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1:1)

 

AC.16

 

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time) 태초(太初, the beginning)라고도 합니다. 선지자들에 의해 선지서 여러 곳에서 이것은 옛날(the days of old, [antiquitatis])이라 하기도 하고, 또한 영원(the days of eternity)이라 하기도 합니다.  태초는 또한 사람이 거듭남의 과정을 시작하는 첫 시기를 포함하는데, 이때 그는 새로 태어나 생명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 자체를 사람의 새 창조(a new creation)라고도 합니다. 선지서 거의 모든 부분에서 창조하다(to create), 짓다(to form), 만들다(to make)라는 표현들은 거듭남을 의미하지만,그 의미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사야를 보면, The most ancient time is called “the beginning.” By the prophets it is in various places called the “days of old” [antiquitatis] and also the “days of eternity.” The “beginning” also involves the first period when man is being regenerated, for he is then born anew, and receives life. Regeneration itself is therefore called a “new creation” of man. The expressions to “create,” to “form,” to “make,” in almost all parts of the prophetic writings signify to regenerate, yet with a difference in the signification. As in Isaiah:

 

내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43:7) Everyone that is called by my name, I have created him for my glory, I have formed him, yea, I have made him (Isa. 43:7).

 

그러므로 주님은 구속자(the redeemer), 태 속에 만드신 이(the former from the womb), 만드신 이(the maker)  창조자(the creator)라 일컬음을 받으시는데, 역시 이사야를 보면, And therefore the Lord is called the “redeemer,” the “former from the womb,” the “maker,” and also the “creator”; as in the same prophet: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 (43:15) I am Jehovah your holy one, the creator of Israel, your king (Isa. 43:15).

 

시편에서는 In David:

 

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 (102:18) The people that is created shall praise Jah (Ps. 102:18).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104:30) Thou sendest forth thy spirit, they are created, and thou renewest the faces of the ground (Ps. 104:30).

 

(, heaven)은 거듭나기 전 속 사람(the internal man), (, earth) 겉 사람(the external man)을 의미한다는 것은 뒤에 이어질 내용에서 볼 수 있습니다. That “heaven” signifies the internal man and “earth” the external man before regeneration may be seen from what follows.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 1절의 ‘태초(太初, the beginning)라는 표현을 시간적 최초의 순간이 아니라, ‘영적 질서의 출발점’으로 해석합니다. ‘태초’는 태고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각 사람이 거듭남을 시작하는 첫 시기를 포함합니다. 즉, 창세기의 ‘태초’는 역사 속 한 시점이면서 동시에, 지금도 반복되는 영적 현실입니다. 사람이 거듭남을 시작할 때, 그는 그 사람만의 ‘태초’에 들어가는 셈입니다.

 

선지자들이 이 시기를 ‘옛날(the days of old, [antiquitatis]), 혹은 ‘영원(the days of eternity)이라 한다는 설명은, 이 상태가 단순히 과거에 속한 것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질서’에 속해 있음을 보여 줍니다. 태고의 상태는 연대기적으로 오래되었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직접적인 관계, 곧 영원의 질서가 인간 안에 처음 세워지는 상태이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 상태는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수 있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태초’, 곧 ‘시작’을 사람의 거듭남의 첫 시기와 직접 연결합니다. 사람이 거듭날 때, 그는 단순히 이전의 삶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 태어나’ 생명을 받습니다. 여기서 생명은 생물학적 생명이 아니라, 영적 생명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단순한 변화나 성장으로는 설명될 수 없고, 반드시 ‘새 창조’라는 표현이 필요합니다. 이는 매우 강한 표현이지만, 그만큼 거듭남이 전면적인 전환임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이 맥락에서 스베덴보리는 선지서에 나오는 ‘창조하다’, ‘짓다’, ‘만들다’ 같은 표현들이 거의 언제나 거듭남을 뜻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 표현들은 미묘한 차이를 가지는데, 창조는 생명의 근원 주시는 것을, 지음, 곧 형성은 그 생명에 질서 부여하는 것을, 그리고 만드는 것은 그것을 삶 속에서 실제로 이루어 가는 걸 가리킵니다. 이 차이는 이후에 더 자세히 다루지만, 여기서는 중요한 원칙 하나가 제시됩니다. 성경에서 창조의 언어는 곧 거듭남의 언어라는 점입니다.

 

이사야의 인용은 이 점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주님은 ‘내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자’를 창조하시고, 지으시며, 만드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단지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 곧 주님의 신성과 진리 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의 영적 재창조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구속자이시며, 태에서부터 지으시는 분이시고, 만드시는 분이시며, 창조자이십니다. 이 모든 호칭은 주님의 다양한 역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 분 주님이 인간의 거듭남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루신다는 사실’을 서로 다른 측면에서 말해 주는 표현들입니다.

 

시편의 인용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주님을 찬송한다는 말은, 새로 생명을 받은 사람들이 주님을 인식하고 사랑하게 됨을 뜻합니다. 또한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라는 표현은, 거듭남이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며, 그 결과 인간의 외적 삶, 곧 ‘지면’까지 새로워진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거듭남은 내면의 변화에 머무르지 않고, 삶의 표면까지 갱신합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스베덴보리는 중요한 해석 원리를 예고합니다. ‘(, heaven), 곧 ‘하늘’은 거듭남 이전의 ‘속 사람’을, ‘(, earth), 곧 ‘’은 ‘겉 사람’을 의미한다는 점입니다. 이는 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가 곧 인간 내면의 구조를 가리킨다는 결정적인 단서입니다. 하늘과 땅은 우주의 두 영역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두 차원입니다. 이 해석이 이후 글들에서 구체적으로 전개되면서, 창세기 전체가 인간 거듭남의 지도임이 점점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결국 AC.16은 창세기의 ‘시작’을 역사와 인간을 동시에 꿰뚫는 개념으로 제시합니다. 태고의 시대, 거듭남의 첫 시기, 새로운 창조는 서로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영적 질서를 서로 다른 각도에서 본 표현들입니다. 주님은 그 모든 시작의 주체이시며, 인간의 영적 삶은 언제나 그분 안에서 다시 시작됩니다.  

 

 

심화

 

1.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

 

AC.16 본문 중,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의 차이를, 해설에서는 창조는 생명의 근원 주시는 것을, 지음, 곧 형성은 그 생명에 질서 부여하는 것을, 만드는 것은 그것을 삶 속에서 실제로 이루어 가는 걸 가리킨다고 했는데, 이 부분,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네, 이 부분은 AC.16에서 아주 짧게 지나가지만, 사실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를 압축해서 보여 주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목사님께서 적어 주신 해설 문장, 곧 ‘창조는 생명의 근원을 주시는 것, 형성은 그 생명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 만드는 것은 그것을 삶 속에서 실제로 이루어 가는 것’이라는 설명은 방향이 아주 정확합니다. 다만 처음 접하는 분들에게는 여전히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으니, 조금 더 천천히 풀어 보겠습니다.

 

먼저 큰 원리부터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는 성경에서 같은 뜻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는 단어들도 그냥 수사적으로 겹쳐 쓴다고 보지 않습니다. 특히 ‘창조하다(create), ‘형성하다(form), ‘만들다(make)처럼 나란히 오는 표현은, 다 비슷해 보여도 각각 다른 국면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즉 주님이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일을 한 단어로만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서로 다른 세 동사를 통해 그 과정의 깊이와 순서를 드러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AC.16의 핵심은, 인간의 새 창조가 한순간의 사건이 아니라, 시작과 질서와 구현을 가진 전인적 과정이라는 데 있습니다.

 

창조하다(create)는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깊은 차원에서의 주님의 역사입니다. 이것은 인간 안에 없던 생명의 원리를 주님께서 넣어주시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단지 살아 있다는 생물학적 생명이 아니라, 주님을 향해 열릴 수 있는 영적 생명입니다. 사람이 전에는 자기 자신과 세상을 중심으로만 살다가, 어느 순간 참된 선과 진리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받아들이고, 자기 삶이 이대로는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고, 하나님 쪽으로 마음이 열리기 시작하는 것, 이 모든 출발이 ‘창조’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창조는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결심이 아니라, 주님께서 먼저 씨를 심으시는 일입니다. 비유하자면, 전혀 생명이 없던 땅에 처음으로 씨가 들어오는 것과 같습니다. 또는 완전히 어두운 방에 처음으로 빛이 켜지는 것과 같습니다. 방의 구조가 아직 정리되지 않았고, 그 빛으로 무엇을 할지도 아직 모르지만, 일단 빛이 들어온 것 자체가 결정적인 시작입니다. 이것이 창조입니다.

 

그다음 ‘형성하다, 짓다(form)는 그렇게 시작된 생명에 모양과 질서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씨가 들어왔다고 바로 나무가 되는 것이 아니듯, 빛이 켜졌다고 곧바로 삶이 정돈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 안에 들어온 진리와 선의 씨앗은 자라기 위해 배열과 분별과 구조를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형성, 곧 지음은 인간 안에서 무질서하게 섞여 있던 것들을 나누고, 위아래를 세우고, 중심과 주변을 정리하는 단계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처음에는 종교적 열심과 자기 의, 참된 순종을 잘 구분하지 못합니다. 선을 행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인정받고 싶어서 하는 것인지, 정말 옳기 때문에 하는 것인지도 잘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주님은 그 사람 안에 분별을 세워 주십니다. 무엇이 속 사람에 속하고, 무엇이 겉 사람에 속하는지, 무엇이 기억 지식이고, 무엇이 살아 있는 진리인지, 무엇이 자기 본성의 욕구이고, 무엇이 주님께서 주시는 선한 감동인지 조금씩 구별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형성이고, 지음입니다. 그러므로 형성은 이미 주어진 생명을 ‘아름답고 바른 형식’ 안에 놓는 일입니다. 비유하자면, 설계도 없이 쌓여 있던 자재들이 하나의 집 구조를 이루어 가는 과정과 같습니다. 또는 태아가 단순한 생명 덩어리가 아니라 점차 눈, 귀, 손, 발을 갖춘 인격적 형체로 자라나는 과정과도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만들다(make)는 그렇게 창조되고 형성된 것이 실제 삶에서 구현되고 굳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단지 계획이나 가능성의 단계가 아니라, 실제 생활 속에서 그것이 행동과 습관과 성품이 되어 가는 상태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안다고 해서 곧바로 그 진리가 자기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 선을 좋아한다고 해서 당장 선한 삶이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그 진리와 선이 말과 선택과 관계와 습관 속에서 실제로 ‘만들어져’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용서해야 한다’는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창조와 형성의 단계에서는 이미 들어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자기를 상하게 한 사람을 대할 때, 분노 대신 절제하고, 보복 대신 인내하고, 마음속 판단을 내려놓는 쪽으로 행동하기 시작하면, 그때 비로소 그 진리가 그의 삶 안에 ‘만들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make는 삶의 현실 속에서 구체화되는 차원입니다. 집의 비유로 말하면, 설계와 구조가 끝난 후 실제로 그 집에 사람이 살고, 방이 쓰이고, 문이 열리고 닫히고, 불이 켜지고 꺼지는 단계입니다. 즉 살아 있는 사용의 단계입니다.

