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4

 

11절,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Verse 11, And now art thou cursed from the ground, which hath opened its mouth to receive thy brother’s bloods from thy hand.

 

※ 11절 속뜻

 

가인의 신앙, 곧 사랑 따로, 신앙 따로의 신앙을 가진 자들은 그런 이단적 가르침을 따라 사랑의 선인 체어리티를 폭행, 사라지게 하였고, 그 결과 스스로를 주님과 멀어지게 하는 저주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378.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는 그런 종교적 입장, 곧 스키즘(schism)을 통해 그가 외면을 자초하게 되었음을, 즉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는 입장을 고수함으로써 스스로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음을, ‘그 입을 벌려는 그 이단(heresy)이 그들을 가르쳤음을,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은 그것이 체어리티를 폭행, 사라지게 하였음을 말합니다. Cursed art thou from the ground” signifies that through the schism he had become averted; “which hath opened its mouth” signifies that the heresy taught them; to “receive thy brother’s bloods from thy hand” signifies that it did violence to charity, and extinguished it.

 

 

379. 위 표현들이 이런 걸 의미함은 앞서 지금까지 다룬 내용들을 보아 분명하고요, 그리고 저주를 받는다는 건 선을 싫어한다는, 즉 스스로 주님을 외면한다는 의미임은 앞서 245번 글에서 이미 보여드렸습니다. That these things are signified is evident from what has gone before; and that to be “cursed” is to be averse to good, has been already shown (n. 245).

 

※ 245번 글은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창3:14)라는 말씀에 대한 겁니다. 여기 나오는 ‘저주를 받아’에 대해, 본래 주님은 누구를 외면하시거나 화를 내시거나, 벌하시거나, 시험하시거나, 심지어 죽이시고, 저주하시는 그런 분이 아니시라는 것, 이 모든 것은 사람이 자초하는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 말씀에 사람들이 오해할 수도 있게 마치 주님이 그런 분이신 것처럼 그렇게 표현하신 이유는, 이 모든 것이 다 주님의 다스리심 가운데 있으며, 어떻게 역사하시고 섭리하시는지, 돌이켜 선이 되게 하시는지를 보고 배울 수 있게 하심이라 설명하고 있습니다.

 

불법과 혐오, 혹은 증오는 사람으로하여금 주님으로부터 시선을 돌려 오직 아랫것, 곧 육체적이고 세속적인 것들, 그결과 지옥에 속한 것들만 바라보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For iniquities and abominations, or hatreds, are what avert man, so that he looks downward only, that is, to bodily and earthly things, thus to those which are of hell.

 

이런 일은 체어리티가 쫓겨나 사라졌을 때 일어납니다. 이때 주님과 사람 사이 유대가 손상되기 때문인데요, 오직 체어리티, 혹은 사랑과 자비로만 우리는 주님과 결합하며, 체어리티 없는 신앙으로는 절대 결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체어리티 없는 신앙... 이런 건 신앙도 아닌 것이, 그저 신앙 관련 무슨 지식에 불과하기 때문이며, 지옥스런 끔찍한 패거리들이나 소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런 걸로 선한 사람들을 아주 교활하게 속일 수도, 자신들을 빛의 천사로 위장할 수도 있습니다. 가장 사악한 설교자들이 마음은 전혀 아니면서도 입술로는 아주 그럴듯하게 종종 아주 경건한 척 열정적으로 설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This takes place when charity is banished and extinguished, for then the bond which connects the Lord with man is severed, since only charity, or love and mercy, are what conjoin us with him, and never faith without charity, for this is no faith, being mere knowledge, such as the infernal crew themselves may possess, and by which they can craftily deceive the good, and feign themselves angels of light; and as the most wicked preachers are sometimes wont to do, with a zeal like that of piety, although nothing is further from their hearts than that which proceeds from their lips.

 

어떤 사람의 말이 무슨 의지나 의도 등 진정성이 없는데도 그런 거하고는 상관없이 그를 존경하거나 그의 말을 찬성하는 그런 사람은 없다는 걸 사람들은 누구나 다 경험적으로 알지요. 그런데도 그저 머리로만 아는 신앙, 혹은 그런 신앙에서 나오는 생각들을 보고 뭔가 쓸모가 있을 것이다 믿을 정도로 그렇게 판단력이 미약한 그런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Can anyone be of judgment so weak as to believe that faith alone in the memory, or the thought thence derived, can be of any avail, when everybody knows from his own experience that no one esteems the words or assenting of another, no matter of what nature, when they do not come from the will or intention?

 

※ 네,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많이! ^^

 

그들을 기쁘게 하고, 서로를 묶어주는 것이 바로 이것, 곧 의지, 의도, 진정성, 마음 등입니다. It is this that makes them pleasing, and that conjoins one man with another.

 

사람의 의지가 그 사람의 진짜 모습입니다. 그가 의도하지 않은, 즉 그의 마음이 안 담긴 생각이나 말 같은 거는 말고 말입니다. The will is the real man, and not the thought or speech which he does not will.

 

사람은 그의 천성과 기질을 이 의지에서 얻습니다. 이것이 그에게 영향을 끼치기 때문인데요, A man acquires his nature and disposition from the will, because this affects him.

 

그러나 만일 누가 선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다면, 신앙의 본질, 이것이 체어리티인데요, 이것이 그 안에 있습니다. 선이라는 것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가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But if anyone thinks what is good, the essence of faith, which is charity, is in the thought, because the will to do what is good is in it.

 

그러나 만일 그가 자기는 선한 것을 생각한다 말은 하면서도 정작 사악하게 산다면, 그는 오직 악한 것밖에는 의도할 수가 없고, 그런 이유로 거기에는 신앙이라는 게 전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But if he says that he thinks what is good, and yet lives wickedly, he cannot possibly will anything but what is evil, and there is therefore no fa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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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4

 

10절,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Verse 10, And he said, What hast thou done? The voice of thy brother’s bloods crieth to me from the ground.

 

※ 10절 속뜻

 

태고교회의 두 자녀 중 맏이인 신앙이 아우인 체어리티에게 폭행을 가했음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사랑에서 분리한 신앙인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을 향해 ‘유죄!’, ‘유죄!’ 그 종파 안에서 고발하는 것입니다.

 

 

373. 네 아우의 핏소리는 체어리티에게 폭행이 가해졌음을 말합니다. ‘피의 호소는 유죄(有罪, guilt) 고발이며, ‘은 어떤 종파(schism)나 이단(heresy)을 말합니다. The “voice of thy brother’s bloods” signifies that violence had been done to charity; the “crying of bloods” is the accusation of guilt, and “ground” signifies a schism or heresy.

