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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2.05.10 창3:24, AC.306-313,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창3:20-24

 

24절,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Verse 24, And he cast out the man; and he made to dwell from the east toward the garden of Eden cherubim, and the 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 to keep the way of the tree of lives.

 

※ 24절 속뜻

 

 

 

306.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그에게서 선에 관한 모든 의지와 진리에 관한 모든 이해를 깡그리 박탈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그는 그것들과 분리되었고, 그렇게 ‘사람’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것들을 찾아볼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더 이상 도저히 사람이라고는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To “cast out the man” is to entirely deprive him of all the will of good and understanding of truth, insomuch that he is separated from them, and is no longer man.

 

‘동쪽에 그룹들을 두어’, 무슨 비밀스런 신앙의 일 안으로 못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위 표현이 이런 뜻인 것은, ‘에덴 동산 동쪽’은 天的인 것이며, 지성은 여기서 나오기 때문이며. ‘그룹’이란, 저런 사람이 신앙의 일들에 들어가는 것을 금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To “make cherubim from the east to dwell” is to provide against his entering into any secret thing of faith; for the “east toward the garden of Eden” is the celestial, from which is intelligence; and by “cherubim” is signified the providence of the Lord in preventing such a man from entering into the things of faith.

 

‘두루 도는 불 칼’이 상징하는 것은 비정상적인 것들을 원하고, 그 결과 그런 것들로 고착된 자아 사랑입니다. 그는 정말 거룩한 것들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지만 본능적으로 육체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에게 끌려 휩쓸려 버리고 맙니다. 이것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즉, 거룩한 것들에 대한 신성모독을 금하시는 이유입니다. By the “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 is signified self-love with its insane desires and consequent persuasions, which are such that he indeed wishes to enter, but is carried away to corporeal and earthly things, and this for the purpose of “keeping the way of the tree of lives,” that is, of preventing the profanation of holy things.

 

 

307. 여기서 다루는 후손들은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입니다. 이들은 홍수로 사라졌고, 모두 ‘에덴 동산에서 쫓아내신’, 즉, 진리에 관한 모든 이해가 박탈되어, 비정상적인 탐욕들과 설득들만 남은, 그래서 도저히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It here treats of the sixth and seventh posterities, which perished by the flood, and were altogether “cast out of the garden of Eden,” that is, from all understanding of truth, and became as it were not men, being left to their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

 

 

308. ‘동쪽’과 ‘에덴 동산’에 관한 상징은 위에서 다루었기 때문에, 여기서 다시 이들을 가지고 오래 머물 필요는 없습니다. 대신 ‘그룹’이 주님의 섭리를 가리킨다는 것은 말씀들 가운데 ‘그룹’이 나오는 모든 구절들을 보면 분명합니다. 주님의 섭리는, 사람이 비정상적으로 자기 본성을 따라, 그리고 감각들과 기억-지식을 따라 신앙의 신비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시는, 그리고 그렇게 해서 그것들을 신성모독하고, 그리고 그렇게 해서 결국 자기 자신을 파괴하지 못하도록 하시는 섭리입니다. As the signification of the “east” and of the “garden of Eden” were given above, it is needless to dwell longer on them; but that “cherubim” denote the providence of the Lord lest man should insanely enter into the mysteries of faith from his own, and from what is of the senses and of memory-knowledge, and should thus profane them, and destroy himself, is evident from all the passages in the Word where mention is made of “cherubim.”

