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스베덴보리(1688-1772, 스웨덴) 생전에 창세기, 출애굽기를 친히 풀어 주셨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당시 관례처럼 자신의 글에 번호들을 매겼는데, 창세기 50장, 출애굽기 40장까지 글 번호가 10,837번까지 갔으며, 걸린 기간은 1749년에서 1756년이고, 라틴어로 기록했습니다. 이 저작의 이름은 ‘Arcana Coelestia’, 역시 라틴어이며, 천계비의(天界秘義)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습니다. 약어로는 AC를 사용합니다.

 

그는 이 주석을 쓸 때, 곁에 주님이 계셔서 딕테이트하시면, 자기는 그저 받아적기만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마치 오늘날의 프린터 역할만 했다는 말이지요. 그는 성경 외에 그 어떤 세상 책도 참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저는 여러 해 전부터 스베덴보리의 여러 Writings를 작업 중인데, 특별히 그 메인은 이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입니다. 위 라틴 제목을 저는 이렇게 읽습니다.

 

우리에게 친숙한 창세기는 다분히 그 기록된 겉 글자의 뜻인데요, 그러니까 창세기 1장 천지창조의 기록을 글자 그대로 하나님이 천지를 육 일 만에 창조하셨고, 인류 첫 번째 인간은 아담이다라는 식으로 읽는 것입니다. 기독교 전체가 이렇게 읽지요.

 

그러나 이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어 보시면 단번에 느끼시겠지만, 우리가 알던 창세기, 출애굽기하고는 많이, 아니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창세기 1장은 한 사람의 거듭남 전 과정을 여섯 단계로 설명하고 있는, 그리고 아담은 인류 최초의 교회로 설명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닫힌 마음으로 읽으시면, 무척 당황하시거나 화가 나실 겁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로 읽는 걸 ‘속뜻으로 읽는다’ 하고, 기존처럼 읽는 걸  ‘겉뜻으로 읽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영과 육으로 되어 있듯, 말씀도 그렇게 되어 있는 걸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사람은 영과 육이 하나 되어 살듯, 말씀 역시 속뜻과 겉뜻이 하나 되어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건 어느 게 옳다, 그르다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자신의 몸, 즉 육은 친숙, 익숙하지만, 자신의 영은 무척 낯설듯, 우리 중에 아직 자기 영을 본 사람은 없듯이 말입니다, 그런 식으로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겉뜻이라는 그릇 안에 속뜻이라는 내용이 담긴 것이지요!

 

그러니까, 도저히 속뜻으로는 못 읽겠다, 너무 어렵고, 거부감이 심하게 든다 하시면, 겉뜻으로만 읽으며, 신앙생활 하시면 됩니다. 주님은 놀랍게도 겉뜻이라는 그릇만으로도 얼마든지 그 속 사람이 천국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속뜻이 와닿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부디 겉 글자에 담아놓으신 주님의 신성을 실천, 체어리티(charity)의 삶을 사시면 됩니다.

 

그럼에도 굳이 이 책을 번역, 속뜻으로 주님 말씀 읽는 걸 소개하는 이유는, 그 유익이 헤아릴 수 없이 크기 때문이며, 이것이 천국 천사들이 말씀 읽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혹시 이 속뜻으로 푼 창세기가 이해가 되시고, 와닿으시면 정말 복 받으신 겁니다. 그런 분이 만 명 중 한 명도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친히 풀어 주셨다는 사실에 닻을 내리시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도우심, 곧 빛을 비추어 주시기를 구하면서 읽으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주님이 보내주신 천사들의 도우심이 있으실 것입니다. 아멘, 할렐루야!

 

우선 창세기 1장만 올립니다.

창1, AC.1-66.pdf
1.49MB

 

아래 링크는 스베덴보리라는 사람에 관한 링크이며, 그 아래는 그의 저작들(Writings)에 관한 링크입니다.

 

 

에마누엘 스베덴보리(Emanuel Swendenborg, 1688-1772)

다음은 제가 번역하는 책들의 저자에 대한 간단한 소개입니다. 에마누엘 스베덴보리는 1688년,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출생, 웁살라대학에서 언어학, 수학, 광물학, 천문학, 생리학, 신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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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의 저서들(Writings)

다음은 스베덴보리의 저서목록(Writings)입니다. 인류사에 존재했던 사람 중 가장 지능이 높은 사람으로 기네스 북에는 밀턴, 괴테 그리고 스베덴보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 생전에 가장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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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래는 스베덴보리가 알려준, 성경 66권 중 어떤 성경이 말씀’(The Word)인가 하는 내용입니다.

 

 

성경 66권 중 말씀(The Word)은...

성경 66권 중에서 속뜻(internal sense, inner meaning)이 있는 성경, 곧 그 안에 주님의 아르카나(arcana, 秘義, 말씀의 내적 의미)가 담긴 성경을 ‘말씀’(The Word, 총 34권)이라 하며, 스베덴보리에 의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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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거에 관하여 (2024/12/18)

 

주님은 시대의 끝, 종말을 예언하실 때, 신앙이 없거나 사랑 없는 신앙을 또한 ‘겨울(winter)로 비유하셨습니다. 마가복음입니다. No faith and faith without love are also compared by the Lord to “winter,” where he foretells the consummation of the age, in Mark:

 

18이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 19이는 그날들이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초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막13:18-19) Pray ye that your flight be not in the winter, for those shall be days of affliction (Mark 13:18–19).

 

여기서 ‘이 일(Flight, 비행, 들림, 휴거)은 마지막 때를, 그리고 모든 사람이 자기가 죽는 때를 의미합니다. ‘겨울(Winter)은 사랑이 결핍된 삶을, ‘환난의 날(the day of affliction)은 저세상 삶의 끔찍한 상태를 말합니다. Flight” means the last time, and also that of every man when he dies. “Winter” is a life destitute of love; the “day of affliction” is its miserable state in the other life. (AC.34)

 

 

※ 휴거는 특히 개신교인들에게 아주 중요한 사건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겉 글자의 뜻 그대로 이해를 했기 때문인데요, 같은 본문의 마태복음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마24:31)

 

AC.4060번 글을 보면, 이 말씀은 새 교회의 일어남을 의미합니다. ‘택하신 자들’은 사랑의 선, 신앙의 선 안에 있는 사람들을, ‘사방에서’는 선과 진리의 모든 상태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는 교회의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들을 의미합니다. 즉 휴거란, 종말의 때임에도 불구, 여전히 사랑과 신앙의 선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일으켜 주님의 새 교회 세우시는 걸 의미하지, 우리가 아는 것처럼 사람들이 갑자기 공중으로 들림 받고 하는 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태고교회 종말의 때에, 그런 암흑과도 같은 상황에서도 노아라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 주님 신앙을 이어가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즉, 그들을 리메인스처럼 보관하셨다가 나중에 쓰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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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주님, 이 대통령 탄핵 정국을 수습하여 주시옵소서! (2024/12/14)

 

먼저 주님을 사랑하는, 그래서 주께 속한 모든 자녀를 주님, 안전하게 지켜주시고, 일곱 배나 되는 진리의 빛을 더하사 천국 천사들 같은 판단력 안에 머무르게 하여 주시옵소서!

