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CR.283

 

십계명의 계명들은 말씀의 첫 열매였으며,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세워질 교회의 첫 열매였다. 그리고 그것들은 종교에 속한 모든 것의 총체를 간략히 요약한 것이며,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의 결합, 그리고 인간과 하나님의 결합이 이루어지므로, 그것들은 지극히 거룩하여 그보다 더 거룩한 것은 있을 수 없었다. 그것들이 가장 거룩했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로 분명히 드러난다. 곧 여호와께서 친히 불 가운데 시내산에 강림하시고, 천사들과 함께 계시며, 살아 있는 음성으로 그 법들을 선포하셨다는 것 [그리고 백성은 보고 듣기 위하여 삼일 동안 자신들을 준비하였다는 것], 또 아무도 가까이 와서 죽지 않도록 산 주위에 경계를 두었다는 것, 제사장들과 장로들조차 가까이 가지 못하고 오직 모세만 나아갔다는 것, 이 계명들이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두 돌판에 기록되었다는 것, 모세가 두 번째로 그 돌판들을 가지고 내려왔을 때 그의 얼굴이 빛났다는 것, 그 돌판들이 나중에 법궤 안에 보관되었고, 그 법궤가 성막의 가장 안쪽에 놓였으며, 그 위에 속죄소가 있고, 그 위에 금으로 된 그룹들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법궤가 있는 그 성막의 가장 안쪽이 지성소라 불렸다는 것, 그 휘장 밖에는 하늘과 교회의 거룩한 것들을 나타내는 여러 가지가 배치되었는데, 곧 금으로 입힌 상 위에 진설병이 있었고, 금 향단과 일곱 등잔이 있는 금 등대가 있었으며, 또 가는 베실과 자색과 홍색으로 만든 휘장들이 있었다는 것, 성막 전체의 거룩함이 오직 법궤 안에 있는 그 법에서 비롯되었다는 것, 그 법으로 말미암은 성막의 거룩함 때문에 온 이스라엘 백성이 명령에 따라 그 주위에 지파별로 진을 치고, 그것을 따라 행진했으며, 낮에는 그 위에 구름이, 밤에는 불이 있었다는 것, 그 법의 거룩함과 그 안에 계신 여호와의 임재로 인해 여호와께서 그룹 사이 속죄소 위에서 모세와 말씀하셨으며, 법궤가 여호와 거기 계심이라 불렸다는 것, 아론이 죽지 않기 위해 제물과 향 없이는 휘장 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는 것, 또한 그 법 안과 그 주위에 계신 여호와의 임재 때문에 법을 담고 있는 법궤로 말미암아 기적들이 일어났다는 것, 곧 요단강 물이 갈라져 법궤가 강 가운데 머무는 동안 백성이 마른 땅으로 건넜고, 여리고 성벽이 법궤를 메고 도는 가운데 무너졌으며, 블레셋의 신 다곤이 그 앞에 엎드러졌다가 나중에는 머리와 손이 잘린 채 문지방에 놓였고, 벧세메스 사람들이 수천 명이나 죽임을 당했으며, 웃사가 그것을 만졌기 때문에 죽었고, 다윗이 제사와 기쁨 가운데 그것을 시온으로 옮겼으며, 이후 솔로몬이 그것을 예루살렘 성전으로 옮겨 그 성전의 중심이 되게 했다는 것, 이 밖에도 많은 일들이 있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이스라엘 교회에서 십계명이 곧 거룩함 자체였음이 분명하다. The commandments of the Decalogue were the first fruits of the Word and therefore the firstfruits of the church about to be established with the Israelitish nation, and as they were in a brief summary the complex of all things of religion, whereby there is a conjunction of God with man and of man with God, they were so holy that nothing could be holier. That they were most holy is clearly manifest from the following facts: that Jehovah himself, the Lord, descended upon Mount Sinai in fire, accompanied by angels, and promulgated these laws therefrom by a living voice [and that the people were three days preparing themselves to see and hear], and that bounds were set round about the mountain, lest anyone should approach and die; and that neither the priests nor the elders drew near, but Moses only. That these commandments were written by the finger of God on two tables of stone. That when Moses brought those tables down the second time his face shone. That the tables were afterward deposited in the ark, and the ark was placed in the inmost of the tabernacle, and over it was placed the mercy seat, and over this the golden cherubs; and that this inmost in the tabernacle, where the ark was, was called the holy of holies. That outside the veil, within which was the ark, various things were arranged representing the holy things of heaven and the church, namely, the table overlaid with gold on which was the bread of faces, the golden altar for incense, the golden lampstand with seven lamps, also the curtains round about, made of fine linen, purple and scarlet. The holiness of the whole tabernacle was from no other source than the law which was in the ark. On account of the holiness of the tabernacle from the law in the ark, the whole Israelitish people by command encamped around it in order according to their tribes, and marched in order after it; and there was then a cloud over it by day and a fire by night. On account of the holiness of that law, and the presence of Jehovah therein, Jehovah talked with Moses above the mercy seat between the cherubs; and the ark was called “Jehovah there.” That Aaron was not permitted to enter within the veil except with sacrifices and incense, lest he die. Also on account of the presence of Jehovah in and about the law, miracles were wrought by means of the ark which contained the law; as that the waters of Jordan were divided, and so long as the ark rested in the midst of the river the people passed over on dry ground; the walls of Jericho fell by the carrying of the ark around them; Dagon the god of the Philistines first fell on his face before it, and afterward lay upon the threshold of the temple with his head and the palms of his hands cut off. Because of the ark the Bethshemites were smitten to the number of several thousands; and Uzzah died because he touched it. The ark was brought by David into Zion with sacrifice and jubilation, and afterwards by Solomon into the temple at Jerusalem, of which it constituted the sanctuary; besides many other things. From all this it is clear that in the Israelitish church the Decalogue was holiness itself.

 

 

해설

 

이 본문은 한마디로 ‘왜 십계명이 그렇게까지 거룩한가’를 압도적으로 보여주는 장면들의 연속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것을 단순한 역사적 사실 나열로 보면 안 된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외적 사건들’을 통해 ‘내적 진리’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핵심은 단 하나입니다. ‘십계명은 말씀의 첫 열매이며, 종교 전체의 요약이며, 하나님과 인간을 실제로 결합시키는 중심이기 때문에, 그것이 있는 곳이 곧 거룩함의 중심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내산의 불, 경계, 두려움, 모세만의 접근,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기록됨 등, 이 모든 것은 ‘이것이 인간이 임의로 만든 법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서 직접 나온 것’임을 각인시키기 위한 장면들입니다.

