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2026/10/18)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8, ‘성도들아 찬양하자’, 찬131, ‘다 나와 찬송부르세’입니다.

 

오늘은 창5 절별 주석 그 두 번째, 6절로 14절, AC 글 번호로는 496번에서 509번입니다. 먼저 창세기 본문입니다.

 

 

6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7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8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9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10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1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12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13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4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6-14)

 

 

제목은

 

흐려지는 퍼셉션, 변함없는 주님의 섭리

 

 

이며, 다음은 이 특별한 예배를 위한 ‘3분 요약’입니다.

 

오늘 리딩에 들어가기 전에, 지금까지의 큰 흐름을 잠깐 돌아보겠습니다. 우리는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라틴 Arcana Coelestia, 영어 Secrets of Heaven, 天界秘義, 1749-1756, 창, 출 속뜻 주석, 총 10,837개 글)를 따라 창세기의 문자적 의미를 존중하면서 그 속뜻을 함께 읽고 있습니다. 창1에서는 천지창조를 인간의 거듭남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여섯 날의 과정을 통하여 사람을 영적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일곱째 날의 안식에 이르러 사랑으로 살아가는 천적 인간으로 이끄십니다.

 

창2에서는 에덴동산을 통하여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알아차리는 ‘퍼셉션’(perception)을 지녔으며, 신앙은 사랑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창3에서는 사람이 주님보다 자신의 감각과 ‘프로프리움’(proprium)을 신뢰하면서 이 질서가 무너졌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인간이 더 깊은 파멸에 이르지 않도록 보호하시며 구원의 길을 보존하셨습니다.

 

창4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charity)의 관계를 살펴보았습니다. 가인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을 통해 체어리티인 아벨이 죽임을 당했고, 그 계열은 라멕에 이르러 황폐해졌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가인의 표’를 통하여, 그러나 신앙 자체를 보존하시고, 셋과 에노스를 통하여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가 다시 이어지게 하셨습니다. 인간의 황폐보다 더 깊은 주님의 섭리를 보았습니다.

 

지난주 시작한 창5에서는 또 다른 계열인 셋 계열을 통해 아담에서 노아까지의 족보가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지는 여러 교회의 계승과 변화를 나타낸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최초의 태고교회에서는 사랑과 신앙이 하나였고,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였습니다. 그러나 셋 교회에 이르면서 그 완전성에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오늘은 그 변화가 에노스와 게난으로 이어지면서 어떻게 깊어지는지 살펴봅니다. 특별히 기억할 것은 ‘참된 신앙의 생명은 진리를 아는 데만 있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으로 선을 행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마음으로 오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다음은 오늘 리딩 범위인 AC.496-509 요약입니다.

 

지난주 우리는 창5:1-5을 통하여, 태고교회가 어떤 교회였으며 그 뒤를 이은 셋(Seth) 교회가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태고교회는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부터 신앙이 나오는 천적 교회였습니다. 그들에게는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주님으로부터 내적으로 알아차리는 ‘퍼셉션’이 있었습니다. 신앙과 사랑은 여전히 결합되어 있었지만, 그러나 셋 교회에 이르면서 사랑의 중심성과 퍼셉션의 완전성에는 이미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오늘은 그다음 말씀인 창5:6-14, AC.496-509를 읽습니다. 여기에는 셋이 에노스(Enosh)를 낳고, 에노스가 게난(Kenan)을 낳으며, 게난이 다시 마할랄렐(Mahalalel)을 낳는 계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지난주와 마찬가지로 이름과 나이, 자녀들의 출생과 죽음이 반복되는 족보입니다. 그러나 속뜻으로는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진 여러 교회가 어떻게 서로 다른 상태를 거치며 변화해 갔는지를 보여 줍니다.

 

먼저 6절은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라고 합니다. AC.496-498에 따르면 여기서 ‘셋’은 태고교회의 뒤를 이은 두 번째 교회이며, ‘에노스’는 셋 교회로부터 이어져 나온 또 하나의 교회입니다. 셋 교회는 최초의 태고교회보다 덜 천적이었지만, 여전히 가장 오래된 교회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셋이 에노스를 낳았다는 것은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이 태어났다는 사실을 넘어, 한 교회로부터 다음 교회가 이어져 나왔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어졌다’는 사실과 ‘달라졌다’는 사실을 함께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노스 교회는 셋 교회로부터 무엇인가를 이어받았지만, 셋 교회와 완전히 같은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앞선 교회가 지녔던 천적 생명과 퍼셉션이 후대의 교회에 그대로 전달된 것이 아니라, 그 본질적인 것들이 점차 감소하였습니다. 따라서 창5의 계보는 단순히 여러 교회가 차례로 생겨났다는 기록이 아니라, 교회의 내적 상태가 세대를 따라 어떻게 달라져 갔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AC.497은 이러한 변화를 ‘교회는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지나면서 본질적인 것들에 있어 점차 감소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교회의 외적 모습이 반드시 먼저 사라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교회라는 이름도 남아 있고, 신앙의 형식도 남아 있으며, 앞선 세대가 전해 준 진리도 상당 부분 보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있어야 할 주님을 향한 사랑과 선을 행하는 생명, 그리고 그 사랑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는 능력은 점차 약해질 수 있습니다. 이어 7절과 8절에서는 셋이 에노스를 낳은 뒤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고,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다고 합니다. AC.499는 여기서도 ‘날들’과 ‘연수’는 때와 상태들을, ‘아들들과 딸들’은 진리들과 선들을, ‘죽었다’는 것은 그 교회의 고유한 상태가 끝났음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셋 교회가 오래 살았다는 것은 그 교회가 일정한 상태들을 지나며 존속했다는 뜻이고, 자녀들을 낳았다는 것은 그 안에서 진리와 선이 생겨났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죽었다는 것은 셋 교회를 특징짓던 고유한 상태가 더 이상 계속되지 않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것의 완전한 소멸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셋으로부터 이미 에노스라는 다음 교회가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이제 9절은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라고 합니다. AC.500은 에노스를 세 번째 교회, 게난을 네 번째 교회라고 밝힙니다. 에노스는 셋보다 더욱 덜 천적이었지만, 여전히 가장 오래된 교회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렇게 태고교회에서 셋으로, 셋에서 에노스로, 다시 에노스에서 게난으로 이어지면서 교회의 천적 상태는 점차 약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는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AC.501은 이를 설명하기 위하여 두 가지 비유를 사용합니다. 하나는 ‘열매와 씨앗’이고, 다른 하나는 ‘뇌와 그 덮개들’입니다. 열매나 씨앗의 가장 안쪽에는 생명을 품고 있는 중심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열매의 열매’, 또는 ‘씨앗의 씨앗’이라고 표현합니다. 그 중심에서 바깥으로 나아갈수록 본질적인 것은 점차 적어지고, 마침내 얇은 껍질과 덮개에 이릅니다. 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내적인 섬세한 조직으로부터 점차 더 일반적이고 조밀한 덮개들이 이어져 마지막에는 두개골에 이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비유를 사용하는 이유는 태고교회 이후의 교회들이 서로 아무 관계 없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앞선 교회로부터 일정한 질서를 따라 이어졌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최초의 가장 내적 중심으로부터 멀어질수록 그 본질적 생명은 점차 감소하였습니다. 태고교회에서 셋으로, 셋에서 에노스로, 다시 게난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바로 그러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껍질’이나 ‘덮개’ 자체가 악하다는 뜻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껍질은 열매를 보호하고 덮개는 그 안에 있는 것을 감쌉니다. 문제는 껍질이 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어야 할 생명이 점차 사라지는 데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리와 예배, 신앙의 형식과 전통은 모두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심에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가 살아 있지 않다면, 교회는 겉모습을 유지하면서도 그 본질적 생명은 잃어 갈 수 있습니다.

 

AC.502는 이러한 쇠퇴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더욱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그것은 바로 ‘퍼셉션의 완전성이 감소하는 것’입니다. 최초의 태고교회인 ‘사람’, 곧 아담 교회와 그 뒤를 이은 셋과 에노스 교회는 모두 태고교회에 속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지닌 퍼셉션의 완전성은 서로 달랐습니다. 최초의 교회에서는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매우 명료하게 퍼셉션할 수 있었지만, 후대의 교회들에서는 그 능력이 점차 약해지고 더욱 일반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더욱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는 것은 퍼셉션의 범위가 넓어져 더 좋아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전에는 선과 진리의 차이와 그 성질을 매우 분명하고 세밀하게 알아차렸지만, 후대로 갈수록 그것을 점점 덜 명료하게, 보다 막연하게 퍼셉션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처음에는 분명했던 것이 점차 흐릿해졌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퍼셉션의 완전성이 ‘명료하게 퍼셉션하는 능력’에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퍼셉션이 더욱 일반적이고 흐릿한 것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이 줄어든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내적으로 받아들이고 분별하는 능력이 점차 약해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AC.503에 이르면 퍼셉션에 관한 더욱 깊은 가르침이 나타납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은 단순히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아는 능력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선을 행함으로써 생기는 행복과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행복과 기쁨이 없다면 퍼셉션 능력에는 생명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무엇이 옳은지 알고 무엇이 선인지 분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선을 실제로 행하기를 사랑하고, 선을 행할 때 기쁨을 느끼는 것이 살아 있는 퍼셉션의 본질이었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진리를 아는 것과 선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그 선을 행하는 것이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쓰임’이라는 개념을 소개합니다. 사랑은 단순히 마음속에 있는 좋은 감정이 아닙니다. 사랑은 실제로 선을 행하고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쓰임으로 나타납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은 이러한 쓰임 안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특히 AC.503은 ‘주님께서는 쓰임으로부터, 쓰임을 통하여, 그리고 쓰임에 따라 생명을 주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생명의 근원이 인간의 행위에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생명의 근원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다만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과 선이 인간 안에서 실제적인 쓰임으로 나타날 때, 그 사랑과 신앙이 살아 있는 생명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단지 아는 것 자체에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진리를 행하는 것, 곧 쓰임 있는 사람이 되는 데서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AC를 읽는 목적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말씀의 속뜻을 많이 알고, 상응을 정확히 이해하며, 교리를 깊이 공부하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앎이 마지막 목적은 아닙니다. 그 진리가 실제 삶에서 사랑과 체어리티가 되고,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진리에 관한 지식은 많아질 수 있어도 그 안의 영적 생명은 그만큼 자라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지난주 살펴본 ‘천국의 기쁨은 쓰임에 있다’는 가르침과 오늘의 AC.503은 깊이 연결됩니다. 천국의 천사들이 이웃을 섬기는 데서 기쁨을 누리는 것처럼, 태고교회 사람들 역시 선을 행하는 데서 행복과 기쁨을 누렸습니다. 사랑은 선을 행하는 데서 기뻐하고, 그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퍼셉션합니다. 이것이 태고교회가 지녔던 천적 생명의 질서였습니다. 그러므로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쇠퇴했다는 것은 단지 특별한 영적 감각이 약해졌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그 퍼셉션에 생명을 주던 사랑과 선한 쓰임의 기쁨 역시 약해져 갔다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사랑의 생명이 약해지면 그 사랑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보는 능력도 함께 흐려지기 때문입니다.

 

이제 10절과 11절에서는 에노스가 게난을 낳은 뒤 자녀들을 낳고,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다고 합니다. AC.504-505는 여기서도 앞서 설명한 ‘날들과 연수’, ‘아들들과 딸들’, ‘죽음’의 의미가 그대로 적용된다고 밝힙니다. 그러나 AC.505는 한 가지 중요한 구별을 덧붙입니다. 최초의 ‘사람’ 교회와 셋, 에노스라는 세 교회는 뒤에 이어지는 교회들과 비교할 때 열매나 씨앗의 ‘알맹이’와 같았다는 것입니다. 반면 그 뒤에 이어지는 교회들은 그 알맹이를 둘러싼 ‘막과 같은 부분들’에 비유됩니다. 이것은 창5의 계보에 하나의 중요한 경계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최초의 사람 교회, 곧 아담 교회에서 셋과 에노스로 이어지는 동안에도 퍼셉션은 점차 감소했지만, 이 세 교회는 여전히 태고교회의 가장 내적 생명에 가까운 교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게난부터는 그 상태가 한층 더 외적인 것으로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12절에서 ‘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라고 합니다. AC.506은 게난을 네 번째 교회, 마할랄렐을 다섯 번째 교회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AC.507에서는 게난 교회의 상태를 더욱 구체적으로 밝힙니다. 게난은 앞선 세 교회처럼 더 완전한 교회들 가운데 포함시키기 어려웠습니다. 앞선 교회들에서는 비교적 명료했던 퍼셉션이 게난에 이르러 더욱 일반적인 것이 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열매나 씨앗의 알맹이를 둘러싼 ‘첫 번째의 더 부드러운 막’에 비유합니다. 여기서도 변화는 갑작스러운 단절이 아닙니다. 게난 교회가 곧바로 가장 바깥의 딱딱한 껍질처럼 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직 알맹이에 가까운 부드러운 막에 해당했습니다. 다시 말해 최초의 태고교회가 지녔던 내적 생명으로부터 조금 더 멀어졌지만, 여전히 그 계승 안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퍼셉션의 상태에는 분명한 변화가 있었습니다. 이전에는 선과 진리를 비교적 명료하게 퍼셉션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 구체적인 차이와 성질을 이전처럼 분명하게 알아차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퍼셉션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점차 덜 명료하고 더욱 일반적인 것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앞으로 이어질 에녹(Enoch)과 노아(Noah)의 교회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인간이 태고교회와 같은 퍼셉션을 점차 유지하지 못하게 되자, 훗날 에녹을 통하여 퍼셉션에서 나온 것들이 교리의 형태로 보존되고, 마침내 노아에 이르러 새로운 교회의 질서가 준비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주님의 섭리를 보게 됩니다. 인간의 내적 상태가 약해지고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능력이 달라진다고 해서, 주님께서는 곧바로 인간을 버리시거나 교회의 역사를 끝내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에 맞추어 선과 진리를 계속 보존하시며, 다음 교회가 이어질 길을 마련하십니다.

