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And God said, Let there be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distinguish between the day and the night; and let them be for signs, and for seasons, and for days, and for years. And let them be for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give light upon the earth; and it was so. And God made two great luminaries, the greater luminary to rule by day, and the lesser luminary to rule by night; and the stars. And God set them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give light upon the earth;(창1:14-17)
AC.30
‘큰 광명체들’(great luminaries)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먼저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새로 창조되고 있는 사람들 안에서 신앙이 어떻게 자라 가는지를 알지 않으면 분명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신앙의 본질과 생명은 오직 주님이시며,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생명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는 주님 친히 요한복음에서 밝히신 바입니다.What is meant by “great luminaries” cannot be clearly understood unless it is first known what is the essence of faith, and also what is its progress with those who are being created anew. The very essence and life of faith is the Lord alone, for he who does not believe in the Lord cannot have life, as he himself has declared in John: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3:36)He that believeth on the son hath eternal life, but he that believeth not on the son shall not see life, but the wrath of God shall abide upon him(John 3:36).
[2]새로 창조되고 있는 사람들 안에서 신앙이 자라 가는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그들에게 생명이 없습니다. 생명은 선과 진리 안에만 있고, 악과 거짓 안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다음에 그들은 신앙을 통해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데, 먼저는 기억에 속한 신앙, 곧 단지 지식에 불과한 신앙인 기억 지식의 신앙을 받습니다. 다음에는 이해에 속한 신앙, 곧 이성적 신앙을 받고, 마지막으로는 마음에 속한 신앙, 곧 사랑의 신앙이며 구원의 신앙을 받습니다. 앞의 두 종류의 신앙은 3절로 13절에서 생명 없는 것들로 표현되며, 사랑에 의해 생명을 얻는 신앙은 20절로 25절에서 생명 있는 것들로 표현됩니다. 이 때문에 여기서는 이제 처음으로 사랑과 거기서 나온 신앙을 다루는데, 이것들이 바로 ‘광명체들’(luminaries)입니다. 사랑은 ‘낮을 다스리는 큰 광명체’(the greater luminary which rules by day)이고, 사랑에서 나온 신앙이 ‘밤을 다스리는 작은 광명체’(the lesser luminary which rules by night)입니다. 이 두 광명체는 하나가 되어야 하므로, ‘광명체들이 있어’(Let there be luminaries, [sit luminaria])라는 라틴어 단수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라틴어 복수 표현인 [sint luminaria]가 아니고 말입니다.The progression of faith with those who are being created anew is as follows. At first they have no life, for it is only in the good and the true that there is life, and none in the evil and the false; afterwards they receive life from the Lord by faith, first by faith of the memory, which is a faith of mere knowledge [fides scientifica]; next by faith in the understanding, which is an intellectual faith; lastly by faith in the heart, which is the faith of love, or saving faith. The first two kinds of faith are represented from verse 3 to verse 13, by things inanimate, but faith vivified by love is represented from verse 20 to verse 25, by animate things. For this reason love, and faith thence derived, are now here first treated of, and are called “luminaries”; love being “the greater luminary which rules by day”; faith derived from love “the lesser luminary which rules by night”; and as these two luminaries ought to make a one, it is said of them, in the singular number, “Let there be luminaries” [sit luminaria], and not in the plural [sint luminaria].
[3]속 사람 안에서의 사랑과 신앙은 겉 사람의 육체적 차원에서의 열과 빛과 같으므로, 전자는 후자로 표현됩니다. 이런 이유로 광명체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set in the expanse of heaven)라고 하는데, 이는 속 사람 안에 놓였다는 뜻입니다. 큰 광명체는 의지 안에, 작은 광명체는 이해 안에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이듯이, 의지와 이해 안에서 그렇게 나타날 뿐입니다. 의지를 사랑으로 움직이게 하고, 이해를 진리 또는 신앙으로 비추는 것은 오직 주님의 자비뿐입니다.Love and faith in the internal man are like heat and light in the external corporeal man, for which reason the former are represented by the latter. It is on this account that luminaries are said to be “set in the expanse of heaven,” or in the internal man; a great luminary in its will, and a lesser one in its understanding; but they appear in the will and the understanding only as does the light of the sun in its recipient objects. It is the Lord’s mercy alone that affects the will with love, and the understanding with truth or faith.
해설
이 글은 창세기1장의 넷째 날, 곧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가 등장하는 장면을 신앙의 성숙 단계와 직접 연결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장면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전제를 제시하는데, 그것은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신앙은 어떤 교리 체계나 인간의 심리적 태도가 아니라, 그 생명과 본질이 오직 주님 자신이라는 점을 여기서 분명히 선언합니다. 주님과 분리된 신앙은 형태는 있을 수 있어도 생명이 없습니다.
이 점에서 요한복음3장의 인용은 단순한 성경 증거가 아니라, 전체 논증의 중심축입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과 연결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생명이 선과 진리 안에만 있고, 악과 거짓 안에는 전혀 없다고 단언합니다. 이것은 도덕적 평가가 아니라, 존재론적 진술입니다. 생명은 주님에게서만 오기 때문에, 주님과 분리된 악과 거짓은 스스로 생명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어지는 부분에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자라 가는 과정을 매우 세밀하게 구분합니다. 첫 단계는 기억에 속한 신앙입니다. 이것은 지식의 형태를 띤 신앙으로, 사람이 배워서 알고 있는 수준의 신앙입니다. 이 단계에서 신앙은 아직 삶을 움직이지 못하며, 생명도 없습니다. 다음 단계는 이해에 속한 신앙으로, 사람이 그 내용을 이성적으로 파악하고 동의하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이 단계 역시 아직은 지성의 차원에 머무르며, 마음을 완전히 바꾸지는 못합니다.
마지막 단계에서 비로소 신앙은 마음에 속한 것이 됩니다. 이는 사랑의 신앙이며, 삶을 실제로 움직이는 신앙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구원의 신앙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이 단계에서 신앙이 선과 결합하여 생명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앞선 두 단계가 ‘생명 없는 것들’로 표현되는 이유는, 그것들이 준비 단계이기 때문이지 무가치해서가 아닙니다. 준비 없이는 결합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 구조는 창세기 본문과 정확히 맞물립니다.3절부터13절까지는 빛, 궁창, 땅과 물, 풀과 나무 등 아직 동물이 등장하지 않는 단계로, 생명 없는 것들로 묘사됩니다. 반면20절 이후에는 물고기와 새, 짐승과 사람이 등장하는데, 이는 사랑에 의해 신앙이 생명을 얻은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광명체들은 바로 이 전환 지점에서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다루어집니다.
사랑과 신앙이 각각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로 불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은 주된 것이며, 신앙은 사랑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종속적인 위치를 가집니다. 그러나 이 둘은 분리될 수 없고 반드시 하나를 이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광명체들’이라는 복수가 아니라, 단수 표현을 사용합니다. 라틴어 표현에서는 이게 명료하며, 각각[sit luminaria,단수]와[sint luminaria,복수]로 구분됩니다. 이는 사랑과 신앙이 두 개의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하나의 생명 안에서 두 기능으로 작동함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관계를 열과 빛의 비유로 설명합니다. 겉 사람의 육체 세계에서 열과 빛이 각각 생명과 인식을 담당하듯이, 속 사람에서는 사랑이 열과 같고, 신앙이 빛과 같습니다. 열 없는 빛은 차갑고 생명을 주지 못하며, 빛 없는 열은 방향을 잃습니다. 이 둘이 함께 있을 때만 생명이 유지됩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점은, 이 모든 과정의 주체가 인간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의지를 사랑으로 움직이게 하고, 이해를 진리로 밝히는 것은 인간의 결단이나 훈련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자비입니다. 인간은 다만 수용체로서, 빛과 열이 들어와 작용하도록 자리를 내어줄 뿐입니다. 이 인식이 바로 넷째 날의 핵심이며, 이후 다섯째 날과 여섯째 날의 생명 충만으로 나아가는 기초가 됩니다.
심화
1.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이듯이, 의지와 이해 안에서 그렇게 나타날 뿐’
위 AC.30 분문 [3], ‘그러나 그것들은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이듯이, 의지와 이해 안에서 그렇게 나타날 뿐입니다.’(but they appear in the will and the understanding only as does the light of the sun in its recipient objects.),이게 무슨 뜻인가요?
AC.30 [3]의 이 문장은 스베덴보리 인간론의 핵심 원리 하나를 아주 압축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문장을 그대로 보면 ‘선과 진리는 의지와 이해 안에서 나타나지만, 그것은 태양빛이 어떤 대상에 비치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in its recipient objects’, 곧 ‘빛을 받아들이는 대상’이라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의지와 이해가 선과 진리의 ‘근원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그릇’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자연적인 비유부터 생각해 보면 이해가 쉬워집니다. 태양 빛이 창문, 물, 나뭇잎, 돌 등에 비치면 각각 다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물 위에서는 반짝이고, 잎에서는 녹색으로 보이고, 거울에서는 강하게 반사됩니다. 그래서 마치 그 빛이 그 물건들에서 나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빛의 근원은 그 물건들이 아니라 ‘태양’입니다. 물건들은 단지 빛을 ‘받아들이고 드러내는 매개체’일 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 마음에서 선과 진리가 나타나는 방식도 바로 이와 같다고 설명합니다.
이 비유를 인간의 의지와 이해에 적용해 보면 이런 뜻이 됩니다. 사람이 어떤 선한 생각을 하거나 진리를 이해할 때, 그것은 마치 그 생각과 선이 ‘자기 안에서 생겨난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실제로 선과 진리의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신적 선과 신적 진리’입니다. 인간의 이해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그릇이고, 의지는 선을 받아들이는 그릇입니다. 그래서 선과 진리는 의지와 이해 안에서 나타나지만, 그것은 마치 태양 빛이 물체 안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또 하나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만약 사람이 선과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확신해 버리면, 인간은 쉽게 ‘자기 의로움’이나 ‘자기 지혜’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선과 진리를 행하고 이해할 때 그것이 자기 안에서 나타나기는 하지만, 실제 근원은 ‘주님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앞서 나누었던 ‘inanimate’와 ‘animate’의 구분과도 연결됩니다. 사람이 선을 행하더라도 그것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는 동안에는 아직 완전히 살아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설명이 바로 여기에서 나옵니다.
실제 예를 하나 들어 보면 이해가 더 분명해집니다. 어떤 사람이 어려운 상황에서 누군가를 도와주려고 결심합니다. 그때 그는 ‘내가 이렇게 선한 결정을 했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 결정은 그의 의지와 이해 안에서 일어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그 선한 마음과 판단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그 사람의 마음을 통해 나타난 것’입니다. 그 사람은 그 빛을 받아들이는 ‘대상’이고, 그 빛 자체는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래서 AC.30 [3]의 문장은 결국 인간과 주님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인간의 의지와 이해는 선과 진리의 ‘근원이 아니라 수용 기관’입니다. 선과 진리는 그 안에서 나타나지만, 그것은 마치 태양 빛이 사물 안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방식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선과 진리를 실제로 행하고 이해하면서도 동시에 ‘그 근원이 주님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는 중요한 원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라틴어에서 ‘homo’와 ‘vir’는 모두 한국어로 번역하면 흔히 ‘사람’ 또는 ‘남자’로 번역될 수 있지만, 원래 의미와 뉘앙스는 상당히 다릅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특히 스베덴보리의 저작, 예컨대 ‘Arcana Coelestia’나 ‘Heaven and Hell’을 읽을 때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성경의 단어 선택이 단순한 문체상의 차이가 아니라 ‘영적 상태의 차이’를 표현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곳에서는 ‘homo’를 쓰고, 어떤 곳에서는 ‘vir’를 쓰는데, 이것은 단순한 문법상의 선택이 아니라 인간의 내적 상태와 관련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먼저 ‘homo’는 가장 기본적인 의미로 ‘인간’, ‘사람’, ‘인류’를 뜻하는 말입니다. 남자만을 의미하지 않고 여자도 포함하는 ‘human being’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라틴어에서 ‘homo’는 인간 종 전체를 가리키거나,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를 말할 때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homo’는 ‘사람’이라는 존재가 하나님에게서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존재라는 점을 강조할 때 쓰입니다. 스베덴보리도 이 단어를 매우 자주 사용하며, 특히 ‘인간이라는 존재가 무엇인가’를 말할 때 ‘homo’를 씁니다. 예컨대 인간이 ‘의지와 이해’를 가진 존재라는 점, 또는 인간이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을 말할 때 ‘homo’라는 단어가 사용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homo’는 ‘인간 일반’, ‘영적 존재로서의 인간’,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존재’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vir’는 훨씬 좁은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이 말은 원래 ‘성인 남자’, ‘남성’, 또는 ‘용기 있는 남자’를 의미합니다. 고전 라틴어에서 ‘vir’는 단순히 남성이라는 뜻뿐 아니라 ‘용기’, ‘덕성’, ‘남자다움’을 가진 사람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vir’에서 ‘virtus’(덕, 용기)라는 단어가 나오기도 합니다. 성경 라틴어에서도 ‘vir’는 보통 ‘남자’, ‘남편’, 또는 ‘특정한 인물’을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vir’는 종종 ‘여자와 대비되는 남자’ 또는 ‘특정한 인격적 주체’를 강조할 때 사용됩니다.
