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13.심화

 

6. ‘16:15

 

보라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16:15) Blessed is he who watcheth, and keepeth his garments, lest he walk naked and they see his shame (Rev. 16:15).

 

 

이 구절을 AC.213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garments)은 진리와 선을, ‘벌거벗음(nakedness)은 그것들을 상실한 상태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이 구절은 벌거벗음’이 단순히 결핍의 상태를 뜻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영적 경계와 깨어 있음의 문제와도 연결된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요한계시록의 이 말씀은 주님의 재림과 영적 심판을 다루는 문맥 속에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여기서 깨어 있으라 하시며, 동시에 자기 옷을 지키라 하십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의 상응에 따르면, 사람이 깨어 있다는 것은 단순히 잠을 자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경계하며, 진리 안에 머무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옷을 지킨다’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진리와 선을 보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거듭남의 과정에서 많은 진리를 배우고 깨닫지만, 그것을 삶 속에서 지키지 않으면 점차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영적으로 벌거벗게 됩니다. 즉 선과 진리의 보호를 잃고 자신의 own이 드러나게 됩니다.

 

AC.213의 문맥에서 보면, 이것은 창3의 아담과 하와와 직접 연결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벌거벗은 줄 알게 되었고, 급히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을 가렸습니다. 그러나 계16:15에서는 인간이 만든 무화과 나뭇잎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을 지키는 것이 강조됩니다. 즉 영적 안전은 자기 변명이나 자기 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진리 안에 머무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서 부끄러움(shame)이라는 표현은 AC.213의 핵심 개념과 일치합니다. 2:25에서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순진무구함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타락 이후에는 벌거벗음이 곧 수치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악에 대한 의식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란, 자신의 악을 감추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 안에서 보호받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더 깊이 보면, 이 구절은 모든 신앙인의 평생 과제를 말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깨어 있으라’, ‘옷을 지키라’는 말씀은 단순히 마지막 날을 준비하라는 뜻이 아니라, 매일 자신의 사랑과 생각을 살피며, 주님께 받은 진리를 잃지 말라는 권면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own은 끊임없이 진리의 옷을 벗기려 하고, 자신을 중심에 두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AC.213에서 계16:15를 인용하는 이유는, ‘벌거벗음’이 영적 수치와 결핍을 의미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동시에, 그 상태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깨어 있음’과 옷을 지킴’, 곧 주님으로부터 받은 진리와 선 안에 머무는 삶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음을 깨달은 장면이 인간 타락의 시작을 보여 준다면, 요한계시록의 이 말씀은 그 반대로 영적 경계와 보존의 길을 보여 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213, 심화 5, ‘계3:18’

AC.213.심화 5. ‘계3: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 (계3:18) I counsel thee to buy of me white raiment that thou mayest be clothed, and that the shame of thy naked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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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3: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 (3:18) I counsel thee to buy of me white raiment that thou mayest be clothed, and that the shame of thy nakedness do not appear (Rev. 3:18).

 

 

이 구절을 AC.213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벌거벗음(nakedness)이 선과 진리를 상실한 영적 상태를 의미하고, 반대로 (raiment)은 그 상태를 덮어 주는 진리와 선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 구절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어진 말씀입니다. 그들은 스스로는 나는 부자라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주님께서는 오히려 그들이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외적으로는 풍요롭고 종교적으로도 부족함이 없어 보였지만, 내적으로는 진리와 선이 결핍된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흰옷을 사서 입으라’고 권하십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에 따르면 ’은 진리를 의미합니다. 사람이 육체를 옷으로 가리듯, 영혼은 진리로 덮여 보호받습니다. 특히 흰옷’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순수한 진리를 뜻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문자 그대로 옷을 사라는 뜻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진리를 받아들이라는 초청입니다.

 

AC.213의 문맥에서 보면 이것은 창3:7과 직접 연결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이 벌거벗은 줄 알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을 가리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이 만든 덮개였습니다. 반면 계3:18에서는 주님께서 친히 내게서 흰옷을 사서 입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인간이 스스로 만든 변명과 자기 의로는 벌거벗음을 덮을 수 없고, 주님께로부터 오는 진리만이 그것을 덮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특히 여기서 벌거벗은 수치(shame of thy nakedness)라는 표현은 AC.213의 핵심을 잘 보여 줍니다. 2:25에서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순진무구함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창3 이후에는 벌거벗음이 수치가 되었습니다. 선과 진리의 보호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바로 그 상태를 가리켜 벌거벗은 수치’라고 부릅니다.

 

또한 이 구절은 스베덴보리의 구원관을 잘 보여 줍니다. 주님은 단순히 너는 벌거벗었으니 부끄러운 존재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내게서 흰옷을 사서 입으라’고 하십니다. 즉 주님은 인간의 결핍을 폭로하시기만 하는 분이 아니라, 동시에 그것을 채우시는 분입니다. 벌거벗음을 드러내시면서도 그 벌거벗음을 덮을 옷도 함께 주십니다.