 

 

374. 핏소리가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행임이 분명한 것은 말씀에 나오는 많은 본문들 때문입니다. 거기에 보면 소리는 어떤 것에 대한 고발을, ‘는 어떤 종류의 죄, 특히 증오(hatred)를 가리킵니다. 주님의 가르치심 대로 누구든지 형제를 향하여 증오를 품는 사람은 마음으로는 그를 죽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That the “voice of bloods” signifies that violence had been done to charity is evident from many passages in the Word, in which “voice” denotes anything that accuses, and “blood” any kind of sin, and especially hatred; for whosoever bears hatred toward his brother, kills him in his heart; as the Lord teaches:

 

21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5:21-22) Ye have heard that it was said to them of old, thou shalt not kill, and whosoever shall kill shall be in danger of the judgment; but I say unto you, that whosoever is angry with his brother rashly shall be in danger of the judgment; and whosoever shall say to his brother, Raca, shall be in danger of the council; but whosoever shall say, thou fool, shall be in danger of the hell of fire, (Matt. 5:2122)

 

이 말씀들은 증오의 등급을 의미합니다. by which words are meant the degrees of hatred.

 

증오는 체어리티와 정반대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만일 직접 안 되면, 간접적으로라도 죽입니다. 증오는 오직 직접적인 외적 규제로만 저지됩니다. Hatred is contrary to charity, and kills in whatever way it can, if not with the hand, yet in spirit, and is withheld only by external restraints from the deed of the hand.

 

이런 이유로 예레미야에서처럼 모든 증오는 입니다. Therefore all hatred is “blood,” as in Jeremiah:

 

33네가 어찌 사랑을 얻으려고 네 행위를 아름답게 꾸미느냐 그러므로 네 행위를 악한 여자들에게까지 가르쳤으며 34또 네 옷단에는 죄 없는 가난한 자를 죽인 피가 묻었나니 그들이 담 구멍을 뚫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이 모든 일 때문이니라 (2:33-34) Why makest thou thy way good to seek love? Even in thy skirts are found the bloods of the souls of the needy innocent ones. (Jer. 2:3334)

 

[2] 하면 증오이듯 모든 종류의 불법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증오는 모든 불법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And as hatred is denoted by “blood,” so likewise is every kind of iniquity, for hatred is the fountain of all iniquities.

 

호세아에서처럼 As in Hosea:

 

2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음이라 3그러므로 이 땅이 슬퍼하며 거기 사는 자와 들짐승과 공중에 나는 새가 다 쇠잔할 것이요 바다의 고기도 없어지리라 (4:2-3) Swearing falsely, and lying, and killing, and stealing, and committing adultery, they rob, and bloods, in bloods have they touched; therefore shall the land mourn, and everyone that dwelleth therein shall languish. (Hos. 4:23)

 

그리고 에스겔에서 무자비함을 말씀하시면서 And in Ezekiel, speaking of unmercifulness:

 

2인자야 네가 심판하려느냐 이 피흘린 성읍을 심판하려느냐 그리하려거든 자기의 모든 가증한 일을 그들이 알게 하라 3너는 말하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자기 가운데에 피를 흘려 벌 받을 때가 이르게 하며 우상을 만들어 스스로 더럽히는 성아 4네가 흘린 피로 말미암아 죄가 있고 네가 만든 우상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혔으니 네 날이 가까웠고 네 연한이 찼도다 그러므로 내가 너로 이방의 능욕을 받으며 만국의 조롱 거리가 되게 하였노라 6이스라엘 모든 고관은 각기 권세대로 피를 흘리려고 네 가운데에 있었도다 9네 가운데에 피를 흘리려고 이간을 붙이는 자도 있었으며 네 가운데에 산 위에서 제물을 먹는 자도 있었으며 네 가운데에 음행하는 자도 있었으며 (22:2-4, 6, 9) Wilt thou judge the city of bloods, and make known to her all her abominations, a city that sheddeth bloods in the midst of it? Thou art become guilty through thy blood that thou hast shed. (Ezek. 22:24, 6, 9)

 

너는 쇠사슬을 만들라 이는 피 흘리는 죄가 그 땅에 가득하고 포악이 그 성읍에 찼음이라 (7:23) The land is full of the judgment of bloods, and the city is full of violence. (Ezek. 7:23)

 

그리고 예레미야 애가에서 And in Jeremiah:

 

13그의 선지자들의 죄들과 제사장들의 죄악들 때문이니 그들이 성읍 안에서 의인들의 피를 흘렸도다 14그들이 거리 거리에서 맹인 같이 방황함이여 그들의 옷들이 피에 더러워졌으므로 그들이 만질 수 없도다 (4:13-14) For the sins of the prophets of Jerusalem, and the iniquities of her priests, that have shed the blood of the righteous in the midst of her, they wander blind in the streets, they have been polluted with blood. (Lam. 4:1314)

 

이사야에서 In Isaiah:

 

이는 주께서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기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 중에서 청결하게 하실 때가 됨이라 (4:4) When the Lord shall wash away the filth of the daughters of Zion, and shall have purged the bloods of Jerusalem from the midst, with the spirit of judgment, and with the spirit of burning. (Isa. 4:4)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워졌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냄이라 (59:3) Your palms are defiled in blood, and your fingers in iniquity. (Isa. 59:3)

 

에스겔에서 예루살렘의 혐오스러운 것들, 라 하는 것들을 말씀하시면서 In Ezekiel, speaking of the abominations of Jerusalem, which are called “bloods:”

 

6내가 네 곁으로 지나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하고 22네가 어렸을 때에 벌거벗은 몸이었으며 피투성이가 되어서 발짓하던 것을 기억하지 아니하고 네가 모든 가증한 일과 음란을 행하였느니라 (16:6, 22) I passed by thee, and saw thee trampled in thine own bloods, and I said unto thee, Live in thy bloods, yea, I said unto thee, Live in thy bloods. (Ezek. 16:6, 22)

 

[3] 계시록에 보면, 마지막 때의 무자비함과 증오 또한 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16:3, 4) The unmercifulness and hatred of the last times are also described by “blood” in the Revelation (16:3, 4).

 

3둘째 천사가 그 대접을 바다에 쏟으매 바다가 곧 죽은 자의 피 같이 되니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더라 4셋째 천사가 그 대접을 강과 물 근원에 쏟으매 피가 되더라 (계16:3, 4)

 

는 영어로 bloods라 하여 복수로 언급되는데요, 모든 불공정하고 혐오스러운 것들이 증오로부터 솟구쳐 나오기 때문입니다. 마치 모든 선하고 거룩한 것들이 사랑으로부터 그렇게 나오는 것처럼 말입니다. Bloods” are mentioned in the plural, because all unjust and abominable things gush forth from hatred, as all good and holy ones do from love.

 

그래서 이웃을 향하여 증오를 느끼는 사람은 만일 그가 할 수만 있다면 그를 죽일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그렇게 할 것입니다. 이런 것이 이웃을 폭행하는 것이며, 그것을 여기서 아주 적절하게 핏소리라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Therefore he who feels hatred toward his neighbor would murder him if he could, and indeed does murder him in any way he can; and this is to do violence to him, which is here properly signified by the “voice of bloods.”

 

 

375. 호소에 관한 두 표현, ‘voice cryingvoice of a cry는 말씀에 흔히 나오는 표현 형식인데요, 어떤 동요(動搖)나 소란, 혼란, 또는 어떤 행복한 일이 일어난 경우 등에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32:17, 18; 1:9, 10; 65:19; 48:3처럼 말입니다.) A “voice crying” and the “voice of a cry” are common forms of expression in the Word, and are applied to every case where there is any noise, tumult, or disturbance, and also on the occasion of any happy event (as in Exod. 32:17–18; Zeph. 1:9–10; Isa. 65:19; Jer. 48:3).