 

이 세 단어를 한 번에 붙들면, 스베덴보리가 왜 굳이 셋을 구별했는지가 더 또렷해집니다. ‘창조’는 시작의 은혜이고, ‘형성’은 질서의 은혜이며, ‘만듦’은 구현의 은혜입니다. 창조가 없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고, 형성이 없으면 시작된 것이 무질서하게 흩어지며, 만듦이 없으면 모든 것이 관념과 가능성에만 머물고 실제 삶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하나님이 나를 새롭게 하셨다’는 한 문장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생명을 심으시고, 그 생명을 정리하시고, 마침내 그것이 삶이 되게 하시는 전 과정을 포함합니다.

 

초심자에게는 이렇게 풀어도 이해가 쉽습니다. 주님은 먼저 우리 안에 새 생명을 ‘심으시고’(창조), 그다음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정리하시며’(형성), 마지막에는 그것이 실제 성품과 행동이 되게 ‘빚어 가십니다’(만듦). 또는 신앙의 말로 하면, 주님은 먼저 우리를 깨우시고, 그다음 가르치시고, 마지막에는 살게 하십니다. 이 셋이 합쳐져야 비로소 사람이 ‘새로 지음 받은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AC.16의 이 구별은 단지 단어 공부가 아닙니다. 이것은 성도들에게도 큰 위로가 됩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은 자기 안에 겨우 씨앗만 들어온 상태인데, 벌써 열매 맺지 못한다고 낙심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주님은 먼저 창조하시고, 그다음 형성하시고, 그다음 만들어 가신다고. 그러므로 아직 질서가 덜 잡혀 있거나, 실제 삶이 더디게 변한다고 해서 주님의 일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모든 단계가 다 주님의 일입니다. 이 점을 붙들면, 사람은 조급함 대신 신뢰를 배우게 됩니다.

 

 

 

AC.15, 창1, '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AC.15 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데, 이는 그분과 아버지가 하나이시기 때문이며, 그분 자신이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In the universal heaven they know no other father than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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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

 

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데, 이는 그분과 아버지가 하나이시기 때문이며, 그분 자신이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In the universal heaven they know no other father than the Lord, because he and the father are one, as he himself has said:

 

6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8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14:6, 8-11) I am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 Philip saith, Show us the father Jesus saith to him, Am I so long time with you, and hast thou not known me, Philip? He that hath seen me hath seen the father how sayest thou then, Show us the father? Believest thou not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me? Believe me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me. (John 14:6, 8–11)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주님’에 대한 선언을 한층 더 깊은 차원으로 끌어올립니다. AC.14에서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이 ‘주님’이심을 분명히 했다면, AC.15에서는 그 주님이 곧 ‘아버지’이시라는 사실을 천국의 인식 방식으로부터 설명합니다. 온 천국에서는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데, 이는 천국에서 삼위가 분리된 개념으로 인식되지 않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천국의 인식은 교리적 분해가 아니라, 실재에 대한 직관적 인식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근거를 주님의 말씀 자체에서 찾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주님은 자신을 ‘(the way)이며, ‘진리(the truth)이며, ‘생명(the life)이라고 선언하시는데, 이는 단지 구원의 통로라는 의미를 넘어, 신적 실재 자체가 주님 안에 있음을 말하는 표현입니다. 길은 접근의 방식이고, 진리는 빛이며, 생명은 존재의 근원인데, 이 모든 것이 주님 한 분 안에 있다는 선언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떠나서는 아버지께 이를 수도, 알 수도 없습니다.

 

빌립의 질문은 인간적이며, 동시에 매우 표상적인 질문입니다. 그는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는 눈에 보이고, 분리된 어떤 신적 대상을 기대하는 마음의 표현이지요. 그러나 주님의 대답은 단호하면서도 깊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는 말씀은, 아버지가 주님과 다른 어딘가에 계신 분이 아니라, 주님의 인성 안에 완전히 계신다는 선언입니다. 이는 단순한 연합이나 동행이 아니라, 상호 내재, 곧 하나 됨을 뜻합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이라는 반복된 표현은, 주님의 신성과 인성이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 신학에서 이 진술은 매우 핵심적입니다. 주님의 인성은 부활을 통해 완전히 신성화되었고, 그 결과 천국에서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따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천국의 모든 존재들은 주님의 얼굴에서 곧 아버지를 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아버지’라는 개념이 추상적 근원이 아니라, 주님 자신으로 인식됩니다.

 

이 점은 거듭남의 교리와도 직접 연결됩니다. 인간의 거듭남은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이루어지는데, 만일 주님과 아버지를 분리된 대상으로 생각한다면, 인간의 내적 시선은 필연적으로 갈라집니다. 그러나 천국의 질서에서는 신적 선과 신적 진리가 하나로 인식되며, 그 하나 됨이 주님 안에 완전히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거듭남의 모든 단계는 주님을 향해 단일한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이 글은 또한 신앙의 단순성을 회복해 줍니다. 인간의 이성은 종종 신적 실재를 분해하여 이해하려 하지만, 천국의 인식은 오히려 단순합니다. 주님을 알면 아버지를 아는 것이고, 주님을 사랑하면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리를 축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리를 살아 있는 인식으로 회복하는 길이지요.

 

결국 AC.15는 독자에게 하나의 분명한 초점을 요구합니다. 거듭남을 말할 때, 신앙을 말할 때, 기도를 말할 때, 그 대상은 언제나 주님 한 분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천국이 그렇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길이시며, 그 길의 끝에서 만나는 또 다른 분이 계신 것이 아니라, 그 길 자체가 곧 목적지이십니다. 이 인식 위에서만, 이후에 이어질 태고교회와 창세기의 모든 상응적 해설이 올바른 중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AC.16,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창1:1) AC.16 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time)를 ‘태초’(太初, the beginning)라고도 합니다. 선지자들에 의해 선지서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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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 창1, '주님' =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

AC.14 이어지는 모든 글 가운데서 주님이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분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며, 다른 무슨 보조적 이름을 덧붙이지 않고 단지 ‘주님’(the Lord)으로만 일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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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

 

이어지는 모든 글 가운데서 주님이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분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며, 다른 무슨 보조적 이름을 덧붙이지 않고 단지 주님(the Lord)으로만 일컬음을 받으십니다. 온 천국 전체에서 그분만이 주님으로 인정되고 경배를 받으시는데, 이는 그분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에게도 자신을 그렇게 부를 것을 명하셨는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In the following work, by the name Lord is meant the savior of the world, Jesus Christ, and him only; and he is called “the Lord” without the addition of other names. Throughout the universal heaven he it is who is acknowledged and adored as Lord, because he has all sovereign power in the heavens and on earth. He also commanded his disciples so to call him, saying,

 

너희가 나를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3:13) Ye call me Lord, and ye say well, for I am (John 13:13).

 

그래서 그분의 부활 후에 제자들은 그분을 주님(the Lord)이라 불렀습니다. And after his resurrection his disciples called him “the Lord.”

 

 

해설

 

이 글은 창세기 1장의 거듭남 해설 중 잠시 멈추고, ‘Arcana Coelestia’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전제 하나를 분명히 선언하는 자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후의 모든 설명에서 ‘주님(the Lord)이라는 이름이 누구를 가리키는지를 명확히 규정합니다. 그것은 막연한 신적 존재나 삼위 중 한 위격이 아니라,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이 선언은 단순한 명칭 설명이 아니라, 이후 모든 속뜻 해석의 중심이 오직 주님께 있음을 밝히는 신학적 기준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을 다른 어떤 이름과도 결합하지 않고, 단순히 ‘주님’으로만 부른다고 말합니다. 이는 호칭의 단순화를 넘어서, 천국과 교회의 인식 구조를 드러냅니다. 천국에서는 ‘주님’이라는 이름 하나로 모든 것이 충분하며, 다른 구분이나 보충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에서는 주님이 곧 신적 선과 신적 진리 자체로 인식되기 때문입니다. 이름은 구별을 위해 필요하지만, 주님 안에서는 구별이 아니라 결합이 중심이 됩니다.

 

온 천국 전체에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주님으로 인정되고 경배를 받는다는 진술은 매우 결정적입니다. 그 이유는 그분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시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는 단순히 권위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질서의 근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천국의 모든 질서, 모든 생명, 모든 빛과 사랑은 주님에게서 흘러나오기 때문에, 그분만이 주님으로 불릴 수 있습니다. 다른 어떤 존재도 이 자리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사실이 성경 안에서도 분명히 증언되었음을 보여 주기 위해 주님의 말씀을 직접 인용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요13:13)고 하시며, 그 호칭이 올바른 인식임을 스스로 확인해 주십니다. 이는 제자들의 개인적 존경 표현이 아니라, 주님 자신의 정체성 선언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주님이라 불리는 것을 허락하셨을 뿐 아니라, 그것이 진리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부활 이후 제자들이 그분을 ‘주님’이라 불렀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부활은 주님의 인성마저 신성화되었음을 의미하는 사건이며, 그 이후에 ‘주님’이라는 호칭은 더 이상 단순한 존칭이 아니라, 신성과 인성을 하나로 지니신 분을 가리키는 고백이 됩니다. 즉, 주님이라는 이름은 부활 이후 더욱 온전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이 글이 거듭남의 여섯 상태를 설명한 직후에 배치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깊습니다. 거듭남의 모든 단계, 모든 상태, 모든 변화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다시 한번 분명히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거듭남은 어떤 원리나 추상적 진리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주님, 곧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로 이루어집니다. 그분이 아니면 그 어떤 단계도 시작되지 않고, 유지되지 않으며,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AC.14는 독자에게 조용하지만, 단호한 방향 설정을 요구합니다. 이후에 나올 모든 속뜻 해설, 모든 상징, 모든 단계는 주님과 무관하게 이해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창세기 1장의 빛, 궁창, 식물, 광명체, 생물, 사람은 모두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참된 의미를 가집니다. 주님을 떠난 해석은 아무리 정교해 보여도 중심을 잃은 해석이 됩니다.

