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창4:24)

 

AC.433

가인이 ‘일곱 배로 보복을 받을 것’(avenged sevenfold)이라는 말이 ‘가인’(Cain)이 나타내는 분리된 신앙에 폭력을 가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라는 뜻임은 이미 15절에서 밝혔습니다. 그리고 ‘일흔일곱 배의 보복’(seventy and sevenfold avengement)이 훨씬 더 큰 신성모독을 뜻하며, 그 결과가 정죄라는 사실은 ‘일흔일곱 배’(seventy and sevenfold)의 의미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일곱’(seven)이라는 수가 거룩한 것은 ‘일곱째 날’(seventh day)이 천적 인간, 천적 교회, 천적 천국을 뜻하며, 가장 높은 의미에서는 주님 자신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일곱’(seven)이라는 수는 어디에 나오든 거룩한 것 또는 지극히 거룩한 것을 뜻합니다. 다만 그 거룩함과 신성함은 그곳에서 다루는 대상에 따라 적용되며, 그 대상에 상응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일흔’(seventy)이라는 수의 의미도 나옵니다. 일흔은 일곱 시대를 포함하는데, 말씀에서 한 시대는 십 년이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거룩하거나 신성한 것을 표현하고자 할 때에는 ‘일흔일곱 배’(seventy-sevenfold)라고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형제를 일곱 번까지만 용서할 것이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하라고 말씀하신 경우가 그러합니다(마18:22). 이는 형제가 죄를 범할 때마다 용서하여 그 용서가 끝이 없도록, 곧 영원하도록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거룩한 것입니다. That Cain’s being “avenged sevenfold” signifies that it was sacrilege to do violence to that separated faith which is meant by “Cain,” has been already shown at verse 15. And that by a “seventy and sevenfold avengement” is signified a far greater sacrilege, the consequence of which is damnation,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seventy and sevenfold.” That the number “seven” is holy originates in the fact that the “seventh day” signifies the celestial man, the celestial church, the celestial kingdom, and, in the highest sense, the Lord himself. Hence the number “seven,” wherever it occurs in the Word, signifies what is holy, or most sacred; and this holiness and sanctity is predicated of, or according to, the things that are being treated of. From this comes the signification of the number “seventy,” which comprises seven ages; for an age, in the Word, is ten years. When anything most holy or sacred was to be expressed, it was said “seventy-sevenfold,” as when the Lord said that a man should forgive his brother not until seven times, but until seventy times seven (Matt. 18:22), by which is meant that they should forgive as many times as he sins, so that the forgiving should be without end, or should be eternal, which is holy.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마18:22)

 

그리고 여기서 라멕이 ‘일흔일곱 배로 보복을 받을 것’(be avenged seventy and sevenfold)이라는 말은 지극히 거룩한 것을 침해했기 때문에 정죄가 있다는 뜻입니다. And here, that Lamech should “be avenged seventy and sevenfold” means damnation, because of the violation of that which is most sacred.

 

해설

AC.433은 앞의 AC.432에서 ‘일흔일곱 배의 보복’이 정죄를 뜻한다고 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앞 번호에서는 라멕이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을 소멸시켰을 뿐 아니라, 그 신앙을 통해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까지 소멸시켰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후자를 훨씬 더 큰 신성모독이라고 했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왜 그러한 상태를 하필 ‘일흔일곱 배’라는 수로 표현하는지, 말씀에서 ‘일곱’이 지니는 의미를 통해 설명합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창4:15로 돌아갑니다. 가인이 ‘일곱 배로 보복을 받을 것’이라는 말은 가인이 나타내는 ‘분리된 신앙’에 폭력을 가하는 것이 신성모독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분리된 신앙에 폭력을 가하는 것조차 신성모독이라고 설명합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그 안에 남아 있는 거룩한 것을 함부로 파괴해도 된다는 뜻은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곱’은 왜 거룩한 것을 뜻할까요? 스베덴보리는 그 근거를 ‘일곱째 날’에서 찾습니다. 창세기 1장의 엿새와 창세기 2장의 일곱째 날을 설명하면서, 그는 일곱째 날이 천적 인간과 천적 교회, 천적 천국을 뜻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가장 높은 의미에서는 주님 자신을 뜻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일곱이라는 수의 거룩함은 숫자 자체에 어떤 신비한 힘이 있어서가 아니라, 말씀에서 일곱째 날이 나타내는 영적 의미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중요한 해석 원칙도 덧붙입니다. 말씀에서 일곱은 거룩한 것 또는 지극히 거룩한 것을 뜻하지만, 그 거룩함은 ‘다루는 대상에 따라’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같은 수가 등장한다고 해서 모든 구절의 의미가 완전히 같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에 관해 일곱이라고 말하는지, 그 구절이 어떤 내용을 다루고 있는지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이 원칙을 놓치면 말씀의 숫자를 문맥과 관계없이 일정한 뜻으로만 대입하는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 ‘일흔’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말씀에서 한 시대를 십 년으로 나타내므로, 일흔은 일곱 시대를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극히 거룩한 것을 표현할 때 ‘일흔일곱 배’라는 말을 사용했다고 밝힙니다. 여기서 독자가 붙들어야 할 핵심은 일흔이나 일흔일곱을 실제 연수나 형벌의 횟수로 계산하는 일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수들이 말씀에서 거룩한 것의 의미를 나타내는 방식에 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를 보여 주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마18:22를 인용합니다. 베드로가 형제를 몇 번까지 용서해야 하는지 묻자, 주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용서의 횟수에 상한선을 정한 것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형제가 죄를 범할 때마다 용서하여 그 용서가 끝이 없도록, 곧 영원하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일흔 번씩 일곱 번은 끝없는 용서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이 수가 용서와 연결되는 반면, 창세기에서는 라멕의 보복과 연결됩니다. 이것이 앞에서 말한 ‘다루는 대상에 따라’라는 원칙을 이해하는 중요한 사례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스베덴보리가 밝히는 의미는 끝없는 용서이고, 창세기에서 밝히는 의미는 지극히 거룩한 것을 침해한 데 따른 정죄입니다. 따라서 두 구절의 숫자 표현을 단순히 같은 결과를 나타내는 공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같은 거룩함의 의미가 각 구절에서 다루는 대상에 따라 달리 적용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라멕의 ‘일흔일곱 배의 보복’이 지극히 거룩한 것을 침해했기 때문에 정죄가 있다는 뜻이라고 결론짓습니다. 앞의 AC.432와 연결하면, 라멕은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을 소멸시켰을 뿐 아니라 그 신앙을 통해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까지 소멸시켰습니다. 이번 번호는 바로 그 상태가 왜 ‘일흔일곱 배’라는 표현으로 나타나는지를 설명합니다. 따라서 일흔일곱 배를 실제 형벌의 배율로 계산하거나, 주님께서 인간처럼 분노하여 복수하신다는 뜻으로 읽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밝히는 속뜻과 다릅니다. (AC.433 해설)

 

심화

1.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하라는 말씀은 왜 인용되었는가?’

 

스베덴보리가 AC.433에서 마18:22를 인용한 이유는 라멕의 ‘일흔일곱 배의 보복’에 사용된 숫자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두 말씀은 얼핏 보면 서로 정반대의 내용을 말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주님은 형제를 끝없이 용서하라고 말씀하시지만, 창세기에서 라멕은 일흔일곱 배의 보복을 말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두 말씀을 연결합니다. 그 이유를 이해하려면 숫자 자체보다 그 숫자가 사용된 문맥을 먼저 살펴야 합니다.

 

마태복음에서 베드로는 형제가 자신에게 죄를 범하면 몇 번까지 용서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주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를 문자적인 횟수로만 읽으면 용서할 수 있는 최대 횟수가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말씀을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형제가 죄를 범할 때마다 용서하여 그 용서가 끝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밝힙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핵심은 용서의 횟수를 계산하는 데 있지 않고, 용서에 끝을 정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께서는 단순히 ‘계속 용서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이러한 숫자를 사용하셨을까요? AC.433에서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말씀의 ‘일곱’이 지니는 의미와 연결합니다. 일곱째 날이 천적 인간과 천적 교회, 천적 천국을 나타내며, 가장 높은 의미에서는 주님 자신을 나타내기 때문에 일곱은 거룩한 것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에 나오는 일곱과 일흔 번씩 일곱 번은 단순한 계산을 넘어 거룩한 의미를 지닌 표현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구별할 점이 있습니다. 창4:24의 표현은 ‘일흔일곱 배’이고, 마18:22의 개역개정 표현은 ‘일흔 번씩 일곱 번’입니다. 두 표현을 산술적으로 같은 수라고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두 구절을 연결하는 이유는 숫자가 계산상 동일하기 때문이 아니라, 말씀에서 지극히 거룩한 것을 나타내는 수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번 번호의 논증은 산술적 일치가 아니라 말씀의 영적 의미에 관한 것입니다.

 

이 점을 이해하면 같은 계열의 숫자가 서로 다른 문맥에서 사용되는 이유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형제를 용서하는 일이 다루어집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는 표현을 끝없는 용서, 곧 영원한 용서로 풀이합니다. 반면 창세기에서는 라멕이 신앙과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일이 다루어집니다. 그래서 일흔일곱 배의 보복은 지극히 거룩한 것을 침해한 데 따른 정죄를 나타냅니다. 두 구절은 같은 행동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대상에 적용된 숫자의 의미를 보여 줍니다.

 

그렇다고 마태복음의 용서와 창세기의 정죄를 단순히 ‘하나는 무한한 자비, 다른 하나는 무한한 복수’라는 대칭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AC.433에서 스베덴보리는 마태복음의 용서가 끝없고 영원하다는 사실을 밝히지만, 라멕에 대해서는 지극히 거룩한 것을 침해했기 때문에 정죄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이번 번호에서 정죄를 ‘끝없는 복수’라고 정의하지 않습니다. 두 구절을 연결하되, 각각에 관해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밝힌 내용은 구별해야 합니다.

