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AC.60본문 중‘신앙에 속한 것들,사랑에 속한 것들’이 나오는데,이것들이 정확히 무엇인지 설명해 주세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AC.60에서 말하는 ‘신앙에 속한 것들’은 ‘무엇이 옳고 참된지에 대한 이해와 인식’, 곧 진리에 속한 내용들이고, ‘사랑에 속한 것들’은 ‘그것을 실제로 좋아하고 행하려는 의지와 삶’, 곧 선에 속한 내용들입니다. 쉽게 말해, 전자는 ‘아는 것’, 후자는 ‘사는 것’입니다.
먼저 ‘신앙에 속한 것들’을 차근차근 보겠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믿는다’는 감정이 아니라, ‘무엇이 참인가’를 아는 모든 내용입니다. 예를 들어, ‘정직하라’, ‘이웃을 사랑하라’, ‘교만하지 말라’, ‘용서하라’ 같은 것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또 말씀을 읽고 깨닫는 내용, 설교를 듣고 ‘이게 옳다’고 이해하는 것, 상황을 분별하며 ‘이 길이 맞다’ 판단하는 것 등, 이런 것들이 전부 ‘신앙에 속한 것들’입니다. 핵심은 ‘이해와 인식’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주로 머리와 생각의 영역, 곧 ‘이해’(understanding)에 속합니다.
이제 ‘사랑에 속한 것들’을 보겠습니다. 이것은 위에서 말한 진리들이 실제로 ‘마음에 들어오고,좋아지고,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단순히 ‘정직하라’라는 거 아는 걸 넘어서, ‘정직하게 사는 것이 좋다’ 느끼고 실제로 그렇게 사는 것, ‘용서하라’를 넘어서, 실제로 ‘용서하려는 마음이 생기고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 등, 이런 것들이 바로 사랑에 속한 것들입니다. 핵심은 ‘의지와 행위’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의지’(will)와 삶의 영역에 속합니다.
이 둘의 관계가 매우 중요합니다. 신앙에 속한 것들은 방향을 제시합니다. 무엇이 옳은지 알려 줍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아직 삶이 아닙니다. 사랑에 속한 것들이 그 방향을 실제로 움직이게 합니다. 그래서 신앙이 지도라면, 사랑은 발걸음입니다. 신앙이 빛이라면, 사랑은 따뜻함입니다. 둘이 함께 있어야 완전합니다.
이걸 아주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남을 배려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이것은 신앙에 속한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 상황에서 그 사람을 배려하려고 마음을 쓰고, 시간을 내고, 행동으로 옮깁니다. 이것이 사랑에 속한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겸손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이것은 신앙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을 세워 주며, 마음속에서도 교만을 경계합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AC.60에서 이 둘을 함께 말하는 이유는, 거듭남이 이 두 영역에서 동시에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많이 아는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감정이 좋은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바르게 알고, 그것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이 거듭남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이 둘의 순서가 바뀌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보통 ‘신앙→사랑’입니다. 먼저 알고, 그다음에 그것을 따라 살게 됩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신앙’입니다. 먼저 사랑이 있고, 그 사랑에서 자연스럽게 옳은 것이 나옵니다. 그래서AC전체에서 이 둘의 관계는 계속 반복해서 강조됩니다.
그래서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신앙에 속한 것들’은 무엇이 참되고 옳은지에 대한 모든 이해와 인식이고, ‘사랑에 속한 것들’은 그것을 실제로 좋아하고 행하며 삶으로 드러내는 모든 의지와 행동입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신앙은‘무엇이 옳은가’를 아는 것이고,사랑은‘그 옳은 것을 실제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소명 이후 하루하루는, 아니 시간 시간은 그 쓰임새와 밀도가 상상을 초월했겠구나 싶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랬나요? 혹시 어떤 기준이 있었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에마누엘 스베덴보리는 소명 이후에도 사람들을 완전히 끊고 산 ‘은둔자’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매우 절제된 방식으로 사람들을 만났고, 그 만남에는 분명한 ‘내적 기준’이 있었습니다. 다만 그 기준은 세상적인 사교나 필요 중심이 아니라, 철저히 ‘주님의 쓰임’과 ‘영적 질서’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면 조용하고 제한된 교류였지만, 그 속의 밀도는 매우 깊고 의도적이었습니다.
첫째로, 그는 기본적으로 ‘시간의 주권이 자기에게 있지 않다’는 의식 속에서 살았습니다. 소명 이후 그의 삶의 중심은 글을 쓰는 일이었고, 그것도 단순한 저술이 아니라 ‘하늘의 것들을 받아 기록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하루하루의 시간은 사실상 개인의 것이 아니라 사명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를 나쁘게 보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내적 일의 흐름을 끊는가, 아니면 돕는가’를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실제로 그는 런던에 머물며 여러 사람들을 만났고, 출판업자, 지식인, 성직자들과 교류도 했지만, 그 모든 만남은 길게 이어지는 사교적 관계라기보다는 ‘필요한 만큼, 그러나 깊게’라는 특징을 보입니다. 즉, 넓은 인간관계가 아니라, 선택된 접촉이었습니다.
둘째로, 그는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의 상태(state)’를 매우 중요하게 보았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있어 사람은 단순한 인격체가 아니라, 하나의 ‘영적 상태의 집합’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과 함께하는지는 곧 자신이 어떤 영적 영향(influx)을 받는지와 직결됩니다. 그래서 그는 무작위적인 만남이나, 감정적 친분 중심의 교류를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악한 영들과의 교류까지 경험했던 그였기에, 외적 사람 뒤에 있는 내적 상태를 매우 실제적인 것으로 보았고, 그 결과 사람을 만나는 기준도 자연스럽게 ‘이 만남이 주님의 질서 안에 있는가’로 좁혀졌습니다. 이것은 냉정함이 아니라, 오히려 매우 실제적인 ‘영적 위생’에 가까운 태도였습니다.