 

결국 이 글은 ‘Arcana Coelestia’ 전체의 신앙 고백과 같습니다. 천국에서 주님이 누구이신가, 교회에서 누구를 주님이라 부르는가, 그리고 인간의 거듭남을 실제로 이루시는 분이 누구인가에 대한 분명한 선언입니다. 이 선언 위에서만 이후의 모든 해설이 올바른 방향을 갖게 됩니다.  

 

 

심화

 

1.주님 = 예수 그리스도?’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 AC.14본문 중 주님이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분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며라는 내용을 접하면, ? 그럼, 다른 이름들, 그러니까 여호와 하나님, 성령 등 다른 분들보다 높으시다는 말인가? 삼위일체라 하시니 한 분이신 건 알겠는데... 그래도 그중 어느 한 분이 독식하는 건 좀 불공평한 거 같은데...’ 할 것 같습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요?

 

많은 기독교인들이 AC.14의 그 문장을 처음 접하면 목사님 말씀처럼 바로 그 지점에서 잠깐 멈칫합니다. ‘주님이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분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라고 하면, 마치 성부와 성령보다 예수님이 더 높은 분처럼 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의도는 ‘세 위 가운데 한 분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삼위일체를 한 분 안에서 이해하자는 것’입니다. 이 차이를 차근차근 설명해 주면 대부분의 반감이 자연스럽게 풀립니다.

 

먼저 스베덴보리가 전제하는 가장 중요한 원리를 먼저 짚어 주는 것이 좋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한 분’이라고 봅니다. 이것은 사실 전통 기독교도 동일하게 고백하는 부분입니다. 다만 역사적으로 교회는 그 한 분 하나님 안에서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세 위격’을 구분하여 설명해 왔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설명 방식이 사람들에게 자칫 ‘세 분 하나님’처럼 느껴질 위험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삼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삼위가 한 분 안에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다른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그의 설명은 비교적 단순합니다. 그는 성부, 성자, 성령을 ‘세 분 인격’이라기보다 ‘한 분 하나님 안의 세 가지 본질적 측면’으로 이해합니다. 쉽게 말하면 이렇게 설명합니다. 성부는 하나님 안의 ‘신적 본질’, 성자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나타나신 ‘신적 인성’, 성령은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작용과 영향’입니다. 이렇게 보면 세 분이 서로 경쟁하거나 높고 낮은 관계가 아니라 ‘한 분 하나님 안의 세 차원’이 됩니다.

 

이 관점에서 AC.14의 문장을 보면 의미가 훨씬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가 ‘주님’이라는 이름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가장 완전히 나타나신 모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보이지 않는 신적 본질 자체를 직접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접근하시기 위해 ‘인성을 입고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 기독교의 성육신 교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점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실제로 알 수 있는 방식은 ‘주님,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부보다 성자를 높인다는 뜻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이 인간에게 나타나신 방식이 바로 주님’이라는 뜻입니다. 복음서에서도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구절을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또 하나 설명하기 좋은 비유가 있습니다. 인간도 영혼, 몸, 그리고 활동이라는 세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혼이 근원이고, 몸이 그것을 드러내며, 활동이 그 영향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세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스베덴보리는 삼위일체도 이와 비슷하게 이해합니다. 성부는 신적 본질, 성자는 그 본질이 인간에게 보이는 모습, 성령은 그 본질이 인간에게 작용하는 영향입니다. 그러나 그 전체는 ‘한 분 하나님’입니다.

 

이렇게 설명하면 ‘예수님이 다른 위보다 더 높다는 오해’도 자연스럽게 풀립니다. 스베덴보리는 예수님을 성부보다 높은 분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이 인간에게 완전하게 나타나신 분’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라는 이름이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설교나 강의에서는 이렇게 정리하면 성도들이 이해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그 한 분 하나님이 인간에게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신 모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성경과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을 말할 때, 종종 ‘주님’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그 주님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삼위 중 한 분을 높이는 말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을 한 분 안에서 이해하려는 표현’입니다.

 

이렇게 설명해 주면,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느끼는 ‘불공평하다’는 느낌은 사라지고, 오히려 ‘, 결국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뜻이구나’ 하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AC.15, 창1, '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AC.15 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데, 이는 그분과 아버지가 하나이시기 때문이며, 그분 자신이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In the universal heaven they know no other father than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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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 창1 개요,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첫 번째 상태까지만'

AC.13 거듭남 과정 중인 모든 사람이 이 상태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첫 번째 상태까지만 이르고, 어떤 이들은 두 번째 상태까지만, 또 다른 이들은 세 번째,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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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

 

거듭남 과정 중인 모든 사람이 이 상태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첫 번째 상태까지만 이르고, 어떤 이들은 두 번째 상태까지만, 또 다른 이들은 세 번째, 네 번째, 혹은 다섯 번째 상태에도 이르지만, 이렇게 여섯 번째 상태까지 이르는 이는 적고(few), 일곱 번째 상태에 이르는 이는 거의(scarcely) 없습니다. Those who are being regenerated do not all arrive at this state. The greatest part, at this day, attain only the first state; some only the second; others the third, fourth, or fifth; few the sixth; and scarcely anyone the seventh.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여섯 단계, 더 나아가 일곱 번째 상태까지 제시한 뒤, 매우 현실적이고도 냉정한 평가를 덧붙입니다. 그는 거듭남의 질서가 보편적이라고 해서, 모든 사람이 그 모든 단계를 실제로 통과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듭남의 초입에 머물며, 일부만이 중간 단계로 나아가고, 극히 소수만이 깊은 단계에 이른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이는 영적 삶에 대한 이상화나 낙관을 경계하게 하는 매우 중요한 진술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첫 번째 상태는 혼돈과 공허, 흑암의 상태였지요.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상태에만 머문다는 말은, 많은 이들이 여전히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속에서 살면서도 그것을 문제로 인식하지 못한 채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신앙을 말하고 종교적 언어를 사용하더라도, 실제 삶의 중심은 여전히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지요. 이는 비난이 아니라, 영적 현실에 대한 관찰입니다.

 

두 번째 상태에 이르는 사람들은 주님께 속한 것과 자기에게 고유한 것을 어느 정도 구별하기 시작하지만, 그 구별이 삶 전체에 미칠 만큼 깊어지지는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상태에 이르는 이들은 점점 줄어드는데, 이는 회개, 내적 빛, 살아 있는 신앙의 단계로 갈수록 더 큰 인내와 진실한 내적 변화가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이 단계들은 외적 신앙 활동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고, 실제 삶에서의 선택과 싸움을 동반합니다.

 

여섯 번째 상태에 이르는 사람이 적다(few)는 말은, 신앙과 사랑이 실제로 하나가 되어 말과 행위가 일치하는 삶에 이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 줍니다. 이 단계에서는 영적 즐거움과 자연적 즐거움 사이의 싸움이 본격적으로 일어나며, 사랑이 삶의 중심을 차지하도록 지속적인 내적 전환이 요구됩니다. 많은 이들이 이 지점에서 멈추거나 뒤로 물러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덧붙여 언급하는 일곱 번째 상태는 안식의 상태, 곧 천적 상태에 해당하는데, 그는 이 상태에 이르는 이는 거의 없다(scarcely)고 말합니다. 이는 절망을 주기 위한 말이 아니라, 오히려 천적 상태가 인간의 공로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극히 드문 깊은 결합의 열매임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동시에 이것은 주님의 섭리가 얼마나 인내심 있게 인간을 인도하시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 주기도 합니다.

 

이 글은 성도들에게 매우 중요한 균형 감각을 줍니다. 한편으로는 거듭남의 목표가 분명히 제시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사람이 동일한 영적 성취에 이르러야 한다는 압박은 제거됩니다. 주님은 각 사람을 그가 설 수 있는 자리에서 인도하시며, 첫 번째 상태에 머물러 있는 사람조차도 주님의 섭리 밖에 있지 않습니다. 거듭남의 깊이는 다를 수 있지만, 주님의 자비는 동일하게 작용합니다.

 

그래서 AC.13은 거듭남의 교리를 인간 평가의 기준으로 사용하지 말라는 조용한 경고로도 읽을 수 있어요. 누가 더 높은 단계에 있는지를 가늠하려 들기보다, 주님이 각 사람을 어떤 질서 속에서 인도하고 계신지를 바라보게 합니다. 또한 자기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디까지 왔는가를 따지기보다,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주님께 속한 것을 선택하고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결국 이 글은 창세기 1장의 거대한 영적 구조를 제시한 뒤, 그것을 인간의 현실 속에 다시 내려놓습니다. 거듭남은 위대한 이상이지만, 동시에 매우 개별적이고 점진적인 여정입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을 천적 상태로 억지로 끌어올리시는 분이 아니라, 각 사람의 자유와 상태에 맞추어 선과 진리를 조금씩 심으시는 분이십니다. AC.13은 그 점을 차분하게, 그러나 매우 분명하게 밝혀 주는 개요 마무리 글입니다.  

 

 

심화

 

1.일곱 번째 상태와 수도원 전통의 완덕’, 합일의 비교

 

수도원 전통에서 말하는 ‘완덕’이나 ‘합일’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일곱째 날 상태’와 ‘부분적으로 겹치는 개념’이지만, 그 이해의 방식과 구조는 꽤 다릅니다. 이 차이를 차분히 정리하면 AC.13의 의미도 훨씬 또렷해집니다.

