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3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빛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하니라(호6:2, 3)After two days will he vivify us;in the third day he will raise us up,and we shall live before him and we shall know,and shall follow on to know Jehovah:his going forth is prepared as the dawn,and he shall come unto us as the rain,as the late rain watering the earth(Hos. 6:2–3).
이 구절은Book of Hosea 6:2-3으로,AC.93의 맥락에서는‘거듭남의 완성과 안식에 이르는 과정’을 시간 개념이 아니라‘상태의 단계’로 매우 선명하게 보여주는 대표 본문입니다.
먼저‘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라는 표현을 보시면,여기서‘이틀’, ‘셋째 날’은 자연적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상태의 단계’를 의미합니다.스베덴보리의 흐름에서 보면, ‘둘’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곧 싸움과 준비의 상태를 의미하고, ‘셋’은 완성,충만,결합을 의미합니다.그래서‘셋째 날에 일으키신다’는 것은 단순히 시간이 지난 뒤가 아니라, ‘과정이 완성된 상태에서 새 생명으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이 점은 주님의‘사흘 만에 부활’과도 같은 구조입니다.
그다음‘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는 말씀은 단순히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임재 안에서 사는 상태’,곧 주님과 결합된 생명을 의미합니다.이것이 바로 앞에서 보신‘안식’의 상태입니다.싸움이 끝나고,분열이 정리되고,이제 주님 앞에서 사는 상태입니다.
이어지는‘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는 표현도 중요합니다.여기서‘알다’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경험과 삶을 통해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그래서 이 구절은‘거듭남은 단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점점 더 깊이 주님을 알아가는 과정’임을 보여줍니다.앞의‘셋째 날’이 어떤 완성이라면,여기서는 그 완성 이후에도 계속되는‘살아 있는 관계’가 강조됩니다.
그리고‘그의 나타나심은 새벽빛같이 어김없나니’라는 부분은,주님의 임재가 점점 밝아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새벽빛’은 어둠에서 빛으로 넘어가는 전환,곧 진리가 점점 분명해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이것은 거듭남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경험되는‘빛의 열림’입니다.
마지막으로‘비와 같이,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는 말씀이 나오는데,여기서‘비’는 앞에서도 보신 것처럼‘진리의 유입’,곧 주님의 진리가 인간 안으로 들어와 삶을 적시는 것을 의미합니다.특히‘늦은 비’는 완성에 가까운 상태에서 주어지는 더 깊고 풍성한 진리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즉,처음에는 기본적인 진리가 오고,이후에는 더 깊은 진리가 와서 삶을 완성해 갑니다.
이 전체를 한 흐름으로 묶으면 이렇게 됩니다. ‘사람은 과정을 거쳐 새 생명으로 일으켜지고,그 후에는 주님 안에서 살며 점점 더 주님을 알게 되고,그 과정에서 주님의 진리가 계속해서 그를 적시며 완성으로 이끈다.’이것이AC.93이 말하는‘안식 이후에도 계속되는 살아 있는 생명’입니다.
‘셋째 날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그날부터 우리는 주님 안에서 살며,계속해서 더 깊이 주님을 알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보시면,이 말씀은 단순한 회복 약속이 아니라, ‘거듭남의 완성과 그 이후의 삶’까지 함께 보여주는 매우 깊은 구조를 가진 말씀으로 열리게 됩니다.
25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맺고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리니 그들이 빈 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에서 잘지라26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고 내 산 사방에 복을 내리며 때를 따라 소낙비를 내리되 복된 소낙비를 내리리라27그리한즉 밭에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그 소산을 내리니 그들이 그 땅에서 평안할지라 내가 그들의 멍에의 나무를 꺾고 그들을 종으로 삼은 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낸 후에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겠고,31내 양 곧 내 초장의 양 너희는 사람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겔34:25-27, 31)I will make with them a covenant of peace,and will cause the evil wild beast to cease out of the land,and they shall dwell confidently in the wilderness,and sleep in the woods;and I will make them and the places round about my hill a blessing;and I will cause the rain to come down in his season;rains of blessing shall they be.And the tree of the field shall yield its fruit,and the earth shall yield its increase,and they shall be upon their ground in confidence,and shall know that I am Jehovah,when I have broken the reins of their yoke,and delivered them out of the hand of those that make them to serve them;and ye my flock,the flock of my pasture,ye are a man,and I am your God(Ezek. 34:25–27, 31).
이 구절은Book of Ezekiel 34장의 말씀으로,AC.93에서는 ‘천적 인간의 상태’, 곧 여섯 날의 싸움 이후에 들어가는 ‘안식의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매우 풍성하게 보여주는 대표 본문으로 사용됩니다. 문자로 보면 평화로운 목자의 약속처럼 보이지만, 속뜻으로는 ‘거듭남이 이루어진 사람 안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내적 변화와 질서’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먼저 ‘화평의 언약을 맺고 악한 짐승을 그치게 하리니’라는 부분을 보시면, 여기서 ‘화평’은 단순한 감정적 평온이 아니라, 선과 진리가 하나로 결합된 상태, 곧 더 이상 근본적인 내적 싸움이 필요하지 않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악한 짐승’은 외부의 동물이 아니라, 사람 안에 있는 거칠고 무질서한 욕망과 충동, 곧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본성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주님께서 그 사람 안의 악한 충동을 다스리시어 그 사람을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안식의 출발입니다.
이어 ‘빈 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에서 잘지라’는 표현은 겉으로 보면 위험해 보이는 환경에서도 두려움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영적으로는, 이전에는 불안과 유혹의 장소였던 상태들, 곧 ‘광야’와 같은 내적 상태에서도 이제는 평안히 거할 수 있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환경이 바뀌어서가 아니라 ‘내적 질서가 바뀌었기 때문에’ 평안이 유지되는 상태입니다.
그다음 ‘때를 따라 소낙비를 내리되 복된 소낙비를 내리리라’는 말씀에서 ‘비’는 스베덴보리의 용어로 ‘진리의 유입’, 곧 주님의 진리가 인간의 이해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때를 따라’라는 표현이 붙어 있습니다. 이것은 무질서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상태에 맞게 정확한 시기에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비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삶을 살리는 ‘복된 비’가 됩니다.
