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478에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강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여기서다루는주제는인류최초의어떤한사람의창조가아니라태고교회’라고 합니다. 창세기를 전통적인 방식으로 읽어 온 독자라면 여기서 자연스럽게 질문하게 됩니다. ‘그렇다면스베덴보리는아담을인류최초의한남성개인으로보지않았다는말인가?’
먼저 스베덴보리가 창세기의 ‘아담’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는 분명합니다. AC.478에서 그는 히브리어 ‘아담’(Adam)이 ‘사람’(man)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더욱이 창1:26에서는 ‘사람’을 단수로 말하면서 곧이어 ‘그들’이라는 복수로 받고, 창5:2에서는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뒤 ‘그들의이름을사람이라일컬으셨더라’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 ‘사람’은 한 남성 개인에게만 적용되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남자와 여자를 함께 포함하는 말이며, 속뜻으로는 태고교회를 가리킵니다. AC.137에서도 창세기 처음 세 장은 ‘사람’(homo)이라 하는 태고교회를 그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다룬다고 설명합니다.
이 점은 ‘신적섭리’(DivineProvidence, 1764, DP) 241에서 더욱 직접적으로 밝혀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아담과그의아내’가 ‘세상에창조된최초의인간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아담이라는개인에게태고교회라는추가적인상징적의미도있다’는 정도의 설명보다 훨씬 강합니다. 창세기에서 ‘아담과그의아내’라는 형상으로 묘사된 대상 자체가 인류 최초의 두 개인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DP.328에서도 같은 원리가 다시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스라엘·유대교회 이전의 여러 교회가 역사적인 방식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민족들과 사람들의 이름 아래 묘사되었다고 설명하면서, 그 첫 번째인 태고교회가 ‘아담과그의아내하와’의 이름 아래 묘사되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AC.478한 곳에서 우연히 등장하는 특이한 해석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초기 역사를 이해하는 일관된 방식입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역사적개인아담의존재를부정했는가?’라는 질문에는 어떻게 답해야 할까요? 여기서는 질문 자체를 조금 정밀하게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창세기에나오는아담은하나님께서세상에최초로창조하신한남성개인이며,하와는그와함께최초로창조된한여성개인이라고스베덴보리가보았는가?’라고 묻는다면, DP.241에 비추어 답은 분명합니다. 그는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아담과그의아내’는 최초로 창조된 두 인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직접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과 ‘인류역사전체를통틀어아담이라는이름을가진어떤개인도실제로존재한적이없었다’는 명제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후자의 문제를 입증하는 데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의 질문은 ‘아담이라는이름을가진사람이역사상단한명도없었는가?’가 아니라 ‘주님께서창세기의아담과하와라는이름아래무엇을계시하셨는가?’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그의 답은 명확합니다. ‘태고교회’입니다.
이 구별은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시대 자체를 신화적이고 비역사적인 시대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AC.1114이하에서는 ‘사람또는아담이라했던태고교회’에 속했던 이들과 사후세계에서 대화했다고 기록하며, 그 교회의 후대에 속했던 사람들도 언급합니다. 따라서 ‘아담=태고교회’라는 해석은 ‘실제로존재했던사람들은없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실제 많은 사람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교회가 있었으며, 말씀은 그 교회와 그 상태를 ‘아담’, 곧 ‘사람’이라는 이름 아래 묘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5의 계보를 이해하는 데도 매우 중요합니다. 창5의 아담,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등의 이름을 단순히 한 가족의 생물학적 족보로만 읽는다면 스베덴보리가 밝히려는 속뜻을 놓치게 됩니다. AC.470은 이 이름들이 실제적인 것들, 곧 여러 교회와 그 상태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AC.485는 창4의 셋과 창5의 셋이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어도 서로 다른 교회를 의미한다고까지 명시합니다. 따라서 창5의 계보는 태고교회에서 이어져 나온 여러 교회와 그 상태의 계승을 기록한 내적 역사로 읽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스베덴보리가 ‘그러므로역사적개인아담은존재하지않았다’라는 현대적인 문장으로 결론짓지 않았는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의 목적은 역사학적 논쟁을 벌이는 데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이름의 개인이 있었느냐 없었느냐가 아니라, 주님께서 말씀의 ‘아담’이라는 이름 안에 어떤 신적 진리를 담으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담은존재하지않았다’고 말하는 대신, 훨씬 더 자신의 해석 원리에 맞는 방식으로 ‘아담과그의아내는세상에창조된최초의인간들을의미하지않고태고교회의사람들을의미한다’고 말합니다(DP.241).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입장을 가장 정확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는 인류 최초의 두 개인에 관한 전기적 기록의 주인공이 아니라 태고교회와 그 교회에 속한 사람들을 나타냅니다. 그렇다고 태고시대의 실제 사람들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실제 사람들로 이루어진 최초의 교회가 있었으며, 말씀은 그 교회를 ‘아담’, 곧 ‘사람’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창세기의 아담을 읽을 때 중심 질문은 ‘최초의한남자가누구였는가?’보다 ‘왜주님께서는최초의교회를‘사람’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내셨는가?’가 됩니다. 그 질문을 따라가면 창1의 창조, 창2의 에덴, 창3의 타락, 그리고 창5의 계보가 모두 한 개인의 전기를 넘어 태고교회의 형성과 천적 상태, 쇠퇴와 후대 교회들의 계승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내적 역사로 열리게 됩니다. (AC.475-480심화2)
창5:2에는 하나님께서 ‘남자와여자를창조하셨고...그들의이름을사람이라일컬으셨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AC.475-480에서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태고교회의 거듭남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남자’는 이해(understanding)와 거기에 속한 것들을, 따라서 신앙을 의미하고, ‘여자’는 의지(will)와 거기에 속한 것들을, 따라서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말씀은 이 둘을 끝까지 ‘남자와여자’라고 따로 부르지 않고, 그들의 이름을 하나의 ‘사람’(homo)이라 합니다. 왜 신앙과 사랑이 결혼을 이루었을 때 비로소 둘을 하나의 ‘사람’이라 하는 것일까요?