 

먼저 스베덴보리의 설명부터 보겠습니다. AC에서 창세기 창조의 여섯 날은 인간 거듭남의 단계이고, ‘일곱째 날은 안식의 상태’입니다. 여기서 안식이라는 것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주님이 인간 안에서 주된 분으로 역사하시는 상태’를 말합니다. 여섯 번째 상태까지는 인간이 싸우는 단계입니다. 진리와 거짓, 선과 욕정 사이에서 많은 영적 전투가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과 사랑이 결합되고 나면, 인간의 의지가 더 이상 주도권을 잡지 않고 ‘주님의 사랑이 중심이 되는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전투가 멈추고 평안이 옵니다. 이것이 일곱째 날입니다.

 

이 점에서 수도원 전통의 ‘완덕’이나 ‘합일’과 닮은 점이 있습니다. 중세 수도원 영성에서는 영적 여정을 보통 ‘정화조명합일’ 같은 단계로 설명합니다. 마지막 단계인 합일(union)은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여기서 인간은 더 이상 자기 중심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살게 됩니다. 이런 설명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주님이 인간 안에서 주된 분으로 역사하시는 상태’와 상당히 비슷하게 들립니다.

 

하지만 중요한 차이도 있습니다. 수도원 전통에서는 종종 이 상태를 ‘신비적 체험이나 관상적 합일’로 강조합니다. 즉 깊은 기도나 관상을 통해 하나님과 직접적인 합일을 경험하는 상태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일곱째 날 상태를 그런 신비 체험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것을 ‘삶의 질서가 완전히 바뀐 상태’로 설명합니다. 즉 사랑이 의지의 중심이 되고, 선을 행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삶이 된 상태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수도원 전통에서는 이 상태가 종종 ‘소수의 성자들이 도달하는 특별한 영적 단계’처럼 설명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그는 이것을 ‘모든 사람이 거듭남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정상적인 상태’로 설명합니다. 물론 그 깊이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원리 자체는 특별한 수도 생활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삶 속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정리하면 가장 정확합니다. 수도원 전통의 ‘완덕’이나 ‘합일’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일곱째 날 상태와 ‘어떤 공통된 영적 직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인간의 중심이 자기 자신에서 하나님 쪽으로 완전히 이동하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수도원 전통이 그것을 ‘신비적 합일 경험’으로 강조하는 반면,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사랑이 주도하는 삶의 상태’로 설명합니다.

 

창세기의 일곱째 날은 어떤 특별한 신비 체험이 아니라, 사람이 오랫동안 주님과 함께 살아오면서 결국 ‘주님의 사랑이 그 사람의 삶을 자연스럽게 이끌게 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영적 전투가 중심이 아니라 평안과 질서가 중심이 됩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안식입니다.

 

역사적으로 많은 신앙 전통이 이 상태를 ‘완덕, 합일, 안식, 평안’ 같은 이름으로 표현해 온 것입니다.

 

 

 

AC.14, 창1, '주님' =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

AC.14 이어지는 모든 글 가운데서 주님이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분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며, 다른 무슨 보조적 이름을 덧붙이지 않고 단지 ‘주님’(the Lord)으로만 일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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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 창1 개요, '여섯 번째 상태'

AC.12 여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때입니다. 이때 그에게서 나오는 것들을 ‘산 영’(living soul)과 ‘짐승’(beast)이라 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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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20, ‘큰 영광 중에 계신 주와, 찬65, ‘내 영혼아 찬양하라입니다.

 

오늘은 창1 세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6절로 8절, AC 글 번호로는 24번에서 26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8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창1:6-8)

 

이 본문을

 

둘째 날, 두 번째 상태

 

라는 제목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시티아(Arcana Coelestia)에 주목하여 귀 기울이고자 합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AC.24, 창1:6-7,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AC.24-25)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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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5, 창1:6-7,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1:6, 7) AC.25 ‘하늘을 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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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6, 창1:8,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And God called the expanse heaven.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econd day. (창1:8) AC.26 ‘저녁’(evening), ‘아침’(mo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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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서 창1 둘째 날, 곧 거듭남의 두 번째 상태를 마칩니다. 이 ‘둘째 날, 두 번째 상태’에 나온 중요한 표현, 개념들은 ‘궁창’, ‘하늘 위의 물’, ‘하늘 아래 물’, ‘속 사람’, ‘겉 사람’, ‘기억 지식’ 및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 등이었습니다. 거듭 지금 다룬 내용들이 다음 단계의 기초가 되는 전개이니, 반드시 이전 학습한 내용들을 반복 복습, 보다 탄탄한 배경지식으로 계속 앞으로 쭉쭉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지난 8, 9년째 계속 반복, 또 반복하고 있는 이 창세기 1장을, 그러나 할 때마다 점점 더 이전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내용들과, 그리고 이젠 그런 내용들을 접해도 이해가 되게 하시는 주님, 고맙고 감사합니다. 오늗도 지난날 배운 것들을 더욱 깊이 알려주시고, 특별히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의 속뜻 통해 주님이 어떤 분이시며, 우리의 거듭남을 위해 얼마나 돌보시고, 보살피시며, 끝까지 우리를 책임지시는지를 확인했습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들에게 주님이 저희에게 하신 것처럼 그렇게 하게 도와주세요. 우리가 타인의 연약함에 정신줄 놓치 않도록 끝까지 빛 비춰 주세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3-08(D1)

 

2641, 3. 창1.3, 2026-03-08(D1)-주일예배(창1,6-8, AC.24-26), ‘둘째 날, 두 번째 상태’.pdf
0.50MB

 

 

 

주일예배(2026/02/22, 창1:3-5), '빛이 있으라', 거듭남의 시작

※ 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9, ‘찬송하는 소리 있어’와 찬64, ‘기뻐하며 경배하세’입니다. 오늘은 창1 두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3절로 5절, AC 글 번호로는 20번에서 23번입니다. 본문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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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And God called the expanse heaven.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econd day. (1:8)

 

AC.26

 

저녁(evening), ‘아침(morning), 그리고 (day)의 의미는 위의 5절에서 이미 설명했습니다. The meaning of “evening,” of “morning,” and of “day,” was shown above at verse 5.

 

 

해설

 

이 짧은 문장은 단순한 주석처럼 보이지만, 창세기 1장 전체 해석을 지탱하는 ‘핵심 해석 원리의 재확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새로운 내용을 추가하지 않고, 오히려 독자가 다시 한번 5절로 돌아가 그 의미를 굳게 붙들도록 합니다. 이는 ‘저녁’, ‘아침’, ‘’이 더 이상 문자적 시간 개념이 아니라, ‘거듭남의 상태 변화’를 가리킨다는 사실이 이후 모든 단락의 전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미 5절에서 밝혔듯이, ‘저녁’은 선과 진리가 없는 상태, 혹은 약화된 상태를 뜻하고, ‘아침’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과 생명이 유입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리고 ‘’은 이 두 상태를 함께 포함하는 하나의 완결된 과정, 곧 하나의 영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AC.26은 이 정의가 일회성 설명이 아니라, 이후 모든 ‘’ 해석에 반복 적용되는 기준임을 분명히 합니다.

 

특히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굳이 여기서 다시 설명하지 않고 ‘이미 위에서 보였다’고만 말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창세기 해설이 ‘앞에서 세운 원리를 계속 누적, 확장해 가는 구조’임을 보여 줍니다. 만일 독자가 ‘저녁’과 ‘아침’을 다시 시간으로 되돌려 이해한다면, 둘째 날 이후의 모든 해석은 무너집니다. 그래서 AC.26은 짧지만, 해석 전체를 고정하는 쐐기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또한 이 문장은 거듭남의 과정이 반복 구조임을 조용히 상기시킵니다. 이후에 등장하는 모든 ‘저녁과 아침’은 각각 다른 내용을 담지만, 동일한 질서를 따릅니다. 즉, 혼란과 약화의 상태를 거치지 않고는 새로운 빛의 상태가 오지 않으며, 모든 영적 성장은 이 리듬 안에서 진행됩니다.

 

결국 AC.26은 독자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미 배운 것을 잊지 말라. 창세기의 언어는 시간의 기록이 아니라, 인간 내면에서 반복되는 생명의 질서이다.’ 이 인식을 붙드는 한, 이후의 창조 기사들은 더 이상 멀어진 고대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의 영적 상태를 설명하는 살아 있는 말씀으로 열리게 됩니다.

 

 

 

AC.25, 창1:6-7,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1:6, 7) AC.25 ‘하늘을 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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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 7)

 

AC.25

 

하늘을 폈으며 땅을 펼쳤고(spread out the earth and stretch out the heavens)라는 표현은, 사람의 거듭남을 다룰 때 선지자들이 아주 흔히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이사야에 보면, To “spread out the earth and stretch out the heavens,” is a common form of speaking with the prophets, when treating of the regeneration of man. As in Isaiah:

 

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지은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 (44:24) Thus saith Jehovah thy redeemer, and he that formed thee from the womb; I am Jehovah that maketh all things, that stretcheth forth the heavens alone, that spreadeth abroad the earth by myself (Isa. 44:24).

 

또한 주님의 강림을 분명히 말하고 있는 곳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And again, where the advent of the Lord is openly spoken of: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42:3) A bruised reed shall he not break, and the smoking flax shall he not quench; he shall bring forth judgment unto truth (Isa. 42:3);

 

이는 오류를 바로잡거나 욕정을 소멸시키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참되고 선한 것으로 굽히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that is, he does not break fallacies, nor quench cupidities, but bends them to what is true and good; and therefore it follows: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내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영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42:5) Jehovah God createth the heavens, and stretcheth them out; he spreadeth out the earth, and the productions thereof; he giveth breath unto the people upon it, and spirit to them that walk therein (Isa. 42:5).

 

이와 같은 뜻을 지닌 다른 구절들은 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Not to mention other passages to the same purport.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하늘을 펴고 땅을 펼친다’는 성경의 전형적인 표현이 실제로는 우주 창조의 묘사가 아니라, ‘인간 거듭남의 과정’을 말하는 언어임을 분명히 합니다. 선지자들은 반복해서 하늘과 땅을 언급하지만, 그 목적은 자연 세계의 구조를 설명하는 데 있지 않고, 인간 내면에서 일어나는 재질서화, 곧 거듭남의 과정을 드러내는 데 있습니다. 하늘과 땅은 앞서 보았듯이 속 사람과 겉 사람을 가리키며, ‘펼친다’는 말은 그 구조가 열리고 정돈된다는 뜻입니다.

