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And the woman saw that the tree was good for food, and that it was pleasant to the eyes, and a tree to be desired to give intelligence, and she took of the fruit thereof and did eat, and she gave also to her man [vir] with her, and he did eat. (3:6)

 

AC.209

 

여기 사용된 표현들, 곧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the tree was good for food, pleasant to the eyes, and desirable for giving intelligence)는 표현들은, 태고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성향에 맞추어진 것들로서, 특별히 의지(will)와 관련하여 사용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악은 의지로부터 흘러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에서 홍수 이후 사람들을 다룰 때에는, 의지보다는 이해(understanding)와 관련된 표현들이 사용됩니다. 이는 태고 사람들은 선으로부터 진리를 가졌지만, 홍수 이후 사람들은 진리로부터 선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The expressions here employed, as that “the tree was good for food, pleasant to the eyes, and desirable for giving intelligence,” are such as were adapted to the genius of those who lived in that most ancient time, having especial reference to the will, because their evils streamed out from the will. Where the Word treats of the people who lived after the flood, such expressions are used as relate not so much to the will as to the understanding; for the most ancient people had truth from good, but those who lived after the flood had good from truth.

 

 

해설

 

이 본문은 매우 짧지만, 스베덴보리 인간론 전체의 핵심 구조가 들어 있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그는 여기서 왜 창세기 3장의 표현들이 유난히 ‘욕망’, ‘즐거움’, ‘탐스러움’ 같은 의지적 표현들로 가득 차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오늘날 사람들과 인간 구조 자체가 달랐습니다. 그들은 먼저 사랑했고, 그 사랑 안에서 진리를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중심은 이해가 아니라 의지였습니다. 그들은 선을 사랑했기 때문에 진리를 알았고, 진리를 배우고 분석해서 선을 찾아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태고 사람들은 선으로부터 진리를 가졌다’고 말합니다.

 

이 때문에 그들의 타락 역시 의지에서 시작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보통 먼저 잘못 생각하고, 그 생각이 행동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태고교회 사람들은 먼저 사랑이 변질되었습니다. 사랑이 변하자 지각이 흐려졌고, 그 결과 진리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창3:6에는 ‘먹기에 좋고’, ‘눈에 즐겁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다’ 같은 표현이 나오는 것입니다. 모두 의지와 애정의 움직임을 묘사하는 말들입니다.

 

반면 홍수 이후 인간은 달라졌습니다. AC.200에서 이미 보았듯이, 주님은 인류가 완전히 멸망하지 않도록 인간 구조 자체를 바꾸셨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처럼 선에서 진리로 가는 길이 아니라, 진리에서 선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홍수 이후 사람들은 먼저 배우고, 이해하고, 분별한 뒤에 선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태고 사람들은 선으로부터 진리를 가졌고, 홍수 이후 사람들은 진리로부터 선을 가졌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전자는 사랑이 먼저이고 진리가 뒤따르는 구조이며, 후자는 진리가 먼저이고 선이 뒤따르는 구조입니다.

 

이 때문에 말씀의 표현도 달라집니다. 태고교회를 다룰 때에는 의지와 애정을 나타내는 표현들이 많고, 홍수 이후 교회들을 다룰 때에는 이해와 사고와 분별에 관한 표현들이 더 많이 등장합니다. 이는 단순한 문체 차이가 아니라, 인간 구조 자체의 변화가 말씀의 언어에도 반영된 결과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스베덴보리가 여기서도 인간의 타락을 단순한 도덕적 문제로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인간 안의 사랑과 진리의 질서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설명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사랑이 먼저였기 때문에 사랑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함께 무너졌습니다. 반면 홍수 이후 사람들은 이해가 먼저였기 때문에, 비록 더 낮은 상태에 살지만, 한편으로는 더 안전하게 보호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AC.209는 창3:6의 표현들을 설명하는 해설인 동시에, 태고교회와 홍수 이후 인류를 가르는 거대한 전환점을 설명하는 본문이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선으로부터 진리를 보는 시대’가 지나가고, ‘진리로부터 선을 배우는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선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이 후자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태고교회의 언어를 읽을 때면 낯설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랑으로 알았지만, 우리는 이해를 통해 배우기 때문입니다.

 

 

심화

 

1. ‘이해(understanding)와 관련된 표현들’

 

그러나 말씀에서 홍수 이후 사람들을 다룰 때에는, 의지보다는 이해(understanding)와 관련된 표현들이 사용됩니다. Where the Word treats of the people who lived after the flood, such expressions are used as relate not so much to the will as to the understanding; (AC.209)

 

혹시 저렇게 사용된 말씀의 예를 든다면?

 

 

좋은 질문입니다. AC.209를 읽으면 ‘의지와 관련된 표현’과 ‘이해와 관련된 표현’이 실제로 어떻게 다른지 궁금해집니다. 스베덴보리가 의도한 차이를 가장 쉽게 보려면 창세기 3장과 홍수 이후 인물들, 특히 노아와 아브라함 이야기를 비교해 보면 됩니다.

 

창3:6의 표현들을 보십시오. ‘먹기에 좋고’, ‘눈에 즐겁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다’는 말들이 반복됩니다. 이것들은 모두 사랑, 욕망, 즐거움, 끌림 같은 의지의 언어입니다. 무엇을 생각하는가보다 무엇을 원하고 사랑하는가에 초점이 있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선을 사랑하는 상태에서 진리를 알았기 때문에, 말씀도 그들의 내적 애정과 의지의 움직임을 묘사하는 방식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반면, 홍수 이후를 보면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노아에 대해서는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행하였다’와 같은 표현들이 나옵니다. 여기서는 무엇이 옳은지 배우고, 이해하고, 순종하는 모습이 강조됩니다. 또한 아브라함 이야기에서는 ‘보라’, ‘들으라’, ‘알라’, ‘기억하라’, ‘생각하라’, ‘깨달으라’와 같은 이해와 인식에 관련된 표현들이 훨씬 많이 나타납니다.

 

선지서들에서도 같은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너희는 듣고 깨달으라’, ‘보아도 알지 못한다’, ‘마음으로 깨닫지 못한다’, ‘지혜와 명철’, ‘지식과 총명’ 같은 표현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이런 표현들은 인간의 이해와 판단, 분별과 관련된 언어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사랑의 상태가 중심이었다면, 홍수 이후 사람들에게는 진리를 배우고 이해하는 과정이 중심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복음서에서 하신 말씀도 흥미롭습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깨닫지 못하느냐?’, ‘어찌하여 생각하지 못하느냐?’ 같은 말씀들이 많습니다. 물론 복음서의 최종 목적은 사랑이지만, 접근 방식은 이해를 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 역시 홍수 이후 인류의 구조와 관련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을 빌리면, 태고 사람들은 ‘선으로부터 진리를 가졌습니다’. 그래서 말씀은 ‘무엇을 사랑하는가?’를 주로 말합니다. 반면 홍수 이후 사람들은 ‘진리로부터 선을 가집니다’. 그래서 말씀은 ‘무엇을 알고 있는가?’, ‘무엇을 이해하는가?’, ‘무엇을 분별하는가?’를 더 많이 말합니다.

