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4:25에도 ‘셋’이 나오고 창5:3에도 ‘셋’이 나옵니다. 문자 그대로 읽으면 당연히 동일한 셋이며, 창5는 창4끝에 등장한 셋의 후손을 계속 기록하는 족보로 보입니다. 그런데 AC.485에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분명하게 말합니다. ‘여기서셋은앞에서묘사된셋(창4:25)과다른교회를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창4와 창5에 각각 등장하는 ‘에녹’과 ‘라멕’ 역시 같은 이름을 가진 서로 다른 교회들이라고 밝힙니다.
그렇다면 왜 같은 이름을 사용했을까요? AC.485의 답은 간단하면서도 중요합니다. ‘서로다른교리를가진교회들이같은이름으로일컬어졌기’ 때문입니다. 즉 이름이 같다는 사실 자체가 속뜻에서 동일한 교회임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창4의 에녹과 창5의 에녹, 창4의 라멕과 창5의 라멕이 서로 다른 교회인 것처럼, 창4의 셋과 창5의 셋도 서로 다른 교회입니다.
AC.485가 직접 참조하라고 한 AC.435를 보면 그 차이는 더욱 분명해집니다. 창4:25의 ‘사람과그의아내’는 앞에서 아다와 씰라로 표상된 ‘새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태어난 셋은 체어리티를 얻을 수 있게 하는 ‘새로운신앙’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창4의 장 전체 개요에서도 스베덴보리는 가인으로 표상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뒤, 주님께서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질 수 있는 새로운 신앙을 주셨으며 그것을 ‘셋’이라 한다고 요약합니다.
그러나 창5에서는 상황이 다릅니다. AC.435는 바로 다음 장인 창5:1-4에서 다시 ‘사람과그의아내’와 ‘셋을낳음’이 언급되지만, 여기서는 ‘태고교회의첫후대’가 의미된다고 명시합니다. 같은 사람과 같은 출생 이야기가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뜻에서는 서로 다른 것을 다루기 때문에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창1과 창2에서 사람의 창조가 반복되는 것과 비교합니다. 창1에서는 영적 인간의 창조를, 창2에서는 천적 인간의 창조를 다루므로 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되지만 속뜻은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제 창4와 창5의 구조가 상당히 흥미로워집니다. AC.337은 창4전체가 태고교회의 타락, 곧 교리의 왜곡과 그 결과 생겨난 이단과 분파들을 가인과 그의 후손들의 이름 아래 다룬다고 설명합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나타내고, 그로부터 여러 이단적 계열이 전개됩니다. 그러다가 창4후반에는 아다와 씰라로 표상된 ‘새교회’가 일어나며, 마지막에는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질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신앙이 ‘셋’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납니다.
반면 창5의 장 전체 개요는 전혀 다른 출발점을 제시합니다. AC.460은 이 장이 ‘태고교회가연속되는세대들을통하여홍수에거의이르기까지이어지는과정’을 다룬다고 밝힙니다. 이어 AC.461은 태고교회 자체를 ‘사람’이라 하고, AC.462는 태고교회만큼 천적이지는 않았던 두 번째 교회를 ‘셋’이라 하며, 이후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 노아로 교회들이 이어진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창4와 창5를 속뜻에서 하나의 단순한 직선 계보로 이어 붙이는 것은 어렵습니다. 창4는 태고교회 안에서 사랑과 분리된 신앙이 발생하면서 생긴 가인 계열의 이단과 분파, 그리고 그 흐름 가운데 새 교회가 일어나는 과정을 추적합니다. 창5는 다시 태고교회 자체와 그 첫 후대로부터 시작하여 여러 교회가 노아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과정을 추적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두 장 모두 셋, 에녹, 라멕이라는 이름을 포함하면서도 그 이름들이 서로 다른 교회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창4의교회계열과창5의교회계열이같은홍수이전시대에서로병행하여존재했던것인가?’ 이것은 충분히 제기할 수 있는 가설입니다. 특히 창4가 태고교회에서 생겨난 이단과 분파들을 다루고, 창5가 태고교회 자체의 후대를 따로 추적한다는 설명을 함께 놓으면, 한 계열이 나타났다고 해서 다른 계열이 곧바로 사라졌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AC.337자체도 가인과 그의 후손들을 태고교회에서 생겨난 ‘이단과분파들’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한 가지 선을 분명히 그어야 합니다. AC.435와 AC.485가 직접 확정하는 것은 ‘창4의셋과창5의셋은서로다른교회이며,같은이름이서로다른교회를가리킬수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AC.337과 창5의 개요가 보여 주는 것은 두 장이 서로 다른 교회적 흐름을 추적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창4의 각 교회와 창5의 각 교회를 하나씩 대응시켜 ‘이교회와저교회가정확히같은시기에존재했다’고 연대기적으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병행’이라는 말을 사용한다면 ‘홍수이전태고교회시대안에서서로구별되는여러교회적계열과분파가전개되었다’는 의미로 제한하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창4와 창5를 문자적 족보처럼 한 줄로만 읽으면 ‘가인계열이후에셋계열이시작되었다’는 식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속뜻에서는 ‘누가누구다음에태어났는가’보다 ‘태고교회로부터어떤교회적상태와교리가갈라져나오고,어떤것은쇠퇴하며,어떤것은보존되어다음교회로이어졌는가’가 중심입니다. 창4와 창5는 동일한 홍수 이전 세계를 서로 다른 교회적 관점에서 비추고 있을 가능성을 열어 줍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주님의 섭리에 관한 중요한 의미도 있습니다. 태고교회 안에서 가인과 같은 이단이 생겨났다고 해서 주님께서 교회 전체를 즉시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는 흐름이 한쪽에서 전개되는 동안에도, 주님께서는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고 다른 형태의 교회가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창4의 마지막에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시고, 창5에서는 태고교회 자체의 후대가 노아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은, 인간의 타락보다 주님의 보존하시는 섭리가 더 깊고 오래 지속된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창4의셋과창5의셋은같은교회인가?’라는 질문의 답은 분명합니다. ‘아닙니다.’ AC.485가 직접 그렇게 밝힙니다. 그러나 그 답은 더 큰 질문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왜 말씀은 서로 다른 교회에 같은 이름을 사용했으며, 왜 창4와 창5에 셋, 에녹, 라멕이라는 이름들이 반복되는가? 그것은 창세기 초반의 계보가 단순한 인물 명단이 아니라, 태고교회 시대에 나타난 여러 교회와 교리와 내적 상태의 역사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관점에서 보면 창4와 창5는 서로 중복되는 족보가 아니라, 태고교회의 쇠퇴와 분화, 보존과 계승이라는 서로 다른 측면을 보여 주는 두 개의 창이 됩니다. (AC.481-485심화2)
