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49.심화

 

6. ‘24:30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24:30) Then shall they see the son of man coming in the clouds of heaven with power and great glory (Matt. 24:30).

 

이 구절은 단7의 ‘인자’가 누구이며 어떻게 오시는지를 더 분명히 풀어 주는 말씀입니다. 특히 많은 분들이 이 구절을 ‘눈에 보이는 재림 사건’으로만 이해하는데, AC.49의 흐름에서는 이것이 ‘말씀과 진리를 통해 주님이 나타나시는 방식’을 가리키는 핵심 구절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24:30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온다는 것은 물리적 하늘에서의 등장이라기보다, 말씀의 문자(구름) 안에 감추어져 있던 신적 진리(영광)가 드러나며, 주님이 인식되는 사건, 곧 영적 의미에서의 오심을 뜻합니다.’

 

먼저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인다’입니다. 여기서 ‘징조(sign)는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무언가가 드러났음을 알리는 표지’, 특히 ‘주님의 임재가 인식되기 시작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리고 ‘하늘’은 단순한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사람의 속 사람, 혹은 교회의 내적 상태’를 가리킵니다. 즉, 이 징조는 바깥 하늘에서 번쩍이는 어떤 현상이 아니라, ‘사람의 내적 인식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그다음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한다’고 합니다. ‘’은 ‘겉 사람, 외적 삶의 영역’, ‘족속(tribes)은 그 안에 있는 ‘여러 종류의 선과 진리, 혹은 그 상태들’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통곡한다’는 것은, 단순한 감정 표현이 아니라, ‘자기 상태가 드러날 때 오는 고통과 깨달음’입니다. 즉, 주님의 빛이 비출 때, 지금까지 의지하던 것이 진리가 아니었음을 보게 되고, 그로 인해 ‘내적 충격과 슬픔’이 일어나는 상태입니다.

 

이제 핵심 표현입니다.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온다.’ 여기서 ‘구름(clouds)은 앞에서도 보셨듯이 ‘말씀의 문자적 의미’, 즉 우리가 읽고 접하는 성경의 외적 형태를 뜻합니다. 그리고 ‘영광(glory)은 그 안에 담긴 ‘내적 의미, 신적 진리의 빛’입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은 이렇게 읽혀야 합니다. ‘주님은 말씀의 문자 안에서 오시지만, 그 안에 숨겨진 영광, 곧 내적 의미가 드러날 때, 비로소 참되게 인식된다’는 것입니다.

 

능력(power)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힘이 아니라, ‘진리가 실제로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즉, 이 ‘오심’은 단순히 보여 주는 사건이 아니라, ‘사람의 내면과 삶을 실제로 뒤흔들고 새롭게 하는 작용’입니다.

 

이제 AC.49와 연결하면 전체가 또렷해집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주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직접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시대에서는 그렇게 나타나시지 않고, ‘말씀 안에서, 그리고 그 말씀의 내적 의미가 열릴 때’ 나타나십니다. 그래서 ‘구름’(문자)과 ‘영광’(내적 의미)이 함께 나옵니다. 즉, ‘보이는 방식은 다르지만, 동일한 주님의 나타나심’입니다.

 

이걸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이렇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성경을 읽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글자로만 보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안의 뜻이 열리면서, ‘, 이 말씀이 나를 향한 말씀이었구나’, ‘이게 주님의 뜻이구나’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때 그는 단순히 성경을 이해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오는 것’입니다.

 

주님의 오심은 인자가 구름을 타고라는 표현을 빌린 말씀의 겉 글자를 통해 주님을 새롭게 깨닫는 순간에도 이루어집니다.’

 

24:30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온다는 것은 말씀의 문자 안에 감추어져 있던 신적 진리가 드러나며, 사람들이 주님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는 영적 오심을 의미합니다.’

 

 

 

AC.49, 창1:26,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AC.49-52)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And God said, Let 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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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9, 심화 5, ‘단7:13-14’

AC.49.심화 13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14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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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9.심화

 

13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14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7:13, 14) I saw, and behold, one like the son of man came with the clouds of heaven, and came to the ancient of days, and they brought him near before him; and there was given him dominion, and glory, and a kingdom, that all people, and nations, and languages should serve him. His dominion is an everlasting dominion, which shall not pass away, and his kingdom that which shall not be destroyed (Dan. 7:13–14).

 

이 구절은 AC.49의 맥락에서 매우 결정적인 위치를 차지합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보신 겔1:26의 ‘사람의 모양’이 하나의 암시였다면, 이 단7:13-14는 그것을 더 분명하게, 그리고 ‘역사와 구원의 중심으로 확정해 주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7:13-14 인자 같은 이는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하나님께서 인간의 형상으로 나타나셔서 모든 권세와 영광을 가지신 주님이 되셨음을 선언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AC.49에서 말하는 ‘주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신다’는 진리를 한층 더 분명히 합니다.

 

먼저 ‘인자 같은 이(one like the son of man)를 보겠습니다. ‘인자’는 단순히 인간을 뜻하는 표현이 아니라, 스베덴보리에게서는 특별히 ‘진리를 나타내시는 주님, 곧 말씀으로 오신 주님’을 가리킵니다. 즉,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 볼 수 있고, 알 수 있고, 따를 수 있는 형태로 나타나신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모양’이 여기서 ‘인자’라는 이름으로 더 구체화됩니다.

