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15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생각하니 16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17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18또 그밖에 여러 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 19분봉왕 헤롯은 그의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자기가 행한 모든 악한 일로 말미암아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20그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 (눅3:15-20)

 

 

사람은 마지막의 것들 안에 있을 때 천국과 결합한다. 즉 자연적 사람은 세상의 것들 안에 있고, 영적 사람은 천국의 것들 안에 있을 때 천국과의 결합이 일어난다. 말씀이 세상의 것들을 통해 기록되고 그 속에 천국의 것들인 영적 의미가 들어 있는 것, 즉 말씀의 글자의 뜻은 자연적이지만 그 속에 영적 의미가 들어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AE.475:21, 이순철 역)

 

※ AE(Apocalypse Explained, 계시록 해설) 475:21번 글에 대한 Ager 영역본은 아래와 같습니다.

 

for heaven is conjoined to man when man is in ultimates, that is, in such things as are in the world in regard to his natural man, while he is in such things as are in heaven in regard to his spiritual man; in no other way is conjunction possible. This is why baptism was instituted; also the holy supper; likewise why the Word was written by means of such things as are in the world, while there is in it a spiritual sense, containing such things as are in heaven, that is, that the sense of the letter of the Word is natural, while in it there is a spiritual sense. (AE.475:21, Ager 역)

 

이는 계시록 7장 14절,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에 관한 주석 중 ‘그 옷을 씻어’에 대한 내용 일부입니다. //

 

 

네, 그럼 시작합니다.

 

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할 때, 많은 사람이 요한에게 와서 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무리가 요한에게 ‘우리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묻자, 요한은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누어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하라’ 했습니다. 요한이 말하는 ‘’과 ‘먹을 것’은 겉뜻으로는 우리가 입는 옷과 먹는 음식이지만, 속뜻으로는 영적인 옷과 음식, 즉 진리와 선을 뜻합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것을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라고 합니다. 왜 그렇게 말할까요? 여분의 옷과 음식은 주님의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아에서 나오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것에 인간의 생각이나 의도 같은 것들이 섞이면 그 순수함을 잃어버립니다. 그러니까 진리는 더 이상 진리 아닌 것이 되고, 선은 선 아닌 것이 되지요. 그래서 주님은 여분의 옷과 음식을 가지지 말라 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잘 아는 분들 중에는 진리를 대할 때, 자기만의 틀을 가지고 있는 분이 계십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건강해 보이지 않습니다. 자기만의 어떤 틀이 있다는 것은 얼핏 바람직한 것 같지만 사실은 자아의 작용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떤 정보를 이해할 때, 자기만의 틀을 갖지 않을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고정관념처럼 굳어져 버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대단히 유연한 것입니다. 마치 물이 어떤 모양의 그릇에도 담기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를 받아들이는 틀 역시 유연해야 합니다. 그 유연성은 어디서 옵니까? 자아로부터가 아닌,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다시 말하면, 자아를 내려놓을 때, 진리를 받아들이는 그 틀조차도 주님이 허락하시는데요, 그렇게 자기가 만든 틀이 아닌, 주님이 주시는 틀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언제나 주님이 열어주시는 그대로의 진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가끔 설교를 준비하면서 말씀이 이해 안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조바심이 납니다. 이것을 알아야 말씀의 실마리가 풀리는데, 왜 주님께서 깨달음을 주시지 않는가? 하고 조바심이 생깁니다. 그런데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그것이 결국 저를 위한 섭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깨달음도 때가 있습니다. 그때가 언제인지는 주님만이 아십니다. 그래서 깨닫지 못하는 부분이 있어도 주님께서 깨달음을 주실 때까지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런 모든 것들이 여분의 음식과 옷을 갖지 않는 것과 통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 15절에서는 요한을 바라보는 백성들의 심경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15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생각하니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라는 말은 그들이 요한에 거는 기대를 나타냅니다. 그들이 어떤 기대를 했을까요? 요한이 혹시 메시아가 아닌가 하는 기대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라는 말은 메시아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메시아 사상은 어떤 것입니까?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인류를 구원하신다는 믿음입니다. 사실 메시아 사상은 고대교회 이전부터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유대교회만의 믿음이 아니고 지구상의 광범위한 지역에 퍼져있었던 믿음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의 전통 종교 속에 등장하는 미륵 신앙 역시 메시아 사상입니다.

