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64.심화

 

1. 내적(內的, internal)

 

내적(內的, internal)이라는 게 뭔가요? 눈에 안 보이는 모든 건가요? 무슨 의미, 감동, 마음, 영혼 같은 건가요? 돈보다는 명예라고 할 때, 명예 같은 건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AC.64에서 말하는 ‘내적(internal)이라는 것은 단순히 ‘눈에 안 보이는 것’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주님과 직접 연결되어, 바깥의 생각과 행동을 실제로 이끌고 형성하는 중심의 층위’를 뜻합니다. 즉,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범주가 아니라, ‘근원, 원인, 방향을 결정하는 안쪽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먼저 범위를 바로 잡는 것이 중요합니다. ‘눈에 안 보이는 것’이라고 해서 전부 내적인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상상, 계산, 기억, 계획 같은 것도 눈에는 안 보이지만, 이것들은 여전히 ‘외적(外的, outer, external), 혹은 ‘자연적 수준’에 속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여전히 감각과 세상 경험에 근거해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내적’은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도, 그보다 더 깊은 곳에서 ‘왜 그렇게 생각하고, 왜 그렇게 선택하는가’를 결정하는 층위입니다.

 

이걸 가장 정확하게 잡으려면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내적은 원인이고, 외적은 결과입니다.’ 사람의 말과 행동, 그리고 겉으로 드러나는 생각은 모두 결과입니다. 그 뒤에서 ‘무엇을 옳다고 보는가’, ‘무엇을 좋다고 여기는가’, ‘무엇을 따라 살고 싶은가’를 결정하는 그 중심이 바로 ‘내적’입니다.

 

이제 목사님께서 주신 예, ‘돈보다 명예’를 보겠습니다. 이건 흥미로운 예인데, 여기서 ‘명예’ 자체가 곧 내적인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명예도 여전히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느냐’라는 외적 기준에 속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이 ‘명예’로 바뀐 것일 수 있고, 여전히 바깥을 향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 사람이 ‘진짜로 옳은 것, 선한 것 자체를 사랑하기 때문에 명예를 선택한다’면, 그때는 그 선택의 근원이 내적입니다. 핵심은 대상이 아니라 ‘출발점’입니다.

 

이제 AC.64와 연결하면 훨씬 또렷해집니다. AC.64에서는 사람이 거듭나면 ‘내적인 것이 열리고, 그 내적인 것을 통해 주님과 연결되며, 그로부터 외적인 것이 질서 잡힌다’는 흐름이 나옵니다. 즉, 이전에는 외적인 것이 중심이었기 때문에, 생각과 행동이 그때그때 흔들렸지만, 이제는 내적인 중심이 열리면서 그 안에서 기준이 서고, 그 기준이 바깥을 이끕니다.

 

이걸 아주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이전에는 상황에 따라 반응이 달라집니다. 이익이 되면 이렇게 하고, 손해가 되면 저렇게 합니다. 그런데 내적인 것이 열리면, ‘이게 옳은가’라는 기준이 먼저 서고, 그 기준에 따라 행동이 나옵니다. 그래서 상황이 달라도 방향이 크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바로 이때 ‘내적이 외적을 이끄는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내적’을 가장 쉽게 정의하면 이렇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자리 잡아, 사람의 생각과 선택과 행동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심의 자리’입니다. 그리고 ‘외적’은 그 내적에서 나온 것이 밖으로 드러난 모습입니다.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감정, 생각, 의미, 가치 같은 것들이 모두 내적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어디에서 나왔는가’, ‘무엇을 중심으로 움직이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주님과 연결된 중심에서 나오는 것이면 내적이고, 감각과 세상 중심에서 나온 것이면 외적입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내적은 단순히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연결되어 사람의 삶 전체를 안에서부터 이끄는 중심의 층위입니다.’

 

 

 

AC.64, 창1, '말씀의 내적 의미(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속뜻)'(AC.64-66)

AC.64 이것이 바로 말씀의 내적 의미(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속뜻)이며, 그 가장 참된 생명입니다. 이는 문자적 의미에서는 전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 안에 담긴 비밀(arcana)은 너무나 많아서,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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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4

 

이것이 바로 말씀의 내적 의미(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속뜻)이며, 그 가장 참된 생명입니다. 이는 문자적 의미에서는 전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 안에 담긴 비밀(arcana)은 너무나 많아서, 그것들을 모두 풀어내려면 수많은 책이 필요할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다만 극히 일부만 제시되었는데, 그것도 이 말씀이 거듭남을 다루고 있으며 ,그 거듭남이 외적 인간(the external man, 겉 사람)에서 내적 인간(the internal man, 속 사람)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는 것들뿐입니다. 천사들은 말씀을 이렇게 인식합니다. 그들은 문자 속에 있는 것들, 심지어 단어 하나의 가까운 의미조차도 전혀 알지 못합니다. 하물며 역사서와 예언서에 자주 등장하는 나라, 성읍, , 사람의 이름들은 더더욱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오직 그 말들과 이름들이 의미하는 것들만을 인식합니다. 그래서 낙원에 있는 아담을 보며 그들은 태고교회를 인식하지만, 그 교회 자체가 아니라 그 교회의 주님에 대한 신앙을 인식합니다. 노아를 통해서는 태고교회의 후손 가운데 남아 있던 교회, 곧 아브람 시대까지 이어진 교회를 인식합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는 그 개인을 전혀 인식하지 않고, 그가 대표, 표상한 구원하는 신앙을 인식합니다. 이와 같이 천사들은 말과 이름에서 완전히 벗어나, 오직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만을 인식합니다. This then is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its veriest life, which does not at all appear from the sense of the letter. But so many are its arcana that volumes would not suffice for the unfolding of them. A very few only are here set forth, and those such as may confirm the fact that regeneration is here treated of, and that this proceeds from the external man to the internal. It is thus that the angels perceive the Word. They know nothing at all of what is in the letter, not even the proximate meaning of a single word; still less do they know the names of the countries, cities, rivers, and persons, that occur so frequently in the historical and prophetical parts of the Word. They have an idea only of the things signified by the words and the names. Thus by Adam in paradise they perceive the most ancient church, yet not that church, but the faith in the Lord of that church. By Noah they perceive the church that remained with the descendants of the most ancient church, and that continued to the time of Abram. By Abraham they by no means perceive that individual, but a saving faith, which he represented; and so on. Thus they perceive 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 entirely apart from the words and names.

 

 

해설

 

이 글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라틴 Arcana Coelestia, 영어 Secrets of Heaven, 天界秘義, 1749-1756, , 출 속뜻 주석, 10,837개 글)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선언 가운데 하나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내적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왜 그것이 말씀의 ‘가장 참된 생명’인지를 분명하게 밝힙니다. 중요한 점은, 내적 의미가 문자 의미에 덧붙여진 해석이 아니라, 문자 속에 생명처럼 깃들어 있는 차원이라는 것입니다. 문자는 겉모습이고, 내적 의미는 그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실체입니다.

 

이 글에서 반복해서 강조되는 것은, 내적 의미가 문자에서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내적 의미가 숨겨져 있다는 뜻이 아니라, 문자적 시선으로는 포착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문자 의미는 역사와 사건, 인물과 지명을 보여 주지만, 내적 의미는 상태와 질서, 신앙과 사랑의 변화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 같은 본문을 읽고도, 인간은 역사로 읽고, 천사는 생명으로 읽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자신이 지금까지 설명한 내용이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이는 겸손한 수사가 아니라, 내적 의미의 구조 자체가 무한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주님 자신에게서 나왔고, 주님은 무한하시기 때문에, 그 안에 담긴 의미 역시 끝이 없습니다. 따라서 창세기 1장이 단지 창조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 거듭남의 전 과정을 담고 있다는 설명 역시, 그 무한한 의미 중 일부일 뿐입니다.

