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가인에게이르시되’(JehovahsaiduntoCain)가양심이말해주었음을뜻한다는것은별도의확증이필요하지않습니다. 이와비슷한구절이앞에서이미설명되었기때문입니다. That “JehovahsaiduntoCain” means that conscience dictated, needs no confirmation, as a similar passage was explained above.
AC.360은 한 문장뿐인 매우 짧은 글입니다. 그러나 바로 앞 AC.359에서 우리가 만난 ‘여호와께서가인에게이르시되=양심이말해주었다’는 해석을 다시 한번 분명하게 확인해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별도의 성경 인용을 동원하여 입증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그 이유를 ‘이와비슷한구절이앞에서이미설명되었기때문’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AC.360의 핵심은 새로운 교리를 제시하는 데 있지 않고, AC.359의 해석을 앞에서 이미 세워 놓은 해석 원리에 연결하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우리가 AC.359심화에서 살펴본 ‘양심’(conscience)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AC.360에서도 다시 conscience라는 말을 그대로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단순한 번역상의 우연이나 AC.359의 일회적인 표현으로 돌리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의도적으로 ‘여호와께서말씀하셨다’는 것을 인간 안에서 ‘양심이말해주는것’과 연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근거로 ‘가인은홍수후고대교회의영적인간과동일한양심을가지고있었다’고 결론 내려서는 안 됩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은 퍼셉션에 의해 인도되었고, 홍수 후 고대교회의 영적 인간에게는 진리에 관한 지식을 기초로 양심이 형성된다는 큰 구별은 그대로 유지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AC.359-360의 conscience는 그 시대적 차이를 무시한 채 후대의 양심 개념을 그대로 가인에게 옮겨 놓기보다, 가인의 타락한 상태에서도 여전히 그의 내면에 잘못을 알리고 제지하는 내적 딕테이트가 있었다는 문맥에서 조심스럽게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오히려 AC.360에서 새롭게 눈여겨볼 부분은 ‘이와비슷한구절이앞에서설명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에게 ‘여호와께서말씀하셨다’는 성경의 표현이 반드시 외부에서 음성으로 들려오는 말씀만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내적 상태에 따라 퍼셉션이나 내적 딕테이트, 그리고 후대 영적 인간에게는 양심을 통하여 선과 진리를 알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여호와께서이르셨다’는 표현을 만날 때에는 그때 그 사람 또는 교회의 내적 상태가 어떠했는지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이것은 가인의 현재 상태에서 특히 중요합니다. 가인은 이미 자기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분노했고, 그의 얼굴이 떨어졌습니다. 체어리티가 떠났고 내적인 것들이 변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아벨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때 ‘여호와께서가인에게말씀하셨습니다.’ 즉 악이 이미 애정 안에서 움직이고 있지만 아직 완전히 행위로 굳어지기 전에, 그 악을 보게 하고 돌이킬 수 있도록 하는 내적 경고가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AC.359-360을 함께 읽으면 하나의 중요한 장면이 보입니다. 가인의 내적인 상태는 이미 나빠졌지만, 주님과의 모든 접점이 즉시 끊어진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여전히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이후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가인은 아무런 경고도 없이 갑자기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것이 아니라, 그 전에 자신의 상태를 돌아볼 기회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그 내적 경고를 따르지 않고 계속 자기 방향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할 때에는 시대적 차이를 구별하면서 그 원리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홍수 후 영적 인간의 질서에 속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우리가 말씀에서 배우고 받아들인 선과 진리를 통하여 양심을 형성하시고, 그 양심을 통하여 우리의 애정과 생각과 행위를 돌아보게 하십니다. 특히 분노나 질투, 자기 의가 일어날 때 그 상태를 정당화하는 목소리만 듣지 않고, ‘이것이정말체어리티와일치하는가?’라고 묻게 하는 내적 경고에 귀 기울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AC.360은 짧기 때문에 별도의 심화가 필요한 글은 아니겠습니다. 오히려 이미 작성한 ‘AC.359심화1, 양심은홍수후고대교회부터인데왜가인에게‘양심이말해주었다’고 하는가?’에 AC.360을 중요한 추가 근거로 반영하면 좋겠습니다. AC.359에서 한 번 사용된 conscience가 AC.360에서 다시 확인된다는 사실은 그 심화의 문제의식을 더욱 분명하게 해 줍니다.
AC.359를 읽다가 상당히 중요한 의문을 만나게 됩니다.스베덴보리는 창4:6의‘여호와께서가인에게이르시되’를 설명하면서 아주 분명하게‘consciencedictated’,곧‘양심이말해주었다’고 합니다.그런데 지금까지AC를 읽으며 배운 교회의 영적 역사를 생각하면 이 표현이 선뜻 이해되지 않습니다.태고교회의 특징은‘양심’(conscience)이 아니라‘퍼셉션’(perception)이었기 때문입니다.그리고 양심은 홍수 이후 노아로 표상되는 고대교회의 영적 인간에게서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그렇다면 아직 홍수 이전인 가인에게 어떻게‘양심’이 있을 수 있을까요?
