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해서 창1 둘째 날, 곧 거듭남의 두 번째 상태를 마칩니다. 이 ‘둘째 날, 두 번째 상태’에 나온 중요한 표현, 개념들은 ‘궁창’, ‘하늘 위의 물’, ‘하늘 아래 물’, ‘속 사람’, ‘겉 사람’, ‘기억 지식’ 및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 등이었습니다. 거듭 지금 다룬 내용들이 다음 단계의 기초가 되는 전개이니, 반드시 이전 학습한 내용들을 반복 복습, 보다 탄탄한 배경지식으로 계속 앞으로 쭉쭉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지난 8, 9년째 계속 반복, 또 반복하고 있는 이 창세기 1장을, 그러나 할 때마다 점점 더 이전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내용들과, 그리고 이젠 그런 내용들을 접해도 이해가 되게 하시는 주님, 고맙고 감사합니다. 오늗도 지난날 배운 것들을 더욱 깊이 알려주시고, 특별히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의 속뜻 통해 주님이 어떤 분이시며, 우리의 거듭남을 위해 얼마나 돌보시고, 보살피시며, 끝까지 우리를 책임지시는지를 확인했습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들에게 주님이 저희에게 하신 것처럼 그렇게 하게 도와주세요. 우리가 타인의 연약함에 정신줄 놓치 않도록 끝까지 빛 비춰 주세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And God called the expanse heaven.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econd day.(창1:8)
AC.26
‘저녁’(evening), ‘아침’(morning), 그리고 ‘날’(day)의 의미는 위의 5절에서 이미 설명했습니다.The meaning of “evening,” of “morning,” and of “day,” was shown above at verse 5.
해설
이 짧은 문장은 단순한 주석처럼 보이지만, 창세기1장 전체 해석을 지탱하는 ‘핵심 해석 원리의 재확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새로운 내용을 추가하지 않고, 오히려 독자가 다시 한번5절로 돌아가 그 의미를 굳게 붙들도록 합니다. 이는 ‘저녁’, ‘아침’, ‘날’이 더 이상 문자적 시간 개념이 아니라, ‘거듭남의 상태 변화’를 가리킨다는 사실이 이후 모든 단락의 전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미5절에서 밝혔듯이, ‘저녁’은 선과 진리가 없는 상태, 혹은 약화된 상태를 뜻하고, ‘아침’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과 생명이 유입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리고 ‘날’은 이 두 상태를 함께 포함하는 하나의 완결된 과정, 곧 하나의 영적 상태를 의미합니다.AC.26은 이 정의가 일회성 설명이 아니라, 이후 모든 ‘날’ 해석에 반복 적용되는 기준임을 분명히 합니다.
특히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굳이 여기서 다시 설명하지 않고 ‘이미 위에서 보였다’고만 말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창세기 해설이 ‘앞에서 세운 원리를 계속 누적, 확장해 가는 구조’임을 보여 줍니다. 만일 독자가 ‘저녁’과 ‘아침’을 다시 시간으로 되돌려 이해한다면, 둘째 날 이후의 모든 해석은 무너집니다. 그래서AC.26은 짧지만, 해석 전체를 고정하는 쐐기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또한 이 문장은 거듭남의 과정이 반복 구조임을 조용히 상기시킵니다. 이후에 등장하는 모든 ‘저녁과 아침’은 각각 다른 내용을 담지만, 동일한 질서를 따릅니다. 즉, 혼란과 약화의 상태를 거치지 않고는 새로운 빛의 상태가 오지 않으며, 모든 영적 성장은 이 리듬 안에서 진행됩니다.
결국AC.26은 독자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미 배운 것을 잊지 말라. 창세기의 언어는 시간의 기록이 아니라, 인간 내면에서 반복되는 생명의 질서이다.’ 이 인식을 붙드는 한, 이후의 창조 기사들은 더 이상 멀어진 고대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의 영적 상태를 설명하는 살아 있는 말씀으로 열리게 됩니다.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창1:6, 7)
AC.25
‘하늘을 폈으며 땅을 펼쳤고’(spread out the earth and stretch out the heavens)라는 표현은, 사람의 거듭남을 다룰 때 선지자들이 아주 흔히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이사야에 보면,To “spread out the earth and stretch out the heavens,” is a common form of speaking with the prophets, when treating of the regeneration of man. As in Isaiah:
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지은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사44:24)Thus saith Jehovah thy redeemer, and he that formed thee from the womb; I am Jehovah that maketh all things, that stretcheth forth the heavens alone, that spreadeth abroad the earth by myself (Isa. 44:24).
또한 주님의 강림을 분명히 말하고 있는 곳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And again, where the advent of the Lord is openly spoken of: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사42:3)A bruised reed shall he not break, and the smoking flax shall he not quench; he shall bring forth judgment unto truth (Isa. 42:3);
이는 오류를 바로잡거나 욕정을 소멸시키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참되고 선한 것으로 굽히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어서 말씀하시기를,that is, he does not break fallacies, nor quench cupidities, but bends them to what is true and good; and therefore it follows: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내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영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사42:5)Jehovah God createth the heavens, and stretcheth them out; he spreadeth out the earth, and the productions thereof; he giveth breath unto the people upon it, and spirit to them that walk therein (Isa. 42:5).
이와 같은 뜻을 지닌 다른 구절들은 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Not to mention other passages to the same purport.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하늘을 펴고 땅을 펼친다’는 성경의 전형적인 표현이 실제로는 우주 창조의 묘사가 아니라, ‘인간 거듭남의 과정’을 말하는 언어임을 분명히 합니다. 선지자들은 반복해서 하늘과 땅을 언급하지만, 그 목적은 자연 세계의 구조를 설명하는 데 있지 않고, 인간 내면에서 일어나는 재질서화, 곧 거듭남의 과정을 드러내는 데 있습니다. 하늘과 땅은 앞서 보았듯이 속 사람과 겉 사람을 가리키며, ‘펼친다’는 말은 그 구조가 열리고 정돈된다는 뜻입니다.
이사야44장의 인용은 이 점을 매우 직접적으로 보여 줍니다. 주님은 모태에서부터 사람을 지으신 분이며, 만물을 지은 분으로 소개됩니다. 여기서 하늘을 펼치고 땅을 편다는 표현은, 주님만이 인간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을 올바른 질서로 세우실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는 거듭남이 인간의 자율적 노력이나 도덕적 훈련의 결과가 아니라, ‘주님의 단독 사역’임을 분명히 하는 고백입니다.
이사야42장으로 넘어가면, 이 언어가 더욱 섬세한 의미를 띱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라는 말씀은, 주님이 인간 안에 있는 오류와 욕정을 즉각적으로 제거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오류를 바로잡거나 욕정을 소멸시키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참되고 선한 것으로 굽히신다’고 풀이합니다. 이는AC.24에서 보았던 원리와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본성과 그 착각을 재료로 삼아, 그것들을 점진적으로 선과 진리의 방향으로 이끄십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다시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내시며’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는 단순히 위와 아래를 나누는 행위가 아니라, 인간 안에서 ‘질서가 작동하기 시작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속 사람은 하늘로서 열리고, 겉 사람은 땅으로서 제자리를 찾으며, 그 사이에서 생명과 호흡이 주어집니다. 이때 주님은 그 위에 사는 백성에게 ‘호흡’을, 그 가운데 행하는 자들에게 ‘영’을 주신다고 합니다. 이는 생명의 유입이 속 사람에서 겉 사람으로, 다시 삶의 행위로 흘러간다는 질서를 보여 줍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모든 과정이 ‘파괴가 아니라 보존과 굽힘’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십니다. 이는 인간 안에 남아 있는 미약한 선의 가능성과 희미한 진리의 불꽃을 끝까지 존중하신다는 뜻입니다. 거듭남은 급진적 단절이 아니라, 생명이 꺼지지 않도록 보호하면서 방향을 바꾸는 섬세한 작업입니다.
이 글은 선지서의 언어가 왜 그렇게 반복적으로 하늘과 땅을 말하는지를 이해하게 해 줍니다. 그것은 우주론적 집착이 아니라, 인간 한 사람 한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거듭남의 보편적 구조를 말하기 위함입니다. 하늘이 펼쳐지고 땅이 펴지는 일은, 오늘도 인간 안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여전히 하늘을 펼치시고, 땅을 펴시며, 사람에게 호흡과 영을 주십니다.
결국AC.25는 거듭남의 방식이 ‘온유하고 질서 있으며 점진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주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부수지 않으시고, 그 연약함 속에서 생명을 살려 내십니다. 하늘과 땅이 그렇게 펼쳐질 때, 인간은 비로소 숨을 쉬고, 걸을 수 있게 됩니다. 이는 창조의 언어로 말한 구원의 실제 모습입니다.
심화
1.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 (사42:3)
AC.25의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인간관과 거듭남 이해가 매우 잘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문자 그대로 읽으면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다,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는다’는 말이 단순히 ‘연약한 사람을 불쌍히 여긴다’는 정도로 들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거듭남 과정에서 주님이 인간을 어떻게 다루시는가’라는 관점에서 해석합니다.
먼저 문자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갈대는 약한 식물입니다. 이미 상해 있는 갈대를 더 꺾어 버리면 완전히 부러집니다. 또 등불이 거의 꺼져 가는 상태에서 바람을 세게 불면 완전히 꺼집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겉뜻은 ‘이미 약해진 것을 더 파괴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즉 매우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다룬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갈대와 등불을 ‘사람 안에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상응으로 봅니다. 갈대는 바람에 흔들리는 식물이기 때문에 흔히 ‘약하고 흔들리는 진리 상태’를 상징합니다. 사람이 아직 진리를 확실히 이해하지 못하고 흔들리는 상태입니다. 또 꺼져가는 등불은 ‘거의 사라질 듯한 선과 진리의 작은 불빛’을 의미합니다. 사람 안에 아직 완전히 죽지 않은 양심이나 선의 작은 흔적입니다.
