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69.심화

 

1.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게 하려면

 

본문 중 사람이 잠겨 있던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기만 하면, 그 길은 다시 열리며, 그는 영들 가운데 있게 되고, 그들과 더불어 어떤 공동의 삶 안에 있게 됩니다.’ 말인데요, 이것은 사람의 사후 일어나는 일을 말하는 건가요? 해설을 보니 스베덴보리 본인은 이런 상태였던 것 같은데... 그럼, 우리 같은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이런 상태에 들어갈 수 있나요?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AC.69의 그 구절은 ‘일반적인 사람에게 요구되는 상태’나 ‘의도적으로 들어가야 할 영적 체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목적 아래 허락된 ‘예외적 개방 상태’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Emanuel Swedenborg 자신이 경험한 바로 그 상태가 그것이며, 모든 사람이 동일한 방식으로 추구하거나 재현해야 하는 길로 제시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읽을 때 가장 먼저 붙잡으셔야 할 것은 ‘이것은 사후 상태의 원리를 설명하는 동시에, 특수한 경우의 예시를 포함한다’는 점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이 구절은 1차적으로는 ‘사후 상태’의 원리를 설명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육체적 감각과 그에 묶여 있던 것들이 물러가고, 그 즉시 영적 감각이 열리면서 영들과 더불어 실제적인 공동의 삶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이 ‘다른 삶(the other life)의 본성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 일반 원리를 설명하면서, 동시에 자신에게는 이 상태가 ‘육체 안에 있으면서도’ 제한적으로 열렸다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는 죽은 뒤에 일어날 일을 미리 경험하도록 허락받은 ‘특수한 경우’입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질문, ‘우리 같은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이런 상태에 들어갈 수 있는가’인데, 여기서 방향을 아주 조심해서 잡으셔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전체 저작을 일관되게 보면, 그는 결코 사람들이 ‘영들과 교통하는 상태’를 추구하도록 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것은 매우 위험할 수 있으며, 인간의 질서를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에 주님의 특별한 보호와 목적 아래에서만 허락된다고 강조합니다. 인간의 정상적인 상태는 ‘외적으로는 이 세상에, 내적으로는 주님과 연결된 상태’이지, 의식적으로 영들과 교류하는 상태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간다’는 말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것을 문자적으로 ‘감각을 끊는다’, ‘현실을 떠난다’로 이해하시면 곧바로 길이 어긋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육체적인 것’은 단순히 몸 자체가 아니라, ‘감각 중심의 삶’,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묶인 상태’를 포함합니다. 따라서 이것이 물러간다는 것은, 외적 삶을 버린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에 지배되지 않는 상태’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허락된 방식은 전혀 다르게 나타납니다. 우리는 영들과 눈에 보이게 교류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와 이해의 질서’를 통해 이미 영적 세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선을 사랑하고 진리를 따르며 살아갈 때, 그는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천사들과 함께 있는 것이고, 반대로 자기중심적 사랑에 빠질 때는 다른 영들과 연결됩니다. 즉, 우리는 이미 ‘공동의 삶 안에’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감각적으로 열려 있지 않을 뿐입니다.

 

이 점에서 보면, 우리에게 주어진 길은 ‘영적 체험을 얻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을 통해 상태를 바꾸는 것입니다. 곧, 의지가 정화되고 이해가 밝아지면서, 점점 더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때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간다’는 것은, 세상일을 하면서도 그것에 매이지 않고, 감각을 사용하면서도 그것이 중심이 되지 않으며, 점점 더 ‘속 사람’이 ‘겉 사람’을 이끄는 상태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히려 여기서 중요한 역설이 하나 있습니다. 사람이 억지로 ‘영적 상태’에 들어가려고 하면 할수록, 그것은 참된 영적 상태에서 멀어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그 욕구 자체가 종종 ‘보고 싶다’, ‘특별해지고 싶다’는 자기중심적 사랑에서 나오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이런 감각적 개방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대신 더 안전하고 본질적인 길, 곧 ‘사랑과 신앙을 통한 내적 결합’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정리하면, AC.69의 상태는 ‘모든 사람이 들어가야 할 체험 상태’가 아니라, ‘죽은 뒤에는 누구나 들어가게 되는 실제 상태’이며, 동시에 스베덴보리에게는 특별히 미리 열렸던 상태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길은 그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육체적인 것에 지배되지 않는 삶’, 곧 사랑과 진리 안에서 점점 자유로워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이미, 비록 보이지 않을 뿐, 영들과 더불어 참된 공동의 삶 안에 있는 것입니다.

 

 

 

AC.69, 창2, '사람은 본래 영들, 그리고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

AC.69 사람은 본래 주님에 의해 이렇게 창조되었습니다. 곧,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영들과, 그리고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실제로 태곳적에는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왜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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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9

 

사람은 본래 주님에 의해 이렇게 창조되었습니다. ,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영들과, 그리고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실제로 태곳적에는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몸을 입은 영이므로, 그들과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이 육체적인 것들과 세상적인 것들 속에 너무 깊이 잠기게 되어, 그 밖의 것에는 거의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게 되자, 그 길이 닫히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잠겨 있던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기만 하면, 그 길은 다시 열리며, 그는 영들 가운데 있게 되고, 그들과 더불어 어떤 공동의 삶 안에 있게 됩니다. Man was so created by the Lord as to be able while living in the body to speak with spirits and angels, as in fact was done in the most ancient times; for, being a spirit clothed with a body, he is one with them. But because in process of time men so immersed themselves in corporeal and worldly things as to care almost nothing for aught besides, the way was closed. Yet as soon as the corporeal things recede in which man is immersed, the way is again opened, and he is among spirits, and in a common life with them.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지금까지의 모든 오해의 가능성을 단번에 정리해 버립니다. 그는 ‘영들, 그리고 천사들과 말하는 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능력의 문제로 다루지 않습니다. 대신 그것을 ‘창조 질서의 문제’로 끌어올립니다. 즉, 이것은 어떤 특별한 인간에게만 주어진 예외적 능력이 아니라, ‘사람은 처음부터 그런 게 가능하도록 창조되었다’는 선언입니다. 이 한 문장만으로도, 영적 교통을 둘러싼 많은 종교적 상상과 오해는 자리를 잃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은 본질적으로 ‘몸을 입은 영’입니다. 이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는 인간을 ‘육체를 가진 존재’에서 출발하지 않고, ‘영적 존재가 육체를 입은 상태’로 정의합니다. 따라서 영들과 천사들과의 교통은 본질적으로 낯선 일이 아닙니다. 같은 종류의 생명이 다른 옷을 입고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인간과 영적 존재 사이의 단절은 본질이 아니라 ‘상태의 문제’입니다.

