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95의 마지막 문장은 매우 강합니다. ‘신앙의생명은그를준비하지만,그를‘사람’이 되게 하는 것은 사랑의 생명’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신앙만으로는 왜 아직 충분하지 않으며, 왜 사랑의 생명이 그를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일까요?
이 말을 신앙의 가치를 낮추는 것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의 생명이 필요 없다고 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이 사람을 ‘준비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준비는 없어도 되는 단계가 아닙니다. 사람의 이해가 진리를 받아들이고,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악인지 배우며, 주님과 말씀에 속한 것들을 인정하게 되는 것은 거듭남의 실제 과정에 속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어떤 진리를 이해하고 믿는 것과 그 진리가 그의 의지와 사랑의 생명이 되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무엇이 옳은지 알면서도 그것을 원하지 않을 수 있고, 선을 인정하면서도 실제로는 다른 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때 진리는 이해 안에 있지만 아직 사람의 삶 전체를 움직이는 사랑이 된 것은 아닙니다. 바로 이 점에서 신앙의 생명은 사람을 준비합니다.
앞의 AC.83에서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이 될 때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고 사랑이 주된 것이 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AC.95의 ‘사랑의생명이그를‘사람’이 되게 한다’는 말은 신앙이 없어지고 사랑만 남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이 사랑과 하나를 이루고, 사람이 알고 믿는 진리가 그가 사랑하고 원하는 것과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AC.91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와도 연결됩니다.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할 때 싸움이 그칩니다. 단지 이해로 ‘순종해야한다’고 아는 것만으로는 싸움이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닙니다. 겉 사람의 바람 자체가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질서와 조화를 이루기 시작할 때 비로소 그 순종은 억지 복종이 아니라 삶이 됩니다. AC.85에서 주님의 뜻이 천적 인간의 ‘바람’이 된다고 했던 것도 이와 연결됩니다.
따라서 사랑은 여기서 단순한 감정이 아닙니다. 사랑은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원하며 무엇을 자신의 삶으로 삼는가와 관련됩니다. AC.95가 사랑을 의지와 나란히 놓아 ‘사랑또는의지의생명’이라고 하는 것도 이 점을 보여 줍니다. 진리가 이해 안에서 받아들여지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의지와 사랑 안에서 살아날 때, 그것은 실제 삶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의생명은준비하고사랑의생명은사람을‘사람’이 되게 한다’는 말은 신앙과 사랑의 경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의 질서를 말합니다. 진리는 사람을 준비하고 인도하지만, 마침내 그 진리가 사랑과 의지의 생명이 되어 사람이 그것을 원하고 살아갈 때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룹니다. AC.95가 천적 인간의 겉 사람을 비로소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생명의 질서가 겉 사람에까지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AC.95심화1)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창5:2)
AC.479
말씀에서‘이름을부르다’(callinganame)또는‘이름으로부르다’(callingbyname)는사물의어떠함을아는것을의미한다는것은앞에서보여준바있습니다.여기서는태고교회의어떠함과관련되는데,곧사람이흙에서취해졌다는것,다시말해주님에의해거듭났다는것을나타냅니다.‘아담’(Adam)이라는말이‘흙’(ground)을의미하기때문입니다.그리고그후그가천적인간이되었을때에는주님을향한사랑에서비롯된신앙으로말미암아가장탁월한의미에서‘사람’이되었습니다.By “callinganame,” or “callingbyname,” is signified in the Word to know the quality of things, as was shown above, and in the present case it has relation to the qual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denoting that man was taken from the ground, or regenerated by the Lord, for the word “Adam” means “ground”; and that afterwards when he was made celestial he became most eminently “man,” by virtue of faith originating in love to the Lord.
