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6:1-8

 

6절,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Verse 6, And it repented Jehovah that he had made man on the earth, and it grieved him at his heart.

 

※ 6절 속뜻

 

 

586a. ‘한탄하사’는 자비(mercy)를 상징하며, ‘마음에 근심하시고’ 역시 같은 걸 상징합니다. ‘한탄하사’(후회, repent)는 지혜와 관련이 있고, ‘마음에 근심하시고’는 사랑과 관련이 있습니다. That he “repented” signifies mercy; that he “grieved at the heart,” has a like signification; to “repent” has reference to wisdom; to “grieve at the heart” to love.

 

 

587.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가 자비를 상징하며, ‘마음에 근심하시고’ 역시 같은 상징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 분명, 곧 결론지을 수 있는데요, 여호와는 결코 후회하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만물을 온전히 영원부터 예견(豫見, foresee)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가 사람을 지으셨을 때, 즉 사람을 새롭게 창조하시고, 온전하게 하사 천적 인간이 되게 하셨을 때에도 그는 시간이 흐르면 사람은 지금 여기서 설명 중인 이런 인종이 될 것을 예견하셨습니다. 그는 이런 것을 예견하셨고, 그래서 후회하실 수 없으십니다. That it repented Jehovah that he made man on the earth signifies mercy, and that “he grieved at the heart” has a like signification, is evident from this, that Jehovah never repents, because he foresees all things from eternity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and when he made man, that is, created him anew, and perfected him till he became celestial, he also foresaw that in process of time he would become such as is here described, and because he foresaw this he could not repent.

 

사무엘이 한 말을 보면, 이런 사실이 명료하게 드러납니다. This appears plainly from what Samuel said: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 하니 (삼상15:29) The invincible one of Israel doth not lie, nor repent, for he is not a man that he should repent. (1 Sam. 15:29)

 

모세의 글에는 And in Moses: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민23:19) God is not a man that he should lie, or the son of man that he should repent; hath he said, and shall he not do? Or hath he spoken, and shall he not make it good? (Num. 23:19)

 

오히려 ‘후회하다’라는 것은 자비로워짐, 불쌍히 여김을 상징합니다. But to “repent” signifies to be merciful.

 

여호와의 자비(mercy), 곧 주님의 자비는 인류를 향하여 주님이 행하신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인류는 주님이 불쌍히 여기시는 상태에 있으며, 주님은 인류 한 사람 한 사람을 저마다의 상태에 따라 불쌍히 여기십니다. 주님은 벌을 받게 되어 있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며, 선의 즐거움을 누리게(grant) 된 사람 또한 불쌍히 여기십니다. 벌(punishment)은 자비의 한 가지 행위인데, 그 이유는 자비는 벌에 포함된 모든 악을 선으로 구부리기 때문입니다. 선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 또한 자비의 한 가지 행위인데, 아무도 어떤 종류의 선도 결코 자기 공로로 얻을(earn)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류 전체가 악하며, 모든 사람은 그냥 방치되면 지옥을 향해 거꾸로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옥 밖으로 사람을 끌어당기시는 것이 자비이며, 이것이 순수한 자비인 것은, 주님은 이 일에 어떤 사람의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The mercy of Jehovah, or of the Lord, includes everything that is done by the Lord toward mankind, who are in such a state that the Lord pities them, each one according to his state; thus he pities the state of him whom he permits to be punished, and pities him also to whom he grants the enjoyment of good; it is of mercy to be punished, because mercy turns all the evil of punishment into good; and it is of mercy to grant the enjoyment of good, because no one merits anything that is good; for all mankind are evil, and of himself everyone would rush into hell, wherefore it is of mercy that he is delivered thence; nor is it anything but mercy, inasmuch as he has need of no man.

 

자비를 미세리코르디아(misericordia, 라틴, 자비)라 합니다. 인간을 지옥의 비참(miseries)1에서 건져주시기 때문이며, 인류가 처한 비참한 상태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자비는 비참 가운데 있는 전 인류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의 결과입니다. Mercy has its name from the fact that it delivers man from miseries1 and from hell; thus it is called mercy in respect to mankind, because they are in such a state of misery, and it is the effect of love toward them all, because all are so.

 

 

588. 주님에 대하여, ‘후회하신다’, ‘마음에 근심하신다’ 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의 자비 한가운데 이런 것들이 있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 주님의 ‘후회’, ‘근심’이라는 표현은, 말씀 여러 다른 구절처럼 그래 보이는 겉모습을 따른 것입니다. But it is predicated of the Lord that he “repents,” and “is grieved at heart,” because there appears to be such a feeling in all human mercy, so that what is said here of the Lord’s “repenting” and “grieving” is spoken according to the appearance, as in many other passages in the Word.

 

주님의 자비가 어떤 것인지, 곧 주님의 자비의 본 모습은 어떤 것인지를 인간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주님에 대한 것은 인간의 이해를 무한히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자비, 곧 후회하고 근심하고 하는 것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 나름의 이해를 가지고 자비에 대한 개념을 잡지 않으면, 그는 결코 자비에 대한 어떤 개념도 가질 수 없으며, 그래서 어떤 것도 배울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 곧 주님의 속성을 서술할 때, 왜 종종 인간의 속성을 가지고 하는지 하는 이유입니다. 예를 들면, 여호와 또는 주님이 벌하신다, 시험하신다, 파괴하신다, 화내신다 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주님은 결코 누구를 벌하시지도, 결코 누구를 시험에 빠트리시지도, 결코 누구를 파멸에 이르게 하시지도, 그리고 결코 화를 내시지도 않으시는데 말입니다. What the mercy of the Lord is none can know, because it infinitely transcends the understanding of man; but what the mercy of man is we all know to be to repent and grieve; and unless a man were to form his idea of mercy according to his own apprehension, he could not have any conception of it, and thus he could not be instructed; and this is the reason why human properties are often predicated of the attributes of Jehovah or the Lord, as that Jehovah or the Lord punishes, leads into temptation, destroys, and is angry; when yet he never punishes anyone, never leads any into temptation, never destroys any, and is never angry.

 

※ 각주

 

1. 자비에 대한 라틴어, 미세리코르디아는 딱 봐도 그 생김새가 불쌍한 사람들한테서 느끼는 마음의 어떠함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The Latin word for mercy—misericordia—by its very construction expresses the idea of a heart that feels for the wretched.

 

실제로 주님에 대하여 이런 주장들을 하기 때문에, 후회와 근심 또한 주님의 속성, 성품이라고 하는 일이 이어집니다. 어떤 한 가지 주장은 또 다른 주장을 낳기 때문인데요. 이런 건, 말씀에 나오는 다음 본문들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But as even such things as these are predicated of the Lord, it follows that repentance also and grief may be predicated of him; for the predication of the one follows from that of the other, as plainly appears from the following passages in the Word.

 

[2] 에스겔입니다. In Ezekiel:

 

이와 같이 내 노가 다한즉 그들을 향한 분이 풀려서 내 마음이 가라앉으리라 내 분이 그들에게 다한즉 나 여호와가 열심으로 말한 줄을 그들이 알리라 (겔5:13) Mine anger shall be consummated, I will make my wrath to rest, and it shall repent me. (Ezek. 5:13)

 

여기, ‘노’(anger)와 ‘분’(wrath)을 여호와께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마음의 가라앉음’(repentance) 또한 사용되고 있습니다. Here, because “anger” and “wrath” are predicated, “repentance” is predicated also.

 

스가랴입니다. In Zechariah:

 

14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 조상들이 나를 격노하게 하였을 때에 내가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기로 뜻하고 뉘우치지 아니하였으나 15이제 내가 다시 예루살렘과 유다 족속에게 은혜를 베풀기로 뜻하였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니라 (슥8:14-15) As I thought to do evil when your fathers provoked me to anger, saith Jehovah Zebaoth, and it repented me not, so again I will think in those days to do good unto Jerusalem and to the house of Judah. (Zech. 8:14–15)

 

여기 보면, 여호와가 ‘재앙을 내리기로 뜻하고’라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는, 주님은 결코 악을 행하실 생각조차 하실 수 없으시며, 오직 각 사람과 모두에게 선을 행하시는 분이신데도 말입니다. Here it is said that Jehovah “thought to do evil,” and yet he never thinks to do evil to any, but good to all and to everyone.

 

모세의 글, 모세가 여호와께 나아가 관용을 구할 때에 In Moses, when he prayed forbearance of the face of Jehovah:

 

12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 하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14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출32:12, 14) Turn from the wrath of thine anger and repent thee of this evil against thy people; and Jehovah repented of the evil which he said he would do unto his people. (Exod. 32:12, 14)

 

여기서도 ‘맹렬한 노’(wrath of anger)라는 표현을 여호와께 사용하고 있고, 그 결과, ‘뜻을 돌이키사’(repentance)라는 표현 역시 뒤따르고 있습니다. Here also the “wrath of anger” is attributed to Jehovah, and consequently “repentance.”

 

요나서에서, 니느웨 왕의 말입니다. In Jonah, the king of Nineveh said: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가 멸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 (욘3:9) Who knoweth whether God will not turn and repent, and turn from the heat of his anger, that we perish not? (Jonah 3:9)

 

여기서도 비슷하게 ‘노’(anger)라는 표현 때문에 ‘뜻을 돌이키시고’(repentance)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Here similarly “repentance” is predicated because “anger” is.

 

[3] 호세아입니다. In Hosea:

 

8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9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호11:8-9) My heart is turned within me; my repentings are kindled together; I will not execute the wrath of mine anger; (Hos. 11:8–9)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본문, ‘마음에 근심하시고’와 똑같은 말씀,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가 나오네요. where likewise it is said of the heart that “repentings were kindled,” just as in the passage we are considering it is said that he “grieved at heart.”

 

‘긍휼’(repentings)은 누가 봐도 큰 자비를 가리킵니다. “Repentings” plainly denote great mercy.

 

그래서 요엘서에는 So in Joel: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욜2:13) Turn unto Jehovah your God; for he is gracious and compassionate, slow to anger and plenteous in mercy, and repenteth of the evil; (Joel 2:13)

 

여기 ‘뜻을 돌이켜’(repent) 역시 두말할 것도 없이 자비를 가리킵니다. where also to “repent” manifestly denotes mercy.

 

예레미야입니다. In Jeremiah:

 

그들이 듣고 혹시 각각 그 악한 길에서 돌아오리라 그리하면 내가 그들의 악행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려 하던 뜻을 돌이키리라 (렘26:3) If so be they will hearken, and turn every man from his evil way, and it repent me of the evil, (Jer. 26:3)

 

이 역시 자비, 불쌍히 여기심을 상징합니다. signifying to have mercy.

 

계속해서 Again:

 

만일 내가 말한 그 민족이 그의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렘18:8) If that nation turn from their evil, it shall repent me of the evil; (Jer. 18:8)

 

이 또한 ‘뜻을 돌이키겠고’(repent)는 그들이 만일 돌아오면 불쌍히 여기시겠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where also to “repent” denotes to have mercy provided they would turn.

 

자기한테서 주님의 자비가 떠나버리게 한 장본인은 바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결코 먼저 사람을 떠나시지 않습니다. For it is man who turns the Lord’s mercy away from himself: the Lord never turns it away from man.

 

 

589. 이들과 다른 많은 구절들을 보고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말씀(the Word)은 인간의 수준(appearances)으로 기술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에게 맞춰 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From these and many other passages it is evident that the Word was spoken according to the appearances with man.

 

그래서 말씀이 기술된 이런 수준을 가지고 거짓된 원리들(false principles)을 컨펌(confirm, 증거를 들어 사실임을 보여주다, 확인하여주다)하고픈, 잘못된 전제들(false premises)을 뒷받침(support)하고픈 사람은 수없이 많은 말씀 구절들을 가지고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Whoever therefore desires to confirm false principles by the appearances according to which the Word was spoken, can do so by passages without number.

 

그러나 잘못된 가정들(false assumptions)을 증명하기 위해 말씀을 사용하는 것은 말씀을 액면가(face value)로 사용하는 것, 말씀을 겉글자의 뜻 그대로 사용하는 것하고는 아주 다릅니다. 또다른 사람은 말씀에 있는 것을 단순히 믿는 사람입니다. But it is one thing to confirm false principles by the Word, and another to believe in simplicity what is in the Word.

 

잘못된 가정들을 컨펌하는 사람은 먼저 그가 절대 포기하거나 부분적으로라도 물러설 마음이 없는 어떤 원리를 골라 시작합니다. 대신 그는 말씀을 포함, 모든 가용(可用, available) 소스들로부터 증거들을 긁어모아 차곡차곡 쌓습니다. 더 이상 진리를 볼 수 없을 정도로 지독하게 그 원리, 전제, 가정에 철저하게 스스로 사로잡힙 때까지 말이지요. 한 마디로, 이런 사람은 진리 앞에 장님이 될 때까지 이런 짓을 멈추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He who confirms false principles, first assumes a principle which he will not at all recede from, nor in the least yield, but scrapes together and accumulates confirmations wherever he can, thus also from the Word, until he so strongly persuades himself that he can no longer see the truth.

 

똑같이 말씀을 겉글자의 뜻으로 받지만, 그러나 단순한 마음(simple heart)으로 그걸 믿는 사람은 저 사람처럼 무슨 원리를 붙잡으면서 시작하는 게 아니고, 즉, 자기 입장을 강화하기 위해 말씀을 이용해 먹으려는 동기가 아닌, ‘이건 주님이 하신 말씀이야. 그러니까 진리야.’라는 생각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만일 그 말씀의 속뜻을 말씀의 다른 구절들을 가지고 이해하는 법을 배우게 되면, 그는 잠자코 따르며, 마음으로 즐거워 합니다. But he who simply or with simple heart believes, does not first assume principles, but thinks that because the Lord has thus said it is true; and if instructed from other sayings of the Word how it is to be understood, he acquiesces and rejoices in his heart.

 

주님은 화를 내시며, 벌하시고, 후회하시거나 근심하시는 분이시며, 그래서 우리는 악을 두려워하고, 선을 행해야 한다고 믿되 순진무구하고 천진난만하게 믿는 것은 전혀 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런 태도는 사람으로 하여금 주님은 크고 작은 모든 걸 보고 계신다는 믿음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일단 이런 믿음을 갖게 되면, 그는 다른 모든 영역에서 눈이 밝아지며, 현세가 아니면 내세에서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Even the man who in simplicity believes that the Lord is angry, punishes, repents, and grieves, and so believing is afraid of evil and does good, takes no harm; for this belief causes him to believe also that the Lord sees everything; and being in such a belief he is afterwards enlightened in other matters of faith, if not before, then in the other life.

 

자기들이 사랑한 가정들(assumptions)과, 아주 역겨운 자기 사랑 및 탐욕으로 스스로를 속인 사람들의 경우는 아주 다릅니다. Very different is the case with those who in agreement with a foul love of self or of the world persuade themselves to believe certain things that are deduced from the principles they have already adopted.

 

 

590. ‘후회’(repenting)는 지혜와, ‘마음에 근심함’(grieving at heart)은 사랑과 각각 관계가 있다는 것은 인간의 이해(apprehension)로는 명료하게 이해할 수 없고, 다만 인간의 경험 수준, 겉모습 수준에서만 가능합니다. That “repenting” has reference to wisdom, and “grieving at heart,” to love, cannot be explained to human apprehension, save in accordance with the things that are with man, that is, by means of appearances.

 

인간의 사고(thought) 속에 들어있는 모든 생각(idea)은 지적 능력(understanding, intellect) 및 의지, 다르게는, 사고와 그 사고에 대한 사랑과 관계된 무엇입니다. In every idea of thought in man there is something from the understanding and from the will, or from his thought and his love.

 

어떤 생각이든지 어느 정도 그의 의지나 그 의지에서 나온 사랑으로 말미암은 게 아니면 그건 생각이 아닙니다. 사랑이 없으면 사람은 전혀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Whatever idea does not derive anything from his will or love is not an idea, for otherwise than from his will he cannot think at all.

 

사고와 의지 사이엔 영원히 떼어놓을 수 없는 일종의 결혼 같은 게 있는데, 사람의 사고 속 생각들에도 타고나거나 후천적으로 생겨나는, 의지 혹은 사랑에 속한 일들이 있습니다. There is a kind of marriage, perpetual and indissoluble, between the thought and the will, so that in the ideas of man’s thought there inhere or adhere the things that are of his will or his love.

 

인간에게 속한 이런 일들을 잘 관찰하면, 주님의 자비 그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를, 즉, 지혜와 사랑인데요, 어느 정도 살짝 아는 것, 얼핏 짐작하는 것은 가능하지 싶습니다. From this state of things in man it may as it were be known, or rather it seems possible to form some idea of what is contained in the Lord’s mercy, namely, wisdom and love.

 

그래서 선지자들, 특히 이사야 같은 경우, 어디서나 거의 항상 두 가지 표현을 써서 모든 것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영적인 것을, 다른 하나는 천적인 것을 각각 포함하지요. Thus in the prophets, especially in Isaiah, there are almost everywhere double expressions concerning everything; one involving what is spiritual, the other what is celestial.

 

주님의 자비, 영적 측면이 지혜요, 천적 측면이 사랑입니다. The spiritual of the Lord’s mercy is wisdom; the celestial is love.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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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6:1-8

 

5절,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Verse 5, And Jehovah saw that the evil of man was multiplied on the earth, and that all the imagination of the thoughts of his heart was only evil every day.