 

또한 주님의 용서에 관한 말씀을 읽으면서, 용서란 잘못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여기거나 피해를 계속 감수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단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AC.433이 직접 설명하는 것은 용서의 횟수에 끝을 정하지 말라는 말씀의 속뜻입니다. 실제 관계에서 잘못을 어떻게 바로잡고 어떤 경계를 세워야 하는지까지 이번 번호가 모두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거룩한 의미를 받아들이면서도, 본문이 다루지 않은 문제에 관한 결론을 성급히 덧붙이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마18:22를 인용한 것은 라멕의 보복을 용서와 동일시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말씀에서 일곱과 그에 연결된 수들이 문자적인 횟수를 넘어 거룩한 의미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그 의미가 끝없는 용서로, 창세기에서는 지극히 거룩한 것을 침해한 데 따른 정죄로 나타납니다. 이 구별을 이해하면 ‘일흔일곱 배의 보복’이라는 낯선 표현을 단순한 형벌의 배율로 읽지 않고, 라멕이 나타내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이라는 문맥 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433 심화 1)

 

 

 

AC.432, 창4:24, ‘라멕의 일흔일곱 배 보복은 무엇을 뜻하는가?’ (AC.432-433)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If Cain shall be avenged sevenfold, truly Lamech seventy and sevenfold. (창4:24) AC.432 이 말씀은 그들이 ‘가인’(Cain)이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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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2 심화

2. ‘일흔일곱 배의 보복은 주님의 분노를 뜻하는가?’

 

창4:24에서 라멕은 가인을 위한 벌이 일곱 배라면 자신을 위한 벌은 일흔일곱 배라고 말합니다. 문자적으로 읽으면 가인보다 라멕에게 훨씬 더 큰 보복이 가해진다는 선언처럼 들립니다. 그래서 독자는 ‘주님께서 라멕에게 일흔일곱 배로 복수하신다는 뜻인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AC.432는 이 표현을 ‘정죄’라고 풀이합니다. 이 짧은 설명을 이해하려면 문자적 표현과 스베덴보리가 밝히는 속뜻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이번 번호는 일흔일곱이라는 수를 실제 형벌의 횟수나 배율로 계산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들이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을 소멸시키고, 신앙을 통해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까지 소멸시켰으며, 그로 인해 정죄가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 정죄가 곧 ‘일흔일곱 배의 보복’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에서 이 표현의 핵심은 정확한 수량이 아니라, 앞에서 설명한 신성모독과 그에 따른 정죄입니다.

 

또한 ‘보복’이라는 단어만을 근거로 주님께서 인간처럼 원한을 품고 복수하신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432가 직접 밝히는 속뜻은 정죄입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주님의 분노나 정죄의 작용에 관한 교리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보복’이라는 표현이 어떻게 사용되는지에 관한 더 넓은 설명은 관련 번호들을 함께 살펴야 합니다. 여기서는 스베덴보리가 보복을 정죄라고 풀이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붙드는 것이 우선입니다.

 

가인의 일곱 배와 라멕의 일흔일곱 배를 비교할 때에도 주의가 필요합니다. 앞의 AC.396에서는 가인의 표가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을 보존하는 일과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라멕이 그 신앙을 소멸시켰을 뿐 아니라 체어리티까지 소멸시킨 상태를 설명합니다. 따라서 두 표현을 함께 읽으면 가인에게서 다룬 신앙의 문제와 라멕에게서 드러나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차이를 단순히 숫자만으로 계산하여 영적 상태의 정확한 크기를 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 말씀을 읽는 독자가 또 하나 조심해야 할 것은 ‘정죄’라는 표현을 곧바로 자신의 현재 상태에 적용하는 일입니다. 신앙에 관한 의문이 생기거나 체어리티를 실천하지 못한 일이 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자신이 일흔일곱 배의 보복을 받는 상태라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라멕이 나타내는 황폐와 신성모독의 상태를 풀이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신앙과 체어리티의 중요성을 일깨우지만, 각 개인의 최종적인 상태를 판단하도록 주어진 설명은 아닙니다.

 

결국 ‘일흔일곱 배의 보복’은 AC.432에서 신앙과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데 따른 정죄를 나타냅니다. 이 표현을 실제 보복의 횟수로 계산하거나 주님의 인간적인 분노로 곧바로 이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라멕의 말이 가리키는 영적 상태를 밝히고 있으며, 그 중심에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이라는 문제가 놓여 있습니다. (AC.432 심화 2)

 

 

 

AC.432, 창4:24, ‘라멕의 일흔일곱 배 보복은 무엇을 뜻하는가?’ (AC.432-433)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If Cain shall be avenged sevenfold, truly Lamech seventy and sevenfold. (창4:24) AC.432 이 말씀은 그들이 ‘가인’(Cain)이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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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2 심화 1,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은 왜 신성모독인가?’

AC.432 심화1.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은 왜 신성모독인가?’ AC.432를 처음 읽는 독자에게 가장 낯설게 다가올 수 있는 말은 ‘신성모독’입니다. 우리는 흔히 신성모독을 하나님을 욕하거나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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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If Cain shall be avenged sevenfold, truly Lamech seventy and sevenfold. (창4:24)

 

AC.432

 

이 말씀은 그들이 ‘가인’(Cain)이 나타내는 신앙을 소멸시켰다는 뜻입니다. 그 신앙에 폭력을 가하는 것은 신성모독이었습니다. 동시에 그들은 신앙을 통해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까지 소멸시켰는데, 이는 훨씬 더 큰 신성모독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정죄가 있었으며, 이것이 곧 ‘일흔일곱 배의 보복’(seventy and sevenfold avengement)입니다. These words signify that they had extinguished the faith meant by “Cain,” to do violence to which was sacrilege, and at the same time had extinguished the charity which should be born through faith, a far greater sacrilege, and that for this there was condemnation, that is, a “seventy and sevenfold avengement.”

 

해설

AC.432는 창4:24의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라는 말씀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앞의 AC.427-431에서 스베덴보리는 라멕이 죽였다고 말한 ‘사람’이 신앙을, ‘어린아이’가 체어리티를 나타낸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상처’와 ‘타박상’은 각각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나타낸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번 번호는 이 설명들을 하나로 모아, 라멕의 말에 담긴 신성모독과 정죄의 의미를 밝힙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그들이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을 소멸시켰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가인은 단순히 한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앞에서 설명한 신앙의 교리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을 소멸시켰다는 것은 교회 안에 있던 신앙이 파괴되었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신앙에 폭력을 가하는 것 자체가 신성모독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신앙이 단지 인간이 만들어 낸 의견이 아니라 교회의 거룩한 것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라멕의 상태는 신앙의 소멸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들이 ‘신앙을 통해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까지 소멸시켰다고 말합니다. 앞의 AC.429에서 ‘어린아이’가 체어리티를 나타낸다고 한 이유가 여기서 다시 중요해집니다. 라멕이 ‘사람’과 ‘어린아이’를 함께 죽였다는 것은 신앙뿐 아니라 그 신앙에서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까지 소멸시켰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후자를 ‘훨씬 더 큰 신성모독’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독자가 주의할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를 단순히 지식과 행동의 두 항목으로 나누지 않는 것입니다. AC.432에서 문제 되는 것은 어떤 사람이 신앙에 관한 내용을 조금 잘못 이해했거나 이웃을 충분히 돕지 못했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 안의 거룩한 것인 신앙이 소멸되고, 그 신앙을 통해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까지 소멸된 상태를 말합니다. 앞의 번호들에서 ‘더 이상 성한 곳이 없다’고 설명한 황폐가 이번 번호에서는 신성모독과 정죄라는 표현으로 이어집니다.

 

‘훨씬 더 큰 신성모독’이라는 말도 이 문맥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을 소멸시키는 일 자체가 신성모독이지만, 체어리티까지 소멸시키는 것은 그보다 더 큰 신성모독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체어리티가 신앙과 무관한 별개의 덕목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보여 줍니다. 신앙이 보존되어야 하는 이유를 생각할 때, 그 신앙을 통해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를 함께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번 번호의 한 문장만으로 모든 종류의 죄와 신성모독에 대한 일반적인 서열을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소멸로 인해 ‘정죄’가 있었으며, 그것이 ‘일흔일곱 배의 보복’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일흔일곱 배를 가인의 일곱 배보다 정확히 열한 배 무거운 형벌로 계산해서는 안 됩니다. AC.432가 직접 밝히는 것은 이 표현이 신앙과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데 따른 정죄를 나타낸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보복’이라는 말만으로 주님께서 인간처럼 분노하여 복수하신다고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이번 번호는 그 표현의 속뜻을 정죄라고 밝히지만, 정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관한 모든 설명을 제공하지는 않습니다.

 

결국 AC.432는 라멕의 고백에 담긴 황폐의 의미를 한층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그들은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을 소멸시켰고, 신앙을 통해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까지 소멸시켰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각각 신성모독과 훨씬 더 큰 신성모독이라고 설명하며, 그 결과인 정죄를 ‘일흔일곱 배의 보복’이라고 풀이합니다. 따라서 라멕의 말은 단순히 더 큰 보복을 요구하는 선언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가 모두 소멸된 교회의 상태를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AC.432 해설)

 

심화

1.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은 왜 신성모독인가?’

 

AC.432 심화 1,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은 왜 신성모독인가?’

AC.432 심화1.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은 왜 신성모독인가?’ AC.432를 처음 읽는 독자에게 가장 낯설게 다가올 수 있는 말은 ‘신성모독’입니다. 우리는 흔히 신성모독을 하나님을 욕하거나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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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일흔일곱 배의 보복은 주님의 분노를 뜻하는가?’

 

AC.432 심화 2, ‘일흔일곱 배의 보복은 주님의 분노를 뜻하는가?’