 

이제 ‘하늘 구름을 타고 온다’는 표현입니다. 말씀에서 ‘구름(clouds)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 곧 사람들이 접할 수 있는 외적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주님이 어떤 추상적 방식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 그리고 역사 속에서 드러나는 방식으로 오신다’는 뜻입니다. 즉,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다음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간다’는 장면이 나옵니다. 겉으로 보면 두 인물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두 하나님으로 보지 않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신성 자체(아버지), 그 신성이 인성 안에서 나타난 것(아들)’ 사이의 관계를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즉, 분리된 둘이 아니라, ‘내적과 외적, 보이지 않는 신성과 보이는 형상 사이의 결합 과정’입니다.

 

이제 핵심 결과가 나옵니다. ‘권세와 영광과 나라가 주어지고, 모든 민족이 그를 섬긴다.’ 여기서 ‘권세’는 ‘다스림의 힘’, ‘영광’은 ‘신적 진리의 빛’, ‘나라’는 ‘그 진리와 선이 작용하는 영역, 곧 교회와 천국’을 뜻합니다. 즉, 주님은 단순히 나타나시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주님으로 확립되십니다.’

 

특히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언어가 그를 섬긴다’는 표현은, 이것이 특정 민족이나 시대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인간과 모든 상태를 포함하는 보편적 통치’임을 뜻합니다. 그리고 ‘영원한 권세, 멸망하지 않는 나라’는, 이것이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되는 주님의 통치’임을 강조합니다.

 

이제 AC.49와 연결해 보겠습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주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고, 사람들은 그것을 직접적으로 인식했습니다. 그런데 이 단7의 말씀은, 그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주님’이 단순한 현현이 아니라, ‘모든 권세와 영광을 가지신 주님, 곧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아는 그분’임을 분명히 합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 ‘성육신과 주님의 통치에 대한 예언적 선언’입니다.

 

이걸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보이고, 말씀하시고, 따라갈 수 있도록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분’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단순한 스승이 아니라, ‘내 삶 전체를 다스리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막연한 하나님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알고 따르게 됩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가 보고 따를 수 있도록 사람으로 오신 주님이시며, 그분이 지금도 모든 것을 다스리십니다.’

 

7:13-14 인자 같은 이는 인간의 형상으로 나타나신 하나님,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그분이 모든 권세와 영광을 가지신 영원한 주님이심을 선언하는 말씀입니다.’

 

 

 

AC.49, 심화 6, ‘마24:30’

AC.49.심화 6. ‘마24:30’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마24:30) Then shall they s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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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9, 심화 4, ‘겔1:26’

AC.49.심화 4. ‘겔1:26’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 (겔1:26) Above the expanse, as the appearance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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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26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 (1:26) Above the expanse, as the appearance of a sapphire stone, the likeness of a throne, and upon the likeness of the throne was the likeness as the appearance of a man above upon it (Ezek. 1:26).

 

이 구절은 AC.49의 그 문장, 곧 ‘주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를 성경적으로 가장 직접적으로 뒷받침하는 매우 중요한 본문입니다. 겉으로는 환상 장면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에게서는 이것이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주님의 신성이 인간적 형상 안에서 나타나는 방식’을 보여 주는 핵심 증거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1:26 보좌 위 사람의 모양은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사람의 형상(Divine Human)으로 계시며, 인간은 그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고, 거듭남은 그 형상으로 다시 회복되는 과정임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먼저 구조를 보겠습니다. ‘궁창 위에 보좌’가 있습니다. 여기서 ‘궁창(expanse)은 앞에서 보셨듯이 ‘구별과 질서가 이루어진 영역’, 즉 진리의 질서가 펼쳐진 상태를 뜻합니다. 그 위에 ‘보좌(throne)가 있다는 것은, 그 질서 위에서 ‘주님의 통치가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보좌는 언제나 통치와 주권의 상징입니다.

 

그다음 ‘남보석 같은 모양’이 나옵니다. ‘남보석(sapphire)은 말씀에서 ‘맑고 투명한 진리의 빛’, 특히 하늘적 차원의 빛을 상징합니다. 즉, 이 통치는 어둡거나 강압적인 것이 아니라, ‘진리의 빛 속에서 이루어지는 통치’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다스림은 사랑과 함께하는 ‘밝은 이해와 질서’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이제 핵심입니다. ‘그 보좌 위에 사람의 모양 같은 형상’이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추상적 힘이나 형체 없는 존재로 나타나지 않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우리가 이해하기 쉽게 그렇게 보인 것이 아니라,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하나님의 본질 자체가 인간적 형상(Divine Human)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말도,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실제 근거를 가진 표현’이 됩니다.

 

이 점이 AC.49와 연결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주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는 말은, 어떤 임시적인 환상이 아니라, ‘주님의 본질적 나타나심의 방식’입니다. 즉, 주님은 본래 그렇게 나타나실 수 있는 분이며, 태고교회는 그만큼 ‘내적으로 열려 있어서 그것을 인식할 수 있었던 상태’였습니다.

 

이걸 거듭남과 연결하면 더 깊어집니다. 사람은 거듭남을 통해 점점 ‘주님의 형상에 가까워지는 존재’입니다. 즉, 단순히 도덕적으로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생각과 의지, 사랑과 진리가 주님의 질서와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단순히 ‘하나님이 이렇게 보였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이 궁극적으로 무엇으로 회복되는가를 보여 주는 그림’입니다.