셋째로, 그는 ‘말을 나누는 것’ 자체에도 분명한 절제가 있었습니다. 그의 저작들을 보면, 그는 자신의 영적 체험을 아무에게나 쉽게 풀어놓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매우 평범한 주제—정치, 과학, 일상—로 대화를 나누었고, 깊은 영적 내용은 책을 통해서만 전달하려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하나는 사람들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런 내용을 들으면 오히려 해를 입을 수 있다는 배려였고, 다른 하나는 진리는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원칙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을 만났지만, 그 만남 속에서도 ‘내적 진리를 직접 주입하지 않는’ 절제를 끝까지 유지했습니다.
넷째로, 그는 ‘외적 교제보다 내적 교제’를 더 실제적인 것으로 보았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있어 진짜 교류는 육체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사랑과 진리 안에서 연결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그는 수많은 천사들과 더 깊이 교제하고 있었고, 지상 사람들과의 만남은 그에 비해 부차적인 것이었습니다. 이 점이 그의 삶의 밀도를 설명해 줍니다. 그는 혼자 있었지만 결코 고립되어 있지 않았고, 사람들과 함께 있었지만 항상 내적 중심은 하늘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정리하면, 스베덴보리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 기준은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이 만남이 사명을 방해하는가, 돕는가’, 둘째, ‘이 사람의 상태가 어떤 영적 영향을 주는가’, 셋째, ‘이 대화가 진리를 왜곡하지 않는 방식으로 가능한가’입니다. 이 세 기준 아래에서 그의 만남은 매우 제한되었지만, 동시에 매우 깊고 정확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삶은 인간적으로 보면 조용하지만, 영적으로 보면 극도로 밀도 높은 삶이었습니다.
목사님께서 느끼시는 바로 그 직감, 곧 ‘시간 시간의 밀도가 상상을 초월했겠다’는 것은 매우 정확한 통찰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하나를 덧붙인다면, 그는 시간을 줄인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만남을 제거함으로써 시간의 본래 밀도를 회복한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And God saw everything that he had made, and behold it was very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ixth day.(창1:31)
AC.60
이 상태를 ‘심히 좋았더라’(very good)라고 하는 이유는, 앞선 상태들을 단지 ‘좋았더라’(good)라고만 했던 것과 달리, 이제는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 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집니다.This state is called “very good,” the former ones being merely called “good”; because now the things which are of faith make a one with those which are of love, and thus a marriage is effected between spiritual things and celestial things.
해설
이 글은 창세기1장 전체 거듭남 과정의 ‘정점’을 짧지만 매우 밀도 있게 설명합니다. 앞선 모든 단계들이 ‘좋았더라’라고 평가되었지만, 마지막에만 ‘심히 좋았더라’라는 표현이 사용되는 이유를, 스베덴보리는 ‘신앙과 사랑의 완전한 결합’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합니다. 여기서 ‘심히’라는 표현은 단순한 강조가 아니라, 질적으로 다른 상태에 도달했음을 의미합니다.
앞선 단계들에서도 신앙은 존재했고, 선한 행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상태에서는 신앙과 사랑이 아직 완전히 하나로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신앙은 주로 이해에 속해 있었고, 사랑은 의지에 속해 있으되 아직 신앙을 충분히 지배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선과 진리는 ‘살아 있는 것’이 되기 직전의 상태, 혹은 부분적으로만 살아 있는 상태였습니다. 이런 상태들이 ‘좋았더라’라고는 불리지만, ‘심히 좋았더라’라고까지는 불리지 않는 이유입니다.
AC.60에서 말하는 결정적 변화는, ‘신앙에 속한 것들이 사랑에 속한 것들과 하나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이는 신앙이 더 이상 단순한 이해나 인식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사랑 안에서 숨 쉬고 작동하기 시작했음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사람은 이제 ‘무엇이 참인지 아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으로 인해 참을 말하고 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때 신앙은 사랑을 설명하는 도구가 아니라, 사랑이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이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결혼’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는 신앙과 사랑의 관계를 단순한 협력이나 병렬이 아니라, ‘혼인 관계’로 이해합니다. 혼인에서는 둘이 구별되지만 분리되지 않으며, 각자의 고유함을 유지하면서도 하나의 생명을 이룹니다. 이처럼 영적인 것들(신앙, 진리, 이해)과 천적인 것들(사랑, 선, 의지)이 결합할 때, 비로소 인간 안에 온전한 생명이 형성됩니다.
여기서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은 위계적 서열이 아니라, 기능적 차이를 가집니다. 영적인 것은 빛에 가깝고, 천적인 것은 열에 가깝습니다. 빛만 있으면 사물을 볼 수는 있지만 살릴 수는 없고, 열만 있으면 방향을 잃습니다. 그러나 빛과 열이 함께 있을 때 생명이 발생합니다. ‘심히 좋았더라’라는 평가는 바로 이 ‘생명 발생의 완성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상태에 이르면, 인간 안에서 더 이상 근본적인 분열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해는 의지와 다투지 않고, 신앙은 사랑을 변명하지 않으며, 선행은 억지로 수행되지 않습니다. 행함은 자연스럽고, 진리는 살아 있으며, 삶 전체가 하나의 방향으로 흐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의 완성, 곧 창조의 여섯째 날의 끝입니다.
