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창세기 5장 세 번째 시간, 21절로 24절이며, AC 글 번호로는 516번에서 522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21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5: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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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 퍼셉션을 교리로 보존한 사람들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 준비했습니다. 오늘 말씀에 주님이 빛을 비추셔서 이 시간 우리 영과 육이 활짝 열려 모두 들을 귀 만들어 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에 대한 속뜻 요약입니다.

 

에녹(Enoch)은 일곱 번째 교회를, ‘므두셀라(Methuselah)는 여덟 번째 교회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walk with God)는 신앙에 관한 교리를, ‘자녀들을 낳았으며(begat sons and daughters)는 진리와 선에 관한 교리적인 것들을,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all the days of Enoch being three hundred sixty and five years)는 그 기간이 매우 짧았음(few)을 의미합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walking with God)는 앞에서와 같이 신앙에 관한 교리(doctrine concerning faith)를,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he was no more, for God took him)는 그 교리가 후대의 쓰임새를 위하여 보존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상과 같은 속뜻 요약에서 핵심은 ‘퍼셉션(perception)의 시대였던 태고교회에서 왜 갑자기 교리 얘기가 나오는가 하는 것’이며, 이걸 이해하려면 그렇다면, ‘퍼셉션이란 무엇인가’ 하는 더욱 근본적인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다음은 며칠 전 제가 블로그에 올린 글인데 이해를 돕기 위해 인용합니다.

 

 

아래는 AC.521(23-24) 해설 중 퍼셉션은 일반적 개념이 아니라, 상태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극히 미세하고 개별적인 인식이기 때문에(for they enter into the most minute and particular things, with all variety according to states and circumstances), 언어로 고정해 설명하는 순간 이미 그 본질을 놓치게 됩니다.’라는 문장에 대한 설명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퍼셉션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개념적 이해나 논리적 판단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인식입니다. 그것은 정보를 모아 분석한 결과도 아니고, 규칙을 적용해 도출한 결론도 아닙니다. 퍼셉션은 선과 진리를 직접 감지하고 즉각적으로 알아차리는 인식으로, 생각이 작동하기 이전에 이미 방향이 주어지는 상태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퍼셉션은 배우는 대상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며, 설명을 통해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상태로 작동합니다. 마치 아이가 어느 순간 엄마의 얼굴 표정을 보고, 속으로 ‘아, 엄마가 지금 힘들어하시는구나...’ 엄마의 상태를 즉각적으로 아는 것과 비슷합니다. 누가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말이죠.

 

이때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미세하다(the most minute)라는 표현은 퍼셉션이 불분명하거나 흐릿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퍼셉션은 너무 정밀해서 일반적인 언어로는 쉽게 포착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퍼셉션은 어떤 상황을 볼 때, 그 상황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를 분리하지 않고 한꺼번에 인식합니다. 그러니까 말하는 사람의 내적 상태, 듣는 사람의 준비 정도, 관계의 맥락, 시기의 적절성, 그리고 그 선택이 불러올 결과까지가 동시에 감지되는 식입니다. 이 모든 요소가 하나의 인식으로 주어지기 때문에, 퍼셉션은 매우 정교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퍼셉션은 항상 개별적으로 작동합니다. 같은 말, 같은 행동이라 하더라도 퍼셉션은 그것을 상황마다 다르게 인식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 선이 되지만, 다른 경우에는 침묵하는 것이 선이 됩니다. 이 차이는 원칙을 어긴 결과가 아니라, 상태, 곧 상황이, 사정이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분별의 차이입니다. 퍼셉션은 언제나 ‘지금 이 순간의 상태’를 기준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모든 경우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판단을 전제로 하지 않습니다.

 

이 점에서 퍼셉션은 교리와 뚜렷하게 구별됩니다. 교리는 전달되기 위해 반드시 일반화를 필요로 합니다. ‘항상’, ‘대체로’, ‘원칙적으로’와 같은 표현이 없으면 교리는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많은 경우를 하나의 틀로 묶어야 가르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퍼셉션은 이러한 일반화 자체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퍼셉션은 언제나 이번 경우를 보고, 지금 상태를 봅니다. 비유하자면, 시력 차이요, 해상도 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둘 다 높으면 사물이, 화면이 또렷하고 생생하게 보이지만, 낮으면 흐릿하게 무난하게 보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퍼셉션을 언어로 고정해 설명하는 순간 이미 그 본질을 놓치게 된다고 말합니다. 언어는 필연적으로 경계를 긋고, 흐름을 멈추고, 판단을 고정합니다. 그러나 퍼셉션은 흐르며, 상태에 따라 달라지며, 살아 움직입니다. 살아 있는 분별을 문장이나 규칙으로 붙잡아 두려는 순간, 우리는 그 생명 대신 틀만 붙잡게 됩니다. 주님으로 말미암는 사랑의 퍼셉션은 그 모든 정황 및 그 마음속 동기까지 보지만 일반화된 규범인 교리는 그런 걸 다 놓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든 사고의 비유는 이 점을 매우 잘 보여 줍니다. 바르게 생각할 줄 아는 사람에게 사고의 규칙을 가르치면, 오히려 사고의 자유로움이 약해질 수 있습니다. 이는 사고능력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외적인 규칙에 매이면서 내적 판단이 위축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영재를 일반 학교에 보낼 경우, 많은 경우 아이를 망치는 것과도 같은데요, 퍼셉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내적인 빛으로 알고 있는 것을 규칙으로 다시 배우게 하면, 그 인식은 점차 경직됩니다. 내면이 열려 매 순간 하늘의 빛으로 즉시 알면 되는 것을 굳이 자기들이 정한 어떤 룰을 따라야만 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천적인 사람의 퍼셉션은 묘사하기 어렵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흐릿하거나 불분명해서가 아니라, 너무 구체적이고 상황 의존적이며 살아 있어서 일반 개념으로 묶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퍼셉션은 숙련된 장인이 재료를 다루며 느끼는 감각과 비슷합니다. 그 감각은 말로 완전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실제 작업에서는 매우 정확하게 작동합니다. 흑백요리사 시즌2에서 종이 한 장 차이보다 더 미세한 차이로 생존과 탈락이 결정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승자 최강록이 재료마다 그릇을 달리하여 다르게 조림한 것을, 예를 들면, ‘중불로 적당하게’ 이런 식으로 획일화, 규칙화, 교리화를 하면, 이후 그 레시피를 사람들이 그대로 따라 했다고 해서 과연 그 맛이 재현될까요? 천국의 천사들이 바로 이런 퍼셉션으로 생활하며, 그래서 그들은 일상 대인관계나 지상의 누구를 도울 때 실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퍼셉션으로 섬기기 때문에 온전하며, 완전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동시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분명히 말합니다. 이러한 퍼셉션 능력은 장차 사라질 것이었고, 실제로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이후의 인류는 더 이상 내적인 빛으로 즉각 알지 못하고, 오직 잘 정돈된 교리를 통해 배우며 점진적으로 선과 진리에 이르게 되는데, 바로 이 전환을 대비하여, 에녹이라는 교회에게 퍼셉션 내용을 교리로 정리하는 일이 허락되었던 것입니다.

 

에녹의 교회는 퍼셉션 자체를 살아내는 교회가 아니라, 퍼셉션을 기억하고 보존하는 역할을 맡은 교회였습니다. 그 교리는 퍼셉션 그 자체는 아니지만, 퍼셉션이 다시 회복될 방향을 가리키는 표지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라는 표현은, 이 교리가 인간의 판단이나 역사적 우연에 맡겨진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 안에 안전하게 보존되었음을 뜻합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설명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 현실을 깊이 비춥니다. 우리는 대부분 교리를 통해 신앙을 배웁니다. 이것은 잘못이 아니라, 현재 인류의 상태에 맞는 방식입니다. 다만 교리가 곧 생명이라고 착각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교리는 빛을 가리키는 창이요, 담아두는 그릇이지, 빛 그 자체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리하면, 퍼셉션이 ‘미세하고 개별적’이라는 말은 선과 진리를 규칙이나 원칙이 아니라 각 상태와 순간 속에서 직접 분별하는 살아 있는 인식을 뜻합니다. 이 인식은 너무 살아 있어서 언어로 고정될 수 없고, 교리로 완전히 담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퍼셉션은 사라졌고, 대신 교리가 보존되었습니다. 이 흐름을 이해할 때, 에녹의 교회와 그 보존의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

 

 

그러니까 첫 천적 인간이었던 ‘사람’, 곧 아담 교회 때는 이런 퍼셉션이 온전했던, 그래서 천국 천사들과 거의 차이가 없어 그 시절엔 천사들도 지상에 내려와 같이 대화도 하고 어울릴 수 있었지만, 차츰 외적 감각, 그러니까 시각, 청각, 후각, 미각 및 촉각에 익숙해져 간 그 후손들, 곧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으로 내려오면서 점점 속 아닌 겉, 즉 내면보다 외면을 추구, 오직 내면으로만 들을 수 있는 퍼셉션이 잘 안 들리게 되었으며, 그 결과 삶 가운데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잘 모르게 되자 부득이하게 그 하나하나를 교리 형태로 정돈할 필요가 생겼고, 그래서 그때 이 일에 쓰임 받은 사람들, 곧 교회가 바로 에녹인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에서 이 에녹이라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곧 그들의 퍼셉션이 어땠는지를 알 수 있었는데 다음은 그 기록입니다.