먼저 가장 분명한 원칙부터 확인해야 합니다.태고교회와 고대교회의 내적 구조는 같지 않습니다.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은 사랑의 선으로부터 진리를 지각했습니다.사랑과 신앙,의지와 이해가 오늘날 사람처럼 분리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선을 사랑하면 그 선으로부터 무엇이 진리인지를 퍼셉션으로 알았습니다.반면 홍수 이후의 사람들은 이 천적 구조를 잃었습니다.스베덴보리는AC.310에서 홍수 후 사람들에게는 천적 씨가 아니라 영적 씨가 있으며,이들에게 주님께서는‘진리의지식과거기에서비롯되는선에기초하여양심을심어주심으로써’체어리티에 이를 수 있도록 하신다고 설명합니다.이것은 홍수 이전과 이후의 인간 구조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매우 중요한 설명입니다.
따라서‘태고교회=퍼셉션,고대교회=양심’이라는 기본 구별은 그대로 유지되어야 합니다.실제로 우리는 앞서AC.224를 해설하면서도 이 문제를 한 번 만났습니다.창3의 타락한 아담과 하와를 두고‘양심의흔적이남아있었다’고 표현하면 시대가 뒤섞인다는 문제가 있었습니다.그래서 그때도‘양심의흔적’보다는‘퍼셉션의잔재’, ‘남아있는지각’, ‘약해진퍼셉션’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정리했습니다.
그렇다면AC.359에서는 왜 스베덴보리 자신이‘conscience’라고 했을까요?여기서 첫 번째로 주의할 것은‘가인’을 태고교회의 처음 상태와 동일시하지 않는 것입니다.창4에서 다루는 것은 이미 타락이 시작된 이후의 태고교회 후손들과 거기서 파생된 교리적 상태들입니다.가인은 본래 사랑 안에 하나로 존재하던 신앙에 속한 것들이 점차 독립된 것으로 여겨지고,마침내 사랑과 분리된 신앙의 교리가 되어 가는 과정을 표상합니다.즉 가인은 퍼셉션이 가장 충만했던 태고교회의 전성기를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그 천적 질서가 해체되어 가는 과정 안에 있습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AC.359의‘conscience’는‘노아이후영적인간의양심이이미가인에게완성되어있었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곤란합니다.그렇게 읽으면AC.310에서 스베덴보리가 매우 분명하게 설정한 홍수 이전과 이후의 차이가 무너집니다.반대로‘스베덴보리가실수로conscience라고썼으니사실perception이라고읽어야한다’고 말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우리에게 주어진AC.359의 문장은 분명히‘consciencedictated’입니다.따라서 두 진술을 모두 보존하면서 그 관계를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실마리가 앞의AC.224에 있습니다.스베덴보리는 그곳에서‘자비,평화,그리고모든선,곧여호와의얼굴들’이‘퍼셉션을가진사람들에게는딕테이트(dictate)의원인이되며,비록다른방식이기는하지만양심을가진사람들에게도마찬가지’라고 설명합니다.즉 근원은 언제나 주님이시지만 그 내적 딕테이트가 받아들여지는 방식은 인간의 영적 상태에 따라 다릅니다.퍼셉션을 가진 천적 인간에게는 퍼셉션의 방식으로,양심을 가진 영적 인간에게는 양심의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을AC.359에 비추어 보면,여기서 핵심은‘conscience’라는 단어 하나를 시대 구분의 기술적 용어로만 읽기보다‘Jehovahsaid’,곧 주님에게서 오는 내적 딕테이트가 아직 가인에게 있었다는 사실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다만 스베덴보리가 왜 여기서 특별히‘perceptiondictated’가 아니라‘consciencedictated’라고 표현했는지에 대해서는AC.359자체가 더 설명하지 않습니다.그러므로 이 지점에서는 본문이 말하는 것 이상을 단정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만 전체 문맥에서 한 가지는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가인은 이미 태고교회의 순수한 천적 상태에서 상당히 멀어지고 있습니다.신앙이 사랑으로부터 독립되기 시작했고,그 분리가 교리로 굳어지고 있으며,체어리티 없는 행위와 예배가 생겨났습니다.이제 체어리티가 받아들여지고 자기 예배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분노하고 그의 내적인 것들까지 변합니다.따라서AC.359의 가인은 태고교회의 온전한 퍼셉션을 가진 사람의 상태를 보여 주는 인물이 아닙니다.
이 점에서 가인은 오히려 매우 흥미로운‘과도기적상태’를 보여 줍니다.다만 여기서‘가인에게퍼셉션이양심으로바뀌기시작했다’고까지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스베덴보리가 홍수 후 인간에게 마련된 새로운 영적 구조와 양심의 형성을 명백히 구별하기 때문입니다.AC.310에 따르면 홍수 후 사람들에게는 사랑이나 선한 의지가 본래적으로 존재하지 않지만,진리를 이해하고 신앙할 능력은 남아 있으며,주님께서는 바로 그 진리의 지식에 기초하여 양심을 심어 주십니다.이것이 고대교회와 오늘날 영적 인간에게 속하는 본격적인 양심의 질서입니다.
