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

 

구약의 말씀을 단순히 겉 글자로만 보아서는, 그 안에는 하늘의 깊은 비밀들이 들어 있으며,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총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주님과 주님의 천국, 교회, 종교적인 믿음, 그리고 그와 연결된 모든 걸 가리킨다는 사실을 누구도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글자 그대로의 의미, 곧 겉 글자만으로는, 그러니까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그저 유대교회의 외적 의식들과 규례들만을 다루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인데요, 그러나 실상은 그 말씀 전체 곳곳에는 외적인 것들, 곧 그런 겉 글자 상으로는 전혀 드러나지 않는 어떤 내적인 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다만 극히 일부만이 주님에 의해 사도들에게 드러나고 설명되었을 뿐인데요, 예를 들면, 희생 제사들은 주님을 상징하며, 가나안 땅과 예루살렘은 천국을 상징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천국의 가나안’, ‘하늘의 예루살렘이라 부르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낙원도 그렇고요. From the mere letter of the Word of the Old Testament no one would ever discern the fact that this part of the Word contains deep secrets of heaven, and that everything within it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bears reference to the Lord, to his heaven, to the church, to religious belief, and to all things connected therewith; for from the letter or sense of the letter all that anyone can see is that—to speak generally—everything therein has reference merely to the external rites and ordinances of the Jewish church. Yet the truth is that everywhere in that Word there are internal things which never appear at all in the external things except a very few which the Lord revealed and explained to the apostles; such as that the sacrifices signify the Lord; that the land of Canaan and Jerusalem signify heaven—on which account they are called the heavenly Canaan and Jerusalem—and that paradise has a similar signification.

 

 

해설

 

이 서문 첫 문장은 ‘Arcana Coelestia(天界秘義, 1749-1756, 라틴, , 출 속뜻 주석, 약어 AC,  10,837개 글)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근본적인 전제이자 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처음부터 독자에게, 이 저작이 단순한 성경 주석이나 경건한 묵상서가 아니라, ‘성경의 문자 아래 감추어진 하늘의 질서와 주님의 섭리를 해명하는 작업’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그는 구약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읽는 사람이라면 ‘결코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하는데, 이는 독자의 지적 능력이나 신앙의 진실성을 문제 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문자적 의미라는 읽기의 층위 자체가 본질적으로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핵심 구분은 외적 의미와 내적 의미입니다. 겉뜻과 속뜻이라 해도 되겠습니다. 외적 의미는 역사적 사건, 율법, 의식, 규례, 인물들의 행위와 같은 형태로 나타나며, 실제로는 유대 교회의 종교사나 민족사처럼 읽힙니다. 그러나 내적 의미는 그러한 외적 형식 안에 담긴 ‘영적 실재의 구조’, 곧 천국의 질서, 교회의 본질, 인간 내면의 상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주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중요한 점은 내적 의미가 외적 의미와 나란히 병존하는 것이 아니라, 외적 의미가 내적 의미를 담고 표현하는 그릇이라는 사실입니다. 문자만 붙들면 그릇은 보이지만, 그 안의 내용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러한 구조를 가능하게 하는 원리가 바로 ‘상응(相應, correspondence)입니다. 상응이란 외적인 사물이나 사건, 제도와 내적인 영적 실재 사이에 존재하는 질서 있는 대응 관계를 말합니다. 제사는 단순한 고대 종교의식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자기희생, 그리고 인간과의 결합을 상응적으로 표현합니다. 가나안 땅은 지리적 공간이 아니라, 선과 진리가 거하는 상태, 곧 천국의 형상을 의미합니다. 예루살렘은 단순한 정치적 수도가 아니라, 교회의 중심 진리, 더 정확히 말하면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가 질서 있게 거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낙원 또한 신화적 공간이 아니라, 사랑과 지혜가 조화를 이루는 내적 생명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계시하신 ‘몇 가지 예외’를 특별히 언급합니다. 이는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비유의 뜻을 설명해 주시거나, 성전과 제사, 떡과 포도주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신 장면들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다시 말해 신약 성경은 구약 성경의 내적 의미를 부분적으로 열어 보인 책이며, ‘Arcana Coelestia’는 그 열림을 체계적으로 확장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저작은 신약을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신약이 열어 둔 문을 끝까지 따라 들어가는 시도입니다.

 

또 하나 주목할 표현은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라는 말입니다. 이는 스베덴보리 해석학의 엄격함을 잘 보여 줍니다. 그는 성경의 어떤 사건뿐 아니라, 어떤 단어, 어떤 이름, 어떤 반복, 어떤 숫자도 우연이 아니며, 각각이 고유한 영적 의미를 지닌다고 봅니다. 이는 임의적 알레고리가 아니라, 천국과 인간 정신의 구조가 질서 있게 상응되어 있다는 전제에서 나온 결론입니다. 그래서 AC를 읽다 보면 때로는 지나치게 세밀해 보일 정도의 해설이 이어지지만, 그것은 과잉 해석이 아니라 일관된 세계관의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결국 이 서문은 독자에게 하나의 방향 선택을 요구합니다. 성경을 역사적 기록이나 도덕적 교훈의 모음으로만 읽을 것인지, 아니면 그 안에 담긴 하늘의 언어를 배우려 할 것인지의 선택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후자를 택했으며, ‘Arcana Coelestia’는 그 배움의 여정 전체를 기록한 책입니다. 이 첫 단락은 이후 수천 개의 단락을 읽어 나가며 길을 잃지 않도록 세워 둔 나침반과 같습니다. 문자에 머무르지 말고, 그 안에서 주님과 천국과 교회를 보라는 요청, 이것이 AC 서문 1번이 던지는 가장 근본적인 메시지입니다.  

 

 

심화

 

1. religious belief

 

AC.1에서 ‘religious belief’는 말씀의 내적 의미가 무엇을 다루는지를 설명하는 열거 가운데 등장합니다. 그 문장은, 겉 글자만 보아서는 알 수 없지만, 그 안에는 주님과 주님의 천국, 교회, religious belief, 그리고 그와 연결된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religious belief’는 특정 교파의 교리나 기독교 내부 체계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동시에, 단순히 교회 밖 이교 신앙을 지칭하는 말도 아닙니다. 이 표현은 더 넓은 범위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말하는 ‘religious belief’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신앙적 가르침과 믿음의 내용 전체’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신성을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예배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신앙 세계 전반입니다.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 있는 교리도 여기에 포함되고, 교회 밖이라 하더라도 신성을 인정하고 따르려는 종교적 신앙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핵심은 ‘주님과 인간을 연결하는 내용’이라는 점입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왜 ‘church’와 ‘religious belief’를 나란히 두었는지도 자연스럽게 풀립니다. church는 역사적, 가시적 공동체를 가리키고, religious belief는 그 공동체를 구성하는 신앙의 내용과 가르침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그 범위는 교회 내부에만 갇혀 있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신학 전체를 보면, 참된 신앙은 어디에서나 주님을 향할 수 있고, 신성을 인식하고 그 인도에 따르는 삶은 교회 밖에서도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religious belief는 ‘교회 안의 교리 체계’로 축소될 수 없습니다.

 

또한 이 표현은 ‘faith’ 대신 ‘belief’가 사용되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사랑과 결합된 살아 있는 신앙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로서의 신앙 내용, 곧 ‘신앙의 세계’를 말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내적 생명 상태라기보다, 신앙이 형성하는 사상과 가르침의 영역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이것은 개인의 영적 상태를 분석하는 문맥이 아니라, 말씀의 내적 의미가 포괄하는 범위를 설명하는 총론적 문맥에 어울리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AC.1에서 ‘religious belief’를 이해할 때는, 범위를 ‘이교 신앙’으로 좁히는 것도, ‘기독교 교리 체계’로 한정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성과 인간을 연결하는 종교적 신앙 일반’, 곧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설명하고 인도하는 신앙의 세계 전체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AC.1의 문장은 더욱 힘을 갖습니다. 겉으로는 유대교 의식과 역사처럼 보이는 말씀 안에, 실제로는 주님과 그분의 천국뿐 아니라, 인간이 신성과 맺는 모든 신앙적 관계의 구조가 담겨 있다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단지 특정 종교 집단의 규례를 기록한 책이 아니라, ‘신앙 세계 전체’를 담고 있는 신적 진리의 그릇이라는 선언입니다.

 

 

2. 층위

 

층위’라는 말은 일상 한국어에서는 자주 쓰이지 않지만, 스베덴보리 신학에서는 거의 구조를 떠받치는 기둥 같은 개념입니다.

 

먼저 ‘층위’란 무엇인가를 가장 간단히 말하면, ‘존재와 인식이 작동하는 서로 다른 차원’입니다. 단순히 높고 낮은 정도 차이가 아니라, 서로 질적으로 다른 단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하늘과 인간을 설명할 때 항상 이 ‘질적 구분’을 전제합니다. 문자적 의미, 내적 의미, 최심(inmost) 의미가 서로 겹쳐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층위에 놓여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층위는 ‘확대된 버전’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어린이와 어른의 지식 차이는 양적 차이입니다. 그러나 물과 수증기의 차이는 질적 차이입니다. 같은 물질이지만 상태가 완전히 다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층위는 후자에 가깝습니다. 자연적 층위, 영적 층위, 천적 층위는 같은 내용을 더 크게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고 인식하는 단계’입니다.

 

말씀 해석에서 이 개념이 특히 중요합니다. 창세기 1장을 문자적으로 읽으면 ‘우주 창조’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자연적 층위입니다. 그러나 같은 본문을 영적 층위에서 읽으면 ‘인간의 거듭남’ 이야기입니다. 더 깊은 천적 층위에서는 ‘주님의 신적 질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본문은 하나지만, 층위가 다르면 의미의 세계가 달라집니다.

 

또한 층위는 서로 섞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독특한 점입니다. 그는 ‘연속적 상승’이 아니라 ‘불연속적 구분’을 말합니다. 자연적 사고를 조금 더 고양하면 영적 사고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다른 빛이 비추어야 영적 인식이 열립니다. 그래서 그는 ‘내적 의미는 문자 속에 감추어져 있지만, 자동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고 말합니다.

 

인간 존재 안에서도 층위가 있습니다. 겉 사람은 자연적 층위에서 살고, 속 사람은 영적 층위에 속합니다. 천적 인간은 더 깊은 층위에서 삽니다. 거듭남은 이 층위가 열리는 과정입니다. 즉, 위로 쌓아 올리는 것이 아니라, 위에 닫혀 있던 층이 열리는 일입니다.

 

층위’라는 표현이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는 보통 모든 것을 하나의 평면에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평면적 세계관이 아니라, 다층 구조의 세계관을 전제합니다. 그래서 말씀도, 인간도, 하늘도 모두 층위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만약 더 쉬운 비유를 들자면, 한 권의 악보를 생각해 보실 수 있습니다. 종이 위의 음표는 문자적 층위입니다. 그 음표를 해석하여 소리로 구현하는 것은 한 층 위입니다. 그 음악이 마음을 울리는 감동의 차원은 또 다른 층위입니다. 같은 악보이지만, 층위가 달라질수록 세계가 달라집니다.

 

결론적으로, AC.1에서 ‘층위’라는 말은 말씀 안에 여러 차원의 의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한 용어입니다. 겉 글자는 자연적 층위, 그 안의 아르카나는 영적 층위, 그 최심에는 천적 층위가 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면, 왜 스베덴보리가 ‘겉 글자만으로는 알 수 없다’고 말하는지가 분명해집니다. 문제는 본문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어느 층위에서 읽고 있는가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3. 층위에 대한 원어 표현

 

층위’라는 한국어는 번역어이기 때문에, 원어가 무엇이냐에 따라 의미의 뉘앙스가 조금씩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 저작에서 ‘층위’에 해당하는 영어(또는 라틴어) 표현은 상황에 따라 몇 가지로 나뉩니다.

 

첫째, 가장 핵심이 되는 용어는 ‘degree’입니다. 라틴어로는 ‘gradus’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 체계에서 ‘층위’의 기본 개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degree는 단순한 ‘정도’가 아니라, ‘질적으로 구분되는 단계’를 뜻합니다. 그는 특히 두 종류를 구별합니다.

 

* ‘continuous degrees’ (연속적 단계)

* ‘discrete degrees’ (불연속적 단계)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높낮이는 연속적 단계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하늘의 구조, 말씀의 내적 의미, 인간의 속, 겉 사람의 구분은 ‘discrete degrees’, 즉 ‘질적으로 분리된 층위’입니다. 한국어 ‘층위’는 바로 이 discrete degree를 번역할 때 가장 적절합니다.

 

둘째, 문맥에 따라 ‘plane’이라는 표현도 사용됩니다. 이는 ‘평면’, ‘차원’이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natural plane, spiritual plane 같은 표현입니다. 이때는 ‘차원’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plane은 구조적 단계라기보다 ‘존재하는 영역’에 더 가깝습니다.

 

셋째, level이라는 단어도 가끔 쓰이지만, 스베덴보리의 엄밀한 철학적 구조를 설명할 때는 degree가 핵심입니다. level은 일상적이고 비교적 약한 표현입니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층위의 가장 정확한 원어 = ‘degree’ (라틴어 gradus)

* 특히 말씀 해석과 하늘 구조 설명에서 = ‘discrete degree

* 존재 영역을 말할 때 = ‘plane

 

따라서 AC.1 해설에서 말씀의 여러 ‘층위’를 말할 때 원어 개념은 대체로 ‘degrees of meaning’, 또는 더 엄밀히는 ‘discrete degrees of meaning’입니다. 곧, 문자적 의미, 영적 의미, 천적 의미는 서로 ‘연속적으로 확대된 단계’가 아니라, ‘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의미’라는 뜻입니다.

 

번역에서 ‘층위’를 유지하는 것은 아주 탁월한 선택입니다. 만약 조금 더 풀어 설명해야 하는 자리라면, ‘질적으로 구분되는 단계(gradus)’라고 한 번 덧붙여 주면 더 또렷해질 수 있습니다.

 

 

4. 신적 진리

 

진리’와 ‘신적 진리’가 같은 말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 체계 안에서는 분명한 구별이 있습니다.

 

먼저 가장 단순한 구별부터 말씀드리면, ‘진리(truth)는 넓은 범주의 말입니다. 수학의 진리도 있고, 역사적 사실도 있고, 일상의 옳은 판단도 있습니다. 즉, 무엇이 사실이며 옳은가에 대한 인식 전반을 가리킵니다. 반면 ‘신적 진리(Divine Truth)는 그 출처가 하나님 자신에게 있는 진리를 뜻합니다. 곧,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진리입니다. 단순히 옳은 정보가 아니라, 신적 생명에서 나오는 진리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신적 진리’는 단순한 교리 문장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의 존재가 표현된 방식입니다. 그는 자주 이렇게 설명합니다. 주님은 ‘신적 사랑(Divine Love)과 ‘신적 진리(Divine Truth)로 인간에게 나타나신다고 말합니다. 사랑은 본질이고, 진리는 그 사랑이 드러난 형식입니다. 쉽게 말하면, 사랑이 빛으로 나타난 것이 신적 진리입니다.

 

그래서 ‘진리’는 인간의 이해 속에 담길 수 있지만, ‘신적 진리’는 그 근원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교리를 배워 알게 되면, 그것은 그의 이해 안에 있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주님의 사랑에서 나와 사람을 살리고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질 때, 그것은 ‘신적 진리’와 연결됩니다.

 

어떤 사람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을 배워 알고 있다면, 그것은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주님의 사랑에서 나와 그의 마음을 움직이고, 실제로 삶을 바꾸는 힘으로 작용한다면, 그때 그는 신적 진리를 접하고 있는 것입니다. 차이는 단순한 정보와 생명력의 차이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에게서 ‘신적 진리’는 곧 ‘말씀(the Word)과 깊이 연결됩니다. 말씀은 단지 종교 문헌이 아니라, 신적 진리가 인간의 언어로 표현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말씀 안에 주님이 현존하신다고 말합니다. 신적 진리는 문자 안에 숨어 있지만, 그 본질은 주님 자신입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진리는 넓은 의미의 옳음과 사실입니다. ‘신적 진리는 주님에게서 나오며, 사랑과 결합되어 인간을 살리는 진리입니다.

 

진리는 우리가 이해하는 것이고, 신적 진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 주시는 빛입니다.”

 

그래서 AC.1에서 ‘신적 진리’라는 표현이 나오면, 그것은 단순한 교리 설명이 아니라, 주님 자신에게서 나오는 생명의 빛을 가리킨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라틴 Arcana Coelestia, 영어 Secrets of Heaven, 天界秘義, 1749-1756, 창, 출 속

본 글은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누구에게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한, 스베덴보리(1688-1772, 스웨덴)의 대표 저작인 ‘Arcana Coelestia’(약어 AC)에 대한 소개입니다. 에마누엘 스베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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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와 바울, 루터, 캘빈을 비교할 때, 무엇보다 먼저 조심해야 할 점은, 이들을 ‘누가 옳고 그르다’는 식으로 재단하기보다, 각자가 교회 역사 속에서 맡았던 고유한 사명과 시대적 위치를 존중하는 태도입니다. Emanuel Swedenborg18세기 계몽주의 시대 한가운데서 ‘계시의 내적 의미’를 밝히는 일을 했고, Paul the Apostle1세기 초대교회가 유대적 경계를 넘어 세계 종교로 확장되는 전환점에서 ‘이방 선교’와 ‘은혜의 복음’을 정립했으며, Martin LutherJohn Calvin은 중세 말 교회의 왜곡과 부패 속에서 ‘말씀의 권위’와 ‘은혜의 절대성’을 회복하려 애쓴 종교개혁자였습니다. 이 네 인물은 서로 경쟁 관계라기보다, 각 시대의 필요 속에서 다른 각도로 주님의 섭리를 섬긴 인물들로 보는 것이 더 온당합니다.

