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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2.08.01 창6:7, AC.591-595,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창6:1-8

 

7절,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Verse 7, And Jehovah said, I will destroy man whom I have created, from upon the faces of the ground, both man and beast, and creeping thing, and fowl of the heavens; for it repenteth me that I have made him.

 

※ 7절 속뜻

 

 

591. ‘이르시되 내가 사람을 쓸어버리되’는 인류가 전멸을 자초할 것을, ‘내가 창조한 사람을 지면에서’는 태고 교회의 후손이었던 사람들을,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는 그들의 의지 안에 무엇이 있든지 그것이 그들을 전멸시킬 것이라는 것, ‘공중의 새까지’는 그들의 지적 능력 또는 사고 능력 안에 무엇이 있든지를,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는 위에서(cf. AC.587-588) 살핀, 불쌍히 여기심을 각각 상징합니다. “Jehovah said, I will destroy man” signifies that man would extinguish himself; “whom I have created, from upon the faces of the ground” signifies the man of the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both man and beast and creeping thing” signifies that whatsoever is of the will would extinguish him; “and fowl of the heavens” is whatever is of the understanding or thought; “for it repenteth me that I have made them” signifies as before compassion.

 

 

592. 이르시되 내가 사람을 쓸어버리되 Jehovah said, I will destroy man.

 

이 말씀은, 인류가 전멸을 자초할 것이라는 의미임은 위(cf. AC.588)에서 말씀드린 내용으로 확인할 수 있는데요, 즉, 여호와이신 주님에 관한 서술을, 그가 벌을 주신다, 그가 유혹하신다, 그가 악을 시행하신다, 그가 파괴하시거나 죽이시며, 저주하신다 한다는 것입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man would extinguish himself 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explained before, namely, that it is predicated of Jehovah or the Lord that he punishes, that he tempts, that he does evil, that he destroys or kills, and that he curses.

 

예를 들면, 그는 유다의 장자 엘과, 또 다른 아들 오난을 죽이셨고, (창38:7, 10) 애굽의 모든 초태생(初胎生, firstborn)을 치셨습니다. (출12:12, 29) As for example, that he slew Er, Judah’s firstborn; and Onan, another son of Judah (Gen. 38:7, 10); that Jehovah smote all the firstborn of Egypt (Exod. 12:12, 29).

 

7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 10그 일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 (창38:7, 10)

 

12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을 내가 심판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29밤중에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난 것 곧 왕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가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시매 (출12:12, 29)

 

예레미야에서도 And so in Jeremiah:

 

싸우려 하였으나 내가 나의 노여움과 분함으로 그들을 죽이고 그들의 시체로 이 성을 채우게 하였나니 이는 그들의 모든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얼굴을 가리어 이 성을 돌아보지 아니하였음이라 (렘33:5) Whom I have slain in mine anger and in my wrath. (Jer. 33:5)

 

다윗의 글에 In David:

 

그의 맹렬한 노여움과 진노와 분노와 고난 곧 재앙의 천사들을 그들에게 내려보내셨으며 (시78:49) He cast upon them the wrath of his anger; vehement anger, and fury and straitness, a sending of evil angels. (Ps. 78:49)

 

아모스에 In Amos:

 

성읍에서 나팔이 울리는데 백성이 어찌 두려워하지 아니하겠으며 여호와의 행하심이 없는데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 (암3:6) Shall evil befall a city, and Jehovah hath not done it? (Amos 3:6)

 

계시록에 In John:

 

15:1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7네 생물 중의 하나가 영원토록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 대접 일곱을 그 일곱 천사들에게 주니 16:1또 내가 들으니 성전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일곱 천사에게 말하되 너희는 가서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 하더라 (계15:1, 7; 16:1) Seven golden vials full of the wrath of God who liveth forever and ever. (Rev. 15:1, 7; 16:1)

 

이 모든 골치 아픈 일들이 다 여호와로 말미암는다 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완전 정반대인데도 말입니다. All these things are predicated of Jehovah, although entirely contrary to his nature.

 

앞서 말씀드린 이유로, 이런 속성들이 다 여호와께 속한 걸로 서술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사람들이 가장 먼저 형성해야 하는, 하나님에 대한 보편적인 생각은, 일반적이든 구체적이든 주님이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정돈하신다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나서 배우게 되는 것은, 어떤 악도, 주님으로말미암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죽이시고 하는 건 더더욱 아니지요. 오히려 악을 자초하는 장본인은 바로 사람 자신입니다. 그가 악을 자신에게로 가져와 자신을 망치게 하고, 파괴하게 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를 부추기고 꾀는 것은 그가 아니라 사실은 악한 영들이지만, 그러나 사람은 자기가 그렇게 했다고, 자기가 그렇게 한 장본인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냥 자기가 한 게 되는 것입니다. They are predicated of him for the reason explained before; and also in order that men may first form the very general idea that the Lord governs and disposes all things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and may afterwards learn that nothing of evil is from the Lord, much less does he kill; but that it is man who brings evil upon himself, and ruins and destroys himself—although it is not man, but evil spirits who excite and lead him; and yet it is man, because he believes that he is himself the doer.

