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을 요한이라 쓰매

 

 

57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58이웃과 친족이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더라 59팔 일이 되매 아이를 할례 하러 와서 그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하고자 하더니 60그 어머니가 대답하여 이르되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 하매 61그들이 이르되 네 친족 중에 이 이름으로 이름한 이가 없다 하고 62그의 아버지께 몸짓하여 무엇으로 이름을 지으려 하는가 물으니 63그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을 요한이라 쓰매 다 놀랍게 여기더라 64이에 그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 65그 근처에 사는 자가 다 두려워하고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골에 두루 퍼지매 66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이르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까 하니 이는 주의 손이 그와 함께 하심이러라 (눅1:57-66)

 

창세기 30장 1절을 보면, 야곱의 아내 라헬이 아들을 낳지 못해 남편에게,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의 언니를 시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창30:1)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야곱은 형 에서에게 팥죽 한 그릇을 주고, 장자의 축복을 빼앗았습니다. 그러자 에서는 너무 분해 야곱을 해치려고 했고, 야곱은 외삼촌 라반에게로 피신, 도망을 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외삼촌의 딸들인 레아와 라헬을 차례로 아내로 맞이하였습니다. 야곱은 레아보다는 동생 라헬을 더 사랑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헬은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라헬은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하는 것입니다. 라헬의 고민이 얼마나 깊은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말씀에서 라헬은 ‘내적 진리에 대한 사랑’(the affection of interior truth)(AC.3782, 창29:6)을 뜻한다고 새 교회 가르침에는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말씀의 내적 의미를 배우기를 좋아하고, 또 실천하려고 애쓴다면 우리 안에는 라헬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라헬이 아이가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아이가 없다는 것은 진리의 결실이 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의 내적 진리를 알기는 아는데, 아직 그 진리에 따라 제대로 살지는 못한다’는 뜻입니다. 진리에 대한 애정이 큰 사람일수록 그것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할 때 상심이 큽니다. 그것은 새 교회 성도님들이라면 다 경험해 보신 일일 것이고, 지금도 그런 고민을 안고 계실 것입니다. 그것이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엘리사벳 역시 라헬이 그랬던 것처럼 오랫동안 아이가 없었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엘리사벳의 속뜻은 ‘주님을 많이 사랑하지만, 그러나 타락한 교회에 몸담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녀에게는 참된 진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진리를 올바로 가르치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진리에 따라 사는 것이 불가능하겠지요. 진리를 모르니까요. 따라서 믿음, 곧 신앙의 열매를 맺는 것 또한 어렵습니다. 그것을 말씀에서는 엘리사벳이 오랫동안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므로 엘리사벳 역시 여러 가지로 고민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 사정을 모두 아시는 주님께서 이제 잘못된 교회 안에 있는 엘리사벳과 같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말씀을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엘리사벳이 낳는 아이는 바로 ‘새 교회를 위한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57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이 말씀의 의미는 앞에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타락한 교회 안에 있지만, 그럼에도 진리와 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새 교회의 말씀을 주시는 것이며, 그들이 그 말씀에 따라서 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해산할 기한이 차서’는 무슨 뜻일까요? 말씀을 받아들였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의 신앙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누가 나에게 새 교회 말씀을 전한다고 해서 덥석 받아들이지는 않지 않습니까? 여러 가지로 생각하고 이해할 것이 있고, 그러므로 신앙으로 받아들이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믿는다고 해도 그것을 삶으로 살아내기까지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립니까? 그것이 바로 ‘해산할 기한’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을 낳는 것은 비로소 그 말씀이 우리 안에서 살아있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58이웃과 친족이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더라

 

여기서 ‘이웃과 친족’은, ‘엘리사벳과 비슷한 종류의 선과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것이 그 속뜻입니다. 선이 비슷하다는 것은 애정이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일이 저마다 있듯, 교회를 섬긴다고 해도 저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 따로 있는데요, 그 좋아하는 비슷한 점이 바로 선이 비슷한 것입니다. 그러면 진리가 비슷하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진리가 비슷하다는 것은, 예를 들어, 어떤 두 사람이 있는데, 교회를 섬김에 있어 하는 일이 같습니다. 그런데 같은 일을 하더라도 사람에 따라 일하는 방법이나 순서 같은 것이 다 다릅니다. 그런데 개중에 그 방법이나 질서가 같은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니까 서로 잘 맞는 것이죠. 그런 것이 진리가 비슷한 것입니다. 그러면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는 무슨 뜻일까요?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셨다는 것은, ‘주께서 엘리사벳에게 새로운 말씀을 주신 것’을 의미하고요, 그걸 들었다는 것은 ‘그들, 즉 엘리사벳과 비슷한 종류의 선과 진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역시 그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듣고’는 순종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도 새로운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여 거기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웃과 친족이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더라’라는 이 말씀은 속뜻으로는 엘리사벳으로 표상된 사람들에게 주어진 새로운 말씀이 비슷한 선 안에 있는 사람들을 통해 점점 퍼져나간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그런 식으로 신념과 애정이 비슷한 사람들을 통해 끊임없이 퍼져나갑니다. 마치 하나의 물결이 또 다른 물결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또 새로운 물결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끊임없이 퍼져나갑니다. 그것이 ‘함께 즐거워하더라’의 의미입니다.