 

이걸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이렇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처음에는 자기중심으로 살다가, 점점 주님의 진리와 선 안으로 들어가면서, 그의 생각은 더 밝아지고, 그의 마음은 더 부드러워지고, 그의 삶은 더 질서 있게 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점점 ‘사람다워집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의 형상을 닮아 가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모양’은 단순한 외형이 아니라, ‘가장 완전한 질서와 생명의 형상’입니다.

 

하나님은 막연한 분이 아니라, 우리가 닮아 가야 할 참된 인간의 모습으로 계신 분입니다.’

 

1:26 보좌 위 사람의 모양은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인간적 형상으로 계시며, 인간은 그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고, 거듭남은 그 형상으로 회복되는 과정임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지금 하나하나 짚어 가시는 이 인용 구절들이, 결국 한 방향, 곧 ‘주님의 형상으로의 회복’으로 모이고 있다는 것이 점점 더 또렷해지실 것입니다.

 

 

 

AC.49, 심화 5, ‘단7:13-14’

AC.49.심화 13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14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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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9, 심화 3, ‘사45:11-12’

AC.49.심화 3. ‘사45:11-12’ 11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너희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며 또 내 아들들과 내 손으로 한 일에 관하여 내게 명령하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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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45:11-12

 

11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너희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며 또 내 아들들과 내 손으로 한 일에 관하여 내게 명령하려느냐 12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내가 내 손으로 하늘을 펴고 하늘의 모든 군대에게 명령하였노라 (45:11, 12) Thus saith Jehovah the holy one of Israel, and his former, I have made the earth, and created man upon it; I, even my hands, have stretched out the heavens, and all their army have I commanded (Isa. 45:11–12).

 

이 구절은 AC.49의 문맥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앞서 보신 렘4의 ‘황폐 상태’와 대비되면서, ‘주님이 어떻게 사람 안에 다시 질서를 세우시는가,  창조와 재창조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분명히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45:11-12는 사람 안의 속 사람(하늘)과 겉 사람(땅), 그리고 그 위의 사람’(참된 인간 상태)까지 모두 주님이 창조하시고 다스리신다는 것을 선언하는 말씀이며, 따라서 거듭남은 전적으로 주님의 역사라는 것을 밝히는 구절’입니다.

 

먼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입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은 계속 보신 것처럼 ‘진리 안에 있는 사람, 혹은 교회 상태’를 뜻합니다. 그리고 ‘지으신 이(former)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단순히 처음 만든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람 안에 질서를 세우고 형상을 갖추게 하는 분’을 뜻합니다. 즉, 주님은 단순한 창조자가 아니라, ‘지금도 사람을 계속 형성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이제 핵심 선언이 나옵니다. ‘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다.’ 여기서 ‘(earth)은 ‘겉 사람, 외적인 삶의 자리’이고, 그 위에 ‘사람(man)을 창조하셨다고 합니다.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겉 사람이라는 기반 위에, 비로소 ‘참된 인간 상태, 즉 진리와 선이 결합된 상태’가 세워진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보신 ‘거듭남이 겉 사람에서 시작된다’는 흐름과도 연결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모든 과정의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시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다음 ‘내가 하늘을 펴고, 그 모든 군대를 명령하였다’입니다. ‘하늘(heavens)은 ‘속 사람, 내적인 영역’, 그리고 ‘하늘의 군대’는 그 안에 있는 ‘모든 진리와 선, 혹은 생각과 애정의 질서’를 뜻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단순한 우주 창조가 아니라, ‘사람 안의 내적 구조 전체, 즉 생각, 이해, 애정, 질서를 주님이 배열하고 다스리신다’는 뜻입니다.

 

이제 전체를 하나로 묶어 보면 이렇게 됩니다. ‘주님은 사람의 겉 사람(삶의 자리)을 마련하시고, 그 위에 참된 인간 상태를 창조하시며, 동시에 속 사람(내면의 하늘)을 펼쳐 그 안의 모든 질서를 다스리신다.’ 즉, 위와 아래, 안과 밖, 시작과 완성까지 ‘전부 주님의 손안에 있다’는 선언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의 앞부분이 매우 중요합니다. ‘너희가 장래 일을 내게 묻고, 내 아들들과 내 손으로 한 일에 관하여 내게 명령하려느냐?’ 이것은 일종의 책망입니다. 즉, ‘사람이 자기 힘으로 무엇을 이루려 하거나, 하나님의 일을 자기 기준으로 재단하려는 태도’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곧 ‘거듭남을 내가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생각을 경계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이렇게 읽혀야 합니다. ‘사람을 새롭게 하는 일은 너희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일이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사람은 협력하고 응답할 수는 있지만, ‘창조와 형성의 주체는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이걸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이렇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노력하고, 애쓰고, 결단합니다. 이것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어느 지점에서 반드시 깨닫게 됩니다. ‘이 변화는 내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 안에서 하시는 일이다.’ 바로 그 깨달음이 이 구절이 말하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변화되기 위해 애쓰지만, 실제로 우리를 바꾸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45:11-12는 사람의 속 사람과 겉 사람, 그리고 그 안의 모든 질서를 창조하고 다스리시는 분이 오직 주님이심을 선언하며, 거듭남이 전적으로 주님의 역사임을 밝히는 말씀입니다.’

