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는 어떤 사람이었길래 주님이 직접 부르셨을까?

 

 

27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28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29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30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31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32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33그들이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34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35그러나 그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36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아니하리라 37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 쓰게 되리라 38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39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눅5:27-39)

 

 

오늘날 남을 지배하려는 사랑과 부에 대한 사랑이 기독교계에 만연하고, 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들이 어떤 식으로든 그들을 잘못된 길로 이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것들은 악을 죄로 알고 멀리하지 않는 사람들을 미혹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그러므로 자연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남을 지배하려는 사랑과 부에 대한 사랑은 자연적인 사람 고유의 사랑이기 때문에, 그는 자기 안에 있는 그런 사랑을 인정하지도 않고, 알지도 못한다. 사람은 악과의 싸움을 통해서만 개혁되고, 개혁이 되어야 그것을 알 수 있다. 신앙으로 개혁된다고 믿는 사람도 있지만, 악과 싸우기 전에는 사람 안에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존재할 수 없다. (AE.1189:3, 이순철 역)

 

※ AE(Apocalypse Explained, 계시록 해설) 위 1189번 글 3번 항에 대한 Ager 영역 및 Whitehead 개정본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As the love of rule and the love of riches prevail universally in the Christian world, and these loves at this day are so deeply rooted that it is not known that they in any wise lead astray, it is important that their quality should be set forth. They lead every man astray who does not shun evils because they are sins; for he who does not thus shun evils does not fear God, and therefore remains natural. And as the love of ruling and the love of riches are the natural man’s own loves, he does not see with any interior acknowledgment what the quality of those loves is in him. This he does not see unless he is reformed, and he can be reformed only by combat against evils. It is believed that he can be reformed by faith; but there can be no faith of God in man until he fights against evils. (AE.1189:3, Ager 역)

 

이는 계시록 18장 23절, ‘등불 빛이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비치지 아니하고 신랑과 신부의 음성이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너의 상인들은 땅의 왕족들이라 네 복술로 말미암아 만국이 미혹되었도다’에 관한 주석 중 ‘신랑과 신부의 음성이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들리지 아니하리로다’(And the voice of bridegroom and of bride shall not be heard in thee any more)에 대한 내용입니다. //

 

 

오늘 본문 27, 8절입니다.

 

27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28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주님께서 길을 가시다 가버나움 세관 앞을 지나시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곳에는 레위라는 이름의 세리가 앉아서 일을 보고 있었는데, 주님은 어찌 된 영문인지 그에게 다가가서 ‘나를 따르라’ 하셨고, 그러자 놀랍게도 레위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여기 레위는 마태복음에 나오는 마태입니다. 레위는 그렇게 해서 주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세리 레위는 그들의 원수인 로마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더구나 세리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힘없는 동족, 백성들을 토색질하는 사람들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 우리나라도 보면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에 부역한 사람들이 있지 않았습니까? 순경이며 관공서 및 은행이며... 등, 물론 그들이 다 악인들은 아니었을지라도 거의 대부분 정말 지독한 악인들이었습니다. 어떨 땐 본토 일본 사람들보다도 더 말이지요. 참고로, 누가복음 19장에 나오는 삭개오는 세리장이요 부자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레위를 제자로 택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 이유는 레위라는 이름과 세리라는 직업의 내적 의미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데요, 속뜻으로, ‘레위’는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을, ‘세리’는 이방인을 뜻합니다. 주님을 모르는 이방인이 어떻게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주님과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선과 진리를 그 자체로 사랑하는 것을 뜻하며, 그렇게 보면, 교회 다닌다고 해서 모두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며, 또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이라고 모두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레위를 제자로 부르신 것은, 교회 밖의 이방인 가운데서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 곧 선과 진리를 그 자체로 사랑하는 사람을 택해 제자로 삼으신 걸 의미합니다. 여기 교회 밖의 사람들이란, 마지막 때 타락한 교회에 몸담고 있지 않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일까요? 새 교회에서는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즉 자신의 직업에 관한 일들을 그 자체의 목적으로 정직하고 성실하게, 그리고 근면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하찮은 일일지라도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일 자체를 위해 성실하고 정직하게 하는 것, 그것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누가 보든 안 보든 말입니다.

 

※ 자신의 직업과 관련, 물론 선한 직업이겠지요, 그리고 직업을 쓰임새(use)라 해도 무방하겠습니다. 주님께 쓰임 받는다는 생각, 이 쓰임을 통해 주님의 더 큰 어떤 공공선에 기여한다는 생각, 또 이 쓰임, 이 직업과 관련된 모든 것 안에 주님이 계신다는 생각, 그래서 아주 사소한 것 하나라도 소홀함이 없으며, 관련된 사람들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는 생각, 이 모든 것이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이지 싶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레위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레위에게 다가가셔서 ‘나를 따르라’ 하셨고, 레위 또한 주님의 말씀을 듣고, 모든 것을 버리고 즉시 주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주님의 제자 베드로도 주님께서 ‘나를 따르라’ 하셨을 때, 즉시 주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사실 이것은 대단히 감동적인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따르라’ 하실 때, 자기가 가진 모든 걸 버리고, 즉시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데 지금까지 보면,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 그리고 레위는 주저하지 않고 즉시 주님을 따라나섰습니다.

 

※ 과거 삼십 대 중반에 잘 다니던 대기업을 그만두고, 주님의 교회를 사랑하여 주님께 보답하고자 교회 직원의 삶을 선택했던 저는, 지금 생각하면 그런 중요한 결정에 비해 허점투성이였던 그 과정에도 불구, 저의 그런 면을 보시고, 주님은 오늘날 이렇게 스베덴보리를 알게 하시고, 그의 일을 이어받게 하신 건 아닐까 깊은 생각에 잠겨 봅니다.

 

29절입니다.

 

29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주님의 제자가 된 레위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주님을 자기 집으로 모시고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계시록 3장 20절에는 이 말씀과 연관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거기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계3:20)

 

그러니까 주님의 음성을 듣고 즉시 문을 여는 사람은 바로 레위 같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레위의 집에서 열린 잔치는, 그 속뜻으로는 레위가 베푼 잔치가 아니고요, 주님을 향해 문을 여는 자에게 주님께서 오셔서 함께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진리와 선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 주시는 진리를 받아들여 그에 따라 선을 행하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적으로 먹는다는 것은 진리를 따라 선을 행하는 것이며, 그렇게 해서 진리와 선을 자신의 생명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0절입니다.

 

30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구약 규례에서는 부정한 사람이나 죄인들이 제사의 예물 먹는 것을 금했습니다.

 

20만일 몸이 부정한 자가 여호와께 속한 화목제물의 고기를 먹으면 그 사람은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요 21만일 누구든지 부정한 것 곧 사람의 부정이나 부정한 짐승이나 부정하고 가증한 무슨 물건을 만지고 여호와께 속한 화목제물의 고기를 먹으면 그 사람도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레7:20-21)

 

이 규례의 의미는 악하고 거짓된 사람들은 진리와 선을 소유하면 안 된다는 뜻인데요, 왜냐하면 악한 사람들이 진리와 선을 가지게 되면 진리와 선을 더럽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곧 신성모독이며, 그래서 이런 것은 당사자에게 씻을 수 없는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 다음은 ‘신성모독’(神性冒瀆, sacrilege)에 관해 전에 제가 정리한 글의 일부입니다.

 

...주님은 유대인들에게는 그들이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의 타고난 성정상, 그들이 깨닫고 알게 되면 그들은 반드시 주님 모독의 길을 걸을 것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보호하시기 위해 막으신 것입니다.

 

주님을 모독하는 신성모독의 두려움은 그것이 사람의 영을 더럽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덕지덕지 붙어 있기만 한 악은 나중에 주님이 떼어내시면 되지만, 영 자체가 변질되어 더럽혀지면, 그건 주님도 어떻게 하실 수가 없기 때문인데요, 노아의 홍수로 표현된 태고교회의 멸망 때, 사실은 바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며, 그래서 이들, 곧 네피림을 포함한 이들 태고교회의 마지막 후손들은 지금도 지옥 저 한쪽 구석에서 지옥의 다른 영들을 해치지 못하게 따로 격리 상태에 있다고 합니다. 신성모독의 폐해는 이토록 정말 지독한 것입니다. //

 

이 규례 속에 그런 뜻이 있다는 것을 몰랐던 유대인들은 그 말씀을 그냥 문자적으로만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죄인들과는 음식을 함께 먹지 않는다는 인간의 전통을 만들어 놓고, 백성들에게 그 전통 지킬 것을 강요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주님께서 세리와 함께 음식을 드시는 것은 유대교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고, 그래서 그들은 주님을 그토록 미워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비방을 들으신 주님께서 31절과 3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1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32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이 말씀에서 ‘의사’는 바로 주님 자신이십니다. 주님은 질병으로 상징되는 모든 악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병의 치유를 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병자 스스로 자기의 병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건강한 자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하신 것입니다.

 

※ 이들에 대한 또 다른 주님 말씀이 하나 생각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요9:41) //

 

주님은 겸손하게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자를 위해 오셨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들은 바리새인들이 다시 주님께 말합니다. 33절입니다.

 

33그들이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조금 전에 바리새인들은 주님이 부정한 자들과 함께 음식을 드신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금식 전통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난하고 있어요. 금식의 전통은,

 

29너희는 영원히 이 규례를 지킬지니라 일곱째 달 곧 그달 십 일에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말되 본토인이든지 너희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이든지 그리하라 30이날에 너희를 위하여 속죄하여 너희를 정결하게 하리니 너희의 모든 죄에서 너희가 여호와 앞에 정결하리라 (레16:29-30)

 

하신 규례로부터 시작되었고, 그렇게 금식은 회개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볼 때 주님과 그의 제자들은 금식 전통을 전혀 지키지 않고, 오직 먹고 마시는 일에만 열중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내적 의미로 ‘금식’(禁食)은 자기에게 진리와 선이 없음을 슬퍼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보통 자기가 진리를 많이 알고 있고, 또 선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깨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바로 시험받을 때입니다. 시험 가운데 ‘나에게는 악하고 거짓된 것밖에 없구나, 진리와 선이 나한테는 하나도 없구나’ 하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습니다. 왜냐하면 시험 중에는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과 심하게 다투거나, 또 악한 유혹에 미혹되기도 합니다. 그때 우리는 ‘오, 주님! 저에게는 진리와 선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며 주님께 매달립니다. 바로 그것이 금식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바리새인들의 금식은 진정한 금식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자기의 경건함을 자랑하기 위한 그런 금식이었는데요, 왜냐하면 그들은 누구보다 스스로 진실하고 선하다 생각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음 주님 말씀들처럼 말입니다.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6:16)

 

11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눅18:11-12)

 

그러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4절,

 

34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35그러나 그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이 말씀에서 ‘신랑’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혼인 집 손님들’은 회개를 통해 주님과 하나 되는 사람, 즉 주님과 결혼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회개하는 과정에서 이미 자신에게 진리와 선은 없고, 대신 악과 거짓만 있다는 것을 충분히 고백하고 슬퍼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주님이 입혀주시는 구원의 옷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바리새인들에게 혼인집 손님들을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하셨던 것입니다. 혼인 잔치는 주님이 주시는 진리와 선을 먹고 마시는 곳이며, 그것을 통해 주님과 결혼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는 바리새인들은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비난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그들에게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이 말씀에서 ‘그날’은 타락한 교회가 문을 닫을 때입니다. 그리고 ‘신랑을 빼앗기는’ 것은 그때 교회가 주님과 완전히 결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있어도 주인이신 주님이 계시지 않는, 빈껍데기뿐인 교회만 있는 날이 그날이며, 신랑을 빼앗기는 때입니다. 주님은 그동안 교회들이 아무리 주님을 배반하더라도 끝까지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다시 돌아오도록 수없이 많은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돌이키지 않고, 그러다가 결국 자기 스스로 교회의 문을 닫아버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교회를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주님과의 통로를 닫아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가 마지막 때 신랑을 빼앗기는 모습입니다.

 

36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아니하리라 37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 쓰게 되리라 38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이 말씀 역시 타락한 모든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여기 ‘새 옷’은 새로운 교회의 진리를 나타내고요, ‘낡은 옷’은 이전 교회의 잘못된 진리들을 나타냅니다. 포도주의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로운 교회의 진리를 나타내며, ‘낡은 가죽 부대’는 이전 교회의 잘못된 교리를 뜻합니다. 이를테면 유대교회의 장로의 전통이라던가, 오늘날 교회에서 주장하는 신앙만의 교리, 즉 ‘오직 믿음’의 교리가 바로 낡은 가죽 부대입니다. 그러한 낡은 가죽 부대로는 주님께서 밝혀주시는 새 진리를 받을 수 없습니다. 설령 받는다 하더라도 이전의 진리도 쓸데없는 것이 되고, 새로운 진리도 쓸데없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새 교회에 오신 분들은 대개 이전 교회의 잘못된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갈등하셨던 분들입니다. 따라서 이전에 가지고 있던 잘못된 교리들을 모두 버리고 새로운 교리를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새로운 가죽 부대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만일, 전의 것을 여전히 가진 채,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려 한다면 결국 둘 다 못쓰게 됩니다. 그런 진리를 가지고는 더 이상 영적 성장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39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이 말씀은 교회의 마지막 때, 신앙인들이 타락한 교회의 진리를 고수하고 새로운 진리를 배척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묵은 포도주’는 이전 교회의 낡은 진리들이고요, ‘새 포도주’는 새로운 진리들입니다. 많은 사람이 그동안 자신이 쌓아 놓은 진리 체계 허무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거듭나는 데 장애가 생기고, 어쩌면 주님과의 관계가 끊어질 수도 있습니다. 마치 타락한 교회가 신랑을 빼앗기는 것과 같은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새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라 하시는 말씀에서 주님의 그런 안타까운 심정이 느껴집니다.

 

※ 저 역시, 아니 저는 정말 묵은 포도주 버리는 걸 지독하게도 거부했던 사람입니다. 저는 스베덴보리의 저작 읽는 걸 무슨 종교적 금서(禁書) 읽는 걸로 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런 저를 아시고 평범하지 않은 어떤 특별한 접근, 곧 먼저 영계에 대한 입문으로 정원 목사의 글들을 읽게 하신 후, 이어 유튜브나 인터넷을 통해 서사라 목사 등 다양한 사례들을 접하게 하신 후, 강문호 목사님을 통해 수도원, 수도사의 세계로 이끄셨고, 공용복 선생의 시흥영성수련원 등을 알게 하신 후, 그곳을 통해 스베덴보리라는 이름을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개신교, 특히 침례교에서 바로 스베덴보리로 점프하는 건 저 같은 사람한테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 주님은 이렇게 준비의 준비의 준비를 통해 차근차근 밟게 하신 것이지요. 저는 젊은 시절, 네비게이토식 제자훈련이 참 신앙인 줄 알았고, 그게 전부인 줄 알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즈음 저는 주일날 교회에 오는 것이 매우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교회 식구들 한분 한분의 모습에서 교회의 성장을 보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이 양적으로 늘어나는 것만이 성장은 아닙니다. 저는 성도들의 내면에 다양한 보석들이 있고, 그것이 점점 더 아름답게 빛을 내고 있음을 매일 봅니다. 우리를 영적으로 빛나게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에서 주님은 회개와 겸손이라 하셨습니다.

 

마태라고도 부르는 레위는 세리였습니다. 세리를 직업으로 가진 사람들은 세상의 눈으로 보면 죄인이었습니다. 조국이 아니라 로마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었고요, 대부분 직위를 이용, 동족 백성들을 수탈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레위는 자기의 자리에서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고, 늘 회개했습니다. 주님은 그런 레위를 기억하시고 마침내 그를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레위를 제자로 부르신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그런 주님을 비난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하고 음식을 함께 드신다 비난하고, 금식을 하지 않는다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회개의 기회를 계속해서 놓쳤습니다. 급기야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들이 끝내 주님을 떠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며, 사후에 영계에 가서야 자기에게 선과 진리가 없음을 깨닫고 이를 갈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금식할 것이다’ 하신 것은 그런 의미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질서는 참으로 두렵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기회를 주실 때 그것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끝으로 말씀드릴 것은, 세상에 세리와 바리새인이 있는 것처럼, 우리의 내면에도 세리와 바리새인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겸손한 자와 교만한 자가 있고요, 회개하는 자와 회개할 줄 모르는 자가 우리 속에도 공존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만한 자의 말을 듣지 말고, 늘 겸손한 자의 말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회개할 줄 모르는 자의 말을 듣지 않고, 늘 회개하는 자의 말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매일 같이 낡은 진리들을 버리고 주님으로부터 흠 없는 진리를 받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제자로 부름받은 새 교회 모든 성도가 주님과 함께 영원히 먹고 마시는 영광 누리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사61:10)

 

아멘

 

원본

2017-12-10(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30(D5)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029. 2023-03-30(D5)-매일예배(2446, 눅5,27-39), '레위는 어떤 사람이었길래 주님이 직접 부르셨을까'.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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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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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취한 노아와 그 세 아들, 셈, 함, 야벳

 

 

21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And he drank of the wine and was drunken; and he was uncovered in the midst of his tent. 22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And Ham, the father of Canaan, saw the nakedness of his father, and told his two brethren without. 23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And Shem and Japheth took a garment, and laid it upon the shoulder, both of them, and went backward, and covered the nakedness of their father; and their faces were back ward, and they saw not their father’s nakedness. (창9:21-23)

 

※ 오늘부터는 본문에 영문도 함께 싣겠습니다.

 

 

스스로 납득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믿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신비에 대해 깊이 파고들어 살피는 사람을 말씀에서는 술 취한 자라 부른다. 이들은 이러한 일들을 감각적인 것, 기억에 속한 것, 또는 철학이나 그 자신의 인간적인 것을 수단으로 하기 때문에 결국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다. (AC.1072, 이순철 역) That this signifies that he thereby fell into errors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a “drunkard” in the Word. They are called “drunkards” who believe nothing but what they apprehend, and for this reason search into the mysteries of faith. And because this is done by means of sensuous things, either of memory or of philosophy, man being what he is cannot but fall thereby into errors. (AC.1072, Clowes 역)

 

※ 위 인용은 AC(Arcana Coelestia, 라틴, 천국의 비밀, 창, 출 속뜻 주석) 1072번 글에서 가져왔으며, 이는 창세기 9장 21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중 ‘취하여’에 관한 주석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

 

 

먼저, 오늘 배경입니다.

 

18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라 19노아의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 20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창9:18-20)

 

홍수가 끝나고,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 함, 야벳이었고, 이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졌습니다. 말씀에는 노아가 포도나무를 심고 농사를 시작했다고 하네요. 어느 날 아버지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 잠이 들었는데 벌거벗은 채로 자고 있었습니다. 그때 함이 우연히 아버지의 장막에 들렀다가 그 모습을 보게 되었지요. 함은 그냥 자기 선에서 조용히 처리해도 될 일을, 아니 그러는 게 더 나았을 일을 형제들에게로 가 알려요. 점잖게 말해 ‘알렸다’이지 아마 키득키득 천박, 경박하게 알렸을 겁니다. 함의 말을 듣고 그의 형제 셈과 야벳이 아버지의 장막으로 가서는 옷을 가지고 뒷걸음쳐 들어가 아버지의 벌거벗은 몸을 덮습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줄거리입니다. 문자적으로만 본다면, 노아와 아들들에게 일어난 이 일은 작은 사고입니다만, 그러나 내적 의미로 보면, 이 말씀에는 영적 교회와 관련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숨겨져 있습니다.

 

내적 의미로 볼 때, 노아와 그 자손들은 아담으로 상징되는 태고교회의 몰락 후, 주님에 의해 새로 세워진 고대교회를 나타냅니다.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와 고대교회(古代, The Ancient Church)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성(聖) 문서(스베덴보리가 주님의 계시로 기술한 그의 모든 저작, Writings)에 의하면,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과 직접 대화하는 사람들, 즉 아직 지상에도 퍼셉션(perception)이 있었던 시절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으로부터 필요한 말씀을 그때그때 직접 들었고, 말씀을 들으면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들이 태고교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태고교회를 천적 교회(天的, Celestial Church)라고도 부릅니다.

 

※ 위 퍼셉션에 관해 전에 정리했던 글입니다.

 

태고교회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바로 퍼셉션(perception)이 지상에 머물던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이 퍼셉션이라는 걸 잃어버린, 노아 이후 지금까지 우리 인류는 이 퍼셉션이 무엇인지 그 무슨 말로도 설명이 안 되고, 또 설령 그 어떤 말로 설명을 한다 해도 결코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천국은 퍼셉션으로 충만한 나라이며, 천국 모든 구성원은 주님과 이걸로 커뮤니케이션을 한다고 합니다. 천국은 주님의 신성으로 이루어진 나라인데, 주님의 신성은 신적 사랑(Divine Love)이신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적 선(Divine Good)과 신적 진리(Divine Truth)이며, 그래서 천국 모든 구성원은 기본적으로 이 둘을 즉시 아는 능력, 곧 퍼셉션이 필요한 것이지요.

