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주보

2022-08-14(D1)-제10권33호통468호.pdf
0.28MB

 

2. 설교 원고 및 유튜브

2022-08-14(D1)-주일예배(2320, 요15,4-5, HH.7-12), '주님의 신성(神性, the Divine of the Lord)'.pdf
0.48MB

https://youtu.be/x2hFRzjcXcY

 

3. 축도 원고 및 유튜브

2022-08-14(D1)-주일예배(2320, 요15,4-5, HH.7-12), '주님의 신성(神性, the Divine of the Lord)', 축도.pdf
0.22MB

https://youtu.be/wZTaBkFpd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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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보

2022-08-07(D1)-제10권32호통467호.성찬.pdf
0.26MB

 

2. 설교 원고 및 유튜브

2022-08-07(D1)-주일예배(2319, 창4,20-21, AC.412-420), '‘아케이나’(arcana, 秘義)'.pdf
0.45MB

https://youtu.be/HWJpGwUB7zM

 

3. 성찬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예식.pdf
0.13MB

https://youtu.be/mBWdnuci8qw

 

4. 축도 원고 및 유튜브

2022-08-07(D1)-주일예배(2319, 창4,20-21, AC.412-420), '‘아케이나’(arcana, 秘義)', 축도.pdf
0.21MB

https://youtu.be/VzqwmWLIb_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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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6:9-22

 

10절,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Verse 10, And Noah begat three sons: Shem, Ham, and Japheth.

 

※ 10절 속뜻

 

 

 

616. ‘세 아들을 낳았으니’는 그 교회에서 일어난 세 종류의 교리, 신학(theology)을 말하며, ‘셈과 함과 야벳이라’가 의미하는 게 바로 그것입니다. “Noah begat three sons” signifies that three kinds of doctrine thence arose, which are meant by “Shem, Ham, and Japheth.”

 

 

617. ‘세 아들을 낳았으니’ 이것은 거기, 곧 노아 교회에서 세 종류의 새 교리, 신학이 일어남에 대한 상징이라는 것은, 앞서 살핀 모든 내용들(AC.337, 339, 402, 468), 곧 이름들은 오직 다양한 교회들, 그리고 같은 말이지만, 교리들, 신학들을 상징할 뿐이라는 내용들을 보면 분명합니다. 여기서도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이름들이 여기 언급되는 이유는 순전히 이전 내용의 연속성 혹은 본문의 문맥 때문인데, 그것은 주님이 예견하신 것으로, 이런 지니어스를 가진 사람들, 곧 타고난 마음이 이렇게 움직이는 사람들은 체어리티, 곧 이웃 사랑이라는 선물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그 가운데서 세 종류의 다른 교리들이 생겨남에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이들 세 교리, 곧 신학은 아래 셈, 함 및 야벳을 다루는 데서 주님의 자비, 곧 허락하심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Noah begat three sons. That this signifies that three kinds of doctrine thence arose is evident from all that has been shown before about names signifying nothing else than churches, or, what is the same, doctrines. So it is here; but here they are merely mentioned for the sake of the series or connection with the things that precede, which are, that it was foreseen by the Lord that the man of this genius could be endowed with charity; but yet that three kinds of doctrines would thence have birth, which doctrines, of the Lord’s Divine mercy, shall be described hereafter, where Shem, Ham, and Japheth are treated of.

 

 

618. ‘노아는 의인이요 완전한 자라’,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그리고 본 절, ‘세 아들을 낳았으니’ 모두 과거 시제로 언급되었다는 사실, 이 모두, 아직 미래의 일인데 말이지요.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속뜻이라는 건, 시간, 즉 시제하고는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최초의 언어(the original language, 원어)는 이런 방식을 선호합니다. 거기서는 종종 한 가지 같은 말을 가지고 아무 시제에나 상관없이 사용합니다. 시제에 따라 다른 말을 쓰는 게 아니고요. 그렇게 하면, 그 속뜻, 그 내적인 것들이 더 명료해지기 때문입니다. 언어는 이런 융통성을 그 속뜻으로부터 얻는데요, 그 풍부함이란, 사람들이 믿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것이 바로 왜 시제라든지 혹은 언어 문법의 어떤 엄격함 같은 걸 따지지 않았을까 하는 이유가 되겠습니다. That “Noah was righteous and perfect,” that he “walked with God,” and in this verse that he “begat three sons,” is all said in the past tense, and yet these expressions look to the future. It should be known that the internal sense is such that it has no relation to times; and this the original language favors, where sometimes one and the same word is applicable to any time whatever, without using different words, for by this means interior things appear more evidently. The language derives this from the internal sense, which is more manifold than anyone could believe; and therefore it does not suffer itself to be limited by times and distinc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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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6:9-22

 

9절,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Verse 9, These are the births of Noah; Noah was a man righteous and perfect in his generations: Noah walked with God.

 

※ 9절 속뜻

 

 

610. ‘노아의 족보’는 새 교회가 개선되거나 다시 태어날 방법에 대한 설명을 의미합니다. By “the births of Noah” is signified a description of the reformation or regeneration of the new church.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는 그 교회는 체어리티를 타고난 교회였다는 뜻입니다. ‘의인’(또는 ‘의로운’)(just, righteous)은 체어리티에 수반된 선과 관계가 있고, ‘완전한’(perfect)은 체어리티에 수반된 진리와 관계가 있습니다. That “Noah was a man just and perfect in his generations” signifies that he was such that he could be endowed with charity; “just” (or “righteous”) has relation to the good of charity, and “perfect” to the truth of charity.

‘당대’(generation)는 종교적 발전의 한 단계를 말합니다. The “generations” are those of faith.

‘하나님과 동행’은 앞서 에녹의 경우처럼, 여기서도 신앙과 관련된 교리를 상징합니다. To “walk with God” signifies here as before, when said of Enoch, the doctrine of faith.

 

 

611. ‘노아의 족보’라는 표현이, 새 교회가 개선되거나 다시 태어날 방법에 대한 설명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앞서 말씀드린 내용들을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창2:4; 5:1) That by “the births of Noah” is signified a description of the reformation or regeneration of the new church, 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said before (Gen. 2:4; Gen. 5:1).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창2:4)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612.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cf. 주석 #2) 자라 Noah was a man righteous and perfect(cf. 주석 #2) in his generations.

이 교회는 체어리티라는 정서를 타고날 수 있었던 교회였음을 위와 같이 표현한 것이라는 이런 사실은, ‘의인이요 완전한’이라는 표현의 상징을 확인하면 됩니다. ‘의인’(또는 ‘의로운’)은 체어리티에 수반된 선과, ‘완전한’은 체어리티에 수반된 진리와 각각 관련됩니다. 같은 의미를 이 교회만의 차별화된 특징인 체어리티를 들여다 볼 때 또 만나게 되는데요, 그것은 주님의 자비, 곧 주님의 허락하심을 따라 나중에 다루겠습니다. (AC.640, 765) That this signifies that he was such that he could be endowed with charity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just and perfect,” “just” (or “righteous”) having regard to the good of charity, and “perfect” to the truth of charity; and also from the essential of that church being charity, concerning which,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의인’(또는 ‘의로운’)은 체어리티에 수반된 선과 관련이 있고, ‘완전한’은 체어리티에 수반된 진리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아래 이사야 말씀을 보면 확실합니다. That “just” (or “righteous”) has regard to the good of charity, and “perfect” to the truth of charity, is evident from the Word, as in Isaiah: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공의를 행하여 그의 하나님의 규례를 저버리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거워하는도다 (사58:2) They will seek me daily and desire knowledge of my ways, as a nation that doeth righteousness, and forsaketh not the judgment of their God; they will ask of me the judgments of righteousness, and will long for the approach of God. (Isa. 58:2)

 

여기 ‘규례, 판단’(judgment)은 진리에 의해 옹호되는 일들을, ‘공의, 의’(righteousness)는 선에 의해 촉구되어지는 일들을 각각 대표합니다. Here “judgment” denotes the things which are of truth, and “righteousness” those which are of good.

