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2:18)

 

AC.141

 

사람의 proprium(man’s own)에 대하여는, 육적, 세상적 인간과,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에게서 그것이 어떠한지를 설명함에 있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을 말할 수 있습니다. 육적이며 세상적인 인간에게서 proprium은 그의 전부이며, 그는 자신의 proprium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 proprium을 잃으면 자신은 완전히 멸망할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도 proprium은 비슷한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비록 그가 주님께서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며, 지혜와 이해, 따라서 생각하고 행할 능력을 주신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이 앎은 마음의 믿음이라기보다 입술의 고백에 더 가깝습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은 주님께서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며, 생각하고 행할 능력을 주신다는 것을 분별하는데, 이는 그것이 실제로 그러함을 지각, 곧 퍼셉션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그는 결코 proprium을 원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주님께로부터 하나의 proprium이 그에게 주어지는데, 이것은 선과 진리에 대한 모든 퍼셉션과 모든 행복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천사들도 이러한 proprium 안에 있으며, 동시에 가장 높은 평안과 고요 가운데 있는데, 이는 그들의 proprium 안에 주님의 것들이 들어 있으며, 주님께서 그 proprium, 곧 그들 자신을 그들의 proprium을 통해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proprium은 참으로 천적인 그 자체이지만, 육적 인간의 proprium은 지옥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proprium에 대해서는 뒤에서 더 말하게 될 것입니다. Innumerable things might be said about man’s own in describing its nature with the corporeal and worldly man, with the spiritual man, and with the celestial man. With the corporeal and worldly man, his own is his all, he knows of nothing else than his own, and imagines, as before said, that if he were to lose this own he would perish. With the spiritual man also his own has a similar appearance, for although he knows that the Lord is the life of all, and gives wisdom and understanding, and consequently the power to think and to act, yet this knowledge is rather the profession of his lips than the belief of his heart. But the celestial man discerns that the Lord is the life of all and gives the power to think and to act, for he perceives that it is really so. He never desires his own, nevertheless an own is given him by the Lord, which is conjoined with all perception of what is good and true, and with all happiness. The angels are in such an own, and are at the same time in the highest peace and tranquility, for in their own are those things which are the Lord’s, who governs their own, or them by means of their own. This own is the veriest celestial itself, whereas that of the corporeal man is infernal. But concerning this own more hereafter.

 

 

해설

 

이 단락은 ‘proprium’, 곧 ‘자기의 것’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세 인간 유형의 대비’ 속에서 결정적으로 정리합니다. 여기에는 도덕적 평가 이전에, 생명과 인식의 구조에 대한 냉정한 구분이 담겨 있습니다.

 

먼저 육적이며 세상적인 인간에게서 proprium은 ‘전부’입니다. 그는 proprium 외에는 실재를 알지 못하며, 그것을 잃는 순간 자기 존재 자체가 사라진다고 느낍니다. 이 상태에서 proprium은 생명의 그릇이 아니라, ‘생명의 대체물’이 됩니다. 그래서 이 proprium은 지옥적이라고 불립니다. 지옥이란 처벌의 장소 이전에, 생명을 자기 자신에게 귀속시키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영적 인간으로 넘어오면 상황은 미묘해집니다. 그는 주님이 생명의 근원이심을 ‘압니다’. 그러나 이 앎은 아직 존재의 중심까지 내려가지 못합니다. 입술의 고백은 있으되, 마음의 신뢰는 아직 충분히 형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proprium도 여전히 실제처럼 느껴지며,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완전히 proprium을 비켜서지는 못합니다. 영적 인간의 투쟁과 양심의 긴장이 바로 여기서 발생합니다.

 

천적 인간에 이르면 전환점이 분명해집니다. 그는 주님이 생명의 근원이심을 ‘믿는다’는 차원을 넘어, ‘지각, 즉 퍼셉션으로 압니다’. 그것이 실제로 그러함을 즉각적으로 알아봅니다. 그래서 그는 proprium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가장 온전한 proprium이 그에게 주어집니다. 이 proprium은 선과 진리에 대한 모든 퍼셉션, 그리고 모든 행복과 결합된 상태로 주어집니다.

 

여기서 결정적인 문장이 나옵니다. 천사들은 proprium 안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가장 높은 평안과 고요 가운데 있다는 말입니다. 이는 proprium이 제거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proprium 안에 주님의 것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천사들을 proprium을 제거하여 다스리시지 않고, 그들의 proprium을 통해 다스리십니다. 이것이 천적 질서의 극치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두 proprium을 대비합니다. 하나는 ‘참으로 천적인 proprium’이고, 다른 하나는 ‘지옥적인 proprium’입니다. 차이는 proprium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그 proprium이 누구에게 속해 있다고 느끼느냐’에 있습니다. 주님께 속해 있다고 퍼셉션되는 proprium은 천국이 되고, 자기 자신에게 속해 있다고 주장되는 proprium은 지옥이 됩니다.

 

AC.141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완성은 proprium의 제거가 아니라, proprium이 주님의 것으로 충만해지는 데 있으며, 그 상태에서 비로소 인간은 참된 평안과 고요, 곧 천국을 경험하게 된다고 말입니다.