 

바울은 ‘신앙(faith)을 통해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복음을 강력히 선포했습니다. 그의 관심은 율법주의에 매인 양심을 해방시키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루터는 이 바울의 외침을 재발견하여 ‘이신칭의’(以信稱義)를 교회의 중심 교리로 세웠고, 캘빈은 이를 더욱 조직적으로 정리하여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의 질서를 체계화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는 데 있습니다. 이 점은 오늘날 가톨릭과 개신교를 막론하고 여전히 소중한 유산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전통을 부정하기보다, 그 위에 한 걸음 더 들어가 ‘신앙과 삶의 결합’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참된 신앙은 반드시 사랑(자선, charity)과 하나로 결합되어야 하며, 삶 속에서 선을 행하지 않는 신앙은 살아 있는 신앙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바울의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선언과 대립한다기보다, 그 말씀을 내적 의미 차원에서 더 깊이 파고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루터와 캘빈이 ‘은혜의 기초’를 놓았다면, 스베덴보리는 ‘그 은혜가 인간 안에서 어떻게 실제 삶으로 열매 맺는가’를 설명하려 한 셈입니다.

 

또 하나의 차이는 계시 이해 방식입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사도로서 직접적 사도적 권위를 가졌고, 루터와 캘빈은 성경의 문자적 의미를 중심으로 교리를 재정립했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성경이 ‘상응’에 의해 기록되었으며, 문자 속에 영적, 천적 의미가 담겨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것은 기존 교회 전통을 무너뜨리려는 시도라기보다, 성경의 깊이를 더 확장해 보려는 시도였습니다. 가톨릭의 영적 해석 전통이나, 개신교 안의 경건주의적 흐름과도 어떤 접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구원 이해에서도 결은 조금 다릅니다. 루터와 캘빈은 ‘법정적 칭의’에 무게를 두었고, 스베덴보리는 ‘인간 존재의 실제 변화’, 곧 거듭남과 성품의 개혁을 더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서로를 부정하기보다, 한쪽은 ‘출발점’을, 다른 한쪽은 ‘과정과 완성’을 더 부각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국 모두가 말하려 한 것은, 인간이 자기 사랑에서 벗어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와 바울, 루터, 캘빈을 나란히 놓고 볼 때, 우리는 긴장보다는 ‘연속성과 심화’라는 관점으로 접근하는 것이 유익합니다. 바울이 복음의 기초를 놓고, 종교개혁자들이 그것을 역사 속에서 다시 밝히며, 스베덴보리가 그 복음의 내적 의미와 천상적 차원을 해설했다는 식의 이해는, 가톨릭이나 개신교인들에게도 비교적 부담이 적은 설명이 될 수 있습니다.

 

결국 네 인물 모두의 중심에는 ‘주님이 누구이신가’와 ‘인간이 어떻게 새 사람이 되는가’라는 공통 질문이 있습니다. 강조점과 언어, 시대적 문제의식은 달랐지만, 그들이 향한 방향은 하나님과 인간의 참된 결합이었습니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우리는 누구를 배척하기보다 각자의 빛을 통해 더 넓은 빛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빛의 근원은 한 분 주님이심을, 서로 다른 증언들이 조용히 가리키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심화

 

스베덴보리와 바울, 루터, 캘빈을 조금 더 깊이 비교하려면, 단순히 ‘교리 몇 가지의 차이’를 나열하기보다, 이들이 각각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어떤 구조로 이해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유익합니다. Paul the Apostle에게서 중심은 ‘그리스도 안에 있음’입니다. 인간은 율법 아래에서 스스로 의로워질 수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새 사람이 됩니다. 바울의 사상은 법정적 선언(칭의)만이 아니라, 실제 존재의 변화(“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까지 포함합니다. 다만 그의 서신은 논쟁적 상황 속에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행위가 아닌 신앙’이라는 표현이 강하게 부각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 자신도 ‘사랑으로 역사하는 신앙’을 말하며, 신앙과 삶의 분리를 의도하지는 않았습니다.

 

Martin Luther는 중세 교회의 공로 사상과 면죄부 남용 속에서 양심의 해방을 절박하게 외쳤습니다. 그의 체험에서 핵심은 ‘하나님의 의는 인간을 정죄하는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선물로 주어지는 의’라는 발견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신앙을 ‘붙드는 손’으로, 은혜를 ‘주어지는 선물’로 비유했습니다. John Calvin은 이 은혜를 더 체계화하여,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예정 교리를 강조했습니다. 그의 관심은 혼란한 시대 속에서 ‘구원의 확실성’을 보장하는 것이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인간의 공로를 배제하고, 하나님 중심의 구원을 세우려는 공통 목적을 가졌습니다.

 

Emanuel Swedenborg는 이 전통을 정면으로 거부하기보다, 그 내부에서 제기된 긴장을 해소하려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신앙만’, 즉 ‘오직 믿음’이 구원한다는 공식이 실제 삶에서 ‘사랑 없는 신앙’으로 오해될 가능성을 우려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참된 신앙은 본질적으로 사랑과 하나이며, 사랑 없는 신앙은 실재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가 행위를 공로로 세우려 한 것이 아니라, ‘신앙의 실체는 사랑 안에서만 존재한다’고 본 것입니다. 다시 말해, 루터가 말한 ‘참된 신앙은 반드시 선행을 낳는다’는 주장과 깊은 차원에서는 통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이를 단순한 윤리적 열매가 아니라, 존재 구조의 결합, 곧 진리와 선의 결혼이라는 형이상학적 틀로 설명했습니다.

 

계시 이해에서도 한 단계 더 들어갈 수 있습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난 사도로서, 복음의 중심 내용을 선포했습니다. 루터와 캘빈은 성경의 문자적 의미를 최종 권위로 삼았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성경의 문자적 의미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그 속에 ‘상응’에 따른 영적 의미가 내재한다고 보았습니다. 이것은 문자 해석을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문자 해석이 서로 충돌해 보일 때, 그 깊은 일관성을 보여주려는 시도였습니다. 실제로 종교개혁 전통 안에도 알레고리적, 영적 해석의 흔적은 존재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체계적으로 복원하려 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구원 과정에 대한 이해에서도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루터와 캘빈은 ‘칭의’라는 사건적 전환을 강조했고, 성화는 그 결과로 보았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을 하나의 긴 여정으로 설명하며, 인간 안의 사랑의 질서가 실제로 재배열되는 과정을 상세히 다룹니다. 여기서 그는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그러나 이 역시 ‘은혜 없이 인간이 스스로 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오지만, 인간은 그것을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협력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는 가톨릭 전통의 ‘은총과 자유의 협력’ 사상과도 대화를 시도할 수 있는 지점입니다.

 

결국 네 인물을 깊이 비교하면, 차이만큼이나 공통점이 보입니다. 모두 인간 중심 신앙을 경계했고, 모두 그리스도를 구원의 중심에 두었으며, 모두 인간의 삶이 변화되어야 함을 말했습니다. 강조점이 달랐을 뿐, 서로를 완전히 배제하는 관계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바울이 복음의 씨앗을 뿌렸고, 루터와 캘빈이 그 씨앗을 다시 일으켜 세웠으며, 스베덴보리가 그 나무의 보이지 않는 뿌리 구조를 설명하려 했다고 비유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가톨릭이나 개신교인들에게도 이 비교는 위협이 아니라 확장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기존 전통을 허무는 혁명가라기보다, 복음의 내적 구조를 더 깊이 해설하려 한 해설자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바울, 루터, 캘빈 역시 각각의 시대 속에서 주님께 붙들린 증인들이었습니다. 서로 다른 시대의 다른 목소리들이지만, 그들이 가리키는 중심은 하나였다고 조심스럽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SC.22, 스베덴보리가 자신이 어떻게 ‘계시’를 받았는지를 직접 묘사한 주요 원문들

혹시 스베덴보리가 자신이 어떻게 ‘계시’를 받았는지를 직접 묘사한 주요 원문들을 좀 확인 및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스베덴보리가 자신이 어떻게 계시를 받았는지를 직접 묘사한 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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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을 만드는 것은 주님의 신성이다

It Is the Divine of the Lord That Makes Heaven

 

HH.9

천사들은 그들의 지혜로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선과 진리뿐 아니라 생명에 속한 모든 것 역시 주님으로부터 온다고 말이지요. 그들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컨펌(confirm)합니다. 어떤 것도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생겨날 수 없고, 오직 자기보다 앞선(prior to) 어떤 것에서만 생겨날 수 있으며, 그러므로 모든 것은 하나의 첫째(a first)로부터, 즉 맨 처음 존재로부터 나온다고 말입니다. 그들은 이것을 만물 생명의 존재 그 자체(esse)라고 합니다. 또한 존재의 지속도 마찬가지인데요, 지속적 존재란 끊임없는 생겨남(a ceaseless springing forth)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도 중간 매개들(intermediates)을 통하여 처음과 계속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즉시 흩어지고 완전히 소멸됩니다. 천사들은 또한 말하기를, 생명의 근원은 오직 하나이며, 인간의 생명은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와 같다고 합니다. 만일 그 물줄기가 그 근원으로부터 끊임없이 이어지지 않는다면, 즉시 말라 버릴 것입니다. Angels from their wisdom go still further. They say that not only everything good and true is from the Lord, but everything of life as well. They confirm it by this, that nothing can spring from itself, but only from something prior to itself; therefore all things spring from a first, which they call the very being [esse] of the life of all things. And in like manner all things continue to exist, for continuous existence is a ceaseless springing forth, and whatever is not continually held by means of intermediates in connection with the first instantly disperses and is wholly dissipated. They say also that there is but one fountain of life, and that man’s life is a rivulet therefrom, which if it did not unceasingly continue from its fountain would immediately flow away.

 

[2] 천사들은 또 말하기를, 이 하나의 생명의 근원(fountain), 곧 주님으로부터 나아오는 것은 오직 신적 선(Divine good)과 신적 진리(Divine truth)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각 사람은 그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영향을 받는데요, 그것들을 신앙과 삶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그 안에서 천국을 발견하지만, 그것들을 거부하거나 억누르는 자는 그것을 지옥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선을 악으로, 진리를 거짓으로, 그리고 그렇게 해서 생명을 죽음으로 바꾸기 때문입니다. 거듭 생명의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천사들은 이렇게 컨펌합니다. 우주의 모든 것은 선과 진리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인간 의지의 생명, 곧 그의 사랑의 생명은 선과 관련되어 있고, 그의 이해의 생명, 곧 그의 신앙의 생명은 진리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선과 진리가 위로부터 오기 때문에, 생명의 모든 것도 위로부터 와야 한다고 말입니다. Again, they say that from this one fountain of life, which is the Lord, nothing goes forth except Divine good and Divine truth, and that each one is affected by these in accordance with his reception of them—those who receive them in faith and life find heaven in them while those who reject them or stifle them change them into hell; for they change good into evil and truth into falsity, thus life into death. Again, that everything of life is from the Lord they confirm by this: that all things in the universe have relation to good and truth—the life of man’s will, which is the life of his love, to good, and the life of his understanding, which is the life of his faith, to truth; and since everything good and true comes from above it follows that everything of life must come from above.

 

[3] 이러한 믿음을 지닌 천사들은 자기들이 행한 선에 대해 어떤 감사도 받으려 하지 않으며, 누가 선을 그들에게 돌리면 기뻐하지 않고 물러납니다(withdraw). 누군가가 자기가 스스로 지혜롭다고 믿거나, 스스로 선을 행한다고 믿는 것을 그들은 이상하게 여깁니다. 자기 자신을 위하여 선을 행하는 것은 선이라 부르지 않는데, 그것은 자기(self)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을 위하여 선을 행하는 것은 신성(the Divine)으로부터 나온 선이라 부르며, 그들은 이것이 곧 천국을 이루는 선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 선이 곧 주님이기 때문입니다.주18 This being the belief of the angels they refuse all thanks for the good they do, and are displeased and withdraw if anyone attributes good to them. They wonder how anyone can believe that he is wise from himself or does anything good from himself. Doing good for one’s own sake they do not call good, because it is done from self. But doing good for the sake of good they call good from the Divine; and this they say is the good that makes heaven, because this good is the Lord.18

 

 

18. 주님으로 말미암는 선은 그 안에 내적으로 주님이 계시지만, 사람으로 말미암는 선은 그렇지 않다. Good from the Lord has the Lord inwardly in it, but good from one’s own has not (n. 1802, 3951, 8480).

 

 

해설

 

이 글은 HH.8에서 제시된 원리를 철학적, 형이상학적 깊이로 확장합니다. 단지 ‘선과 진리는 주님한테서 온다’는 차원을 넘어, ‘생명 그 자체가 주님한테서 온다’고 말합니다.

 

천사들의 논증은 매우 단순하면서도 근본적입니다. ‘아무것도 스스로 생겨날 수 없다.’ 이것은 존재론의 제1 원리입니다. 어떤 것이 존재하려면, 그것보다 앞선 원인이 있어야 합니다. 끝없이 거슬러 올라가면, 반드시 ‘맨 처음’, 곧 더 이상 다른 것에서 오지 않는 근원이 있어야 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esse’, 곧 ‘존재 그 자체’는 바로 그 첫째 원리이며, 스베덴보리에게 그것은 주님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속적 존재는 끊임없는 생겨남’이라는 통찰입니다. 우리는 존재를 한 번 생겨난 후 스스로 유지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천사들의 관점에서는 존재란 매 순간 새롭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마치 등불이 계속 타오르려면 계속 기름이 공급되어야 하듯, 생명은 매 순간 근원으로부터 흘러들어와야 합니다. 연결이 끊어지면 즉시 소멸입니다.

 

인간의 생명은 근원에서 흘러나오는 시냇물, 물줄기와 같다’는 비유는 매우 아름답습니다. 시냇물은 스스로 흐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근원이 있기에 흐릅니다. 만일 근원이 마르면, 흐름도 사라집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의지, 생각, 사랑, 신앙은 모두 생명의 근원과 연결되어 있을 때만 살아 있습니다.

 

또한 주님으로부터 나아오는 것은 오직 ‘신적 선’과 ‘신적 진리’뿐이라고 말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같은 신적 유입이 사람에 따라 ‘천국’이 되기도 하고, ‘지옥’이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근원이 둘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근원은 하나입니다. 그러나 수용 방식이 다릅니다. 받아들이는 이는 선과 진리 안에서 사랑과 신앙을 이루고, 거부하거나 왜곡하는 이는 그것을 악과 거짓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즉, 지옥은 별도의 창조물이 아니라, 왜곡된 수용의 결과입니다.

 

이어지는 설명에서 천사들은 생명의 구조를 선과 진리의 관계로 설명합니다. 의지의 생명은 사랑이며 선과 관련되고, 이해의 생명은 신앙이며 진리와 관련됩니다. 모든 선과 진리가 위로부터 온다면, 의지와 이해의 생명 역시 위로부터 와야 합니다. 이로써 ‘생명 전체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도출됩니다.

 

이러한 인식 때문에 천사들은 선에 대한 감사를 받지 않으려 합니다. 선을 자기 것으로 돌리는 순간, 그것은 이미 변질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하여 선을 행하는 것은 겉으로는 선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자기 사랑의 확장일 수 있습니다. 반면 ‘선을 위하여 선을 행하는 것’은 곧 신적 선의 흐름에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 자체가 주님이시기 때문에, 그 선이 곧 천국을 이룹니다.

 

이 글은 인간의 공로 의식과 자율성에 대한 자연적 사고를 근본에서 흔듭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을 무가치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높입니다. 왜냐하면 ‘근원과 연결된 존재’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빛나는 존재가 아니라, 태양과 연결될 때 빛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연결이 바로 천국입니다.

 

결국 HH.9은 이렇게 말합니다.

 

생명은 소유가 아니라 참여다.’

 

그리고 그 참여가 사랑과 신앙 안에서 이루어질 때, 그것이 곧 천국입니다.

 

 

심화

 

1. 형이상학’(形而上學)

 

형이상학’(形而上學)이라는 말이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는, 일상에서 잘 쓰이지 않는 철학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아주 쉽게 말하면, 형이상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근본 원리를 묻는 학문’입니다. 무엇이 존재하는가, 존재는 어떻게 유지되는가, 모든 것의 근원은 무엇인가 같은 질문을 다룹니다. 눈에 보이는 사물이나 현상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존재의 구조와 원인을 묻는 것이 형이상학입니다.

 

예를 들어, 나무가 자라는 과정을 생물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과학입니다. 그러나 ‘왜 무엇인가가 존재하는가?’, ‘존재는 스스로 설 수 있는가, 아니면 근원이 필요한가?’ 같은 질문은 형이상학입니다. HH.9에서 천사들이 ‘아무것도 스스로 생겨날 수 없고, 모든 것은 처음 것에서 나온다’고 말하는 부분이 바로 형이상학적 사고입니다. 이것은 도덕 이야기가 아니라, 존재의 근본 구조를 묻는 설명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단지 ‘착하게 살아라’고 말하는 윤리 교사가 아니라, ‘존재 자체는 어디에서 오는가?’를 묻는 사상가입니다. 그가 ‘지속적 존재는 끊임없는 생겨남이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철저히 형이상학적 진술입니다. 우리는 한 번 태어나면 그냥 계속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는 존재가 매 순간 근원으로부터 유지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이 바로 형이상학입니다.

