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2026/10/04)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6, ‘은혜로신 하나님 우리 주 하나님’, 찬230, ‘우리의 참되신 구주시니’, 찬96, ‘예수님은 누구신가’입니다.

 

오늘은 창4 절별 주석 그 일곱 번째, 25절로 26절, 창4 마지막, AC 글 번호로는 434번에서 442번입니다. 먼저 본문입니다.

 

25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26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25-26)

 

제목은

 

보존된 신앙에서 체어리티의 예배로

 

 

이며, 다음은 ‘3분 요약’입니다. 새로 오신 분들, 그리고 그동안 함께해오신 분들 모두를 위한, 지난 2월부터 시작, 이 특별한 주일예배를 위한, 그 흐름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한 시간입니다.

 

오늘 리딩에 들어가기 전에 지금까지의 큰 흐름을 잠깐 돌아보겠습니다. 우리는 창세기의 문자적 의미를 존중하면서,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따라 그 속뜻을 함께 읽고 있습니다. 창1에서는 천지창조를 거듭남의 과정으로, 창2에서는 에덴동산을 천적 상태로, 창3에서는 사람이 주님보다 자기 감각과 proprium을 따르면서 그 질서가 무너지는 과정으로 읽었습니다.

 

창4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읽고 있습니다. 가인은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뒤에도 주님께서는 ‘가인의 표’를 통해 신앙을 보존하셨습니다. 지난주에는 그 계열이 라멕에게 이르러 황폐해지는 한편, 바로 그 자리에서 새 교회의 질서가 준비되는 것을 읽었습니다.

 

오늘은 창4의 마지막 두 절, 셋과 에노스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 ‘다른 씨’인 셋을 주십니다. 셋은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새로운 신앙’을, 에노스는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여기는 교회’를 나타냅니다. 가인에게서 분리되었던 신앙과 체어리티가 다시 올바른 관계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인류 최초의 예배가 아니라, 새 교회에서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가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체어리티에서 나오지 않는 예배가 입술의 예배라면,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예배는 마음의 예배입니다.

 

오늘은 이것을 마음에 두고 읽겠습니다. ‘주님께서 보존하시는 것은 회복을 향합니다.’ 가인의 표로 보존된 신앙은 셋을 거쳐 에노스에 이르며 다시 체어리티와 결합되고, 마침내 마음에서 주님을 예배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오늘은 창4를 마무리하면서, 인간의 황폐보다 더 깊은 주님의 섭리와 회복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다음은 오늘 리딩 범위인 AC.434-442 요약입니다.

 

AC.434-442는 지난번 AC.405-433에서 가인으로부터 시작된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가 라멕에 이르러 신앙과 체어리티 모두의 소멸이라는 황폐에 이른 바로 다음부터 시작합니다. 지난 범위에서 우리는 그 황폐 가운데서도 아다와 씰라를 통하여 새 교회가 준비되고, 야발·유발·두발가인을 통하여 사랑의 거룩한 것과 선, 신앙의 영적인 것, 자연적 선과 진리가 다시 나타나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창4의 마지막 두 절에서는 이 모든 흐름이 하나의 결론에 도달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벨 대신 ‘다른 씨’인 셋을 주시고, 셋에게서 에노스가 태어나며, 마침내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황폐로 끝날 것 같았던 창4가 체어리티의 회복과 참된 예배의 시작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AC.434에서 ‘사람과 그의 아내’는 앞에서 아다와 씰라로 나타냈던 새 교회를 뜻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태어난 ‘셋’은 ‘체어리티를 얻을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신앙’을 뜻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셋은 단순히 가인을 대신하는 또 하나의 신앙이 아닙니다. 가인이 나타낸 신앙은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었지만, 셋이 나타내는 신앙은 체어리티로 이어지고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질 수 있게 하는 신앙입니다. 같은 신앙이라 하더라도 체어리티와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아벨은 체어리티를 나타냈고,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것을 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주님께서 ‘다른 씨’를 주십니다. 이것은 인간이 잃어버린 체어리티를 스스로 되살렸다는 뜻이 아니라, 가인에 의해 소멸되었던 체어리티가 다시 존재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셋은 바로 그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질 수 있는 통로가 되는 신앙입니다.

 

AC.435는 여기서 ‘사람과 그의 아내’를 왜 다시 아담과 하와 개인으로만 읽어서는 안 되는지를 설명합니다. 바로 다음 창5에서도 아담과 그의 아내와 셋이 다시 등장하지만, 스베덴보리는 동일한 인물과 사건이 반복된다고 해서 속뜻에서도 반드시 같은 교회와 같은 상태를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창1과 창2가 모두 인간의 창조를 다루면서도 각각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창조를 다루듯이, 창4:25과 창5:1-4 역시 문자적으로 비슷한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서로 다른 교회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말씀의 반복은 단순한 중복이 아니라 서로 다른 내적 상태를 드러내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4의 가인 계열과 셋 계열을 이해할 때에도 중요합니다. 문자적으로는 서로 다른 두 혈통의 계보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속뜻에서는 그 족보를 그대로 교회사의 시간표처럼 옮겨 놓을 수 없습니다. 각 이름은 서로 다른 교리와 교회의 상태를 나타내며, 중요한 것은 누가 누구와 역사적으로 동시에 살았는가보다 그 이름들을 통해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가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창4의 속뜻은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발생과 쇠퇴, 그 가운데서의 보존, 그리고 새로운 교회의 형성이라는 하나의 영적 흐름을 보여 줍니다.

 

이 전체 흐름을 가장 선명하게 정리해 주는 것이 AC.436입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나타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무도 가인을 죽이지 못하도록 ‘표’를 주셨습니다. 그 이유가 이번 범위에서 마침내 분명해집니다. 주님께서 가인의 신앙을 보존하신 것은 분리된 신앙 자체를 영구히 유지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장차 ‘체어리티가 그 신앙을 통해 주님에 의해 심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앞에서 오래 살펴보았던 ‘가인의 표’의 의미가 여기서 완성됩니다. 가인의 표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을 승인하신 표시가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아직 남아 있는 신앙을 완전히 파괴되지 않게 보존하시고, 언젠가 바로 그것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심으시기 위한 섭리였습니다. 인간은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했지만, 주님께서는 그 실패 속에서도 남아 있는 것을 보존하시고 그것을 새로운 시작의 통로로 사용하셨습니다.

 

그 사이 야발·유발·두발가인을 통하여 사랑의 거룩한 것과 선, 신앙의 영적인 것, 자연적 선과 진리가 차례로 준비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셋에 이르러 ‘체어리티가 심어지는 통로가 되는 신앙’이 나타납니다. AC.436은 창4의 마지막 두 절을 ‘이 모든 것의 결론, 따라서 그 요약’이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러므로 셋의 등장은 앞의 이야기를 지워 버리고 전혀 다른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가인 이후 창4 전체를 통해 이어져 온 주님의 보존과 회복의 섭리가 결실을 향해 나아가는 지점입니다.

 

AC.437은 이것을 창4:25의 ‘다른 씨’라는 표현으로 더욱 분명히 합니다. 말씀은 단순히 다시 ‘씨’를 주셨다고 하지 않고 ‘다른 씨’를 주셨다고 합니다. ‘씨’는 신앙을 뜻하며, ‘다른 씨’는 가인으로 나타났던 신앙과 다른 종류의 신앙, 곧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신앙입니다. 가인의 신앙은 사랑에서 분리되어 체어리티를 죽였지만, 셋의 신앙은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질 수 있는 통로가 됩니다. 따라서 ‘다른’이라는 한 단어 안에 신앙의 질서가 근본적으로 달라졌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여기서 아벨과 셋의 관계도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벨이 체어리티를 뜻한다면 ‘아벨 대신’ 주어진 셋 역시 체어리티를 뜻해야 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셋은 체어리티 자체가 아니라 체어리티가 다시 주어질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신앙입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절에서 등장하는 에노스가 ‘신앙을 통해 심어진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아벨 대신 다른 씨를 주셨다’는 것은 체어리티를 곧바로 다른 체어리티로 바꾸셨다는 뜻이 아니라, 소멸된 체어리티를 다시 세우기 위한 새로운 질서를 주님께서 시작하셨다는 뜻입니다.

 

AC.438에서 마침내 에노스가 등장합니다. 셋이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신앙’이라면, 그의 아들 에노스는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여긴 교회’를 뜻합니다. 여기서 셋과 에노스의 차이가 중요합니다. 셋은 체어리티가 심어질 수 있는 신앙이고, 에노스는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실제로 교회의 중심에 자리 잡은 상태입니다. 가인에게서 뒤집혔던 신앙과 체어리티의 질서가 이제 다시 바로잡히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때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사람들이 처음으로 ‘여호와’라는 이름을 입으로 부르기 시작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주님께 드리는 예배를 뜻하며, 여기서는 특별히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를 뜻합니다. 따라서 셋에서 새로운 신앙이 나타나고, 에노스에서 체어리티가 신앙의 으뜸이 되며, 그 체어리티에서 마침내 참된 예배가 나옵니다. 신앙의 회복이 향하는 최종 목적이 어디인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AC.439는 에노스의 이름에 또 하나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밝힙니다. ‘에노스’ 역시 ‘사람’을 뜻하지만, 여기서의 사람은 천적 인간이 아니라 ‘영적 인간’입니다. 이것은 창2의 태고교회가 누렸던 최초의 천적 상태가 그대로 복원된 것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태고교회의 본래 질서는 사랑으로부터 신앙이 나오는 천적 질서였습니다. 그러나 그 질서가 무너지고 가인과 라멕을 거쳐 깊은 황폐에 이른 뒤, 주님께서는 보존된 신앙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심으십니다. 따라서 에노스에서 나타나는 회복은 과거로의 단순한 원상복귀가 아니라, 무너진 인간의 상태에 맞추어 주님께서 새롭게 일으키시는 회복입니다.

