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 전에라도 예수 믿으면 천국 가는 거 아닌가.’ 많은 개신교인에게 이 질문의 답은 거의 당연하게 ‘그렇다’일 것입니다. 평생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거나 심지어 큰 죄를 지으며 살았더라도 죽기 직전 진심으로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십자가에 달린 강도입니다. 그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예수님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했고, 주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23:42-43). 그렇다면 이 본문이 ‘죽기 5분 전이라도 예수 믿으면 천국에 간다’는 교리를 확증하는 것일까요?

 

먼저 아주 중요한 것은 ‘임종 직전에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반대편의 또 다른 교리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구원은 인간이 정한 시간표에 갇히지 않습니다. 사람이 마지막 순간에 주님을 향하여 진실하게 돌아설 가능성을 우리가 부정할 수도 없습니다. 특히 우리는 어떤 사람의 내면에서 평생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겉으로는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살았던 것처럼 보여도 그 안에 어떤 선과 진리가 보존되어 있었는지, 마지막 순간 어떤 내적 변화가 일어났는지는 주님만 아십니다. 따라서 ‘너무 늦었다’고 인간이 선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전혀 다른 질문이 생깁니다. ‘마지막 순간 진실한 회심이 가능하다’는 것과 ‘평생 어떻게 살았든 죽기 직전에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면 자동으로 천국에 간다’는 것은 같은 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후자의 생각은 구원을 마치 임종 직전에 사용할 수 있는 마지막 비상카드처럼 만들어 버립니다. 평생 자기 사랑과 탐욕과 미움과 거짓을 사랑하며 살아도 마지막 순간 특정한 신앙고백만 하면 그 사람의 영원한 상태가 즉시 반전된다는 생각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지배적 사랑’(ruling love)입니다. 사람은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선택을 통하여 자신이 무엇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인지를 형성해 갑니다. 선을 알고도 계속 악을 선택하고, 그 악을 즐기고 정당화하며 반복한다면 그것은 점차 그 사람의 의지와 사랑의 일부가 됩니다. 반대로 넘어지고 실패하더라도 악을 죄로 여기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고 다시 선을 향한다면 그 사람 안에서는 다른 방향의 사랑이 형성됩니다. 사후에 드러나는 것은 단순히 ‘마지막으로 무슨 말을 했는가?’가 아니라 자연계의 삶을 통하여 실제로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입니다.

 

이 때문에 임종 직전의 회개를 생각할 때 ‘말’과 ‘내면의 변화’를 구별해야 합니다. 죽음이 눈앞에 다가오면 누구라도 두려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 살려 주세요’, ‘예수님 믿겠습니다’, ‘제 죄를 용서해 주세요’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 기도를 무가치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형벌을 피하고 싶어 하는 것과 악 자체를 미워하여 주님께 돌아서는 것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입술의 고백이 순간적으로 가능하다고 해서 수십 년 동안 자유롭게 형성해 온 사랑의 방향까지 반드시 그 순간 바뀌었다고 인간이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의 강도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리는 그 사람의 전 생애를 모릅니다. 성경도 그의 생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마지막 장면뿐입니다. 그런데 그 짧은 장면에서도 한 가지 중요한 차이가 나타납니다. 다른 행악자는 예수님을 비방하며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하지만, 이 사람은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고 말합니다(눅23:39-41). 그는 자신의 악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주님의 무죄함을 인정하며, 주님의 나라를 인정하고 자신을 주님께 맡깁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을 단순히 ‘마지막 순간에 예수 믿는다는 말 한마디를 해서 천국에 갔다’고 축소하면 오히려 본문에 나타난 강도의 내적 태도를 놓칠 수 있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그 강도의 내면을 완전히 알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위에서 그가 한 몇 마디만 듣지만 주님께서는 그의 전 생애와 내면을 보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신 말씀은 ‘누구든지 죽기 직전에 이와 비슷한 문장을 말하면 동일한 결과를 얻는다’는 구원 공식을 제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볼 수 없는 한 사람의 내면까지 완전히 아시는 주님께서 그 사람의 상태를 보시고 하신 말씀이라고 이해하는 편이 더 깊습니다.