 

17여호수아가 백성들의 요란한 소리를 듣고 모세에게 말하되 진중에서 싸우는 소리가 나나이다 18모세가 이르되 이는 승전가도 아니요 패하여 부르짖는 소리도 아니라 내가 듣기에는 노래하는 소리로다 하고 (출32:17, 18)

 

9그 날에 문턱을 뛰어넘어서 포악과 거짓을 자기 주인의 집에 채운 자들을 내가 벌하리라 10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어문에서는 부르짖는 소리가, 제 이 구역에서는 울음 소리가, 작은 산들에서는 무너지는 소리가 일어나리라 (습1:9, 10)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에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사65:19)

 

호로나임에서 부르짖는 소리여 황폐와 큰 파멸이로다 (렘48:3)

 

본문에서는 고발을 가리킵니다. In the present passage it denotes accusation.

 

 

376. 이로부터 피의 호소는 유죄 고발을 말한다 하는 건데요,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은 유죄이기 때문입니다From this it follows that the “crying of bloods” signifies the accusation of guilt; for those who use violence are held guilty.

 

시편에서처럼 As in David: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벌을 받으리로다 (시34:21) Evil shall slay the wicked, and they that hate the righteous shall be guilty. (Ps. 34:21)

 

에스겔에서 In Ezekiel:

 

네가 흘린 피로 말미암아 죄가 있고 네가 만든 우상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혔으니 네 날이 가까웠고 네 연한이 찼도다 그러므로 내가 너로 이방의 능욕을 받으며 만국의 조롱 거리가 되게 하였노라 (겔22:4) Thou city art become guilty by the blood which thou hast shed. (Ezek. 22:4)

 

 

377. 여기 ’(ground)이 종파나 이단을 말한다는 건 ’(field)이 교리를 가리키며, 그래서 들을 자신의 일부로 하는 은 일종의 종파라는 사실로 분명합니다. That the “ground” here signifies a schism or heresy,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a “field” signifies doctrine, and therefore the “ground,” having the field in it, is a schism.

 

사람 자체가 이요, 또한 입니다. 이런 것들이 사람 안에서 수정(受精)되기 때문인데요, 사람은 그 안에서 수정되는 게 무엇이냐에 따라 그런 사람이 됩니다. 선과 진리로 수정된 사람은 선하고 진실한 사람이 되고, 악과 거짓으로 수정된 사람은 악하고 거짓된 사람이 됩니다. Man himself is the “ground,” and also the “field,” because these things are inseminated in him, for man is man from what is inseminated in him, a good and true man from goods and truths, an evil and false man from evils and falsities.

 

어떤 특별한 교리나 이단 가운데 있는 사람은 나중에 그 이름으로 부르게 되는데요, 그래서 지금 이 본문에 나오는 이라는 용어도 종종 사람의 어떤 종파나 이단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곤 하는 것입니다. He who is in any particular doctrine or heresy is named from it, and so in the passage before us the term “ground” is used to denote a schism or heresy in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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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보

2022-05-29(D1)-제10권22호통457호.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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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설교 원고 및 유튜브

2022-05-29(D1)-주일예배(2309, 창3,15, AC.250-260), '뱀의 후손, 여자의 후손, 머리, 발꿈치'.pdf
0.47MB

https://youtu.be/RYOdWxZ1H4s

 

3. 축도 원고 및 유튜브

2022-05-29(D1)-주일예배(2309, 창3,15, AC.250-260), '뱀의 후손, 여자의 후손, 머리, 발꿈치', 순서, 축도.pdf
0.20MB

https://youtu.be/bkOWAqcMJ-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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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4

 

9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Verse 9, And Jehovah said to Cain, Where is Abel thy brother? And he said, I know not, am I my brother’s keeper?

 

※ 9절 속뜻

 

가인의 교리를 따르는 자들에게 주님의 어떤 딕테이트, 곧 체어리티에 대한 딕테이트가 있자 그들은 체어리티에 대한 평소 그들의 생각, 곧 자신들은 체어리티를 하찮게 여기며, 체어리티를 섬겨야 한다는 자신들의 의무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와 관련된 모든 걸 일체 거부한다는 자신들의 입장과 정체를 드러냈습니다.

 

 

370.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는 그들에게 체어리티, 혹은 아우 아벨에 관하여 일종의 딕테이트(dictate)를 준 어떤 퍼셉션 같은 것(perceptivity)을 말합니다. Jehovah said unto Cain” signifies a certain perceptivity from within that gave them a dictate concerning charity or the “brother Abel.

 

가인의 대답,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는 신앙이 체어리티를 뭣도 아닌 걸로 여겼음을, 그리고 체어리티가 원하는 대로 하는 걸 마음에 내켜 하지 않았고 그 결과, 체어리티와 관련된 모든 걸 거부했다는 말입니다. Cain’s reply, “I know not, am I my brother’s keeper?” signifies that faith considered charity as nothing, and was unwilling to be subservient to it, consequently that faith altogether rejected everything of charity.

 

그런 게 그들의 교리가 되었습니다.  Such did their doctrine become.

 

 

371. 태고인들은 자신들의 퍼셉션을 여호와의 스피킹이라는 워딩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이런 퍼셉션 역량을 주신 분이 주님이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By the “speaking of Jehovah” the most ancient people signified perception, for they knew that the Lord gave them the faculty to perceive.

 

이 퍼셉션은 사랑이 주(, the principal)일 동안은 계속될 수 있었습니다. This perception could continue no longer than while love was the principal.

 

주님을 향한(to) 사랑이 식고 그 결과, 이웃을 향한(toward) 사랑 또한 식으면 퍼셉션은 사라졌습니다만 그러나 아직 사랑이 남아 있는 한은 퍼셉션도 남아 있었습니다. When love to the Lord ceased, and consequently love toward the neighbor, perception perished; but insofar as love remained, perception remained.

 

이러한 퍼셉션 역량은 태고교회에 맞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홍수 후 세대처럼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고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해서 주어지자 양심이라는 게 그 뒤를 이었습니다. 이 양심이라는 것 또한 일종의 딕테이트를 주는 건데 방식은 다릅니다. 이에 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This perceptive faculty was proper to the most ancient church, but when faith became separated from love, as in the people after the flood, and charity was given through faith, then conscience succeeded, which also gives a dictate, but in a different way, of which, by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양심이 딕테이트할 때, 그것은 말씀에 나오는 여호와께서 이르시되와 같은 식입니다. 양심은 계시(things revealed)와 지식, 그리고 말씀으로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말씀이(the Word) 말씀하시거나(speaks) 딕테이트하실 때, 말씀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런 까닭에 심지어 오늘날에조차 양심, 혹은 신앙에 관한 걸 언급하면서 주께서 말씀하십니다라고 하는 것보다 더 일반적인 표현은 없습니다. When conscience dictates, it is in like manner said in the Word that “Jehovah speaks”; because conscience is formed from things revealed, and from knowledges, and from the Word; and when the Word speaks, or dictates, it is the Lord who speaks; hence nothing is more common, even at the present day, when referring to a matter of conscience, or of faith, than to say, “the Lord says.