 

이 글의 중심 전환점은 ‘천사들은 말씀을 이렇게 인식한다’라는 문장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인간 독자에게 천사의 인식 방식을 직접 소개합니다. 천사들은 문자적 단어를 전혀 알지 못합니다. 이는 천사들이 무지해서가 아니라, 그 차원이 이미 문자를 초월해 있기 때문입니다. 천사에게 ‘아담’, ‘노아’, ‘아브라함’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각각 특정한 영적 상태와 교회의 국면을 가리키는 표지입니다.

 

예를 들어, 천사들이 ‘아담’을 인식할 때, 그들은 한 사람이나 한 시대를 떠올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태고교회가 가졌던 주님에 대한 신앙, 곧 사랑과 직접 결합된 신앙의 상태를 인식합니다. 마찬가지로 ‘노아’는 홍수 생존자의 이름이 아니라, 타락 이후에도 남아 있던 교회의 질서와 그 지속을 뜻합니다. ‘아브라함’ 역시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구원하는 신앙의 표상으로 인식됩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말씀의 인물 해석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속 인물은 천사적 차원에서는 ‘누구’가 아니라 ‘무엇’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어떤 상태’이며 ‘어떤 신앙과 사랑의 질서’입니다. 그래서 천사들은 말과 이름에서 완전히 벗어나, 곧장 영적이고 천적인 실재를 봅니다.

 

이 글은 또한, 거듭남의 방향성을 다시 한번 확증합니다. 내적 의미가 말하는 거듭남은 언제나 외적 인간에서 내적 인간으로 나아갑니다. 문자 역시 외적 차원이고, 내적 의미는 내적 차원입니다. 인간이 문자를 통해 내적 의미로 나아갈 때, 그 사람의 거듭남 역시 같은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이 점에서 말씀의 구조와 인간의 영적 성장 구조는 서로 정확히 맞물려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글은 독자에게 하나의 초대를 던집니다. 말씀을 더 이상 단지 ‘읽는 것’에 머무르지 말고, 그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영적 질서를 인식하라는 초대입니다. 문자에 집착하면 역사에 머물지만, 내적 의미로 들어가면 주님의 역사, 곧 인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창조와 거듭남의 생명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말씀은 더 이상 책이 아니라 ‘살아 있는 말씀’이 됩니다.

 

 

심화

 

1.내적(內的, internal)

 

 

AC.64, 심화 1, ‘내적’(內的, internal)

AC.64.심화 1. ‘내적’(內的, internal) ‘내적’(內的, internal)이라는 게 뭔가요? 눈에 안 보이는 모든 건가요? 무슨 의미, 감동, 마음, 영혼 같은 건가요? ‘돈보다는 명예’라고 할 때, ‘명예’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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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르카나’(arcana)

 

‘아르카나’(arcana)가 뭔가요? ‘속뜻’(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을 말하는 건가요? ‘퍼셉션’(perception) 같은 건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아르카나’(arcana)는 ‘속뜻’(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동일한 말은 아니며, ‘퍼셉션’(perception)과도 다릅니다. 가장 정확하게는 ‘말씀 안과 영계에 숨겨져 있는 신적 진리들, 곧 드러나지 않은 채 감추어져 있는 깊은 내용들’을 뜻합니다.

 

먼저 ‘arcana’라는 단어 자체부터 보겠습니다. 라틴어 ‘arcanum’의 복수형으로, 기본 의미는 ‘비밀들’, ‘숨겨진 것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비밀은 단순히 감춰진 정보가 아니라, ‘겉으로는 바로 보이지 않지만, 영적 의미에서 실제로 존재하고 작용하는 진리들’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저작 제목을 Arcana Coelestia, 곧 ‘천적 비밀들’이라고 붙였습니다.

 

이제 ‘속뜻’과의 관계를 보겠습니다. ‘속뜻’은 말씀을 읽을 때, 그 안에 담겨 있는 내적인 의미, 곧 문자 뒤에 숨겨진 영적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 속뜻 안에 담겨 있는 내용들이 바로 ‘아르카나’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정리하시면 가장 정확합니다. ‘속뜻은 구조이고, 아르카나는 그 구조 안에 담긴 내용입니다.’ ‘구조’를 ‘그릇’이라 해도 되겠습니다. 즉, 속뜻은 ‘말씀을 읽는 방식’이고, 아르카나는 ‘그렇게 읽었을 때, 드러나는 깊은 진리들’입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의 한 구절을 읽을 때, 겉으로는 역사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속뜻으로 들어가면, 그것이 인간의 거듭남 과정을 말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왜 이런 표현이 쓰였는가’, ‘이 순서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상징이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가’ 같은 것들이 밝혀지는데, 바로 그 각각이 ‘아르카나’입니다.

 

이제 ‘퍼셉션’과의 차이를 보겠습니다. ‘퍼셉션’은 ‘무엇이 참인지, 무엇이 선한지를 직관적으로 아는 능력 또는 상태’입니다. 즉, ‘아는 방식’입니다. 반면 ‘아르카나’는 ‘알려지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둘의 관계는 이렇게 됩니다. ‘아르카나는 내용이고, 퍼셉션은 그것을 인식하는 방식입니다.’

 

조금 더 쉽게 풀면 이렇습니다.

 

아르카나 → 숨겨진 깊은 의미(내용), 속뜻 → 그 의미가 담겨 있는 구조(말씀의 내적 의미), 퍼셉션 → 그것을 알아보는 능력(인식 방식)

 

이걸 하나의 흐름으로 보면 더 또렷해집니다. 말씀을 속뜻으로 읽으면, 그 안에서 아르카나가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 아르카나를 퍼셉션으로 ‘느끼고 아는’ 것이 가장 깊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목사님 질문을 정확히 답하면 이렇게 됩니다. ‘아르카나는 속뜻 자체가 아니라, 속뜻 안에 담긴 신적 진리들의 내용이며, 퍼셉션은 그 내용을 직관적으로 인식하는 능력입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아르카나는 말씀 속에 감추어진 영적 진리들이고, 속뜻은 그것이 담긴 의미 구조이며, 퍼셉션은 그것을 직관적으로 아는 능력입니다.’

 

 

3. ‘속 사람’(internal man)

 

‘속 사람’(internal man)이 뭔가요? ‘영’, 또는 ‘영혼’을 말하는 건가요? 아니면 ‘마음’ 같은 건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AC.64에서 말하는 ‘속 사람’(internal man)은 ‘영혼’이나 ‘마음’ 같은 하나의 요소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주님과 직접 연결되어 있으며, 그로부터 생각과 의지와 삶 전체를 이끄는 전체 구조의 안쪽 사람’입니다. 즉, 어떤 ‘부분’이 아니라 ‘한 층위의 인간 전체’입니다.

