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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2.08.04 창6:9, AC.610-615,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창6:9-22

 

9절,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Verse 9, These are the births of Noah; Noah was a man righteous and perfect in his generations: Noah walked with God.

 

※ 9절 속뜻

 

 

610. ‘노아의 족보’는 새 교회가 개선되거나 다시 태어날 방법에 대한 설명을 의미합니다. By “the births of Noah” is signified a description of the reformation or regeneration of the new church.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는 그 교회는 체어리티를 타고난 교회였다는 뜻입니다. ‘의인’(또는 ‘의로운’)(just, righteous)은 체어리티에 수반된 선과 관계가 있고, ‘완전한’(perfect)은 체어리티에 수반된 진리와 관계가 있습니다. That “Noah was a man just and perfect in his generations” signifies that he was such that he could be endowed with charity; “just” (or “righteous”) has relation to the good of charity, and “perfect” to the truth of charity.

‘당대’(generation)는 종교적 발전의 한 단계를 말합니다. The “generations” are those of faith.

‘하나님과 동행’은 앞서 에녹의 경우처럼, 여기서도 신앙과 관련된 교리를 상징합니다. To “walk with God” signifies here as before, when said of Enoch, the doctrine of faith.

 

 

611. ‘노아의 족보’라는 표현이, 새 교회가 개선되거나 다시 태어날 방법에 대한 설명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앞서 말씀드린 내용들을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창2:4; 5:1) That by “the births of Noah” is signified a description of the reformation or regeneration of the new church, 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said before (Gen. 2:4; Gen. 5:1).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창2:4)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612.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cf. 주석 #2) 자라 Noah was a man righteous and perfect(cf. 주석 #2) in his generations.

이 교회는 체어리티라는 정서를 타고날 수 있었던 교회였음을 위와 같이 표현한 것이라는 이런 사실은, ‘의인이요 완전한’이라는 표현의 상징을 확인하면 됩니다. ‘의인’(또는 ‘의로운’)은 체어리티에 수반된 선과, ‘완전한’은 체어리티에 수반된 진리와 각각 관련됩니다. 같은 의미를 이 교회만의 차별화된 특징인 체어리티를 들여다 볼 때 또 만나게 되는데요, 그것은 주님의 자비, 곧 주님의 허락하심을 따라 나중에 다루겠습니다. (AC.640, 765) That this signifies that he was such that he could be endowed with charity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just and perfect,” “just” (or “righteous”) having regard to the good of charity, and “perfect” to the truth of charity; and also from the essential of that church being charity, concerning which,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의인’(또는 ‘의로운’)은 체어리티에 수반된 선과 관련이 있고, ‘완전한’은 체어리티에 수반된 진리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아래 이사야 말씀을 보면 확실합니다. That “just” (or “righteous”) has regard to the good of charity, and “perfect” to the truth of charity, is evident from the Word, as in Isaiah: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공의를 행하여 그의 하나님의 규례를 저버리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거워하는도다 (사58:2) They will seek me daily and desire knowledge of my ways, as a nation that doeth righteousness, and forsaketh not the judgment of their God; they will ask of me the judgments of righteousness, and will long for the approach of God. (Isa. 58:2)

 

여기 ‘규례, 판단’(judgment)은 진리에 의해 옹호되는 일들을, ‘공의, 의’(righteousness)는 선에 의해 촉구되어지는 일들을 각각 대표합니다. Here “judgment” denotes the things which are of truth, and “righteousness” those which are of good.

 

‘정의와 공의를 행함’은 선과 진리를 행하는 일종의 공식 표준이 되었습니다. (아래 말씀들 참조) “Doing judgment and righteousness” became as it were an established formula for doing what is true and good (as in Isa. 56:1; Jer. 22:3, 13, 15; 23:5; 33:15; Ezekiel 33:14, 16, 19).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정의를 지키며 의를 행하라 이는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공의가 나타날 것임이라 하셨도다 (사56:1)

 

3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탈취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 13불의로 그 집을 세우며 부정하게 그 다락방을 지으며 자기의 이웃을 고용하고 그의 품삯을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15네가 백향목을 많이 사용하여 왕이 될 수 있겠느냐 네 아버지가 먹거나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정의와 공의를 행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때에 그가 형통하였었느니라 (렘22:3, 13, 15)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렘23:5)