 

그래서 AC.209의 요점은 단순히 문체의 차이가 아닙니다. 말씀의 언어 자체가 인간 구조의 변화에 맞추어졌다는 것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의지의 언어가, 홍수 이후 사람들에게는 이해의 언어가 더 적합했습니다. 그 결과 창3에서는 ‘먹기에 좋고’, ‘눈에 즐겁고’, ‘탐스럽다’가 중심이 되지만, 이후 말씀에서는 ‘듣다’, ‘알다’, ‘깨닫다’, ‘명철’, ‘지혜’, ‘총명’ 같은 표현들이 점점 더 전면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AC.208, 창3:6, ‘태고교회의 네 번째 후손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And the woman saw t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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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스베덴보리가 집중한 주제

 

스베덴보리 본인도 학자였으면서 천국을 왕래하며 어떻게 이런 걸 일절 다루질 않았을까요? 마치 주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말이지요... 천국은 이 지상의 일과 역사에 아무런 관심이 없나 봐요?

 

 

목사님 같은 의문을 가진 사람은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오래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아니, 천국과 지옥을 수십 년 동안 드나들었고, 천사들과 대화했으며, 인류의 가장 오래된 교회들까지 언급하는데, 왜 정작 우리가 궁금해하는 역사 연대나 고고학이나 지구의 나이 같은 것은 거의 말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흥미로운 것은, 주님께서 지상에 계셨을 때도 비슷했다는 점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로마 제국의 미래, 이스라엘의 정치적 독립, 메시아 왕국의 건설, 종말의 시기 같은 것에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대부분 그런 질문들에는 직접 답하지 않으시고, 사람의 마음과 삶, 사랑과 신앙, 회개와 거듭남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매우 비슷한 방향을 보입니다.

 

천국이 지상의 역사에 아무 관심이 없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체가 사실은 교회의 역사와 인류의 영적 역사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태고교회, 고대교회, 히브리교회, 유대교회, 기독교회에 대한 설명만 보아도 천국은 인류 역사에 깊이 관여하고 있습니다. 다만 천국이 보는 역사의 관점이 우리와 매우 다를 뿐입니다.

 

우리는 보통 ‘언제?’를 묻습니다. ‘몇 년도인가?’, ‘몇천 년 전인가?’,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는가?’를 궁금해합니다. 그러나 천국은 ‘어떤 상태였는가?’를 더 중요하게 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천사들은 연대기보다 애정의 변화에 관심을 두고, 사건보다 상태를 보고, 왕조의 흥망보다 인간과 교회의 내적 변화를 봅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의 여러 저작을 보면 천사들은 시간 자체를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천국에서는 시간 대신 상태(state)가 중심 개념입니다. 사랑이 변하면 상태가 변하고, 상태가 변하면 거리도 변하고, 만남도 변합니다. 그래서 천사들에게 ‘몇 년이 지났다’는 것은 우리만큼 중요한 정보가 아닙니다.

 

목사님께서 지금 읽고 계신 창3도 좋은 예입니다. 우리는 ‘아담 이후 몇 년 뒤의 후손인가?’를 묻지만, 스베덴보리는 ‘세 번째 후손’, ‘네 번째 후손’이라는 말을 하면서도 연대는 전혀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들이 어떻게 주님에 대한 신뢰를 잃고, 어떻게 자기 own을 신뢰하게 되었는지에 집중합니다. 천국의 시선이 바로 그곳에 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천국이 역사나 자연계 자체를 무시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자연계 전체가 영계의 결과물이며, 역사는 섭리의 무대라고 설명합니다. 다만 천국은 역사를 그 자체로 보지 않고, 역사 속에서 형성되는 인간의 사랑과 의도, 상태를 보는 것입니다.

 

어쩌면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마치 주님이 그러셨던 것처럼’이라는 표현이 핵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지상에 계실 때 로마 황제의 이름보다 사람의 마음을 더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지구의 연대보다 인간 영혼의 구조를 더 중요하게 다루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천국은 이 지상의 일과 역사에 관심이 없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관심의 초점이 다르다’고 답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사건을 보지만 천국은 상태를 봅니다. 우리는 연대를 보지만 천국은 사랑을 봅니다. 우리는 ‘언제 일어났는가?’를 묻지만, 천국은 ‘왜 일어났는가?’와 ‘그것이 영혼을 어디로 이끌었는가?’를 묻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천국을 그렇게 다녀왔으면 지구의 역사나 고대 문명의 비밀도 좀 알려 주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오래 읽다 보면, 천국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가지 주제에만 거의 집착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그것은 ‘사람이 어떻게 주님께 가까워지는가’입니다. 그리고 그 관점에서 보면, 수천 년의 역사도 결국은 한 영혼의 사랑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를 보여 주는 배경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AC.208, 창3:6, ‘태고교회의 네 번째 후손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And the woman saw t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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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8, 심화 2, ‘후손과 후손 사이 실제 시간 간격’

AC.208.심화 2. ‘후손과 후손 사이 실제 시간 간격’ 이 각각의 후손이 실제로는 몇백, 몇천, 몇만 년의 간격이 있었을까요? 현재까지 우리가 확인한 AC 본문만을 근거로 매우 조심스럽게 말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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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8.심화

 

2. ‘후손과 후손 사이 실제 시간 간격

 

이 각각의 후손이 실제로는 몇백, 몇천, 몇만 년의 간격이 있었을까요?

