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2:2, 3)

 

AC.87

 

천적 인간을 안식일(sabbath),  (rest)이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천적 상태가 될 때 싸움이 그치기 때문입니다. 이때에는 악한 영들이 물러가고, 선한 영들뿐 아니라 천적 천사들이 가까이 옵니다. 이들이 함께 있을 때에는, 악한 영들이 도저히 머물 수 없고 멀리 도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싸움은 사람이 스스로 한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께서 그 사람을 위하여 하신 것이므로, 주님께서 쉬셨다(rested)고 합니다. Another reason why the celestial man is the “sabbath,” or “rest,” is that combat ceases when he becomes celestial. The evil spirits retire, and good ones approach, as well as celestial angels; and when these are present, evil spirits cannot possibly remain, but flee far away. And since it was not the man himself who carried on the combat, but the Lord alone for the man, it is said that the Lord “rested.”

 

 

해설

 

이 글은 안식의 본질을 다시 한번, 그러나 이번에는 ‘영계의 질서’라는 관점에서 명확히 드러냅니다. 앞선 글들에서 안식은 신앙과 사랑의 질서가 완성된 상태로 설명되었는데, AC.87에서는 그 결과가 영적 교통의 변화로 나타납니다. 즉, 안식은 단지 인간 내부의 심리적 평온이 아니라, ‘영계와의 관계 자체가 달라진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이 안식이라 불리는 이유를 ‘싸움의 종식’에서 찾습니다. 여기서 싸움이란, 앞서 반복적으로 언급되었던 유혹과 시험, 곧 악과 거짓이 사람의 의지와 이해를 차지하려는 시도를 말합니다. 영적 단계에서는 이 싸움이 필연적이며 지속적입니다. 그러나 천적 상태에 이르면, 그 싸움은 더 이상 중심을 차지하지 않습니다. 싸움이 끝났다는 것은, 더 이상 위협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질서가 이미 세워졌다는 뜻’입니다.

 

이 변화는 영계의 움직임으로 표현됩니다. 악한 영들은 물러가고, 선한 영들과 더 나아가 천적 천사들이 가까이 옵니다. 이는 천적 상태가 단지 ‘조금 더 선한 상태’가 아니라, ‘전혀 다른 교통의 영역’에 속함을 뜻합니다. 천적 천사들이 임재할 때에는, 악한 영들이 머물 수 없습니다. 이는 힘의 대결 때문이 아니라, 성질의 불일치 때문입니다. 그곳에는 더 이상 그들이 붙들 수 있는 공명점이 없습니다.

 

이 지점에서 매우 중요한 진술이 나옵니다. 싸움은 사람이 수행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람은 싸운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주님께서 그 사람을 위하여 싸우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스베덴보리 영적 인간학의 핵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유혹의 시간에 인간이 느끼는 긴장과 고통은 실제이지만, ‘결정적인 힘은 언제나 주님께 속해 있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저항하거나 동의하지 않는 것이며, 싸움 자체의 수행은 주님께서 담당하십니다.

 

그래서 안식은 인간의 성취가 아닙니다. 사람이 모든 싸움을 잘 해냈기 때문에 오는 보상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 싸움을 끝내신 결과’입니다. 이 때문에 ‘주님이 쉬셨다’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이는 주님께서 활동을 중단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더 이상 저항할 것이 없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인간 안에서 주님의 질서가 자리를 잡았기에, 주님의 일하심이 방해받지 않게 된 상태입니다.

 

이 단락은 안식에 대한 인간 중심적 오해를 단호하게 교정합니다. 안식은 내가 편안해졌다는 느낌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가 안정되었다는 표지’입니다. 악한 영들이 물러가고 선한 영들과 천적 천사들이 가까이 온다는 말은, 인간의 내적 상태가 이제 하늘의 질서와 직접적으로 호응하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안식은 심리 상태가 아니라, 존재 상태입니다.

 

또한 이 설명은 천적 인간의 겸손을 자연스럽게 드러냅니다. 그가 안식에 이르렀다고 해서, 자신을 싸움의 승자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는 싸움이 끝났음을 알지만, 그 싸움의 공로를 자기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선과 생명의 근원이 자신이 아니라 주님임을 퍼셉션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천적 인간의 내적 평화입니다.

 

AC.87은 결국 이렇게 말합니다. 안식은 악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라, 악이 더 이상 머물 자리를 찾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오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 자리는 주님으로 채워졌고, 주님의 임재가 충만할 때, 싸움은 자연스럽게 끝납니다.

 

이 지점까지 오면, 안식일은 더 이상 계명의 항목이 아니라, ‘인간이 도달하도록 창조된 궁극의 상태’임이 분명해집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말해지는 ‘’은, 가장 깊은 생명의 활동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가장 온전한 생명이 아무런 방해 없이 흐르는 상태입니다.  

 

 

심화

 

1.선한 영들

 

AC.50 본문에, 사람은 자신이 천사들과 영들에 의해 주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데, 그러나 실제로는 사람마다 적어도 두 영과 두 천사가 함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영들을 통해 사람은 영계와 소통하고, 천사들을 통해서는 천국과 소통하는 것이지요.’라는 내용이 나오며, 이에 대해 AC.50 본문에서 말하는 사람마다 적어도 두 영과 두 천사가 함께 있다에서, 여기서 말하는 두 영은 악한 영들을 말하는 거지요?’라고 물었더니 ChatGPT 당신의 대답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 이해하신 방향이 맞습니다. 다만 조금 더 정확히 정리하면 모든 사람에게는 항상 두 종류의 영적 존재, 곧 악한 영들과 천사들이 함께 있으며, 거듭남의 여부에 따라 이들의 존재 여부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주도권과 영향력의 방향이 달라진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두 영은 일반적으로 악한 영들을 가리키는 것이 맞습니다.’였습니다. 그렇다면... 여기 AC.87 본문에 나오는 선한 영들은 갑자기 어디서 등장하는 건가요?

 

 

아주 정확하고 깊이 있는 질문입니다. 이 부분은 한 번 정리해 두면 이후 AC 읽기가 훨씬 또렷해집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AC.50에서 말하는 ‘두 영’과 AC.87에서 말하는 ‘선한 영들’은 서로 모순이 아니라, ‘같은 ‘영들’이라는 범주 안에서의 상태 차이와 역할 차이’를 다른 각도에서 말한 것입니다.