이어 ‘밭에 나무가 열매를 맺고 땅이 소산을 낸다’는 표현은 아주 전형적인 상응 구조입니다. ‘나무’는 사랑과 인식의 상태, ‘열매’는 그로부터 나오는 삶의 결과, 곧 선한 행위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땅’은 겉 사람, 삶의 실제 영역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나무,곧 내적 상태가 바로 서면,열매와 소산,곧 외적 삶도 자연스럽게 선을 맺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앞에서 말씀드린 ‘이성이 사랑의 봉사자가 되는 상태’와도 연결됩니다.
또 ‘멍에의 나무를 꺾고...종으로 삼은 자의 손에서 건져낸다’는 표현은, 이전에 인간을 지배하던 것, 곧 자기 사랑, 세상 사랑, 그리고 그것에 결합된 거짓의 힘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해방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겠고’라고 합니다. 즉, 주님을 참으로 아는 것은 지식으로가 아니라, 실제로 자유를 경험할 때 이루어집니다.
마지막으로 ‘내 양 곧 내 초장의 양 너희는 사람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는 선언은 이 모든 과정의 결론입니다. ‘양’은 선을 사랑하는 상태의 인간을 의미하고, ‘초장’은 그 선이 양육되는 진리의 환경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너희는 사람이요’라는 말은 단순한 생물학적 인간이 아니라, ‘참된 인간됨’, 곧 주님과 결합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전체를 한 흐름으로 묶으면 이렇게 정리됩니다. ‘주님이 인간 안의 악을 잠잠케 하시고,진리를 때에 맞게 공급하시며,그 결과 선한 삶이 자연스럽게 열매 맺게 하시고,마침내 그를 자유와 평안의 상태로 이끄신다.’ 이것이 바로AC.93이 말하는 ‘천적 인간의 상태’, 곧 안식의 실제 모습입니다.
‘안식은 아무 일도 없는 상태가 아니라,주님이 내 안의 질서를 바로 세우셔서 모든 것이 제자리에서 평안히 움직이는 상태입니다.’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창2:5, 6)
AC.93
평화의 평온함을 부여받고,비로 새로워지며,악과 거짓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된 천적 인간의 상태는 주님에 의해 에스겔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됩니다.The state of the celestial man, thus gifted with the tranquility of peace—refreshed by the rain—and delivered from the slavery of what is evil and false, is thus described by the Lord in Ezekiel:
25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맺고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리니 그들이 빈 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에서 잘지라26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고 내 산 사방에 복을 내리며 때를 따라 소낙비를 내리되 복된 소낙비를 내리리라27그리한즉 밭에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그 소산을 내리니 그들이 그 땅에서 평안할지라 내가 그들의 멍에의 나무를 꺾고 그들을 종으로 삼은 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낸 후에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겠고,31내 양 곧 내 초장의 양 너희는 사람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겔34:25-27, 31)I will make with them a covenant of peace,and will cause the evil wild beast to cease out of the land,and they shall dwell confidently in the wilderness,and sleep in the woods;and I will make them and the places round about my hill a blessing;and I will cause the rain to come down in his season;rains of blessing shall they be.And the tree of the field shall yield its fruit,and the earth shall yield its increase,and they shall be upon their ground in confidence,and shall know that I am Jehovah,when I have broken the reins of their yoke,and delivered them out of the hand of those that make them to serve them;and ye my flock,the flock of my pasture,ye are a man,and I am your God(Ezek. 34:25–27, 31).
또한 이것이‘셋째 날’(third day)에 이루어진다고 말하는데,말씀에서‘셋째 날’은‘일곱째 날’(seventh)과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이는 호세아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됩니다.And that this is effected on the “third day,” which in the Word signifies the same as the “seventh,” is thus declared in Hosea:
2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3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빛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하니라(호6:2, 3)After two days will he vivify us;in the third day he will raise us up,and we shall live before him and we shall know,and shall follow on to know Jehovah:his going forth is prepared as the dawn,and he shall come unto us as the rain,as the late rain watering the earth(Hos. 6:2–3).
또한 이 상태가‘밭의 성장’(growth of the field)에 비유된다는 것은,에스겔에서 태고교회를 말하면서 분명히 드러납니다.And that this state is compared to the “growth of the field” is declared by Ezekiel, when speaking of the ancient church:
내가 너를 들의 풀같이 많게 하였더니 네가 크게 자라고 심히 아름다우며(겔16:7)I have caused thee to multiply as the growth of the field,and thou hast increased and hast grown up,and hast come to excellent ornaments(Ezek. 16:7).
이 상태는 또한 비유되기를,And it is also compared to:
그들은 내가 심은 가지요 내가 손으로 만든 것으로서(사60:21)A shoot of the Lord’s planting,and a work of the hands of Jehovah God(Isa. 60:21).
해설
이 글은 지금까지 축적해 온 모든 설명을, ‘말씀 전체의 증언’ 속에 단단히 고정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더 이상 개념 설명에 머물지 않고, 에스겔, 호세아, 이사야를 연속적으로 인용하여, 천적 인간의 상태가 특정 저자의 사상이나 체험이 아니라, ‘말씀 전체에 일관되게 흐르는 주제’임을 보여 줍니다.
먼저 에스겔의 ‘화평의 언약’(covenant of peace)은, 천적 상태의 핵심을 가장 압축적으로 표현합니다. 언약은 단순한 약속이 아니라, ‘관계의 안정’을 뜻합니다. 평화의 언약이 세워졌다는 것은, 주님과 사람 사이 관계가 더 이상 깨질 위험 속에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악한 들짐승이 그친다는 표현은, 외적 위협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악과 거짓이 더 이상 내면을 점령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빈 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에서 잘지라’는 말은 역설적으로 들리지만, 영적 의미에서는 매우 정확합니다. 광야와 숲은 본래 위험과 불확실성의 장소입니다. 그곳에서 안심하고 잠든다는 것은, 환경이 안전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 안에 평화가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천적 평화는 조건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적 질서의 결과입니다.