 

이사야 44장의 인용은 이 점을 매우 직접적으로 보여 줍니다. 주님은 모태에서부터 사람을 지으신 분이며, 만물을 지은 분으로 소개됩니다. 여기서 하늘을 펼치고 땅을 편다는 표현은, 주님만이 인간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을 올바른 질서로 세우실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는 거듭남이 인간의 자율적 노력이나 도덕적 훈련의 결과가 아니라, ‘주님의 단독 사역’임을 분명히 하는 고백입니다.

 

이사야 42장으로 넘어가면, 이 언어가 더욱 섬세한 의미를 띱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라는 말씀은, 주님이 인간 안에 있는 오류와 욕정을 즉각적으로 제거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오류를 바로잡거나 욕정을 소멸시키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참되고 선한 것으로 굽히신다’고 풀이합니다. 이는 AC.24에서 보았던 원리와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본성과 그 착각을 재료로 삼아, 그것들을 점진적으로 선과 진리의 방향으로 이끄십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다시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내시며’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는 단순히 위와 아래를 나누는 행위가 아니라, 인간 안에서 ‘질서가 작동하기 시작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속 사람은 하늘로서 열리고, 겉 사람은 땅으로서 제자리를 찾으며, 그 사이에서 생명과 호흡이 주어집니다. 이때 주님은 그 위에 사는 백성에게 ‘호흡’을, 그 가운데 행하는 자들에게 ‘’을 주신다고 합니다. 이는 생명의 유입이 속 사람에서 겉 사람으로, 다시 삶의 행위로 흘러간다는 질서를 보여 줍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모든 과정이 ‘파괴가 아니라 보존과 굽힘’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십니다. 이는 인간 안에 남아 있는 미약한 선의 가능성과 희미한 진리의 불꽃을 끝까지 존중하신다는 뜻입니다. 거듭남은 급진적 단절이 아니라, 생명이 꺼지지 않도록 보호하면서 방향을 바꾸는 섬세한 작업입니다.

 

이 글은 선지서의 언어가 왜 그렇게 반복적으로 하늘과 땅을 말하는지를 이해하게 해 줍니다. 그것은 우주론적 집착이 아니라, 인간 한 사람 한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거듭남의 보편적 구조를 말하기 위함입니다. 하늘이 펼쳐지고 땅이 펴지는 일은, 오늘도 인간 안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여전히 하늘을 펼치시고, 땅을 펴시며, 사람에게 호흡과 영을 주십니다.

 

결국 AC.25는 거듭남의 방식이 ‘온유하고 질서 있으며 점진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주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부수지 않으시고, 그 연약함 속에서 생명을 살려 내십니다. 하늘과 땅이 그렇게 펼쳐질 때, 인간은 비로소 숨을 쉬고, 걸을 수 있게 됩니다. 이는 창조의 언어로 말한 구원의 실제 모습입니다.  

 

 

심화

 

1.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 (42:3)

 

AC.25의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인간관과 거듭남 이해가 매우 잘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문자 그대로 읽으면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다,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는다’는 말이 단순히 ‘연약한 사람을 불쌍히 여긴다’는 정도로 들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거듭남 과정에서 주님이 인간을 어떻게 다루시는가’라는 관점에서 해석합니다.

 

먼저 문자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갈대는 약한 식물입니다. 이미 상해 있는 갈대를 더 꺾어 버리면 완전히 부러집니다. 또 등불이 거의 꺼져 가는 상태에서 바람을 세게 불면 완전히 꺼집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겉뜻은 ‘이미 약해진 것을 더 파괴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즉 매우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다룬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갈대와 등불을 ‘사람 안에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상응으로 봅니다. 갈대는 바람에 흔들리는 식물이기 때문에 흔히 ‘약하고 흔들리는 진리 상태’를 상징합니다. 사람이 아직 진리를 확실히 이해하지 못하고 흔들리는 상태입니다. 또 꺼져가는 등불은 ‘거의 사라질 듯한 선과 진리의 작은 불빛’을 의미합니다. 사람 안에 아직 완전히 죽지 않은 양심이나 선의 작은 흔적입니다.

 

이제 AC.25의 설명이 왜 나오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사람이 거듭나기 시작할 때, 그의 상태는 매우 불완전합니다. 생각 속에는 오류가 많고, 의지 속에는 욕정과 이기심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님이 그것들을 ‘즉시 다 제거해 버리시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사람 전체가 무너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기존 삶 전체가 그 안에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람의 오류나 욕정을 바로 파괴하는 방식으로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그것들을 ‘조금씩 방향을 바꾸어 선과 진리를 향하도록 굽히십니다’. 바로 이것을 AC.25에서 설명합니다. 즉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의 약하고 불완전한 상태를 갑자기 부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처음 신앙을 갖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러나 그의 동기는 아직 순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복을 받을 것 같아서 믿을 수도 있고, 어려움을 해결하고 싶어서 믿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동기는 완전히 순수한 사랑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을 즉시 없애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 사람의 그런 동기를 사용하여 조금씩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이것이 바로 ‘굽히신다’는 뜻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정직하게 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하나님을 사랑해서라기보다 평판을 지키기 위해서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주님은 그 행동을 통해 점점 더 깊은 선으로 인도하십니다. 결국 그 사람은 ‘이것이 옳기 때문에 정직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바뀌게 됩니다. 즉 처음의 불완전한 동기가 점차 더 좋은 방향으로 ‘변형, 즉 완전해지고 정화’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욕정(cupidities)도 이런 방식으로 다루어진다고 설명합니다. 욕정은 단번에 사라지지 않습니다. 대신 주님은 그것들을 ‘다른 방향으로 돌려 사용’하십니다. 예를 들어 명예욕이 강한 사람은 처음에는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선을 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람은 점점 선 자체를 사랑하게 됩니다. 이렇게 욕정이 점차 더 높은 목적을 위해 사용됩니다.

 

그래서 AC.25는 인간 거듭남의 매우 중요한 원리를 말합니다. 주님은 인간을 변화시키실 때 ‘파괴 방식이 아니라 전환 방식’으로 역사하십니다. 즉 인간 안의 불완전한 요소들을 즉시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조금씩 선과 진리 쪽으로 돌리십니다.

 

이 점 때문에 이사야의 그 말씀이 매우 적절한 상징이 됩니다. 상한 갈대를 꺾어 버리면 끝입니다. 그러나 꺾지 않고 받쳐주면 다시 설 수 있습니다. 꺼져가는 등불을 끄면 완전히 어둠입니다. 그러나 보호하면 다시 밝아질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의 섭리 방식’입니다.

 

그래서 AC.25의 결론은 이렇게 이해하면 가장 쉽습니다. 사람 안에는 오류도 있고 욕정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들을 당장 없애 버리시지 않습니다. 대신 그것들을 조금씩 선과 진리의 방향으로 돌리시며 사람을 새롭게 만드십니다. 이것이 바로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한다’는 말씀의 깊은 의미입니다.

 

주님은 사람을 고치실 때 부수어 버리지 않고, 그 사람이 가진 것을 사용하여 점점 더 좋은 방향으로 바꾸신다.’

 

 

 

AC.26, 창1:8,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And God called the expanse heaven.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econd day. (창1:8) AC.26 ‘저녁’(evening), ‘아침’(mo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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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4, 창1:6-7,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AC.24-25)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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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he midst of the waters, and 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in the waters. And God made the expanse, and made a distinction between the waters which we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were above the expanse; and it was so. (1:6, 7)

 

AC.24

 

하나님의 영, 곧 주님의 자비가 참되고 선한 지식을 낮으로 이끌어 내시고, 첫 빛, 곧 주님이 계시며, 그분이 선 자체이시고 진리 자체이시며, 그분으로 말미암지 않는 선과 진리는 없는 그런 빛을 주신 후, 주님은 속 사람과 겉 사람, 곧 속 사람 안에 있는 지식과 겉 사람에 속한 기억 지식(2)을 구별하십니다. 속 사람을 궁창(expanse), 속 사람 안에 있는 지식을 궁창 위의 물(the waters above the expanse)이라 하며, 겉 사람의 기억 지식은 궁창 아래의 물(the waters beneath the expanse)이라 합니다. After the spirit of God, or the Lord’s mercy, has brought forth into day the knowledges of the true and of the good, and has given the first light, that the Lord is, that he is good itself, and truth itself, and that there is no good and truth but from him, he then makes a distinction between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consequently between the knowledges [cognitiones] that are in the internal man, and the memory-knowledges [scientifica] that belong to the external man.2 The internal man is called an “expanse”; the knowledges which are in the internal man are called “the waters above the expanse”; and the memory-knowledges of the external man are called “the waters beneath the expanse.”

 

2. 지식(knowledges, cognitiones)이란 우리가 실제로 알고 있는 것들을 뜻하는데, 예를 들면 우리가 ‘나는 단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안다’라고 말할 때의 그 앎입니다. 반면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 scientifica)은 외적 기억 속에 들어 있는 것들로, 신학적인 것이든 그 밖의 것이든 온갖 종류가 대량으로 축적되어 있는 것들을 말합니다. 이 두 용어에 대한 스베덴보리 자신의 정확한 정의는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27번, 896번, 1486번, 2718번, 5212번을 보시고, 또 편집자의 서문 주해도 참고하세요. Knowledges [cognitiones] are what we really know, as when we say “I do not merely think so, I know it.” Memory-knowledges [scientifica] are what we have in the external memory—a vast accumulation of all kinds, theological and otherwise. For precise definitions of these words by Swedenborg himself, see Arcana Coelestia, n. 27, 896, 1486, 2718, 5212. See also the Reviser’s Prefatory Notes. [Reviser]

 

[2]사람은 거듭남이 시작되기 전에는 속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며, 더욱이 그 성질과 상태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서로 구별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 속에 깊이 잠겨 있으며, 그 결과 속 사람에 속한 것들까지 그 안에 잠기게 하여, 서로 구별되는 것들을 혼란스럽고 어두운 하나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으라(Let there be an expanse in the midst of the waters) 하시고, 그다음에 물과 물로 나뉘라(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in the waters) 하시는 것입니다. 이후 나오는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라(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which a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are above the expanse)고는 아직은 아니고 말입니다. Man, before he is being regenerated, does not even know that any internal man exists, much less is he acquainted with its nature and quality. He supposes the internal and the external man to be not distinct from each other. For, being immersed in bodily and worldly things, he has also immersed in them the things that belong to his internal man, and has made of things that are distinct a confused and obscure unit. Therefore it is first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he midst of the waters,” and then, “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in the waters”; but not, “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which a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are above the expanse,” as is afterwards said in the next verses: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8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1:7, 8) And God made the expanse, and made a distinction between the waters which we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were above the expanse, and it was so. And God called the expanse heaven(Gen. 1:7–8).

