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날, 리메인스’의 속뜻 (1:1-5)

 

 

1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3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1:1-5) 1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2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e waters. 3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4And God saw the light, that it was good; and God distinguished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5And God called the light day, and the darkness he called night.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Gen. 1:1-5)

 

 

오늘부터 창세기, 출애굽기 속뜻 강해를 시작합니다. 창세기 50장, 출애굽기 40장, 총 90장을 달에 한 장씩 하면 살짝 여유롭게 8년 걸립니다. 가끔 절기 설교도 해야 하니 말입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라틴, 창, 출 속뜻 주석) 마지막 글 번호가 10,837이니 매주 평균 30여 개의 글을 읽어야 합니다. 마칠 때쯤이면 제 나이 7학년 초중반이 될 테니 아예 할 때 번역도 병행해야 하고 말입니다. 이런 걸 스베덴보리는 8년에 걸쳐 기록했군요. 신기하네요. 기록도 8년, 번역 및 설교도 8년... 컴퓨터도 없던 시절, 오직 종이와 펜으로만 모든 걸 해야만 했던 시절,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풀이를 딕테이션하느라 보냈을 스베덴보리의 8년의 일상이 어땠을지가 눈에 선합니다. 그의 나이 61세에 시작한 일입니다. 더더욱 그는 거의 매일 주님의 부르심으로 영계 체험을 병행하는 가운데 절대적으로 시간도 많이 부족했을 텐데... 하루하루 정말 치열한 삶을 살았음을 안 보고도 알겠습니다. 주님이 250년 전 스베덴보리와 함께하신 것처럼, 오늘 제게도 그리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바로 창세기 11절로 5절, 첫째 날 본문으로 들어가지만, 아무래도 당분간은 전반적인 배경 이야기를 중간중간 좀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스베덴보리도 마치 하얀 백지 위에 점과 선 그려나가듯 처음엔 매우 조금씩, 가급적 자세한 설명, 깊은 배경 이야기는 자제하면서 살살 풀어나가고 있습니다. 저도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시작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에 대한 속뜻입니다.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주님은 맨 처음, 아직 거듭남도 시작되지 않은 사람에게 그의 안에 속 사람을 지으시며, 거듭남의 전 과정을 시작하십니다.

 

2절,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아직 거듭남이 시작되지 않은 사람의 상태는 그의 안에 선도 진리도 전혀 파종되지 않은 상태이며, 그래서 어리석은 상태가 되어 주님 신앙(faith in the Lord), 곧 영적 천적인 모든 것(all things belonging to spiritual and heavenly life)에 아주 무지합니다. 이 상태에 있는 사람은 탐욕과 거기서 나오는 거짓에 완전히 잠겨 있는데, 그래서 빛이라는 게 전혀 없어 매우 어둡습니다. 천사들이 이런 사람을 보면 그냥 까만 덩어리로만 보입니다. 천사들은 내적 존재라 사람의 내면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의 어린 시절부터 그가 모르게 ‘리메인스’(remains), 혹은 ‘남은 자’(a remnant)라고도 하는, 곧 그의 안에 참과 선에 관한 지식(the knowledges of the true and of the good), 그러니까 주님의 것을 차곡차곡 소중히 쌓아 보관해 오셨는데, 이런 것이 바로 주님의 자비입니다. 이 리메인스라고 하는 것은 그의 겉의 삶이 황폐해질 때까지는, 그러니까 죽은 것 같은 상태가 될 때까지는 쉽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3, 4절, 3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거듭남이 시작되어 그 첫 번째 상태 가운데 있는 사람의 첫 번째 변화는 그가 비로소 참과 선을 인식, 이것이 뭔가 더 높은 것이라는 걸 알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그는 자기 사랑(the love of self)과 세상 사랑(the love of the world)에 속한 걸 선으로, 그리고 이런 사랑에 우호적인 걸 진리로 여기는 뒤집힌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이랬던 그가 주님을 향해 몸을 돌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갈수록 그는 빛 가운데로 들어가 비로소 자기가 알던 선은 선이 아닌 악이며, 진리 역시 진리가 아닌 거짓이라는 사실에 눈을 뜹니다. 주님은 선 그 자체, 곧 생명이시며, 진리 그 자체, 곧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4, 5절, 4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빛’(light)은 주님으로 말미암으며, 주님은 선(good) 그 자체이신 분입니다. 반면, ‘어둠’(darkness)은 사람이 새롭게 잉태되어 태어나기 전, 그동안 빛처럼 보여 그런 줄 알았던 모든 것입니다. 빛은 주님으로, 어둠은 사람으로 말미암습니다. 주님에게 속하는 건 ‘낮’(day)이지만, 사람에게 속하는 것, 사람의 본성(own, proprium)과 관련되는 건 모두 ‘밤’(night)입니다. ‘저녁’(evening)은 모든 선행 상태(every preceding state)를 말합니다. 그것은 일종의 그늘 상태, 즉 거짓의 상태, 불신앙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아침’(morning)은 모든 이후 상태(every subsequent state)입니다. 빛이나 진리, 그리고 신앙 지식에 속하는 상태이지요. ‘저녁’은 사람의 본성에 속한 모든 걸, ‘아침’은 무엇이든지 다 주님에게 속한 것을 의미합니다. ‘저녁’은 불신앙의 때요, ‘아침’은 신앙의 때이기 때문에, 주님이 세상에 오심은 ‘아침’, 주님의 떠나심, 그때는 불신앙의 때이므로, ‘저녁’이라 합니다.

 

속뜻을 몇 줄 문장으로만 적으면 좀 어리둥절하실 것 같아 설명과 함께 풀어 적어보았습니다.