 

그러므로 셋에서 에노스로 이어지는 ‘신앙을 통한 체어리티’를 모든 경우에 적용되는 보편적인 순서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곧 ‘먼저 신앙을 얻고 그다음 체어리티를 얻는 것이 언제나 정상적인 영적 질서’라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이미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생겨났고 체어리티가 소멸된 뒤, 주님께서 그 가운데 남아 있던 신앙을 보존하시고 그것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심으시는 특별한 회복의 과정이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AC.440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다’라는 표현을 더욱 깊이 설명합니다. 이것은 말씀에서 주님께 드리는 모든 예배를 나타내는 일반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나 모든 외적인 예배가 참된 예배인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매우 분명하게 ‘주님은 체어리티가 아니고서는 예배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체어리티에 속하지 않은 신앙에서 나오는 예배는 ‘입술의 것’일 뿐 ‘마음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참된 예배를 결정하는 것은 예배의 외적인 형식만이 아니라 그 예배가 어떠한 내적 사랑에서 나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말씀들과 이사야의 번제·제물·유향에 관한 말씀이 인용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단지 한 가지 기도 행위가 아니라 주님께 드리는 예배 전반을 포괄합니다. 그러나 제단과 제물과 향이 있어도 체어리티가 없다면 참된 예배가 되지 못합니다. 반대로 체어리티가 신앙의 으뜸이 될 때 그 마음에서 나오는 기도와 찬송과 예배가 참된 예배가 됩니다. 참된 예배는 입술에서 시작하여 마음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있는 마음에서 나와 입술과 삶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AC.441은 그렇다면 왜 말씀에서 ‘그때에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이것은 그때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예배가 생겼다는 뜻이 아닙니다. 태고교회는 이미 주님을 경배했고, 아벨 역시 양 떼의 첫 새끼를 제물로 드렸습니다. 여기서 ‘비로소’ 시작된 것은 예배 자체가 아니라 ‘새 교회의 예배’입니다. 가인과 라멕으로 나타나는 이전 교회가 소멸된 뒤, 셋과 에노스로 나타나는 새 교회가 형성되었고 이제 그 새 교회에서 체어리티로부터 나오는 예배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창4의 마지막은 매우 놀라운 반전을 보여 줍니다. 가인으로 시작된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아벨이 나타내는 체어리티를 소멸시켰고, 라멕에 이르러서는 보존되어 있던 신앙마저 황폐해졌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실패가 창4의 마지막 말은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남아 있는 것을 보존하시고, 새로운 신앙인 셋을 주시며,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다시 심으시고, 에노스로 나타나는 새 교회를 일으키십니다. 그리고 그 교회에서 다시 체어리티로부터 주님을 예배하는 일이 시작됩니다. 이전 교회의 죽음 뒤에 주님께서 새로운 교회와 새로운 예배를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마지막 AC.442는 창4 전체를 뒤돌아보며 태고 시대에도 교회에서 분리된 많은 교리와 이단들이 있었고, 각각 고유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창4에 등장하는 수많은 이름들은 단순한 개인들의 계보만이 아니라 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서로 다른 교리와 교회 상태들을 나타냅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그 분리된 교리와 이단들이 오늘날의 어떤 것보다도 ‘훨씬 더 깊은 사고’에서 나왔다는 설명입니다. 깊이 생각한다고 해서 반드시 참된 것은 아니며, 정교한 교리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살아 있는 교회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창4 전체의 핵심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이 너무 단순하거나 지식이 부족했다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깊은 사고와 정교한 교리를 가지고 있어도 그것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 교회의 생명을 잃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셋과 에노스에서 다시 제시되는 길은 단순히 더 많은 진리를 알고 더 깊은 교리를 갖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다시 체어리티를 향하고 체어리티가 신앙의 으뜸이 되며, 그 체어리티에서 주님께 대한 예배가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 AC.434-442를 창4 전체와 함께 놓고 보면 매우 긴 하나의 흐름이 완성됩니다. ‘가인의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 아벨인 체어리티의 소멸 → 가인의 표를 통한 신앙의 보존 → 보존된 신앙을 통한 새 교회의 준비 → 라멕에서 이전 교회의 황폐 → 셋이라는 다른 씨, 곧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새로운 신앙 → 에노스, 곧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여기는 새 교회 →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여호와께 대한 참된 예배’입니다. 창4의 처음에 무너졌던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가 마지막 두 절에서 주님의 섭리 가운데 새로운 형태로 다시 세워지는 것입니다.

 

특히 이번 범위는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가인의 표’를 다시 돌아보게 합니다. 그때에는 왜 주님께서 체어리티를 죽인 가인을 보호하시며 신앙을 보존하시는지가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AC.436에 이르면 그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주님께서는 그 신앙 자체를 최종적인 것으로 인정하신 것이 아니라, 언젠가 그 신앙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심으시기 위해 보존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표’에서 시작된 주님의 섭리는 셋에서 새로운 신앙으로 나타나고, 에노스에서 체어리티로 결실하며, 마침내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로 완성됩니다.

 

이것은 AC를 읽는 우리에게도 매우 직접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말씀의 속뜻을 배우고, 상응을 알고, 수많은 아르카나를 알아 갑니다. 그러나 AC.442가 보여 주듯 깊은 사고 자체가 참된 신앙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아는 진리가 무엇과 결합되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진리가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자기 지식과 자기 확신을 세우는 데 쓰인다면 가인의 길이 다시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우리를 주님께로 이끌고, 이웃을 사랑하게 하며,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삼게 한다면 셋과 에노스의 질서가 우리 안에서도 시작될 수 있습니다.

 

결국 AC.434-442의 중심에는 인간의 회복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인간은 체어리티를 소멸시켰고, 보존된 신앙마저 황폐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간이 무너뜨린 것 가운데서도 남은 것을 보존하시고, ‘다른 씨’를 주시며, 그 신앙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심으시고, 마침내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가 가능하도록 새 교회를 일으키십니다. 인간의 실패보다 주님의 섭리가 더 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4의 마지막 메시지는 단순히 ‘셋이 태어났다’거나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아무리 깊은 황폐에 이르더라도 주님께서는 남아 있는 것을 보존하시고, 그것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심으시며, 마침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예배로 이끄신다는 데 있습니다. ‘보존된 신앙 →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새로운 신앙 → 체어리티를 으뜸으로 여기는 새 교회 →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참된 예배’, 바로 이것이 가인과 아벨로 시작된 창4의 긴 이야기가 셋과 에노스에서 도달하는 결론입니다.

 

 

이상 요약을 마치고, 아래는 AC 본문, 해설 및 심화입니다.

 

 

AC.434, 창4:25, ‘셋은 왜 새로운 신앙을 의미하는가?’ (AC.434-437)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And the man [homo] knew his wife again, and she 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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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5, 창4:25, ‘같은 사람과 아내가 다시 나오는데 왜 다른 교회를 의미하는가?’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AC.435여기서 ‘사람’(man)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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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6, 창4:25, ‘가인에서 셋과 에노스까지, 신앙과 체어리티는 어떻게 다시 이어지는가?’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AC.436그 여자의 ‘아들’(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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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7, 창4:25, ‘다른 씨는 왜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새로운 신앙을 의미하는가?’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AC.437여기서 ‘셋’(Seth)이 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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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8, 창4:26, ‘에노스는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여긴 교회를 의미한다’ (AC.438-442)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And to Seth, to him also there was born a son; and he called his name Enosh: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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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9, 창4:26, ‘에노스는 왜 천적 인간이 아닌 영적 인간을 의미하는가?’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26) AC.439‘셋’(Seth)이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신앙을 뜻한다는 것은 앞 절에서 설명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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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40, 창4:26, ‘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를 의미하는가?’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26) AC.440방금 인용한 말씀이 그 교회의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를 뜻한다는 것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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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41, 창4:26,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은 새 교회의 예배가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26) AC.441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 이때 처음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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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42, 창4:26, ‘태고 시대에도 교회에서 분리된 많은 교리와 이단이 있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26) AC.442앞에서 설명한 이 장의 내용으로부터, 태고 시대에도 교회에서 분리된 많은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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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AC 리딩 본문 전체는 여기까지이고, 아래는 창4 뒤에 이어지는 영계 경험입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 그리고 지금까지 AC를 계속해서 연속으로 읽어오신 분들을 위해 링크를 제공합니다.

 

 

AC.443, 창4 뒤, ‘육체의 생명이 사라지면 영의 삶도 희미해질 것이라는 생각’ (AC.443-448)

영혼 또는 영에 관하여 그들이 육체의 삶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영들과의 체험에서 얻은 몇 가지 사례 Some Examples Drawn from Experience with Spirits Concerning What They Had Thought during Their Life in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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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44, 창4 뒤, ‘영은 단지 생각일 뿐이며 아무런 형체도 없는가?’

영혼 또는 영에 관하여 그들이 육체의 삶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영들과의 체험에서 얻은 몇 가지 사례 AC.444이 세상에 살 때 영은 아무런 연장(extension)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믿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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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45, 창4 뒤, ‘영혼을 추상적 생각으로만 여길 때 생기는 문제’

영혼 또는 영에 관하여 그들이 육체의 삶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영들과의 체험에서 얻은 몇 가지 사례 AC.445더 나아가 이런 말도 했습니다. 학자들은 죽은 뒤에도 살아갈 영혼, 곧 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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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46, 창4 뒤,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영의 실재를 부정하는 오류’

영혼 또는 영에 관하여 그들이 육체의 삶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영들과의 체험에서 얻은 몇 가지 사례 AC.446나는 오늘날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견해, 곧 영은 눈으로 볼 수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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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47, 창4 뒤, ‘감각하는 것은 몸이 아니라 사람 안의 영이다’

영혼 또는 영에 관하여 그들이 육체의 삶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영들과의 체험에서 얻은 몇 가지 사례 AC.447어떤 초보 영(novitiate spirit)이 내가 영에 관해 말하는 것을 듣고는 자신이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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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48, 창4 뒤, ‘육체의 삶보다 더 밝고 분명하게 이어지는 사후의 삶’

영혼 또는 영에 관하여 그들이 육체의 삶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영들과의 체험에서 얻은 몇 가지 사례 AC.448나는 이 세상에서 알고 지냈던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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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공지입니다. 오늘로 창4 AC 리딩을 마칩니다. 다음 주 창5부터는 각 장 앞뒤의 영계 경험 및 장 또는 단락 개요는 전체 AC 원고에는 그대로 유지하되, 주일예배 AC 리딩 본문으로는 빼겠습니다. 장 또는 단락이 바뀔 때 바로 1절이나 해당 절로 들어간다는 말씀입니다. 전체 개요가 필요하시거나 AC 연속 리딩 중이신 분들은 교회 블로그(https://bygrace.kr/)를 방문하시면 되겠습니다.