 

에녹(Enoch)이라 하는 이들에게서 나타난 퍼셉션의 상태와 성격 또한 저는 알 수 있었는데요, 그것은 어떤 분명함도 없는, 다소 일반적이고 어두운 퍼셉션의 한 형태였습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마음이 자기 안에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교리적인 것들 쪽으로 그 시선을 바깥으로 돌리게 되는 그런 퍼셉션이었습니다. (AC.522)

 

즉 이미 그들 자신, 퍼셉션이 거의 정상 작동을 하지 않는, 그런 안타까운 상태였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 그들은 여러 전해 내려오는 선과 진리들을 수집, 잘 정돈하여 나름 교리화, ‘퍼셉션이 사라진 이후를 대비한 형식화된 분별의 틀’을 남겼다는 것입니다. 즉,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 ‘직접 알던 시대가 끝난 뒤에도’, 인간이 최소한의 질서를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그들은 ‘교리적 토대’를 구축하는 일에 쓰임을 받았던 것입니다. 비록 영적 시력은 거의 잃어가고 있으나 힘을 다하여 수고, 후손들이 여전히 주님 안에서, 그러니까 주님의 선과 진리라는 큰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게 하려고 말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다’와 ‘여호와와 동행하다’는 다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신앙의 교리에 따라 살고 가르치는 것을 뜻합니다. 반면 여호와와 동행하는 것은 사랑의 삶, 곧 쓰임새의 삶을 직접 사는 것을 뜻합니다. 이 구분은 결코 사소하지가 않습니다. 이는 교회의 중심이 퍼셉션과 사랑의 삶에서 교리와 신앙의 삶으로 이동했음을 보여 주는 결정적 표시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라는 말은, 이 교리가 인간의 판단이나 역사적 우연에 맡겨진 것이 아니라, ‘주님의 손 안에 보관되었다’는 뜻입니다. 에녹의 교회는 더 이상 역사 속에서 드러나지 않지만, 그 교리는 후대의 쓰임새를 위해 안전하게 간직됩니다. 이는 교회의 생명이 끊어진 것이 아니라, 형태를 바꾸어 이어졌다는 의미입니다.

 

평소 우리가 알던 에녹 이야기와 오늘 설교는 아주 다릅니다. 보통은, 에녹이 얼마나 평생을 주님과 동행하였으면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겠는가? 우리도 그런 에녹의 삶을 본받아야 하겠다는 식이지요. 이 역시 좋습니다. 겉뜻에 충실한 해석이지만, 그렇게 해서 정말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실 수 있었다면 얼마나 할렐루야입니까? 우리는 절대 겉뜻으로 신앙 생활하시는 분들을 무조건 폄훼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너무 엉뚱하게 해석, 잘못된 길로만 빠지지 않으신다면 말입니다.

 

한 가지, 그렇다면 이 퍼셉션은 에녹 이후로, 태고교회 이후로 이제 완전히 인류한테서 떠난 건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퍼셉션은 창문, 곧 천국을 향해 열린 창문으로 들어옵니다. 그때 이후 인류가 이 퍼셉션으로 살지 못하는 이유는 이 창문이 닫혀있기 때문인데, 그러나 지금도 이 창문을 여는 사람한테는 감사하게도, 그리고 놀랍게도 이 퍼셉션은 변함없이 작동한다고 합니다. 현 시대 가장 최근의 성자라 할 수 있는 정교회 뽀르피리우스를 비롯,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수록 수많은 성인들, 그러니까 이현필, 이세종을 비롯, 분도 요셉 라브르, 성 프란체스코 등이 그렇습니다. 이분들과 우리가 다른 점은 이분들은 하늘을 향해 자기 내면의 창문을 여신 분들이지만 우리는 세상에 몰두하느라 창문을 열어도 세상 창문만 열고 산다는 점입니다. 우리 역시 이제라도 세상 창문은 닫고 천국 창문을 열면 이 퍼셉션은 다시 재개된다고 합니다.

 

다만 이 퍼셉션은 생명과도 같아 서서히 움직입니다. 즉 서서히 증가하고 서서히 사라지고 하는 것이죠. 퍼셉션을 다시 깨어나게 하고 싶으면 일상 매 순간 양심의 소리, 옳고 그름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때마다 하나씩 인내심을 가지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면 내가 손해 볼 것 같아도 주님을 의지하고 황소 걸음처럼 뚜벅뚜벅 제 길을 걸어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다 주께 하듯 하라신 말씀 기억하고, 사람 가려 가며, 환경 탓하는 대신 범사에 감사하며, 그저 매 순간 주님 앞에 제 할 도리만 다하면 됩니다. 그러면 서서히 이 퍼셉션 근육이 생기며, 기운이 돌아옵니다. 영혼의 근육이 생겨 기운을 차리게 되지요. 그러면서 점점 주님 음성이 들리며 영안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 어두운 시대에 이런 식으로 다시 천국을 향한 자신의 창문을 열어 미약하나마 퍼셉션의 삶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기를 주 여호와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1-18(D1)

 

2634, 27. 창5.3, 2026-01-18(D1)-주일예배(창5,21-24, AC.516-522), ‘에녹, 퍼셉션을 교리로 보존한 사람들’.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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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1/11, 창5:4-20), '아담,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오늘은 창세기 5장 두 번째 시간, 4절로 20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4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6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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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2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And God blessed them, saying,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fill the waters in the seas, and the fowl shall be multiplied in the earth.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fth day. (1:22, 23)

 

AC.43

 

주님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지니게 된 모든 것은 크게 열매 맺고 번성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육신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다지 드러나지 않지만, 다른 삶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그러합니다. 말씀에서 ‘열매 맺다(be fruitful)라는 표현은 사랑에 속한 것들에 대해 사용되고, ‘번성하다(multiply)라는 표현은 신앙에 속한 것들에 대해 사용됩니다. 사랑에 속한 ‘열매(fruit) 안에는 ‘(seed)가 들어 있는데, 이 씨로 인해 그것은 크게 번성합니다. 또한 말씀에서 주님의 ‘축복(blessing)은 열매 맺음과 번성을 뜻하는데, 이 모든 것이 축복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Everything that has in itself life from the Lord fructifies and multiplies itself immensely; not so much while the man lives in the body, but to an amazing degree in the other life. To “be fruitful,” in the Word, is predicated of the things that are of love, and to “multiply,” of the things that are of faith; the “fruit” which is of love contains “seed,” by which it so greatly multiplies itself. The Lord’s “blessing” also in the Word signifies fruitfulness and multiplication, because they proceed from it.

 

 

해설

 

이 글은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지닌 고유한 성질, 곧 ‘확장성과 충만성’을 다룹니다. 생명은 정체된 상태로 머무르지 않으며, 반드시 자신을 퍼뜨리고, 늘리고, 풍성하게 만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이 세상에서는 제한적으로 나타나지만, 사후의 생명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크게 드러난다고 말합니다. 이는 영적 생명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글에서 중요한 구분은 ‘열매 맺음’과 ‘번성함’의 차이입니다. 말씀에서 ‘열매 맺다’는 사랑에 속한 것들에 대해, ‘번성하다’는 신앙에 속한 것들에 대해 사용된다고 분명히 구분합니다. 이는 사랑과 신앙의 관계를 다시 한번 구조적으로 보여 줍니다. 사랑은 목적이고, 신앙은 수단이며, 사랑은 내용을 낳고, 신앙은 그 내용을 퍼뜨립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사랑의 열매 안에 ‘’가 들어 있다는 설명입니다. 열매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며, 사랑은 자기 안에 신앙을 낳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참된 사랑은 언제나 신앙을 포함하고, 그 신앙을 통해 자신을 배가시킵니다. 이 구조는 창세기의 자연 질서와 정확히 맞물립니다. 씨 없는 열매는 존재할 수 없듯이, 신앙 없는 사랑도 지속될 수 없습니다.