 

그날 그때에 내가 다윗에게서 한 공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정의와 공의를 실행할 것이라 (렘33:15)

 

14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돌이켜 자기의 죄에서 떠나서 정의와 공의로 행하여 16그가 본래 범한 모든 죄가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반드시 살리라 이는 정의와 공의를 행하였음이라 하라 19만일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 정의와 공의대로 행하면 그가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겔33:14, 16, 19)


주님 말씀입니다. The Lord said:

 

그때에 의인들(cf. 주석 #3)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마13:43) The righteous(cf. 주석 #3) shall shine forth as the sun, in the kingdom of my father, (Matt. 13:43)

 

‘의인들’은 체어리티를 타고난 사람들을 대표합니다. 그리고 시대의 종말과 관련된 구절에서는, “the righteous” meaning those who are endowed with charity; and concerning the consummation of the age he said: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마13:49) The angels shall go forth and shall sever the wicked from among the righteous. (Matt. 13:49)

 

여기서도 ‘의인들’은 체어리티에서 오는 선을 보여주는 사람들을 대표합니다. Here also the “righteous” denote those who are in the good of charity.

 

[2] 하지만 ‘완전한’(perfect)은 체어리티 가운데 자라는 진리를 상징합니다. 진리는 여러 다른 곳에서 비롯될 수 있는데, 체어리티의 품에 안겨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 가운데서 자란 진리, 이 진리를 이름하여 ‘완전한’, ‘완전한 자’(perfect man,)라 하는 것입니다. 그 한 예가 다윗의 글에 나옵니다. But “perfect” signifies the truth which is from charity, for there is truth from many another origin; but that which is from the good of charity from the Lord is called “perfect” and a “perfect man,” as in David:

 

1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2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시15:1-2) Who shall sojourn in thy tent, who shall dwell in the mountain of thy holiness? He that walketh perfect, and worketh righteousness, and speaketh the truth in his heart. (Ps. 15:1–2)

 

‘완전한’(perfect, 혹은 온전한 complete, 정직한, 반듯한 upright) 사람을 여기 묘사하고 있습니다. The “perfect” [or “complete”] man is here described.

계속해서 Again:

 

자비로운 자에게는 주의 자비로우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시18:25) With the holy thou wilt show thyself holy; with the perfect man thou wilt show thyself perfect, (Ps. 18:25)

 

‘완전한 자’는 체어리티를 동반한 거룩이나 선의 결과로 완전한 사람, 반듯한 사람입니다. where the “perfect man” is one who is so from holiness, or the good of charity.

다시 계속해서 And again: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시84:11) Jehovah will withhold no good from them that walk in perfectness [integritate]. (Ps. 84:11)

 

[3] ‘완전한 자’(perfect man), 반듯한 한 개인은 진실한 사람이 되도록 선으로 격려를 받는 사람, 다시 말해서, 타인을 위한 사랑으로 말도 하고 행동도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실은 반듯함, 정직함에 대해 말씀이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를 보면 분명한데요, 말씀에서는 이것을 종종 ‘걸어가다’(walk), ‘길’(way) 같은 단어로 표현합니다. 반듯한 사람 혹은 성실한 사람과 관련해서는 ‘반듯한, 옳은’(upright, right)이나 ‘정직, 청렴’(uprightness, rectitude)을 사용하는데, 이런 단어들은 진리와 관련이 있습니다. That a “perfect man” is one who is true from good, or who speaks and does truth from charity, is evident from the words “walk” and “way” being often applied to what is perfect, that is, to wholeness or entirety, and also the words “upright” or “uprightness,” which words pertain to truth.

