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창4:23)

 

AC.429

‘사람’(man [vir])이 신앙을 뜻한다는 사실은 이 장의 첫 절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하와가 가인을 낳았을 때 ‘내가 한 사람을 얻었다, 여호와를’(I have gotten a man, Jehovah)이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가인은 신앙의 교리를 뜻했으며, 그 교리를 ‘한 사람, 여호와’(a man, Jehovah)라고 불렀습니다. 또한 앞에서 사람 또는 남자가 이해력을 뜻한다고 밝힌 내용에서도 이를 알 수 있습니다. 이해력은 신앙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여기서 ‘어린 것’(a little one), 곧 ‘어린아이’(a little child)라고 부르는 체어리티까지 소멸시켰다는 사실도 여기에서 따라 나옵니다. 신앙을 부인하고 죽이는 사람은 동시에 신앙에서 태어나는 체어리티도 부인하고 죽이기 때문입니다. That by a “man” [vir] is signified faith is evident from the first verse of this chapter, in that Eve said, when she bare Cain, “I have gotten a man, Jehovah”; by whom was meant the doctrine of faith, called “a man, Jehovah.” It is evident also from what was shown above concerning a man or male, that he signifies understanding, which is of faith. That he had also extinguished charity, here called a “little one,” or a “little child,” follows, for he who denies and murders faith, at the same time also denies and murders the charity that is born from faith.

 

해설

AC.429는 앞의 AC.427에서 라멕의 말을 풀이하면서 제시한 두 가지 상응의 근거를 설명합니다. 라멕이 ‘한 사람’을 죽였다는 것은 신앙을 소멸시켰다는 뜻이고,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것은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는 뜻이었습니다.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는 먼저 왜 ‘사람’이 신앙을 나타내는지 밝힌 다음, 신앙의 소멸이 체어리티의 소멸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설명합니다.

 

‘사람’이 신앙을 뜻한다는 첫 번째 근거는 창4:1입니다. 하와는 가인을 낳고 ‘내가 한 사람을 얻었다, 여호와를’이라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에서 이 구절의 가인이 신앙의 교리를 뜻한다고 풀이했습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의 ‘사람’은 단순히 남성이나 인간 일반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가인에게 적용된 ‘사람’이라는 표현을 앞선 해설과 연결하여, 그것이 신앙을 나타낸다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근거는 사람 또는 남자가 ‘이해력’을 나타낸다는 앞선 설명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해력이 신앙에 속한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이해력을 통해 신앙에 관한 것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과 ‘신앙’의 관계는 단순히 한 단어에 임의의 뜻을 붙인 결과가 아니라, 이해력과 신앙의 관계를 통해 설명됩니다. 다만 이해력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에게 살아 있는 신앙이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번 번호는 이해력이 신앙에 속한다는 관계를 밝히는 데 초점을 맞춥니다.

 

그렇다면 왜 ‘어린아이’는 체어리티를 뜻할까요?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를 ‘신앙에서 태어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신앙을 부인하고 죽이는 사람은 신앙에서 태어나는 체어리티도 동시에 부인하고 죽인다고 말합니다. 라멕이 ‘사람’과 ‘어린아이’를 함께 죽였다고 한 것은, 신앙의 소멸과 체어리티의 소멸이 서로 무관한 두 사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신앙에서 태어나는 체어리티’라는 표현은 주의해서 읽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른 곳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여러 각도에서 설명하며, 특히 신앙을 체어리티와 분리하는 일을 경계합니다. 따라서 이 한 문장만으로 체어리티가 언제나 신앙보다 낮거나 부차적이라는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AC.429의 직접적인 논지는 신앙을 소멸시키면 그 신앙에서 태어나는 체어리티도 함께 소멸된다는 데 있습니다.

 

이 설명은 앞에서 살펴본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와도 연결됩니다. 창4장의 앞부분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분리되는 문제를 다루었고, 라멕의 말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모두 소멸된 상태가 나타납니다. AC.429는 그 가운데 ‘사람’과 ‘어린아이’라는 표현을 통해 두 소멸의 관계를 밝힙니다. 라멕의 고백을 단순히 두 사람을 죽였다는 문자적 진술로만 읽으면 놓치기 쉬운 부분입니다.

