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부모를 공경하라’의 속뜻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출20:12) Honor thy father and thy mother, that thy days may be prolonged upon the land which Jehovah thy God giveth thee. (Exod. 20:12)

 

 

앞에서 말씀드린 십계명의 네 가지 계명에 이어서 나머지 계명의 의미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십계명의 각 계명은 별개의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내적으로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아에 대한 사랑을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아를 사랑하면 안 되는 이유는, 그렇게 되면 속 사람을 통해 들어오는 천국의 흐름이 막히고, 지옥의 흐름이 열리게 되며, 그렇게 해서 지옥으로부터 악하고 거짓된 것들이 흘러들어오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십계명을 주신 것은, 한마디로 자아를 사랑하지 말고,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 이 설교는 이순철 목사님의 청주 새 교회 및 서울 새 교회 시절 설교하신 ‘출애굽기 속뜻 강해’ 중 한 편입니다. 원래는 13절, 14절까지 포함된 본문이지만, 5월이 가정의 달이며, 어버이날, 어린이날이 있는 달이어서 12절만 따로 다루겠습니다.

 

※ 다음은 십계명 관련, 먼저 좀 알고 있어야 할 내용입니다.

 

...부모 공경에 관한 계명이 그러한 것들을 의미한다는 사실이 좀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겉 글자의 뜻하고는 너무 거리감이 있어 보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십계명(the commandments of the Decalogue)은 세상과 천국, 양쪽 사람들의 삶을 다스리는 계명임을 알아야 합니다. 겉 글자, 즉 겉뜻으로는 세상 사람들을, 그리고 영적, 즉 속뜻으로는 천국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계명이라는 것, 그리고 그 결과 겉과 속, 즉 세상 살 동안 천국에도 속한 사람들을 위한, 그러니까 교리적 진리를 따라 선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위한 계명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십계명이 천국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말씀에 나오는 모든 것의 속뜻으로부터,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 곧 주님이 친히 하신 말씀들은 사람들뿐 아니라 세상을 위해서도, 그리고 또 천사들, 아니 온 천국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로부터도 아주 명백한데요, 이는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적 진리는 천국을 경유, 관통, 사람한테로 흘러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친히 시내 산에서 이 십계명을 말씀하신 경우가 이에 해당합니다. (천국의 비밀 8899) ...That such things are signified by the commandment about honoring parents, may seem strange, because they are remote from the sense of the letter. But be it known that the commandments of the Decalogue are rules of life both for those who are in the world and for those who are in heaven—the sense of the letter or the external sense being for those who are in the world, and the spiritual or internal sense for those who are in heaven—and consequently both senses, external as well as internal, are for those who while they are in the world are also in heaven, that is, for those who are in the good of life according to the truths of doctrine. That the commandments of the Decalogue are also for those who are in heaven, is plain from the internal sense of all things in the Word, and clearly from the fact that the things which Jehovah God (that is, the Lord) Himself speaks, are not only for men, or for the world; but are also for angels, nay, for the whole heaven, because the Divine truth which proceeds from the Lord flows through heaven and passes through down unto man. This is the case with these ten commandments, which the Lord Himself spoke from Mount Sinai. (AC.8899) //

 

※ 주님이 우리에게 한 부모 밑에 태어나게 하시고, 부모와 자녀, 즉 가족이라는 혈연으로 묶어주시는 이유를 살피기 위해, 이 지상 혈연관계가 사후 천국에까지 이어지는 여부에 대해서 본 설교 후반에 따로 조금 다루겠습니다. 그 이유는, 그래야 천국을 염두에 둔 올바른 자녀 사랑, 그리고 부모 사랑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2절, 다섯 번째 계명입니다.

 

※ 스베덴보리는 히브리 및 슈미트(Schmidt)의 라틴 성경(1696) 넘버링을 따르고 있으며, 그래서 이 계명을 네 번째 계명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다음은 그 관련 내용입니다.

 

...그런 까닭에 이 계명은 순서상 네 번째이며, 거룩함에 있어 이어지는 계명들을 능가합니다. 여호와, 즉 주님을 경배함에 관한 계명은 첫 번째와 두 번째인데, 이는 주님은 가장 거룩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안식일(the Sabbath)에 관한 계명입니다. 이 계명은 가장 높은 뜻으로는 주님의 신성 자체와 신적 인성 간 연합(the union of the Divine Itself and the Divine Human in the Lord)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다음으로 부모 공경의 계명이 이어집니다. 이 계명은 주님을 사랑함과 그에 따른, 주님으로 말미암은 선과 진리를 사랑함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비밀 8899:2) ...therefore this commandment is the fourth in order, and surpasses in holiness those which follow. The commandment concerning the worship of Jehovah, that is, the Lord, is first and second, because the most holy one. Next comes the commandment concerning the Sabbath, because by this in the supreme sense is signified the union of the Divine Itself and the Divine Human in the Lord. After this follows the commandment concerning honoring parents, because by this is signified the love of the Lord and the consequent love of good and truth which are from the Lord. (AC.8899:2) //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여기서 부모는 육신의 부모로만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건 겉뜻이고요, 속뜻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과 진리를 의미합니다.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와 내적 의미가 이렇게 다른 이유는, 세상의 모든 자연적인 것들은 천국에 있는 것들과 내적으로 상응(相應, correspondence)하기 때문입니다.

 

※ 즉 그래서 말씀 또한 모두 상응으로만 기록된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라고 하면 세상에서는 육신의 부모라고 생각하지만, 천국의 천사들은 선과 진리로 이해합니다. 즉 아버지는 선을 뜻하고, 어머니는 진리를 뜻하지요. 선과 진리를 부모라고 하는 이유는, 사람은 선과 진리를 통해 새롭게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원한 부모는 선과 진리이며, 궁극적으로는 선과 진리 그 자체인 주님이십니다. 세상 부모는 세상에 있는 동안만 우리를 돌보는 부모이지만, 주님은 영원한 부모이십니다.

 

※ 그러니까 세상 부모는 부모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계신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효가 고스란히 주님을 향한 효가 되는 것이지요. 이 사실을 알든 모르든 말입니다. 한 가지, 그러나 자녀가 부모를 따르고 의뢰할 때까지만 세상 부모는 부모이고, 더 이상 의뢰하지 않고, 제 뜻대로 살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하늘의 하나님이 그의 부모가 된다고 합니다.

 

아래는 이와 관련된, 지난날 제가 써놓은 글입니다.

 

...자녀가 장성하여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된 후에는 그는 전처럼 아버지(father)를 아버지로 인정하면 안 되는데, 그 이유, 즉 왜 아버지는 자녀가 자랄 동안만 아버지인가 하는 이유는, 그때는 그가 주님을 대신하기 때문이며, 그때는 아직 자녀가 어려 아버지가 돌봐주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자녀가 장성하여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어 제법 스스로 생각할 줄도 알고, 스스로 잘 헤쳐 나갈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때는 이미 주님이 그의 아버지(Father)이심이 틀림없는데요, 이 아버지 노릇을 그동안은 육신의 아버지가 해왔었죠... (천국의 비밀 6492) ...after a son becomes his own master he ought not to acknowledge his father as father, as before; for the reason why the father is to be acknowledged during the bringing up of the son, is that the father is then in the Lord’s stead, nor does a son know at that time what he ought to do except by the direction of his father. But when a son becomes his own master, and competent to think for himself, and seems to himself to be able to direct himself from himself, then the Lord must be his Father, whose vice regent his natural father had been... (AC.6492)

 

이 글은 스베덴보리의 창세기 주석 중, 입류(influx)와 사람의 영과 육 사이 교류를 다룬, ‘About Influx and The Intercourse of The Soul and The Body’라는 글에 나오는 내용인데, 어느 날 꿈에 자기에게 나타나신 아버지와 나눈 대화의 주 내용입니다.

 

사람이 장성하면 더 이상 육신의 아버지가 아버지가 아니며, 그때는 주님이 그의 아버지시라는 이 글을 읽고 했던 몇 가지 생각을 적어봅니다.

 

이 글에 의하면, 그 이유는 먼저, 육의 아버지는 우리의 어린 시절, 어디까지나 주님의 대역이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이때 아버지 노릇을 하는 우리 육의 아버지들은 끊임없이 실제 아버지이신 하늘의 주님께 안테나를 세우고, 그 주파수를 고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 당연한 귀결, 곧 그때 주님으로부터 나와 내게 흘러들어오는 입류를 통해, 내게 맡기신 이 아이를 내 뜻, 내 생각, 또는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인도해서는 안 되고, 늘 주님 뜻대로 인도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세 번째는, 장성한 자녀도 이제는 하늘의 주님께 직접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지상의 혈연, 그리고 서류상, 행정적으로는 여전히 부모-자식 간이지만, 그러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자기의 실제 아버지는 주님이심을 시인, 아버지를 사랑하는 가운데 끝없이 아버지께 여쭙고, 아버지의 인도하심 가운데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상은 위 원본 내용 중, ‘세상의 부모는 세상에 있는 동안만 우리를 돌보는 부모’라는 부분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본 것입니다. //

 

그렇기 때문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은 내적으로는 선과 진리를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선과 진리를 그 자체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 자신을 내세우거나 타인을 지배하기 위해, 아니면 물질적 이득을 보기 위해 선과 진리를 사랑한다면 그것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선과 진리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고, 아는 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보통 행하지는 않고 말로만 사랑한다고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것은 반드시 원하고, 원하는 것은 반드시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정말로 선과 진리를 사랑한다면 반드시 행함이 뒤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 이성 가운데 있던 선과 진리가 의지 가운데 심어지고, 그렇게 해서 사람의 생명이 됩니다. 사람의 생명은 이성이 아니라 의지이기 때문입니다. 즉 그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의도하고 행하느냐가 바로 그 사람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주님은 네 부모를 공경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여호와가 주신 땅이란 주님의 나라를 의미합니다. 즉 하늘의 천국과 땅에 있는 교회가 주님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부모를 공경하면 그곳에서 생명이 길다고 하십니다. 생명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폐의 호흡이나, 심장의 박동을 생명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육체의 생명이지 영원한 생명은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은 사람의 의지, 또는 의지 속에 있는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가 무엇을 의도하고 사랑하느냐에 따라 생명의 질이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생명은 의지와 사랑입니다. 그렇게 볼 때,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라는 말씀은,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사후에 천국에서도 그 사랑이 영원히 커진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란 선과 진리에 대한 사랑이며,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우리가 교회 생활을 하는 것은 선과 진리에 대한 사랑을 키워가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많은 세상 사람처럼 세속적 성공이나, 자녀들의 성공을 위해 교회 생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한한 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원한 복을 위해 우리는 이 세상에서 교회 생활을 하는 것이지요. 영원한 복이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를 우리의 생명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진리를 처음 받아들일 때는 머리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아직 의지에 심어지지는 않은 상태입니다. 그러다가 한 번 두 번 진리를 행할 때, 그것은 의지에 심어지고 생명이 됩니다. 진리는 그런 과정을 통해 우리의 생명이 되는데 그것은 사후에도 영원히 계속됩니다. 그리고 진리가 생명이 될 때의 기쁨은 세상 어느 것에서 얻는 기쁨보다 비교할 수 없는 내적인 기쁨입니다. 주님은 그 기쁨을 주시기 위해 우리를 이 세상에 내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는 말씀은,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에 살 때에는 교회 안에서, 그리고 사후에는 천국에서 그 사랑이 영원히 커진다는 뜻입니다.

 

※ 다음은 시작 때 말씀드린, ‘이 지상 혈연관계가 사후 천국에까지 이어지는 여부’ 관련, 전에 제가 정리해 둔 글입니다.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53장, ‘사람의 사후 셋째 상태’ 512번 글입니다.

 

죽은 후의 사람, 즉 영의 셋째 상태는 교육받는 단계다. 이 상태는 천국에 들어가 천사가 될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지옥에 갈 사람들에게는 이 단계가 없다. 그들을 가르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둘째 상태는 셋째 상태를 겸한 것이며, 그들이 자기 자신의 사랑, 즉 그 사랑이 있는 지옥 사회로 완전히 돌아서면 완료된다. 이렇게 완료되면, 그들은 그 사랑으로 의도하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사랑이 지옥적이므로, 그들은 오직 악한 것만 의도하고, 그릇된 것만 생각한다. 그런 생각과 의도를 그들은 즐긴다. 그것이 그들의 사랑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들은 이전에 자기의 사랑을 위해 수단으로 이용했던 모든 선하고 참된 것을 거부한다. The third state of man after death, that is, of his spirit, is a state of instruction. This state is for those who enter heaven and become angels. It is not for those who enter hell, because such are incapable of being taught, and therefore their second state is also their third, ending in this, that they are wholly turned to their own love, thus to that infernal society which is in a like love. When this has been done they will and think from that love; and as that love is infernal they will nothing but what is evil and think nothing but what is false; and in such thinking and willing they find their delights, because these belong to their love; and in consequence of this they reject everything good and true which they had previously adopted as serviceable to their love as means.