 

이어 13절과 14절에서는 게난이 마할랄렐을 낳은 뒤 자녀들을 낳고,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다고 합니다. AC.508은 여기서도 ‘아들들과 딸들’이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차이가 있습니다. 게난 교회의 구성원들은 그 진리와 선을 ‘더욱 일반적인 방식으로’ 퍼셉션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앞선 교회에도 진리와 선이 있었고, 게난 교회에도 진리와 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이고 퍼셉션하는 상태는 같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같은 ‘아들들과 딸들’이라는 표현이 반복되어도, 그 표현이 나타내는 진리와 선의 구체적인 어떠함은 각각의 교회에 따라 달라집니다. ‘죽었다’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게난이 죽었다는 것은 게난 교회를 특징짓던 그러한 퍼셉션의 상태가 끝났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교회에 속했던 모든 선과 진리가 완전히 없어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미 게난으로부터 마할랄렐이라는 다음 교회가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AC.509는 이 모든 내용을 한 문장으로 정리합니다. ‘모든 것이 교회의 상태와의 관계에 따라 결정된다.’ 이 짧은 문장은 창5뿐 아니라 말씀의 상응을 이해하는 데도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아들들’은 진리를, ‘딸들’은 선을, ‘날들과 연수’는 때와 상태들을, ‘죽었다’는 것은 어떤 상태의 끝을 의미한다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응의 기본 의미를 안다고 해서 그 말씀이 나타내는 구체적인 속뜻까지 모두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아들들’이 진리를 의미하더라도 그것이 어떤 교회에서 나온 진리인지에 따라 그 진리의 질이 달라집니다. 같은 ‘딸들’이 선을 의미하더라도 그 선이 어떤 사랑과 퍼셉션의 상태에 속하는지에 따라 그 어떠함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같은 ‘죽었다’는 말씀도 무엇의 끝인지는 해당 교회의 고유한 상태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상응은 몇 가지 단어의 뜻을 외워서 성경에 기계적으로 대입하는 암호표가 아닙니다. 상응에는 일정한 질서와 기본 의미가 있지만, 그 구체적인 의미는 전체 문맥과 그것이 관계하는 영적 상태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말씀을 읽는 태도에도 중요한 가르침을 줍니다. 상응의 지식을 많이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상응을 통하여 주님께서 어떤 영적 상태를 드러내고 계시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같은 말씀을 읽더라도 그 말씀이 어떤 사랑과 선, 어떤 신앙과 진리의 상태에 관계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이렇게 오늘의 AC.496-509를 하나로 모아 보면, 창5의 계보에는 두 가지 흐름이 함께 나타납니다. 하나는 ‘퍼셉션의 점진적인 쇠퇴’입니다. 최초의 태고교회에서 셋으로, 셋에서 에노스로, 다시 게난으로 이어지면서 선과 진리를 내적으로 퍼셉션하는 능력이 점차 약해졌습니다. 처음에는 매우 명료했던 퍼셉션이 점점 덜 명료해지고, 더욱 일반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열매와 씨앗의 알맹이에서 그것을 둘러싼 부드러운 막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교회의 내적 상태도 점차 외적인 것으로 변화하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그 쇠퇴 속에서도 계속되는 주님의 보존과 계승’입니다. 한 교회의 고유한 상태가 끝나더라도 주님께서는 그 가운데 남아 있는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며 다음 교회가 이어지게 하십니다. 인간이 최초의 상태를 계속 유지하지 못하더라도, 주님께서는 그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에 맞추어 구원의 길을 계속 마련하십니다.

 

그리고 이 두 흐름의 중심에는 오늘 AC.503에서 살펴본 매우 중요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바로 ‘참된 영적 생명은 사랑이 선한 쓰임으로 나타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태고교회가 지녔던 퍼셉션의 생명은 단지 선과 진리를 아는 능력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 선을 행하는 데서 행복과 기쁨을 느끼는 사랑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참된 생명도 얼마나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는가, 얼마나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가, 얼마나 완전한 형식을 갖추고 있는가에만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의 중심에 주님을 향한 사랑이 살아 있으며, 그 사랑이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나타나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읽고 진리를 배우며 신앙의 지식을 쌓아 갑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선을 행하는 기쁨이 점점 커지고 있는지, 아니면 아는 것은 많아지지만 실제로 사랑하고 섬기는 마음은 오히려 약해지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진리를 많이 아는 것과 그 진리로 살아가는 것은 서로 다른 일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태고교회와 같은 퍼셉션이 주어져 있지 않지만, 주님께서는 말씀과 진리를 통하여 양심이 형성되도록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말씀에서 배운 진리를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실제 삶에서 행할 때, 그 진리는 단순한 지식으로 머무르지 않고 우리 안에서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특별한 퍼셉션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미 주신 진리를 사랑하고 그 진리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아는 진리가 이웃을 판단하는 도구가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길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을 행하는 일을 무거운 의무로만 여기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흘러가는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오늘 창5:6-14은 우리에게 교회의 쇠퇴만을 보여 주지 않습니다. 그 쇠퇴의 한가운데서도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을 보여 줍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점차 흐려지는 동안에도 주님께서는 선과 진리의 근원이기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능력은 약해졌지만,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진리 자체가 약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달라진 것은 주님이 아니라 인간의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바로 그 달라진 상태를 아시고, 그 상태에 맞추어 다음 교회를 준비하셨습니다. 셋에서 에노스로, 에노스에서 게난으로, 다시 게난에서 마할랄렐로 이어지는 계보는 인간의 상태가 변하는 가운데서도 교회를 이어 가시는 주님의 오래 참으심과 섭리를 보여 줍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주님의 모습입니다. 주님은 인간이 처음의 완전한 상태를 잃어버렸다고 해서 곧바로 버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내적 상태가 약해지고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능력이 흐려질 때에도,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의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며 다시 생명의 길을 마련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신앙이 약해지는 것을 느낄 때에도 주님을 향한 소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과 진리를 붙들고, 그것을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으로 옮기며, 작은 일에서부터 이웃에게 선한 쓰임이 되는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진리를 아는 기쁨이 선을 행하는 기쁨으로 이어지고, 우리가 받은 사랑이 이웃을 위한 쓰임으로 나타날 때,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은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이게 됩니다. 창5의 계보는 그렇게 우리에게 묻습니다. ‘나는 얼마나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는가?’를 넘어, ‘내가 아는 진리는 지금 어떤 사랑과 결합되어 있으며, 그 사랑은 누구를 위한 선한 쓰임으로 나타나고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 앞에서 우리는 다시 주님을 바라봅니다. 우리의 신앙과 사랑을 살아 있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시며, 우리 안에서 선과 진리의 열매가 맺히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상태가 변하고 약해지는 가운데서도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며 다음 길을 준비하시는 분 역시 주님이십니다. 이것이 오늘 창5:6-14, AC.496-509를 통하여 우리가 배우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퍼셉션은 흐려져도 주님의 사랑과 섭리는 흐려지지 않으며, 참된 신앙의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나타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상 요약을 마치고, 아래는 AC 본문, 해설 및 심화입니다.

 

 

창5:6, AC.496, ‘셋으로부터 이어진 또 하나의 교회 에노스’(AC.496-498)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And Seth lived a hundred and five years, and begat Enosh. (창5:6) AC.496‘셋’(Seth)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두 번째 교회로서, 그 부모인 태고교회보다는 덜 천적이었지만,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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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6, AC.497, ‘시간이 흐르며 본질적인 것들이 감소하는 교회’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창5:6) AC.497‘셋’(Seth)이 그 부모인 태고교회보다는 덜 천적인 두 번째 교회이면서도, 여전히 가장 오래된 교회들 가운데 하나였다는 것은 위에서 셋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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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6, AC.498, ‘셋으로부터 이어져 나온 또 하나의 교회 에노스’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창5:6) AC.498그가 ‘에노스를 낳았다’(begat Enosh)는 것은 그들로부터 ‘에노스’(Enosh)라 하는 또 하나의 교회가 이어져 나왔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이 장에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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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7-8, AC.499, ‘날들과 연수, 아들들과 딸들, 그리고 죽음의 의미’

7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8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Seth lived after he begat Enosh eight hundred and seven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Seth were n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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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9, AC.500, ‘셋보다 더욱 덜 천적이었던 에노스와 그 뒤를 이은 게난’(AC.500-503)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And Enosh lived ninety years, and begat Kenan. (창5:9) AC.500 앞에서 말한 것처럼 ‘에노스’(Enosh)는 세 번째 교회를 의미하는데, 이 교회는 ‘셋’(Seth) 교회보다 더욱 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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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9, AC.501, ‘열매의 속과 씨앗에서 껍질로, 교회의 점진적인 쇠퇴’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창5:9) AC.501시간이 흐르면서 서로 뒤를 이어 나타났고, 하나가 다른 하나에게서 태어났다고 하는 교회들의 경우는 열매나 그 씨앗의 경우와 같았습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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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9, AC.502, ‘점차 흐려지고 일반적이 되어 간 태고교회의 퍼셉션’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창5:9) AC.502이 세 교회, 곧 ‘사람’(man), ‘셋’(Seth), ‘에노스’(Enosh)는 태고교회를 이루지만, 퍼셉션의 완전성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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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9, AC.503, ‘선을 행하는 기쁨과 쓰임 안에서 살아나는 퍼셉션’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창5:9) AC.503 태고교회의 퍼셉션 능력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퍼셉션하는 데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함으로써 생기는 행복과 기쁨에도 있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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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4, 창5:10-11, ‘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오 세를 살

10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1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Enosh lived after he begat Kenan eight hundred and fifteen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Enosh w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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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5, 창5:10-11, ’에노스‘, '셋', '사람'(아담)의 퍼셉션 차이

10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1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10, 11) AC.505 ‘에노스’(Enosh)는 앞서 관찰한 바와 같이 세 번째 교회를 의미하는데, 여전히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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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6, 창5:12, ’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AC.506-507)

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And Kenan lived seventy years, and begat Mahalalel. (창5:12) AC.506 ‘게난’(Kenan)은 네 번째 교회를 의미하고, ‘마할랄렐’(Mahalalel)은 다섯 번째 교회를 의미합니다. 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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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7, 창5:12, ‘게난’, 퍼셉션의 성격이 달라지기 시작한 상태

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창5:12) AC.507 ‘게난’(Kenan)이라 하는 교회는, 앞의 세 더 완전한 교회들 가운데에 그렇게 많이 포함시킬 수는 없는데, 이는 이전의 교회들에서는 분명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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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8, 창5:13-14, ‘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십 세

13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4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Kenan lived after he begat Mahalalel eight hundred and forty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K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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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9, 창5:13-14, ‘모든 것은 언제나 교회의 상태에 따라’

13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4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13, 14) AC.509 여기서 단지 주목해야 할 것은, 모든 것들이 교회의 상태와의 관계에 따라 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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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AC 리딩 본문 전체는 여기까지이고, 아래는 오늘 범위 창5:6-14, AC.496-509 중 리딩 필독 세 편 링크입니다. 혹시 몹시 바쁘신 분들은 꼭 이 링크들만이라도 읽으시기 바랍니다.

 

 

창5:9, AC.501, ‘열매의 속과 씨앗에서 껍질로, 교회의 점진적인 쇠퇴’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창5:9) AC.501시간이 흐르면서 서로 뒤를 이어 나타났고, 하나가 다른 하나에게서 태어났다고 하는 교회들의 경우는 열매나 그 씨앗의 경우와 같았습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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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9, AC.502, ‘점차 흐려지고 일반적이 되어 간 태고교회의 퍼셉션’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창5:9) AC.502이 세 교회, 곧 ‘사람’(man), ‘셋’(Seth), ‘에노스’(Enosh)는 태고교회를 이루지만, 퍼셉션의 완전성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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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9, AC.503, ‘선을 행하는 기쁨과 쓰임 안에서 살아나는 퍼셉션’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창5:9) AC.503 태고교회의 퍼셉션 능력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퍼셉션하는 데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함으로써 생기는 행복과 기쁨에도 있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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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이며, 다음은 다음 주(20261025) 리딩 본문(창5:15-20, AC.510-515) 소개입니다.

