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15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15:14, 15)Ye are my friends if ye do whatsoever I command you(John 15:14–15).
이 구절은AC.51의 문맥에서 ‘사람이 진리를 단순히 아는 상태에서,그것을 행함으로써 주님과 결합되는 상태로 나아가는 과정’을 설명하는 핵심 말씀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요15:14-15의‘너희는 나의 친구라’는 것은 단순한 관계의 변화가 아니라,진리를 행함으로써 더 이상 외적으로 복종하는 상태(종)가 아니라,내적으로 이해하고 함께하는 상태(친구)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먼저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행하면’입니다.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따르는 것’이 기준입니다.AC의 흐름에서 보면, 이것은 ‘이해에 있는 진리가 의지와 삶으로 내려오는 순간’을 말합니다. 사람이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행하지 않으면, 그 진리는 아직 자기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행하기 시작할 때, 그 진리는 사람 안에서 살아 있는 것이 됩니다.
그다음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입니다. ‘종’은 단순히 신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상태’를 의미합니다. 종은 주인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채’ 따릅니다. 즉, 두려움이나 의무 때문에 복종하는 상태입니다. 이것은 거듭남의 초기 상태와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이때 사람은 진리를 ‘옳기 때문에’, 혹은 ‘그래야 하니까’ 따릅니다. 아직 그것을 사랑하거나 기뻐하는 상태는 아닙니다.
반면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에서 ‘친구’는 ‘내적인 결합 상태’를 의미합니다. 친구는 단순히 명령을 따르는 존재가 아니라, ‘뜻을 함께 아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이어서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알게 하였다’는 것은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라, ‘이해하게 하였다’, ‘내적 의미를 공유하게 하였다’는 뜻입니다. 즉, 더 이상 바깥에서 명령을 받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부터 같은 뜻으로 움직이는 상태입니다.
이제AC.51과 연결하면 더 또렷해집니다. 앞에서 ‘빛을 믿으라’, ‘빛의 아들이 되라’는 말씀이 나왔는데, 여기서는 그다음 단계가 설명됩니다.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에서 더 나아가, 그것을 실제로 행함으로써, 그 진리가 사람 안에서 ‘자기 것이 되는 상태’, 곧 주님과 내적으로 연결되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때 비로소 사람은 ‘종’이 아니라 ‘친구’가 됩니다.
이건 그러니까 이런 뜻입니다. 처음에는 어떤 말씀을 들으면 ‘그래야지’ 하고 억지로라도 따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말씀이 점점 이해되고, 결국에는 ‘아,이게 참 좋다’는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행하게 됩니다. 그때는 더 이상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됩니다. 바로 그 변화가 ‘종에서 친구로’의 전환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단순히 관계의 친밀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외적 순종에서 내적 일치로’, ‘의무에서 사랑으로’, ‘명령에서 이해로’ 넘어가는 거듭남의 중요한 전환점을 설명합니다.
‘요15:14-15의‘너희는 나의 친구라’라는 것은 진리를 행함으로써 외적 복종의 상태를 넘어,주님의 뜻을 이해하고 함께하는 내적 결합의 상태에 들어감을 의미합니다.’
35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36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시니라(요12:35, 36)He that walketh in the darkness knoweth not whither he goeth.While ye have the light,believe in the light,that ye may be sons of light(John 12:35–36).
이 구절은AC.51의 문맥에서 ‘사람이 진리를 통해 어떻게 인도받고,또 그것을 거부할 때 어떤 상태에 놓이게 되는가’를 설명하는 핵심 말씀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요12:35-36의‘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는 것은 단순한 권면이 아니라,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가 아직 의식 속에 주어져 있을 때,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곧 어둠(거짓과 무지)에 사로잡혀 더 이상 길을 분별할 수 없게 된다는 영적 상태의 법칙을 말합니다.’
먼저 ‘빛이 너희 중에 있다’입니다. 여기서 ‘빛’은 자연적인 빛이 아니라 ‘진리’,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해의 빛을 의미합니다. 이 빛은 항상 있는 것이 아니라, ‘잠시 동안’이라고 표현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사람에게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상태를 허락하시는 시간이 제한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언제나 진리를 똑같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때는 더 밝게 보이고, 어떤 때는 거의 보이지 않는 상태가 됩니다.
그다음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입니다. ‘다닌다’는 것은 단순히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살아간다’, ‘선택하고 행한다’는 뜻입니다. 즉, 진리를 알게 되었을 때, 그것을 실제 삶 속에서 따르지 않으면, 곧바로 ‘어둠’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여기서 ‘붙잡힌다’는 표현이 중요한데, 이것은 단순히 모르는 상태가 아니라 ‘빠져나오기 어려운 상태’, 곧 거짓이 굳어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어지는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한다’는 말씀은,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방향 상실’을 말합니다. 진리를 잃은 상태에서는 사람이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지, 그것이 선인지 악인지조차 분별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AC에서 말하는 ‘이해가 어두워진 상태’, 곧 영적 눈이 감긴 상태입니다.
이제 핵심입니다.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여기서 ‘믿는다’는 것은 단순한 지적 동의가 아니라, ‘받아들이고 따르는 것’, 곧 신앙과 삶의 결합을 의미합니다. 진리는 단지 아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것을 실제로 따를 때, 비로소 사람 안에 자리 잡습니다. 그래서 ‘믿는다’는 것은 ‘그 진리에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빛의 아들이 된다’입니다. ‘아들’은 성경에서 ‘어떤 것에서 나온 것’, ‘그것을 닮은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빛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진리로부터 태어난 사람’, 곧 이해와 삶이 진리에 의해 형성된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지식을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진리가 그 사람의 삶의 원리가 된 상태입니다.
이제AC.51과 연결하면, 의미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주님은 사람에게 진리를 주시고, 그 진리를 통해 사람을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 진리를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자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받아들이면, 그 진리는 점점 사람 안에서 빛이 되어 길을 밝히고, 결국 그 사람을 ‘빛의 아들’, 곧 진리 안에 사는 상태로 이끕니다. 그러나 거부하면, 그 자리는 곧 어둠이 차지하게 되고, 사람은 점점 방향을 잃게 됩니다.
