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과 ‘아벨’의 속뜻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1-8)

 

 

인애(charity)가 없는 신앙(faith)의 행위는 신앙의 행위가 아니며 자체로 죽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들은 외적인 사람들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천국의 비밀 348, 이순철 역) for the works of faith devoid of charity are works of no faith, being in themselves dead, for they are solely of the external man. (AC.348)

 

※ 윗글은 오늘 본문 중 3절,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에 나오는 ‘땅의 소산’에 대한 주석 일부 인용입니다.

 

※ 오늘 설교는 원래 추수감사절 설교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추수감사절을 맞아 가인과 아벨처럼 각자 예물을 가지고 주님께 나왔습니다.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신 주님께서 우리의 예물은 어떻게 보실지 생각하면 참으로 두렵습니다. 주님은 왜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물만 받으셨을까요? 그리고 급기야 가인은 왜 아벨을 죽이기까지 했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그 이유, 즉 그 속뜻을 하나씩 알아보겠습니다. 본문 1절입니다.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보통 아담과 하와라고 하면 주님께서 창조하신 인류 최초의 인간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실제로 창세기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고, 다들 그렇게 믿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말씀의 그런 겉뜻과는 달리 아담과 하와의 속뜻은 전혀 다릅니다. 영적인 의미, 곧 속뜻으로 ‘아담’과 ‘하와’는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즉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를 의미합니다. 주님은 인간을 만들어 처음 세상에 내시던 그때부터 그들 가운데 교회를 세워주셨습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이유는, 주님은 교회를 통해 인간과 만나시고, 교회를 통해 인간을 가르치시며, 그렇게 해서 인간을 영원히 사는 존재로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가 첫아들을 낳았다는 것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신앙이 생긴 걸 말합니다.

 

※ 교회로 말미암는 자녀는 신앙과 체어리티(charity, 이웃 사랑), 둘밖에 없는데요, 그래서 신앙을 첫아들, 곧 ‘가인’(Cain)으로, 체어리티를 그 아우, 곧 ‘아벨’(Abel)이라 한 것입니다.

 

사람이 교회에 처음 나오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먼저 진리를 배웁니다. 그리고 그 진리가 옳다고 여겨질 때, 비로소 진리로 말미암은 신앙, 곧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생깁니다. 바로 그 신앙이 하와가 낳은 첫째 아들 가인입니다. 그런데 처음 신앙이 생겼을 때는, 말로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지만 그분의 말씀대로 살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말씀대로 살려고 할 때, 내면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욕심, 이를테면 나를 높이고자 하는 욕심이나 세상에 대한 욕심 같은 것, 즉 자아 사랑, 세상 사랑과 충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 충돌을 극복,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는 어떤 선한 에너지가 필요한데요, 그 에너지는 바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입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이고, 이웃에 대한 사랑이며, 진리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는 내면에 있는 좋지 않은 욕망들을 극복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 신앙이 생겼을 때는 아직 그런 사랑이 없습니다. 그래서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은 사랑 없는 신앙, 사랑과 분리된 신앙입니다. 신앙의 교리라고 해도 됩니다. 아직은 신앙 따로, 사랑 따로의 상태인 것이지요.

 

※ 모든 것이 완전, 온전했던 태고교회도 점차 변질, 기울어져 그 끝은 노아의 홍수라는 비극으로 끝나게 되지요. 그때까지 태고교회는 대략 여덟 번 정도의 상태변화를 겪게 되는데, 오늘 본문은 세 번째 상태변화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는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2:18) 부분부터입니다. 이 부분부터 아담, 즉 태고교회는 자신의 자아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건데요, 그러니까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주님한테서 시선을 돌려 두리번거리기 시작하는 거, 이것이 바로 상태가 변하는 것입니다.

 