 

다음 주에는 마할랄렐과 야렛, 그리고 에녹으로 이어지는 교회의 계승을 살펴보겠습니다. 마할랄렐 교회에서는 ‘쓰임에서 오는 기쁨’보다 ‘진리를 아는 기쁨’을 더 좋아하게 되면서 사랑과 퍼셉션의 생명이 더욱 약해졌습니다. 그리고 야렛을 거쳐 에녹에 이르면, 이전 교회들이 퍼셉션했던 진리들을 후대를 위해 교리로 보존하는 새로운 전환이 나타납니다. 다음 주에는 이 변화를 통하여 ‘진리를 아는 기쁨과 선을 행하는 기쁨 중 무엇이 앞서야 하는가’, 그리고 인간의 퍼셉션이 약해지는 가운데 주님께서 어떻게 진리를 보존하시는지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네, 이상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10-18(D1)

 

2673, 2, 창5.2, 2026-10-18(D1)-주일예배(창5,6-14, AC.496-509), ‘흐려지는 퍼셉션, 변함없는 주님의 섭리’.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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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10/25, 창5:15-20, AC.510-515), ‘마할랄렐, 야렛, 에녹’

※ 오늘(2026/10/25)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9, ‘찬송하는 소리 있어’, 찬132, ‘주의 영광 빛나니’입니다. 오늘은 창5 절별 주석 그 세 번째, 15절로 20절, AC 글 번호로는 510번에서 515번입니다. 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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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10/11, 창5:1-5, AC.469-495), ‘하나님의 형상에서 모양으로, 그리고 시작된 변화’

※ 오늘(2026/10/11)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7, ‘사랑의 하나님’, 찬130, ‘찬란한 주의 영광은’입니다. 오늘은 창5 절별 주석 그 첫 번째, 1절로 5절, AC 글 번호로는 469번에서 495번입니다. 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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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2026/10/11)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7, ‘사랑의 하나님’, 찬130, ‘찬란한 주의 영광은’입니다.

 

오늘은 창5 절별 주석 그 첫 번째, 1절로 5절, AC 글 번호로는 469번에서 495번입니다. 먼저 창세기 본문입니다.

 

 

1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2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3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4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1-5)

 

 

제목은

 

하나님의 형상에서 모양으로, 그리고 시작된 변화

 

 

이며, 다음은 ‘3분 요약’입니다. 이 요약은 새로 오신 분들, 그리고 그동안 함께해오신 분들 모두를 위한, 지난 2월부터 시작한 이 특별한 주일예배를 위한, 그 흐름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한 시간입니다.

 

오늘 리딩에 들어가기 전에 지금까지의 큰 흐름을 잠깐 돌아보겠습니다. 우리는 창세기의 문자적 의미, 그러니까 겉 글자의 뜻을 존중하면서,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천국의 비밀, 창, 출 속뜻 주석)를 따라 그 속뜻을 함께 읽고 있습니다. 창1에서는 천지창조를 거듭남의 과정으로, 창2에서는 에덴동산을 천적 상태로, 창3에서는 사람이 주님보다 자기 감각과 proprium을 따르면서 그 질서가 무너지는 과정으로 읽었습니다.

 

창4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살펴보았습니다. 가인은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나타냈으며,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서 아벨이 죽임을 당하고 그 계열은 라멕에 이르러 황폐해졌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가인의 표’를 통해 신앙을 보존하시고, 마침내 셋과 에노스를 통하여 신앙이 다시 체어리티와 결합되고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가 시작되게 하셨습니다. 인간의 황폐보다 주님의 섭리와 회복이 더 깊다는 것이 창4의 마지막 메시지였습니다.

 

오늘부터는 창5로 들어갑니다. 창5는 겉으로는 아담에서 노아까지 이어지는 족보이지만, 속뜻으로는 태고교회로부터 여러 교회가 어떻게 이어지고 변화되어 갔는지를 보여 줍니다. 오늘 첫 다섯 절에서는 그 출발점인 태고교회의 본래 모습을 먼저 살펴봅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영적으로 창조하시고 천적으로 만드시며, 신앙과 사랑을 하나로 결합하셨을 때 비로소 그들을 ‘사람’이라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셋에 이르면서 아주 미세한 변화가 시작됩니다. 셋 교회에서도 신앙은 여전히 사랑과 결합되어 있었지만, 태고교회에서처럼 ‘사랑이 그만큼 주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창5의 ‘날과 해’는 교회의 여러 상태를, ‘아들들과 딸들’은 그 안에서 생겨나는 진리와 선을 나타냅니다. 마침내 ‘죽었더라’는 말씀은 태고교회의 고유한 생명이었던 ‘퍼셉션’, 곧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알아차리던 상태가 점차 사라져 갔음을 보여 줍니다.

 

오늘은 이것을 마음에 두고 읽겠습니다. ‘교회의 생명은 신앙이 사랑과 어떤 관계를 이루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으로부터 신앙이 나왔고, 그 둘이 하나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그 질서에 작은 변화가 시작되면서 교회도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오늘은 창5의 첫 리딩을 통해 주님께서 이루신 태고교회의 본래 질서와, 그 질서 안에서 시작되는 변화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다음은 오늘 리딩 범위인 AC.469-495 요약입니다. 그전에 오늘부터는 그동안 창 각 장 앞뒤로 소개하던 ‘영계 체험’ 및 각 장이나 단락의 ‘개요’는 생략, 바로 각 장 본문으로 들어가기로 하였습니다만, 그러나 이 첫 요약에서만큼은 그 내용 역시 요약 버전으로 조금 언급하는 것이 그 연결성 면에서 적절할 것 같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AC.449-468을 리딩하시면 되겠습니다.

 

창세기 5장은 ‘아담 자손의 계보’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겉으로 보면 아담에서 노아까지 이어지는 사람들의 이름과 나이, 그리고 죽음이 반복되는 족보입니다. 그러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는 이 장을 단순히 오래전 사람들의 혈통을 기록한 족보로만 읽지 않습니다. 그 속뜻에서는 태고교회로부터 여러 교회가 어떻게 이어지고, 그 내적 상태가 어떻게 변화되어 마침내 노아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교회의 영적 역사’로 읽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5장 본문을 해설하기에 앞서, AC.449-459에서는 ‘천국과 천국의 기쁨’에 관한 영계 경험을 먼저 소개합니다. 이것은 창세기 5장의 각 절을 직접 풀이하는 부분은 아니지만, 이어질 태고교회와 그 후대 교회들의 상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사람들은 흔히 천국을 세상에서 경험하는 가장 좋은 것들이 끝없이 계속되는 곳으로 생각합니다.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 부족한 것 없이 풍요롭게 사는 것, 찬란한 빛 가운데 있는 것, 아무런 수고 없이 평안히 쉬는 것, 혹은 영원히 주님을 찬양하는 것 등을 천국의 행복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영계에서 만난 영들은 그러한 생각만으로는 천국의 참된 기쁨을 알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먼저 어떤 ‘장소’가 아니라, 사람 안에 형성된 사랑과 체어리티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AC.450은 천국을 높은 곳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관념을 다룹니다. 세상에서는 높은 자리에 오르고 다른 사람보다 위에 서는 것이 행복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려는 욕망 자체가 천국의 질서와 반대됩니다. 천국의 기쁨은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의 행복을 기뻐하고 그 행복을 위하여 섬기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높은 곳에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체어리티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AC.452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천국에서 ‘큰 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을 높이는 사람이 아니라,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행복을 원하며 그들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다만 그 섬김 역시 자신이 인정받거나 보상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랑 자체에서 나와야 합니다. 여기서 천국의 기쁨이 무엇인지가 드러납니다. 천국의 기쁨은 자기 자신을 위한 만족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이웃을 향하여 흘러가는 데서 오는 기쁨입니다.

 

그래서 AC.454는 천사들의 삶을 ‘쓰임’과 연결합니다. 천사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영원히 평안만 누리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새로 영계에 들어온 영들을 가르치고, 사람들을 섬기며, 악한 영들의 영향을 억제하고, 사람들에게 선한 것을 불어넣으며, 이 세상을 떠난 영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일으키고, 준비된 영들을 천국으로 인도합니다. 천사들의 행복은 이러한 쓰임과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쓰임 안에서, 쓰임으로부터, 그리고 쓰임에 따라 행복을 누립니다.

 

찬란한 빛을 보는 것만으로도 천국의 행복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놀라운 외적인 광경이라도 그것만 계속된다면 결국 익숙해집니다. 주님을 찬양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의 삶은 끝없이 입술로 찬양만 하는 삶이 아닙니다. 참된 찬양은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에서 나오는 결과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단지 입술의 찬양이 아니라, 주님께 받은 사랑이 실제로 이웃을 향한 선과 쓰임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천국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다양성이 있습니다. 모든 천사가 똑같이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수많은 천국 사회가 있고, 그 안에서도 각자의 사랑과 신앙에 따라 무수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모든 다양성은 하나를 이룹니다. 그 하나 됨의 근원은 ‘오직 주님’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이 서로 다른 존재들을 조화롭게 연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하나 됨은 모두가 똑같아지는 획일성이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들이 주님 안에서 사랑으로 조화를 이루는 하나 됨입니다.

 

AC.459에서는 이러한 천국의 질서를 ‘천적’과 ‘영적’이라는 구분으로 마무리합니다. 천적인 존재는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부터 신앙을 받으며, 영적인 존재는 신앙의 지식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받습니다. 이 차이는 이제 창세기 5장을 읽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5장의 출발점인 태고교회는 바로 ‘천적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태고교회에서는 먼저 사랑이 있었고, 그 사랑으로부터 신앙이 나왔습니다. 진리를 먼저 배운 뒤 그것을 사랑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 안에서 무엇이 참인지 알았습니다.

 

이러한 배경 위에서 AC.460-468은 창세기 5장 전체의 지도를 먼저 보여 줍니다. 창세기 5장의 족보는 속뜻에서 태고교회로부터 홍수에 이르기까지 여러 교회가 차례로 이어지는 과정을 나타냅니다. ‘사람’, 곧 아담은 천적 교회였던 태고교회 자체를 나타내고, 셋은 그 뒤를 잇는 두 번째 교회, 에노스에서 므두셀라까지는 그 뒤를 이어 나타나는 여러 교회를 나타냅니다. 라멕은 아홉 번째 교회이며, 노아는 열 번째 교회로서 홍수 이후의 새로운 교회로 이어지는 출발점이 됩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5장에 나오는 이름들을 속뜻에서 읽을 때 중요한 것은 각각의 인물을 단순히 개인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나타내는 ‘교회의 상태’를 보는 것입니다. 각 교회는 앞선 교회로부터 무엇인가를 이어받았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았습니다. 특별히 그 차이는 ‘퍼셉션’의 차이에서 나타났습니다. 태고교회가 지녔던 퍼셉션이 후대의 교회들로 이어지면서 조금씩 달라지고 약해졌던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에녹은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내적으로 알아차리는 퍼셉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처럼 모든 것을 교리로 정리하여 배울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퍼셉션이 점차 사라질 것을 대비하여, 태고교회에서 받은 계시와 퍼셉션을 교리의 형태로 모아 보존하는 일이 필요해졌습니다. 이것을 나타내는 교회가 에녹입니다. 당시에는 아직 그 교리가 크게 필요하지 않았지만, 훗날을 위하여 보존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다’는 말씀도 이러한 보존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마침내 노아에 이르게 됩니다. 태고교회의 고유한 퍼셉션은 거의 사라졌지만 모든 것이 완전히 없어져 버린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남아 있는 것을 보존하셨습니다. 이것이 창세기 5장의 마지막에서 노아로 이어지는 중요한 의미이며, 여기서 ‘리메인스’라는 주제가 나타납니다. 주님께서는 교회가 쇠퇴하는 가운데서도 다음 교회를 위하여 필요한 선과 진리를 남겨 두십니다. 한 사람의 거듭남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살아오면서 주님께 받은 선과 진리, 순진함과 체어리티의 상태들을 주님께서 보존하시고, 훗날 거듭남을 위하여 사용하십니다.

 

따라서 창세기 5장 전체에는 두 흐름이 함께 있습니다. 하나는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점차 쇠퇴하는 흐름이고, 다른 하나는 그 쇠퇴 속에서도 주님께서 필요한 것을 보존하시며 다음 교회를 준비하시는 흐름입니다. 인간의 상태만 보면 점점 내려가는 역사처럼 보이지만, 주님의 섭리에서 보면 그 안에서도 끊임없이 보존과 준비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실제 본문인 창세기 5장 1절에서 5절, AC.469-495로 들어갑니다. 첫 말씀은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입니다. AC.469는 여기서 ‘계보를 적은 책’이 태고교회에 속했던 교회들을 열거하는 것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제부터 나오는 이름과 숫자를 단순한 족보의 정보로만 읽지 않고,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지는 교회의 여러 상태를 나타내는 말씀으로 읽게 됩니다.