이건 그러니까 이런 말입니다. 어떤 순간에 ‘이게 옳다’는 깨달음이 옵니다. 그런데 그것을 따르지 않고 미루거나 무시하면, 그 깨달음은 점점 흐려지고, 나중에는 아예 느껴지지 않게 됩니다. 반대로 그것을 따라 행동하면, 다음에는 더 분명한 빛이 주어집니다. 이 반복 속에서 사람은 점점 ‘빛 가운데 사는 사람’이 되거나, 반대로 ‘어둠 속에서 길을 잃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단순한 도덕적 권면이 아니라, 영적 삶의 아주 실제적인 법칙을 말합니다. ‘빛은 주어질 때 붙잡아야 하며,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사라지고,그 자리를 어둠이 대신한다’는 것입니다.
‘요12:35-36의‘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는 것은 주어진 진리를 실제 삶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곧 어둠에 사로잡혀 방향을 잃게 된다는 영적 법칙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1:26)
AC.51
‘형상’(image)에 대해 말하자면, 형상은 닮음(likeness) 그 자체가 아니라 닮음에 따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라고 말합니다. 영적 인간은 ‘형상’(image)이고, 천적 인간은 ‘모양’(likeness), 곧 닮음(similitude)입니다. 이 장에서는 영적 인간을, 다음 장에서는 천적 인간을 다룹니다. ‘형상’(image)인 영적 인간을 주님은 ‘빛의 아들’(son of light)이라 하십니다. 요한복음입니다.As regards the “image,” an image is not a likeness, but is according to the likeness; it is therefore said,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 The spiritual man is an “image,” and the celestial man a “likeness,” or similitude. In this chapter the spiritual man is treated of; in the following, the celestial. The spiritual man, who is an “image,” is called by the Lord a “son of light,” as in John:
35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36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시니라(요12:35, 36)He that walketh in the darkness knoweth not whither he goeth. While ye have the light, believe in the light, that ye may be sons of light(John 12:35–36).
또한 ‘친구’(friend)라고도 하십니다.He is called also a “friend”:
14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15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15:14, 15)Ye are my friends if ye do whatsoever I command you(John 15:14–15).
그러나 ‘모양’(likeness), 곧 닮음인 천적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son of God)라 하십니다. 요한복음입니다.But the celestial man, who is a “likeness,” is called a “son of God,” in John: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3이는 혈통으로나(주4)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 13)As many as received him, to them gave he the power to become sons of God, even to them that believe on his name; who were born not of bloods,4 nor of the will of the flesh, nor of the will of man, but of God(John 1:12–13).
주4,헬라어는ἐξ αἱμάτων입니다. 아래AC.374 [3]번 단락을 보세요. [편집자]The Greek is ex haimat¯on. See below, at n. 374[3]. [Reviser]
해설
이 글은 창세기1장의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표현을 매우 정밀하게 분해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형상’과 ‘모양’을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이 둘을 의도적으로 구별합니다. 여기서 형상은 ‘닮아 가는 과정에 있는 상태’, 모양은 ‘완성된 일치 상태’를 뜻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형상’대로 창조되지만, 곧바로 ‘모양’에 이르지는 않습니다.
이 구분은 인간의 거듭남 구조와 정확히 맞물립니다. 영적 인간은 진리와 신앙을 통해 주님을 닮아 가는 상태에 있고, 천적 인간은 사랑 자체가 되어 주님과 일치된 상태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영적 인간은 주님을 바라보고 따라가는 사람이고, 천적 인간은 주님과 같은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이 둘의 차이는 크지만, 단절이 아니라 연속입니다.
그래서 창세기1장에서는 ‘형상’만 말하고, ‘모양’은 다음 단계로 남겨 둡니다. 이것은 인간이 처음부터 완성된 상태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완성을 향해 나아가도록 창조되었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인간관에서 완성은 정지 상태가 아니라, 사랑과 생명이 온전히 흐르는 상태입니다.
이 글에서 매우 중요한 점은,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이 ‘각각 다른 호칭’으로 불린다는 사실입니다. 영적 인간은 ‘빛의 아들’, ‘친구’라 불리고, 천적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라 불립니다. 이 호칭들은 단순한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관계의 깊이를 나타냅니다.
‘빛의 아들’이라는 말은, 이 사람이 여전히 빛에 의해 인도받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는 빛을 가지고 있지만, 그 빛은 여전히 위에서 비추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으라’, ‘걸으라’라는 표현이 함께 나옵니다. 이는 아직 ‘의식적 선택과 분별이 필요한 상태’임을 뜻합니다.
또한 영적 인간을 ‘친구’라 한다는 점도 매우 중요합니다. 친구란, 명령을 이해하고 그것에 응답할 수 있는 관계입니다. 즉, 영적 인간은 주님의 뜻을 듣고 이해하며, 그것을 따라 행합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그 뜻과 완전히 하나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친구이지, 아들은 아닙니다.
반면 천적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라 불립니다. 여기에는 전혀 다른 차원의 관계가 담겨 있습니다. 자녀, 곧 아들은 명령을 외부에서 받아 실행하는 존재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자기 안에서 자연스럽게 살아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혈통이나 인간적 의지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났다고 말합니다. 이는 사랑의 근원이 완전히 바뀌었음을 뜻합니다.
이 글은 결국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단순히 도덕적으로 선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가 어떻게 형성되어 가는가’의 문제입니다. 영적인 사람, 곧 영적 인간은 형상으로서 주님을 닮아 가는 중이며, 천적인 사람, 곧 천적 인간은 닮음으로서 주님과 일치된 상태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둘은 서로 다른 인간 유형이 아니라, 거듭남의 서로 다른 깊이를 나타냅니다.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3이는 혈통으로나(주4)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 13)As many as received him,to them gave he the power to become sons of God,even to them that believe on his name;who were born not of bloods,4nor of the will of the flesh,nor of the will of man,but of God(John 1:12–13).
