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5:9, AC.500-503 심화

1. ‘왜 태고교회의 퍼셉션은 후대 교회로 갈수록 흐려졌는가?’

 

AC.500-503을 읽으면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태고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직접 퍼셉션할 수 있었던 가장 천적인 교회였는데, 왜 그 능력은 후대 교회로 갈수록 점점 흐려졌을까요? ‘사람’(man), ‘셋’(Seth), ‘에노스’(Enosh)는 모두 태고교회에 속했지만, AC.502는 첫 번째 교회의 퍼셉션 능력이 뒤를 이은 교회들에서 점차 감소하여 더욱 일반적인 것이 되었고, 분명했던 퍼셉션이 점점 흐릿해지다가 마침내 사라지기 시작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오랜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시간 그 자체는 교회를 쇠퇴시키는 원인이 아닙니다. 문제는 인간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는 질서가 세대를 거치면서 달라졌다는 데 있습니다.

 

그 배경 가운데 하나는 AC.494에서 설명한 ‘유전적 악의 누적’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유전적 악을 단순히 최초의 한 사람에게서 시작하여 모든 인류에게 동일하게 전달된 어떤 고정된 죄의 덩어리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실제적인 악(actual evil)을 반복하여 자기 삶의 일부로 만들면 그것이 그의 본성에 더해지고, 그렇게 형성된 성향이 후대에 전달되면서 유전적 악은 세대를 거쳐 더욱 증가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고 후손이 조상의 죄책까지 물려받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AC.4563에서 분명히 하듯 사람은 유전적인 것 자체 때문에 정죄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신의 이해와 의지로 받아들여 실제적인 악으로 만들 때 책임을 지게 됩니다. 그러나 세대를 거치며 악으로 기울어지는 성향이 깊어질수록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맑게 받아들이는 내적 상태 역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AC.501의 ‘열매와 씨앗’의 비유는 이러한 변화를 구조적으로 보여 줍니다. 열매와 씨앗의 가장 안쪽에는 ‘열매의 열매’, ‘씨앗의 씨앗’이라 할 수 있는 중심이 있고, 거기서 바깥쪽으로 갈수록 그 본질은 점차 적어져 마침내 껍질과 덮개에 이릅니다. 뇌의 비유도 같습니다. 가장 내적인 섬세한 유기적 형태로부터 점차 더 일반적이고 조밀한 덮개들이 이어져 마지막에는 두개골에 이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비유를 든 것은 태고교회 이후의 교회들이 서로 아무 관계 없이 등장한 것이 아니라, 앞선 교회에서 다음 교회가 일정한 질서를 따라 이어졌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최초의 내적인 중심으로부터 멀어질수록 그 본질을 받아들이는 상태는 점차 외적이고 일반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AC.502에서 퍼셉션의 쇠퇴를 ‘더욱 일반적인 것이 됨’이라고 표현합니다. 최초의 태고교회는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매우 명료하고 세밀하게 퍼셉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셋과 에노스로 이어지면서 퍼셉션은 여전히 존재했으나 그 구별이 덜 분명해졌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지식의 양이 줄어든 것과는 다릅니다.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 안에서 진리를 즉각적이고 구체적으로 알아보던 내적인 능력이 점차 흐려진 것입니다. 따라서 태고교회의 쇠퇴는 먼저 교리책이 없어졌다거나 예배 제도가 무너졌다는 데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인간의 가장 깊은 내적 상태가 변한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AC.503은 여기서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갑니다. 퍼셉션은 단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아는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선을 실제로 행할 때 생기는 행복과 기쁨이 퍼셉션의 생명이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선을 행하는 데서 오는 이러한 행복과 기쁨이 없다면 퍼셉션 능력에는 생명이 없다’고까지 말합니다. 왜냐하면 천적 인간에게 사랑은 지식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쓰임’(use)으로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선을 행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실제로 이웃에게 선한 쓰임이 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퍼셉션의 쇠퇴는 단순히 영적인 감각이 둔해진 사건이 아니라, 선을 행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던 사랑의 생명 자체가 점차 약해진 과정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태고교회 쇠퇴의 흐름을 하나로 연결해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 안에 있을 때에는 선을 행하는 것이 기쁨이었고, 그 선 안에서 무엇이 진리인지 명료하게 퍼셉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 세상을 향한 사랑이 점차 강해지고 실제적인 악이 반복되면서 인간의 내적 질서는 달라졌습니다. 선을 행하는 기쁨이 약해지면 그 선으로부터 진리를 보는 퍼셉션도 함께 흐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태가 세대를 거쳐 누적되면서 최초에는 명료했던 퍼셉션이 더욱 일반적이고 흐릿한 것이 되고, 마침내 태고교회 특유의 퍼셉션 자체가 사라져 간 것입니다. 따라서 ‘유전적 악의 증가’, ‘사랑과 쓰임의 생명 약화’, ‘퍼셉션의 흐려짐’은 서로 무관한 세 현상이 아니라 하나의 쇠퇴 과정의 서로 다른 측면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주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퍼셉션이 사라졌다고 해서 주님께서 인간에게 선과 진리를 알 수 있는 길 자체를 닫으신 것은 아닙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은 선으로부터 진리를 퍼셉션했지만, 이후의 영적 인간에게는 다른 길이 마련되었습니다. AC.2831은 천적 인간의 퍼셉션과 영적 인간의 양심을 구별하며, AC.7935는 영적 교회의 양심이 사람이 배우고 받아들인 신앙의 진리들로부터 형성된다고 설명합니다. 즉 인간이 더 이상 태고교회처럼 직접 퍼셉션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에도 주님은 말씀과 진리와 양심을 통하여 인간을 인도하실 수 있는 새로운 질서를 마련하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쇠퇴에 맞추어 진리의 기준을 낮추셨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이 자유롭게 진리를 배우고 받아들이며 그것을 삶으로 만들 수 있는 길을 계속 보존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흐려져 간 역사를 읽으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잃어버린 퍼셉션을 인위적으로 되찾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강렬한 직감이나 내면의 음성을 태고교회의 퍼셉션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길은 말씀에서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주님 앞에서 분별하며, 실제 삶에서 선을 행함으로써 양심이 더욱 바르게 형성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AC.503이 보여 주는 가장 깊은 원리는 오늘도 변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단지 많이 아는 데서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결합하여 쓰임이 될 때 살아납니다. 우리가 진리를 배우면서도 선을 행하는 기쁨을 잃어 간다면 지식은 늘어도 영적 시야는 오히려 흐려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주님으로부터 받은 진리를 삶에 옮기고 이웃에게 선한 쓰임이 되는 것을 기뻐할수록, 태고교회와 같은 퍼셉션을 소유하지는 않더라도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과 양심의 빛 안에서 선과 진리를 더욱 분명하게 분별해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퍼셉션의 쇠퇴를 기록한 창5의 계보가 오늘의 우리에게도 살아 있는 말씀이 되는 이유입니다. (AC.500-503 심화 1)

 

 

 

창5:9, AC.503, ‘선을 행하는 기쁨과 쓰임 안에서 살아나는 퍼셉션’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창5:9) AC.503 태고교회의 퍼셉션 능력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퍼셉션하는 데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함으로써 생기는 행복과 기쁨에도 있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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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5, AC.492-495 심화

2.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오늘날의 양심은 어떻게 다른가?’