이제 AC.25의 설명이 왜 나오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사람이 거듭나기 시작할 때, 그의 상태는 매우 불완전합니다. 생각 속에는 오류가 많고, 의지 속에는 욕정과 이기심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님이 그것들을 ‘즉시 다 제거해 버리시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사람 전체가 무너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기존 삶 전체가 그 안에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람의 오류나 욕정을 바로 파괴하는 방식으로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그것들을 ‘조금씩 방향을 바꾸어 선과 진리를 향하도록 굽히십니다’. 바로 이것을 AC.25에서 설명합니다. 즉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의 약하고 불완전한 상태를 갑자기 부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처음 신앙을 갖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러나 그의 동기는 아직 순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복을 받을 것 같아서 믿을 수도 있고, 어려움을 해결하고 싶어서 믿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동기는 완전히 순수한 사랑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을 즉시 없애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 사람의 그런 동기를 사용하여 조금씩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이것이 바로 ‘굽히신다’는 뜻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정직하게 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하나님을 사랑해서라기보다 평판을 지키기 위해서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주님은 그 행동을 통해 점점 더 깊은 선으로 인도하십니다. 결국 그 사람은 ‘이것이 옳기 때문에 정직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바뀌게 됩니다. 즉 처음의 불완전한 동기가 점차 더 좋은 방향으로 ‘변형, 즉 완전해지고 정화’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욕정(cupidities)도 이런 방식으로 다루어진다고 설명합니다. 욕정은 단번에 사라지지 않습니다. 대신 주님은 그것들을 ‘다른 방향으로 돌려 사용’하십니다. 예를 들어 명예욕이 강한 사람은 처음에는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선을 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람은 점점 선 자체를 사랑하게 됩니다. 이렇게 욕정이 점차 더 높은 목적을 위해 사용됩니다.
그래서 AC.25는 인간 거듭남의 매우 중요한 원리를 말합니다. 주님은 인간을 변화시키실 때 ‘파괴 방식이 아니라 전환 방식’으로 역사하십니다. 즉 인간 안의 불완전한 요소들을 즉시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조금씩 선과 진리 쪽으로 돌리십니다.
이 점 때문에 이사야의 그 말씀이 매우 적절한 상징이 됩니다. 상한 갈대를 꺾어 버리면 끝입니다. 그러나 꺾지 않고 받쳐주면 다시 설 수 있습니다. 꺼져가는 등불을 끄면 완전히 어둠입니다. 그러나 보호하면 다시 밝아질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의 섭리 방식’입니다.
그래서 AC.25의 결론은 이렇게 이해하면 가장 쉽습니다. 사람 안에는 오류도 있고 욕정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들을 당장 없애 버리시지 않습니다. 대신 그것들을 조금씩 선과 진리의 방향으로 돌리시며 사람을 새롭게 만드십니다. 이것이 바로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한다’는 말씀의 깊은 의미입니다.
‘주님은 사람을 고치실 때 부수어 버리지 않고, 그 사람이 가진 것을 사용하여 점점 더 좋은 방향으로 바꾸신다.’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And God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he midst of the waters, and 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in the waters. And God made the expanse, and made a distinction between the waters which we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were above the expanse; and it was so.(창1:6, 7)
AC.24
하나님의 영, 곧 주님의 자비가 참되고 선한 지식을 낮으로 이끌어 내시고, 첫 빛, 곧 주님이 계시며, 그분이 선 자체이시고 진리 자체이시며, 그분으로 말미암지 않는 선과 진리는 없는 그런 빛을 주신 후, 주님은 속 사람과 겉 사람, 곧 속 사람 안에 있는 지식과 겉 사람에 속한 기억 지식(주2)을 구별하십니다. 속 사람을 ‘궁창’(expanse), 속 사람 안에 있는 지식을 ‘궁창 위의 물’(the waters above the expanse)이라 하며, 겉 사람의 기억 지식은 ‘궁창 아래의 물’(the waters beneath the expanse)이라 합니다.After the spirit of God, or the Lord’s mercy, has brought forth into day the knowledges of the true and of the good, and has given the first light, that the Lord is, that he is good itself, and truth itself, and that there is no good and truth but from him, he then makes a distinction between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consequently between the knowledges [cognitiones] that are in the internal man, and the memory-knowledges [scientifica] that belong to the external man.2 The internal man is called an “expanse”; the knowledges which are in the internal man are called “the waters above the expanse”; and the memory-knowledges of the external man are called “the waters beneath the expanse.”
주2.‘지식’(knowledges, cognitiones)이란 우리가 실제로 알고 있는 것들을 뜻하는데, 예를 들면 우리가 ‘나는 단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안다’라고 말할 때의 그 앎입니다. 반면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 scientifica)은 외적 기억 속에 들어 있는 것들로, 신학적인 것이든 그 밖의 것이든 온갖 종류가 대량으로 축적되어 있는 것들을 말합니다. 이 두 용어에 대한 스베덴보리 자신의 정확한 정의는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27번,896번,1486번,2718번,5212번을 보시고, 또 편집자의 서문 주해도 참고하세요.Knowledges [cognitiones] are what we really know, as when we say “I do not merely think so, I know it.” Memory-knowledges [scientifica] are what we have in the external memory—a vast accumulation of all kinds, theological and otherwise. For precise definitions of these words by Swedenborg himself, see Arcana Coelestia, n. 27, 896, 1486, 2718, 5212. See also the Reviser’s Prefatory Notes. [Reviser]
[2]사람은 거듭남이 시작되기 전에는 속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며, 더욱이 그 성질과 상태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서로 구별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 속에 깊이 잠겨 있으며, 그 결과 속 사람에 속한 것들까지 그 안에 잠기게 하여, 서로 구별되는 것들을 혼란스럽고 어두운 하나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으라’(Let there be an expanse in the midst of the waters) 하시고, 그다음에 ‘물과 물로 나뉘라’(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in the waters) 하시는 것입니다. 이후 나오는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라’(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which a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are above the expanse)고는 아직은 아니고 말입니다.Man, before he is being regenerated, does not even know that any internal man exists, much less is he acquainted with its nature and quality. He supposes the internal and the external man to be not distinct from each other. For, being immersed in bodily and worldly things, he has also immersed in them the things that belong to his internal man, and has made of things that are distinct a confused and obscure unit. Therefore it is first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he midst of the waters,” and then, “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in the waters”; but not, “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which a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are above the expanse,” as is afterwards said in the next verses: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8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창1:7, 8)And God made the expanse, and made a distinction between the waters which we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were above the expanse, and it was so. And God called the expanse heaven(Gen. 1:7–8).
[3] 따라서 사람이 거듭남의 과정에서 다음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은, 속 사람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속 사람 안에 있는 것들은 오직 주님께 속한 선과 진리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는 동안, 그의 겉 사람은 여전히 자기가 행하는 선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자기가 말하는 진리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깁니다.이런 실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이러한 자기 본성, 곧 이런 자신의 것들을 통해 주님에 의해 인도되어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먼저 궁창 아래의 물들의 구별이 언급되고, 그다음에 궁창 위의 물들이 언급됩니다. 또한 이것은 천국의 아르카나인데, 사람은 감각의 착각이나 욕정과 같은 자기 자신의 것들에 의해서도 주님에 의해 참된 것과 선한 것들로 이끌리고 굽혀진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거듭남의 모든 움직임과 순간은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나 저녁에서 아침으로, 곧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또는 ‘땅’(earth)에서 ‘하늘’(heaven)로 진행되며, 이런 이유로 이제 궁창, 곧 속 사람을 가리켜 ‘하늘’(heaven)이라 하는 것입니다.The next thing therefore that man observes in the course of regeneration is that he begins to know that there is an internal man, or that the things which are in the internal man are goods and truths, which are of the Lord alone. Now as the external man, when being regenerated, is of such a nature that he still supposes the goods that he does to be done of himself, and the truths that he speaks to be spoken of himself, and whereas, being such, he is led by them of the Lord, as by things of his own, to do what is good and to speak what is true, therefore mention is first made of a distinction of the waters under the expanse, and afterwards of those above the expanse. It is also an arcanum of heaven, that man, by things of his own, as well by the fallacies of the senses as by cupidities, is led and bent by the Lord to things that are true and good, and thus that every movement and moment of regeneration,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proceeds from evening to morning, thus from the external man to the internal, or from “earth” to “heaven.” Therefore the expanse, or internal man, is now called “heaven.”
해설
이 글은 창세기 1장의 둘째 날, 곧 ‘궁창’의 창조가 인간 거듭남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가장 체계적으로 풀어 주는 핵심 본문입니다. 앞선 글들에서 주님의 자비가 리메인스(remains)를 품고, 빛이 처음 인식되기 시작했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내적 구조의 분화’, 곧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구별이 시작됩니다. 이것은 거듭남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질서를 분명히 합니다. 주님은 참되고 선한 지식을 ‘낮’으로 이끌어 내시고, 주님 자신이 선 자체이시며, 진리 자체이시고, 모든 선과 진리가 그분으로 말미암는, 그런 첫 빛을 주신 뒤에야, 비로소 속 사람과 겉 사람을 구별하십니다. 다시 말해, ‘구별은 빛 이후에만 가능’합니다. 빛이 없으면 모든 것이 섞여 있고, 구별은 혼란을 낳을 뿐입니다.
여기서 속 사람을 가리켜 ‘궁창’(expanse)이라고 합니다. 궁창을 가리켜 위와 아래를 나누는 중간 영역이면서, 동시에 하늘이라고 하는데요, 이는 속 사람이라는 것이 단순히 마음의 깊은 층이라는 심리적 개념이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가 머무는 하늘의 영역임을 뜻합니다. 속 사람 안에 있는 지식은 ‘궁창 위의 물’이라 하고, 겉 사람의 기억 지식은 ‘궁창 아래의 물’이라 합니다. 이 구분은 지식의 내용 차이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근원의 차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남 이전의 인간은 이 구별을 전혀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속 사람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혹시 알아도 속 사람과 겉 사람은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 속에 깊이 잠겨 있고, 그 결과 속 사람의 것들까지도 동일한 차원으로 끌어내려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것들이 섞이면, 명확한 구별은 사라지고, 모든 것이 혼탁한 하나로 느껴집니다. 이것이 거듭남 이전 인간의 내면 상태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본문에서도 매우 섬세한 표현이 사용됩니다. 처음에는 ‘물 가운데 궁창이 있으라’라고만 하십니다. 곧바로 위와 아래의 물을 명확히 나누라고는 하지 않으시고요. 이는 사람이 처음에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을 어렴풋이 인식할 뿐, 그 안의 질서와 차이를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후에야 비로소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의 구별이 명확히 언급되는데, 이런 문장 순서 자체가 인간 거듭남의 실제 진행 순서를 그대로 반영합니다.