스베덴보리의 해석에서는 이 차이가 더욱 의미를 갖습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homo’는 인간 전체, 곧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성’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시 말해 ‘homo’는 남녀를 포함한 ‘사람이라는 존재’를 가리키며, 더 깊은 의미에서는 ‘교회에 속한 인간’, ‘주님의 형상과 모양을 받을 수 있는 인간’을 의미합니다. 반면 ‘vir’는 보통 ‘이해 또는 진리의 측면’을 나타낼 때 사용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종종 남자를 ‘이해 또는 진리’, 여자를 ‘의지 또는 선’과 상응한다고 설명하는데, 이 맥락에서 ‘vir’는 진리를 담당하는 측면, 즉 이해의 기능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창1:26의 ‘사람을 만들자’라는 구절에서 사용되는 ‘사람’은 라틴어로 ‘homo’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은 남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창2에서 ‘남자와 여자’가 구별되어 등장할 때는 ‘vir’와 ‘mulier’가 사용됩니다. 여기서는 남성과 여성의 구별이 강조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단순한 성별 구분이 아니라 ‘이해와 의지’, ‘진리와 선’의 관계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vir’는 종종 ‘진리의 사람’, ‘이해의 사람’을 의미하는 쪽으로 사용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진정한 인간’을 설명할 때입니다. 그는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이 진리를 알고 선을 사랑할 때 비로소 ‘homo’가 된다고 합니다. 즉 ‘homo’는 단순히 생물학적 인간이 아니라 ‘영적으로 인간다운 인간’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의 글에서는 ‘to become a man’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단순히 성장한다는 뜻이 아니라 ‘참된 인간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homo’는 인간 존재의 본질을 가리키는 단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homo’는 ‘인간 일반’, ‘인류’, ‘남녀를 포함한 사람’, 더 깊게는 ‘주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된 인간 존재’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반면 ‘vir’는 ‘남성’, ‘남편’, 또는 상징적으로 ‘진리와 이해의 측면’을 강조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글이나 라틴어 성경을 읽을 때 어떤 구절에서 ‘homo’가 나오고 어떤 구절에서 ‘vir’가 나오는지를 보면, 그 구절이 ‘인간 전체’를 말하는지, 아니면 ‘특정한 남성적 또는 진리의 측면’을 말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이런 단어 선택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말씀의 가장 작은 부분까지도 의미를 담고 있다는 스베덴보리의 관점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21, ‘다 찬양하여라’와, 찬66, ‘다 감사드리세’입니다.
오늘은 창1 네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9절로 13절, AC 글 번호로는 27번에서 29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9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10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11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12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1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창1:9-13)
이 본문을
셋째 날,세 번째 상태
라는 제목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시티아’(Arcana Coelestia)에 주목하여 귀 기울이고자 합니다.
이렇게 해서 창1 셋째 날, 곧 거듭남의 세 번째 상태를 마칩니다. 이 ‘셋째 날, 세 번째 상태’에 나온 중요한 표현, 개념들은 속 사람과 겉 사람 간 ‘유입과 저장의 질서’, ‘기억 지식’, ‘마른 땅’, ‘물’, ‘바다’ 및 오늘 본문에 나오는 ‘풀’, ‘씨 맺는 채소’,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 그리고 ‘inanimate’, ‘living soul’, ‘repentance’ 등입니다. 이들 개념이 각 절 본문 및 해설, 그리고 심화에 빠짐없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으니 부디 거듭 읽고, 또 읽고 하여 확실히 이해, 안 보고도 타인에게 설명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공지입니다. 어느덧 AC 리딩 및 해설 병행 주일예배 설교가 자릴 잡아가는 중인데요, 지난주부터이지만, 앞으로 ‘AC본문 번역-해설-심화’로 구성된 원고를 리딩하는 형태의 주일설교로 쭉 갈 것 같습니다. 해설에 심화까지 곁들이다 보니 이 정도면 그냥 읽기만 해도 정말 귀한 주일설교 한 편 한 편이 될 것 같기 때문입니다. 다만 주일예배는 또 시간의 제한도 고려해야 해서 그 주 범위에 해당하는 모든 글을 다 다룰 수는 없고, 그래서 오늘처럼 맨 끝 AC 글 한 편만 리딩하고자 합니다. 다만 그 앞 범위 글들은 오늘처럼 모두 프린트해서 나눠드리고요. 프린트가 없어도 제 블로그에 글 번호별로 계속 올리고 있으니 참고하세요.
11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12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1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And God said, Let the earth bring forth the tender herb, the herb yielding seed, and the fruit tree bearing fruit after its kind, whose seed is in itself, upon the earth; and it was so. And the earth brought forth the tender herb, the herb yielding seed after its kind, and the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was in itself, after it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third day.(창1:11-13)
AC.29
‘땅’(earth), 곧 사람이 이렇게 주님에게서 오는 천적 씨앗을 받을 준비가 되고, 선과 진리에 속한 어떤 싹을 낼 수 있는 상태가 되면, 주님은 먼저 아주 연약한 것을 돋아나게 하시는데, 이것이 바로 ‘풀’(tender herb)입니다. 다음으로는 더 괜찮은 것이 나오는데, 이것은 그 안에 씨를 지니고 있어 ‘씨 맺는 채소’(herb yielding seed)라고 하지요. 마지막으로는 선한 것이 나와 열매를 맺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이며, 이 모든 것은 ‘각기 종류대로’입니다. 거듭나는 중인 사람은 처음에는 자기가 행하는 선과 자기가 말하는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모든 선과 모든 진리는 주님에게서만 오지요. 그러므로 그것들이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여기는 사람은 아직 참된 신앙의 생명을 갖고 있지 않은 상태인데, 그렇다 하더라도 그는 나중에 그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아직 그것들이 주님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믿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며, 다만 신앙의 생명을 받아들일 준비 상태에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 상태는 여기서 생명 없는(inanimate) 것들로 표현되고, 그다음에 오는 신앙의 생명 상태는 생명 있는(animate) 것들로 표현됩니다.When the “earth,” or man, has been thus prepared to receive celestial seeds from the Lord, and to produce something of what is good and true, then the Lord first causes some tender thing to spring forth, which is called the “tender herb”; then something more useful, which again bears seed in itself, and is called the “herb yielding seed”; and at length something good which becomes fruitful, and is called the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 each according to its own kind. The man who is being regenerated is at first of such a quality that he supposes the good which he does, and the truth which he speaks, to be from himself, when in reality all good and all truth are from the Lord, so that whosoever supposes them to be from himself has not as yet the life of true faith, which nevertheless he may afterwards receive; for he cannot as yet believe that they are from the Lord, because he is only in a state of preparation for the reception of the life of faith. This state is here represented by things inanimate, and the succeeding one of the life of faith, by animate things.
[2] 씨를 뿌리는 이는 주님이시며, 씨는 주님의 말씀이고, 땅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주님 자신 친히 밝혀 주셨습니다.(마13:19-24, 37-39; 막4:14-21; 눅8:11-16)The Lord is he who sows, the “seed” is his Word, and the “earth” is man, as he himself has deigned to declare (Matt. 13:19–24, 37–39; Mark 4:14–21; Luke 8:11–16).
19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려진 자요20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21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22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23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24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37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38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39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마13:19-24, 37-39)
14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15말씀이 길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16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17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18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19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20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막4:14-20)
11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12길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13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14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15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눅8:11-15)
같은 뜻으로 주님은 이렇게도 설명하십니다.To the same purport he gives this description:
26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27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28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막4:26-28)So is the kingdom of God, as a man when he casteth seed into the earth, and sleepeth and riseth night and day, and the seed groweth and riseth up, he knoweth not how; for the earth bringeth forth fruit of herself, first the blade, then the ear, after that the full corn in the ear(Mark 4:26–28).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는 가장 보편적 의미로는 전체 천국을 뜻하고, 덜 보편적으로는 주님의 참된 교회를, 가장 개별적 의미로는 참된 신앙에 속한 사람, 곧 신앙의 삶으로 거듭난 각 사람을 뜻합니다. 이런 이유로 이러한 사람을 ‘천국’(heaven)이라 하는데, 이는 천국이 그 사람 안에 있기 때문이며, 또 그를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라고도 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그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주님은 누가복음에서 친히 이렇게 가르치십니다.By the “kingdom of God,” in the universal sense, is meant the universal heaven; in a sense less universal, the true church of the Lord; and in a particular sense, everyone who is of true faith, or who is regenerate by a life of faith. Wherefore such a person is also called “heaven,” because heaven is in him; and likewise the “kingdom of God,” because the kingdom of God is in him, as the Lord himself teaches in Luke:
20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21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0, 21)Being demanded of the Pharisees when the kingdom of God should come, he answered them, and said, The kingdom of God cometh not with observation; neither shall they say, Lo here! or, Lo there! for behold, the kingdom of God is within you(Luke 17:20–21).
이것이 사람 거듭남의 세 번째 연속 단계로서, 곧 회개(repentance)의 상태이며, 이 역시 그늘에서 빛으로, 곧 저녁에서 아침으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13절에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라고 하는 것입니다.This is the third successive stage of the regeneration of man, being his state of repentance, and in like manner proceeding from shade to light, or from evening to morning; wherefore it is said (verse 13),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third day.”
해설
이 글은 창세기1장에서 처음으로 ‘생명처럼 보이는 것’이 등장하는 장면을 인간 거듭남의 실제 단계와 연결합니다. 앞선 단계들에서 사람은 빛을 인식하고,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구별되며, 지식이 기억 속에 모이는 준비를 거쳤습니다. 이제 그 준비 위에서 비로소 무엇인가가 ‘자라기’ 시작합니다. 이 성장은 단번에 열매로 나타나지 않고, 연한 풀에서 시작해 씨 맺는 채소를 거쳐 열매 맺는 나무에 이르는 점진적 과정으로 묘사됩니다.
연한 풀은 거듭남 초기에 나타나는 매우 미약한 선의 움직임을 뜻합니다. 이는 아직 삶을 이끌 만큼 강하지도, 분명하지도 않지만, 분명히 이전에는 없던 변화입니다. 그다음 단계인 씨 맺는 채소는, 선이 어느 정도 유용성을 갖기 시작하고, 그 안에 다시 진리를 낳을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상태를 가리킵니다. 마지막으로 열매 맺는 나무는, 선이 안정되어 실제 삶 속에서 반복적으로 선한 행위를 낳는 상태입니다. 이 모든 과정은 ‘각기 자기 종류대로’ 이루어지는데, 이는 거듭남이 사람마다 동일한 외형을 갖지 않음을 뜻합니다.
중요한 점은, 이 단계 전체에서 사람이 여전히 착각 속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행하는 선과 자기가 말하는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생각을 즉시 잘못이라고 정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것이 반드시 거쳐야 할 상태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아직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금 신앙의 생명을 받기 위한 준비 단계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 단계는 ‘생명이 없는 것들’로 표현됩니다. 풀과 채소와 나무는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기서는 아직 참된 의미에서의 신앙의 생명, 곧 주님에게서 직접 나오는 생명이 완전히 작동하는 단계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 단계는 헛된 것이 아니라, 다음 단계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토양입니다. 주님은 사람이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 느끼는 그 선과 진리를 통해서도, 실제로는 그를 더 깊은 신앙의 생명으로 이끄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원리를 주님의 비유로 확증합니다. 씨를 뿌리는 이는 주님이시고, 씨는 주님의 말씀이며, 땅은 사람입니다. 씨가 자라나는 과정에서 사람은 ‘어떻게 되는지 알지 못합니다’. 이것은 거듭남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변화는 일어나지만, 그 메커니즘은 인간의 통제와 인식 바깥에서 작동합니다. 사람은 다만 땅으로서, 수용체로서 그 과정을 통과할 뿐입니다.