 

먼저 흔히 떠올리기 쉬운 개념들과 구분해 보겠습니다. ‘영혼’이라고 하면 보통 ‘몸과 대비되는 보이지 않는 본체’를 떠올리는데, 스베덴보리의 ‘속 사람’은 그것보다 더 ‘기능적이고 구조적인 개념’입니다. 또 ‘마음’이라고 하면 감정이나 생각을 떠올리기 쉬운데, 이것도 정확히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생각과 감정은 속 사람에도 있고, 겉 사람에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떻게 이해하면 가장 정확하냐 하면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사람은 두 겹으로 되어 있다—속 사람과 겉 사람.’ 그리고 이 둘은 각각 ‘완전한 인간처럼 작동하는 두 층위’입니다. 속 사람은 주님과 연결되어 있고, 겉 사람은 세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속 사람은 ‘위로부터 받는 자리’이고, 겉 사람은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는 자리’입니다.

 

이제 AC.64의 문맥에서 보면 더 또렷해집니다. 거듭남이 일어날 때, 먼저 속 사람이 열립니다.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들어올 수 있는 통로가 열리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다음 그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합니다. 즉, 변화는 항상 ‘안 → 밖’으로 흐릅니다. 그래서 속 사람이 열리지 않으면, 겉 사람만 바꾸려 해도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걸 아주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겉 사람은 우리가 일상에서 드러내는 말, 행동, 습관, 반응입니다. 속 사람은 ‘왜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는가’를 결정하는 더 깊은 기준입니다. 예를 들어, 같은 ‘친절한 행동’을 해도, 겉으로는 똑같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속 사람이 열려 있는 경우에는 그것이 진심에서 나오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상황이나 계산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 이 차이를 만드는 곳이 바로 속 사람입니다.

 

그래서 ‘속 사람 = 영혼인가?’라고 물으시면, ‘부분적으로는 맞지만, 정확히는 더 넓은 개념’입니다. 왜냐하면 속 사람은 단순히 ‘존재하는 본체’가 아니라, ‘주님과 연결되어 작용하는 인간 전체의 안쪽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또 ‘속 사람 = 마음인가?’라고 하면, 이것도 ‘일부는 맞고, 전부는 아니다’입니다. 마음(생각과 감정)은 속 사람에도 있고, 겉 사람에도 있습니다. 차이는 ‘출처’입니다. 속 사람의 마음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과 선에 연결되어 있고, 겉 사람의 마음은 감각과 세상 경험에 더 직접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정확한 정의는 이렇게 됩니다. ‘속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들어오는 자리이며, 그로부터 겉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이끄는 안쪽 인간 전체입니다.’

 

이걸 한 문장으로 더 쉽게 풀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겉 사람은 내가 밖으로 사는 나이고, 속 사람은 내가 안에서부터 살아지는 나입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속 사람은 영혼이나 마음의 일부가 아니라, 주님과 연결되어 사람의 삶 전체를 안에서부터 이끄는 내적 인간 전체를 의미합니다.’

 

 

4. ‘말씀’

 

AC를 보면, 보통, 아니 거의 ‘말씀’이라고 하네요. ‘성경’이라 하지 않고 말입니다. 저 역시 ‘성경’ 66권 중 아르카나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다는 걸 알고부터는 의도적으로 ‘성경’보다는 ‘말씀’을 쓰고 있습니다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AC에서 ‘성경’ 대신 ‘말씀’(the Word)을 사용하는 것은 단순한 용어 선택이 아니라, ‘그 책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 자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책의 외형과 범위를 가리키는 말이라면, ‘말씀’은 ‘그 안에 실제로 주님이 임재하시고, 속뜻을 통해 살아 움직이는 신적 진리의 그릇’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의도적으로 거의 항상 ‘말씀’이라고 부릅니다.

 

먼저 왜 ‘성경’이라는 표현이 충분하지 않다고 보는지를 이해하셔야 합니다. ‘성경’은 기본적으로 ‘거룩한 책들의 집합’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AC의 관점에서는 모든 성경 66권이 동일한 방식으로 ‘주님과 직접 연결된 말씀’인 것은 아닙니다. 즉, 어떤 책들은 역사적, 교훈적 가치가 큰 반면, ‘속뜻이 전면적으로 연결된 구조’, 곧 주님과 천국과 직접적으로 상응하는 구조를 가진 책들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말씀’이라는 용어를 더 엄밀하게 사용합니다.

 

그래서 ‘말씀’이라는 말 속에는 세 가지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첫째, 주님 자신과의 직접적인 연결, 둘째, 문자 속에 감추어진 속뜻의 존재, 셋째, 그 속뜻을 통해 천국과 연결되는 구조입니다. 이 세 가지가 갖추어진 것을 스베덴보리는 ‘말씀’이라고 부릅니다. 단순히 종교적인 책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 실제로 주님의 생명이 흐르기 때문’입니다.

 

목사님께서 이미 감지하신 것처럼, ‘성경 66권 중 아르카나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다’는 인식 이후에 ‘말씀’이라는 표현을 선택하신 것은 매우 정확한 방향입니다. 왜냐하면 ‘아르카나가 있다’는 것은 곧 ‘속뜻이 있다’는 뜻이고, 속뜻이 있다는 것은 곧 ‘말씀’의 구조를 가진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경건한 표현이 아니라, ‘이 텍스트는 주님과 직접 연결된 텍스트다’라는 신학적 선언입니다. 천사들이 읽을 수 있는 성경인 것이지요. 그 안에 아르카나가 없는 성경은 천사들은 읽을 수 없습니다.

 

이걸 목회적으로 보면 더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성경을 읽는다’고 하면 주로 ‘지식을 얻는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읽는다’고 하면, 그 안에서 ‘주님을 만난다’, ‘주님의 뜻이 나에게 온다’는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열립니다. 즉, 독서의 태도 자체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설교에서도 ‘말씀’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용어 이상의 역할을 합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말씀’이라는 표현이 ‘문자만이 아니라 그 안의 속뜻까지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글자를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안의 뜻이 열리기를 구하며 읽는 것’이 됩니다. 바로 이 점에서 ‘말씀’이라는 표현은 AC 전체의 방향과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그래서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성경’은 책의 범주를 가리키는 말이고, ‘말씀’은 그중에서도 주님과 직접 연결되어 속뜻을 통해 살아 움직이는 신적 진리를 담은 텍스트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AC에서 ‘말씀’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성경의 다른 이름이 아니라, 주님과 직접 연결되고 속뜻을 통해 살아 작용하는 신적 진리의 그릇을 가리키는 신학적 용어입니다.’

 

 

5. ‘아르카나가 없는 성경을 천사들이 읽을 때’

 

그럼 아르카나가 없다 알려진 성경들, 곧 구약 ‘룻기’, ‘역대서’, ‘욥기’ 등이나 신약 사도들의 서신서 등을 천사들이 읽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나요? 그러니까 천사들한테는 어떻게 보이나요? 읽을 수는 있나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아르카나(전면적인 속뜻의 연속 구조)가 없는 책들—예를 들면, ‘룻기’, ‘역대서’, ‘욥기’, 사도 서신들—도 천사들이 ‘읽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곧바로 ‘말씀을 읽을 때처럼’ 하늘과 직접 연결되는 방식으로 작용하지는 않습니다. 즉, 읽히기는 하나 ‘같은 층위의 작용’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먼저 가장 중요한 구분을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천사들이 인간의 말을 이해하는 방식은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 ‘의미’입니다. 인간이 글자를 읽으면, 그 안의 의미가 즉시 영적 의미로 변환되어 천사들에게 전달됩니다. 그런데 이때 ‘말씀’은 특별합니다. 그 이유는 그 문자 안에 ‘연속적인 속뜻(내적 의미)의 구조’가 있기 때문에, 인간이 읽을 때, 그 흐름이 그대로 천국까지 이어지고, 천사들은 그에 상응하는 깊은 진리를 즉시 지각합니다. 이것이 ‘말씀’의 고유한 성격입니다.