따라서 가인의‘conscience’와 홍수 후 영적 인간의‘conscience’를 완전히 동일한 구조라고 단정하는 것보다는,AC.359에서는‘체어리티에서멀어져가는가인에게도아직그잘못을내적으로알리는딕테이트가있었다’는 데 초점을 두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가인은 이미 분노했습니다.그의 내적인 것들도 변했습니다.그러나 아직 아벨을 죽이지 않았습니다.그 사이에‘여호와께서가인에게말씀하셨습니다.’이것이AC.359가 강조하는 결정적인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후의 가인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은 아무런 경고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갑자기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사랑에서 신앙이 분리되고,그 분리에서 죽은 행위와 예배가 생기고,체어리티가 떠나면서 분노가 일어나고,내적인 것들이 변했을 때에도 주님의 내적 딕테이트가 있었습니다.주님께서는 그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보게 하셨습니다.그런데 가인은 그 말씀을 따라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하는 길로 돌아서지 않았고,결국 다음 단계에서 아벨,곧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여기에는 주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라는 더 깊은 원리도 담겨 있습니다.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악을 행하지 못하도록 강제하시지 않습니다.강제로 선하게 만든다면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이 사라지고,따라서 진정한 거듭남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주님께서는 인간이 악을 행하기 전에 끊임없이 선과 진리를 통하여 경고하시고,돌이킬 수 있는 길을 마련하십니다.가인에게‘왜네가분하여하느냐?’고 말씀하신 것이 바로 그러한 장면입니다.강제가 아니라 딕테이트이고,심판에 앞선 경고이며,자유 안에서 다시 선을 선택하도록 하시는 자비입니다.
이제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할 때에는 다시 시대를 건너와야 합니다.우리는 가인 시대의 홍수 이전 인간이 아닙니다.AC.310이 설명하듯 우리는 홍수 이후의 영적 인간 구조에 속하며,주님께서는 말씀에서 배운 진리를 통하여 우리 안에 양심을 형성하십니다.그러므로 우리가‘왜내가이렇게분노하는가?’, ‘이것이정말진리를위한분노인가,아니면내proprium이상처받았기때문인가?’, ‘내가옳음을주장하는동안체어리티가떠나고있지는않은가?’라고 내적으로 살피게 될 때,그 양심의 딕테이트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AC.359는 오늘날 우리에게 매우 엄중한 경고가 됩니다.양심의 소리를 반복해서 거스르면 처음에는‘잘못인줄알면서하는것’이었던 것이 점차‘잘못이라고느끼지않는것’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가인의 경우에도 분노 그 자체가 마지막 상태가 아니었습니다.분노에서 돌이키지 않자 마침내 아벨을 죽이는 데까지 나아갑니다.영적으로는 체어리티를 완전히 소멸시키는 상태입니다.그러므로 양심은 단순히 죄를 지은 뒤 우리를 괴롭히는 기능이 아니라,악이 아직 행위와 습관과 지배적 사랑으로 굳어지기 전에 주님께서 우리를 돌이키시는 중요한 수단입니다.
결국AC.359의 이 작은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인간론 전체를 다시 보게 합니다.태고교회에는 퍼셉션이 있었고,그 퍼셉션은 교회가 타락하면서 점차 쇠퇴했습니다.홍수 후에는 인간의 구조가 달라졌으며,주님께서는 진리의 지식을 통하여 양심을 형성하시는 새로운 길을 마련하셨습니다.따라서AC.359의‘consciencedictated’를 이 두 시대의 구별을 무시한 채 단순하게 읽어서는 안 됩니다.그러나 동시에 그 표현을 지워서도 안 됩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 구별을 하고 나면AC.359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 더욱 선명해집니다.중요한 것은 가인의 내적 딕테이트를 정확히 어느 시대의 기술적 범주에 넣을 것인가만이 아닙니다.더 근본적으로는‘가인의얼굴이떨어진뒤,그러니까안색이변한뒤에도여호와께서말씀하셨다’는 사실입니다.체어리티가 떠나고 내적인 것들이 변하기 시작했어도 주님의 자비는 먼저 떠나지 않았습니다.인간이 악을 향하여 가는 바로 그 길목에서 주님께서는 여전히 말씀하시고,보게 하시고,돌이킬 기회를 주십니다.태고교회의 퍼셉션이든,후대 영적 인간의 양심이든,그 모든 선한 내적 딕테이트의 궁극적인 근원은 주님이십니다.그리고 거듭남의 중요한 순간은 바로 그 말씀을 들었을 때 가인처럼 자기 분노를 붙드는가,아니면 주님 앞에서 자기 상태를 보고 체어리티로 돌아서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2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10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12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1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1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15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16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17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창4:1-17)
이 가인 본문을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창, 출 속뜻 주석)에서는 글 번호 AC.324-403에 걸쳐 다루고 있지만, 오늘은 한 가지, 곧 여호와는 왜 친 아우를 살해한 자를 보호하시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게 하시는,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의 속뜻에만 주목하고자 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여기에도 사실 여러 아르카나가 있어, 그리고 모두 서로 연결되어 있어 어느 하나를 분리해 내기가 쉽지 않지만, 그래도 한 가지,
‘심지어 그 신앙이, 분리된 신앙, 곧 사랑 따로 신앙 따로 신앙일지라도 신앙에 대한 폭행은 신성모독이 될 수 있다’(to do violence to faith even when thus separated would be a sacrilege)
는 이것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 창세기 첫 열한 장, 곧 1장부터 11장까지는,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알리신 바에 의하면 실제 역사가 아닙니다. 여기는 고대인들이 즐겨 사용하던 스토리텔링식 역사 서술 방식으로, 지구의 지질학적 나이가 45, 6억 년 정도임을 감안하면, 그리고 말씀에 나오는 숫자들, 특히 날 수, 연 수의 의미가 상태들과 그 변화임을 감안하면, 그래서 비록 총 11장에 불과하지만 실제로는 수천, 수만, 아니 수십, 수백만 년의 역사일지도 모릅니다. 말씀은,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인류의 출발, 그 첫 등장에 대한 역사적 사실 확인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습니다. 실제 역사는 아브라함의 등장부터입니다. 참고로, 그래서 창11까지 말씀에 나오는 인명들은 어느 한 개인의 이름이 아닌, 그 이름으로 부른 교회, 교리, 신앙을 말합니다. 즉 예를 들면, 므두셀라가 969세를 살았다는 건, 므두셀라라는 교회, 혹은 교리나 신앙이 숫자 969로 표현하는 어떤 장구한 세월 존재했다는 말입니다.