 

이것은 포도원 품꾼의 비유와도 연결됩니다. 어떤 사람은 아침부터 일했고 어떤 사람은 거의 일이 끝날 무렵 들어왔지만 모두 한 데나리온을 받았습니다(마20:1-16). 주님의 은혜는 ‘너는 너무 늦었다’며 문을 닫지 않습니다. 인생의 황혼에 주님을 만난 사람이라고 해서 젊어서부터 신앙생활을 한 사람보다 구원에서 불리하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늦게 온 품꾼은 포도원 밖에 그대로 있으면서 품삯만 요구한 것이 아닙니다. 늦게라도 주인의 부름을 받고 포도원으로 들어왔습니다. 중요한 것은 ‘몇 시에 불렸느냐’만이 아니라 부름에 응답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문제는 회심의 ‘시각’보다 회심의 ‘실재’입니다. 열 살에 주님을 믿었다고 해서 자동으로 천국에 적합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여든 살에 주님을 알았다고 해서 너무 늦은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달력상의 날짜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입니다. 다만 자연계의 삶이 중요한 까닭은 바로 이곳에서 우리의 사랑이 선택과 행동을 통하여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기 전에만 믿으면 되지’라는 생각은 매우 위험합니다. 그것은 회개를 미래로 미루면서 오늘의 악을 계속 사랑해도 된다는 허가증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회개하면 되지’라는 생각에는 또 하나의 함정이 있습니다. 우리는 미래의 내가 무엇을 사랑하게 될지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악을 반복할수록 그 악은 습관이 되고, 습관은 성향이 되며, 성향은 점차 사랑의 일부가 됩니다. 젊어서 평생 자기만을 위해 살다가 죽기 직전에 마음속 스위치를 한 번 눌러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겠다고 계획할 수는 없습니다. 거듭남(regeneration)은 주님께서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rationality)을 보존하시면서 사람의 사랑과 삶의 질서를 변화시키시는 실제적인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러면 임종 직전 회개는 가짜라는 말인가?’라는 반론도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마지막 순간의 주님을 향한 돌이킴이 그 사람의 내면에 오래 보존되어 있던 선과 진리가 마지막에 드러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리메인스’(remains), 곧 주님께서 사람 안에 보존하시는 선과 진리의 상태를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눈에는 평생 하나님과 멀리 살았던 사람처럼 보여도 주님께서는 우리가 전혀 알지 못했던 내면의 역사를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임종의 회개를 가볍게 여겨서도 안 되고, 그것을 기계적인 구원 공식으로 만들어서도 안 됩니다.

 

이 원리는 앞서 이야기했던 자살한 사람의 장례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우리는 사람의 마지막 몇 분만 보고 그 사람의 영원한 상태를 판정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 행동 하나 때문에 ‘지옥에 갔다’고 단정해서도 안 되고, 마지막 고백 한마디 때문에 ‘틀림없이 천국에 갔다’고 단정해서도 안 됩니다. 두 경우 모두 인간이 볼 수 있는 마지막 장면 하나를 가지고 주님만이 보실 수 있는 한 사람의 전 생애와 내면을 판결하려는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마지막 순간은 중요하지만, 마지막 순간만이 그 사람 전체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할 때도 ‘지금 예수님을 영접하기만 하면 오늘 죽어도 천국 갑니다’라는 말만으로 구원을 설명하는 데에는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는 첫걸음이 될 수 있지만, 자칫 구원을 ‘죽은 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자격 확보’로 축소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목적은 단지 죽은 뒤 우리의 위치를 지옥에서 천국으로 변경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여기서 우리를 악에서 건져 내시고, 우리의 사랑을 변화시키시며,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천국적인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임종 전에라도 예수 믿으면 천국 가는 거 아닌가?’라는 질문에는 두 가지를 동시에 대답해야 합니다. ‘아무리 늦어도 주님께 돌아가기에는 늦지 않습니다.’ 이것은 복음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러니 지금은 어떻게 살아도 되고 마지막에 믿으면 됩니다’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주님의 자비에는 ‘너무 늦었다’는 시간이 없지만, 그 자비를 핑계로 오늘의 거듭남을 미루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결국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몇 분 전까지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는가?’가 아닙니다. 그런 시간의 경계선을 찾는 것 자체가 구원을 너무 외적으로 이해한 질문일 수 있습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오늘 주님께서 나를 부르고 계실 때 나는 왜 내일로 미루는가?’입니다. 주님은 임종의 순간에도 사람을 사랑하시지만, 바로 지금도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마지막 순간에도 주님께 진실하게 돌아설 가능성을 인간이 닫을 수는 없지만, 마지막 순간의 신앙고백 하나가 평생 자유롭게 형성해 온 사랑과 삶에 관계없이 자동으로 천국을 보장한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강도를 생각하며 더 짧게 말한다면 이것이겠습니다. ‘주님의 자비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 없지만, 그렇다고 회개를 마지막 순간까지 미루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SL.16, ‘한번 구원받으면 끝, 무슨 일이 있어도 구원은 유효한 거 아닌가’