 

석연치 않은 삶을 사는 자들 안에 와있는 저 악한 영들과 저들에게 매여 함께 저 광란의 칼춤을 추며, 함께 미쳐 돌아가는 사람들의 저 광기를 주님, 주의 천사들을 통해 수습하여 주시옵소서!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김은경 역에서 인용

 

영계에서의 천사들의 능력은 너무도 커서 그에 대해 내가 목격한 것을 모두 얘기한다면 믿기 어려울 것이다. 영계에서 신적 질서에 어긋나 제거해야 하는 어떤 장애물이든지 천사들은 단지 한 번의 의도함과 응시함으로(merely by an effort of the will and a look) 쫓아내거나 전복한다. 나는 악인들이 점령한 산들이 그렇게 내던져지고 파괴되는 것과, 때로는 지진이 난 듯 끝에서 끝까지 흔들리는 것을 보았으며, 암벽이 밑바닥까지 갈라져 그 위에 있던 악인들을 삼키는 것도 보았다. 또 나는 천사들이 수십만의 악한 영들을 흩어 지옥으로 내던져지는 것도 보았다.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악한 영들은 천사를 당할 수 없고, 술책과 교활함과 무리 지음도 허사가 된다. 천사들은 그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즉시 쫓아버리기 때문이다.영계에서 천사들은 이와 같은 능력이 있다. 성서를 보면 천사들은 허락되었을 때는 자연계에서도 이런 힘을 나타낸 것을 알 수 있다. 군대 전체를 쳐부수거나 전염병을 내려 칠만 명을 멸했다고 한 구절 등이 그 예다.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 (왕하19:35)

 

15이에 여호와께서 그 아침부터 정하신 때까지 전염병을 이스라엘에게 내리시니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백성의 죽은 자가 칠만 명이라 16천사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그의 손을 들어 멸하려 하더니 여호와께서 이 재앙 내리심을 뉘우치사 백성을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하시니 여호와의 사자가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 곁에 있는지라 (삼하24:15-16)(HH.229)

 

 

마치 무저갱이 열린 듯 지옥의 모든 악과 거짓의 기운이 우든 좌든, 여든 야든, 보수든 진보, 빨갱이든 가리지 않고, 누구든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틈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거침없이 쏟아져 들어가 그를 초토화하고 있습니다.

 

이런 지옥의 공격에, 오래도록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명확하게 아는 사람이 아니면, 그리고 천국을 오랫동안 사모하여 이 세상 그 어떤 걸로도 도저히 빈틈을 만들어 낼 수 없는 사람이 아니면, 요즘 저 광기 앞에 배겨날 사람이 없습니다.

 

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주의 날개 아래 피하오니 주님, 저희를 지키시며, 안전하게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제발 사법부 저 대법 산하, 그리고 헌재 판사들에게 역시 일곱 배의 빛을 더하사 하늘에 저들의 판관이 있음을 시인, 두려워하게, 그래서 의롭고 정의로운 판결을 내리게 하옵소서! 절대로 세상 여론, 특히 조중동의 신문 기사나 여론조사에 휘둘리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비록 각 사람 안에서 부추기는 자들은 지옥에서 온 악한 영들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악이요, 거짓임을 알고도 자기 사랑에 함몰된 나머지 악령들과 함께 즐겁게 악을 행한 자들의 모든 행위에 벌을 주시고, 그 모든 결과가 본인에게 돌아가게 하옵소서!

 

이것은 주의 정하신 보응의 법칙(the law of retaliation), 곧 심은 대로 거두고, 행한 대로 갚는, 그리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주께서 정하신 신적 질서(Divine Order)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주님을 사랑한 모든 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혹시 순진한 마음에, 그리고 단순한 사람들, 그러니까 무슨 무료 아이돌 음악회 한다 하여, 그리고 그냥 재미로 저들의 구호를 따라 외치는 등 잠시 미혹된 사람들은 주님의 빛이 비칠 때, 정신들을 차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윤석열 대통령의 심령을 붙드사 요동치 않게 하시고, 그가 헌재 앞에 서서 자신을 변호할 때에 요셉 같고, 다니엘 같게 하옵소서! 그가 대답할 말이 사람의 말이 아니라 주님으로 말미암는 주의 권능이 실린 말이 되게 하시오며, 그에게 친히 대답할 말을 주시옵소서!

 

우리의 가장 큰 적은 자기 사랑(the love of self)입니다. 우리가 잠시라도 주님으로부터 눈을 돌려 자기를 바라보는 순간, 빈틈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의 자녀들은 주님 사랑(the love of the Lord)으로, 아직 주를 모르는 사람들은 나라 사랑으로, 그리고 ‘올바른 일을 그것이 올바르기 때문에 하는, 그런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 주님, 저희 대한민국, 대통령 탄핵 정국을 수습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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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1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2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3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4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7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8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10(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11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12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눅24:1-12)

 

 

사람의 생명에 속한 모든 것은 내적인 것에서 외적인 것으로 차례로 흘러들어온다. 외적인 것은 호감이 느껴지는 기억의 지식과 가장 바깥쪽의 것인 감각에 속한 것인데, 감각에 속한 것이란,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만짐으로써 세상과 소통하는 것이다. 외적인 것에 내적인 것들이 머무는 까닭은 내적인 것의 흐름이 거기서 끝나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로 사람이 걸치는 피복이나 옷으로 나타내어지는 것은 바로 이 외적인 것을 말한다. (천국의 비밀 9216:2, 이순철 역) It is the same with all things that belong to man’s very life, as with those which relate to his understanding, and those which relate to his will. These also follow in order from interior to exterior things. Exterior things are memory-knowledges with their pleasant feelings; and outermost things are those of the senses, which communicate with the world by the sight, the hearing, the taste, the smell, and the touch. Upon these the interior things rest, for in these they terminate. These are the things which are signified in the spiritual sense by the “covering” or “garment wherein he may sleep.” (AC.9216:2)

 

 

다음 주(22일)가 주님 오신 성탄인데 그 전 주인 오늘(15일) 주님의 부활 본문을 만나니 이 또한 새롭습니다.

 

오늘부터 누가복음 24장입니다. 누가복음 마지막 장입니다. 그전에 매일예배 본문으로 하다가 작년 5월, 9장부터 주일예배 본문으로 하였으니, 만일 처음부터 주일예배 본문으로 하였으면 만 3년 정도가 걸리는 대장정이 될 뻔했습니다. 이 귀한 누가복음 속뜻 강해의 길을 먼저 걸으신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님, 지금은 원로 목사님이 되셨지요, 목사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목사님의 이런 원본 설교가 있었기에, 그리고 사용 허락이 있었기에 저 같은 사람이 용기를 내어 살필 수 있었습니다. 거듭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네, 그럼 시작합니다.

 

주님은 왜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받고 죽었다 다시 사셨을까요? 그와 관련해 스베덴보리 저,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9216번 글 2항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의 생명에 속한 모든 것은 내적인 것에서 외적인 것으로 차례로 흘러들어온다... 외적인 것에 내적인 것들이 머무는 까닭은 내적인 것의 흐름이 거기서 끝나기 때문이다.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여러 가지로 이해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가장 내적 존재인 주님은 가장 외적 존재인 인간에게로 오셔서 영원히 그와 함께 살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섭리입니다. 영원 전부터 계신 무한하신 주님이 당신의 피조물인 유한한 인간과 영원히 함께 살기를 원하신다는 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은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실 정도로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지극히 높은 천국으로부터 지극히 낮은 땅으로 내려오셔서 모진 고난을 이기시고, 신성하고 완전한 진리가 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진리를 통해서만 인간은 주님을 바르게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은 완전하고 신성한 진리로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 만나는 사람들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습니다.

 

1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새벽은 영적으로는 주님과 주님의 나라가 임하는 때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부활하신 주님이 완전한 진리로 인간 앞에 모습을 드러내시는 때이며, 동시에 그 진리를 가지고 낡고 부패한 교회를 심판, 새로운 교회를 여시는 때입니다. 그때가 새벽입니다.

