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02에서 스베덴보리는 ‘선악을알게하는나무’를 ‘감각적인것에서나오는신앙,곧단순한기억지식에서나오는신앙’이라고 설명합니다. 처음 읽으면 상당히 낯선 해석입니다. 성경 본문에는 ‘선악을알게하는나무’라고 되어 있는데, 왜 이것을 감각과 기억지식에서 비롯되는 ‘신앙’의 문제로 해석하는 것일까요? 더구나 이렇게 읽으면 감각이나 지식 자체가 위험하거나 악하다는 뜻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문맥은 그렇게 읽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앞에서 스베덴보리는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을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AC.99에서는 주님께서 천적 인간의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신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문제는 감각과 기억지식이 ‘있느냐없느냐’가 아닙니다. 그것들이 생명의 질서 안에서 어디에 놓이며, 무엇이 무엇의 근원이 되느냐가 문제입니다.
이 점에서 AC.102의 두 나무를 함께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생명나무’는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을 뜻합니다. 여기서는 사랑이 먼저이고 신앙이 거기서 나옵니다. 그리고 AC.105에 이르면 이 생명나무를 ‘주님의자비’라고까지 설명합니다. 모든 사랑과 신앙과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생명나무가 나타내는 질서에서는 신앙의 생명과 근원이 인간의 감각이나 지식이 아니라 주님께 있습니다.
반면 ‘선악을알게하는나무’에서는 신앙이 감각적인 것과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나옵니다’. 이 차이가 핵심입니다. 사람이 보고 듣고 배우고 기억한 것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들을 출발점으로 삼아 신앙의 진실 여부를 스스로 세우려는 질서가 문제로 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감각으로확인할수있는가?’, ‘내가가진지식으로납득할수있는가?’가 신앙의 근원을 결정하는 자리에 놓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그러므로생각하지말라’, ‘이성을사용하지말라’, ‘증거를살피지말라’는 뜻으로 확대해서도 안 됩니다. AC.102-106은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은 계속 인간 안에 있으며 주님의 유입을 받습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 섬기는 자리에 있는가, 아니면 그것들 자체가 참과 선을 판정하는 궁극적인 근원이 되는가 하는 질서의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이 해석은 반지성주의라기보다 신앙의 생명이 어디에서 시작되는가에 관한 설명으로 읽는 것이 적절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스베덴보리가 ‘생명나무’와 ‘선악을알게하는나무’를 서로 다른 신앙의 질서와 연결하는지 조금씩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사랑에서 신앙이 나오고 그 사랑과 신앙의 근원이 주님께 있는 질서이며, 다른 하나는 감각과 기억지식에서 신앙을 끌어내는 질서입니다. 결국 두 나무의 차이는 단순히 ‘신앙대지식’이 아니라, 신앙이 어디에서 생명을 얻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다만 AC.106은 ‘지식의나무’, 곧 감각적인 것과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비롯되는 신앙의 본성이 ‘뒤에이어지는글들에서밝혀질것’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그 의미를 모두 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단계에서 분명히 해 둘 것은 감각과 기억지식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스베덴보리가 문제 삼는 것은 그것들로부터 신앙을 만들어 내려고 하는 생명의 질서라는 점입니다. 왜 그것이 인간의 타락과 연결되는지는 이어지는 설명을 따라가면서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AC.102심화1)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창4:23)
AC.429
‘사람’(man[vir])이신앙을뜻한다는사실은이장의첫절에서분명하게드러납니다.하와가가인을낳았을때‘내가한사람을얻었다,여호와를’(Ihavegottenaman, Jehovah)이라고말했기때문입니다.여기서가인은신앙의교리를뜻했으며,그교리를‘한사람,여호와’(aman, Jehovah)라고불렀습니다.또한앞에서사람또는남자가이해력을뜻한다고밝힌내용에서도이를알수있습니다.이해력은신앙에속하기때문입니다.그가여기서‘어린것’(alittleone),곧‘어린아이’(alittlechild)라고부르는체어리티까지소멸시켰다는사실도여기에서따라나옵니다.신앙을부인하고죽이는사람은동시에신앙에서태어나는체어리티도부인하고죽이기때문입니다. That by a “man” [vir]is signified faith is evident from the first verse of this chapter, in that Eve said, when she bare Cain, “Ihavegottenaman,Jehovah”; by whom was meant the doctrine of faith, called “aman,Jehovah.” It is evident also from what was shown above concerning a man or male, that he signifies understanding, which is of faith. That he had also extinguished charity, here called a “littleone,” or a “littlechild,” follows, for he who denies and murders faith, at the same time also denies and murders the charity that is born from faith.