 

형이상학은 보이는 것 뒤에 있는 보이지 않는 근본을 묻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HH.9에서는 ‘모든 생명의 근원은 주님이시다’라는 존재의 근본 원리를 설명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그것을 형이상학적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다시 말해, 행동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구조를 다루는 설명이라는 뜻입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형이상학은 왜 존재하는가, 무엇이 근원인가를 묻는 사유이며, HH.9는 바로 그 차원에서 생명의 근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2. 생명

 

이 ‘생명’에 대한 질문은 HH.9에서 가장 근본을 묻는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생명’은 단순히 숨 쉬고 움직이는 상태를 뜻하지 않습니다. 그는 생명을 ‘사랑하고 생각하고 의지하는 능력의 근원’으로 이해합니다. 다시 말해, 생명은 단순한 생물학적 활동이 아니라, 사랑하고, 원하고, 이해하고, 신앙하는 그 모든 의식 활동의 근원적 힘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생명은 인간의 소유가 아니라, 오직 주님께만 속한다고. 인간은 생명의 근원이 아니라 생명을 받는 그릇입니다. 우리가 ‘내가 생각한다’, ‘내가 사랑한다’, ‘내가 결정한다’고 느끼지만, 그 생각과 사랑과 의지의 능력 자체는 근원에서 계속 흘러와야 유지됩니다. 그래서 HH.9에서 ‘지속적 존재는 끊임없는 생겨남’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생명은 한 번 주어지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주어지는 것입니다.

 

생명은 단순히 살아 있다는 상태가 아니라, 사랑하고 생각할 수 있는 힘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덧붙일 수 있습니다. ‘그 힘의 근원은 나 자신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마치 빛은 전구가 내지만, 그 근원인 전기는 발전소에서 오는 것처럼, 우리는 사랑하고 생각하지만, 그 생명의 근원은 우리 안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생명은 항상 ‘사랑’과 ‘진리’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의지의 생명은 사랑이고, 이해의 생명은 진리 안에서 활동합니다. 그래서 모든 생명이 선과 진리의 관계 안에서 설명됩니다. 만약 사랑이 왜곡되면 생명도 왜곡되고, 진리가 거짓으로 변하면 생명의 빛도 어두워집니다. 그가 ‘선과 진리를 거부하면 생명을 죽음으로 바꾼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생명은 내가 살아 있다는 느낌이 아니라, 사랑하고 생각하게 하는 근원적 힘이며, 그 근원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3. 존재론’(存在論)

 

이런 용어를 정확히 풀어 두지 않으면, HH 같은 텍스트는 계속 추상적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존재론’(存在論)은 아주 간단히 말하면 ‘무엇이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묻는 생각입니다. 더 어렵게 말하면 ‘존재의 구조를 다루는 철학’이지만, 쉽게 풀면 ‘있는 것의 근본을 묻는 질문’입니다.

 

예를 들어 이런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은 어떻게 착해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윤리의 문제입니다. ‘사람은 왜 존재하는가?’ 또는 ‘사람의 생명은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질문은 존재론의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 행동의 옳고 그름을 묻는 것이 아니라, 그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의 근원을 묻는 것입니다. HH.9에서 천사들이 ‘아무것도 스스로부터 생겨날 수 없다’고 말할 때, 그것은 도덕 이야기가 아니라 존재론적 설명입니다. 존재가 어떻게 유지되는지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존재론은 왜 있는가?”를 묻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묻는다면 그것은 삶의 방법에 대한 질문이고, ‘왜 내가 존재하는가?’를 묻는다면 그것은 존재론적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착하게 살아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진리, 생명 자체는 어디에서 오는가?’를 묻습니다. 그래서 그의 설명은 존재론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조금 더 쉬운 비유를 들면 이렇습니다. 나무가 열매를 맺는 법을 설명하는 것은 농업 지식입니다. 그러나 ‘나무가 존재할 수 있는 근원은 무엇인가? 씨앗은 어디에서 왔는가?’를 묻는 것은 존재론적 질문입니다. HH.9는 바로 이런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생명은 어디에서 오는가?’, ‘존재는 스스로 설 수 있는가?’를 묻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존재론은 무엇이 근원이며, 무엇이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묻는 생각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도덕만 말하는 분이 아니라, 존재의 근원을 설명하는 분이기 때문에 이런 용어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4. esse

 

esse’는 라틴어로, 가장 기본적인 뜻은 ‘있다(to be)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이 단어를 사용할 때는 단순히 ‘존재한다’는 상태를 넘어서, ‘존재하게 하는 근원적 있음’, 곧 ‘존재 그 자체’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HH.9에서 천사들이 ‘만물 생명의 존재 그 자체(the very being [esse] of the life of all things)라고 말할 때, 그것은 단순히 ‘하나의 존재’가 아니라,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는 근원적 있음, 더 이상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첫째 원리를 뜻합니다.

 

쉽게 설명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나도 있고, 나무도 있고, 별도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개별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esse’는 그런 개별적인 것들보다 더 깊은 차원입니다. ‘도대체 있음이라는 것은 어디에서 오는가?’를 묻는 자리입니다. 어떤 것도 스스로 존재할 수 없다면, 반드시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는 첫 근원이 있어야 합니다. 그 근원을 그는 ‘esse’라고 부르고, 그것을 곧 주님과 동일시합니다.

 

esse는 그냥 있다가 아니라, “있게 하는 있음입니다.’ 마치 전구 하나하나는 빛나지만, 그 빛을 가능하게 하는 전기가 따로 있듯이, 개별 존재들은 있지만, 그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근원이 있습니다. 그 근원적 있음이 바로 ‘esse’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는 ‘esse’와 ‘existere’를 구분합니다. ‘esse’는 존재의 근원이고, ‘existere’는 그 존재가 밖으로 나타난 상태입니다. 태양 자체가 ‘esse’라면, 그 빛이 퍼져 나와 드러나는 것은 ‘existere’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존재 그 자체(esse)이시고, 그분으로부터 나오는 사랑과 진리는 나타남(existere)의 차원에서 피조물 안에 드러납니다.

 

그래서 HH.9에서 말하는 ‘esse’는 철학적 장식어가 아니라, 매우 중요한 신학적 선언입니다. ‘생명은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이신 주님에게서 나온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esse는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 모든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 있음이며,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주님으로 이해합니다.’

 

 

5. 의지의 생명, 이해의 생명

 

의지의 생명, 이해의 생명’이라는 표현은 처음 들으면 매우 추상적으로 들리지만, 사실은 인간 안의 가장 기본적인 두 기능을 설명하는 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을 크게 두 축으로 봅니다. 하나는 ‘의지(will), 곧 사랑하고 원하고 선택하는 능력이고, 다른 하나는 ‘이해(understanding), 곧 생각하고 판단하고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 두 기능이 단순한 심리 작용이 아니라, ‘생명’의 서로 다른 표현이라고 말합니다.

 

의지의 생명’이라는 것은 의지를 의지 되게 하는 근원적 힘을 뜻합니다. 의지는 단순히 결심하는 능력이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원하는지에 의해 움직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의지의 생명을 곧 ‘사랑의 생명’이라고 설명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진정으로 사랑하는가가 그의 의지의 중심입니다. 이 사랑이 바로 의지의 생명입니다. 만약 사랑이 없다면, 의지는 작동하지 않습니다.

 

이해의 생명’은 이해를 이해 되게 하는 근원적 힘을 뜻합니다. 이해는 단순한 정보 처리 능력이 아니라, 무엇이 참인지 분별하고 의미를 파악하는 능력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신앙의 생명’ 혹은 ‘진리의 생명’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참으로 받아들이고 믿는가가 그의 이해의 중심을 형성합니다. 진리의 빛이 없다면 이해는 어둡습니다.

 

사람 안에는 사랑하는 부분과 생각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부분이 의지이고, 생각하는 부분이 이해입니다. 그리고 그 둘을 움직이게 하는 근원적 힘을 각각 의지의 생명, 이해의 생명이라고 합니다.’ 즉, 의지는 사랑으로 살고, 이해는 진리로 삽니다.

 

조금 더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자동차에 엔진과 조향 장치가 있다고 합시다. 엔진이 차를 움직이게 하는 힘이라면, 그것이 의지의 생명과 비슷합니다. 조향 장치가 방향을 잡아 준다면, 그것이 이해의 생명과 비슷합니다. 둘 다 있어야 차가 제대로 움직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랑만 있고 진리가 없으면 방향을 잃고, 진리만 있고 사랑이 없으면 움직일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HH.9에서 ‘의지의 생명은 선과 관련되고, 이해의 생명은 진리와 관련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생명은 하나이지만, 인간 안에서는 사랑과 진리라는 두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근원은 오직 주님에게 있습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의지의 생명은 사랑이며, 이해의 생명은 진리이고, 이 두 생명이 함께 작용할 때 인간은 살아 있는 존재가 됩니다.’

 

 

 

HH.8, 2장, '주님 신성의 수용은 철저한 자기 부인 위에'

2천국을 만드는 것은 주님의 신성이다It Is the Divine of the Lord That Makes Heaven HH.8천국에 있는 모두가 알고, 믿으며, 심지어 지각하기(perceive)까지 하는 게 있는데, 그것은 곧 스스로 뭘 의도하거나 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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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이곳 파주 크리스찬 메모리얼 파크에서 세 번째 故 권성조(權聖祚, 1923 生 - 2015 卒, 享 91세), 故 김정자(金貞子, 1926 生 - 2005 卒, 享 79세), 두 분의 추모예배를 드리겠습니다.

 

찬송

563장, 예수 사랑하심을1, 2

 

본문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17:21)

 

설교

 

※ 편의상 두 분의 호칭을 각각 ‘아버님’, ‘어머님’으로 통일하겠습니다.

 

오늘로 어느덧 두 분의 각각 11주기, 21주기 기일이 되었습니다.

 

아버님의 경우, 11년 전인 2015년 삼일절 날, 며칠 전인 설 연휴 기간 뵌 모습을 마지막으로 다들 마음의 준비들을 하고 있던 차,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 그날 밤 국립중앙의료원 도착, 아직 간호사실에 병상 채 계신, 잠깐 손대어 느낀, 아직 그 발에 남아 있던 온기며... 그리고 이어 장례식장에서 입관 및 하관 예배 준비에 여념 없었던 그런 여러 장면들이 생각납니다. 특히 입관예배 때 다들 크게 울던 장면들이며, 포천 황동묘원 시절, 새벽 미명 그 춥고 어두운 길을 따라 당시 사정상 은밀하게 드려야 했던 하관예배도 생각납니다.

 

어머님의 경우는 더 거슬러 올라가 21년 전인 지난 2005527일 금요일, 그날, 위독하시다는 소식에 온 가족 함께 찾았다가 괜찮아 보이셔서 저녁 무렵 대전 집으로 내려왔는데, 집에 도착하자마자 돌아가셨다는 연락 받고, 방금 벗었던 구두를 얼른 다시 신고 그대로 출발, 이번엔 한양대학교 병원 장례식장으로 갔지요. 그때 어머님, 돌아가시기 며칠 전, 갑자기 찬송가 ‘예수 사랑하심을’을 부르시더라는 말씀에 감동하던 생각이 납니다. 발인까지는 사랑의교회에서 섬기시지만, 주일이라 장지까지는 어렵겠다 하시는 교회 부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장례식장에서 생전 처음 장례, 특히 하관예배 준비를 해야 했던 기억도 납니다. 아직 신학도 안 한 사람이 말입니다. 저는 사실 어머님 병 낫기를 위한 철야기도 때 주님 음성 듣고 신학교를 간 사람입니다. 그때 살던 아파트 앞, 다니던 교회에 가서 한밤 본당에서 혼자 어머님 병 낫게 하여 주시기를 간구하던 중, 신학교를 가라시는 음성을 들었지요. 주님은 어머님의 연약함을 통해서 둘째 사위를 신학교 가게 하시려는 계획이 있으셨었나 봅니다. 어쨌든 저는 신학도 하기 전 인생 첫 장례 집례를, 그것도 장모의 장례 하관예배를 인도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해 여름과 가을을 서둘러 준비, 이듬해인 2006년, 대전침례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입학, 신대원 3년 과정을 마치고, 계속해서 대전 모 교회에 부사역자로 청빙 받아 장년 사역을 시작하게 되지요.

 

잠시 두 분 관련, 저의 오래된 옛 기억들을 되살려 보았습니다. 저와는 다른 저마다 다들 특별한 기억들이 있으시지요? 이런 기억들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마치 어제 있었던 일처럼 생생합니다. 저의 모친께서는 제가 고3 때인 1980년 가을, 교통사고로 갑자기 떠나셨는데, 그 황망함 중에 겪었던 모든 것이 아직도 무슨 비디오 영상 보듯 생생하지요... 네, 과거 기억들 이야기는 이쯤하고...

 

그러면, 두 분은 지금쯤 천국에서 어떻게 지내고 계실까요?

 

주님의 자비(mercy)로 생전에 특별히 천국을 비롯, 영계를 27년간 왕래하며, 주님의 허락으로 많은 걸 기록으로 남긴 분이 계시는데, 이분의 대표적 저작 중 하나인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1758)이라는 책을 보면, 아버님, 어머님, 두 분의 현재 모습들을 대략 유추해 볼 수 있어 잠시 나누겠습니다.

 

참고로, 다음은 이분에 대한 간략한 소개입니다.

 

에마누엘 스베덴보리(Emanuel Swendenborg, 1688-1772)1688년,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출생, 웁살라대학에서 언어학, 수학, 광물학, 천문학, 생리학, 신학을 수학했습니다. 자연과학을 연구하여 광산학자로서의 권위를 인정받고, 아이작 뉴턴과 같은 최고 과학자 반열에 올랐으나 57세에 주님의 부르심으로 영계 체험을 시작, 이후 27년간 영계를 자유롭게 오고 가며, 보고 들은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겨 그 라틴어 원고만 수만 장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의 과학적 재능을 아낀 동료들에게 그는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합니다.

 

저와 같은 과학자는 얼마든지 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일, 곧 영계에 관한 진리를 남기는 일은 인류 전체의 생명이 걸린 중요한 문제입니다. 주님께 받은 이 특별한 소명은 제가 과학자로 공헌하는 것보다 수천수만 배 더 중요합니다...”

 

그는 그의 마지막 저서, ‘True Christian Religion(1771)을 끝으로 이듬해인 1772년 주님이 부르시는 영원한 천국으로 들어갔습니다. //

 

이 스베덴보리라는 분이 전하는 많은 놀라운 사실들에 의하면, 사람은 사후 영계에서 눈을 뜰 때, 천국도, 지옥도 아닌, 중간 상태에서 눈을 뜬다고 합니다. 그에 의하면, 영계는 우리 사는 이 자연계처럼 시공간(視空間)의 나라가 아닌, 상태(state)와 그 변화의 나라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천국’이라고 하면, 그것은 사실은 ‘천국이라는 상태’의 준말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지옥도 마찬가지고요.

 

사람이 사후 바로 천국이라는 상태나 지옥이라는 상태로 못 들어가고 일단 이렇게 중간 상태에서 눈을 뜨는 이유는, 좀 쉽게 말씀드리면, 천국이나 지옥은 완전히 선하든지, 완전히 악하든지, 혹은 완전히 진실하든지, 완전히 거짓되든지 해야만 갈 수 있는, 즉 그래야만 들어갈 수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들 아시겠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세상 살면서 이 둘이 어느 정도는 좀 섞여 있습니다. 그래서 바로는 못 가고 사람마다 다르지만 저마다 소위 ‘정제 기간’, 그러니까 렌더링(rendering)하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말이죠. 천국 갈 사람은 천국에서는 소용없는 악과 거짓을 떼어내는 시간이, 지옥 갈 사람은 지옥에선 소용없는 선과 진리를 떼어내는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둘이 섞여 있는 정도에 따라 그 중간 상태 체류 기간이 짧기도 하고 길기도 한데, 그런데 아버님, 어머님의 경우, 두 분 모두 겉과 속이 거의 같은 분들이셔서 아마 중간 상태 체류 기간은 무척 짧았겠고, 얼마 안 있어 두 분 다 바로 천국으로 올라가셨으리라 짐작됩니다. 사람이 이 중간 상태에 머무르는 기간은 다 다른데 최장 한 30년 정도랍니다.

 

방금 ‘겉과 속’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요, 이는 사람의 겉, 곧 겉 사람(external man)과, 사람의 속, 곧 속 사람(internal man)을 줄여 말씀드린 겁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우리 눈에 보이는 겉모습이 곧 겉 사람이고요, 눈에 안 보이지만 우리의 진짜 모습, 곧 우리의 진짜 정체가 바로 속 사람입니다. 사람의 사후, 천국이든 지옥이든 가는 건 바로 이 속 사람이 가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는 영이라고 하지요. 사후 세계를 가리켜 영계라고 하는 이유는 사후 세계는 육이 아닌 영들이 가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나라라고 했지만, 사실은 상태입니다. 아직 살아있는 우리는 사실은 영적 존재인 영(靈)이 자연적 존재인 이 육(肉)의 옷을 입고 이 세상에서 활동하는 것입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이 육은 영이 떠나면 바로 부패 시작, 썩어 없어집니다.

