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4:2)

 

AC.345

 

농사하는 자(tiller of the ground)가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을 나타낸다는 것, 곧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안에 아무리 깊이 있다 하더라도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을 나타내며, 그런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는 사실은 뒤에 이어지는 내용에서 분명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고, 그가 자기 형제를 죽였기 때문입니다. 곧 그는 아벨(Abel)이 상징하는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습니다.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가리켜 땅을 경작하는 사람들(till the ground)이라고 했다는 것은 창3:19, 23에서 분명합니다. 거기에는 사람이 에덴동산에서 내보내져 땅을 경작하게 되었다(cast out of the garden of Eden to till the ground)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That a “tiller of the ground” is one who is devoid of charity, however much he may be in faith separated from love, which is no faith, is evident from what follows: that Jehovah had no respect to his offering, and that he slew his brother, that is, destroyed charity, signified by “Abel.” Those were said to “till the ground” who look to bodily and earthly things, as is evident from what is said in Gen. 3:19, 23, where we read that the man was “cast out of the garden of Eden to till the ground.”

 

19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23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3:19, 23)

 

 

해설

 

AC.345는 앞의 AC.341에서 제시했던 ‘양 치는 자’와 ‘농사하는 자’의 대비 가운데 이제 두 번째 표현, 곧 가인이 ‘농사하는 자’였다는 말의 의미를 본격적으로 설명합니다. AC.343-344에서는 ‘양 치는 자’가 체어리티의 선으로 사람을 인도하는 사람이며, 신앙과 교리의 궁극적인 목적 역시 체어리티라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그 반대편에 있는 ‘농사하는 자’는 체어리티 없이 신앙에 속한 것만을 붙드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먼저 주의할 것은 ‘농사하는 자’ 또는 ‘땅을 경작하는 자’ 자체가 언제나 나쁜 의미를 가진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말씀에서 ‘’은 문맥에 따라 좋은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실제로 바로 앞 AC.343에서 인용한 사30:23에서는 땅에 씨를 뿌리고, 그 땅에서 양식이 나는 모습을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므로 ‘농사=’, ‘목축=’이라는 식으로 자연적 직업 자체에 고정된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는 가인이 나타내는 상태와 창3에서 에덴동산 밖으로 쫓겨난 사람이 ‘땅을 경작하는’ 상태가 서로 연결되면서 부정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가인이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이후의 이야기 자체에서 확인합니다. 첫째, 여호와께서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십니다. 둘째, 가인이 자기 형제 아벨을 죽입니다. 특히 두 번째 사건이 결정적입니다. ‘아벨’은 체어리티를 상징하므로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것은 속뜻으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가인이 아무리 신앙을 주장한다 하더라도 그에게 체어리티가 없다는 사실은 그가 자기 형제 아벨을 죽이는 데서 최종적으로 드러납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44의 결론과 정확하게 이어집니다. AC.344에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의 기억 지식(scientia)과 인식 지식(cognitio), 그리고 교리(doctrina)가 아무리 많아도 사람이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지 못하고 체어리티에 이르지 못한다면, 그것은 ‘텅 빈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했습니다. AC.345에서는 바로 그런 신앙의 모습을 ‘농사하는 자’ 가인을 통해 보여 줍니다. 신앙에 속한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신앙의 목적지인 체어리티에는 이르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however much he may be in faith separated from love’를 단순히 ‘신앙이 없는 사람’이라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겉으로는 신앙이 상당히 많아 보일 수도 있습니다. 말씀을 알고, 교리를 알고, 신앙을 고백하며,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열심히 논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런 신앙에 대해 다시 한번 ‘그것은 신앙이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여기서 AC.345가 창3:19, 23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유가 중요합니다. 창3에서 사람은 에덴동산에서 나와 ‘땅을 경작하게’ 됩니다. 에덴동산은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퍼셉션 가운데 살아가던 상태와 연결됩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 상태에서 물러난 뒤에는 이전처럼 사랑으로부터 직접 진리를 퍼셉션하지 못하고, 더 낮고 외적인 차원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AC.345는 바로 그 상태와 가인의 ‘농사하는 자’를 연결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땅을 경작한다’는 것은 단순히 사람이 노동하게 되었다는 뜻보다 훨씬 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을 바라보는’ 상태와 연결합니다. 시선이 주님과 천적인 것에서 육체와 세상적인 것으로 내려온 것입니다. 사람은 여전히 종교적인 것을 알고, 신앙에 속한 것을 가지고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을 바라보고 다루는 중심이 더 외적인 차원으로 내려갑니다.

 

이렇게 보면 창3과 창4 사이의 연결도 매우 흥미롭습니다. 창3에서는 사람이 에덴동산에서 나와 땅을 경작하게 되고, 창4에서는 가인이 바로 ‘농사하는 자’가 됩니다. 이것을 단순한 역사적 시간 순서로 읽을 필요는 없지만, 말씀의 내적 연결에서는 분명한 연속성이 있습니다. 창3이 보여 준 인간의 내적 하강이 창4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라는 구체적인 형태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계속 주의해 온 점을 다시 붙들어야 합니다. 창4의 가인 계열과 이후 셋 계열을 자연적인 족보의 시간 순서만으로 읽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창3의 ‘땅을 경작함’에서 창4의 가인이 역사적으로 곧바로 생겨났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보여 주는 것은 ‘영적 상태의 연결’입니다. 에덴으로 나타낸 천적 상태에서 멀어져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을 바라보는 상태와,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여 외적인 것으로 다루는 가인의 상태 사이에 내적인 친연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바라본다’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을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사람은 자연계에 사는 동안 먹고 일하고 재산을 관리하며 세상적인 지식도 배워야 합니다. 문제는 무엇을 ‘바라보는가’, 곧 무엇을 목적으로 삼는가입니다.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을 섬긴다면 질서 안에 있지만, 영적인 것까지 자연적이고 세상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하기 시작하면 질서가 뒤집힙니다.

 

가인의 신앙도 이와 같습니다. 신앙에 관한 지식과 교리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AC.344가 이미 보여 주었듯 그것들은 모두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체어리티를 향해야 합니다. 진리가 사람을 선으로 이끌고, 신앙이 사랑을 섬겨야 합니다. 그런데 가인은 신앙을 사랑에서 떼어 내어 독립적인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수단이 목적이 되고, 결국 체어리티라는 본래 목적을 잃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마침내 ‘형제를 죽이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처음에는 단지 신앙과 사랑을 ‘구별’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 구별이 분리가 되고, 분리가 독립이 되며, 마침내 신앙이 체어리티를 밀어내고 소멸시키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그래서 창4에서 아벨의 죽음은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사건이 아닙니다. AC.338부터 계속 설명해 온 ‘가인의 분리’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필연적인 귀결입니다.

 

AC.345는 따라서 ‘농사하는 자’라는 짧은 표현을 통해 매우 중요한 대비를 보여 줍니다. 아벨은 ‘양 치는 자’로서 체어리티의 선을 돌보고 행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가인은 ‘농사하는 자’로서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붙들면서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을 바라보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한쪽에서는 신앙이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고, 다른 한쪽에서는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떨어져 점점 외적인 것이 됩니다.

 

결국 AC.345의 핵심은 ‘신앙이 얼마나 많은가?’가 아니라 ‘그 신앙이 무엇을 바라보고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있습니다. 신앙이 사람을 체어리티의 선으로 이끌고 주님과 이웃을 향하게 한다면 그 신앙은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에 머물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밀어낸다면 아무리 신앙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어도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신앙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가인의 비극은 신앙을 버린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붙들면서도 그 신앙의 생명인 사랑과 체어리티를 잃어버린 데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농사하는 자’라는 표현을 통해 AC.345가 보여 주는 가인의 상태입니다.

 

 

 

AC.344, 창4:2, ‘신앙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그 목적은 체어리티입니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4 신앙, 곧 신앙에 관한 기억 지식(memory-knowledge, scientia)과 인식 지식(knowledge, cognitio),그리고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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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4:2)

 

AC.344

 

신앙, 곧 신앙에 관한 기억 지식(memory-knowledge, scientia)과 인식 지식(knowledge, cognitio),그리고 교리(doctrine of faith)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사람이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신앙이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체어리티입니다. (12:28-35; 22:34-39) What avails faith, that is, the memory-knowledge [scientia], the knowledge [cognitio], and the doctrine of faith, but that the man may become such as faith teaches? And the primary thing that it teaches is charity. (Mark 12:28-35; Matt. 22:34-39)

 

28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29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32서기관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33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34예수께서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35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새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12:28-35)

 

34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22:34-39)

 

이것이 신앙이 지향하는 모든 것의 목적입니다. 이 목적에 이르지 못한다면, 모든 지식이나 교리가 대체 무엇이겠습니까? 그저 텅 빈 아무것도 아닌 것에 불과합니다. This is the end of all it has in view, and if this be not attained, what is all knowledge or doctrine but a mere empty nothing?

 

 

해설

 

AC.344는 짧지만 지금까지 이어진 가인과 아벨의 문제를 매우 날카로운 질문 하나로 압축합니다. ‘신앙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 자체를 무가치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에 속한 모든 것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으며, 그 목적에 이르지 못한 신앙이 문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목적을 한 단어로 말하면 ‘체어리티’입니다.

 

첫 문장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신앙을 풀어 설명하면서 ‘기억 지식[scientia], ‘인식 지식[cognitio], ‘신앙의 교리’를 함께 언급한다는 점입니다. 사람은 말씀을 읽고 여러 사실을 배우며, 그것을 이해하고, 서로 연결하여 교리로 정리합니다. 이 모든 것은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지식이나 교리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것들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입니다.