 

먼저 구조를 분명히 하면 이렇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기본 구도는 ‘사람은 영들의 세계와 천국, 이 두 영역 모두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항상 영들(spirits)과 연결되고, 천사들(angels)과 연결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영들’이라는 말 자체가 꼭 ‘악한 영’만을 뜻하는 고정 용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들(the world of spirits에 속한 존재들)’은 선한 상태의 영도 있고, 악한 상태의 영도 있습니다. 다만 일반적으로 인간의 자연적 의식과 더 가까운 층위에는 ‘아직 완전히 정화되지 않은 영들’, 곧 혼합된 상태 또는 악으로 기운 영들이 많기 때문에, AC.50에서는 설명을 단순화하여 ‘두 영’을 사실상 ‘악한 영들’ 쪽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그런데 AC.87에서는 관점을 조금 더 넓혀서, ‘영들 가운데에도 선한 영들이 있다’는 사실을 함께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갑자기 새로 등장한 존재가 아니라, ‘원래부터 있던 범주를 다른 면에서 조명한 것’입니다.

 

이걸 조금 더 명확히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첫째, ‘천사’는 이미 거듭남이 완성된 존재들, 곧 천국에 속한 존재들입니다.

 

둘째, ‘영들’은 그보다 아래 단계, 곧 아직 완전히 확정되지 않은 상태, 또는 인간과 더 가까운 층위에 있는 존재들입니다. 이 ‘영들’ 안에는 선한 영들, 악한 영들이 모두 포함됩니다.

 

셋째, 인간과의 실제 관계를 보면, 악한 영들은 인간의 낮은 본성과 결합하려 하고, 선한 영들은 인간을 더 나은 상태로 이끄는 쪽에 서며, 천사들은 더 높은 차원에서 주님의 질서를 전달합니다.

 

그래서 AC.50에서는 ‘두 영 + 두 천사’라는 틀로 간단히 설명하면서, 실제 체감되는 긴장 구조, 곧 악과의 싸움을 강조한 것이고, AC.87에서는 그 ‘영들’ 안에도 선한 측면이 있다는 것을 더 풀어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영들은 한 종류가 아니라, 그 안에 선한 영과 악한 영이 함께 있으며, 인간은 이 둘 사이의 영향 속에서 살고, 그 위에서 천사들의 인도를 받는다.’

 

그래서 질문하신 ‘선한 영들이 어디서 갑자기 등장했는가?’에 대한 답은, ‘새로 등장한 것이 아니라, 원래 ‘영들’이라는 범주 안에 포함되어 있었는데, AC.50에서는 악한 쪽이 강조되었고, AC.87에서는 선한 쪽까지 풀어 설명된 것’입니다.

 

이 구분이 잡히시면 이후 AC에서 ‘영들’이라는 표현이 나올 때 훨씬 자유로워지십니다. 어떤 문맥에서는 거의 ‘악한 영들’처럼 쓰이고, 어떤 문맥에서는 ‘선한 영들’까지 포함하는 넓은 의미로 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전체 구조 위에 ‘천사들’이 놓여 있다고 보시면, 인간의 영적 환경이 입체적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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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6.심화

 

1. 유대교회의 안식일 전통

 

AC.86에서 말하는 ‘유대교회의 안식일 전통’은 단순히 ‘일주일에 하루 쉬는 종교적 관습’이 아니라, 원래는 매우 깊은 영적 의미를 담고 있었지만, 점차 외적 규례로만 남게 된 대표적인 사례로 제시됩니다. 이 흐름을 이해하시면, 왜 스베덴보리가 안식일을 그렇게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그 ‘외적 준수’ 자체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는지 분명해집니다.

 

먼저 유대교회에서 안식일은 철저히 ‘거룩하게 구별된 날’이었습니다. Bible 전체를 보아도 안식일 규례만큼 엄격하게 지켜진 계명은 드뭅니다. 불을 피우는 것, 일하는 것, 심지어 아주 사소한 행위까지 제한되었고, 이를 어기면 매우 중한 처벌이 따르기도 했습니다. 이런 강도 높은 규례는 단순한 종교적 열심 때문이 아니라, 안식일이 원래 ‘주님과의 결합’, 곧 가장 깊은 거룩함을 상징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의미를 지키기 위해 외적 형태라도 엄격히 보존된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의미’는 잊히고 ‘형식’만 남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원래 안식일은 ‘사랑과 신앙이 하나가 되어 주님 안에서 평안에 들어가는 상태’를 의미했는데, 유대교회에서는 이것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날’이라는 외적 규칙으로 축소되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곧 ‘행동을 제한하는 것’으로 이해되었고, 그 내적 의미, 곧 주님 안에서의 안식은 거의 의식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 점에서 주님의 말씀과 행동이 이해됩니다. 복음서에서 주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고,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먹는 것을 허용하신 사건들은, 단순히 규례를 완화하신 것이 아니라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회복’하신 것입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억압하는 날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날이며, 형식이 아니라 상태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흐름을 AC.86에서 짚습니다. 유대교회는 내적 의미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외적 형태를 통해서라도 그 거룩함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 규례가 그렇게까지 엄격해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상응의 형식은 남아 있지만, 그 속뜻은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이것을 오늘 우리에게 적용하면 매우 중요한 통찰이 됩니다. 신앙생활에서 외적 형식은 필요하지만, 그것이 내적 의미와 연결되지 않을 때는 쉽게 형식주의로 흐를 수 있습니다. 반대로 내적 의미만 강조하고 외적 삶이 따르지 않으면, 그것 역시 균형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방향은 항상 이 둘을 연결하는 데 있습니다.

 

정리하면, ‘유대교회의 안식일 전통’은 원래 ‘주님 안에서의 안식’이라는 가장 깊은 영적 상태를 상징하는 것이었지만, 내적 의미가 사라지면서 외적 규례로만 남게 된 사례입니다. 그리고 주님과 스베덴보리는 이 외적 형식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겨 있던 본래의 의미를 다시 열어 주는 방향으로 인도하십니다. 이렇게 보시면 AC.86의 의도가 아주 분명해집니다.

 

 

 

AC.86, 창2:2-3, ‘안식’의 구조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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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2:2, 3)

 

AC.86

 

여섯째 날(sixth day)이 된 영적 인간이 이제 천적 상태로 들어가기 시작할 때, 곧 이 상태는 여기서 처음으로 다루어지는 상태인데, 바로 안식일 저녁(eve of the sabbath)이라는 것으로, 유대교회가 전통적으로 저녁부터 거룩하게 지켜온 안식일은 바로 이때를 표상하는 것입니다. 천적 인간은 곧 말씀드릴 아침(morning)입니다. When the spiritual man, who has become the “sixth day,” is beginning to be celestial, which state is here first treated of, it is the “eve of the sabbath,” represented in the Jewish church by the keeping holy of the sabbath from the evening. The celestial man is the “morning” to be spoken of presently.