 

그래서 AC.213에서 계3:18을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벌거벗음’이 영적 수치와 결핍을 의미하고, ‘흰옷’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와 선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창세기에서 인간은 벌거벗음을 깨닫고 스스로 무화과 나뭇잎을 엮었지만, 요한계시록에서는 주님께서 친히 내게서 흰옷을 사서 입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어쩌면 이 두 본문 사이에는 인간의 모든 종교적 노력과, 그 노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주님의 은혜가 함께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AC.213, 심화 6, ‘계16:15’

AC.213.심화 6. ‘계16:15’ 보라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계16:15) Blessed is he who watcheth, and keepeth his garments, 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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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3, 심화 4, ‘겔23:29’

AC.213.심화 4. ‘겔23:29’ 그들이 너를 벌거벗은 몸으로 두어서 네 벗은 몸을 드러낼 것이라 (겔23:29) They shall leave her naked and bare, and the nakedness shall be uncovered (Ezek. 23:29). 이 구절을 AC.213에서 인용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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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23:29

 

그들이 너를 벌거벗은 몸으로 두어서 네 벗은 몸을 드러낼 것이라 (23:29) They shall leave her naked and bare, and the nakedness shall be uncovered (Ezek. 23:29).

 

 

이 구절을 AC.213에서 인용하는 이유 역시, 말씀에서 벌거벗음(nakedness)이 단순한 육체적 상태가 아니라 선과 진리를 상실한 영적 상태, 곧 타락한 교회의 수치와 악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에스겔 23장은 오홀라와 오홀리바라는 두 여인을 통해 이스라엘과 유다의 영적 음행, 곧 진리를 버리고 거짓과 우상을 받아들인 상태를 묘사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벌거벗음이 드러난다’는 것은 단순히 신체가 노출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이 감추고 있던 영적 실상이 드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순진무구함 가운데 있는 사람은 벌거벗었어도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2:25가 바로 그런 상태입니다. 그러나 순진무구함을 잃고 악과 거짓 가운데 들어가면 벌거벗음은 곧 수치가 됩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감추고 싶은 것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3:7에서는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을 가리게 되고, 에스겔 23장에서는 그 감추어진 상태가 폭로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특히 벌거벗은 몸으로 두어서 네 벗은 몸을 드러낼 것이라’는 표현은, 인간이 외적으로는 경건과 신앙을 가장하고 있을 수 있으나, 결국 내면의 사랑과 의도가 드러난다는 의미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영계에서는 사람의 내면이 감추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여러 저작에서 설명하듯, 사후에는 각 사람이 실제로 사랑한 것이 겉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 점에서 에스겔 23장의 벌거벗음은 단순히 선과 진리가 없는 상태’만이 아니라, ‘그 상태가 드러나는 것’을 강조합니다. 악과 거짓이 숨겨져 있을 때는 사람 스스로도 자신을 속일 수 있지만, 벌거벗음이 드러나면 더 이상 숨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영적 심판과도 관련된 표현입니다.

 

AC.213의 문맥에서는 바로 이 의미가 중요합니다. 3:7에서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이 벌거벗은 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상태를 자각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에스겔 23장에서는 그 상태가 외적으로도 드러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벌거벗음’이 영적 수치와 악의 상징이라는 사실을 더욱 강하게 보여 주는 예로 사용됩니다.

 

결국 AC.213에서 겔23:29를 인용하는 이유는, 벌거벗음이 단순한 신체적 노출이 아니라 선과 진리의 상실, 그리고 그로 인한 영적 수치가 드러나는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입니다. 2의 벌거벗음이 순진무구함의 상징이었다면, 에스겔 23장의 벌거벗음은 순진무구함을 잃은 교회의 참모습이 드러난 상태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통해 벌거벗음’이 말씀에서 어떻게 반대 의미로 사용되는지를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AC.213, 심화 5, ‘계3:18’

AC.213.심화 5. ‘계3: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 (계3:18) I counsel thee to buy of me white raiment that thou mayest be clothed, and that the shame of thy naked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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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3, 심화 3, ‘겔16:22’

AC.213.심화 3. ‘겔16:22’ 네가 어렸을 때에 벌거벗은 몸이었으며 피투성이가 되어서 발짓하던 것을 (겔16:22) Thou wast naked and bare, and trampled on in thy blood (Ezek. 16:22). 이 구절을 AC.213에서 인용하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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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6:22

 

네가 어렸을 때에 벌거벗은 몸이었으며 피투성이가 되어서 발짓하던 것을 (16:22) Thou wast naked and bare, and trampled on in thy blood (Ezek. 16:22).

 

 

이 구절을 AC.213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벌거벗음(nakedness)이 단순히 옷이 없는 상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진리가 결핍된 영적 상태, 곧 타락하고 황폐해진 교회의 상태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에스겔 16장은 예루살렘, 곧 교회를 한 버려진 여자아이로 비유하여 설명하는 장입니다. 그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들판에 버려졌고, 벌거벗은 채 피투성이가 되어 있습니다. 문자적으로는 매우 비참한 모습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영적 상태에 대한 묘사로 읽습니다. 여기서 벌거벗음’은 진리의 옷을 입지 못한 상태를, ‘피투성이’는 선과 진리가 훼손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AC.213의 문맥에서 보면, 스베덴보리는 창2:25와 창3:7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2에서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다’고 했는데, 이는 순진무구함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창3에서는 벌거벗음을 부끄러워합니다. 왜냐하면 순진무구함을 잃고, 악을 의식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에스겔 16장의 벌거벗음’은 바로 이 후자의 의미에 속합니다.

