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의 찬송
46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47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48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49능하신 이가 큰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50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51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52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53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도다 54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55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56마리아가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니라 (눅1:46-56)
마태복음 10장 28절에서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라고 말한다. 여기서 두려워하는 것은 영적으로 죽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걱정과 공포 같은 자연적인 두려움이다. 그러나 영적인 두려움은 모든 영적 사랑 안에 내재되어 있고, 또한 사랑의 질과 양에 따라 달라지는 거룩한 두려움이다. 영적인 사람은 이러한 두려움 가운데 있다. 그리고 그는 주님은 어떤 사람에게도 악을 행하시지 않으며, 그의 육신과 영혼을 파괴하여 지옥에 던지시지도 않으며,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시고, 그들의 육신과 영혼을 천국에 있는 당신께로 들어 올리시길 원하신다는 것을 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인 사람의 두려움은 그가 삶의 악과 교리의 거짓으로 인해 자기 안의 신적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거나 그것에 해를 끼치지 않도록 하는 거룩한 두려움이다. (계시록 해설 696.23, 이순철 역) Jesus said, Fear not them who are able to kill the body but are not able to kill the soul; rather fear Him who is able to destroy both body and soul in Gehenna (Matt. 10:28). Here, however, “to fear” signifies to have a fear of dying spiritually, thence a natural fear, which is fearfulness and dread; but spiritual fear is a holy fear that abides within every spiritual love variously according to the quality and quantity of the love. In such a fear is the spiritual man, and he knows that the Lord does not do evil to anyone, much less does He destroy anyone as to body and soul in Gehenna, but that He does good to all and desires to raise up everyone as to body and soul into heaven to Himself. This is why the fear of the spiritual man is a holy fear lest by the evil of life and the falsity of doctrine man should turn away, and thus do harm to that Divine love in himself. (AE.696.23)
오늘은 계속해서 누가복음 1장 말씀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만나면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성경에 기록하기는,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처음 만났을 때, 엘리사벳의 복중에서 아이가 뛰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은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마리아에게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라고 말했습니다.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은 단순히 천사가 예언한 일들을 마리아가 확인하는 그 정도 차원의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주님의 새 교회에 새로운 말씀이 전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마리아는 주님이 이방인들을 통해 세우시는 새 교회를 표상하구요, 엘리사벳이 잉태한 아이는 새 교회에 필요한 말씀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마리아가 부르는 찬송은 주님의 새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주님께 드리는 찬송입니다.
주님의 은혜로 새로운 말씀을 알게 되고, 말씀을 통해 교리에 대한 이해가 점점 깊어졌을 때, 우리 성도님들은 어떤 마음이었습니까? 아마 대부분은 구원에 대한 확신이 생겼을 것이며, 또 살아계신 주님의 섭리를 느끼셨을 것입니다. 저 또한 처음 새 교회 말씀을 대했을 때, 이것이야말로 주님의 말씀이다, 이런 교회야말로 진짜 교회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마리아도 아마 그런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46, 47절에서 마리아는 이렇게 주님을 찬양합니다.
46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47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마리아는 그냥 주님을 찬양한다고 하지 않고, 영혼과 마음으로 찬양한다고 합니다. 한글 성경에는 ‘영혼’, ‘마음’으로 번역되어 있지만, 본래 표현은 ‘혼’, ‘영’입니다. 마리아는 왜 혼과 영으로 찬송한다고 했을까요? 새 교회 가르침에서는 혼과 영에 대해 명확하게 구별해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냥 ‘혼과 영은 사람의 영적 생명이다’라고만 말합니다. 사람 안에는 하나님의 생명을 받는 두 개의 그릇이 있습니다. 하나는 ‘의지’(will, 마음먹는 능력)라는 그릇이구요, 하나는 ‘이성’(understanding, 이해하는 능력)이라는 그릇입니다. 새 교회 교인들은 다 아시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성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담는 그릇이고, 의지는 선을 담는 그릇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생명은 자존심이나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혼과 영입니다. 그런데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창세기, 출애굽기 속뜻 주석) 6054번 글에는 또 이런 말도 있습니다.