 

‘정의와 공의를 행함’은 선과 진리를 행하는 일종의 공식 표준이 되었습니다. (아래 말씀들 참조) “Doing judgment and righteousness” became as it were an established formula for doing what is true and good (as in Isa. 56:1; Jer. 22:3, 13, 15; 23:5; 33:15; Ezekiel 33:14, 16, 19).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정의를 지키며 의를 행하라 이는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공의가 나타날 것임이라 하셨도다 (사56:1)

 

3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탈취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 13불의로 그 집을 세우며 부정하게 그 다락방을 지으며 자기의 이웃을 고용하고 그의 품삯을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15네가 백향목을 많이 사용하여 왕이 될 수 있겠느냐 네 아버지가 먹거나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정의와 공의를 행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때에 그가 형통하였었느니라 (렘22:3, 13, 15)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렘23:5)

 

그날 그때에 내가 다윗에게서 한 공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정의와 공의를 실행할 것이라 (렘33:15)

 

14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돌이켜 자기의 죄에서 떠나서 정의와 공의로 행하여 16그가 본래 범한 모든 죄가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반드시 살리라 이는 정의와 공의를 행하였음이라 하라 19만일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 정의와 공의대로 행하면 그가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겔33:14, 16, 19)


주님 말씀입니다. The Lord said:

 

그때에 의인들(cf. 주석 #3)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마13:43) The righteous(cf. 주석 #3) shall shine forth as the sun, in the kingdom of my father, (Matt. 13:43)

 

‘의인들’은 체어리티를 타고난 사람들을 대표합니다. 그리고 시대의 종말과 관련된 구절에서는, “the righteous” meaning those who are endowed with charity; and concerning the consummation of the age he said: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마13:49) The angels shall go forth and shall sever the wicked from among the righteous. (Matt. 13:49)

 

여기서도 ‘의인들’은 체어리티에서 오는 선을 보여주는 사람들을 대표합니다. Here also the “righteous” denote those who are in the good of charity.

 

[2] 하지만 ‘완전한’(perfect)은 체어리티 가운데 자라는 진리를 상징합니다. 진리는 여러 다른 곳에서 비롯될 수 있는데, 체어리티의 품에 안겨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 가운데서 자란 진리, 이 진리를 이름하여 ‘완전한’, ‘완전한 자’(perfect man,)라 하는 것입니다. 그 한 예가 다윗의 글에 나옵니다. But “perfect” signifies the truth which is from charity, for there is truth from many another origin; but that which is from the good of charity from the Lord is called “perfect” and a “perfect man,” as in David:

 

1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2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시15:1-2) Who shall sojourn in thy tent, who shall dwell in the mountain of thy holiness? He that walketh perfect, and worketh righteousness, and speaketh the truth in his heart. (Ps. 15:1–2)

 

‘완전한’(perfect, 혹은 온전한 complete, 정직한, 반듯한 upright) 사람을 여기 묘사하고 있습니다. The “perfect” [or “complete”] man is here described.

계속해서 Again:

 

자비로운 자에게는 주의 자비로우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시18:25) With the holy thou wilt show thyself holy; with the perfect man thou wilt show thyself perfect, (Ps. 18:25)

 

‘완전한 자’는 체어리티를 동반한 거룩이나 선의 결과로 완전한 사람, 반듯한 사람입니다. where the “perfect man” is one who is so from holiness, or the good of charity.

다시 계속해서 And again: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시84:11) Jehovah will withhold no good from them that walk in perfectness [integritate]. (Ps. 84:11)

 

[3] ‘완전한 자’(perfect man), 반듯한 한 개인은 진실한 사람이 되도록 선으로 격려를 받는 사람, 다시 말해서, 타인을 위한 사랑으로 말도 하고 행동도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실은 반듯함, 정직함에 대해 말씀이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를 보면 분명한데요, 말씀에서는 이것을 종종 ‘걸어가다’(walk), ‘길’(way) 같은 단어로 표현합니다. 반듯한 사람 혹은 성실한 사람과 관련해서는 ‘반듯한, 옳은’(upright, right)이나 ‘정직, 청렴’(uprightness, rectitude)을 사용하는데, 이런 단어들은 진리와 관련이 있습니다. That a “perfect man” is one who is true from good, or who speaks and does truth from charity, is evident from the words “walk” and “way” being often applied to what is perfect, that is, to wholeness or entirety, and also the words “upright” or “uprightness,” which words pertain to truth.

예를 들면, 다윗의 글입니다. As in David:

 

내가 완전한 길을 주목하오리니 주께서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 안에서 행하리이다 (시101:2) I will teach the perfect in the way how far he shall come unto me. I will walk within my house in the perfectness of my heart; (Ps. 101:2)

 

그리고 6절에서 and in the sixth verse: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살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따르리로다 (시101:6) He that walketh in the way of the perfect, he shall minister unto me. (Ps. 101:6)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음이여 (시119:1) Blessed are the perfect in the way, who walk in the law of Jehovah. (Ps. 119:1)

 

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 (시25:21) Perfectness and uprightness shall guard me. (Ps. 25:21)

 

온전한 사람을 살피고 정직한 자를 볼지어다 모든 화평한 자의 미래는 평안이로다 (시37:37) Mark the perfect man, and behold the upright, for the end of that man is peace. (Ps. 37:37)

 

이 구절들을 보면, ‘정직하다, 의롭다’(righteous)는 선을 행하는 사람을, ‘온전하다’(perfect)는 선에서 나온 진리를 행하는 사람을 일컫는 것임을 알 수 있으며, 이것이 또한 ‘정의와 공의를 행함’인 것입니다. It is evident from these passages that he is called “righteous” who does what is good, and that he is called “perfect” who does what is true therefrom, which also is to “do righteousness and judgment.”

 

‘거룩’(holiness)과 ‘의’(righteousness)는 신앙의 천적 측면이며, ‘온전함, 성실’(perfectness, integrity)과 ‘공의’(judgment)는 그런 천적 측면에서 나오는 영적 측면입니다. “Holiness” and “righteousness” are the celestial of faith; “perfectness” and “judgment” are the spiritual thence derived.

 

 

※ 각주

 

2. 여기에 쓰인 ‘완전하다’는 ‘전체’, ‘모든, 온’의 의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말, 단어는 정수입니다. [개정자] “Perfect” is used here in the sense of “whole,” “entire.” Swedenborg’s word is integer. [Reviser]

 

3. 두 영어 단어 ‘정의롭다’, ‘의롭다’에 대한 라틴어는 하나밖에 없으며, ‘정의’, ‘의’의 경우도 같습니다. [개정자] The Latin has only one word for our two English words “just” and “righteous,” and it is the same with “justice” and “righteousness.” [Reviser]

 

 

613. ‘당대에’(generations)가 신앙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은 글자의 뜻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글자의 뜻으로 말씀을 보게 되면 역사적으로, 즉 실제 일어난 역사 중 언제 어떤 사건을 가리키는 건지로만 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는 오직 내적 의미만 다루기 때문에, 이 표현은 신앙에 관한 ‘당대에’, 즉, ‘신앙의 발전 단계 중 어느 한 단계에’라는 의미입니다. That the “generations” are those of faith, does not appear from the sense of the letter, which is historical; but as internal things only are here treated of, generations of faith are signified.

 

NCE(New Centry Edition)에서는, 이 ‘당대에’(generation)를 ‘종교적 발전의 한 단계’(a stage of religious development)로, 내포된 메시지를 ‘신앙의 여러 속성들’(attributes of faith)로 풀고 있습니다.


‘당대에’가 여기서 의미하는 게, ‘연결’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로도 또한 분명합니다. It is also evident from the connection that the generations here are no others.