 

※ 여자들이 이렇게 안식일이 끝나자마자 새벽같이 무덤으로 찾아간 이유는, 주님 운명하신 첫날, 주님을 장사할 때, 바로 코앞이 안식일의 시작이라 부랴부랴 서두르느라 미처 주님 시신에 향품 바를 새도 없었기 때문이고, 또 관습적으로 장례 때 죽은 시신에 향품 바르는 일은 오직 여자들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여자들이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여자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진리를 사랑하여 참된 진리이신 주님을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심판 때 구원받을 사람들이며, 주님이 세우시는 새 교회에 참여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자들은 부활하신, 그래서 살아계신 주님이 아니라 주님의 시신을 만나러 갑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있는 진리가 죽은 자의 시신처럼 아직 생명 없는 진리라는 반증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시신은 죽은 진리, 즉 생명 없는, 말씀의 지식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처음 진리를 받아들일 때의 진리는 생명 없는 진리입니다. 그 이유는 처음에는 진리를 믿기만 할 뿐 아직 행동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자들이 향품을 가지고 주님의 시신에 바르는 것은 죽은 것 같은 진리에 생명을 불어넣는 최초의 노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향품은 내적 진리를 획득하기 전, 신앙인들이 소유하는 자연적인 진리, 이를테면 십계명의 문자적인 가르침 같은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2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3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여자들이 무덤에 갔을 때, 무덤을 막았던 돌이 옮겨져 있었고, 그 안에는 시신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덤을 막은 돌은 뭘까요? 신앙인들의 내면에서 진리가 살아나는 것을 방해하는, 여러 가지 자아의 거짓을 뜻합니다. 예를 들면, 진리를 안다는 자부심이나 진리에 대한 잘못된 추론, 또는 그 밖에 이기적인 악과 그것에서 비롯된 거짓들입니다. 우리 안에 그런 것들이 있는 동안에는 진리는 무덤 밖으로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처음에는 자연적 진리로, 그리고 다음에는 내적 진리로 말씀을 이해하고 지키려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에 의해 진리를 방해하던 거짓들이 물러갑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자아의 거짓을 물리칠 수 없고, 심지어 어떤 게 거짓인지도 잘 모릅니다. 거짓들은 마치 칡넝쿨이 나무를 감아 옴짝달싹 못 하게 하는 것처럼 진리가 자라는 걸 가로막습니다. 주님만이 그것들을 잘라내 치워주실 수 있습니다. 그때 죽었던 진리가 살아납니다. 바로 그런 상태가 무덤을 막았던 돌이 옮겨지는 것이고, 주님이 무덤에서 살아나시는 것입니다.

 

무덤을 막았던 돌이 옮겨진 걸 보고 들어갔는데 정작 있어야 할 주님의 시신이 보이지 않자 여자들은 어쩔 줄을 몰라 합니다. 그 모습, 그 상황을 4절과 5절에선 이렇게 전합니다.

 

4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한글 성경에는 여자들이 근심했다고 하지만, 영어 성경에는 perplex, 즉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공황 상태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셨는데 왜 여인들은 기뻐하는 대신 공황 상태에 빠졌을까요? 첫째는, 신앙인의 내면에서 진리가 살아나려면 자아에 속한 게 죽어야 하는데, 그때 모든 걸 잃은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진리가 살아났다 해도 처음 한동안은 진리가 나를 주장한다는 걸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 앞에 바로 나타나시지 않은 것과 같은 일일 것입니다. 한마디로, 내면에서 진리가 살아날 때, 신앙인들은 역설적으로 어디에도 기댈 진리가 없는 것 같은 상실감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인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것입니다.

 

※ 제가 그랬습니다. 저는 소위 모태신앙이라는 사람으로, 유아세례라는 것을 받은, 정말 나이 육십 되기까지 태어나 교회 밖 세상에 있어 본 적이 없는,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평범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만, 그러나 칠 년 전 처음 스베덴보리를 접하여 이 새로운 계시를 받아들일 땐 정말이지 얼마나 두려웠는지 모릅니다. 지난 세월 저를 떠받치고 있던 모든 신앙과 종교적 신념이 한꺼번에 떠나가는 듯했기 때문입니다. 그건 마치 고3 때 갑자기 어머니를 교통사고로 잃었던 트라우마에 버금가는 일이었습니다.

 

※ 위 교회 밖 세상에 있어 본 적이 없는’이라는 말은, 죄를 지어본 적이 없다는 말이 절대 아닙니다. ㅎㅎㅎ

 

그때 그들 곁에 빛나는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두 사람은 누굴까요?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살아있는 진리이신 주님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입은 빛나는 옷은 부활하신 주님에게서 나오는 가장 밝고 환한, 완전한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두 사람이 나타났다고 했을까요? 부활하신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리는 선만 있고 진리는 없거나, 진리만 있고 선은 없는 그런 진리가 아니라, 선과 진리가 함께 있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천사가 여인들에게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여인들은 전에 주님이 고난을 받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실 거라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으나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신앙이 아직 자연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직접 눈으로 봐야만 믿는 그런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천사들을 보고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댑니다. 주님이 나타나셨을 때, 사람들이 두려워 떨거나 죽은 자처럼 되었다는 것은 말씀의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계시록을 쓴 요한도 주님의 발 앞에 죽은 자처럼 되었다고 했습니다. 다니엘도 그랬지요. 신앙인들이 그렇게 두려워하는 것은, 내면에서 어떤 영적 변화가 일어날 때 느끼는 불안과 공포를 의미합니다. 주님의 신성이 사람 안으로 임하실 때 인간이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자들이 느끼는 두려움은 일종의 경건한 두려움입니다. 그러면 여자들에게 일어난 내면의 변화란 어떤 것입니까? 그에게서 죽은 진리가 살아나는 것이며, 그로 인해 자연적 신앙이 영적 신앙으로 한 단계 올라서는 것입니다.

 

7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8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10(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11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여자들이 마침내 주님이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것을 기억해 내고는 무덤에서 돌아가 그 모든 것을 사도들에게 알렸습니다. 무덤은 속뜻으로는 그들이 죽은 진리를 만나던 곳이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 사용하던 곳입니다. 이를테면 진리의 지식이 보관된 내면의 기억 장소와 같은 곳이죠. 그러나 진리가 완전히 살아날 때, 이제는 애써 그곳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살아있는 진리, 살아계신 주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면서 그때그때 필요한 진리를 공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14:26)

 

※ 이것이 퍼셉션(perception)입니다. 천사들이 천국에서 주님과 커뮤니케이션하는 방식인데, 그 내면이 열려있던 태고교회도 바로 지상에서 이 방식으로 주님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즉 주님의 뜻과 인도하심을 공부를 통해서, 학습해서 아는 게 아닌, 내가 묻거나 무슨 의문을 품을 때 내적으로 바로 답이 오는 그런 것입니다. 가령, 창세기에 나오는

 

8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창3:8-9)

 

와 같은 커뮤니케이션이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의 딕테이트(dictate)를 나의 내면, 곧 내 영이 듣는, 가장 고급하고 고차원적인 커뮤니케이션입니다. //

 

그것이 부활하신 주님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주님이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들은 사도들은 여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 역시 아직은 자연적 신앙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봐야만 믿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베드로가 주님의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12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베드로란 이름의 속뜻은 진리에 대한 순종입니다. 실제로 베드로의 성품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는 급히 무덤으로 달려가 몸을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봤습니다. 무덤으로 달려가는 것은 진리에 대한 뜨거운 애정을 뜻합니다. 그리고 몸을 구부려 들여다보는 건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 안에 있는 진리들을 돌아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 또는 말씀을 대할 때는 언제나 몸을 낮춰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진리가 보이고, 또한 죽었던 진리가 살아나는 것이 보입니다.