창5:2에는 하나님께서 ‘남자와여자를창조하셨고...그들의이름을사람이라일컬으셨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AC.475-480에서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태고교회의 거듭남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남자’는 이해(understanding)와 거기에 속한 것들을, 따라서 신앙을 의미하고, ‘여자’는 의지(will)와 거기에 속한 것들을, 따라서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말씀은 이 둘을 끝까지 ‘남자와여자’라고 따로 부르지 않고, 그들의 이름을 하나의 ‘사람’(homo)이라 합니다. 왜 신앙과 사랑이 결혼을 이루었을 때 비로소 둘을 하나의 ‘사람’이라 하는 것일까요?
그 출발점은 AC.477의 매우 중요한 선언에 있습니다. ‘가장높은의미로는오직주님자신만이사람이시다’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참된 사람이 되는 기준은 인간 자신에게 있지 않고 주님께 있습니다. 천적 교회를 ‘사람’이라 하는 것은 그 교회가 주님의 ‘모양’이기 때문이고, 영적 교회를 ‘사람’이라 하는 것은 주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교회와 사람이 ‘사람’이라 하는 것은 그들 안에 독립적으로 참된 인간성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선과 진리를 받아 주님의 형상과 모양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남자’와 ‘여자’가 함께 있어야 합니까? 남자가 의미하는 신앙은 진리를 알고 받아들이는 쪽과 관계되고, 여자가 의미하는 사랑은 그 진리를 원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쪽과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이해하면서도 그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의 이해와 의지는 하나가 아닙니다. 반대로 선을 원한다고 하면서도 무엇이 참된 선인지를 밝혀 주는 진리와 분리되어 있다면 역시 온전한 질서를 이루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과정은 이처럼 나뉘어 있던 신앙과 사랑, 이해와 의지를 하나의 생명으로 결합하시는 과정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천적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AC.479는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었을 때 ‘주님을향한사랑에서비롯된신앙’으로 말미암아 가장 탁월한 의미로 ‘사람’이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신앙과 사랑의 결혼은 두 요소를 반반씩 결합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질서의 중심에는 사랑이 있고, 신앙은 그 사랑으로부터 나옵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의 진리를 보고,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무엇이 진리인지를 지각하며, 그렇게 알게 된 진리를 다시 삶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4의 가인이 표상하는 상태와 정확히 대조됩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 자체에 있지 않았습니다. 신앙을 사랑과 분리하여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만든 데 있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본래 질서에서는 사랑이 신앙의 중심이었으며, 사랑으로부터 신앙에 속한 것들을 지각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신앙을 사랑으로부터 분리하면서 그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AC.337). 따라서 창5:2의 ‘남자와여자’의 결혼은 창4에서 무너진 바로 그 질서의 본래 모습을 보여 줍니다.
AC.476에서 결혼이 이루어진 뒤 더 이상 ‘남자와여자’라 하지 않고 ‘사람’이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이 서로 분리되어 움직일 때에는 아직 둘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 둘을 결합하시면 하나의 삶이 됩니다. 사람이 믿는 것과 사랑하는 것, 아는 것과 원하는 것, 고백하는 것과 살아가는 것이 하나의 방향을 향하게 됩니다. 말씀에서 ‘그의이름’이 아니라 ‘그들의이름을사람이라일컬으셨다’ 한 것은 바로 이 하나 됨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AC.480은 이 상태를 창1의 여섯째 날의 끝과 일곱째 날의 시작에 연결합니다. 여섯째 날에는 신앙과 사랑이 하나가 되며, 그때 사랑이 중심이 되는 천적 상태가 시작됩니다. AC.83도 여섯째 날이 완성되는 때를 신앙과 사랑이 하나가 되어 사랑이 중심이 되기 시작하는 상태로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일곱째 날의 안식은 단순히 모든 활동이 중단된 상태가 아니라, 사람 안의 질서가 주님을 중심으로 바로잡혀 더 이상 신앙과 사랑이 서로 갈라져 싸우지 않는 천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결국 ‘사람’은 단순히 인간이라는 종의 명칭만이 아닙니다. 속뜻으로는 주님께서 사람 안에서 신앙과 사랑, 이해와 의지를 결합하여 하나의 생명으로 이루신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가장 높은 의미로는 오직 주님만이 사람이시고, 교회와 거듭난 사람은 주님의 형상과 모양을 받아 ‘사람’이 됩니다. 참된 인간성은 많이 아는 데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받은 진리가 사랑이 되고 그 사랑에서 다시 신앙과 삶이 흘러나오는 데서 완성됩니다. 창5:2의 ‘그들의이름을사람이라일컬으셨다’는 말씀은 바로 이러한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를 압축하여 보여 줍니다. (AC.475-480심화1)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26)
AC.442
앞에서설명한이장의내용으로부터,태고시대에도교회에서분리된많은교리와이단들이있었으며,각각에는저마다의이름이있었다는사실이분명합니다.이렇게분리된교리와이단들은오늘날의어떤것보다도훨씬더깊은사고에서나온것이었습니다.그시대사람들의천성이그러했기때문입니다. From the contents of this chapter as above explained, it is evident that in the most ancient time there were many doctrines and heresies separate from the church, each one of which had its name, which separate doctrines and heresies were the outcome of much more profound thought than any at the present day, because such was the genius of the men of that time.