※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이 주시는 퍼셉션(perception, 주님으로부터 내 영으로 들려오는 일종의 내적 음성)으로 모든 것, 곧 주님에 관한 모든 것, 천국에 관한 모든 걸 100% 무슨 별도 학습 없이 그냥 알았습니다. 무엇에 대하여 궁금해하면 하늘로부터 바로 답이, 그것도 주님으로 말미암는 100% 온전한 답이 자신의 열린 영으로 들려오니 굳이 따로 교리화하여 학습할 필요가 없었지요. 마치 천적 천국 천사들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소위 두리번거리기 시작하면서 이 퍼셉션의 해상도(?), 수신 감도가 흐릿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가인’이라는 신앙의 사람들이 일어난 것인데요, 주님한테서 시선을 돌리니 영이 흐려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전까지는 사람들은 ‘신앙’이라는 게 뭔지도 몰랐습니다. 그런 거 몰라도 얼마든지 행복하며, 주님이 일일이 다 알려주시니 부족한 거 없이 늘 ‘내 잔이 넘치나이다’였기 때문입니다. 마치 갓난아이들이, 어린 영유아들이 무슨 신앙이 있어 엄마, 아빠를 사랑하고 따르는 게 아니듯 말입니다. 주님 아닌 다른 데로 시선을 돌리는 바람에 자신들의 퍼셉션 감도가 흐릿해졌으면서도 그걸 커버하느라 이런 쪽, 그러니까 전에는 저절로 알던 것들을 이제는 하나하나 글로 정리, 교리화하여 그때그때 주님 찾을 필요 없이 꺼내볼 수 있는 쪽으로 잔머리를 굴린 겁니다. 오히려 회개하고 돌이켜 다시 주님만 바라봄으로써 선조들처럼 회복할 생각은 안 하고 말입니다...

 

그러다가 아담과 하와를 통해 두 번째 아들이 태어납니다. 2절입니다.

 

2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아담 부부에게 두 번째 태어난 아들의 이름은 아벨입니다. 아벨은 사랑, 그러니까 체어리티를 뜻합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함이 바로 체어리티인데요, 이 체어리티를 아벨이라 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 부부에게 아벨이 태어난 것은, 할 수 없이 생긴 신앙으로 신앙 생활하던 태고교회 사람들이 이제는 이 신앙으로 다시 사랑을 회복할 수 있게 된 걸 의미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같이, 신앙만 있을 때는 진리를 인정하기는 하지만 진리에 따라 살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이제 사랑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진리에 따라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말이 아닌 행동, 즉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교회에 신앙과 사랑이 있다고 해서 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에게 신앙과 사랑의 분량이 똑같은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신앙보다 사랑이 더 많고, 어떤 사람에게는 사랑보다 신앙이 더 많습니다. 전자의 사람을 우리는 ‘사랑으로 사는 사람’이라고 하고, 후자의 사람에 대해서는 ‘신앙으로 사는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 다음은 ‘천국과 지옥’ 21번 글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성(神性, the Divine)을 더 내적으로(內的, more interiorly) 받는 천사들이 있고, 덜 내적으로 받는 천사들이 있다. 더 내적으로 받는 천사들은 천적 천사들(天的, celestial angels)이라 하고, 덜 내적으로 받는 천사들을 영적 천사들이라 한다. 이에 따라 천국이 두 나라로 구분되는 것이다. 하나는 천적 나라(the celestial kingdom), 다른 하나는 영적 나라라 한다.

 

그래서 우리도 자신의 성향, 곧 머리가 먼저 반응하는지, 아니면 가슴이 먼저 반응하는지를 잘 살피면 나중에 나는 어떤 천국으로 가게 될지를 미리 가늠할 수 있습니다. //

 

그런 의미에서 양치는 자 ‘아벨’은 사랑, 즉 체어리티로 사는 사람이었고, 농사짓는 자 ‘가인’은 신앙으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태고교회 안에 두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는데요, 그것은 지금 우리 교회도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새 교회 안에도 사랑으로 사는 분들이 계시고, 신앙으로 사는 분들이 계십니다. 사랑으로 산다고 해서 신앙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고요, 신앙보다 사랑이 주도권을 잡고 있다, 뚜렷하다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으로 산다고 해서 사랑이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사랑보다는 신앙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 뚜렷하다, 두드러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두 부류의 사람, 즉 가인과 아벨이 주님 앞에 제사를 드렸습니다. 3절입니다.

 