 

59팔 일이 되매 아이를 할례하러 와서 그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하고자 하더니

 

팔 일’은 영적으로 하나의 상태가 끝나고, 다시 새로운 상태가 시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일주일은 하나의 상태가 처음부터 끝까지 완성되는 것을 의미하고, 팔 일째는 그 일주일이 끝난 다음 첫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팔 일째가 되기 전 일주일이란 기간은 사람들이 새로운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이기까지의 기간이고요, 그리고 팔 일째 되는 날은 그들의 영적 상태가 한 단계 올라서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새로운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동안 그가 가지고 있던 잘못된 진리들을 모두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보더라도 이 진리를 받아들이기 전에 진리라고 믿었던 것들이 많았는데요, 그러니 그걸 버리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었겠습니까?

 

※ 저 역시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는데요, 그러니까 장로교 통합 측에서 소위 모태신앙으로 출발, 고등학교 때 침례교회를 다니게 된 저는, 그리고는 결국 침례교 신학을 하고 침례교회 목사가 된 저는 오십 대 후반까지 쌓아온 모든 신앙의 관계를 접어야 하는, 그리고 등돌림과 외면을 당해야 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저 역시도 처음에 큰 걸림돌이었던 몇 가지, 곧 첫째, 신구약 66권 중 ‘말씀’(The Word)은 오직 주님이 말씀하신 것만, 다시 말하면, 그 안에 속뜻이 담긴 성경만 말씀이라는 것, 둘째, 구원은 ‘오직 믿음’의 신앙을 고백한다고 해서가 아닌, 사람은 자신의 ‘속 사람의 상태’로 천국에 올라간다는 것, 셋째, 노아의 홍수는 역사적으로 실제 있었던 홍수가 아닌, 태고교회의 종말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라는 것, 넷째, 계시록의 ‘짐승’은 현 개신교를 가리킨다는 것, 다섯째, 주님의 교회는 말씀이 있는 기독교회뿐 아니라 타 종교도 포함, 어느 곳에서든 오직 주님의 신성에 합당한 삶을 사는 사람들로 이루어진다는 것 등, 지난 2017년 가을, 스베덴보리를 처음 접한 이래, 초기 몇 년간 안팎으로 극심한 갈등을 겪었던 주제들이 있었는데요... 결국 스베덴보리를 통한 주님의 부르심을 따르기까지 치렀던 값 지불은 결코 작지가 않았습니다.

 

그 진리를 얻기까지 들어간 시간과 노력들이 아깝기도 하고, 또 그중에는 최선의 진리는 아니라도 여전히 진리처럼 생각되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이면 진리와 진리 아닌 것이 서로 섞이게 되는데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최선의 것이 나타나면 차선의 것은 모두 버리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그것을 마태복음 9장 17절에서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마9:17)

 

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창세기 17장에서는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창17:12)

 

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이전에 가지고 있던 사상 가운데는 진리 아닌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비(非) 진리, 또는 인간의 자아에서 나온 것들이 섞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것을 씻어내라고 하세요. 그것이 모든 남자로 할례받게 하는 것이고, 낡은 가죽 부대를 버리는 일입니다. 그래야 영적으로 새로운 상태가 시작됩니다.

 

본문에서 ‘팔 일이 되매 아이를 할례하러 와서’는 바로 그런 뜻입니다. 우리가 가진 진리 안에 인간적인 것, 진리 아닌 것들이 섞여 있다면, 우리는 영적으로 한 단계 올라설 수 없습니다. 팔 일째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죠. 그러면 아이의 이름을 지을 때, ‘그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짓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말씀에서 아버지는 대개는 주님, 또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반대의 의미입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인간의 자아에서 나오는 악을 의미합니다. 말씀에서 아버지가 그런 뜻으로 사용된 예는 요한복음 8장 44절에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요8:44)

 