 

 

 

AC.49, 심화 4, ‘겔1:26’

AC.49.심화 4. ‘겔1:26’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 (겔1:26) Above the expanse, as the appearance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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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9, 심화 2, ‘렘4:23, 25’

AC.49.심화 23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25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렘4:23, 25) I beheld the earth, and lo, it was void and emptiness, and the hea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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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25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4:23, 25) I beheld the earth, and lo, it was void and emptiness, and the heavens, and they had no light. I beheld and lo there was no man, and all the birds of the heavens were fled (Jer. 4:23, 25).

 

이 구절은 겉으로 보면 단순히 폐허와 심판의 장면처럼 보이지만, AC.49의 문맥에서는 ‘거듭남 이전, 혹은 교회가 완전히 무너진 상태,  내면의 빛이 꺼진 상태’’를 매우 선명하게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4:23, 25 혼돈, 공허, 빛 없음, 사람 없음, 새가 날아감, 사람 안에서 진리와 선, 이해와 의지, 그리고 그 작용들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를 단계적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먼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다’입니다. 여기서 ‘(earth)은 앞서 계속 보신 것처럼 ‘사람, 혹은 그의 삶의 자리’를 뜻합니다. 그리고 ‘혼돈(void)과 ‘공허(emptiness)는 창세기 1장의 첫 상태와 동일한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질서가 완전히 무너진 상태, 선과 진리가 전혀 자리 잡지 못한 상태’로 봅니다. 즉, 단순히 부족한 것이 아니라, ‘아직 아무것도 정돈되지 않은 상태’, 혹은 다시 무너져 그 상태로 돌아간 상태입니다.

 

그다음 ‘하늘에 빛이 없다’입니다. ‘하늘(heavens)은 ‘속 사람, 내적인 영역’, ‘(light)은 ‘진리의 인식과 이해’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은 ‘사람 안의 내적 영역에서 더 이상 진리가 비추지 않는 상태’, 다시 말해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주님의 뜻인지 ‘분별할 빛이 완전히 꺼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이 매우 심각한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외적인 문제보다, ‘내적 빛이 꺼지는 것이 더 근본적인 붕괴’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사람이 없으며’가 나옵니다. 여기서 ‘사람(man, homo)은 단순한 인간 존재가 아니라, 스베덴보리에게서는 ‘진리와 선이 결합된 상태, 곧 ‘참된 인간성’’을 뜻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없다’는 것은 사람이 물리적으로 없다는 말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더 이상 사람다운 상태’, 곧 진리와 선의 결합이 없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겉으로는 사람처럼 살아도, 영적으로는 ‘사람이 아닌 상태’입니다.

 

마지막으로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다’입니다. ‘(birds)는 앞서 계속 보셨듯이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 곧 생각과 이해의 작용’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새들이 ‘날아갔다’는 것은, 단순히 약해진 것이 아니라, ‘완전히 사라진 상태’입니다. 즉, 더 이상 진리를 생각하거나 분별하는 능력이 작동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진리를 생각하려는 힘 자체가 떠난 상태’입니다.

 

이 네 가지를 하나로 묶으면 이렇게 됩니다. ‘삶의 자리(땅)가 무너지고  내적 빛이 꺼지고  참된 인간 상태가 사라지고  생각과 분별의 기능까지 떠난 상태’입니다. 이것이 바로 ‘완전한 황폐’, 곧 스베덴보리가 자주 말하는 ‘vastation’(황폐)의 상태입니다.

 

이걸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이렇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처음에는 진리를 알고, 양심도 있고, 선을 행하려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점점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사로잡히면서, 진리를 무시하고, 양심을 거스르고, 결국에는 무엇이 옳은지도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부터는, ‘옳고 그름 자체가 의미 없게 느껴지고’, 마음도 굳어지고, 생각도 흐려집니다. 이것이 바로 이 구절이 말하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왜 이런 구절이 AC.49에 등장하느냐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무서운 상태를 보여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왜 주님이 태고교회와 같은 직접적인 방식으로 더 이상 말씀하지 않으시는가’를 설명하는 배경이 됩니다. 인간이 이처럼 내적으로 어두워진 상태에서는, 설령 주님이 직접 나타나셔도 그것을 바르게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다른 방식, 곧 말씀과 진리를 통한 인도라는 방식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가장 위험한 상태는 고통받는 때가 아니라, 무엇이 옳은지 더 이상 느끼지도, 생각하지도 않는 상태입니다.’

 

4:23, 25는 사람 안에서 진리의 빛과 선의 상태,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고 생각하는 기능까지 모두 사라진 영적 황폐의 상태를 묘사한 말씀입니다.’

 

 

 

AC.49, 심화 3, ‘사45:11-12’

AC.49.심화 3. ‘사45:11-12’ 11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너희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며 또 내 아들들과 내 손으로 한 일에 관하여 내게 명령하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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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9, 심화 1,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AC.48.심화 1.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이 AC.49 본문 중, ‘태고교회, 곧 그 교회의 사람들과는 주님께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하셨는데, 그때 주님은 사람의 모습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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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9.심화

 

1.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AC.49 본문 중, ‘태고교회, 곧 그 교회의 사람들과는 주님께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하셨는데, 그때 주님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에 나오는 이에 대해서는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가 무척 궁금합니다. 이 간단해 보이는 기술(記述) 안에 무엇이 들어있길래 드릴 말씀이 많지만이라 하였으며, 그런데 왜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라고 한 것일까요?