해설
AC.429는 앞의 AC.427에서 라멕의 말을 풀이하면서 제시한 두 가지 상응의 근거를 설명합니다. 라멕이 ‘한사람’을 죽였다는 것은 신앙을 소멸시켰다는 뜻이고,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것은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는 뜻이었습니다.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는 먼저 왜 ‘사람’이 신앙을 나타내는지 밝힌 다음, 신앙의 소멸이 체어리티의 소멸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설명합니다.
‘사람’이 신앙을 뜻한다는 첫 번째 근거는 창4:1입니다. 하와는 가인을 낳고 ‘내가한사람을얻었다,여호와를’이라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에서 이 구절의 가인이 신앙의 교리를 뜻한다고 풀이했습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의 ‘사람’은 단순히 남성이나 인간 일반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가인에게 적용된 ‘사람’이라는 표현을 앞선 해설과 연결하여, 그것이 신앙을 나타낸다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근거는 사람 또는 남자가 ‘이해력’을 나타낸다는 앞선 설명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해력이 신앙에 속한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이해력을 통해 신앙에 관한 것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과 ‘신앙’의 관계는 단순히 한 단어에 임의의 뜻을 붙인 결과가 아니라, 이해력과 신앙의 관계를 통해 설명됩니다. 다만 이해력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에게 살아 있는 신앙이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번 번호는 이해력이 신앙에 속한다는 관계를 밝히는 데 초점을 맞춥니다.
그렇다면 왜 ‘어린아이’는 체어리티를 뜻할까요?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를 ‘신앙에서태어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신앙을 부인하고 죽이는 사람은 신앙에서 태어나는 체어리티도 동시에 부인하고 죽인다고 말합니다. 라멕이 ‘사람’과 ‘어린아이’를 함께 죽였다고 한 것은, 신앙의 소멸과 체어리티의 소멸이 서로 무관한 두 사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신앙에서태어나는체어리티’라는 표현은 주의해서 읽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른 곳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여러 각도에서 설명하며, 특히 신앙을 체어리티와 분리하는 일을 경계합니다. 따라서 이 한 문장만으로 체어리티가 언제나 신앙보다 낮거나 부차적이라는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AC.429의 직접적인 논지는 신앙을 소멸시키면 그 신앙에서 태어나는 체어리티도 함께 소멸된다는 데 있습니다.
이 설명은 앞에서 살펴본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와도 연결됩니다. 창4장의 앞부분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분리되는 문제를 다루었고, 라멕의 말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모두 소멸된 상태가 나타납니다. AC.429는 그 가운데 ‘사람’과 ‘어린아이’라는 표현을 통해 두 소멸의 관계를 밝힙니다. 라멕의 고백을 단순히 두 사람을 죽였다는 문자적 진술로만 읽으면 놓치기 쉬운 부분입니다.
결국 AC.429는 라멕이 죽였다고 말한 ‘사람’이 왜 신앙을 뜻하는지 창4:1과 이해력에 관한 앞선 설명을 통해 밝힙니다. 또한 ‘어린아이’가 체어리티를 뜻하는 이유를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에서 설명합니다. 신앙을 부인하고 소멸시키는 일은 그 신앙에서 태어나는 체어리티의 소멸과도 연결됩니다. 이처럼 라멕의 말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모두 사라진 교회의 황폐를 드러냅니다. (AC.429해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And out of the ground made Jehovah God to grow every tree desirable to behold, and good for food; the tree of lives also, in the midst of the garden; and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창2:9)
AC.102
‘나무’(tree)는퍼셉션을뜻하고,‘보기에아름다운나무’(treedesirabletobehold)는진리의퍼셉션을,‘먹기에좋은나무’(treegoodforfood)는선의퍼셉션을뜻합니다.‘생명나무’(treeoflives)는사랑과거기서나오는신앙을,‘선악을알게하는나무’(treeoftheknowledgeofgoodandevil)는감각적인것에서나오는신앙,곧단순한기억지식에서나오는신앙을뜻합니다. A “tree” signifies perception; a “treedesirabletobehold,” the perception of truth; a “treegoodforfood,” the perception of good; the “treeoflives,” love and the faith thence derived; the “treeoftheknowledgeofgoodandevil,” faith derived from what is sensuous, that is, from mere memory-knowledge.