 

AC.495는 태고교회가 ‘퍼셉션을 가진 교회’였으며 ‘오늘날에는 그러한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말을 읽으면 질문이 생깁니다. 오늘날에도 사람은 기도하거나 말씀을 읽는 가운데 ‘이것은 옳다’, ‘이것은 해서는 안 된다’는 내적인 깨달음을 경험합니다. 어떤 때에는 이유를 길게 따져 보지 않아도 무엇이 선하고 진실한지를 깊이 확신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것도 태고교회의 ‘퍼셉션’(perception)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그렇지 않습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후대 영적 인간의 양심은 모두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에 관계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질서가 서로 다릅니다.

 

그 차이를 가장 간단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천적 인간은 ‘선으로부터 진리를 퍼셉션’하지만, 영적 인간은 ‘배운 진리로부터 양심이 형성되어 선으로 인도’됩니다. AC.2831은 이 차이를 매우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천적 인간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주님으로부터 일종의 내적인 지각으로 즉시 알아차립니다. 그들이 주님과 사랑으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영적 인간에게는 그러한 퍼셉션이 없으며 그 대신 양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양심은 부모와 스승에게서 배우고, 교리와 말씀을 통하여 받아들인 선과 진리로부터 형성됩니다.

 

그러므로 퍼셉션은 단순히 ‘양심이 아주 강해진 상태’가 아닙니다. 둘은 주님께서 인간을 이끄시는 서로 다른 질서에 속합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에게는 사랑의 선이 먼저 있었고 그 선으로부터 무엇이 진리인지 퍼셉션되었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외부에서 먼저 배우고 논증하여 ‘이것이 참이므로 믿겠다’고 하는 방식이 중심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선 안에서 무엇이 진리인지 내적으로 알아차렸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계속 살펴온 ‘천적 질서’, 곧 사랑에서 신앙이 나오는 질서입니다.

 

반대로 영적 인간은 진리를 먼저 배웁니다. 말씀을 읽고, 가르침을 받고, 무엇이 주님의 뜻인지 배운 뒤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삶에서 행합니다. 이렇게 받아들인 진리가 사람의 속 사람에 깊이 새겨지고 삶으로 확증되면 그것이 양심을 형성합니다. AC.7935는 영적 교회 사람들의 양심이 그들이 어려서부터 배우고 이후 삶으로 확증한 교회의 진리들로부터 ‘태어나고 형성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렇게 진리가 내면에 자리 잡으면 사람은 그것에 따라 생각하고 원하고 행동하도록 내적으로 이끌립니다. 이것이 영적 인간에게 있는 양심입니다.

 

예를 들어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이 어떤 일을 마주했을 때에는 주님을 향한 사랑의 선으로부터 그것이 선인지 아닌지를 퍼셉션했습니다. 반면 오늘날 영적 질서 안에 있는 사람은 ‘주님께서 말씀에서 어떻게 가르치셨는가’, ‘이웃을 사랑하라는 진리에 비추어 이것은 옳은가’, ‘내가 알고 믿는 진리에 따라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통하여 양심의 인도를 받습니다. 처음에는 배운 진리를 기억하여 판단하지만, 그 진리에 따라 오래 살아가면 그것이 내면에 깊이 자리 잡아 일일이 논리를 펼치지 않아도 ‘이것은 해서는 안 된다’는 내적인 요구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양심 역시 단순한 사회적 죄책감이나 심리적 불편함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AC.2831은 시민 생활에서의 정의와 공정함을 지각하는 것, 도덕생활에서 명예로운 것을 지각하는 것과 신앙의 선과 진리에 관한 영적 퍼셉션을 구별합니다. 또한 사람의 양심은 그가 받아들인 선과 진리에 의해 형성되므로, 그가 배운 것이 충분히 참되지 않다면 양심 역시 불완전하게 형성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내 양심이 그렇게 말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판단이 언제나 절대적으로 참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양심도 말씀의 진리에 의해 계속 밝혀지고 바로잡혀야 합니다.

 

이 점은 퍼셉션과 개인적인 직감을 구별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강하게 떠오르는 것’, ‘내적으로 어떤 음성을 듣는 것’, ‘설명하기 어렵지만 확신이 드는 것’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의 강한 느낌은 자기애, 욕망, 두려움, 선입견에서도 나올 수 있습니다. AC.2515는 퍼셉션에서 나오는 생각, 양심에서 나오는 생각, 양심 없이 욕망과 환상에서 나오는 생각을 분명히 구별합니다. 따라서 확신의 강도가 그 근원이 주님이라는 보증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퍼셉션과 양심에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둘의 근원은 궁극적으로 주님이며, 둘 다 인간을 선과 진리로 이끄시는 방식입니다. 차이는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질서에 있습니다. 천적 인간에게는 사랑의 선이 의지 안에 자리 잡아 그 선으로부터 진리를 퍼셉션하는 질서가 있었고, 영적 인간에게는 진리가 먼저 이해 안에 받아들여지고 그 진리에 따라 새로운 의지가 형성되면서 양심이 생기는 질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퍼셉션과 양심은 서로 무관한 두 능력이 아니라 주님께서 서로 다른 상태의 인간을 이끄시는 서로 다른 방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차이를 알면 왜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사라지는 것이 그렇게 중대한 ‘죽음’이었는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교회의 생명은 주님을 향한 사랑 안에서 선과 진리를 직접 퍼셉션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의지가 악으로 물들면서 그 질서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선에서 진리를 퍼셉션하던 통로가 변질되면, 자기 욕망을 주님의 뜻으로 오인하는 훨씬 위험한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타락한 인간에게 옛 퍼셉션을 그대로 유지시키시는 대신 진리를 외적으로 배우고 그것으로 새로운 내면을 형성하는 영적 질서, 곧 신앙과 양심의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억지로 회복하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도 주님으로부터 직접 무엇이 진리인지 느끼고 싶다’며 특별한 내적 감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말씀의 진리를 겸손히 배우고 그것을 삶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삶으로 확증될수록 그것은 단순히 머릿속에 기억된 지식으로 머물지 않고 우리의 내면을 형성하며, 마침내 양심을 통하여 생각과 의지와 행동을 이끄는 살아 있는 진리가 됩니다.

 

그렇다고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모든 신앙생활이 계속 외적인 규칙 확인에만 머문다는 뜻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더 높은 형태의 양심과 선으로부터의 지각도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성급하게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특별한 체험을 했는가’가 아니라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 가르치신 진리가 우리의 삶 안에서 선과 결합되고 있는가입니다. AC.495가 퍼셉션을 설명하면서 마지막에 ‘삶으로 확증되는 신앙고백’을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결국 퍼셉션과 양심의 차이는 창세기 초반 전체를 관통하는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의 차이’를 보여 줍니다. 천적 인간은 사랑에서 신앙으로, 선에서 진리로 나아갔고, 영적 인간은 진리를 받아들여 신앙으로 삼고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선으로 인도됩니다. 방식은 다르지만 두 경우 모두 생명의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잃어버린 태고교회의 상태를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과 신앙과 양심의 길을 따라 주님께서 우리를 이끄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진리가 삶이 되고 신앙이 사랑과 결합될 때, 주님은 우리를 영적 인간에서 더욱 온전한 사랑의 질서로 계속 이끌어 가십니다. (AC.492-495 심화 2)

 

 

 

창5:5, AC.495, ‘태고교회의 쇠퇴를 이해하는 열쇠, 퍼셉션’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5태고교회가 어떻게 쇠퇴하였는지는 퍼셉션(perception)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태고교회는 퍼셉션을 가진 교회였으며, 오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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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5, AC.492-496 심화 1, ‘유전적 악은 어떻게 대대로 누적되며, 우리는 조상의 죄까지 책임져야

창5:5, AC.492-496 심화1, ‘유전적 악은 어떻게 대대로 누적되며, 우리는 조상의 죄까지 책임져야 하는가?’ AC.494는 태고교회가 쇠퇴한 주된 원인을 설명하면서 ‘유전적 악’(hereditary evil)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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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3, AC.481-485 심화

1, ‘셋 교회는 태고교회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달랐는가?’