‘한번 구원받으면 끝, 무슨 일이 있어도 구원은 유효한 거 아닌가.’ 이 말은 많은 개신교인에게 상당히 익숙합니다.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 혹은 영어로 ‘Once saved, always saved’라고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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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구원받으면 끝, 무슨 일이 있어도 구원은 유효한 거 아닌가.’ 이 말은 많은 개신교인에게 상당히 익숙합니다.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 혹은 영어로 ‘Once saved, always saved’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매우 귀중한 신앙적 확신이 들어 있습니다. 구원이 인간의 변덕스러운 감정이나 매일의 성적표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며, 주님께서 한번 붙드신 사람을 쉽게 버리시는 분도 아니라는 믿음입니다. 실제로 주님께서는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0:28). 그러므로 신자가 죄를 지을 때마다 ‘오늘 구원을 잃었나? 다시 구원받아야 하나?’ 하며 공포 속에서 살아가는 것도 건강한 신앙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문제는 여기에서 아주 작은 문장 하나가 덧붙을 때 생깁니다. ‘그러므로 이후에 어떻게 살아도 구원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이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아무도 주님의 손에서 나를 빼앗을 수 없다’와 ‘내가 끝까지 악을 사랑하고 그것을 선택하며 살아도 천국에 간다’는 같은 말이 아닙니다. 전자는 주님의 신실하심에 관한 말이고, 후자는 인간의 자유와 거듭남을 사실상 무의미하게 만드는 말입니다.

 

성경에는 구원의 확신을 주는 말씀과 함께 놀라울 정도로 많은 ‘끝까지’, ‘거하라’, ‘열매를 맺으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셨고(마24:13),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고 하셨습니다(요15:4). 특히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에서 주님은 이미 가지로 불리는 사람들에게 ‘내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울도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했습니다(빌2:12). 이런 말씀들은 구원이 인간의 공로로 유지된다는 뜻은 아니지만, 적어도 구원을 어느 과거 시점에 취득한 뒤 금고에 넣어 둔 증서처럼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문제가 훨씬 선명해집니다. 구원은 어떤 사람의 법적 신분만 바뀌는 사건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이 실제로 천국에 적합한 사람이 되어 가는 ‘거듭남’(regeneration)의 과정입니다. 주님께서 인간 안에 선과 진리를 심으시고, 인간은 주님에게서 받은 ‘자유’(freedom)와 ‘합리성’(rationality) 안에서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선을 선택합니다. 그 과정을 통하여 사람의 사랑 자체가 점차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핵심을 ‘내 이름이 구원자 명단에 올라갔는가?’로 생각하기보다 ‘나는 주님께서 나를 거듭나게 하시는 일을 받아들이고 있는가?’라고 묻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구원을 취소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마치 어떤 날 인간이 큰 죄를 지으면 주님께서 ‘네 구원은 오늘부로 취소한다’고 선언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끊임없이 인간을 천국으로 이끄십니다. 문제는 인간에게 자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자유를 없애고 강제로 선하게 만드신다면 그것은 더 이상 사랑도, 선도, 천국도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주님을 향할 수도 있고 주님에게서 돌아설 수도 있으며, 선을 반복하여 선택할 수도 있고 악을 자신의 사랑으로 만들어 갈 수도 있습니다.