 

 

372. 지키는 자가 된다는 건 유대 교회의 문지기수위’(문지방을 지키는 자)처럼 섬기는 걸 말합니다. To be a “keeper” signifies to serve, like “door keepers” and “porters” (that is, the keepers of the threshold) in the Jewish church.

 

신앙은 체어리티를 지키는 자라고 합니다. 그것이 원래 신앙의 의무이니까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신앙은 자기가 체어리티를 지배해야 한다는, ‘가인이라 하는 교리를 원리로 삼아 따르고 말았습니다. 7절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말입니다. Faith is called the “keeper” of charity, from the fact that it ought to serve it, but it was according to the principles of the doctrine called “Cain” that faith should rule, as was said in verse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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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4

 

8절,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Verse 8, And Cain talked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and slew him.

 

※ 8절 속뜻

 

시간이 흐르자 교회의 두 자녀 중 형인 신앙이 아우인 체어리티를 교리적으로는 한 배에서 나왔으면서도 자신에게서 완전히 분리, 소멸시켰습니다. 태고교회에서 일어난 이단인 가인은 사랑과 신앙을 분리, 이를 교리화한 사람들인데, 이들은 자신들을 사랑의 선인 체어리티로부터 완전히 분리, 결국 체어리티를 소멸시켜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366.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는 일종의 시간 간격, 즉 시간이 흘렀음을 말합니다. Cain spake to Abel” signifies an interval of time.

 

가인은 앞서 기술(記述)처럼,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 곧 신앙의 아우를 말하며, 그래서 여기 그는 두 번 아우라 언급되고 있는 것입니다. Cain,” as before stated, signifies faith separated from love; and “Abel” charity, the brother of faith, on which account he is here twice called his “brother.”

 

’(field)은 무엇이든지 교리에 속한 것이면 다 입니다. A “field” signifies whatever is of doctrine.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는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의 불을 꺼트렸음을, 즉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음을, 끝장냈음을 말합니다.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and slew him” signifies that separated faith extinguished charity.

 

 

367. 체어리티가 신앙의 아우라는 것, 그리고 이 교리에 속한 것이면 무엇이든 의미한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말고는 굳이 말씀 내 유사 구절들을 찾아 이들을 컨펌할 필요는 없지 싶습니다. It is unnecessary to confirm these things by similar passages from the Word, except so far as to prove that charity is the “brother” of faith, and that a “field” signifies whatever is of doctrine.

 

체어리티가 신앙의 아우라는 사실은 신앙의 본성이나 본질상 누구에게나 자명합니다. That charity is the “brother” of faith is evident to everyone from the nature or essence of faith.

 

이 형제지간(兄弟之間)이 에서와 야곱으로 표현되었으며, 그 생득권(生得權, the birthright) 및 그로 인한 주도권 다툼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This brotherhood was represented by Esau and Jacob, and was the ground of their dispute about the birthright and the consequent dominion.

 

이것은 또한 유다로 말미암은 다말의 두 아들, 베레스와 세라로 (창38:28-30), It was also represented by Pharez and Zarah, the sons of Tamar by Judah (Gen. 38:28, 29, 30);

 

28해산할 때에 손이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이는 먼저 나온 자라 하고 홍색 실을 가져다가 그 손에 매었더니 29그 손을 도로 들이며 그의 아우가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터뜨리고 나오느냐 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베레스라 불렀고 30그의 형 곧 손에 홍색 실 있는 자가 뒤에 나오니 그의 이름을 세라라 불렀더라 (창38:28-30)

 

또 에브라임과 므낫세로도 표현되었습니다 (창48:13-14). and by Ephraim and Manasseh (Gen. 48:13, 14);

 

13오른손으로는 에브라임을 이스라엘의 왼손을 향하게 하고 왼손으로는 므낫세를 이스라엘의 오른손을 향하게 하여 이끌어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매 14이스라엘이 오른손을 펴서 차남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손을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엇바꾸어 얹었더라 (창48:13-14)

 

이 둘도 다른 유사한 경우들과 같이 장자권(長子權, the primogeniture)과 그로 인한 주도권 다툼이 있습니다. and in both of these, as well as in other similar cases, there is a dispute about the primogeniture and the consequent dominion.

 

신앙과 체어리티는 교회의 자식들이기 때문입니다. For both faith and charity are the offspring of the church.

 

신앙은 남자라 합니다. 본 장 1절의 가인처럼 말이지요. 그리고 체어리티는 아우라 합니다. 19:2, 13:14 및 다른 데서들처럼 말이지요. Faith is called a “man,” as was Cain, in verse 1 of this chapter, and charity is called a “brother,” as in Isa. 19:2; Jer. 13:14; and other places.

 

내가 애굽인을 격동하여 애굽인을 치리니 그들이 각기 형제를 치며 각기 이웃을 칠 것이요 성읍이 성읍을 치며 나라가 나라를 칠 것이며 (사19:2)

 

또 그들로 피차 충돌하여 상하게 하되 부자 사이에도 그러하게 할 것이라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사랑하지 아니하며 아끼지 아니하고 멸하리라 하셨다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13:14)

 

신앙과 체어리티의 연합을 형제의 계약’(1:9)이라 합니다. The union of faith and charity is called “the covenant of brethren.” (Amos 1:9)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두로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그 형제의 계약을 기억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로잡은 자를 에돔에 넘겼음이라 (암1:9)

 

가인과 아벨의 상징과 비슷한 것이 방금 말씀드린 야곱과 에서의 상징이었습니다. 야곱 또한 그의 형 에서를 대신하고 싶어 했다는 점에서 그런데요, 호세아를 봐도 분명합니다. Similar to the signification of Cain and Abel was that of Jacob and Esau, as just said; in that Jacob also was desirous of supplanting his brother Esau, as is evident also in Hosea:

 

2야곱을 그 행실대로 벌하시며 그의 행위대로 그에게 보응하시리라 3야곱은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호12:2-3) To visit upon Jacob his ways, according to his doings will he recompense him; he supplanted his brother in the womb. (Hos. 12:23)

 

그러나 에서, 곧 에서로 표현된 체어리티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주도권을 쥘 것이라는 내용이 그들의 아버지 이삭의 예언을 보면 나옵니다. But that Esau, or the charity represented by Esau, should nevertheless at length have the dominion, appears from the prophetic prediction of their father Isaac: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하였더라 (창27:40) By thy sword shalt thou live, and shalt serve thy brother; and it shall come to pass, when thou hast the dominion, that thou shalt break his yoke from off thy neck. (Gen. 27:40)

 

또한 같은 건데요, 이방인들의 교회, 혹은 새 교회는 에서로, 유대인들의 교회는 야곱으로 표현됩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형제로 인정해야 한다는 말을 그렇게 자주 듣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의 교회, 혹은 원시 교회에서는 체어리티로 말미암아 모두 서로를 형제라 하였습니다. Or what is the same, the church of the gentiles, or new church, is represented by Esau, and the Jewish church is represented by Jacob; and this is the reason for its being so often said that the Jews should acknowledge the gentiles as brethren; and in the church of the gentiles, or primitive church, all were called brethren, from charity.