그 출발점은 AC.477의 매우 중요한 선언에 있습니다. ‘가장높은의미로는오직주님자신만이사람이시다’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참된 사람이 되는 기준은 인간 자신에게 있지 않고 주님께 있습니다. 천적 교회를 ‘사람’이라 하는 것은 그 교회가 주님의 ‘모양’이기 때문이고, 영적 교회를 ‘사람’이라 하는 것은 주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교회와 사람이 ‘사람’이라 하는 것은 그들 안에 독립적으로 참된 인간성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선과 진리를 받아 주님의 형상과 모양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남자’와 ‘여자’가 함께 있어야 합니까? 남자가 의미하는 신앙은 진리를 알고 받아들이는 쪽과 관계되고, 여자가 의미하는 사랑은 그 진리를 원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쪽과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이해하면서도 그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의 이해와 의지는 하나가 아닙니다. 반대로 선을 원한다고 하면서도 무엇이 참된 선인지를 밝혀 주는 진리와 분리되어 있다면 역시 온전한 질서를 이루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과정은 이처럼 나뉘어 있던 신앙과 사랑, 이해와 의지를 하나의 생명으로 결합하시는 과정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천적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AC.479는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었을 때 ‘주님을향한사랑에서비롯된신앙’으로 말미암아 가장 탁월한 의미로 ‘사람’이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신앙과 사랑의 결혼은 두 요소를 반반씩 결합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질서의 중심에는 사랑이 있고, 신앙은 그 사랑으로부터 나옵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의 진리를 보고,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무엇이 진리인지를 지각하며, 그렇게 알게 된 진리를 다시 삶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4의 가인이 표상하는 상태와 정확히 대조됩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 자체에 있지 않았습니다. 신앙을 사랑과 분리하여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만든 데 있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본래 질서에서는 사랑이 신앙의 중심이었으며, 사랑으로부터 신앙에 속한 것들을 지각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신앙을 사랑으로부터 분리하면서 그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AC.337). 따라서 창5:2의 ‘남자와여자’의 결혼은 창4에서 무너진 바로 그 질서의 본래 모습을 보여 줍니다.
AC.476에서 결혼이 이루어진 뒤 더 이상 ‘남자와여자’라 하지 않고 ‘사람’이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이 서로 분리되어 움직일 때에는 아직 둘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 둘을 결합하시면 하나의 삶이 됩니다. 사람이 믿는 것과 사랑하는 것, 아는 것과 원하는 것, 고백하는 것과 살아가는 것이 하나의 방향을 향하게 됩니다. 말씀에서 ‘그의이름’이 아니라 ‘그들의이름을사람이라일컬으셨다’ 한 것은 바로 이 하나 됨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AC.480은 이 상태를 창1의 여섯째 날의 끝과 일곱째 날의 시작에 연결합니다. 여섯째 날에는 신앙과 사랑이 하나가 되며, 그때 사랑이 중심이 되는 천적 상태가 시작됩니다. AC.83도 여섯째 날이 완성되는 때를 신앙과 사랑이 하나가 되어 사랑이 중심이 되기 시작하는 상태로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일곱째 날의 안식은 단순히 모든 활동이 중단된 상태가 아니라, 사람 안의 질서가 주님을 중심으로 바로잡혀 더 이상 신앙과 사랑이 서로 갈라져 싸우지 않는 천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결국 ‘사람’은 단순히 인간이라는 종의 명칭만이 아닙니다. 속뜻으로는 주님께서 사람 안에서 신앙과 사랑, 이해와 의지를 결합하여 하나의 생명으로 이루신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가장 높은 의미로는 오직 주님만이 사람이시고, 교회와 거듭난 사람은 주님의 형상과 모양을 받아 ‘사람’이 됩니다. 참된 인간성은 많이 아는 데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받은 진리가 사랑이 되고 그 사랑에서 다시 신앙과 삶이 흘러나오는 데서 완성됩니다. 창5:2의 ‘그들의이름을사람이라일컬으셨다’는 말씀은 바로 이러한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를 압축하여 보여 줍니다. (AC.475-480심화1)
AC.95의 마지막 문장은 매우 강합니다. ‘신앙의생명은그를준비하지만,그를‘사람’이 되게 하는 것은 사랑의 생명’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신앙만으로는 왜 아직 충분하지 않으며, 왜 사랑의 생명이 그를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일까요?
이 말을 신앙의 가치를 낮추는 것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의 생명이 필요 없다고 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이 사람을 ‘준비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준비는 없어도 되는 단계가 아닙니다. 사람의 이해가 진리를 받아들이고,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악인지 배우며, 주님과 말씀에 속한 것들을 인정하게 되는 것은 거듭남의 실제 과정에 속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어떤 진리를 이해하고 믿는 것과 그 진리가 그의 의지와 사랑의 생명이 되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무엇이 옳은지 알면서도 그것을 원하지 않을 수 있고, 선을 인정하면서도 실제로는 다른 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때 진리는 이해 안에 있지만 아직 사람의 삶 전체를 움직이는 사랑이 된 것은 아닙니다. 바로 이 점에서 신앙의 생명은 사람을 준비합니다.
앞의 AC.83에서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이 될 때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고 사랑이 주된 것이 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AC.95의 ‘사랑의생명이그를‘사람’이 되게 한다’는 말은 신앙이 없어지고 사랑만 남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이 사랑과 하나를 이루고, 사람이 알고 믿는 진리가 그가 사랑하고 원하는 것과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AC.91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와도 연결됩니다.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할 때 싸움이 그칩니다. 단지 이해로 ‘순종해야한다’고 아는 것만으로는 싸움이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닙니다. 겉 사람의 바람 자체가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질서와 조화를 이루기 시작할 때 비로소 그 순종은 억지 복종이 아니라 삶이 됩니다. AC.85에서 주님의 뜻이 천적 인간의 ‘바람’이 된다고 했던 것도 이와 연결됩니다.
