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In the sweat of thy face shalt thou eat bread, till thou return unto the ground; for out of it wast thou taken; for dust thou art, and unto dust shalt thou return. (3:19)



AC.275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By eating bread in the sweat of the face)는 천적인 것(celestial things)을 싫어하고 멀리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to return to the ground from whence he was taken)는 거듭나기 이전에 그러하였던 것과 같은 겉 사람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dust thou art, and unto dust shalt thou return)는 그가 정죄된 상태, 곧 지옥적 상태에 있게 됨을 의미합니다. By “eating bread in the sweat of the face,” is signified to be averse to what is celestial; to “return to the ground from whence he was taken,” is to relapse into the external man, such as he was before regeneration; and “dust thou art, and unto dust shalt thou return” signifies that he is condemned and infernal.

 

 

해설

 

AC.275는 창3:19에 대한 내적 의미를 간결하면서도 매우 강하게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문자적으로는 인간의 노동, 죽음, 그리고 육체의 흙으로의 귀환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전적으로 영적 상태의 변화로 해석합니다.

 

먼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라는 말씀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생계를 위한 고된 노동을 뜻한다고 이해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먹을 것’을 천적 선,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의 선으로 이해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원래 그러한 천적 생명 가운데 살았기 때문에, 선과 진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타락 이후에는 그것이 더 이상 즐거움이 아니라 수고와 저항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천적 생명을 기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거기에 저항하고 멀어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천적인 것에 대한 반감과 소외를 뜻합니다.

 

다음으로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라는 말씀은 육체가 흙으로 돌아간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영적 퇴보로 이해합니다. 원래 인간은 거듭남을 통해 겉 사람이 속 사람의 지배 아래 놓이는 상태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타락이 진행되면 반대로 겉 사람이 다시 주도권을 잡게 되고, 사람은 거듭나기 이전의 자연적 상태로 되돌아갑니다. 그래서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라는 것은 영적 상승의 반대 방향, 곧 겉 사람 중심의 삶으로의 회귀를 의미합니다.

 

특히 마지막의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에 대한 해석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육체적 죽음에 대한 선언으로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영적으로 볼 때, 인간은 결코 소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dust)은 물질 자체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분리된 가장 낮은 자연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흙은 생명이 없는 것이며, 바람에 날리는 것이고, 발 아래 밟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라는 것은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거부함으로써 영적으로 가장 낮고 생명 없는 상태로 떨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정죄(condemnation)와 ‘지옥적 상태(infernal state)로 설명합니다. 물론 이것도 주님께서 인간을 지옥으로 보내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의 AC.269에서 설명했듯이, 인간이 스스로 주님에게서 멀어질 때, 그 결과로 그러한 상태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생명과 천국을 주시지만, 사람이 그것을 거부하면 결국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만 남게 되고, 그것이 바로 지옥의 본질입니다.

 

AC.275는 창3의 심판 선언이 단순한 육체적 노동과 육체적 죽음의 기원을 설명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태고교회가 주님으로부터 멀어지면서 겪게 된 영적 쇠퇴의 마지막 단계를 묘사하는 말씀입니다. 천적인 것을 싫어하게 되고, 거듭남 이전의 겉 사람 상태로 되돌아가며, 마침내 생명의 근원과 분리된 ‘’의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인간 존재의 비극이 죽음 자체가 아니라 주님과의 분리에 있음을 보여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274, 창3:18,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창3:18)AC.274‘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to eat the herb of the field), 곧 거친 음식(wild food)을 먹는다는 것은, 들짐승처럼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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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74.심화

 

2. ‘37:26-27

 

26네가 어찌하여 듣지 못하였느냐 이 일들은 내가 태초부터 행한 바요 상고부터 정한 바로서 이제 내가 이루어 네가 견고한 성읍들을 헐어 돌무더기가 되게 하였노라 27그러므로 그 주민들이 힘이 약하여 놀라며 수치를 당하여 들의 풀 같이, 푸른 나물 같이, 지붕의 풀 같이, 자라지 못한 곡초 같이 되었느니라 (37:26, 27) Hast thou not heard how I have done it long ago, and from the days of old have I formed it; now have I brought it to pass, and it shall be to lay waste bulwarks, fenced cities, in heaps; and their inhabitants, short of hand, were dismayed and put to shame; they were made the grass of the field, and the green [olus] of the herb, the grass of the housetops, and a field parched before [coram] the standing corn (Isa. 37:26–27).