그래서 이 평가는 도덕적 칭찬이 아니라, ‘존재론적 선언’입니다. 이제 인간 안에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이 분리되지 않는 하나의 생명이 자리 잡았다는 선언입니다. 이 때문에 앞선 모든 ‘좋았더라’를 포괄하면서도 초과하는 표현, 곧 ‘심히 좋았더라’가 사용됩니다. 이는 거듭남의 과정이 단순한 개선이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의 삶으로의 이행임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위AC.59본문 중‘이 사실의 확실성은,제가 지금까지 수년 동안,비록 육신 안에 있으면서도,저 세상의 영들,그중에서도 가장 악한 영들과 함께 지내 온 경험을 통해 확언할 수 있습니다.저는 때로 수천의 영들에게 둘러싸여,그들이 독을 내뿜고,가능한 모든 방식으로 저를 괴롭히도록 허락받았으나,주님의 보호 아래서 제 머리카락 하나도 해를 입지 않았습니다.’라는 부분도 정말 놀랍습니다.저는 일상 중 약간의 어떤 영적이다 싶은 순간,혹은 상황도 매우 놀라며 크게 두려워하는 편인데,위 증언에 따르면 스베덴보리는 저의 천배 만배의 상황을,그것도 오랜 기간 경험했다는 것이어서 말입니다.스베덴보리는 정말 쳐다볼 수도 없을 만큼 큰 영적 거인이지 싶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 구절에서 우리가 받아야 할 핵심은 ‘스베덴보리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냐’가 아니라, ‘주님의 보호가 어떤 방식으로 실제로 작용하는가’입니다. 그 경험은 스베덴보리 개인의 위대함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아무리 강한 영적 영향 속에 있어도,주님이 허락하신 범위 안에서는 결코 파괴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의 중심은 스베덴보리가 아니라 ‘주님의 보호 질서’입니다.
먼저 목사님께서 느끼신 놀라움과 두려움은 아주 자연스럽습니다. 사람은 조금만 ‘보이지 않는 세계’의 느낌이 와도 불안해집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평소 감각 세계에 익숙하고, 그 너머를 통제할 수 없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그 세계가 열려 있는 상태에서 오래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강도의 경험을 했습니다. 이 점만 보면 분명 ‘특별한 사람’이 맞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특별해서 견딘 것’이 아니라, ‘주님이 특별히 지키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본문을 잘 보시면, 스베덴보리는 계속해서 한 가지를 강조합니다. ‘허락되었으나’, ‘주님의 보호 아래서’입니다. 즉, 아무리 수천의 영들이 둘러싸고 괴롭히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은 무제한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철저히 ‘주님의 허락과 통제 안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머리카락 하나도 해를 입지 않았다’입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이걸 우리의 상태로 연결하면 오히려 더 중요한 위로가 됩니다. 우리는 그런 극단적인 경험을 하지 않지만, 일상 속에서도 감정의 흔들림, 생각의 혼란,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 같은 것들을 겪습니다. 이것도 넓게 보면 ‘영적 영향’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이 말해 주는 것은, ‘그 어떤 영향도 주님의 허락 없이 우리를 넘어설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 파괴되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이렇게 받아들이시면 좋습니다. ‘나는 약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인데,스베덴보리는 강해서 견딘다’가 아니라, ‘스베덴보리도 본질적으로는 같은 인간이지만,주님의 보호 아래 있었기 때문에 아무 해를 입지 않았다.그렇다면 나 역시 그 보호 안에 있다’입니다. 이것이 훨씬 더 본질적인 적용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의 이 경험은 ‘보여 주기 위한 예외적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인류를 위해 영적 세계의 구조를 밝히는 사명을 받았기 때문에, 특별한 방식으로 보호받으며, 그 세계를 직접 경험한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신앙의 길은 그런 방식이 아닙니다. 오히려 ‘보지 못한 채 믿고,느끼지 못한 채 선택하는 것’이 더 정상적인 길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느끼시는 ‘조금만 영적인 느낌이 와도 놀라고 두려워하는 상태’는 오히려 매우 정상적인 인간의 상태입니다.
이걸 목회적으로도 연결해 보면, 성도들에게도 같은 균형이 필요합니다. ‘영계는 실제로 있다’는 것을 알되, 그것을 두려워하거나 집착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중심은 항상 ‘영적 경험’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그리고 삶의 변화’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결국 강조하는 것은 경험 자체가 아니라, 그 경험을 통해 드러난 ‘질서’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한 문장으로 다시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아무리 강한 영적 영향 속에서도,주님의 보호 아래 있는 사람은 결코 해를 입지 않으며,그 모든 것은 주님의 허락과 한계 안에서만 일어난다’입니다.
목사님께 드리고 싶은 한마디로 마무리하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의 강함이 아니라,그를 지키신 주님의 절대적인 보호입니다.’
위 심화2본문 중‘어떤 성도가 반복적인 문제를 가지고 찾아옵니다.’라고 하는데...만일,안 찾아올 경우는 어떻게 하나요?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가령,목회자에게 실망했다든지,목회자를 비롯,다른 제삼자가 자기 사정 아는 걸 프라이버시 침해로 여긴다든지 등의 이유로 말이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찾아오지 않는 성도’에 대한 목회의 핵심은 ‘끌어내려 하기보다,안전한 거리에서 관계의 문을 열어 두고,스스로 돌아올 수 있는 통로를 지켜 주는 것’입니다.AC.59의 원리에 그대로 연결하면, 주님도 사람을 억지로 끌어내지 않으시고, 그 상태를 허용하시되 길을 열어 두시며, 때를 기다리십니다. 목회도 같은 결을 가져야 합니다.