이제 다시 ‘비’의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때를 따라 소낙비를 내리되 복된 소낙비를 내리리라’는 앞서AC.90–92에서 말한 안개 같은 평온함을, 보다 풍성한 생명의 공급으로 확장합니다. 이 비로 인해 밭의 나무는 열매를 맺고, 땅은 소산을 냅니다. 이는 천적 인간에게서 겉 사람의 행위와 삶의 결과가 ‘자연스럽고 풍성하게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더 이상 억지나 불안이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특히 ‘그들의 멍에의 나무를 꺾고’라는 표현은 결정적입니다. 이는 죄책감이나 규범의 억압에서 벗어났다는 뜻이 아니라, ‘악과 거짓의 강제적 지배에서 해방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겠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지식의 증가가 아니라, 관계의 확증입니다.
에스겔의 마지막 선언, ‘내 양 곧 내 초장의 양 너희는 사람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라는 말씀은, 태고교회가 단수로 ‘사람’이라 불렸던 이유를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천적 상태에서 인간은 흩어진 개인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하나의 사람’으로 서게 됩니다.
이어지는 호세아의 인용은 시간의 상징을 더합니다. ‘셋째 날’은 말씀에서 항상 완성을 뜻하며, 여기서는 ‘일곱째 날’과 같은 상태를 가리킵니다. 둘 다 ‘안식과 생명의 완성’을 뜻합니다. 이틀은 준비의 시간이고, 셋째 날은 생명이 일어나는 날입니다. 그래서 ‘살리심’과 ‘일으키심’을 함께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호세아에서 주님이 비와 같이, 늦은 비와 같이 오신다는 표현은, 천적 상태의 평화가 ‘갑작스러운 개입이 아니라,때가 찼을 때 자연스럽게 임하는 은혜’임을 보여 줍니다. 늦은 비는 성숙을 위한 비입니다. 씨 뿌릴 때 필요한 봄비가 아니라, 열매를 맺게 하는 비입니다.
마지막으로 에스겔과 이사야의 비유는 이 상태를 ‘성장’으로 묘사합니다. 천적 상태는 점프나 도약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성장’입니다. 밭에서 자라나는 식물처럼, 주님이 심으시고 주님의 손으로 이루신 일입니다. 그래서 이 상태는 ‘여호와의 심으심’이며, ‘여호와 하나님의 손의 일’이라 불립니다.
AC.93은 이렇게 모든 것을 하나로 묶습니다. 천적 평화는 싸움이 끝난 뒤에 오는 정지 상태가 아니라, 주님과의 언약 안에서 자라나는 ‘살아 있는 생명 상태’입니다. 비가 내리고, 열매가 맺히고, 사람은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주님의 양 떼이자 ‘사람’으로 서게 됩니다.
이 지점에 이르면, 안식은 더 이상 설명의 대상이 아니라, 말씀 전체가 한 목소리로 증언하는 ‘궁극의 목적’으로 드러납니다.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창2:5, 6)
AC.92
싸움이 그치거나,혹은 욕망과 거짓으로 인해 일어났던 불안이 사라질 때에,겉 사람이 누리는 평화의 평온함(the tranquility of peace)이 어떠한 것인지는,오직 평화의 상태를 알고 있는 사람들만이 알 수 있습니다.이 상태는 모든 기쁨에 대한 관념을 능가할 만큼 즐거운 것이어서,단지 싸움이 그친 상태일 뿐만 아니라,내적 평화로부터 나오는 생명이 겉 사람에게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미치는 상태입니다.이때 신앙의 진리들과 사랑의 선들이 태어나는데,그것들은 평화의 기쁨으로부터 생명을 받습니다.The nature of the tranquility of peace of the external man, on the cessation of combat, or of the unrest caused by cupidities and falsities, can be known only to those who are acquainted with a state of peace. This state is so delightful that it surpasses every idea of delight: it is not only a cessation of combat, but is life proceeding from interior peace, and affecting the external man in such a manner as cannot be described; the truths of faith, and the goods of love, which derive their life from the delight of peace, are then born.
해설
이 글은 지금까지 설명되어 온 ‘안식’과 ‘평온함’을, 가장 내밀한 체험의 언어로 풀어 주는 자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이 평온함이 무엇인지 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것은 정의하거나 전달할 수 있는 정보가 아니라, ‘오직‘알게 되는’상태’, 곧 직접 겪은 사람만이 아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그는 분명히 선을 긋습니다. 이 평온함은 단순히 싸움이 없어진 상태가 아닙니다. 싸움이 없다는 것은 소극적 설명일 뿐입니다. 이 상태의 본질은, ‘내적 평화로부터 나오는 생명’이라는 데 있습니다. 즉, 이것은 공백이나 정지의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생명이 가장 깊은 근원에서부터 자유롭게 흐르기 시작한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가 모든 기쁨의 관념을 능가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과장이나 수사가 아닙니다. 그가 말하는 기쁨은 감정적 흥분이나 만족이 아니라, ‘존재 전체가 제자리를 찾았을 때 오는’ 기쁨입니다. 욕망과 거짓으로 인한 불안이 사라졌다는 것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방어하거나 정당화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 결과로 오는 기쁨은, 무엇을 얻어서 생기는 기쁨이 아니라, ‘방해가 사라져서 드러나는’ 기쁨입니다.
이 평온함의 핵심은, 내적 평화가 겉 사람에게 ‘미친다’(affecting)라는 표현에 있습니다. 내적 평화는 속 사람 안에 머무는 추상적 상태가 아니라, 겉 사람의 사고, 감정, 행동 전반에 실제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그러나 그 방식은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섬세합니다. 강요나 명령, 규범의 형태로 나타나지 않고, ‘자연스러운 생명의 흐름’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이 상태에서는 겉 사람이 더 이상 긴장하거나 계산하지 않습니다. 그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지 않고, 무엇이 옳은지를 따로 증명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겉 사람은 속 사람의 평화를 그대로 받아, 그 안에서 움직입니다. 이 때문에 이 상태는 설명될 수 없고, 오직 체험될 수만 있습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결론에 도달합니다. 이 상태에서 ‘신앙의 진리들’과 ‘사랑의 선들’이 태어난다고 말합니다. 이는 앞서 영적 단계에서 다루어졌던 진리와 선과는 다른 차원입니다. 이전에는 진리와 선이 노력과 선택의 산물이었다면, 이제는 ‘평화의 기쁨에서 태어나는 생명’입니다.