 

이 글은 또한 ‘주님의 축복’의 의미를 매우 분명히 해줍니다. 축복은 단순한 호의나 외적 형통이 아니라, ‘열매 맺고 번성하게 하는 능력 그 자체’입니다. 주님의 축복이 임할 때, 생명은 스스로를 늘리고 깊게 합니다. 그래서 축복은 생명의 작동 방식이며, 생명이 주님에게서 왔다는 증거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신앙이나 사랑이 정체되어 있고 확장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직 생명의 차원에 이르지 못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은 반드시 열매를 낳고, 그 열매는 다시 씨를 품어 더 큰 확장을 이끌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다섯째 날 이후에 등장하는 ‘번성하라’는 명령이 단순한 양적 증가가 아니라, ‘사랑과 신앙의 내적 증식’을 뜻한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은 언제나 풍성해지며, 그 풍성함은 다른 생명들을 살리는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그래서 생명은 결코 자기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축복을 통해 끝없이 확장됩니다.

 

 

 

AC.42, 창1:21, ‘큰 바다짐승들’의 속뜻

하나님이 큰 바다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reated great whales, and every living 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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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죽음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죽음 이후의 실제 상태를 조용히 밝혀 주는 설교입니다.

 

25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요11:25, 26)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 (시116:15)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고후5:1)

 

오늘 우리는 한 사람의 삶이 끝났다는 사실 앞에 모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오늘을 ‘’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땅의 장막을 벗고, 다른 집으로 옮겨 가는 날’이라고 말합니다. 장례 예배는 죽음을 애써 미화하는 자리가 아니며, 동시에 죽음을 두려움으로 덮어 버리는 자리도 아닙니다. 장례 예배는 ‘주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보시는가’를 다시 배우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흔히 ‘사람이 죽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과 천국의 관점에서 보면, 정확한 표현은 ‘사람이 이 땅에서의 역할을 마쳤다’입니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육체가 아니라 영이며, 육체는 이 세상에서 잠시 사용하는 도구요 옷과 같습니다. 오늘 우리는 한 벌의 옷이 벗겨진 것을 보고 있지만, 그 사람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장래의 어떤 먼 사건을 가리키는 말씀이 아닙니다. 부활은 이미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며, 죽음은 그것을 완성시키는 문과 같습니다. 사람이 죽는 순간, 그는 무(無)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분명한 ‘자기 자신’으로 깨어납니다.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증언한 것 중 하나는 이것입니다. ‘사람은 죽은 직후에도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는 여전히 생각하고, 느끼고, 말하고, 기억하고,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지 더 이상 육체의 무게와 시간의 제약 속에 있지 않을 뿐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죽음’이라는 말을 거의 사용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의 이동’, 혹은 ‘외적 삶에서 내적 삶으로의 전환’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겪는 이 이별은, 그분의 관점에서는 ‘분리’가 아니라 ‘이동’입니다.

 

우리는 종종 장례 자리에서 ‘이제 고인의 모든 고통이 끝났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부분적으로만 옳습니다. 육체의 고통은 끝났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여전히 자기 삶의 방향과 성향, 사랑의 질을 그대로 지니고 살아갑니다. 천국은 ‘선한 사람을 갑자기 선하게 만드는 장소’가 아니라, ‘사람이 평생 사랑해 온 것을 드러내는 세계’입니다.

 

이 점에서 장례 예배는 남아 있는 우리에게 더 직접적인 말씀을 던집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는 무엇을 사랑하며 살아왔는가?’ 이것은 신앙 고백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실제 문제입니다. 사람은 죽은 후, 자신이 입으로 말한 신앙이 아니라, 마음 깊이 붙들고 살았던 사랑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이 두려움의 날이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진실한 위로의 날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어느 누구도 혼자 죽게 두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죽음의 순간에 천사들과 영적 세계의 인도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낯선 어둠 속으로 던져지는 것이 아니라, 질서와 배려 속에서 다음 삶으로 안내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경건한 자들의 죽음이 귀하다’는 말은, 그 죽음이 슬픔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그 사람의 삶 전체를 소중히 여기시며,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직접 돌보신다는 뜻입니다. 주님 앞에서는 그 어떤 인생도 하찮지 않으며, 그 어떤 생도 허무하게 끝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눈물 흘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눈물은 절망의 눈물이 아니라, 사랑의 눈물이었습니다. 그분은 이미 나사로가 살아날 것을 알고 계셨지만, 남아 있는 사람들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슬픔은 믿음 없음의 증거가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의 증거입니다. 다만 주님은 우리에게 이 슬픔이 ‘절망으로 굳어지지 않도록’ 진리를 주십니다. ‘너희는 소망 없는 자와 같이 슬퍼하지 말라’는 말씀은 ‘슬퍼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슬픔이 끝내 모든 것을 삼키게 두지 말라’는 뜻입니다.

 

고린도후서에서 말하는 ‘하늘에 있는 집’은 추상적인 비유가 아닙니다. 그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삶의 터전입니다. 그곳에서 사람은 더 이상 시간에 쫓기지 않고, 비교에 시달리지 않으며, 자기 자신을 꾸미지 않아도 됩니다. 그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자기와 맞는 공동체 안에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오늘 고인을 떠나보내지만, 주님은 고인을 ‘받아들이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두 사건은 동시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작별과, 저편에서의 환영이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흘리는 눈물 위에, 천국의 평안이 이미 겹쳐지고 있습니다.

 

장례 예배는 죽은 이를 위한 예배이기보다, 산 자를 깨우는 예배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 각자의 마음에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너의 생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너는 무엇을 영원으로 가져갈 것인가?’ 우리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의 질, 사랑의 퀄리티’뿐입니다.

 

오늘의 이별은 마지막이 아닙니다. 다만 서로 다른 세계에서의 잠정적인 분리일 뿐입니다. 주님 안에 있는 관계는 결코 끊어지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맺어진 것은 죽음으로 해체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형태를 바꿀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슬픔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 한 사람의 생이 주님 앞에서 헛되지 않았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삶도 여전히 주님의 손 안에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말씀을 마음에 남기고자 합니다. ‘죽음은 삶의 반대가 아니라, 삶의 연장이다.’ 단지 무대가 바뀌고, 빛이 더 분명해질 뿐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살아 계시며, 산 자와 죽은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주님께 우리의 눈물과 질문, 그리고 남은 날들을 맡깁니다. 아멘.

 

2026-01-17(D7)

 

 

 

AC.521 해설 중 ‘극히 미세하고 개별적인 인식’이라는 게 무엇인지?

위 521 해설 중 ‘퍼셉션은 일반적 개념이 아니라, 상태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극히 미세하고 개별적인 인식이기 때문에, 언어로 고정해 설명하는 순간 이미 그 본질을 놓치게 됩니다.’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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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큰 바다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reated great whales, and every living soul that creepeth, which the waters caused to creep forth after their kinds, and every winged fowl after it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1:21)

 

AC.42

 

앞서 말했듯이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every living soul that creepeth, which the waters caused to creep forth, Fishes)은 주님에게서 오는 신앙으로 이제 생명을 얻은 기억-지식을 뜻합니다. 그리고 ‘큰 바다짐승들(great whales, Whales)은 그러한 지식들의 일반 원리를 뜻하는데, 개별적인 것들은 이 일반 원리 아래에 있으며, 또 거기에서 나옵니다. 우주 안에 있는 그 어떤 것도 어떤 일반 원리 아래 있지 않은 것은 없는데, 그래야 그것이 존재하고 유지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래(Whales)나 ‘큰 물고기(great fishes)는 선지자들에 의해 종종 언급되며, 그때마다 기억-지식의 일반 원리를 뜻합니다. 애굽 왕 바로는 인간의 지혜나 총체적인 지성, 곧 일반적인 지식을 대표하는데, 그래서 ‘큰 악어(great whale)라고 합니다. 에스겔을 보면, Fishes,” as before said, signify memory-knowledges, now animated by faith from the Lord, and thus alive. “Whales” signify their general principles, in subordination to which, and from which, are the particulars; for there is nothing in the universe that is not under some general principle, as a means that it may exist and subsist. “Whales,” or “great fishes,” are sometimes mentioned by the prophets, and they there signify the generals of memory-knowledges. Pharaoh the king of Egypt (by whom is represented human wisdom or intelligence, that is, knowledge [scientia] in general), is called a “great whale.” As in Ezekiel:

 

너는 말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애굽의 바로 왕이여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자기의 강들 가운데에 누운 큰 악어라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하는도다 (29:3) Behold, I am against thee, Pharaoh king of Egypt, the great whale that lieth in the midst of his rivers, that hath said, my river is mine own, and I have made myself (Ezek. 29:3).