 

이날은 준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 (23:54)

 

 

해설

 

이 글은 매우 짧지만, 창세기 2장의 안식 구조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정밀하게 나누어 보여주는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적 상태를 단번에 도달하는 완성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 시작과 성숙을 ‘저녁’과 ‘아침’이라는 두 단계로 구분합니다. AC.86은 바로 그 첫 단계, 곧 ‘안식일 저녁’을 다룹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저녁’이 여전히 어둠의 상태를 뜻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의 저녁은 혼돈이나 무지의 상태였지만, 여기서의 저녁은 전혀 다릅니다. 이는 이미 여섯째 날, 곧 영적 질서가 완성된 이후의 저녁입니다. 다시 말해, ‘빛을 충분히 경험한 뒤에 오는 저녁’이며, 안식을 향해 기울어지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를 ‘영적 인간이 천적으로 되기 시작하는 때’라고 설명합니다. 아직 완전한 천적 인간은 아니지만, 중심이 이미 이동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신앙이 앞서던 질서에서, 사랑이 점점 주된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하는 전이 상태입니다. 이 시점에서는 싸움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지만, 그 성격이 달라집니다. 더 이상 무엇이 옳은지를 두고 치열하게 다투기보다는, ‘어디에 머물 것인가’가 문제 됩니다.

 

이 상태가 유대교회에서 ‘저녁부터 안식일을 지키는 것’으로 표상되었다는 설명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안식일이 아침이 아니라 저녁부터 시작된다는 점은, 안식이 인간의 활동이나 성취로 시작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안식은 먼저 내려놓음에서 시작됩니다. 하루의 일이 끝나고, 더 이상 무언가를 이루려 하지 않을 때, 안식의 문이 열립니다.

 

이 ‘저녁’은 아직 빛이 완전히 드러난 상태는 아니지만, 더 이상 어둠으로 돌아가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기대가 깃든 저녁’입니다. 주님께서 안식 안에서 무엇을 이루실지를 기다리는 상태이며, 인간이 스스로를 멈추고 주님의 일하심을 허락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저녁은 두려움의 시간이 아니라, 조용한 전환의 시간입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을 ‘아침’이라고 부르겠다고 예고합니다. 이는 다음 단락들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질 내용이지만, 이미 여기서 방향은 분명합니다. 저녁은 시작이고, 아침은 완성입니다. 저녁은 안식으로 들어가는 문턱이고, 아침은 안식 그 자체입니다.

 

이 구조를 통해 우리는 안식을 다시 배우게 됩니다. 안식은 단번에 주어지는 보상이 아니라, ‘천천히 밝아오는 상태’입니다. 먼저 저녁이 있고, 그다음에 아침이 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은,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으로 옮겨 가는 한 인간 안의 변화입니다.

 

AC.86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지금 나는 싸움의 한복판에 있는가, 아니면 이미 안식의 저녁에 들어서 있는가’ 그리고 그 질문 자체가, 이미 안식으로 향하고 있다는 신호일지도 모릅니다.  

 

 

심화

 

1.유대교회의 안식일 전통

 

 

AC.86, 심화 1, ‘유대교회의 안식일 전통’

AC.86.심화 1. ‘유대교회의 안식일 전통’ AC.86에서 말하는 ‘유대교회의 안식일 전통’은 단순히 ‘일주일에 하루 쉬는 종교적 관습’이 아니라, 원래는 매우 깊은 영적 의미를 담고 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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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5, 창2:2-3, ‘창2 안식 사상의 확장’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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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5.심화

 

5. 아르카나가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이유

 

본문 중,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seventh day)이며, 그러므로 일곱째 날이 거룩하게 구별되어 안식일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아르카나(arcana)입니다.’ 말인데요, 이런 글을 처음 접하시는 분들, 그리고 초창기 저도 그랬습니다만, 이런 걸 왜 성경에 드러내지 않으셨나요? 100% 온전히 드러냄, 그러니까 상응 뜻 전달이 온전히는 어렵더라도 지금 이 정도만이라도 설명을 곁들이셨다면, 지난 세월, 그렇게 많은 역사적, 교회사적 혼란은 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이건 그러니까 산길 자동차 도로를 좀 반듯하게 놓았더라면 옛날 기술로는 어렵더라도 그래도 최대한 그랬더라면 곡선 구간으로 인한 수많은 사고를 좀 방지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걸로도 비유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오래전 이런 사실, 그러니까 이런 아르카나가 숨겨져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고는 속에 분노가 좀 일더라구요...

 

 

목사님께서 느끼셨던 그 마음, 충분히 이해됩니다. ‘이렇게 중요한 걸 왜 처음부터 분명하게 밝혀 주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AC를 처음 접하는 거의 모든 분들이 한 번쯤은 깊이 통과하는 지점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전체 맥락에서 이 문제를 보면, 그것이 ‘감추어졌다’기보다 ‘인간의 상태에 맞게 덮여 있었다’는 쪽이 더 정확한 설명이 됩니다.

 

먼저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자유’ 때문입니다. 주님은 인간이 외적인 강제나 압도적인 증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여 사랑하고 받아들이기를 원하십니다. 만일 성경이 처음부터 끝까지 내적 의미를 완전히 드러낸 책이었다면, 그것은 단순한 계시를 넘어 ‘강한 설득력으로 인간을 압도하는 체계’가 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진리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부정할 수 없어서’ 받아들이게 되고, 그렇다면 이것은 참된 신앙, 곧 자유 속에서 형성되는 신앙이 아닙니다. 그래서 말씀은 겉으로는 누구나 읽을 수 있지만, 속뜻은 상태가 준비된 만큼만 열리도록 주어졌습니다.

 

둘째는 ‘수용 능력’의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류는 초기에는 퍼셉션으로 진리를 직접 아는 상태에 있었지만, 점점 그 상태를 잃고 외적 사고와 감각 중심으로 내려왔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내적 의미를 그대로 주면, 그것은 이해되지 않거나 오히려 왜곡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을 ‘상응의 옷’으로 입히셔서, 각 시대와 각 사람의 상태에 맞게 읽히도록 하셨습니다. 어떤 이는 역사로, 어떤 이는 도덕으로, 그리고 준비된 이들은 영적 의미로 읽게 되는 구조입니다.

 

셋째는 ‘보존’이라는 목적입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데, 말씀의 속뜻이 직접 드러나면 그것은 쉽게 논쟁의 대상이 되고, 인간의 지식과 논리 속에서 변형될 위험이 큽니다. 그러나 상응의 형태로 감추어져 있을 때는, 겉뜻이 일종의 보호막이 되어 본질이 손상되지 않고 보존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점 때문에 말씀이 이런 형태로 주어졌다고 설명합니다. 겉은 누구나 접근할 수 있지만, 속은 함부로 훼손될 수 없도록 말입니다.