여기서 ‘태어난다’(are born)라는 표현이 결정적입니다. 이는 진리와 선이 더 이상 외부에서 주입되거나 학습된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자연스럽게 생성된다는 뜻입니다. 그 생명의 근원은 신앙의 논리나 도덕적 결단이 아니라, ‘평화 자체의 기쁨’입니다. 평화가 생명을 낳고, 그 생명이 진리와 선의 형태로 드러납니다.
이 글은 결국 이렇게 말합니다. 천적 상태에서의 삶은, 더 잘 싸우는 삶이 아니라, ‘싸움이 끝난 뒤에 비로소 시작되는’ 삶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삶의 특징은 고요함이지만, 결코 무기력이 아닙니다. 그것은 가장 깊고 충만한 생명 활동입니다.
AC.92는 안식을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정의합니다. 안식은 멈춤이 아니라, 평화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이 겉 사람 전체를 적시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 속에서, 진리와 선은 더 이상 의무가 아니라, ‘기쁨에서 태어난 열매’가 됩니다.
위 해설 중,‘영적 단계에서는 이성과 지식이 진리를 분별하기 위한 도구였다면,천적 단계에서는 사랑을 섬기기 위한 도구가 됩니다.이성은 더 이상 판단의 주인이 아니라,사랑의 봉사자가 됩니다.’말인데요,여기‘사랑을 섬기기 위한 도구’,‘사랑의 봉사자’에 대한 구체적 사례가 필요합니다.그러니까 이성과 지식이 어떻게 사용되어야 저런‘도구와 봉사자’가 되는 건가요?
아주 중요한 지점을 짚으셨습니다. 이 문장이 실제 삶에서 어떻게 구현되는지 감이 와야AC.91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성이 사랑의 봉사자가 된다’는 것은 이성이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라, ‘무엇이 옳은가를 따지기 위해 쓰이던 이성이 이제는 사랑을 실현하기 위해 쓰이는 상태’로 바뀐다는 뜻입니다. 곧, ‘판단의 중심이‘나의 기준’에서‘선(사랑)’으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먼저 대비부터 분명히 보시면 이해가 쉽습니다. 영적 단계에서는 사람이 ‘이게 맞는가?’를 먼저 묻고, 그다음 ‘그러면 그렇게 해야겠다’고 움직입니다. 이때 이성은 판단의 주인입니다. 반면 천적 단계에서는 먼저 ‘이것이 선한가,사랑에 맞는가’가 중심이 되고, 이성은 ‘그 선을 어떻게 가장 잘 실현할 수 있을까’를 찾는 데 사용됩니다. 이때 이성은 주인이 아니라 ‘도구’가 됩니다.
이걸 구체적인 사례로 보겠습니다.
첫째, ‘용서’의 경우입니다. 영적 단계에서는 ‘저 사람이 잘못했으니 용서해야 하는가?어디까지가 정당한가?’를 따집니다. 이성은 옳고 그름을 계산합니다. 그런데 천적 단계에서는 이미 ‘용서하는 것이 선하다’는 중심이 서 있습니다. 그러면 이성은 이제 다른 일을 합니다. ‘어떻게 하면 상대를 살리면서도 진리를 지킬 수 있을까?’, ‘지금 바로 말하는 것이 좋은가,아니면 기다리는 것이 좋은가?’ 이런 식으로 ‘사랑을 실제로 구현하는 방법을 찾는 도구’가 됩니다.
둘째, ‘진리를 말하는 문제’입니다. 영적 단계에서는 ‘이 말이 맞는가 틀리는가’를 먼저 봅니다. 그래서 맞으면 말하고, 틀리면 반박합니다. 그런데 천적 단계에서는 ‘이 말이 상대에게 유익한가,지금 이 말이 사랑에 맞는가’를 먼저 봅니다. 그래서 같은 진리라도 어떤 때는 바로 말하고, 어떤 때는 침묵하고, 어떤 때는 완곡하게 표현합니다. 이성은 여기서 ‘논리적 정확성’을 주장하는 주인이 아니라, ‘사랑에 맞게 진리를 전달하는 방식’을 찾는 봉사자가 됩니다.
셋째, ‘선행(봉사)’의 경우입니다. 영적 단계에서는 ‘이 일이 옳은가,효과적인가,내가 손해를 보지는 않는가’를 따지며 움직입니다. 그런데 천적 단계에서는 이미 ‘이웃을 돕는 것이 선하다’는 중심이 있기 때문에, 이성은 ‘어떻게 하면 가장 실제적으로 도움이 될까’, ‘이 사람에게 지금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를 판단하는 데 사용됩니다. 즉, ‘사랑의 방향은 이미 정해져 있고,이성은 그 방향을 구체화하는 역할’을 합니다.
넷째, ‘신앙 이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 단계에서는 ‘이 교리가 맞나 틀리나’를 논증합니다. 그러나 천적 단계에서는 ‘이 진리가 나를 더 선하게 만드는가,더 사랑하게 만드는가’를 먼저 봅니다. 그래서 이성은 논쟁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삶을 더 선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진리를 정리하고 적용하는 도구’가 됩니다.
‘영적 단계에서는 이성이‘무엇이 옳은가’를 결정하고,천적 단계에서는 사랑이‘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하며,이성은 그것을 이루는 방법을 찾는다.’