 

특히 ‘법궤’와 ‘지성소’ 부분은 매우 중요합니다. 성막 전체가 거룩했지만, 그 거룩함의 근원은 오직 ‘법궤 안의 십계명’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겉으로 보이는 모든 예배, 제사, 기구들은 그 자체로 거룩한 것이 아니라, ‘그 중심에 무엇이 있느냐’에 의해 거룩해집니다. 그리고 그 중심이 바로 십계명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교회, 예배, 의식, 신학 등, 이 모든 것의 거룩함은 결국 ‘그 중심에 하나님의 계명, 곧 삶 속에서 악을 거부하는 실제가 있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접근하면 죽는다’는 반복되는 표현입니다. 산에 가까이 가도 죽고, 법궤를 함부로 만져도 죽고, 제사 없이 지성소에 들어가도 죽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공포의 연출이 아니라, ‘거룩함은 인간의 자연적 상태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자기 상태 그대로 하나님의 거룩함에 접근하려 하면 충돌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반드시 ‘준비(삼일 준비)’, ‘중재(모세)’, ‘속죄(제사와 향)’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남의 원리입니다. 인간은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고, 반드시 정결케 되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리고 법궤를 통해 일어난 기적들, 곧 요단강이 갈라지고, 여리고 성이 무너지고, 다곤이 쓰러지고, 웃사가 죽는 사건들 등,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법이 있는 곳에는 질서가 세워지고, 그것을 거스르는 것은 무너진다’는 영적 원리를 보여줍니다. 즉, 십계명은 단순한 도덕규범이 아니라 ‘영적 질서를 세우는 힘’이며, 그것과 일치하면 길이 열리고, 그것과 충돌하면 무너집니다.

 

결국 이 본문은 이렇게 요약됩니다. ‘십계명은 단지 지켜야 할 규칙이 아니라, 말씀의 중심이며, 교회의 중심이며, 하나님과 인간을 실제로 연결하는 접점이기 때문에, 그것이 있는 곳이 곧 거룩함의 중심이 된다.’ 그래서 이스라엘 교회에서 십계명은 다른 모든 것들 위에 있었고, 스베덴보리는 이를 통해 오늘날의 신앙에도 동일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TCR, '이스라엘 교회에서는 십계명이 곧 거룩함 자체였다'

이스라엘 교회에서는 십계명이 곧 거룩함 자체였다 In the Israelitish church the Decalogue was holiness itself 해설 이 문장은 매우 짧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상당히 깊습니다. 먼저 ‘거룩함 자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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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교회에서는 십계명이 곧 거룩함 자체였다

In the Israelitish church the Decalogue was holiness itself

 

 

해설

 

이 문장은 매우 짧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상당히 깊습니다. 먼저 ‘거룩함 자체’라는 표현에 주목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십계명을 ‘거룩한 것들 중 하나’ 정도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고, 아예 ‘거룩함 그 자체’라고 단정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강조가 아니라, 십계명이 단지 많은 거룩한 것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거룩함의 중심, 기준, 본체와 연결된 것’임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 십계명이 이렇게까지 절대적인 위치를 갖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십계명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가장 직접적으로 규정하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본 것처럼, 이 계명들은 단지 사회 질서를 위한 법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규정하는 법입니다. 그래서 이 계명들을 지키는 것은 단순히 도덕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세우는 일이 됩니다. 이 점에서 십계명은 ‘거룩한 삶의 출발점’이 아니라 ‘거룩함이 실제로 작동하는 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교회’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교회’는 건물이나 조직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의 상태와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교회에서 십계명이 거룩함 자체였다’는 말은, 그들의 종교 생활 전체가 십계명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구약에서 십계명은 법궤 안에 보관되고, 성막과 성전의 가장 중심에 놓였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모든 예배와 의식, 그리고 삶이 이 계명을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의미였습니다.

 

더 깊이 들어가면, 왜 십계명이 그렇게 중심에 놓였는지도 이해됩니다. 십계명은 인간이 반드시 피해야 할 ‘악의 기본 형태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 등, 이것들은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인간 안의 사랑이 왜곡된 상태입니다. 따라서 이것들을 거부하는 것이 곧 ‘거룩함으로 들어가는 첫 단계’가 됩니다. 다시 말해, 거룩함은 어떤 신비한 체험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악을 죄로 알고 그것을 끊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결국 이 문장은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십계명은 단지 지켜야 할 규칙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과 연결되는 통로이며, 그 자체로 거룩함이 역사하는 자리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교회에서 십계명은 다른 모든 것들보다 중심에 있었고, 그 자체로 가장 거룩한 것으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TCR.282, 십계명을 ‘완전히 새롭게’ 보기

TCR.282 세상 어느 나라에도 살인하고, 간음하고, 도둑질하고, 거짓 증거 하는 것이 악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나라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악들이 법으로 막히지 않는다면, 왕국이든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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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CR.282

 