 

즉 여기서의 벌거벗음은 천진한 어린아이의 벌거벗음이 아니라, 영적 보호를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로 덮여 있지 않은 상태이며, 따라서 수치와 황폐함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벌거벗음 = 수치와 악’이라는 자신의 설명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인용합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에스겔 16장의 이야기가 결국 주님의 자비를 보여 준다는 점입니다. 그 아이는 벌거벗고 피투성이였지만, 주님께서는 그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찾아오셔서 살게 하시고, 옷을 입히시고, 아름답게 꾸며 주십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보면, 선과 진리를 잃은 교회와 사람을 주님께서 다시 회복시키시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AC.213에서 이 구절은 단순히 벌거벗음은 나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인용된 것이 아닙니다. 더 깊게 보면, 벌거벗음은 주님 없이 남겨진 인간의 상태를 보여 줍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덮을 수 없으며, 결국 주님께서 입혀 주시는 진리와 선의 옷이 필요합니다. 3의 아담과 하와가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을 가리려 했던 것과 달리, 에스겔 16장에서는 주님께서 친히 그 벌거벗음을 덮어 주십니다.

 

따라서 AC.213에서 겔16:22를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벌거벗음’이 영적으로는 선과 진리를 상실한 상태, 곧 타락하고 황폐해진 교회의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그런 상태에 있는 사람과 교회조차 포기하지 않으시고, 다시 입히시고 회복시키시는 주님의 자비를 암시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AC.213, 심화 4, ‘겔23:29’

AC.213.심화 4. ‘겔23:29’ 그들이 너를 벌거벗은 몸으로 두어서 네 벗은 몸을 드러낼 것이라 (겔23:29) They shall leave her naked and bare, and the nakedness shall be uncovered (Ezek. 23:29). 이 구절을 AC.213에서 인용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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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3, 심화 2, ‘악을 생각하고 있다는 의식’

AC.213.심화 2. ‘악을 생각하고 있다는 의식’ 순진무구함이 없는 곳에서는 벌거벗음이 수치와 치욕이 되는데, 이는 악을 생각하고 있다는 의식이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for where there is no innoc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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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3.심화

 

2. ‘악을 생각하고 있다는 의식

 

순진무구함이 없는 곳에서는 벌거벗음이 수치와 치욕이 되는데, 이는 악을 생각하고 있다는 의식이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for where there is no innocence, nakedness is a scandal and disgrace, because it is attended with a consciousness of thinking evil. (AC.213)

 

 

이 글은 매우 짧은 문장이지만, 인간의 영적 심리를 깊이 꿰뚫고 있는 설명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2:25의 아담과 하와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안에는 아직 순진무구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순진무구함이란 단순히 순수하거나 착한 상태가 아니라, 자기 자신보다 주님을 앞세우고,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인정하는 상태입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숨길 것이 없습니다. 감출 악의 의도가 없고, 위장할 거짓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순진무구함이 사라지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의도를 의식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생각들 가운데 주님 앞에 그대로 드러나기를 원하지 않는 것들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악을 생각하고 있다는 의식(a consciousness of thinking evil)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악을 행했다는 것이 아니라 악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안다’는 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느 정도 자기 내면을 압니다. 겉으로는 선한 척해도 속으로는 시기하고 있음을 알고, 사랑하는 척해도 사실은 인정받고 싶어 함을 알고, 겸손한 척해도 사실은 칭찬받고 싶어 함을 압니다. 바로 이런 자기 인식이 있을 때 벌거벗음은 수치가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설명은 매우 현실적입니다. 사람이 부끄러움을 느끼는 이유는 단순히 남이 보기 때문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자기 상태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상태가 주님의 질서와 다르다는 것을 어렴풋하게라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끄러움은 일종의 영적 자각이기도 합니다.

 

이 점에서 창3의 아담과 하와는 완전히 죽은 상태가 아닙니다. 오히려 아직 살아 있는 양심과 지각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만일 완전히 악 속에 잠겼다면 부끄러움조차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벌거벗음을 부끄러워했습니다. 이것은 자신들의 상태가 이전과 달라졌음을 알았다는 뜻이며, 따라서 아직 내적 빛이 완전히 꺼지지는 않았다는 뜻입니다.