그래서 ‘사랑의 봉사자’라는 표현은 감정적인 말이 아니라 매우 실제적인 구조를 말합니다. 중심(의지)이 먼저 방향을 정하고, 이성은 그 방향을 가장 질서 있게 실현하도록 돕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성이 주인일 때는 말은 옳게 하더라도 정작 사람 살리는 건 어려울 수 있지만,반대로 사랑이 주인일 때는 동일한 이성이 이번에는 사람 살리는 방법을 찾기 위해 애를 씁니다.’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창2:5, 6)
AC.91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무엇을 내포하는지는, 사람이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로 되어 가는 동안 그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알지 못하면, 결코 인식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매우 깊이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영적 상태에 있는 동안에는, 겉 사람이 아직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려 하지 않으므로 싸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천적 상태가 되면,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하므로 싸움이 그치고, 평온함이 따르게 됩니다. (AC.87) 이 평온함이 ‘비’(rain)와 ‘안개’(mist)로 의미됩니다. 이는 그것이 마치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이 물을 받아 적셔지는 수증기와 같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평온함, 곧 평화에서 태어난 이 상태에서, ‘들의 초목’(shrub of the field)과 ‘밭의 채소’(herb of the field)라 하는 것들이 나옵니다. 이것들은 구체적으로 말하면, 천적 영적 기원에서 나온 이성적인 것들과 기억 지식들입니다.But what these things involve cannot possibly be perceived unless it is known what man’s state is while from being spiritual he is becoming celestial, for they are deeply hidden. While he is spiritual, the external man is not yet willing to yield obedience to and serve the internal, and therefore there is a combat; but when he becomes celestial, then the external man begins to obey and serve the internal, and therefore the combat ceases, and tranquility ensues (see n. 87). This tranquility is signified by “rain” and “mist,” for it is like a vapor with which the external man is watered and bedewed from the internal; and it is this tranquility, the offspring of peace, which produces what are called the “shrub of the field,” and the “herb of the field,” which, specifically, are things of the rational mind and of the memory [rationalia et scientifica] from a celestial spiritual origin.
해설
이 단락은AC.90에서 언급된 ‘안개 같은 평온함’이 무엇인지를, 인간의 내면 상태의 변화라는 관점에서 한층 더 깊이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분명히 말합니다. 이 모든 설명은, 사람이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로 ‘옮겨 가는 중간 국면’을 알지 못하면 이해될 수 없다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 이것은 개념 설명이 아니라 ‘경험적 전이 상태’에 대한 설명입니다.
영적 상태에 있는 동안, 겉 사람과 속 사람 사이에는 여전히 긴장이 존재합니다. 겉 사람은 진리를 알고 인정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기쁘게 섬기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겉 사람은 여전히 자기 방식, 자기 판단, 자기 습관을 고집하려 하고, 속 사람의 질서에 완전히 자신을 맡기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싸움이 생깁니다. 이 싸움은 선과 악 사이의 추상적 대결이 아니라, ‘순종할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매우 실제적인 긴장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천적 상태로 들어서면, 이 관계가 바뀝니다. 겉 사람이 더 이상 억지로 굴복하는 위치에 있지 않고, 속 사람을 섬기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순종이 강요가 아니라 기쁨이 되는 순간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싸움은 끝납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맞서 싸울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겉 사람은 속 사람의 질서를 자기 생명의 질서로 인식하게 됩니다.
이렇게 싸움이 끝난 뒤에 오는 상태가 바로 ‘평온함’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평온함을 단순한 정서적 안정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관계가 바로잡힌 결과입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위계와 질서가 회복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따르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평온함은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질서의 결과’입니다.
이 평온함이 ‘비’와 ‘안개’로 표현됩니다. 여기서 비는 폭우나 강수량 많은 비가 아닙니다. 곧 ‘안개’라고 불릴 만큼 부드럽고 은은한 것입니다. 이는 겉 사람이 외적 교훈이나 명령에 의해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으로부터 조용히 흘러나오는 생명의 영향으로 적셔진다는 뜻입니다. 겉 사람은 이제 스스로를 방어하거나 긴장하지 않고, 이 영향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이 비유는 매우 섬세합니다. 안개는 소리를 내지 않고, 경계를 넘나들며, 모든 것을 고르게 적십니다. 천적 상태에서의 평온함도 이와 같습니다. 그것은 어떤 결단의 순간이나 극적 체험으로 드러나지 않고, 어느새 삶 전체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언제부터 싸움이 끝났는지를 정확히 말하기 어렵지만, 이미 평온 속에 머물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 평온함, 곧 평화에서 태어난 상태가 ‘들의 초목’과 ‘밭의 채소’를 산출합니다. 이는 겉 사람한테서 나오는 것이 더 이상 자기 의지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뜻합니다. 이제 겉 사람의 생각과 행위는, 속 사람에서 흘러나온 생명의 자연스러운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구체적으로 ‘이성적인 것들’과 ‘기억 지식들’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이성과 기억 지식이 ‘천적 영적 기원’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즉, 같은 이성, 같은 지식이라도, 그 근원이 다릅니다. 영적 단계에서는 이성과 지식이 진리를 분별하기 위한 도구였다면, 천적 단계에서는 사랑을 섬기기 위한 도구가 됩니다. 이성은 더 이상 판단의 주인이 아니라, 사랑의 봉사자가 됩니다.
그래서AC.91은 이렇게 말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 겉 사람은 더 이상 저항하거나 계산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미 평온 속에 있으며, 그 평온함이 이성과 기억 지식을 적셔 줍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모든 외적 산출물은, 억지로 만들어진 선이 아니라, ‘평화에서 태어난 열매’입니다.
이 글은 천적 상태의 깊이를 가장 조용한 언어로 보여 줍니다. 싸움이 끝난 뒤에 오는 것은 공백이 아니라, 평화의 자궁에서 태어나는 새로운 삶의 형태입니다. 그리고 그 삶은, 안개처럼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겉 사람 전체를 적셔 갑니다.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And there was no shrub of the field as yet in the earth, and there was no herb of the field as yet growing, because Jehovah God had not caused it to rain upon the earth. And there was no man to till the ground. And he made a mist to ascend from the earth, and watered all the faces of the ground.(창2:5, 6)
AC.90
‘들에는 초목’(shrub of the field)과‘밭에는 채소’(herb of the field)는 일반적으로 그의 겉 사람한테서 나오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겉 사람은 그가 영적 상태에 머물러 있을 때에는‘땅’(earth)이라 하지만,천적 상태가 되면‘들’(ground)이라 하고,또한‘밭’(field)이라 합니다.곧이어‘안개’(mist)라 하게 될‘비’(rain)는,싸움이 그친 뒤에 오는 평화의 평온함을 의미합니다.By the “shrub of the field” and the “herb of the field” are meant in general all that his external man produces. The external man is called “earth” while he remains spiritual, but “ground” and also “field” when he becomes celestial. “Rain,” which is soon after called “mist,” is the tranquility of peace when combat ceases.