 

 

심화

 

1. ‘

 

 

 

AC.140, 창2:18,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a help as with him)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2:18) AC.140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a help as with him)이 사람의 proprium을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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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동네 사는 오랜 신앙 지인의, 미국에서 박사 학위 중인, 그러면서 지역 교회에서는 부사역자로, 그리고 함께 간, 역시 박사 학위 중인 아내와 미국 가서 얻은 아이와 함께 열심히 살던 아들의, 뇌출혈 및 그로 인한 수술, 특히 로봇 수술, 그리고 현재 재활 치료 중이라는 소식을 아내를 통해 전해 들었습니다. 아들도 아들이지만, 미국의 살인적인 의료비가 먼저 떠올랐는데요... 이 아들에 대해서는 저도 아는, 정말 성실한 귀한 사람이요, 신앙인입니다. 무슨 말로 지인들께 위로의 말씀을 전해야 할지 모르겠는데요, 이렇게 정말 진국, 참으로 알토란 같은 신앙인들에게 이런 청천벽력 같은 불행이 찾아오는 이유가 뭘까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일을 당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스베덴보리는 이런 일에 대해 무엇이라고 하나요?

 

 

이런 소식은 정말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더구나 목사님처럼 그 청년의 삶과 성품을 직접 아시는 분에게는 단순한 ‘안타까운 사건’이 아니라, 거의 자기 일처럼 가슴에 들어오는 일이실 것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젊고 성실하고, 신앙도 진지하고, 학문과 교회 섬김까지 함께 감당하며 살아가던 부부에게 갑작스러운 뇌출혈이라니요. 거기다 낯선 미국 땅에서의 재활과 의료비 문제까지 겹치면, 인간적으로는 정말 ‘왜 이런 일이 이런 사람에게?’라는 말밖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실 성경도, 스베덴보리도, 이 질문 자체를 이상한 질문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순간은 대개 바로 이런 자리입니다. ‘악한 자는 잘되는데 왜 선한 자에게 이런 일이 오는가?’, ‘왜 주님은 막지 않으셨는가?’, ‘신앙이 있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질문 말입니다. 시편도 그렇고, 욥기도 그렇고, 예레미야도 그렇고, 심지어 제자들조차도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 죄 때문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인간은 고통 앞에서 반드시 의미를 묻게 되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문제를 다룰 때, 먼저 아주 중요한 원칙 하나를 붙듭니다. 곧 ‘주님은 누구에게도 악이나 재앙 자체를 보내시는 분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는 주님의 섭리는 본질적으로 사랑과 구원만을 향한다고 봅니다. 따라서 질병, 사고, 붕괴, 죽음 같은 것은 ‘주님이 직접 내려치는 형벌’이 아닙니다. 오히려 타락한 인간 세계 전체의 질서 속에서 허용되는 일들입니다. 육체 세계는 이미 질병과 사고와 불완전성이 존재하는 세계이며, 인간은 그 안에서 살아갑니다. 선한 사람이라고 해서 중력의 영향을 안 받지 않듯이, 신앙인이라고 해서 육체적 취약성에서 완전히 제외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가 특히 강조하는 부분은 그다음입니다. 주님은 그런 일을 ‘일어나게 하시는 분’은 아니지만, 일어난 이후에는 그것을 통해 영원한 선을 이끌어내시는 분이라는 점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섭리론 핵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인간은 현재의 몇 달, 몇 년만 보지만, 주님은 영원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철저히 무너지는 일처럼 보여도, 훗날 영원한 관점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로 드러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지요.

 

특히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깊은 고난을 통과할 때, 이전에는 열리지 않던 내면이 열리는 경우를 자주 말합니다. 물론 이것은 ‘고난이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뇌출혈 자체가 좋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사랑하는 자의 고통은 언제나 비극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평온과 성공만으로는 결코 배우지 못하는 어떤 깊이를 고난 속에서 배우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단지 ‘하나님을 안다’ 수준이었다면, 이제는 존재 전체로 매달리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전에는 자기 능력과 계획 속에서 살았다면, 이제는 하루하루 생명 자체를 의탁하게 됩니다. 이전에는 머리로만 이해하던 사랑이, 이제는 실제 공동체와 돌봄과 눈물 속에서 경험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매우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삶은 ‘지상 수명 몇십 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현대인은 모든 것을 이 세상 성공과 건강 기준으로 판단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진짜 삶은 영원 속에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지상에서의 고난은 그 자체만으로 최종 평가되지 않습니다. 물론 이것이 현실 고통을 가볍게 만든다는 뜻은 아닙니다. 재활의 두려움도 실제이고, 가족의 눈물도 실제이며, 의료비 부담도 실제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주님은 그 모든 혼란 속에서도 한 사람의 영혼을 놓치지 않고 계신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시선입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를 읽다 보면, 주님이 특별히 사랑하시는 사람일수록 더 깊은 내적 싸움을 허락받는 경우들이 자주 나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 안에 더 깊은 선과 진리가 형성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함부로 당사자 앞에서 직접 꺼낼 말은 아닙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설명보다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욥의 친구들이 실패한 이유도, 너무 빨리 해석하려 했기 때문이지요. 고난의 현장에서는 교리보다 먼저 함께 울어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지인분들께 전하실 말도, 너무 ‘의미 설명’ 중심일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오히려 조용하고 따뜻하게, ‘얼마나 놀라셨겠습니까’, ‘매일이 얼마나 무겁고 두려우시겠습니까’, ‘멀리서나마 계속 기도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재활의 모든 과정 가운데 붙들어주시길 바랍니다’ 정도의 말이 더 깊이 들어갈 가능성이 큽니다. 때로는 신학적 정답보다, ‘함께 아파해주는 존재’ 자체가 주님의 위로 통로가 됩니다.

