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20.심화

 

2. ‘자신이 저세상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임종, 그러니까 지상에서 숨을 거두는, 정말 수없이 다양한 케이스가 있습니다. 평안한, 온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쓸쓸히 홀로 고독사하는 사람도 있고... 병원이나 요양원에서 편안하게 떠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교통사고 등 갑작스런 사고사나 전쟁이나 강도, 감옥 형장의 이슬, 혹은 자살 등... 제가 말씀드리고픈 것은 저는 고등학생 때 모친을 교통사고로 잃은 경험이 있는데요, 그러니까 이런 사별의 경험은 정말 선 굵은 인생의 자국을 남기더라는 거죠. 아마 숨을 거두시는 분도 그러지 싶은데... 그런데 어떻게 사후 자기가 죽은지조차 모를 수가 있는 건가요? 모든 게 이어진다면서 말이죠...

 

 

겉으로 보면 모순처럼 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한편으로는 사람이 죽은 뒤에도 의식은 끊어지지 않고 그대로 이어진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사람이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두 진술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같은 사실을 서로 다른 측면에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먼저 구별해야 할 것은 ‘의식의 연속’과 ‘상황에 대한 인식’입니다. 사람은 죽는 순간 자신의 기억과 생각, 감정과 사랑, 성격과 삶의 방향을 그대로 지닌 채 영계로 들어갑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삶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죽었다’는 사실을 즉시 깨닫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지상에서도 깊이 잠들었다가 막 깨어났을 때 잠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분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의식은 계속 이어졌지만, 새로운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죽음 직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더욱이 주님께서는 죽음을 인간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단절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의 자연스러운 이행이 되도록 섭리하십니다. 만일 사람이 육체를 떠나는 순간 자신이 모든 것을 잃었다고 느낀다면, 특히 교통사고나 전쟁, 살해, 갑작스러운 사고와 같은 경우에는 엄청난 충격과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러한 충격이 영혼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보호하십니다. 사람은 여전히 보고, 듣고, 생각하고, 느끼며, 자신이 살아 있다는 연속된 의식 속에 머물게 됩니다. 그리고 천사들의 인도와 새로운 환경을 통해 조금씩 자신이 영계에 들어왔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 점은 지상에서의 죽음의 모습이 얼마나 다양하든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안히 숨을 거두고, 어떤 사람은 병원이나 요양원에서 생을 마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교통사고나 재난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전쟁이나 범죄의 희생자가 되기도 하며, 때로는 극심한 절망 속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도 합니다. 남겨진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죽음의 방식이 평생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됩니다. 갑작스러운 사별은 삶을 ‘그 이전’과 ‘그 이후’로 나누어 놓을 만큼 깊은 흔적을 남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증언은 지상에서 바라본 죽음과 영계에서 경험하는 죽음이 반드시 같은 모습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지상에서는 사고의 순간이 마지막 장면으로 기억되지만, 영계에서는 그 한순간의 충격이 새로운 삶의 출발점이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각 사람의 상태에 맞게 천사들을 보내시고, 마치 깊이 잠든 아이를 조심스럽게 옮기듯 그 영혼을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영원히 사고의 충격 속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연속성 안에서 주님의 보호를 받으며 점차 영계의 삶에 적응하게 됩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AC.320은 ‘사람은 자신이 아직도 이 세상에 있으며, 심지어 아직도 육체 안에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죽음을 부정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로 인해 죽음이 파괴적인 단절로 경험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나는 끝났다’는 의식보다 ‘나는 계속 살아 있다’는 의식을 먼저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 연속된 삶 속에서 비로소 자신이 영계에 들어왔음을 하나씩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AC.320은 단순히 사후 세계의 한 현상을 설명하는 글이 아닙니다. 오히려 죽음의 순간에도 변함없이 역사하시는 주님의 자비를 보여 주는 글입니다. 인간에게는 죽음이 가장 큰 변화처럼 보이지만, 주님께서는 그 변화가 영혼에게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이 되지 않도록 섭리하십니다.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의 손 안에서 이 세상의 삶에서 저세상의 삶으로 조용히 옮겨지며, 그 연속성 속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삶의 새로운 시작이 됩니다.

 

 

 

AC.320, 창4 앞,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AC.320-323)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On The Nature Of The Life Of The Soul Or Spirit AC.320 영혼(soul)으로서의 삶, 곧 죽은 뒤 처음 영계에 들어가는 신참, 신생 영들(novitiate spirits)의 삶에 관한 일반적인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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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0, 심화 1, ‘soul’과 ‘spirit’

AC.320.심화 1. ‘soul’과 ‘spirit’ ‘soul’과 ‘spirit’의 차이가 뭔가요? 그리고 적절한 우리말 번역은? AC.320에는 흥미롭게도 ‘soul’과 ‘spirit’이라는 두 단어가 함께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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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0.심화

 

1. ‘soul spirit

 

soul spirit의 차이가 뭔가요? 그리고 적절한 우리말 번역은?