 

그런데 ‘룻기’, ‘욥기’, 사도 서신 등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그 안에도 물론 선한 내용, 진리, 교훈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그것을 읽고 이해하면, 그 ‘의미’ 자체는 천사들에게 전달됩니다. 예를 들어 사랑, 인내, 신앙, 섭리 같은 내용은 천사들도 분명히 인식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말씀’처럼 한 절 한 절, 단어 하나하나까지 천국과 직접 연결된 상응 구조를 따라 깊은 속뜻으로 펼쳐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차이를 이렇게 정리하시면 가장 정확합니다. ‘말씀’은 읽는 순간 그 문자 자체가 하늘과 직접 연결되는 통로가 되고, ‘아르카나가 없는 책들’은 그 내용의 의미가 천사들에게 전달되기는 하지만, 그 자체가 통로 역할을 하지는 않습니다. 다시 말해, 전자는 ‘구조적으로 연결된 텍스트’이고, 후자는 ‘내용적으로 유익한 텍스트’입니다.

 

이걸 조금 더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사람이 창세기나 복음서를 읽으면, 그 안의 표현 하나하나가 천사들에게는 영적 의미로 살아 움직이며, 그 흐름이 그대로 천국과 연결됩니다. 반면 어떤 사람이 사도 바울의 서신을 읽으면, 그 안의 ‘신앙’, ‘사랑’, ‘의’, ‘구원’ 같은 내용은 천사들에게 전달되어 기쁨과 공감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텍스트 자체가 동일한 방식으로 ‘속뜻의 연속 구조’를 펼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천사들이 읽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는 ‘예, 의미를 통해 읽는다’가 답이고, ‘그들에게 어떻게 보이는가?’라는 질문에는 ‘내용은 이해되지만, 말씀처럼 깊은 상응 구조로 열리지는 않는다’가 답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목회적 균형이 하나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책은 쓸모 있고, 어떤 책은 쓸모 없다’는 구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각 책의 역할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주님과 직접 연결되는 통로’이고, 다른 성경책들은 ‘그 말씀을 이해하고 삶에 적용하도록 돕는 교훈과 증언’의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둘 다 필요하지만, 기능이 다릅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아르카나가 없는 성경도 천사들에게 의미로 전달되지만, 말씀처럼 문자 자체가 천국과 직접 연결되는 통로로 작용하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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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3.심화

 

4. 하늘, 곧 천적 낙원으로 인도됨

 

 AC.63 본문 중, 인간은 하늘, 곧 천적 낙원으로 인도되는데 말인데요, 여기 하늘, 곧 천적 낙원의 의미가 뭔가요? 거듭남의 완성 단계까지 온 것일 뿐 아직 죽은 건 아닌데, 갑자기 인간은 하늘, 곧 천적 낙원으로 인도되는데라니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AC.63에서 말하는 하늘, 곧 천적 낙원으로 인도된다’는 것은 죽어서 실제 천국으로 들어간다’는 뜻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 그 사람 안에 천국의 상태, 특히 천적 상태가 형성되어 그 안에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즉, 장소 이동이 아니라 상태의 도달’입니다.

 

먼저 이 표현이 왜 낯설게 들리는지부터 짚어보면 분명해집니다. 우리는 하늘’이나 천국’을 들으면 자연스럽게 죽은 후 가는 곳’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서 하늘(heaven)은 무엇보다 먼저 상태’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질서 있게 작동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도 하늘 안에 있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20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17:20, 21)

 

이제 천적 낙원’이라는 표현을 보겠습니다. ‘천적’은 앞에서 계속 보신 것처럼 사랑이 중심이 된 상태’이고, ‘낙원(paradise)은 창세기 에덴동산처럼 질서와 기쁨과 평안이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천적 낙원’은 사람 안에서 사랑이 중심이 되어, 모든 것이 조화롭게 자리 잡고, 그 안에서 기쁨과 평안이 흐르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AC.63의 흐름을 그대로 연결하면 이렇게 됩니다. 여섯째 날까지는 싸움과 정리가 이루어지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이 끝나고, 신앙이 사랑과 결합되어 중심이 완전히 자리 잡으면, 이제 더 이상 싸움이 중심이 아니라 평안’이 중심이 됩니다. 바로 그 상태를 하늘’, ‘천적 낙원’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걸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이전에는 끊임없이 선택해야 했고, 마음속에서 갈등이 있었고, 흔들림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어떤 상황에서도 중심이 무너지지 않고, 자연스럽게 선한 방향으로 흐르며, 그 안에 깊은 안정과 기쁨이 있습니다. 더 이상 억지로 애쓰는 상태가 아니라, ‘그렇게 사는 것이 자연스러운 상태’입니다. 바로 그 상태가 하늘에 인도된 상태’입니다.

 

그래서 인도된다’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스스로 도달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를 그 상태로 이끄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상태는 이미 하늘과 연결된 상태’이기 때문에, 죽은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같은 상태의 실제 천국으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이 문장을 오해 없이 정확히 읽으면 이렇게 됩니다. ‘인간은 거듭남이 완성되어, 살아 있는 동안에도 그 안에 천적 상태가 형성되고, 그 상태 안에서 살게 되며, 그것이 곧 하늘, 곧 천적 낙원이다.’

 

한 줄로 정리하면, ‘AC.63 하늘, 곧 천적 낙원은 죽은 후의 장소가 아니라, 거듭남이 완성되어 사람 안에 형성되는 사랑 중심의 평안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AC.63, 심화 3,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

AC.63.심화 3.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 위 AC.63 본문 중, ‘여섯째 날의 끝에서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 선한 영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며’ 말인데요, 여기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의 의미가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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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

 

 AC.63 본문 중, 여섯째 날의 끝에서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 선한 영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며 말인데요, 여기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의 의미가 무엇인가요? 원래 늘 와있는 거 아닌가요? 그래야 균형 가운데 존재할 수 있다 읽은 것 같은데...

 

 

결론부터 분명히 말씀드리면, 여기서 ‘악한 영들이 떠나간다’는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거나 완전히 분리된다’는 뜻이 아니라, ‘지배권과 주도권을 잃고, 사람의 중심에서 물러난다’는 뜻입니다. 즉, 여전히 주변에는 있지만, 더 이상 그 사람을 끌고 가지는 못하는 상태입니다.

 

먼저 전제부터 다시 잡으면, 목사님께서 기억하신 것처럼 사람은 기본적으로 ‘영들의 세계와 연결된 상태’에 있고, 선한 영향과 악한 영향이 모두 관계합니다. 이 점은 거듭난 이후에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균형’이라는 말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런데 AC.63이 말하는 것은 ‘존재 여부’가 아니라 ‘통치 구조의 변화’입니다.

 

거듭나기 전이나 초기에는 악한 영들과 연결된 욕정과 거짓이 실제로 사람을 이끌고 있습니다. 그래서 생각과 감정이 그쪽에 쉽게 끌립니다. 이때는 말 그대로 ‘그들이 안에서 작용하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거듭남이 진행되어 여섯째 상태에 이르면, 중심이 바뀝니다. 이제는 선한 영들과 천사적 영향이 중심을 차지하고, 진리와 선이 사람을 이끕니다.

