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상태는 사람이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의 빛을 받는 때입니다. 그는 이전에도 경건하게 말하고 선한 것들을 행했으나, 그것은 신앙과 체어리티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그가 겪고 있던 시험과 곤경의 결과, 마음에도 없이 하는, 그러니까 별로 기쁘지도 않은데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그의 속 사람 안에서 불붙게 되었으며, 이것들을 가리켜 두 ‘광명체’(luminaries)라고 합니다. The fourth state is when the man becomes affected with love, and illuminated by faith. He indeed previously discoursed piously, and brought forth goods, but he did so in consequence of the temptation and straitness under which he labored, and not from faith and charity; wherefore faith and charity are now enkindled in his internal man, and are called two “luminaries.”
해설
이 단락에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네 번째 ‘상태’(state)를 이전 단계들과 질적으로 구별되는 전환점으로 제시합니다. 세 번째 상태에서 사람은 회개하며 경건하게 말하고 선한 일을 행하기 시작했지만, 그 모든 것은 여전히 외적 압박과 내적 곤경 속에서 나온 반응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선을 행했으나 그것을 기뻐서 행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몰려 있었고, 그 결과로 경건과 선행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 선은 아직 자유롭고 자발적인 생명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네 번째 상태에 들어서면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제 사람은 단지 선을 ‘행해야 해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선 자체에 감동되기 시작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사랑에 감동된다’고 표현하는데, 이것은 감정적 흥분이나 종교적 열정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의 애정이 사람의 속 사람 안에서 실제로 작용하기 시작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동시에 그는 신앙의 ‘빛을 받는데’, 이는 진리가 더 이상 외부에서 들려오는 규범이 아니라, 내면에서 이해되고 인식되는 빛이 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이 변화의 핵심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이제 ‘불붙게 되었다’라는 표현에 있습니다. 이전 단계들에서도 신앙의 지식과 선한 행위는 존재했지만, 그것들은 마치 꺼져 있는 숯처럼 잠재된 상태였습니다. 네 번째 상태에서 주님의 역사로 그것들이 실제로 불이 붙어, 속 사람 안에서 생명력 있게 작용하기 시작합니다. 이 불붙음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주님이 정하신 때에 주시는 은혜이며, 이전의 모든 준비 단계가 이 시점을 위해 존재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신앙과 체어리티를 두 ‘광명체’(luminaries)라고 합니다. 이는 창세기 1장에서 해와 달이 창조되는 장면과 직접 연결됩니다. 해는 사랑, 특히 체어리티를 상징하고, 달은 신앙을 상징합니다. 이 둘이 하늘에 놓여 낮과 밤을 다스리듯, 이 단계에서 신앙과 체어리티는 사람의 내적 삶을 다스리는 중심 원리가 됩니다. 이전에는 겉 사람의 욕망과 두려움이 삶을 이끌었다면, 이제는 속 사람 안에서 타오르는 사랑과 빛나는 신앙이 삶의 방향을 결정하기 시작합니다.
이 상태는 또한 선의 근원에 대한 인식이 바뀌기 시작하는 시점입니다. 사람은 점차 자신이 행하는 선과 이해하는 진리가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온 것임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이 깨달음은 아직 완전히 확립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이전처럼 선을 자기 공로로 붙잡지는 않게 됩니다. 이는 이후 다섯 번째 상태에서 신앙에서 말하고, 진리와 선을 더 깊이 확증할 수 있는 기초가 됩니다.
결국 AC.10에서 말하는 네 번째 상태는 거듭남의 과정에서 ‘내적 빛의 시대’가 열리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빛이 되고, 체어리티는 의무가 아니라 사랑이 됩니다. 이 상태가 없이는 이후의 모든 생기 있는 영적 활동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네 번째 상태는 거듭남의 여정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며, 주님이 인간의 속 사람 안에 실제로 거처를 마련하시기 시작하는 시점입니다.
세 번째 상태는 회개(repentance)의 상태로서, 이때 사람은 속 사람(internal man)으로부터 경건하고 정성스러운 말과, 체어리티(charity)의 행위들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여전히 생기가 없는데, 그가 그것들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걸로 여기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선들을 ‘풀’(tender grass), ‘씨 맺는 채소’(herb yielding seed)라 하고, 나중에는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tree bearing fruit)라고 합니다. The third state is that of repentance, in which the man, from his internal man, speaks piously and devoutly, and brings forth goods, like works of charity, but which nevertheless are inanimate, because he thinks they are from himself. These goods are called the “tender grass,” and also the “herb yielding seed,” and afterwards the “tree bearing fruit.”
해설
이 단락에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세 번째 ‘상태’(state)를 ‘회개의 상태’로 규정하며, 인간의 내적 변화가 처음으로 의식적 삶의 형태를 띠기 시작하는 단계를 설명합니다. 앞선 두 상태에서 사람은 아직 수동적인 위치에 있었고, 주님의 자비가 어둠 위에서 운행하거나, 주님께 속한 것과 자기에게 고유한 것이 구별되기 시작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 상태에 이르면, 사람은 비로소 자신의 삶과 말, 행동에서 변화를 보이기 시작하며, 이것이 회개라는 이름으로 드러납니다.
이 회개는 겉 사람의 형식적 변화가 아니라, ‘속 사람’(internal man)에서 비롯된 반응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사람은 이 단계에서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말하며, 신앙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이전과는 다른 삶의 태도를 보입니다. 또한 실제로 체어리티의 행위들과 같은 선한 일들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는 거듭남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진전이며, 신앙이 단지 생각이나 감정 차원에 머물지 않고, 삶으로 나타나기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단계의 선들을 ‘생기 없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여전히 그 선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기 때문입니다. 즉, 그는 선한 일을 하면서도 그것이 주님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결심, 자신의 경건, 자신의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이로 인해 이 단계의 선은 참된 영적 생명을 갖지 못하며, 아직은 자연적 차원의 선에 머뭅니다. 이것은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는 평가가 아니라, 선의 근원에 대한 인식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의 선을 설명하기 위해 창세기 1장 11절의 식물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먼저 ‘풀’(tender grass)입니다. 이 풀은 막 돋아난 초기의 선을 가리키며, 매우 연약하고 쉽게 상할 수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는 회개 초기에 나타나는 선의 특징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다음으로 ‘씨 맺는 채소’(herb yielding seed)는 이 선 안에 진리의 씨앗이 들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즉, 비록 아직 생기는 없지만, 이후에 성장할 가능성과 번식의 능력을 이미 내포하고 있다는 뜻이지요. 마지막으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tree bearing fruit)는 이 초기적 선이 장차 성숙하여 지속적이고 안정된 선으로 발전할 잠재력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 비유는 회개의 상태가 단번에 완성되는 단계가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사람은 회개를 시작했다고 해서 곧바로 참된 영적 선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성장과 성숙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주님은 이 단계에서 나타나는 미숙한 선조차도 소중히 여기시며, 그것을 제거하지 않으시고 보호하시며 자라게 하십니다. 이는 주님의 자비가 인간의 불완전함을 고려하여 단계적으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또한 이 단락은 인간의 협력과 한계를 동시에 드러냅니다. 세 번째 상태에서 사람은 실제로 선을 행하며, 말과 행동에서 책임 있는 주체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아직 선의 근원을 오해하고 있으며, 이 오해가 바로 다음 상태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교정되어야 할 지점입니다. 이 때문에 이 상태는 매우 중요하면서도, 동시에 위험을 내포한 단계입니다. 사람이 이 선을 자기 의로 고착시키면 더 나아가지 못하지만, 주님의 인도에 따라 이 선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배우게 되면, 이후의 깊은 변화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결국 AC.9에서 말하는 회개의 상태는 거듭남의 여정에서 최초로 인간의 삶이 눈에 띄게 변하는 시점이지만, 아직은 시작에 불과한 단계입니다. 이 상태의 선은 생기가 없으나, 성장할 모든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 연한 풀을 자라게 하시고, 씨를 맺게 하시며, 마침내 열매를 맺는 나무로 이끄시기 위해 다음 단계들을 준비하십니다. 그래서 세 번째 상태는 인간의 진지한 응답이 처음으로 나타나는 단계이자, 주님의 더 깊은 역사가 이어지기 위한 중요한 발판이 됩니다.