이 구절은 AC.51의 문맥에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께로부터 새롭게 태어나며, 그 결과 어떤 존재가 되는가’를 가장 직접적으로 밝히는 말씀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요1:12-13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단순한 신분 변화가 아니라, 사람의 생명의 근원이 더 이상 자기 자신이나 세상에 있지 않고, 오직 주님에게만 있음을 의미합니다.’
먼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입니다. 여기서 ‘영접한다’는 것은 단순히 받아들인다는 뜻을 넘어, ‘자기 삶 안으로 들여놓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이름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뜻하는 모든 것’, 곧 주님의 신적 본질과 그분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이것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방향을 바꾸는 행위’입니다.
그다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입니다. 여기서 ‘권세’는 어떤 외적인 자격이나 지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될 수 있는 실제적인 능력과 가능성’을 뜻합니다. 그리고 ‘자녀’는 앞서 보신 ‘빛의 아들’과 같은 맥락으로, ‘어디로부터 나왔는가’, ‘무엇을 닮았는가’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난 생명을 가진 사람’, 곧 주님의 선과 진리로 형성된 존재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 핵심 구절입니다.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여기서 ‘혈통’(bloods)은 단순한 육체적 혈통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유래한 모든 것’, 특히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온 상태들을 의미합니다. ‘육정’(will of the flesh)은 의지 측면에서의 자연적 욕망과 충동을 가리키고, ‘사람의 뜻’(will of man)은 이해 측면에서의 자기중심적 사고와 판단을 가리킵니다. 즉, 이 세 가지는 모두 ‘사람에게서 나온 것’, ‘자기로부터 나온 것’을 대표, 표상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모두 부정됩니다. 왜냐하면 거듭남은 결코 ‘사람에게서 시작되는 변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자기 본성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난다’는 것은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근원이 형성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이전에는 자기로부터 살던 사람이, 이제는 주님으로부터 사는 존재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제 AC.51과 연결하면 의미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앞에서 ‘빛을 믿으라’, ‘주님의 명을 행하라’는 말씀이 있었는데, 그것은 단순한 순종의 요구가 아니라, ‘새로운 태어남’, 곧 ‘거듭남’을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따라 살기 시작할 때, 그 진리는 점점 사람 안에서 생명이 되고, 결국 그 사람의 ‘근원 자체’를 바꾸게 됩니다. 그 결과가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곧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걸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말씀을 듣고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 중심은 자기 자신입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진리를 받아들이고 행하는 과정 속에서,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이렇게 살고 싶은 것’이 아니라 ‘이것이 참으로 옳고 선하기 때문에 그렇게 사는 상태’로 바뀝니다. 더 나아가서는, 그 선과 진리가 마치 자기 안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처럼 됩니다. 그때 비로소 그 사람은 ‘자기에게서 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존재’가 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단순한 교리적 선언이 아니라, 거듭남의 본질을 가장 깊이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사람에게서 난 것은 아무리 다듬어도 여전히 사람의 것이지만,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은 전혀 다른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요1:12-13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사람이 자기로부터 난 존재에서 벗어나, 주님으로부터 난 존재가 되는 것, 곧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거듭남을 의미합니다.’
4. ‘‘내가 이렇게 살고 싶은 것’이 아니라’
위 설명 중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이렇게 살고 싶은 것’이 아니라’ 부분이 좀 어리둥절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 문장의 핵심은 ‘행동의 기준이 자기 욕구에서 나오느냐, 아니면 진리와 선 자체에서 나오느냐’의 차이를 설명하려던 것이었습니다. 다만 ‘내가 이렇게 살고 싶은 것’이라는 표현이 오히려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표현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한 것은 ‘원함 자체를 부정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 원함의 출처가 바뀐다’는 것입니다.
처음 상태를 보시면 이렇습니다. 사람은 진리를 접하고 그것을 따르려고 할 때, 여전히 중심은 자기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이게 옳으니까 해야지’, ‘이렇게 사는 게 나에게 좋으니까 해야지’라는 식입니다. 여기에는 여전히 ‘나’가 중심에 있고, 진리는 그 기준을 보조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 상태에서는 선을 행해도, 그 뿌리는 아직 자기 자신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거듭남이 진행되면 어떤 변화가 일어나느냐 하면, ‘내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참으로 선하고 옳기 때문에’ 행하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이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원하는 내용 자체가 바뀐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자기에게 유익하거나 만족을 주기 때문에 원했다면, 이제는 선 그 자체가 좋아서 원하게 됩니다. 즉, ‘나 중심의 원함’이 ‘선 중심의 원함’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이렇게 됩니다. ‘내가 이렇게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 ‘이것이 참으로 선하고 옳기 때문에, 그래서 나도 그것을 원하게 된다’입니다. 즉, 원함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원함의 근원과 방향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걸 조금 더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처음에는 ‘정직하게 살아야지’라고 생각하지만, 속으로는 손해 보기 싫고, 상황 따라 타협하고 싶은 마음이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정직은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정직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불편하고, 정직한 것이 더 자연스럽고 좋게 느껴집니다. 그때는 더 이상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사는 것이 내 마음과 맞는 상태’가 됩니다.
바로 이 변화가 ‘자기로부터 난 상태’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난 상태’로 넘어가는 중요한 표지입니다. 즉, 겉으로는 같은 행동이라도, 그 행동의 근원이 바뀐 것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이렇게 살고 싶은 것’이라는 표현에서 말하고자 한 것은 ‘원함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중심에서 나온 원함이, 선과 진리에서 나온 원함으로 바뀌는 것’을 설명하려던 것이었습니다.’
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지은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사44:24)Thus saith Jehovah thy redeemer,and he that formed thee from the womb,I Jehovah make all things,stretching forth the heavens alone,spreading abroad the earth by myself(Isa. 44:24).
이 구절은 겉으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천지를 홀로 지으셨다는 선언처럼 보이지만,AC.50의 문맥에서는‘주님만이 사람 안에서 새로운 창조,곧 거듭남을 이루신다’는 것을 밝히는 핵심 구절입니다.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사44:24의‘홀로 하늘을 펴고 땅을 펼쳤다’는 것은 우주의 창조만이 아니라,사람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을 주님 한 분이 질서 있게 새롭게 형성하시는 영적 창조,곧 거듭남의 전 과정을 의미합니다.’