마가복음의 비유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성장의 순서입니다. 먼저 풀잎, 다음에 이삭, 그다음에 충만한 알곡이 나옵니다. 이는 스베덴보리가 창세기에서 풀, 채소, 나무의 순서를 설명하는 것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즉,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는 이미 복음서에서 거듭남의 비유로 다시 해석되고 있습니다.
이 글의 후반부에서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의미를 세 층위로 설명합니다. 천국 전체, 참된 교회, 그리고 각 개인입니다. 특히 마지막 의미가 중요합니다. 참된 신앙의 삶으로 거듭난 사람 자신이 ‘천국’이며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를 외적 제도나 미래 사건으로만 이해하는 관점을 근본적으로 뒤집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관찰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 세워지는 질서입니다.
그래서 이 단계는 회개(repentance)의 상태라고 불립니다. 회개는 단순히 잘못을 뉘우치는 행위가 아니라, 선과 진리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서 주님으로 옮겨 가는 방향 전환입니다. 이 방향 전환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분명히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단계 역시 저녁에서 아침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며, 셋째 날로 불립니다.
AC.29는 거듭남이 얼마나 인내를 요구하는 과정인지를 보여 줍니다. 주님은 처음부터 열매를 요구하지 않으시고, 아주 연한 풀 하나가 돋아나는 것을 귀히 여기십니다. 이 점에서 이 단락은 신학적으로 깊을 뿐 아니라, 목회적으로도 매우 큰 위로를 줍니다.
심화
1. ‘tender herb’, ‘herb yielding seed’ 및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에 대한 실제 예
AC.29의 ‘tender herb’, ‘herb yielding seed’ 및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에 대한 실제 예를 들어주세요. 거듭남 가운데 있는 한 개인에 있어 어떤 게 ‘tender herb’이고, 어떤 게 ‘herb yielding seed’인지, 그리고 어떤 모습이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인지 말이지요.
AC.29에서 나오는 ‘tender herb’, ‘herb yielding seed’,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는 식물 비유이지만, 실제로는 ‘거듭남 과정에서 선과 진리가 자라는 단계’를 설명하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의 식물들을 인간 영혼 안에서 자라는 영적 상태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실제 한 사람의 신앙 경험 속에서 보면 훨씬 이해가 쉬워집니다.
먼저 ‘tender herb’입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막 돋아난 연한 싹 같은 상태’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사람이 아직 진리를 체계적으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떤 선한 감정이나 진리를 향한 마음이 처음으로 생깁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어느 날 설교를 듣다가 ‘그래,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옳지 않다’라는 마음이 처음으로 생깁니다. 또는 ‘내 삶이 조금은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아직 그 사람은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깊이 알지 못합니다. 그저 마음이 조금 움직였을 뿐입니다. 이런 상태가 바로 ‘tender herb’입니다. 어린아이의 순진함이나, 신앙 초기에 생기는 막연한 선한 마음도 여기에 속합니다. 아직 약하고 쉽게 흔들리지만 ‘생명의 시작’이 이미 있는 상태입니다.
그다음이 ‘herb yielding seed’입니다. 여기서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진리가 조금씩 이해되고 그것이 다시 다른 진리를 낳을 수 있는 상태’가 됩니다. 예를 들어 아까의 사람을 생각해 보면, 처음에는 막연히 ‘미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거나 말씀을 배우면서 ‘왜 미워하면 안 되는지’, ‘주님이 왜 사랑을 말씀하셨는지’를 조금씩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진리는 또 다른 생각을 낳습니다. ‘그러면 나는 직장에서 이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내 가족에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식으로 진리가 계속 확장됩니다. 이것이 바로 ‘seed’를 가진 상태입니다. 즉 ‘한 진리가 다른 진리를 낳는 상태’입니다. 목회적으로 보면 성도들이 말씀을 듣고 삶 속에서 적용하기 시작하는 단계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마지막이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진리가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삶의 성품이 됩니다’. 이제 그 사람은 ‘사람을 미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리를 생각해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렇게 행동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자신을 공격해도 이전처럼 바로 분노가 올라오는 것이 아니라 먼저 이해하려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그런 행동이 그 사람에게서 ‘열매처럼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여기서 ‘fruit’는 실제 선한 행동과 삶의 열매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seed is in itself’라는 표현은 그 선이 다시 다른 선을 낳을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즉 그 사람의 삶 자체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고 새로운 선을 낳는 상태입니다. 예를 들어 그 사람의 태도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변화되거나, 그의 삶이 다른 사람들에게 신앙의 본보기가 되는 경우입니다.
어떤 성도가 처음 교회에 나와 말씀을 들으면서 마음이 따뜻해지고 ‘사람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이 ‘tender herb’입니다. 그다음 그는 말씀을 배우면서 왜 사랑과 봉사가 중요한지 이해하게 되고, 구체적으로 교회 봉사나 이웃 돕기에 참여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herb yielding seed’입니다. 시간이 더 지나면서 그는 봉사를 의무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기쁨으로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삶은 주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을 줍니다. 이것이 ‘tree bearing fruit’의 상태입니다.
중요한 점은 이 세 단계가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성장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작은 싹처럼 시작하고, 그다음에는 진리가 확장되며, 마지막에는 삶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가 식물 비유를 사용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입니다. 식물처럼 영적 생명도 ‘점진적으로 자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AC.29의 세 표현을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tender herb’는 선과 진리를 향한 ‘첫 마음의 싹’, ‘herb yielding seed’는 이해된 진리가 계속 ‘새 진리를 낳는 상태’,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는 그 진리가 삶 속에서 ‘선한 열매가 되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이 바로 이런 식으로 사람 안에서 자라난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2. ‘각기 종류대로’
‘각기 종류대로’라는 표현이 계속 나오는데요, 그냥 다양한 종류의 채소, 나무라는 단순한 의미만은 아니겠지요?
‘각기 종류대로’라는 표현은 창세기 1장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문자적으로만 보면 단순히 식물이 여러 종류로 나뉘어 있다는 뜻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표현을 훨씬 깊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종류’(kind, genus, species)라는 말은 단순한 생물학적 분류가 아니라 ‘선과 진리의 질서와 구별’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주님이 창조하시는 것은 무질서한 혼합이 아니라, 각각 고유한 성질을 가진 선과 진리들이 ‘자기 질서 속에서 자라도록 하는 것’입니다.
먼저 자연적인 차원에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자연 세계에서도 모든 생명은 ‘종류대로’ 번식합니다. 밀은 밀을 낳고, 포도는 포도를 낳습니다. 이것은 자연의 질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자연의 질서가 사실은 더 깊은 영적 질서를 반영한다고 말합니다. 즉 인간의 영적 삶에서도 ‘각 선과 진리는 그 고유한 성질에 따라 자라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랑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 친구 사이의 우정, 이웃을 돕는 자비,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 등이 모두 다릅니다. 이 사랑들은 서로 관련되어 있지만 동일하지 않습니다. 각각 고유한 성질과 역할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영적 의미에서 ‘각기 종류대로’입니다.
거듭남의 과정에서도 이 원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이 선을 배우고 진리를 받아들일 때, 그것들이 무질서하게 섞이면 건강한 영적 생명이 자라기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진리를 사랑하지만,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선한 감정은 있지만 진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상태를 ‘혼합’ 또는 ‘혼동’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사람을 거듭나게 하실 때는 선과 진리가 ‘자기 종류와 질서에 맞게 자라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창세기에서 계속 ‘각기 종류대로’라는 표현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실제 신앙생활에서도 이 원리를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진리를 배우는 기쁨이 먼저 자랍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이웃을 돕는 사랑이 먼저 자랄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는 경건한 예배의 마음이 강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서로 다른 ‘종류’의 선과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주님에게서 온 것이라면 각각의 자리에서 조화를 이루며 성장합니다. 이것이 ‘각기 종류대로 열매 맺는다’는 의미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의미는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이 섞이지 않는다는 원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선과 진리는 서로 결합하지만, 선과 악은 결합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영계에서는 모든 것이 결국 자기 ‘종류’에 따라 나뉘게 됩니다. 선한 사랑은 선한 사랑과 함께 있고, 이기적인 사랑은 그와 같은 것들과 함께 모입니다. 이 점에서도 ‘각기 종류대로’라는 표현은 단순한 식물 분류가 아니라 ‘영계의 근본 질서’를 나타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거듭나게 하실 때 모든 사람을 똑같은 모습으로 만들지 않으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지혜가, 어떤 사람에게는 자비가, 어떤 사람에게는 봉사의 마음이 더 두드러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주님에게서 온 선과 진리라는 공통된 뿌리 안에서 자랍니다. 이것이 바로 ‘각기 종류대로’라는 표현이 가리키는 깊은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 표현은 단순히 ‘여러 종류의 채소와 나무가 있다’는 자연 묘사가 아니라, ‘주님이 인간의 영적 삶을 질서 있게 자라게 하시는 방식’을 보여 주는 말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반복되는 이 표현은 결국 한 가지 중요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주님이 창조하시는 모든 생명은 무질서하게 섞이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고유한 성질과 자리 속에서 조화를 이루며 자라난다는 것입니다.
3.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 단계에서도 ‘생명 없는’(inanimate) 상태?
위 심화 1의 세 번째 단계인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 단계, 즉 ‘진리가 삶의 성품이 되며, 선한 행동이 열매처럼 자연스럽게 나오는’ 단계에서도 여전히 ‘생명 없는’(inanimate) 상태일 수가 있나요?
이 질문은 사실 창세기 1장 해석에서 매우 미묘하지만 핵심적인 지점을 건드립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 단계에서도 여전히 어느 정도 ‘inanimate’, 곧 완전히 살아 있는 상태는 아닐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창세기 해석 구조를 보면 이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흐름입니다.
먼저 ‘inanimate’라는 표현의 의미를 정확히 짚을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animate’와 ‘inanimate’는 단순히 활동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생명의 근원이 어디에 있다고 느끼느냐’의 문제입니다. 사람이 어떤 선한 일을 하고 진리를 말하며 실제 삶에서 선한 열매를 맺고 있어도, 그 사람이 그 선과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여긴다면’,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완전히 살아 있는 상태라고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생명은 오직 주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선이 아무리 아름다워 보일지라도, 그것이 여전히 ‘나의 선’이라는 의식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면 그 상태는 완전히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 ‘자기 생명처럼 보이는 상태’, 곧 어느 의미에서는 ‘inanimate’에 가까운 상태입니다.
이 점에서 창세기 1장의 식물 단계가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식물들을 설명할 때 ‘‘living soul’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대신 ‘herb’, ‘tree’, ‘fruit’ 같은 식물적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의도적인 것입니다. 식물은 생명이 있지만 ‘자기 스스로 움직이거나 의식적으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영적 의미에서, 사람이 선과 진리를 가지고 있고 실제로 선한 삶을 살고 있어도 아직 그 선이 ‘자유로운 사랑에서 살아 움직이는 상태까지는 이르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의 이 단계는 선이 존재하지만, 아직 완전히 ‘animate’ 상태는 아닌 단계로 이해됩니다.
어떤 성도가 오랜 신앙생활을 통해 매우 성실하고 선한 삶을 살고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정직하며 교회에서도 헌신적으로 봉사합니다. 그의 삶에는 분명히 ‘fruit’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이런 생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는 그래도 꽤 선하게 살아왔다’, ‘내가 이렇게 봉사해 왔다.’ 이것은 교만한 마음이라기보다 자연스러운 자기의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이 상태에서도 여전히 선의 근원이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있기 때문에’ 완전히 살아 있는 상태는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다음 단계로 이어지는 이유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식물 다음에 등장하는 것이 ‘‘living soul’, 즉 살아 있는 생명’입니다. 이것은 동물 단계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동물은 ‘사랑과 애정’(affection)을 상징합니다. 즉 사람이 선과 진리를 단순히 알고 실천하는 수준을 넘어, 그것을 ‘사랑 자체로 살기 시작할 때’ 비로소 진짜 ‘animate’ 상태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때 사람은 선을 행하면서도 그것이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 것이라는 걸 더 깊이 인식하게 됩니다.’