 

이 점에서 ‘한번 구원받았으니 끝’이라는 표현에는 뜻밖의 위험이 숨어 있습니다. 그것이 ‘주님은 나를 끝까지 붙드신다’는 신뢰라면 아름다운 고백입니다. 그러나 ‘그러므로 이제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도 상관없다’는 안전보장이 된다면 ‘프로프리움’(proprium)이 신앙의 언어를 이용하기 시작합니다. ‘나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자기 규정이 현재 자신의 악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방패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움을 품고 살아도, 거짓을 일삼아도, 탐욕을 사랑해도, 다른 사람을 짓밟아도 ‘그래도 나는 30년 전에 예수님을 영접했고 구원받았다’고 한다면 구원의 확신이 오히려 회개를 막는 기묘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큰 죄를 한 번 지으면 구원을 잃는 것일까요? 이것 역시 아닙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한 번의 범죄와 그 사람의 ‘지배적 사랑’(ruling love)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것도 주님께서 붙잡히신 결정적인 순간에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실패가 그의 전 존재를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통곡했고 다시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다윗의 경우처럼 성경에는 심각한 악에 빠진 사람들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한번 넘어졌는가?’만이 아니라 그 악을 사랑하고 정당화하며 자신의 삶으로 만들었는가, 아니면 그것을 죄로 깨닫고 주님께 돌아섰는가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잃는다’는 표현 자체도 조심해서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치 지갑에 넣어 둔 구원증을 실수로 떨어뜨리는 것처럼 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더 본질적인 질문은 ‘나는 구원을 가지고 있는가, 잃어버렸는가?’보다 ‘나는 지금 어느 방향으로 내 사랑을 형성하고 있는가?’입니다. 천국은 외적으로 배정되는 장소이기 전에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의 질서이며, 지옥 역시 외부에서 억지로 던져지는 형벌의 장소이기 전에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지배하는 삶의 질서와 연결됩니다. 결국 사후에 드러나는 것은 과거 어느 날 내가 받은 자격증이 아니라 자연계의 삶을 통하여 내가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형성한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의 확신’은 없어지는 것일까요?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확신의 근거가 바뀝니다. ‘나는 그날 영접기도를 했으므로 무슨 일을 해도 안전하다’가 아니라 ‘주님께서는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며 오늘도 나를 악에서 건져 선으로 이끄신다. 그러므로 나는 그분을 신뢰하며 오늘도 그 인도를 따르겠다’가 됩니다. 전자의 확신은 과거의 사건을 붙들지만, 후자의 확신은 살아 계신 주님을 붙듭니다.

 

여기에는 아주 아름다운 역설이 있습니다. 주님은 인간을 끝까지 붙드시지만 인간을 억지로 붙잡아 두시지는 않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지만 인간에게 주신 자유 역시 거두어 가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구원은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느냐, 사랑하지 않으시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은 언제나 구원을 원하십니다. 문제는 내가 그 사랑을 받아들이며 그분이 나를 변화시키시도록 허용하느냐입니다. 이것이 자유와 섭리가 만나는 자리입니다.

 

이 때문에 ‘끝까지 견디는 것’도 인간의 공로가 아닙니다. ‘나는 죽을 때까지 신앙을 잘 지켰으므로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거듭남 전체의 주체는 주님이십니다. 다만 주님께서는 인간을 돌이나 기계처럼 구원하지 않으시고, 인간이 자유롭게 주님의 선과 진리에 응답하도록 하십니다. 인간은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악과 싸우고 선을 행하지만, 그 싸움의 능력과 선의 근원이 주님에게 있음을 인정합니다.