 

AC.484는 셋 교회를 가리켜 태고교회와 ‘매우 비슷했다’고 하면서도 곧바로 중요한 차이를 덧붙입니다. ‘사랑이 그만큼 주된 것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신앙은 사랑과 결합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한 문장은 셋 교회의 위치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셋 교회는 태고교회와 단절된 교회도 아니고, 태고교회의 가장 완전한 상태를 그대로 유지한 교회도 아니었습니다. ‘사랑과 신앙의 결합’이라는 본질적인 질서는 이어받았지만, 그 결합 안에서 사랑이 차지하는 위치에는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AC.484는 실제로 셋 교회가 태고교회와 매우 비슷하면서도 사랑과 거기서 비롯되는 신앙에 있어서는 동일하지 않았다고 설명합니다.

 

태고교회의 본래 질서를 먼저 보아야 이 차이가 선명해집니다. AC.337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가 천적 인간이었으며,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서 비롯되는 신앙’ 외에는 다른 신앙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설명합니다. 그들에게 신앙은 사랑과 나란히 놓이는 별도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 안에서 신앙에 속한 것들을 퍼셉션했기 때문에,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신앙이라는 말 자체를 따로 언급하려 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이것이 가장 완전한 천적 질서입니다. 먼저 사랑이 있고, 그 사랑 안에서 진리를 퍼셉션하며, 따라서 신앙은 사랑에서 나옵니다. AC.202에서도 천적 인간은 감각과 기억 지식으로부터 신앙의 것을 추론하지 않고,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퍼셉션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태고교회에서 ‘사랑이 주된 것’이라는 말은 단순히 사랑을 신앙보다 조금 더 중요하게 여겼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사랑이 신앙의 근원이며, 신앙이 사랑 안에 포함되어 있는 질서를 뜻합니다.

 

그런데 셋 교회에서는 이 질서가 미묘하게 달라집니다. 사랑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분리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사랑이 태고교회에서처럼 절대적으로 주된 위치에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AC.484는 셋 교회를 ‘여섯째 날의 영적 인간’과 연결합니다. 여섯째 날에는 신앙과 사랑이 결합되어 있지만, 일곱째 날이 표상하는 완전한 천적 상태와는 아직 구별됩니다. 셋 교회가 태고교회와 ‘매우 비슷하면서도 같지는 않았다’는 말의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 차이는 창4의 가인과 비교할 때 더욱 또렷해집니다. 가인의 문제는 사랑의 주도성이 조금 약해졌다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사랑보다 앞세우고 마침내 신앙을 사랑으로부터 ‘분리’한 데 있었습니다. AC.337은 이것을 태고교회 교리의 왜곡으로 설명하고, AC.362는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이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다고 설명합니다. 그 결과 신앙은 체어리티로부터도 분리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셋과 가인은 매우 중요한 대조를 이룹니다. 셋 교회에서는 ‘사랑이 이전만큼 주된 것은 아니지만 신앙은 여전히 사랑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가인에게서는 ‘신앙이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마침내 사랑으로부터 분리’됩니다. 둘 다 태고교회의 가장 완전한 상태와는 차이가 있지만, 그 차이의 성격은 전혀 다릅니다. 셋에게서는 결합이 아직 살아 있고, 가인에게서는 그 결합 자체가 무너집니다.

 

이것은 훗날 나타나는 천적 교회와 영적 교회의 차이를 생각하게 하는 초기 징후이기도 합니다. AC.393은 인류가 태고교회와 같은 상태를 계속 유지하지 못하고 신앙을 사랑으로부터 분리할 것이 예견되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신앙의 지식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받을 수 있는 새로운 질서를 마련하셨다고 설명합니다. 이때에는 태고교회의 퍼셉션 대신 신앙과 체어리티에 결합된 양심이 뒤따르게 됩니다. 이것이 곧 셋 교회 자체가 이미 후대의 영적 교회였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AC.484에서 보이는 ‘사랑의 주도성은 약해졌지만 신앙과 사랑의 결합은 유지되는 상태’는 태고교회의 순수한 천적 질서로부터 인류가 점차 멀어져 가는 큰 흐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따라서 셋 교회의 의미를 단순히 ‘태고교회의 두 번째 버전’ 정도로 이해해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셋은 ‘계승과 변화’가 동시에 일어나는 지점입니다. 앞선 교회의 선과 진리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음 교회가 받을 수 있는 상태로 이어지지만, 그 상태는 이미 앞선 교회와 동일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섭리는 모든 시대의 사람을 똑같은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받을 수 있는 상태 안에서 선과 진리의 결합을 보존하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AC.484의 마지막 문장은 창5 전체를 읽는 하나의 기준이 됩니다. 셋 이후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으로 이어지는 것은 단순히 사람들이 늙어 죽고 다음 세대가 태어나는 과정이 아닙니다. AC.483이 밝힌 것처럼 이 이름들은 서로 다른 퍼셉션을 가진 여러 교회들을 나타냅니다. 셋에게서 이미 나타난 ‘같으면서도 달라지는’ 교회의 계승은 앞으로 더욱 다양한 상태로 전개됩니다.

 

결국 셋 교회가 태고교회와 같은 점은 ‘신앙이 사랑과 결합되어 있었다’는 것이고, 다른 점은 ‘사랑이 더 이상 태고교회에서처럼 그만큼 주된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작은 차이 안에서 우리는 거대한 변화의 시작을 봅니다. 교회의 쇠퇴는 어느 날 갑자기 모든 진리가 사라지는 방식으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신앙의 질서가 조금씩 달라지는 데서 시작될 수도 있습니다. 동시에 주님께서는 그 변화 가운데서도 아직 남아 있는 결합을 보존하시고, 그것을 통하여 다음 교회를 이어 가십니다. (AC.481-485 심화 1)

 

 

 

창5:3, AC.481-485 심화 2, ‘창4의 셋과 창5의 셋은 왜 서로 다른 교회인가?’

창5:3, AC.481-485 심화2, ‘창4의 셋과 창5의 셋은 왜 서로 다른 교회인가?’ 창4:25에도 ‘셋’이 나오고 창5:3에도 ‘셋’이 나옵니다. 문자 그대로 읽으면 당연히 동일한 셋이며, 창5는 창4 끝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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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81, 창5:3, '태고교회와 닮은 새 교회 셋' (AC.481-485)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And man lived a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begat into his likeness, after his image, and called his name Seth. (창5:3) AC.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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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64 심화

‘에녹이 보존한 교리는 후대의 고대 말씀과 모세의 창세기 기록에 어떻게 이어졌는가?’

