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4

 

8절,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Verse 8, And Cain talked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and slew him.

 

※ 8절 속뜻

 

 

 

366.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는 시간의 경과를 상징합니다. “Cain spake to Abel” signifies an interval of time.

 

‘가인’은 앞서 기술처럼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벨’은 이웃 사랑, 곧 신앙의 아우를 각각 상징하며, 그래서 여기서 그는 두 번 ‘아우’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Cain,” as before stated, signifies faith separated from love; and “Abel” charity, the brother of faith, on which account he is here twice called his “brother.”

 

‘들’은 무엇이든지 교리에 속한 것을 상징합니다. A “field” signifies whatever is of doctrine.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는 분리된 신앙이 이웃 사랑의 불을 꺼트렸음을 상징합니다.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and slew him” signifies that separated faith extinguished charity.

 

 

367. 이웃 사랑이 신앙의 ‘아우’라는 것과, ‘들’이 교리에 속한 무언가를 상징한다는 걸 증명하기 위한 것 말고는 이들 아케이나 확증을 위해 굳이 말씀 내 유사 구절들을 찾는 것은 불필요합니다. It is unnecessary to confirm these things by similar passages from the Word, except so far as to prove that charity is the “brother” of faith, and that a “field” signifies whatever is of doctrine.

 

이웃 사랑이 신앙의 ‘아우’라는 사실은 신앙의 속성이나 본질상 누구에게나 자명합니다. That charity is the “brother” of faith is evident to everyone from the nature or essence of faith.

 

이 형제지간(兄弟之間)이 에서와 야곱으로 표현되었으며, 그 장자권 및 그로 말미암은 주도권 다툼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This brotherhood was represented by Esau and Jacob, and was the ground of their dispute about the birthright and the consequent dominion.

 

이것은 또한 유다로 말미암은 다말의 두 아들, 베레스와 세라로 (창38:28-30),

 

28해산할 때에 손이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이는 먼저 나온 자라 하고 홍색 실을 가져다가 그 손에 매었더니 29그 손을 도로 들이며 그의 아우가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터뜨리고 나오느냐 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베레스라 불렀고 30그의 형 곧 손에 홍색 실 있는 자가 뒤에 나오니 그의 이름을 세라라 불렀더라 (창38:28-30)

 

또 에브라임과 므낫세(창48:13-14)로도 표현되었습니다.

 

13오른손으로는 에브라임을 이스라엘의 왼손을 향하게 하고 왼손으로는 므낫세를 이스라엘의 오른손을 향하게 하여 이끌어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매 14이스라엘이 오른손을 펴서 차남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손을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엇바꾸어 얹었더라 (창48:13-14)

 

이 둘도 다른 유사한 경우들과 같이 장자권과 그로 인한 주도권 다툼이 있습니다. It was also represented by Pharez and Zarah, the sons of Tamar by Judah (Gen. 38:28, 29, 30); and by Ephraim and Manasseh (Gen. 48:13, 14); and in both of these, as well as in other similar cases, there is a dispute about the primogeniture and the consequent dominion.

 

신앙과 이웃 사랑은 교회의 자식들이기 때문에, For both faith and charity are the offspring of the church.

 

신앙을 일컬어 ‘남자’라 하였고, 이 장 1절에 나오는 ‘가인’을 가리켰지요, 이웃 사랑을 일컬어 ‘아우’라 불렀습니다. 사19:2, 렘13:14 및 다른 데서들도 말이지요. Faith is called a “man,” as was Cain, in verse 1 of this chapter, and charity is called a “brother,” as in Isa. 19:2; Jer. 13:14; and other places.

 

내가 애굽인을 격동하여 애굽인을 치리니 그들이 각기 형제를 치며 각기 이웃을 칠 것이요 성읍이 성읍을 치며 나라가 나라를 칠 것이며 (사19:2)

 

또 그들로 피차 충돌하여 상하게 하되 부자 사이에도 그러하게 할 것이라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사랑하지 아니하며 아끼지 아니하고 멸하리라 하셨다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13:14)

 

신앙과 이웃 사랑 간 결합을 ‘형제의 계약’(암1:9)이라 합니다. The union of faith and charity is called “the covenant of brethren.” (Amos 1:9)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두로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그 형제의 계약을 기억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로잡은 자를 에돔에 넘겼음이라 (암1:9)

 

가인과 아벨의 상징과 비슷한 것이 방금 말씀드린 야곱과 에서의 상징이었습니다. 야곱 역시 그의 형 에서를 대신하고 싶어 했다는 점에서 그런데요, 호세아를 보면 분명합니다. Similar to the signification of Cain and Abel was that of Jacob and Esau, as just said; in that Jacob also was desirous of supplanting his brother Esau, as is evident also in Hosea:

 

2야곱을 그 행실대로 벌하시며 그의 행위대로 그에게 보응하시리라 3야곱은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To visit upon Jacob his ways, according to his doings will he recompense him; he supplanted his brother in the womb. (호12:2-3)

 

그러나 에서, 곧 에서로 표현된 이웃 사랑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주도권을 쥘 것이라는 내용이, 그들의 아버지 이삭의 예언을 보면 나옵니다. But that Esau, or the charity represented by Esau, should nevertheless at length have the dominion, appears from the prophetic prediction of their father Isaac: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하였더라 By thy sword shalt thou live, and shalt serve thy brother; and it shall come to pass, when thou hast the dominion, that thou shalt break his yoke from off thy neck. (창27:40)

 

또는 같은 건데요, 이방인들의 교회, 혹은 새 교회는 에서로, 유대인들의 교회는 야곱으로 표현됩니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형제로 여겨야 한다는 말을 아주 자주 듣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의 교회, 혹은 원시 교회에서는 이웃 사랑으로 모두가 형제로 불렸습니다. Or what is the same, the church of the gentiles, or new church, is represented by Esau, and the Jewish church is represented by Jacob; and this is the reason for its being so often said that the Jews should acknowledge the gentiles as brethren; and in the church of the gentiles, or primitive church, all were called brethren, from charity.

 

마찬가지로 주님도 누가복음에서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을 형제라 하셨습니다. Such as hear the Word and do it are likewise called brethren by the Lord (Luke 8: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 (눅8:21)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 말씀을 행하는 사람들은 이웃 사랑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들으면서, 혹은 신앙인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행함은 없는, 혹은 이웃 사랑은 없는 사람들, 이들은 형제가 아닙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들을 어리석은 사람들에 비유하셨기 때문입니다. those who hear are such as have faith; those who do are such as have charity; but those who hear, or say that they have faith, and do not, or have not charity, are not brethren, for the Lord likens them unto fools (Matt. 7:24, 26).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마7:24)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마7:26)

 

 

368. ‘들’이 교리를, 그리고 결과적으로 신앙과 이웃 사랑의 교리에 속한 것이면 무엇이나 상징한다는 것은 다음 예레미야 말씀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a “field” signifies doctrine, and consequently whatever belongs to the doctrine of faith and charity, is evident from the Word, as in Jeremiah:

 

들에 있는 나의 산아 네 온 영토의 죄로 말미암아 내가 네 재산과 네 모든 보물과 산당들로 노략을 당하게 하리니 (17:3) O my mountain in the field, I will give thy possessions [facultates] and all thy treasures for a spoil.

 

이 구절에서, ‘들’은 교리를, ‘재산’과 ‘보물’은 신앙의 영적인 부(富), 혹은 신앙의 교리에 속한 것들을 뜻합니다. 다음 말씀도 같습니다. In this passage “field” signifies doctrine; “possessions” and “treasures” denote the spiritual riches of faith, or the things that belong to the doctrine of faith. In the same:

 

레바논의 눈이 어찌 들의 바위를 떠나겠으며 먼 곳에서 흘러내리는 찬물이 어찌 마르겠느냐 (18:14) Shall the snow of Lebanon fail from the rock of my field?

 

신앙의 교리의 결핍 시, 시온을 향하여 선포하시기를, ‘시온은 밭 같이 경작지가 될 것’이라 하십니다. It is declared concerning Zion, when destitute of the doctrine of faith, that she shall be “plowed like a field.” (Jer. 26:18, Micah 3:12)

 

유다의 왕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가 유다의 모든 백성에게 예언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시온은 밭 같이 경작지가 될 것이며 예루살렘은 돌 무더기가 되며 이 성전의 산은 산당의 숲과 같이 되리라 하였으나 (렘26:18)

 

이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시온은 갈아엎은 밭이 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이 되리라 (미3:12)

 

에스겔에서 In Ezekiel:

 

또 그 땅의 종자를 꺾어 옥토에 심되 수양버들 가지처럼 큰 물 가에 심더니 (17:5) He took of the seed of the land, and set it in a field of sowing,

 

교회와 교회의 신앙을 다루고 있습니다. 교리를 일컬어 그 안에 종자가 있는 ‘들’이라 하기 때문입니다. treating of the church and of its faith; for doctrine is called a “field” from the seed in it.