 

 

AC.320에는 흥미롭게도 ‘soul’과 ‘spirit’이라는 두 단어가 함께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the life of souls’라고 말한 뒤, 곧바로 ‘that is, of novitiate spirits’라고 덧붙입니다. 이는 두 단어가 서로 전혀 다른 개념이라기보다, 같은 대상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표현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일반적으로 ‘soul’은 사람의 생명이나 존재 자체를 가리키는 보다 포괄적인 표현입니다. 성경의 히브리어 ‘네페쉬’와 헬라어 ‘프쉬케’에 가까운 용법으로, 살아 있는 인간은 물론 죽은 뒤에도 계속 존재하는 사람 자체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AC.320의 ‘the life of souls’는 문자 그대로는 ‘영혼들의 삶’이지만, 실제 의미는 ‘사후 인간의 삶’ 또는 ‘죽은 사람들의 삶’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반면 ‘spirit’은 영계에서 실제로 살아가는 영적 인간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죽은 뒤의 사람을 매우 자주 ‘spirit’이라고 부르며, 특히 영계의 사회와 공동체 안에서 활동하는 존재를 말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따라서 ‘novitiate spirits’는 ‘영계에 처음 들어온 새 영들’, 곧 신참, 신생 영들을 뜻합니다.

 

이 때문에 AC.320의 첫 문장은 먼저 가장 넓은 의미의 ‘사후 인간의 삶’을 제시한 뒤, 그것이 곧 ‘영계에 처음 들어온 새 영들의 삶’을 말하는 것이라고 풀어 설명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soul’은 주제를 포괄적으로 제시하는 표현이고, ‘spirit’은 그 주제를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두 단어를 모두 ‘영혼’으로 번역하면 원문의 의도가 흐려지고, 모두 ‘’으로 번역해도 스베덴보리의 섬세한 표현 차이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한편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체를 살펴보면, 그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사실 ‘soul’이나 ‘spirit’보다 ‘man’이라는 표현입니다. 특히 ‘천국과 지옥’에서는 사람이 죽은 뒤에도 여전히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설명합니다. 그는 영을 희미한 기운이나 추상적 의식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영은 보고, 듣고, 말하고, 기억하고, 생각하며, 사랑하는 완전한 인간입니다. 그래서 영계에서는 ‘’이라는 말보다 ‘사람’이라는 표현이 오히려 본질을 더 잘 나타내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AC 번역에서는 ‘soul’은 기본적으로 ‘영혼’으로, ‘spirit’은 ‘’으로 옮기는 것이 가장 일관성이 있습니다. 다만 ‘the life of souls’처럼 ‘영혼’이라는 우리말이 다소 추상적으로 들리는 문맥에서는, 해설을 통해 이것이 곧 ‘사후 인간의 삶’을 뜻한다는 점을 함께 설명해 주는 것이 좋습니다. 따라서 AC.320의 첫 문장은 ‘영혼의 삶, 곧 영계에 처음 들어온 새 영들의 삶에 관한 일반적인 사항과 관련하여...’라고 번역하는 것이 원문의 의미와 스베덴보리의 의도를 가장 잘 살리는 번역이라고 생각됩니다.

 

 

 

AC.320, 심화 2, ‘자신이 저세상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AC.320.심화 2. ‘자신이 저세상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임종, 그러니까 지상에서 숨을 거두는, 정말 수없이 다양한 케이스가 있습니다. 평안한, 온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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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0, 창4 앞,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AC.320-323)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On The Nature Of The Life Of The Soul Or Spirit AC.320 영혼(soul)으로서의 삶, 곧 죽은 뒤 처음 영계에 들어가는 신참, 신생 영들(novitiate spirits)의 삶에 관한 일반적인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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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On The Nature Of The Life Of The Soul Or Spirit

 

AC.320

 

영혼(soul)으로서의 삶, 곧 죽은 뒤 처음 영계에 들어가는 신참, 신생 영들(novitiate spirits)의 삶에 관한 일반적인 사항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저는 많은 경험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저세상(the other life)에 들어가면 그는 자신이 저세상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여전히 이 세상에 있으며, 심지어 아직도 육체 안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상태는 매우 실제적이어서, 누군가 그에게 자신이 영이라고 말해 주면 그는 크게 놀라고 경이로워합니다. 이는 자신이 감각과 욕구, 생각에 있어서 전과 똑같이 한 인간으로 존재함을 발견하기 때문이며, 또한 세상에 살 때에는 영의 존재를 믿지 않았거나, 혹은 어떤 사람들처럼 영이 지금 자신이 경험하는 것과 같은 존재일 수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With regard to the general subject of the life of souls, that is, of novitiate spirits, after death, I may state that much experience has shown that when a man comes into the other life he is not aware that he is in that life, but supposes that he is still in this world, and even that he is still in the body. So much is this the case that when told he is a spirit, wonder and amazement possess him, both because he finds himself exactly like a man, in his senses, desires, and thoughts, and because during his life in this world he had not believed in the existence of the spirit, or, as is the case with some, that the spirit could be what he now finds it to be.