 

한 가지 더, 오늘부터는 그 주 리딩을 마치기 전, 그 다음 주 리딩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드리겠습니다. 아래처럼 말입니다.

 

다음 주부터 창5를 시작합니다. 창5의 족보는 단순히 아담의 후손들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로부터 여러 교회가 어떻게 이어지고 변화되어 갔는지를 보여 줍니다. 첫 시간에는 창5:1-5, AC.469-495를 통해 ‘하나님의 형상’에서 ‘하나님의 모양’으로 나아가는 거듭남, 신앙과 사랑의 결합, 그리고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후대의 교회들 가운데 어떻게 변화되고 보존되어 갔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네, 이상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다음은 성찬입니다.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10-04(D1)

 

2671, 8, 창4.8, 2026-10-04(D1)-주일예배(창4,25-26, AC.434-442, 성찬), ‘보존된 신앙에서 체어리티의 예배로’.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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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10/11, 창5:1-5, AC.469-495), ‘하나님의 형상에서 모양으로, 그리고 시작된 변화’

※ 오늘(2026/10/11)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7, ‘사랑의 하나님’, 찬130, ‘찬란한 주의 영광은’입니다. 오늘은 창5 절별 주석 그 첫 번째, 1절로 5절, AC 글 번호로는 469번에서 495번입니다. 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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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9/27, 창4:19-24, AC.405-433), ‘황폐의 끝에서 다시 시작되는 새 교회’

※ 오늘(2026/09/27)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5, ‘하나님의 크신 사랑’, 찬95,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되시며’입니다. 오늘은 창4 절별 주석 그 여섯 번째, 19절로 24절, AC 글 번호로는 405번에서 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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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9 심화

1. ‘왜 홍수 전 에노스가 벌써 영적 인간인가?’

 

AC.439를 읽다 보면 한 가지 뜻밖의 표현을 만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에노스’(Enosh)라는 이름 역시 ‘사람’(man)을 뜻한다고 하면서, 그 사람이 ‘천적 인간’(celestial man)이 아니라 ‘영적 인간’(spiritual man)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지금까지 창1과 창2를 따라온 독자에게 자연스럽게 질문을 일으킵니다. 창1에서는 거듭남의 여섯 날을 거쳐 영적 인간이 형성되고, 창2에서는 일곱째 날과 함께 천적 인간이 다루어지며, 그 천적 상태가 태고교회의 고유한 상태로 설명되었습니다. 반면 홍수 후에 나타나는 고대교회는 영적 성격의 교회로 이해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아직 홍수 이전인 창4에서 에노스가 벌써 ‘영적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먼저 ‘영적 인간’이라는 표현을 곧바로 ‘홍수 후 고대교회에 속한 사람’이라는 역사적 명칭과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천적’과 ‘영적’은 서로 다른 교회 시대를 가리킬 때도 사용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서로 다른 질서와 상태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나 교회가 홍수 이전에 존재한다고 해서 그 상태가 언제나 천적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며, 반대로 ‘영적 인간’이라는 표현이 등장했다고 해서 곧 홍수 후 고대교회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뜻도 아닙니다. AC.439 자체도 에노스의 교회를 ‘영적 교회’라고 하지 않습니다. 정확히는 에노스라는 이름이 나타내는 ‘사람’을 ‘천적 인간이 아니라 영적 인간’이라고 합니다. 이 구별을 그대로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왜 태고교회의 시대 안에서 이런 영적 상태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창2에서 보았던 태고교회의 처음 상태와 창4에서 다루는 상태가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창2의 태고교회는 사랑이 먼저이고 그 사랑으로부터 신앙과 진리를 지각하는 천적 질서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창3과 창4로 진행하면서 인간은 점차 자기 자신에게 기울었고, 마침내 가인으로 나타나는 신앙은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었습니다. 아벨이 나타내는 체어리티가 소멸된 뒤에도 주님께서는 신앙을 완전히 사라지게 하지 않으시고 ‘가인의 표’를 통해 보존하셨으며, 이후 라멕에 이르러서는 그렇게 보존되어 있던 신앙마저 황폐해지는 상태가 나타났습니다. 따라서 창4 마지막의 회복은 창2의 최초 천적 상태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대로 되돌아오는 장면으로 볼 수 없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셋과 에노스가 중요해집니다. AC.436에 따르면 셋은 ‘체어리티가 심어지는 신앙’을 뜻하고, 에노스는 ‘신앙을 통해 심어진 체어리티’를 뜻합니다. AC.438에서는 이를 교회의 차원에서 다시 설명하여, 셋은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신앙을, 에노스는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여긴 교회를 나타낸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창2의 천적 인간과는 다른 질서가 보입니다. 최초의 천적 상태에서는 사랑과 체어리티로부터 신앙이 나왔지만, 여기서는 이미 무너진 상태 가운데 보존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지는 회복의 과정이 나타납니다. 따라서 에노스를 ‘영적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적어도 이 새로운 상태가 최초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와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과 잘 맞습니다.

 

이 때문에 ‘셋은 신앙, 에노스는 체어리티’라는 표현도 조심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을 인간의 정상적인 영적 질서가 언제나 ‘먼저 신앙을 얻고 그다음 체어리티를 얻는 것’이라는 보편 공식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는 이미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발생했고, 체어리티가 소멸되었으며, 그 가운데 주님께서 신앙을 보존하신 뒤 그것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심으시는 특별한 회복의 과정이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셋에서 에노스로 이어지는 ‘신앙을 통한 체어리티’는 태고교회 본래의 천적 질서를 설명한다기보다, 그 질서가 무너진 뒤 주님께서 다시 교회를 일으키시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러므로 에노스에서 이미 영적 교회가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것도 현재 본문보다 앞서 나갑니다. AC.439가 분명히 말하는 것은 에노스로 나타나는 사람이 ‘천적 인간이 아니라 영적 인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AC.438은 에노스를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여긴 교회라고 하며, AC.441은 이전 교회가 소멸된 뒤 나타난 ‘새 교회’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 새 교회를 훗날 홍수 후에 나타나는 고대교회와 같은 의미의 ‘영적 교회’라고 AC.439가 직접 규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영적 인간’이라는 표현과 ‘영적 교회’라는 역사적·교회적 구분을 성급하게 하나로 합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오히려 이 대목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주님의 회복이 언제나 과거 상태의 단순한 복원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창2의 천적 상태가 무너진 뒤 주님께서는 인간을 버려 두지 않으시고, 남아 있는 것을 보존하시며 그 상태에서 다시 체어리티를 심으십니다. 에노스는 바로 그러한 과정에서 나타나는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홍수 전에 ‘영적 인간’이 등장한다는 사실 자체를 이상하게 여길 필요는 없습니다. ‘영적’이라는 말이 반드시 홍수 후의 특정 교회 시대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적 상태를 나타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왜 스베덴보리가 이 시점의 에노스를 특별히 ‘영적 인간’이라고 규정했으며, 이것이 이후 홍수와 고대교회의 영적 질서와 정확히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AC.439만으로 모두 밝혀지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현재까지의 설명 안에서 가장 안전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에노스가 홍수 전에 ‘영적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홍수 후 고대교회가 벌써 시작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창2에서 나타난 태고교회 본래의 천적 상태가 이미 크게 무너진 뒤, 주님께서 보존하신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다시 심으시는 새로운 회복의 상태가 나타났으며, 에노스는 그 과정에서 ‘천적 인간이 아니라 영적 인간’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창4 마지막은 단순히 최초의 천적 상태로 되돌아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깊이 무너진 인간을 그 상태에 맞게 다시 붙드시고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시는 주님의 섭리를 보여 줍니다. 이후 AC에서 이 영적 상태의 성격이 더 구체적으로 밝혀진다면, 그때는 여기서 확인한 기초 위에서 한 단계 더 깊이 살펴볼 수 있을 것입니다. (AC.439 심화 1)

 

 

 

AC.439, 창4:26, ‘에노스는 왜 천적 인간이 아닌 영적 인간을 의미하는가?’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26) AC.439‘셋’(Seth)이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신앙을 뜻한다는 것은 앞 절에서 설명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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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26)

 

AC.441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 이때 처음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앞에서 태고교회에 관해 이미 설명한 내용으로 충분히 분명합니다. 태고교회는 다른 어떤 교회보다도 주님을 경배하고 예배했습니다. 또한 아벨이 양 떼의 첫 새끼를 제물로 드렸다는 사실에서도 이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다’(calling upon the name of Jehovah)는 가인과 라멕이라고 하는 이들에 의해 이전 교회가 소멸된 후에 세워진 새 교회의 예배 외에 다른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That the invocation of the name of Jehovah did not commence at this time is sufficiently evident from what has already been said above in regard to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more than any other adored and worshiped the Lord; and also from the fact that Abel brought an offering of the firstlings of the flock; so that in this passage by “calling upon the name of Jehovah” nothing else is signified than the worship of the new church, after the former church had been extinguished by those who are called “Cain” and “Lamech.”

 

해설

AC.441은 창4:26의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는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이해할 때 생길 수 있는 오해를 직접 바로잡습니다. ‘비로소’라고 해서 이때 인류가 처음으로 주님을 알고 예배하거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에서 설명한 태고교회만 생각해 보아도 이것이 분명하다고 합니다. 태고교회는 다른 어떤 교회보다도 주님을 경배하고 예배했기 때문입니다.