 

마찬가지로 주님도 누가복음에서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을 형제라 하고 계십니다. (8:21) Such as hear the Word and do it are likewise called brethren by the Lord (Luke 8: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 (눅8:21)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신앙의 사람들이요, 말씀을 행하는 사람들은 체어리티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들으면서, 혹은 신앙을 가졌다고 하면서 행함은 없는, 혹은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형제가 아닙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들을 어리석은 사람들에 비유하셨기 때문입니다. (7:24, 26) those who hear are such as have faith; those who do are such as have charity; but those who hear, or say that they have faith, and do not, or have not charity, are not brethren, for the Lord likens them unto fools (Matt. 7:24, 26).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마7:24)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마7:26)

 

 

368. 이 교리를, 그리고 결과적으로 신앙과 체어리티의 교리에 속한 것이면 무엇이든 의미한다는 것은 다음 예레미야 말씀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a “field” signifies doctrine, and consequently whatever belongs to the doctrine of faith and charity, is evident from the Word, as in Jeremiah:

 

들에 있는 나의 산아 네 온 영토의 죄로 말미암아 내가 네 재산과 네 모든 보물과 산당들로 노략을 당하게 하리니 (17:3) O my mountain in the field, I will give thy possessions [facultates] and all thy treasures for a spoil. (Jer. 17:3)

 

이 구절에서 은 교리를, ‘재산보물은 신앙의 영적인 부(), 혹은 신앙의 교리에 속한 것들을 가리킵니다. In this passage “field” signifies doctrine; “possessions” and “treasures” denote the spiritual riches of faith, or the things that belong to the doctrine of faith.

 

다음 말씀도 같습니다. In the same:

 

레바논의 눈이 어찌 들의 바위를 떠나겠으며 먼 곳에서 흘러내리는 찬물이 어찌 마르겠느냐 (18:14) Shall the snow of Lebanon fail from the rock of my field? (Jer.18:14)

 

시온을 향하여 선포하시기를 신앙의 교리가 결핍되면 시온은 밭 같이 경작지가 될 것이라 하십니다. (26:18; 3:12) It is declared concerning Zion, when destitute of the doctrine of faith, that she shall be “plowed like a field.” (Jer. 26:18, Micah 3:12)

 

유다의 왕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가 유다의 모든 백성에게 예언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시온은 밭 같이 경작지가 될 것이며 예루살렘은 돌 무더기가 되며 이 성전의 산은 산당의 숲과 같이 되리라 하였으나 (렘26:18)

 

이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시온은 갈아엎은 밭이 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이 되리라 (미3:12)

 

에스겔에서 In Ezekiel:

 

또 그 땅의 종자를 꺾어 옥토에 심되 수양버들 가지처럼 큰 물 가에 심더니 (17:5) He took of the seed of the land, and set it in a field of sowing,(Ezek. 17:5)

 

교회와 교회의 신앙을 다루면서 말입니다. 교리를 일컬어 그 안에 종자, 씨가 심긴 이라 하기 때문입니다. treating of the church and of its faith; for doctrine is called a “field” from the seed in it.

 

같은 본문에서 In the same:

 

들의 모든 나무가 나 여호와는 높은 나무를 낮추고 낮은 나무를 높이며 푸른 나무를 말리고 마른 나무를 무성하게 하는 줄 알리라 나 여호와는 말하고 이루느니라 하라 (17:24) And let all the trees of the field know that I Jehovah bring down the high tree. (Ezek. 17:24)

 

요엘입니다. In Joel:

 

10밭이 황무하고 토지가 마르니 곡식이 떨어지며 새 포도주가 말랐고 기름이 다하였도다 11농부들아 너희는 부끄러워할지어다 밭의 소산이 다 없어졌음이로다 12밭의 모든 나무가 다 시들었으니 (1:10-12) The field is laid waste, the ground mourneth, for the corn is wasted, the new wine is dried up, the oil languisheth, the husbandmen are ashamed, the harvest of the field is perished, all the trees of the field are withered, (Joel 1:1012)

 

여기 은 교리를, ‘나무는 지식들을, ‘농부들은 예배자들을 말합니다. where the “field” signifies doctrine, “trees” knowledges, and “husbandmen” worshipers.

 

시편에서 In David:

 

밭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즐거워할지로다 그 때 숲의 모든 나무들이 여호와 앞에서 즐거이 노래하리니  (96:12) The field shall exult and all that is therein; then shall all the trees of the forest sing, (Ps. 96:12)

 

여기 이 어떻게 기뻐 어쩔 줄 몰라 하겠으며, ‘숲의 모든 나무들이 어떻게 노래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사람 안에 있는 것들, 곧 신앙에 관한 지식들 얘기임이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where it is perfectly evident that the field cannot exult, nor the trees of the forest sing; but things that are in man, which are the knowledges of faith.

 

예레미야에서 In Jeremiah:

 

언제까지 이 땅이 슬퍼하며 온 지방의 채소가 마르리이까 (12:4) How long shall the land mourn, and the herb of every field wither? (Jer. 12:4)

 

여기서도 분명한 것은 , ‘지방의 채소도 슬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표현들은 황폐한 상태 가운데 있는 사람의 어떤 것에 관한 것입니다. where it is also evident that neither the land nor the herbs of the field can mourn; but that the expressions relate to something in man while in a state of vastation.

 

비슷한 구절이 이사야에도 나옵니다. A similar passage occurs in Isaiah:

 

산들과 언덕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칠 것이며 (55:12) The mountains and the hills shall break forth before you into singing, and all the trees of the field shall clap their hands. (Isa. 55:12)

 

주님 또한 세상 종말 관련 예언 가운데 신앙의 교리를 가리켜 이라 하십니다. The Lord also in his prediction concerning the consummation of the age calls the doctrine of faith a “field:”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24:40; 17:36) Then shall two be in the field, the one shall be taken and the other left, (Matt. 24:40; Luke 17:36)

 

※ 개역개정 한글 성경에는 눅17:36 본문이 ‘(없음)’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 은 신앙의 교리, 곧 참된 교리, 거짓된 교리 둘 다를 의미합니다. where by a “field” is meant the doctrine of faith, both true and false.

 

이 교리를 가리키기 때문에, 신앙의 씨앗을 받아들이는 그 누구든, 그것이 사람이든, 교회든, 아니면 세상이든 또한 일컬어 이라 합니다. As a “field” signifies doctrine, whoever receives a seed of faith, whether a man, the church, or the world, is also called a “field.”