해설
AC.102는 창2:9에 나오는 여러 ‘나무’의 속뜻을 먼저 한꺼번에 제시합니다. ‘나무’ 자체는 퍼셉션을 뜻하고, 그 가운데 ‘보기에아름다운나무’는 진리의 퍼셉션을, ‘먹기에좋은나무’는 선의 퍼셉션을 뜻합니다. 그리고 동산 가운데 있는 ‘생명나무’는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을, ‘선악을알게하는나무’는 감각적인 것에서, 곧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나오는 신앙을 뜻합니다.
여기서 먼저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나무’를 단순히 어떤 지식이나 교리를 뜻한다고 하지 않고 ‘퍼셉션’과 연결한다는 점입니다. 앞에서 에덴동산은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천적 인간의 지성을 뜻했습니다(AC.98-101). 그러므로 그 동산에서 자라는 나무들도 그 사람 안에 독립적으로 축적된 지식의 목록이라기보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 안에서 진리와 선을 퍼셉션하는 것과 관계됩니다. ‘보기에아름다운나무’와 ‘먹기에좋은나무’가 각각 진리와 선의 퍼셉션을 뜻하는 것도 이 문맥 안에 있습니다.
특히 ‘생명나무’가 사랑만이 아니라 ‘사랑과거기서나오는신앙’을 뜻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바로 앞에서 살펴본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와 이어집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주된 것이며, 신앙은 그 사랑에서 나옵니다. 따라서 생명나무가 나타내는 것은 사랑과 신앙이 서로 분리된 상태가 아니라, 사랑이 근원이 되고 신앙이 거기서 나오는 질서입니다.
반대로 ‘선악을알게하는나무’는 ‘감각적인것에서나오는신앙,곧단순한기억지식에서나오는신앙’을 뜻합니다. 여기서 곧바로 ‘감각이나기억지식은악하다’고 결론 내리면 안 됩니다. 앞의 여러 번호에서도 이성과 기억지식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질서 안에 놓여야 함을 보았습니다. AC.102에서 대비되는 것은 지식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신앙의 근원과 질서입니다.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앙과, 감각적인 것과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신앙을 끌어내려는 질서가 서로 대비되고 있습니다.
AC.102는 아직 이 각각의 의미를 자세히 증명하거나 설명하지 않습니다. 창2:9의 여러 나무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먼저 제시하는 개요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나무는퍼셉션’, ‘생명나무는사랑과거기서나오는신앙’, ‘선악을알게하는나무는감각적인것과단순한기억지식에서나오는신앙’이라는 기본 구조를 붙들고, 이어지는 설명에서 그 의미가 어떻게 구체화되는지를 따라가는 것이 좋습니다. (AC.102해설)
AC.11을 처음 읽으면 ‘자신을확증하다’(confirms himself)라는 표현에서 조금 멈추게 됩니다. 우리말의 ‘확증하다’는 보통 어떤 사실이 틀림없음을 증명하거나 확인한다는 뜻으로 들리고, ‘자신을확증한다’고 하면 자기 생각이나 주장을 스스로 옳다고 굳히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먼저 AC.11의 문맥을 그대로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에 이른 사람이 ‘신앙으로말하며,그럼으로써자신이진리와선안에있음을확증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확증’의 중심은 자기주장을 강하게 내세우거나 자기 생각이 옳다는 증거를 모으는 데 있지 않습니다. 사람이 거듭남의 과정에서 신앙으로 말하게 되고, 진리와 선 안에서 점점 확고해지는 상태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문맥에 더 가깝습니다.