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세월이 지난 후에‘는 가인과 아벨로 표상되는 사람들의 영적 상태가 변했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변했을까요? ‘가인’, 즉 신앙으로 사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더 나빠졌고, ‘아벨’로 표상되는, 체어리티로 사는 사람들은 전보다 훨씬 더 좋아졌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거듭난다는 것은 결국 ‘신앙의 상태’에서 ‘사랑의 상태’로 바뀌는 것인데, 만약 그러지 않고 ‘신앙의 상태’에 계속 머물러만 있게 되면, 가지고 있던 사랑을 점점 잃어버리게 되어 영적으로 타락하기 때문입니다. 그에 비해 ‘사랑의 상태’로 나아간 사람은 신앙이 더 깊어져서 영적으로 점점 성숙해지는데요, 왜냐하면 올바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진리를 더 많이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상태에 있는 사람은 그 사랑의 수준에 맞는 진리, 즉 신앙이 주어집니다. 왜냐하면 올바르게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진리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 체어리티로 사는 아벨은 영적으로 성장했고, 신앙으로 사는 가인은 영적으로 쇠퇴했습니다. 그 결과가 그들이 주님께 드리는 제사로 나타났는데,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사를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땅의 소산으로 드리는 제물’은 사랑 없이 신앙만으로 사는 삶을 말합니다. 그것이 가인이 드린 제물입니다. 반면 ‘양의 새끼로 드린 제물’은 이웃사랑, 체어리티의 삶을 뜻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아니, 받지 않으셨다기보다 받으실 수가 없었다가 맞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가인은 진리를 믿는다 고백은 하면서도 정작 진리에 따라 그렇게 살지는 않은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위선자의 삶이지요. 그러니 가인의 제사를 받으실 리가, 받으실 수가 있겠습니까? 주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 곧 주님을 예배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먼저 인애, 체어리티의 삶으로 제사를 드려야 하고, 그다음에 헌금과 떡을 드려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소에는 아무렇게나 살다가, 그러니까 자기 사랑, 세상 사랑으로 살다가 예배를 드릴 때만 경건한 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래 말씀들처럼 말입니다.

 

23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5:23-24)

 

11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사1:11-12)

 

가인은 여호와께서 자기 제물을 안 받으시자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했습니다.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는 것’은 그의 마음속에 조금 있는 사랑마저 식어버렸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분한 마음을 가질 수 있으며, 안색을 붉힐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자기 제사를 받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았을 때, 가인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반성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주님께 반발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내면에서 주님에 대한 사랑도, 이웃에 대한 사랑도 사라졌습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이것은 여호와께서 가인의 양심을 통해 그의 사랑이 식었음을 알려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또는 도덕적으로 잘못되고 있을 때, 양심이 아직 살아있는 사람은 그걸 바로 느낍니다. 그러니까 그런 느낌은 주님으로부터 양심을 통해 오는 경고의 메시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가인 역시 자기 안에 사랑이 식어가고 있는 걸 느꼈을 겁니다. 그럼에도 가인은 원망의 마음이 커서 양심의 경고를 무시해 버렸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더욱더 회복될 수 없는 상태로 빠져 들었습니다. 그렇게 회복될 수 없는 상태로 빠져드는 것을 8절에서는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그러므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은 사랑 없이 신앙만의 삶을 사는 사람들, 즉 입으로는 사랑을 외치면서도 정작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교회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 결국 사랑, 즉 체어리티를 모두 잃어버리는 걸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오직 ‘신앙’, ‘신앙’, ‘교리’, ‘교리’하며 마음이 돌덩어리같이 딱딱해지는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아벨을 죽이는 것입니다.

 

모두가 아시는 것처럼 인류가 창조된 이래로 그동안 여러 시대의 교회, 곧 태고교회, 고대교회, 유대교회가 있었고, 지금은 기독교회입니다. 모든 교회는 처음에는 신앙과 사랑, 진리와 선을 함께 가지고 있었습니다. 태고교회도 그랬고, 고대교회, 유대교회 및 오늘날 기독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초대 기독교회는 신앙과 사랑이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앞에 세 교회 시대처럼 이 기독교회도 교인들이 점점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신앙은 높이고, 삶은 등한시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신앙과 삶이 함께 있어야 하는데 신앙과 삶을 분리하게 된 것이지요. 그러더니 급기야는 신앙만으로 구원받는다는 잘못된 교리, 곧 ‘오직 믿음’의 교리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 물론 이는 마틴 루터 당시 극도로 부패한 카톨릭 교회에 반발, 저들의 엉터리 같은 ‘행위’를 극단적으로 고발하고자 애쓴 결과이지만 말입니다. 그 결과 엉뚱하게도 이번엔 완전 반대쪽 극단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가 사랑을 죽이는 일이고,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행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에는 인류 최초의 교회인 태고교회, 아담교회라고도 하는데요, 이 교회의 순수한 모습을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고 다니는 모습으로 표현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그렇게 처음에는 순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순수한 지각을 통해서 주님과 직접 대화할 수 있었지요. 그들이 주님으로부터 직접 받는 진리는 선이 있는 진리였고, 주님으로부터 직접 받는 신앙은 사랑이 있는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사랑과 신앙, 또는 진리와 선이 분리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태고교회 사람들도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빠지기 시작하더니 신앙과 사랑을 분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즉 신앙 따로, 사랑 따로의 삶을 살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것이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떠나는 모습입니다. 신앙과 사랑을 분리하고, 진리와 선을 분리하는 사람은 한마디로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천국은 그런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태고교회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들에게 먼저 신앙, 그러니까 진리를 주시고, 각자의 신앙에 따라 그다음에 사랑, 그러니까 선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사람에게 있는 진리의 상태에 따라 그에게 인애의 선을 만들어주신다. (계시록의 속뜻 935, 이순철 역) the Lord produces the goods of charity with a man according to the state of truth with him. (AR.935)