 

 

현재까지 우리가 확인한 AC 본문만을 근거로 매우 조심스럽게 말한다면, ‘각 후손 사이에 실제로 몇백 년, 몇천 년, 혹은 몇만 년의 간격이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확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확실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AC.194에서 ‘세 번째 후손’을, AC.208에서 ‘네 번째 후손’을 언급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후손들이 서로 얼마만큼의 시간적 간격을 두고 존재했는지는 전혀 말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심은 연대기보다 영적 상태의 변화에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현재까지 확인한 본문들 가운데는 ‘세 번째 후손과 네 번째 후손 사이에는 몇 년이 흘렀다’거나, ‘첫 번째 후손부터 네 번째 후손까지는 몇 세기에 걸친 변화였다’는 식의 진술이 없습니다. 따라서 AC 본문만으로는 수백 년인지, 수천 년인지, 혹은 그보다 더 긴 기간인지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다만 추론은 가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를 인류 최초의 교회로 설명하며, 그 쇠퇴 또한 하루아침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점진적인 과정이었다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또한 창3:1-6의 몇 절 속에 세 번째 후손과 네 번째 후손이라는 서로 다른 후손들을 배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적어도 스베덴보리의 눈에는 창세기 본문이 단순한 하루의 사건 기록이 아니라, 여러 세대에 걸친 영적 역사를 압축한 기록으로 보였음을 시사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조심해야 합니다. ‘여러 세대’라는 말이 곧 ‘수천 년’이나 ‘수만 년’을 뜻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몇십 년’에 불과했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현재까지 확인된 AC 본문은 그 어느 쪽도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의 질문에 대한 현재의 가장 안전한 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세 번째 후손과 네 번째 후손의 존재는 AC.194 AC.208을 통해 확인되지만, 그들 사이의 실제 시간 간격은 스베덴보리는 밝히지 않는다. 따라서 수백 년인지 수천 년인지 수만 년인지는 알 수 없으며, 현재로서는 추정의 영역에 속한다.’

 

어쩌면 여기서도 스베덴보리의 관심은 시간적 거리보다 영적 거리였던 것 같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가’보다, ‘주님으로부터 직접 지각하던 상태가 어떻게 감각과 자기 판단을 신뢰하는 상태로 변해갔는가’였습니다.

 

따라서 지금 시점에서 가장 정직한 결론은 이것입니다. ‘후손들 사이에 상당한 시간적 간격이 있었을 가능성은 있지만, AC 본문은 그 기간을 알려 주지 않는다. 우리는 영적 상태의 변화는 확인할 수 있지만, 그것을 연대기적 숫자로 환산할 수는 없다.’ 이것이 현재까지 확인된 AC 자료에 가장 충실한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AC.208, 심화 3, ‘스베덴보리가 집중한 주제’

AC.208.심화 3. ‘스베덴보리가 집중한 주제’ 스베덴보리 본인도 학자였으면서 천국을 왕래하며 어떻게 이런 걸 일절 다루질 않았을까요? 마치 주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말이지요... 천국은 이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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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8, 심화 1, ‘각 후손과 장절 구분’

AC.208.심화 1. ‘각 후손과 장절 구분’ 이들은 태고교회의 네 번째 후손들이었는데, This was the fourth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AC.208) 각 후손이 몇 장 몇 절에서 시작되는지? 현재까지 우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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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8.심화

 

1. ‘각 후손과 장절 구분

 

이들은 태고교회의 네 번째 후손들이었는데, This was the fourth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AC.208)

 

각 후손이 몇 장 몇 절에서 시작되는지?

 

 

현재까지 우리가 확인한 AC 본문만을 근거로 매우 조심스럽게 말한다면, ‘각 후손이 정확히 몇 장 몇 절에서 시작되는가?’에 대해 확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AC.194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창3:1을 해설하면서 ‘여기서는 태고교회의 세 번째 후손(the third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이 다루어진다’고 직접 말합니다. 따라서 세 번째 후손은 적어도 창3:1에서 시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확실한 것은 AC.208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창3:6을 해설하면서 ‘이들은 태고교회의 네 번째 후손(the fourth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이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네 번째 후손은 적어도 창3:6에서 시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첫 번째 후손과 두 번째 후손입니다. 앞서 우리가 확인했듯이 AC.190의 ‘첫 번째 상태’, ‘두 번째 상태’, ‘세 번째 상태’를 그대로 ‘첫 번째 후손’, ‘두 번째 후손’, ‘세 번째 후손’으로 연결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는 state(상태)와 posterity(후손)를 서로 다른 범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현재까지 읽은 AC.67-208 범위 안에서 본다면, 우리는 ‘세 번째 후손 = 3:1’, ‘네 번째 후손 = 3:6’은 확인할 수 있지만, ‘첫 번째 후손 = 2 몇 절’, ‘두 번째 후손 = 2 몇 절’이라고 단정할 근거는 아직 확보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오히려 지금 시점에서 가장 정직한 정리는 이렇습니다. 스베덴보리는 AC.194에서 이미 세 번째 후손을 언급하므로, 첫 번째와 두 번째 후손은 반드시 그 이전 어딘가에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창2:7인지, 창2:8인지, 창2 전체의 어느 구간인지, 혹은 AC.67 이후의 어느 상태에 해당하는지는 AC 본문 속에서 직접 확인해야 하며, 현재까지 확인된 자료만으로는 단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의 질문에 대한 현재의 가장 안전한 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세 번째 후손은 창3:1에서 시작하며(AC.194), 네 번째 후손은 창3:6에서 시작한다(AC.208). 그러나 첫 번째 후손과 두 번째 후손의 시작 지점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으며, 그것을 AC.190의 첫째, 둘째 상태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함께 검토한 결과를 가장 충실하게 반영하는 결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앞으로 AC.209 이하를 계속 읽다 보면, 또는 AC.67-193 구간을 다시 추적하다 보면, 스베덴보리가 first posterity, second posterity를 직접 언급하는 대목을 만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때 가서야 비로소 첫 번째 후손과 두 번째 후손의 위치를 보다 정확하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은 ‘확실히 아는 것’과 ‘추정하는 것’을 구분해 두는 것이 가장 안전해 보입니다.

 

 

 

AC.208, 심화 2, ‘후손과 후손 사이 실제 시간 간격’

AC.208.심화 2. ‘후손과 후손 사이 실제 시간 간격’ 이 각각의 후손이 실제로는 몇백, 몇천, 몇만 년의 간격이 있었을까요? 현재까지 우리가 확인한 AC 본문만을 근거로 매우 조심스럽게 말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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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8, 창3:6, ‘태고교회의 네 번째 후손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And the woman saw t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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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And the woman saw that the tree was good for food, and that it was pleasant to the eyes, and a tree to be desired to give intelligence, and she took of the fruit thereof and did eat, and she gave also to her man [vir] with her, and he did eat. (3:6)

 

AC.208

 

이들은 태고교회의 네 번째 후손들이었는데, 자기 사랑(self-love, [amor proprius])에 스스로를 미혹되도록 내어주었으며, 감각과 기억 지식에 속한 것들로 확증되는 걸 보지 않는 한, 계시된 걸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This was the fourth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ho suffered themselves to be seduced by self-love [amore proprio] and were unwilling to believe what was revealed, unless they saw it confirmed by the things of sense and of memory-knowledge.