 

사람의 영이 육에서 분리되는 순간은 사람의 주요 장기인 심장과 폐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을 때입니다. 이 순간은 의료장비보다도 더 미묘하여 오직 모든 생명의 주(主)이신 주님만이 직접 하십니다. 왜 심장과 폐냐면, 사람의 심장은 주님의 신성(神性, Divine) 중 선(, Good)과, 사람의 폐는 주님의 신성 중 진리(眞理, Truth)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두 분도 이런 분리의 순간이 있으셨을 텐데요, 그럼, 이렇게 영과 육이 분리되면, 이후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이 세상인 우리 쪽에서는 임종이지만, 저 세상인 영계에서는 신생(新生), 곧 새롭게 태어남입니다. 마치 신생아실 아기들처럼 말입니다.

 

참고로, 임종 후 저세상에서 새롭게 눈 뜨기까지는 대략 72시간 정도 걸립니다. 이는 우리 안에서 뭔가 아주 근본적으로 준비되어야 할 게 있기 때문인데, 이때 영계의 악한 영들이 가까이 다가와 해치지 못하도록 가장 높은, 사랑의 천사들인 삼층천 천사들이 찾아와 지킵니다. 이 천사들이 찾아오면 특유의 향기가 진동하는데, 악한 영들은 이 향기를 아주아주 질색해서 다들 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에도 영감이 좀 예민하신 분들은 장례식장이나 영안실, 혹은 장지에서 이 향기를 느끼시는 분들이 계시며, 천주교의 많은 성인들 중에는 그 임종 시 또는 그 묘역 주위에 이 향기가 오래 머물렀다는 이야기들이 많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세상 사는 우리도 뭐 저희처럼 서울 살다 대전으로 가거나, 한국 살다 미국이나 호주로 이민을 가거나 하면, 제일 먼저 하는 게 자기가 살러 간 그곳의 가장 중요한 것들을 우선 배우고 익히는 것인 것처럼, 두 분 역시 사후 도착한 너무나도 생소한 영계에서 눈을 뜨셨을 때, 굉장히 생소하고 어리둥절하셨을 겁니다. 그러나 모든 걸 각자 알아서 해야 하는 우리와는 달리 사람이 사후 영계에서 눈을 뜨면, 이미 주님이 보내신 천사들의, 이루 말할 수 없는 사랑과 지혜의 돌봄을 받으며, 하나하나 새로운 생활을 위한 모든 준비를 하게 됩니다. 선인이든 악인이든 처음에는 말입니다. 지상에도 이와 거의 유사한 시스템이 있는데 바로 산부인과 신생아실 간호사들의 돌봄 시스템인 것 같아요. 누구든 영계에서 처음 눈을 뜰 땐, 그쪽에서 봤을 땐 신생영이기 때문이지요. 어머님도, 그리고 아버님도 여기서는 할머니로, 할아버지로 눈을 감으셨지만, 저쪽에서는 갓 태어난 여아, 남아였을 뿐입니다. 몸집이 그렇다는 게 아니고요! ㅎㅎㅎ

 

우리가 남의 나라에 살러 갈 때 그러듯, 영들도 영계에서의 신생아 과정 및 100퍼센트 속 사람 과정이 끝나 천국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배우는 게 바로 천국이라는 나라의 주인, 곧 주님이 누구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뭐 주인이랄 것까지는 없지만, 그래도 대통령이든 주석이든, 왕이든 총리든 하여튼 소위 통치자, 최고 결정권자라는 게 있고, 그 사람이 누구냐, 어떤 사람이냐가 중요한데요, 거기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처럼 천국 역시 천국의 하나님이 누구시냐 하는 지식이 모든 걸 결정합니다. 두 분도 이 오리엔데이션 과정을 밟고, 그 내면이 확 열려 말할 수 없이 지혜로운 천국 천사의 지성으로 들어가셨을 겁니다. 천국에서는 주님에 대한 사랑의 지식이 많을수록 부자이기 때문이지요.

 

참고로, 사람의 이 오감, 즉 시각, 청각, 후각, 미각 및 촉각은 사후 영이 되면 몇 배로 향상, 놀라운 능력을 갖게 됩니다. 그동안은 물질인 육체에 갇혀 매우 제한적이었지만 말입니다. 이들 감각 역시 사실은 영에 속한 것입니다.

 

아, 그리고 또 하나, 모든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때, 그 사람의 가장 눈부시게 젊었던 상태로 들어갑니다. 가끔 영안이 열린 분들이 계시는데 이런 분들은 주님의 허락으로 다른 사람의 영, 곧 그 사람의 속 사람의 모습을 보실 수 있게 됩니다. 겉보기엔 그렇게 아름답지만, 그러니까 얼굴이며 몸매며 말이지요. 그러나 그 속 사람은 뭐랄까, 거의 괴물 수준의 여자들이 있더랍니다. 반면, 어떤 할머니는 허리도 굽고, 온통 쭈글쭈글 주름살투성이 겉모습이었지만, 그 속 사람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아름다움인지 가히 천사의 모습 같더라는 말을 합니다. 우리도 사실 살면서 우리 속 사람의 모습을 본 적이 없어요. 어떤 사람들은 사후 영이 되어 드디어 자기 속 사람의 모습을 보고는 너무 놀라 기절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사람이 사후 천국이나 지옥에 들어가기 전 두 번의 상태 변화를 겪는데, 우리 속 사람의 모습이 드러나 정착하는 건 두 번째 상태 변화 후입니다. 첫 번째 상태 변화 때까지는 그래도 지상에서 내가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맞이하지만, 이 두 번째 상태 변화 이후에는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심지어 가족과 혈연까지도 말이지요. 우리도 사후 영계에 도착하면 먼저 가신 부모님들, 그리고 형제들을 만날 텐데요, 우리가 만나는 분들은 주님의 허락으로 잠시 우리를 만나러 오신, 그러나 우리가 ‘, 누구시지?’ 할 정도로 눈부시게 빛나는, 매우 아름답고 생명력 넘치는 젊은이들 모습의 부모님, 그리고 형제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이미 지옥에 가신 분들을 이렇게 반갑게 만났다는 기록은 저는 아직 접하지를 못했습니다. 아마 지옥 가신 분들의 접견은 허락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천국에서는 모든 것이 질, 그러니까 퀄러티(quality)로 결정됩니다. 세상에서는 신앙생활을 몇 년 했냐, 교회를 몇 년 다녔냐? 회사에서 직급이 뭐냐? 무슨 자격증, 무슨 학위를 받았냐? 재산이 얼마나 되냐? 주식이나 코인, 금, 그리고 집 등 자산이 얼마나 되냐? 자식들은 얼마나 출세했냐? 등등으로 소위 행복과 불행, 인생을 잘 살았다, 못 살았다 같은 게 결정되지만, 천국은 그렇지 않습니다. 천국은 그런 걸로 들어가는 데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천국은 천국이라는 나라에 얼마나 어울리느냐로 그 입국 자격이 결정됩니다. 그러니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니고, 신학적 지식이 가득해도 그 속 사람의 퀄러티가 천국에 맞지 않으면 못 들어가는 데라는 말입니다. 천국은 그러니까, 음... 굳이 비유하자면, 로또 1등 당첨의 수천수만 배보다도 더 큰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건 말이지요. 그래서 주님도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28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6:28-30)

 

두 분이 지금 천국에서 어떤 삶을 살고 계실지 살짝 짐작이 되시지요?

 

이 세상과 천국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른 말로는 서로 상응(相應, correspondence)한다고 하는데요, 그래서 세상 살 때, 미리 천국에 대한 지식들을 알면, 헛된 인생을 살지 않을 수 있어 아주 중요합니다. 헛된 인생이란, 뭔가 세상 살 때 열심히 했는데, 그래서 뭔가를 이루고, 뭔가를 남기고 그랬는데, 정작 나중에 보니 전혀 천국스럽지 않은, 그러니까 전혀 천국 입국을 염두에 두고 한 게 아닌, 그래서 본의 아니게 자기 속 사람이 전혀 천국에 안 어울리는 모습, 상태가 된, 그런 인생을 말합니다. 그럼, 세상에서 열심히 살지 말라는 말이냐? 하실 수도 있으나 그건 아니고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기준은 간단합니다. 세상 살면서 천국을 염두에 두고 뭘 한다는 건, 그걸 주님을 사랑해서 하는 걸 말합니다. 아주 작은 사소한 일 하나도 주님을 사랑해서 했으면 그건 천국을 염두에 두고 한 것이 되며, 반대로 자기를 사랑해서 한 거면 그건 천국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한 것이 됩니다. 오직 주님을 사랑하여 하는 모든 말과 행동만이 자기의 속 사람을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말입니다. 기독교인이어도 그 모든 동기가 자기 사랑이면, 나라와 민족을 사랑해도 그 동기가 자기 사랑이면, 매우 미안한 표현이지만 다 나가리가 됩니다. 반면, 타 종교인이어도 그 교리에 스며있는 주님의 신성을 따라 양심적이고 도덕적으로 살았으면, 즉 선과 진리를 행했으면, 주님은 그 사람의 그 모든 행위를 주님을 섬긴 것으로 쳐주십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결론입니다.

 

제 블로그(https://bygrace.kr/)에 오시면 더욱 많은 걸 접하실 수 있습니다.

 

 

찬송

563장, 예수 사랑하심을3, 4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여호와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빛과 도우심의 그 은혜와 사랑이, 오늘 이 추모예배를 통해 들려주신 천국 이야기, 곧 두 분의 천국의 삶 이야기를 통해, 이제라도 우리 속 사람의 모습을 천국에 어울리는 상태가 되게 하자는 메시지를 듣고, 그동안 안개처럼 흐리고 뿌옇던 시야가 맑아져 마음에 굳게 결심하고 돌아가는 모든 심령 가운데, 그리고 생활과 삶 가운데 이제부터 영원토록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2026-03-01(D1)

삼일절

파주 크리스찬 메모리얼 파크

변일국 목사

 

2640. 2026-03-01(D1)-추모예배(눅12,2-3), '2026 故 권성조(11주기), 김정자(21주기) 추모예배'.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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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을 만드는 것은 주님의 신성이다

It Is the Divine of the Lord That Makes Heaven

 

HH.8

천국에 있는 모두가 알고, 믿으며, 심지어 지각하기(perceive)까지 하는 게 있는데, 그것은 곧 스스로 뭘 의도하거나 행하는 게 전혀 없다는 것, 그리고 스스로 뭘 생각하거나 믿는 것도 전혀 없다는 것, 대신 오직 신성(the Divine)으로, 그러니까 오직 주님한테서 오는 걸로만 그렇다는 것, 그리고 또 자신한테서 나오는 선은 선이 아니며, 진리 역시 자기한테서 나오는 건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이는 그것들 안에는 신성으로 말미암는 생명이 전혀 없기 때문이지요. 더 나아가, 가장 내적 천국(the inmost heaven) 천사들은 그 인플럭스를 분명히 지각하고 느끼며, 그것을 더 많이 받아들이면 들일수록 자신들이 더욱더 천국 안에 있는 걸 느낍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그들은 사랑과 신앙 안에, 지성과 지혜의 빛 안에, 그리고 거기서 오는 천적 기쁨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주님의 신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바로 그 안에서 천사들은 자기들의 천국(their heaven)을 가지므로, 천국을 만드는 것은 천사들한테나 어울리는 그들 고유의 어떤 것(proprium. own, 고유 본성)이 아니라 주님의 신성임이 분명합니다.(16) 이것이 왜 천국을 말씀에서 주님의 거처(dwelling place)라 하고, ‘그의 보좌(his throne)라 하며, 그곳에 있는 이들을 주님 안에 있다고 하는가 하는 이유입니다.(주17) 그러나 신성이 어떤 식으로 주님으로부터 나아와 천국을 채우는지는 이어지는 내용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Everyone in the heavens knows and believes and even perceives that he wills and does nothing of good from himself, and that he thinks and believes nothing of truth from himself, but only from the Divine, thus from the Lord; also that good from himself is not good, and truth from himself is not truth, because these have in them no life from the Divine. Moreover, the angels of the inmost heaven clearly perceive and feel the influx, and the more of it they receive the more they seem to themselves to be in heaven, because the more are they in love and faith and in the light of intelligence and wisdom, and in heavenly joy therefrom; and since all these go forth from the Divine of the Lord, and in these the angels have their heaven, it is clear that it is the Divine of the Lord, and not the angels from anything properly their own that makes heaven.16 This is why heaven is called in the Word the “dwelling place” of the Lord and “his throne,” and those who are there are said to be in the Lord.17 But in what manner the Divine goes forth from the Lord and fills heaven will be told in what follows.

 

 

16. 천국 천사들은 모든 선은 주님으로 말미암으며, 자신들로부터는 아무것도 말미암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주님은 그들 안에 있는 주님의 것 안에 계시고, 그들의 것 안에는 계시지 않으신다. The angels of heaven acknowledge all good to be from the Lord, and nothing from themselves, and the Lord dwells in them in His own and not in their own (n. 9338, 10125, 10151, 10157). 그래서 말씀에서 ‘천사들’은 주님께 속한 무엇을 의미한다. Therefore in the Word by “angels” something of the Lord is meant (n. 1925, 2821, 3039, 4085, 8192, 10528). 더 나아가 천사들은 주님으로 말미암는 신성 수용체라는 의미에서 ‘신들’이라 한다. Furthermore, angels are called “gods” from the reception of the Divine from the Lord (n. 4295, 4402, 7268, 7873, 8192, 8301). 거듭, 선이기 때문에 선한 모든 것, 진리이기 때문에 진리인 모든 것, 결과적으로, 모든 평화, 사랑, 체어리티, 그리고 신앙은 주님으로 말미암는다. Again, all good that is good, and all truth that is truth, consequently all peace, love, charity, and faith, are from the Lord (n. 1614, 2016, 2751, 2882, 2883, 2891, 2892, 2904). 또한 모든 지혜와 지성도 마찬가지다. Also all wisdom and intelligence (n. 109, 112, 121, 124).

 

17. 천국에 있는 사람들을 주 안에 있다고들 한다. Those who are in heaven are said to be in the Lord (n. 3637, 3638).

 

 

해설

 

이 글은 HH.7의 내용을 한층 더 깊이 밀어붙입니다. HH.7이 ‘천국은 주님의 신적 사랑과 신적 진리를 받아들이는 상태’라고 했다면, HH.8은 그 받아들임이 얼마나 철저한 자기 부인 위에 서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천국의 모든 천사는 ‘선을 의도하는 것, 이것은 나한테서 나오는 게 아니다. 진리를 생각하는 것, 이것도 마찬가지다’라는 것을 단지 교리적으로만이 아닌, ‘알고, 믿고, 지각하기까지 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지각한다(perceive)는 말은 단순한 추론이 아니라, 내적 확신이며 살아 있는 인식입니다. 천사에게는 이것이 사상(思想)이 아니라 경험입니다.

 

왜냐하면 자기한테서 나온 선과 진리는 ‘신적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생명은 오직 주님께만 속합니다. 피조물은 생명의 그릇입니다. 따라서 ‘자기에게서 나온 선’이라는 것은 실제로는 자기 사랑과 공로 의식이 섞인 선이며, 그 안에는 하늘의 빛이 없습니다. 천사들은 이것을 분명히 압니다.

 

특히 ‘가장 내적 천국’ 천사들은 ‘인플럭스(influx, 유입)를 분명히 느낀다고 합니다. 인플럭스는 스베덴보리 사상의 핵심 개념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끊임없이 흘러들어오며, 천사는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더 많이 받을수록 자기 자신이 더 살아 있는 것처럼, 더 천국 안에 있는 것처럼 느낍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의 자연적 사고로는 ‘내 것이 아니면 나는 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천국의 질서는 그 반대입니다. ‘내 것이 아니라고 인정할수록, 나는 더 충만해진다.’ 왜냐하면 그때 비로소 사랑과 신앙, 지성과 지혜, 그리고 거기서 오는 천적 기쁨이 온전히 흐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천국은 어떤 외적 환경이 아니라, ‘사랑 안에 있음’, ‘신앙 안에 있음’, ‘지성과 지혜의 빛 안에 있음’, ‘거기서 오는 기쁨 안에 있음’으로 정의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주님의 신성으로부터 나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을 만드는 것은 천사들의 프로프리움(proprium. own, 고유 본성)이 아니라, 주님의 신성입니다.

 

그래서 말씀에서는 천국을 ‘주님의 거처’, ‘그의 보좌’라고 부릅니다. 이는 공간적 표현이 아니라 상태적 표현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충만히 받아들여지는 곳이 곧 그의 거처이며 보좌입니다. 또한 천사들이 ‘주님 안에 있다’고 하는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이 글은 결국 우리에게 한 가지 근본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선과 진리를 어디에서 온 것으로 인정하는가?’ 만일 내가 ‘내가 옳다, 내가 선하다, 내가 했다’는 생각에 머문다면, 그만큼 인플럭스는 가려집니다. 그러나 ‘모든 선과 진리는 오직 주님으로부터만 온다’는 고백이 단지 말이 아니라 실제 인식이 될 때, 그만큼 사랑과 빛과 기쁨이 열립니다.