 

어쩌면 목사님께서 앞서 자주 말씀하신 own과도 연결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 own 안에 있을수록 자신을 포장하려 하고, 감추려 하고, 정당화하려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상태를 어느 정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own은 언제나 무언가를 덮으려 합니다. 반대로 순진무구함은 숨길 것이 없기 때문에 덮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AC.213의 이 문장은 결국 이런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순진무구함이 있는 사람은 주님 앞에서 숨을 것이 없지만, 순진무구함을 잃은 사람은 자기 안의 악을 어느 정도 알기 때문에 자신을 감추려 한다.’ 바로 그 감추고 싶은 마음이 벌거벗음을 수치로 만들고, 그 수치가 창3의 무화과 나뭇잎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부끄러움 자체는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문맥에서는, 자신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아직 영적으로 살아 있다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정말 위험한 상태는 벌거벗었으면서도 벌거벗은 줄 모르는 상태, 악 가운데 있으면서도 그것을 선이라고 믿는 상태일 것입니다. AC.206 눈이 열렸다고 생각하는 뱀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반면 AC.213의 사람들은 적어도 자신들이 벌거벗었다는 사실만큼은 알고 있었고, 바로 그 점에서 아직 회복의 가능성이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AC.213, 심화 3, ‘겔16:22’

AC.213.심화 3. ‘겔16:22’ 네가 어렸을 때에 벌거벗은 몸이었으며 피투성이가 되어서 발짓하던 것을 (겔16:22) Thou wast naked and bare, and trampled on in thy blood (Ezek. 16:22). 이 구절을 AC.213에서 인용하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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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3, 심화 1, ‘순진무구’(innocence)

AC.213.심화 1. ‘순진무구’(innocence) ‘순진무구’(innocence)는 스베덴보리 신학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입니다. 일반적으로 한국어의 ‘순진하다’는 말은 세상 물정을 모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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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3.심화

 

1. ‘순진무구(innocence)

 

순진무구(innocence)는 스베덴보리 신학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입니다. 일반적으로 한국어의 순진하다’는 말은 세상 물정을 모르거나 경험이 부족하다는 뜻으로 사용되곤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innocence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순진무구를 천국 전체의 본질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순진무구란 자신으로부터는 아무 선도, 아무 진리도 나오지 않으며, 모든 선과 진리는 오직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고 인정하며,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순진무구는 무지가 아니라 가장 깊은 지혜와 결합되어 있습니다. 천사들은 인간보다 훨씬 지혜롭지만, 동시에 가장 순진무구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지혜가 자기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순진무구는 AC.210에서 설명된 own과 정반대에 있습니다. own 내가 생각한다’, ‘내가 안다’, ‘내가 한다’, ‘내 것이 옳다’고 주장합니다. 반면 순진무구는 모든 것은 주님께로부터 온다’고 인정합니다. 그래서 순진무구는 단순한 덕목 하나가 아니라, 인간과 주님의 관계 자체를 규정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213에서 창2:25 그들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다’는 말이 순진무구를 의미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감출 필요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것을 주장하지 않았고, 악을 품고 있지 않았으며, 모든 것을 주님께로부터 받는 상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순진무구가 있는 곳에서는 벌거벗음이 수치가 아닙니다. 그러나 순진무구가 사라지면, 사람은 자신을 방어하고, 포장하고, 숨기고, 정당화하려 하게 됩니다. 그때 벌거벗음은 곧 수치가 됩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어린아이들을 예로 들어 설명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을 순진무구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은 순진무구의 그림자 같은 것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순진무구는 어린아이의 무지가 아니라, 많은 것을 알고 경험한 뒤에도 여전히 자신이 주님께 의존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천국의 순진무구는 어린아이의 순진함이 아니라 천사의 순진함입니다.

 

목사님께서 AC를 오래 읽으시면서 자주 언급하시는 퍼셉션(perception)도 결국 순진무구와 깊이 연결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이 주님의 뜻을 직접 지각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의 지성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순진무구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것을 앞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의 인플럭스가 막힘없이 흘러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순진무구는 천국 입장의 필수 조건입니다. 그것은 어린아이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가 아니라, 모든 것을 주님께 돌리는 상태입니다. 자신의 지혜가 많을수록 더욱 주님의 지혜를 인정하고, 자신의 능력이 클수록 더욱 주님의 능력을 인정하며, 자신의 선이 아니라 주님의 선을 사랑하는 상태입니다.

 

결국 AC.213의 문맥에서 순진무구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는 상태’이며, 더 깊게 말하면 자기 자신 안에는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기쁘게 인정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체를 관통하는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순진무구란 주님께서 하시는 것을 내가 하듯 여기지 않고, 내가 하는 것조차 사실은 주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사랑으로 인정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AC.213, 심화 2, ‘악을 생각하고 있다는 의식’

AC.213.심화 2. ‘악을 생각하고 있다는 의식’ 순진무구함이 없는 곳에서는 벌거벗음이 수치와 치욕이 되는데, 이는 악을 생각하고 있다는 의식이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for where there is no innoc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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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3, 창3:7,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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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les. (3:7)

 

AC.213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knowing that they were naked), 그들이 이전처럼 더 이상 순진무구(innocence)한 상태에 있지 않고, 악 가운데 있음을 알게 되고 인정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앞 장 마지막 절에서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더라(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라고 말한 것으로부터 분명합니다. 거기서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더라(not to be ashamed because they were naked)는 순진무구함 가운데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절에서는 그 반대가 됩니다. 여기서는 그들이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hid themselves)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순진무구함이 없는 곳에서는 벌거벗음이 수치와 치욕이 되는데, 이는 악을 생각하고 있다는 의식이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말씀에서 벌거벗음(nakedness)은 수치와 악의 표상으로 사용되며, 타락한 교회에 대해 말할 때 적용됩니다. 에스겔서에는 By “knowing that they were naked” is signified their knowing and acknowledging themselves to be no longer in innocence as before, but in evil, as is evident from the last verse of the preceding chapter, where it is said, “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 and where it may be seen that “not to be ashamed because they were naked” signifies to be innocent. The contrary is signified by their “being ashamed,” as in this verse, where it is said that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hid themselves”; for where there is no innocence, nakedness is a scandal and disgrace, because it is attended with a consciousness of thinking evil. For this reason “nakedness” is used in the Word as a type of disgrace and evil, and is predicated of a perverted church, as in Ezekiel:

