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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2.06.09 창4:19, AC.405-411,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창4

 

19절,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Verse 19,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 19절 속뜻

 

 

 

405. 가인으로부터 여섯 번째 순서인 ‘라멕’은 황폐함을 상징합니다. 더이상 어떤 신앙도 남아 있지 않게 된 결과입니다. 그의 ‘두 아내’는 일종의 새로운 교회의 도래를 상징하며, ‘아다’는 그 교회의 천적 영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그리고 ‘씰라’는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각각 상징합니다. By “Lamech,” who was the sixth in order from Cain, is signified vastation, in consequence of there being no longer any faith; by his “two wives” is signified the rise of a new church; by “Adah,” the mother of its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and by “Zillah,” the mother of its natural things.

 

 

406. ‘라멕’은 황폐함, 혹은 신앙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음을 상징합니다. 이 사실은 이어지는 23절, 24절을 보면 분명한데요, 거기에서,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말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사람’은 신앙을, ‘어린아이’ 혹은 ‘소년’은 이웃 사랑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That by “Lamech” is signified vastation, or that there was no faith, is evident from the following verses (23–24), in which it is said that he “slew a man to his wounding, and a little one to his hurt”; for there, by a “man” is meant faith, and by a “little one” or “little child,” charity.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24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창4:23, 24)

 


407
. 보통 한 교회의 상태는 그래서 상황에 따라 달라집니다. The state of a church in general is thus circumstanced.

 

시간이 흐름에 따라, 교회는 참 신앙으로부터 멀어지다가 결국 신앙이라는 것이 완전히 사라지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는데, 그때를 일컬어 ‘황폐해졌다’고 합니다. In process of time it departs from the true faith until at last it comes to be entirely destitute of faith, when it is said to be “vastated.”

 

이런 일이 태고교회의 경우, 가인파(가인派, Cainites)라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리고 또한 홍수 후 고대교회의 경우와, 뿐만 아니라, 유대 교회의 경우에도 있었습니다. This was the case with the most ancient church among those who were called Cainites, and also with the ancient church after the flood, as well as with the Jewish church.

 

주의 강림(降臨, the Lord’s advent)의 때에, 이런 종말이 다음과 같은 황폐한 상태 가운데 있었는데요, 그들은 자기들을 구원하러 오시기로 예정되어 있던 주님에 관하여 아무것도 몰랐으며,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님 신앙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습니다. At the time of the Lord’s advent this last was in such a state of vastation that they knew nothing about the Lord, that he was to come into the world for their salvation, and they knew still less about faith in him.

 

초대 기독교회, 혹은 주님 강림 후 존재했던 교회의 경우 또한 그랬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1750년대 즈음 유럽) 교회의 경우 역시 그 안에 아무런 신앙도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철저하게 황폐해진 상황입니다. Such was also the case with the primitive Christian church, or that which existed after the Lord’s advent, and which at this day is so completely vastated that there is no faith remaining in it.

 

그러나 교회의 극소수 핵들은 늘 남아 있는데, 이것은 신앙에 관해서 황폐해진 사람들은 인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태고교회의 경우가 그랬는데, 태고교회의 남은 자들은 홍수 때까지 있었고, 홍수 후에도 계속 있었습니다. Yet there always remains some nucleus of a church, which those who are vastated as to faith do not acknowledge; and thus it was with the most ancient church, of which a remnant remained until the time of the flood, and continued after that event.

 

이들 태고교회 내 남은 자들을 이름하여 ‘노아’라 하는 것입니다. This remnant of the church is called “Noah.”

 

 

408. 하나의 교회가 더이상 그 어떤 신앙도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황폐해지면, 전과 다르게 새로움이 시작됩니다. 즉, 새 빛이 발(發)하는데요, 이걸 말씀에서는 ‘아침’이라고 합니다. When a church has been so vastated that there is no longer any faith, then and not before, it begins anew, that is, new light shines forth, which in the Word is called the “morning.”