해설
AC.442는 창4의 마지막 절에 대한 세부 해석을 하나 더 덧붙인다기보다, 지금까지 해설한 창4전체를 뒤돌아보며 하나의 중요한 결론을 제시합니다. 창4에 등장한 가인, 에녹, 이랏, 므후야엘, 므드사엘, 라멕과 그의 아내들 및 자녀들, 그리고 마지막의 셋과 에노스에 이르기까지, 이 이름들을 단순히 개인들의 계보로만 읽어서는 이 장의 속뜻을 알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장의 해설 전체를 근거로 태고 시대에 교회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여러 교리와 이단들이 있었으며, 그것들이 각각 고유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특히 주의할 표현은 ‘교회에서분리된’(separatefromthechurch)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교회와 아무 관계도 없던 외부의 종교나 사상들이 있었다는 뜻이라기보다, 본래 교회 안에 있던 것들이 점차 분리되어 독립적인 교리와 이단으로 발전했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창4에서 가인으로 나타난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고, 그 후 여러 이름으로 나타나는 상태들이 계속 전개된 것도 이러한 흐름 안에 있습니다. 하나였던 교회의 생명에서 어떤 교리적 요소가 떨어져 나가 독자적인 것이 될 때, 그것은 더 이상 본래 교회의 질서 안에 머물지 않게 됩니다.
이 점에서 AC.442는 창4에 그렇게 많은 이름이 등장하는 이유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선 해설에서 이 이름들을 단순한 개인의 이름으로만 다루지 않고, 서로 다른 교리와 교회 상태를 나타내는 이름으로 해석해 왔습니다. 따라서 ‘각각에는저마다의이름이있었다’는 말은 단순히 여러 사람이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서로 구별되는 교리적 흐름들이 존재했다는 뜻입니다. 이름이 달라진다는 것은 그만큼 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사상과 교리의 성격도 서로 달랐음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이 글에서 상당히 뜻밖인 대목은 그러한 교리와 이단들이 ‘오늘날의어떤것보다도훨씬더깊은사고’에서 나왔다고 하는 부분입니다. ‘이단’이라고 해서 반드시 사고가 단순하거나 지적으로 수준이 낮았던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태고 시대 사람들의 천성 자체가 오늘날 사람들과 달랐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생겨난 잘못된 교리와 이단조차 매우 깊은 사고의 산물이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깊다’는 것은 그것이 참되거나 선하다는 평가가 아닙니다. 사고의 깊이와 교리의 진실성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아무리 깊은 사고에서 나온 것이라도 교회의 생명에서 분리되면 그릇된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4의 핵심 문제와도 잘 맞습니다.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의 문제는 신앙 자체가 얕거나 무지했다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따라서 AC.442가 말하는 여러 교리와 이단의 존재 역시 단순히 지적 수준의 저하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매우 깊이 사고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기에 교회에서 분리된 교리 역시 복잡하고 깊게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리의 깊이가 그것을 참된 교회로 만들어 주지는 않습니다. 창4전체에서 계속 드러났듯이, 결정적인 것은 진리가 사랑과 체어리티에 결합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동시에 AC.442의 ‘그시대사람들의천성이그러했다’는 마지막 말은 태고 시대 사람들을 오늘날의 사고방식으로 단순히 환원해서는 안 된다는 점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시대 사람들의 내적 상태와 사고 능력이 오늘날과 달랐다고 전제합니다. 다만 이 짧은 글은 그 차이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까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태고인의 사고방식을 세부적으로 추정하기보다, 스베덴보리가 명시한 범위에 머무르는 것이 안전합니다. 곧 그들은 매우 깊이 사고할 수 있었고, 그러한 특성 때문에 교회에서 분리된 교리와 이단들 역시 오늘날보다 훨씬 깊은 사고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AC.442는 창4를 마무리하면서 매우 의미 있는 역설을 남깁니다. 교회가 무너지는 것은 반드시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게 되거나 지적으로 무지해지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깊은 사고와 정교한 교리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될 수 있습니다. 창4에서 가인으로 시작된 문제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장 마지막에서 셋과 에노스를 통해 다시 제시되는 길 역시 단순히 더 깊은 교리를 갖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다시 체어리티를 향하고 체어리티가 신앙의 으뜸이 되며, 그 체어리티에서 주님께 대한 예배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AC.442는 창4전체를 ‘얼마나깊이아는가’보다 ‘그진리가어떠한사랑과결합되어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마무리하게 합니다. (AC.442해설)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And the man [homo] knew his wife again, and she bare a son, and called his name Seth; for God hath appointed me another seed instead of Abel, for Cain slew him. (창4:25)
AC.434
여기서‘사람’(man)과그의‘아내’(wife)는앞에서‘아다와씰라’(AdahandZillah)로나타낸새교회를뜻합니다.그리고그여자의‘아들’(son),곧이름을셋이라한아들은체어리티를얻을수있게하는새로운신앙을뜻합니다.‘하나님이가인이죽인아벨대신에다른씨를주셨다’(GodappointedanotherseedinsteadofAbel, whomCainslew)는것은가인이분리하여소멸시켰던체어리티가이제주님에의해이교회에주어졌다는뜻입니다. The “man” and his “wife” here mean the new church signified above by “AdahandZillah”; and by her “son,” whose name was Seth, is signified a new faith, by which charity might be obtained. By “GodappointedanotherseedinsteadofAbel,whomCainslew,” is signified that charity, which Cain had separated and extinguished, was now given by the Lord to this church.