 

이어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라고 합니다. 여기서 ‘창조하다’와 ‘만들다’는 비슷해 보이지만 속뜻에서는 차이가 있습니다. AC.472에 따르면 ‘창조하다’는 사람이 새롭게 창조되어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 곧 거듭나는 것을 뜻합니다. 반면 ‘만들다’는 그 사람이 더욱 완전해져 천적인 사람이 되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우리가 이미 살펴본 거듭남의 질서와 연결됩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완성된 천적 존재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면서 먼저 영적인 사람이 되게 하시고, 더 나아가 천적인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영적인 사람은 주님의 ‘형상’이고, 천적인 사람은 주님의 ‘모양’입니다. 형상에서 모양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단순히 더 많은 진리를 알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알고 믿는 진리가 사랑 안으로 들어가고, 마침내 사랑으로부터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영적인 사람에게는 아직 신앙이 먼저 보입니다. 진리를 배우고, 그것이 옳기 때문에 믿으며, 그 진리를 따라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천적인 사람에게서는 사랑이 먼저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무엇이 참인지 알고, 그 사랑에서 신앙이 나옵니다. 이것이 태고교회의 특징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신앙과 사랑은 서로 떨어진 두 가지가 아니라, 사랑 안에 신앙이 살아 있는 하나의 생명이었습니다.

 

그래서 AC.473은 ‘하나님의 모양’을 천적인 사람과 연결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영적인 사람과 연결합니다. 형상은 모양으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람에게 진리를 주시는 목적도 단지 많은 것을 알게 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진리를 통하여 사람의 의지와 삶이 변화되고, 마침내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 안에서 살도록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어 2절에서는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고 합니다. 여기서 ‘남자’와 ‘여자’ 역시 단순히 성별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AC.475-476에 따르면 ‘남자’는 이해와 신앙을, ‘여자’는 의지와 사랑을 나타냅니다.

 

사람이 아직 영적인 상태에 있을 때에는 이해와 신앙이 앞서고 의지와 사랑이 뒤따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어 천적인 상태에 이르면 신앙과 사랑, 이해와 의지가 하나의 결혼을 이룹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다’고 합니다. 신앙만 따로 있어도 온전한 사람이 아니고, 사랑을 말하면서 진리를 떠나 있어도 온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진리와 선, 신앙과 사랑, 이해와 의지가 하나를 이룰 때 비로소 속뜻에서의 ‘사람’이 됩니다.

 

여기서 ‘사람’이라는 말은 매우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가장 높은 의미에서 오직 주님만이 참으로 ‘사람’이십니다. 교회가 ‘사람’이라 불릴 수 있는 것도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 주님의 모양과 형상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참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를 받아 그것들이 자기 안에서 하나를 이룰 때 참된 의미에서 사람이 되어 갑니다.

 

그러므로 ‘아담’이라는 이름 역시 이 속뜻에서는 한 남성 개인만을 가리키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AC.478-479는 ‘아담’이 ‘사람’을 뜻하며, 여기서는 특별히 태고교회를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다’는 표현 자체가 남자와 여자 모두를 함께 ‘사람’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본문의 중심이 한 개인의 전기가 아니라, 신앙과 사랑이 결합되어 하나를 이루었던 교회의 상태임을 보여 줍니다.

 

AC.480은 ‘그들이 창조되던 날’이라는 표현도 설명합니다. 여기서 ‘날’은 단순한 24시간의 하루가 아니라 하나의 영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창세기 1장의 여섯째 날 끝에서 사람은 ‘사람’이 되고, 이어지는 일곱째 날, 곧 안식일의 상태에서 천적인 사람이 됩니다. 결국 창세기 5장의 첫 두 절은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다루었던 거듭남의 전체 과정을 아주 압축된 형태로 다시 보여 주고 있는 셈입니다.

 

이제 3절에서 새로운 변화가 시작됩니다.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라고 합니다. 여기서 ‘백삼십 년’은 단순히 세속적인 시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교회가 일어나기까지의 하나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교회가 ‘셋’입니다.

 

셋 교회는 태고교회와 전혀 다른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AC.484는 셋 교회가 태고교회와 ‘매우 비슷했다’고 설명합니다. 신앙도 여전히 사랑과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아주 중요한 차이가 하나 나타납니다. ‘사랑이 그만큼 주된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겉으로 보면 매우 작아 보입니다. 신앙과 사랑이 아직 분리된 것도 아니고, 사랑이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태고교회의 가장 본래적인 질서에서는 사랑이 모든 것의 중심이었고 신앙은 그 사랑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셋 교회에서도 둘은 여전히 결합되어 있지만, 사랑의 중심성이 이전과 완전히 같지는 않았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교회의 상태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이 점은 창세기 4장에서 보았던 셋과도 구별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름은 같지만 속뜻에서 언제나 같은 교회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AC.485는 창세기 5장의 셋 교회가 창세기 4장 25절의 셋과는 다른 교회라고 분명히 설명합니다. 같은 이름이 사용되더라도 문맥과 계열에 따라 서로 다른 교리와 교회의 상태를 나타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4절에서는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라고 합니다. 여기서부터 창세기 5장을 읽을 때 반복해서 만나게 될 중요한 표현들이 등장합니다. 바로 ‘날’, ‘해’, 그리고 ‘아들들과 딸들’입니다.

 

AC.482와 AC.486 이하에서는 이러한 ‘해’와 숫자들이 교회의 상태를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시간은 상태와 연결됩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몇 년 동안 지속되었는지를 생각하지만, 천사들은 말씀의 속뜻에서 그러한 시간보다 그 기간이 나타내는 영적 상태와 그 변화를 지각합니다. 그래서 창세기 5장의 긴 수명과 숫자들은 단순한 연대 계산을 넘어, 각 교회가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를 담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문자적 의미의 역사성을 단순히 지워 버린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가 여기서 집중하는 것은 말씀의 속뜻입니다. 속뜻에서 천사들은 세상의 시간과 숫자에 머무르지 않고 그것들이 나타내는 상태를 지각합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이 장을 읽으면서 ‘몇 년을 살았는가?’만이 아니라 ‘그 숫자를 통하여 어떤 교회의 상태가 표현되고 있는가?’를 보게 됩니다.

 

‘아들들과 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AC.489-491에서 ‘아들들’은 진리를, ‘딸들’은 선을 나타냅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교회가 살아 있으면 그 안에서 무엇인가가 태어납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신앙과 사랑이 결합되어 있으면 그 결합으로부터 새로운 진리와 선이 생겨납니다.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고, 그 진리가 삶에서 선한 행위와 쓰임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영적인 의미에서 ‘아들들과 딸들을 낳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들과 딸들의 상태는 그들을 낳는 교회의 상태와 관계됩니다. 교회가 어떠한가에 따라 그 교회가 받아들이고 산출하는 진리와 선도 달라집니다. 사랑이 중심에 있는 교회가 받아들이는 진리와, 자기 자신이나 세상을 중심에 둔 교회가 받아들이는 진리는 겉으로 같은 말처럼 보여도 그 내적인 생명은 다를 수 있습니다. 진리의 생명은 그것이 어떤 사랑에서 나오는가와 깊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 개인의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같은 성경 말씀을 알고 같은 교리를 고백하더라도, 그것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려는 마음에서 받아들여지는지 아니면 자신을 높이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위하여 사용되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열매를 낳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진리를 많이 가지고 있는 것만이 아니라, 그 진리가 어떤 사랑과 결합되어 있으며 어떤 선을 낳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침내 5절은 ‘그는 죽었더라’는 말로 끝납니다. 창세기 5장에서는 앞으로 이 표현이 계속 반복됩니다. 문자적으로는 한 사람의 생애가 끝났다는 뜻이지만, AC.492 이하에서는 이것을 교회의 내적 상태와 관련하여 설명합니다. 여기서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태고교회가 가지고 있던 것과 같은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태고교회의 가장 독특한 특징 가운데 하나가 바로 ‘퍼셉션’이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머리가 좋아서 진리를 빨리 이해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AC.495에 따르면 퍼셉션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참인지를 ‘주님으로부터’ 지각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주님을 향한 사랑의 선과 그분을 향한 신앙의 진리를 주님으로부터 내적으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가 어떤 문제를 놓고 먼저 교리를 찾아보고 논리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선과 진리를 지각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사랑과 신앙이 깊이 하나 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랑으로부터 무엇이 참인지 지각하는 내적인 능력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천적 교회의 고유한 퍼셉션이었습니다.

 

그러나 세대를 거치면서 이러한 퍼셉션은 점차 쇠퇴합니다. AC.494는 그 배경에서 유전적인 악을 다룹니다. 인간의 실제적인 악이 계속되면서 그것이 후대에 영향을 미치고, 인간의 내적 상태는 점점 더 이전의 순수한 상태에서 멀어집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아담 한 사람의 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악해졌다’는 식으로만 이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이 실제로 선택하고 행하는 악이 쌓이고 이어지면서 유전적인 악의 경향도 더욱 강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AC.494는 여기서 절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유전적인 악이 있다고 해서 인간이 거듭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거듭나게 하심으로 그 악을 억제하고 약화시키십니다. 사람 자신의 힘으로 악의 뿌리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 안에 보존하신 선과 진리를 통하여 그를 새롭게 하십니다. 이것은 앞서 창세기 5장 전체 개요에서 살펴본 ‘리메인스’와도 연결됩니다.

 

이렇게 보면 이번 주에 읽는 모든 내용이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집니다. 먼저 천국의 참된 기쁨은 자기 자신을 위한 행복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과 체어리티가 이웃을 위한 쓰임이 되는 데 있음을 보았습니다. 천국의 모든 다양성도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 안에서 하나를 이룹니다. 그리고 천적인 존재에게서는 바로 그 사랑으로부터 신앙이 나옵니다.

 

그러한 천적 질서를 지상에서 가장 온전히 나타냈던 교회가 태고교회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영적으로 창조하시고, 더 나아가 천적인 사람으로 완성해 가십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에서 ‘하나님의 모양’으로 나아가며, 그 과정에서 신앙과 사랑, 이해와 의지가 하나를 이룹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함께 ‘사람’이라 부르셨습니다. 참된 사람은 진리만 가진 사람도 아니고 사랑만 말하는 사람도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진리와 선, 신앙과 사랑이 하나의 생명을 이루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결합으로부터 ‘아들들과 딸들’, 곧 진리와 선이 계속 태어납니다. 살아 있는 교회는 진리와 선을 낳습니다. 살아 있는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믿는 것이 실제 사랑으로 이어지고, 그 사랑이 다시 삶의 선과 쓰임으로 나타날 때 신앙은 살아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창세기 5장 앞의 ‘천국의 기쁨은 쓰임에 있다’는 가르침과 오늘 본문의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는 말씀이 서로 만납니다.

 

그러나 동시에 변화도 시작됩니다. 셋 교회에서도 신앙과 사랑은 아직 결합되어 있지만 사랑의 중심성은 태고교회와 조금 달라집니다. 교회가 계속 이어지면서 상태가 변하고, 마침내 태고교회가 지녔던 고유한 퍼셉션도 점차 쇠퇴합니다. ‘그는 죽었더라’는 짧은 한마디 안에 한 사람의 죽음뿐 아니라, 한 교회의 고유한 내적 생명이 더 이상 이전과 같지 않게 되는 깊은 변화가 담겨 있습니다.

 

그럼에도 창세기 5장의 이야기는 단순한 쇠퇴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교회가 달라지고 퍼셉션이 사라져 가는 가운데서도 주님께서는 필요한 것을 보존하십니다. 태고교회의 계시와 퍼셉션은 에녹을 통하여 교리로 보존되고, 마지막에는 노아라는 새로운 교회를 준비하십니다. 인간에게서 무엇인가가 사라질 때마다 주님의 일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는 남아 있는 선과 진리를 붙드시고 그것을 통하여 다음 단계를 준비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읽으며 우리는 ‘나는 얼마나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는가?’만을 묻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내가 알고 믿는 진리는 어떤 사랑에서 나오고 있는가?’, ‘내 신앙과 사랑은 서로 결합되어 있는가?’, ‘내가 받은 진리는 실제 삶에서 선을 낳고 있는가?’, 그리고 ‘그 선은 이웃을 위한 쓰임으로 이어지고 있는가?’를 묻게 됩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은 오늘날 우리에게 그대로 주어져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퍼셉션의 근원은 여전히 같습니다. 선과 진리는 주님에게서 옵니다. 우리의 거듭남도 주님에게서 옵니다. 신앙과 사랑을 하나 되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시며, 우리 안에서 진리와 선의 열매가 태어나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상태가 약해지고 이전에 가졌던 것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남겨 두신 것을 보존하시며 다시 거듭남의 길을 여십니다.