이 단계에서 사람은 중요한 인식을 하나 얻게 됩니다. 속 사람이 존재하며, 그 안에 있는 것들은 주님께 속한 선과 진리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겉 사람은 여전히 자기중심적입니다. 이 와중에도 그는 자기가 행하는 선을 자기에게서 나온 걸로 여기고, 자기가 말하는 진리도 자기 생각의 산물로 여깁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한데,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문제 삼기보다는 오히려 ‘주님의 섭리의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주님은 사람이 여전히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 느끼는 그 선과 진리를 통해서도, 사람을 실제로 선과 진리로 이끄십니다. 즉, 주님은 인간의 본성과 착각을 즉시 제거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것을 통로로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먼저 궁창 아래의 물, 곧 겉 사람의 지식과 활동이 언급되고, 그다음에야 궁창 위의 물이 언급됩니다. 이는 인간의 경험 순서에 맞춘 주님의 배려, 신적 배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천국의 아르카나를 밝힙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의 것들, 곧 감각의 착각과 욕정에 의해서조차, 주님에 의해 참되고 선한 것들한테로 이끌리고 굽혀진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인간의 오류와 약함마저도 주님의 섭리 안에 있다는 뜻이지요. 물론 이것이 자기중심적 삶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거듭남의 실제 과정이 얼마나 점진적이고 주님의 인내로 가득한지를 보여 줍니다.
이 때문에 거듭남의 모든 움직임은 ‘저녁에서 아침으로’ 진행됩니다. 이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방향성의 선언입니다.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땅에서 하늘로,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것이 주님의 불변의 방식입니다. 이 과정은 단번에 일어나지 않고, 수없이 반복되며 점점 더 깊어집니다.
그래서 마침내 궁창, 곧 속 사람은 ‘하늘’이라 불립니다. 이는 인간 안에 하늘이 세워졌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하늘과 연결될 수 있는 내적 영역이 열렸다는 뜻입니다. 이 하늘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주님이 질서와 자비로 세우신 것입니다. AC.24는 이처럼 거듭남의 구조적 중심을 밝혀 주며, 창세기 1장의 둘째 날이 단순한 우주론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재조직에 대한 계시임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심화
1.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 scientifica)
‘기억 지식’이라는 표현은 처음 들으면 낯설게 느껴지지만, 사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아주 평범한 종류의 지식을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가 라틴어로 ‘scientifica’, 영어로 ‘memory-knowledges’라고 부른 것은 특별한 신비한 지식이 아니라,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는 모든 사실 지식’을 말합니다. 즉 우리가 보고 듣고 배우고 읽으면서 머릿속에 쌓아 두는 정보들입니다.
가장 쉬운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서울은 한국의 수도다’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또 ‘물은 100도에서 끓는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또 성경에 대해 ‘아브라함은 이삭의 아버지다’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기억 속에 저장된 지식’입니다. 우리가 필요할 때 꺼내 쓰지만, 그 자체가 곧 삶의 성품이나 사랑을 바꾸지는 않습니다. 이런 종류의 지식을 스베덴보리는 ‘기억 지식’이라고 부릅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학교 공부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역사 연도, 과학 공식, 지리 정보, 언어 단어, 직업 기술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의사는 의학 지식을, 목수는 목공 기술을, 목회자는 성경 지식을 많이 기억 속에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기억 속에 축적된 지식입니다. 바로 이런 것들을 통틀어 스베덴보리는 ‘memory-knowledges’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가 이 개념을 특별히 강조하는 이유는 ‘이 지식이 사람의 겉 사람(external man)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인간을 크게 속 사람과 겉 사람으로 구분합니다. 겉 사람은 세상과 접촉하는 부분입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공부하고 배우면서 지식을 쌓는 영역입니다. 그래서 기억 지식은 대부분 ‘겉 사람의 창고’에 저장됩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기억 지식 자체가 나쁜 것도 아니고 쓸모없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매우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진리와 선이 사람 안에 들어올 때, 그것을 담을 그릇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진리를 이해하려면 먼저 성경 이야기, 사람의 삶, 여러 상황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기억 지식입니다. 마치 씨앗이 자라기 위해 흙이 필요한 것처럼, 영적 진리가 작용하려면 기억 지식이 바탕이 됩니다.
예를 하나 더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성경을 많이 읽어서 성경 지식을 많이 알고 있다고 합시다. 아브라함 이야기, 모세 이야기, 복음서 이야기 등을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직 ‘기억 지식의 단계’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어느 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제 삶에서 실천하기 시작하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그때 그 성경 지식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삶을 움직이는 진리’가 됩니다. 즉 기억 지식이 속 사람과 연결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기억 지식을 종종 ‘재료’나 ‘도구’처럼 설명합니다. 목수가 집을 짓기 위해 나무와 연장을 사용하는 것처럼, 사람의 속 사람은 기억 지식을 사용하여 진리를 이해하고 선을 행합니다. 기억 지식은 그 자체가 영적 생명은 아니지만, ‘영적 생명이 활동할 수 있는 재료’가 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기억 지식이 ‘선한 방향으로도, 잘못된 방향으로도 사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같은 지식이라도 어떤 사람은 그것을 통해 진리를 더 깊이 이해하고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그 지식을 이용해 자기 생각을 정당화하거나 남을 이기려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지식이 많다고 해서 곧 지혜로운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지혜는 지식이 ‘선한 사랑과 결합될 때’ 생깁니다.
초심자에게 가장 쉽게 설명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기억 지식은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고 책에서 읽고 경험을 통해 얻는 ‘머릿속 정보 창고’입니다. 그러나 그 지식이 사랑과 연결되어 삶 속에서 사용될 때 비로소 ‘지혜’가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기억 지식’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래서 AC.24에서 주님이 ‘속 사람 안의 지식’과 ‘겉 사람의 기억 지식’을 구별하신다고 할 때의 뜻은 이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단순히 기억 속에 저장된 지식이 있고, 그보다 더 깊은 곳에는 ‘삶과 사랑과 연결된 진리’가 있습니다. 기억 지식은 겉 사람의 창고이고, 속 사람은 그 지식을 사용하여 진리와 선을 살아가는 곳입니다. 이런 구별을 이해하면 스베덴보리의 글이 훨씬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여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때입니다. 이때 그에게서 나오는 것들을 ‘산 영’(living soul)과 ‘짐승’(beast)이라 합니다. 그리고 그가 이제 신앙과 사랑 양쪽에서 동시에 함께 행동하기 시작하므로, 그는 ‘형상’(image)이라 하는 영적 인간이 됩니다. 그의 영적 생명은 신앙의 지식들과 체어리티의 행위들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되는데, 이것들이 그의 ‘음식’(food)이 됩니다. 또한 그의 자연적 생명은 몸과 감각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되는데, 이로부터 싸움이 일어나며, 사랑이 지배권을 얻을 때까지 계속되고, 그 후 그는 천적 인간이 됩니다.The sixth state is when, from faith, and thence from love, he speaks what is true, and does what is good: the things which he then brings forth are called the “living soul” and the “beast.” And as he then begins to act at once and together from both faith and love, he becomes a spiritual man, who is called an “image.” His spiritual life is delighted and sustained by such things as belong to the knowledges of faith, and to works of charity, which are called his “food”; and his natural life is delighted and sustained by those which belong to the body and the senses; whence a combat arises, until love gains the dominion, and he becomes a celestial man.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26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27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29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30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31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창1:24-31)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여섯 번째 상태를 설명하는데, 이는 창세기1장의 여섯째 날, 곧 짐승과 사람의 창조에 해당하는 단계입니다. 앞선 다섯 번째 상태에서 신앙은 이미 살아 있는 생명이 되었고, 사람은 신앙으로 말하며 진리와 선을 확증하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여섯 번째 상태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앙만이 아니라 사랑이 함께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사람은 신앙으로 말할 뿐 아니라, 그 신앙에서 나오는 사랑으로 선을 행하게 됩니다. 즉, 말과 행위가 하나의 근원에서 나오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순서를 제시합니다. 그는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라고 말합니다. 이는 사랑이 신앙을 배제하고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 의해 인도되고 형성된 사랑임을 뜻합니다. 먼저 진리가 빛으로 들어오고, 그 진리 안에서 사랑이 불붙으며, 그 둘이 함께 작동, 즉 움직일 때 비로소 참된 영적 삶이 형성됩니다. 이 점은 감정 중심의 신앙이나, 행위 중심의 도덕과 분명히 구별되는 지점이에요.
이 상태에서 사람한테서 나오는 것들을 ‘산 영’(living soul)과 ‘짐승’(beast)이라 한다는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산 영’은 더 이상 생기 없는 선이나 잠재적 생명이 아니라, 실제로 살아 있는 영적 생명을 뜻합니다. 그리고 ‘짐승’은 낮고 거친 본능을 뜻하는 부정적 이미지가 아니라, 선한 애정들이 생명을 가지고 움직이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즉, 사람 안의 감정과 욕망 자체가 이제 주님의 질서 안에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지요.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의 사람을 ‘영적 인간’이라고 부르며, 동시에 그를 가리켜 ‘형상’(image)이라 하는데, 이는 창세기에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말씀과 직접 연결됩니다. 여기서 형상이란 외형적인 모방이 아니라, ‘신앙과 사랑이 함께 작동하는, 즉 함께 움직이는 구조’를 뜻합니다. 주님 안에서 진리와 선이 하나이듯, 사람 안에서도 말과 행위, 이해와 의지가 하나로 움직이기 시작할 때 그는 형상이라 불릴 수 있습니다.