첫 사람 아담은 일곱째 날, 곧 안식일 상태, 천적 인간의 상태를 말하며, 이는 곧 태고교회를 의미합니다. 이 상태는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가 하나 된 상태입니다. 여기 사랑과 신앙은 주님 사랑, 주님 신앙을 말합니다. 이때는 주님 사랑 안에서만 주님 신앙도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랬던 태고교회가 시간이 흐르자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는 사람들이 일어났는데 이들이 곧 가인입니다. 이들은 주님을 사랑하는 일에 올인하는 대신 주님을 연구하는 일에 올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의 신비를 탐구, 그걸 교리화하는 일에 전념하는 사람들이었지요. 당연히 이들의 삶은 이웃 사랑, 곧 체어리티를 소홀히 하는 삶이었고, 그러므로 이들은 오리지날 태고교회 입장에서 보면 이단(heresy)이었습니다.
반면, 이런 중에도 여전히 주님을 사랑하여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체어리티(charity)의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이 바로 아벨입니다. 이들은 주님께 받아들여졌지만, 가인이라는 교회는, 당연한 얘기지만, 주님이 받으실 수 없었습니다. 참고로, 교회가 낳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 이 둘 뿐입니다. 그래서 아담이라는 교회에서 가인과 아벨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불행히도 가인이라는 교회는 그럼에도 돌이키는 대신 아벨이라는 체어리티를 자신들한테서 완전히 끊어내었는데, 즉 박탈하고 말았는데, 이것을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 결과, 이제 끔찍한 삶이 펼쳐지는데요, 그러자 가인은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하소연합니다. 사람은, 교회는 오직 체어리티로만 주님과 결합하는데, 이 유일한 연결고리를 끊어냈으니, 즉 스스로 박탈하고 말았으니, 이제는 철저히 악과 거짓만 남은 상태로 큰 두려움 가운데 살아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것은, 그러자 주님은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보통 우리 같으면, 그걸 이제 알았냐? 너는 선을 넘었으니 어쩔 수 없다.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니 나는 모르겠다 보통 이럴 텐데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러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예상을 깨고, 주님은 이런 가인일지라도 그를 지키시며, 보호하십니다. 가인은 형제 살해범, 곧 이단인데도 말입니다.
이 아르카나의 결론만 말씀드리면, 주님의 섭리는 이후 인류의 미래를 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류가 아벨의 길이 아닌, 결국 가인의 길을 걷게 될 걸 아시고, 비록 그가 이단이지만 그의 안에 새로운 일을 시작하셔서, 그를 통해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큰 그림을 그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가인을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이 ‘그의 안에 새로운 일을 시작하셨다’는 표현 안에는 사실은 어마어마한 배경 이야기가 숨어있습니다. 여기서 다루기에는 무리여서 그냥 이렇게만 넘어가겠습니다.
※ 창4:25,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에 나오는 ‘아담’(the man)과 그의 ‘아내’(wife)는 앞 19절에 나오는 ‘아다와 씰라’(Adah and Zillah)로 상징된 새 교회를, 이름이 셋(Seth)인 그녀의 ‘아들’(son)은 새로운 신앙을 의미합니다. 가인의 계보는 역사 속에 사라지고, 아담과 하와로부터 새로운 아들이 시작되는 게 아닙니다.
주님은 가인에 대하여 이런 섭리를 갖고 계시는데, 이런 주님의 계획은 아랑곳하지 않고, 가인은 이단이야, 가인은 아벨을 죽였어, 그러므로 가인을 죽여야 해 하며 그에게 손을 대는 것은, 주님 보실 때 신앙에 대한 폭행이며, 곧 신성모독을 범하는 것입니다. 기억할 것은, 단지 가인에 대한 소멸만 막으셨을 뿐, 그에 대한 저주는 계속 유효하다는 사실입니다.
※ 저 같으면 시작부터 헝클어져서 에이, 파토났네... 그냥 다 리셋하고, 첨부터 다시 하지 할 것 같은데 주님은 그러지 않으십니다.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정말 번거로운 일을 시작하십니다. 주님은 참으로 우리가 상상할 수 없으신 신(The Divine)이십니다. 그런 분이 또 사랑의 신이신 게 얼마나 천만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이단을 대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많은 것을 알려줍니다. 두 가지만 말씀드립니다.