 

유대인들은, 만일 그들이 주님의 오심에 관하여, 그 교회의 표상들이나 형식들이 주님을 상징한다는 것에 관하여, 그리고 사후에도 계속되는 삶에 관하여, 또한 속 사람과 말씀의 속뜻에 관하여 어떤 명료한 지식을 갖게 되면, 그들은 반드시 그것을 모독하고, 영원히 소멸되었을 그런 퀄러티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상과 같은 사실을 궤 위(above) 속죄소 위(on), 성막 휘장들 위(upon), 성전 안 휘장 위(upon) ‘그룹’으로 표현하신 것이며, 이것은 또한 주님이 그들을 지키심을 상징한 것입니다. As the Jews were of such a quality that if they had possessed any clear knowledge concerning the Lord’s coming, concerning the representatives or types of the church as being significative of him, concerning the life after death, concerning the interior man and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they would have profaned it, and would have perished eternally; therefore this was represented by the “cherubim” on the mercy seat over the ark, upon the curtains of the tabernacle, upon the veil, and also in the temple; and it was signified that the Lord had them in keeping. (출25:18-21; 26:1, 31; 왕상6:23-29, 32)

 

18금으로 그룹 둘을 속죄소 두 끝에 쳐서 만들되 19한 그룹은 이 끝에, 또 한 그룹은 저 끝에 곧 속죄소 두 끝에 속죄소와 한 덩이로 연결할지며 20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 21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출25:18-21)

 

1너는 성막을 만들되 가늘게 꼰 베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로 그룹을 정교하게 수 놓은 열 폭의 휘장을 만들지니 31너는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짜서 휘장을 만들고 그 위에 그룹들을 정교하게 수 놓아서 (출26:1, 31)

 

23내소 안에 감람나무로 두 그룹을 만들었는데 그 높이가 각각 십 규빗이라 24한 그룹의 이쪽 날개도 다섯 규빗이요 저쪽 날개도 다섯 규빗이니 이쪽 날개 끝으로부터 저쪽 날개 끝까지 십 규빗이며 25다른 그룹도 십 규빗이니 그 두 그룹은 같은 크기와 같은 모양이요 26이 그룹의 높이가 십 규빗이요 저 그룹도 같았더라 27솔로몬이 내소 가운데에 그룹을 두었으니 그룹들의 날개가 퍼져 있는데 이쪽 그룹의 날개는 이쪽 벽에 닿았고 저쪽 그룹의 날개는 저쪽 벽에 닿았으며 두 날개는 성전의 중앙에서 서로 닿았더라 28그가 금으로 그룹을 입혔더라 29내 외소 사방 벽에는 모두 그룹들과 종려와 핀 꽃 형상을 아로새겼고 32감람나무로 만든 그 두 문짝에 그룹과 종려와 핀 꽃을 아로새기고 금으로 입히되 곧 그룹들과 종려에 금으로 입혔더라 (왕상6:23-29, 32)

 

이 구절에서, 그 안에 증거판이 들어있었던 증거궤가 생명 나무와 같은 것, 즉, 주님과 오직 주님에게 속한 천적인 것들 상징했기 때문입니다. For the ark, in which was the testimony, signified the same as the tree of lives in this passage, namely, the Lord and the celestial things which belong solely to him.

 

그래서 또한 주님은 자주 일컬음 받으시기를,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 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 하셨고, 그래서 주님은 모세와 아론에게 ‘두 그룹 사이에서’ 말씀하셨습니다. Hence also the Lord is so often called the “God of Israel sitting on the cherubim,” and hence he spoke with Moses and Aaron “between the cherubim.” (출25:22; 민7:89)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출25:22)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서 여호와께 말하려 할 때에 증거궤 위 속죄소 위의 두 그룹 사이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목소리를 들었으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이었더라 (민7:89)

 

이것은 그룹이 언급된, 에스겔에 잘 나와 있습니다. This is plainly described in Ezekiel, where it is said:

 

3그룹에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에 이르더니 여호와께서 그 가는 베 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을 불러 4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 하시고 5그들에 대하여 내 귀에 이르시되 너희는 그를 따라 성읍 중에 다니며 불쌍히 여기지 말며 긍휼을 베풀지 말고 쳐서 6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이와 여자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하지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지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더라 7그가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성전을 더럽혀 시체로 모든 뜰에 채우라 너희는 나가라 하시매 그들이 나가서 성읍 중에서 치더라 (9:3-7) The glory of the God of Israel was uplifted from upon the cherub whereon he was, to the threshold of the house. And he called to the man clothed with linen, and said unto him, Go through the midst of the city, through the midst of Jerusalem, and set a mark upon the foreheads of the men who groan and sigh for all the abominations done in the midst thereof. And to the others he said, Go ye after him through the city, and smite; let not your eye spare, neither have ye pity; slay to blotting out the old man, and the young man, and the virgin, the infant, and the women; defile the house, and fill the courts with the slain.