해설
AC.434는 라멕으로 끝난 계보 뒤에 왜 다시 아담과 그의 아내, 그리고 셋의 탄생 이야기가 나오는지를 설명하는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앞의 AC.432-433까지는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 그리고 마침내 라멕에게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모두 소멸되는 황폐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창4:25은 갑자기 다시 ‘아담이그의아내와동침하매그가아들을낳아그의이름을셋이라하였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히 가족 계보가 다시 이어지는 장면으로만 보지 않고, 황폐 이후에 주님께서 새 교회를 일으키시는 장면으로 읽습니다.
먼저 여기서 ‘사람’과 그의 ‘아내’는 앞에서 ‘아다와씰라’로 나타난 새 교회를 뜻합니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아담과 하와가 곧 아다와 씰라라는 뜻이 아닙니다. 속뜻으로는 서로 다른 인물들이 같은 교회의 새로운 상태를 나타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앞의 라멕 계열에서 아다와 씰라가 등장한 뒤, 이제 ‘사람과그의아내’라는 표현을 통해 그 새 교회가 다시 언급됩니다. 따라서 창4:25은 이야기의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준비된 새 교회의 흐름을 이어 갑니다.
그런데 이 새 교회에는 ‘아들’이 태어납니다. 그의 이름은 셋(Seth)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셋을 ‘체어리티를얻을수있게하는새로운신앙’으로 풀이합니다. 이 표현은 특히 주의 깊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셋은 단순히 가인을 대신하는 또 하나의 ‘신앙’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의 가인은 결국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을 나타냈습니다. 반면 셋이 나타내는 새로운 신앙은 체어리티를 다시 얻을 수 있게 하는 신앙입니다. 같은 ‘신앙’이라 하더라도 체어리티와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창4:25의 ‘아벨대신에다른씨를주셨다’는 말이 중요해집니다. 아벨은 앞에서 체어리티를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것은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고 마침내 체어리티가 소멸되었다는 뜻이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다른씨’를 주셨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가인이 분리하고 소멸시킨 체어리티가 주님에 의해 이 새 교회에 다시 주어진 것으로 설명합니다. 인간이 잃어버린 것을 인간 스스로 되살린 것이 아니라 ‘주님에의해’ 다시 주어졌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셋 자신이 곧 체어리티라고 하지 않고, 셋은 ‘체어리티를얻을수있게하는새로운신앙’이라고 한다는 사실입니다. ‘다른씨’가 아벨을 대신한다는 말씀의 목적은 단순히 아벨이라는 인물을 셋이라는 인물이 대신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아벨이 나타냈던 체어리티가 다시 교회에 주어지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신앙이 셋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셋의 등장은 신앙이 다시 체어리티를 향하도록 질서가 회복되는 새로운 시작입니다.
이것은 앞의 라멕 이야기를 지나온 독자에게 상당히 중요한 장면입니다. 라멕에게서는 ‘사람’과 ‘어린아이’가 모두 죽었습니다. 곧 신앙과 체어리티가 모두 소멸되어 ‘성한곳이없는’ 황폐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말씀은 그 황폐로 창4를 끝내지 않습니다. 바로 뒤에서 ‘하나님이다른씨를주셨다’고 합니다. 황폐 이후에도 주님께서는 체어리티가 다시 존재할 수 있도록 새로운 신앙을 일으키시고, 그것을 통해 새 교회를 세우십니다. AC.434는 이 전환을 보여 주는 번호입니다.
결국 셋의 탄생은 단순한 족보의 연장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소멸된 뒤 주님께서 새 교회에 그것을 다시 주시는 장면입니다.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은 체어리티를 분리했고 아벨을 죽였지만, 셋이 나타내는 새로운 신앙은 체어리티를 얻을 수 있게 하는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AC.434에서 중심에 계신 분은 셋 자체라기보다 새 교회를 일으키시는 주님이십니다. 인간에게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황폐해진 뒤에도 ‘다른씨’를 주시고, 다시 사랑과 신앙이 함께할 수 있는 길을 여시는 분이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AC.434해설)
그리고여기서라멕이‘일흔일곱배로보복을받을것’(beavengedseventyandsevenfold)이라는말은지극히거룩한것을침해했기때문에정죄가있다는뜻입니다. And here, that Lamech should “beavengedseventyandsevenfold” means damnation, because of the violation of that which is most sacred.
