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더 확장되고 전개되었으며, 그 첫 상태를 ‘에녹’이라 합니다. 창4의 계보는 이제부터 바로 그 분리된 신앙이 이후 어떤 교리적 형태들로 발전해 가는지를 추적하게 합니다.

 

이 짧은 한 문장은 오늘 우리의 신앙을 돌아볼 때에도 하나의 경고를 줍니다. 어떤 잘못된 분리는 작은 생각으로 시작될 수 있지만, 그것이 계속 유지되면 점차 설명과 논리를 얻고 하나의 확고한 체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어떤 교리가 얼마나 잘 정리되어 있는가만이 아니라, 그 교리가 여전히 선과 진리, 신앙과 체어리티의 올바른 결합 안에 있는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심화

1. 창4의 ‘에녹’과 창5의 ‘에녹’은 같은 의미인가?

 

AC.331 심화 1, 창4의 ‘에녹’과 창5의 ‘에녹’은 같은 의미인가?

AC.331 심화1. 창4의 ‘에녹’과 창5의 ‘에녹’은 같은 의미인가? AC를 처음 읽는 분에게는 여기서 매우 자연스러운 혼란이 생길 수 있습니다. 창4에도 ‘에녹’이 나오고 창5에도 ‘에녹’이 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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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2, 창4:18, 라멕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창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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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0, 창4:10-16, 창4:10-16 전체의 속뜻

10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And he said, What hast thou done? The voice of thy brother’s bloods crieth to me from the ground. 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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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AC.464

‘에녹’(Enoch)이라 하는 교회는 태고교회에 계시되고 그 교회가 퍼셉션한 것들로부터 교리를 형성한 것으로 묘사됩니다. 이 교리는 당시에는 쓸모가 없었지만 후대의 쓰임을 위해 보존되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에녹이 더 이상 있지 아니하였으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기 때문이라’(Enoch was no more, because God took him)고 한 것입니다. (22-24절) The church called “Enoch” is described as framing doctrine from what was revealed to and perceived by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doctrine, although of no use at that time, was preserved for the use of posterity.This is signified by its being said that “Enoch was no more, because God took him.” (verses 22–24)

 

22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22-24절)

 

해설

AC.464는 앞의 AC.463에서 일곱 번째 교회로 제시된 ‘에녹’이 다른 교회들과 구별되는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보여 줍니다. 에녹이라 하는 교회는 태고교회에 계시되고 그 교회가 퍼셉션한 것들을 모아 ‘교리’로 형성하였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에녹이 새로운 진리를 스스로 만들어 냈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태고교회가 주님으로부터 계시받고 퍼셉션을 통해 알았던 것들을 일정한 교리 형태로 정리한 것입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의 상태와 이후 교회의 상태가 달라지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태고교회는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교리로 배워서 아는 교회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 안에서 그것을 퍼셉션하던 천적 교회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퍼셉션이 살아 있던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이 이미 내적으로 알고 있는 것을 따로 교리 형태로 정리하여 배우는 일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AC.464가 에녹이 형성한 교리가 ‘당시에는 쓸모가 없었다’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교리는 ‘후대의 쓰임을 위해’ 보존되었습니다. 이 짧은 표현 안에는 교회의 상태가 앞으로 달라질 것이라는 사실이 들어 있습니다. 태고교회와 같은 퍼셉션이 계속 유지된다면 별도의 교리가 필요하지 않았겠지만, 그것이 사라져 갈 때에는 이전에 퍼셉션으로 알았던 것들을 다른 방식으로 보존하고 전달할 필요가 생깁니다. 에녹이라 하는 교회가 한 일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살아 있는 퍼셉션으로 받아들였던 것들을 교리 형태로 남김으로써 후대가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교리’는 퍼셉션을 대신하여 에녹이 만들어 낸 인간적인 사상이 아닙니다. 그 근원은 여전히 주님으로부터 태고교회에 계시되고 퍼셉션된 것들입니다. 다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교회의 상태가 달라짐에 따라, 이전에는 내적으로 직접 퍼셉션하던 것이 이제는 가르치고 배우며 보존할 수 있는 형태로 옮겨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에녹은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이후 교회가 사용할 교리 사이에 놓인 중요한 전환점을 보여 줍니다.

 

이와 연결되는 말씀이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입니다. 장 개요에서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에녹이라는 교회가 형성한 교리가 ‘후대의 쓰임을 위해 보존되었다’는 뜻으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다’는 말씀은 장 개요의 속뜻으로는 에녹이라는 교회의 역할과 그 교리가 보존된 일을 가리킵니다. 이 표현의 보다 구체적인 의미는 뒤의 본문 해설에서 다시 자세히 다루어집니다.

 

AC.464에서 특히 눈여겨볼 것은 주님께서 한 교회의 상태가 변해 가는 가운데서도 다음 시대에 필요한 것을 미리 보존하신다는 점입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은 계속 같은 방식으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그들에게 계시되고 퍼셉션된 것이 함께 사라지도록 두지 않으셨습니다. 에녹이라 하는 교회를 통하여 그것을 교리 형태로 보존하여 후대의 쓰임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에녹의 이야기는 단순히 한 교회의 상태만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상태가 달라질 때에도 진리가 다음 세대에 전달될 길을 마련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함께 보여 줍니다. (AC.464 해설)

 

심화

‘에녹이 보존한 교리는 후대의 고대 말씀과 모세의 창세기 기록에 어떻게 이어졌는가?’