 

이것이 오늘 창세기 5장 첫 다섯 절을 통해 보게 되는 큰 그림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새롭게 창조하시고 자신의 형상에서 모양으로 이끄십니다. 그 과정에서 신앙과 사랑을 하나 되게 하시고, 그 결합으로부터 진리와 선이 삶 가운데 태어나게 하십니다. 교회의 상태가 변하고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점차 쇠퇴하는 가운데서도 주님께서는 남아 있는 것을 보존하시며 다음 교회를 준비하십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5장의 족보는 단지 ‘누가 누구를 낳고 몇 년을 살다가 죽었다’는 반복되는 기록이 아닙니다. 그 이름과 날과 해, 아들들과 딸들, 그리고 ‘죽었더라’는 말씀 속에는 사람과 교회의 내적 상태가 어떻게 변화해 가는지, 그리고 그 모든 변화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어떻게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며 구원의 역사를 계속 이어 가시는지가 담겨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다시 주님을 바라봅니다. 우리의 신앙이 사랑에서 떨어지지 않게 하시고, 우리가 아는 진리가 삶의 선으로 이어지게 하시며, 그 선이 이웃을 위한 쓰임이 되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 안의 좋은 것들이 약해지고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때에도,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깊은 곳에서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며 다시 생명의 길을 준비하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창세기 5장은 바로 그 주님의 오래 참고 보존하시며 이어 가시는 섭리 속에서 이제 첫걸음을 시작합니다.

 

 

이상 요약을 마치고, 아래는 AC 본문, 해설 및 심화입니다.

 

 

AC.469, 창5:1, '계보의 책, 영적으로 창조되어 천적으로 된 태고교회'(AC.469-474)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This is the book of the births of man. In the day that God created man, in the likeness of God made he him. (창5:1) AC.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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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0, 창5:1, ‘이름들은 사람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들을 뜻한다’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0‘계보의 책’(book of the births)이 태고교회에 속했던 사람들을 열거한 것이라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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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1, 창5:1, ‘집과 가족과 민족으로 구별되어 살았던 이유’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1그들이 이처럼 따로 떨어져 살면서 오직 집과 가족과 민족으로 구별되어 있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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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2, 창5:1, ‘창조함과 만드심,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2‘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날’(day in which God created man)이 그가 영적으로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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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3, 창5:1, ‘하나님의 형상에서 하나님의 모양으로’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3‘하나님의 모양’(likeness of God)이 천적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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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4, 창5:1,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로 나아간 태고교회’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4그러므로 여기서 다루는 주제는 태고교회의 출생 또는 번성(birth or propagation)이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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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5, 창5:2, ‘신앙과 사랑의 결혼을 이룬 교회’(AC.475-480)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and blessed them, and called their name man, in the day when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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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6, 창5:2, ‘남자와 여자에서 하나의 사람으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AC.476‘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가 신앙과 사랑 사이의 결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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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7, 창5:2, ‘오직 주님만이 참된 사람이시며, 교회는 그분의 형상과 모양’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AC.477‘사람’(man)이 태고교회를 의미한다는 것은 앞에서 자주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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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8, 창5:2, ‘아담이라는 한 사람이 아니라 태고교회’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AC.478그를 ‘아담’(Adam)이라 하는 이유는 히브리어 ‘아담’(Ad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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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9, 창5:2, ‘흙에서 취하여 거듭나고 참된 사람이 된 태고교회’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AC.479말씀에서 ‘이름을 부르다’(calling a name) 또는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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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80, 창5:2, ‘여섯째 날의 끝과 안식일의 시작에 이른 사람’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AC.480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사람’이라 일컬어졌다는 것은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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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3, AC.481, '태고교회와 닮은 새 교회 셋(Seth)'(AC.481-485)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And man lived a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begat into his likeness, after his image, and called his name Seth. (창5:3) AC.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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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3, AC.482, ‘해(years)와 연수(numbers of years)는 교회의 상태를 의미’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AC.482이 장에 나오는 ‘해’(years)와 ‘연수’(numbers of years)가 속뜻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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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3, AC.483, ‘퍼셉션(perception)의 차이로 구별된 태고교회의 여러 교회’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AC.483뒤이어 나오는 ‘셋’(Seth), ‘에노스’(Enosh), ‘게난’(Kenan), ‘마할랄렐’(Mahalalel),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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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3, AC.484, ‘사랑이 여전히 신앙과 결합되어 있었던 셋 교회’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AC.484‘셋’(Seth)이라 하는 교회가 태고교회와 매우 비슷했다는 것은, 사람이 자기의 모양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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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3, AC.485, ‘창4의 셋과 창5의 셋은 서로 다른 교회’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AC.485여기서 ‘셋’(Seth)이 앞에서 묘사된 교회(창4:25)와는 다른 교회를 의미한다는 것은 AC.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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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4, AC.486, '날들과 해들, 아들들과 딸들의 의미'(AC.486-491)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nd the days of man after he begat Seth were eight hundred years, and he begat sons and daughters. (창5:3) AC.486‘날들’(days)은 일반적인 시간과 상태를 의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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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4, AC.487, ‘날들과 해들에 기록된 교회의 상태 변화’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87‘날들’(days)이 일반적인 시간과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은 1장에서 보여 주었습니다. 거기서 창조의 ‘날들’은 다른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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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4, AC.488, ‘천사들에게 시간은 상태와 그 변화’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88‘날들’(days)이 일반적인 상태를, ‘해들’(years)이 특별한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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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4, AC.489, ‘교회가 낳는 아들들과 딸들, 진리와 선’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89‘아들들과 딸들’(sons and daughters)이 그들이 퍼셉션한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하며, 특히 ‘아들들’(sons)은 진리들을,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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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4, AC.490, ‘딸들이 의미하는 사랑과 신앙의 선’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90말씀에서 ‘딸들’(daughters)은 자주 선들을 의미합니다. 시편에서는, In the Word “daughters” frequently denote goods; as in David: 9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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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4, AC.491, ‘교회의 어떠함에 따라 달라지는 아들들과 딸들’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91이 장에서 ‘아들들’(sons)과 ‘딸들’(daughters)(4, 7, 10, 13, 16, 19, 26, 30절)도 같은 것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어떠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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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5, AC.492, ‘사라진 퍼셉션을 의미하는 사람의 죽음’(AC.492-495)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all the days that man lived were nine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he died. (창5:5) AC.492여기서 ‘날들’(days)과 ‘해들’(years)은 위에서와 같이 시대들과 상태들을 의미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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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5, AC.493, ‘시간과 척도를 넘어 상태를 나타내는 말씀의 숫자’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3‘날들’(days)과 ‘해들’(years)이 시대들과 상태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세상에서는 시간들과 척도들이 반드시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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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5, AC.494, ‘퍼셉션의 죽음과 유전적 악의 누적’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4그가 ‘죽었다’(died)는 것이 그러한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죽다’(die)라는 말의 의미에서 분명합니다. 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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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5, AC.495, ‘태고교회의 쇠퇴를 이해하는 열쇠, 퍼셉션’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5태고교회가 어떻게 쇠퇴하였는지는 퍼셉션(perception)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태고교회는 퍼셉션을 가진 교회였으며, 오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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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AC 리딩 본문 전체는 여기까지이고, 아래는 오늘 범위 창5:1-5, AC.469-495 중 리딩 필독 3편 링크입니다. 혹시 몹시 바쁘신 분들은 꼭 이 3개 링크만이라도 읽으시기 바랍니다.

 

 

AC.473, 창5:1, ‘하나님의 형상에서 하나님의 모양으로’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3‘하나님의 모양’(likeness of God)이 천적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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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6, 창5:2, ‘남자와 여자에서 하나의 사람으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AC.476‘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가 신앙과 사랑 사이의 결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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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5, AC.495, ‘태고교회의 쇠퇴를 이해하는 열쇠, 퍼셉션’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5태고교회가 어떻게 쇠퇴하였는지는 퍼셉션(perception)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태고교회는 퍼셉션을 가진 교회였으며, 오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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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이며, 다음은 다음 주 본문 소개입니다.

 

다음 주에는 창5:6-14, AC.496-509를 읽습니다. 셋에서 에노스로, 다시 에노스에서 게난으로 이어지는 족보를 통해, 이 이름들이 단순한 개인들이 아니라 태고교회 이후 차례로 이어진 서로 다른 교회들을 나타냄을 살펴보겠습니다. 특히 한 교회가 다음 교회로 이어지면서도 ‘본질적인 것들’은 점차 감소해 가는 모습과, 그럼에도 그 흐름을 끊지 않으시고 교회를 계속 이어 가시는 주님의 섭리를 살펴보겠습니다.

 

 

네, 이상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10-11(D1)

 

2672, 1, 창5.1, 2026-10-11(D1)-주일예배(창5,1-5, AC.469-495), ‘하나님의 형상에서 모양으로, 그리고 시작된 변화’.pdf
1.22MB

 

 

 

주일예배(2026/10/18, 창5:6-14, AC.496-509), ‘흐려지는 퍼셉션, 변함없는 주님의 섭리’

※ 오늘(2026/10/18)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8, ‘성도들아 찬양하자’, 찬131, ‘다 나와 찬송부르세’입니다. 오늘은 창5 절별 주석 그 두 번째, 6절로 14절, AC 글 번호로는 496번에서 509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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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10/04, 창4:25-26, AC.434-442), ‘보존된 신앙에서 체어리티의 예배로’

※ 오늘(2026/10/04)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6, ‘은혜로신 하나님 우리 주 하나님’, 찬230, ‘우리의 참되신 구주시니’, 찬96, ‘예수님은 누구신가’입니다. 오늘은 창4 절별 주석 그 일곱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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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9, AC.500-503 심화

1. ‘왜 태고교회의 퍼셉션은 후대 교회로 갈수록 흐려졌는가?’

 

AC.500-503을 읽으면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태고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직접 퍼셉션할 수 있었던 가장 천적인 교회였는데, 왜 그 능력은 후대 교회로 갈수록 점점 흐려졌을까요? ‘사람’(man), ‘셋’(Seth), ‘에노스’(Enosh)는 모두 태고교회에 속했지만, AC.502는 첫 번째 교회의 퍼셉션 능력이 뒤를 이은 교회들에서 점차 감소하여 더욱 일반적인 것이 되었고, 분명했던 퍼셉션이 점점 흐릿해지다가 마침내 사라지기 시작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오랜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시간 그 자체는 교회를 쇠퇴시키는 원인이 아닙니다. 문제는 인간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는 질서가 세대를 거치면서 달라졌다는 데 있습니다.

 

그 배경 가운데 하나는 AC.494에서 설명한 ‘유전적 악의 누적’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유전적 악을 단순히 최초의 한 사람에게서 시작하여 모든 인류에게 동일하게 전달된 어떤 고정된 죄의 덩어리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실제적인 악(actual evil)을 반복하여 자기 삶의 일부로 만들면 그것이 그의 본성에 더해지고, 그렇게 형성된 성향이 후대에 전달되면서 유전적 악은 세대를 거쳐 더욱 증가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고 후손이 조상의 죄책까지 물려받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AC.4563에서 분명히 하듯 사람은 유전적인 것 자체 때문에 정죄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신의 이해와 의지로 받아들여 실제적인 악으로 만들 때 책임을 지게 됩니다. 그러나 세대를 거치며 악으로 기울어지는 성향이 깊어질수록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맑게 받아들이는 내적 상태 역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AC.501의 ‘열매와 씨앗’의 비유는 이러한 변화를 구조적으로 보여 줍니다. 열매와 씨앗의 가장 안쪽에는 ‘열매의 열매’, ‘씨앗의 씨앗’이라 할 수 있는 중심이 있고, 거기서 바깥쪽으로 갈수록 그 본질은 점차 적어져 마침내 껍질과 덮개에 이릅니다. 뇌의 비유도 같습니다. 가장 내적인 섬세한 유기적 형태로부터 점차 더 일반적이고 조밀한 덮개들이 이어져 마지막에는 두개골에 이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비유를 든 것은 태고교회 이후의 교회들이 서로 아무 관계 없이 등장한 것이 아니라, 앞선 교회에서 다음 교회가 일정한 질서를 따라 이어졌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최초의 내적인 중심으로부터 멀어질수록 그 본질을 받아들이는 상태는 점차 외적이고 일반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AC.502에서 퍼셉션의 쇠퇴를 ‘더욱 일반적인 것이 됨’이라고 표현합니다. 최초의 태고교회는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매우 명료하고 세밀하게 퍼셉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셋과 에노스로 이어지면서 퍼셉션은 여전히 존재했으나 그 구별이 덜 분명해졌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지식의 양이 줄어든 것과는 다릅니다.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 안에서 진리를 즉각적이고 구체적으로 알아보던 내적인 능력이 점차 흐려진 것입니다. 따라서 태고교회의 쇠퇴는 먼저 교리책이 없어졌다거나 예배 제도가 무너졌다는 데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인간의 가장 깊은 내적 상태가 변한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AC.503은 여기서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갑니다. 퍼셉션은 단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아는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선을 실제로 행할 때 생기는 행복과 기쁨이 퍼셉션의 생명이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선을 행하는 데서 오는 이러한 행복과 기쁨이 없다면 퍼셉션 능력에는 생명이 없다’고까지 말합니다. 왜냐하면 천적 인간에게 사랑은 지식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쓰임’(use)으로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선을 행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실제로 이웃에게 선한 쓰임이 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퍼셉션의 쇠퇴는 단순히 영적인 감각이 둔해진 사건이 아니라, 선을 행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던 사랑의 생명 자체가 점차 약해진 과정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태고교회 쇠퇴의 흐름을 하나로 연결해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 안에 있을 때에는 선을 행하는 것이 기쁨이었고, 그 선 안에서 무엇이 진리인지 명료하게 퍼셉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 세상을 향한 사랑이 점차 강해지고 실제적인 악이 반복되면서 인간의 내적 질서는 달라졌습니다. 선을 행하는 기쁨이 약해지면 그 선으로부터 진리를 보는 퍼셉션도 함께 흐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태가 세대를 거쳐 누적되면서 최초에는 명료했던 퍼셉션이 더욱 일반적이고 흐릿한 것이 되고, 마침내 태고교회 특유의 퍼셉션 자체가 사라져 간 것입니다. 따라서 ‘유전적 악의 증가’, ‘사랑과 쓰임의 생명 약화’, ‘퍼셉션의 흐려짐’은 서로 무관한 세 현상이 아니라 하나의 쇠퇴 과정의 서로 다른 측면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주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퍼셉션이 사라졌다고 해서 주님께서 인간에게 선과 진리를 알 수 있는 길 자체를 닫으신 것은 아닙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은 선으로부터 진리를 퍼셉션했지만, 이후의 영적 인간에게는 다른 길이 마련되었습니다. AC.2831은 천적 인간의 퍼셉션과 영적 인간의 양심을 구별하며, AC.7935는 영적 교회의 양심이 사람이 배우고 받아들인 신앙의 진리들로부터 형성된다고 설명합니다. 즉 인간이 더 이상 태고교회처럼 직접 퍼셉션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에도 주님은 말씀과 진리와 양심을 통하여 인간을 인도하실 수 있는 새로운 질서를 마련하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쇠퇴에 맞추어 진리의 기준을 낮추셨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이 자유롭게 진리를 배우고 받아들이며 그것을 삶으로 만들 수 있는 길을 계속 보존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흐려져 간 역사를 읽으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잃어버린 퍼셉션을 인위적으로 되찾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강렬한 직감이나 내면의 음성을 태고교회의 퍼셉션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길은 말씀에서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주님 앞에서 분별하며, 실제 삶에서 선을 행함으로써 양심이 더욱 바르게 형성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AC.503이 보여 주는 가장 깊은 원리는 오늘도 변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단지 많이 아는 데서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결합하여 쓰임이 될 때 살아납니다. 우리가 진리를 배우면서도 선을 행하는 기쁨을 잃어 간다면 지식은 늘어도 영적 시야는 오히려 흐려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주님으로부터 받은 진리를 삶에 옮기고 이웃에게 선한 쓰임이 되는 것을 기뻐할수록, 태고교회와 같은 퍼셉션을 소유하지는 않더라도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과 양심의 빛 안에서 선과 진리를 더욱 분명하게 분별해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퍼셉션의 쇠퇴를 기록한 창5의 계보가 오늘의 우리에게도 살아 있는 말씀이 되는 이유입니다. (AC.500-503 심화 1)