이것은 AC.10과 비교하면 조금 더 이해하기 쉽습니다. 네 번째 상태에서는 사람이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의 빛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AC.11의 다섯 번째 상태에서는 이제 ‘신앙으로말한다’고 합니다. 즉 앞에서 받은 신앙이 단지 순간적으로 비추는 빛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서 말로 나타날 정도로 자리 잡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확증한다’는 것을 ‘삶의경험을통해그진리가참이라는사실을확인한다’고 설명해도 될까요? 그렇게 생각하면 이해에는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그것을 AC.11이 직접 내리는 정의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AC.11은 사람이 여러 경험을 해 보고 진리의 효용을 검증한 뒤 확신하게 된다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본문이 직접 말하는 것은 그가 이제 신앙으로 말하며 ‘진리와선안에서자신을확증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처음에는 다른 사람에게서 배운 진리를 ‘그렇다고하니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진리가 점점 자기 생각과 말의 바탕이 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낯설었던 길이 여러 번 다니다 보면 점차 익숙한 길이 되는 것처럼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확증’의 정확한 사전적 정의라기보다 AC.11의 상태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비유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 주의할 것은 ‘자신을확증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자기 힘으로 스스로를 진리와 선 안에 세운다는 뜻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AC.6부터 계속되는 전체 문맥은 사람의 거듭남을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로 다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신을확증한다’는 표현을 인간이 독립적으로 자기 안에 진리와 선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굳힌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다른 곳에서 사용하는 ‘확증’이라는 말까지 생각하면 또 하나의 구별도 필요합니다. 사람은 진리를 확증할 수도 있지만 거짓을 확증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확증’이라는 단어 자체가 언제나 좋은 영적 상태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을 참이라고 받아들이고 무엇 안에서 자신을 굳히느냐가 중요합니다. AC.11에서는 그 대상이 분명히 ‘진리와선’이므로 좋은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점은 처음 읽는 독자에게 특히 중요합니다. ‘확증’이라는 단어만 떼어 읽으면 ‘자기가믿고싶은것을더욱굳게믿는것’처럼 생각할 수 있지만, AC.11에서는 그런 완고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사람이 이제 신앙으로 말하고, 진리와 선 안에서 더욱 확고해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 상태는 아직 거듭남의 마지막 상태도 아닙니다. 바로 다음 AC.12에서는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여섯 번째 상태가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AC.11의 ‘확증’을 거듭남의 완성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이것은 여섯 상태 가운데 다섯 번째 상태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중요한 변화입니다.
따라서 AC.11의 ‘자신을확증하다’는 표현은 우선 이렇게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자기생각이옳다고고집한다는뜻이아니라,거듭남이진행되면서사람이신앙으로말하고진리와선안에서점점확고해지는상태를가리킨다.’ 그리고 이것을 우리의 경험에 적용하여 설명할 때에는 ‘배운진리가점차자기생각과말의바탕으로자리잡아간다’고 풀어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AC.11에서 왜 ‘신앙으로말한다’는 것과 ‘진리와선안에서자신을확증한다’는 것이 함께 나오는지도 조금 더 쉽게 보입니다.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에서는 진리와 선이 더 이상 멀리서 들은 가르침으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신앙으로 말할 수 있을 만큼 그 안에서 점차 확고해지고 있는 것입니다.(AC.11심화1)
AC.1에서 ‘religiousbelief’는 말씀의 내적인 것들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열거하는 가운데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이 주님과 주님의 천국, 교회, ‘religiousbelief’, 그리고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faith’가 아니라 ‘belief’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AC번역에서 ‘faith’는 기본적으로 ‘신앙’, ‘belief’는 ‘믿음’으로 구별하기로 한 원칙을 따르면, ‘religiousbelief’는 ‘종교적인믿음’으로 옮기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이것을 곧바로 ‘신앙’이라고 번역하면 원문에서 서로 다른 단어를 사용했을 때 그 차이가 한국어에서 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AC.1의 이 한 표현만으로 ‘religiousbelief’의 신학적 범위를 지나치게 크게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교리 체계만을 가리키는지, 교회 밖에서 신성을 인정하는 종교적 믿음까지 모두 포함하는지, 또는 ‘faith’와 ‘belief’사이에 스베덴보리가 언제나 일정한 전문적 구별을 두는지까지는 더 많은 용례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AC.1은 아직 그러한 구별을 설명하는 문맥이 아니라 말씀 안의 내적인 것들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넓게 열거하는 서문의 첫 문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서는 원문의 차이를 보존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faith’가 나오지 않았는데 익숙한 신학 용어라는 이유로 ‘신앙’으로 바꾸지 않고, ‘religiousbelief’를 ‘종교적인믿음’으로 옮겨 두는 것입니다. 