 

 

스베덴보리가 AC.274에서 사37:26-27을 인용하는 이유는, 창3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이라는 말씀이 영적으로 자연적 생명만을 따라 살아가는 상태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사야는 ‘들의 풀’, ‘푸른 나물’, ‘지붕의 풀’, ‘자라지 못한 곡초’라는 여러 식물 비유를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잃은 사람과 교회의 상태를 단계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주민들이 힘이 약하여 놀라며 수치를 당하여 들의 풀 같이, 푸른 나물 같이, 지붕의 풀 같이, 자라지 못한 곡초 같이 되었느니라’라는 말씀은, 단순히 식물 종류를 나열한 것이 아니라, 영적 생명이 점차 쇠퇴,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는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먼저 ‘들의 풀’과 ‘푸른 나물’은 쉽게 자라고 쉽게 시드는 식물입니다.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깊은 생명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감각과 기억 지식에만 의존하는 자연적 생명을 상징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겉으로는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영원한 생명을 맺는 열매는 자라나지 못합니다.

 

이어지는 ‘지붕의 풀’은 더욱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지붕 위에는 흙이 거의 없기 때문에, 풀이 잠시 돋아날 수는 있어도 오래 자라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과의 내적 연결 없이 외적 지식과 형식만으로 유지되는 신앙도 잠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뿐, 유혹과 시련을 만나면 쉽게 메말라 버립니다. 이는 겉 사람은 활동하고 있지만, 속 사람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지 못하는 상태를 보여줍니다.

 

또한 ‘자라지 못한 곡초’는 영적 성장의 중단을 의미합니다. 곡식은 본래 열매를 맺기 위하여 자라야 하지만, 아직 익기도 전에 말라 버리면 아무런 결실도 남기지 못합니다. 이처럼 사람 안에 심겨진 선과 진리도 주님으로부터 계속 생명을 공급받지 못하면 거듭남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중도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이것이 영적 황폐(vastation)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서 이 본문의 ‘태초부터’와 ‘상고부터’라는 표현에도 주목합니다. 그는 이것을 단순히 먼 옛날을 뜻하는 시간 표현으로 보지 않고, 홍수 이전 태고교회 말기를 가리키는 상응적 표현으로 이해합니다. 곧 이사야는 당시의 역사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오래된 교회가 어떻게 주님으로부터 멀어져 영적으로 메말라 갔는지를 함께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사37:26-27은 창3과 직접 연결됩니다. 창3에서는 사람이 타락한 결과 ‘밭의 채소를 먹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고, 사37에서는 그 결과가 ‘들의 풀’, ‘푸른 나물’, ‘지붕의 풀’, ‘자라지 못한 곡초’라는 다양한 상징으로 더욱 자세하게 설명됩니다. 즉,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잃을수록 점점 깊은 영적 황폐 속으로 들어가며, 결국 열매 없는 생명만 남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사37:26-27을 인용하는 이유는, 창3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이라는 말씀이 단순히 자연적인 음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영적 생명을 잃은 사람의 상태를 뜻한다는 사실을 성경 전체를 통하여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들의 풀’, ‘푸른 나물’, ‘지붕의 풀’, ‘자라지 못한 곡초’는 모두 생명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참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상태를 상징하며, 이를 통하여 스베덴보리는 타락한 사람의 영적 상태를 더욱 선명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AC.274, 창3:18,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창3:18)AC.274‘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to eat the herb of the field), 곧 거친 음식(wild food)을 먹는다는 것은, 들짐승처럼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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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74, 심화 1, ‘단4:25’