혼에 대해 깊이 생각하다 보면 혼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 혼을 사람의 영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다. (이순철 역) But lest in consequence of the conjectures and hypotheses about it, the word “soul” should give rise to the idea of the unknown, it is better to say man’s “spirit,” or if you prefer it, the “interior man,” (AC.6054.2)
이 말은 사람의 혼과 영을 인간의 머리로 이해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니, 혼과 영을 구별하지 않아도 무방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 마리아는 혼과 영으로 주님을 찬송한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이때 혼은 믿음 또는 진리의 생명을 의미하구요, 영은 사랑 또는 선의 생명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혼으로는 주님을 찬송한다고 했고, 영으로는 주님을 기뻐한다고 말했습니다. 말씀에서 찬송하는 것과 기뻐하는 것은 다 주님을 예배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찬송한다고 할 때는 믿음으로 주님을 예배하는 것이구요, 기뻐한다는 것은 선한 삶으로 주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으로는 주님을 기뻐한다고 하고, 혼으로는 주님을 찬송한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리아가 한 말은 ‘내가 믿음과 선한 삶으로 주님을 예배합니다!’ 이런 말입니다.
이와 비슷한 말씀이 요한복음 4장 23절에도 있습니다. 그 말씀은 이렇습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4:23)
여기서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다르게 표현하면 혼과 영으로 예배하는 것이구요, 더 쉽게 표현하면, 진리와 선한 삶으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바로 마리아와 같은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새 교회를 표상하는 것은 이런 까닭입니다. 사실 마리아와 같이 주님을 예배할 수 있는 사람은 비록 새 교회라 하더라도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주님을 찬양하는 것은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자기 좋을 때만 주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앞이 안 보이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기뻐하는 것은 자기 뜻대로 살지 않고,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자아의 애정으로가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애정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주님을 찬양하는 사람은 더러 있어도 주님을 기뻐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주님을 기뻐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아직 겸손하지 못해서입니다. 조금 전 본문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은 비천한 자를 도우시는 분이지, 결코 교만한 자를 돕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겸손하지 못하면, 주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도와주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손을 뿌리치기 때문인데, 그러므로 그런 상태, 그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도 주님을 기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48절에서 마리아는 그가 주님을 찬양하고 기뻐할 수 있는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48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마리아는 스스로 자기는 비천한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그가 여자로서 가장 큰 축복을 받은 이유입니다. 누구나 겉으로는 겸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면이 겸손한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 사람의 행동을 보면 압니다. 만약 우리가 습관적으로 다른 사람을 험담하는 사람들이라면, 또 일상생활에서 나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입장을 존중하지는 않는 사람들이라면,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이 조금만 서운하게 해도 발끈, 반드시 보복하려는 사람들이라면, 계속해서 주님의 도를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으로 말씀을 이해하지 않고, 자기의 지성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이라면, 우리는 겸손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칭 겸손하다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으며, 주님이 보시기에 겸손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진리의 지식 속으로 주님의 능력이 흘러 들어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진심으로 주님을 찬송할 뿐만 아니라,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전에는 아무리 주님을 기뻐하려고 해도, 아무리 주야로 말씀을 기억하고, 삶에 적용하려고 해도 잘 안 됩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49절에
49능하신 이가 큰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한 것입니다. 겸손한 자에게 주님의 능력이 함께 하심을 위와 같이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능력이 함께하셔서 큰일을 행하시는데요, 다만 우리가 겸손할 때만 그렇습니다.
마리아의 찬송은 계속됩니다.