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아이의 이름을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짓는 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진리 안에 자아에 속한 악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아이의 이름을 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상태는 아직 할례가 이루어진 상태가 아닙니다. 사실 진리를 처음 받아들일 때는 누구나 그의 자아를 통해 받아들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해 진리를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구원을 위해 진리를 찾고 배웁니다. 그때의 진리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불리는 아이입니다. 왜냐하면, 그 진리 안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만 있고, 이웃에 대한 사랑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순수하게 이웃을 위해 진리를 사용하기까지는 상당히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심지어는 이웃을 위해 하는 일 가운데도 자기 사랑이 들어 있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그래서 순수하게 이웃을 위해 진리를 사용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할례가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할례를 통해 자아에 속한 것을 제거하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아이의 이름을 사가랴로 지으려고 하자 아이의 어머니 엘리사벳이 이렇게 말합니다. 60절로 63절,

 

60그 어머니가 대답하여 이르되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 하매 61그들이 이르되 네 친족 중에 이 이름으로 이름한 이가 없다 하고 62그의 아버지께 몸짓하여 무엇으로 이름을 지으려 하는가 물으니 63그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을 요한이라 쓰매 다 놀랍게 여기더라

 

그러자 사람들이 이번에는 사가랴에게 몸짓하여 ‘무엇으로 이름을 지으려 하는가’ 묻습니다. 그러자 사가랴가 서판을 달라 하더니 거기에다 요한이라 썼습니다. 서판에다 아이의 이름을 쓴 이유는, 사가랴가 말을 하지 못했기 때문인데, 사가랴는 아이를 낳을 것이라는 천사의 말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천사와 만난 이후로 지금까지 줄곧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말씀에서, 엘리사벳과 사가랴는 새로운 말씀을 통해 내면에 교회를 이룬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속뜻으로는 두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입니다. 즉 엘리사벳은 교회를 이루는 진리를, 남편 사가랴는 교회를 이루는 선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60절에서는 엘리사벳이 ‘대답하여’라 했고, 63절, 사가랴에 대해서는 ‘서판을 달라 하여 쓰매’라고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뭘까요? 말씀에서 ‘대답한다’는 것은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진리가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엘리사벳이 대답했다고 할 때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이의 이름을 짓는, 그런 관례에 포함된, 자기 안에도 있는 이기적인 사랑을 보는 것이고요. 그러므로 그것이 잘못되었다 하는 것입니다. 즉 원래는 자기도 아이의 이름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했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던 것이며, 그러나 그것은 지금 이 상황에서는 주님의 뜻이 아닌 자신의 뜻, 곧 주님 사랑이 아닌 자기 사랑인 것이지요. 주님의 뜻은 아이의 이름을 주님 사랑에서 나오는 이웃 사랑으로 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잘못이라고 판단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는 것, 즉 이기적인 사랑은 몰아내고, 이웃에 대한 순수한 사랑으로 채워야 합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은 아이의 이름을 요한으로 짓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요한이란 이름은 이웃 사랑의 선(those who are in the good of love)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가랴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을 요한이라 쓰매’는 무슨 뜻입니까? ‘자기의 생명 안에 그의 삶을 그대로 기록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서판’은 각 사람의 내면에 있는 영적 생명을 의미합니다. 말씀에서는 그것을 자주 생명책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서판’, 또는 ‘생명책’은 개인의 영적 생명입니다. 그 생명 안에는 그 사람의 삶의 내용이 그대로 기록됩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그의 영적 생명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 아래는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48장, ‘두고 가는 것은 육체밖에 없다’ (461-469) 중 463번 글에 나오는, ‘생명책’ 관련 내용입니다. 참고하세요.

 

사후 사람의 행위가 드러날 때, 조사하는 일을 맡은 천사는 사람의 얼굴을 살핀다. 이어 양손의 손가락에서 시작해 전신을 살펴본다. 내가 이것을 이상하게 여겼더니, 그 이유를 알려주었다. 사고와 의지에 속한 모든 것은 뇌에 새겨져 있다. 뇌에 그 출발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전신에도 새겨지는데, 이는 사고와 의지의 모든 것은 출발점에서 시작해 몸의 모든 부분으로 퍼져나가고, 가장 말초적인 것에 종착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의지와 그에 따른 생각에서 나와 기억에 새겨진 모든 것은 단지 뇌에만 새겨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전체에 새겨지는 것이며, 몸의 각 부분의 질서에 따라 거기 배열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확실한 것은 사람 전체가 그 자신의 의지와 사고와 똑같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악인은 그의 악이고, 선인은 그의 선인 것이다. 말씀에 나오는 사람의 생명책이 의미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즉 사람이 행하고 생각한 모든 것은 그 사람 전체에 새겨져 있어 그 기억에서 불러일으키면 책 읽듯이 읽을 수 있고, 천국의 빛으로 그 영을 비추면 그 모든 것이 영상으로 나타난다. (HH.463, 김은경 역)

 