 

따라서 ‘한번 구원받으면 끝, 무슨 일이 있어도 구원은 유효한 거 아닌가?’라는 질문에는 ‘주님의 사랑과 구원의 의지는 끝까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가 이후 어떤 악을 사랑하며 살아도 상관없다는 보증을 뜻하지는 않습니다’라고 답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께서는 구원을 취소하려고 인간의 실수를 기다리시는 분이 아니라 끝까지 인간을 구원하려 하시는 분입니다. 동시에 그분은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시므로, 인간이 일생 동안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선택하는가는 실제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내 구원은 아직 유효한가?’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오늘도 나를 구원하고 계실 때 나는 그분의 손길을 받아들이고 있는가?’입니다.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구원은 한번 발급받으면 어떤 삶을 살아도 효력이 유지되는 자격증이 아니라, 끝까지 우리를 붙드시는 주님을 자유롭게 받아들이며 실제로 천국에 적합한 사람으로 거듭나 가는 삶입니다.’

 

그리고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말을 꼭 살려서 표현한다면 저는 이렇게 바꾸고 싶습니다. ‘한번 구원하신 주님이 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주님의 구원을 끝까지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의 거듭남입니다.’

 

 

 

SL.15, ‘예수님을 영접했으니 나는 구원받은 거 아닌가’

‘예수님을 영접했으니 나는 구원받은 거 아닌가’ - 한 번의 영접과 일생의 거듭남 이 말에는 분명 복음의 중요한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기독교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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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영접했으니 나는 구원받은 거 아닌가’ - 한 번의 영접과 일생의 거듭남

 

이 말에는 분명 복음의 중요한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입니다. 요한복음도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 자체를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문제는 ‘영접’의 의미를 어느 순간 드린 기도나 입술의 고백 하나로 축소하고, 그때부터 자신의 영원한 구원이 이미 확정되었다고 이해할 때 생깁니다. 성경에서 주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훨씬 더 깊고 삶 전체에 걸친 일입니다.

 

한국 개신교에서는 흔히 ‘예수님을 마음속에 영접하셨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주 예수님, 저는 죄인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합니다’라고 기도했다면 그 날짜를 자신의 구원받은 날로 기억하기도 합니다. 그런 기도는 매우 귀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한 사람이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돌아서서 주님을 향하기 시작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특정한 형식의 ‘영접기도’를 한 번 했다는 사실 자체를 영원한 구원의 보증서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영접기도는 주님을 향한 삶의 ‘시작’이 될 수 있지만, 그 기도 자체가 거듭남(regeneration)의 전 과정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은 오히려 우리를 더 깊은 곳으로 데려갑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여기에서 주님은 입술로 주님을 인정하는 것과 실제로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구별하십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다음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까지 행했다고 말합니다. 단순히 불신자들이 아닙니다. 주님의 이름을 알고 주님의 이름으로 종교적인 일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그들의 ‘삶’을 문제 삼으십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문제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구원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장부에서 죄인의 신분을 의인의 신분으로 바꾸어 놓으시는 외적 법적 선언에 그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실제로 사람을 변화시키십니다. 인간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자신의 삶 속에서 선을 행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이 ‘거듭남’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말도 결국 주님께서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나의 사랑과 생각, 행동을 새롭게 하시도록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의 유명한 말씀도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이 말씀도 흔히 영접기도의 근거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원래 문맥을 보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대상은 예수를 전혀 모르는 불신자가 아니라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이미 자신을 신앙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문 밖에 주님께서 서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당히 의미심장합니다. ‘나는 이미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도 주님께서는 여전히 문을 두드리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입술로는 주님을 영접했지만 삶의 어떤 방들은 여전히 열어 드리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믿습니다. 그러나 돈 문제는 제가 원하는 대로 하겠습니다. 주님은 사랑합니다. 그러나 저 사람만은 미워할 권리가 있습니다. 성경은 믿습니다. 그러나 내 욕망을 건드리는 말씀은 따르고 싶지 않습니다.’ 이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영접했다는 과거의 고백과 현재 내가 실제로 주님께 내어 드리고 있는 삶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생깁니다.