 

그렇다면 그때 베드로의 눈에 들어온 것은 뭘까요? 주님의 시신이 아니라 세마포였습니다. 세마포의 속뜻은 주님이 주시는 내적 진리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본 진리는 이전에 알던, 생명 없는 지식이 아니라 내적 진리였던 것입니다. 그제서야 그는 자신에게 있던 진리들이 살아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면에서 진리가 살아나는 건 눈먼 자가 눈을 뜨는 것 이상의 기적입니다. 흔히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진리가 살아나면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던 기질이 바뀝니다. 그것은 주님만이 이루실 수 있는 기적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 모든 일을 놀랍게 여겼다고 합니다. 놀랍게 여겼다는 건 기적과 같은 일이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여자들은 향품으로 표상되는 자연적 진리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시작합니다. 자연적 진리란 말씀의 문자로 표현된 진리이며, 내적 진리를 담기 위한 그릇 역할을 하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그 자체로는 아직 완전한 진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자연적 진리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점차 그 안에 내적 진리를 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는 까닭은 내적 진리가 자연적 그릇인 글자 안에 담길 때, 온전하고 힘 있는 진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지옥을 이기신 주님의 능력이 그 안에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세상에 계실 때 완전하지 않은 진리의 상태에서 지옥의 시험을 완전히 이기시고, 신성한 진리(Divine Truth) 자체가 되셨습니다. 만약 주님이 처음부터 신성한 진리 자체이셨다면, 주님은 시험을 당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피조물인 지옥이 감히 창조주이신 주님을 대적하거나 도발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에는 시험을 당하는 주님의 진리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고, 인자, 곧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완전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께 기대어 자신에게 있는 진리를 매일 살려야 하고, 더 내적인 진리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온전히 거듭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은혜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성도, 그리고 이들과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 다음 주일(22일)은 성탄 주일로, 그리고 성탄절인 25일(수)은 성탄 예배로 드립니다. 시간은 오전 10시 반입니다. 그리고 올해의 마지막 주일인 29일은 송년 예배로, 2025년 첫 주일인 1월 5일은 신년 예배로 드립니다. 이 송년 예배와 신년 예배는 각각 성찬이 있으며, 올해부터는 밤늦은 자정에 드리는 송구영신 예배를 쉬겠습니다. 나중에 교회 규모가 커지고, 또 특별히 많은 요청이 있으면, 그때 가서 재개를 고려하겠습니다. 누가복음 이 24장 속뜻 강해는 2025년 1월 둘째 주일인 1월 12일 주일부터 계속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호6:2)

 

아멘

 

2023-04-09(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12-15(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4-12-15(D1)-주일예배(2574, 눅24,1-12),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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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12-15(D1)-주일예배(2574, 눅24,1-12),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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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마19:12)

 

천국의 결혼(the heavenly marriage)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고자’(鼓子, eunuch)라 합니다. ‘어머니의 태로부터 된’(born from the womb) 고자들은 천적 천사들(the celestial angels)을 닮았고, ‘사람이 만든’(made of men) 고자들은 영적 천사들(the spiritual angels)과 같으며, ‘스스로 된’(made so by themselves) 고자들은 천사 같은 영들(angelic spirits)과 같은데, 그 행위가 체어리티(charity)로라기보다는 순종(obedience)으로가 더 두드러진 사람들입니다. (AC.394)

 

천국의 결혼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고자’인 이유는, 영적 고자, 즉 이들은 천국과 결혼 상태에 있기 위해, 지상에서 자칫 있을 수 있는 성적(性的) 문란의 악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필요 이상의 성적 호기심으로부터 물러나 다른 사람들이 볼 때, 혹시 저 사람, 성적으로 무슨 문제 있는 거 아냐? 할 정도로 자기 자신을 지킨, 그러니까 성적으로 건강한 금욕을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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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한민국 상황에서 천사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2024/12/8)

 

다음은 책, ‘천국과 지옥’ 26장, ‘천국 천사들의 능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영계에서의 천사들의 능력은 너무도 커서 그에 대해 내가 목격한 것을 모두 얘기한다면 믿기 어려울 것이다. 영계에서 신적 질서에 어긋나 제거해야 하는 어떤 장애물이든지 천사들은 단지 한 번의 의도함과 응시함으로(merely by an effort of the will and a look) 쫓아내거나 전복한다. 나는 악인들이 점령한 산들이 그렇게 내던져지고 파괴되는 것과, 때로는 지진이 난 듯 끝에서 끝까지 흔들리는 것을 보았으며, 암벽이 밑바닥까지 갈라져 그 위에 있던 악인들을 삼키는 것도 보았다. 또 나는 천사들이 수십만의 악한 영들을 흩어 지옥으로 내던져지는 것도 보았다.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악한 영들은 천사를 당할 수 없고, 술책과 교활함과 무리지음도 허사가 된다. 천사들은 그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즉시 쫓아버리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바빌론의 멸망을 다룬 책에서 자세히 다루었다.) 영계에서 천사들은 이와 같은 능력이 있다. 성서를 보면 천사들은 허락되었을 때는 자연계에서도 이런 힘을 나타낸 것을 알 수 있다. 군대 전체를 쳐부수거나 전염병을 내려 칠만 명을 멸했다고 한 구절 등이 그 예다.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 (왕하19:35)

 

15이에 여호와께서 그 아침부터 정하신 때까지 전염병을 이스라엘에게 내리시니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백성의 죽은 자가 칠만 명이라 16천사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그의 손을 들어 멸하려 하더니 여호와께서 이 재앙 내리심을 뉘우치사 백성을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하시니 여호와의 사자가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 곁에 있는지라 (삼하24:15-16)

 

이 외에 다른 구절들도 있다. 천사들에게 이런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능력’이라고 불린다.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행하며 그의 말씀의 소리를 듣는 여호와의 천사들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시103:20) (HH.229, 김은경 역)

 

 

마음 같아서는 주님이 천사들을 보내어 대한민국의 현 상황 역시 저렇게 수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절대로 어느 한 개인도 그의 속 사람 역량을 무시, 강제로 그를 천국으로 인도하시거나 지옥으로 던지시거나 하지 않으십니다. 그에게 돕는 천사들을 통해 끝까지 빛을 비추시지만, 결국 자신들의 영원한 운명은 본인들이 선택하는 것이며, 결국 모든 벌은 각 개인이 스스로 자초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사랑 그 자체이셔서 결코 누구를 벌주고 처단하는 신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보응의 법칙(the law of retaliation), 즉 심은 대로 거두고, 행한 대로 갚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돌아감의 법칙’ 대로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현 상황에서 주님은 천사들을 통해 남아 있는 리메인스(remains)들, 곧 주님의 자녀들을 곁에서 지켜 보호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계십니다. 마치 대홍수 때 노아라는 리메인스를 지키셨던 것처럼, 그리고 모세 때, 여호와의 편에 섰던 갈렙과 여호수아, 그리고 레위 자손처럼, 또한 주님 승천 후, 초대교회를 지켜 보호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애쓰시는 모든 분, 곧 주님 편에 서고자 몸부림치는 의로운 국회의원들과 광화문 모든 어르신, 그리고 보수 우파 유튜버들의 영육 간 강건을 허락, 지켜주시고, 저들에게 주님의 빛을 비추시되 일곱 배로 비추사 저들로 오직 주님의 능력을 힘입어 이 의로운 싸움을 싸울 수 있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또한 이럴 때일수록 주님을 향해 심령을 활짝 열어 주께서 내게 붙이신 천사들의 인도를 받아 절대 흔들리지 말고 주님 진리의 빛 안에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부화뇌동하는 대신 말입니다.

 

※ 모든 사람한테는 지옥에서 온 악한 영 둘, 그리고 주님이 보내신 천사 둘이 와있습니다. 왜 둘이냐면, 사람은 의지(will)와 이해하는 능력(understanding)이 있어 사람인데, 이 두 가지가 주님의 신성인 선(Divine Good)과 진리(Divine Truth)로 연결되며, 또 두 종류의 천국과 두 종류의 지옥으로도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오, 주님, 주님을 영원히 사랑합니다. 주님이 저 이재명 같은 자와 그 무리들을 당장 오늘밤 데려가지 않으심도 주님은 신이시요, 저들은 인간, 곧 한 줌 호흡이요, 해 뜨면 사라질 아침 안개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국회에 주님의 빛을 일곱 배나 더하사 국회의원들의 사리 판단을 흐리게 하는 악한 영들의 활동이 망하게 하시고, 이쪽이든 저쪽이든 그 가운데 주께 속한 자들이 정신들을 차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 같은 일개 필부도 분명히 아는 옳고 그름을 저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지옥조차 그 빽빽한 구름을 뚫고 천국의 빛이 한 줄기 들어가면 그 순간 지옥 그 악한 영들이 살짝 정신들이 돌아온다 하니 주님, 국회를, 그리고 모든 언론, 방송, 인터넷 등을 천국 주님의 빛으로 환히 비추사 다들 좀 제 정신들을 차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이 나라의 쓰임새가 아직 남았으면 부디 이 나라가 문재인에 이어 다시 이재명과 그 무리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지켜주시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 받들어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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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마대 요셉, 세마포, 무덤, 향품과 향유’의 속뜻

 

 

50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51(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52그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 53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 54이날은 준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 55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따라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두었는지를 보고 56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더라 계명을 따라 안식일에 쉬더라 (눅23:50-56)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신 후, 주님의 시신을 거두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요? 스승의 참혹한 죽음을 보고 놀라 어딘가에 숨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 공회의 의원이었던 요셉이란 사람이 나타나 빌라도에게 주님의 시신을 달라 요청했습니다. 요셉에 대해 본문 50절과 5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50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51(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주님이 계시던 시대는 로마가 세계를 지배하던 때였습니다. 로마인들은 점령지마다 자치정부를 두고, 그들로 하여금 본국에서 보낸 총독의 감독을 받게 하는 방법으로 세상을 지배했습니다. 그러니까 요셉이 의원으로 있는 산헤드린이라 하는 공회는 이를테면 유대의 자치정부 같은 것이었습니다. 당시 공회의 의장은 대제사장 가야바였고, 그 아래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은 율법에 밝은 엘리트들 70명이 회원으로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요셉이었습니다.