심화
1. ‘회개(repentance)의 상태’
AC.9의 ‘회개(repentance)의 상태’라는 표현을 설명해 주세요. 이어지는 내용인, ‘사람은 속 사람(internal man)으로부터 경건하고 정성스러운 말과, 체어리티(charity)의 행위들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여전히 생기가 없는데, 그가 그것들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걸로 여기기 때문이지요.’에서 갑자기 ‘회개’(repentance)라는 용어가 나오는 게 좀 너무 갑작스럽습니다. 비약에 가깝다 느껴지는데요... 뭐랄까... 그 정도는 아직 성숙하지 못한 정도지 무슨 회개할 정도로 죄를 진 건가 싶어서입니다.
목사님께서 느끼신 ‘갑작스러움’은 매우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현대 한국어에서 ‘회개’라는 단어는 보통 ‘큰 죄를 뉘우치는 사건’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AC.9에서 스베덴보리가 사용하는 ‘repentance’는 그런 의미보다 훨씬 ‘구조적이고 영적 과정에 가까운 개념’입니다. 그래서 그 맥락을 조금 풀어 보면 비약처럼 보이던 부분이 상당히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먼저 스베덴보리에게서 ‘회개’는 단순히 ‘죄를 후회한다’는 감정이 아닙니다. 그는 여러 저작에서 회개를 ‘자신의 삶을 살펴보고, 악을 인식하고, 그것을 버리기 시작하는 상태’로 설명합니다. 즉 회개는 사건이라기보다 ‘상태’(state)입니다. 사람이 자기 삶을 돌아보고 ‘내 안에는 주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나에게서 나온 것이 많구나’ 하고 깨닫기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그래서 AC.9의 ‘repentance의 상태’는 ‘죄를 크게 저질러서 울며 회개하는 순간’이 아니라 ‘자기 중심성의 문제를 처음 의식하기 시작하는 영적 단계’입니다.
이제 AC.9의 문장과 연결해 보겠습니다. 그 글에서는 사람이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한 말과 체어리티의 행위를 하기는 하지만, 그것들이 아직 ‘생기’(life)가 없다고 말합니다. 이유는 그 사람이 그것들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즉 그는 선을 행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마음 깊은 곳에서는 ‘내가 이렇게 선하게 행동했다’는 자기중심적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은 단순한 미숙함을 넘어 ‘거듭남이 아직 완전히 시작되지 않았다는 표지’입니다.
여기서 ‘회개’가 등장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이 처음에는 선한 말과 행동을 하더라도 그것을 자기 공로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 가면 그 사람은 점차 깨닫기 시작합니다. ‘내가 하는 선이 사실은 내 힘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구나.’‘내 안에는 여전히 자기 사랑이 강하구나.’ 이런 인식이 생기면, 그때부터 자기 중심성을 내려놓는 방향으로 마음이 움직입니다. 바로 이 전환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회개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AC.9의 흐름을 거듭남 단계로 보면 이렇습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진리와 선을 알기 시작합니다. 그다음에는 경건한 말과 선한 행동도 어느 정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자기 공로의 한계를 깨닫는 단계’, 즉 회개의 상태가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회개는 ‘큰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중심적 선의 한계를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그래도 선한 행동을 하는데 왜 회개까지?’라는 느낌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기준에서는 선한 행동의 외형보다 ‘그 출처가 어디냐’가 더 중요합니다. 선이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믿는 한, 그것은 아직 완전히 살아 있는 선이 아닙니다. 그 선이 주님에게서 온 것임을 인정할 때 비로소 생명이 들어옵니다. 그 전환의 문턱이 바로 ‘회개의 상태’입니다.
처음 신앙을 시작하면 사람은 선한 행동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것은 매우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사람은 점점 깨닫습니다. ‘내가 선을 행하려 해도 내 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구나.’ 바로 그 깨달음이 회개의 시작입니다. 그것은 죄인의 절망이라기보다 ‘자기 중심성에서 주님 중심으로 방향이 바뀌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AC.9의 ‘repentance’는 죄책감의 폭발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거듭남의 구조 안에서 나타나는 자기 인식의 단계’라고 이해하시면 가장 정확합니다. 그렇게 보면 그 표현은 갑작스러운 비약이 아니라, 오히려 바로 앞 문장과 정확히 연결된 설명이 됩니다.
2. ‘체어리티(charity)의 행위’
체어리티(charity)를 좀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이 영어 ‘charity’를 우리말로 옮기기가 참 그런 게, 우리말 어떤 하나의 표현으로 옮기는 순간, 그것 말고도 가지고 있는 다른 많은 뉘앙스들을 다 놓치는 것 같아요...
목사님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스베덴보리 저작에서 ‘charity’는 한국어 한 단어로 옮기기 가장 어려운 단어 가운데 하나입니다. ‘자선’, ‘사랑’, ‘인애’, ‘선행’, ‘이웃 사랑’ 어느 하나로 번역해도 항상 뭔가 빠집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개념을 먼저 분명히 이해하고, 번역은 문맥에 따라 유연하게 처리하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먼저 스베덴보리가 사용하는 ‘charity’의 가장 기본적인 뜻부터 말씀드리면, 그것은 ‘이웃을 향한 사랑이 삶 속에서 실제 행동으로 나타난 상태’입니다. 즉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삶의 태도와 행동의 방향’입니다. 그는 자주 ‘love to the Lord’와 ‘charity toward the neighbor’를 함께 말합니다. 전자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고, 후자는 그 사랑이 사람들 사이의 삶으로 흘러나오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charity는 사랑의 감정이라기보다 ‘사랑이 삶 속에서 작동하는 형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charity는 ‘자선 행위’보다 훨씬 넓은 개념입니다. 현대 영어에서 charity라고 하면 흔히 가난한 사람을 돕는 자선 활동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charity를 그렇게 좁게 보지 않습니다. 그는 charity를 ‘이웃에게 선을 행하려는 의지와 그에 따른 삶 전체’로 이해합니다. 즉 정직하게 일하는 것, 공정하게 판단하는 것, 남을 해치지 않는 것, 다른 사람의 유익을 고려하는 것, 이런 모든 것이 charity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이 점 때문에 한국어 번역이 어려워집니다. ‘자선’이라고 하면 너무 좁아지고, ‘사랑’이라고 하면 감정 중심으로 들리고, ‘선행’이라고 하면 도덕적 행위 정도로 축소됩니다. 그래서 많은 번역자들이 ‘이웃 사랑’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비교적 좋은 선택입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 자신이 charity를 설명할 때 거의 항상 ‘이웃(neighbor)과의 관계’ 속에서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charity는 단순히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도 아닙니다. 그는 charity를 ‘진리(truth)에 의해 인도되는 선(good)’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무엇이 진짜로 이웃에게 유익한지 분별하면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에게 돈을 주는 것이 항상 charity는 아닙니다. 때로는 그것이 그 사람을 더 해롭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charity는 감정적 친절이 아니라 ‘지혜와 결합된 선한 의지’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특징은 charity가 ‘삶의 중심 원리’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그 사람이 믿는 교리보다 ‘그가 어떤 사랑으로 살고 있는가’로 판단합니다. 그 사랑이 이웃의 선을 향하고 있다면 그는 charity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faith without charity’는 살아 있는 신앙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신앙은 charity 안에서만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charity는 ‘남을 불쌍히 여겨 돕는 마음’보다 훨씬 넓습니다. 그것은 ‘이웃의 선을 진심으로 바라며 그를 위해 옳은 일을 하려는 삶의 태도’입니다. 그리고 그 태도는 작은 일들 속에서 나타납니다. 정직하게 일하는 것, 공정하게 행동하는 것,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려는 것, 다른 사람의 유익을 생각하는 것, 이런 모든 것이 charity입니다.