이 단계에서 사람의 삶은 두 층위로 유지됩니다. 먼저 그의 영적 생명은 신앙의 지식들과 체어리티의 행위들로 기뻐하고 유지되는데, 이것을 그의 ‘음식’(food)이라고 합니다. 즉,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에 따라 선을 행하는 것이 더 이상 부담이나 의무가 아니라, 영혼을 살리는 양식이 되는 것이지요. 이건 정말 중요한 변화입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이제부터는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살게 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자연적 생명은 여전히 몸과 감각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됩니다. 사람은 아직 세상에 살고 있고, 육체를 가지고 있으며, 자연적 즐거움과 필요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싸움’이 일어납니다. 영적 즐거움과 자연적 즐거움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에, 어느 것이 삶의 중심을 차지할 것인가를 두고 긴장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 싸움은 이전 단계들에서는 본격적으로 일어나지 않았던, 매우 실제적이고 깊은 영적 전투입니다.
이 싸움은 주님이 허용하시되, 목적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사랑이 지배권을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자기 사랑이나 세상 사랑이 아니라,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삶의 중심이 되고, 신앙이 그 사랑을 섬기는 위치로 들어갈 때, 사람은 비로소 ‘천적 인간’이 됩니다. 천적 인간은 더 이상 계산이나 갈등 속에서 선을 선택하지 않고, 사랑 자체에서 자연스럽게 선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결국AC.12는 거듭남의 거의 완성 단계에 해당합니다. 신앙은 사랑과 결합하고, 말과 행위는 하나가 되며, 영적 생명은 실제 양식을 얻고, 자연적 생명과의 싸움 속에서도 사랑이 점점 우위를 차지합니다. 이 상태는 모든 사람이 쉽게 도달하는 단계는 아니지만, 창세기1장이 제시하는 거듭남의 목표가 바로 여기에 있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그래서 여섯 번째 상태는 ‘형상’의 회복이며, 인간이 본래 의도된 모습으로 다시 세워지는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심화
1. ‘구체적인 예들’
AC.12본문 중,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및 ‘신앙과 사랑 양쪽에서 동시에 함께 행동’, 그리고 ‘그의 영적 생명은 신앙의 지식들과 체어리티의 행위들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되는’이라는 표현들이 나오는데, 이런 표현들의 구체적 예들을 좀 보여주실 수 있나요?
말씀하신 AC.12의 표현들은 스베덴보리 신학에서 매우 핵심적인 상태를 묘사하는 문장들이라서, 실제 삶의 모습으로 풀어 보지 않으면 다소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말씀하신 세 표현을 중심으로, 가능한 한 구체적인 삶의 예를 들어 설명드리겠습니다.
먼저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이라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어떤 진리를 단지 알고 있는 상태가 아니라, ‘그 진리 때문에 사랑의 행동을 하게 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말씀을 통해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알고 있다고 합시다. 이것이 아직 이해 속 지식에만 머물러 있다면 그는 실제 상황이 벌어져도 그저 그렇게 말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직장에서 동료가 실수를 해서 큰 곤란에 처했을 때, 그 사람은 그 동료를 비난하거나 이용하지 않고 조용히 도와줍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물으면, 그는 ‘이게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는 좀더 무난한(?) 표현을 쓰겠지만 말입니다. 이때 그가 행한 도움은 단순한 친절이 아니라 ‘신앙의 진리에서 나온 사랑의 행동’입니다. 바로 이런 경우가 ‘신앙에서 사랑으로 선을 행하는’ 상태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는 신앙적 진리를 알고 있다고 합시다. 그는 사업이나 직장에서 이익을 얻을 기회가 있어도 거짓말이나 속임수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단순히 법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거짓은 하나님 앞에서 옳지 않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때 그의 행동은 단순한 도덕이 아니라 ‘신앙에서 나온 선한 행위’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신앙에서 사랑으로 선을 행하는 삶’입니다.
다음으로 ‘신앙과 사랑 양쪽에서 동시에 함께 행동한다’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생각에서는 진리를 알고, 의지에서는 선을 사랑하며, 그 둘이 함께 작동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어려운 이웃을 돕는 상황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단순한 감정만 있다면 그는 잠깐 동정하다가 지나갈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지식만 있다면 ‘도와야 한다’는 원칙을 말할 뿐 행동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과 사랑이 함께 작동할 때는 다릅니다. 그는 먼저 ‘이웃을 돕는 것이 옳다’는 진리를 이해하고, 동시에 그 사람의 형편을 마음으로 느끼며 실제로 도움을 줍니다. 여기서 ‘이해는 신앙의 역할이고, 행동으로 이어지는 마음의 움직임은 사랑의 역할’입니다. 이 둘이 동시에 작동하는 것이 바로 ‘신앙과 사랑이 함께 행동하는 상태’입니다.
가정에서의 예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대할 때 단지 규칙만 강조하면 관계가 메말라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사랑만 있고 기준이 없다면 아이가 바르게 자라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아이를 바르게 길러야 한다’는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 동시에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그는 때로는 훈계하고 때로는 격려하며 아이의 유익을 위해 행동합니다. 이런 경우도 신앙과 사랑이 함께 작용하는 모습입니다.
마지막으로 ‘그의 영적 생명은 신앙의 지식들과 체어리티의 행위들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된다’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점점 영적으로 살아갈수록 ‘무엇에서 기쁨을 느끼느냐가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처음에는 사람의 기쁨이 주로 세상의 것에서 옵니다. 명예, 돈, 인정, 편안함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면 다른 종류의 기쁨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말씀을 읽다가 새로운 진리를 깨달았을 때 마음이 밝아지는 경험을 합니다. 또는 누군가를 도왔을 때 마음 깊은 곳에서 조용한 기쁨을 느낍니다. 또 어떤 사람이 갈등 속에서 용서를 선택했을 때 마음이 평안해집니다. 이런 기쁨은 외적인 보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선 자체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런 상태를 ‘영적 생명이 유지되는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목사님께서 말씀을 연구하시다가 어떤 구절의 내적 의미가 또렷하게 보일 때 느끼는 깊은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또는 성도 한 사람이 말씀을 통해 삶이 조금 변화되는 모습을 보실 때 느끼는 기쁨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기쁨은 세상의 즐거움과 다른 종류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기쁨을 ‘신앙의 진리와 체어리티의 삶에서 오는 기쁨’이라고 말합니다.
정리하면 AC.12의 세 표현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먼저 사람은 신앙의 진리를 알고, 그 진리에서 사랑의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해와 의지가 함께 작동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그 사람의 기쁨과 삶의 활력 자체가 진리와 선에서 나오게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적 인간의 삶입니다.
다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말하고, 그로써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하는 때입니다. 이때 그에게서 나오는 것들은 생기를 지닌 것들이며, ‘바다의 물고기’(fish of the sea)와 ‘하늘의 새들’(birds of the heavens)이라 불립니다. The fifth state is when the man discourses from faith, and thereby confirms himself in truth and good: the things then produced by him are animate, and are called the “fish of the sea,” and the “birds of the heavens.”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state)를 설명하면서, 이전 단계들과는 또 다른 질적 전환이 일어났음을 분명히 합니다. 네 번째 상태에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속 사람 안에서 불붙기 시작했다면, 다섯 번째 상태에서는 그 신앙이 이제 ‘말과 사고의 직접적인 근원’이 됩니다. 즉, 사람은 더 이상 외적 규범이나 압박, 혹은 막연한 경건 감정에 의해 말하지 않고, 신앙 그 자체로 말하기 시작합니다. 이는 신앙이 단순한 지식이나 교리가 아니라, 사고를 이끄는 살아 있는 원리가 되었음을 뜻하지요.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를 ‘신앙으로 말한다’고 표현하는데, 이는 사람이 진리를 말할 때 그것이 외부에서 빌려 온 언어가 아니라, 내면에서 확신한 이해에서 흘러나온다는 의미입니다. 이로 인해 사람은 자신이 받아들인 진리와 선을 삶 속에서 점점 더 확증하게 되는데, 여기서 ‘확증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스스로를 설득한다는 뜻이 아니라, ‘삶의 경험 속에서 진리와 선이 참됨을 확인해 간다’는 의미입니다. 신앙은 이제 머릿속의 동의가 아니라, 살아 보면서 검증되는 삶의 기준이 됩니다. 그러니까 앉은뱅이 신앙이 아니라 걸어 다니는 신앙이 되는 것이지요.
이 단계에서 중요한 변화는, 사람이 산출하는 것들, 곧 사람한테서 나오는 것들이 ‘생기를 가진 것들’이 된다는 점입니다. 이전 단계들에서도 선한 행위와 진리의 말이 있었지만, 그것들은 아직 생명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다섯 번째 상태에 이르면, 주님의 생명이 신앙과 함께 작용, 그 말과 행위에 실제적인 영적 생명력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다시 말해, 사람의 신앙은 이제 살아 있으며, 그가 말하는 진리와 행하는 선도 살아 있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생기 있는 산출물들을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들’이라는 상징으로 설명합니다. ‘바다’는 지식과 기억의 차원을 가리키며, 그 안의 ‘물고기’는 지식적 차원에서 살아 움직이는 진리들을 뜻합니다. 이는 사람이 신앙 안에서 지식들을 단순히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유기적으로 이해하고 활용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반면 ‘하늘의 새들’은 더 높은 차원의 이해, 곧 사고와 사유의 영역에서 자유롭게 날아오르는 진리들을 가리킵니다. 이는 신앙이 지식의 차원을 넘어, 통찰과 분별의 차원으로 확장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이 두 상징은 다섯 번째 상태가 단지 지식이 늘어나는 단계가 아니라, ‘지식과 이해가 함께 살아 움직이는 단계’임을 분명히 합니다. 물고기와 새는 서로 다른 차원에 속하지만, 모두 생명을 지니고 있으며, 각각 바다와 하늘이라는 자기 영역 안에서 자유롭게 활동합니다. 마찬가지로 이 단계의 사람은 외적 지식과 내적 이해를 모두 갖추고, 그것들을 신앙 안에서 질서 있게 사용합니다.
이 상태는 또한 신앙의 책임성이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단계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신앙으로 말하고, 그로써 진리와 선을 확증하기 시작하면, 그는 더 이상 무지나 미숙함을 변명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신앙은 이제 삶을 이끄는 원리이므로, 말과 행동이 그것과 일치하지 않을 때 스스로 그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이 점에서 다섯 번째 상태는 자유와 책임이 함께 커지는 단계입니다.