 

※ 5절 속뜻

 

 

 

584.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을 보시고’는,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가 사라지기 시작했음을,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었다’는, 진리와 선에 관한 퍼셉션이 전혀 없었음을 각각 상징합니다. “Jehovah saw that the evil of man was multiplied on the earth” signifies that there began to be no will of good; “all the imagination of the thoughts of his heart was only evil every day” signifies that there was no perception of truth and good.

 

 

585.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이,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가 사라지기 시작했음을 상징한다는 것은, 위에서 말씀드린 내용(cf. AC.568), 즉, 진정한 의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대신 탐욕(cupidity), 욕구(desire)만 남았다는 사실을 통해 분명하고요, ‘세상에 있는 사람’이 상징하는 것을 통해서도 그렇습니다. That by the evil of man being multiplied in the earth is signified that there began to be no will of good is evident from what was said above, namely, that there was no longer any will, but only cupidity; and from the signification of “man in the earth.

 

‘땅’, ‘세상’은 글자의 뜻으로는, 사람이 사는 곳을 말합니다. In the literal sense the “earth” is where man is.

 

‘땅’은 속뜻으로는, 사랑이 있는 곳, 그리고 사랑은 의지 혹은 욕망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사람의 의지 그 자체를 의미하기 위해 ‘땅’이 사용된 것입니다. In the internal sense it is where the love is, and as love is of the will, or of the cupidity, the earth is taken to mean the will itself of man.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것은 의지입니다. 알고 있고, 이해한다고 해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안다는 것, 이해한다는 것은 다 그의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의지에서 나오지 않는 것은 그게 무엇이든 그는 알려고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의도하지 않은 뭔가를 말하거나 하고 있을 때조차 거기엔 여전히 그의 의지와 관계된 뭔가가 있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말이나 행위하고는 직접적 관련은 없어 보이나 사실은 은밀히 그를 움직이는 무슨 숨은 동기, 의지가 있는 것입니다. For man is man from willing, and not so much from knowing and understanding, because these flow out from his will; whatever does not flow out from his will he is willing neither to know nor understand; nay, even when he is speaking or doing something that he does not will, still there is something of the will remote from the speech or action that governs him.

 

‘가나안 땅’이라든지, ‘거룩한 땅’ 같은 표현을 써서 사실은 사랑, 그리고 결과적으로 천적(天的, the celestial) 인간의 의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말씀 여러 곳에서 이런 사실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데요, 같은 식으로, 세상 여러 나라들 역시 그들의 사랑, 곧 일반적으로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다만 이 주제는 아주 많이 반복되기 때문에 여기서 이걸 다루느라 머무를 필요는 없지 싶습니다. That the “land of Canaan,” or the “holy land,” denotes love, and consequently the will of the celestial man, might be confirmed by many passages from the Word; in like manner, that the lands of various nations denote their loves, which in general are the love of self and the love of the world; but as this subject so often recurs, it need not be dwelt upon here.

 

이런 이유들로, 이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려보는데요, ‘땅(세상) 위 사람의 죄악’은 그의 자연적 악, 곧 그의 의지를 표현하는 세속적 악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이 악을 ‘불어났다’, ‘배가되었다’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모든 사람이 그 정도로 타락하지는, 즉, 철저하게 사악하지는 않았기 때문인데, 선행을 하기 원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이기적인 목적으로였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라는 표현을 통해 도착(倒錯, perversion), 왜곡(corruption)의 완성, 즉, 철저하게 부패하고, 변질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Hence it appears that by “the evil of man on the earth” is signified his natural evil, which is of the will, and which is said to be “multiplied” because it was not so depraved in all but that they wished good for others, yet for the sake of themselves; but that the perversion became complete is signified by the “imagination of the thoughts of the heart.

 

 

586.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다’가 상징하는 것은 진리와 선에 관한 퍼셉션(perception, 지각, 영적 통찰)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전에 말씀드리고 보여드린 대로 (cf. AC.560, 570), 그 이유는, 그들이 신앙에 관한 가르침들로 하여금 그들의 아주 더러운 갈망(yearnings)에 잠기게 하였고, 이런 일이 벌어진 결과, 모든 퍼셉션은 사라졌으며, 그 자리를 대신 끔찍한 자기기만(persuasion), 즉, 가장 뿌리 깊고 치명적인 환상들이 차지한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을 질식시켜 멸망케 한 것입니다. The imagination of the thoughts of the heart was only evil every day signifies that there was no perception of truth and good, for the reason, as before said and shown, that they immersed the doctrinal things of faith in their filthy yearnings, and when this occurred all perception was lost, and in place thereof a dreadful persuasion succeeded, that is, a most deep-rooted and deadly fantasy, which was the cause of their extinction and suffocation.

 

이 끔찍한 자기기만, 죽음을 초래하는 신념이 바로 여기서 말씀하신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 곧 그들이 마음으로 생각하고 고안해낸 것이 상징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하는 계획’, 곧 마음이 날조(fabricate), 조작하는 것이 ‘생각’, 사고(thoughts) 없이 언급될 때, 그것은 자기 사랑 혹은 갈망의 악, 곧 자기 사랑이나 욕망과 연결된 악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뒤에 나오는 장에서 노아가 번제를 드린 후, 여호와께서 하신 아래 말씀에 나옵니다. This deadly persuasion is here signified by “the imagination of the thoughts of the heart”; but by “the imagination of the heart,” without the word “thoughts,” is signified the evil of the love of self, or of yearnings, as in the following chapter, where Jehovah said, after Noah had offered a burnt offering: “I will not again curse the ground for man’s sake, because the imagination of the heart of man is evil from his childhood” (Gen. 8:21).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창8:21)

 

‘계획’(imagination), 곧 제작(fabrication)은, 사람이 자기를 위해 지어내는 것, 곧 자기 마음 안을 꾸미며, 자기가 참이라고 설득하는 것입니다. 하박국에 그 예가 있습니다. An “imagination” is that which man invents for himself, and of which he persuades himself; as in Habakkuk:

 

새긴 우상은 그 새겨 만든 자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 만든 자가 이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2:18) What profiteth a graven image, that the fashioner thereof hath graven it, the molten image and teacher of lies, that the fashioner trusteth to his imagination, to make dumb idols? (Hab. 2:18)

 

‘새긴 우상’, 조각물은 사람이 속으로 품고 생각해낸 것들에 기반을 둔 거짓된 설득, 신념, 자기기만을 상징합니다. ‘새겨 만든 자’, 제작자는 자기-설득된 사람, 곧 위에서 설명한 ‘계획’으로 설득된 사람입니다. A “graven image” signifies false persuasions originating in principles conceived and hatched out by one’s self; the “fashioner” is one who is thus self-persuaded, of whom this “imagination” is predicated.

 

이사야입니다. In Isaiah:

 

너희의 패역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 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 (29:16) O your perversity! Shall the potter be reputed as the clay, that the work should say to him that made it, He made me not; and the thing fashioned say to him that fashioned it, He had no understanding?; (Isa. 29:16)

 

여기 ‘빚음을 받은 물건’은 사람의 것에 기반한 사고와, 거짓과 거기서 나온 것에 의한 설득, 곧 자아중심적 사고와, 거짓을 참이라 하는, 거기서 나온 확신을 상징합니다. the “thing fashioned” here signifies thought originating in man’s own, and the persuasion of what is false thence derived.

 

‘빚음을 받은 물건’이나 ‘계획된’, 곧 제작(fabrication)이나 디자인은 일반적으로, 사람이 마음이나 의지로 고안한 것, 그리고 또 생각이나 신념(persuasion)으로 발명한 것입니다. 다윗의 글입니다. A “thing fashioned” or “imagined,” in general, is what a man invents from the heart or will, and also what he invents from the thought or persuasion, as in David: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103:14) Jehovah knoweth our fashioning [figmentum], he remembereth that we are dust. (Ps. 103:14)

 

모세의 글입니다. In Moses:

 

그들이 수많은 재앙과 환난을 당할 때에 그들의 자손이 부르기를 잊지 아니한 이 노래가 그들 앞에 증인처럼 되리라 나는 내가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이기 전 오늘 나는 그들이 생각하는 바를 아노라 (31:21) I know his imagination that he doeth this day, before I bring him into the land. (Deut. 3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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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6:1-8

 

4절,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Verse 4, There were Nephilim in the earth in those days; and most especially after the sons of God went in unto the daughters of man, and they bare to them; the same became mighty men, who were of old, men of renown.

 

※ 4절 속뜻

 

 

580. ‘네피림’은, ‘아, 나는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가, 아, 나는 얼마나 탁월한 사람인가...’ 하는 신념(persuasion)과 망상(delusions)에 사로잡혀, 거룩하거나 참된 어떤 것도 하찮게 여긴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는, 이런 일이 그들이 신앙에 관한 가르침을 그들의 갈망(yearnings)과 욕구(appetites)에 잠기게 하여, 거짓된 것을 신념화했을 때 일어났음을 말합니다. ‘그들은 용사라’는 그들이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는 전에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By “Nephilim” are signified those who through a persuasion of their own loftiness and preeminence made light of all things holy and true; “and especially after the sons of God went in unto the daughters of man, and they bare to them” signifies that this occurred when they immersed the doctrinals of faith in their yearnings, and formed persuasions of what is false; they are called “mighty men” from their love of self; “of old, men of renown” signifies that there had been such before.

 

 

581. ‘네피림’ 하면, ‘아, 나는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가, 아, 나는 얼마나 탁월한 사람인가...’ 하는 신념과 망상에 사로잡혀, 거룩하거나 참된 어떤 것도 하찮게 여긴 사람들을 말한다는 사실은, 앞서 말한 것과 뒤에 이어지는 내용, 즉,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라는 말씀을 통해, 그들이 신앙에 관한 가르침을 그들의 갈망과 욕구에 잠기게 하여, 거짓된 것을 신념화하였음을 상징한다는 걸 보면 알 수 있습니다. That by the “Nephilim” are signified those who through a persuasion of their own loftiness and preeminence made light of all things holy and true, appears from what precedes and what follows, namely, that they immersed the doctrinals of faith in their yearnings, signified by the “sons of God going in unto the daughters of man, and their bearing unto them.”

 

그들 자신 및 그들이 가진 환상과 관련된 신념과 망상은 그와 관련된 것들이 축적되면 축적될수록 증가하다가 결국 되돌릴 수 없는, 돌이킬 수 없는 데까지 갑니다. 이런 상태에서, 이번엔 여기다 신앙의 교리들, 신앙적인 가르침들까지 보태어지면 원리에 가까운 가장 강력한 엉뚱한 종교적 신념들이 생겨나고, 이것이 하나의 입장이 되면, 이번에는 거룩하고 참된 모든 것의 가치를 무시해 버리고 마는 상태가 되는데, 이 상태가 바로 ‘네피림’인 것입니다. Persuasion concerning self and its fantasies increases also according to the multitude of things that enter into it, till at length it becomes indelible; and when the doctrinals of faith are added thereto, then from principles of the strongest persuasion they make light of all things holy and true, and become “Nephilim.”

 

이 네피림이라는 인종(race)은, 홍수 전에 살았는데, 자기들이 가진 끔찍한 환상, 망상으로 모든 영들을 질식시켜 죽이는 그런 인종입니다. (cf. AC.562-563) 이들에게서 쏟아져나오는 이 망상은 질식시키는 독가스 같은 것인데, 영들은 여기에 한 번 걸리면 생각하는 능력을 완전히 빼앗겨 거의 반 죽은 상태가 되지요. 주께서 세상에 오셔서 이런 독을 가진 인종으로부터 영들의 세계를 해방하여 주지 않으셨으면, 거기에 아무도 존재할 수 없었고, 그 결과, 주님으로 말미암아 영들에 의해 인도함을 받는 인류는 사라졌을 것입니다. That race, which lived before the flood, is such that they so kill and suffocate all spirits by their most direful fantasies (which are poured forth by them as a poisonous and suffocating sphere) that the spirits are entirely deprived of the power of thinking, and feel half dead; and unless the Lord by his coming into the world had freed the world of spirits from that poisonous race, no one could have existed there, and consequently the human race, who are ruled by the Lord through spirits, would have perished.

 

그래서 그들은 지금 지옥 왼쪽 발뒤꿈치 아래, 안개 속 육중하고 거대한 바위 밑에 격리되어, 그곳을 빠져나갈 어떤 시도도 할 수 없습니다. They are therefore now kept in a hell under as it were a misty and dense rock, under the heel of the left foot, nor do they make the slightest attempt to rise out of it.

 

그래서 영들의 세계는 이 가장 위험한 무리로부터 안전합니다. 이들에 관한, 그리고 이런 종류의 신념, 망상이 왜 독과 같은 것인지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cf. AC.1265-1272) Thus is the world of spirits free from this most dangerous crew, concerning which and its most poisonous sphere of persuasions,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네피림’이라 하는 자들이 있었고, 이들은 거룩하고 참된 모든 것을 하찮게 여겼습니다. These are they who are called “Nephilim,” and who make light of all things holy and true.

 

말씀에 그들에 대한 언급이 더 나오는데요, 그들의 후손은 ‘아낙 족속’으로, ‘르바임’으로 불렸습니다. Further mention is made of them in the Word, but their descendants were called “Anakim” and “Rephaim.”

 

그들을 ‘아낙 자손’으로 불렀음이 모세의 글에 나옵니다. That they were called “Anakim” is evident from Moses: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민13:33) There we saw the Nephilim, the sons of Anak, of the Nephilim, and we were in our own eyes as grasshoppers, and so we were in their eyes. (Num. 13:33)

 

그들을 또한 ‘르바임’으로도 불렀음이 모세의 글에 나옵니다. That they were called “Rephaim” appears also from Moses:

 

10이전에는 에밈 사람이 거기 거주하였는데 아낙 족속 같이 강하고 많고 키가 크므로 11그들을 아낙 족속과 같이 르바임이라 불렀으나 모압 사람은 그들을 에밈이라 불렀으며 (신2:10-11) The Emim dwelt before in the land of Moab, a people great, and many, and tall, as the Anakim, who also were accounted Rephaim, as the Anakim, and the Moabites call them Emim. (Deut. 2:10–11)

 

네피림은 더 이상 언급되지 않는 반면, 르바임은 계속 나오는데, 선지자들은 르바임을 바로 위에서 다룬 저런 사람들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입니다. The Nephilim are not mentioned any more, but the Rephaim are, who are described by the prophets to be such as are above stated; as in Isaiah:

 

아래의 스올이 너로 말미암아 소동하여 네가 오는 것을 영접하되 그것이 세상의 모든 영웅을 너로 말미암아 움직이게 하며 열방의 모든 왕을 그들의 왕좌에서 일어서게 하므로 (사14:9) Hell low down has been in commotion for thee, to meet thee in coming, it hath stirred up the Rephaim for thee, (Isa. 14:9)

 

르바임 같은 영들이 거주하는 지옥을 설명합니다. speaking of the hell which is the abode of such spirits.

 

다시 이사야입니다. In the same:

 

그들은 죽었은즉 다시 살지 못하겠고 사망하였은즉 일어나지 못할 것이니 이는 주께서 벌하여 그들을 멸하사 그들의 모든 기억을 없이하셨음이니이다 (사26:14) Thy dead shall not live, the Rephaim shall not arise, because thou hast visited and destroyed them, and made all their memory to perish, (Isa. 26:14)

 

여기서도 그들의 지옥이 언급되고 있는데, 그들은 그곳에서 다시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where also their hell is referred to, from which they shall no more rise again.

 

계속 이사야입니다. In the same: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로다 (사26:19) Thy dead shall live, my corpse, they shall rise again; awake and sing, ye that dwell in the dust, for the dew of herbs is thy dew; but thou shalt cast out the land of the Rephaim; (Isa. 26:19)

 

‘르바임의 땅’은 위에서 말한 지옥입니다. “the land of the Rephaim” is the hell above spoken of.

 

다윗의 글입니다. In David:

 

주께서 죽은 자에게 기이한 일을 보이시겠나이까 유령들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 (시88:10) Wilt thou show a wonder to the dead? Shall the Rephaim arise, shall they confess to thee? (Ps. 88:10)

 

르바임의 지옥에 대해 같은 뜻으로 말하면서, 그들은 절대 일어나지 못하며, 그들의 아주 끔찍한 독과 같은 망상으로 영들의 세계를 들끓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speaking in like manner concerning the hell of the Rephaim, and that they cannot rise up and infest the sphere of the world of spirits with the very direful poison of their persuasions.

 

그러나 주님은 인류가 더 이상 그런 끔찍한 망상과 신념에 푹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하셨습니다. But it has been provided by the Lord that mankind should no longer become imbued with such dreadful fantasies and persuasions.

 

홍수 전을 살았던 사람들은 자신들로 하여금 그런 뒤틀린 생각들을 흡수하게 했던 본성(ature)과 정신(genius)을 가졌던 사람들입니다. 그 이유는 아직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았으나 주님의 신적 자비로 나중에 (cf. AC.927) 밝힐 것입니다. Those who lived before the flood were of such a nature and genius that they could be imbued, for a reason as yet unknown, concerning which,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582.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After that the sons of God came in unto the daughters of men, and they bare to them.

 

이 말씀은, 그들이 신앙에 대한 가르침들을 자신들의 타락한 갈망(yearnings)을 가지고 합쳐버린 바로 그때, 그들은 네피림이 되었다는 뜻으로, 이런 사실은 위 2절의 내용, 즉, ‘하나님의 아들들’은 신앙의 가르침들을, ‘딸들’은 갈망(yearnings)을 각각 상징함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they became Nephilim when they had immersed the doctrinals of faith in their is evident from what was said and shown above in verse 2, namely, that the “sons of God” signify the doctrinal things of faith, and that “daughters” signify yearnings.