 

 

369. 그래서 이상으로부터 이어지는 내용은 본문,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의 의미인데요, 그것은 신앙과 체어리티는 둘 다 교리적으로는 신앙의 교리로부터 말미암았음에도 불구, 신앙, 얘가 문젠데... 곧 애써 자기를 사랑에서 분리 및 체어리티를 무시, 반드시 체어리티를 지배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래서 결국은 체어리티의 불을 꺼트리고야 마는 게 신앙이라는 내용인데요, 오늘날의 경우, 체어리티의 실천은 없이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 바로 이런 걸로 그들은 체어리티의 불을 꺼트리기 때문인데요, 아무리 그들이 사랑 없이 신앙 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고, 입술로 고백할지라도 말입니다. From this then it follows that the words “Cain rose up against his brother Abel, and slew him,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ogether,” denote that while both faith and charity were from the doctrine of faith, yet faith separate from love could not but disregard and thereby extinguish charity; as is the case at the present day with those who maintain that faith alone saves, without a work of charity, for in this very supposition they extinguish charity, although they know and confess with their lips that faith is not saving unless there is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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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4

 

7절,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Verse 7, If thou doest well, art thou not exalted? And 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 and 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

 

※ 7절 속뜻

 

신앙이 만일 선을 행하고자 한다면 그 신앙은 체어리티의 신앙이라 할 수 있지만, 만일 그 반대, 곧 신앙이라고 하면서 선을 행할 마음은 없다면 그건 체어리티의 신앙, 더 나아가 신앙도 아니며, 오히려 악이라는 것입니다.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지내기를 무척 원합니다. 다만 이때 신앙은 체어리티에게 주도권을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361.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는 만일 네가 선을 행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너는 체어리티의 사람이라는 것이며,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는 만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체어리티의 사람이 아니고 대신 악인이라는 말입니다. If thou doest well, an uplifting” signifies that if thou art well disposed, thou hast charity; “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 signifies that if thou art not well disposed, thou hast no charity, but evil.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는 체어리티는 너와 함께 있기를 무척 원하지만 그럴 수가 없는 게 너는 오히려 그것에 대한 지배를 무척 원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 signifies that charity is desirous to be with thee, but cannot because thou desirest to rule over it.

 

 

362. 가인이라 하는 신앙의 교리를 여기서 설명하고 있는데요,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면 그 결과, 체어리티에서도 분리됩니다. 체어리티는 사랑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The doctrine of faith called “Cain” is here described, which in consequence of separating faith from love, separated it also from charity, the offspring of love.

 

어디든지 교회가 있는 곳이면 이단들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신앙의 어떤 특별한 신조에 과도한 관심을 기울이다가 그만 그걸 메인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런 게 바로 인간 사고의 본성, 즉 사람은 어떤 것 하나에 과도한 관심을 보이다가 그걸 다른 모든 것보다 우선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며, 이런 경향은 특히 그가 오버한 나머지(his imagination) 그걸 자신의 고유한 발견이라고 주장할 때라든지, 그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 부풀어 올랐을 때 그렇습니다. Wherever there is any church, there arise heresies, because while men are intent on some particular article of faith they make that the main thing; for such is the nature of man’s thought that while intent on some one thing he sets it before any other, especially when his imagination claims it as a discovery of his own, and when the love of self and of the world puff him up.

 

그렇게 되면 그때부터는 모든 것이 다 그것에 들어맞는 것 같고, 그것을 컨펌하는 것 같아서 그는 결국 그것이 맞다 맹세까지 하게 됩니다. 심지어 그것이 거짓이더라도 말이지요. Everything then seems to agree with and confirm it, until at last he will swear that it is so, even if it is false.

 

바로 이런 식으로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은 신앙을 사랑보다도 더 본질적인 걸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결과적으로 사랑 없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런 삶에서 비롯된 자아와 환상 둘 다에 대한 사랑으로 그들은 어이없게도 그런 컨펌 가운데 있게 된 것입니다. Just in this way those called “Cain” made faith more essential than love, and as they consequently lived without love, both the love of self and the fantasy thence derived conspired to confirm them in it.

 

 

363. 가인이라 부르는 신앙의 교리의 본성을 본 절 그 부분 설명을 보면 알 수 있는데요, 거기 보면 체어리티는 신앙이 아닌 체어리티가 주(, the dominion)가 되기 위해서라면 신앙과 조인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The nature of the doctrine of faith that was called “Cain” is seen from the description of it in this verse, from which it appears that charity was capable of being joined to faith, but so that charity and not faith should have the dominion.

 

이런 이유로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가 먼저 언급되는 것입니다. 네가 선을 행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체어리티의 사람일 수 있다는 뜻으로 말이지요. ‘선을 행하다의 속뜻이 기꺼이 선을 행하고자 함이기 때문인데요, 선한 일을 행함은 기꺼이 선한 일을 의도함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On this account it is first said, “If thou doest well art thou not uplifted?” signifying, If thou art well disposed, charity may be present; for to “do well” signifies, in the internal sense, to be well disposed, since doing what is good comes from willing what is good.

 

고대에는 행위와 의지는 하나였습니다. 어떤 행위를 보면 그 의지를 알 수 있었지요. 그때는 위선이 뭔지도 몰랐습니다. In ancient times action and will made a one; from the action they saw the will, dissimulation being then unknown.

 

낯을 들다가 체어리티가 있다임은 얼굴에 대해 이미 드린 말씀을 보시면 분명한데요, 거기 보시면 낯을 들다는 체어리티가 있음을, 그리고 낯을 떨구다는 그 반대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That an “uplifting” signifies that charity is present 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already said about the face, that to “lift up the face” is to have charity, and that for the “face to fall” is the contrary.

 

 

364. 두 번째로,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는 만일 네가 선을 행할 마음이 없는 사람이라면 너는 체어리티의 사람이 아니고 대신 악인이라는 것입니다. Secondly, it is said, “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 which signifies, If thou art not well disposed, there is no charity present, but evil.

 

누구나 알 수 있는 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가 안으로 들어가고자 준비를 마치고 대기 중인 악을 말한다는 사실입니다. 체어리티가 모두 사라지게 되면, 그때는 오직 무자비함과 증오, 결과적으로는 모든 악만 남기 때문입니다. Everybody can see that “sin lying at the door” is evil ready and desirous to enter; for when there is no charity there are unmercifulness and hatred, consequently all evil.

 

일반적으로 죄를 가리켜 악마’(the devil)라고 하지요, 이 악마는 체어리티가 결핍된 사람에게 아주 가까이 와 있는, 지옥과도 같이 끔찍한 그의 동료입니다. 마음 문 앞에 와 있는 이 악마와 그의 동료를 쫓아버리는 유일한 방법은 주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Sin in general is called the “devil,” who, that is, his crew of infernals, is ever at hand when man is destitute of charity; and the only means of driving away the devil and his crew from the door of the mind is love to the Lord and toward the neighbor.

 

 

365. 세 번째입니다.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는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지내기를 무척 원하지만 그럴 수가 없는 게, 신앙은 오히려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기 때문이며, 그것은 질서에 역행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In the third place it is said, “Un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 by which is signified that charity is desirous to abide with faith, but cannot do so because faith wishes to rule over it, which is contrary to order.

 

신앙이 주도권을 쥐려 하는 한, 그런 건 신앙이 아닙니다. 오직 체어리티의 지배하에서만 신앙이 됩니다. 위에서 보여드린 것처럼, 체어리티가 신앙보다 주(, the principal)이기 때문입니다. So long as faith seeks to have the dominion, it is not faith, and only becomes faith when charity rules; for charity is the principal of faith, as was shown above.