 

선한 영들은 이와 반대로 둘째 상태에서 셋째 상태로 인도된다. 이 상태는 교육을 통해 천국에 갈 준비가 이루어지는 상태다. 선과 진리를 알아야만, 즉 가르침을 통해서만 천국에 합당하게 준비될 수 있다. 사람은 가르침을 받아야만 영적 선과 진리가 무엇인지, 그에 반대되는 악과 거짓은 무엇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세상에서 무엇이 올바름과 정직함인지, 즉 무엇이 사회적, 도덕적 선과 진리인지 배울 수 있다. 세상에는 무엇이 올바른 것인가를 가르치는 사회적 법이 있고, 또 대인관계에서 도덕적 법에 따라 사는 것을 배울 수 있으며, 이 모든 것이 정직하고 올바른 것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적인 선과 진리에 대한 가르침은 세상에서 나오지 않고 천국에서 오는 것이다. 그것은 말씀에서, 그리고 말씀에서 도출된 교회의 가르침에서 배울 수 있다. 그러나 사람 마음에 속한 내면이 천국에 있지 않으면, 영적 선과 진리는 사람의 삶 속으로 유입될 수 없다. 그리고 사람은 신성을 인정하고, 말씀에 그렇게 하라고 했기 때문에 올바르고 정직하게 행할 때, 그 마음이 천국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나 세상을 목적으로 해서가 아니라 신성을 위해서 올바르고 정직하게 사는 것이다. Good spirits, on the other hand, are led from the second state into the third, which is the state of their preparation for heaven by means of instruction. For one can be prepared for heaven only by means of knowledges of good and truth, that is, only by means of instruction, since one can know what spiritual good and truth are, and what evil and falsity are, which are their opposites, only by being taught. One can learn in the world what civil and moral good and truth are, which are called justice and honesty, because there are civil laws in the world that teach what is just, and there is association with others whereby man learns to live in accordance with moral laws, all of which have relation to what is honest and right. But spiritual good and truth are learned from heaven, not from the world. They can be learned from the Word and from the doctrine of the church that is drawn from the Word; and yet unless man in respect to his interiors which belong to his mind is in heaven, spiritual good and truth cannot flow into his life; and man is in heaven when he both acknowledges the Divine and acts justly and honestly for the reason that he ought so to act because it is commanded in the Word. This is living justly and honestly for the sake of the Divine, and not for the sake of self and the world, as ends.

 

그러나 아무도 가르침을 받기 전에는 그렇게 행할 수 없다. 하나님이 계시고, 천국과 지옥이 있으며, 사후 생활이 있다는 것, 하나님을 가장 사랑해야 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것, 말씀은 신성하기 때문에 말씀 안의 가르침을 믿어야 한다는 것 등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이런 사항들을 알고 인정하지 못하면, 사람은 영적으로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영적인 생각이 전혀 없다면, 영적인 것을 의도할 수도 없는 것이다. 사람은 알지 못하는 것을 생각할 수 없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의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이 위와 같은 것을 의도할 때, 천국이, 즉 천국을 거쳐서 주께서 그의 삶 속에 들어오신다. 주께서는 사람의 의지 속으로 들어오시고, 의지를 통해서 생각 속으로 들어오시며, 그 둘을 통해 삶 속으로 들어오신다. 사람의 삶 전체가 여기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상의 내용으로, 영적 선과 진리는 세상으로부터가 아니라 천국으로부터 배우는 것이며, 사람은 가르침을 통해서만 천국에 합당하게 준비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But no one can so act until he has been taught, for example, that there is a God, that there is a heaven and a hell, that there is a life after death, that God ought to be loved supremely, and the neighbor as oneself, and that what is taught in the Word ought to be believed because the Word is Divine. Without a knowledge and acknowledgment of these things man is unable to think spiritually; and if he has no thought about them he does not will them; for what a man does not know he cannot think, and what he does not think he cannot will. So it is when man wills these things that heaven flows into his life, that is, the Lord through heaven, for the Lord flows into the will and through the will into the thought, and through both into the life, and the whole life of man is from these. All this makes clear that spiritual good and truth are learned not from the world but from heaven, and that one can be prepared for heaven only by means of instruction.

 

나아가서 주님은 사람의 삶 속으로 유입하시는 정도만큼 그를 가르치신다. 그 정도만큼 주님은 사람의 의지를 진리를 알고자 하는 사랑으로 불붙이시고, 진리를 앎에 따라 그의 사고를 밝히 깨우치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루어지는 만큼 사람의 내면은 열리고, 천국이 그 안에 심어진다. 이에 그치지 않고, 신성하고 천국적인 것이 사람의 도덕적 삶에 속하는 정직한 행위와, 사회적 삶에 속하는 올바른 행위 안으로 유입되어 그것을 영적인 것으로 변화시킨다. 그때 사람은 그런 행위를 신으로 말미암아, 즉 신성을 목적으로 행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도덕적, 사회적 삶에서 그런 목적으로 행하는 정직하고 올바른 행위는 영적 삶의 필수적인 결과이며, 결과의 모든 요소는 그 결과를 낸 원인에서 파생된 것이다. 원인의 성격이 결과의 성격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Moreover, so far as the Lord flows into the life of anyone he instructs him, for so far he kindles the will with the love of knowing truths and enlightens the thought to know them; and so far as this is done the interiors of man are opened and heaven is implanted in them; and furthermore, what is Divine and heavenly flows into the honest things pertaining to moral life and into the just things pertaining to civil life in man, and makes them spiritual, since man then does these things from the Divine, which is doing them for the sake of the Divine. For the things honest and just pertaining to moral and civil life which a man does from that source are the essential effects of spiritual life; and the effect derives its all from the effecting cause, since such as the cause is such is the effect. (천국과 지옥 512, 김은경 역)

 

좀 길었지요? 네, 좀 길었지만... 너무나도 중요한 내용이라, 가령, 주님은 어떤 조건과 상황 가운데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지, 우리의 내면은 어떻게 열리는 건지, 우리의 지상 생활이 어떻게 해서 영적으로 변화되는지 등등...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번역도 참 깔끔하게 잘 되었고요. 주님의 빛을 구하시며, 충분히 ‘정독’하시면, 점차 밝아지며, 환하게 이해되실 줄 믿습니다.

 

이 외에도 이 교육장의 전체 구조 및 교육생들의 구성, 그리고 생전에 비기독교인이었던 영들의 경우, 이곳에서 어떻게 주님을 영접하게 되는지 등은, 그리고 교육이 다 끝나면, 주님이 직접 한 사람 한 사람, 앞으로 그가 영원히 있게 될 해당 공동체로 인도하시는 등등은, 글이 너무 길어져 나중에 따로 다루겠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나중에 사후 다 알게 될 사항들을 굳이 이렇게 미리 다루는 이유는, 이런 내용은 닥쳐서 깨닫기에는, 그리고 겪어서 알기에는 너무 늦어 돌이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지상 생활을 하는 동안 혈연과 혈육으로 지내게 하신 그 참뜻을 몰라 이 관계가 천년만년 갈 줄 알고, 내 핏줄, 내 혈육, 우리 집과 가문 등에 올인하는 삶을 사는 것은, 내면, 곧 속 사람의 형성에 올인해도 모자랄 시간을 외면, 곧 겉 사람의 삶으로 죄다 낭비를 하는 것과도 같아 사후,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참 안타까운 상황에 놓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영이란 실상은 그의 애정, 곧 그의 중심 사랑(ruling love, 그 사람의 모든 언행을 지배하는 사랑)이 사람의 모양을 띤 것이며, 이것은 오직 삶을 통해서만 형성됩니다. 삶의 대부분을 겉과 속이 다르게 살아놓고는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가는 그런 건 없습니다. 구원, 곧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비기독교인들이 보기에 공정하지 않은 무슨 허락이나 자비, 은혜를 받아 들어가는 게 아닌, 오직 이런 만인 앞에 공정하고도 공의로운 방법과 시스템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다음은 다섯 번째인, ‘⑤ 자신의 영원한 공동체에 합류’인데요, 이 내용은 위 책, 40장, ‘천국 안의 결혼’ 383번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아래는 윗글에 대한 저의 결론입니다.

 

비슷한 사람들끼리, 곧 선이 비슷한, 거의 같은 사람들끼리는 한 공동체를 이룹니다. 물론, 한 공동체 내에서도 모든 구성원의 선이 다 다르며, 그것은 중심에서 동심원 퍼져나가듯 그렇게 다릅니다. 즉 중심에는 그 공동체의 가장 뚜렷한 선을 가진 사람이, 바깥으로 갈수록 좀 덜한 사람이 배열됩니다. 그러나 한 공동체의 범위를 벗어나지는 않을 정도로만 다릅니다. 마치 아들을 보면 어느 정도 그 얼굴에 아버지의 얼굴이 반영된 것처럼 말입니다. 한 공동체 안에서는 비록 처음 보는 초면일지라도 마치 오랜 고향 사람 만나듯 친숙하고 반갑습니다. 그러나 천국일지라도 공동체가 다르면, 즉 선이 다르면 마치 외국인을 만난 듯 그저 대면대면합니다.

 

네, 이렇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제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지상의 혈육 관계는 휴면 상태로 들어가고, 전혀 새로운 존재로 새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만일, 지금의 남편 혹은 아내를 천국에서도 계속 부부로 만나 지내고 싶으면, 그리고 지금의 자녀들과 또 그리 하고 싶으면, 방법은 하나, 서로 선이 같으면 됩니다. 즉 그 중심 사랑이 같으면, 참된 결혼 생활을 하면 됩니다. 아내가 원하는 걸 남편도 원하고, 남편이 말하는 걸 아내는 따르고... 하여 둘이 한 몸 되면 됩니다!

 

끝으로 ‘⑥ 우리가 지상에서 혈연관계로 살아가게 하신 이유’입니다. 이미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 ‘속 사람, 곧 내면을 준비하게 하시려고’입니다.

 

땅 위 혈연관계는 천국의 관점에서 보면, 인류의 모종밭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인류로 채워지며 구성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천사들은 땅 위 혈연관계, 그중에서도 특히, 결혼을 가장 신성시합니다. 천국 자체가 ‘결혼’입니다. 천국 결혼과 지상 결혼의 차이는 천국 결혼은 그 결과 선과 진리가 생겨나지만, 지상 결혼은 그 결과, 아들, 딸들이 나온다는 점입니다. 이런 상응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손주, 우리의 자녀들을 보며, ‘이 아이의 선과 진리는 어떤 면에서 나랑 살짝 다를까?’, 영적 시야로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땅 위 혈연관계를 통해 부지런히 우리는 자신의 속 사람, 영의 내면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것은 자녀, 부모, 손주 등 혈육, 핏줄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계신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육의 눈으로 이들을 볼 때, 영의 눈이 함께 켜져서 주님의 모습 또한 겹쳐 보여야 하겠습니다. 자녀를 볼 땐, 부부, 곧 주님의 선과 진리의 결합으로 새로운 선과 진리가 생겨난 것으로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부모를 뵐 땐, 자신의 뿌리이신 주님의 선과 진리를 역시 볼 수 있어야 하겠고 말입니다.

 

이래야 우리의 지상 혈육, 핏줄 사랑이 주께 복을 받으며, 안전할 것입니다. 이걸 놓치면, 우리는 그저 겉 사람의 일로, 육체의 일로 끝나게 될 것입니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동안 십계명의 의미를 배우면서 겉뜻과 속뜻의 의미가 많이 다르다는 사실에 놀라셨을 것입니다. 신앙인들에게 십계명은 자연적 법이면서 영적인 법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 법이면서 천국 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겉뜻과 속뜻이 모두 중요합니다.

 

※ 즉 겉뜻도 지키지 않으면서, 속뜻, 속뜻 하는 것은 마치 기초 없이 집을 짓겠다 하는 것과 같고, 반대로 속뜻을 모르면서 겉뜻, 겉뜻 하는 것은 기초는 있는데 정작 집이 올라가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속뜻을 이해하고 사랑해야 겉뜻도 온전히 지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먼저 내면에서 천국적 결혼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즉 신앙과 체어리티의 삶에 있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십계명의 속뜻뿐 아니라 겉뜻까지도 온전히 지킬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체어리티의 삶을 살지 않는 사람은 진정으로 부모를 공경할 수 없고, 또한 순결한 결혼 생활을 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십계명의 외적인 뜻은 이렇게 내적인 뜻과 서로 통합니다. 새 교회에서는 이러한 것을 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들의 상응(相應)이라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것들을 잘 이해하셔서 모든 교우께서는 십계명의 내적, 외적 은혜 가운데 충만한 삶을 이루어 나가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14:15)

 

아멘

 

원본

2017-05-21(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5-05-04(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5-04(D1)-주일예배(2596, 출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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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목차 (Contents)

 

Contents

Contents Editor’s Preface ‘저자 서문’ (Author’s Preface, 1) HH.1, '저자 서문(序文)'(Author’s Preface)(HH.1)※ HH는 'Heaven and Hell'의 약어(略語)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모든 저작은 공용 약어가 있습니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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갔다 와 본 사람 말에 귀 기울이지 않기 (2025/4/26)

 

글 제목을 보면, 이미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리고자 함인지 다들 아시겠지요? 맞습니다. 바로 진짜와 가짜를 가려내는 방법인데요, 가짜들은 평소 말은 그럴듯하게 하지만 정작 자기들이 해오던 말이 실제로 일어나면 안 믿습니다. 대표적인 게 바로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인데요, 평소 그리스도, 그리스도 이미 오랜 세월 온 국민의 수 대, 수십 대, 수백 년을 이어온 염원이었지만, 정작 주님이 실제로 오시자,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물론, 유대인들 거의 전부가 몹시 불편해했어요. 이런저런 핑계들이 있겠지만, 일단 저들은 가짜여서 주님을 알아볼 수 없었던 겁니다.

 

※ '가짜'라는 거북한 표현을 써서 좀 그러시지요? 많이 미안합니다...

 

25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26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27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요10:25-27)

 

말씀처럼 말입니다. 주님도 ‘너희는 내 양이 아니다’, 즉 너희는 가짜다 말씀하고 계십니다.

 

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7:21-23)

 

이 말씀도 같습니다. 주님은 이들을 향하여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하십니다. 너희 역시 가짜다 하고 계십니다.