그래서 ‘tree bearing fruit’ 단계는 매우 중요한 단계이지만 아직 최종 단계는 아닙니다. 이 단계에서는 진리가 실제 삶의 열매로 나타나지만, 사람은 여전히 어느 정도는 ‘자기 자신이 그 선을 행한다고 느끼는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다음 단계로 들어가면 사람은 점점 더 분명히 깨닫습니다. ‘내가 하는 선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통해 하시는 선이구나.’ 그때 선은 더 이상 식물처럼 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사랑으로 살아 움직이는 생명’이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구조를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먼저 진리가 싹트는 단계가 있고, 그다음 진리가 열매를 맺는 삶의 단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이 완전히 살아 있는 생명이 되기 위해서는 그 선이 ‘사랑에서 나오고, 또한 주님에게서 온 것임을 인정하는 상태’로 들어가야 합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식물의 상징이 끝나고 ‘living soul’이 등장합니다.
사람은 선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이 아직 ‘내가 하는 선’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열매가 맺힌 단계이지만 아직 완전히 살아 있는 단계는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이 점점 더 빛 속으로 들어가면, 그 선이 주님에게서 온 것임을 알게 되고 그때 선은 진짜 생명처럼 살아 움직이게 됩니다. 창세기 1장의 식물에서 동물로 넘어가는 변화가 바로 이 차이를 보여 준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4. ‘갑작스런 repentance의 등장’
AC.29 두 번째 단락에, ‘This is the third successive stage of the regeneration of man, being his state of repentance,’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 부분이 좀 어리둥절합니다. 갑자기 repentance가 나오기 때문인데... 이게 어떻게 연결이 되는 건가요?
AC.29의 문맥을 처음 읽으면 앞에서는 식물 이야기—‘tender herb’, ‘herb yielding seed’, ‘tree bearing fruit’—를 하다가 갑자기 ‘repentance의 상태’라는 말이 등장하기 때문에 논리 점프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창세기 1장 해석 구조를 보면 이것은 갑작스러운 전환이 아니라 ‘앞 단계에서 준비된 상태의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이 연결을 이해하려면 창세기 1장에서 말하는 거듭남의 초기 단계들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의 첫 부분을 인간 거듭남의 초기 과정으로 설명하면서 대략 이런 흐름을 말합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완전히 혼돈과 어둠 속에 있습니다. 그다음 진리의 빛이 조금씩 들어옵니다. 그리고 진리와 거짓이 분리되기 시작합니다. 이런 과정을 지나면 사람 안에 ‘진리를 받아들이는 상태’, 곧 식물로 상징되는 단계가 나타납니다. 바로 여기서 ‘herb’와 ‘tree’가 등장합니다. 즉 사람 안에 처음으로 선과 진리의 싹이 나타나는 단계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repentance의 상태’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처음으로 진리를 받아들이고 선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할 때 반드시 함께 일어나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상태를 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했던 것들, 자신의 생각과 삶이 괜찮다고 여겼던 것들이 진리의 빛 속에서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 순간에 사람은 처음으로 ‘자기 삶을 돌아보고 바꾸려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repentance입니다.
여기서 repentance라는 말을 오늘날 흔히 생각하는 의미—큰 죄를 뉘우치며 눈물로 회개하는 사건—으로 이해하면 연결이 어려워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repentance는 훨씬 더 기본적인 의미입니다. 그것은 ‘자기 삶을 돌아본 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보고, 그것을 바꾸려는 의지’입니다. 다시 말해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이 자신의 삶을 그 진리에 맞추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AC.29의 식물 비유와 repentance는 실제로 매우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tender herb’는 사람이 처음으로 진리를 듣고 마음이 움직이는 상태입니다. ‘herb yielding seed’는 그 진리가 생각 속에서 자라 다른 진리를 낳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tree bearing fruit’는 그 진리가 실제 삶 속에서 행동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이렇게 진리에 따라 삶을 바꾸기 시작하는 바로 그 과정이 ‘repentance’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식물 단계 전체를 ‘repentance의 상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씀을 듣다가 ‘나는 지금까지 너무 자기중심적으로 살았구나’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듭니다. 이것이 tender herb입니다. 그다음 그는 말씀을 더 배우면서 자신의 행동들을 돌아보기 시작합니다. ‘내가 왜 이렇게 말했을까?’, ‘이 행동은 옳았을까?’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이것이 herb yielding seed입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는 실제 행동을 바꾸기 시작합니다. 이전에는 쉽게 화를 냈다면 이제는 참아 보려고 노력합니다. 이전에는 남을 비판했다면 이제는 말을 조심합니다. 이것이 tree bearing fruit입니다. 바로 이 전체 과정이 repentance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AC.29에서 repentance가 갑자기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식물의 성장 비유가 바로 repentance의 실제 모습’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삶에 적용하기 시작할 때, 그 순간이 바로 회개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회개를 거듭남의 매우 초기 단계로 보고 있습니다. 아직 완전히 거듭난 상태는 아니지만, 사람이 처음으로 ‘자기 삶을 진리의 빛 속에서 고치기 시작하는 단계’이기 때문에 그것을 ‘repentance의 상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회개는 어떤 특별한 감정 사건이 아니라, 진리를 알게 된 사람이 ‘자기 삶을 그 진리에 맞추어 바꾸기 시작하는 과정’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식물이 처음 자라는 장면이 바로 그 회개의 시작을 상징한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And God called the dry [land] earth, and the gathering together of the waters called he sea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창1:10)
AC.28
말씀에서 ‘물’(waters)로는 여러 지식(knowledges, cognitiones et scientifica)을, ‘바다’(seas)로는 그 많은 물, 곧 지식의 집합을 의미할 때가 참 많은데요, 이사야에 보면,It is a very common thing in the Word for “waters” to signify knowledges [cognitiones et scientifica], and consequently for “seas” to signify a collection of knowledges. As in Isaiah: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11:9)The earth shall be full of the knowledge[scientia] of Jehovah, as the waters cover the sea (Isa. 11:9).
이사야 또 다른 데 지식의 결핍이 다루어지는 곳을 보면,And in the same prophet, where a lack of knowledges [cognitionum et scientificorum] is treated of:
5바닷물이 없어지겠고 강이 잦아서 마르겠고6강들에서는 악취가 나겠고애굽의 강물은 줄어들고 마르므로갈대와 부들이 시들겠으며(사19:5, 6)The waters shall fail from the sea, and the river shall be dried up and become utterly dry, and the streams shall recede (Isa. 19:5–6).
학개에서 새 교회에 대해 말하면서,In Haggai, speaking of a new church:
6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7또한 모든 나라를 진동시킬 것이며 모든 나라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이 성전에 영광이 충만하게 하리라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학2:6, 7)I will shake the heavens and the earth, and the sea and the dry [land]; and I will shake all nations; and the desire of all nations shall come; and I will fill this house with glory (Hag. 2:6–7).
또 거듭나는 중인 사람에 대해 스가랴서에서는And concerning man in the process of regeneration, in Zechariah:
7여호와께서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8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슥14:7, 8)There shall be one day, it is known to Jehovah; not day, nor night; but it shall come to pass that at evening time it shall be light; and it shall be in that day that living waters shall go out from Jerusalem, part of them toward the eastern sea, and part of them toward the hinder sea (Zech. 14:7–8).
시편에도 보면, 황폐해졌다가 거듭나 주님을 경배하게 될 사람을 묘사하면서,David also, describing a vastated man who is to be regenerated and who will worship the Lord:
33여호와는궁핍한 자의 소리를 들으시며자기로 말미암아 갇힌 자를 멸시하지 아니하시나니34천지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바다와 그 중의 모든 생물도 그리할지로다(시69:33, 34)Jehovah despiseth not his prisoners; let the heavens and the earth praise him, the seas and everything that creepeth therein (Ps. 69:33–34).
‘땅’(earth)이 그릇(recipient)을 의미한다는 것이 스가랴를 보면 분명한데,That the “earth” signifies a recipient, appears from Zechariah:
이스라엘에 관한 여호와의 경고의 말씀이라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이가 이르시되(슥12:1)Jehovah stretcheth forth the heavens, and layeth the foundation of the earth, and formeth the spirit of man in the midst of him (Zech. 12:1).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물’(waters)과 ‘바다’(seas)가 말씀 전체에서 일관되게 지식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여러 선지서의 예문을 통해 확증합니다. 이는 창세기1장의 상응 해석이 자의적이거나 국지적인 것이 아니라, 성경 전반에 걸쳐 반복되는 보편적 언어 사용임을 보여 주는 작업입니다. 즉, 물을 지식으로 읽는 것은 특정 본문에 대한 독특한 해석이 아니라, 말씀 자체가 제공하는 해석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먼저 이사야11장의 말씀은 긍정적 상태를 보여 줍니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하다’(The earth shall be full of the knowledge [scientia] of Jehovah)는 표현은, 단순히 정보가 많아진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에 대한 인식이 인간과 교회 전체를 채운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그 충만함이 ‘물이 바다를 덮음’에 비유된 것은, 지식이 부분적으로 흩어져 있는 상태가 아니라, 질서 있게 모여 전체를 이루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바다는 기억과 삶 속에 축적된 지식의 총체이며, 물이 바다를 덮는다는 것은 그 총체가 살아 있는 의미로 충만해졌음을 뜻합니다.
반대로 이사야19장의 말씀은 지식의 결핍, 곧 황폐한 상태를 묘사합니다. 바다에서 물이 끊어지고, 강과 시내가 마른다는 표현은, 지식이 사라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의미 있는 지식의 흐름이 끊어진 상태’를 뜻합니다. 정보는 남아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을 연결하고 살리는 생명의 흐름이 멈추면, 말씀은 이를 ‘마름’으로 표현합니다. 이는AC.18에서 말한 황폐의 개념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학개의 인용은 이 상응이 개인을 넘어 교회 전체에 적용됨을 보여 줍니다. 주님은 새 교회를 세우실 때 하늘과 땅과 바다와 마른 땅을 함께 진동시키십니다. 이는 교회의 속 사람과 겉 사람, 그리고 그 안에 축적된 지식과 아직 열매 맺지 못한 영역까지 모두 재정렬하신다는 뜻입니다. 새 교회는 단순히 새로운 교리의 추가가 아니라, 지식의 질서와 수용 구조 전체가 새롭게 되는 사건입니다.
스가랴의 ‘생수’(living waters)는 이 글의 핵심 이미지 중 하나입니다. 여기서 물은 더 이상 정적인 지식이 아니라, 생명을 지닌 지식입니다. 이 물들이 예루살렘에서 흘러나와 동쪽 바다와 서쪽 바다로 나뉘어 흐른다는 것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리의 지식이 인간의 모든 기억 영역으로 퍼져 나가 삶의 전 영역을 적신다는 뜻입니다. ‘동해’는 사랑의 근원을, ‘서해’(toward the hinder sea)는 상대적으로 어두운 영역을 가리키므로, 살아 있는 지식은 밝은 영역뿐 아니라 아직 미처 조명되지 않은 영역까지도 도달한다는 말입니다.
시편의 인용은 황폐했던 사람의 거듭난 이후의 상태를 찬양의 언어로 묘사합니다. 하늘과 땅, 바다와 그 안의 모든 것이 주님을 찬양한다는 말은, 속 사람과 겉 사람, 그리고 기억 속에 저장된 모든 지식이 주님을 향한 질서 안에 들어왔음을 뜻합니다. 여기서 바다는 더 이상 혼란의 장소가 아니라, 찬양에 참여하는 영역이 됩니다. 이는 기억과 지식이 주님께 복종할 때 비로소 제자리를 찾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마지막으로 스가랴12장의 말씀은 ‘땅’(earth)의 의미를 분명히 합니다. 땅은 스스로 무엇을 만들어 내는 주체가 아니라, 주님이 영을 형성하시는 그릇, 곧 수용체입니다. 하늘이 펼쳐지고 땅의 기초가 놓일 때, 그 한가운데서 사람의 영이 형성됩니다. 이는 지식과 기억, 겉 사람의 구조가 갖추어질 때, 비로소 주님의 생명이 그 안에 질서 있게 자리 잡는다는 뜻입니다.
결국AC.28은 ‘물–바다–땅’이라는 연쇄가 거듭남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종합적으로 보여 줍니다. 물은 지식이며, 바다는 그 지식이 모여 저장된 총체이고, 땅은 그것을 받아 생명으로 전환하는 수용 구조입니다. 이 질서가 살아 있을 때, 지식은 더 이상 머리에 머무르지 않고 삶이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생수’(生水), 곧 물이 ‘살아 있다’고 말하며, 지식이 생명으로 변하는 지점을 정확히 짚어 줍니다.