 

같은 본문에서 In the same:

 

들의 모든 나무가 나 여호와는 높은 나무를 낮추고 낮은 나무를 높이며 푸른 나무를 말리고 마른 나무를 무성하게 하는 줄 알리라 나 여호와는 말하고 이루느니라 하라 (17:24) And let all the trees of the field know that I Jehovah bring down the high tree.

 

요엘입니다. In Joel:

 

10밭이 황무하고 토지가 마르니 곡식이 떨어지며 새 포도주가 말랐고 기름이 다하였도다 11농부들아 너희는 부끄러워할지어다 밭의 소산이 다 없어졌음이로다 12밭의 모든 나무가 다 시들었으니 (1:10-12) The field is laid waste, the ground mourneth, for the corn is wasted, the new wine is dried up, the oil languisheth, the husbandmen are ashamed, the harvest of the field is perished, all the trees of the field are withered,

 

여기 ‘밭’은 교리를, ‘나무’는 지식들을, ‘농부들’은 예배자들을 각각 상징합니다. where the “field” signifies doctrine, “trees” knowledges, and “husbandmen” worshipers.

 

시편에서 In David:

 

밭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즐거워할지로다 그 때 숲의 모든 나무들이 여호와 앞에서 즐거이 노래하리니  (96:12) The field shall exult and all that is therein; then shall all the trees of the forest sing,

 

여기서, ‘밭’이 어떻게 기뻐 어쩔 줄 몰라 하겠으며, ‘숲의 모든 나무들’이 어떻게 노래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 안에 있는 것들, 곧 신앙의 지식들 얘기인 것입니다. where it is perfectly evident that the field cannot exult, nor the trees of the forest sing; but things that are in man, which are the knowledges of faith.

 

예레미야에서 In Jeremiah:

 

언제까지 이 땅이 슬퍼하며 온 지방의 채소가 마르리이까 (12:4) How long shall the land mourn, and the herb of every field wither?

 

여기서도 분명한 것은, ‘땅’도, ‘지방의 채소’도 슬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표현들은 황폐함 가운데 있는 사람의 내면 속 어떤 것에 관한 것입니다. where it is also evident that neither the land nor the herbs of the field can mourn; but that the expressions relate to something in man while in a state of vastation.

 

비슷한 구절이 이사야에도 나옵니다. A similar passage occurs in Isaiah:

 

산들과 언덕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칠 것이며 (55:12) The mountains and the hills shall break forth before you into singing, and all the trees of the field shall clap their hands.

 

주님 또한 세상 종말 관련 예언 가운데 신앙의 교리를 가리켜 ‘밭’이라 하십니다. The Lord also in his prediction concerning the consummation of the age calls the doctrine of faith a “field:”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24:40; 17:36) Then shall two be in the field, the one shall be taken and the other left,

 

※ 개역개정 한글 성경에는 눅17:36 본문이 ‘(없음)’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밭’은 신앙의 교리, 곧 참과 거짓 둘 다를 의미합니다. where by a “field” is meant the doctrine of faith, both true and false.

 

‘밭’이 교리를 가리키기 때문에, 신앙의 씨앗을 받아들이는 누구든, 그것이 사람이든, 교회든, 아니면 세상이든, 또한 일컬어 ‘밭’이라 합니다. As a “field” signifies doctrine, whoever receives a seed of faith, whether a man, the church, or the world, is also called a “field.”

 

 

369. 이상으로부터, 그리고 다음 사실들이 이어집니다. 즉, 본문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가 가리키는 것은, 신앙과 이웃 사랑이 둘 다 신앙의 교리로부터 왔으면서도, 자기를 사랑에서 분리하는 신앙은 이웃 사랑을 무시하지 않고는 못 배기며, 그래서 결국은 이웃 사랑의 불을 꺼트린다는 사실입니다. From this then it follows that the words “Cain rose up against his brother Abel, and slew him,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ogether,” denote that while both faith and charity were from the doctrine of faith, yet faith separate from love could not but disregard and thereby extinguish charity;

 

오늘날의 경우를 보면, 이웃 사랑의 행위는 없이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 바로 이런 가정으로 그들은 이웃 사랑의 불을 꺼트리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그들이 알고 있고, 입술로 고백하기를, 사랑 없이 신앙 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as is the case at the present day with those who maintain that faith alone saves, without a work of charity, for in this very supposition they extinguish charity, although they know and confess with their lips that faith is not saving unless there is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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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4

 

7절,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Verse 7, If thou doest well, art thou not exalted? And 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 and 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

 

※ 7절 속뜻

 

 

 

361.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가 상징하는 것은, 네가 선에 대해 호의적이면 너는 이웃 사랑을 가졌다는 것이며,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가 상징하는 것은, 네가 만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이웃 사랑은 전혀 없고, 대신 악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If thou doest well, an uplifting” signifies that if thou art well disposed, thou hast charity; “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 signifies that if thou art not well disposed, thou hast no charity, but evil.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가 상징하는 것은, 이웃 사랑은 신앙과 함께, 같이 지내는 걸 원하지만 그럴 수가 없는 게, 신앙이 이웃 사랑을 다스리고 지배하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 signifies that charity is desirous to be with thee, but cannot because thou desirest to rule over it.

 

 

362. ‘가인’이라 하는 신앙의 교리를 여기서 설명하고 있는데요,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면, 그 결과, 이웃 사랑으로부터도 분리됩니다. 이웃 사랑은 사랑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The doctrine of faith called “Cain” is here described, which in consequence of separating faith from love, separated it also from charity, the offspring of love.

 

어디든지 교회가 있는 곳이면 이단들이 일어나는데요, 사람들은 신앙의 어떤 특별한 조항에 과도한 관심을 기울이다가 그만 그걸 메인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런 게 바로 인간 사고의 본성인데요, 사람은 어떤 것 하나에 과도한 관심을 보이다가 그걸 다른 것 앞에 두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며, 이런 경향은 특히 그가 그걸 자신의 고유한 발견이라고 주장할 때라든지, 그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 부풀어 올랐을 때 그렇습니다. Wherever there is any church, there arise heresies, because while men are intent on some particular article of faith they make that the main thing; for such is the nature of man’s thought that while intent on some one thing he sets it before any other, especially when his imagination claims it as a discovery of his own, and when the love of self and of the world puff him up.

 

그렇게 되면, 그때부터는 모든 것이 다 그것에 들어맞는 것 같고, 그것이 사실임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그는 결국 그것이 맞다 맹세까지 하게 됩니다. 심지어 그것이 거짓이더라도 말이지요. Everything then seems to agree with and confirm it, until at last he will swear that it is so, even if it is false.

 

바로 이런 식으로,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은 신앙을 사랑보다도 더 본질적인 걸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결과적으로 사랑 없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이런 삶에서 비롯된 자아와 판타지 둘 다에 대한 사랑으로 그들은 그런 어처구니없는 확신 가운데 있게 된 것입니다. Just in this way those called “Cain” made faith more essential than love, and as they consequently lived without love, both the love of self and the fantasy thence derived conspired to confirm them in it.

 

 

363. ‘가인’이라 부르는 신앙의 교리의 본질을 이 구절 설명 중 그 부분을 보면 알 수 있는데요, 그걸 보면, 이웃 사랑은 신앙과 결합할 수 있었다는 것, 그러나 신앙이 아닌 이웃 사랑이 주가 되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The nature of the doctrine of faith that was called “Cain” is seen from the description of it in this verse, from which it appears that charity was capable of being joined to faith, but so that charity and not faith should have the dominion.

 

이런 이유로,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를 먼저 거론한 것입니다. 이 표현은 선에 대해 호의적이면 이웃 사랑도 있을 수 있음을 상징합니다. ‘선을 행하다’의 속뜻이 기꺼이 선을 선택하고자 하는 마음인데요,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은 선한 일을 마음먹는 것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On this account it is first said, “If thou doest well art thou not uplifted?” signifying, If thou art well disposed, charity may be present; for to “do well” signifies, in the internal sense, to be well disposed, since doing what is good comes from willing what is good.

 

고대에는 행위와 의지가 하나였습니다. 행위를 보면, 그 의지를 알 수 있었지요. 그때는 위선이 뭔지도 모르던 시절이었습니다. In ancient times action and will made a one; from the action they saw the will, dissimulation being then unknown.

 

‘낯을 들다’가 이웃 사랑이 있다를 상징함은 얼굴에 대해 이미 말씀드린 내용을 보시면 분명한데요, 거기에 보시면, ‘낯을 들다’가 이웃 사랑을 가지고 있음을, 그리고 ‘낯을 떨구다’는 그 반대를 각각 상징하고 있습니다. That an “uplifting” signifies that charity is present 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already said about the face, that to “lift up the face” is to have charity, and that for the “face to fall” is the contrary.

 

 

364. 두 번째로,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가 상징하는 것은, 만일 네가 선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다면 이웃 사랑은 전혀 있을 수 없고 대신 악이 있다는 것입니다. Secondly, it is said, “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 which signifies, If thou art not well disposed, there is no charity present, but evil.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은,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가 준비를 마치고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악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웃 사랑이 전혀 없는 곳에는 오직 무자비함과 증오, 결과적으로는 모든 악만 있기 때문입니다. Everybody can see that “sin lying at the door” is evil ready and desirous to enter; for when there is no charity there are unmercifulness and hatred, consequently all evil.