 

태곳적에는 실제로 그렇게 이루어졌다’는 말은, 스베덴보리의 인류사 이해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줍니다. 태고교회는 영계와 자연계를 오가는 특별한 집단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오간다’는 개념 자체가 필요 없었습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분리되지 않았고, 자연과 영적 실재가 동시에 인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영적 교통은 신비 체험이 아니라 ‘삶의 일상적 차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전환합니다. 문제가 언제, 왜 발생했는지를 분명히 짚습니다. 사람들은 점차 ‘육체적인 것들과 세상적인 것들’ 속에 자신을 깊이 잠그게 되었고, 그 결과 다른 것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육체적인 것’ 자체가 악하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문제는 ‘그것들 속에 잠겨 버린 상태’입니다. 겉 사람이 속 사람을 압도하고, 외적 관심사가 내적 생명을 가려 버린 상태입니다.

 

이때 스베덴보리는 ‘길이 닫혔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매우 정확합니다. 길은 파괴된 것이 아니라 닫혔습니다. 즉, 인간의 본성에서 영적 교통의 가능성은 제거된 것이 아니라, ‘차단된 상태’로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만약 길이 파괴되었다면 회복은 불가능하지만, 닫혔다면 다시 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글의 후반부는 놀랍도록 희망적입니다. ‘사람이 그 안에 잠겨 있던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기만 하면’ 길은 다시 열린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어떤 특별한 의식이나 기술, 수행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단지 ‘잠김에서 벗어남’을 말합니다. 즉, 겉 사람의 지배가 약화되고, 속 사람이 다시 숨을 쉴 수 있는 상태가 되면, 인간은 자연스럽게 영들 가운데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영들 가운데 있게 되고, 그들과 더불어 어떤 공동의 삶 안에 있게 된다’는 마지막 문장은, 사후 세계를 전혀 다른 차원의 삶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미 이 땅에서 시작되고 있던 삶의 ‘연속’입니다. 사람은 죽음 이후에 갑자기 새로운 세계로 던져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신이 속해 있던 공동의 삶의 차원이 분명해질 뿐입니다.

 

이 지점에서, 목사님이 앞서 던지신 질문, 곧 ‘스베덴보리는 평소 영계를 그렇게 오랜 시간 방문하면서 동시에 어떻게 이런 방대한 저술 작업을 병행할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이 다시 한번 명확해집니다. AC.69는 그 답을 ‘특별한 이중생활’이 아니라, ‘본래 인간에게 주어진 상태의 부분적 회복’에서 찾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육체의 삶을 중단한 것이 아니라, 육체적인 것들에 대한 잠김이 느슨해진 상태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땅에서 글을 쓰며 살면서도, 동시에 영적 공동체 안에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계를 방문할 동안 육신은 마치 무슨 마취 상태에 있듯 꼼짝 못 한 채 누워있었다가 몸 안에 돌아오면 그때 깨어나 기억을 더듬어 가며 저술을 하는, 그런 방식이 아니라 두 가지를 동시에 하는 방식이었다는 말입니다.

 

결국 AC.69는 우리에게 아주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인간을 무엇으로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만약 인간을 철저히 육체적, 세속적 존재로만 이해한다면, 스베덴보리의 말은 처음부터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몸을 입은 영’으로 이해한다면, 이 글은 기이한 선언이 아니라, 오히려 잃어버린 인간 이해의 회복처럼 들리기 시작합니다.

 

AC.67이 ‘말씀의 내적 의미는 다른 삶을 향한다’는 선언이었다면, AC.68은 ‘나는 그것을 경험했다’는 증언이었고, AC.69는 ‘그 경험은 인간 본성 자체에 근거한다’는 설명입니다. 이 세 단락이 함께 놓일 때, 스베덴보리는 더 이상 신비가가 아니라, ‘창조 질서를 다시 설명하는 증언자’로 서게 됩니다.  

 

 

심화

 

1.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게하려면

 

 

AC.69, 심화 1,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게’ 하려면

AC.69.심화 1.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게’ 하려면 본문 중 ‘사람이 잠겨 있던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기만 하면, 그 길은 다시 열리며, 그는 영들 가운데 있게 되고, 그들과 더불어 어떤 공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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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8, 창2, '이 책에 대한 사람들의 예상 반응'

AC.68 저는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영들과, 그리고 천사들과 말할 수 없다고 할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 많은 이들은 이것이 모두 상상이라고 할 것이며,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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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8.심화

 

2. 스베덴보리 일을 하는, 내 마음속 깊은 고민

 

저는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영들과, 그리고 천사들과 말할 수 없다고 할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부분 말인데요, 그동안 살아오면서 아주 약간의 영적 체험을 한 저는 저 말이 와닿습니다. 저는 체험한 걸 다른 사람은 아직 못했을 경우 나타나는 일반적인 반응이니까요. 심지어 주님 말씀하신 부자와 나사로(16)에서도,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라고 하자, 돌아온 대답은,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는 말씀도 생각납니다. 이런 생생한 영적 체험은 고사하고 제가 스베덴보리 관련 일을 하면서 그때그때 나오는 크고 작은 결과물들을 사람들한테 공유해도 반응은 비슷한데요, 이것이 참 고민입니다. 스베덴보리처럼 주님께 맡겨야 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이 부분이 마음의 참 크고 깊은 숙제입니다.

