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66.심화

 

1. 삼상2:3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삼상2:3) Speak what is high! high! Let what is ancient come out of your mouth (1 Sam. 2:3).

 

 AC.66 첫 인용구절의 경우, 그 한글 개역개정의 번역이 좀 엉뚱, 많이 안 맞습니다. 번역자들이 아르카나에 대한 이해와 배경지식이 없었기 때문이었던 같은데... 과연 그런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목사님께서 느끼신 그 ‘어긋남’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다만 그 원인을 ‘아르카나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만 보시는 것은 조금 조정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구절의 차이는 단순히 번역자의 영적 이해 문제라기보다, ‘히브리어 원문 해석 전통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우리가 흔히 보는 개역개정, 곧 삼상2:3,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는 히브리어 문맥을 ‘경고와 책망’으로 읽은 번역입니다. 실제로 히브리어에는 ‘높다, 교만하다(gābah) 계열의 표현이 있고, 그 반복을 ‘교만한 말을 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전통적인 유대, 기독교 번역 흐름입니다. 그래서 이 번역은 언어적으로 크게 틀렸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AC에서 제시하는 영어 표현, 곧 ‘Speak what is high! high! Let what is ancient come out of your mouth.’는 같은 히브리어를 ‘다른 방향으로 읽은 것’입니다. 여기서 ‘high’는 단순히 ‘교만’이 아니라 ‘높은 것, 숭고한 것’, 그리고 ‘ancient’는 ‘태고의 것, 근원적인 것’을 가리키는 방향으로 풀립니다. 즉, 이 구절을 ‘금지’가 아니라 ‘권면’, 그러니까 ‘높은 것, 근원적인 것을 말하라’는 쪽으로 읽은 것입니다.

 

이 차이는 바로 AC가 늘 취하는 방식과 연결됩니다. 문자 자체를 그대로 번역하기보다, 그 안에 담긴 ‘영적 의미의 방향’을 따라 읽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역개정은 ‘문자적, 도덕적 경고’에 가깝고, AC는 ‘내적 의미인 높은 진리와 태고의 것을 말하라’는 방향으로 열어 줍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가장 균형 있게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개역개정 번역은 히브리어 문법과 전통적 해석에 따른 것이고, AC의 번역은 같은 본문을 내적 의미의 방향에서 재해석한 것이다.’ 둘은 ‘맞고 틀림’의 관계라기보다, ‘층위가 다른 해석’입니다.

 

이걸 목회적으로 보면 오히려 매우 유익한 지점이 됩니다. 같은 구절을 두고, 한쪽에서는 ‘교만을 경계하라’는 교훈이 나오고, 다른 쪽에서는 ‘높은 것, 곧 주님께 속한 것을 말하라’는 방향이 열립니다. 이 둘은 서로 모순이 아니라, ‘외적 의미와 내적 의미의 관계’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교만을 버려야 비로소 ‘높은 것’을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느끼신 ‘왜 이렇게 다르지?’라는 감각은 매우 중요한 지점입니다. 그것이 바로 ‘문자와 내적 의미 사이의 간극’을 실제로 느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차이를 ‘번역자의 부족’으로만 보지 마시고, ‘같은 본문을 서로 다른 층위에서 읽고 있는 것’으로 보시면 훨씬 더 정돈됩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개역개정은 히브리어 문맥에 따른 문자적 번역이고, AC는 그 본문을 내적 의미의 방향에서 풀어낸 해석이므로, 둘의 차이는 오류라기보다 해석 층위의 차이입니다.’

 

 

 

AC.66, 창1, '말씀의 네 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

AC.66 말씀에는 전반적으로 네 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이 있습니다. 첫째는 태고교회의 스타일입니다. 그들의 표현 방식은 이 땅의 것과 세상의 것을 말할 때, 그것들이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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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6

 

말씀에는 전반적으로 네 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이 있습니다. 첫째는 태고교회의 스타일입니다. 그들의 표현 방식은 이 땅의 것과 세상의 것을 말할 때, 그것들이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동시에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단지 표상으로 표현했을 뿐 아니라, 그것들을 하나의 역사적 연속으로 엮어, 더욱 생명력을 갖게 했는데, 이런 방식은 그들에게 더없이 큰 기쁨이었습니다. 이런 스타일을 가리켜 한나는 예언 가운데 이렇게 말했습니다. There are in the Word, in general, four different styles. The first is that of the most ancient church. Their mode of expression was such that when they mentioned terrestrial and worldly things they thought of the 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 which these represented. They therefore not only expressed themselves by representatives, but also formed these into a kind of historical series, in order to give them more life; and this was to them delightful in the very highest degree. This is the style of which Hannah prophesied, saying: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삼상2:3) Speak what is high! high! Let what is ancient come out of your mouth (1 Sam. 2:3).

 

이러한 표상들은 시편에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78:2-4) Such representatives are called in David, “Dark sayings of old” (Ps. 78:2–4).

 

2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 하니 3이는 우리가 들어서 아는 바요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전한 바라 4우리가 이를 그들의 자손에게 숨기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영예와 그의 능력과 그가 행하신 기이한 사적을 후대에 전하리로다 (78:2-4)

 

창조, 에덴동산 등에 관한 이 모든 내용, 곧 아브람 시대까지의 기록을 모세는 태고교회의 후손들로부터 전해 받았습니다. These particulars concerning the creation, the garden of Eden, etc., down to the time of Abram, Moses had from the descendants of the most ancient church.

 

[2] 둘째 스타일은 역사적 스타일로, 아브람 이후의 모세오경과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기, 열왕기에 나타납니다. 이 책들에서 역사적 사실들은 문자 그대로 나타나 있지만, 그 안에는 전체적으로도 부분적으로도 전혀 다른 것들이 내적 의미 안에 담겨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이어지는 글들에서 차례대로 설명하겠습니다. 셋째 스타일은 예언적 스타일입니다. 이 스타일은 태고교회에서 가장 신성하게 여겼던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나 태고교회의 스타일처럼 연속적이고 역사적인 형식은 아니고, 단절되어 있으며, 내적 의미 없이는 거의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내적 의미 안에는 가장 깊은 비밀들이 담겨 있는데, 그것들은 아름다운 질서 속에서 이어지며, 겉 사람과 속 사람, 교회의 다양한 상태들, 하늘 자체, 그리고 가장 깊은 차원에서는 주님을 다룹니다. 넷째 스타일은 다윗의 시편에 나타나는 스타일로, 예언적 스타일과 일상적인 언어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그 안에서는 다윗이라는 왕의 인격 아래에서, 내적 의미로는 주님이 다루어집니다. The second style is historical, which is found in the books of Moses from the time of Abram onward, and in those of Joshua, Judges, Samuel, and Kings. In these books the historical facts are just as they appear in the sense of the letter; and yet they all contain, in both general and particular, quite other things in the internal sense, of which, by the Lord’s Divine mercy, in their order in the following pages. The third style is the prophetical one, which was born of that which was so highly venerated in the most ancient church. This style, however, is not in connected and historical form like the most ancient style, but is broken, and is scarcely ever intelligible except in the internal sense, wherein are deepest arcana, which follow in beautiful connected order, and relate to the external and the internal man; to the many states of the church; to heaven itself; and in the inmost sense to the Lord. The fourth style is that of the psalms of David, which is intermediate between the prophetical style and that of common speech. The Lord is there treated of in the internal sense, under the person of David as a king.