따라서 사랑은 여기서 단순한 감정이 아닙니다. 사랑은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원하며 무엇을 자신의 삶으로 삼는가와 관련됩니다. AC.95가 사랑을 의지와 나란히 놓아 ‘사랑또는의지의생명’이라고 하는 것도 이 점을 보여 줍니다. 진리가 이해 안에서 받아들여지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의지와 사랑 안에서 살아날 때, 그것은 실제 삶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의생명은준비하고사랑의생명은사람을‘사람’이 되게 한다’는 말은 신앙과 사랑의 경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의 질서를 말합니다. 진리는 사람을 준비하고 인도하지만, 마침내 그 진리가 사랑과 의지의 생명이 되어 사람이 그것을 원하고 살아갈 때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룹니다. AC.95가 천적 인간의 겉 사람을 비로소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생명의 질서가 겉 사람에까지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AC.95심화1)
이세교회,곧‘사람’(man),‘셋’(Seth),‘에노스’(Enosh)는태고교회를이루지만,퍼셉션의완전성에있어서는차이가있었습니다.첫번째교회의퍼셉션능력은뒤를이은교회들에서점차감소하였고더욱일반적인것이되었는데,이는열매나그씨앗에관하여,그리고뇌에관하여앞에서살펴본것과같습니다.완전성은명료하게퍼셉션하는능력에있습니다.그런데퍼셉션이덜명료하고더욱일반적인것이될때그능력은감소합니다.그러면더분명했던퍼셉션을대신하여더흐릿한퍼셉션이뒤따르게되고,이와같이퍼셉션은사라지기시작합니다.These three churches, “man,” “Seth,” and “Enosh,” constitute the most ancient church, but still with a difference of perfection as to perceptions: the perceptive faculty of the first church gradually diminished in the succeeding churches, and became more general, as observed concerning fruit or its seed, and concerning the brain. Perfection consists in the faculty of perceiving distinctly, which faculty is diminished when the perception is less distinct and more general; an obscurer perception then succeeds in the place of that which was clearer, and thus it begins to vanish away.
해설
AC.502는 지금까지 말해 온 태고교회의 ‘쇠퇴’가 구체적으로 무엇의 쇠퇴였는지를 아주 분명하게 밝혀 줍니다. ‘사람’, ‘셋’, ‘에노스’라는 세 교회는 모두 태고교회에 속합니다. 따라서 셋이나 에노스가 나타났다고 해서 태고교회가 끝나고 전혀 다른 종류의 교회가 시작된 것은 아닙니다. 세 교회 모두 같은 태고교회의 큰 계열 안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구별하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는데, 바로 ‘퍼셉션의완전성’이었습니다.
여기서 AC.500의 ‘덜천적’이라는 표현이 더욱 구체적인 의미를 갖게 됩니다. 셋이 최초의 태고교회보다 덜 천적이고, 에노스가 셋보다 더욱 덜 천적이었다는 것은 단순히 그들이 도덕적으로 더 나빠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천적 인간의 특징인 퍼셉션 능력이 점차 약해졌다는 뜻입니다. 최초의 ‘사람’ 교회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매우 명료하고 구체적으로 퍼셉션할 수 있었지만, 셋과 에노스로 이어지면서 그 퍼셉션이 점점 덜 명료해지고 더욱 일반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교회의 쇠퇴는 무엇보다 ‘주님으로부터선과진리를받아들이고분별하는내적능력의쇠퇴’입니다.
특히 ‘더욱일반적인것’이 되었다는 표현을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일반적’이라는 것은 퍼셉션의 대상이 넓어졌다는 긍정적인 뜻이 아니라, 세밀하고 분명하게 구별하던 것이 점차 뭉뚱그려지고 희미해졌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처음에는 여러 선과 진리의 차이와 그 각각의 성질을 분명하게 알아차렸다면, 후대로 갈수록 그것을 그렇게 세밀하게 구별하지 못하고 보다 막연하고 포괄적으로만 퍼셉션하게 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완전성은명료하게퍼셉션하는능력에있다’고 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입니다.
이 설명은 앞의 AC.501에서 사용한 열매와 씨앗, 그리고 뇌의 비유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가장 내적인 중심에는 본질적인 생명이 가장 충만하고, 거기서 바깥으로 나아갈수록 그것이 점차 일반적이고 외적인 형태를 취합니다. 마찬가지로 최초의 태고교회에는 퍼셉션이 가장 내적이고 명료한 형태로 존재했지만, 그 뒤를 이은 교회들에서는 그것이 점차 흐릿해졌습니다. 따라서 ‘사람→셋→에노스’라는 계승은 단순히 세 교회의 시간적 순서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퍼셉션이 ‘명료한상태에서덜명료한상태로’, 그리고 ‘구체적인상태에서더욱일반적인상태로’ 변해 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퍼셉션의 쇠퇴를 ‘있음’과 ‘없음’의 두 단계로만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처음에는 분명한 퍼셉션이 있었고 어느 순간 갑자기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먼저 덜 명료해지고, 더욱 일반적이 되고, 더 흐릿해지면서 ‘사라지기시작’합니다. 이것은 교회의 내적 생명이 쇠퇴하는 방식이 대개 점진적이라는 AC.497의 설명과도 일치합니다. 겉으로는 여전히 같은 태고교회이고, 퍼셉션도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 질과 명료함이 이미 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점은 교회의 쇠퇴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교회의 본질적인 것이 사라질 때 반드시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살아 있는 진리를 아주 분명하게 분별하던 것이 조금씩 흐릿해지고, 구체적인 선과 진리의 차이를 알아보던 것이 점차 막연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태가 계속되면 외적인 형태는 상당 기간 남아 있어도 그 안의 내적 생명은 점점 희미해집니다. AC.501의 표현대로 하면 아직 열매의 모양은 남아 있지만 점차 그 속보다 껍질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오늘날 우리가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되찾아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AC.495에서 이미 스베덴보리는 오늘날에는 태고교회와 같은 퍼셉션의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밝혔습니다. 이후의 영적 교회에는 말씀에서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삶으로 받아들임으로써 형성되는 양심이라는 다른 길이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태고교회의 내적 감각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주신 말씀의 진리를 더욱 분명히 배우고, 그것을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으로 받아들여 양심이 더욱 바르게 형성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흐릿해지면서 사라져 간 역사는 결국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주님께서주시는진리를점점더분명하게보고있는가,아니면알고있다고생각하면서실제로는점점더막연하게받아들이고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AC.502해설)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창5:2)
AC.480
그들이창조되던날에‘사람’이라일컬어졌다는것은1장에서도알수있습니다(창1:26-27).곧여섯째날의끝인데,이는안식일의저녁,다시말해안식일또는일곱째날이시작되는때에해당합니다.앞에서보여준것처럼일곱째날,곧안식일은천적인간을의미하기때문입니다.That they were called “man” in the day that they were created, appears also from the first chapter (Gen.1:26–27), that is, at the end of the sixth day, which answers to the evening of the sabbath, or when the sabbath or seventh day began; for the seventh day, or sabbath, is the celestial man, as was shown above.