 

오늘 전할 메시지들이 이미 이 풀어쓴 속뜻 안에 다 들어있는데요, 저는 오늘 특별히 이 ‘리메인스(remains)라는 것에 주목했으면 합니다.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인 주님의 자비가 바로 이 ‘리메인스’ 안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원본에 영어 ‘remains’를 그냥 일반명사화해서 그대로 명명하는 게 좀 특이했는데요, 다음은 이와 관련, 전에 제가 정리한 글들이 있어 그대로 인용합니다.

 

AC.8 설명, ‘리메인스(remains)에 관하여 (2024/6/1)

 

그러니까 유형(有形), 즉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만이 진짜라 믿고, 그런 삶을 추구하던 사람이 어떤 일을 계기로 ‘아, 무형(無形), 즉 보다 가치로운 삶, 윤리, 도덕, 사람다움, 더 나아가 영적인 삶이라는 게 있구나!’ 깨닫는 걸 말합니다.

 

저의 경우는 그 첫 계기가 고3 때 모친 교통사고 별세가 아니었나 합니다. 저는 그전까지는 아인슈타인처럼 대학교수가 되어 캠퍼스 내 교수 사택에서 살며, 평생 학자의 길을 걷는 걸 목표로 하였었으나, 어머니의 갑작스런 사별(死別)로, 그동안 추구하던 삶에 대해 ‘아, 내게 있는 이 모든 것, 내가 꽉 쥐고 있는 이것들은 언제든 갑자기 나를 떠날 수 있는 것들이구나!’ 깨닫게 되었고, 이후 그전까진 한 사람의 흔한 모태(母胎) 신앙인, 그러니까 교회를 그냥 일종의 문화생활, 써클 활동 정도로만 다니던 신앙생활에 변화가 생기게 되었는데요, 곧 관점의 변화, 전엔 내 삶의 행복을 위해 신앙은 그저 선택할 수 있는 한 가지 옵션이었다면, 이후엔 신앙을 이용해서 행복을 추구하는, 그러니까 신앙이라는 옵션을 선택한 후, 그 안에서 내 행복을 추구하는 모습으로 한 단계 올라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표현들이 살짝 좀 이상하지요? ‘신앙을 이용해서 행복을 추구하는 모습’이라... 그러니까 신앙도 내가 천국 가기 위해서이고, 말씀 가까이하는 것도 내가 병 낫고, 복 받고, 내 삶의 형통과 핏줄들을 위해서, 그리고 교회 내 두드러진 활동, 우아하고 세련된 매너 등을 통해서 사람들의 이목과 관심받는 걸 좋아하면서 하는 신앙생활 말입니다. 물론, 이런 게 다 조금씩은 필요한 거긴 하지만, 뭔가 좀 이상하지요? 그러니까 한마디로 신앙생활을 사후를 대비한 일종의 보험 정도로 여긴 것입니다.

 

네, 아직 이런 상태가 바로 한 사람의 거듭남 초기 상태이며, 기특하게도 신앙생활이라는 걸 시작은 했지만, 아직은 머리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가슴 신앙으로 가려면 아직 한참 멀었죠. 그러나 주님은 모든 사람이 다 그 연약함으로 인해 이런 순서로밖에는 진행될 수 없음을 아시기 때문에 이런 잘난 체와 실수를 허락하십니다. 제가 선을 넘지 않도록 보살피시면서 말이죠...

 

3, 대1 때 시작된 이런 상태변화가 6학년 3반이 된 지금 돌아보면 몇 번 더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때그때 혹시 필요하면 더 나누겠습니다.

 

오늘 내용대로라면, 저 유명한 누가복음 15장, 돌아온 탕자의 비유 앞부분,

 

11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15:11-19)

 

에서, ‘스스로 돌이켜’ 부분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하는 부분들이 바로 이 사람 안에 주님이 넣어두신 리메인스를 주님이 이때 꺼내쓰신 예가 아닐까 싶고,

 

또, 스베덴보리를 통해 주님이 알려주신 바에 의하면, 아담으로 시작, 나중에 므두셀라, 라멕으로 이어지는 태고교회, 이 교회의 변질과 타락, 황폐화로 인한, 자기 사랑, 세상 사람의 광풍 한 가운데 종말의 때에 등장하는 ‘노아’ 말인데요, 이 ‘노아’가 바로 첫 교회시대인 태고교회의 리메인스라고 합니다. 한 개인에 있어 리메인스가 하는 저런 역할처럼 말입니다.

 

참고로, 창세기 아브라함 전까지는 그 등장하는 모든 인물명은 사실은 신앙명, 교리명, 교회명을 말하는데요, 그러니까 ‘아담’하면 ‘아담’이라는 신앙을 가진 교회, ‘’하면 ‘’이라는 신앙을 가진 교회 등등 말이죠. ‘노아’ 역시 그 당시 정말 희귀했던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의 신앙을 끝까지 붙든 사람들과 그 교회, 그 신앙을 말합니다. 그런 신앙의 사람들, 그런 교회를 ‘노아’라는 이름으로 부른 것이지요. //

 

두 번째 글입니다.

 

십일조’의 속뜻 (2025/3/11)

 

오늘은 특별히 우리의 헌금 생활 중 십일조에 대하여, 그 아르카나(arcana, 秘義, 속뜻)에 대하여 같이 나누고자 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십일조에 관한 거의 첫 본문이라 할 수 있는 곳은 바로 창세기 14장, 아브람이 살렘 왕 멜기세덱에게 드린 부분입니다.

 

17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쳐부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의 골짜기로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18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19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20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 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14:17-20)

 

여기 20절,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 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에 나오는 이 ‘십 분의 일’에 관하여, 창세기 주석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38번 글을 보면 이렇게 풀이하고 있습니다.