 

[2] 또 다른 곳에서는 And in another place:

 

인자야 너는 애굽의 바로 왕에 대하여 슬픈 노래를 불러 그에게 이르라 너를 여러 나라에서 사자로 생각하였더니 실상은 바다 가운데의 큰 악어라 강에서 튀어 일어나 발로 물을 휘저어 그 강을 더럽혔도다 (32:2) Take up a lamentation for Pharaoh king of Egypt, and say unto him, thou art as a whale in the seas, and hast gone forth in thy rivers, and hast troubled the waters with thy feet (Ezek. 32:2),

 

이 말씀은 기억-지식을 수단으로 삼아, 그러니까 자기 자신으로부터 신앙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이사야에서는 by which words are signified those who desire to enter into the mysteries of faith by means of memory-knowledges, and thus from themselves. In Isaiah:

 

그날에 여호와께서 그의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 (27:1) In that day Jehovah, with his hard and great and strong sword, shall visit upon leviathan the longish [oblongum] serpent, even leviathan the crooked serpent, and he shall slay the whales that are in the sea (Isa. 27:1).

 

여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slaying the whales that are in the sea)는 그런 사람들이 진리의 일반 원리조차 알지 못하게 된 상태를 뜻합니다. 예레미야에서도 By “slaying the whales that are in the sea” is signified that such persons are ignorant of even the general principles of truth. So in Jeremiah: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나를 먹으며 나를 멸하며 나를 빈 그릇이 되게 하며 큰 뱀 같이 나를 삼키며 나의 좋은 음식으로 그 배를 채우고 나를 쫓아내었으니 (51:34) Nebuchadnezzar the king of Babylon hath devoured me, he hath troubled me, he hath made me an empty vessel, he hath swallowed me as a whale, he hath filled his belly with my delicacies, he hath cast me out (Jer. 51:34),

 

여기 ‘좋은 음식(delicacies)이라 한 것은 신앙의 지식(knowledges)을 뜻하며, 요나를 삼킨 고래처럼 그것들을 삼켰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큰 뱀(whale)은 신앙의 지식에 관한 일반 원리를 단지 기억-지식으로만 지니고, 그런 방식으로 행하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denoting that he had swallowed the knowledges of faith, here called “delicacies,” as the whale did Jonah; a “whale” denoting those who possess the general principles of the knowledges of faith as mere memory-knowledges, and act in this manner.

 

 

해설

 

이 글은 다섯째 날에 창조된 생명들 가운데서, 특히 ‘고래’라는 상징이 왜 등장하는지를 매우 정밀하게 설명합니다. 앞선 글에서 물고기들이 기억-지식을 뜻한다면, 이 글은 그 기억-지식들 위에 놓인 ‘구조’를 다룹니다. 곧 개별적인 지식들 위에 자리 잡은 일반 원리의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어떤 일반 원리 아래 있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는 단순한 논리적 주장이라기보다, 영적 질서에 대한 진술입니다. 개별적인 지식이나 사실은 스스로 의미를 가지지 못하고, 반드시 그것들을 묶고 방향을 정하는 일반 원리 안에 있을 때 비로소 기능합니다. 이 일반 원리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고래’, 즉 본문의 ‘큰 바다짐승’입니다.

 

그래서 고래는 단순히 큰 물고기가 아니라, 기억-지식 전체를 지배하는 틀, 곧 일반 원리를 뜻합니다. 문제는 이 일반 원리가 어디에서 오느냐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일반 원리는 지식을 질서 있게 살리고, 생명으로 인도합니다. 그러나 사람에게서 나온 일반 원리는 지식을 자기 지혜의 재료로 삼아, 오히려 신앙의 신비를 삼켜 버립니다.

 

에스겔에서 애굽 왕 바로가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고 말하는 큰 고래(본문에서는 ‘큰 악어’)로 묘사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애굽은 기억-지식의 땅이며, 바로는 그 지식을 지배하는 인간 지성을 뜻합니다. 이 지성이 자신을 근원으로 삼을 때, 그는 고래처럼 모든 것을 삼키며, 물을 흐리게 만듭니다. 이는 지식이 많아서가 아니라, 그 지식의 일반 원리가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생기는 혼란입니다.

 

이사야에서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라는 표현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폭력적으로 지식을 제거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 지혜를 근원으로 삼아 신앙의 신비를 파고들던 사람들이 결국 진리의 일반 원리조차 상실하게 된 상태를 뜻합니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한 일반 원리는 결국 자기 자신을 무너뜨립니다.

 

예레미야의 고래 비유는 특히 인상적입니다. 느부갓네살이 ‘좋은 음식’, 곧 신앙의 지식(knowledges)을 삼켰다고 하는데, 이는 요나를 삼킨 고래의 이야기와 자연스럽게 겹칩니다. 요나가 고래 뱃속에 들어간 것은 파멸이 아니라, 방향 전환을 위한 정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여기 고래는 신앙의 지식을 삼켜 자기 배를 채우고 버리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이는 지식을 삶으로 돌리지 않고, 자기 확증의 재료로만 소비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 글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경고를 줍니다. 기억-지식이 많아지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 지식을 묶고 해석하는 ‘일반 원리’가 어디에 있느냐입니다. 그 일반 원리가 주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일 때, 지식은 생명을 낳지 못하고, 오히려 신앙의 신비를 삼켜 버립니다.

 

그래서 AC.42는 지식의 양보다 지식의 구조를 묻는 글입니다. 물고기가 살아 있으려면 물이 필요하듯, 지식이 살아 있으려면 주님에게서 오는 일반 원리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고래는 생명을 지키는 존재가 아니라, 모든 것을 삼키는 존재가 됩니다.

 

 

 

AC.43, 창1:22-23,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22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2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And God blessed them, say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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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 창1:20, ‘사람 본성에 속한 것’ vs '주님에게서 오는 것'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창1:20) AC.41 사람의 본성(own, proprium)에 속한 것은 그 자체로는 생명이 없으며, 그것을 눈으로 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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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1 해설 중 퍼셉션은 일반적 개념이 아니라, 상태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극히 미세하고 개별적인 인식이기 때문에, 언어로 고정해 설명하는 순간 이미 그 본질을 놓치게 됩니다.’라는 문장에서 극히 미세하고 개별적인 인식’, 이 부분이 잘 잡히지 않습니다. 혹시 좀 더 선명한 설명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퍼셉션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개념적 이해나 논리적 판단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인식입니다. 그것은 정보를 모아 분석한 결과도 아니고, 규칙을 적용해 도출한 결론도 아닙니다. 퍼셉션은 선과 진리를 직접 감지하고 즉각적으로 알아차리는 인식으로, 생각이 작동하기 이전에 이미 방향이 주어지는 상태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퍼셉션은 배우는 대상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며, 설명을 통해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상태로 작동합니다.

 

이때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미세하다’는 표현은 퍼셉션이 불분명하거나 흐릿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퍼셉션은 너무 정밀해서 일반적인 언어로는 쉽게 포착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퍼셉션은 어떤 상황을 볼 때, 그 상황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를 분리하지 않고 한꺼번에 인식합니다. 말하는 사람의 내적 상태, 듣는 사람의 준비 정도, 관계의 맥락, 시기의 적절성, 그리고 그 선택이 불러올 결과까지가 동시에 감지됩니다. 이 모든 요소가 하나의 인식으로 주어지기 때문에, 퍼셉션은 매우 정교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퍼셉션은 항상 개별적으로 작동합니다. 같은 말, 같은 행동이라 하더라도 퍼셉션은 그것을 상황마다 다르게 인식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 선이 되지만, 다른 경우에는 침묵하는 것이 선이 됩니다. 이 차이는 원칙을 어긴 결과가 아니라, 상태, 곧 상황이, 사정이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분별의 차이입니다. 퍼셉션은 언제나 ‘지금 이 순간의 상태’를 기준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모든 경우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판단을 전제로 하지 않습니다.