그래서 번역할 때는 한 단어에 너무 묶이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어떤 문맥에서는 ‘이웃 사랑’이 가장 자연스럽고, 어떤 곳에서는 ‘선행’, ‘선한 삶’, ‘이웃을 위한 사랑’, 또는 ‘이웃을 향한 선’이라고 풀어 번역하는 것이 오히려 의미를 더 잘 전달합니다. 스베덴보리의 charity는 하나의 단어라기보다 ‘삶의 방향 전체를 가리키는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정리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charity는 단순한 자선이 아니라 ‘이웃의 선을 바라며 그 선을 위해 살려는 의지와 삶 전체’입니다. 감정이 아니라 삶의 질서이고, 순간적 행위가 아니라 지속적인 상태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charity 안에서 신앙이 살아 움직입니다.
두 번째 상태는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서로 구별되는 때입니다. 주님께 속한 것들은 말씀에서 ‘리메인스’(remains)라고 하는 건데, 여기서는 특별히 유아기부터 배워 온 신앙의 지식들을 뜻하며, 그것들은 저장되어 있다가 사람이 이 상태에 이르기 전까지는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상태는 시험, 불행, 또는 슬픔 없이 존재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이를 통해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 곧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잠잠해지고, 마치 죽은 것처럼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여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이 속 사람에 속한 것들로부터 분리됩니다. 속 사람 안에는 주님께서 이때까지 저장해 두신 리메인스가 있으며, 바로 이 목적을 위해 보존되어 온 것입니다. The second state is when a distinction is made between those things which are of the Lord, and those which are proper to man. The things which are of the Lord are called in the word “remains,” and here are especially knowledges of faith, which have been learned from infancy, and which are stored up, and are not manifested until the man comes into this state. At the present day this state seldom exists without temptation, misfortune, or sorrow, by which the things of the body and the world, that is, such as are proper to man, are brought into quiescence, and as it were die. Thus the things which belong to the external man are separated from those which belong to the internal man. In the internal man are the remains, stored up by the Lord unto this time, and for this use.
해설
이 단락에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두 번째 ‘상태’(state)를 첫 번째 상태와 분명히 구별합니다. 첫 상태가 전적으로 주님의 자비가 어둠 위에서 운행하는 준비 단계였다면, 두 번째 상태는 인간 안에서 ‘구별이 처음으로 일어나는 단계’입니다. 이 구별이란 선과 악의 윤리적 분별 이전에, 무엇이 주님께 속한 것이고 무엇이 사람 자신에게서 나온 것인지를 구별하는 인식의 시작을 뜻합니다. 이 구별 없이는 거듭남은 결코 진행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기에게서 나온 것을 선과 진리로 착각하는 한,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께 속한 것들을 ‘리메인스’(remains)라고 합니다. 리메인스는 사람이 살아오면서 스스로 축적한 종교 지식이나 도덕적 자산이 아니라, ‘주님이 유아기부터 사람 안에 조용히 저장해 두신 것들’입니다. 여기에는 신앙의 기초적 지식들, 선한 감정의 흔적들, 순수한 애정, 주님을 향한 어린 마음의 인상들이 포함됩니다. 중요한 점은, 이 리메인스가 평소에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오랫동안 그것의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며, 오직 이 두 번째 상태에 이르러서야 그것들이 작동할 준비를 갖춥니다.
이 상태가 오늘날에는 거의 항상 시험, 불행, 슬픔과 함께 온다고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이유는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주님이 고통을 기뻐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이 잠잠해지지 않고서는 속 사람이 드러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고유한 것, 곧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비롯된 욕망과 판단은 평소에는 매우 활발하여, 속 사람의 미세한 움직임을 완전히 덮어 버립니다. 그래서 주님은 섭리 안에서 외적 삶이 흔들리거나 제한되는 상황을 허용하시는데, 이로 인해 겉 사람의 활동은 약해지고, 마치 죽은 것처럼 조용해집니다.
이 과정은 스베덴보리가 자주 말하는 ‘황폐’(vastation)의 초기 형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겉 사람의 것들이 약화되고 무력해질 때, 비로소 사람은 자신의 힘과 지혜에 의존할 수 없음을 느끼게 됩니다. 바로 이때 속 사람 안에 저장되어 있던 리메인스가 깨어날 수 있는 공간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이 상태에서 겪는 슬픔이나 시험은 거듭남을 방해하는 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거듭남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입니다.
이 단락의 핵심 결과는 겉 사람과 속 사람의 분리입니다. 이는 인간이 둘로 쪼개진다는 뜻이 아니라, 내적 질서가 처음으로 형성된다는 의미입니다. 이전에는 겉 사람의 사고와 욕망이 인간 전체를 지배했다면, 이제는 속 사람이라는 또 하나의 중심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속 사람 안에 바로 리메인스가 있으며, 그것들은 주님께서 오랫동안 이 시점을 위해 보존해 오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두 번째 상태는 주님이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해 두신 것이 실제로 사용되기 시작하는 전환점입니다.
이 상태는 또한 인간의 신앙이 본격적으로 현실성을 갖기 시작하는 단계이기도 합니다. 이전까지 신앙이 있었다면 그것은 주로 외적 습관이나 전통, 혹은 지적 동의에 머물렀지만, 이제 신앙은 내면에서 삶과 연결될 가능성을 갖습니다. 그러나 이 가능성은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라, 오직 구별의 시작일 뿐입니다. 무엇이 주님께 속한 것인지, 무엇이 자기에게 고유한 것인지에 대한 이 구별은 이후의 모든 상태를 관통하는 기준이 됩니다.
결국 AC.8은 거듭남이 감정적 각성이나 도덕적 결심으로 진행되지 않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거듭남은 먼저 ‘구별의 눈이 열리는 사건’이며, 이 구별은 종종 고통과 침묵, 상실의 시간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언제나 주님의 섭리가 있으며, 속 사람 안에 저장된 리메인스를 사용하여 인간을 새롭게 하시려는 오랜 준비가 놓여 있습니다. 두 번째 상태는 그래서 고통의 단계이면서 동시에, 주님의 오랜 인내가 처음으로 열매를 맺기 시작하는 거룩한 전환의 단계입니다.
심화
1. ‘오늘날 이 상태는 시험, 불행, 또는 슬픔 없이 존재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이를 통해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 곧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잠잠해지고, 마치 죽은 것처럼 되기 때문입니다.’
