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과 그의 아내’의 속뜻, 위 아다와 씰라가 의미하는 새 교회

 

25절,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And the man knew his wife again, and she bare a son, and called his name Seth; for God hath appointed me another seed instead of Abel; for Cain slew him.

 

435

아담’과 그의 ‘아내’가 위 아다와 씰라가 의미하는 새 교회를 뜻한다는 사실은 겉뜻으로는 아무도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습니다. ‘아담과 그의 아내’가 이전까지는 태고교회와 그 후손을 의미했기 때문인데요, 그러나 이런 사실이 그 속뜻과, 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은 사실로는 너무나도 분명한 것이, 바로 이어지는 장인 5장 1절로 4절에, 아담과 그의 아내, 그리고 그들이 낳은 셋이 다시 언급되는데, 여기서는 오늘 본문과 전혀 다른 말로 언급되며, 이 경우는 태고교회의 첫 번째 후손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보고 있는 이 구절에, 이것 말고 다른 아무 의미도 없다면, 여기서 굳이 같은 걸 말할 필요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비슷한 예를 하나 들면, 1장에서 보면 거기 사람, 땅의 열매들, 그리고 짐승들의 창조를 다루더니, 얼핏 보면 같은 내용을 2장에서 또 다룹니다. 그 이유는 이미 말씀드렸지만, 1장에서는 영적 인간의 창조를, 반면 2장에서는 천적 인간의 창조를 다루기 때문입니다. 하나를 언급하고 다른 데서 또 같은 사람이나 사물을 언급하는 이런 반복이 있는 곳마다 항상 어떤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속뜻이 아니고서는 아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여기 이 컨넥션 자체로 이미 어떤 주어진 의미가 있음을 컨펌하고 있고요, 그리고 생각할 수 있는 부가적인 것은 ‘아담(homo)과 아내’라는 표현은 지금 말하고 있는 부모 교회를 의미하는 관용적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That the “man” and his “wife” here mean the new church signified above by Adah and Zillah no one could know or infer from the literal sense, because the “man and his wife” had previously signified the most ancient church and its posterity; but it is very evident from the internal sense, as well as from the fact that immediately afterwards, in the following chapter (verses 1–4), the man and his wife, and their begetting Seth, are again mentioned, but in entirely different words, and in this case there is signified the first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If nothing else were signified in the passage before us, there would be no need to say the same thing here: in like manner as in the first chapter the creation of man, and of the fruits of the earth, and of the beasts, is treated of, and then in the second chapter they are treated of again, for the reason, as has been said, that in the first chapter it is the creation of the spiritual man that is treated of, whereas in the second chapter the subject is the creation of the celestial man. Whenever there is such a repetition in the mention of one and the same person or thing, it is always with a difference of signification, but what it is that is signified cannot possibly be known except from the internal sense. Here, the connection itself confirms the signification that has been given, and there is the additional consideration that man [homo] and wife are general terms which signify the parent church that is in question.

 

창5:1-4

1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2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3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4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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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십칠 배의 벌의 속뜻, 아주 끔찍한 신성모독(a far greater sacrilege)이요, 신성불가침을 심각하게 범하는 것

 

25절,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And the man knew his wife again, and she bare a son, and called his name Seth; for God hath appointed me another seed instead of Abel; for Cain slew him.

 

434

여기 ‘아담’(man, 남자, 사람)과 그의 ‘아내’는 위 ‘아다와 씰라’가 의미하는 새 교회를 말하며, 그녀의 ‘아들’ 셋(Seth)은 체어리티(charity, 이웃 사랑, 선행, 인애)가 말미암게 될 새 신앙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는 가인이 분리 및 소멸시켰던 체어리티를 주님이 이제 이 교회에 주셨음을 의미합니다. The “man” and his “wife” here mean the new church signified above by “Adah and Zillah”; and by her “son,” whose name was Seth, is signified a new faith, by which charity might be obtained. By “God appointed another seed instead of Abel, whom Cain slew,” is signified that charity, which Cain had separated and extinguished, was now given by the Lord to this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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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십칠 배의 벌의 속뜻, 아주 끔찍한 신성모독(a far greater sacrilege)이요, 신성불가침을 심각하게 범하는 것

 

24절,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If Cain shall be avenged sevenfold, truly Lamech seventy and sevenfold.