 

네가 어렸을 때에 벌거벗은 몸이었으며 피투성이가 되어서 발짓하던 것을 (16:22) Thou wast naked and bare, and trampled on in thy blood (Ezek. 16:22).

 

그들이 너를 벌거벗은 몸으로 두어서 네 벗은 몸을 드러낼 것이라 (23:29) They shall leave her naked and bare, and the nakedness shall be uncovered (Ezek. 23:29).

 

요한계시록에서는 In John: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 (계3:18) I counsel thee to buy of me white raiment that thou mayest be clothed, and that the shame of thy nakedness do not appear (Rev. 3:18).

 

그리고 마지막 날 관련, And concerning the last day:

 

보라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16:15) Blessed is he who watcheth, and keepeth his garments, lest he walk naked and they see his shame (Rev. 16:15).

 

신명기에서는 In Deuteronomy:

 

사람이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줄 것이요 (24:1) If a man hath found some nakedness in his wife, let him write her a bill of divorcement (Deut. 24:1).

 

같은 이유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제단에 나아가 섬길 때, 벌거벗은 살을 가리기 위한 세마포 바지를 입도록 하체를 가리게 하라(cover the flesh of their nakedness,)는 명령을 받았는데, 이는 죄를 짊어진 채 죽지 않게 하기 위함(lest they should bear iniquity, and die)이었습니다 (28:42-43). For the same reason Aaron and his sons were commanded to have linen breeches when they came to the altar, and to minister, to “cover the flesh of their nakedness, lest they should bear iniquity, and die (Exod. 28:42–43).”

 

42또 그들을 위하여 베로 속바지를 만들어 허리에서부터 두 넓적다리까지 이르게 하여 하체를 가리게 하라 43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나 제단에 가까이하여 거룩한 곳에서 섬길 때에 그것들을 입어야 죄를 짊어진 채 죽지 아니하리니 그와 그의 후손이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 (28:42, 43)

 

 

해설

 

이 본문은 창3:7의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라는 말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것을 단순히 육체의 벗은 몸을 인식하게 된 사건으로 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영적 상태의 변화로 봅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변화는 옷이 없다는 사실을 새롭게 발견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순진무구함 가운데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창2:25와 창3:7을 의도적으로 대조합니다. 창2에서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더라’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때는 순진무구함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순진무구함이 있는 곳에서는 벌거벗음이 수치가 아닙니다. 어린아이가 자신의 벌거벗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처럼, 그들의 내면에는 숨겨야 할 악 의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창3에서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들은 같은 벌거벗음 속에 있으면서도 부끄러움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이제 그 안에 악에 대한 의식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매우 깊이 있게 설명합니다. 순진무구함이 사라지면 사람은 자신을 감추고 싶어집니다. 자신의 상태를 드러내기 두려워하고, 무언가로 가리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곧바로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게 됩니다.

 

이 때문에 말씀에서 ‘벌거벗음’은 점차 영적 의미를 갖게 됩니다. 순진무구함 가운데 있는 벌거벗음은 악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지만, 타락 이후의 벌거벗음은 선과 진리의 보호를 잃은 상태, 곧 영적 빈곤과 수치를 의미하게 됩니다. 그래서 에스겔과 요한계시록에서 ‘벌거벗음’은 타락한 교회의 상태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사용됩니다.

 

특히 계3:18의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는 말씀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에 따르면 옷은 진리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벌거벗음은 진리의 보호를 잃은 상태이고, 흰옷을 입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받아들이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문제는 육체의 옷이 아니라 영혼의 옷입니다.

 

또한 출애굽기의 제사장 복장 규정도 같은 원리로 설명됩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제단에 나아갈 때, 벌거벗음을 가리도록 명령받은 것은 단순한 예절 문제가 아니라, 거룩한 것 앞에서는 인간 자신의 own이 드러나지 않아야 함을 상징합니다. 인간은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로 덮여 있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영적 벌거벗음이 드러나게 됩니다.

