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교회와 그 후속 교회들 전반에 걸쳐 그중 퍼셉션과 관련된 것들로부터 교리들을 추출, 뼈대를 세우며 조직하던 사람들이 그때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런 일을 한 이유는, 이걸 기준으로 무엇이 선이요, 진리인지를 알게 하려는 것이었지요. 이 사람들이 바로 에녹입니다.

 

22절,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nd Enoch walked with God after he begat Methuselah three hundred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519

태고교회와 그 후속 교회들 전반에 걸쳐 그중 퍼셉션과 관련된 것들로부터 교리들을 추출, 뼈대를 세우며 조직하던 사람들이 그때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런 일을 한 이유는, 이걸 기준으로 무엇이 선이요, 진리인지를 알게 하려는 것이었지요. 이 사람들이 바로 ‘에녹’입니다. ‘그리고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라는 표현이 상징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며, 그래서 그들은 그걸 가리켜 교리라 하였는데, 이것은 ‘에녹’이라는 이름이 상징하는 바와 비슷합니다. 이 이름의 뜻이 ‘가르치다’이기 때문입니다. ‘동행하다’라는 표현 역시 같은 걸 상징하는데요, 그를 일컬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라 하지 ‘여호와와 동행하였다’라고는 하지 않는 걸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신앙의 교리를 따라 가르치며 사는 것이지만, ‘여호와와 동행하는 것’은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行)하다, 걷다, 살다’라는 표현은 살아가는 걸 상징하는 일상적인 말투입니다. 예를 들면, ‘법대로 살다’, ‘규범 가운데 살다’, ‘진실하게 살다’처럼 말입니다. ‘행하는 것’은 어떤 길이나 삶, 방식에 대한 적절한 레퍼런스를 갖는 것인데, 이 레퍼런스는 진리, 결과적으로는 신앙이나 신앙의 교리와 관련됩니다. 말씀에서 ‘행함’이 상징하는 바는 이어지는 구절들을 보면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There were some at that time who framed doctrines from the things that had been matters of perception in the most ancient and succeeding churches, in order that such doctrine might serve as a rule whereby to know what was good and true: such persons were called “Enoch.” This is what is signified by the words, “and Enoch walked with God”; and so did they call that doctrine; which is likewise signified by the name “Enoch,” which means to “instruct.” The same is evident also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expression to “walk,” and from the fact that he is said to have “walked with God,” not “with Jehovah”; to “walk with God” is to teach and live according to the doctrine of faith, but to “walk with Jehovah” is to live the life of love. To “walk” is a customary form of speaking that signifies to live, as to “walk in the law,” to “walk in the statutes,” to “walk in the truth.” To “walk” has reference properly to a way, which has relation to truth, consequently to faith, or the doctrine of faith. What is signified in the Word by “walking,” may in some measure appear from the following passages.

 

[2] 미가입니다. In Micah: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6:8) He hath showed thee, O man, what is good, and what doth Jehovah require of thee, but to do judgment and the love of mercy, and to humble thyself by walking with thy God? (Micah 6:8)

 

여기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상징하는 바는 여기서 가리키는 것들을 따라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 ‘하나님과 함께(with God)라는 표현에 대해서, 에녹에 대한 다른 성경(히브리 성경)에서는 ‘하나님과 함께로부터(from with God)를 상징하고 있는데, 이 표현은 좀 애매합니다. where to “walk with God” signifies to live according to the things here indicated; here, however, it is said “with God,” while of Enoch another word is used which signifies also “from with God,” so that the expression is ambiguous.

 

시편입니다. In David: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시56:13) Thou hast delivered my feet from impulsion, that I may walk before God in the light of the living, (Ps. 56:13)

 

여기 ‘하나님 앞에서 다니는 것’은 신앙의 진리, 곧 ‘생명의 빛’ 가운데 다니는 것입니다. where to “walk before God” is to walk in the truth of faith, which is the “light of the living.”