 

그것을 본문에서는 ‘하와가 먼저 가인을 낳고 그다음에 아벨을 낳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교회가 되었든 개인이 되었든 ‘신앙의 단계에 있는 사람은 사랑의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영적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단계에서 사랑의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 이런 신앙을 ‘앉은뱅이 신앙’이라고도 합니다.

 

또는 사랑의 단계로 나아갔다가 후퇴해서 다시 신앙의 단계로 내려오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잘못하면 내면에 있는 사랑을 모두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주 조심하여야 합니다.

 

신앙의 단계에 계속 머물러 있는 분들이 계십니다. 진리를 실천하려고 하는데 잘 안 됩니다. 우리 모두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습관이 있으면 하나씩 고쳐나가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계속 주저앉아 있으면 가지고 있던 사랑을 모두 잃어버리게 됩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도, 이웃에 대한 사랑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각자가 어떤 감사의 예물을 가지고 왔는지를 볼 수 있었습니다. 아벨의 예물을 가지고 오신 분들은 주님으로부터 큰 축복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개중에는 가인의 예물을 가지고 온 분도 계실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느끼시는 분들이 계신다면 올 한 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시고 철저히 회개해야만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분들에게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죄의 유혹을 다스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마음속에 사랑을 다시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때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십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을 꼭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이 귀에 들려 심장이 뛰는 모든 성도에게 주님의 그러한 풍성한 은혜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3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공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바칠 것이라 4그 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의 봉헌물이 옛날과 고대와 같이 나 여호와께 기쁨이 되려니와 (말3:2-4)

 

아멘

 

2019-11-17(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5-03-02(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3-02(D1)-주일예배(2587, 창4,1-8), ‘가인’과 ‘아벨’의 속뜻.pdf
0.46MB
성찬.pdf
0.14MB
축도.2025-03-02(D1)-주일예배(2587, 창4,1-8), ‘가인’과 ‘아벨’의 속뜻.pdf
0.22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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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영들의 존재를 부인하며, 설령 부인까지는 아니더라도 누가 영들에 관해 말하는 걸 아주 듣기 거북해들 한다.

 

448

저는 세상에서 저를 알고 지냈던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해오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오랫동안, 몇 달 혹은 몇 년 동안씩 해오고 있습니다.) 그것도 비록 내적이지만 아주 맑은 목소리로, 마치 이 세상 친구들하고 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 대화의 주제는 때때로 사람의 사후 상태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들은 사람들이, 몸 안에 사는 동안 아무도 자기가 몸 안에 사는 삶을 마친 후에도 여전히 삶은 계속되며, 사람은 현재의 모호한 삶을 지나 명료한 삶으로 계속해서 나아간다는 사실, 그리고 주님 신앙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더욱 더 명료한 삶 속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을 안 믿는다는 말에 소스라치게 놀라곤 하였습니다. 그들은 제가 아직 살아있는 자기 친구들에게 글이나 말로, 자기들이 지금 어떤 상태 가운데 있는지, 마치 제가 여기 있는 자기 친구들에 관해 자기들한테 많은 걸 알려주는 거처럼 그렇게 알려주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답하기를, 만일 제가 그들의 친구들에게 그렇게 하면, 혹은 그들에게 편지를 쓰거나 하면, 그들은 안 믿을뿐더러, 오히려 그들은 망상이라며 비웃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믿을 수 있도록 무슨 싸인이나 기적을 구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저 그들의 조롱거리가 될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얘기가 사실이다, 혹시 믿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진실로, 사람들은 영들의 존재를 부인하며, 설령 부인까지는 아니더라도 누가 영들에 관해 말하는 걸 아주 듣기 거북해들 합니다. 고대에는 영들에 관한 그런 상태의 믿음은 거의 없었습니다. 지금은 정신 나간 추론을 가지고 사람들은 영들이 무엇인지 발견하려고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자신들의 정의와 가설들을 가지고 영들로부터 모든 감각을 박탈하며, 더 많이, 더 많이 배운 자들일수록 이런 짓을 저리르고 있습니다. I have conversed with many who had been known to me in this life (and this I have done for a long time—for months and years), in as clear a voice, although an inward one, as with friends in this world. The subject of our conversation has sometimes been the state of man after death, and they have wondered exceedingly that during the bodily life no one knows or believes that he is so to live when the bodily life is over, when yet there is then a continuation of life, and such a continuation that the man passes from an obscure life into a clear one, and those who are in faith in the Lord into a life that is more and more clear. They have desired me to tell their friends that they are alive, and to write and tell them what their condition is, even as I had related to themselves many things about that of their friends here. But I replied that were I to tell their friends such things, or to write to them about them, they would not believe, but would call them delusions, would scoff at them, and would ask for signs or miracles before they would believe; and I should merely expose myself to their derision. And that these things are true, perchance but few will believe. For at heart men deny the existence of spirits, and even those who do not deny it are unwilling to hear that anyone can speak with spirits. In ancient times there was no such state of belief in regard to spirits, but so it is now when by crazy ratiocination men try to find out what spirits are, and by their definitions and suppositions deprive them of all the senses, and do this the more, the more learned they desire to 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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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을 지각하는 것은 몸이 아닌, 사람 안에 있는 영이다.