해설
AC.433은 앞의 AC.432에서 ‘일흔일곱배의보복’이 정죄를 뜻한다고 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앞 번호에서는 라멕이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을 소멸시켰을 뿐 아니라, 그 신앙을 통해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까지 소멸시켰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후자를 훨씬 더 큰 신성모독이라고 했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왜 그러한 상태를 하필 ‘일흔일곱배’라는 수로 표현하는지, 말씀에서 ‘일곱’이 지니는 의미를 통해 설명합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창4:15로 돌아갑니다. 가인이 ‘일곱배로보복을받을것’이라는 말은 가인이 나타내는 ‘분리된신앙’에 폭력을 가하는 것이 신성모독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분리된 신앙에 폭력을 가하는 것조차 신성모독이라고 설명합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그 안에 남아 있는 거룩한 것을 함부로 파괴해도 된다는 뜻은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곱’은 왜 거룩한 것을 뜻할까요? 스베덴보리는 그 근거를 ‘일곱째날’에서 찾습니다. 창세기 1장의 엿새와 창세기 2장의 일곱째 날을 설명하면서, 그는 일곱째 날이 천적 인간과 천적 교회, 천적 천국을 뜻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가장 높은 의미에서는 주님 자신을 뜻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일곱이라는 수의 거룩함은 숫자 자체에 어떤 신비한 힘이 있어서가 아니라, 말씀에서 일곱째 날이 나타내는 영적 의미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중요한 해석 원칙도 덧붙입니다. 말씀에서 일곱은 거룩한 것 또는 지극히 거룩한 것을 뜻하지만, 그 거룩함은 ‘다루는대상에따라’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같은 수가 등장한다고 해서 모든 구절의 의미가 완전히 같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에 관해 일곱이라고 말하는지, 그 구절이 어떤 내용을 다루고 있는지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이 원칙을 놓치면 말씀의 숫자를 문맥과 관계없이 일정한 뜻으로만 대입하는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 ‘일흔’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말씀에서 한 시대를 십 년으로 나타내므로, 일흔은 일곱 시대를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극히 거룩한 것을 표현할 때 ‘일흔일곱배’라는 말을 사용했다고 밝힙니다. 여기서 독자가 붙들어야 할 핵심은 일흔이나 일흔일곱을 실제 연수나 형벌의 횟수로 계산하는 일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수들이 말씀에서 거룩한 것의 의미를 나타내는 방식에 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를 보여 주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마18:22를 인용합니다. 베드로가 형제를 몇 번까지 용서해야 하는지 묻자, 주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용서의 횟수에 상한선을 정한 것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형제가 죄를 범할 때마다 용서하여 그 용서가 끝이 없도록, 곧 영원하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일흔 번씩 일곱 번은 끝없는 용서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이 수가 용서와 연결되는 반면, 창세기에서는 라멕의 보복과 연결됩니다. 이것이 앞에서 말한 ‘다루는대상에따라’라는 원칙을 이해하는 중요한 사례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스베덴보리가 밝히는 의미는 끝없는 용서이고, 창세기에서 밝히는 의미는 지극히 거룩한 것을 침해한 데 따른 정죄입니다. 따라서 두 구절의 숫자 표현을 단순히 같은 결과를 나타내는 공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같은 거룩함의 의미가 각 구절에서 다루는 대상에 따라 달리 적용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라멕의 ‘일흔일곱배의보복’이 지극히 거룩한 것을 침해했기 때문에 정죄가 있다는 뜻이라고 결론짓습니다. 앞의 AC.432와 연결하면, 라멕은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을 소멸시켰을 뿐 아니라 그 신앙을 통해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까지 소멸시켰습니다. 이번 번호는 바로 그 상태가 왜 ‘일흔일곱배’라는 표현으로 나타나는지를 설명합니다. 따라서 일흔일곱 배를 실제 형벌의 배율로 계산하거나, 주님께서 인간처럼 분노하여 복수하신다는 뜻으로 읽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밝히는 속뜻과 다릅니다. (AC.433해설)
심화
1.‘일곱번이아니라일흔번씩일곱번까지용서하라는말씀은왜인용되었는가?’
스베덴보리가 AC.433에서 마18:22를 인용한 이유는 라멕의 ‘일흔일곱배의보복’에 사용된 숫자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두 말씀은 얼핏 보면 서로 정반대의 내용을 말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주님은 형제를 끝없이 용서하라고 말씀하시지만, 창세기에서 라멕은 일흔일곱 배의 보복을 말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두 말씀을 연결합니다. 그 이유를 이해하려면 숫자 자체보다 그 숫자가 사용된 문맥을 먼저 살펴야 합니다.
마태복음에서 베드로는 형제가 자신에게 죄를 범하면 몇 번까지 용서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주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를 문자적인 횟수로만 읽으면 용서할 수 있는 최대 횟수가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말씀을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형제가 죄를 범할 때마다 용서하여 그 용서가 끝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밝힙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핵심은 용서의 횟수를 계산하는 데 있지 않고, 용서에 끝을 정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께서는 단순히 ‘계속용서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이러한 숫자를 사용하셨을까요? AC.433에서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말씀의 ‘일곱’이 지니는 의미와 연결합니다. 일곱째 날이 천적 인간과 천적 교회, 천적 천국을 나타내며, 가장 높은 의미에서는 주님 자신을 나타내기 때문에 일곱은 거룩한 것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에 나오는 일곱과 일흔 번씩 일곱 번은 단순한 계산을 넘어 거룩한 의미를 지닌 표현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구별할 점이 있습니다. 창4:24의 표현은 ‘일흔일곱배’이고, 마18:22의 개역개정 표현은 ‘일흔번씩일곱번’입니다. 두 표현을 산술적으로 같은 수라고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두 구절을 연결하는 이유는 숫자가 계산상 동일하기 때문이 아니라, 말씀에서 지극히 거룩한 것을 나타내는 수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번 번호의 논증은 산술적 일치가 아니라 말씀의 영적 의미에 관한 것입니다.