 

주님의 신성을 천사들은 지상에 사는 우리처럼 무슨 공부를 통해서, 학습을 통해서 배우는 게 아니라 오직 주님이 주시는 이 퍼셉션으로 그냥 압니다. 직감, 직관이라고 해야 하나요? 천사들이 뭘 궁금해하면, 그 즉시 그냥 어떤 답이 내적으로 들린답니다. 참 신기하지요? 그만큼 주님과 늘 막힘없이 커뮤니케이션하는 천사들이 정말 부럽습니다. 놀라운 것은, 바로 태고교회가 이런 퍼셉션을 지상에서도 누렸다는 것입니다... //

 

천적 교회는 사랑의 교회입니다. 즉 사랑이나 선이 먼저이고, 그다음에 신앙, 또는 진리가 따라오는 교회인 것입니다. 그에 비해 노아로 상징되는 고대교회는 영적인 교회(靈的, Spiritual Church)입니다. 영적 교회는 지성의 교회입니다. 즉 신앙이나 진리가 먼저이고, 다음에 사랑과 선이 따르는 교회입니다. 태고교회가 사랑의 교회라는 것은 그들이 주님의 말씀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고 바로 행동으로 옮겼다는 사실로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은 의지이며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Heaven and Its Wonders and Hell, 김은경 역) 4장, ‘천국은 두 나라로 구분되어 있다’(Heaven Is Divided into Two Kingdoms)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가장 기본이 되는, 일종의 천국에 관한 공리(公理, 너무나 자명하여 굳이 증명이 필요 없는 사실)이기 때문에 읽고 또 읽어 거의 심비(心碑, 마음 판)에 새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천국에는 무한한 다양성이 있다. 완전히 동일한 사회는 하나도 없고, 심지어 단 한 천사도 다른 이와 똑같지 않다. 그러므로 천국에는 일반적, 종류별, 그리고 세부적 구분이 있다. 일반적으로는 두 나라로 구분된다. 종류별로는 세 천국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세부적으로는 무수한 사회공동체(societies)로 나누어진다. 이제 그것을 자세히 설명하겠다. 두 나라라고 부르는 이유는, 천국을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라고 하기 때문이다. (HH.20)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성(神性, the Divine)을 더 내적으로(內的, more interiorly) 받는 천사들이 있고, 덜 내적으로 받는 천사들이 있다. 더 내적으로 받는 천사들은 천적 천사들(天的, celestial angels)이라 하고, 덜 내적으로 받는 천사들을 영적 천사들이라 한다. 이에 따라 천국이 두 나라로 구분되는 것이다. 하나는 천적 나라(the celestial kingdom), 다른 하나는 영적 나라(the spiritual kingdom)라 한다. (HH.21)

 

천적 나라를 이루는 천사들은 그들이 주님의 신성을 보다 깊이 받아들이기 때문에, 더 내적인 천사, 또는 더 높은 천사라고 부른다. 따라서 그들이 구성하고 있는 천국도 더 내적이고, 더 높은 천국이라고 한다. 더 높다, 더 낮다고 말하는 이유는,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을 그렇게 표현하기 때문이다. (HH.22)

 

천적 나라에 있는 사람들의 사랑인 천적 사랑은 주님을 향한 사랑(love to the Lord)이다. 영적 나라에 있는 사람들의 사랑은 영적 사랑이라 부르며, 이는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이다. 또 사람이 사랑하는 것은 그에게 선(좋은 것)이기 때문에, 모든 선은 사랑에 속한다. 따라서 그 두 나라의 선도 하나는 천적 선, 다른 하나는 영적 선이라 한다. 이로 보아 주님을 향한 사랑이 이웃 사랑과 구분되는 것처럼, 그 두 나라가 서로 구분되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나온 선은 보다 내적인 선이고, 그 사랑도 보다 내적인 사랑이기 때문에, 천적 천사들은 더 내적인 천사들이고, 더 높은 천사들이라 부르는 것이다. (HH.23)

 

천적 나라는 주의 성직(聖職)의 나라(the Lord’s priestly kingdom)라고도 불린다. 성경 말씀에서는 ‘주의 처소’(his dwelling place)라고 한다. 영적 나라는 주의 왕권(王權)의 나라(his royal kingdom)라고도 하며, 성경에 ‘주의 보좌’(his throne)라고 표현되어 있다. 또 이 세상에 계실 때의 주님을 신성의 천적 측면(the celestial Divine the Lord)에서 ‘예수’라 했고, 신성의 영적 측면으로는 ‘그리스도’라고 칭했다. (HH.24)

 

주님의 천적 나라에 있는 천사들은 주님의 신성을 보다 내적으로 받기 때문에, 영적 나라의 천사들보다 지혜와 영광에 있어 훨씬 뛰어나다. 그들이 주님을 사랑하므로 더욱 주님과 가깝고 친밀하게 결합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들이 신적 진리를 계속 그들의 생활 속에 직접, 즉시(at once) 받아들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와 대조적으로 영적 천사들은 신적 진리를 먼저 그들의 기억과 사고 속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천적 천사들은 신적 진리가 그들의 마음에 새겨져 있어 진리를 직관하며(perceive), 진리를 마치 자기 안에 들어있는 것처럼 본다. 그들은 진리가 옳은지 그른지 추론하지 않는다. 예레미야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된 것이 바로 이들에 대한 말씀이다.

 

33...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34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렘31:33, 34)

 

그들이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다. ‘여호와의 교훈을 받는 것’(the taught of Jehovah)은 주님이 가르치시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요한복음 6장 45, 46절에 주께서 직접 말씀하셨다.

 

45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46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요6:45, 46) (HH.25)

 

앞서 말한 대로, 이 천적 천사들이 지혜와 영광에 있어 다른 천사들보다 뛰어난 이유는, 그들이 끊임없이 신적 진리를 생활 속에 직접, 즉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신적 진리를 듣자마자 그것을 의도하고 행하며(will and do), 결코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옳은지 그른지 생각하지 않는다. 이 천사들은 어떤 진리를 들으면, 주의 입류(入流, influx)에 의해 즉시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주님은 사람의 의지 속으로는 직접(directly) 들어가시고, 생각 속으로는 의지를 거쳐 간접적으로 들어가시기 때문이다. 같은 말이지만, 주님은 선 안으로는 직접 유입하시지만, 진리 안으로는 선을 거쳐 간접적으로 유입하신다. 왜 두 가지가 같은 말이 되는가 하면, 사람의 의지와 거기서 나오는 행동에 속한 것은 선이라 부르며, 기억과 거기서 나오는 생각에 속한 것은 진리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실로 모든 진리는 사람의 의지 속에 들어가는 순간 선으로 바뀌어 사랑 안에 심어진다. 그러나 그냥 기억과 생각 안에만 머무는 진리는 선이 되지 못하고 생명이 없으며, 그 사람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 의지와 의지에서 비롯된 사고 능력(understanding, 이해, 이성)으로 인해 사람인 것이며, 의지를 떠난 사고 능력만으로는 사람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HH.26) //

 

그렇게 순수하고 따뜻했던 천적 교회의 사람들도 자아에 눈을 뜨면서 점점 타락하기 시작했는데요, 말씀에서는 그것을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는 것, 그리고 네피림과 같은 괴물이 출현하는 걸로 그리고 있습니다. 태고교회가 그렇게 무너지고, 이어 고대교회가 등장합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고대교회는 영적인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말씀에는 노아가 포도나무를 심었다고 했습니다. 포도나무는 영적 교회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 말씀에는 세 종류, 곧 감람(橄欖, 올리브)나무, 포도나무, 그리고 무화과나무가 자주 나오는데요, 이들 나무는 각각 천적(celestial), 영적(spiritual), 그리고 자연적(natural)인 것과 상응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에서 노아와 아들들에게 일어난 일들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지금부터 그것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본문 21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1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벌거벗은 채로 자고 있습니다. ‘포도주’는 본래 진정한 신앙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그릇된 신앙을 뜻합니다. 진정한 신앙은 무엇이고, 그릇된 신앙은 무엇일까요? 진정한 신앙은 주님 신앙에 따라 이웃을 사랑하는 신앙입니다. 그러나 그릇된 신앙은 입으로만 주님을 신앙할 뿐, 삶은 정반대인 신앙입니다. 따라서 노아가 포도주를 마셨다는 것은 그릇된 신앙 안에 있는 교회, 또는 사람들이 인간의 생각으로 말씀을 마음대로 곡해, 잘못된 교리와 신앙을 만들어 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천국의 비밀’ 1072번 글은 그것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스스로 납득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믿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신비에 대해 깊이 파고들어 살피는 사람을 말씀에서는 술 취한 자라 부른다. 이들은 이러한 일들을 감각적인 것, 기억에 속한 것, 또는 철학이나 그 자신의 인간적인 것을 수단으로 하기 때문에 결국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다. (AC.1072)

 

진정한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은 진리를 마음대로 추론하지 않습니다. 이해가 잘 안되는 부분이 있더라도 주님이 깨달음을 주실 때까지 참고 기다립니다. 반대로 그릇된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은 진리를 순진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마음대로 추론하고 왜곡합니다.

 

※ 모든, 주님으로 말미암은 선 안에는 순진함, 천진난만함(innocence)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선행이 이상하게 순진하지가 않다면 그건 주님으로 말미암은 선이 아닌 겁니다. 다음은 관련 글입니다.

 

순진함은 신앙의 진리와 사랑의 선을 받는 그릇이기 때문에 천국의 모든 것이 심기는 바탕이 된다. and in innocence all things of heaven can be implanted, for it is a receptacle of the truth of faith and of the good of love. (HH.330)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김은경 역), 37장, ‘천국의 어린이들’(Little Children in Heaven)에서 인용 //

 

내적으로 볼 때, 그들은 주님에 대해서나 말씀에 대해 신뢰하지 않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멀어질 때, 말씀을 왜곡하는 일이 많았고, 그럴 때마다 그릇된 교리가 양산되었습니다. 주님 당시 유대교회가 그랬고, 오늘날의 많은 교회들이 그렇습니다. 그런 교회들이, 이를테면 오늘 노아처럼 포도주를 마시고 취한 자들인 것입니다. 말씀에는 술에 취한 노아가 벌거벗고 잠이 들었다 했습니다. ‘벌거벗은지라’는 교회 안에 진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즉 인간의 생각으로 진리를 추론하거나 왜곡하는 교회에는 진정한 진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또 잠이 들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그들이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자신의 자아와 세상을 바라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고 잠을 자는 것은 고대교회가 처음의 순수함을 잃어버리고, 점점 세속화되어 가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그때 마침 함이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봤습니다. 22절입니다.

 

22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은 노아의 아들들 중 두 번째로 언급되는 아들로, 영적으로는 부패한 교회를 뜻합니다. 부패한 교회란 어떤 교회일까요? ‘천국의 비밀’ 1076번 글은 부패한 교회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가 말씀을 받아들이고 진정한 교회처럼 예배를 드리지만 체어리티로부터 신앙을 분리시키고, 그렇게 해서 신앙을 그 본질과 생명으로부터 분리시키며, 그로 인해 신앙을 죽은 것으로 만든다면 그 교회는 필연적으로 부패하게 된다. (AC.1076, 이순철 역) A church is said to be corrupted when it acknowledges the Word and has a certain worship like that of a true church, but yet separates faith from charity, thus from its essential and from its life, whereby faith becomes a kind of dead affair; the result of which necessarily is that the church is corrupted. (AC.1076, Clowes 역)

 

한마디로 말해서, 겉으로만 경건하게 예배를 드릴 뿐, 삶에 있어서는 사랑이나 체어리티가 없는 교회가 부패한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는 부패한 교회의,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자기들이 생각할 때 잘못된 교리나 신앙에 대해 알게 된 것을 뜻합니다. 말씀에는 함이 그 사실을 다른 형제들에게 알렸다고 합니다.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는 그들, 곧 잘못된 교리나 신앙을 가졌다 여겨지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저 자신을 돌아봤습니다. 우리 새 교회에서도 다른 교회의 잘못된 신앙이나 교리적 오류를 지적할 때가 있기 때문이지요. 대표적인 것으로 오늘날 주류교회들의 신앙인 ‘오직 믿음’ 교리 같은 것입니다. 만약 비난을 할 목적으로 그런 문제들을 거론한다면, 우리는 여기 함과 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릇된 신앙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게 하고, 그렇게 해서 그들이 진정한 신앙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이라면 그건 잘못이 아니겠지요. 함의 말을 듣고, 셈과 야벳이 아버지의 장막으로 갑니다. 23절입니다.

 

23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함은 아버지의 잘못을 비난하고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옷을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 그것으로 아버지의 벗은 몸을 덮어줬습니다. 함과 나머지 두 아들의 행동이 선명하게 대비가 되지요. 속뜻으로 셈과 야벳은 각각 어떤 사람일까요? ‘’은 고대교회 예배의 내적인 것인 주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체어리티를 뜻합니다. 그리고 ‘야벳’은 예배의 외적인 것을 뜻합니다. 즉 제사의 제물들과 의례들을 뜻합니다. 내적인 것 없는 외적 예배, 오직 외적이기만 한 예배는 생명 없는 죽은 예배입니다. 반대로 예배의 내적인 것만 있고, 외적인 것이 없다면 내적인 것은 허공중에 흩어져 버릴 것입니다. 그것은 천국만 있고 지상의 교회가 없는 것과 같고, 사람의 내면에 속 사람만 있고 겉 사람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지상의 교회가 없이 어떻게 천국의 시민들을 키울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교회의 예배 안에는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반드시 함께 있어야 합니다. 예배의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 안에 동시에 있는 교인들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비난하거나 경멸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셈과 야벳은 옷을 가지고 아버지의 벗은 몸을 덮어드렸습니다. ‘옷을 가져다가’는 다른 사람의 잘못을 선의로 해석하는 것을 뜻하고, ‘하체를 덮었으며’는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는 있는 힘을 다해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고 용서하는 것을 뜻합니다. 어깨는 힘과 능력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뒷걸음쳐 들어가서’는 다른 사람의 잘못에 동조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벗은 몸을 똑바로 보지 않고 뒷걸음쳐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다양한 이유로 다른 사람의 잘못에 동조합니다. 상대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함께 다른 사람을 비난하기도 하고, 마치 공모를 하듯 진심으로 잘못된 행동에 동조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잘못을 덮어주더라도 그것에 동조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주님과 이웃에게 죄를 짓는 일입니다.

 

※ 다음은 셈, 함, 야벳 요약입니다.

 

, 참된 내적(internal) 교회

야벳, 참된 외적(external) 교회

, 부패한(corrupted) 내적 교회

가나안, 부패한 외적 교회 (AC.1227)

 

어떤 예배가 참되다 하는 것은 그 예배가 주님을 향한 참사랑의 애정(affection)을 가지고 드려지고 있다는 뜻이고, 어떤 예배가 부패했다 하는 것은 그런 애정 없이 형식적으로, 즉 다른 동기와 목적으로 드려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천적(天的, celestial, heavenly)이라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참사랑의 애정을 말하는데, 이걸 영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체어리티의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과 체어리티로부터 분리된 신앙 안에 있는 사람에 대해 배웠습니다. 체어리티로부터 분리된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을 말씀에서는 노아의 아들 함으로 표현했습니다. 체어리티로부터 분리된 신앙이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주님에 대해서나 이웃에 대해 사랑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아버지가 술에 취한 채 벌거벗고 자는 모습을 보고 형제들에게 달려가 비난하고 조롱했습니다. 신앙만 있고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들은 그렇게 다른 사람의 허물을 주로 보고 장점은 보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잘못하면 무섭게 추궁하고 마음속으로 정죄하고 경멸합니다. 그러나 체어리티의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함의 형제 셈과 야벳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함의 말을 듣고 급히 옷을 가지고 아버지에게로 뒷걸음쳐 들어가 아버지의 벌거벗은 몸을 덮어줬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체어리티의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의 관대함을 나타냅니다. 체어리티의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잘못을 해도 비난하지 않으며 앙심을 품지도 않습니다. 살다 보면 억울한 일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다 보면 아무리 애를 써도 용서가 안 될 때가 있지요. 그래서 말씀에는 셈과 야벳이 옷을 어깨에 메고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어깨에 옷을 메는 것은 온 힘을 다해 다른 사람의 잘못을 덮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그렇게나 힘든 일입니다. 우리도 교회 건축을 할 때, 이유 없이 여러 가지로 불이익을 당했습니다.

 

※ 제가 알기로 근처 개신교 교회들이 와서 시위를 하고, 민원을 넣는 등 그렇게 반대하고 괴롭혔다고 합니다.

 

신축 허가가 나지 않아 개축을 해야 했고, 그렇게 건축이 늦어지면서 시공비는 엄청나게 인상되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여러분들이 말할 수 없이 고통을 받았고, 지금도 그 후유증을 앓고 있습니다. 그런 일들은 쉽게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온 힘을 다해 잊으라고 하시고, 그들의 잘못을 덮어주라고 하십니다. 생각해 보면, 다른 사람이 나에게 잘못을 하듯 그동안 나도 다른 사람에게 많은 잘못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 걸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잘못만 생각하고, 분풀이를 하려 한다면 세상은 지옥으로 변할 것입니다. 주님께 항상 체어리티의 마음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이웃이 잘못을 할 때, 선의(善意)로 해석하는 능력을 구하시길 바랍니다. 또한 타인의 허물을 덮어주되 결코 동조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진리 안에 있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1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3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시15:1, 3)

 

아멘

 

2022-02-20(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5-03-23(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3-23(D1)-주일예배(2590, 창9,21-23), '술 취한 노아와 그 세 아들, 셈, 함, 야벳'.pdf
0.54MB
축도2025-03-23(D1)-주일예배(2590, 창9,21-23), '술 취한 노아와 그 세 아들, 셈, 함, 야벳'.pdf
0.25MB
천국과지옥.1.4.20-28.'천국은 두 나라로 구분되어 있다'.pdf
0.32MB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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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중풍에 걸렸어도 침상에서 일어날 수 있으려면

 

 

17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하더라 18한 중풍 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19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20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21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여 이르되 이 신성 모독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22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 마음에 무슨 생각을 하느냐 23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24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25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26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니라 (눅5:17-26)

 

 

주님에 의해 치유 받은 병자들의 신앙은 역사적이라 불리는 신앙이었는데 그것은 기적을 바라는 신앙이었다. 이 신앙은 주님이 당신 자신으로부터 기적을 행하실 수 있으며 그러므로 전능하다는 신앙이었다. 그런 까닭에 주님은 구약의 선지자들과는 달리 사람들이 주님을 예배하는 것을 허락하셨다. 그런데 이러한 역사적 신앙(this historical faith)은 구원의 신앙(a saving faith)이 생기기 전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말씀으로부터 진리를 배우고 그것에 따라 살아갈 때 역사적 신앙은 비로소 구원의 신앙이 되기 때문이다. (AE.815:4, 이순철 역)

 

※ AE(Apocalypse Explained, 계시록 해설) 위 815번 글 4번 항에 대한 Ager 영역 및 Whitehead 개정본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No other faith than that which is called historical, which at that time was a miraculous faith, was meant by this faith whereby the sick were healed; consequently by this faith many wrought miracles at that time. This faith was, that the Lord was Almighty, because He was able to do miracles of Himself; for this reason He also allowed Himself to be worshiped, which was not the case with the prophets of the Old Testament, who were not worshiped. But there must always be this historical faith before it becomes a saving faith; for a historical faith becomes a saving faith with man by his learning truths from the Word, and living according to them. (AE.815:4, Ager 역)

 

이는 계시록 13장 11절,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어린 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을 하더라’에 관한 주석 중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And I saw another beast coming up out of the earth)에 대한 내용입니다.

 

 

오늘 말씀은 주님께서 중풍 병자를 고치셨다는 내용입니다. 주님이 세상에 계셨을 때 주로 하셨던 일은 말씀을 가르치시고, 병자들을 고치시는 일이었습니다. 주님은 특히 병자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시고, 유출 병 걸린 여인을 고치셨으며, 귀신 들린 자를 치유하셨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병자들과 죄인들과 함께하셨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주님의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마9:11) 하기도 했고, 그러면 주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마9:12) 하시면서 당신의 일을 계속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어쩌면 가장 병이 깊은 사람들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이 병자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 수많은 병자의 병을 치유하신 것은 역설적으로 보면, 신앙인들이 그토록 다양한 질병을 앓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중풍 병자 역시 그런 신앙인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치유되기 어려운 영적 질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의지해서 병을 고치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다합니다. 자기 힘으로 고치려고 하는 대신 주님께 의지해서 고치려고 하는 것입니다. 중풍 병자는 어떻게 병을 고쳤을까요? 말씀을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17절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17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주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 마침 그곳에는 갈릴리에서 온 자들도 있었고요,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자들도 있었습니다. 말씀에서 ‘갈릴리’는 교회 밖의 이방인들을 뜻하고, ‘유대’는 타락한 교회를 뜻합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타락한 교회 안의 위선자를 뜻합니다. 여기 바리새인들이 위선자를 뜻하는 이유가 뭘까요? 어느 날 주님께서 그들에게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마23:25) 책망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뜻으로 미루어 볼 때, 갈릴리와 유대, 예루살렘에서 많은 사람이 주님께로 나왔다는 말씀은, 참 진리가 나타났을 때, 교회 안과 밖에서 많은 사람이 이 진리를 주시하고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왜 나사렛의 목수 출신에 불과한 예수를 그렇게 주목했을까요? 다시 말하면, 기독교회 안에서, 또는 밖에서 왜 많은 사람이 새 진리로 나타나신 주님을 주목하고 있었을까요? 본문에서는 그 이유를,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로 설명합니다. 주님으로 표상되는 새 진리는 능력의 진리입니다. 그냥 진리가 아니고요, 그 속에 주님의 선이 들어 있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원하기만 한다면 누구나 이 진리를 통해서 거듭날 수 있습니다. 물론 말씀의 글자의 뜻만 가지고도 어느 정도는 거듭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주 힘이 듭니다. 왜냐하면 말씀의 글자의 뜻만 가지고는 주님의 온전한 생명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말씀의 글자의 뜻을 ‘구름’으로, 그리고 말씀의 속뜻은 구름 속에 빛나는 ‘영광’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마24:30)

 

그만큼 글자의 뜻은 어둡고 둔탁한 진리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가 진리로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신지를 알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말씀 가운데 능력이 있음을 놀라워했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새 교회의 진리가 마지막 때에 주님이 밝혀주신 참 진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막연하게 이 진리에 특별한 능력이 있음을 느끼고 주시하고는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 사람들이 중풍 병자 한 사람을 주님께로 메고 왔습니다. 18, 19절에서는 그것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18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19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중풍 병자가 주님께 가까이 가려 했으나 무리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고 합니다. 중풍 병자는 수족이 마비되어 걷지도 못하고, 손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뇌혈관이 막히거나 터져 뇌가 손상되어 나타나는 증상으로 뇌졸중이라고도 하는, 우리나라에서는 암 다음으로 사망률이 높은 질환이지요. 영적 의미로 ‘걷지 못한다’는 것은 진리를 따라 제대로 살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손을 쓰지 못하는’ 것은 진리를 행하려 해도 행할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손은 능력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중풍 병자’는 진리를 따라 살고자 하나 능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악을 멀리하려 해도 잘되지 않고요, 선을 행하려 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 사람이 중풍 병자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사람들이 왜 말씀에 따라 살지 못하고, 또 좌절할까요? 그 이유는, 주님과 연결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연결되지 않으면 그에게 주님으로부터 선이 흘러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행하려고 해도 잘되지 않고, 시험에서 자주 넘어집니다. 지금 중풍 병자의 상태가 바로 그런 상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중풍 병자와 주님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바로 선이 없는 진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지식 형태의 진리만 있고, 정작 그걸 실천할 수 있는 선은 없는 진리, 바로 그것이 주님과 중풍 병자를 가로막고 있는 벽인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말씀에서는 병자와 주님 사이를 많은 무리가 가로막고 있는 걸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 무리는 선이 없는 진리를 나타냅니다. 중풍 병자는 주님께 의지해서 병을 고치려 했는데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고민이 많았겠습니까? 그렇지만 고민 끝에 깨닫는 것이 있었는데요, 그건 바로 지붕을 뚫고 주님께 가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지붕’은 선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지붕을 뚫는 것은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할 수 있는 작은 선부터 하나씩 실천하는 것입니다. 중풍 병자의 상태는 영적인 어떤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신앙생활이 멈춰 선 상태, 정체된 상태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런 사람에게 지금 지붕을 뚫으라고 하세요. 작은 선이라도 행하라 하십니다. 그 작은 선은 어쩌면 그가 당면하고 있는 영적 질병과는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위장병이 있는 사람이 손을 깨끗이 씻는 것 같은 일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런 식으로라도 조그마한 선한 습관들을 하나씩 몸에 붙이라 하십니다. 오랜 습관을 버리고, 새로운 습관을 몸에 붙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붕을 뚫는 만큼이나 힘든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손 씻는 일은 병자일지라도 할 수 있는 일이기에 주님은 그 일을 권고하십니다. 마침내 병자가 지붕을 뚫고 주님께로 내려왔습니다.