 

 

해설

 

AC.208은 창세기 3장의 타락이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태고교회 안에서 여러 세대를 거치며 점진적으로 진행된 영적 쇠퇴의 결과임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특별히 ‘태고교회의 네 번째 후손들’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창세기 3장이 인류 최초의 범죄 이야기가 아니라, 태고교회가 점차 본래의 순수한 상태를 잃어 가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표현은 ‘자기 사랑(amore proprio)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자기 사랑은 단순한 자존감이나 자기 보존 본능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보다 자신을 중심에 두는 사랑이며, 진리가 참인 이유를 주님께 두지 않고 자기 판단에 두는 상태입니다. 태고교회의 초기 사람들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지각(perception)을 통해 진리를 알았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보았기 때문에’가 아니라 ‘주님께서 보여 주셨기 때문에’ 알았습니다. 그러나 후대로 갈수록 자기 own이 강해지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그 지각을 신뢰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계시된 것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것은 계시 자체를 전면 부정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확인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그런가?’, ‘내가 직접 납득할 수 있는가?’, ‘감각과 경험, 지식으로 검증할 수 있는가?’를 묻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창3에서 뱀이 제안한 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특히 ‘감각의 것들(the things of sense)과 ‘기억 지식의 것들(the things of memory-knowledge)을 함께 언급합니다. 감각의 것들, 곧 감각에 속한 것들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는 외적 경험을 말합니다. 기억 지식(scientificum)은 인간이 축적한 학문, 논리, 정보, 경험 등을 말합니다. 이 둘은 본래 유익한 것이지만, 그것들이 신앙의 종이 아니라 주인이 되는 순간 문제가 발생합니다. 사람은 더 이상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참이다’라고 하지 않고, ‘내가 확인했기 때문에 참이다’라고 말하게 됩니다.

 

AC.208은 따라서 창3 전체의 핵심을 매우 간결하게 요약합니다. 타락의 본질은 선악과를 먹었다는 외적 행위가 아니라, 자기 사랑이 주님에 대한 신뢰를 대신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인간은 계시를 출발점으로 삼지 않고, 감각과 기억 지식을 출발점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문제를 ‘지식이 많음’에서 찾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그는 학문과 이성을 높이 평가합니다. 문제는 지식을 사용하는 위치입니다. 진리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지식을 사용하는 것은 영적 인간의 길입니다. 그러나 진리가 참인지 아닌지를 결정하기 위해 지식을 사용하는 것은 창3의 길입니다.

 

결국 AC.208은 태고교회 네 번째 후손들의 상태를 설명하는 동시에, 오늘날 인간이 빠지기 쉬운 영적 위험도 보여 줍니다. 그것은 ‘믿기 위해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되어야만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바로 그 지점에서 자기 own은 조용히 주님의 자리를 대신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심화

 

1. ‘각 후손과 장절 구분

 

 

AC.208, 심화 1, ‘각 후손과 장절 구분’

AC.208.심화 1. ‘각 후손과 장절 구분’ 이들은 태고교회의 네 번째 후손들이었는데, This was the fourth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AC.208) 각 후손이 몇 장 몇 절에서 시작되는지? 현재까지 우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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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후손과 후손 사이 실제 시간 간격

 

 

AC.208, 심화 2, ‘후손과 후손 사이 실제 시간 간격’

AC.208.심화 2. ‘후손과 후손 사이 실제 시간 간격’ 이 각각의 후손이 실제로는 몇백, 몇천, 몇만 년의 간격이 있었을까요? 현재까지 우리가 확인한 AC 본문만을 근거로 매우 조심스럽게 말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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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스베덴보리가 집중한 주제

 

 

AC.208, 심화 3, ‘스베덴보리가 집중한 주제’

AC.208.심화 3. ‘스베덴보리가 집중한 주제’ 스베덴보리 본인도 학자였으면서 천국을 왕래하며 어떻게 이런 걸 일절 다루질 않았을까요? 마치 주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말이지요... 천국은 이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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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9, 창3:6, ‘창3의 표현들이 의지, 애정의 언어들인 이유’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And the woman saw t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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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7, 창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AC.207-210)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And the woman saw t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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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7.심화

 

1. ‘AC.265

 

남편(man [vir])이 이성(the rational, 합리적 능력)을 말한다는 게 본 장 6절에 나오는데요, 거기 보면, 여자는 자기와 함께 있는 자기의 남자(her man)에게 주었고, 그는 먹었는데, 이는 그도 동의했다는 의미입니다. 같은 내용이 158번 글에 나오는 남자(the man)에 대한 말로도 분명한데요, 거기서 그는 지혜와 지성의 사람(one who is wise and intelligent)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여기 나오는 남자(man)는 그와는 달리 이성을 의미하는데, 왜냐하면, 지식의 나무, 곧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지혜와 지성이 파괴된 결과, 더 이상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성이라는 건 지성의 모방, 말하자면 겉모습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That by “man” [vir] is signified the rational appears from verse 6 of this chapter, in that the woman gave to her man with her, and he did eat, by which is meant his consent; and the same is also evident from what was said of the man in n. 158, where by him is meant one who is wise and intelligent. Here however “man” denotes the rational, because in consequence of the destruction of wisdom and intelligence by eating of the tree of knowledge, nothing else was left, for the rational is imitative of intelligence, being as it were its semblance. (AC.265)

 

AC.207에서 위 AC.265를 인용하는 이유

 

 

AC.207에서 스베덴보리가 AC.265를 인용하는 이유는, 창세기 3 6절의 ‘남편도 함께 먹었다’는 표현이 단순히 아담이라는 한 개인의 행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의 ‘이성 파트(rational)가 유혹에 동의한 사건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창세기 3장의 내적 의미를 따라가면, 뱀은 감각 파트(sensuous part), 여자는 own, 곧 자신의 proprium에 속한 애정과 의지를, 남자는 이성 파트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타락은 감각이 제안하고, own이 그것을 좋아하며, 마지막으로 이성이 그것에 동의하는 순서로 진행됩니다. AC.207이 ‘남편이 먹었다는 것은 이성의 동의를 의미한다’고 말하는 근거가 바로 AC.265입니다.

 

특히 AC.265에서 중요한 것은 ‘이성은 지성의 모방물이며, 마치 그것의 형상 같은 것(the rational is imitative of intelligence, being as it were its semblance)이라는 설명입니다. 원래 인간의 이성은 지성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지성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의 빛 안에서 사물을 보는 능력이고, 이성은 그 지성을 표현하고 정리하며 적용하는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이성이 지성을 섬깁니다.