 

그 답이 바로 이어집니다. ‘사람이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여기서 신앙의 목적은 단순히 사람이 무엇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에 맞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차이가 매우 중요합니다. 진리를 아는 것과 진리가 자기 삶의 성질이 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사람이 사랑과 용서, 겸손과 정직에 관하여 아무리 많이 알아도, 그것이 그의 의지와 삶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그 지식은 아직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AC.344의 ‘사람이 그러한 사람이 되게 한다’는 표현에는 거듭남의 핵심이 들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진리를 주시는 목적은 우리의 머릿속에 정확한 교리 체계를 만들어 놓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진리를 통해 우리의 사랑과 의지, 그리고 삶을 변화시키시는 데 있습니다. 진리를 배우는 것은 거듭남의 수단이며,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는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목적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42에서 살펴본 ‘르우벤 시므온 레위’의 질서와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르우벤은 신앙을, 시므온은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을, 레위는 체어리티를 상징했습니다. AC.344는 그 흐름을 교리적으로 다시 설명하는 셈입니다. 신앙은 신앙으로 끝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삶으로 나아가고, 그 삶 안에서 체어리티가 형성되도록 하기 위해 주어졌습니다.

 

바로 다음 문장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신앙이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체어리티입니다.’ 이것은 체어리티가 신앙 옆에 놓인 여러 교리 가운데 하나라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이 가르치는 모든 진리가 궁극적으로 사람을 이끌어 가야 할 중심이 체어리티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에 관하여 배우고, 주님에 관하여 배우고, 말씀과 계명, 그리고 천국에 관하여 배우는 것도 결국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막12:28-35와 마22:34-39을 인용합니다. 두 본문 모두 모든 계명의 중심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두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특히 마22:37-40에서 주님께서는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뒤,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신앙이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체어리티’라고 한 것은 자신의 독자적인 윤리적 주장을 덧붙인 것이 아니라, 모든 계명을 사랑으로 모으신 주님의 가르침에 근거합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표현도 주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체어리티가 중요하다고 해서 신앙이 없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무엇이 참으로 선한지를 알기 위해서는 진리가 필요합니다. 인간의 자연적인 선의나 감정만으로는 참된 체어리티가 무엇인지 온전히 알 수 없습니다. 신앙의 진리는 사람에게 무엇이 선인지 가르치고, 그 선으로 가는 길을 밝혀 줍니다. 다만 길은 목적지가 아닙니다. 진리가 길이라면 체어리티의 삶은 그 길이 우리를 데려가야 할 곳입니다.

 

이것을 가인과 아벨의 관계에 놓으면, AC.344의 의미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가인의 근본적인 문제는 신앙을 없앤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너무 독립적인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에 속한 것들을 따로 떼어 교리로 만들고, 그것을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신앙이 어디를 향해 가야 하는지가 점점 사라졌습니다.

 

아벨은 바로 그 잃어버린 목적을 나타냅니다. 아벨은 체어리티이며 ‘양 치는 자’입니다. 따라서 가인이 아벨과 분리된다는 것은 단순히 신앙과 체어리티라는 두 요소가 서로 갈라진다는 뜻을 넘어섭니다. 신앙이 자기 자신의 ‘목적’을 잃는 것입니다. 신앙은 체어리티에 이르도록 주어진 것인데,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은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 자체를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AC.344의 마지막 문장은 대단히 강합니다. ‘이 목적에 이르지 못한다면, 모든 지식이나 교리가 대체 무엇이겠습니까? 그저 텅 빈 아무것도 아닌 것에 불과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조금 부족하다’거나 ‘불완전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텅 빈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합니다. 지식과 교리가 아무리 방대하고 정교해도 그것이 사람을 체어리티의 삶으로 데려가지 못한다면, 영적인 관점에서는 그 안에 있어야 할 생명이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앞서 가인의 ‘분리’를 설명하면서 사용했던 비유도 다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부부가 서로 잘 사랑하며 살기 위해 ‘부부생활 준수 사항 20가지’를 만들었다고 해 봅시다. 처음에는 그 규칙이 사랑을 돕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를 사랑하는 것은 사라지고, ‘나는 20개 가운데 19개를 지켰고, 당신은 16개밖에 지키지 않았다’는 계산만 남는다면, 규칙은 남아 있어도 그 규칙이 존재했던 목적은 사라진 것입니다. 규칙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규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삼은 것이 문제입니다.

 

신앙의 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리는 필요합니다. 정확한 교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교리의 목적은 사람을 자기 교리의 정확성을 자랑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진리에 따라 살며,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AC.344는 ‘교리가 중요한가, 체어리티가 중요한가?’라는 양자택일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리는 무엇을 위해 중요한가?’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그 답이 ‘체어리티’입니다.

 

이 점은 AC를 읽는 우리 자신에게도 매우 중요한 경고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신앙, 체어리티, 퍼셉션, 상응, proprium, 리메인스,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 등 수많은 아르카나를 배우고 있습니다. 이러한 지식은 놀랍고 귀합니다. 그러나 AC.344는 바로 이런 공부를 하는 사람에게 ‘그래서 당신은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라고 묻습니다. 아르카나를 더 많이 아는 것이 우리를 더 온유하게 하고, 더 정직하게 하며, 이웃의 선을 더 바라게 하고, 주님께 자신의 proprium을 내려놓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가진 지식 역시 목적지에 아직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AC.344의 핵심은 ‘지식보다 사랑이 중요하다’는 단순한 구호가 아닙니다. 훨씬 더 정확하게 말하면 ‘진리는 삶을 위해 존재하고, 신앙은 체어리티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기억 지식(scientia)과 인식 지식(cognitio), 그리고 교리(doctrina)는 모두 필요하지만, 그것들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입니다. 그 모든 것을 통하여 사람은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고, 마침내 체어리티가 그의 삶의 성질이 되어야 합니다.

 

결국 AC.344는 가인의 오류를 가장 근본적인 자리에서 드러냅니다. 가인은 신앙을 너무 귀하게 여긴 것이 문제가 아니라, 신앙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잃어버렸습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라는 자신의 목적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 목적에 이르지 못한다면 아무리 많은 지식과 교리를 가지고 있어도 그것은 ‘텅 빈 아무것도 아닌 것’에 불과합니다. 참된 신앙은 결국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무엇을 믿는 사람’에 그치지 않고, ‘그 믿음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게 합니다. 그리고 그 삶의 중심에는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 곧 체어리티가 있습니다.

 

 

 

AC.345, 창4:2,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농사하는 자’ 가인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5 ‘농사하는 자’(tiller of the ground)가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을 나타낸다는 것, 곧 사랑에서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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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3, 창4:2, ‘참된 목자는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합니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3 ‘양 치는 자’(shepherd of the flock)가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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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3.심화

 

1. ‘양 떼를 먹이고, 모으고, 품고, 인도하시는 주님 (40:11)

 

그는 목자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40:11) The Lord Jehovih shall feed his flock like a shepherd; he shall gather the lambs into his arm, and carry them in his bosom, and shall gently lead those that are with young. (Isa. 40:11)

 

 

AC.343에서 스베덴보리가 사40:11을 인용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목자’와 ‘양 떼’가 무엇을 나타내는지를 보여 주는 동시에, 참된 목자의 원형이 바로 주님이심을 분명하게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AC.343은 ‘사람들을 인도하고 가르치는 사람을 목자라고 하고, 인도와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을 양 떼라고 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사40:11에서는 주 여호와께서 친히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고, 모으고, 품에 안고,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참된 목자직은 결국 주님으로부터 나오며, 사람인 목자는 주님의 목자직을 섬기는 쓰임을 맡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특히 눈여겨볼 것은 목자가 하는 일이 네 가지 동사로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주님께서는 양 떼를 ‘먹이시고’, 어린 양을 ‘모으시며’, 품에 ‘안으시고’, 연약한 양들을 ‘인도하십니다’. 목자의 역할이 단순히 무엇이 옳은지를 말해 주는 ‘가르침’에 머물지 않습니다. 먹이고, 모으고, 품고, 인도합니다. 이것은 AC.343에서 말하는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하는 것’이 어떤 성질을 지니는지를 매우 아름답게 보여 줍니다.

 

먼저 ‘양 떼를 먹이신다’는 것은 영적인 생명을 유지할 선과 진리를 공급하시는 주님의 역사를 생각하게 합니다. 양은 목자가 제공하는 먹이를 먹고 살아갑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영적 생명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로 살아갑니다. 따라서 참된 목자는 자기 생각이나 자기 지혜로 사람을 먹이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전달하여 사람이 그것으로 살아가도록 돕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AC.343의 문맥에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목자를 단순히 ‘진리를 잘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정의하지 않고,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하고,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결국 양을 먹이는 목적은 그 사람이 진리를 많이 아는 데 있지 않고, 그 진리가 삶에서 선이 되게 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42에서 살펴본 ‘신앙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  체어리티’의 흐름과도 연결됩니다. 참된 목자는 사람을 신앙에 속한 지식에 머물게 하지 않고, 그 신앙이 삶이 되고 마침내 체어리티가 되도록 인도합니다.

 

특히 중요한 표현은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입니다. AC.343의 마지막에서 스베덴보리는 ‘모든 모임과 결합은 체어리티에서 나오고, 모든 흩어짐과 분리는 체어리티가 없는 데서 나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40:11에서는 바로 그 주님께서 어린 양들을 ‘모으시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AC.343의 마지막 원리를 눈앞에 보이는 한 장면처럼 보여 줍니다. 주님의 사랑과 체어리티는 흩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모으고, 갈라놓는 것이 아니라 결합합니다.