 

※ 창세기, 출애굽기 주석인 Arcana Coelestia 4680번 글에는 고대교회에 관한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홍수 후 주님에 의해 세워진 고대교회는 일종의 표상 교회로, 예배와 관련, 전반적으로 외적으로는 주님 나라 천적(天的, celestial) 영적인 것들을, 그리고 가장 높은 뜻으로는 주님의 신성 그 자체(the Divine things themselves of the Lord)를 표상하는, 그러면서도 내적으로는 체어리티(charity, 이웃사랑)와 연결되는 그런 속성을 갖는 교회였습니다. 이 교회는 아시아 전역으로, 그리고 거기 있는 많은 왕국을 통해 확산되었습니다. The ancient church which was set up by the Lord after the flood was a representative church, and was of such a nature that all and each of its externals of worship represented the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of the Lord’s kingdom, and in the supreme sense the Divine things themselves of the Lord; but all and each of its internals of worship bore relation to charity. This church was spread over a large part of the Asiatic world, and through many kingdoms there; (AC.4680)

 

그래서 아마 한반도에까지 이르러 우리나라에서는 미륵 신앙으로 표현되었나 봅니다. //

 

그런데 고대교회가 몰락하면서 메시아의 의미가 모두 잊혀버렸습니다. 메시아의 의미를 모르기는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에게 메시아는 로마의 압제로부터 그들을 구해낼, 그리고 그들을 지구상의 어느 민족보다도 우월한 민족, 번영하는 민족으로 만들어 줄 그런 세속적 메시아였습니다. 본문에서 백성들이 요한에게 기대하는 것 또한 그런 것입니다. 즉 그들은 요한이 그런 세속적 메시아가 아닌가? 하는 기대를 했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을 꿰뚫어 본 요한이 1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6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요한은 자기는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과, 앞으로 오실 메시아는 인류를 구원할 영적 메시아라는 사실을 지금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말합니까?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요한’은 말씀을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요한의 세례에서 사용하는 ‘’은 그 속뜻으로는 말씀의 지식을 뜻합니다. 따라서 요한의 세례는 말씀의 지식을 통해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례 요한, 즉 말씀의 지식이 하는 일은 바로 거기까지입니다. 그 이후에는 주님의 세례가 필요합니다. 주님에게서는 성령과 불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진리이구요, ‘’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사랑 또는 선입니다. 그것으로 우리는 거듭날 수 있습니다. 말씀의 지식만으로는 거듭날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주님, 신적 인성(神的 人性, Divine Human)이신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생명인 성령과 불로 우리는 거듭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라고 말한 것입니다.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라는 요한의 말은 주님에 대한 겸손함을 나타내지만, 그것 말고도 내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신발은 신체의 가장 아래쪽 발에 걸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영적으로는 가장 낮은 등차(degree, 등급)의 것인 사람의 육체와 감각을 나타냅니다.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주님이 계신 가장 깊은 내면이 있구요, 그 바깥쪽으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차례로 있습니다. 겉 사람은 사람의 육체와 맞닿아 있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겉 사람을 지배하는 것들은 대개는 육신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 욕망과 탐심 같은 것들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속 사람을 먼저 개혁을 하시고, 그리고 속 사람을 통해서 겉 사람까지 거듭나게 하십니다. 그래야만 천국에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속 사람이 아무리 주님을 사모하더라도 육신의 행위들이 거룩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겉 사람 또는 육체를 영적으로 가장 낮은 등차, 등급의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말하는 ‘신발 끈’은 특히 육체에서 나오는 불결한 것들을 나타냅니다. 그렇다면 신발 끈을 푸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것은 육신에 속한 불결한 것을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주님의 신발 끈’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표현한 이유는, 주님도 세상에 계실 때, 육신으로부터 올라오는 불결한 것들과 싸우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에게도 ‘신발 끈’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입으신 몸은 인간 마리아로부터 받은 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순결하거나 거룩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주님의 인간 본질은 거룩한 인간(Divine Human)이었으며, 다만 그것을 덮고 있는 외적 인성이 마리아로부터 받은 인성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육신에 속한 불결한 것을 벗기 위해서 지옥과 싸우셔야 했습니다. 그런 의미로 볼 때, 주님의 신발 끈이 풀리는 것은 주님께서 육신의 한계를 벗으시고 영광스럽게 되신 것을 뜻하며, 동시에 인간의 거듭남과 구원을 뜻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영화(glorification)와 인간의 구원을 동시에 의미하는 까닭은, 주님의 영화 또는 영광스럽게 되시는 일은 2천 년 전에 딱 한 번 있었던 역사적인 사건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거듭나는 모든 사람 안에서도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즉 거듭나는 사람의 주님께서는 신발 끈을 풀기 위해 지옥과 싸우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신발 끈은 곧 인류의 신발 끈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라는 요한의 고백은 말씀의 지식만으로는 인간을 거듭나게 할 수 없고, 영광스럽게 되신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리와 선이라야만 인류의 신발 끈을 풀 수 있다는 뜻입니다.