심화
1. ‘스베덴보리가 AC 초기부터 여러 인용 구절의 속뜻을 알 수 있었던 이유’
AC.28을 보면, 스베덴보리는 여러 곳, 그러니까 이사야, 학개, 스가랴, 시편 등에서 여러 구절들을 인용하는데, 그것도 겉뜻이 아닌 속뜻으로 인용합니다. 어떻게 이게 가능했을까요? 실제로 주석한 성경은 창세기와 출애굽기 및 계시록 뿐인데 말입니다. 창세기도 28번 글이면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한 거고 말이지요.곁에서 주님이 구절들을 생각나게 하시면서 계속 풀어 주고 계셨던 건가요?
실제로 ‘Arcana Coelestia’를 읽다 보면 창세기 초반인데도 이미 이사야, 예레미야, 시편, 복음서 등 여러 곳의 말씀을 자유롭게 인용하면서 그것들의 속뜻을 설명합니다. 그래서 많은 독자들이 ‘이 많은 연결을 스베덴보리가 어떻게 알았을까?’라는 궁금증을 갖게 됩니다.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스베덴보리의 계시 이해와 집필 방식, 그리고 말씀의 구조에 대한 그의 인식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먼저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성경의 속뜻을 ‘연구’만으로 발견했다고 주장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여러 곳에서 분명히 말합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는 인간의 학문적 연구로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 열려야만 알 수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설명을 ‘주님의 자비로 보여진 것’ 또는 ‘주님의 자비로 알게 된 것’이라는 표현으로 자주 소개합니다. 즉 그는 자신이 해석 체계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영계의 경험과 주님의 조명을 통해 알게 된 것을 기록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받아쓰기’(dictation) 방식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글을 쓸 때, 주님이 곁에서 문장을 그대로 불러 주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조명’(illumination)과 ‘내적 지각’(perception)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즉 말씀을 읽고 묵상할 때 그 안에 담긴 영적 의미가 마음에 분명하게 보이도록 밝혀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실제로 성경을 읽으면서 설명을 써 내려갔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두 번째 요소가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이 ‘전체적으로 하나의 일관된 체계’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말씀은 전부 상응(correspondence)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한 번 그 상응의 질서를 알게 되면 다른 구절들에도 같은 원리가 적용됩니다. 예를 들어, ‘해’는 사랑을, ‘달’은 신앙을, ‘별’은 신앙의 지식들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이사야든 시편이든 복음서든 어디에서 같은 상징이 나와도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다른 예언서 구절들이 인용됩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에서 ‘빛’이 등장하면, 예언서에서 ‘빛’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도 함께 연결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주석이 아니라 ‘말씀 전체의 상응 구조를 보여 주는 방식’입니다. 다시 말해 스베덴보리는 한 구절만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의 영적 언어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생각해야 할 점은, 스베덴보리가 이미 매우 깊은 성경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계시 이전에도 성경을 오랫동안 연구했습니다. 그의 일기와 기록을 보면, 성경을 매우 정밀하게 읽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 구절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다만 그는 그 구절들의 ‘내적 의미를 보는 눈이 열렸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주님이 곁에서 구절을 떠올리게 해 주셨느냐’라는 부분은 어느 정도 맞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비슷한 경험을 여러 번 기록합니다. 어떤 구절을 읽다가 다른 구절이 연결되어 떠오르고, 그것이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게 되는 경험입니다. 그는 이것을 자신의 능력이라기보다 ‘주님의 인도와 조명’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AC.28 같은 곳에서 여러 예언서를 자유롭게 인용하는 것은, 창세기 주석이 아직 초반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말씀 전체가 하나의 영적 언어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를 설명하면서 동시에 예언서의 상징도 설명하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이 인용들은 단순한 참고 구절이 아니라 ‘상응의 보편성을 보여 주는 증거’ 역할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성경을 연구하여 상징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에 공통으로 흐르는 영적 언어를 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창세기를 설명할 때도 자연스럽게 이사야나 시편의 구절들이 연결됩니다. 이는 성경 전체가 하나의 동일한 영적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AC를 읽다 보면 창세기 주석이면서 동시에 ‘성경 전체의 영적 사전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창세기의 한 단어를 설명하는 순간, 같은 상징이 사용된 다른 말씀들도 함께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And God said, Let the waters under the heaven be gathered together in one place, and let the dry [land] appear; and it was so.(창1:9)
AC.27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둘 다 존재한다는 사실과, 여러 진리와 선이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에서 겉 사람으로, 즉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으로 흘러 들어온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러니까 겉보기에는 그렇지 않아 보여도 말입니다. 그때 거듭나는 중인 사람 안에 있는 그러한 여러 진리와 선, 곧 참과 선에 관한 여러 지식은 그의 기억 속에 저장되어 ‘기억 지식’(scientifica) 가운데로 분류됩니다. 왜냐하면 겉 사람의 기억 속에 스며든 건, 그것이 자연적이든, 영적이든, 또는 천적이든 간에 모두 기억 지식으로 그곳에 머물며, 나중에 필요에 따라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지식들이 바로 ‘한곳으로 모인 물’(waters gathered together into one place)이며, 이렇게 모인 것들을 ‘바다’(seas)라고 합니다. 이때 겉 사람 자체를 가리켜서는 ‘마른 땅’(dry [land])이라 하고, 곧이어 ‘땅’(earth)이라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다음 내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When it is known that there is both an internal and an external man, and that truths and goods flow in from, or through, the internal man to the external, from the Lord, although it does not so appear, then those truths and goods, or the knowledges of the true and the good in the regenerating man, are stored up in his memory, and are classed among its knowledges [scientifica]; for whatsoever is insinuated into the memory of the external man, whether it be natural, or spiritual, or celestial, abides there as memory-knowledge, and is brought forth thence by the Lord. These knowledges are the “waters gathered together into one place,” and are called “seas,” but the external man himself is called the “dry [land],” and presently “earth,” as in what follows.
해설
이 글은 창세기1장의 셋째 날, 곧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는’ 장면이 인간 거듭남에서는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풀어 주는 핵심 연결 고리입니다. 앞선 글들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구별이 세워졌다면, 이제 그 둘 사이의 ‘유입과 저장의 질서’가 설명됩니다. 거듭남은 단지 내면에서 무언가가 일어나는 사건만이 아니라, 기억과 삶의 차원에서도 실제로 무언가가 일어나는, 축적되는 과정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중요한 전제를 다시 확인합니다. 진리(truths)와 선(goods)은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으로 흘러 들어옵니다. 그러나 이 유입은 대부분의 사람들한테 있어서는 이런 순서로 인식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자기가 이해하고, 자기가 느끼고, 자기가 선택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그러나 실제로는 그 모든 것이 속 사람을 통해 조용히 유입된 결과입니다. 이것이 영적 실상입니다. 이 ‘보이지 않는 유입’을 알게 되는 것, 이런 영적 실상에 대해 눈이 떠지는 것, 이것이 거듭남의 중요한 인식 단계입니다.
이렇게 유입된 진리와 선이 어디로 가는가 하면, 겉 사람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 저장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매우 분명히 말합니다. 자연적인 지식이든, 영적인 지식이든, 아니면 천적인 지식이든, 한 번 겉 사람의 기억 속에 들어온 것은 모두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으로서 그곳에 머뭅니다. 즉, 기억은 단순한 정보 창고가 아니라, 주님이 언제든지 꺼내어 사용하실 수 있는 ‘영적 저장소’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기억 지식이 인간의 소유로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 ‘불러내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기억 속에 무엇이 있는지조차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주님은 적절한 때에, 적절한 질서로, 필요한 지식을 기억에서 꺼내어 삶과 사고에 연결시키십니다. 이는 거듭남이 인간의 계획이나 통제가 아니라, ‘주님의 섭리에 의해 조율되는 과정’임을 다시 한번 보여 줍니다.
이제 창세기의 표현이 상응으로 해석됩니다. 기억 속에 저장된 이 모든 지식이 ‘한곳으로 모인 물’입니다. 물은 진리의 지식을 뜻하고, 그것들이 한곳으로 모인다는 것은 이렇게 모인 지식이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지 않고, 기억이라는 한 영역 안에 정돈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것들을 가리켜 ‘바다’라고 합니다. 바다는 넓고 깊으며, 겉으로 보기에는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풍부한 내용이 저장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겉 사람 자체는 ‘마른 땅’으로 불립니다. 이는 겉 사람이 그 자체로는 생명을 생산하지 못한다는 뜻이지요. 마른 땅은 씨앗을 받아야만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겉 사람은 속 사람을 통해 유입된 진리와 선이 있어야만 의미 있는 활동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때 비로소 겉 사람은 단순한 ‘마른 땅’을 넘어 ‘땅’(earth)이라 불리게 됩니다. 이는 다음 단계에서 생명 있는 것이 나타날 준비가 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글은 거듭남의 중요한 균형을 가르쳐 줍니다. 한편으로는,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들이 인간의 기억과 삶의 영역에 실제로 저장되고 사용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거듭남은 인간을 수동적인 그릇으로 만들지 않고, 기억과 사고와 행위를 지닌 ‘살아 있는 협력자로 세웁니다’.
또한 이 설명은 왜 말씀과 교훈, 설교와 배움이 거듭남에서 중요한지를 잘 보여 줍니다. 지금 당장 이해되지 않거나 감동 없는 말씀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기억 속에 저장되면, 언젠가 주님에 의해 기억-지식이라는 바다에서 불려 나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거듭남의 관점에서 보면, 헛된 배움은 없습니다. 모든 참된 것과 선한 것은, 때를 기다리며 바닷속에 모여 있습니다.
결국AC.27은 셋째 날의 준비 단계입니다. 물들이 모이고 땅이 드러난 뒤에야, 비로소 풀과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가 나타납니다. 마찬가지로, 진리와 선에 관한 수많은 지식이 기억 속에 질서 있게 모이고, 겉 사람이 그 자리를 갖춘 뒤에야 삶의 실제 변화가 시작됩니다. 이 질서는 느리지만 확실하며, 언제나 주님의 손안에서 진행됩니다.
심화
1. ‘나중에 필요에 따라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지다’
AC.27 본문에 나오는 위 표현은 스베덴보리 사상을 처음 접하는 분들이 거의 반드시 멈칫하는 부분입니다. ‘지식이 필요할 때 주님에 의해 불러내어진다’라는 말은 자칫 들으면 ‘그럼 나는 아무 역할이 없다는 말인가?’라는 느낌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생각은 인간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주님의 협력 구조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 균형을 이해하면 오히려 인간의 역할이 더 분명해집니다.
먼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기본 전제부터 정리해야 합니다. 그는 인간의 삶을 두 층으로 봅니다. 하나는 ‘생명의 근원’, 다른 하나는 ‘생명의 수용과 사용’입니다. 생명의 근원은 인간에게 있지 않고 주님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생명을 받아서 생각하고 선택하고 행동하는 ‘자유로운 수용자’입니다. 전기는 발전소가 만들지만, 실제로 방을 밝히는 건 전등인 것과 같습니다.
기억도 이와 비슷한 구조로 설명됩니다. 사람이 공부하고, 경험하고, 생각하면서 기억을 쌓는 일은 분명히 인간의 활동입니다. 책을 읽고, 듣고, 배우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이 실제로 하는 일입니다. 스베덴보리도 이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기억 속에 있는 것들을 언제 어떻게 떠올리게 할지, 어떤 진리를 어떤 순간에 살아 움직이게 할지는 더 깊은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성경 말씀을 오래전에 읽었습니다. 그때는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몇 년 뒤 어떤 어려운 상황을 겪으면서 순간 그 말씀이 갑자기 마음에 떠오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그 사람의 판단과 행동을 바꾸어 놓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경험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경우를 두고 ‘주님이 기억 속에서 필요한 것을 불러내신다’고 설명합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설교를 준비할 때, 어떤 목사님은 이런 경험을 하실 것입니다. 여러 책을 읽고 자료를 공부했는데, 막상 설교를 준비하는 순간 이전에 읽었던 내용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면서 떠오릅니다. 어떤 때는 생각지도 않았던 구절이 딱 맞게 떠오르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도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섭리 속에서 기억이 질서 있게 사용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중요한 균형은 이것입니다. 인간은 ‘지식을 배우고 쌓는 책임을 가지고 있고’, 주님은 ‘그 지식이 언제 어떻게 살아 움직일지 섭리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은 창고를 채우고, 주님은 그 창고를 질서 있게 사용하십니다. 둘 중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둘이 함께 작용합니다.
