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창세기 5장 두 번째 시간, 4절로 20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4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6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7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8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9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10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1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12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13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4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15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16야렛을 낳은 후 팔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7그는 팔백구십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18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19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0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5:4-20)

 

이 본문을

 

아담,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라는 제목으로 말씀 준비했습니다. 오늘 말씀에 주님이 빛을 비추셔서 이 시간 우리 영과 육이 활짝 열려 모두 들을 귀 만들어 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인 오늘 우리는 어떤 일에 대한, 어떤 상황에 대한 주님의 뜻을 어떻게 아나요? 보통은 기도 응답을 받기 위해 금식을 하거나 안수를 받거나, 아니면 여러 날 산에 올라 소위 산기도를 하거나 합니다. 성경 읽기도 하고, 목사님을 찾아가 상담을 하거나 무슨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이라는 책도 보고, 유튜브 등을 찾아보는 등 사안의 중요성이나 심각성에 따라 할 수 있는 모든 걸 합니다. 인생의 중요한 것들이지요, 보통 결혼에 대하여, 직장, 직업에 대하여, 거주지에 대하여 등 말입니다. 비슷한 노력을 비기독교인들은 점집을 찾거나 사주를 보는 등 저마다 자기들의 방식으로 애들을 씁니다. 왜들 이럴까요? 잘 모르겠어서이지요 주님의 뜻을 잘 모르겠어서 그러는 겁니다. 비기독교인들의 경우는 신의 뜻을 잘 모르겠어서라고 하겠네요. 이상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기독교인인데 왜 우리가 주님이라고 부르는 그 분의 뜻을 잘 모르는 걸까요?

 

한편으로, 그런데 여러분, 좀 우스갯소리일 수도 있지만, 그럼 천국 천사들도 주님 뜻 알기 위해 우리처럼 금식기도 하고 그럴까요? 이건 질문 자체가 좀 이상하지요? 네, 맞습니다. 천사들은 지상에 사는 우리가 하는 이런 거 안 할 거 같아요. 아니, 안 합니다. 왜죠? 천사들은 주님의 뜻을 즉시, 그리고 또렷이 알기 때문입니다. 안 그러면 그건 천사가 아니지 않을까요? 네, 맞습니다. 천국의 천사들은 우리처럼 이런 거 안 합니다. 안 하고도 늘 주님의 뜻을 즉시, 그리고 또렷이 압니다. 그리고 우리와는 다르게 그들은 알게 된 그 주님의 뜻을 마음을 다해 즉시 기쁘고 즐겁게 실행에 옮깁니다. 그들이 주님의 뜻을 순종, 즉시 실행에 옮길수록 그만큼 더 그들은 더욱더 주님의 뜻을 더 잘 알게 됩니다. 그들은 100% 주님 뜻대로만 삽니다. 그것도 기쁘고 즐겁게 자원하여 삽니다. 천사들과 주님은 서로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쌍방은 내 것이 모두 네 것 되기를 진심으로 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천사들의 이런 차이는 어디서 오는 걸까요? 즉 천사들은 즉시 아는데 우리는 왜 모를까요? 이것이 바로 퍼셉션의 차이입니다. ‘퍼셉션(perception)이란, 어떤 일과 상황에 대한 주님의 뜻, 곧 그 일, 그 상황에 대한 그분의 선과 진리를 아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알게 된 주님의 선과 진리를 실천, 거기서 오는 기쁨과 즐거움 안에 머무르는 능력입니다. 어떤 일에 대한 주님의 뜻을 안다는 건, 그 일을 주님의 진리 안에서 실천하여 주님의 선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즉, 내가 이 일을 어떻게 해야 주님이 기뻐하실까? 내가 이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일까? 를 아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13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5:13-16)

 