 

17절에서 요한이 주님에 대해 말합니다.

 

17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말씀에는 타작마당이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타작마당’은 교회를 뜻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농부가 수확한 것을 도리깨로 쳐서 알곡과 쭉정이를 나누는 것처럼, 주님께서 선한 것과 악한 것, 진실한 것과 거짓된 것을 분리하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라는 말씀에서 ‘’은 주님의 사랑에서 나오는 능력을 뜻합니다. 주님께서 그 능력으로 교회를 부단히 정화하신다는 것입니다. 내면의 교회이든 외부에 있는 교회이든, 선한 것과 악한 것, 진실한 것과 거짓된 것이 섞여 있기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키를 들고 알곡과 쭉정이를 나누세요. 다시 말하면 선과 악을 분리하시고, 진리와 거짓을 분리하십니다. 교회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일종의 시험입니다. 그러나 그 시험이 끝나면 쭉정이는 사라지고 알곡만 남게 됩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우리 안에 거짓과 악한 것들이 사라지고, 점점 신실한 믿음과 주님, 그리고 이웃에 대한 사랑만 남게 됩니다. 이와 같이 교회를 정화하는 일은 오직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 교회의 한 분, 한 분 성도들의 내면에서 교회가 바로 서는 것으로 이 교회가 정화됩니다. 그것은 오직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신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18절에서는,

 

18또 그밖에 여러 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

 

요한이 말하는 ‘좋은 소식’, 즉 영어로 good tidings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선지자들이 전하는 좋은 소식은 주님이 이 땅에 오신다는 것이고, 주님의 나라가 지상에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좋은 소식입니다. 주님은 이제는 다시 2천 년 전에 오신 것과 똑같은 모습으로 오시지 않습니다. 새로운 진리, 선을 동반한 진리로 우리 내면으로 임재하십니다. 그러면 주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매일 같이 우리 속에서 낡은 교회가 무너지고, 주님의 새 교회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주님의 나라가 세워진다는 것은 대단히 감동적인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매일 같이 오시고, 매일 같이 새로운 교회를 세워주십니다. 그것이 요한, 즉 말씀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좋은 소식입니다. 그 좋은 소식이란 주님께서 오신다는 것과, 새 교회가 지상에 세워진다는 것과, 주님께서 지속적으로 교회를 정화하신다는 것,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오직 주님의 사랑에서 나오는 능력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말씀이 우리에게 늘 가르치는 진리입니다.

 

마지막으로 19절과 20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19분봉왕 헤롯은 그의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자기가 행한 모든 악한 일로 말미암아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20그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

 

요한으로부터, 또는 말씀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 그것으로 매일 새롭게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입니까? 지금 19, 20절에 나오는 헤롯과 헤로디아 같은 사람들입니다. 갈릴리 분봉왕이었던 헤롯에게는 빌립이라는 이복동생이 있었습니다. 헤로디아는 본래 이 빌립의 아내였는데, 그가 남편을 버리고, 남편의 이복형인 헤롯과 재혼을 했습니다. 헤롯이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인하여 책망을 받았다는 말은 그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 아래는 이들에 관한 배경 설명입니다.

 

갈릴리 분봉왕 헤롯은 헤롯 안티파스(주전4–주후39)로 헤롯 아켈라오스의 친동생입니다. 이 둘은 아버지 대왕 헤롯의 네 번째 아내인 말타케의 소생입니다. 그는 이복형제인 빌립(분봉왕 빌립하고는 다른 인물)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 딸 살로메를 통해 침례 요한을 처형한 자입니다.

 

분봉왕 빌립(주전4–주후34)은 대왕 헤롯과 예루살렘 출신 클레오파트라 사이에 태어난 아들입니다. 클레오파트라는 다섯 번째 아내입니다. 위 헤로디아의 전남편인 빌립은 대왕 헤롯과 대제사장 보에투스의 딸 마리암네 2세 사이에 태어난 아들입니다. 마리암네 2세는 세 번째 아내입니다. 참고로, 대왕 헤롯은 아내가 열 명이었습니다. //

 