 

품에 안으신다’는 표현은 그 결합의 성질을 더욱 깊게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양 떼를 외적인 명령과 강제로 몰아붙이시는 분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어린 양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십니다. 여기에는 보호와 사랑, 그리고 각자의 연약함을 헤아리시는 주님의 인도가 담겨 있습니다. 참된 영적 인도는 사람을 억지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의 상태를 살피면서 선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젖 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라는 말씀도 같은 원리를 보여 줍니다. 모든 양을 똑같은 속도로 몰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각 양의 상태에 맞추어 인도합니다. 어린 양에게 필요한 돌봄과 새끼를 돌보는 어미에게 필요한 인도가 서로 다르듯, 주님께서는 각 사람의 상태와 수용 능력에 맞추어 인도하십니다. 따라서 주님의 목자직에는 진리뿐 아니라 지혜로운 배려와 체어리티가 함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사40:11은 목회에 대해서도 상당히 중요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목자는 양을 자기에게 모으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 모으는 사람이며, 자기 교리적 지식을 과시하는 사람이 아니라 양들이 주님의 선으로 살아가도록 먹이는 사람입니다. 또한 연약한 사람을 몰아붙이는 사람이 아니라 품고, 각자의 상태에 맞추어 선으로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권위도 궁극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거느리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주님의 목자직을 섬기는가’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구절을 가인과 아벨의 문맥에서 읽으면 더욱 의미가 깊어집니다. 아벨은 ‘양 치는 자’이며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사40:11에서는 주님 자신이 목자처럼 양 떼를 먹이고 모으고 품고 인도하십니다. 따라서 아벨의 ‘양 치는 자’라는 모습은 단순히 체어리티를 행하는 인간의 모습을 넘어, 그 체어리티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도 생각하게 합니다. 사람이 체어리티의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은 그 선이 자기에게서 나오기 때문이 아니라, 목자이신 주님께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가인의 길은 ‘분리’의 길이었습니다. 신앙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떼어 내어 독립시키고, 마침내 자기 ‘형제’ 아벨을 소멸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런데 사40:11의 목자는 정반대의 일을 합니다. ‘모으고’, ‘품고’, ‘인도합니다’. 이것은 AC.343 마지막의 ‘체어리티는 모으고 결합하지만, 체어리티의 부재는 흩고 분리한다’는 말과 정확하게 대응합니다. 가인은 흩어지는 방향을 보여 주고, 목자이신 주님은 모으는 방향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AC.343의 여러 인용 구절 가운데 사40:11을 별도로 살펴볼 가치가 가장 큰 구절로 봅니다. 이 구절은 단순히 ‘목자 = 인도하는 자, 양 떼 = 인도받는 자’라는 상응을 증명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누가 참된 목자인가’, ‘목자는 어디로 인도하는가’, ‘그 인도는 어떤 성질을 가지는가’, 그리고 ‘체어리티가 왜 모음과 결합을 이루는가’까지 한 장면 안에서 보여 줍니다.

 

결국 사40:11 AC.343에서 인용한 이유는 ‘양 치는 자’ 아벨이 나타내는 체어리티의 선을 그 근원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여 주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참된 목자직의 원형은 주님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양 떼를 먹이시고, 흩어진 것을 모으시며, 연약한 것을 품으시고, 각자의 상태에 맞추어 온순히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양 치는 자’란 결국 이러한 주님의 사랑과 인도하심을 받아 이웃에게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AC.343, 창4:2, ‘참된 목자는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합니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3 ‘양 치는 자’(shepherd of the flock)가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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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4:2)

 

AC.343

 

양 치는 자(shepherd of the flock)가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할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의 말씀에서 아주 익숙하게 사용하는 표상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인도하고 가르치는 사람을 목자(shepherd)라고 하고, 인도와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을 양 떼(flock)라고 합니다.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하지 않고, 그것을 가르치지도 않는 사람은 참된 목자가 아니며, 선으로 인도받지 않고, 무엇이 선인지를 배우지 않는 사람은 양 떼에 속하지 않습니다. ‘목자양 떼가 이런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말씀의 인용으로 확증할 필요는 거의 없지만, 다음 구절들을 인용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에서, That a “shepherd of the flock” is one who exercises the good of charity, must be obvious to everyone, for this is a familiar figure in the Word of both Old and New Testaments. He who leads and teaches is called a “shepherd,” and those who are led and taught are called the “flock.” He who does not lead to the good of charity and teach it, is not a true shepherd; and he who is not led to good, and does not learn what is good, is not of the flock. It is scarcely necessary to confirm this signification of “shepherd” and “flock” by quotations from the Word; but the following passages may be cited. In Isaiah:

 

네가 땅에 뿌린 종자에 주께서 비를 주사 땅이 먹을 것을 내며 곡식이 풍성하고 기름지게 하실 것이며 그날에 네 가축이 광활한 목장에서 먹을 것이요 (30:23) The Lord shall give the rain of thy seed, wherewith thou sowest the ground, and bread of the increase of the ground; in that day shall he feed thy cattle in a broad meadow, (Isa. 30:23)

 

여기서 땅의 소산의 양식(bread of the increase of the ground)은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다시 이사야에서, where “bread of the increase of the ground,” denotes charity. Again:

 

그는 목자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40:11) The Lord Jehovih shall feed his flock like a shepherd; he shall gather the lambs into his arm, and carry them in his bosom, and shall gently lead those that are with young. (Isa. 40:11)

 

다윗의 시편에서, In David:

 

요셉을 양 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여 빛을 비추소서 (80:1) Give ear, O Shepherd of Israel, thou that leadest Joseph like a flock; thou that sittest on the cherubim, shine forth. (Ps. 80:1)

 

예레미야에서, In Jeremiah:

 

2아름답고 우아한 시온의 딸을 내가 멸절하리니 3목자들이 그 양 떼를 몰고 와서 주위에 자기 장막을 치고 각기 그 처소에서 먹이리로다 (6:2, 3) I have likened the daughter of Zion to a comely and delicate woman; the shepherds and their flocks shall come unto her, they shall pitch tents near her round about, they shall feed everyone his own space. (Jer. 6:2, 3)

 

에스겔에서, In Ezekiel:

 

37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수효를 양 떼같이 많아지게 하되 38제사 드릴 양 떼 곧 예루살렘이 정한 절기의 양 무리 같이 황폐한 성읍을 사람의 떼로 채우리라 그리한즉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느니라 (36:37, 38) Thus saith the Lord Jehovih, I will multiply them as a flock of man, as a hallowed flock, as the flock of Jerusalem in her appointed times; so shall the waste cities be filled with the flock of man. (Ezek. 36:37–38)

 

이사야에서, In Isaiah:

 

게달의 양 무리는 다 네게로 모일 것이요 느바욧의 숫양은 네게 공급되고 내 제단에 올라 기꺼이 받음이 되리니 내가 내 영광의 집을 영화롭게 하리라 (60:7) All the flocks of Arabia shall be gathered together unto thee, the rams of Nebaioth shall minister unto thee. (Isa. 60:7)

 

양 떼를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하는 사람들이 양 떼를 모으는(gather the flock)사람들이며,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하지 않는 사람들이 양 떼를 흩는(scatter the flock) 사람들입니다. 모든 모임과 결합은 체어리티에서 나오고, 모든 흩어짐과 분리는 체어리티가 없는 데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They who lead the flock to the good of charity are they who “gather the flock”; but they who do not lead them to the good of charity “scatter the flock”; for all gathering together and union are of charity, and all dispersion and disunion are from want of charity.

 

 

해설

 

AC.343은 앞의 AC.341-342에서 아벨을 ‘양 치는 자’라고 한 이유를 말씀 전체의 ‘목자와 양 떼’라는 표상을 통해 본격적으로 설명합니다. AC.341에서는 ‘양 치는 자’가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했고, AC.342에서는 체어리티를 상징하는 레위가 제사장직을 맡았으며, ‘양 치는 자’를 표상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343은 왜 ‘양 치는 자’가 체어리티와 연결되는지를 구약과 신약 전체에 익숙한 목자의 표상을 통해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아주 간단한 정의를 제시합니다. ‘사람들을 인도하고 가르치는 사람을 목자라고 하고, 인도와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을 양 떼라고 합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목자의 역할은 주로 ‘가르치는 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문장에서 중요한 조건을 붙입니다.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하지 않고, 그것을 가르치지도 않는 사람은 참된 목자가 아니다.’ 이것이 AC.343 전체를 읽는 열쇠입니다.

 

즉 목자의 본질은 단순히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사람’이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성경을 많이 가르치고, 교리를 정확하게 설명하며, 사람들을 열심히 지도한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참된 목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가르침과 인도가 궁극적으로 사람을 ‘체어리티의 선’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신앙의 진리를 가르치는 목적도 사람이 그 진리를 따라 선하게 살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목자의 가르침은 진리에서 출발할 수 있지만, 그 진리가 향해야 할 곳은 체어리티의 선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42에서 살펴본 ‘르우벤 시므온 레위’의 질서와 놀랍도록 잘 연결됩니다. 르우벤은 신앙을, 시므온은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을, 레위는 체어리티를 상징했습니다. 참된 목자는 사람을 르우벤에만 머물게 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참인지를 알고 인정하게 하는 데서 끝내지 않고, 그것을 삶으로 행하도록 인도하며, 마침내 그 선을 사랑하여 행하는 체어리티에 이르도록 돕습니다. 그러므로 AC.342가 신앙이 체어리티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 주었다면, AC.343은 목자가 사람을 어디로 인도해야 하는지를 보여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목회와 가르침을 바라보는 매우 중요한 기준이 생깁니다. ‘얼마나 정확하게 가르쳤는가?’만 물어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가?’도 물어야 합니다. 말씀을 많이 알게 되었지만, 다른 사람을 쉽게 정죄하게 되고, 자기 교리의 우월성을 자랑하며, 자신과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갈라서게 된다면 그 가르침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진리를 배우면서 사람 안에 겸손과 선의와 용서와 섬김이 자라나고, 무엇이 참으로 이웃에게 선한지를 분별하여 행하려 한다면 그 진리는 자신의 목적지인 체어리티를 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AC.343이 ‘사랑만 있으면 교리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목자는 ‘인도하고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무엇이 선인지를 알아야 선으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진리를 가르치는 일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진리는 선을 섬겨야 하고, 신앙은 체어리티로 나아가야 합니다. 가인의 문제가 바로 이 질서를 뒤집어 신앙을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세운 데 있었음을 생각하면, AC.343의 목자에 관한 설명은 창4의 중심 주제와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양 떼의 편에서도 똑같이 말합니다. ‘선으로 인도받지 않고, 무엇이 선인지를 배우지 않는 사람은 양 떼에 속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것 역시 상당히 강한 표현입니다. 양 떼에 속한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교회에 등록되어 있거나 목자의 설교를 듣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참된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그 인도를 따라 선으로 나아갑니다. 결국 목자와 양 떼 모두를 판단하는 기준이 ‘체어리티의 선’에 놓여 있습니다.