첫째, 이단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교리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기독교, 개신교 교리로 살아간다 하더라도 신앙 따로 체어리티 따로의 삶, 곧 자기 사랑, 세상 사랑의 삶을 산다면, 그는 주님이 보실 땐, 그가 오히려 가인의 후예, 곧 정통 이단입니다. 반면, 개신교에서 말하는 이단이라 하더라도 그가 그의 신앙 안에서 체어리티의 삶을 산다면, 그는 주님 보실 때 아벨의 후손인 것이고 말입니다. 이런 분들은 혹시 생전에 회심하지 못해도 사후, 돕는 천사들에 의해 재교육받고, 주님을 영접하여 천국에 들어갑니다. 천국은 생전에 그 속 사람의 상태가 천국을 받을 수 있는 상태인 사람이 들어가는 나라이지, 속 사람의 상태와 상관없이 무슨 라이센스만 취득하면 무조건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둘째, 이단에 속했다고 강제로 무릎 꿇리고, 개종 기도를 시키고, 강요와 윽박, 협박과 위협을 가하는 것은 신앙에 대한 폭행이며, 주님에 대한 신성모독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나면, 이런 일을 주도한 개신교인은 아멘, 할렐루야! 오, 주님, 감사합니다. 제가 길 잃은 어린양을 구원시켰습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일은 착하고 신실할수록, 그리고 굳은 신념의 소유자일수록 더욱 아무 거리낌 없이 행합니다. 무지하기 때문인데요, 자기가 하는 일이 영혼을 살리는 일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옳고 그름, 선과 진리를 오직 학습으로만 알고, 퍼셉션(perception, 천사들과 주님 간 커뮤니케이션 방법), 곧 하늘의 음성으로는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무지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무지하더라도 혹시 주님은? 하며 늘 주님의 눈치 볼 줄은 알아야 합니다. 저런 개신교인은, 아니 어느 종교라 하더라도 자기와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 저렇게 하는 사람은 평소 그의 삶의 태도가 주님 앞에 어떤지를 여과 없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유다서에 보면 천사장 미가엘 이야기가 나옵니다.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비방하는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유1:9)
천사장 미가엘조차도 심지어 마귀에 관한 일조차 주님 앞에 조심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도 그래야겠습니다. 몰라서 그럴 수는 있으나 겸손해야 합니다. 무의식 중에라도 늘 주님을 경외하며, 모든 언변과 행실을 조심해야 합니다. 경외란 주님을 향한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결론입니다.
가인같은 이단도 주님은 존중하셨거늘, 만일 내가 함부로 대하는 이 사람의 신앙이 오히려 아벨의 신앙이라면, 나중에 그 후과를 어떻게 감당하시려고 그러십니까? 유대인들도 신념의 사람들이었지만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이 되었고, 사울 시절 바울도 그렇게 교회를 핍박, 박해하였으나 결국 거꾸러지지 않았습니까? 다른 사람을 살펴보고 그 열매가 아벨의 열매이면, 비록 내가 믿는 교리와 다르더라도 시비, 훼방, 간섭 등을 하지 말고, 그 시간에 오히려 주님 앞에 자기 할 도리만 다 하시기 바랍니다. 이 ‘자기 할 도리’는 심지어 전도, 선교, 목회보다도 더 우선합니다. 주님의 나라는 속 사람의 나라인데, 이 속 사람은‘자기 할 도리’로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굳은 신념으로 함부로 사는 사람보다는 사랑으로 늘 주님 뒤에 있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사랑보다 더 강력한 신념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언행에 있어 항상 나의 이 말과 글, 행위와 행실로 주님을 온전히 드러내고 있는가, 증거하고 있는가, 아니면 사울 시절 바울처럼 바보같이 나의 이 열심으로 오히려 주님을 욕되게 하고 있는 건 아닌가 살펴야 할 것입니다. 이 ‘주님을 드러낸다’는 것은, 거기에 주님이 느껴지는가, 사람들이 내 말, 내 글, 곧 일상 중 나를 접하고 주님을 느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천사들처럼 말입니다.
오늘날 저마다 무슨 이단 대책 위원회다, 이단 심판, 혹은 판정 위원회다 하여 열심히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정성을 다합니다. ‘현대종교’라는 앱을 켜면 수많은 이단 목록이 나오지요. 전에는 저도 여기를 자주 찾곤 했습니다. 이 모든 분들의 노고를 모르는 바 아니며, 한편으론 감사한 마음도 있습니다.
시야가 좀 더 높아진, 그리고 넓어진 지금은, 그러나 이 ‘이단’(heresy)에 대한 생각이 좀 달라졌습니다. 지금의 저 이단 판정의 기준은 ‘교리’인데요, 즉 내 교리를 기준으로 봤을 때, 너는 틀렸다 판정하는 것이 지금의 이단 판정입니다. 교리라는 것은 진리에서 추출하는 것이므로, 그러니까 내가 진리라고 믿는 것들로 봤을 때, 네가 믿는 진리는 틀렸다는 것이죠.
이런 모습은 ‘영적인 사람들’(the spiritual)의 일반적 특징인데요, 놀라운 것은, 이들은 ‘지적인 면’(the intellectual part)으로만 거듭날 수 있어, 주님은 이들 역시 온전한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새로운 의지를 심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저마다 믿는 그 교리 눈높이에 맞춰서 말이죠. 그러니까 누구나 자기가 믿는 교리에 따라 선을 행하면 천국 가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거기 묻은 좀 어설픈 오류들은 천국에 오르기 전 다 정돈되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중요한 건, 교리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자기 교리에 녹아져 들어간 주님의 신성을 따라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천국에 합당한 선이 구비되기 때문인데, 천국은 선의 나라이므로 이는 매우 중요한 필수 구비 요건 중 하나입니다.참고로, 그러나 이 선을 행하는 것 또한 오직 주님으로만 말미암는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첫 번째 책 창세기에 나오는 첫 번째 이단이 가인입니다. 창세기 첫 1, 2, 3장의 태고교회는 사랑으로 주님을 신앙하는 교회였으나, 창세기 4장,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는 사람들이 일어납니다. 바로 가인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가인과 아벨이 나오는데요, 이들의 속뜻을 살펴보면,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를 ‘가인’(Cain)이라 하고, 이웃을 향한 사랑인 체어리티(charity, 이웃 사랑)를 ‘아벨’(Abel)이라고 합니다.