 

결국 AC.429는 라멕이 죽였다고 말한 ‘사람’이 왜 신앙을 뜻하는지 창4:1과 이해력에 관한 앞선 설명을 통해 밝힙니다. 또한 ‘어린아이’가 체어리티를 뜻하는 이유를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에서 설명합니다. 신앙을 부인하고 소멸시키는 일은 그 신앙에서 태어나는 체어리티의 소멸과도 연결됩니다. 이처럼 라멕의 말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모두 사라진 교회의 황폐를 드러냅니다. (AC.429 해설)

 

심화

1, ‘신앙에서 체어리티가 태어난다는 말은 체어리티가 신앙보다 낮다는 뜻인가?’

 

AC.429 심화 1, ‘신앙에서 체어리티가 태어난다는 말은 체어리티가 신앙보다 낮다는 뜻인가?’

AC.429 심화1, ‘신앙에서 체어리티가 태어난다는 말은 체어리티가 신앙보다 낮다는 뜻인가?’ AC.429에서 처음 읽는 독자가 특히 멈칫할 만한 표현은 ‘신앙에서 태어나는 체어리티’입니다. 앞에

bygrace.kr

 

 

 

AC.430, 창4:23, ‘어린아이는 왜 순진무구와 체어리티를 의미하는가?’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창4:23) AC.

bygrace.kr

 

AC.428, 창4:23, ‘라멕의 말은 왜 황폐를 분명하게 보여 주는가?’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창4:23) AC.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11 심화

1. ‘자신을 확증하다’(confirms himself)는 무슨 뜻인가?

 

AC.11을 처음 읽으면 ‘자신을 확증하다’(confirms himself)라는 표현에서 조금 멈추게 됩니다. 우리말의 ‘확증하다’는 보통 어떤 사실이 틀림없음을 증명하거나 확인한다는 뜻으로 들리고, ‘자신을 확증한다’고 하면 자기 생각이나 주장을 스스로 옳다고 굳히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먼저 AC.11의 문맥을 그대로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에 이른 사람이 ‘신앙으로 말하며, 그럼으로써 자신이 진리와 선 안에 있음을 확증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확증’의 중심은 자기주장을 강하게 내세우거나 자기 생각이 옳다는 증거를 모으는 데 있지 않습니다. 사람이 거듭남의 과정에서 신앙으로 말하게 되고, 진리와 선 안에서 점점 확고해지는 상태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문맥에 더 가깝습니다.

 

이것은 AC.10과 비교하면 조금 더 이해하기 쉽습니다. 네 번째 상태에서는 사람이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의 빛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AC.11의 다섯 번째 상태에서는 이제 ‘신앙으로 말한다’고 합니다. 즉 앞에서 받은 신앙이 단지 순간적으로 비추는 빛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서 말로 나타날 정도로 자리 잡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확증한다’는 것을 ‘삶의 경험을 통해 그 진리가 참이라는 사실을 확인한다’고 설명해도 될까요? 그렇게 생각하면 이해에는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그것을 AC.11이 직접 내리는 정의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AC.11은 사람이 여러 경험을 해 보고 진리의 효용을 검증한 뒤 확신하게 된다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본문이 직접 말하는 것은 그가 이제 신앙으로 말하며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처음에는 다른 사람에게서 배운 진리를 ‘그렇다고 하니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진리가 점점 자기 생각과 말의 바탕이 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낯설었던 길이 여러 번 다니다 보면 점차 익숙한 길이 되는 것처럼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확증’의 정확한 사전적 정의라기보다 AC.11의 상태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비유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 주의할 것은 ‘자신을 확증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자기 힘으로 스스로를 진리와 선 안에 세운다는 뜻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AC.6부터 계속되는 전체 문맥은 사람의 거듭남을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로 다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신을 확증한다’는 표현을 인간이 독립적으로 자기 안에 진리와 선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굳힌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다른 곳에서 사용하는 ‘확증’이라는 말까지 생각하면 또 하나의 구별도 필요합니다. 사람은 진리를 확증할 수도 있지만 거짓을 확증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확증’이라는 단어 자체가 언제나 좋은 영적 상태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을 참이라고 받아들이고 무엇 안에서 자신을 굳히느냐가 중요합니다. AC.11에서는 그 대상이 분명히 ‘진리와 선’이므로 좋은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점은 처음 읽는 독자에게 특히 중요합니다. ‘확증’이라는 단어만 떼어 읽으면 ‘자기가 믿고 싶은 것을 더욱 굳게 믿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지만, AC.11에서는 그런 완고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사람이 이제 신앙으로 말하고, 진리와 선 안에서 더욱 확고해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 상태는 아직 거듭남의 마지막 상태도 아닙니다. 바로 다음 AC.12에서는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여섯 번째 상태가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AC.11의 ‘확증’을 거듭남의 완성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이것은 여섯 상태 가운데 다섯 번째 상태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중요한 변화입니다.