 

 

해설

 

이 글은 말씀 전체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결정짓는, 매우 구조적인 설명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말씀을 하나의 동일한 스타일로 보지 않고, 네 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이는 성경 해석에서 매우 중요한 관점 전환을 요구합니다. 같은 방식으로 모든 본문을 읽으려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오해를 낳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첫째 스타일로 소개되는 태고교회의 스타일은, 오늘날 우리가 ‘신화적’이라고 부르기 쉬운 방식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은 신화가 아니라, 가장 높은 차원의 언어입니다. 이 스타일의 핵심은, 외적 사물과 사건을 말하면서도 동시에 그 안에 담긴 영적, 천적 실재를 직접 떠올렸다는 점입니다. 그들에게 자연은 상징이 아니라, 곧바로 영적 세계와 연결된 창문이었습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태고교회의 사람들이 표상들을 ‘역사적 연속’으로 엮었다는 설명입니다. 이는 단순한 비유의 나열이 아니라, 하나의 살아 있는 이야기로 구성되었음을 뜻합니다. 창조 이야기, 에덴동산, 초기 족장들의 이야기가 단절된 상징이 아니라, 인간의 영적 상태가 변화해 가는 하나의 생명 서사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스타일은 그들에게 ‘최고의 기쁨’이었습니다. 진리를 안다는 것은 곧 삶의 기쁨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나의 예언과 다윗의 시편이 인용되는 것도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높은 말’,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은 난해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깊이를 뜻합니다. 이 ‘감추어졌던 것’은 악이나 무지가 아니라, 인간의 자연적 이해를 넘어서는 신적 깊이를 가리킵니다. 즉, 빛이 너무 강해 눈이 부신 상태와 같습니다.

 

둘째 스타일인 역사적 스타일은, 오늘날 독자들이 가장 익숙하게 느끼는 형식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말합니다. 이 역사들은 문자 그대로 사실이지만, 그 안에는 전혀 다른 차원의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즉, 역사성과 상징성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습니다. 역사로서 참이면서 동시에 내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 성경 해석의 핵심 중 하나입니다.

 

셋째 스타일인 예언적 스타일은, 많은 독자들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부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분명히 짚습니다. 이 스타일은 ‘연결된 역사 형식’이 아니라, 단절되고 압축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적 의미 안에서는 이 파편들이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질서로 연결됩니다. 예언서가 혼란스럽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스타일의 문제가 아니라, 읽는 차원의 문제입니다.

 

이 예언적 스타일의 특징은 범위의 확장성입니다. 겉 사람과 속 사람, 교회의 상태, 하늘의 질서,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주님 자신까지를 동시에 다룹니다. 그래서 이 스타일은 문자적 차원에 머물러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내적 의미로 들어가야 합니다.

 

넷째 스타일인 시편은 이 모든 스타일을 이어주는 다리와 같습니다. 예언처럼 높고, 그러나 일상 언어처럼 인간적입니다. 다윗이라는 인물의 감정과 경험을 통해 말하지만, 내적 의미에서는 주님의 상태와 주님의 왕적 통치를 노래합니다. 그래서 시편은 개인의 기도이면서 동시에 보편적 신앙 고백이 됩니다.

 

이 글 전체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말씀은 단일한 방식으로 읽히도록 쓰이지 않았습니다. 스타일을 구별하지 않으면, 의미도 왜곡됩니다. 그러나 스타일을 구별하고, 각 스타일이 가리키는 차원을 인식하기 시작하면, 말씀은 점점 하나의 살아 있는 구조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 구조의 중심에는 언제나 주님과 인간의 거듭남이 놓여 있습니다.  

 

 

심화

 

1.삼상2:3

 

 

AC.66, 심화 1, ‘삼상2:3’

AC.66.심화 1. ‘삼상2:3’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삼상2:3) Speak what is high! high! Let what is ancient come out of your mouth (1 Sam. 2:3). 위 AC.66 첫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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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시78:2-4’

 

2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 하니 3이는 우리가 들어서 아는 바요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전한 바라 4우리가 이를 그들의 자손에게 숨기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영예와 그의 능력과 그가 행하신 기이한 사적을 후대에 전하리로다 (78:2-4)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 구절은 AC.66의 문맥에서 ‘말씀 안에는 처음부터 감추어져 있던 깊은 것들(아르카나)이 있으며, 그것이 비유와 이야기의 형식 속에 담겨 전해지고, 때가 되면 드러나 사람들을 통해 이어진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즉, ‘비유로 말한다’는 것은 감추기 위함이 아니라, ‘담아 두기 위함’이며, ‘드러낸다’는 것은 단순한 설명이 아니라 ‘내적 의미의 열림’을 뜻합니다.

 

먼저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 하니’입니다. 여기서 ‘비유’는 단순한 교훈적 이야기 방식이 아니라, ‘겉으로는 이야기지만 속에는 다른 뜻이 담겨 있는 표현 방식’입니다. 그리고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은 바로 아르카나, 곧 말씀 안에 항상 있었지만 문자 속에 감추어져 있던 내적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말씀 자체가 처음부터 이중 구조—겉 이야기와 속 의미—로 주어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 ‘우리가 들어서 아는 바요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전한 바라’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역사적 전승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진리들이 끊어진 것이 아니라 계속 이어져 왔다’는 뜻입니다. 다만 그 전해짐은 항상 ‘비유와 상징의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그 안에는 더 깊은 것이 계속 보존되어 온 것입니다.

 

그다음 ‘우리가 이를 그들의 자손에게 숨기지 아니하고’입니다. 여기서 ‘숨기지 않는다’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앞에서는 ‘감추어졌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숨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모순이 아니라, ‘방식의 차이’입니다. 말씀은 겉으로는 감추어져 있지만, 그것을 열어 주는 방향으로는 결코 숨겨지지 않습니다. 즉, 찾는 사람에게는 열리고, 찾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대로 덮여 있는 구조입니다.

 

마지막으로 ‘여호와의 영예와 그의 능력과 그가 행하신 기이한 사적을 후대에 전하리로다’입니다. 여기서 ‘영예’는 단순한 찬양이 아니라 ‘주님의 신적 진리의 빛’, 곧 영광(glory)을 뜻하고, ‘능력’은 그 진리가 실제로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 ‘기이한 사적’은 그 진리가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변화의 역사입니다. 즉, 이 모든 것은 단순한 과거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영적 사건들입니다.