해설
AC.479는 창5:2의 ‘그들의이름을사람이라일컬으셨더라’에서 왜 ‘이름’이 중요한지를 설명합니다. 말씀에서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단순히 그 대상을 다른 대상과 구별하기 위한 호칭을 붙인다는 뜻에 그치지 않습니다. 속뜻으로는 그 대상의 ‘어떠함’, 곧 그 본질과 상태가 어떠한지를 알고 나타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하셨다는 것은 단순한 명명이 아니라 태고교회가 어떤 교회였는지를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그 첫 번째 어떠함은 ‘흙에서취해졌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흙’은 단순한 물질적 흙을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람이 주님에 의해 거듭나는 상태와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아담’이라는 말이 ‘흙’(ground)을 의미한다고 설명하면서, 사람이 흙에서 취해졌다는 것을 ‘주님에의해거듭났다’는 의미로 풀이합니다. 따라서 ‘아담’이라는 이름 자체에 태고교회의 거듭남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 ‘흙’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자연 상태 그대로의 인간을 뜻한다고 보기보다, 주님께서 거듭남의 역사를 행하실 수 있도록 준비된 사람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씨가 땅에 떨어져 싹을 내고 열매를 맺듯이, 주님께서 사람 안에 선과 진리를 심으시고 자라게 하실 수 있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흙에서취해졌다’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새롭게 만들었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를 새롭게 하시고 거듭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태고교회의 과정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AC.479는 ‘그후그가천적인간이되었을때’ 가장 탁월한 의미에서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앞의 AC.472-476에서 계속 살펴본 흐름과 연결됩니다. 처음에는 영적 인간으로 창조되어 진리와 신앙을 통하여 선과 사랑으로 나아가지만, 마침내 신앙과 사랑이 결혼을 이루면 천적 인간이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상태에서 그는 더욱 온전한 의미의 ‘사람’이 됩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그가 무엇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되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AC.479는 그것을 ‘주님을향한사랑에서비롯된신앙’이라고 분명히 밝힙니다. 신앙이 사랑과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랑이 근원이고 신앙은 그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바로 이러한 질서가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를 이루었습니다. 따라서 참된 사람됨은 얼마나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는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 신앙이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나오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 점은 창4에서 다루었던 가인의 상태와 다시 선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가인은 사랑과 분리된 신앙을 표상했습니다. 반면 창5에서 ‘사람’이라 하는 태고교회의 본래 상태는 ‘주님을향한사랑에서비롯된신앙’입니다. 신앙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신앙이 어디에서 나오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사랑에서 나온 신앙은 사람을 참된 ‘사람’으로 이루지만, 사랑에서 분리되어 독립하려는 신앙은 본래의 천적 질서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결국 AC.479에서 ‘아담’, ‘흙’, ‘거듭남’, ‘사람’은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됩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흙’과 같은 상태에서 새롭게 하시고 거듭나게 하시며, 그를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로 이끄시고, 마침내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신앙이 흘러나오는 질서를 이루실 때 그는 가장 온전한 의미에서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의이름을사람이라일컬으셨다’는 말씀은 태고교회의 이름을 알려 주는 데 그치지 않고, 주님께서 그 교회 안에 이루신 거듭남의 어떠함 전체를 압축하여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AC.479해설)
AC.478은 창세기 초반의 ‘아담’을 스베덴보리가 어떻게 읽는지를 매우 직접적으로 밝히는 대목입니다. 핵심은 히브리어 ‘아담’(Adam)이 본래 ‘사람’을 뜻한다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는 이 대목의 ‘아담’을 처음부터 한 개인의 고유명사로 읽기보다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읽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속뜻으로는 태고교회를 가리킨다고 봅니다.
그 근거 가운데 하나가 단수와 복수의 변화입니다. 창1:26에서 하나님은 ‘사람을만들고’라고 단수로 말씀하신 뒤 곧이어 ‘그들로...다스리게하자’고 복수로 말씀하십니다. 창5:2에서도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뒤 ‘그들의이름을사람이라일컬으셨다’고 합니다. 따라서 본문 자체에서 ‘사람’은 어느 한 남성 개인만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고, 남자와 여자를 함께 포괄하는 말로 사용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문법적 특징을 태고교회라는 집단적 의미를 보여 주는 중요한 단서로 봅니다.