 

그러나 창3에서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음으로 인해 지혜와 지성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이성만 남게 되었다(AC.265)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원래 태고교회 사람들은 지각(perception)을 통해 진리를 알았습니다. 사랑 안에서 직접 진리를 보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타락 이후에는 그 지각과 지성이 약해지고, 대신 이성이 앞에 나서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AC.265는 ‘남자’라는 단어가 창2와 창3에서 미묘하게 다르게 사용된다고 설명합니다. 창2에서는 아직 지혜와 지성이 살아 있으므로 ‘남자’가 지혜롭고 총명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창3에서는 이미 지혜와 지성이 손상되었기 때문에 ‘남자’는 더 이상 그런 높은 상태를 의미하지 않고, 단지 이성적 부분만을 의미하게 됩니다.

 

이 때문에 AC.207 AC.265를 인용하여, 선악과 사건의 마지막 단계가 무엇인지를 보여 줍니다. 그것은 단순히 감각의 유혹이나 own의 욕망이 아닙니다. 인간 안의 이성이 그것을 승인하는 순간입니다. 감각은 제안할 수 있고, 욕망은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성이 동의하지 않으면 아직 완전한 타락은 아닙니다. 그런데 ‘남편도 먹었다’는 것은 이성이 마침내 자기 own의 편에 섰다는 뜻입니다.

 

생각해 보면, 이것은 인간 경험에서도 매우 익숙한 과정입니다. 처음에는 어떤 욕망이 생깁니다. 그다음에는 그것이 좋아 보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성이 등장하여 ‘이 정도는 괜찮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사실 이것이 더 옳다’고 정당화합니다. 이 순간 욕망은 단순한 충동이 아니라 하나의 확정된 선택이 됩니다.

 

그래서 AC.207 AC.265를 인용하는 이유는 매우 분명합니다. 창3의 타락은 감각이나 애정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이성까지 그것에 동의한 사건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성은 원래 지성을 섬기도록 창조되었지만, 지성이 무너지면 자신이 주인이 되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비극적 전환을 ‘남편도 먹었다’는 짧은 표현 속에서 읽어 내고 있는 것입니다.

 

 

 

AC.207, 창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AC.207-210)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And the woman saw t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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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And the woman saw that the tree was good for food, and that it was pleasant to the eyes, and a tree to be desired to give intelligence, and she took of the fruit thereof and did eat, and she gave also to her man [vir] with her, and he did eat. (3:6)

 

AC.207

 

먹음직도 하고(Good for food)는 탐욕(cupidity), ‘보암직도 하고(pleasant to the eyes)는 환상(fantasy),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desirable to give intelligence)은 쾌락(pleasure)을 각각 의미합니다. 이것들은 다 own, 여자(woman)에게 속한 것들이며, ‘그도 먹은지라(husband eating)는 이성의 동의(the consent of the rational)를 의미합니다. (AC.265) Good for food” signifies cupidity; “pleasant to the eyes,” fantasy; and “desirable to give intelligence,” pleasure: these are of the own, or “woman”; by the “husband eating” is signified the consent of the rational (n. 265).

 

 

해설

 

AC.207은 창세기 36절에 대한 매우 압축적인 요약입니다. 지금까지 AC.194-206에서 설명된 내적 과정이 실제 행동으로 옮겨지는 순간을 보여 줍니다. 뱀이 제안하고, 여자가 듣고, 의심이 생기고, 그것이 불법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던 상태가 이제는 실제 동의와 실행으로 발전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먹기에 좋은(good for food)이라는 표현을 ‘욕망(cupidity)으로 해석합니다. 여기서 욕망은 단순한 식욕이 아니라 자기 own이 원하는 것을 갖고자 하는 내적 갈망입니다. 선악과가 실제로 맛있어 보였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신뢰하고, 자기 판단으로 진리를 결정하고 싶어 하는 욕망이 강해졌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신앙의 문제를 주님께 맡기기보다 자기 손에 쥐고 싶어 하는 상태입니다.

 

다음으로 ‘보기에 아름답고(pleasant to the eyes)는 ‘환상(fantasy)을 의미합니다. 욕망은 항상 상상을 동반합니다. 사람은 먼저 어떤 것을 원하고, 그다음에는 그것이 얼마나 좋을지를 마음속에 그려 봅니다. 그래서 여기서의 ‘’은 단순한 육체의 눈이 아니라 자기 own에 의해 왜곡된 이해를 가리킵니다. 그 결과 사람은 실제보다 훨씬 매력적이고 합리적이며, 아름답게 그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환상’입니다.

 

또한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desirable to give intelligence)은 ‘즐거움(pleasure)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사람은 단순히 욕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통해 더 현명해지고 더 많이 알게 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이것은 창3 전체를 관통하는 유혹의 핵심입니다. ‘주님께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 판단하라. 그러면 네 눈이 열리고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 그래서 이 즐거움은 단순한 쾌락이 아니라 자기 지혜에 대한 만족과 자기 확신의 기쁨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세 가지, 곧 욕망(cupidity), 환상(fantasy), 즐거움(pleasure)이 모두 ‘여자’, 즉 인간의 own에 속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타락이 처음부터 이성의 문제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애정의 문제로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먼저 사랑하고, 그다음에 생각합니다. 먼저 원하고, 그다음에 이유를 만듭니다. 그래서 타락의 중심에는 언제나 own의 애정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남편도 먹었다’는 것은 이성(rational)의 동의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점은 이성이 처음부터 주도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먼저 욕망이 생기고, 그 욕망이 상상을 낳고, 상상이 즐거움을 만들고, 마지막에 이성이 그것을 승인합니다. 그래서 이성은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라, 종종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 때문에 AC.207은 인간 타락의 심리적 구조를 매우 정확하게 보여 줍니다. 사람은 보통 먼저 잘못을 생각하고 나서 욕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먼저 원하고, 그다음에 그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애정이 움직이고, 그다음에 이성이 그 애정을 지지합니다. 이것이 바로 ‘여자가 먹고 남편도 먹었다’는 표현 속에 담긴 아르카나입니다.

 

그래서 AC.207은 단순히 선악과 사건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 유혹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욕망이 생기고, 그것이 환상을 만들고, 환상이 즐거움을 낳고, 마지막에 이성이 동의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 인간은 주님께 의존하는 상태에서 자기 own을 신뢰하는 상태로 넘어가게 됩니다. 이것이 창3에서 스베덴보리가 보는 타락의 실제 구조입니다.