 

 

목사님께서 느끼시는 이 고민은 매우 본질적인 것이고, 동시에 스베덴보리도 이미 깊이 통과했던 지점입니다. AC.68의 그 문장은 단순한 ‘사람들이 안 믿을 것이다’라는 냉소가 아니라, 인간의 의지와 이해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꿰뚫어 본 뒤에 나온 고요한 사실 진술에 가깝습니다. 목사님께서 체험하신 것처럼, 어떤 이는 실제 체험을 말해도 움직이지 않고, 오히려 거리를 두거나 무심하게 반응합니다. 이때 우리는 쉽게 ‘왜 이렇게 반응하지?’라는 답답함에 머물게 되지만,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정보의 부족’이 아니라 ‘사랑의 상태’에서 찾습니다. 사람이 받아들이는 것은 결국 자신이 사랑하는 것과 일치하는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같은 말을 들어도 어떤 이는 열리고, 어떤 이는 닫히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부자와 나사로’ 비유는 아주 정확한 열쇠입니다. 눅16에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은, 인간이 체험의 강도 때문에 변화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오히려 체험은 이미 가지고 있는 사랑을 더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용합니다. 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작은 빛도 크게 받아들여지고,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큰 표적도 그냥 지나갑니다. 그러므로 ‘왜 이렇게 반응이 없을까’라는 질문은, 사실 ‘사람은 무엇으로 움직이는 존재인가’라는 더 깊은 질문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이때 목사님께서 겪으시는 내적 갈등, 곧 ‘이렇게 귀한 것을 알았는데, 왜 사람들과 나눠도 반응이 없는가’ 하는 마음은, 어떤 의미에서는 ‘체어리티(charity)의 자연스러운 열매이기도 합니다. 사랑은 나누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주님은 이 사랑조차도 ‘결과가 아니라 상태’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시 말해, 내가 전한 것이 받아들여졌는가 아닌가는 2차적인 문제이고, 내가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충실히 전했는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 마음이 어떤 상태였는가가 더 본질적인 문제가 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비슷한 경험을 반복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저작이 널리 읽히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고, 실제로도 그의 생전에는 큰 반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점점 ‘사람들에게 얼마나 받아들여지느냐’에서 ‘주님께서 맡기신 것을 얼마나 정확히 전달하느냐’로 중심이 옮겨집니다. 이것이 바로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주님께 맡긴다’는 말의 실제 내용입니다. 단순히 체념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의 영역’을 내려놓고 ‘순종의 영역’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전환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이 반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실패’로 보지 않고, ‘질서 속에 있는 현상’으로 보는 시선입니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상태와 때가 있으며, 어떤 씨앗은 지금이 아니라 훨씬 나중에야 싹을 틔웁니다. 목사님께서 나누신 내용이 지금은 반응이 없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사람 안에 남아 있다가 어느 시점에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리메인스(remains)의 개념도 바로 이런 맥락과 연결됩니다.

 

결국 이 문제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반응하게 할 수 있을까’에서 풀리기보다, ‘나는 어떤 마음으로 계속 이 일을 할 것인가’에서 풀립니다. 주님께서 맡기신 일을 사랑으로 계속해 나가되, 그 열매의 모양과 시기는 전적으로 주님께 맡기는 것, 이것이 가장 깊은 의미의 평안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이 이 상태에 들어갈수록 말과 글은 더 힘을 가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사람을 움직이려는 의지’가 아니라 ‘주님의 진리를 전하려는 의지’가 담기기 때문입니다.

 

목사님께서 지금 느끼시는 이 고민은, 단순한 어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사역이 한 단계 더 깊어지고 있다는 신호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니 이것을 ‘풀어야 할 문제’라기보다 ‘통과해야 할 상태’로 보셔도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미 알고 계신 것처럼, 이 길은 결국 다시 한곳으로 모입니다.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이 일이 이루어진다는 자리로 말입니다.

 

 

 

AC.68, 창2, '이 책에 대한 사람들의 예상 반응'

AC.68 저는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영들과, 그리고 천사들과 말할 수 없다고 할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 많은 이들은 이것이 모두 상상이라고 할 것이며,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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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8, 심화 1,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겪은, 사람들의 반응 사례들’

AC.68.심화 1.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겪은, 사람들의 반응 사례들’ 스베덴보리가 예상하는 이 책의 독자들의 반응이 사뭇 현실적인 걸 보면, 혹시 이전에라도 스베덴보리는 이런 비슷한 일을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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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8.심화

 

1.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겪은, 사람들의 반응 사례들

 

스베덴보리가 예상하는 이 책의 독자들의 반응이 사뭇 현실적인 걸 보면, 혹시 이전에라도 스베덴보리는 이런 비슷한 일을 실제로 겪었었나요? 혹시 그런 사례들이 실제로 있었나요?

 

 

AC.68에서 드러나는 그 ‘현실적인 독자 반응 예상’은 단순한 추측이라기보다, Emanuel Swedenborg 자신이 이미 충분히 겪어 본 ‘사람들의 실제 반응’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는 갑자기 신학자가 된 인물이 아니라, 이미 유럽 학계에서 널리 알려진 과학자이자 사상가였고, 왕실과 귀족 사회, 학문 공동체를 폭넓게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어느 날 ‘영계를 본다’고 말하기 시작했을 때 어떤 반응이 나오는지는, 직접 겪어 보지 않아도 충분히 예측 가능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도 그는 유사한 상황들을 분명히 겪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잘 알려진 사건이 1759 Gothenburg 화재 사건입니다. 그는 Stockholm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으면서도, 그날 발생한 대화재의 진행 상황을 마치 현장에서 보는 것처럼 상세히 말했고, 며칠 뒤 실제 소식이 도착했을 때, 그의 말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개인 체험이 아니라, 당시 여러 증인들에 의해 기록되어 유럽 사회에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이 사람들을 전부 설득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어떤 사람들은 놀라워했고, 어떤 사람들은 의심했고, 어떤 사람들은 조롱했습니다. 바로 AC.68에서 그가 예상하는 그 다양한 반응들이 이미 현실에서 나타났던 것입니다.