AC.432 심화2. ‘일흔일곱 배의 보복은 주님의 분노를 뜻하는가?’ 창4:24에서 라멕은 가인을 위한 벌이 일곱 배라면 자신을 위한 벌은 일흔일곱 배라고 말합니다. 문자적으로 읽으면 가인보다 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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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3, 창4:24, ‘일흔일곱 배의 보복은 왜 가장 거룩한 것의 침해를 뜻하는가?’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창4:24) AC.433 가인이 ‘일곱 배로 보복을 받을 것’(avenged sevenfold)이라는 말이 ‘가인’(Cain)이 나타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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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1, 창4:23, ‘상처와 타박상은 왜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뜻하는가?’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창4:23)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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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창4:23)

 

AC.428

이 절과 다음 절의 내용에서 ‘라멕’(Lamech)이 황폐를 뜻한다는 사실이 매우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가 ‘한 사람을 죽였다’(slain a man)고 하고, ‘어린아이’(little child)를 죽였다고 하며, 가인은 일곱 배로 보복을 받겠지만 라멕은 ‘일흔일곱 배로’(seventy and sevenfold) 보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From the contents of this and the following verse, it is very evident that by “Lamech” is signified vastation; for he says that he had “slain a man,” and a “little child,” and that Cain should be avenged sevenfold, and Lamech “seventy and sevenfold.”

 

해설

AC.428은 앞의 AC.427에서 풀이한 라멕의 고백을 다음 절까지 연결하여, 라멕이 왜 ‘황폐’를 나타내는지 확인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번 번호에서 새로운 상응을 길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라멕이 직접 한 말들을 근거로, 그가 나타내는 상태가 황폐라는 사실이 매우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의 핵심은 창4:23의 ‘죽였다’는 표현과 창4:24의 ‘일흔일곱 배’라는 표현을 함께 읽는 데 있습니다.

 

앞의 AC.427에서 ‘한 사람을 죽였다’는 말은 신앙을 소멸시켰다는 뜻이었고,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말은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는 뜻이었습니다. 이번 번호는 이 두 표현을 다시 언급합니다. 라멕의 황폐는 단순히 신앙이 약해진 상태나 체어리티가 잠시 부족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앞 번호에서 설명했듯이, 신앙과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더 이상 온전함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와 관련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다음 절의 ‘가인은 일곱 배, 라멕은 일흔일곱 배’라는 말까지 함께 제시합니다. 창4:24는 가인에게 적용된 ‘일곱 배’와 라멕에게 적용된 ‘일흔일곱 배’를 대비합니다. 이 대비가 라멕의 황폐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는 것이 이번 번호의 설명입니다. 다만 AC.428 자체는 일곱과 일흔일곱의 속뜻을 아직 풀이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일흔일곱 배를 황폐의 정도를 나타내는 단순한 수치로 계산하거나, 가인보다 라멕이 정확히 열한 배 더 악하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보복’이라는 표현을 곧바로 주님께서 분노하여 가인이나 라멕에게 복수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는 보복의 성격을 설명하기보다, 라멕의 말에 등장하는 두 죽음과 두 수치의 대비를 통해 황폐의 의미를 확인합니다. 보복과 숫자의 속뜻은 다음 절에 관한 설명을 살피면서 판단해야 합니다.

 

이처럼 AC.428은 짧지만 앞뒤 번호를 연결하는 역할을 합니다. AC.427은 라멕이 죽였다고 말한 ‘사람’과 ‘어린아이’의 의미를 밝히고, AC.428은 그 말과 다음 절의 보복에 관한 선언을 함께 제시합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는 라멕의 황폐에 관한 설명을 마무리하는 동시에, 창4:24의 ‘일곱 배’와 ‘일흔일곱 배’에 관한 해설로 독자를 이끕니다.

 

결국 라멕이 황폐를 나타낸다는 사실은 그가 신앙과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고 고백하는 말에서 드러나며, 다음 절에서 가인과 라멕의 보복을 대비하는 표현을 통해 더욱 분명해집니다. AC.428은 이 두 절을 하나의 문맥으로 읽게 하면서, 라멕의 상태를 이해하려면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뿐 아니라 이어지는 ‘일흔일곱 배’의 의미도 살펴야 함을 보여 줍니다. (AC.428 해설)

 

 

 

AC.429, 창4:23, 왜 ‘사람’은 신앙을, ‘어린아이’는 체어리티를 뜻하는가?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창4:23)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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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7, 창4:23, ‘라멕은 왜 신앙과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고 고백하는가?’ (AC.427-431)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And Lamech 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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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1 심화

1.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왜 결국 선과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게 되는가?

 

체어리티 없는 신앙이 결국 선과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게 된다는 스베덴보리의 설명은 처음에는 다소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교리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설령 그의 삶에 사랑이 부족하더라도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는 더 잘 분별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지적인 차원에서는 많은 진리를 알고 그것들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AC.379-381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앎’은 단순히 교리 내용을 기억하고 설명할 수 있다는 뜻보다 훨씬 깊습니다.

 

AC.379에서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가 사람을 주님과 결합하게 하는 ‘결속’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 단순한 지식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진리가 그 자체로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교리를 알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사랑과 선으로 이어지지 않을 때, 그 진리는 사람 안에서 생명을 얻지 못하고 기억과 이해성 안에 머물게 됩니다. 다시 말해 진리를 ‘아는 것’과 진리가 자기 삶에서 ‘참인 것을 보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스베덴보리에게서 진리의 목적은 선입니다. 진리는 사람이 무엇이 선인지 알게 하고, 그 선으로 인도하기 위해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진리를 배우면서 실제로 선을 행하고 악을 죄로 여겨 피할 때, 그 진리는 점차 그의 의지와 삶에 결합됩니다. 그때 그는 단순히 ‘이것이 옳다고 배웠다’고 말하는 데서 더 나아가 왜 그것이 옳은지를 삶을 통해 알게 됩니다. 반대로 진리를 많이 배우면서도 그것을 자기 삶의 선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진리와 그의 실제 애정 사이에 틈이 생깁니다.

 

이것이 AC.380의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라는 말씀과 연결됩니다. 가인은 계속 ‘땅’을 갈 수 있습니다. 곧 신앙에 관한 지식을 계속 연구하고 배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체어리티가 소멸한 상태에서는 그 땅이 더 이상 결실하지 않습니다. 지식은 늘어날 수 있지만 그것이 선한 삶이라는 열매로 이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 결과를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진리를 전혀 모르는 것이 아니라,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들을 하나의 살아 있는 중심에서 보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이 점은 ‘체어리티가 있으면 교리를 몰라도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신앙의 진리는 무엇을 사랑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며, 체어리티는 그 진리를 살아 있게 합니다. 눈이 있어야 길을 볼 수 있지만 실제로 걸어야 목적지에 이르는 것과 비슷합니다. 보는 것과 걷는 것을 서로 경쟁시키는 것이 잘못인 것처럼,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하나를 제거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을 가진 것 자체가 아니라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마침내 그것이 체어리티를 지배하게 한 데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라는 말은 교리적 정확성을 가볍게 여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교리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묻는 말입니다. 진리를 연구할수록 주님과 이웃을 더 사랑하고, 자기 악을 더 분명히 보고 그것을 버리며, 실제 쓰임의 삶으로 나아간다면 그 진리는 살아 있는 신앙이 되어 갑니다. 그러나 진리를 연구할수록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만 많아지고 자기의 지적 우월성을 확인하는 데 그친다면, 지식은 증가해도 그 지식이 자라야 할 ‘땅’은 점차 효력을 잃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과 진리에 대한 영적인 분별은 지식의 양만으로 생기지 않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사랑하고 그 선을 행하려는 삶 안에서 진리는 서로 연결되고 질서를 얻습니다. 체어리티는 진리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살아 움직일 수 있게 하는 생명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 안에 있을 때 사람은 진리를 단지 기억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를 보게 됩니다. 이것이 체어리티를 잃은 가인이 마침내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는 이유이며, 동시에 신앙이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AC.381 심화 1)

 

 

 

AC.381, 창4:12,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왜 결실이 없는가?’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창4:12) AC.381‘땅을 가는 것’(till the ground)이 이 분열 또는 이단을 배양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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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2026/09/20)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4, ‘주 우리 하나님’, 찬94,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입니다.

 

오늘은 창4 절별 주석 그 다섯 번째, 16절로 18절, AC 글 번호로는 397번에서 404번입니다. 먼저 본문입니다.

 

16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17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18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창4:16-18)

 

제목은

 

보존된 신앙은 어디로 가는가, 가인의 성읍 에녹

 

이며, 다음은 ‘3분 요약’입니다. 새로 오신 분들, 그리고 그동안 함께해오신 분들 모두를 위한, 지난 2월부터 시작한 이 특별한 주일예배를 위한, 그 흐름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한 시간입니다.

 

 

 

 

오늘 리딩에 들어가기 전에 지금까지의 큰 흐름을 잠깐 돌아보겠습니다. 우리는 창세기의 문자적 의미를 존중하면서,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따라 그 속뜻을 함께 읽고 있습니다. 창1에서는 천지창조를 거듭남의 과정으로, 창2에서는 에덴동산을 주님의 사랑과 생명 안에 살아가는 천적 상태로, 창3에서는 사람이 주님보다 자기 감각과 proprium을 따르면서 그 질서가 무너지는 과정으로 읽었습니다.

 

창4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가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읽고 있습니다. 가인은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지난주에는 체어리티를 죽인 가인이 선과 진리의 방향을 잃고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었지만, 주님께서는 그런 가인을 완전히 없애지 않으시고 ‘가인의 표’를 주어 보존하시는 것을 읽었습니다. 가인의 잘못을 승인하신 것이 아니라, 장차 인간이 다시 체어리티로 돌아오는 데 쓰일 수 있도록 신앙 자체를 보존하신 것입니다.