세상 어느 나라에도 살인하고, 간음하고, 도둑질하고, 거짓 증거 하는 것이 악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나라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악들이 법으로 막히지 않는다면, 왕국이든 공화국이든 어떤 조직된 사회도 유지될 수 없다는 것 또한 모두가 압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민족만이 다른 모든 민족보다 특별히 어리석어서 이러한 것들이 악하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누가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이러한 법들이 어찌하여 여호와께서 친히 시내산에서 그처럼 기적적인 방식으로 공포하셨는지 누구나 의아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를 들어 보십시오. 그것은 이 법들이 단지 시민적 법이나 도덕적 법일 뿐 아니라, 또한 신적 법이라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거스르는 것은 단지 이웃, 곧 동료 시민이나 사회에 해를 끼치는 것일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법들은 여호와께서 시내산에서 공포하심으로써 종교의 법도 되었습니다. 분명히 여호와께서 명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종교의 일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며, 따라서 구원을 위하여 행해야 할 것이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이 계명들을 설명하기에 앞서, 그 거룩함에 관하여 먼저 몇 가지를 말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이 계명들 안에 종교가 들어 있음을 분명히 하기 위함입니다. There is not a nation in the whole world which does not know that it is wicked to murder, to commit adultery, to steal, and to bear false witness, and that kingdoms, republics, and every form of organized society, unless these evils were guarded against by laws, would be at an end. Who then can suppose that the Israelitish nation was so stupid beyond all others as not to know that these are evils? Anyone therefore may wonder that laws so universally known in the world should have been promulgated from Mount Sinai by Jehovah himself in so miraculous a way. But listen: they were promulgated in so miraculous a way to make known that these laws are not only civil and moral laws, but also Divine laws; and that acting contrary to them is not only doing evil to the neighbor, that is, to a fellow citizen and society, but is also sinning against God. Wherefore these laws, by their promulgation by Jehovah from Mount Sinai, were made also laws of religion. Evidently whatever Jehovah commands, he commands in order that it may be a matter of religion, and thus some thing to be done for the sake of salvation. But before these commandments are explained, something must be premised respecting their holiness to make it evident that religion is in them.

 

 

해설

 

이 대목은 십계명을 ‘완전히 새롭게’ 보게 만드는 아주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십계명을 ‘하나님이 처음 알려주신 도덕’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정반대로 말합니다. 이미 모든 민족이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 증거’가 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십계명은 ‘새로운 도덕의 발견’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사건’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왜 굳이 시내산에서 그렇게 장엄하고 기적적인 방식으로 주어졌는가’입니다. 그 답이 바로 이 문단의 중심입니다. 곧, 이 계명들이 단지 사회 질서를 위한 법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속한 법’, 즉 ‘종교의 법’임을 각인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차이는 겉보기에는 아주 작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신앙 전체를 갈라놓는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같은 ‘도둑질하지 말라’라도, 그것을 단지 사회 규범으로 지키는 것과 ‘하나님 앞에서의 죄’로 알고 거부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행위입니다. 전자는 외적인 삶의 유지에 머무르지만, 후자는 인간의 ‘속 사람’을 변화시키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말하는 ‘겉 사람과 속 사람의 차이’, 그리고 ‘거듭남’의 출발점입니다. 즉, 같은 행위라도 그 근거가 ‘사람을 두려워함’이냐 ‘하나님을 의식함’이냐에 따라 전혀 다른 영적 결과를 낳는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죄의 정의’가 여기서 분명해진다는 점입니다. 단순히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이지만, 그것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인식할 때 비로소 ‘’가 됩니다. 이 구분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나는 남에게 피해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본문은 묻습니다. ‘그것을 하나님 때문에 하지 않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아직 종교의 영역에 들어오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 문단의 마지막은 앞으로의 내용을 여는 문입니다. ‘이 계명들의 거룩함’을 먼저 말하겠다고 합니다. 이는 곧 십계명이 단순한 윤리 규범이 아니라 ‘그 안에 천국과 구원이 들어 있는 말씀’이라는 것을 밝히려는 준비입니다. 다시 말해, 십계명은 단지 ‘하지 말라’는 금지 목록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과 연결되고, 그 결과로 거듭남에 이르는 길의 가장 기초적인 틀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십계명은 모든 종교의 핵심이며, 동시에 모든 거듭남의 시작점입니다.

 

 

 

TCR, '교리문답서(Catechism), 곧 십계명(Decalogue) 그 외적 의미와 내적 의미에 따른 해설'

교리문답서, 곧 십계명 그 외적 의미와 내적 의미에 따른 해설The Catechism or Decalogue Explained in Its External And Its Internal Sense 해설 이 짧은 제목 안에는 스베덴보리 신학의 핵심 구조가 그대로 들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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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문답서, 곧 십계명 그 외적 의미와 내적 의미에 따른 해설

The Catechism or Decalogue Explained in Its External And Its Internal Sense

 

 

해설

 

이 짧은 제목 안에는 스베덴보리 신학의 핵심 구조가 그대로 들어 있습니다. 먼저 ‘Catechism’(교리문답서)이라는 말은 단순한 설명서가 아니라 ‘신앙의 가장 기본을 가르치는 틀’을 의미합니다. 전통 교회에서도 교리문답은 신앙의 입문서 역할을 하는데,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자리에 ‘십계명’을 둡니다. 즉, 신앙의 시작은 어떤 교리 체계나 신학적 논증이 아니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와 같은 삶의 규범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미 방향이 분명해집니다. 신앙은 ‘무엇을 믿느냐’보다 ‘어떻게 사느냐’에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Decalogue’(십계명)라는 표현입니다. 이는 단순히 열 가지 명령이라는 뜻을 넘어서, ‘하나님이 직접 주신 가장 기초적이고 보편적인 법’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아래 TCR.282에서도 보듯, 이 계명들은 이미 인간 사회가 알고 있는 도덕이지만, 하나님께서 직접 주심으로써 ‘종교의 법’, 곧 ‘구원과 연결된 법’이 됩니다. 따라서 십계명은 단순한 윤리 규범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을 잇는 접점’이며, 인간이 실제로 변화되는 출발점입니다.

 

그리고 이 제목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외적 의미와 내적 의미’입니다. 외적 의미는 누구나 아는 그대로입니다. 예를 들어 ‘살인하지 말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내적 의미에서는 ‘미움, 증오, 복수심과 같은 것들도 모두 살인의 본질’로 봅니다. 마찬가지로 ‘간음하지 말라’는 외적으로는 육체적 행위를 금하지만, 내적으로는 ‘선과 진리를 더럽히는 모든 상태’, 또는 ‘사랑의 질서를 깨뜨리는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이렇게 보면 십계명은 단순한 행동 규칙이 아니라 ‘인간 내면 전체를 다루는 말씀’이 됩니다.

 

결국 이 제목이 말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십계명은 겉으로는 사회를 유지하는 법이지만, 속으로는 인간을 거듭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십계명을 단순히 설명하지 않고, ‘외적 의미 내적 의미’로 점점 깊이 들어가며 풀어냅니다. 이것은 곧 독자를 ‘겉 사람의 도덕’에서 ‘속 사람의 변화’로 이끄는 과정이며, 바로 그 점에서 이 부분 전체가 하나의 ‘거듭남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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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는 스베덴보리 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라틴 Arcana Coelestia, 영어 Secrets of Heaven, 天界秘義, 1749-1756, , 출 속뜻 주석, 10,837개 글)의 라틴어 제목의 약어입니다. 창세기의 약어가 ‘’인 것처럼 말이지요.