 

그 결과는, 신앙의 거룩한 속성들을 하찮게 여기고, 모독하는 것밖에 없음은 너무도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곧 물질만능주의로 되어 있는 인간의 갈망(yearnings)은 거룩하고 참된 것하고는 완전히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The birth thereby produced must needs make light of and profane the holy things of faith, for the yearnings of man, being those of the love of self and of the world, are altogether contrary to what is holy and true.

 

지금은 사람 안에 갈망(yearnings)이 만연합니다. 거룩하고 참되며, 또 그런 걸로 인식되는 무언가가 갈망(yearnings)에 잠기면, 사람은 끝입니다. 갈망은 뿌리뽑히거나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갈망(yearnings)은 모든 생각(idea)에 착 달라붙습니다. 예를 들면, 저세상에서는 생각으로 서로 커뮤니케이션을 하는데, 거룩하고 참된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바로 모독과 거짓이 그 생각과 결합하고, 이런 이상한 일은 즉시 지각됩니다. Now in man yearnings prevail, so that when what is holy and true, and is acknowledged to be such, is immersed in yearnings, it is all over with the man, for the yearnings cannot be rooted out and separated; they cling to every idea, and in the other life it is ideas that are communicated from one to another, so that as soon as any idea of what is holy and true is brought forth, what is profane and false is joined to it, which is instantly perceived.

 

이런 이유로, 그런 사람들은 당연히 분리되어 지옥으로 던져지게 됩니다. Therefore such persons have to be separated and thrust down into hell.

 

 

583. 네피림을 일컬어 ‘용사’라 하는 것은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인데, 이것은 말씀 여러 곳에서 그런 사람을 가리켜 ‘용사’라 하는 것으로 보아 분명합니다. 예레미야입니다. That the Nephilim are called “mighty men” from the love of self, is evident from various passages of the Word, where such are called “mighty”; as in Jeremiah:

 

바벨론의 용사는 싸움을 그치고 그들의 요새에 머무르나 기력이 쇠하여 여인 같이 되며 그들의 거처는 불타고 그 문빗장은 부러졌으며 (렘51:30) The mighty ones of Babel have ceased to fight, they sit in their holds, their might faileth, they are become as women, (Jer. 51:30)

 

여기 ‘바벨론의 용사’는 자기 사랑의 덫에 걸린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where the “mighty ones of Babel” denote those who are eaten up with the love of self.

 

같은 이사야입니다. In the same:

 

칼이 자랑하는 자의 위에 떨어지리니 그들이 어리석게 될 것이며 칼이 용사의 위에 떨어지리니 그들이 놀랄 것이며 (렘50:36) A sword is against the liars, and they shall be insane, a sword is against her mighty ones, and they shall be dismayed. (Jer. 50:36)

 

5그들이 놀라 물러가며 그들의 용사는 패하여 황급히 도망하며 뒤를 돌아보지 아니함은 어찜이냐 두려움이 그들의 사방에 있음이로다 6발이 빠른 자도 도망하지 못하며 용사도 피하지 못하고 그들이 다 북쪽에서 유브라데 강가에 넘어지며 엎드러지는도다 9말들아 달려라 병거들아 정신없이 달려라 용사여 나오라 방패 잡은 구스 사람과 붓 사람과 활을 당기는 루딤 사람이여 나올지니라 하거니와 (렘46:5-6, 9) I saw them dismayed, and turning away back, their mighty ones were broken in pieces, and have been put to flight, and looked not back; fear was round about; the swift shall not flee away, nor the mighty one escape; come up, ye horses, and rage, ye chariots, and let the mighty ones go forth, Cush, Put, the Lydians, (Jer. 46:5–6, 9)

 

사람을 속이는 합리화에 관한 말씀입니다. speaking of persuasion from reasonings.

 

계속해서 Again:

 

14너희가 어찌하여 말하기를 우리는 용사요 능란한 전사라 하느냐 15만군의 여호와라 일컫는 왕께서 이와 같이 말하노라 모압이 황폐하였도다 (렘48:14-15) How say ye, We are mighty, and men of strength for war? Moab is laid waste. (Jer. 48:14–15)

 

성읍들이 점령을 당하며 요새가 함락되는 날에 모압 용사의 마음이 산고를 당하는 여인 같을 것이라 (렘48:41) The city is taken, and the strongholds, it has been seized, and the heart of the mighty men of Moab in that day is become as the heart of a woman in her pangs. (Jer. 48:41)

 

같은 뜻으로 말씀하시기를 In like manner it is said:

 

에돔 용사의 마음이 진통하는 여인 같이 되리라 하시니라 (렘49:22) The heart of the mighty ones of Edom. (Jer. 49:22)

 

여호와께서 야곱을 구원하시되 그들보다 강한 자의 손에서 속량하셨으니 (렘31:11) Jehovah hath redeemed Jacob, and hath avenged him from the hand of him that was mightier than he, (Jer. 31:11)

 

여기 ‘강한 자’는 다른 말, 히브리 말 표현입니다. where “mighty” is expressed by another term.

 

네피림이었던 아낙 자손이 ‘강대한 나라들’이었음은 모세의 글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e Anakim, who were of the Nephilim, were called “mighty ones” is evident from Moses:

 

1이스라엘아 들으라 네가 오늘 요단을 건너 너보다 강대한 나라들로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니 그 성읍들은 크고 성벽은 하늘에 닿았으며 2크고 많은 백성은 네가 아는 아낙 자손이라 그에 대한 말을 네가 들었나니 이르기를 누가 아낙 자손을 능히 당하리요 하거니와 (신9:1_2) Thou passest over Jordan today, to go in to possess nations greater and more numerous than thyself, cities great and fortified to heaven, a people great and tall, the sons of the Anakim, whom thou knowest, and of whom thou hast heard; who shall stand before the sons of Anak? (Deut. 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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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6:1-8

 

3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Verse 3, And Jehovah said, My spirit shall not reprove man forever, for that he is flesh; and his days shall be a hundred and twenty years.

 

※ 3절 속뜻

 

 

 

57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가 의미하는 것은, 사람들은 더 이상 같은 방식으로 인도함을 받지 않을 것임을,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는 그들이 육(肉, flesh)-중심의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는 그들은 남은 신앙의 리메인스(remains, traces)를 가져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By “Jehovah’s saying my spirit shall not always reprove man” is signified that man would not be so led any longer; “for that he is flesh” signifies because he had become corporeal; “and his days shall be a hundred and twenty years” signifies that he ought to have remains of faith.

 

이것은 또한 앞으로 다가올 교회의 미래에 관한 예언입니다. It is also a prediction concerning a future church.

 

 

57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라는 표현이 사람들이 더 이상 그렇게 인도함을 받지 않을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본문을 보면 알 수 있는데요, 앞선 본문을 보면, 그들은 종교적 가르침이나 진리를 자신들의 고유한 욕망으로 뒤섞어 결국 자신들의 길의 오류를 더 이상 볼 수도, 무엇이 악인지를 알 수도 없는 지경까지 자신들의 캐릭터를 발전시켰습니다. 선과 진리를 지각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은 그들의 자기기만에 의해 심지가 꺼지듯 꺼지고 말았는데요, 그것은 그들이 참이라고 믿었던 유일한 것들이라고는 그저 자기들의 이론에 딱 맞는 것들뿐이었기 때문입니다. 뒤에 나오는 본문을 보면, 그 교회 사람들이 홍수 후 바뀌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퍼셉션의 자리를 대신하여 그들 가운데 일어난 것은 양심이었습니다. 이 양심으로 그들은 비로소 가책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That by Jehovah’s saying my spirit shall not forever reprove man is signified that man would not be so led any longer, is evident from what has gone before and from what follows; from what has gone before in that men had become such, through the immersion of the doctrinal things or truths of faith in yearnings, that they could no longer be reproved, that is, know what evil is; all capacity to perceive truth and good having been extinguished through their persuasions, so that they believed that only to be true that was in conformity with their persuasions; and in regard to what follows, that after the flood the man of the church became different, in that with him conscience succeeded in place of perception, through which he could be reproved.

 

‘여호와의 영의 책망’은 그래서 내적 음성, 곧, 퍼셉션 혹은 양심을 상징하며, ‘여호와의 영’은 흘러들어 오는 진리와 선, 곧 인플럭스(influx, 入流)를 상징합니다. 이사야도 그렇게 말합니다. “Reproof by the spirit of Jehovah” therefore signifies an inward dictate, a perception, or a conscience; and the “spirit of Jehovah” signifies the influx of what is true and good; as also in Isaiah:

 

내가 영원히 다투지 아니하며 내가 끊임없이 노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지은 그의 영과 혼이 내 앞에서 피곤할까 함이라 (사57:16) I will not contend to eternity, neither will I be forever wroth, for the spirit would overwhelm before me, and the souls I have made. (Isa. 57:16)

 

 

574. ‘육’(肉, flesh, 살)은 사람이 육-중심(body-centered)이 된 것을 상징하는데요, 이것은 말씀에서 ‘육’이 상징하는 것을 보면 됩니다. 거기 보면, 두 가지, 곧 일반적으로는 모든 사람을, 구체적으로는 육-중심의 사람을 상징합니다. That “flesh” signifies that man had become corporeal, appears from the signification of “flesh” in the Word, where it is used to signify both every man in general, and also, specifically, the corporeal man.

 

요엘서에서, 모든 사람을 넌지시 나타내기 위해 쓰였습니다. It is used to signify every man, in Joel: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욜2:28) I will pour out my spirit upon all flesh, and your sons and your daughters shall prophesy, (Joel 2:28)

 

‘만민’(flesh)은 사람들을, ‘영’은 주님에게서 나와 사람 안으로 흘러들어 오는 선과 진리, 곧 인플럭스를 나타냅니다. where “flesh” signifies man, and “spirit” the influx of truth and good from the Lord.

 

다윗의 글입니다. In David: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시65:2) Thou that hearest prayers, unto thee shall all flesh come, (Ps. 65:2)

 

여기 ‘육체’는 모든 사람을 상징합니다. where “flesh” denotes every man.

 

예레미야입니다. In Jeremiah: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렘17:5) Cursed is the man that trusteth in man, and maketh flesh his arm, (Jer. 17:5)

 

‘육신’은 사람을, ‘힘’은 파워를 상징합니다. where “flesh” signifies man, and “arm” power.

 

에스겔입니다. In Ezekiel:

 

4내가 의인과 악인을 네게서 끊을 터이므로 내 칼을 칼집에서 빼어 모든 육체를 남에서 북까지 치리니 5모든 육체는 나 여호와가 내 칼을 칼집에서 빼낸 줄을 알지라 칼이 다시 꽂히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하라 (겔21:4-5) That all flesh may know. (Ezek. 21:4–5)

 

스가랴입니다. In Zechariah:

 

모든 육체가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의 거룩한 처소에서 일어나심이니라 하라 하더라 (슥2:13) Be silent, all flesh, before Jehovah, (Zech. 2:13)

 

여기 ‘육체’는 모든 사람을 상징합니다. where “flesh” denotes every man.

 

[2] 육(flesh)은 특별히 육-중심적인 사람을 상징한다는 것이 이사야서를 보면 분명합니다. That it signifies specifically the corporeal man, is evident from Isaiah: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들의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펴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 (사31:3) The Egyptian is man and not God, and his horses are flesh and not spirit, (Isa. 31:3)

 

그들의 지식은 육-중심 수준임을 상징합니다. 여기 및 말씀 어디에서나 ‘말들’은 합리적 수준, 이성적 수준을 나타냅니다. signifying that their memory-knowledge is corporeal; “horses” here and elsewhere in the Word denoting the rational.

 

계속해서 Again:

 

오른쪽으로 움킬지라도 주리고 왼쪽으로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여 각각 자기 팔의 고기를 먹을 것이며 (사9:20) He shall withdraw to the right hand, and shall be hungry; and he shall devour on the left hand, and they shall not be satisfied; they shall eat everyone the flesh of his own arm, (Isa. 9:20)

 

‘고기’는 사람의 고유한 것들, 곧 육-중심의 모든 것을 상징합니다. signifying such things as are man’s own, which are all corporeal.

 

같은 이사야입니다. In the same:

 

그의 숲과 기름진 밭의 영광이 전부 소멸되리니 병자가 점점 쇠약하여 감 같을 것이라 (사10:18) He shall consume from the soul, and even the flesh, (Isa. 10:18)

 

여기 ‘몸’은 그를 온통 사로잡고 있는 육-중심의 모든 걸 상징합니다. where “flesh” signifies corporeal things.

 

계속해서 Again:

 

5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6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사40:5-6) The glory of Jehovah shall be revealed, and all flesh shall see it together; the voice said, Cry; and he said, What shall I cry? All flesh is grass, (Isa. 40:5–6)

 

여기 ‘육체’는 모든 육-중심, 몸-오리엔티드된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flesh” here signifies every man who is corporeal.

 

[3] 같은 이사야입니다. In the same:

 

여호와께서 불과 칼로 모든 혈육에게 심판을 베푸신즉 여호와께 죽임 당할 자가 많으리니 (사66:16) In fire will Jehovah dispute, and with his sword with all flesh, and the slain of Jehovah shall be multiplied, (Isa. 66:16)

 

‘불’은 왜곡된 욕망에 가해지는 형벌을, ‘칼’은 거짓에 가해지는 형벌을, 그리고 ‘혈육’(flesh)은 육-중심, 몸 관련 일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가해지는 형벌을 각각 상징합니다. where “fire” signifies the punishment of yearnings; the “sword,” the punishment of falsities; and “flesh” the corporeal things of man.

 

다윗의 글입니다. In David:

 

그들은 육체이며 가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라 (시78:39) God remembered that they were flesh, a breath that passeth away, and cometh not again, (Ps. 78:39)

 

이 말씀은 광야에서 살(flesh)과 고기(meat)를 탐했던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몸-중심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육(flesh)에 대한 그들의 갈망은 그들은 그저 육-중심, 몸 수준 보상만 구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speaking of the people in the wilderness desiring flesh, because they were corporeal; their desiring flesh represented that they desired only things corporeal (Num. 11:32–34).

 

32백성이 일어나 그 날 종일 종야와 그 이튿날 종일토록 메추라기를 모으니 적게 모은 자도 열 호멜이라 그들이 자기들을 위하여 진영 사면에 펴 두었더라 33고기가 아직 이 사이에 있어 씹히기 전에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대하여 진노하사 심히 큰 재앙으로 치셨으므로 34그 곳 이름을 기브롯 핫다아와라 불렀으니 욕심을 낸 백성을 거기 장사함이었더라 (민11:32-34)

 

 

575.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라는 표현은, 그들이 남겨진 신앙의 리메인스(remains), 신앙의 흔적들(traces)을 가져야 함을 의미합니다. 전 장 3절과 4절에서, ‘날들’(days)과 ‘해들’(years)은 그들의 때(times)와 상태(states)를 상징한다(cf. AC.482, 487-488)는 것과, 태고인들은 그 교회의 상태와 상태 변화들(cf. AC.487:2)을 상징하기 위해 숫자들의 서로 다른 조합들을 사용했음을 말씀드렸습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지금은 그들이 그 교회와 관련된 일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했던 그 숫자 조합 방법을 완전히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That by the days of man being a hundred and twenty years is signified that he ought to have remains of faith, appears from what has been said in the foregoing chapter (Gen. 5:3–4), concerning “days” and “years” signifying times and states; and also from the circumstance of the most ancient people from numbers variously compounded signifying states and changes of states in the church; but the nature of their ecclesiastical computation is now totally lost.

 

3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4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3-4)

 

본 절 이 ‘백이십 년’이라는 표현에 나오는 숫자 역시 같은 방식이며, 그래서 그 의미를 안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one, 1)에서 ‘열둘’(twelve, 12) 및 기타 등등 그 각각의 숫자에 감춰진 의미들부터 먼저 알지 않고서는 말입니다. Here in like manner numbers of years are mentioned, whose signification it is impossible for anyone to understand, unless he be first acquainted with the hidden meaning of each particular number from “one” to “twelve,” and so on.

 

분명한 건, 그 안에 뭔가 비밀스러운 게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백이십 년’이라는 인간의 수명과 선행절들하고는 맞지가 않기 때문이며, 홍수 후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봐도 사람들이 딱 백이십 년만 산 게 아닙니다. 창세기 11장을 보면, 셈의 경우, ‘아르박삿을 낳은 후에 오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라고 되어 있고, 아르박삿은 셀라를 낳은 후, ‘사백삼 년’을, 셀라는 에벨을 낳은 후, ‘사백삼 년’을, 에벨은 벨렉을 낳은 후, ‘사백삼십 년’을, 그리고 노아는 홍수 후, ‘삼백오십 년’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It plainly appears that they contain within them something else that is secret, for that men were to live a “hundred and twenty years” has no connection with the preceding part of the verse, nor did they live one hundred and twenty years, as is evident from the people after the flood (chapter 11), where it is said of Shem that “he lived after he begat Arphaxad five hundred years”; and that Arphaxad lived after be begat Selah “four hundred and three years”; and that Selah lived after he begat Eber “four hundred and three years”; and that Eber lived after he begat Peleg “four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that Noah lived after the flood “three hundred and fifty years” (Gen. 9:28), and so on.