 

이제 AC.66과 연결하면 의미가 또렷해집니다. AC.66은 ‘말씀 안의 아르카나는 단어와 문자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내적 의미와 그 연속적인 질서에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바로 이 시편 구절이 그 사실을 증언합니다. ‘비유로 말한다’—문자, ‘감추어졌다’—내적 의미, ‘드러낸다’—그 의미의 열림. 이 구조가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이걸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 처음에는 이야기로 읽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안에서 ‘이게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구나’, ‘이건 내 상태를 말하는 거구나’, ‘이건 주님의 일하심이구나’ 하고 열리는 순간이 옵니다. 바로 그때 ‘감추어졌던 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단순히 ‘옛 이야기를 전하자’는 말이 아니라, ‘말씀 안에 감추어진 주님의 진리와 역사를 계속 드러내고 이어 가자’는 선언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아르카나’, 곧 내적 의미가 있습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시78:2-4는 말씀이 비유 속에 감추어진 아르카나를 담고 있으며, 그것이 때가 되어 드러나 주님의 영광과 능력으로 사람 안에서 이어지는 과정을 말하는 구절입니다.’

 

 

3. ‘주님의 부활로 본 창1’

 

이것으로 창1 번역 및 해설, 그리고 심화 관련, 모든 작업을 마칩니다. 끝으로, 창1의 모든 내용을 주님의 ‘부활’과 연결해 주세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창세기 1장은 ‘세상의 창조 이야기’이기 이전에 ‘주님의 부활이 어떻게 인간 안에서 재현되는가’를 보여 주는 가장 깊은 지도입니다. 곧, ‘부활은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반복되는 창조와 거듭남의 완성’이며, 창1의 여섯 날과 일곱째 날은 바로 그 부활의 내적 과정을 단계적으로 보여 줍니다.

 

먼저 부활을 어떻게 보느냐가 핵심입니다. 보통은 부활을 ‘십자가 이후 사흘 만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으로만 이해합니다. 물론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AC의 시선에서는 그 사건이 단순히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이루신 것을 사람 안에서 실제로 이루어 가시는 현재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창1은 곧 ‘주님의 부활이 인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과정’입니다.

 

첫째 날은 ‘빛이 있으라’입니다. 이것은 부활의 시작입니다. 완전히 어둠 속에 있던 상태에서 ‘무엇이 참인지’에 대한 첫 빛이 들어옵니다. 이때는 아직 삶이 바뀐 것이 아니라, ‘보이기 시작한 상태’입니다.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죽음의 상태에서 생명의 빛이 처음 비추는 순간입니다.

 

둘째 날은 ‘궁창으로 위와 아래를 나눔’입니다. 이것은 ‘내적과 외적의 구분’입니다. 이전에는 모든 것이 뒤섞여 있었지만, 이제 ‘하늘에 속한 것’과 ‘세상에 속한 것’이 구분되기 시작합니다. 부활의 과정에서도 이 분리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무엇이 위에서 오는 것이고, 무엇이 아래에서 올라오는 것인지 분별되기 시작합니다.

 

셋째 날은 ‘땅이 드러나고, 풀과 씨 맺는 채소가 남’입니다. 이것은 ‘삶의 자리 위에 진리가 자라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이제 단순한 깨달음을 넘어, 실제로 무엇인가 자라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아직은 ‘씨의 단계’, 곧 시작입니다. 부활의 과정에서도 이 시기는 ‘생명이 싹트는 시기’입니다.

 

넷째 날은 ‘해와 달과 별’입니다. 이것은 ‘사랑(해)과 신앙(달), 그리고 다양한 진리(별)가 질서를 갖추는 상태’입니다. 이제 삶을 이끄는 중심이 생깁니다. 부활이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질서 있는 생명’으로 자리 잡기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다섯째 날은 ‘물고기와 새’입니다. 이것은 ‘생각과 인식이 살아 움직이는 상태’입니다. 이전에는 배운 것이 머리에만 있었지만, 이제 그것이 실제로 살아 움직이며 다양한 방식으로 작용합니다. 부활의 생명이 사고와 인식 영역까지 퍼지는 단계입니다.

 

여섯째 날은 결정적입니다. ‘짐승과 사람’이 창조됩니다. 이것은 ‘모든 것이 하나로 통합되고, 사람이 주님의 형상을 이루는 상태’입니다. 여기서 신앙과 사랑이 결합합니다. 더 이상 따로 움직이지 않고 하나로 작동합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 직전의 완성 상태’입니다. 그래서 ‘심히 좋았더라’가 나옵니다.

 

그리고 일곱째 날, ‘안식’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더 이상 싸움이 중심이 아니라, 생명이 중심이 됩니다. 주님이 쉬신다는 것은 ‘주님의 일이 끝났다’는 뜻이 아니라, ‘이제 그 생명이 사람 안에서 안정되게 작동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전체를 하나로 묶으면 이렇게 됩니다. ‘부활은 죽은 뒤에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어둠에서 빛으로, 혼돈에서 질서로, 분열에서 결합으로, 그리고 싸움에서 안식으로 옮겨가는 창조의 완성이다.’

 

이걸 설교적으로 아주 간단히 풀면 이렇게 전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주님이 부활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더 깊이 보면, ‘주님은 지금도 우리 안에서 부활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 빛을 받을 때, 분별이 생길 때, 삶이 자라날 때, 사랑과 신앙이 하나가 될 때—그 모든 과정이 부활입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더 이상 억지로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선 안에 머무는 상태가 올 때, 그때 우리는 ‘부활의 안식’ 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창1은 단순한 시작의 이야기가 아니라, ‘부활의 완성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부활은 지금도 계속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창세기 1장은 주님의 부활이 인간 안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보여 주는 지도이며, 여섯 날의 창조는 부활을 향한 과정이고, 일곱째 날의 안식이 바로 그 부활의 상태입니다.’

 

 

 

AC.65, 창1, 'AC.64에 대한 경험적 증언'

AC.65 제가 말씀을 읽고 있을 때, 어떤 이들이 하늘의 첫 입구 뜰까지 들려 올라갔고, 그곳에서 저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는 말씀 속의 어떤 단어나 글자도 전혀 이해할 수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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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5.심화

 

2. 말씀을 내적으로 경험하기

 

 AC.65 본문 중

 

그 내적 의미가 너무도 아름답고, 연속의 질서가 너무도 완전하며, 그들의 마음을 깊이 감동시켜서, 그들은 그것을 영광(glory)이라고 불렀다

 

라는 내용 말인데요, , 천국과 지옥에도 이런 장면들이 여러 번 나오는 걸로 기억합니다. 정말 궁금합니다. 주님이 제게도 허락하셔서 저도 이런 걸 경험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AC.65와 ‘Heaven and Hell’에서 말하는 그 ‘영광’의 경험은 ‘특별한 환상이나 감각적 체험’을 주로 가리키기보다, ‘말씀의 내적 의미가 열리면서 주님과 진리가 실제로 인식되고, 그 안에서 깊은 감동과 확신이 생기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그것은 반드시 눈에 보이거나 들리는 형태로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부분은 ‘내면에서의 분명하고 살아 있는 깨달음’으로 주어집니다.