 

결국 AC.213의 핵심은 매우 아름답고도 깊습니다. 창2의 벌거벗음은 순진무구함의 상징이었지만, 창3의 벌거벗음은 순진무구함의 상실을 의미합니다. 같은 ‘벌거벗음’이라는 표현이지만, 상태가 달라졌기 때문에 의미도 달라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부끄러움을 느꼈다는 사실은 아직 완전히 죽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알고 부끄러워할 수 있다는 것은, 여전히 자신의 상태를 인식하는 내적 빛이 남아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AC.213은 단순히 수치의 이야기가 아니라, 타락 속에서도 아직 남아 있는 지각의 흔적과 회복의 가능성을 보여 주는 본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심화

 

1. ‘순진무구(innocence)

 

 

AC.213, 심화 1, ‘순진무구’(innocence)

AC.213.심화 1. ‘순진무구’(innocence) ‘순진무구’(innocence)는 스베덴보리 신학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입니다. 일반적으로 한국어의 ‘순진하다’는 말은 세상 물정을 모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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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악을 생각하고 있다는 의식

 

 

AC.213, 심화 2, ‘악을 생각하고 있다는 의식’

AC.213.심화 2. ‘악을 생각하고 있다는 의식’ 순진무구함이 없는 곳에서는 벌거벗음이 수치와 치욕이 되는데, 이는 악을 생각하고 있다는 의식이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for where there is no innoc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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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6:22

 

 

AC.213, 심화 3, ‘겔16:22’

AC.213.심화 3. ‘겔16:22’ 네가 어렸을 때에 벌거벗은 몸이었으며 피투성이가 되어서 발짓하던 것을 (겔16:22) Thou wast naked and bare, and trampled on in thy blood (Ezek. 16:22). 이 구절을 AC.213에서 인용하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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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23:29

 

 

AC.213, 심화 4, ‘겔23:29’

AC.213.심화 4. ‘겔23:29’ 그들이 너를 벌거벗은 몸으로 두어서 네 벗은 몸을 드러낼 것이라 (겔23:29) They shall leave her naked and bare, and the nakedness shall be uncovered (Ezek. 23:29). 이 구절을 AC.213에서 인용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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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3:18

 

 

AC.213, 심화 5, ‘계3:18’

AC.213.심화 5. ‘계3: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 (계3:18) I counsel thee to buy of me white raiment that thou mayest be clothed, and that the shame of thy naked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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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6:15

 

 

AC.213, 심화 6, ‘계16:15’

AC.213.심화 6. ‘계16:15’ 보라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계16:15) Blessed is he who watcheth, and keepeth his garments, 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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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출28:42-43’

 

42또 그들을 위하여 베로 속바지를 만들어 허리에서부터 두 넓적다리까지 이르게 하여 하체를 가리게 하라 43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나 제단에 가까이하여 거룩한 곳에서 섬길 때에 그것들을 입어야 죄를 짊어진 채 죽지 아니하리니 그와 그의 후손이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 (출28:42, 43)

 

 

‘또 그들을 위하여 베로 속바지를 만들어 허리에서부터 두 넓적다리까지 이르게 하여 하체를 가리게 하라.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나 제단에 가까이하여 거룩한 곳에서 섬길 때에 그것들을 입어야 죄를 짊어진 채 죽지 아니하리니 그와 그의 후손이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출28:42-43)를 AC.213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벌거벗음(nakedness)’이 단순한 신체 노출이 아니라 영적 결핍과 인간 자신의 own을 의미하며, 거룩한 것 앞에서는 반드시 그것이 덮여 있어야 함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이것은 제사장 복장에 관한 규정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제사장의 모든 의복이 상응에 의해 영적 의미를 가진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제사장은 주님을 표상하고, 제사장의 옷은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적 진리와 신적 선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제사장이 벌거벗음을 드러낸 채 거룩한 곳에 들어가지 못하게 한 것은 단순한 예절이나 품위의 문제가 아닙니다.

 

AC.213의 문맥에서는 이것이 창3장의 벌거벗음과 연결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타락 후 자신들이 벌거벗은 줄을 알게 되었고, 그 벌거벗음을 가리려 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벌거벗음은 선과 진리의 보호를 잃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제사장이 거룩한 곳에 들어갈 때 벌거벗음이 드러나서는 안 된다는 것은, 인간 자신의 것(own)이 드러난 상태로는 주님의 거룩함에 접근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특히 본문은 ‘죄를 짊어진 채 죽지 아니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이것 역시 육체적 죽음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보면 인간 자신의 것만으로 주님 앞에 서는 것은 곧 영적 죽음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인간 자신의 것 안에는 사랑 자체가 아니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있으며, 진리 자체가 아니라 왜곡된 이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반드시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로 덮여 있어야 합니다.

 

또한 여기서 속바지가 ‘베(linen)’로 만들어졌다는 점도 의미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세마포나 베는 깨끗한 진리, 특히 선에서 나온 진리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제사장이 베 속바지로 벌거벗음을 가리는 것은, 인간의 자연적인 것과 자신의 것을 주님께서 주시는 순수한 진리로 덮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구절은 계3:18의 ‘흰 옷을 사서 입으라’는 말씀과도 연결됩니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의 의와 지혜로는 자신의 벌거벗음을 덮을 수 없습니다. 무화과 잎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주님께서 주시는 옷, 곧 진리와 선이 필요합니다. 출애굽기의 제사장 복장은 바로 그 원리를 의식적으로 보여 주는 표상입니다.

 

그래서 AC.213에서 출28:42-43을 인용하는 이유는, 벌거벗음이 영적으로는 인간 자신의 것과 그로 인한 결핍을 의미하며, 거룩한 것 앞에서는 반드시 그것이 덮여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제사장의 베 속바지는 단순한 의복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와 선으로 덮이는 데 있음을 상징하는 매우 깊은 표상인 것입니다.