주님의 이 마태복음 말씀처럼 우리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며,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퍼셉션 능력입니다. 우리와 천사의 차이가 바로 이 차이입니다. 이 퍼셉션이라는 능력은 각 사람의 ‘착한 행실’만큼 생깁니다. 그리고 이 ‘착한 행실’은 세상 속에서, 그러니까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이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즉, 세상을 향해 주님의 빛을 비추며, 세상에 필요한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우리가 감당하면 할수록 주님은 우리에게 주님의 뜻을 천사들처럼 쉽게 알게 하십니다. 퍼셉션이 또렷해지는 것이지요. 우리와 천사들의 퍼셉션 차이는 바로 여기에서 오는 것입니다. 천사들은 주님 뜻을 알면 즉시 순종하는 반면, 우리는 그러지 않거든요. 저들은 주님 뜻 실천하는 일에 조금도 주저하거나 망설임이 없는데 우리는 안 그러거든요. 그래서 저들은 또렷하지만 우리는 희미하며, 저들은 생생하지만 우리는 흐릿한 것입니다. 이런 것이 퍼셉션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저 이름들의 순서는 바로 이 퍼셉션이 또렷한가, 흐릿한가의 순서입니다. 저 이름들, 그러니까 아담,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이라는 이름은, 그리고 뒤에 더 나오는 므두셀라, 라멕, 그리고 노아까지, 이 이름들은 사실은 어느 한 개인들의 이름이 아니라 해당 시대를 관통하던 퍼셉션의 이름들입니다. 즉 첫 사람 아담 시대를 이끌던 퍼셉션을 일컬어 ‘아담(Adam, 사람)이라 이름한 것이며, 이런 퍼셉션으로 살던 사람들을 가리켜 ‘아담’ 교회라고 하는 것이지요. ‘(Seth), ‘에노스(Enosh)도... 등등,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첫 교회인 아담의 퍼셉션만 제일 온전했고, 이후 갈수록 점점 더 모호하고 흐릿해져 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담으로 갈수록 퍼셉션은 온전하여 어떤 일에 대한 주님의 뜻을 즉시, 그리고 분명하게 알은 반면, 반대로 에녹, 므두셀라를 거쳐 라멕에 이르러서는 거의 사라졌다는 것이지요. 이 중 이 에녹은 특별한데, 이 에녹 이야기는 다음 주에 다룰 예정입니다. 기대해 주세요.

 

이런 퍼셉션의 온도차는 비유하자면, 한 가운데 씨앗이 있는 과일과도 같고, 방 한가운데 전구가 환하게 켜져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과일의 중심으로 갈수록 근원이지만, 반대로 바깥 껍질 쪽으로 갈수록 근원에서 멀어지는 것과 같고, 방 한가운데로 갈수록 빛이 환하지만, 반대로 멀어질수록 빛이 흐릿해지는 것과도 같은 것처럼 말입니다. 천적 인간이요, 안식일이고, 일곱째 날이었던 아담으로 갈수록 퍼셉션은 온전한 반면, 반대로, 즉 후손, 후대로 갈수록 흐릿해진 이유는, 아담으로 갈수록 선과 진리는 하나, 곧 앎은 삶을 섬겼던 반면, 그 반대 순서로 갈수록 진리는 선에서 분리되어 앎이 삶을 누르고 머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신앙(faith)이 체어리티(charity)의 머리가 되었기 때문이지요. 원래대로라면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겨 체어리티가 입고 다니는 옷이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신앙은 단지 그릇일 뿐이고, 정작 중요한 건 거기 담긴 내용인 체어리티여야 하는데 말입니다.

 

세상 종말은 다른 게 아닙니다. 세상을 떠받치는 건 창조주이신 주님의 신성, 곧 주님의 선과 진리인데 이것이 남김없이 다 사라진 상태, 그래서 더 이상 퍼셉션이 없는, 완전히 끊긴 상태가 바로 끝, 곧 종말이요, 최후의 심판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는 한편으로는 새로운 시작입니다. 주님은 항상 각 교회 시대든, 한 국가, 한 개인이든 종말이 오기 전까지는 무슨 새로운 걸 시작하시지 않습니다. 완전히 황폐해져야, 그래서 완전히 자기를 비워내야 그 빈 그릇에 주님의 새것을 담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래 누가복음 둘째 아들 이야기는 바로 이 이야기입니다.

 

13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15:13-20)

 

우리는 우리의 무슨 신앙 연수와 상관없이 갈수록 주님의 선과 진리를 즉시, 그리고 생생하게 아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굳이 인생의 바닥까지 내려가서 깨닫지 말고 웬만하면 그런 무슨 조짐이 보이면 얼른 돌이켜 그 무한 루프, 그 끝없이 되풀이되는 그 악한 패턴에서 탈출하시기 바랍니다. 탈출이란, 위 누가복음 본문 맨 마지막 말씀처럼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 곧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 내 생각, 내 판단, 내 선택 등 내가 끌어다 쓸 수 있는 모든 것이 다 바닥난 후, 드디어 주님을 찾는 것이지요. 이때 반드시 위 둘째 아들처럼 ‘스스로 돌이키는’ 시간, 곧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는 시간이 꼭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 말씀을 저는 오늘 설교로 여러분께 드리고 있지만, 사실은 지난날 제 얘기를 주님 앞에 말씀드리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설교