 

이어지는 성경 구절들은 이 원리를 여러 모습으로 보여 줍니다. 사30:23에서는 주님께서 비를 주시고, ‘땅의 소산의 양식’을 풍성하게 하시며, 가축을 넓은 목장에서 먹이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땅의 소산의 양식’을 체어리티라고 합니다. 목자가 양에게 먹이를 준다는 것은 속뜻으로는 단순히 지식을 많이 제공한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에게 영적 생명을 주는 선을 공급하는 것과 연결됩니다.

 

40:11은 이 모습을 더욱 따뜻하게 보여 줍니다. 주 여호와께서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인도하십니다. 여기서 모든 참된 목자직의 원형이 주님 자신에게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목회자가 목자라고 하는 것도 본래 자기에게 양 떼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양들을 주님을 대신하여 섬기는 쓰임을 맡았기 때문입니다. 참된 목자는 양들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지 않고, 주님의 선으로 인도합니다.

 

80:1에서는 아예 주님을 ‘이스라엘의 목자’라고 부르며 ‘요셉을 양 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모든 목자직의 중심에는 결국 주님의 인도가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천국으로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을 인도하시며, 목자는 그 인도에 쓰임을 받습니다. 이것을 잊는 순간 목자는 양 떼를 주님의 것이 아니라 자기 것으로 여기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AC.343의 마지막 문장은 이 모든 설명을 하나의 매우 중요한 원리로 모읍니다. ‘모든 모임과 결합은 체어리티에서 나오고, 모든 흩어짐과 분리는 체어리티가 없는 데서 나온다.’ 여기서 ‘모인다’는 것은 단순히 많은 사람이 한 장소에 모인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들을 참으로 하나 되게 하는 것은 체어리티라는 뜻입니다. 외적으로 같은 교리를 고백하고, 같은 예배에 참석하며, 같은 조직에 속해 있어도 서로를 향한 선의가 없다면 내적으로는 하나가 아닐 수 있습니다. 반대로 외적인 생각과 판단에 차이가 있어도 서로의 선을 바라고, 주님 안에서 이웃을 사랑한다면 더 깊은 차원에서는 결합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가인’의 문제가 다시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면 결국 ‘분리’가 시작됩니다. 처음에는 신앙과 체어리티 사이의 작은 분리처럼 보였지만, 그것이 진행되면서 가인은 자기 형제 아벨을 견디지 못하게 되고, 마침내 그를 죽입니다. AC.343의 마지막 원리를 창4 전체에 적용하면, 가인의 역사는 ‘체어리티가 사라질수록 분리와 흩어짐이 깊어지는 과정’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원리는 교회의 일치에 대해서도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교회를 하나 되게 하는 가장 깊은 힘은 모든 사람이 모든 교리적 세부 사항에서 똑같이 생각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물론 진리는 중요하고, 교리적 오류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을 실제로 결합시키는 것은 체어리티입니다. 서로 다른 사람을 향하여 선을 품고, 그가 주님 안에서 잘되기를 바라며, 진리를 자기 우월성을 증명하는 무기가 아니라 이웃의 선을 위한 빛으로 사용하는 데서 참된 결합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AC.343의 마지막 문장은 목회자에게도, 성도에게도 상당히 엄중한 자기 점검의 기준이 됩니다. 내가 전하고 붙들고 있는 진리가 사람들을 주님과 이웃에게 더 가까이 가게 하는가, 아니면 끊임없이 편을 나누고, 적을 만들며, 사람을 밀어내게 하는가? 내가 진리를 말하면서 실제로는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려는 것은 아닌가? 반대로 체어리티라는 이름으로 진리를 흐리면서 참된 선으로 인도하는 일을 포기하고 있지는 않은가? AC.343은 진리와 체어리티 어느 하나를 버리라고 하지 않습니다. 진리가 체어리티의 선으로 사람을 인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양 치는 자’ 아벨의 의미를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 줍니다. 아벨은 단순히 ‘착한 쪽’, 가인은 ‘나쁜 쪽’이라는 대비가 아닙니다. 아벨은 신앙이 본래 향해야 할 체어리티의 선을 나타내며, ‘양 치는 자’라는 그의 모습은 그 선을 돌보고, 먹이며, 삶으로 행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가인이 아벨을 죽인다는 것은 신앙이 단지 체어리티라는 한 덕목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신앙 자체가 사람을 선으로 인도해야 하는 자신의 목적을 없애 버리는 것입니다.

 

결국 AC.343의 핵심은 ‘참된 목자는 어디로 인도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답은 분명합니다. ‘체어리티의 선으로’입니다. 참된 목자는 진리를 가르치되 진리 자체에 사람을 붙잡아 두지 않고, 그 진리가 삶이 되고, 선이 되도록 인도합니다. 그리고 참된 양 떼 역시 단순히 듣고 아는 데 머물지 않고, 무엇이 선인지를 배우며, 그 선으로 인도받기를 원합니다.

 

그 결과가 ‘모임과 결합’입니다. 체어리티는 주님과 사람을 결합하고 사람과 사람을 결합합니다. 반대로 체어리티가 사라지면, 아무리 신앙을 크게 외쳐도 결국 분리와 흩어짐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AC.343은 목자와 양 떼에 관한 해설이면서 동시에 창4의 가인과 아벨 전체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원리를 제시합니다. ‘신앙이 사람을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할 때는 모이고 결합하지만,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될 때는 흩어지고 갈라집니다.’ 이것이 ‘양 치는 자’ 아벨을 통해 말씀이 보여 주는 참된 목자의 모습입니다.  

 

 

심화

 

1. ‘양 떼를 먹이고, 모으고, 품고, 인도하시는 주님(40:11)

 

 

AC.343, 심화 1, ‘양 떼를 먹이고, 모으고, 품고, 인도하시는 주님’ (사40:11)

AC.343.심화 1. ‘양 떼를 먹이고, 모으고, 품고, 인도하시는 주님’ (사40:11) 그는 목자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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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2, 창4:2, ‘신앙에서 행위로, 행위에서 체어리티로’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2 교회의 두 번째 자손이 체어리티라는 것은, 교회가 잉태하고 낳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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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2.심화

 

1. ‘르우벤에서 시므온을 거쳐 레위로, 신앙이 체어리티에 이르는 길 (창29:32-34)

 

32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33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34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레위라 하였으며 (29:32-34)

 

 

AC.342에서 스베덴보리가 창29:32-34의 르우벤, 시므온, 레위의 출생을 한꺼번에 인용한 이유는, 교회가 낳는 두 가지가 본질적으로 신앙’과 체어리티’이며,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하여 나아가는 질서가 말씀의 다른 곳에서도 나타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AC.340에서는 같은 창29의 구절 가운데 르우벤과 시므온의 이름을 고대인들이 어떤 상태와 의미를 이름에 담았다’는 사실의 예로 인용했습니다. 그러나 AC.342에서는 같은 구절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사용합니다. 이번에는 르우벤, 시므온, 레위가 차례로 무엇을 상징하는지를 통해 신앙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  체어리티’라는 질서를 보여 줍니다.

 

먼저 르우벤’은 신앙’을 상징합니다. 레아는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다’고 말하며 첫아들의 이름을 르우벤이라 합니다. 르우벤이라는 이름에는 보다’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다른 해설까지 연결해서 보면 ’은 이해성, 그러니까 이해하는 능력(understanding)으로 진리를 보고 인정하는 것과 관계됩니다. 따라서 르우벤은 진리를 보고 그것을 참이라고 인정하는 신앙의 첫 단계를 나타냅니다. AC.342에서는 이 복잡한 내용을 길게 풀지 않고 간단히 르우벤은 신앙을 상징한다’고 정리합니다.

 

그다음 시므온’은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을 상징합니다. 레아는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다’고 말하고 둘째 아들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합니다. 시므온은 듣다’와 연결된 이름입니다. 말씀에서 듣는 것’은 단순히 귀로 소리를 받아들이는 데 그치지 않고, 들은 것을 받아들이고 순종하여 행하는 것과 연결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도 말을 들었다’와 말을 들었다가 그대로 했다’를 구별하듯, 영적인 의미에서 참으로 듣는 것은 진리를 받아들여 삶으로 옮기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그래서 르우벤에서 보고 인정한 신앙’이 시므온에서는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셋째 레위’가 체어리티’를 상징합니다. 여기서 창29:34의 표현이 특히 중요합니다. 레아는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라고 말하고 그의 이름을 레위라 합니다. ‘레위’라는 이름은 연합하다’, ‘결합하다’라는 의미와 연결됩니다. 따라서 레위가 체어리티를 상징한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과 별도로 하나 더 덧붙이는 덕목이 아니라, 신앙의 진리가 사람의 삶과 사랑에 결합되는 데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 이름을 차례로 놓으면 AC.342의 핵심이 아주 선명해집니다. ‘르우벤’에서는 진리를 보고 인정합니다. ‘시므온’에서는 그 진리를 받아들여 행합니다. ‘레위’에서는 그렇게 행하던 선이 마침내 사랑과 결합하여 체어리티가 됩니다. 다시 말하면 앎과 인정  행함  사랑과의 결합’이라는 흐름입니다. 이것이 AC.342가 창29:32-34 전체를 한꺼번에 인용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조심해야 합니다. 이것을 먼저 지식으로 신앙을 얻고, 그다음 행동을 충분히 반복하면, 마지막에 자동으로 체어리티가 생긴다’는 기계적인 과정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체어리티를 심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사람이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에 따라 살려고 할 때, 주님께서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심으시고, 신앙과 체어리티를 결합하십니다. 따라서 르우벤에서 레위로 나아가는 과정 전체가 거듭남 안에서 이루어지는 주님의 역사입니다.