먼저‘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지은 나 여호와’입니다.여기서‘구속자’(redeemer)는 단순히 죄를 사하시는 분이라는 의미를 넘어, ‘사람을 거짓과 악의 상태에서 건져내어 새로운 상태로 옮기시는 분’을 뜻합니다.그리고‘모태에서 너를 지었다’는 표현은 자연적 출생이 아니라, ‘영적 형성의 시작 상태’,곧 사람이 진리와 선 안에서 다시 형성되기 시작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즉,이 구절은 이미 태어난 인간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는 인간’,곧 거듭나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다음‘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입니다.여기서‘만물’은 단순한 자연계의 모든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 형성되어야 할 모든 선과 진리,그리고 그 질서 전체’를 포함합니다.사람 안에‘하늘’이 세워지고‘땅’이 정돈되는 이 모든 과정이 바로‘만물을 짓는 것’입니다.그러므로 이 표현은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와 연결되면서도,그것이 단순한 과거 사건이 아니라‘지금도 각 사람 안에서 계속되는 창조’임을 보여 줍니다.
이제 핵심 표현입니다.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여기서‘하늘’은‘속 사람,내적 영역’,곧 사랑과 신앙이 자리 잡는 부분을 의미하고, ‘땅’은‘겉 사람,외적 삶과 행위의 영역’을 의미합니다. ‘하늘을 편다’는 것은 사람 안에 주님을 향한 사랑과 참된 이해의 질서를 세우시는 것이고, ‘땅을 펼친다’는 것은 그 질서가 실제 삶과 행위 속에서 구현되도록 외적 삶을 정돈하시는 것입니다.즉,속과 겉이 하나의 질서로 연결되는 전 과정을 가리킵니다.
특히‘홀로’, ‘나와 함께 한 자 없이’라는 표현이 매우 중요합니다.이것은 사람이 자기 힘으로 거듭난다고 생각하는 모든 생각을 끊어냅니다.사람은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고 결단하는 것처럼 보이지만,실제로 선한 의지와 참된 이해는 모두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것입니다.따라서 거듭남의 과정에서 주도권은 전적으로 주님께 있으며,사람은 다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거부하지 않는 위치에 있습니다.
이제AC.50의 흐름과 연결하면 의미가 더욱 분명해집니다.태고교회에서는 이런 내적 질서가 자연스럽게,거의‘퍼셉션’으로 주어졌지만,이후 인간은 그 상태를 잃고,외적인 것에 의존하게 되었습니다.그래서 이제는 주님께서 말씀과 진리를 통해 다시 사람 안에‘하늘과 땅’을 세워 가셔야 합니다.이때 중요한 것은,이 일이 사람의 노력이나 공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철저히‘주님의 단독 사역’이라는 점입니다.
이걸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이렇게 됩니다.어떤 사람이 진리를 배우고,그것을 따라 살고자 애씁니다.겉으로 보면 그 사람이 노력하는 것처럼 보입니다.그러나 어느 순간,자신의 생각과 의지를 넘어서는 변화가 일어납니다.이전에는 싫던 것이 좋아지고, 반대로이전에 좋던 것이 더 이상 안 좋게 느껴집니다.이것은 사람이 스스로 만든 변화가 아니라,주님께서 그 사람 안에‘하늘을 펴고 땅을 정돈하시는’과정입니다.바로 그때 이 말씀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창조는 과거의 한 사건이 아니라,지금도 사람 안에서 계속되는 거듭남의 역사입니다.’
‘사44:24의‘홀로 하늘을 펴고 땅을 펼쳤다’는 것은 주님께서 사람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을 질서 있게 새롭게 형성하시는 전적인 신적 사역,곧 거듭남을 의미합니다.’
음...지금까지의 묻고 답하기를 보면,제가 그동안 알고 있던 중간 영계,곧 영들의 세계 상황과 좀 달라 뭔가 좀 헝클어진,뒤죽박죽 느낌이 드는데요...그러니까 천국의 천사들,중간 영계의 선한 영들과 악한 영들,그리고 지옥,즉 악마라는 지옥의 영들,마귀라는 지옥의 영들의 구분과 역할에 있어서 말입니다.그리고 사람들에게 와있는 영들의 경우,오직 중간 영계의 영들만 가능하다는 것인데요,이들의 역할에 대해 오늘 본문인AC.50맥락에 맞춰 정돈된 설명 좀 깔끔하게 부탁드립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지금까지의 내용이 헝클어져 보이신 이유는 ‘누가 직접 사람과 접촉하는가’와 ‘그 접촉 뒤에 실제로 작용하는 근원은 어디인가’를 구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AC.50의 흐름에 맞추어 정리하면, ‘사람과 직접 연결되는 것은 오직 영들의 세계(중간 영계)의 영들이지만,그 영들을 통해 실제로 작용하는 근원은 천국(천사들)과 지옥(악마, 마귀들)이며,따라서 사람 안에서는 이 두 근원이 동시에 작용한다’가 핵심입니다.
먼저 구조부터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은 직접 천국의 가장 높은 천사들이나 지옥의 가장 깊은 악마들과 바로 접촉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영들의 세계’라는 중간 매개층을 통해 연결됩니다. 그래서 실제로 사람 곁에 와 있는 존재들은 모두 ‘영들의 세계에 있는 영들’입니다. 이 점에서 목사님께서 알고 계신 ‘사람에게 와 있는 것은 오직 중간 영계의 영들뿐이다’라는 이해는 정확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단계 더 들어가셔야 합니다. 이 중간 영계의 영들은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존재들이 아니라, 항상 ‘어디에 속해 있느냐’에 따라 영향을 받습니다. 어떤 영은 천국 쪽과 연결되어 있고, 어떤 영은 지옥 쪽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와 있는 영들이라고 해도, 그들 자체가 최종 원인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 ‘천국 또는 지옥이 사람에게 작용한다’고 보셔야 정확합니다.