 

먼저 ‘영광’이라는 표현부터 정확히 보셔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영광’은 언제나 ‘신적 진리가 드러날 때의 빛’입니다. 즉, 단순히 아름답거나 감동적인 느낌이 아니라, ‘, 이것이 주님의 뜻이구나’, ‘이 말씀이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이었구나’ 하고 확연히 보이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천사들이 그것을 ‘영광’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들이 어떤 환상을 보기 때문이 아니라, ‘진리가 완전한 질서와 연결 속에서 드러나는 것을 직접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목사님께서 느끼신 그 소망, ‘나도 이런 걸 경험하고 싶다’는 마음은 매우 자연스럽고, 사실 매우 귀한 방향입니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균형이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경험은 ‘보여 주기 위한 예외적 방식’이었고, 일반적인 길은 ‘그와 다른 방식의 동일한 본질’입니다. 다시 말해, 형태는 다르지만 본질은 이미 우리에게도 열려 있습니다.

 

그 본질이 무엇이냐 하면, ‘말씀을 읽다가 어느 순간 그 뜻이 열리면서, 그것이 단순한 글이 아니라 나를 향한 주님의 뜻으로 느껴지는 순간’입니다. 그때 오는 깊은 울림, 설명하기 어려운 확신, 그리고 마음이 정돈되는 느낌—바로 그것이 같은 계열의 경험입니다. 그것이 작고 조용할 수는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그 경험을 어떻게 하면 받을 수 있는가?’ AC의 흐름은 아주 분명합니다. ‘삶이 먼저 열려야, 의미가 열린다’입니다. 즉, 진리를 알고 그것을 따라 살려는 마음과 노력이 있을 때, 그다음에 그 진리가 더 깊이 열립니다. 그래서 단순히 ‘보여 달라’는 방향보다는, ‘이 말씀대로 살게 해 달라’는 방향이 더 직접적인 길입니다.

 

이걸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어떤 말씀을 읽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단순히 이해하려 하지 않고, ‘이걸 오늘 어떻게 살까’를 붙들고 살아 봅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 말씀이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의미’로 확 열리는 때가 옵니다. 그때 마음이 깊이 감동되고, 동시에 질서가 잡히는 느낌이 옵니다. 바로 그 순간이 ‘영광이 스치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 조심스럽게 말씀드리면, ‘그런 경험을 하고 싶다’는 소망은 매우 좋은 것이지만, 그 방향을 ‘특별한 체험을 보게 해 달라’보다 ‘말씀의 의미 안에 살게 해 달라’로 두시면, 오히려 훨씬 더 실제적이고 깊은 방식으로 그 ‘영광’을 경험하시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경우는 그 문이 감각적으로까지 열렸던 것이고, 우리 대부분은 ‘의미와 삶의 결합’ 속에서 그 문이 열립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영광’의 본질은 같습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천사들이 말하는 영광은 특별한 어떤 장면보다 말씀의 내적 의미가 열려 주님을 실제로 인식하는 상태이며, 그 경험은 삶 속에서  말씀을 따라 살 때 우리에게도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주어집니다.’

 

 

 

AC.65, 심화 1, ‘원어 연구’

AC.65.심화 1. ‘원어 연구’ 위 AC.65 본문 중 ‘그들은 그곳에서는 말씀 속의 어떤 단어나 글자도 전혀 이해할 수 없고, 오직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로서 뜻해지는 것만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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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5.심화

 

1. 원어 연구

 

 AC.65 본문 중

 

그들은 그곳에서는 말씀 속의 어떤 단어나 글자도 전혀 이해할 수 없고, 오직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로서 뜻해지는 것만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라는 내용과, 위 해설 중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 집착하는 단어 하나, 문장 구조 하나는 천사적 차원에서는 거의 의미를 갖지 않습니다. 대신 그 말씀이 어떤 영적 상태를 말하고 있는지, 신앙과 사랑의 어떤 질서를 드러내는지가 전부입니다. 그래서 문자에 매달릴수록 오히려 의미에서 멀어질 수 있고, 의미를 향해 마음을 열수록 문자는 자연스럽게 그 역할을 다하게 됩니다.’

 

라는 내용으로 볼 때, 기독교, 개신교의 원어 연구를 어떻게 봐야 할까요? 어떤 이들은 히브리어, 헬라어 원어 연구에 평생을 바칠 정도로 자신을 쏟아부으며, 그 결과물들에 대해 은근히 어떤 자부심과 권위를 드러내곤 하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AC.65의 관점에서 볼 때, ‘원어 연구’는 분명 유익한 도구이지만, 그것 자체가 말씀의 핵심에 도달하게 하는 길은 아니며, 오히려 잘못 붙들면, ‘문자에 머무는 또 하나의 방식’이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필요하지만 중심은 아니다’가 가장 정확한 평가입니다.

 

먼저 왜 원어 연구가 필요한지부터 공정하게 보셔야 합니다.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통해 단어의 뉘앙스, 문맥, 표현의 범위를 더 정확히 파악할 수 있고, 번역에서 놓치기 쉬운 부분을 보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 의미 있는 일입니다. 특히 설교나 번역, 주해 작업에서는 도움이 됩니다. 이 점은 부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AC.65가 말하는 지점은 완전히 다른 차원입니다. 천사들은 단어와 문장을 이해하지 않고, ‘의미 자체’를 지각합니다. 즉, ‘어떤 단어가 쓰였는가’가 아니라 ‘그 말씀이 어떤 상태와 질서를 말하는가’를 봅니다. 이 기준에서 보면, 원어 연구는 여전히 ‘문자 층위 안에서의 정밀 작업’입니다. 아무리 정교해도, 여전히 ‘겉층’을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기는 지점은 여기입니다. 원어 연구가 ‘의미로 들어가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 권위와 우월감을 형성하는 영역’이 될 때입니다. 그러면 사람은 ‘나는 이 단어의 진짜 뜻을 안다’는 데 머물고, 정작 그 말씀이 자기 삶과 상태를 어떻게 드러내는지는 놓치게 됩니다. 이때는 오히려 AC.65의 표현대로 ‘문자에 더 깊이 매달리는 상태’가 됩니다.

 

이걸 아주 실제적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사랑’이라는 단어의 원어 의미를 깊이 연구합니다. 이것은 유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기 삶에서 사랑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고민하지 않습니다. 이 경우 그는 ‘단어는 더 정확히 알지만, 의미에서는 더 멀어질 수 있는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원어를 전혀 모르지만, 말씀을 읽으며 ‘, 내가 이렇게 살아야 하는구나’ 하고 실제로 변화됩니다. AC의 기준에서는 이 사람이 더 ‘말씀의 의미 안에 들어간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의 목적은 ‘정확한 해석’ 자체가 아니라 ‘사람의 변화와 결합’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원어 연구는 이렇게 자리 잡는 것이 가장 건강합니다. ‘문자를 더 정확히 이해하도록 돕는 보조 도구’로는 매우 유익하지만, ‘말씀의 본질에 이르게 하는 핵심 수단’으로는 과대평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이 삶과 연결되지 않으면 절반도 아닌 것입니다.