2026-01-11(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633, 26. 창5.2, 2026-01-11(D1)-주일예배(창5,4-20, AC.486-515), ‘아담,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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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1/04, 창5:1-3, 신년예배, 성찬), '창5 아담 계보의 속뜻'

2026년 첫 주일입니다. 보통은 신년 주일이라 하여 설교도 그에 맞게 준비하지만, 저희는 당분간 아주 특별한 절기 외에는 오직 이 AC에만 전념하기로 한 점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부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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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첫 주일입니다. 보통은 신년 주일이라 하여 설교도 그에 맞게 준비하지만, 저희는 당분간 아주 특별한 절기 외에는 오직 이 AC에만 전념하기로 한 점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부터는 창세기 5장입니다. 오늘부터 6주에 걸쳐 창세기 5장을 살피게 되며,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 1절로 3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1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2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3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5:1-3)

 

위 본문을 아래

5 아담 계보의 속뜻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겉으로 보면 무슨 가계 족보의 서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성경 전체에서 인간이 무엇이며 교회가 무엇인지를 가장 압축적으로 선언하는 대목입니다. ‘아담의 계보’라는 말로 시작하지만, 이는 한 개인의 혈통 기록이 아니라, 태고교회라는 최초의 교회 상태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다음 상태로 넘어갔는지를 말해 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인간의 기원이 아니라, ‘사람됨의 기원’, 곧 교회의 기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전혀 새로울 수 있는 이 관점을 아래 세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성경이 말하는사람은 개인이 아니라 교회입니다

 

본문은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어떤 한 사람의 족보를 떠올리지만, 곧바로 이어지는 말씀은 그 기대를 깨뜨립니다. 바로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히브리어 ‘아담(אָדָם, Adam)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사람’을 뜻하는 말이며, 성경은 이 ‘사람’을 단수로 말하면서도 동시에 복수로 취급합니다. 이는 분명히 어떤 한 개인,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인류 최초의 인간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닌 것이지요.

 

성경에서 ‘사람’은 언제나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형성된 상태를 뜻합니다. 신앙과 사랑이 결합한 상태, 다시 말해 교회가 존재할 때, 그 상태를 성경은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태고교회는 곧 ‘사람’이었고, 그 교회에 속한 이들은 개인이기 이전에 교회의 일부였습니다. 그들의 사고, 사랑, 퍼셉션(perception), 삶 전체가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이 ‘아담의 계보’로 시작하는 것은, 인간 개인의 계보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교회 상태의 계승’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이 얼마나 오래 살았는가’보다, ‘그 이름으로 불리던 교회가 어떤 상태로 얼마나 오래 이어졌는가’를 기록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본문을 읽으며, 나 자신을 한 개인으로 보기보다, 지금 나는 어떤 교회 상태에 서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모양은 즉각적 퍼셉션의 삶을 뜻합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인간이 외적으로 하나님을 닮았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살도록 지어졌다’는 뜻입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참인지를 배움과 학습을 통해서 알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랑 안에서 즉각적으로 인식, 곧 지각(perception, 퍼셉션)했습니다. 이것을 스베덴보리는 ‘퍼셉션’이라 부릅니다. 아래는 관련 설명입니다.

 

스베덴보리는 AC.483에서 창세기 5장에 나열된 이름들, 곧 ‘셋’(Seth), ‘에노스’(Enosh), ‘게난’(Kenan), ‘마할랄렐’(Mahalalel), ‘야렛’(Jared), ‘에녹’(Enoch), ‘므두셀라’(Methuselah), ‘라멕’(Lamech), ‘노아’(Noah)라는 이름들을 다시 한번 분명히 정리합니다. 셋에서 노아에 이르는 모든 이름들은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각각 하나의 ‘교회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교회들 가운데 첫째이자 중심이 되는 교회를 ‘사람’이라 했습니다. 이는 앞서 여러 차례 보았듯이, 태고교회가 주님의 모양과 형상을 가장 온전하게 반영했던 교회였기 때문이지요. 이후에 나오는 모든 교회들은 이 ‘사람’의 상태에서 파생된 변형들이었습니다.

 

이 교회들의 가장 중요한 공통 특징은 바로 ‘퍼셉션’(perception)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퍼셉션이란, 지식이나 판단 능력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진리를 즉각적으로 알아보는 내적 지각’을 의미합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선한지를 배워서 알지 않았고, 명령을 통해 분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랑 안에서 곧바로 퍼셉션, 곧 지각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시대 교회들 사이의 차이는 교리의 차이나 제도의 차이가 아니라, ‘퍼셉션의 차이’였습니다.