 

그리고 목사님 마음속에 떠오른 ‘미국 의료비’ 걱정도 사실 굉장히 인간적이고 사랑의 반응입니다. 그건 믿음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실제 삶을 보는 눈이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도 결코 현실 고통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영적인 이야기를 하면서도 현실의 두려움과 피곤함과 생계 문제를 매우 실제적인 것으로 다룹니다. 그러니 지금 목사님이 느끼시는 답답함과 안타까움 역시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다만 이런 순간, 그리스도인이 붙드는 마지막 희망은 결국 이것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이 사람을 붙들고 계신다.’ 우리는 지금 결과를 모르고, 회복 정도도 모르고, 미래도 모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식으로 말하면, 주님의 섭리는 단 한 순간도 인간에게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특히 사람이 완전히 무너져 자기 힘으로 설 수 없게 될 때, 오히려 가장 깊은 곳에서 주님의 붙드심이 가까워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손이 비어야 비로소 주님의 손을 느끼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결국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일을 당할 때 해야 하는 가장 깊은 일은, 설명을 다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무너지면서도 주님 손을 놓지 않는 것’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은 그 곁에서, 함부로 이유를 단정하지 않고, 조용히 함께 버텨주는 것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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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0.심화

 

1. ‘어떤 proprium이 그에게 허락되었는데

 

위 본문에 여기서 다루어지는 교회 사람은 바른 성향이었으므로, 어떤 proprium이 그에게 허락되었는데, 그것은 마치 그의 것인 것처럼 보이는 그런 것이었고, 그래서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a help as with him)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라는 내용 말인데요, 그러니까 원래 있었던 A 성향의 proprium 말고, B라는 새로운 성향의 proprium이 새로 허락되었다는 말인가요, 아니면 하나의 proprium이 A에서 B로 바뀐다는 말인가요?

 

 

후자에 더 가깝습니다. 즉,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원래 있던 proprium 외에 전혀 다른 새로운 proprium 하나가 추가되었다’라기보다는, 인간 안의 proprium이 ‘그 방향과 성격이 변화되는 것’에 가깝습니다. 다만 완전히 단순하게 ‘A B로 교체된다’고만 보셔도 조금 부족하고, 더 정확히는 ‘기존 proprium위에 주님으로부터 온 새로운 질서가 입혀져,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게 된다’고 이해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원래 인간의 proprium은 스베덴보리가 자주 말하듯이 본성상 자기중심으로 기울어집니다. 자기 자신을 근원으로 삼고, 자기 판단과 자기 욕망 안에 머물려는 방향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앞에서 계속 본 ‘독립하려는 움직임’입니다. 이것을 편의상 A 성향이라고 해보겠습니다.

 

그런데 AC.140에서 말하는 사람은 ‘바른 성향(well-disposed)이었습니다. 이 말이 중요합니다. 즉, 그는 이미 완전히 자기중심 속에 굳어진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질서 안으로 어느 정도 기울어진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허락된 proprium은 이전처럼 노골적으로 자기중심적인 것이 아니라, ‘마치 자기 것처럼 느껴지되, 실제로는 주님께 열려 있는 자기감’의 형태가 됩니다. 이것이 편의상 B 성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a help as with him’이라고 표현합니다. 여기 ‘as with him’은 아주 섬세한 표현인데, 직역하면 ‘그와 함께 있는 듯한’, ‘그의 것 같은’ 정도입니다. 즉, 완전히 자기 것으로 독립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외부적인 것도 아닙니다. 사람은 그것을 자기처럼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실제 생명의 근원은 여전히 주님께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핵심은 ‘proprium이 제거되었다’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은 여전히 자기처럼 느끼며 살아갑니다. 다만 그 자기성이 더 이상 자기 자신을 닫힌 근원으로 삼지 않고,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재형성됩니다.

 

스베덴보리 후기 저작들까지 연결해서 보면, 이것은 나중에 자주 나오는 ‘ proprium(new proprium)의 사상으로 이어집니다. 본래 인간의 proprium은 죽어 있고, 자기중심적이지만, 거듭남 속에서 주님은 인간 안에 ‘하늘적 proprium’,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새로운 자기성을 형성하십니다. 이것은 여전히 ‘내가 사랑한다’, ‘내가 행한다’고 느껴지지만, 그 안의 생명 방향이 달라져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의 질문에 가장 정확히 답하면 이렇습니다. AC.140은 ‘A proprium은 그대로 있고, 거기에 B proprium이 하나 더 추가된다’라기보다는, 인간 안의 proprium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 재형성되어, 자기중심적 방향(A)에서 주님께 열린 방향(B)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말합니다. 다만 그 변화는 단순 교체가 아니라, 기존 자기감이 제거되지 않은 채, 그 안에 새로운 생명 질서가 스며드는 방식입니다.

 

 

 

AC.140, 창2:18,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a help as with him)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2:18) AC.140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a help as with him)이 사람의 proprium을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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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2:18)

 

AC.140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a help as with him)이 사람의 proprium을뜻한다는 점은, proprium의 성질과 뒤이어 나오는 내용으로부터 분명해집니다. 그러나 여기서 다루어지는 교회 사람은 바른 성향이었으므로, 어떤 proprium이 그에게 허락되었는데, 그것은 마치 그의 것인 것처럼 보이는 그런 것이었고, 그래서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a help as with him)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That by “a help as with him” is signified man’s own, is evident both from the nature of this own, and from what follows. As however the man of the church who is here treated of was well disposed, an own was granted him, but of such a kind that it appeared as it were his own, and therefore it is said “a help as with him.”