 

보통, 죄를 일컬어 ‘악마’라고 부르는데, 지옥에 있는 이 악마의 동료들은 사람에게 이웃 사랑이 결핍될 때, 그 사람 마음의 문 아주 가까이 와 있습니다. 마음의 문에서 이 악마와 그의 동료들을 쫓아버리는 오직 유일한 방법은 주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Sin in general is called the “devil,” who, that is, his crew of infernals, is ever at hand when man is destitute of charity; and the only means of driving away the devil and his crew from the door of the mind is love to the Lord and toward the neighbor.

 

 

365. 세 번째입니다.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가 상징하는 것은, 이웃 사랑은 신앙과 함께, 같이 지내기를 원하지만 그럴 수가 없는 게, 신앙은 이웃 사랑을 다스리고 지배하려고 하기 때문이며, 그것은 질서에 반(反)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In the third place it is said, “Un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 by which is signified that charity is desirous to abide with faith, but cannot do so because faith wishes to rule over it, which is contrary to order.

 

신앙이 주도권을 쥐며, 지배하려고 하는 한, 그런 건 전혀 신앙이 아닙니다. 오직 이웃 사랑이 다스릴 때만 신앙이 됩니다. 위에서 보여드린 것처럼 이웃 사랑이 신앙의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So long as faith seeks to have the dominion, it is not faith, and only becomes faith when charity rules; for charity is the principal of faith, as was shown above.

 

이웃 사랑은 불에 비유할 수 있겠는데요, 불은 열과 빛의 본질이지요. 열과 빛이 불에서 나오기 때문인데, 분리 상태에 있는 신앙은 마치 불의 빛은 빛인데 열 없는 빛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빛이 있어도 만물이 무기력하게 죽어가는 겨울철 빛입니다. Charity may be compared to flame, which is the essential of heat and light, for heat and light are from it; and faith in a state of separation may be compared to light that is without the heat of flame, when indeed there is light, but it is the light of winter in which everything becomes torpid and d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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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3:20-24

 

20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And the man [homo] called his wife’s name Eve, because she was the mother of all living.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And Jehovah God made for the man and for his wife coats of skin, and clothed them. 22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And Jehovah God said, Behold, the man is become as one of us, knowing good and evil; and now lest he put forth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ves, and eat, and live to eternity, 23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Therefore Jehovah God sent him forth from the garden of Eden, to till the ground from which he was taken. 24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And he cast out the man; and he made to dwell from the east toward the garden of Eden cherubim, and the 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 to keep the way of the tree of lives.

 

개요

 

280. 태고(太古) 교회와, 사라진 사람들이 여기서 간략하게 다루어집니다; 즉, 그 교회가 끝났을 때, 결국 홍수로 이어진 그 후손들을 포함한 이야기입니다. The most ancient church, and those who fell away, are here summarily treated of; thus also its posterity down to the flood, when it expired.

 

 

281. 20절은, 천적(天的, celestial)이었던 태고 교회에 관한 것입니다. 주님 신앙의 생명으로 시작한 교회이며, 이 교회를 가리켜 ‘하와’(Eve),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 하였습니다. (20절) Of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was celestial, and from the life of faith in the Lord, called “Eve,” and the “mother of all living.” (verse 20)

 

 

282. 21절은, 그 첫 번째 후손에 관한 것으로, 그들에게는 천적 영적 선이 있었습니다; 이어 그 두 번째와 세 번째 후손에 관해서는, 그들에게는 자연적 선이 있었고, 그것을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지으신 가죽옷’으로 상징하였습니다. (21절) Of its first posterity, in which there was celestial spiritual good; and of its second and third, in which there was natural good, signified by the “coat of skin which Jehovah God made for the man and his wife.” (verse 21)

 

 

283. 22절은, 네 번째 후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거기서 자연적 선이 소멸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만일 그들이 신앙의 천적인 것들 안에서 새롭게 빚어지거나 가르침을 받고자 하였더라면, 그들은 소멸되어 버리고 말았을 텐데요,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의 의미가 바로 이런 내용입니다. (22절) Of the fourth posterity, in which natural good began to be dissipated, and which, had they been created anew or instructed in the celestial things of faith, would have perished, which is meant by, “Lest he put forth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ves, and eat, and live to eternity.” (verse 22)

 

 

284. 23절은, 다섯 번째 후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후손에 이르러는 드디어 모든 선과 진리가 박탈되었고, 그리고 거듭남 이전 본래의 상태로 돌아갔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의 의미가 이런 내용입니다. (23절) Of the fifth posterity, which was deprived of all good and truth, and was reduced to the state in which they had been previous to regeneration, which is meant by his being “sent forth out of the garden of Eden to till the ground from which he was taken.” (verse 23)

 

 

285. 24절은, 여섯 번째, 그리고 일곱 번째 후손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 후손들은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기억-지식을 박탈당했고, 그들의 본성에는 아주 더러운 사랑들과 신념들만 남았습니다; Of the sixth and seventh posterities, in that they were deprived of all memory-knowledge of what is good and true, and were left to their own filthy loves and persuasions;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이들로 말미암아 신앙에 관한 거룩한 것들이 모독을 당할 것이기 때문인데요,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가 상징하는 것이 이런 내용입니다. (24절) this being provided lest they should profane the holy things of faith, which is signified by his being “driven out, and cherubim being made to dwell at the garden, with the flame of a sword, to keep the way of the tree of lives.” (verse 24)

 

배경

 

286. 이 장과 앞의 장들, 그리고 지금 보고 있는 이 절들에 이르기까지 다루어지고 있는 것은 태고 시대 사람들과 그들의 거듭남에 관한 내용입니다: 먼저, 들짐승처럼 살았던 사람들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들은 그러나 결국 영적인 사람들이 되었지요; 그다음은, 천적 인간이 된 사람들에 관한 내용입니다. 태고 교회를 구성한 사람들이 바로 이들입니다; 그 뒤에, 사라진 사람들과 그들의 자손들, 차례대로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후손들과 홍수 때까지 이른 그들의 계승자들에 관한 내용입니다. This and the preceding chapters, down to the verses now under consideration, treat of the most ancient people and of their regeneration; first, of those who lived like wild animals, but at length became spiritual men; then of those who became celestial men, and constituted the most ancient church; afterwards of those who fell away, and their descendants, in regular order through the first, second, and third posterities and their successors, down to the flood.

이 장을 포함, 이어지는 절들을 통해, 태고 교회의 사람이 형성된 때부터 홍수 때까지 이 기간에 일어난 일들에 대한 개요를 만나게 됩니다; 즉, 이것이 앞서 다룬 모든 내용, 곧 창세기 맨 앞 첫 세 장의 결론입니다. In the verses following, which conclude the chapter, we have a recapitulation of what occurred from the period when the man of the most ancient church was formed, until the flood; thus it is a conclusion to all that goes bef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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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4

 

6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Verse 6,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y art thou wroth, and why are thy faces fallen?

 

※ 6절 속뜻

 

 

 

35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가 의미하는 것은 양심에 진행된 각성(覺醒)으로, 구체적으로는, 그의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를 의미하며, 이것은 앞에서처럼 이웃 사랑이 떠나버림, 내면이 변함을 상징합니다. “Jehovah said unto Cain,” means that conscience dictated; that his “anger was kindled, and that his countenance fell,” signifies as before that charity had departed, and that the interiors were changed.

 

※ 211번 글(창3:7)에서는 an interior dictate, 즉, 내적 직관 정도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해 보입니다.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창3:7)

 

※ 218번 글(창3:8)에서는 an internal dictate, 내면의 음성 정도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할 듯...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창3:8)

 

 

360.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가 양심에 진행된 각성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계속 확증해야 할까요? 앞에 비슷한 구절들의 설명들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That “Jehovah said unto Cain” means that conscience dictated, needs no confirmation, as a similar passage was explained above.

 

※ 영어 dictate로 표현된 이 말은 정리하면, 어떤 영적 실상을 직관적으로 깨닫게 되는 영적 각성, 통찰, 음성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쓰레기 더미 속에서 깜깜한 밤을 보내다가 동이 터 빛이 비치면 그때 비로소 ‘아, 내가 밤새 이런 쓰레기 더미 가운데 있었구나!’ 깨닫는 것처럼 말입니다...

 

퍼셉션을 받아 선악을 분별할 수 있게 되는 것과 비슷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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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4

 

5절,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Verse 5, And unto Cain and unto his offering he looked not, and Cain’s anger was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ell.

 

※ 5절 속뜻

 

 

 

355. ‘가인’은 지금까지 말씀드린 대로, 사랑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이나 분리 가능성을 용인하는 그런 교리를 상징합니다.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는 앞서와 같이 그런 예배는 받으실 수가 없었음을 상징합니다. By “Cain,” as has been stated, is signified faith separated from love, or such a doctrine as admits of the possibility of this separation; by his “offering not being looked to” is signified as before that his worship was unacceptable.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는 속에 있는 것들이 변했음을 상징합니다. By “Cain’s anger being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alling” is signified that the interiors were changed.