 

이런 케이스가 성경에 참 많이 나옵니다. 거의 모든 선지자와 사도들, 그리고 그 속사도들, 즉 사도들의 직계 제자들 또한 그랬는데요. 어쩌면 태고교회부터 고대, 유대, 기독 등 교회사 전체를 이 주제로 기술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짜와 진짜의 차이는 그 숨은 동기에 있습니다. 가짜는 그 모든 겉보기와는 달리 그 숨은 동기가 자기 사랑입니다. 진짜는 그렇지 않습니다. 진짜 역시 그 모든 겉보기와는 달리 그러나 그 숨은 동기는 주님 사랑입니다. 천사들은 사람의 겉을 보지 않습니다. 내적 존재인 천사들한테는 사람의 겉은 안 보이고, 사람의 속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이 볼 때 사람은 곧 그의 의지이며, 어떤 일을 하는 그 숨은 동기입니다. 사람들은 겉만 보지만, 천사들은 속, 곧 그 숨은 동기를 봅니다.

 

그런데 다른 건 몰라도 주님에 관해서는 가짜들도 좀 그 혀가 뻣뻣해지는지 주님에 대한 직접적인 사랑의 고백 같은 거를 어색해 합니다. ‘주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주님은 저런 분이십니다’ 하는 얘기를 잘 못해요. 아마 주님에 대한 개인적 경험이 별로 없어서 그런가 봅니다. 대신 ‘아무개가 주님에 대해 이런 책을 썼는데 저는 그 책을 읽었습니다. 아무개는 평생 주님과 동행했는데, 그 기록을 저는 읽어 보았습니다’ 식으로 그 핀트를 살짝 틉니다. 그리고 그런 책 많이 읽은 걸 자랑합니다. 본의 아니게 가짜가 되셨겠지만... 문제는, 이런 분들의 많은 말과 글을 접하고 나면, 우리의 시선이 주님을 향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을 향하게 된다는 게 문제입니다.

 

천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 천국 해서 정말 천국에 대해 알고픈 모양이구나 싶어 주님의 허락으로 천국을 오랫동안 왕래한 사람이 천국에 대해 알려주려고 하면, 정작 이 사람 말에는 귀 기울이지 않고, 천국을 가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천국에 대해 연구하고, 기술한 책만 잔뜩 읽고 있습니다. 엉뚱합니다. 천국, 천국 하는 그 숨은 동기가 정말 천국을 사랑하여 거기 가 살고픈 게 아니라 천국을 통해 얻고자 하는, 자기도 잘 모르는 무슨 목적들이 있었나 봅니다. 이런 것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저는 전혀 그럴 생각도, 그럴 마음도 없었는데 제 나이 57세 되던 어느 날 주님이 천사를 보내어 저를 부르시더니 이렇게 무려 27년간 영계를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경험 중 기록으로 남기라 하신 것만 이렇게 적고 있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1688-1772, 스웨덴)의 말입니다. 강문호 목사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주님은 자원병을 쓰지 않으시고, 차출병을 쓰신다는 적확한 예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가고 없는 지금, 주님의 지시와 허락으로 그가 남기고 간 책을, 특히 그중에 ‘천국과 지옥’을, 신기하게도 저 역시 57세 때 접한 이후, 지난 8년 여의 세월, 집안 행사 등 부득이한 날만 빼고, 거의 하루도 낭비 없이 이 길을 달려왔습니다. 마치 뭐에 이끌리듯 말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제 주변, 가족이며, 친지며, 교계 지인들이며... 그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아, 우리 큰아들 포함, 몇 분 계시군요. 다행입니다. 그러나 1%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어디에 적기를 이것을 이해하는 사람은 천 명 중 한 사람도 쉽지 않다 했다는데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다만 그,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몇몇 분한테서는 주님이 서둘러 저를 떼어놓으셨고, 대부분은 선량하신 분들입니다. 그 가운데 온유하신 분들과 다소 강한 분들의 차이만 있지요. 그러나 그런 것과 이건 다른 건가 봅니다.

 

각 사람의 거듭남의 여정은 각 사람에게 맞춘 철저한 맞춤식이라 절대 획일적일 수도, 일률적일 수도 없습니다. 또한 각 사람이 붙들고 있는 나름의 교리적 입장은 그에게 있어서는 생명과도 같아 주님조차 그걸 무조건 새것으로 가시지 않습니다. 그랬다가는 큰일나기 때문입니다. 그 역시 지금은 그의 생명이기 때문인데요, 아우 아벨을 죽인 가인을 헤아려 그에게 무슨 표를 주어 살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의 이단적 입장 역시 나중을 위해, 후손을 위해, 인류가 결국은 신앙에서 사랑을 분리하는 길로 걸어갈 걸 아시고, 그런 가인을 보호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 주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게 무슨 주님의 섭리 있으시지 싶고, 그래서 지금은 그러려니 하고 있습니다.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얼마나 더 지상에 머무르게 될까요? 사실 천국에 대해 많이 알면 알수록 주님을 향한 경외감이 말할 수 없이 깊어지며, 그래서 그냥 오늘 밤에라도 훌쩍 떠난들 무슨 아무 미련도 없고, 후회도 없을 것 같습니다. 아내와 자식들이 처음 얼마 동안 좀 힘들어할까요? 제가 그동안 가정경제에 거의 보탠 게 없어 그 부분은 참 많이 미안합니다. 그래서 요즘 이 부분을 많이 주님께 구하고 있어요. 제 아내와 두 아들, 특히 작은아들에게 주님이 경제적으로 조금 은혜 베풀어주시기를 말입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신 주님 말씀이 전에 제게 들렸듯 오늘도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께 들렸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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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H.1, '저자 서문(序文)'(Author’s Preface)(HH.1)

※ HH는 'Heaven and Hell'의 머릿글자입니다; 본문 번역은 김은경 역입니다. 단, 주석들은 저의 번역입니다; 주석에 나오는 참조 숫자들은 스베덴보리 저, 'Arcana Coelestia'(AC, 창, 출 속뜻 주석, 라틴, 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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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이성(理性, the rational)이 거듭나야 하는 이유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And he said, Returning I will return unto thee about this time of life; and behold Sarah thy wife shall have a son. And Sarah heard at the door of the tent, and it was behind him. (창18:10)

 

 

인간의 합리적 진리는 신성한 것들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신성한 것들은 인간의 진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밖에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합리적 진리는 겉 사람 안의 기억 지식과 소통하며, 그러므로 그 상태에서 자신보다 높은 것을 바라보면 그만큼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천국의 비밀 2196:2, 이순철 역) Human rational truth does not apprehend Divine things, because these are above the sphere of its understanding, for this truth communicates with the memory–knowledges which are in the natural man, and in so far as it looks from these at the things which are above itself, so far it does not acknowledge them. (AC.2196:2)

 

※ 위는 오늘 본문 중 ‘그 뒤’(And it was behind him)에 관한 풀이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생의 목표가 뭐냐고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은 돈 많이 벌거나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이라고 답합니다. 돈이나 지위를 귀하게 여기는 이유는, 그것을 통해 모든 억압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며, 그러므로 자유와 평화, 그리고 안정된 미래를 얻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돈이나 지위 같은 것으로는 진정한 자유와 평화, 그리고 안정된 미래를 얻을 수 없습니다. 당장의 상황 수습, 그리고 당면한 필요들은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겠지만 말입니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여러모로 자유를 얻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고, 나름대로 성과도 거뒀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가 궁핍했던 196, 70년대보다 더 행복하다고 믿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물질적으로는 풍요롭게 됐을지 모르지만, 빈부의 격차나 계층 간의 차별로 인한 억압과 불화는 더 커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오늘은 그것에 대해 알아보려고 합니다.

 

※ 이 설교는 지난 2021년 10월 설교이지만 2025년 4월 지금도 별반 달라진 게 없어 그대로 인용합니다.

 

※ 아래는 소유에 대한, 그리고 삶에 대한 천사들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 제가 참 좋아하는 글입니다.

 

그들은 많든 적든 자기가 가진 것으로 만족한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필요한 만큼만 주어진다는 것을, 즉 조금 필요한 사람은 조금 받고, 많이 필요한 사람은 많이 받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무엇이 우리에게 좋은지 우리는 모른다는 것, 오직 모든 것을 살피시고 영원한 것을 섭리하시는 주님만이 아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김은경 역) They live contented with their own, whether it is little or much, because they know that they receive just as much as is good for them— those receiving little for whom a little is useful, and those receiving much for whom much is useful; also they do not themselves know what is good for them, the Lord alone knowing this, who looks in all things that he provides to what is eternal. (HH,278)

 

이는 ‘천국과 지옥’ 31장, ‘천국 천사들의 순진한 상태’(The State of Innocence of the Angels of Heaven, 276-283)에 나오는 글입니다. //

 

※ 그리고 다음은 같은 책 39장, ‘천국의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The Rich and the Poor in Heaven, 357-365)에 나오는 글들입니다. 이 장을 통해 저는 많은 편견을 교정할 수 있었습니다. 내용이 좀 길지만 숙려 끝에 그대로 싣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여러 가지 의견이 있다. 일부에서는 가난한 사람은 들어가고 부자는 못 들어간다고 하고, 또 일부는 부자나 가난한 자나 다 들어간다고 하고, 일부는 부자는 그들의 재산을 포기하고 가난해져야만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이 모든 주장이 전부 말씀을 근거로 한 신념이다. 그러나 천국에 가는데 부자와 가난한 사람 사이에 차별을 두는 것은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다. 말씀은 그 속뜻으로 보면 영적이고, 글자의 뜻으로는 자연적이다. 따라서 말씀을 영적 뜻으로 보지 않고, 오직 그 글자의 뜻으로만 이해하면 여러 가지 면에서 오류가 생긴다. 예를 들어, 부자와 가난한 사람에 대해서가 특히 그렇다. 부자가 천국 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을 지나는 것처럼 어렵고, 가난한 사람은 가난하기 때문에 천국에 쉽게 간다고 하는 생각이 그것이다. 이는 말씀에 아래의 구절이 있기 때문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5:3)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눅6:20)

 

그러나 말씀의 영적 뜻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천국은 가난하건 부자이건 간에 신앙과 사랑의 생활을 한 모든 사람을 위한 곳임을 안다. 그렇다면 말씀에 나오는 부자와 가난한 자는 어떤 사람들을 말하는가를 이제 설명하겠다. 천사들과 많은 대화를 하고, 그들과 함께 지낸 결과, 내가 확실히 알게 된 것은 부자도 가난한 사람과 똑같이 쉽게 천국에 간다는 것이며, 사람은 재산 때문에 천국에 못 가거나 가난 때문에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부자나 가난한 사람 모두 천국에 가고, 부자들 중 많은 사람은 가난한 사람보다 더 큰 영광과 행복을 누린다. (HH.357)

 

먼저 얘기해 둘 것은, 사람은 술책이나 사기가 아니라면 기회가 닿는 대로 부를 얻고 쌓아도 되며, 너무 빠져들지 않는 한 고급 음식을 즐겨도 되고, 조건에 따라 호화로운 저택에 살며 조건이 같은 사람들과 교제할 수 있고, 오락을 즐기고 세상사를 얘기해도 된다는 사실이다. 또 경건한 사람처럼 슬프고 애통하는 얼굴로 고개를 떨구고 다닐 필요가 없으며, 즐겁고 활기에 넘칠 수 있다. 또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가난한 사람에게 자기 것을 주지 않아도 된다. 한마디로 사람이 세상 사람과 겉으로 보기에 똑같이 살아도, 내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생각을 올바로 가지며, 이웃에게 신실하고 공정하게 대하기만 하면, 천국 가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어떠한가는 그의 애정과 생각이 어떠한가, 즉 그의 사랑과 신앙이 어떠한가가 결정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모든 외적 행동은 그 두 가지 것에서 생명을 얻는 까닭이다. 사람은 의지로 말미암아 행동하고, 사고로 말미암아 말하므로 행동은 곧 의지이고, 말은 곧 생각이다. 따라서 말씀에 사람은 그의 행위대로 심판받고, 일한 대로 상을 받는다고 하신 것은, 사람이 그의 행위의 근원인, 즉 행위 안에 들어 있는 생각과 애정에 따라 심판받는다는 뜻이다. 행위는 생각과 애정을 제외하면 아무 것도 아니고, 그 두 가지에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이다.233 따라서 어떤 결과를 이루는 것은 사람의 외면이 아니라 오직 그 외면의 근원인 내면이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예를 들면, 사람이 정직하게 행하고 남을 속이지 않는 이유가 단지 법이 두렵고 평판을 잃을까 봐, 그래서 명예와 이득을 잃을까 봐 두려워서라면, 그 두려움에 의해 제지당하지 않는다면 기회 있을 때마다 남을 속일 것이다. 비록 그의 행동이 겉으로는 정직해 보이더라도 그의 사고와 의지는 속이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게 그는 정직하지 않고 속이고자 하기 때문에, 그런 사람 안에는 지옥이 있다. 반면 그것이 하나님과 이웃을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에, 남을 속이는 행위를 하지 않고 정직하게 행하는 사람은 기회가 주어져도 남을 속이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생각과 의지는 그의 양심이며, 그 사람 안에는 천국이 있다. 이 두 사람의 행위는 외적 형태는 같아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주233. 사람은 그의 행위와 한 일에 따라 심판받고 상 받을 것이라는 내용이 말씀에 자주 나온다 (AC.3934). ‘행위와 일’이라 하면, 그 내적 형태의 행위와 일을 의미하지, 외적 형태의 걸 의미하는 게 아니다. 악인에 의한 외적 형태의 선한 일도 겉보기에는 똑같기 때문인데, 내적, 외적 형태가 같은 행위와 일은 오직 선인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AC.3934, 6073). 모든 활동처럼 일도 사람의 내면으로부터 존재와 결과, 그리고 퀄러티를 가지는데, 이는 사람의 사고와 의지에 관한 것이다. 일은 이들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면이 어떠하면, 그 일도 그러하다 (AC.3934, 8911, 10331). 즉, 그 내면은 사랑과 신앙에 관한, 그런 것이다 (AC.3934, 6073, 10331, 10332). 그렇게 일에는 사랑과 신앙이 들어있으며, 실제로도 일이라는 것은 사랑과 신앙이다 (AC.10331). 그러므로 행위와 한 일에 따라 심판하고 상을 준다는 것은 사랑과 신앙에 따라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AC.3147, 3934, 6073, 8911, 10331, 10332). 일이라는 것이 자신과 세상을 주목하는 한, 그 일은 선하지 않다. 그러나 주님과 이웃을 주목하는 한, 그 일은 선하다 (AC.3147). (HH.358)

 

사람이 신을 인정하고, 이웃을 선의로 대하기만 한다면, 겉으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도 되고, 부자가 될 수도 있으며, 형편과 역할에 따라 풍성한 식탁과 우아한 집과 좋은 옷을 갖추고 살 수도 있고, 즐거움과 만족을 누려도 되며, 직무와 사업을 위해, 그리고 정신생활과 육신 생활을 위해 세상일에 종사할 수 있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분명한 결론을 낳는다. 즉 천국에 가는 것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사실이다. 유일한 어려움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저항하고, 그 두 사랑이 지배적이 되지 않도록 하는 데 있다. 그 두 사랑이 모든 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234 다음의 주의 말씀은 이것이 생각처럼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11:29, 30)

 

주의 멍에는 쉽고 주의 짐은 가볍다고 하신 이유는 사람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비롯되는 악에 저항하는 정도만큼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의 인도를 따르는 것이며, 그렇게 되면 주께서 그 사람 안에 있는 악을 물리치고 제거하시기 때문이다.