 

이 점은 지금 읽고 있는 가인과 아벨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AC.341-342에서 가인과 아벨은 각각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정상적인 질서라면 신앙은 체어리티와 경쟁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신앙은 체어리티를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바로 그것을 르우벤, 시므온, 레위가 보여 줍니다. 신앙은 행위로 나아가고,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은 마침내 체어리티와 결합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런데 가인’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일어납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하여 나아가지 않고 사랑에서 자신을 떼어 내어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이 되려고 합니다. 정상적인 길은 르우벤  시므온  레위’인데, 가인은 그 길을 거부하고 신앙 자체에 머물려 하는 셈입니다. 그래서 결국 자신의 형제’인 아벨, 곧 체어리티와 충돌하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AC.342에서 왜 하필 레아의 첫 세 아들’을 가져왔는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신앙과 체어리티를 각각 상징하는 성경 인물을 하나씩 찾아 제시한 것이 아닙니다. 세 아들이 출생의 순서’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르우벤에서 시작된 것이 시므온을 거쳐 레위에 이릅니다. 즉 말씀의 계보 자체가 신앙이 삶으로 들어가 체어리티에 이르는 질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특히 레위의 연합’이라는 의미는 AC.342의 전체 내용을 아름답게 마무리합니다. 신앙의 최종 목적은 진리를 많이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가 사람의 삶에 들어와 선이 되고, 그 선이 사랑과 결합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보는 것’에서 시작하여 그것을 듣고 행하는 것’으로 나아가며, 마침내 사랑과 연합하는 것’에 이릅니다. 따라서 르우벤과 시므온을 지나 레위에 이르는 흐름은 단순한 세 이름의 나열이 아니라 거듭남의 방향을 압축해서 보여 주는 하나의 작은 그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이어서 레위 지파가 제사장직을 맡았으며, ‘양 치는 자를 표상했다’고 설명합니다. 레위가 체어리티를 상징하므로, 레위 지파가 맡은 제사장직 역시 가장 깊은 의미에서는 사랑과 체어리티의 선을 섬기는 일을 나타냅니다. 이것이 다시 아벨의 양 치는 자’와 연결됩니다. 아벨도 체어리티를 상징하고, 레위도 체어리티를 상징하며, 두 경우 모두 양 치는 자’라는 이미지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AC.341 형제’라는 표현도 더욱 깊어집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 경쟁하는 두 교리가 아닙니다. 신앙은 본래 체어리티에 이르도록 주어진 것이며, 체어리티는 신앙이 생명을 얻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아벨을 가인의 형제’라고 한 것은 단순한 가족관계의 표현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가 본래 함께 있어야 하는 관계임을 보여 줍니다.

 

결국 창29:32-34 AC.342에서 인용한 이유는 르우벤은 신앙, 시므온은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 레위는 체어리티’라는 세 단계의 연결을 통해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하여 나아가는 정상적인 질서를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 정상적인 질서를 옆에 놓아 보면 가인’의 문제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가인의 잘못은 신앙을 가진 것 자체가 아니라, 그 신앙이 가야 할 곳으로 가지 않은 데 있습니다. 신앙은 아벨, 곧 체어리티를 향하여 나아가야 했는데, 오히려 체어리티에서 자신을 분리하고 마침내 그것을 소멸시키려 했습니다.

 

그래서 이 세 구절을 AC.342의 문맥에서 한 문장으로 압축한다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르우벤에서 신앙이 시작되고, 시므온에서 그 신앙이 삶으로 나아가며, 레위에서 마침내 신앙과 사랑이 결합하여 체어리티에 이릅니다.’

 

이것이 가인이 걸어야 했지만 걷지 않은 길이며, 동시에 오늘 우리의 신앙도 끊임없이 걸어야 하는 길입니다. 무엇을 알고 무엇을 믿는가에서 멈추지 않고, 그것을 실제로 행하며, 마침내 주님께서 그 선을 우리의 사랑과 결합하시도록 하는 것, 바로 그것이 신앙이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어 가는 거듭남의 질서입니다.

 

 

 

AC.342, 창4:2, ‘신앙에서 행위로, 행위에서 체어리티로’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2 교회의 두 번째 자손이 체어리티라는 것은, 교회가 잉태하고 낳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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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4:2)

 

AC.342

 

교회의 두 번째 자손이 체어리티라는 것은, 교회가 잉태하고 낳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서 분명합니다. 야곱에게서 난 레아의 첫 아들들도 같은 것을 상징합니다. ‘르우벤(Reuben)은 신앙을, ‘시므온(Simeon)은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을, ‘레위(Levi)는 체어리티를 상징합니다(29:32-34). 이런 이유로 레위 지파가 제사장직을 맡았으며, ‘양 치는 자(shepherd of the flock)를 표상했습니다. That the second offspring of the church is charity,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 church conceives and brings forth nothing else than faith and charity. The same is signified by the first children of Leah from Jacob; “Reuben” denoting faith; “Simeon,” faith in act; and “Levi,” charity (Gen. 29:32, 33, 34), wherefore also the tribe of Levi received the priesthood, and represented the “shepherd of the flock.”

 

32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33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34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레위라 하였으며 (29:32-34)

 

체어리티는 교회의 두 번째 자손이므로 형제(brother)라고 하며, 그 이름을 아벨(Abel)이라고 합니다. As charity is the second offspring of the church, it is called “brother,” and is named “Abel.”

 

 

해설

 

AC.342는 바로 앞 AC.341의 ‘교회의 두 번째 자손은 체어리티이며, ‘아벨형제가 이를 상징한다’는 설명에 성경 안의 또 다른 근거를 제시합니다. 그리고 그 근거로 매우 흥미롭게도 야곱과 레아에게서 난 첫 세 아들, 곧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를 가져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세 이름을 통해 ‘신앙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 체어리티’라는 하나의 영적 질서를 보여 줍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교회가 잉태하고 낳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잉태하고 낳는다’는 표현은 AC.339에서 살펴본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교회가 실제로 아이를 낳는다는 뜻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생겨나는 영적인 것들을 잉태와 출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참으로 생겨나야 할 것은 주님을 향한 신앙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이며, 결국 교회의 모든 교리와 삶도 이 둘을 향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신앙과 체어리티’라는 두 가지를 서로 독립된 두 요소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까지 가인의 문제를 통해 계속 살펴보았듯,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이 되는 순간 본래의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AC.342가 레아의 세 아들을 가져오는 이유도 오히려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해 어떻게 나아가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첫째 아들 ‘르우벤’은 신앙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40에서 르우벤의 이름을 다룬 것과는 관점이 조금 다릅니다. AC.340에서는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다’는 말과 ‘르우벤’이라는 이름의 관계를 통해 고대인들이 이름에 어떤 상태와 의미를 담았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습니다. 여기 AC.342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르우벤이 신앙을 상징한다고 밝힙니다.

 

둘째 아들 ‘시므온’은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을 상징합니다. 이 단계가 매우 중요합니다. 신앙은 머릿속에서 어떤 것을 참이라고 인정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면 그것은 그의 행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진리를 알고 인정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진리에 따라 살아 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르우벤에서 나타난 신앙이 시므온에서는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리고 셋째 아들 ‘레위’가 체어리티를 상징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신앙 다음에 행동하고, 그다음에 착한 사람이 된다’는 외적인 단계의 나열이 아닙니다. 신앙으로 받아들인 진리를 실제로 행하면서, 그 진리가 점차 사람의 의지와 사랑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주님의 뜻이므로 해야 한다’고 알고 행하지만,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마침내 그것을 사랑하여 기꺼이 행하게 됩니다. 그때 선은 더 이상 외적인 의무에 머물지 않고 체어리티의 선이 됩니다.

 

따라서 ‘르우벤 시므온 레위’의 흐름은 매우 아름답습니다. 신앙이 있고, 그 신앙이 행위로 나아가며, 마침내 체어리티에 이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앞 단계가 뒤 단계에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체어리티에 이르렀다고 신앙이 필요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자신의 목적과 생명을 얻습니다. 진리는 선을 향해 나아가고, 신앙은 사랑을 향해 나아가며, 마침내 둘이 하나의 삶 안에서 결합됩니다.

 

이 점에서 AC.342는 우리가 앞서 살펴본 태고교회와 오늘날 교회의 차이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은 사랑으로부터 신앙을 가졌습니다. 사랑 안에서 무엇이 참인지를 퍼셉션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영적 인간에게는 신앙의 진리를 먼저 배우고, 그것을 행하며, 그 신앙으로 주님께서 체어리티를 심으시는 질서가 필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르우벤 시므온 레위’는 특히 영적 인간의 거듭남의 질서를 생각하게 합니다.

 

여기서 레위 지파가 제사장직을 맡았다는 사실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레위가 체어리티를 상징하기 때문에 레위 지파가 제사장직을 맡았으며 ‘양 치는 자’를 표상했다고 설명합니다. 제사장직의 본질은 지위나 종교적 권력에 있지 않고,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과 선을 섬기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체어리티를 상징하는 레위와 제사장직이 연결되는 것은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다시 아벨에게 돌아옵니다. AC.341에서 ‘아벨’은 체어리티를, ‘양 치는 자’는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을 나타냈습니다. 이제 AC.342에서는 레위 역시 체어리티를 상징하며, 바로 그 때문에 ‘양 치는 자’를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레위 - 체어리티 제사장직 양 치는 자’와 ‘아벨 체어리티 양 치는 자’가 서로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서로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여러 부분에서 같은 영적 질서가 반복해서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양 치는 자’라는 표현을 제사장직과 연결하면 체어리티의 성격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목자는 양을 지배하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라 먹이고, 돌보고, 보호하고,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마찬가지로 참된 제사장직과 목회 역시 사람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영적 선을 돌보는 쓰임입니다. 그러므로 ‘양 치는 자’는 단순히 선한 감정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이웃의 영적 선을 위하여 실제로 섬기는 체어리티의 삶을 아름답게 보여 줍니다.