이후 AC를 읽으며 ‘faith’와 ‘belief’의 실제 용례가 충분히 쌓이면 두 단어의 관계도 스베덴보리 자신의 사용을 따라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AC.1심화1)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창1:14-17)
AC.36
신앙을사랑에서분리한사람들은신앙이무엇인지조차알지못합니다.어떤이들은신앙을단지생각이라고여기고,어떤이들은주님을향한생각이라고여기며,또어떤이들은신앙의교리라고생각합니다.그러나신앙은신앙교리에포함된모든것을아는것과인정하는데에만있지않고,특히그교리가가르치는모든것에순종하는데에있습니다.그교리가가르치는가장중요한것,곧사람이반드시순종해야할것은주님을사랑하는것(lovetotheLord)과이웃을사랑하는것(lovetowardtheneighbor)입니다.사람이이사랑안에있지않다면,그는신앙안에있지않습니다.이점에대해주님은너무도분명하게가르치셔서,조금도의심할여지를남기지않으십니다.마가복음입니다. They who have separated faith from love do not even know what faith is.When thinking of faith, some imagine it to be mere thought, some that it is thought directed toward the Lord, few that it is the doctrine of faith.But faith is not only a knowledge and acknowledgment of all things that the doctrine of faith comprises, but especially is it an obedience to all things that the doctrine of faith teaches.The primary point that it teaches, and that which men should obey, is love to the Lord, and love toward the neighbor, for if a man is not in this, he is not in faith.This the Lord teaches so plainly as to leave no doubt concerning it, in Mark:
AC.36은 매우 직접적인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신앙을사랑에서분리한사람들은신앙이무엇인지조차알지못합니다.’ 상당히 강한 말입니다. 그런데 이 문장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스베덴보리가 무엇을 ‘신앙’이라고 부르는지부터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는 어떤 교리를 머리로 알고 참이라고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아직 신앙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신앙을 여러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을 종교적인 생각이라고 여기고, 어떤 사람은 주님을 생각하는 마음이라고 여기며, 어떤 사람은 올바른 교리를 알고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것들이 전혀 필요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원문은 신앙이 신앙 교리에 포함된 것들을 ‘아는것과인정하는데에만있지않고’라고 말합니다. 즉 ‘앎’과 ‘인정’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더 필요할까요? 스베덴보리는 ‘특히그교리가가르치는모든것에순종하는데에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순종’은 AC.36을 이해하는 중요한 말입니다. 신앙은 머릿속에 있는 교리로 끝나지 않고, 그 교리가 가르치는 것을 실제 삶에서 따르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처음 읽는 독자에게 질문이 하나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기독교신앙이란결국계명을잘지키는것인가?’ AC.36은 곧바로 그 오해를 막아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순종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수많은 규칙을 외적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사랑하는것’과 ‘이웃을사랑하는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교리가 가장 먼저 가르치며 사람이 순종해야 할 핵심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신앙은순종이다’라는 말을 ‘명령을잘따르는것이신앙이다’라는 뜻으로만 이해하면 부족합니다. 어떤 순종인가가 중요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람이이사랑안에있지않다면그는신앙안에있지않다’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사랑과 분리된 신앙을 독립적인 영적 실재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예수그리스도를믿습니다’라고 진심으로 고백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AC.36의 논점은 신앙의 고백이나 교리의 인정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데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사랑과 삶으로부터 분리하는 데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주님께서 가장 중요하다고 가르치신 사랑을 삶에서 완전히 떼어 놓는다면,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온전한 신앙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입니다.