그러나 이 상태 역시 거듭남의 완성은 아닙니다. 신앙이 살아 있고, 진리와 선이 생기를 갖고 작용하고 있지만, 여전히 중심에는 신앙이 있으며, 사랑과 완전한 결합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다음 단계, 곧 여섯 번째 상태에서 신앙과 사랑이 동시에 작용하며 하나로 결합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다섯 번째 상태는 그 결합을 위한 성숙 단계로서, 신앙이 충분히 살아 있고 견고해져야만 사랑이 전면적으로 주도권을 잡을 수 있습니다.
결국 AC.11에서 말하는 다섯 번째 상태는 거듭남의 여정에서 ‘신앙이 실제 생명이 되는 단계’입니다. 사람은 이제 신앙으로 말하고, 그 신앙으로 살아가며, 그 안에서 진리와 선이 살아 움직입니다. 물고기와 새가 생명력을 가지고 각자의 영역을 채우듯, 이 단계의 신앙은 사람의 지식과 이해 전반을 살아 있는 것으로 만듭니다. 이는 이후에 올 더 깊은 변화, 곧 신앙과 사랑의 완전한 결합을 위한 필수적 성숙 단계입니다.
심화
1. ‘자신을 확증하다’(confirms himself)
위 ‘자신을 확증하다’의 해설을 보면, 이는 ‘삶의 경험 속에서 진리와 선이 참됨을 확인해 간다’라는 의미라고 하는데요, 이게 무슨 말인가요?
AC.11의 ‘자신을 확증하다’(confirm oneself)라는 표현은, 스베덴보리 사상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그런데 이 표현은 문자 그대로 보면 마치 ‘자기 생각을 고집스럽게 밀어붙인다’는 뜻처럼 들릴 수 있어서 오해가 생기기 쉽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의미는 조금 다릅니다.
먼저 스베덴보리에게서 ‘확증’(confirm)이라는 말은 단순한 이론적 동의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어떤 진리를 머리로만 이해하는 단계와, 그것이 실제 삶 속에서 참된 것임을 경험을 통해 점점 분명히 알게 되는 단계는 다릅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말씀을 듣거나 가르침을 통해 ‘이것이 옳다’고 배웁니다. 그러나 그때는 아직 그것이 자기 삶 속에서 살아 있는 진리가 아닙니다. 다만 이해 속에 있는 진리입니다.
그다음 단계에서 사람은 그 진리를 실제 삶 속에서 적용해 봅니다. 예를 들어,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들었다고 합시다. 처음에는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하고, 정직하게 살고, 남을 해치지 않으려 애쓰면서 살아가다 보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다. 그 사람은 점점 깨닫습니다. ‘아, 이렇게 사는 것이 정말 옳구나.’ ‘이것이 진짜 선이구나.’ 이런 깨달음이 경험을 통해 마음에 자리 잡습니다. 이것이 바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확증’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확증한다’는 말은 자기 의견을 억지로 강화한다는 뜻이 아니라, ‘삶 속에서 진리와 선이 실제로 참됨을 확인해 가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진리가 단순한 지식에서 벗어나 삶의 확신이 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때 진리는 머리의 생각이 아니라, 마음과 삶에 뿌리를 내린 것이 됩니다.
AC.11의 문맥에서는 사람이 신앙의 원리로 말하고 행동하면서 점점 진리와 선 안에 자신을 세운다고 설명합니다. 즉 처음에는 신앙이 이해 속 지식일 뿐이지만, 그 신앙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동안 그 사람은 점점 그 진리 안에서 자신을 확고히 세우게 됩니다. 이것이 ‘확증’입니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른 곳에서 ‘거짓을 확증하는 것’도 자주 말합니다. 사람이 어떤 잘못된 생각을 붙들고, 그 생각을 지지하는 근거만 계속 찾으면 그 역시 ‘확증’이 됩니다. 그래서 확증이라는 과정 자체는 중립적입니다. 문제는 무엇을 확증하느냐입니다. 진리를 확증하면 지혜가 깊어지고, 거짓을 확증하면 오히려 더 어두워집니다.
처음에는 진리가 ‘배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진리를 따라 살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그것이 ‘내가 실제로 아는 것’이 됩니다. 바로 그 변화가 ‘확증’입니다. 다시 말해, ‘진리가 지식에서 확신으로 바뀌는 과정’입니다.
AC.11에서 말하는 ‘자신을 확증한다’는 것은 자기 생각을 고집하는 태도가 아니라, 신앙의 진리와 선이 삶 속에서 참됨을 드러내면서 사람 안에 점점 확고하게 자리 잡는 과정을 말합니다.
네 번째 상태는 사람이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의 빛을 받는 때입니다. 그는 이전에도 경건하게 말하고 선한 것들을 행했으나, 그것은 신앙과 체어리티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그가 겪고 있던 시험과 곤경의 결과, 마음에도 없이 하는, 그러니까 별로 기쁘지도 않은데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그의 속 사람 안에서 불붙게 되었으며, 이것들을 가리켜 두 ‘광명체’(luminaries)라고 합니다. The fourth state is when the man becomes affected with love, and illuminated by faith. He indeed previously discoursed piously, and brought forth goods, but he did so in consequence of the temptation and straitness under which he labored, and not from faith and charity; wherefore faith and charity are now enkindled in his internal man, and are called two “luminaries.”
해설
이 단락에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네 번째 ‘상태’(state)를 이전 단계들과 질적으로 구별되는 전환점으로 제시합니다. 세 번째 상태에서 사람은 회개하며 경건하게 말하고 선한 일을 행하기 시작했지만, 그 모든 것은 여전히 외적 압박과 내적 곤경 속에서 나온 반응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선을 행했으나 그것을 기뻐서 행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몰려 있었고, 그 결과로 경건과 선행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 선은 아직 자유롭고 자발적인 생명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네 번째 상태에 들어서면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제 사람은 단지 선을 ‘행해야 해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선 자체에 감동되기 시작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사랑에 감동된다’고 표현하는데, 이것은 감정적 흥분이나 종교적 열정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의 애정이 사람의 속 사람 안에서 실제로 작용하기 시작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동시에 그는 신앙의 ‘빛을 받는데’, 이는 진리가 더 이상 외부에서 들려오는 규범이 아니라, 내면에서 이해되고 인식되는 빛이 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이 변화의 핵심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이제 ‘불붙게 되었다’라는 표현에 있습니다. 이전 단계들에서도 신앙의 지식과 선한 행위는 존재했지만, 그것들은 마치 꺼져 있는 숯처럼 잠재된 상태였습니다. 네 번째 상태에서 주님의 역사로 그것들이 실제로 불이 붙어, 속 사람 안에서 생명력 있게 작용하기 시작합니다. 이 불붙음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주님이 정하신 때에 주시는 은혜이며, 이전의 모든 준비 단계가 이 시점을 위해 존재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신앙과 체어리티를 두 ‘광명체’(luminaries)라고 합니다. 이는 창세기 1장에서 해와 달이 창조되는 장면과 직접 연결됩니다. 해는 사랑, 특히 체어리티를 상징하고, 달은 신앙을 상징합니다. 이 둘이 하늘에 놓여 낮과 밤을 다스리듯, 이 단계에서 신앙과 체어리티는 사람의 내적 삶을 다스리는 중심 원리가 됩니다. 이전에는 겉 사람의 욕망과 두려움이 삶을 이끌었다면, 이제는 속 사람 안에서 타오르는 사랑과 빛나는 신앙이 삶의 방향을 결정하기 시작합니다.
이 상태는 또한 선의 근원에 대한 인식이 바뀌기 시작하는 시점입니다. 사람은 점차 자신이 행하는 선과 이해하는 진리가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온 것임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이 깨달음은 아직 완전히 확립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이전처럼 선을 자기 공로로 붙잡지는 않게 됩니다. 이는 이후 다섯 번째 상태에서 신앙에서 말하고, 진리와 선을 더 깊이 확증할 수 있는 기초가 됩니다.
결국 AC.10에서 말하는 네 번째 상태는 거듭남의 과정에서 ‘내적 빛의 시대’가 열리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빛이 되고, 체어리티는 의무가 아니라 사랑이 됩니다. 이 상태가 없이는 이후의 모든 생기 있는 영적 활동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네 번째 상태는 거듭남의 여정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며, 주님이 인간의 속 사람 안에 실제로 거처를 마련하시기 시작하는 시점입니다.
세 번째 상태는 회개(repentance)의 상태로서, 이때 사람은 속 사람(internal man)으로부터 경건하고 정성스러운 말과, 체어리티(charity)의 행위들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여전히 생기가 없는데, 그가 그것들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걸로 여기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선들을 ‘풀’(tender grass), ‘씨 맺는 채소’(herb yielding seed)라 하고, 나중에는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tree bearing fruit)라고 합니다. The third state is that of repentance, in which the man, from his internal man, speaks piously and devoutly, and brings forth goods, like works of charity, but which nevertheless are inanimate, because he thinks they are from himself. These goods are called the “tender grass,” and also the “herb yielding seed,” and afterwards the “tree bearing fruit.”
해설
이 단락에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세 번째 ‘상태’(state)를 ‘회개의 상태’로 규정하며, 인간의 내적 변화가 처음으로 의식적 삶의 형태를 띠기 시작하는 단계를 설명합니다. 앞선 두 상태에서 사람은 아직 수동적인 위치에 있었고, 주님의 자비가 어둠 위에서 운행하거나, 주님께 속한 것과 자기에게 고유한 것이 구별되기 시작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 상태에 이르면, 사람은 비로소 자신의 삶과 말, 행동에서 변화를 보이기 시작하며, 이것이 회개라는 이름으로 드러납니다.