 

447

어떤 수사 수련 기간 중인 영이 저에게 영에 관한 얘기를 듣고는 “영이라는 게 뭡니까?” 물었습니다. 마치 자기는 사람인 줄 착각하면서 말이지요. 그리고 저는 그에게 모든 사람에게는 영이 있다는 것과, 생명 관련, 사람은 영이라는 사실, 즉, 몸은 그저 사람이 지상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일 뿐이며, 살과 뼈, 곧, 몸이 사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 전혀 아님을 말하면서, 그리고 이런 말을 들은 그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하는 걸 보면서, 그에게 혹시 전에 혼에 대해 들은 적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혼은 뭡니까?” 그는 대답하면서, “저는 혼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하였습니다. 그때 저는 허락을 받아 그에게 그 자신 지금 혼 또는 영이라고, 그가 지금 내 머리 위에 있으며, 땅 위에 있지 않은 걸 보면 알 수 있지 않느냐고 하였습니다. 제가 그에게 이 사실을 알겠느냐 묻자 그는 몸서리치며 도망가면서 “나는 영이다! 나는 영이다!” 소리소리 질렀습니다. A certain novitiate spirit, on hearing me speak about the spirit, asked, “What is a spirit?” supposing himself to be a man. And when I told him that there is a spirit in every man, and that in respect to his life a man is a spirit; that the body is merely to enable a man to live on the earth, and that the flesh and bones, that is, the body, does not live or think at all; seeing that he was at a loss, I asked him whether he had ever heard of the soul. “What is a soul?” he replied, “I do not know what a soul is.” I was then permitted to tell him that he himself was now a soul, or spirit, as he might know from the fact that he was over my head, and was not standing on the earth. I asked him whether he could not perceive this, and he then fled away in terror, crying out, “I am a spirit! I am a spirit!

 

어떤 유대인이 자기는 완전히 몸 안에 살고 있다 생각하는 영이었는데, 그는 사실은 그 정반대임을 도무지 설득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가 영임을 보았으면서도, 그는 여전히 자기는 사람이라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자기는 보기도 하고, 듣기도 한다고 말이지요. 이런 사람들은 세상 살 때, 몸에 헌신한 사람들입니다. A certain Jew supposed himself to be living wholly in the body, insomuch that he could scarcely be persuaded to the contrary. And when he was shown that he was a spirit, he still persisted in saying that he was a man, because he could see and hear. Such are they who, during their abode in this world, have been devoted to the body.

 

이런 사례들은 끝도 없이 더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만 이런 말씀 드리는 이유는, 감각을 지각하는 것은 몸이 아닌, 사람 안 영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To these examples very many more might be added, but these have been given merely in order to confirm the fact, that it is the spirit in man, and not the body, which exercises sens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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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0년대 유럽 사람들 사이에 만연한 일반적인 생각들

 