 

체어리티를 불에 비유할 수 있겠는데요, 불은 열과 빛의 본질이지요. 열과 빛이 불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분리 상태에 있는 신앙은 마치 빛은 빛인데 열 없는 빛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빛은 있어도 만물이 무기력하게 죽어가는 겨울철 빛 말입니다. Charity may be compared to flame, which is the essential of heat and light, for heat and light are from it; and faith in a state of separation may be compared to light that is without the heat of flame, when indeed there is light, but it is the light of winter in which everything becomes torpid and d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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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3:20-24

 

20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And the man [homo] called his wife’s name Eve, because she was the mother of all living.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And Jehovah God made for the man and for his wife coats of skin, and clothed them. 22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And Jehovah God said, Behold, the man is become as one of us, knowing good and evil; and now lest he put forth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ves, and eat, and live to eternity, 23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Therefore Jehovah God sent him forth from the garden of Eden, to till the ground from which he was taken. 24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And he cast out the man; and he made to dwell from the east toward the garden of Eden cherubim, and the 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 to keep the way of the tree of lives.

 

개요

 

280. 여기서는 태고(太古) 교회와, 태고 교회에서 떨어져 나간(fell away) 사람들, 그러니까 태고 교회의 끝인 홍수 때까지로 이어지는 태고 교회 후손들 이야기를 대략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The most ancient church, and those who fell away, are here summarily treated of; thus also its posterity down to the flood, when it expired.

 

 

281. 20절은, 천적(天的, celestial)이었던, 그리고 주님 신앙의 생명으로 시작한, ‘하와’(Eve)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 했던 태고 교회 이야기입니다. (20) Of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was celestial, and from the life of faith in the Lord, called “Eve,” and the “mother of all living.” (verse 20)

 

 

282. 21절은, 천적 영적 선이 있었던 첫 번째 후손과, 자연적 선이 있었던 두 번째, 세 번째 후손에 관한 내용인데, 그걸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지으신 가죽옷으로 상징하고 있습니다. (21) Of its first posterity, in which there was celestial spiritual good; and of its second and third, in which there was natural good, signified by the “coat of skin which Jehovah God made for the man and his wife.” (verse 21)

 

 

283. 22절은, 자연적 선이 소멸되기 시작했던, 그리고 만일 이런 상태에서 그들이 신앙의 천적인 것들 안에서 새롭게 빚어지거나 가르침을 받기라도 했었더라면 소멸되어 버리고 말았을 네 번째 후손에 관한 내용으로, 그걸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로 말하고 있습니다. (22) Of the fourth posterity, in which natural good began to be dissipated, and which, had they been created anew or instructed in the celestial things of faith, would have perished, which is meant by, “Lest he put forth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ves, and eat, and live to eternity.” (verse 22)

 

 

284. 23절은, 다섯 번째 후손에 관한 것으로, 이 후손에 이르러는 드디어 모든 선과 진리가 박탈되었고, 그리고 거듭남 이전이었던 본래의 상태(1:2)로 돌아갔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의 의미가 이런 내용입니다. (23) Of the fifth posterity, which was deprived of all good and truth, and was reduced to the state in which they had been previous to regeneration, which is meant by his being “sent forth out of the garden of Eden to till the ground from which he was taken.” (verse 23)

 

 

285. 24절은, 여섯 번째, 그리고 일곱 번째 후손에 관한 내용으로, 이들은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기억-지식, 곧 머릿속 지식으로만 알고 있던 것들마저 다 박탈당했고, 그들의 본성에는 아주 더러운 사랑들과 망상에 가까운 신념들만 남았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이들로 말미암아 신앙에 관한 거룩한 것들이 모독을 당할 것이기 때문인데요,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24) Of the sixth and seventh posterities, in that they were deprived of all memory-knowledge of what is good and true, and were left to their own filthy loves and persuasions; this being provided lest they should profane the holy things of faith, which is signified by his being “driven out, and cherubim being made to dwell at the garden, with the flame of a sword, to keep the way of the tree of lives.” (verse 24)

 

배경

 

286. 이 장과 앞의 장들, 그리고 지금 보고 있는 이 절들에 이르기까지 다루어지고 있는 내용은 태고 시대 사람들과 그들의 거듭남에 관한 것입니다: 먼저 들짐승처럼 살았던 사람들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들은 그러나 결국 영적인 사람들이 되었지요; 그 다음은 천적 인간이 된 사람들에 관한 내용입니다. 태고 교회를 구성한 사람들이 바로 이들입니다; 그 뒤에 사라진 사람들과 그들의 자손들, 차례대로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후손들과 홍수 때까지 이른 그들의 계승자들에 관한 내용입니다. This and the preceding chapters, down to the verses now under consideration, treat of the most ancient people and of their regeneration; first, of those who lived like wild animals, but at length became spiritual men; then of those who became celestial men, and constituted the most ancient church; afterwards of those who fell away, and their descendants, in regular order through the first, second, and third posterities and their successors, down to the flood.

이 장을 포함, 이어지는 절들을 통해, 태고 교회의 사람이 형성된 때부터 홍수 때까지 이 기간에 일어난 일들에 대한 개요를 만나게 됩니다; , 이것이 앞서 다룬 모든 내용, 곧 창세기 맨 앞 첫 세 장의 결론입니다. In the verses following, which conclude the chapter, we have a recapitulation of what occurred from the period when the man of the most ancient church was formed, until the flood; thus it is a conclusion to all that goes bef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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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4

 

6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Verse 6,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y art thou wroth, and why are thy faces fallen?

 

※ 6절 속뜻

 

가인의 교리에 선 사람들은 체어리티에 대한 자신들의 외면 및 그 결과, 자신들의 내면에 생긴 악한 변화에 대한 양심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35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는 양심이 말했음을, 그의 몹시 분하여 함’, ‘안색이 변함은 앞서와 같이 체어리티가 떠났음, 그리고 내면이 변했음을 의미합니다. Jehovah said unto Cain,” means that conscience dictated; that his “anger was kindled, and that his countenance fell,” signifies as before that charity had departed, and that the interiors were changed.

 

※ ‘dictated’를 NCE 역에서는 ‘spoke’로 번역, 저도 이 번역을 따랐습니다.

 

 

360.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가 양심의 소리를 의미한다는 건 앞서 설명한 비슷한 구절(3:8, AC.219)이 있어 더 이상 컨펌할 필요는 없지 싶습니다. That “Jehovah said unto Cain” means that conscience dictated, needs no confirmation, as a similar passage was explained above.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창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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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4

 

5절,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Verse 5, And unto Cain and unto his offering he looked not, and Cain’s anger was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ell.

 

※ 5절 속뜻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나 이런 걸 눈감아주는 교리, 이런 게 가인인데, 주님은 이런 예배는 받으실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체어리티가 떠나면 그 내면 상태가 바뀌게 되는데 이런 걸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라 하신 것입니다.

 

 

355. 가인은 지금까지 말씀드린 대로 사랑과 분리된 신앙, 혹은 이런 분리 가능성을 용인하는 그런 교리를 말합니다.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는 앞서와 같이 그의 예배는 받아들여질 수 없었음을 말합니다. By “Cain,” as has been stated, is signified faith separated from love, or such a doctrine as admits of the possibility of this separation; by his “offering not being looked to” is signified as before that his worship was unacceptable.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는 그 내면(the interiors)이 변했음을, 내면 상태가 바뀌었음을 말합니다. By “Cain’s anger being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alling” is signified that the interiors were changed.