 

오늘은 바로 그다음 장면입니다. 가인은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가 에덴 동쪽 놋 땅에 거하고, 에녹을 낳아 성읍을 세웁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이제 하나의 가르침이 되고, 그 가르침이 다시 하나의 교리적 세계를 이루며, 거기에서 또 다른 분리들이 이어지는 과정을 보게 됩니다. 특히 오늘은 ‘신앙이 먼저 온다’는 것과 ‘신앙이 지배한다’는 것이 전혀 다르다는 사실도 중요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오늘은 한 가지를 마음에 두고 읽겠습니다. ‘주님께서 신앙을 보존하신 목적은 신앙이 홀로 자기 성읍을 쌓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 신앙이 다시 체어리티와 결합하여 생명을 얻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오늘은 가인의 표로 보존된 신앙이 그 뒤 어디로 향하는지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다음은 오늘 리딩 범위인 AC.397-404 요약입니다.

 

AC.397-404는 지난주에 읽은 AC.370-396에서 주님께서 ‘가인의 표’를 주어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을 보존하신 바로 다음부터 시작합니다. 지난주 본문의 마지막에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역설을 보았습니다. 가인은 체어리티를 죽였고, 그 결과 선과 진리의 방향을 잃어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었지만, 주님께서는 그를 완전히 소멸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이 더 이상 태고교회처럼 사랑으로부터 직접 진리를 퍼셉션할 수 없게 된 뒤에는, 먼저 신앙의 지식을 배우고 그것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로 인도받는 길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인의 표’는 가인의 잘못을 승인하는 표가 아니라, 장차 인류의 쓰임을 위하여 신앙 자체를 구별하여 보존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의미했습니다. 이번 AC.397-404는 바로 그 보존된 신앙이 이후 어떤 상태에 놓이고, 또 어떻게 새로운 교리적 계보를 만들어 가는지를 보여 줍니다.

 

AC.397-398에서 가인은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합니다.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갔다’는 것은 신앙이 사랑의 신앙에 속한 선에서 분리되었음을 의미하고, ‘놋 땅에 거하였다’는 것은 진리와 선 밖에 있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가인에게서 얼굴을 돌리셨다는 것이 아니라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자비와 사랑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인간 쪽에서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질서가 무너진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보존되었지만 더 이상 진리와 선의 살아 있는 질서 안에 거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매우 흥미롭게도 가인은 에덴에서 완전히 동떨어진 곳이 아니라 ‘에덴 동쪽’에 거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전에 사랑이 지배하던 이해의 마음 가까이’, 그리고 AC.398에서는 ‘전에 체어리티가 지배하던 합리적 마음 가까이’라고 설명합니다. ‘동쪽’은 주님을, ‘에덴’은 사랑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가인은 에덴 ‘안’에는 있지 않습니다. 사랑과 신앙이 하나였던 태고교회의 본래 질서에서 이미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에덴과 아무 관계도 없는 완전한 소멸 상태로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지난주에 본 ‘가인의 표’에 의해 신앙이 보존되었기 때문에, 사랑이 지배했던 마음 가까이에 여전히 남아 있는 것입니다.

 

AC.398은 여기서 태고교회에서 일어난 결정적인 변화를 설명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서는 의지와 이해가 하나였고, 사랑이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었으며 신앙은 그 사랑에 속해 있었습니다. 곧 ‘의지에서 이해로’, ‘사랑에서 신앙으로’ 흐르는 질서였습니다. 그러나 가인에게서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자 이 질서가 뒤집혔습니다. ‘의지 대신 이해가, 곧 사랑 대신 신앙이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가인의 문제는 단순히 신앙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본래 사랑을 섬겨야 할 신앙이 사랑에서 독립하여 오히려 사랑을 지배하려 했다는 데 있습니다. 진리가 선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선 위에 서려 한 것입니다.

 

여기서 지난주의 AC.393과 이번 AC.398을 반드시 구별해야 합니다. 홍수 후의 영적 인간에게서는 신앙의 지식이 먼저 주어지고, 그 신앙을 통하여 주님께서 체어리티를 주십니다. 그러나 ‘신앙이 먼저 온다’는 것과 ‘신앙이 지배한다’는 것은 전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전자는 거듭남의 순서에 관한 것이고, 후자는 질서의 전도에 관한 것입니다. 영적 인간은 먼저 진리를 배우지만 결국 그 진리는 체어리티와 결합되어야 하며 체어리티가 신앙에서 주된 것이 되어야 합니다. 가인은 바로 이 결합을 거부하고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여 독립시킨 상태입니다.

 

그런데 AC.399부터 이야기가 다시 한 단계 진행됩니다. 가인이 아내와 동침하여 ‘에녹’을 낳고, 성읍을 쌓아 그 이름을 에녹이라 합니다. 속뜻에서 이것은 가인이라는 하나의 분열 또는 이단이 자기 자신에게서 또 다른 분열 또는 이단을 산출한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의 잘못된 영적 원리는 그 상태에 그대로 머물지 않습니다. 그 원리 안에서 새로운 결론들이 나오고, 그 결론에서 다시 다른 교리들이 생겨납니다. 가인의 최초 원리가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는 것’이었다면, 이제 그 원리가 자기 논리를 따라 새로운 형태로 전개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AC.400은 창세기의 ‘족보’를 읽는 매우 중요한 원리를 제시합니다. 교회의 것이든 이단의 것이든 ‘잉태’와 ‘출생’은 앞의 영적 상태에서 뒤의 영적 상태가 산출되는 것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누가 누구를 낳았다는 것은 단순히 생물학적 세대가 이어졌다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의 교리나 상태가 자기에게서 다음 상태를 산출했다는 영적 계보를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아주 강한 문장으로 요약합니다. ‘하나의 이단이 잉태되면 거기에서 수많은 이단이 태어납니다.’ 하나의 근본적인 분리가 받아들여지면 그것은 자기 안에 들어 있는 논리를 따라 계속 새로운 분리를 낳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단’이라는 말을 오늘날 어떤 특정 교파나 사람에게 쉽게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이번 본문의 관심은 다른 사람에게 이단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데 있지 않고, 하나의 잘못된 영적 원리가 어떻게 자기 자신에게서 계속 새로운 오류를 산출하는지를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 자신의 마음을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옳다는 것이 사랑하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작은 원리 하나가 마음에 들어오면, 거기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생각이 나오고, 그 판단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생기며, 마침내 사랑하지 않는 행동까지도 옳다고 설명하는 하나의 내적 세계가 형성될 수 있습니다. 가인의 계보는 바로 이러한 영적 출생의 과정을 보여 줍니다.

 

AC.401에서는 왜 그 새로운 상태를 ‘에녹’이라고 불렀는지를 설명합니다. ‘에녹’이라는 이름은 ‘그렇게 시작되거나 형성되기 시작한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즉 가인에게서 일어난 분리는 이제 단순한 생각이나 주장으로 머물지 않고 ‘가르침’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합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다른 사람에게 설명되고 전해질 수 있는 교리적 형태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에녹은 ‘분리된 신앙’이 ‘가르쳐지는 분리된 신앙’으로 발전한 단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성읍’이 중요해집니다. AC.399와 AC.402에서 가인이 쌓은 성읍은 그 이단에서 나온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를 의미합니다. 처음에는 하나의 잘못된 원리였지만, 그것이 에녹이라는 가르침이 되고, 그 가르침에서 여러 교리적인 내용들이 생겨나 서로 연결되면서 하나의 전체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하나의 분리가 이제 하나의 교리적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교리가 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 교리가 어디에서 태어났느냐에 있습니다.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나온 진리인가, 아니면 사랑에서 분리되어 스스로 지배하려는 신앙에서 나온 진리인가가 중요합니다.

 

AC.402는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말씀 전체에서 ‘성읍’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길게 보여 줍니다. 거룩한 예루살렘, 시온, 하나님의 성, 진리의 성읍에서부터 혼돈의 성읍과 계시록의 큰 성읍에 이르기까지 많은 구절이 인용됩니다. 이 모든 인용의 중심은 하나입니다. 속뜻에서 ‘성읍’은 ‘교리적인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읍 자체가 선하거나 악한 것은 아닙니다. 거룩한 예루살렘은 주님의 나라와 참된 교리의 질서를 나타내지만, 가인이 세운 에녹 성읍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온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를 나타냅니다.

 

이 대조는 매우 중요합니다. ‘가인의 성읍’도 성읍이고 ‘거룩한 예루살렘’도 성읍입니다. 둘 다 교리적인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그 안에 거하는 사랑이 다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를 중심으로 진리들이 질서를 이루면 ‘거룩한 성’이 되지만,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원리를 중심으로 진리들이 조직되면 ‘가인의 성읍’이 됩니다. 따라서 교리의 규모가 크고 논리가 정교하며 성경 지식이 많다는 것 자체가 그 교리가 살아 있다는 보증은 아닙니다. 그 교리가 어떤 사랑에서 나오며, 사람을 어떤 삶으로 이끄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AC.402의 수많은 성경 인용 가운데 특히 스가랴의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는 말씀이 이 구별을 잘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진리의 성읍’인 예루살렘을 신앙의 영적인 것으로, ‘성산’인 시온산을 신앙의 천적인 것으로 설명합니다. 사랑과 선이라는 천적인 것이 중심이 되고 그로부터 진리와 교리라는 영적인 것이 질서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인의 질서와 정반대입니다. 가인은 사랑 대신 신앙이 지배하도록 했지만, 거룩한 성읍에서는 진리가 다시 사랑과 선의 질서 안에 놓입니다.