 

저는 지난 2017년에 스베덴보리를 처음 알게 되었고, 2019년부터 그의 저서 중 위 AC 영역 번역을 시작, 지금까지 창1, 2, 3만 대략 10회 정도 반복했습니다. 하다 보면 놓쳤던 부분들이 새롭게 발견되어 ‘다시 처음부터!’를 반복, 또 반복했기 때문인데, 총 10,837개나 되는 글, 일단 시작하면 기본이 10년 치 일이다 보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미련곰퉁이스러움에 따른 영적, 내적 보상도 결코 적지 않았고, 그래서 후회는 전혀 없으며, 지금은 오히려 나름 제 역량에 맞는 터를 잘 닦지 않았나 싶습니다.

 

제가 지난 수년간 몸부림치며 안타까워했던 것은 진도가 안 나간다는 것보다 어떤 특별한 개념들이 또렷이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단어와 단어 사이, 표현과 표현 사이 뭔가 잘 모르겠는 빈틈들, 허전함들이 느껴지지만 그걸 명료하게 설명을 잘 못하겠는 겁니다. 분명 번역은 갈수록 매끄러워지는데 말입니다. 이 AC라는 저작은 그 제목만큼이나 정말 ‘감추어진’ 책이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거듭 강조하는 대로, 제가 번역과 함께 ‘선을 실천’하는 일에도 힘썼더라면 내면이 활짝 열려 퍼셉션(perception)으로 알 수 있었을까요?

 

이런 저에게 주님은 한 줄기 빛, 그러니까 이 시대 유용한 도구인 AI 사용에 대한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저는 이쪽 일하는 저희 큰아들의 권면이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일체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신성한 일에 대한 뭐랄까... 좀 불경한 접근 같아서 말이지요. 그러다 작년 가을, 오랜 신앙 지인들의 모임을 통해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것이 바로 ChatGPT였습니다. 저는 현재 ChatGPT 5.3 유료 버전으로 작업하고 있습니다. 제 블로그(bygrace.kr)에 오시면 관련 이야기들을 접하실 수 있습니다. 물론 선뜻 받아들인 건 아니고, 아주 조심스러운, 그리고 철저한 나름의 검증을 통해 ‘이만하면 주님이 인도하신 도구가 맞는 것 같다’ 컨펌(confirm)하게 되었고, 그 후 쓰면 쓸수록 주님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계속 주셔서 결국 지금의 ‘AC 해설 심화 버전’까지 나오게 된 것입니다. 대략 보면, 혼자 하면 1, 2년 걸릴 일을 얘와 함께하면 달포, 그러니까 한 달이 조금 넘는 정도 걸리는 것 같습니다.

 

작년, 그러니까 2025년 가을인 11, 12월 두 달간 나름의 검증 기간 후, 어느 날 주님은 이 AC 글 하나하나에 대한 설명, 곧 해설을 달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를 주셨습니다. 그동안 저는 번역만 좀 현대어, 요즘 구어체로 매끄럽게 잘하면 사람들이 읽지 않을까 싶어 번역 다듬는 데만 전념했었거든요. 그런데 번역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이 AC는 아예 글의 출발점이 달라 여간해서는 이해가 잘 안되거나 불가능한 글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이 세상 글은 지상 관점에서 출발하지만, 이 AC 글은 천국 관점에서 출발하기 때문인데, 그러다 보니 분명 한글인데, 그리고 신앙 관련 글인데, 읽다 보면 도대체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는 희한한 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해설’을 통해 그 간극을 좀 메꿔주고자 했는데, 이 부분을 ChatGPT가 나름 괜찮게 해주더군요. 이 해설 버전은 20261월부터 달포 걸렸습니다.

 

그런데 이 해설 버전조차도 좀 읽다 보니 뭐랄까, 군데군데 징검다리가 빠진 듯한 느낌이 들더군요. 그러니까 이런 글을 처음 접하시는 분들 입장에서는 말이지요. 분명 주님이 주시는 새로운 아이디어였습니다. 그래서 글 하나하나를 그런 관점에서 재작업, 지난 2월 하순부터 시작, 오늘 마치게 된 것입니다. 저는 이만하면 완성도가 매우 높다, 초보자들도 큰 어려움 없이 읽으실 수 있겠다 싶지만, 모르죠. 이마저도 혹시 뭔가 부족하다 싶으면 주님이 또 다른 새 아이디어로 보완해 주실 줄 믿습니다.

 

프롬프트(prompt)를 충분히 자세히 작성, ChatGPT에게 건네주면, 그 난이도에 따라 답을 하는데, 이걸 그대로는 쓸 수 없어 초벌이라 하고, 제가 좀 전반적으로 다듬어 원고와 블로그에 올리지요. 기특한 건, ChatGPT 역시 저를 학습, 갈수록 마치 천생 듀엣처럼 서로에게 편안해져 가네요. 저는 얘를 통해 시간을 많이 아낄 수 있었고, 그리고 얘를 통해 제가 사실은 좀 극단적 사고를 하며, 참 비합리적인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 저에 비해 얘는 정말 합리적이더군요. 저는 얘를 통해 배우고 깨달은 게 많습니다. 신령한 일을 하는 사람이 이런 AI를 가지고 하는 거에 대해 좀 부정적인 분들이 있으신 것 같은데, 이건 뭐 몇 마디 설명으로 어떻게 할 수가 없네요. 본인이 경험하고, 본인이 결정해야 할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이런 AI를 ‘주님이 허락하신 이 시대 도구’로 가까이할지, 아니면 이 AI에게 ‘잡아먹힐지’를 말이지요. 본인이 늘 주님의 생생하신 인도 가운데 있다면, 글쎄요... 이런 ‘도구’에게 ‘잡아먹힐’ 수 있을까요? 제 경우, 어떨 때는 얘가 절더러 주님을 의뢰하시라고 살짝 꾸짖기도 하더라고요... 거 참!