이를 확증하기 위해 AC.36은 스베덴보리 자신의 철학이나 신학 체계를 먼저 제시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직접 인용합니다. 막12:29-31에서 주님은 모든 계명 가운데 첫째로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을, 둘째로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을 말씀하시며 ‘이보다더큰계명이없느니라’고 하십니다. 스베덴보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신앙의 중심에 두는 직접적인 근거입니다.
이어 마22에서도 같은 두 계명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더욱 중요한 말씀이 덧붙습니다. ‘이두계명이온율법과선지자의강령이니라.’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율법과선지자’가 ‘신앙의보편적교리이며말씀전체’를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성경의 수많은 가르침 가운데 두 항목을 골라 중요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가 달려 있는 중심 원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리는중요하지않고사랑만있으면된다’는 말과도 다릅니다. 오히려 참된 교리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교리는 무엇이 참인지 가르치고, 사람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러나 그 교리를 아무리 정확하게 알고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AC.36의 기준에서는 신앙의 본래 목적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반대로 사랑을 강조한다고 해서 진리를 아무렇게나 생각해도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AC.36자체가 ‘신앙의교리’와 그것이 ‘가르치는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무엇에 순종할지를 알려면 먼저 무엇이 참인지 배워야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대립시키는 것은 ‘교리냐사랑이냐’가 아니라 ‘삶과분리된교리적신앙’과 ‘사랑안에서살아움직이는신앙’이라고 보는 편이 정확합니다.
이렇게 보면 앞의 AC.35와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AC.35에서는 이해가 하늘을 향하면서도 의지가 그 반대 방향을 향할 수 있는 인간의 분열을 다루었습니다. AC.36에서는 그 문제가 신앙의 언어로 다시 나타납니다. 이해로 교리를 알고 인정하는 것과 실제로 그 교리가 가르치는 사랑 안에서 사는 것이 갈라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AC.36은 우리에게 단순히 ‘당신은무엇을믿습니까?’라고만 묻지 않습니다. ‘당신이믿는다고하는것이당신의사랑과삶에서는어떻게나타나고있습니까?’라고도 묻습니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빠진 신앙은 아무리 많은 지식과 올바른 고백을 가지고 있어도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신앙의 본질에는 아직 이르지 못합니다.
결국 AC.36에서 신앙은 머리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알고 인정한 진리가 사랑과 만나고, 그 사랑이 순종하는 삶으로 나타날 때 신앙은 신앙답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는 순간 신앙 자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된다고 말합니다. 신앙의 중심에는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두 큰 계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심화
1. ‘주님사랑’(love to the Lord),‘이웃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
다섯번째상태는사람이신앙으로말하고,그로써진리와선안에서자신을확증하는때입니다.이때그에게서산출되는것들은생명있는것들이며,‘바다의물고기’(fishofthesea)와‘하늘의새들’(birdsoftheheavens)이라불립니다. The fifth state is when the man discourses from faith,and thereby confirms himself in truth and good:the things then produced by him are animate,and are called the “fishofthesea,” and the “birdsoftheheavens.”
해설
AC.11은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를 설명합니다. AC.10의 네 번째 상태에서는 사람이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으로 밝아지면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속 사람 안에서 불붙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다섯 번째 상태에서는 그 내적인 생명이 실제로 활동하면서 ‘생명있는것들’을 산출하기 시작합니다. 창조 이야기에서도 넷째 날까지 빛과 궁창과 땅과 식물과 광명체들이 나타났지만, 다섯째 날에 이르러 처음으로 움직이는 생물들이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순서를 인간의 거듭남 과정과 연결합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은 ‘신앙으로말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신앙에 관한 말을 많이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선 상태에서도 사람은 이미 경건하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AC.9에서는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일과 같은 선을 행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그것들을 아직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AC.10에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속 사람 안에서 불붙기 시작한 뒤, AC.11에서는 이제 신앙이 실제로 그 사람의 말과 생각에서 활동하는 상태에 이릅니다.