이것은 바로 앞의 AC.475-477과도 이어집니다. 남자와 여자는 각각 신앙과 사랑을 의미하고, 이 둘이 결혼을 이루었을 때 더 이상 둘을 따로 ‘남자와여자’라고 하지 않고 하나의 ‘사람’(homo)이라 합니다. 그리고 AC.477에서는 가장 높은 의미로 오직 주님 자신만이 사람이시며, 천적 교회는 주님의 ‘모양’으로서, 영적 교회는 주님의 ‘형상’으로서 사람이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창5:2의 ‘사람’은 단순한 종(種)으로서의 인간이라는 뜻을 넘어, 주님의 형상과 모양을 받아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는 교회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AC.478의 마지막 문장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다루는주제는인류최초의어떤한사람의창조가아니라태고교회’라고 명시합니다. 이것은 창세기 초반의 속뜻을 읽는 그의 기본 원리를 다시 확인해 줍니다. ‘아담’이라는 이름 아래 한 개인의 생애를 중심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최초의 사람들을 어떻게 교회로 세우시고 그 교회를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로 이끄셨는가를 읽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조심할 점이 있습니다. AC.478의 논점은 창세기 본문의 역사성 전체를 한 문장으로 부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가 분명히 밝히는 것은 말씀의 속뜻에서 ‘아담’이 인류 최초의 한 개인을 주제로 삼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를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관심 역시 ‘실제로아담이라는개인이존재했는가?’라는 문제로 곧바로 옮겨가기보다, 왜 주님께서 말씀에서 하나의 교회를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내셨는가를 이해하는 데 두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보면 창5:1의 ‘아담계보의책’도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것은 속뜻으로 한 개인 아담의 생물학적 후손 명단을 제시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 하는 태고교회로부터 여러 후대 교회가 어떻게 이어졌는지를 보여 주는 교회의 계승에 관한 기록입니다. AC.469에서 ‘계보의책’을 태고교회에 속한 사람들의 열거라고 한 것과 AC.470에서 이어지는 이름들이 실제적인 것들, 곧 교회적 실재를 의미한다고 한 설명이 여기서 서로 연결됩니다.
결국 AC.478은 ‘아담’이라는 이름을 통하여 다시 한번 창5를 읽는 관점을 정리해 줍니다. 문자에서는 한 사람의 이름과 그의 후손들의 계보가 이어지지만, 속뜻으로는 ‘사람’이라 하는 태고교회와 그 교회로부터 이어지는 여러 교회의 역사가 펼쳐집니다. 그러므로 창5의 계보를 따라간다는 것은 단순히 누가 누구를 낳았는지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가 여러 세대를 거치며 어떤 영적 상태들을 지나 노아에 이르게 되는지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AC.478해설)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창5:2)
AC.477
‘사람’(man)이태고교회를의미한다는것은앞에서자주말하고보여주었습니다.가장높은의미로는오직주님자신만이사람이시기때문입니다.이로부터천적교회는주님의모양이므로사람이라하고,이후영적교회도주님의형상이므로사람이라합니다.그러나일반적인의미로는인간다운이해(humanunderstanding)를가진모든이를사람이라합니다.사람은이해하는능력으로말미암아사람이기때문이며,그능력에따라어떤사람은다른사람보다더사람답습니다.그러나사람과사람사이의구별은마땅히주님을향한사랑에기초한그의신앙에따라이루어져야합니다.That “man” is the most ancient church has been often said and shown above; for in the supreme sense the Lord himself alone is man.From this the celestial church is called man, as being a likeness, and from this the spiritual church is afterwards so called because it was an image.But in a general sense everyone is called a man who has human understanding; for man is man by virtue of understanding, and according thereto one person is more a man than another, although the distinction of one man from another ought to be made according to his faith as grounded in love to the Lord.