 

그래서 여기 지금 여호와를 가리켜 그가 ‘사람을 쓸어버리신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자신을 파괴하고 끝내는 것은 바로 사람인 자기 자신인데도 말입니다. So now here it is said of Jehovah that he would “destroy man,” when in fact it was man who would destroy and extinguish himself.

 

[2] 이 경우, 내세에서는 실제로 어떤 상태일까 하는 것은, 지옥의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보면 아주 명확하게 알 수 있는데요, 그들은 자기들이 받고 있는 형벌에 뒤따르는 모든 부정적인 결과들에 대해 끝없이 애통해 하며, 주님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The state of the case may be very evident from those in the other life who are in torment and in hell, and who are continually lamenting and attributing all the evil of punishment to the Lord.

 

악령들의 세계에는 남을 해하고 벌주며 처벌하는 걸 즐거움으로, 심지어 가장 큰 즐거움으로 삼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바로 주님이시라고 생각합니다. So in the world of evil spirits there are those who make it their delight, even their greatest delight, to hurt and punish others; and those who are hurt and punished think it is from the Lord.

 

하지만 그들은 어떠한 나쁜 일도 절대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게 아니라는 말을 듣고, 또 눈으로 확인도 합니다. 정반대로, 이 모든 일은 그들이 스스로 자초한 것이라는 거, 내세의 모든 것은 정돈과 균형의 상태 가운데 있는데, 바로 악은 악을 행한 자에게로 돌아오고, 그 악에 대한 형벌의 비극으로 바뀐다는 거, 이것이 악은 어떻게 도울 수가 없는 이유이며, 이런 작용-반작용의 법칙, 질서는 피할 수가 없는 이유라는 말을 듣습니다. But they are told, and it is shown them, that not the least of evil is from the Lord, but they bring it upon themselves; for such is the state and such the equilibrium of all things in the other life that evil returns upon him who does evil, and becomes the evil of punishment; and for the same reason it is inevitable.

 

이런 균형, 이런 질서는 악을 고치기 위해, 악을 치료하기 위해 허용되는 것이라는 말을 그들은 듣습니다. This is said to be permitted for the sake of the amendment of the evil.

 

여기 허용이라는 말은 용인하다, 참다, 겪다라는 말입니다.

 

주님은 여전히 한결같이 모든 악의 형벌을 선으로 돌리시며, 주님으로부터는 선말고 다른 무엇은 없으시다는 말도 듣습니다. But still the Lord turns all the evil of punishment into good; so that there is never anything but good from the Lord.

 

지금까지 허용이 무엇인지, 즉 이런 종류의 용인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허용되었다는 건, 허용하신 분에 의해, 그가 허용하셨기 때문에 행해진 것으로 믿는 것입니다. But hitherto no one has known what permission is; what is permitted is believed to be done by him who permits, because he permits.

 

사람들이 보는 것은 용인된 일입니다. 그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신 분에 의해 실행되어진, 쉽게 말해 그분이 허락하셨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지요.

 

그러나 사실은 아주 다른데요, 이에 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 곧 주님의 허락을 받아 나중에(cf. AC.2447) 말씀드리겠습니다. But the fact is quite otherwise, concerning which,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593. 내가 창조한 사람을 지면에서 Whom I have created, from upon the faces of the ground.

 

이 본문이 태고 교회의 후손이었던 사람을 상징한다는 것은, 이 사람을 일컬어, 그는 주께서 ‘창조하신’(created), 즉, 거듭나게 하신 사람이었다는 것, 그리고 나중에 천적(天的, celestial) 인간이 될 때까지 ‘만드신’(made), 즉, 완벽하게 하신, 또는 거듭나게 하신 사람이었다라는 표현 뿐 아니라, ‘지면(地面)에서’(from upon the faces of the ground)라는 표현을 통해서도 분명합니다. That this signifies the man from the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is evident not only from its being said, the man whom he had “created,” that is, whom he had regenerated; and afterwards whom he had “made,” that is, had perfected, or regenerated until he became celestial; but also from its being said “from upon the faces of the ground.”

 

‘지(地)’, 곧 ‘땅’(ground)은 앞서(cf. AC.566-567) 보여드린 대로, 교회가 있는 지역입니다. The “ground” is where the church is, as has been shown before.

 

다음 사실 또한 그 분명한 증거가 되는데요, 이 본문은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을 자신들의 갈망(yearnings)에 침수시킨 사람들을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교리적인 것 자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은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The same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ose are treated of who immersed the doctrinal things of faith in their yearnings; and those who had not doctrinal things of faith could not do so.