AC.480은 창5:2의 ‘그들이창조되던날에’라는 표현을 창1:26-27의 여섯째 날과 연결합니다. 창1에서 ‘사람’이 등장하는 때는 여섯째 날의 마지막이며, 곧 일곱째 날인 안식일을 눈앞에 둔 때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날’은 단순히 시간의 하루를 가리키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람이 거듭나는 과정에서 하나의 영적 상태가 완성되고 다음 상태로 들어가는 것을 나타냅니다.
여섯째 날은 거듭남의 싸움이 거의 완성되는 단계입니다.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진리와 선을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악과 거짓에 맞서고, 신앙을 통하여 사랑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아직 여섯째 날인 동안에는 싸움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닙니다. 이 상태가 완성되고 일곱째 날이 시작되면서 사람은 천적 인간의 상태로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AC.480이 ‘사람’이라는 이름을 여섯째 날의 끝과 일곱째 날의 시작에 연결하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여섯째 날의 끝을 ‘안식일의저녁’이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이 완전히 끊어진 두 상태가 아니라, 앞의 상태가 완성되면서 다음 상태가 열리는 연속적인 거듭남의 과정임을 보여 줍니다. 영적 인간이 어느 순간 사라지고 전혀 다른 존재인 천적 인간이 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영적 인간 안에 이루어 오신 일을 완성하시면서 그를 천적 상태로 이끄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의 AC.472-479에서 이어져 온 설명을 다시 하나로 묶어 줍니다. ‘창조하다’는 영적 인간과 관련되고, ‘만들다’는 천적 인간과 관련되며, ‘하나님의형상’은 영적 인간을, ‘하나님의모양’은 천적 인간을 의미합니다. 또한 ‘남자와여자’로 나타나는 신앙과 사랑이 결혼을 이루었을 때 그 둘을 함께 ‘사람’이라 합니다. 이제 AC.480은 이 모든 과정이 창1의 여섯째 날에서 일곱째 날로 넘어가는 구조 안에 이미 들어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안식일’의 의미도 중요합니다. 안식은 단순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닙니다. 거듭남의 앞선 단계에서는 사람이 마치 자신의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느끼지만, 천적 상태에서는 주님께서 역사하시는 질서 안에 더욱 온전히 들어가게 됩니다. 신앙과 사랑, 이해와 의지가 서로 맞서지 않고 하나를 이루며, 선을 행하는 것이 억지스러운 의무가 아니라 사랑에서 나오는 기쁨이 됩니다. 이러한 천적 상태가 바로 일곱째 날, 곧 안식일이 의미하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그들이창조되던날에그들의이름을사람이라일컬으셨다’는 창5:2의 말씀은 창1의 창조 이야기를 다시 불러옵니다. 창1의 여섯 날은 사람의 거듭남의 연속적인 상태들이며, 그 과정은 일곱째 날의 천적 상태를 향합니다. 창5는 그 전체 과정을 길게 반복하지 않고, ‘창조되던날’과 ‘사람’이라는 표현을 통해 그 완성된 태고교회의 상태를 다시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결국 AC.480은 창1과 창5가 서로 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창1에서 여섯 날에 걸쳐 묘사된 거듭남은 일곱째 날의 천적 인간에 이르고, 창5는 바로 그 천적 인간이었던 태고교회로부터 후대의 여러 교회가 어떻게 이어졌는지를 다루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라는 이름은 단순한 인간의 명칭이 아니라, 주님께서 거듭남의 전 과정을 통하여 신앙과 사랑을 결합하시고 마침내 안식의 질서 안으로 이끄신 교회의 상태를 담고 있습니다. (AC.480해설)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창5:2)
AC.479
말씀에서‘이름을부르다’(callinganame)또는‘이름으로부르다’(callingbyname)는사물의어떠함을아는것을의미한다는것은앞에서보여준바있습니다.여기서는태고교회의어떠함과관련되는데,곧사람이흙에서취해졌다는것,다시말해주님에의해거듭났다는것을나타냅니다.‘아담’(Adam)이라는말이‘흙’(ground)을의미하기때문입니다.그리고그후그가천적인간이되었을때에는주님을향한사랑에서비롯된신앙으로말미암아가장탁월한의미에서‘사람’이되었습니다.By “callinganame,” or “callingbyname,” is signified in the Word to know the quality of things, as was shown above, and in the present case it has relation to the qual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denoting that man was taken from the ground, or regenerated by the Lord, for the word “Adam” means “ground”; and that afterwards when he was made celestial he became most eminently “man,” by virtue of faith originating in love to the Lord.