이런 상황에서 요한이 그들의 부정한 결혼을 지적한 것입니다. 전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헤롯왕은 타락한 교회를 지배하는 거짓 진리를 나타냅니다. 왜냐하면 왕은 진리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반대로 쓰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헤롯과 헤로디아의 부정한 결혼은 타락한 교회에서 벌어지는 영적 간음을 말합니다. 영적 간음이란 어떤 것입니까? 교회가 진리를 왜곡해서 거짓으로 만드는 것이 영적 간음입니다. 왜냐하면 영적 간음은 진리와 진리 아닌 것, 또는 진리와 악한 것을 섞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배우자와 사랑하는 것은 아주 순수한 것입니다. 그러나 배우자 아닌 사람과 사랑을 하는 것은 불결한 것이고 간음입니다.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리가 선이 아닌 것과 결합하거나, 또는 비진리가 선과 결합하는 것이 모두 영적 간음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영적 간음이란 어떤 것입니까? 교회가 진리를 왜곡하고 거짓 교리를 만드는 것이 영적 간음입니다. 또 주님을 사랑하는 교인들에게 거짓 진리를 가르쳐서 그들의 순수한 사랑을 더럽히는 것이 바로 영적 간음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모두 교회의 마지막 때에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영적인 간음은 진리와 선을 모독하는 것이기 때문에 용서받을 수 없는 죄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28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29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 (막3:28-29)

 

그러므로 요한이 헤롯과 헤로디아를 부정하다 책망한 것은 말씀의 진리를 통해 영적 간음의 실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났음을 의미합니다. 즉 오늘날 교회에서 거짓 교리를 만들어 내고, 여러 가지 종류의 우상 숭배가 성행하는 것은 모두 영적 간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이 그동안 교회의 마지막 때 늘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부정하다 말할 수 있는 근거는 교회의 마지막 때, 주님께서 밝혀주시는 새로운 진리밖에 없습니다. 그 진리를 통해서만 그것의 부정함이 드러납니다. 헤롯과 헤로디아의 부정이 요한에 의해 밝혀졌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그때 진실한 교회라면 어떻게 행동할까요? 참된 진리를 받아들일 것이고, 주님 앞에 죄를 고백하고 회개의 삶을 살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한 교회들은 정반대의 길을 선택합니다. 그들은 참된 진리를 부정하고 오히려 이단이라고 배척합니다. 그러므로 헤롯과 헤로디아가 요한을 옥에 가두는 것은 타락한 교회가 참된 진리의 말씀을 부정하고 배척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한 가지 악을 더해서 요한을 옥에 가두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의 의미는 그들이 참된 진리를 파괴하기 위해서 거짓 논리를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그냥 ‘그건 진리가 아니야’라고 말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여러 구절을 가지고 거짓 논리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참된 진리를 대적합니다. 그것이 헤롯이 요한을 옥에 가두는 것이며, 타락한 교회들이 참된 진리의 입을 막는 행동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한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메시아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요한은 그들에게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라고 말했습니다. 요한의 이 말은 말씀의 지식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나타냅니다. 말씀의 지식은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그릇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 속으로 성령과 불이 흘러들어와야 합니다. 성령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리이며, 불은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선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사람을 거듭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지식만으로 사람이 바뀌지 않습니다. 진리의 지식 안으로 주님의 생명이 흘러 들어와 살아있는 지식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안에서 주님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님으로부터 성령과 불이 흘러 들어올 때, 그때 우리는 악한 습관을 끊을 수 있게 되고요, 그리고 이웃을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주님으로부터 성령과 불을 받을 수 있습니까? 주님은 두 벌 옷과 음식을 가지지 말라 하십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두 벌 옷은 자아에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거룩한 흐름을 방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자아를 붙잡고 있는 손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눅9:23)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14:21)

 

그리고 온전히 주님께 마음을 열고, 주님이 오시기만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 성령과 불로 오셔서 우리 안에 교회를 매일 같이 새롭게 만들어 주십니다. 새 교회 모든 성도께 주님의 그런 은혜가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사52:7)

 

아멘

 

 

원본

2017-04-23(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18(D7)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018. 2023-03-18(D7)-토요예배(2435, 눅3,15-20),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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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례(세례) 요한의 메시지

 

 

7요한이 세례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9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10무리가 물어 이르되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11대답하여 이르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12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13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14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눅3:7-14)

 

물로 씻는 것과 세례는 그 자체로 유대인들에게서 악과 거짓을 제거하는 것은 아니었고, 다만 그러한 것을 표상하고 뜻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천국에서 마치 정결한 것처럼 받아들여졌다. 그러므로 유대 교회 사람들이 요한의 세례를 통해 천국과 결합했을 때, 천국의 하나님이신 주님은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을 가르치고 그들 가운데 거하셨다. (AE.724:8, 이순철 역)