 

※ ‘산헤드린’(‘סַנְהֶדְרִין’)이라는 말은 헬라어 ‘수네드리온’(συνέδριον, 모여 앉다)에서 나온 히브리 차용어(loan word)입니다.

 

※ 산헤드린의 의장은 대제사장이 맡습니다. 대제사장은 종신직이며, 유고 시 그의 직계가 직무를 자동 승계하는데, 이들의 권력이 너무 커지는 걸 막기 위해 로마는 대제사장의 임면(任免)권을 파견된 총독에게 주었습니다. 복음서에 ‘대제사장들’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은,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이 직이 종신직이어서 한번 대제사장 된 사람을 그가 살아있는 동안은 물릴 수가 없었던 반면, 로마는 저들을 통제하느라 그때그때 파면 및 임명을 새로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즉 오늘 본문의 배경 된 당시는 로마가 임명한 대제사장 가야바와 유대인들이 인정하는 종신직 대제사장 안나스가 함께 있었습니다. 가야바는 안나스의 사위입니다. 가야바는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볼 때는 일종의 허수아비였던 것이지요.

 

요셉 말고도 공회 의원 중에서 주님을 지지했던 사람은 저 유명한 니고데모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니고데모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으나 복음서의 다른 곳에는 주님의 장례를 위해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준비한 사람이 바로 니고데모였다고 전합니다.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요19:39)

 

본문에는 공회에서 주님을 죽이기로 결의했을 때, 요셉은 찬성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요셉이란 이름은 속뜻으로는 영적인 사람, 즉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을 뜻하는데, 그것이 바로 요셉의 성품이었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에 의해 영의 눈이 열려 진리와 거짓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요셉은 일찍부터 주님이 선과 진리이신 분이라는 걸 알고 흠모했던 것 같습니다. 요셉을 가리켜 선하고 의로운 자,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선과 진리이신 주님이 다스리시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린다는 것은 주님이 온전히 자기 자신을 다스리길 바란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통치를 바라는 것처럼 선하고 의로운 바람, 사모함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요셉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주님을 반대할 때도 두려움 없이 주님 편에 섰고, 주님이 운명하신 후에는 용감하게 빌라도에게 가서 주님의 시신을 달라한 것입니다. 52절과 53절에는 요셉이 주님의 시신을 수습하여 매장하는 모습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습니다.

 

52그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 53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

 

말씀에서 무덤이나 매장은 속뜻으로는 부활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주님의 시신을 세마포로 싸서 무덤에 안치하는 모든 과정은 주님의 편에서는 부활의 마지막 과정, 즉 어머니로부터 받은 인성(human), 유전 악이 묻어 있는 인성을 완전히 벗고, 아버지가 주시는 신성한 인성(Divine Human)으로 갈아입는 마지막 과정을 의미합니다.

 

※ 유대 산지는 대부분 화강암 지대라 조금만 파도 바로 암석이 나와 우리나라처럼 봉분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굴을 파 시신을 보관하는 형태로 매장을 하는데, 부자들은 그 규모가 커 바위 안에 생전에 살던 집 모양을 그대로 구현, 방을 여러 개 만들 정도였습니다. 이런 방식의 매장은 시간도 오래 걸리고, 무엇보다도 큰돈이 들어 일반 백성은 주로 평토장을 해야 했습니다. 평토장(平土葬)이란 한 30센티 정도만 파 관도 없이 시신을 묻고는 대충 흙으로 메워 평평하게 하는 매장을 말합니다. ‘바위에 판 무덤’이라는 낯선 표현엔 이런 배경이 있습니다.

 

그러면 요셉과 같은 신앙인의 편에서는 어떤 의미일까요? 신앙인들이 생명 없는 말씀, 즉 지식으로만 받아들인 말씀을 살아있는 진리, 또는 살아있는 신앙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볼 때, 요셉이 빌라도에게 주님의 시신을 달라 하는 건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참된 진리의 지식을 구하는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요셉이 달라 하는 주님의 시신은 신앙인들이 처음 진리를 배울 때의 아직 생명 없는 말씀 지식, 즉 말씀을 일단 지식으로 받아들이는 걸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말씀 자체이신 반면, 주님의 몸은 말씀의 외관인 문자적 의미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씀으로부터 진리를 처음 배울 때, 그것들은 일단 기억이라는 창고에 보관됩니다. 그때의 진리의 지식은 마치 서가에 꽂힌 책처럼 아직 생명 없는 상태입니다. 그러다가 그것을 꺼내 읽으며, 말씀의 의미를 깨닫고, 깨달은 그것을 실천, 삶으로 옮기려 할 때, 그때 그 지식은 비로소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비로소 생기가 돈다 할까요? 우리 삶에 영향을 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좋지 않은 버릇을 끊으려 할 때, 또는 하기 어려운 선한 일을 하려 할 때, 말씀의 능력이 우리를 돕는 것입니다. 나는 그 악습, 그 버릇을 계속하고 싶은데 주님은 그걸 원치 않으심을 알고는, 사랑하는 주님을 위하여 기꺼이 그걸 포기하는 것, 그것이 죽었던 말씀이 살아나는 것이고, 오늘 말씀에서는 요셉의 무덤에서 주님의 시신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14:21)

 

그렇다면 요셉은 왜 이방인인 빌라도에게서 말씀의 지식을 얻으려 했을까요? 교회의 마지막 때는 부패한 교회의 눈으로는 진리를 볼 수 없고, 교회 밖 사람의 단순한 눈을 통해서만 참된 진리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관련해 말씀에는 교회 밖의 사람인 빌라도가 주님을 보고 바로 진리로 인정한 것을 여러 곳에서 증언합니다.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 (눅23:4)

 

19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20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21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22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쓸 것을 썼다 하니라 (요19:19-22)

 

이 역시 주님이 진정한 진리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스스로 많이 안다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진리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이방인들처럼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봐야 보입니다. 그런 까닭에 교회 안의 사람인 요셉은 교회 밖의 사람인 빌라도에게 가서 말씀의 지식을 구한 것입니다.