해설
AC.479는 창5:2의 ‘그들의이름을사람이라일컬으셨더라’에서 왜 ‘이름’이 중요한지를 설명합니다. 말씀에서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단순히 그 대상을 다른 대상과 구별하기 위한 호칭을 붙인다는 뜻에 그치지 않습니다. 속뜻으로는 그 대상의 ‘어떠함’, 곧 그 본질과 상태가 어떠한지를 알고 나타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하셨다는 것은 단순한 명명이 아니라 태고교회가 어떤 교회였는지를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그 첫 번째 어떠함은 ‘흙에서취해졌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흙’은 단순한 물질적 흙을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람이 주님에 의해 거듭나는 상태와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아담’이라는 말이 ‘흙’(ground)을 의미한다고 설명하면서, 사람이 흙에서 취해졌다는 것을 ‘주님에의해거듭났다’는 의미로 풀이합니다. 따라서 ‘아담’이라는 이름 자체에 태고교회의 거듭남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 ‘흙’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자연 상태 그대로의 인간을 뜻한다고 보기보다, 주님께서 거듭남의 역사를 행하실 수 있도록 준비된 사람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씨가 땅에 떨어져 싹을 내고 열매를 맺듯이, 주님께서 사람 안에 선과 진리를 심으시고 자라게 하실 수 있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흙에서취해졌다’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새롭게 만들었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를 새롭게 하시고 거듭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태고교회의 과정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AC.479는 ‘그후그가천적인간이되었을때’ 가장 탁월한 의미에서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앞의 AC.472-476에서 계속 살펴본 흐름과 연결됩니다. 처음에는 영적 인간으로 창조되어 진리와 신앙을 통하여 선과 사랑으로 나아가지만, 마침내 신앙과 사랑이 결혼을 이루면 천적 인간이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상태에서 그는 더욱 온전한 의미의 ‘사람’이 됩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그가 무엇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되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AC.479는 그것을 ‘주님을향한사랑에서비롯된신앙’이라고 분명히 밝힙니다. 신앙이 사랑과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랑이 근원이고 신앙은 그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바로 이러한 질서가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를 이루었습니다. 따라서 참된 사람됨은 얼마나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는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 신앙이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나오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 점은 창4에서 다루었던 가인의 상태와 다시 선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가인은 사랑과 분리된 신앙을 표상했습니다. 반면 창5에서 ‘사람’이라 하는 태고교회의 본래 상태는 ‘주님을향한사랑에서비롯된신앙’입니다. 신앙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신앙이 어디에서 나오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사랑에서 나온 신앙은 사람을 참된 ‘사람’으로 이루지만, 사랑에서 분리되어 독립하려는 신앙은 본래의 천적 질서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결국 AC.479에서 ‘아담’, ‘흙’, ‘거듭남’, ‘사람’은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됩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흙’과 같은 상태에서 새롭게 하시고 거듭나게 하시며, 그를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로 이끄시고, 마침내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신앙이 흘러나오는 질서를 이루실 때 그는 가장 온전한 의미에서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의이름을사람이라일컬으셨다’는 말씀은 태고교회의 이름을 알려 주는 데 그치지 않고, 주님께서 그 교회 안에 이루신 거듭남의 어떠함 전체를 압축하여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AC.479해설)
AC.478은 창세기 초반의 ‘아담’을 스베덴보리가 어떻게 읽는지를 매우 직접적으로 밝히는 대목입니다. 핵심은 히브리어 ‘아담’(Adam)이 본래 ‘사람’을 뜻한다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는 이 대목의 ‘아담’을 처음부터 한 개인의 고유명사로 읽기보다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읽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속뜻으로는 태고교회를 가리킨다고 봅니다.
그 근거 가운데 하나가 단수와 복수의 변화입니다. 창1:26에서 하나님은 ‘사람을만들고’라고 단수로 말씀하신 뒤 곧이어 ‘그들로...다스리게하자’고 복수로 말씀하십니다. 창5:2에서도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뒤 ‘그들의이름을사람이라일컬으셨다’고 합니다. 따라서 본문 자체에서 ‘사람’은 어느 한 남성 개인만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고, 남자와 여자를 함께 포괄하는 말로 사용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문법적 특징을 태고교회라는 집단적 의미를 보여 주는 중요한 단서로 봅니다.
이것은 바로 앞의 AC.475-477과도 이어집니다. 남자와 여자는 각각 신앙과 사랑을 의미하고, 이 둘이 결혼을 이루었을 때 더 이상 둘을 따로 ‘남자와여자’라고 하지 않고 하나의 ‘사람’(homo)이라 합니다. 그리고 AC.477에서는 가장 높은 의미로 오직 주님 자신만이 사람이시며, 천적 교회는 주님의 ‘모양’으로서, 영적 교회는 주님의 ‘형상’으로서 사람이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창5:2의 ‘사람’은 단순한 종(種)으로서의 인간이라는 뜻을 넘어, 주님의 형상과 모양을 받아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는 교회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AC.478의 마지막 문장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다루는주제는인류최초의어떤한사람의창조가아니라태고교회’라고 명시합니다. 이것은 창세기 초반의 속뜻을 읽는 그의 기본 원리를 다시 확인해 줍니다. ‘아담’이라는 이름 아래 한 개인의 생애를 중심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최초의 사람들을 어떻게 교회로 세우시고 그 교회를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로 이끄셨는가를 읽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조심할 점이 있습니다. AC.478의 논점은 창세기 본문의 역사성 전체를 한 문장으로 부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가 분명히 밝히는 것은 말씀의 속뜻에서 ‘아담’이 인류 최초의 한 개인을 주제로 삼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를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관심 역시 ‘실제로아담이라는개인이존재했는가?’라는 문제로 곧바로 옮겨가기보다, 왜 주님께서 말씀에서 하나의 교회를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내셨는가를 이해하는 데 두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보면 창5:1의 ‘아담계보의책’도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것은 속뜻으로 한 개인 아담의 생물학적 후손 명단을 제시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 하는 태고교회로부터 여러 후대 교회가 어떻게 이어졌는지를 보여 주는 교회의 계승에 관한 기록입니다. AC.469에서 ‘계보의책’을 태고교회에 속한 사람들의 열거라고 한 것과 AC.470에서 이어지는 이름들이 실제적인 것들, 곧 교회적 실재를 의미한다고 한 설명이 여기서 서로 연결됩니다.