 

이사야에서도 같습니다. In like manner in Isaiah: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9:2) The people that walk in darkness see a great light. (Isa. 9:1)

 

그래서 주께서 모세를 통해 말씀하시기를 So the Lord says by Moses: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 (레26:12) I will walk in the midst, and will be your God, and ye shall be my people, (Lev. 26:12)

 

율법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야 할 것을 상징합니다. signifying that they should live according to the doctrine of the law.

 

[3] 예레미야입니다. In Jeremiah:

 

그들이 사랑하며 섬기며 뒤따르며 구하며 경배하던 해와 달과 하늘의 뭇 별 아래에서 펼쳐지게 하리니 (렘8:2) They shall spread them before the sun, and the moon, and to the armies of the heavens, whom they have loved, and whom they have served, and after whom they have walked, and whom they have sought, (Jer. 8:2)

 

여기 보면, 사랑에 속한 것들과 신앙에 속한 것들 사이 뚜렷한 차이를 두는데요, 전자는 ‘사랑하며’와 ‘섬기며’로, 후자는 ‘뒤따르며’와 ‘구하며’로 각각 표현하고 있습니다. 모든 예언서들을 보면, 모든 표현들을 아주 정교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어떤 용어가 다른 것의 자리에 대신 사용되는 일조차 절대 없습니다. 말씀에서 ‘여호와와 함께 걷다’나 ‘여호와 앞에’라는 표현은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where a manifest distinction is made between the things of love, and those of faith; the things of love being expressed by “loving” and “serving”; and those of faith by “walking” and “seeking.” In all the prophetical writings every expression is used with accuracy, nor is one term ever used in the place of another. But to “walk with Jehovah,” or “before Jehovah,” signifies, in the Word, to live the life of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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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것은 그 교회의 상태에 대한 그들의 관계로 결정된다

 

13-14절, 13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nd Kenan lived after he begat Mahalalel eight hundred and forty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14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all the days of Kenan were nine hundred and ten years; and he died.

 

509

여기서 꼭 주목했으면 하는 것은, 이 모든 것은 그 교회의 상태에 대한 그들의 관계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It is here only to be remarked, that all things are determined by their relation to the state of the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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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교회 멤버들에게도 역시 퍼셉션이 있었다. 비록 더 일반적인 방식으로만 지각했지만...

 

13-14절, 13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nd Kenan lived after he begat Mahalalel eight hundred and forty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14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all the days of Kenan were nine hundred and ten years; and he died.

 

508

여기 ‘’과 ‘’의 수들(The days and numbers of years)은 앞서와(AC.482, 487, 488) 같은 의미입니다. 여기 자녀 또한 진리와 선을 의미합니다(AC.55:2, 486, 489491). 이 교회 멤버들에게도 역시 퍼셉션이 있었습니다. 비록 더 일반적인 방식으로만 지각했지만 말입니다. 그가 죽었다라는 것은 이런 퍼셉션의 상태가 멈추는, 중단되는 것과 같은 걸 말합니다. The “days” and numbers of “years” have the same signification here as before. Sons and daughters” here also signify truths and goods, whereof the members of the church had a perception, but in a more general manner. That he “died” signifies in like manner the cessation of such a state of perception.

 

※ 퍼셉션이란, 개략적으로는 주님의 신성을 호흡할 수 있는, 즉 주님의 선과 진리를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타고나는 역량으로, 이것이 있어야 교회든 개인이든 주님과 연결되며, 주님과 연결되어 있어야 ‘살아있는’ 것입니다. 만일 어느 개인이나 교회가 더 이상 이 퍼셉션이 작동하지 않는다면 그는 ‘살았으나 사실은 죽은’ 상태입니다. 지금 이 창세기 본문에서 ‘몇 세를 살고 죽었다’라는 건 그 교회가 주님의 퍼셉션으로 지상에 머물렀던 상태와 그 변화를 말하는 것인데, 퍼셉션의 유무로 어느 교회의 삶을 말하는 건 이 태고교회에만 해당합니다. 노아의 홍수 이후 세대는 퍼셉션이 아닌 양심이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주님과 연결되기 때문이며, 이 퍼셉션의 고갈로 태고교회는 노아의 홍수라는 종말을 맞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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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난, 퍼셉션에 있어 보다 더 완전한 교회인 아담’, ’, 에노스’, 위 세 교회 중 하나로 여겨질 정도는 아니다.