 

목회적으로 보면 이 균형이 매우 중요합니다. 원어를 아는 것은 도움이 되지만, 그것이 설교의 중심이 되면 청중은 ‘지식’은 듣지만, ‘변화’는 경험하지 못합니다. 반대로 의미와 상태를 중심으로 풀어 주면, 원어를 몰라도 말씀은 살아 움직입니다. 그래서 중심은 언제나 ‘의미, 곧 신앙과 사랑의 질서’입니다.

 

그래서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원어 연구는 ‘문자를 더 정확히 보는 눈’을 주지만, 말씀의 핵심은 ‘그 의미가 삶 안에서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것’입니다. 둘은 대립이 아니라, ‘도구와 목적’의 관계입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원어 연구는 유익한 도구이지만, 말씀의 핵심은 단어가 아니라 그 안의 영적 의미와 삶의 변화에 있으며, 그 중심을 놓치면 오히려 문자에 더 깊이 머무를 수 있습니다.’

 

 

 

AC.65, 심화 2, ‘말씀’을 내적으로 경험하기

AC.65.심화 2. ‘말씀’을 내적으로 경험하기 위 AC.65 본문 중 ‘그 내적 의미가 너무도 아름답고, 연속의 질서가 너무도 완전하며, 그들의 마음을 깊이 감동시켜서, 그들은 그것을 ‘영광’(gl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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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5, 창1, 'AC.64에 대한 경험적 증언'

AC.65 제가 말씀을 읽고 있을 때, 어떤 이들이 하늘의 첫 입구 뜰까지 들려 올라갔고, 그곳에서 저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는 말씀 속의 어떤 단어나 글자도 전혀 이해할 수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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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5

 

제가 말씀을 읽고 있을 때, 어떤 이들이 하늘의 첫 입구 뜰까지 들려 올라갔고, 그곳에서 저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는 말씀 속의 어떤 단어나 글자도 전혀 이해할 수 없고, 오직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로서 뜻해지는 것만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내적 의미가 너무도 아름답고, 연속의 질서가 너무도 완전하며, 그들의 마음을 깊이 감동시켜서, 그들은 그것을 영광(glory)이라고 불렀다고 하였습니다. Certain ones were taken up to the first entrance court of heaven, when I was reading the Word, and from there conversed with me. They said they could not there understand one whit of any word or letter therein, but only what was signified in the nearest interior sense, which they declared to be so beautiful, in such order of sequence, and so affecting them, that they called it glory.

 

 

해설

 

이 글은 AC.64의 내용을 경험적 차원에서 직접 증언하는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앞선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천사들은 문자적 의미를 전혀 알지 못한다’고 원리적으로 설명했는데, 여기서는 그 사실이 실제 영계의 경험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다시 말해, 교리가 아니라 체험의 보고입니다.

 

여기서 먼저 주목할 것은 ‘하늘의 첫 입구 뜰(the first entrance court of heaven)이라는 표현입니다. 이는 최고천(最高天)도, 내천(內天)도 아닌, 비교적 낮은 단계의 하늘 영역을 가리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있는 이들조차 말씀의 문자나 글자를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는 천사적 인식이 얼마나 철저히 ‘의미 중심’인지 보여 줍니다. 인간에게는 단어가 의미로 가는 관문이지만, 천사에게는 의미만 있고 단어는 없습니다.

 

이들이 이해한다고 말한 것은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입니다. 이는 최심층(最深層)의 천적 의미라기보다, 문자 바로 안쪽에 있는 영적 의미를 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는 인간의 지성으로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답고 질서 정연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연속의 질서’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내적 의미는 파편적인 상징들의 집합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살아 있는 흐름으로 이어진 구조라는 뜻입니다.

 

이 글에서 특히 인상적인 대목은, 그들이 그 내적 의미를 ‘영광’이라고 불렀다는 점입니다. 성경에서 ‘영광’은 단순한 찬란함이나 위엄이 아니라, 신적 진리가 사랑과 결합되어 드러나는 상태를 뜻합니다. 즉, 진리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사랑과 질서 속에서 완전하게 작동할 때, 그것이 ‘영광’입니다. 그들이 내적 의미를 영광이라고 부른 것은, 그 의미 안에서 주님의 신적 질서가 직접 체험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경험은 인간 독자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줍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 집착하는 단어 하나, 문장 구조 하나는 천사적 차원에서는 거의 의미를 갖지 않습니다. 대신 그 말씀이 어떤 영적 상태를 말하고 있는지, 신앙과 사랑의 어떤 질서를 드러내는지가 전부입니다. 그래서 문자에 매달릴수록 오히려 의미에서 멀어질 수 있고, 의미를 향해 마음을 열수록 문자는 자연스럽게 그 역할을 다하게 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이 경험이 스베덴보리가 ‘말씀을 읽고 있을 때’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즉, 말씀은 인간이 읽는 순간에도 동시에 천사적 차원에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말씀은 단일한 텍스트이지만, 그 독자는 인간일 수도 있고 천사일 수도 있으며, 각자의 차원에 맞는 방식으로 동일한 말씀을 경험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말씀의 다층적 생명’입니다.

 

결국 이 글은 우리에게 하나의 방향을 제시합니다. 말씀을 문자로만 붙잡으려 하기보다, 그 안에서 질서와 흐름, 상태와 생명을 느끼려는 태도로 접근할 때, 비록 우리가 천사처럼 직접 내적 의미를 보지는 못하더라도, 그 방향을 향해 마음이 정렬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때 말씀은 점차 정보의 책이 아니라, 우리를 거듭남으로 이끄는 살아 있는 통로가 됩니다.

 

 

심화

 

1.원어 연구

 

 

AC.65, 심화 1, ‘원어 연구’

AC.65.심화 1. ‘원어 연구’ 위 AC.65 본문 중 ‘그들은 그곳에서는 말씀 속의 어떤 단어나 글자도 전혀 이해할 수 없고, 오직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로서 뜻해지는 것만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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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말씀을 내적으로 경험하기

 

 

AC.65, 심화 2, ‘말씀’을 내적으로 경험하기

AC.65.심화 2. ‘말씀’을 내적으로 경험하기 위 AC.65 본문 중 ‘그 내적 의미가 너무도 아름답고, 연속의 질서가 너무도 완전하며, 그들의 마음을 깊이 감동시켜서, 그들은 그것을 ‘영광’(gl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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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4, 창1, '말씀의 내적 의미(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속뜻)'(AC.64-66)

AC.64 이것이 바로 말씀의 내적 의미(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속뜻)이며, 그 가장 참된 생명입니다. 이는 문자적 의미에서는 전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 안에 담긴 비밀(arcana)은 너무나 많아서,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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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아르카나가 없는 성경을 천사들이 읽을 때