 

십일조(tithes)가 리메인스(remains)를 상징한다, 가리킨다는 사실은 앞에서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만 다시 한번 말씀드리면, 리메인스라는 것은 사랑과 체어리티(charity, 이웃 사랑, 선행, 인애)의 모든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 사랑의 모든 상태, 이웃 사랑의 모든 상태를 말하며,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순진함(innocence)과 평화(peace)의 모든 상태, 곧 천국의 모든 상태이며, 주님은 이런 상태, 이런 리메인스를 거듭남의 과정을 걷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선물로 주십니다. 이 상태들이 사람에게 그 유아기 때부터 주어져 어른이 되면서 점점 줄어들지만, 그러다가 거듭남이 시작되면 사람은 다시 이번에는 새로운 리메인스를 받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주님이 주시는 새 생명입니다. 사람이 진정 사람이 되는 것은 바로 이 리메인스로부터, 또는 리메인스에 의해서이며, 만약 사람에게 이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의 상태가 없다면, 그래서 결국 순진함의 상태가 없다면 사람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며, 그때는 오히려 짐승보다도 더 최악이 됩니다. 사람은 순진함이 있어 자기도 모르게 점점 더 생명의 다른 상태들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본문에서 말하는 리메인스는 시험을 이김으로써 얻는 리메인스입니다.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싸워 이긴 후, 멜기세덱에게 바친 십일조를 가지고 이 리메인스를 표현한 것입니다. 이 리메인스는 사랑의 모든 상태, 곧 사랑의 모든 천적인 것들인데, 주님도 마리아로 유전한 인성을 입고 계신 동안은 지속적인 싸움과 이김을 통해서 힘들게 습득하신 것입니다. 이것으로 주님은 끊임없이 주님의 신적 본성과 결합하셨고, 같은 방식으로 주님의 인성이 사랑, 곧 생명 그 자체, 곧 여호와가 되실 때까지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해가 되시나요? 스베덴보리의 글들은 천계(天界), 초월적 지혜의 나라의 일을 매우 제한적인 지상의 언어로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는지, 원문은 사실 이보다 더 간략하고 문장과 문장 사이, 글과 글 사이 무슨 배경지식이 없으면 한 번에 이해하기가 다소 좀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위 주석을 아래 제가 이해한 바로 좀 쉽게 풀어보았습니다.

 

모든 사람은 거듭남의 유무와 관계없이 일단은 주님으로부터 첫 번째 리메인스라는 것을 선물로 받습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어떻게든 결국 선 쪽으로 기울어지는데요, 물론 사람들 중에는 끝까지 주님을 거절하여 선보다는 악을, 천국보다는 지옥을 선택, 결국 멸망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말입니다. 주님의 이 첫 번째 선물로 말미암아 사람은 여러 우여곡절 끝에 거듭남의 여정을 시작하며, 일단 거듭남이 시작되면 이제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두 번째 리메인스를 또 선물로 받습니다. 이 선물로 말미암아 사람은 생명, 곧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발자국을 떼는 것이지요. 사람은 주님의 선물, 주님의 호의, 주님의 돌보심 없이는 결코 거듭남의 여정을 시작도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탐욕과 거짓의 덩어리, 곧 악의 덩어리이기 때문입니다.  

 

※ 아, 그리고 참고로, 우리 특히 개신교인들은 사람의 거듭남의 시작을 그가 예수님 영접 기도를 따라 했을 때부터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거 아닙니다. 어떤 사람의 거듭남이 언제 시작되는지는 아무도 모르고 오직 주님만이 아십니다. 우리 주변에 교회를 안 다니는 데도 선한 사람들, 법 없이도 살 사람들이 있는 걸 보면 말입니다. 그러니 함부로 판단하시면 안 됩니다.

 

이것입니다. 사람 안에 주님이 넣어 두신, 주님으로 말미암은 이 리메인스라는 것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십 분의 일’로 표현된,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십일조’라 일컫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무슨 이쁜 짓을 하고, 무슨 기특한 행실을 보일 수 있는 것도 다 우리 안에 넣어 두신 이 리메인스 덕분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이것으로 멜기세덱, 곧 여호와 하나님으로 나타나신 주님을 공경하였습니다. ‘주님, 이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이것으로 제가 롯을 데려올 수 있었습니다’ 사례한 것입니다. 이것이 십일조의 아르카나입니다.

 

이 멜기세덱 본문을 보다 더 온전히 이해하려면 그돌라오멜, 소돔왕, 그리고 롯과 아브람의 속뜻, 그 아르카나가 무엇이며, 그들 간 전쟁과 그 결과, 그리고 멜기세덱과 그가 들고 온 ‘떡과 포도주’의 아르카나가 무엇인지 등을 알아야 하지만, 그것은 내용이 깊어지므로 다음에 기회 있을 때 정식으로 다루기로 하고요, 여기서는 간략히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주님도 인성을 입고 오셔서 처음에는 외견상의 선과 진리(apparent good and truth), 겉으로 보기엔 선이요, 진리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닌 것, 가짜인 것들과 끊임없이 싸우셨습니다. 그것이 아브람과 그돌라오멜 간 전쟁입니다. 아브람은 주님의 합리성(合理性, rationality)을, 그돌라오멜은 외견상 진리를, 롯은 주님의 겉 사람을 각각 가리킵니다. 겉 사람과 합리성은 같이 있어야 하는데 겉 사람이 합리성을 떠나 가짜 진리에게 사로잡힌 것을 롯이 아브람을 떠나 소돔에 있다가 그돌라오멜에게 사로잡힌 것으로 본문은 말씀하고 있는 것이며, 주님이 이 가짜들과 싸워 이기신 후, 주님의 겉 사람이 속 사람이신 여호와 하나님께로 온전히 인도된 것을 아브람이 롯을 데리고 멜기세덱을 만난 것과 그의 ‘떡과 포도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네, 여기서는 이 정도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렇게 간략하게라도 소개를 하고 넘어가는 것은, 말씀(The Word)은 정말 철저하게 상응(相應, correspondence)으로 기록되었다는 것과, 그래서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깊은 아르카나로 기록되었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신명기 1428, 29절입니다.