 

‘분’(憤, anger)은 이웃 사랑이 떠나버렸음을, ‘안색’(顔色, faces)은 속에 있는 것들을 각각 가리키며, 그것들이 변하는 걸 ‘안색이 변했다’(fall)고 합니다. By “anger” is denoted that charity had departed; and by the “faces,” the interiors, which are said to “fall” when they are changed.

 

 

356. ‘가인’이 사랑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이나 이런 분리를 용인하는 교리를, 그리고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가 그런 자의 예배는 받으실 수가 없음을 각각 상징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앞서 보여드렸습니다. That by “Cain” is signified faith separated from love, or a doctrine that admits of this separation; and that “to his offering he looked not” signifies that his worship was not acceptable, has been shown before.

 

 

357. ‘가인이 분하여’는 이웃 사랑이 떠나버렸음을 상징함이 분명한 것은, 이것이 나중에 그가 그의 아우 아벨을 죽이는 것과 관련되기 때문이며, 아벨은 이웃 사랑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That “Cain’s anger was kindled” signifies that charity had departed is evident from what is afterwards related of his killing his brother Abel, by whom is signified charity.

 

분노는 무엇이든지 자아 사랑 및 그 탐욕과 배치되기만 하면 야기되는 아주 일반적인 악감정입니다. Anger is a general affection resulting from whatever is opposed to self-love and its cupidities.

 

이것은 악한 영들의 세계에서는 아주 생생하게 지각됩니다. 거기는 이웃 사랑은 전혀 없고, 대신 증오로 가득한 악한 영들의 결과, 주님을 대적하는 전반적인 분노가 있기 때문이며,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호의적이지 않은 것에는 무엇이든지 신경질적으로 안티를 드러내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분노가 이런 안티들을 생생하게 합니다. This is plainly perceived in the world of evil spirits, for there exists there a general anger against the Lord, in consequence of evil spirits being in no charity, but in hatred, and whatever does not favor self-love [amori proprio] and the love of the world, excites opposition, which is manifested by anger.

 

말씀에서 여호와에 관한 서술 시, ‘분노’, ‘진노’, 심지어 ‘노함, 격노’까지 자주 사용됩니다만 그러나 이런 것들은 사람에게나 쓰는 것이며, 단지 위에서 언급한 어떤 이유로 그렇게 표현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말씀을 읽다 보면 여호와의 무슨 속성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In the Word, “anger,” “wrath,” and even “fury,” are frequently predicated of Jehovah, but they are of man, and are attributed to Jehovah because it so appears, for a reason mentioned above.

 

그래서 시편에 기록되기를 Thus it is written in David:

 

49그의 맹렬한 노여움과 진노와 분노와 고난 곧 재앙의 천사들을 그들에게 내려보내셨으며 50그는 진노로 길을 닦으사 그들의 목숨이 죽음을 면하지 못하게 하시고 그들의 생명을 전염병에 붙이셨으며 (시78:49-50) He sent against them the anger of his nostril, and wrath, and fury, and trouble, and an immission of evil angels; he hath weighed a path for his anger, he withheld not their soul from death. (Ps. 78:49–50)

 

여호와는 누구에게도 화를 내신 적이 없으십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화를 자초하는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 가운데 재앙의 천사들을 보내시지도 않습니다. 반대로 사람이 그들을 자기한테로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Not that Jehovah ever sends anger upon anyone, but that men bring it upon themselves; nor does he send evil angels among them, but man draws them to himself.

 

이런 이유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좀 더 보면, ‘그는 진노로 길을 닦으사 그들의 목숨이 죽음을 면하지 못하게 하시고’; 또한 그래서 이사야에서도,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갈 것이라 무릇 그에게 노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리라’ (사45:24)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분명한 것은, ‘분냄’은 악, 또는 같은 의미이지만, 이웃 사랑으로부터 떠남을 상징합니다. And therefore it is added, that he “hath weighed a path for his anger, and withheld not their soul from death”; and therefore it is said in Isaiah, “To Jehovah shall he come, and all that were incensed against him shall be ashamed” (Isa. 45:24), whence it is evident that “anger” signifies evils, or what is the same, a departure from charity.

 

 

358. ‘안색이 변하니’가 내면이 변했음을 가리킨다는 것은 ‘얼굴’과 ‘변함’의 상징으로부터 분명합니다. That by the “faces falling” is signified that the interiors were change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face” and of its “falling.”

 

얼굴은, 고대인들에게는, 속에 있는 것들을 상징했습니다. 속에 있는 것들이 겉으로 얼굴을 통해서 반영되기 때문인데요, 태곳적에는 사람들이 겉과 속이 완전히 일치하는 얼굴이었고, 그래서 사람들은 타인의 얼굴을 보고 그 사람이 어떤 기질이나 마인드의 사람인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The face, with the ancients, signified internal things, because internal things shine forth through the face; and in the most ancient times men were such that the face was in perfect accord with the internals, so that from a man’s face everyone could see of what disposition or mind he was.

 

그들은 속사정하고는 다른 얼굴을 하고 다니는 것을 무슨 괴물 같은 걸로 여겼습니다. They considered it a monstrous thing to show one thing by the face and think another.

 

무슨 척, 무슨 체 하는 것과 속이는 것은 그래서 혐오스럽게 여겨졌고, 이상과 같은 사유로, 얼굴을 보면 그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을 알 수 있었습니다. Simulation and deceit were then considered detestable, and therefore the things within were signified by the face.

 

이웃 사랑이 얼굴에 나타나 빛날 때, 그 얼굴을 일컬어 ‘위로 들린다’ 하고, 그 반대는 ‘아래로 떨어진다’ 합니다. 그래서 축복기도문에서 주님을,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시는’ 주님으로 서술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민6:26)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시4:6)

 

이것이 상징하는 것은 주님은 사람에게 인애(仁愛, cherity)를 베푸신다는 사실입니다. When charity shone forth from the face, the face was said to be “lifted up”; and when the contrary occurred, the face was said to “fall”; wherefore it is also predicated of the Lord that he “lifts up his faces upon man,” as in the benediction (Num. 6:26; and in Ps. 4:6), by which is signified that the Lord gives charity to man.

 

‘얼굴을 떨굼’이 의미하는 바는 예레미야에 보면 이렇습니다. What is meant by the “face falling,” appears from Jeremiah: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3:12) I will not make my face to fall toward you, for I am merciful, saith Jehovah. (Jer. 3:12)

 

‘여호와의 얼굴’은 자비입니다. 그가 어떤 사람을 향해 ‘그 얼굴을 드심’은 그가 자비하심 가운데 그를 향해 인애를 베푸심인 반면, 그 반대는, 그가 ‘얼굴을 숙이심’, 곧, 사람의 얼굴이 변한 것, ‘안색이 변하니’입니다. The “face of Jehovah” is mercy, and when he “lifts up his face” upon anyone, it signifies that out of mercy he gives him charity; and the reverse when he “makes the face to fall,” that is, when man’s face fal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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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보

2022-05-22(D1)-제10권21호통456호.pdf
0.27MB

 

2. 설교 원고 및 유튜브

2022-05-22(D1)-주일예배(2308, 창3,9-10, AC.226-228), '네가 어디 있느냐'.pdf
0.46MB

https://youtu.be/dGgp-tZzyOk

 

 

3. 축도 원고 및 유튜브

2022-05-22(D1)-주일예배(2308, 창3,9-10, AC.226-228), '네가 어디 있느냐', 순서, 축도.pdf
0.23MB

https://youtu.be/K6U503kejP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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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4

 

4절,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Verse 4, And Abel, he also brought of the firstlings of his flock, and of the fat thereof. And 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ing:

 

※ 4절 속뜻

 

 

 

350. 여기 ‘아벨’은 앞서와 같이 이웃 사랑(charity, 인애, 자선, 기부 등)을 상징합니다. ‘양의 첫 새끼’는 거룩한 것을 상징하는데, 이 거룩은 홀로 주님 한 분에게만 해당하는 것입니다. ‘기름’은 천적(天的, the celestial) 그 자체를 상징하며, 이 역시 주님에게만 속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는 이웃 사랑의 행위들과 이웃 사랑으로 드리는 모든 예배들, 그래서 주님을 아주 기쁘시게 하는 예배들을 각각 상징합니다. By “Abel” here as before is signified charity; and by the “firstlings of the flock” is signified that which is holy, which is of the Lord alone; by “fat” is signified the celestial itself, which also is of the Lord; and by “Jehovah looking unto Abel, and to his offering,” that the things of charity, and all worship grounded in charity, were well-pleasing to the Lord.

 

 

351. ‘아벨’은 앞서 보여드린 대로 이웃 사랑을 상징합니다. That “Abel” signifies charity has been shown before.

 

이웃 사랑은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를 의미합니다. 자기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람은 또한 슬픔 중에 있는 이웃을 향해 마치 자신을 향해 연민을 느끼듯 느끼기 때문입니다. By charity is meant love toward the neighbor, and mercy; for he who loves his neighbor as himself is also compassionate toward him in his sufferings, as toward himself.