이 회개는 겉 사람의 형식적 변화가 아니라, ‘속 사람’(internal man)에서 비롯된 반응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사람은 이 단계에서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말하며, 신앙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이전과는 다른 삶의 태도를 보입니다. 또한 실제로 체어리티의 행위들과 같은 선한 일들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는 거듭남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진전이며, 신앙이 단지 생각이나 감정 차원에 머물지 않고, 삶으로 나타나기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단계의 선들을 ‘생기 없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여전히 그 선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기 때문입니다. 즉, 그는 선한 일을 하면서도 그것이 주님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결심, 자신의 경건, 자신의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이로 인해 이 단계의 선은 참된 영적 생명을 갖지 못하며, 아직은 자연적 차원의 선에 머뭅니다. 이것은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는 평가가 아니라, 선의 근원에 대한 인식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의 선을 설명하기 위해 창세기 1장 11절의 식물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먼저 ‘풀’(tender grass)입니다. 이 풀은 막 돋아난 초기의 선을 가리키며, 매우 연약하고 쉽게 상할 수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는 회개 초기에 나타나는 선의 특징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다음으로 ‘씨 맺는 채소’(herb yielding seed)는 이 선 안에 진리의 씨앗이 들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즉, 비록 아직 생기는 없지만, 이후에 성장할 가능성과 번식의 능력을 이미 내포하고 있다는 뜻이지요. 마지막으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tree bearing fruit)는 이 초기적 선이 장차 성숙하여 지속적이고 안정된 선으로 발전할 잠재력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 비유는 회개의 상태가 단번에 완성되는 단계가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사람은 회개를 시작했다고 해서 곧바로 참된 영적 선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성장과 성숙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주님은 이 단계에서 나타나는 미숙한 선조차도 소중히 여기시며, 그것을 제거하지 않으시고 보호하시며 자라게 하십니다. 이는 주님의 자비가 인간의 불완전함을 고려하여 단계적으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또한 이 단락은 인간의 협력과 한계를 동시에 드러냅니다. 세 번째 상태에서 사람은 실제로 선을 행하며, 말과 행동에서 책임 있는 주체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아직 선의 근원을 오해하고 있으며, 이 오해가 바로 다음 상태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교정되어야 할 지점입니다. 이 때문에 이 상태는 매우 중요하면서도, 동시에 위험을 내포한 단계입니다. 사람이 이 선을 자기 의로 고착시키면 더 나아가지 못하지만, 주님의 인도에 따라 이 선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배우게 되면, 이후의 깊은 변화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결국 AC.9에서 말하는 회개의 상태는 거듭남의 여정에서 최초로 인간의 삶이 눈에 띄게 변하는 시점이지만, 아직은 시작에 불과한 단계입니다. 이 상태의 선은 생기가 없으나, 성장할 모든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 연한 풀을 자라게 하시고, 씨를 맺게 하시며, 마침내 열매를 맺는 나무로 이끄시기 위해 다음 단계들을 준비하십니다. 그래서 세 번째 상태는 인간의 진지한 응답이 처음으로 나타나는 단계이자, 주님의 더 깊은 역사가 이어지기 위한 중요한 발판이 됩니다.
심화
1. ‘회개(repentance)의 상태’
AC.9의 ‘회개(repentance)의 상태’라는 표현을 설명해 주세요. 이어지는 내용인, ‘사람은 속 사람(internal man)으로부터 경건하고 정성스러운 말과, 체어리티(charity)의 행위들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여전히 생기가 없는데, 그가 그것들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걸로 여기기 때문이지요.’에서 갑자기 ‘회개’(repentance)라는 용어가 나오는 게 좀 너무 갑작스럽습니다. 비약에 가깝다 느껴지는데요... 뭐랄까... 그 정도는 아직 성숙하지 못한 정도지 무슨 회개할 정도로 죄를 진 건가 싶어서입니다.
목사님께서 느끼신 ‘갑작스러움’은 매우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현대 한국어에서 ‘회개’라는 단어는 보통 ‘큰 죄를 뉘우치는 사건’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AC.9에서 스베덴보리가 사용하는 ‘repentance’는 그런 의미보다 훨씬 ‘구조적이고 영적 과정에 가까운 개념’입니다. 그래서 그 맥락을 조금 풀어 보면 비약처럼 보이던 부분이 상당히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먼저 스베덴보리에게서 ‘회개’는 단순히 ‘죄를 후회한다’는 감정이 아닙니다. 그는 여러 저작에서 회개를 ‘자신의 삶을 살펴보고, 악을 인식하고, 그것을 버리기 시작하는 상태’로 설명합니다. 즉 회개는 사건이라기보다 ‘상태’(state)입니다. 사람이 자기 삶을 돌아보고 ‘내 안에는 주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나에게서 나온 것이 많구나’ 하고 깨닫기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그래서 AC.9의 ‘repentance의 상태’는 ‘죄를 크게 저질러서 울며 회개하는 순간’이 아니라 ‘자기 중심성의 문제를 처음 의식하기 시작하는 영적 단계’입니다.
이제 AC.9의 문장과 연결해 보겠습니다. 그 글에서는 사람이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한 말과 체어리티의 행위를 하기는 하지만, 그것들이 아직 ‘생기’(life)가 없다고 말합니다. 이유는 그 사람이 그것들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즉 그는 선을 행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마음 깊은 곳에서는 ‘내가 이렇게 선하게 행동했다’는 자기중심적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은 단순한 미숙함을 넘어 ‘거듭남이 아직 완전히 시작되지 않았다는 표지’입니다.
여기서 ‘회개’가 등장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이 처음에는 선한 말과 행동을 하더라도 그것을 자기 공로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 가면 그 사람은 점차 깨닫기 시작합니다. ‘내가 하는 선이 사실은 내 힘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구나.’‘내 안에는 여전히 자기 사랑이 강하구나.’ 이런 인식이 생기면, 그때부터 자기 중심성을 내려놓는 방향으로 마음이 움직입니다. 바로 이 전환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회개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AC.9의 흐름을 거듭남 단계로 보면 이렇습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진리와 선을 알기 시작합니다. 그다음에는 경건한 말과 선한 행동도 어느 정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자기 공로의 한계를 깨닫는 단계’, 즉 회개의 상태가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회개는 ‘큰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중심적 선의 한계를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그래도 선한 행동을 하는데 왜 회개까지?’라는 느낌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기준에서는 선한 행동의 외형보다 ‘그 출처가 어디냐’가 더 중요합니다. 선이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믿는 한, 그것은 아직 완전히 살아 있는 선이 아닙니다. 그 선이 주님에게서 온 것임을 인정할 때 비로소 생명이 들어옵니다. 그 전환의 문턱이 바로 ‘회개의 상태’입니다.
처음 신앙을 시작하면 사람은 선한 행동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것은 매우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사람은 점점 깨닫습니다. ‘내가 선을 행하려 해도 내 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구나.’ 바로 그 깨달음이 회개의 시작입니다. 그것은 죄인의 절망이라기보다 ‘자기 중심성에서 주님 중심으로 방향이 바뀌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AC.9의 ‘repentance’는 죄책감의 폭발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거듭남의 구조 안에서 나타나는 자기 인식의 단계’라고 이해하시면 가장 정확합니다. 그렇게 보면 그 표현은 갑작스러운 비약이 아니라, 오히려 바로 앞 문장과 정확히 연결된 설명이 됩니다.
2. ‘체어리티(charity)의 행위’
체어리티(charity)를 좀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이 영어 ‘charity’를 우리말로 옮기기가 참 그런 게, 우리말 어떤 하나의 표현으로 옮기는 순간, 그것 말고도 가지고 있는 다른 많은 뉘앙스들을 다 놓치는 것 같아요...
목사님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스베덴보리 저작에서 ‘charity’는 한국어 한 단어로 옮기기 가장 어려운 단어 가운데 하나입니다. ‘자선’, ‘사랑’, ‘인애’, ‘선행’, ‘이웃 사랑’ 어느 하나로 번역해도 항상 뭔가 빠집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개념을 먼저 분명히 이해하고, 번역은 문맥에 따라 유연하게 처리하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먼저 스베덴보리가 사용하는 ‘charity’의 가장 기본적인 뜻부터 말씀드리면, 그것은 ‘이웃을 향한 사랑이 삶 속에서 실제 행동으로 나타난 상태’입니다. 즉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삶의 태도와 행동의 방향’입니다. 그는 자주 ‘love to the Lord’와 ‘charity toward the neighbor’를 함께 말합니다. 전자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고, 후자는 그 사랑이 사람들 사이의 삶으로 흘러나오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charity는 사랑의 감정이라기보다 ‘사랑이 삶 속에서 작동하는 형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charity는 ‘자선 행위’보다 훨씬 넓은 개념입니다. 현대 영어에서 charity라고 하면 흔히 가난한 사람을 돕는 자선 활동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charity를 그렇게 좁게 보지 않습니다. 그는 charity를 ‘이웃에게 선을 행하려는 의지와 그에 따른 삶 전체’로 이해합니다. 즉 정직하게 일하는 것, 공정하게 판단하는 것, 남을 해치지 않는 것, 다른 사람의 유익을 고려하는 것, 이런 모든 것이 charity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이 점 때문에 한국어 번역이 어려워집니다. ‘자선’이라고 하면 너무 좁아지고, ‘사랑’이라고 하면 감정 중심으로 들리고, ‘선행’이라고 하면 도덕적 행위 정도로 축소됩니다. 그래서 많은 번역자들이 ‘이웃 사랑’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비교적 좋은 선택입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 자신이 charity를 설명할 때 거의 항상 ‘이웃(neighbor)과의 관계’ 속에서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charity는 단순히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도 아닙니다. 그는 charity를 ‘진리(truth)에 의해 인도되는 선(good)’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무엇이 진짜로 이웃에게 유익한지 분별하면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에게 돈을 주는 것이 항상 charity는 아닙니다. 때로는 그것이 그 사람을 더 해롭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charity는 감정적 친절이 아니라 ‘지혜와 결합된 선한 의지’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특징은 charity가 ‘삶의 중심 원리’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그 사람이 믿는 교리보다 ‘그가 어떤 사랑으로 살고 있는가’로 판단합니다. 그 사랑이 이웃의 선을 향하고 있다면 그는 charity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faith without charity’는 살아 있는 신앙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신앙은 charity 안에서만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charity는 ‘남을 불쌍히 여겨 돕는 마음’보다 훨씬 넓습니다. 그것은 ‘이웃의 선을 진심으로 바라며 그를 위해 옳은 일을 하려는 삶의 태도’입니다. 그리고 그 태도는 작은 일들 속에서 나타납니다. 정직하게 일하는 것, 공정하게 행동하는 것,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려는 것, 다른 사람의 유익을 생각하는 것, 이런 모든 것이 charity입니다.