 

이 퍼셉션의 삶은 율법 이전의 삶이었고, 교리 이전의 삶이었습니다. 옳고 그름을 따로 계산하지 않아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마음으로 직관적으로 알았던 삶입니다. 그래서 태고교회는 규범 중심의 교회가 아니라, ‘사랑 중심의 교회’였습니다.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말은, 인간이 그와 같은 질서 안에 놓였다는 선언입니다.

 

그러나 이 모양은 자동적으로 유지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자유가 있었기 때문에, 이 퍼셉션의 삶은 점차 약해졌고, 결국 다른 방식의 교회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먼저 이 가장 완전한 상태를 제시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인간 창조의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상태에 이르지 못할지라도, 성경은 여전히 그 방향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셋째, ‘셋을 낳았다는 것은 새로운 교회가 세워졌음을 뜻합니다

 

본문 3절에서 갑자기 시간이 흐르고, 아담이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Seth)이라 부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오해하기 쉽습니다. 마치 한 사람이 나이 들어 아들을 낳은 것처럼 읽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새로운 교회 상태의 출현’을 말합니다.

 

태고교회의 완전한 퍼셉션의 상태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고, 주님께서는 그 리메인스(remains)를 보존하시어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셨습니다. 그 교회가 바로 ‘’으로 대표, 표상됩니다. 이 교회는 태고교회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동일하지도 않았습니다. 사랑이 여전히 중요했으나, 더 이상 모든 것을 즉각적으로 인식하지는 못했고, 신앙이 점점 더 전면에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교회를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가장 순수한 상태가 지나가도, 주님은 언제나 그다음 상태를 준비하십니다. 셋은 타락의 결과가 아니라, ‘섭리의 응답’입니다.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방식으로, 교회는 계속 이어집니다.

 

오늘 우리의 교회 역시 셋의 교회와 닮아 있습니다. 우리는 즉각적 퍼셉션의 삶을 살지 못하지만, 사랑과 신앙의 결합 안에서 여전히 주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형태가 아니라, 결합입니다. 사랑이 신앙과 분리되지 않을 때, 교회는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한 가지 분명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단지 존재하게 하시기 위해 창조하지 않으셨고, 교회를 세우기 위해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는 무너져도 끝나지 않고, 언제나 다음 상태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계보 위에 서 있는가, 그리고 우리의 삶은 다음 상태를 낳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를 이 말씀 앞에서 함께 돌아보게 됩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우리 신앙의 핵심은 ‘속 사람의 상태’입니다. 천국도 지옥도 모두 이 속 사람의 상태를 다르게 표현한 것입니다. 천국이나 지옥은 무슨 시공간의 나라가 아니라 상태와 그 변화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무엇보다도 자기 속 사람의 상태 관리에 매진해야 합니다. 대신 ‘나는 교회 몇 년 다녔어’, ‘나는 예수님 영접 기도한 지 벌써 30년이나 된 사람이야’, ‘나는 교회에서 목사로, 장로로, 권사, 집사로 평생 섬겼어’ 등등 이런 다분히 겉 사람에 치우친 공로에 의지하시다가는 나중에 큰일 납니다.

 

동일한 원리로 우리는 성경도 이제는 겉이 아닌 속으로, 아니 겉도 보고 속도 보면서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 엉뚱하게 해석하는 바람에 삼천포로 빠지지 않게 됩니다. 겉도 중요하지만, 속으로 읽는 훈련, 곧 천사들이 읽는 방식으로 읽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오, 사랑의 주님,

 

오늘 신년을 맞아 창세기 5장 첫 본문으로 주님 음성에 귀 기울였습니다. 다소 생소하고 낯선 내용들이 혹시 있었을지라도 반발심 대신 주님을 사랑하는 애정 어린 마음으로 저마다 자기 내면을 들을 귀 있는 상태로 유지하고자 힘써 노력하는 심령들에게는 주님, 아낌없이 놀라운 하늘의 계시를 부어주시옵소서. 그래서 놀라운 일, 곧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 결실의 기적들이 일어나게 하시고, 그렇지 못한 심령들에게도 주님, 저들을 어루만지사 부드러운 심령들 되게 하시기를, 그래서 다들 올 한 해 능히 주님의 계시를 받기에 합당한 심령들 되게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다음 본문은 창5:4-20(AC.486-515)입니다.