50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마리아는 이번에는 주님을 두려워하는 자에게 긍휼하심이 이른다고 말합니다. 주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여호와께서 시내산에 강림하실 때, 이스라엘 백성이 죽을 것 같이 두려워했던 것처럼 그렇게 두려워하는 것입니까? 그게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느끼는 두려움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 재앙이나 화를 당할까 봐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연적인 두려움입니다. 말씀에서 말하는 두려움은 내 삶의 행위가 주님의 사랑을 배반하지는 않을까, 주님의 사랑을 욕되게 하지는 않을까 항상 스스로를 근신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런 두려움은 영적 두려움이며,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한 자에게 주님의 능하심이 큰일을 행하시는 것처럼, 주님을 두려워하는 자에게 그분의 긍휼과 능력이 미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51절에서 마리아가
51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라고 한 것이 그 말입니다. 그것은 앞에서 주님의 능하심이 큰일을 내게 이루셨다는 고백과 같은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팔’은 곧 주님의 능력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지옥에서 오는 악과 거짓을 이길 수 없습니다. 자신의 힘을 의지하는 사람은 백번이면 백번 다 집니다. 그런데 주님의 능력이 우리와 함께 할 때는 항상 이깁니다. 그래서 사람은 겸손해야 하고, 주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때 주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흘러 들어와서 우리 앞에 있는 영적 장애물들을 하나씩 걷어냅니다.
※ 그러니까 우리 속 사람의 상태가 주님의 능력이 흘러들어올 수 있는 상태, 들어와 머무를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복’하고도 연결되는데요, ‘주님, 제게도 복을 주세요’라며, 안수를 통해 복 받기를 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님은 복을 주시는 분이시며, 주님께 복을 구하는 것이 나쁘거나 부끄러운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안전하며, 확실하고 영원하지요. 문제는, 주님의 복은 위 주님의 능력처럼 우리 속 사람의 상태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이 복을 허락하셔도 정작 우리 속 사람의 상태가 그 복을 받을 수 없는 상태라면, 그러니까 그 복이 우리 안에 머무를 수 없는 그런 상태라면, 그 복은 우리를 떠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삶이 주님의 복하고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들면, 그 원인을 밖이 아닌, 내 안에서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정작 내 방 커텐을 꼭꼭 쳐서 빛이 조금도 못 들어오게 해놓고는 계속해서 ‘내 방이 어두워, 내 방이 어두워’ 하고 있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51절로 53절입니다.
51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52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53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도다
위 본문에서는 구원을 가로막는 영적 장애물들을 ‘교만한 자’, ‘권세 있는 자’, ‘부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교만한 자, 권세 있는 자, 부자는 우리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내면에도 그런 것들이 다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만한 자’, ‘권세 있는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모든 선하고 진실한 것을 오직 주님께만 돌리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사람입니다. 말하자면, 아주 작은 선한 일을 하면서도 내 힘으로 했다고 생각하는, 즉 나는 선하다고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 속에는 선하고 진실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선을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아주 작은 선도 행할 수 없습니다.
※ 아래는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2장, ‘주의 신성이 천국을 이룬다’, 10번 글입니다. 참고하세요.
세상에 살 때 자기가 행한 선과 믿어온 진리가 모두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또는 자기 것이 되었다고 확신한 영들이 있다. 선행을 자기 공로로 여기고,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모두 그런 신념이 있다. 그런 영들은 천국에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천사들은 그들을 어리석은 도둑이라 여겨 피한다. 어리석다는 이유는, 그 영들의 관심사가 신성이 아니라 자기 자신뿐이기 때문이다. 도둑이라는 이유는, 그들이 주님의 것을 가로채려 하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는 천사들 안에 있는 주의 신성이 천국을 이룬다는 천국의 신념에 반대되는 것이다. (HH.10, 김은경 역) Such spirits as have confirmed themselves during their life in the world in the belief that the good they do and the truth they believe is from themselves, or is appropriated to them as their own (which is the belief of all who place merit in good actions and claim righteousness to themselves) are not received into heaven. Angels avoid them. They look upon them as stupid and as thieves; as stupid because they continually have themselves in view and not the Divine; and as thieves because they steal from the Lord what is his. These are averse to the belief of heaven, that it is the Divine of the Lord in the angels that makes heaven. (HH.10)
그러면 ‘부자’는 또 누굽니까? 부자는 진리에 대해 많이 알고는 있는데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우리 안에 있는 부자입니다. 마치 주님 당시에 바리새인들과 같은 그런 사람이 우리 안에도 있는 것이죠.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셔서 그런 것들을 다 몰아내셔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모두 없어진 다음, 그 빈자리를 구원에 필요한 덕목들로 채워 주셔야 합니다. 위 본문에서는 구원에 필요한 덕목들을 ‘비천한 자’, ‘주리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비천한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비천한 자는 내 안에는 악하고 거짓된 것밖에 없고, 오직 주님만이 선하시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에 의해 우리 안에 이 ‘비천한 자’가 높아져야 합니다. 그래야 진심으로 주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생기지요. 그러지 않고서는 항상 내가 잘난 줄 알고, 그래서 자신의 지혜에만 의지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짐작하시는 대로, 이런 상태로는, 즉 우리 속 사람의 상태가 이래서는 시험이 끝나지 않습니다. 이런 상태는 지옥을 닮아서 지옥의 기운들을 끌어당기기 때문이지요.