 

따라서 AC.11의 ‘자신을 확증하다’는 표현은 우선 이렇게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자기 생각이 옳다고 고집한다는 뜻이 아니라,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사람이 신앙으로 말하고 진리와 선 안에서 점점 확고해지는 상태를 가리킨다.’ 그리고 이것을 우리의 경험에 적용하여 설명할 때에는 ‘배운 진리가 점차 자기 생각과 말의 바탕으로 자리 잡아 간다’고 풀어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AC.11에서 왜 ‘신앙으로 말한다’는 것과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한다’는 것이 함께 나오는지도 조금 더 쉽게 보입니다.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에서는 진리와 선이 더 이상 멀리서 들은 가르침으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신앙으로 말할 수 있을 만큼 그 안에서 점차 확고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AC.11 심화 1)

 

 

 

AC.11, 창1 개요, 신앙으로 말하며 진리와 선 안에서 확증되는 때 :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

AC.11 다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말하고, 그로써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하는 때입니다. 이때 그에게서 나오는 것들은 생기를 지닌 것들이며, ‘바다의 물고기’(fish of the sea)와 ‘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1 심화

1. ‘religious belief’를 왜 ‘종교적인 믿음’으로 번역하는가?

 

AC.1에서 ‘religious belief’는 말씀의 내적인 것들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열거하는 가운데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이 주님과 주님의 천국, 교회, ‘religious belief’, 그리고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faith’가 아니라 ‘belief’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AC 번역에서 ‘faith’는 기본적으로 ‘신앙’, ‘belief’는 ‘믿음’으로 구별하기로 한 원칙을 따르면, ‘religious belief’는 ‘종교적인 믿음’으로 옮기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이것을 곧바로 ‘신앙’이라고 번역하면 원문에서 서로 다른 단어를 사용했을 때 그 차이가 한국어에서 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AC.1의 이 한 표현만으로 ‘religious belief’의 신학적 범위를 지나치게 크게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교리 체계만을 가리키는지, 교회 밖에서 신성을 인정하는 종교적 믿음까지 모두 포함하는지, 또는 ‘faith’와 ‘belief’ 사이에 스베덴보리가 언제나 일정한 전문적 구별을 두는지까지는 더 많은 용례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AC.1은 아직 그러한 구별을 설명하는 문맥이 아니라 말씀 안의 내적인 것들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넓게 열거하는 서문의 첫 문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서는 원문의 차이를 보존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faith’가 나오지 않았는데 익숙한 신학 용어라는 이유로 ‘신앙’으로 바꾸지 않고, ‘religious belief’를 ‘종교적인 믿음’으로 옮겨 두는 것입니다. 이후 AC를 읽으며 ‘faith’와 ‘belief’의 실제 용례가 충분히 쌓이면 두 단어의 관계도 스베덴보리 자신의 사용을 따라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AC.1 심화 1)

 

 

 

AC.1 심화 2, ‘층위’란 무엇인가?

AC.1 심화2. ‘층위’란 무엇인가? AC.1 해설에서 ‘층위’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말씀의 겉 글자와 그 안의 내적인 것이 단순히 같은 평면에 놓인 두 가지 설명이 아니라는 점을 쉽게 표현하기 위

bygrace.kr

 

AC.1, 서문, ‘말씀 안에 담긴 하늘의 비밀들’

AC.1구약의 말씀을 단순히 겉 글자로만 보아서는, 그 안에 하늘의 깊은 비밀들이 들어 있으며,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주님과 주님의 천국, 교회, 종교적인 믿음, 그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창1:14-17)

 