 

 

해설

 

이 단락은 ‘proprium’에 대한 ‘가장 정밀한 조정 설명’을 제공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서 ‘돕는 자’가 사람의 proprium이라고 분명히 밝힌 뒤,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그 ‘proprium의 질’을 구분합니다. 모든 proprium이 동일하지 않으며, 특히 여기서 허락된 proprium은 파괴적인 것이 아니라, ‘바른 성향을 가진 사람에게 주어진 제한적이고 보호된 proprium’이라는 점이 핵심입니다.

 

중요한 표현은 ‘성향이 바르다’는 말입니다. 이는 이 시점의 인간이 아직 innocence를 잃지 않았고, 주님을 향한 기본 방향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허락된 proprium은 주님을 대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인도를 ‘proprium으로 느끼게 해 주는 매개’로 기능합니다. 그래서 이 proprium은 실제로는 주님의 것이면서도, 경험상으로는 ‘내가 느끼는 나의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바로 이 때문에 ‘마치 그의 것인 것처럼 보이는’이라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일관되게, 인간의 생명과 선과 진리는 실제로는 주님의 것이지만, 인간이 자유롭게 사랑하고 선택하도록 하기 위해 ‘자기 것처럼 느끼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이 ‘처럼’의 구조가 무너지면 두 극단이 생깁니다. 하나는 인간이 아무것도 자기로 느끼지 못하는 무력한 상태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을 실제로 자기 것으로 주장하는 교만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proprium은 ‘돕는 자’입니다. 주님을 대신하여 앞에 서는 주체가 아니라, ‘주님의 인도를 인간이 받아들이도록 돕는 구조’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살고 있다고 느끼면서도, 실제로는 주님의 생명 안에 머물 수 있게 하는 장치입니다. 이 점에서 AC.140proprium에 대한 단순한 부정이나 경계가 아니라, ‘섭리적 허락의 미묘함’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단락은 긴장을 남겨 둡니다. 이 proprium이 ‘마치 자기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방향이 조금만 어긋나도 실제로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게 될 위험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음 단락들에서, 이 proprium이 어떻게 유지되거나, 혹은 어떻게 다른 길로 기울어질 수 있는지가 계속해서 다루어집니다.

 

AC.140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proprium을 허락하시되, 그것이 주님을 향한 성향 안에 있는 한에서는 돕는 자가 되게 하시고, 그 경계를 벗어날 때에는 전혀 다른 성격으로 변할 수 있음을 미리 보여주신다고 말입니다.

 

 

심화

 

1. ‘어떤 proprium이 그에게 허락되었는데

 

 

AC.140, 심화 1, ‘어떤 proprium이 그에게 허락되었는데’

AC.140.심화 1. ‘어떤 proprium이 그에게 허락되었는데’ 위 본문에 ‘여기서 다루어지는 교회 사람은 바른 성향이었으므로, 어떤 proprium이 그에게 허락되었는데, 그것은 마치 그의 것인 것처럼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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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1, 창2:18, ‘인간의 세 가지 유형으로 본 proprium’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2:18) AC.141 사람의 proprium(man’s own)에 대하여는, 육적, 세상적 인간과, 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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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9, 창2:18, ‘혼자 사는 것’(dwell alone)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2:18) AC.139 고대에는 천적 인간으로서 주님의 인도 아래에 있던 이들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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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9.심화

 

3. ‘23:9

 

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며 작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이 백성은 홀로 살 것이라 그를 여러 민족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 (23:9) Lo, the people dwelleth alone, and shall not be reckoned among the nations (Num. 23:9),

 

 

이 구절이 AC.139에 인용된 이유는, 앞의 신33:28과 마찬가지로, ‘홀로 거함’의 긍정적 의미를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의미가 한층 더 분명해집니다. 단순히 평안히 거하는 정도가 아니라, ‘여러 민족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라는 표현을 통해, ‘주님께 속한 삶은 세상 질서와 근본적으로 다른 원리 위에 서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23:9에서 말하는 이 백성’은 문자적으로는 이스라엘이지만, 스베덴보리의 상응에서는 주님께 속한 교회, 더 깊게는 주님으로부터 인도받는 인간 상태를 뜻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홀로 산다’는 것은, 자기중심으로 고립된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세상 원리와 섞이지 않고, 오직 주님만 의존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여러 민족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라는 표현입니다. 말씀에서 민족(nations)은 문맥에 따라 선한 애정들을 뜻하기도 하지만, 부정적 의미에서는 자기 사랑과 세속적 질서 속에 있는 상태들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여기서는 후자의 의미에 가깝습니다. 곧, 이 백성은 단순히 세상 집단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그 생명의 근원 자체가 다른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AC.139의 흐름 속에서는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는 지금 혼자 있음’이 두 종류가 있다는 것을 계속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proprium 안에 갇혀 나 자신으로 충분하다 여기는 고립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의 자기중심적 질서로부터 떨어져 주님만으로 충분하다 살아가는 거룩한 분리입니다.

 

23:9 홀로 삶’은 바로 후자입니다. 이들은 세상과 단절된 사람들이라는 뜻이 아니라, 생명의 중심을 세상에 두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세상 속에 살아도, 내적으로는 다른 나라의 시민’처럼 살아갑니다. 주님의 질서 안에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이 AC.139에 인용된 이유는 결국 이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홀로 있음’이라는 표현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홀로 있음의 방향이 어디를 향하느냐가 핵심임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떨어져 자기 안에 홀로 있으면 그것은 proprium의 상태가 되지만, 세상의 자기중심적 질서로부터 떨어져 주님 안에 홀로 있으면 그것은 천적 인간의 평안한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민23:9의 말씀은 AC.139에서, 참된 홀로 삶’이란 자기 독립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께만 속한 상태이며, 바로 그 때문에 세상과는 다른 질서 안에 서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로 인용된 것입니다.