말씀 다른 구절들, 가령 이사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It is the same in other passages of the Word, as in Isaiah: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 (사58:12) They that shall be of thee shall build the waste places of old; thou shalt raise up the foundations of generation and generation; and thou shalt be called the repairer of the breach, the restorer of paths to dwell in. (Isa. 58:12)

 

이 모든 것들은 신앙에 속한 것들, 곧 신앙의 여러 면들을 상징합니다. ‘오래 황폐된 곳들’은 신앙의 천적인 것들, 곧 황폐해진, 신앙의 천적 퀄러티들을, ‘역대의 파괴된 기초’는 신앙의 영적인 것들, 곧 신앙의 영적 퀄러티들의 기초들을 각각 상징합니다. 이것들은 고대 이래로 폐허가 되었는데, 이 또한 상징하는 바입니다. All these things signify what is of faith; the “waste places of old” signify celestial things of faith; the “foundations of generation and generation,” spiritual things of faith, which had lapsed from the ancient times that are likewise signified.

 

계속해서 Again: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옛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 (사61:4) They shall build the old wastes, they shall raise up the former desolations, they shall renew the waste cities, the desolations of generation and generation; (Isa. 61:4)

 

유사한 상징이지요. with similar signification.

계속해서 And again: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그들이 생산한 것이 재난을 당하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요 그들의 후손도 그들과 같을 것임이라 (사65:23) They shall not labor in vain, nor bring forth for trouble; for they are the seed of the blessed of Jehovah, and their offspring with them. (Isa. 65:23)

 

여기서도 ‘생산한 것’, 즉 자녀를 낳은 것은 신앙에 속한 것들, 곧 신앙의 속성들에 대한, ‘수고’는 사랑에 속한 것들, 곧 사랑의 속성들에 대한 서술입니다. Here also “bringing forth” [generare] is predicated of the things of faith; “laboring,” of those of love.

후자의 경우, 그들을 가리켜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라, 전자를 가리켜는 ‘후손’이라 하고 있습니다. Of the latter it is said that they are “the seed of the blessed of Jehovah”; of the former, that they are “offspring.”

 

이처럼 말씀에서 ‘당대’, ‘역대’, ‘자손’, ‘후손’ 등의 표현은 모두 신앙과 관련된 표현들입니다. 단순한 무슨 역사 이야기가 아닙니다.

 

 

614.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가 신앙의 교리, 신앙에 관한 교리를 상징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며’라는 동일한 표현으로 언급되었던 에녹에 대한 내용(창5:22, 24, AC.519)을 보면 되는데요, 거기 보면, 이 표현은 후손들의 사용을 위해 보전된, 즉, 나중에 일어날 후손들로 하여금 그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따로 보관하신 신앙의 교리를 상징했습니다. That “to walk with God” signifies the doctrine of faith, may be seen from what was said before respecting Enoch (chapter v. 22, 24), of whom also it is said that he “walked with God”; and there it signifies the doctrine of faith preserved for the use of posterity.

 

22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5:22, 24)


그리고 지금 이들이 바로 그 후손이기 때문에, 이 주제가 지금 다시 거론된 것입니다. And as this is the posterity for whose use it was preserved, the subject is now here taken up again.

 

 

615. 이 교회 사람의 퀄리티가 여기서는 일반적으로 서술되고 있습니다. 즉, 본 절은 이 교회 사람들의 전체적인 모습, 일반적인 모습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그 모습이 된 건 아니고, 앞으로 될 모습입니다. 뒤에 이어지는 여러 장을 통해 이제 그 형성 과정을 보게 되는데요, (AC.838, 977-979) 즉, 신앙에 관한 지식들을 통해, 이들은 체어리티의 사람들, 체어리티라는 감정, 정서를 선물로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되며, 이렇게 이들은 체어리티 가운데 어떤 행동들을 하게 되고, 그 결과, 체어리티와 연결된 선량함을 통해 진리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The quality of the man of this church is here described in general; not that he was such as yet—for his formation is treated of in what follows—but that such he might become: that is to say, that by knowledges of faith he could be endowed with charity, and so act from charity, and from the good of charity know what is true.

 

전에는, 즉, 이들의 선조인 태고 교회 사람들은 퍼셉션이라는 타고나는 능력으로 무슨 학습 없이도 선과 진리를 직관하며,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면, 이제 이들 홍수 후 세대인 노아 교회부터는 선과 진리를 이런 방식으로 알게 됩니다. 퍼셉션의 자리를 이제 이런 방식, 곧 신앙의 체어리티를 경유하는 방식이 대신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체어리티의 선 혹은 ‘의인이요’(righteous, just)가 먼저 나오고, 체어리티의 진리 혹은 ‘완전한’(perfect, upright)이 그 뒤를 잇는 것입니다. For this reason the good of charity or “righteous” precedes, and the truth of charity or “perfect” follows.

체어리티는 앞서 말씀드렸듯(AC.325, 351), 이웃(our fellow human beings)을 향한 사랑이요, 자비입니다. 이것은 태고 교회가 주님을 향해 직접(directed) 가졌던 주님 사랑의 낮은 단계입니다. Charity, as before said, is love toward the neighbor and mercy; and it is a lower degree of the love of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was love to the Lord.

이제 보시듯, 사랑은 내리막이 되었고, 더욱 외적, 곧 더욱 피상적이 되었는데, 이걸 가리켜 체어러티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Thus love now descended and became more external, and is to be called cha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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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6:9-22

 

9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These are the births of Noah; Noah was a man righteous and perfect in his generations: Noah walked with God. 10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And Noah begat three sons: Shem, Ham, and Japheth. 11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And the earth was corrupt before God; and the earth was filled with violence. 12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And God saw the earth, and behold it was corrupt, for all flesh had corrupted its way upon the earth. 13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And God said unto Noah, The end of all flesh is come before me, for the earth is filled with violence from their faces, and behold I will destroy them with the earth. 14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Make thee an ark of gopher woods; mansions shalt thou make the ark, and shalt pitch it within and without with pitch. 15네가 만들 방주는 이러하니 그 길이는 삼백 규빗, 너비는 오십 규빗, 높이는 삼십 규빗이라 And thus shalt thou make it: three hundred cubits the length of the ark, fifty cubits its breadth, and thirty cubits its height. 16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A window shalt thou make to the ark, and to a cubit shalt thou finish it from above; and the door of the ark shalt thou set in the side thereof; with lowest, second, and third stories shalt thou make it. 17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것들이 다 죽으리라 And I, behold I do bring the flood of waters upon the earth, to destroy all flesh wherein is the breath of lives from under the heavens; everything that is in the earth shall expire. 18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And I will set up my covenant with thee; and thou shalt enter into the ark, thou and thy sons, and thy wife, and thy sons’ wives with thee. 19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게 하되. And of every living thing of all flesh, pairs of all shalt thou make to enter into the ark, to keep them alive with thee; they shall be male and female. 20새가 그 종류대로,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 Of the fowl after its kind, and of the beast after its kind, of every creeping thing of the ground after its kind, pairs of all shall enter unto thee, to keep them alive. 21너는 먹을 모든 양식을 네게로 가져다가 저축하라 이것이 너와 그들의 먹을 것이 되리라. And take thou unto thee of all food that is eaten, and gather it to thee, and it shall be for food for thee and for them. 22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And Noah did according to all that God commanded him; so did he.

 

 

개요

 

599. 여기서 다루고 있는 주제는 ‘노아’라는 이름을 가졌던 교회의, 거듭나기 이전 상태입니다. The subject here treated of is the state of the church called “Noah,” before its regeneration.

 

 

600. (9절) 그 교회의 사람들을 거듭날 수 있었던 사람들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10절) 그런 가운데 그 교회에서 세 종류의 교리(doctrine), 신학(theology)이 일어났는데, 그들이 바로 ‘셈과 함과 야벳’입니다. The man of that church is described, that he was such that he could be regenerated (verse 9); but that there arose thence three kinds of doctrine, which are “Shem, Ham, and Japheth” (verse 10).

 

 

601. (11-12절) 태고 교회의 남은 후손들은 그들의 끔찍한 종교적 신념(persuasion, 설득, 기만)과 더러운 갈망(yearnings, 욕망) 때문에 아무도 거듭날 수 없었으며, (13절) 그들은 결국 이런 걸로 자신을 철저히 파괴했습니다. That the man who was left from the most ancient church could not be regenerated, on account of his direful persuasions and foul yearnings (verses 11–12); whereby he would utterly destroy himself (verse 13).