 

※ 이 AE(Apocalypse Explained) 724:8번 글에 대한 Ager 영역본은 아래와 같고,

 

The washing and baptizing itself did not indeed purify them from falsities and evils, but only represented and thence signified purification from them; nevertheless, this was received in heaven as if they were themselves purified. It was thus that heaven was conjoined to the people of that church by means of the baptism of John; and when heaven was thus conjoined to them, the Lord, who was the God of heaven, could manifest Himself to them there, teach them, and abide among them... (AE.724:8, Ager 역)

 

이는 계시록 12장 5절의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남자라’에 대한 주석 일부입니다.

 

 

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요단강 근처에서 요한이 회개의 세례, 침례를 가르칠 때, 많은 사람이 침례를 받기 위해 요한에게로 왔습니다.

 

※ 신약 성서 원어인 헬라어 원전에 의하면 ‘침례’(浸禮, baptism, 헬, βἀπτισμα)가 맞습니다. 그럼에도 한글 성경에 ‘세례’(洗禮)가 된 것은, 광복 전 남한에서 성경 한글화 작업으로 각 교단이 모였을 때, 침례교만 빠졌기 때문인데, 침례교만 빠진 건 침례교 대표가 연락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며, 이는 당시 대부분의 교단은 효과적 선교를 위해 큰 도시 위주로 움직인 반면, 침례교만 유독 내륙 오지 선교에 힘썼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그래서인지 일본은 그냥 원어를 그대로 표기합니다.

 

요한에게 침례를 받는다는 것은, 한마디로 교회의 낡은 교리를 버리고,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 진리를 바탕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한’은 새로운 말씀을 의미하고, ‘침례’는 말씀을 통해 거듭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의식의 개혁이며, 동시에 신앙의 전향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 교회 사람들 대부분은 그렇게 깊이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어떤 이는 새로운 진리가 신선해서, 또 어떤 이는 요한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몰려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는 바리새인들 같은 위선자도 있었고, 진리에 대해 무지하지만 순종할 줄 아는 단순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7절입니다.

 

7요한이 침례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요한이 ‘독사의 자식’이라고 말합니다. ‘천국의 비밀’ 4533번에는 천국에서는 사기꾼들이나 위선자들이 천사들 앞에 나타날 때 독사의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 AC(Arcana Coelestia, 천국의 비밀) 4533번 글에 대한 Clowes 영역본은 아래와 같습니다. 참고하시라고 내용을 조금 더 추가했습니다.

 

But when the same are looked at by the angels of heaven, that luminosity is instantly dissipated, and they appear with totally different faces, each according to his genius. Some are dusky and black like devils; some have ghastly faces like that of a corpse; some have almost no face at all, and instead of a face there is a mass of hair; some are like grates of teeth; some like skeletons; and what was still more strange, some are like monsters, the deceitful are like serpents, and the most deceitful are like vipers, while others appear differently. (AC.4533, Clowes 역)

 

이는 창세기 34장 주석 클로징 글인 큰 사람의 눈과 빛에 관한 상응 관련 글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여기 ‘큰 사람’이라는 표현은 천국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천국 전체가 한 사람 모습이라는 데서 나온 말입니다. 영어로는 ‘The Grand Man’이라고 합니다. //

 

그러니까 요한이 무리에게 ‘독사의 자식’이라고 한 것은 무리 전체를 향해 말한 것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 위선자들(the most deceitful)에게 한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이 다시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고 말했습니다. 주님은 노하시거나 사람을 저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사랑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에서 ‘진노’란 주님이 노하시는 것이 아니라 위선자들의 내면에 있는 분노와 증오심을 말합니다. 위선자와 거짓말쟁이는 마치 진리를 사랑하는 것처럼 자신을 위장하지만, 속으로는 진리를 혐오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사후에 육신의 옷을 벗게 되면 진리에 대한 혐오감과 적개심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피할 수 없다는 진노는 주님의 진노가 아니라 진리에 대한 그들 자신의 분노이며 적개심입니다. 그것이 자기의 발목을 잡아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도록 만든다는 그런 뜻입니다.

 

8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여기서는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이 두 번 나오는데, 앞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뒤에 나오는 아브라함은 의미가 다릅니다. 먼저 앞의 ‘아브라함’은 사랑 자체이신 주님을 표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자랑하는 것은 자기들만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하는 그들의 오만함을 나타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자기들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상한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과 세상만 믿는 사람들이었지요. 그래서 그들은 사실은 우상 숭배자들이었습니다. 요한이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있다’ 한 것은 그래서입니다. 즉 뒤에 나오는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기 전 우상을 믿었던 아브라함, 즉 아브람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든다는 돌들은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돌들’은 감각의 진리를 뜻합니다.