 

HH.8은 천국의 본질을 한 문장으로 요약합니다. ‘천국은 주님의 신성이 받아들여지는 상태이다.’ 그리고 그 받아들임은 자기 고유 본성을 내려놓는 데서 시작됩니다. 다음 글에서는 그 신성이 어떻게 나아가 천국을 채우는지 설명하겠다고 합니다. 이로써 스베덴보리는 천국을 심리적, 영적 역동 속에서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심화

 

1.천국에 있는 모두가 알고, 믿으며, 심지어 지각하기(perceive)까지 하는 게 있는데

 

알고, 믿고, 심지어 지각한다’는 표현은 단순한 반복이나 강조가 아니라, 의식의 서로 다른 층위를 가리키는 점층적 구조입니다. 먼저 ‘안다(know)는 것은 지성의 차원입니다. 어떤 교리를 듣고 이해하며, 논리적으로 납득하는 단계입니다. 예를 들어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말을 듣고 그 뜻을 이해하고 기억하는 것은 앎입니다. 다음으로 ‘믿는다(believe)는 것은 그 이해에 동의하는 단계입니다. 단순히 뜻을 아는 것을 넘어 ‘그렇다’고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차원입니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아직 생각과 판단의 영역에 속합니다.

 

지각한다(perceive)는 것은 그 진리가 단지 생각 속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의지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은 추론의 결과가 아니라, 내적 빛 속에서 즉각적으로 느껴지는 확신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을 아는 것과, 그 말이 참이라고 믿는 것은 가능하지만, 실제로 기도 가운데 그 사랑이 자기 안에 흘러들어와 마음이 녹고 평안과 기쁨이 동반되는 경험은 지각의 차원입니다. 또 ‘불은 뜨겁다’는 것을 배우는 것은 앎이고, 그것이 사실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믿음이지만, 실제로 불 가까이에서 열기를 느끼는 것은 지각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지각은 바로 이런 살아 있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HH.8에서 천국의 모든 이가 ‘알고, 믿고, 지각한다’고 한 것은, 그들이 단지 교리적으로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실제로 느끼며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들에게는 이것이 사상이 아니라 경험입니다. 진리가 그들의 사랑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은 내적 감각처럼 분명합니다. 반대로 어떤 이들은 진리를 알고 심지어 믿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사랑과 결합되지 않으면 지각하지는 못합니다.

 

앎은 머리의 빛이고, 믿음은 의지의 동의이며, 지각은 사랑 안에서 느끼는 내적 빛입니다. 머리로 아는 것과 가슴으로 살아 있는 것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HH.8은 바로 그 살아 있는 차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2.오직 신성(the Divine)으로, 그러니까 오직 주님한테서 오는 걸로만 그렇다는 것

 

먼저 분명히 해야 할 점은, 스베덴보리에게서 ‘주님(the Lord)과 ‘신성(the Divine)은 서로 다른 두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신성은 주님과 분리된 어떤 에너지나 힘이 아니라, 주님의 본질이며 주님 자신입니다. 다만 표현의 관점이 다를 뿐입니다. ‘주님’이라는 말은 인격적 호칭으로, 사랑하시고 인도하시고 말씀하시는 분을 가리킵니다. 반면 ‘신성’이라는 말은 그 주님의 본질적 생명, 곧 사랑과 진리 자체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존재는 하나이되, 우리가 그것을 바라보는 각도가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HH.8에서 ‘신성으로부터, 곧 주님으로부터’라고 병렬로 말하는 것은 둘을 구분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이 추상적 무엇이 아니라 바로 주님 자신임을 분명히 하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도 주님을 영적 태양에 비유하며, 그 태양으로부터 사랑의 열과 진리의 빛이 나온다고 설명합니다. 이 비유를 사용할 때 중요한 점은, 열과 빛이 태양과 다른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열과 빛은 태양의 발현이며, 태양이 밖으로 나타난 방식입니다. 태양이 없으면 열과 빛도 없고, 열과 빛이 닿는 곳에는 태양의 영향과 현존이 실제로 작용합니다. 마찬가지로 신성은 주님이 사랑과 진리로 우리에게 나아오시는 방식이며, 우리가 받는 것은 어떤 비인격적 에너지가 아니라 주님 자신의 사랑과 진리입니다.

 

주님은 영적 태양과 같고, 신성은 그 태양에서 나오는 사랑의 열과 진리의 빛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 열과 빛은 태양과 분리된 다른 무엇이 아니라, 태양 자신이 밖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직접 물리적으로 들어오시는 것은 아니지만, 그분의 사랑과 진리가 우리 안을 채울 때, 우리는 실제로 주님의 현존 안에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신성은 주님과 다른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 안에 임하시는 살아 있는 방식입니다.

 

 

3.가장 내적 천국(the inmost heaven) 천사들

 

가장 내적 천국(the inmost heaven)이라는 표현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가 ‘내적’이라는 말을 들으면 공간적 안쪽을 먼저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내적’은 공간의 깊이가 아니라 사랑의 깊이, 수용의 깊이를 말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은 위아래로 층이 있는 장소라기보다,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얼마나 깊이 받아들이느냐에 따른 상태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가장 내적’이란 더 안쪽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가장 순수하고 직접적으로 받아들이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사람 안에도 바깥 생각이 있고, 더 깊은 생각이 있으며, 그보다 더 깊은 마음의 중심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같은 말을 해도, 어떤 사람은 습관적으로 말하고, 어떤 사람은 진심으로 말하며, 어떤 사람은 사랑에서 우러나와 말합니다. 이처럼 인간 안에도 층이 있습니다. 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천국이지만, 어떤 이는 주님의 사랑을 더 깊이, 더 직접적으로 받아들이고, 어떤 이는 비교적 외적인 진리의 빛을 통해 받아들입니다. 그 차이를 가리켜 ‘가장 내적’, ‘중간’, ‘가장 외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조금 더 쉽게 말하면, ‘내적’은 거리의 개념이 아니라 친밀도의 개념입니다. 태양에 더 가까운 행성이 더 많은 빛과 열을 받는 것처럼, 주님의 사랑에 더 깊이 열려 있는 상태를 ‘내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내적 천국’의 천사들은 주님의 사랑의 유입, 곧 인플럭스를 가장 분명히 느끼고, 그 사랑 안에서 사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진리를 먼저 따져서 사는 사람들이라기보다, 사랑 안에서 즉각적으로 옳고 선한 것을 지각하는 상태에 있는 이들입니다.

 

가장 내적 천국이란, 주님의 사랑을 가장 깊이 받아들이는 상태를 말합니다.’

 

 

4.그 안에서 천사들은 자기들의 천국(their heaven)을 가지므로

 

그 안에서 천사들은 자기들의 천국(their heaven)을 가진다’는 표현은 처음 들으면 마치 각자가 따로 자기 전용 천국을 소유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어서 설명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their’는 소유권의 의미가 아니라 ‘수용의 정도에 따른 고유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천국은 하나이며, 그 본질은 주님의 신적 사랑과 신적 진리입니다. 하지만 그 동일한 신성이 각 천사 안에서 받아들여지는 방식과 깊이가 다르기 때문에, 각 천사는 그 수용에 따라 ‘자기에게 해당하는 천국’을 경험합니다.

 

이미 ‘가장 내적’, ‘중간’, ‘가장 외적’ 천국으로 구분된다고 했을 때, 그것은 큰 범주의 구분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각 천사들은 서로 다릅니다. 마치 하나의 오케스트라 안에서 모두 같은 곡을 연주하지만, 각 악기는 서로 다른 음색과 역할을 가지는 것과 같습니다. 음악은 하나이지만, 각 악기는 그 음악을 자기 방식으로 담고 울립니다. 이처럼 천국은 하나의 유기적 전체이지만, 각 천사는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자기 고유한 사랑과 기능에 따라 받아들이고, 바로 그 수용 안에서 ‘자기 천국’을 가집니다.

 

천국은 하나이지만, 각 사람은 그 천국을 자기 마음의 그릇만큼 담습니다.’ 같은 햇빛이 비추어도 수정과 유리, 물은 서로 다르게 빛을 반사합니다. 빛은 하나지만, 반사되는 색과 광채는 다릅니다. 그 차이를 가리켜 ‘자기들의 천국’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리된 여러 천국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의 천국이 각 존재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방식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누가 ‘이미 가장 내적, 중간, 가장 외적으로 나뉘어 있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할 수 있습니다. 그 구분은 큰 구조이고, ‘자기들의 천국’은 그 구조 안에서 각 천사가 주님의 신성을 받아들이는 고유한 상태를 말합니다. 천국은 공동체적이면서도 동시에 인격적입니다. 모두가 하나의 천국에 속하지만, 그 천국은 각 사람 안에서 각기 다른 깊이와 색채로 살아 있습니다.

 

천국은 하나이되, 각 천사는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자기 고유한 상태 안에서 그 천국을 경험한다.’ 이것이 ‘their heaven’의 의미입니다.

 

 

5.천사들한테나 어울리는 그들 고유의 어떤 것(proprium. own, 고유 본성)이 아니라

 

프로프리움(proprium)이 어려운 이유는, 이 단어가 단순히 ‘자기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주님과 분리된 채 자기에게서 비롯되었다고 느끼는 생명 의식 전체’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프로프리움은 ‘내가 스스로 생각하고, 내가 스스로 사랑하고, 내가 스스로 선을 행한다’고 느끼는 그 자아 중심의 감각입니다. 겉으로는 자율성과 개성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그것이 주님과 단절된 상태일 때, 참된 생명을 담지 못하는 왜곡된 중심이 됩니다.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고유 본성’이라고 할 때, 단순히 개성이나 인격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분명 고유한 성향과 기능, 독특한 자리와 역할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거되어야 할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을 ‘근원으로부터 독립된 것’으로 여길 때입니다. 프로프리움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자기 것으로 돌리는 태도’이며, 더 깊이 말하면 ‘자기 자신을 생명의 근원으로 여기는 상태’입니다.

 

달은 빛을 냅니다. 그러나 달은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이 아니라 태양빛을 반사합니다. 만약 달이 ‘이 빛은 내 것이다’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이 바로 프로프리움의 상태입니다. 빛을 반사하는 고유한 모습은 남아 있어야 하지만, 빛의 근원을 자기로 돌리는 순간 왜곡이 시작됩니다. 스베덴보리가 ‘프로프리움은 본질상 악하다’고까지 말하는 이유는, 그것이 자기중심으로 굽어 들어가는 사랑, 곧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중심에 두기 때문입니다.

 

또 이렇게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프로프리움은 내가 주인이라고 느끼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천국의 질서는 내가 주인이 아니라 주님이 주인이시라는 것을 아는 데서 시작됩니다.’ 여기서 ‘아는 것’은 단지 교리적 동의가 아니라, 실제로 모든 선과 진리를 주님께 돌리는 내적 방향 전환을 말합니다.

 

따라서 ‘천사들 고유의 어떤 것(proprium)이 아니라’라는 말은, 천국을 이루는 것이 천사들의 독립적 능력이나 자아적 힘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들 안에 있는 선과 진리는 그들의 소유물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그들이 가진 것은 ‘근원과 연결된 고유성’이지, ‘근원과 단절된 자아’가 아닙니다.

 

프로프리움은 내가 스스로 살아 있고 스스로 선하다고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참된 생명은 주님에게서 오며,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프로프리움은 주님의 질서 안으로 재정렬됩니다.’  

 

 

6.그 인플럭스(influx, 유입)를 분명히 지각하고 느끼며

 

인플럭스(influx, 유입)와 ‘퍼셉션(perception, 지각)의 차이는 방향과 위치를 구분하면 비교적 쉽습니다. 인플럭스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흐름’이고, 퍼셉션은 ‘그 흐름을 안에서 알아차리는 내적 감각’입니다. 하나는 원천에서 나오는 작용이고, 다른 하나는 그 작용이 도달했을 때 생기는 의식입니다. 쉽게 말해 인플럭스는 ‘들어오는 것’이고, 퍼셉션은 ‘그 들어옴을 느끼는 것’입니다.

 

비유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햇빛이 창문을 통해 방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인플럭스입니다. 그런데 그 방 안에 있는 사람이 따뜻함과 밝음을 느끼는 것은 퍼셉션입니다. 바람이 불어오는 것은 인플럭스이고, 그 바람을 피부로 감지하는 것은 퍼셉션입니다. 음악이 울려 퍼지는 것은 인플럭스이고, 그 음악의 화성과 조화를 마음으로 감지하는 것은 퍼셉션입니다. 들어오는 것과 느끼는 것은 구분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구조 안에서 보면, 인플럭스는 항상 주님에게서 먼저 시작됩니다. 사랑과 진리, 생명은 위로부터 흘러옵니다. 인간이나 천사는 그 근원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유입이 곧바로 퍼셉션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이 순수할수록, 자기 중심성이 적을수록, 그 유입은 더 분명히 느껴집니다. 그래서 ‘가장 내적 천국’의 천사들은 인플럭스를 분명히 지각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유입은 모든 천사에게 있지만, 그것을 자각하는 깊이는 다릅니다.

 

또 이렇게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인플럭스는 객관적 사실이고, 퍼셉션은 주관적 체험입니다. 주님으로부터의 유입은 언제나 일어나고 있지만, 그것을 의식하는가 아닌가는 사랑의 상태에 달려 있습니다. 마치 공기가 항상 우리를 둘러싸고 있지만, 숨을 깊이 들이쉴 때 더 또렷이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인플럭스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흐름이고, 퍼셉션은 그 흐름을 안에서 느끼는 빛입니다.’

 

유입은 근원 쪽의 작용이고, 지각은 수용 쪽의 반응입니다. 둘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관계 안에 있습니다. 주님이 흘러오시고, 천사는 그것을 느낍니다. 바로 그 만남의 자리에서 천국이 이루어집니다.

 

 

 

HH.9, 2장, '주님은 의지, 이해의 생명 그 자체이시다'

2천국을 만드는 것은 주님의 신성이다It Is the Divine of the Lord That Makes Heaven HH.9천사들은 그들의 지혜로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선과 진리뿐 아니라 생명에 속한 모든 것 역시 주님으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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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H.7, 2장, '천국을 만드는 것은 주님의 신성이다' (HH.7-12)

2천국을 만드는 것은 주님의 신성이다It Is the Divine of the Lord That Makes Heaven HH.7천사들을 다 합쳐 ‘천국’(heaven)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천국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나 개별적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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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을 만드는 것은 주님의 신성이다

It Is the Divine of the Lord That Makes Heaven

 

HH.7

천사들을 다 합쳐 천국(heaven)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천국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천국을 만드는 것은, 주님한테서 나와 천사들한테로 흘러드는, 그리고 그들에 의해 수용되는 신성(Divine)입니다. 주님한테서 나오는 신성은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이므로, 천사들은 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만큼만 천사이며, 천국입니다. The angels taken collectively are called heaven, for they constitute heaven; and yet that which makes heaven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is the Divine that goes forth from the Lord and flows into the angels and is received by them. And as the Divine that goes forth from the Lord is the good of love and the truth of faith, the angels are angels and are heaven in the measure in which they receive good and truth from the Lord.

 

 

해설

 

이 글은 이 책, ‘천국과 지옥’ 전체를 여는 매우 중요한 기초 원리를 제시합니다. 곧 ‘천국은 장소가 아니라 상태이며, 그 상태의 본질은 주님한테서 나오는 신적 사랑과 신적 진리를 받아들이는 정도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첫 문장에서 스베덴보리는 ‘천사들을 다 합쳐 천국이라고 한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천국이 어떤 건축물이나 공간 개념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인격적 존재들의 공동체라는 뜻입니다. 천사들이 모여 천국을 이룹니다. 그러나 곧바로 그는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갑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천국을 만드는 것은 천사들 자신이 아니라, 주님한테서 나와 그들 안으로 흘러들어 수용되는 주님의 신성이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핵심 개념은 ‘나아감(go forth)과 ‘흘러듦(flow into), 곧 ‘발출’과 ‘유입’입니다. 주님은 태양처럼 사랑과 진리를 끊임없이 발출하십니다. 이 신적 사랑과 신적 진리는 모든 천사에게 흘러들어갑니다. 그러나 그들이 천사가 되는 이유는 단지 그 빛과 열을 받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무리 빛이 비추어도 천사가 되지 않습니다.

 

또한 스베덴보리는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라는 두 요소를 함께 말합니다. 이것은 그의 저작 전체를 관통하는 대원리입니다. 선과 진리는 결코 분리되지 않습니다. 선은 사랑의 내용이고, 진리는 신앙의 내용입니다. 선은 의지에 속하고, 진리는 이해에 속합니다. 천국은 단지 무엇을 ‘아는’ 상태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는’ 상태입니다. 진리를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사랑의 선과 결합될 때, 비로소 천국이 됩니다.

 

따라서 ‘천사들은 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만큼만 천사이며, 천국이다’라는 말은, 천사도 본질상 자립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빛을 내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들은 주님의 빛을 반사하는 존재입니다. 받아들이는 정도, 곧 수용의 정도가 곧 그 존재의 질을 결정합니다.

 

이 원리는 인간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인간 역시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진리를 끊임없이 받습니다. 그러나 교만과 자기 사랑, 세상 사랑이 그것을 막으면, 흘러들어와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반대로 겸손과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같은 말씀을 읽어도 그 안에서 빛을 받습니다.