 

즉, ‘내가 지면에서 창조한 사람’이라는 이 표현은 한편으로, 신앙의 가르침과 자신들의 욕구를 합친 사람들에 대한 내용이라는 것이며, 참 신앙의 교리가 무엇인지도 몰라 접근도 못하는 사람들은 절대 이런 행위(offense, 위법 행위, 범죄)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저런 짓을 하는 사람들의 예로는, 자신의 사사로운 목적을 위해 말씀(the Word) 또는 어떤 종교적인 이슈를 사사로이 이용해 먹는 사람들이 되겠습니다.

 

교회 밖 사람들은 진리와 선에 관해 무지하며, 이런 사람들은 신앙의 진리와 선에 다소 반대되는 말과 행실 중에도 일종의 이노센스 가운데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들이 무슨 환상, 곧 그것이 진리요 선인 줄 믿는 그런 것으로 가득 찬 나머지 어떤 열심을 가지고 워십에 참여하기 때문입니다. They who are outside the church are in ignorance of truth and good, and those who are in ignorance may be in a kind of innocence while speaking and acting somewhat contrary to the truths and goods of faith; for they may act from a certain zeal for the worship with which they have been imbued from infancy, and which they therefore believe to be true and good.

 

그러나 그 가운데 신앙의 교리를 가진 사람들의 경우는 아주 다릅니다. But the case is entirely different with those who have the doctrine of faith among them.

 

그들은 진리를 거짓과, 거룩한 것을 신성모독과 섞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These can mingle truths with falsities, and holy things with profane.

 

그래서 이런 사람들의 운명은 내세에서는 소위 이방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운명보다도 훨씬 더 나쁜데, 이에 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 곧 허락하심을 받아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Hence their lot in the other life is much worse than the lot of those who are called gentiles, concerning whom,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594.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 Both man and beast, and creeping thing.

 

이 말씀의 뜻이, 의지와 관련된 무엇이든지 그것이 그를 끝낸다라는 것임은 ‘사람’(man), ‘가축’(beast), 그리고 ‘기는 것’(creeping thing)의 상징들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whatsoever is of the will would extinguish him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man,” of “beast,” and of “creeping thing.”

 

사람은 오직 의지(will)와 이해하는 능력(understanding, intellect)이 있어 사람이며, 이것이 있어 사람은 짐승과 구별되는 것입니다. 그 외 다른 모든 면은 짐승과 매우 유사합니다. Man is man solely from the will and understanding, by which he is distinguished from brutes; in all other respects he is very similar to them.

 

그런데 지금 저들의 경우는, 모든 선한 의지와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이 전부 사라졌습니다. In the case of these men all will of good and understanding of truth had perished.

 

선한 의지 대신 제정신이 아닌 갈망이,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 대신 정신나간 환상이 각각 그 자리를 대신했습니다. 이런 갈망과 환상이 서로 뒤섞이자 그들의 상황은 마치 리메인스가 파괴된 것 같았으며, 그렇게 그들은 종말을 맛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In place of a will of good there followed insane yearnings, in place of an understanding of truth insane fantasies; and these were commingled with their yearnings, so that after they had thus as it were destroyed remains, they could not but be extinguished.

 

의지와 관련된 모든 것을 가리켜 ‘가축’과 ‘기는 것’이라 한다는 것은, 짐승과 기는 것에 관해 전에 말씀드린 내용(cf. AC.44-46, 246)을 보시면 됩니다. That all things of the will are called “beasts” and “creeping things” 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said before concerning beasts and creeping things.

 

그러나 여기서는, 지금 다루고 있는 사람의 캐릭터 때문에, ‘가축’이 선한 어펙션(affections, 애정, emotions)이 아닌, 악한 것, 곧 악한 갈망을, ‘기는 것’은 쾌락(pleasures), 곧 육체적, 감각적 쾌락을 각각 상징합니다. But here, because of the character of the man treated of, good affections are not signified by “beasts,” but evil, consequently yearnings; and by “creeping things,” pleasures, both bodily and sensuous.

 

‘가축’과 ‘기는 것’이 그런 걸 상징한다는 것은 말씀을 가지고 더 이상 깊이 확인하지는 않겠습니다. 앞서 이미 충분히 다루었기 때문입니다. (AC.45-46, 142-143을 보시기 바랍니다.) That such things are signified by “beasts” and “creeping things” needs no further confirmation from the Word, because they have been treated of before (see n. 45–46, 142–143).

 

 

595. 공중의 새가 이해하는 능력, 곧 사고력에 관계된 모든 것을 상징한다는 것은 앞의 내용을 보시면 됩니다. (cf. AC.40) That the fowl of the heavens signifies whatever is of the understanding, that is, of thought, may also be seen above (n. 40).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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