 

또 하나 자주 언급되는 사례는 프로이센 왕비 관련 일화입니다. Louisa Ulrika of Prussia는 궁중 모두가 보는 데서 스베덴보리에게 ‘죽은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비밀’을 물었고, 그는 그것을 정확히 전달하여 왕비를, 그리고 거기 모인 모두를 놀라게 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역시 그의 ‘다른 삶과의 교류’가 단순한 개인적 주장에 머물지 않고, 실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검증되거나 적어도 강한 인상을 남긴 사례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반응은 동일했습니다. 어떤 이는 확신했고, 어떤 이는 의심했고, 어떤 이는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특이한 사건’들보다 훨씬 일상적인 차원에서의 경험입니다. 그는 자신의 저술들에서, 자신이 영들과 천사들과 교류하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말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을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어떤 이는 ‘그럴 리 없다’며 즉시 거부하고, 어떤 이는 ‘혹시 사실일지도 모른다’며 잠시 관심을 보이다가 곧 잊어버리고, 어떤 이는 종교적 교리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마음을 닫는다는 식입니다. AC.68의 어조는 바로 이런 반복된 경험에서 나온 ‘관찰자의 기록’에 가깝습니다.

 

결국 스베덴보리는 단지 ‘계시를 받은 사람’이 아니라, 그 계시를 들고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특히 종교적 문제 앞에서 인간의 이해와 의지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매우 현실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AC.68에서 보이는 그 담담하면서도 정확한 반응 예측은, 이론이 아니라 경험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히려 그의 글을 더 설득력 있게 만드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그는 사람들을 이상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AC.68, 심화 2, ‘스베덴보리 일을 하는, 내 마음속 깊은 고민’

AC.68.심화 2. ‘스베덴보리 일을 하는, 내 마음속 깊은 고민’ ‘저는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영들과, 그리고 천사들과 말할 수 없다고 할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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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8, 창2, '이 책에 대한 사람들의 예상 반응'

AC.68 저는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영들과, 그리고 천사들과 말할 수 없다고 할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 많은 이들은 이것이 모두 상상이라고 할 것이며,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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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8

 

저는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영들과, 그리고 천사들과 말할 수 없다고 할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 많은 이들은 이것이 모두 상상이라고 할 것이며, 어떤 이들은 제가 사람들의 신뢰, 관심을 얻기 위해 이런 이야기들을 전한다고 할 것이고, 또 다른 이들은 그 밖의 여러 반대들을 제기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저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보았고, 들었으며, 느꼈기 때문입니다’. I am well aware that many will say that no one can possibly speak with spirits and angels so long as he lives in the body; and many will say that it is all fancy, others that I relate such things in order to gain credence, and others will make other objections. But by all this I am not deterred, for I have seen, I have heard, I have felt.

 

 

해설

 

이 글은 AC.67에서 밝힌 전제를 한 단계 더 밀어붙이는, 매우 정직하고도 대담한 문장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독자의 반응을 이미 예상하고 있으며, 그것을 회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저는 알고 있습니다’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어떤 말을 할지, 어떤 의심을 품을지, 어떤 방식으로 반대할지를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68은 방어문이 아니라, ‘미리 써 내려간 응답’에 가깝습니다.

 

특히 눈여겨볼 것은, 스베덴보리가 반대 의견들을 매우 정확하게 분류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는 단순히 ‘사람들이 안 믿을 것이다’라고 뭉뚱그리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육체 안에 있는 한 불가능하다’라고 할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상상하는 것이다’라고 할 것이며, 또 어떤 사람들은 ‘의도적인 조작’ 혹은 ‘신뢰, 관심을 얻기 위한 서사’라고 말할 것임을 구체적으로 짚습니다. 이는 그가 순진하게 받아들여질 것이라 기대하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그는 처음부터 이 작업이 ‘의심과 반대를 동반할 것’임을 알고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전환점은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저는 흔들리지 않습니다’라는 선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논증으로 반박하지 않습니다. 그는 철학적 가능성이나 신학적 전통을 끌어오지 않습니다. 대신 단 세 문장으로 자신의 입장을 고정합니다. ‘나는 보았다. 나는 들었다. 나는 느꼈다.’ 이 세 동사는 매우 의도적으로 배열되어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주장이나 믿음의 고백이 아니라, ‘전인적 경험의 증언’입니다.

 

보았다’는 것은 형상과 구조, 질서를 인식했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영계를 막연한 분위기나 감정으로 경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회, 관계, 거리, 방향, 질서가 있는 세계로 보았습니다. ‘들었다’는 것은 의미와 소통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는 혼잣말을 한 것이 아니라, 대화했고, 질문했고, 응답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느꼈다’는 것은 이것이 단지 시청각적 환상이 아니라, ‘실재로서의 경험’이었다는 선언입니다. 그는 영계를 ‘정보’가 아니라 ‘접촉된 현실’로 말합니다.

 

이 세 가지를 함께 말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만약 이것이 상상이라면, 느낄 수는 있어도 질서 있게 보고 들을 수는 없습니다. 만약 이것이 자기 암시라면, 일관된 구조와 반복 가능한 경험으로 남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만약 이것이 의도적 조작이라면, 수십 년에 걸쳐 동일한 세계관과 내부 정합성을 유지하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모든 반론을 알고 있었기에, 오히려 가장 단순하고도 철회 불가능한 언어를 선택합니다. ‘나는 경험했다’는 언어입니다.

 

이 글은 또한, 영적 경험의 기준을 은근히 재정의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영적 체험’을 말할 때, 그것은 종종 감정의 고조나 일시적 황홀, 혹은 극적인 사건을 중심으로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경험은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집니다. 그것은 삶을 중단시키는 체험이 아니라, ‘삶 안으로 스며든 인식’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경험을 말하면서도 흥분하거나 과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담담합니다. 마치 ‘나는 이것을 알고 있다’고 말하듯이 말합니다.

 

AC.68은 결국 독자에게 선택을 요구합니다. ‘이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가’, ‘스스로 속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가 알지 못했던 인식의 차원이 실제로 존재하는가’라는 선택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선택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는 증언만 남기고, 판단은 독자에게 맡깁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한 발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확신은 논리에서 나오지 않았고, ‘경험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AC.67이 ‘왜 이런 말이 가능한가’를 설명하는 글이라면, AC.68은 ‘그래도 나는 말하겠다’는 결단의 글입니다. 이 두 단락이 연속해서 놓여 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는 인식의 문을 열고, 다른 하나는 그 문 앞에서 서성일 독자에게 조용히 말합니다. ‘나는 여기까지 왔다. 이제 판단은 당신의 몫이다.