 

결국 이 글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나는 얼마나 받아들이고 있는가?’ 천국은 먼 곳에 있는 공간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내 안에서 받아들여지는 정도만큼 지금 여기서 시작됩니다. 천국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내 것으로 주장하는 대신, 그분께 돌려드리며, 기꺼이 수용하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HH.7이 제시하는 천국의 본질입니다. 천국은 천사들의 모임이지만, 그 본질은 주님의 신적 사랑과 신적 진리가 그들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그 수용의 정도가 곧 천국의 깊이와 높이를 결정합니다.

 

 

심화

 

1.그들이 천국을 이루기(constitute)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천국을 만드는(make) 것은

 

HH.7에서 스베덴보리가 굳이 ‘constitute’와 ‘make’라는 두 동사를 나누어 쓴 것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외형적 구성’과 ‘본질적 원인’을 구별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면 HH.7 전체의 구조가 선명해집니다.

 

먼저 ‘constitute’라는 말은 ‘구성하다, 이루다, 형성하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어떤 집합체를 이루는 구성 요소라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시민들이 도시를 구성한다’고 할 때, 시민들은 도시의 구성원입니다. 같은 의미로, 천사들은 모여서 천국을 ‘구성’합니다. 그래서 ‘the angels taken collectively are called heaven, for they constitute heaven’이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집합적, 구성적 차원’입니다. 천국은 텅 빈 공간이 아니라, 천사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곧이어 스베덴보리는 전환합니다. ‘and yet...’라고 하면서 ‘make’라는 동사를 씁니다. ‘that which makes heaven... is the Divine that goes forth from the Lord.’ 여기서 ‘make’는 단순히 구성한다는 뜻이 아니라, ‘존재하게 하다, 성립하게 하다, 본질을 이루다’에 가깝습니다. 즉, 무엇이 그것을 실제로 그 존재가 되게 하는가 하는 ‘본질적 원인’의 문제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constitute’ → 천사들이 천국의 구성 요소라는 점을 말함 (외형적, 집합적 차원)

make’ → 무엇이 천국을 천국 되게 하는지를 말함 (본질적, 원인적 차원)

 

스베덴보리는 이 두 층위를 의도적으로 구분합니다. 겉으로 보면 천사들이 천국입니다. 그러나 깊이 들어가면 천사들 자체가 천국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천사들 안에 받아들여진 ‘주님의 신적 사랑과 신적 진리’가 천국을 천국 되게 합니다.

 

만일 여기서 두 동사를 구별하지 않으면, 다음과 같은 오해가 생깁니다. ‘천국은 천사들이 있으니까 천국이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천사들이 구성하기는 하지만, 천국을 성립시키는 것은 주님의 신성이다.’

 

이 차이는 그의 전체 신학에서 반복됩니다. 예를 들어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를 ‘구성’하지만, 사랑과 진리가 그들 안에 살아 있지 않으면 교회를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더 깊이 보면, 여기에는 존재론적 구별이 있습니다.

 

constitute → 형상(form)의 차원

make → 본질(esse, being)의 차원

 

천사들은 형상을 이루는 주체들이고, 주님의 신성은 존재의 본질입니다. 형상은 본질을 담는 그릇이고, 본질이 빠지면 형상은 껍데기만 남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두 동사를 나눈 것은 단순한 문체상의 다양성이 아니라, 매우 정밀한 신학적, 형이상학적 구분입니다.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천사들은 천국을 구성하지만, 주님의 신성만이 천국을 천국 되게 만든다.’

 

이 차이를 보시면 HH.7 전체가 훨씬 또렷해질 것입니다.  

 

 

2. 일반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in general and in particular)

 

스베덴보리가 ‘in general and in particular’를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단순히 ‘예외 없이’라는 뜻을 강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 이 표현은 논리적 강조가 아니라 존재론적 구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먼저 자연적 언어 감각으로 보면 ‘in general and in particular’는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라는 뜻이고, 일상적으로는 ‘빠짐없이’라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저작에서는 이것이 단순한 수사적 표현이 아닙니다. 그는 우주와 천국, 인간, 교회, 말씀까지 모두를 ‘보편과 개별의 상응적 구조’ 안에서 이해합니다.

 

그의 사상에서 ‘보편(general)은 단순히 큰 덩어리를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여러 개별적인 것들을 함께 묶어 하나로 작용하게 하는 ‘포괄적 질서’입니다. 반면 ‘개별(particular)은 그 보편 안에 들어 있는 각각의 실제 요소들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는 때로 ‘most particular’이라는 표현까지 써서, 가장 미세한 단위까지 포함시킵니다.

 

예를 들어, 천국을 생각해 보면, 전체 천국이라는 보편이 있고, 각 천국(삼층천)이라는 중간 보편이 있으며, 각 천사 사회, 각 천사 개인, 심지어 그 개인의 사랑과 사고의 가장 작은 움직임까지 모두 구조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는 ‘보편’이 따로 있고 ‘개별’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은 개별들 안에서만 존재하며, 개별들은 보편 안에서만 존재합니다.

 

따라서 HH.7에서 ‘천국을 만드는 것은 일반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신성이다(the Divine makes heaven in general and in particular)라고 할 때, 이것은 ‘예외 없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이런 뜻입니다.

 

천국 전체를 이루는 것도 주님의 신성이며, 각 천사 한 사람 한 사람을 천국 되게 하는 것도 주님의 신성이다.’

 

만약 그가 단순히 ‘without exception’이라고 썼다면, 그것은 논리적 배제의 의미에 머물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in general and in particular’은 구조적, 유기적 포함을 말합니다. 천국이라는 전체가 주님의 신성으로 이루어질 뿐 아니라, 그 전체를 이루는 각각의 부분도 동일한 원리로 살아 있다는 뜻입니다.

 

이 표현이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그의 ‘상응’ 사상과 연결됩니다. 상응에서는 보편과 개별이 서로 반영합니다. 큰 것은 작은 것 안에, 작은 것은 큰 것 안에 질서 있게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주 ‘천국은 사람과 같다’고 말합니다. 전체 천국은 하나의 거대한 인간 형상(the Grand Man)이고, 각 천사는 그 안의 지체입니다. 이런 사고 안에서는 ‘보편’과 ‘개별’을 항상 함께 말해야 합니다. 둘 중 하나만 말하면 구조가 무너집니다.

 

결국 이 표현은 단순히 ‘예외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같은 신적 원리가 전체 구조와 각 요소에 동시에 작용한다’는 선언입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보편은 개별 안에 있고, 개별은 보편 안에 있으며, 주님의 신성은 그 둘 모두의 본질이다.’

 

그래서 그는 습관적으로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in general and in particular’를 반복합니다. 그것은 그의 존재 이해 방식 자체를 드러내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HH.8, 2장, '주님 신성의 수용은 철저한 자기 부인 위에'

2천국을 만드는 것은 주님의 신성이다It Is the Divine of the Lord That Makes Heaven HH.8천국에 있는 모두가 알고, 믿으며, 심지어 지각하기(perceive)까지 하는 게 있는데, 그것은 곧 스스로 뭘 의도하거나 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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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H.6, 1장, 사람들이 가지는 '천국에 대한 오해'

1천국의 하나님은 주님이시다The God of Heaven Is the Lord HH.6세상 살 때, 성부(聖父, the Father)를 믿는다 고백하였던 어떤 영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에 대해서는 다른 어떤 일반인 같은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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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하나님은 주님이시다

The God of Heaven Is the Lord

 

HH.6

세상 살 때, 성부(聖父, the Father)를 믿는다 고백하였던 어떤 영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에 대해서는 다른 어떤 일반인 같은 관념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분이 천국의 하나님이심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주님의 천국 외에 다른 천국이 있는지, 원하는 곳마다 돌아다니며 찾아보도록 허락되었습니다. 그들은 여러 날 동안 찾아보았으나, 어디에서도 다른 천국을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들은 천국의 행복을 영광과 지배(dominion)에 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원하는 걸 얻을 수 없었고, 천국은 그런 걸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은 분노하였습니다. 그러고는 다른 이들을 지배하고, 세상에서처럼 영광 가운데 높아질 수 있는 그런 천국을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There were certain spirits who while living in the world had professed to believe in the Father; but of the Lord they had the same idea as of any other man, and therefore did not believe him to be the God of heaven. For this reason they were permitted to wander about and inquire wherever they wished whether there were any other heaven than the heaven of the Lord. They searched for several days, but nowhere found any. These were such as place the happiness of heaven in glory and dominion; and as they were unable to get what they desired, and were told that heaven does not consist in such things, they became indignant, and wished for a heaven where they could lord it over others and be eminent in glory like that in the world.

 

 

해설

 

HH.6은 매우 생생한 장면을 통해 한 가지 영적 원리를 보여 줍니다. 여기 등장하는 영들은 지상에서 ‘성부 아버지를 믿는다’고 고백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은 다른 사람들, 곧 일반인과 같은 존재로 여겼습니다. 즉, 그들의 하나님 관념은 추상적 아버지 하나님에 머물렀고, 주님을 통해 드러난 신성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천국의 중심이 주님이라는 사실과 연결되지 못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그들이 즉시 정죄되거나 쫓겨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스스로 확인해 보도록 허락됩니다. ‘주님의 천국 말고 다른 천국이 있는지’ 자유롭게 찾아보도록 허락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영계 이해에서 매우 중요한 특징입니다. 영계에서는 강압적 판결보다 ‘스스로 상태를 드러내는 과정’이 먼저 이루어집니다. 그들은 여러 날 동안 찾아보지만, 다른 천국은 발견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하나이며, 그 중심은 오직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진짜 문제가 드러납니다. 그들의 관심은 하나님이 누구인가에 있지 않고, ‘천국의 행복이 무엇인가’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천국을 ‘영광과 지배’의 장소로 생각했습니다. 세상에서 누렸거나 누리고 싶었던 권세와 명예가 천국에서도 계속되기를 기대했던 것이지요. 다시 말해, 그들의 사랑의 중심은 여전히 자기 자신과 우월감에 있었던 것입니다.

 

천국은 그런 질서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천국의 행복은 지배하는 데 있지 않고, 섬기는 데 있습니다. 높아지는 데 있지 않고, 다른 이를 유익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이 말을 듣고 분노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기대가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원한 것은 하나님과의 결합이 아니라, 자기 영광의 연장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은 단순히 특정 집단을 비판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 안에 있는 ‘천국에 대한 오해’를 드러냅니다. 우리는 종종 천국을 고통이 없고, 인정받고, 높임 받는 상태로 상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본질을 사랑의 질서로 설명합니다. 거기서는 서로가 서로를 위해 존재합니다. 그래서 지배하려는 사랑은 그 질서와 맞지 않습니다.

 

결국 HH.6이 말하는 핵심은 이것입니다.

 

하나님 이해의 왜곡은 천국 이해의 왜곡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천국에 대한 왜곡은 사랑의 왜곡에서 비롯됩니다. 주님을 단지 사람으로만 보고, 아버지를 추상적으로만 믿으며, 천국을 자기 영광의 장소로만 생각하는 한, 그 사람은 천국의 실제 행복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글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나는 천국을 무엇으로 기대하고 있는가? 주님과 함께하는 사랑의 질서를 원하는가, 아니면 내 자아가 높아지는 자리를 원하는가? 천국은 찾는 자에게 열리지만, 그 마음의 사랑이 천국의 질서와 같을 때에만 그 안에 머물 수 있습니다.

 

 

 

HH.5, 1장, '천국의 하나님은 주님'이심을 증명하는 말씀들

1천국의 하나님은 주님이시다The God of Heaven Is the Lord HH.5교회에 속한 자들은 주님이 천국의 하나님이심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Those who are of the church cannot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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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하나님은 주님이시다

The God of Heaven Is the Lord

 

HH.5

교회에 속한 자들은 주님이 천국의 하나님이심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Those who are of the church cannot doubt that the Lord is the God of heaven, for he himself taught,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11:27);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 (16:15);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17:2) That all things of the Father are his (Matt. 11:27; John 16:15; 17:2).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28:18) And that he hath all power in heaven and on earth (Matt. 28:18).

 

하늘과 땅에서라고 하신 것은, 하늘을 다스리는 분은 땅도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하나가 다른 하나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지요.(주15)하늘과 땅을 다스린다는 것은, 사랑에 속한 모든 선과 신앙에 속한 모든 진리, 곧 모든 지성과 지혜, 그 결과로서의 모든 행복, 한마디로 영원한 생명을 주님으로부터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주님께서도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He says “in heaven and on earth,” because he that rules heaven rules the earth also, for the one depends upon the other.15 “Ruling heaven and earth” means to receive from the Lord every good pertaining to love and every truth pertaining to faith, thus all intelligence and wisdom, and in consequence all happiness, in a word, eternal life. This also the Lord taught when he said: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3:36) He that believeth on the Son hath eternal life; but he that believeth not the Son shall not see life (John 3:36).

 

25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11:25, 26)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he that believeth on Me, though he die yet shall he live; and whosoever liveth and believeth on Me shall never die (John 11:25,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14:6) I am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 (John 14:6).

 

 

15. 천국 전체가 주님의 것이다. The entire heaven is the Lord’s (n. 2751, 7086). 주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 계신다. He has all power in the heavens and on the earths (n. 1607, 10089, 10827). 주님이 천국을 다스리시므로 주님은 또한 천국에 의존하는 모든 것, 곧 지상의 모든 것도 다스리신다. As the Lord rules heaven He rules also all things that depend thereon, thus all things in the world (n. 2026, 2027, 4523, 4524). 주님 홀로 지옥들로부터 떨어트리시고, 악에서 떠나 선 가운데 있게 하시며, 그렇게 해서 구원하시는 권세가 있으시다. The Lord alone has power to remove the hells, to withhold from evil and hold in good, and thus to save (n. 10019).

 

 

해설

 

HH.5는 앞선 글들의 논지를 성경 말씀으로 확증하는 부분입니다. HH.2HH.3에서 스베덴보리는 천국에서는 오직 주님만이 하나님으로 인정된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그는 ‘교회에 속한 자들’이라면 이것을 의심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주님 자신의 말씀 때문입니다. 여기서 ‘교회에 속한 자들’이란 단순히 교적에 이름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을 알고 읽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말씀 안에서 주님은 아버지의 모든 것이 자기의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만일 아버지의 모든 것이 아들의 것이라면, 신성은 분리된 두 중심으로 나뉘어 있을 수 없습니다.

 

또한 주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표현을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그는 ‘하늘을 다스리는 분은 땅도 다스린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늘과 땅은 분리된 체계가 아니라 서로 연결된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은 영적 원인이고, 땅은 그 결과인 외적 표현입니다. 영적 세계가 자연 세계에 유입하고, 자연 세계는 영적 세계에 의존합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주권자가 곧 땅의 주권자입니다. 주님이 하늘의 주이시라면, 동시에 우주의 주이십니다.

 

그러면 ‘하늘과 땅을 다스린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매우 실질적으로 풀이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통치 권한을 행사하는 왕의 이미지가 아닙니다. 하늘을 다스린다는 것은, 사랑에 속한 모든 선과 신앙에 속한 모든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온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천사들이 지혜롭고 행복한 이유는 그들 안으로 주님의 생명이 흘러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선과 진리, 지성과 지혜, 그리고 그로부터 오는 행복과 영원한 생명은 모두 주님에게서 유래합니다. 이것이 ‘다스림’의 의미입니다.

 

여기서 ‘믿는다’는 표현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다’고 할 때, 이것은 단순히 존재를 인정하는 지적 동의를 뜻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믿음은 주님과의 결합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그분에게서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분의 생명이 내 안에 흐르도록 허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곧 생명과 연결됩니다. 주님을 믿는 자가 영생을 가진다는 것은, 그가 이미 주님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선언은 이 모든 것을 한 문장에 담고 있습니다. 길이라는 것은 주님을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 이를 수 없다는 뜻이며, 진리라는 것은 모든 참된 인식이 그분 안에 있다는 뜻이고, 생명이라는 것은 존재의 근원이 그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은 교리적 선택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HH.5는 결국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은 단지 중개자가 아니라, 생명 자체이시며, 사랑과 진리의 근원이시며,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중심이십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은 그분과의 결합에서 흘러나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천국의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것은 천국 이해의 출발점일 뿐 아니라, 인간 생명의 근원을 바로 세우는 일입니다.

 

이 글은 설교적으로도 매우 힘이 있습니다. ‘다스림’을 권위가 아니라 ‘생명의 유입’으로 설명하면, 성도들이 주님 통치의 의미를 훨씬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심화

 

1.주님으로부터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HH.5에서 ‘하늘과 땅을 다스린다’는 것이 곧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 모든 지성과 지혜, 행복, 영원한 생명을 주님으로부터 받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때, 여기서 ‘받는다’는 말은 오해하기 쉬운 표현입니다. 마치 없던 능력이 갑자기 주입되는 것처럼, 혹은 아이큐가 올라가듯 지적 능력이 증가하는 것처럼 상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받음’은 그런 외적, 기계적 주입이 아닙니다.