그래서 번역할 때는 한 단어에 너무 묶이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어떤 문맥에서는 ‘이웃 사랑’이 가장 자연스럽고, 어떤 곳에서는 ‘선행’, ‘선한 삶’, ‘이웃을 위한 사랑’, 또는 ‘이웃을 향한 선’이라고 풀어 번역하는 것이 오히려 의미를 더 잘 전달합니다. 스베덴보리의 charity는 하나의 단어라기보다 ‘삶의 방향 전체를 가리키는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정리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charity는 단순한 자선이 아니라 ‘이웃의 선을 바라며 그 선을 위해 살려는 의지와 삶 전체’입니다. 감정이 아니라 삶의 질서이고, 순간적 행위가 아니라 지속적인 상태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charity 안에서 신앙이 살아 움직입니다.
두 번째 상태는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서로 구별되는 때입니다. 주님께 속한 것들은 말씀에서 ‘리메인스’(remains)라고 하는 건데, 여기서는 특별히 유아기부터 배워 온 신앙의 지식들을 뜻하며, 그것들은 저장되어 있다가 사람이 이 상태에 이르기 전까지는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상태는 시험, 불행, 또는 슬픔 없이 존재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이를 통해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 곧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잠잠해지고, 마치 죽은 것처럼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여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이 속 사람에 속한 것들로부터 분리됩니다. 속 사람 안에는 주님께서 이때까지 저장해 두신 리메인스가 있으며, 바로 이 목적을 위해 보존되어 온 것입니다. The second state is when a distinction is made between those things which are of the Lord, and those which are proper to man. The things which are of the Lord are called in the word “remains,” and here are especially knowledges of faith, which have been learned from infancy, and which are stored up, and are not manifested until the man comes into this state. At the present day this state seldom exists without temptation, misfortune, or sorrow, by which the things of the body and the world, that is, such as are proper to man, are brought into quiescence, and as it were die. Thus the things which belong to the external man are separated from those which belong to the internal man. In the internal man are the remains, stored up by the Lord unto this time, and for this use.
해설
이 단락에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두 번째 ‘상태’(state)를 첫 번째 상태와 분명히 구별합니다. 첫 상태가 전적으로 주님의 자비가 어둠 위에서 운행하는 준비 단계였다면, 두 번째 상태는 인간 안에서 ‘구별이 처음으로 일어나는 단계’입니다. 이 구별이란 선과 악의 윤리적 분별 이전에, 무엇이 주님께 속한 것이고 무엇이 사람 자신에게서 나온 것인지를 구별하는 인식의 시작을 뜻합니다. 이 구별 없이는 거듭남은 결코 진행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기에게서 나온 것을 선과 진리로 착각하는 한,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께 속한 것들을 ‘리메인스’(remains)라고 합니다. 리메인스는 사람이 살아오면서 스스로 축적한 종교 지식이나 도덕적 자산이 아니라, ‘주님이 유아기부터 사람 안에 조용히 저장해 두신 것들’입니다. 여기에는 신앙의 기초적 지식들, 선한 감정의 흔적들, 순수한 애정, 주님을 향한 어린 마음의 인상들이 포함됩니다. 중요한 점은, 이 리메인스가 평소에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오랫동안 그것의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며, 오직 이 두 번째 상태에 이르러서야 그것들이 작동할 준비를 갖춥니다.
이 상태가 오늘날에는 거의 항상 시험, 불행, 슬픔과 함께 온다고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이유는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주님이 고통을 기뻐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이 잠잠해지지 않고서는 속 사람이 드러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고유한 것, 곧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비롯된 욕망과 판단은 평소에는 매우 활발하여, 속 사람의 미세한 움직임을 완전히 덮어 버립니다. 그래서 주님은 섭리 안에서 외적 삶이 흔들리거나 제한되는 상황을 허용하시는데, 이로 인해 겉 사람의 활동은 약해지고, 마치 죽은 것처럼 조용해집니다.
이 과정은 스베덴보리가 자주 말하는 ‘황폐’(vastation)의 초기 형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겉 사람의 것들이 약화되고 무력해질 때, 비로소 사람은 자신의 힘과 지혜에 의존할 수 없음을 느끼게 됩니다. 바로 이때 속 사람 안에 저장되어 있던 리메인스가 깨어날 수 있는 공간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이 상태에서 겪는 슬픔이나 시험은 거듭남을 방해하는 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거듭남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입니다.
이 단락의 핵심 결과는 겉 사람과 속 사람의 분리입니다. 이는 인간이 둘로 쪼개진다는 뜻이 아니라, 내적 질서가 처음으로 형성된다는 의미입니다. 이전에는 겉 사람의 사고와 욕망이 인간 전체를 지배했다면, 이제는 속 사람이라는 또 하나의 중심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속 사람 안에 바로 리메인스가 있으며, 그것들은 주님께서 오랫동안 이 시점을 위해 보존해 오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두 번째 상태는 주님이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해 두신 것이 실제로 사용되기 시작하는 전환점입니다.
이 상태는 또한 인간의 신앙이 본격적으로 현실성을 갖기 시작하는 단계이기도 합니다. 이전까지 신앙이 있었다면 그것은 주로 외적 습관이나 전통, 혹은 지적 동의에 머물렀지만, 이제 신앙은 내면에서 삶과 연결될 가능성을 갖습니다. 그러나 이 가능성은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라, 오직 구별의 시작일 뿐입니다. 무엇이 주님께 속한 것인지, 무엇이 자기에게 고유한 것인지에 대한 이 구별은 이후의 모든 상태를 관통하는 기준이 됩니다.
결국 AC.8은 거듭남이 감정적 각성이나 도덕적 결심으로 진행되지 않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거듭남은 먼저 ‘구별의 눈이 열리는 사건’이며, 이 구별은 종종 고통과 침묵, 상실의 시간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언제나 주님의 섭리가 있으며, 속 사람 안에 저장된 리메인스를 사용하여 인간을 새롭게 하시려는 오랜 준비가 놓여 있습니다. 두 번째 상태는 그래서 고통의 단계이면서 동시에, 주님의 오랜 인내가 처음으로 열매를 맺기 시작하는 거룩한 전환의 단계입니다.
심화
1. ‘오늘날 이 상태는 시험, 불행, 또는 슬픔 없이 존재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이를 통해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 곧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잠잠해지고, 마치 죽은 것처럼 되기 때문입니다.’
AC.8 본문에 나오는 위 문장에 대한자세한 설명 부탁합니다. 왜 시험, 불행, 슬픔들이 있어야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 곧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잠잠해지고, 마치 죽은 것처럼 되나요? 안 그런 사람들도 제법 있던데...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AC.8의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에서 매우 현실적이고도 예민한 지점입니다. 먼저 핵심부터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반드시 사람을 괴롭혀야만 거듭남이 일어난다’는 뜻이 아닙니다. 또한 ‘시험, 불행, 슬픔을 많이 겪은 사람일수록 더 거듭난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가 말하는 핵심은 이것입니다. 사람의 겉 사람, 곧 몸과 세상에 붙어 있는 자기 확신, 자기 의지, 자기 만족, 자기 판단의 소음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평소에는 속 사람 안에 저장된 리메인스와 주님의 조용한 인도를 거의 듣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시험, 불행, 슬픔이 그 시끄러운 바깥층을 잠잠하게 만드는 도구가 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고난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 ‘겉 사람의 지배력이 약해지는 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왜 하필 시험, 불행, 슬픔이 이런 역할을 하느냐 하면, 평소 인간은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을 너무도 당연하고, 강하게 붙들고 살기 때문입니다. 건강, 체면, 성공, 인정, 계획, 통제감, 내 판단의 옳음,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일이 풀려야 한다는 기대, 이런 것들이 겉 사람의 질서를 이룹니다. 그런데 사람이 형통하고 자기 뜻대로 되는 동안에는 이것들이 거의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면 사람은 자기가 주도하고 자기가 판단하고 자기가 산다고 느끼기 쉽습니다. 그 상태에서는 주님에게서 오는 더 깊은 선과 진리가 있어도, 그것이 거의 드러나지 못합니다. 반면 시험이나 불행이나 슬픔이 찾아오면, 그 사람이 당연하게 여기던 바깥 질서가 흔들립니다. 내가 다 할 수 있다는 생각, 내가 옳다는 생각, 세상적 안전이 나를 붙들어 준다는 생각이 약해집니다. 바로 그때 겉 사람의 주장들이 ‘잠잠해지고’, 그래서 속 사람 안에 저장된 리메인스, 곧 주님께서 미리 보존해 두신 선과 진리의 씨앗이 좀 더 앞으로 나올 수 있게 됩니다. AC.8이 말하는 ‘마치 죽은 것처럼 된다’는 말은 바로 이 의미입니다.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이 실제로 제거되거나 파괴된다는 뜻이 아니라, 적어도 한동안은 그 지배권이 멈추고, 절대적인 주도권을 잃는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구별이 하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시험, 불행, 슬픔’이 언제나 자동으로 사람을 더 좋게 만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실 많은 경우, 사람은 고난을 겪고도 더 완고해질 수 있습니다. 더 원망하고, 더 자기중심적이 되고, 더 비뚤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사람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고난이라는 상황 속에서도 사람의 겉 사람을 느슨하게 하셔서, 속 사람 안의 더 깊은 것을 건드리실 수 있다는 것이 정확한 뜻입니다. 다시 말해, 변화의 원인은 고난 자체가 아니라 주님의 역사입니다. 고난은 수단일 수 있지만, 주체는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큰 시련 없이도 겸손해지고, 어떤 사람은 큰 시련을 겪고도 전혀 부드러워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마지막에 말씀하신 ‘안 그런 사람들도 제법 있던데...’라는 관찰은 아주 정확합니다. 실제로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비교적 평탄한 삶 속에서도 자기 고집이 약해지고, 진리를 듣고 순순히 받아들이며, 주님의 인도를 따르려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대개 두 가지 중 하나입니다. 하나는 그 사람 안에 이미 강한 리메인스가 있고, 양심과 겸손이 비교적 일찍 형성되어 있어서, 큰 충격 없이도 겉 사람의 소음이 과도하게 커지지 않는 경우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겉으로 보기에는 평탄해 보여도, 그 사람 안에서는 이미 깊은 내적 씨름과 조용한 슬픔, 숨은 깨짐이 오래 진행되고 있는 경우입니다. 겉으로는 ‘시험 없이 잘 자란 사람’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주님께서 그 사람 안에서 매우 섬세하고 조용한 방식으로 겉 사람을 다루고 계셨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AC.8의 문장은 ‘반드시 모두가 큰 불행을 겪는다’는 예외 없는 공식이 아니라, ‘오늘날 대체로는 이런 방식이 많다’는 관찰로 이해해야 맞습니다. 실제로 본문도 ‘거의 없다’(seldom exists without...)고 말하지, ‘절대 없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왜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이 문제인가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것들을 죄악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몸도 필요하고 세상 속 삶도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주도권’을 잡을 때입니다.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은 본래 겉 사람의 도구여야 하는데, 타락한 인간 안에서는 그것들이 왕이 되려 합니다. 편안함, 인정, 소유, 비교우위, 안정, 자기 이미지, 이런 것들이 인간을 끌고 가기 시작하면, 사람은 속 사람의 빛보다 바깥 조건의 변화를 더 강하게 따라갑니다. 시험과 슬픔은 바로 이 잘못된 왕좌를 흔듭니다. 그래서 사람이 처음으로 ‘나는 내 힘으로 서 있는 존재가 아니구나’, ‘내가 붙들던 것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구나’, ‘참된 선과 진리는 다른 곳에서 오는구나’를 배울 여지가 생깁니다. 누가복음 15장, ‘돌아온 탕자’ 비유의 둘째가 스스로 돌이키는 장면이 바로 이런 장면입니다. 그러므로 AC.8의 논리는 ‘고난이 좋아서’가 아니라, ‘겉 사람의 폭주가 멈출 때 속 사람의 질서가 드러날 수 있기 때문에’입니다.