 

 

 

창5:9, AC.503, ‘선을 행하는 기쁨과 쓰임 안에서 살아나는 퍼셉션’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창5:9) AC.503 태고교회의 퍼셉션 능력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퍼셉션하는 데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함으로써 생기는 행복과 기쁨에도 있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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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5, AC.492-495 심화

2.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오늘날의 양심은 어떻게 다른가?’

 

AC.495는 태고교회가 ‘퍼셉션을 가진 교회’였으며 ‘오늘날에는 그러한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말을 읽으면 질문이 생깁니다. 오늘날에도 사람은 기도하거나 말씀을 읽는 가운데 ‘이것은 옳다’, ‘이것은 해서는 안 된다’는 내적인 깨달음을 경험합니다. 어떤 때에는 이유를 길게 따져 보지 않아도 무엇이 선하고 진실한지를 깊이 확신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것도 태고교회의 ‘퍼셉션’(perception)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그렇지 않습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후대 영적 인간의 양심은 모두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에 관계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질서가 서로 다릅니다.

 

그 차이를 가장 간단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천적 인간은 ‘선으로부터 진리를 퍼셉션’하지만, 영적 인간은 ‘배운 진리로부터 양심이 형성되어 선으로 인도’됩니다. AC.2831은 이 차이를 매우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천적 인간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주님으로부터 일종의 내적인 지각으로 즉시 알아차립니다. 그들이 주님과 사랑으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영적 인간에게는 그러한 퍼셉션이 없으며 그 대신 양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양심은 부모와 스승에게서 배우고, 교리와 말씀을 통하여 받아들인 선과 진리로부터 형성됩니다.

 

그러므로 퍼셉션은 단순히 ‘양심이 아주 강해진 상태’가 아닙니다. 둘은 주님께서 인간을 이끄시는 서로 다른 질서에 속합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에게는 사랑의 선이 먼저 있었고 그 선으로부터 무엇이 진리인지 퍼셉션되었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외부에서 먼저 배우고 논증하여 ‘이것이 참이므로 믿겠다’고 하는 방식이 중심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선 안에서 무엇이 진리인지 내적으로 알아차렸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계속 살펴온 ‘천적 질서’, 곧 사랑에서 신앙이 나오는 질서입니다.

 

반대로 영적 인간은 진리를 먼저 배웁니다. 말씀을 읽고, 가르침을 받고, 무엇이 주님의 뜻인지 배운 뒤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삶에서 행합니다. 이렇게 받아들인 진리가 사람의 속 사람에 깊이 새겨지고 삶으로 확증되면 그것이 양심을 형성합니다. AC.7935는 영적 교회 사람들의 양심이 그들이 어려서부터 배우고 이후 삶으로 확증한 교회의 진리들로부터 ‘태어나고 형성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렇게 진리가 내면에 자리 잡으면 사람은 그것에 따라 생각하고 원하고 행동하도록 내적으로 이끌립니다. 이것이 영적 인간에게 있는 양심입니다.

 

예를 들어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이 어떤 일을 마주했을 때에는 주님을 향한 사랑의 선으로부터 그것이 선인지 아닌지를 퍼셉션했습니다. 반면 오늘날 영적 질서 안에 있는 사람은 ‘주님께서 말씀에서 어떻게 가르치셨는가’, ‘이웃을 사랑하라는 진리에 비추어 이것은 옳은가’, ‘내가 알고 믿는 진리에 따라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통하여 양심의 인도를 받습니다. 처음에는 배운 진리를 기억하여 판단하지만, 그 진리에 따라 오래 살아가면 그것이 내면에 깊이 자리 잡아 일일이 논리를 펼치지 않아도 ‘이것은 해서는 안 된다’는 내적인 요구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양심 역시 단순한 사회적 죄책감이나 심리적 불편함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AC.2831은 시민 생활에서의 정의와 공정함을 지각하는 것, 도덕생활에서 명예로운 것을 지각하는 것과 신앙의 선과 진리에 관한 영적 퍼셉션을 구별합니다. 또한 사람의 양심은 그가 받아들인 선과 진리에 의해 형성되므로, 그가 배운 것이 충분히 참되지 않다면 양심 역시 불완전하게 형성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내 양심이 그렇게 말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판단이 언제나 절대적으로 참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양심도 말씀의 진리에 의해 계속 밝혀지고 바로잡혀야 합니다.

 

이 점은 퍼셉션과 개인적인 직감을 구별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강하게 떠오르는 것’, ‘내적으로 어떤 음성을 듣는 것’, ‘설명하기 어렵지만 확신이 드는 것’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의 강한 느낌은 자기애, 욕망, 두려움, 선입견에서도 나올 수 있습니다. AC.2515는 퍼셉션에서 나오는 생각, 양심에서 나오는 생각, 양심 없이 욕망과 환상에서 나오는 생각을 분명히 구별합니다. 따라서 확신의 강도가 그 근원이 주님이라는 보증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퍼셉션과 양심에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둘의 근원은 궁극적으로 주님이며, 둘 다 인간을 선과 진리로 이끄시는 방식입니다. 차이는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질서에 있습니다. 천적 인간에게는 사랑의 선이 의지 안에 자리 잡아 그 선으로부터 진리를 퍼셉션하는 질서가 있었고, 영적 인간에게는 진리가 먼저 이해 안에 받아들여지고 그 진리에 따라 새로운 의지가 형성되면서 양심이 생기는 질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퍼셉션과 양심은 서로 무관한 두 능력이 아니라 주님께서 서로 다른 상태의 인간을 이끄시는 서로 다른 방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차이를 알면 왜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사라지는 것이 그렇게 중대한 ‘죽음’이었는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교회의 생명은 주님을 향한 사랑 안에서 선과 진리를 직접 퍼셉션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의지가 악으로 물들면서 그 질서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선에서 진리를 퍼셉션하던 통로가 변질되면, 자기 욕망을 주님의 뜻으로 오인하는 훨씬 위험한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타락한 인간에게 옛 퍼셉션을 그대로 유지시키시는 대신 진리를 외적으로 배우고 그것으로 새로운 내면을 형성하는 영적 질서, 곧 신앙과 양심의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억지로 회복하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도 주님으로부터 직접 무엇이 진리인지 느끼고 싶다’며 특별한 내적 감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말씀의 진리를 겸손히 배우고 그것을 삶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삶으로 확증될수록 그것은 단순히 머릿속에 기억된 지식으로 머물지 않고 우리의 내면을 형성하며, 마침내 양심을 통하여 생각과 의지와 행동을 이끄는 살아 있는 진리가 됩니다.

 

그렇다고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모든 신앙생활이 계속 외적인 규칙 확인에만 머문다는 뜻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더 높은 형태의 양심과 선으로부터의 지각도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성급하게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특별한 체험을 했는가’가 아니라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 가르치신 진리가 우리의 삶 안에서 선과 결합되고 있는가입니다. AC.495가 퍼셉션을 설명하면서 마지막에 ‘삶으로 확증되는 신앙고백’을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결국 퍼셉션과 양심의 차이는 창세기 초반 전체를 관통하는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의 차이’를 보여 줍니다. 천적 인간은 사랑에서 신앙으로, 선에서 진리로 나아갔고, 영적 인간은 진리를 받아들여 신앙으로 삼고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선으로 인도됩니다. 방식은 다르지만 두 경우 모두 생명의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잃어버린 태고교회의 상태를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과 신앙과 양심의 길을 따라 주님께서 우리를 이끄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진리가 삶이 되고 신앙이 사랑과 결합될 때, 주님은 우리를 영적 인간에서 더욱 온전한 사랑의 질서로 계속 이끌어 가십니다. (AC.492-495 심화 2)

 

 

 

창5:5, AC.495, ‘태고교회의 쇠퇴를 이해하는 열쇠, 퍼셉션’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5태고교회가 어떻게 쇠퇴하였는지는 퍼셉션(perception)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태고교회는 퍼셉션을 가진 교회였으며, 오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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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5, AC.492-496 심화 1, ‘유전적 악은 어떻게 대대로 누적되며, 우리는 조상의 죄까지 책임져야

창5:5, AC.492-496 심화1, ‘유전적 악은 어떻게 대대로 누적되며, 우리는 조상의 죄까지 책임져야 하는가?’ AC.494는 태고교회가 쇠퇴한 주된 원인을 설명하면서 ‘유전적 악’(hereditary evil)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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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3, AC.481-485 심화

1, ‘셋 교회는 태고교회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달랐는가?’

 

AC.484는 셋 교회를 가리켜 태고교회와 ‘매우 비슷했다’고 하면서도 곧바로 중요한 차이를 덧붙입니다. ‘사랑이 그만큼 주된 것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신앙은 사랑과 결합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한 문장은 셋 교회의 위치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셋 교회는 태고교회와 단절된 교회도 아니고, 태고교회의 가장 완전한 상태를 그대로 유지한 교회도 아니었습니다. ‘사랑과 신앙의 결합’이라는 본질적인 질서는 이어받았지만, 그 결합 안에서 사랑이 차지하는 위치에는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AC.484는 실제로 셋 교회가 태고교회와 매우 비슷하면서도 사랑과 거기서 비롯되는 신앙에 있어서는 동일하지 않았다고 설명합니다.

 

태고교회의 본래 질서를 먼저 보아야 이 차이가 선명해집니다. AC.337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가 천적 인간이었으며,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서 비롯되는 신앙’ 외에는 다른 신앙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설명합니다. 그들에게 신앙은 사랑과 나란히 놓이는 별도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 안에서 신앙에 속한 것들을 퍼셉션했기 때문에,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신앙이라는 말 자체를 따로 언급하려 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이것이 가장 완전한 천적 질서입니다. 먼저 사랑이 있고, 그 사랑 안에서 진리를 퍼셉션하며, 따라서 신앙은 사랑에서 나옵니다. AC.202에서도 천적 인간은 감각과 기억 지식으로부터 신앙의 것을 추론하지 않고,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퍼셉션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태고교회에서 ‘사랑이 주된 것’이라는 말은 단순히 사랑을 신앙보다 조금 더 중요하게 여겼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사랑이 신앙의 근원이며, 신앙이 사랑 안에 포함되어 있는 질서를 뜻합니다.