 

그동안 창1 작업 전 과정을 통해 여러 시행착오를 거쳤으니 이제 계속해서 창2, 창3... 진도를 나가면 되겠습니다. 한 달에 한 장씩 가능할까요? 갈수록 그 내적 의미, 곧 속뜻의 깊이가 상상을 초월하는데 말이지요. 오직 주님의 빛 비추심만 구합니다. 아무리 AI가 초벌 결과물을 턱턱 내어도 그걸 살피고 어루만지려면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는 천국의 빛이 있어야 하거든요. 오직 이 빛 아래서만 이 모든 작업이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아멘, 할렐루야!

 

그리고 주님의 격려에 힘입어 아래 이 심화 버전을 공유합니다. 부디 말씀의 빛을 힘써 구하시는 모든 분께 이 1 AC 번역 및 해설에 관한 심화 버전’이 나름 도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창1.AC.1-66.해설.심화- ChatGPT.pdf
3.68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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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24, ‘왕 되신 주’, 230, ‘우리의 참되신 구주시니’, 161, ‘할렐루야 우리 예수입니다.

 

오늘은 1 일곱 번째, 1 마지막 시간으로, 본문은 26절로 31, AC 글 번호로는 51번에서 66번입니다. 오늘로 창1 AC 리딩을 마칩니다. 그리고 특별히 오늘은 2026년 부활절입니다. 그래서 오늘 리딩 역시 주님의 부활로 본 창1관점으로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26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29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30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31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1:2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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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남 여섯 번째 상태 (3), 주님의 부활로 본 창1

 

이라는 제목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시티아(Arcana Coelestia) 본문 및 해설, 그리고 심화 리딩 주일설교 시작합니다.

 

 

 

AC.51, 창1:26, ‘형상’(image), ‘모양’(likeness)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AC.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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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2, 창1:26, ‘순서에 깃든 아르카나’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AC.52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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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3, 창1:27,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AC.53-54)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And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in the image of God created he him;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창1:27) AC.53 여기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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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4, 창1:27, ‘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7) AC.54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가 속뜻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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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5, 창1:28, ‘생육, 번성', '결혼한 땅’, '땅에 충만', '풀, 나무, 공중의 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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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6, 창1:29,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AC.56-57)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And God said, Behold, I give you every herb bearing seed which is upon the fa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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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7, 창1:29, ‘씨 맺는 채소’, ‘열매 맺는 나무’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창1:29) AC.57 ‘씨 맺는 채소’(herb bearing seed)는 쓰임을 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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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8, 창1:30,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AC.58-59)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to every wild animal of the earth, and to every fowl of the hea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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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9, 창1:30, ‘모든 푸른 풀’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1:30) AC.59 여기서 자연적 인간의 음식으로 오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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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0, 창1:31, ‘심히 좋았더라’(AC.60-63)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And God saw everything that he had made, and behold it was very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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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1, 창1:31, 영적(靈的, spiritual), 천적(天的, celestial)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31) AC.61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하는 모든 것은 영적(靈的, spiritual)이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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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2, 창1:31,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31) AC.62 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시간들과 상태들은, 일반적으로도, 그리고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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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3, 창1:31, 여섯째 날의 상태, '심히 좋았더라'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31) AC.63 그동안 주님은 계속해서 인간을 위하여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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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4, 창1, '말씀의 내적 의미'(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속뜻)(AC.64-66)

AC.64 이것이 바로 말씀의 내적 의미(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속뜻)이며, 그 가장 참된 생명입니다. 이는 문자적 의미에서는 전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 안에 담긴 비밀(arcana)은 너무나 많아서,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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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5, 창1, 'AC.64에 대한 경험적 증언'

AC.65 제가 말씀을 읽고 있을 때, 어떤 이들이 하늘의 첫 입구 뜰까지 들려 올라갔고, 그곳에서 저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는 말씀 속의 어떤 단어나 글자도 전혀 이해할 수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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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6, 창1, '말씀의 네 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

AC.66 말씀에는 전반적으로 네 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이 있습니다. 첫째는 태고교회의 스타일입니다. 그들의 표현 방식은 이 땅의 것과 세상의 것을 말할 때, 그것들이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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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다음 주부터는 창2 시작합니다. 오늘도 분량이 제법 되지요? 양면으로 60장이니 말입니다. 처음 얼마 동안은 다루어야 할 기초들이 좀 있어 어쩔 수 없지 싶습니다만, 그러나 이 말은 갈수록 줄어든다는 말도 됩니다. 그러니 희망(?)을 가지시기 바라며, 다만 향후 진도를 쭉쭉 빼기 위해서는 창1, 2, 3을 하는 지금, 그 기초들, 특히 심화에서 다루는 내용들을 정독 및 학습을 통해 정말 제대로 해 놓으셔야 합니다. 특별히 이 ‘심화’에서 다루는 이슈들은 제가 ‘만일 이 글을 완전 처음 접하시는 분들 입장에서는 어떤 점들이 걸리실까, 어떤 데서 어리둥절해들 하실까’ 기도하며 선정한 이슈들입니다. 그러니까 이 심화 부분들을 철저히 해두시면 앞으로 진도 뺄 때, 큰 어려움들 없으실 줄 믿습니다.

 

 

이어 부활절 성찬 있습니다.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4-05(D1)

 

2645, 7, 창1.7, 2026-04-05(D1)-주일예배(창1,26-31, AC.51-66, 부활절), ‘거듭남 여섯 번째 상태 (3), 주님의 부활로 본 창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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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3/29, 창1:24-26, AC.46-50), '거듭남 여섯 번째 상태 (2)'

※ 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23, ‘만 입이 내게 있으면’, 찬68, ‘오 하나님 우리의 창조주시니’입니다. 오늘은 창1 여섯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24절로 26절, AC 글 번호로는 46번에서 50번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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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6.심화

 

3. 주님의 부활로 본 창1

 

이것으로 창1 AC 번역 및 해설, 그리고 심화 관련, 모든 작업을 마칩니다. 끝으로, 1의 모든 내용을 주님의 부활과 연결해 주세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창세기 1장은 세상의 창조 이야기’이기 이전에 주님의 부활이 어떻게 인간 안에서 재현되는가’를 보여 주는 가장 깊은 지도로도 볼 수 있습니다. 곧, ‘부활은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반복되는 창조와 거듭남의 완성’이며, 그렇다면 창1의 여섯 날과 일곱째 날은 바로 그 부활의 내적 과정을 단계적으로 보여 주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부활을 어떻게 보느냐가 핵심입니다. 보통은 부활을 십자가 이후 사흘 만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으로만 이해합니다. 물론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AC의 시선에서는 그 사건이 단순히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이루신 것을 사람 안에서 지금도 실제로 이루어 가시는 현재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창1은 곧 주님의 부활이 인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첫째 날은 빛이 있으라’입니다. 이것은 부활의 시작입니다. 완전히 어둠 속에 있던 상태에서 무엇이 참인지’에 대한 첫 빛이 들어옵니다. 이때는 아직 삶이 바뀐 것이 아니라, ‘보이기 시작한 상태’입니다.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죽음의 상태에서 생명의 빛이 처음 비추는 순간입니다.