 

 

 

AC.212, 창3:7, ‘interior dictate’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이해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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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2.심화

 

12. ‘검색이 없던 시절

 

스마트폰, PC가 없어 검색이라는 걸 할 수 없었을 스베덴보리는 어떻게 어느 성경 몇 장 몇 절에 어떤 말씀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까요?

 

 

목사님 같은 의문은 스베덴보리를 오래 읽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반드시 하게 되는 질문인 것 같습니다. AC를 읽다 보면 정말 놀라울 정도로 성경 전체를 자유롭게 오가며 인용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를 해설하다가 갑자기 시편, 이사야, 에스겔, 신명기, 복음서를 넘나들며 몇 구절씩 정확하게 끌어오는 모습을 보면, ‘도대체 검색도 없던 시대에 이게 가능한가?’ 하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우선 가장 현실적인 답부터 말하자면, 스베덴보리는 당대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학자였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라틴어, 히브리어, 그리스어 교육을 받았고, 평생 독서와 연구 속에서 살았습니다. 오늘날의 대학 교수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성경과 고전 문헌 연구에 쏟아부은 사람입니다. 당시 학자들은 지금처럼 검색창에 입력하는 대신, 중요한 구절들을 직접 필사하고, 주제별로 정리하고, 머릿속에 축적하는 훈련을 했습니다.

 

또한 당시에는 성경 자체가 현대인보다 훨씬 삶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특히 성직자나 학자들은 성경을 반복해서 읽고 암송했습니다. 실제로 17, 18세기 유럽의 신학자들 가운데는 성경의 상당 부분을 암송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스베덴보리 정도의 독서량과 기억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특정 주제와 관련된 구절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는 느낌도 듭니다. 왜냐하면 AC를 읽다 보면 단순히 많이 외운 수준을 넘어서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한 상응을 설명하기 위해 성경 여러 권에서 같은 상응을 가진 구절들을 정확하게 모아 오는 모습을 보면, 단순 암기 이상의 체계성이 보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를 연구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그가 평소 만들어 두었던 방대한 노트와 색인(index)을 활용했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실제로 당시 학자들은 오늘날 데이터베이스 대신 공통 주제집(commonplace book)이라는 것을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예를 들어, ‘’, ‘’, ‘’, ‘’, ‘’, ‘ 같은 주제를 적어 두고, 관련 구절들을 계속 정리하는 방식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비슷한 작업을 했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 자신의 입장에 서면 또 다른 설명이 나옵니다. 그는 여러 곳에서 천사들과의 교통 가운데 말씀의 내적 의미를 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천사들에게서 성경 구절 번호를 받아 적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먼저 성경을 철저히 알고 있었고, 그 위에서 내적 의미가 열렸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실제로 AC를 읽어보면 스베덴보리는 천사가 내게 이 구절을 알려주었다’기보다, ‘말씀 전체가 하나의 유기체처럼 연결되어 있음을 보았다’는 식으로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치 숙련된 음악가가 악보를 보며, 곡 전체의 구조를 한눈에 파악하듯, 그는 말씀 전체 안에서 상응의 연결망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스베덴보리가 영계 체험을 27년이나 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천사들이 모든 것을 즉석에서 알려주었다면 그렇게 방대한 본문 인용과 문헌 작업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AC를 보면 그는 놀라울 정도로 꼼꼼하게 성경 본문을 대조하고, 단어를 분석하고, 상응을 추적합니다. 즉 영계 체험이 그의 학문을 대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존의 학문과 성경 연구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린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어느 성경 몇 장 몇 절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 수 있었던 것은 첫째, 원래부터 비범한 학자적 기억력과 평생의 성경 연구 때문이었고, 둘째, 방대한 노트와 색인 작업 때문이었으며, 셋째, 영계 체험을 통해 말씀 전체의 내적 연결성을 이전보다 훨씬 선명하게 보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입니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가 검색창에 단어를 입력해 구절을 찾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검색’을 하지만, 그는 기억’하고, ‘연결’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AC를 읽다 보면, 마치 성경 전체가 그의 머릿속에서 하나의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움직이고 있었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그것이야말로 현대인이 가장 부러워해야 할 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검색 능력이 아니라, 말씀 자체가 내면에 살아 있었던 상태 말입니다.

 

 

 

AC.212, 창3:7, ‘interior dictate’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이해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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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2, 심화 11, ‘사29:18’

AC.212.심화 11. ‘사29:18’ 그날에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 (사29:18) 이 구절을 AC.212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듣는다’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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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2.심화

 

11. ‘29:18

 

그날에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 (29:18)

 

 