 

[3] 따라서 사람이 거듭남의 과정에서 다음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은, 속 사람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속 사람 안에 있는 것들은 오직 주님께 속한 선과 진리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는 동안, 그의 겉 사람은 여전히 자기가 행하는 선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자기가 말하는 진리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깁니다.이런 실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이러한 자기 본성, 곧 이런 자신의 것들을 통해 주님에 의해 인도되어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먼저 궁창 아래의 물들의 구별이 언급되고, 그다음에 궁창 위의 물들이 언급됩니다. 또한 이것은 천국의 아르카나인데, 사람은 감각의 착각이나 욕정과 같은 자기 자신의 것들에 의해서도 주님에 의해 참된 것과 선한 것들로 이끌리고 굽혀진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거듭남의 모든 움직임과 순간은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나 저녁에서 아침으로, 곧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또는 (earth)에서 하늘(heaven)로 진행되며, 이런 이유로 이제 궁창, 곧 속 사람을 가리켜 하늘(heaven)이라 하는 것입니다. The next thing therefore that man observes in the course of regeneration is that he begins to know that there is an internal man, or that the things which are in the internal man are goods and truths, which are of the Lord alone. Now as the external man, when being regenerated, is of such a nature that he still supposes the goods that he does to be done of himself, and the truths that he speaks to be spoken of himself, and whereas, being such, he is led by them of the Lord, as by things of his own, to do what is good and to speak what is true, therefore mention is first made of a distinction of the waters under the expanse, and afterwards of those above the expanse. It is also an arcanum of heaven, that man, by things of his own, as well by the fallacies of the senses as by cupidities, is led and bent by the Lord to things that are true and good, and thus that every movement and moment of regeneration,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proceeds from evening to morning, thus from the external man to the internal, or from “earth” to “heaven.” Therefore the expanse, or internal man, is now called “heaven.”

 

 

해설

 

이 글은 창세기 1장의 둘째 날, 곧 ‘궁창’의 창조가 인간 거듭남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가장 체계적으로 풀어 주는 핵심 본문입니다. 앞선 글들에서 주님의 자비가 리메인스(remains)를 품고, 빛이 처음 인식되기 시작했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내적 구조의 분화’, 곧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구별이 시작됩니다. 이것은 거듭남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질서를 분명히 합니다. 주님은 참되고 선한 지식을 ‘’으로 이끌어 내시고, 주님 자신이 선 자체이시며, 진리 자체이시고, 모든 선과 진리가 그분으로 말미암는, 그런 첫 빛을 주신 뒤에야, 비로소 속 사람과 겉 사람을 구별하십니다. 다시 말해, ‘구별은 빛 이후에만 가능’합니다. 빛이 없으면 모든 것이 섞여 있고, 구별은 혼란을 낳을 뿐입니다.

 

여기서 속 사람을 가리켜 ‘궁창(expanse)이라고 합니다. 궁창을 가리켜 위와 아래를 나누는 중간 영역이면서, 동시에 하늘이라고 하는데요, 이는 속 사람이라는 것이 단순히 마음의 깊은 층이라는 심리적 개념이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가 머무는 하늘의 영역임을 뜻합니다. 속 사람 안에 있는 지식은 ‘궁창 위의 물’이라 하고, 겉 사람의 기억 지식은 ‘궁창 아래의 물’이라 합니다. 이 구분은 지식의 내용 차이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근원의 차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남 이전의 인간은 이 구별을 전혀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속 사람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혹시 알아도 속 사람과 겉 사람은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 속에 깊이 잠겨 있고, 그 결과 속 사람의 것들까지도 동일한 차원으로 끌어내려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것들이 섞이면, 명확한 구별은 사라지고, 모든 것이 혼탁한 하나로 느껴집니다. 이것이 거듭남 이전 인간의 내면 상태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본문에서도 매우 섬세한 표현이 사용됩니다. 처음에는 ‘물 가운데 궁창이 있으라’라고만 하십니다. 곧바로 위와 아래의 물을 명확히 나누라고는 하지 않으시고요. 이는 사람이 처음에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을 어렴풋이 인식할 뿐, 그 안의 질서와 차이를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후에야 비로소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의 구별이 명확히 언급되는데, 이런 문장 순서 자체가 인간 거듭남의 실제 진행 순서를 그대로 반영합니다.

 

이 단계에서 사람은 중요한 인식을 하나 얻게 됩니다. 속 사람이 존재하며, 그 안에 있는 것들은 주님께 속한 선과 진리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겉 사람은 여전히 자기중심적입니다. 이 와중에도 그는 자기가 행하는 선을 자기에게서 나온 걸로 여기고, 자기가 말하는 진리도 자기 생각의 산물로 여깁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한데,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문제 삼기보다는 오히려 ‘주님의 섭리의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주님은 사람이 여전히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 느끼는 그 선과 진리를 통해서도, 사람을 실제로 선과 진리로 이끄십니다. 즉, 주님은 인간의 본성과 착각을 즉시 제거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것을 통로로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먼저 궁창 아래의 물, 곧 겉 사람의 지식과 활동이 언급되고, 그다음에야 궁창 위의 물이 언급됩니다. 이는 인간의 경험 순서에 맞춘 주님의 배려, 신적 배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천국의 아르카나를 밝힙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의 것들, 곧 감각의 착각과 욕정에 의해서조차, 주님에 의해 참되고 선한 것들한테로 이끌리고 굽혀진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인간의 오류와 약함마저도 주님의 섭리 안에 있다는 뜻이지요. 물론 이것이 자기중심적 삶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거듭남의 실제 과정이 얼마나 점진적이고 주님의 인내로 가득한지를 보여 줍니다.

 

이 때문에 거듭남의 모든 움직임은 ‘저녁에서 아침으로’ 진행됩니다. 이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방향성의 선언입니다.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땅에서 하늘로,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것이 주님의 불변의 방식입니다. 이 과정은 단번에 일어나지 않고, 수없이 반복되며 점점 더 깊어집니다.

 

그래서 마침내 궁창, 곧 속 사람은 ‘하늘’이라 불립니다. 이는 인간 안에 하늘이 세워졌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하늘과 연결될 수 있는 내적 영역이 열렸다는 뜻입니다. 이 하늘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주님이 질서와 자비로 세우신 것입니다. AC.24는 이처럼 거듭남의 구조적 중심을 밝혀 주며, 창세기 1장의 둘째 날이 단순한 우주론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재조직에 대한 계시임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심화

 

1.기억 지식(memory-knowledges, scientifica)

 

기억 지식’이라는 표현은 처음 들으면 낯설게 느껴지지만, 사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아주 평범한 종류의 지식을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가 라틴어로 ‘scientifica’, 영어로 ‘memory-knowledges’라고 부른 것은 특별한 신비한 지식이 아니라,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는 모든 사실 지식’을 말합니다. 즉 우리가 보고 듣고 배우고 읽으면서 머릿속에 쌓아 두는 정보들입니다.

 

가장 쉬운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서울은 한국의 수도다’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또 ‘물은 100도에서 끓는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또 성경에 대해 ‘아브라함은 이삭의 아버지다’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기억 속에 저장된 지식’입니다. 우리가 필요할 때 꺼내 쓰지만, 그 자체가 곧 삶의 성품이나 사랑을 바꾸지는 않습니다. 이런 종류의 지식을 스베덴보리는 ‘기억 지식’이라고 부릅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학교 공부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역사 연도, 과학 공식, 지리 정보, 언어 단어, 직업 기술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의사는 의학 지식을, 목수는 목공 기술을, 목회자는 성경 지식을 많이 기억 속에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기억 속에 축적된 지식입니다. 바로 이런 것들을 통틀어 스베덴보리는 ‘memory-knowledges’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가 이 개념을 특별히 강조하는 이유는 ‘이 지식이 사람의 겉 사람(external man)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인간을 크게 속 사람과 겉 사람으로 구분합니다. 겉 사람은 세상과 접촉하는 부분입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공부하고 배우면서 지식을 쌓는 영역입니다. 그래서 기억 지식은 대부분 ‘겉 사람의 창고’에 저장됩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기억 지식 자체가 나쁜 것도 아니고 쓸모없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매우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진리와 선이 사람 안에 들어올 때, 그것을 담을 그릇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진리를 이해하려면 먼저 성경 이야기, 사람의 삶, 여러 상황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기억 지식입니다. 마치 씨앗이 자라기 위해 흙이 필요한 것처럼, 영적 진리가 작용하려면 기억 지식이 바탕이 됩니다.

 

예를 하나 더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성경을 많이 읽어서 성경 지식을 많이 알고 있다고 합시다. 아브라함 이야기, 모세 이야기, 복음서 이야기 등을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직 ‘기억 지식의 단계’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어느 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제 삶에서 실천하기 시작하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그때 그 성경 지식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삶을 움직이는 진리’가 됩니다. 즉 기억 지식이 속 사람과 연결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기억 지식을 종종 ‘재료’나 ‘도구’처럼 설명합니다. 목수가 집을 짓기 위해 나무와 연장을 사용하는 것처럼, 사람의 속 사람은 기억 지식을 사용하여 진리를 이해하고 선을 행합니다. 기억 지식은 그 자체가 영적 생명은 아니지만, ‘영적 생명이 활동할 수 있는 재료’가 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기억 지식이 ‘선한 방향으로도, 잘못된 방향으로도 사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같은 지식이라도 어떤 사람은 그것을 통해 진리를 더 깊이 이해하고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그 지식을 이용해 자기 생각을 정당화하거나 남을 이기려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지식이 많다고 해서 곧 지혜로운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지혜는 지식이 ‘선한 사랑과 결합될 때’ 생깁니다.