 

감각의 진리란 어떤 것입니까? 눈이나 코, 입, 손과 발 같은 감각으로 이해하는 진리가 감각 진리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감각은 진리를 이해하는 수단으로는 믿을 만한 것이 못됩니다. 예를 한번 들어 보겠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 태양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집니다. 그런데 진실은 어떻습니까? 태양은 그대로 있고 지구가 도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실입니다. 그러므로 감각을 통해 얻는 정보가 모두 진리는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감각의 진리를 믿을까요? 주님보다 자신을 더 믿고, 주님이 주시는 내적 기쁨보다 감각이 주는 쾌감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사29:13)라고 한탄하셨고, 요한 역시 그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말한 것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은, 그동안의 위선과 악행을 버리고, 진리에 따라 새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9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말씀에서는 사람을 나무로 비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는 이유는 ‘나무’는 사람의 지성, 즉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understanding)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을 가진 존재는 자연계에서 사람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에서는 사람을 종종 나무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나무의 뿌리에 도끼가 놓였다고 합니다. ‘도끼’는 인간의 자아에서 나오는 진리를 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는 위선자들이 주장하는 진리의 뿌리에 그들의 자아가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주장하는 진리는 모두 거짓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아에서 나오는 것은 모두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없으니 당연히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그들을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라 하고,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나무마다 찍혀’는 주님을 믿지 않고 자신의 지성을 믿는 사람들이 결국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을 모두 잃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면 ‘불에 던져지리라’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설명할 것도 없이 지옥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지옥을 불로 표현하는 이유는 그곳이 유황불이 펄펄 끓는 곳이라서가 아닙니다. 그곳 사람들에게서 발산되는 탐욕의 불길이 그렇게 뜨겁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가끔 순수하지 않은 어떤 것을 간절히 바랄 때가 있고, 그때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지옥의 사람들에게서는 그런 욕망의 열기가 한도 끝도 없이 발산됩니다. 그래서 그것을 말씀에서는 유황불로 표현합니다.

 

※ 다음은 이 ‘지옥불’(infernal fire) 관련, ‘천국과 지옥’ 59장, ‘무엇이 지옥 불이고 이를 가는 것인가’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참고하세요.

 

‘지옥의 불’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온 악을 행하려는 욕망을 의미하고, 이전 장에서 밝힌 것처럼, 지옥에 있는 모든 사람의 욕망이 그러하므로 지옥이 열리면, 큰 화재가 났을 때와 같은 연기와 불이 거기 보인다. 자기 사랑이 우세한 지옥에서는 탁한 불이, 세상 사랑이 우세한 지옥에서는 불꽃을 내는 불이 보인다. 그러나 지옥이 닫히면, 이 불의 형상은 보이지 않고, 그 대신 연기가 응집한 것 같은 어두움이 보인다. 그래도 그 불은 여전히 안에서 이글거리고 있는 것을 거기서 뿜어나오는 열기로 알아볼 수 있다. 그것은 마치 화재 뒤의 폐허에서 나는 열기 같고, 또 다른 곳에서는 가열된 용광로에서 나는 열기 같고, 어떤 곳에서는 뜨거운 목욕탕에서 나는 열기와 같다. 이 열이 사람에게 들어가면 그의 욕망을 자극하고, 악한 사람 안에서는 미움과 복수심을, 병약자에게는 광기를 일으킨다.

 

이것이 위에 말한 사랑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불이고, 열이다. 그들은 몸 안에 있을 때도 영이 그런 지옥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지옥에 있는 사람들이 불 속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불은 하나의 외관이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조금도 자기가 탄다는 느낌이 없고, 단지 세상에서와 같은 체온을 느낄 뿐이다. 이런 외관상의 불은 상응에 의한 것이다. 사랑은 불에 상응한다. 그리고 영계에 나타나는 모든 것은 상응에 따라서 나타나는 것이다. (HH.571) //

 

10절입니다.

 

10무리가 물어 이르되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요한에게 묻는 사람들은 적어도 말씀을 통해 삶의 지침을 얻으려고 하는 신앙인들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앞에서 말한 ‘독사의 자식’이라 불리는 위선자들과는 다른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저들 독사의 자식들과는 달리 비록 진리에 대해서는 무지하지만, 그래도 진리에 순종하려 하는 사람들입니다.