 

주234. 모든 악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온다 (AC.1307, 1308, 1321, 1594, 1691, 3413, 7255, 7376, 7488, 7490, 8318, 9335, 9348, 10038, 10742). 모든 악이란 다른 사람을 향한 경멸, 원한, 증오, 복수, 잔인, 속임이다 (AC.6667, 7370–7374, 9348, 10038, 10742). 그런 사랑들 가운데 인간은 태어나며, 그래서 인간의 유전한 악이 그 안에 있는 것이다 (AC.694, 4317, 5660). (HH.359) //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인간의 지식을 믿는 사람과 하나님의 진리를 믿는 사람입니다. 전자의 사람을 자연적인 사람(the natural)이라 하고, 후자의 사람을 영적인 사람(the spiritual)이라 합니다. 자연적인 사람들에게 있어 지식을 배우는 목적은 돈과 명예를 얻기 위한 것입니다. 이를테면, 좋은 학교에 진학, 출세하고 돈 많이 벌기 위해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지요.

 

※ 그렇다고 영적인 사람은 돈, 명예, 좋은 학교 진학, 출세 및 부자가 되는 걸 죄악시 해야 한다는 건 아닙니다. 앞 인용글들에서도 읽으셨겠지만, 단지 이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지상에서 주님의 진리를 추구함에 있어 이런 것들이 어디까지나 수단일 뿐 목적이 아닌 사람들이 영적인 사람들이고, 반대로 그저 목적이기만 한 사람들이 자연적인 사람들입니다. 참고로, 천국의 부(富)는 주님의 선과 진리입니다. 말씀에 나오는 부자는 주님의 진리를 많이 소유한 사람들, 주로 유대인을 가리킵니다.

 

어떤 의미에서든 지식, 즉 세상 지식에 대한 애정을 말씀에서는 이스마엘을 낳은 애굽 여인 하갈로 표현합니다. 영적 의미, 곧 속뜻으로 애굽은 세상 지식을 뜻하고, 여자는 진리에 대한 애정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애굽 여인 하갈은 세상 지식에 대한 애정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갈에게서 태어나는 이스마엘은 누굴까요? 거듭나는 사람들에게 생기는 첫 번째 합리적 능력을 의미합니다.

 

※ 창세기 본문에서는 주님의 첫 번째 합리적 능력(The Lord’s first rational)을 말합니다.

 

합리적 능력이란 지식이나 진리를 바탕으로 사물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 말이 좀 어려우시면 추론하는 능력이나 이성(理性)으로 이해하셔도 되겠습니다.

 

이스마엘로 표현되는 첫 번째 합리적 능력(the first rational)이 열릴 때, 사람들은 그동안 세상 지식을 가지고 물질만을 좇았던 자신을 반성하고, 비로소 영적인 걸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이 태어나기까지의 기간은 한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 결코 간단치 않은 시간입니다. 많은 역경과 좌절이 있고, 그때마다 주님이 주시는 깨달음이 있습니다. 그런 깨달음을 통해 우리는 물질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낳은 아브라함은 이번에는 본처 사라로부터 두 번째 아들 이삭을 얻습니다. 사라가 낳은 아들 이삭은 거듭나는 사람에게 생기는 두 번째 합리적 능력을 뜻합니다.

 

※ 역시 창세기 본문에서는 주님의 두 번째 합리적 능력, 곧 주님의 신성한 합리적 능력(the Lord’s Divine rational)을 말합니다.

 

사라는 지식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애정(affection)을 뜻합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이삭이라는 합리적 능력이 어떤 성격인지 짐작할 수 있는데요, 즉 첫 번째 합리적 능력인 이스마엘이 인간의 지식을 바탕으로 한 인간의 합리적 능력이라면, 두 번째 합리적 능력인 이삭은 하나님의 진리를 바탕으로 한 거룩한 합리적 능력인 것입니다. 바로 그 거룩한 합리적 능력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진리인 말씀의 내적 의미, 곧 아르카나(arcana)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 후자는 너무 높고 깊어 전자로는 쳐다볼 수도, 이해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주님이 그 태생적 인성(human)을 신성(Divine Human)으로 갈아입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주님에 관한 모든 것, 곧 모든 신령한 진리, 천국에 속한 진리들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고, 그 결과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마리아의 몸을 빌려 태어나신 후, 부단한 영적 전투를 통해 마침내 십자가에서 이기심으로써 영광의 몸, 곧 신성으로 갈아입으셔야만 했던 이유입니다.

 

이삭을 얻은 후에 아브라함은 결국 하갈과 이스마엘을 집에서 내보냅니다.

 

8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베풀었더라 9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 10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므로 11아브라함이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그 일이 매우 근심이 되었더니 12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13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14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하니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더니 (창21:8-14)

 

문자적으로만 보면, 참 냉정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만, 그러나 이 말씀의 영적 의미는, 거듭나는 동안 첫 번째 합리적 능력과의 결별을 의미합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합리적 능력을 그대로 두면,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합리적 능력을 대적하거나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누구나 때가 되면, 첫 번째 합리적 능력을 버려야 합니다.

 

※ 즉, 세상 지식과 세상 경험을 가지고 주님의 일, 주님의 신비를 살피려는 태도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 말씀하신, 낙타가 바늘귀 통과하는 비유인데요, 대부분의 신학교 교수, 그리고 유튜브에 나와 대담하는 많은 신학자 류(類)의 경우, 일단 해당 주제에 관한 많은 견해, 입장들을 좍 나열한 후, 끝에 자기 생각을 보탭니다. 연역이든 귀납이든 뭐, 하나의 방법론이니 그런가 보다 할 수 있지만, 문제는 주님이 어떤 분이신가 보다는 ‘자, 나는 이렇게 이 주제에 대한 열린 마음의 소유자입니다. 저는 극단적이지 않습니다’라는 사실에 더 초점을 맞춘듯하다는, 그러니까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고 있는지보다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공감을 더 많이 끌어낼 수 있을까에만 초점을 맞추는듯하다는 것입니다. ‘제가 경험한 주님은 이런 분입니다. 제게 나타나신 신은 이런 신이셨습니다’하는 신학자는 거의 보질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 두 번째 합리적 능력이 생기기 직전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바로 앞 절인 9절 말씀,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창18:9)

 

에 의하면, 여기서 말을 하는 사람들, 즉 ‘그들’은 한 분 주님을 이루는 세 가지 본질을 나타내는데요, 이를 최대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중심으로 설명합니다.

 

이 세 본질은, 사실은 신성 자체(Divine itself)이시며, 신적 인성(Divine Human)이시고, 신성의 활동(Holy proceeding)이신 한 분 여호와 하나님을 뜻하는 것입니다. 신성 자체라는 말은 존재 자체이시며, 동시에 사랑과 선 그 자체이신 여호와를 뜻합니다. 그리고 신적 인성은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여호와 하나님, 즉 예수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신적 인성이신 예수는 본질적으로는 존재 자체이신 신성의 드러나심이며, 동시에 무한한 사랑에서 비롯한 진리이신 분입니다. 신성의 활동은 신적 인성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신성의 능력, 즉 성령을 뜻합니다. 성령을 다르게 표현하면 진리를 통해 발현되는 선의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성의 능력이 곧 성령이시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시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9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요20:19-22)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는 ‘그들’은 사실은 셋이 아닌 한 분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은 세상에 오신 주님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네게로 돌아오겠다는 말씀은 주님 안에서 여호와 하나님이신 신성과 예수 그리스도이신 인성이 결합하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신성과 인성의 결합을 이루시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사람이신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야 인간들이 하나님과 결합할 수 있고, 그래야 신적 진리들을 이해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이 되시는 과정은 혹독한 시험의 연속이었습니다.

 

※ 복음서에 보면, ‘주님이 시험받으시는 장면은 몇 없는데 왜 혹독한 시험의 연속이라 하는가?’ 하실 텐데요, 사실은 주님의 어린 시절 및 청소년, 청년기 모든 과정이 창세기 12장 이하에 속뜻으로 다 기술되어 있어 그러는 것이고요, 그 시험이 혹독하다고 하는 건, 사람이 받는 시험은 그가 사랑하는 대상에 비례하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기껏해야 자기 사랑, 혹은 가족을 포함한 주위 몇 사람이 전부이지만, 주님은 인류 전체를 사랑하셨어요. 그래서 지옥도 우리한테는 몇 명의 악령이면 충분하지만, 주님께는 지옥 전체가 달려들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시험을 ‘혹독한 시험의 연속’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 시험을 이길 때마다 주님의 겉 사람인 인성은 속 사람인 신성과 하나가 되어 갔습니다. 신성과 인성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는 주님의 겉 사람을 이루는 모든 생각과 의지들이 신성한 진리와 선 그 자체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몸 안에 신성이 머무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 그 자체가 신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시나요? 그래서 주님의 영화는 인간의 거듭남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인간의 거듭남은 주님을 닮는 것이지만, 주님의 영화는 주님이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셨습니다.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씀은 주님의 영화의 과정에서 두 번째 합리적 능력이 곧 열릴 것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이때는 주님에게 이스마엘이라고 하는 첫 번째 합리적 능력이 열려 있는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이 첫 번째 합리적 능력은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잔재가 섞인 순수하지 않은 인간적 합리적 능력입니다. 반면, 이제 이 두 번째 합리적 능력이 열린다는 건 신성에서 비롯한 순수하고 거룩한 합리적 능력이 열리는 걸 의미합니다. 그 거룩한 합리적 능력이 열릴 때, 그것을 통해 주님의 인성은 빠르게 신성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을 연결하여 주는 중간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이 합리적 능력이라는 영적 지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직 두 번째 합리적 능력이 생기기 전이라는 것은 주님의 인성이 아직은 신성과 결합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그러므로 거룩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말씀에는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라고 합니다.

 

사라는 주님의 합리적 사람 안에 있는 진리, 즉 합리적 진리(rational truth)를 뜻합니다. 그리고 사라의 남편 아브라함은 주님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특별히 합리적 진리와 결합한 합리적 선(rational good)을 뜻합니다.

 

※ 여기 이런 표현들, 즉 ‘주님의 합리적 사람 안에 있는 진리, 즉 합리적 진리’ 같은... 이런 표현들이 좀 어려우시지요? 네, 저도 이런 게 많이 마음에 걸립니다. 거의 다들 이런 설교는 어렵고 지루하실 것 같아서지요. 이 말씀의 속뜻을 풀어드리는 설교는 참 귀하고 좋은데, 딱 한 가지, 우리한테는 어렵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준비하는 저도 결코 쉽지가 않아요. 아마 제 역량의 한계이지 싶습니다. 이동원 목사님이나 강문호 목사님 같은 이름난 설교가들이시라면 아마 이런 설교도 참 재미나게 잘 전하실 것 같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창12 이후 등장인물들은 주님을 표상합니다. 다들 자기 인생을 살다 갔지만, 사실은 자기도 모르게 주님 역할을 하다 간 것이지요. 그중엔 선인도 있고, 악인도 있어요. 그리고 많은 전쟁도 있지요. 이런 것이 모두 주님과 주님의 내면에서 있었던 영적 전투를 표상하는 것입니다. 우리처럼 인성(human)을 입고 태어나신 주님은 여전히 그 속 사람은 신성(Divine), 즉 금수저 중에서도 금수저이셨으면서도 결코 쉬운 길을 안 가시고, 대신 철저히, 아주 철저히 우리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영적 전투를 다 치루신 후,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피날레인 십자가에서도 완벽하게 이기신 것이고요. 인간으로서 치룰 수 있는 모든 시험을 남김없이 통과하셨으므로, 그때 주님은 그 인성을 벗고 신성으로 옷 입으셨으며, 그 몸 또한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몸의 부활은 오직 주님께만 가능한 것이었다고!

 

우리는 오직 영으로만 부활합니다. 바울의 서신서 중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오지요.

 

16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살전4:16-17)

 

이런 구절들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몸의 부활을 믿고 사모하는데요, 그러나 사실은 몸의 부활은 주님한테서 한번 일어나는 걸로 끝입니다. 만일 우리한테도 주님처럼 저런 몸의 부활이 일어나면 오히려 큰일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임종 후 사흘이 지나 영계에서 눈을 뜨는데요, 그게 곧 우리의 부활이며, 그때 우리한테는 영의 몸이 주어져 눈뜰 때 이미 자신이 영체를 입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천국이든 지옥이든 오직 영, 곧 속 사람으로만 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지상 물질은 일체 반입 금지이며, 우리는 신이 아니므로 우리 몸이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는 건 있을 수 없습니다.