 

※ 위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달아 내리니’라는 표현은 성서시대 이스라엘 가옥 구조를 좀 아셔야 이해하실 수 있는데요, 다음은 류모세 저, ‘열린다 성경, 생활풍습 이야기 하’ 12장, ‘중풍 병자의 친구들은 어떻게 지붕을 뚫었을까?, 지붕 위의 삶’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성서시대 이스라엘 평민들은 사면의 벽은 돌로 쌓고, 지붕은 진흙으로 발랐다. 조선시대 사대부 양반가는 기와로 지붕을 얹었지만, 평민들은 초가로 지붕을 얹은 것과 같다. 성서시대 이스라엘의 부자들은 기와지붕을 얹은 반면, 평민들은 진흙 지붕을 얹었던 것이다. 지붕은 먼저 수평으로 뽕나무(돌무화과나무) 가지로 만든 대들보를 깔고, 수직으로 갈대 또는 종려나무 가지를 깔았다. 그리고 그 위에 진흙을 발라 최종 처리를 했다... 그래서 그들은 ‘사면이 단단한 돌로 싸인 벽과 달리 진흙으로 살짝 덮은 지붕! 그 지붕에 올라가 손으로 흙을 긁어내서 그 틈새로 중풍 병자 친구를 달아 내리면 되겠다!’ 했던 것이다. //

 

20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주님께서 병자를 비롯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십니다. 중풍 병자는 그렇게 주님에 의해 치유를 받았습니다. 참으로 고대하고 고대하던 일이었습니다.

 

※ 천국 가는 것이 누가 대신 표를 끊어줘서 가는 게 아니라 결국 본인의 어떠함, 곧 본인의 속 사람의 상태로 가는 것처럼, 병 낫는 것, 곧 주님의 능력이 병자에게 흘러 들어가는 것 역시 병자 본인의 영적 상태의 문제, 그러니까 병자의 내면이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인지로 결정되는 것 같습니다. 저희 형님 중 한 분이 바로 이 중풍으로 삶을 마치셔야 했는데, 그때 보니 중풍이 깊으면 그 어떤 의사 표시도 하실 수 없더군요. 그럼에도 오늘 본문의 병자는 고침을 받은 걸 볼 때, 그러니까 그를 향해 주님이 말씀하시고, 그걸 또 그가 알아듣는 걸 볼 때, 비록 그 육은 저 정도로 중증이었을지라도 그 영, 곧 그의 속 사람은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21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여 이르되 이 신성 모독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그런데 정작 그 광경을 지켜보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 신성 모독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생각하며, 속으로 말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왜 그렇게 말했을까요? 그들은 자연적인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영적인 것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적 질병의 치유가 곧 죄 사함을 뜻한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만일 그들이 사랑의 사람, 가슴의 신앙인들이었다면 저런 판단하는 말 대신 오히려 하나님이 사람 살리시는 일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22절로 24절입니다.

 

22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 마음에 무슨 생각을 하느냐 23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24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 여기 22절, 23절은 이 설교 원본에도, 그리고 성 문서에도 특별한 언급이 없습니다. 나중에 혹시 주님으로 말미암은 어떤 퍼셉션이 오게 되면 그때 나누겠습니다.

 

주님께서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인자’는 진리로 세상에 오신 주님을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인자는 바로 참된 진리입니다. 주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믿지 않은 것처럼, 감각적인 사람들은 언제나 참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신 것은 그런 자연적이고 감각적인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 다음은 주님의 두 호칭, ‘인자’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글입니다.

 

주님은 (어머니로부터 받은) 인성(人性, this human)을 벗으셨을 때, 신적 인성(the Divine human)을 입으셨다. 그것 때문에 주님은 신약 성경에 여러 번 언급된 바와 같이 자신을 ‘인자’(the son of man)라 부르시고, 또 ‘하나님의 아들’(the son of God)이라 부르셨다. ‘인자’로서 주님은 진리 자체를 뜻하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주님은 선 자체를 뜻하는데, 그것은 주님의 인간 본질(human essence)이 신성하게 되었을 때, 그 본질에 속한 것이었다. ‘인자’의 상태는 주님의 겸비(謙卑)와 관련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의 상태는 주님의 영화와 관련이 있다. (AC.2159:2, 이순철 역)

 

그래서 주님은 시험받으실 때 ‘인자’로 받으셨습니다. 지옥은 오직 진리만 건드릴 수 있을 뿐, 선은 건드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

 

주님은 그런 감각적인 사람들, 즉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야만 진실, 진리를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방법으로 진리를 증거하실까요? 주님은 마태복음 5장 14절 이하의 말씀을 통해 그것을 알려주십니다.

 

14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5:14-16)

 

참 좋은 말씀 아닙니까?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거듭나는 사람들의 삶을 통해 이 진리를 증거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병자들을 치료하시는 것은 그의 구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중풍 병자에게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셨습니다. 그러자 25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25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병자가 일어나서 자기 침상을 들고 집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는 악과 거짓 안에 있던 사람이 영적으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침상’은 신앙인들 각자가 가지고 있는 교회의 교리를 나타냅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네 침상’이라고 하셨는데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사람마다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교리가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계시록의 속뜻’ 137번 글을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의 침상, 즉 교리는 그의 학식과 지성에 따라 다르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고상한 교리를, 어리석은 자는 천박한 교리를, 거짓말쟁이는 불결한 교리를 가진다. (AR.137, 이순철 역)

 

※ AR(Apocalypse Revealed, 계시록 속뜻) 137번 글에 대한 Whitehead 영역본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for there everyone’s bed is according to the quality of his science and intelligence, magnificent for the wise, mean for the unwise, and filthy for falsifiers. (AR.137, Whitehead 역)

 

이는 계시록 2장 22절,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에 관한 주석 중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Behold I will cast her into a bed, and them that commit adultery with her into great affliction)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

 

그러므로 병자가 자기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주님에 의해 회복된 교리를 개인의 의지 안에 심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은 사람의 의지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병자가 그렇게 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주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했습니다. 주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결혼애’ 9번 글에서는 그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은 사랑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즉 자신의 직업과 관련된 일을 성실하고 정직하게, 그리고 근면하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결과물이며, 자신이 속한 사회와 연대하는 것이고, 그 자체로 선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CL.9, 이순철 역)

 

※ CL(Conjugial Love, 結婚愛) 9번 글에 대한 Warren 영역본 및 Tafel 개정본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You do not know what is meant by the glorification of God. It means to bring forth the fruits of love; that is, faithfully, sincerely, and diligently to do the work of one’s employment—for this is of love to God and of love to the neighbor. And this is the bond of society and its good. (CL.9, Warren 역) //

 

이 말씀은 제가 새 교회 가르침에서 가장 좋아하는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남에게 뭔가를 베풀고 봉사하고 그런 것만이 아니라는 것이죠. 물론 그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자기 직업과 관련된 일을 성실하고 정직하게 하지 않으면서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은 선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중풍 병자가 그렇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26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26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니라

 

중풍 병자가 일어나는 모습을 보고, 거기에 모였던 바리새인들과 갈릴리에서 온 사람들도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두려워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병자를 고치시는 이유입니다. 조금 전 마태복음 5장 16절 말씀,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가 생각납니다. 네, 이렇게 중풍 병자가 치유되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뿐 아니라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놀라운 일은 어떤 것입니까. 놀라운 일은 한글 성경의 번역이고요, 영어 성경에는 ‘strange thing’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strange thing, 그러니까 자기 땅에서는 볼 수 없는 이상한 일, 생소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자기 종교나 교파에서는 볼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났다는 말이지요. 그 기적이란 주님의 능력에 의해 병자가 일어나는 것이며, 다르게 표현하면, 진리의 능력으로 죄 가운데 있던 사람이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가 놀랐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중풍 병자는 교리의 지식만 붙들고 있을 뿐 거듭나는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좌절 중에 주님께 가서 병을 고치려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주님께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주신 깨달음은 지붕을 뚫고 내려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지붕은 영적 의미로 선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지붕을 뚫는 것은 사소하지만 선한 습관을 몸에 붙이는 일입니다. 주님은 모든 선한 일을 통해서 우리와 결합하시기 때문에 병자에게 그렇게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중풍 병자는 선을 행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지금 부당한 요구를 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중풍 병자라 해서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일어나 걸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몸을 뒤척이거나 표정을 지을 수는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술을 끊지 못해 고생하는 사람이라도 자기 일을 정직하게 할 수는 있습니다. 또 만나는 사람에게 환한 웃음을 선사할 수는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술을 끊는 것과는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어 보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지속적으로 그런 일을 행하라고 하세요. 그러면 주님과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런 식으로 주님을 만날 때 극복할 수 없었던 모든 영적인 문제가 주님에 의해 해결됩니다. 물론 하루 이틀에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몇 년이 걸릴 수도 있고요, 세상을 떠날 때에야 비로소 해결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인내심을 갖고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병이 치유되고 새사람이 될 때, 이를 통해 믿지 않던 주변 많은 사람에게 새 교회 진리가 전해질 것입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새 교회의 진리, 곧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계시하신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요15:8)

 

아멘

 

원본

2017-11-19(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29(D4)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028. 2023-03-29(D4)-매일예배(2445, 눅5,17-26), '중풍에 걸렸어도 침상에서 일어날 수 있으려면'.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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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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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한 나병환자

 

 

12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몸에 나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하여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니 13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나병이 곧 떠나니라 14예수께서 그를 경고하시되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가 깨끗하게 됨으로 인하여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니 15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 오되 16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눅5:12-16)

 

 

주님과 아버지가 합일해 가는 과정을 주님의 겸비의 상태라고 하고, 합일 그 자체를 영화의 상태라고 한다.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 겸비와 영화라 불리는 두 가지 상태에 계셨다는 것은 교회에서 인정하는 일이다. 전자의 상태, 즉 주님의 겸비의 상태는 말씀의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테면 다윗의 시편과 예언서에 기록되어 있다. 특히 이사야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사53:12)이러한 상태가 아버지 앞에서 주님의 상태, 즉 겸비, 겸손의 상태다. 왜냐하면 그 상태에서 주님은 아버지께 기도하셨고, 또 아버지의 뜻을 행하겠다고 하셨으며, 그가 행하고 말한 모든 것을 아버지께 돌리셨기 때문이다. (TCR.104, 이순철 역)

 

※ TCR(True Christian Religion, 참된 기독교) 위 104번 글에 대한 Ager 영역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8) The progress towards union was his state of exinanition [emptying himself], and the union itself is his state of glorification. It is acknowledged in the church that when the Lord was in the world he was in two states, called the state of exinanition and the state of glorification. The prior state, which was the state of exinanition, is described in the Word in many places, especially in the psalms of David and also in the prophets, and particularly in Isaiah (chapter 53) where it is said:

 

That he emptied his soul even unto death (Isa. 53:12).

 

This same state was his state of humiliation before the Father; for in it he prayed to the Father; and he says that he does the Father’s will, and ascribes to the Father all that he did and said. (TCR.104, Ager 역) //

 

 

오늘 말씀은 주님께서 나병 들린 환자를 치유하셨다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나병(癩病)은 문둥병이라고 부르는 피부병입니다. 오늘날엔 한센병이라고 하지요. 구약 레위기의 기록에 따르면 나병이 걸리면 먼저 제사장에게 가서 진단을 받았습니다. 제사장이 진찰해 나병인지 아닌지 확인을 하는 것입니다. 나병이 확정되면 환자는 장막 밖으로 격리되어 그곳에서 생활해야 했습니다. 병이 완전히 치유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사장이 먼저 진단을 하고, 완치되었다는 판정을 내리면 하나님 앞에 정결 예식을 드리고, 그다음에 소속된 사회로 복귀했습니다. 아래는 관련 레위기 말씀들입니다. 좀 길지만 함께 읽겠습니다.

 

1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만일 사람이 그의 피부에 무엇이 돋거나 뾰루지가 나거나 색점이 생겨서 그의 피부에 나병 같은 것이 생기거든 그를 곧 제사장 아론에게나 그의 아들 중 한 제사장에게로 데리고 갈 것이요 3제사장은 그 피부의 병을 진찰할지니 환부의 털이 희어졌고 환부가 피부보다 우묵하여졌으면 이는 나병의 환부라 제사장이 그를 진찰하여 그를 부정하다 할 것이요 4피부에 색점이 희나 우묵하지 아니하고 그 털이 희지 아니하면 제사장은 그 환자를 이레 동안 가두어둘 것이며 5이레 만에 제사장이 그를 진찰할지니 그가 보기에 그 환부가 변하지 아니하고 병색이 피부에 퍼지지 아니하였으면 제사장이 그를 또 이레 동안을 가두어둘 것이며 6이레 만에 제사장이 또 진찰할지니 그 환부가 엷어졌고 병색이 피부에 퍼지지 아니하였으면 피부병이라 제사장이 그를 정하다 할 것이요 그의 옷을 빨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라 7그러나 그가 정결한지를 제사장에게 보인 후에 병이 피부에 퍼지면 제사장에게 다시 보일 것이요 8제사장은 진찰할지니 그 병이 피부에 퍼졌으면 그를 부정하다 할지니라 이는 나병임이니라 (레13:1-8)

 

45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46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 (레13:45-46)

 

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나병 환자가 정결하게 되는 날의 규례는 이러하니 곧 그 사람을 제사장에게로 데려갈 것이요 3제사장은 진영에서 나가 진찰할지니 그 환자에게 있던 나병 환부가 나았으면 4제사장은 그 정결함을 받을 자를 위하여 명령하여 살아 있는 정결한 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홍색 실과 우슬초를 가져오게 하고 5제사장은 또 명령하여 그 새 하나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게 하고 6다른 새는 산 채로 가져다가 백향목과 홍색 실과 우슬초와 함께 가져다가 흐르는 물 위에서 잡은 새의 피를 찍어 7나병에서 정결함을 받을 자에게 일곱 번 뿌려 정하다 하고 그 살아 있는 새는 들에 놓을지며 8정결함을 받는 자는 그의 옷을 빨고 모든 털을 밀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니 그 후에 진영에 들어올 것이나 자기 장막 밖에 이레를 머물 것이요 9일곱째 날에 그는 모든 털을 밀되 머리털과 수염과 눈썹을 다 밀고 그의 옷을 빨고 몸을 물에 씻을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라 10여덟째 날에 그는 흠 없는 어린 숫양 두 마리와 일 년 된 흠 없는 어린 암양 한 마리와 또 고운 가루 십분의 삼 에바에 기름 섞은 소제물과 기름 한 록을 취할 것이요 11정결하게 하는 제사장은 정결함을 받을 자와 그 물건들을 회막 문 여호와 앞에 두고 12어린 숫양 한 마리를 가져다가 기름 한 록과 아울러 속건제로 드리되 여호와 앞에 흔들어 요제를 삼고 13그 어린 숫양은 거룩한 장소 곧 속죄제와 번제물 잡는 곳에서 잡을 것이며 속건제물은 속죄제물과 마찬가지로 제사장에게 돌릴지니 이는 지극히 거룩한 것이니라 14제사장은 그 속건제물의 피를 취하여 정결함을 받을 자의 오른쪽 귓부리와 오른쪽 엄지 손가락과 오른쪽 엄지 발가락에 바를 것이요 15제사장은 또 그 한 록의 기름을 취하여 자기 왼쪽 손바닥에 따르고 16오른쪽 손가락으로 왼쪽 손의 기름을 찍어 그 손가락으로 그것을 여호와 앞에 일곱 번 뿌릴 것이요 17손에 남은 기름은 제사장이 정결함을 받을 자의 오른쪽 귓부리와 오른쪽 엄지 손가락과 오른쪽 엄지 발가락 곧 속건제물의 피 위에 바를 것이며 18아직도 그 손에 남은 기름은 제사장이 그 정결함을 받는 자의 머리에 바르고 제사장은 여호와 앞에서 그를 위하여 속죄하고 19또 제사장은 속죄제를 드려 그 부정함으로 말미암아 정결함을 받을 자를 위하여 속죄하고 그 후에 번제물을 잡을 것이요 (레14:1-19)

 

그러면 나병의 영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나병’(癩病, 한센병)의 영적인 의미는 교회의 진리를 모독하는 것, 즉 진리를 더럽히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에게 진리의 모독은 보통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진리가 옳다 인정하고 믿으면서도 진리에 반(反)하는 삶을 사는 경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를 모르는 사람은 진리를 모독할 수 없습니다. 진리를 소유하고 있지 않으니까 진리를 더럽힐 수 없는 것입니다. 진리를 모독하는 또 다른 경우는, 진리를 인정했던 사람이 나중에 진리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인정했던 사람이 진리를 부정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요. 진리를 인정하는 것이 자신의 이익에 배치되기 때문에 부인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진리에 따라 사는 것이 너무 힘이 들어서 진리를 포기해 버리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다 귀찮다. 이렇게 나를 속박하는 것이 어떻게 진리가 될 수 있어!’라고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진리를 떠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28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29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막3:28-29)

 

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성령은 진리로 세상에 오신 주님 자신, 또는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리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모독하는 것은 성령을 모독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경우든 알면서 진리를 어기거나, 또 부인하는 일은 진리를 모독하는 일이며 두려운 일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이 진리를 모독하는 죄, 영적인 나병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서 그 방법을 알아보겠습니다. 12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12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몸에 나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하여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니

 

주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 온몸에 나병 들린 사람이 주님을 찾아왔다고 합니다. 말씀에서 ‘동네’는 교회의 교리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라는 말씀은 주님이 우리 내면에서 교회의 교리를 가르치고 계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에서는 주님께서 교회의 교리를 가르치시는 모습을 이처럼 ‘한 동네에 계실 때’라 하기도 하고, 지난 시간 말씀처럼,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라 하기도 합니다. 배 역시 교회의 교리를 뜻하기 때문인데요, 그런데 그때 한 나병환자가 찾아와 주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나병환자는 진리를 믿으면서도 진리에 반대되는 삶을 사는 사람, 또는 그런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여기 ‘나병환자’라는 상태는 어떤 종류의 계명을 잘 이해하고 믿으면서도 그 계명을 습관적으로 어기는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일부러 주님의 말씀을 어기기야 하겠습니까? 진리에 따라 살고자 하는 마음은 있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아서 그러는 거겠죠.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의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깨어 있으라 하셨는데 제자들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무어라 하셨습니까?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26:41) 하셨습니다. 그처럼 몸이 말을 듣지 않아 계명을 어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때 신실한 사람들이라면 할 수 있는 노력은 다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의 힘으로는 이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고 오직 주님만이 치유하실 수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을 찾아온 나병환자의 모습입니다. 말씀에는 나병환자가 주님께 엎드렸다고 했지만, 영어 성경에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고 표현합니다. 성(聖) 문서의 기록에 따르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는 것은 고대교회 때부터 있었던 습관이라고 합니다. 고대교회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을까요? 상대에 대한 지극한 공경심을 표현할 때 그렇게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나병환자가 주님 앞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것은 자신을 낮추고 주님을 지극히 높이는 행동입니다. 얼굴은 내적인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는 외적인 부분이 있고, 내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얼굴을 땅에 댄다 할 때는 그냥 겉으로만 자기를 낮추는 것이 아니고요, 내적으로도 몸을 낮추는 것입니다. 주님께 내적으로 몸을 낮춘다는 것은, 그냥 생각으로만 겸손한 것이 아니고요, 의지로부터도 나오는 겸손함입니다. 의지로부터 나오는 겸손함이란, 주님의 계명을 머리로만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계명대로 살기를 원하는 강한 의지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겸손한 것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굳은 의지를 갖고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주님 앞에 겸손한 것입니다. 입으로 아무리 주님을 높이고 찬양한다 하더라도 주님의 계명대로 살지 않으면 주님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겸손한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내적으로 겸손하다 하는 것은 주님의 계명대로 살기를 원하는 강한 애정의 상태를 말합니다. 지금 나병환자가 그런 상태인 것이며, 그 상태에서 병자가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원하시면’이 나오는데요, 이 말을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이렇게 형편없는 죄인인데 과연 주님께서 받아주실까? 라며 자신을 낮추는 것이며, 또한 절실한 간구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병자의 말을 들으시고 어떻게 하시나요? 13절입니다.

 

13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나병이 곧 떠나니라

 

주님께서 나병환자의 간절한 마음을 받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내가 원한다 하시며 그의 몸에 손을 대셨습니다. 주님께서 병자를 고치실 때, 병자의 몸에 손을 대시곤 하셨는데요, ‘몸에 손을 대시는 것’은 주님과 우리 사이 접촉이 일어나는 것이며, 그렇게 해서 주님과 우리가 결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때 주님으로부터 능력이 병자에게 흘러 들어갑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손을 대시면서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셨을 때, 나병이 떠났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능력이 나병을 치유한 것입니다. 14절에서는 주님께서 나병환자에게 경고를 하셨다고 합니다. 경고라고 하지만 영어 성경의 표현은 명령입니다. 주님의 명령을 본문에서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14예수께서 그를 경고하시되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가 깨끗하게 됨으로 인하여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니

 

여기 주님의 명령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둘째는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셋째는 ‘네가 깨끗하게 됨으로 인하여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입니다. 주님에 의해 영적 질병의 치유를 받으면 우리는 그냥 가만히 있어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영적 질병에 들렸던 자는 스스로 완치되었음을 입증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병이 완치되었음을 입증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같은 범죄를 다시는 저지르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질병을 치유하신다는 것은 같은 죄를 다시 저지르지 않도록 능력을 주신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죄의 유혹이 있을 때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 병은 완치됩니다. 그렇다면 병이 깨끗하게 나았음을 입증하려면 어떤 과정이 필요할까요?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께서는 세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첫째,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입니다. ‘이르다’, 즉 말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진리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는 것은 어떤 진리도 생각하지 말라는 뜻인데, 주님께서 과연 그런 뜻으로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이 아니고요, 자신의 자아에서 나오는 생각을 진리처럼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것들 중에는 진리처럼 보이지만 진리 아닌 것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우리가 이웃에게 선을 베풀 때, 과하게 선을 베푸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옛 성인들의 말씀에 ‘과한 것은 모자람만 못하다’(過猶不及)는 말이 있습니다. 선이나 진리는 그렇게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상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상식적으로 너무 과하다 싶은 것은 보통 진리에서 벗어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라고 누가 시킵니까? 우리 내면에 있는 자아가 시킵니다. 나병환자가 그동안 병을 떼어내지 못한 이유는, 진리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에 의지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의 생각을 멈추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의 유입을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그것을 주님께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표현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또 ‘가라’고 하셨는데, 이 말은 진리를 행동으로 옮기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자아에서 오는 생각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주님께서 주시는 진리를 따라 그냥 행하라는 뜻입니다.

 

병의 완치를 입증하기 위한 두 번째 해법은 무엇입니까?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제사장은 말씀에서 선을 나타냅니다. 주님에 대해 제사장이라 부를 때가 있고, 왕이라 부를 때가 있는데요, 왕으로서의 주님은 진리이신 주님을, 제사장으로서의 주님은 선이신 주님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에게 몸을 보인다는 것은, 자신의 삶 전체를 선의 관점에서 돌아보라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극복할 수 없는 영적 문제가 있을 때, 그 원인은 대개 진리의 문제라기보다는 삶의 문제일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삶을 이루는 습관들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서로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마치 집을 지을 때, 기둥을 세우고 보를 치고, 그 위에 슬라브와 지붕을 얹는 것처럼 그렇게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가 흔들리면 다른 것도 흔들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삶의 습관이 하나 잘못되면 다른 것에도 영향을 줘서 치유되기 어려운 영적 질병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 문제가 있을 때는 원인을 찾아 해결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삶의 습관들을 선의 관점에서 하나씩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행하는 습관들이 많이 있습니다. 말하는 습관과 행동하는 습관, 일을 처리하는 습관, 이웃에게 선을 베푸는 습관 등 어쩌면 진리처럼 보이는 이러한 모든 것들이 정말 진정한 체어리티이며 사랑인가를 따져 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주님은 그에게 너는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라’ 하신 것입니다.