 

그러나 숫자 ‘백이십’(one hundred and twenty, 120) 안에 들어있는 의미는 ‘열’(ten, 10)과 ‘열둘’(twelve, 12)의 의미로만 나타나는데, 이 둘이 곱해져서 백이십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이들 숫자를 이루는 숫자 성분들의 상징으로부터, ‘백이십 년’은 신앙의 리메인스를 상징하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But what is involved in the number “one hundred and twenty,” appears only from the meaning of “ten” and “twelve,” which being multiplied together make one hundred and twenty, and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se component numbers it may be seen that “one hundred and twenty” signifies the remains of faith.

 

말씀에서 숫자 ‘열’은 ‘십분의 일’(tenths, tithes 십일조)과 함께 리메인스를 상징하고 표현합니다. 이 리메인스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속사람 안에 보관되는데, 이것은 오직 주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에 거룩한 것입니다. 한편, 숫자 ‘열둘’은 신앙, 혹은 신앙과 관련된 모든 것을 전체적으로 상징합니다. 그래서 이 숫자 ‘백이십’이 이들 숫자 성분들의 조합으로 신앙의 리메인스를 상징하게 되는 것입니다. The number “ten” in the Word, as also “tenths,” signify and represent remains, which are preserved by the Lord in the internal man, and which are holy, because they are of the Lord alone; and the number “twelve” signifies faith, or all things relating to faith in one complex; the number therefore that is compounded of these, signifies the remains of faith.

 

 

576. 숫자 ‘열’, 그리고 ‘십분의 일’이 리메인스를 상징한다는 것은 말씀에 나오는 다음 구절들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e number “ten,” and also “tenths,” signify remains, is evident from the following passages of the Word:

 

9만군의 여호와께서 내 귀에 말씀하시되 정녕히 허다한 가옥이 황폐하리니 크고 아름다울지라도 거주할 자가 없을 것이며 10열흘 갈이 포도원에 겨우 포도주 한 바트가 나겠고 한 호멜의 종자를 뿌려도 간신히 한 에바가 나리라 하시도다 (사5:9-10) Many houses shall be a desolation, great and fair, without an inhabitant; for ten acres of vineyard shall yield one bath, and the seed of a homer shall yield an ephah, (Isa. 5:9–10)

 

영적, 천적인 것들이 황폐해지는 것에 관한 본문입니다. ‘열흘 갈이 포도원에 겨우 포도주 한 바트가 나겠고’는 영적인 것들의 리메인스가 아주 보잘 것 없을 것을, ‘한 호멜의 종자를 뿌려도 간신히 한 에바가 나리라’는 천적인 것들의 리메인스 또한 그럴 것임을 상징합니다. speaking of the vastation of things spiritual and celestial: “ten acres of vineyard making a bath” signifies that the remains of things spiritual were so few; and “the seed of a homer yielding an ephah” signifies that there were so few remains of things celestial.

 

같은 이사야 본문입니다. In the same:

 

12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13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사6:12-13) And many things are forsaken in the midst of the land, yet in it shall be a tenth part, and it shall return, and nevertheless it shall be consumed; (Isa. 6:12–13)

 

여기 ‘이 땅 가운데에’는 속사람을, ‘그 중에 십분의 일이’는 그 리메인스가 아주 적음을 상징합니다. where the “midst of the land” signifies the internal man; a “tenth part” signifies the smallness of the remains.

 

에스겔입니다. In Ezekiel:

 

10너희는 공정한 저울과 공정한 에바와 공정한 밧을 쓸지니 11에바와 밧은 그 용량을 동일하게 하되 호멜의 용량을 따라 밧은 십분의 일 호멜을 담게 하고 에바도 십분의 일 호멜을 담게 할 것이며 14기름은 정한 규례대로 한 고르에서 십분의 일 밧을 드릴지니 기름의 밧으로 말하면 한 고르는 십 밧 곧 한 호멜이며 (십 밧은 한 호멜이라) (겔45:10-11, 14) Ye shall have balances of justice, and an ephah of justice, and a bath of justice: the ephah and the bath shall be of one measure, the bath to contain the tenth of a homer, and an ephah the tenth of a homer; the measure thereof shall be after the homer; and the ordinance of oil, a bath of oil, the tenth of a bath out of a kor, ten baths to the homer, for ten baths are a homer; (Ezek. 45:10–11, 14)

 

이 구절에서는 여호와의 거룩한 속성들을 도량형 용어들을 써서 표현하되, 신성한 퀄러티들은 각기 다른 카테고리로 상징하고 있습니다. 여기 ‘십’(ten, 10)은 천적,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영적 리메인스를 상징합니다. 여기 나오는 도량형 용어들과 관련 숫자들이 만일 그 안에 무슨 감춰진 신성한 속뜻이 없다면 뭐하러 이렇게 장황하게 기록했겠습니까? 이것은 하늘의 예루살렘과 새 성전을 다루는 에스겔 45장과 그 앞장들에도, 그리고 다른 예언서들과 유대 종교의 다양한 의식, 의전들에도 다 해당되는 것입니다. in this passage the holy things of Jehovah are treated of by measures, whereby are signified the kinds of the holy things; by “ten” are here signified the remains of celestial and of the derivative spiritual things; for unless such holy arcana were contained herein, what could be the use or intent of describing so many measures determined by numbers, as is done in this and the former chapters in the same prophet, where the subject is the heavenly Jerusalem and the new temple?

 

[2] 아모스입니다. In Amos:

 

2처녀 이스라엘이 엎드러졌음이여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로다 자기 땅에 던지움이여 일으킬 자 없으리로다 3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 중에서 천 명이 행군해 나가던 성읍에는 백 명만 남고 백 명이 행군해 나가던 성읍에는 열 명만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암5:2-3) The virgin Israel is fallen, she shall no more rise. Thus saith the Lord Jehovih, The city that went out a thousand shall have a hundred remaining, and that which went out a hundred, shall have ten remaining to the house of Israel, (Amos 5:2–3)

 

리메인스 본문입니다. 리메인스 중에서도 가장 적은 리메인스가 남는다는 내용인데요, ‘십분의 일의 일’, 즉, 리메인스의 리메인스만 남는다는 말씀입니다. where, speaking of remains, it is said that very little would be left, being only a “tenth part,” or remains of remains.

 

계속해서 아모스입니다. Again:

 

8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주 여호와가 당신을 두고 맹세하셨노라 내가 야곱의 영광을 싫어하며 그 궁궐들을 미워하므로 이 성읍과 거기에 가득한 것을 원수에게 넘기리라 하셨느니라 9한 집에 열 사람이 남는다 하여도 다 죽을 것이라 (암6:8-9) I abhor the pride of Jacob and his palaces, and will shut up the city, and its fullness, and it shall come to pass if there shall be left ten men in one house they shall even die, (Amos 6:8–9)

 

리메인스가 거의 남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speaking of remains which should scarcely remain.

 

모세의 글입니다. In Moses: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신23:3) An Ammonite or Moabite shall not come into the congregation of Jehovah, even the tenth generation of them shall not come into the congregation of Jehovah to eternity; (Deut. 23:3)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신앙의 천적, 영적 신성모독을 상징하며, 그들의 ‘리메인스’에 관해서는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cf. AC.468, 530, 560-561) “an Ammonite and a Moabite” signify the profanation of the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of faith, the “remains” of which are spoken of in what precedes.

 

[3] ‘십일조’(tenths, tithes) 또한 리메인스를 표현한다는 사실은 앞에서 다룬 내용을 보시면 아실 수 있습니다. Hence it appears also that “tenths” represent remains.

 

십일조 내용이 말라기에도 이렇게 있습니다. And so in Malachi: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말3:10) Bring ye all the tithes [tenths] into the treasure house, that there may be booty in my house, and let them prove me, bestir ye in this, if I will not open for you the cataracts of heaven, and pour you out a blessing; (Mal. 3:10)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는 속사람 안에 있는 리메인스를 상징합니다. 리메인스는 ‘양식’(booty, plunder)에 비유되는데요, 수많은 악과 거짓 가운데 슬며시 넣어두는 스텔스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리메인스를 통해 모든 복이 옵니다. “that there may be booty in my house” signifies remains in the internal man, which are compared to “booty,” because they are insinuated as by stealth among so many evils and falsities; and it is by these remains that all blessing comes.

 

모든 사람의 체어리티가 그 속사람 안에 있는 리메인스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은 유대 교회에서 다음과 같은 법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거기에 보면, 그들이 모든 십일조 드리기를 마쳤을 때에, 그들은 그 십일조를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야 했습니다. That all man’s charity comes by the remains which are in the internal man, was also represented in the Jewish church by this statute: that when they had made an end of tithing all the tithes, they should give to the Levite, to the stranger, to the fatherless, and to the widow. (신26:12 seq.)

 

셋째 해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 네 성읍 안에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신26:12)

 

[4] 리메인스가 오직 주님께만 속한 까닭에, 십일조 또한 ‘여호와의 성물’로 불립니다. 모세의 글입니다. Inasmuch as remains are of the Lord alone, therefore the tenths are called “holiness to Jehovah”; as in Moses:

 

30그리고 그 땅의 십분의 일 곧 그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열매는 그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의 성물이라 31또 만일 어떤 사람이 그의 십일조를 무르려면 그것에 오분의 일을 더할 것이요 (레27:30-31) All the tenths of the land, of the seed of the land, of the fruit of the tree, they are Jehovah’s, holiness to Jehovah: all the tenths of the herd and of the flock, whatsoever passeth under the shepherd’s rod, the tenth shall be holiness to Jehovah. (Lev. 27:30–31)

 

십계명이 ‘열’ 계명, 혹은 ‘열’ 가지 말로 되어 있는 것과, 여호와께서 그것을 돌판에 쓰신 것은 리메인스를 상징하며, 그것을 여호와의 손으로 쓰신 것은 리메인스는 오직 주님께만 속한 것이라는 거, 그리고 그것을 돌판에 쓰신 것은 리메인스를 속사람 안에 두셨음을 각각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That the Decalogue consisted of “ten” precepts, or “ten” words, and that Jehovah wrote them on tables (Deut. 10:4), signifies remains, and their being written by the hand of Jehovah signifies that remains are of the Lord alone; their being in the internal man was represented by the tables.

 

여호와께서 그 총회 날에 산 위 불 가운데에서 너희에게 이르신 십계명을 처음과 같이 그 판에 쓰시고 그것을 내게 주시기로 (신10:4)

 

 

577. ‘열둘’이라는 숫자가 신앙, 혹은 사랑의 속성들과 그 속성에서 대략적으로 파생된 신앙을 상징한다는 사실은 말씀 여러 구절, 곧 여러 현상을 통해 또한 확인할 수 있는데요, 가령, 야곱의 ‘열두’ 아들과 그들의 이름이라든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라든지, 그리고 주님의 ‘열두’ 제자 등등... 그러나 이와 관련된 내용은 주님의 신적 자비, 곧 주님의 허락하심으로 나중에(cf. AC.3858, 3913:1), 특히 창세기 29장과 30장을 다룰 때 말씀드리겠습니다. That the number “twelve” signifies faith, or the things of love and the derivative faith in one complex, might also be confirmed by many passages from the Word, as from the “twelve” sons of Jacob and their names, the “twelve” tribes of Israel, and the Lord’s “twelve” apostles; but concerning these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especially in Genesis 29 and 30.

 

 

578. 이 숫자들을 살핀 것만으로도 주님의 말씀은 그 심장과 내면 깊숙이 무엇이 들어 있으며, 육안으로는 결코 볼 수 없는 얼마나 많은 아케이나가 그 안에 봉인되어 있는지가 분명해졌습니다. From these numbers alone it is evident what the Word of the Lord contains in its bosom and interior recesses, and how many arcana are concealed therein which do not at all appear to the naked eye.

 

말씀 어디서나 그렇습니다. 모든 말씀에 다 그런 똑같은 것이 있습니다. And so it is everywhere: there are like things in every word.

 

 

579. 여기서 다룬 홍수 전 세대의 경우, 리메인스가 아주 적거나 거의 없었다는 사실은 주님의 신적 자비로 나중에 (cf. AC.660, 661:2) 그들에 대해 주로 다루게 될 때 말씀드릴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리메인스가 전혀 보존될 수 없었기 때문에 ‘노아’라는 새 교회의 출현이 여기 예언된 것인데요, 이들은 리메인스를 가지고 있을 수 있었습니다. 이들에 관하여도 역시, 주님의 신적 자비로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cf. AC.635, 737, 1050) That with the antediluvians here treated of there were few and almost no remains, will be manifest from what, of the Lord’s Divine mercy, will be said of them hereafter; and as no remains could be preserved among them, it is here foretold of the new church called “Noah” that it should have remains; concerning which also,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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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6:1-8

 

2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Verse 2, And the sons of God saw the daughters of man that they were good; and they took to themselves wives of all that they chose.

 

※ 2절 속뜻

 

 

 

569. ‘하나님의 아들들’은 신앙의 교리, 가르침(teachings)을 상징합니다. By the “sons of God” are signified the doctrinal things of faith.

 

여기 나오는 ‘딸들’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갈망, 욕망(cravings)을 상징합니다. By “daughters,” here as before, yearnings.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는 신앙의 가르침과 사람의 욕망 둘을, 그 욕망이 무엇이든, 어떤 종류든 상관없이 이 둘을 단단히 묶었다는 뜻입니다. By the “sons of God seeing the daughters of man that they were good, and taking to themselves wives of all that they chose” is signified that the doctrinal things of faith conjoined themselves with yearnings, in fact with any yearnings whatever.

 

※ 여기 둘을 묶었다, 결합하게 했다, 또는 잠기게 했다 하는 표현의 뜻은, 신앙의 교리, 신학, 가르침을 자신의 갈망, 자신의 욕구, 욕망을 해소, 해결하는 방편으로 이용했다는 의미입니다. 신앙의 진리, 곧 주님의 말씀은 그 자체가 주님의 말씀이며, 주님이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순전함으로 따라야 하는데, 이들은 그럴 마음은 전혀 없고, 대신 오로지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만 이용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전형적인, 주님의 것에 사사로이 사람의 것을 섞는 신성모독입니다. 이것은 전형적인 자기 사랑의 모습이며, 결코 주님 사랑이 아닙니다.

 

 

570. ‘하나님의 아들들’이 신앙의 가르침을 상징한다는 것은, ‘아들들’의 상징을 보면 분명합니다. (바로 위, 그리고 앞 장 4절, ‘아들들’은 교회의 진리를 상징한다는 내용 참조, AC.489) That by the “sons of God” are signified doctrinal things of faith,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sons” (concerning which just above, and also in the preceding chapter, verse 4, where “sons” signify the truths of the church).

 

교회의 진리는 교리 형태의 가르침으로 되어 있으며, 본 장에 나오는 사람들은 이 진리를 참으로 여겼습니다. 태고인들을 통해 구전(口傳)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이 진리를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부르는 것이며, 한편으로는, 갈망을 가리켜 ‘사람의 딸들’이라 부르기 때문에, 비교해서 그렇게 부른 것이기도 합니다. The truths of the church are doctrinal things, which regarded in themselves were truths because those here treated of had them by tradition from the most ancient people, and therefore they are called the “sons of God”; they are so called also relatively, because yearnings are called the “daughters of man.”

 

본 절에서는 이 교회 사람들의 퀄러티(캐릭터)를 설명하고 있는데요, 즉, 이들은 본래 거룩했던, 교회의 진리를 자기들의 갈망으로 잠기게 했고, 그렇게 더럽혔으며, 그런 식으로, 그들은 자기들이 강하게 붙들고 있는 원리들을 더욱 더 신념으로 확고하게 삼았습니다. The quality of the members of this church is here described, namely, that they immersed the truths of the church, which were holy, in their yearnings, and thereby defiled them; and in this way they confirmed the principles of which they were so strongly persuaded.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하는 것은 누구라도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는데요,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것을 관찰하면 말입니다. 우리가 어떤 주제에 관해 자신을 확신시키고자 할 때, 우리는 그것이 진리임을 모든 그럴듯한 것들을 가지고, 심지어는 주님의 말씀으로부터도 가지고 와서 자신에게 증명해 보이지요. 우리는 우리가 채택한 원리들과 신념들에 착 달라붙어 있는 한, 우리는 모든 것을 그것들과 일치시키려 하고 조화시키려 합니다. How this occurred may be easily conceived by anyone, from observing what passes in himself and others: those who persuade themselves in regard to any subject, confirm themselves in such persuasion by everything which they imagine to be true, even by what they find contained in the Word of the Lord; for while they cling to principles which they have received, and have become persuaded of, they make everything favor and assent to them.

 

우리가 우리 자신에 빠져들면 들수록, 우리는 점점 더 완고하게 그 입장을 고수합니다. And the more anyone is under the influence of self-love, the more firmly he holds them.

 

이런 설명이 지금 논의 중인 인종(人種, race)에 딱 맞습니다. 이들에 관해서는, 나중에 주님의 신적 자비, 곧 주님의 허락하심으로, 우리가 그들의 가공할 신념들을 다루게 될 때 말씀드리겠습니다. (cf. AC.573, 580-586a, 607:3, 619-637, 659-662, 792-813) 참 말씀드리기 생소한 것은, 그들은 결코 자신들의 합리적 사고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려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그랬다면 그들은 그들 주위 영들의 모든 합리적인 능력들을 죄다 죽여버렸을 것입니다. 그들은 오직 자신들의 욕망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려 했습니다. Such was this race, concerning whom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when we come to treat of their direful persuasions, which strange to say are such that they are never allowed to flow in by reasonings, but only from yearnings, for otherwise they would kill everything rational in the spirits present.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분명해집니다. 그것은 그들이 신앙의 가르침들과 그들의 욕망 둘을 하나로, 실제로 어떤 종류의 무슨 욕망이든지, 이 둘을 하나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Hence it appears what is signified by the “sons of God seeing the daughters of man, that they were good, and taking to themselves wives of all that they chose,” namely, that they conjoined the doctrinal things of faith with their yearnings, in fact with any yearnings.