 

 

602. (14절) 그러나 ‘방주’로 묘사하고 있는 ‘노아’ 교회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15절) 그들에게 남아 있는 리메인스를 여러 수치(measures, 측량)로, (16절) 그들의 언더스탠딩(understanding, 이해력)의 여러 특징들은 ‘창’, ‘문’, ‘칸’으로 각각 묘사하고 있습니다. But the man of the church called “Noah,” who is described by the “ark,” was not so (verse 14); and the remains with him are described by the measures (verse 15); the things of his understanding, by the “window,” “door,” and “mansions.” (verse 16)

 

 

603. (17절) 그들은 보호를 받게 되지만 나머지 다른 모든 사람은 악과 거짓의 범람, 홍수로 사라질 것입니다. That he would be preserved when the rest would perish by an inundation of evil and falsity (verse 17).

 

 

604. (18절) 그들에게 있던 진리들과 선들이 건짐을 받으며, (19-20절) 언더스탠딩에 속한 모든 것, 그리고 의지에 속한 모든 것도 건짐을 받을 텐데, 그 방법은 바로 거듭남입니다. (21절) 그들은 거듭남을 위한 준비에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며, (22절) 그렇게 되었습니다. And that the truths and goods which were with him would be saved (verse 18); and thus whatever was of the understanding and whatever was of the will, by regeneration (verses 19–20); for receiving which he was to be prepared (verse 21); and that it was so done (verse 22).

 

배경

 

605. 지금 다루는 주제는 ‘노아’라는 이름을 가진 새 교회의 생겨남(formation)입니다. 이 교회의 생겨남을 방주를 가지고 묘사하고 있는데, 방주 안에는 온갖 종류의 생물들이 수용되어 있었습니다. The subject now treated of is the formation of a new church, which is called “Noah”; and its formation is described by the ark into which living things of every kind were received.

늘 그렇듯, 새 교회가 일어나기 전에는 그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하는데, 그것을 방주를 지어 띄움, 홍수로 범람한 물 위를 흔들거리며 하염없이 둥둥 떠다님 등으로 묘사하는 것입니다. But as is wont to be the case, before that new church could arise it was necessary that the man of the church should suffer many temptations, which are described by the lifting up of the ark, its fluctuation, and its delay upon the waters of the flood.

새 교회, 곧 거듭남 가운데 있는 사람은 마침내 참된 영적 인간이 되면서 자유하게 되는데, 이것을 물의 빠짐과, 이어지는 많은 일들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And finally, that he became a true spiritual man and was set free is described by the cessation of the waters, and the many things that follow.

말씀의 문자적 의미만 고수하시는 분들은 결코 이런 메시지를 볼 수 없습니다. 이 경우가 특히 그런데요, 말씀에 기록된 모든 것이 역사적으로 연결되고, 어떤 역사적 사건에 대한 아이디어들을 제공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No one can see this who adheres to the sense of the letter only, in consequence (and especially is this the case here) of all things being historically connected, and presenting the idea of a history of events.

 

하지만 말씀을 이렇게 겉 글자와 달리 그 속뜻이 담기도록 기록한 이유는, 이런 형식이 그 당시 사람들의 스타일이요, 그들에게는 가장 큰 즐거움을 주는 형식이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무슨 대표성을 띤 그림처럼 포장, 그걸 역사 형태로 정돈하는 이런 문학 형태는, 그것이 더욱 더 역사 시리즈물처럼 보이면 보일수록, 그것은 더욱 더 그들의 재능에 어울리는 것이었습니다. But such was the style of the men of that time, and most pleasing to them it was that all things should be wrapped up in representative figures, and that these should be arranged in the form of history; and the more coherent the historical series, the better suited it was to their genius.

고대인들은 오늘날처럼 어떤 사실을 날 것으로, 있는 그대로 다루느라 많은 시간을 쓰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들은 깊은, 심오한 사고(思考, thoughts)에 힘썼고, 그 결과는 오늘 본문에서 보듯 아주 기름진 결과들을 가져왔습니다. For in those ancient times men were not so much inclined to memory-knowledges as at this day, but to profound thoughts, of which the offspring was such as has been described.

이것이 고대인들의 지혜였습니다. This was the wisdom of the ancients.

 

 

606. ‘홍수’, ‘방주’ 및 이런 이유로, 이들과 관련된 것들이 거듭남과, 거듭남에 앞서 선행하는 시험들을 상징한다는 사실을, 오늘날 학자들 사이에서는 어느 정도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은 또한 거듭남과 시험을 홍수, 그 범람하는 물에 비유하지요. That the “flood,” the “ark,” and therefore the things described in connection with them signify regeneration, and also the temptations that precede regeneration, is in some degree known among the learned at this day, who also compare regeneration and temptations to the waters of a flood.

 

※ 여기서 말하는 ‘오늘날’은 1750년대 유럽을 말합니다.

 

 

607. 하지만 이 교회의 캐릭터에 관해서는 나중에 설명하겠습니다. But the character of this church will be described hereafter.

여기서는 살짝, 간략히만 말씀드리면, 태고 교회는 이미 말씀드린 대로, 천적(天的, celestial, heavenly)이었던 반면, 지금 보고 있는 이 교회는 영적인 교회가 되었습니다. That an idea of it may be presented here, it shall be briefly said that the most ancient church was celestial, as already shown, but this church became spiritual.

태고 교회는 선과 진리에 관한 퍼셉션(perception)을 가졌었던 반면, 지금 이 고대 교회는 퍼셉션이 아닌, 그 자리를 대신하여 다른 종류의 딕테이트(dictate, inner voice), 곧 양심(conscience)이라고 하는 것을 갖게 되었습니다. The most ancient church had a perception of good and truth; this, or the ancient church, had not perception, but in its place another kind of dictate, which may be called conscience.

 

[2] 그러나 아직 세상에 알려진 적이 없고, 또 아마 믿기도 어려운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태고 교회 사람들은 내적 호흡을 했다는 것입니다. 외적 호흡은 그저 암묵적이었고요. But what is as yet unknown in the world, and is perhaps difficult to believe, is that the men of the most ancient church had internal respiration, and only tacit external respiration.

그래서 그들은 오늘날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많은 말을 하는 대신 천사들처럼 생각으로 말을 했습니다. 그들은 안색의 무궁한 변화, 특히 입술 주변의 미세한 변화들을 가지고 어떤 정신적 이미지들을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Thus they spoke not so much by words, as afterwards and as at this day, but by ideas, as angels do; and these they could express by innumerable changes of the looks and face, especially of the lips.

입술에는, 셀 수 없는 근섬유들이 시리즈로 있는데, 오늘날엔 이 근섬유들을 자유롭게 쓸 수가 없지만, 그 시절 사람들은 자유로웠습니다. 그들은 그 근섬유들을 가지고, 오늘날 사람들이 또렷한 음성으로 한 시간 동안이나 설명해야 할 어떤 아이디어를 일 분도 안 되어 보여주기도, 상징하기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이런 일을 오늘날 우리처럼 단어나 단어의 이런저런 조합, 곧 문장으로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충만하고 분명하게 확 이해시킬 수 있었습니다. In the lips there are countless series of muscular fibers which at this day are not set free, but being free with the men of that time, they could so present, signify, and represent ideas by them as to express in a minute’s time what at this day it would require an hour to say by articulate sounds and words, and they could do this more fully and clearly to the apprehension and understanding of those present than is possible by words, or series of words in combination.

이런 이야기는 확실히 믿어지지 않지는 이야기이지만, 사실입니다. This may perhaps seem incredible, but yet it is true.

또한 이 행성에 속하지 않은 다른 많은 존재가 있는데, 그들은 이런 비슷한 방식의 언어생활을 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이들에 관해서는 나중에 주님의 자비로 말씀드리겠습니다. (cf. AC.6814, 7359-7360, 7745-7746, 8022-8026, 8247-8248, 10587-10588, 10708-10710) And there are many others, not of this earth, who have spoken and at this day speak in a similar manner; concerning whom,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3] 저로 하여금 이 내적 호흡이 과연 무엇과 같으며, 시간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배울 수 있게 하셨습니다. It has been given me to know the nature of that internal respiration, and how in process of time it was changed.