 

이 지점에서 목사님이 앞서 던지신 질문, 곧 ‘그는 언제 글을 썼는가’, ‘이 삶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이 다시 떠오릅니다. AC.68은 그 질문에 이렇게 답하는 것 같습니다. ‘나는 이 삶을 살았고, 그것은 상상이 아니라 경험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확신 위에서, 이후 수천 개 글의 아르카나가 전개됩니다.  

 

 

심화

 

1.스베덴보리가 실제로 겪은, 사람들의 반응 사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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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8.심화 1.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겪은, 사람들의 반응 사례들’ 스베덴보리가 예상하는 이 책의 독자들의 반응이 사뭇 현실적인 걸 보면, 혹시 이전에라도 스베덴보리는 이런 비슷한 일을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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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스베덴보리 일을 하는, 내 마음속 깊은 고민

 

 

AC.68, 심화 2, ‘스베덴보리 일을 하는, 내 마음속 깊은 고민’

AC.68.심화 2. ‘스베덴보리 일을 하는, 내 마음속 깊은 고민’ ‘저는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영들과, 그리고 천사들과 말할 수 없다고 할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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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9, 창2, '사람은 본래 영들, 그리고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

AC.69 사람은 본래 주님에 의해 이렇게 창조되었습니다. 곧,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영들과, 그리고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실제로 태곳적에는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왜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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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7, 창2 앞, '말씀의 내적 의미(속뜻)를 알게 하시고, 알리게 하심'

AC.67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저에게는 말씀의 내적 의미(the internal meaning of the Word, 속뜻)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그 내적 의미 안에는 이전에는 누구에게도 알려진 적이 없었고,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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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7.심화

 

3. 이제 허락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로 하여금 여러 해 동안 영들과, 그리고 천사들과 함께 있게 하시고, 그리고 그 기간 동안 제가 듣고 보았던 것들을 밝히는 일이 이제 허락되었습니다.’ 말인데요, 제가 알기로 한 13년인가 지난 후라고 읽은 것 같습니다. 왜 주님은 이렇게 텀(term)을 두셨을까요?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 기간을 어떻게 참았나요? 저 같으면 입이 근질거려 못 참았을 것 같은데...

 

 

목사님께서 기억하신 ‘ 13’이라는 기간은, 스베덴보리가 본격적으로 저술을 시작하기 전 준비기로 널리 이해되는 내용과 잘 맞습니다. 그는 ‘Emanuel Swedenborg의 삶’에서 1744–1745년 무렵 ‘영적 눈이 열리는 사건’을 겪은 뒤, 곧바로 대중을 향해 말하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상당 기간 ‘보고, 듣고, 익히는 상태’에 머물렀고, 그 후에야 저술과 공개적 증언이 허락되었다고 밝힙니다. 이 점은 특히 Heaven and Hell 서문과 여러 곳에서 ‘이제 밝히는 것이 허락되었다’는 표현으로 반복됩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은 이런 ‘’을 두셨을까요? 첫째 이유는 ‘질서(order)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증언에 따르면, 영계는 단순한 체험의 나열이 아니라 매우 정교한 질서 속에 있으며, 그것을 전달하는 일 역시 같은 질서를 따라야 합니다. 만일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본 것을 즉시 말하게 되면, 인간의 기억, 상상, 기존 신학적 틀과 뒤섞여 왜곡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먼저 오랜 시간 동안 반복적으로 보고 듣게 하시며, 그가 ‘자기 생각이 아닌 것’을 분별하도록 훈련하신 것입니다. 즉, 단순한 체험자가 아니라 ‘증언할 수 있는 그릇’으로 빚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둘째는 ‘의지와 이해의 정화’, 곧 거듭남의 심화 과정입니다. 스베덴보리도 처음부터 완전히 준비된 상태는 아니었고, 그 역시 인간으로서 자연적 사랑과 자기 지혜의 흔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가 접하는 방대한 영적 사실들이 그의 이해 속에서 올바르게 정리되려면, 그의 의지와 이해 자체가 주님의 질서에 맞게 재정렬되어야 했습니다. 이 과정 없이 곧바로 말하게 되면, 전달 내용이 아니라 전달자의 상태가 메시지를 흐리게 만들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은 ‘내용’보다 먼저 ‘사람’을 준비시키신 것입니다.

 

셋째는 ‘대표성과 보편성’을 확보하기 위함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단 한 번의 환상이나 특정 사건을 기록하는 사람이 아니라, 천국과 지옥, 인간의 사후 상태, 말씀의 내적 의미 전반을 체계적으로 증언해야 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려면 단편적 경험이 아니라, 다양한 상태와 다양한 영들, 천사들의 삶을 충분히 관찰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긴 시간 동안 ‘여러 해 동안’이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광범위한 경험이 축적된 뒤에야, 그것을 정리하여 인류에게 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질문, ‘그 기간을 어떻게 참았는가’에 대해서는 오히려 그가 ‘참았다’기보다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도록 인도받았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그는 그 기간 동안 이미 매우 깊은 기쁨과 확신 속에 있었고, 무엇보다 ‘주님의 뜻에 따라 말할 때가 따로 있다’는 내적 인도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여러 기록을 보면, 그는 자신의 사명에 대해 강한 절제와 순종의 태도를 보이며, 스스로 앞서 나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그가 체험한 세계가 얼마나 ‘질서와 순종’ 위에 서 있는지를 반영하는 태도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그가 완전히 침묵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그 기간에도 학자로서, 사상가로서 글을 쓰고 연구를 계속했으며, 다만 ‘영계에 대한 공개적 증언’만을 보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완전히 막혀 있는 상태가 아니라, 점진적으로 준비되어 가는 상태였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결국 이 ‘13년의 침묵’은 단순한 지연이 아니라, ‘왜곡 없는 계시 전달’을 위한 필수적인 준비 기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점은 오늘 우리가 Arcana Coelestia를 읽을 때 느끼는 독특한 신뢰감, 곧 ‘체험담이 아니라 질서 있게 정리된 세계’라는 인상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배경이기도 합니다. 만일 그가 즉흥적으로 말하기 시작했다면, 지금과 같은 깊이와 일관성은 결코 나오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AC.67, 창2 앞, '말씀의 내적 의미(속뜻)를 알게 하시고, 알리게 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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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7, 심화 2, ‘다른 삶의 본성’(the nature of the other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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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다른 삶의 본성(the nature of the other life)