446

저는 오늘날(18세기 중엽 유럽) 사람들 사이에 만연한 일반적인 생각들에 관하여 영들과 담론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영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그들이 영이라는 것을 두 눈으로 볼 수도, 그들이 가진 머릿속 지식으로 이해할 수도 없기 때문이며, 그래서 그들은 영이 확장, 곧 무슨 외연을 가진다는 것을 부인할 뿐 아니라, 영이 일종의 실체라는 것도 부인한다는 것입니다. 실체가 무엇이냐를 가지고도 다투면서 말이지요. 영이 외연을 가진다는 것을 부인하며, 또 영의 실체에 관해 다투기 때문에, 그들은 또한 영은 어떤 곳, 곧 사람 몸 안에 있다는 사실을 부인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단순한 사람들은 여전히 자기의 혼 또는 영이 자기 몸 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제가 이런 얘기들을 하자 훨씬 더 단순한 사람들이었던 그 영들은 현대인들이 그토록 어리석다는 사실에 무척 놀랐습니다. 그리고 ‘부분들 없는 부분들’ 같은, 그리고 다른 말들을 가지고 다투고들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은 그런 걸 우스꽝스럽다, 터무니없다, 웃음거리다고 하며, 그런 걸로 마음을 채우면 안 된다고, 안 그러면 지혜의 길이 닫힌다고 하였습니다. I have discoursed with spirits concerning the common opinion that prevails among men at the present day, that the existence of the spirit is not to be credited because they do not see it with their eyes, nor comprehend it by their memory-knowledges [scientias], and so they not only deny that the spirit has extension, but also that it is a substance, disputing as to what substance is. And as they deny that it has extension, and also dispute about substance, they also deny that the spirit is in any place, and consequently that it is in the human body; and yet the most simple might know that his soul or spirit is within his body. When I said these things, the spirits, who were some of the more simple ones, marveled that the men of the present day are so foolish. And when they heard the words that are disputed about, such as “parts without parts,” and other such terms, they called them absurd, ridiculous, and farcical, which should not occupy the mind at all, because they close the way to intellig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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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운 사람들한테는 사후 살게 될 혼, 즉 영은 추상적인 생각이다라는 거 말고는 아무런 믿음도 없다

 

445

더욱 주목하게 된 것은, 배운 사람들한테는 ‘사후 살게 될 혼, 즉 영은 추상적인 생각이다’라는 거 말고는 아무런 믿음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외연과 외연에 속한 것이면 무엇이든 어떤 말도 인정하기를 꺼리는 그들의 태도를 보면 아주 지배적입니다. 어떤 주제를 가지고 추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외연을 갖지 않지만, 생각의 주제, 그리고 생각의 대상들은 외연을 갖기 때문입니다. 외연을 갖지 않는 그런 대상들에 관하여는 사람들은 범위를 정하고, 외연을 허용합니다. 그것들을 이해하려고 말이지요. 이것으로 아주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배운 사람들은 혼 또는 영의 개념과 관련, 그건 그저 생각에 지나지 않으며, 사후엔 사라지는 것으로밖에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It was further remarked, that the learned have no other belief than that the soul which is to live after death, that is, the spirit, is abstract thought. This is very manifest from their unwillingness to admit of any term that implies extension and what belongs to extension, because thought abstractedly from a subject is not extended, whereas the subject of the thought, and the objects of the thought, are extended; and as for those objects which are not extended, men define them by boundaries and give extension to them, in order that they may comprehend them. This shows very clearly that the learned have no other conception of the soul or spirit than that it is mere thought, and so cannot but believe that it will vanish when they d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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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에 믿기를, 영은 무슨 외연(外延, extension) 같은 걸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믿었던, 그리고 이 때문에 일절 무슨 외연 개념을 포함한 말 한마디도 용납하지 않았던 사람과 대화

 