 

 

571. 사람이 정신 나간 욕망 가운데 신앙의 진리를 침수시키는 그런 캐릭터가 될 때, 그는 진리를 모독하며, 자신에게서 리메인스를 빼앗습니다. 비록 이들 리메인스가 사람 안에 머물지라도 그는 이 리메인스를 양심으로 데리고 가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순간, 그는 이미 더럽혀진 사고(思考, thoughts)로 또 다시 리메인스를 훼손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대한 신성모독은 일종의 굳은살을 만들어 모든 남아 있는 선과 진리를 마치 댐처럼 차단, 흡수해버리고 맙니다. When a man is of such a character that he immerses the truths of faith in his insane yearnings, he then profanes the truths, and deprives himself of remains, which although they remain cannot be brought forth, for as soon as they are brought forth they are again profaned by things that are profane; for profanations of the Word produce as it were a callosity, which causes an obstruction, and absorbs the goods and truths of remains.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훼손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거짓된 원리, 가정(assumptions)에 사로잡혀있는 사람한테는 진리가 들어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지라도, 주님의 말씀에는 영원한 산 생명이 들어 있습니다. Therefore let man beware of the profanation of the Word of the Lord, which contains the eternal truths wherein is life, although one who is in false principles does not believe that they are tru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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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6:1-8

 

1절,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Verse 1, And it came to pass that man began to multiply himself upon the faces of the ground, and daughters were born unto them.

 

※ 1절 속뜻

 

 

 

564. 여기 ‘사람’ [호모, homo, man]은 그 시절 존재하던 인류를 상징합니다. By “man” [homo] is here signified the race of mankind existing at that time.

 

‘땅 위’(faces of the ground)는 교회가 있던 모든 지역을 상징합니다. By the “faces of the ground” is signified all that tract where the church was.

 

여기 ‘딸들’(daughters)은 그 사람의 의지에 속하는 것들, 결과적으로 갈망, 욕망을 상징합니다. By “daughters” are here signified the things appertaining to the will of that man, consequently yearnings.

 

 

565. 여기 ‘사람’(man)은 그 시절 존재하던 인류, 실제로 악하거나 부패했던 인류를 상징한다는 것이 다음 구절들을 보면 나옵니다. That by “man” is here signified the race of mankind existing at that time, and indeed a race which was evil or corrupt, appears from the following passages: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3절) My spirit shall not reprove man forever, for that he is flesh. (verse 3)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5절) The evil of man was multiplied on the earth, and the imagination of the thoughts of his heart was only evil. (verse 5)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7절) I will destroy man whom I have created; (verse 7)

 

그리고 다음 장에서 and in the following chapter

 

21땅 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으니 곧 새와 가축과 들짐승과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라 22육지에 있어 그 코에 생명의 기운의 숨이 있는 것은 다 죽었더라 (창7:21-22) All flesh died that crept upon the earth, and every man, in whose nostrils was the breath of the spirit of lives. (Gen. 7:21–22)

 

사람에 관하여는, 주님 홀로 사람이시라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AC.49, 162) 그리고 주님으로 말미암아 모든 천적(天的, celestial) 인간, 혹은 천적 교회들을 일컬어 ‘사람’(man)이라 합니다. (AC.477) Of man it has already been said that the Lord alone is man, and that from him every celestial man, or celestial church, is called “man.”

 

그래서 다른 모든 교회도 사람이라 이름하며, 그렇게 모든 사람 또한 그의 신앙이 무엇인지 상관없이 다 그를 짐승과 구별하여 사람이라 합니다. Hence all of other churches are called men; and so is everyone, no matter of what faith, to distinguish him from the brutes.

 

그러나 주님께 속한 리메인스가 아니면, 여전히 사람은 사람이 아니며, 짐승과 구별되지 않습니다. (AC.530, 560) But still a man is not a man, and distinct from the brutes, except by virtue of remains, which are of the Lord.

 

리메인스 덕에 사람은 사람이라 이름하며, 리메인스, 곧 주님께 속한 이 리메인스가 있어 우리가 사람으로 불린다는 점을 고려하면, 사람이 전에 얼마나 악했든 지금 우리가 사람이라는 이름을 가진 것은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사람은 리메인스가 없으면, 결코 사람이 될 수 없으며, 오히려 가장 고약한 짐승이 되기 때문입니다. From these also a man is called man, and inasmuch as he is so called by reason of remains, which belong to the Lord, it is from him that he has the name of man be he ever so wicked, for a man is by no means man, but the vilest of brutes, unless he has remains.

 

 

566. ‘땅 위’(faces of the ground, 地面)는 교회가 있던 모든 지역을 상징한다는 것은 ‘지면’(ground)의 상징을 보면 분명합니다. 말씀에서는 ‘지면’(ground)과 ‘땅’(earth) 둘 사이 구분을 아주 정확하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면’(ground)은 어디서 언급되든지 교회를 상징하거나 교회의 어떤 면을 상징합니다. 이것이 인간 이름의 기원인 ‘아담’(Adam, man)인데, 이 아담이라는 이름의 의미가 바로 ‘지면’(ground)입니다. ‘땅’(earth)은 말씀 여러 곳에서 교회가 없거나 교회와 아무 관련이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창세기 1장이 보기인데요, 거기 보면, 오직 ‘땅’(earth)만 나옵니다. 아직 교회, 곧, 거듭난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That by the “faces of the ground” is signified all that region where the church was,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ground”; for in the Word there is an accurate distinction made between “ground” and “earth”; by “ground” is everywhere signified the church, or something belonging to the church; and from this comes the name of “man,” or “Adam,” which is “ground”; by “earth” in various places is meant where there is no church, or anything belonging to the church, as in the first chapter, where “earth” only is named, because as yet there was no church, or regenerate man.

 

‘지면’(ground)은 2장에서 처음 언급됩니다. 그때는 교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The “ground” is first spoken of in the second chapter, because then there was a church.

 

유사한 내용이 이곳과 다음 장에 나옵니다. ‘4내가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버리리라 23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이는 교회가 있었던 지역을 의미합니다. 같은 장 3절을 보면,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하게 하라’ 이는 생겨날 교회에 관한 것입니다. In like manner it is said here, and in the following chapter (Gen. 7:4, 23), that “every substance should be destroyed from off the faces of the ground,” signifying in the region where the church was; but in Gen. 7:3, speaking of a church about to be created, it is said, “to keep seed alive on the faces of the ground.”

 

‘지면’(ground)은 말씀 어디서나 그 가리키는 바가 동일합니다. 이사야입니다. “Ground” has the same signification everywhere in the Word; as in Isaiah:

 

1여호와께서 야곱을 긍휼히 여기시며 이스라엘을 다시 택하여 그들의 땅에 두시리니 2민족들이 그들을 데리고 그들의 본토에 돌아오리니 이스라엘 족속이 여호와의 땅에서 그들을 얻어 (사14:1-2) Jehovah will have mercy on Jacob, and will yet choose Israel, and will set them upon their own ground, and the peoples shall take them, and shall bring them to their place, and the house of Israel shall inherit them on the ground of Jehovah, (Isa. 14:1–2)

 

이 말씀은 이미 형성된 교회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없는 장소에 관해서는 같은 장 9, 12, 16, 20, 21, 25 및 26절에서 ‘땅’(earth)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speaking of the church that has been made; whereas where there is no church it is in the same chapter called “earth” (Isa. 14:9, 12, 16, 20–21, 25–26).

 

9아래의 스올이 너로 말미암아 소동하여 네가 오는 것을 영접하되 그것이 세상의 모든 영웅을 너로 말미암아 움직이게 하며 열방의 모든 왕을 그들의 왕좌에서 일어서게 하므로 12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16너를 보는 이가 주목하여 너를 자세히 살펴 보며 말하기를 이 사람이 땅을 진동시키며 열국을 놀라게 하며 20네가 네 땅을 망하게 하였고 네 백성을 죽였으므로 그들과 함께 안장되지 못하나니 악을 행하는 자들의 후손은 영원히 이름이 불려지지 아니하리로다 할지니라 21너희는 그들의 조상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그의 자손 도륙하기를 준비하여 그들이 일어나 땅을 차지하여 성읍들로 세상을 가득하게 하지 못하게 하라 25내가 앗수르를 나의 땅에서 파하며 나의 산에서 그것을 짓밟으리니 그 때에 그의 멍에가 이스라엘에게서 떠나고 그의 짐이 그들의 어깨에서 벗어질 것이라 26이것이 온 세계를 향하여 정한 경영이며 이것이 열방을 향하여 편 손이라 하셨나니 (사14:9, 12, 16, 20-21, 25-26)

 

[2] 다시 Again:

 

17유다의 땅은 애굽의 두려움이 되리니 18그 날에 애굽 땅에 가나안 방언을 말하는 다섯 성읍이 있을 것이며 (사19:17-18) And the ground of Judah shall be a terror unto Egypt; in that day there shall be five cities in the land of Egypt speaking with the lip of Canaan, (Isa. 19:17–18)

 

유다의 ‘땅’(ground)은 교회가 있는 곳, 애굽 ‘땅’(land)은 교회가 없는 곳입니다. where “ground” signifies the church, and “land” where there is no church.

 

같은 이사야에서 In the same:

 

20땅이 취한 자 같이 비틀비틀하며 원두막 같이 흔들리며 21여호와께서 높은 데에서 높은 군대를 벌하시며 땅에서 땅의 왕들을 벌하시리니 (사24:20-21) The earth shall reel to and fro like a drunkard; Jehovah shall visit upon the army of the height in the height, and upon the kings of the ground on the ground. (Isa. 24:20–21)

 

예레미야에서 In Jeremiah:

 

4땅에 비가 없어 지면이 갈라지니 밭 가는 자가 부끄러워서 그의 머리를 가리는도다 5들의 암사슴은 새끼를 낳아도 풀이 없으므로 내버리며 (렘14:4-5) Because of the ground that is worn, because there was no rain on the earth, the husbandmen were ashamed, they covered their heads, yea, the hind also calved in the field, (Jer. 14:4–5)

 

‘땅’(earth)은 ‘지면’(ground)을 둘러싼 지역을, ‘지면’(ground)은 ‘들’(field)을 둘러싼 지역을 각각 의미합니다. where “earth” is that which contains the “ground,” and “ground” that which contains the “field.”

 

[3] 같은 예레미야에서 In the same:

 

이스라엘 집 자손을 북쪽 땅, 그 모든 쫓겨났던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할 것이며 그들이 자기 땅에 살리라 하시니라 (렘23:8) He brought the seed of the house of Israel from the northern land, from all the lands whither I have driven them, and they shall dwell on their own ground, (Jer. 23:8)

 

북쪽 ‘땅’(land), 쫓겨났던 ‘나라’(lands)는 교회가 없는 곳을, 자기 ‘땅’(ground)은 교회나 참된 예배가 있는 곳입니다. where “land” and “lands” are where there are no churches; “ground” where there is a church or true worship.

 

다시 Again:

 

8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유다의 왕 시드기야와 그 고관들과 예루살렘의 남은 자로서 이 땅에 남아 있는 자와 애굽 땅에 사는 자들을 나빠서 먹을 수 없는 이 나쁜 무화과 같이 버리되 9세상 모든 나라 가운데 흩어서 그들에게 환난을 당하게 할 것이며 또 그들에게 내가 쫓아 보낼 모든 곳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며 말 거리가 되게 하며 조롱과 저주를 받게 할 것이며 10내가 칼과 기근과 전염병을 그들 가운데 보내 그들이 내가 그들과 그들의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멸절하기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시니라 (렘24:8-10) I will give the remains of Jerusalem, them that are left in this land, and them that dwell in the land of Egypt, and I will deliver them to commotion, for evil to all the kings of the earth, and I will send the sword, the famine, and pestilence among them, till they be consumed from off the ground which I gave to them and to their fathers, (Jer. 24:8–10)

 

‘땅’(ground)은 교리(혹은 신학)과 거기서 나오는 예배를 상징합니다. 이사야 25장 5절 말씀도 같습니다. where “ground” signifies doctrine and the worship thence derived; and in like manner in the same prophet, chapter 25:5.

 

마른 땅에 폭양을 제함 같이 주께서 이방인의 소란을 그치게 하시며 폭양을 구름으로 가림 같이 포학한 자의 노래를 낮추시리이다 (사25:5)

 

[4] 에스겔에서 In Ezekiel:

 

41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나오게 하고 너희가 흩어진 여러 민족 가운데에서 모아 낼 때에 내가 너희를 향기로 받고 내가 또 너희로 말미암아 내 거룩함을 여러 나라의 목전에서 나타낼 것이며 42내가 내 손을 들어 너희 조상들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 곧 이스라엘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들일 때에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 알고 (겔20:41-42) I will gather you out of the lands wherein ye have been scattered, and ye shall know that I am Jehovah when I shall bring you again into the ground of Israel, into the land for which I lifted up my hand to give it to your fathers, (Ezek. 20:41–42)

 

이스라엘 ‘땅’(ground)은 내적 예배를 상징합니다. 내적 예배가 없는 곳은 여러 ‘나라’(land)라고 합니다. where “ground” signifies internal worship; it is called “land” when there is no internal worship.

 

말라기에서 In Malachi:

 

11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12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말3:11-12) I will rebuke him that consumeth for your sakes, and he shall not corrupt for you the fruit of the ground, nor shall the vine be bereaved for you in the field and all nations shall call you blessed, because ye shall be a delightsome land, (Mal. 3:11–12)

 

너희 ‘땅’(land)은 컨테이너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토지’(ground)가 교회, 혹은 교리를 가리킬 때, ‘땅’(land)이라고 부르는 사람을 분명히 가리키고 있습니다. where “land” denotes the container, and therefore it plainly denotes man, who is called “land” when “ground” denotes the church, or doctrine.

 

[5] 모세의 글에서 In Moses:

 

너희 민족들아 주의 백성과 즐거워하라 주께서 그 종들의 피를 갚으사 그 대적들에게 복수하시고 자기 땅과 자기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시리로다 (신32:43) Sing, O ye nations, his people, he will make expiation for his ground, his people, (Deut. 32:43)

 

이것은 분명히 이방인들, 곧 유대인이 아닌 나라들의 교회를 상징하며, 그걸 가리켜 자기 ‘땅’(ground)이라 하고 있습니다. evidently signifying the church of the gentiles, which is called “ground.”

 

이사야에서 In Isaiah:

 

대저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네가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황폐하게 되리라 (사7:16) Before the child shall know to refuse the evil and choose the good, the ground shall be forsaken, which thou abhorrest in presence of both her kings, (Isa. 7:16)

 

‘땅이 황폐하게 되리라’(ground will be forsaken)를 통해 교회, 혹은 신앙에 관한 참된 교리를 위해 준비된 땅이 황폐해질 것을 말하면서, 주님의 강림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speaking of the advent of the Lord; that the “ground will be forsaken” denotes the church, or the true doctrine of faith.

 

‘땅’(ground)과 ‘밭’(field)이라는 말들은 곡식 심기와 연결되어 사용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사야에서처럼 말입니다. That “ground” and “field” are so called from being sown with seed is evident; as in Isaiah:

 

23네가 땅에 뿌린 종자에 주께서 비를 주사 땅이 먹을 것을 내며 곡식이 풍성하고 기름지게 하실 것이며 그 날에 네 가축이 광활한 목장에서 먹을 것이요 24밭 가는 소와 어린 나귀도 키와 쇠스랑으로 까부르고 맛있게 한 먹이를 먹을 것이며 (사30:23-24) Then shall he give rain of thy seed wherewith thou shalt sow the ground; the oxen also and the young asses that labor on the ground. (Isa. 30:23–24)

 

그리고 요엘입니다. And in Joel:

 

밭이 황무하고 토지가 마르니 곡식이 떨어지며 새 포도주가 말랐고 기름이 다하였도다 (욜1:10) The field is laid waste, and the ground hath mourned, because the corn is laid waste. (Joel 1:10)

 

이런 걸 보면, 히브리말로 ‘아담’이라고 하는 ‘사람’은 ‘토지’(ground)에서 왔으며, 교회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Hence then it is evident that “man,” who in the Hebrew tongue is called “Adam,” from “ground,” signifies the church.

 

 

567. 참된 신앙에 관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사는 지역 전부를 총체적으로 아울러 교회 지역이라고 합니다. 전에 유대 교회가 있었던 가나안 땅 같은 곳이지요. 지금 기독 교회가 있는 유럽 또한 그렇습니다. 그 외의 지역과 나라들은 교회 지역이 아니며, 이것이 곧 오늘 본문, ‘땅 위’(faces of the ground)의 의미입니다. All that region is called the region of the church where those live who are instructed in the doctrine of true faith; as the land of Canaan, when the Jewish church was there, and Europe, where the Christian church now is; the lands and countries outside of this are not the region of the church, or the “faces of the ground.”