 

2하나님이 가는 베 옷을 입은 사람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그룹 밑에 있는 바퀴 사이로 들어가 그 속에서 숯불을 두 손에 가득히 움켜 가지고 성읍 위에 흩으라 하시매 그가 내 목전에서 들어가더라 7그 그룹이 그룹들 사이에서 손을 내밀어 그 그룹들 사이에 있는 불을 집어 가는 베 옷을 입은 자의 손에 주매 그가 받아 가지고 나가는데 (10:2, 7) He said to the man clothed in linen, Go in between the wheel to beneath the cherub, and fill thy palms with coals of fire from between the cherubim, and scatter them over the city; the cherub put forth his hand from between the cherubim unto the fire which was between the cherubim, and took thereof, and put it into the palms of him that was clothed in linen, who took it and went out.

 

이 구절들에서 분명한 사실은, 사람들이 신앙의 신비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금하시는 주님의 섭리가 ‘그룹’으로 상징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비정상적인 탐욕들 가운데 남겨졌다는 사실을 여기 ‘성읍 위에 흩을 숯불’이 상징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아무도 불쌍히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From these passages it is evident that the providence of the Lord in preventing men from entering into the mysteries of faith is signified by the “cherubim”; and that therefore they were left to their insane cupidities, here also signified by the “fire that was to be scattered over the city,” and that “none should be spared.”

 

 

309. ‘두루 도는 불 칼’이 비정상적인 탐욕들과 설득들을 동반한 자아 사랑을 상징한다는 것은 말씀에서 페이지들을 가득 채울 수도 있을 만큼 많은 인용구절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에스겔에 나오는 몇 구절만 인용하고자 합니다. 이 ‘비정상적인 탐욕들과 설득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신앙의 신비들을 추구하게 하지만, 사실은 육체적, 세속적인 것들에게 끌려 휩쓸려 버리고 말게 하는 그런 것들입니다. That by the “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 is signified self-love with its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 which are such that they desire to enter [into the mysteries of faith], but are carried away to corporeal and earthly things, might be confirmed by so many passages from the Word as would fill pages; but we will cite only these from Ezekiel:

 

9인자야 너는 예언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이같이 말하라 칼이여 칼이여 날카롭고도 빛나도다 10그 칼이 날카로움은 죽임을 위함이요 빛남은 번개 같이 되기 위함이니 우리가 즐거워하겠느냐 내 아들의 규가 모든 나무를 업신여기는도다 14그러므로 인자야 너는 예언하며 손뼉을 쳐서 칼로 두세 번 거듭 쓰이게 하라 이 칼은 죽이는 칼이라 사람들을 둘러싸고 죽이는 큰 칼이로다 15내가 그들이 낙담하여 많이 엎드러지게 하려고 그 모든 성문을 향하여 번쩍번쩍하는 칼을 세워 놓았도다 오호라 그 칼이 번개 같고 죽이기 위하여 날카로웠도다 (21:9-10, 14-15) Prophesy and say, Thus saith Jehovah, Say a sword, a sword, it is sharpened, and also burnished to make a sore slaughter; it is sharpened that it may be as lightning. Let the sword be doubled the third time, the sword of his slain; the sword of a great slaughter, which entereth into their bed chambers, that their heart may melt, and their offenses be multiplied, I have set the terror of the sword in all their gates. Alas! it is made as lightning.