 

사도들의 서신서들은 성경에는 포함되어 있지만, 주의 말씀은 아닙니다. 그 안에 속뜻이 없기 때문입니다. 속뜻 없는 글들까지 성경에 포함시킨 건, 오늘의 성경 66권이 있기까지 구약은 구약대로, 그리고 신약 역시 역사적으로 수차례 있었던 카톨릭 공의회에서 결정된 것인데, 그때 참여한 추기경들이 아직 말씀의 속뜻에 대해 그 내면이 열리지 않았고, 단지 자기들이 정한 몇 가지 기준에 부합하는 여부만 살폈기 때문입니다. 속뜻이 있는 성경은 천사들이 읽을 수 있지만, 없는 성경은 천사들은 읽을 수 없습니다. 겉뜻만 있기 때문이지요. 신구약 66권 중 구약은 29권, 신약은 5권에만 속뜻이 있으며, 그러므로 이들만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한 저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보낸 편지 내용은 그냥 바울의 사견일 뿐입니다.

 

천국을 다녀왔다는 많은 사람이 유튜브나 인터넷에 있는데 특이한 건, 그들이 진술하는 천국이 조금씩 다 달라요. 이상하지요? 제 생각에 이것은 천국의 그 모든 외관은 보는 자의 역량에 맞추어지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니까 보는 사람이 원하는 대로, 그리고 그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형태로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한테는 사람의 부활에 대해 평소 저런 선입견이 있었던 것 같아요. 혹시 바울이 저 진술을 영적 체험을 하고 나서 한 거라면 틀림없습니다. 바울처럼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은 천국도 자기가 보고픈 대로만 보기 때문입니다. 정말 천국을 있는 그대로 보기 원한다면, 그리고 알기 원한다면 어린아이 같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모든 걸 허락하시거든요. 스베덴보리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의 서신서에서 어떤 걸 인용하는 건 안전하지 않은 일입니다. 될 수 있으면 피하시길 권하며, 꼭 인용하셔야 한다면, 신약에서는 복음서들과 계시록에서만, 구약에서는 창, 출, 레, 민, 신, 수, 삿, 삼상, 삼하, 왕상, 왕하, 시, 사, 렘, 애, 겔, 단, 호, 욜, 암, 옵, 욘, 미, 나, 합, 습, 학, 슥, 말에서만 하시기를 권합니다. 아래 내용은 바울에 관한 스베덴보리의 기록입니다. 참고하세요.

 

...복음을 전하기 전에 그가 올무에 빠져있던 자아애가 그 후에도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 이후의 대부분의 시기도 그런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자아애와 자기의 기질에 휘둘려, 격동의 장(場)에 있기를 원하였다. 천국에서 가장 큰 자가 되고, 이스라엘 족을 심판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그는 모든 것을 했다. 그가 그 후에도 그러한 상태에 머물렀다는 것은 매우 많은 경험으로 분명하다. 왜냐하면 나는 다른 이보다 더 많이 그와 대화했기 때문이다. 실로 그는 그러한 자였기 때문에, 그곳 다른 사도들은 그를 벗 삼으려 하지 않고, 자기들의 일원으로도 여기지 않고 있다... 그가 신약성서의 서간을 쓴 것은 그의 내면도 그와 같다는 증거는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경건치 못한 자도 좋은 설교를 하고, 서간을 쓸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전해진 것처럼, 말하고 쓰는 것과 그 사람이 어떠한지는 별개의 문제다. 게다가 그는 그의 서간 중에 주님께서 가르치신 말씀의 한마디도 말하고 있지 않으며, 주님의 비유의 말씀 중 한 가지도 인용하고 있지 않다. 이렇게 그는 주님의 생애나 그 말씀으로부터 아무것도 받지 않았다...

 

...바울의 사도서간이 속뜻이 없다는 것은 영계에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편지는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속뜻이 담긴 주님의 말씀에 악을 행하지 못하도록 교회 안에 허락되어 있다. 만약 사람이 악한 생활을 하면서도 거룩한 말씀을 믿는다면, 그 사람은 천국에 악을 행하는 것이다. 이러므로 바울의 편지가 허락되어 있으나, 바울 자신에게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비유의 말씀이나 주님께서 가르치신 교리 중 하나라도 그것을 들어 설명하거나 밝히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것이다. 바울은 모든 것을 주님으로부터가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 취했다. 교회는 분명 주님의 말씀을 설명하고는 있으나 바울의 서간을 수단으로 함으로 교회 도처에서 사랑의 선을 떠난 신앙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주님은 오직 인애의 선이 모든 것이 되도록 하는 길로만 가르치셨다...  //

 

사람의 마음을 이루는 생각(understanding)과 의지(will)는 본질적으로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good)과 진리(truth)이거나 지옥에서 오는 악(evil)과 거짓(falsity)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듭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등차(degree)가 다른 수많은 선과 진리들이 있습니다. 속 사람(internal man)의 선과 진리가 있고, 겉 사람(external man)의 선과 진리가 있으며,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 합리적 사람(rational man)을 이루는 선과 진리가 있습니다. 그 합리적 선과 합리적 진리가 바로 아브라함과 사라로 표상되는 선과 진리입니다.

 

그런데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곧 아브라함 뒤에서 들었다고 합니다. 사라가 아브라함 뒤에 있다는 것은 주님의 합리적 진리가 합리적 선과 아직 결합하지 못하고 분리된 상태를 의미하는데요, 이처럼 주님의 겉 사람 안에서 합리적 진리가 온전한 상태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그렇게 해서 거룩함이 떨어지는 이유는, 이스마엘이라고 하는, 인간의 합리적 능력(human rational) 때문입니다. ‘천국의 비밀’ 2196:2항은 인간의 합리적 능력이 신성한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인간의 합리적 진리는 신성한 것들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신성한 것들은 인간의 진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밖에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합리적 진리는 겉 사람 안의 기억의 지식과 소통하며 그러므로 그 상태에서 자신보다 높이 있는 것을 바라보면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같은 글 4항 이하에서는 인간적 합리적 능력이 신성한 진리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몇 가지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첫째, 인간적 합리적 능력은 겉으로 나타나는 외관(appearance)만 보고 사람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선을 행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사람에게서는 어떤 선도 나오지 않고 악만 나올 뿐이다.

 

둘째, 인간적 합리적 능력은 사람이 선을 행함으로써 스스로 구원받을 공로를 얻는다라고 말하지만, 그러나 사람에게는 구원에 관한 어떤 공로(merit)도 없고 오직 주님에게만 공로가 있다.

 

셋째, 인간적 합리적 능력은 어떤 사람도 자기 자신보다 이웃을 사랑할 수는 없고, 모든 사랑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하지만, 천국의 사랑 안에는 자아에 대한 사랑은 조금도 없다.

 

주님의 안에도 아직 인성이셨을 때는 이스마엘로 표상되는 이런 순수하지 않은 진리들이 있었습니다. 그것들이 사라로 표상되는 합리적 진리가 흘러들어올 때,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러므로 온전히 받아들이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첫 번째 합리적 능력이 자기보다 높은 차원의 합리적 능력을 방해하고 심지어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아래 말씀처럼 말입니다.

 

8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베풀었더라 9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 10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므로 (창21:8-10)

 

그렇기 때문에 거듭나는 과정에 있는 사람은, 때가 되면 인간적인 합리적 능력을 버리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거룩한 합리적 능력을 새롭게 입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억압과 불화 부조리가 있고, 그로 인한 고통들이 있습니다. 만약 그것들을 물질이나 인간의 지식으로 해결하려고 한다면 구원은 영원히 없을 것입니다. 거듭나는 사람들에게 물질은 또 다른 억압을 낳고, 인간의 지식은 또 다른 굴레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젠가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물질이나 인간의 지식이 삶의 목적이 될 때, 그것은 결국 불의한 것이 됩니다. 그러나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를 위한 도구가 된다면 그것은 우리의 친구가 됩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모든 억압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자유와 평화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을 살며 습득한 모든 세상 지식과 경험 또한 그렇습니다. 그동안은 이것들이 우리의 주인이었다면, 이제는 새롭게 주님이 우리의 주인 되시고, 이것들은 주님을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이 복되고 안전합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6:33)

 

아멘

 

원본

2021-10-03(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5-04-27(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4-27(D1)-주일예배(2595, 창18,10), '우리의 이성(理性, the rational)이 거듭나야 하는 이유'.pdf
0.62MB
heaven_and_hell, 581.pdf
1.77MB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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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일에서 한발 물러나기 (2025/4/25)

 

천국에 대해 더욱 알아갈수록 시야, 그러니까 세상일에 대한 시야가 점점 또렷해지고, 그에 따른 마음이 더욱 평안하여짐을 뚜렷하게 느낍니다. 주님 말씀하신,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14:27)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16:33)

 

비로소 이 말씀들의 의미를 알 것도 같습니다.

 

사실 우리가 이 땅에서 근심하고 걱정, 염려하는 것들을, 그러나 하늘의 천사들은 전혀 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니 할 수도 없는 게, 그들은 삼위일체 전능하신 하나님을 주님으로 매 순간 그분의 면전에서 살며, 그분에 관한 신성을 호흡, 곧 선과 진리로 가득한 천국의 대기 가운데 호흡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단 한 순간도 주님을 떠나 살 수도, 깜빡 주님을 까먹고 뭘 할 수도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루 24시간 주목하는 대상과 천사들이 주목하는 대상의 차이가 이런 차이를 가져옵니다. 주목한다는 건 사랑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곧 그럼, 세상 직업 버리고, 산속이나 골방에서 신령한 책만 읽고, 수도 생활만 하라는 말이겠습니까? 그게 아닌 게, 오히려 세상 등지고 산속에 들어간 사람들 중 상당수가 겉보기와는 달리 그 속은 여전히 세상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무슨 봉쇄 수도를 한다고 해서 저 천사들처럼 저절로 주님과 연결되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사11:9)

 

우리의 신앙이 참 신앙이 되려면, 이 말씀처럼 세상 지식으로 충만할 게 아니라 여호와를 아는 지식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 한 가지 방법은 천국을 아는 것인데요, 그러면 그런 천국을 설계하신 분 또한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방법이라 했지만, 사실은 아마 거의 유일한 방법일 겁니다. 우리는 주님을 직접 알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천국을 통해 간접적으로 아는 게 아마 가장 확실한, 그리고 유일한 방법일 것입니다. 제가 경험한 바로는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천국을 알 수 있는, 역시 거의 유일한 방법은 주님의 허락으로 천국을 가 본, 그리고 역시 주님의 허락으로 지상 언어로 기술한 사람이 남긴 기록을 접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기록이 있겠지만, 저의 경우는 스베덴보리(Emanuel Swedenborg, 1688-1772, 스웨덴)라는 사람이 남긴 기록으로, 그의 수많은 저서 중 ‘천국과 지옥’(Heaven and Its Wonders and Hell From Things Heard and Seen, 1758, 라틴, 김은경 역)이라는 책을 통해서였습니다. 물론 주님의 허락으로 직접 천국을 다녀오는 방법도 있으나 이건 우리가 뭐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라서 좀...

 

이 글 제목처럼 세상일에서 한발 물러나는 걸 익히기 위해서는 먼저 알아야 할 사실이 있는데요, 바로 질서에 관한 것입니다.

 

두 종류의 질서가 있습니다. 하나는 밑에서 위를 추구하는 게 있고, 다른 하나는 그 정반대, 곧 위에서 밑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질서가 있습니다. 후자가 참 질서이며, 거룩한 질서, 신성한 질서(Divine order)입니다. 바로 그 근원이 주님이시기 때문이지요. 반면, 전자는 진리를 역행함, 곧 주님이 ‘바늘귀로 들어가려는 낙타’(마19:24)로 표현하신 불가능한 질서입니다. 이는 그 근원이 인간의 자아이며, 이 세상이어서 그 결과는 지옥입니다. 후자는 천국이지만 말입니다.

 

분명, 세상 지식이 전혀 없으면 우리는 이 땅에 살 수도 없고, 거듭남의 첫발도 뗄 수 없을 겁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로 하여금 처음 세상 지식을 통해 이 세상 삶 걸음마를 떼도록 하신 것은 우리를 거듭남 전 과정에 입문케 하시기 위함이었고, 그러므로 그 역할을 다했으면 이제 세상 지식은 옆으로 비켜나고, 우리는 주님의 인도를 받아 거듭남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 이것이 주님의 질서이며, 주님 또한 이런 순서를 밟아 그 처음 인성(human)을 거룩한 인성(Divine Human)으로 갈아입으셨습니다.

 

주님의 질서는, 주님을 근원으로 출발, 천국을 적시고, 우리 거듭남을 시작한 사람의 속 사람으로, 그리고 최종 겉 사람에 종착하는 질서입니다. 우리의 겉 사람이 주님 신성이 흘러들어오는 속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 이것이 주님의 질서입니다. 사람이 이 질서 안에 있게 되면, 세상일에서 한발 물러날 수 있게 됩니다. 사람이 세상일에서 물러나는 만큼, 그는 주님의 임재에 사로잡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일에 붙잡혀 있으면, 주님은 우리에게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심지어 나라 사랑도 그 안에 주님이 안 보이실 경우는 말입니다.

 

천국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래서 그런 천국을 설계하신 분의 어떠하심을 깊이 느끼면 느낄수록 세상 근심 걱정이 희미해져 갑니다. 참 질서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위 요한복음 말씀에서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하셨어요.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고 말입니다. ‘나 떠나고 큰 환난이 올 텐데 너희는 나의 제자이니 내가 특별히 너희만큼은 환난을 피하게 해주마...