 

433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라는 것은, 이미 15절에서 보여드린 대로, ‘가인’의 분리된 신앙을 폭행하는 것은 신성모독, 신성불가침을 범함이었음을 의미합니다. (cf. 392-396) That Cain’s being “avenged sevenfold” signifies that it was sacrilege to do violence to that separated faith which is meant by “Cain,” has been already shown at verse 15.

 

※ ‘가인’ 신앙은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는 신앙입니다. 원래 태고교회 신앙은 사랑 하나였습니다. 사랑 따로, 신앙 따로 같은 건 생각조차 할 수 없었으나, 그 교회에서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신앙은 하려는 사람들이 서서히 일어난 것입니다.

 

칠십칠 배의 벌’은 아주 끔찍한 신성모독(a far greater sacrilege)이요, 신성불가침을 심각하게 범하는 것으로서, 그 결과는 지옥이라는 것이 ‘칠십칠’이 의미하는 바를 보면 분명합니다. 이라는 숫자가 거룩하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유래하는데요, ‘일곱째 날은 천적 인간, 천적 교회, 천적 나라, 그리고 가장 높은 뜻으로 바로 주님 자신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라는 숫자는 말씀 가운데 나올 때마다 거룩한 것, 즉 가장 신성한 것을 의미하며, 이 거룩(holiness)과 신성(sanctity)이 어떤 것인지는 그때 다루어지고 있는 것들에 의해 서술되거나 따릅니다. 일곱 때들(ages)을 구성하는 숫자 칠십의 의미가 여기에서 오는데요, 말씀에서, 한 때는 십 년입니다. 가장 거룩하거나 신성한 어떤 것을 표현해야 했을 때, ‘칠십칠 배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사람은 그의 형제를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하셨는데, 이 말씀의 의미는, 그가 죄를 얼마나 짓든지 끝없이, 혹은 영원히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거룩입니다. 그리고 여기, 라멕의 말,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의 의미는 지옥인데, 그 이유는 가장 신성한 것을 더럽혔기 때문입니다. And that by a “seventy and sevenfold avengement” is signified a far greater sacrilege, the consequence of which is damnation,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seventy and sevenfold.” That the number “seven” is holy originates in the fact that the “seventh day” signifies the celestial man, the celestial church, the celestial kingdom, and, in the highest sense, the Lord himself. Hence the number “seven,” wherever it occurs in the Word, signifies what is holy, or most sacred; and this holiness and sanctity is predicated of, or according to, the things that are being treated of. From this comes the signification of the number “seventy,” which comprises seven ages; for an age, in the Word, is ten years. When anything most holy or sacred was to be expressed, it was said “seventy-sevenfold,” as when the Lord said that a man should forgive his brother not until seven times, but until seventy times seven (Matt. 18:22), by which is meant that they should forgive as many times as he sins, so that the forgiving should be without end, or should be eternal, which is holy. And here, that Lamech should “be avenged seventy and sevenfold” means damnation, because of the violation of that which is most sacred.

 

마18: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마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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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십칠 배의 벌의 속뜻, 그들은 신성불가침(sacrilege, sacred ban)이었던 가인 신앙을 폭행, 소멸시켰고, 동시에 신앙을 통해 생겨나야 했던, 훨씬 더 신성불가침(sacrosanct)인 체어리티 또한 소멸시켰다

 

24절,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If Cain shall be avenged sevenfold, truly Lamech seventy and sevenfold.