 

둘째 날은 궁창으로 위와 아래를 나눔’입니다. 이것은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곧 겉과 속의 구분’입니다. 이전에는 모든 것이 뒤섞여 있었지만, 이제 하늘에 속한 것’과 세상에 속한 것’이 구분되기 시작합니다. 부활의 과정에서도 이 분리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무엇이 위에서 오는 것이고, 무엇이 아래에서 올라오는 것인지 분별되기 시작합니다.

 

셋째 날은 땅이 드러나고, 풀과 씨 맺는 채소가 남’입니다. 이것은 삶의 자리 위에 진리가 자라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이제 단순한 깨달음을 넘어, 실제로 무엇인가 자라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아직은 씨의 단계’, 곧 시작입니다. 부활의 과정에서도 이 시기는 생명이 싹트는 시기’입니다.

 

넷째 날은 해와 달과 별’입니다. 이것은 사랑(해)과 신앙(달), 그리고 다양한 진리(별)가 질서를 갖추는 상태’입니다. 이제 삶을 이끄는 중심이 생깁니다. 부활이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질서 있는 생명’으로 자리 잡기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다섯째 날은 물고기와 새’입니다. 이것은 생각과 인식이 살아 움직이는 상태’입니다. 이전에는 배운 것이 머리에만 있었지만, 이제 그것이 실제로 살아 움직이며 다양한 방식으로 작용합니다. 부활의 생명이 사고와 인식 영역까지 퍼지는 단계입니다.

 

여섯째 날은 결정적입니다. ‘짐승과 사람’이 창조됩니다. 이것은 모든 것이 하나로 통합되고, 사람이 주님의 형상을 이루는 상태’입니다. 여기서 신앙과 사랑이 결합합니다. 더 이상 따로 움직이지 않고 하나로 작동합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 직전의 완성 상태’입니다. 그래서 심히 좋았더라’가 나옵니다.

 

그리고 일곱째 날, ‘안식’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더 이상 싸움이 중심이 아니라, 생명이 중심이 됩니다. 주님이 쉬신다는 것은 주님의 일이 끝났다’는 뜻이 아니라, ‘이제 그 생명이 사람 안에서 안정되게 작동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전체를 하나로 묶으면 이렇게 됩니다. ‘부활은 죽은 뒤에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어둠에서 빛으로, 혼돈에서 질서로, 분열에서 결합으로, 그리고 싸움에서 안식으로 옮겨가는 창조의 완성이다.’

 

이걸 설교적으로 아주 간단히 풀면 이렇게 전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주님이 부활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더 깊이 보면, ‘주님은 지금도 우리 안에서 부활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 빛을 받을 때, 분별이 생길 때, 삶이 자라날 때, 사랑과 신앙이 하나가 될 때 등, 이 모든 과정이 부활입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더 이상 억지로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선 안에 머무는 상태가 올 때, 그때 우리는 부활의 안식 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창1은 단순한 시작의 이야기가 아니라, ‘부활의 완성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부활은 지금도 계속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창세기 1장은 주님의 부활이 인간 안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보여 주는 지도이며, 여섯 날의 창조는 부활을 향한 과정이고, 일곱째 날의 안식이 바로 그 부활의 상태입니다.’

 

 

 

AC.66, 창1, '말씀의 네 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

AC.66 말씀에는 전반적으로 네 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이 있습니다. 첫째는 태고교회의 스타일입니다. 그들의 표현 방식은 이 땅의 것과 세상의 것을 말할 때, 그것들이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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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6, 심화 2, ‘시78:2-4’

AC.66.심화 2. ‘시78:2-4’ 2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 하니 3이는 우리가 들어서 아는 바요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전한 바라 4우리가 이를 그들의 자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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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AC번역 및 해설, 그리고 심화 버전 작업을 여러 달에 걸쳐 마쳤습니다. 5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인데... 이걸 아는 지인들에게 카톡으로 공유하는 게 맞을까요? 일단 블로그에는 실시간으로 글 단위 공유는 꾸준히 해오고 있지만... 정성을 쏟는 거에 비해 조회수나 좋아요는 거의 제로에 수렴합니다. 거의 아무도 안 보는 일을 하느라 시간을 써오고 있는 것이죠. 카톡 일대일 공유 역시 상황은 비슷합니다. 100명에게 보내던 걸 추려 20명에게 창1해설 버전을 보냈었는데 그나마 회신이라도 온 건 대여섯... 그냥 예의상인 것 같았습니다. 몇 달이 지난 지금까지 그에 대한 진정성 어린, 그리고 제가 원하는 회신은 없습니다. 100여 명의 지인분들은 저의 평생 신앙 지인들 중 알곡들로 추린, 그러니까 마음을 주고받았다 저는 생각한 사람들인데도 그렇습니다. 해설 버전조차도 많이 어려운 건지... 이번 심화 버전 앞에서 제가 공유를 망설이는 이유는, 혹시 이것이 좀 미안한 표현이지만, 마치 돼지에게 진주를 던져주는건 아닌지, 그래서 주님의 신적 진리를 모독하는 건 아닌지 하는 우려가 있어서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냥 블로그에 글 하나 올려 자유롭게 원하는 사람은 받아 가게 하고, 저는 계속 창2, 3... 진도 나가는 게 맞겠죠? 언젠가는 주님이 이 결과물들을 사용하실 줄 믿으면서...