 

 

 

설교

2026-01-04(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632, 25. 창5.1, 2026-01-04(D1)-주일예배(창5,1-3, AC.469-485, 성찬), ‘창5 아담 계보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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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1/11, 창5:4-20), '아담,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오늘은 창세기 5장 두 번째 시간, 4절로 20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4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6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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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5/12/28, 창4:25-26),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25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26셋도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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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 무척 있고는 싶은데 사실 천국에 있을 수는 없는 그런 사람들의 경우는 어떻게 되는지를 저로 하여금 알게 하시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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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 무척 있고는 싶은데 사실 천국에 있을 수는 없는 그런 사람들의 경우는 어떻게 되는지를 저로 하여금 알게 하시려고, 한번은 제가 하늘 어느 소사이어티에 있을 때, 한 천사가 머리에는 밝게 빛나는 파란 꽃들로 엮은 화관을 쓰고, 가슴에는 다른 색 꽃들로 꾸민 화환을 두른 유아로 제게 나타났습니다. 이걸 보고, 저는 그곳이 체어리티가 있는 어느 소사이어티임을 알았습니다. 그때 어떤 착한 영들이 제가 있던 같은 소사이어티 안으로 들어왔는데, 그들은 들어오는 순간, 들어오기 전보다 훨씬 더 총명해져서 마치 천사적 영들처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어떤 영들이 들어왔는데 그들은 스스로 순진무구하기를 원하던 영들이었고, 그중 저에게 표현된 한 영의 상태는 젖을 입 밖으로 토하는 유아의 모습이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상태였습니다. 그때 또 어떤 영들이 들어왔는데, 그들은 스스로를 지성적이다, 총명하다 여기던 영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상태가 그들의 얼굴로 표현되었는데, 날카로워 보였으나 매우 고왔습니다. 그들은 날카로운 부분이 돌출된, 끝이 뾰족한 모자를 쓰고 있는 것 같았는데, 그런데 그들의 얼굴은 사람의 살처럼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마치 칼로 깎은 듯, 생명이 없는 듯한 얼굴이었습니다. 이런 것은 스스로를 우리는 영적이다, 즉, 스스로를 우리는 신앙을 가졌다 믿는 사람들의 상태입니다. 거기 머무를 수 없는 다른 영들이 들어왔는데, 실망들을 하며, 괴로워들 하더니, 가버리는 것이었습니다. In order that I might know how the case is with those who desire to be in heaven and are not such that they can be there, once when I was in some heavenly society, an angel appeared to me as an infant with a chaplet of bright blue flowers about its head, and girded about the breast with wreaths of other colors. By this I was given to know that I was in some society where there was charity. Some well-disposed spirits were then admitted into the same society, who the moment they entered became much more intelligent, and spoke like angelic spirits. Afterwards some were admitted who desired to be innocent from themselves, whose state was represented to me by an infant that vomited milk out of its mouth. Such is their state. Then some were admitted who supposed that they were intelligent from themselves, and their state was represented by their faces, which appeared sharp, but fair enough; and they seemed to wear a peaked hat from which a sharp point projected, but their faces did not appear to be of human flesh, but as if carved out and devoid of life. Such is the state of those who believe that they are spiritual from themselves, that is, able from themselves to have faith. Other spirits were admitted who could not remain there, but were dismayed, became distressed, and fled a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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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기쁨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즐거움과 기쁨을 수반하는 일종의 어펙션, 애정입니다. 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즐거움과 기쁨이 전면적으로 동시에 경험되는 하나의 기쁨인데요, 이 전면적인 기쁨, 즉 전방위적인 애정 안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애정들이 조화를 이루며 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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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로 하여금 천국과 천국 기쁨의 본질과 퀄러티에 대해 알게 하시려고, 주님은 오랫동안 종종 제가 천국 기쁨의 즐거움을 지각할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이런 실제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지만, 그러나 그것을 말로, 글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제가 다음과 같이라도 말씀드리면 혹시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살짝 가늠하실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천국의 기쁨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즐거움과 기쁨을 수반하는 일종의 어펙션, 애정입니다. 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즐거움과 기쁨이 전면적으로 동시에 경험되는 하나의 기쁨인데요, 이 전면적인 기쁨, 즉 전방위적인 애정 안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애정들이 조화를 이루며 존재합니다. 