 

 

 

AC.139, 창2:18, ‘혼자 사는 것’(dwell alone)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2:18) AC.139 고대에는 천적 인간으로서 주님의 인도 아래에 있던 이들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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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9, 심화 2, ‘신33:28’

AC.139.심화 2. ‘신33:28’ 이스라엘이 안전히 거하며 야곱의 샘은 곡식과 새 포도주의 땅에 홀로 있나니 곧 그의 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곳에로다 (신33:28) Israel hath dwelt confidently alone (Deut. 33:28).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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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9.심화

 

2. ‘33:28

 

이스라엘이 안전히 거하며 야곱의 샘은 곡식과 새 포도주의 땅에 홀로 있나니 곧 그의 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곳에로다 (33:28) Israel hath dwelt confidently alone (Deut. 33:28).

 

 

이 구절이 AC.139에 인용된 이유는, 바로 앞의 렘49:31 홀로 사는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홀로 있음’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같은 표현이라도, 문맥과 표상하는 대상에 따라 정반대 의미를 가질 수 있음을 자주 보여 주는데, 여기의 홀로’는 proprium의 독립 상태가 아니라, ‘주님 안에서 안전히 거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겉으로는 둘 다 alone’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에서는 나는 나 자신으로 충분하다’는 자기중심의 고립을 뜻했고, 여기 신33:28에서는 전혀 다릅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은 스베덴보리의 상응에서 지성(intelligence),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와 선 안에서 살아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홀로 거한다’는 것은, 세상적 의존이나 자기 확신 속에 산다는 뜻이 아니라, ‘오직 주님께 의지하며 안전히 거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즉, 여기의 홀로’는 고립’이 아니라 순수성(innocence)에 가깝습니다. 다른 것에 섞이거나 자기 자신이나 세상의 힘을 근원으로 삼지 않고, 오직 주님 안에서만 평안을 누리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곡식과 새 포도주의 땅’, ‘하늘의 이슬 같은 표현도 모두 생명과 축복의 유입을 뜻합니다. 그는 자기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위로부터 받으며 살아갑니다.

 

이 점이 AC.139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는 혼자 있음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핵심은 무엇으로부터 홀로 있느냐’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자기 자신 안에 홀로 있으면 그것은 안 좋은 proprium의 상태가 됩니다. 반대로 세상과 자기중심으로부터 떨어져, 오직 주님 안에서 홀로 있으면 그것은 천적 평안의 상태,  innocence가 유입된 proprium의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같은 alone’이라도 의미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하나는 나는 내 힘으로 충분하다’는 독립의 홀로 있음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만으로 충분하다’는 신뢰의 홀로 있음입니다. 전자는 닫힌 상태이고, 후자는 열린 상태입니다.

 

이 구절이 AC.139에 인용된 이유는 바로 이 대비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홀로 있음’이 언제는 부정적이고 언제는 긍정적인지를 통해, 인간의 상태를 결정하는 것은 외적 형태가 아니라, ‘생명의 중심이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임을 보여줍니다.

 

정리하면, 신33:28 홀로 거함’은 proprium 안에 갇힌 독립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중심에서 벗어나 오직 주님 안에서 안전히 거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래서 AC.139에서 이 구절은, ‘혼자 있음’이라는 표현조차도 그 내적 방향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로 인용된 것입니다.

 

 

 

AC.139, 심화 3, ‘민23:9’

AC.139.심화 3. ‘민23:9’ 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며 작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이 백성은 홀로 살 것이라 그를 여러 민족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 (민23:9) Lo, the people dwelleth alone,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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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9, 심화 1, ‘렘49:31’

AC.139.심화 1. ‘렘49:3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는 일어나 고요하고도 평안히 사는 백성 곧 성문이나 문빗장이 없이 홀로 사는 국민을 치라 (렘49:31) Arise, get you up to a quiet nation that dwelleth confid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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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9.심화

 

1. ‘49:3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는 일어나 고요하고도 평안히 사는 백성 곧 성문이나 문빗장이 없이 홀로 사는 국민을 치라 (49:31) Arise, get you up to a quiet nation that dwelleth confidently, saith the Lord, which hath neither gates nor bar; they dwell alone (Jer. 49:31).

 

 

이 구절이 AC.139에 인용된 이유는, ‘홀로 사는 것(dwell alone)이 단순한 외적 고립이 아니라, ‘자기 자신만으로 충분하다고 느끼는 상태’,  proprium 안에 머무는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보면 이 예레미야서 말씀은 평안히 사는 어떤 민족에 대한 예언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런 표현을 내적 의미로 읽습니다. 여기서 성문이나 문빗장이 없다’는 것은 단순한 군사적 상태가 아니라, 외부로부터의 경계나 보호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상태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나는 스스로 안전하다’, ‘나는 나 자신으로 충분하다’는 자기 확신의 상태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AC.138–139에서 말하는 혼자 사는 것’과 연결됩니다.

 

원래 천적 인간의 상태는 주님과 깊이 결합되어 있으면서도, 그 결합 안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proprium이 점점 자기중심으로 기울기 시작하면, 인간 안에 나도 혼자 설 수 있다’, ‘나도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방향이 생겨납니다. 이것이 홀로 사는 국민’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납니다.