 

그럼 아르카나가 없다 알려진 성경들, 곧 구약 룻기’, 역대서’, 욥기 등이나 신약 사도들의 서신서 등을 천사들이 읽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나요? 그러니까 천사들한테는 어떻게 보이나요? 읽을 수는 있나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아르카나(전면적인 속뜻의 연속 구조)가 없는 책들—예를 들면, ‘룻기’, ‘역대서’, ‘욥기’, 사도 서신들—도 천사들이 ‘읽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곧바로 ‘말씀을 읽을 때처럼’ 하늘과 직접 연결되는 방식으로 작용하지는 않습니다. 즉, 읽히기는 하나 ‘같은 층위의 작용’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먼저 가장 중요한 구분을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천사들이 인간의 말을 이해하는 방식은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 ‘의미’입니다. 인간이 글자를 읽으면, 그 안의 의미가 즉시 영적 의미로 변환되어 천사들에게 전달됩니다. 그런데 이때 ‘말씀’은 특별합니다. 그 이유는 그 문자 안에 ‘연속적인 속뜻(내적 의미)의 구조’가 있기 때문에, 인간이 읽을 때, 그 흐름이 그대로 천국까지 이어지고, 천사들은 그에 상응하는 깊은 진리를 즉시 지각합니다. 이것이 ‘말씀’의 고유한 성격입니다.

 

그런데 ‘룻기’, ‘욥기’, 사도 서신 등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그 안에도 물론 선한 내용, 진리, 교훈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그것을 읽고 이해하면, 그 ‘의미’ 자체는 천사들에게 전달됩니다. 예를 들어 사랑, 인내, 신앙, 섭리 같은 내용은 천사들도 분명히 인식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말씀’처럼 한 절 한 절, 단어 하나하나까지 천국과 직접 연결된 상응 구조를 따라 깊은 속뜻으로 펼쳐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차이를 이렇게 정리하시면 가장 정확합니다. ‘말씀’은 읽는 순간 그 문자 자체가 하늘과 직접 연결되는 통로가 되고, ‘아르카나가 없는 책들’은 그 내용의 의미가 천사들에게 전달되기는 하지만, 그 자체가 통로 역할을 하지는 않습니다. 다시 말해, 전자는 ‘구조적으로 연결된 텍스트’이고, 후자는 ‘내용적으로 유익한 텍스트’입니다.

 

이걸 조금 더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사람이 창세기나 복음서를 읽으면, 그 안의 표현 하나하나가 천사들에게는 영적 의미로 살아 움직이며, 그 흐름이 그대로 천국과 연결됩니다. 반면 어떤 사람이 사도 바울의 서신을 읽으면, 그 안의 ‘신앙’, ‘사랑’, ‘’, ‘구원’ 같은 내용은 천사들에게 전달되어 기쁨과 공감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텍스트 자체가 동일한 방식으로 ‘속뜻의 연속 구조’를 펼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천사들이 읽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는 ‘, 의미를 통해 읽는다’가 답이고, ‘그들에게 어떻게 보이는가?’라는 질문에는 ‘내용은 이해되지만, 말씀처럼 깊은 상응 구조로 열리지는 않는다’가 답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목회적 균형이 하나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책은 쓸모 있고, 어떤 책은 쓸모 없다’는 구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각 책의 역할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주님과 직접 연결되는 통로’이고, 다른 성경책들은 ‘그 말씀을 이해하고 삶에 적용하도록 돕는 교훈과 증언’의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둘 다 필요하지만, 기능이 다릅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아르카나가 없는 성경도 천사들에게 의미로 전달되지만, 말씀처럼 문자 자체가 천국과 직접 연결되는 통로로 작용하지는 않습니다.’

 

 

 

AC.64, 심화 4, ‘말씀’(the Word)

AC.64.심화 4. ‘말씀’(the Word) AC를 보면, 보통, 아니 거의 ‘말씀’(the Word)이라고 하네요. ‘성경’이라 하지 않고 말입니다. 저 역시 ‘성경’ 66권 중 아르카나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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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4.심화

 

4. 말씀(the Word)

 

AC를 보면, 보통, 아니 거의 말씀(the Word)이라고 하네요. 성경이라 하지 않고 말입니다. 저 역시 성경 66권 중 아르카나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다는 걸 알고부터는 의도적으로 성경보다는 말씀을 쓰고 있습니다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AC에서 ‘성경’ 대신 ‘말씀(the Word)을 사용하는 것은 단순한 용어 선택이 아니라, ‘그 책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 자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책의 외형과 범위를 가리키는 말이라면, ‘말씀’은 ‘그 안에 실제로 주님이 임재하시고, 속뜻을 통해 살아 움직이는 신적 진리의 그릇’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의도적으로 거의 항상 ‘말씀’이라고 부릅니다.

 

먼저 왜 ‘성경’이라는 표현이 충분하지 않다고 보는지를 이해하셔야 합니다. ‘성경’은 기본적으로 ‘거룩한 책들의 집합’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AC의 관점에서는 모든 성경 66권이 동일한 방식으로 ‘주님과 직접 연결된 말씀’인 것은 아닙니다. 즉, 어떤 책들은 역사적, 교훈적 가치가 큰 반면, ‘속뜻이 전면적으로 연결된 구조’, 곧 주님과 천국과 직접적으로 상응하는 구조를 가진 책들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말씀’이라는 용어를 더 엄밀하게 사용합니다.

 

그래서 ‘말씀’이라는 말 속에는 세 가지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첫째, 주님 자신과의 직접적인 연결, 둘째, 문자 속에 감추어진 속뜻의 존재, 셋째, 그 속뜻을 통해 천국과 연결되는 구조입니다. 이 세 가지가 갖추어진 것을 스베덴보리는 ‘말씀’이라고 부릅니다. 단순히 종교적인 책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 실제로 주님의 생명이 흐르기 때문’입니다.

 

목사님께서 이미 감지하신 것처럼, ‘성경 66권 중 아르카나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다’는 인식 이후에 ‘말씀’이라는 표현을 선택하신 것은 매우 정확한 방향입니다. 왜냐하면 ‘아르카나가 있다’는 것은 곧 ‘속뜻이 있다’는 뜻이고, 속뜻이 있다는 것은 곧 ‘말씀’의 구조를 가진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경건한 표현이 아니라, ‘이 텍스트는 주님과 직접 연결된 텍스트다’라는 신학적 선언입니다. 천사들이 읽을 수 있는 성경인 것이지요. 그 안에 아르카나가 없는 성경은 천사들은 읽을 수 없습니다. 아니, 읽을 수는 있어도 방금 언급한 세 가지가 없어 주님의 생명을 느낄 수 없으며, 그래서 얼른 물러납니다.