AC.8 본문에 나오는 위 문장에 대한자세한 설명 부탁합니다. 왜 시험, 불행, 슬픔들이 있어야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 곧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잠잠해지고, 마치 죽은 것처럼 되나요? 안 그런 사람들도 제법 있던데...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AC.8의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에서 매우 현실적이고도 예민한 지점입니다. 먼저 핵심부터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반드시 사람을 괴롭혀야만 거듭남이 일어난다’는 뜻이 아닙니다. 또한 ‘시험, 불행, 슬픔을 많이 겪은 사람일수록 더 거듭난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가 말하는 핵심은 이것입니다. 사람의 겉 사람, 곧 몸과 세상에 붙어 있는 자기 확신, 자기 의지, 자기 만족, 자기 판단의 소음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평소에는 속 사람 안에 저장된 리메인스와 주님의 조용한 인도를 거의 듣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시험, 불행, 슬픔이 그 시끄러운 바깥층을 잠잠하게 만드는 도구가 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고난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 ‘겉 사람의 지배력이 약해지는 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왜 하필 시험, 불행, 슬픔이 이런 역할을 하느냐 하면, 평소 인간은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을 너무도 당연하고, 강하게 붙들고 살기 때문입니다. 건강, 체면, 성공, 인정, 계획, 통제감, 내 판단의 옳음,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일이 풀려야 한다는 기대, 이런 것들이 겉 사람의 질서를 이룹니다. 그런데 사람이 형통하고 자기 뜻대로 되는 동안에는 이것들이 거의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면 사람은 자기가 주도하고 자기가 판단하고 자기가 산다고 느끼기 쉽습니다. 그 상태에서는 주님에게서 오는 더 깊은 선과 진리가 있어도, 그것이 거의 드러나지 못합니다. 반면 시험이나 불행이나 슬픔이 찾아오면, 그 사람이 당연하게 여기던 바깥 질서가 흔들립니다. 내가 다 할 수 있다는 생각, 내가 옳다는 생각, 세상적 안전이 나를 붙들어 준다는 생각이 약해집니다. 바로 그때 겉 사람의 주장들이 ‘잠잠해지고’, 그래서 속 사람 안에 저장된 리메인스, 곧 주님께서 미리 보존해 두신 선과 진리의 씨앗이 좀 더 앞으로 나올 수 있게 됩니다. AC.8이 말하는 ‘마치 죽은 것처럼 된다’는 말은 바로 이 의미입니다.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이 실제로 제거되거나 파괴된다는 뜻이 아니라, 적어도 한동안은 그 지배권이 멈추고, 절대적인 주도권을 잃는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구별이 하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시험, 불행, 슬픔’이 언제나 자동으로 사람을 더 좋게 만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실 많은 경우, 사람은 고난을 겪고도 더 완고해질 수 있습니다. 더 원망하고, 더 자기중심적이 되고, 더 비뚤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사람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고난이라는 상황 속에서도 사람의 겉 사람을 느슨하게 하셔서, 속 사람 안의 더 깊은 것을 건드리실 수 있다는 것이 정확한 뜻입니다. 다시 말해, 변화의 원인은 고난 자체가 아니라 주님의 역사입니다. 고난은 수단일 수 있지만, 주체는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큰 시련 없이도 겸손해지고, 어떤 사람은 큰 시련을 겪고도 전혀 부드러워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마지막에 말씀하신 ‘안 그런 사람들도 제법 있던데...’라는 관찰은 아주 정확합니다. 실제로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비교적 평탄한 삶 속에서도 자기 고집이 약해지고, 진리를 듣고 순순히 받아들이며, 주님의 인도를 따르려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대개 두 가지 중 하나입니다. 하나는 그 사람 안에 이미 강한 리메인스가 있고, 양심과 겸손이 비교적 일찍 형성되어 있어서, 큰 충격 없이도 겉 사람의 소음이 과도하게 커지지 않는 경우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겉으로 보기에는 평탄해 보여도, 그 사람 안에서는 이미 깊은 내적 씨름과 조용한 슬픔, 숨은 깨짐이 오래 진행되고 있는 경우입니다. 겉으로는 ‘시험 없이 잘 자란 사람’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주님께서 그 사람 안에서 매우 섬세하고 조용한 방식으로 겉 사람을 다루고 계셨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AC.8의 문장은 ‘반드시 모두가 큰 불행을 겪는다’는 예외 없는 공식이 아니라, ‘오늘날 대체로는 이런 방식이 많다’는 관찰로 이해해야 맞습니다. 실제로 본문도 ‘거의 없다’(seldom exists without...)고 말하지, ‘절대 없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왜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이 문제인가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것들을 죄악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몸도 필요하고 세상 속 삶도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주도권’을 잡을 때입니다.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은 본래 겉 사람의 도구여야 하는데, 타락한 인간 안에서는 그것들이 왕이 되려 합니다. 편안함, 인정, 소유, 비교우위, 안정, 자기 이미지, 이런 것들이 인간을 끌고 가기 시작하면, 사람은 속 사람의 빛보다 바깥 조건의 변화를 더 강하게 따라갑니다. 시험과 슬픔은 바로 이 잘못된 왕좌를 흔듭니다. 그래서 사람이 처음으로 ‘나는 내 힘으로 서 있는 존재가 아니구나’, ‘내가 붙들던 것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구나’, ‘참된 선과 진리는 다른 곳에서 오는구나’를 배울 여지가 생깁니다. 누가복음 15장, ‘돌아온 탕자’ 비유의 둘째가 스스로 돌이키는 장면이 바로 이런 장면입니다. 그러므로 AC.8의 논리는 ‘고난이 좋아서’가 아니라, ‘겉 사람의 폭주가 멈출 때 속 사람의 질서가 드러날 수 있기 때문에’입니다.
초심자에게 이 부분을 설명하실 때는 이렇게 말씀하시면 좋겠습니다. ‘주님은 사람을 일부러 괴롭히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너무 바깥 것들에 붙잡혀 있을 때 그것들이 잠잠해질 틈을 통해 더 깊은 생명으로 이끄시는 분입니다. 어떤 사람은 큰 시험을 통해, 어떤 사람은 조용한 양심의 깨달음을 통해,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의 아픔이나 자신의 한계를 통해 그 길을 배웁니다. 핵심은 고난의 크기가 아니라, 겉 사람의 소리가 줄어들고 속 사람의 문이 열리는가에 있습니다.’ 이렇게 설명하시면 AC.8의 엄중한 표현도 훨씬 바르게 전달될 것입니다.
첫 번째 ‘상태’(state)는 앞서는(precede) 상태로서, 유아기에서부터의 상태와 거듭남 바로 직전에 있는 상태를 모두 포함합니다. 이 상태를 ‘혼돈’(void), ‘공허’(emptiness), 그리고 ‘흑암’(thick darkness)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첫 번째 움직임은 주님의 자비(the Lord’s mercy)인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the spirit of God moving upon the faces of the waters)입니다. The first state is that which precedes, including both the state from infancy, and that immediately before regeneration. This is called a “voi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And the first motion, which is the Lord’s mercy, is “the spirit of God moving upon the faces of the waters.”
해설
이 단락에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첫 번째 ‘상태’(state)를 정의하면서, 인간의 영적 삶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는지를 매우 솔직하고도 철저하게 드러냅니다. 이 첫 상태는 거듭남 이후의 어떤 성취나 빛의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그 이전의 모든 상태를 포괄하는 단계입니다. 여기에는 유아기의 상태와, 성인이 되어 거듭남 직전에 이르는 상태가 함께 포함됩니다. 이 점은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유아기를 무죄의 상태로 보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이미 거듭난 상태로 보지는 않습니다. 유아기는 악을 의식적으로 행하지는 않지만, 동시에 선과 진리를 의식적으로 인식하지도 못하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유아기와 거듭남 직전의 상태는 서로 다른 모습이지만, 모두 아직 영적 생명이 실제로 형성되기 이전이라는 점에서 하나의 첫 상태로 묶입니다.