 

이 새 빛 혹은 ‘아침’이 왜 교회가 황폐해질 때까지는 발하지 않는지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동안 신앙과 이웃 사랑의 일들은 모독의 일들과 뒤엉킨 상태로 지내왔습니다. 그리고 이 일들이 여전히 이런 상태에 있는 한, 무슨 빛이나 이웃 사랑이 시작되기란 불가능합니다. ‘잡초들’이 모든 ‘좋은 씨’를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The reason why the new light or “morning” does not shine forth until the church is vastated, is that the things of faith and of charity have been commingled with things profane; and so long as they remain in this state it is impossible for anything of light or charity to be insinuated, since the “tares” destroy all the “good seed.”

 

그러나 신앙이 전혀 없으면, 신앙은 더이상 모독 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선포된 것을 더이상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시인도, 믿지도 않고, 대신 알기만 하는 사람들은 위에서 관찰한 것처럼, 모독을 할 수가 없습니다. But when there is no faith, faith can no longer be profaned, because men no longer believe what is declared unto them; and those who do not acknowledge and believe, but only know, cannot profane, as was observed above.

 

이것이 바로 오늘날 유대인들의 경우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더불어 살면서, 그리스도인들이 시인하는 주님이 자기들이 그토록 기다려 왔고, 지금도 기다리고 있는 바로 그 메시아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은 이 사실을 모독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시인도, 믿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This is the case with the Jews at the present day, who in consequence of living among Christians must be aware that the Lord is acknowledged by Christians to be the messiah whom they themselves have expected, and still continue to expect, but yet they cannot profane this because they do not acknowledge and believe it.

 

그리고 주님에 대하여 들은 모하메드인들과 이방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And it is the same with the Mohammedans and gentiles who have heard about the Lord.

 

이것이 바로 유대 교회가 아무것도 시인도, 믿지도 않을 때까지는 주님이 세상에 오실 수 없으셨던 이유였습니다. It was for this reason that the Lord did not come into the world until the Jewish church acknowledged and believed nothing.

 

 

409. ‘가인’이라 하는 이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이단 역시 세월이 흘러 황폐해졌는데요, 사랑을 시인했지만, 신앙을 머리 삼고, 사랑보다 앞세웠기 때문입니다. 이 가인이라는 이단에서 유래한 이단들은 점점 더 곁길로 빠지더니, 순서상 여섯 번째인 라멕에 이르러서는 아예 신앙조차 부인했습니다. The case was the same with the heresy called “Cain,” which in process of time was vastated, for although it acknowledged love, yet it made faith the chief and set it before love, and the heresies derived from this one gradually wandered from it, and Lamech, who was the sixth in order, altogether denied even faith.

 

이 지경이 되자 새 빛 혹은 아침이 빛을 발하며, 새 교회가 나왔는데 여기 본문에 보면, 그 이름이 ‘아다와 씰라’이며, 부르기를, ‘라멕의 아내들’이라 하고 있습니다. When this time arrived, a new light, or morning, shone forth, and a new church was made which is here named “Adah and Zillah,” who are called the “wives of Lamech.”

 

그들을 일컬어 라멕의 아내들이라 하고 있습니다. 라멕은 아무 신앙도 갖고 있지 않았던 사람인데도 말입니다. 마치 유대인들의 내적, 외적 교회의 경우와 같은데요, 유대인들 역시 아무 신앙도 갖고 있지 않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이 두 교회를, 말씀에 보면 ‘아내들’, 곧 야곱의 두 아내, 레아와 라헬로 표현하고 있는데, 여기서 레아는 외적 교회를, 라헬은 내적 교회를 표현합니다. They are called the wives of Lamech, although he possessed no faith, just as the internal and external church of the Jews, who also had no faith, are also in the Word called “wives,” being represented by Leah and Rachel, the two wives of Jacob—Leah representing the external church and Rachel the internal.