 

질병의 완치를 위한 세 번째 해법은,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앞서 읽은 레위기 14장에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정결 예물의 목록이 있습니다.

 

2나병 환자가 정결하게 되는 날의 규례는 이러하니 곧 그 사람을 제사장에게로 데려갈 것이요 3제사장은 진영에서 나가 진찰할지니 그 환자에게 있던 나병 환부가 나았으면 4제사장은 그 정결함을 받을 자를 위하여 명령하여 살아 있는 정결한 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홍색 실과 우슬초를 가져오게 하고 (레14:2-4)

 

여기 ‘정결한 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홍색 실과 우슬초’가 그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러한 것들을 나병환자의 정결 예물로 드리라 하신 이유는, 이 각각의 것들이 어떤 영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의미를 살펴볼까요? 먼저 ‘정결한 새 두 마리’는 진리와 선의 결합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진리를 머리로만 생각하지 말고, 행동으로도 옮기라는 뜻입니다. 그다음 ‘백향목과 우슬초’를 드리는 것은 각각 내적 진리와 외적 진리를 함께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백향목은 내적인 진리를 나타내고, 우슬초는 외적인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 내적 진리와 외적 진리를 함께 주님께 드린다는 것은, 먼저 외적 진리를 드리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 정직하고 바르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법도에도 어긋나지 않고, 윤리와 도덕에도 어긋나지 않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에 비해 내적 진리를 드리는 것은, 겉으로 반듯하고 진실하게 행동할 뿐 아니라 그 동기도 진실하고 선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행위의 동기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과 이웃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겉으로는 반듯해 보여도 속을 들여다보면 자기 이익을 챙기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외적 진리만 드릴 뿐 내적 진리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두 가지를 함께 드리라고 하세요. 따라서 우리가 겉으로 진리에 따라 반듯하게 살 뿐 아니라 내면의 동기에 있어서도 주님과 이웃을 위한 사랑으로 충만하다면 영적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다고 봐도 될 것입니다. 그러기 전까지는 우리의 영적 질병은, 겉은 깨끗하지만, 속의 뿌리는 아직 남아 있는 종양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적으로 취약하거나 할 때면 언제든지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정결 예물로 정결한 새 두 마리와 백향목, 우슬초를 함께 드리라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는 나병의 완치를 선언하십니다. 다음 15절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15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 오되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는 주님에 의해 치유된 자들의 모습을 통해 진리이신 주님이 증거 되시는 것입니다.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많은 무리가 참 진리가 있는 교회로 모여듭니다. 여기서 ‘무리’란 속뜻으로는 진리 안에만 있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진리만 있고 선은 없는 사람들이 무리인데, 그들은 선이 없기 때문에 영적 질병에 감염되기 쉬운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참 진리가 있는 교회, 선을 동반한 진리가 있는 교회로 모여들게 됩니다. 그 매개자의 역할을 누가 합니까? 주님으로부터 치유 받은 우리가 할 수 있습니다. 끝으로 16절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16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여기서 ‘한적한 곳’은 영어 성경에는 광야라고 되어 있습니다. ‘광야’는 선도 없고 진리도 없는 상태를 말씀에서는 광야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광야에 계신다는 것은 곧 시험을 당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시험을 받지 않았습니까? 왜 광야에 계시는 것을 시험받으시는 상태라고 하느냐면, 극심한 시험 상태에 있을 때는, 보통 내 안에 선도 없고, 진리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아마 주님께서도 극심한 시험의 상태에서는 그런 느낌이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감히 합니다. 주님에게 선도 없고 진리도 없다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지만, 그러나 역설적으로 보면 그만큼 주님은 세상에 계실 때 겸손의 상태에 계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세상에서의 생애 전체는 아버지와 합일하는 과정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주님은 당신 안에 계신 아버지에 대해 일관되게 겸손의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그것은 시험 중에 아버지께 기도하시는 모습을 통해 알 수 있는데요,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26:39)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와 주님은 한 분이세요. 그러나 주님께서 인성을 거룩하게 만드시기 전, 주님의 인성은 아버지보다 조금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시편 8편에서는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라고 기록하신 것입니다. 또한 십자가상에서도 주님께서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 부르짖으셨습니다. 이러한 것이 모두 아버지에 대한 주님의 겸비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또 주님께서 기도하신다고 했는데, 이 말씀은 주님께서 당신 안의 아버지와 대화하시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주님은 그렇게 아버지와 끊임없이 대화하시면서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은 주님께서 나병환자를 치유하시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나병은 겉으로 보기에도 흉측하고 치유하기가 어려운 병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나병의 속뜻은 진리를 모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를 모르는 사람은 진리를 모독할 수가 없기 때문에 나병은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질병입니다. 레위기 13장과 14장을 보면 나병의 종류가 아주 많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병이 오랜 것과 오래지 않은 것이 있고요, 외적인 나병과 내적인 나병이 있습니다. 그리고 치유될 수 있는 나병이 있고, 치유될 수 없는 나병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나병’이라고 하면 진리를 인정하고 믿는다고 하면서 진리에 역행하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누구나 감염될 수 있는 병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나병 들린 환자는 어떻게 치유될 수 있었습니까? 얼굴을 땅에 대고 주님 앞에 엎드렸다고 했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는 것은 내적으로 주님을 공경하는 모습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 악을 끊겠다는 결심을 하는 것이 내적으로 주님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나병환자가 그런 마음으로 주님께 매달렸을 때, 주님께서 그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주님은 또 병의 완치를 위해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고 예물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라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자신의 삶 전체를 선의 관점에서 돌아보라는 뜻이고요, 즉 삶의 모든 습관들 속에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있는지를 살펴보라는 뜻입니다. 그런 다음에야 우리는 주님께 진실한 예물을 드릴 수 있고, 다시는 나병에 걸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던져주신 또 하나의 메시지는, 주님은 병자들의 병을 고쳐 주시면서, 한편으로는 광야에서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어떤 종교의 수도자들처럼 세상과 격리된 곳에서 기도만 하시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지옥의 끊임없는 도전을 뿌리치시고, 다른 한편으로는 병자들과 함께 지내셨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우리 신앙인들에게 모범이 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한편으로는 혹시 있을지 모르는 나병과 싸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어떤 형태로든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그밖에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자기가 잘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봉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보여주신 모범을 따르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러한 은혜가 새 교회의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시51:7)

 

아멘

 

원본

2017-10-29(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28(D3)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027. 2023-03-28(D3)-매일예배(2444, 눅5,12-16), '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한 나병환자'.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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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1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2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3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4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8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9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10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1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눅5:1-11)

 

 

물고기는 지혜로워지기 위한 수단으로, 영적 사람을 섬기는 자연적 사람에 속한 지식과 인식을 뜻한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어부는 단순히 지식 안에만 있는 사람들, 자신을 위해 지식을 획득하는 사람, 또한 지식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그들의 의식을 새롭게 하는 사람을 뜻한다. (AE.513:11, 이순철 역)

 

※ AE(Apocalypse Explained, 계시록 해설) 위 513번 글 11항에 대한 Ager 영역 및 Whitehead 개정본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Because “fishes” signify the knowledges and cognitions belonging to the natural man that serve the spiritual man as means for becoming wise, so “fishers” mean in the Word those who are merely in knowledges, also those who are acquiring knowledges for themselves, also those who teach others and by means of knowledges reform them. (AE.513:11, Ager 역)

 

이는 계시록 8장 9절, ‘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들의 삼 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 분의 일이 깨지더라’에 관한 주석 중 ‘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들의 삼 분의 일이 죽고’(And there died the third part of the creatures in the sea having souls,)에 대한 내용입니다.

 

 

오늘날 신약 서신서들 중 가장 많이 읽히는 것은 바울 서신서들입니다. 바울은 유대교회에서 가장 유명한 학파인 힐렐 학파의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교육을 받은 엘리트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탁월한 설교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배경 때문인지 바울 서신은 문체가 대단히 유려(流麗)하고 깊이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바울 서신에 빠져드는 것은 아마 그런 이유일 것입니다. 반면, 바울에 비해서 오늘 말씀드릴 베드로는 어부였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적으로 보면, 바울과 베드로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그 학식이나 배경에 있어 차이가 나는 사람들이지요. 그럼에도 베드로 서신 역시 읽어 보면, 바울 서신과는 또 다른 영감으로 가득합니다. 베드로 서신의 몇 구절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베드로 전서 1장 22절로 25절입니다.

 

22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23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24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벧전1:22-25)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갈릴리 어부에 불과했던 베드로가 이렇게 깊고 명료한, 진솔한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에 감동했습니다. 그리고 어부였던 그가 주님의 특별한 섭리 있으셔서 주님의 위대한 사도로 거듭날 수 있었음도 느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먼저 그럼, 주님은 왜 물고기를 잡는 어부 베드로를 당신의 사도로 택하셨을까요? 지금부터 그것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본문 1절입니다.

 

1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말씀에서 ‘바다’나 ‘호수’는 선과 진리에 대한 지식을 의미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지옥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선과 진리의 지식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시는 것은, 각 사람에게 있는 진리와 선의 지식 안으로 주님께서 임하시는 걸 말합니다. 우리가 학문을 배우거나, 또는 신앙의 교리를 공부하는 것은 주님을 받아들일 그릇을 준비하는 행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진리의 지식은 곧 주님을 받아들이는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진리가 무엇인지, 선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오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어릴 때부터 학문을 배우고, 종교의 교리를 배우는 것입니다.

 

※ 여기서 잠깐, ‘종교’라는 용어를 쓰신 이유는, 기독교회 밖의 사람들, 그러니까 타 종교인들까지 포함, 폭넓게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온 인류는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으며, 누구는 기독교 가정에, 누구는 불교나 이슬람 등, 또는 무교 가정에 태어납니다만, 그러나 그건 그 사람 본인의 선택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나면서 유대인이거나 나면서 기독교 국가 기독교 가정에 태어나 처음부터 말씀 생활, 교회 생활을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특별히 더 겸손해야 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기독교(유대교 포함)는 그 비율이 30% 정도로 열에 셋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다들 이렇듯 다양한 배경 가운데 태어나며, 그러나 그들 또한 모두 주님으로 말미암았으므로, 그래서 주님은 모든 민족에게 저마다의 종교가 일어나도록 허락하셨고, 저마다의 종교에 주님의 신성이 스며들게 하셨으며, 그래서 자기 종교의 교리 중 선한 교리를 따라 나름의 선과 진리의 하나 됨을 위해 성실하게 사는 걸로 주님 사랑을 표현하도록 배려하신 것입니다. 어떤 종교든 그 종교의 교리를 통해 나름의 선한 삶을 살며, 인애, 곧 체어리티(charity)의 삶을 나름 성실히 살아간다면 그는 그 나름의 방식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만 기독교와 여타 종교와의 차이는 말씀의 유무에 있으며, 그것은 밝은 빛 가운데 사는 것과 주변 희미하고 어슴푸레한 등잔불 빛 아래 사는 것에 비유할 수 있겠습니다. 만일 어느 누가 진리, 곧 살아계신 주님 만나기를 정직한 심령으로 평소 간절히 구했다면 그는 자기가 무슨 종교를 믿느냐와는 상관없이 주님에 관한 가르침을 받을 때, 매우 호의적이며 반갑게 반응할 것입니다.

 

그런데 진리의 지식이 있다고 주님은 아무한테나 오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어떤 사람에게 오십니까? 2절과 3절에서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2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3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이 말씀에서는 주께서 교리의 진리를 가르쳐 주실 때 어떤 사람에게 오시는지를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로 주님은 영적인 어부에게 오십니다. 둘째는 어부 중에서도 자신의 그물을 씻는 사람에게 오십니다. 그리고 셋째는 시몬으로 표상되는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 오십니다. 먼저, 주님이 어부에게 오시는 이유는 ‘어부’는 속뜻으로 말씀으로부터 진리를 낚아 올리는 사람들이며, 그 진리를 통해 거듭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높은 차원의 어부가 있습니다. 즉 진리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가르쳐 그들로 거듭나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어부는 자신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흔히 자신만 구원받으면 된다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면 자칫 구원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구원만 생각하는 것은 이기적인 생각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사람은 자신의 구원뿐만 아니라 이웃의 구원을 위해서도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웃이 진리를 원하지 않는데도 그들에게 진리를 가르쳐야 할까요? 새 교회 가르침에서는 이웃의 자유를 간섭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웃이 진리 알기를 원할 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또 진리에 따라 경건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건하고 진실한 삶을 살면 그것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진리의 빛이 전해집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보다 높은 차원의 영적 어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어부의 배에 오르셔서 진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 이웃이 ‘진리 알기를 원할 때’는 쉽지 않습니다. 교회 안 다니는 이웃은 고사하고,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물론 목회자나 사모, 교회 리더십들 역시 게 중에 참으로 ‘진리 알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주 극소수입니다. 대부분 자연적이기 때문인데, 그러니까 말씀의 겉면만, 즉 말씀을 피상적으로만 살펴 그저 지식으로만 소유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속, 그러니까 내적 의미에 마음을 쏟으며 실제 생활과 삶, 인격에 적용하고자 하는 사람은 오늘날 아주아주 희귀합니다. 고민입니다. 그러나 복음서 주님 계신 곳에는 항상 사람들이 모여들었던 것처럼 지금도 제 안에, 우리 참된 그리스도인 안에 주님이 계시면 그곳엔 사람들이 모일 줄 믿습니다.

 

두 번째, 주님은 그물을 씻는 사람에게 오셨습니다. 그물을 씻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진리를 얻기 위해 내면의 어떤 것을 깨끗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진리를 습득하려면 어떤 것이 있어야 할까요? 우선은 진리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다음은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그런 것들이 그물입니다. 그러므로 그물을 씻는 것은 내면의 애정을 순수한 상태로 유지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진리에 대한 이해력이 밝아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를 추구할 때, 그 애정이나 동기가 주님과 이웃을 향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야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내면의 동기가 순수하지 않을 때는 우리 내면에 천국과 통하는 문이 닫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내면의 그물을 씻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세 번째, 주님은 시몬의 배로 들어가셨습니다. 주님께서 시몬에게 가신 이유는, ‘시몬’은 속뜻으로는 순종하는 신앙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믿으면서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가 진리에 순종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영적인 것보다 세상적인 것들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나라보다 세상을 더 사랑할 때 내면에 천국과 통하는 문이 닫힙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실 수 없는 것입니다.

 

4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의 배에 오르신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신 후,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하십니다. 시몬은 오래 고기를 잡은 베테랑 어부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쳐 주실 때, “주님, 제가 이 부분은 잘 압니다. 그러니 제게 맡기십시오.”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만, 그러나 시몬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깊은 데는 어디입니까? 영적으로 깊은 곳은 높은 곳과 통합니다. 그러니까 가장 깊은 곳(inmost)은 천적인 등차(等差, degree), 단계, 즉 사랑의 단계를 뜻하고, 보통 깊은 곳은 영적인 단계, 즉 진리의 단계를 뜻합니다. 그리고 얕은 곳은 자연적인 단계를 뜻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리라 하시는 것은 사랑으로 진리를 구하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를 구할 때, 자신의 이익을 위해 구하지 말고, 주님과 이웃을 위한 목적으로 구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주님은 요한복음 21장에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는데요, 거기서 주님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요21:6)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깊은 데로 그물을 던지는 것과 오른편으로 던지는 것은 같은 의미입니다. 오른편도 사랑이요 선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5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러자 시몬이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시몬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러나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우리 신앙인들이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고, 진리에 순종하는 순간입니다. 시몬과 동료들이 밤을 새워 고기를 잡았다고 했는데, 밤은 무슨 뜻입니까? ‘’은 사랑이 없는 때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신앙인의 영적 상태는 항상 일정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크기에 따라 아침과 낮, 저녁과 밤으로 수시로 변합니다. 그래서 밤은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없고 오직 자아에 대한 사랑만 있는 때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진리의 고기를 잡으려 할 때는 고기가 잡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몬의 일행은 밤새 고기를 잡으려고 했으나 아무 소득이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은 시몬이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깊은 곳에 던졌습니다.

 

6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그러자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잡혔습니다. 좀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진 것은 자기 사랑이 아니라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진리를 구하는 행동입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쏟아붓듯이 진리의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 내면에 있던 그물이 찢어집니다. ‘그물이 찢어진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동안의 진리에 대한 불순한 애정이 깨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불순한 애정이 깨질 때 진리에 대한 새로운 이해력이 생깁니다. 그물이 찢어진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진리에 대한 순수한 사랑이 아니면 어떤 영적 성취도 이룰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물이 찢어지려고 하자 시몬이 다른 배에 있던 동료들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동료들이 와서 거들자 두 배에 물고기들이 가득하여 배가 가라앉을 정도가 됐습니다. ‘두 배에 물고기가 가득 찼다’는 것은 교리의 선과 교리의 진리가 하나로 결합하는 것을 뜻합니다. 말씀에서 둘이란 수는 선과 진리의 결합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배우는 교리 중에는 진리도 있고, 선도 있습니다. 그러면 교리의 진리는 무엇이고, 교리의 선은 무엇일까요? 명확하게 구별하기는 어렵지만, 제가 이해하기로는 이렇습니다. 선은 본질에 있어 밖으로 뻗치는 성질이 있습니다. 반대로 진리는 안으로 단속하고 절제하는 성질이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계명 가운데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교리의 진리에 가깝다고 보고요, 적극적으로 행해야 하는 것은 교리의 선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십계명에도 열 가지 계명 중에 아홉 가지는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행해야 하는 것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과 진리의 결합이란, 먼저 계명에 반하는 악을 행하지 말고, 그런 다음 계명에 따라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두 배에 물고기가 가득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두 배에 가득 물고기를 채웠더니 배가 가라앉으려 했습니다. 배가 가라앉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것은 좀 전에 그물이 찢어지는 것과 비슷한 의미입니다. 즉 주님이 주시는 진리와 선의 결합을 통해서 내면의 교회가 개혁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개혁된다는 것은 이전 낡은 교회가 새로운 교회로 거듭나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깊은 데로 그물을 내리라 하셨을 때에 신앙이 깊은 시몬조차 긴가민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잡혔습니다. 시몬은 놀라 주님 발 앞에 완전히 엎드렸습니다. 8절에서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8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9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10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자아 사랑이 아닌 주님 사랑으로 참 진리를 얻고, 그것으로 거듭나기 시작할 때, 그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 앞에 죄인임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 전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진리는 선이 없는 진리였고, 그래서 그것으로는 겸손해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시몬이 주님 앞에 엎드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자복한 것은, 주님으로부터 참 진리, 즉 선이 있는 진리를 받았을 때, 비로소 자아 사랑으로 했던 모든 일들이 주님께 큰 죄였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9...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려 있는 시몬에게 주님께서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성(聖) 문서에서는 시몬이 느낀 두려움을 ‘거룩한 두려움’이라고 표현합니다. 말씀에는 거룩한 두려움을 느꼈던 사람들이 여럿 있습니다. 다니엘이 주님을 뵈었을 때, 죽은 자처럼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주님으로부터 계시록을 받는 순간, 요한도 극도의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이들이 느낀 두려움이 모두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그것을 거룩한 두려움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주님에 대한 지극한 겸손과 공경에서 나오는 두려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은 주님에 의해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의 겸손함을 보시고 두려워하지 말라 하실 때 우리의 죽었던 영성이 소생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 주님께서 다시 시몬에게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셨습니다. 고기를 잡는 어부가 아니라, 이후로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란 어떤 것입니까? 이웃에게 진리를 가르치고 진리로 거듭날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이 바로 사람을 낚는 어부 입니다. 11절에는 시몬 베드로와 동료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을 따라나서는 모습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11...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주님께서 시몬에게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말씀하시자 시몬뿐만 아니라, 야고보와 요한도 주님을 따라나섰습니다. 말씀에는 그들이 모든 것을 버려두고 나섰다고 합니다. 대단한 신앙이고 용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 저는 36세이던 젊은 시절, 대학 후 입사하여 잘 다니던 대기업을 퇴사, 어느 교회의 교회 직원으로 들어갔습니다. 어린 두 아들과 아내의 희생을 마다하고 말입니다. 그 결정으로 이후 저희의 삶은 매우 고단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모든 과정이 너무나 미숙하고 안타깝습니다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 모든 일을 선으로 돌려 오늘의 저와 저희 가정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래서 특히 제게는 저 표현,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라는 표현이 정말 가슴에 와닿습니다.

 

주님은 왜 시몬뿐 아니라 야고보와 요한도 함께 제자로 받아들이셨을까요? 그 세 사람을 통해 주님의 제자들이 갖춰야 할 덕목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하시려는 것입니다. ‘시몬’과 ‘야고보’와 ‘요한’은 각각 신앙과 체어리티, 그리고 체어리티의 삶을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세 가지 중 어느 것 하나도 없어선 안 됩니다. 그래서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신앙만 있어도 안 되고, 체어리티만 있어도 안 되며, 체어리티의 삶만으로도 안 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 체어리티의 구체적인 삶이 함께 있어야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말씀하셨을 때, 시몬과 야고보, 요한이 모두 주님을 따라나섰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시몬과 요한과 야고보는 주님의 첫 번째 제자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가장 사랑하신 제자인 시몬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은 모두 어부였습니다. ‘어부’는 속뜻으로 진리를 탐구하고 그것을 통해 거듭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 진리를 가르쳐 그들을 구원으로 이끄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인 어부는 나의 구원과 이웃의 구원을 함께 생각하는 사람이며, 나아가서 이웃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버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어부를 제자로 선택하신 이유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제자가 된 어부들은 어떤 자질들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그들은 첫째, 그물을 씻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물을 씻는다는 것은 내면의 애정을 살피면서 그 속의 악하고 거짓된 것을 씻어내기 위해 항상 노력한다는 뜻입니다. 둘째, 시몬과 같이 진리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베테랑 어부였을 시몬은 목수 출신이셨을 주님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말씀에 토 달지 않고 순종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에게는 이렇듯 훌륭한 자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질은 잠재적인 것이며,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말씀에 여러 차례 기록된 베드로의 성정(性情)을 보면 알 수 있지요. 그들 역시 보통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을 만나기 전에 밤을 새워 고기를 잡았고, 소득 없는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도 처음 진리를 배울 때는 자아 사랑으로 시작했고, 그래서 참 진리를 얻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들을 택하셔서 훗날 주님을 위해 자기를 버릴 수 있는 위대한 사도로 키우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어떤 면을 보시고 우리를 이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셨는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주님은 우리 각 사람의 약점을 덮으시고, 장점을 키워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순진한 마음으로 주님께 순종할 때 주께서 우리를 이 시대에 필요한 어부로 키워주실 것을 믿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모든 성도님과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3배들을 바다에 띄우며 큰 물에서 일을 하는 자는 24여호와께서 행하신 일들과 그의 기이한 일들을 깊은 바다에서 보나니 (시107:23-24)

 

아멘

 

원본

2017-09-24(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27(D2)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026. 2023-03-27(D2)-매일예배(2443, 눅5,1-11),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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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지옥.1.36.318-328.'천국의 비기독교인들'.scan.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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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질병과 주님의 병 고치심

 

 

38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을 앓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 39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40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41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그들이 말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앎이러라 42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4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44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 (눅4:38-44)

 

 

질병(diseases)이라는 것은 영적 삶과 관련된 해롭고 악한 것들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주님께서 질병을 치유하신다는 것은 교회와 인류에게 우글우글 들러붙어 그들을 영적 죽음으로 이끄는 다양한 종류의 악과 거짓들로부터 그들을 자유하게 하심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신적 기적들(Divine miracles), 주님의 미러클들은 교회와 천국의 상태들을 포함하고, 그들에 대한 것들이라는 점에서 다른 기적들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기적들은 주로 병 고치심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곧 요한이 보낸 제자들에게 하신 다음과 같은 주님의 말씀이 의미하는 것입니다.