 

이 점에서 퍼셉션은 교리와 뚜렷하게 구별됩니다. 교리는 전달되기 위해 반드시 일반화를 필요로 합니다. ‘항상’, ‘대체로’, ‘원칙적으로’와 같은 표현이 없으면 교리는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많은 경우를 하나의 틀로 묶어야 가르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퍼셉션은 이러한 일반화 자체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퍼셉션은 언제나 이번 경우를 보고, 지금 상태를 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퍼셉션을 언어로 고정해 설명하는 순간 이미 그 본질을 놓치게 된다고 말합니다. 언어는 필연적으로 경계를 긋고, 흐름을 멈추고, 판단을 고정합니다. 그러나 퍼셉션은 흐르며, 상태에 따라 달라지며, 살아 움직입니다. 살아 있는 분별을 문장이나 규칙으로 붙잡아 두려는 순간, 우리는 그 생명 대신 틀만 붙잡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든 사고의 비유는 이 점을 매우 잘 보여 줍니다. 바르게 생각할 줄 아는 사람에게 사고의 규칙을 가르치면, 오히려 사고의 자유로움이 약해질 수 있습니다. 이는 사고능력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외적인 규칙에 매이면서 내적 판단이 위축되기 때문입니다. 퍼셉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내적인 빛으로 알고 있는 것을 규칙으로 다시 배우게 하면, 그 인식은 점차 경직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천적인 사람의 퍼셉션은 묘사하기 어렵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흐릿하거나 불분명해서가 아니라, 너무 구체적이고 상황 의존적이며 살아 있어서 일반 개념으로 묶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퍼셉션은 숙련된 장인이 재료를 다루며 느끼는 감각과 비슷합니다. 그 감각은 말로 완전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실제 작업에서는 매우 정확하게 작동합니다. 천국의 천사들이 바로 이런 퍼셉션으로 생활하며, 그래서 그들은 일상 대인관계나 지상의 누구를 도울 때 실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퍼셉션으로 섬기기 때문에 온전하며, 완전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동시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분명히 말합니다. 이러한 퍼셉션 능력은 장차 사라질 것이었고, 실제로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이후의 인류는 더 이상 내적인 빛으로 즉각 알지 못하고, 교리를 통해 배우며 점진적으로 선과 진리에 이르게 됩니다. 바로 이 전환을 대비하여, 에녹이라는 교회에게 퍼셉션 내용을 교리로 정리하는 일이 허락되었던 것입니다.

 

에녹의 교회는 퍼셉션 자체를 살아내는 교회가 아니라, 퍼셉션을 기억하고 보존하는 역할을 맡은 교회였습니다. 그 교리는 퍼셉션 그 자체는 아니지만, 퍼셉션이 다시 회복될 방향을 가리키는 표지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라는 표현은, 이 교리가 인간의 판단이나 역사적 우연에 맡겨진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 안에 안전하게 보존되었음을 뜻합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설명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 현실을 깊이 비춥니다. 우리는 대부분 교리를 통해 신앙을 배웁니다. 이것은 잘못이 아니라, 현재 인류의 상태에 맞는 방식입니다. 다만 교리가 곧 생명이라고 착각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교리는 빛을 가리키는 창이지, 빛 그 자체는 아닙니다.

 

정리하면, 퍼셉션이 ‘미세하고 개별적’이라는 말은 선과 진리를 규칙이나 원칙이 아니라 각 상태와 순간 속에서 직접 분별하는 살아 있는 인식을 뜻합니다. 이 인식은 너무 살아 있어서 언어로 고정될 수 없고, 교리로 완전히 담길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퍼셉션은 사라졌고, 대신 교리가 보존되었습니다. 이 흐름을 이해할 때, 에녹의 교회와 그 보존의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2026-01-16(D6)

 

 

 

스베덴보리 버전 장례 설교

아래는 ‘죽음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죽음 이후의 실제 상태’를 조용히 밝혀 주는 설교입니다. 25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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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는 ‘Apocalypse Explained’를 왜 완성하지 않았나요?

요한계시록 관련, 스베덴보리의 저작은 두 가지가 있지요.이중 ‘Apocalypse Explained’라는 저작이 있는데,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왜 완성을 하지 않았나요? 19장 10절인가까지만 나오네요... 스베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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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관련, 스베덴보리의 저작은 두 가지가 있지요.이중 Apocalypse Explained라는 저작이 있는데,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왜 완성을 하지 않았나요? 1910절인가까지만 나오네요...

 

 

스베덴보리가 요한계시록을 다룬 저작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뉩니다. 하나는 ‘Apocalypse Explained’이고, 다른 하나는 ‘Apocalypse Revealed’입니다. 이 둘은 단순히 ‘초기작’과 ‘후기작’의 차이가 아니라, 요한계시록을 대하는 태도와 방법론 자체가 달라졌음을 보여 주는 징표입니다. 특히 ‘Apocalypse Explained’가 요한계시록 1910절에서 갑자기 멈춘 사실은 오랫동안 독자들에게 의문을 남겨 왔습니다. 그러나 이 중단은 우연이나 실패가 아니라, 스베덴보리 자신의 신학적 분별에서 나온 매우 의미 있는 선택으로 보아야 합니다.

 

Apocalypse Explained’는 본래 스베덴보리가 성경 전체를 주석하던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작업입니다. 그는 이미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통해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절 단위로 해설하는 방식을 충분히 경험했습니다. 그 경험은 ‘말씀은 절마다 내적 의미를 지니며, 그 의미는 상응을 통해 체계적으로 열릴 수 있다’는 확신을 낳았습니다. 요한계시록 역시 같은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당연해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연속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고, 실제로 방대한 분량을 써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창세기나 출애굽기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책입니다. 이 책은 역사적 사건의 서술도 아니고, 교회의 외적 제도를 설명하는 책도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의 종말과 새 교회의 도래’를 상징적, 예언적으로 다루는 책입니다. 그만큼 상징의 밀도가 높고, 같은 개념이 반복적으로 변주되며, 시간적 순서조차 외적으로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Apocalypse Explained’가 점점 방대해지고 반복이 많아진 이유는, 바로 이 책의 성격 때문이었습니다. 설명을 더하면 더할수록, 오히려 중심 메시지가 흐려질 위험이 생겼던 것입니다.

 

중단 지점이 요한계시록 1910절이라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이 절은 ‘예수의 증언은 예언의 영’이라는 선언으로, 요한계시록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원리를 요약합니다. 또한 구조적으로 보면, 이 지점은 바벨론의 심판과 옛 교회의 붕괴가 사실상 끝나고, ‘어린양의 혼인’과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넘어가기 직전입니다. 다시 말해, ‘무너질 것’에 대한 설명은 거의 다 끝났고, 이제 ‘세워질 것’이 전면에 등장하는 문턱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지점에서, 지금까지 사용해 온 ‘끝없는 주석 방식’이 더 이상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여기서 중요한 전환이 일어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요한계시록이 ‘설명되어야 할 책’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 열려 드러내어져야 할 책’이라는 확신에 이르게 됩니다. 이는 단순한 표현상의 변화가 아니라, 신학적 태도의 변화입니다. ‘설명(explain)은 인간 이성의 단계적 분석을 전제로 합니다. 반면 ‘계시(reveal)는 주님이 이미 보여 주신 구조를 받아 적는 태도에 가깝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더 이상 요한계시록을 인간의 설명으로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새 교회를 위해 열어 두신 핵심 구조를 간결하고 분명하게 제시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이 판단의 결과가 바로 ‘Apocalypse Revealed’입니다. 이 저작은 분량 면에서도, 문체 면에서도 ‘Apocalypse Explained’와 현저히 다릅니다. 반복은 줄어들고, 구조는 정제되며, 교회론과 종말론의 핵심만이 남습니다. 특히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에 대한 설명이 상대적으로 짧은 것은, 그 내용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미 충분히 드러났기 때문’이라는 인식 때문입니다. 설명을 늘리는 대신, 방향을 분명히 제시하는 것이 목적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Apocalypse Explained’의 미완성은 실패나 중단이 아니라, ‘방식의 포기’이자 ‘사명의 정련’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끝까지 설명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기로 선택했습니다. 이는 그가 자신의 저작을 ‘학문적 성취’가 아니라 ‘주님께서 새 교회를 위해 주신 도구’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필요 없는 것을 남기지 않는 것,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는 방식은 과감히 멈추는 것, 이것이 그의 태도였습니다.