그들 태고 교회 사람들은 천사들, 천사들이 이런 식으로 호흡을 하는데요, 이렇게 천사들이 가진 것과 같은 호흡을 가졌기 때문에, 그들은 사고 속 아주 깊은 데까지 들어갈 수 있었고, 일종의 퍼셉션 같은 것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 퍼셉션이라는 것은 설명 불가한 것인데, 설령 그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걸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없고, 따라서 실제로는 아무도 그걸 믿지 않을 것입니다. As these most ancient people had a respiration such as the angels have, who breathe in a similar manner, they were in profound ideas of thought, and were able to have such perception as cannot be described; and even if it could be described such as it really was, it would not be believed, because it would not be comprehended.

그러나 그들의 후손으로 가면서 이 내적 호흡은 점차 감소, 고갈되어 갔습니다. 끔찍한 신념과 환상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이 내적 호흡은 소름 끼치도록 추한 것 말고는 무슨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생존할 수가 없었고, 그렇게 그들 모두는 쓸어버림을 당했습니다. But in their posterity this internal respiration little by little came to an end; and with those who were possessed with dreadful persuasions and fantasies, it became such that they could no longer present any idea of thought except the most debased, the effect of which was that they could not survive, and therefore all became extinct.

 

 

608. 내적 호흡이 줄어들면서, 오늘날 우리가 하고 있는 것과 거의 똑같은 외적 호흡이 점점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고, 이 외적 호흡과 함께 온 것이 바로 말로 하는 스피치인데, 또렷이 발음되어 잘 들리는 스피치입니다. 생각을 구성하는 개별 아이디어들을 실어나르는 것이 바로 이 스피치입니다. When internal respiration ceased, external respiration gradually succeeded, almost like that of the present day; and with external respiration a language of words, or of articulate sound into which the ideas of thought were determined.

이 과정에서 인간의 상태는 급격히 바뀌었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그들이 전에 가졌던 그런 식으로 사물을 지각할 수가 없었고, 이 퍼셉션을 대신해서, 양심이라 부를 수 있는 또 다른 종류의 내적 음성(dictate)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이것, 곧 이 ‘내적 음성’이라는 것은 양심과 흡사하며, 퍼셉션과 양심 사이 거의 중간쯤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이 양심과 친숙합니다. Thus the state of man was entirely changed, and became such that he could no longer have similar perception, but instead of perception another kind of dictate which may be called conscience, for it was like conscience, though a kind of intermediate between perception and the conscience known to some at this day.

생각을 구성하는 아이디어들이 이런 형태의 주물 안으로 부어지기 시작하자, 즉, 말로 표현, 발음되기 시작하자, 태고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속사람을 통한 가르침을 받는 대신, 오직 겉사람을 통해서만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And when such determination of the ideas of thought took place, that is to say, into spoken words, they could no longer be instructed, like the most ancient man, through the internal man, but through the external.

태고 교회 계시들의 자리를 교리들이 계승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육체적 감각들을 가지고 붙들 수 있는 첫 번째가 바로 이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들 육체적 감각들은 기억 속 구체적 이미지들로 이미지화 되어 가고, 다시 아이디어들, 생각을 구성하는 것들인데, 다시 이미지화되어 아이디어들이 됩니다. 바로 이 아이디어들이 가르침의 어떤 도로 내지는 틀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And therefore in place of the revelations of the most ancient church, doctrinal things succeeded, which could first be received by the external senses, and from them material ideas of the memory could be formed, and from these, ideas of thought, by which and according to which they were instructed.

이렇게 태고 교회 뒤를 이어 일어난 교회인 고대 교회는 전혀 다른 종류의 지니어스(genius, 재능, 마음, 정신, 심령)를 갖게 되었습니다. 주께서 인류에게 이 새로운 지니어스 또는 상태를 허락하시지 않았다면 인류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Hence it was that this church which followed possessed an entirely different genius from that of the most ancient church, and if the Lord had not brought the human race into this genius, or into this state, no man could have been saved.

 

 

609. ‘노아’라 이름하는 교회 사람들의 상태 변화 역시 똑같이 태고 교회 사람들의 상태 변화에서 왔기 때문에, 앞서 설명대로, 그들 역시 아무도 더 이상 태고 사람들이 누렸던 방식으로 무슨 가르침을 받거나 내면이 열리거나 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내면이 닫히고, 그래서 더 이상 하늘과 교통할 수 없었기 때문이며, 예전의 그런 건 다 무의식 속에 가라앉아 버렸기 때문입니다. As the state of the man of this church which is called “Noah” was altogether changed from that of the man of the most ancient church, he could no longer—as said before—be informed and enlightened in the same way as the most ancient man; for his internals were closed, so that he no longer had communication with heaven, except such as was unconscious.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제는 오감을 통한 외적 방식으로밖엔 무엇을 배울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Nor, for the same reason, could he be instructed except as before said by the external way of sense or of the senses.

이런 이유로, 태고 교회를 위해 만들었던 어떤 계시들과 함께, 신앙에 관한 가르침들이 이 세대의 사용을 위해 보호, 보전된 것은 바로 주님의 섭리입니다. On this account, of the Lord’s providence, doctrinal matters of faith, with some of the revelations to the most ancient church, were preserved for the use of this posterity.

‘가인’이 바로 이런 가르침들을 맨처음 수집, 멸망을 대비, 보전한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죽임을 면케 하셨다 하신 이유입니다. (이에 관한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창4:15 관련 내용인 AC.392-396 참조) These doctrinal things were first collected by “Cain,” and were stored up that they might not be lost; and therefore it is said of Cain that a “mark was set upon him, lest anyone should slay him” (concerning which see what was said at that place, Gen. 4: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에녹’은 이런 가르침들을 일종의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으로 줄인 사람입니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아닌, 아직 오지 않은 미래세대에게만 유용한 것이었으며, 이걸 가리켜,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다’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창5:24 및 AC.521 참조) These doctrinal matters were afterwards reduced into doctrine by “Enoch”; but because this doctrine was of use to no one at that time, but was for posterity, it is said that “God took him.” (See also Gen. 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5:24)

 

지금 설명 중인 후손 또는 교회가 사용할 수 있도록 주님이 따로 보관하신 것이 바로 이들 신앙의 가르침입니다. 퍼셉션은 사라질 것이며, 그래서 이 신앙의 가르침들이 잘 견디고 보존, 후대에 전달되어야 할 것을 주님은 미리 내다보셨습니다. These doctrinal matters of faith are what were preserved by the Lord for the use of this posterity or church; for it was foreseen by the Lord that perception would be lost, and therefore it was provided that these doctrinal things should remain.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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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6:1-8

 

8절,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Verse 8, And Noah found grace in the eyes of Jehovah.

 

※ 8절 속뜻

 

 

 

596. ‘노아’는 새 교회를 상징합니다. By “Noah” is signified a new church.

 

그가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라는 말씀은, 주님은 인류가 이렇게 구원받게 될 것임을 예견하셨다는 뜻입니다. That he “found grace in the eyes of Jehovah” signifies that the Lord foresaw that the human race might thus be saved.

 

즉, 이것이 인류가 구원받는 방법임을 주님은 예견하셨다는 것입니다.

 

 

597. ‘노아’는 고대 교회라 하는 새 교회를 상징하는데요, 고대 교회라는 명칭은 홍수 전 존재했던 태고 교회와, 홍수 후 존재했던 이 교회를 구별해 부르기 위한 것입니다. By “Noah” is signified a new church, which is to be called the ancient church, for the sake of distinction between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was before the flood, and that which was after the flood.

 

이들 두 교회들의 상태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The states of these two churches were entirely different.

 

태고 교회의 상태는,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선과 거기서 나오는 진리에 관한 일종의 퍼셉션(perception, 지각, 배우지 않고도 주님의 선과 진리를 아는 타고난 능력)을 받은 그런 상태였습니다. The state of the most ancient church was such that they had from the Lord a perception of good and the derivative truth.