 

이걸 목회적으로 보면 더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성경을 읽는다’고 하면 주로 ‘지식을 얻는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읽는다’고 하면, 그 안에서 ‘주님을 만난다’, ‘주님의 뜻이 나에게 온다’는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열립니다. 즉, 독서의 태도 자체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설교에서도 ‘말씀’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용어 이상의 역할을 합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말씀’이라는 표현이 ‘문자만이 아니라 그 안의 속뜻까지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글자를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안의 뜻이 열리기를 구하며 읽는 것’이 됩니다. 바로 이 점에서 ‘말씀’이라는 표현은 AC 전체의 방향과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그래서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성경’은 책의 범주를 가리키는 말이고, ‘말씀’은 그중에서도 주님과 직접 연결되어 속뜻을 통해 살아 움직이는 신적 진리를 담은 텍스트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AC에서 말씀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성경의 다른 이름이 아니라, 주님과 직접 연결되고 속뜻을 통해 살아 작용하는 신적 진리의 그릇을 가리키는 신학적 용어입니다.’

 

 

 

AC.64, 심화 5, ‘아르카나가 없는 성경을 천사들이 읽을 때’

AC.64.심화 5. ‘아르카나가 없는 성경을 천사들이 읽을 때’ 그럼 아르카나가 없다 알려진 성경들, 곧 구약 ‘룻기’, ‘역대서’, ‘욥기’ 등이나 신약 사도들의 서신서 등을 천사들이 읽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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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4, 심화 3, ‘속 사람’(internal man)

AC.64.심화 3. ‘속 사람’(internal man) ‘속 사람’(internal man)이 뭔가요? ‘영’, 또는 ‘영혼’을 말하는 건가요? 아니면 ‘마음’ 같은 건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AC.64에서 말하는 ‘속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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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4.심화

 

3. 속 사람(internal man)

 

속 사람(internal man)이 뭔가요? ’, 또는 영혼을 말하는 건가요? 아니면 마음 같은 건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AC.64에서 말하는 ‘속 사람(internal man)은 ‘영혼’이나 ‘마음’ 같은 하나의 요소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주님과 직접 연결되어 있으며, 그로부터 생각과 의지와 삶 전체를 이끄는 전체 구조의 안쪽 사람’입니다. 즉, 어떤 ‘부분’이 아니라 ‘한 층위의 인간 전체’입니다.

 

먼저 흔히 떠올리기 쉬운 개념들과 구분해 보겠습니다. ‘영혼’이라고 하면 보통 ‘몸과 대비되는 보이지 않는 본체’를 떠올리는데, 스베덴보리의 ‘속 사람’은 그것보다 더 ‘기능적이고 구조적인 개념’입니다. 또 ‘마음’이라고 하면 감정이나 생각을 떠올리기 쉬운데, 이것도 정확히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생각과 감정은 속 사람에도 있고, 겉 사람에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떻게 이해하면 가장 정확하냐 하면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사람은 두 겹으로 되어 있다속 사람과 겉 사람.’ 그리고 이 둘은 각각 ‘완전한 인간처럼 작동하는 두 층위’입니다. 속 사람은 주님과 연결되어 있고, 겉 사람은 세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속 사람은 ‘위로부터 받는 자리’이고, 겉 사람은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는 자리’입니다.

 

이제 AC.64의 문맥에서 보면 더 또렷해집니다. 거듭남이 일어날 때, 먼저 속 사람이 열립니다.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들어올 수 있는 통로가 열리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다음 그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합니다. 즉, 변화는 항상 ‘  ’으로 흐릅니다. 그래서 속 사람이 열리지 않으면, 겉 사람만 바꾸려 해도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걸 아주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겉 사람은 우리가 일상에서 드러내는 말, 행동, 습관, 반응입니다. 속 사람은 ‘왜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는가’를 결정하는 더 깊은 기준입니다. 예를 들어, 같은 ‘친절한 행동’을 해도, 겉으로는 똑같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속 사람이 열려 있는 경우에는 그것이 진심에서 나오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상황이나 계산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 이 차이를 만드는 곳이 바로 속 사람입니다.

 

그래서 ‘속 사람 = 영혼인가?’라고 물으시면, ‘부분적으로는 맞지만, 정확히는 더 넓은 개념’입니다. 왜냐하면 속 사람은 단순히 ‘존재하는 본체’가 아니라, ‘주님과 연결되어 작용하는 인간 전체의 안쪽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또 ‘속 사람 = 마음인가?’라고 하면, 이것도 ‘일부는 맞고, 전부는 아니다’입니다. 마음(생각과 감정)은 속 사람에도 있고, 겉 사람에도 있습니다. 차이는 ‘출처’입니다. 속 사람의 마음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과 선에 연결되어 있고, 겉 사람의 마음은 감각과 세상 경험에 더 직접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정확한 정의는 이렇게 됩니다. ‘속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들어오는 자리이며, 그로부터 겉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이끄는 안쪽 인간 전체입니다.’

 

이걸 한 문장으로 더 쉽게 풀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겉 사람은 내가 밖으로 사는 나이고, 속 사람은 내가 안에서부터 살아지는 나입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속 사람은 영혼이나 마음의 일부가 아니라, 주님과 연결되어 사람의 삶 전체를 안에서부터 이끄는 내적 인간 전체를 의미합니다.’

 

 

 

AC.64, 심화 2, ‘아르카나’(arcana)

AC.64.심화 2. ‘아르카나’(arcana) ‘아르카나’(arcana)가 뭔가요? ‘속뜻’(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을 말하는 건가요? ‘퍼셉션’(perception) 같은 건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아르카나’(arc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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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르카나(arcana)

 

아르카나(arcana)가 뭔가요? 속뜻(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을 말하는 건가요? 퍼셉션(perception) 같은 건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아르카나(arcana)는 ‘속뜻(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동일한 말은 아니며, ‘퍼셉션(perception)과도 다릅니다. 가장 정확하게는 ‘말씀 안과 영계에 숨겨져 있는 신적 진리들, 곧 드러나지 않은 채 감추어져 있는 깊은 내용들’을 뜻합니다.

 

먼저 ‘arcana’라는 단어 자체부터 보겠습니다. 라틴어 ‘arcanum’의 복수형으로, 기본 의미는 ‘비밀들’, ‘숨겨진 것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비밀은 단순히 감춰진 정보가 아니라, ‘겉으로는 바로 보이지 않지만, 영적 의미에서 실제로 존재하고 작용하는 진리들’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저작 제목을 Arcana Coelestia, 곧 ‘천적 비밀들’이라고 붙였습니다.

 

이제 ‘속뜻’과의 관계를 보겠습니다. ‘속뜻’은 말씀을 읽을 때, 그 안에 담겨 있는 내적인 의미, 곧 문자 뒤에 숨겨진 영적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 속뜻 안에 담겨 있는 내용들이 바로 ‘아르카나’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정리하시면 가장 정확합니다. ‘속뜻은 구조이고, 아르카나는 그 구조 안에 담긴 내용입니다.’ ‘구조’를 ‘그릇’이라 해도 되겠습니다. 즉, 속뜻은 ‘말씀을 읽는 방식’이고, 아르카나는 ‘그렇게 읽었을 때, 드러나는 깊은 진리들’입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의 한 구절을 읽을 때, 겉으로는 역사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속뜻으로 들어가면, 그것이 인간의 거듭남 과정을 말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왜 이런 표현이 쓰였는가’, ‘이 순서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상징이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가’ 같은 것들이 밝혀지는데, 바로 그 각각이 ‘아르카나’입니다.