 

먼저 가장 중요한 전제부터 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은 생명의 ‘자체 소유자’가 아닙니다. 인간은 생명의 수용체입니다. 즉, 생명은 본질적으로 주님께 속해 있고, 인간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존재입니다. 그는 자주 이런 비유를 씁니다. 태양이 빛과 열을 발할 때, 식물은 그 빛과 열을 받아 자랍니다. 식물은 빛을 ‘만들어내는’ 존재가 아니라 ‘받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식물이 기계처럼 자동으로 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수용 능력과 상태에 따라 성장의 질이 달라집니다.

 

받는다’는 것은 바로 이 수용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사랑과 진리, 곧 선과 지혜를 끊임없이 발하고 계십니다. 천국에서 ‘다스림’은 강압적 통치가 아니라, 이 선과 진리의 지속적 유입입니다. 천사들이 지혜롭고 행복한 이유는, 그들 안에 주님의 생명이 자유롭게 흘러들어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받는다’는 것은 갑자기 지능 지수가 상승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아이큐는 자연적 사고 능력의 측면에 속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지성(intelligence)과 지혜(wisdom)는 영적 차원의 능력입니다. 진리를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니라, 선과 결합된 진리를 보는 능력입니다. 사랑 안에서 진리를 이해하는 상태입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천국에서 지혜가 증가한다는 것은 정보를 많이 암기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진리를 더 밝게 이해하게 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사랑이 중심이 되고, 그 사랑이 주님을 향할 때, 그에 상응하여 이해도 밝아집니다. 그래서 ‘받는다’는 것은 능력의 외적 증가라기보다, 존재의 투명도가 높아지는 것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자유입니다. 인간은 수동적 파이프가 아닙니다. 주님의 생명은 끊임없이 흘러오지만, 인간은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습니다. 이 자유가 지상 생애에서 결정적으로 작용합니다. 천국에 있는 자들은 그들의 사랑이 이미 주님과 일치해 있기 때문에, 그 유입을 막지 않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더 큰 기쁨과 더 밝은 이해를 ‘받게’ 됩니다.

 

정리하면, ‘받는다’는 것은 없던 두뇌 기능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본래 인간이 수용하도록 창조된 생명과 지혜가 방해 없이 흐르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마치 창문이 깨끗해질수록 햇빛이 더 잘 들어오는 것과 같습니다. 빛이 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가림이 줄어든 것입니다.

 

그래서 HH.5의 ‘받는다’는 말은 이렇게 풀 수 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선과 진리의 근원이 아니며, 주님으로부터 그것을 끊임없이 받아 존재한다. 그리고 그 수용이 깊어질수록 지혜와 행복도 깊어진다.

 

 

아래는 위 심화 해설 중 인간은 생명의 수용체라는 표현을 중심으로 한 번 더 해설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 신학에서 가장 근본적인 원리 가운데 하나는 이것입니다. 인간은 생명의 근원이 아니라 수용체입니다. 이 한 문장을 이해하지 못하면 ‘주님으로부터 받는다’는 말도 오해하게 되고, 천국의 지혜와 행복이 무엇인지도 왜곡되기 쉽습니다.

 

먼저 근원에 대한 문제부터 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십니다. 인간은 스스로 존재하고 스스로 살아가는 독립적 근원이 아닙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것처럼 느끼지만, 그 생명은 순간순간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옵니다. 마치 전구가 스스로 빛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류를 받아 빛나는 것과 같습니다. 전류가 끊기면 전구는 어두워집니다. 전구가 빛의 근원이 아니듯, 인간도 생명의 근원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인간은 단순한 기계적 통로가 아닙니다. 인간은 ‘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수용체’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진리가 끊임없이 유입되지만, 인간은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자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자유 때문에 인간은 책임 있는 존재가 됩니다. 수용체이되, 능동적 수용체입니다.

 

이제 ‘받는다’는 말의 의미를 더 분명히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외부에서 능력이 덧붙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없던 두뇌 기능이 새로 생기는 것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인간이 본래 수용하도록 창조된 구조가 점점 더 열리는 것입니다. 사랑이 정화될수록, 이해는 더 밝아집니다. 자기 중심성이 줄어들수록, 진리를 왜곡 없이 보게 됩니다. 이것이 지성과 지혜가 ‘증가한다’는 의미입니다.

 

아이큐와 같은 자연적 지능은 두뇌 기능과 관련된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지성(intelligence)과 지혜(wisdom)는 영적 차원입니다. 그것은 선과 결합된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입니다. 단순히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참으로 선한지 보고, 그것을 사랑하며, 그에 따라 사는 능력입니다. 이것은 외적 정보 축적이 아니라, 존재의 투명성입니다.

 

한 가지 비유를 더 들어보겠습니다. 태양은 항상 빛과 열을 발합니다. 그러나 창문이 더럽거나 닫혀 있으면 빛은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창문을 닦고 열면 방은 밝아집니다. 방이 스스로 빛을 만든 것이 아닙니다. 단지 빛을 더 잘 받게 된 것입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진리는 항상 흘러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만, 자기 사랑, 왜곡된 관념이 그것을 가립니다. 거듭남이란 결국 창문이 맑아지는 과정입니다.

 

천국에서 ‘받는다’는 것은 창문이 거의 완전히 투명해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천사들은 점점 더 깊은 사랑과 더 밝은 이해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은 정지된 완성이 아니라, 무한하신 주님으로부터 무한히 더 깊이 받아들이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이 무한하시기 때문에, 수용도 끝이 없습니다.

 

결국 이 원리는 이렇게 정리됩니다.

 

주님은 근원이시고, 인간은 수용체입니다. 생명, 사랑, 진리, 지혜, 행복은 모두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인간은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써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수용이 깊어질수록 인간은 더 인간다워집니다.

 

 

 

HH.6, 1장, 사람들이 가지는 '천국에 대한 오해'

1천국의 하나님은 주님이시다The God of Heaven Is the Lord HH.6세상 살 때, 성부(聖父, the Father)를 믿는다 고백하였던 어떤 영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에 대해서는 다른 어떤 일반인 같은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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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H.4, 1장, '천국의 삼 분의 일을 이루는 유아들'

1천국의 하나님은 주님이시다The God of Heaven Is the Lord HH.4유아들은 천국의 삼 분의 일을 이루는데, 그들은 모두 주님이 자기들의 아버지이심을 인정하고 믿는 가운데로 인도됩니다. 그리고 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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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하나님은 주님이시다

The God of Heaven Is the Lord

 

HH.4

유아들은 천국의 삼 분의 일을 이루는데, 그들은 모두 주님이 자기들의 아버지이심을 인정하고 믿는 가운데로 인도됩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그분이 만유의 주이시며, 곧 하늘과 땅의 하나님이심을 알게 됩니다. 아이들이 천국에서 자라나며, 지식을 통해 점점 완전해져 천사적 지성과 지혜에 이르게 되는 일은, 뒤의 장들에서 보게 될 것입니다. Infants, who form a third part of heaven, are all initiated into the acknowledgment and belief that the Lord is their Father, and afterwards that he is the Lord of all, thus the God of heaven and earth. That children grow up in heaven and are perfected by means of knowledges, even to angelic intelligence and wisdom, will be seen in the following pages.



해설

 

이 글은 매우 짧지만, ‘Heaven and Hell’ 전체에서 가장 위로가 되는 선언 가운데 하나입니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유아들이 천국의 삼 분의 일을 이룬다’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상징적 과장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영계에서 본 실제 상태에 대한 증언입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아이들이 모두 천국으로 가며, 그 수가 매우 많다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교회 안팎의 구분이 없습니다. 유아는 아직 스스로 악을 선택하거나 진리를 거부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all initiated into the acknowledgment’라는 표현입니다. 아이들은 이미 완성된 천사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인도되어 들어가게 됩니다’. 즉, 천국은 단번에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성장의 세계입니다. 아이들은 먼저 주님을 ‘아버지’로 배우고 받아들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교리 교육이 아니라, 관계의 형성입니다. 어린 존재가 가장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 관념은 ‘아버지’입니다. 사랑하고 보호하며 돌보는 분으로서의 주님을 먼저 경험합니다.

 

그다음 단계가 중요합니다. 그들은 이후에 주님이 ‘만유의 주(the Lord of all)이시며 ‘하늘과 땅의 하나님(the God of heaven and earth)이심을 알게 됩니다. 다시 말해, 인격적 친밀성에서 시작하여 점차 우주적 통치의 주님으로 이해가 확장됩니다. 사랑의 관계가 먼저이고, 교리적 인식은 그다음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질서와 일치합니다. 항상 사랑이 먼저이고, 진리의 이해는 그다음입니다.

 

또 하나 매우 중요한 선언은, 아이들이 천국에서 ‘자라난다(grow up)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죽음 이후의 상태를 정지된 상태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은 정체의 세계가 아니라 성장의 세계입니다. 아이들은 지식을 통해 점점 완전해지며, 마침내 천사적 지성과 지혜에 이릅니다. 여기서 ‘지식(knowledges)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선과 진리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능력을 뜻합니다.

 

이 대목은 또한 인간의 본질을 보여 줍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가능성의 존재입니다. 지상에서 그 가능성이 충분히 펼쳐지지 못했다 하더라도, 천국에서 계속 자라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아의 죽음은 영적 성장의 단절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순수한 환경에서 계속되는 시작입니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HH.2HH.3에서 ‘주님을 어떻게 인정하느냐’가 천국과의 연결 문제로 제시되었는데, HH.4에서는 유아들이 자연스럽게 주님을 아버지로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이는 주님 인식의 가장 순수한 형태를 보여 줍니다. 복잡한 교리 논쟁 없이, 관계적 사랑에서 출발합니다.

 

결국 이 글은 두 가지를 동시에 말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자비는 어린 생명들을 완전히 품고 계시다는 것. 둘째, 천국은 완성된 자들의 박물관이 아니라 계속 성장하는 학교라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거기서 배우고, 자라고, 지혜에 이릅니다. 그리고 그 성장의 중심에는 언제나 주님이 계십니다.

 

이 부분은 목회적으로도 매우 큰 위로를 줍니다. 아이를 먼저 떠나보낸 부모들에게, 혹은 어린 생명의 의미를 묻는 이들에게, HH.4는 깊은 소망의 문을 열어 줍니다.  

 

 

심화

 

1.유아들은 천국의 삼 분의 일을 이루는데

 

HH.4에서 스베덴보리가 ‘유아들이 천국의 삼 분의 일을 이룬다’고 말하는 부분은 많은 독자들에게 가장 놀라운 진술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해야 하는지, 상징적으로 이해해야 하는지, 또 어떻게 그런 비율이 가능한지 질문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먼저 전제부터 정리하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한 비유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영계에서 본 실제 상태에 대한 관찰로 제시합니다. 그에 따르면, 세상에서 유아기 혹은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아이들은 예외 없이 천국으로 인도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직 스스로 악을 확정적으로 선택하거나 진리를 고의적으로 거부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삼 분의 일’이라는 규모가 가능한가? 여기에는 몇 가지 현실적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 역사적으로 인류의 사망률을 생각해 보면, 특히 고대와 중세, 근대 초기까지는 유아 사망률이 매우 높았습니다. 의료가 발달하기 전에는 태어난 아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성인이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살던 18세기에도 유아 사망은 매우 흔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인구 통계적으로 보아도, 인류 전체 역사 속에서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인구는 결코 적지 않습니다.

 

둘째, 스베덴보리는 천국을 단일 시대의 공동체로 보지 않습니다. 천국은 인류 역사 전체를 통해 모여든 모든 세대의 사람들로 이루어진 세계입니다. 수천 년, 수만 년에 걸친 인류의 흐름 속에서 축적된 영적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현재 지구 인구 비율과 단순 비교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장구한 역사 전체를 배경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셋째, 여기에는 신학적 의미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태어날 때는 선과 진리에 대한 가능성을 지닌 상태로 태어난다고 봅니다. 유아는 아직 자신의 자유를 통해 악을 확정적으로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형성 중인 존재’로서 천국에서 계속 자라날 수 있습니다. HH.4 다음 부분들에서 그는 아이들이 천국에서 교육받고, 지식들을 통해 점점 완전해지며, 마침내 천사적 지성과 지혜에 이른다고 설명합니다. 즉, 천국은 완성된 자들만 모여 있는 정지된 세계가 아니라, 성장의 세계입니다.

 

여기서 ‘삼 분의 일’이라는 표현을 상징적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성경과 스베덴보리 저작 전반에서 ‘’은 완전함이나 충만함과 관련된 수입니다. 반드시 정확한 수학적 33.3%를 의미한다기보다, ‘결코 소수가 아니다’,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는 강조의 의미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대체로 자신이 본 것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려는 경향이 강하므로, 완전히 상징으로만 돌리기는 어렵습니다. 가장 균형 잡힌 이해는 ‘매우 많은 수’라는 실제적 진술로 보는 것입니다.

 

이 대목이 주는 목회적 의미는 매우 큽니다. 인류 역사 속에서 수많은 어린 생명이 짧은 삶을 마치고 떠났습니다. HH.4는 그 생명들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더 순수한 환경에서 성장하고 있다고 선언합니다. 그들은 멈춘 존재가 아니라 계속 자라나는 존재입니다.

 

결국 ‘천국의 삼 분의 일’이라는 말은 단순한 통계 보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와 섭리의 광대함을 드러내는 진술입니다. 인간의 눈에는 상실처럼 보이는 수많은 생명들이, 영적 질서 안에서는 잃어버려지지 않았다는 선언입니다.

 

 

2.아이들이 천국에서 자라나며

 

많은 신앙인들이 막연히 ‘죽으면 상태가 고정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이가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면, 영원히 어린 모습으로 머무는 것이 아닌가 상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HH.4에서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말합니다. 아이들은 천국에서 자라납니다. 이것은 단순한 시적 표현이 아니라, 영적 존재 이해를 뒤집는 선언입니다.

 

먼저 기본 원리를 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은 육체가 아니라 영으로 존재합니다. 육체는 일시적 외적 형식이고, 영은 참된 인간입니다. 지상에서의 성장은 육체적 성장과 함께 이루어지지만, 본질은 영적 성장입니다. 즉, 사랑과 진리를 배우고, 의지와 이해가 형성되는 과정이 진짜 성장입니다. 그렇다면 육체가 없어졌다고 해서 성장이 멈출 이유는 없습니다. 오히려 외적 제약이 사라진 상태에서 더 순수한 환경 속에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천국에서 자란다는 말은, 그들이 단번에 완성된 천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 시작하여, 천국의 질서 안에서 교육받고, 사랑을 배우고, 진리를 배우며, 점점 성숙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후 장들에서 천국에는 아이들을 돌보는 천사들이 있고, 그들이 매우 부드럽고 지혜로운 방식으로 아이들을 인도한다고 설명합니다. 그 교육은 강압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우리는 흔히 ‘지상 생애가 전부’라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상 생애는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자유와 선택이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상 생애가 ‘완성의 전부’는 아닙니다. 특히 아직 자유로운 악의 선택을 하지 않은 아이들에게는, 성장이 계속되는 장이 열려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를 동시에 보여 줍니다. 아이는 아직 자신의 영적 방향을 확정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그 가능성은 천국에서 펼쳐집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놀라는 이유는, ‘죽음 이후는 정지된 상태’라는 관념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천국을 살아 있는 세계, 역동적인 세계로 묘사합니다. 거기에는 배움이 있고, 깊어짐이 있고, 점점 더 큰 사랑과 더 밝은 이해로 나아가는 과정이 있습니다. 완성은 정지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더 충만해지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이 무한하시기 때문에, 그분과의 결합도 무한히 깊어질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천국에서 자란다는 것은, 인간의 참된 나이는 육체적 나이가 아니라 영적 상태라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모든 천사는 결국 ‘젊음의 상태’에 이릅니다. 왜냐하면 젊음은 사랑과 생명의 충만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이는 자라서 천사적 성숙에 이르며, 동시에 그 존재는 영원한 생명의 젊음 안에 머뭅니다.

 

결국 이 선언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성장은 지상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차원에서 계속된다. 지상은 시작이고, 천국은 그 성숙이 더 순수하게 진행되는 장이다.

 

그러므로 어린 생명의 죽음은 성장이 중단된 사건이 아니라, 다른 환경에서 계속되는 사건입니다.

 

 

3. 응용 질문, ‘그러면 사후 열심히 노력하면 더 높은 천국으로 신분 상승 같은 걸 할 수 있나요?’

 

많은 초심자들이 자연스럽게 이렇게 묻습니다. ‘천국에서도 더 노력하면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갈 수 있나요?’, ‘일종의 영적 승진이 있나요?’ 이런 생각은 우리가 세상 구조에 익숙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세상에서는 노력하면 신분이 오르고, 성과가 있으면 승진합니다. 그래서 천국도 비슷한 구조일 것이라고 상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Heaven and Hell’ 전체의 관점에서 보면, 천국은 그런 ‘신분 상승 체계’가 아닙니다.

 

먼저 아주 중요한 원리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천국의 ‘높고 낮음’은 계급이나 지위가 아니라 ‘사랑의 질(quality)’의 차이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천국은 가장 내적 천국, 중간 천국, 가장 외적 천국처럼 구분되지만, 이것은 서열 구조가 아니라 사랑과 지혜의 깊이에 따른 차이입니다. 누가 더 중요한 사람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종류의 사랑 안에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사후에는 인간의 근본적 사랑이 드러납니다. 지상 생애에서 무엇을 중심으로 살았는지가 그 사람의 영적 본질이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지상 생애가 끝나면 그 기본 사랑이 확정된다고 봅니다. 다시 말해, 죽음 이후에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랑으로 ‘전환’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후에 열심히 노력해서 전혀 다른 단계의 천국으로 올라가는 식의 구조는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서 오해하면 안 되는 점이 있습니다. ‘확정’되었다고 해서 ‘성장이 멈춘다’는 뜻은 아닙니다. 천국에 들어간 사람은 자기 사랑의 본질 안에서 끝없이 더 깊어집니다. 사랑은 더 정결해지고, 이해는 더 밝아지고, 기쁨은 더 커집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종류의 천국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맞는 천국 안에서 무한히 깊어지는 것입니다.