 

432

이 말씀들의 의미는, 그들은 신성불가침(sacrilege, sacred ban)이었던 ‘가인’ 신앙을 폭행, 소멸시켰고, 동시에 신앙을 통해 생겨나야 했던, 훨씬 더 신성불가침(sacrosanct)인 체어리티 또한 소멸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이유로, 지옥, 곧 ‘칠십칠 배의 벌’이 있게 된 것입니다. These words signify that they had extinguished the faith meant by “Cain,” to do violence to which was sacrilege, and at the same time had extinguished the charity which should be born through faith, a far greater sacrilege, and that for this there was condemnation, that is, a “seventy and sevenfold aveng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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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상함의 속뜻, 더이상 온전한 것이 없음

 

23절,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And Lamech said unto his wives, Adah and Zillah, Hear my voice, ye wives of Lamech, and with your ears perceive my speech, for I have slain a man to my wounding, and a little one to my hurt.

 

431

상처’와 ‘상함’은 더이상 온전한 것이 없음을 의미하는데, ‘상처’로는 신앙이 황량해졌음을, ‘상함’으로는 체어리티가 황폐해졌음을 의미함이 분명한 것은 ‘상처’는 사람에게, ‘상함’은 소년에게 속한 것으로 서술되고 있는 걸 보면 그렇습니다. 신앙의 황량함 및 체어리티의 황폐함을 이사야에 보면 같은 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That by a “wound” and a “bruise” is signified that there was soundness no longer, by a “wound” that faith was desolated, and by a “bruise” that charity was devastated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wound” is predicated of a “man,” and “bruise” of a “little one.” The desolation of faith and the vastation of charity are described in the same terms in Isaiah: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사1:6) From the sole of the foot even unto the head there is no soundness in it; but wound and bruise and a fresh sore they have not been pressed out, neither bound up, neither mollified with oil. (Isa. 1:6)

 

이 구절에서, ‘상한 것’은 황량해진 신앙으로, ‘터진 것’은 황폐해진 체어리티로, ‘새로 맞은’은 둘 다로 서술되고 있습니다. In this passage “wound” is predicated of faith desolated, “bruise” of charity devastated, and “sore” of bo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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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소년의 속뜻, 이노센스, 체어리티

 

23절,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And Lamech said unto his wives, Adah and Zillah, Hear my voice, ye wives of Lamech, and with your ears perceive my speech, for I have slain a man to my wounding, and a little one to my hurt.

 

430

말씀에 나오는 ‘어린이’(little one)나 ‘소년’(little child)은 이노센스(innocence, 순진)를 의미하며, 또한 체어리티도 의미합니다. 참된 이노센스는 체어리티 없이 존재할 수 없으며, 체어리티 역시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이노센스에는 세 단계가 있는데, 말씀에서는 각각 젖먹이’(sucklings), 걸음마 배우는 아이’(infants)  소년’(little children)으로 구분합니다. 참된 사랑과 체어리티 없이 참된 이노센스는 없기 때문에, ‘젖먹이’, ‘아이  소년은 또한 사랑의 세 단계를 의미하는데요, 즉 엄마나 유모를 향한 젖먹이의 사랑 같은 다정한 사랑, 부모를 향한 아이의 사랑 같은 사랑, 선생님을 향한 소년의 상냥한 사랑과 유사한 체어리티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에는 말하기를 A “little one,” or “little child,” in the Word, signifies innocence, and also charity, for true innocence cannot exist without charity, nor true charity without innocence. There are three degrees of innocence, distinguished in the Word by the terms “sucklings,” “infants,” and “little children”; and as there is no true innocence without true love and charity, therefore also by “sucklings,” “infants,” and “little children” are signified the three degrees of love: namely, tender love, like that of a suckling toward its mother or nurse; love like that of an infant toward its parents; and charity, similar to that of a little child toward its instructor. Thus it is said in Isaiah:

 