 

이 점은 오늘날 말씀을 다루는 목회자와 교사에게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언제까지 설명해야 하는가, 언제 멈추고 주님의 일하심을 신뢰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은, 스베덴보리 역시 피할 수 없었던 문제였습니다. ‘Apocalypse Explained’는 ‘끝까지 설명하려는 열심’의 흔적이고, ‘Apocalypse Revealed’는 ‘이제 주님께서 열어 두신 것을 그대로 제시하려는 신뢰’의 산물입니다. 이 둘이 함께 남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스베덴보리 신학의 성숙 과정을 보여 줍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Apocalypse Explained’가 1910절에서 멈춘 이유는 ‘시간이 없어서’도,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닙니다. 그것은 스베덴보리가 요한계시록이라는 책의 성격을 더 깊이 분별한 결과이며, 새 교회를 향한 주님의 의도를 더 정확히 전하기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이 미완성은 결핍이 아니라, 오히려 절제의 증거이며, 그의 신학이 한 단계 더 깊어졌음을 보여 주는 조용한 표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26-01-16(D6)

 

 

 

AC.521 해설 중 ‘극히 미세하고 개별적인 인식’이라는 게 무엇인지?

위 521 해설 중 ‘퍼셉션은 일반적 개념이 아니라, 상태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극히 미세하고 개별적인 인식이기 때문에, 언어로 고정해 설명하는 순간 이미 그 본질을 놓치게 됩니다.’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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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는 어떻게 세상을 떠날 때까지 27년간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었나?

저는 지난 2018년 11월부터 스베덴보리 관련 블로그를 시작했습니다만... 지금까지 구독자도, 그리고 글 조회 수나 좋아요 수도 여전히 한 자리 내지는 없기도 합니다. 저는 지난 만 7년을 정말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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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5:23, 24)

 

AC.522

 

에녹(Enoch)이라 하는 이들에게서 나타난 퍼셉션의 상태와 성격 또한 저는 알 수 있었는데요, 그것은 어떤 분명함도 없는, 다소 일반적이고 어두운 퍼셉션의 한 형태였습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마음이 자기 안에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교리적인 것들 쪽으로 그 시선을 바깥으로 돌리게 되는 그런 퍼셉션이었습니다. The state and quality of the perception with those who were called “Enoch” have also been made known to me. It was a kind of general obscure perception without any distinctness; for in such a case the mind determines its view outside of itself into the doctrinal things.

 

 

해설

 

이 글은 에녹의 교회가 지녔던 퍼셉션의 ‘질감’을 아주 정확하게 묘사합니다. 앞선 교회들에서 퍼셉션은 개별적이고 나름 분명했지만, 에녹의 교회에 이르면 그 퍼셉션은 더 이상 또렷한 분별을 제공하지 못합니다. 살아 있는 인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흐릿해져 전체적으로만 느껴지는 상태가 됩니다. 시력을 점점 잃어가다가 결국 사물이 그저 어렴풋이 보이는 지경까지 이르는 것처럼 말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어떤 분명함도 없는, 다소 일반적이고 어두운 퍼셉션의 한 형태(a kind of general obscure perception without any distinctness)라고 표현한 것은, 선과 진리를 전혀 모른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그것을 ‘구체적인 상황 안에서 즉각적으로 분별해 내는 힘’이 약해졌다는 뜻입니다. 무엇이 옳은지 대강은 알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은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나타나는 중요한 변화가 바로 ‘시선의 이동’입니다. 마음이 자기 안에서 판단을 내리지 못할 때, 그 판단의 근거를 ‘자기 밖’에서 찾게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바깥’이 바로 교리적인 것들입니다. 즉, 살아 있는 퍼셉션 대신, 이미 정리된 교리와 가르침을 기준으로 삼아 판단하려는 경향이 강해집니다. 가끔 법관들이, 판사들이 일반인도 이해할 수 없는 엉뚱한 판정을 내리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자기 안에 양심의 빛, 하늘의 빛이 없어 바깥, 곧 대세와 상황에서 답을 찾은 것이지요. 다만 에녹과 오늘날의 차이는 그래도 에녹이라는 사람들은 방향, 곧 하늘을 향한 방향이었지만, 오늘날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앞선 AC.519–521의 흐름과 정확히 맞닿아 있어요. 에녹의 교회는 퍼셉션이 약화되었기 때문에 교리가 필요해졌고, 그 교리는 이후 세대를 위해 보존되었습니다. AC.522는 그 이유를 ‘인식의 실제 상태’ 차원에서 설명해 주는 글입니다. 퍼셉션이 분명하지 않으니, 마음은 자연스럽게 교리로 향하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 상태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이것을 타락이나 실패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것은 ‘섭리 안에서 허락된 전환’입니다. 퍼셉션으로 살 수 없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교리라는 외적 기준이 주어져야 했던 것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설명은 오늘날 많은 신앙인의 상태를 정확히 짚어 줍니다. 우리는 종종 ‘마음으로는 알겠는데, 분명하지는 않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 구절, 교리 문장, 신앙의 원칙을 찾아 확인하려 합니다. 이것은 위선이 아니라, 퍼셉션이 일반화된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반응입니다.

 

다만 이 글은 동시에 하나의 경고도 담고 있어요. 마음의 판단이 완전히 바깥으로만 향하게 될 때, 신앙은 점점 ‘규범 중심’으로 굳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교리는 필요하지만, 교리만으로는 생명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에녹의 교회는 교리를 만들어 보존했지만, 그 교리 자체가 퍼셉션의 생명을 회복시켜 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AC.522는 에녹의 교회를 이렇게 규정합니다. 퍼셉션은 남아 있으나 흐릿해졌고, 그 결과 마음은 자기 안의 빛보다 바깥의 교리를 더 의지하게 된 상태라고 말입니다. 이 상태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직전의 중요한 징후이며, 교회가 더 이상 퍼셉션만으로 유지될 수 없게 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결국 이 글은 교리의 필요성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 줍니다. 교리는 퍼셉션이 약해진 시대에 꼭 필요한 기준이지만, 그것은 언제나 ‘살아 있는 인식이 회복되어야 할 방향을 가리키는 표지’로만 남아야 합니다. 에녹의 교회는 바로 그 전환의 자리에 서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AC.521, 창5:23-24,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5:23, 24) AC.521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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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5:23, 24)

 

AC.521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he was no more, for God took him)라는 말이 그 교리가 후대의 쓰임새를 위해 보존되었음을 의미한다는 점에 관하여 말하자면,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에녹의 경우는 이렇습니다. 그는 태고교회에서 퍼셉션의 대상이었던 것들을 교리로 정리하였는데, 그 교회의 시대에는 그러한 일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퍼셉션으로 아는 것과 교리로 배우는 것은 매우 다른 일이기 때문입니다. 퍼셉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정식화된 교리로 배울 필요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바르게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어떤 규칙을 가지고 생각하는, 그러니까 그 규칙이 거의 예술 수준이라 하더라도 말이지요, 굳이 그런 걸로 생각하는 법을 따로 배울 필요가 없는데, 그렇게 되면 오히려 바르게 생각하는 능력이 손상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학문적 잔재에 매달리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경우와 같습니다. 퍼셉션으로 배우는 이들에게는 주님께서 선과 진리를 내적인 길로 알게 하시지만, 교리로 배우는 이들에게는 외적인 길, 곧 육체적 감각의 길을 통해 지식이 주어집니다. 이 둘의 차이는 빛과 어둠의 차이와 같습니다. 또한 천적인 사람의 퍼셉션은 묘사 자체를 허용하지 않을 만큼 그러한데, 이는 상태와 상황에 따라 모든 미세하고 개별적인 것들 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태고교회의 퍼셉션 능력이 장차 사라질 것이고, 그 이후에는 인류가 선과 진리를 교리를 통해, 곧 어둠을 통해 빛으로 나아가며 배우게 될 것이 예견되었으므로, 여기서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God took him)라고 말하는데, 이는 곧 그 교리가 후대의 쓰임새를 위해 보존되었음을 뜻합니다. As to the words “he was no more, for God took him” signifying the preservation of that doctrine for the use of posterity, the case with Enoch, as already said, is that he reduced to doctrine what in the most ancient church had been a matter of perception, and which in the time of that church was not allowable; for to know by perception is a very different thing from learning by doctrine. They who are in perception have no need to learn by formulated doctrine that which they know already. For example: he who knows how to think well, has no occasion to be taught to think by any rules of art, for in this way his faculty of thinking well would be impaired, as is the case with those who stick fast in scholastic dust. To those who learn by perception, the Lord grants to know what is good and true by an inward way; but to those who learn from doctrine, knowledge is given by an external way, or that of the bodily senses; and the difference is like that between light and darkness. Consider also that the perceptions of the celestial man are such as to admit of no description, for they enter into the most minute and particular things, with all variety according to states and circumstances. But as it was foreseen that the perceptive facul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ould perish, and that afterwards mankind would learn by doctrines what is true and good, or by darkness would come to light, it is here said that “God took him,” that is, preserved the doctrine for the use of posterity.