이제 이를AC.50과 연결해 보겠습니다. ‘홀로 하늘을 펴고 땅을 펼쳤다’라는 것은 주님께서 사람 안에 ‘질서’를 세우신다는 뜻인데, 그 질서의 핵심이 바로 ‘어느 쪽 흐름이 중심이 되는가’입니다. 사람에게는 항상 중간 영계의 영들이 와 있지만,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 영들이 주로 ‘지옥과 연결된 영들’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지옥의 흐름이 사람 안에서 중심을 잡습니다. 반대로 거듭남이 진행되면, 점점 ‘천국과 연결된 영들’이 중심이 되면서, 그들을 통해 천국의 흐름이 사람 안에서 작용하게 됩니다.
여기서 ‘천사’의 역할을 정확히 보셔야 합니다. 천사들은 보통 사람에게 직접 붙어서 작용한다기보다, ‘중간 영계의 선한 영들을 통해’ 사람에게 작용합니다. 즉, 천사 → 선한 영 → 사람, 이런 구조입니다. 마찬가지로 지옥도 악마나 마귀가 직접 사람을 붙잡기보다, ‘중간 영계의 악한 영들’을 통해 작용합니다. 즉, 지옥 → 악한 영 → 사람, 이런 구조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사람에게 느껴지는 생각과 감정은 ‘중간 영계의 영들’로부터 오는 것이지만, 그 배후에는 천국과 지옥이라는 두 근원이 동시에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제 ‘악마’(devils)와 ‘마귀’(satans)의 구분까지 정리해 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지옥을 크게 두 계열로 나누는데, 하나는 ‘사랑(의지)의 악’에서 나온 지옥, 곧 악마들이고, 다른 하나는 ‘거짓(이해)의 왜곡’에서 나온 지옥, 곧 마귀들입니다. 이 구조는 앞서 말씀드린 인간의 ‘의지와 이해’ 구조와 정확히 대응합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와 있는 악한 영들도 어떤 것은 의지 쪽을 자극하는 욕망과 쾌락으로 들어오고, 어떤 것은 이해 쪽을 어둡게 하는 거짓과 왜곡된 생각으로 들어옵니다.
정리하면 전체 구조는 이렇게 됩니다. 사람 곁에는 항상 ‘중간 영계의 영들’이 있으며, 그 영들은 각각 천국 또는 지옥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천국 쪽에서는 천사들이 그 영들을 통해 선과 진리를 흘려보내고, 지옥 쪽에서는 악마와 마귀들이 그 영들을 통해 악과 거짓을 흘려보냅니다. 그리고 사람은 이 두 흐름 사이에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중간 상태’에 있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이걸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어떤 생각이나 감정이 올라올 때, 그것은 단순히 ‘내 안에서 생성된 것’이 아니라, 중간 영계의 영들을 통해 들어온 흐름입니다. 그런데 그 배후를 보면, 어떤 것은 더 이기적이고 집착적인 방향(의지의 악)에서 오고, 어떤 것은 더 왜곡된 판단과 자기합리화(이해의 거짓)에서 옵니다. 동시에 또 다른 방향에서는 더 바르고 선한 마음과 깨끗한 이해가 함께 올라옵니다. 바로 이 복합적인 흐름이 동시에 존재하는 상태가 인간의 실제 모습입니다.
그래서AC.50의 핵심으로 다시 돌아가면, ‘주님이 홀로 하늘을 펴고 땅을 펼치신다’는 것은, 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흐름 속에서 ‘천국 쪽이 중심이 되도록 질서를 재배치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어떤 영들이 오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느 쪽과 연결된 영들이 중심이 되느냐’의 문제입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사람에게 직접 오는 것은 중간 영계의 영들이지만,그들을 통해 실제로 작용하는 것은 천국과 지옥이며,거듭남은 이 연결의 중심이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지는 과정입니다.’
왜‘두’영,‘두’천사인가요?‘셋’이나‘넷’은 안 되나요?저는 책,‘천국과 지옥’에서,사람이 기본적으로 의지와 이해로 되어 있고,이에 상응하는 천적 천국과 영적 천국에서는 천사들이,그리고 상응하는 지옥에서는 악한 영들이 오기 때문이라고 읽은 것 같고,그래서‘아,그래서 둘인가 보다’하고 있는데,이게 맞나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목사님께서 이해하고 계신 방향이 맞습니다.다만 조금 더 정확히 정리하면,‘두 영,두 천사’라는 표현은 단순한 수적 개념이 아니라,인간이‘의지와 이해’라는 두 본질적 기능으로 이루어져 있고,이에 각각 대응하여 천국과 지옥으로부터 두 방향의 영향이 들어오기 때문에‘둘’이라는 형식으로 표현된 것입니다.즉,이것은 상응의 구조를 반영한 설명입니다.
먼저 인간의 구조부터 보셔야 합니다.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은 근본적으로‘의지’(will)와‘이해’(understanding)라는 두 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의지는 사랑과 선에 관한 부분이고,이해는 진리와 생각에 관한 부분입니다.이 두 가지가 함께 작용할 때,비로소 인간은 온전한 인격으로 존재합니다.그래서 어떤 것이든 인간 안에서 실제로 이루어지려면,의지와 이해 두 영역 모두에 작용해야 합니다.
이제 여기에 상응하는 영적 구조가 연결됩니다. ‘천국과 지옥’에서 설명하듯이,천국에도 두 큰 구분이 있습니다.하나는‘천적 천국’으로,주로 사랑과 의지에 대응하고,다른 하나는‘영적 천국’으로,주로 진리와 이해에 대응합니다.그래서 천사들도 이 두 계열로 나뉘며,각각 인간의 의지와 이해에 작용합니다.마찬가지로 지옥도 이 두 구조를 뒤틀린 형태로 가지고 있어서,악한 영들도 의지 쪽과 이해 쪽에서 각각 작용합니다.