 

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5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마11:4-5) (AC.8364:6, 변일국 역)

 

※ AC(Arcana Coelestia, 천국의 비밀) 위 8364번 글 6번 항에 대한 Clowes 영역 및 Potts 개정본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As diseases represented the hurtful and evil things of the spiritual life, therefore by the diseases which the Lord healed is signified liberation from various kinds of evil and falsity which infested the church and the human race, and which would have led to spiritual death. For Divine miracles are distinguished from other miracles by the fact that they involve and have regard to states of the church and of the heavenly kingdom. Therefore the Lord’s miracles consisted chiefly in the healing of diseases. This is meant by the Lord’s words to the disciples sent by John:

 

Tell John the things which ye hear and see: the blind see, and the lame walk, the lepers are cleansed, and the deaf hear, the dead rise again, and the poor hear the gospel (Matt. 11:4, 5).

 

이는 출애굽기 15장 26절,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에 관한 주석 중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

 

 

지난 시간에는 주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시고, 귀신 들린 자를 치유하셨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주님은 온갖 병자들을 고치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십니다. 특별한 점은 시몬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을 앓고 있는데 주님께서 그 병을 낫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38, 39절입니다.

 

38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을 앓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 39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주님께서 회당에서 나오셔서 시몬 베드로의 집으로 들어가셨다고 합니다. 문자적으로는 주님께서 회당에서 시몬 베드로의 집으로 이동하신 것이지만, 속뜻으로는 다른 의미인데요, 우리의 내면으로 임재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이성 가운데 계시다가 우리의 의지 안으로 이동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회당’은 신앙인의 이성을 뜻하며, ‘’은 의지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 그러니까 ‘속뜻’이란 천사들이 읽는 말씀을 말합니다. 천사들은 영적 존재라 사람의 육이 아닌 영을 보는데요, 그런 것처럼 말씀도 지상 언어로 된 말씀이 아닌 거기에 담긴 영을 보는 겁니다. 우리가 천사들처럼 말씀을 속뜻으로 볼 줄 아는 게 중요한 이유는, 그래야 엉뚱한 해석으로 인생을 우왕좌왕 낭비하지 않고, 그대로 천국에서도 통하는 말씀 이해의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게 그 말씀의 속뜻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이 지점에서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중요해지는 겁니다. 주님이 이 일을 위해 그를 불러 말씀의 속뜻과 그 원리를 오픈하셨거든요. 그가 여러 해에 걸쳐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속뜻을 라틴어로 풀어 기록했는데요, 그 글의 수만 10,837개나 되며, 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주님의 허락으로만, 다시 말씀드리면, 주님이 계시하시는 걸 곁에서 받아적기만 한 것입니다. 그럼, 성경의 나머지 말씀들은 왜 안 했냐면, 이 두 책에 나오는 원리들과 그 인용 구절들로 이미 충분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의 많은 저작 중, 특별히 ‘천국과 지옥’(Heaven and Its Wonders and Hell), 그리고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이 두 권은 꼭 좀 읽으시라 권하는 것입니다. 전자를 통해서는 우리의 시각을 교정하고, 후자를 통해서는 우리의 마음을 고정하기 위해서입니다. 천사들의 시각과 마음을 가지고 남은 인생을 살기 위해서 말입니다.

 

※ 아래 링크로 가시면 구하실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서들(Writings)

다음은 스베덴보리의 저서목록(Writings)입니다. 인류사에 존재했던 사람 중 가장 지능이 높은 사람으로 기네스 북에는 밀턴, 괴테 그리고 스베덴보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 생전에 가장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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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당은 본래 교회를 뜻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사람의 내면에서 주님께서 교리를 가르치시는 곳, 즉 인간의 이성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시몬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 시몬의 장모가 열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시몬의 장모는 누구입니까? 말씀에서 ‘어머니’나 ‘아내’는 교회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내면에 있는 교회인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어디에 세워집니까? 사람의 의지 속에 세워집니다. 말씀 지식이 많다 해서 그 사람 내면에 교회가 있는 건 아닙니다. 말씀을 받아들여 그것을 의도하고, 삶으로 옮길 때라야 비로소 그 사람 내면에 교회가 세워집니다. 교회를 뜻하는 ‘시몬의 장모’와 ‘시몬의 집’은 그런 뜻입니다. 의지 가운데 교회가 세워진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지금 병을 앓고 있습니다. 교회는 어떤 경우에 병이 들까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는데, 보통은 신앙인들이 악의 유혹에 넘어가 헤어 나오지 못할 때이거나,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 진리를 거짓으로 만들고, 그 거짓을 믿을 때 교회는 중병에 걸립니다. 그러니까 시몬의 장모가 지금 열병을 앓고 있는 상태는, 신앙인들이 어떤 종류의 악이나 거짓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그런 상태에서 사람들이 주님 앞에 그를 위하여 구합니다. 말씀에서 ‘사람’은 보통 진리에 대한 애정을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주님께 구하는 것은, 진리에 대한 애정이 진리이신 주님과 하나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자신의 영적 질병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진리에 대한 순수한 애정을 가지고 자신의 영적 질병을 고치려고 노력할 때, 주님께서 열병을 꾸짖어 주십니다. ‘꾸짖으신대’는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 악들과 싸우시는 모습입니다. 주님께서 병을 꾸짖으시자 악한 영이 떠나고, 시몬의 장모의 병이 나았습니다.

 

그리고 병이 나은 시몬의 장모가 자리에서 일어나 주님께 수종을 들었다고 기록합니다. 주님께 ‘수종드니라’는 무슨 뜻입니까? 주님은 진리 자체이신 분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수종을 드는 것’은 진리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병이 낫기 전에는 어떤 상태였습니까? 진리에 순종하려 해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냥 악과 거짓이 이끄는 대로 끌려다닐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데 주님께서 병을 고쳐 주시자 악을 거절할 수 있는 힘이 생겼고, 그렇게 해서 진리에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베드로의 장모가 주님께 수종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내면에 있는 교회가 진리이신 주님을 섬기는 모습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의 장모의 병을 고치셨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병자들을 데리고 주님께 왔습니다. 40절입니다.

 

40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해 질 무렵은 어떤 때입니까? 신앙인들의 마음에 사랑이 없고, 그러므로 지혜가 없는 때입니다. 사람의 영적 상태는 항상 일정하지 않습니다. 아침일 때가 있고요, 한낮일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저녁일 때가 있고, 밤일 때도 있습니다. 아침이나 낮처럼 햇빛이 밝을 때는 마음에 사랑이 넘치고,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지혜가 넘칠 때입니다. 그러나 저녁은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고, 교회에 대한 애정도 없으며, 그러므로 지혜가 없는 때입니다. 지혜는 사랑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해 질 무렵은 시험의 기간이며, 영적 질병에 걸리기 쉬운 때입니다. 본문에서 해 질 무렵에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왔다 하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온갖 병자를 데리고 왔다는 것은 신앙인들이 안고 있는 영적인 문제가 그만큼 다양하다는 뜻입니다. 사람마다 직면하는 영적인 문제들이 다 다릅니다. 그 이유는, 사람마다 애정이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 애정의 다양성에 대해 성(聖) 문서에서는 수만, 또는 수만 곱하기 수만 개만큼이나 많다 합니다.

 

※ 위 ‘(聖) 문서’라는 용어는 스베덴보리가 영계 체험 이후부터 기록한, 그러니까 주님이 그의 손을 빌려 기록하신 저작들(Writings)을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자기가 천국에서 듣고 본 모든 경험과 남기는 이 모든 기록은 오직 주님의 허락으로 하는 것이며, 특히 창세기, 출애굽기 주석은 오직 주님이 친히 하시는 말씀을 자기는 성경 한 권만 가지고 받아 적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마치 오늘날의 프린터처럼 말이지요. 그래서 그가 남긴 기록들에 대하여 ‘’(聖, Divine)이라는 글자를 붙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절대로 안 되죠. 감히 말입니다! 이 형용은 오직 주님 한 분께만 사용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 얼굴의 생김새가 모두 다른 것처럼, 각자의 애정이 모두 다르고, 그러므로 직면하고 있는 영적 문제가 다 다른 것입니다. 사람들이 병자들을 주님께 데리고 온 것은, 신앙인들이 자신의 영적 질병을 주님 앞에 진심으로 고백하고, 치유 받기를 원하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다 생각하는 한, 주님의 도움을 받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도와주시려 해도 개입할 틈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를 온전히 비우고, 주님의 도우심을 청해야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환부에 당신의 손을 얹으시고, 병을 고쳐 주십니다. 환부에 손을 얹으실 때, 주님과 우리 사이 소통이 일어납니다. 소통이란 어떤 것입니까? 소통이란 주님의 생명이 우리 안으로 끊임없이 흘러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병에 걸리지 않습니다. 마치 몸 안 혈액이 각 장기와 조직, 세포 속을 원활하게 흐를 때, 병에 안 걸리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41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그들이 말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앎이러라

 

주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실 때, 병자들의 내면에 있던 귀신들이 나가면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소리를 질렀고, 그러자 주님은 그들을 꾸짖으시며, 그들의 말함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악인들의 입에서 나오는 진리 고백은 순수한 고백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혐오이며 적대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때문인지 주님께서는 당신이 그리스도란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꺼리셨습니다. 심지어 대제사장 가야바가 네가 그리스도인지 말하라 했을 때에도 주님께서는 직접적 대답을 피하시고, ‘네가 말하였느니라’ 하실 정도였습니다. 아마 악한 사람들에게 진리가 들어가면 진리를 더럽히거나 파괴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말씀에서는 그것을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폭행, 십자가에 매다는 걸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악인들이 진리에 접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 위 ‘병자들의 내면에 있던 귀신들’이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다음 글들을 참고하세요.

 

각 사람에게는 선한 영들과 악한 영들이 와있다. 선한 영들을 통해서는 사람은 천국과 결합되고, 악한 영들을 통해서는 지옥과 결합된다. 이 영들은 천국과 지옥 사이에 놓여 있는 중간 영계에 있다. 이곳에 대해서는 앞으로 특별히 다룰 것이다. 이 영들이 사람에게 오면 사람의 기억 전체 안으로 들어가고, 그렇게 해서 생각 전체에 들어간다. 이때 악한 영은 사람의 악한 기억과 생각 속으로, 선한 영은 선한 기억과 생각 속으로 들어간다. 이 영들은 자기들이 사람과 같이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그들이 사람과 같이 있을 때, 그 사람의 모든 기억과 생각이 자기 것인 줄 안다. 또 그들에게는 그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 태양계 내의 것은 아무 것도 그들 시각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영들이 자기가 사람과 같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도록 각별히 배려하신다. 만일 그들이 알아차리면 사람에게 말을 걸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악한 영의 경우, 사람을 파괴하려 들기 때문이다. 악한 영들은 지옥과 결합되어 있으므로, 그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바로 사람의 영혼을, 즉 그의 신앙과 사랑을 파괴하고, 사람의 몸까지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들이 사람과 대화를 하지 않으면 그런 일이 없다. 이 경우, 그들은 자기의 말과 생각이 사람에게서 온 것임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서로 나누는 말도 사람에게서 온 것인데도 그들은 자기가 하는 생각과 말이 자기 것인 줄 믿는다. 그리고 누구나 자기 것은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영들은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도록 그들이 모르는 제재를 받는다. 나는 여러 해 동안 계속되는 경험의 결과로 사람과 영들과의 이러한 결합에 대해 너무도 잘 알게 되었다. 내가 이보다 더 잘 아는 것이 없을 정도이다. (HH.292)

 

지옥과 교통하는 영들 역시 사람에게 와있는 이유는, 사람이 모든 악을 지니고 태어나기 때문이며, 따라서 사람의 생명이 전적으로 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과 동질의 영이 함께 있지 않으면, 사람은 살 수도 없고, 사실상 그의 악에서 떠날 수도, 개선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악한 영들에 의해서 자아의 생명 안에 머물고, 동시에 선한 영들에 의해서 거기서 물러나는 것이다. 그리고 양쪽에 의해 균형이 유지되고, 균형이 유지되기 때문에 자유가 있다. 따라서 악에서 떠날 수 있고, 선 쪽으로 돌아설 수 있는 것이며, 그렇게 해서 선이 사람 안에 심겨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에게 자유가 없으면 전혀 불가능하다. 그리고 사람은 지옥측 영들이 한쪽에서 작용하고, 천국측 영들이 다른 한쪽에서 작용하는 그 중간에 있을 때만 자유로울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생명이 그 타고난 것에 들어 있고, 따라서 자기 본성에 들어 있는 한, 만일 악 안에 있는 것이 허락되지 않으면, 그에게 생명이 있을 수 없다. 또 사람에게 자유가 없으면 생명이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사람은 강제로 선해질 수 없다. 강제로 하는 것은 오래 남지 않는다. 사람이 자유 안에서 받아들이는 선은 그의 의지 안에 심어져 그 자신의 것처럼 된다. 이런 이유로 사람은 지옥과 교통하고, 또 천국과 교통하는 것이다. (HH.293)

 

이 글들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33장, ‘천국과 인류의 결합’에 나오는 글들로서, 모든 사람에겐 최소한 천국 측 선한 영 둘, 지옥 측 악한 영 둘이 와 있다는 내용입니다. 저는 이 글들을 통해 ‘사람’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되었고, 더 이상 무슨 귀신이니, 악령이니, ‘누구는 귀신 들렸다’ 하는 것들에 관해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

 

다음 42, 43절입니다.

 

42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4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조금 전에 ‘해 질 무렵’이 사랑이 없는 상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날이 밝으매’는 무슨 뜻입니까? 날이 밝았다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천국의 빛이 흘러들어오는 영적 상태이며, 그래서 사랑과 지혜가 풍성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그때 주님은 ‘한적한 곳’으로 가셨다고 합니다. ‘한적한 곳’은 한글 성경의 번역이고요, 영어 성경 번역은 ‘황무지’ 또는 ‘사막’입니다. 황무지는 진리가 없고, 그러므로 선한 삶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날이 밝은 것과 황무지의 상태는 정반대의 상태입니다. 그러면 왜 주님은 날이 밝았을 때 황무지로 가셨을까요? 그 이유는, 주님은 우리 내면의 황무지를 진리로 개간하시는데 한 번에 하지 않으시고, 점진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이미 옥토로 변한 곳도 있을 것이고, 여전히 황무지와 같은 곳도 있을 것입니다. 저 스스로도 그런 걸 느낄 때가 많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비교적 합리적인데, 다른 어떤 면에서는 전혀 합리적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실수도 하고 후회도 합니다. 합리적이지 못하다는 것은 그 부분에 있어서는 진리가 없다는 것이고, 황무지와 같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날이 밝았을 때 주님께서 황무지에 가신 것은, 주님이 사람의 내면 어떤 부분을 치유하신 후에, 이번에는 황무지와 같은 곳으로 이동하셔서 그곳을 다시 변화시키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때 주님을 찾던 무리가 주님을 발견하고는 떠나지 마시라 붙잡습니다. 주님을 찾는 무리처럼 우리도 주님의 부재(不在)를 느낄 때, 주님을 찾곤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떠나시지 않습니다. 아주 가까이에서 우리의 의도와 생각을 살피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되 스스로 하듯 자신의 의지로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라고 무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주님께서 다른 곳으로 가신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삶의 어떤 문제에 대해 주님의 지혜를 구할 때마다 교리적인 답변을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에서 ‘동네’는 교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다른 동네’는 삶의 어떤 문제에 대해 특별한 교리적 해법을 기다리는 곳입니다.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은 삶의 모든 상황에서 다 같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때마다 우리는 애정을 가지고 주님께 특별한 진리를 구합니다. 그것은 마치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물을 향해 뿌리를 뻗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원천이신 주님께 닿으려는 수많은 뿌리는 주님이 복음을 전하실 다른 동네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십니다. 이 말씀은 세상에 오신 주님은, 사랑 자체이신 여호와로부터 나오는 진리시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리는 그냥 진리가 아니고, 선을 동반한 진리입니다.

 

끝으로 44절에서는 주께서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라고 합니다. ‘갈릴리’는 이방을 뜻합니다. 그러면 우리 내면에 있는 이방 지역은 어떤 곳입니까? 주님으로부터 가장 먼 곳이며, 가장 나중에 주님의 교회가 세워지는 곳, 그곳이 이방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내면의 갈릴리는 겉 사람입니다. 따라서 주께서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는 것’은 앞에서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말씀입니다. 즉 주님께서 겉 사람 안의 여러 애정과 소통하시면서 그들을 가르치신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주님은 시몬의 집을 방문, 열병을 앓고 있는 그의 장모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시몬의 장모가 그런 것처럼, 우리 신앙인들 역시 거듭나는 과정에서 수많은 병치레를 합니다. 때로는 죽을 것 같은 열병을 앓기도 합니다. 그때 주님은 병의 치유를 위해서 우리의 의지 속으로 오십니다. 영적 질병은 이성의 문제가 아니고, 의지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주님께 소상하게 고(告)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자신의 문제를 소상하게 고하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지 몰랐습니다. 그냥 ‘주님, 도와주세요’ 하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자세하게 말씀드리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고, 또 중언부언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주님께 구체적으로 도움을 청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때 우리는 자기의 내면을 정직하게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적 질병을 치유 받으려고 주님께 구체적으로 도움을 청하는 것을, 오늘 말씀에서는 시몬의 집에 있던 사람들이 장모의 병을 낫게 해달라 주님께 간청하는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그 위에 손을 얹으시니 질병의 원인인 악한 영들이 소리를 지르며 나갔습니다. 신앙인의 질병은 각자의 애정의 종류만큼이나 다양하고, 그리고 그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가능하면 그 문제를 그동안 어떻게 다루어왔는지, 그리고 어떻게 실패했는지를 주님께 말씀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주님의 지혜와 능력을 구할 때 주님께서 그 질병들 위에 일일이 손을 얹어 고쳐 주십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우리 성도님들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렘17:14)

 

아멘

 

원본

2017-09-10(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26(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025. 2023-03-26(D1)-주일예배(2442, 눅4,38-44), '우리의 질병과 주님의 병 고치심'.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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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들리지 않으려면

 

 

31갈릴리의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 32그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위가 있음이러라 33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34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35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 36다 놀라 서로 말하여 이르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위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하더라 37이에 예수의 소문이 그 근처 사방에 퍼지니라 (눅4:31-37)

 

 

거듭남의 첫 번째는 진리를 아는 것이고, 두 번째는 진리를 인정하는 것이며, 세 번째는 진리를 믿는 것이다. 진리를 아는 것과 인정하는 것과 믿는 것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다음의 사실로 알 수 있다. 즉 가장 나쁜 사람들도 진리를 알 수는 있다. 그러나 인정하지는 않는다. 유대인이나 그럴듯한 논리로 교리를 파괴하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그리고 진리를 인정하기는 하는데 믿지 않는 사람도 있다. 어떤 경우에 그들은 진리를 강론하고, 입증하며 열정적으로 설득하기도 한다. 그러나 진리를 믿지 않으면 누구도 신앙을 가질 수는 없다. (AC.896, 이순철 역)

 

※ AC(Arcana Coelestia, 천국의 비밀, 라틴) 위 896번 글에 대한 Clowes 영역 및 Potts 개정본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To know is the first thing of regeneration, to acknowledge is the second, to have faith is the third. What difference there is between knowing, acknowledging, and having faith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 worst men may know, and yet not acknowledge, like the Jews and those who attempt to destroy doctrinal things by specious reasoning; and that unbelievers may acknowledge, and in certain states preach, confirm, and persuade with zeal; but none can have faith who are not believers. (AC.896, Clowes 역)

 

이는 창세기 8장 13절, ‘육백일 년 첫째 달 곧 그달 초하룻날에 땅 위에서 물이 걷힌지라 노아가 방주 뚜껑을 제치고 본즉 지면에서 물이 걷혔더니’에 관한 주석 중 ‘노아가 방주 뚜껑을 제치고 본즉’(And Noah removed the covering of the ark and saw.)에 대한 내용입니다. //

 

 

지난 시간에는 주님께서 나사렛 사람들에게 큰 화를 당할 뻔하셨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이 주님을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곳을 조용히 떠나십니다. 그리고 오늘은 주님께서 다시 가버나움으로 오셔서 말씀을 전하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31절입니다.

 

31갈릴리의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

 

갈릴리 가버나움의 동네란, 속뜻으로는 이방인의 교리를 뜻합니다. 동네는 진리나 교리를 뜻하고, 갈릴리는 이방 지역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에서 가르치신다는 것은 이방인의 진리를 가지고 사람들을 가르치신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건 아니고, 주님께서 당시 갈릴리 지역에서 전파하신 말씀이 유대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는 마치 이방인의 진리와 같았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주님의 말씀은 그들의 주장과는 전혀 다른 진리였습니다. 그러한 사정은 어쩌면 오늘날 새 교회가 부딪치고 있는 현실과도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새 교회 진리를 처음 접하시는 분들은 이 진리가 기독교 주류 교회들의 교리와 많이 다르다는 걸 금방 느끼십니다. 그리고 오히려 기독교회가 아닌 다른 종교의 교리와 통하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모든 순수한 종교의 교리는 신앙과 사랑을 분리하지 않고 하나라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회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오직 믿음’, 곧 신앙만으로 구원받는다 가르치는데요, 그것은 신앙과 사랑이 하나라는 걸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 기독교회의 입장에서 보면, 새 교회 가르침은 이단 종교, 종파 가르침 같이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에서는 그걸 주께서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에서 가르치시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 양쪽을 다 있어 본 사람으로서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제가 저 자신을 ‘양쪽을 다 있어 봤다’ 하는 이유는, 저 자신 현재 개신교 침례교 목사이면서, 그러나 한편으로 스베덴보리의 글들이 주님으로 말미암았음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유튜브나 인터넷상에 떠도는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저 자신 스베덴보리의 글들을 직접 읽고 확인하면서 번역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비록 ‘오직 믿음’ 교리를 배운 개신교인이라 할지라도 그가 참으로 의롭고 올바름의 사람이라면 본인이 직접 이 글들을 읽어 주님을 만나게 될 줄 저는 믿습니다. 그가 참으로 진리 만나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이라면 다른 누구의 글이나 의견, 기사나 소문이 아닌, 본인이 직접 일대일로 주님께 나아갈 것이기 때문이며, 주님은 그런 사람을 예외 없이 만나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바로 진리이시기 때문이지요.