 

 

목사님, 결론부터 먼저 조심스럽게 말씀드리면, 지금의 고민은 ‘전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전하는 것이 주님의 질서에 맞는가’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경험, 곧 100명 중 극소수의 반응, 그마저도 깊지 않은 회신은 사실 실패의 신호가 아니라, 오히려 매우 정상적이고 건강한 ‘영적 분별의 데이터’라고 보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에마누엘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보여주는 원리는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강요되지 않으며, 준비된 상태에서만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진리가 널리 퍼지지 않는 것은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 수용하는 상태의 문제입니다.

 

지금 목사님께서 느끼시는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은 매우 진지한 것이고, 실제로 스베덴보리 역시 이 원리를 강하게 말합니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 깊은 진리를 무리하게 노출시키는 것은, 그 사람에게도 해가 되고, 진리 자체도 가볍게 취급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반드시 구분하셔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강요’와 ‘개방’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상대가 원하지 않는데 반복적으로 밀어 넣는 것은 분명 질서에 어긋나지만, 조용히 문을 열어 두고 원하는 사람이 들어오게 하는 것은 질서에 합당한 방식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 지금 가장 적합한 방식은 이미 거의 마음속에서 정리하신 그 방향, 곧 ‘블로그에 두고, 원하는 사람이 스스로 찾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소극적 선택이 아니라, 매우 적극적인 ‘영적 질서에 순종하는 방식’입니다. 씨를 길바닥에 뿌리느냐, 아니면 밭에 심느냐의 차이입니다. 지금까지의 카톡 일괄 공유는 사실상 ‘길바닥에 뿌리는 방식’에 가까웠다면, 블로그는 ‘밭을 만들어 두는 방식’입니다. 밭은 당장 열매가 없어 보여도, 때가 되면 반드시 열매를 맺습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이것입니다. 목사님께서 기대하시는 ‘진정성 있는 회신’이 오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이 읽지 않아서라기보다, 읽더라도 ‘반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일 가능성이 훨씬 큽니다. 스베덴보리의 글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상태를 요구하는 진리’이기 때문에, 그것을 접한 사람은 두 가지 반응 중 하나를 보입니다. 깊이 들어오거나, 아니면 조용히 물러나거나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은 후자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나쁘거나 무관심해서가 아니라, 아직 그 상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반응 없음’은 거절이 아니라 ‘유보’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목사님, 여기서 아주 중요한 전환이 하나 필요합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전했는데 왜 반응이 없을까’라는 방향이었다면, 이제는 ‘주님이 언제, 누구에게, 어떻게 이 글을 사용하실까’로 중심을 옮기셔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삶을 보면, 그는 당대에 거의 이해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의 반응을 기준으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록하는 것’ 자체를 사명으로 보았고, ‘전달의 시기와 방식’은 주님의 영역으로 남겨 두었습니다. 이 점이 목사님의 지금 상황과 매우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그래서 실천적으로는 이렇게 정리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대량 카톡 공유는 중단하셔도 좋습니다. 이것은 지금 단계에서는 효율도 낮고, 오히려 진리의 무게를 가볍게 만들 위험이 있습니다. 둘째, 대신 블로그를 ‘저장소가 아니라 살아 있는 밭’으로 계속 가꾸십시오. 글의 밀도는 이미 충분하니, 이제는 접근성을 조금씩 보완하시는 것도 좋습니다. 예를 들어 ‘아주 쉬운 요약 버전’이나 ‘입문자를 위한 길잡이 글’을 간간이 추가하는 것입니다. 셋째, 정말로 마음이 향하는 소수, 그러니까 한두 명, 많아야 서너 명에게만 ‘개별적으로, 조용히’ 나누십시오. 그것도 ‘읽어 달라’가 아니라 ‘혹시 필요하시면 참고하시라’는 식으로 문을 열어 두는 방식으로요.

 

마지막으로, 목사님께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것입니다. 지금 하시는 일은 ‘사람을 모으는 일’이 아니라 ‘진리를 보존하고 기록하는 일’에 더 가깝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은 언제나 외로워 보이고, 열매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 식으로 말하면, 이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 저장되는 리메인스(remains)’와 같은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정확한 때에, 정확한 사람에게 연결됩니다.

 

그러니 목사님, 지금처럼 창2, 창3...로 계속 나아가십시오. 그것이 가장 안전하고, 가장 깊고, 그리고 가장 ‘주님의 방식’에 가까운 길입니다. 그리고 블로그에 조용히 올려 두십시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지금은 ‘알려지는 시간’이 아니라 ‘쌓이는 시간’일 가능성이 큽니다.

 

 

 

SC.52, 스베덴보리와 부활절, 성탄절 같은 기독교 절기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는 사람들은 부활절, 성탄절 같은 기독교 절기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에마누엘 스베덴보리에게 있어 부활절과 성탄절은 ‘폐지해야 할 외적 전통’도 아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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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는 사람들은 부활절, 성탄절 같은 기독교 절기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에마누엘 스베덴보리에게 있어 부활절과 성탄절은 ‘폐지해야 할 외적 전통’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그 자체로 거룩한 절대 시간’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전체 사상을 관통하는 한 가지 원리가 그대로 적용됩니다. 곧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을 담기 위해 존재한다’는 원리입니다. 그래서 절기는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주님의 신적 사역의 상태들’을 사람들로 하여금 기억하고 묵상하게 하는 도구로서 의미를 갖습니다. 다시 말해, 성탄절은 단순히 예수님의 역사적 탄생을 기념하는 날이 아니라, ‘주님이 인간의 마음 안에 새롭게 태어나시는 상태’를, 부활절은 단순히 무덤에서 일어나신 사건이 아니라 ‘지옥과 싸워 이기시고 인간 안에 새로운 생명을 여시는 상태’를 상기시키는 표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들을 보면, 그는 절기를 중심으로 신앙을 조직하지 않습니다. 그의 모든 초점은 ‘거듭남’, 곧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지속적인 영적 변화에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는 특정한 하루에 감정적으로 고양되는 것보다, 매일의 삶 속에서 주님의 탄생과 고난과 부활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훨씬 더 본질적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있어 ‘참된 성탄’은 어떤 날짜가 아니라, 사람이 처음으로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는 순간이며, ‘참된 부활’은 사람이 자신의 악과 거짓과 싸워 그것을 이기고 새로운 삶으로 일어서는 모든 순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절기는 ‘일 년에 한 번’이 아니라 ‘영적으로는 수없이 반복되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스베덴보리가 절기를 무시하거나 거부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실제로 교회에 출석했고, 성찬에도 참여했으며, 당시 교회의 외적 질서를 존중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의 ‘내적 태도’였습니다. 그는 외적 의식이 사람을 구원한다고 보지 않았지만, 그것이 사람의 마음을 주님께로 향하게 하는 데 쓰일 수 있다면 충분히 가치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절기는 ‘지켜야만 하는 법’이 아니라, ‘올바르게 사용될 수 있는 수단’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방향은 매우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는 사람이라면, 절기를 두 가지 층위에서 동시에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외적 층위’로서, 가족과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함께 기억하고 나누는 시간으로서의 절기입니다. 이것은 사랑과 질서의 차원에서 소중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내적 층위’로서, 그 절기가 가리키는 영적 실재가 지금 내 삶 속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만일 이 두 번째가 없다면, 첫 번째는 공허한 형식이 되고 말고, 반대로 첫 번째를 완전히 버리면 사랑의 교통과 질서가 약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에게 부활절과 성탄절은 ‘지켜야 할 날’이라기보다 ‘깨어 있어야 할 의미’였습니다. 그는 날짜를 통해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상태를 통해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우리에게도 방향을 제시합니다. 절기를 잊었다고 해서 영적으로 뒤처진 것이 아니며, 절기를 잘 챙겼다고 해서 자동으로 깊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내 안에서 주님의 탄생이 일어나고 있는가, 그리고 내 안에서 부활이 일어나고 있는가입니다.