 

 

AC.464는 ‘에녹’이라 하는 교회가 태고교회에 계시되고 그 교회가 퍼셉션한 것들로부터 교리를 형성했으며, 그 교리가 당시에는 쓸모가 없었지만 ‘후대의 쓰임을 위해’ 보존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에녹이 정돈하여 보존한 교리가 훗날 고대교회에 전해지고, 더 나아가 모세가 창세기를 기록할 때 사용한 고대의 자료가 된 것일까요? 큰 흐름에서는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에녹의 교리 = 고대 말씀 = 모세오경’이라고 곧바로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에녹의 역할부터 정확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태고교회는 천적 교회였으며,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 안에서 선과 진리를 퍼셉션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후대처럼 체계적인 교리를 먼저 배우고 그것을 통해 무엇이 참인지를 판단하는 방식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상태가 변하면서 이러한 퍼셉션이 계속 유지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때 ‘에녹’이라 하는 교회가 태고교회에 계시되고 퍼셉션된 것들을 모아 교리의 형태로 정돈했습니다. 살아 있는 내적 퍼셉션으로 알고 있던 것이 후대에도 전달될 수 있는 형태로 보존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다’는 창5:24의 속뜻과 연결됩니다. 에녹의 교리가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즉시 필요한 것이어서 널리 사용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당시에는 쓰이지 않으면서도 훗날 필요할 때를 위하여 보존되었다는 것입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사라질 것을 주님께서 아셨기 때문에, 그 안에 있던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까지 함께 사라지도록 두지 않으시고 다른 형태로 보존하신 것입니다. AC.464의 에녹은 이런 의미에서 ‘퍼셉션에서 교리로’ 넘어가는 중요한 전환점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에녹이 정돈한 교리를 곧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고대 말씀’ 전체와 동일시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른 곳에서 고대교회에 하나의 ‘고대 말씀’(Ancient Word)이 있었으며, 그것이 후대에는 소실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민21:14의 ‘여호와의 전쟁기’와 수10:13 및 삼하1:18에 언급되는 ‘야살의 책’ 등을 그 고대 말씀과 관련하여 설명합니다. 이것은 태고교회로부터 내려온 상응과 표상의 지식이 고대교회에서 말씀과 교리의 형태로 발전하고 보존되었던 더 넓은 전승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에녹의 교리화는 이 긴 전승의 매우 초기적이고 중요한 단계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모세와의 관계에서도 같은 주의가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앞부분의 기록이 모세 시대에 처음 아무 자료도 없이 생겨난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는 태고교회와 고대교회에서 내려오던 고대의 기록과 전승이 있었으며, 모세가 그러한 자료를 사용했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창세기 원역사에 해당하는 부분에는 태고교회와 고대교회로부터 전해 내려온 매우 오래된 교회적 전승이 상응적 서술의 형태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고대의 말씀과 상응 지식 자체는 후대에 상당 부분 소실되었지만, 그 내용과 표현의 일부는 섭리 가운데 후대의 말씀 안에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기록한 창세기와 에녹의 교리 보존 사이에는 ‘고대의 계시와 퍼셉션이 후대를 위해 보존되고 전승되었다’는 큰 연속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연속성을 ‘에녹이 책을 한 권 써 두었고 그것이 그대로 전해져 모세오경이 되었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464는 그런 직접적인 문헌 계보를 말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모세오경 전체가 에녹의 교리에서 유래했다고 할 근거도 없습니다. 보다 정확한 그림은 ‘태고교회의 계시와 퍼셉션 → 에녹이라 하는 교회의 교리화와 보존 → 고대교회에서의 전승과 발전 → 고대의 말씀과 여러 기록 및 전승 → 모세가 사용한 고대 자료’라는 긴 흐름입니다. 이 과정에는 여러 시대와 여러 형태의 전승이 놓여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에녹의 의미가 더욱 깊어집니다. 주님은 한 시대의 사람들이 누리던 특별한 영적 상태가 사라질 때 그들과 함께 모든 진리가 사라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은 사라졌지만, 그 퍼셉션으로 알았던 것 가운데 후대에 필요한 것은 교리와 전승의 형태로 보존되었습니다. 그리고 훗날 사람들이 더 이상 태고교회처럼 직접 퍼셉션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보존된 진리는 다른 형태로 그들을 섬길 수 있었습니다. AC.464가 ‘후대의 쓰임’이라고 한 말에는 바로 이러한 주님의 섭리가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에녹에서 모세까지의 관계를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에녹이 정돈한 교리가 그대로 모세오경이 된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계시와 퍼셉션을 후대에 전달하기 위해 보존한 에녹의 사역이 고대교회의 오랜 전승을 거쳐 훗날 말씀의 기록으로 이어지는 큰 섭리적 흐름의 한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영적 상태가 변할 때마다 진리를 없애시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가 받을 수 있는 형태로 보존하고 전달하십니다. 에녹의 ‘들려감’은 바로 그 보존의 섭리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AC.464 심화)

 

 

 

AC.464, 창5, ‘에녹은 태고교회의 계시와 퍼셉션으로부터 교리를 형성한 교회이다’

개요 AC.464‘에녹’(Enoch)이라 하는 교회는 태고교회에 계시되고 그 교회가 퍼셉션한 것들로부터 교리를 형성한 것으로 묘사됩니다. 이 교리는 당시에는 쓸모가 없었지만 후대의 쓰임을 위해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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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또는 영에 관하여 그들이 육체의 삶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영들과의 체험에서 얻은 몇 가지 사례 Some Examples Drawn from Experience with Spirits Concerning What They Had Thought during Their Life in the Body about the Soul or Spirit

 

AC.443

다른 삶에서는 사람들이 육체 안에서 살았을 때 영혼과 영, 그리고 사후의 삶에 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분명하게 지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육체의 상태와 비슷한 상태에 놓이면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며, 그들의 생각은 마치 소리 내어 말하는 것처럼 분명하게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의 경우,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나는 그가 살아 있을 때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지각했으며, 그 자신도 그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는 영의 존재를 믿기는 했지만, 죽은 뒤에는 영이 어떤 희미한 삶을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육체의 생명이 거두어지면 희미하고 흐릿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는 생명이 육체 안에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영을 하나의 유령 같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또한 짐승들도 사람과 거의 마찬가지로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이러한 생각을 더욱 굳혔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영들과 천사들이 가장 큰 빛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총명과 지혜와 행복 가운데서 살아가며, 거의 묘사하기 어려울 만큼 완전한 퍼셉션을 누린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삶은 희미하기는커녕 가장 완전하게 밝고 분명합니다. In the other life it is given to perceive clearly what opinions people had entertained while they lived in the body concerning the soul, the spirit, and the life after death; for when kept in a state resembling that of the body they think in the same way, and their thought is communicated as plainly as if they spoke aloud. In the case of one person, not long after his decease, I perceived (what he himself confessed) that he had indeed believed in the existence of the spirit, but had imagined that it must live after death an obscure kind of life, because if the life of the body were withdrawn there would remain nothing but what is dim and obscure; for he had regarded life as being in the body, and therefore he had thought of the spirit as being a phantom; and he had confirmed himself in this idea from seeing that brutes also have life, almost as men have it. He now marveled that spirits and angels live in the greatest light, and in the greatest intelligence, wisdom, and happiness, attended with a perception so perfect that it can scarcely be described; consequently that their life, so far from being obscure, is most perfectly clear and distinct.