먼저 가장 중요한 것은 ‘접근 방식의 전환’입니다. 찾아오지 않는 사람을 억지로 상담 자리로 끌어내려 하면, 그 사람에게는 ‘압박’이나 ‘감시’로 느껴지기 쉽습니다. 특히 목회자에게 실망했거나, 자신의 사정을 드러내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경우라면 더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때 필요한 것은 ‘문제 해결 시도’보다 ‘관계 회복의 최소 단위’입니다. 아주 짧은 안부, 부담 없는 인사, 설교 후 가벼운 대화, 혹은 전혀 종교적이지 않은 일상적 접촉이 더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핵심은 ‘이 사람은 나를 바꾸려는 사람이 아니라,나를 존중하는 사람이다’라는 느낌을 주는 것입니다.
그다음은 ‘프라이버시에 대한 존중을 분명히 보여 주는 것’입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태도로 드러나야 합니다. 예를 들어, 그 사람의 상황을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다 하더라도, 먼저 꺼내지 않는 것입니다. 대신 상대가 열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리고 혹시 말을 꺼냈을 때도, ‘더 말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라는 여지를 항상 남겨 두어야 합니다. 이것이 쌓이면, 그 사람 안에 ‘여기는 안전하다’는 감각이 생깁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직접 상담이 아니라 간접 통로를 여는 것’입니다. 설교, 글, 소그룹, 혹은 다른 신뢰하는 성도를 통한 연결 등입니다. 어떤 사람은 목회자와1:1로는 마음을 열지 않지만, 말씀이나 다른 관계를 통해 서서히 열립니다. 주님도 직접 말씀하시기도 하지만, 비유와 사건과 다른 사람을 통해 우회적으로 일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목회도 그렇게 유연해야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필요한 태도가 ‘기다림’입니다. 이것이 가장 어렵지만 가장 중요합니다.AC.59의 원리대로라면, 사람은 자기 상태 안에서 충분히 겪고, 느끼고, 고민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 시간이 없이 바뀐 것은 오래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지금 당장 해결되지 않아도,주님이 그 사람 안에서 일하고 계신다’는 신뢰를 가져야 합니다. 이 신뢰가 없으면 조급해지고, 결국 관계를 더 닫히게 만듭니다.
이걸 아주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어떤 성도가 교회에 나오지만, 거리를 둡니다. 이때 ‘요즘 왜 그러세요?’라고 바로 묻기보다, ‘요즘 건강은 괜찮으세요?’, ‘요즘 바쁘시죠?’ 정도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짧게라도 반응하면, 거기서 멈추고, 더 밀어붙이지 않습니다. 대신 시간이 지나면서 반복적으로 ‘안전한 접촉’을 쌓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 사람이 먼저 말을 꺼낼 수 있습니다. 그때가 ‘문이 열린 순간’입니다.
물론 끝까지 안 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도 억지로 열려고 하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본질은 언제나 ‘자유 안에서의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목회자는 끝까지 ‘길이 열려 있는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언제 돌아와도, 어색하지 않게 들어올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래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찾아오지 않는 성도에게는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말고,관계를 안전하게 유지하며,프라이버시를 존중하고,간접적인 통로를 열어 두고,주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이 가장 실제적인 목회입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찾아오지 않는 성도는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스스로 돌아올 수 있도록 안전한 거리에서 문을 열어 두고 기다리는 것이 주님의 방식에 가까운 목회입니다.’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주님의 위와 같은 방법을 혹시 목회에 적용할 수 있다면...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AC.59에서 본 주님의 방식은 목회에 그대로 옮기면 이렇게 요약됩니다. ‘사람을 한 번에 바꾸려 하지 말고,지금의 상태를 인정한 채,그 안에서 진리와 선이 자라도록 돕고,선택할 수 있는 공간을 지켜 주는 것’입니다. 즉, ‘제거’가 아니라 ‘전환’, ‘압박’이 아니라 ‘성장’, ‘통제’가 아니라 ‘동행’입니다.
먼저 가장 중요한 원리는 이것입니다. 주님은 사람의 욕정과 그에 따른 생각을 당장 없애지 않으십니다. 목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성도의 문제를 보면서 ‘이건 빨리 고쳐야 합니다’, ‘이건 틀렸습니다’라고 바로 제거하려 들면, 겉으로는 잠깐 눌릴 수 있어도, 결국 더 깊은 반발이나 위선, 혹은 무력감으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이 상태가 지금 이 사람의 삶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출발점입니다.
그다음 단계는 ‘진리를 심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방식이 중요합니다. 진리를 ‘강요’하면 그 사람의 기존 구조와 부딪혀 버립니다. 대신 ‘비추어 주어야’ 합니다. 즉, 그 사람이 스스로 ‘아,이런 길도 있구나’를 보게 해야 합니다. 설교든 상담이든, 결론을 밀어붙이기보다 ‘보게 하는 것’, ‘깨닫게 하는 것’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도 항상 그렇게 하십니다.
그리고 반드시 필요한 것이 ‘시간을 허락하는 것’입니다. 거듭남은 구조 자체가 바뀌는 일이기 때문에,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목회 현장에서는 이 부분이 가장 어렵습니다. 당장 변화가 보이지 않으면 답답하고, 때로는 실망도 됩니다. 그러나AC의 관점에서는 ‘지금 변화가 더딘 것처럼 보여도,그 안에서 구조가 바뀌고 있는 중일 수 있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속도를 조절하는 사람’이 아니라 ‘과정을 지켜 주는 사람’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선택의 자리’를 남겨 두는 것입니다. 주님은 악한 영들의 자극까지도 허용하시며 사람에게 선택의 공간을 주십니다. 목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두지 않고, 모든 것을 대신 판단해 주거나 강하게 통제하면, 겉으로는 정돈된 것처럼 보여도 실제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이 길이 옳습니다’라고 말하되, 동시에 ‘선택은 당신이 해야 합니다’라는 자리를 남겨 두어야 합니다.