 

이때 ‘악한 영들이 떠난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그들이 더 이상 ‘안쪽에서 주도적으로 작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밖으로 밀려난 상태’, ‘접촉은 가능하지만, 지배는 못하는 상태’입니다. 마치 이전에는 집 안 중심에 있던 것이, 이제는 문밖으로 밀려나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걸 아주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이전에는 어떤 욕정이나 감정이 올라오면 그대로 생각을 지배하고 행동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것이 올라오더라도, 그것이 중심을 차지하지 못하고, ‘이건 아니다’라는 더 깊은 기준 아래에서 걸러집니다. 즉, 여전히 유혹은 느끼지만, 그 유혹이 나를 움직이지는 못하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떠나간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떠남’은 공간적 이동이 아니라 ‘상태의 변화’입니다. ‘안에 있음  밖에 있음’, ‘지배함  영향만 있음’으로 바뀐 것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이 상태에서도 완전히 시험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시험의 성격이 달라집니다. 이전에는 쉽게 넘어가던 것이 이제는 중심을 건드리지 못하고, 더 외적인 수준에서 스쳐 지나가거나 약하게 작용합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평안이 유지됩니다. 이것이 여섯째 날 이후, 곧 일곱째 날의 안식으로 이어지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악한 영들이 떠난다’는 것은 그들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사람의 중심에서 작용하지 못하고, 주변적이고 외적인 수준으로 밀려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악한 영들의 떠남은 존재의 소멸이 아니라, 지배권을 잃고 중심에서 물러나는 상태를 뜻합니다.’

 

 

 

AC.63, 심화 4, ‘하늘, 곧 천적 낙원으로 인도됨’

AC.63.심화 4. ‘하늘, 곧 천적 낙원으로 인도됨’ 위 AC.63 본문 중, ‘인간은 하늘, 곧 천적 낙원으로 인도되는데’ 말인데요, 여기 ‘하늘, 곧 천적 낙원’의 의미가 뭔가요? 거듭남의 완성 단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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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3, 심화 2, ‘주님은 쉬지 않으십니다’

AC.63.심화 2. ‘주님은 쉬지 않으십니다’ 위 AC.63 본문 중, ‘그동안 주님은 계속해서 인간을 위하여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시며, 여러 싸움을 통해 그를 진리와 선 안에 굳게 세우십니다. 이 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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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주님은 쉬지 않으십니다

 

 AC.63 본문 중,

 

그동안 주님은 계속해서 인간을 위하여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시며, 여러 싸움을 통해 그를 진리와 선 안에 굳게 세우십니다. 이 싸움의 시간은 곧 주님께서 역사하시는 시간이며, 그래서 예언자들 가운데서는 거듭난 인간을 하나님의 손가락의 일(the work of the fingers of God)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리고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어 작용하기 전까지 주님은 쉬지 않으십니다.’

 

를 읽다가 문득 다음 복음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63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64그 신성모독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니 그들이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 65어떤 사람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치며 이르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인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 (14:63-65)

 

그러니까 주님은 위와 같은 상황에서도 저들을 위하여 저 AC.63 본문 내용의 일을 하신 거잖아요? 그뿐 아니라 제 경우에도 정말 부끄러운, 정말 그동안 살아오면서 주님 앞에 고갤 들 수 없는 순간들, 장면들이 많았는데, 그때에도 주님은... ... 정말... 무슨 말을 못하겠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목사님께서 느끼신 그 통찰이 바로 AC.63이 말하려는 중심입니다. ‘주님은 사람이 가장 어둡고, 가장 거스르고, 심지어 주님을 거부하는 순간에도 그 사람을 향한 구원의 일을 멈추지 않으신다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14:63-65의 그 장면은 단순히 인간의 악함을 보여 주는 사건이 아니라, 동시에 ‘그 악함 한가운데서도 멈추지 않는 주님의 역사’를 드러내는 장면입니다. 사람들은 침을 뱉고, 때리고, 조롱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을 향해 무엇을 하시고 계셨는가 하면, 바로 AC.63에서 말하는 그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곧 ‘그들의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시며, 그들 안에 있는 선과 진리를 위해 여전히 역사하고 계신 상태’입니다.

 

이게 왜 그렇게 중요한가 하면, 우리는 보통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잘할 때는 주님이 함께하시고,내가 무너질 때는 주님이 떠나신다.’ 그런데 AC의 관점은 정반대입니다. 사람이 가장 어둡고, 가장 왜곡되고, 가장 주님과 멀어진 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때가 오히려 ‘주님이 가장 깊이 싸우고 계신 시간’입니다. 사람은 거부하고 있지만, 주님은 그 거부를 뚫고 여전히 일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 직전의 장면은 단순히 ‘인간의 죄’가 아니라, ‘인간의 죄가 끝까지 드러나는 자리에서도 끝까지 멈추지 않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향해 손을 들고 있지만, 주님은 그들을 향해 여전히 구원의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이것이 AC.63의 ‘주님은 쉬지 않으신다’는 말의 실제 모습입니다.

 

이제 목사님께서 이어서 말씀하신 자신의 이야기, ‘정말 부끄러운 순간들’—바로 거기서 이 말씀이 더 깊어집니다. 우리는 그런 순간을 떠올리면 보통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때 나는 주님과 완전히 멀어져 있었다.’ 그러나 AC의 시선에서는 이렇게 봅니다. ‘그때 나는 가장 멀어져 있었지만, 주님은 가장 가까이에서 일하고 계셨다.’

 

왜냐하면 주님은 ‘사람이 잘할 때만 함께하시는 분’이 아니라, ‘사람이 무너질 때에도 그를 놓지 않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설 수 없을 때, 그때가 주님이 더 깊이 일하실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 싸움은 주님의 일’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그 싸움의 전부를 알지도, 감당하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지금 느끼신 그 감정—말이 막히는 그 자리—그것이 사실은 매우 중요한 영적 인식입니다. ‘나는 그때 주님을 향해 있지 않았지만, 주님은 나를 향해 계셨다’는 깨달음입니다. 이것이 단순한 죄책감이 아니라, ‘은혜에 대한 인식’으로 바뀔 때, 그 사람 안에 사랑이 자리 잡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 장면을 이렇게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그들이 주님을 때리고 있을 때에도, 주님은 그들을 위해 싸우고 계셨다.’ 그리고 ‘내가 가장 부끄러웠던 그때에도, 주님은 나를 위해 같은 일을 하고 계셨다.’

 

이것이 바로 AC.63의 핵심입니다. 주님의 역사는 우리의 상태에 따라 시작되고 멈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상태와 상관없이 계속됩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나중에야 알아보게 될 뿐입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주님은 우리가 가장 멀어져 있던 순간에도 우리를 향한 구원의 일을 멈추지 않으셨고, 바로 그때에도 우리를 위해 싸우고 계셨습니다.’