이것입니다. 이것이 이단의 기준입니다. 즉 가인 편에 서면 이단, 아벨 편에 서면 정통(?), 그러니까 안전합니다. 자신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사랑과 신앙이 일치하는가? 그러니까 나는 주님 사랑 따로, 주님 신앙 따로인가 아닌가 말이죠. 말로만, 립 서비스로만 이웃 사랑을 하고 있는 건 아닌가 말입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글 쓰는 저 자신도 여기서 자유롭지 못하네요... 어쩌면 우리 모두 여전히 가인의 후손, 후예인지 모르겠어요. 이런 우리를 건사하여 주시는 주님, 진심으로 고맙고 감사합니다...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1-8)
인애(charity)가 없는 신앙(faith)의 행위는 신앙의 행위가 아니며 자체로 죽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들은 외적인 사람들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천국의 비밀 348, 이순철 역) for the works of faith devoid of charity are works of no faith, being in themselves dead, for they are solely of the external man. (AC.348)
※ 윗글은 오늘 본문 중 3절,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에 나오는 ‘땅의 소산’에 대한 주석 일부 인용입니다.
※ 오늘 설교는 원래 추수감사절 설교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추수감사절을 맞아 가인과 아벨처럼 각자 예물을 가지고 주님께 나왔습니다.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신 주님께서 우리의 예물은 어떻게 보실지 생각하면 참으로 두렵습니다. 주님은 왜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물만 받으셨을까요? 그리고 급기야 가인은 왜 아벨을 죽이기까지 했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그 이유, 즉 그 속뜻을 하나씩 알아보겠습니다. 본문 1절입니다.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보통 아담과 하와라고 하면 주님께서 창조하신 인류 최초의 인간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실제로 창세기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고, 다들 그렇게 믿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말씀의 그런 겉뜻과는 달리 아담과 하와의 속뜻은 전혀 다릅니다. 영적인 의미, 곧 속뜻으로 ‘아담’과 ‘하와’는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즉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를 의미합니다. 주님은 인간을 만들어 처음 세상에 내시던 그때부터 그들 가운데 교회를 세워주셨습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이유는, 주님은 교회를 통해 인간과 만나시고, 교회를 통해 인간을 가르치시며, 그렇게 해서 인간을 영원히 사는 존재로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가 첫아들을 낳았다는 것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신앙이 생긴 걸 말합니다.
※ 교회로 말미암는 자녀는 신앙과 체어리티(charity, 이웃 사랑), 둘밖에 없는데요, 그래서 신앙을 첫아들, 곧 ‘가인’(Cain)으로, 체어리티를 그 아우, 곧 ‘아벨’(Abel)이라 한 것입니다.
사람이 교회에 처음 나오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먼저 진리를 배웁니다. 그리고 그 진리가 옳다고 여겨질 때, 비로소 진리로 말미암은 신앙, 곧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생깁니다. 바로 그 신앙이 하와가 낳은 첫째 아들 가인입니다. 그런데 처음 신앙이 생겼을 때는, 말로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지만 그분의 말씀대로 살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말씀대로 살려고 할 때, 내면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욕심, 이를테면 나를 높이고자 하는 욕심이나 세상에 대한 욕심 같은 것, 즉 자아 사랑, 세상 사랑과 충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 충돌을 극복,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는 어떤 선한 에너지가 필요한데요, 그 에너지는 바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입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이고, 이웃에 대한 사랑이며, 진리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는 내면에 있는 좋지 않은 욕망들을 극복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 신앙이 생겼을 때는 아직 그런 사랑이 없습니다. 그래서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은 사랑 없는 신앙, 사랑과 분리된 신앙입니다. 신앙의 교리라고 해도 됩니다. 아직은 신앙 따로, 사랑 따로의 상태인 것이지요.
※ 모든 것이 완전, 온전했던 태고교회도 점차 변질, 기울어져 그 끝은 노아의 홍수라는 비극으로 끝나게 되지요. 그때까지 태고교회는 대략 여덟 번 정도의 상태변화를 겪게 되는데, 오늘 본문은 세 번째 상태변화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는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2:18) 부분부터입니다. 이 부분부터 아담, 즉 태고교회는 자신의 자아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건데요, 그러니까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주님한테서 시선을 돌려 두리번거리기 시작하는 거, 이것이 바로 상태가 변하는 것입니다.
※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이 주시는 퍼셉션(perception, 주님으로부터 내 영으로 들려오는 일종의 내적 음성)으로 모든 것, 곧 주님에 관한 모든 것, 천국에 관한 모든 걸 100% 무슨 별도 학습 없이 그냥 알았습니다. 무엇에 대하여 궁금해하면 하늘로부터 바로 답이, 그것도 주님으로 말미암는 100% 온전한 답이 자신의 열린 영으로 들려오니 굳이 따로 교리화하여 학습할 필요가 없었지요. 마치 천적 천국 천사들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소위 두리번거리기 시작하면서 이 퍼셉션의 해상도(?), 수신 감도가 흐릿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가인’이라는 신앙의 사람들이 일어난 것인데요, 주님한테서 시선을 돌리니 영이 흐려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전까지는 사람들은 ‘신앙’이라는 게 뭔지도 몰랐습니다. 그런 거 몰라도 얼마든지 행복하며, 주님이 일일이 다 알려주시니 부족한 거 없이 늘 ‘내 잔이 넘치나이다’였기 때문입니다. 마치 갓난아이들이, 어린 영유아들이 무슨 신앙이 있어 엄마, 아빠를 사랑하고 따르는 게 아니듯 말입니다. 주님 아닌 다른 데로 시선을 돌리는 바람에 자신들의 퍼셉션 감도가 흐릿해졌으면서도 그걸 커버하느라 이런 쪽, 그러니까 전에는 저절로 알던 것들을 이제는 하나하나 글로 정리, 교리화하여 그때그때 주님 찾을 필요 없이 꺼내볼 수 있는 쪽으로 잔머리를 굴린 겁니다. 오히려 회개하고 돌이켜 다시 주님만 바라봄으로써 선조들처럼 회복할 생각은 안 하고 말입니다...