 

 

352. ‘양의 첫 새끼’가 홀로 주님 한 분에게 속한 것을 상징한다는 것은 표상 교회에서 첫 새끼 혹은 초태생(初胎生)은 모두 거룩했다는 사실을 보면 분명합니다. 그들은 주님과 관련되었는데, 주님은 홀로 ‘초태생’, ‘장자(長子)’이시기 때문입니다. That the “firstlings of the flock” signify that which is of the Lord alone is evident from the firstlings or firstborn in the representative church, which were all holy, because they had relation to the Lord, who alone is the “firstborn.”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들이 ‘초태생’입니다. Love and the faith thence derived are the “firstborn.”

 

모든 사랑은 주님의 것입니다. 요만큼의 사랑도 사람의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 홀로 ‘초태생’이신 것입니다. All love is of the Lord, and not one whit of it is of man, therefore the Lord alone is the “firstborn.”

 

이것을 고대 교회들에서는 사람과 짐승 가운데 처음 난 것을 거룩히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것으로 표현하였습니다. This was represented in the ancient churches by the firstborn of man and of beast being sacred to Jehovah; (출13:2, 12, 15)

 

2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 12너는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과 네게 있는 가축의 태에서 처음 난 것을 다 구별하여 여호와께 돌리라 수컷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15그 때에 바로가 완악하여 우리를 보내지 아니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모든 것은 사람의 장자로부터 가축의 처음 난 것까지 다 죽이셨으므로 태에서 처음 난 모든 수컷들은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려서 내 아들 중에 모든 처음 난 자를 다 대속하리니 (출13:2, 12, 15)

 

그리고 속뜻으로 사랑을 상징하는 레위 자손은, 속뜻으로 신앙을 상징하는 르우벤과 시므온의 뒤를 따라 셋째로 태어났음에도, 모든 초태생을 대신하여 받아들여졌고, 제사장직을 받들게 되었습니다. and by the tribe of Levi, which in the internal sense signifies love—though Levi was born after Reuben and Simeon who in the internal sense signify faith—being accepted instead of all the firstborn, and constituting the priesthood. (민3:40-45; 8:14-20)

 

40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의 처음 태어난 남자를 일 개월 이상으로 다 계수하여 그 명수를 기록하라 41나는 여호와라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태어난 자 대신에 레위인을 내게 돌리고 또 이스라엘 자손의 가축 중 모든 처음 태어난 것 대신에 레위인의 가축을 내게 돌리라 42모세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대로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태어난 자를 계수하니 43일 개월 이상으로 계수된 처음 태어난 남자의 총계는 이만 이천이백칠십삼 명이었더라 44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45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태어난 자 대신에 레위인을 취하고 또 그들의 가축 대신에 레위인의 가축을 취하라 레위인은 내 것이라 나는 여호와니라 (민3:40-45)

 

14너는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구별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내게 속할 것이라 15네가 그들을 정결하게 하여 요제로 드린 후에 그들이 회막에 들어가서 봉사할 것이니라 16그들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게 온전히 드린 바 된 자라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초태생 곧 모든 처음 태어난 자 대신 내가 그들을 취하였나니 17이스라엘 자손 중에 처음 태어난 것은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내게 속하였음은 내가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태어난 자를 치던 날에 그들을 내게 구별하였음이라 18이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태어난 자 대신 레위인을 취하였느니라 19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취하여 그들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주어 그들로 회막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봉사하게 하며 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성소에 가까이 할 때에 그들 중에 재앙이 없게 하려 하였음이니라 20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께서 레위인에 대하여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을 다 따라 레위인에게 행하였으되 곧 이스라엘 자손이 그와 같이 그들에게 행하였더라 (민8:14-20)

 

주님은 주님의 인성 관련, 장자(長子)이십니다. 그래서 시편에 기록되기를 Of the Lord as the firstborn of all, with respect to his human essence, it is thus written in David:

 

26그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 27내가 또 그를 장자로 삼고 세상 왕들에게 지존자가 되게 하며 (89:26-27) He shall call me, my Father, my God, and the rock of my salvation. I will also make him my firstborn, high above the kings of the earth.

 

그리고 계시록에도 And in John: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1:5) Jesus Christ the firstborn of the dead, and the prince of the kings of the earth.

 

예배의 장자는 주님을, 교회의 장자는 신앙을 각각 상징함을 잘 관찰하시기 바랍니다. Observe that the firstborn of worship signify the Lord, and the firstborn of the church, faith.

 

 

353. ‘기름’은 천적(天的) 그 자체를 상징하는데, 이 천적이라는 것은 또한 주님에게 속한 것입니다. By “fat” is signified the celestial itself, which is also of the Lord.

 

사랑에 속한 모든 것이 천적입니다. The celestial is all that which is of love.

 

신앙 또한 그것이 사랑으로부터 나올 때는 천적입니다. Faith also is celestial when it is from love.

 

이웃 사랑은 천적입니다. Charity is the celestial.

 

모든 이웃 사랑의 선도 천적입니다. All the good of charity is the celestial.

 

희생제물들 몸 안 여러 종류의 기름들이 가리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하나 구별하여 말씀드리면, 간 또는 태를 덮고 있는 기름, 콩팥 기름, 창자 위와 전체를 덮고 있는 기름인데요, 이 기름들은 거룩하였고, 단 위 번제로 드려지는 것들이었습니다. All these were represented by the various kinds of fat in the sacrifices, and distinctively by that which covered the liver, or the caul; by the fat upon the kidneys; by the fat covering the intestines, and upon the intestines; which were holy, and were offered up as burnt offerings upon the altar. (Exod. 29:13, 22; Lev. 3:3, 4, 14; 4:8–9, 19, 26, 31, 35; 8:16, 25)

 

13내장에 덮인 모든 기름과 간 위에 있는 꺼풀과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을 가져다가 제단 위에 불사르고 22또 너는 그 숫양의 기름과 기름진 꼬리와 그것의 내장에 덮인 기름과 간 위의 꺼풀과 두 콩팥과 그것들 위의 기름과 오른쪽 넓적다리를 가지라 이는 위임식의 숫양이라 (출29:13, 22)

 

3그는 또 그 화목제의 제물 중에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곧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4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낼 것이요 14그는 그 중에서 예물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곧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레3:3-4, 14)

 

8또 그 속죄제물이 된 수송아지의 모든 기름을 떼어낼지니 곧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9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내되 19그것의 기름은 다 떼어 제단 위에서 불사르되 26그 모든 기름은 화목제 제물의 기름 같이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같이 제사장이 그 범한 죄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 31그 모든 기름을 화목제물의 기름을 떼어낸 것 같이 떼어내 제단 위에서 불살라 여호와께 향기롭게 할지니 제사장이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35그 모든 기름을 화목제 어린 양의 기름을 떼낸 것 같이 떼내어 제단 위 여호와의 화제물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같이 제사장이 그가 범한 죄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레4:8-9, 19, 26, 31, 35)

 

16또 내장에 덮인 모든 기름과 간 꺼풀과 두 콩팥과 그 기름을 가져다가 모세가 제단 위에 불사르고 25그가 또 그 기름과 기름진 꼬리와 내장에 덮인 모든 기름과 간 꺼풀과 두 콩팥과 그 기름과 오른쪽 뒷다리를 떼어내고 (레8:16, 25)

 

그래서 이 기름들을 일컬어 ‘이는 화제로 드리는 음식이요 향기로운 냄새라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레3:14, 16) 하였습니다. They were therefore called the “bread of the offering by fire for a rest unto Jehovah.” (Lev. 3:14, 16)

 

14그는 그 중에서 예물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곧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16제사장은 그것을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로 드리는 음식이요 향기로운 냄새라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레3:14, 16)

 

같은 이유로 유대인들은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레3:17; 7:23, 25)라고 하는 이 말씀에 의해 모든 종류의 짐승 기름 먹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For the same reason the Jewish people were forbidden to eat any of the fat of the beasts by what is called “a perpetual statute throughout your generations.” (Lev. 3:17; 7:23, 25)

 

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 이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레3:17)

 

23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소나 양이나 염소의 기름을 먹지 말 것이요 25사람이 여호와께 화제로 드리는 제물의 기름을 먹으면 그 먹는 자는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레7:23, 25)

 

이것은 교회가 천적인 것들은 말할 것도 없고, 내적인 것조차 인정하지 않는 그런 상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This was because that church was such that it did not even acknowledge internal, much less celestial things.

 

[2] ‘기름’이 천적인 것들과 이웃 사랑의 선들을 가리킨다는 것은 예언서들을 보면 분명한데요, 이사야입니다. That “fat” signifies celestial things, and the goods of charity, is evident in the prophets; as in Isaiah: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55:2) Wherefore do ye weigh silver for that which is not bread, and your labor for that which satisfieth not? Attend ye diligently unto me, and eat ye that which is good, and let your soul delight itself in fatness.

 

그리고 예레미야 And in Jeremiah:

 

내가 기름으로 제사장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며 내 복으로 내 백성을 만족하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1:14) I will fill the soul of the priests with fatness, and my people shall be satiated with my good,

 

여기서 기름은 정말 지방 덩어리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천적 영적 선을 가리킨다는 것이 너무나 자명한데요, where it is very evident that fatness is not meant, but celestial spiritual good.