 

다른 삶의 본성(the nature of the other life)에는 대략 어떤 것들이 있나요?  AC를 읽는 분들이 열에 아홉, 거의 다 어리둥절해하시는 이유가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후 세계, 곧 사람이 죽은 뒤에도 계속 살아가는 생명의 상태를 바라보며 기록된 책이라는 사실에서 한발 물러나 계시기 때문인 것 같은데, 개신교 많은 분들이 사실은 이 다른 삶의 본성에 대해 많이 무지하시거든요. 저는 감사하게도 책, 천국과 지옥을 여러 번 정독 후,  AC를 시작해서 큰 도움이 되었지만 말입니다.

 

 

목사님 말씀처럼, ‘Heaven and Hell’을 먼저 충분히 읽고 나서 ‘Arcana Coelestia’로 들어오신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의 이해도 차이는 상당히 큽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다른 삶(the other life)은 단순히 ‘죽은 뒤의 세계’라는 막연한 개념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본질이 계속 이어지는 실제의 삶이며, 성경 전체가 바로 그 상태를 염두에 두고 기록되었다는 전제 위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다른 삶의 본성’을 몇 가지 핵심 축으로 정리해 드리면, AC를 읽는 분들이 왜 자주 막히는지, 그리고 어디서부터 이해가 풀리는지 함께 보이게 됩니다.

 

첫째로, ‘다른 삶은 죽은 뒤 시작되는 새로운 삶이 아니라, 지금 삶의 연속’이라는 점입니다. 사람은 죽는 순간 전혀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육체적 껍질을 벗고 자신의 ‘속 사람’ 상태로 그대로 살아갑니다. 따라서 그 사람이 무엇을 사랑했고 무엇을 즐거워했는지가 그대로 그 사람의 삶의 환경과 세계를 결정합니다. 이 점을 모르면, 성경을 읽을 때 모든 것을 ‘이 세상 이야기’로만 이해하게 되어, AC의 내적 의미가 거의 닫혀 버립니다.

 

둘째로, ‘그 세계는 공간이 아니라 상태(state)의 세계’라는 점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물리적 위치가 아니라 사랑과 신앙의 상태가 외적으로 펼쳐진 것입니다. 같은 장소에 있어도 상태가 다르면 서로 보이지 않고, 서로 다른 상태에 있는 자들은 자연스럽게 다른 공동체로 나뉩니다. 그래서 성경의 ‘올라간다’, ‘내려간다’, ‘가깝다’, ‘멀다’ 같은 표현들은 모두 상태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이 감각이 없으면, 말씀의 거의 모든 표현이 문자적 공간 이동으로 오해됩니다.

 

셋째로, ‘모든 것은 사랑에 의해 질서 잡힌다’는 점입니다. 다른 삶에서는 무엇을 생각하느냐보다 무엇을 사랑하느냐가 그 사람의 본질을 결정합니다. 사랑은 곧 의지이며, 그 의지의 방향이 그 사람의 얼굴, 말, 관계, 심지어 주변 환경까지 형성합니다. 그래서 천국은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자들의 상태’, 지옥은 ‘자기와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의 상태’로 나뉘며, 이는 외부에서 판결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 상태로 흘러 들어가는 것입니다.

 

넷째로, ‘겉과 속이 완전히 일치하는 세계’라는 점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겉으로는 선하게 보여도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품을 수 있지만, 다른 삶에서는 이런 분리가 불가능합니다. 속에 있는 사랑과 생각이 그대로 밖으로 드러나며, 위선이나 가식은 자연히 벗겨집니다. 그래서 심판이란 어떤 외부의 판정이라기보다, 그 사람의 본성이 드러나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다섯째로, ‘천사와 영들의 사회는 철저히 질서 있고 실제적’이라는 점입니다. 많은 분들이 사후 세계를 막연한 영적 공간이나 감정 상태로 생각하지만,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매우 구체적인 ‘사회’로 묘사합니다. 집, 도시, 공동체, 직무가 있으며, 모든 것이 사랑과 쓰임새(use)에 따라 조직됩니다. 이 점을 이해하면 성경 속 ‘’, ‘’, ‘왕국’ 등의 표현이 단순 비유가 아니라 실제 영적 실재를 가리킨다는 것이 보입니다.

 

여섯째로, ‘인간은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모든 사람은 이 세상에 살 때부터 이미 영들과 천사들과 연결되어 있으며, 죽은 뒤 그 연결이 드러날 뿐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생각과 감정은 고립된 것이 아니라 영적 세계와의 교류 속에서 일어납니다. 이 관점을 알면, 성경의 많은 영적 싸움, 유혹, 인도에 관한 구절들이 훨씬 입체적으로 이해됩니다.

 

일곱째로, ‘거듭남(regeneration)은 바로 이 다른 삶을 준비하는 과정’이라는 점입니다. 이 세상은 목적지가 아니라 준비의 장소이며, 여기서 형성된 의지와 이해의 질서가 그대로 영원으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신앙은 단순히 ‘죽은 뒤 어디로 가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어떤 사람이 되어가고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이렇게 보면, 목사님께서 지적하신 것처럼 많은 개신교인들이 이 ‘다른 삶의 본성’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AC를 읽을 때 계속 현실 세계 기준으로 해석하려 하고, 그 결과 내적 의미가 닫히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반대로 ‘Heaven and Hell’을 통해 먼저 ‘상태의 세계’, ‘사랑 중심의 존재’, ‘죽음 이후의 연속성’을 체득하면, 성경의 모든 사건과 표현이 단순 역사나 도덕 교훈을 넘어 ‘영혼의 여정’으로 열리게 되고, 그때 비로소 ‘Arcana Coelestia’의 설명들이 자연스럽게 맞물리기 시작합니다.