 

여기 ‘칼’은 사람의 황량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사람이 선과 진리는 전혀 못 보고, 대신 ‘많이 엎드러지게 하다’로 표현한 거짓들과 잘못된 일들만 볼 뿐임을 상징합니다. A “sword” here signifies the desolation of man such that he sees nothing that is good and true, but mere falsities and things contrary, denoted by “multiplying offenses.”

 

또 나훔에도 나오는데요, 거기 신앙의 신비들을 추구하는 자들을 가리켜, ‘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 같은 창, 죽임 당한 자의 떼’라 하고 있습니다. It is also said in Nahum, of those who desire to enter into the mysteries of faith, “The horseman mounting, and the flame of the sword, and the flash of the spear, and a multitude of the slain.” (나3:3)

 

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 같은 창, 죽임 당한 자의 떼, 주검의 큰 무더기, 무수한 시체여 사람이 그 시체에 걸려 넘어지니 (훔3:3)

 

 

310. 이 구절 각각의 표현들에는 가장 깊은 의미들을 가진 아케이나가 너무나 많아 그걸 다 제시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 아케이나에 들어있는 것들은 홍수로 사라진 지금 이 사람들의 천성에 적용할 수 있는 것으로, 홍수 후 살았던 사람들의 천성하고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Each particular expression in this verse involves so many arcana of deepest import (applicable to the genius of this people who perished by the flood, a genius totally different from that of those who lived subsequent to the flood), that it is impossible to set them forth.

 

다음과 같은 사실에 대해 간략히 보겠습니다. 그들의 첫 부모 세대는 태고 교회를 형성한 세대로서, 천인(天人)들이었고, 그 결과, 그들 안에 심긴 천적(天的)인 씨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후손들은 천적 기원을 가진 씨를 자기들 안에 가졌습니다. We will briefly observe that their first parents, who constituted the most ancient church, were celestial men, and consequently had celestial seeds implanted in them; whence their descendants had seed in them from a celestial origin.

 

천적 기원을 가진 씨는 사랑이 온 마음을 다스리며, 하나로 만드는 그런 것입니다. Seed from a celestial origin is such that love rules the whole mind and makes it a one.

 

사람의 마음은 두 가지, 의지와 이해력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방금 ‘하나로 만든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 즉, 이 두 가지가 하나되게 하는 것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For the human mind consists of two parts, the will and the understanding.

 

사랑 혹은 선은 의지에, 신앙 혹은 진리는 이해력에 각각 속합니다. 태고 교회 사람들은 사랑 혹은 선을 가지고 무엇이 신앙 혹은 진리에 속하는지를 지각하였으며, 그래서 그들의 마음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Love or good belongs to the will, faith or truth to the understanding; and from love or good those most ancient people perceived what belongs to faith or truth, so that their mind was a one.

 

이런 인류의 후손이기 때문에, 동일한 천적 기원을 가진 씨가 필연적으로 남게 됩니다. 진리와 선이 각각 자기 쪽, 곧 진리는 진리 쪽에서, 선은 선 쪽에서 조금씩이라도 떨어져 나가는 것은 가장 끔찍한 경우인데요, 그렇게 되면 그들의 온 마음이 너무나 왜곡되어 저 세상에서 도저히 회복 불가능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With the posterity of such a race, seed of the same celestial origin necessarily remains, so that any falling away from truth and good on their part is most perilous, since their whole mind becomes so perverted as to render a restoration in the other life scarcely possible.

 

한편, 천적인 씨 대신 영적인 씨를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홍수 후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하며, 오늘날 사람들도 해당합니다. It is otherwise with those who do not possess celestial but only spiritual seed, as did the people after the flood, and as also do the people of the present day.