444

생전에 믿기를, 영은 무슨 외연(外延, extension) 같은 걸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믿었던, 그리고 이 때문에 일절 무슨 외연 개념을 포함한 말 한마디도 용납하지 않았던 사람과 대화하면서, 저는 그에게 지금은 자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습니다. 그가 지금은 혼 또는 영이 되었고, 시각, 청각, 후각, 매우 정교해진 촉각, 욕망, 사고 등, 그가 자신을 마치 몸 안에 있는 거와 완전 똑같이 여길 정도로 모든 감각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세상에 있을 때 했던 생각 가운데 여전히 머물러 있었는데, 말하기를 영은 생각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의 답변을 구하면서 묻기를, 혹시 세상 살 때, 눈 같은 보는 기관(organ)이 없으면 무슨 육체적 시력 같은 것도 있을 수 없음을 알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러면, 내적 시야(internal sight), 곧 생각은 어떻게 있을 수 있는지,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 위해 어떤 기관을 이루는 실체를 가져서는 안 되는지를 말입니다. 그러자 그가 인정하기를, 몸 안에 있는 동안, 자기는 영은 그저 생각일 뿐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기관이나 외연을 갖는 모든 것을 외면하느라 헛고생만 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덧붙이기를, 만일 혼이나 영이 단지 생각일 뿐이라면, 사람의 머리가 그렇게 클 필요는 없었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머리 전체가 내면의 모든 감각을 총괄하는 걸 보면 말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두개골은 텅 비었을 것이고, 그럴지라도 생각은 여전히 영처럼 그 안에서 활동하고 있을 테니 말입니다. 이 한 가지만 살펴보더라도, 게다가 혼이 근육 안에서 매우 엄청나게 다양한 움직임을 일으키는 걸 보더라도, 당신은 영이 유기적이라는, 즉 일종의 유기적 실체임을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오류를 고백했고, 자신이 그토록 어리석었었다는 사실에 어이없어했습니다. Conversing with one who while he lived in this world had believed that the spirit has no extension, and on that ground would admit of no word that implied extension, I asked him what he now thought of himself, seeing that now he was a soul or spirit, and possessed sight, hearing, smell, an exquisite sense of touch, desires, thoughts, insomuch that he supposed himself to be exactly as if in the body. He was kept in the idea which he had when he had so thought in the world, and he said that the spirit is thought. I was permitted to ask him in reply, whether, having lived in the world, he was not aware that there can be no bodily sight without an organ of vision or eye? And how then can there be internal sight, or thought? Must it not have some organic substance from which to think? He then acknowledged that while in the bodily life he had labored under the delusion that the spirit is mere thought, devoid of everything organic or extended. I added that if the soul or spirit were mere thought man would not need so large a brain, seeing that the whole brain is the organ of the interior senses; for if it were not so the skull might be hollow, and the thought still act in it as the spirit. From this consideration alone, as well as from the operation of the soul into the muscles, giving rise to so great a variety of movements, I said that he might be assured that the spirit is organic, that is, an organic substance. Whereupon he confessed his error, and wondered that he had been so fool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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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이나 영에 대해 가졌던 생각에 관하여 그들을 만나보고 쓴 몇 가지 사례들

 

443

다른 삶(the other life)에서는 사람들이 혼(soul), 영(spirit) 및 사후 삶(life after death)에 관해 몸 안에서 살 동안 품었던 견해들을 더욱 명료하게 지각하게 되는데요, 그 이유는 몸 안에 있었을 때와 비슷한 상태에 놓이게 되면, 그들은 그때와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는데, 그때 그들의 생각이 마치 큰 소리로 말하는 것처럼 명료하게 서로 소통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 이야기입니다. 그는 죽은 지 얼마 안 된 사람이었는데, 제가 그에게서 지각한 건 다음과 같습니다. (그가 혼자 중얼거린 겁니다) 그는 생전에 영의 존재를 정말로 믿었던 사람이지만, 속으로는 나는 사후 무슨 안개 같은 생명으로 살게 될 거야. 왜냐하면, 몸의 생명이 그치면 남는 것은 안개같이 희미한 것밖에 없을 테니까...라고 생각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생명이라는 것을 몸 안에 있는 것으로만 보았고, 영은 일종의 유령처럼 생각했었기 때문인데, 그는 사람들이 가진 생명과 거의 같은 생명을 짐승들도 갖고 있는 걸 보고, 이런 생각을 스스로 확신했던 겁니다. 그랬던 그가 이제는 경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영들과 천사들이 가장 밝은 빛 가운데 살며, 또 너무나 완벽하여 도저히 말로 설명하기가 정말 쉽지 않은 그런 퍼셉션(perception)을 가지고, 가장 놀라운 지성과 지혜, 그리고 행복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었으며, 그 결과 그들의 삶은 모호함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가장 완벽한 명료함과 확실함 가운데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In the other life it is given to perceive clearly what opinions people had entertained while they lived in the body concerning the soul, the spirit, and the life after death; for when kept in a state resembling that of the body they think in the same way, and their thought is communicated as plainly as if they spoke aloud. In the case of one person, not long after his decease, I perceived (what he himself confessed) that he had indeed believed in the existence of the spirit, but had imagined that it must live after death an obscure kind of life, because if the life of the body were withdrawn there would remain nothing but what is dim and obscure; for he had regarded life as being in the body, and therefore he had thought of the spirit as being a phantom; and he had confirmed himself in this idea from seeing that brutes also have life, almost as men have it. He now marveled that spirits and angels live in the greatest light, and in the greatest intelligence, wisdom, and happiness, attended with a perception so perfect that it can scarcely be described; consequently that their life, so far from being obscure, is most perfectly clear and distin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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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 시대에 교회에서 분리되어 나간 많은 교리와 이단이 있었으며, 그 하나하나는 다 이름이 있었고, 그 교리와 이단의 결과물들은 오늘날 교회의 것보다 훨씬 더 심오했다

 

26절,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And to Seth, to him also there was born a son; and he called his name Enosh: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ehovah.