[2]태고교회와모든참된교회,그리고그로부터교회에속한사람들,곧주님을향한사랑과주님을믿는신앙으로살아가는사람들이특별히‘사람’이라일컬어지는것은말씀으로부터분명합니다.에스겔에서는,That the most ancient church, and every true church, and hence those who are of the church, or who live from love to the Lord and from faith in him, are especially called “man,” is evident from the Word, as in Ezekiel:
하였습니다.여기서‘옛적’(antiquities)은태고교회를,‘처음’(beginnings)은고대교회들을의미하며,‘이스라엘족속’과‘내백성이스라엘’은초대교회,곧이방인들의교회를의미합니다.이모든교회를‘사람’이라합니다.where by “antiquities” is signified the most ancient church; by “beginnings,” the ancient churches; by the “houseofIsrael” and “peopleIsrael,” the primitive church, or church of the Gentiles; all which churches are called “man.”
하였습니다.여기서‘옛날’(daysofeternity)은태고교회를,‘역대’(generationandgeneration)는고대교회들을의미합니다.‘인종’(sonsofman)은주님을향한신앙안에있던사람들이며,이신앙이‘이스라엘자손의수효’입니다.거듭난사람을‘사람’이라하는것은예레미야에서도나타납니다.where by the “daysofeternity” is meant the most ancient church; by “generationandgeneration,” the ancient churches; the “sonsofman” are those who were in faith toward the Lord, which faith is the “numberofthesonsofIsrael.” That a regenerate person is called “man,” appears from Jeremiah:
하였습니다.여기서‘땅’은외적인간(externalman, 겉사람)을,‘하늘’은내적인간(internalman, 속사람)을,‘사람’은선에대한사랑을,‘공중의새’는진리에대한이해를의미합니다.where “earth” signifies the external man; “heaven” the internal; “man” the love of good; the “birdsoftheheavens” the understanding of truth.
하였습니다.여기서첫번째‘사람’에해당하는말은‘에노스’(Enosh)이고,두번째는‘아담’(Adam)입니다.where the word for man in the first place is “Enosh,” and in the second is “Adam.”
해설
AC.477의 출발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 교회를 ‘사람’이라 하는가 하는 질문에 스베덴보리는 가장 높은 곳에서부터 답합니다. ‘가장높은의미로는오직주님자신만이사람이시기때문’입니다. 즉 사람이 교회의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사람의 기준이십니다. 교회와 거듭난 사람이 ‘사람’이라 하는 까닭은 그들 자신에게서 참된 인간성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선과 진리를 받아 주님의 것을 닮아 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AC.473의 ‘형상’과 ‘모양’이 다시 연결됩니다. 천적 교회는 주님의 ‘모양’이므로 사람이라 하고, 영적 교회는 주님의 ‘형상’이므로 역시 사람이라 합니다. 따라서 창5:1-2에서 ‘하나님의모양’과 ‘사람’이라는 표현이 이어지는 것은 우연한 배열이 아닙니다. 태고교회가 주님의 모양을 이루는 천적 교회였기 때문에 말씀은 그 교회를 특별히 ‘사람’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사람은이해하는능력으로말미암아사람이다’라는 문장은 주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만 떼어 놓으면 지적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더 참된 사람이라는 뜻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즉시 그 기준을 바로잡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참된 구별은 ‘주님을향한사랑에기초한신앙’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이해’(understanding)는 단순한 지능이나 지식의 양이 아니라 진리를 받아들이고 분별할 수 있는 인간의 내적 능력과 관계됩니다. 그리고 그 이해 역시 사랑과 결합될 때 비로소 참된 인간성을 이룹니다.
이어지는 수많은 성경 인용은 바로 이 사실을 여러 각도에서 보여 줍니다. 겔36:10-12에서 ‘사람’이 많아진다는 것은 단순한 인구 증가만을 뜻하지 않고 교회가 회복되고 번성하는 것을 속뜻으로 포함합니다. 그래서 ‘옛적’은 태고교회, ‘처음’은 고대교회들을 가리키며, 이스라엘과 이방인 가운데 세워진 교회까지 모두 ‘사람’이라는 이름 아래 묶입니다. 시대와 외적 형태는 달라도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아 살아 있는 교회라는 점에서는 모두 ‘사람’인 것입니다.