 

그런데 셋 교회에서는 이 질서가 미묘하게 달라집니다. 사랑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분리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사랑이 태고교회에서처럼 절대적으로 주된 위치에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AC.484는 셋 교회를 ‘여섯째 날의 영적 인간’과 연결합니다. 여섯째 날에는 신앙과 사랑이 결합되어 있지만, 일곱째 날이 표상하는 완전한 천적 상태와는 아직 구별됩니다. 셋 교회가 태고교회와 ‘매우 비슷하면서도 같지는 않았다’는 말의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 차이는 창4의 가인과 비교할 때 더욱 또렷해집니다. 가인의 문제는 사랑의 주도성이 조금 약해졌다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사랑보다 앞세우고 마침내 신앙을 사랑으로부터 ‘분리’한 데 있었습니다. AC.337은 이것을 태고교회 교리의 왜곡으로 설명하고, AC.362는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이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다고 설명합니다. 그 결과 신앙은 체어리티로부터도 분리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셋과 가인은 매우 중요한 대조를 이룹니다. 셋 교회에서는 ‘사랑이 이전만큼 주된 것은 아니지만 신앙은 여전히 사랑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가인에게서는 ‘신앙이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마침내 사랑으로부터 분리’됩니다. 둘 다 태고교회의 가장 완전한 상태와는 차이가 있지만, 그 차이의 성격은 전혀 다릅니다. 셋에게서는 결합이 아직 살아 있고, 가인에게서는 그 결합 자체가 무너집니다.

 

이것은 훗날 나타나는 천적 교회와 영적 교회의 차이를 생각하게 하는 초기 징후이기도 합니다. AC.393은 인류가 태고교회와 같은 상태를 계속 유지하지 못하고 신앙을 사랑으로부터 분리할 것이 예견되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신앙의 지식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받을 수 있는 새로운 질서를 마련하셨다고 설명합니다. 이때에는 태고교회의 퍼셉션 대신 신앙과 체어리티에 결합된 양심이 뒤따르게 됩니다. 이것이 곧 셋 교회 자체가 이미 후대의 영적 교회였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AC.484에서 보이는 ‘사랑의 주도성은 약해졌지만 신앙과 사랑의 결합은 유지되는 상태’는 태고교회의 순수한 천적 질서로부터 인류가 점차 멀어져 가는 큰 흐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따라서 셋 교회의 의미를 단순히 ‘태고교회의 두 번째 버전’ 정도로 이해해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셋은 ‘계승과 변화’가 동시에 일어나는 지점입니다. 앞선 교회의 선과 진리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음 교회가 받을 수 있는 상태로 이어지지만, 그 상태는 이미 앞선 교회와 동일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섭리는 모든 시대의 사람을 똑같은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받을 수 있는 상태 안에서 선과 진리의 결합을 보존하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AC.484의 마지막 문장은 창5 전체를 읽는 하나의 기준이 됩니다. 셋 이후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으로 이어지는 것은 단순히 사람들이 늙어 죽고 다음 세대가 태어나는 과정이 아닙니다. AC.483이 밝힌 것처럼 이 이름들은 서로 다른 퍼셉션을 가진 여러 교회들을 나타냅니다. 셋에게서 이미 나타난 ‘같으면서도 달라지는’ 교회의 계승은 앞으로 더욱 다양한 상태로 전개됩니다.

 

결국 셋 교회가 태고교회와 같은 점은 ‘신앙이 사랑과 결합되어 있었다’는 것이고, 다른 점은 ‘사랑이 더 이상 태고교회에서처럼 그만큼 주된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작은 차이 안에서 우리는 거대한 변화의 시작을 봅니다. 교회의 쇠퇴는 어느 날 갑자기 모든 진리가 사라지는 방식으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신앙의 질서가 조금씩 달라지는 데서 시작될 수도 있습니다. 동시에 주님께서는 그 변화 가운데서도 아직 남아 있는 결합을 보존하시고, 그것을 통하여 다음 교회를 이어 가십니다. (AC.481-485 심화 1)

 

 

 

창5:3, AC.481-485 심화 2, ‘창4의 셋과 창5의 셋은 왜 서로 다른 교회인가?’

창5:3, AC.481-485 심화2, ‘창4의 셋과 창5의 셋은 왜 서로 다른 교회인가?’ 창4:25에도 ‘셋’이 나오고 창5:3에도 ‘셋’이 나옵니다. 문자 그대로 읽으면 당연히 동일한 셋이며, 창5는 창4 끝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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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81, 창5:3, '태고교회와 닮은 새 교회 셋' (AC.481-485)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And man lived a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begat into his likeness, after his image, and called his name Seth. (창5:3) AC.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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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64 심화

‘에녹이 보존한 교리는 후대의 고대 말씀과 모세의 창세기 기록에 어떻게 이어졌는가?’

 

 

AC.464는 ‘에녹’이라 하는 교회가 태고교회에 계시되고 그 교회가 퍼셉션한 것들로부터 교리를 형성했으며, 그 교리가 당시에는 쓸모가 없었지만 ‘후대의 쓰임을 위해’ 보존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에녹이 정돈하여 보존한 교리가 훗날 고대교회에 전해지고, 더 나아가 모세가 창세기를 기록할 때 사용한 고대의 자료가 된 것일까요? 큰 흐름에서는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에녹의 교리 = 고대 말씀 = 모세오경’이라고 곧바로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에녹의 역할부터 정확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태고교회는 천적 교회였으며,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 안에서 선과 진리를 퍼셉션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후대처럼 체계적인 교리를 먼저 배우고 그것을 통해 무엇이 참인지를 판단하는 방식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상태가 변하면서 이러한 퍼셉션이 계속 유지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때 ‘에녹’이라 하는 교회가 태고교회에 계시되고 퍼셉션된 것들을 모아 교리의 형태로 정돈했습니다. 살아 있는 내적 퍼셉션으로 알고 있던 것이 후대에도 전달될 수 있는 형태로 보존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다’는 창5:24의 속뜻과 연결됩니다. 에녹의 교리가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즉시 필요한 것이어서 널리 사용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당시에는 쓰이지 않으면서도 훗날 필요할 때를 위하여 보존되었다는 것입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사라질 것을 주님께서 아셨기 때문에, 그 안에 있던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까지 함께 사라지도록 두지 않으시고 다른 형태로 보존하신 것입니다. AC.464의 에녹은 이런 의미에서 ‘퍼셉션에서 교리로’ 넘어가는 중요한 전환점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에녹이 정돈한 교리를 곧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고대 말씀’ 전체와 동일시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른 곳에서 고대교회에 하나의 ‘고대 말씀’(Ancient Word)이 있었으며, 그것이 후대에는 소실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민21:14의 ‘여호와의 전쟁기’와 수10:13 및 삼하1:18에 언급되는 ‘야살의 책’ 등을 그 고대 말씀과 관련하여 설명합니다. 이것은 태고교회로부터 내려온 상응과 표상의 지식이 고대교회에서 말씀과 교리의 형태로 발전하고 보존되었던 더 넓은 전승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에녹의 교리화는 이 긴 전승의 매우 초기적이고 중요한 단계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모세와의 관계에서도 같은 주의가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앞부분의 기록이 모세 시대에 처음 아무 자료도 없이 생겨난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는 태고교회와 고대교회에서 내려오던 고대의 기록과 전승이 있었으며, 모세가 그러한 자료를 사용했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창세기 원역사에 해당하는 부분에는 태고교회와 고대교회로부터 전해 내려온 매우 오래된 교회적 전승이 상응적 서술의 형태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고대의 말씀과 상응 지식 자체는 후대에 상당 부분 소실되었지만, 그 내용과 표현의 일부는 섭리 가운데 후대의 말씀 안에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기록한 창세기와 에녹의 교리 보존 사이에는 ‘고대의 계시와 퍼셉션이 후대를 위해 보존되고 전승되었다’는 큰 연속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연속성을 ‘에녹이 책을 한 권 써 두었고 그것이 그대로 전해져 모세오경이 되었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464는 그런 직접적인 문헌 계보를 말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모세오경 전체가 에녹의 교리에서 유래했다고 할 근거도 없습니다. 보다 정확한 그림은 ‘태고교회의 계시와 퍼셉션 → 에녹이라 하는 교회의 교리화와 보존 → 고대교회에서의 전승과 발전 → 고대의 말씀과 여러 기록 및 전승 → 모세가 사용한 고대 자료’라는 긴 흐름입니다. 이 과정에는 여러 시대와 여러 형태의 전승이 놓여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에녹의 의미가 더욱 깊어집니다. 주님은 한 시대의 사람들이 누리던 특별한 영적 상태가 사라질 때 그들과 함께 모든 진리가 사라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은 사라졌지만, 그 퍼셉션으로 알았던 것 가운데 후대에 필요한 것은 교리와 전승의 형태로 보존되었습니다. 그리고 훗날 사람들이 더 이상 태고교회처럼 직접 퍼셉션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보존된 진리는 다른 형태로 그들을 섬길 수 있었습니다. AC.464가 ‘후대의 쓰임’이라고 한 말에는 바로 이러한 주님의 섭리가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에녹에서 모세까지의 관계를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에녹이 정돈한 교리가 그대로 모세오경이 된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계시와 퍼셉션을 후대에 전달하기 위해 보존한 에녹의 사역이 고대교회의 오랜 전승을 거쳐 훗날 말씀의 기록으로 이어지는 큰 섭리적 흐름의 한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영적 상태가 변할 때마다 진리를 없애시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가 받을 수 있는 형태로 보존하고 전달하십니다. 에녹의 ‘들려감’은 바로 그 보존의 섭리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AC.464 심화)

 

 

 

AC.464, 창5, ‘에녹은 태고교회의 계시와 퍼셉션으로부터 교리를 형성한 교회이다’

개요 AC.464‘에녹’(Enoch)이라 하는 교회는 태고교회에 계시되고 그 교회가 퍼셉션한 것들로부터 교리를 형성한 것으로 묘사됩니다. 이 교리는 당시에는 쓸모가 없었지만 후대의 쓰임을 위해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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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또는 영에 관하여 그들이 육체의 삶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영들과의 체험에서 얻은 몇 가지 사례 Some Examples Drawn from Experience with Spirits Concerning What They Had Thought during Their Life in the Body about the Soul or Spirit

 

AC.443

다른 삶에서는 사람들이 육체 안에서 살았을 때 영혼과 영, 그리고 사후의 삶에 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분명하게 지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육체의 상태와 비슷한 상태에 놓이면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며, 그들의 생각은 마치 소리 내어 말하는 것처럼 분명하게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의 경우,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나는 그가 살아 있을 때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지각했으며, 그 자신도 그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는 영의 존재를 믿기는 했지만, 죽은 뒤에는 영이 어떤 희미한 삶을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육체의 생명이 거두어지면 희미하고 흐릿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는 생명이 육체 안에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영을 하나의 유령 같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또한 짐승들도 사람과 거의 마찬가지로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이러한 생각을 더욱 굳혔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영들과 천사들이 가장 큰 빛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총명과 지혜와 행복 가운데서 살아가며, 거의 묘사하기 어려울 만큼 완전한 퍼셉션을 누린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삶은 희미하기는커녕 가장 완전하게 밝고 분명합니다. In the other life it is given to perceive clearly what opinions people had entertained while they lived in the body concerning the soul, the spirit, and the life after death; for when kept in a state resembling that of the body they think in the same way, and their thought is communicated as plainly as if they spoke aloud. In the case of one person, not long after his decease, I perceived (what he himself confessed) that he had indeed believed in the existence of the spirit, but had imagined that it must live after death an obscure kind of life, because if the life of the body were withdrawn there would remain nothing but what is dim and obscure; for he had regarded life as being in the body, and therefore he had thought of the spirit as being a phantom; and he had confirmed himself in this idea from seeing that brutes also have life, almost as men have it. He now marveled that spirits and angels live in the greatest light, and in the greatest intelligence, wisdom, and happiness, attended with a perception so perfect that it can scarcely be described; consequently that their life, so far from being obscure, is most perfectly clear and distinct.

 

해설

AC.443부터 AC.448까지는 창4의 속뜻에 대한 해설을 마친 뒤 이어지는 체험 기록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부분에 ‘영혼 또는 영에 관하여 그들이 육체의 삶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영들과의 체험에서 얻은 몇 가지 사례’라는 제목을 붙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부터는 창4의 특정 구절을 직접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세상에서 영혼과 영, 사후의 삶에 관해 품었던 생각이 사후에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여러 실제 사례를 통해 보여 줍니다.