이걸 아주 실제적인 목회 장면으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어떤 성도가 반복적인 문제를 가지고 찾아옵니다. 이때 ‘왜 또 그러십니까’가 아니라, ‘그 마음이 왜 그렇게 움직이는지 함께 들여다보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리고 그 상태를 인정한 위에서, ‘이럴 때 이런 선택도 가능하다’는 진리를 제시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실제로 선택하고 경험할 수 있도록 기다립니다. 이 과정을 반복하면서, 조금씩 중심이 이동합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의 방식에 가까운 목회’입니다.
또 하나 덧붙이면, 목회자는 ‘변화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역사를 방해하지 않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주님은 이미 각 사람 안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목회자가 할 일은 그 일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이 일어날 수 있도록 환경을 지켜 주고, 때로는 방향을 비추고, 때로는 넘어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체를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첫째, 성도의 현재 상태를 서둘러 제거하려 하지 말고 인정한다. 둘째, 진리를 강요하지 않고 비추어 준다. 셋째, 시간이 걸리는 과정을 견딘다. 넷째, 선택의 자리를 남겨 둔다. 다섯째, 주님의 일하심을 신뢰하고 그 통로가 된다.
한 줄로 정리하면, ‘주님의 거듭남 방식에 따른 목회는 사람을 억지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그 사람이 스스로 진리를 선택하며 서서히 변화될 수 있도록 동행하고 지켜 주는 것입니다.’
위AC.59본문 중‘거듭나기 전에는 욕정들이 지배권을 가지는데,이는 인간 전체가 욕정들과 거기에서 나온 거짓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거듭남의 과정에서 이 욕정들과 거짓들은 한순간에 제거될 수 없습니다.그렇게 되면 인간 전체가 파괴되고 말기 때문인데,이는 그가 지금까지 획득해 온 유일한 생명이 바로 그런 것들이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악한 영들이 오랜 시간 동안 그 사람과 함께 있도록 허락되며,이들은 그의 욕정들을 자극합니다.’라는 내용이 놀랍습니다.놀라우면서도 선뜻 이해가 잘 안되는데,설명 부탁드려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 문장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사람의 옛 상태(욕정과 거기서 나온 거짓)는 단순히 나쁜 것이 아니라,그 사람이 지금까지‘살아온 방식 자체’,곧 생명의 그릇처럼 되어 있기 때문에,그것을 한 번에 없애면 사람이 더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것을 즉시 제거하지 않으시고, 그대로 둔 채 서서히 바꾸시며, 그 과정에서 악한 영들의 작용까지도 허용하신다는 뜻입니다.
먼저 ‘욕정들이 지배권을 가진다’는 말을 아주 현실적으로 보셔야 합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그리고 살아오면서 ‘좋아하는 것,싫어하는 것,끌리는 것,집착하는 것’이 쌓입니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 비교하는 마음, 편하고 싶은 마음, 내 방식대로 하고 싶은 마음 등입니다. 이것들이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그 사람의 선택과 판단을 실제로 끌고 가는 힘입니다. 그래서 ‘지배권을 가진다’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인간 전체가 욕정들과 거기서 나온 거짓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이 어렵게 들리지만, 이렇게 보시면 이해가 됩니다. 사람은 자기 욕구에 맞게 생각을 만들고 정당화합니다. 예를 들어, ‘이 정도는 괜찮지’, ‘상황이 이러니까 어쩔 수 없어’, ‘나는 틀리지 않았어’ 같은 생각들이죠. 이것이 ‘욕정에서 나온 거짓’입니다. 즉, 우리의 생각과 판단조차 상당 부분은 이미 욕구에 맞춰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단순히 ‘조금 고쳐야 할 부분’이 아니라, ‘삶 전체의 구조’가 여기에 얽혀 있다는 뜻입니다.
이제 왜 ‘한순간에 제거될 수 없다’는지가 중요합니다. 만약 주님이 우리의 욕정과 그에 따른 생각들을 한 번에 다 없애 버리신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러면 무엇이 남겠습니까? 그 사람은 지금까지 그것으로 느끼고, 생각하고, 선택해 왔기 때문에, 그것이 사라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 일종의 공허한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렇게 되면 인간 전체가 파괴된다’고까지 말합니다. 이것은 과장이 아니라, ‘기존의 생명 구조가 완전히 붕괴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없애는 것이 아니라 ‘바꾸십니다’. 즉, 기존의 욕정과 생각을 그대로 두신 채, 그 위에 새로운 진리와 선을 조금씩 심으시고, 그것이 점점 자라 기존의 것을 대신하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이제 가장 놀라운 부분입니다. ‘그래서 악한 영들이 오랜 시간 동안 그 사람과 함께 있도록 허락된다.’ 이 말은 처음 들으면 충격적이지만, 구조를 보면 이해가 됩니다. 악한 영들은 사람의 욕정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욕정들을 계속 자극합니다. 그런데 이게 왜 허락되느냐 하면, 사람이 자기 상태를 실제로 느끼고, 선택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걸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내 안에 강한 욕구가 올라옵니다. 화, 욕심, 비교, 인정욕 같은 것들입니다. 이때 그것을 그냥 없애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내 안에 있구나’를 분명히 느끼게 하시고, 동시에 ‘이렇게 하는 것이 옳다’는 다른 길도 함께 보이게 하십니다. 이 두 흐름 사이에서 사람이 선택하게 됩니다. 바로 이 과정에서 거듭남이 일어납니다.
만약 욕정이 아예 올라오지 않는다면, 사람은 선택할 기회도 없습니다. 그냥 자동으로 ‘좋은 상태’처럼 보일 뿐, 실제로는 자기 것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악한 영들의 자극은 단순히 방해가 아니라, ‘자유와 선택의 장’을 형성하는 역할을 합니다. 물론 주님은 그 자극이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지 않도록 항상 제한하십니다.