그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사11:6) The wolf shall dwell with the lamb, and the leopard shall lie down with the kid; and the calf, and the young lion, and the fatling together, and a little child shall lead them. (Isa. 11:6)

 

여기 ‘’, ‘염소’, ‘송아지’는 이노센스와 사랑의 세 단계를, ‘이리’, ‘표범’ 및 ‘어린 사자’는 그 반대를, 그리고 ‘어린아이’는 체어리티를 의미합니다. 예레미야에 Here a “lamb,” a “kid,” and a “calf” signify the three degrees of innocence and love; a “wolf,” a “leopard,” and a “young lion,” their opposites; and a “little child,” charity. In Jeremiah:

 

만군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너희가 어찌하여 큰 악을 행하여 자기 영혼을 해하며 유다 가운데에서 너희의 남자와 여자와 아이와 젖 먹는 자를 멸절하여 남은 자가 없게 하려느냐 (렘44:7) Ye commit this great evil against your souls, to cut off from you man and wife, infant and suckling, out of the midst of Judah, to leave you no remains. (Jer. 44:7)

 

남자와 여자’는 이해와 의지에 속한, 곧 진리와 선에 속한 것들을, ‘아이와 젖 먹는 자’는 사랑의 첫 번째 단계들을 의미합니다. 아이 어린이가 이노센스와 체어리티를 가리키는 것은 누가복음에 주님 하신 말씀을 보면 아주 분명합니다. Man and wife” denote things of the understanding and of the will, or of truth and of good; and “infant and suckling,” the first degrees of love. That an “infant” and a “little child” denote innocence and charity is very evident from the Lord’s words in Luke:

 

15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16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7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눅18:15-17) They brought unto him little children that he should touch them. And Jesus said, Suffer little children to come unto me, and forbid them not, for of such is the kingdom of God. Verily I say unto you, Whosoever shall not receive the kingdom of God as a little child, shall in no wise enter therein. (Luke 18:15-17)

 

주님 자신 ‘아기’(little one), ‘아들’(child)(사9:6)로 불리십니다. 주님은 이노센스 자체이시며,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같은 구절에서 주님을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시라 하고 있습니다. The Lord himself is called a “little one,” or “child” (Isa. 9:6), because he is innocence itself and love itself, and in the same passage he is spoken of as “wonderful, counselor, God, hero, father of eternity, prince of peace.”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사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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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a man [vir])의 속뜻, 신앙(faith)

 

23절,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And Lamech said unto his wives, Adah and Zillah, Hear my voice, ye wives of Lamech, and with your ears perceive my speech, for I have slain a man to my wounding, and a little one to my hurt.

 

429

사람’이 신앙을 의미한다는 것은 본 장 1절, 하와가 가인을 낳고 한 말,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I have gotten a man, Jehovah, 내가 여호와라는 사람을 얻었다)를 보면 알 수 있는데, 여기서 사람은 ‘여호와라는 사람(a man, Jehovah)이라는 신앙의 교리를 의미합니다 (cf. 340). 이런 사실은 또 훨씬 앞서 다룬 (cf. 158, 265), 사람(남자) 또는 남성에 관한 내용을 봐도 분명합니다. 거기서 남자는 이해를 의미하는데, 이해는 신앙에 속한 것입니다. 그는 체어리티 또한 소멸시켰는데요, 여기 뒤이어 나오는 어린이’, 혹은 소년이라고 하는 게 바로 체어리티입니다. 신앙을 부인하고 죽이는 자는 동시에 체어리티 또한 그렇게 하는데, 그것은 체어리티가 신앙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That by a “man” [vir] is signified faith is evident from the first verse of this chapter, in that Eve said, when she bare Cain, “I have gotten a man, Jehovah”; by whom was meant the doctrine of faith, called “a man, Jehovah.” It is evident also from what was shown above concerning a man or male, that he signifies understanding, which is of faith. That he had also extinguished charity, here called a “little one,” or a “little child,” follows, for he who denies and murders faith, at the same time also denies and murders the charity that is born from fa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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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멕의 속뜻, 황폐함(vastation)

 

23절,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And Lamech said unto his wives, Adah and Zillah, Hear my voice, ye wives of Lamech, and with your ears perceive my speech, for I have slain a man to my wounding, and a little one to my hurt.