이 상태를 ‘혼돈’(void)과 ‘공허’(emptiness)라 하는 이유는, 사람 안에 아직 참된 선과 참된 진리가 심기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혼돈’은 선의 부재를, ‘공허’는 진리의 부재를 가리킵니다. 이는 도덕적으로 나쁘다는 평가라기보다, 영적 구조가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는 존재론적 진술입니다. 사람은 이 상태에서 생각하고 느끼며 살아가지만, 그것은 모두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라는 자연적 근원에서 나온 것들이며, 주님의 선과 진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상태를 ‘흑암’(thick darkness)이라고도 합니다. 이 어둠은 단순한 무지나 지식 부족이 아니라, 신앙에 속한 것들, 곧 주님과 천적, 영적 삶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러나 이 단락의 핵심은 인간의 상태를 어둡게 묘사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바로 그 어둠 속에서 ‘첫 번째 움직임’이 일어난다는 선언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첫 움직임이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주님에게서 나온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것은 주님의 자비이며,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라는 표현으로 묘사됩니다. 여기서 ‘운행하다’라는 말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보호하고 품으며 생명을 준비하는 움직임을 뜻합니다. 이는 마치 어미 새가 알 위에 머물며 그 안에서 생명이 형성되도록 따뜻함을 전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이때 주님의 자비가 운행하는 대상은 ‘수면’, 곧 ‘물들의 얼굴’입니다. 이 ‘물들’은 이후에 밝혀지듯이, 주님이 사람 안에 미리 저장해 두신 ‘리메인스’(remains), 곧 선과 진리의 지식들을 가리킵니다. 사람은 의식적으로는 완전히 공허하고 어두운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내면 깊은 곳에는 주님이 유아기부터 보존해 오신 선한 흔적들이 남아 있습니다. 첫 상태에서 사람은 이것을 전혀 자각하지 못하지만, 주님의 자비는 이미 그 위에서 조용히 움직이며, 거듭남의 가능성을 준비합니다. 이 점에서 첫 상태는 절망의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주님의 창조 사역이 막 시작되는 지점입니다.
이 단락은 또한 거듭남이 인간의 결단이나 종교적 열심에서 출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사람은 첫 상태에서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고, 심지어 자신이 어둠 속에 있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듭남은 시작되는데, 그것은 오직 주님의 자비가 먼저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첫 상태는 인간 쪽에서 보면 수동적이고 무력한 상태이지만, 주님 쪽에서 보면 가장 적극적인 창조의 출발점입니다.
결국 AC.7은 거듭남의 출발을 인간의 빛이나 선에서 찾지 않고, 철저히 주님의 자비에서 찾도록 시선을 돌려줍니다. 인간의 영적 여정은 언제나 ‘혼돈’과 ‘공허’, ‘흑암’에서 시작되지만, 그 어둠 위로 주님의 영이 먼저 운행하십니다. 이 질서는 이후의 모든 상태에서도 반복됩니다. 그래서 첫 상태는 단지 과거의 한 단계가 아니라, 사람이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갈 때마다 다시 경험하게 되는 근원적 상태이며, 주님의 자비가 언제나 먼저이고, 인간의 응답은 그다음이라는 영적 질서의 원형을 보여 줍니다.
심화
1. ‘앞서는(precede) 상태’
AC.7에서 말하는 ‘앞서는 상태’(preceding states)는 단순히 ‘거듭남이 시작되기 전 상태’만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문맥에서는 이것이 조금 더 넓은 의미를 갖습니다. 그는 인간의 거듭남을 하나의 연속적인 과정으로 설명하면서, 어떤 상태가 나타날 때, 그것은 항상 그 이전에 있었던 상태들 위에서 생겨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preceding states’는 ‘현재 상태보다 앞서 있었던 모든 상태들’, 곧 그 상태를 가능하게 만든 이전 단계들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거듭남 이전의 상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 과정 속에서 서로 이어지는 단계들 전체를 포함하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에서 ‘상태’(states)라는 개념은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의 삶은 일정한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는 여러 상태들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의 상태는 이전 상태에서 자라나고, 다음 상태의 기초가 됩니다. 그러니까 한 상태가 나타날 때, 그것은 그 이전 상태들과 완전히 끊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세워지는 것이지요. AC.7에서 말하는 ‘preceding states’는 바로 이런 의미에서 ‘앞서 있었던 상태들’을 말합니다. 즉 지금 설명되는 상태보다 먼저 있었고, 그것을 준비하거나 가능하게 만든 상태들입니다.
이 점은 거듭남 설명에서 특히 중요합니다. 창세기의 여섯 날은 각각 독립적인 사건이 아니라, 하나가 다음을 준비하는 연속적인 상태들입니다. 예를 들어 첫째 날의 ‘빛’은 진리의 첫 인식을 의미하고, 그다음 상태들이 그 위에서 발전합니다. 따라서 둘째 날, 셋째 날 등 뒤의 상태들은 모두 앞선 상태들에 의존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preceding states’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지금 설명되는 상태는 이전 상태들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그 위에서 더 발전한 상태라는 뜻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에게서 이전 상태는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음 상태 안에 어떤 방식으로 남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다른 곳에서 인간의 상태들이 서로 이어지며 축적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앞선 상태들은 단순히 지나가 버린 과거가 아니라, 이후 상태 안에 기초로 남아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preceding states’는 단지 시간적으로 앞선 단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상태의 토대가 되는 상태들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따라서 AC.7의 ‘앞서는 상태’라는 표현은 ‘거듭남 이전 상태’라는 의미로만 좁히면 조금 부족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지금 설명되는 상태보다 먼저 있었고, 그것을 준비하고 가능하게 만든 모든 이전 상태들’을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의 창조 서술을 통해 인간의 거듭남이 이런 연속적인 상태들의 질서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거듭남의 연속적 상태들인 여섯‘날’(days),곧 여섯‘시기’(periods)는 전반적으로 다음과 같습니다.The six days, or periods, which are so many successive states of the regeneration of man, are in general as follows.
해설
이 문장은 ‘Arcana Coelestia’ 전체의 해석 방향을 결정하는 핵심 선언으로서, 창세기1장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한 문장으로 규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1장의 ‘여섯 날’을 시간의 흐름이나 물리적 우주 창조의 단계로 보지 않고,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거듭남의 여섯 연속적 상태로 정의합니다. 이를 분명히 하기 위해 그는 ‘날’(days)이라는 표현에 곧바로 ‘시기’(periods)라는 설명을 덧붙이는데, 이는 창세기의 창조 기사가 시간표가 아니라 내적 상태의 변화에 대한 기록임을 명확히 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이 문장은 창세기1장을 역사서나 자연과학적 기원 서술이 아니라, 인간 영혼의 재창조에 관한 계시로 읽도록 방향을 전환시킵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강조하는 핵심 개념 중 하나는 ‘연속적’(successive)이라는 표현입니다. 거듭남은 단번에 완결되는 사건이 아니라, 주님이 질서와 순서에 따라 사람 안에서 점진적으로 이루어 가시는 과정입니다. 각 ‘날’, 각 ‘시기’는 서로 분리된 독립적 단계가 아니라, 앞선 상태에 기초하여 다음 상태가 열리는 필연적 연속을 이룹니다. 이 질서는 영적 생명이 형성되는 데 본질적인 구조로, 어떤 단계를 건너뛰거나 임의로 재배열할 수 없습니다. 창세기1장의 순서는 곧 거듭남의 질서이며, 이는 주님의 신적 질서 자체를 반영합니다.
이 문장은 또한 ‘창조’와 ‘거듭남’을 동일한 틀 안에서 이해하게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창조는 과거에 한 번 일어난 우주적 사건으로 제한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거듭날 때, 그는 실제로 ‘새로 창조’되며, 그래서 거듭남은 새로운 창조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창세기1장은 인류 최초의 사건을 기록한 문서가 아니라, 모든 시대 모든 사람 안에서 반복되는 영적 현실을 묘사한 말씀입니다. 각 사람이 거듭남을 시작할 때마다, 그 사람 안에서 창세기1장의 여섯 ‘날’, 여섯 ‘시기’가 다시 전개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이 여섯 상태의 주체가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섯 ‘날’을 인간의 자기 수련 단계나 심리적 성장 도식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전적으로 주님이 사람 안에서 역사하시는 상태들이며, 사람은 이 과정에서 협력할 수 있을 뿐, 그 질서와 생명을 만들어내는 존재가 아닙니다. 따라서 이 여섯 시기는 인간 중심적 영성의 단계가 아니라, 주님의 자비와 진리가 인간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을 어떻게 재구성하는지를 보여 주는 신적 사역의 단계들입니다.