 

12절, 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And Kenan lived seventy years, and begat Mahalalel.

 

507

게난’이라 하는 교회는 퍼셉션에 있어 보다 더 완전한 교회인 위 세 교회 중 하나로 여겨질 정도는 아닙니다. 이들 세 교회는 퍼셉션에 있어 전에는 뚜렷했지만 지금은 평범해지기 시작했지요. 비유하자면, 마치 열매나 씨의 핵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첫 번째 막과도 같이 말이지요. 이런 상태는 사실 어떻게 설명할 수는 없는데, 하지만 이어지는 후속 교회들, 예를 들면, ‘에녹’, ‘노아’라 하는 교회들의 상태를 보면 분명히 다릅니다. The church called “Kenan” is not to be so much reckoned among those three more perfect ones, inasmuch as perception, which in the former churches had been distinct, began now to become general, comparatively as are the first and softer membranes relatively to the kernel of fruits or seeds; which state is not indeed described, but still is apparent from what follows, as from the description of the churches called “Enoch” and “No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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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교회의 퍼셉션 역량은 선과 진리에 관한 지각만이 아닌, 나아가 그걸 가지고 선을 실천함으로써 맛보는 행복과 기쁨으로 되어 있었다.

 

9절,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And Enosh lived ninety years, and begat Kenan.

 

503

태고교회의 퍼셉션 역량은 선과 진리에 관한 지각만이 아닌, 나아가 그걸 가지고 선을 실천함으로써 맛보는 행복과 기쁨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선을 행할 때 맛보는 이런 행복과 기쁨 없는 그런 퍼셉션 역량에는 아무런 생명이 없습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이런 행복과 기쁨으로 말미암아 퍼셉션 역량은 생명을 받는 것입니다. 태고교회가 즐겁게 누렸던 것과 같은 것이 바로 사랑과 사랑에서 오는 신앙의 생명인데요, 이것이 곧 쓰임새의 삶, 즉 쓰임새의 선과 진리 안에 있는 동안 허락되는 생명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생명은 쓰임새로부터, 쓰임새에 의해, 그리고 쓰임새를 따릅니다. 쓸모없는 것 안에는 생명이 없는데요, 쓸모가 없는 것은 버림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태고인들은 주님의 모양들(likenesses of the Lord)이었고, 그래서 퍼셉션 능력(perceptive powers) 가운데서 그들은 주님의 형상들(images of him)이 되었습니다. 퍼셉션 능력은 선과 진리가 무엇인지를, 그 결과 신앙이란 무엇인가를 아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아는 것으로만 기뻐하지 않고, 선과 진리를 행하는 것, 즉 쓰임새의 사람이 되는 것으로 기뻐합니다. The perceptive facul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consisted not only in the perception of what is good and true, but also in the happiness and delight arising from well doing; without such happiness and delight in doing what is good the perceptive faculty has no life, but by virtue of such happiness and delight it receives life. The life of love, and of the derivative faith, such as the most ancient church enjoyed, is life while in the performance of use, that is, in the good and truth of use: from use, by use, and according to use, is life given by the Lord; there can be no life in what is useless, for whatever is useless is cast away. In this respect the most ancient people were likenesses of the Lord, and therefore in perceptive powers they became images of him. The perceptive power consists in knowing what is good and true, consequently what is of faith: he who is in love is not delighted in knowing, but in doing what is good and true, that is, in being usef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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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교회, ‘아담(사람, man), ‘’, ‘에노스는 함께 태고교회를 구성하면서도 그러나 퍼셉션에 관한 온전함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

 

9절,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And Enosh lived ninety years, and begat Kenan.