 

AC.403은 여기서 창세기 초반 전체를 읽는 매우 중요한 해석 원리를 제시합니다. 창세기의 이 부분은 ‘역사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태고인들은 영적인 실재를 ‘표상적 유형들’ 아래 역사 형식으로 배열하는 데 익숙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문자적으로는 가인이 아들을 낳고 성읍을 세우며 그 성읍에 이름을 붙이는 역사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서는 교회의 상태와 교리의 변화가 하나의 영적 연속으로 펼쳐집니다. 가인이 에녹을 낳고 성읍을 세우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에서 새로운 가르침이 나오고, 그 가르침에서 다시 하나의 교리적 세계가 형성되는 영적 과정을 살아 있는 이야기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인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모든 것을 표현하는 것을 ‘지극히 즐거워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것이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말씀의 상응을 공부하는 목적이 단어마다 뜻을 붙여 암호표를 만드는 데 있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가인은 신앙’, ‘아벨은 체어리티’, ‘성읍은 교리’라고 외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가고, 놋 땅에 거하며, 에녹을 낳고, 성읍을 쌓는 전체 흐름 속에서 신앙과 사랑의 관계가 어떻게 무너지고 또 그 결과가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살아 있는 영적 서사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AC.403을 근거로 창세기 초반의 문자적 의미를 무가치하게 여기거나 단순히 ‘꾸며 낸 이야기’라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초점은 역사 형식 자체를 버리는 데 있지 않고, 그 역사 형식 안에 담긴 속뜻을 보는 데 있습니다. 사건들의 순서와 관계가 바로 영적 상태들의 연속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누구를 낳고, 어디로 이동하며, 무엇을 세우고, 무엇이라 이름하는지가 모두 속뜻을 담는 외적 그릇입니다. 따라서 문자적 의미와 속뜻은 서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외적 형식과 그 안에 담긴 내적 생명의 관계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마지막 AC.404에서는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는 계보가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모든 이름이 ‘가인이라 불린 최초의 이단에서 파생된 이단들’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가인에서 시작된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가 에녹에서 가르침이 되고 성읍에서 교리적인 전체를 형성한 뒤, 이제 그 교리적 전체에서 다시 여러 후속적인 분리가 파생되는 것입니다. 하나의 근본 원리가 자기 안에서 계속 후손을 낳으며 하나의 계보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AC.404에서 눈여겨볼 것은 스베덴보리의 절제입니다. 그는 이랏이라는 이름이 ‘성읍에서 내려온다’는 뜻이므로 에녹이라는 이단에서 파생된 것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고 설명하지만, 므후야엘과 므드사엘 등의 구체적인 의미를 자세히 만들어 내지는 않습니다. ‘그것들에 관하여는 이름들 외에는 전해지는 것이 없으므로 그것들에 관하여 무엇인가 말하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멈춥니다. 속뜻이 있다고 해서 우리가 그 모든 세부를 안다는 뜻은 아닙니다. 말씀과 AC가 밝혀 주는 곳에서는 깊이 들어가되, 밝혀 주지 않은 곳에서는 멈추어야 합니다. 이것은 상응을 다루는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태도입니다.

 

이렇게 보면 AC.397-404 전체에는 하나의 분명한 흐름이 있습니다. 지난주 마지막에서 주님께서는 가인의 신앙을 ‘인류의 쓰임을 위하여’ 보존하셨습니다. 그러나 보존되었다는 것이 곧 회복되었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가인은 여전히 ‘놋 땅’, 곧 진리와 선 밖에 있으며, 사랑 대신 신앙이, 의지 대신 이해가 지배하는 뒤집힌 질서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분리된 신앙은 에녹이라는 새로운 가르침을 낳고, 성읍이라는 교리적인 전체를 형성하며, 다시 그 안에서 여러 후속적인 분리들을 낳습니다. 주님께서 신앙을 보존하셨지만 인간은 그 보존된 신앙을 다시 체어리티와 결합시킬 수도 있고, 자기 지성과 proprium을 따라 더 많은 분리를 만들어 내는 데 사용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난주의 ‘가인의 표’를 더욱 깊이 이해하게 합니다. 주님의 보존 섭리는 인간의 자유를 없애는 강제적인 교정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신앙을 보존하시지만 그 신앙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하는 인간의 자유까지 제거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보존된 신앙이 한편으로는 훗날 영적 인간이 체어리티로 돌아가는 통로가 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인의 계열에서처럼 사랑에서 분리된 교리적 세계를 만들어 내는 데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가인의 표’는 가인을 자동으로 에덴으로 돌려보내는 표가 아니라, 인간이 다시 주님의 질서로 돌아올 수 있는 가능성을 보존하는 표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 본문은 AC를 읽고 교리를 공부하는 우리 자신에게 매우 직접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지금 ‘성읍’을 쌓고 있습니다. 말씀을 읽고, AC를 공부하고, 번역하고, 해설하며 수많은 진리를 서로 연결하여 하나의 교리적 이해를 만들어 갑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질문은 ‘우리의 성읍이 얼마나 크고 정교한가?’가 아닙니다. ‘그 성읍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가?’입니다. 더 많은 아르카나를 아는 것이 사랑과 체어리티를 더욱 깊게 하고, 다른 사람을 더 이해하고 섬기게 하며, 주님 앞에서 더 겸손하게 한다면 그 진리는 생명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많이 알수록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우리의 이해를 높이며, 사랑보다 교리적 옳음을 앞세우게 된다면 우리 안에서도 가인이 다시 에녹을 낳고 성읍을 쌓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이번 본문은 교리 자체를 경계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거룩한 예루살렘 역시 ‘성읍’입니다. 진리는 필요하고 교리는 필요하며, 특히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잃은 영적 인간에게 신앙의 지식은 주님께서 체어리티로 인도하시는 중요한 수단입니다. 문제는 교리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그 교리가 사랑에서 나왔는가, 사랑을 섬기는가, 그리고 사람을 다시 사랑으로 인도하는가입니다. 참된 교리는 사랑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지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리는 선을 섬기고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결국 AC.397-404는 지난주의 ‘가인의 표’ 이후에 남은 질문에 답합니다. ‘보존된 신앙은 이제 어떻게 되는가?’입니다. 그 신앙은 에덴 안에 있지는 않지만 에덴 가까이에 있습니다. 사랑과 분리되어 진리와 선 밖에 있지만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보존된 신앙 앞에는 두 방향이 놓입니다. 다시 사랑과 체어리티에 결합되어 주님께서 사용하시는 영적 신앙이 될 수도 있고, 사랑에서 계속 독립하여 자기 가르침과 자기 성읍과 자기 계보를 만들어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AC.397-404의 전체 흐름은 ‘가인의 보존 → 여호와의 얼굴에서 나감 → 진리와 선 밖의 놋 땅 → 에덴 가까이에 남아 있는 신앙 → 사랑 대신 신앙, 의지 대신 이해의 지배 → 가인에게서 에녹의 출생 → 분리된 신앙의 가르침 형성 → 성읍이라는 교리적 전체의 형성 → 하나의 분리에서 여러 분리가 파생되는 계보’로 읽을 수 있습니다. 지난주 본문이 인간의 실패보다 더 깊은 주님의 보존 섭리를 보여 주었다면, 이번 본문은 그 보존된 것을 인간이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신앙을 보존하십니다. 그러나 그 신앙의 참된 목적은 자기만의 성읍을 높이 쌓는 데 있지 않습니다. 보존된 신앙이 다시 사랑을 만나고, 진리가 다시 선과 결합하며, 이해가 다시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섬기게 하는 것, 바로 그것이 가인의 길을 넘어 주님께서 마련하신 영적 질서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이상 요약을 마치고, 아래는 AC 본문, 해설 및 심화입니다.

 

 

AC.397, 창4:16, ‘가인이 에덴 동쪽 놋 땅에 거하다 - 사랑이 지배하던 이해의 마음 가까이에 남은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And Cain went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 and dwelt in the land of Nod, toward the east of Eden. (창4:16) AC.397‘가인이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갔다’(Cain 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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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8, 창4:16, ‘의지 대신 이해가, 사랑 대신 신앙이 지배하다 - 에덴 동쪽에 거한 가인의 속뜻’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창4:16) AC.398‘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가는 것’(go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이 사랑의 신앙에 속한 선에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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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9, 창4:17, ‘가인이 에녹을 낳고 성을 쌓다 - 분리된 신앙이 새로운 교리 체계를 낳다’ (AC.399-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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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0, 창4:17, ‘하나의 이단이 잉태되면 수많은 이단이 태어납니다 - 잉태와 출생과 계보의 속뜻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창4:17) AC.400‘가인이 그의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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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1, 창4:17, ‘에녹이라는 이름은 무엇을 뜻하는가? - 시작되고 형성되기 시작한 교리적 가르침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창4:17) AC.401‘에녹’(Enoch)이라 불린 것은 그 모든 교리적 또는 이단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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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2, 창4:17, ‘성읍은 왜 교리를 의미하는가? - 거룩한 예루살렘에서 가인의 성읍까지’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창4:17) AC.402가인이 ‘쌓은 성읍’(city that was built)이 그 이단에서 나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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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3, 창4:17, ‘왜 창세기 초반은 역사 형식으로 기록되었는가? - 태고인들의 표상적 서술 방식’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창4:17) AC.403이제 우리는 ‘성읍’(city)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살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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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4, 창4:18, ‘가인의 계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 최초의 이단에서 파생된 여러 이단들’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창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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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AC 리딩 본문 전체는 여기까지이고, 이 가운데 필수 리딩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AC.398, 창4:16, ‘의지 대신 이해가, 사랑 대신 신앙이 지배하다 - 에덴 동쪽에 거한 가인의 속뜻’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창4:16) AC.398‘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가는 것’(go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이 사랑의 신앙에 속한 선에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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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2, 창4:17, ‘성읍은 왜 교리를 의미하는가? - 거룩한 예루살렘에서 가인의 성읍까지’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창4:17) AC.402가인이 ‘쌓은 성읍’(city that was built)이 그 이단에서 나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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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3, 창4:17, ‘왜 창세기 초반은 역사 형식으로 기록되었는가? - 태고인들의 표상적 서술 방식’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창4:17) AC.403이제 우리는 ‘성읍’(city)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살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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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9-20(D1)

 

2668, 6, 창4.6, 2026-09-20(D1)-주일예배(창4,16-18, AC.397-404), ‘보존된 신앙은 어디로 가는가, 가인의 성읍 에녹’.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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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9/13, 창4:9-15, AC.370-396), ‘가인의 표, 인간의 실패보다 더 깊은 주님의 섭리’

※ 오늘(2026/09/13)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3, ‘영원한 하늘나라’, 찬93, ‘예수는 나의 힘이요’입니다. 오늘은 창4 절별 주석 그 네 번째, 9절로 15절, AC 글 번호로는 370번에서 396번입니다. 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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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And Cain went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 and dwelt in the land of Nod, toward the east of Eden. (창4:16)

 

AC.397

‘가인이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갔다’(Cain went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는 신앙이 사랑의 신앙에 속한 선에서 분리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가 놋 땅에 거하였다’(he dwelt in the land of Nod)는 진리와 선 밖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에덴 동쪽’(toward the east of Eden)은 전에 사랑이 지배하던 이해의 마음(intellectual mind) 가까이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By the words “Cain went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 is signified that faith was separated from the good of the faith of love; “he dwelt in the land of Nod” signifies outside of truth and good; “toward the east of Eden” is near the intellectual mind, where love reigned before.