 

428

이 본문도 그렇고, 다음 절도 그렇고... 아주 분명한 사실은 ‘라멕’이 황폐함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말하길, ‘내가 사람을 죽였다’, ‘내가 소년을 죽였다’ 하고 있고, 또 가인의 경우는 그 벌이 일곱 배이지만, 라멕의 경우는 ‘일흔일곱 배’라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From the contents of this and the following verse, it is very evident that by “Lamech” is signified vastation; for he says that he had “slain a man,” and a “little child,” and that Cain should be avenged sevenfold, and Lamech “seventy and sevenfo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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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멕’,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의 속뜻

 

23절,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And Lamech said unto his wives, Adah and Zillah, Hear my voice, ye wives of Lamech, and with your ears perceive my speech, for I have slain a man to my wounding, and a little one to my hurt.

 

427

앞서 살핀 대로(cf. 405, 406), ‘라멕’은 황폐함(vastation)을 의미합니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말을 들으라’는 죄에 대한 자백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교회라는 게 있는 데서만 할 수 있는 것이며, 지금까지 말씀드린 대로(cf. 409), 라멕의 ‘아내들’이 의미하는 게 바로 이 교회입니다.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는 그가 신앙을 소멸시켰음을 의미하는데, 여기 사람은 신앙을(cf. 340, 367:1)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은 그가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음을 의미합니다. 상처 상함은 더이상 온전한 것이 없음을 의미하는데, 여기 상처는 신앙이 황량해졌음을, ‘상함은 체어리티가 황폐해졌음을 의미합니다. By “Lamech” is signified vastation, as before; that he “said unto his wives Adah and Zillah, With your ears perceive my speech” signifies confession, which can only be made where there is a church, which, as has been said, is signified by his “wives.” I have slain a man to my wounding” signifies that he had extinguished faith, for by a “man” is signified faith; “a little one to my hurt” signifies that he had extinguished charity. By a “wound” and a “bruise” is signified that there was no more soundness; by a “wound,” that faith was desolated; by a “hurt,” that charity was devast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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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속뜻, 자연적 진리

 

22절,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And Zillah, she also bare Tubal-Cain, an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 and the sister of Tubal-Cain was Naamah.

 

426

’이 자연적 진리를 의미한다는 것은 에스겔 두로에 대한 말씀을 보면 더 분명합니다. That “iron” signifies natural truth is further evident from what Ezekiel says of Tyre:

 

12다시스는 각종 보화가 풍부하므로 너와 거래하였음이여 은과 철과 주석과 납을 네 물품과 바꾸어 갔도다, 19워단과 야완은 길쌈하는 실로 네 물품을 거래하였음이여 가공한 쇠와 계피와 대나무 제품이 네 상품 중에 있었도다 (겔27:12, 19) Tarshish was thy trader by reason of the multitude of all riches; in silver, iron, tin, and lead, they gave thy traffickings. Dan, and Javan, and Meusal furnished bright iron in thy tradings; cassia and calamus were in thy mart. (Ezek. 27:12, 19)

 

이 구절들뿐 아니라 같은 장 앞뒤 이어지는 구절들을 볼 때 정말 분명한 것은, 이 모든 표현이 천적, 영적 부들에 대한 의미라는 것과, 모든 특정 표현들, 하나하나 언급된 이름들까지 어떤 특별한 의미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영이요,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From these words, as well as from what is said both previously and subsequently in the same chapter, it is very evident that celestial and spiritual riches are signified; and that every particular expression, and even the names mentioned, have some specific signification, for the Word of the Lord is spiritual, and not verbal.