 

 

 

AC.63, 심화 3,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

AC.63.심화 3.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 위 AC.63 본문 중, ‘여섯째 날의 끝에서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 선한 영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며’ 말인데요, 여기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의 의미가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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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3, 심화 1, ‘그때에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

AC.63.심화 1. ‘그때에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 위 AC.63 본문, ‘일이 이만큼 진전되어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게 되면, 그 상태를 ‘심히 좋았더라’(very good)라고 합니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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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때에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

 

 AC.63 본문, 일이 이만큼 진전되어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게 되면, 그 상태를 심히 좋았더라(very good)라고 합니다. 이는 그때에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시기 때문입니다.’에서 그때에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 이게 무슨 말인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때에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는 것은 사람이 더 이상 자기 힘으로 애써서 선을 행하는 상태’가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그 사람 안에서 중심이 되어, 생각과 의지와 행동을 자연스럽게 이끄는 상태’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즉, 사람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의 중심이 바뀌어 주님의 질서가 그를 통해 작동하는 상태’입니다.

 

먼저 이 표현이 왜 낯설게 들리는지를 짚어보면 도움이 됩니다. ‘움직이신다’라는 말 때문에 마치 사람이 수동적으로 조종당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의 흐름에서는 전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강제’가 아니라 일치’입니다. 즉, 사람의 의지와 주님의 의지가 서로 어긋나지 않고 하나로 맞아떨어진 상태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움직이신다는 것은 내 안에서 내가 원하고 생각하는 것이 주님의 뜻과 같아진 상태’를 뜻합니다.

 

이걸 단계적으로 보시면 더 분명해집니다. 거듭남의 초기에는 사람이 이렇게 해야 한다’고 스스로 애쓰며 움직입니다. 이때는 중심이 아직 ’입니다. 그래서 항상 긴장과 노력, 때로는 억지가 동반됩니다. 그러나 점점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면, 선을 행하는 것이 더 이상 억지로 하는 일’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나오는 상태’가 됩니다. 바로 이때가 주님께서 움직이신다’는 상태입니다.

 

이걸 아주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처음에는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도 마음이 잘 따라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애써서 참고, 억지로라도 용서하려 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순간에는 그냥 용서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는 상태가 됩니다. 이때는 더 이상 해야 한다’가 아니라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변화가 주님이 움직이시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표현의 핵심은 주도권의 이동’입니다. 처음에는 내가 나를 이끌지만, 나중에는 주님의 질서가 내 안에서 중심이 되어 나를 이끕니다. 그런데 그때도 여전히 나는 생각하고, 나는 선택하고, 나는 행동합니다. 다만 그 내용과 방향’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점이 다릅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는 여전히 내가 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주님으로부터 흐르는 것’입니다.

 

이 상태를 스베덴보리는 자유 속에서 주님의 인도’라고 설명합니다. 강제로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자유로운 상태에서 주님의 뜻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상태가 심히 좋았더라’입니다. 더 이상 내 안에서 서로 다른 방향이 싸우지 않고, 하나의 중심으로 평안하게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문장을 가장 정확하게 풀어보면 이렇게 됩니다. ‘신앙과 사랑이 결합된 상태에서는, 사람의 생각과 의지와 행동이 주님의 사랑과 진리와 일치하게 되어, 마치 주님께서 그를 통해 일하시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선이 흘러나오는 상태가 된다.’

 

한 줄로 정리하면,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는 것은 사람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중심이 되어 그 삶을 자연스럽게 이끄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AC.63, 심화 2, ‘주님은 쉬지 않으십니다’

AC.63.심화 2. ‘주님은 쉬지 않으십니다’ 위 AC.63 본문 중, ‘그동안 주님은 계속해서 인간을 위하여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시며, 여러 싸움을 통해 그를 진리와 선 안에 굳게 세우십니다. 이 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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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3, 창1:31, '여섯째 날이 어떤 상태인지, 그리고 그 상태가 어떻게 완성되는지'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31) AC.63 그동안 주님은 계속해서 인간을 위하여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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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1:31)

 

AC.63

 

그동안 주님은 계속해서 인간을 위하여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시며, 여러 싸움을 통해 그를 진리와 선 안에 굳게 세우십니다. 이 싸움의 시간은 곧 주님께서 역사하시는 시간이며, 그래서 예언자들 가운데서는 거듭난 인간을 하나님의 손가락의 일(the work of the fingers of God)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리고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어 작용하기 전까지 주님은 쉬지 않으십니다. 일이 이만큼 진전되어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게 되면, 그 상태를 심히 좋았더라(very good)라고 합니다. 이는 그때에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시기 때문입니다. 여섯째 날의 끝에서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 선한 영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며, 인간은 하늘, 곧 천적 낙원으로 인도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다루겠습니다. Meanwhile the Lord continually fights for him against evils and falsities, and by combats confirms him in truth and good. The time of combat is the time of the Lord’s working; and therefore in the prophets the regenerate man is called the work of the fingers of God. Nor does he rest until love acts as principal; then the combat ceases. When the work has so far advanced that faith is conjoined with love, it is called “very good”; because the Lord then actuates him, as his likeness. At the end of the sixth day the evil spirits depart, and good spirits take their place, and the man is introduced into heaven, or into the celestial paradise; concerning which in the following chapter.

 

 

해설

 

이 글은 거듭남의 여섯째 날이 어떤 상태인지, 그리고 그 상태가 어떻게 완성되는지를 매우 역동적으로 묘사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거듭남의 전 과정에서 싸움의 주체가 인간이 아니라 주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싸움을 겪지만, 실제로 싸우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그 싸움의 현장에 서 있을 뿐이며, 주님은 그 안에서 끊임없이 역사하십니다.

 

싸움’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윤리적 갈등이나 심리적 고민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는 악과 거짓, 곧 인간 본성에 뿌리내린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진리와 선에 저항하는 영적 충돌을 의미합니다. 이 충돌이 반복되는 동안 인간은 진리와 선을 더 이상 개념으로만 붙잡지 않고, 삶의 실제 기준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래서 이 싸움들은 인간을 소모시키는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확증하는’ 과정입니다.

 

이 글에서 매우 인상적인 표현은, 이 싸움의 시간이 ‘주님의 역사하심의 시간’이라는 말입니다. 인간의 눈에는 혼란과 불안, 실패와 흔들림처럼 보이는 순간들이 사실은 주님께서 가장 적극적으로 일하시는 때라는 뜻이며, 그래서 예언자들이 거듭난 인간을 가리켜 ‘하나님의 손가락의 일’이라고 부르는 것이라고 합니다. 손가락은 세밀하고 정교한 작용을 상징합니다. 즉, 거듭남은 거칠고 강압적인 개입이 아니라, 가장 미세한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주님의 섭리입니다.

 

또 하나의 핵심은, 주님께서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어 작용할 때까지’ 쉬지 않으신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삶을 이끄는 중심 원리입니다. 신앙이 먼저 작동하던 단계에서는 진리가 인간을 이끌지만, 그 진리는 여전히 노력과 긴장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주가 되면, 선한 행위는 더 이상 억지로 행하는 일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흘러나옵니다. 이때 비로소 싸움은 멈춥니다.

 

그래서 신앙이 사랑과 결합했을 때, 그 상태를 ‘심히 좋았더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창세기 1장에서 여섯째 날에만 사용된 표현으로, 거듭남의 완성을 뜻합니다. 여기서 ‘좋았더라’라는 표현은 도덕적 평가가 아니라, 질서가 완성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인간 안에서 자유롭게 역사하실 수 있는 상태, 곧 인간이 주님의 닮음이 된 상태입니다.