결국 AC.478은 ‘아담’이라는 이름을 통하여 다시 한번 창5를 읽는 관점을 정리해 줍니다. 문자에서는 한 사람의 이름과 그의 후손들의 계보가 이어지지만, 속뜻으로는 ‘사람’이라 하는 태고교회와 그 교회로부터 이어지는 여러 교회의 역사가 펼쳐집니다. 그러므로 창5의 계보를 따라간다는 것은 단순히 누가 누구를 낳았는지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가 여러 세대를 거치며 어떤 영적 상태들을 지나 노아에 이르게 되는지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AC.478해설)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창5:2)
AC.477
‘사람’(man)이태고교회를의미한다는것은앞에서자주말하고보여주었습니다.가장높은의미로는오직주님자신만이사람이시기때문입니다.이로부터천적교회는주님의모양이므로사람이라하고,이후영적교회도주님의형상이므로사람이라합니다.그러나일반적인의미로는인간다운이해(humanunderstanding)를가진모든이를사람이라합니다.사람은이해하는능력으로말미암아사람이기때문이며,그능력에따라어떤사람은다른사람보다더사람답습니다.그러나사람과사람사이의구별은마땅히주님을향한사랑에기초한그의신앙에따라이루어져야합니다.That “man” is the most ancient church has been often said and shown above; for in the supreme sense the Lord himself alone is man.From this the celestial church is called man, as being a likeness, and from this the spiritual church is afterwards so called because it was an image.But in a general sense everyone is called a man who has human understanding; for man is man by virtue of understanding, and according thereto one person is more a man than another, although the distinction of one man from another ought to be made according to his faith as grounded in love to the Lord.
[2]태고교회와모든참된교회,그리고그로부터교회에속한사람들,곧주님을향한사랑과주님을믿는신앙으로살아가는사람들이특별히‘사람’이라일컬어지는것은말씀으로부터분명합니다.에스겔에서는,That the most ancient church, and every true church, and hence those who are of the church, or who live from love to the Lord and from faith in him, are especially called “man,” is evident from the Word, as in Ezekiel:
하였습니다.여기서‘옛적’(antiquities)은태고교회를,‘처음’(beginnings)은고대교회들을의미하며,‘이스라엘족속’과‘내백성이스라엘’은초대교회,곧이방인들의교회를의미합니다.이모든교회를‘사람’이라합니다.where by “antiquities” is signified the most ancient church; by “beginnings,” the ancient churches; by the “houseofIsrael” and “peopleIsrael,” the primitive church, or church of the Gentiles; all which churches are called “man.”
하였습니다.여기서‘옛날’(daysofeternity)은태고교회를,‘역대’(generationandgeneration)는고대교회들을의미합니다.‘인종’(sonsofman)은주님을향한신앙안에있던사람들이며,이신앙이‘이스라엘자손의수효’입니다.거듭난사람을‘사람’이라하는것은예레미야에서도나타납니다.where by the “daysofeternity” is meant the most ancient church; by “generationandgeneration,” the ancient churches; the “sonsofman” are those who were in faith toward the Lord, which faith is the “numberofthesonsofIsrael.” That a regenerate person is called “man,” appears from Jeremiah:
하였습니다.여기서‘땅’은외적인간(externalman, 겉사람)을,‘하늘’은내적인간(internalman, 속사람)을,‘사람’은선에대한사랑을,‘공중의새’는진리에대한이해를의미합니다.where “earth” signifies the external man; “heaven” the internal; “man” the love of good; the “birdsoftheheavens” the understanding of truth.
하였습니다.여기서첫번째‘사람’에해당하는말은‘에노스’(Enosh)이고,두번째는‘아담’(Adam)입니다.where the word for man in the first place is “Enosh,” and in the second is “Adam.”
해설
AC.477의 출발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 교회를 ‘사람’이라 하는가 하는 질문에 스베덴보리는 가장 높은 곳에서부터 답합니다. ‘가장높은의미로는오직주님자신만이사람이시기때문’입니다. 즉 사람이 교회의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사람의 기준이십니다. 교회와 거듭난 사람이 ‘사람’이라 하는 까닭은 그들 자신에게서 참된 인간성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선과 진리를 받아 주님의 것을 닮아 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AC.473의 ‘형상’과 ‘모양’이 다시 연결됩니다. 천적 교회는 주님의 ‘모양’이므로 사람이라 하고, 영적 교회는 주님의 ‘형상’이므로 역시 사람이라 합니다. 따라서 창5:1-2에서 ‘하나님의모양’과 ‘사람’이라는 표현이 이어지는 것은 우연한 배열이 아닙니다. 태고교회가 주님의 모양을 이루는 천적 교회였기 때문에 말씀은 그 교회를 특별히 ‘사람’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사람은이해하는능력으로말미암아사람이다’라는 문장은 주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만 떼어 놓으면 지적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더 참된 사람이라는 뜻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즉시 그 기준을 바로잡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참된 구별은 ‘주님을향한사랑에기초한신앙’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이해’(understanding)는 단순한 지능이나 지식의 양이 아니라 진리를 받아들이고 분별할 수 있는 인간의 내적 능력과 관계됩니다. 그리고 그 이해 역시 사랑과 결합될 때 비로소 참된 인간성을 이룹니다.
이어지는 수많은 성경 인용은 바로 이 사실을 여러 각도에서 보여 줍니다. 겔36:10-12에서 ‘사람’이 많아진다는 것은 단순한 인구 증가만을 뜻하지 않고 교회가 회복되고 번성하는 것을 속뜻으로 포함합니다. 그래서 ‘옛적’은 태고교회, ‘처음’은 고대교회들을 가리키며, 이스라엘과 이방인 가운데 세워진 교회까지 모두 ‘사람’이라는 이름 아래 묶입니다. 시대와 외적 형태는 달라도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아 살아 있는 교회라는 점에서는 모두 ‘사람’인 것입니다.