 

11대답하여 이르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이 말씀은 말 그대로 자기 소유를 이웃과 함께 나누라는 것이지만, 그러나 속뜻으로는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서 ‘’은 진리를 말합니다. 왜 옷이 진리를 의미하느냐 하면, 진리는 선의 드러남, 즉 선의 겉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선은 자체로는 보이지 않고 진리를 통해서만 드러납니다. 그래서 진리를 옷으로 비유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먹을 것’은 선을 의미합니다. 영적인 양식은 곧 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옷 두 벌 있는’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 신앙인들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와 자아에서 나오는 진리를 함께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주시는 진실한 것과 자아에서 오는 거짓된 것이 함께 섞여 있는 것이지요. 그것이 ‘옷 두 벌 있는 자’라는 상태입니다. 사실 대부분의 신앙인들의 상태가 이렇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마음과 인간의 마음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중에서 인간의 것을 버리라 하십니다. 왜 그러실까요? 인간의 것은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10장에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거기에 보면 전도를 위해 길을 떠나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 역시 인간의 생각을 버리고, 오직 주님이 주시는 말씀만을 전하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생각은 능력이 없습니다. 오직 주님이 주시는 진리라야 능력이 있습니다. 그 안에 선한 것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두 벌 옷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지팡이’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러 온 사람들 중에 세리가 있었습니다. 세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세금을 징수하는 사람들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세리에 대한 인식이 그다지 좋지는 않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세리를 거의 매춘을 하는 사람 정도로 멸시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요한에게 물었습니다. 12절, 13절 말씀입니다.

 

12세리들도 침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13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성(聖) 문서에서는 ‘세리’가 무슨 뜻인지를 정확하게 밝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돈을 거두어들이는 일이고, 그러므로 진리와 선의 지식을 습득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은 진리와 선에 대한 지식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세리와 요한의 문답은 진리를 배우는 사람들의 마음가짐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면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진리를 배울 때, 주님께서 열어주시는 대로 받고, 그 이상의 것을 욕심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각자의 영적 능력만큼 진리도 주시고, 선도 주십니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사람이 자기의 영적 역량보다 더 많은 진리를 받을 때, 그것을 더럽히거나 남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와 선을 남용한다는 것은, 진리를 주님과 이웃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스스로 높아지려 하거나, 또는 물질적 이득을 보기 위해 진리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거룩한 것을 남용하고 더럽히는 것은 차라리 모르는 것만 못 합니다. 그래서 두려운 일이지요. 그럼에도 우리는 진리를 욕심낼 때가 간혹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자기 마음대로 진리를 추론, 그렇게 해서 왜곡합니다. 주님은 ‘그러지 말라’ 하십니다. 그러므로 요한이 세리들에게 하는 말은 진리를 배우는 사람의 자세에 대한 권고입니다. 그런데 무리 중에는 세리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군인들도 있었습니다. 14절입니다.

 