 

마지막으로, 여섯째 날이 끝날 때 일어나는 변화는 매우 결정적입니다. 악한 영들이 떠나가고 선한 영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는 말은, 인간의 내적 환경이 근본적으로 바뀌었음을 뜻합니다. 더 이상 악이 주도권을 잡지 못하고, 선이 삶의 분위기를 지배합니다. 이때 인간은 ‘하늘(heaven), 곧 ‘천적 낙원(the celestial paradise)으로 인도됩니다. 이는 사후 세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 땅에서 시작되는 하늘의 삶을 의미합니다.

 

이 글은 결국 거듭남을 하나의 완성된 사건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싸움, 인내, 주님의 지속적인 역사, 그리고 마침내 찾아오는 평화까지를 하나의 유기적인 흐름으로 보여 줍니다. 여섯째 날은 끝이 아니라, 참된 안식으로 들어가기 직전의 문턱이며, 그 문을 여는 분은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심화

 

1.그때에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

 

 

AC.63, 심화 1, ‘그때에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

AC.63.심화 1. ‘그때에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 위 AC.63 본문, ‘일이 이만큼 진전되어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게 되면, 그 상태를 ‘심히 좋았더라’(very good)라고 합니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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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님은 쉬지 않으십니다

 

 

AC.63, 심화 2, ‘주님은 쉬지 않으십니다’

AC.63.심화 2. ‘주님은 쉬지 않으십니다’ 위 AC.63 본문 중, ‘그동안 주님은 계속해서 인간을 위하여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시며, 여러 싸움을 통해 그를 진리와 선 안에 굳게 세우십니다. 이 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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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악한 영들은 떠나가고

 

 

AC.63, 심화 3,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

AC.63.심화 3.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 위 AC.63 본문 중, ‘여섯째 날의 끝에서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 선한 영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며’ 말인데요, 여기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의 의미가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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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하늘, 곧 천적 낙원으로 인도됨

 

 

AC.63, 심화 4, ‘하늘, 곧 천적 낙원으로 인도됨’

AC.63.심화 4. ‘하늘, 곧 천적 낙원으로 인도됨’ 위 AC.63 본문 중, ‘인간은 하늘, 곧 천적 낙원으로 인도되는데’ 말인데요, 여기 ‘하늘, 곧 천적 낙원’의 의미가 뭔가요? 거듭남의 완성 단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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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3, 창1:31, 여섯째 날의 상태, '심히 좋았더라'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31) AC.63 그동안 주님은 계속해서 인간을 위하여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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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2, 창1:31, '여섯째 날'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31) AC.62 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시간들과 상태들은, 일반적으로도, 그리고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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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2.심화

 

5. 일곱 번째 상태에 이르는 이는 거의(scarcely) 없습니다

 

천적 인간’,  일곱째 날에 대한 위와 같은 생각은 AC.13, 거듭남 과정 중인 모든 사람이 이 상태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첫 번째 상태까지만 이르고, 어떤 이들은 두 번째 상태까지만, 또 다른 이들은 세 번째, 네 번째, 혹은 다섯 번째 상태에도 이르지만, 이렇게 여섯 번째 상태까지 이르는 이는 적고(few), 일곱 번째 상태에 이르는 이는 거의(scarcely) 없습니다.’라는 글 때문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AC.13의 ‘일곱째 상태에 이르는 이는 거의 없다(scarcely)’는 말씀은 ‘천적 인간은 극히 소수의 특별한 사람만 해당된다’는 뜻이라기보다, ‘인간의 거듭남이 그만큼 깊고 어려운 과정이며, 실제로 완전한 안식의 상태까지 이르는 경우가 드물다’는 현실적 진술입니다. 즉, ‘배제의 선언’이 아니라 ‘과정의 난이도에 대한 설명’입니다.

 

먼저 이 문장의 무게를 정확히 보셔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없다’라고 하지 않고 ‘거의 없다(scarcely)라고 합니다. 이 차이가 중요합니다. 이것은 문을 닫는 표현이 아니라, ‘열려 있지만, 매우 깊고 어려운 상태’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은 그 상태로 이끄시지만, 인간 쪽에서 거기까지 온전히 응답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AC 전체 흐름으로 보면 더 분명해집니다. 여섯째 상태까지는 ‘싸움과 선택의 과정’입니다. 여기까지도 사실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일곱째 상태는 ‘싸움이 끝나고, 사랑이 완전히 중심이 되어, 주님의 질서 안에서 자연스럽게 사는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 이르려면, 단순히 몇 가지를 고치는 수준이 아니라, 사람의 중심 자체가 바뀌어야 합니다. 그래서 ‘희귀하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균형이 하나 더 있습니다. AC.13에서 말하는 ‘일곱째 상태’는 매우 ‘강한 의미의 완성’을 가리킵니다. 즉, 거의 흔들림이 없는, 깊이 자리 잡은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조금이라도 평안을 경험하면 일곱째인가?’처럼 낮춰 보면 혼선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완전히 정착된 안식 상태’를 말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히 ‘드물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제 목사님 질문과 연결하면 핵심이 또렷해집니다. ‘그래서 천적 인간이 극히 적은 것 아닌가?’—부분적으로 맞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처음부터 정해진 소수’로 이해하면 균형이 깨집니다. AC의 흐름에서는 언제나 ‘열려 있음’이 유지됩니다. 누구든지 그 길로 인도받고 있습니다. 다만 실제로 그 깊이까지 가는 경우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꼭 보셔야 할 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적다(few), 거의 없다(scarcely)’는 표현은 종종 ‘영적 질서의 기준’에서 말한 것이지, 우리가 통계적으로 셀 수 있는 숫자 개념과는 조금 다릅니다. 즉, ‘인간의 상태가 그만큼 깊은 변화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이걸 목회적으로 풀어보면 오히려 방향이 분명해집니다. ‘대부분은 여기까지밖에 못 갑니다’라는 낙심의 메시지가 아니라, ‘이 길은 깊고 긴 길이지만, 주님이 끝까지 이끄신다’는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실제 목회 현장에서는 ‘일곱째 상태를 완전히 이룬 사람’을 찾기보다, ‘지금 이 사람이 그 방향으로 한 걸음이라도 나아가고 있는가’를 보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그래서 전체를 이렇게 정리하시는 것이 가장 균형 잡힙니다. ‘일곱째 상태, 곧 천적 상태는 실제로 깊고 어려운 단계이기 때문에 드물게 보이지만, 그것은 닫힌 길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인도받고 있는 방향이며, 각 사람은 그 길 위에서 자기 정도만큼 그 안식에 참여하게 된다.’

 

한 줄로 정리하면, ‘AC.13 거의 없다는 표현은 천적 상태가 배제된 소수의 영역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만큼 깊고 완전한 거듭남의 상태가 실제로는 드물게 성취된다는 현실적 진술입니다.’

 

 

 

AC.62, 창1:31, '여섯째 날'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31) AC.62 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시간들과 상태들은, 일반적으로도, 그리고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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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2, 심화 4, ‘천적 인간은 상대적으로 무척 적겠네요?’

AC.62.심화 4. ‘천적 인간은 상대적으로 무척 적겠네요?’ 그러면... 천적 인간은 상대적으로 무척 적겠어요. 천성적으로 ‘사랑스런’ 사람, 처음부터 사랑으로 출발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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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천적 인간은 상대적으로 무척 적겠네요?