초심자에게 이 부분을 설명하실 때는 이렇게 말씀하시면 좋겠습니다. ‘주님은 사람을 일부러 괴롭히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너무 바깥 것들에 붙잡혀 있을 때 그것들이 잠잠해질 틈을 통해 더 깊은 생명으로 이끄시는 분입니다. 어떤 사람은 큰 시험을 통해, 어떤 사람은 조용한 양심의 깨달음을 통해,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의 아픔이나 자신의 한계를 통해 그 길을 배웁니다. 핵심은 고난의 크기가 아니라, 겉 사람의 소리가 줄어들고 속 사람의 문이 열리는가에 있습니다.’ 이렇게 설명하시면 AC.8의 엄중한 표현도 훨씬 바르게 전달될 것입니다.
첫 번째 ‘상태’(state)는 앞서는(precede) 상태로서, 유아기에서부터의 상태와 거듭남 바로 직전에 있는 상태를 모두 포함합니다. 이 상태를 ‘혼돈’(void), ‘공허’(emptiness), 그리고 ‘흑암’(thick darkness)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첫 번째 움직임은 주님의 자비(the Lord’s mercy)인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the spirit of God moving upon the faces of the waters)입니다. The first state is that which precedes, including both the state from infancy, and that immediately before regeneration. This is called a “voi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And the first motion, which is the Lord’s mercy, is “the spirit of God moving upon the faces of the waters.”
해설
이 단락에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첫 번째 ‘상태’(state)를 정의하면서, 인간의 영적 삶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는지를 매우 솔직하고도 철저하게 드러냅니다. 이 첫 상태는 거듭남 이후의 어떤 성취나 빛의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그 이전의 모든 상태를 포괄하는 단계입니다. 여기에는 유아기의 상태와, 성인이 되어 거듭남 직전에 이르는 상태가 함께 포함됩니다. 이 점은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유아기를 무죄의 상태로 보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이미 거듭난 상태로 보지는 않습니다. 유아기는 악을 의식적으로 행하지는 않지만, 동시에 선과 진리를 의식적으로 인식하지도 못하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유아기와 거듭남 직전의 상태는 서로 다른 모습이지만, 모두 아직 영적 생명이 실제로 형성되기 이전이라는 점에서 하나의 첫 상태로 묶입니다.
이 상태를 ‘혼돈’(void)과 ‘공허’(emptiness)라 하는 이유는, 사람 안에 아직 참된 선과 참된 진리가 심기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혼돈’은 선의 부재를, ‘공허’는 진리의 부재를 가리킵니다. 이는 도덕적으로 나쁘다는 평가라기보다, 영적 구조가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는 존재론적 진술입니다. 사람은 이 상태에서 생각하고 느끼며 살아가지만, 그것은 모두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라는 자연적 근원에서 나온 것들이며, 주님의 선과 진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상태를 ‘흑암’(thick darkness)이라고도 합니다. 이 어둠은 단순한 무지나 지식 부족이 아니라, 신앙에 속한 것들, 곧 주님과 천적, 영적 삶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러나 이 단락의 핵심은 인간의 상태를 어둡게 묘사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바로 그 어둠 속에서 ‘첫 번째 움직임’이 일어난다는 선언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첫 움직임이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주님에게서 나온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것은 주님의 자비이며,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라는 표현으로 묘사됩니다. 여기서 ‘운행하다’라는 말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보호하고 품으며 생명을 준비하는 움직임을 뜻합니다. 이는 마치 어미 새가 알 위에 머물며 그 안에서 생명이 형성되도록 따뜻함을 전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이때 주님의 자비가 운행하는 대상은 ‘수면’, 곧 ‘물들의 얼굴’입니다. 이 ‘물들’은 이후에 밝혀지듯이, 주님이 사람 안에 미리 저장해 두신 ‘리메인스’(remains), 곧 선과 진리의 지식들을 가리킵니다. 사람은 의식적으로는 완전히 공허하고 어두운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내면 깊은 곳에는 주님이 유아기부터 보존해 오신 선한 흔적들이 남아 있습니다. 첫 상태에서 사람은 이것을 전혀 자각하지 못하지만, 주님의 자비는 이미 그 위에서 조용히 움직이며, 거듭남의 가능성을 준비합니다. 이 점에서 첫 상태는 절망의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주님의 창조 사역이 막 시작되는 지점입니다.
이 단락은 또한 거듭남이 인간의 결단이나 종교적 열심에서 출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사람은 첫 상태에서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고, 심지어 자신이 어둠 속에 있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듭남은 시작되는데, 그것은 오직 주님의 자비가 먼저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첫 상태는 인간 쪽에서 보면 수동적이고 무력한 상태이지만, 주님 쪽에서 보면 가장 적극적인 창조의 출발점입니다.
결국 AC.7은 거듭남의 출발을 인간의 빛이나 선에서 찾지 않고, 철저히 주님의 자비에서 찾도록 시선을 돌려줍니다. 인간의 영적 여정은 언제나 ‘혼돈’과 ‘공허’, ‘흑암’에서 시작되지만, 그 어둠 위로 주님의 영이 먼저 운행하십니다. 이 질서는 이후의 모든 상태에서도 반복됩니다. 그래서 첫 상태는 단지 과거의 한 단계가 아니라, 사람이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갈 때마다 다시 경험하게 되는 근원적 상태이며, 주님의 자비가 언제나 먼저이고, 인간의 응답은 그다음이라는 영적 질서의 원형을 보여 줍니다.
심화
1. ‘앞서는(precede) 상태’
AC.7에서 말하는 ‘앞서는 상태’(preceding states)는 단순히 ‘거듭남이 시작되기 전 상태’만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문맥에서는 이것이 조금 더 넓은 의미를 갖습니다. 그는 인간의 거듭남을 하나의 연속적인 과정으로 설명하면서, 어떤 상태가 나타날 때, 그것은 항상 그 이전에 있었던 상태들 위에서 생겨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preceding states’는 ‘현재 상태보다 앞서 있었던 모든 상태들’, 곧 그 상태를 가능하게 만든 이전 단계들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거듭남 이전의 상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 과정 속에서 서로 이어지는 단계들 전체를 포함하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에서 ‘상태’(states)라는 개념은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의 삶은 일정한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는 여러 상태들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의 상태는 이전 상태에서 자라나고, 다음 상태의 기초가 됩니다. 그러니까 한 상태가 나타날 때, 그것은 그 이전 상태들과 완전히 끊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세워지는 것이지요. AC.7에서 말하는 ‘preceding states’는 바로 이런 의미에서 ‘앞서 있었던 상태들’을 말합니다. 즉 지금 설명되는 상태보다 먼저 있었고, 그것을 준비하거나 가능하게 만든 상태들입니다.
이 점은 거듭남 설명에서 특히 중요합니다. 창세기의 여섯 날은 각각 독립적인 사건이 아니라, 하나가 다음을 준비하는 연속적인 상태들입니다. 예를 들어 첫째 날의 ‘빛’은 진리의 첫 인식을 의미하고, 그다음 상태들이 그 위에서 발전합니다. 따라서 둘째 날, 셋째 날 등 뒤의 상태들은 모두 앞선 상태들에 의존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preceding states’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지금 설명되는 상태는 이전 상태들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그 위에서 더 발전한 상태라는 뜻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에게서 이전 상태는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음 상태 안에 어떤 방식으로 남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다른 곳에서 인간의 상태들이 서로 이어지며 축적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앞선 상태들은 단순히 지나가 버린 과거가 아니라, 이후 상태 안에 기초로 남아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preceding states’는 단지 시간적으로 앞선 단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상태의 토대가 되는 상태들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따라서 AC.7의 ‘앞서는 상태’라는 표현은 ‘거듭남 이전 상태’라는 의미로만 좁히면 조금 부족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지금 설명되는 상태보다 먼저 있었고, 그것을 준비하고 가능하게 만든 모든 이전 상태들’을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의 창조 서술을 통해 인간의 거듭남이 이런 연속적인 상태들의 질서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