이 점을 이해하면 같은 계열의 숫자가 서로 다른 문맥에서 사용되는 이유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형제를 용서하는 일이 다루어집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는 표현을 끝없는 용서, 곧 영원한 용서로 풀이합니다. 반면 창세기에서는 라멕이 신앙과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일이 다루어집니다. 그래서 일흔일곱 배의 보복은 지극히 거룩한 것을 침해한 데 따른 정죄를 나타냅니다. 두 구절은 같은 행동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대상에 적용된 숫자의 의미를 보여 줍니다.
그렇다고 마태복음의 용서와 창세기의 정죄를 단순히 ‘하나는무한한자비,다른하나는무한한복수’라는 대칭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AC.433에서 스베덴보리는 마태복음의 용서가 끝없고 영원하다는 사실을 밝히지만, 라멕에 대해서는 지극히 거룩한 것을 침해했기 때문에 정죄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이번 번호에서 정죄를 ‘끝없는복수’라고 정의하지 않습니다. 두 구절을 연결하되, 각각에 관해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밝힌 내용은 구별해야 합니다.
또한 주님의 용서에 관한 말씀을 읽으면서, 용서란 잘못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여기거나 피해를 계속 감수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단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AC.433이 직접 설명하는 것은 용서의 횟수에 끝을 정하지 말라는 말씀의 속뜻입니다. 실제 관계에서 잘못을 어떻게 바로잡고 어떤 경계를 세워야 하는지까지 이번 번호가 모두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거룩한 의미를 받아들이면서도, 본문이 다루지 않은 문제에 관한 결론을 성급히 덧붙이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마18:22를 인용한 것은 라멕의 보복을 용서와 동일시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말씀에서 일곱과 그에 연결된 수들이 문자적인 횟수를 넘어 거룩한 의미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그 의미가 끝없는 용서로, 창세기에서는 지극히 거룩한 것을 침해한 데 따른 정죄로 나타납니다. 이 구별을 이해하면 ‘일흔일곱배의보복’이라는 낯선 표현을 단순한 형벌의 배율로 읽지 않고, 라멕이 나타내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이라는 문맥 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433심화1)
창4:24에서 라멕은 가인을 위한 벌이 일곱 배라면 자신을 위한 벌은 일흔일곱 배라고 말합니다. 문자적으로 읽으면 가인보다 라멕에게 훨씬 더 큰 보복이 가해진다는 선언처럼 들립니다. 그래서 독자는 ‘주님께서라멕에게일흔일곱배로복수하신다는뜻인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AC.432는 이 표현을 ‘정죄’라고 풀이합니다. 이 짧은 설명을 이해하려면 문자적 표현과 스베덴보리가 밝히는 속뜻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이번 번호는 일흔일곱이라는 수를 실제 형벌의 횟수나 배율로 계산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들이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을 소멸시키고, 신앙을 통해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까지 소멸시켰으며, 그로 인해 정죄가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 정죄가 곧 ‘일흔일곱배의보복’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에서 이 표현의 핵심은 정확한 수량이 아니라, 앞에서 설명한 신성모독과 그에 따른 정죄입니다.
또한 ‘보복’이라는 단어만을 근거로 주님께서 인간처럼 원한을 품고 복수하신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432가 직접 밝히는 속뜻은 정죄입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주님의 분노나 정죄의 작용에 관한 교리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보복’이라는 표현이 어떻게 사용되는지에 관한 더 넓은 설명은 관련 번호들을 함께 살펴야 합니다. 여기서는 스베덴보리가 보복을 정죄라고 풀이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붙드는 것이 우선입니다.
가인의 일곱 배와 라멕의 일흔일곱 배를 비교할 때에도 주의가 필요합니다. 앞의 AC.396에서는 가인의 표가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을 보존하는 일과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라멕이 그 신앙을 소멸시켰을 뿐 아니라 체어리티까지 소멸시킨 상태를 설명합니다. 따라서 두 표현을 함께 읽으면 가인에게서 다룬 신앙의 문제와 라멕에게서 드러나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차이를 단순히 숫자만으로 계산하여 영적 상태의 정확한 크기를 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 말씀을 읽는 독자가 또 하나 조심해야 할 것은 ‘정죄’라는 표현을 곧바로 자신의 현재 상태에 적용하는 일입니다. 신앙에 관한 의문이 생기거나 체어리티를 실천하지 못한 일이 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자신이 일흔일곱 배의 보복을 받는 상태라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라멕이 나타내는 황폐와 신성모독의 상태를 풀이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신앙과 체어리티의 중요성을 일깨우지만, 각 개인의 최종적인 상태를 판단하도록 주어진 설명은 아닙니다.
결국 ‘일흔일곱배의보복’은 AC.432에서 신앙과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데 따른 정죄를 나타냅니다. 이 표현을 실제 보복의 횟수로 계산하거나 주님의 인간적인 분노로 곧바로 이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라멕의 말이 가리키는 영적 상태를 밝히고 있으며, 그 중심에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이라는 문제가 놓여 있습니다. (AC.432심화2)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If Cain shall be avenged sevenfold, truly Lamech seventy and sevenfold. (창4:24)
AC.432
이말씀은그들이‘가인’(Cain)이나타내는신앙을소멸시켰다는뜻입니다.그신앙에폭력을가하는것은신성모독이었습니다.동시에그들은신앙을통해태어나야할체어리티까지소멸시켰는데,이는훨씬더큰신성모독이었습니다.이로인해정죄가있었으며,이것이곧‘일흔일곱배의보복’(seventyandsevenfoldavengement)입니다. These words signify that they had extinguished the faith meant by “Cain,” to do violence to which was sacrilege, and at the same time had extinguished the charity which should be born through faith, a far greater sacrilege, and that for this there was condemnation, that is, a “seventyandsevenfoldavengement.”