해설
이 글은 창2:5-6에 나오는 자연적 이미지들을, 인간 내적 상태의 변화라는 관점에서 아주 간결하게 풀어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초목’(shrub)과 ‘채소’(herb)를 식물학적 대상으로 보지 않고, ‘겉 사람한테서 나오는 모든 것의 총칭’으로 읽습니다. 즉, 이는 행동, 말, 습관, 외적 사고, 삶의 열매 전반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이 ‘겉 사람’한테서 나온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겉 사람을 폄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겉 사람이 반드시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봅니다. 다만 그 열매의 성격은, 겉 사람이 어떤 상태에 있느냐에 따라 전혀 달라집니다. 그래서 같은 겉 사람이라도, 영적 상태일 때와 천적 상태일 때 부르는 이름이 달라집니다.
영적 상태에 있을 때, 겉 사람은 ‘땅’이라 합니다. 땅은 아직 경작의 방향이 외부 규범과 진리 중심으로 잡혀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때의 겉 사람은 아직도 싸움과 선택, 분별의 긴장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산출하는 것들, 곧 ‘초목’과 ‘채소’는 존재할 수는 있지만, 아직 풍성하거나 안정된 상태는 아닙니다.
그러나 겉 사람이 천적 상태로 들어가면, 더 이상 ‘땅’이라 하지 않습니다. 이제 그는 ‘들’(ground)혹은 ‘밭’(field)이라 합니다. 이는 단어 하나의 변화가 아니라, ‘겉 사람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바뀌었음을 뜻합니다’. 밭은 이미 목적과 질서가 정해진 땅입니다. 씨가 무엇인지 알고, 어디에 뿌려야 하는지가 분명한 상태입니다. 겉 사람은 이제 속 사람의 사랑과 퍼셉션을 그대로 받아, 자연스럽게 열매를 맺습니다.
이 차이는, 겉 사람한테서 나오는 모든 것이 더 이상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는 데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 겉 사람의 행위는 애써 만들어낸 선이 아니라, ‘속에서 흘러나온 선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들의 초목’과 ‘밭의 채소’는 억지로 키운 식물이 아니라, 제때에 자연스럽게 자라는 생명입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비’와 ‘안개’라는 이미지를 통해, 이 변화의 정서를 섬세하게 덧붙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비는, 영적 단계에서의 교훈이나 진리의 강한 주입이 아닙니다. 그것은 곧 ‘안개’라 불릴 만큼 부드러운 것입니다. 이 안개는 싸움이 그친 뒤에 찾아오는 ‘평화의 평온함’을 뜻합니다.
이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천적 상태에서 오는 평화는, 감정의 고조나 강렬한 체험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조용하고, 넓게 퍼지며, 모든 것을 적셔 주는 안개와 같습니다. 이는 더 이상 싸워서 이겨야 할 대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평화는 성취의 흥분이 아니라, ‘질서가 자리를 잡았을 때의 고요함’입니다.
그래서 이 안개는 겉 사람을 적십니다. 밭이 된 겉 사람은 이 평화의 평온함을 그대로 받아, 무리 없이 열매를 맺습니다. 더 이상 비가 내려야만 살 수 있는 메마른 땅이 아니라, 이미 수분을 머금은 밭이기 때문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외적 행위 하나하나가 긴장이나 계산에서 나오지 않고, 평온 속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옵니다.
AC.90은 이렇게 말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 겉 사람은 더 이상 문제의 영역이 아니라, ‘표현의 영역’이 된다고 말입니다. 싸움은 이미 끝났고, 평화는 안개처럼 조용히 내려와 모든 것을 감싸고 있습니다. 이 평온함 속에서, 겉 사람은 더 이상 저항하지 않고, 속 사람의 질서를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이 글은 짧지만, 천적 삶의 분위기를 가장 잘 전해 주는 대목 중 하나입니다. 천적 상태는 웅장하거나 극적인 상태가 아니라, 조용하고 안정된 생명의 흐름입니다. 그리고 그 흐름은, ‘온 지면을 적시는’ 안개처럼, 눈에 잘 띄지 않지만 모든 것을 살립니다.
위 설명 중,‘스베덴보리에게 이 여러 호칭은‘서로 다른 분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한 분 주님,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서로 다른 신적 측면,작용,나타나심,그리고 인간이 그분을 받아들이는 방식의 차이를 드러내는 이름들입니다’처럼,자주 이‘작용’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요,이 표현에 대한 설명이 좀 필요합니다.
이‘작용’이라는 말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말씀 전체가 추상적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결론부터 말씀드리면,여기서‘작용’이란‘주님이 실제로 무엇을 하시는가,그리고 그것이 인간 안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라는 뜻입니다.다시 말해‘존재’,즉,무엇이신가가 아니라‘활동’,그러니까 어떻게 역사하시는가 하는 측면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조금 더 풀어드리면,스베덴보리의 핵심 구조는 언제나 이 두 축입니다. ‘주님은 무엇이신가’,그러니까 사랑과 지혜,선과 진리이신 축과, ‘그 주님이 인간 안에서 어떻게 역사하시는가’하는 축 말입니다.여기서‘작용’은 바로 두 번째,곧 주님의 신적 속성이 실제로 인간 안에 흘러들어와 변화와 삶으로 나타나는 과정 전체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주님이‘사랑’이시라는 것은 존재에 관한 말입니다.그런데 그 사랑이 인간 안에 들어와‘용서하게 만들고’, ‘이웃을 생각하게 하고’, ‘자기를 내려놓게 하는’실제 변화로 나타날 때,이것이 바로 그 사랑의‘작용’입니다.마찬가지로 주님이‘진리’이시라는 것은 존재에 관한 말이고,그 진리가 인간 안에서‘깨닫게 하고’, ‘옳고 그름을 분별하게 하고’, ‘삶을 바로잡게 하는’것으로 나타날 때,그것이 진리의‘작용’입니다.