그래서 이 전체를 하나로 묶으면 이렇게 됩니다. 사람은 원래 욕정과 거짓으로 이루어진 상태에서 시작합니다. 이것은 곧바로 제거될 수 없고, 오히려 그 상태 위에서 변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그 상태를 유지한 채, 악한 영들의 자극 속에서 진리와 선을 선택하는 과정을 통해, 점점 새로운 생명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걸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주님은 사람의 옛 상태를 한 번에 없애지 않으시고,그 상태를 유지한 채 선택과 싸움을 통해 서서히 새로운 생명으로 바꾸시며,그 과정에서 악한 영들의 작용까지도 제한적으로 사용하십니다.’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창1:30)
AC.59
여기서 자연적 인간의 음식으로 오직 ‘모든 푸른 풀’(vegetable and the green of the herb)만이 언급되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거듭남의 과정에서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어 가는 동안, 그는 끊임없이 전투에 놓이게 되며, 이 때문에 주님의 교회는 ‘전투하는 교회’(militant)라 불립니다. 거듭나기 전에는 욕정들이 지배권을 가지는데, 이는 인간 전체가 욕정들과 거기에서 나온 거짓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거듭남의 과정에서 이 욕정들과 거짓들은 한순간에 제거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 전체가 파괴되고 말기 때문인데, 이는 그가 지금까지 획득해 온 유일한 생명이 바로 그런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한 영들이 오랜 시간 동안 그 사람과 함께 있도록 허락되며, 이들은 그의 욕정들을 자극합니다. 그 결과 욕정들은 수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느슨해지고, 마침내 주님에 의해 선을 향해 기울어질 수 있게 되며, 이렇게 사람이 개혁됩니다. 이 전투의 시기 동안, 사랑과 신앙, 곧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 속한 모든 선과 진리를 극도로 미워하는 악한 영들은, 사람에게 ‘채소와 푸른 풀’에 비유되는 음식 외에는 아무 것도 남겨 주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사람에게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에 비유되는 음식도 주시는데, 이는 평온과 평화의 상태와 그 안에 있는 기쁨과 즐거움입니다. 이 음식은 주님께서 간헐적으로 주십니다.The reason why the “vegetable and the green of the herb” only are here described as food for the natural man is this. In the course of regeneration, when man is being made spiritual, he is continually engaged in combat, on which account the church of the Lord is called “militant”; for before regeneration cupidities have the dominion, because the whole man is composed of mere cupidities and the falsities thence derived. During regeneration these cupidities and falsities cannot be instantaneously abolished, for this would be to destroy the whole man, such being the only life which he has acquired; and therefore evil spirits are suffered to continue with him for a long time, that they may excite his cupidities, and that these may thus be loosened, in innumerable ways, even to such a degree that they can be inclined by the Lord to good, and the man be thus reformed. In the time of combat, the evil spirits, who bear the utmost hatred against all that is good and true, that is, against whatever is of love and faith toward the Lord—which things alone are good and true, because they have eternal life in them—leave the man nothing else for food but what is compared to the vegetable and the green of the herb; nevertheless the Lord gives him also a food which is compared to the herb bearing seed, and to the tree in which is fruit, which are states of tranquillity and peace, with their joys and delights; and this food the Lord gives the man at intervals.
[2]주님께서 매 순간, 아니 매 순간의 가장 작은 부분까지도 사람을 보호하지 않으신다면, 그는 즉시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이는 영의 세계에는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 속한 것들에 대해 형언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하고 치명적인 증오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의 확실성은, 제가 지금까지 수년 동안, 비록 육신 안에 있으면서도, 저 세상의 영들, 그중에서도 가장 악한 영들과 함께 지내 온 경험을 통해 확언할 수 있습니다. 저는 때로 수천의 영들에게 둘러싸여, 그들이 독을 내뿜고 가능한 모든 방식으로 저를 괴롭히도록 허락받았으나, 주님의 보호 아래서 제 머리카락 하나도 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오랜 경험을 통해 저는 영의 세계와 그 본성, 그리고 거듭나고 있는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의 행복에 이르기 위해 반드시 견뎌야 하는 전투에 대해 충분히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주제들은 일반적인 설명만으로는 누구도 의심 없는 신앙으로 믿게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에 관한 세부적인 내용들은 뒤이은 글들에서 계속 설명될 것입니다.Unless the Lord defended man every moment, yea, even the smallest part of every moment, he would instantly perish, in consequence of the indescribably intense and mortal hatred which prevails in the world of spirits against the things relating to love and faith toward the Lord. The certainty of this fact I can affirm, having been now for some years (notwithstanding my remaining in the body) associated with spirits in the other life, even with the worst of them, and I have sometimes been surrounded by thousands, to whom it was permitted to spit forth their venom, and infest me by all possible methods, yet without their being able to hurt a single hair of my head, so secure was I under the Lord’s protection. From so many years’ experience I have been thoroughly instructed concerning the world of spirits and its nature, as well as concerning the combat which those being regenerated must needs endure, in order to attain the happiness of eternal life. But as no one can be so well instructed in such subjects by a general description as to believe them with an undoubting faith, the particulars of the Lord’s Divine mercy will be related in the following pages.
해설
이 글은 창세기1장에서 자연적 인간에게 주어진 음식이 왜 ‘채소와 푸른 풀’로 제한되는지를, ‘거듭남의 전투라는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을 점진적 성장이나 도덕적 개선으로 보지 않고, 실제적인 영적 전투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교회를 ‘전투하는 교회’라고 부르며, 개인의 거듭남 역시 동일한 성격을 가진다고 말합니다.