이어지는 ‘그로써진리와선안에서자신을확증한다’는 표현은 조금 주의해서 읽어야 합니다. 여기서 ‘자신을확증한다’는 것은 자기 생각이 옳다고 고집하거나 자신의 주장을 증명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반드시 ‘여러삶의경험을통하여진리와선이참임을검증한다’는 구체적인 과정으로 한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AC.11자체가 직접 말하는 것은 사람이 이제 신앙으로 말하며, 그로써 진리와 선 안에서 점점 확고해지는 상태입니다. 처음에는 밖에서 배워 받아들였던 진리가 이제 그 사람 안에서 신앙으로 활동하며 그의 생각과 말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AC.9와 AC.11을 비교하면 중요한 변화가 더욱 선명하게 보입니다. AC.9에서 사람은 이미 회개하고 선을 행했지만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가 행하는 것들은 ‘생명이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AC.11에서는 그에게서 산출되는 것들이 ‘생명있는것들’이라고 합니다. 두 표현의 대비는 거듭남에서 단순히 어떤 행동을 하느냐만이 아니라, 그 행동이 어떤 내적 생명에서 나오는가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렇다고 AC.11에서 사람이 자기 힘으로 영적 생명을 만들어 냈다는 뜻은 아닙니다. AC.7부터 이어지는 전체 과정에서 거듭남을 이루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주님께 속한 것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이 구별되게 하시며, 사람이 회개하고 선을 행하는 과정을 지나도록 이끄십니다. 그리고 AC.10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속 사람 안에서 불붙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AC.11의 ‘생명있는것들’역시 그 생명의 근원을 인간 자신에게 두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생명 있는 산출물들을 ‘바다의물고기’와 ‘하늘의새들’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창1:20-23의 다섯째 날과 직접 연결됩니다. 그러나 AC.11은 아직 물고기와 새의 세부적인 상응을 밝히는 곳이 아니라 창조의 여섯 날이 거듭남의 여섯 상태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개괄하는 부분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물고기와 새가 각각 무엇을 세밀하게 의미하는지를 미리 확정하기보다, 넷째 상태에서 속 사람 안에 불붙은 신앙과 체어리티로부터 이제 처음으로 ‘생명있는것들’이 산출되기 시작한다는 큰 흐름을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이 점에서 창조의 순서도 의미 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셋째 날에는 식물이 나타나고, 넷째 날에는 광명체들이 나타나며, 다섯째 날에는 살아 움직이는 물고기와 새가 등장합니다. 거듭남에서도 진리를 배우고 선을 행하는 외적인 변화가 먼저 나타날 수 있지만, 그것이 처음부터 모두 동일한 영적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사람 안의 것을 차례로 질서 있게 하시면서 신앙과 체어리티에 생명을 주시고, 그 생명으로부터 살아 있는 결과들이 산출되게 하십니다.
그러나 다섯 번째 상태 역시 거듭남의 마지막 상태는 아닙니다. 바로 다음 AC.12에서는 사람이 ‘신앙으로,그리고그신앙에서사랑으로’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여섯 번째 상태가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AC.11에서는 신앙이 살아 움직이며 진리와 선 안에서 사람이 확고해져 가는 것이 중심이라면, 다음 상태에서는 사랑이 더욱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이 차이를 남겨 두어야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상태의 경계가 흐려지지 않습니다.
또한 ‘확증’이라는 말 자체를 언제나 긍정적인 것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다른 문맥에서는 사람이 거짓을 확증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 안에서 확고해지는가입니다. AC.11에서는 그 대상이 분명히 ‘진리와선’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의 확증은 자기주장의 완고함이 아니라, 거듭남 가운데 신앙이 활동하면서 사람이 진리와 선 안에서 점차 확고해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AC.11의 다섯 번째 상태는 ‘생명’과 ‘확고해짐’이라는 두 흐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은 더 이상 외부에서 배운 지식으로만 머물지 않고 그 사람에게서 말로 나타날 만큼 활동하기 시작하며, 사람은 그 신앙으로 진리와 선 안에서 점점 확고해집니다. 동시에 그에게서 산출되는 것들이 이제 ‘생명있는것들’이라고 불립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 변화를 창조의 다섯째 날에 나타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들로 표현합니다. 다음 여섯 번째 상태에서는 이 살아 있는 신앙이 사랑과 더욱 깊이 결합하는 단계로 나아가게 됩니다. (AC.11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