이때 이것은 하나하나 뚜렷이 지각되는 게 아니고, 모호하게 지각됩니다. 퍼셉션이 매우 전면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허락하심을 받아 그 안, 천국의 기쁨 안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이 내재하고 있음을 지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들은 말로는 도저히 어떻게 설명할 수 없는 질서로 내재해 있었는데, 바로 천국의 질서로부터 흐르는 질서였습니다. 이런 질서는 그 애정 모든 가장 미세한 것에까지 존재하며, 함께 합쳐 그 전체가 하나로 보이고, 그것의 주제, 곧 그 애정을 느끼고 있는 그 사람의 역량에 따라 아주 전체적인 것으로 지각됩니다. 한 마디로, 모든 전반적인 기쁨 혹은 애정에는 가장 온전한 형태로 조성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이 존재하지만, 살아있지 않거나 우리 안 가장 내적인 것에까지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천국의 기쁨은 가장 내적인 것들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또 지각하기를, 그 기쁨과 상쾌함은 마치 심장에서 나와 모든 가장 미세한 섬유조직들을 통해, 그리고 그렇게 조직 다발 속으로, 즐거움의 가장 내적 감각을 가지고 자신들을 아주 부드럽게 퍼트리는 것 같았으며, 이것은 마치 기쁨과 상쾌함만 남은 섬유조직 같았고, 이런 가운데서 나온 퍼셉션과 감각의 영향권 역시 전체적으로 그 행복하게 살아있는 것이 같았습니다. 이들 기쁨들을 육체적 쾌락이 주는 기쁨과 비교하자면, 전자는 맑고 부드러운 산들바람 같다면, 후자는 역겹고 퀘퀘한 먼지와도 같다 할 수 있습니다. But in order that I might know the nature and quality of heaven and of heavenly joy, for long and often I have been permitted by the Lord to perceive the delights of heavenly joys, so that as I know them from actual experience I can indeed know them, but can by no means describe them. However, in order to give some idea of it I may say that heavenly joy is an affection of innumerable delights and joys that form one general simultaneous joy, in which general joy, that is, in which general affection, there are harmonies of innumerable affections that do not come distinctly to perception, but obscurely, because the perception is very general. Yet I was permitted to perceive that there are things innumerable within it, in such order as can never be described, these innumerable things being such as flow from the order of heaven. Such order exists in every least thing of the affection, all of which together are presented and perceived as a very general one according to the capacity of him who is the subject of it. In a word, in every general joy or affection there are illimitable things ordinated in a most perfect form, and there is nothing that is not alive or that does not affect even the inmost things of our being, for heavenly joys proceed from inmost things. I perceived also that the joy and deliciousness came as if from the heart, and very softly diffused themselves through all the inmost fibers, and so into the congregated fibers, with such an inmost sense of delight that the fiber is as it were nothing but joy and deliciousness, and the whole derivative perceptive and sensitive sphere the same, being alive with happiness. In comparison with these joys the joy of bodily pleasures is like gross and pungent dust as compared with a pure and gentle bree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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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제가 여기는 첫 번째 천국이라고 들은 그런 천국의 이노센스 안으로 받아들여진 어떤 영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거기서 고백하기를, 자기들이 지금 맛보고 있는 기쁨과 반가움의 상태는 자기들이 그동안 결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첫 번째 천국일 뿐이었습니다. 세 천국과 각각의 이노센스 상태들이 있으며, 그 각각이 또한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하게 펼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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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제가 여기는 첫 번째 천국이라고 들은 그런 천국의 이노센스 안으로 받아들여진 어떤 영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거기서 고백하기를, 자기들이 지금 맛보고 있는 기쁨과 반가움의 상태는 자기들이 그동안 결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첫 번째 천국일 뿐이었습니다. 세 천국과 각각의 이노센스 상태들이 있으며, 그 각각이 또한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하게 펼쳐집니다. Certain spirits who were admitted into the heaven of innocence of the first heaven spoke to me thence, and confessed that the state of joy and gladness was such as they never could have conceived any idea of. Yet this was only in the first heaven, and there are three heavens, and states of innocence in each, with their innumerable varie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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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에는 레벨, 곧 수준 차이가 있으며, 어떤 기쁨의 가장 깊은 레벨은 다른 기쁨의 가장 바깥이나 중간에도 못 미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누가 자신의 가장 내적 기쁨을 받으면 그는 그 자신의 천국 기쁨 가운데 있는 것이며, 그 이상 무슨 내적 기쁨을 받으면 도저히 견딜 수가 없는데 그때는 그 기쁨이 그에게 고통이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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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 기쁨의 본질 알기를 무척이나 갈망하던 어떤 영들이 있었는데, 그래서 그들은 허락을 받아 그들 본성의 가장 깊은 내면을 지각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수준으로는 도저히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최대치였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천사적 기쁨이 아니었고, 천사적 기쁨 중 기껏해야 가장 낮은 것이라고나 할까요? 