 

 

심화

 

1. ‘AC.265

 

 

AC.207, 심화 1, ‘AC.265’

AC.207.심화 1. ‘AC.265’ ‘남편’(man [vir])이 이성(the rational, 합리적 능력)을 말한다는 게 본 장 6절에 나오는데요, 거기 보면, 여자는 자기와 함께 있는 자기의 남자(her man)에게 주었고, 그는 먹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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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8, 창3:6, ‘태고교회의 네 번째 후손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And the woman saw t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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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6, 창3:4-5, ‘너희 눈이 밝아져’가 실제로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And the serpent said unto the woman, Ye shall n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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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2026/06/14)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34, ‘참 놀랍도다 주 크신 이름’, 찬80, ‘천지에 있는 이름 중입니다.

 

오늘은 창3 두 번째, 본문은 창3:1-5이고, AC 글 번호로는 194번에서 206입니다.  

 

먼저 본문,

 

1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3:1-5)

 

제목은

 

태고교회 후손들의 상태 변화, 그 중심의 이동

 

이며, 다음은 AC.194-206입니다. 그전에 먼저 오늘 범위에 대한 요약 설명 후, 필요하면 몇몇 글 리딩식으로 진행하겠습니다.

 

 

3:1-5와 이에 대한 AC.194-206은 인류 타락의 시작을 설명하는 본문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어떤 한 남자와 여자가 과일 하나를 따먹은 사건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는 이것을 태고교회 후손들 안에서 일어난 영적 상태의 변화, 곧 인간이 주님을 신뢰하던 상태에서 자기 자신을 신뢰하는 상태로 이동해 가는 과정을 보여 주는 말씀으로 해석합니다.

 

AC.194에서 스베덴보리는 먼저 등장인물들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은 인간의 감각 파트(sensuous part)이며, ‘여자’는 인간의 own, 곧 자신의 proprium을 뜻합니다. ‘남자’는 이성 파트(rational part)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뱀이 처음부터 악마나 사탄으로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뱀은 본래 인간의 감각 파트입니다. 문제는 그 감각이 주님의 질서 아래 머물지 않고, 신앙의 재판관 자리에 앉기 시작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더냐?’라는 뱀의 질문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계시를 자기 판단으로 검증하려는 태도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AC.195에서는 왜 감각 파트가 ‘’으로 불리는지 설명합니다. 고대인들은 감각적인 것들을 뱀으로 불렀는데, 이는 뱀이 땅에 가장 가까이 붙어사는 것처럼 감각도 인간 존재의 가장 바깥 단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감각 자체는 악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신앙의 신비를 감각으로 판단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시편, 아모스, 예레미야, 욥기의 여러 구절을 인용하여, 감각에 근거한 거짓 추론이 어떻게 ‘뱀의 독’으로 묘사되는지를 설명합니다. 여기서 뱀의 독은 단순한 오류가 아니라, 사람을 진리에서 멀어지게 하는 자기 확신의 힘을 뜻합니다.

 

AC.196에 이르면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시대를 향해 더 강한 경고를 합니다. 고대인들은 감각만을 신뢰했지만, 현대인들은 여기에 학문(scientia), 철학, 기억 지식까지 더해 자신들의 불신앙을 더욱 강하게 정당화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 사후 생명을 비웃는 사람, 모든 것을 물질과 자연으로 설명하려는 사람들을 예로 듭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학문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학문을 신앙의 재판관으로 삼는 태도를 비판한다는 점입니다. 그는 지식이 주님의 진리를 밝히는 도구가 되어야지, 그것을 심판하는 권위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그러나 AC.197은 중요한 균형을 제공합니다. 뱀은 항상 악한 상징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말씀하신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또한 광야의 놋뱀 역시 주님의 감각 파트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감각은 본래 나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질서 아래 있을 때는 신중함과 분별력을 의미합니다. 창3의 뱀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감각이 종의 자리를 떠나 주인의 자리에 앉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AC.198-199에서는 여자가 뱀에게 대답하는 내용이 해설됩니다. ‘동산 나무의 열매’는 태고교회로부터 전해진 신앙의 선과 진리, 곧 신앙의 지식들(cognitiones)을 뜻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동산 나무’가 아니라 ‘동산 나무의 열매’라는 표현에 주목합니다. 태고교회는 진리를 직접 지각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나무’ 자체가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손들은 더 이상 직접 지각하지 못하고, 조상들로부터 전해진 진리의 열매를 배우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열매’라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또한 ‘만지지도 말라’는 것은 신앙의 문제를 감각과 기억 지식으로 판단하지 말라는 뜻이며, ‘죽을까 하노라’는 것은 그렇게 하면 신앙과 지혜가 소멸된다는 의미입니다.

 

AC.200-201은 홍수 이전과 이후 인간 구조의 차이를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알았습니다. 그러나 후대로 갈수록 사람들은 진리를 먼저 배우고, 그 진리로부터 선을 배우는 구조로 바뀌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결국 ‘quod scirent’, 곧 ‘그저 알고 있는 것’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한 타락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홍수 이후 세상이 완전히 멸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주님의 섭리적 조치였습니다. 태고교회의 높은 지각이 타락과 결합되면 회복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홍수 이후 인간은 비록 더 낮은 상태에 있게 되었어도 더 안전하게 보호받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유대인을 보호하기 위해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13:13) 하신 것과 같습니다.

 

AC.202-203은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의 차이를 설명합니다. 천적 인간은 사랑 안에서 진리를 직접 지각하기 때문에 신앙에 대해 추론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옳다, 옳다’, ‘아니다, 아니다’면 충분합니다. 반면 영적 인간은 이해와 이성, 기억 지식을 사용하여 신앙을 확증합니다. 그러나 그들도 그것들로부터 신앙의 진위를 결론짓지는 않습니다. 확증은 이미 받아들인 진리를 더 깊이 이해하는 것이고, 결론은 자기 지성으로 신앙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전자는 영적 천사들의 길이고, 후자는 뱀의 길입니다.

 

마지막으로 AC.204-206은 타락의 내적 과정을 요약합니다. 뱀은 ‘너희 눈이 밝아질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감각과 자기 판단으로 신앙을 검증하면 진리를 더 잘 알게 될 것이라는 유혹입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정말 불법일까?’라는 작은 의심으로 시작됩니다. 그러나 점차 ‘내가 직접 판단하겠다’, ‘내가 스스로 인도하겠다’는 생각으로 발전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인간은 자신을 신뢰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사람들을 두고 ‘자신들이 신들처럼 되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은 양심이 무엇인지, 지각이 무엇인지,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열린 눈’이며,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어둠의 심연’이라고 부릅니다.