그래서 같은 주님이시지만,어떤 문맥에서는‘사랑으로 역사하시는 모습’이 강조되고,어떤 문맥에서는‘진리로 인도하시는 모습’이 강조되며,또 어떤 때는‘악과 싸우시는 모습’, ‘구원하시는 모습’, ‘위로하시는 모습’이 강조됩니다.이 각각이 바로‘작용의 차이’입니다.그래서 이름도 달라집니다. ‘구주’는 구원하시는 작용, ‘주’는 다스리시는 작용, ‘인자’는 진리로 나타나시는 작용, ‘성령’은 내적으로 역사하시는 작용을 강조하는 이름입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작용’은 주님 쪽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인간 쪽에서‘체험되는 방식’과도 연결됩니다.같은 주님의 작용이라도,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깨달음’으로 느껴지고,어떤 사람에게는‘책망’으로,어떤 사람에게는‘위로’로 느껴집니다.그래서‘작용’이라는 말에는‘주님의 활동’과‘그것이 인간 안에서 경험되는 양상’이 함께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걸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비유가‘태양’입니다.태양 자체는 하나입니다.그러나 그 태양은 빛으로도 작용하고,열로도 작용합니다.그리고 같은 태양 빛이라도 어떤 식물에는 생명을 주고,어떤 것에는 마르게 하는 작용을 합니다.태양이 여럿이어서가 아니라,하나의 태양이 다양한 방식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은 이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에서‘하나이면서도 다양한 작용으로 나타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처음에 드린 그 문장을 다시 풀어 쓰면 이렇게 됩니다. ‘주님은 한 분이시지만,그분이 인간을 사랑하시고,가르치시고,고치시고,이끄시고,싸우시고,구원하시는 여러 방식의 실제 역사하심이 있으며,성경의 여러 호칭은 바로 그 다양한 역사하심을 가리키는 이름들이다.’이것이‘작용’이라는 말의 실제 내용입니다.
주님의 호칭들,즉‘여호와 하나님’,‘예수 그리스도’,‘주’, ‘구주’, ‘성령’, ‘아버지’, ‘아들’, ‘하나님의 아들’, ‘인자’등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이 주제는 아주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다 보면, 같은 주님을 가리키는 듯한 여러 호칭이 계속 나오는데, 이것을 구별하지 못하면,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가’, ‘왜 어떤 때는 여호와라 하고,어떤 때는 주라 하며,어떤 때는 아들이라 하는가’라고 하면서 흐려지기 때문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에게 이 여러 호칭은 ‘서로 다른 분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한 분 주님,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서로 다른 신적 측면, 작용, 나타나심, 그리고 인간이 그분을 받아들이는 방식의 차이를 드러내는 이름들입니다. 다시 말해, 인격이 여럿이라서 이름이 여럿인 것이 아니라, 한 분 주님의 충만한 실재가 너무 깊고 넓기 때문에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것입니다.
먼저 가장 근본적인 이름은 ‘여호와’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여호와’는 본질적으로 ‘스스로 계시는 분’, ‘존재 자체이신 분’, 곧 신적 존재 그 자체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여호와’라는 이름은 단순한 신의 호칭이 아니라, 모든 생명과 사랑과 존재의 근원이신 분을 뜻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 순수한 신적 존재 자체를 직접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너무 무한하고 너무 순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여호와께서 인간에게 다가오실 때는, 인간이 받을 수 있는 방식으로 자신을 나타내셔야 했고, 그 완전한 나타나심이 바로 성육신,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는 여호와께서 인간의 형상으로 오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곧, 여호와와 예수는 둘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신성이 보이는 인성 안에 오신 한 분이십니다.
이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보면, 이것은 매우 자주 나오는데, 스베덴보리식으로 보면 대개 ‘신적 사랑과 신적 진리’, 또는 ‘신적 존재와 신적 나타나심’이 함께 작용하는 맥락을 드러냅니다. ‘여호와’가 보다 존재와 사랑의 측면을 강하게 띠고 있다면, ‘하나님’은 진리와 질서, 말씀과 판단의 측면을 더 강하게 띠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언제나 기계적으로 나눌 수는 없지만, 대체로 ‘여호와’는 사랑의 이름, ‘하나님’은 진리의 이름으로 더 자주 작용합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함께 부를 때는, 사랑과 진리, 선과 지혜, 존재와 질서가 하나로 결합된 주님의 충만한 작용을 암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창세기2장 이후에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두드러지는 것도, 단순 창조가 아니라 이제 인간과의 보다 인격적이고 질서 있는 관계, 곧 거듭남과 동행의 질서가 전개되기 시작하기 때문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주님의 ‘구원하시는 인성’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냅니다. 이름 자체가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특히 인간과 가까이 계시며, 인간의 상태 속으로 들어오셔서 실제로 구원하시는 주님을 생각하게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구원은 단순히 법적 선언이 아니라, 실제로 지옥의 세력을 이기시고, 인간의 본성을 영화롭게 하시며,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역사 속에 오셔서 싸우시고 이기시고 구원하신 주님의 이름입니다. 반면 ‘그리스도’는 ‘기름부음 받은 자’, 곧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의 충만한 뜻을 가진 호칭으로서, 특히 ‘신적 진리’, ‘말씀’, ‘기름부음 받은 진리의 통치’를 더 강하게 떠올리게 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라고 할 때는, 구원하시는 주님과 진리로 통치하시는 메시아가 하나라는 뜻이 함께 담깁니다.