 

아벨 역시 그 사실을 보여 주는 직접적인 근거입니다. 창4:4에서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여호와께 제물로 드렸습니다. 에노스가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이미 주님께 드리는 예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창4:26의 ‘그때에 비로소’라는 표현을 인류 역사에서 예배 자체가 처음 생겨난 시점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AC.440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다’가 주님께 드리는 예배 전반을 뜻한다 설명했다면, AC.441은 이제 그 예배가 ‘비로소 시작되었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밝힙니다.

 

그 답은 ‘새 교회의 예배’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다’가 여기서는 ‘이전 교회가 가인과 라멕이라고 하는 이들에 의해 소멸된 후에 시작된 새 교회의 예배’를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시작’의 주어는 인류 전체의 예배가 아니라 새 교회의 예배입니다. 이전에는 아무도 주님을 예배하지 않다가 에노스 때 처음 예배가 생긴 것이 아니라, 이전 교회가 소멸된 뒤 새롭게 형성된 교회가 이제 그 교회에 속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창4 전체의 흐름과 연결해서 볼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나타냈고, 그 신앙은 아벨이 나타내는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가운데에서도 신앙을 완전히 사라지게 하지 않으시고 ‘가인의 표’를 통해 보존하셨습니다. 이후 라멕에 이르러서는 그렇게 보존되어 있던 신앙마저 황폐해지는 상태가 나타납니다. 곧 창4의 흐름은 체어리티가 소멸된 뒤에도 보존되었던 신앙이 마침내 황폐해지는 데까지 내려갑니다. 그런데 바로 그 지점에서 이야기가 끝나지 않고, 주님께서 새로운 것을 일으키시는 방향으로 전환됩니다.

 

그 새로운 시작을 나타내는 것이 셋과 에노스입니다. 앞의 AC.434-440에서 셋은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새로운 신앙을, 에노스는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여긴 교회를 나타냈습니다. 그러므로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는 말씀은 단순히 새로운 종교적 행위가 생겨났다는 뜻이 아닙니다.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그 후 보존되어 있던 신앙마저 황폐해진 이전 교회의 뒤를 이어,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을 주시고 체어리티가 다시 중심이 되는 새 교회를 일으키셨으며, 이제 그 교회에서 체어리티로부터 나오는 예배가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보면 AC.440과 AC.441은 서로 정확히 이어집니다. AC.440의 초점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있었다면, AC.441의 초점은 ‘왜 그것을 이제 시작했다고 하는가’에 있습니다. 전자는 그것이 주님께 드리는 예배 전반이며 그 예배는 체어리티에서 나와야 한다고 설명하고, 후자는 그러한 예배 자체가 인류에게 처음 생긴 것이 아니라 ‘새 교회의 예배’가 이제 시작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창4:26의 ‘비로소’는 최초의 예배를 가리키는 시간적 표현이라기보다, 이전 교회의 소멸과 새 교회의 출현 사이에 놓인 영적 전환을 보여 주는 말입니다.

 

또한 ‘가인과 라멕이라고 하는 이들’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두 역사적 개인이 하나의 교회를 없앴다는 의미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까지의 속뜻에서 가인과 라멕은 교회가 거쳐 간 특정한 영적 상태를 나타냈습니다. 따라서 이전 교회의 소멸 역시 창4에서 계속 다루어 온 신앙과 체어리티의 변질과 황폐라는 흐름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소멸 뒤에 셋과 에노스가 등장한다는 것은 인간의 실패가 마지막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전 교회의 생명이 다한 자리에서도 주님께서는 새로운 신앙과 체어리티를 일으키시고, 그로부터 다시 참된 예배가 시작되게 하십니다. 이것이 AC.441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ehovah)는 말씀을 통해 드러나는 창4 마지막 부분의 중요한 전환입니다. (AC.441 해설)

 

 

 

AC.442, 창4:26, ‘태고 시대에도 교회에서 분리된 많은 교리와 이단이 있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26) AC.442앞에서 설명한 이 장의 내용으로부터, 태고 시대에도 교회에서 분리된 많은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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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40, 창4:26, ‘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를 의미하는가?’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26) AC.440방금 인용한 말씀이 그 교회의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를 뜻한다는 것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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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26)

 

AC.440

방금 인용한 말씀이 그 교회의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를 뜻한다는 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다’(call upon the name of Jehovah)가 주님께 드리는 모든 예배를 나타내는 관용적이고 일반적인 표현이라는 사실에서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 예배가 체어리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앞 절에서는 그분을 ‘하나님’(God)이라고 했으나 여기서는 ‘여호와’(Jehovah)라고 한 사실에서도 분명합니다. 또한 주님은 체어리티가 아니고서는 예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체어리티에 속하지 않은 신앙에서는 참된 예배가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런 예배는 단지 입술의 것일 뿐 마음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다’(call on the name of Jehovah)가 주님께 드리는 모든 예배를 나타내는 관용적인 표현이라는 것은 말씀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 관해, That by the words just quoted is signified the worship of that church from charity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o “call upon the name of Jehovah” is a customary and general form of speech for all worship of the Lord; and that this worship was from charity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Jehovah” is here mentioned, whereas in the preceding verse he was called “God,” as well as from the fact that the Lord cannot be worshiped except from charity, since true worship cannot proceed from faith that is not of charity, because it is merely of the lips, and not of the heart. That to “call on the name of Jehovah” is a customary form of speech for all worship of the Lord, appears from the Word; thus it is said of Abraham, that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창12:8);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13:4) “he built an altar to Jehovah, and called on the name of Jehovah” (Gen. 12:8; 13:4)

 

또다시, and again, that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창21:33) he “planted a grove in Beersheba, and called there on the name of Jehovah, the God of eternity” (Gen. 21:33).

 

이 표현이 모든 예배를 포함한다는 것은 이사야에서도 분명합니다. That this expression includes all worship, is plain from Isaiah:

 

22그러나 야곱아 너는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고 이스라엘아 너는 나를 괴롭게 여겼으며 23네 번제의 양을 내게로 가져오지 아니하였고 네 제물로 나를 공경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나는 제물로 말미암아 너를 수고롭게 하지 아니하였고 유향으로 말미암아 너를 괴롭게 하지 아니하였거늘 (사43:22, 23) Jehovah the holy one of Israel hath said, thou hast not called upon me, O Jacob, but thou hast been weary of me, O Israel. Thou hast not brought to me the small cattle of thy burnt offerings, neither hast thou honored me with thy sacrifices. I have not caused thee to serve with an offering, nor wearied thee with incense, (Isa. 43:22–23)

 

이 말씀에는 모든 표상적 예배의 요약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in which text a summary is given of all representative worship.

 

해설

AC.440은 창4:26의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는 말씀 가운데 특히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다’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이것은 단순히 ‘여호와’라는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르기 시작했다는 뜻이 아니라, 말씀에서 주님께 드리는 ‘모든 예배’를 나타내는 일반적인 표현입니다. 따라서 창4:26의 초점은 하나님의 이름을 처음 발음한 시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에노스로 나타나는 교회에서 어떠한 예배가 이루어졌는가에 있습니다.

 

그런데 AC.440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예배의 근원이 ‘체어리티’였다고 말합니다. 그 첫 번째 근거로 제시하는 것이 ‘하나님’(God)과 ‘여호와’(Jehovah)라는 이름의 차이입니다. 앞 절, 곧 창4:25에서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고 하여 ‘하나님’이라고 했지만, 창4:26에서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명칭의 변화 자체를 의미 있는 것으로 보고, 여기서 말하는 예배가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라는 근거 가운데 하나로 제시합니다. 다만 AC.440은 이 글에서 ‘하나님’과 ‘여호와’의 차이를 더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으므로, 그 구체적인 의미까지 미리 확대해서 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두 번째 근거는 더욱 직접적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은 체어리티가 아니고서는 예배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예배의 외적 형식보다 그것을 낳는 내적 생명입니다. 신앙이 있다고 말하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입술로 신앙을 고백한다고 해서 그 자체로 참된 예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에 속하지 않는다면 그 신앙에서 나오는 예배 역시 ‘입술의 것’일 뿐 ‘마음의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참된 예배는 체어리티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 설명은 창4 전체의 흐름과도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나타냈고, 그 분리된 신앙은 아벨이 나타내는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신앙을 보존하셨고, 셋에 이르러서는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신앙’이 나타났으며, 에노스에서는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여긴 교회’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제 그 교회의 예배가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라고 설명됩니다. 결국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가 예배에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무엇을 믿는가만이 아니라 그 믿음이 어떠한 사랑과 삶에서 나오는가가 예배의 성격을 결정합니다.

 

아브라함에 관한 창12:8, 13:4와 창21:33의 인용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다’라는 표현이 예배 전반을 가리킨다는 것을 말씀 자체에서 보여 주기 위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거나 브엘세바에서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단순히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르는 한 행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드리는 예배를 포괄하는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4:26의 같은 표현 역시 이러한 말씀의 용례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어지는 사43:22-23의 인용은 그 의미를 더욱 넓혀 줍니다. 그 말씀에는 여호와를 부르는 것과 함께 번제, 제물, 향 등 당시의 여러 예배 행위가 함께 언급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모든 표상적 예배의 요약’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표현 안에는 한 가지 기도 행위만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예배 전반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단, 번제, 제물, 향과 같은 외적 형식들이 서로 달라도 그것들은 모두 예배라는 하나의 큰 범주 안에 놓입니다.