 

이제 ‘퍼셉션’과의 차이를 보겠습니다. ‘퍼셉션’은 ‘무엇이 참인지, 무엇이 선한지를 직관적으로 아는 능력 또는 상태’입니다. 즉, ‘아는 방식’입니다. 반면 ‘아르카나’는 ‘알려지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둘의 관계는 이렇게 됩니다. ‘아르카나는 내용이고, 퍼셉션은 그것을 인식하는 방식입니다.’

 

조금 더 쉽게 풀면 이렇습니다.

 

아르카나  숨겨진 깊은 의미(내용)

속뜻  그 의미가 담겨 있는 구조(말씀의 내적 의미)

퍼셉션  그것을 알아보는 능력(인식 방식)

 

이걸 하나의 흐름으로 보면 더 또렷해집니다. 말씀을 속뜻으로 읽으면, 그 안에서 아르카나가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 아르카나를 퍼셉션으로 ‘느끼고 아는’ 것이 가장 깊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목사님 질문을 정확히 답하면 이렇게 됩니다. ‘아르카나는 속뜻 자체가 아니라, 속뜻 안에 담긴 신적 진리들의 내용이며, 퍼셉션은 그 내용을 직관적으로 인식하는 능력입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아르카나는 말씀 속에 감추어진 영적 진리들이고, 속뜻은 그것이 담긴 의미 구조이며, 퍼셉션은 그것을 직관적으로 아는 능력입니다.’

 

 

 

AC.64, 심화 3, ‘속 사람’(internal man)

AC.64.심화 3. ‘속 사람’(internal man) ‘속 사람’(internal man)이 뭔가요? ‘영’, 또는 ‘영혼’을 말하는 건가요? 아니면 ‘마음’ 같은 건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AC.64에서 말하는 ‘속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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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4, 심화 1, ‘내적’(內的, internal)

AC.64.심화 1. ‘내적’(內的, internal) ‘내적’(內的, internal)이라는 게 뭔가요? 눈에 안 보이는 모든 건가요? 무슨 의미, 감동, 마음, 영혼 같은 건가요? ‘돈보다는 명예’라고 할 때, ‘명예’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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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4.심화

 

1. 내적(內的, internal)

 

내적(內的, internal)이라는 게 뭔가요? 눈에 안 보이는 모든 건가요? 무슨 의미, 감동, 마음, 영혼 같은 건가요? 돈보다는 명예라고 할 때, 명예 같은 건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AC.64에서 말하는 ‘내적(internal)이라는 것은 단순히 ‘눈에 안 보이는 것’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주님과 직접 연결되어, 바깥의 생각과 행동을 실제로 이끌고 형성하는 중심의 층위’를 뜻합니다. 즉,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범주가 아니라, ‘근원, 원인, 방향을 결정하는 안쪽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먼저 범위를 바로 잡는 것이 중요합니다. ‘눈에 안 보이는 것’이라고 해서 전부 내적인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상상, 계산, 기억, 계획 같은 것도 눈에는 안 보이지만, 이것들은 여전히 ‘외적(外的, outer, external), 혹은 ‘자연적 수준’에 속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여전히 감각과 세상 경험에 근거해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내적’은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도, 그보다 더 깊은 곳에서 ‘왜 그렇게 생각하고, 왜 그렇게 선택하는가’를 결정하는 층위입니다.

 

이걸 가장 정확하게 잡으려면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내적은 원인이고, 외적은 결과입니다.’ 사람의 말과 행동, 그리고 겉으로 드러나는 생각은 모두 결과입니다. 그 뒤에서 ‘무엇을 옳다고 보는가’, ‘무엇을 좋다고 여기는가’, ‘무엇을 따라 살고 싶은가’를 결정하는 그 중심이 바로 ‘내적’입니다.

 

이제 목사님께서 주신 예, ‘돈보다 명예’를 보겠습니다. 이건 흥미로운 예인데, 여기서 ‘명예’ 자체가 곧 내적인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명예도 여전히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느냐’라는 외적 기준에 속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이 ‘명예’로 바뀐 것일 수 있고, 여전히 바깥을 향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 사람이 ‘진짜로 옳은 것, 선한 것 자체를 사랑하기 때문에 명예를 선택한다’면, 그때는 그 선택의 근원이 내적입니다. 핵심은 대상이 아니라 ‘출발점’입니다.

 

이제 AC.64와 연결하면 훨씬 또렷해집니다. AC.64에서는 사람이 거듭나면 ‘내적인 것이 열리고, 그 내적인 것을 통해 주님과 연결되며, 그로부터 외적인 것이 질서 잡힌다’는 흐름이 나옵니다. 즉, 이전에는 외적인 것이 중심이었기 때문에, 생각과 행동이 그때그때 흔들렸지만, 이제는 내적인 중심이 열리면서 그 안에서 기준이 서고, 그 기준이 바깥을 이끕니다.

 

이걸 아주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이전에는 상황에 따라 반응이 달라집니다. 이익이 되면 이렇게 하고, 손해가 되면 저렇게 합니다. 그런데 내적인 것이 열리면, ‘이게 옳은가’라는 기준이 먼저 서고, 그 기준에 따라 행동이 나옵니다. 그래서 상황이 달라도 방향이 크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바로 이때 ‘내적이 외적을 이끄는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내적’을 가장 쉽게 정의하면 이렇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자리 잡아, 사람의 생각과 선택과 행동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심의 자리’입니다. 그리고 ‘외적’은 그 내적에서 나온 것이 밖으로 드러난 모습입니다.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감정, 생각, 의미, 가치 같은 것들이 모두 내적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어디에서 나왔는가’, ‘무엇을 중심으로 움직이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주님과 연결된 중심에서 나오는 것이면 내적이고, 감각과 세상 중심에서 나온 것이면 외적입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내적은 단순히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연결되어 사람의 삶 전체를 안에서부터 이끄는 중심의 층위입니다.’

 

 

 

AC.64, 심화 2, ‘아르카나’(arcana)

AC.64.심화 2. ‘아르카나’(arcana) ‘아르카나’(arcana)가 뭔가요? ‘속뜻’(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을 말하는 건가요? ‘퍼셉션’(perception) 같은 건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아르카나’(arc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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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4, 창1, '말씀의 내적 의미(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속뜻)'(AC.64-66)

AC.64 이것이 바로 말씀의 내적 의미(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속뜻)이며, 그 가장 참된 생명입니다. 이는 문자적 의미에서는 전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 안에 담긴 비밀(arcana)은 너무나 많아서,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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