이렇게 설명하면 처음 읽는 분들도 반감을 덜 느낍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노력과 책임이 분명히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공부하지 않으면 기억도 없습니다. 읽지 않으면 떠오를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억을 쌓는 일은 인간의 몫’입니다. 그러나 그 기억이 진리와 선을 위해 가장 적절한 순간에 사용되도록 이끄시는 것은 ‘주님의 섭리’입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바로 이 균형을 강조합니다. 그는 인간이 마치 모든 것을 스스로 하는 것처럼 살아야 한다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실제 삶에서는 그렇게 느끼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깊이 생각해 보면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은 주님에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마치 자기가 하는 것처럼’(as of oneself)의 삶입니다.
사람은 공부하고, 경험하고, 생각하면서 기억을 쌓습니다. 그러나 그 기억이 언제 어떻게 살아 움직여 진리가 되고 지혜가 되는지는 더 깊은 섭리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열심히 배우고 기억을 쌓는 책임이 있고’, 주님은 ‘그 기억을 통해 사람을 이끄시는 분’입니다.
이렇게 보면 인간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분명해집니다. 인간은 배우고, 선택하고, 행동하는 ‘자유로운 협력자’이고, 주님은 그 모든 것을 ‘생명과 질서 속에서 이끄시는 근원’입니다. 바로 이 두 요소의 균형이 스베덴보리 인간 이해의 핵심입니다.
2.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지다’
혹시 위 심화 1의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지다’를 좀 자세히 알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각 사람에게 와있다는 천사나 선한 영들을 통해선가요, 아니면 퍼셉션 같은 영적 지각으로인가요?
AC.27에서 말하는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지다’는 표현은 리메인스(remains)가 실제 삶 속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여기서 ‘거기’라는 것은 사람의 속 사람 안에 보존되어 있는 리메인스의 저장소를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사람의 어린 시절부터 주님은 여러 선한 감정과 진리의 씨앗들을 그 속 사람 안에 저장해 두시는데, 이것들이 바로 리메인스입니다. 평소에는 그것들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마치 조용히 보관되어 있는 것처럼 있지만, 사람이 어떤 상황에 놓이거나 어떤 진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을 때 주님이 그것들을 ‘‘불러내어’ 사용하신다’고 말합니다. 이때 ‘불러낸다’는 말은 기억 속에서 어떤 지식을 꺼내듯이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생각과 의지 안에 그 선과 진리의 감정을 다시 살아나게 하시는 작용’을 뜻합니다.
이 과정은 대체로 사람에게는 매우 자연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주님의 역사라는 사실을 거의 의식하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어려운 상황에서 갑자기 ‘그래도 선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마음이 일어나거나, 어떤 진리를 들었을 때 이상하게 마음이 깊이 공감하며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순간들은 종종 사람이 자신의 양심이나 성격에서 나온 것처럼 느끼지만, 스베덴보리는 이런 작용 가운데 상당 부분이 ‘리메인스가 다시 활성화되는 순간’이라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오래전에 주님이 사람 안에 심어 두셨던 선과 진리의 씨앗이 그 순간 다시 살아나 사람의 생각과 의지를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목사님께서 질문하신 것처럼, 이 일이 ‘천사나 선한 영들을 통해 이루어지는가’, 아니면 ‘퍼셉션 같은 직접적인 영적 지각으로 이루어지는가’ 하는 문제는 스베덴보리의 인간 구조 이해와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결코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영적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고 설명합니다. 사람에게는 항상 두 천사와 두 영이 함께 있으며, 이를 통해 인간은 영계와 연결된 상태에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이 인간에게 어떤 선과 진리를 작용시키실 때, 그 작용은 대부분 ‘천사들의 매개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천사들은 인간의 속 사람과 연결되어 있고, 그 속 사람 안에 있는 리메인스와 조화를 이루는 선과 진리를 사람에게 흘려보냅니다. 그러므로 리메인스가 불러내어지는 작용은 대체로 ‘주님 → 천사들 → 인간의 속 사람 → 인간의 생각과 의지’라는 질서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그것을 직접적으로 ‘천사가 이렇게 했다’고 느끼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사람 자신의 생각과 감정처럼 느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주님의 섭리라고 설명합니다. 만약 사람이 그 선과 진리가 외부에서 강제로 들어온다는 사실을 명확히 느낀다면, 인간의 자유가 손상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람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그 작용이 ‘마치 사람 자신의 생각과 감정처럼 느껴지도록’ 하신다고 합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리메인스가 작용하는 순간에도 그것을 대개 ‘내 마음이 그렇게 움직였다’고 느끼게 됩니다.
퍼셉션(perception)은 이와 조금 다른 차원의 경험입니다. 퍼셉션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있었던 것으로 설명되는데, 그들은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오는 것임을 거의 직접적으로 ‘느끼는’ 상태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이런 직접적인 퍼셉션이 거의 없고, 대신 ‘양심’(conscience)을 통해 주님의 작용이 전달됩니다. 그러므로 현대 인간에게서 리메인스가 불러내어질 때, 그것은 대개 퍼셉션의 형태가 아니라 ‘양심의 움직임이나 내적 깨달음’으로 나타납니다. 사람이 어떤 일을 하려 할 때, 마음속에서 ‘이건 옳지 않다’거나 ‘이렇게 하는 것이 선하다’는 조용한 감각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는데, 스베덴보리는 이런 양심의 작용 속에도 리메인스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설명합니다.
결국 AC.27에서 말하는 ‘주님이 거기에서 불러내신다’는 말은 한 가지 단일한 메커니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속 사람 안에 저장된 리메인스를 ‘천사들의 매개를 통해 다시 활성화하여 사람의 생각과 의지 안에 작용하게 하시는 주님의 섭리적 역사’를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대개 자신의 양심이나 깨달음처럼 느껴지지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그것이 바로 주님이 인간을 거듭남의 길로 이끄시기 위해 리메인스를 사용하시는 방식입니다.
수도원, 수도사 등 성인들의 삶에 대해 스베덴보리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저는 스베덴보리를 그의 책, ‘천국과 지옥’을 통해 만나기 전, 여러 해 이쪽에 몸담았던 적이 있어 그런 삶의 유익과 한계를 조금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도원과 수도사, 그리고 금욕과 고독 속에서 하나님을 찾으려 했던 성인들의 삶에 대해 ‘Heaven and Hell’을 비롯한 여러 저작에서 Emanuel Swedenborg는 비교적 분명하면서도 동시에 매우 공정한 평가를 합니다. 그는 먼저, 그런 삶 자체를 무조건 부정하거나 비웃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을 향한 진지한 열망’과 ‘세속적 욕망을 경계하려는 노력’은 분명 귀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역사 속 많은 수도자들 가운데에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려 했던 사람들이 있었으며, 그런 사람들은 사후에도 주님의 자비 아래에서 천국의 삶으로 인도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원칙을 반복해서 말합니다. 그것은 ‘참된 영적 삶은 세상을 떠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사랑과 쓰임새를 실천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은 원래 ‘천국을 이루는 공동체적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삶은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가족을 돌보고, 사회 속에서 일하며, 이웃에게 유익을 끼치고, 공동체를 세우는 일 속에서 ‘사랑’(charity)이 실제로 살아 움직입니다. 그런데 수도원적 삶은 종종 이런 관계적 삶에서 벗어나 개인의 영적 상태에만 집중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상태를 조심스럽게 경계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사랑은 실제 행위와 쓰임새 속에서 자라나기 때문입니다. 세상과의 접촉을 지나치게 끊어 버리면, 겉으로는 경건해 보일지라도 사랑이 실제 삶 속에서 시험되고 성장할 기회를 잃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을 떠난 고독한 거룩함’보다 ‘세상 속에서 이웃을 섬기는 거룩함’을 더 완전한 영적 삶으로 봅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금욕 자체를 목적처럼 여기는 태도를 비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음식, 결혼, 재산, 사회적 활동 등을 멀리하면 그 자체로 하나님께 더 가까워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영적 삶의 본질로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더럽히는 것은 외적인 것들이 아니라 ‘사랑의 방향’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도 자신을 위한 사랑과 세속적 욕망을 다스리고 이웃을 위한 삶을 살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영적으로 매우 높은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수도원 안에 있어도 마음속 사랑이 여전히 자기 자신과 명예와 공로에 머물러 있다면 그 삶이 자동으로 거룩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을 떠나는 금욕’이 아니라 ‘사랑을 위해 세상 속에서 사는 절제’를 더 건강한 영적 길로 설명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수도사나 은둔자의 삶을 전부 헛된 것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다양한 성향과 역사적 상황을 인정합니다. 어떤 시대에는 교회의 혼란과 타락 속에서 수도원적 공동체가 신앙을 보존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고독과 기도가 내면을 정리하는 준비의 시간이 되기도 합니다. 다만 그는 그것이 ‘최종적인 영적 삶의 형태’라고 보지 않습니다. 인간은 결국 사랑을 실천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하며, 그 사랑은 대부분의 경우 세상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그의 글에서는 수도원적 경건이 ‘준비 단계’나 ‘부분적인 형태’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스베덴보리가 사후 세계를 설명할 때도 같은 원칙을 적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천국을 거대한 수도원처럼 묘사하지 않습니다. 천국은 수많은 공동체가 서로 협력하며 쓰임새를 이루는 살아 있는 사회입니다. 천사들은 단순히 기도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를 돕고 섬기며 각자의 역할 속에서 기쁨을 누립니다. 천국의 행복은 ‘사랑을 행하는 쓰임새’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지상에서 ‘세상을 떠난 거룩함’만을 영적 삶으로 생각했다면, 사후에 천국의 이런 적극적인 삶을 처음에는 낯설어하기도 한다고 그는 말합니다.
목사님께서 과거에 수도원적 삶에 몸을 담았던 경험이 있으셨다고 하셨는데,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그 시간 역시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고자 했던 마음, 세속적 욕망을 내려놓으려 했던 노력, 고요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았던 시간들은 모두 인간의 내면을 다듬는 과정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것은, 그런 경험이 결국 ‘사랑의 실제 삶’으로 이어질 때 가장 완전해진다는 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목사님께서 지금 하고 계신 일, 곧 말씀의 속뜻을 연구하고 번역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삶은 수도원의 침묵보다 훨씬 더 ‘천국적인 쓰임새’에 가까운 길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천국의 질서는 결국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영적 삶을 한 문장으로 이렇게 요약합니다. ‘세상을 떠나 거룩해지려 하지 말고, 세상 속에서 사랑을 위해 살라.’ 이런 관점에서 보면 수도원의 시간도, 그리고 지금 목사님께서 걸어가고 계신 길도 모두 하나의 긴 여정 속에 놓여 있는 단계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길을 사용하여 결국 사랑과 지혜의 더 넓은 삶으로 이끄신다고 스베덴보리는 말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에서‘날’(day)이 시간 자체를 뜻하는 용례보다 더 흔한 것은 없습니다.이사야에 보면,Nothing is more common in the Word than for “day” to be used to denote time itself. As in Isaiah:
6너희는 애곡할지어다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니전능자에게서 멸망이 임할 것임이로다,9보라 여호와의 날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이르러 땅을 황폐하게 하며 그중에서 죄인들을 멸하리니,13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분하여 맹렬히 노하는 날에 하늘을 진동시키며 땅을 흔들어 그 자리에서 떠나게 하리니,22그의 궁성에는 승냥이가 부르짖을 것이요 화려하던 궁전에는 들개가 울 것이라그의 때가 가까우며 그의 날이 오래지 아니하리라(사13:6, 9, 13, 22)The day of Jehovah is at hand.Behold,the day of Jehovah cometh.I will shake the heavens,and the earth shall be shaken out of her place in the day of the wrath of mine anger.Her time is near to come,and her days shall not be prolonged(Isa. 13:6, 9, 13, 22).
7이것이옛날에건설된 너희 희락의 성 곧 그 백성이 자기 발로 먼 지방까지 가서 머물던 성읍이냐,15그날부터 두로가 한 왕의 연한 같이 칠십 년 동안 잊어버린 바 되었다가칠십 년이 찬 후에 두로는 기생의 노래 같이 될 것이라(사23:7, 15)Her antiquity is of ancient days.And it shall come to pass in that day that Tyre shall be forgotten seventy years,according to the days of one king(Isa. 23:7, 15).
‘날’(day)이 시간을 뜻하는 데 사용되기 때문에,또한 그 시간의 상태를 뜻하는 데에도 사용됩니다.예레미야에 보면,As “day” is used to denote time, it is also used to denote the state of that time, as in Jeremiah:
너희는 그를 칠 준비를 하라 일어나라 우리가 정오에 올라가자아하 아깝다 날이 기울어 저녁 그늘이 길었구나(렘6:4)Woe unto us,for the day is gone down,for the shadows of the evening are stretched out(Jer. 6:4).