 

그래서 시편입니다. So in David:

 

8그들이 주의 집에 있는 살진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물을 마시게 하시리이다 9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36:8-9) They are filled with the fatness of thy house, and thou makest them drink of the river of thy deliciousnesses. For with thee is the fountain of lives; in thy light we see light.

 

여기 ‘살진 것’, ‘생명의 원천’은 천적인 것, 곧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을, ‘복락의 강물’과 ‘빛’은 영적인 것, 곧 사랑으로 말미암은 신앙에 속한 영적인 것을 각각 가리킵니다. Here “fatness” and the “fountain of lives” signify the celestial, which is of love; and the “river of deliciousnesses,” and “light,” the spiritual, which is of faith from love.

 

다시 시편입니다. Again in David: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나의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63:5) My soul shall be satiated with marrow and fatness, and my mouth shall praise thee with lips of songs,

 

여기도 같습니다. ‘기름’은 천적인 것을, ‘기쁜 입술’은 영적인 것을 가리킵니다. where in like manner “fat” denotes the celestial, and “lips of songs” the spiritual.

 

이것이 천적인 걸 가리키는 것이 분명한 이유는 그것이 영혼을 아주 충분히 만족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That it is what is celestial is very evident, because it will satiate the soul.

 

같은 이유로, 땅의 첫 소산인 첫 열매들을 가리켜 ‘기름’(민18:12)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For the same reason the first fruits, which were the firstborn of the earth, are called “fat.” (Num. 18:12)

 

그들이 여호와께 드리는 첫 소산 곧 제일 좋은 기름과 제일 좋은 포도주와 곡식을 네게 주었은즉 (민18:12)

 

[3] 천적인 것들은 도저히 셀 수 없는 속(屬, genera)으로, 그리고 더욱 더 종(種)으로 세분되기 때문에, 모세가 백성 앞에서 말하여 낭송한 노래를 통해 다음과 같이 표현되었습니다. As celestial things are of innumerable genera, and still more innumerable species, they are described in general in the song which Moses recited before the people:

 

소의 엉긴 젖과 양의 젖과 어린 양의 기름과 바산에서 난 숫양과 염소와 지극히 아름다운 밀을 먹이시며 또 포도즙의 붉은 술을 마시게 하셨도다 (32:14) Butter of kine, and milk of the flock, with fat of lambs and of rams, the sons of Bashan, and of goats, with the fat of the kidneys of wheat; and thou shalt drink the blood of the grape, unmixed.

 

이 구절의 속뜻을 모르고서는 그 어느 누구도 이 표현들이 상징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It is impossible for anyone to know the signification of these expressions except from the internal sense.

 

속뜻을 모르면, 위 구절의 표현들, ‘소의 엉긴 젖’, ‘양의 젖’, ‘어린 양의 기름’, ‘바산에서 난 숫양과 염소’, ‘지극히 아름다운 밀’, ‘포도즙의 붉은 술’은 그저 단어의 나열일 뿐 다른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겉으로는 그럴지라도 이 표현들은 그 전체로나 각각으로나 천적인 것들의 속과 종, 곧 모든 체계를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Without the internal sense, such expressions as the “butter of kine,” the “milk of sheep,” the “fat of lambs,” the “fat of rams and goats,” the “sons of Bashan,” the “fat of the kidneys of wheat,” and the “blood of the grape,” would be words and nothing more, and yet they all and each signify genera and species of celestial things.

 

 

354.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다’는 것은, 이웃 사랑에 속한 것들, 곧 선행과 이에 기반한 모든 예배가 주님을 무척 기쁘시게 함을 가리킨다는 것은 앞에 ‘아벨’과 ‘제물’에 대한 글에서 설명했습니다. That “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ing,” signifies that the things of charity, and all worship grounded therein, are pleasing to the Lord, has been explained before, as regards both “Abel,” and his “offe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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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4

 

3절,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Verse 3, And at the end of days it came to pass that Cain brought of the fruit of the ground an offering to Jehovah.

 

※ 3절 속뜻

 

 

 

346. ‘세월이 지난 후에’는 시간의 경과를; ‘땅의 소산’은 이웃 사랑이 없는 신앙으로 한 행위들을; ‘여호와께 드리는 제물’은 그런 신앙으로 드리는 예배를 각각 의미합니다. By the “end of days” is meant in process of time; by the “fruit of the ground,” the works of faith without charity; and by “an offering to Jehovah,” worship thence derived.

 

 

347. ‘세월이 지난 후에’가 시간의 경과를 상징한다는 것은 누가 봐도 분명합니다. That by the “end of days” is signified in process of time, is evident to all.

 

처음에는, 그리고 아직 상황이 심각하지 않았을 때는, 여기 ‘가인’이라 부르는 교리가 그렇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자녀를 ‘여호와로 말미암았다’ 한 것을 보면 분명합니다. At first, and while there was simplicity in it, the doctrine here called “Cain” does not appear to have been so unacceptable as it became afterwards, as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y called their offspring a “man Jehovah.”

 

그래서 처음엔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세월이 지난 후에’, 혹은 시간이 그만큼 흐른 것으로 표현해야 할 만큼 그 정도로 분리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모든 참 신앙의 교리들이 다 그런 것처럼 말입니다. Thus at first faith was not so far separated from love as at the “end of days,” or in process of time; as is wont to be the case with every doctrine of true faith.

 

 

348. ‘땅의 소산’이 이웃 사랑이 없는 신앙으로 한 행위들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또한 다음과 같이도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이웃 사랑이 전혀 없는 신앙으로 한 행위들은 절대로 신앙의 행위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며, 그 자체로 죽은 것입니다. 그런 일들은 그저 겉 사람의 행위들이기 때문입니다. That by the “fruit of the ground” are meant the works of faith without charity, appears also from what follows; for the works of faith devoid of charity are works of no faith, being in themselves dead, for they are solely of the external man.

 

예레미야에 이런 것에 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Of such it is written in Jeremiah:

 

1여호와여 내가 주와 변론할 때에는 주께서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 2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었거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들의 마음은 머니이다 4언제까지 이 땅이 슬퍼하며 온 지방의 채소가 마르리이까 짐승과 새들도 멸절하게 되었사오니 이는 이 땅 주민이 악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그가 우리의 나중 일을 보지 못하리라 함이니이다 (12:1-2, 4) Wherefore doth the way of the wicked prosper? Thou hast planted them, they also have taken root; they have gone on, they also bear fruit; thou art near in their mouth, and far from their reins; how long shall the land mourn, and the herb of every field wither?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들의 마음은 머니이다’는 이웃 사랑과 분리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 ‘이 땅이 슬퍼하며’라는 말을 듣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Near in the mouth, but far from the reins” denotes those who are of faith separated from charity, concerning whom it is said that “the land mourns.”

 

같은 예언서에서 이런 일들을 일컬어 ‘그의 행실대로’라 하고 있습니다. In the same prophet such works are called the “fruit of works”:

 

9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10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17:9-10) The heart is deceitful [supplantativum] above all things, and it is desperate, who can know it? I Jehovah search the heart, I try the reins, even to give to every man according to his ways, and according to the fruit of his works.

 

미가서에서 In Micah:

 

그 땅은 그 주민의 행위의 열매로 말미암아 황폐하리로다 (7:13) The land shall be desolate because of them that dwell therein, for the fruit of their works.

 

이런 ‘열매’는 아무 열매도 아니며, 이런 ‘행위’는 죽은 행위라는 사실, 그리고 열매와 뿌리 둘 다 진멸된다는 선언이 아모스서에 나옵니다. That such “fruit” is no fruit, or that the “work” is dead, and that both fruit and root perish, is thus declared in Amos:

 

내가 아모리 사람을 그들 앞에서 멸하였나니 그 키는 백향목 높이와 같고 강하기는 상수리나무 같으나 내가 그 위의 열매와 그 아래의 뿌리를 진멸하였느니라 (2:9) I destroyed the Amorite before them, whose height was like the height of the cedars, and he was strong as the oaks; yet I destroyed his fruit from above, and his roots from beneath.

 

그리고 시편에서, And in David:

 

왕이 그들의 후손을 땅에서 멸함이여 그들의 자손을 사람 중에서 끊으리로다 (21:10) Their fruit shalt thou destroy from the earth, and their seed from the sons of man.

 

그러나 이웃 사랑의 행위들은 살아 있으며, 이런 행위들에 관하여, 이사야에 보면, 그들은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으리니’라 선포되고 있습니다. But the works of charity are living, and of them it is declared that they “take root downward, and bear fruit upward;” as in Isaiah:

 

유다 족속 중에 피하여 남은 자는 다시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으리니 (37:31) The remnant that is escaped of the house of Judah shall again take root downward, and bear fruit upward.

 

‘위로 열매를 맺으리니’는 이웃 사랑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To “bear fruit upward” is to act from charity.