 

28매 삼 년 끝에 그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29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 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14:28-29)

 

십 분의 일’을 가지고 주님이 무슨 일을 하시는지를 말씀하시는 본문입니다. 주님은 이 ‘십 분의 일’을 가지고 레위인과 객, 고아와 과부들을 돌보십니다. 이들은 겉뜻으로도 그렇지만 속뜻으로도 영적 결핍을 뜻합니다. 주님은 거듭남을 시작한 사람들이 주님이 주시는 두 번째 리메인스를 가지고 이런 영적 결핍 해결하기를 원하십니다. 거듭남의 여정 가운데 있는 우리는 정말 그래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와 우리의 이웃들에게 있는 이 영적 결핍들을 돌아보고 채워주는 일에 이 두 번째 리메인스를 열심히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 아브라함의 십일조 본문을 통해, 그리고 오늘 주님 말씀 마태복음 본문을 통해 우리가 확인하는 사실들이 있습니다.

 

먼저, 십일조를 드린다, 십일조 헌금을 한다는 것은 단순한 헌금 행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주님이 넣어주신 선한 능력, 리메인스를 잘, 그리고 열심히 사용하여 더욱 주님으로부터 더욱더 많은 리메인스가 우리 속 사람 안에 공급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드리는 개념이 아닌, 주님의 것이 우리 안에 쌓이는 개념입니다.

 

말라기 말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3:10)

 

여기 ‘시험하여’는 ‘증명하여(prove, verify)라는 뜻입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 자신의 신앙을 입증하라, 증명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온전한 십일조를 드릴 때, 주님은 우리 안에 더욱더 넘치게 주님의 리메인스를 공급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넘치는 리메인스로 우리는 더욱더 쉽게 거듭남의 여정, 곧 영적 싸움을 싸울 수 있습니다.

 

또 하나, 내 것을 드리는 게 아니라 사실은 주님의 것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리메인스라는 것을 우리는 두 번 다 거저 받았습니다. 우리가 악을 이겨 낼 근본 능력을 우리도 모르게 주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신 것으로 살며, 영적 전투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사실은 모두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 사실을 시인하며 사는 삶은 복된 삶이며, 그럴수록 우리는 더욱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게 되며, 우리가 드리는 것이 사실은 우리 안에 리메인스로 쌓이게 되는 것입니다. 아멘, 할렐루야!

 

오늘 본문, 주님 말씀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23:23)

 

박하와 회향, 근채의 십일조는 외적인 십일조입니다. 정의와 긍휼, 믿음의 십일조는 내적인 십일조입니다. 이 둘은 같이 갑니다. 외적 십일조는 내적 십일조가 겉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십일조를 하지 않는 사람의 신앙이 온전할 수 없고, 반대로 온전한 신앙의 사람이 십일조 헌금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

 

참고로, 오늘 본문 중 리메인스가 나오는 부분은 2절,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입니다.  

 

창세기 1장을 이렇게 푸는 설교는 아마 처음이시지들 싶습니다. 우리는 창세기 1장을 주로 천지창조의 관점으로만 보고 싶어 하지만, 주님은 말씀을 그런 무슨 역사 다큐로 기록하는 거는 관심 없으시고, 대신 사람의 거듭남의 여러 단계를 당시 고대인들의 언어 습관을 따라 재미있게 표상, 상징하기를 원하셔서 오직 상응으로만 기록하셨습니다. 즉 우리가 아는 천지창조의 육일을 사람의 거듭남의 여섯 단계로 그리신 것이지요. 우리의 관심과 주님의 관심이 참 다릅니다.

 

말씀은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았으며, 그래서 거기엔 주님의 주된 관심, 즉 주님과 천국, 교회, 그리고 종교적 신앙에 관한 것들이 들어있습니다. 말씀은 그 일점일획조차도 모두 그 안에 이런 내적 의미들이 들어있는데 이것을 아르카나(arcana, 라틴, secret, 秘義)라 합니다. 아르카나는 오직 주님으로만 말미암기 때문에 신성(Divine)하며, 생명이 있고, 그래서 아르카나가 들어있는 성경만 말씀입니다. 성경 66권 중, 구약은 창, 출, 레, 민, 신, 수, 삿, 삼상, 삼하, 왕상, 왕하, 시, 사, 렘, 애, 겔, 단, 호, 욜, 암, 옵, 욘, 미, 나, 합, 습, 학, 슥, 말 (29), 신약은 마, 막, 눅, 요, 계 (5) (AC.10325), 이렇게 34권만 말씀입니다.

 

사람이 영과 육으로 되어 있는 줄은 알지만, 실제로 자기 영을 보신 분은 없으신 것처럼, 말씀 또한 그렇습니다. 주님은 사람을 지으신 것처럼 말씀 또한 그렇게 영과 육으로, 곧 속뜻과 겉뜻으로 기록하셨습니다. 우리가 자기의 영을 처음 보면 무척 낯설 것 같은데, 그런 것처럼 말씀 또한 그 속뜻이 이렇게 낯선 건 어쩌면 당연하지 싶습니다. 주님의 은혜와 본인의 간절함, 그리고 사모함으로 이 간격이 빠르게 좁혀질 줄 믿습니다.

 

참고로, 우리가 말씀을 속뜻으로 읽고자 하는 이유는, 첫째는, 우리가 곧 가게 될 본향 언어로 읽고 싶어서입니다. 천사들처럼 말입니다. 둘째는, 오리지날 주님의 마음을 알고, 남은 삶을 그렇게 살고 싶어서입니다. 말씀을 겉뜻으로 읽어온 지난날은 끝없이 원어가 어떠니, 누가 이걸 어떻게 풀었니 하는 연속이었습니다. 말씀은 세상 지식으로 푸는 게 아닙니다.