 

고대 교회, 혹은 ‘노아’의 상태는, 그들은 선과 진리에 관한 일종의 양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The state of the ancient church, or “Noah,” became such that they had a conscience of good and truth.

 

즉, 선량함(goodness)과 진실에 관한 일종의 양심으로 상태가 바뀐 것입니다.

 

태고 교회와 고대 교회 간 상태의 차이는 이런 차이, 곧 퍼셉션을 갖는 것과 양심을 갖는 것 간 차이였습니다. Such as is the difference between having perception and having conscience, such was the difference of state of the most ancient and the ancient churches.

 

퍼셉션은 양심이 아닙니다. 천적(天的, celestial) 천사들은 퍼셉션을, 영적(靈的, spiritual) 천사들은 양심을 갖고 있습니다. Perception is not conscience: the celestial have perception; the spiritual have conscience.

 

태고 교회는 천적이었고, 고대 교회는 영적이었습니다. The most ancient church was celestial, the ancient was spiritual.

 

[2] 태고 교회는 영들 및 천사들과 어울려 지냄을 통해, 그리고 비전 및 꿈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았고, 그렇게 해서 그들에게는 선과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일반적인 능력이 생겼습니다. 그들이 이런 걸 인식하게 되자, 이번에는 이런 퍼셉션 능력으로 얻게 된 무수한 인사이트들(insights, 통찰력)을 통해 가장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원리들, 말하자면, 엑시엄(axioms, 자명한 이치, 公理)들을 컨펌하게 되었습니다. 이들 인사이트들은 특정 디테일들을 구성하는데, 넓은 카테고리들이 이런 디테일들로 채워지는 그런 것입니다. The most ancient church had immediate revelation from the Lord by consort with spirits and angels, as also by visions and dreams; whereby it was given them to have a general knowledge of what was good and true; and after they had acquired a general knowledge, these general leading principles, as we may call them, were confirmed by things innumerable, by means of perceptions; and these innumerable things were the particulars or individual things of the general principles to which they related.

 

즉, 천국, 곧 주님의 신적 질서의 나라, 질서정연한 진리 체계가 차곡차곡 각 사람 내면에 자리 잡아갔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가장 보편적이고 근본적인 원리들이 날마다 컨펌되었습니다. 무엇이든지 이 원리에 부합하지 않으면 그들은 그걸 그렇지 않은 것으로, 부합하면 그런 것으로 지각했습니다. Thus were the general leading principles corroborated day by day; whatever was not in agreement with the general principles they perceived not to be so; and whatever was in agreement with them they perceived to be so.

 

즉, 주님의 신적 질서의 근본에 대한 감각이 저변에 깔려 있어 어떤 것이 그 질서에 맞는지, 안 맞는지를 직관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는 말입니다.

 

천적 천사들이 바로 이런 상태입니다. Such also is the state of the celestial angels.

 

[3] 태고 교회의 보편적 원리들, 곧 엑시엄들은 천적이며, 영원한 진리들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주님이 모든 피조세계를 다스리신다.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으로 말미암는다. 모든 생명은 주님으로 말미암는다. 사람의 것(own, 사람에게 고유한 것)은 악 외에 아무것도 아니며, 그 자체로 죽은 것이다 등등... 그외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The general principles of the most ancient church were heavenly and eternal truths—as that the Lord governs the universe, that all good and truth is from the Lord, that all life is from the Lord, that man’s own is nothing but evil, and in itself is dead; with many others of similar character.

 

태고 교회 사람들은 이런 진리들, 원리들을 컨펌하고 지지하는 수많은 것들, 생각들에 관한 퍼셉션을 주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And they received from the Lord a perception of countless things that confirmed and supported these truths.

 

그들에게 신앙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사랑이었습니다. With them love was the principal of faith.

 

그들로 하여금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을 지각할 수 있도록 주님이 그들을 북돋워 주신 방법은 바로 사랑입니다. 앞에서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말입니다. (cf. AC.32:2, 202, 398) By love it was given them of the Lord to perceive whatever was of faith, and hence with them faith was love, as was said before.

 

그러나 고대 교회의 경우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주님의 신적 자비, 곧 주님의 허락하심을 받고 말씀드리겠습니다. But the ancient church became entirely different, concerning which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598.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의 의미는, 주님은 인류가 이렇게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을 예견하셨다는 것입니다. He found grace in the eyes of Jehovah signifies that the Lord foresaw that the human race might thus be saved.

 

주님의 자비는 인류 전체의 구원에 관한 것이며, 주님은 인류의 구원을 생각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호의, 은혜 역시 그러하며, 그래서 여기 ‘은혜’(grace)가 인류의 구원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The Lord’s mercy involves and looks to the salvation of the whole human race; and it is the same with his “grace,” and therefore the salvation of the human race is signified.

 

‘노아’는 새 교회를 상징할 뿐만 아니라 새 교회의 신앙, 곧 체어리티의 신앙 또한 상징합니다. By “Noah” is signified not only a new church, but also the faith of that church, which was the faith of charity.

 

그래서 주님은 이 체어리티의 신앙, 곧 체어리티가 원인인 신앙을 통해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을 예견하셨습니다. (이 신앙에 관해서는 나중에) Thus the Lord foresaw that through the faith of charity the human race might be saved (concerning which faith hereafter).

 

[2] 말씀에서는 ‘자비’와 ‘은혜’를 구분하며, 이 구분은 이것을 받은 사람들에 따릅니다. ‘자비’는 천적인 사람들에게, ‘은혜’는 영적인 사람들에게 쓰입니다. 천적인 사람들은 자비만, 영적인 사람들은 거의 은혜만 압니다. But there is a distinction in the Word between “mercy” and “grace,” and this in accordance with the difference that exists in those who receive them; “mercy” being applied to those who are celestial, and “grace” to those who are spiritual; for the celestial acknowledge nothing but mercy, and the spiritual scarcely anything but grace.

 

천적인 사람들은 은혜가 무엇인지 모르며, 영적인 사람들은 자비가 무엇인지 거의 모릅니다. 영적인 사람들은 자비와 은혜는 같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The celestial do not know what grace is; the spiritual scarcely know what mercy is, which they make one and the same with grace.

 

이것은 두 가지 아주 다른 겸손에서 나옵니다. 가슴(heart)의 겸손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주님의 자비를, 머리(thought)의 겸손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주님의 은혜를 간구합니다. 만일 후자가 자비를 구한다면, 그건 시험 중이거나 진심이 아닌 말로만 구하는 것입니다. This comes from the ground of the humiliation of the two being so different; they who are in humiliation of heart implore the Lord’s mercy; but they who are in humiliation of thought beseech his grace; and if these implore mercy, it is either in a state of temptation, or is done with the mouth only and not from the heart.

 

‘노아’라 하는 새 교회는 천적이 아닌 영적이기 때문에, 여호와께 ‘자비’를 입었다 하지 않고, ‘은혜’를 입었다 하는 것입니다. Because the new church called “Noah” was not celestial but spiritual, it is not said to have found “mercy,” but “grace,” in the eyes of Jehovah.

 

[3] 말씀에서 ‘자비’와 ‘은혜’를 구분하고 있음은, 여호와를 가리켜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다’ 하시는 많은 구절들을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That there is a distinction in the Word between “mercy” and “grace” is evident from many passages where Jehovah is called “merciful and gracious.” (as in 시103:8; 111:4; 145:8; 욜2:13)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시103:8)

 

그의 기적을 사람이 기억하게 하셨으니 여호와는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도다 (시111:4)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시145:8)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욜2:13)

 

이런 구분은 다른 데, 가령 예레미야에서도 마찬가지로 하고 있습니다. The distinction is likewise made in other places, as in Jeremiah:

 

2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니라 칼에서 벗어난 백성이 광야에서 은혜를 입었나니 곧 내가 이스라엘로 안식을 얻게 하러 갈 때에라 3옛적에 여호와께서 나에게 나타나사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 (렘31:2-3) Thus saith Jehovah, The people which were left of the sword found grace in the wilderness, when I went to give rest to him, to Israel. Jehovah appeared unto me from afar; and I have loved thee with an everlasting love; therefore in mercy have I drawn thee, (Jer. 31:2–3)

 

여기 보면, ‘은혜’는 영적인 퀄러티를, ‘자비’는 천적인 퀄러티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where “grace” is predicated of the spiritual, and “mercy” of the celestial.