 

제가 참 좋아하는, ‘천국과 지옥’ 31장, ‘천국 천사들의 순진한 상태(The State of Innocence of the Angels of Heaven, 276-283) 중 278번 글 일부 인용으로 마칩니다.

 

그들은 많든 적든 자기가 가진 것으로 만족한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필요한 만큼만 주어진다는 것을, 즉 조금 필요한 사람은 조금 받고, 많이 필요한 사람은 많이 받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무엇이 우리에게 좋은지 우리는 모른다는 것, 오직 모든 것을 살피시고 영원한 것을 섭리하시는 주님만이 아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They live contented with their own, whether it is little or much, because they know that they receive just as much as is good for them— those receiving little for whom a little is useful, and those receiving much for whom much is useful; also they do not themselves know what is good for them, the Lord alone knowing this, who looks in all things that he provides to what is eternal. (HH.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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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방이 듣고 싶어 하는 말로 대답하기 (2025/4/23)

 

이 말은 얼핏 상대방에게 아부하라는 말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그런 말이 아니라 상대방이 감당할 수 있는 말로 대답하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내면이 열린 만큼만 들으며,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브리엘 앞에 사가랴처럼, 주님이 말씀하시는데 들을 역량이 안 되면 그가 들릴 때까지 잠시 벙어리가 되는 일도 일어나지요. 그러니까 이젠 그만 깨달아야 하는데 자만과 교만, 자기 사랑, 세상 사랑 등으로 좀체 정신 못 차리면 차릴 때까지 다시, 다시 하며 비슷한 패턴의 불행한 일이 계속 반복되기도 합니다. 제 경우엔, 기억나는 큰 것만 한 서너 가지가 있었네요... 이 역시 우리를 성장케 하시는 주님의 사랑의 섭리이시지만, 그러나 그 과정을 통과하는 본인은 죽을 맛입니다.

 

다른 말로는 하나님이 듣고 싶어 하시는 대답을 하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즉 정답을 말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해야 한다는 것은, 세상에 태어나 어떤 인생을 살든 결국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니까요. 창세기를 비롯, 구약 중 말씀에 등장하는 등장인물들 하나하나가 사실은 주님의 표상이었듯 우리네 인생 역시 둘 사이 대화든 셋 사이 대화든, 아니 그 이상이든 사실은 주님 앞에 입을 여는 것입니다. 바로 앞에 요셉이 그랬고, 요셉 앞에 유다가 그랬으며, 여러 왕을 섬겼던 다니엘이 그랬습니다. 이슬에 젖으며 짐승처럼 풀을 먹던 느부갓네살이 그랬고, 완전 상거지가 되어 아버지를 찾아간 둘째 또한 그랬습니다. 

 

26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7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28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29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중에서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30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민14:26-30)

 

그냥 힘들어 무심코, 그리고 부주의하게 내뱉은 불평 한마디 한마디가 사실은 하나님 앞에 하는 것임을 저들은 몰랐던 것입니다.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무서운 말씀입니다.  

 

천사들이 늘 주님의 얼굴을 향하듯, 사실은 주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천사들을 늘 주님을 향하게 하시는 것이지만, 세상 가운데서 구별되어 사실은 늘 주님을 향하고 있는 우리 역시 깨어있어야 하겠습니다. 단순한 일대일 대화든지, 일대다 무슨 팀 회의든지 우리는 늘 주님을 생각하고 입을 열어야 하겠습니다. 천사들이 전하는 말은 100% 주님 뜻, 자기 생각은 전혀 그 안에 담기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흐릿하고 모자라지만, 그래도 천진난만하게 저 천사들처럼 주님을 바라면 저들과 똑같이 지금도 주님은 그때그때 해야 할 말을 우리 입에 넣어주십니다. 아래 말씀처럼 말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14:26)  

 

덧붙이자면, 그러므로 누가 나한테 하는 말에 너무 일희일비할 필요 없습니다. 무시와 모욕, 수치를 당해도 그러려니... 즉, ‘주님의 무슨 허락 있으신 게지...’ 하고, 칭찬과 영광 앞에서는 ‘이런 건 주님이 받으셔야...’ 하는 게 안전합니다. 중요한 건, 나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가 아니라 내 모습으로 계신 주님을 향한 사람들의 평가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집중하시면, 그다음부터는 사람들이 나에 대해 뭐라 하던 잘 안 들립니다. 그냥 덤덤해지지요. 잘 모르겠으면, 천사들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들 할까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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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이단(heresy)인가? (2025/4/21)

 

오늘날 저마다 무슨 이단 대책 위원회다, 이단 심판, 혹은 판정 위원회다 하여 열심히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정성을 다합니다. ‘현대종교’라는 앱을 켜면 수많은 이단 목록이 나오지요. 전에는 저도 여기를 자주 찾곤 했습니다. 이 모든 분들의 노고를 모르는 바 아니며, 한편으론 감사한 마음도 있습니다.

 

시야가 좀 더 높아진, 그리고 넓어진 지금은, 그러나 이 ‘이단’(heresy)에 대한 생각이 좀 달라졌습니다. 지금의 저 이단 판정의 기준은 ‘교리’인데요, 즉 내 교리를 기준으로 봤을 때, 너는 틀렸다 판정하는 것이 지금의 이단 판정입니다. 교리라는 것은 진리에서 추출하는 것이므로, 그러니까 내가 진리라고 믿는 것들로 봤을 때, 네가 믿는 진리는 틀렸다는 것이죠.

 

이런 모습은 ‘영적인 사람들’(the spiritual)의 일반적 특징인데요, 놀라운 것은, 이들은 ‘지적인 면’(the intellectual part)으로만 거듭날 수 있어, 주님은 이들 역시 온전한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새로운 의지를 심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저마다 믿는 그 교리 눈높이에 맞춰서 말이죠. 그러니까 누구나 자기가 믿는 교리에 따라 선을 행하면 천국 가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거기 묻은 좀 어설픈 오류들은 천국에 오르기 전 다 정돈되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중요한 건, 교리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자기 교리에 녹아져 들어간 주님의 신성을 따라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천국에 합당한 선이 구비되기 때문인데, 천국은 선의 나라이므로 이는 매우 중요한 필수 구비 요건 중 하나입니다. 참고로, 그러나 이 선을 행하는 것 또한 오직 주님으로만 말미암는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첫 번째 책 창세기에 나오는 첫 번째 이단이 가인입니다. 창세기 첫 1, 2, 3장의 태고교회는 사랑으로 주님을 신앙하는 교회였으나, 창세기 4장,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는 사람들이 일어납니다. 바로 가인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가인과 아벨이 나오는데요, 이들의 속뜻을 살펴보면,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를 ‘가인’(Cain)이라 하고, 이웃을 향한 사랑인 체어리티(charity, 이웃 사랑)를 ‘아벨’(Abel)이라고 합니다.

 

이것입니다. 이것이 이단의 기준입니다. 즉 가인 편에 서면 이단, 아벨 편에 서면 정통(?), 그러니까 안전합니다. 자신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사랑과 신앙이 일치하는가? 그러니까 나는 주님 사랑 따로, 주님 신앙 따로인가 아닌가 말이죠. 말로만, 립 서비스로만 이웃 사랑을 하고 있는 건 아닌가 말입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글 쓰는 저 자신도 여기서 자유롭지 못하네요... 어쩌면 우리 모두 여전히 가인의 후손, 후예인지 모르겠어요. 이런 우리를 건사하여 주시는 주님, 진심으로 고맙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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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1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2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3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4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7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8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10(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11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12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눅24:1-12)

 

 

사람의 생명에 속한 모든 것은 내적인 것에서 외적인 것으로 차례로 흘러들어온다. 외적인 것은 호감이 느껴지는 기억의 지식과 가장 바깥쪽의 것인 감각에 속한 것인데, 감각에 속한 것이란,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만짐으로써 세상과 소통하는 것이다. 외적인 것에 내적인 것들이 머무는 까닭은 내적인 것의 흐름이 거기서 끝나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로 사람이 걸치는 피복이나 옷으로 나타내어지는 것은 바로 이 외적인 것을 말한다. (천국의 비밀 9216:2, 이순철 역) It is the same with all things that belong to man’s very life, as with those which relate to his understanding, and those which relate to his will. These also follow in order from interior to exterior things. Exterior things are memory-knowledges with their pleasant feelings; and outermost things are those of the senses, which communicate with the world by the sight, the hearing, the taste, the smell, and the touch. Upon these the interior things rest, for in these they terminate. These are the things which are signified in the spiritual sense by the “covering” or “garment wherein he may sleep.” (AC.9216:2, 출22:26,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의 풀이 중)

 

 

※ 이 원고 중 ‘’ 표시는 원고에 없는, 제가 더한 보충 설명입니다. 이 설명은 한 단락일 경우는 뒤에 아무 마감 표시가 없지만, 두 단락이 넘어가면 ‘//’로 마감합니다. 비록 원고일지라도 상당 부분 우리 교회 실정에 맞게 좀 다듬었습니다. 원고 사용에 관한 원 저자의 사전 허락을 받았습니다.

 

※ 오늘은 기독교의 부활절입니다. 주님 오신 성탄절, 그리고 가을 추수감사절과 함께 중요한 절기이지요. 그래서 ‘부활’에 관한 지난 설교 한 편을 다시 기억하고자 합니다.

 

 

주님은 왜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받고 죽었다 다시 사셨을까요? 그와 관련해 스베덴보리 저,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9216번 글 2항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의 생명에 속한 모든 것은 내적인 것에서 외적인 것으로 차례로 흘러들어온다... 외적인 것에 내적인 것들이 머무는 까닭은 내적인 것의 흐름이 거기서 끝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여러 가지로 이해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가장 내적 존재인 주님은 가장 외적 존재인 인간에게로 오셔서 영원히 그와 함께 살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섭리입니다. 영원 전부터 계신 무한하신 주님이 당신의 피조물인 유한한 인간과 영원히 함께 살기를 원하신다는 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은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실 정도로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지극히 높은 천국으로부터 지극히 낮은 땅으로 내려오셔서 모진 고난을 이기시고, 신성하고 완전한 진리가 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진리를 통해서만 인간은 주님을 바르게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최근 ‘유월절’에 관한 속뜻 공부를 하면서 새롭게 알게 된 놀라운 사실들이 있는데 오늘 여기서 그걸 자세히 다룰 수는 없어 중요한 몇 문장에 대한 번역으로 대신합니다.

 

1. ‘영적인 사람들’(the spiritual)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지적인 면(the intellectual part)에서만 거듭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고, 의지적인 면(the will part)에서는 아니다. 그래서 그들의 지적인 면에 주님은 새로운 의지를 심어주시는데, 이 의지는 그들의 교회와 관련되는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을 따르는 의지다. (AC.6854)

 

※ 즉 영적인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는 이들의 신앙과 그에 따른 교리가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진리라고 믿는 것에서 교리를 추출하고, 그걸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인데요, 하지만 주님은 저들의 다양성을 인정, 거기에 맞춰 어떤 새로운 의지를 주신다는 겁니다.

 

2. 이들, 곧 이런 영적인 사람들은 오직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만 구원을 받았다. 그 이유는, 천국을 통과하는 신성(the Divine passing through heaven), 이 신성은 주님이 오시기 전 신적 인성(the Divine human before the Lord’s coming)이었는데, 이 신성은 그들에게 도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 교회의 교리적인 것들 때문이었는데, 그것들은 대부분 진리가 아니었고, 그 결과 그 의지에서 나오는 선은 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AC.6427)

 

3. 그들은 오직 주님이 오셔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었고, 그래서 그전엔 천국에 올라갈 수 없었으며, 그래서 그들은 그동안 ‘낮은 땅’(the lower earth)이라는 곳에 보내어져 돌봄 받고 있었다. 이곳은 말씀에서 ‘구덩이’(pits)라고 하는 곳이다. 이 땅은 거짓이 가득한 지옥들로 둘러싸여 있었고, 그 거짓으로 인해 그들은 심하게 감염되었지만, 그러나 주님이 그들을 보호하셨다.

 

4. 그러나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스스로 인성(the human)을 신성(Divine)으로 만드신 후, 이 ‘구덩이’에 있던 사람들을 구원, 천국으로 올려보내셨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영적 천국, 즉 이층천을 만드셨는데, 이것이 주님이 더 낮은 지역으로 내려오셔서 갇힌 자들을 구원하신다는,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출3:8)라는 말씀의 속뜻이다.

 

5. ‘영적인 사람들’(the spiritual)은 그 신앙의 진리와 선에 있어 흐릿, 모호하다. (AC.2708, 2715, 2718, 2831, 2849, 2935, 2937, 3241, 3833, 6289)

 

6. 그들의 흐릿함, 모호함(obscurity)은 주님의 신적 인성에 의해 조명, 그러니까 밝혀진다. (AC.2716, 4402)

 

7. 그들은 신앙의 진리와 선에 있어 흐릿하고 모호하기 때문에 지옥의 공격을 많이 받지만, 주님은 그들을 끊임없이 보호하신다. (AC.6419)

 

8. 영적인 사람들은 의지적인 면으로는 거듭날 수 없고, 단지 지적인 면으로만이지만, 주님에 의해 거기에 새 의지가 형성된다. (AC.863, 875, 895, 927, 928, 1023, 1043, 1044, 2256, 4328, 4493, 5113)

 

9. 영적인 사람들은 주님이 세상에 오심으로 구원을 받았다. (AC.2833, 2834, 3969)

 

그러니까 영원하신 창조주 주님은 단지 이 세대뿐 아니라 홍수 이후 주님 오시기 전 인류의 구원에 대해서도 늘 마음을 기울이고 계셨던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이 더 주(主, 메인)였고, 주님 후 세대인 우리는 그저 그 혜택을 받고 있었을 뿐이구나 싶습니다. 이것이 ‘유월절’, 곧 주님이 성육신하여 세상에 오신 주된 이유입니다.