 

창세기를 시작하게 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아멘

 

설교

2025-07-20(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7-20(D1)-주일예배(2607, 창1,1-5, AC.16-23), ‘첫째 날, 리메인스’의 속뜻.pdf
0.56MB
창1,1-5, AC.16-23.pdf
0.39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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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 창1:11-13,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 AC.29, 창1:11-13,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11-13절, 11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And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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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4, 창1:6-7,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AC.24-25)

※ AC.24, 창1:6-7,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AC.24-25) 6-7절,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he midst of the 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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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5, 창1:6-7,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AC.24-25)

※ AC.25, 창1:6-7,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AC.24-25) 6-7절,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he midst of the 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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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the Word)에는 일반적으로 네 가지 스타일이 있습니다. 첫 번째 스타일은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 스타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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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the Word)에는 일반적으로 네 가지 스타일이 있습니다. 첫 번째 스타일은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 스타일입니다. 그들의 표현 방식은 다음과 같았는데요, 그들은 어떤 지상에 속한, 세속적인 것들을 언급할 때, 그것들이 표상하는 영적, 천적인 것들을 생각하면서 하는 그런 것이었지요. 그들은 이만하면 그 영적, 천적인 의미를 충분히 띠겠다 싶은 것들(representatives)을 가지고 언급했을 뿐 아니라, 또한 거기에 생명력을 불어넣기 위해 스토리 텔링 같은 일종의 그럴듯한 역사 시리즈로도 만들었는데요, 이런 식의 표현 방식으로 그들은 정말 최고 수준의 즐거움을 누렸습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예언이 바로 이런 스타일입니다. There are in the Word, in general, four different styles. The first is that of the most ancient church. Their mode of expression was such that when they mentioned terrestrial and worldly things they thought of the 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 which these represented. They therefore not only expressed themselves by representatives, but also formed these into a kind of historical series, in order to give them more life; and this was to them delightful in the very highest degree. This is the style of which Hannah prophesied, saying: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삼상2:3) Speak what is high! high! Let what is ancient come out of your mouth. (1 Sam. 2:3)

 

※ 위 우리말 개역개정 번역은 사실 많이 빗나간 번역입니다. 병행 본문(영어)을 보니 너무나 다르지요? 태고교회, 고대교회 같은 이런 배경, 즉 아르카나를 전혀 모르고 번역을 한 것입니다...

 

이런 표상(表象, representatives)을 시편에서는,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Dark sayings of old)이라고 했습니다. Such representatives are called in David, “Dark sayings of old” (Ps. 78:2–4).

 

2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 하니 3이는 우리가 들어서 아는 바요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전한 바라 4우리가 이를 그들의 자손에게 숨기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영예와 그의 능력과 그가 행하신 기이한 사적을 후대에 전하리로다 (시78:2-4)

 

창조, 에덴동산 등 아브람의 때까지 내려오는 이들 자세한 내용들을 모세는 태고교회의 후손들로부터 얻었습니다. These particulars concerning the creation, the garden of Eden, etc., down to the time of Abram, Moses had from the descendants of the most ancient church.  

 

[2] 두 번째 스타일은 역사적 기술이며, 아브람의 때부터 이어진 모세의 책들에서, 그리고 여호수아, 사사 시대, 사무엘, 열왕기의 책들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들 책에서는 역사적 사실들이 글자의 뜻 그대로입니다. 즉 실제 역사 그대로 기록된 것입니다. 하지만 일반적이든, 특별하게든 속뜻으로는 아주 다른 것들이 그 안에 들어 있는데요, 그것은 주님의 신성하신 자비(the Lord’s Divine mercy)로 말미암음이며, 이어지는 페이지들에서 순서대로 보시게 됩니다. 세 번째 스타일은 예언적 스타일인데, 이것은 태고교회 시절 아주 높은 존경을 받았던 스타일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스타일은 그러나 계속 연결되어 태고 스타일 같은 역사적 형태로 남지를 못하고 그만 끊어져, 이제는 속뜻, 곧 그 안에 가장 깊은 아르카나(arcana, 秘義)가 있어 아름답게 연결된 순서로 이어지며, 겉 사람과 속 사람, 교회의 여러 다양한 상태들, 천국 그 자체, 그리고 주님을 향한 가장 내적 의미와도 관련되는, 이런 속뜻을 제외하고는 이제는 거의 이해할 수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네 번째 스타일은 다윗의 시편 스타일입니다. 이 스타일은 예언적 스타일과 상용어 스타일 간 중간 스타일입니다. 주님은 이 스타일에서 속뜻으로는 왕으로서의 다윗의 인격을 통해 다루어지십니다. The second style is historical, which is found in the books of Moses from the time of Abram onward, and in those of Joshua, Judges, Samuel, and Kings. In these books the historical facts are just as they appear in the sense of the letter; and yet they all contain, in both general and particular, quite other things in the internal sense, of which, by the Lord’s Divine mercy, in their order in the following pages. The third style is the prophetical one, which was born of that which was so highly venerated in the most ancient church. This style, however, is not in connected and historical form like the most ancient style, but is broken, and is scarcely ever intelligible except in the internal sense, wherein are deepest arcana, which follow in beautiful connected order, and relate to the external and the internal man; to the many states of the church; to heaven itself; and in the inmost sense to the Lord. The fourth style is that of the psalms of David, which is intermediate between the prophetical style and that of common speech. The Lord is there treated of in the internal sense, under the person of David as a king.