 

502

이들 세 교회, ‘아담(사람, man), ‘’, ‘에노스’는 함께 태고교회를 구성하면서도 그러나 퍼셉션에 관한 온전함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습니다. 첫 번째 교회의 퍼셉션 역량(faculty)은 앞서 살핀 열매나 씨, 그리고 두뇌의 경우처럼, 그 후속 교회들로 계승되어 내려가면서 점차 줄어들고 흐릿해졌습니다. 완벽(perfection), 완전, 온전함이란 사물을 뚜렷하게 지각하는 역량으로 구성되는데, 이 역량은 퍼셉션이 덜 뚜렷, 덜 명료 및 더욱 평범해지면서 줄어듭니다. 그렇게 전엔 훨씬 명료했던 자리를 이젠 더 모호, 애매해진 퍼셉션이 계승하면서, 퍼셉션은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These three churches, “man,” “Seth,” and “Enosh,” constitute the most ancient church, but still with a difference of perfection as to perceptions: the perceptive faculty of the first church gradually diminished in the succeeding churches, and became more general, as observed concerning fruit or its seed, and concerning the brain. Perfection consists in the faculty of perceiving distinctly, which faculty is diminished when the perception is less distinct and more general; an obscurer perception then succeeds in the place of that which was clearer, and thus it begins to vanish a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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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교회가 어떻게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는 퍼셉션이 무엇인지를 알기 전까지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5절,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all the days that man lived were nine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he died.

 

495

태고교회가 어떻게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는 퍼셉션이 무엇인지를 알기 전까지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태고교회는 퍼셉션이 있었던 교회였고, 오늘날엔 그런 교회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 교회의 퍼셉션은 이런 것으로 구성됩니다. 곧 그 교회의 구성원들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마치 천사들처럼 선악을 구별합니다. 이 선악은 사람들 사는 시민 사회의 선악과 같은 것이 아니고, 주님 사랑과 주님 신앙에 속한 선악을 말합니다. 생활로 확인되는 신앙고백을 통해 퍼셉션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존재하는지 여부를 알 수 있는, 그런 것입니다. How the most ancient church decreased cannot appear unless it be known what perception is, for it was a perceptive church, such as at this day does not exist. The perception of a church consists in this, that its members perceive from the Lord what is good and true, like the angels; not so much what the good and truth of civic society is, but the good and truth of love to the Lord and of faith in him. From a confession of faith that is confirmed by the life it can be seen what perception is, and whether it has any existence.

 

※ 즉 실천, 생활, 삶이 따라주는, 받쳐주는 신앙이 진짜 신앙이라는 말입니다. 선은 실천에 옮겨진 진리이며, 진리는 실천할 때 선이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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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죽었다’는 것은 그런 퍼셉션, 즉 아담교회 때 있었던 퍼셉션이 더이상은 존재하지 않았다라는 의미입니다.

 

5절,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all the days that man lived were nine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he died.

 

494

그가 ‘죽었다’는 것은 그런 퍼셉션, 즉 아담교회 때 있었던 퍼셉션이 더이상은 존재하지 않았다라는 의미임은 ‘죽다’라는 단어의 의미, 즉 어떤 것이 더이상 예전처럼 있기를 그만두다라는 의미임을 생각할 때 분명합니다. That he “died” signifies that there was no longer such perception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word “die,” which is, that a thing ceases to be such as it has been.

 

※ 퍼셉션은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합니다. 각 천국마다 다르고, 해당 천국의 무수한 공동체들마다, 그리고 해당 공동체 각 개인마다도 다릅니다. 이것은 한 분 주님한테서 이렇게 다양한 퍼셉션이 나오는 게 아니라 각 천국마다, 각 공동체마다, 그리고 각 천사마다 그 역량, 곧 주님의 신성인 선과 진리를 담는 역량 차이에 따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입니다. Thus in John:

 

1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2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계3:1-2) Unto the angel of the church in Sardis write, These things saith he that hath the seven spirits, and the seven stars; I know thy works, that thou art said to live, but art dead; be watchful, and strengthen the things which remain, that are ready to die; for I have not found thy works perfect before God. (Rev. 3:1–2)

 

예레미야입니다. In Jeremiah:

 

내가 너와 너를 낳은 어머니를 너희가 나지 아니한 다른 지방으로 쫓아내리니 너희가 거기에서 죽으리라 (렘22:26) I will cast out thy mother that bare thee, into another country where ye were not begotten, and there shall ye die, (Jer. 22:26)

 

여기 ‘어머니’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where “mother” signifies the church.