 

해설

AC.443부터 AC.448까지는 창4의 속뜻에 대한 해설을 마친 뒤 이어지는 체험 기록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부분에 ‘영혼 또는 영에 관하여 그들이 육체의 삶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영들과의 체험에서 얻은 몇 가지 사례’라는 제목을 붙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부터는 창4의 특정 구절을 직접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세상에서 영혼과 영, 사후의 삶에 관해 품었던 생각이 사후에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여러 실제 사례를 통해 보여 줍니다.

 

첫 사례의 사람은 영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영이 존재하고 사람이 죽은 뒤에도 살아간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문제는 그가 그 사후의 삶을 어떻게 상상했느냐에 있었습니다. 그는 생명이 근본적으로 육체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육체가 사라지면 생명의 대부분도 함께 사라지고, 영에게는 희미하고 흐릿한 어떤 존재 상태만 남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사후의 삶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현세의 육체적 삶보다 훨씬 희박하고 불완전한 삶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가 영을 ‘유령’(phantom) 같은 것으로 생각했다는 말은 이러한 관념을 잘 보여 줍니다. 그에게 실재성이 강한 것은 육체였고, 영은 육체에서 생명이 빠져나간 뒤 남는 희미한 잔상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짐승들도 인간과 거의 마찬가지로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 그는 자신의 생각을 더욱 굳혔습니다. 육체를 가진 동물에게도 생명이 있으므로 생명은 육체에 속한 것이며, 그렇다면 육체가 없어지면 인간에게 남는 생명도 매우 희미할 것이라고 추론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그 추론을 일반적인 교리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생전에 실제로 품고 있었던 생각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사후에 직접 경험한 것은 자신의 예상과 정반대였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영들과 천사들이 ‘가장 큰 빛’ 가운데 있으며, ‘가장 뛰어난 총명과 지혜와 행복’을 누린다고 말합니다. 더욱이 그들의 퍼셉션은 거의 묘사하기 어려울 정도로 완전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후의 삶이 단순히 계속된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육체가 사라진 뒤 의식과 지각이 희미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이 더욱 밝고 분명해진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의 ‘가장 완전하게 밝고 분명하다’(most perfectly clear and distinct)는 표현은 이 글의 핵심을 잘 압축합니다. 이 사람은 육체를 생명의 중심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육체가 없어지면 삶도 희미해진다’고 여겼지만, 사후에는 오히려 그 반대를 발견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체험에 따르면 영적 삶은 육체적 삶의 흐릿한 그림자가 아니라, 지각과 사고와 의식이 더욱 선명한 삶입니다. 따라서 육체에서 벗어나는 것은 인간의 의식이 점차 꺼져 가는 과정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다만 여기서 ‘영들과 천사들이 가장 큰 빛과 총명과 지혜와 행복 가운데 산다’는 표현을 모든 영이 사후 즉시 똑같은 천국적 행복을 누린다는 뜻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이 글의 논점은 사후의 모든 사람의 상태가 동일하다는 데 있지 않고, ‘육체가 사라지면 영의 삶은 희미해질 것’이라는 생각을 반박하는 데 있습니다. 선한 영과 악한 영의 상태, 천국과 지옥의 차이 등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AC.443이 강조하는 것은 육체의 죽음이 인간의 영적 의식과 삶을 희미한 그림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 첫 사례가 AC.443-448의 맨 앞에 놓인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사후의 삶을 생각할 때 사람은 자신이 지금 경험하는 육체적 감각을 기준으로 삼기 쉽습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느끼는 현재의 삶을 가장 실재적인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몸이 없어지면 삶도 덜 실재적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체험을 통해 그 전제를 뒤집습니다. 육체가 생명의 근원이 아니라면 육체의 죽음은 생명의 소멸이나 희미해짐을 뜻하지 않습니다. AC.443의 놀라움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생전에 영의 존재를 믿었던 사람조차 사후에 이르러 자신이 영의 삶을 얼마나 희미하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AC.443 해설)

 

 

 

AC.444, 창4 뒤, ‘영은 단지 생각일 뿐이며 아무런 형체도 없는가?’

영혼 또는 영에 관하여 그들이 육체의 삶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영들과의 체험에서 얻은 몇 가지 사례 AC.444이 세상에 살 때 영은 아무런 연장(extension)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믿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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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42, 창4:26, ‘태고 시대에도 교회에서 분리된 많은 교리와 이단이 있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26) AC.442앞에서 설명한 이 장의 내용으로부터, 태고 시대에도 교회에서 분리된 많은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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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3 심화

1. 상응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은가? ‘술어의 성질은 주제의 성질에 달려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AC.103에서 스베덴보리는 ‘나무들’이 퍼셉션을 뜻하는 이유가 여기서 천적 인간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영적 인간을 주제로 할 때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술어의 성질은 주제의 성질에 달려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상응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은 것일까요? ‘나무는 이것을 뜻하고 물은 저것을 뜻한다’는 식으로 상응을 이해해 왔다면 이 문장은 다소 혼란스럽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먼저 AC.103은 상응이 아무 의미로나 자유롭게 바뀐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말씀의 속뜻에는 일정한 질서가 없고 해석하는 사람이 문맥에 따라 마음대로 뜻을 정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그런 자의적인 해석이 아니라, 어떤 자연적 대상이 영적인 것을 나타낼 때 그 의미의 구체적인 성질이 지금 말씀에서 다루는 ‘주제’에 의해 정해진다는 것입니다.

 

창2:9의 경우가 좋은 예입니다. 여기서는 천적 인간을 다루고 있으며, 천적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통하여 생명을 받고 그것을 퍼셉션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에덴동산에서 자라는 ‘나무들’ 역시 그 생명의 질서 안에서 퍼셉션과 관계됩니다. ‘나무’라는 단어만 따로 떼어 놓고 사전에서 뜻을 찾듯 ‘퍼셉션’이라는 의미를 붙인 것이 아니라, 천적 인간이라는 주제와 에덴동산 전체의 문맥 안에서 그 의미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술어의 성질은 주제의 성질에 달려 있다’는 말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 대해 ‘밝다’고 말할 때 그 사람이 있는 방의 조명을 말할 수도 있고, 그의 표정을 말할 수도 있으며, 그의 이해력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밝다’라는 말이 아무 뜻으로나 변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가에 따라 그 구체적인 의미가 정해지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AC.103의 상응 원리를 완전히 설명하는 예는 아니지만, ‘주제’와 ‘술어’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에는 도움이 됩니다.

 

따라서 상응을 공부하면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 가운데 하나는 상응을 고정된 암호표로 만드는 일입니다. ‘나무 = 퍼셉션’이라는 대응 하나를 알았다고 해서 성경에 나오는 모든 나무에 곧바로 퍼셉션을 대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그 본문에서 무엇을 다루는지, 그 대상이 어떤 관계 안에 놓여 있는지, 앞뒤의 말씀과 어떤 질서를 이루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AC.103은 바로 이 점을 짧지만 분명하게 가르쳐 줍니다.

 

이 원리는 상응을 마음대로 해석하는 것을 허용하기는커녕 오히려 제한합니다. 상응의 뜻을 아는 사람이 자기 지식으로 말씀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주제와 문맥이 그 상응의 성질을 결정하도록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상응에 관한 지식이 많아질수록 말씀을 더 쉽게 ‘풀어 버릴’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말씀이 실제로 무엇을 다루고 있는지 더욱 세심하게 살펴야 합니다.