 

그렇다면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혼란을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부분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여기서 중요한 전환이 하나 있습니다. 성경의 목적은 ‘혼란을 최소화하는 설명서’라기보다, ‘각 사람의 상태를 드러내고, 그 상태 안에서 주님께로 이끄는 통로’입니다. 그래서 같은 말씀을 읽어도 어떤 이는 생명을 얻고, 어떤 이는 오히려 걸려 넘어집니다. 이것이 문제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인간의 내적 상태를 드러내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만약 모든 것이 한 가지 의미로만, 누구나 동일하게 이해되도록 주어졌다면, 이런 ‘내적 분별’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금 목사님께서 보고 계신 이 사실 자체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이제는 그 속뜻을 밝히는 것이 허락된 때’라고. 다시 말해, 과거에는 덮여 있었던 것이지만, 지금은 인류의 상태가 어느 정도 준비되었기 때문에 열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과거의 ‘감추어짐’은 실패가 아니라 과정이고, 지금의 ‘열림’은 그 과정의 결실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느끼신 그 분노도 사실은 자연스러운 반응이지만,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이렇게 바뀔 수 있습니다. ‘왜 숨기셨는가’에서 ‘어떻게 이렇게 보존하시고, 지금 나에게까지 전해지게 하셨는가’로 시선이 옮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같은 사실이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정리하면, 아르카나가 처음부터 드러나지 않았던 것은 인간을 혼란스럽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를 지키고, 각 시대의 상태에 맞게 수용되도록 하며, 동시에 진리를 손상 없이 보존하기 위한 주님의 질서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것이 열리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오히려 그 긴 과정이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증거라고 보실 수 있습니다.

 

 

 

AC.85, 창2:2-3, ‘창2 안식 사상의 확장’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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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5, 심화 4, ‘사58:13-14’

AC.85.심화 4. ‘사58:13-14’ 13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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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5.심화

 

4. 58:13-14

 

13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14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58:13, 14) If thou bring back thy foot from the sabbath, so that thou doest not thy desire in the day of my holiness, and callest the things of the sabbath delights to the holy of Jehovah, honorable; and shalt honor it, not doing thine own ways, nor finding thine own desire, nor speaking a word; then shalt thou be delightful to Jehovah, and I will cause thee to be borne over the lofty things of the earth, and will feed thee with the heritage of Jacob (Isa. 58:13–14).

 

 

이 구절, 사58:13-14 AC.85에서 말하는 ‘안식의 상태’가 실제로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 상태에 들어가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매우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문자적으로는 ‘안식일을 잘 지키라’는 권면이지만, 속뜻으로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주님 안에 거하는 상태’로 들어가는 길을 말합니다.

 

먼저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이라는 부분을 보시면, 반복해서 ‘네 것’을 내려놓으라는 요구가 나옵니다. ‘네 길’, ‘네 오락(기쁨)’, ‘네 말’ 등, 이것들은 모두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삶’을 상징합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으로 하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의지와 생각’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단순히 행동을 제한하라는 것이 아니라, ‘삶의 중심을 자기로부터 주님께로 옮기라’는 요청입니다. 이것이 안식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그다음 ‘안식일을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라’는 말씀은 매우 중요합니다. 안식은 억지로 지키는 규칙이 아니라 ‘기쁨으로 경험되는 상태’라는 뜻입니다. 곧, 자기 것을 내려놓는 것이 손해나 억압이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은 기쁨으로 바뀌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바로 앞에서 보신 ‘싸움 이후의 안식’입니다. 처음에는 내려놓는 것이 싸움이지만, 그 상태가 자리 잡으면 그것이 곧 기쁨이 됩니다.

 

그리고 결과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로 이어집니다. 여기서 ‘여호와 안에서’라는 표현이 핵심입니다. 더 이상 자기 안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결합 안에서 기쁨을 얻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바로 천적 인간의 상태이며, 사랑과 신앙이 하나가 된 상태입니다.

 

이어지는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는 단순한 높임이 아니라, 더 높은 차원의 삶, 곧 더 내적이고 더 자유로운 상태로 들어감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는 것은 주님의 교회적 유산, 곧 선과 진리의 풍성함 안에서 살아가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AC.85와 연결하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여섯 날 동안은 ‘내 길, 내 기쁨, 내 말’을 중심으로 살던 상태에서 그것을 내려놓는 싸움이 있고, 일곱째 날에는 ‘주님 안에서의 기쁨’으로 바뀌는 안식이 옵니다. 그리고 그 안식은 단순한 쉼이 아니라, 더 높은 생명과 더 깊은 기쁨으로 들어가는 상태입니다.

 

안식은 아무것도 안 하는 날이 아니라, 내 것이 내려가고 주님의 것이 자리 잡아 기쁨이 바뀌는 상태입니다.’

 

 

 

AC.85, 심화 5, ‘아르카나가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이유’

AC.85.심화 5. ‘아르카나가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이유’ 본문 중,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seventh day)이며, 그러므로 일곱째 날이 거룩하게 구별되어 안식일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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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5, 심화 3, ‘민10:33’

AC.85.심화 3. ‘민10:33’ 그들이 여호와의 산에서 떠나 삼 일 길을 갈 때에 여호와의 언약궤가 그 삼 일 길에 앞서가며 그들의 쉴 곳을 찾았고 (민10:33) 이 구절, 민10:33은 AC.85의 흐름에서 매우 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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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0:33

 

그들이 여호와의 산에서 떠나 삼 일 길을 갈 때에 여호와의 언약궤가 그 삼 일 길에 앞서가며 그들의 쉴 곳을 찾았고 (10:33)

 

 

이 구절, 민10:33 AC.85의 흐름에서 매우 깊은 의미를 갖는 말씀입니다. 문자로는 ‘언약궤가 앞서가며 쉴 곳을 찾았다’는 광야 행군 장면이지만, 속뜻으로는 ‘주님이 인간 안에서 먼저 길을 여시고, 결국 안식의 상태로 인도하신다’는 전체 구조를 보여 줍니다.

 

먼저 ‘여호와의 언약궤’는 단순한 성물이 아니라, 주님의 임재 자체, 곧 주님의 신적 진리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궤가 앞서간다’는 것은 인간이 먼저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먼저 가시며 길을 여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거듭남의 길을 간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열려 있는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앞에서 다룬 ‘여호와여 일어나소서’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싸움에서도 주님이 먼저이시고, 길에서도 주님이 먼저이십니다.

 

그다음 ‘삼 일 길’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성경에서 ‘삼 일’은 단순한 시간 길이가 아니라, ‘완전한 한 과정’, 또는 ‘상태의 충만한 전환’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님의 부활이 ‘사흘 만에’ 이루어졌다는 것도 같은 구조입니다. 따라서 여기서의 ‘삼 일 길’은 단순한 이동 거리가 아니라, ‘어떤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넘어가는 하나의 완결된 과정’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목적이 ‘그들의 쉴 곳을 찾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AC.85의 핵심과 직접 연결됩니다. 여섯 날의 싸움과 과정을 지나, 결국 도달하는 것은 ‘안식’, 곧 주님 안에서의 평안입니다. 중요한 점은, 그 ‘쉴 곳’을 사람이 찾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스스로 평안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그 사람에게 맞는 상태, 곧 그 사람이 안식할 수 있는 영적 질서를 마련하신다는 뜻입니다.