이런 것이 제게 허락되어 그들의 기쁨이 어떤 것인지 지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주 잠깐이지만 오히려 냉기마저 느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도저히 천국의 기쁨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었는데도, 그러나 그들로서는 그것이 가장 깊은 내적 기쁨이었고, 그들은 그것을 가장 깊은 내적 천국의 기쁨이라고 했습니다. 이 사실로 분명한 것은, 기쁨에는 레벨, 곧 수준 차이가 있으며, 어떤 기쁨의 가장 깊은 레벨은 다른 기쁨의 가장 바깥이나 중간에도 못 미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누가 자신의 가장 내적 기쁨을 받으면 그는 그 자신의 천국 기쁨 가운데 있는 것이며, 그 이상 무슨 내적 기쁨을 받으면 도저히 견딜 수가 없는데 그때는 그 기쁨이 그에게 고통이 되기 때문입니다. Certain spirits longed to know the nature of heavenly joy, and were therefore allowed to perceive the inmost of their own, to such a degree that they could bear no more; and yet it was not angelic joy, being scarcely equal to the least angelic joy, as was given me to perceive by a communication of their joy. It was so slight as to be as it were chilly, and yet being their inmost joy they called it most heavenly. From this it was evident not only that there are degrees of joys, but also that the inmost of one scarcely approaches the outmost or middle of another, and that when anyone receives his own inmost joy, he is in his heavenly joy, and cannot endure that which is still more interior, for it becomes painf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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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퀄러티를 알 수 있게 하려고 천국에 사로잡혀 옮겨진 사람들은 그들의 육체적 욕망과 환상이 잠재워지거나, (여기서 잠깐, 사전에 이런 일이 필요한 이유는, 아무도 그들이 세상에서 취한 그런 걸 가지고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는 불순하거나 불일치를 일으키는 그런 것들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억누르는 영들의 아우라로 그들은 둘러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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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퀄러티를 알 수 있게 하려고 천국에 사로잡혀 옮겨진 사람들은 그들의 육체적 욕망과 환상이 잠재워지거나, (여기서 잠깐, 사전에 이런 일이 필요한 이유는, 아무도 그들이 세상에서 취한 그런 걸 가지고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는 불순하거나 불일치를 일으키는 그런 것들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억누르는 영들의 아우라로 그들은 둘러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내면들이 열리는데, 이런저런 방식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삶과 그 삶을 통해 획득한 본성에 따라 준비됩니다. They who are taken up into heaven in order that they may know its quality either have their bodily things and fanciful notions lulled to quiescence—for no one can enter heaven with the bodily things and fanciful notions that they take with them from this world—or else they are surrounded by a sphere of spirits who miraculously temper such things as are impure and that cause disagreement. With some the interiors are opened. In these and other ways they are prepared, according to their lives and the nature thereby acqui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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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 기쁨의 본질에 대해 무지했던 어떤 영들이 갑자기 사로잡혀 천국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들은 그전에 이렇게 천국으로 옮겨지는 것이 가능하도록 그들의 육체에 속한 것들, 곧 육체적 욕망과 상상 속에나 나올 법한 생각들, 곧 환상이 모두 잠재워진 후에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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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 기쁨의 본질에 대해 무지했던 어떤 영들이 갑자기 사로잡혀 천국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들은 그전에 이렇게 천국으로 옮겨지는 것이 가능하도록 그들의 육체에 속한 것들, 곧 육체적 욕망과 상상 속에나 나올 법한 생각들, 곧 환상이 모두 잠재워진 후에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거기서 저는 어떤 사람이 저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지금 자기는 처음에는 천국 기쁨이 얼마나 엄청난지를 느꼈다고, 자기는 그동안 천국에 대해 전혀 다른, 엉뚱한 생각을 갖도록 단단히 속아왔다고, 그러나 지금은 자기 내적 존재 저 깊은 데까지 측량할 수 없는 기쁨을 지각하였는데, 이것은 자기가 몸 안에서 살 때는 결코 맛본 적 없는 즐거움이라고, 사람들은 몸 안에 살면서 그걸로 기뻐하고 그러는데, 지금 보면 그건 그냥 악취였다고 말입니다. Certain spirits who were ignorant of the nature of heavenly joy were unexpectedly taken up into heaven after they had been brought into such a state as to render this possible, that is to say a state in which their bodily things and fanciful notions were lulled into quiescence. From there I heard one saying to me that now for the first time he felt how great is the joy in heaven, and that he had been very greatly deceived in having a different idea of it, but that now he perceived in his inmost being a joy immeasurably greater than he had ever felt in any bodily pleasure such as men are delighted with in the life of the body, and which he called f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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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세상에 들어오는 거의 모든 사람이 천국 행복과 지복(至福, bliss)의 본질에 대하여 무지합니다. 