 

그러나 AC.440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예배를 참된 예배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제단을 쌓고 제물을 드리며 향을 피우는 외적인 예배가 있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마음의 예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신앙을 고백한다고 해도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있다면 그것은 ‘입술의 것’에 머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에노스로 나타나는 교회에서는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 체어리티에서 예배가 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 점에서 창4:26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였다’는 말씀은 앞에서부터 이어져 온 신앙과 체어리티의 문제가 마침내 예배의 문제로까지 나아간 것을 보여 줍니다. 참된 예배는 입술에서 시작하여 마음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있는 마음에서 나와 입술과 삶으로 표현되는 예배입니다. (AC.440 해설)

 

 

 

AC.441, 창4:26,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은 새 교회의 예배가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26) AC.441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 이때 처음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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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9, 창4:26, ‘에노스는 왜 천적 인간이 아닌 영적 인간을 의미하는가?’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26) AC.439‘셋’(Seth)이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신앙을 뜻한다는 것은 앞 절에서 설명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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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26)

 

AC.439

‘셋’(Seth)이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신앙을 뜻한다는 것은 앞 절에서 설명했습니다. 그의 ‘아들, 곧 이름이 에노스인 이’(son, whose name was Enosh)가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여긴 교회를 뜻한다는 것 역시 앞에서 말한 내용으로 분명하며, 또한 그에게 ‘에노스’(Enosh)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사실에서도 분명합니다. 이 이름 역시 ‘사람’(man)을 뜻하는데, 천적 인간(celestial man)이 아니라 여기서 ‘에노스’라고 하는 바로 그 영적 인간(spiritual man)을 뜻합니다. 이것은 바로 이어지는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였다’(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ehovah)는 말씀에서도 분명합니다. That by “Seth” is signified the faith through which comes charity was shown in the preceding verse. That by his “son, whose name was Enosh,” is signified a church that regarded charity as the principal of faith, is also evident from what has been said before, as well as from the fact that it is called “Enosh,” which name also means a “man,” not a celestial man, but that human spiritual man which is here called “Enosh.” The same is evident also from the words that immediately follow: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ehovah.”

 

해설

AC.439는 앞의 AC.438에서 제시한 에노스의 의미를 그의 이름을 통해 한층 더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셋은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신앙’을 뜻하고, 그의 아들 에노스는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여긴 교회’를 뜻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에노스’라는 이름 자체도 ‘사람’(man)을 뜻한다고 하면서 매우 중요한 구별을 하나 덧붙입니다. 에노스가 나타내는 사람은 ‘천적 인간’(celestial man)이 아니라 ‘영적 인간’(spiritual man)이라는 것입니다.

 

이 구별은 창세기 앞부분을 읽어 온 독자에게는 오히려 새로운 질문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창1에서는 거듭남의 과정을 거쳐 영적 인간이 되고, 창2에서는 더 나아가 천적 인간이 된 상태를 다루었습니다. 태고교회의 본래 상태는 이 천적 인간의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아직 홍수 이전인 창4의 에노스에게 스베덴보리가 다시 ‘영적 인간’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따라서 에노스의 등장을 태고교회 처음의 천적 상태가 그대로 회복된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AC.439 자체는 왜 이 시점에서 다시 영적 인간이 나타나는지까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에노스가 천적 인간이 아니라 영적 인간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데 머뭅니다.

 

이 사실은 앞에서 이어져 온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생각하면 더욱 주목할 만합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나타냈습니다.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뒤에도 주님께서는 신앙을 완전히 사라지게 하지 않으시고 보존하셨습니다. 그리고 셋에서는 마침내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신앙’이 나타납니다. 이제 에노스에서는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여기는 교회가 나타납니다. 따라서 에노스는 앞의 가인과 같은 분리된 신앙의 상태가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가 다시 올바른 방향을 찾은 상태와 관련됩니다.

 

여기서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여겼다’(regarded charity as the principal of faith)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에노스로 나타나는 교회는 신앙을 버리거나 가볍게 여긴 교회가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을 인정하면서도 그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해야 하며, 체어리티가 신앙에서 으뜸이 되어야 한다고 여긴 교회입니다. 가인에게서 문제였던 것은 신앙 자체가 아니라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것이었습니다. 셋과 에노스에 이르러서는 이 관계가 달라집니다. 셋은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신앙이고, 에노스는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여기는 교회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어지는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였다’는 말씀도 에노스의 의미를 뒷받침한다고 합니다. AC.438에서는 이 말씀을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그 교회의 예배’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에노스로 나타나는 교회가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여겼다는 것과, 그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예배가 나타났다는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체어리티가 단순히 교리적으로 중요한 것으로 인정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 예배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는 분명히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AC.439는 에노스로 나타나는 ‘교회’를 직접 ‘영적 교회’라고 규정하지 않습니다. 에노스라는 이름이 뜻하는 ‘사람’이 천적 인간이 아니라 영적 인간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 한 글만을 근거로 에노스의 교회를 훗날 홍수 후에 등장하는 고대교회와 같은 의미의 ‘영적 교회’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단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태고교회 처음의 천적 상태가 그대로 되돌아온 것이 아니며, 에노스라는 이름에는 분명히 ‘영적 인간’이라는 새로운 성격이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에서 AC.439는 창4 마지막의 회복을 단순한 원상복귀로 이해하지 못하게 합니다. 주님께서는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신앙을 그대로 두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처음의 천적 상태를 단순히 되돌려 놓으신 것도 아닙니다. 셋으로 나타나는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다시 중심에 놓이는 교회를 마련하셨고, 그 교회를 나타내는 에노스라는 이름에는 ‘천적 인간이 아니라 영적 인간’이라는 중요한 변화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교회에서 체어리티로부터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예배가 나타납니다. 왜 홍수 이전에 벌써 ‘영적 인간’이 등장하는지는 이후의 설명까지 더 살펴보아야 하지만, 적어도 AC.439는 태고교회의 쇠퇴 이후 이루어지는 회복이 처음 상태의 단순한 반복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AC.439 해설)  

 

심화

1. ‘왜 홍수 전 에노스가 벌써 영적 인간인가?’

 

AC.439 심화 1, ‘왜 홍수 전 에노스가 벌써 영적 인간인가?’

AC.439 심화1. ‘왜 홍수 전 에노스가 벌써 영적 인간인가?’ AC.439를 읽다 보면 한 가지 뜻밖의 표현을 만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에노스’(Enosh)라는 이름 역시 ‘사람’(man)을 뜻한다고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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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40, 창4:26, ‘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를 의미하는가?’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26) AC.440방금 인용한 말씀이 그 교회의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를 뜻한다는 것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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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8, 창4:26, ‘에노스는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여긴 교회를 의미한다’ (AC.438-442)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And to Seth, to him also there was born a son; and he called his name Enosh: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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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And to Seth, to him also there was born a son; and he called his name Enosh: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ehovah. (창4:26)

 

AC.438

‘셋’(Seth)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신앙을 뜻합니다. 그의 ‘아들’(son), 곧 이름이 ‘에노스’(Enosh)인 이는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여긴 교회를 뜻합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call on the name of Jehovah) 시작했다는 것은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그 교회의 예배를 뜻합니다. By “Seth” is signified the faith through which comes charity, as was said above; by his “son,” whose name was “Enosh,” is signified a church which regarded charity as the principal of faith; by beginning then to “call on the name of Jehovah” is signified the worship of that church from charity.

 

해설

AC.438은 창4:26 전체의 속뜻을 먼저 압축하여 제시하는 글입니다. 바로 앞의 AC.434-437에서 셋은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신앙’, 곧 주님께서 체어리티를 다시 심으시기 위해 주신 새로운 신앙을 뜻했습니다. 이제 그 셋에게서 ‘아들’ 에노스가 태어납니다. 따라서 여기서 에노스는 단순히 셋 다음에 태어난 한 인물을 넘어, 앞에서 준비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실제로 교회의 중심에 자리 잡은 새로운 교회 상태를 나타냅니다.

 

특히 중요한 표현은 에노스가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여긴 교회’(a church which regarded charity as the principal of faith)를 뜻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으뜸’은 단순히 체어리티가 여러 덕목 가운데 하나로서 중요했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무엇이 신앙의 중심이며 무엇이 신앙을 살아 있게 하는가 하는 문제에서, 이 교회가 체어리티를 중심적인 것으로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앞에서 가인이 나타낸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었다면, 에노스로 나타난 교회에서는 신앙이 다시 체어리티를 중심으로 질서를 찾게 됩니다.

 

이 점에서 셋과 에노스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셋 자체가 곧 체어리티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셋은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신앙’을 뜻하고, 에노스는 그 신앙을 통하여 형성되어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인정하는 ‘교회’를 뜻합니다. AC.436에서 이미 셋은 ‘체어리티가 심어지는 신앙’, 에노스는 ‘신앙을 통해 심어진 체어리티’라고 예고되었습니다. AC.438은 이제 그 관계를 창4:26의 본문에 맞추어 더욱 분명하게 풀어 줍니다. 따라서 셋에서 에노스로의 진행은 단순한 부자 관계가 아니라, 새로운 신앙에서 그 신앙의 목적이었던 체어리티 중심의 교회로 나아가는 흐름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에서 살펴본 가인의 보존과도 연결됩니다. 가인이 나타낸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지만, 주님께서는 그 신앙까지 완전히 없어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신앙을 보존하신 목적은 그것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심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창4 마지막에 이르러 셋은 그 목적에 맞게 새롭게 주어진 신앙을, 에노스는 마침내 체어리티를 중심으로 삼는 교회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에노스의 등장은 앞에서부터 이어져 온 주님의 보존과 회복의 역사가 하나의 교회 형태로 나타난 지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어서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는 말씀도 이러한 흐름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AC.438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call on the name of Jehovah)를 단순히 여호와라는 이름을 입으로 부르기 시작했다는 역사적 사실로만 읽지 않고, 그 교회의 ‘예배’를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예배가 ‘체어리티에서 비롯된’(from charity) 예배라는 점입니다. 즉 에노스로 나타난 교회의 예배는 신앙에 관한 지식이나 고백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를 그 내적 생명으로 삼은 예배였습니다.

 

따라서 ‘그때에 비로소’라는 표현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그 이전에는 아무도 여호와를 부르거나 예배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곧바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적어도 AC.438에서 스베덴보리가 주목하는 것은 예배 행위가 역사상 처음 생긴 시점 자체가 아니라, 앞에서 설명한 새로운 교회가 이제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는 교회적 의미입니다. ‘그때’는 셋으로 나타난 새로운 신앙을 통하여 에노스로 나타난 체어리티 중심의 교회가 형성되고, 그 교회의 성격에 맞는 예배가 나타나는 흐름을 가리킵니다.