그러다가 아담과 하와를 통해 두 번째 아들이 태어납니다. 2절입니다.
2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아담 부부에게 두 번째 태어난 아들의 이름은 아벨입니다. 아벨은 사랑, 그러니까 체어리티를 뜻합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함이 바로 체어리티인데요, 이 체어리티를 아벨이라 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 부부에게 아벨이 태어난 것은, 할 수 없이 생긴 신앙으로 신앙 생활하던 태고교회 사람들이 이제는 이 신앙으로 다시 사랑을 회복할 수 있게 된 걸 의미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같이, 신앙만 있을 때는 진리를 인정하기는 하지만 진리에 따라 살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이제 사랑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진리에 따라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말이 아닌 행동, 즉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교회에 신앙과 사랑이 있다고 해서 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에게 신앙과 사랑의 분량이 똑같은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신앙보다 사랑이 더 많고, 어떤 사람에게는 사랑보다 신앙이 더 많습니다. 전자의 사람을 우리는 ‘사랑으로 사는 사람’이라고 하고, 후자의 사람에 대해서는 ‘신앙으로 사는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 다음은 ‘천국과 지옥’ 21번 글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성(神性, the Divine)을 더 내적으로(內的, more interiorly) 받는 천사들이 있고, 덜 내적으로 받는 천사들이 있다. 더 내적으로 받는 천사들은 천적 천사들(天的, celestial angels)이라 하고, 덜 내적으로 받는 천사들을 영적 천사들이라 한다. 이에 따라 천국이 두 나라로 구분되는 것이다. 하나는 천적 나라(the celestial kingdom), 다른 하나는 영적 나라라 한다.
그래서 우리도 자신의 성향, 곧 머리가 먼저 반응하는지, 아니면 가슴이 먼저 반응하는지를 잘 살피면 나중에 나는 어떤 천국으로 가게 될지를 미리 가늠할 수 있습니다. //
그런 의미에서 양치는 자 ‘아벨’은 사랑, 즉 체어리티로 사는 사람이었고, 농사짓는 자 ‘가인’은 신앙으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태고교회 안에 두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는데요, 그것은 지금 우리 교회도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새 교회 안에도 사랑으로 사는 분들이 계시고, 신앙으로 사는 분들이 계십니다. 사랑으로 산다고 해서 신앙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고요, 신앙보다 사랑이 주도권을 잡고 있다, 뚜렷하다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으로 산다고 해서 사랑이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사랑보다는 신앙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 뚜렷하다, 두드러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두 부류의 사람, 즉 가인과 아벨이 주님 앞에 제사를 드렸습니다. 3절입니다.
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세월이 지난 후에‘는 가인과 아벨로 표상되는 사람들의 영적 상태가 변했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변했을까요? ‘가인’, 즉 신앙으로 사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더 나빠졌고, ‘아벨’로 표상되는, 체어리티로 사는 사람들은 전보다 훨씬 더 좋아졌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거듭난다는 것은 결국 ‘신앙의 상태’에서 ‘사랑의 상태’로 바뀌는 것인데, 만약 그러지 않고 ‘신앙의 상태’에 계속 머물러만 있게 되면, 가지고 있던 사랑을 점점 잃어버리게 되어 영적으로 타락하기 때문입니다. 그에 비해 ‘사랑의 상태’로 나아간 사람은 신앙이 더 깊어져서 영적으로 점점 성숙해지는데요, 왜냐하면 올바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진리를 더 많이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상태에 있는 사람은 그 사랑의 수준에 맞는 진리, 즉 신앙이 주어집니다. 왜냐하면 올바르게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진리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 체어리티로 사는 아벨은 영적으로 성장했고, 신앙으로 사는 가인은 영적으로 쇠퇴했습니다. 그 결과가 그들이 주님께 드리는 제사로 나타났는데,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사를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땅의 소산으로 드리는 제물’은 사랑 없이 신앙만으로 사는 삶을 말합니다. 그것이 가인이 드린 제물입니다. 반면 ‘양의 새끼로 드린 제물’은 이웃사랑, 체어리티의 삶을 뜻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아니, 받지 않으셨다기보다 받으실 수가 없었다가 맞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가인은 진리를 믿는다 고백은 하면서도 정작 진리에 따라 그렇게 살지는 않은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위선자의 삶이지요. 그러니 가인의 제사를 받으실 리가, 받으실 수가 있겠습니까? 주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 곧 주님을 예배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먼저 인애, 체어리티의 삶으로 제사를 드려야 하고, 그다음에 헌금과 떡을 드려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소에는 아무렇게나 살다가, 그러니까 자기 사랑, 세상 사랑으로 살다가 예배를 드릴 때만 경건한 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래 말씀들처럼 말입니다.