 

내용이 좀 어리둥절하지요? 네, 저도 좀 그렇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아는 진리는 사실은 겨우 요만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담는 그릇인데, 지금은 이 그릇의 크기가 겨우 요 정도이기 때문이지요. 비유하자면, 발전, 송전, 배전으로 구성된 전기 이야기인데요, 역시 처음 댐이나 발전소에서 생성된 몇십만 볼트의 전기가 가정집에 맞는 볼트가 되기까지 낮추고 또 낮춰 220볼트가 되듯 주님도 그렇게 진리의 근원이신 주님을 우리 역량에 맞춰 허락하시는 것으로 이해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그러니까 기록된 성경만 신앙과 삶의 유일한 기준으로 삼겠다는, 즉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태도는, 물론 중세 때 카톨릭의 극심한 타락으로 루터, 멜랑히톤, 쯔빙글리, 칼빈 등이 일어나 이를 바로잡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었어서 그 배경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지만, 이 또한 지나쳐 주님으로부터 오는 또 다른 형태의 계시는 모두 차단하는 우를 범하는, 그러니까 구더기 무섭다고 장 담그는 걸 포기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는 영계, 즉 천국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인데요, 주님을 사랑하되 순진하게 그냥 뭘 몰라서였다면 몰라도 아니라면, 너무 이런 태도에 함몰되는 것은 그건 무슨 신념도 고백도 아닌, 그저 주님을 모독하는 게 될 수 있으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

 

 

오늘 본문 1절은 완전하고 신성한 진리로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 만나는 사람들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습니다.

 

1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새벽은 영적으로는 주님과 주님의 나라가 임하는 때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부활하신 주님이 완전한 진리로 인간 앞에 모습을 드러내시는 때이며, 동시에 그 진리를 가지고 낡고 부패한 교회를 심판, 새로운 교회를 여시는 때입니다. 그때가 새벽입니다.

 

※ 여자들이 이렇게 안식일이 끝나자마자 새벽같이 무덤으로 찾아간 이유는, 주님 운명하신 첫날, 주님을 장사할 때, 바로 코앞이 안식일의 시작이라 부랴부랴 서두르느라 미처 주님 시신에 향품 바를 새도 없었기 때문이고, 또 관습적으로 장례 때 죽은 시신에 향품 바르는 일은 오직 여자들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여자들이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여자들은, 진리를 사랑하여 참된 진리이신 주님을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심판 때 구원받을 사람들이며, 주님이 세우시는 새 교회에 참여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자들은 부활하신, 그래서 살아 계신 주님이 아니라 주님의 시신을 만나러 갑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있는 진리가 죽은 자의 시신처럼 아직은 생명 없는 진리라는 반증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시신은 죽은 진리, 즉 생명 없는, 말씀의 지식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처음 진리를 받아들일 때의 진리는 생명 없는 진리입니다. 그 이유는 처음에는 진리를 믿기만 할 뿐, 아직 행동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자들이 향품을 가지고 주님의 시신에 바르는 것은 죽은 것 같은 진리에 생명을 불어넣는 최초의 노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향품은 내적 진리를 획득하기 전, 신앙인들이 소유하는 자연적인 진리, 이를테면 십계명의 문자적인 가르침 같은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2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3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여자들이 무덤에 갔을 때, 무덤을 막았던 돌이 옮겨져 있었고, 그 안에는 시신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덤을 막은 돌은, 신앙인들의 내면에서 진리가 살아나는 것을 방해하는, 여러 가지 자아의 거짓을 뜻합니다. 예를 들면, 진리를 안다는 자부심이나 진리에 대한 잘못된 추론, 또는 그밖에 이기적인 악과 그것에서 비롯된 거짓들입니다. 우리 안에 그런 것들이 있는 동안에는 진리는 무덤 밖으로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처음에는 자연적 진리로, 그리고 다음에는 내적 진리로 말씀을 이해하고 지키려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에 의해 진리를 방해하던 거짓들이 물러갑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자아의 거짓을 물리칠 수 없고, 심지어 어떤 게 거짓인지도 잘 모릅니다. 거짓들은 마치 칡넝쿨이 나무를 감아 옴짝달싹 못 하게 하는 것처럼 진리가 자라는 걸 가로막습니다. 주님만이 그것들을 잘라내 치워주실 수 있습니다. 그때 죽었던 진리가 살아납니다. 바로 그런 상태가 무덤을 막았던 돌이 옮겨지는 것이고, 주님이 무덤에서 살아나시는 것입니다.

 

무덤을 막았던 돌이 옮겨진 걸 보고 들어갔는데, 정작 있어야 할 주님의 시신이 보이지 않자, 여자들은 어쩔 줄을 몰라 합니다. 그 모습, 그 상황을 4절로 6절에선 이렇게 전합니다.

 

4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한글 성경에는 여자들이 근심했다고 하지만, 영어 성경에는 perplex, 즉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공황 상태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셨는데 왜 여인들은 기뻐하는 대신 공황 상태에 빠졌을까요? 첫째는, 신앙인의 내면에서 진리가 살아나려면 자아에 속한 게 죽어야 하는데, 그때 모든 걸 잃은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진리가 살아났다 해도 처음 한동안은 진리가 나를 주장한다는 걸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 앞에 바로 나타나시지 않은 것과 같은 일일 것입니다. 한마디로, 내면에서 진리가 살아날 때, 신앙인들은 역설적으로 어디에도 기댈 진리가 없는 것 같은 상실감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인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것입니다.

 

※ 제가 그랬습니다. 저는 소위 모태신앙이라는 사람으로, 유아세례라는 것을 받은, 정말 이 나이 되도록 평생 교회 밖 세상에 있어 본 적이 없는,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평범한 기독교인입니다만, 그러나 지난 2017년 여름, 처음으로 스베덴보리를 접하여 이 새로운 계시를 받아들이던 초창기 땐 정말이지 얼마나 두려웠는지 모릅니다. 지난 세월 저를 떠받치고 있던 모든 신앙과 종교적 신념이 한꺼번에 떠나가는 듯했기 때문입니다. 그건 마치 고3 때 어머니를 갑자기 교통사고로 잃었던 트라우마를 훨씬 웃도는 일이었지요.

 

그때 그들 곁에 빛나는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두 사람은 누굴까요?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살아있는 진리인 주님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입은 빛나는 옷은 부활하신 주님에게서 나오는 가장 밝고 환한, 완전한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두 사람이 나타났다고 했을까요? 부활하신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리는 선만 있고 진리는 없거나, 진리만 있고 선은 없는 그런 진리가 아니라, 선과 진리가 함께 있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천사가 여인들에게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여인들은 전에 주님이 고난을 받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실 거라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으나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신앙이 아직 자연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직접 눈으로 봐야만 믿는 그런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31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32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33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34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눅18:31-34)

 

천사들을 보고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댑니다. 주님이 나타나셨을 때, 사람들이 두려워 떨거나 죽은 자처럼 되었다는 것은 말씀의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계시록을 쓴 요한도 주님의 발 앞에 죽은 자처럼 되었다고 했습니다. 다니엘도 그랬지요. 신앙인들이 그렇게 두려워하는 것은, 내면에서 어떤 영적 변화가 일어날 때 느끼는 불안과 공포를 의미합니다. 주님의 신성이 사람 안으로 임하실 때, 인간이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자들이 느끼는 두려움은 일종의 경건한 두려움입니다. 여자들에게 일어난 이러한 내면의 변화는, 그에게서 죽은 진리가 살아나는 것이며, 그로 인해 자연적 신앙이 영적 신앙으로 한 단계 올라서는 것입니다.

 

※ 그래서 저는 저희 혈육들을 비롯, 주위 많은 지인이 영적 체험을 좀 했으면 좋겠습니다. 기록된 겉 글자 신앙에만 갇혀 있지 말고, 그 안에 꿈틀대는 영계를 살짝살짝,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이라도 좀 주님이 허락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본인이 원해야 하지만 말입니다. 신령한 영적 체험은 두꺼운 껍질을 깨고, 저 높은 곳으로 도약하는 데 있어 큰 도움이 됩니다.

 

저는 지난날 제 안에 있는 악령을 어렴풋이나마 본 적이 있습니다. 물론 영안으로 보았겠지요. 정원 목사의 ‘대적기도’라는 책을 읽던 시절이었는데, 이 경험은 제가 신앙적으로 새로운 도약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참고로, 그러나 저런 체험보다는 이왕이면 천사를 만나는 그런 체험이면 더 좋겠습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평소 마음 상태가 천사가 찾아올 수 있는 상태여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

 

7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8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10(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11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여자들이 마침내 주님이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것을 기억해 내고는 무덤에서 돌아가 그 모든 것을 사도들에게 알렸습니다. 무덤은 속뜻으로는 그들이 죽은 진리를 만나던 곳이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 사용하던 곳입니다. 이를테면 진리의 지식이 보관된 내면의 기억 장소와 같은 곳이죠. 그러나 진리가 완전히 살아날 때, 이제는 애써 그곳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살아있는 진리, 살아 계신 주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면서 그때그때 필요한 진리를 공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14:26)

 

※ 이것이 퍼셉션(perception)입니다. 천사들이 천국에서 주님과 커뮤니케이션하는 방식인데, 그 내면이 열려있던 태고교회가 바로 지상에서 이 방식으로 주님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즉 주님의 뜻과 인도하심을 공부를 통해서, 학습해서 아는 게 아닌, 내가 묻거나 무슨 의문을 품을 때 내적으로 바로 답이 오는 그런 것입니다. 가령, 창세기에 나오는

 

8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창3:8-9)

 

와 같은 커뮤니케이션이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의 딕테이트(dictate)를 나의 내면, 곧 내 영이 듣는, 가장 고급하고 고차원적인 커뮤니케이션입니다. 비유하자면, 퍼셉션으로 아는 걸 햇빛으로 보는 것이라 한다면, 이 세상 학습을 통해 아는 건 달빛으로 보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

 

그것이 부활하신 주님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주님이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들은 사도들은 여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 역시 아직은 자연적 신앙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봐야만 믿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베드로가 주님의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12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베드로란 이름의 속뜻은 진리에 대한 순종입니다. 실제로 베드로의 성품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는 급히 무덤으로 달려가 몸을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봤습니다. 무덤으로 달려가는 것은 진리에 대한 뜨거운 애정을 뜻합니다. 그리고 몸을 구부려 들여다보는 건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 안에 있는 진리들을 돌아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 또는 말씀을 대할 때는 언제나 몸을 낮춰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진리가 보이고, 또한 죽었던 진리가 살아나는 것이 보입니다.

 

그때 베드로의 눈에 들어온 것은, 주님의 시신이 아니라 세마포였습니다. 세마포의 속뜻은 주님이 주시는 내적 진리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본 진리는 이전에 알던, 생명 없는 지식이 아니라 내적 진리였던 것입니다. 그제서야 그는 자신에게 있던 진리들이 살아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면에서 진리가 살아나는 건 눈먼 자가 눈을 뜨는 것 이상의 기적입니다. 흔히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진리가 살아나면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던 기질이 바뀝니다. 그것은 주님만이 이루실 수 있는 기적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 모든 일을 놀랍게 여겼다고 합니다. 놀랍게 여겼다는 건 기적과 같은 일이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여자들은 향품으로 표상되는 자연적 진리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시작합니다. 자연적 진리란 말씀의 문자로 표현된 진리이며, 내적 진리를 담기 위한 그릇 역할을 하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그 자체로는 아직 완전한 진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자연적 진리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점차 그 안에 내적 진리를 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는 까닭은 내적 진리가 자연적 그릇인 글자 안에 담길 때, 온전하고 힘 있는 진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지옥을 이기신 주님의 능력이 그 안에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세상에 계실 때 완전하지 않은 진리의 상태에서 지옥의 시험을 완전히 이기시고, 신성한 진리(Divine Truth) 자체가 되셨습니다. 만약 주님이 처음부터 신성한 진리 자체이셨다면, 주님은 시험을 당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피조물인 지옥은 감히 창조주이신 주님을 대적하거나 도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에는 시험을 당하는 주님의 진리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고, 인자, 곧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완전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께 기대어 자신에게 있는 진리를 매일 살려야 하고, 더 내적인 진리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온전히 거듭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은혜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성도, 그리고 이들과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호6:2)

 

아멘

 

 

※ 제 설교가 점점 길어지지요? 저는 10년 전인 지난 2014년 5월, 경기도 고양시 헤븐교회 예배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아직 정원 목사님 살아 계시던 시절이었지요. 목사님은 이듬해인 2015년 11월에 별세하셨습니다. 그때 주일예배가 몇 시간씩 계속되는 것에 질려, 그리고 다른 일정도 있어 할 수 없이 중간에 일어나야만 했던 경험이 있어요. 큰애와 우리 부부, 이렇게 함께 갔는데... 그 당시 제 영적 역량이 그런 예배를 감당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점점 그런 경향을 보이네요. 그나마 저는 원고 설교를 하기 때문에 이 정도이지 싶습니다. 설교를 되새김질하다 보면 계속 내용이 더해지고 보태집니다. 절제도 필요하겠지만, 대부분 퍼셉션, 곧 성령의 인도하심인지 꼭 필요한 내용들이지 싶습니다.