 

이 교회들은 둘로 보이지만 하나입니다. 내적인 것과 분리된, 외적인 것 혹은 대신하는 것은 단지 무슨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거나 죽은 것인 반면, 외적인 것과 함께 하는 내적인 것은 하나의 교회를 형성하며, 여기 아다와 씰라가 그런 것처럼 심지어 하나 된 교회, 같은 교회를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These churches, although they appear like two, are yet only one; for the external or representative, separate from the internal, is but as something idolatrous, or dead, whereas the internal together with the external constitute a church, and even one and the same church, as Adah and Zillah do here.

 

하지만 야곱과 그의 후손은 라멕처럼 아무 신앙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는 그들 가운데 있을 수가 없어 대신 이방인들에게로 옮겨졌습니다. 이들은 부정(不貞, infidelity)한 대신 무지하게 살았습니다. As however Jacob and his posterity, like Lamech, had no faith, the church could not remain with them, but was transferred to the gentiles, who lived not in infidelity but in ignorance.

 

교회가 황폐해졌을 때, 그 가운데 진리를 가진 사람들이 남아 있을 경우는,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극히 드뭅니다. 교회는 그 경우, 진리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에게로 이동하는데요, 오히려 이 사람들이 저 사람들보다 더 쉽게 신앙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The church rarely, if ever, remains with those who when vastated have truths among them [apud se] but is transferred to those who know nothing at all of truths, for these embrace the faith much more easily than the former.

 

 

410. 황폐함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먼저, 알면서 알고 싶어 하지 않거나, 보면서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과거 유대인들과 오늘날 기독교인들처럼 말입니다. 두 번째는, 무지의 결과인데요, 뭘 알지도 볼 줄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고대와 현대 이방인들처럼 말입니다. Vastation is of two kinds; first, of those who know and do not wish to know, or who see and do not desire to see, like the Jews of old, and the Christians of the present day; and secondly, of those who, in consequence of their ignorance, neither know nor see anything, like both the ancient and modern gentiles.

 

황폐함의 마지막 때가, 알면서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즉, 보면서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를 때, 하나의 교회가 새롭게 일어나는데요, 이들이 아니고, 이들이 이방인이라 부르는 사람들한테 일어납니다. When the last time of vastation comes upon those who know and do not desire to know, that is, who see and do not desire to see, then a church arises anew, not among them, but with those whom they call gentiles.

 

이런 일이 홍수 전 태고교회에 일어났고, 또 홍수 후, 고대교회, 그리고 유대교회에도 일어났습니다. This occurred with the most ancient church that was before the flood, with the ancient church that was after that event, and also with the Jewish church.

 

새 빛이 그때 빛을 발하고, 전에는 아닌 이유는,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처럼, 그때 그들은 계시된 것들을 더이상 모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것들이 진리임을 시인도, 믿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The reason why new light shines forth then and not before is, as has been said, that then they can no longer profane the things revealed, because they do not acknowledge and believe that they are true.

 

 

411. 새 교회가 일어나기 전에 반드시 먼저 마지막 황폐함의 때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주님은 예언서에서 자주 선언하셨는데요, 신앙의 천적인 것들과 관련해서는, ‘황폐함’, 혹은 ‘황폐하게 함’으로, 그리고 신앙의 영적인 것들과 관련해서는, ‘황무함’으로 일컬으십니다. That the last time of vastation must exist before a new church can arise, is frequently declared by the Lord in the prophets, and is there called “vastation” or “laying waste,” in reference to the celestial things of faith; and “desolation,” in relation to the spiritual things of faith.

 

또는 ‘종말’, ‘끊음’으로도 말씀하십니다. (※ 다음 본문들 참조 : 사6:9, 11-12, 23:8-끝절, 24장, 42:15-18, 렘25, 단8, 9:24-끝절, 습1, 신32, 계15, 16 및 이어지는 장들) It is also spoken of as “consummation” and “cutting off.” (See Isa. 6:9, 11–12; 23:8 to the end; 24; 42:15–18; Jer. 25; Dan. 8; 9:24 to the end; Zeph. 1; Deut. 32; Rev. 15; 16; and following chapters.)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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