신32:7-8역시 같은 흐름을 보여 줍니다. ‘옛날’과 ‘역대’는 태고교회와 고대교회들을 가리키고, ‘인종’은 주님을 향한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반면 렘4:23, 25에서는 정반대의 상태가 나타납니다. ‘사람이없다’는 것은 단순히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뜻이 아니라, 속뜻으로는 ‘선에대한사랑’이 사라졌음을 의미합니다. 공중의 새가 날아갔다는 것은 ‘진리에대한이해’까지 사라진 상태입니다. 사랑의 선과 진리에 대한 이해가 사라지자 말씀은 그것을 ‘사람이없다’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사람’의 의미를 매우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렘31:27의 ‘사람의씨와짐승의씨’에서는 ‘사람’이 내적 인간(internal man, 속사람)을, ‘짐승’이 외적 인간(external man, 겉사람)을 의미합니다. 사6:12와 사24:6에서는 선과 진리 또는 신앙이 사라지는 교회의 황폐함을 ‘사람’이 사라지는 모습으로 표현합니다. 결국 이 인용들은 모두 한 방향을 가리킵니다. 말씀에서 ‘사람’이라는 말은 단지 생물학적 인간을 가리키는 데 머물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아 참으로 살아 있는 내적 상태를 나타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33:8-9와 사13:12-13에서 ‘에노스’(Enosh)와 ‘아담’(Adam)이라는 히브리어가 구별되어 제시되는 것도 앞으로 창5의 이름들을 읽는 데 중요합니다. 창5의 이름들은 단순히 사람의 이름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서로 다른 상태를 담고 있으며, ‘사람’을 뜻하는 여러 표현 자체에도 서로 다른 내적 의미가 있습니다. 특히 ‘에노스’는 곧 창5에서 하나의 교회를 나타내는 이름으로 다시 다루어지므로, 여기서는 그 의미가 앞으로 더욱 구체적으로 밝혀질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AC.477은 ‘사람이란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주님으로부터 시작하여 교회와 개인에게로 내려옵니다. 가장 높은 의미로 참된 사람은 오직 주님이시며, 교회는 주님의 모양 또는 형상을 받아 ‘사람’이 되고, 개인 역시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를 받아 거듭날수록 참된 사람이 됩니다. 따라서 창5:2의 ‘그들의이름을사람이라일컬으셨다’는 말씀은 단순히 남자와 여자를 통칭하여 인간이라고 이름 붙였다는 것보다 훨씬 깊습니다. 신앙과 사랑이 결혼을 이루고 주님의 모양을 나타내는 교회, 바로 그것이 말씀의 속뜻으로는 ‘사람’입니다. (AC.477해설)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창5:2)
AC.476
‘남자와여자’(maleandfemale)가신앙과사랑사이의결혼을의미한다는것은앞에서밝히고입증하였습니다.거기서남자,곧남성(man[vir])은이해(understanding)와거기에속한모든것을의미하며,따라서신앙에속한모든것을의미하고,여자,곧여성은의지(will)또는의지에속한것들을의미하며,따라서사랑과관계되는모든것을의미한다는것을보여주었습니다.그러므로여자를‘하와’(Eve)라하였는데,이이름은생명을의미하며,생명은오직사랑에속한것이기때문입니다.그러므로앞에서보여준것처럼여자는또한교회를의미하고,남자는교회에속한사람(man[vir] ofthechurch)을의미합니다.여기서다루는것은교회가영적이었을때의상태와그후천적으로만들어진상태입니다.그러므로창1:26-27에서와같이‘여자’보다‘남자’가먼저언급됩니다.또한‘창조하다’(create)라는표현은영적인간과관련됩니다.그러나그후결혼이이루어졌을때,곧교회가천적으로만들어졌을때에는‘남자와여자’라고하지않고‘사람’(man[homo])이라고합니다.이‘사람’은그들의결혼으로말미암아둘모두를의미하기때문입니다.그러므로곧이어‘그들의이름을사람이라일컬으셨다’고하며,이것은교회를의미합니다.That by “maleandfemale” is signified the marriage between faith and love was declared and proved above, where it was shown that the male or man [vir] signifies the understanding and whatever belongs to it, consequently everything of faith; and that the female or woman signifies the will, or the things appertaining to the will, consequently whatever has relation to love; wherefore she was called Eve, a name signifying life, which is of love alone.By the female therefore is also signified the church, as has been previously shown; and by the male, a man [vir] of the church.The subject here is the state of the church when it was spiritual, and which was afterwards made celestial, wherefore “male” is mentioned before “female,” as also in chapter 1:26–27.The expression to “create” also has reference to the spiritual man; but afterwards when the marriage has been effected, that is, when the church has been made celestial, it is not said “maleandfemale,” but “man” [homo], who, by reason of their marriage, signifies both; wherefore it presently follows, “andhecalledtheirnameman,” by which is signified the church.