 

해설

AC.397부터 가인의 이야기는 새로운 단계로 들어갑니다. 앞의 AC.392-396에서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도록 주님께서 특별히 구별하여 보존하신 것이 ‘가인의 표’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창4:16에서는 그렇게 보존된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합니다. 속뜻에서는 분리된 신앙이 보존된 이후 어떤 상태에 놓이게 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첫째, ‘가인이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갔다’는 것은 신앙이 ‘사랑의 신앙에 속한 선’에서 분리되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얼굴’은 앞의 AC.387과 직접 연결됩니다. 거기서 스베덴보리는 ‘여호와의 얼굴’이 주님의 자비를 의미하며, 그 자비로부터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이 나온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간다는 것은 주님께서 가인을 내쫓아 더 이상 자비를 베풀지 않으셨다는 뜻이 아니라,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이 사랑에 속한 선에서 스스로 분리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의 얼굴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 얼굴에서 돌아선 것입니다. 주님의 자비와 사랑은 변하지 않지만, 인간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신앙을 분리하면 그 자비에서 흘러오는 선을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갔다’는 표현을 주님의 거절이나 버림으로 읽기보다 인간 쪽에서 일어난 영적 분리로 읽어야 합니다.

 

둘째, ‘놋 땅에 거하였다’는 것은 ‘진리와 선 밖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도 표현의 강도를 그대로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번 번호에서 ‘모든 진리와 선이 완전히 소멸되었다’고 말하지 않고 ‘진리와 선 밖에 있었다’고 합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은 보존되었지만,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었기 때문에 참된 진리와 선의 질서 안에 거하지 못하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앞의 AC.380-382에서 가인이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어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하게 되었다는 설명과 연결됩니다. 진리는 선과 결합될 때 그 참된 방향과 생명을 얻습니다. 그런데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 진리에 관한 지식이 남아 있더라도 그것을 무엇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지, 무엇이 실제로 선인지 올바르게 분별하는 능력이 흐려집니다. 그러므로 ‘놋 땅’은 단순한 지리적 망명지가 아니라 신앙이 선과 진리의 살아 있는 질서 밖에 놓인 영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이번 번호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세 번째 표현인 ‘에덴 동쪽’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전에 사랑이 지배하던 이해의 마음 가까이에 있음’이라고 풀이합니다. 여기서 ‘전에’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에덴은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 곧 사랑이 지배하던 상태와 연결됩니다. 그 상태에서는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지 않았으며, 사랑으로부터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을 퍼셉션했습니다. AC.393에서 보았듯이 그들은 신앙을 따로 언급하려 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바로 그 질서를 깨뜨린 신앙입니다.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고 신앙을 하나의 독립된 교리로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가인은 더 이상 에덴 ‘안’에 있지 않습니다. 사랑이 지배하는 상태 안에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에덴에서 완전히 동떨어진 곳에 있다고 하지 않고, ‘전에 사랑이 지배하던 이해의 마음 가까이에’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AC.393-396에서 설명한 신앙의 보존이 다시 연결됩니다. 분리된 신앙은 본래의 천적 질서를 잃었지만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그것을 특별히 구별하여 보존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인은 에덴 안에 있을 수는 없지만, 에덴과 아무 관계도 없는 곳으로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사랑이 지배했던 이해의 마음 ‘가까이에’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이후의 영적 인간에게 신앙의 지식이 어떤 역할을 하게 되는지를 생각하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직접 퍼셉션했습니다. 그러나 그 상태가 사라진 뒤에는 사람이 먼저 신앙의 지식을 배우고, 그 지식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체어리티를 받아야 했습니다. 따라서 신앙의 지식은 사랑 자체는 아니지만 다시 사랑과 결합될 수 있는 수단으로 보존되어야 했습니다. 가인이 에덴 동쪽 가까이에 있다는 표현은 바로 이러한 상태와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intellectual mind’, 곧 ‘이해의 마음’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가인이 에덴 동쪽에 있다는 것은 단순히 옛 천적 상태의 지리적 경계 가까이에 있다는 뜻이 아니라, 전에 사랑이 지배했던 ‘이해의 마음’ 가까이에 있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이해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기능과 관련됩니다. 태고교회에서는 그 이해가 사랑 아래 있었고 사랑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다시 말해 이해가 독립적으로 진리를 만들어 내거나 사랑을 지배한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보았습니다.

 

가인의 상태에서는 이 질서가 뒤집혔습니다. 신앙, 곧 진리에 속한 것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독립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이해의 기능과 신앙의 지식을 완전히 파괴하지 않으셨습니다. 훗날 그것이 다시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보존하셨습니다. 따라서 ‘에덴 동쪽’이라는 위치에는 과거의 천적 질서와 현재의 분리된 신앙 사이의 거리와 연결 가능성이 동시에 표현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가까이에 있다’는 말을 곧 ‘곧바로 다시 에덴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거나 ‘가인의 신앙이 거의 정상적인 상태였다’는 뜻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이번 번호는 분명히 가인이 ‘진리와 선 밖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상태의 단절은 실제적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단절이 완전한 소멸과 동일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사랑에서 분리되었고 진리와 선 밖에 있었지만, 주님의 섭리에 의해 보존되어 여전히 과거 사랑이 지배했던 이해의 마음 가까이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 점에서 AC.397은 앞의 ‘가인의 표’ 설명과 이후의 가인 계보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합니다. 가인의 표를 통하여 신앙이 보존되었고, 이제 그 보존된 신앙이 에덴 밖 놋 땅에서 하나의 새로운 상태를 형성하기 시작합니다. 앞으로 에녹과 성읍, 그리고 가인의 후손들이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 보존된 신앙이 점차 하나의 교리적 계보와 체계로 전개되는 과정으로 읽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AC.397 자체에서는 아직 그 이후를 앞당겨 설명하기보다 ‘분리되었으나 보존된 신앙이 어디에 놓여 있는가’를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결국 AC.397에는 매우 미묘한 긴장이 있습니다. 가인은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갔습니다.’ 사랑의 신앙에 속한 선에서 분리되었습니다. 그는 ‘놋 땅’에 거합니다. 진리와 선 밖에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에덴 동쪽’에 있습니다. 전에 사랑이 지배하던 이해의 마음 가까이에 있습니다. 완전히 에덴 안에도 아니고, 에덴과 아무 관계도 없는 완전한 소멸 상태에도 아닙니다.

 

바로 이 상태가 주님의 보존 섭리 아래 있는 가인의 신앙을 잘 보여 줍니다. 인간은 사랑과 신앙의 본래 질서를 무너뜨렸지만, 주님께서는 그 실패 때문에 진리에 속한 모든 것을 없애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신앙을 보존하시고, 그것이 다시 사랑과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는 수단이 될 가능성을 남겨 두셨습니다. 따라서 ‘에덴 동쪽 놋 땅’은 단순한 추방의 장소가 아니라, 사랑에서 분리되어 진리와 선 밖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과거 사랑이 지배했던 이해의 마음 가까이에 보존되어 있는 신앙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AC.397 해설)

 

 

 

AC.398, 창4:16, ‘의지 대신 이해가, 사랑 대신 신앙이 지배하다 - 에덴 동쪽에 거한 가인의 속뜻’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창4:16) AC.398‘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가는 것’(go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이 사랑의 신앙에 속한 선에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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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6, 창4:15, ‘가인의 표는 무엇인가? - 주님께서 신앙을 구별하여 보존하신 표’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6‘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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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7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하는 것’(hid from thy faces)이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에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여호와의 얼굴’(faces of Jehovah)의 의미에서 분명합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여호와의 얼굴’은 자비이며, 그 자비로부터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주님의 ‘얼굴’(faces)은 신앙의 선들을 의미합니다. That to be “hid from thy faces” signifies to be separated from all the good of the faith of love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faces of Jehovah.” The “face of Jehovah,” as before said, is mercy, from which proceed all the goods of the faith of love, and therefore the goods of faith are here signified by his “faces.”

 

해설

AC.387은 창4:14의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하리니’라는 말을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에서 분리되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그 근거를 ‘여호와의 얼굴’의 상응에서 찾습니다. 앞에서 이미 설명했듯이 ‘여호와의 얼굴’은 자비를 의미하며, 그 자비로부터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는 ‘얼굴’이라는 한 상응어를 설명하는 짧은 문장이면서도, 선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매우 분명하게 밝혀 주는 번호입니다.