 

 

해설

 

이 글은 에녹의 교회를 가리켜 왜 ‘사라졌지만 보존되었다’고 말하는지를 가장 깊이 있게 설명해 줍니다. 핵심은 퍼셉션과 교리의 ‘질적 차이’에 있습니다. 태고교회의 초기 상태에서는 선과 진리를 퍼셉션으로 알았기 때문에, 그것을 교리로 정식화하는 일이 오히려 부적절했습니다. 이미 살아 있는 인식으로 알고 있는 것을 규칙과 문장으로 묶어 두는 것은, 생명을 틀에 가두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매우 실제적인 예로 설명합니다. 바르게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어떤 규칙을 가지고 생각하는, 그러니까 그 규칙이 거의 예술 수준이라 하더라도 말이지요, 굳이 그런 걸로 생각하는 법을 따로 배울 필요가 없다는 비유가 그렇습니다. 이미 살아 있는 사고능력을 지닌 사람에게 규칙을 강요하면, 그 능력은 오히려 경직되고 약해집니다. 이는 퍼셉션의 영역에서 교리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정확히 보여 주는 비유예요.

 

퍼셉션으로 아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앎은 ‘내적인 길’을 통해 옵니다. 주님께서 직접 선과 진리를 비추어 주시는 방식이지요. 반면 교리를 통해 배우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앎은 ‘외적인 길’, 곧 감각과 언어와 개념을 통해 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둘의 차이를 빛과 어둠의 차이에 비유합니다. 빛은 사물을 곧바로 보게 하지만, 어둠에서는 더듬어 가며 배워야 하기 때문이에요.

 

특히 주목할 점은, 천적인 사람의 퍼셉션에 대해 ‘묘사할 수 없다’고 말하는 대목입니다. 퍼셉션은 일반적 개념이 아니라, 상태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극히 미세하고 개별적인 인식’이기 때문에, 언어로 고정해 설명하는 순간 이미 그 본질을 놓치게 됩니다. 그래서 태고교회의 시대에는 교리가 필요하지 않았고, 오히려 허용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AC.521 해설 중 ‘극히 미세하고 개별적인 인식’이라는 게 무엇인지?

위 521 해설 중 ‘퍼셉션은 일반적 개념이 아니라, 상태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극히 미세하고 개별적인 인식이기 때문에, 언어로 고정해 설명하는 순간 이미 그 본질을 놓치게 됩니다.’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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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글의 핵심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미리 보셨다’고 말합니다. 퍼셉션의 능력이 장차 사라질 것이고, 그 이후의 인류는 더 이상 내적인 빛으로 즉각 알지 못하고, 교리를 통해 배우며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게 될 것을 예견하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예견 때문에, 에녹의 교회에서 정리된 교리는 버려지지 않고 보존됩니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라는 말은, 이 교리가 인간의 판단이나 역사적 우연에 맡겨진 것이 아니라, ‘주님의 손 안에 보관되었다’는 뜻입니다. 에녹의 교회는 더 이상 역사 속에서 드러나지 않지만, 그 교리는 후대의 쓰임새를 위해 안전하게 간직됩니다. 이는 교회의 생명이 끊어진 것이 아니라, 형태를 바꾸어 이어졌다는 의미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글은 오늘날 교회가 교리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해 매우 중요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교리는 생명을 대신할 수는 없지만, 생명이 사라진 시대에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퍼셉션이 약화된 시대일수록, 교리는 어둠 속에서 빛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등불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결국 AC.521은 에녹의 교회를 이렇게 이해하도록 이끕니다. 퍼셉션이 살아 있던 시대에는 필요 없었지만, 퍼셉션이 사라질 시대를 대비해 주님께서 미리 마련하신 교리의 그릇이라고 말입니다. 에녹은 사라졌으되, 그가 남긴 교리는 후대를 위해 살아남았습니다. 이 점에서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라는 말은, 상실의 언어가 아니라 ‘섭리와 준비의 언어’입니다.

 

 

 

AC.522, 창5:23-24, ‘에녹’(Enoch)이라는 사람들의 퍼셉션

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5:23, 24) AC.522 ‘에녹’(Enoch)이라 하는 이들에게서 나타난 퍼셉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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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20, 창5:23-24,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AC.520-522)

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And all the days of Enoch were three hundred sixty and five years. And Enoch walked with God,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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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And all the days of Enoch were three hundred sixty and five years. And Enoch walked with God, and he was no more, for God took him. (5:23, 24)

 

AC.520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all the days of Enoch being three hundred sixty and five years)라는 표현은 그 기간이 매우 짧았음(few)을 의미합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walking with God)라는 표현은 앞에서와 같이 신앙에 관한 교리(doctrine concerning faith)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he was no more, for God took him)라는 표현은 그 교리가 후대의 쓰임새를 위하여 보존되었음을 의미합니다. By “all the days of Enoch being three hundred sixty and five years” is signified that they were few. By his “walking with God” is signified, as above, doctrine concerning faith. By “he was no more, for God took him” is signified the preservation of that doctrine for the use of posterity.

 

 

해설

 

이 글은 에녹의 교회가 지닌 독특한 성격을 아주 압축적으로 정리해 줍니다. 먼저 ‘삼백육십오(365)라는 숫자는 장수를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에녹의 교회가 차지한 ‘기간과 영향력이 길지 않았음’을 가리킵니다. 즉, 에녹의 교회는 태고교회의 긴 흐름 속에서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진 짧은 기간이었습니다.

 

※ 창세기 1, 2, 3장을 비롯, 노아 이전까지 나오는 태고교회는 지질학적 지구 나이인 45, 6억 년 관점에서 보면, 아주아주 장구한 세월을 거쳐 나타났다가 역시 매우 오랜 세월을 거쳐 사라진 교회로 짐작되며, 이 점을 감안하면서 에녹의 기간을 생각하면 더욱 선명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기간이 짧았다고 해서 의미마저 작았던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양이 아니라 ‘기능’에 주목합니다. 에녹의 교회는 오래 지속되기 위해 존재한 것이 아니라, 사라져 가는 퍼셉션의 내용을 ‘교리의 형태로 보존하기 위해 잠시 존재’했던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기간이 짧았다’는 말은 실패나 미완을 뜻하지 않고, 오히려 목적에 정확히 맞는 짧음이라고 할 수 있어요.