 

11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12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13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렘29:13)

 

스베덴보리(1688-1772) 시절 유럽 기독교와 개신교처럼 지금도 특히 한국 기독교와 개신교는, 그러니까 가톨릭은 ‘행위’에다 이것저것 뭘 좀 교리적으로 섞었고요, 개신교는 ‘오직 믿음’으로 일단 구원은 받아놓고, 그러고 나서 그에 합당한 체어리티의 ‘행위’로 삶을 받쳐줘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입장이지요. 실상은 전도와 선교에 더 힘을 쓰고 있지만 말입니다. 마치 속 사람은 뭐 잘 모르겠고, 일단 전도 많이 하면, 선교 많이 하면 하늘 상급이 많으니까... 라고 믿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특히 개신교인들은 자신들의 ‘오직 믿음’ 교리에 대한 확고한 태도가 주님의 신성(Divine)인 ‘’(good)과 ‘진리’(truth)를, 그리고 ‘체어리티’(charity)와 ‘신앙’(faith)이라는 신적 인성(Divine Human)을 부인하는 것임을 모르고 있습니다. 사도들의 서신서들을 주님의 말씀으로 믿고 있기 때문이지요. 제가 뭐 그렇게 거창한 사람은 못 되어서 이렇게 요약해도 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참고로, 기독교는 가톨릭과 개신교, 정교회 등을 포함한, 좀 더 큰 카테고리입니다. //

 

본문에서는 또 주님께서 안식일에 말씀을 가르치셨다고 합니다. 안식일 관련한 말씀들은 아래와 같이 엄중합니다.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일지니라 (출31:15)

 

그래서인지 유대 율법 가운데서도 이 안식일 법은 아주 엄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이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에 대한 속뜻을 좀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요, 그것은 무슨 일이든 자신의 자아로부터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아가 시키는 대로 하지 말고, 주님 말씀을 따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유대교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겉으로만 생각했지요. 그래서 언젠가 주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을 지나다 이삭을 따 먹었을 때, 어떻게 안식일을 어길 수 있는가 하고 주님을 질책했습니다. 본래 안식일의 의미는, 주님께서 지옥의 시험을 모두 이기시고, 영광스럽게 되시는 것을 나타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인성과 내면에 계시는 신성, 곧 여호와 하나님이 하나가 되는 걸 의미하지요. 그리고 그렇게 되셨을 때의 주님의 상태, 곧 더 이상 지옥의 도전이 없는, 주님 안 평화의 상태가 바로 안식의 상태, 그러니까 안식일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은 영화(榮化)하신 주님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해서, 그동안 주님을 나타내던 모든 표상이 사라졌습니다. 빛 자체이신 주님이 오시자 더 이상 그 빛을 대신하던 역할 대행들은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안식일은 주님으로부터 말씀을 배우고, 이웃사랑, 곧 체어리티(charity)를 실천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께서 안식일에 진리를 가르치고 병자를 고치신 것은, 안식일에 체어리티를 실천하는 모범을 친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런 안식일에 대한 속뜻을 전혀 몰랐고, 그저 겉으로만 지킨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안식일’이 나와서 잠깐 다루었습니다.

 

32절에는 주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32그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위가 있음이러라

 

이 말씀에서 ‘놀라니’는 사람의 내면 영의 상태가 바뀌는 걸 의미합니다. 영의 상태가 바뀐다는 건 예를 들면, 아주 이기적이던 사람이 진심으로 다른 사람을 배려하기 시작했다면, 그는 영이 변한 것입니다. 또 자기도 몰랐던 단점을 깨닫고, 그것을 고치려고 노력한다면, 영이 변한 것입니다. 또 큰 잘못을 해서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던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게 된다면 그 역시 영의 상태가 변한 것입니다. 그래서 영의 상태가 변한다는 건 영적으로 한 단계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러한 변화는 사람의 힘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능력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모두 놀랐다고 했습니다. 주님 말씀의 능력으로 그들의 영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는 그 말씀이 권위가 있음이러라’ 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에 능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능력이 없다면 어떻게 영이 바뀔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주님 말씀에 놀라고, 그 말씀에 권위가 있음을 느꼈던 것입니다. 인간의 진리 안에는 사랑이 없지만,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 안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그 사랑이 인간을 변화시킵니다. 그것은 겨울의 햇볕은 능력이 없지만 따뜻한 봄볕은 만물을 생장시키는 능력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가버나움 사람들의 영이 바뀌고 있을 때, 한 귀신 들린 자가 나타났습니다. 그에 대해 33절과 34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33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34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여기서 ‘귀신’은 진리를 왜곡하는 지옥의 영을 말합니다. 지옥의 영들은 말씀의 진리를 어떻게 해서든지 왜곡, 곡해해서 그것이 마치 진리인 것처럼 꾸밉니다. 왜곡된 진리로 사람들을 지옥으로 끌고 가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귀신 들린 자는 진리를 왜곡하는 영에게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진리를 왜곡하는 영에게 사로잡힌 사람은 스스로 대단한 지적 능력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말씀의 의미를 마음대로 왜곡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가르치는 진리 가운데는 그렇게 왜곡된 진리들이 많이 있습니다.

 

귀신 들린 자가 주님을 향해 큰 소리로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앞부분에서는 ‘우리’라고 했고요, 뒷부분에서는 ‘’라고 했습니다. 귀신 들린 자는 왜 그렇게 말했을까요? 앞에서 ‘우리’는 귀신 들린 자를 사로잡고 있는 지옥의 영들을 나타냅니다. 그의 내면에 지옥의 영들이 한 둘이겠습니까? 얼마나 많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라고 소리 지른 것은, 주님, 또는 진리에 대한 반감을 나타냅니다. 거짓 진리를 진리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은 참 진리가 나타날 때 진리를 혐오합니다. 둘은 본질적으로 서로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끔 다른 종교나 교회에 계신 분들과 진리에 대해서 말할 때가 있습니다. 제가 먼저 말하는 경우는 없고, 그분들이 당신의 교회에서는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고 물어오면서 대화가 시작되는데, 그때 저희 교회의 가르침을 설명하면 조금 놀라거나 거리를 두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어쩌면 그런 분들의 반응이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앞에서 ‘우리’라고 한 것은 지옥의 영들이 하는 말이고, 주님에 대한 반감, 또는 진리에 대한 혐오감을 나타냅니다. 그러면 뒷부분에 ‘’는 누구일까요? 그것은 귀신 들린 사람, 자신을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천사 또는 지옥의 영으로부터 영향을 받습니다.

 

※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Heaven and Its Wonders and Hell) 33장 ‘천국과 인류의 결합’(The Conjunction of Heaven with the Human Race) 292번 글입니다.

 

각 사람에게는 선한 영들과 악한 영들이 와있다. 선한 영들을 통해서는 사람은 천국과 결합되고, 악한 영들을 통해서는 지옥과 결합된다. 이 영들은 천국과 지옥 사이에 놓여 있는 중간 영계에 있다. 이곳에 대해서는 앞으로 특별히 다룰 것이다. 이 영들이 사람에게 오면 사람의 기억 전체 안으로 들어가고, 그렇게 해서 생각 전체에 들어간다. 이때 악한 영은 사람의 악한 기억과 생각 속으로, 선한 영은 선한 기억과 생각 속으로 들어간다. 이 영들은 자기들이 사람과 같이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그들이 사람과 같이 있을 때, 그 사람의 모든 기억과 생각이 자기 것인 줄 안다. 또 그들에게는 그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 태양계 내의 것은 아무 것도 그들 시각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영들이 자기가 사람과 같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도록 각별히 배려하신다. 만일 그들이 알아차리면 사람에게 말을 걸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악한 영의 경우, 사람을 파괴하려 들기 때문이다. 악한 영들은 지옥과 결합되어 있으므로, 그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바로 사람의 영혼을, 즉 그의 신앙과 사랑을 파괴하고, 사람의 몸까지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들이 사람과 대화를 하지 않으면 그런 일이 없다. 이 경우, 그들은 자기의 말과 생각이 사람에게서 온 것임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서로 나누는 말도 사람에게서 온 것인데도 그들은 자기가 하는 생각과 말이 자기 것인 줄 믿는다. 그리고 누구나 자기 것은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영들은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도록 그들이 모르는 제재를 받는다. 나는 여러 해 동안 계속되는 경험의 결과로 사람과 영들과의 이러한 결합에 대해 너무도 잘 알게 되었다. 내가 이보다 더 잘 아는 것이 없을 정도이다. (HH.292, 김은경 역) //

 

지옥의 영이 지배할 때 사람들은 생각지도 않은 엉뚱한 말을 해서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줍니다. 그런가 하면 자기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 교묘하게 남을 속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모두 지옥 영들이 하는 장난입니다. 그러나 그러다가도 온전한 정신으로 돌아올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때가 귀신 들린 자가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라고 말할 때입니다. 그러니까 귀신이 들려 어쩔 수 없이 끌려다니기는 하지만 진리에 대한 인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귀신 들린 자가 그렇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라고 말했을 때, 주님께서 바로 그의 내면에 있는 귀신을 쫓아내 주셨습니다. 35절에서는 그것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35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

 

앞에서 잠깐 말씀드린 것처럼 거듭남의 첫 번째 단계는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아야 그것을 인정하고, 자기의 신념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거듭남의 첫 번째는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귀신 들린 자가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라고 고백했을 때, 즉시 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셨습니다. 진실을 왜곡하는 영들에게 사로잡힌 사람들이 그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주님의 도우심을 받아 진실은 진실이라 하고 거짓은 거짓이라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우리를 지옥 영들의 손아귀에서 건져 주십니다.

 

주님이 귀신을 꾸짖어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나오면서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렸습니다. 귀신이 사람을 넘어뜨리는 모습은, 참된 진리가 나타났을 때, 그 앞에서 거짓 진리가 수치를 당하는 모습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제까지는 자기가 믿는 것이 진리라고 믿었는데, 그것이 참된 진리 앞에서 거짓이라는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으니 얼마나 수치스럽겠습니까? 그것이 귀신이 주님 앞에서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는 모습입니다.

 

※ 이쯤에서 떠오르는 제 영적 체험이 하나 있는데요, 과거 정원 목사의 저서, ‘대적기도’를 읽고, 잠자리에 누워 ‘귀신아!’ 따라 해 보다가 내 안에 숨어든 악령을 어렴풋이 보게 된 체험이었습니다. 지난 2013년 12월 15일 주일 밤에 있었던 일인데, 다음은 그날의 일지에 적힌 내용입니다.

 

자정 즈음, 다시 치통 시작, 잠결에 ‘귀신아!’ 하였더니 갑자기 온몸에 전율이 오래도록 지속, 정원 목사님이 대적기도 책에서 기술한 그대로의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직감, 내 안에 뭔가가 숨어있다가 들켜 어쩔 줄 몰라 하는 듯한 느낌 받음,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나가라’ 하는데 혀가 꼬여서 발음이 잘 안됨, 아내, 내가 잠꼬대를 하는 줄 알고 대적기도 중인 나를 계속 흔들어 댐... 전율이 잦아들 즈음, 치통도 사라짐, 책의 내용 그대로여서 너무 신기, 아내에게 자초지종 설명

 

제 안에서 몰래 활동하던 악한 영이 그만 갑자기 들키는 바람에 저쪽 주방 정수기 쪽으로 황급히 숨는 무슨 다급함이었지요. 형체는 그냥 검은 그림자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참 놀라운 건, 이 체험 후, 저를 평생 괴롭히던 혈기가 사라진 것이었습니다. 이 혈기는 저뿐 아니라 저희 집안의 내력 중 하나이기 때문에 더욱 신기했습니다. //

 

악령들은 항상 우리를 유혹해서 죄를 짓게 만듭니다. 그리고 떠날 때는 결과를 모두 그 사람에게 전가합니다. 그래서 죄를 지으면 마치 부메랑처럼 죄의 결과가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죄는 그냥 없어지지 않습니다. 수치심을 느끼고 철저하게 자신을 자책하는 그런 과정이 반드시 있습니다. 어떨 때는 그 곤욕과 수치의 시간이 길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한 모든 것들이 악령이 떠나면서 우리를 무리 중에 심하게 넘어뜨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성을 하되 너무 자책하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그건 모두 지옥 영들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악령은 사람에게 물리적인 고통을 줄 뿐이고요, 영을 해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본문에서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라는 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악한 영이 주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는 사탄이 욥에게 한 짓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했습니까? 몸을 아프게 하고, 재물을 잃게 했습니다. 물론 세상에 사는 동안 그러한 것들은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잃는 것이 영을 다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인정하는 한, 악령은 우리의 영을 손상하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36절 말씀입니다.

 

36다 놀라 서로 말하여 이르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위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하더라

 

주님께서 말씀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냈을 때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그래서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위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거기 모인 사람들이 모두 말씀의 능력을 인정한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의 능력’이란 세상적 능력이 아닙니다. 인간을 구원하시는 능력입니다. 죽은 자와 같았던 우리가 살아나는 것, 짐승처럼 살던 사람이 사람으로 사는 것, 이것은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의 능력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이 말씀이 이 시대에 꼭 필요한 말씀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귀신 들린 자가 진리이신 주님을 진리라고 인정했을 때 주님께서 그의 내면에 있는 귀신을 쫓아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진리가 진리인 줄을 모르고 거짓이 거짓인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마치 귀신 들린 자처럼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습니다.

 

저는 가급적 정치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 정치 상황을 보면 안타까운 점이 많습니다. 정치가 무엇입니까? 정견이 달라 치열하게 싸우더라도 때에 따라서는 대의(大義)를 위해 연합하고 협력하는 것이 정치입니다. 그런데 우리 정치에 협력이 있습니까, 조화가 있습니까? 무섭게 상대를 적대하고 증오할 뿐입니다. 우리 역사를 보면 그런 일이 많았습니다. 정치적 견해가 다른 사람들이 서로를 모함하고 처절하게 죽이고 했던 것이 조선의 역사였습니다. 서로 타협하고 조화를 이루며 싸우다가도 손을 잡은 적이 과연 얼마나 있었습니까? 지금 이 시대에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백성들이라도 중심을 잡아야 하는데 그들 역시 정치인들에게 끌려다니고 있습니다. 증오와 살의가 가득 찬 이 나라의 현실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오늘 이 시대에 꼭 필요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 여기서 말씀하시는 ‘오늘’은 지난 2017년도 8월을 말합니다. 지난 2017년도에 있었던 가장 큰 정치적 사건이라면 뭐니 뭐니 해도 박근혜 대통령 탄핵 파면(3/10)과 문재인 대통령 당선(5/9)일 것입니다. 만 5년이 지난 지금은 세월호 촛불 및 박근혜 대통령 탄핵 등이 모두 조작이요, 기획 선동인 것으로 점점 밝혀지고 있어 그때 덩달아 촛불을 지지하며, 박근혜 대통령을 원망했던 저는 너무나도 미안, 부끄러워 고갤 못들 지경입니다만... 네, 하여튼 당시 상황을 돌이켜볼 때, 정말 역사의 큰 변곡점의 시기였음은 분명하다 하겠습니다.

 

우리는 대의를 위해 상대방의 진리라 하더라도 그것이 진리라면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대의를 위한다는 것은 주님을 위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선이며 진리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우리 교회 안에서도 정치적 견해가 다르면 서로를 증오하십니까? 우리는 자신의 이해와 관계없이 진리를 진리라고 하고, 거짓을 거짓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적어도 진리를 거짓으로 만들거나 거짓을 진리로 둔갑시키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를 사로잡고 있을지도 모를 악한 영을 쫓아내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오직 주님의 말씀뿐입니다. 말씀의 능력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능력으로 우리 안에 어둡고 불결한 것들을 몰아낼 수 있다고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말씀의 능력이 이 교회로부터 사방으로 퍼져나갈 것입니다. 그것이 이 시대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라는 신념으로 우리 함께 주님을 위해서 싸웁시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새 교회 모든 성도님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14:27)

 

아멘

 

원본

2017-08-27(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24(D6)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024. 2023-03-24(D6)-매일예배(2441, 눅4,31-37), '귀신 들리지 않으려면'.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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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렛 사람들이 주님에게 크게 화를 낸 이유

 

 

23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24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25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엘리야가 그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27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었느니라 28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29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30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눅4:23-30)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은 주님과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는 교회 안의 사람들보다 교회 밖의 사람들이 더 잘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을 뜻한다. 주님은 당시 교회가 그들에게 있던 유대인들에게 이 말씀을 하셨고, 그렇게 해서 그들이 교회 밖의 사람들보다 주님을 더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오늘날 기독교회라고 불리는 교회 안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은 기독교회의 교리를 통해 주님을 받아들이지만, 소수의 사람들만 마음으로 주님을 인정하고, 그나마 사랑에서 비롯한 애정으로 주님을 인정하는 사람은 숫자가 더 작다. 그러나 교회 밖의 개종한 이교도들은 다르다. 이들은 주님을 그들의 한 분 하나님으로 예배하고 공경한다. (AC.9198:2, 이순철 역)

 

※ AC(Arcana Coelestia, 천국의 비밀, 라틴) 9198번 글에 대한 Clowes 영역 및 Potts 개정본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That ‘no prophet is accepted in his own country’ signifies that the Lord, and the Divine truth which is from him, are less received and loved in heart within the church, than outside of it. He spoke to the Jews, with whom the church then was; and it is known that the Lord was less received by them than by the nations outside the church. The case is similar at this day in the church which from him is called the Christian church. In this the Lord is indeed received in doctrine; but only by a few with acknowledgment of heart; and by still fewer from the affection of love. It is otherwise with the converted gentiles outside the church. These worship and adore him as their one only God, (AC.9198:2, Clowes 역)

 

이는 출애굽기 22장 22절,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에 관한 주석 중 ‘과부나’(Any widow)에 대한 내용입니다. //

 

 

그동안 장마철이라 비가 많이 왔는데, 오늘 맑은 하늘을 보니 여러 가지로 기분이 상쾌합니다. 양동룡 부목사님께서 휴가를 가셨는데 좋은 시간 보내고 오시면 좋겠습니다.

 

※ 이 설교는 지난 2017년 7월 30일,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님의 설교를 원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구절에는 주님께서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주님께서 성경을 읽으시고, 사람들은 말씀에 귀 기울이고 있는데, 그 모습이 참으로 평화로워 보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은 분위기가 많이 다릅니다. 주님께서 나사렛 사람들을 질책하시고, 그러는 주님에게 사람들이 화를 냅니다. 그리고 결국 주님을 동네 밖으로 쫓아내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 밀쳐 떨어뜨리려고까지 합니다. 주님과 회당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 과연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겉뜻으로는 어리둥절한 이 상황, 그 이유를, 하지만 속뜻을 통해서는 알 수 있는데요, 23절입니다.

 

23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주님은 나사렛 사람들이 당신이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자기들에게도 똑같이 행하라고 요구할 거라 말씀하십니다. 가버나움에서 주님이 행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가버나움은 주님께서 공생애를 처음 시작하신 갈릴리 북쪽에 있는 동네입니다. 그곳에서 주님은 많은 기적을 행하셨는데요, 가령,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시고, 회당에서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도 고치시며, 천정을 뜯고 달아 내린 중풍병자도 고치시는 등 많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들은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이란 그곳에서 행하신 여러 기적을 말합니다. 기적이란 노력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행운이 찾아오거나, 또는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어떤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주님께서 가버나움에서 행하신 일들은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죽어가는 심령들을 살리는 구원의 역사였고, 그러한 역사는 주님을 진실하게 믿는 사람에게는 늘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나사렛 사람들의 눈에는 그것이 기적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 기적들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하신 것입니다.

 

※ 저는 특히 이 신유(神癒), 즉 병 고침의 역사에 관심이 많습니다. 아마 개척 전 부사역자로 있던 중형교회에서의 경험 때문인 것 같은데요, 저는 그때 한 80여 세대를 담당하는 마을사역자였습니다. 거의 웬만한 큰 교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 겪어야만 했었는데요, 그중 열에 일곱은 이 질병과 장애, 장례에 관련된 일이었지요... 그래서인지 저는 특히 복음서 내용 중 주님의 치유의 현장이 늘 부러웠고, 주목할 수 밖에 없었으며, 그 비밀을 찾기 위해 애썼습니다. 아마 ‘나는 내가 안수하는 자마다 낫는다’라는, 치유의 은사로 좀 유명해지고 싶은 공명심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부끄럽지만... 그러나 정확하게는, 마을 목원들의 그 아픔과 안타까운 사정들을 좀 해결해 줄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더 컸더랬습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 수도원 공부를 하게 되고, 그러다가 스베덴보리를 알게 되어 지금은 이 일, 이 길을 소명으로 받아 벌써 햇수로 8년째입니다. 그러면서 지금은 어렴풋이 그 어떤 영적 원리 내지는 비밀을 알게 된 것 같은데요, 그것은 바로 ‘천국의 모든 것과 사람의 모든 것은 상응한다’(There Is a Correspondence of All Things of Heaven with All Things of Man)라는,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Heaven and Its Wonders and Hell) 12장에 나오는 내용 덕분입니다. 즉 천국 전체는 한 사람 모습이며, 천국은 사람의 모든 신체, 곧 머리, 몸, 팔과 다리 등에 상응하는 수많은 공동체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 그런 천국과 상응하고 있다는 등의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몸 어디가 아프면 그 부분에 상응하는 천국 공동체들의 인플럭스(influx, 입류)를 통해 그 능력을 공급받으면 되는 것이지요. 좀 엉뚱하고 믿기 어려운 내용이시겠지만... 하여튼 저는 이 책의 모든 내용이 쑤욱 들어왔으며, 그러니까 그냥 믿어졌으며, 드러내어 밝히기는 좀 그렇지만, 어쨌든 저는 이렇게 제 몸에 대해 적용, 나름 상당한, 거의 확실하다는 걸 알았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물론, 저도 때로는 약도 쓰고, 병원도 다닙니다만, 네, 하여튼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술(記述)이 믿어지려면 사람의 내면이 열려야 합니다. 내면이 닫히면 천국을 향한 창이 닫혀 천국의 모든 걸 받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사람의 내면은 세 단계로 되어 있는데, 단계마다 천국에서 흘러들어오는 것들이 차원이 다릅니다. 아마 천국이 삼층천으로 되어 있는 것도 그래서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만나 그 자리에서 고침 받은 복음서 여러 케이스는 그 내면이 그 일이 일어날 수 있도록 확실히 열렸던 사람들이지 싶습니다. 주님은 그 사람의 내면이 어디까지 열렸는가를 보시고, 엔터키만 치셨던 거 같아요. 여러분도 이 사실을 믿어 내면이 열리고, 그래서 동일한 은혜를 입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사렛은 갈릴리 지역에 있기 때문에, 속뜻으로는 이방인의 지역을 뜻하고, 또한 겉 사람을 의미한다는 건 지난주에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내면에 있는 겉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가장 멀리 있으며, 심지어 주님을 배척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나사렛을 주님의 고향이라고 했습니다. 나사렛을 주님의 고향이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주님께서 겉 사람 안에 세우신 교회를 뜻하기 때문이며, 주님의 고향은 천국, 또는 교회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실 때, 제일 먼저 하시는 일은 속 사람을 변화시키시는 일입니다. 그다음에는 겉 사람을 변화시키시지요. 어떤 방법으로 변화시키십니까? 겉 사람 안에 진리의 씨를 뿌리십니다. 주님께서 겉 사람 안에 진리의 씨 뿌리시는 모습이 오늘 본문 바로 전 본문에 나오는 장면입니다. 즉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나사렛 사람들이 그 말씀을 경청하는 모습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경청한다는 것은 귀의 작용이며, 그러므로 겉 사람 안에 있는 애정을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그 애정 안에 진리의 씨를 뿌리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방법으로 겉 사람 안에 교회를 세우시고, 궁극적으로 그곳에 거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교회가 24절에서 말하는 주님의 고향 나사렛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교회가 가버나움의 기적을 원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 이유를 설명하겠습니다.