 

요셉이 주님의 시신을 세마포로 싸서 바위에 판 자기 무덤에 넣었습니다. 세마포는 주님에게서 오는 내적 진리를 뜻합니다. 그것은 사랑이 있는 진리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몸을 세마포로 쌌다는 건 신앙인들이 내적 진리를 가지고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말씀을 조금씩 살리는 행위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시신을 바위에 판 자기 무덤에 넣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바위는 진리를 뜻하고, 팠다는 것은 가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무덤은 죽은 진리가 살아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진리를 처음 배울 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이해한 어떤 모양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다 보면 인간의 생각이 섞일 때가 있고, 때로는 본래의 의미를 앞질러 가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모두 그렇게 진리를 받아들입니다. 그것이 돌을 파낸 자기의 무덤에 주님의 시신을 모시는 것입니다. 요셉은 그런 방법으로 참된 말씀을 받아들여 자신의 신앙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요셉 말고도 주님을 받아들인 사람이 또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에 대해 본문 55절은,

 

55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따라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두었는지를 보고

 

말씀에서 갈릴리는 이방인을 뜻합니다. 그리고 여자들은 교회를 뜻하지만, 여기서는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갈릴리에서 주님을 따라온 여자들은 교회 밖의 이방인들 가운데 특히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고, 그러므로 참된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무덤과 주님의 시신을 어떻게 두었는지 보았다고 합니다. 그것은 참된 진리를 받아들인 요셉의 삶에서 죽은 말씀이 어떻게 살아있는 말씀으로 변하는지를 지켜봤다는 뜻입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들 안에서 진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나는지 서로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는 모습과 같은 것이고, 바람이 불 때마다 코끝을 스치는 향기와 같은 것입니다. 갈릴리에서 온 여자들은 요셉에게서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56절에서는 여자들의 그 후의 모습을 이렇게 말합니다.

 

56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더라 계명을 따라 안식일에 쉬더라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삶 가운데서 나타나는 영적인 변화들을 서로 느끼고, 또 자극을 받습니다. 그런 의미에 여자들이 돌아갔다는 것은 요셉에게서 진리가 살아나는 모습을 보고, 여자들이 자신을 돌아봤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여자들은 왜 향품과 향유를 준비했을까요? 그들도 무덤을 찾아가 주님의 시신에 향품과 향유를 바르기 위해서입니다. 향품과 향유를 죽은 자의 시신에 바르는 것은 고대로부터의 관습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향품과 향유는 진리의 가장 바깥에 있는 자연적 진리를 뜻하는데 그것은 그 안쪽에 있는 내적 진리를 마치 방부제처럼 보호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고대인들은 사람이 죽었을 때, 향품과 향유를 시신에 바름으로써 그가 생전에 획득한 선과 진리를 훼손됨 없이 영계에까지 가지고 가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래야 천국에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자들이 주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려 했던 이유는 뭘까요? 말씀의 지식을 살리기 위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말씀에서 배운 진리를 가지고 자연적이고 감각적인 욕구들을 다스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향품과 향유는 신앙인의 삶과 가장 맞닿아 있는 자연적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인들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해 다시 주님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갈 생각을 합니다.

 

※ 현실적으로 유대인의 유월절은 안식일 전날 해질녘인 오후 5시부터 시작됩니다. 주님은 오후 3시에 운명하셨으므로 두 시간 만에 모든 장례를 마치느라 다들 경황이 없었을 것입니다. 빌라도에게 시신 처리에 대한 승낙도 받아야지, 사람들을 시켜 나무에서 내려 시신 수습, 곧 세마포로 싸야지, 얼른 무덤에 넣어 두어야지... 무슨 제대로 된 염할 시간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시신에 대한 염, 즉 시신에 향품과 향유 바르는 일은 여자들이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여자들은 무덤의 위치와 시신 상태를 봐두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안식일 후 새벽같이 와서 오늘 미처 하지 못한 이 일을 그 어두운 무덤 안에서 더듬거려가면서라도 할 수 있으려면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 교회 가르침 ‘천국의 비밀’ 10252:7항은 주님의 부활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은 여느 사람과는 달리 세상에서 입으셨던 몸 그대로 부활하셨다. 왜냐하면 무덤에 아무 것도 남기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을 보고 영을 본 것으로 생각한 제자들에게 이르시길, ‘어찌하여 두려워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천국의 비밀 10252:7, 이순철 역) It is known that the Lord rose again with the whole body which he had in the world, differently from other men, for he left nothing in the sepulcher; and therefore he also said to the disciples, who when they saw the Lord supposed that they saw a spirit, “Why are ye troubled? Behold my hands and my feet, touch me and see; for a spirit hath not flesh and bones as ye see me have” (Luke 24:38, 39). (AC.10251:7)

 

주님은 보이지 않는 영으로 살아나신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볼 수 있는 신성한 인간으로 살아나셨습니다. 그 살아나신 주님, 살아있는 말씀이 거듭나는 사람들의 삶 가운데 매일 나타나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서로의 모습을 보며, 더 많은 사랑과 기쁨을 느낄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요셉이 세마포로 주님의 시신을 싸는 것처럼, 또는 여인들이 향품과 향유를 준비해 주님의 시신에 바르는 것과 같은 노력과 정성을 기울여야 합니다. 세마포로 주님의 시신을 싸는 것은 내적 진리를 가지고 말씀을 이해하고 그것을 삶에 적용함으로써 말씀을 살려내는 것입니다. 향품과 향유를 주님의 시신에 바르는 것은 자연적 진리를 가지고 육신의 욕구들을 다스림으로써 말씀을 살려내는 것입니다. 그런 노력이 없다면 우리에게 있는 말씀은 살아나지 못하고 언제까지나 무덤 속에 갇혀 있을 것입니다.

 

요셉과 갈릴리에서부터 주님을 따라온 여인들에게 내려졌던 은혜가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요18:37)

 

아멘

 

2023-04-02(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12-08(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4-12-08(D1)-주일예배(2573, 눅23,50-56), ‘아리마대 요셉, 세마포, 무덤, 향품과 향유’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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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12-08(D1)-주일예배(2573, 눅23,50-56), ‘아리마대 요셉, 세마포, 무덤, 향품과 향유’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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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 비상계엄 해프닝(?) 후 가족에게 (2024/12/4)

 

새벽 3시 다 되어 누웠다가 둘째 출근 맞춰 깨어나 보니...

 

음... 이게 뭐지? 싶구나...

 

1. 지옥은 말할 것도 없고, 영들의 세계에도 악한 영들은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모든 상황이 더 괴랄하게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 즉 너무 놀라거나 절망할 필요 없다는 것! 그곳이나 이곳이나 모든 것이 주님의 다스리심, 통치 아래, 허락 아래 벌어지기 때문

 

2. 단, 그곳과 이곳의 차이는, 그곳은 주님과 싱크로율 100%인 천사들에 의해 모든 것이 정밀하게, 큰 권능으로 다스려지는 반면, 이곳은 그렇지 못해 모든 상황이 대부분 예측 불가일 때가 많다는 것. 우파 보수라 하더라도 주님이 허락은 하시되 도우실 수는 없는 게 있을 수 있다는 것

 

3. 이럴 때일수록 우리 영혼을 보호해야겠다.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되겠지만, 저들 의도대로 윤 대통령 탄핵, 하야, 조기 대선, 이재명 당선... 등 일련의 상황이 전개되더라도 우리가 심령이 병들어 빛이 꺼져가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겠다는 것

 

4. 당분간 세상 창문을 닫자. 유튜브나 인터넷 보는 걸 좀 줄이거나 잠시 중단하고, 대신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자. 그래서 세상 뉴스 대신 주님 음성에 온전히 귀 기울이도록 하자. 아침저녁으로 주님께 나아가고, 말씀 암송으로 우리의 의식을 가득 채우자

 

5. 참고로, 주님의 허락이 곧 주님 뜻이라는 말은 아님. 그럴 때도 간혹 있지만, 대부분은 주님 뜻과 내 뜻이 다를 때, 내가 끝까지 고집을 부리는 상황에서 할 수 없이 주님이 내 뜻, 내 선택, 나라 지도자의 결정을 존중하시는 것을 말함, 그러므로 철부지같이 ‘야, 주님이 허락하셨다’ 좋아하면 안 됨, 오히려 ‘주님이 말씀하셨다, 주님이 명령하셨다’를 좋아해야 함. 이 둘의 차이는 빙 돌아가느냐, 질러가느냐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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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누구를 고치실 때, ‘내가 고쳐주마’ 하지 않으시고,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하시는 이유 (2024/12/2)

 

 

햇빛이 커튼이 젖힌 만큼만 어두운 방 안을 비출 수 있고, 수돗물도 꼭지 밸브가 열린 만큼만 나올 수 있는 것처럼, 치유의 광선, 곧 신적 진리(Divine Truth)이신 주님의 치유 능력 또한 그 사람의 속 사람 역량만큼만 흘러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열두 해 혈루 여인만 유일하게 그 몸 부대끼는 무리 속에서도 몰래 주님의 겉옷 가에 손을 댄 것만으로 주님으로부터 능력이 흘러나간 반면, 주님 몸에 닿았을 다른 많은 사람한테는 아무 일도 안 일어난 걸 보면 말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저들의 역량, 곧 그의 속 사람 상태이면, 능히 천국을 받을 수 있음을, 능히 천국 능력이 흘러들어와 그가 고침 받을 수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지요.