AC.476은 ‘남자와여자’가 어떻게 ‘신앙과사랑의결혼’을 의미하는지를 이해(understanding)와 의지(will)의 관계를 통해 설명합니다. ‘남자’(vir)는 이해와 거기에 속한 것들을 의미하므로 신앙에 속한 것을 표상하고, ‘여자’는 의지와 거기에 속한 것들을 의미하므로 사랑에 속한 것을 표상합니다. 여기서 신앙은 단순히 어떤 교리를 믿는 행위가 아니라 진리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쪽과 관계되고, 사랑은 그 진리를 원하고 기뻐하며 살아내는 의지의 쪽과 관계됩니다.
여자를 ‘하와’라 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하와’는 생명을 의미하고, 스베덴보리는 생명이 본질적으로 사랑에 속한다고 설명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따라 살고, 그 사랑이 그의 의지와 삶을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자가 의지와 사랑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교회를 의미한다는 것은 서로 연결됩니다. 교회의 생명 역시 단순히 진리를 알고 있는 데 있지 않고, 그 진리가 사랑과 의지 안에서 살아 있게 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특히 눈여겨볼 것은 ‘남자’가 ‘여자’보다 먼저 언급된 이유입니다. AC.476은 여기서 다루는 상태가 교회가 처음에는 ‘영적’이었다가 이후 ‘천적’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영적 상태에서는 진리와 신앙을 통하여 사랑과 선으로 나아가므로, 이해와 신앙을 의미하는 ‘남자’가 먼저 나옵니다. 이것은 창1:26-27에서도 동일합니다. 또한 AC.472에서 살펴본 것처럼 ‘창조하다’라는 표현 역시 영적 인간과 관련됩니다.
그러나 신앙과 사랑의 결혼이 이루어져 교회가 천적 상태에 이르면 표현이 달라집니다. 더 이상 ‘남자와여자’라고 각각 말하지 않고 둘을 하나로 묶어 ‘사람’(homo)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남자나 여자의 구별이 없어졌다는 뜻이 아니라, 속뜻으로는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이 더 이상 서로 분리된 두 원리로 머물지 않고 하나의 생명을 이루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그의이름’이 아니라 ‘그들의이름을사람이라일컬으셨다’고 합니다. 둘이 결혼을 이루었기 때문에 하나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 점은 AC.472-473의 ‘형상’과 ‘모양’의 구별과도 정확히 이어집니다. 영적 인간은 진리를 받아들이고 신앙을 통하여 선으로 나아가는 ‘하나님의형상’이며, 천적 인간은 신앙과 사랑, 이해와 의지가 결혼을 이루어 주님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모양’입니다. 따라서 창5:1-2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가 영적 상태에서 출발하여 신앙과 사랑의 결혼을 이루는 천적 상태에 이른 과정을 압축하여 보여 줍니다.