 

각 사람의 내면에 교회가 처음 세워질 때는 진리에 대한 애정 위에 세워집니다. 우리 역시 진리에 대한 애정이 있었기 때문에 새 교회로 들어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교회가 세워지면 제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영적으로 계속 발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처음 가졌던 진리의 애정을 잃어버리게 되니까요. 처음 가졌던 진리에 관한 애정을 잃어버리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진리를 악용하기 시작합니다. 진리를 악용한다는 것은 진리를 주님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을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자기 자신을 위해 쓰지 않을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그렇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주님과 이웃을 위해 써야 합니다. 지난번 교리 강좌에서도 우리는 구원을 위해 믿는가, 아니면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믿는가? 라는 문제를 서로 얘기했습니다. 처음 교회에 나올 때는 누구나 구원을 받기 위해 나옵니다. 즉 천국에서의 행복한 삶을 위해 신앙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그걸 최종 목적으로 삼는 걸 원하시지 않습니다. 이웃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몸담고 있는 사회와 나라,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것이 신앙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런 삶을 살 때 천국은 저절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자신의 구원만을 생각하는 신앙, 그런 신앙을 새 교회에서는 자연적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에서 가버나움의 기적을 바라는 사람들, 자기들은 그냥 앉아서 또 무슨 신기한 기적이나 구경하고 있겠다 하는 사람들은 자연적 신앙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입니다. 자연적 신앙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의 삶은 어떤 것입니까? 이웃을 위한 일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녀가 좋은 직장에 취업하기를 원하고, 또 질병의 치유를 바라며 사업의 성공을 바랍니다. 그러한 것들이 다 가버나움의 기적 구경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하신 말씀은 자연적 신앙에 계속 머물러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일종의 경고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나사렛 사람들이 주님을 산으로 끌고 가 낭떠러지에서 떨어뜨리려 하는데, 바로 그런 것이 자연적 신앙 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24절에서 말씀하시기를

 

24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말씀에서 선지자는 성경, 즉 말씀을 나타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은 가장 큰 선지자이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말씀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선지자의 고향이란 어디입니까?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교회가 선지자의 고향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는 말씀은, 자연적 교회가 말씀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배척한다는 뜻입니다. 주님 당시에는 유대교회가 자연적 교회였구요, 오늘날에는 기독교회가 자연적 교회입니다. 그리고 좀 더 깊은 뜻으로는 모든 신앙인의 내면에 있는 자연적 신앙이 자연적 교회입니다. 그들이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주님보다는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고, 세상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속에 주님이 들어가실 틈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을 환영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것에 대해 주님은 25절로 2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5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엘리야가 그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27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여기서 엘리야 선지자 역시 말씀으로서 주님을 표상합니다. 엘리야 시대라고 시대를 구분하는 것은, 많은 교회가 각각의 영적 상태에 따라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다 달랐기 때문입니다. 어떤 교회는 말씀을 왜곡했고, 어떤 교회는 말씀 안의 진리를 말살했습니다. 말씀에서는 그것을 교회가 선지자를 핍박, 심지어 죽이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면 엘리야 시대는 영적으로 어떤 상태의 교회일까요? 그것에 대해 본문에서는 그때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으며,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았다고 말합니다. 하늘이 닫힌 것은 그 교회에 속한 사람들의 속 사람이 닫혔다는 뜻입니다. 흉년이 들었다는 것은, 속 사람이 닫혔기 때문에 겉 사람 안으로 진리와 선이 더 이상 흘러들어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는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 안으로 끊임없이 흘러들어와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세상 것들만 사랑하는 사람들은 속 사람이 닫히고 선과 진리의 흐름이 끊어집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적으로 흉년 상태가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들 내면의 교회가 타락하게 됩니다. 교회가 타락한다는 것은 교회 안에 선과 진리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선과 진리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를 말씀에서는 삼 년 육 개월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3년 6개월은 교회가 타락해 문을 닫기 직전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한 상태를 다른 곳에서는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단7:25)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한 해와 두 해를 합하면 삼 년이고, 거기에 반년을 더하면 3년 6개월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 계시록에서는 ‘천이백육십 일’(계12:6)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를 한 달을 삼십 일로 계산하면 42 개월, 즉 3년 반으로 모두 같은 의미입니다. 즉 교회가 영적으로 완전히 타락해 문을 닫는 상태가 되었을 때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그런 상태가 되었을 때,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은 교회를 나타내지만, 영적인 교회는 아니고 자연적 교회를 나타냅니다. 왜냐하면 타락한 교회 안에 영적인 것이 남아 있을 리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곳에 과부가 많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말씀에서 과부는 선이 없는 진리를 나타내거나, 또는 진리가 없는 선을 나타냅니다. 과부는 이렇게 두 가지 의미로 쓰이는데, 본문에 이스라엘의 과부는 진리만 있고 선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진리만 있고 선이 없다는 것은, 진리를 지식으로만 접근할 뿐 실천하지는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리 말씀을 읽어도 진리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으로부터 그들의 내면으로 빛이 흘러들어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봐도 진리인지를 모릅니다. 캄캄한 암흑 속에서 어떻게 진리가 보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이스라엘 과부에게 선지자를 보내지 않으셨다는 것은 말씀을 아무리 읽어도 진리의 깨달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어떤 사람에게 진리의 깨달음을 주실까요? 사렙다의 과부와 같은 사람, 수리아 사람 나아만과 같은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주십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사렙다의 과부는 앞에서 말한 이스라엘의 과부와는 다른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과부가 선이 없는 진리라면, 사렙다의 과부는 선은 있는데 진리가 없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에 순종하기를 원하지만,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어떻게 하는 것이 순종인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진리를 갈구합니다. 주님은 그런 그녀에게 엘리야 선지자를 보내셔서 흉년 내내 부양하게 하셨습니다. 부양한다는 것은 말씀의 진리와 선으로 그의 영을 먹이시는 것입니다. 말씀에서는 그것을 과부의 집에 기름과 곡식이 끊어지지 않는 것, 곧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왕상17:16)로 표현했습니다.

 

여기 나아만 이야기는 아래 열왕기하 5장 말씀으로 대신합니다.

 

1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그의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 2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사로잡으매 그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더니 3그의 여주인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하는지라 4나아만이 들어가서 그의 주인께 아뢰어 이르되 이스라엘 땅에서 온 소녀의 말이 이러이러하더이다 하니 5아람 왕이 이르되 갈지어다 이제 내가 이스라엘 왕에게 글을 보내리라 하더라 나아만이 곧 떠날새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의복 열 벌을 가지고 가서 6이스라엘 왕에게 그 글을 전하니 일렀으되 내가 내 신하 나아만을 당신에게 보내오니 이 글이 당신에게 이르거든 당신은 그의 나병을 고쳐 주소서 하였더라 7이스라엘 왕이 그 글을 읽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 그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로 보내 그의 나병을 고치라 하느냐 너희는 깊이 생각하고 저 왕이 틈을 타서 나와 더불어 시비하려 함인줄 알라 하니라 8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이 자기의 옷을 찢었다 함을 듣고 왕에게 보내 이르되 왕이 어찌하여 옷을 찢었나이까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그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하니라 9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10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11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12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려 분노하여 떠나니 13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 14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왕하5:1-14) //

 

주님께서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시자, 사람들이 주님께 화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동네 밖으로 쫓아내려고 합니다. 28, 29절에는 나사렛 사람들의 그런 모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28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29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주님께 화를 내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그런데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났고, 우리 역시 그럴 때가 있습니다. 진리를 통해 감추고 싶었던 내면의 악이 드러날 때, 그리고 간절히 원하던 어떤 것을 주님께서 주시지 않을 때, 우리는 속으로 불평하거나 원망합니다. 그런 것이 주님께 화를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바로 자연적 신앙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데 있어 진리가 방해가 될 때는 화를 내며 진리를 밀어냅니다. 여기 ‘그들이 일어나’라고 했는데 이 말은 본래 진리에 대한 사랑이 뜨겁게 일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반대로 진리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주님을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한 것으로 봐서 그들이 지금 주님을 대적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여기서 동네는 교리를 뜻합니다. 따라서 동네에서 주님을 쫓아내는 것은 교리 속에 들어있는 내적 진리를 말살하는 것입니다. 내적 진리란 말씀의 지식 속에 들어있는 선이며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님을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어버리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산은 사랑 또는 선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동네가 건설된 산’이란 교리의 바탕에 있는 진리에 대한 사랑을 말합니다. 우리가 교회의 교리를 처음 받아들일 때 마음 가운데 진리에 대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나사렛 사람들은 주님을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즉 교리의 바탕에 있는 사랑을 몰아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진리에 대한 사랑은 없어지고,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만 남습니다. 그러므로 동네가 건설된 산 아래로 주님을 밀어내는 것은 교리로부터 교리의 생명인 사랑을 몰아내는 것입니다. 사랑 없는 진리를 가지고는 자신은 물론이고 세상을 바꿀 수 없습니다. 그것이 주님을 동네 밖으로 쫓아내고 동네가 건설된 산에서 밀쳐 떨어뜨릴 때, 우리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30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신다는 것은 주님은 어느 곳에나 임재해 계신다는 뜻입니다. 주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나 쫓아내는 사람에게나 주님은 언제나 그들과 함께 계십니다. 그가 주님의 손을 잡기를 기다리시면서 항상 임재해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처음 새 진리 안으로 들어왔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 우리에게는 진리에 대한 순수한 애정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혹시 타성에 젖어서 제자리걸음을 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거듭남의 길에서 한곳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정체가 아니라 후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단히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오리가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지만 물밑에서는 계속 발을 움직이는 것처럼 그렇게 노력해야 합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하고요, 십계명의 법으로 자기를 비춰보면서 자기 안에 있는 거짓과 악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신앙이 매일 조금씩 성장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오늘 나사렛 사람들의 신앙을 기적을 바라는 신앙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렙다의 과부와 수리아 사람 나아만의 신앙을 가지라고 권고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본받으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선지자의 말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따르고자 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나아만은 엘리사가 말한 대로 나병을 고치기 위해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었습니다. 사렙다의 과부는 엘리야의 말에 따라 자기와 외동아들이 먹을 마지막 양식을 선지자에게 드렸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기적을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겠습니다. 선량한 이방인들처럼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 전체를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인간의 생각으로 이것은 취하고 저것은 버리는 그런 신앙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 신앙은 자연적 신앙에서 영적 신앙으로, 영적 신앙에서 천적 신앙으로 계속 발전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출15:26)

 

아멘

 

원본

2017-07-30(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23(D5)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023. 2023-03-23(D5)-매일예배(2440, 눅4,23-30), '나사렛 사람들이 주님에게 크게 화를 낸 이유'.pdf
0.54MB
천국과지옥.1.12.87-102.'천국의 모든 것과 사람의 모든 것은 상응한다'scan..pdf
0.56MB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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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창9:3)

 

 

기쁨이 없는 즐거움은 즐거움이 아니고, 생명이 없는 어떤 것이다. 그러므로 즐거움은 기쁨으로부터 나오고, 그것이 이른바 즐거움이다.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것은 자체로 물질이고, 생명이 없는 것이며 죽은 것이다. 그러나 질서에 따라 내적인 것에서 비롯한 기쁨과 그 기쁨에 바탕은 둔 즐거움은 생명을 지닌다. (천국의 비밀 995, 이순철 역) Pleasure without delight is not pleasure, but is something without life, and only from delight is and is called pleasure. Such also as is the delight, such is the pleasure. Corporeal and sensuous things are in themselves only material, lifeless, and dead; but from delights which come in order from the interiors, they have life. (AC.995)

 

※ 윗글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창, 출 속뜻 주석) 창9:3 중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에 관한 주석 내용 일부입니다.

 

※ 다음은 이 설교의 원 저자이신 서울 새 교회 전 담임 이순철 목사님 이야기입니다.

 

아주 어릴 때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선친께서 저와 동생을 앉혀 놓고 커서 뭐가 되고 싶으냐고 가끔 물으셨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동생은 비행기 조종사가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우물쭈물하며 아무 대답을 하지 못했지요. 장래에 뭐가 되겠다든가, 해 보고 싶다든가 하는 꿈을 꿔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시절에 우연히 친구의 집에 갔다가 일제 릴 테이프 녹음기로 음악을 듣게 되었는데 그 소리가 너무나 좋았습니다. 일반 녹음기와는 소리가 전혀 달랐습니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인생의 꿈이 하나 생겼는데, 그것은 나중에 돈을 많이 벌면 좋은 음향기기로 음악을 듣겠다는 꿈이었습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그렇게 마음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어떤 것이 있습니다. 취미일 수도 있고, 일일 수도 있고, 또는 거창한 무슨 이상 같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러한 것에 끌리는 이유는 그것이 주는 기쁨이나 즐거움 때문입니다. 기쁨이 없다면 일도 인생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기쁨이나 즐거움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살아있는 것으로 만듭니다. 저의 경우는 어릴 때의 꿈을 한동안 좇다가 어느 시점에서 그만두었습니다. 그러나 잠시 꿈을 좇으면서 깨달은 것이 있는데요, 그것은 세상에는 여러 가지 기쁨이 있는데 좋은 것도 있고, 좋지 않은 것도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눈이나 귀, 입 같은 감각을 통해 얻는 기쁨은 지속적이지 못하고, 사람에게 진정한 행복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새 교회에서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물질이나 감각을 통해 얻는 기쁨은 차원이 낮은 기쁨, 즉 외적인 기쁨이고, 그보다 차원이 높은 기쁨이 있는데, 그것은 선과 진리로부터 얻는 내적인 기쁨이다. 외적인 기쁨은 내적인 기쁨과 연결될 때 진정한 기쁨이 된다.

 

그러니까 내적이지 않고 그저 외적이기만 한 기쁨은 찰나적이고 공허한 기쁨이며, 그러므로 죽은 기쁨이라는 것이지요.

 

오늘 창세기 9장 3절의 말씀은 바로 이런 것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본문의 말씀을 영어 성경의 번역으로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땅을 기는 모든 살아있는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먹을 수 있는 풀도 내가 다 너희에게 주노라 Every creeping thing that liveth shall be food for you; as the esculent herb have I given it all to you.

 

이 말씀은 홍수가 끝난 뒤 방주에서 나온 노아에게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노아’는 인류 최초의 교회인 아담교회, 즉 태고교회가 무너지고 새로 생긴 고대교회와 그 교회의 사람들을 뜻합니다. 홍수가 끝난 후, 그들이 방주에서 나왔다는 것은 고대교회 사람들이 영적 시험을 모두 이기고 거듭난 것을 의미합니다. ‘홍수’는 거듭나는 과정에서의 시험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거듭난 노아교회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두 가지 먹을거리를 주셨다고 하는데요, 하나는 ‘모든 산 동물’(Every creeping thing that liveth)이고, 다른 하나는 ‘채소’(the esculent herb)입니다.

 

먼저 ‘모든 산 동물’(creeping thing, 땅을 기는 동물)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가장 차원 낮은 기쁨, 즉 감각의 기쁨을 뜻합니다. 땅은 가장 낮은 곳에 있기 때문에 영적으로는 몸의 가장 바깥쪽에 있는 감각과 관련이 있습니다.

 

※ 그래서 사람을 이루는 몇 가지 중 감각과 관련된 것(the sensuous part)을 ‘’(창3:1)이라 하였고, ‘발꿈치’ 역시 그래서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창25:26) 등이 다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감각의 기쁨이란 어떤 것일까요? 예를 들면,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한다든가,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음악을 듣는 것처럼 오감으로 느끼는 기쁨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쁨들은 자칫하면 신앙인들을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 노아교회 사람들에게 그러한 기쁨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이미 거듭난 사람들은 저속한 외적 기쁨을 내적 기쁨으로 승화(昇華, 한 단계 더 높은 상태가 됨)시킬 수 있으며, 그렇게 해서 삶을 윤택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땅을 기는 살아있는 동물을 먹을거리로 삼는다는 것은 거듭난 사람들의 경우, 감각의 기쁨까지도 내적인 것, 즉 주님과 이웃을 위한 목적으로 사용한다는 뜻입니다. 감각의 즐거움이 그렇게 내적인 것을 위해 쓰임 받을 때 그것은 살아있는 기쁨이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냥 땅을 기는 동물이라고 하시지 않고, 땅을 기는 살아있는 동물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신 것입니다. 먹을거리로 주신다는 것은 그러한 기쁨을 마음껏 즐기도록 허용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을 통해 주님과 이웃을 섬기려고만 한다면 주님께서는 그에게 좋은 음식이나 좋은 옷, 좋은 집을 주시고, 때로는 좋은 곳을 여행하게도 하십니다. 세상 사는 동안에는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기쁨을 떠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신앙인들에게 물질이나 감각의 기쁨을 어느 정도 허락하십니다. 마치 광야를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때때로 메추라기를 내려주시는 것처럼 그렇게 세상 즐거움을 허락하십니다.

 

최근 어느 스님이 젊은 나이에 좋은 집에 살면서 값비싼 전자기기를 가지고 일을 하는 모습이 방송에 나왔는데 그것이 논란이 되었습니다. 성직자가, 종교인이 무소유의 삶을 살지 않고 호사를 부린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 새 교회 교리의 관점에서 보면, 성직자라도 지나치게 재물을 많이 모으거나 사치를 부리지만 않는다면 재산이 있다는 게 큰 흠이 되지는 않습니다. 주님과 이웃을 위해 일을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안락한 삶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종교인들 가운데는 세속의 것들에 담을 쌓고 스스로를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 것이 수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세상의 것들은 모두 주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을 누리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다만 물질 자체에 빠지면 안 되고,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데 그것들을 선용해야 합니다. 인생의 홍수를 통과하면서 거듭난 사람들은 이 단계의 삶에 도달한 사람들입니다.

 

※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김은경 역) 39장, ‘천국의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The Rich and the Poor in Heaven)에 나오는 글들입니다.

 

먼저 얘기해 둘 것은, 사람은 술책이나 사기가 아니라면 기회가 닿는 대로 부를 얻고 쌓아도 되며, 너무 빠져들지 않는 한 고급 음식을 즐겨도 되고, 조건에 따라 호화로운 저택에 살며 조건이 같은 사람들과 교제할 수 있고, 오락을 즐기고 세상사를 얘기해도 된다는 사실이다. 또 경건한 사람처럼 슬프고 애통하는 얼굴로 고개를 떨구고 다닐 필요가 없으며, 즐겁고 활기에 넘칠 수 있다. 또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가난한 사람에게 자기 것을 주지 않아도 된다. 한마디로 사람이 세상 사람과 겉으로 보기에 똑같이 살아도, 내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생각을 올바로 가지며, 이웃에게 신실하고 공정하게 대하기만 하면, 천국 가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 (HH.358)

 

사람이 신을 인정하고, 이웃을 선의로 대하기만 한다면, 겉으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도 되고, 부자가 될 수도 있으며, 형편과 역할에 따라 풍성한 식탁과 우아한 집과 좋은 옷을 갖추고 살 수도 있고, 즐거움과 만족을 누려도 되며, 직무와 사업을 위해, 그리고 정신생활과 육신 생활을 위해 세상일에 종사할 수 있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분명한 결론을 낳는다. 즉 천국에 가는 것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사실이다. 유일한 어려움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저항하고, 그 두 사랑이 지배적이 되지 않도록 하는 데 있다. 그 두 사랑이 모든 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다음의 주의 말씀은 이것이 생각처럼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11:29, 30)

 

주의 멍에는 쉽고 주의 짐은 가볍다고 하신 이유는 사람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비롯되는 악에 저항하는 정도만큼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의 인도를 따르는 것이며, 그렇게 되면 주께서 그 사람 안에 있는 악을 물리치고 제거하시기 때문이다. (HH.359)

 

천국의 부자들은 남들보다 더 화려한 생활을 한다. 그들 중 일부는 모든 것이 금, 은으로 된 듯 광채 나는 궁전에 산다. 그들은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풍족하지만, 조금도 거기 마음을 두지 않고, 오직 그 쓰임새만 생각한다. 그들에게 쓰임새는 빛을 받은 듯 분명하게 보이지만, 금, 은은 거기 비하면 그늘에 있는 듯 흐릿하게 보인다. 그 이유는 이들이 세상에 살 때, 쓰임새를 사랑했고, 금, 은은 단지 수단과 도구로만 사랑했기 때문이다. 천국에서 광채를 내는 것은 쓰임새다. 쓰임새에 속한 선은 금처럼, 쓰임새에 속한 진리는 은처럼 광채가 난다. 따라서 천국에서 그들의 부와 기쁨과 행복은 세상에서의 그들의 쓰임새와 일치한다. 선한 쓰임새란, 자신과 가족의 생활에 필요한 것을 공급하는 것, 그리고 나라와 이웃을 위해서 부를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면에서는 부자가 가난한 사람보다 훨씬 크게 이바지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선한 쓰임새인 이유는 그것을 통해 사람이 나태한 생활에 빠지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나태한 생활은 사람의 생각을 그 타고난 악으로 흐르게 하기 때문에 해롭다. 쓰임새는 그 안에 신성을 담고 있는 만큼, 다시 말하면 사람이 신과 천국을 바라보고, 이 쓰임새에서 유익을 찾으며, 재물은 오직 부수적 유익으로 여기는 정도만큼 선하다. (HH.361)

 

가난한 사람은 그들이 가난해서가 아니라 생활에 따라서 천국에 간다. 모든 사람의 생활은 부자이건 가난하건 상관없이 그 사람을 따른다. 어느 한쪽을 선호하는 특별한 자비는 없다. 선하게 산 사람은 들어가고, 선하게 살지 않은 사람은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나아가서는 가난도 재물과 전혀 다름없이 사람을 천국에서 멀어지게 만든다. 가난한 사람들 중에는 자기 형편에 불만하고, 많은 것을 가지려고 애쓰며, 재물이 축복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재물을 얻지 못하면 화를 내며, 신의 섭리에 대해 좋지 않은 생각을 품는다. 또한 그들은 좋은 것을 가진 사람을 질투하고, 기회만 오면 누구든 속일 태세이며, 불결한 쾌락에 몰두한다. 그러나 이와 다른 가난한 사람들도 있다. 자기 형편에 만족하고, 성심껏 부지런히 일하며, 태만함보다 일을 사랑하고, 정직하고 신용 있게 행하면서, 동시에 기독교적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때로 이 세상에 살 때 하나님을 믿었고, 공정하고 바르게 자기 일을 행한 농부들이나 서민층 사람들과 대화를 해 보았다. 그들은 진리에 대한 애정이 있었기 때문에, 체어리티와 신앙에 대해 계속 질문했다. 그들이 이 세상에서는 신앙에 대해서, 저세상에서는 체어리티에 대해 많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대답을 들었다. ‘체어리티는 모두 생활에 속한 것이고, 신앙은 모두 교리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체어리티란 모든 일에 있어서 공정하고 바른 것을 의도하고 행하는 것이며, 신앙은 공정하고 바르게 생각하는 것이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교리와 그에 따른 생활처럼, 또는 생각과 의지처럼 서로 결부되어 있다. 사람이 그가 생각하는 공정하고 올바른 것을 의도하고 행할 때, 신앙은 비로소 체어리티가 된다. 이것이 이루어지면 신앙과 체어리티는 둘이 아닌 하나가 된다.’ 그 사람들은 이것을 완전히 이해하고, 매우 기뻐했다. 믿는다는 것이 다른 게 아니라 생활임을 이 세상에 있을 때는 이해하지 못했었다고 그들은 말했다. (HH.364) //

 

다음은 ‘채소’(the esculent herb), 즉 먹을 수 있는 풀도 함께 주셨습니다. ‘’은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풀을 먹을거리로 주시는 것은 진리를 배우는 기쁨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미 거듭난 사람들은 진리보다는 선을 기뻐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배우는 기쁨은 거듭난 사람에게는 그리 좋은 것이 아니지요. 늘 말씀드리지만, 거듭나기 전에는 진리를 먼저 배우고 그다음에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거듭나게 되면 먼저 선을 행하고 그러다 보면 진리는 저절로 따라옵니다. 주님께서 필요한 진리를 주시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거듭난 사람들의 경우는 진리를 추구하기보다는 선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노아에게 풀을 주셨을까요? 말씀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냥 풀이라고 하지 않고 ‘먹을 수 있는 풀’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앞에서 기는 동물이라고 하지 않고 ‘살아있는 기는 동물’을 주셨다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즉 먹을 수 있는 풀은 내적 기쁨과 연결된 진리의 기쁨을 뜻합니다. ‘내적인 기쁨’이란 쓰임(use)의 기쁨, 쓰임 받는 기쁨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진리의 기쁨은 진리 자체에 대한 열망이 아니라 주님과 이웃을 위해 사용하려고, 쓰임 받으려고 진리를 알고자 하는 열망입니다. 그럴 경우, 주님께서는 거듭난 사람이라도 진리의 기쁨을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먹을 수 있는 풀을 양식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참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사용하려는 목적이 아니면, 쓰임 받기 위해서가 아니면 진리에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선을 행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 위 인용글들 중 특히 쓰임새가 나오는 다음 글처럼 말입니다.