20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너희가 능히 낮에 대한 나의 언약과 밤에 대한 나의 언약을 깨뜨려 주야로 그때를 잃게 할 수 있을진대,25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주야와 맺은 언약이 없다든지 천지의 법칙을 내가 정하지 아니하였다면(렘33:20, 25)If ye shall make vain my covenant of the day,and my covenant of the night,so that there be not day and night in their season(Jer. 33:20, also 25).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애5:21)Renew our days,as of old(Lam. 5:21).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날’(day)이라는 표현이 말씀에서 얼마나 폭넓고 깊게 사용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날’은 시간의 단위이지만, 말씀에서는 그보다 훨씬 넓은 의미를 지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날’이 단순히 하루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자주 사용된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이사야에서 반복되는 ‘여호와의 날’은 특정한24시간을 뜻하지 않고, 주님의 심판과 섭리가 작동하는 한 시대 전체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날’은 사건이 일어나는 시점이 아니라, ‘주님의 역사 아래 놓인 기간’을 뜻합니다.
이사야의 인용에서 ‘그의 때(Her time)가 가까우며 그의 날(her days)이 오래지 아니하리라’라는 표현은, ‘날’이 곧 ‘때’와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이는 말씀에서 시간이 물리적 길이로 측정되지 않고, 상태와 목적에 따라 규정된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한 시대의 날들은 주님의 뜻이 성취되면 끝나고, 성취되지 않으면 연장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날’은 시계의 문제가 아니라 ‘섭리의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서 ‘날’이 시간뿐 아니라 그 시간의 ‘상태’를 뜻하는 데에도 사용된다고 설명합니다. 예레미야의 ‘날이 기울어 저녁 그늘이 길었구나’라는 표현은, 하루가 끝나감을 말하는 동시에, 영적 상태가 어두워졌음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날의 기울어짐은 빛의 감소이며, 이는 곧 진리의 빛이 사라지고 있음을 뜻합니다. 저녁의 그림자들이 길어진다는 표현은, 거짓과 혼합이 점점 지배적인 상태가 되었음을 상징합니다.
예레미야33장에서 말하는 ‘낮의 언약’과 ‘밤의 언약’ 역시 시간의 반복 질서를 넘어서, ‘영적 질서의 불변성’을 가리킵니다. 낮과 밤이 제때에 있는 것은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주님께서 선과 진리, 그리고 인간의 상태 변화를 질서 있게 다스리고 계신다는 표지입니다. 만일 낮과 밤의 언약이 깨진다면, 그것은 곧 주님의 질서가 무너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표현은 거듭남의 질서 또한 주님의 언약 안에 있음을 암시합니다.
예레미야애가의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라는 기도는 특히 중요합니다. 여기서 ‘날들’은 단순한 과거의 시간들이 아니라, ‘과거의 영적 상태’, 곧 주님과 더 가까웠던 상태를 뜻합니다. 이 기도는 시간의 회귀를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상태의 회복을 구하는 간구입니다. 이는AC.16에서 말한 ‘태고의 날들’과도 연결되며, 거듭남이란 언제나 ‘옛날’의 상태, 곧 주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로 돌아가는 것임을 보여 줍니다.
이 글은 창세기1장의 ‘날’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해석 원리를 제공합니다. 만일 ‘날’을 문자적 시간으로만 이해한다면, 창조 이야기는 과거의 연대기적 기록으로 끝나게 됩니다. 그러나 ‘날’을 시간과 상태를 함께 포괄하는 표현으로 이해하면, 창세기1장의 여섯 날은 인간 거듭남의 여섯 상태로 자연스럽게 읽히게 됩니다. 이는 이미AC.6에서 제시된 원리를, 말씀 전체의 용례를 통해 다시 확증하는 작업입니다.
결국AC.23은 말씀의 언어가 시간 중심이 아니라 ‘상태 중심’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주님은 시계를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과 교회의 상태를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말씀에서 ‘오늘’, ‘그날’, ‘여호와의 날’, ‘옛날’이라는 표현들은 모두, 주님 앞에서의 영적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인식을 가지고 말씀을 읽을 때, 성경은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상태를 비추는 살아 있는 거울이 됩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창1:5)
AC.22
이제‘저녁’(evening)이 무엇을 뜻하고, ‘아침’(morning)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저녁’은 모든 이전의 상태를 의미하는데,그것은 그 상태가 그늘의 상태,곧 거짓의 상태이며 신앙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아침’은 모든 이후의 상태를 의미하는데,그것은 빛의 상태,곧 진리의 상태이며 신앙의 지식들이 있는 상태입니다.일반적으로 말해‘저녁’은 사람 자신의 것에 속한 모든 것을 의미하지만, ‘아침’은 주님께 속한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이는 사무엘에서 다윗을 통해 하신 다음 말씀과 같습니다.What is meant by “evening” and what by “morning” can now be discerned. “Evening” means every preceding state, because it is a state of shade, or of falsity and of no faith; “morning” is every subsequent state, being one of light, or of truth and of the knowledges of faith, “Evening,” in a general sense, signifies all things that are of man’s own; but “morning,” whatever is of the Lord, as is said through David:
2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3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석이 내게 이르시기를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4그는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삼하23:2-4)The spirit of Jehovah spake in me,and his word was on my tongue;the God of Israel said,the rock of Israel spake to me.He is as the light of the morning,when the sun ariseth,even a morning without clouds,when from brightness,from rain,the tender herb springeth out of the earth(2 Sam. 23:2–4).
신앙이 없을 때가‘저녁’이고 신앙이 있을 때가‘아침’이므로,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을‘아침’이라 하며,그가 오신 그때는 신앙이 없었기 때문에‘저녁’이라고 합니다.이는 다니엘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As it is “evening” when there is no faith, and “morning” when there is faith, therefore the coming of the Lord into the world is called “morning”; and the time when he comes, because then there is no faith, is called “evening,” as in Daniel:
14그가 내게 이르되 이천삼백 주야까지니그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되리라 하였느니라,26이미 말한 바 주야에 대한 환상은 확실하니 너는 그 환상을 간직하라 이는 여러 날 후의 일임이라 하더라(단8:14, 26)The holy one said unto me,Even unto evening when it becomes morning,two thousand and three hundred(Dan. 8:14, 26).
이와 같이 말씀에서‘아침’은 주님의 모든 오심을 의미하며,그러므로 그것은 곧 새로운 창조를 의미하는 표현입니다.In like manner “morning” is used in the Word to denote every coming of the Lord; consequently it is an expression of new creation.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1장에서 반복되는 ‘저녁’과 ‘아침’을 시간적 개념이 아니라 영적 상태의 언어로 해석하는 결정적인 원리를 제시합니다. ‘저녁’은 언제나 이전의 상태를 가리키며, 그것은 빛이 약해진 상태, 곧 그늘과 혼합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 상태는 거짓이 섞여 있고, 신앙이 부재한 상태로, 인간의 내면이 아직 주님의 빛에 의해 질서 잡히지 않았음을 뜻합니다. 반대로 ‘아침’은 이후의 상태로, 주님의 빛이 비추어 진리와 신앙의 지식들이 살아나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표현은 하루의 경과가 아니라, 거듭남이 반드시 거치는 영적 이동의 방향을 나타냅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혼돈에서 질서로 나아가는 것이 주님의 불변의 방식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대비를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해 ‘저녁’을 사람 자신의 것, 곧 본성(proprium)에 속한 모든 것으로 설명합니다. 사람 자신의 것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비롯되며, 주님의 빛이 없을 때에는 그것이 선처럼, 진리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것은 신앙이 없는 상태이며, 영적 실재에 비추어 보면 어둠입니다. 반대로 ‘아침’은 주님께 속한 모든 것으로, 주님의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역사하는 상태입니다. 이 구분은 도덕적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근원에 대한 문제입니다.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주님에게서인가 사람 자신에게서인가의 문제이며, 거듭남은 바로 이 근원 인식이 점점 명료해지는 과정입니다.
다윗의 예언에서 묘사되는 ‘아침 빛’은 이 상태를 매우 풍부하게 설명합니다. 해가 떠오르는 아침, 구름 없는 밝은 빛, 비 뒤에 돋아나는 연한 풀은 모두 주님의 임재로 인해 생명이 새롭게 발생하는 상태를 상징합니다. 이는 단순한 지식의 증가가 아니라, 주님의 진리가 사람 안에서 살아 움직이며, 퍼셉션으로 인식되는 상태입니다. 이때 진리는 외부에서 주입된 교리가 아니라,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해되고 받아들여지는 빛이 됩니다. 연한 풀이 돋아난다는 표현은, 주님의 빛 아래에서 선한 삶의 움직임이 자발적으로 시작됨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서 주님의 세상 오심을 ‘아침’이라 부르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신앙이 사라지고, 교회가 황폐해진 상태는 ‘저녁’이며, 바로 그 상태 속으로 주님이 오시기 때문에 그때는 동시에 ‘저녁’이라고도 합니다. 다니엘의 ‘주야’라는 표현은, 교회가 완전히 어두워진 상태에서 다시 빛을 받기까지의 전 과정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따라서 ‘아침’은 단지 과거의 탄생 사건만을 가리키지 않고, 신앙이 없는 상태 속으로 주님이 새롭게 임하시는 모든 순간을 뜻합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말씀에서 ‘아침’이라는 표현이 주님의 모든 오심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오심은 언제나 새로운 창조입니다. 이는 우주의 창조가 아니라,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재창조, 곧 거듭남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창세기1장에서 반복되는 저녁과 아침은 과거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고, 오늘도 각 사람 안에서 계속되는 주님의 창조 사역의 리듬을 드러냅니다.AC.22는 이처럼 성경의 시간 언어를 상태의 언어로 전환함으로써, 말씀이 언제나 현재형으로 우리 안에서 작용하는 살아 있는 계시임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심화
1. ‘저녁, 아침 설명과 단8:14, 26 인용’
AC.22, ‘As it is “evening” when there is no faith, and “morning” when there is faith, therefore the coming of the Lord into the world is called “morning”; and the time when he comes, because then there is no faith, is called “evening,” as in Daniel: The holy one said unto me, Even unto evening when it becomes morning, two thousand and three hundred (Dan. 8:14, 26).’에서 이 morning 및 evening을 단8:14, 26과 연결하는 게 여전히 좀 어리둥절합니다. 단순히 ‘주야’라는 표현이 나오기 때문인 건 아닐 텐데... 이 부분 좀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단순히 단8:14에 ‘evening’과 ‘morning’이라는 말이 나온다고 해서 곧바로 창1의 ‘저녁’과 ‘아침’에 mechanically 연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그렇게 연결하는 이유는, 그가 말씀 전체에 공통으로 흐르는 하나의 영적 언어, 곧 ‘상응의 질서’를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창세기 1장에서 ‘저녁’과 ‘아침’이 한 번 정의되면, 이후 말씀의 다른 곳들에서도 그 표현은 같은 영적 구조 안에서 읽혀야 한다는 전제가 있는 것입니다. AC.22에서 스베덴보리가 먼저 세운 원리는 이것입니다. ‘저녁’은 빛이 약해진 상태, 곧 신앙이 거의 없거나 꺼져 가는 상태이고, ‘아침’은 다시 빛이 오는 상태, 곧 진리와 신앙의 빛이 살아나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저녁’과 ‘아침’은 단순한 시간 표시가 아니라 ‘교회와 인간의 영적 상태 변화’를 가리키는 표지입니다. 이 전제를 가지고 다니엘서로 가면, 거기서의 ‘저녁-아침’도 단지 시간 계산이 아니라 ‘신앙이 거의 사라진 상태로부터 다시 회복되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읽히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점을 붙잡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핵심은 ‘주야라는 단어가 같으니까 연결한다’가 아니라, ‘저녁과 아침이 성경 안에서 반복해서 같은 영적 패턴을 가리킨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단8:14는 시간표를 넘어서 ‘황폐와 회복’의 리듬을 담고 있고, 창1은 그 리듬의 기본 문법을 먼저 보여 주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제 단8장의 문맥 자체를 보면 왜 스베덴보리가 이 본문을 끌어오는지가 더 분명해집니다. 다니엘 8장은 성소가 짓밟히고, 항상 드리는 제사가 중단되고, 진리가 땅에 던져지고, 거룩한 것들이 훼손되는 장면을 말합니다. 문자적으로는 역사 속 박해와 성전 모독의 맥락이지만, 스베덴보리식으로 읽으면 이것은 곧 ‘교회 안에서 신앙의 빛이 꺼져 가는 상태’, 다시 말해 ‘저녁’입니다. 거룩한 것이 짓밟히고 진리가 흐려질 때, 그 상태는 시간상 밤이 아니라 영적으로 저녁이며 흑암입니다. 그런데 그 본문에서 ‘저녁에서 아침까지’ 또는 KJV 표현처럼 ‘unto evening-morning’이라는 말이 나오고, 그 뒤에 성소가 정결하게 되거나 회복되는 말이 이어집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는 ‘아, 이것은 단지 해가 지고 뜨는 자연의 시간이 아니라, 신앙이 무너진 상태에서 다시 회복되는 영적 상태의 전환을 말하는구나’ 하고 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8:14의 ‘저녁-아침’은 ‘신앙이 사라진 교회의 상태에서 주님에 의해 다시 빛이 회복되는 상태’의 압축어가 됩니다. AC.22에서 ‘주님이 세상에 오시는 때가 왜 저녁이냐’고 말할 때도 같은 논리가 작동합니다. 주님이 오셔야 할 만큼 교회가 이미 어두워졌기 때문에 그 시기는 ‘저녁’이고, 바로 그 오심으로 인해 새 빛이 시작되기 때문에 그 오심은 ‘아침’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오심은 ‘저녁 같은 시대’ 속에 일어나는 ‘아침의 시작’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연결 방식입니다.