 

 

원본

2023-04-09(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두 번째 설교

2025-04-20(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4-20(D1)-주일예배(2594, 눅24,1-12. 부활절),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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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사랑하되 주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사랑하는 건 좀... (2025/4/16)

 
이런 제목이 좀 터무니없거나 자극적이십니까? 그러나 실제로는 자주, 아니 거의 만연하다시피 한 걸 볼 수 있습니다. 제 주변, 나라 사랑하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분들은 그 어떤 분들보다도 나라를 사랑하여 나라의 장래에 대한 근심과 걱정으로 몸이 마르실 지경입니다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많은 말씀 중에도 주님이 어떤 분이시고, 천국은 어떤 곳인지에 대한 말씀은 거의 안 하십니다. 이상하지요? 또 가령 지방회 같은 델 참석해 보면, 분명 수십 교회 목사님과 사모님들이 모이셨음에도 주님은 어떤 분이시고, 천국은 어떤 곳이고 하는 얘긴 요만큼도 들을 수 없습니다. 그냥 기본으로 깔고 가는 건가요? 아니면, 그런 걸 꼭 말을 해야 아나 인가요? 지방회뿐이 아닙니다. 무슨 이만한, 그러니까 전국 규모의 무슨 집회나 세미나에 가봐도 이런저런 방법이나 간증, 그러니까 뭘 어떻게 했더니 어떻게 부흥하고 성장했다는 등이 주된 내용이지, 주님이 어떤 분이시며, 천국은 어떤 곳인지에 대해서는 거의 전혀 무슨 언급이 없습니다. 새삼 뭘 그런 걸 다... 인가요? 오히려 좀 뻘쭘해지나요? 참 이상합니다... 천국은 그렇지 않은데 말입니다. 천국은 주님을 빼면 모든 것이 멈추는 것은 물론, 존재 자체도 못하는데 말입니다.
 
혹시 우리 안에 이런 거, 그러니까 가령, 나는 전도 몇 명 했고, 선교지 몇 번 나갔고, 어디를 얼만큼 몇 교회를 후원하거나 교회 몇 개를 세웠고, 지금까지 몇 교회 주의 종들을 섬겼고, 무슨 헌신과 헌금을 얼마나 했고... 등등 많은 공을 세웠으니,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이미 오래전에 영접기도한 사람이므로, 그러므로 나같은 사람은 당연히 천국 프리패스지... 같은 이런 생각, 이런 오해와 착각이 있는 거 아닐까요? 천국은 예수 영접기도로 가는 나라가 아니라 속 사람의 상태로 가는 나라이며, 특히 그 상태가 천국을 수용할 수 있는 상태여야 갈 수 있는 나라인데, 그렇다면 이런 분들은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나라 사랑, 교회 사랑 등 열심히 하셔야 합니다. 아니, 특히 우리 기독교인들은 더욱 그래야 합니다. 실제로 많은 분들이 이런 분들이십니다. 그러나 나라 사랑하다 보면, 교회 사랑하다 보면 주님이 알아서 그걸 주님 사랑한 걸로 쳐주셔서 하늘 상급 많아지겠지 하시는 의식과 태도, 동기로 하신다면 조심하셔야 합니다. 안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행위들이 고스란히 하늘 상급이 되려면, 이런 행위들은 주님을 더욱 사랑한 결과로 당연히 뒤따르는 행위일 때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다만 주님을 놓치시지 말기 바랍니다. 천사들처럼 말입니다. 천사들한테는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 뜻 가운데 주님 주신 쓰임새의 삶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없습니다. 그때 그들은 주님 주시는 지고한(inmost) 행복 가운데 들기 때문입니다.
 
 
※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김은경 역) 31장, ‘천국 천사들의 순진한 상태’(276-283) 중 278번 글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순진함은 지혜를 거처로 삼는다고 하고, 천사는 그 순진한 정도만큼만 지혜롭다고 한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사실들은 다음과 같다. 순진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선한 것도 제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지 않고, 모든 것을 받은 것으로 여기고, 그 근원을 주께 돌린다. 그들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의 인도를 받기 원한다. 또 모든 선한 것을 사랑하고, 모든 진리에서 기쁨을 얻는다. 선을 사랑하는 것, 즉 선을 의도하고 행하는 것이야말로 주를 사랑하는 것이고, 진리를 사랑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임을 그들이 알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들은 많든 적든 자기가 가진 것으로 만족한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필요한 만큼만 주어진다는 것을, 즉 조금 필요한 사람은 조금 받고, 많이 필요한 사람은 많이 받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무엇이 우리에게 좋은지 우리는 모른다는 것, 오직 모든 것을 살피시고 영원한 것을 섭리하시는 주님만이 아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2] 그들은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지도 않는다. 미래에 대한 불안을 그들은 내일 염려라 부르고, 그것은 삶에 필요하지도 않은 것을 잃거나, 못 받을까 봐 근심하는 일이라고 정의한다. 대인관계에서 그들은 절대 악한 의도로 행동하지 않으며, 오직 선하고 공정하고 정직한 의도로 행동한다. 악한 의도로 행동하는 것을 그들은 교활함이라 부르며, 뱀의 독처럼 기피한다. 그것이 순진함에 완전히 대립되기 때문이다. 그들이 주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없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받는 모든 것의 근원을 주께 돌리기 때문에, 자기 본성으로부터 떨어져 있다. 그들이 자기 본성에서 떨어져 있는 정도만큼 주께서 그들에게 들어가신다. 그 결과 성경 말씀이나 설교를 통해 주의 말씀을 들으면, 그들은 기억에 저장하지 않고 즉시 순종한다. 즉 말씀대로 의도하고 실천한다. 그들에게는 의지 자체가 기억인 것이다. 이들은 겉으로는 대체로 단순해 보인다. 그러나 내적으로는 아주 지혜롭고 분별력 있다. 다음의 성경 말씀은 이들을 가리킨 것이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마10:16) Be ye prudent as serpents and simple as doves (Matt. 10:16).
 
이것이 ‘지혜로운 순진함’이라 부르는 그 순진함이다.
 
[3] 순진함이란, 어떤 선함도 그 근원을 자기에게 돌리지 않고, 모두 주께 돌리는 것이다. 따라서 순진함이란, 주의 인도를 받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며, 이것은 지혜를 이루는 모든 선과 진리를 받는 근본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어린 시절에는 외적 순진성, 나이 들어서는 내적 순진성을 지니도록 창조되었다. 그래서 전자를 통해 후자에 이르고, 다시 후자에서 전자로 돌아가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사람은 늙으면 몸도 줄어들고, 다시 아이가 되는 것인데, 그러나 이번엔 지혜로운 아이, 즉 천사가 되는 것이다. ‘지혜로운 아이’란 높은 의미로는 천사를 뜻한다. 성서에서 ‘어린아이’는 순진한 사람을 뜻하고, ‘노인’은 순진한 상태에 있는 지혜로운 사람을 의미한다.192
 
 
주192. 말씀에서 ‘어린아이들’은 이노센스를 의미한다 (AC.5608). ‘젖먹이들’도 마찬가지다 (AC.3183). ‘노인’은 지혜로운 사람을, 그리고 추상적으로는 지혜를 의미한다 (AC.3183, 6524). 인간은 나이가 들수록 어린아이가 되며, 그때 그의 지혜 안에 이노센스가 있어, 그 상태로 천국에 들어가 천사가 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 (AC.3183, 5608). //
 
 
천사들은 금식기도, 산기도, 안수기도, 방언기도, 예언기도, 무슨 무슨 작정기도 같은 거 안 합니다. 그들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늘 주님 앞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이 저런 거 한다면 너무 이상하잖아요? 기도든 뭐든 주님을 움직여 내 뜻을 관철하기 위한 동기로는 하지 마세요. 설령, 40일 금식기도 했더니 전에 없던 신령한 은사가 마침내 생겼다 해도 사실은 별로 안 좋은 겁니다. 그게 나중에 자기 계급장이 된다면 말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이웃을 열심히 사랑했더니 생각지도 않은 이런 은혜를 주셨어요 한다면 몰라도 말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다가 영생을 얻는 사람이 되어야지 영생을 얻기 위해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안 된다기보다는 뭐랄까, 주님 보시기에 좀 아쉬운 사람이 되는 것이죠.
 
육으로는 세상과, 영으로는 천국과 연결되어 있는 우리 역시 천사들처럼 천국과, 그리고 주님과 연결되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천국과 천사 공부 많이 하시고, 지상에서 천국을 사시기 바랍니다. 거듭 당부드립니다. 주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천국은 주님의 신성으로 가득 찬 나라이며, 주님의 신성은 주님의 선과 진리로 되어 있습니다. 마치 해에서 열과 빛이 나오는 것처럼 말입니다. 천국에서 주님을 사랑한다는 건, 주님을 개인적으로 사랑하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사랑하는 것이고요, 마찬가지로 이웃을 사랑한다는 건 이웃을 개인적으로 사랑하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걸 좀 확장하면, 지상에서 원수를 사랑한다는 건, 원수를 개인적으로 사랑하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라 원수 안에 거하시는 주님의 형상을 사랑하는, 그러니까 그의 안에 깃드신 주님 신성에 대해 예의를 잃지 않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닐까 합니다. 가령, 이재명 같은 사람한테도 말이죠. 비록 그와 같은 사람들한테 예의 바르게 대했다가 해를 입더라도 말입니다. 아래 유다서를 보면,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비방하는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 (유1:9)
 
비록 천사장 미가엘일지라도 비방하는 판결을 삼가지 않습니까? 심지어 그 상대가 마귀인데도 말입니다. 우리 주님은 사랑 그 자체이신 분, 심지어 지옥도 사랑하셔서 여전히 돌보시는 분임을 미가엘은 알고 있는 것입니다.
 
선한 집회, 평화적 시위에서도 우리는 만에 하나 적의, 증오, 복수 같은, 지옥에서 올라오는 기운에 사로잡히면 안 됩니다. 그러면 주님은 더 이상 우리를 보호하실 수 없게 되며, 우리를 향한 천국이 닫히기 때문입니다. 좌우가 서로 먹느냐, 먹히느냐의 긴박한 상황인데 이 무슨 한가한 소리인가 싶으셔도 우리는 주님의 자녀! 끝까지 주님의 전능, 전지, 편재, 그리고 사랑과 섭리를 붙들어야 합니다. 붙들어 보시면 압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우리 시야에 다른 건 안 들어옵니다. 제발 두리번거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heaven_and_hell, 58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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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스베덴보리의 글들(Writings)이 필요하시면 (2025/4/13)

 

아래 Swedenborg Foundation에 가시면 거의 모든 글을 pdf로 받으실 수 있습니다. 참고로 Redesigned Standard Edition이며, 1900년대 초 번역을 1990년대에 몇 가지 손본 버전입니다. 그러니까 영어가 좀 옛글투입니다. 저는 이걸로 하고 있어 그런지 이젠 오히려 NCE라고 현대어역은 좀 낯설더군요. 뭐랄까... 좀 지나치게 의역을 했다고나 할까? 네, 뭐 좀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제 처음 입문하시는 분들한테는 오히려 NCE역이 나을 수도 있겠습니다.

 

https://swedenborg.com/emanuel-swedenborg/writings/rse-downloa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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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의 글들을 읽다 보면 (2025/4/13)

 

스베덴보리의 글들을 읽다 보면, 순간 뇌 정지가 오는 때가 있습니다. 글의 내용이 저의 이해력 역량을 초과했기 때문인데요, 그래서인지 더 이상 진도가 안 나가지는 겁니다.

 

저는 살면서 이런 걸 몇 번 경험했는데요, 지금 생각나는 첫 번째는, 대학 시절, 철학과 다니는 친구 통해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처음 읽었던 때입니다. 비록 어려서부터, 그러니까 중학생 때 벌써 한국문학전집 같은 걸 읽은 저지만, 예를 들면, 월탄 박종화의 ‘금삼의 피’를, 페이지당 열 개 정도 나오는 고어들을 사전을 찾아 노트에 옮겨 적어 가며 읽었지요. 그런 저인데도... 아, 그때 그 당혹감이란... 단 한 문장을 후련하게 읽지 못하겠더군요. 아니, 그 책은 고사하고, 그 친구의 글조차 읽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전자공학을 하던 저라서 그랬는지... 나중엔 화가 나서 원어로 읽고 싶더군요. 그러나 독일어를 따로 해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포기했지요.

 

또 하나는, 제가 삼성에 입사, 당시 기흥 첨단연구소라는 데를 가서 C 언어 관련 무슨 과정 밟느라 연수 중이었는데, 하루는 어느 현업 여성 개발자 한 분이 나와 소프트웨어 드라이버 개발 과정을 설명하면서 특별히 어셈블리 관련 부분 핸들링을 설명하셨던 것 같은데... 저는 당시 이게 무슨 외계어인가 머리가 하얘지며 토할 것 같았습니다. 이 역시 저의 수준을 훨씬 웃도는, 저 높고 깊은 세계를 잠깐 들여다본 것이었지요.

 

그 후론 거의 없다가 오랜만에 또 이런 일이 생겼는데 바로 스베덴보리의 글들입니다. 이분의 글들은 영계를 다녀오신 분의 글이라 기본적으로 신비스러운데요, 특히 그에 더해 당혹스럽기까지 한 건 거의 모든 추상 개념을 마치 영상처럼 설명하시는 겁니다. 눈으로 보지 않았으면, 도저히 그렇게 표현, 묘사하실 수 없는... 이 지상의 모든 추상 개념은 그곳에선 눈에 보이게 나타난답니다. 주님의 어떠하심에 대한 설명들 역시 사실 저 개인적으로는 참으로 영광스럽고 그렇게 귀할 수가 없음에도, 본 적 없는 나라, 접한 적 없는 개념들 앞에 뇌 정지가 오는 건 어쩔 수가 없습니다. 아래는 이럴 때 눈 딱 감고 드리는 유일한 기도입니다.

 

오, 주님, 지금 제게 천국 빛을 더하사 이 글들을 읽고 이해하게 해주세요. 저를 천국 천사들 가운데 잠시 올려주셔서 이 글들을 이해할 수 있는 천사들의 지혜 가운데 저를 잠시 있게 해주세요...

 

놀랍게도 이 기도를 드리고 나면 잠시 후 웬만하면 거의 다 깨닫게 됩니다. 아멘,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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