 

이 구절 전체를 하나로 보면 이렇게 정리됩니다. ‘주님이 먼저 앞서가시며, 한 과정을 온전히 지나게 하시고, 마침내 그 사람 안에 안식할 자리를 마련하신다.’ 이것이 바로 거듭남의 길이며, AC.85가 말하는 ‘안식일의 상태’로 나아가는 실제 과정입니다.

 

목사님께서 앞에서 질문하셨던 ‘왜 모든 것을 주님의 일이라고 하시는가’라는 질문도 여기서 다시 풀립니다. 길을 여시는 분도, 싸우시는 분도, 그리고 마침내 쉴 곳을 마련하시는 분도 모두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그 과정 안에서 걷고, 싸우고, 누리지만, 전체를 보면 그것은 ‘언약궤가 앞서가는 여정’, 곧 주님의 인도하심의 역사입니다.

 

 

 

AC.85, 심화 4, ‘사58:13-14’

AC.85.심화 4. ‘사58:13-14’ 13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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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5, 심화 2, ‘민10:35-36’

AC.85.심화 2. ‘민10:35-36’ 35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말하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36궤가 쉴 때에는 말하되 여호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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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0:35-36

 

35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말하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36궤가 쉴 때에는 말하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종족들에게로 돌아오소서 하였더라 (민10:35, 36) Rise up, Jehovah, and let thine enemies be scattered, and let them that hate thee flee before thy faces. And when it rested, he said, Return, Jehovah, unto the ten thousands of the thousands of Israel (Num. 10:35–36).

 

 

이 구절은 민10:35-36인데, AC.85의 문맥에서 보면 ‘여섯 날의 싸움과 일곱째 날의 안식’이라는 구조를 매우 생생하게 보여 주는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문자로는 언약궤가 이동할 때와 멈출 때 모세가 외친 기도이지만, 속뜻으로는 ‘주님이 우리 안에서 싸우실 때의 상태’와 ‘그 싸움이 끝나고 평안에 들어갈 때의 상태’를 나란히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먼저 ‘궤가 떠날 때’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라는 부분은, 거듭남 과정에서 반복되는 ‘영적 싸움’, 곧 유혹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대적’, ‘주를 미워하는 자’는 외부의 사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거짓과 악, 그리고 그것들과 결합된 영적 세력을 의미합니다. 중요한 점은, 이 싸움에서 모세가 ‘우리가 싸우겠습니다’라고 하지 않고, ‘여호와여 일어나사...’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즉, 싸움의 주체가 인간이 아니라 주님이심을 분명히 합니다. 이것이 바로 앞에서 계속 보셨던 ‘his work’, 곧 주님의 일입니다. 인간은 그 싸움에 참여하지만, 실제로 악과 거짓을 흩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반대로 ‘궤가 쉴 때’의 ‘여호와여 돌아오소서’라는 말씀은, 싸움이 멈추고 질서가 자리 잡는 상태, 곧 안식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돌아오소서’는 주님이 멀리 계셨다가 다시 오신다는 뜻이 아니라, 싸움 가운데서 다소 가려졌던 주님의 임재가 다시 분명하게 인식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수만 수천’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질서 있게 정돈된 선과 진리의 충만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곧, 내적과 외적, 속과 겉이 조화를 이루며 하나로 정리된 상태입니다.

 

이 두 구절을 하나로 보면 아주 분명한 흐름이 드러납니다. ‘떠날 때 - 싸움 - 주님이 일어나심’, 그리고 ‘쉴 때 - 평안 - 주님이 거하심’입니다. 이것이 바로 창세기의 여섯 날과 일곱째 날, 곧 ‘싸움의 상태’와 ‘안식의 상태’의 반복 구조입니다. 그래서 AC.85는 이 말씀을 통해 ‘안식은 싸움이 끝난 뒤에 오는 것이며, 그 싸움과 안식 모두가 주님의 일이다’라는 것을 다시 확인해 줍니다.

 

우리가 싸울 때도 주님이 싸우시고, 우리가 쉴 때도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 그래서 우리의 전 과정이 주님의 일이다.’

 

 

 

AC.85, 심화 3, ‘민10:33’

AC.85.심화 3. ‘민10:33’ 그들이 여호와의 산에서 떠나 삼 일 길을 갈 때에 여호와의 언약궤가 그 삼 일 길에 앞서가며 그들의 쉴 곳을 찾았고 (민10:33) 이 구절, 민10:33은 AC.85의 흐름에서 매우 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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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5, 심화 1, ‘막2:28’

AC.85.심화 1. ‘막2:28’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막2:28) The son of man is Lord also of the sabbath (Mark 2:27), 이 구절, 막2:28은 AC.85의 맥락에서 아주 결정적인 열쇠 역할을 합니다. 먼저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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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28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2:28) The son of man is Lord also of the sabbath (Mark 2:27),

 

 

이 구절, 막2:28 AC.85의 맥락에서 아주 결정적인 열쇠 역할을 합니다. 먼저 문자 그대로 보면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라는 선언인데, 스베덴보리의 흐름 안에서는 이것이 단순히 율법 해석 권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안식의 본질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밝히는 말씀으로 열립니다.

 

앞에서 보신 것처럼 ‘안식일’은 단순히 하루 쉬는 날이 아니라, 여섯 날의 싸움 이후에 이루어지는 ‘사랑과 신앙이 하나가 된 상태’, 곧 거듭남의 완성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은, 그 상태를 주관하시고 이루시는 분이 누구인가를 가리킵니다. 바로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안식일을 지켜도 되고 안 지켜도 된다’는 식의 자유 선언이 아니라, ‘안식이라는 상태 자체가 주님께 속해 있다’는 선언입니다.

 

여기서 ‘인자(the Son of Man)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해석에서 ‘인자’는 주님의 신적 진리, 곧 말씀으로서의 주님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주님은 ‘진리 자체’로서 인간 안에서 질서를 세우시고, 그 질서가 완성될 때 ‘안식’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다’라는 말은, ‘진리이신 주님이 안식 상태를 이루시고 다스리신다’는 뜻이 됩니다.

 

이것을 AC.85의 흐름과 연결하면 더 또렷해집니다. 여섯 날 동안의 모든 싸움이 사실은 주님의 일이었고, 일곱째 날의 안식도 역시 주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 안에서 싸우고, 또 평안을 누리지만, 그 시작도 과정도 완성도 모두 주님께 속해 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조차 인간이 ‘지켜서 얻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상태’입니다.