신32:7-8역시 같은 흐름을 보여 줍니다. ‘옛날’과 ‘역대’는 태고교회와 고대교회들을 가리키고, ‘인종’은 주님을 향한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반면 렘4:23, 25에서는 정반대의 상태가 나타납니다. ‘사람이없다’는 것은 단순히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뜻이 아니라, 속뜻으로는 ‘선에대한사랑’이 사라졌음을 의미합니다. 공중의 새가 날아갔다는 것은 ‘진리에대한이해’까지 사라진 상태입니다. 사랑의 선과 진리에 대한 이해가 사라지자 말씀은 그것을 ‘사람이없다’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사람’의 의미를 매우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렘31:27의 ‘사람의씨와짐승의씨’에서는 ‘사람’이 내적 인간(internal man, 속사람)을, ‘짐승’이 외적 인간(external man, 겉사람)을 의미합니다. 사6:12와 사24:6에서는 선과 진리 또는 신앙이 사라지는 교회의 황폐함을 ‘사람’이 사라지는 모습으로 표현합니다. 결국 이 인용들은 모두 한 방향을 가리킵니다. 말씀에서 ‘사람’이라는 말은 단지 생물학적 인간을 가리키는 데 머물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아 참으로 살아 있는 내적 상태를 나타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33:8-9와 사13:12-13에서 ‘에노스’(Enosh)와 ‘아담’(Adam)이라는 히브리어가 구별되어 제시되는 것도 앞으로 창5의 이름들을 읽는 데 중요합니다. 창5의 이름들은 단순히 사람의 이름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서로 다른 상태를 담고 있으며, ‘사람’을 뜻하는 여러 표현 자체에도 서로 다른 내적 의미가 있습니다. 특히 ‘에노스’는 곧 창5에서 하나의 교회를 나타내는 이름으로 다시 다루어지므로, 여기서는 그 의미가 앞으로 더욱 구체적으로 밝혀질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AC.477은 ‘사람이란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주님으로부터 시작하여 교회와 개인에게로 내려옵니다. 가장 높은 의미로 참된 사람은 오직 주님이시며, 교회는 주님의 모양 또는 형상을 받아 ‘사람’이 되고, 개인 역시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를 받아 거듭날수록 참된 사람이 됩니다. 따라서 창5:2의 ‘그들의이름을사람이라일컬으셨다’는 말씀은 단순히 남자와 여자를 통칭하여 인간이라고 이름 붙였다는 것보다 훨씬 깊습니다. 신앙과 사랑이 결혼을 이루고 주님의 모양을 나타내는 교회, 바로 그것이 말씀의 속뜻으로는 ‘사람’입니다. (AC.477해설)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창5:2)
AC.476
‘남자와여자’(maleandfemale)가신앙과사랑사이의결혼을의미한다는것은앞에서밝히고입증하였습니다.거기서남자,곧남성(man[vir])은이해(understanding)와거기에속한모든것을의미하며,따라서신앙에속한모든것을의미하고,여자,곧여성은의지(will)또는의지에속한것들을의미하며,따라서사랑과관계되는모든것을의미한다는것을보여주었습니다.그러므로여자를‘하와’(Eve)라하였는데,이이름은생명을의미하며,생명은오직사랑에속한것이기때문입니다.그러므로앞에서보여준것처럼여자는또한교회를의미하고,남자는교회에속한사람(man[vir] ofthechurch)을의미합니다.여기서다루는것은교회가영적이었을때의상태와그후천적으로만들어진상태입니다.그러므로창1:26-27에서와같이‘여자’보다‘남자’가먼저언급됩니다.또한‘창조하다’(create)라는표현은영적인간과관련됩니다.그러나그후결혼이이루어졌을때,곧교회가천적으로만들어졌을때에는‘남자와여자’라고하지않고‘사람’(man[homo])이라고합니다.이‘사람’은그들의결혼으로말미암아둘모두를의미하기때문입니다.그러므로곧이어‘그들의이름을사람이라일컬으셨다’고하며,이것은교회를의미합니다.That by “maleandfemale” is signified the marriage between faith and love was declared and proved above, where it was shown that the male or man [vir] signifies the understanding and whatever belongs to it, consequently everything of faith; and that the female or woman signifies the will, or the things appertaining to the will, consequently whatever has relation to love; wherefore she was called Eve, a name signifying life, which is of love alone.By the female therefore is also signified the church, as has been previously shown; and by the male, a man [vir] of the church.The subject here is the state of the church when it was spiritual, and which was afterwards made celestial, wherefore “male” is mentioned before “female,” as also in chapter 1:26–27.The expression to “create” also has reference to the spiritual man; but afterwards when the marriage has been effected, that is, when the church has been made celestial, it is not said “maleandfemale,” but “man” [homo], who, by reason of their marriage, signifies both; wherefore it presently follows, “andhecalledtheirnameman,” by which is signified the church.
AC.476은 ‘남자와여자’가 어떻게 ‘신앙과사랑의결혼’을 의미하는지를 이해(understanding)와 의지(will)의 관계를 통해 설명합니다. ‘남자’(vir)는 이해와 거기에 속한 것들을 의미하므로 신앙에 속한 것을 표상하고, ‘여자’는 의지와 거기에 속한 것들을 의미하므로 사랑에 속한 것을 표상합니다. 여기서 신앙은 단순히 어떤 교리를 믿는 행위가 아니라 진리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쪽과 관계되고, 사랑은 그 진리를 원하고 기뻐하며 살아내는 의지의 쪽과 관계됩니다.
여자를 ‘하와’라 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하와’는 생명을 의미하고, 스베덴보리는 생명이 본질적으로 사랑에 속한다고 설명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따라 살고, 그 사랑이 그의 의지와 삶을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자가 의지와 사랑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교회를 의미한다는 것은 서로 연결됩니다. 교회의 생명 역시 단순히 진리를 알고 있는 데 있지 않고, 그 진리가 사랑과 의지 안에서 살아 있게 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특히 눈여겨볼 것은 ‘남자’가 ‘여자’보다 먼저 언급된 이유입니다. AC.476은 여기서 다루는 상태가 교회가 처음에는 ‘영적’이었다가 이후 ‘천적’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영적 상태에서는 진리와 신앙을 통하여 사랑과 선으로 나아가므로, 이해와 신앙을 의미하는 ‘남자’가 먼저 나옵니다. 이것은 창1:26-27에서도 동일합니다. 또한 AC.472에서 살펴본 것처럼 ‘창조하다’라는 표현 역시 영적 인간과 관련됩니다.