 

 

 

AC.67, 심화 1, ‘자비’와 ‘은혜’

AC.67.심화 1. ‘자비’와 ‘은혜’ ‘자비’와 ‘은혜’는 어떻게 다른가요? 기독교, 그리고 개신교는 보통 ‘은혜’에 익숙한데,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처럼 거의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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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비 은혜

 

자비 은혜는 어떻게 다른가요? 기독교, 그리고 개신교는 보통 은혜에 익숙한데,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처럼 거의 자비를 쓰네요? 전에 어느 글에선가 자비는 의지가 겸손한 것, 은혜는 이해가 겸손한 것이라 읽은 것도 같은데, 맞나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목사님께서 기억하신 ‘자비는 의지의 겸손, 은혜는 이해의 겸손’이라는 구분은 스베덴보리 사상 전체의 맥락에서는 상당히 정확한 통찰에 가깝습니다. 다만 그는 이 둘을 그렇게 딱 잘라 정의문처럼 정식화하기보다는, 전반적인 인간 구조(의지와 이해)와 주님의 신적 속성(사랑과 지혜)의 상응 속에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드러나게 설명합니다. 그래서 이 구분은 ‘정확한 문장 그대로의 정의’라기보다 ‘전체 교리에서 도출되는 핵심 요약’이라고 보시면 가장 안전합니다.

 

먼저 스베덴보리의 기본 틀부터 보면, 인간은 ‘의지(will)와 ‘이해(understanding)라는 두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고, 주님 역시 본질적으로 ‘신적 사랑(Divine Love)과 ‘신적 지혜(Divine Wisdom)로 계십니다. 여기서 ‘자비(mercy)는 주님의 신적 사랑이 인간에게 흘러들어오는 방식이며, ‘은혜(grace)는 그 사랑이 인간의 이해 안에서 받아들여질 때 경험되는 빛과 도움의 양상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즉 자비는 더 근원적이고 존재적인 것이고, 은혜는 그것이 인간 안에서 의식되고 작용하는 한 양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보면, ‘자비는 의지의 겸손’이라는 말은 매우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의지는 사랑의 자리이고, 인간의 가장 깊은 중심입니다. 이 의지가 꺾이고 낮아질 때, 곧 ‘나는 스스로 선할 수 없다’는 상태에 이를 때, 비로소 주님의 사랑, 곧 자비가 흘러들어옵니다. 그래서 자비는 단순히 ‘불쌍히 여김’의 감정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 자체를 다시 살리는 주님의 근원적 작용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자주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라고 반복하는 이유는, 구원과 거듭남의 출발점이 언제나 이 ‘의지에 대한 주님의 작용’이기 때문입니다. 인간 쪽에서는 아무 공로도 개입될 수 없는, 전적으로 주님 편에서 시작되는 사랑의 역사라는 뜻입니다.

 

반면 ‘은혜는 이해의 겸손’이라는 말도 잘 맞습니다. 이해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자리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내려놓고, ‘나는 참을 알지 못한다’는 상태가 될 때, 주님의 빛이 들어와 깨달음과 인도를 주는데, 이것이 은혜로 경험됩니다. 그래서 전통적 기독교에서 말하는 ‘은혜를 받았다’는 표현은 대개 ‘깨달음’, ‘용서의 확신’, ‘말씀의 조명’ 같은 이해의 영역에서 먼저 체험됩니다. 이 때문에 개신교 전통에서는 은혜라는 용어가 훨씬 친숙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스베덴보리는 ‘은혜’보다 ‘자비’를 훨씬 더 자주 사용할까요? 이유는 그의 신학이 ‘이해 중심’이 아니라 ‘의지 중심’, 곧 ‘사랑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인 개신교 신학은 ‘믿음(신앙)’과 ‘은혜’를 강조하면서,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해의 변화)을 중심축으로 삼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본질은 이해가 아니라 의지, 곧 사랑에 있다고 보기 때문에, 구원의 핵심도 ‘무엇을 아느냐’보다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있습니다. 따라서 구원의 근원적 표현 역시 ‘은혜’보다 ‘자비’, 곧 사랑의 작용으로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해지는 것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차이는, ‘은혜’라는 말은 때로 인간의 상태에 따라 ‘받았다’, ‘잃었다’처럼 경험적으로 변하는 느낌을 주지만, ‘자비’는 주님 편에서는 언제나 동일하고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것으로 이해된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자비는 항상 있고, 은혜는 그것이 인간 안에서 인식될 때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구원을 설명할 때, 변하는 인간의 상태보다 변하지 않는 주님의 근원을 더 강조하기 위해 ‘자비’를 반복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목사님이 기억하신 구분은 이렇게 다듬을 수 있습니다. 자비는 주님의 신적 사랑이 인간의 의지에 작용하는 근원적 힘이며, 은혜는 그 작용이 인간의 이해 안에서 깨달음과 도움으로 나타나는 경험입니다. 따라서 자비는 더 깊고 근본적인 차원이고, 은혜는 그 자비가 의식 속에서 드러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스베덴보리는 구원과 거듭남을 말할 때 거의 언제나 ‘주님의 신적 자비’라는 표현을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AC.67, 심화 2, ‘다른 삶의 본성’(the nature of the other life)

AC.67.심화 2. ‘다른 삶의 본성’(the nature of the other life) ‘다른 삶의 본성’(the nature of the other life)에는 대략 어떤 것들이 있나요? 이 AC를 읽는 분들이 열에 아홉, 거의 다 어리둥절해하시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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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7, 창2 앞, '말씀의 내적 의미(속뜻)를 알게 하시고, 알리게 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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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7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저에게는 말씀의 내적 의미(the internal meaning of the Word, 속뜻)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그 내적 의미 안에는 이전에는 누구에게도 알려진 적이 없었고, 또한 다른 삶의 본성(the nature of the other life)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결코 알 수 없는 가장 깊은 아르카나(arcana)가 들어 있습니다. 이는 말씀의 내적 의미에 속한 매우 많은 것들이 바로 그 삶, 곧 다른 삶을 향하고 있고, 그것들을 묘사하며, 또한 그 안에 그것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로 하여금 여러 해 동안 영들과, 그리고 천사들과 함께 있게 하시고, 그리고 그 기간 동안 제가 듣고 보았던 것들을 밝히는 일이 이제 허락되었습니다. As of the Lord’s Divine mercy it has been given me to know the internal meaning of the Word, in which are contained deepest arcana that have not before come to anyone’s knowledge, nor can come unless the nature of the other life is known (for very many things of the Word’s internal sense have regard to, describe, and involve those of that life), I am permitted to disclose what I have heard and seen during some years in which it has been granted me to be in the company of spirits and angels.