‘주’라는 호칭은 신약과 스베덴보리 저작에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구약의 ‘여호와’가 신약에서는 ‘주’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고 보고, 실제로 ‘주’를 거의 ‘인간에게 가까이 계시며 다스리시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사용합니다. 그래서 ‘주’는 매우 친밀하면서도 권위 있는 이름입니다. ‘여호와’가 다소 장엄하고 근원적 이름이라면, ‘주’는 그 여호와께서 이제 구원과 거듭남의 실제 과정에서 인간을 인도하시고 다스리시는 이름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문장들, 특히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같은 표현에서는 ‘주’가 곧 우리와 관계하시는 하나님,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신학적으로도 실천적으로도 가장 살아 있는 호칭이 바로 ‘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주’는 말 그대로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다만 이 말도 단지 ‘벌에서 건져내는 자’ 정도로 생각하시면 너무 약해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구원이란 인간 안의 지옥적 질서가 깨지고, 주님의 질서가 그 안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주’란, 우리 대신 서류를 처리해 주시는 분이 아니라, 실제로 지옥과 싸워 이기시고, 인간 안에 새 하늘과 새 땅을 세우시며, 거듭남과 안식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구주’라는 호칭에는 주님의 전투, 승리, 해방, 회복, 새 창조의 의미가 다 들어 있습니다. ‘예수’가 구원의 이름이라면, ‘구주’는 그 이름의 기능과 사역을 더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호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아버지’와 ‘아들’은 가장 오해가 많은 부분입니다. 전통 교회에서는 흔히 이것을 서로 다른 두 인격처럼 받아들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한 분 주님 안의 ‘신성 자체’와 ‘신성이 입으신 인성’의 관계로 봅니다. 곧 ‘아버지’는 주님 안의 보이지 않는 신성, 근원적 신적 존재를 가리키고, ‘아들’은 그 신성이 세상에 나타난 신적 인간, 곧 성육신하신 주님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아들을 보내셨다’는 말은, 마치 하늘에 두 신적 인격이 따로 계셔서 한 분이 다른 분을 파송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신성이 보이는 인성으로 세상에 나타나셨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아버지’께 기도하신 것도, 단지 두 분이 대화하신 장면이라기보다, 아직 완전히 영화롭게 되기 전의 인성이 그 안의 신성과 연합되어 가는 실제 과정을 드러내는 것으로 읽습니다. 그래서 부활 이후에는 이 구별이 점점 ‘한 분 주님 안의 완전한 연합’으로 수렴됩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씀도 바로 이 방향에서 이해됩니다.
‘아들’ 가운데서도 특히 ‘하나님의 아들’과 ‘인자’를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용법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은 주님의 ‘신적 인성’, 또는 주님의 신성이 드러난 인성 자체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 ‘인자’는 주로 ‘신적 진리’, 곧 말씀으로 나타나시는 주님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진리의 거절, 말씀의 수난, 심판, 계시, 구름을 타고 오심 같은 말씀을 하실 때 ‘인자’라는 호칭이 자주 쓰입니다. ‘인자’는 단순히 ‘사람의 아들’이라는 인간적 겸손 표현이 아니라, 다니엘서의 배경까지 포함해 ‘말씀 가운데 나타나시는 주님’, ‘진리로 오시는 주님’, ‘심판하시는 진리이신 주님’을 가리키는 깊은 호칭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하실 때, 그것은 단지 ‘나도 권리가 있다’는 말이 아니라, ‘신적 진리이신 주님 자신이 안식의 본질이며 주관자이시다’는 선언으로 열립니다.
‘성령’도 별도의 세 번째 인격으로 이해하면 스베덴보리의 사상과 어긋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성령’은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적 진리의 발출’, ‘주님의 실제 작용’, ‘인간 안에서 역사하시는 거룩한 영향’입니다. 쉽게 말하면, ‘아버지’가 신성 자체이고, ‘아들’이 그 신성이 보이게 나타난 신적 인성이라면, ‘성령’은 그 한 분 주님에게서 흘러나와 천국과 교회와 인간 안에서 역사하시는 신적 영향력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또 다른 신적 인격’이 아니라, 한 분 주님의 살아 있는 숨결, 진리의 유출, 거룩한 활동이라고 이해됩니다. 주님께서 ‘보혜사를 보내겠다’고 하신 것도, 떠나시는 주님 대신 전혀 다른 누군가를 보내신다는 뜻이 아니라, 영화롭게 되신 후 더 내적으로, 더 보편적으로, 더 능력 있게 자신을 역사하시게 하신다는 뜻으로 읽습니다.
이제 이 여러 호칭을 한데 묶으면, 대체로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는 존재 자체이신 주님의 가장 근원적 이름이고, ‘하나님’은 진리와 질서의 측면에서 보이는 이름이며, ‘여호와 하나님’은 사랑과 진리가 하나 된 충만한 이름입니다. ‘예수’는 구원하시는 인성의 이름이고, ‘그리스도’는 진리로 기름부음 받은 메시아의 이름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과 진리의 통치가 하나이신 주님입니다. ‘주’는 인간에게 가까이 계셔서 실제로 다스리시고 인도하시는 이름이고, ‘구주’는 지옥과 악에서 건져내시는 사역적 이름입니다. ‘아버지’는 그 안의 신성 자체, ‘아들’은 나타난 신적 인성, ‘인자’는 말씀과 신적 진리로 나타나시는 주님, ‘성령’은 그 한 분 주님에게서 발출되어 역사하시는 거룩한 영향입니다.
‘성경과 스베덴보리가 사용하는,주님에 관한 여러 호칭은 서로 다른 신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한 분 주님이 누구이시며,어떻게 우리에게 오시고,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시는지를 여러 각도에서 보여 주는 이름들입니다.’
이 한 문장을 붙들고 읽으시면, 호칭이 바뀔 때마다 ‘주님 안의 어떤 측면이 지금 강조되는가’를 보는 눈이 열립니다. 그리고AC.89의 문맥에서는 특별히 이 점이 중요합니다. 창조, 거듭남, 안식, 구원, 말씀, 진리, 자비, 심판, 위로, 인도, 이 모든 것이 결국 한 분 주님 안에서 하나라는 사실이, 바로 이 다양한 호칭들을 통해 펼쳐지고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