 

그리고 AC.342 마지막에서 스베덴보리는 다시 ‘형제’라는 표현으로 돌아옵니다. ‘체어리티는 교회의 두 번째 자손이므로 형제라고 하며, 그 이름을 아벨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형제’는 단순한 가족 호칭이 아닙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본래 서로 결합되어야 하는 관계임을 보여 줍니다. 가인과 아벨이 ‘형제’라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말씀의 이야기 구조 자체가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후 가인이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말하는 장면은 훨씬 무겁게 다가옵니다. 속뜻으로는 신앙이 ‘내가 체어리티를 돌보아야 합니까?’라고 말하는 것과도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이라면 바로 그 ‘형제’를 지켜야 합니다.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AC.341이 이미 단호하게 말했듯 ‘신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죽이는 순간, 단지 자기 형제를 잃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생명도 잃게 됩니다.

 

AC.342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르우벤 시므온 레위’의 질서와 ‘가인 아벨’의 관계를 함께 볼 때 드러나는 대조입니다. 한쪽에서는 신앙이 행위로 나아가 마침내 체어리티에 이릅니다. 이것이 신앙이 가야 할 정상적인 방향입니다. 그러나 가인으로 나타나는 흐름에서는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해 나아가는 대신 자신을 사랑에서 분리하여 독립시키려 합니다. 결국 체어리티라는 ‘형제’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소멸시키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그래서 AC.342는 가인의 문제가 무엇인지 역으로 더욱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신앙의 목적지는 자기 자신이 아닙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향해 가야 합니다. 진리는 선을 향해 가야 하며, 아는 것은 행하는 것으로 이어지고, 행하는 것은 마침내 사랑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이 이 길을 걸으면 ‘르우벤 시므온 레위’의 질서가 나타나지만, 신앙이 자기 자신을 목적 삼으면 ‘가인’의 길이 시작됩니다.

 

따라서 AC.342는 매우 짧지만 거듭남의 중요한 질서를 보여 줍니다. ‘신앙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 체어리티.’ 진리를 배우고 인정하는 데서 시작하여, 그 진리를 실제 삶에서 행하고, 마침내 그 선을 사랑하여 기꺼이 행하는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신앙과 체어리티는 더 이상 서로 떨어진 두 가지가 아니라 하나의 삶을 이루게 됩니다.

 

결국 AC.342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도 매우 실제적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진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입니다. 머릿속의 신앙으로 머물러 있는가, 삶의 행동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그리고 그 행동이 점차 사랑과 체어리티가 되어 가고 있는가?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자신의 경쟁자로 여기지 않습니다. 체어리티를 향해 나아가며, 마침내 체어리티 안에서 자신의 생명을 발견합니다. 바로 그것이 ‘아벨’을 신앙의 ‘형제’라고 한 깊은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심화

 

1. ‘르우벤에서 시므온을 거쳐 레위로, 신앙이 체어리티에 이르는 길(창29:32-34)

 

 

AC.342, 심화 1, ‘르우벤에서 시므온을 거쳐 레위로, 신앙이 체어리티에 이르는 길’ (창29:32-34)

AC.342.심화 1. ‘르우벤에서 시므온을 거쳐 레위로, 신앙이 체어리티에 이르는 길’ (창29:32-34) 32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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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1, 창4: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AC.341-345)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And she added to bear his brother Abel; and Abel was a shepherd of the flock, and Cain was a tiller of the ground. (창4:2) AC.341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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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And she added to bear his brother Abel; and Abel was a shepherd of the flock, and Cain was a tiller of the ground. (4:2)

 

AC.341

 

교회의 두 번째 자손은 체어리티이며, ‘아벨(Abel)형제(brother)가 이를 상징합니다. ‘양 치는 자(shepherd of the flock)는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을 나타내고, ‘농사하는 자(tiller of the ground)는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을 나타냅니다. 비록 그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안에 아무리 깊이 있다 하더라도 그러하며, 그런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The second offspring of the church is charity, signified by “Abel” and “brother”; a “shepherd of the flock” denotes one who exercises the good of charity; and a “tiller of the ground,” is one who is devoid of charity, however much he may be in faith separated from love, which is no faith.

 

 

해설

 

AC.341은 매우 짧지만, 창4의 가인과 아벨을 이해하는 핵심 구조를 한 문장 안에 압축하고 있습니다. 바로 앞 AC.338-340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첫 번째 자손을 ‘신앙’이라고 했고, 그 신앙을 ‘가인’으로 나타냈습니다. 이제 두 번째 자손으로 ‘체어리티’가 등장하며, 이를 ‘아벨’과 ‘형제’가 상징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창4의 가인과 아벨 이야기는 처음부터 두 개인의 형제 관계를 중심으로 읽기보다, 태고교회 안에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어떤 관계에 있었으며, 그 관계가 어떻게 변해 갔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읽어야 합니다.

 

여기서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체어리티를 ‘아벨’뿐 아니라 ‘형제’도 상징한다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이후 창4를 읽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은 단순히 한 사람이 자기 동생을 죽였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신앙이 자기 ‘형제’인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본래 서로 남남이 아니라 함께 있어야 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아벨을 계속 가인의 ‘형제’라고 하는 데에도 깊은 뜻이 있습니다.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을 때에만 참된 신앙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섬세하게 구별할 것이 있습니다. AC.338에서는 태고교회의 ‘첫 번째 자손’을 신앙이라고 했고, AC.341에서는 ‘두 번째 자손’을 체어리티라고 합니다. 이것을 시간순으로 ‘먼저 신앙이 생기고 나중에 체어리티가 생겼다’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태고교회의 본래 질서는 오히려 사랑이 먼저이고, 신앙이 그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질서였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첫째와 둘째는 자연적인 출생 순서를 그대로 영적 우선순위로 옮긴 것이 아닙니다. 창4의 계보와 출생은 AC.339에서 살펴본 것처럼 교회에 속한 것들이 서로 어떤 관계를 맺으며 나타나는지를 고대의 출생과 계보 형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벨’과 함께 나오는 것이 ‘양 치는 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양 치는 자’를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체어리티가 단순한 감정이나 관념으로 머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체어리티는 실제로 선을 행하는 데서 나타납니다. 이웃의 선을 바라고, 그 선을 위하여 실제로 행동하며, 자신에게 맡겨진 쓰임을 성실하게 행하는 것이 체어리티의 삶입니다. 따라서 ‘양을 친다’는 것은 속뜻으로 단순히 목축업에 종사한다는 뜻이 아니라, 체어리티의 선을 돌보고, 그것을 삶으로 행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양 떼’라는 표현도 이와 잘 어울립니다. 말씀에서 양은 순진함과 선, 그리고 주님께 인도받는 사람들과 연결됩니다. 목자는 양에게 먹을 것을 주고, 위험에서 보호하며, 길을 잃지 않도록 돌봅니다. 그러므로 ‘양 치는 자’라는 모습에는 체어리티가 무엇인지가 매우 아름답게 담겨 있습니다. 체어리티는 무엇을 옳다고 주장하는 데 머물지 않고, 실제로 다른 사람의 선을 돌보고 보살피며 섬기는 삶으로 나타납니다.

 

반면 가인은 ‘농사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를 매우 강하게 해석하여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자칫 ‘농사’ 자체에 부정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에서 ‘’은 문맥에 따라 매우 다양한 의미를 가지며, 좋은 의미로 사용될 때도 많습니다. 여기서는 ‘가인’이 나타내는 상태와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농사하는 자’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에 몰두하면서 체어리티는 없는 사람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AC.341의 마지막 말은 매우 단호합니다. 그런 사람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안에 아무리 깊이가 있다 하더라도’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이며, ‘그런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창4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명제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은 단지 어떤 교리를 정확하게 알고, 그것이 참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 외형상 아무리 정교하고 확고한 신앙처럼 보여도 그 안에는 신앙의 생명이 없습니다.

 

바로 여기서 가인의 문제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가인의 처음은 반드시 명백한 거짓에서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AC.340에서 보았듯이, 원래 마음에 새겨져 있던 신앙에 속한 것들을 따로 구별하여 교리로 정리하고, 그것을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 출발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분리가 계속되면 결국 신앙은 자신의 형제인 체어리티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고 여기게 됩니다. AC.341은 그 결과를 미리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런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앞서 생각했던 ‘부부생활 준수 가이드 20가지’의 비유와도 연결됩니다. 서로 사랑하는 부부에게 생활의 원칙과 약속은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사랑 자체보다 규칙이 중심이 되어 ‘나는 20가지를 모두 지켰으니 좋은 배우자다’라고 주장한다면 이상해집니다. 상대방을 향한 사랑과 배려는 사라졌는데 규칙 준수만 남았다면, 결혼의 형식은 유지해도 결혼의 생명은 크게 훼손된 것입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도 이와 비슷합니다. 교리와 신앙의 고백은 필요하지만, 그것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자기 완결적인 것이 되면 신앙의 본래 생명을 잃습니다.

 

앞서 떠올리셨던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 관한 비유도 여기에서 더욱 선명해집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부모 자식 간에도 돈 계산은 분명해야 해요’라고 말하는 것 자체는 경우에 따라 틀린 말이 아닐 수 있습니다. 실제로 재정 문제를 분명하게 하는 것이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와 자녀 사이를 지탱하던 사랑과 신뢰보다 ‘계산의 원칙’이 더 근본적인 자리에 올라가 버린다면 관계의 성질이 달라집니다. 원칙이 사랑을 섬기는 동안에는 유익하지만, 사랑에서 독립하여 관계를 지배하기 시작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가인의 분리도 바로 이런 종류의 변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AC.341의 ‘형제’라는 말이 더욱 무겁게 다가옵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경쟁자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진리가 중요하냐 사랑이 중요하냐’, ‘신앙이 먼저냐 행위가 먼저냐’라고 서로 맞세우는 순간 이미 가인의 문제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밀어내지 않으며, 참된 체어리티 역시 진리를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둘은 서로를 필요로 하는 ‘형제’입니다. 더 깊이 말하면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고, 체어리티는 신앙을 통하여 무엇이 참으로 선한지를 배우며 올바른 방향을 얻습니다.