 

안식은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 안에 이루시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시다.’

 

 

 

AC.85, 심화 2, ‘민10:35-36’

AC.85.심화 2. ‘민10:35-36’ 35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말하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36궤가 쉴 때에는 말하되 여호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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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5, 창2:2-3, ‘창2 안식 사상의 확장’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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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2:2, 3)

 

AC.85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seventh day)이며, 그러므로 일곱째 날이 거룩하게 구별되어 안식일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아르카나(arcana)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천적 인간이 어떤 상태인지를 알지 못하였고, 영적 인간이 어떤 상태인지조차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무지로 인해, 사람들은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을 동일시하였으나, 그 둘 사이에는 사실 매우 큰 차이가 있으며, 이는 AC.81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일곱째 날에 관해서, 그리고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 또는 안식일(sabbath)이라는 사실에 관해서는, 주님 자신이 안식일이시라는 점에서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That the celestial man is the “seventh day,” and that the seventh day was therefore hallowed, and called the sabbath, are arcana which have not hitherto been discovered. For none have been acquainted with the nature of the celestial man, and few with that of the spiritual man, whom in consequence of this ignorance they have made to be the same as the celestial man, notwithstanding the great difference that exists between them, as may be seen in n. 81. As regards the seventh day, and as regards the celestial man being the “seventh day” or “sabbath,” this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 Lord himself is the sabbath; and therefore he says: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2:28) The son of man is Lord also of the sabbath (Mark 2:27),

 

이 말씀은 주님이 곧 사람 자신(man himself)이시며, 동시에 안식일 그 자체(the sabbath itself)이심을 뜻합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주님의 나라를 가리켜 안식일이라 하는데, 이 안식은 그분으로 말미암으며, 다른 말로는 영원한 평화와 쉼이라고 합니다. which words imply that the Lord is man himself, and the sabbath itself. His kingdom in the heavens and on the earth is called, from him, a sabbath, or eternal peace and rest.

 

[2] 여기서 다루고 있는 태고교회는, 그 이후에 있었던 모든 교회들 가운데서도 무엇보다 주님의 안식일이었습니다. 이후에 이어진 모든 주님의 가장 내적인 교회들 역시 안식일이며, 또한 거듭남을 거쳐 천적 상태가 된 모든 개인 역시 안식일입니다. 이는 그가 주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전에는 여섯 날의 싸움과 수고가 선행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유대교회에서 노동의 날들과 안식일로 대표, 즉 표상되었습니다. 그 교회에는 주님과 그의 나라를 표상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제정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같은 것이 광야에서 언약궤가 나아갈 때와 쉴 때로도 표상되었습니다. 언약궤가 광야에서 행진할 때는 싸움과 시험이, 쉴 때는 평화의 상태가 표상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언약궤가 나아갈 때에 모세는 말하기를,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is here treated of, was the sabbath of the Lord above all that succeeded it. Every subsequent inmost church of the Lord is also a sabbath; and so is every regenerate person when he becomes celestial, because he is a likeness of the Lord. The six days of combat or labor precede. These things were represented in the Jewish church by the days of labor, and by the seventh day, which was the sabbath; for in that church there was nothing instituted which was not representative of the Lord and of his kingdom. The like was also represented by the ark when it went forward, and when it rested, for by its journeyings in the wilderness were represented combats and temptations, and by its rest a state of peace; and therefore, when it set forward, Moses said:

 

35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말하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36궤가 쉴 때에는 말하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종족들에게로 돌아오소서 하였더라 (민10:35, 36) Rise up, Jehovah, and let thine enemies be scattered, and let them that hate thee flee before thy faces. And when it rested, he said, Return, Jehovah, unto the ten thousands of the thousands of Israel (Num. 10:35–36).

 

또한 언약궤에 관하여는, 그것이 여호와의 산에서 나아가 그들을 위하여 쉴 곳을 찾았다고 합니다. (10:33) It is there said of the ark that it went from the Mount of Jehovah “to search out a rest for them” (Num. 10:33).

 

그들이 여호와의 산에서 떠나 삼 일 길을 갈 때에 여호와의 언약궤가 그 삼 일 길에 앞서가며 그들의 쉴 곳을 찾았고 (10:33)

 

[3] 천적 인간의 안식은 이사야에서 안식일로 묘사됩니다. The rest of the celestial man is described by the sabbath in Isaiah:

 

13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14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58:13, 14) If thou bring back thy foot from the sabbath, so that thou doest not thy desire in the day of my holiness, and callest the things of the sabbath delights to the holy of Jehovah, honorable; and shalt honor it, not doing thine own ways, nor finding thine own desire, nor speaking a word; then shalt thou be delightful to Jehovah, and I will cause thee to be borne over the lofty things of the earth, and will feed thee with the heritage of Jacob (Isa. 58:13–14).

 

이와 같이 천적 인간의 성질은 자기 자신의 욕망을 따라 행하지 않고, 주님의 선하신 기쁨을 따라 행하는 데 있으며, 그것이 곧 그의 욕망(desire)입니다. 이로 인해 그는 내적인 평화와 행복을 누리는데, 이것이 여기서는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being uplifted over the lofty things of the earth)로 표현되었고, 동시에 외적인 평온과 기쁨도 누리게 되는데,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being fed with the heritage of Jacob)라는 말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Such is the quality of the celestial man that he acts not according to his own desire, but according to the good pleasure of the Lord, which is his “desire.” Thus he enjoys internal peace and happiness—here expressed by “being uplifted over the lofty things of the earth”—and at the same time external tranquility and delight, which is signified by “being fed with the heritage of Jacob.”

 

 

해설

 

이 글은 창세기 2장의 안식 사상이 어디까지 확장되는지를 보여 주는, 매우 밀도 높은 정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천적 인간 = 일곱째 날 = 안식일’이라는 등식을 단순한 해석 차원이 아니라, ‘지금까지 인류에게 드러나지 않았던 아르카나’라고 선언합니다. 다시 말해, 이 내용은 새로운 교리를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말씀 속에 이미 들어 있었으나 아무도 보지 못했던 구조를 드러내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지금까지 교회는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을 거의 구분하지 못해 왔고, 그 결과 신앙 중심의 상태를 곧 완성 상태로 오해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AC.81에서 이미 보았듯이,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신앙이 중심인 상태와 사랑이 중심인 상태는,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해 보일 수 있지만, 내적 질서는 전혀 다릅니다. 이 차이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안식일의 본질 역시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안식의 본질을 주님 자신에게서 찾습니다. 주님이 곧 안식일이시라는 말은, 안식이 어떤 규범이나 제도가 아니라 ‘인격적 실재’임을 뜻합니다. 주님이 안식일의 주인이시라는 말씀은, 주님이 인간의 참된 안식이시며, 동시에 참된 인간의 형상이시라는 뜻을 내포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주님이 곧 ‘사람 자신’이며 ‘안식일 그 자체’라고까지 말합니다. 안식은 주님과 분리된 어떤 상태가 아니라, 주님과의 일치 안에서만 가능한 상태입니다.