 

442

위에 설명한 대로 본 장의 내용으로부터 분명한 사실은, 태고 시대에 교회에서 분리되어 나간 많은 교리와 이단이 있었으며, 그 하나하나는 다 이름이 있었고, 그 교리와 이단의 결과물들은 오늘날 교회의 것보다 훨씬 더 심오했다는 사실입니다. 그 시대 사람들의 천재성이 그랬기 때문입니다. From the contents of this chapter as above explained, it is evident that in the most ancient time there were many doctrines and heresies separate from the church, each one of which had its name, which separate doctrines and heresies were the outcome of much more profound thought than any at the present day, because such was the genius of the men of that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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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는 이미 태고교회 때부터, 그리고 아벨의 때에도

 

26절,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And to Seth, to him also there was born a son; and he called his name Enosh: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ehovah.

 

441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이때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다음 두 가지 사실을 보면 아주 분명한데요, 첫 번째는, 태고교회에 관하여 위에서 지금까지 말씀드려온 내용입니다. 태고교회는 다른 어느 교회보다도 가장 주님을 경배하고 예배한 교회로서 이미 이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주님을 예배했습니다. 두 번째는, 양 떼의 첫 새끼를 희생제물로 드린 아벨의 경우입니다. 이런 이유로 이 본문,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는 새 교회의 예배를 상징하는 것 말고는 다른 의미는 없습니다. 아다와 씰라 이전의 교회들은 ‘가인’과 ‘라멕’이라는 사람들, 교회들에 의해 소멸되었기 때문입니다. That the invocation of the name of Jehovah did not commence at this time is sufficiently evident from what has already been said above in regard to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more than any other adored and worshiped the Lord; and also from the fact that Abel brought an offering of the firstlings of the flock; so that in this passage by “calling upon the name of Jehovah” nothing else is signified than the worship of the new church, after the former church had been extinguished by those who are called “Cain” and “Lame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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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의 속뜻, 그 교회는 체어리티로 예배드리는 교회

 

26절,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And to Seth, to him also there was born a son; and he called his name Enosh: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ehov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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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인용된 본문,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의 의미가 그 교회는 체어리티로 예배드리는 교회라는 의미임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 곧 선행구절에서는 ‘하나님(God)이었는데 여기서는 ‘여호와(Jehovah)라는 점과, 뿐만 아니라 주님은 체어리티의 예배가 아니면 받으실 수가 없으신데, 그 이유는 참된 예배는 체어리티에 속하지 않은 신앙에서는 나올 수가 없기 때문이며, 그것은 단지 입술이지 마음의 예배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사실 등으로 보아 분명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주님을 향한 모든 예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언어 형태라는 사실은 말씀에도 나오는데요, 다음은 아브라함에 관한 본문들입니다.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13:4) 그리고,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21:33) 이 표현에 모든 예배가 포함되어 있음은 이사야를 통해서도 명료합니다. That by the words just quoted is signified the worship of that church from charity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o “call upon the name of Jehovah” is a customary and general form of speech for all worship of the Lord; and that this worship was from charity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Jehovah” is here mentioned, whereas in the preceding verse he was called “God,” as well as from the fact that the Lord cannot be worshiped except from charity, since true worship cannot proceed from faith that is not of charity, because it is merely of the lips, and not of the heart. That to “call on the name of Jehovah” is a customary form of speech for all worship of the Lord, appears from the Word; thus it is said of Abraham, that “he built an altar to Jehovah, and called on the name of Jehovah” (Gen. 12:8; 13:4) and again, that he “planted a grove in Beersheba, and called there on the name of Jehovah, the God of eternity” (Gen. 21:33). That this expression includes all worship, is plain from Isaiah:

 

22그러나 야곱아 너는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고 이스라엘아 너는 나를 괴롭게 여겼으며 23네 번제의 양을 내게로 가져오지 아니하였고 네 제물로 나를 공경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나는 제물로 말미암아 너를 수고롭게 하지 아니하였고 유향으로 말미암아 너를 괴롭게 하지 아니하였거늘 (사43:22-23) Jehovah the holy one of Israel hath said, thou hast not called upon me, O Jacob, but thou hast been weary of me, O Israel. Thou hast not brought to me the small cattle of thy burnt offerings, neither hast thou honored me with thy sacrifices. I have not caused thee to serve with an offering, nor wearied thee with incense, (Isa. 43:22–23)

 

이 본문에 모든 표상적 예배(表象, representative worship)의 요약이 들어있습니다. in which text a summary is given of all representative worship.

 

창12:8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창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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