AC.36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한 사람들은 신앙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어떤 이들은 신앙을 단지 생각이라고 여기고, 어떤 이들은 주님을 향한 생각이라고 여기며, 또 어떤 이들은 신앙의 교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신앙 교리에 포함된 모든 것을 아는 것과 인정하는 데에만 있지 않고, 특히 그 교리가 가르치는 모든 것에 순종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 교리가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것, 곧 사람이 반드시 순종해야 할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love to the Lord)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love toward the neighbor)입니다. 사람이 이 사랑 안에 있지 않다면, 그는 신앙 안에 있지 않습니다. 이 점에 대해 주님은 너무도 분명하게 가르치셔서, 조금도 의심할 여지를 남기지 않으십니다. 마가복음입니다. They who have separated faith from love do not even know what faith is. When thinking of faith, some imagine it to be mere thought, some that it is thought directed toward the Lord, few that it is the doctrine of faith. But faith is not only a knowledge and acknowledgment of all things that the doctrine of faith comprises, but especially is it an obedience to all things that the doctrine of faith teaches. The primary point that it teaches, and that which men should obey, is love to the Lord, and love toward the neighbor, for if a man is not in this, he is not in faith. This the Lord teaches so plainly as to leave no doubt concerning it, in Mark:

 

29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막12:29-31) The foremost of all the commandments is, Hear, O Israel, the Lord our God is one Lord; therefore thou shalt love the Lord thy God with all thy heart, and with all thy soul, and with all thy mind, and with all thy strength: this is the foremost commandment; and the second is like, namely this, thou shalt love thy neighbor as thyself; there is none other commandment greater than these (Mark 12:29–31).

 

마태복음에서 주님은 앞의 계명을 ‘크고 첫째 되는 계명’(first and great commandment)이라 하시며,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on these commandments hang all the law and the prophets)라고 하십니다 (마22:37-40). 여기서 ‘율법과 선지자’(law and the prophets)는 신앙의 보편적 교리이며, 말씀 전체를 뜻합니다. In Matthew, the Lord calls the former of these the “first and great commandment,” and says that “on these commandments hang all the law and the prophets.” (Matt. 22:37–41) The “law and the prophets” are the universal doctrine of faith, and the whole Word.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22:37-40)

 

해설

AC.36은 매우 직접적인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한 사람들은 신앙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상당히 강한 말입니다. 그런데 이 문장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스베덴보리가 무엇을 ‘신앙’이라고 부르는지부터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는 어떤 교리를 머리로 알고 참이라고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아직 신앙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신앙을 여러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을 종교적인 생각이라고 여기고, 어떤 사람은 주님을 생각하는 마음이라고 여기며, 어떤 사람은 올바른 교리를 알고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것들이 전혀 필요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원문은 신앙이 신앙 교리에 포함된 것들을 ‘아는 것과 인정하는 데에만 있지 않고’라고 말합니다. 즉 ‘앎’과 ‘인정’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더 필요할까요? 스베덴보리는 ‘특히 그 교리가 가르치는 모든 것에 순종하는 데에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순종’은 AC.36을 이해하는 중요한 말입니다. 신앙은 머릿속에 있는 교리로 끝나지 않고, 그 교리가 가르치는 것을 실제 삶에서 따르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처음 읽는 독자에게 질문이 하나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기독교 신앙이란 결국 계명을 잘 지키는 것인가?’ AC.36은 곧바로 그 오해를 막아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순종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수많은 규칙을 외적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교리가 가장 먼저 가르치며 사람이 순종해야 할 핵심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신앙은 순종이다’라는 말을 ‘명령을 잘 따르는 것이 신앙이다’라는 뜻으로만 이해하면 부족합니다. 어떤 순종인가가 중요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람이 이 사랑 안에 있지 않다면 그는 신앙 안에 있지 않다’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사랑과 분리된 신앙을 독립적인 영적 실재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라고 진심으로 고백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AC.36의 논점은 신앙의 고백이나 교리의 인정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데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사랑과 삶으로부터 분리하는 데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주님께서 가장 중요하다고 가르치신 사랑을 삶에서 완전히 떼어 놓는다면,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온전한 신앙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입니다.

 

이를 확증하기 위해 AC.36은 스베덴보리 자신의 철학이나 신학 체계를 먼저 제시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직접 인용합니다. 막12:29-31에서 주님은 모든 계명 가운데 첫째로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을, 둘째로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을 말씀하시며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스베덴보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신앙의 중심에 두는 직접적인 근거입니다.