예를 들면, 다윗의 글입니다. As in David:

 

내가 완전한 길을 주목하오리니 주께서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 안에서 행하리이다 (시101:2) I will teach the perfect in the way how far he shall come unto me. I will walk within my house in the perfectness of my heart; (Ps. 101:2)

 

그리고 6절에서 and in the sixth verse: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살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따르리로다 (시101:6) He that walketh in the way of the perfect, he shall minister unto me. (Ps. 101:6)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음이여 (시119:1) Blessed are the perfect in the way, who walk in the law of Jehovah. (Ps. 119:1)

 

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 (시25:21) Perfectness and uprightness shall guard me. (Ps. 25:21)

 

온전한 사람을 살피고 정직한 자를 볼지어다 모든 화평한 자의 미래는 평안이로다 (시37:37) Mark the perfect man, and behold the upright, for the end of that man is peace. (Ps. 37:37)

 

이 구절들을 보면, ‘정직하다, 의롭다’(righteous)는 선을 행하는 사람을, ‘온전하다’(perfect)는 선에서 나온 진리를 행하는 사람을 일컫는 것임을 알 수 있으며, 이것이 또한 ‘정의와 공의를 행함’인 것입니다. It is evident from these passages that he is called “righteous” who does what is good, and that he is called “perfect” who does what is true therefrom, which also is to “do righteousness and judgment.”

 

‘거룩’(holiness)과 ‘의’(righteousness)는 신앙의 천적 측면이며, ‘온전함, 성실’(perfectness, integrity)과 ‘공의’(judgment)는 그런 천적 측면에서 나오는 영적 측면입니다. “Holiness” and “righteousness” are the celestial of faith; “perfectness” and “judgment” are the spiritual thence derived.

 

 

※ 각주

 

2. 여기에 쓰인 ‘완전하다’는 ‘전체’, ‘모든, 온’의 의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말, 단어는 정수입니다. [개정자] “Perfect” is used here in the sense of “whole,” “entire.” Swedenborg’s word is integer. [Reviser]

 

3. 두 영어 단어 ‘정의롭다’, ‘의롭다’에 대한 라틴어는 하나밖에 없으며, ‘정의’, ‘의’의 경우도 같습니다. [개정자] The Latin has only one word for our two English words “just” and “righteous,” and it is the same with “justice” and “righteousness.” [Reviser]

 

 

613. ‘당대에’(generations)가 신앙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은 글자의 뜻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글자의 뜻으로 말씀을 보게 되면 역사적으로, 즉 실제 일어난 역사 중 언제 어떤 사건을 가리키는 건지로만 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는 오직 내적 의미만 다루기 때문에, 이 표현은 신앙에 관한 ‘당대에’, 즉, ‘신앙의 발전 단계 중 어느 한 단계에’라는 의미입니다. That the “generations” are those of faith, does not appear from the sense of the letter, which is historical; but as internal things only are here treated of, generations of faith are signified.

 

NCE(New Centry Edition)에서는, 이 ‘당대에’(generation)를 ‘종교적 발전의 한 단계’(a stage of religious development)로, 내포된 메시지를 ‘신앙의 여러 속성들’(attributes of faith)로 풀고 있습니다.


‘당대에’가 여기서 의미하는 게, ‘연결’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로도 또한 분명합니다. It is also evident from the connection that the generations here are no others.

말씀 다른 구절들, 가령 이사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It is the same in other passages of the Word, as in Isaiah: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 (사58:12) They that shall be of thee shall build the waste places of old; thou shalt raise up the foundations of generation and generation; and thou shalt be called the repairer of the breach, the restorer of paths to dwell in. (Isa. 58:12)

 

이 모든 것들은 신앙에 속한 것들, 곧 신앙의 여러 면들을 상징합니다. ‘오래 황폐된 곳들’은 신앙의 천적인 것들, 곧 황폐해진, 신앙의 천적 퀄러티들을, ‘역대의 파괴된 기초’는 신앙의 영적인 것들, 곧 신앙의 영적 퀄러티들의 기초들을 각각 상징합니다. 이것들은 고대 이래로 폐허가 되었는데, 이 또한 상징하는 바입니다. All these things signify what is of faith; the “waste places of old” signify celestial things of faith; the “foundations of generation and generation,” spiritual things of faith, which had lapsed from the ancient times that are likewise signified.

 

계속해서 Again: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옛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 (사61:4) They shall build the old wastes, they shall raise up the former desolations, they shall renew the waste cities, the desolations of generation and generation; (Isa. 61:4)

 

유사한 상징이지요. with similar signification.