 

 

해설

 

이 글은 사람이 죽은 직후 경험하는 가장 보편적인 상태를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증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사실을 단순한 추측이나 철학적 사색이 아니라, 오랜 기간 영계에서 직접 보고 경험한 결과로 제시합니다. 따라서 이 글은 이후 이어지는 사후 세계에 관한 모든 설명의 출발점이 됩니다.

 

가장 먼저 주목할 것은, 사람은 죽는 순간 자신의 존재가 끊어진다고 느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자신이 ‘저세상(the other life)에 왔다는 사실조차 처음에는 의식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여전히 이전과 같은 세상에 있으며, 여전히 육체를 가지고 살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영이 곧 사람 자신이며, 육체는 단지 세상에서 사용하는 가장 바깥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육체를 벗는다고 해서 의식 자체가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의식은 그대로 계속됩니다.

 

스베덴보리는 특히 사람이 ‘감각과 욕구, 생각’을 그대로 가지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영이 막연한 기운이나 그림자가 아니라 완전한 인간(homo)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보고, 듣고, 말하고, 기억하며, 생각하고, 사랑합니다. 다만 이제는 물질적 몸을 통하여가 아니라 영적 몸을 통하여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은 사람의 인격이 새롭게 만들어지는 사건이 아니라, 이미 형성된 내면의 사람이 자신의 본래 세계로 옮겨가는 과정입니다.

 

사람들이 놀라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살아 있을 때 영을 비물질적인 어떤 에너지나 희미한 의식 정도로 상상합니다. 그러나 실제 영계에 들어가면 자신이 여전히 완전한 사람이며, 이전과 거의 같은 의식과 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결과 자신이 죽었다는 말을 들으면 오히려 믿기 어려워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주님의 자비로운 섭리와도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만일 사람이 죽는 순간 모든 환경이 갑자기 바뀌고, 자신의 존재 방식이 완전히 달라진다면 그는 극심한 혼란과 두려움에 빠질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람의 의식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그는 마치 한 방에서 다른 방으로 옮겨간 것처럼 점진적으로 새로운 세계에 적응하게 됩니다. 이후에야 비로소 자신이 영계에 있으며, 육체를 떠났음을 차츰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점진적인 전이는 주님의 사랑과 섭리가 영혼을 얼마나 세심하게 보호하시는지를 보여 줍니다.

 

또한 이 글은 사람의 사후 상태가 죽음 자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 형성된 삶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도 암시합니다. 죽음은 사람을 다른 존재로 바꾸지 않습니다. 사람은 세상에서 사랑하던 것을 그대로 사랑하고, 생각하던 방식 그대로 생각하며, 살아온 삶의 성향을 그대로 가지고 영계로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새로운 사람을 만드는 순간이 아니라, 이미 형성된 참된 사람이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결국 AC.320은 ‘죽음은 삶의 단절이 아니라 연속’이라는 스베덴보리의 사후관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 주는 글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람이 저세상에 들어가도 자신이 여전히 같은 사람이라고 느끼는 이유는, 참된 인간은 육체가 아니라 영이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죽음은 존재의 끝이 아니라, 영원한 삶을 향한 첫걸음이며, 주님께서는 그 첫걸음을 혼란이 아니라 평안 가운데 내딛도록 섭리하고 계십니다.

 

 

심화

 

1. ‘soulspirit

 

 

AC.320, 심화 1, ‘soul’과 ‘spirit’

AC.320.심화 1. ‘soul’과 ‘spirit’ ‘soul’과 ‘spirit’의 차이가 뭔가요? 그리고 적절한 우리말 번역은? AC.320에는 흥미롭게도 ‘soul’과 ‘spirit’이라는 두 단어가 함께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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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자신이 저세상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AC.320, 심화 2, ‘자신이 저세상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AC.320.심화 2. ‘자신이 저세상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임종, 그러니까 지상에서 숨을 거두는, 정말 수없이 다양한 케이스가 있습니다. 평안한, 온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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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9, 창3 뒤, ‘두 번째 사례’

사람이 영생에 들어감에 관하여 (계속) AC.319 나는 또 다른 한 사람도 보았는데, 그는 천사들에 의해 곧바로 천국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는 주님께 받아들여졌고, 천국의 영광을 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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