 

이것은 말씀 앞에서 인간의 이해가 어떤 자리에 있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상응은 우리가 말씀을 장악하기 위한 해독 도구가 아니라, 말씀 안에 있는 질서와 연결을 더 깊이 보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AC.103의 이 짧은 원리는 앞으로 AC를 읽는 동안 계속 기억할 가치가 있습니다. 하나의 상응을 발견했을 때 곧바로 그것을 공식화하기보다 ‘지금 이 말씀은 무엇을 다루고 있는가?’를 먼저 묻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상응은 인간이 말씀 위에 세운 공식이 아니라, 말씀 자체가 그 속뜻을 열어 보여 주는 질서 안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AC.103 심화 1)

 

 

 

AC.103, 창2:9, ‘나무가 퍼셉션을 뜻하는 것은 여기서 천적 인간을 다루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3여기서 ‘나무들’(trees)이 퍼셉션을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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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9 심화

1. 영적 인간에게서 생명의 질서가 ‘뒤집혀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C.99에서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에게서 생명의 질서가 ‘뒤집혀 있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처음 읽는 독자에게 상당히 강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영적 인간 역시 주님에 의해 거듭나는 사람인데, 그의 생명의 질서가 뒤집혀 있다는 것은 그가 잘못된 상태에 있다는 뜻일까요? 더 나아가 천적 인간이 되기 전에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는 뜻일까요?

 

먼저 AC.99 자체가 말하는 것을 정확히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에게도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신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므로 ‘뒤집혀 있다’는 것은 생명의 근원이 주님이 아니라 사람 자신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실제 생명의 근원은 영적 인간에게도 주님입니다. 문제는 그 생명이 흘러드는 실제 질서와 사람이 그것을 경험하고 퍼셉션하는 방식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데 있습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겉 사람이 아직 속 사람과 싸웁니다. 이 때문에 실제로는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시는데도, 사람에게는 지성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기 자신에게서 기억지식과 이성을 통하여 나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곧 ‘내가 배우고, 내가 생각하고, 내가 추론하여 이해하게 되었다’는 방향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AC.99이 말하는 ‘뒤집힘’은 우선 이 질서와 관련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이 관계가 달라집니다. 주님께서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통하여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시며,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싸움이 없으므로 그는 이것이 실제로 그러하다는 것을 퍼셉션합니다. 다시 말해 천적 인간은 이성과 기억지식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생명과 지성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그 질서대로 퍼셉션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에게서 뒤집혀 있던 질서가 천적 인간에게서 ‘회복’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을 단순히 ‘잘못된 사람’과 ‘올바른 사람’, 또는 ‘낮은 사람’과 ‘높은 사람’으로 나누라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적어도 AC.99가 강조하는 차이는 주님의 유입 자체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닙니다. 둘 다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습니다. 다만 영적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앞서고 겉 사람과 속 사람 사이의 싸움이 아직 있기 때문에, 그 생명의 실제 근원이 사람 자신에게서 시작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주된 것이 되고 싸움이 그치면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질서가 더 이상 거꾸로 보이지 않고 실제 그러한 것으로 퍼셉션됩니다.

 

따라서 ‘뒤집혀 있다’는 표현 때문에 영적 인간의 신앙과 이성, 기억지식의 삶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AC.99는 그것들 안에도 이미 주님께서 흘러들고 계신다고 말합니다. 다만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주된 질서 안에서 그 유입의 근원이 더욱 직접적으로 퍼셉션됩니다. 바로 이 회복된 생명의 질서, 곧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통하여 지성이 흘러드는 사람을 스베덴보리는 ‘동쪽 에덴에 있는 동산’이라 합니다. (AC.99 심화 1)

 

 

 

AC.99, 창2:8, ‘영적 인간에게 뒤집혀 있던 생명의 질서가 천적 인간에게서 회복됨’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창2:8) AC.99영적 인간에게서 생명, 곧 생명의 질서는 이러합니다. 주님께서는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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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7 심화

1. 태고교회 사람들은 어떻게 사랑과 신앙의 상태를 ‘호흡의 상태’로 퍼셉션했는가?

 

AC.97에서 가장 놀라운 대목은 태고교회 사람들이 ‘사랑과 신앙의 상태들을 호흡의 상태들로 퍼셉션했다’는 말입니다. 오늘날의 독자라면 자연스럽게 ‘그것이 도대체 어떤 호흡이었는가?’라고 묻게 됩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질문 앞에서 스베덴보리 자신이 멈춥니다. 그는 ‘이 호흡에 관해서는 아직 아무것도 말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에는 그러한 것들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라고 합니다. 따라서 AC.97을 충실하게 읽으려면 먼저 이 한계를 그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이 번호만으로 태고교회 사람들이 어떤 속도나 방식으로 호흡했는지, 특정한 사랑이나 신앙의 상태에 어떤 호흡이 대응했는지를 재구성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이것을 오늘날의 명상 호흡법이나 복식호흡, 호흡 훈련 같은 것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AC.97은 태고교회 사람들이 어떤 호흡법을 훈련하여 영적 상태에 들어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방향은 반대에 가깝습니다. 그들의 사랑과 신앙의 상태와 호흡의 상태가 서로 연결되어 있었고, 그들은 그것을 퍼셉션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호흡은 영적 상태를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는 기술로 제시되지 않습니다.

 

이 점은 지금까지 태고교회의 퍼셉션에 관하여 읽어 온 내용과도 어울립니다. 그들의 퍼셉션은 오늘날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막연한 직감이나 감정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인 퍼셉션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호흡의 상태를 퍼셉션했다는 말도 단순히 자신의 몸 상태를 예민하게 관찰했다는 뜻으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호흡이 그들의 후손들에게서 점차 변화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의 독특한 내적 상태가 후대로 그대로 보존되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오늘날 이 땅에서는 더 이상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하지만 ‘다른 삶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안다고 덧붙입니다. 따라서 이 호흡은 스베덴보리에게 단순한 고대인의 생리적 습관이 아니라 인간의 영적 상태와 관련된 현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AC.97에서 우리가 확실히 붙들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첫째,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사랑과 신앙의 상태와 호흡의 상태 사이에 실제적인 관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 관계는 오늘날에는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셋째, 따라서 그것을 현대적인 호흡법으로 재현하거나 추측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넷째, 바로 이러한 배경 때문에 고대인들과 말씀에서 영 또는 생명이 ‘바람’과 ‘숨’으로 표현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대목의 가치는 잃어버린 태고교회의 호흡법을 복원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이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것보다 훨씬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엿보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왜 창2:7의 ‘생명의 숨’이 단순한 시적 표현이 아니라 그들에게 실제적인 의미를 가진 표현이었는지를 이해하게 합니다. 그 이상의 구체적인 내용은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밝히지 않은 만큼 우리도 여기서는 밝히지 않는 것이 맞습니다. (AC.97 심화 1)

 

 

 

AC.97, 창2:7, '호흡과 숨이 생명을 뜻하는 이유, 태고교회의 퍼셉션'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AC.97생명을 ‘숨을 내쉼’(breathing)과 ‘숨’(breath)으로 묘사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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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6 심화

1. 왜 ‘콧구멍’은 퍼셉션을 뜻하는가?

 

AC.96에서 스베덴보리는 고대와 말씀에서 ‘콧구멍’으로 냄새로 말미암아 기분 좋은 모든 것을 이해했으며, 이것이 퍼셉션을 뜻한다고 합니다. 처음 접하는 독자에게는 다소 뜻밖의 상응입니다. 눈이 이해나 인식과 관계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지만, 왜 코와 냄새가 퍼셉션과 연결되는 것일까요?