 

이들에겐 사랑이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선한 의지도 없지요. 그러나 신앙, 혹은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은 여전히 있습니다. 이 능력으로, 이 사람들은 어느 정도 체어리티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비록 방식은 다르지만, 즉, 진리에 관한 지식들과 거기서 나오는 선에 기반, 주님으로 말미암은 양심의 암시라는 방식, 즉, 이런 양심을 주님이 은근히 사람들 속으로 주입하시는 방식이지만 말입니다. There is no love in these, consequently no will of good, but still there is a capability of faith, or understanding of truth, by means of which they can be brought to some degree of charity, although by a different way, namely, by the insinuation of conscience from the Lord grounded in the knowledges of truth and the derivative good.

 

그들의 상태는 그래서 홍수 전 사람들의 상태와 아주 다릅니다. 그 상태에 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이후 다루겠습니다. Their state is therefore quite different from that of the antediluvians, concerning which state,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현 세대에게는 정말 낯선 아케이나가 있습니다. 오늘날은 아무도 천인이 무엇인지, 심지어 영인 조차 아는 사람이 없고, 그 결과, 사람의 마음과 생명의 퀄러티에 대해서조차 아는 바가 없고, 최종 결과인 사후 상태에 대해서도 그렇기 때문입니다. These are arcana with which the present generation are utterly unacquainted, for at the present day none know what the celestial man is nor even what the spiritual man is, and still less what is the quality of the human mind and life thence resulting, and the consequent state after death.

 

 

311. 홍수로 사라진 사람들의 저세상 상태는 이렇습니다. 그들은 영들의 세계 그 어디에서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다른 영들과 함께 할 수도 없지요. 있을 데라고는 오직 지옥뿐인데, 그마저도 다른 어떤 지옥으로부터도 분리된, 어떤 산 아래인 것 같은 지옥에 있습니다. In the other life, the state of those who perished by the flood is such that they cannot be in the world of spirits, or with other spirits, but are in a hell separated from the hells of others, and as it were under a certain mountain.

 

이것은 그들의 무서운 판타지들과 설득들의 결과, 마치 중간에 가로막는 산처럼 나타납니다. This appears as an intervening mountain in consequence of their direful fantasies and persuasions.

 

그들의 판타지들과 설득들은 이런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영들을 아주 중증(重症) 인사불성 상태에 이르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지금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 상태가 되게 하는데, 이것은 그들이 다른 영들에게서 진리에 대한 그들의 모든 이해력을 빼앗아 그들로 하여금 아무것도 지각하지 못 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Their fantasies and persuasions are such as to produce so profound a stupor in other spirits that they do not know whether they are alive or dead, for they deprive them of all understanding of truth, so that they perceive nothing.

 

세상 살 동안의 그들의 설득 능력, 사람의 혼을 쏙 빼먹는 능력 또한 그랬습니다. 저 세상에서도 그들은 다른 영들을 일종의 죽음으로 이르게 하지 않고는 그들과 어울릴 수가 없는 자들임이 예견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소멸되었고, 저 세상에서도 저렇게 격리된 채로 지내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홍수 후를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이들과는 다른 상태들을 허락하셨습니다. Such also was their persuasive power during their abode in the world; and because it was foreseen that in the other life they would be incapable of associating with other spirits without inducing on them a kind of death, they all became extinct, and the Lord of his Divine mercy induced other states on those who lived after the flood.

 

 

312. 이 절에서, 이들 홍수 전 시대를 산 사람들의 상태가 아주 충분히 설명되었습니다. 그들은 ‘쫓아내시고’, 혹은 천적 선으로부터 분리되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을 두어’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In this verse, the state of these antediluvians is fully described, in that they were “cast out,” or separated from celestial good, and in that “cherubim were placed from the east toward the garden of Eden.”

 

이 표현, 개역 성경 표현인 ‘에덴 동산 동쪽에’라는 표현 대신 아래 영어 성경을 원어 그대로 옮기면 ‘에덴 동산을 향하여(toward) 동쪽으로부터(from)’라는 표현은 그들에게만 쓸 수 있는 표현입니다. 홍수 후 세대들에게는 쓸 수 없습니다. 만일 홍수 후 세대들에게 이 표현을 썼다면 ‘에덴 동산으로부터 동쪽을 향하여’라고 했을 것입니다. This expression, “from the east toward the garden of Eden,” is applicable only to them, and could not be used in relation to those who lived afterwards, of whom it would have been said, “from the garden of Eden toward the east.”