 

홍수 전 교회들이 있었던 곳은 에덴동산에서 발원한 강들로 둘러싸인 땅들을 보고도 알 수 있겠는데요, 이 강들은 말씀 여러 곳에서 가나안 땅 경계로 자주 언급된 강들입니다. (cf. 창15:18; 신1:7; 11:24; 수1:4; 왕상5:9) Where the church was before the flood, may also appear from the lands which the rivers encompassed that went forth from the garden of Eden, by which in various parts of the Word are likewise described the boundaries of the land of Canaan;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창15:18)

 

방향을 돌려 행진하여 아모리 족속의 산지로 가고 그 근방 곳곳으로 가고 아라바와 산지와 평지와 네겝과 해변과 가나안 족속의 땅과 레바논과 큰 강 유브라데까지 가라 (신1:7)

 

너희의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다 너희의 소유가 되리니 너희의 경계는 곧 광야에서부터 레바논까지와 유브라데 강에서부터 서해까지라 (신11:24)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강 곧 유브라데 강까지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쪽 대해까지 너희의 영토가 되리라 (수1:4)

 

또 동으로 가서 거주하면서 유브라데 강에서부터 광야 지경까지 다다랐으니 이는 길르앗 땅에서 그 가축이 번식함이라 (대상5:9)

 

그 장소는 또한 이어지는 내용들, 가령, 네피림이 ‘거기에’(in the land) 있었다는 사실과, 그들이 가나안 땅에 거주했다는 민수기 13장 33절 말씀,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에 관한 말씀 등으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and also from what follows concerning the Nephilim that were “in the land”; and that these Nephilim dwelt in the land of Canaan is evident from what is said of the sons of Anak: that they were “of the Nephilim” (Num. 13:33).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민13:33)

 

 

568. ‘딸들’(daughters)이 그런 사람의 의지 안에 거주하는 것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갈망, 욕망을 상징한다는 것은, 그동안 ‘자녀들’(sons and daughters) 관련, 앞장에서 다루어 온 내용들(AC.489-491, 창5:4)을 보면 분명하며, 거기서 ‘아들들’(sons)은 진리를, ‘딸들’(daughters)은 선을 각각 상징합니다. That “daughters” signify such things as are of the will of that man, consequently yearnings, is evident from what was said and shown concerning “sons and daughters” in the preceding chapter (Gen. 5:4), where “sons” signify truths, and “daughters,” goods.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딸들’, 혹은 선은 의지에 속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그런 사람이면 그의 인식능력도, 그의 의지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이 ‘자녀들’입니다. “Daughters,” or goods, are of the will, but such as a man is, such is his understanding and such his will, thus such are the “sons and daughters.”

 

※ 즉, 우리의 지적 능력과 의지가 어떤 모습일지는 우리의 캐릭터가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의 ‘자녀들’ 또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다루는 사람은 부패한 상태입니다. 이런 사람은 의지랄 게 없으며, 대신 원색적 욕망만 있습니다. 이들은 이런 걸 의지로 여기며, 실제로 그렇게 부릅니다. The present passage treats of man in a corrupt state, who has no will, but mere cupidity instead of will, which is supposed by him to be will, and is also so called.

 

어떤 것에 대한 설명은 설명하고 있는 그것의 퀄러티와 일치합니다. 여기서 딸들이 설명하고 있는 사람은 앞서 지금까지 죽 설명해온 대로 부패한 사람입니다. (cf. AC.)What is predicated is in accordance with the quality of the thing whereof it is predicated, and that the man of whom the daughters are here predicated was a corrupt man, has been shown before.

 

‘딸들’은 의지 안에 있는 것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그 안에 선을 위한 게 전혀 없으면, 그때는 갈망(yearnings)을 상징하게 되며, ‘아들들’은 이해하는 능력(understanding) 안에 있는 것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그 안에 진리에 관한 이해가 전혀 없으면, 그때는 환상(fantasies)을 상징합니다. 왜 이런가 하는 것은, 성(sex)의 본성 때문입니다. 여성은 태생적으로 의지나 탐욕(cupidity)이 이해하는 능력(understanding)을 다스리게 되어 있습니다. The reason why “daughters” signify the things of the will, and, where there is no will of good, yearnings; and why “sons” signify the things of the understanding, and, where there is no understanding of truth, fantasies, is that the female sex is such, and so formed, that the will or cupidity reigns in them more than the understanding.

 

여성의 몸 모든 섬유조직이 다 이런 기질(disposition), 이런 성향이며, 이것이 여성의 본성인 반면, 남성은 지성(intellect) 또는 이성(reason)이 우위를 나타내는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남성의 몸 모든 섬유조직이 다 이런 기질, 이런 성향이며, 이것이 남성의 본성입니다. Such is the entire disposition of their fibers, and such their nature, whereas the male sex is so formed that the intellect or reason rules, such also being the disposition of their fibers and such their nature.

 

두 사람 간 결혼이 그래서 각 사람 안의 의지와 이해하는 능력(understanding) 간 결혼과 비슷한 것입니다. 오늘날엔 선을 위한 의지는 없고, 대신 탐욕(cupidity)만 있으며, 약간의 지성(intellectual)이나 이성(rational)만 가능한데, 이것이 바로 유대 교회에 있는 그 많은 법들이 왜 남편의 특권(prerogative)과 아내의 복종(obedience)에 관한 것인지 하는 이유가 되겠습니다. Hence the marriage of the two is like that of the will and the understanding in every man; and since at this day there is no will of good, but only cupidity, and still something intellectual, or rational, can be given, this is why so many laws were enacted in the Jewish church concerning the prerogative of the husband [vir], and the obedience of the w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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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보

2022-07-24(D1)-제10권30호통465호.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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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설교 원고 및 유튜브

2022-07-24(D1)-주일예배(2317, 창4,19, AC.405-411), '라멕의 때에 아다와 씰라를 일으키시는 주님'.pdf
0.49MB

https://youtu.be/vSxq7JTOtHA

 

3. 축도 원고 및 유튜브

2022-07-24(D1)-주일예배(2317, 창4,19, AC.405-411), '라멕의 때에 아다와 씰라를 일으키시는 주님', 축도.pdf
0.21MB

https://youtu.be/VMYexAsvrq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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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6:1-8

 

1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And it came to pass that man began to multiply himself upon the faces of the ground, and daughters were born unto them. 2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And the sons of God saw the daughters of man that they were good; and they took to themselves wives of all that they chose. 3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And Jehovah said, My spirit shall not reprove man forever, for that he is flesh; and his days shall be a hundred and twenty years. 4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There were Nephilim in the earth in those days; and most especially after the sons of God went in unto the daughters of man, and they bare to them; the same became mighty men, who were of old, men of renown. 5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And Jehovah saw that the evil of man was multiplied on the earth, and that all the imagination of the thoughts of his heart was only evil every day. 6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And it repented Jehovah that he had made man on the earth, and it grieved him at his heart. 7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And Jehovah said, I will destroy man whom I have created, from upon the faces of the ground, both man and beast, and creeping thing, and fowl of the heavens; for it repenteth me that I have made him. 8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And Noah found grace in the eyes of Jehovah.

 

개요

 

554. 여기서 다루는 주제는 홍수 전 사람들의 상태입니다. The subject here treated of is the state of the people before the flood.

 

 

555. 사람과 더불어 교회가 있었던 곳에 갈망(yearnings, 욕구, 욕망, appetites)이 일어나 사람과 교회를 다스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갈망이 바로 ‘딸들’입니다. That with man, where the church was, yearnings—which are the “daughters”—began to reign.

 

그들은 또한 신앙의 가르침들과 자신들의 갈망을 단단히 묶어, 그 결과, 자기들이 악과 거짓 가운데 있음을 확실히 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라는 표현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1-2절) Also that they conjoined the doctrinal things of faith with their yearnings, and thus confirmed themselves in evils and falsities, which is signified by “the sons of God taking to themselves wives of the daughters of man” (verses 1–2).

 

 

556. 그 결과, 선과 진리의 리메인스가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고, 이런 상황에서 주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리메인스를 습득하여 계속해서 지니고 있게 하시려고 사람들을 새롭게 만드시려는 마음을 먹으셨습니다. ‘백이십 년’은 리메인스를 가리킵니다. (3절) And whereas there were thus no remains of good and truth left, it is foretold that man should be differently formed, in order that he might have remains, which are “a hundred and twenty years” (verse 3).

 

 

557. 신앙의 가르침들을 자기들이 가진 욕망 실현의 도구로 이용하고, 이런 상태로 자기를 사랑하고, 자아를 사랑하면서, 남들과 비교, 자기들만이 가진 위대함이 얼마나 뛰어난지, 자기들이 얼마나 중요한 사람들인지 하는, 끔찍할 정도로 소름 돋는 망상, 즉 종교적 신념에 사로잡힌 사람들, 이런 자들이 바로 ‘네피림’입니다. (4절) Those who immersed the doctrinal things of faith in their yearnings, and in consequence of this as well as of the love of self conceived dreadful persuasions of their own greatness in comparison with others, are signified by the “Nephilim” (verse 4).

 

 

558. 이렇게 되고 나자 선과 진리에 관한 무슨 의지나 퍼셉션은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5절) In consequence of this there no longer remained any will or perception of good and truth (verse 5).

 

 

559.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는 주님의 자비(mercy)에 대한 묘사입니다. (6절) The mercy of the Lord is described by “repenting and grieving at heart” (verse 6).

 

그들은 이런 갈망과 이런 신념은 사람을 반드시 죽음에 이르게 하고 만다는 것을 입증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7절) That they became such that their yearnings and persuasions must needs prove fatal to them (verse 7).

 

이런 상황에서, 인류가 건짐을, 구원을 받을 수 있으려면 새로운 교회가 반드시 일어나야 했는데, 그 교회가 바로 ‘노아’입니다. (8절) Therefore in order that the human race might be saved, a new church should arise, which is “Noah” (verse 8).

 

배경

 

560. 계속해서 진도를 나가기 전에 먼저, 홍수 이전 교회의 상황은 어땠는지를 좀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Before proceeding further we may mention how the case was with the church before the flood.

 

일반적으로는, 후에 일어난 교회들의 상황들과 같았다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즉, 주님 강림 전 유대교회의 경우나, 주님 강림 후 기독교회의 경우처럼, 참 신앙 지식의 부패와 타락, 뒤집힘 및 불순물을 섞음 등이 되어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자세히는, 홍수 전 교회에 속한 사람의 경우, 그는 시간이 흐르면서 무서운 신념, 곧 소름 끼치는 망상을 품게 되었고, 신앙에 속한 선과 진리를 역겨운 갈망, 욕망에 철저히 잠기게 하여 그 결과, 그들 안에 리메인스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을 지경까지 가도록 만들었습니다. Speaking generally, it was as with succeeding churches, as with the Jewish church before the Lord’s advent, and the Christian church after his advent, in that it had corrupted and adulterated the knowledges of true faith; but specifically, as regards the man of the church before the flood, he in course of time conceived direful persuasions, and immersed the goods and truths of faith in foul yearnings, insomuch that there were scarcely any remains in them.

 

그들이 이 상태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사실은 스스로를 질식시킨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리메인스 없이는 살 수가 없기 때문인데요,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AC.530), 사람을 짐승 수준의 삶에서 인간의 삶으로 고양하는 것이 바로 이 리메인스이기 때문입니다. When they came into this state they were suffocated as if of themselves, for man cannot live without remains; for, as we have said, it is in the remains that the life of man is superior to that of brutes.

 

리메인스를 가지고, 즉, 주님에게서 온 리메인스를 통해서, 사람은 사람이 될 수도, 무엇이 선이요, 진리인지를 알 수도, 온갖 종류의 일들을 생각할 수도,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리메인스 그 안에는 영적, 천적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From remains, that is, through remains from the Lord, man is able to be as man, to know what is good and true, to reflect upon matters of every kind, and consequently to think and to reason; for in remains alone is there spiritual and celestial life.

 

 

561. 그러면 리메인스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But what are remains?

 

리메인스는 사람이 유년기부터 주님의 말씀을 통해 배워 그의 기억에 강한 인상을 심어준 선과 진리뿐 아니라, 거기서 기원한 모든 상태, 가령, 영유아기 순진무구한 상태, 부모, 형제, 선생님과 친구를 향한 사랑의 상태,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 및 가난한 자, 빈궁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상태 등, 한 마디로, 선과 진리에 속한 모든 상태 또한 가리킵니다. They are not only the goods and truths that a man has learned from the Lord’s Word from infancy, and has thus impressed on his memory, but they are also all the states thence derived, such as states of innocence from infancy; states of love toward parents, brothers, teachers, friends; states of charity toward the neighbor, and also of pity for the poor and needy; in a word, all states of good and truth.

 

선과 진리와 함께 기억에 각인된 이런 상태를 일컬어 리메인스라 합니다. 이것은 주님에 의해 사람 안에 보관되는데, 이때 주님은 사람으로 하여금 조금도 눈치 못 채게 조심조심 그의 속사람 안에 쌓아가십니다. 이것은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즉, 악과 거짓에 관련된 것들하고는 철저히 격리됩니다. These states together with the goods and truths impressed on the memory, are called remains, which are preserved in man by the Lord and are stored up, entirely without his knowledge, in his internal man, and are completely separated from the things that are proper to man, that is, from evils and falsities.

 

이 모든 상태는 그 가운데 아주 작은 것조차 잃는 것이 없도록 주님에 의해 사람 안에 보존됩니다. 저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도록 전에 이런 경험을 했는데요, 사람의 모든 상태는 그의 영유아 때부터 아주 늙었을 때까지 내세에 그대로 보존될 뿐만 아니라 다시 체험되기도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실제로 사람의 상태는 그가 현세에 살면서 처음 겪었던 상태 그대로 정확히 다시 체험됩니다. All these states are so preserved in man by the Lord that not the least of them is lost, as I have been given to know from the fact that every state of a man, from his infancy to extreme old age, not only remains in the other life, but also returns; in fact his states return exactly as they were while he lived in this world.

 

우리 기억에 아로새겨진 선과 진리뿐 아니라, 우리가 경험한 모든 이노센스나 체어리티도 마찬가지, 즉, 하나도 잃는 것은 없습니다. Not only do the goods and truths of memory thus remain and return, but also all states of innocence and charity.

 

그리고 악과 거짓의 상태가 재발될 때, 곧, 이들 악과 거짓이 개별적이든 전체적이든, 심지어 아주 작은 것조차 역시 고스란히 남아 있고, 다시 체험되는데요, 이때는 주님에 의해 선한 상태로 누그러뜨려집니다. And when states of evil and falsity recur—for each and all of these, even the smallest, also remain and return—then these states are tempered by the Lord by means of the good states.

 

이 모든 사실로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에게 리메인스가 전혀 남아 있지 않게 되면, 그는 반드시 영원한 지옥살이, 곧, 영원히 지옥에 있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전에 말씀드린 AC.468번 글을 보시기 바랍니다.) From all this it is evident that if a man had no remains he must necessarily be in eternal damnation. (See what was said before at n. 468.)

 

 

562. 홍수 전 사람들은 결국 리메인스를 거의 갖고 있지 못하게 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가진 독특한 멘탈 때문인데요, 그들은 자신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과 떠오르는 모든 생각에 관해, 무서울 정도로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종교적 신념으로 가득 채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런 멘탈적 특성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고자 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이들은 어마어마한 자아 사랑의 사람들이었고, 자신들을 신으로 여기며, 자기들이 하는 생각은 무엇이든지 신성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The people before the flood were such that at last they had almost no remains, because they were of such a genius that they became imbued with direful and abominable persuasions concerning all things that occurred to them or came into their thought, so that they would not go back from them one whit, for they were possessed with the most enormous love of self, and supposed themselves to be as gods, and that whatever they thought was Divine.

 

이런 종교적 신념, 종교적 설득력, 이쯤 되면 종교적 수준의 자기기만인데요, 이런 것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어떤 사람들한테서도 존재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을 숨 막히게 하고 질식시켜 죽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내세에서는 이 홍수 전 시대 사람들은 다른 영들과 함께 있을 수가 없는데요, 그들이 나타나면 그들은 공포스럽다 판명된 자신들의 이 종교적 신념을 주입함으로써 사람들의 모든 사고능력을 거두어 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는 이쯤 하고, 나머지는 주님의 신적 자비, 곧 허락하심으로 이어지는 그 부분에서 계속하겠습니다. (AC.1265-1272) No such persuasion has ever existed in any people before or since, for it is deadly or suffocative, and therefore in the other life the antediluvians cannot be with any other spirits, for when they are present they take away from them all power of thought by injecting their fearfully determined persuasions, not to mention other matters which of the Lord’s Divine mercy shall be spoken of in what follows.

 

 

563. 이런 종류의 자기기만이 사람을 점유, 점령하게 되면, 이것은 무슨 접착제처럼 착 달라붙어 만일 이것이 없었으면 여전히 남아 있었을 선과 진리로 하여금 도저히 남아나게도, 더 이상 쌓이게도 하질 않습니다. 또 그동안 쌓아놓은 것들은 사용할 수도 없게 됩니다. 이런 상황이 되면, 이들은 이런 망상의 정상에 도달, 결국 그들에게 부합하는 고유한 종말, 멸망에 이르게 되며, 홍수와 다름없는 범람으로 질식당하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이들의 종말을 ‘홍수’에 비유하며, 태고인들의 관습에 따라 같은 것, 곧, 홍수로 묘사합니다. When such a persuasion takes possession of a man, it is like a glue which catches in its sticky embrace the goods and truths that otherwise would be remains, the result of which is that remains can no longer be stored up, and those which have been stored up can be of no use; and therefore when these people arrived at the summit of such persuasion they became extinct of their own accord, and were suffocated by an inundation not unlike a flood; and therefore their extinction is compared to a “flood,” and also, according to the custom of the most ancient people, is described as 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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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 천국 기쁨에 관하여

Concerning Heaven And Heavenly Joy

 

 

547. 저세상 삶 안으로 들어오는 영혼들 모두가 천국과 천국 기쁨의 본질에 관하여 무지합니다. The souls who come into the other life are all ignorant of the nature of heaven and of heavenly joy.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천국의 기쁨을 다음과 같은 것일 거라고 아무렇게나 가정하는데요, 자기들이 어떤 삶을 살았든, 심지어 자기들이 이웃을 증오하며 살았든, 간음과 간통의 삶을 살았든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허락되는 그런 것으로 말이지요. 사람들의 이런 모습은 그들 대부분이 천국에 대해 정말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곧, 천국은 상호 순결한 사랑의 나라이며, 천국의 기쁨은 그런 사랑에서 나오는 행복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Very many suppose it to be a kind of joy into which any can be admitted no matter how they have lived, even those who have borne hatred against their neighbor and have passed their lives in adulteries, being quite unaware of the fact that heaven is mutual and chaste love, and that heavenly joy is the derivative happiness.