 

그러면... 천적 인간은 상대적으로 무척 적겠어요. 천성적으로 사랑스런 사람, 처음부터 사랑으로 출발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싶어서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목사님 생각처럼 천적 인간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인식은 어느 정도 맞지만, 동시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극단적으로 희귀한 존재로만 볼 필요는 없다’가 더 정확한 균형입니다. 왜냐하면 천적’이라는 것을 흔히 말하는 성격 좋은 사람’이나 착한 사람’으로 오해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먼저 중요한 오해부터 풀어야 합니다. ‘천적 인간 = 타고나기를 사랑스러운 사람’은 아닙니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온순함, 다정함, 눈물 많음, 배려심 같은 것은 자연적 애정일 수도 있고, 영적 과정 중의 상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적’은 그런 성격적 특성이 아니라, ‘의지의 가장 깊은 중심이 주님과 직접 결합된 상태’,  선 자체를 사랑하는 상태’입니다. 이건 단순한 기질 문제가 아니라 거듭남의 깊이’에 관한 것입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부드럽지 않은 사람도 천적일 수 있고, 반대로 매우 따뜻하고 착해 보이는 사람도 아직 자연적 수준에 머물러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점을 먼저 분명히 하셔야 천적 인간은 극소수일 것 같다’는 느낌이 조금 정리됩니다.

 

그 다음으로, 왜 천적 인간이 상대적으로 적게 느껴지느냐를 보면, 이유는 단순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진리를 통해 자라기 때문입니다. 즉, ‘이게 옳다’를 배우고, 그걸 따라 살면서 점점 변화됩니다. 이것이 영적 길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도 대부분은 이 길을 걷습니다. 설교도, 교훈도, 교육도 대부분 이 구조를 전제로 합니다.

 

반면 천적 상태는 사랑이 먼저’인 상태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감정이 따뜻한 것이 아니라, ‘무엇이 옳은지 따지기 전에 이미 선을 사랑하는 상태’입니다. 이런 상태는 인간이 타락 이후 일반적으로 잃어버린 상태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드물게 느껴지는 것이 맞습니다. 스베덴보리도 태고교회를 바로 이 천적 상태’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반전이 있습니다. ‘천적 인간이 적다’는 것을 특별한 몇 사람만의 영역’으로 이해하면, 오히려 AC의 흐름과 어긋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모든 사람을 결국 사랑이 중심이 되는 상태’로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사랑’이 어떤 구조 위에서 형성되느냐가 다를 뿐입니다. 그래서 영적 인간도 결국 사랑에 이르지만, 그것은 진리를 통해 형성된 사랑’입니다.

 

이걸 목회적으로 풀어보면 훨씬 편안해집니다. 어떤 성도는 계속 이게 맞나요?’를 묻고, 고민하고, 분별하며 자랍니다. 또 어떤 성도는 복잡한 설명 없이도 자연스럽게 선한 방향을 택합니다. 둘은 다른 길을 걷고 있지만, 둘 다 주님께로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누가 더 높다’가 아니라 각 사람이 어떤 길 위에 있는가’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목사님 질문에 가장 정확한 답은 이렇게 정리됩니다. ‘천적 인간은 상대적으로 적게 느껴지는 것이 맞지만, 그것은 소수 엘리트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보통 진리를 통해 거듭나는 구조 때문이며, 모든 사람은 각자의 길 위에서 결국 사랑 중심의 상태로 인도됩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천적 인간은 드물게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은 특별한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거듭남의 방식의 차이이며, 모든 사람은 자기 방식 안에서 사랑 중심의 완성으로 인도됩니다.’

 

 

 

AC.62, 심화 5, ‘일곱 번째 상태에 이르는 이는 거의(scarcely)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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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2, 심화 3, ‘변화의 가능성, 완성의 방식’

AC.62.심화 3. ‘변화의 가능성, 완성의 방식’ 음... 위 설명은 좀 서로 충돌하는 것 같아요. ‘사랑이 중심이 되는 상태까지는 갈 수 있지만, 그 구조와 본질은 여전히 영적 방식 위에 있다’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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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변화의 가능성, 완성의 방식

 

... 위 설명은 좀 서로 충돌하는 것 같아요. 사랑이 중심이 되는 상태까지는 갈 수 있지만, 그 구조와 본질은 여전히 영적 방식 위에 있다 최종 상태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가 말이죠.

 

 

결론부터 분명히 말씀드리면, 목사님께서 느끼신 대로 그 두 문장은 그대로 두면 충돌처럼 들리는 것이 맞습니다. 다만 이것은 내용의 모순이라기보다 ‘두 층위(가능성 vs 최종 구조)를 한 문장 안에 섞어 말하면서 생긴 혼선’입니다. 이걸 분리해서 보면 깔끔하게 정리됩니다. 핵심은 이렇습니다. ‘사람은 변화될 수 있는 자유는 열려 있지만, 그 변화는 아무 형태로나 무한히 바뀌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구조 안에서 완성된다’입니다.

 

먼저 ‘최종 상태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가리키는 층위부터 보겠습니다. 이것은 ‘사람은 처음 상태에 묶여 있지 않고, 선택과 거듭남을 통해 실제로 변화된다’는 뜻입니다. 즉, 처음에 자연적이었던 사람이 영적이 될 수 있고, 영적 인간도 더 깊이 사랑 중심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말은 맞습니다. 주님은 사람을 출발 상태에 묶어 두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두 번째 문장, ‘사랑이 중심이 되는 상태까지는 갈 수 있지만, 그 구조와 본질은 여전히 영적 방식 위에 있다’는 전혀 다른 층위를 말합니다. 이것은 ‘그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거듭났는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영적 인간은 ‘진리를 통해 사랑에 이르는 구조’로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그가 아무리 깊이 사랑에 이르더라도, 그 사랑은 ‘진리를 통해 형성된 사랑’입니다. 반면 천적 인간은 처음부터 ‘사랑이 먼저’인 구조입니다.

 

그래서 이 둘을 정확히 나누면 이렇게 됩니다. ‘변화의 가능성’ 차원에서는 열려 있습니다. 누구든지 더 깊은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형성된 구조’ 차원에서는 차이가 유지됩니다. 즉, 영적 인간이 사랑에 이르더라도 그는 ‘영적 방식으로 사랑하는 사람’이고, 천적 인간은 ‘천적 방식으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걸 비유로 풀어보면 더 또렷합니다. 두 사람이 같은 ‘평안’에 이르렀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한 사람은 오랜 고민과 분별, 선택의 과정을 거쳐 평안에 이르렀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처음부터 그 평안에 자연스럽게 들어가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둘 다 평안하지만, 그 평안의 ‘형성 방식’은 다릅니다. 이 차이가 바로 영적과 천적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영적 사람이 천적이 될 수 없는가?’라는 질문은 이렇게 바꾸는 것이 정확합니다. ‘영적 사람도 사랑 중심의 상태에 이를 수 있는가?’—예,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천적 인간의 사랑과 동일한 구조인가?’—아니오, 형성 방식이 다릅니다.

 

이렇게 보시면 두 문장이 충돌하지 않습니다. 하나는 ‘열려 있음(자유와 변화 가능성)’을 말하고 있고, 다른 하나는 ‘형성된 질서(구조의 고유성)’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가장 정확한 정리는 이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 중심의 상태로 나아갈 수 있지만, 그 사랑은 각자가 거듭난 방식에 따라 영적 구조 안에서 혹은 천적 구조 안에서 완성된다.’

 

한 줄로 정리하면, ‘변화의 가능성은 열려 있지만, 완성의 방식은 각자의 구조에 따라 다르게 유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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