 

같은 예언서에서, 그런 열매를 일컬어 ‘영화로운 소산’이라 하고 있습니다. Such fruit is called the “fruit of excellence,” in the same prophet:

 

그 날에 여호와의 싹이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요 그 땅의 소산은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를 위하여 영화롭고 아름다울 것이며 (4:2) In that day shall the shoot of Jehovah be beautiful and glorious, and the fruit of the earth excellent and comely for them that are escaped of Israel.

 

그것은 또한 ‘구원의 열매’이며, 같은 예언서에서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It is also the “fruit of salvation,” and is so called by the same prophet:

 

하늘이여 위로부터 공의를 뿌리며 구름이여 의를 부을지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싹트게 하고 공의도 함께 움돋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가 이 일을 창조하였느니라 (45:8) Drop down, ye heavens, from above, and let the skies pour down righteousness; let the earth open, and let them bring forth the fruit of salvation, and let righteousness spring up together; I Jehovah will create it.

 

 

349. ‘제물’이 예배를 의미한다는 것은 유대 교회의 표상들을 보면 분명합니다. 유대 교회에서는 모든 종류의 희생제물들 및 땅의 첫 열매들과 그 모든 소산물, 그리고 초태생(初胎生)의 봉헌물 등을 가리켜 ‘제물들’이라 하였고, 그들의 예배는 이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That by an “offering” is meant worship is evident from the representatives of the Jewish church, in which sacrifices of every kind, as well as the first fruits of the earth and of all its produce, and the oblation of the firstborn, were called “offerings,” in which their worship consisted.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 천국의 어떤 것들을 표현하며, 모든 것이 주님을 가리키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분명한 사실은, 참 예배는 이런 제물들로 상징된다는 사실입니다. And as they all represented heavenly things, and all had reference to the Lord, it must be obvious to everyone that true worship was signified by these offerings.

 

어떤 표상이라고 하면서 정작 표현하는 게 없거나, 어떤 겉보기에 종교이면서 정작 무슨 내적인 건 없고 대신 무슨 우상이나 죽음에 관한 것만 있다면 그게 무슨 표상이며, 그게 무슨 종교인가요? 겉이 가지고 있는 생명은 속, 곧 주님으로부터 속을 통해서 공급된 생명입니다. For what is a representative without the thing it represents? Or what is an external religion without an internal but a kind of idol and a thing of death? The external has life from things internal, that is, through these from the Lord.

 

이런 고찰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은, 표상 교회의 모든 제물은 주님을 향한 예배를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우리는 이어지는 페이지들에서 구체적으로 다루게 됩니다. From these considerations it is evident that all the offerings of a representative church signify the worship of the Lord; and concerning these of the Lord’s Divine mercy we shall treat in particular in the following pages.

 

‘제물들’이 보통은 예배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예언서들 전반을 보면, 특히, 미가서를 보면 분명합니다. That by “offerings” in general is meant worship, is evident in the prophets throughout, as in Malachi:

 

2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3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공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바칠 것이라 4그 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의 봉헌물이 옛날과 고대와 같이 나 여호와께 기쁨이 되려니와 (3:2-4) Who shall abide the day of his coming? He shall sit as a refiner and purifier of silver, and he shall purify the sons of Levi, and purge them as gold and silver, and they shall offer unto Jehovah an offering in righteousness. Then shall the offering of Judah and of Jerusalem be pleasant unto Jehovah, as in the days of eternity, and as in ancient years.

 

‘공의로운 제물’은 내적 제물이며, ‘레위 자손’, 곧, 거룩한 예배자들이 드릴 것입니다. An “offering in righteousness” is an internal offering, which the “sons of Levi,” that is, holy worshipers, will offer.

 

‘옛날’은 태고 교회를, ‘고대’는 고대 교회를 각각 상징합니다. The “days of eternity,” signify the most ancient church, and the “ancient years,” the ancient church.

 

에스겔에서 In Ezekiel: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그 땅에 있어서 내 거룩한 산 곧 이스라엘의 높은 산에서 다 나를 섬기리니 거기에서 내가 그들을 기쁘게 받을지라 거기에서 너희 예물과 너희가 드리는 첫 열매와 너희 모든 성물을 요구하리라 (20:40) In the mountain of my holiness, in the mountain of the height of Israel, there shall all the house of Israel, all that land, worship me; there will I accept them, and there will I require your oblations, and the first￾fruits of your offerings, in all your sanctifyings.

 

‘예물’과 ‘너희 예물과 너희가 드리는 첫 열매와 너희 모든 성물’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이웃 사랑으로 행해진 신성한 행위와 똑같은 것입니다. “Oblations” and the “first fruits of the offerings in the sanctifyings” are likewise works sanctified by charity from the Lord.

 

스바냐에서 In Zephaniah:

 

내게 구하는 백성들 곧 내가 흩은 자의 딸이 구스 강 건너편에서부터 예물을 가지고 와서 내게 바칠지라 (3:10) From beyond the rivers of Ethiopia my suppliants shall bring mine offering.

 

‘구스’는 하늘에 속한 것들, 곧, 사랑, 이웃 사랑 및 이웃 사랑으로 행한 선행들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Ethiopia” denotes those who are in possession of celestial things, which are love, charity, and the works of cha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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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4

 

2절,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Verse 2, And she added to bear his brother Abel; and Abel was a shepherd of the flock, and Cain was a tiller of the ground.

 

※ 2절 속뜻

 

 

 

341. 교회의 두 번째 자녀는, ‘아우’, ‘아벨’로 상징된 체어리티입니다; ‘양 치는 자’가 가리키는 것은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이고; ‘농사하는 자’는 체어리티가 전혀 없는, 하지만 신앙은 신봉 수준일지도 모르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다만 이 사람의 신앙은 사랑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으로, 이런 건 아예 신앙이라고도 할 수 없는 그런 신앙입니다. The second offspring of the church is charity, signified by “Abel” and “brother”; a “shepherd of the flock” denotes one who exercises the good of charity; and a “tiller of the ground,” is one who is devoid of charity, however much he may be in faith separated from love, which is no faith.

 

 

342. 교회의 두 번째 자녀가 체어리티인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 분명합니다. 즉, 교회는 신앙과 체어리티 말고는 잉태하고 해산할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That the second offspring of the church is charity,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 church conceives and brings forth nothing else than faith and charity.

 

레아가 야곱에게서 낳은 첫 자녀들 역시 같은 것을 상징합니다; ‘르우벤’은 신앙을; ‘시므온’은 행하는 신앙을; 그리고 ‘레위’는 체어리티를 각각 가리키며, 이런 이유로, 레위 지파는 제사장직을 받아 ‘양 치는 자’임을 나타냈습니다. The same is signified by the first children of Leah from Jacob; “Reuben” denoting faith; “Simeon,” faith in act; and “Levi,” charity (Gen. 29:32, 33, 34), wherefore also the tribe of Levi received the priesthood, and represented the “shepherd of the flock.”

 

32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33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 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34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레위라 하였으며 (창29:32-34)

 

체어리티가 교회의 두 번째 자녀이므로, 부르기를, ‘아우’라 하고, 이름하여 ‘아벨’이라 하는 것입니다. As charity is the second offspring of the church, it is called “brother,” and is named “Abel.”

 

 

343. ‘양 치는 자’는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자라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분명한데요, 이것은 신구약 말씀에 나오는 하나의 익숙한 그림이기 때문입니다. That a “shepherd of the flock” is one who exercises the good of charity, must be obvious to everyone, for this is a familiar figure in the Word of both Old and New Testaments.

 

인도하고 가르치는 자를 ‘목자’라 하고, 인도를 받고,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을 ‘양 떼’라 합니다. He who leads and teaches is called a “shepherd,” and those who are led and taught are called the “flock.”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하지도, 그리고 그것을 가르치지도 않는 자는 참 목자가 아니며, 선으로 인도함을 받지도, 선에 대해서 배우지도 않는 자는 양 떼에 속한 자가 아닙니다. He who does not lead to the good of charity and teach it, is not a true shepherd; and he who is not led to good, and does not learn what is good, is not of the flock.

 

굳이 말씀에서 무슨 구절들을 대대적으로 인용하면서까지 ‘목자’와 ‘양떼’가 상징하는 것을 확실히 하려고 애쓸 필요는 거의 없습니다. 다음 몇 구절들 정도면 되지 싶습니다. It is scarcely necessary to confirm this signification of “shepherd” and “flock” by quotations from the Word; but the following passages may be cited.

 

이사야에서: In Isaiah:

 

네가 땅에 뿌린 종자에 주께서 비를 주사 땅이 먹을 것을 내며 곡식이 풍성하고 기름지게 하실 것이며 그날에 네 가축이 광활한 목장에서 먹을 것이요 (30:23) The Lord shall give the rain of thy seed, wherewith thou sowest the ground, and bread of the increase of the ground; in that day shall he feed thy cattle in a broad meadow, 

 

여기, ‘땅이 먹을 것을 내며 곡식이 풍성하고 기름지게 하실 것’이 체어리티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where “bread of the increase of the ground,” denotes charity.

 

계속해서: Again:

 

그는 목자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40:11) The Lord Jehovih shall feed his flock like a shepherd; he shall gather the lambs into his arm, and carry them in his bosom, and shall gently lead those that are with young.