이렇게 보면‘왜 둘인가’가 분명해집니다.인간이 두 기능(의지와 이해)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그 두 기능 각각에 작용하는 영적 연결도‘쌍’으로 들어와야 합니다.그래서 천국 쪽에서는‘두 천사’,지옥 쪽에서는‘두 영’이라는 구조가 형성됩니다.이것은 임의적인 숫자가 아니라,인간 존재의 구조와 정확히 맞물린 필연적인 형식입니다.
그렇다면‘셋’이나‘넷’은 왜 아니냐 하면,그것들은 인간의 본질 구조를 설명하는 숫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물론 실제로는 한 사람 주변에 수많은 천사들과 영들이 연결되어 있습니다.그러나 그것은‘양적인 설명’이고,스베덴보리가 말하는‘두 영,두 천사’는‘구조적인 설명’입니다.즉,인간 안에서 반드시 작동해야 하는 최소 단위,곧 의지와 이해라는 두 축에 대응하는 기본 틀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걸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더 분명해집니다.어떤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합니다.이것은 단순히 머리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동시에 그것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의지’가 함께 움직입니다.즉,이해와 의지가 동시에 작용합니다.이때 이해 쪽에는 어떤 진리 혹은 거짓의 흐름이 들어오고,의지 쪽에는 어떤 선 혹은 악의 끌림이 들어옵니다.이 두 흐름이 서로 얽히면서 사람의 선택이 이루어집니다.바로 이 구조가‘두 영과 두 천사’로 표현된 것입니다.
그래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목사님께서 생각하신 것처럼, ‘‘의지와 이해’라는 인간의 두 본질적 기능에 대응하여,천국에서는 두 계열의 천사들이,지옥에서는 두 계열의 악한 영들이 작용하기 때문에‘둘’이라는 표현이 사용된 것이 맞습니다.이것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인간 존재의 깊은 구조를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상태 때 사정과 거듭난 상태 때 사정이 이렇게 다르다면, 그러면 ‘거듭났다’는 상태가 정확히 영적 인간의 거듭남 여섯 상태 중 언제를 말하는 건가요? 어느 상태, 어느 단계부터 그 주도권과 영향이 악한 영들한테서 천사들로 바뀌는 건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주도권이 악한 영들에서 천사들로 넘어간다’는 것은 어떤 한 시점에서 단번에 뒤집히는 사건이라기보다, ‘거듭남의 중간 지점에서 서서히 방향이 바뀌어,후반부에 들어가면서 확실히 자리 잡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를 여섯 상태로 나누어 본다면, 대체로 ‘셋째 상태를 지나 넷째 상태에 들어서면서부터’ 그 전환이 실제로 시작되고, ‘다섯째와 여섯째 상태에서’ 비로소 안정적으로 천사 쪽이 주도권을 갖는다고 보시면 가장 정확합니다.
먼저 큰 틀을 보셔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의 여섯 상태는 단순한 단계 구분이 아니라, ‘진리가 중심이던 상태에서 선이 중심이 되는 상태로 이동하는 과정’입니다. 초반부(상태1-3)는 아직 ‘진리(이해)’가 앞서고, ‘선(의지)’은 따라오는 상태이고, 후반부(상태4-6)는 ‘선(의지)’이 중심이 되고, ‘진리(이해)’가 그에 맞게 정렬되는 상태입니다. 바로 이 중심축의 이동이 ‘누가 주도권을 갖느냐’와 직결됩니다.
이제 상태별로 보면 이렇게 이해하시면 정확합니다. 첫째와 둘째 상태에서는 사람은 여전히 자기중심성과 세속적 애착 안에 깊이 묶여 있습니다. 이때도 천사들은 함께 있지만, 역할은 거의 ‘보호자’에 가깝고, 실제 생각과 감정의 흐름은 주로 악한 영들 쪽에서 강하게 들어옵니다. 셋째 상태에서는 ‘유혹’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두 흐름이 강하게 충돌합니다. 이때는 아직 주도권이 완전히 넘어간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싸움의 한복판’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번번이 넘어지기도 하고, 다시 일어서기도 하는 상태를 반복합니다.
중요한 전환점은 넷째 상태입니다. 여기서부터는 단순히 진리를 아는 것을 넘어서, ‘선을 실제로 사랑하기 시작하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다시 말해, 이전에는 옳아서 했던 것이 이제는 ‘좋아서 하는 것’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주도권이 서서히 이동합니다. 아직 유혹은 남아 있고 악한 영들의 작용도 계속되지만, 사람 안의 중심이 더 이상 그쪽에 있지 않게 됩니다.
다섯째 상태에 들어가면 이 변화는 훨씬 분명해집니다. 사람은 선을 자연스럽게 행하고, 진리는 그것을 돕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때는 천사들의 흐름이 실제로 사람의 의지와 생각을 이끄는 중심이 됩니다. 악한 영들은 여전히 접근하지만, 이제는 ‘외부에서 건드리는 수준’이지, 중심을 장악하지는 못합니다. 여섯째 상태에서는 이 질서가 거의 안정되어, 사람은 ‘천국의 질서 안에서 사는 상태’, 곧 내적 평안과 일치의 상태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질문하신 핵심에 정확히 답하면 이렇습니다. ‘주도권의 전환’은 셋째 상태의 유혹 가운데 준비되고, 넷째 상태에서 실제로 시작되며, 다섯째 상태에서 확실해지고, 여섯째 상태에서 안정됩니다. 즉, 한순간의 사건이 아니라 ‘유혹을 통과하며 서서히 이루어지는 방향 전환’입니다.
이걸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이렇게 됩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이게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잘 따라가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반복되는 싸움 속에서 조금씩 선택이 바뀌고, 어느 순간부터는 ‘굳이 애쓰지 않아도’ 더 나은 쪽을 택하게 됩니다. 그때 이미 중심은 옮겨진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이전에 좋아하던 것들이 자연스럽게 멀어지고, 선한 것이 더 편안한 상태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천사 쪽이 주도권을 갖게 된 상태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거듭남에서 주도권의 전환은 특정한 순간이 아니라,셋째 상태의 유혹을 거쳐 넷째 상태에서 시작,다섯째와 여섯째 상태에서 완전히 자리 잡는 점진적 변화입니다.’