문장 속 ‘전반적으로’(in general)라는 표현 역시 의미심장합니다. 이는 여섯 ‘날’의 질서가 보편적이라는 점을 말하면서도, 각 개인의 삶에서 그것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방식은 다양할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어떤 이는 특정 단계에 오래 머물고, 어떤 이는 중간 단계까지만 이르며, 또 어떤 이는 더 깊은 단계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거듭남의 기본 구조와 순서는 변하지 않습니다. 이 문장은 보편성과 개별성을 동시에 포괄하는 거듭남의 틀을 제시합니다.
이 한 문장은 이후에 이어질 모든 세부 해설의 문지방 역할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곧 이어서 빛의 창조, 궁창의 분리, 식물의 발아, 광명체의 배치, 생물의 생성, 사람의 창조를 차례로 설명하며, 이 모든 것이 인간 내면에서 일어나는 영적 사건임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AC.6은 단순한 개요 문장이 아니라, 창세기1장을 ‘거듭남의 지도’로 읽게 하는 해석의 출발점이며, 주님이 인간을 어떻게 어둠에서 빛으로, 혼돈에서 질서로, 자기중심에서 주님 중심으로 이끄시는지를 보여 주는 대서사의 첫 문장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어떤 길이 있는가’라는 질문은 결국 ‘생명이 어떻게 인간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가’라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그는 이 흐름을 ‘인플럭스’(influx, 流入)라는 말로 설명합니다. 인플럭스란, 한마디로 말하면, 생명과 사랑과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인간 안으로 들어오는 흐름을 뜻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생명을 만들어내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기본 생각입니다.
이 흐름의 방향은 항상 ‘위에서 아래로’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으로, 그리고 속 사람에서 겉 사람으로 흐릅니다. 속 사람은 주님과 직접 연결되는 영적 차원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생명은 먼저 이 속 사람에 닿습니다. 그다음, 이 생명이 겉 사람의 마음으로 흘러 들어가 우리의 생각과 의지, 곧 우리의 삶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생각과 의지가 육체의 행동으로 표현됩니다.
이 구조를 하나의 그림처럼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마치 태양에서 빛과 열이 내려와 식물에 생명을 주고, 그 생명이 줄기와 잎을 통해 바깥으로 나타나는 것과 비슷합니다. 태양이 없으면 식물은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태양의 빛은 먼저 식물의 내부 생명에 작용하고, 그다음 잎과 꽃이라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삶도 이와 비슷하다고 설명합니다. 주님이 영적 태양이시며, 그 빛을 먼저 받는 자리가 바로 인간의 속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생각과 의지가 사실은 완전히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 선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모두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작용입니다. 인간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사용할 수는 있지만, 그 자체를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그는 이 점을 설명할 때, ‘주님만이 생명 그 자체이시다’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매우 중요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인플럭스는 강제로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생명은 항상 인간 안으로 흐르고 있지만, 인간은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 흐름을 받아들여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방향으로 살아가고, 어떤 사람은 그것을 거부하고 자기중심적인 방향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 때문에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관계가 매우 중요해집니다. 속 사람이 열려 있으면 주님의 생명이 겉 사람으로 잘 흐릅니다. 그러면 사람의 생각과 행동도 점점 더 선과 진리에 가까워집니다. 그러나 속 사람이 닫혀 있으면 그 흐름이 겉 사람으로 내려오지 못합니다. 그 경우 겉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아니라 자기 사랑이나 세상 사랑에서 나온 생각에 의해 움직이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을 바로 이 구조 속에서 설명합니다. 거듭남은 겉 사람이 단순히 도덕적으로 조금 나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속 사람이 열리고, 그 속 사람을 통해 주님의 생명이 겉 사람으로 내려오는 과정입니다. 그 결과 겉 사람의 생각과 습관이 점점 변화됩니다. 그래서 그는 거듭남을 ‘속 사람이 새로워지고, 겉 사람이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구조를 이해하면 인간 삶의 많은 현상이 설명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진리를 듣고 마음 깊이 감동을 받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같은 말을 들어도 전혀 움직이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속 사람의 상태에서 찾습니다. 속 사람이 열려 있으면 진리가 들어와 마음을 밝히지만, 속 사람이 닫혀 있으면 같은 진리도 단순한 지식으로만 남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신앙을 단순히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의 문제로 설명합니다. 인간이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속 사람이 열리기도 하고 닫히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선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흐름을 거부하게 됩니다.
이 모든 설명을 하나로 묶어 보면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는 매우 명확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생명의 근원은 주님입니다. 그 생명은 속 사람으로 들어옵니다. 그리고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으로 흐릅니다. 마지막으로 겉 사람을 통해 행동과 삶으로 나타납니다. 인간의 자유는 이 흐름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에 있습니다.
이 지점을 이해하면 스베덴보리의 여러 표현들이 훨씬 또렷하게 보입니다. 예를 들어 그가 ‘주님은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계신다’고 말할 때, 그것은 바로 속 사람의 중심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인간의 삶은 그 사랑에 따라 형성된다’는 말은 그 생명이 겉 사람을 통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설명하는 표현입니다.
목사님께서 지금까지 질문해 오신 내용들을 하나로 연결해 보면 매우 흥미로운 그림이 나타납니다. 인간은 속 사람과 겉 사람으로 이루어져 있고, 주님의 생명은 속 사람을 통해 인간 안으로 흐릅니다. 그리고 죽음은 이 구조 가운데 육체라는 바깥 도구가 벗겨지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죽은 후에도 여전히 생각하고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설명이 서로 연결된 하나의 구조 안에 들어 있습니다.
위 SC.29 설명 중 ‘인간은 죽은 후 얼마나 빨리 영이 되는가?’에서 ‘육체의 기능이 멈추면 인간의 겉 사람 가운데 육체와 관련된 부분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습니다.’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러면 ‘겉 사람’은 ‘육체와 관련된 부분’ 말고 또 다른 부분들이 있다는 말인가요?
목사님께서 짚으신 질문은 매우 중요한 지점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의 설명에서 ‘겉 사람’은 단순히 ‘육체’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겉 사람에는 육체도 포함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요소들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겉 사람은 ‘몸 + 자연적인 마음(자연적 이해와 의지)’을 함께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을 설명할 때 크게 ‘속 사람’과 ‘겉 사람’으로 구분합니다. 속 사람은 영적 차원의 인간이며, 주님과 직접 연결되는 부분입니다. 여기에는 영적 사랑과 영적 이해가 자리합니다. 반면 겉 사람은 자연계와 연결된 인간입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생각, 판단, 기억, 감정, 행동 등이 포함됩니다. 그리고 이 겉 사람의 가장 바깥쪽 도구가 바로 육체입니다.
그래서 겉 사람은 크게 두 층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자연적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육체’입니다. 자연적인 마음에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기억, 지식, 추론, 감정, 상상 같은 것들이 들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기억 지식’(memory-knowledge)이나 자연적 이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부분은 육체가 살아 있을 때, 감각을 통해 계속 자료를 받아들이며 작동합니다.
육체가 죽으면 이 구조 가운데 가장 바깥쪽 층, 곧 육체와 감각 기관이 먼저 멈춥니다. 눈, 귀, 신경, 뇌 같은 물질 기관들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상 세계의 빛과 소리를 감지하는 기능은 끝납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겉 사람의 ‘자연적인 마음’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마음은 여전히 영적 형태로 남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죽은 후에도 생각하고 기억하고 말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생각과 기억의 근본 기능은 육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기 때문입니다. 육체는 단지 그것을 표현하는 도구였습니다. 죽음은 그 도구가 제거되는 사건일 뿐입니다.