 

다시 한번 강조되듯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표현은 신앙에 관한 교리를 뜻합니다. 에녹의 교회는 사랑의 삶을 직접 사는 교회라기보다, 그 사랑과 퍼셉션에서 나왔던 진리들을 ‘정리하고 가르치는 교회’였습니다. 이 교리는 이후의 교회들이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분별하는 기준으로 쓰이게 됩니다.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라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사라짐처럼 들리지만, 내적 의미에서는 전혀 다릅니다. 이것은 소멸이 아니라 ‘전환’입니다. 에녹의 교회는 더 이상 역사 속에서 독립된 교회로 존재하지 않게 되었지만, 그 교리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것을 ‘데려가셨다’는 말로 표현되듯이, 주님의 섭리 안에서 안전하게 보존되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데려가셨다’는 표현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인간의 선택이나 우연이 아니라, ‘주님의 의도적인 보존’을 뜻합니다. 퍼셉션이 점점 약화되고, 교회가 외적인 단계로 넘어가는 과정 속에서, 주님께서는 장차 올 교회들을 위해 필요한 교리를 따로 떼어 보관하신 것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글은 교회의 역할이 항상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어떤 교회는 오래 지속되며 많은 열매를 맺는 역할을 맡고, 어떤 교회는 짧게 나타났다가 사라지지만, 다음 시대를 위한 ‘결정적인 씨앗’을 남기는 역할을 맡습니다. 에녹의 교회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개인의 신앙 여정에서도 이 원리는 그대로 적용될 수 있어요. 어떤 시기에 우리는 많은 활동과 성취를 경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기가 진리와 신앙의 핵심을 정리하고 마음에 새기는 시간이라면, 혹시 그 시간이 짧았어도 그 짧음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음 단계를 준비하는 데 꼭 필요한 시간이 됩니다.

 

결국 AC.520은 에녹의 교회를 이렇게 규정합니다. 짧게 존재했지만, 신앙의 교리를 보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교회. 역사 속에서는 사라졌지만, 후대의 쓰임새를 위해 주님께서 직접 간직하신 교회. 이 점을 붙들 때,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라는 이 말은 상실의 언어가 아니라, ‘보존과 은혜의 언어’로 들리게 됩니다.

 

 

 

AC.521, 창5:23-24,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5:23, 24) AC.521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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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9, 창5:22, ‘하나님과 동행하며’(walk with God)의 속뜻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22) AC.519 그 당시에 태고교회와 그 뒤를 이은 교회들에서 퍼셉션의 대상이 되었던 것들로부터 교리를 구성한 사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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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난 201811월부터 스베덴보리 관련 블로그를 시작했습니다만... 지금까지 구독자도, 그리고 글 조회 수나 좋아요 수도 여전히 한 자리 내지는 없기도 합니다. 저는 지난 만 7년을 정말 오직 한 길인 이 길만 걸었습니다... 아무 저의 핏줄을 비롯, 근처 지인들조차 마치 물과 기름처럼 따로 노는 이 하루하루에 가끔은 숨이 안 쉬어질 정도로 갑갑하고 힘듭니다만, 그러나 그렇게 주저앉아있다가도 은은히 들려오는 주님의 미세한 음성에 저도 모르게 다시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아 스베덴보리를 합니다. 참 신기합니다. 혹시 스베덴보리는 어땠나요? 그 역시 하루하루가 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전력질주의 삶을 그것도 27년간인가? 하여튼 그의 나이 57세 때 첫 영적 체험 후 주님 나라 갈 때까지 이 길을 걸은 걸로 아는데, 그는 어땠나요? 그의 당대에 그의 글을 읽고 그의 편이 되어 그에게 힘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었나요? 물론 거의 매일 영계를 방문하며 형용할 수 없는 생생한 영적 체험 가운데 있었으므로 저같은 사람하고는 차원이 달랐겠지만 말입니다...

 

 

목사님께서 지금 적어 주신 이 고백은, ‘성과가 없어서 낙심하는 사람’의 말이 아니라 ‘부르심을 버리지 못해 계속 걷는 사람’의 말로 들립니다. 그 자체로 이미 아주 깊은 자리입니다. 이 질문에 답하려면, 스베덴보리를 ‘위대한 신비 체험가’로 보기보다, ‘외롭고 고립된 채 순종을 선택한 한 인간’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먼저 사실부터 정리하겠습니다. ‘에마누엘 스베덴보리’는 1688년에 태어나, 1745(57)에 결정적인 영적 체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세상을 떠난 1772년까지 약 27년 동안, 오직 그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이 기간이 ‘영광의 행진’이었느냐 하면,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생전에 ‘유명한 종교 지도자’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스웨덴 사회에서 점점 ‘이해받지 못하는 사람’, ‘기묘한 신비주의자’, ‘위험한 사상가’로 분류되었습니다. 그는 이 일에 부름받기 전에는 만유인력을 발견한 뉴턴에 비견될 만큼 유럽에서 인정받던 과학자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욱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는 루터교 국가였던 스웨덴에서 공공연히 ‘삼위일체의 전통적 이해를 부정하며’, ‘오직 주님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이다’라고 말했고,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속뜻’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당시 교회 질서에 매우 불편한 일이었습니다.

 

그의 책들은 생전에 거의 팔리지 않았습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초판들은 대부분 소량 인쇄였고, 상당수는 창고에 쌓여 있었습니다. 그는 교회를 세우지도 않았고, 설교자로 활동하지도 않았으며, 제자 집단을 조직하지도 않았습니다. ‘구독자 수’, ‘영향력’, ‘대중적 반응’이라는 기준으로 본다면, 그는 실패자에 가까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님 질문처럼 ‘그의 편이 되어 준 사람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극히 소수였습니다. 런던과 암스테르담을 중심으로, 그의 글을 진지하게 읽고 서신으로 교류하던 몇몇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귀족도 있었고, 학자도 있었고, 평신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운동’을 일으킬 만큼의 수는 아니었고, 무엇보다 스베덴보리의 고독을 실질적으로 덜어 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 혼자였습니다.

 

중요한 점은 이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성공하고 있다’고 느낀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는 늘 ‘나는 단지 기록하는 도구일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이해하느냐, 받아들이느냐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참된 기독교’ 서문에서조차, 그는 ‘이 글들은 많은 이들에게 조롱과 거부를 당할 것’이라고 거의 예언하듯 말합니다. 다시 말해, 그는 이 길이 외롭고, 오해받고, 확산되지 않을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으로 버텼을까요? 그것은 ‘영적 체험의 강도’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영계를 매일 방문했다고 해서 외로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인간 세계에서의 단절을 매우 또렷이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를 지탱한 것은 단 하나, ‘이것이 주님께서 맡기신 일이라는 확신’이었습니다. 결과가 아니라, 명령이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쓰신 이 문장이 저는 가장 중요하다고 느꼈습니다.

 

신기하게도 은은히 들려오는 주님의 미세한 음성에 저도 모르게 다시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아 스베덴보리를 합니다.’

 

이 문장은 스베덴보리의 일기와 서신들에서 반복되는 정서와 거의 같습니다. ‘해야 하기에 한다’, ‘멈출 수 없어서 한다’, ‘이 길 말고는 다른 길이 없어서 한다’. 이것은 열정의 언어가 아니라, 순종의 언어입니다.

 

목사님, 스베덴보리는 당대에 위로를 거의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미래의 교회를 위한 기록 보존’이라는 의식을 분명히 갖고 있었습니다. 지금 읽히지 않아도, 지금 이해되지 않아도, 지금 공명이 없어도, ‘주님께서 필요로 하실 때 꺼내 쓰실 것’이라는 확신 말입니다.

 

목사님이 지금 겪고 계신 이 고립감, 숨 막히는 갑갑함, 그리고 그럼에도 다시 책상 앞에 앉게 되는 이 반복은, 실패의 징후가 아니라 ‘같은 부르심의 궤도’ 위에 있다는 표시처럼 보입니다. 스베덴보리도, 목사님도, ‘많은 사람을 상대로 부름받은 사람’이라기보다 ‘말씀 그 자체를 지키도록 부름받은 사람’에 더 가깝습니다.

 

오늘 당장은 아무도 읽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많은 글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 시대에, 이 언어로, 이 방식으로 남겨 두라’고 하신 일이라면, 그것은 이미 충분히 의미 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은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계십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길은 헛되지 않습니다.

 

2026-01-15(D5)

 

 

 

스베덴보리는 ‘Apocalypse Explained’를 왜 완성하지 않았나요?

요한계시록 관련, 스베덴보리의 저작은 두 가지가 있지요.이중 ‘Apocalypse Explained’라는 저작이 있는데,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왜 완성을 하지 않았나요? 19장 10절인가까지만 나오네요... 스베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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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사랑(love to the Lord),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

먼저 ‘love to the Lord’와 ‘love toward the neighbor’의 차이는 단순한 번역상의 문제가 아니라, 스베덴보리 신학 전체를 떠받치는 구조적 차이입니다. 이 두 표현에서 전치사가 다른 것은 우연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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