계속해서 And again: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그들이 생산한 것이 재난을 당하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요 그들의 후손도 그들과 같을 것임이라 (사65:23) They shall not labor in vain, nor bring forth for trouble; for they are the seed of the blessed of Jehovah, and their offspring with them. (Isa. 65:23)

 

여기서도 ‘생산한 것’, 즉 자녀를 낳은 것은 신앙에 속한 것들, 곧 신앙의 속성들에 대한, ‘수고’는 사랑에 속한 것들, 곧 사랑의 속성들에 대한 서술입니다. Here also “bringing forth” [generare] is predicated of the things of faith; “laboring,” of those of love.

후자의 경우, 그들을 가리켜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라, 전자를 가리켜는 ‘후손’이라 하고 있습니다. Of the latter it is said that they are “the seed of the blessed of Jehovah”; of the former, that they are “offspring.”

 

이처럼 말씀에서 ‘당대’, ‘역대’, ‘자손’, ‘후손’ 등의 표현은 모두 신앙과 관련된 표현들입니다. 단순한 무슨 역사 이야기가 아닙니다.

 

 

614.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가 신앙의 교리, 신앙에 관한 교리를 상징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며’라는 동일한 표현으로 언급되었던 에녹에 대한 내용(창5:22, 24, AC.519)을 보면 되는데요, 거기 보면, 이 표현은 후손들의 사용을 위해 보전된, 즉, 나중에 일어날 후손들로 하여금 그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따로 보관하신 신앙의 교리를 상징했습니다. That “to walk with God” signifies the doctrine of faith, may be seen from what was said before respecting Enoch (chapter v. 22, 24), of whom also it is said that he “walked with God”; and there it signifies the doctrine of faith preserved for the use of posterity.

 

22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5:22, 24)


그리고 지금 이들이 바로 그 후손이기 때문에, 이 주제가 지금 다시 거론된 것입니다. And as this is the posterity for whose use it was preserved, the subject is now here taken up again.

 

 

615. 이 교회 사람의 퀄리티가 여기서는 일반적으로 서술되고 있습니다. 즉, 본 절은 이 교회 사람들의 전체적인 모습, 일반적인 모습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그 모습이 된 건 아니고, 앞으로 될 모습입니다. 뒤에 이어지는 여러 장을 통해 이제 그 형성 과정을 보게 되는데요, (AC.838, 977-979) 즉, 신앙에 관한 지식들을 통해, 이들은 체어리티의 사람들, 체어리티라는 감정, 정서를 선물로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되며, 이렇게 이들은 체어리티 가운데 어떤 행동들을 하게 되고, 그 결과, 체어리티와 연결된 선량함을 통해 진리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The quality of the man of this church is here described in general; not that he was such as yet—for his formation is treated of in what follows—but that such he might become: that is to say, that by knowledges of faith he could be endowed with charity, and so act from charity, and from the good of charity know what is true.

 

전에는, 즉, 이들의 선조인 태고 교회 사람들은 퍼셉션이라는 타고나는 능력으로 무슨 학습 없이도 선과 진리를 직관하며,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면, 이제 이들 홍수 후 세대인 노아 교회부터는 선과 진리를 이런 방식으로 알게 됩니다. 퍼셉션의 자리를 이제 이런 방식, 곧 신앙의 체어리티를 경유하는 방식이 대신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체어리티의 선 혹은 ‘의인이요’(righteous, just)가 먼저 나오고, 체어리티의 진리 혹은 ‘완전한’(perfect, upright)이 그 뒤를 잇는 것입니다. For this reason the good of charity or “righteous” precedes, and the truth of charity or “perfect” follows.

체어리티는 앞서 말씀드렸듯(AC.325, 351), 이웃(our fellow human beings)을 향한 사랑이요, 자비입니다. 이것은 태고 교회가 주님을 향해 직접(directed) 가졌던 주님 사랑의 낮은 단계입니다. Charity, as before said, is love toward the neighbor and mercy; and it is a lower degree of the love of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was love to the Lord.

이제 보시듯, 사랑은 내리막이 되었고, 더욱 외적, 곧 더욱 피상적이 되었는데, 이걸 가리켜 체어러티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Thus love now descended and became more external, and is to be called charity.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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