 

이로부터 중요한 확장이 일어납니다. 주님의 나라는 ‘안식일’이라 불리며, 이는 영원한 평화와 안식을 뜻합니다. 안식은 시간의 하루가 아니라, ‘존재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태고교회는 그 이후의 어떤 교회보다도 주님의 안식일이었다고 합니다. 이는 그들이 도덕적으로 더 완벽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삶의 중심이 사랑과 퍼셉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후에 등장한 모든 가장 내적인 교회들, 그리고 거듭남을 거쳐 천적인 상태에 이른 각 개인 역시 이름하여 안식일이라 합니다. 이는 그가 주님의 형상, 곧 주님의 안식을 담는 그릇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안식은 갑자기 주어지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말합니다. 엿새 동안의 싸움과 수고가 선행한다고 말입니다. 이는 앞서 반복적으로 강조된 질서입니다. 영적인 단계의 싸움과 선택, 유혹과 투쟁 없이는 천적인 안식이 오지 않습니다. 안식은 싸움을 회피한 결과가 아니라, ‘싸움을 통과한 결과’입니다.

 

이 구조는 유대교회의 제도 안에 표상으로 새겨져 있었습니다. 육일 간의 노동과 안식일의 구분은 단순한 사회 질서가 아니라, 인간 내적 상태의 상응이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유대교회에 제정된 것 가운데 주님과 그의 나라를 표상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고 단언합니다. 즉, 안식일 계명은 외적 순종을 요구하기 위한 규정이 아니라, ‘인간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가리키는 표지’였습니다.

 

이 표상은 광야에서 언약궤의 움직임에서도 반복됩니다. 언약궤가 나아갈 때는 싸움과 시험이 표상되고, 쉴 때는 평화의 상태가 표상됩니다. 모세의 두 기도는 이 두 상태를 정확히 가릅니다. 나아갈 때에는 원수들이 흩어지기를 구하고, 쉴 때에는 여호와께서 백성 가운데로 돌아오시기를 구합니다. 싸움의 때와 안식의 때가 분명히 구분되어 있으며, 그 중심에는 언제나 주님의 임재가 있습니다.

 

언약궤가 ‘쉴 곳을 찾으러’ 나아갔다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싸움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안식을 찾기 위한 여정’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인간의 영적 여정 전체를 요약하는 말과도 같습니다. 유혹과 시험은 목적이 아니라 과정이며, 그 끝에는 반드시 쉼이 있습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이사야를 통해 천적 인간의 안식을 한층 더 내적으로 묘사합니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단순히 행위를 멈추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욕망’을 멈추는 것입니다. 자기 길, 자기 기쁨, 자기 말을 내려놓는 것이 안식의 본질입니다. 이는 금욕이나 억압이 아니라, ‘중심의 이동’입니다. 자기 자신이 중심에서 물러나고, 주님의 기쁨이 중심에 놓일 때, 비로소 안식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천적 인간은 자기 욕망을 따라 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가 무욕(無慾)의 사람이라는 건 아닙니다. 그의 욕망 자체가 주님의 선하신 기쁨과 일치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천적 자유입니다. 그는 억지로 자기 뜻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의 뜻이 이미 주님의 뜻 안에서 형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상태에서 그는 두 가지를 동시에 누립니다. 하나는 내적 평화와 행복이며, 다른 하나는 외적 평온과 기쁨입니다. 이사야에서 말하는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는 내적 상승을,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는 말은 외적 삶의 안정과 충만을 뜻합니다. 천적 안식은 내면과 외면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둘을 하나로 엮습니다.

 

AC.85는 이렇게 해서 안식일을 도덕규범이나 종교 의무에서 해방, ‘인간 완성의 상태’로 되돌려 놓습니다. 안식은 멈춤이 아니라, 가장 깊은 일치이며, 가장 충만한 생명입니다. 그리고 그 안식은 주님 자신으로부터 오며, 주님을 닮아갈수록 인간 안에서 실제가 됩니다.  

 

 

심화

 

1.2:28

 

 

AC.85, 심화 1, ‘막2:28’

AC.85.심화 1. ‘막2:28’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막2:28) The son of man is Lord also of the sabbath (Mark 2:27), 이 구절, 막2:28은 AC.85의 맥락에서 아주 결정적인 열쇠 역할을 합니다. 먼저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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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5-36

 

 

AC.85, 심화 2, ‘민10:35-36’

AC.85.심화 2. ‘민10:35-36’ 35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말하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36궤가 쉴 때에는 말하되 여호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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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0:33

 

 

AC.85, 심화 3, ‘민10:33’

AC.85.심화 3. ‘민10:33’ 그들이 여호와의 산에서 떠나 삼 일 길을 갈 때에 여호와의 언약궤가 그 삼 일 길에 앞서가며 그들의 쉴 곳을 찾았고 (민10:33) 이 구절, 민10:33은 AC.85의 흐름에서 매우 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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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8:13-14

 

 

AC.85, 심화 4, ‘사58:13-14’

AC.85.심화 4. ‘사58:13-14’ 13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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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아르카나가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이유

 

 

AC.85, 심화 5, ‘아르카나가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이유’

AC.85.심화 5. ‘아르카나가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이유’ 본문 중,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seventh day)이며, 그러므로 일곱째 날이 거룩하게 구별되어 안식일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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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4, 창2:2-3, 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seventh day)(AC.84-88)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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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25, ‘면류관 벗어서’, 찬69, ‘온 천하 만물 우러러입니다.

 

오늘은 2 첫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1절로 3, AC 글 번호로는 82번에서 84번입니다만, 2 여는 글들 및 개요 글들 포함, 67번부터 다루겠습니다. 여기 여는 글들은 아래 71번 글을 참고하세요.

 

본문 함께 읽습니다.

 

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2:1-3)

 

이 본문을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천적 인간의 시작

 

이라는 제목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시티아(Arcana Coelestia) 본문 및 해설, 그리고 심화 리딩 주일설교 시작합니다.