14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여기서 군인은 누구입니까? 군인은 영적인 군인을 말합니다. 영적인 ‘군인’은 진리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입니다. 내면에서 올라오는 불순한 욕망과 싸우고, 진리에 따르지 않고 엉뚱한 길로 가고자 하는 유혹과 싸우는 사람이 주님의 군사입니다. 따라서 세리와 군인은 신앙인들의 삶의 두 가지 측면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자는 진리의 지식을 배우는 측면이고, 후자는 배운 것을 실천하는 측면입니다. 그러므로 세리와 군인은 모두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교회의 마지막 때에는 교회 안의 사람들이 주님을 대적하는 지옥의 군대로 변합니다. 그것은 유대 교회 사람들을 보면 알 수 있는데요, 그들은 진리이신 주님을 죽였습니다. 그것이 지옥의 군대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요한이 그들에게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라고 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는 한글 성경 번역이구요, 영어 성경에는 ‘사람을 폭행하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을 폭행하는 것이 어떤 것일까요? 여기서 ‘사람’은 진리를 나타냅니다. 말씀에서 사람은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이지만 여기서는 진리를 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폭행하지 말라’는 것은 진리를 모독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를 더럽히지 말라는 것이지요. 어떻게 하는 것이 진리를 더럽히는 것일까요? 진리에 대해 명확한 인식을 가진 사람이 진리에 위배 되는 삶을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진리를 더럽히는 것입니다. 또 진리를 자기 마음대로 추론하고 왜곡하는 것 또한 진리를 더럽히는 일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군대가 할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유대 교회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면서 열심히 실천하다 보면 주님께서 깨달음을 주시는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생각으로 말씀을 마음대로 추론하여 이른바 장로의 전통이라고 하는 인간의 계율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제자들이 이 장로의 전통을 지키지 않는다고 흠을 잡았습니다. 예를 들면, 식사를 할 때, 손을 씻지 않는다 타박을 하고, 안식일에 곡식 이삭을 먹었다 흠을 잡았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막7:8)며 나무라셨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들이 모두 진리를 모독하는 것이며, ‘사람을 폭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는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거짓 진리를 가지고 참된 진리를 비방하는 것입니다. 아까 바리새인들이 장로의 전통을 어겼다며 주님의 제자들과 주님을 비난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거짓 진리를 가지고 참된 진리를 비방하는 행동들입니다. 유대 교회 사람들이 그렇게 진리를 비방하고 욕보이는 것을 말씀에서는 그들이 주님을 때리고, 침을 뱉고, 주님을 십자가에 매다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주님 당시에만 있었던 일들이 아닙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벌어지고 있는 일들입니다. 새 교회의 진리를 흠집 내려고 하는 사람들이 대단히 많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표상하는 요한은 군인들에게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라고 합니다. 주님 편에 서야 할 사람들이 지옥의 편에 서서 진리를 비방하고 욕보여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요한은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말했습니다. 주님의 군사들이 받는 급료란 어떤 것입니까? 우리가 주님의 군사로서의 소임을 충실히 할 때, 주님은 급료를 주세요. 그 ‘급료’란 진리와 선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모두 진리와 선을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진실로 진리와 선을 사랑합니까? 진리를 머릿속에 저장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일상의 삶 가운데로 끌어내어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진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주셔야 합니다. 아직 진리에 대한 애정은 충분치 않지만, 주님의 군사로서 진리를 위해 싸울 때, 주님께서는 급료를 주세요. 주님의 군대에 합당한 급료를 주십니다. 그 급료가 바로 진리와 선에 대한 애정입니다. 세속의 사람들은 물질을 원하고 명예를 원하지만, 우리와 같이 천국을 소망하는 사람들은 진리와 선에 대한 애정을 원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리에게 더없이 소중한 급료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십니다. 족하라, 즉 만족하라는 말씀은 어떤 뜻일까요? 그것을 기뻐하고 다른 세속의 것들을 바라지 말라는 뜻입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세상에서 필요한 것들도 부족하지 않게 주십니다. 다만 세상의 것들을 목적으로 삼지는 말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러 온 것처럼, 오늘날에도 새 교회 진리를 혼자 배우거나 배우러 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스스로 진리를 안다 자부하면서도 진리를 따라 살지는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경건하지만, 내적으로 보면 위선자들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주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하시고, 또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여 있다 경고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상태에 머무르는 이유는, 그들이 주님보다 자기의 지성을 더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진리에 대해 많이 알지는 못하지만, 아는 만큼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도 ‘두 벌 옷을 갖지 말라’ 주의를 주십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자아에서 나오는 생각이나 애정을 버리고, 주님이 주시는 지혜와 사랑만 가지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자아의 말을 들을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기적인 욕심에 휘둘리게 되고,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서 멀어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는 어느 만큼은 위선자들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위선을 벗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참된 기독교 784항에서는 ‘거짓이 있는 곳에 참된 것이 들어설 수 없다. 그러므로 먼저 거짓의 뿌리가 뽑혀야 한다. 이러한 변화가 목회자로부터 시작해 평신도들에 이르기까지 일어나야 한다’ (이순철 역)고 합니다.

 

※ TCR(True Christian Religion, 참된 기독교) 784번 글에 대한 영역은 아래와 같습니다.

 

For where falsities have already been implanted what is new cannot enter until the falsities have been rooted out, and this will take place with the clergy, and so with the laity; (TCR.784, Ager 역)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교회의 낡은 가르침, 교회의 낡은 습관들이 있다면 그것을 비워야 합니다. 그래야 새로운 진리가 온전하게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가복음 2장 22절에서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전에 가졌던 낡은 습관들을 매일 같이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그 자리에 새 교회가 세워집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새 교회 모든 가족과, 또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형제, 자매들에게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여호와께서 땅끝까지 선포하시되 너희는 딸 시온에게 이르라 보라 네 구원이 이르렀느니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느니라 하셨느니라 (사62:11)

 

아멘

 

원본

2017-03-26(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17(D6)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017. 2023-03-17(D6)-매일예배(2434, 눅3,7-14), '침례(세례) 요한의 메시지'.pdf
0.52MB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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