 

이어 마22에서도 같은 두 계명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더욱 중요한 말씀이 덧붙습니다.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율법과 선지자’가 ‘신앙의 보편적 교리이며 말씀 전체’를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성경의 수많은 가르침 가운데 두 항목을 골라 중요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가 달려 있는 중심 원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리는 중요하지 않고 사랑만 있으면 된다’는 말과도 다릅니다. 오히려 참된 교리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교리는 무엇이 참인지 가르치고, 사람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러나 그 교리를 아무리 정확하게 알고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AC.36의 기준에서는 신앙의 본래 목적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반대로 사랑을 강조한다고 해서 진리를 아무렇게나 생각해도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AC.36 자체가 ‘신앙의 교리’와 그것이 ‘가르치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무엇에 순종할지를 알려면 먼저 무엇이 참인지 배워야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대립시키는 것은 ‘교리냐 사랑이냐’가 아니라 ‘삶과 분리된 교리적 신앙’과 ‘사랑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신앙’이라고 보는 편이 정확합니다.

 

이렇게 보면 앞의 AC.35와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AC.35에서는 이해가 하늘을 향하면서도 의지가 그 반대 방향을 향할 수 있는 인간의 분열을 다루었습니다. AC.36에서는 그 문제가 신앙의 언어로 다시 나타납니다. 이해로 교리를 알고 인정하는 것과 실제로 그 교리가 가르치는 사랑 안에서 사는 것이 갈라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AC.36은 우리에게 단순히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라고만 묻지 않습니다. ‘당신이 믿는다고 하는 것이 당신의 사랑과 삶에서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라고도 묻습니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빠진 신앙은 아무리 많은 지식과 올바른 고백을 가지고 있어도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신앙의 본질에는 아직 이르지 못합니다.

 

결국 AC.36에서 신앙은 머리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알고 인정한 진리가 사랑과 만나고, 그 사랑이 순종하는 삶으로 나타날 때 신앙은 신앙답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는 순간 신앙 자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된다고 말합니다. 신앙의 중심에는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두 큰 계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심화

1.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

 

AC.36, 심화 1,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

AC.36.심화1.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과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이 무엇인가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이웃 사

bygracetistory.tistory.com

 

2.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AC.36, 심화 2,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AC.36.심화2.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AC.36 참조 구절인 마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bygrace.kr

 

 

 

 

AC.37, 창1:14-17,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bygrace.kr

 

AC.35, 창1:14-17, ‘의지'(will)와 '이해’(understanding)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11

다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말하고, 그로써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하는 때입니다. 이때 그에게서 산출되는 것들은 생명 있는 것들이며, ‘바다의 물고기’(fish of the sea)와 ‘하늘의 새들’(birds of the heavens)이라 불립니다. The fifth state is when the man discourses from faith, and thereby confirms himself in truth and good: the things then produced by him are animate, and are called the “fish of the sea,” and the “birds of the heavens.”

 

해설

AC.11은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를 설명합니다. AC.10의 네 번째 상태에서는 사람이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으로 밝아지면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속 사람 안에서 불붙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다섯 번째 상태에서는 그 내적인 생명이 실제로 활동하면서 ‘생명 있는 것들’을 산출하기 시작합니다. 창조 이야기에서도 넷째 날까지 빛과 궁창과 땅과 식물과 광명체들이 나타났지만, 다섯째 날에 이르러 처음으로 움직이는 생물들이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순서를 인간의 거듭남 과정과 연결합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은 ‘신앙으로 말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신앙에 관한 말을 많이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선 상태에서도 사람은 이미 경건하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AC.9에서는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일과 같은 선을 행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그것들을 아직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AC.10에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속 사람 안에서 불붙기 시작한 뒤, AC.11에서는 이제 신앙이 실제로 그 사람의 말과 생각에서 활동하는 상태에 이릅니다.

 