 

가장 먼저 붙들어야 할 것은 ‘여호와의 얼굴은 자비’라는 말입니다. 성경의 문자적 표현에서는 하나님께서 얼굴을 보이시기도 하고 감추시기도 하며, 얼굴을 사람에게 향하시거나 돌리시는 것처럼 묘사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주님의 사랑과 자비 자체가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언제나 사랑이시며 자비이십니다. 따라서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어느 순간 자비를 거두시고 가인에게서 얼굴을 돌리셨다는 뜻이 아니라, 가인이 그 자비를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가인의 ‘저주’를 설명하면서 계속 지켜 온 원리와 같습니다. 주님께서 먼저 사람에게서 돌아서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악과 거짓으로 말미암아 주님에게서 돌아섭니다. 태양은 계속 빛을 비추고 있지만 사람이 등을 돌리거나 문을 닫으면 어둠 가운데 있게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물론 이것은 이해를 위한 비유일 뿐이지만,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한다’는 상태가 주님의 자비가 사라진 상태가 아니라 그 자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간의 상태라는 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AC.387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여호와의 얼굴이 자비일 뿐 아니라 ‘그 자비로부터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이 나온다’고 합니다. 이것은 이번 번호에서 매우 중요한 문장입니다. 사람에게 있는 참된 선의 근원을 사람 자신에게 두지 않습니다.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은 여호와의 얼굴, 곧 주님의 자비로부터 나옵니다. 사람이 선을 의도하고 행한다고 해서 그 선의 최초 근원이 인간의 proprium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사람이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자기 삶에서 의지하고 행할 때 그것이 사람 안에서 신앙의 선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한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을 느끼지 못한다거나 종교적인 위로가 사라졌다는 정도의 의미가 아닙니다. 훨씬 깊게는 신앙에 생명을 주는 선의 근원과의 결합을 잃은 상태입니다. 가인은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체어리티를 신앙 아래에 두려 했으며, 마침내 아벨을 죽이는 것으로 표상된 체어리티의 소멸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체어리티를 제거한 결과는 신앙만 깨끗하게 남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랑의 신앙에 속한 선에서 분리되고, 결국 그 선의 근원이신 주님의 자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사랑의 신앙’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참된 신앙은 사랑과 독립하여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생명을 받는 신앙이 참된 신앙입니다. 따라서 ‘사랑의 신앙에 속한 선’이라는 표현은 신앙과 사랑을 두 개의 독립된 것으로 놓은 뒤 나중에 결합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신앙 자체가 사랑과 결합되어 있으며, 그 신앙 안에서 선이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인이 주장했던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과 정반대입니다.

 

AC.386과 AC.387을 나란히 놓으면 창4:14의 두 표현도 아름답게 대응합니다. ‘지면에서 쫓겨남’은 교회의 진리에서 분리되는 것이고,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함’은 사랑의 신앙에 속한 선에서 분리되는 것입니다. 하나는 진리의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선의 측면입니다. 결국 가인의 길은 진리만 잃는 것도 아니고 선만 잃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한 결과 선과 진리 모두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이어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어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게 된다는 설명은 바로 이 두 가지 분리의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AC.385-387의 구조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교회의 진리에서 분리되고, 주님의 자비에서 나오는 사랑의 신앙의 선에서 분리되자, 선과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유리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악과 거짓이 그를 멸망시킬 위험에 놓입니다.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하나의 교리적 오류가 점차 인간의 영적 생명 전체를 흔드는 결과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함’을 주님의 거절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바로 다음 전개가 그것을 더욱 분명히 보여 줍니다. 가인은 주님의 얼굴에서 숨겨졌다고 느끼고 자신이 죽임을 당할 것을 두려워하지만, 주님은 그를 완전히 버려두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에게 표를 주어 보존하십니다. 주님의 얼굴이 자비라는 AC.387의 선언은 이후 ‘가인의 표’를 이해하는 열쇠 가운데 하나가 됩니다. 인간이 자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에 빠졌어도 주님의 자비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AC.384에서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다고 한 것도 여기와 연결하여 볼 수 있습니다. 그 선의 근원이 가인 자신에게 있었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번 번호가 모든 선의 근원을 분명히 밝혀 줍니다.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은 주님의 자비로부터 나옵니다. 그러므로 가인에게 아직 남아 있던 선의 어떤 것도 궁극적으로는 주님에게서 온 것이며, 주님께서는 악과 거짓이 그것을 완전히 파괴하지 못하도록 보존하실 수 있습니다. 이후의 가인의 표를 단순한 형벌의 완화가 아니라 주님의 보존 섭리와 연결하여 볼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결국 AC.387의 중심은 ‘여호와의 얼굴은 자비’라는 짧은 선언에 있습니다. 주님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단지 주님을 지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자비에서 흘러오는 사랑과 선을 받아들이는 것과 연결됩니다. 반대로 그 얼굴에서 숨겨진다는 것은 주님의 자비가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이 그 자비에서 나오는 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가인의 비극은 주님께서 자비를 거두신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함으로써 그 자비에서 나오는 사랑의 신앙의 선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 데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가인에게도 주님은 보존의 길을 마련하십니다. 이것이 곧이어 나타날 ‘가인의 표’를 바라보게 하는 중요한 준비가 됩니다.

 

 

 

AC.388, 창4:14, ‘피하며 유리하는 자 - 선과 진리를 알지 못하는 상태’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8‘땅에서 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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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6, 창4:14, ‘지면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 교회의 진리에서 분리되는 것’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6‘지면에서 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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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Behold thou hast cast me out this day from the faces of the ground, and from thy faces shall I be hid; and I shall be a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everyone that findeth me shall slay me. (창4:14)

 

AC.385

‘지면에서 쫓겨나는 것’(cast out from the faces of the ground)은 교회의 모든 진리에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하는 것’(hid from thy faces)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모든 선에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가 된다는 것은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everyone that findeth me shall slay me)는 모든 악과 거짓이 그를 멸망시키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To be “cast out from the faces of the ground” signifies to be separated from all the truth of the church; to be “hid from thy faces” signifies to be separated from all the good of faith of love; to be a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is not to know what is true and good; “everyone that findeth me shall slay me” signifies that all evil and falsity would destroy him.

 

해설

AC.385는 창4:14의 네 표현을 차례로 해석하면서 가인이 처한 영적 상태가 얼마나 위태로워졌는지를 보여 줍니다. ‘지면에서 쫓겨나는 것’은 교회의 모든 진리에서 분리되는 것이고,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하는 것’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모든 선에서 분리되는 것이며,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는 것은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는 모든 악과 거짓이 그를 멸망시키리라는 뜻입니다. 이 네 가지는 서로 떨어진 상응들이 아니라 하나의 영적 붕괴가 진행되는 순서를 보여 줍니다.

 

먼저 ‘지면에서 쫓겨나는 것’은 ‘교회의 모든 진리에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앞에서 ‘땅’은 문맥에 따라 사람 자신, 교리, 그리고 가인의 경우에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열이 자리 잡은 상태를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지면에서 쫓겨난다’는 표현을 교회의 진리와의 단절로 해석합니다. 가인은 신앙을 높이려 했지만, 체어리티에서 신앙을 분리함으로써 결국 교회의 진리 자체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이것은 앞의 AC.380-382에서 보았던 역설과 같습니다. 진리를 지키기 위해 체어리티를 버렸다고 생각했지만, 그 결과 무엇이 진리인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두 번째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하는 것’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모든 선에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는 진리의 상실에서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갑니다. 단지 무엇이 참인지 알지 못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랑에서 생명을 받는 신앙의 선과도 분리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얼굴’은 단순한 외적 형상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사랑과 자비, 선의 현존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얼굴에서 숨겨진다는 것은 주님께서 얼굴을 돌리셨다는 뜻으로 이해하기보다, 사람이 악과 거짓 때문에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흘러오는 사랑과 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살펴본 ‘저주’와도 같은 원리입니다. 주님께서 가인을 미워하시고 그에게서 선과 진리를 빼앗으신 것이 아닙니다. 가인이 체어리티를 배척함으로써 스스로 그것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는 변하지 않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상태가 변합니다. 그러므로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한다’는 표현은 주님의 부재라기보다 인간 쪽에서 일어난 수용 능력의 상실을 나타낸다고 보는 것이 안전합니다.

 

세 번째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는 AC.380과 AC.382에서 이미 설명했듯이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번 번호에서 이 표현이 다시 나오는 것은 앞의 두 상태가 실제로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교회의 진리에서 분리되고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선에서 분리되면, 결국 선과 진리를 분별할 방향을 잃습니다.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이 많은 종교적 지식을 가지고 있을 수는 있지만, 그 지식을 선을 위해 사용할 생명의 중심을 잃으면 무엇이 실제로 선이며 무엇이 실제로 진리인지 알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번 번호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마지막입니다.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는 ‘모든 악과 거짓이 그를 멸망시키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문자적으로 읽으면 가인이 다른 사람에게 살해당할 것을 두려워하는 장면이지만, 속뜻에서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의 상태가 악과 거짓에 의해 완전히 파괴될 위험에 놓였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죽인다’는 것은 자연적인 생명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아직 남아 있는 영적인 것을 소멸시키는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AC.384가 중요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자기 악 때문에 어떤 내적 고통을 느끼고 그것을 어느 정도 고백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서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AC.385의 ‘모든 악과 거짓이 그를 멸망시킨다’는 말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존재가 다시 멸망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가인의 상태 안에 아직 보존되어 있는 어떤 것이 악과 거짓에 의해 완전히 소멸될 위험을 말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곧이어 가인을 죽이지 못하게 하는 ‘가인의 표’가 왜 필요한지를 이해하는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다만 여기서도 AC.384의 ‘선의 어떤 것’을 곧바로 전문적인 의미의 ‘리메인스’라고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아직 그렇게 부르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가인에게 선에 속한 무엇인가가 아직 남아 있었으며, 이제 악과 거짓이 그것마저 파괴할 위험이 있었다는 정도입니다. 이후 스베덴보리가 가인의 표와 보존의 의미를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본 뒤 리메인스와의 관계를 판단하는 것이 더 안전합니다.