23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5:23-24)
11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사1:11-12)
가인은 여호와께서 자기 제물을 안 받으시자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했습니다.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는 것’은 그의 마음속에 조금 있는 사랑마저 식어버렸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분한 마음을 가질 수 있으며, 안색을 붉힐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자기 제사를 받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았을 때, 가인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반성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주님께 반발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내면에서 주님에 대한 사랑도, 이웃에 대한 사랑도 사라졌습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이것은 여호와께서 가인의 양심을 통해 그의 사랑이 식었음을 알려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또는 도덕적으로 잘못되고 있을 때, 양심이 아직 살아있는 사람은 그걸 바로 느낍니다. 그러니까 그런 느낌은 주님으로부터 양심을 통해 오는 경고의 메시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가인 역시 자기 안에 사랑이 식어가고 있는 걸 느꼈을 겁니다. 그럼에도 가인은 원망의 마음이 커서 양심의 경고를 무시해 버렸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더욱더 회복될 수 없는 상태로 빠져 들었습니다. 그렇게 회복될 수 없는 상태로 빠져드는 것을 8절에서는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그러므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은 사랑 없이 신앙만의 삶을 사는 사람들, 즉 입으로는 사랑을 외치면서도 정작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교회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 결국 사랑, 즉 체어리티를 모두 잃어버리는 걸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오직 ‘신앙’, ‘신앙’, ‘교리’, ‘교리’하며 마음이 돌덩어리같이 딱딱해지는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아벨을 죽이는 것입니다.
모두가 아시는 것처럼 인류가 창조된 이래로 그동안 여러 시대의 교회, 곧 태고교회, 고대교회, 유대교회가 있었고, 지금은 기독교회입니다. 모든 교회는 처음에는 신앙과 사랑, 진리와 선을 함께 가지고 있었습니다. 태고교회도 그랬고, 고대교회, 유대교회 및 오늘날 기독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초대 기독교회는 신앙과 사랑이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앞에 세 교회 시대처럼 이 기독교회도 교인들이 점점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신앙은 높이고, 삶은 등한시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신앙과 삶이 함께 있어야 하는데 신앙과 삶을 분리하게 된 것이지요. 그러더니 급기야는 신앙만으로 구원받는다는 잘못된 교리, 곧 ‘오직 믿음’의 교리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 물론 이는 마틴 루터 당시 극도로 부패한 카톨릭 교회에 반발, 저들의 엉터리 같은 ‘행위’를 극단적으로 고발하고자 애쓴 결과이지만 말입니다. 그 결과 엉뚱하게도 이번엔 완전 반대쪽 극단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가 사랑을 죽이는 일이고,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행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에는 인류 최초의 교회인 태고교회, 아담교회라고도 하는데요, 이 교회의 순수한 모습을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고 다니는 모습으로 표현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그렇게 처음에는 순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순수한 지각을 통해서 주님과 직접 대화할 수 있었지요. 그들이 주님으로부터 직접 받는 진리는 선이 있는 진리였고, 주님으로부터 직접 받는 신앙은 사랑이 있는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사랑과 신앙, 또는 진리와 선이 분리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태고교회 사람들도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빠지기 시작하더니 신앙과 사랑을 분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즉 신앙 따로, 사랑 따로의 삶을 살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것이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떠나는 모습입니다. 신앙과 사랑을 분리하고, 진리와 선을 분리하는 사람은 한마디로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천국은 그런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태고교회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들에게 먼저 신앙, 그러니까 진리를 주시고, 각자의 신앙에 따라 그다음에 사랑, 그러니까 선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사람에게 있는 진리의 상태에 따라 그에게 인애의 선을 만들어주신다. (계시록의 속뜻 935, 이순철 역) the Lord produces the goods of charity with a man according to the state of truth with him. (AR.935)
그것을 본문에서는 ‘하와가 먼저 가인을 낳고 그다음에 아벨을 낳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교회가 되었든 개인이 되었든 ‘신앙의 단계에 있는 사람은 사랑의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영적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단계에서 사랑의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 이런 신앙을 ‘앉은뱅이 신앙’이라고도 합니다.
또는 사랑의 단계로 나아갔다가 후퇴해서 다시 신앙의 단계로 내려오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잘못하면 내면에 있는 사랑을 모두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주 조심하여야 합니다.
신앙의 단계에 계속 머물러 있는 분들이 계십니다. 진리를 실천하려고 하는데 잘 안 됩니다. 우리 모두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습관이 있으면 하나씩 고쳐나가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계속 주저앉아 있으면 가지고 있던 사랑을 모두 잃어버리게 됩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도, 이웃에 대한 사랑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각자가 어떤 감사의 예물을 가지고 왔는지를 볼 수 있었습니다. 아벨의 예물을 가지고 오신 분들은 주님으로부터 큰 축복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개중에는 가인의 예물을 가지고 온 분도 계실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느끼시는 분들이 계신다면 올 한 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시고 철저히 회개해야만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분들에게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죄의 유혹을 다스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마음속에 사랑을 다시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때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십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을 꼭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이 귀에 들려 심장이 뛰는 모든 성도에게 주님의 그러한 풍성한 은혜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3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공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바칠 것이라 4그 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의 봉헌물이 옛날과 고대와 같이 나 여호와께 기쁨이 되려니와 (말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