 

여기서 ‘양 치는 자’와 ‘농사하는 자’의 대비도 단순한 두 직업의 대비를 넘어섭니다. 한쪽에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선을 돌보고 실제로 행하는 삶이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신앙에 속한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체어리티가 없는 상태가 있습니다. 그래서 창4의 질문은 결국 ‘누가 더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는가?’가 아닙니다. ‘그 진리가 실제로 어떤 사랑을 품고 있으며 어떤 선을 낳고 있는가?’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어떤 사람이 성경을 많이 알고, 교리를 정확하게 설명하며, 신학적인 오류를 예리하게 찾아낼 수 있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참된 신앙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 지식과 신앙이 이웃을 향한 선으로 이어지는지, 다른 사람을 돌보고 용서하고 섬기는 체어리티로 나타나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반대로 체어리티를 진리 없는 막연한 친절로 축소해서도 안 됩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주님의 진리로부터 무엇이 실제로 이웃에게 선한지를 분별하며 행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AC.341은 가인과 아벨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한 아주 중요한 출발점을 마련합니다. ‘가인’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독립하려는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양 치는 자’는 그 체어리티의 선을 실제로 행하는 사람을 나타내며, ‘농사하는 자’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도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마지막에 판단의 기준을 조금도 흐리지 않습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 이 한 문장이 앞으로 이어질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읽는 열쇠가 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은 단순히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우위를 차지하는 정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신앙이 자신의 생명을 이루는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면서 결국 자기 자신도 참된 신앙이기를 그치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창4의 비극은 아벨만 죽는 데 있지 않습니다. 체어리티를 죽이는 순간, 가인이 붙들고 있던 ‘신앙’ 역시 그 본래의 생명을 잃는다는 데 더 깊은 비극이 있습니다.

 

 

 

AC.342, 창4:2, ‘신앙에서 행위로, 행위에서 체어리티로’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2 교회의 두 번째 자손이 체어리티라는 것은, 교회가 잉태하고 낳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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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0, 창4:1,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4:1) AC.340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I have gotten a man, Jehov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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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0.심화

 

5. ‘17:15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17:15)

 

 

AC.340에서 스베덴보리가 출17:15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를 인용한 이유는 앞서 이스마엘, 르우벤, 시므온, 유다의 이름을 인용한 이유와 기본적으로 같습니다. 고대에는 어떤 새로운 사건이나 상태가 나타났을 때, 그 의미와 성질을 이름에 담아 표현했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다만 앞의 네 사례가 모두 사람의 이름’이었다면, 이번에는 제단의 이름’을 예로 듭니다. 따라서 이 마지막 사례는 이름에 의미를 담는 고대의 방식이 사람에게만 적용된 것이 아니라 사물이나 장소에도 적용되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17의 배경은 이스라엘과 아말렉의 전쟁입니다. 여호수아가 아말렉과 싸우는 동안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겼으며, 아론과 훌이 모세의 손을 붙들어 마침내 이스라엘이 승리합니다. 그 후 모세는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고 합니다. ‘여호와 닛시’는 여호와는 나의 깃발’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모세가 제단에 아무 의미 없이 하나의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니라, 그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신 분이 여호와이심을 그 이름에 담아 나타낸 것입니다.

 

여기서 AC.340의 논점은 여호와 닛시’의 속뜻 자체를 깊이 해설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주목하는 것은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했다’는 명명의 방식입니다. 어떤 중요한 일이 일어나고, 그 일의 의미를 하나의 이름으로 표현하여 기억하고 나타내는 것입니다. 앞에서 사람에게 이름을 붙일 때 보았던 것과 같은 원리가 이번에는 제단에도 적용됩니다.

 

이 사례가 특별히 중요한 이유는 이름’의 의미를 단순한 개인 이름의 어원 문제로 한정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마엘, 르우벤, 시므온, 유다까지만 예로 들었다면 성경 시대에는 아이가 태어났을 때 출생 상황에 맞추어 이름을 지었구나 정도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마지막에 사람도 아닌 제단’을 가져옵니다.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것을 여호와 닛시’라고 한 것입니다. 이로써 이름은 단순한 사람의 호칭을 넘어 어떤 대상의 성질과 의미, 그와 관련된 상태를 표현하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리고 이것이 다시 가인’이라는 이름을 이해하는 열쇠가 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본래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을 사랑 안에서 퍼셉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신앙에 속한 것들을 따로 구별하여 하나의 신앙의 교리로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전에는 마음에 새겨져 있던 것이 이제는 지식으로 아는 것이 되었고, 그들은 그것을 마치 새로운 무엇을 발견하고 얻은 것처럼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 상태를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고 표현하고, 그렇게 나타난 신앙의 교리를 가인’이라고 한 것입니다.

 

따라서 여호와 닛시’와 가인’이 같은 것을 의미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두 이름의 속뜻을 서로 연결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비교하는 것은 오직 이름을 붙이는 방식’입니다. 모세가 여호와께서 승리하게 하신 일을 나타내기 위해 제단에 여호와 닛시’라는 이름을 붙였듯이, 태고인들도 새롭게 나타난 어떤 교리와 상태의 성질을 이름에 담아 표현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AC.340에 나온 사례들을 한꺼번에 놓고 보면 스베덴보리의 논증 방식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하갈의 고통을 여호와께서 들으셨다’는 것을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에 담았고, 레아의 괴로움을 여호와께서 보셨다’는 것을 르우벤’이라는 이름에 담았으며, 자신이 사랑받지 못함을 여호와께서 들으셨다’는 것을 시므온’이라는 이름에 담았습니다. 또한 이번에는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는 상태를 유다’라는 이름에 담았고, 아말렉과의 싸움에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깃발이 되어 주셨다는 사실을 제단의 이름 여호와 닛시’에 담았습니다. 그리고 같은 원리에 따라, 태고교회에서 신앙의 교리를 마치 새롭게 얻은 것처럼 여긴 상태를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가인’이라고 한 것입니다.

 

특히 출17:15의 사례는 바로 앞 AC.339와 연결해서 읽을 때 더욱 의미가 있습니다. AC.339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인들이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으로 어떤 것들을 나타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AC.340에서는 실제 말씀 안에서 이름이 어떻게 그런 역할을 하는지 여러 사례를 들어 보여 줍니다. ‘여호와 닛시’는 그 가운데 마지막 사례로서, 이름이 단순한 사람의 호칭이 아니라 어떤 영적 의미를 담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다는 사실을 더욱 넓게 확인시켜 줍니다.

 

그러므로 출17:15 AC.340에서 인용한 이유를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모세가 아말렉과의 싸움에서 나타난 여호와의 도우심과 승리를 제단의 이름에 담아 여호와 닛시’라고 한 것처럼, 고대인들은 어떤 새로운 일이나 상태가 나타나면 그 성질을 이름에 담아 표현했습니다. 따라서 가인’이라는 이름 역시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는 말로 표현된 태고교회의 어떤 상태와 교리의 성질을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마지막 사례에는 한 가지 중요한 효과가 있습니다. ‘가인’이라는 이름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가인이라는 역사적 개인이 왜 그런 이름을 얻었는가?’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제단도 여호와 닛시’라는 이름을 통해 그와 관련된 상태와 의미를 나타낼 수 있었듯이, 태고인들은 교회에 속한 어떤 교리나 영적 상태에도 이름을 붙여 그 성질을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AC.339에서 설명한 창4의 계보를 이해하는 방식과 정확히 이어집니다.

 

결국 여호와 닛시’는 AC.340에 나온 여러 예 가운데 마지막이면서,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가장 넓게 열어 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름은 단지 사람을 부르는 호칭이 아니라 어떤 것의 성질과 상태를 담아 나타낼 수 있다.’ 이 원리를 확인하고 다시 창4로 돌아가면, ‘가인’은 단순한 이름이 아니라 태고교회 안에서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에 속한 것들을 따로 구별하여 교리로 만들고, 그것을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인식하고 인정하기 시작한 변화를 담아 나타내는 이름이라는 AC.340의 설명이 훨씬 자연스럽게 이해됩니다.

 

 

 

AC.340, 창4:1,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4:1) AC.340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I have gotten a man, Jehov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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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0, 심화 4, ‘창29:35’

AC.340.심화 4. ‘창29:35’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 (창29:35) AC.340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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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29:35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 (29:35)

 

 

AC.340에서 스베덴보리가 창29:35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를 인용한 이유도 앞서 이스마엘, 르우벤, 시므온을 인용한 이유와 같습니다. 고대인들은 어떤 새로운 일이 생기거나 새로운 상태가 나타났을 때, 그 성질을 이름에 담아 표현했으며, 스베덴보리는 이 원리를 통해 창4의 ‘가인’이라는 이름 역시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그 이름으로 나타내는 교리의 성질을 담고 있음을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29:35에서는 이름과 그 이름을 붙인 이유가 본문 안에서 직접 연결됩니다. 레아는 넷째 아들을 낳은 뒤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고 말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의 이름을 ‘유다’라고 합니다. ‘유다’라는 이름은 ‘찬송하다’, ‘감사하다’라는 뜻의 히브리어와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유다’라는 이름에는 단순히 넷째 아들이라는 신분이 아니라, 그때 레아에게 있었던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는 상태가 담겨 있습니다.