 

이렇게 보면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라는 가인의 두려움은 단순한 자기보존의 공포 이상으로 읽힙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뒤에도 신앙에 속한 어떤 지식과 선에 반응할 가능성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상태가 악과 거짓에 완전히 삼켜지면 그것마저 없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섭리는 단지 완전한 사람이나 온전한 교회만을 보존하시는 방식으로 역사하지 않습니다. 심각하게 훼손된 상태에서도 아직 보존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지키시고, 궁극적으로 구원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여기서 앞으로 나올 ‘가인의 표’의 의미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문자적으로는 살인자인 가인을 왜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는지가 매우 낯설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속뜻에서 가인은 한 개인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교리와 그것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 상태가 잘못되었다고 해서 거기에 남아 있는 신앙에 속한 모든 것까지 즉시 소멸되도록 허용하시는 것이 주님의 목적은 아닙니다. 악과 거짓 가운데에서도 아직 보존될 수 있는 것을 보존하시는 것이 주님의 섭리입니다.

 

이 점은 ‘악과 거짓이 그를 멸망시킨다’는 표현을 이해할 때도 중요합니다. 악과 거짓은 주님에게서 오는 어떤 독립된 형벌의 도구가 아닙니다. 악은 선을 파괴하고 거짓은 진리를 왜곡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그것들을 받아들이고 확증할수록 자신 안에 남아 있는 선과 진리를 더욱 밀어냅니다. 따라서 악과 거짓에 의한 멸망은 외부에서 임의적으로 부과되는 형벌이라기보다 사람이 악과 거짓을 받아들임으로써 영적 생명을 스스로 파괴하는 과정입니다.

 

AC.385의 네 표현을 다시 연결하면 흐름이 매우 분명합니다. 먼저 교회의 진리에서 분리됩니다. 이어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선에서 분리됩니다. 그러자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악과 거짓이 아직 남아 있는 것마저 완전히 파괴할 위험에 이릅니다. 이것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가 단순한 교리상의 작은 차이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선과 진리는 서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 결합을 깨뜨리면 결국 둘 모두를 잃어버리는 방향으로 진행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가장 위태로운 지점에서 창4의 이야기는 뜻밖의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가인이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라고 말한 뒤 주님은 그를 즉시 멸하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에게 표를 주어 죽임을 당하지 않게 하십니다. 따라서 AC.385는 단지 가인의 멸망을 선언하는 번호가 아니라, 왜 그에게 보존이 필요했는지를 보여 주는 번호이기도 합니다.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고, 모든 악과 거짓이 그것을 완전히 파괴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어지는 ‘가인의 표’에서는 잘못된 상태를 승인하지 않으면서도 그 안에 남아 있는 것을 보존하시는 주님의 섭리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AC.386, 창4:14, ‘지면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 교회의 진리에서 분리되는 것’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6‘지면에서 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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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4, 창4:13, ‘가인에게도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습니다 - 라멕에 이르러 소멸되는 체어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창4:13) AC.384이로부터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후 체어리티의 모든 선이 소멸되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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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창4:13)

 

AC.384

이로부터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후 체어리티의 모든 선이 소멸되었다는 것은 라멕에 관하여 말한 것에서 분명합니다(창4:19,23-24). Hence it appears that something of good still remained in Cain; but that all the good of charity afterwards perished is evident from what is said of Lamech (verses 19, 23–24).

 

19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24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창4:19, 23-24)

 

해설

AC.384는 바로 앞 AC.383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짧은 설명입니다. AC.383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라는 말을 어떤 내적 고통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악 가운데 있음을 어느 정도 고백한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사실에서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다’고 결론짓습니다. 이것은 가인을 선한 사람으로 평가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미 가인은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체어리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며, 마침내 ‘아벨을 죽이는 것’, 곧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럼에도 자기 악 때문에 내적인 고통을 느끼고 어느 정도 그것을 인정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 안의 선에 속한 모든 것이 아직 완전히 사라진 상태는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선의 어떤 것’이라는 제한된 표현을 그대로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에게 ‘선이 있었다’고 일반적으로 말하지 않고 ‘something of good still remained’라고 합니다. 즉 악이 크게 지배하고 있었지만 선에 반응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아직 남아 있었다는 뜻입니다. AC.383에서 보았듯이 가인은 자기 상태 때문에 내적 고통을 느꼈고, 자기가 악 가운데 있음을 어느 정도 고백했습니다. 만일 선에 속한 것이 완전히 소멸되었다면 그러한 내적 고통과 인정조차 일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 작은 반응 가능성이 이번 번호에서 말하는 ‘아직 남아 있던 선의 어떤 것’입니다.

 

이 점은 가인에 관한 지금까지의 설명을 지나치게 단순화하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가인은 ‘악’, 아벨은 ‘선’이라는 식으로 두 사람을 단순한 도덕적 인물 유형으로 나누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해석은 아닙니다. 가인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교리와 그것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 상태가 매우 심각하게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선의 가능성이 한순간에 완전히 없어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가 시작되고,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고,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며, 그 결과 선과 진리의 방향을 잃어 가는 과정 가운데에서도 아직 선의 어떤 잔여가 남아 있었던 단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AC.384의 후반부는 곧바로 더 어두운 방향을 예고합니다. ‘이후 체어리티의 모든 선이 소멸되었다는 것은 라멕에 관하여 말한 것에서 분명하다’고 합니다. 즉 가인에게 남아 있던 선의 어떤 것이 계속 보존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가인으로 시작된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는 후대로 내려가면서 더욱 심화되었고, 마침내 라멕으로 표상되는 상태에서는 체어리티의 선이 완전히 소멸됩니다. 그러므로 AC.384는 가인의 상태를 설명하는 동시에 창4 후반부의 라멕을 미리 바라보게 하는 연결 문장입니다.

 

스베덴보리가 특별히 창4:19,23-24를 가리키는 것도 이 흐름 때문입니다. 창4:19에서는 라멕이 두 아내를 취하는 일이 나오고, 23-24절에서는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그리고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라는 라멕의 말이 나옵니다. 이 구절들의 구체적인 속뜻은 해당 번호에서 자세히 살펴보아야 하므로 지금 미리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AC.384에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 자신이 이 구절들을 ‘체어리티의 모든 선이 소멸된’ 후대의 상태를 보여 주는 근거로 미리 지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가인에서 라멕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단순히 악한 개인들의 계보가 아닙니다. 하나의 영적 원리가 세대를 거치며 어디까지 진행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교리적 계보입니다. 처음에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구별이 있었고, 그 구별이 분리가 되었으며,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 위에 서려고 했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습니다. 그러나 가인의 단계에서는 자기 악에 대한 어떤 내적 고통과 인정이 가능할 만큼 선에 속한 무엇인가가 아직 남아 있었습니다. 그 뒤 그 원리가 더욱 악화되어 라멕에 이르면 그것마저 소멸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이것은 앞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구별했던 ‘체어리티의 소멸’이라는 표현을 좀 더 세밀하게 읽게 합니다. 앞 번호들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것은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AC.384에서는 다시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두 진술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하나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교리에서 체어리티가 신앙의 본질과 주도 원리로서 배척되고 소멸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상태에 속한 사람들 안에서 선에 속한 모든 흔적과 반응 가능성이 그 순간 완전히 없어졌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교리적 원리의 소멸과 사람 안에 남아 있는 선의 어떤 것을 구별하여 보고 있습니다.

 

이 구별은 앞으로 ‘가인의 표’를 이해할 때도 중요해질 것입니다. 만일 가인 안에 선에 속한 모든 것이 이미 완전히 소멸되어 아무것도 보존할 것이 없었다면, 왜 주님께서 가인을 즉시 멸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표를 주어 아무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는가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AC.384는 아직 그 답을 본격적으로 설명하지 않지만, 적어도 가인의 상태 안에 아직 보존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었다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그러므로 이후의 ‘가인의 표’는 단순히 악인을 보호하시는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 아니라, 완전히 소멸되지 않은 것을 보존하시는 주님의 섭리라는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선의 어떤 것’을 곧바로 ‘리메인스’라고 단정하는 것은 아직 조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번 번호에서 ‘remains’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단지 ‘something of good still remained’라고 말합니다. 더 넓은 AC의 가르침과 연결하여 리메인스와의 관계를 생각해 볼 수는 있지만, AC.384 자체가 이것을 전문적 의미의 리메인스라고 명시한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은 원문이 말하는 만큼, 곧 ‘선에 속한 무엇인가가 아직 남아 있었다’고 두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목회적으로도 이 짧은 번호에는 중요한 통찰이 있습니다. 사람의 상태가 크게 무너져 있다고 해서 우리가 그 사람 안에 선에 반응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쉽게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을 근거로 다른 사람의 내면을 우리가 판정할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가인조차 자기 악 때문에 어떤 내적 고통을 느끼고 그것을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사람의 외적인 상태만 보고 그의 내면에 남아 있는 모든 가능성을 우리가 판단할 수 없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사람의 내면을 아시고 남아 있는 것을 보존하실 수 있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결국 AC.384는 가인의 이야기에 매우 중요한 미세한 차이를 넣습니다. 가인은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이르렀지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악을 어느 정도 인정하게 하는 내적 고통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그 상태가 계속 악화되면서 라멕에 이르러서는 체어리티의 모든 선이 소멸됩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는 가인의 타락을 단번에 완성된 상태로 보지 않고 하나의 진행 과정으로 보게 하며, 동시에 아직 남아 있는 것을 보존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이후 ‘가인의 표’와 연결하여 바라볼 준비를 하게 합니다.

 

 

 

AC.385, 창4:14,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 남아 있는 것을 위협하는 악과 거짓’ (A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Behold thou hast cast me out this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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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3, 창4:13,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 악을 인정하게 한 내적 고통과 절망’ (AC.3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And Cain said unto Jehovah, 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 (창4:13) AC.38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Cain said unto Jehovah)는 어떤 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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