 

비유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과 수학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영역 안에서 무한히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수학을 사랑하는 사람이 음악가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고 해서 그 본성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천국에서도 각자의 근본 사랑에 상응하는 영역이 있고, 그 안에서 완전해집니다.

 

천국은 경쟁 구조가 아니라 조화 구조입니다.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기 위해 애쓰는 곳이 아니라,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사랑 안에서 가장 충만해지는 곳입니다. 천국에서는 남과 비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각자가 자기 자리에서 완전한 행복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누구나 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23)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상에서는 신분 상승을 위해 애쓰지만, 천국에서는 ‘유익하게 섬기는 것’이 가장 큰 기쁨입니다. 가장 높은 자리는 가장 많이 사랑하는 자리이며, 가장 많이 섬기는 자리입니다. 그러니까 ‘높아진다’는 개념 자체가 세상과 다릅니다.

 

결론적으로, 사후에 노력해서 다른 계층으로 올라가는 개념은 스베덴보리의 천국 구조와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천국 안에서의 성장은 끝이 없습니다. 그 성장은 서열 상승이 아니라 사랑과 지혜의 심화입니다.

 

 

 

HH.5, 1장, '천국의 하나님은 주님'이심을 증명하는 말씀들

1천국의 하나님은 주님이시다The God of Heaven Is the Lord HH.5교회에 속한 자들은 주님이 천국의 하나님이심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Those who are of the church cannot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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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H.3, 1장, '주님을 부인하는 여러 유형의 사람들'

1천국의 하나님은 주님이시다The God of Heaven Is the Lord HH.3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주님을 부인하고, 아버지만을 인정하며, 그 신념을 스스로 굳힌 자들은 천국에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주님만이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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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하나님은 주님이시다

The God of Heaven Is the Lord

 

HH.3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주님을 부인하고, 아버지만을 인정하며, 그 신념을 스스로 굳힌 자들은 천국에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주님만이 예배받으시는 천국으로부터 어떠한 유입(influx)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점차 어떠한 주제에 대해서도 참된 것을 생각하는 능력을 잃어버립니다. 마침내는 벙어리와 같이 되거나, 어리석은 말을 하며, 관절에 힘이 없는 사람처럼 팔을 축 늘어뜨리고 흔들며 비틀거리게 됩니다. 또한 소키니안들(the Socinians)처럼 주님의 신성을 부인하고, 그분의 인성만을 인정하는 자들도 마찬가지로 천국 밖에 있습니다. 그들은 오른쪽으로 조금 끌려 나왔다가 깊은 곳으로 내려보내지며, 이렇게 하여 기독교 세계에서 온 다른 이들과 완전히 분리됩니다. 마지막으로, ‘우주의 영혼(the soul of the universe [ens universi])이라 부르는 보이지 않는 신적 존재(an invisible Divine)를 믿는다고 고백하며, 모든 것이 거기서 비롯되었다고 말하면서 주님에 대한 모든 신앙을 거부하는 자들은, 결국 자기들이 아무 하나님도 믿고 있지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 보이지 않는 신성은 그들에게 있어 자연의 최초 원리와 같은 어떤 속성에 불과하며, 생각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신앙과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주14). 이러한 자들은 이른바 자연 숭배자들 가운데 속하게 됩니다. 그러나 교회 밖에서 태어난 자들, 곧 이방인이라 불리는 자들은 이와 다릅니다. 이들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루겠습니다. Those within the church who have denied the Lord and have acknowledged the Father only, and have confirmed themselves in that belief, are not in heaven; and as they are unable to receive any influx from heaven, where the Lord alone is worshiped, they gradually lose the ability to think what is true about any subject whatever; and finally they become as if dumb, or they talk stupidly, and ramble about with their arms dangling and swinging as if weak in the joints. Again, those who, like the Socinians, have denied the Divinity of the Lord and have acknowledged his humanity only, are likewise outside of heaven; they are brought forward a little toward the right and are let down into the deep, and are thus wholly separated from the rest that come from the Christian world. Finally, those who profess to believe in an invisible Divine, which they call the soul of the universe [ens universi], from which all things originated, and who reject all belief in the Lord, find out that they believe in no God; since this invisible Divine is to them a property of nature in her first principles, which cannot be an object of faith and love, because it is not an object of thought.14 Such have their lot among those called nature worshipers. It is otherwise with those born outside the church, who are called the heathen; these will be treated of hereafter.

 

 

14. 어떤 생각으로도 지각될 수 없는 신성은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 A Divine that cannot be perceived by any idea cannot be received by faith (n. 4733, 5110, 5663, 6982, 6996, 7004, 7211, 9356, 9359, 9972, 10067, 10267).



해설

 

HH.3HH.2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앞 절에서 스베덴보리는 천국에서는 오직 주님 한 분만이 하나님으로 인정된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그는 그 원리에 비추어, 주님을 부인하는 여러 유형의 사람들의 상태를 설명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특정 집단을 정죄하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과의 연결이 어떻게 끊어지는가’를 보여주는 데 있습니다. 천국은 주님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세계이기 때문에, 주님과의 연결이 차단되면 그 세계와의 유입도 차단됩니다.

 

첫 번째 유형은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주님을 부인하고 아버지만을 인정하는 사람들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그 하나님을 주님과 분리된 존재로 생각하며, 주님을 단지 중개자나 도덕 교사 정도로 여깁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이런 관념은 천국의 실제 질서와 맞지 않습니다. 천국에서는 모든 신성이 주님 안에 있다고 지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천국의 영향, 곧 영적 유입을 받을 통로가 열리지 않습니다. 유입이 끊기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그는 ‘참된 것을 생각하는 능력을 점차 잃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신학 지식이 줄어든다는 뜻이 아니라, 진리 자체를 분별하는 내적 힘이 약해진다는 의미입니다. 마침내 그는 벙어리처럼 되거나, 말이 어눌해지고, 몸이 힘없이 흔들리는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이 표현은 문자적 장면이라기보다, 내적 생명력이 빠져나간 영적 상태를 상징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과 빛이 차단되면, 생각과 의지가 힘을 잃는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 유형은 소키니안들처럼 주님의 신성을 부인하고 인성만 인정하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역사적 집단 그 자체보다, ‘주님의 신성을 거부하는 관념’입니다. 주님을 단지 위대한 인간, 도덕 교사, 혹은 예언자로만 인정하고, 그 안에 신성이 거하지 않는다고 보는 관념은 천국의 하나님 이해와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독교 세계에서 온 다른 영들과 분리된다고 묘사됩니다. ‘오른쪽으로 조금 끌려 나왔다가 깊은 곳으로 내려보내진다’는 표현 역시 영적 분리 상태를 상징합니다. 빛의 중심으로부터 멀어지는 과정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유형은 더 철학적인 형태입니다. 이들은 보이지 않는 어떤 ‘우주의 영혼’ 혹은 ‘절대적 원리’를 신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격적 하나님이 아니라, 자연의 최초 원리와 같은 추상적 개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결국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사랑과 신앙은 생각의 대상, 곧 인격적 대상이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것은 ‘누군가’이지 ‘어떤 원리’가 아닙니다. 생각할 수 없는 것은 믿을 수도 없고,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신 개념은 결국 자연 숭배와 다르지 않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자연의 속성으로 환원하면, 신앙은 사라지고 철학적 추상만 남게 됩니다.

 

그러나 마지막 문장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 밖에서 태어난 이방인들은 이와 다르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출생이나 문화가 문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교회 안에서 복음을 듣고도 주님을 의식적으로 부인한 경우와, 복음을 알 기회가 없었던 경우는 동일하게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는 이후에 이방인들이 어떻게 천국에 받아들여지는지를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본문은 배타적 선언이 아니라, ‘빛을 알고도 거부하는 상태’와 ‘아직 빛을 알지 못한 상태’를 구분하는 설명입니다.

 

결국 HH.3의 중심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천국은 주님을 중심으로 한 질서이며, 주님을 부인하는 관념은 그 질서와 연결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추상화하거나, 주님을 단지 인간으로 축소하거나, 신성을 분리된 존재로 상상하는 관념은 영적 유입을 차단합니다. 그리고 유입이 끊기면 진리를 생각하는 힘도 약해집니다. 그러나 이 모든 설명의 목적은 정죄가 아니라 경고입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단순한 교리 선택이 아니라, 영적 생명과 직접 연결된 문제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심화

 

1.그들은 오른쪽으로 조금 끌려 나왔다가 깊은 곳으로 내려보내지며

 

이 표현은 문자적으로 읽으면 공간 이동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의 영계 묘사에서는 ‘공간은 곧 상태(state)’인 점을 감안하면, 이 표현은 지리적 이동이라기보다 ‘영적 상태의 변화와 분리’를 묘사하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먼저 큰 원리를 하나 정리하겠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영계에는 우리가 아는 물리적 공간 개념이 본질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거기서 ‘가까움’과 ‘멀어짐’은 사랑과 진리의 유사성 혹은 차이에 의해 결정됩니다. 다시 말해, 누군가가 빛 쪽으로 간다는 것은 더 큰 진리 인식 상태로 나아감을 뜻하고, 아래로 내려간다는 것은 더 외적이고 자연적이며, 진리의 빛이 약한 상태로 들어감을 뜻합니다.

 

이제 문제의 표현을 보겠습니다. ‘오른쪽으로 조금 끌려 나왔다가 깊은 곳으로 내려보내진다’는 말은 세 단계로 나뉩니다.

 

첫째, ‘오른쪽’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반에서 오른쪽은 보통 ‘진리의 빛’ 혹은 ‘지적 측면’을 상징합니다. 천국에서도 오른편은 진리에 더 밝은 영역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오른쪽으로 조금 끌려 나온다’는 것은, 그들의 사상이 어느 정도 진리의 빛에 비추어져 시험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그들이 가진 ‘주님은 단지 인간일 뿐이다’라는 생각이 천국의 빛 앞에 드러나는 과정입니다.

 

둘째, ‘조금’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완전히 빛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잠시 그 빛에 노출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내적 상태가 그 빛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계에서는 상태가 맞지 않으면 오래 머물 수 없습니다.

 

셋째, ‘깊은 곳으로 내려보내진다’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여러 저작에서 ‘아래’ 혹은 ‘깊음’은 더 외적이고 자연적이며, 때로는 거짓과 자기 확신 속에 머무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빛과 조화되지 않는 상태는 자연히 더 낮은, 즉 더 어두운 영역과 결합합니다. 이것은 형벌을 받는 장면이라기보다, ‘유사한 것끼리 모이는’ 영계의 질서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것이 임의적 처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밀려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내적 사랑과 신념이 그들을 그에 상응하는 영역으로 이끕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 아래’는 도덕적 서열이라기보다 사랑의 질에 따른 상태 차이입니다.

 

따라서 이 문장은 이렇게 이해하시면 가장 정확합니다.

 

그들은 천국의 진리의 빛에 잠시 비추어지지만, 주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그들의 내적 상태가 그 빛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자신들과 상응하는 더 낮은 영적 상태로 분리된다.

 

이 장면은 교리적 정죄의 그림이 아니라, 영계의 ‘상응과 유입의 법칙’을 보여주는 예시입니다.

 

 

2.생각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신앙과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이 문장은 HH.3 전체의 철학적 핵심에 해당합니다. 단순히 ‘추상적 신은 안 된다’는 말이 아니라, ‘신앙과 사랑의 본질 구조’를 설명하는 표현입니다.

 

먼저 하나의 기본 원리부터 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신앙은 단순한 동의가 아닙니다. 신앙은 ‘진리를 인식하고 그것을 향해 마음이 결합되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어떤 대상을 향해 의지가 나아가는 상태’입니다. 여기서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둘 다 반드시 ‘대상(object)이 있어야 합니다. 생각 없는 사랑은 존재할 수 없고, 인식 없는 신앙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제 문제의 표현을 보겠습니다. 보이지 않는 ‘우주의 영혼(the soul of the universe [ens universi])이라는 개념은 인격적 존재라기보다 철학적 원리입니다. 일종의 ‘자연의 최초 원리’ 혹은 ‘우주적 에너지’ 같은 개념입니다. 그런데 이런 개념은 머릿속에서 구체적으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관계 맺을 수 있는 ‘누군가’가 아니라, 설명을 위한 ‘어떤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논지가 시작됩니다.

 

생각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은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구체적 인격을 향해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선함’이라는 추상 개념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 선함이 구현된 인격이나 행위를 사랑합니다. 마찬가지로 ‘자연의 원리’나 ‘우주의 영혼’은 사고의 구조 속에서 붙잡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향한 관계적 애정이 형성될 수 없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모든 사랑은 결합을 지향합니다. 사랑은 서로를 향해 나아가고, 응답을 받고, 상호작용을 이루려는 성질입니다. 그런데 비인격적 원리는 응답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의지를 가지지 않고, 사랑을 돌려보내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개념은 영적 결합을 만들 수 없습니다.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하나님 이해가 분명해집니다. 하나님은 무한한 존재이시지만, 동시에 인격적이십니다. 사랑과 지혜를 가지신 분이며, 관계를 맺으시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생각될 수 있고, 사랑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분과 결합할 수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을 단지 ‘자연의 속성’이나 ‘비인격적 절대자’로 이해한다면, 인간의 신앙은 곧 철학적 관념으로 바뀌고 맙니다. 철학은 사유를 자극할 수는 있지만, 사랑을 결합시키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런 사람들이 결국 ‘아무 하나님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신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자연의 질서를 신격화하고 있을 뿐입니다. 자연은 생각될 수는 있지만, 사랑의 응답을 주는 인격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 신은 신앙과 사랑의 중심이 될 수 없습니다.

 

이 문장을 한 줄로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은 생각 속에서 인격적으로 인식될 수 있어야 하며, 그래야만 사랑과 결합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 부분은 현대인들에게 특히 중요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에너지’, ‘우주적 힘’, ‘자연의 법칙’을 말하면서도 인격적 하나님을 거부합니다. HH.3은 이미 18세기에 그 문제의 영적 구조를 정확히 짚고 있는 셈입니다.

 

 

3.교회 안에 있으면서도’,교회 밖에서 태어난 자들이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

 

HH.3에서 스베덴보리가 굳이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와 ‘교회 밖에서 태어난 자들’을 구분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의 구원론과 책임 개념을 이해하는 핵심 열쇠입니다.

 

먼저 스베덴보리에게서 ‘교회’는 단순히 제도적 교회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교회란 ‘말씀을 가지고 있으며, 주님을 알 수 있는 계시의 빛이 주어진 상태’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복음과 말씀을 통해 주님이 누구신지를 알 수 있는 환경 속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이라는 말은 지리적 소속보다도 ‘계시의 빛 아래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왜 구분이 필요한가? 이유는 ‘책임의 정도’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사람은 자신이 받은 빛에 따라 판단됩니다. 더 큰 빛을 받았는데 그것을 의식적으로 거부하면, 그 거부는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의도적 분리’가 됩니다. HH.3에서 주님을 부인하는 자들이 문제 되는 이유는, 그들이 주님에 대한 가르침을 들었고, 이해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것을 확정적으로 부정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정보 부족이 아니라 방향 선택입니다.

 

반대로 ‘교회 밖에서 태어난 자들’, 곧 이방인들은 주님에 대한 명확한 계시를 접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경우는 상황이 다릅니다. 그들은 빛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빛을 충분히 받지 못한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른 곳에서 이방인들 가운데 선을 사랑하고 양심에 따라 살았던 이들은 사후에 기꺼이 진리를 받아들인다고 설명합니다. 그들에게는 주님을 알 기회가 주어지며, 많은 이들이 그것을 받아들인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 구분은 배타성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공의를 설명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동일한 기준으로 기계적으로 판단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빛을 알고 거부한 상태와, 아직 빛을 듣지 못한 상태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교회’는 궁극적으로 외적 소속이 아니라 ‘내적 상태’입니다.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주님을 부인하는 사람은 실제로는 교회의 내적 본질과 분리된 상태입니다. 반대로 교회 밖에 태어났어도 진리와 선을 사랑하는 사람은 내적으로는 교회의 본질에 가까운 상태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방인에 대한 설명을 뒤로 미루면서, 먼저 ‘빛 아래 있으면서도 그 빛을 거부한 상태’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교회 안’은 계시의 빛을 받은 상태를 의미하고, ‘교회 밖’은 그 빛을 아직 받지 못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빛을 받은 후의 거부는 책임이 따르지만, 빛을 받지 못한 무지는 동일하게 취급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HH.3에서 그 구분을 두는 이유입니다.

 

 

 

HH.2, 1장, '천국의 하나님은 주님이시다' (HH.2-6)

1천국의 하나님은 주님이시다The God of Heaven Is the Lord HH.2무엇보다 먼저, ‘천국의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아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위에 다른 모든 것이 달려 있기 때문입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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