 

특히 개역개정의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라는 표현은 AC.340에서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원리를 아주 잘 보여 줍니다. 먼저 어떤 상태가 있고, 그 상태를 말로 표현하며, ‘이로 말미암아’ 그에 맞는 이름을 붙입니다. 따라서 이름은 그 상태와 아무 관계 없이 임의로 정한 표지가 아니라, 그 상태를 한 이름 안에 담아 나타내는 역할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원리를 ‘가인’에게 적용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본래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을 사랑 안에서 퍼셉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퍼셉션으로 알고 있던 신앙에 속한 것들을 따로 구별하여 하나의 신앙의 교리로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전에는 마음에 새겨져 있던 것이 이제는 지식으로 아는 것이 되었고, 그들은 그것을 마치 전에 없던 새로운 무엇을 발견하고 얻은 것처럼 여겼습니다. 그 상태를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고 표현했고, 그렇게 나타난 신앙의 교리를 ‘가인’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다와 가인이 나타내는 영적 의미가 같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유다의 속뜻을 가인의 속뜻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이름을 붙이는 방식’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레아에게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는 상태가 있었고, 그 상태를 담아 ‘유다’라고 한 것처럼, 태고교회 안에서도 신앙을 하나의 독립된 교리로 얻었다고 여기는 상태가 생겼고, 그것을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곧 ‘가인’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보면 AC.340에서 이스마엘, 르우벤, 시므온, 유다를 연이어 제시한 의도도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스마엘’에는 ‘여호와께서 들으셨다’는 것이, ‘르우벤’에는 ‘여호와께서 보셨다’는 것이, ‘시므온’에는 다시 ‘여호와께서 들으셨다’는 것이, ‘유다’에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는 것이 각각 이름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러 사례를 거듭 제시하면서, 말씀의 이름을 오늘날의 단순한 고유명사처럼 읽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특히 유다의 사례는 ‘가인’을 이해하는 데 한 가지를 더욱 선명하게 해 줍니다. 이름은 단순히 이미 존재하는 사람에게 나중에 의미를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태의 성질을 이름으로 표현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창4에서 ‘가인’이라는 이름을 만났을 때도 먼저 ‘가인이라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묻기보다 ‘왜 이것을 가인이라고 했는가?’, ‘이 이름에는 어떤 상태가 담겨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39에서 설명한 태고인들의 계보 작성 방식과도 이어집니다. 태고인들은 교회에 속한 것들에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으로 그것들의 성질을 나타냈습니다. 또한 하나가 다른 하나에게서 생겨나는 관계를 잉태와 출생과 자손과 계보의 형식으로 표현했습니다. 따라서 ‘하와가 가인을 낳았다’는 기록도 속뜻으로는 태고교회로부터 하나의 새로운 신앙의 교리가 생겨난 것을 나타내며, ‘가인’이라는 이름은 바로 그 교리의 성질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다의 사례를 가인과 나란히 놓으면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이 보입니다. 이름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다는 사실 자체는 그 이름이 나타내는 상태가 선한지 악한지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유다’에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는 상태가 담기고, ‘가인’에는 신앙을 사랑에서 구별하여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상태가 담깁니다. 이름을 붙이는 형식은 같지만, 그 이름으로 나타내는 내용은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고대의 명명법은 어떤 특정한 교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상태와 성질을 이름에 담아 나타내는 하나의 표현 방식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유다’라는 이름의 속뜻 자체로 너무 깊이 들어갈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후반에서 유다와 그의 이름이 나타내는 것을 훨씬 더 깊게 다루지만, AC.340에서는 그것이 논점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오직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는 말과 ‘유다’라는 이름이 직접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증거로 제시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야 독자가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는 말과 ‘가인’이라는 이름의 관계도 같은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창29:35 AC.340에서 인용한 이유를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레아가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는 자신의 상태를 표현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 아들의 이름을 ‘유다’라고 한 것처럼, 고대인들은 어떤 상태와 성질을 이름 안에 담아 나타냈습니다. 마찬가지로 ‘가인’이라는 이름에도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는 말로 표현된 태고교회의 어떤 상태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본래 사랑 안에서 퍼셉션으로 알고 있던 신앙에 속한 것들을 따로 구별하여 하나의 교리로 만들고, 그것을 마치 새롭게 얻은 독립된 무엇처럼 인식하고 인정하기 시작한 상태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유다의 이름까지 예로 든 목적은 ‘가인’이라는 이름을 읽는 법을 더욱 확실하게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유다’라는 이름 뒤에서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를 읽듯이, ‘가인’이라는 이름 뒤에서도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를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 뒤에서는 다시 태고교회 안에서 일어난 더 깊은 변화, 곧 마음에 새겨져 있던 신앙에 속한 것들이 사랑에서 구별되어 하나의 교리와 지식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변화를 읽어야 합니다. 이것이 창29:35 AC.340에서 하는 역할입니다.

 

 

 

AC.340, 심화 3, ‘창29:33’

AC.340.심화 3. ‘창29:33’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창29:33) AC.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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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9:33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29:33)

 

 

AC.340에서 스베덴보리가 창29:33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를 인용한 이유는, 앞의 이스마엘과 르우벤의 경우처럼 고대인들이 어떤 이름을 붙일 때, 그 이름 안에 당시의 사건이나 상태, 그리고 그 상태의 성질을 담았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관심은 시므온의 속뜻 자체를 해설하는 데 있지 않고, ‘시므온’이라는 이름과 여호와께서 들으셨다’라는 말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29:33에서 레아는 자신이 야곱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처지에 있음을 말하면서,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아들의 이름을 시므온’이라고 합니다. ‘시므온’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의 듣다’와 연결됩니다. 따라서 시므온’은 단순히 한 아이를 다른 아이와 구별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들으셨다’는 레아의 경험과 그때의 상태를 이름 안에 담아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 창29:32의 르우벤과 아주 비슷한 구조를 가집니다. 르우벤에서는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다’,  보셨다’는 것이 이름과 연결되고, 시므온에서는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다’는 것이 이름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는 이 사례들을 연이어 제시함으로써, 고대의 이름에는 그 이름으로 나타내고자 하는 어떤 성질이나 상태가 담겨 있었다는 사실을 점점 더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것이 AC.340에서 중요한 이유는 결국 가인’이라는 이름 때문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본래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을 사랑 안에서 퍼셉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퍼셉션으로 알고 있던 것들을 따로 구별하여 하나의 신앙의 교리’로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전에는 마음에 새겨져 있던 것을 이제는 지식으로 알게 되었고, 그것을 마치 새롭게 무엇인가를 얻은 것처럼 여겼습니다. 이 상태를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고 표현했고, 그렇게 나타난 신앙의 교리를 가인’이라고 한 것입니다.

 

따라서 시므온의 사례와 가인의 경우는 의미 자체가 같은 것이 아니라 이름을 붙이는 방식’이 같습니다. 시므온에게서는 여호와께서 들으셨다’는 상태가 먼저 있고, 그 상태를 시므온’이라는 이름에 담았습니다. 가인의 경우에는 신앙에 속한 것들을 따로 구별하여 하나의 독립된 교리로 얻었다고 여기는 상태가 먼저 있고, 그것을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는 말과 가인’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시므온은 무엇을 상징하는가?’라는 질문으로 곧바로 넘어가면 AC.340에서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한 직접적인 목적에서는 조금 벗어나게 됩니다. 물론 창세기 후반에서 스베덴보리는 시므온의 이름에 담긴 속뜻을 별도로 아주 깊이 해설합니다. 그러나 AC.340에서는 그 내용까지 다루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오직 이름에는 그 이름을 붙이게 된 상태와 의미가 담긴다’는 원리를 보여 주는 증거로 시므온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특히 스베덴보리가 이스마엘, 르우벤, 시므온을 차례로 인용하는 것을 보면 하나의 공통된 형식이 더욱 또렷하게 드러납니다. 이스마엘은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다’, 르우벤은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다’, 시므온은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다’라는 말과 각각 연결됩니다. 이름이 먼저 있고, 나중에 임의로 뜻을 붙인 것이 아니라, 어떤 사건과 상태가 있었고,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 그에 맞는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이것은 AC.339에서 설명한 태고인들의 이름과 계보를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인들이 교회에 속한 것들에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으로 그것들의 성질을 나타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창4에서 가인’, ‘에녹’, ‘이랏’, ‘므후야엘 같은 이름들이 이어질 때, 우리는 그것들을 단순한 개인들의 이름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으로 어떤 교리와 신앙의 모습을 나타내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AC.340의 여러 성경 인용은 바로 이러한 독법이 말씀의 이름 사용 방식과 동떨어진 것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또 한 가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듣다’라는 매우 일상적인 동사가 하나의 이름에 담긴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고대의 이름이 반드시 복잡한 신학적 개념을 직접 표현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어떤 사건 가운데 경험한 주님의 역사하심, 어떤 상태에서 느낀 것, 그때 일어난 중요한 일이 이름에 담길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들으셨다’는 경험이 시므온’이라는 이름이 되고, ‘여호와께서 보셨다’는 경험이 르우벤’이라는 이름과 연결됩니다.

 

이렇게 보면 하와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도 훨씬 자연스럽게 이해됩니다. 그 말은 단순히 가인을 낳고 한 감탄이 아니라, 속뜻으로는 태고교회 안에서 일어난 하나의 중요한 변화를 표현합니다. 이전에는 사랑 안에서 퍼셉션으로 알고 있던 신앙에 속한 것들을 따로 구별하여 교리로 만들고, 그것을 우리가 무엇인가를 얻었다’고 여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신앙의 교리를 가인’이라고 한 것입니다.

 

따라서 창29:33 AC.340에서 인용한 이유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시므온’이라는 이름에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다’는 상태와 의미를 담았듯이, ‘가인’이라는 이름에도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는 말로 표현된 태고교회의 어떤 상태가 담겨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는 시므온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이름을 이름으로만 읽지 말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왜 이 이름을 붙였는가?’, ‘이 이름에 어떤 상태가 담겨 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원리를 가지고 다시 창4로 돌아가면 가인’이라는 이름은 한 개인의 호칭이 아니라, 본래 사랑 안에서 살아 있던 신앙을 따로 구별하여 하나의 교리로 세우고, 그것을 독립된 무엇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태고교회의 중대한 변화를 담고 있는 이름으로 읽히게 됩니다.

 

 

 

AC.340, 심화 2, ‘창29:32’

AC.340.심화 2. ‘창29:32’ 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창29:32) AC.340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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