결국 ‘남자와여자’에서 ‘사람’으로 표현이 바뀌는 것은 태고교회의 거듭남이 어디에 이르렀는지를 보여 줍니다. 진리를 이해하는 것과 선을 사랑하는 것, 신앙과 사랑이 따로 움직이는 동안에는 아직 결혼이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 둘을 결합하시면 신앙은 사랑으로부터 나오고, 이해는 의지와 하나가 되어 움직이며, 사람의 내적 삶 전체가 하나의 질서를 이루게 됩니다. 바로 이 상태를 말씀은 ‘사람’(homo)이라 하고, AC.476은 이 ‘사람’이 곧 교회를 의미한다고 밝힙니다. (AC.476해설)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and blessed them, and called their name man, in the day when they were created.(창5:2)
AC.475
‘남자와여자’(maleandfemale)는신앙과사랑사이의결혼을의미하며,‘그들의이름을사람이라일컬으셨다’(callingtheirnameman)는것은그들이교회였음을의미합니다.특별한의미로는교회를‘사람’(man[homo])이라하기때문입니다.By “maleandfemale,” is signified the marriage between faith and love; by “callingtheirnameman,” is signified that they were the church, which, in an especial sense, is called “man” [homo].
해설
AC.475는 창5:2의 ‘남자와여자를창조하셨고...그들의이름을사람이라일컬으셨더라’는 말씀을 태고교회의 내적 상태에 대한 묘사로 읽습니다. 여기서 ‘남자와여자’는 단순히 두 성별을 가리키는 데 머물지 않고 ‘신앙과사랑사이의결혼’을 의미합니다. 즉 태고교회 안에서 신앙과 사랑이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고 하나를 이루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말하는 ‘결혼’은 두 가지가 단순히 함께 존재한다는 뜻보다 훨씬 깊습니다. 참된 신앙은 사랑으로부터 나오고, 참된 사랑은 신앙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냅니다. 사랑과 분리된 신앙은 살아 있는 신앙이 될 수 없으며, 신앙과 진리 없이 막연한 감정에 머무는 사랑 역시 온전한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앙과 사랑의 결혼은 사람 안에서 진리와 선이 하나의 생명을 이루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것은 창4에서 우리가 보았던 가인의 문제와도 뚜렷한 대조를 이룹니다. 가인이 표상한 것은 사랑 또는 체어리티로부터 분리된 신앙이었습니다. 반면 여기 창5:2에서 태고교회를 묘사하는 ‘남자와여자’는 신앙과 사랑이 결혼을 이루고 있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창5는 처음부터 태고교회의 본래 질서가 무엇이었는지를 다시 보여 줍니다. 신앙이 사랑과 경쟁하거나 사랑으로부터 독립하여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결합되어 하나의 생명을 이루는 질서입니다.
이어지는 ‘그들의이름을사람이라일컬으셨다’는 말씀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사람’(homo)은 특별한 의미로는 ‘교회’를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말씀에서 참된 의미의 사람은 단지 인간의 외형을 가진 존재라는 뜻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신앙을 받아 그 둘이 하나를 이루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신앙과 사랑의 결혼이 이루어진 공동체를 ‘사람’이라 한다는 것은,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참된 인간성을 받아 살아가는 공동체임을 보여 줍니다.
더욱이 본문은 ‘그의이름’이 아니라 ‘그들의이름을사람이라일컬으셨다’고 합니다. 남자와 여자를 함께 가리키면서 하나의 이름인 ‘사람’을 주신 것입니다. 속뜻으로는 이것이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신앙과 사랑은 서로 떨어져 각각 완전한 것이 아니라 결합될 때 하나의 교회를 이루며, 바로 그 결합된 상태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참된 정체성은 신앙만으로도, 사랑만으로도 설명되지 않고, 주님 안에서 신앙과 사랑이 결혼을 이루는 데 있습니다.