또 ‘주리는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말씀 배우기를 항상 갈망하고, 말씀을 통해 주님과 교통하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을 배불리 먹이십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 주님과 교통하려고 할 때, 주님으로부터 온갖 선하고 진실한 것들이 우리 안으로 흘러 들어옵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이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의 주린 자가 말씀을 소유할 때, 우리 안의 주린 자가 주님으로부터 지식을 배울 때, 그 지식은 살아있는 지식이 되며, 삶을 바꾸는 지식이 됩니다. 반면에 부자의 지식은 살아있는 지식이 아니라 죽은 지식입니다. 그것은 쓰지 않는 잡다한 물건들을 창고에 쌓아놓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린 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그런 방법으로 당신의 자녀들을 구원으로 이끄십니다.
그래서 54, 55절에서 마리아는
54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55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과 아브라함의 자손은 주님의 교회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오늘 그들을 기억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기억하신다는 말은 말 그대로 기억만 하신다, 안 잊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구원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인류 최초의 교회인 태고교회 이래로 주님께서 일관되게 약속하셨던 일입니다. 주님은 마리아로 상징되는 새 교회를 통해 그 약속을 이루시겠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말씀에서 조상은 인류 최초의 교회인 태고교회와 고대교회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셨다’는 말은 그 일이 태고교회 이래로 주님께서 계속 약속하신 일이라는 뜻입니다.
56마리아가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니라
‘석 달’에서 이 ‘삼’(3, 셋)이라는 수는 처음부터 끝까지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완전한 상태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마리아가 엘리사벳 집에서 석 달 동안 머물렀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마리아로 표상되는 새 교회에 새로운 말씀이 완전하게 전해지는 것이구요, 그 말씀을 통해 새 교회의 교리를 완전히 이해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섭리에 의해 새 교회의 사람들에게 말씀이 전해지는 것이구요, 그 말씀을 통해 교리를 완전하게 이해하는 기간과 과정이 바로 ‘석 달’입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집으로 돌아갔다’는 말은 이제 새로운 말씀을 배우는 단계가 끝나고, 삶으로 옮기는 단계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새 교회 사람들은 말씀을 배우기만 하는 사람들이 아니고, 배운 말씀을 각자의 삶 속에서 실천해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마리아가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니라’의 속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마리아가 주님께 드리는 찬송은 모든 새 교회인들이 마음으로 주님께 드리는 찬송입니다. 입술만으로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삶으로 주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주님을 찬송한다고 했고, 또한 주님을 기뻐한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많은 반성을 했습니다. 저 자신을 돌아봐도 주님보다 더 사랑하고 기뻐하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주님을 기뻐한다면 절대 뒤 돌아보지 말아야 하는데 뒤를 돌아본 적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마리아의 찬송을 들으면서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기뻐할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에서 주님께서는 겸손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을 두려워하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이제까지 네가 겸손하지 못했고, 나를 두려워하지도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우리가 주님을 두려워하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또 겸손하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뜻대로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주님 앞에 다시 무릎을 꿇습니다. 이제 능력의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 안에 교만한 자와 권세 있는 자를 몰아내시고, 비천한 자를 높이소서, 주린 자를 먹이소서 이렇게 간절하게 주님께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흘렸던 눈물을 기억하시고, 이제 그 눈물을 닦아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6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겔36:26-27)
아멘
원본
2016-06-05(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2-28(D3)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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