 

이사야에는 In Isaiah: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사30:18) Therefore will Jehovah wait that he may give grace unto you, and therefore will he exalt himself that he may have mercy upon you. (Isa. 30:18)

 

이 역시, ‘은혜’는 영적인 퀄러티를, ‘자비’는 천적인 퀄러티를 보고 있습니다. Here likewise “grace” regards the spiritual, and “mercy” the celestial.

 

창세기 후반부, 롯이 천사에게 말하는 장면, So in the chapter presently following, where Lot says to the angel:

 

주의 종이 주께 은혜를 입었고 주께서 큰 인자를 내게 베푸사 내 생명을 구원하시오나 내가 도망하여 산에까지 갈 수 없나이다 두렵건대 재앙을 만나 죽을까 하나이다 (창19:19) Behold I pray thy servant hath found grace in thine eyes, and thou hast made great thy mercy which thou hast wrought with me, to make alive my soul. (Gen. 19:19)

 

‘은혜’는 신앙이나 언더스탠딩(understanding, 이해하는 능력) 같은 영적 목표에 초점을 맞춘다는 사실은 여기 ‘주께 은혜를 입었고’라는 표현을 보면 확실하고요, ‘자비’는 사랑이나 의지 같은 천적 목표에 초점을 맞춘다는 사실은 천사가 한 말, ‘인자를 베푸셨다’, ‘내 생명을 구원하셨다’라는 표현들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grace” relates to spiritual things, which are of faith, or of the understanding, is evident here also in that it is said, he “hath found grace in thine eyes”; and that “mercy” relates to celestial things which are of love, or of the will,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 angel is said to have “wrought mercy,” and to have “made alive the s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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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6:1-8

 

7절,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Verse 7, And Jehovah said, I will destroy man whom I have created, from upon the faces of the ground, both man and beast, and creeping thing, and fowl of the heavens; for it repenteth me that I have made him.

 

※ 7절 속뜻

 

 

591. ‘이르시되 내가 사람을 쓸어버리되’는 인류가 전멸을 자초할 것을, ‘내가 창조한 사람을 지면에서’는 태고 교회의 후손이었던 사람들을,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는 그들의 의지 안에 무엇이 있든지 그것이 그들을 전멸시킬 것이라는 것, ‘공중의 새까지’는 그들의 지적 능력 또는 사고 능력 안에 무엇이 있든지를,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는 위에서(cf. AC.587-588) 살핀, 불쌍히 여기심을 각각 상징합니다. “Jehovah said, I will destroy man” signifies that man would extinguish himself; “whom I have created, from upon the faces of the ground” signifies the man of the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both man and beast and creeping thing” signifies that whatsoever is of the will would extinguish him; “and fowl of the heavens” is whatever is of the understanding or thought; “for it repenteth me that I have made them” signifies as before compassion.

 

 

592. 이르시되 내가 사람을 쓸어버리되 Jehovah said, I will destroy man.

 

이 말씀은, 인류가 전멸을 자초할 것이라는 의미임은 위(cf. AC.588)에서 말씀드린 내용으로 확인할 수 있는데요, 즉, 여호와이신 주님에 관한 서술을, 그가 벌을 주신다, 그가 유혹하신다, 그가 악을 시행하신다, 그가 파괴하시거나 죽이시며, 저주하신다 한다는 것입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man would extinguish himself 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explained before, namely, that it is predicated of Jehovah or the Lord that he punishes, that he tempts, that he does evil, that he destroys or kills, and that he curses.

 

예를 들면, 그는 유다의 장자 엘과, 또 다른 아들 오난을 죽이셨고, (창38:7, 10) 애굽의 모든 초태생(初胎生, firstborn)을 치셨습니다. (출12:12, 29) As for example, that he slew Er, Judah’s firstborn; and Onan, another son of Judah (Gen. 38:7, 10); that Jehovah smote all the firstborn of Egypt (Exod. 12:12, 29).

 

7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 10그 일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 (창38:7, 10)

 

12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을 내가 심판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29밤중에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난 것 곧 왕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가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시매 (출12:12, 29)

 

예레미야에서도 And so in Jeremiah:

 

싸우려 하였으나 내가 나의 노여움과 분함으로 그들을 죽이고 그들의 시체로 이 성을 채우게 하였나니 이는 그들의 모든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얼굴을 가리어 이 성을 돌아보지 아니하였음이라 (렘33:5) Whom I have slain in mine anger and in my wrath. (Jer. 33:5)

 

다윗의 글에 In David:

 

그의 맹렬한 노여움과 진노와 분노와 고난 곧 재앙의 천사들을 그들에게 내려보내셨으며 (시78:49) He cast upon them the wrath of his anger; vehement anger, and fury and straitness, a sending of evil angels. (Ps. 78:49)

 

아모스에 In Amos:

 

성읍에서 나팔이 울리는데 백성이 어찌 두려워하지 아니하겠으며 여호와의 행하심이 없는데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 (암3:6) Shall evil befall a city, and Jehovah hath not done it? (Amos 3:6)

 

계시록에 In John:

 

15:1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7네 생물 중의 하나가 영원토록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 대접 일곱을 그 일곱 천사들에게 주니 16:1또 내가 들으니 성전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일곱 천사에게 말하되 너희는 가서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 하더라 (계15:1, 7; 16:1) Seven golden vials full of the wrath of God who liveth forever and ever. (Rev. 15:1, 7; 16:1)

 

이 모든 골치 아픈 일들이 다 여호와로 말미암는다 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완전 정반대인데도 말입니다. All these things are predicated of Jehovah, although entirely contrary to his nature.

 

앞서 말씀드린 이유로, 이런 속성들이 다 여호와께 속한 걸로 서술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사람들이 가장 먼저 형성해야 하는, 하나님에 대한 보편적인 생각은, 일반적이든 구체적이든 주님이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정돈하신다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나서 배우게 되는 것은, 어떤 악도, 주님으로말미암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죽이시고 하는 건 더더욱 아니지요. 오히려 악을 자초하는 장본인은 바로 사람 자신입니다. 그가 악을 자신에게로 가져와 자신을 망치게 하고, 파괴하게 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를 부추기고 꾀는 것은 그가 아니라 사실은 악한 영들이지만, 그러나 사람은 자기가 그렇게 했다고, 자기가 그렇게 한 장본인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냥 자기가 한 게 되는 것입니다. They are predicated of him for the reason explained before; and also in order that men may first form the very general idea that the Lord governs and disposes all things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and may afterwards learn that nothing of evil is from the Lord, much less does he kill; but that it is man who brings evil upon himself, and ruins and destroys himself—although it is not man, but evil spirits who excite and lead him; and yet it is man, because he believes that he is himself the doer.

 

그래서 여기 지금 여호와를 가리켜 그가 ‘사람을 쓸어버리신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자신을 파괴하고 끝내는 것은 바로 사람인 자기 자신인데도 말입니다. So now here it is said of Jehovah that he would “destroy man,” when in fact it was man who would destroy and extinguish himself.

 

[2] 이 경우, 내세에서는 실제로 어떤 상태일까 하는 것은, 지옥의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보면 아주 명확하게 알 수 있는데요, 그들은 자기들이 받고 있는 형벌에 뒤따르는 모든 부정적인 결과들에 대해 끝없이 애통해 하며, 주님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The state of the case may be very evident from those in the other life who are in torment and in hell, and who are continually lamenting and attributing all the evil of punishment to the Lord.

 

악령들의 세계에는 남을 해하고 벌주며 처벌하는 걸 즐거움으로, 심지어 가장 큰 즐거움으로 삼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바로 주님이시라고 생각합니다. So in the world of evil spirits there are those who make it their delight, even their greatest delight, to hurt and punish others; and those who are hurt and punished think it is from the Lord.