AC.274.심화 1. ‘단4:25’ 왕이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며 소처럼 풀을 먹으며 하늘 이슬에 젖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낼 것이라 그때에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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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74.심화

 

1. ‘4:25

 

왕이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며 소처럼 풀을 먹으며 하늘 이슬에 젖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낼 것이라 그때에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아시리이다 (4:25) They shall drive thee from man, and thy dwelling shall be with the beast of the field; they shall make thee to eat grass as oxen, and seven times shall pass over thee (Dan 4:25).

 

 

스베덴보리가 AC.274에서 단4:25를 인용하는 이유는, 창3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이라는 말씀이 단순히 음식에 관한 말이 아니라, 사람이 영적으로 들짐승과 같은 상태로 살아가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성경 자체로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느부갓네살이 ‘소처럼 풀을 먹게’ 된 사건은 바로 이러한 영적 상태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왕이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며 소처럼 풀을 먹으며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낼 것이라’라는 말씀은, 느부갓네살이 단순히 육체적으로 짐승처럼 살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사람의 영적 상태를 보여주는 상응으로 이해합니다. 곧 주님을 떠난 사람은 비록 인간의 모습을 하고 살아가지만, 영적으로는 들짐승과 같은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 ‘사람에게서 쫓겨나서’는 참된 인간성을 잃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사람은 단순히 이성과 언어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주님과의 연결을 잃으면 육체는 여전히 사람이지만, 영적으로는 더 이상 참된 사람이 아닙니다.

 

또한 ‘들짐승과 함께 살며’는 삶의 중심이 영적인 것에서 자연적인 것으로 바뀌었음을 나타냅니다. 들짐승은 본능과 감각을 따라 살아갑니다. 마찬가지로 own과 자기 사랑에 지배되는 사람도 감각과 욕망을 따라 살아가며,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인도를 받지 못합니다. 이것이 창3에서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으로 표현된 상태입니다.

 

소처럼 풀을 먹으며’라는 말씀도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풀은 쉽게 자라고 쉽게 마르는 식물로서, 깊은 생명력을 가진 열매와는 대조됩니다. 따라서 ‘풀을 먹는다’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선과 진리가 아니라, 자연적 욕망과 감각 수준에서만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상징을 통하여 사람이 영적 생명을 잃으면 들짐승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일곱 때를 지낼 것이라’라는 표현도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성경에서 ‘일곱’은 완전한 상태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일곱 때’는 단순히 일곱 해를 뜻하기보다, 이러한 낮아진 상태가 충분히 이루어지고, 그 교만이 완전히 꺾일 때까지의 전 과정을 상징합니다. 그 후에야 느부갓네살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다시 회복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단4:25를 인용하는 이유는, 창3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이라는 말씀을 해석하는 가장 분명한 예를 제시하기 위해서입니다. 느부갓네살은 자기 사랑과 교만으로 말미암아 참된 인간의 상태를 잃고, 들짐승과 함께 살며, 소처럼 풀을 먹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거부하면 영적으로는 들짐승처럼 살아가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창3의 상징이 말씀 전체에서 일관되게 사용되고 있음을 증명하는 대표적인 본문입니다.

 

 

 

AC.274, 심화 2, ‘사37:26-27’

AC.274.심화 2. ‘사37:26-27’ 26네가 어찌하여 듣지 못하였느냐 이 일들은 내가 태초부터 행한 바요 상고부터 정한 바로서 이제 내가 이루어 네가 견고한 성읍들을 헐어 돌무더기가 되게 하였노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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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74, 창3:18,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창3:18)AC.274‘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to eat the herb of the field), 곧 거친 음식(wild food)을 먹는다는 것은, 들짐승처럼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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