이 구절을 AC.212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듣는다’는 것이 단순히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고, ‘본다’는 것이 단순히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해(understanding)를 통해 진리를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문자 그대로 읽으면, 이 구절은 귀머거리와 맹인이 기적적으로 회복되는 장면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영적인 상태에 관한 예언으로 봅니다. 왜냐하면, 본문은 단순히 육체의 장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책의 말을 듣는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은 말씀을 가리키며, 따라서 듣는다’는 것은 말씀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이해하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마찬가지로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본다’는 표현도 육체적 시력 회복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어둠과 캄캄함은 영적으로는 무지와 거짓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런 상태에 있던 사람이 이제 보게 된다는 것은, 이해가 열려 진리의 빛을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맹인’은 단순히 육체적 장애인이 아니라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던 사람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점 때문에 이 구절을 AC.212에 인용합니다. 3:7 눈이 밝아져’라는 표현이 단순한 시력의 문제가 아니라 이해의 문제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사야 29장에서도 맹인의 눈이 본다’는 말은 이해가 밝아진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으므로, 3:7 역시 같은 원리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 구절은 AC.211 interior dictate’와도 잘 연결됩니다. 사람은 진리의 빛이 비칠 때, 비로소 자신의 상태와 주님의 뜻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전에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해를 밝히실 때, 이전에는 어둠으로 보이던 것들이 의미를 갖기 시작하고, 이전에는 들리지 않던 말씀의 소리가 마음에 들리기 시작합니다.

 

또한 이 구절은 AC.212 전체의 논증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역할도 합니다. 발람의 눈이 열린 사람’, 요나단의 눈이 밝아졌다’, 다윗의 눈을 밝히소서’, 에스겔의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다’, 이사야의 눈을 감기게 하라’, 모세의 보는 눈을 주지 아니하셨다’, 그리고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힌다’는 말씀까지 모두 하나의 원리를 증언합니다. 곧 말씀에서 ’은 이해를 뜻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AC.212에서 사29:18을 인용하는 이유는, ‘맹인의 눈이 본다’는 표현이 이해의 계몽과 진리의 인식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창3:7 눈이 밝아져’라는 표현 역시 육체적 변화가 아니라 이해가 열려 자신의 상태를 인식하게 된 것을 뜻한다는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사야가 말하는 맹인의 눈이 본다’는 것은 단순한 기적의 약속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의 이해를 열어 진리의 빛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구원의 약속인 것입니다.

 

 

 

AC.212, 심화 10, ‘사42:7’

AC.212.심화 10. ‘사42:7’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사42:7) 이 구절을 AC.212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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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2.심화

 

10. ‘42:7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42:7)

 

 

이 구절을 AC.212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이 이해(understanding)를 의미하며, ‘눈을 밝힌다’는 것이 단순한 육체적 치유가 아니라 영적 이해를 열어 진리를 보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문자적으로 이 구절은 메시아의 사역을 예언하는 말씀입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지상에 계실 때, 실제 맹인들의 눈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기적 자체보다 그 안에 담긴 더 깊은 의미에 주목합니다. 왜냐하면 본문이 단지 맹인의 시력 회복만을 말하는 것이라면, 이어지는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는 표현들과 자연스럽게 연결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눈먼 자’는 육체적으로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또한 감옥’과 흑암’은 거짓과 무지 안에 갇혀 있는 영적 상태를 뜻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 전체는 주님께서 인간을 무지와 거짓의 상태에서 건져 내어 진리의 빛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사역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AC.212에서는 이 구절이 매우 중요한 증거가 됩니다. 만일 ’이 단순한 육체의 기관만을 의미한다면,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힌다’는 말씀은 의학적 치유의 의미에 머물게 됩니다. 그러나 ’이 이해를 의미한다면, 이 말씀은 주님께서 인간의 내적 이해를 열어 주시고, 진리를 보게 하신다는 훨씬 깊은 의미를 갖게 됩니다.

 

특히 이 구절은 AC.211 interior dictate’와도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3:7에서 사람들은 아직 남아 있는 퍼셉션의 흔적에 의해 자신들의 상태를 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는 그보다 더 적극적으로, 주님께서 친히 눈먼 자들의 눈을 열어 주십니다. 즉 이해를 밝히시고, 진리를 보게 하시며, 거짓의 감옥에서 이끌어 내시는 것입니다.

 

또한 이사야의 이 예언은 복음서에서 실제로 성취됩니다. 주님께서는 육체의 맹인을 고치셨을 뿐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는 사람들의 이해를 열어 말씀의 의미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기적은 언제나 영적 의미의 표상이기도 합니다. 육체의 눈을 뜨게 하신 것은 이해의 눈을 뜨게 하시는 더 큰 사역을 보여 주는 상응적 행동이었습니다.

 

결국 AC.212에서 사42:7을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 전체에서 ’이 이해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힌다’는 것은 진리를 보지 못하던 사람들의 이해를 열어 주시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창3:7 눈이 밝아져’라는 표현을 이해하는 데에도 직접 연결됩니다. 눈이 열린다는 것은 단순한 시력의 문제가 아니라 이해의 문제이며, 주님께서 주시는 빛 안에서 자신의 상태와 진리를 보게 되는 영적 각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AC.212, 심화 11, ‘사29:18’

AC.212.심화 11. ‘사29:18’ 그날에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 (사29:18) 이 구절을 AC.212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듣는다’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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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2, 심화 9, ‘신29:4’

AC.212.심화 9. ‘신29:4’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신29:4) Jehovah hath not given you a heart to know, and eyes to see, and ears to hear (Deut. 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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