 

 

548. 저는 세상에서 갓 들어온 신참 영들과 영원한 삶의 상태에 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종종 있습니다. 그들에게 말하기를, 여러분은 이 나라의 주님이 누구시며, 이 나라의 속성과 형태에 관해 아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꼭 아셔야 하는데요, 그것은 마치 이 세상에서도 다른 나라에 가는 사람들은 특별히 그 나라의 왕이 누구며, 어떤 사람인지, 그 나라 정부는 어떤 정부인지 등등 그 나라에 속한 다른 많은 것들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물며, 여기는 이제 여러분이 영원히 살아가게 될 나라로서 여러분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I have sometimes spoken with spirits fresh from the world concerning the state of eternal life, telling them how important it was for them to know who is the Lord of that kingdom, and what is the nature and form of its government, just as those in this world who go into another kingdom are especially interested to know who and of what sort is the king, what is the nature of the government, and many other things that belong to the kingdom; and how much more should they be interested in this kingdom, where they are to live forever.

 

저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천국과 우주 둘 다를 다스리시는 분은 주님뿐이십니다. 하나를 다스리시는 분이 다른 쪽도 다스리셔야 하기 때문인데요, 여러분이 지금 있는 이 나라는 주님의 나라이며, 이 나라의 법은 영원한 진리들이고, 그 모든 것은 하나의 위대한 법, 곧 사람들은 주님을 무엇보다도 사랑해야 하며,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법, 심지어 지금은 자기보다 더 사랑해야 한다는 법에 베이스를 두고 있는, 그런 법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천사가 되고 싶으면, 여러분은 이 법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I told them that the Lord alone rules both heaven and the universe, for he who rules the one must rule the other; and that the kingdom in which they were now is the Lord’s kingdom, the laws of which are eternal truths, all of which are based on the one great law that men shall love the Lord above all things and their neighbor as themselves, and now even more than themselves, for if they would be as the angels this is what they must do.

 

이 모든 말을 듣고 그들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아직 몸 안에 있을 때, 그들은 이런 종류의 말들을 계속해서 들었지만 계속해서 안 믿었기 때문입니다. To all this they could make no reply, because in their bodily life they had heard something of the kind, but had not believed it.

 

그들은 천국에 이런 사랑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을 들어 알고는 있었는데, 여기 와보니 여기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람이 이웃을 자기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들을 듣고는 경이로워하기까지 했습니다. They marveled that there is such love in heaven, and that it is possible for anyone to love his neighbor more than himself, seeing that they had heard that they were to love their neighbor as themselves.

 

그러나 그들은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저세상에서는 모든 선이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확장된다는 것과, 몸 안에 있는 삶은, 사람이 몸의 일 안에 있을 수밖에 없는 태생적 이유로, 이웃을 자기 몸보다 더 사랑할 수는 없게 만든다는 것, 그러나 이런 몸을 벗게 되면, 사랑은 더욱 순수해지다가 마침내 천사처럼 사랑하게 되는데, 이 사랑은 이웃을 자기보다 더 사랑하는 그런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But they were instructed that in the other life all goods are immeasurably increased, and that the life in the body is such that men can go no further than loving the neighbor as themselves because they are in the things of the body, but that when these are removed, the love becomes purer, and at last angelic, which consists in loving the neighbor more than themselves.

 

이런 사랑의 가능 여부는 다음과 같은 실제 예들을 보면 분명합니다. 가령, 먼저, 결혼애입니다. 이것은 결혼한 배우자가 크게 다치는 것을 막기 위해 대신 죽음도 불사하는 사람들한테서 볼 수 있는 사랑입니다. 다음은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의 사랑입니다. 어머니는 자기 자녀의 배고픔을 자기가 대신 담당, 유일한 식량을 흔쾌히 자녀에게 먹이고, 자기는 기꺼이 굶주림을 선택합니다. 이것은 심지어 새나 짐승들도 같습니다. 신실한 우정을 통해서도 이런 사랑을 볼 수 있는데요, 친구를 위해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는 사랑입니다. 참된 우정을 흉내 내는, 짐짓 정중함을 가장한 꾸민 우정에서조차 그렇습니다. 심지어 마음에도 없는 말을 큰소리치며 하더라도 좋게 대하며, 더 나은 것으로 제공하면서 말이지요. The possibility of such love is evident from the conjugial love that exists with some persons, who would suffer death rather than let their married partner be injured; and also from the love of parents for their children, in that a mother will endure starvation rather than see her infant hunger, and this even among birds and animals; and likewise from sincere friendship, in that perils will be undergone for our friends; and even from polite and feigned friendship, that would emulate real friendship in offering the better things to those to whom we wish well, making great professions even when they do not come from the heart.

 

최종적인 예는 바로 사랑 그 자체에 있습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을 섬기는 데에서 기쁨을 발견합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사랑 그 자체를 위해서 말이지요. And finally its possibility is evident from the very nature of love, which finds its joy in being of service to others, not for the sake of self but for the love’s own sake.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더 사랑한 사람들, 그리고 육체적 삶 가운데 이익을 얻기 위해 탐욕적이었고, 욕심 많은 삶을 산 사람들한테는 정말 이해 불가한 것입니다. But all this could not be comprehended by those who loved themselves more than others, and who in the bodily life had been greedy for gain, and least of all by the avaricious.

 

 

549. 천사 같은 상태란 누구나 자신의 진복(眞福, bliss)과 행복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그런 것입니다. The angelic state is such that everyone communicates his own bliss and happiness to others.

 

저세상에서는 모든 어펙션들과 생각들을 가장 아름답고 정교하게 서로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지각합니다. 누구나 자신의 기쁨을 모두와, 그리고 모두는 각 개인과 이런 식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하는데, 이렇게 하면, 모두는 마치 자기가 모든 것의 중심이 된 것 같기 때문입니다. For in the other life there is a most exquisite communication and perception of all the affections and thoughts, so that each person communicates his joy to all, and all to each, so that each one is as it were the center of all.

 

이것이 천국의 형태입니다. This is the heavenly form.

 

이런 이유로, 주님의 나라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행복 또한 더욱 더 커집니다. 천국의 행복은 그 수에 비례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왜 천국의 행복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가 하는 이유입니다. And therefore the more there are who constitute the Lord’s kingdom, the greater is the happiness, for it increases in proportion to the numbers, and this is why heavenly happiness is unutterable.

 

모두가 남을 자기보다 더 사랑할 때, 전체는 개인과, 개인은 전체와 라는 이런 커뮤니케이션이 있게 됩니다. There is this communication of all with each and of each with all when everyone loves others more than himself.

 

그러나 만일 누가 남보다 자기를 더 이롭게 하기를 원하면 그때부터는 자기 사랑이라는 것이 다스림을 시작합니다. 이 자기 사랑으로부터는 오직 나만, 나만! 이라는 것밖에 다른 아무것도 커뮤니케이션 되는 게 없는데, 이것은 정말 악취 나는, 반칙과 같은 짓입니다. 천국에서는 이런 것이 지각되는 순간, 그는 즉시 추방되고, 거부됩니다. But if anyone wishes better for himself than for others the love of self reigns, which communicates nothing to others from itself except the idea of self, which is very foul, and when this is perceived the person is at once banished and rejected.

 

 

550. 인체 내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나 나머지 모두를 위한 전체적이고 개별적인 쓰임새에 기여하고 있는 것과 똑같이 주님의 나라에서도 그렇습니다. 천국도 한 사람의 인체와 같아서 사실은 ‘그랜드 맨’(the grand man)이라 하기 때문입니다. Just as in the human body all things both in general and particular contribute to the general and individual uses of all the rest, so is it in the Lord’s kingdom, which is constituted like a man, and in fact is called the grand man.

 

이런 식으로 그곳 천국의 모두는 더 가깝게든 더 멀리든, 다양한 방법으로 모두의 행복을 위해 서로에게 기여하며, 이 모든 것은 오직 주님이 시작하신 질서에 따라 결과적으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In this way everyone there contributes either more nearly or more remotely, and in many ways, to the happiness of all, and this in accordance with the order instituted and consequently maintained by the Lord alone.

 

 

551. 주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광대한 천국으로부터, 그리고 전체적인 우주와 그 안 가장 개별적인 구성원들 둘 다와 일대일, 유일한 관계를 맺고 있는 거기 있는 모두로부터 질서, 연합, 서로 사랑, 그리고 행복이 옵니다. 거기 있는 하나하나는 모두의 복지와 행복을 배려하며, 모두 또한 각 개인의 행복을 배려하기 때문입니다. From the universal heaven bearing relation to the Lord, and all there in both general and particular bearing relation to the very and only being both in the universal as a whole and in its most individual constituents, there comes order, there comes union, there comes mutual love, and there comes happiness; for so each person regards the welfare and happiness of all, and all that of each one.

 

 

552. 천국 모든 기쁨과 행복은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주님은 저로 하여금 많은 걸 경험하게 하심으로써 보여주셨습니다. 다음은 이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That all the joy and happiness in heaven are from the Lord alone, has been shown me by many experiences, of which the following may be related.

 

저는 램프가 달린 램프 스탠드와 꽃처럼 생긴 가장 값진 조명기구들을 주님에 대한 경외함으로 온 힘을 다해 부지런히 빚고 있는 천사 같은 영들을 보았습니다. I saw that with the utmost diligence some angelic spirits were fashioning a lampstand with its lamps and flowers of the richest ornamentation in honor of the Lord.

 

두어 시간 동안 저는 그들이 얼마나 엄청난 수고로 그 모든 것들로 하여금 아름답고, 또 주님을 잘 표현하게 하려고 애를 쓰는지를 허락을 받아 참관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자기들 힘으로 하고 있다 여기고 있었습니다. For an hour or two I was permitted to witness with what great pains they labored to make everything about it beautiful and representative, they supposing that they were doing it of themselves.

 

그러나 저에게 어떤 지각이 주어졌는데, 그것은 그들의 힘으로는 그들은 그것을 고안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But to me it was given to perceive that of themselves they could devise nothing at all.

 

마침내 여러 시간이 흐른 후, 그들은 자기들이 이렇게 정말 아름답고, 또 주님을 잘 표현하는 가지가 달린 촛대를 주님을 경외함 가운데 만들었다고 말하며, 그것으로 그들은 진심으로 즐거워하였습니다. At last after some hours they said that they had formed a very beautiful representative candelabrum in honor of the Lord, whereat they rejoiced from their very hearts.

 

그러나 저는 그들에게 그들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만드는 것은 고사하고 고안조차 할 수 없으며, 오직 그들을 사랑하시는 주님으로 한 것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But I told them that of themselves they had devised and formed nothing at all, but the Lord alone for them.

 

처음에 그들은 이 사실을 거의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눈이 밝아져 천사 같은 영들이 되자 그들은 과연 그렇다며 고백했습니다. At first they would scarcely believe this, but being angelic spirits they were enlightened, and confessed that it was so.

 

주님을 표상하는 다른 모든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반적이든 구체적이든 모든 어펙션과 생각도 그렇고, 천국 모든 기쁨과 더할 나위 없는 행복 역시 그렇습니다. 그것들 중 가장 작은 것조차 오직 주님으로만 말미암는 것입니다. So it is with all other representative things, and with everything of affection and thought in both general and particular, and also with heavenly joys and felicities—the very smallest bit of them is from the Lord alone.

 

 

553. 천국에서 서로 사랑 가운데 있는 그들은 그들 젊음의 봄날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갑니다. 그들은 수천 년을 더 살면 살수록 더욱 더 기쁘고 행복한 봄을 향해 나아갑니다. 이것은 서로 사랑, 체어리티, 그리고 신앙의 진보와 정도에 따라 영원히 계속해서 증가합니다. They who are in mutual love in heaven are continually advancing to the springtime of their youth, and to a more and more gladsome and happy spring the more thousands of years they live, and this with continual increase to eternity, according to the advance and degree of mutual love, charity, and faith.

 

나이 들고 오랜 세월 쇠약해져 죽은, 주님 신앙, 이웃 사랑, 그리고 남편과 행복한 결혼애 안에서 살아온 여성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꽃 같은 젊음과 꽃다운 시절, 그리고 육안으로는 결코 지각할 수 없는, 미(美)에 대한 모든 관념을 다 초월해 버리는 아름다움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들의 본 모습(likeness)을 꾸미고 표현하며, 체어리티의 즐거움과 아름다움으로 하여금 얼굴의 모든 아주 미세한 데서부터 뿜어져 나오게 하는 것은 바로 그들의 선과 체어리티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체어리티의 모습들(forms) 그 자체입니다. 더러는 그들을 보고 무척 놀라워했습니다. Those of the female sex who have died in old age and enfeebled with years, and who have lived in faith in the Lord, in charity toward the neighbor, and in happy conjugial love with their husbands, after a succession of years come more and more into the bloom of youth and early womanhood, and into a beauty that surpasses all idea of beauty such as is ever perceptible to the natural sight; for it is goodness and charity forming and presenting their own likeness, and causing the delight and beauty of charity to shine forth from every least feature of the countenance, so that they are the very forms of charity: some have beheld them and been amazed.

 

체어리티의 모습은, 이런 관념적인 것들이 저 세상 삶에서는 표상과 외관으로 보이기 때문에, 초상화처럼 그림으로 그리거나 그려진 체어리티 자체입니다. 이것은 전체적인 천사, 특히 천사의 얼굴이 천사의 내면을 온전히 표현하는 것과 같은 방식인데요, 이렇게 초상화 그림처럼 보이는 체어리티는 보기에도 분명히 체어리티요, 마음으로 지각하기에도 분명히 체어리티인 그런 생생한 체어리티입니다. The form of charity, as is seen to the life in the other world, is such that it is charity itself that portrays and is portrayed, and this in such a manner that the whole angel, and especially the face, is as it were charity, the charity both plainly appearing to the view and being perceived by the mind.

 

이 모습을 눈으로 보게 되면, 그 말로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 때문에, 보는 사람의 마음 저 안쪽 가장 깊은 생명은 감동으로 가득 찹니다. When this form is beheld, it is unutterable beauty that affects with charity the very inmost life of the beholder’s mind.

 

이런 아름다운 모습을 통해서 신앙의 진리들이, 하나의 이미지로 볼 수 있도록 제공되며, 심지어 그 이미지로부터 지각까지 됩니다. Through the beauty of this form the truths of faith are presented to view in an image, and are even perceived from it.

 

주님 신앙, 곧 체어리티 신앙으로 살아온 사람들은 저 세상에서는 이런 모습들, 즉, 아름다움들이 됩니다. Such forms, or such beauties, do those become in the other life who have lived in faith in the Lord, that is, in the faith of charity.

 

모든 천사들은 헤아릴 수 없는 다양함과 함께 모두 이런 모습들이며, 이런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All the angels are such forms, with countless variety, and of such is hea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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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 천국 기쁨에 관하여

Concerning Heaven And Heavenly Joy

 

 

537. 어떤 영이 제 왼쪽에 달라붙어 제게 묻기를, 자기가 어떻게 천국에 올 수 있었는지 아십니까 하였습니다. A certain spirit attached himself to my left side, and asked me whether I knew how he could get into heaven.

 

저는 허락을 받아 그 영에게 말하기를, 천국 입국 허가는 오직 주님에게만 속한 것이며, 주님만이 어떤 사람의 퀄러티를 아십니다 대답하였습니다. I was permitted to tell him that admission into heaven belongs solely to the Lord, who alone knows what a man’s quality is.

 

천국에 오려고 나름 무슨 추구를 하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그러나 정작 천국이 어떤 곳인지, 천국의 기쁨이 무엇인지, 천국은 서로 사랑하는 곳이며, 천국의 기쁨은 그런 사랑에서 나오는 기쁨이라는 등의 사실들을 전혀 모른 채 세상을 떠나 이곳에 오고 있습니다. Very many arrive from the world who make it their sole pursuit to get into heaven, being quite ignorant of what heaven is, and of what heavenly joy is, that heaven is mutual love, and that heavenly joy is the derivative joy.

 

그래서 이런 걸 모르고 오는 사람들을 위해 먼저 실제 경험을 통해 배우게 하고 있습니다. Therefore those who do not know this are first instructed about it by actual experience.

 

예를 들어, 세상을 떠나 막 도착한 어떤 신참 영이 있었습니다. 그 역시 같은 식, 그러니까 천국에 대한 철저한 무지 가운데서도 천국을 갈망하던 사람이었는데, 그런 그에게 천국의 본성이 어떤 것인지 직접 지각하게 하려고, 그의 내면들을 열어 천국의 기쁨 얼마를 실제 느껴볼 수 있게 했습니다. For example, there was a certain spirit, newly arrived from the world, who in like manner longed for heaven, and in order that he might perceive what the nature of heaven is, his interiors were opened so that he should feel something of heavenly joy.