 

바로 여기에서 ‘프로프리움’(proprium)의 아주 미묘한 형태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나는 30년 전에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러므로 나는 구원받았다.’ 처음에는 주님을 의지하는 신앙고백이었던 것이 어느 순간 자기 자신이 소유한 ‘구원 자격증’처럼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지, 어떤 악을 붙들고 있는지, 이웃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는 부차적인 문제가 됩니다. 심지어 삶이 주님의 말씀과 반대 방향으로 흘러가도 ‘그래도 나는 구원받은 사람이야’라는 확신이 자기 성찰을 막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을 향했던 믿음이 역설적으로 자기 확신을 지키는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그러므로 행위를 많이 해야 구원받는다’는 말로 바꾸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선행을 쌓아 천국 입장권을 얻는 과정이 아닙니다. 선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사람이 할 일은 주님께서 주시는 ‘자유’(freedom)와 ‘합리성’(rationality) 안에서 악을 죄로 알고 물리치며 주님께서 주시는 선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람은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지만, 참된 신앙 안에서는 그 힘과 선의 근원이 주님에게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냐 행위냐’의 단순한 양자택일보다 ‘주님에게서 받은 믿음이 실제 삶에서 어떤 사랑과 행위가 되었는가’를 묻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야고보가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2:17)고 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행위가 믿음에 추가되어 구원의 점수를 높여 주기 때문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믿음이라면 삶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사과나무가 사과를 맺는 것은 사과를 달아서 사과나무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그 생명이 나무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참으로 받아들인 믿음은 체어리티(charity), 곧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이 이웃을 향한 선과 유용한 일로 나타나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영접했으니 나는 구원받은 거 아닌가?’라는 질문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과거형 ‘영접했으니’일지도 모릅니다. 성경적 신앙은 ‘언젠가 주님을 영접했는가?’뿐 아니라 ‘오늘도 주님을 영접하고 있는가?’를 묻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내 미움을 보여 주실 때 그것을 내려놓는 것, 내 거짓을 드러내실 때 인정하는 것, 내 욕심과 교만을 말씀으로 비추실 때 돌이키는 것, 그리고 이웃에게 해야 할 선을 보여 주실 때 행하는 것, 이것 역시 주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접은 한 번의 사건인 동시에 일생에 걸친 과정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구원의 확신을 없애자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내가 충분히 거듭났나? 선행을 충분히 했나? 이 정도면 천국에 갈 수 있나?’ 하며 끊임없이 자기 상태를 측정하는 것도 결국 시선이 주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머무는 또 다른 형태가 될 수 있습니다. 구원의 소망은 내가 몇 점짜리 그리스도인이 되었느냐에 있지 않고 나를 끝까지 거듭나게 하시는 주님께 있습니다. 다만 그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주님께서 나를 구원하실 테니 나는 변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변화시키시는 일을 나는 거부하지 않겠다’는 신뢰를 포함합니다.

 

결국 질문은 ‘나는 언제 영접기도를 했는가?’에서 한 걸음 더 깊어져야 합니다. ‘내가 영접했다고 고백한 그 주님께서 지금 내 삶을 실제로 다스리고 계시는가? 나는 주님께서 악이라고 하시는 것을 악으로 여기고 있는가?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나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입니다. 여기에서 구원은 과거 어느 날 받은 증명서가 아니라, 주님과의 살아 있는 결합이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영접했으니 나는 구원받은 거 아닌가?’라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것은 구원의 길에 들어서는 너무나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한 번 입술로 그분을 받아들였다고 고백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선과 진리를 내 삶 안으로 계속 받아들이며 그분이 나를 실제로 변화시키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참된 영접은 한 번의 기도로 주님을 내 구원자로 선언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일생의 거듭남을 통하여 주님이 내 사랑과 삶의 주인이 되시도록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짧게 말한다면 이것이겠습니다. ‘구원은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는 과거의 기억보다, 내가 영접한 주님께서 지금 나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어 가고 계시는가의 문제입니다.’

 

 

 

SL.16, ‘한번 구원받으면 끝, 무슨 일이 있어도 구원은 유효한 거 아닌가’

‘한번 구원받으면 끝, 무슨 일이 있어도 구원은 유효한 거 아닌가.’ 이 말은 많은 개신교인에게 상당히 익숙합니다.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 혹은 영어로 ‘Once saved, always saved’라고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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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14, ‘시댁이, 처가가 이단이지만 그래도 나는 내 할 도리는 다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돼’

‘시댁이, 처가가 이단이지만 그래도 나는 내 할 도리는 다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돼’ - 진리를 지키면서 가족을 사랑한다는 것 이 말에는 앞의 경우와는 상당히 다른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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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2026/10/25)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9, ‘찬송하는 소리 있어’, 찬132, ‘주의 영광 빛나니’입니다.