 

이 한 문장은 정말 짧지만, 스베덴보리 전체 저작의 깊은 층을 살짝 열어 보이는 ‘힌트’ 같은 구절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드릴 말씀이 많지만은 태고교회의 사람들과 주님 사이의 직접적 교통, 곧 퍼셉션과 가시적 현현에 대한 매우 깊은 실제 내용들이 있기 때문이고,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는 것은 그것을 지금의 독자 상태로는 오해하거나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먼저 ‘드릴 말씀이 많지만’에 담긴 내용을 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른 곳들에서 조금씩 흘려 말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지금 우리처럼 말씀을 ‘배워서’ 아는 사람들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직접 퍼셉션(perception)으로 아는 사람들’이며,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옳은지를 외부에서 배우지 않고, ‘내면에서 바로 느끼고 분별하는 상태’였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나아가, AC.49가 암시하는 것은 단순한 내적 지각을 넘어서, ‘주님이 실제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 그들과 교통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비유나 상징이 아니라, 스베덴보리에게서는 ‘영계에서 실제로 경험한 사실’입니다. 즉,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과의 교통이 지금보다 훨씬 직접적이어서, 어떤 경우에는 ‘영적 눈으로 주님의 현현을 인식하는 상태’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라는 표현의 배경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실제로 스베덴보리가 다른 저작들에서, 천사들과의 대화, 영계에서의 주님의 현현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드릴 말씀이 많다’는 것은, 단순한 교리 설명이 아니라, ‘인간과 주님의 관계가 지금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졌던 상태 전체’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왜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고 했을까요? 여기에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독자의 상태 문제’입니다. AC를 읽는 사람들은 대부분 ‘영적 인간’의 단계, 즉 양심과 진리를 통해 인도받는 상태에 있습니다. 그런데 태고교회는 그보다 훨씬 위의 ‘천적 인간’ 상태입니다. 이 상태를 충분한 준비 없이 설명하면, 사람은 그것을 ‘자기 상태로 착각하거나, 혹은 신비주의적으로 오해할 위험’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나도 직접 주님을 보고 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식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그것은 오히려 큰 혼란을 가져옵니다.

 

둘째는 ‘섭리적 이유’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반복해서 말합니다. 주님은 각 시대와 각 사람의 상태에 맞게 자신을 드러내신다고. 지금 시대는 태고교회처럼 직접적 현현과 퍼셉션으로 인도받는 시대가 아니라, ‘말씀과 진리를 통해, 그리고 자유와 이성 안에서 인도받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너무 앞선 상태를 상세히 드러내는 것은, 현재 주어진 길, 곧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삶으로 옮기는 길을 흐리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문장은 이렇게 읽혀야 합니다. ‘이 주제는 매우 깊고 실제적인 내용이 있지만, 지금 단계에서는 간략히 언급만 하고 넘어가는 것이 적절하다.’ 즉, 숨기는 것이 아니라, ‘순서를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의 상태에 맞게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우리가 지금은 말씀을 통해 배우고 따르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길입니다.’ 이 정도로 설명하시면, 성도들이 괜히 신비적인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으면서도, 이 구절의 깊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는 것은, 태고교회의 직접적 주님 교통에 관한 깊은 실제들이 있으나, 그것을 지금 단계에서 자세히 밝히는 것은 오해와 혼란을 낳을 수 있기 때문에 섭리적으로 유보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AC 전체를 따라가다 보면, 지금 이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고 되어 있는 부분들이 나중에 다른 글들에서 조금씩 풀려나오는 것을 경험하시게 될 것입니다.

 

 

 

AC.49, 심화 2, ‘렘4:23, 25’

AC.49.심화 23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25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렘4:23, 25) I beheld the earth, and lo, it was void and emptiness, and the hea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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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9, 창1:26,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AC.49-52)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And God said, Let 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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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8.심화

 

1. ‘다섯 번째 상태와 여섯 번째 상태

 

AC.48에 의하면, 다섯 번째 상태에서 사람은 이해에 속한 신앙의 원리로 말하며, 그로써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한다 하고, 여섯 번째 상태에서는 이해에 속한 신앙과, 거기에서 나온 의지에 속한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선을 행한다고 하네요. 뭐가 다른 거지요? 다섯 번째 상태에서는 이해가 주된 반면, 여섯 번째 상태에서는 의지가 주라는 말 같은데, 좀 더 명료하게 설명해 주세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다섯 번째 상태는 이해(진리)가 앞서고 의지는 아직 따라오는 단계이고, 여섯 번째 상태는 의지(사랑)가 중심이 되어 이해와 행동까지 자연스럽게 이끄는 단계’’입니다. 겉으로 보면, 둘 다 ‘진리를 말하고 선을 행한다’는 점에서 비슷해 보이지만, ‘그 근원과 무게 중심이 완전히 다릅니다.’