 

결국 창3:1-5는 단순히 선악과를 먹은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주님을 신뢰하던 상태에서 자기 own을 신뢰하는 상태로 이동하는 과정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감각의 제안, own의 동의, 이성의 승인이라는 흐름 속에서 인간은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참이다’에서 ‘내가 인정해야 참이다’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이것이 바로 모든 영적 타락의 시작입니다. 동시에, 이 본문은 오늘날 우리 각 사람 안에서도 계속 반복되는 영적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상 요약 설명을 마치고, 아래는 해당 AC 본문, 해설 및 심화입니다.

 

 

 

AC.194, 창3:1,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AC.194-197)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And the serpent was more sub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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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5, 창3:1, ‘뱀’(serpent)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And the serpent was more sub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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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6, 창3:1, ‘뱀’의 시대적 확장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And the serpent was more sub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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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7, 창3:1,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진 ‘뱀’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And the serpent was more sub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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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8, 창3:2-3,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AC.198-203)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And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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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9, 창3:2-3, ‘나무’와 ‘열매’, 태고교회의 상태 변화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And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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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0, 창3:2-3, 창2 ‘사랑’에서 창3 ‘신앙’으로 중심 이동을 허락하신 이유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And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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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1, 창3:2-3, ‘홍수 이전 태고 사람들의 성향(genius) 이해의 어려움’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And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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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2, 창3:2-3, ‘신앙’ 관련, 천적 천사들의 경우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And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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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3, 창3:2-3, ‘신앙’ 관련, 영적 천사들의 경우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And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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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4, 창3:4-5,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AC.204-206)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And the serpent said unto the woman, Ye shall n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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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5, 창3:4-5, 창3의 서술, ‘상태의 연속적 변화’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And the serpent said unto the woman, Ye shall n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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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6, 창3:4-5, ‘너희 눈이 밝아져’가 실제로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And the serpent said unto the woman, Ye shall n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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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오늘 창3 본문에 대한, 그러나 그 드러내시는, 너무나 놀라운 속뜻 앞에 어리둥절, 감사, 감동하게 됩니다. 오, 주님, 저희로 이 생명의 말씀 안에서 살아가게 하여 주세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6-14(D1)

 

 

축도

 

주 여호와 하나님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 그 거룩한 역사하심이, 오늘 ‘태고교회 후손들의 상태 변화, 그 중심의 이동(3:1-5)에 대한, 놀라운 아르카나의 말씀들 앞에 거듭 참된 ‘눈 밝아짐’으로 아멘 하며, 마음에 더욱 깊은 주님 사랑을 결심하는, 그리고 주님 주신 일부를 감사함으로 주님께 헌금하는 모든 손길 위에, 이제부터 영원토록 함께하시길 간절히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2655, 2, 창3.2, 2026-06-14(D1)-주일예배(창3,1-5, AC.194-206), ‘태고교회 후손들의 상태 변화, 그 중심의 이동’.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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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6/07, 창3:1-13, AC.190-193), ‘창3 전체 소개 및 창3:1-13 개요’

※ 오늘(2026/06/07, 성찬)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33, ‘영광스런 주를 보라’, 찬230, ‘우리의 참되신 구주시니’(성찬), 찬79,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입니다. 오늘부터 창3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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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6.심화

 

2. ‘주님의 영원하신 사랑과 자비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인정하지 않는데, 이는 멸망하는 짐승들과 자신들을 같게 여기기 때문이며, 주님을 인정하지도 않고, 오직 자기 자신과 자연만을 숭배합니다. 그들 가운데 말에 신중하려는 자들은, 그 본질은 알지 못하지만, 어떤 최고 존재[ens]가 만물을 다스린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그들이 감각과 기억 지식의 것들로 여러 방식으로 스스로를 확증하는 원리들이며, 만일 감히 할 수만 있다면, 온 우주 앞에서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지혜이며,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열린 눈(open eyes)이며, 이러한 신들(gods)입니다. 그들이 한낮보다 더 분명하다고 여기는 이러한 원리들을 출발점으로 삼아 계속 나아가며, 이런 방식으로 신앙의 신비들에 대해 추론하는데, 그 결과가 무엇이겠습니까? 어둠의 심연일 뿐입니다. 이들이야말로 무엇보다도 세상을 미혹하는 뱀들(serpents)입니다. they do not acknowledge an eternal life; for they believe themselves to be like the brutes which perish; neither do they acknowledge the Lord, but worship only themselves and nature. Those among them who wish to be guarded in their expressions, say that a certain supreme existence [ens] of the nature of which they are ignorant rules all things. These are the principles in which they confirm themselves in many ways by things of sense and of memory-knowledge, and if they dared, they would do the same before all the universe... Such is their wisdom, such “open eyes” have they, and such “gods” are they. Principles like these, which they think clearer than the day, they make their starting point, and so continue on, and in this way reason about the mysteries of faith; and what can be the result but an abyss of darkness? These above all others are the “serpents” who seduce the world. (AC.206)

 

주님은 그럼에도 불구, 저런 사람들에게도 끝까지 볕과 비를 내리시고, 지상의 삶은 물론, 사후 지옥으로 뛰어들 때까지 보살피시네요...

 

 

네, 목사님께서 짚으신 부분이야말로 AC.206을 읽으며, 가장 깊은 감동을 받게 되는 지점 가운데 하나인 것 같습니다.

 

사실 AC.206의 묘사는 상당히 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사람들을 ‘세상을 미혹하는 뱀들’이라고까지 부릅니다.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믿지 않고, 주님을 인정하지 않으며, 자기 자신과 자연을 숭배하고, 신앙의 신비들을 감각과 기억 지식으로 심판합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이미 돌이키기 어려운 상태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의 다른 저작들을 함께 읽어보면, 주님은 그런 사람들조차 단 한 순간도 버리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선한 사람들만의 주님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햇빛이 의인과 악인 위에 함께 비치고, 비가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위에 함께 내리는 것처럼, 주님의 생명과 인플럭스는 천국에 갈 사람에게만 흐르는 것이 아니라 지옥으로 가는 사람에게도 계속 흐릅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을 빌리면, 지옥에 있는 자들조차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지 않으면 단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차이는 생명이 어디서 오느냐가 아니라, 그 생명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있습니다. 천사는 그것을 사랑과 지혜로 받아들이고, 악한 영은 그것을 자기 사랑과 지배욕으로 왜곡하여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생명 자체는 여전히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래서 목사님 말씀처럼, 주님은 저런 사람들에게도 끝까지 볕과 비를 내리십니다. 그들이 지상에 사는 동안에도 그렇고, 죽은 후 중간 영계에 있는 동안에도 그렇고, 심지어 그들이 최종적으로 지옥을 선택하는 순간에도 그렇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주님은 누구도 지옥으로 보내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끝까지 천국으로 이끌려고 하십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자기 사랑이 너무 강하여 결국 주님의 질서보다 자신의 삶을 선택하게 됩니다.