 

’(, anger)은 체어리티가 떠났음을, ‘안색’(顔色, faces)은 내면을 말합니다. 사람의 내면 상태가 바뀌는 걸 안색이 변한다라고 하지요. By “anger” is denoted that charity had departed; and by the “faces,” the interiors, which are said to “fall” when they are changed.

 

 

356. 가인은 사랑과 분리된 신앙, 혹은 이런 분리를 용인하는 어떤 교리를, 그리고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는 그의 예배는 받아들여질 수 없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 보여드렸습니다. That by “Cain” is signified faith separated from love, or a doctrine that admits of this separation; and that “to his offering he looked not” signifies that his worship was not acceptable, has been shown before.

 

 

357. 가인이 분하여의 의미가 체어리티의 떠남이라는 것은 나중에 그가 그의 아우 아벨을 죽이는 것과 관련되는 걸 보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아벨은 체어리티입니다. That “Cain’s anger was kindled” signifies that charity had departed is evident from what is afterwards related of his killing his brother Abel, by whom is signified charity.

 

분노는 무엇이든지 자아 사랑 및 그 탐욕을 거스르기만 하면 야기되는 일반적인 일종의 어펙션(affection, 애정, 감정, 애착)입니다. Anger is a general affection resulting from whatever is opposed to self-love and its cupidities.

 

이것은 악령들의 세계에서는 아주 생생하게 지각되는데요, 거기는 체어리티는 전혀 없고, 대신 증오로 가득한 악령들로 인해 주님을 대적하는 전반적인 분노가 있기 때문이며,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에 호의적이지 않은 것에는 무엇이든지 신경질적으로 적의를 드러내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적의는 분노에 의해 주도적이 됩니다. This is plainly perceived in the world of evil spirits, for there exists there a general anger against the Lord, in consequence of evil spirits being in no charity, but in hatred, and whatever does not favor self-love [amori proprio] and the love of the world, excites opposition, which is manifested by anger.

 

말씀에서 여호와의 어떠하심을 서술하면서 종종 분노’, ‘진노’, 심지어 격노까지 이런 표현들을 사용합니다만 그러나 이런 표현들은 사람에게나 쓰는 것이며, 다만 위에서 언급한 어떤 이유로 그렇게 보이기 때문에, 마치 그런 게 여호와의 속성인 듯 사용하는 것입니다. In the Word, “anger,” “wrath,” and even “fury,” are frequently predicated of Jehovah, but they are of man, and are attributed to Jehovah because it so appears, for a reason mentioned above.

 

그래서 시편에 기록되기를 Thus it is written in David:

 

49그의 맹렬한 노여움과 진노와 분노와 고난 곧 재앙의 천사들을 그들에게 내려보내셨으며 50그는 진노로 길을 닦으사 그들의 목숨이 죽음을 면하지 못하게 하시고 그들의 생명을 전염병에 붙이셨으며 (시78:49-50) He sent against them the anger of his nostril, and wrath, and fury, and trouble, and an immission of evil angels; he hath weighed a path for his anger, he withheld not their soul from death. (Ps. 78:49–50)

 

여호와는 누구에게도 화를 내신 적이 없으시며, 대신 사람들이 화를 자초하는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 가운데 재앙의 천사들을 보내시지도. 반대로 사람이 그들을 자신한테로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Not that Jehovah ever sends anger upon anyone, but that men bring it upon themselves; nor does he send evil angels among them, but man draws them to himself.

 

그래서 그는 진노로 길을 닦으사 그들의 목숨이 죽음을 면하지 못하게 하시고라는 말씀을 더하시며, 그래서 이사야에서도,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갈 것이라 무릇 그에게 노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리라’ (45:24) 하시는데, 그래서 여기 분명한 것은, ‘노함은 악, 또는 같은 의미인데, 체어리티로부터 떠남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And therefore it is added, that he “hath weighed a path for his anger, and withheld not their soul from death”; and therefore it is said in Isaiah, “To Jehovah shall he come, and all that were incensed against him shall be ashamed” (Isa. 45:24), whence it is evident that “anger” signifies evils, or what is the same, a departure from charity.

 

 

358. 안색이 변하니가 내면이 변했음이라는 것은 얼굴변함의 상징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by the “faces falling” is signified that the interiors were change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face” and of its “falling.

 

얼굴은, 고대인들에게는, 내면(internal things)을 상징했습니다. 내면이 얼굴을 통해서 밖으로 반영되기 때문인데요, 태곳적 사람들은 그 얼굴이 내면과 완전히 일치하는 그런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어떤 사람의 얼굴을 보고 그 사람의 기질이나 마인드를 알 수 있었던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The face, with the ancients, signified internal things, because internal things shine forth through the face; and in the most ancient times men were such that the face was in perfect accord with the internals, so that from a man’s face everyone could see of what disposition or mind he was.

 

그들은 얼굴로는 이런 표정을 하면서 속으로는 다른 거 생각하는 걸 무슨 괴물 같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They considered it a monstrous thing to show one thing by the face and think another.

 

무슨 척, 무슨 체 하는 것과 속이는 것을 그래서 혐오스럽게 여겼고, 그래서 얼굴은 속, 곧 내면의 상징이었습니다. Simulation and deceit were then considered detestable, and therefore the things within were signified by the face.

 

체어리티가 얼굴을 통해 빛날 때는 그 얼굴을 ‘위로 들린다’ 하였고, 그 반대는 ‘아래로 떨군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축복기도문에서 주님을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시는’ 주님으로 서술하는 것입니다. (민6:26; 시4:6) When charity shone forth from the face, the face was said to be “lifted up”; and when the contrary occurred, the face was said to “fall”; wherefore it is also predicated of the Lord that he “lifts up his faces upon man,” as in the benediction (Num. 6:26; and in Ps. 4: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민6:26)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시4:6)

 

이것은 주님이 사람에게 체어리티(cherity)를 베푸심을 상징합니다. by which is signified that the Lord gives charity to man.

 

얼굴을 떨굼의 의미는 예레미야에 보면 이렇습니다. What is meant by the “face falling,” appears from Jeremiah: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3:12) I will not make my face to fall toward you, for I am merciful, saith Jehovah. (Jer. 3:12)

 

여호와의 얼굴은 자비입니다. 그가 누굴 향해 그 얼굴을 드심은 그가 자비하셔서 그를 향해 체어리티를 베푸심을, 그 반대는 그가 얼굴을 떨구심’, 즉 사람의 안색이 변할 때입니다. The “face of Jehovah” is mercy, and when he “lifts up his face” upon anyone, it signifies that out of mercy he gives him charity; and the reverse when he “makes the face to fall,” that is, when man’s face fal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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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보

2022-05-22(D1)-제10권21호통456호.pdf
0.27MB

 

2. 설교 원고 및 유튜브

2022-05-22(D1)-주일예배(2308, 창3,9-10, AC.226-228), '네가 어디 있느냐'.pdf
0.46MB

https://youtu.be/dGgp-tZzyOk

 

3. 축도 원고 및 유튜브

2022-05-22(D1)-주일예배(2308, 창3,9-10, AC.226-228), '네가 어디 있느냐', 순서, 축도.pdf
0.23MB

https://youtu.be/K6U503kejP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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