 

첫 사례의 사람은 영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영이 존재하고 사람이 죽은 뒤에도 살아간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문제는 그가 그 사후의 삶을 어떻게 상상했느냐에 있었습니다. 그는 생명이 근본적으로 육체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육체가 사라지면 생명의 대부분도 함께 사라지고, 영에게는 희미하고 흐릿한 어떤 존재 상태만 남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사후의 삶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현세의 육체적 삶보다 훨씬 희박하고 불완전한 삶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가 영을 ‘유령’(phantom) 같은 것으로 생각했다는 말은 이러한 관념을 잘 보여 줍니다. 그에게 실재성이 강한 것은 육체였고, 영은 육체에서 생명이 빠져나간 뒤 남는 희미한 잔상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짐승들도 인간과 거의 마찬가지로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 그는 자신의 생각을 더욱 굳혔습니다. 육체를 가진 동물에게도 생명이 있으므로 생명은 육체에 속한 것이며, 그렇다면 육체가 없어지면 인간에게 남는 생명도 매우 희미할 것이라고 추론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그 추론을 일반적인 교리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생전에 실제로 품고 있었던 생각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사후에 직접 경험한 것은 자신의 예상과 정반대였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영들과 천사들이 ‘가장 큰 빛’ 가운데 있으며, ‘가장 뛰어난 총명과 지혜와 행복’을 누린다고 말합니다. 더욱이 그들의 퍼셉션은 거의 묘사하기 어려울 정도로 완전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후의 삶이 단순히 계속된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육체가 사라진 뒤 의식과 지각이 희미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이 더욱 밝고 분명해진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의 ‘가장 완전하게 밝고 분명하다’(most perfectly clear and distinct)는 표현은 이 글의 핵심을 잘 압축합니다. 이 사람은 육체를 생명의 중심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육체가 없어지면 삶도 희미해진다’고 여겼지만, 사후에는 오히려 그 반대를 발견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체험에 따르면 영적 삶은 육체적 삶의 흐릿한 그림자가 아니라, 지각과 사고와 의식이 더욱 선명한 삶입니다. 따라서 육체에서 벗어나는 것은 인간의 의식이 점차 꺼져 가는 과정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다만 여기서 ‘영들과 천사들이 가장 큰 빛과 총명과 지혜와 행복 가운데 산다’는 표현을 모든 영이 사후 즉시 똑같은 천국적 행복을 누린다는 뜻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이 글의 논점은 사후의 모든 사람의 상태가 동일하다는 데 있지 않고, ‘육체가 사라지면 영의 삶은 희미해질 것’이라는 생각을 반박하는 데 있습니다. 선한 영과 악한 영의 상태, 천국과 지옥의 차이 등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AC.443이 강조하는 것은 육체의 죽음이 인간의 영적 의식과 삶을 희미한 그림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 첫 사례가 AC.443-448의 맨 앞에 놓인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사후의 삶을 생각할 때 사람은 자신이 지금 경험하는 육체적 감각을 기준으로 삼기 쉽습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느끼는 현재의 삶을 가장 실재적인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몸이 없어지면 삶도 덜 실재적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체험을 통해 그 전제를 뒤집습니다. 육체가 생명의 근원이 아니라면 육체의 죽음은 생명의 소멸이나 희미해짐을 뜻하지 않습니다. AC.443의 놀라움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생전에 영의 존재를 믿었던 사람조차 사후에 이르러 자신이 영의 삶을 얼마나 희미하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AC.443 해설)

 

 

 

AC.444, 창4 뒤, ‘영은 단지 생각일 뿐이며 아무런 형체도 없는가?’

영혼 또는 영에 관하여 그들이 육체의 삶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영들과의 체험에서 얻은 몇 가지 사례 AC.444이 세상에 살 때 영은 아무런 연장(extension)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믿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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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42, 창4:26, ‘태고 시대에도 교회에서 분리된 많은 교리와 이단이 있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26) AC.442앞에서 설명한 이 장의 내용으로부터, 태고 시대에도 교회에서 분리된 많은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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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3 심화

1. 상응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은가? ‘술어의 성질은 주제의 성질에 달려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AC.103에서 스베덴보리는 ‘나무들’이 퍼셉션을 뜻하는 이유가 여기서 천적 인간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영적 인간을 주제로 할 때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술어의 성질은 주제의 성질에 달려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상응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은 것일까요? ‘나무는 이것을 뜻하고 물은 저것을 뜻한다’는 식으로 상응을 이해해 왔다면 이 문장은 다소 혼란스럽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먼저 AC.103은 상응이 아무 의미로나 자유롭게 바뀐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말씀의 속뜻에는 일정한 질서가 없고 해석하는 사람이 문맥에 따라 마음대로 뜻을 정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그런 자의적인 해석이 아니라, 어떤 자연적 대상이 영적인 것을 나타낼 때 그 의미의 구체적인 성질이 지금 말씀에서 다루는 ‘주제’에 의해 정해진다는 것입니다.

 

창2:9의 경우가 좋은 예입니다. 여기서는 천적 인간을 다루고 있으며, 천적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통하여 생명을 받고 그것을 퍼셉션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에덴동산에서 자라는 ‘나무들’ 역시 그 생명의 질서 안에서 퍼셉션과 관계됩니다. ‘나무’라는 단어만 따로 떼어 놓고 사전에서 뜻을 찾듯 ‘퍼셉션’이라는 의미를 붙인 것이 아니라, 천적 인간이라는 주제와 에덴동산 전체의 문맥 안에서 그 의미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술어의 성질은 주제의 성질에 달려 있다’는 말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 대해 ‘밝다’고 말할 때 그 사람이 있는 방의 조명을 말할 수도 있고, 그의 표정을 말할 수도 있으며, 그의 이해력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밝다’라는 말이 아무 뜻으로나 변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가에 따라 그 구체적인 의미가 정해지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AC.103의 상응 원리를 완전히 설명하는 예는 아니지만, ‘주제’와 ‘술어’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에는 도움이 됩니다.

 

따라서 상응을 공부하면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 가운데 하나는 상응을 고정된 암호표로 만드는 일입니다. ‘나무 = 퍼셉션’이라는 대응 하나를 알았다고 해서 성경에 나오는 모든 나무에 곧바로 퍼셉션을 대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그 본문에서 무엇을 다루는지, 그 대상이 어떤 관계 안에 놓여 있는지, 앞뒤의 말씀과 어떤 질서를 이루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AC.103은 바로 이 점을 짧지만 분명하게 가르쳐 줍니다.

 

이 원리는 상응을 마음대로 해석하는 것을 허용하기는커녕 오히려 제한합니다. 상응의 뜻을 아는 사람이 자기 지식으로 말씀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주제와 문맥이 그 상응의 성질을 결정하도록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상응에 관한 지식이 많아질수록 말씀을 더 쉽게 ‘풀어 버릴’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말씀이 실제로 무엇을 다루고 있는지 더욱 세심하게 살펴야 합니다.

 

이것은 말씀 앞에서 인간의 이해가 어떤 자리에 있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상응은 우리가 말씀을 장악하기 위한 해독 도구가 아니라, 말씀 안에 있는 질서와 연결을 더 깊이 보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AC.103의 이 짧은 원리는 앞으로 AC를 읽는 동안 계속 기억할 가치가 있습니다. 하나의 상응을 발견했을 때 곧바로 그것을 공식화하기보다 ‘지금 이 말씀은 무엇을 다루고 있는가?’를 먼저 묻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상응은 인간이 말씀 위에 세운 공식이 아니라, 말씀 자체가 그 속뜻을 열어 보여 주는 질서 안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AC.103 심화 1)

 

 

 

AC.103, 창2:9, ‘나무가 퍼셉션을 뜻하는 것은 여기서 천적 인간을 다루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3여기서 ‘나무들’(trees)이 퍼셉션을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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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9 심화

1. 영적 인간에게서 생명의 질서가 ‘뒤집혀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C.99에서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에게서 생명의 질서가 ‘뒤집혀 있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처음 읽는 독자에게 상당히 강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영적 인간 역시 주님에 의해 거듭나는 사람인데, 그의 생명의 질서가 뒤집혀 있다는 것은 그가 잘못된 상태에 있다는 뜻일까요? 더 나아가 천적 인간이 되기 전에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는 뜻일까요?

 

먼저 AC.99 자체가 말하는 것을 정확히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에게도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신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므로 ‘뒤집혀 있다’는 것은 생명의 근원이 주님이 아니라 사람 자신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실제 생명의 근원은 영적 인간에게도 주님입니다. 문제는 그 생명이 흘러드는 실제 질서와 사람이 그것을 경험하고 퍼셉션하는 방식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데 있습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겉 사람이 아직 속 사람과 싸웁니다. 이 때문에 실제로는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시는데도, 사람에게는 지성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기 자신에게서 기억지식과 이성을 통하여 나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곧 ‘내가 배우고, 내가 생각하고, 내가 추론하여 이해하게 되었다’는 방향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AC.99이 말하는 ‘뒤집힘’은 우선 이 질서와 관련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이 관계가 달라집니다. 주님께서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통하여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시며,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싸움이 없으므로 그는 이것이 실제로 그러하다는 것을 퍼셉션합니다. 다시 말해 천적 인간은 이성과 기억지식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생명과 지성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그 질서대로 퍼셉션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에게서 뒤집혀 있던 질서가 천적 인간에게서 ‘회복’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을 단순히 ‘잘못된 사람’과 ‘올바른 사람’, 또는 ‘낮은 사람’과 ‘높은 사람’으로 나누라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적어도 AC.99가 강조하는 차이는 주님의 유입 자체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닙니다. 둘 다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습니다. 다만 영적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앞서고 겉 사람과 속 사람 사이의 싸움이 아직 있기 때문에, 그 생명의 실제 근원이 사람 자신에게서 시작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주된 것이 되고 싸움이 그치면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질서가 더 이상 거꾸로 보이지 않고 실제 그러한 것으로 퍼셉션됩니다.

 

따라서 ‘뒤집혀 있다’는 표현 때문에 영적 인간의 신앙과 이성, 기억지식의 삶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AC.99는 그것들 안에도 이미 주님께서 흘러들고 계신다고 말합니다. 다만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주된 질서 안에서 그 유입의 근원이 더욱 직접적으로 퍼셉션됩니다. 바로 이 회복된 생명의 질서, 곧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통하여 지성이 흘러드는 사람을 스베덴보리는 ‘동쪽 에덴에 있는 동산’이라 합니다. (AC.99 심화 1)

 

 

 

AC.99, 창2:8, ‘영적 인간에게 뒤집혀 있던 생명의 질서가 천적 인간에게서 회복됨’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창2:8) AC.99영적 인간에게서 생명, 곧 생명의 질서는 이러합니다. 주님께서는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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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7 심화

1. 태고교회 사람들은 어떻게 사랑과 신앙의 상태를 ‘호흡의 상태’로 퍼셉션했는가?

 

AC.97에서 가장 놀라운 대목은 태고교회 사람들이 ‘사랑과 신앙의 상태들을 호흡의 상태들로 퍼셉션했다’는 말입니다. 오늘날의 독자라면 자연스럽게 ‘그것이 도대체 어떤 호흡이었는가?’라고 묻게 됩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질문 앞에서 스베덴보리 자신이 멈춥니다. 그는 ‘이 호흡에 관해서는 아직 아무것도 말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에는 그러한 것들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라고 합니다. 따라서 AC.97을 충실하게 읽으려면 먼저 이 한계를 그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이 번호만으로 태고교회 사람들이 어떤 속도나 방식으로 호흡했는지, 특정한 사랑이나 신앙의 상태에 어떤 호흡이 대응했는지를 재구성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이것을 오늘날의 명상 호흡법이나 복식호흡, 호흡 훈련 같은 것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AC.97은 태고교회 사람들이 어떤 호흡법을 훈련하여 영적 상태에 들어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방향은 반대에 가깝습니다. 그들의 사랑과 신앙의 상태와 호흡의 상태가 서로 연결되어 있었고, 그들은 그것을 퍼셉션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호흡은 영적 상태를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는 기술로 제시되지 않습니다.

 

이 점은 지금까지 태고교회의 퍼셉션에 관하여 읽어 온 내용과도 어울립니다. 그들의 퍼셉션은 오늘날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막연한 직감이나 감정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인 퍼셉션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호흡의 상태를 퍼셉션했다는 말도 단순히 자신의 몸 상태를 예민하게 관찰했다는 뜻으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호흡이 그들의 후손들에게서 점차 변화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의 독특한 내적 상태가 후대로 그대로 보존되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오늘날 이 땅에서는 더 이상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하지만 ‘다른 삶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안다고 덧붙입니다. 따라서 이 호흡은 스베덴보리에게 단순한 고대인의 생리적 습관이 아니라 인간의 영적 상태와 관련된 현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AC.97에서 우리가 확실히 붙들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첫째,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사랑과 신앙의 상태와 호흡의 상태 사이에 실제적인 관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 관계는 오늘날에는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셋째, 따라서 그것을 현대적인 호흡법으로 재현하거나 추측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넷째, 바로 이러한 배경 때문에 고대인들과 말씀에서 영 또는 생명이 ‘바람’과 ‘숨’으로 표현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대목의 가치는 잃어버린 태고교회의 호흡법을 복원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이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것보다 훨씬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엿보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왜 창2:7의 ‘생명의 숨’이 단순한 시적 표현이 아니라 그들에게 실제적인 의미를 가진 표현이었는지를 이해하게 합니다. 그 이상의 구체적인 내용은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밝히지 않은 만큼 우리도 여기서는 밝히지 않는 것이 맞습니다. (AC.97 심화 1)

 

 

 

AC.97, 창2:7, '호흡과 숨이 생명을 뜻하는 이유, 태고교회의 퍼셉션'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AC.97생명을 ‘숨을 내쉼’(breathing)과 ‘숨’(breath)으로 묘사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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