 

※ 이렇게 해서 창세기 1장을 마칩니다. 앞으로도 이렇게 진행됩니다. 즉 본문 주석 앞뒤로 어떤 아르카나가 곁들여져 말씀을 읽는 우리의 이해를 깊게, 아주 넓고 깊게 열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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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말씀(the Word)을 읽고 있을 때, 어떤 사람들이 천국 뜰 첫 번째 입구로 옮겨져 거기서 저와 대화를 나누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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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말씀(the Word)을 읽고 있을 때, 어떤 사람들이 천국 뜰 첫 번째 입구로 옮겨져 거기서 저와 대화를 나누었는데요, 그들은 말하길, 자기들은 그 안에 있는 무슨 단어나 글자는 전혀 이해할 수 없지만, 대신 그 가장 가까운 속뜻이 뭔지는 이해할 수 있다고 하면서, 그것은 너무도 아름답고, 그런 일련의 순서로 자기들을 깊이 감동, 감명케 한다고, 그것은 영광이라고 가슴 벅차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Certain ones were taken up to the first entrance court of heaven, when I was reading the Word, and from there conversed with me. They said they could not there understand one whit of any word or letter therein, but only what was signified in the nearest interior sense, which they declared to be so beautiful, in such order of sequence, and so affecting them, that they called it gl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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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말씀의 속뜻, 즉 겉 글자의 뜻으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말씀의 생명 그 자체(its veriest life)입니다. 그런데 이 아르카나(arcana, 秘義, 말씀에 담긴, 주님이 숨겨놓으신 의미)는 너무나 엄청나 이 정도의 볼륨들 가지고는 그 속에 담긴 것을 도저히 다 담아낼 수 없을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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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말씀의 속뜻, 즉 겉 글자의 뜻으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말씀의 생명 그 자체(its veriest life)입니다. 그런데 이 아르카나(arcana, 秘義, 말씀에 담긴, 주님이 숨겨놓으신 의미)는 너무나 엄청나 이 정도의 볼륨들 가지고는 그 속에 담긴 것을 도저히 다 담아낼 수 없을 정도입니다. 여기서는 아주 조금만 제시하는데요,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도 여기서 다루고 있는 게 거듭남이며, 거듭남이란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진행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천사들이 말씀을 지각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인데요, 그들은 글자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심지어 어떤 단어 하면 탁 떠오르는 의미조차 전혀 모릅니다. 나라, 도시, 강과 인물 등, 말씀 내 역사, 예언 쪽에 매우 자주 등장하는 이런 것들 역시 더더욱 모릅니다. 그들은 오직 그 단어들과 이름들의 의미에 대해서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낙원의 아담 하면 그들은 태고교회를 지각합니다. 물론, 그 교회 자체가 아니라 그 교회가 가졌던 주님 신앙(the faith in the Lord)을 지각하는 것이지요. 노아 하면 그들은 태고교회의 후손들과 함께 살아남아 아브람의 때까지 계속되었던 교회를 지각합니다. 아브라함 하면 천사들은 결코 아브라함 개인이 아닌, 그가 표상한 어떤 구원 신앙(a saving faith)을 지각하는 등 말이지요. 천사들은 이렇게 단어들과 이름들하고는 완전 별개인 영적, 천적인 것들을 지각합니다. This then is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its veriest life, which does not at all appear from the sense of the letter. But so many are its arcana that volumes would not suffice for the unfolding of them. A very few only are here set forth, and those such as may confirm the fact that regeneration is here treated of, and that this proceeds from the external man to the internal. It is thus that the angels perceive the Word. They know nothing at all of what is in the letter, not even the proximate meaning of a single word; still less do they know the names of the countries, cities, rivers, and persons, that occur so frequently in the historical and prophetical parts of the Word. They have an idea only of the things signified by the words and the names. Thus by Adam in paradise they perceive the most ancient church, yet not that church, but the faith in the Lord of that church. By Noah they perceive the church that remained with the descendants of the most ancient church, and that continued to the time of Abram. By Abraham they by no means perceive that individual, but a saving faith, which he represented; and so on. Thus they perceive 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 entirely apart from the words and na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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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위해 악과 거짓을 대항하여 끊임없이 싸우시는 한편, 주님은 이 전투를 통해 그를 진리와 선 안에서 확실하게 하십니다.

 

31절,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And God saw everything that he had made, and behold it was very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ixth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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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위해 악과 거짓을 대항하여 끊임없이 싸우시는 한편, 주님은 이 전투를 통해 그를 진리와 선 안에서 확실하게 하십니다. Meanwhile the Lord continually fights for him against evils and falsities, and by combats confirms him in truth and good.

 

※ 다음은 이 ‘주님이 나를 위해 대신 악과 거짓에 대항하여 싸우심’에 대한 보충 설명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책, ‘천국과 지옥’ 577번 글(김은경 역)입니다.

 

천사에게 지혜와 지성이 있는 것처럼 지옥 영들에게는 그만큼의 악의와 교활함이 있다. 사람의 영은 몸을 벗어나면 그 자신의 선 아니면 악 안에 있기 때문이다. 천사적 영이 그의 선 안에 있다면, 지옥적 영은 그의 악 안에 있다. 앞에서 자주 설명했듯이 모든 영이 그 자신의 선 아니면 악인 것은 영이 그 자신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사적 영은 그의 선에서, 지옥적 영은 그의 악에서 생각하고 의도하고 말하고 행동한다. 악 자체로 생각하고 의도하고 말하고 행동한다는 것은 그 악에 포함된 모든 것으로 생각하고 의도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In the same degree in which angels have wisdom and intelligence infernal spirits have malice and cunning; for the case is the same, since the spirit of man when released from the body is in his good or in his evil—if an angelic spirit in his good, and if an infernal spirit in his evil. Every spirit is his own good or his own evil because he is his own love, as has been often said and shown above. Therefore as an angelic spirit thinks, wills, speaks, and acts, from his good, an infernal spirit does this from his evil; and to think, will, speak, and act from evil itself, is to think, will, speak, and act from all things included in the evil.