 

AC.464 심화, ‘에녹이 보존한 교리는 후대의 고대 말씀과 모세의 창세기 기록에 어떻게 이어졌는

AC.464 심화‘에녹이 보존한 교리는 후대의 고대 말씀과 모세의 창세기 기록에 어떻게 이어졌는가?’ AC.464는 ‘에녹’이라 하는 교회가 태고교회에 계시되고 그 교회가 퍼셉션한 것들로부터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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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65, 창5, ‘라멕은 아홉 번째 교회이다’

개요 AC.465 아홉 번째 교회를 가리켜 ‘라멕’(Lamech)이라 하였습니다. (25절) A ninth church was called “Lamech.” (verse 25) 25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25절) 해설AC.465는 앞에서 이어져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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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63, 창5, ‘에노스에서 므두셀라까지 이어지는 교회들’

개요 AC.463세 번째 교회를 가리켜 ‘에노스’(Enosh)라 하였고(6절), 네 번째는 ‘게난’(Kenan)(9절), 다섯 번째는 ‘마할랄렐’(Mahalalel)(12절), 여섯 번째는 ‘야렛’(Jared)(15절), 일곱 번째는 ‘에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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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AC.463

세 번째 교회를 가리켜 ‘에노스’(Enosh)라 하였고(6절), 네 번째는 ‘게난’(Kenan)(9절), 다섯 번째는 ‘마할랄렐’(Mahalalel)(12절), 여섯 번째는 ‘야렛’(Jared)(15절), 일곱 번째는 ‘에녹’(Enoch)(18절), 그리고 여덟 번째 교회는 ‘므두셀라’(Methuselah)라 하였습니다(21절). A third church was called “Enosh” (verse 6); a fourth “Kenan” (verse 9); a fifth “Mahalalel” (verse 12); a sixth “Jared” (verse 15); a seventh “Enoch” (verse 18); and an eighth church “Methuselah” (verse 21).

 

6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9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12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15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18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21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6, 9, 12, 15, 18, 21절)

 

해설

AC.463은 앞의 AC.461-462에서 시작된 창5의 구조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천적이었던 태고교회 자체에 이어 ‘셋’이 두 번째 교회로 제시되었고, 이제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가 각각 세 번째에서 여덟 번째 교회로 차례로 제시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이름들을 단순히 족보에 나열된 이름으로 다루지 않고, 각각 하나의 교회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AC.463에서는 ‘세 번째 교회’,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일곱 번째’, ‘여덟 번째 교회’라고 순서를 분명하게 밝힙니다. 이것은 AC.460에서 말한 태고교회의 ‘이어지는 여러 세대’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문자상으로는 한 이름 다음에 다른 이름이 이어지는 족보의 형식이지만, 속뜻으로는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지는 교회들이 차례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이름들을 단순히 서로 다른 명칭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각각이 교회의 서로 다른 상태를 나타낸다는 점입니다. 앞의 AC.462에서 이미 ‘셋’은 태고교회만큼 천적이지 않았던 두 번째 교회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차례로 이어진다고 해서 그 상태까지 그대로 반복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지면서도 각각의 교회에는 그에 해당하는 상태가 있었으며, 창5는 그 연속적인 변화를 이름들의 계승을 통하여 보여 줍니다.

 

다만 AC.463은 아직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가 각각 구체적으로 어떠한 상태의 교회였는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우선 그 이름들이 세 번째부터 여덟 번째까지 이어지는 교회들을 가리킨다는 전체 구조를 제시합니다. 각 교회의 구체적인 성격과 차이는 뒤의 본문 해설을 따라가면서 하나씩 드러나게 됩니다. 따라서 장 개요 단계에서는 그 의미를 미리 채워 넣기보다, 스베덴보리가 먼저 제시하는 순서와 구조를 정확하게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보면 창5의 반복되는 이름들은 단순한 나열이 아닙니다. ‘에노스’에서 ‘므두셀라’에 이르기까지 이름이 바뀔 때마다 속뜻으로는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진 교회의 한 상태가 다음 상태로 넘어갑니다. 따라서 창5를 읽으면서 각각의 이름을 만날 때에는 ‘이 이름은 어떤 교회를 가리키며, 그 교회의 상태는 앞선 교회와 어떻게 다른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이후의 해설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AC.463은 짧은 한 문장 안에 창5의 상당 부분을 한꺼번에 펼쳐 놓습니다. 태고교회에서 시작하여 ‘셋’을 거친 흐름이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에 이르기까지 계속됩니다. 그러므로 창5의 족보를 따라간다는 것은 속뜻으로는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진 여러 교회의 상태와 그 변화를 차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AC.463은 앞으로의 본문 해설에 들어가기 전에 그 전체적인 흐름을 한눈에 보여 주는 장 개요입니다. (AC.463 해설)

 

 

 

AC.464, 창5, ‘에녹은 태고교회의 계시와 퍼셉션으로부터 교리를 형성한 교회이다’

개요 AC.464‘에녹’(Enoch)이라 하는 교회는 태고교회에 계시되고 그 교회가 퍼셉션한 것들로부터 교리를 형성한 것으로 묘사됩니다. 이 교리는 당시에는 쓸모가 없었지만 후대의 쓰임을 위해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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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62, 창5, ‘셋은 태고교회만큼 천적이지 않았던 두 번째 교회이다’

개요 AC.462태고교회만큼 천적이지는 않았던 두 번째 교회를 가리켜 ‘셋’(Seth)이라 하였습니다. (2-3절) A second church which was not so celestial as the most ancient church is called “Seth.” (verses 2–3) 2남자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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