 

우선 AC.96이 직접 제시하는 연결을 따라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콧구멍’에서 곧바로 퍼셉션으로 뛰어가는 것이 아니라 ‘콧구멍 - 냄새 - 기분 좋은 것 - 퍼셉션’이라는 흐름이 있습니다. 즉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코라는 신체기관 자체보다 냄새를 통하여 어떤 것을 기분 좋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작용입니다.

 

이 점은 지금까지 설명된 천적 인간의 퍼셉션과 잘 연결됩니다. 퍼셉션은 단순히 어떤 명제를 논리적으로 추론하여 결론을 얻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천적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내적으로 퍼셉션합니다. AC.95에서 사랑의 생명이 그를 ‘사람’이 되게 한다고 했고, AC.96에서는 사랑과 신앙에 관한 것들이 주님께 가장 기분 좋은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퍼셉션은 사랑과 신앙의 생명과 분리된 지적 판단으로 제시되지 않습니다.

 

냄새의 특징을 생각해 보면 이 표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사람은 어떤 향기를 맡을 때 매번 논리적 추론을 거친 뒤에야 그것이 향기로운지 불쾌한지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냄새는 직접적으로 받아들여지고 그 성질이 감지됩니다. 물론 자연적인 후각과 영적인 퍼셉션이 동일하다는 뜻은 아니지만, 스베덴보리가 고대의 표현과 말씀에서 냄새와 퍼셉션을 연결하는 이유를 이해하는 하나의 실마리가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현대적인 의미의 ‘직감’이나 ‘느낌’을 곧바로 퍼셉션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어떤 것에 좋은 느낌을 받았다고 해서 그것이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지금 다루는 것은 천적 인간의 상태이며, 그의 사랑과 신앙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질서 안에 놓여 있는 가운데 주어지는 퍼셉션입니다.

 

따라서 ‘콧구멍이 퍼셉션을 뜻한다’는 말을 신체기관 하나와 영적 개념 하나를 기계적으로 짝짓는 상응표로 이해하기보다, 말씀 안에서 냄새와 향기로움이 어떤 것을 받아들이고 그 성질을 퍼셉션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문맥에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AC.96은 그 연결을 통하여 창2:7의 ‘콧구멍’이 단순한 해부학적 표현이 아니라 천적 인간의 생명과 퍼셉션에 관계된 표현임을 밝혀 줍니다. (AC.96 심화 1)

 

 

 

AC.96, 창2:7, ‘콧구멍과 향기와 퍼셉션, 사랑과 신앙의 생명을 불어넣으심’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AC.96‘여호와 하나님이 그의 콧구멍에 불어넣으셨다’(Jehovah God breathed into his nostri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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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3

지금 우리 앞에 있는 말씀의 속뜻을 계속 밝혀 나가기 전에, 신앙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태고교회는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는 어떠한 신앙도 인정하지 않는 성격의 교회였으며, 심지어 신앙을 따로 언급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을 통하여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을 퍼셉션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한 천적 천사들도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인류가 계속 이러한 성격으로 있을 수 없고,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여 신앙을 그 자체로 하나의 교리로 만들 것이 예견되었으므로, 그것들이 실제로 분리되도록 허용하시되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섭리하셨습니다. 곧 신앙을 통하여, 다시 말해 신앙에 관한 지식들을 통하여 사람들이 주님으로부터 체어리티를 받을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지식(cognitio), 곧 듣는 것이 먼저 오고, 그 후 지식 또는 들음을 통하여 체어리티, 곧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가 주님으로부터 주어지게 하셨습니다. 이 체어리티는 신앙과 분리될 수 없어야 할 뿐 아니라 신앙에서 주된 것을 이루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태고교회에 있었던 퍼셉션을 대신하여, 체어리티와 결합된 신앙을 통하여 얻어지는 양심이 뒤를 이었습니다. 이 양심은 무엇이 진리인지를 딕테이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딕테이트하였는데, 이는 주님께서 말씀에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홍수 후의 교회들은 대부분 이러한 성격이었으며, 주님의 강림 후 원시교회 또는 초대교회도 그러했습니다. 천적 천사들과 영적 천사들이 구별되는 것도 바로 이것에 의해서입니다. Before we proceed to elucidate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s before us, it is necessary to know how the case is with faith. The most ancient church was of such a character as to acknowledge no faith except that which is of love, insomuch that they were unwilling even to mention faith, for through love from the Lord they perceived all things that belong to faith. Such also are the celestial angels of whom we have spoken above. But as it was foreseen that the human race could not be of this character, but would separate faith from love to the Lord, and would make of faith a doctrine by itself, it was provided that they should indeed be separated, but in such a way that through faith, that is, through the knowledges of faith, men might receive from the Lord charity, so that knowledge [cognitio] or hearing should come first, and then through knowledge or hearing, charity, that is, love toward the neighbor, and mercy, might be given by the Lord, which charity should not only be inseparable from faith, but should also constitute the principal of faith. And then instead of the perception they had in the most ancient church, there succeeded conscience, acquired through faith joined to charity, which dictated not what is true, but that it is true, and this because the Lord has so said in the Word. The churches after the flood were for the most part of this character, as also was the primitive or first church after the Lord’s advent, and by this the spiritual angels are distinguished from the celestial.

 

해설

AC.393은 가인의 표에 대한 설명을 잠시 멈추고 신앙의 역사를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번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 우리 앞에 있는 말씀의 속뜻을 계속 밝혀 나가기 전에, 신앙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알아둘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어질 가인의 표를 이해하려면 먼저 태고교회에서 신앙과 사랑이 어떤 관계에 있었고, 이후 그 관계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AC.393은 단순한 삽입 설명이 아니라 AC.392에서 말한 ‘분리된 신앙의 보존’을 이해하는 교리적 열쇠입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는 어떠한 신앙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들이 ‘신앙’을 따로 언급하려 하지도 않았다는 설명입니다. 그들에게 사랑과 신앙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두 개의 별도 항목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 안에 있으면서 그 사랑을 통하여 신앙에 속한 것들을 퍼셉션했기 때문입니다. 먼저 어떤 교리를 배우고 그것이 참이라고 믿은 다음 사랑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가운데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내적으로 퍼셉션했습니다. 그래서 사랑과 신앙을 따로 떼어 ‘나는 이것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 자체가 그들의 본래적 질서와 맞지 않았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적 천사들도 이와 같다고 합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의 상태와 천적 천사의 상태 사이에 깊은 상응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천적 상태에서는 사랑이 중심이며 진리는 그 사랑 안에서 퍼셉션됩니다. 진리를 먼저 지적으로 확보하고 그 진리를 통하여 선으로 나아가는 질서가 아니라, 선 안에서 진리를 보는 질서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까지 ‘천적 인간은 사랑에서 신앙으로’라고 정리해 온 이유입니다.

 

그러나 인류가 계속 그러한 상태에 머물 수 없을 것이 예견되었습니다. 인간은 결국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고’, 신앙을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교리로 만들게 됩니다. 이것이 가인으로 표상된 분리의 핵심입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그 분리를 원하셨다고 이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분리는 인간의 타락에서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간이 그렇게 될 것을 예견하시고, 이미 낮아진 상태에서도 다시 체어리티를 받을 수 있는 길을 섭리하셨습니다.