해설
AC.432는 창4:24의 ‘가인을위하여는벌이칠배일진대라멕을위하여는벌이칠십칠배이리로다’라는 말씀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앞의 AC.427-431에서 스베덴보리는 라멕이 죽였다고 말한 ‘사람’이 신앙을, ‘어린아이’가 체어리티를 나타낸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상처’와 ‘타박상’은 각각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나타낸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번 번호는 이 설명들을 하나로 모아, 라멕의 말에 담긴 신성모독과 정죄의 의미를 밝힙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그들이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을 소멸시켰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가인은 단순히 한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앞에서 설명한 신앙의 교리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을 소멸시켰다는 것은 교회 안에 있던 신앙이 파괴되었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신앙에 폭력을 가하는 것 자체가 신성모독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신앙이 단지 인간이 만들어 낸 의견이 아니라 교회의 거룩한 것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라멕의 상태는 신앙의 소멸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들이 ‘신앙을통해태어나야할체어리티’까지 소멸시켰다고 말합니다. 앞의 AC.429에서 ‘어린아이’가 체어리티를 나타낸다고 한 이유가 여기서 다시 중요해집니다. 라멕이 ‘사람’과 ‘어린아이’를 함께 죽였다는 것은 신앙뿐 아니라 그 신앙에서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까지 소멸시켰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후자를 ‘훨씬더큰신성모독’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독자가 주의할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를 단순히 지식과 행동의 두 항목으로 나누지 않는 것입니다. AC.432에서 문제 되는 것은 어떤 사람이 신앙에 관한 내용을 조금 잘못 이해했거나 이웃을 충분히 돕지 못했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 안의 거룩한 것인 신앙이 소멸되고, 그 신앙을 통해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까지 소멸된 상태를 말합니다. 앞의 번호들에서 ‘더이상성한곳이없다’고 설명한 황폐가 이번 번호에서는 신성모독과 정죄라는 표현으로 이어집니다.
‘훨씬더큰신성모독’이라는 말도 이 문맥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을 소멸시키는 일 자체가 신성모독이지만, 체어리티까지 소멸시키는 것은 그보다 더 큰 신성모독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체어리티가 신앙과 무관한 별개의 덕목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보여 줍니다. 신앙이 보존되어야 하는 이유를 생각할 때, 그 신앙을 통해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를 함께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번 번호의 한 문장만으로 모든 종류의 죄와 신성모독에 대한 일반적인 서열을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소멸로 인해 ‘정죄’가 있었으며, 그것이 ‘일흔일곱배의보복’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일흔일곱 배를 가인의 일곱 배보다 정확히 열한 배 무거운 형벌로 계산해서는 안 됩니다. AC.432가 직접 밝히는 것은 이 표현이 신앙과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데 따른 정죄를 나타낸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보복’이라는 말만으로 주님께서 인간처럼 분노하여 복수하신다고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이번 번호는 그 표현의 속뜻을 정죄라고 밝히지만, 정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관한 모든 설명을 제공하지는 않습니다.
결국 AC.432는 라멕의 고백에 담긴 황폐의 의미를 한층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그들은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을 소멸시켰고, 신앙을 통해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까지 소멸시켰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각각 신성모독과 훨씬 더 큰 신성모독이라고 설명하며, 그 결과인 정죄를 ‘일흔일곱배의보복’이라고 풀이합니다. 따라서 라멕의 말은 단순히 더 큰 보복을 요구하는 선언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가 모두 소멸된 교회의 상태를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AC.432해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창4:23)
AC.428
이절과다음절의내용에서‘라멕’(Lamech)이황폐를뜻한다는사실이매우분명하게드러납니다.그가‘한사람을죽였다’(slainaman)고하고,‘어린아이’(littlechild)를죽였다고하며,가인은일곱배로보복을받겠지만라멕은‘일흔일곱배로’(seventyandsevenfold)보복을받을것이라고말하기때문입니다. From the contents of this and the following verse, it is very evident that by “Lamech” is signified vastation; for he says that he had “slainaman,” and a “littlechild,” and that Cain should be avenged sevenfold, and Lamech “seventyandsevenfold.”
해설
AC.428은 앞의 AC.427에서 풀이한 라멕의 고백을 다음 절까지 연결하여, 라멕이 왜 ‘황폐’를 나타내는지 확인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번 번호에서 새로운 상응을 길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라멕이 직접 한 말들을 근거로, 그가 나타내는 상태가 황폐라는 사실이 매우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의 핵심은 창4:23의 ‘죽였다’는 표현과 창4:24의 ‘일흔일곱배’라는 표현을 함께 읽는 데 있습니다.
앞의 AC.427에서 ‘한사람을죽였다’는 말은 신앙을 소멸시켰다는 뜻이었고,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말은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는 뜻이었습니다. 이번 번호는 이 두 표현을 다시 언급합니다. 라멕의 황폐는 단순히 신앙이 약해진 상태나 체어리티가 잠시 부족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앞 번호에서 설명했듯이, 신앙과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더 이상 온전함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와 관련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다음 절의 ‘가인은일곱배,라멕은일흔일곱배’라는 말까지 함께 제시합니다. 창4:24는 가인에게 적용된 ‘일곱배’와 라멕에게 적용된 ‘일흔일곱배’를 대비합니다. 이 대비가 라멕의 황폐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는 것이 이번 번호의 설명입니다. 다만 AC.428자체는 일곱과 일흔일곱의 속뜻을 아직 풀이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일흔일곱 배를 황폐의 정도를 나타내는 단순한 수치로 계산하거나, 가인보다 라멕이 정확히 열한 배 더 악하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보복’이라는 표현을 곧바로 주님께서 분노하여 가인이나 라멕에게 복수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는 보복의 성격을 설명하기보다, 라멕의 말에 등장하는 두 죽음과 두 수치의 대비를 통해 황폐의 의미를 확인합니다. 보복과 숫자의 속뜻은 다음 절에 관한 설명을 살피면서 판단해야 합니다.