이 점을 이해하면 왜 사람이 사후 세계에서도 여전히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지도 설명됩니다. 사람의 기억, 성격, 사랑의 방향, 생각하는 습관 등이 그대로 이어집니다. 겉 사람의 자연적 마음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더 이상 물질계의 감각을 통해 작동하지 않고, 영계의 환경 속에서 작동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를 설명할 때 ‘사람은 여전히 사람이다’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그는 죽은 후의 인간을 흐릿한 영혼이나 추상적 존재로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또렷한 인간으로 존재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왜냐하면 영계에서는 마음의 상태가 곧바로 형태와 환경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리하면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겉 사람에는 두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는 육체와 감각 기관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적인 마음입니다. 죽을 때 사라지는 것은 육체와 감각 기관입니다. 그러나 자연적인 마음은 영적 형태로 계속 존재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죽은 후에도 생각하고 기억하고 말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구조를 조금 더 넓게 보면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는 인간을 세 층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가장 깊은 층은 ‘속 사람’으로서 주님과 연결되는 영적 차원입니다. 그다음은 ‘겉 사람의 마음’으로서 자연적인 생각과 기억의 영역입니다. 그리고 가장 바깥쪽이 ‘육체’입니다. 죽음은 이 세 층 가운데 가장 바깥층이 벗겨지는 사건입니다.
목사님께서 지금 질문하신 이 지점은 사실 스베덴보리 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열쇠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구조 때문에 ‘거듭남’도 설명되기 때문입니다. 거듭남은 육체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에서 시작되어 겉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그는 늘 ‘속 사람이 열리고, 겉 사람이 새롭게 된다’는 방식으로 구원의 과정을 설명합니다.
위 설명들 중 SC.29에 보면,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인간은 죽은 뒤에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야 영이 되는 것이 아니라, 거의 즉시 영의 상태로 깨어납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죽는 순간 어떤 긴 공백 기간이 지나야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 곧바로 영적인 삶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럼, 주님이 사흘 만에 부활하신 거며, 스베덴보리 자신도 ‘천국과 지옥’ 449번 글에 ‘그런 상태로 몇 시간이 지나자, 내 주위에 있던 영들이 내가 죽은 줄 알고 점차 물러갔다.’ 및 어디 선가 72시간이라는 걸 본 거 같은데... 이런 좀 서로 상반되는 듯한 말들은 어떻게 된 거죠? 누구 말이 맞는 건가요?
목사님께서 느끼신 의문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글을 읽다 보면 ‘죽은 뒤 곧바로 영으로 깨어난다’는 설명과 ‘몇 시간’ 혹은 ‘사흘’ 같은 시간이 언급되는 구절이 함께 등장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서로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충돌되는 내용이 아닙니다.
먼저 인간의 죽음에 대해 스베덴보리가 가장 기본적으로 말하는 원칙부터 보겠습니다. ‘Heaven and Hell’에서는 인간이 죽으면 곧바로 영으로 깨어난다고 설명합니다. 즉 인간의 속 사람, 곧 영적 존재는 육체가 멈추는 순간 바로 영계에서 의식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죽음을 ‘삶의 중단’이 아니라 ‘상태의 전환’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점에서는 긴 무의식 기간이나 수면 같은 상태가 있다는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스베덴보리는 죽음의 과정에 ‘전환 과정’이 있다는 것도 말합니다. 사람이 죽을 때 곧바로 모든 것이 완전히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 몸과 영적 몸 사이의 연결이 점차 풀리는 과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 과정을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 일어나는 변화로 설명합니다. 이 과정 속에서 천사들이 새로 떠나는 사람을 돌본다고도 말합니다. 바로 이 전환 단계 때문에 몇 시간 같은 표현이 등장합니다.
목사님께서 언급하신 ‘Heaven and Hell’ 449번 글의 구절은 바로 이 ‘전환 과정’을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그 부분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죽을 때 처음에는 주변 영들이 그 사람의 상태를 살피고 있다가, 어느 시점이 지나면 그가 완전히 다른 상태로 들어갔다고 보고 물러난다고 말합니다. 이때 ‘몇 시간’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영적 삶이 시작되기까지 오래 기다린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연적인 죽음 과정이 완전히 마무리되는 짧은 시간대를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72시간’ 혹은 ‘사흘’이라는 표현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이것은 두 가지 서로 다른 전통이 섞여 있기 때문에 생긴 인상입니다. 첫째는 성경의 ‘사흘’이라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성경에서는 ‘셋째 날’이 매우 자주 등장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시간 계산이라기보다 ‘완성’ 혹은 ‘새로운 상태의 시작’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님의 부활도 바로 이 상징 구조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사흘’은 단순히 생물학적 시간이라기보다 영적 의미를 가진 표현으로 이해됩니다.
둘째는 고대 종교나 민간 전통에서 전해지는 ‘영혼이 며칠 동안 머문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런 민속적 전통을 자신의 교리로 채택하지 않습니다. 그의 설명에서는 사람이 죽은 뒤 의식이 없는 상태로 72시간 동안 기다린다는 개념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사람이 거의 즉시 영적 세계에서 깨어난다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주님의 부활과 인간의 죽음을 직접 비교하는 것도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의 경우는 단순한 인간의 죽음이 아니라 신적 인격의 영화 과정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주님의 부활은 단순히 영이 몸에서 분리된 사건이 아니라, 인간성을 완전히 신성화하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사흘’이라는 구조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등장합니다. 이것을 일반 인간의 죽음 과정과 동일한 시간 구조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정리하면 이렇게 이해하면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인간은 죽는 순간 거의 즉시 영적 의식을 가지고 깨어납니다. 그러나 육체적 생명이 완전히 멈추고 자연 세계와의 연결이 풀리는 데에는 짧은 전환 과정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몇 시간’은 바로 이 전환 단계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사흘’은 주님의 부활과 관련된 상징적 시간 구조이며, 인간의 사후 의식이 시작되는 시간을 설명하는 표현은 아닙니다.
그래서 서로 다른 문장들이 실제로는 같은 사실의 서로 다른 측면을 설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영적 의식의 시작이 매우 빠르다’는 원칙을 말하고 있고, 다른 하나는 ‘죽음의 과정에 짧은 전환 단계가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을 뿐입니다.
목사님께서 이런 질문을 하신 것은 매우 중요한 포인트를 짚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의 사후 세계 설명에서 가장 핵심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가 바로 ‘죽음 이후에도 의식이 계속 이어진다’는 점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이해하면 많은 신앙인들이 가지고 있는 ‘죽으면 긴 잠을 잔다’는 생각과는 전혀 다른 그림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가운데서도 특히 창세기 1–11장을 매우 중요하게 본 이유는, 이 부분이 단순한 고대 이야기의 기록이 아니라 ‘인류의 가장 오래된 영적 역사’를 담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구간을 읽을 때 문자적 역사보다 훨씬 더 깊은 층을 보았습니다. 즉 인류 최초의 교회 상태, 그 교회의 변화와 쇠퇴, 그리고 이후 새로운 교회가 일어나는 과정이 상징적인 이야기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이해하면 인류의 영적 역사 전체를 바라보는 틀이 생긴다고 보았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11장 속에 세 가지 큰 시대가 담겨 있다고 설명합니다. 첫 번째는 ‘태고교회’입니다. 그는 창세기 1–2장을 태고교회의 상태를 묘사하는 기록으로 이해했습니다. 태고교회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처음 존재했던 교회로, 매우 특별한 영적 상태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추론 중심의 사고보다 훨씬 깊은 ‘지각’, 곧 퍼셉션(perception)을 가지고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들은 선이 무엇이고 진리가 무엇인지 마음속에서 직접 느끼는 능력이 있었고, 그래서 하나님과 매우 가까운 상태로 살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에덴동산 이야기의 속뜻이라고 해석됩니다.