 

이렇게 보면 창4의 마지막은 가인과 라멕으로 이어진 쇠퇴의 이야기와 뚜렷한 대조를 이룹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고 마침내 황폐에 이르렀지만, 주님께서는 남아 있는 것을 보존하시고 새 교회를 준비하셨습니다. 셋에서는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새로운 신앙이 나타나고, 에노스에서는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여기는 교회가 나타나며, 마침내 그 교회에서는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가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AC.438은 창4 마지막 절을 통해 신앙의 회복이 어디를 향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 목적은 신앙 자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이며, 그 체어리티에서 참된 예배가 나오는 것입니다. (AC.438 해설)

 

 

 

AC.439, 창4:26, ‘에노스는 왜 천적 인간이 아닌 영적 인간을 의미하는가?’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26) AC.439‘셋’(Seth)이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신앙을 뜻한다는 것은 앞 절에서 설명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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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7, 창4:25, ‘다른 씨는 왜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새로운 신앙을 의미하는가?’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AC.437여기서 ‘셋’(Seth)이 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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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AC.437

여기서 ‘셋’(Seth)이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새로운 신앙을 뜻한다는 것은 그의 이름으로 설명됩니다. 그의 이름이 그렇게 붙여진 것은 하나님께서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기’(appointed another seed instead of Abel, whom Cain slew)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씨를 주셨다’(appointed another seed)는 것은 주님께서 다른 신앙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다른 씨’(another seed)는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씨’(seed)가 신앙을 뜻한다는 것은 앞의 AC.255에서 볼 수 있습니다. That “Seth” here signifies a new faith, through which comes charity, is explained by his name, which it is said was given him because God “appointed another seed instead of Abel, whom Cain slew.” That God “appointed another seed” means that the Lord gave another faith; for “another seed” is the faith through which comes charity. That “seed” signifies faith may be seen above (n. 255).

 

해설

AC.437은 창4:25에 대한 설명을 마무리하면서 ‘셋’과 ‘다른 씨’가 왜 새로운 신앙을 뜻하는지를 밝힙니다. 앞의 AC.434에서는 셋이 ‘체어리티를 얻을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신앙’이라고 했고, AC.436에서는 그것을 ‘체어리티가 심어지는 통로가 되는 신앙’이라고 좀 더 분명하게 설명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그 해석의 근거를 창4:25 자체의 ‘다른 씨’라는 표현과 셋의 이름에서 찾습니다.

 

먼저 중요한 것은 ‘다른’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단순히 다시 ‘씨’를 주셨다고 하지 않고 ‘다른 씨’(another seed)를 주셨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주님께서 다른 신앙을 주셨다’는 뜻으로 풀이합니다. 여기서 ‘다른 신앙’은 신앙과 전혀 다른 어떤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가인으로 나타났던 신앙과는 성격이 달라진 신앙을 뜻합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나타냈지만, 셋은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신앙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가인과 셋은 모두 신앙과 관계되지만, 그 신앙이 체어리티와 맺는 관계가 서로 다릅니다.

 

이 차이는 AC.436에서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가인이 나타내는 분리된 신앙은 아벨이 나타내는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신앙 자체를 완전히 없어지게 하지 않으시고 ‘가인의 표’를 통해 보존하셨습니다. 그 목적은 보존된 신앙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심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제 AC.437의 ‘다른 씨’는 그 긴 과정의 결과를 나타냅니다. 가인과 같은 분리된 신앙이 그대로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로 이어질 수 있는 ‘다른 신앙’이 주님에 의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씨’가 신앙을 뜻할까요? 바로 이 점 때문에 AC.437은 AC.255를 참조합니다. AC.255는 창3:15의 ‘여자의 씨’(seed of the woman)를 설명하면서, ‘여자’(woman)는 교회를 뜻하고 그 교회의 ‘씨’는 신앙이라고 밝힙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주님을 믿는 신앙으로부터 교회가 교회라 불리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AC.437에서 ‘다른 씨’가 ‘다른 신앙’을 뜻한다는 해석은 이번 글에서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앞에서 이미 세워진 ‘씨 = 신앙’이라는 상응에 근거합니다.

 

AC.255에 인용된 여러 성경 구절도 이 의미를 뒷받침합니다. 말2:14-15에서는 ‘하나님의 씨’(seed of God), 사44:3에서는 ‘네 씨’(thy seed), 계12:17에서는 여자의 ‘남은 자손’(remnant of her seed), 시89편에서는 다윗의 ‘씨’(seed)가 언급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가운데 특히 ‘여자’가 교회를 나타내고 그 교회의 ‘씨’가 신앙을 나타낸다는 관계를 밝힙니다. 그러므로 창4:25의 ‘다른 씨’ 역시 단순히 아벨 대신 태어난 또 하나의 육적인 후손이라는 의미를 넘어, 새 교회에 주어진 새로운 신앙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창4:25은 ‘아벨 대신에’ 다른 씨가 주어졌다고 말합니다. 아벨은 앞에서 체어리티를 나타냈으므로, 여기에는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아벨이 체어리티라면 아벨을 대신하여 주어진 셋도 체어리티를 뜻해야 할 것 같은데, 스베덴보리는 셋을 신앙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AC.434-437을 함께 읽으면 그 이유가 드러납니다. 셋은 아벨이 나타냈던 체어리티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체어리티가 다시 주어질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신앙입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절의 에노스가 ‘신앙을 통해 심어진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아벨 대신’이라는 말은 상응하는 의미가 단순히 ‘체어리티에서 체어리티로’ 일대일 교체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소멸된 체어리티가 다시 세워지기 위한 새로운 질서가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보면 창4:25의 구조가 상당히 정교합니다. 아벨이 나타내는 체어리티는 가인에 의해 소멸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마저 함께 소멸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보존하셨습니다. 그 보존된 신앙을 통하여 사랑의 거룩한 것과 선, 신앙의 영적인 것, 자연적 선과 진리가 차례로 주어졌고, 마침내 셋이라는 ‘다른 씨’, 곧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새로운 신앙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다음 절의 에노스에서 그 신앙을 통해 심어진 체어리티가 나타납니다. 창4의 마지막 부분은 이렇게 처음의 가인과 아벨 문제를 다시 풀어 가는 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주목해야 할 것은 주어가 ‘주님’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씨를 주셨다’는 것은 주님께서 다른 신앙을 주셨다는 뜻이라고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스스로 자신을 고쳐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남아 있는 신앙을 보존하시고, 그것을 통하여 새 교회를 준비하시며, 마침내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새로운 신앙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셋이 나타내는 새로운 시작의 중심에는 인간의 자기 회복이 아니라 주님의 역사하심이 있습니다.

 

결국 AC.437에서 ‘셋’은 단순히 가인을 대신하는 또 하나의 인물도, 아벨을 대신하는 또 하나의 아들도 아닙니다. 그는 ‘다른 씨’, 곧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새로운 신앙을 나타냅니다. 가인으로 나타난 신앙은 사랑에서 분리되어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지만, 셋으로 나타난 신앙은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질 수 있는 통로가 됩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신앙을 주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이로써 창4:25은 가인과 아벨에서 시작된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가 어떻게 주님의 섭리 가운데 새로운 질서를 향해 나아가는지를 보여 주는 글로 마무리됩니다. (AC.437 해설)

 

 

 

AC.438, 창4:26, ‘에노스는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여긴 교회를 의미한다’ (AC.438-442)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And to Seth, to him also there was born a son; and he called his name Enosh: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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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6, 창4:25, ‘가인에서 셋과 에노스까지, 신앙과 체어리티는 어떻게 다시 이어지는가?’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AC.436그 여자의 ‘아들’(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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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AC.436

그 여자의 ‘아들’(son), 곧 그가 셋이라 이름한 아들이 체어리티에 이를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신앙을 뜻한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것으로부터 분명하며, 또한 가인에 관해 ‘아무도 그를 죽이지 못하도록 그에게 표를 주셨다’(mark was set upon him, lest anyone should slay him)고 기록된 사실에서도 분명합니다. 이 주제가 연속적으로 전개되는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가인’(Cain)으로, 체어리티는 ‘아벨’(Abel)로 나타냈으며, 분리된 상태의 그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것은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으로 나타냈습니다. 체어리티가 그 신앙을 통해 주님에 의해 심어질 수 있도록 신앙을 보존하신 것은 아무도 가인을 죽이지 못하도록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신 것으로 나타냈습니다. That by her “son,” whom she named Seth, is signified a new faith, by which charity may be attained, 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previously stated, as well as from its being related of Cain that a “mark was set upon him, lest anyone should slay him.” For the subject as it stands in a series is as follows: Faith separated from love was signified by “Cain”; charity, by “Abel”; and that faith in its separated state extinguished charity was signified by Cain slaying Abel. The preservation of faith in order that charity might be thereby implanted by the Lord was signified by Jehovah’s setting a mark on Cain lest anyone should slay him.

 

그 후 사랑의 거룩한 것과 거기서 나오는 선이 주님에 의해 신앙을 통해 주어진 것은 아다가 낳은 야발로 나타냈고, 신앙의 영적인 것이 주어진 것은 그의 아우 유발로 나타냈으며, 이들로부터 자연적 선과 진리가 나온 것은 씰라가 낳은 두발가인으로 나타냈습니다. 창세기 4장의 마지막 두 절에는 이 모든 것의 결론, 따라서 그 요약이 들어 있습니다. 곧 ‘사람과 그의 아내’(man and his wife)는 앞에서 아다와 씰라라고 불렸던 그 새 교회를 뜻하고, ‘셋’(Seth)은 체어리티가 심어지는 통로가 되는 신앙을 뜻하며, 이제 이어지는 절의 ‘에노스’(Enosh)는 신앙을 통해 심어진 체어리티를 뜻합니다. That afterwards the holy of love and the good thence derived were given by the Lord through faith was signified by Jabal whom Adah bare; and that the spiritual of faith was given, was signified by his brother Jubal; and that from these there came natural good and truth was signified by Tubal-Cain whom Zillah bare. In these two concluding verses of Genesis 4 we have the conclusion, and thus the summary, of all these matters, to this effect, that by the “man and his wife” is signified that new church which before was called Adah and Zillah, and that by “Seth” is signified the faith through which charity is implanted; and in the verse which now follows, by “Enosh” is signified the charity that is implanted through faith.