 

[2] 사람이 몸을 입고 살 동안은 그렇지 않다. 그때는 모든 사람이 받는 법의 제재와 이득, 명성, 평판을 얻을 희망 또는 그것을 잃는 데 대한 두려움의 제재로 그 영의 악이 억눌려 있었고, 따라서 그 악의 참모습이 밖으로 터져 나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때는 사람의 영에 있는 악은 그가 세상을 목적으로 내세우고 꾸미는 외적인 정직함, 올바름, 선과 진리에 대한 애정 등으로 포장되고 가려져 있다. 이런 가면 뒤에서 그 악은 너무도 단단히 밀폐되고 숨겨져 있어 그 자신도 자기 영이 그렇게 엄청난 악의와 교활함을 숨기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즉 사후에 영이 되면 드러날 자기의 본성이 악마라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하는 것이다. So long as man lived in the body it was different, since the evil of the spirit was then under the restraints that every man feels from the law, from hope of gain, from honor, from reputation, and from the fear of losing these; and therefore the evil of his spirit could not then burst forth and show what it was in itself. Moreover, the evil of the spirit of man then lay wrapped up and veiled in outward probity, honesty, justice, and affection for truth and good, which such a man professes and counterfeits for the sake of the world; and under these semblances the evil has lain so concealed and obscured that he himself scarcely knew that his spirit contained so much malice and craftiness, that is, that in himself he was such a devil as he becomes after death, when his spirit comes into itself and into its own nature.

 

[3] 사후에는 그런 악의가 스스로 드러나는데 그것은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악하다. 악은 하나에서 수천 가지 종류가 파생하는데 그 중에는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것들도 있다. 나는 내게 허락된 수많은 경험으로 그 악들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고 관찰할 수 있었다. 주께서 내게 영으로는 영계에 있으면서 동시에 몸으로는 자연계에 있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의 악은 너무도 엄청나서 그 천분의 일을 기록하는 것도 어렵다는 것을 나는 증언한다. 그 악이 너무도 커서, 만일 사람이 주님의 보호를 받지 못하면 결코 지옥에서 구원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각 사람에게는 천국에서 온 천사들과 지옥에서 온 영들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292, 293) 그러나 사람이 신성을 인정하고 신앙과 이웃 사랑의 삶을 살지 않으면 주께서는 그를 보호하실 수 없다.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은 주님께 등을 돌리고 지옥 영들에게 돌아서며, 그렇게 되면 그의 영은 자기와 동질의 악의를 흡수하기 때문이다. Such malice then manifests itself as exceeds all belief. There are thousands of evils that then burst forth from evil itself, among which are such as cannot be described in the words of any language. What they are has been granted me to know and also to perceive by much experience, since it has been granted me by the Lord to be in the spiritual world in respect to my spirit and at the same time in the natural world in respect to my body. This I can testify, that their malice is so great that it is hardly possible to describe even a thousandth part of it; and so great that if man were not protected by the Lord he could never be rescued from hell; for with every man there are spirits from hell as well as angels from heaven (see above, n. 292, 293); and yet the Lord cannot protect man unless he acknowledges the Divine and lives a life of faith and charity; for otherwise man turns himself away from the Lord and turns himself to infernal spirits, and thus his spirit becomes imbued with a malice like theirs.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끊임없이 사람을 그가 달라붙는 악에서, 그리고 지옥의 영들과 교류함으로써 스스로 끌어들인다고 할 수 있는 악에서 떼어내신다. 사람이 신성을 부인하면 양심의 내적 제재를 받지 못하는데, 사람이 양심의 내적 제재로 악에서 떨어지지 않으면 외적 제재로 떼어내신다. 외적 제재는 앞에서 말한 대로 법에 대한 두려움과 이득, 명성, 평판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다. 사실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의 즐거움을 통해서, 그 즐거움을 잃거나 빼앗기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통해서 악에서 떨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영적 선으로 인도되지 못한다. 그런 사람이 영적 선을 대하면 그 즉시 남을 꾀고 속이려고 선함과 정직함과 올바름을 가장함으로써 그 선을 술책과 교활함으로 바꿔버리기 때문이다. 그런 교활함은 그의 영에 들어있는 악과 결탁하여 그 특성을 주입함으로써 악에 형태를 부여한다. Nevertheless, man is continually withdrawn by the Lord from the evils that he attaches and as it were attracts to himself by his affiliation with infernal spirits. If he is not withdrawn by the internal bonds of conscience, which he fails to receive if he denies a Divine, he is nevertheless withdrawn by external bonds, which are, as said above, fears in respect to the law and its penalties, and fears of the loss of gain and the deprivation of honor and reputation. In fact, such a man may be withdrawn from evils by means of the delights of his love and through fear of the loss or deprivation of those delights; but he cannot be led thereby into spiritual goods. For as soon as such a man is led into these he begins to give his thought to pretenses and devices by simulating or counterfeiting what is good, honest, and just, for the purpose of persuading and thus deceiving. Such cunning adjoins itself to the evil of his spirit and gives form to it, causing his evil to be of the same nature as itself.

 

전투의 때는 주님이 일하시는 때입니다. 그래서 선지서에서는 거듭난 사람을 가리켜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빚으신 작품(the work of the fingers of God)이라고 합니다. The time of combat is the time of the Lord’s working; and therefore in the prophets the regenerate man is called the work of the fingers of God.

 

1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2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3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4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5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6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7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8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9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시8)

 

사랑이 그의 모든 행위의 원리가 될 때까지, 이때 전투가 그치는데요, 주님은 쉬지 않으십니다. 이 일이 아주 순조롭게 되어 드디어 신앙과 사랑 간 결합이 일어날 때가 바로 ‘심히 좋았더라(very good) 하시는 때입니다. 이때 주님은 그를 주님의 모양대로(as his likeness) 행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Nor does he rest until love acts as principal; then the combat ceases. When the work has so far advanced that faith is conjoined with love, it is called “very good”; because the Lord then actuates him, as his likeness.