 

그는 천국을 향해 열린 내면들을 통해 천국의 기운이 닿자마자 온몸을 비틀며 고통스러워하더니 제발 좀 자기를 옮겨달라고, 자기는 극심한 괴로움 때문에 도저히 살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천국을 향해 열렸던 그의 내면들이 도로 닫혔고, 그렇게 그의 상태는 다시 원래대로 회복되었습니다. But as soon as he felt it he began to lament and to writhe, and begged to be delivered, saying that he could not live on account of the anguish; and therefore his interiors were closed toward heaven, and in this way he was restored.

 

이 사례를 통해, 우리는 천국에 대한 준비가 전혀 안 된 사람들은 아주 잠깐이라도, 양심의 격렬한 고통과 고문을 당하는 듯한 극심한 괴로움을 맛보게 된다는 것을, 즉, 단 한 순간이라도 천국 안에 발을 들여놓을 수가 없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From this instance we may see with what pangs of conscience and with what anguish those are tortured who not being prepared for it are admitted even but a little way.

 

 

538. 천국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천국에 들어가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There were some who sought admission into heaven without knowing what heaven is.

 

그들은 사랑의 신앙 안에 있지 않으면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마치 화염 속으로 들어가는 것 만큼이나 위험한 일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그걸 추구했습니다. They were told that unless they were in the faith of love, to enter heaven would be as dangerous as going into a flame; but still they sought for it.

 

그들이 첫 번째 입구 안 마당, 즉, 천사적 영들의 낮은 영역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고통에 사로잡혀 머리를 아래로 하여 거꾸로 자신을 던질 정도로 힘들어했습니다. 신앙의 어펙션들을 받을 수 있도록 먼저 주님에 의해 준비되지 않고, 무작정 천국을 향해 접근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그들은 이런 방식으로 배웠습니다. When they arrived at the first entrance court, that is to say, the lower sphere of angelic spirits, they were smitten so hard that they threw themselves headlong back, and in this way were taught how dangerous it is merely to approach heaven until prepared by the Lord to receive the affections of faith.

 

 

539. 몸 안에 있었던 생애 동안 간음과 간통의 빛 가운데 살았던 어떤 영이 간절히 원한 덕분에 천국의 첫 번째 문턱에 들어가 보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A certain spirit who during his life in the body had made light of adulteries, was in accordance with his desire admitted to the first threshold of heaven.

 

그가 거기 도착하자마자 그는 고통스러워했고, 자신에게서 죽은 사람의 악취가 나는 것을 도저히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As soon as he came there he began to suffer and to be sensible of his own cadaverous stench, until he could endure it no longer.

 

그는 내가 여기 더 머물렀다간 소멸됙겠구나 싶어 다 내던지고 더 낮은 곳으로 뛰어내렸습니다. 그는 천국 첫 문턱, 고작 간음과 정반대되는 영역에 도착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런 고통을 겪어야만 하는 사실에 격분했습니다. It seemed to him that if he went any farther he should perish, and he was therefore cast down to the lower earth, enraged that he should feel such torment at the first threshold of heaven, merely because he had arrived in a sphere that was contrary to adulteries.

 

그는 불행한 사람들과 함께 있습니다. He is among the unhappy.

 

 

540. 저 세상에 들어오는 거의 모든 사람이 천국 행복과 지복(至福, bliss)의 본질에 대하여 무지합니다. 내적 기쁨의 본질과 퀄러티에 대해 모르기 때문이지요. Almost all who come into the other life are ignorant of the nature of heavenly happiness and bliss, because they know not the nature and quality of inward joy.

 

그들은 그저 육체와 세상의 기쁨과 즐거움을 가지고 좀 미루어 짐작할 뿐입니다. They form a conception of it merely from the delights and joys of the body and the world.

 

그들은 자기들이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그건 아무것도 아닌 걸로 여깁니다. 그러나 실상은, 육체적이고 세속적인 즐거움이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아주 더러운 것입니다. What they are ignorant of they suppose to be nothing, the truth being that bodily and worldly joys are relatively non-existent and foul.

 

성품은 좋으나 천국에 대해서는 무지한 사람들로 하여금 천국의 기쁨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며 알 수 있도록, 그들을 모든 상상을 뛰어넘는 파라다이스들의 첫 번째 장소로 데려갑니다. (이곳에 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 곧 허락하심으로 나중에 밝히겠습니다. cf. 1622) 그곳에 도착하면 그들은 자기들은 지금 천국의 파라다이스에 도착했다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은 천국의 참된 기쁨이 아니라는 것과, 다음 순서로, 허락하심을 받아 그들의 가장 깊은 내면에까지 지각되는 기쁨의 내적 상태들을 맛보게 됩니다. In order therefore that those who are well disposed may learn and may know what heavenly joy is, they are taken in the first place to paradises that surpass every conception of the imagination (concerning which,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and they suppose that they have arrived in the paradise of heaven; but they are taught that this is not true heavenly happiness, and are therefore permitted to experience interior states of joy which are perceptible to their inmost being.

 

그들은 평화의 상태, 심지어 가장 내적인 데까지 옮겨졌고, 거기서 그들은 고백하기를, 지금 이 상태, 이 기쁨은 그 어떤 말로도 전혀 표현할 수 없고, 그 어떤 것으로도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They are then transported into a state of peace, even to their inmost being, and they confess that nothing of it is at all expressible or conceivable.

 

최종적으로, 그들은 이노센스 상태로 인도되었고, 또한 그들의 가장 내적 느낌, 곧 가장 깊은 레벨의 감각으로도 인도되었습니다. And finally they are introduced into a state of innocence, also to their inmost feeling.

 

이렇게 그들은 허락하심을 받아 참된 영적, 천적 선의 본질에 대하여 배웠습니다. In this way are they permitted to learn the nature of true spiritual and celestial good.

 

 

541. 천국 기쁨의 본질에 대해 무지했던 어떤 영들이 갑자기 사로잡혀 천국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들은 그전에 이렇게 천국으로 옮겨지는 것이 가능하도록 그들의 육체에 속한 것들, 곧 육체적 욕망과 상상 속에나 나올 법한 생각들, 곧 환상이 모두 잠재워진 후에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Certain spirits who were ignorant of the nature of heavenly joy were unexpectedly taken up into heaven after they had been brought into such a state as to render this possible, that is to say a state in which their bodily things and fanciful notions were lulled into quiescence.

 

거기서 저는 어떤 사람이 저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지금 자기는 처음에는 천국 기쁨이 얼마나 엄청난지를 느꼈다고, 자기는 그동안 천국에 대해 전혀 다른, 엉뚱한 생각을 갖도록 단단히 속아왔다고, 그러나 지금은 자기 내적 존재 저 깊은 데까지 측량할 수 없는 기쁨을 지각하였는데, 이것은 자기가 몸 안에서 살 때는 결코 맛본 적 없는 즐거움이라고, 사람들은 몸 안에 살면서 그걸로 기뻐하고 그러는데, 지금 보면 그건 그냥 악취였다고 말입니다. From there I heard one saying to me that now for the first time he felt how great is the joy in heaven, and that he had been very greatly deceived in having a different idea of it, but that now he perceived in his inmost being a joy immeasurably greater than he had ever felt in any bodily pleasure such as men are delighted with in the life of the body, and which he called foul.

 

 

542. 천국의 퀄러티를 알 수 있게 하려고 천국에 사로잡혀 옮겨진 사람들은 그들의 육체적 욕망과 환상이 잠재워지거나, - 여기서 잠깐, 사전에 이런 일이 필요한 이유는, 아무도 그들이 세상에서 취한 그런 걸 가지고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 또는 불순하거나 불일치를 일으키는 그런 것들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억누르는 영들의 아우라로 그들은 둘러싸입니다. They who are taken up into heaven in order that they may know its quality either have their bodily things and fanciful notions lulled to quiescence—for no one can enter heaven with the bodily things and fanciful notions that they take with them from this world—or else they are surrounded by a sphere of spirits who miraculously temper such things as are impure and that cause disagreement.

 

어떤 사람들은 그 내면들이 열리는데, With some the interiors are opened.

 

이런저런 방식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삶과 그 삶을 통해 획득한 본성에 따라 준비됩니다. In these and other ways they are prepared, according to their lives and the nature thereby acquired.

 

 

543. 천국 기쁨의 본질 알기를 무척이나 갈망하던 어떤 영들이 있었는데, 그래서 그들은 허락을 받아 그들 본성의 가장 깊은 내면을 지각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수준으로는 도저히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최대치였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천사적 기쁨이 아니었고, 천사적 기쁨 중 기껏해야 가장 낮은 것이라고나 할까요? 이런 것이 제게 허락되어 그들의 기쁨이 어떤 것인지 지각할 수 있었습니다. Certain spirits longed to know the nature of heavenly joy, and were therefore allowed to perceive the inmost of their own, to such a degree that they could bear no more; and yet it was not angelic joy, being scarcely equal to the least angelic joy, as was given me to perceive by a communication of their joy.

 

그것은 아주 잠깐이지만 오히려 냉기마저 느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도저히 천국의 기쁨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었는데도, 그러나 그들로서는 그것이 가장 깊은 내적 기쁨이었고, 그들은 그것을 가장 깊은 내적 천국의 기쁨이라고 했습니다. It was so slight as to be as it were chilly, and yet being their inmost joy they called it most heavenly.

 

이 사실로 분명한 것은, 기쁨에는 레벨, 곧 수준 차이가 있으며, 어떤 기쁨의 가장 깊은 레벨은 다른 기쁨의 가장 바깥이나 중간에도 못 미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누가 자신의 가장 내적 기쁨을 받으면 그는 그 자신의 천국 기쁨 가운데 있는 것이며, 그 이상 무슨 내적 기쁨을 받으면 도저히 견딜 수가 없는데 그때는 그 기쁨이 그에게 고통이 되기 때문입니다. From this it was evident not only that there are degrees of joys, but also that the inmost of one scarcely approaches the outmost or middle of another, and that when anyone receives his own inmost joy, he is in his heavenly joy, and cannot endure that which is still more interior, for it becomes painful.

 

 

544. 그때 제가 여기는 첫 번째 천국이라고 들은 그런 천국의 이노센스 안으로 받아들여진 어떤 영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거기서 고백하기를, 자기들이 지금 맛보고 있는 기쁨과 반가움의 상태는 자기들이 그동안 결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Certain spirits who were admitted into the heaven of innocence of the first heaven spoke to me thence, and confessed that the state of joy and gladness was such as they never could have conceived any idea of.

 

그러나 이 역시 첫 번째 천국일 뿐이었습니다. 세 천국과 각각의 이노센스 상태들이 있으며, 그 각각이 또한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하게 펼쳐집니다. Yet this was only in the first heaven, and there are three heavens, and states of innocence in each, with their innumerable varieties.

 

 

545. 저로 하여금 천국과 천국 기쁨의 본질과 퀄러티에 대해 알게 하시려고 주님은 오랫동안 종종 제가 천국 기쁨의 즐거움을 지각할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이런 실제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지만 그러나 그것을 말로, 글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But in order that I might know the nature and quality of heaven and of heavenly joy, for long and often I have been permitted by the Lord to perceive the delights of heavenly joys, so that as I know them from actual experience I can indeed know them, but can by no means describe them.

 

하지만 제가 다음과 같이라도 말씀드리면 혹시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살짝 가늠하실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천국의 기쁨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즐거움과 기쁨을 수반하는 일종의 어펙션입니다. 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즐거움과 기쁨이 전면적으로 동시에 경험되는 하나의 기쁨인데요, 이 전면적인 기쁨, 즉, 전면적인 어펙션 안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어펙션들이 조화를 이루며 존재합니다. 이때 이것은 하나하나 뚜렷이 지각되는 게 아니고, 모호하게 지각됩니다. 퍼셉션이 매우 전면적이기 때문입니다. However, in order to give some idea of it I may say that heavenly joy is an affection of innumerable delights and joys that form one general simultaneous joy, in which general joy, that is, in which general affection, there are harmonies of innumerable affections that do not come distinctly to perception, but obscurely, because the perception is very general.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허락하심을 받아 그 안, 천국의 기쁨 안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이 내재하고 있음을 지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들은 말로는 도저히 어떻게 설명할 수 없는 질서로 내재해 있었는데, 바로 천국의 질서로부터 흐르는 질서였습니다. Yet I was permitted to perceive that there are things innumerable within it, in such order as can never be described, these innumerable things being such as flow from the order of heaven.

 

이런 질서는 그 어펙션 모든 가장 미세한 것에까지 존재하며, 함께 합쳐 그 전체가 하나로 보이고, 그것의 주제, 곧 그 어펙션을 느끼고 있는 그 사람의 역량에 따라 아주 전체적인 것으로 지각됩니다. Such order exists in every least thing of the affection, all of which together are presented and perceived as a very general one according to the capacity of him who is the subject of it.

 

한 마디로, 모든 전반적인 기쁨 혹은 어펙션에는 가장 온전한 형태로 조성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이 존재하지만, 살아있지 않거나 우리 안 가장 내적인 것에까지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천국의 기쁨은 가장 내적인 것들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In a word, in every general joy or affection there are illimitable things ordinated in a most perfect form, and there is nothing that is not alive or that does not affect even the inmost things of our being, for heavenly joys proceed from inmost things.

 

저는 또 지각하기를, 그 기쁨과 상쾌함은 마치 심장에서 나와 모든 가장 미세한 섬유조직들을 통해, 그리고 그렇게 조직 다발 속으로, 즐거움의 가장 내적 감각을 가지고 자신들을 아주 부드럽게 퍼트리는 것 같았으며, 이것은 마치 기쁨과 상쾌함만 남은 섬유조직 같았고, 이런 가운데서 나온 퍼셉션과 감각의 영향권 역시 전체적으로 그 행복하게 살아있는 것이 같았습니다. I perceived also that the joy and deliciousness came as if from the heart, and very softly diffused themselves through all the inmost fibers, and so into the congregated fibers, with such an inmost sense of delight that the fiber is as it were nothing but joy and deliciousness, and the whole derivative perceptive and sensitive sphere the same, being alive with happiness.

 

이들 기쁨들을 육체적 쾌락이 주는 기쁨과 비교하자면, 전자는 맑고 부드러운 산들바람 같다면, 후자는 역겹고 퀘퀘한 먼지와도 같다 할 수 있습니다. In comparison with these joys the joy of bodily pleasures is like gross and pungent dust as compared with a pure and gentle breeze.

 

 

546. 천국에 무척 있고는 싶은데 사실 천국에 있을 수는 없는 그런 사람들의 경우는 어떻게 되는지를 저로 하여금 알게 하시려고, 한번은 제가 하늘 어느 소사이어티에 있을 때, 한 천사가 머리에는 밝게 빛나는 파란 꽃들로 엮은 화관을 쓰고, 가슴에는 다른 색 꽃들로 꾸민 화환을 두른 유아로 제게 나타났습니다. In order that I might know how the case is with those who desire to be in heaven and are not such that they can be there, once when I was in some heavenly society, an angel appeared to me as an infant with a chaplet of bright blue flowers about its head, and girded about the breast with wreaths of other colors.

 

이걸 보고, 저는 그곳이 체어리티가 있는 어느 소사이어티임을 알았습니다. By this I was given to know that I was in some society where there was charity.

 

그때 어떤 착한 영들이 제가 있던 같은 소사이어티 안으로 들어왔는데, 그들은 들어오는 순간, 들어오기 전보다 훨씬 더 총명해져서 마치 천사적 영들처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Some well-disposed spirits were then admitted into the same society, who the moment they entered became much more intelligent, and spoke like angelic spirits.

 

그 후, 어떤 영들이 들어왔는데 그들은 스스로 순진무구하기를 원하던 영들이었고, 그중 저에게 표현된 한 영의 상태는 젖을 입 밖으로 토하는 유아의 모습이었습니다. Afterwards some were admitted who desired to be innocent from themselves, whose state was represented to me by an infant that vomited milk out of its mouth.

 

이것이 그들의 상태였습니다. Such is their state.

 

그때 또 어떤 영들이 들어왔는데, 그들은 스스로를 지성적이다, 총명하다 여기던 영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상태가 그들의 얼굴로 표현되었는데, 날카로워 보였으나 매우 고왔습니다. 그들은 날카로운 부분이 돌출된, 끝이 뾰족한 모자를 쓰고 있는 것 같았는데, 그런데 그들의 얼굴은 사람의 살처럼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마치 칼로 깎은 듯, 생명이 없는 듯한 얼굴이었습니다. Then some were admitted who supposed that they were intelligent from themselves, and their state was represented by their faces, which appeared sharp, but fair enough; and they seemed to wear a peaked hat from which a sharp point projected, but their faces did not appear to be of human flesh, but as if carved out and devoid of life.

 

이런 것은 스스로를 우리는 영적이다, 즉, 스스로를 우리는 신앙을 가졌다 믿는 사람들의 상태입니다. Such is the state of those who believe that they are spiritual from themselves, that is, able from themselves to have faith.

 

거기 머무를 수 없는 다른 영들이 들어왔는데, 실망들을 하며, 괴로워들을 하더니, 가버리는 것이었습니다. Other spirits were admitted who could not remain there, but were dismayed, became distressed, and fled away.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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