그러나 신앙과 사랑의 결혼이 이루어져 교회가 천적 상태에 이르면 표현이 달라집니다. 더 이상 ‘남자와여자’라고 각각 말하지 않고 둘을 하나로 묶어 ‘사람’(homo)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남자나 여자의 구별이 없어졌다는 뜻이 아니라, 속뜻으로는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이 더 이상 서로 분리된 두 원리로 머물지 않고 하나의 생명을 이루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그의이름’이 아니라 ‘그들의이름을사람이라일컬으셨다’고 합니다. 둘이 결혼을 이루었기 때문에 하나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 점은 AC.472-473의 ‘형상’과 ‘모양’의 구별과도 정확히 이어집니다. 영적 인간은 진리를 받아들이고 신앙을 통하여 선으로 나아가는 ‘하나님의형상’이며, 천적 인간은 신앙과 사랑, 이해와 의지가 결혼을 이루어 주님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모양’입니다. 따라서 창5:1-2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가 영적 상태에서 출발하여 신앙과 사랑의 결혼을 이루는 천적 상태에 이른 과정을 압축하여 보여 줍니다.
결국 ‘남자와여자’에서 ‘사람’으로 표현이 바뀌는 것은 태고교회의 거듭남이 어디에 이르렀는지를 보여 줍니다. 진리를 이해하는 것과 선을 사랑하는 것, 신앙과 사랑이 따로 움직이는 동안에는 아직 결혼이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 둘을 결합하시면 신앙은 사랑으로부터 나오고, 이해는 의지와 하나가 되어 움직이며, 사람의 내적 삶 전체가 하나의 질서를 이루게 됩니다. 바로 이 상태를 말씀은 ‘사람’(homo)이라 하고, AC.476은 이 ‘사람’이 곧 교회를 의미한다고 밝힙니다. (AC.476해설)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and blessed them, and called their name man, in the day when they were created.(창5:2)
AC.475
‘남자와여자’(maleandfemale)는신앙과사랑사이의결혼을의미하며,‘그들의이름을사람이라일컬으셨다’(callingtheirnameman)는것은그들이교회였음을의미합니다.특별한의미로는교회를‘사람’(man[homo])이라하기때문입니다.By “maleandfemale,” is signified the marriage between faith and love; by “callingtheirnameman,” is signified that they were the church, which, in an especial sense, is called “man” [homo].
해설
AC.475는 창5:2의 ‘남자와여자를창조하셨고...그들의이름을사람이라일컬으셨더라’는 말씀을 태고교회의 내적 상태에 대한 묘사로 읽습니다. 여기서 ‘남자와여자’는 단순히 두 성별을 가리키는 데 머물지 않고 ‘신앙과사랑사이의결혼’을 의미합니다. 즉 태고교회 안에서 신앙과 사랑이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고 하나를 이루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말하는 ‘결혼’은 두 가지가 단순히 함께 존재한다는 뜻보다 훨씬 깊습니다. 참된 신앙은 사랑으로부터 나오고, 참된 사랑은 신앙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냅니다. 사랑과 분리된 신앙은 살아 있는 신앙이 될 수 없으며, 신앙과 진리 없이 막연한 감정에 머무는 사랑 역시 온전한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앙과 사랑의 결혼은 사람 안에서 진리와 선이 하나의 생명을 이루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것은 창4에서 우리가 보았던 가인의 문제와도 뚜렷한 대조를 이룹니다. 가인이 표상한 것은 사랑 또는 체어리티로부터 분리된 신앙이었습니다. 반면 여기 창5:2에서 태고교회를 묘사하는 ‘남자와여자’는 신앙과 사랑이 결혼을 이루고 있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창5는 처음부터 태고교회의 본래 질서가 무엇이었는지를 다시 보여 줍니다. 신앙이 사랑과 경쟁하거나 사랑으로부터 독립하여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결합되어 하나의 생명을 이루는 질서입니다.
이어지는 ‘그들의이름을사람이라일컬으셨다’는 말씀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사람’(homo)은 특별한 의미로는 ‘교회’를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말씀에서 참된 의미의 사람은 단지 인간의 외형을 가진 존재라는 뜻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신앙을 받아 그 둘이 하나를 이루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신앙과 사랑의 결혼이 이루어진 공동체를 ‘사람’이라 한다는 것은,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참된 인간성을 받아 살아가는 공동체임을 보여 줍니다.
더욱이 본문은 ‘그의이름’이 아니라 ‘그들의이름을사람이라일컬으셨다’고 합니다. 남자와 여자를 함께 가리키면서 하나의 이름인 ‘사람’을 주신 것입니다. 속뜻으로는 이것이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신앙과 사랑은 서로 떨어져 각각 완전한 것이 아니라 결합될 때 하나의 교회를 이루며, 바로 그 결합된 상태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참된 정체성은 신앙만으로도, 사랑만으로도 설명되지 않고, 주님 안에서 신앙과 사랑이 결혼을 이루는 데 있습니다.
결국 AC.475가 보여 주는 태고교회의 모습은 ‘사랑으로부터나오는신앙’과 ‘그신앙을통하여나타나는사랑’이 하나를 이루는 교회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교회를 ‘사람’이라 부르십니다. 창4에서 사랑과 신앙의 분리가 교회의 질서를 무너뜨렸다면, 창5:2는 그보다 먼저 있었던 본래의 질서를 다시 보여 줍니다. 참된 교회도 참된 인간도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신앙이 서로 결혼을 이루는 곳에서 형성됩니다. (AC.475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