결국 AC.475가 보여 주는 태고교회의 모습은 ‘사랑으로부터나오는신앙’과 ‘그신앙을통하여나타나는사랑’이 하나를 이루는 교회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교회를 ‘사람’이라 부르십니다. 창4에서 사랑과 신앙의 분리가 교회의 질서를 무너뜨렸다면, 창5:2는 그보다 먼저 있었던 본래의 질서를 다시 보여 줍니다. 참된 교회도 참된 인간도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신앙이 서로 결혼을 이루는 곳에서 형성됩니다. (AC.475해설)
천적이었던태고교회그자체를가리켜‘사람’(homo),그리고‘하나님의모양’이라하였습니다.(1절)The most ancient church itself, which was celestial, is what is called “man” [homo], and a “likenessofGod.” (verse 1)
이것은아담의계보를적은책이니라하나님이사람을창조하실때에하나님의모양대로지으시되(1절)
해설
AC.461은 창5:1의 ‘하나님이사람을창조하실때에하나님의모양대로지으시되’라는 말씀의 속뜻을 아주 압축하여 제시합니다. 여기서 ‘사람’과 ‘하나님의모양’은 먼저 어떤 한 개인을 설명하기 위한 표현이 아니라 ‘태고교회자체’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 태고교회를 특별히 ‘천적’이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창5의 첫머리는 한 개인의 족보를 소개하는 데서 출발하기보다, 이 장에서 이어질 모든 교회의 출발점이 어떠한 상태의 교회였는지를 먼저 보여 줍니다.
태고교회가 ‘천적’이었다는 것은 그 교회의 사람들이 주님에 대한 사랑을 가장 중심에 두고, 그 사랑으로부터 신앙과 진리를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천적인 질서는 ‘먼저진리를알고그진리를통하여사랑에이르는것’이라기보다, 주님께 받은 사랑과 선으로부터 무엇이 참인지를 퍼셉션하는 질서입니다. 그러므로 태고교회가 ‘사람’이라 불렸다는 것은 단순히 그 구성원들이 인간이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에게 주님으로부터 오는 참된 인간성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이 점은 ‘하나님의모양’이라는 표현과 직접 연결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모양이라는 것은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과 같은 존재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 안에 있는 선과 진리, 사랑과 지혜의 모든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사람이 그것을 받아들일수록 주님의 모양이 그 안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모양’은 인간 자신의 고유한 탁월함을 높이는 표현이라기보다, 인간이 참으로 인간다워지는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 주는 표현입니다.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받아들이는 만큼 참된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AC.461의 ‘사람’(homo)이라는 표현은 중요합니다. 말씀의 속뜻에서 ‘사람’은 단순히 생물학적 인간을 뜻하는 데 그치지 않고,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신앙을 받아 참된 질서 안에 있는 사람, 더 넓게는 그러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교회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태고교회가 ‘사람’이라 불린 것은 그 교회가 이러한 천국의 질서를 가장 온전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창5가 바로 이 ‘사람’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은 이후 이어지는 교회들의 상태를 이해하는 기준점이 됩니다.
또한 AC.461은 창1의 인간 창조와 창5의 족보가 서로 떨어져 있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창1에서 ‘하나님의형상대로’ 창조되는 사람은 거듭남을 통하여 주님의 형상과 모양을 받아 가는 사람을 다루었고, 여기 창5에서는 그 출발점에 있었던 천적 태고교회가 다시 ‘사람’과 ‘하나님의모양’이라는 말로 제시됩니다. 따라서 창5는 전혀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형성된 태고교회가 이후 어떠한 상태들을 거쳐 이어져 갔는지를 계속해서 보여 주는 장입니다.
결국 AC.461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사람’의 기준은 외적인 조건이나 인간 자신의 프로프리움에 있지 않습니다. 참된 인간성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선,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태고교회가 ‘사람’이며 ‘하나님의모양’이라 불릴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리고 창5는 이 가장 처음의 천적 상태를 기준점으로 삼아, 이후 교회들의 상태가 어떻게 이어지고 달라져 가는지를 보여 주기 시작합니다. (AC.461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