 

[2] 예레미야입니다. In Jeremiah:

 

12누가 능히 철 곧 북방의 철과 놋을 꺾으리요 13그러나 네 모든 죄로 말미암아 네 국경 안의 모든 재산과 보물로 값없이 탈취를 당하게 할 것이며 (렘15:12-13) Can one break iron, even iron from the north, and brass? Thy substance [facultates] and thy treasures will I give for a spoil without price, and this for all thy sins, (Jer. 15:12–13)

 

여기 ‘’과 ‘’은 자연적 진리와 선을 의미하며, 그것이 ‘북방(the north)에서 온다는 것은 그것이 감각적이고 자연적임을 의미합니다. 영적, 천적인 것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짙은 흑암, 즉 ‘북방’과 같기 때문인데, 빛 혹은 ‘남방(the south)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말입니다. 또 그늘과도 같은데, 그늘은 두발-가인의 ‘어머니’인 ‘씰라’로 의미되는 것입니다. 재산 보물은 천적, 영적 부를 의미하는 게 아주 분명합니다. where “iron” and “brass” signify natural truth and good; that it came from the “north” signifies what is sensuous and natural; for what is natural, relatively to what is spiritual and celestial, is like thick darkness (that is, the “north”) relatively to light or the “south”; or like shade, which is also signified here by “Zillah,” who is the “mother.” That the “substance” and “treasures” are celestial and spiritual riches is also very evident.

 

[3] 다시 에스겔입니다. Again in Ezekiel:

 

또 철판을 가져다가 너와 성읍 사이에 두어 철벽을 삼고 성을 포위하는 것처럼 에워싸라 이것이 이스라엘 족속에게 징조가 되리라 (겔4:3) Take thou unto thee a pan of iron, and set it for a wall of iron between thee and the city, and set thy faces toward it, and let it be for a siege, and thou shalt straiten against it, (Ezek. 4:3)

 

여기도 역시 ‘’이 진리를 의미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강함은 진리의 속성입니다. 진리를 저항할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철을 가리켜 다니엘과 계시록에서, ‘부서뜨리다’, ‘깨뜨리다 하는 것입니다. ‘은 진리, 곧 신앙의 진리를 의미합니다. where also it is evident that “iron” signifies truth. Strength is attributed to truth, because it cannot be resisted, and for this reason it is said of iron—by which is signified truth, or the truth of faith—that it “breaks in pieces” and “crushes”; as in Daniel (2:34, 40), and in John:

 

26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27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계2:26–27) He that overcometh, to him will I give sovereign power over the nations, that he may pasture them with a rod of iron; as the vessels of a potter shall they be broken to shivers. (Rev. 2:26–27)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계12:5) The woman brought forth a man child, who should pasture all nations with a rod of iron. (Rev. 12:5)

 

[4] ‘철장’(鐵杖, a rod of iron)은 주님의 말씀에 속한 진리임을 계시록에서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That a “rod of iron” is the truth which is of the Word of the Lord, is explained in John:

 

11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13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15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계19:11, 13, 15) I saw heaven open, and behold a white horse, and he that sat upon him was called faithful and true, and in righteousness he doth judge and fight; He was clothed with a vesture dipped in blood, and his name is called the Word of God; out of his mouth goeth a sharp sword, that with it he should smite the nations; and he shall pasture them with a rod of iron. (Rev. 19:11, 13, 15)

 

단2:34, 40

34또 왕이 보신즉 손대지 아니한 돌이 나와서 신상의 쇠와 진흙의 발을 쳐서 부서뜨리매, 40넷째 나라는 강하기가 쇠 같으리니 쇠는 모든 물건을 부서뜨리고 이기는 것이라 쇠가 모든 것을 부수는 것 같이 그 나라가 뭇 나라를 부서뜨리고 찧을 것이며 (단2:34, 40)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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