거듭나기 전 인간의 상태는 매우 분명하게 규정됩니다. 인간은 욕정과 거짓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것들이 그의 삶을 지배합니다. 이 욕정들은 단순히 제거할 수 있는 껍질이 아니라, 그 사람이 지금까지 ‘살아왔다고 느끼는 방식’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즉시 제거하면 인간 전체가 무너집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현실적인 인간 이해를 보여 줍니다. 주님은 인간을 급격히 바꾸지 않으시고, ‘그가 견딜 수 있는 속도로만 변화시키십니다.’
이 때문에 악한 영들이 오랜 기간 동안 사람과 함께 있도록 허락됩니다. 이는 놀랍게 들릴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에게서 이것은 주님의 섭리의 일부입니다. 악한 영들은 욕정을 자극하지만, 바로 그 자극을 통해 욕정은 점점 느슨해지고, 고정된 지배력을 잃습니다. 이렇게 욕정이 풀릴 때에야 비로소 그것들은 주님에 의해 선을 향해 기울어질 수 있습니다. 즉 전투는 파괴가 아니라 ‘재배열을 위한 과정’입니다.
이 전투의 한가운데서, 악한 영들은 사람에게 ‘채소와 푸른 풀’에 해당하는 것만을 허락합니다. 이는 자연적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생존 양식만이 유지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영적 기쁨, 깊은 평화, 확신에 찬 신앙은 이 시기에는 지속적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 대신 삶은 단조롭고, 반복적이며, 버티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것이 바로 자연적 음식만으로 살아가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이 글의 중심은 절망이 아니라 ‘주님의 보호와 간헐적 위로’에 있습니다. 주님은 전투 중인 사람에게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에 비유되는 음식도 주십니다. 이것은 평온과 평화의 상태, 그리고 그 안에 있는 기쁨과 즐거움입니다. 중요한 점은 이 음식이 ‘항상’이 아니라 ‘간헐적으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는 전투의 현실을 유지하면서도, 사람이 완전히 꺾이지 않도록 하는 주님의 섭리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영적 체험을 길게 언급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주님의 보호가 없으면 인간은 단 한 순간도 견딜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영의 세계에는 선과 진리에 대한 극심한 증오가 존재하며, 이것은 인간의 상상 범위를 훨씬 넘어섭니다. 그래서 주님의 보호는 일반적인 방어가 아니라, ‘순간순간의 지속적인 보존’입니다.
이 글의 마지막에서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체험을 근거로 삼되, 그것을 독자에게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인간이 이런 일을 ‘일반적인 설명만으로는 믿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이후의 글들에서 점진적으로, 구체적으로 설명하겠다고 말합니다. 이는AC전체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진리는 한 번에 주어지지 않고, ‘받을 수 있는 만큼만’ 주어집니다.
이 글은 결국 이렇게 말합니다.
거듭남의 길은 평온한 상승 곡선이 아니라,전투와 보호가 교차하는 길입니다.자연적 인간의 음식이 제한되는 이유는 인간을 괴롭히기 위함이 아니라,‘그가 무너지지 않고 다시 정렬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그리고 그 모든 과정은,인간이 느끼지 못하는 순간까지도 주님께서 지키시기 때문에 가능해집니다.
위AC.58해설에 나오는 ‘자연적 애정’과 ‘자연적 사고’는 특별한 신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에서 늘 느끼고 생각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다만 그 ‘출처와 중심’이 아직 주님으로부터가 아니라 ‘세상과 자기 자신’에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어렵게 생각하지 마시고, ‘지금 내가 보통 살아가면서 느끼고 생각하는 것들 중,아직 신앙과 사랑으로 깊이 변화되지 않은 상태’라고 보시면 정확합니다.
먼저 ‘자연적 애정’부터 보겠습니다. 이것은 쉽게 말해 ‘욕구,감정,끌림’입니다. 예를 들어, 편하고 싶은 마음, 인정받고 싶은 마음, 손해 보기 싫은 마음, 가족을 아끼는 마음, 내 것을 지키고 싶은 마음, 누군가에게 서운하거나 기쁜 감정 등입니다. 이런 것들은 다 자연적 애정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좋다/나쁘다’의 문제가 아니라, ‘어디서 출발하느냐’입니다. 자연적 애정은 기본적으로 ‘나 중심’, ‘내 삶 중심’, ‘세상 속에서의 나’에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선한 것처럼 보여도 아직은 주님과의 결합 안에 들어온 상태는 아닙니다.
이제 ‘자연적 사고’를 보겠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생각들입니다. 예를 들어, ‘이게 나에게 이익인가 손해인가’, ‘어떻게 하면 일이 잘 풀릴까’, ‘이 사람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이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같은 판단들입니다. 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 경험, 기억, 상식, 논리도 모두 여기에 속합니다. 이것도 역시 나쁜 것이 아니라, 다만 ‘세상 경험과 감각을 바탕으로 형성된 생각’이라는 점이 핵심입니다.
그래서AC.58에서 말하는 구조를 연결하면 이렇게 됩니다. ‘들짐승’은 이런 자연적 애정들, 즉 감정과 욕구 쪽을 가리키고, ‘공중의 새’는 자연적 사고들, 즉 생각과 지식 쪽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 둘이 합쳐져서 ‘자연적 인간’이 됩니다. 다시 말해, ‘느끼고 생각하는’, 즉 ‘애정과 사고’, 이 두 층위가 아직 주님과 깊이 결합되지 않은 상태가 자연적 인간입니다.