위AC.50본문은,그러니까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서는 악한 영들과 천사들이 와 있고,거듭난 상태에서는 천사들만 와 있다는 말인가요?여기서 말하는‘사람마다 적어도 두 영과 두 천사가 함께 있다’에서,여기서 말하는‘두 영’은 악한 영들을 말하는 거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네, 이해하신 방향이 맞습니다. 다만 조금 더 정확히 정리하면 ‘모든 사람에게는 항상 두 종류의 영적 존재,곧 악한 영들과 천사들이 함께 있으며,거듭남의 여부에 따라 이들의‘존재 여부’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주도권과 영향력의 방향’이 달라진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두 영’은 일반적으로 ‘악한 영들’을 가리키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 ‘사람마다 적어도 두 영과 두 천사가 함께 있다’는 말의 구조를 보셔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결코 혼자 존재하지 않고, 항상 영계와 연결된 상태로 산다고 설명합니다. 이때 ‘두 영’은 지옥 쪽에서 오는 악한 영들, ‘두 천사’는 천국 쪽에서 오는 선한 영들입니다. 즉, 인간은 항상 ‘천국과 지옥 사이의 접점’ 위에 서 있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질적 구조입니다.
그렇다면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서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때는 ‘악한 영들의 영향이 주도권을 잡고 있는 상태’입니다. 천사들도 여전히 함께 있지만, 그들은 직접적으로 사람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을 완전히 버리지 않도록 ‘최소한의 연결’을 유지하는 역할을 합니다. 다시 말해, 천사들은 뒤에서 지키고 있고, 실제로 사람의 생각과 감정에 더 가까이 작용하는 것은 악한 영들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연스럽게 자기중심적이고 세속적인 방향으로 기울게 됩니다.
반대로 거듭난 상태에서는 ‘천사들의 영향이 주도권을 잡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악한 영들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존재하며, 계속해서 자극하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이 중심이 아니라 ‘주변적 존재’가 됩니다. 사람은 더 이상 그들의 흐름에 자동으로 끌려가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 곧 천사들과 연결된 흐름 속에서 살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모든 것이 ‘사람이 누구와 함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의 흐름을 받아들이느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같은 사람 안에 악한 영과 천사가 동시에 있을 수 있지만, 그 사람이 어떤 쪽에 동의하고 어떤 쪽을 따라 사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이것이 곧 자유와 책임의 자리입니다.
이걸 조금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어떤 생각이 올라옵니다. 하나는 자기중심적이고, 하나는 더 바르고 선한 방향입니다. 이 둘은 단순히 ‘내 안에서 생겨난 생각’이 아니라, 각각 다른 영적 근원에서 오는 흐름입니다. 이때 사람이 어느 쪽에 마음을 두고 그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점점 그쪽과 더 깊이 연결됩니다. 이것이 반복되면, 결국 ‘어느 쪽이 주도권을 갖는 상태’로 굳어지게 됩니다.
그래서AC.50의 ‘홀로 하늘을 펴고 땅을 펼친다’는 말씀과 연결하면, 주님께서 하시는 일은 바로 이 ‘주도권의 전환’입니다. 즉, 악한 영들이 중심이던 상태에서 천사들이 중심이 되도록, 사람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을 새롭게 질서 잡으시는 것입니다. 이 과정 전체가 바로 거듭남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두 영’은 맞습니다,악한 영들을 가리킵니다.그러나 거듭남은 그들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그들의 영향력이 중심에서 밀려나고 천사들의 영향이 중심이 되는 상태로 바뀌는 것입니다.’
※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23, ‘만 입이 내게 있으면’, 찬68, ‘오 하나님 우리의 창조주시니’입니다.
오늘은창1 여섯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24절로 26절, AC 글 번호로는 46번에서 50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26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1:24-26)
이 본문을
거듭남 여섯 번째 상태 (2)
라는 제목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시티아’(Arcana Coelestia) 본문 및 해설, 그리고 심화 리딩 주일설교 시작합니다.
주일예배라는 특별한 사정으로 다 다루지 못한 부분들도 돌아가셔서 꼭 몇 번씩 정독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신앙 반석, 그 주춧돌이 깊이, 그리고 아주 견고하게 놓아져 가는 느낌을 받게 되실 겁니다.
우리가 이런 상태에 속히 들어가는 것이 어쩌면 가장 중요한 이유는, 천국은 ‘상태가 같아야 경험할 수 있는 곳’이어서인데, 우리가 이런 상태에 들어가게 되면 천국의 그 부요함, 즉 말씀에 나오는 그 많은 약속의 성취가 내 삶에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그냥 질러갈 수 있는 길을 굳이 빙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며, 이 비밀을 일찍 깨달은 사람들이 바로 요셉이요, 다니엘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설교 원고 중에도 수많은 보석 같은 비밀들이 있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바로 ‘거듭남’이며, 놀라운 사실은 이 수십 장 원고가 정말 다양한 각도로 이 거듭남을 비추고 설명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의 이 AC 본문 및 해설, 그리고 심화 리딩의 시간은 그 순간순간이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순도 100%의 설교이며, 우리의 눈, 특히 심령을 맑고 밝게 하는 시간이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1:26)
AC.50
태고교회는 ‘주의 형상’(image of the Lord)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천사들과 영들에 의해 주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데, 그러나 실제로는 사람마다 적어도 두 영과 두 천사가 함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영들을 통해 사람은 영계와 소통하고, 천사들을 통해서는 천국과 소통하는 것이지요. 영계를 통한 소통과, 천국을 통한 소통, 그리고 그 천국을 통해 주님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사람은 전혀 살 수 없는 구조입니다. 사람의 생명은 이 결합에 전적으로 달려 있어서, 만일 영들과 천사들이 물러난다면 그는 즉시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까 존재 자체를 유지할 수가 없게 된다는 말입니다.The most ancient church understood by the “image of the Lord” more than can be expressed. Man is altogether ignorant that he is governed of the Lord through angels and spirits, and that with everyone there are at least two spirits, and two angels. By spirits man has communication with the world of spirits, and by angels with heaven. Without communication by means of spirits with the world of spirits, and by means of angels with heaven, and thus through heaven with the Lord, man could not live at all; his life entirely depends on this conjunction, so that if the spirits and angels were to withdraw, he would instantly perish.