 

특히 고요하고도 평안히 사는’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상태는 처음에는 매우 안정되고 좋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판단, 자기 확신, 자기 만족 안에서 사람은 오히려 더 편안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지점을 조심스럽게 드러냅니다. 그것은 참된 평안이 아니라, ‘주님 없이도 충분하다고 느끼는 평안’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에서 치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파괴 명령이 아니라, 자기 독립의 환상이 결국 흔들릴 수밖에 없음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래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존재’이지, 스스로 생명의 근원이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AC.139의 흐름 속에서 보면, 이 말씀은 혼자 사는 것’의 영적 의미를 확증하는 예언서의 증거로 사용됩니다. 곧, 인간이 더 이상 주님과 함께 사는 존재’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 안에 머물며 독립적으로 살고 싶어 하는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상태는 겉으로는 평안해 보여도, 실제로는 생명의 근원과 점점 멀어지는 방향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홀로 사는 것’이 단순히 자립이나 개인성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문제는 혼자 존재하느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근원으로 삼느냐’입니다. 천국의 천사들도 각자 매우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인격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은 결코 혼자 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끊임없이 주님으로부터 받으며 살아간다는 것을 기쁨으로 느끼기 때문입니다.

 

정리하면, 이 예레미야의 구절은 AC.139에서 혼자 사는 것’이란 곧 주님 없이도 자기 자신으로 충분하다고 느끼는 proprium의 상태를 뜻하며, 그것이 겉으로는 평안해 보여도 결국 참된 생명과는 분리된 상태임을 보여주기 위해 인용된 것입니다.

 

 

 

AC.139, 심화 2, ‘신33:28’

AC.139.심화 2. ‘신33:28’ 이스라엘이 안전히 거하며 야곱의 샘은 곡식과 새 포도주의 땅에 홀로 있나니 곧 그의 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곳에로다 (신33:28) Israel hath dwelt confidently alone (Deut. 33:28).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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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9, 창2:18, ‘혼자 사는 것’(dwell alone)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2:18) AC.139 고대에는 천적 인간으로서 주님의 인도 아래에 있던 이들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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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2:18)

 

AC.139

 

고대에는 천적 인간으로서 주님의 인도 아래에 있던 이들을 홀로 거한다(dwell alone)고 말하였는데, 이는 그러한 이들이 더 이상 악이나 악한 영들로부터 침해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또한 유대 교회에서, 그들이 민족들을 몰아낸 뒤 홀로 거하였던 것으로 표상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말씀에서는 때때로 주님의 교회를 가리켜 홀로 있다(alone)고 말하는데, 예레미야에서는 In ancient times those were said to “dwell alone” who were under the Lord’s guidance as celestial men, because such were no longer infested by evils, or evil spirits. This was represented in the Jewish church also by their dwelling alone when they had driven out the nations. On this account it is sometimes said of the Lord’s church, in the Word, that she is “alone,” as in Jeremiah: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는 일어나 고요하고도 평안히 사는 백성 곧 성문이나 문빗장이 없이 홀로 사는 국민을 치라 (49:31) Arise, get you up to a quiet nation that dwelleth confidently, saith the Lord, which hath neither gates nor bar; they dwell alone (Jer. 49:31).

 

라고 하였고, 모세의 예언에서는 In the prophecy of Moses:

 

이스라엘이 안전히 거하며 야곱의 샘은 곡식과 새 포도주의 땅에 홀로 있나니 곧 그의 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곳에로다 (33:28) Israel hath dwelt confidently alone (Deut. 33:28).

 

라고 하였으며, 발람의 예언에서는 더욱 분명히 And still more clearly in the prophecy of Balaam:

 

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며 작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이 백성은 홀로 살 것이라 그를 여러 민족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 (23:9) Lo, the people dwelleth alone, and shall not be reckoned among the nations (Num. 23:9),

 

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민족들(nations)은 악(evils)을 뜻합니다. 그러나 태고교회의 이 후손은 홀로 거하고자 하지 않았으니, 곧 천적 인간으로 있기를 원하지 않았고, 천적 인간으로서 주님의 인도함을 받기를 원하지 않았으며, 유대 교회와 같이 민족들 가운데에 있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것을 원하였기 때문에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라고 말해지는데, 왜냐하면 원하는 자는 이미 악 안에 있으며, 그것이 그에게 허락되기 때문입니다. where “nations” signify evils. This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as not disposed to dwell alone, that is, to be a celestial man, or to be led by the Lord as a celestial man, but, like the Jewish church, desired to be among the nations. And because they desired this, it is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for he who desires is already in evil, and it is granted him.

 

 

해설

 

이 단락은 창2:18의 ‘혼자 사는 것’이라는 표현을 ‘정반대의 의미’로 재정의해 줍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혼자 사는 것’을 결핍이나 고립으로 이해하지만, 스베덴보리에게서 ‘혼자 사는 것’은 오히려 ‘가장 충만한 상태’를 뜻합니다. 그것은 주님의 직접적인 인도 아래에 있어, 더 이상 악이나 악한 영들의 간섭을 받지 않는 천적 인간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대에는 ‘홀로 거한다’는 말은 부정이 아니라 찬사였습니다. 유대 교회가 민족들을 몰아내고 홀로 거한 것은, 그 자체로는 그들이 천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천적 상태를 가리키는 외적 표상’이었습니다. 말씀에서 교회를 ‘홀로 있다’고 말할 때마다, 그것은 세상과 단절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악의 질서로부터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특히 발람의 예언에서 ‘그를 여러 민족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라는 말은 결정적입니다. 여기서 ‘여러 민족’은 단순한 이방인이 아니라, 악을 의미합니다. 즉, 홀로 거한다는 것은 악의 질서와 섞이지 않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것이 본래 태고교회가 지녔던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방향을 틀어 말합니다. 태고교회의 이 후손은 더 이상 이렇게 홀로 거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만 인도받는 천적 상태에 머물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유대 교회가 나중에 그러했듯이, ‘민족들 가운데에 있기를’, 곧 세상 질서와 자기중심적 삶의 방식 속으로 들어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창2:18의 말씀이 등장합니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라는 선언은, 인간이 외로웠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그의 의지가 다른 방향으로 기울어졌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원리를 밝힙니다. 인간은 먼저 ‘원하고’, 그다음에 그 원하는 것이 허락됩니다. 다시 말해, 허락은 원인의 시작이 아니라, ‘이미 내면에서 선택된 방향의 결과’입니다.