 

그 새로운 길이 바로 ‘신앙에 관한 지식들에서 체어리티로’ 나아가는 질서입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퍼셉션했다면, 이후의 인간에게는 먼저 신앙에 관한 지식이 주어집니다. 사람은 말씀을 듣고 배우며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지식과 들음을 통하여 주님께서 체어리티, 곧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를 주십니다. 따라서 순서는 달라집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으로부터 신앙에 속한 것을 퍼셉션했다면, 이후의 영적 인간에게서는 신앙의 지식이 먼저 오고 그 지식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형성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먼저 지식만 충분히 쌓으면 나중에 자동으로 체어리티가 생긴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393은 체어리티가 ‘주님으로부터 주어진다’고 두 번이나 강조합니다. 지식 자체가 체어리티를 생산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의 진리를 듣고 배우는 것은 주님께서 사람에게 체어리티를 주실 수 있는 수단과 길이 됩니다. 사람이 그 진리를 받아들이고 삶으로 행하려 할 때 주님께서 그 안에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를 형성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질서에서도 생명의 근원은 여전히 주님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주어진 체어리티가 신앙과 ‘분리될 수 없어야 할 뿐 아니라 신앙에서 주된 것을 이루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순서와 주도권을 명확히 구별합니다. 시간적·교육적 순서에서는 신앙의 지식이 먼저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 질서와 주도권에서는 체어리티가 주된 것입니다. 이것은 AC.363에서 살펴본 원리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신앙이 먼저 배워질 수 있지만, 신앙이 지배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향하여 나아가야 하며, 체어리티가 신앙의 생명과 주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신앙이 먼저다’라는 말을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사람이 말씀을 듣고 진리를 배우는 교육적 순서에서 신앙의 지식이 먼저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본질적이고 우월하다는 뜻입니다. AC.393은 첫 번째 의미는 인정하지만 두 번째 의미는 분명히 부정합니다. 지식과 들음은 먼저 올 수 있지만, 그것을 통해 주님께서 주시는 체어리티가 신앙의 ‘주된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퍼셉션과 양심의 차이가 등장합니다. 태고교회에는 퍼셉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후에는 ‘체어리티와 결합된 신앙을 통하여 얻어지는 양심’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습니다. 이 양심은 퍼셉션과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매우 정밀하게 ‘양심은 무엇이 진리인지를 딕테이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딕테이트한다’고 말합니다.

 

이 차이는 처음에는 미묘해 보이지만 매우 큽니다. 퍼셉션을 가진 태고교회 사람은 사랑으로부터 어떤 것이 선하고 참된지를 내적으로 알아차렸습니다. 반면 양심을 가진 영적 인간은 먼저 말씀을 통해 진리를 배웁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말씀에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것은 진리이다’라는 내적인 딕테이트를 받습니다. 즉 양심이 독립적으로 새로운 진리를 발견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계시되고 배운 진리를 진리로 인정하고 그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말해 주는 것입니다.

 

이 설명은 앞의 AC.359와 AC.370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AC.359에서는 가인에게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을 ‘conscience dictated’, 곧 ‘양심이 말해 주었다’고 했습니다. 반면 AC.370에서는 같은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를 ‘체어리티에 관하여 그들에게 어떤 딕테이트를 주는, 내면에서 오는 어떤 퍼셉션’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두 표현을 억지로 하나로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AC.393은 태고교회에 고유한 퍼셉션과 이후 체어리티와 결합된 신앙을 통해 형성되는 양심이 서로 다른 영적 기능임을 분명히 합니다. 따라서 앞의 표현 차이도 그대로 보존하면서, 가인으로 표상되는 과도기적 상태 안에서 퍼셉션의 어떤 흔적과 양심이라는 표현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조심스럽게 읽어야 합니다.

 

특히 AC.393은 ‘홍수 후의 교회들은 대부분 이러한 성격이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따라서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홍수 후 고대교회의 양심을 시대적으로 무분별하게 섞어서는 안 됩니다. 홍수 후의 영적 교회에서는 말씀과 신앙의 지식이 먼저 주어지고, 그것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며, 그 체어리티와 결합된 신앙으로부터 양심이 형성됩니다. 이것이 태고교회의 천적 질서와 구별되는 영적 교회의 질서입니다.

 

더 나아가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강림 후 ‘원시교회 또는 초대교회’도 이러한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단순히 홍수 직후 어느 고대 종교집단만의 특수한 구조가 아닙니다. 사람이 말씀의 진리를 먼저 듣고 배우며, 그 진리를 삶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주님에게서 체어리티를 받고, 그 결과 양심이 형성되는 것은 영적 교회의 기본적인 거듭남의 질서입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차이가 천적 천사와 영적 천사를 구별한다고 말합니다. 천적 천사는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퍼셉션하고, 영적 천사는 진리를 통하여 선으로 인도되며 양심의 질서 안에서 살아갑니다. 둘 가운데 하나가 천국이고 다른 하나가 열등하여 천국이 아니라는 뜻은 아닙니다. 둘 다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지만 그 받아들이는 방식과 질서가 다릅니다. 이것이 천적과 영적의 중요한 구별입니다.

 

이제 AC.392의 ‘가인의 표’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인간이 사랑으로부터 직접 신앙에 속한 것을 퍼셉션하는 태고교회의 상태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었고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시키기 시작했을 때, 주님께서는 단순히 그 신앙을 없애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신앙의 지식이 보존되게 하시고, 훗날 그 지식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받을 수 있는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분리된 신앙을 보존하셨다는 것은 분리를 승인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에게도 다시 체어리티가 주어질 수 있도록 신앙의 지식을 구원의 수단으로 보존하셨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가인의 표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된 것은 타락이지만, 그렇다고 신앙에 관한 모든 지식을 파괴해 버리면 이후의 인간은 무엇을 통하여 체어리티로 인도될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인간의 상태가 낮아진 바로 그 자리에서 새로운 길을 마련하십니다. 사랑에서 직접 진리를 퍼셉션할 수 없게 된 사람에게 말씀을 듣게 하시고, 신앙의 지식을 배우게 하시며, 그 지식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시고, 체어리티와 결합된 신앙으로부터 양심을 형성하십니다.

 

따라서 AC.393은 단순히 ‘옛날에는 퍼셉션이 있었고 나중에는 양심이 생겼다’는 교회사적 설명이 아닙니다. 인간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길을 계속 이어 가시는 주님의 섭리를 보여 줍니다. 인간이 더 이상 천적 방식으로 주님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을 때 주님께서는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더 외적인 길을 통하여 다시 내적인 사랑과 체어리티로 인도하십니다.

 

결국 AC.393의 핵심은 ‘순서는 바뀌었지만 목적은 바뀌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으로부터 신앙이 나왔습니다. 이후 영적 교회에서는 신앙의 지식이 먼저 오고 그것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독립하여 생명을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체어리티는 신앙과 분리될 수 없으며 ‘신앙에서 주된 것’을 이루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가인의 신앙을 보존하신 것도 바로 이 목적을 위해서입니다. 분리된 신앙 자체를 영구히 존속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앙의 지식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가 주어지고 신앙과 사랑의 결합이 회복될 수 있도록 길을 남겨 두신 것입니다.

 

 

 

AC.394, 창4:15, ‘가인의 표와 천국의 결혼 - 분리된 신앙을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4이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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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2, 창4:15,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시다 - 분리된 신앙까지 보존하시는 이유’ (AC.392-396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And Jehovah said unto 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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