 

초심자에게 가장 쉽게 설명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기억 지식은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고 책에서 읽고 경험을 통해 얻는 ‘머릿속 정보 창고’입니다. 그러나 그 지식이 사랑과 연결되어 삶 속에서 사용될 때 비로소 ‘지혜’가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기억 지식’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래서 AC.24에서 주님이 ‘속 사람 안의 지식’과 ‘겉 사람의 기억 지식’을 구별하신다고 할 때의 뜻은 이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단순히 기억 속에 저장된 지식이 있고, 그보다 더 깊은 곳에는 ‘삶과 사랑과 연결된 진리’가 있습니다. 기억 지식은 겉 사람의 창고이고, 속 사람은 그 지식을 사용하여 진리와 선을 살아가는 곳입니다. 이런 구별을 이해하면 스베덴보리의 글이 훨씬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AC.25, 창1:6-7,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1:6, 7) AC.25 ‘하늘을 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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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

 

여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때입니다. 이때 그에게서 나오는 것들을 산 영(living soul)짐승(beast)이라 합니다. 그리고 그가 이제 신앙과 사랑 양쪽에서 동시에 함께 행동하기 시작하므로, 그는 형상(image)이라 하는 영적 인간이 됩니다. 그의 영적 생명은 신앙의 지식들과 체어리티의 행위들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되는데, 이것들이 그의 음식(food)이 됩니다. 또한 그의 자연적 생명은 몸과 감각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되는데, 이로부터 싸움이 일어나며, 사랑이 지배권을 얻을 때까지 계속되고, 그 후 그는 천적 인간이 됩니다. The sixth state is when, from faith, and thence from love, he speaks what is true, and does what is good: the things which he then brings forth are called the “living soul” and the “beast.” And as he then begins to act at once and together from both faith and love, he becomes a spiritual man, who is called an “image.” His spiritual life is delighted and sustained by such things as belong to the knowledges of faith, and to works of charity, which are called his “food”; and his natural life is delighted and sustained by those which belong to the body and the senses; whence a combat arises, until love gains the dominion, and he becomes a celestial man.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26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29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30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31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1:24-31)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여섯 번째 상태를 설명하는데, 이는 창세기 1장의 여섯째 날, 곧 짐승과 사람의 창조에 해당하는 단계입니다. 앞선 다섯 번째 상태에서 신앙은 이미 살아 있는 생명이 되었고, 사람은 신앙으로 말하며 진리와 선을 확증하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여섯 번째 상태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앙만이 아니라 사랑이 함께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사람은 신앙으로 말할 뿐 아니라, 그 신앙에서 나오는 사랑으로 선을 행하게 됩니다. 즉, 말과 행위가 하나의 근원에서 나오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순서를 제시합니다. 그는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라고 말합니다. 이는 사랑이 신앙을 배제하고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 의해 인도되고 형성된 사랑임을 뜻합니다. 먼저 진리가 빛으로 들어오고, 그 진리 안에서 사랑이 불붙으며, 그 둘이 함께 작동, 즉 움직일 때 비로소 참된 영적 삶이 형성됩니다. 이 점은 감정 중심의 신앙이나, 행위 중심의 도덕과 분명히 구별되는 지점이에요.

 

이 상태에서 사람한테서 나오는 것들을 ‘산 영(living soul)과 ‘짐승(beast)이라 한다는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산 영’은 더 이상 생기 없는 선이나 잠재적 생명이 아니라, 실제로 살아 있는 영적 생명을 뜻합니다. 그리고 ‘짐승’은 낮고 거친 본능을 뜻하는 부정적 이미지가 아니라, 선한 애정들이 생명을 가지고 움직이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즉, 사람 안의 감정과 욕망 자체가 이제 주님의 질서 안에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지요.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의 사람을 ‘영적 인간’이라고 부르며, 동시에 그를 가리켜 ‘형상(image)이라 하는데, 이는 창세기에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말씀과 직접 연결됩니다. 여기서 형상이란 외형적인 모방이 아니라, ‘신앙과 사랑이 함께 작동하는, 즉 함께 움직이는 구조’를 뜻합니다. 주님 안에서 진리와 선이 하나이듯, 사람 안에서도 말과 행위, 이해와 의지가 하나로 움직이기 시작할 때 그는 형상이라 불릴 수 있습니다.

 

이 단계에서 사람의 삶은 두 층위로 유지됩니다. 먼저 그의 영적 생명은 신앙의 지식들과 체어리티의 행위들로 기뻐하고 유지되는데, 이것을 그의 ‘음식(food)이라고 합니다. 즉,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에 따라 선을 행하는 것이 더 이상 부담이나 의무가 아니라, 영혼을 살리는 양식이 되는 것이지요. 이건 정말 중요한 변화입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이제부터는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살게 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자연적 생명은 여전히 몸과 감각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됩니다. 사람은 아직 세상에 살고 있고, 육체를 가지고 있으며, 자연적 즐거움과 필요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싸움’이 일어납니다. 영적 즐거움과 자연적 즐거움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에, 어느 것이 삶의 중심을 차지할 것인가를 두고 긴장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 싸움은 이전 단계들에서는 본격적으로 일어나지 않았던, 매우 실제적이고 깊은 영적 전투입니다.

 

이 싸움은 주님이 허용하시되, 목적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사랑이 지배권을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자기 사랑이나 세상 사랑이 아니라,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삶의 중심이 되고, 신앙이 그 사랑을 섬기는 위치로 들어갈 때, 사람은 비로소 ‘천적 인간’이 됩니다. 천적 인간은 더 이상 계산이나 갈등 속에서 선을 선택하지 않고, 사랑 자체에서 자연스럽게 선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결국 AC.12는 거듭남의 거의 완성 단계에 해당합니다. 신앙은 사랑과 결합하고, 말과 행위는 하나가 되며, 영적 생명은 실제 양식을 얻고, 자연적 생명과의 싸움 속에서도 사랑이 점점 우위를 차지합니다. 이 상태는 모든 사람이 쉽게 도달하는 단계는 아니지만, 창세기 1장이 제시하는 거듭남의 목표가 바로 여기에 있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그래서 여섯 번째 상태는 ‘형상’의 회복이며, 인간이 본래 의도된 모습으로 다시 세워지는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심화

 

1.구체적인 예들

 

AC.12본문 중,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신앙과 사랑 양쪽에서 동시에 함께 행동’, 그리고 그의 영적 생명은 신앙의 지식들과 체어리티의 행위들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되는이라는 표현들이 나오는데, 이런 표현들의 구체적 예들을 좀 보여주실 수 있나요?

 

말씀하신 AC.12의 표현들은 스베덴보리 신학에서 매우 핵심적인 상태를 묘사하는 문장들이라서, 실제 삶의 모습으로 풀어 보지 않으면 다소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말씀하신 세 표현을 중심으로, 가능한 한 구체적인 삶의 예를 들어 설명드리겠습니다.

 

먼저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이라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어떤 진리를 단지 알고 있는 상태가 아니라, ‘그 진리 때문에 사랑의 행동을 하게 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말씀을 통해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알고 있다고 합시다. 이것이 아직 이해 속 지식에만 머물러 있다면 그는 실제 상황이 벌어져도 그저 그렇게 말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직장에서 동료가 실수를 해서 큰 곤란에 처했을 때, 그 사람은 그 동료를 비난하거나 이용하지 않고 조용히 도와줍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물으면, 그는 ‘이게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는 좀더 무난한(?) 표현을 쓰겠지만 말입니다. 이때 그가 행한 도움은 단순한 친절이 아니라 ‘신앙의 진리에서 나온 사랑의 행동’입니다. 바로 이런 경우가 ‘신앙에서 사랑으로 선을 행하는’ 상태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는 신앙적 진리를 알고 있다고 합시다. 그는 사업이나 직장에서 이익을 얻을 기회가 있어도 거짓말이나 속임수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단순히 법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거짓은 하나님 앞에서 옳지 않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때 그의 행동은 단순한 도덕이 아니라 ‘신앙에서 나온 선한 행위’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신앙에서 사랑으로 선을 행하는 삶’입니다.

 

다음으로 ‘신앙과 사랑 양쪽에서 동시에 함께 행동한다’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생각에서는 진리를 알고, 의지에서는 선을 사랑하며, 그 둘이 함께 작동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어려운 이웃을 돕는 상황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단순한 감정만 있다면 그는 잠깐 동정하다가 지나갈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지식만 있다면 ‘도와야 한다’는 원칙을 말할 뿐 행동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과 사랑이 함께 작동할 때는 다릅니다. 그는 먼저 ‘이웃을 돕는 것이 옳다’는 진리를 이해하고, 동시에 그 사람의 형편을 마음으로 느끼며 실제로 도움을 줍니다. 여기서 ‘이해는 신앙의 역할이고, 행동으로 이어지는 마음의 움직임은 사랑의 역할’입니다. 이 둘이 동시에 작동하는 것이 바로 ‘신앙과 사랑이 함께 행동하는 상태’입니다.

 

가정에서의 예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대할 때 단지 규칙만 강조하면 관계가 메말라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사랑만 있고 기준이 없다면 아이가 바르게 자라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아이를 바르게 길러야 한다’는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 동시에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그는 때로는 훈계하고 때로는 격려하며 아이의 유익을 위해 행동합니다. 이런 경우도 신앙과 사랑이 함께 작용하는 모습입니다.

 

마지막으로 ‘그의 영적 생명은 신앙의 지식들과 체어리티의 행위들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된다’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점점 영적으로 살아갈수록 ‘무엇에서 기쁨을 느끼느냐가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처음에는 사람의 기쁨이 주로 세상의 것에서 옵니다. 명예, 돈, 인정, 편안함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면 다른 종류의 기쁨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말씀을 읽다가 새로운 진리를 깨달았을 때 마음이 밝아지는 경험을 합니다. 또는 누군가를 도왔을 때 마음 깊은 곳에서 조용한 기쁨을 느낍니다. 또 어떤 사람이 갈등 속에서 용서를 선택했을 때 마음이 평안해집니다. 이런 기쁨은 외적인 보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선 자체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런 상태를 ‘영적 생명이 유지되는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목사님께서 말씀을 연구하시다가 어떤 구절의 내적 의미가 또렷하게 보일 때 느끼는 깊은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또는 성도 한 사람이 말씀을 통해 삶이 조금 변화되는 모습을 보실 때 느끼는 기쁨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기쁨은 세상의 즐거움과 다른 종류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기쁨을 ‘신앙의 진리와 체어리티의 삶에서 오는 기쁨’이라고 말합니다.