 

이 ‘...대로’, ‘...만큼’의 원리, 그러니까 ‘심은 대로’, ‘행한 대로’, ‘뿌린 대로’ 등의 원리는 의외로 피조세계 전체에 적용되는 일종의 설계 원리입니다.

 

천국은 속 사람의 나라, 즉 속 사람이 천국에 합당해야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주님 영접기도를 하고, 구원의 확신 가운데 산다 하더라도, 아무리 우리가 전도와 선교, 그리고 구제와 선행에 힘쓴다 하더라도  우리 속 사람이 여전히 천국에 합당한 상태가 아니면 안 됩니다. 반대로 타종교인이라 하더라도 그의 상태가 천국에 합당하면, 그는 사후, 천사들의 정성을 다한 교정(敎正)을 받아 주님을 영접 후 천국에 올라갑니다. 이것이 주님의 질서이며, 구원 시스템입니다.

 

※ 이에 관해선 아래 링크(318-328)나 첨부파일을 읽어보세요.

 

HH.318, 36장, '천국의 비기독교인들'(HH.318-328)

36천국에 있는, 이교도, 즉 교회 밖 사람들The Heathen, or Peoples outside of the Church, in Heaven 318일반적 견해에 의하면, 교회 밖에서 난 사람들, ‘이교도’, ‘비기독교인’이라 불리는 그들은 구원받지

heavenanditswondersandhell.tistory.com

천국과지옥.1.36.318-328.'천국의 비기독교인들'.scan.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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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이 속 사람은 우리가 심은 대로, 즉 심은 만큼, 그리고 우리가 행한 대로, 즉 행한 만큼, 우리가 뿌린 대로, 즉 뿌린 만큼만 형성됩니다. 그러니까 사랑과 분리된 신앙 상태가 아니라 사랑과 신앙이 하나 된 상태라는 말이며, 이런 상태여야 천국에서 지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복과 형통 또한 그렇습니다. 아무리 안수기도를 받아도, 아무리 축복기도를 받아도 본인의 속 사람 역량, 그러니까 그 복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아니면 그 빈 복이 담기지 않으며, 그럼에도 혹시 복을 누리며, 삶이 형통하다면 그건 복이 아니라 저주요, 형통이 아니라 불행일 수 있으니 안심하시면 안 됩니다.

 

천국도 모두에게 다 똑같지 않습니다. 그의 내면, 곧 속 사람이 열린 만큼만 각 사람은 그에 합당한 천국으로 배정됩니다. 이걸 차별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우리가 자기 역량을 초월하는 천국으로 가거나 자기 역량에 모자라는 천국으로 가게 되면 불행한 일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주님의 배려이며, 사랑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곳에서 저마다 자기가 인식할 수 있는 한계치를 넘도록 주님은 부어주시기 때문에, 다들 ‘내 잔이 넘치나이다’ 할 수 있는 곳, 그런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속 사람 이야기를 잔뜩 해놓고는 정작 그럼 어떻게 해야 속 사람을 잘 준비할 수 있는 건지는 그냥 슬쩍 언급만 하고 지나쳤네요. 위 내용 중, 사랑과 신앙이 하나 된 상태’가 바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속 사람 상태인데요, 이는 주님을 사랑하는 가운데 주님의 말씀을 실천함으로써만 가능한 상태를 말합니다. 말씀을 많이 알아도 정작 실천을 안 하면 그건 그냥 지식일 뿐이요, 속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부디 주님을 사랑하여 말씀을 즐겁게 실천하시는, 그러니까 주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즐겁게 선을 행하시는, 그래서 주님 주시는 천국으로 행복하신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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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숨지시니라

 

 

44때가 제 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며 45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46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47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48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치며 돌아가고 49예수를 아는 자들과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도 다 멀리 서서 이 일을 보니라 (눅23:44-49)

 

 

주님의 고난에 대한 말씀을 읽다 보면, 유대인들은 왜 주님을 그토록 미워했을까? 어떻게 진리를 그렇게나 미워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떨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904번을 보면,

 

사람에게는 적어도 두 악령과 두 천사가 함께 있다. 악령은 사람에게 있는 악을 부추기나 천사들은 선과 진리를 북돋운다. (AC.904, 이순철 역) There are with every man at least two evil spirits and two angels. The evil spirits excite his evils, and the angels inspire things that are good and true. Every good and true thing inspired by the angels is of the Lord; (AC.904)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진리를 바라지 않고, 자신의 욕망이 원하는 쪽으로 행동할 때, 그는 계속해서 악령의 손을 잡게 됩니다. 그리고 시간이 가면서 점점 진리를 미워하고, 나중에는 자기도 모르게, 그러니까 의도치 않게 진리 그 자체이신 주님을 대적하기까지 이릅니다.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지독하게 이기적인 사람들이었고, 일상을 부주의하게 살면서 점점 선을 넘더니 결국 악령이 시키는 대로 주님을 없애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라고 하셨습니다.

 

※ 창세기 에서의 유명한 장자권 이야기이지요.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창25:34)

 

물론 이 본문의 속뜻은 따로 있지만, 겉뜻만으로도 깊이 생각해야 하는 본문입니다. 즉 에서의 저런 행동이 저 날만 갑자기 툭 튀어나온 게 아니라는 것이죠. 일상을 부주의하게 살면서 점점 더 선을 넘게 된 결과라는 사실입니다. 무서운 얘깁니다. //

 

오늘 본문 44절은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현장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44때가 제 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며

 

본문에서 육시와 구시, 그러니까 정오와 오후 세 시는 모두 3의 배수여서 속뜻으로는 3과 같은 의미, 즉 완전한 것을 뜻합니다.

 

※ 오늘날은 자정부터 다음날 자정까지가 하루이지만, 성서 시대 이스라엘은 달랐습니다. 그때는 오후 6시부터 다음 날 오후 6시가 하루였습니다. 그래서 아침 6시가 영시, 아침 7시가 일시, 오전 8시가 이시 등등, 그러므로 본문의 육시는 정오, 구시는 오후 세 시를 말합니다.

 

따라서 주님이 삼시, 곧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셔서 육시, 곧 정오를 지나 구시, 곧 오후 3시에 숨을 거두시는 것은 주님의 편에서는 시험에서 완전히 이기실 때까지 거쳐야 할 모든 상태를 의미합니다. 말씀에서 시간은 영적인 상태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듭나는 사람에게 시험은 단계별로 옵니다. 그리고 그 시험들을 하나하나 완전하게 이겨야 거듭날 수 있습니다. 주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고난받으신 시간은, 내적으로는 당신이 영화롭게 되기까지 겪으신 모든 시험의 단계들을 나타낸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육시에서 구시까지의 시간은 교회가 점점 영적으로 어두워지다가 결국 완전히 문을 닫을 때까지의 모든 상태를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죽어가시는 것은 곧 교회에서 진리가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에 대해 말씀에는, ‘때가 제 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해는 주님을 뜻하고, 땅은 교회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해가 빛을 잃고, 땅이 어둡다는 것은 유대교회 안에 주님에 관한 지식과 신앙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는 걸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에 관한 지식이 없으면 신앙도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에는 어둠이 구시까지 계속되었다고 했습니다. 9는 3의 세 배수입니다. 그러므로 그건 모든 것이 완전히 끝난 걸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유대교회 안에 빛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라는 것이고, 그러므로 교회로서의 사명이 끝났다는 뜻입니다. 본문 45절과 46절입니다.