 

먼저 다섯 번째 상태를 보겠습니다. 여기서는 사람이 ‘이해에 속한 신앙’, 즉 ‘무엇이 옳은가’를 비교적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진리를 가지고 말하고, 판단하고, 심지어 스스로를 설득하기도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그로써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한다’고 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즉, 이 단계의 사람은 이렇게 움직입니다. ‘이게 옳으니까 이렇게 해야 한다.’ 그래서 실제로 선을 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아직 특징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 ‘행동의 중심이 알고 있기 때문에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겁니다. 어떤 사람이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화가 나도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도 용서해야지.’ 그래서 참고, 노력하고, 실제로 용서하려 합니다. 이것은 분명 선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여전히 ‘싸움과 긴장, 그리고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습니다. 이 단계에서는 이해가 주도하고, 의지는 그 이해를 따라가며 형성되고 있는 중입니다.

 

이제 여섯 번째 상태를 보겠습니다. 여기서는 상황이 바뀝니다. 이제 사람은 더 이상 ‘이게 옳으니까 해야 한다’에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대신 ‘‘그렇게 하고 싶다는 상태’가 됩니다. 즉, 의지, 곧 사랑이 중심이 됩니다. 그래서 진리를 말하고 선을 행하는 것이 더 이상 부담이나 의무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흐름’이 됩니다.

 

같은 예로 보면 이렇게 됩니다. 이전에는 ‘용서해야 하니까 참자’였다면, 이제는 ‘저 사람을 이해하고 싶다, 용서하고 싶다’가 됩니다. 그래서 행동이 훨씬 부드럽고 자연스럽고, 억지스럽지 않습니다. 이 상태에서는 이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의지 안으로 들어가 하나가 된 상태’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말할 때도 단순한 논리가 아니라, ‘사랑에서 나오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 두 상태의 차이를 한 줄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다섯 번째 상태는 진리가 사랑을 이끌어 가는 단계이고, 여섯 번째 상태는 사랑이 진리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단계입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포인트가 하나 있습니다. 다섯 번째 상태는 여전히 ‘자기 자신을 확증한다는 표현’이 들어갑니다. 즉, 아직은 어느 정도 ‘내가 이렇게 생각하고, 내가 이렇게 한다’는 의식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여섯 번째 상태로 가면, 점점 이 중심이 바뀌어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사랑이 중심이 되고, 사람은 그것을 받아 행하는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여섯 번째 상태는 단순히 더 착한 상태가 아니라, ‘질적으로 다른 상태’입니다.

 

처음에는 옳은 것을 알기 때문에 선을 행하지만, 나중에는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행하게 됩니다.’

 

다섯 번째 상태는 이해가 주도하여 선을 행하는 단계이고, 여섯 번째 상태는 의지, 곧 사랑이 중심이 되어 진리와 행동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단계입니다.’

 

목사님께서 느끼신 그 미묘한 차이가 바로 거듭남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입니다.

 

 

 

AC.48, 심화 2, ‘상대가 나한테 아직 용서를 구하지 않고 있다면’

AC.48.심화 2. ‘상대가 나한테 아직 용서를 구하지 않고 있다면’ 상대가 아직 저에게 용서를 구하지도 않고 있는데, 무조건 제 쪽에서 먼저 용서해야 하나요? 이건 매우 현실적인 질문이고, 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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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8, 창1:24-25,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 여섯 번째 상태'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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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심화

 

4. 갑작스런 repentance의 등장

 

AC.29 두 번째 단락에, This is the third successive stage of the regeneration of man, being his state of repentance,’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 부분이 좀 어리둥절합니다. 갑자기 repentance가 나오기 때문인데... 이게 어떻게 연결이 되는 건가요?

 

AC.29의 문맥을 처음 읽으면 앞에서는 식물 이야기—‘tender herb’, ‘herb yielding seed’, ‘tree bearing fruit’—를 하다가 갑자기 ‘repentance의 상태’라는 말이 등장하기 때문에 논리 점프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창세기 1장 해석 구조를 보면 이것은 갑작스러운 전환이 아니라 ‘앞 단계에서 준비된 상태의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이 연결을 이해하려면 창세기 1장에서 말하는 거듭남의 초기 단계들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의 첫 부분을 인간 거듭남의 초기 과정으로 설명하면서 대략 이런 흐름을 말합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완전히 혼돈과 어둠 속에 있습니다. 그다음 진리의 빛이 조금씩 들어옵니다. 그리고 진리와 거짓이 분리되기 시작합니다. 이런 과정을 지나면 사람 안에 ‘진리를 받아들이는 상태’, 곧 식물로 상징되는 단계가 나타납니다. 바로 여기서 ‘herb’와 ‘tree’가 등장합니다. 즉 사람 안에 처음으로 선과 진리의 싹이 나타나는 단계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repentance의 상태’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처음으로 진리를 받아들이고 선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할 때 반드시 함께 일어나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상태를 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했던 것들, 자신의 생각과 삶이 괜찮다고 여겼던 것들이 진리의 빛 속에서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 순간에 사람은 처음으로 ‘자기 삶을 돌아보고 바꾸려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repentance입니다.