따라서 사가랴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을 요한이라 쓰매’는 그가 실천하는 진리의 성격이 그대로 그의 생명에 기록되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다시 말하면, 사가랴는 지금 새로운 진리를 잘 실천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는 서판에다 아이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썼습니다. 그가 실천하는 진리의 바탕에 이웃 사랑의 선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생명책에 진리를 기록하는 일은 선이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위 본문에서는 사가랴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을 요한이라 썼다’고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요한이란 이름은 ‘이웃 사랑의 선’을 뜻합니다. 그래서 엘리사벳과 사가랴는 아이의 이름을, 한 사람은 요한이라고 ‘대답’했고요, 또 한 사람은 ‘자기의 서판’에다 요한이라고 썼습니다. 엘리사벳과 사가랴의 이러한 행동을 통해 그들이 새로운 말씀을 받아들인 후에, 그 신앙을 순수하게 지키려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자 사가랴의 입이 열리고 혀가 풀리면서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송하기 시작했습니다.

 

64이에 그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

 

혀가 풀리며’는 사람의 이성이 주님을 향해 열리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으로부터 빛이 흘러 들어오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혀는 우리의 이성, 또는 이해력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에 의해 이성이 밝아질 때, 우리는 진심으로 신앙을 고백할 수 있고, 주님을 찬송할 수 있는데요, 그것이 ‘혀가 풀리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나요? 주님을 찬송한다는 것은 신앙으로, 또는 진리로 주님을 예배하는 것이라고요. 그러니까 사가랴가 주님을 찬송하는 것은 주님이 주신 새로운 말씀을 자기의 신앙으로 온전히 삼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위 본문에서는 사가랴가 혀가 풀리고 주님을 찬송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전에는 어땠습니까? 천사로부터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그 말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가랴가 말을 하는 것은 신실한 신앙의 고백입니다.

 

65그 근처에 사는 자가 다 두려워하고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골에 두루 퍼지매

 

사가랴의 신앙 고백이 온 유대 산골에 두루 퍼졌다고 합니다. 여기서 유대는 본래 가장 순수한 교회를 뜻합니다. 새 교회 용어로 유다는 천적(天的)인 교회를 나타내고요, 이스라엘은 영적인 교회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유다는 가장 순수한 교회를 뜻하지만, 여기서는 반대의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기존의 잘못된 교회, 무너져가는 교회를 뜻하지요. 그리고 유대 산골이라고 할 때 산골은 그 잘못된 교회 안에 남아 있는 선한 사람들, 즉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산은 지난번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큰 산이 아니라 나지막한 산, 영어로는 ‘’(hill)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웃에 대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모든 말이 온 유대 산골에 퍼졌다는 말씀은, 주님이 주신 새로운 말씀이 기존 교회 안의 선한 사람들에게 퍼져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습니다.

 

66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이르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까 하니 이는 주의 손이 그와 함께 하심이러라

 

듣는 사람들이 이 말을 모두 마음에 두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듣는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또 마음에 둔다는 것은 각자의 의지에 새기는 것입니다. 마음은 의지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라는 말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그 말씀에 따라 순종하며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본래 선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들이 받아들인 말씀 가운데 주님의 능력이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는 ‘주의 손이 그와 함께 하심이러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의 손’은 주님의 능력을 의미하고, 아이는 바로 그들이 받아들인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들이 처음 진리를 받아들일 때에는 누구나 자아를 통해 진리를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구원을 생각하고요, 또 자기의 지성으로 진리를 이해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것이 사실은 주님의 섭리를 통해 이루어지는 일들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 신앙을 불완전하고 나약한 신앙에서 시작, 점차 견실하고 확고한 신앙으로 성장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신앙이 깊어질 때, 주님께서는 ‘진리를 너희 것으로 삼지 말고, 내게로 돌리라’ 하세요. 오늘 말씀에서 ‘팔 일째 아이가 받는 할례’의 의미 가운데는 주님의 그러한 뜻과 바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자기의 진리 안에 있는 애정이 무엇인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래서 자아의 사랑은 버리고, 대신 이웃에 대한 사랑을 채워 넣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에게 있는 진리는 나를 구원하는 진리일 뿐 아니라 이웃을 구원하는 진리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오늘 말씀에서는 사가랴-엘리사벳 부부의 아이가 할례를 받는 것으로 표현했고요, 팔 일째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이의 이름을 아버지 이름을 따르지 않고, 요한이라 짓는 것 역시 그런 뜻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성도님들께서 자신의 진리가 어떤 모습인지를 꼭 살펴보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마음의 할례를 통해 팔 일째, 즉 새로운 상태로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우리 성도님들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계3:5)

 

아멘

 

원본

2016-06-26(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01(D4)

한결같은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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