 

지금까지 말씀드린(AC.407, 468) 것처럼 이 교회의 경우, 처음 상태, 정말 깨끗했던 온전함이 시간이 흐를수록 줄어들고 퇴색되며, 잃게 되었는데, 그 주된 이유는 악의 세습 및 증가였는데, 역대 모든 부모마다 자기가 타고난 악에다 새로운 악을 더했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모든 실제적 악은 일종의 본성을 옷 입습니다. 그리고는 종종 재발 시, 그들의 본성이 되고, 그렇게 그들의 유전 악에 더해집니다. 이런 식으로, 자녀들에게 전이되고, 그렇게 후손에게 전해집니다. 이런 식으로, 유전 악은 후손들에 이르러 엄청나게 증가합니다. 이것이 그렇다는 것은 아이들의 악한 기질이 정확히 그들의 조상의 것과 똑같은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담으로부터 우리에게 이식되어 유전되어 온 악 외에 다른 유전 악은 없다 주장하는 사람들의 견해는 완전 거짓입니다. (cf. AC.313) 진실은 이렇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고유한 죄를 실제로 지어 유전 악을 만들며, 그걸 자기가 물려받은 악에다 보태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악은 모든 후손들 가운데 축적되며 남습니다. 주님에 의해 거듭나고 있는 사람들한테서만 줄어드는 거 빼고 말입니다. 모든 교회마다 이것이 타락, 퇴보의 첫째 원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태고교회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For as we have said, the case with the church is that it decreases and degenerates, and loses its pristine integrity, chiefly by reason of the increase of hereditary evil, for every succeeding parent adds new evil to that which he has inherited. All the actual evil in the parents puts on a kind of nature, and when it often recurs, becomes natural to them, and is added to their hereditary evil, and is transmitted into their children, and so to posterity. In this way the hereditary evil is immensely increased in the descendants. That this is so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 evil dispositions of children are exactly like those of their progenitors. Quite false is the opinion of those who think that there is no hereditary evil except that which they allege to have been implanted in us from Adam (see n. 313). The truth is that everyone makes hereditary evil by his own actual sins, and adds it to the evils that he has inherited, and in this way it accumulates, and remains in all the descendants, nor is it abated except in those who are being regenerated by the Lord. In every church this is the principal cause of degeneration, and it was so in the most ancient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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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s) (years, )(times)와 상태(states), ‘사람의 죽음은 그런 퍼셉션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

 

5절,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all the days that man lived were nine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he died.

 

492

여기 ‘(days)과 ‘(years, )는 위에서처럼(AC.482, 487, 488) 때(times)와 상태(states)를, ‘사람의 죽음’은 그런 퍼셉션(perception)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By “days” and “years” are here signified times and states, as above; by “man’s dying” is signified that such perception no longer exis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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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장 4, 7, 10, 13, 16, 19, 26  30절 등에 나오는 자녀들’’(sons and daughters)의 속뜻 선과 진리이며, 이는 그 시절, 퍼셉션으로 지각되었고, 태고교회는 이 퍼셉션으로만 설명 가능한 교회였으며, 이 퍼셉션은 이후 이어지는 모든 교회의 원리요, 부모였다.

 

4절,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nd the days of man after he begat Seth were eight hundred years; and he begat sons and daughters.

 

491

본 장 4, 7, 10, 13, 16, 19, 26 및 30절 등에 나오는 ‘아들’과 ‘’은 같은 걸 상징합니다. 이런 것이 교회요, 이런 것이 ‘자녀들’’(sons and daughters), 즉 이런 것이 선과 진리입니다. 여기서 말씀드린 진리와 선은 뚜렷하게 지각된 것인데요, 태고교회가 바로 이것들로 설명이 되며, 다른 모든 이어지는 교회들의 원리요, 부모였기 때문입니다. The same things are signified by “sons” and “daughters” in this chapter (verses 4, 7, 10, 13, 16, 19, 26, 30), but such as is the church, such are the “sons and daughters,” that is, such are the goods and truths; the truths and goods here spoken of are such as were distinctly perceived, because they are predicated of the most ancient church, the principal and parent of all the other and succeeding church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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