 

여기서 repentance라는 말을 오늘날 흔히 생각하는 의미—큰 죄를 뉘우치며 눈물로 회개하는 사건—으로 이해하면 연결이 어려워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repentance는 훨씬 더 기본적인 의미입니다. 그것은 ‘자기 삶을 돌아본 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보고, 그것을 바꾸려는 의지’입니다. 다시 말해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이 자신의 삶을 그 진리에 맞추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AC.29의 식물 비유와 repentance는 실제로 매우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tender herb’는 사람이 처음으로 진리를 듣고 마음이 움직이는 상태입니다. ‘herb yielding seed’는 그 진리가 생각 속에서 자라 다른 진리를 낳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tree bearing fruit’는 그 진리가 실제 삶 속에서 행동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이렇게 진리에 따라 삶을 바꾸기 시작하는 바로 그 과정이 ‘repentance’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식물 단계 전체를 ‘repentance의 상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씀을 듣다가 ‘나는 지금까지 너무 자기중심적으로 살았구나’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듭니다. 이것이 tender herb입니다. 그다음 그는 말씀을 더 배우면서 자신의 행동들을 돌아보기 시작합니다. ‘내가 왜 이렇게 말했을까?’, ‘이 행동은 옳았을까?’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이것이 herb yielding seed입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는 실제 행동을 바꾸기 시작합니다. 이전에는 쉽게 화를 냈다면 이제는 참아 보려고 노력합니다. 이전에는 남을 비판했다면 이제는 말을 조심합니다. 이것이 tree bearing fruit입니다. 바로 이 전체 과정이 repentance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AC.29에서 repentance가 갑자기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식물의 성장 비유가 바로 repentance의 실제 모습’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삶에 적용하기 시작할 때, 그 순간이 바로 회개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회개를 거듭남의 매우 초기 단계로 보고 있습니다. 아직 완전히 거듭난 상태는 아니지만, 사람이 처음으로 ‘자기 삶을 진리의 빛 속에서 고치기 시작하는 단계’이기 때문에 그것을 ‘repentance의 상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회개는 어떤 특별한 감정 사건이 아니라, 진리를 알게 된 사람이 ‘자기 삶을 그 진리에 맞추어 바꾸기 시작하는 과정’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식물이 처음 자라는 장면이 바로 그 회개의 시작을 상징한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AC.29, 창1:11-13,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

11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12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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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 심화 3,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 단계에서도 ‘생명 없는’(inanimate) 상태?

AC.29.심화 3.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 단계에서도 ‘생명 없는’(inanimate) 상태? 위 심화 1의 세 번째 단계인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 단계, 즉 ‘진리가 삶의 성품이 되며, 선한 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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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심화

 

3.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 단계에서도 생명 없는(inanimate) 상태?

 

위 심화 1의 세 번째 단계인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 단계,  진리가 삶의 성품이 되며, 선한 행동이 열매처럼 자연스럽게 나오는 단계에서도 여전히 생명 없는(inanimate) 상태일 수가 있나요?

 

이 질문은 사실 창세기 1장 해석에서 매우 미묘하지만 핵심적인 지점을 건드립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 단계에서도 여전히 어느 정도 inanimate’, 곧 완전히 살아 있는 상태는 아닐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창세기 해석 구조를 보면 이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흐름입니다.

 

먼저 ‘inanimate’라는 표현의 의미를 정확히 짚을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animate’와 ‘inanimate’는 단순히 활동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생명의 근원이 어디에 있다고 느끼느냐’의 문제입니다. 사람이 어떤 선한 일을 하고 진리를 말하며 실제 삶에서 선한 열매를 맺고 있어도, 그 사람이 그 선과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여긴다면’,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완전히 살아 있는 상태라고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생명은 오직 주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선이 아무리 아름다워 보일지라도, 그것이 여전히 ‘나의 선’이라는 의식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면 그 상태는 완전히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 ‘자기 생명처럼 보이는 상태’, 곧 어느 의미에서는 ‘inanimate’에 가까운 상태입니다.

 

이 점에서 창세기 1장의 식물 단계가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식물들을 설명할 때 ‘‘living soul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대신 ‘herb’, ‘tree’, ‘fruit’ 같은 식물적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의도적인 것입니다. 식물은 생명이 있지만 ‘자기 스스로 움직이거나 의식적으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영적 의미에서, 사람이 선과 진리를 가지고 있고 실제로 선한 삶을 살고 있어도 아직 그 선이 ‘자유로운 사랑에서 살아 움직이는 상태까지는 이르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의 이 단계는 선이 존재하지만, 아직 완전히 ‘animate’ 상태는 아닌 단계로 이해됩니다.

 

어떤 성도가 오랜 신앙생활을 통해 매우 성실하고 선한 삶을 살고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정직하며 교회에서도 헌신적으로 봉사합니다. 그의 삶에는 분명히 ‘fruit’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이런 생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는 그래도 꽤 선하게 살아왔다’, ‘내가 이렇게 봉사해 왔다.’ 이것은 교만한 마음이라기보다 자연스러운 자기의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이 상태에서도 여전히 선의 근원이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있기 때문에’ 완전히 살아 있는 상태는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다음 단계로 이어지는 이유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식물 다음에 등장하는 것이 ‘‘living soul’, 즉 살아 있는 생명’입니다. 이것은 동물 단계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동물은 ‘사랑과 애정(affection)을 상징합니다. 즉 사람이 선과 진리를 단순히 알고 실천하는 수준을 넘어, 그것을 ‘사랑 자체로 살기 시작할 때’ 비로소 진짜 ‘animate’ 상태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때 사람은 선을 행하면서도 그것이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 것이라는 걸 더 깊이 인식하게 됩니다.’