이어지는 ‘그로써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한다’는 표현은 조금 주의해서 읽어야 합니다. 여기서 ‘자신을 확증한다’는 것은 자기 생각이 옳다고 고집하거나 자신의 주장을 증명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반드시 ‘여러 삶의 경험을 통하여 진리와 선이 참임을 검증한다’는 구체적인 과정으로 한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AC.11 자체가 직접 말하는 것은 사람이 이제 신앙으로 말하며, 그로써 진리와 선 안에서 점점 확고해지는 상태입니다. 처음에는 밖에서 배워 받아들였던 진리가 이제 그 사람 안에서 신앙으로 활동하며 그의 생각과 말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AC.9와 AC.11을 비교하면 중요한 변화가 더욱 선명하게 보입니다. AC.9에서 사람은 이미 회개하고 선을 행했지만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가 행하는 것들은 ‘생명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AC.11에서는 그에게서 산출되는 것들이 ‘생명 있는 것들’이라고 합니다. 두 표현의 대비는 거듭남에서 단순히 어떤 행동을 하느냐만이 아니라, 그 행동이 어떤 내적 생명에서 나오는가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렇다고 AC.11에서 사람이 자기 힘으로 영적 생명을 만들어 냈다는 뜻은 아닙니다. AC.7부터 이어지는 전체 과정에서 거듭남을 이루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주님께 속한 것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이 구별되게 하시며, 사람이 회개하고 선을 행하는 과정을 지나도록 이끄십니다. 그리고 AC.10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속 사람 안에서 불붙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AC.11의 ‘생명 있는 것들’ 역시 그 생명의 근원을 인간 자신에게 두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생명 있는 산출물들을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들’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창1:20-23의 다섯째 날과 직접 연결됩니다. 그러나 AC.11은 아직 물고기와 새의 세부적인 상응을 밝히는 곳이 아니라 창조의 여섯 날이 거듭남의 여섯 상태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개괄하는 부분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물고기와 새가 각각 무엇을 세밀하게 의미하는지를 미리 확정하기보다, 넷째 상태에서 속 사람 안에 불붙은 신앙과 체어리티로부터 이제 처음으로 ‘생명 있는 것들’이 산출되기 시작한다는 큰 흐름을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이 점에서 창조의 순서도 의미 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셋째 날에는 식물이 나타나고, 넷째 날에는 광명체들이 나타나며, 다섯째 날에는 살아 움직이는 물고기와 새가 등장합니다. 거듭남에서도 진리를 배우고 선을 행하는 외적인 변화가 먼저 나타날 수 있지만, 그것이 처음부터 모두 동일한 영적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사람 안의 것을 차례로 질서 있게 하시면서 신앙과 체어리티에 생명을 주시고, 그 생명으로부터 살아 있는 결과들이 산출되게 하십니다.

 

그러나 다섯 번째 상태 역시 거듭남의 마지막 상태는 아닙니다. 바로 다음 AC.12에서는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여섯 번째 상태가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AC.11에서는 신앙이 살아 움직이며 진리와 선 안에서 사람이 확고해져 가는 것이 중심이라면, 다음 상태에서는 사랑이 더욱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이 차이를 남겨 두어야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상태의 경계가 흐려지지 않습니다.

 

또한 ‘확증’이라는 말 자체를 언제나 긍정적인 것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다른 문맥에서는 사람이 거짓을 확증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 안에서 확고해지는가입니다. AC.11에서는 그 대상이 분명히 ‘진리와 선’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의 확증은 자기주장의 완고함이 아니라, 거듭남 가운데 신앙이 활동하면서 사람이 진리와 선 안에서 점차 확고해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AC.11의 다섯 번째 상태는 ‘생명’과 ‘확고해짐’이라는 두 흐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은 더 이상 외부에서 배운 지식으로만 머물지 않고 그 사람에게서 말로 나타날 만큼 활동하기 시작하며, 사람은 그 신앙으로 진리와 선 안에서 점점 확고해집니다. 동시에 그에게서 산출되는 것들이 이제 ‘생명 있는 것들’이라고 불립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 변화를 창조의 다섯째 날에 나타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들로 표현합니다. 다음 여섯 번째 상태에서는 이 살아 있는 신앙이 사랑과 더욱 깊이 결합하는 단계로 나아가게 됩니다. (AC.11 해설)

 

심화

1. ‘자신을 확증하다’(confirms himself)는 무슨 뜻인가?

 

AC.11 심화 1, ‘자신을 확증하다’(confirms himself)는 무슨 뜻인가?

AC.11 심화1. ‘자신을 확증하다’(confirms himself)는 무슨 뜻인가? AC.11을 처음 읽으면 ‘자신을 확증하다’(confirms himself)라는 표현에서 조금 멈추게 됩니다. 우리말의 ‘확증하다’는 보통 어떤 사

bygrace.kr

 

 

 

AC.12, 창1 개요, ‘신앙과 사랑이 함께 움직이는 영적 인간의 여섯 번째 상태’

AC.12여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때입니다. 이때 그에게서 나오는 것들을 ‘생물’(living soul)과 ‘짐승’(beast)이라 합니

bygrace.kr

 

AC.10, 창1 개요,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으로 밝아지는 네 번째 상태’

AC.10네 번째 상태는 사람이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으로 밝아지는 때입니다. 그는 이전에도 경건하게 말하고 선들을 행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가 겪고 있던 시험과 곤경의 결과였으며, 신앙과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