 

45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46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주님이 숨지신 것을 영어 성경은 영혼을 ‘포기’한(give up) 걸로 표현합니다. 주목할 점은, 앞에서 주님이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실 때는 spirit, 즉 영이라 하고, 뒤에 영혼을 포기하셨다 할 때는 ghost, 즉 망령이라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포기하신 ghost는 무엇이고,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신 spirit은 무엇일까요? 포기하신 ghost는 마지막까지 주님 안에 남아 주님을 시험했던, 어머니로부터 받은 유전적 자아(human self)를 말합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신 spirit은 인간의 자아를 완전히 버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받는 신성한 자아(Divine Self)를 뜻합니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의 마지막 시험에서 완전히 이기셨을 때, 주님은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로부터 받은 자아를 남김없이 벗으시고, 대신 아버지이신 여호와의 신성한 자아로 갈아입으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타고난 생명인 자아는 그냥 생각으로 버린다고 버려지는 게 아닙니다. 주님께 의지해서 죽기를 무릅쓰고 끊어내려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버릴 수 있습니다. 주님도 그런 방법으로 육신의 어머니로부터 받은 자아를 완전히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그때 주님은 내면에 계신 아버지인 여호와 하나님과 하나로 결합하셨고, 그리하여 신성한 인간(Divine Human)이며,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숨을 거두실 때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이와 관련해서 ‘천국의 비밀’ 4772번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고대교회의 외적인 것은 주님에 관한 모든 것을 표상했고, 또한 주님의 나라의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 즉 사랑과 인애와 그것에서 비롯한 믿음을 표상했으며, 결과적으로는 기독교회에 속한 것을 표상했다. 그러므로 고대교회와 유대교회의 외적인 것들이 꺼풀이 벗겨지듯 밝혀졌을 때 기독교회가 나타났다. 말씀에서 성전의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바로 그것을 의미한다. (AC.4772, 이순철 역) The externals of the ancient church were all representative of the Lord and of the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of his kingdom, that is, of love and charity and the faith thence derived, consequently of such things as are of the Christian church. Thus when the externals of the ancient, and also of the Jewish church, are unfolded and as it were unwrapped, the Christian church is disclosed. This was signified also by the veil of the temple being rent asunder (Matt. 27:51; Mark 15:38; Luke 23:45). (AC.4772)

 

이 글은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신성한 인간으로 우리와 함께 계실 때, 그동안 주님을 표상해 오던 모든 것이 사라졌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고대교회와 유대교회 같은 표상의 교회는 사라지고, 대신 새로운 교회인 기독교회가 나타났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는 것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성전의 성소와 언약궤가 있는 지성소 사이에는 위에서 아래로 휘장이 처져 있었습니다. 영적 의미로 볼 때, 휘장 바깥쪽에 있는 성소는 교회의 외적인 것, 이를테면 말씀의 문자적인 뜻과 예배의 의례, 성전의 기물 같은 것을 나타냅니다. 그에 비해 휘장 안쪽의 지성소는 외적인 것들로 표상되는 교회의 내적인 것, 즉 사랑과 체어리티, 신앙 같은 것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주님이 오시기 전에는 이른바 상응(相應, correspondence) 지식을 가진 극소수의 사람들 말고는 아무도 그 외적인 것들로 표상되는 내적인 것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운명하실 때,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그때부터 인류는 신성한 인간이신 주님과 직접 교통함으로써 그동안 표상에 가려져 왔던 주님과 주님의 나라에 관한 내적 비밀들을 알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영원 전부터 계신 주님이 신성한 인간이 되어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주님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의 몸을 만지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직접 들은 것처럼 신성한 인간이신 주님을 통해 말씀의 내적인 것들을 직접 만지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가리고 있던 휘장이 찢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소의 휘장이 주님이 운명하시는 순간에 찢어진 이유는 뭘까요? 그때 주님은 비로소 어머니로부터 받은 인성(human)을 완전히 벗고, 아버지가 주시는 신성한 인성(Human)을 입으셨으며, 그리하여 신성한 인간으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운명하셨을 때, 군중은 모두 기뻐했을까요? 꼭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그것에 대해 47절로 49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47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48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치며 돌아가고 49예수를 아는 자들과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도 다 멀리 서서 이 일을 보니라

 

마태복음 8장에도 믿음이 깊은 백부장 얘기가 나오는데 여기서도 백부장이 등장합니다. 백부장은 로마 사람으로 자기 종교의 교리에 따라 신실하게 사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백부장이라고 하는 군대의 지휘관은 속뜻으로 신앙의 교리 안에 있는 사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비록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이지만, 자신의 신앙에 따라 신실하게 사는 사람이 백부장입니다. 말씀에는 그가 그동안의 일을 모두 봤다고 전합니다. 즉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후, 숨을 거두시기까지 조롱하는 군중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것이며, 강도의 간구와 신앙고백을 듣고, 그를 구원하시는 것을 봤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지켜본 백부장이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라고 말합니다. 마침내 주님이 진리시라는 사실을 인정한 것입니다. 주님이 의인이시며 진리시라는 사실을 안 사람들은 백부장 말고도 또 있었는데요, 갈릴리로부터 주님을 따라온 여자들입니다. 말씀에서 갈릴리는 이방을 뜻합니다. 그리고 여자는 교회를 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갈릴리에서부터 주님을 따라온 여자들은 백부장처럼 이방 종교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이지만, 마음속에 교회가 세워진 사람을 뜻합니다. 그들의 교회란 진리에 대한 믿음과 사랑입니다. 그들 역시 멀리서 주님이 운명하시기까지의 모든 일을 봤습니다. 그들이 본 건 무엇이었을까요? 단지 주님이 조롱받고 죽어가는 모습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본 건 주님이 세상에 오실 때 입으셨던 부정한 인간을 벗고, 신성한 인간으로 새로 태어나시는 장면이었으며, 그렇게 해서 인류의 구속자이시며 구원자가 되시는 모습이었습니다. 주님은 이제 그런 교회 밖 이방인들을 데리고 새로운 교회를 세우려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오시기 전의 교회들을 표상(表象, representative)의 교회라고 하는 이유는, 구약 말씀의 모든 문자적 의미와, 그로 말미암아 세워진 교회, 그리고 예배의 외적인 것들이 모두 주님과 주님의 나라에 대한 표상이며, 그림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직접 세상에 오심으로써 그동안 주님을 나타냈던 이 모든 표상이 사라졌습니다. 즉 그 역할을 다한 것이지요. 실체가 나타나면 그림자는 사라지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운명하실 때,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것은 그동안 주님의 본래 모습을 가리던 표상들이 모두 사라지고, 주님의 실체가 드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실체로서의 주님이 바로 신적 인성, 또는 말씀의 신성한 내적 의미이신 주님이십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교회 안에 말씀의 내적 진리로 오신 주님을 인정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내적 진리로 오신 주님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주님을 의인으로 인정한 백부장과 같은 사람입니다. 본문에는 그에 대해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전합니다. ‘그 된 일을 보았다’는 건, 성경의 주님의 모든 말씀과 행적을 보고, 이해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그것에 대해 ‘계시록 해설’ 815:3번 글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사랑의 열매를 맺는 것을 뜻한다. 즉 자신의 직업에 관한 일을 성실하고 정직하고 근면하게 수행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며,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일이며, 선이기 때문이다. (AE.815:3, 이순철 역)

 

라고 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주님의 모든 말씀과 행적을 본받아 우리도 자신의 직업에 관한 일들을 성실하고 정직하게, 그리고 근면하고 겸손하게 해야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이방인과 같이 어두운 우리의 눈과 귀, 그리고 마음을 열어주셔서 주님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하십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요15:8)

 

아멘

 

 

2023-03-19(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12-01(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4-12-01(D1)-주일예배(2572, 눅23,44-49), '예수께서 숨지시니라'.pdf
0.38MB
성찬.pdf
0.14MB
축도.2024-12-01(D1)-주일예배(2572, 눅23,44-49), '예수께서 숨지시니라'.pdf
0.23MB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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