 

해설

AC.436은 창4의 가인 이후 이야기를 거의 한눈에 펼쳐 보이는 매우 중요한 글입니다. 지금까지 가인, 아벨, 가인의 표, 야발, 유발, 두발가인, 그리고 마지막의 셋이 각각 무엇을 뜻하는지 개별적으로 설명해 왔다면, 여기서는 그 모든 내용을 하나의 연속된 과정으로 묶습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이 주제가 연속적으로 전개되는 순서는 다음과 같다’고 하며 그 흐름을 다시 정리합니다. 따라서 창4의 인물들을 서로 독립된 상징들로만 읽어서는 안 되고,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와 소멸, 보존, 그리고 다시 결합을 향한 과정으로 읽어야 합니다.

 

출발점은 가인과 아벨입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것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AC.436은 가인의 의미를 더욱 정확하게 표현합니다. 단순히 ‘신앙’이 아니라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입니다. 문제는 신앙 자체가 아니라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매우 중요한 반전이 일어납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가인을 곧바로 없애지 않으셨습니다. 아무도 가인을 죽이지 못하도록 표를 주셨습니다. 앞에서 이 ‘가인의 표’를 신앙의 보존으로 설명했지만, AC.436은 이제 그 보존의 목적을 아주 분명하게 밝힙니다. 그것은 단순히 분리된 신앙 자체를 영구히 보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체어리티가 그 신앙을 통해 주님에 의해 심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보존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을 보존하신 것은 그 신앙을 최종 상태로 인정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장차 체어리티를 다시 심으실 수 있는 수단을 남겨 두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은 ‘가인의 표’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가인의 표는 악한 상태를 승인하거나 분리된 신앙을 이상적인 신앙으로 인정한다는 표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아직 남아 있는 신앙을 파괴되지 않게 보존하시고, 바로 그것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심으십니다. 인간 편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분리되고 체어리티가 소멸되었지만, 주님의 섭리는 그 가운데 남아 있는 것을 보존하여 새로운 교회의 출발점으로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이후 야발, 유발, 두발가인의 의미도 이러한 큰 흐름 안에서 다시 정리됩니다. 야발은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주신 ‘사랑의 거룩한 것과 거기서 나오는 선’을, 유발은 ‘신앙의 영적인 것’을, 두발가인은 이들로부터 나온 ‘자연적 선과 진리’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 인물들의 이야기는 단순히 목축, 음악, 금속 기술의 기원을 말하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속뜻으로는 보존된 신앙을 통하여 주님께서 교회 안에 다시 사랑과 선, 신앙의 영적인 것, 그리고 자연적 선과 진리를 마련해 가시는 과정이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설명은 앞의 AC.434-435에서 제기된 창4의 가인 계열과 창5의 셋 계열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도 중요한 빛을 비춥니다. 문자적으로만 보면 가인에게서 시작된 후손들의 계보와 셋에게서 시작되는 계보를 두 개의 나란한 혈통으로 읽기 쉽습니다. 그러나 AC.436은 속뜻으로는 창4의 가인 이후 이야기가 셋과 단절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연속된 교회적 과정임을 분명히 합니다. 가인이 나타내는 분리된 신앙이 보존되고, 그 보존된 신앙을 통하여 사랑과 선 및 영적인 것이 주어지며, 마침내 셋이 나타내는 새로운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지는 흐름입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창4의 마지막 두 절이 ‘이 모든 것의 결론, 따라서 그 요약’이라고 직접 말합니다. 이것은 창4:25-26을 앞의 가인 계열과 전혀 관계없는 새로운 족보의 시작으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는 강력한 단서입니다. 창4 전체에서 전개되어 온 신앙과 체어리티의 이야기가 마지막 두 절에서 결론을 맺는 것입니다. ‘사람과 그의 아내’는 앞에서 아다와 씰라라고 불렸던 새 교회이고, 그들에게서 난 셋은 체어리티가 심어지는 통로가 되는 신앙입니다. 따라서 셋은 앞의 이야기를 지워 버리고 새로 시작하는 인물이 아니라, 앞에서 보존되고 준비되어 온 것이 새로운 질서 안에서 결실을 향해 나아가는 지점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AC.436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직 읽지 않은 창4:26의 에노스까지 미리 밝혀 줍니다. 셋이 ‘체어리티가 심어지는 통로가 되는 신앙’이라면, 에노스는 ‘신앙을 통해 심어진 체어리티’입니다. 이 둘의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셋 자체가 체어리티인 것이 아닙니다. 셋은 체어리티가 주님에 의해 심어질 수 있게 하는 신앙이고, 에노스에 이르러 그 체어리티가 실제로 심어진 상태가 나타납니다. 따라서 가인에서 셋과 에노스에 이르는 전체 흐름을 보면, 분리된 신앙에서 시작하여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그럼에도 신앙이 보존되며, 그 신앙을 통해 주님께서 다시 사랑과 선을 주시고, 마침내 새로운 신앙을 통해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지는 하나의 긴 과정이 드러납니다.

 

무엇보다 이 과정에서 주도권은 계속 주님께 있습니다. 체어리티를 다시 만들어 내는 것은 보존된 신앙 자체가 아닙니다. AC.436은 체어리티가 ‘주님에 의해’ 신앙을 통해 심어진다고 거듭 말합니다. 신앙은 통로이며, 심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가인의 표에서부터 셋과 에노스에 이르는 과정의 중심에는 인간이 무너뜨린 것 가운데서도 남은 것을 보존하시고, 그것을 통하여 다시 사랑과 체어리티를 심으시는 주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이 점에서 AC.436은 창4의 어두운 역사를 단순한 쇠퇴의 기록으로 끝내지 않고, 그 쇠퇴 속에서도 새 교회를 준비하시는 주님의 역사를 보여 주는 글이라 할 수 있습니다. (AC.436 해설)

 

 

 

AC.437, 창4:25, ‘다른 씨는 왜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새로운 신앙을 의미하는가?’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AC.437여기서 ‘셋’(Seth)이 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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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5, 창4:25, ‘같은 사람과 아내가 다시 나오는데 왜 다른 교회를 의미하는가?’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AC.435여기서 ‘사람’(man)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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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6 심화

1. 왜 체어리티가 심어지자 다시 ‘사람’[homo]이라 불리는가?

 

AC.336에서 가장 깊이 생각해 볼 표현은 ‘another man [homo]’, 곧 ‘또 하나의 사람’일 것입니다. 왜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에노스는 새로운 교회였다’고 하지 않고 굳이 ‘또 하나의 사람’이라고 했을까요? 이 질문은 스베덴보리에게 ‘사람’이라는 말이 어떤 영적 의미를 가지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창세기 초기의 속뜻에서 사람은 단순히 인간의 외적 형체를 가진 존재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인간을 참으로 사람답게 하는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며, 그 생명이 인간 안에서 선과 진리의 결합으로 받아들여질 때 인간은 영적인 의미에서 더욱 참된 사람이 됩니다. 따라서 ‘사람’이라는 표현은 교회의 상태를 나타내는 이름으로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가인의 상태와 에노스의 상태가 대조됩니다. 가인은 신앙을 의미했지만 그 신앙은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었습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이 무너지면서 교회적 생명도 무너졌고, 그 분리는 마침내 체어리티의 소멸과 신앙 자체의 변질로 이어졌습니다.

 

반면 AC.335에서는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을 주셨고,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심으셨다고 합니다. 그 새로운 신앙이 셋이며, 이제 AC.336에서는 그렇게 심어진 체어리티를 에노스라고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에노스를 ‘또 하나의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다시 올바른 관계 안에 놓이면서 하나의 교회적 생명이 형성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앙만 따로 존재하거나 체어리티와 분리된 상태에서는 교회의 생명이 온전하지 않지만,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심으시고 그 둘이 다시 결합될 때 하나의 살아 있는 교회적 상태가 형성됩니다.

 

그러므로 ‘또 하나의 사람’이라는 말은 단지 에노스라는 개인에게 붙여진 별명이 아닙니다. AC.336은 바로 이어서 ‘이것이 그 교회의 이름’이라고 말합니다. 에노스는 한 개인의 이름인 동시에 속뜻에서는 그 상태를 가진 교회의 이름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체어리티를 다시 심으심으로써 교회가 다시 ‘사람’이라고 불릴 수 있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됨의 근원이 인간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신앙과 체어리티를 만들어 결합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신앙도 주님께서 주셨고, 체어리티 역시 주님께서 심으십니다. 인간이 참으로 사람이 되는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의 생명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람’이라는 말에는 인간의 영적 존엄과 함께 인간의 전적인 의존도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proprium으로 참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받아들이는 만큼 사람다운 생명을 갖게 됩니다. 교회 역시 조직이나 이름 때문에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살아 있을 때 참된 교회가 됩니다.

 

가인의 상태에서는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되었습니다. 그래서 외적으로는 신앙에 관한 교리와 예배가 있어도 그 안의 생명은 점차 무너질 수 있었습니다. 반면 에노스에서는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지고, 그 결과 새로운 교회가 ‘또 하나의 사람’이라는 이름을 받습니다. 이것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이 교회의 인간다운 형상을 이루는 데 얼마나 본질적인지를 보여 줍니다.

 

다만 이 ‘또 하나의 사람’을 최초의 태고교회와 완전히 같은 상태의 회복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에노스 역시 태고교회의 흐름 안에 있지만, 앞선 상태와 동일한 교회라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another man’, 곧 ‘또 하나의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새로운 교회적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 구체적인 성격과 변화는 이어지는 AC의 설명을 따라가며 확인해야 합니다.