내적 기쁨의 본질과 퀄러티에 대해 모르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그저 육체와 세상의 기쁨과 즐거움을 가지고 좀 미루어 짐작할 뿐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그건 아무 것도 아닌 걸로 여깁니다. 그러나 실상은, 육체적이고 세속적인 즐거움이야말로 아무 것도 아닌, 아주 더러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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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세상에 들어오는 거의 모든 사람이 천국 행복과 지복(至福, bliss)의 본질에 대하여 무지합니다. 내적 기쁨의 본질과 퀄러티에 대해 모르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그저 육체와 세상의 기쁨과 즐거움을 가지고 좀 미루어 짐작할 뿐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그건 아무 것도 아닌 걸로 여깁니다. 그러나 실상은, 육체적이고 세속적인 즐거움이야말로 아무 것도 아닌, 아주 더러운 것입니다. 성품은 좋으나 천국에 대해서는 무지한 사람들로 하여금 천국의 기쁨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며 알 수 있도록, 그들을 모든 상상을 뛰어넘는 파라다이스들의 첫 번째 장소로 데려갑니다. (이곳에 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 곧 허락하심으로 나중에 밝히겠습니다. cf. 1622) 그곳에 도착하면 그들은 자기들은 지금 천국의 파라다이스에 도착했다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은 천국의 참된 기쁨이 아니라는 것과, 다음 순서로, 허락하심을 받아 그들의 가장 깊은 내면에까지 지각되는 기쁨의 내적 상태들을 맛보게 됩니다. 그들은 평화의 상태, 심지어 가장 내적인 데까지 옮겨졌고, 거기서 그들은 고백하기를, 지금 이 상태, 이 기쁨은 그 어떤 말로도 전혀 표현할 수 없고, 그 어떤 것으로도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최종적으로, 그들은 이노센스 상태로 인도되었고, 또한 그들의 가장 내적 느낌, 곧 가장 깊은 레벨의 감각으로도 인도되었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허락하심을 받아 참된 영적, 천적 선의 본질에 대하여 배웠습니다. Almost all who come into the other life are ignorant of the nature of heavenly happiness and bliss, because they know not the nature and quality of inward joy. They form a conception of it merely from the delights and joys of the body and the world. What they are ignorant of they suppose to be nothing, the truth being that bodily and worldly joys are relatively non-existent and foul. In order therefore that those who are well disposed may learn and may know what heavenly joy is, they are taken in the first place to paradises that surpass every conception of the imagination (concerning which,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and they suppose that they have arrived in the paradise of heaven; but they are taught that this is not true heavenly happiness, and are therefore permitted to experience interior states of joy which are perceptible to their inmost being. They are then transported into a state of peace, even to their inmost being, and they confess that nothing of it is at all expressible or conceivable. And finally they are introduced into a state of innocence, also to their inmost feeling. In this way are they permitted to learn the nature of true spiritual and celestial g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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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안에 있었던 생애 동안 간음과 간통의 빛 가운데 살았던 어떤 영이 간절히 원한 덕분에 천국의 첫 번째 문턱에 들어가 보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가 거기 도착하자마자 그는 고통스러워했고, 자신에게서 죽은 사람의 악취가 나는 것을 도저히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내가 여기 더 머물렀다간 소멸되겠구나 싶어 다 내던지고 더 낮은 곳으로 뛰어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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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안에 있었던 생애 동안 간음과 간통의 빛 가운데 살았던 어떤 영이 간절히 원한 덕분에 천국의 첫 번째 문턱에 들어가 보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가 거기 도착하자마자 그는 고통스러워했고, 자신에게서 죽은 사람의 악취가 나는 것을 도저히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내가 여기 더 머물렀다간 소멸되겠구나 싶어 다 내던지고 더 낮은 곳으로 뛰어내렸습니다. 그는 천국 첫 문턱, 고작 간음과 정반대되는 영역에 도착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런 고통을 겪어야만 하는 사실에 격분했습니다. 그는 불행한 사람들과 함께 있습니다. A certain spirit who during his life in the body had made light of adulteries, was in accordance with his desire admitted to the first threshold of heaven. As soon as he came there he began to suffer and to be sensible of his own cadaverous stench, until he could endure it no longer. It seemed to him that if he went any farther he should perish, and he was therefore cast down to the lower earth, enraged that he should feel such torment at the first threshold of heaven, merely because he had arrived in a sphere that was contrary to adulteries. He is among the unhap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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