 

목사님께서 AC를 붙들고 씨름하시는 그 시간 속에서, 만일 혼돈이 질서로 바뀌고, 어둠 속에 빛이 들어오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가장 실제적인 성탄이며, 가장 실제적인 부활입니다. 그 순간이 외적 절기와 내적 실재가 아름답게 하나로 만나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SC.53, ‘창1 AC 심화 버전 공유를 어떻게 해야 할지...’

창1 AC번역 및 해설, 그리고 심화 버전 작업을 여러 달에 걸쳐 마쳤습니다. 5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인데... 이걸 아는 지인들에게 카톡으로 공유하는 게 맞을까요? 일단 블로그에는 실시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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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51, 스베덴보리가 사람을 만났던 기준

스베덴보리의 소명 이후 하루하루는, 아니 시간 시간은 그 쓰임새와 밀도가 상상을 초월했겠구나 싶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랬나요? 혹시 어떤 기준이 있었을까요? 결론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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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6.심화

 

2. 78:2-4

 

2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 하니 3이는 우리가 들어서 아는 바요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전한 바라 4우리가 이를 그들의 자손에게 숨기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영예와 그의 능력과 그가 행하신 기이한 사적을 후대에 전하리로다 (78:2-4)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 구절은 AC.66의 문맥에서 ‘말씀 안에는 처음부터 감추어져 있던 깊은 것들(아르카나)이 있으며, 그것이 비유와 이야기의 형식 속에 담겨 전해지고, 때가 되면 드러나 사람들을 통해 이어진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즉, ‘비유로 말한다’는 것은 감추기 위함이 아니라, ‘담아 두기 위함’이며, ‘드러낸다’는 것은 단순한 설명이 아니라 ‘내적 의미의 열림’을 뜻합니다.

 

먼저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 하니’입니다. 여기서 ‘비유’는 단순한 교훈적 이야기 방식이 아니라, ‘겉으로는 이야기지만 속에는 다른 뜻이 담겨 있는 표현 방식’입니다. 그리고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은 바로 아르카나, 곧 말씀 안에 항상 있었지만, 문자 속에 감추어져 있던 내적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말씀 자체가 처음부터 이중 구조, 즉 겉 이야기와 속 의미로 주어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 ‘우리가 들어서 아는 바요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전한 바라’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역사적 전승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진리들이 끊어진 것이 아니라 계속 이어져 왔다’는 뜻입니다. 다만 그 전해짐은 항상 ‘비유와 상징의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그 안에는 더 깊은 것이 계속 보존되어 온 것입니다.

 

그다음 ‘우리가 이를 그들의 자손에게 숨기지 아니하고’입니다. 여기서 ‘숨기지 않는다’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앞에서는 ‘감추어졌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숨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모순이 아니라, ‘방식의 차이’입니다. 말씀은 겉으로는 감추어져 있지만, 그것을 열어 주는 방향으로는 결코 숨겨지지 않습니다. 즉, 찾는 사람에게는 열리고, 찾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대로 덮여 있는 구조입니다.

 

마지막으로 ‘여호와의 영예와 그의 능력과 그가 행하신 기이한 사적을 후대에 전하리로다’입니다. 여기서 ‘영예’는 단순한 찬양이 아니라 ‘주님의 신적 진리의 빛’, 곧 영광(glory)을 뜻하고, ‘능력’은 그 진리가 실제로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 ‘기이한 사적’은 그 진리가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변화의 역사입니다. 즉, 이 모든 것은 단순한 과거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영적 사건들입니다.

 

이제 AC.66과 연결하면 의미가 또렷해집니다. AC.66은 ‘말씀 안의 아르카나는 단어와 문자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내적 의미와 그 연속적인 질서에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바로 이 시편 구절이 그 사실을 증언합니다. ‘비유로 말한다’는 문자를, ‘감추어졌다’는 내적 의미, 곧 속뜻을, ‘드러낸다’는 그 의미의 열림을 등, 이 구조가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이걸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 처음에는 이야기로 읽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안에서 ‘이게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구나’, ‘이건 내 상태를 말하는 거구나’, ‘이건 주님의 일하심이구나’ 하고 열리는 순간이 옵니다. 바로 그때 ‘감추어졌던 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단순히 ‘옛이야기를 전하자’는 말이 아니라, ‘말씀 안에 감추어진 주님의 진리와 역사를 계속 드러내고 이어 가자’는 선언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아르카나’, 곧 내적 의미가 있습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78:2-4는 말씀이 비유 속에 감추어진 아르카나를 담고 있으며, 그것이 때가 되어 드러나 주님의 영광과 능력으로 사람 안에서 이어지는 과정을 말하는 구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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