 

마찬가지로, 말씀 ‘두루 도는 불 칼’, 즉, ‘스스로 도는 검의 화염’이라는 표현을 오늘날 사람들에게 쓰고자 하였다면, ‘스스로 도는 화염의 검’이라고 표현해야 했을 것입니다. In like manner, had the words “the 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 been applied to the people of the present day, they would have been “the sword of a flame turning itself.”

 

뿐만 아니라, ‘생명 나무’, 즉, ‘생명들의 나무’ 역시 ‘생명의 나무’로 표현했을 것입니다. 설명이 불가능한, 오직 천사들에게만 이해되는 이런 일련의 다른 것들은 더 이상 말씀드릴 것도 없습니다. 모든 상태마다 무한한 아케이나가 들어 있으며, 그 중 단 한 개도 사람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은 이걸 이해하는데 그 이유는, 주님이 이들에게는 계시를 드러내시기 때문이며, 이들은 그 계시를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내면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Nor would it have been said the “tree of lives,” but the “tree of life”; not to mention other things in the series that cannot possibly be explained, being understood only by the angels, to whom the Lord reveals them; for every state contains infinite arcana, not even one of which is known to men.

 

 

313. 여기서 말씀드리는 내용이 첫 사람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로부터 분명한 것은, 오늘날 존재하는 모든 유전된 악은 그로 말미암은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 가정한 것입니다. From what is here said of the first man, it is evident that all the hereditary evil existing at the present day did not come from him, as is falsely supposed.

 

여기서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은 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교회이며, 이 교회를 ‘아담’이라 부를 때, 그것이 상징하는 것은, 사람은 땅에서, 즉 ‘사람이 아닌 상태’(nonman)에서 시작, 주님으로 말미암아 거듭나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For it is the most ancient church that is here treated of under the name of “man”; and when it is called “Adam,” it signifies that man was from the ground, or that from being nonman he became man by regeneration from the Lord.

 

이것이 그 이름, 곧 ‘사람’이라는 이름의 기원과 상징입니다. 유전악에 대해서는, 이 경우는 이렇습니다. 실제 죄를 짓는 사람마다 그로 인해 그 자신 안에 어떤 본성이 초래되며, 그로 인한 악이 그의 어린 시절에 심겨 유전되는 것입니다. This is the origin and signification of the name. But as to hereditary evil, the case is this. Everyone who commits actual sin thereby induces on himself a nature, and the evil from it is implanted in his children, and becomes hereditary.

 

그렇게 해서 모든 부모로부터,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 그리고 가계를 따라 그들의 선조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며, 그렇게 각 세대 후손들 안에서 배가하고 늘어납니다. 유전악은 각 사람 안에 남으며, 각자 실제 짓는 죄로 인해 증가하고, 주님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고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절대 사람에게 해가 되지 않도록 저절로 소멸되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It thus descends from every parent, from the father, grandfather, great-grandfather, and their ancestors in succession, and is thus multiplied and augmented in each descending posterity, remaining with each person, and being increased in each by his actual sins, and never being dissipated so as to become harmless except in those who are being regenerated by the Lord.

 

모든 주의 깊게 관찰하시는 분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이 진리임을 분명히 아십니다. 부모의 악한 경향은 자녀 안에 눈에 보이게 남아 한 가족, 심지어 그 가계 전체가 그로 인해 서로 구별될 수 있을 정도라는 것을 말입니다. Every attentive observer may see evidence of this truth in the fact that the evil inclinations of parents remain visibly in their children, so that one family, and even an entire race, may be thereby distinguished from every other.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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