 

정리하면 AC.12의 세 표현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먼저 사람은 신앙의 진리를 알고, 그 진리에서 사랑의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해와 의지가 함께 작동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그 사람의 기쁨과 삶의 활력 자체가 진리와 선에서 나오게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적 인간의 삶입니다.

 

 

 

AC.13, 창1 개요,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첫 번째 상태까지만'

AC.13 거듭남 과정 중인 모든 사람이 이 상태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첫 번째 상태까지만 이르고, 어떤 이들은 두 번째 상태까지만, 또 다른 이들은 세 번째,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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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 창1 개요, '다섯 번째 상태'

AC.11 다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말하고, 그로써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하는 때입니다. 이때 그에게서 나오는 것들은 생기를 지닌 것들이며, ‘바다의 물고기’(fish of the sea)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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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

 

다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말하고, 그로써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하는 때입니다. 이때 그에게서 나오는 것들은 생기를 지닌 것들이며, ‘바다의 물고기(fish of the sea)하늘의 새들(birds of the heavens)이라 불립니다. The fifth state is when the man discourses from faith, and thereby confirms himself in truth and good: the things then produced by him are animate, and are called the “fish of the sea,” and the “birds of the heavens.”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state)를 설명하면서, 이전 단계들과는 또 다른 질적 전환이 일어났음을 분명히 합니다. 네 번째 상태에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속 사람 안에서 불붙기 시작했다면, 다섯 번째 상태에서는 그 신앙이 이제 ‘말과 사고의 직접적인 근원’이 됩니다. 즉, 사람은 더 이상 외적 규범이나 압박, 혹은 막연한 경건 감정에 의해 말하지 않고, 신앙 그 자체로 말하기 시작합니다. 이는 신앙이 단순한 지식이나 교리가 아니라, 사고를 이끄는 살아 있는 원리가 되었음을 뜻하지요.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를 ‘신앙으로 말한다’고 표현하는데, 이는 사람이 진리를 말할 때 그것이 외부에서 빌려 온 언어가 아니라, 내면에서 확신한 이해에서 흘러나온다는 의미입니다. 이로 인해 사람은 자신이 받아들인 진리와 선을 삶 속에서 점점 더 확증하게 되는데, 여기서 ‘확증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스스로를 설득한다는 뜻이 아니라, ‘삶의 경험 속에서 진리와 선이 참됨을 확인해 간다’는 의미입니다. 신앙은 이제 머릿속의 동의가 아니라, 살아 보면서 검증되는 삶의 기준이 됩니다. 그러니까 앉은뱅이 신앙이 아니라 걸어 다니는 신앙이 되는 것이지요.

 

이 단계에서 중요한 변화는, 사람이 산출하는 것들, 곧 사람한테서 나오는 것들이 ‘생기를 가진 것들’이 된다는 점입니다. 이전 단계들에서도 선한 행위와 진리의 말이 있었지만, 그것들은 아직 생명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다섯 번째 상태에 이르면, 주님의 생명이 신앙과 함께 작용, 그 말과 행위에 실제적인 영적 생명력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다시 말해, 사람의 신앙은 이제 살아 있으며, 그가 말하는 진리와 행하는 선도 살아 있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생기 있는 산출물들을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들’이라는 상징으로 설명합니다. ‘바다’는 지식과 기억의 차원을 가리키며, 그 안의 ‘물고기’는 지식적 차원에서 살아 움직이는 진리들을 뜻합니다. 이는 사람이 신앙 안에서 지식들을 단순히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유기적으로 이해하고 활용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반면 ‘하늘의 새들’은 더 높은 차원의 이해, 곧 사고와 사유의 영역에서 자유롭게 날아오르는 진리들을 가리킵니다. 이는 신앙이 지식의 차원을 넘어, 통찰과 분별의 차원으로 확장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이 두 상징은 다섯 번째 상태가 단지 지식이 늘어나는 단계가 아니라, ‘지식과 이해가 함께 살아 움직이는 단계’임을 분명히 합니다. 물고기와 새는 서로 다른 차원에 속하지만, 모두 생명을 지니고 있으며, 각각 바다와 하늘이라는 자기 영역 안에서 자유롭게 활동합니다. 마찬가지로 이 단계의 사람은 외적 지식과 내적 이해를 모두 갖추고, 그것들을 신앙 안에서 질서 있게 사용합니다.

 

이 상태는 또한 신앙의 책임성이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단계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신앙으로 말하고, 그로써 진리와 선을 확증하기 시작하면, 그는 더 이상 무지나 미숙함을 변명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신앙은 이제 삶을 이끄는 원리이므로, 말과 행동이 그것과 일치하지 않을 때 스스로 그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이 점에서 다섯 번째 상태는 자유와 책임이 함께 커지는 단계입니다.

 

그러나 이 상태 역시 거듭남의 완성은 아닙니다. 신앙이 살아 있고, 진리와 선이 생기를 갖고 작용하고 있지만, 여전히 중심에는 신앙이 있으며, 사랑과 완전한 결합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다음 단계, 곧 여섯 번째 상태에서 신앙과 사랑이 동시에 작용하며 하나로 결합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다섯 번째 상태는 그 결합을 위한 성숙 단계로서, 신앙이 충분히 살아 있고 견고해져야만 사랑이 전면적으로 주도권을 잡을 수 있습니다.

 

결국 AC.11에서 말하는 다섯 번째 상태는 거듭남의 여정에서 ‘신앙이 실제 생명이 되는 단계’입니다. 사람은 이제 신앙으로 말하고, 그 신앙으로 살아가며, 그 안에서 진리와 선이 살아 움직입니다. 물고기와 새가 생명력을 가지고 각자의 영역을 채우듯, 이 단계의 신앙은 사람의 지식과 이해 전반을 살아 있는 것으로 만듭니다. 이는 이후에 올 더 깊은 변화, 곧 신앙과 사랑의 완전한 결합을 위한 필수적 성숙 단계입니다.

 

 

심화

 

1.자신을 확증하다(confirms himself)

 

자신을 확증하다의 해설을 보면, 이는 삶의 경험 속에서 진리와 선이 참됨을 확인해 간다라는 의미라고 하는데요, 이게 무슨 말인가요?

 

AC.11의 ‘자신을 확증하다(confirm oneself)라는 표현은, 스베덴보리 사상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그런데 이 표현은 문자 그대로 보면 마치 ‘자기 생각을 고집스럽게 밀어붙인다’는 뜻처럼 들릴 수 있어서 오해가 생기기 쉽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의미는 조금 다릅니다.

 

먼저 스베덴보리에게서 ‘확증(confirm)이라는 말은 단순한 이론적 동의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어떤 진리를 머리로만 이해하는 단계와, 그것이 실제 삶 속에서 참된 것임을 경험을 통해 점점 분명히 알게 되는 단계는 다릅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말씀을 듣거나 가르침을 통해 ‘이것이 옳다’고 배웁니다. 그러나 그때는 아직 그것이 자기 삶 속에서 살아 있는 진리가 아닙니다. 다만 이해 속에 있는 진리입니다.

 

그다음 단계에서 사람은 그 진리를 실제 삶 속에서 적용해 봅니다. 예를 들어,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들었다고 합시다. 처음에는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하고, 정직하게 살고, 남을 해치지 않으려 애쓰면서 살아가다 보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다. 그 사람은 점점 깨닫습니다. ‘, 이렇게 사는 것이 정말 옳구나.’ ‘이것이 진짜 선이구나.’ 이런 깨달음이 경험을 통해 마음에 자리 잡습니다. 이것이 바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확증’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확증한다’는 말은 자기 의견을 억지로 강화한다는 뜻이 아니라, ‘삶 속에서 진리와 선이 실제로 참됨을 확인해 가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진리가 단순한 지식에서 벗어나 삶의 확신이 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때 진리는 머리의 생각이 아니라, 마음과 삶에 뿌리를 내린 것이 됩니다.

 

AC.11의 문맥에서는 사람이 신앙의 원리로 말하고 행동하면서 점점 진리와 선 안에 자신을 세운다고 설명합니다. 즉 처음에는 신앙이 이해 속 지식일 뿐이지만, 그 신앙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동안 그 사람은 점점 그 진리 안에서 자신을 확고히 세우게 됩니다. 이것이 ‘확증’입니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른 곳에서 ‘거짓을 확증하는 것’도 자주 말합니다. 사람이 어떤 잘못된 생각을 붙들고, 그 생각을 지지하는 근거만 계속 찾으면 그 역시 ‘확증’이 됩니다. 그래서 확증이라는 과정 자체는 중립적입니다. 문제는 무엇을 확증하느냐입니다. 진리를 확증하면 지혜가 깊어지고, 거짓을 확증하면 오히려 더 어두워집니다.

 

처음에는 진리가 ‘배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진리를 따라 살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그것이 ‘내가 실제로 아는 것’이 됩니다. 바로 그 변화가 ‘확증’입니다. 다시 말해, ‘진리가 지식에서 확신으로 바뀌는 과정’입니다.

 

AC.11에서 말하는 ‘자신을 확증한다’는 것은 자기 생각을 고집하는 태도가 아니라, 신앙의 진리와 선이 삶 속에서 참됨을 드러내면서 사람 안에 점점 확고하게 자리 잡는 과정을 말합니다.

 

 

 

AC.12, 창1 개요, '여섯 번째 상태'

AC.12 여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때입니다. 이때 그에게서 나오는 것들을 ‘산 영’(living soul)과 ‘짐승’(beast)이라 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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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 창1 개요, '네 번째 상태'

AC.10 네 번째 상태는 사람이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의 빛을 받는 때입니다. 그는 이전에도 경건하게 말하고 선한 것들을 행했으나, 그것은 신앙과 체어리티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그가 겪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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