 

이 점에서 저는 AC.182-189의 사후 첫 상태가 떠오릅니다. 목사님께서 여러 번 감탄하셨듯이, 주님은 사람이 죽은 직후 그가 누구였는지, 어떤 신앙을 가졌는지, 얼마나 완고했는지를 먼저 따지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천적 천사들에게 맡기시고, 사랑과 평안 가운데 보호하시며, 마치 어린아이가 잠에서 깨어나듯 조심스럽게 인도하십니다.

 

생각해 보면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AC.206의 저런 사람들조차 죽는 순간에는 주님의 품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들에게도 동일한 사랑을 베푸십니다. 다만 시간이 지나면서 각자가 진정 사랑하는 것이 드러나고, 결국 스스로 자신과 가장 비슷한 공동체를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지옥론에서 가장 인상적인 점은, 주님의 사랑이 천국 문턱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주님을 거부할 수 있지만, 주님은 인간을 거부하지 않으십니다. 인간은 주님에게서 등을 돌릴 수 있지만, 주님은 끝까지 등을 돌리지 않으십니다.

 

어쩌면 AC.206을 읽으며 우리가 정말 놀라워해야 할 것은 저 사람들의 어둠이 아니라, 그런 사람들에게조차 결코 끊어지지 않는 주님의 인내와 자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체를 관통하는 한 가지 메시지가 있다면, 그것은 주님께서는 언제나 인간보다 먼저 사랑하시고, 인간보다 오래 기다리시며, 인간보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지옥으로 뛰어들 때까지 보살피신다’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섭리 이해를 매우 잘 드러내는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마지막 순간에도 주님은 그 사람이 방향을 돌리기를 바라시며 손을 내밀고 계신다는 점까지 함께 기억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AC.206, 창3:4-5, ‘너희 눈이 밝아져’가 실제로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And the serpent said unto the woman, Ye shall n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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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6, 심화 1, ‘실제 경험 사례들인가?’

AC.206.심화 1. ‘실제 경험 사례들인가?’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신들이거나 가장 지혜로운 사람들로 여겨지기를 원하지만, 만일 ‘자신의 own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무엇이냐’(whether they 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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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6.심화

 

1. ‘실제 경험 사례들인가?’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신들이거나 가장 지혜로운 사람들로 여겨지기를 원하지만, 만일 자신의 own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무엇이냐(whether they know what it is not to have anything of their own)고 묻는다면, 그것은 곧 아무런 존재도 가지지 않는 것이며, 자신의 own이 모두 제거된다면 자신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만일 주님으로부터 사는 것이 무엇이냐(what it is to live from the Lord)고 묻는다면, 그것을 공상으로 여길 것입니다. 만일 양심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서민들을 억제하는 데 쓰이는 상상의 산물일 뿐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지각(perception)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그것을 비웃으며, 광신적인 헛소리라 부를 것입니다. Although such persons desire to be regarded as gods, or as the wisest of men, if they were asked whether they know what it is not to have anything of their own, they would answer that it is to have no existence, and that if they were deprived of everything that is their own, they would be nothing. If they are asked what it is to live from the Lord, they think it a fantasy. If asked whether they know what conscience is, they would say it is a mere creature of the imagination, which may be of service in keeping the vulgar under restraint. If asked whether they know what perception is, they would merely laugh at it and call it enthusiastic rubbish. (AC.206)

 

위 내용은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경험한 것들 같아요.

 

 

네, 저도 AC.206을 읽으면 그런 인상을 받습니다. 물론 학문적으로는 조심해서 말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특정 개인들과 나눈 실제 대화를 그대로 기록한 것인지, 아니면 그가 관찰한 인간 유형을 대표적으로 묘사한 것인지는 단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저작 전체를 읽어보면, 이 대목은 단순한 철학적 가정이라기보다 그가 오랫동안 직접 보고 들은 것을 바탕으로 쓰고 있다는 느낌이 매우 강합니다.

 

특히 주목할 것은 AC.206의 논리가 지나치게 생생하다는 점입니다. 그는 단순히 ‘그들은 영적인 것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씩 질문을 던집니다. ‘자신의 own이 없는 상태가 무엇인지 아는가?’, ‘주님으로부터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양심이 무엇인지 아는가?’, ‘지각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리고 각각에 대해 그들이 어떻게 반응할지를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이것은 마치 실제 사람들과 수없이 대화해 본 사람이 하는 설명처럼 보입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스베덴보리가 묘사하는 이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낯설지 않다는 점입니다. ‘자신의 own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은 공상이다’, ‘양심은 사회 질서를 위한 심리적 장치일 뿐이다’, ‘지각 같은 것은 광신이다’라는 생각은 18세기에도 있었겠지만, 어쩌면 21세기에는 더 흔해졌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AC.206을 읽다 보면, 스베덴보리가 특정 시대의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own을 절대화하는 인간 정신의 한 유형을 묘사하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또 한 가지 인상적인 것은, 그가 비판하는 대상이 무식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그는 ‘세상 학문에 뛰어난 사람들’, ‘가장 지혜롭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언급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지식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는 태도를 비판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 자신이 당대 유럽 최고의 과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AC.206을 읽을 때마다 스베덴보리가 영계 체험 이전의 과학자 스베덴보리와, 영계 체험 이후의 계시자 스베덴보리, 두 삶을 모두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는 학문과 철학의 세계도 깊이 알고 있었고, 동시에 영계에서 천사들과 영들과의 교류도 경험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은 단순한 교리적 주장이라기보다, ‘나는 이런 종류의 사람들을 보았고, 그들의 생각이 어디까지 가는지 보았다’는 증언처럼 읽히는 면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AC.206을 읽으며 곧바로 ‘세상 학문을 하는 사람들은 다 틀렸다’는 결론으로 가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심은 학문 자체가 아니라, 학문을 최종 권위로 삼는 태도에 있습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이 평생 쌓은 과학 지식을 버리지 않았고, 오히려 그것을 주님의 질서 안에서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결국 AC.206은 단순한 논쟁문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오랜 세월 관찰한 인간 정신의 한 극단을 보여 주는 글로 읽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목사님 말씀처럼, 그 생생함 때문에 독자는 종종 ‘이건 실제로 스베덴보리가 만나고 경험한 사람들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하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 느낌이 충분히 자연스럽다고 생각합니다.

 

 

 

AC.206, 심화 2, ‘주님의 영원하신 사랑과 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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