 

시편에서: In David:

 

요셉을 양 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여 빛을 비추소서 (80:1) Give ear, O Shepherd of Israel, thou that leadest Joseph like a flock; thou that sittest on the cherubim, shine forth.

 

예레미야에서: In Jeremiah:

 

2아름답고 우아한 시온의 딸을 내가 멸절하리니 3목자들이 그 양 떼를 몰고 와서 주위에 자기 장막을 치고 각기 그 처소에서 먹이리로다 (6:2, 3) I have likened the daughter of Zion to a comely and delicate woman; the shepherds and their flocks shall come unto her, they shall pitch tents near her round about, they shall feed everyone his own space.

 

에스겔에서: In Ezekiel:

 

37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수효를 양 떼 같이 많아지게 하되 38제사 드릴 양 떼 곧 예루살렘이 정한 절기의 양 무리 같이 황폐한 성읍을 사람의 떼로 채우리라 그리한즉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느니라 (36:3738) Thus saith the Lord Jehovih, I will multiply them as a flock of man, as a hallowed flock, as the flock of Jerusalem in her appointed times; so shall the waste cities be filled with the flock of man.

 

이사야에서: In Isaiah:

 

게달의 양 무리는 다 네게로 모일 것이요 느바욧의 숫양은 네게 공급되고 내 제단에 올라 기꺼이 받음이 되리니 내가 내 영광의 집을 영화롭게 하리라 (60:7) All the flocks of Arabia shall be gathered together unto thee, the rams of Nebaioth shall minister unto thee.

 

양 떼를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하는 자들이 ‘양 떼를 모으는’ 자들인 반면, 양 떼를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하지 않는 자들은 ‘양 떼를 흩는’ 자들입니다. 모두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은 체어리티의 일이요, 모두를 흩어 하나가 되지 못 하게 하는 것은 체어리티가 결핍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They who lead the flock to the good of charity are they who “gather the flock”; but they who do not lead them to the good of charity “scatter the flock”; for all gathering together and union are of charity, and all dispersion and disunion are from want of charity.

 

 

344. 신앙, 즉, 기억-지식 [스키엔티아], 지식 [코그니시오], 그리고 신앙의 교리를 쓸모 있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신앙이 가르치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 말고 있을까요? 신앙이 가르치는 가장 핵심이 바로 체어리티입니다. What avails faith, that is, the memory-knowledge [scientia], the knowledge [cognitio], and the doctrine of faith, but that the man may become such as faith teaches? And the primary thing that it teaches is charity. (Mark 12:28-35; Matt. 22:34-39)

 

28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29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32서기관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33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34예수께서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35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새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막12:28-35)

 

34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22:34-39)

 

이것이 모든 신앙의 최종목표이며, 만일 이게 안 되면, 모든 지식이나 교리는 한낱 빈껍데기에 다름 아니게 됩니다. This is the end of all it has in view, and if this be not attained, what is all knowledge or doctrine but a mere empty nothing?

 

 

345. ‘‘농사하는 자’는 체어리티가 전혀 없는, 하지만 신앙은 신봉 수준일지도 모르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다만 이 사람의 신앙은 사랑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으로, 이런 건 아예 신앙이라고도 할 수 없는 그런 신앙입니다.’ 라는 것은, 여호와께서 가인의 제사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으셨다는 것과, 그가 그의 동생을 죽인 것, 즉, ‘아벨’로 상징된 체어리티를 파괴한 것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a “tiller of the ground” is one who is devoid of charity, however much he may be in faith separated from love, which is no faith, is evident from what follows: that Jehovah had no respect to his offering, and that he slew his brother, that is, destroyed charity, signified by “Abel.”

 

‘땅을 간다’는 말을 듣는 사람들은 육(肉)적, 세속적인 것들에 시선을 향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하여, 창세기 3장 19절과 23절에,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하신 말씀을 보면 분명합니다. Those were said to “till the ground” who look to bodily and earthly things, as is evident from what is said in Gen. 3:19, 23, where we read that the man was “cast out of the garden of Eden to till the ground.”

 

19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23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창3:1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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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4

 

1절,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Verse 1,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Jehovah.

 

※ 1절 속뜻

 

 

338. ‘아담과 그의 아내 하와’는 지금까지 알려진 대로 태고 교회를 상징합니다. 그 첫 자식, 처음 난 자녀가 신앙이며, 여기서는 ‘가인’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녀의 말,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가 상징하는 것은, ‘가인’이라는 사람들로 인해 신앙을, 체어리티(charity, 자선, 기부, 이웃 사랑)와 별개인 어떤 것으로 인식하고 인정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By the “man and Eve his wife” is signified the most ancient church, as has been made known; its first offspring, or firstborn, is faith, which is here called “Cain”; her saying “I have gotten a man, Jehovah,” signifies that with those called “Cain,” faith was recognized and acknowledged as a thing by itself.

 

 

339. 앞선 세 장에서, 지금까지 의심할 여지가 없도록 충분히 보여드렸던 것은, ‘아담과 그의 아내’가 태고 교회를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인정하면서 이제 분명한 것은, 이 태고 교회의 영향을 받은 임신 및 출생이 지금까지 우리가 보여온 본성이었다는 사실입니다. In the three foregoing chapters it has been sufficiently shown that by the “man and his wife” is signified the most ancient church, so that it cannot be doubted, and this being admitted, it is evident that the conception and the birth effected by that church were of the nature we have indicated.

 

이름을 주고, 이름을 가지고 사물을 상징하고, 그런 식으로 하나의 계보를 형성하는 것은, 태고인들에게는 하나의 관례였습니다. It was customary with the most ancient people to give names, and by names to signify things, and thus frame a genealogy.

 

태고 교회와 관계된 것들도 이런 식으로 서로 연결이 되었기 때문에, 대대로 하나는 잉태하고, 다른 하나는 해산하고 하였습니다. For the things of the church are related to each other in this way, one being conceived and born of another, as in generation.

 

그래서 말씀에서 교회와 관계된 것들을 일컬어, ‘잉태’, ‘해산’, ‘자녀’, ‘유아’, ‘어린이’, ‘아들’, ‘딸’, ‘젊은이’ 등으로 부르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Hence it is common in the Word to call things of the church “conceptions,” “births,” “offspring,” “infants,” “little ones,” “sons,” “daughters,” “young men,” and so on.

 

말씀 중 예언서들에서 이런 표현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The prophetical parts of the Word abound in such expressions.

 

 

340. 본문,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의 상징이, ‘가인’이라고 하는 사람들로 인해 신앙을 체어리티와 별개인 어떤 것으로 인식하고 인정하게 되었음이라는 것은, 이 장을 처음 시작할 때 드린 말씀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e words “I have gotten a man, Jehovah” signify that with such as are called “Cain” faith is recognized and acknowledged as a thing by itself, is evident from what was said at the beginning of this chapter.

 

전에, 그들은 신앙이 무엇인지에 관해 무지한 듯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퍼셉션이라는 것으로 신앙의 모든 것을 지각했기 때문입니다. Previously, they had been as it were ignorant of what faith is, because they had a perception of all the things of faith.

 

그러나 그들이 신앙의 교리를 뚜렷이 구분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퍼셉션으로 알던 것들을 가져다가 교리화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한 것입니다. 마치 자기들이 뭔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지요. 이렇게 해서 전에는 심비(心碑)에 저절로 새겨지던 것들이 이제는 배워야만 알 수 있는 것으로 전락했습니다. But when they began to make a distinct doctrine of faith, they took the things they had a perception of and reduced them into doctrine, calling it “I have gotten a man, Jehovah,” as if they had found out something new; and thus what was before inscribed on the heart became a mere matter of knowing.

 

고대에 그들은 모든 새로운 것에 어떤 이름을 주었고, 이런 식으로 그 이름들에 들어있는 것들을 설명했습니다. In ancient times they gave every new thing a name, and in this way set forth the things involved in the names.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은 ‘여호와께서 그녀의 고통을 들으셨다’(창16:11)를 상징하며, Thus the signification of the name Ishmael is explained by the saying, “Jehovah hath heard her affliction;” (창16:11)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창16:11)

 

르우벤은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다’(창29:32)를, that of Reuben, by the expression, “Jehovah hath looked upon my affliction;” (창29:32)

 

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창29:32)

 

시므온은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 받지 못함을 들으셨다’(창29:33), the name Simeon, by the saying, “Jehovah hath heard that I was less dear;” (창29:33)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 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창29:33)

 

유다는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창29:35)를, and that of Judah by, “This time will I praise Jehovah;” (창29:35)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 (창29:35)

 

그리고 모세가 세운 제단을 가리켜 ‘여호와 닛시’(출17:15), 곧 ‘여호와는 나의 깃발’이라 하였습니다. and an altar built by Moses was called, “Jehovah my banner.” (출17:15)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출17:15)

 

이런 식으로 여기 신앙의 교리도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또는 ‘가인’이라 명명한 것입니다. In like manner the doctrine of faith is here denominated “I have gotten a man, Jehovah,” or “C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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