조금 더 쉽게 비유하면, 창1은 ‘저녁-아침’이라는 단어의 뜻을 먼저 알려 주는 ‘사전’이고, 단8은 그 단어가 실제 역사와 교회 상태 속에서 어떻게 쓰이는지를 보여 주는 ‘실전 문장’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창1에서 ‘저녁’은 빛이 사라진 상태, ‘아침’은 빛이 회복된 상태라고 이미 뜻풀이가 주어졌기 때문에, 다니엘에서 성소가 짓밟히고 진리가 무너진 상황에 ‘저녁-아침’이 나오면, 그것은 곧 ‘황폐 후 회복’으로 읽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더 나아가 ‘주님의 오심’이라는 큰 축을 넣습니다. 왜냐하면 성경 전체에서 모든 회복의 중심 사건은 결국 주님의 오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침’이라는 말을 단순히 교회 개혁의 시점 정도로만 보지 않고, 가장 궁극적으로는 ‘주님이 오셔서 다시 빛이 되시는 때’로 읽습니다. 그러므로 단8:14를 창1과 연결하는 것은 억지 숫자 놀이나 단어 반복이 아니라, ‘신앙의 상실 → 주님의 개입 → 빛의 회복’이라는 성경 전체의 영적 패턴을 읽어낸 결과입니다.
‘성경에서 저녁은 단지 해가 진 시간이 아니라, 진리의 빛이 약해진 상태입니다. 아침은 단지 해가 뜨는 시간이 아니라, 주님이 다시 빛을 주시는 상태입니다. 다니엘서는 교회가 무너진 저녁을 말하고, 그 저녁 끝에 다시 오는 아침, 곧 회복을 말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의 저녁과 아침을 다니엘서의 저녁과 아침에 연결하는 것입니다.’
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And God saw the light, that it was good; and God distinguished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And God called the light day, and the darkness he called night.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창1:4, 5)
AC.21
‘빛’(light)은 주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에‘선’(good)이라고 합니다.주님은 선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어둠’(darkness)은 사람이 새로 잉태되고 다시 태어나기 이전에 빛처럼 보였던 모든 것들을 의미하는데,이는 악이 선처럼 보였고 거짓이 진리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그러나 그것들은 여전히 어둠이며,단지 사람 자신에게 고유한 것들,곧 사람한테나 맞는 것들(merely of the things proper to man himself)로 이루어져 있고,아직 남아 있는 것들입니다.주님께 속한 모든 것은 빛에 속하므로‘낮’(day)에 비유되고,사람 자신의 모든 것(whatsoever is man’s own)은 어둠에 속하므로‘밤’(night)에 비유됩니다.이러한 비유들은 말씀에 자주 나옵니다.Light is called “good,” because it is from the Lord, who is good itself, The “darkness” means all those things which, before man is conceived and born anew, have appeared like light, because evil has appeared like good, and the false like the true; yet they are darkness, consisting merely of the things proper to man himself, which still remain. Whatsoever is of the Lord is compared to “day,” because it is of the light; and whatsoever is man’s own is compared to “night,” because it is of darkness. These comparisons frequently occur in the Word.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빛’과 ‘어둠’을 단순한 대비 개념이 아니라, ‘근원에 따른 구분’으로 명확히 정의합니다. 빛을 선이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주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즉, 빛은 스스로 선한 것이 아니라, 선 자체이신 주님에게서 흘러나오기 때문에 선이라는 것입니다. 이로써 선과 진리는 어떤 독립적인 속성이나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무슨 자산이 아니라, 언제나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임이 분명해집니다.
이에 반해 ‘어둠’은 단순히 무지나 지식의 결핍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어둠을, 거듭남 이전에 빛처럼 보였던 모든 것들로 정의합니다. 즉, 악이 선처럼 보였고, 거짓이 진리처럼 보였던 상태 전체가 어둠입니다. 이 정의는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어둠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가 아니라, ‘잘못된 것을 옳다고 믿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이 어둠은 특히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비롯된 판단과 가치관 속에서 가장 강하게 작동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어둠이 ‘사람 자신에게 고유한 것들’, 곧 본성(proprium)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합니다. 이 본성은 거듭남 이후에도 한순간에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남아 있으며, 때때로 다시 빛처럼 보이려 합니다. 그래서 거듭남의 과정은 단순히 빛을 한 번 보는 사건이 아니라, 무엇이 진짜 빛이고 무엇이 거짓된 빛인지를 지속적으로 분별하는 여정이 됩니다. 이 분별이 바로 영적 성숙의 핵심이에요.
이 글에서 제시되는 ‘낮’과 ‘밤’의 비유는 이러한 근원적 구분을 매우 직관적으로 보여 줍니다. 주님께 속한 모든 것은 빛에 속하므로 ‘낮’에 비유되고, 사람 자신에게 속한 모든 것은 어둠에 속하므로 ‘밤’에 비유됩니다. 낮과 밤은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지배하는 근원의 문제입니다. 낮에는 태양이 지배하고, 밤에는 태양이 보이지 않듯이, 영적 삶에서도 주님이 중심이 될 때는 낮이고, 자기가 중심이 될 때는 밤입니다.
이러한 대비는 말씀 전체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낮과 밤, 빛과 어둠, 해와 달, 깨어 있음과 잠듦의 이미지들은 모두 같은 영적 질서를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반복이 우연이 아니라, 말씀 자체가 인간의 내적 상태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일관된 언어라고 봅니다. 그래서 창세기1장의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구조 역시, 단순한 하루의 경과가 아니라, 밤에서 낮으로, 자기 중심에서 주님 중심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나타냅니다.
이 글은 또한 거듭남 이후에도 경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조용히 일깨워 줍니다. 어둠은 한 번 물리치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남아 있으며 다시 빛처럼 보이려 합니다. 그래서 영적 삶은 끊임없이 주님에게서 나오는 빛에 자신을 비추어 보는 삶입니다. 무엇이 주님에게서 왔는지, 무엇이 아직도 자기에게서 나오는지를 묻는 이 분별이 없으면, 어둠은 다시 빛으로 위장합니다.
결국AC.21은 빛과 어둠을 감정이나 지식의 많고 적음으로 판단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기준은 언제나 근원입니다. 주님에게서 나온 것은 빛이며 낮이고, 자기에게서 나온 것은 어둠이며 밤입니다. 이 단순하지만 엄격한 기준 위에서만, 거듭남의 길은 혼란 없이 이어질 수 있습니다.
심화
1. ‘빛처럼 보였던’, ‘사람한테나 어울리는 것들’
AC.21, ‘The “darkness” means all those things which, before man is conceived and born anew, have appeared like light, because evil has appeared like good, and the false like the true; yet they are darkness, consisting merely of the things proper to man himself, which still remain.’에 나오는 ‘빛처럼 보였던’이나 ‘사람 자신에게 고유한 것들, 곧 사람한테나 어울리는 것들’의 생생한 예, 구체적 사례들을 좀 알려주세요.
AC.21의 문장은 사실 매우 현실적인 인간 경험을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빛처럼 보였던 것’이라는 표현은, 사람이 거듭나기 전까지는 ‘자기 안에 있는 것들이 선하고 옳다고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상태’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사람에게는 어떤 생각과 행동이 매우 옳고 밝은 것처럼 느껴지는데, 더 깊은 빛 속으로 들어가 보면 그것이 자기 사랑이나 세상 사랑에서 나온 것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AC.21에서 말하는 ‘빛처럼 보였던 어둠’입니다.
첫 번째로 가장 흔한 예는 ‘자기 의로움’입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 성실하게 살고, 교회도 잘 다니며, 도덕적으로도 큰 흠 없이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는 자연스럽게 ‘나는 비교적 선하게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생각은 그 사람에게는 매우 밝은 빛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더 깊은 자기 성찰을 하게 되면 이런 사실을 발견합니다. 자신이 선하게 살았다고 느꼈던 이유 가운데 상당 부분이 사실은 ‘자기만족과 자기 확신’이었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저 사람들보다 낫다’, ‘나는 그래도 양심적으로 산다’ 같은 생각들이 그 선한 삶 속에 섞여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전에는 그것이 의로운 빛처럼 보였지만, 더 큰 빛 속에서는 그것이 ‘자기 사랑의 그림자’였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두 번째 예는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선행’입니다. 어떤 사람이 봉사를 많이 하고, 헌신적으로 일합니다. 겉으로 보면 매우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정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이런 생각이 숨어 있을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신실한 사람으로 봐주면 좋겠다’, ‘내가 이렇게 헌신하는 것을 알아주면 좋겠다.’ 이런 동기가 완전히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선행의 중심이 될 때 그 선은 사실 ‘자기 자신을 위한 선’이 됩니다. 그런데 당사자는 그것을 선한 일이라고 굳게 믿기 때문에 그것이 오히려 ‘빛처럼 보이는 어둠’이 됩니다.
세 번째 예는 ‘신앙적인 열심 자체가 빛처럼 보이는 경우’입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적으로 매우 열심입니다. 전도도 많이 하고, 교리도 열심히 공부하며, 교회를 위해 많은 일을 합니다. 그런데 그 열심 속에 자신도 모르게 이런 마음이 섞여 있을 수 있습니다. ‘내가 진리를 알고 있다’,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다.’ 이런 마음은 매우 미묘해서 본인은 그것을 잘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것을 ‘신앙의 열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더 깊은 빛 속으로 들어가면, 그것이 사실은 ‘신앙을 통한 자기 확증’일 수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과정에서 이런 것들이 하나씩 드러난다고 설명합니다.
네 번째 예는 ‘도덕적 분노’입니다. 사람은 때로 불의한 일을 보면 강하게 분노합니다. 이 분노는 겉으로 보면 정의로운 감정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어느 정도는 그렇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 분노 속에는 종종 ‘자기 감정이 상한 것’이 섞여 있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나를 무시했을 때, ‘저 사람은 틀렸다’고 분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겉으로는 정의를 위한 분노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에 생긴 감정일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도 사람에게는 그것이 정의의 빛처럼 보이지만, 더 깊은 빛 속에서는 ‘자기 사랑의 그림자’로 보이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사람 자신에게 고유한 것들’, 즉 ‘proprium’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proprium은 단순히 인간의 개성이나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 것이 아닌, 인간 자신의 중심’을 가리킵니다. 이 중심은 대부분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기반으로 합니다. 그래서 그 안에서 나오는 생각과 판단은 처음에는 매우 자연스럽고 옳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주님의 선과 진리와는 다른 방향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거듭나는 과정에서 처음 경험하는 빛이 바로 ‘자기 안에 있던, 그동안 ‘빛처럼 보였던 것들’이 사실은 어둠이었다는 사실을 보게 되는 빛’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전까지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하는 경험입니다. 이전에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이 자연스럽고 옳다고 느껴졌다면, 이제는 그것이 어디에서 오는지 질문하게 됩니다.
사람이 처음에는 자기 생각과 감정이 모두 옳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주님의 빛이 조금 더 들어오면, 이전에는 옳다고 느꼈던 것들 속에서도 ‘자기중심적 동기’가 섞여 있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때 사람은 처음으로 진짜 빛과 이전의 ‘빛처럼 보였던 것’을 구별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 과정이 스베덴보리가 AC.21에서 말하는 ‘어둠이 드러나는 단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