 

오늘은 창5 절별 주석 그 세 번째, 15절로 20절, AC 글 번호로는 510번에서 515번입니다. 먼저 창세기 본문입니다.

 

 

15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16야렛을 낳은 후 팔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7그는 팔백구십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18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19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0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15-20)

 

 

제목은

 

마할랄렐, 야렛, 에녹

 

 

이며, 다음은 이 특별한 AC 본문 리딩 예배를 위한 ‘3분 요약’입니다.

 

오늘 리딩에 들어가기 전에, 지금까지의 큰 흐름을 잠깐 돌아보겠습니다. 우리는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라틴 Arcana Coelestia, 영어 Secrets of Heaven, 天界秘義, 1749–1756,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속뜻 주석, 총 10,837개 글)를 따라 창세기의 문자적 의미를 존중하면서 그 속뜻을 함께 읽고 있습니다.

 

창1에서는 천지창조를 인간의 거듭남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여섯 날의 과정을 통하여 사람을 영적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일곱째 날의 안식에 이르러 사랑으로 살아가는 천적 인간으로 이끄십니다.

 

창2에서는 에덴동산을 통하여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알아차리는 ‘퍼셉션’(perception)을 지녔으며, 신앙은 사랑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창3에서는 사람이 주님보다 자신의 감각과 ‘프로프리움’(proprium)을 신뢰하면서 이 질서가 무너졌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인간이 더 깊은 파멸에 이르지 않도록 보호하시며 구원의 길을 보존하셨습니다.

 

창4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charity)의 관계를 살펴보았습니다. 가인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가인의 계열은 라멕에 이르러 황폐해졌지만, 주님께서는 ‘가인의 표’를 통하여 신앙 자체가 완전히 소멸하지 않도록 보존하셨습니다. 또한 셋과 에노스를 통하여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가 다시 이어지게 하셨습니다.

 

창5에서는 아담에서 노아까지의 족보가 단순한 개인들의 출생과 죽음이 아니라,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진 여러 교회의 계승과 상태 변화를 나타낸다는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최초의 태고교회에서 셋과 에노스, 게난으로 이어지면서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알아차리던 퍼셉션은 점차 덜 명료하고 더욱 일반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지난주에는 이러한 쇠퇴가 단지 인식 능력의 약화가 아니라, 사랑과 선한 쓰임의 생명이 약해지는 것과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마할랄렐과 야렛, 그리고 에녹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읽습니다. 특히 마할랄렐 교회에서는 ‘쓰임에서 오는 기쁨보다 진리를 아는 기쁨을 더 좋아하는’ 변화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야렛을 거쳐 에녹에 이르러서는 이전 교회들이 퍼셉션했던 것들을 교리로 보존하여 후대에 전할 길이 준비됩니다.

 

오늘 특별히 기억할 것은 ‘진리를 아는 기쁨은 선을 행하는 기쁨을 섬겨야 하며, 인간의 내적 상태가 약해지는 가운데서도 주님께서는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고 다음 길을 준비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마음으로 오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다음은 오늘 리딩 범위인 AC.510-515 요약입니다.

 

지난주 우리는 창5:6-14, AC.496-509를 통하여 셋에서 에노스로, 에노스에서 게난으로, 다시 게난에서 마할랄렐로 이어지는 태고교회 후속 교회들의 계승을 살펴보았습니다. 최초의 태고교회는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직접 알아차리는 ‘퍼셉션’(perception)을 지닌 천적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후속 교회들에 이르면서 퍼셉션은 점차 덜 명료해지고 더욱 일반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변화를 열매나 씨앗의 가장 안쪽 알맹이에서 그것을 둘러싼 막으로 나아가는 것에 비유하였습니다. 그리고 AC.503에서는 퍼셉션의 생명이 단순히 선과 진리를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함으로써 생기는 행복과 기쁨’에 있다는 중요한 가르침을 배웠습니다.