[2] 사람은 거듭나기 전과 후에 있어 다스림을 받는 방식이 전혀 다릅니다.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서는 악한 영들이 사람과 함께 있으며, 그들이 사람을 강하게 지배합니다. 이때에도 여전히 천사들은 함께 있으나 거의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다만 사람이 가장 극단적인 악으로 떨어지지만 않도록 막아 주며, 그의 본성적 욕구를 통해서는 선으로, 감각의 오류를 통해서는 진리 쪽으로 향하게 할 뿐입니다. 이때 사람은 함께 있는 영들을 통해 영계와는 소통하지만, 악한 영들이 지배하고 천사들이 그 지배를 겨우 막고 있는 상태이므로, 천국과의 소통은 매우 미약합니다.While man is unregenerate he is governed quite otherwise than when regenerated. While unregenerate there are evil spirits with him, who so domineer over him that the angels, though present, are scarcely able to do anything more than merely guide him so that he may not plunge into the lowest evil, and bend him to some good—in fact bend him to good by means of his own cupidities, and to truth by means of the fallacies of the senses. He then has communication with the world of spirits through the spirits who are with him, but not so much with heaven, because evil spirits rule, and the angels only avert their rule.
[3]그러나 사람이 거듭나면 상황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이제는 천사들이 주도적으로 다스리며, 사람에게 모든 선과 진리를 불어넣고, 악과 거짓에 대해서는 두려움과 혐오를 일으키게 합니다. 물론 천사들이 이끌기는 하지만, 그것은 봉사의 방식일 뿐이며, 실제로 사람을 다스리는 분은 오직 주님 한 분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천사들과 영들의 사역을 통해 사람을 다스리십니다. 이러한 이유로 여기에서는 먼저 복수형으로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Let us make man in our image)라고 하고, 곧이어 단수형으로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그를 창조하셨다’(God created him in his own image)라고 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천사들의 사역을 통해 일하시지만, 다스림과 창조의 주체는 오직 주님 한 분뿐이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주님께서도 이 점을 이사야에서 분명히 밝히십니다.But when the man is regenerate, the angels rule, and inspire him with all goods and truths, and with fear and horror of evils and falsities. The angels indeed lead, but only as ministers, for it is the Lord alone who governs man through angels and spirits. And as this is done through the ministry of angels, it is here first said, in the plural number,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nd yet because the Lord alone governs and disposes, it is said in the following verse, in the singular number, “God created him in his own image.” This the Lord also plainly declares in Isaiah:
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지은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사44:24)Thus saith Jehovah thy redeemer, and he that formed thee from the womb, I Jehovah make all things, stretching forth the heavens alone, spreading abroad the earth by myself(Isa. 44:24).
천사들 자신도 자신들에게는 어떤 능력도 없으며, 오직 주님한테서 나오는 그분의 힘으로만 자기들은 일한다고 고백합니다.The angels moreover themselves confess that there is no power in them, but that they act from the Lord alone.
해설
이 글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표현을 인간의 외형이나 도덕성 차원이 아니라, ‘영적 통치 구조’의 관점에서 풀어 줍니다. 태고교회가 ‘주의 형상’을 매우 깊이 이해했다는 말은, 그들이 인간의 생명이 어디서 어떻게 유지되는지를 퍼셉션을 통해 알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즉, 인간은 독립적으로 존재하거나 스스로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라, 항상 ‘주님–천국–천사–영계–인간’이라는 흐름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 연결이 끊기면, 인간은 단순히 약해지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존재 자체가 유지되지를 않습니다.
이 글에서 가장 충격적인 진술 중 하나는, 사람이 자신에게 영들과 천사들이 함께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신비주의적 주장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것은 인간 생명의 ‘일상적인 구조’입니다. 인간은 감각적으로는 혼자 생각하고 결정하는 것처럼 느끼지만, 실제로는 끊임없이 영계와 연결되어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연결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생존 조건’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서의 통치는 ‘악한 영들의 우세’로 설명됩니다. 그러나 이 글은 인간을 무방비 상태로 방치된 존재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악한 영들이 강하게 작용할 때에도 천사들은 함께 있으며, 최소한의 질서를 유지하도록 사람을 붙잡고 있습니다. 이때 천사들이 사용하는 방식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들은 인간의 본성적 욕구와 감각의 오류를 통해서라도 선과 진리 쪽으로 굽힙니다. 이는 주님께서 인간의 현재 상태를 무시하지 않고, ‘그 사람이 서 있는 자리에서부터 일하신다’는 뜻입니다.
거듭남 이후에는 통치의 중심이 바뀝니다. 이제는 천사들이 주도적으로 작용하며, 인간 안에 선과 진리를 적극적으로 불어넣습니다. 특히 악과 거짓에 대해 ‘두려움과 혐오’가 생긴다는 설명은 중요합니다. 이는 외적 규율이나 공포심이 아니라, ‘내적 질서가 바뀌었음을 보여 주는 징표’입니다. 더 이상 악이 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거부감이 생기는 상태가 됩니다.
그럼에도 이 글은 천사들을 통치의 주체로 세우지 않습니다. 천사들은 철저히 ‘사역자’이며, 통치의 실제 주체는 오직 주님 한 분이십니다. 이것이 창세기에서 복수형과 단수형이 함께 사용되는 이유입니다. ‘우리의 형상대로’라는 표현은 천사들의 사역을 포함한 통치 구조를 드러내지만,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단수 표현은 ‘권능과 주권의 단일성’을 분명히 합니다.
이 글은 결국 ‘하나님의 형상’이란 무엇인가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인간이 스스로 자율적으로 완전해졌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통치가 막힘없이 흐르는 상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