그러나 창세기 3장에 등장하는 ‘선악과 사건’은 단순히 금지된 열매를 먹은 사건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중심적 지혜를 선택하면서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지각을 잃어버린 사건을 상징한다고 설명됩니다. 이것이 인류의 첫 번째 큰 전환점입니다. 인간은 더 이상 직관적인 영적 지각으로 진리를 아는 상태가 아니라, 생각하고 추론하는 방식으로 진리를 찾는 상태로 내려오게 됩니다. 이것이 흔히 ‘타락’이라고 불리는 사건의 속뜻이라고 스베덴보리는 설명합니다.
그다음 단계가 바로 ‘고대교회’입니다. 태고교회의 직접적인 지각이 사라진 이후에도 하나님과의 연결이 완전히 끊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신 새로운 방식의 신앙이 등장합니다. 그것이 바로 ‘표상과 상응을 통한 신앙’입니다. 자연계의 사물들이 영적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이 시대 사람들은 자연 속 상징들을 통해 영적 진리를 배웠습니다. 그래서 고대교회의 종교에는 상징적인 의식과 이야기들이 많았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노아 이야기를 이 고대교회의 시작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해석합니다. 홍수 이야기는 실제 자연재해라기보다, 인간의 마음이 악과 혼란으로 가득 차서 이전의 교회 상태가 무너지는 과정을 상징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노아의 방주는 완전히 무너지지 않고 남아 있는 작은 신앙 공동체를 상징한다고 봅니다. 즉 새로운 시대의 교회가 다시 시작되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고대교회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쇠퇴합니다. 사람들이 상징의 의미를 잊어버리고, 겉으로 보이는 의식만 남기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이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이야기가 바로 바벨탑 이야기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벨탑을 인간이 스스로 하늘에 올라가려는 교만의 상징으로 이해합니다. 하나님과의 연결을 잃어버리고 자기 힘으로 신적인 위치에 올라가려는 상태를 표현한 이야기라고 설명합니다.
이렇게 보면 창세기 1–11장은 단순한 고대 전설의 모음이 아니라, 인류의 영적 역사에 대한 압축된 기록이 됩니다. 태고교회의 순수한 상태, 그 상태의 붕괴, 고대교회의 상징적 신앙, 그리고 그 교회의 쇠퇴까지가 이 몇 장 안에 담겨 있다고 스베덴보리는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부분을 매우 중요한 열쇠로 생각했습니다.
이 설명을 이해하면 왜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1장부터 그렇게 길고 자세하게 해설했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단순히 창조 이야기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거듭남과 교회의 역사를 동시에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첫 장을 해석하면서도 인간 마음의 변화, 교회의 상태, 그리고 주님과의 관계까지 계속 연결해서 설명합니다.
목사님께서 지금 ‘Arcana Coelestia’를 읽으시면서 느끼고 계실 그 독특한 경험, 곧 성경 이야기 속에서 인간의 영적 상태가 보이기 시작하는 느낌이 바로 이 접근 방식에서 나옵니다. 창세기의 이야기가 더 이상 먼 옛날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지금 인간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과정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에서 또 하나 매우 중요한 질문이 자연스럽게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태고교회 사람들은 실제로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사람들을 단순히 신화 속 인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들이 실제로 존재했던 인류의 가장 오래된 영적 공동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은 오늘날 인간과 매우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영적 사명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창세기 해설, 곧 ‘Arcana Coelestia’를 쓰기 시작한 이유는 단순한 우연이 아닙니다. 그의 전체 사상을 보면, 이 선택은 매우 의도적이고 필연적인 시작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에게 창세기, 특히 창세기 1–11장은 성경 전체의 기초 구조를 담고 있는 본문이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한 가지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성경을 단순한 역사 기록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경이 전적으로 상응과 표상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 속에는 인간의 영적 삶과 교회의 역사, 그리고 무엇보다 주님에 관한 깊은 속뜻이 담겨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해설하려 할 때, 가장 먼저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까요? 자연스럽게 성경의 시작, 곧 창세기에서 시작하는 것이 가장 논리적인 선택이 됩니다.
특히 창세기 1–3장은 매우 독특한 본문입니다. 문자 그대로 읽으면 세상의 창조 이야기와 에덴동산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부분이 단순한 우주 창조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영적 창조’, 곧 거듭남의 과정을 설명하는 본문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다시 말해 창세기 1장은 인간이 영적으로 새롭게 창조되는 과정을 전체적으로 설명하는 상징적 기록이며, 창세기 2장은 태고교회의 상태를, 창세기 3장은 인간이 타락하는 과정을 설명한다고 본 것입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왜 그가 창세기에서 시작했는지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창세기 첫 장들은 성경 전체의 영적 구조를 보여 주는 일종의 ‘열쇠’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부분의 속뜻이 밝혀지면, 이후 성경의 많은 이야기들도 같은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성경 해설을 창세기에서 시작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고 보았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이유는 창세기 1–11장의 문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부분이 이후의 역사서와는 매우 다른 고대의 문체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이것을 태고교회의 문체라고 부릅니다. 이 문체는 단순한 사건 기록이 아니라, 영적 의미를 담은 상징적 이야기 형식으로 쓰여 있습니다. 그래서 문자만 보면 역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깊은 영적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에덴동산 이야기에는 나무, 강, 뱀, 열매 같은 상징적인 요소가 많이 등장합니다. 문자적으로 읽으면 하나의 신화적 이야기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인간 마음의 상태와 교회의 상태를 설명하는 상징적 기록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해석하면 성경 전체가 어떤 방식으로 기록되었는지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창세기가 인간 이야기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전체를 보면 인간의 창조, 타락, 구속이라는 큰 흐름이 있습니다. 창세기 앞부분은 바로 이 흐름의 출발점입니다. 인간이 처음 어떤 상태로 창조되었는지, 어떻게 타락했는지, 그리고 이후 교회가 어떻게 형성되는지가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부분을 이해하지 않으면 성경 전체의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신학 체계를 설명하는 책을 먼저 쓰지 않고, 성경 해설을 먼저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성경의 맨 처음부터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점은 매우 특징적인 선택입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교리 체계를 먼저 설명한 뒤 성경을 해석하려 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성경의 속뜻을 따라가면서 신학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도록 했습니다.
실제로 ‘Arcana Coelestia’를 읽다 보면 창세기 해설 속에서 인간의 거듭남, 천국의 구조, 사랑과 신앙의 관계, 상응의 질서 등 거의 모든 핵심 교리가 조금씩 나타납니다. 즉 이 책은 단순한 창세기 주석이 아니라, 스베덴보리 신학 전체의 기초를 담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이 책의 제목입니다. ‘Arcana Coelestia’라는 라틴어 표현은 ‘천적 비밀들’ 또는 ‘하늘의 비밀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성경 문자 안에 숨겨져 있는 천적 의미들을 하나씩 밝혀낸다는 의미로 이 제목을 붙였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단순한 해설서가 아니라, 말씀 속에 감추어진 하늘의 의미를 드러내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이유를 종합하면, 스베덴보리가 창세기에서 시작한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습니다. 성경의 시작에서 인간과 교회의 영적 이야기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 속에 이미 성경 전체를 이해할 수 있는 구조가 들어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Arcana Coelestia’를 읽을 때도 같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창세기 해설을 읽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점점 읽다 보면 인간의 영적 삶 전체에 대한 설명이 펼쳐집니다. 결국 이 책은 창세기 해설을 통해 인간과 천국, 그리고 주님에 대한 더 깊은 이해로 안내하는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