 

또한 셋과 에노스의 관계를 곧바로 홍수 이후 영적 인간의 일반적인 거듭남 단계로 옮겨 놓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먼저 진리를 배우고 신앙으로 행하다가 나중에 체어리티가 생긴다’는 식의 단계는 후대 영적 인간의 거듭남을 설명할 때 중요한 의미를 가지지만, AC.336의 에노스는 아직 태고교회 문맥 안에 있습니다.

 

바로 다음 AC.337에서도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를 천적 인간이라고 하며, 그들에게는 사랑으로부터 주님께 받은 신앙, 곧 신앙에 속한 것들을 아는 퍼셉션이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AC.336에서는 우선 ‘주님께서 주신 새로운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졌고, 그 체어리티와 교회가 에노스, 곧 또 하나의 사람이라 불렸다’는 직접 진술을 중심에 두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이 원리를 우리의 거듭남에 적용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서 셋 단계가 지나면 에노스 단계가 온다’는 식의 고정된 시간표로 적용하기보다, 참된 인간의 생명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주님 안에서 결합될 때 나타난다는 영적 원리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안전합니다.

 

이것은 오늘의 교회를 바라볼 때에도 중요합니다. 교회가 교리를 정확히 가지고 있고 많은 지식을 가르친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사람’이라 불릴 만한 살아 있는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진리가 실제로 선과 결합되고,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사람들의 삶 안에 나타나야 합니다.

 

반대로 체어리티를 말한다고 해서 진리를 불필요한 것으로 만드는 것도 올바른 질서가 아닙니다. 에노스는 셋을 없앤 뒤 나타난 것이 아니라 셋으로 의미된 신앙을 통하여 심어진 체어리티입니다. 따라서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를 제거하는 경쟁 관계가 아니라, 주님께서 하나의 살아 있는 교회 안에서 결합시키시는 것입니다.

 

결국 AC.336의 ‘또 하나의 사람’이라는 짧은 표현은 참된 인간과 참된 교회가 무엇인지를 압축해서 보여 줍니다. 참된 사람은 자기 지식이나 자기 선으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그 둘이 결합된 생명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태가 공동체 안에 이루어질 때 그 교회 역시 하나의 ‘사람’이라 불릴 수 있습니다.

 

가인에게서 무너졌던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이 셋과 에노스에서 다시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 회복의 중심에는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이 계십니다. 새로운 신앙을 주시는 분도 주님이시고,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심으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바로 그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교회가 ‘에노스’, 곧 ‘또 하나의 사람’입니다.

 

 

 

AC.336, 창4:26, ‘에노스’(Enosh)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And to Seth, to him also there was born a son; and he called his name Enosh: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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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And to Seth, to him also there was born a son; and he called his name Enosh: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ehovah. (창4:26)

 

AC.336

신앙을 통하여 심어진 체어리티를 ‘에노스’(Enosh), 곧 또 하나의 ‘사람’(man, homo)이라 하는데, 이것이 그 교회의 이름입니다. (26절) The charity implanted by faith is called “Enosh,” or another “man” [homo], which is the name of that church. (verse 26)

 

해설

AC.336은 바로 앞 AC.335와 한 문장처럼 이어서 읽어야 합니다. AC.335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으로 의미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뒤,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을 주셨고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졌다고 했습니다. 그 새로운 신앙이 ‘셋’입니다. 이제 AC.336에서는 그 신앙을 통하여 심어진 체어리티를 ‘에노스’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흐름은 매우 분명합니다. ‘셋’은 새로운 신앙이고, ‘에노스’는 그 신앙을 통하여 심어진 체어리티이며, 동시에 그 상태로 형성된 교회의 이름입니다.

 

여기서 가장 먼저 주의할 것은 ‘신앙을 통하여 심어진 체어리티’라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신앙이 체어리티의 근원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체어리티의 근원은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바로 앞 AC.335에서도 새로운 신앙이 ‘주님에 의해 주어졌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체어리티를 스스로 만들어 내는 원인이 아니라, 주님께서 체어리티를 심으시는 데 사용하시는 하나의 질서와 수단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가인과 셋, 아벨과 에노스의 대조가 매우 인상적입니다. 가인은 신앙을 의미했지만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었고, 그 신앙은 결국 아벨로 의미된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습니다. 반면 셋 역시 신앙을 의미하지만,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집니다. 그래서 가인의 신앙은 아벨을 죽이는 방향으로 진행되지만, 셋의 신앙에서는 에노스가 나타납니다. 같은 ‘신앙’이라 하더라도 체어리티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 따라 그 질이 전혀 달라진다는 사실이 다시 한 번 드러납니다.

 

그러나 이 대조를 곧바로 홍수 이후 영적 인간의 거듭남 순서와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셋과 에노스는 여전히 태고교회 문맥 안에 있습니다. 바로 다음 AC.337에서도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를 천적 인간으로 설명하면서, 그들에게는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부터 신앙이 있었고, 그 신앙은 사실상 퍼셉션의 형태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AC.336의 ‘신앙을 통하여 심어진 체어리티’를 ‘먼저 진리를 배우고 나중에 체어리티가 생기는 후대 영적 인간의 일반적인 거듭남 단계’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우선은 AC.336이 직접 말하는 범위에 머무르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가인으로 의미된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뒤,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을 주셨고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다시 심으셨습니다. 그 체어리티를 에노스라고 했고, 그것이 그 교회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이 상태가 태고교회 안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성격을 가졌는지는 이어지는 상세 해설에서 더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에노스를 단순히 ‘체어리티’라고만 하지 않고 ‘또 하나의 사람’(another man, homo)이라고 부릅니다. 이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창세기 앞부분에서 ‘사람’은 단순히 생물학적 인간이라는 뜻보다 더 깊은 교회적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인간 안에서 살아 있고 서로 결합되어 있을 때, 그 상태가 참된 의미의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므로 에노스를 ‘또 하나의 사람’이라고 한 것은 새로운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짐으로써 다시 교회라 할 수 있는 상태가 형성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분리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이 무너졌지만, 셋과 에노스에서는 그 둘이 다시 교회 안에서 함께 존재할 수 있는 질서가 마련됩니다. 바로 그 때문에 에노스는 단순한 한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그 교회의 이름’이 됩니다.

 

다만 ‘또 하나의 사람’이라는 말을 곧바로 ‘최초의 태고교회와 똑같은 상태가 완전히 회복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또 하나의 사람’이라는 표현은 새로운 교회적 상태가 다시 형성되었음을 보여 주지만, 그 상태가 최초의 태고교회와 어느 점에서 같고 어느 점에서 달랐는지는 뒤의 상세 해설을 따라가며 살펴보아야 합니다. AC.336 한 문장만으로 그 차이를 모두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현재 블로그 해설에는 최초의 태고교회는 사랑으로부터 직접 퍼셉션을 가졌고, 에노스 교회는 셋으로 의미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졌다는 대비가 들어 있습니다. 큰 방향에서는 의미가 있지만, 이것을 ‘최초의 퍼셉션은 이미 사라졌고 이제 신앙을 먼저 배우는 새로운 방식이 시작되었다’는 식으로 강하게 말하면 너무 앞서갑니다. 이어지는 AC.337은 여전히 태고교회의 참된 상태를 사랑에서 오는 퍼셉션으로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최초 상태와 완전히 동일하지 않은 새로운 교회적 상태’라는 정도로 두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또한 AC.336의 마지막 표현인 ‘이것이 그 교회의 이름입니다’는 창세기 초기의 이름들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매우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에노스는 단순히 셋의 아들이라는 개인적 이름에 머물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이 실제로 하나의 교회의 이름이라고 명시합니다. 따라서 창4의 계보에서 인물들의 이름은 교리적, 교회적 상태의 계승을 표상하는 것으로 읽어야 합니다.

 

이 점에서 창4:25-26은 창4 전체의 긴 흐름을 매우 압축해서 마무리합니다. 가인으로 의미된 분리된 신앙은 아벨로 의미된 체어리티를 소멸시켰고, 그 분리는 여러 파생 상태를 거쳐 라멕에서 신앙에 속한 것마저 남지 않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새로운 신앙을 주셨고,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다시 심으셨습니다. 셋과 에노스는 바로 그 새로운 시작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에노스’가 단순히 체어리티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체어리티가 심어진 하나의 교회적 상태 전체의 이름이라는 점입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다시 결합될 수 있는 상태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그 교회가 다시 ‘사람’이라고 불립니다. 참된 교회는 교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선, 신앙과 체어리티가 주님 안에서 살아 있는 결합을 이룰 때 교회가 됩니다.

 

이 원리는 오늘 우리의 신앙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다만 가인, 셋, 에노스의 역사적 표상과 개인의 거듭남을 곧바로 일대일 대응시키지는 않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그 속뜻에서 드러나는 원리를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내가 가진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방향으로 가는지, 아니면 주님께서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살아 있게 하시는 방향으로 가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특히 AC와 말씀의 속뜻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이 질문은 중요합니다. 많은 진리를 아는 것이 교회의 생명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그 진리가 주님께서 우리 안에 선과 체어리티를 이루시는 수단이 될 때 비로소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다시 결합될 때 ‘에노스’, 곧 ‘또 하나의 사람’이 나타난다는 AC.336의 짧은 말은 참된 교회와 참된 인간의 생명이 어디에 있는지를 매우 깊게 보여 줍니다.

 

심화

1. 왜 체어리티가 심어지자 다시 ‘사람’[homo]이라 불리는가?

 

AC.336 심화 1, 왜 체어리티가 심어지자 다시 ‘사람’[homo]이라 불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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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7, 창4, ‘참된 태고교회를 알아야 가인의 왜곡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337이 장은 태고교회의 퇴보, 곧 그 교리의 왜곡과, 그 결과 생겨난 이단들과 분파들을 가인과 그의 후손들의 이름 아래 다루고 있으므로,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참된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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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5, 창4:25, ‘셋’(Seth)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And the man knew his wife again, and she bare a 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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