 

※ 거듭 ‘형상(image)은 그릇, ‘모양(likeness)은 내용입니다. 영적인 사람은 그릇, 천적인 사람은 내용입니다. 그릇보다 그 안에 담긴 내용이 중요하듯 주님의 목표, 즉 거듭남의 최종목표는 천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천적인 사람의 상태가 바로 안식의 상태요, 안식일입니다.

 

※ 천적인 사람은 가슴 신앙이며, 매사 생각하고, 의도하고, 말하고, 행하는 모든 것의 동기가 주님 사랑인 상태입니다. 즉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고,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의도하며,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고,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행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성 프란체스코입니다.

 

※ 프란체스코 앞에 ‘(聖)자를 붙여 부르는 것은 단순히 관례를 따른 것일 뿐입니다. 참으로 ‘’(聖), 즉 ‘거룩하신 분(The Holy)은 오직 주님 한 분뿐이시며, 그래서 이 칭호는 오직 주님에게만 사용해야 하는 칭호입니다.

 

※ 은성출판사(http://eunsungpub.co.kr/)의 엄두섭 저, ‘성 프란치스코’를 꼭 읽어 보시기 바라며, 읽으신 분들도 거듭거듭 계속 읽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이 책을 읽는 우리를 깊은 신앙, 무거운 영성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 여섯째 날 끝에 악한 영들은 떠나고, 선한 영들이 대신 자리를 잡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천국, 혹은 천적인 낙원(the celestial paradise)으로 인도됩니다. 이곳에 관하여는 다음 장에서 다룹니다. At the end of the sixth day the evil spirits depart, and good spirits take their place, and the man is introduced into heaven, or into the celestial paradise; concerning which in the following chapter.

 

※ 우리는 악을 직접 상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본성 상 악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악을 상대하실 수 있습니다.

 

※ 그래서 우리 안에 와 있는 지옥의 영들을 상대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영적 전투는 주님과 악한 영들 간 싸움입니다.

 

※ 우리가 거듭남의 최종단계에서 이제는 의지로도 주님을 사랑하여 매사에 주님 편에 서면 악한 영들은 더 이상 우리를 어떻게 할 수가 없어 그만 우리를 포기하고 떠납니다.

 

※ 우리 안에 더 이상 싸울 상대가 없게 되어 드디어 싸움이 끝나고 쉼이 찾아오는데, 이 쉼은 주님의 쉼입니다. 우리 안에서 주님이 싸워오셨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은 주님이 쉬시는 걸 표상한 것이며, 그래서 주님은 안식일을 가리켜 ‘내 안식일’이라 하신 것입니다.

 

내 안식일을 지키고 내 성소를 귀히 여기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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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거듭남과 관련하여 그 시기와 상태를 일반적, 그리고 구체적으로 여섯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를 그의 창조의 날들(the days of his creation)이라 합니다.

 

31절,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And God saw everything that he had made, and behold it was very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ixth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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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거듭남과 관련하여 그 시기와 상태를 일반적, 그리고 구체적으로 여섯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를 그의 창조의 날들(the days of his creation)이라 합니다. 전혀 사람이 아닌 상태에서 서서히 그는 먼저 뭔가가 되고, 그렇게 조금씩 아주 조금씩 여섯째 날을 향해 가기 때문입니다. 이 여섯째 날에 그는 하나님의 형상(an image of God)이 됩니다. The times and states of man’s regeneration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are divided into six, and are called the days of his creation; for, by degrees, from being not a man at all, he becomes at first something of one, and so by little and little attains to the sixth day, in which he becomes an image of God.

 

※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형상(image)은 그릇, 모양(likeness)은 내용입니다. 즉 영적인 사람은 형상, 곧 주님을 담는 그릇이 되는 것이며, 천적인 사람은 그 영적인 사람 안에 담기는 주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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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지식(the knowledges of faith)과 관련된 모든 것을 영적(靈的, spiritual)이라 하고, 주님 사랑, 이웃 사랑(love to the Lord and our neighbor)에 속한 모든 것을 천적(天的, celestial)이라 합니다.

 

31절,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And God saw everything that he had made, and behold it was very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ixth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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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지식(the knowledges of faith)과 관련된 모든 것을 영적(靈的, spiritual)이라 하고, 주님 사랑, 이웃 사랑(love to the Lord and our neighbor)에 속한 모든 것을 천적(天的, celestial)이라 합니다. 전자는 사람의 이해에, 후자는 사람의 의지에 속합니다. All things relating to the knowledges of faith are called spiritual, and all that are of love to the Lord and our neighbor are called celestial; the former belong to man’s understanding, and the latter to his will.

 

※ 조금 단순하게 말씀드리면, 머리 신앙은 영적이요, 가슴 신앙은 천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열의 문제라기보다는 태생적 특성에 가깝지만, 하여튼 주님은 천적 천사들은 가까이, 영적 천사들은 천적 천사들 다음으로 가까이하십니다. 그러므로 본인의 특성이 그렇다면 할 수 없지만, 가급적 너무 교리, 교리 하지 마시라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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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상태들에 대해서는 단지 ‘좋았더라(good)고만 하시는 반면, 이 상태를 가리켜서는 ‘심히 좋았더라(very good)고 하시는 이유는, 지금은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가 되어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이 마치 서로 결혼한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31절,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And God saw everything that he had made, and behold it was very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ixth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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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상태들에 대해서는 단지 ‘좋았더라(good)고만 하시는 반면, 이 상태를 가리켜서는 ‘심히 좋았더라(very good)고 하시는 이유는, 지금은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가 되어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이 마치 서로 결혼한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This state is called “very good,” the former ones being merely called “good”; because now the things which are of faith make a one with those which are of love, and thus a marriage is effected between spiritual things and celestial th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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