 

하지만 그들은 어떠한 나쁜 일도 절대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게 아니라는 말을 듣고, 또 눈으로 확인도 합니다. 정반대로, 이 모든 일은 그들이 스스로 자초한 것이라는 거, 내세의 모든 것은 정돈과 균형의 상태 가운데 있는데, 바로 악은 악을 행한 자에게로 돌아오고, 그 악에 대한 형벌의 비극으로 바뀐다는 거, 이것이 악은 어떻게 도울 수가 없는 이유이며, 이런 작용-반작용의 법칙, 질서는 피할 수가 없는 이유라는 말을 듣습니다. But they are told, and it is shown them, that not the least of evil is from the Lord, but they bring it upon themselves; for such is the state and such the equilibrium of all things in the other life that evil returns upon him who does evil, and becomes the evil of punishment; and for the same reason it is inevitable.

 

이런 균형, 이런 질서는 악을 고치기 위해, 악을 치료하기 위해 허용되는 것이라는 말을 그들은 듣습니다. This is said to be permitted for the sake of the amendment of the evil.

 

여기 허용이라는 말은 용인하다, 참다, 겪다라는 말입니다.

 

주님은 여전히 한결같이 모든 악의 형벌을 선으로 돌리시며, 주님으로부터는 선말고 다른 무엇은 없으시다는 말도 듣습니다. But still the Lord turns all the evil of punishment into good; so that there is never anything but good from the Lord.

 

지금까지 허용이 무엇인지, 즉 이런 종류의 용인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허용되었다는 건, 허용하신 분에 의해, 그가 허용하셨기 때문에 행해진 것으로 믿는 것입니다. But hitherto no one has known what permission is; what is permitted is believed to be done by him who permits, because he permits.

 

사람들이 보는 것은 용인된 일입니다. 그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신 분에 의해 실행되어진, 쉽게 말해 그분이 허락하셨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지요.

 

그러나 사실은 아주 다른데요, 이에 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 곧 주님의 허락을 받아 나중에(cf. AC.2447) 말씀드리겠습니다. But the fact is quite otherwise, concerning which,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593. 내가 창조한 사람을 지면에서 Whom I have created, from upon the faces of the ground.

 

이 본문이 태고 교회의 후손이었던 사람을 상징한다는 것은, 이 사람을 일컬어, 그는 주께서 ‘창조하신’(created), 즉, 거듭나게 하신 사람이었다는 것, 그리고 나중에 천적(天的, celestial) 인간이 될 때까지 ‘만드신’(made), 즉, 완벽하게 하신, 또는 거듭나게 하신 사람이었다라는 표현 뿐 아니라, ‘지면(地面)에서’(from upon the faces of the ground)라는 표현을 통해서도 분명합니다. That this signifies the man from the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is evident not only from its being said, the man whom he had “created,” that is, whom he had regenerated; and afterwards whom he had “made,” that is, had perfected, or regenerated until he became celestial; but also from its being said “from upon the faces of the ground.”

 

‘지(地)’, 곧 ‘땅’(ground)은 앞서(cf. AC.566-567) 보여드린 대로, 교회가 있는 지역입니다. The “ground” is where the church is, as has been shown before.

 

다음 사실 또한 그 분명한 증거가 되는데요, 이 본문은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을 자신들의 갈망(yearnings)에 침수시킨 사람들을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교리적인 것 자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은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The same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ose are treated of who immersed the doctrinal things of faith in their yearnings; and those who had not doctrinal things of faith could not do so.

 

즉, ‘내가 지면에서 창조한 사람’이라는 이 표현은 한편으로, 신앙의 가르침과 자신들의 욕구를 합친 사람들에 대한 내용이라는 것이며, 참 신앙의 교리가 무엇인지도 몰라 접근도 못하는 사람들은 절대 이런 행위(offense, 위법 행위, 범죄)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저런 짓을 하는 사람들의 예로는, 자신의 사사로운 목적을 위해 말씀(the Word) 또는 어떤 종교적인 이슈를 사사로이 이용해 먹는 사람들이 되겠습니다.

 

교회 밖 사람들은 진리와 선에 관해 무지하며, 이런 사람들은 신앙의 진리와 선에 다소 반대되는 말과 행실 중에도 일종의 이노센스 가운데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들이 무슨 환상, 곧 그것이 진리요 선인 줄 믿는 그런 것으로 가득 찬 나머지 어떤 열심을 가지고 워십에 참여하기 때문입니다. They who are outside the church are in ignorance of truth and good, and those who are in ignorance may be in a kind of innocence while speaking and acting somewhat contrary to the truths and goods of faith; for they may act from a certain zeal for the worship with which they have been imbued from infancy, and which they therefore believe to be true and good.

 

그러나 그 가운데 신앙의 교리를 가진 사람들의 경우는 아주 다릅니다. But the case is entirely different with those who have the doctrine of faith among them.

 

그들은 진리를 거짓과, 거룩한 것을 신성모독과 섞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These can mingle truths with falsities, and holy things with profane.

 

그래서 이런 사람들의 운명은 내세에서는 소위 이방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운명보다도 훨씬 더 나쁜데, 이에 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 곧 허락하심을 받아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Hence their lot in the other life is much worse than the lot of those who are called gentiles, concerning whom,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594.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 Both man and beast, and creeping thing.

 

이 말씀의 뜻이, 의지와 관련된 무엇이든지 그것이 그를 끝낸다라는 것임은 ‘사람’(man), ‘가축’(beast), 그리고 ‘기는 것’(creeping thing)의 상징들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whatsoever is of the will would extinguish him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man,” of “beast,” and of “creeping thing.”

 

사람은 오직 의지(will)와 이해하는 능력(understanding, intellect)이 있어 사람이며, 이것이 있어 사람은 짐승과 구별되는 것입니다. 그 외 다른 모든 면은 짐승과 매우 유사합니다. Man is man solely from the will and understanding, by which he is distinguished from brutes; in all other respects he is very similar to them.

 

그런데 지금 저들의 경우는, 모든 선한 의지와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이 전부 사라졌습니다. In the case of these men all will of good and understanding of truth had perished.

 

선한 의지 대신 제정신이 아닌 갈망이,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 대신 정신나간 환상이 각각 그 자리를 대신했습니다. 이런 갈망과 환상이 서로 뒤섞이자 그들의 상황은 마치 리메인스가 파괴된 것 같았으며, 그렇게 그들은 종말을 맛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In place of a will of good there followed insane yearnings, in place of an understanding of truth insane fantasies; and these were commingled with their yearnings, so that after they had thus as it were destroyed remains, they could not but be extinguished.

 

의지와 관련된 모든 것을 가리켜 ‘가축’과 ‘기는 것’이라 한다는 것은, 짐승과 기는 것에 관해 전에 말씀드린 내용(cf. AC.44-46, 246)을 보시면 됩니다. That all things of the will are called “beasts” and “creeping things” 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said before concerning beasts and creeping things.

 

그러나 여기서는, 지금 다루고 있는 사람의 캐릭터 때문에, ‘가축’이 선한 어펙션(affections, 애정, emotions)이 아닌, 악한 것, 곧 악한 갈망을, ‘기는 것’은 쾌락(pleasures), 곧 육체적, 감각적 쾌락을 각각 상징합니다. But here, because of the character of the man treated of, good affections are not signified by “beasts,” but evil, consequently yearnings; and by “creeping things,” pleasures, both bodily and sensuous.

 

‘가축’과 ‘기는 것’이 그런 걸 상징한다는 것은 말씀을 가지고 더 이상 깊이 확인하지는 않겠습니다. 앞서 이미 충분히 다루었기 때문입니다. (AC.45-46, 142-143을 보시기 바랍니다.) That such things are signified by “beasts” and “creeping things” needs no further confirmation from the Word, because they have been treated of before (see n. 45–46, 142–143).

 

 

595. 공중의 새가 이해하는 능력, 곧 사고력에 관계된 모든 것을 상징한다는 것은 앞의 내용을 보시면 됩니다. (cf. AC.40) That the fowl of the heavens signifies whatever is of the understanding, that is, of thought, may also be seen above (n.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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