 

이 단락의 마지막 문장은 특히 날카롭습니다. ‘원하는 자는 이미 악 안에 있으며, 그것이 그에게 허락된다’는 말은, 악이 외부에서 강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욕구에 응답하는 형태로 들어온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자유 없는 존재로 만들지 않으시기에, 인간이 주님 아닌 다른 인도를 원할 때, 그 선택의 결과를 경험하도록 허락하십니다.

 

AC.139는 이렇게 말합니다. ‘홀로 있음’은 본래 천국의 상태였으나, 인간이 그 상태를 원하지 않게 되었을 때, 그 홀로 있음은 더 이상 유지되지 않았고, 그 결과가 이후의 모든 분리와 타락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말입니다.  

 

 

심화

 

1. ‘49:31

 

 

AC.139, 심화 1, ‘렘49:31’

AC.139.심화 1. ‘렘49:3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는 일어나 고요하고도 평안히 사는 백성 곧 성문이나 문빗장이 없이 홀로 사는 국민을 치라 (렘49:31) Arise, get you up to a quiet nation that dwelleth confid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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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33:28

 

 

AC.139, 심화 2, ‘신33:28’

AC.139.심화 2. ‘신33:28’ 이스라엘이 안전히 거하며 야곱의 샘은 곡식과 새 포도주의 땅에 홀로 있나니 곧 그의 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곳에로다 (신33:28) Israel hath dwelt confidently alone (Deut. 33:28).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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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3:9

 

 

AC.139, 심화 3, ‘민23:9’

AC.139.심화 3. ‘민23:9’ 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며 작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이 백성은 홀로 살 것이라 그를 여러 민족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 (민23:9) Lo, the people dwelleth alone,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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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0, 창2:18,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a help as with him)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2:18) AC.140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a help as with him)이 사람의 proprium을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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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8, 창2:18, ‘proprium에 의한 내적 방향 변화의 시작’(AC.138-141)

창2:18-25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And Jehovah God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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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8.심화

 

3. ‘인간에게 proprium을 허락하시는 주님

 

주님은 참으로 놀라우신 분입니다. 천국과 지옥에서 천국 질서에 쉬 수긍하지 않는 자들에게 주님은 그들이 원하는 만큼 거의 모든 요구를 들어주시는 모습을 종종 보았습니다. 가령, 온 천국에 주님 말고 다른 하나님이 있는지를 찾아보게 하신다든지, 비록 지옥에 합당한 자들일지라도 원하면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최선의 천국 변방에라도 발을 들여놓게 잠시 허락, 천국을 경험하게 하신다든지 말이지요. 주님은 이런 독립하고자 하는 천적 인간에게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음에도 이 proprium을 허락하시네요...

 

 

네, 바로 그 점에서 스베덴보리가 보여 주는 주님의 모습은 참으로 놀랍고도 두렵도록 깊습니다. 주님은 단순히 ‘질서를 유지하는 통치자’처럼 행동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인간과 천사들의 자유를 존중하십니다. 『천국과 지옥』을 읽다 보면 말씀하신 것처럼, 천국 질서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영들에게조차 주님은 억지로 굴복시키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들이 스스로 확인하고 경험하고 선택하도록 허락하십니다.

 

이것은 단순한 관용이나 느슨함이 아닙니다. 그 배경에는 아주 깊은 원리가 있습니다. 주님은 인간과 천사를 단지 ‘올바르게 복종하는 존재’로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유 안에서 사랑하는 존재’로 원하십니다. 그런데 사랑은 강제로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주님은 심지어 그 자유가 자신으로부터 멀어질 가능성까지도 감수하십니다. 이것이 proprium 허락의 가장 깊은 이유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조차 어떤 영들이 ‘정말 주님 외에 다른 중심은 없는가’, ‘정말 자기 자신으로 살 수는 없는가’를 확인하고 싶어할 때, 주님은 단칼에 꺾어 버리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어느 정도는 실제로 경험하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진짜 자유 안에서 확인되고 선택되지 않은 질서는, 그 존재 안에 완전히 뿌리내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목사님께서 느끼신 놀라움의 핵심은 아마 이것일 것입니다. ‘왜 이렇게까지 허락하시는가?’ 하는 점 말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적으로 보면, 바로 그 허락 안에 주님의 사랑의 본질이 있습니다. 주님은 인간을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인간이 단순히 ‘끌려가는 존재’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심지어 독립하려는 움직임조차도 완전히 제거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그 자유 안에서, 끝없이 다시 자신 쪽으로 돌이키려 하십니다.