 

 

해설

 

이 글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전체의 성격을 단번에 규정해 버리는, 매우 무게감 있는 자기 선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나는 무엇을 해석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나는 어떤 조건 아래에서 이것을 말할 수 있는가’를 먼저 밝힙니다. 즉, 이 글은 해석의 결과를 설명하는 문장이 아니라, 해석이 가능해지는 전제 자체를 드러내는 문장입니다. 그래서 AC.67은 내용적으로는 짧지만, 그 무게는 창세기 1장 전체를 여는 열쇠와도 같습니다.

 

스베덴보리가 가장 먼저 강조하는 것은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주어졌다는 점입니다. 그는 자신의 지적 능력이나 통찰, 혹은 신비 체험의 탁월함을 앞세우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지식은 인간 편에서 획득한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허락된 것임을 반복해서 분명히 합니다. 이는 아르카나 전체가 어떤 개인의 독창적 신학이 아니라, 주님 중심의 질서 안에서 주어진 증언이라는 점을 독자에게 처음부터 각인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이어지는 핵심은 ‘말씀의 내적 의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내적 의미를 단순히 문자 뒤에 숨은 교훈이나 비유적 뜻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 안에 ‘가장 깊은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아르카나란, 인간 이성의 깊은 사색으로도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차원의 비밀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 아르카나는 결정적으로 ‘다른 삶의 본성’을 알지 못하면 결코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 한 문장은, 성경을 이 세상 안에서만 이해하려는 모든 시도를 근본에서부터 제한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말씀의 내적 의미에 속한 매우 많은 것들은, 이 세상의 역사나 윤리 이전에 이미 ‘다른 삶’을 향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후 세계, 곧 사람이 죽은 뒤에도 계속 살아가는 생명의 상태를 바라보며 기록된 책이라는 것입니다. 창조 이야기든, 족장들의 이야기든, 율법과 예언이든, 그 중심에는 늘 다른 삶의 질서가 놓여 있습니다. 따라서 다른 삶을 알지 못한 채 읽는 말씀은, 본질을 벗긴 외피만을 읽는 것에 가깝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이 지식을 추론이나 이론으로 제시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내가 생각하기에 그렇다’거나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보고 들은 것’을 말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도 잠깐의 경험이 아니라, ‘여러 해 동안’ 지속된 상태에서 보고 들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그의 증언이 단발적인 환상이나 종교적 감흥이 아니라, 일상적 의식 속에서 지속적으로 열려 있었던 인식의 상태였음을 의미합니다.

 

영들과, 그리고 천사들과 함께 있었다’는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공간을 이동했다는 뜻이 아니라, 인식과 지각의 차원이 열렸다는 뜻입니다. 그는 여전히 이 땅에서 살면서도, 동시에 다른 삶의 질서 속에 있는 존재들과 교통하도록 허락되었습니다. 그 상태에서 그는 말씀이 어떻게 그 세계를 묘사하고, 그 세계를 포함하며, 그 세계를 향하고 있는지를 직접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르카나는 이론서가 아니라, 증언서의 성격을 띱니다.

 

이 글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가장 불편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읽으면서 실제로 ‘다른 삶’을 전제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사후 세계를 단지 막연한 믿음의 대상으로 두고, 실제 구조나 질서에 대해서는 침묵한 채로 말씀을 이해하고 있지는 않은지 묻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말합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는 다른 삶과 분리될 수 없으며, 그 삶을 모르면 내적 의미 역시 닫혀있을 수밖에 없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AC.67은 서론 중의 서론입니다. 이 글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에 따라,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전체는 전혀 다른 책이 됩니다. 하나는 인간의 상상이나 해석의 산물로 보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께서 다시 열어 보이신 말씀의 깊이로 읽히게 될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독자에게 그 선택을 처음부터 정직하게 맡기고 있습니다.  

 

 

심화

 

1.자비은혜

 

 

AC.67, 심화 1, ‘자비’와 ‘은혜’

AC.67.심화 1. ‘자비’와 ‘은혜’ ‘자비’와 ‘은혜’는 어떻게 다른가요? 기독교, 그리고 개신교는 보통 ‘은혜’에 익숙한데,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처럼 거의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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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다른 삶의 본성(the nature of the other life)

 

 

AC.67, 심화 2, ‘다른 삶의 본성’(the nature of the other life)

AC.67.심화 2. ‘다른 삶의 본성’(the nature of the other life) ‘다른 삶의 본성’(the nature of the other life)에는 대략 어떤 것들이 있나요? 이 AC를 읽는 분들이 열에 아홉, 거의 다 어리둥절해하시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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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이제 허락되었습니다

 

 

AC.67, 심화 3, ‘이제 허락되었습니다’

AC.67.심화 3. ‘이제 허락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로 하여금 여러 해 동안 영들과, 그리고 천사들과 함께 있게 하시고, 그리고 그 기간 동안 제가 듣고 보았던 것들을 밝히는 일이 이제 허락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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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8, 창2, '이 책에 대한 사람들의 예상 반응'

AC.68 저는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영들과, 그리고 천사들과 말할 수 없다고 할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 많은 이들은 이것이 모두 상상이라고 할 것이며,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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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6, 창1, '말씀의 네 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

AC.66 말씀에는 전반적으로 네 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이 있습니다. 첫째는 태고교회의 스타일입니다. 그들의 표현 방식은 이 땅의 것과 세상의 것을 말할 때, 그것들이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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