 

 

 

AC.67, 창2, '말씀의 내적 의미(속뜻)를 알게 하시고, 알리게 하심'

AC.67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저에게는 말씀의 내적 의미(the internal meaning of the Word, 속뜻)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그 내적 의미 안에는 이전에는 누구에게도 알려진 적이 없었고,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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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8, 창2, '이 책에 대한 사람들의 예상 반응'

AC.68 저는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영들과, 그리고 천사들과 말할 수 없다고 할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 많은 이들은 이것이 모두 상상이라고 할 것이며,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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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9, 창2, '사람은 본래 영들, 그리고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

AC.69 사람은 본래 주님에 의해 이렇게 창조되었습니다. 곧,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영들과, 그리고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실제로 태곳적에는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왜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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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0, 창2, ‘소생’, 곧 ‘영원한 삶’(the life of eternity)으로 들어갈 때

AC.70 여러 해 동안 제가 듣고 보았던 것을 밝히는 것이 저에게 허락되었으므로, 여기에서는 먼저 사람이 ‘소생될 때’(when he is being resuscitated), 곧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the life of eter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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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1, 창2, 'AC 전개 방식'

AC.71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말씀 본문 안에 들어 있는 내용들 사이에 그대로 끼워 넣게 되면, 그것들은 흩어지고 서로 연결되지 않게 될 것이므로,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그것들을 각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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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2, 창2, '이런 방식을 이 장 끝에서부터 적용'

AC.72 그러므로 이 장의 끝에서,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져 영원한 삶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지를 말해도 좋다는 허락을 저는 받았습니다. At the end of this chapter, accordingly, I am allowed to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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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3, 창2:1-17 개요,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1절)

창2:1-17 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army of them.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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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4, 창2:1-17 개요, '일곱째 날과 안식, 천적 인간'(2-3절)

AC.74 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십니다. (2-3절) The celestial man is the seventh day, on which the Lord rests (verses 2–3).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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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5, 창2:1-17 개요, '초목과 채소, 천적 인간의 내적 구조'(5-6절)

AC.75 그의 지식과 그의 이성(knowledge and rationality, [scientificum et rationale ejus])은 안개에 의해 적셔지는 땅에서 난 초목과 채소(the shrub and the herb)로 묘사됩니다. (5-6절) His knowledge and his rationality [sci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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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6, 창2:1-17 개요, ‘생명의 숨, 천적 인간의 생명'(7절)

AC.76 그의 생명은 그에게 ‘생명의 숨’(the breath of lives)을 불어넣으신 것으로 묘사됩니다. (7절) His life is described by the breathing into him of the breath of lives (verse 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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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7, 창2:1-17 개요, '동방의 에덴동산, 천적 인간의 지성'(8-9절)

AC.77 그다음으로 그의 지성은 ‘동방의 에덴동산’으로 묘사됩니다. 그 안에서 ‘보기에 아름다운’ 나무들은 진리에 대한 퍼셉션들이고, ‘먹기에 좋은’ 나무들은 선에 대한 퍼셉션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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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8, 창2:1-17 개요, '네 강, 천적 인간의 속 사람과 겉 사람'(10-14절)

AC.78 지혜(Wisdom)는 동산 가운데 있는 강을 의미합니다. 그로부터 네 강이 나뉘어 나오는데, 첫째는 선과 진리(good and truth)입니다. 둘째는 모든 선과 진리, 곧 사랑과 신앙에 관한 지식(knowledge [cog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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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9, 창2:1-17 개요, '경작하며 지킴, 천적 인간의 상태'(15절)

AC.79 천적 인간은 이러한 동산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 동산은 주님의 것이므로, 이 사람은 이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은 허락되지만, 그것들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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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0, 창2:1-17 개요, '천적 인간은 오직 퍼셉션으로만'(16-17절)

AC.80 그는 또한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하여 무엇이 선하고 참된지를 아는 지식 얻는 것은 허락됩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얻어서는 안 되며, 감각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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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1, 창2:1-17 배경, '천적 인간,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최종 상태'

AC.81 이 장은 ‘천적 인간’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앞의 장은 ‘죽은 상태에 있던 사람으로부터 형성된 영적 인간’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천적 인간, 영적 인간이 무엇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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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2, 창2: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AC.82-83)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army of them. (창2:1) AC.82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사람이 이제 영적 상태에 이르러(render) ‘여섯째 날’(the sixth day)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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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3, 창2:1, ‘다 이루어지니라’, 천적 인간의 시작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창2:1) AC.83 ‘천지와 만물’(heavens and the earth and all the army of them)이 ‘다 이루어지니라’(finished)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여섯째 날’(sixth day)이 되었을 때입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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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4, 창2:2-3, 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seventh day)(AC.84-88)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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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최근 개신교 어느 교회 예배에 참석, 오랜만에 참 익숙하지만, 그러나 무척 낯설었던 시간을 가졌는데요, 참 익숙했던 건, 제가 개신교에서 50대 후반까지 머물렀었기 때문이고, 또 무척 낯설었던 건 예배와 설교 전반에 아르카나, 즉 ‘속의 언어’가 아닌, 세상 언어, 곧 ‘겉의 언어’가 많이 섞인 예배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제가 아르카나를 처음 접하던 초창기처럼 무슨 반감이 들거나 그러진 않았는데요, 스베덴보리가 죽는 날까지 자신의 배경인 루터교회를 출석했던 거나 주님이 안식일마다 유대교 회당을 찾으셨던 것처럼, 저 역시 전심으로 그 예배에 참여, 함께 손을 들어 주님을 찬양하고, 말씀에 귀 기울이며, 함께 웃고 즐거워했습니다. 전체적으로 두 세계의 언어가 섞인 예배였지만, 속으로 실시간 통역을 하면서 ‘, 이걸 이렇게, 저걸 저렇게 표현한 거구나!’ 하면서 드렸습니다. 우리 안에 와있는 천사들 역시 우리의 일상 일거수일투족 중 그렇겠구나 싶었습니다.

 

이 아르카나 순도 8, 90%의 예배는 지상에서는 정말 쉽지 않습니다. 100%는 천국에서나 가능하겠지요. 어쩌면 주님이 훗날을 위해 미리 우리 교회를 통해 이것저것 테스트를 진행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과 ‘’은 같이 갑니다. ‘’은 ‘’이라는 그릇에 담기며, ‘’이라는 옷을 입고 생활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살아있는 동안 자연적 인간과 영적, 천적 인간 역시 같이 갑니다. 우리의 영적, 천적 인간은 겉으로 보기엔 ‘자연적 인간’으로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쉽진 않으시겠지만, 항상 이 ‘균형’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4-12(D1)

 

2646, 1, 창2.1, 2026-04-12(D1)-주일예배(창2,1-3, AC.67-84),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천적 인간의 시작.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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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4/05, 창1:26-31, AC.51-66, 부활절), '거듭남 여섯 번째 상태 (3), 주님의 부활로 본 창1'

※ 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24, ‘왕 되신 주’, 찬230, ‘우리의 참되신 구주시니’, 찬161, ‘할렐루야 우리 예수’입니다. 오늘은 창1 일곱 번째, 창1 마지막 시간으로, 본문은 26절로 31절,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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