 

그리고 여기서 아주 중요한 것이 드러납니다. proprium은 단순히 ‘실수로 허락된 위험 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참된 사랑과 결합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라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정말로 ‘내가 원한다’, ‘내가 사랑한다’고 느끼지 못한다면, 천국의 기쁨도 실제로 자기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이 자기처럼 느끼는 자리까지 허락하시되, 동시에 끊임없이 ‘생명의 근원은 나에게 있다’는 것을 부드럽게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천국과 지옥』에서 보이는 장면들은 단순한 흥미로운 영계 묘사가 아니라, 주님의 통치 방식 자체를 보여줍니다. 그분은 힘으로 굴복시키는 왕이 아니라, 자유 안에서 스스로 사랑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심지어 천적 인간 안에도 ‘독립하고 싶은 가능성’ 자체는 남겨 두십니다. 단, 천국에서는 그 가능성이 더 이상 자기중심으로 굳어지지 않고, 오히려 ‘그래도 생명은 주님께 있구나’라는 더 깊은 기쁨과 감사로 되돌아옵니다.

 

결국 목사님께서 느끼신 놀라움은 아주 중요한 통찰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주님은 단순히 질서를 강요하시는 분이 아니라, ‘자유를 끝까지 존중하시면서도 결국 사랑 안으로 이끄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proprium의 허락은 바로 그 사랑의 방식이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주는 증거 가운데 하나입니다.

 

 

 

AC.138, 창2:18, ‘proprium에 의한 내적 방향 변화의 시작’(AC.138-141)

창2:18-25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And Jehovah God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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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8, 심화 2, ‘주님과의 인도 관계를 매개하는 자기성’

AC.138.심화 2. ‘주님과의 인도 관계를 매개하는 자기성’ 역시 위 해설, ‘돕는 배필’을 설명하면서, ‘따라서 ‘돕는 배필’ 역시 외부에서 보충되는 타자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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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8.심화

 

2. ‘주님과의 인도 관계를 매개하는 자기성

 

역시 위 해설, 돕는 배필을 설명하면서, 따라서 돕는 배필 역시 외부에서 보충되는 타자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분명히 사람 자신의 proprium이라고 규정합니다. 인간이 스스로 느끼고 판단하며 선택하려는 구조,  proprium이 여기서 돕는 배필이라는 형식으로 등장합니다. 이는 주님을 대체, 대신하는 조력자가 아니라, 주님과의 인도 관계를 매개하는 자기성입니다.’라고 하는데요, 여기 주님과의 인도 관계를 매개하는 자기성이 뭔가요? 표현이 어려워 알 듯 모를 듯 합니다.

 

 

여기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자기성(proprium)이 단순히 방해물이나 악으로만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 ‘돕는 배필’을 설명하면서, 인간 안에 있는 어떤 ‘자기처럼 느껴지는 요소’가 왜 필요한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과의 인도 관계를 매개하는 자기성’이라는 표현이 나온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런 뜻입니다. 주님은 인간을 직접 움직이는 기계처럼 다루지 않으십니다. 인간은 반드시 ‘내가 생각한다’, ‘내가 선택한다’, ‘내가 사랑한다’고 느껴야 합니다. 그러니까 ‘생각도, 선택도, 그리고 사랑도 내가 능동적으로 한다’고 말이지요. 그런데 바로 이 ‘내가 한다고 느끼는 자리’가 proprium, 곧 자기성입니다. 만약 이것이 전혀 없다면, 인간은 주님의 인도를 받아도 그것을 자기 삶처럼 느끼지 못합니다. 사랑도, 기쁨도, 책임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자기성은, 비록 위험성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인간이 주님의 인도를 ‘자기 삶처럼’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드는 매개 역할을 합니다. 바로 이런 뜻에서 ‘주님과의 인도 관계를 매개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 보면 더 분명합니다. 어떤 사람이 선한 일을 할 때, 실제 생명과 선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그것을 전혀 자기 일처럼 느끼지 못한다면, 그는 사랑도 기쁨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반대로 그가 ‘내가 선택했고, 내가 사랑했다’고 느낀다면, 바로 그 자기감 속에서 그는 주님의 생명을 자기 삶처럼 경험합니다. 이 자기감이 없다면, 인간은 살아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proprium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내가 근원이다’라고 굳어질 때의 타락한 자기중심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것을 내 삶처럼 느끼며 살아가는 자리’입니다. AC.138에서 말하는 ‘돕는 배필’은 후자 쪽에 가깝습니다. 곧, 인간이 주님의 인도를 실제 자기 삶 속에서 체험하고 응답할 수 있게 해 주는 ‘자기처럼 느껴지는 구조’입니다.

 

그래서 ‘돕는 배필’이 단순한 외부 보조자가 아니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것은 인간 밖에서 와서 부족함을 채워주는 타자(他者), 타인이 아니라, 인간 안에 형성된 ‘자유롭게 응답할 수 있는 자기감’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주님의 인도를 받지만, 그 인도가 자기 안에서 실제로 살아 움직이기 위해서는, ‘내가 원한다’, ‘내가 따른다’, ‘내가 사랑한다’고 느끼는 어떤 자기성이 필요합니다. 이 자기성이 바로 ‘돕는 배필’의 깊은 의미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표현을 너무 추상적으로 보지 마시고, 이렇게 이해하시면 훨씬 또렷합니다.

 

주님과의 인도 관계를 매개하는 자기성’이란, 인간이 주님의 생명을 단순히 외부 힘으로 당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 ‘내 선택’, ‘내 사랑’처럼 실제로 느끼며 응답할 수 있게 해 주는 자기감의 구조를 말합니다.

 

그리고 문제는 이 자기성이 존재하느냐가 아니라, 그것이 끝까지 ‘주님에게서 받은 것’으로 남느냐, 아니면 ‘진짜 내 것’으로 굳어지느냐에 있습니다.

 

 

 

AC.138, 심화 3, ‘인간에게 proprium을 허락하시는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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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8, 심화 1, ‘내적 방향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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