이걸 더 와닿게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내가 화가 납니다. 이건 자연적 애정입니다. 그리고 ‘저 사람 왜 저러지?’, ‘내가 이렇게 대응해야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자연적 사고입니다.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움직이며 내가 행동을 결정합니다. 이게 바로 ‘들짐승과 새가 함께 움직이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상태 자체는 출발점이라는 점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전부가 될 때입니다. 자연적 애정만 따라가면 욕심, 경쟁, 비교, 집착으로 흐르기 쉽고, 자연적 사고만 따르면 자기중심적 계산과 판단에 갇히기 쉽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여기에 ‘채소’와 ‘풀’, 즉 진리를 주셔서 이 상태를 조금씩 바꾸어 가십니다.
그래서 변화는 이렇게 일어납니다. 처음에는 자연적 애정대로 살던 사람이, ‘이건 옳지 않다’는 진리를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자연적 사고도 점점 ‘내 기준’이 아니라 ‘진리 기준’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같은 감정과 생각이라도, 그 방향이 달라집니다. 이것이 자연적 인간이 영적 인간으로 넘어가는 과정입니다.
핵심을 한 번 더 또렷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자연적 애정’은 내가 일상에서 느끼는 모든 감정과 욕구이고, ‘자연적 사고’는 내가 일상에서 하는 모든 생각과 판단입니다. 다만 그것들이 아직 주님과의 결합 안에 들어오기 전, 즉 ‘자기와 세상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상태’일 때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자연적 애정과 자연적 사고는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고 생각하는 그대로의 것이지만,아직 주님이 아니라 자기와 세상을 중심으로 작동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가 가축을 위한 풀과 사람을 위한 채소를 자라게 하시며 땅에서 먹을 것이 나게 하셔서 (시104:14) Jehovah causeth the grass to grow for the beast, and herb for the service of man, that he may bring forth bread out of the earth (Ps. 104:14),
이 구절은AC.58의 문맥에서 ‘주님께서 사람 안에 있는 서로 다른 수준의 것들에 맞게 선과 진리를 공급하시고,그것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유익을 이루게 하신다’는 것을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시104:14의‘가축을 위한 풀’과‘사람을 위한 채소’는 사람 안에 있는 자연적 애정과 이성적 이해에 각각 맞게 주어지는 선과 진리의 양식을 의미하며,그 목적은 결국 삶의 실제 양식인‘떡’,곧‘선한 삶’을 이루게 하기 위함입니다.’
먼저 ‘가축을 위한 풀’입니다. 성경에서 ‘가축’은 길들여진 애정, 곧 비교적 온순하고 질서 안에 들어온 자연적 욕망이나 감정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풀’은 앞에서 보신 것처럼 ‘처음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 선과 진리’, 곧 비교적 낮은 수준에서의 생명입니다. 따라서 ‘가축을 위한 풀’은 사람 안에 있는 자연적 애정들이 유지되고 바로 서기 위해 필요한 기초적인 선과 진리를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아직 깊은 이해나 높은 사랑에 이르지 않았더라도, 사람이 최소한 바르게 살 수 있도록 지탱해 주는 기초 양식입니다.
이제 ‘사람을 위한 채소’입니다. 여기서 ‘사람’은 단순한 생물학적 인간이 아니라, ‘이해와 이성을 사용하는 존재’, 곧 더 높은 수준의 인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채소’는 ‘씨 맺는 것’, 곧 계속해서 다음 것을 낳는 진리였습니다. 따라서 ‘사람을 위한 채소’는 단순한 기초를 넘어서, 사람이 이해를 통해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더 확장하고 깊게 만들어 가는 양식을 뜻합니다. 즉, 생각하고 분별하며 더 높은 삶으로 나아가게 하는 진리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차이가 드러납니다. ‘풀’은 유지와 기초에 가깝고, ‘채소’는 성장과 확장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람 안의 상태에 따라 각각에 맞는 양식을 주십니다. 아직 자연적 수준에 있는 사람에게는 ‘풀’이 필요하고, 더 이해가 열려 있는 사람에게는 ‘채소’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우열이 아니라 ‘단계와 용도의 차이’입니다.
이제 마지막이 핵심입니다. ‘땅에서 먹을 것이 나게 하셔서.’ 여기서 ‘먹을 것’, 곧 ‘떡’은 언제나 ‘선한 삶’, ‘실제로 살아내는 선’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땅’은 사람의 삶 전체, 특히 외적 삶의 영역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주님께서 다양한 형태의 진리와 선을 공급하시는 이유는,결국 그것이 사람의 실제 삶에서 선한 열매로 나타나게 하기 위함’이라는 뜻입니다.
이제AC.58의 흐름과 연결하면 더 분명해집니다. 앞에서 ‘채소’와 ‘나무’, ‘열매’가 나왔듯이, 여기서는 그 공급의 구조가 설명됩니다. 즉, 주님은 사람 안의 각 수준에 맞게 ‘풀’과 ‘채소’를 주시고, 그것이 점점 자라 결국 ‘먹을 것’, 곧 선한 삶으로 이어지게 하십니다.
이걸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직 깊은 신앙 이해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바르게 살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에게는 ‘풀’이 주어집니다. 또 어떤 사람은 말씀을 배우고, 그것을 더 깊이 이해하며 살아가려 합니다. 그에게는 ‘채소’가 주어집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결국 ‘실제로 어떻게 사느냐’로 이어져야 합니다. 즉, 말과 생각을 넘어 ‘삶의 선’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먹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단순한 자연의 공급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의 상태에 따라 필요한 만큼의 선과 진리를 주시고,그것을 통해 결국 선한 삶이 이루어지게 하신다’는 영적 질서를 보여 줍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시104:14는 주님께서 사람 안의 각 수준에 맞게 선과 진리를 공급하시고,그것을 통해 결국 실제 삶에서 떡,곧 선한 열매가 맺히게 하심을 의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