 

그래서 ‘tree bearing fruit’ 단계는 매우 중요한 단계이지만 아직 최종 단계는 아닙니다. 이 단계에서는 진리가 실제 삶의 열매로 나타나지만, 사람은 여전히 어느 정도는 ‘자기 자신이 그 선을 행한다고 느끼는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다음 단계로 들어가면 사람은 점점 더 분명히 깨닫습니다. ‘내가 하는 선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통해 하시는 선이구나.’ 그때 선은 더 이상 식물처럼 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사랑으로 살아 움직이는 생명’이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구조를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먼저 진리가 싹트는 단계가 있고, 그다음 진리가 열매를 맺는 삶의 단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이 완전히 살아 있는 생명이 되기 위해서는 그 선이 ‘사랑에서 나오고, 또한 주님에게서 온 것임을 인정하는 상태’로 들어가야 합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식물의 상징이 끝나고 ‘living soul’이 등장합니다.

 

사람은 선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이 아직 ‘내가 하는 선’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열매가 맺힌 단계이지만 아직 완전히 살아 있는 단계는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이 점점 더 빛 속으로 들어가면, 그 선이 주님에게서 온 것임을 알게 되고 그때 선은 진짜 생명처럼 살아 움직이게 됩니다. 창세기 1장의 식물에서 동물로 넘어가는 변화가 바로 이 차이를 보여 준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AC.29, 심화 4, ‘갑작스런 repentance의 등장’

AC.29.심화 4. ‘갑작스런 repentance의 등장’ AC.29 두 번째 단락에, ‘This is the third successive stage of the regeneration of man, being his state of repentance,’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 부분이 좀 어리둥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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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 심화 2, ‘각기 종류대로’

AC.29.심화 2. ‘각기 종류대로’ ‘각기 종류대로’라는 표현이 계속 나오는데요, 그냥 다양한 종류의 채소, 나무라는 단순한 의미만은 아니겠지요? ‘각기 종류대로’라는 표현은 창세기 1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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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심화

 

2. 각기 종류대로

 

각기 종류대로라는 표현이 계속 나오는데요, 그냥 다양한 종류의 채소, 나무라는 단순한 의미만은 아니겠지요?

 

각기 종류대로’라는 표현은 창세기 1장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문자적으로만 보면 단순히 식물이 여러 종류로 나뉘어 있다는 뜻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표현을 훨씬 깊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종류(kind, genus, species)라는 말은 단순한 생물학적 분류가 아니라 ‘선과 진리의 질서와 구별’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주님이 창조하시는 것은 무질서한 혼합이 아니라, 각각 고유한 성질을 가진 선과 진리들이 ‘자기 질서 속에서 자라도록 하는 것’입니다.

 

먼저 자연적인 차원에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자연 세계에서도 모든 생명은 ‘종류대로’ 번식합니다. 밀은 밀을 낳고, 포도는 포도를 낳습니다. 이것은 자연의 질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자연의 질서가 사실은 더 깊은 영적 질서를 반영한다고 말합니다. 즉 인간의 영적 삶에서도 ‘각 선과 진리는 그 고유한 성질에 따라 자라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랑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 친구 사이의 우정, 이웃을 돕는 자비,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 등이 모두 다릅니다. 이 사랑들은 서로 관련되어 있지만 동일하지 않습니다. 각각 고유한 성질과 역할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영적 의미에서 ‘각기 종류대로’입니다.

 

거듭남의 과정에서도 이 원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이 선을 배우고 진리를 받아들일 때, 그것들이 무질서하게 섞이면 건강한 영적 생명이 자라기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진리를 사랑하지만,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선한 감정은 있지만 진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상태를 ‘혼합’ 또는 ‘혼동’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사람을 거듭나게 하실 때는 선과 진리가 ‘자기 종류와 질서에 맞게 자라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창세기에서 계속 ‘각기 종류대로’라는 표현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실제 신앙생활에서도 이 원리를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진리를 배우는 기쁨이 먼저 자랍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이웃을 돕는 사랑이 먼저 자랄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는 경건한 예배의 마음이 강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서로 다른 ‘종류’의 선과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주님에게서 온 것이라면 각각의 자리에서 조화를 이루며 성장합니다. 이것이 ‘각기 종류대로 열매 맺는다’는 의미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의미는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이 섞이지 않는다는 원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선과 진리는 서로 결합하지만, 선과 악은 결합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영계에서는 모든 것이 결국 자기 ‘종류’에 따라 나뉘게 됩니다. 선한 사랑은 선한 사랑과 함께 있고, 이기적인 사랑은 그와 같은 것들과 함께 모입니다. 이 점에서도 ‘각기 종류대로’라는 표현은 단순한 식물 분류가 아니라 ‘영계의 근본 질서’를 나타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거듭나게 하실 때 모든 사람을 똑같은 모습으로 만들지 않으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지혜가, 어떤 사람에게는 자비가, 어떤 사람에게는 봉사의 마음이 더 두드러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주님에게서 온 선과 진리라는 공통된 뿌리 안에서 자랍니다. 이것이 바로 ‘각기 종류대로’라는 표현이 가리키는 깊은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 표현은 단순히 ‘여러 종류의 채소와 나무가 있다’는 자연 묘사가 아니라, ‘주님이 인간의 영적 삶을 질서 있게 자라게 하시는 방식’을 보여 주는 말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반복되는 이 표현은 결국 한 가지 중요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주님이 창조하시는 모든 생명은 무질서하게 섞이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고유한 성질과 자리 속에서 조화를 이루며 자라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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