이처럼 AC.428은 짧지만 앞뒤 번호를 연결하는 역할을 합니다. AC.427은 라멕이 죽였다고 말한 ‘사람’과 ‘어린아이’의 의미를 밝히고, AC.428은 그 말과 다음 절의 보복에 관한 선언을 함께 제시합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는 라멕의 황폐에 관한 설명을 마무리하는 동시에, 창4:24의 ‘일곱배’와 ‘일흔일곱배’에 관한 해설로 독자를 이끕니다.
결국 라멕이 황폐를 나타낸다는 사실은 그가 신앙과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고 고백하는 말에서 드러나며, 다음 절에서 가인과 라멕의 보복을 대비하는 표현을 통해 더욱 분명해집니다. AC.428은 이 두 절을 하나의 문맥으로 읽게 하면서, 라멕의 상태를 이해하려면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뿐 아니라 이어지는 ‘일흔일곱배’의 의미도 살펴야 함을 보여 줍니다. (AC.428해설)
체어리티 없는 신앙이 결국 선과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게 된다는 스베덴보리의 설명은 처음에는 다소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교리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설령 그의 삶에 사랑이 부족하더라도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는 더 잘 분별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지적인 차원에서는 많은 진리를 알고 그것들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AC.379-381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앎’은 단순히 교리 내용을 기억하고 설명할 수 있다는 뜻보다 훨씬 깊습니다.
AC.379에서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가 사람을 주님과 결합하게 하는 ‘결속’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 단순한 지식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진리가 그 자체로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교리를 알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사랑과 선으로 이어지지 않을 때, 그 진리는 사람 안에서 생명을 얻지 못하고 기억과 이해성 안에 머물게 됩니다. 다시 말해 진리를 ‘아는것’과 진리가 자기 삶에서 ‘참인것을보는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스베덴보리에게서 진리의 목적은 선입니다. 진리는 사람이 무엇이 선인지 알게 하고, 그 선으로 인도하기 위해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진리를 배우면서 실제로 선을 행하고 악을 죄로 여겨 피할 때, 그 진리는 점차 그의 의지와 삶에 결합됩니다. 그때 그는 단순히 ‘이것이옳다고배웠다’고 말하는 데서 더 나아가 왜 그것이 옳은지를 삶을 통해 알게 됩니다. 반대로 진리를 많이 배우면서도 그것을 자기 삶의 선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진리와 그의 실제 애정 사이에 틈이 생깁니다.
이것이 AC.380의 ‘땅이다시는그효력을네게주지아니할것이요’라는 말씀과 연결됩니다. 가인은 계속 ‘땅’을 갈 수 있습니다. 곧 신앙에 관한 지식을 계속 연구하고 배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체어리티가 소멸한 상태에서는 그 땅이 더 이상 결실하지 않습니다. 지식은 늘어날 수 있지만 그것이 선한 삶이라는 열매로 이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 결과를 ‘피하며유리하는자’가 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진리를 전혀 모르는 것이 아니라,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들을 하나의 살아 있는 중심에서 보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이 점은 ‘체어리티가있으면교리를몰라도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신앙의 진리는 무엇을 사랑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며, 체어리티는 그 진리를 살아 있게 합니다. 눈이 있어야 길을 볼 수 있지만 실제로 걸어야 목적지에 이르는 것과 비슷합니다. 보는 것과 걷는 것을 서로 경쟁시키는 것이 잘못인 것처럼,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하나를 제거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을 가진 것 자체가 아니라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마침내 그것이 체어리티를 지배하게 한 데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없는신앙은신앙이아니다’라는 말은 교리적 정확성을 가볍게 여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교리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묻는 말입니다. 진리를 연구할수록 주님과 이웃을 더 사랑하고, 자기 악을 더 분명히 보고 그것을 버리며, 실제 쓰임의 삶으로 나아간다면 그 진리는 살아 있는 신앙이 되어 갑니다. 그러나 진리를 연구할수록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만 많아지고 자기의 지적 우월성을 확인하는 데 그친다면, 지식은 증가해도 그 지식이 자라야 할 ‘땅’은 점차 효력을 잃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과 진리에 대한 영적인 분별은 지식의 양만으로 생기지 않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사랑하고 그 선을 행하려는 삶 안에서 진리는 서로 연결되고 질서를 얻습니다. 체어리티는 진리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살아 움직일 수 있게 하는 생명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 안에 있을 때 사람은 진리를 단지 기억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를 보게 됩니다. 이것이 체어리티를 잃은 가인이 마침내 ‘피하며유리하는자’가 되는 이유이며, 동시에 신앙이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AC.381심화1)
※오늘(2026/09/20)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4, ‘주 우리 하나님’, 찬94,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입니다.
오늘은창4절별 주석 그 다섯 번째, 16절로 18절, AC 글 번호로는 397번에서 404번입니다. 먼저 본문입니다.
16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17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18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창4:16-18)
제목은
보존된 신앙은 어디로 가는가,가인의 성읍 에녹
이며, 다음은 ‘3분요약’입니다. 새로 오신 분들, 그리고 그동안 함께해오신 분들 모두를 위한, 지난 2월부터 시작한 이 특별한 주일예배를 위한, 그 흐름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한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