 

천국의 부자들은 남들보다 더 화려한 생활을 한다. 그들 중 일부는 모든 것이 금, 은으로 된 듯 광채 나는 궁전에 산다. 그들은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풍족하지만, 조금도 거기 마음을 두지 않고, 오직 그 쓰임새만 생각한다. 그들에게 쓰임새는 빛을 받은 듯 분명하게 보이지만, 금, 은은 거기 비하면 그늘에 있는 듯 흐릿하게 보인다. 그 이유는 이들이 세상에 살 때, 쓰임새를 사랑했고, 금, 은은 단지 수단과 도구로만 사랑했기 때문이다. 천국에서 광채를 내는 것은 쓰임새다. 쓰임새에 속한 선은 금처럼, 쓰임새에 속한 진리는 은처럼 광채가 난다. 따라서 천국에서 그들의 부와 기쁨과 행복은 세상에서의 그들의 쓰임새와 일치한다. //

 

이와 같이 거듭난 사람들의 모든 기쁨은 감각의 기쁨이든 진리에 대한 기쁨이든 반드시 내적인 것과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살아있는 기쁨이 됩니다. 모든 내적인 것은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죽은 기쁨을 살아있게 만드는 내적인 것이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인애(仁愛), 즉 이웃에 대한 사랑, 체어리티(charity)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체어리티는 가난한 사람, 소외된 이웃에게 필요한 걸 베푸는 것이라고만 생각합니다. 심지어 사기꾼이나 도둑처럼 악한 사람들까지도 포용하는 것이 체어리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새 교회의 가르침은 다릅니다. 새 교회에서는 진정한 체어리티는 이웃의 진실과 선을 사랑하는 것이지 악과 거짓까지 사랑하는 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새 교회 가르침의 근원은 오직 주님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체어리티는 한편으로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체어리티는 또한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악을 행하면서 동시에 체어리티를 행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그런 상태에서 체어리티를 행한다면 그건 체어리티가 아닙니다. 진정한 체어리티는 마음으로부터 이웃을 사랑하고 진리와 선을 사랑해야 합니다. 체어리티 안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체어리티의 마음을 가지고 물질을 사랑하고 감각에 속한 걸 사랑해야 합니다. 만약 체어리티가 없는 상태에서 이웃을 사랑한다면 겉으로 보여지기 위한 사랑입니다. 또한 체어리티 없는 상태에서 진리를 사랑한다면 그건 진리가 아니라 지식을 사랑하는 겁니다. 그것은 읽지 않는 책을 사 모으는 것만큼이나 공허한 일입니다. 또 체어리티 없는 상태에서 감각의 기쁨을 추구하면 영적으로 피폐해집니다. 그럴 경우, 점점 더 자극적인 기쁨을 원하게 되고 그렇게 해서 결국 타락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기쁨을 추구하든 체어리티의 기쁨으로 추구해야 합니다. 그때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에 있는 선과 진리, 또는 체어리티와 신앙이 가장 바깥쪽에 있는 몸의 감각과 서로 연결 되어 죽어있던 감각의 기쁨이 살아있는 것으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삶에 생기를 불어넣기 때문입니다. 부디 새 교회 모든 성도는 주님 주시는 세상 기쁨을 누리고 즐기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체어리티로부터 그렇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그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 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호2:18)

 

아멘

 

2020-11-29(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5-03-16(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3-16(D1)-주일예배(2589, 창9,3),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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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5-03-16(D1)-주일예배(2589, 창9,3),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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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의 속뜻

 

 

14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15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16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22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눅4:14-22)

 

 

세상에 계실 때 주님은 인성에 있어서는 신적 진리 자체이셨고, 생명의 본질에 있어서는 신적 선 자체이셨다. 그리고 신적 선은 사람에게 아버지의 혼이라 불리는 그것이었다. 왜냐하면 주님은 여호와로부터 잉태하셨으며, 말씀에서 ‘여호와’는 모든 생명의 본질인 신적 사랑에서 비롯한 신적 선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직 주님만이 본질에 있어서나 행위에 있어서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셨다. 왜냐하면 신적 선이 주님 안에 있었고, 그 선에서 발현되는 신적 진리가 세상에 계시는 동안 주님의 인성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AC.9954:11, 이순철 역)

 

※ AC(Arcana Coelestia, 천국의 비밀) 9954번 글 11번 항에 대한 Clowes 영역본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For when the Lord was in the world, he was, in respect to the human, the Divine truth itself; and in respect to the very being of his life, he was the Divine good itself, which with man is called the soul from the father; for he was conceived from Jehovah, and in the Word ‘Jehovah’ denotes the Divine good of the Divine love, which is the being of the life of all. From this it is that the Lord alone was ‘the Anointed of Jehovah’ in very essence and in very performance, because the Divine good was in him; and the Divine truth proceeding from this good was in his human while he was in the world (see the places cited in n. 9194, 9315). (AC.9954:11, Clowes 역)

 

이는 출애굽기 28장 41절, ‘너는 그것들로 네 형 아론과 그와 함께 한 그의 아들들에게 입히고 그들에게 기름을 부어 위임하고 거룩하게 하여 그들이 제사장 직분을 내게 행하게 할지며’에 관한 주석 중 ‘그들에게 기름을 부어’ 부분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

 

 

오늘 말씀은 주님께서 40일간 광야 시험에서 승리하시고, 안식일에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성경 구절을 읽으시고, 사람들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고 평화로워 보입니다. 사실 이 말씀 뒷부분에는 갈릴리 사람들이 주님을 모욕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왜 그렇게 말씀의 앞부분과 뒷부분이 차이가 있는지는 말씀의 내적 의미가 아니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오늘과 다음 주 두 주에 걸쳐 한 구절씩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14절입니다.

 

14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주님은 광야에서 돌아오셨을 때 먼저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주님이 광야에서 돌아오셨다는 것은 시험에서 이기고 돌아오셨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이 시험이 겉으로는 세상 계실 때 주님이 당하신 시험이지만, 속뜻으로는 거듭나는 사람의 내면에서 그 사람과 함께 싸우시는 시험이라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돌아오실 때 주님은 왜 갈릴리로 가셨을까요? 위 광야 시험의 속뜻을 생각할 때, 갈릴리로 가셨다는 것은 거듭나는 사람이 시험에서 이길 때마다 주님께서 그들의 겉 사람 안으로 들어오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속뜻으로 ‘갈릴리’는 이방인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거듭나는 사람 안의 겉 사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 여기서 잠깐, 겉 사람, 속 사람 등의 용어 정리를 좀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저 역시 이 부분이 아직 명확하진 않지만... 아직은 육(肉)을 입고 살아 있는 상태이기에 ^^, 지금까지 이해하고 있는 바로는, 간단하게는 inmost(가장 안쪽), internal(속), external(겉), body(몸)라는 이 네 가지를 이해하시면 되며, 좀 더 명확성을 위해 영어를 그대로 쓰겠습니다. 여기서 앞의 세 개까지가 영, 나머지인 body는 육, 우선은 이렇게 이해하고 계시라 권하고 싶습니다. 참고로, 이들 네 가지는 사람 생전엔 모호하지만, 일단 사후, 영이 되면 그때는 아주 명료해지는 그런 거라고 합니다. 일단 사람이 죽으면, 영과 육의 분리가 일어나고요, 그때 제일 먼저 body가 분리됩니다. 즉 body를 제외한 나머지 세 가지를 그대로 가지고 영계에서 깨어나게 되지요. 사후 첫 번째 상태는 준비상태로, 그동안 bodyinternal 사이에서 수고한 external이 정리, 휴면 상태에 들어갈 준비를, 그리고 internal이 전면에 드러날 준비를 하는 상태입니다. 천국이든 지옥이든 영계의 영원한 삶은 이 internal로 살아가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이 첫 번째 상태 때는 아직은 생전 식구들이나 친구, 지인들이 서로를 알아봅니다. 알아보고 아주 반가워들 하지요. 사후 두 번째 상태가 되면, 이제 external은 휴면 상태로 들어가고, internal 상태가 되는데, 이때는 살아생전 한 식구였던 사람들끼리도 서로 못 알아봅니다. 본인은 물론, 식구들 역시 서로의 영, 그러니까 internal은 본 적이 없기 때문인데요, 생전 식구들이 본 서로의 모습은 external이지 internal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 말이, 지상 혈연은 지상으로 끝, 영계로까지 이어지지 않는다는, 다소 불편할 수도 있는 말씀을 그동안 드린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inmost는 주님의 영역입니다. 네, 우선은 이 정도만 하겠습니다.

 

신앙인들이 처음 거듭날 때는 먼저 속 사람 안에 교회가 세워집니다. 그것을 우리는 개혁(reformation)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속 사람 안에 교회가 세워졌지만, 겉 사람의 상태는 아직 교회 밖의 사람들과 똑같은 모습입니다. 이를테면 속 사람은 주님 뜻대로 살고자 하지만, 겉 사람은 주님을 믿지 않고, 심지어 주님을 배척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럴 때 겉 사람은 마치 이방인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다가 겉 사람이 시험에서 한 번 이깁니다. 수없이 넘어지고 일어선 끝에 가까스로 주님 손잡고 시험에서 이긴 것이지요. 그때 주님께서 겉 사람 안으로 오셔서 교회의 작은 초석을 하나 세우십니다. 그런 과정이 수없이 되풀이되어야 궁극적으로 겉 사람 안에도 교회가 세워집니다. 그것이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광야에서 돌아오시면서 다른 곳으로 가시지 않고 갈릴리로 오신 것입니다. 15절입니다.

 

15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회당’은 속뜻으로 교리를 뜻합니다. 왜냐하면 유대 교회의 회당은 교리를 가르치는 곳이었고요, 또 교리의 해석이 다를 때, 그것을 조정하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회당은 교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것은 주님께서 겉 사람 안에 오셔서 새 교회의 교리를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또 ‘뭇사람에게 칭송을 받았다’고 했는데, 뭇사람은 겉 사람 안에 있는 여러 가지 선한 애정들과 생각들을 나타냅니다. ‘그들이 칭송했다’는 것은 애정들과 생각들이 주님이 가르치시는 교리를 잘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교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주님으로부터 진리에 대한 지각이 흘러들어올 때, ‘이것이 참 진리로구나!’ 하고 공감하는 것이고요, ‘이제부터는 이대로 살아야 하겠구나’ 하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뭇사람들이 칭송하는 모습입니다. 16절입니다.

 

16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예수께서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셨다’ 말하고 있습니다. ‘나사렛’ 역시 갈릴리 지역에 있는 곳이기 때문에, 겉 사람 안의 어느 부분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나사렛에서 자라나셨다’는 말은 주님은 겉 사람 안에서 성장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는 주님이 계십니다. 어떤 분에게는 구유에 갓 태어나신 주님이 계시고요, 어떤 분에게는 성전에서 랍비들과 진리를 토론하는 주님이 계십니다. 또 어떤 분에게는 청년이신 주님이 계십니다. 각 사람 안에 계신 주님은 그렇게 성장 정도가 다릅니다. 그런데 그 주님이 성장하시는 곳이 어디입니까? 속 사람이 아니라 겉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겉 사람이 악을 끊고 선을 행할 때마다, 그것에 비례해 주님도 조금씩 자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나사렛을 주님이 자라나신 곳이라고 했습니다. 계속되는 말씀에서 주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서 성경을 읽으셨다고 했습니다. 안식일은 본래 완전히 거듭나서 더 이상 시험이 없는 평화로운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안식일’은 하나의 시험이 끝나고 다음번 시험이 올 때까지의 잠시 동안의 평화로운 상태를 뜻합니다. 그 기간 동안 주님께서는 무슨 일을 하실까요? 우리에게 말씀을 읽어주시고, 말씀을 통해서 교리를 가르쳐주십니다. 오늘 주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교리가 바로 그것입니다. 주님이 가르치시는 교리는 어떤 것입니까? 삶의 다양한 상황에 맞게 진리를 올바르게 적용하는 지혜 같은 것입니다. 예를 들면,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 원론이라면, 원론에서 파생되는 수없이 많은 각론이 있습니다. 그 각론들이 주님께서 오늘 회당에서 가르쳐 주시는 교리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사야서 61장을 펴시고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17절로 19절입니다.

 

17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주님께서는 당신 스스로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 하십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말은, ‘선 자체이신 여호와로부터 잉태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기름’은 선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신성한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 그럼에도 고대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 많았습니다. 예를 들면 왕이나 선지자, 제사장 같은 사람들이 직분을 받을 때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이 주님을 표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주님은 당신 스스로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오신 이유에 대해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십니다. 그러면 가난한 자와 포로 된 자는 누구며, 눈먼 자는 누구일까요? 기본적으로 이들은 모두 선과 진리에 대해 무지하여 악과 거짓에 빠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다르게 부르셨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영적 상태가 조금씩 다르고, 그러므로 구원의 처방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선 ‘가난한 자’는 자신에게 진리와 선의 지식이 없다는 것을 알고, 그래서 진리와 선에 대한 지식 알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면,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음식 부스러기를 먹고자 했던 나사로와 같은 사람이 가난한 자입니다. 그에 비해 ‘눈먼 자’는 진리와 선을 모르기는 가난한 자와 마찬가지이지만, 주님을 믿지도 않고 진리를 갈망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가르쳐 주면 순순히 받아들이는 자입니다. ‘포로 된 자’는 악과 거짓의 유혹에 넘어가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그들 중에는 진리를 전혀 몰라 그렇게 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알면서 악에 빠진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두 포로 된 사람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눌린 자’는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거짓이 거짓인 줄 모르고, 진리가 진리인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진리를 분별할 줄 모르는 사람이 눌린 자입니다. 이들은 진리를 알고자 하지 않습니다. 거짓을 진리로 알고 신봉하면서, 진리를 말하면 배척하고 심지어 모독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눌린 자입니다. 비슷한 것 같지만 조금씩 다르지요?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스스로 깨닫고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 오셔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만이 참 빛이시기 때문이지요. 참 빛이 있어야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신 것입니다.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이 주님의 능력을 통해서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20절입니다.

 

20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0절에서 주님은 책을 덮어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셨습니다. 여기서 ‘맡은 자’는 영어 성경의 표현으로는 minister, 즉 ‘섬기는 자’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겉 사람 안으로 오실 때, 반드시 섬기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섬기는 자는 우리 안에 있는 주님에 대한 믿음과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것이 주님을 섬기는 자입니다. 그 섬기는 자들은 주님께서 우리 속으로 오시는 것을 원하며, 그리고 주님께서 오실 때 적극적으로 시중을 듭니다. 주님은 우리 의사와 관계없이 말씀을 읽어주시거나 교리를 가르쳐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 안의 섬기는 자들이 성경을 주님께 갖다 드려야 읽어주시고요, 그리고 그때 그 말씀에 있는 내적 의미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일어나는 주님의 모든 선한 역사는, 주님과 우리 안에 있는 섬기는 자와의 교감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섬기는 자가 성경을 가져다 드리자 주님께서 성경을 읽으셨고, 성경을 다 읽고 덮으셨을 때, 다시 섬기는 자에게 맡기시고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여러 번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앉다, 서다, 걷다라는 말은 우리 내면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을 나타냅니다. ‘앉는 것’은 가장 내적인 상태, 그러니까 의지의 상태를 나타내고요, ‘서는 것’은 의지로부터 무엇인가를 의도하는 것을, 그리고 ‘걷는 것’은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자리에 앉으셨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겉 사람의 의지 가운데 계신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겉 사람의 의지 가운데 계실 때, 겉 사람은 주님의 뜻에 따라 움직일 수 있습니다. 21절입니다.

 

21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주님은 회당에 모인 사람들에게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앉으셨다’는 말과 ‘너희 귀에 응하였다’는 말은 서로 연결되는 말씀입니다. ‘귀에 응하였다’는 것은 영어 성경 표현으로는 ‘귀에서 이루어졌다’입니다. ‘’는 아시는 바와 같이 순종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이 글이 너희 귀에 이루어졌다’라는 말씀은 주님의 가르침을 머리로 받아들이지 않고, 이제 의지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시험에서 이기고 주님께서 겉 사람 안으로 오실 때 이런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한 번이라도 시험을 이기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끝으로 22절입니다.

 

22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그들이 증언했다’는 것은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진리를 인정하고 고백했다는 뜻입니다. 또 사람들이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고 했는데, 이때 ‘요셉’은 신성한 인간이신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표상하는 요셉은 야곱의 아들 요셉이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아닙니다. 그러면 야곱의 아들 요셉과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같은 의미로 해석하는 이유는 뭘까요?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 이 사람은 야곱의 아들 요셉이고, 이 사람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이라고 구별하는 것은 세상 관점입니다. 그러나 천사들은 그가 야곱의 아들인지, 마리아의 남편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천사들은 그냥 요셉이라는 단어와 그 단어가 갖는 내적 의미에만 집중합니다.

 

※ 아래는 이런 이해를 돕는 글입니다.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에서 인용합니다.

 

나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다윗, 그리고 사도들이 방법을 통하지 않고, 자비에 의해 천국에 들어갔는지 천사들에게 물어보았다. 천사들은 대답했다. 그들 중 한 사람도 그렇게 천국에 간 사람은 없고, 모두 이 세상에서의 삶에 의해서 천국에 들어갔다. 우리는 그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 그들이라고 다른 사람보다 더 존경받지 않는다. 그들이 말씀 안에 영광스럽게 기록되어 있는 것은, 그들이 내적 의미로 주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주님의 신성과 신적 인성을 의미하고, 다윗은 주님의 신적 왕권을 의미한다. 사도들은 주의 신적 진리들을 의미한다. 사람이 말씀을 읽을 때, 천사들은 이 사람들 개인에 대해서는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그들의 이름은 천국에 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신 그 이름을 천사들은 방금 설명한 대로의 주님으로 이해하며, 따라서 천국에 있는 말씀(259항 참조)에는 그런 이름들이 나오지 않는다. 천국에 있는 말씀은 이 세상에 있는 성경 말씀의 내적 의미이기 때문이다. (HH.526:4, 김은경 역) //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요셉과 야곱의 아들 요셉은 천사들이 볼 땐 같은 의미인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고 한 것은, 세상 시각에서 볼 때는, ‘목수 요셉의 아들에게 어떻게 이런 지혜가 있느냐?’라는 뜻입니다만, 그러나 내적 의미로 보면 신성한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모든 진리가 나온다는 뜻입니다. 요셉은 신성한 인간이신 주님을 나타내고, 아들은 진리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그분으로부터 모든 진리와 선이 나온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것도 속 사람이 아니라 겉 사람이 인정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광야에서 돌아오신 주님은 제일 먼저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지역에 있는 나사렛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주님의 그런 모습은 우리가 시험에서 이길 때마다 주님께서 겉 사람 안으로 오셔서 그곳에 교회를 세우시는 모습입니다. 주님은 겉 사람의 의지 안에 말씀의 진리를 심는 방법으로 교회를 세우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 갈릴리 사람들에게 말씀을 읽어주시면서 ‘이 글이 너희 귀에 이루어졌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귀에 이루어졌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이 의지 가운데 심어졌다는 뜻입니다. 시험을 이긴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주신 말씀은 어떤 것입니까?

 

첫째는 모든 진리가 주님의 신적 인성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진리는 최초의 신성이신 여호와 하나님으로 나와, 마지막 신성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올 때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들은 세상 자연적인 것 안에 담길 때 가장 힘이 있습니다. 그 자연적인 것이 바로 주님의 인성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두 번째 말씀은, 주님의 인성으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능력이 모든 가난한 자와 눈먼 자, 포로 된 자와 억눌린 자를 구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눈먼 자, 포로 된 자, 억눌린 자가 자기와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어느 만큼은 가난한 자이고 눈먼 자이며, 그리고 포로 된 자이며 억눌린 자입니다. 그것을 알게 하시는 이가 주님이시고, 치유하시는 이 또한 주님이십니다. 주님의 그런 능력이 우리 성도님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영원히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35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 36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3:35-36)

 

아멘

 

원본

2017-07-02(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22(D4)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022. 2023-03-22(D4)-매일예배(2439, 눅4,14-22), ‘예수께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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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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