 

오늘은 그다음 말씀인 창5:15-20, AC.510-515를 읽습니다. 여기에는 마할랄렐이 야렛을 낳고, 야렛이 다시 에녹을 낳는 계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름과 나이, 자녀들의 출생과 죽음이 반복됩니다. 그러나 속뜻으로는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쇠퇴하는 과정에서 사랑과 쓰임의 생명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으며, 주님께서 그 가운데서도 어떻게 선과 진리를 보존할 길을 마련하셨는지를 보여 줍니다.

 

먼저 15절은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라고 합니다. AC.510에 따르면 ‘마할랄렐’(Mahalalel)은 다섯 번째 교회를, ‘야렛’(Jared)은 여섯 번째 교회를 의미합니다. 최초의 ‘사람’ 교회로부터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을 거쳐 이제 야렛이라는 또 하나의 교회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낳았다’는 것은 단순히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이 태어났다는 뜻이 아니라, 한 교회로부터 다음 교회가 이어져 나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계승은 앞선 교회의 상태가 다음 교회에 그대로 반복되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앞선 교회로부터 선과 진리가 이어지는 가운데서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내적 상태는 점차 달라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AC.511에서 마할랄렐 교회의 상태를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설명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퍼셉션 능력이 더욱 개별적이고 명료한 것에서 더욱 일반적이고 흐릿한 것이 되어 감에 따라 ‘사랑의 생명 또는 쓰임의 생명’도 마찬가지로 감소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랑의 생명 또는 쓰임의 생명이 어떠한가에 따라 퍼셉션 능력도 그러하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지난주 AC.503에서 배운 가르침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합니다. 퍼셉션은 사랑이나 쓰임과 별도로 존재하는 특별한 지적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선을 행하는 생명으로 살아 있을 때, 그 사랑과 선으로부터 무엇이 진리인지를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선으로부터 진리를 아는 것은 천적인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짧은 문장은 태고교회가 지녔던 천적 질서를 잘 보여 줍니다. 천적 인간은 먼저 진리를 많이 배운 뒤 그 진리를 통하여 선에 이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선을 사랑하는 생명이 먼저 있었으며, 그 선으로부터 무엇이 진리인지를 퍼셉션했습니다. 다시 말해 사랑과 선이 중심이고 진리는 그 사랑과 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최초의 태고교회가 지녔던 천적 생명의 질서였습니다.

 

그런데 마할랄렐 교회에 이르러 이 질서에 매우 미묘하면서도 중요한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AC.511은 마할랄렐 교회를 이루었던 사람들이 ‘쓰임에서 오는 기쁨보다 진리들에서 오는 기쁨을 더 좋아하는 상태’였다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사실을 저세상에서 그들과 같은 사람들을 경험함으로써 알게 되었다고 밝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들이 진리를 버리거나 거짓을 사랑한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진리를 알고 이해하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기쁨이 선을 행하고 이웃에게 쓰임이 되는 기쁨보다 앞서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겉으로 보면 매우 작은 변화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진리를 사랑하고 알아 가는 일은 분명 좋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적 질서에서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본래 진리는 선을 섬기고, 선은 사랑으로부터 나오며, 사랑은 실제 쓰임 가운데 생명이 됩니다. 그런데 진리를 아는 것 자체에서 얻는 기쁨이 그 진리로 선을 행하는 기쁨보다 더 커지면, 진리와 사랑 사이의 질서가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진리는 여전히 진리이지만 그것을 사랑하는 사람의 내적 상태가 변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경계하는 것은 ‘진리를 아는 기쁨’ 자체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더 사랑하는가’입니다. 진리를 배우는 목적이 주님을 더 깊이 알고, 무엇이 선인지 더 분명하게 이해하며, 이웃에게 더 지혜롭게 쓰임이 되기 위한 것이라면 그 기쁨은 선한 질서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아는 것 자체가 더 큰 목적이 되고 실제로 선을 행하는 일이 그 뒤로 밀려난다면, 진리가 사랑과 쓰임을 섬기는 본래의 질서는 약해지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변화는 퍼셉션이 왜 점차 흐려졌는지도 설명해 줍니다. 퍼셉션은 단순히 특별한 영적 감각이나 신비한 인식 능력이 아니라, 사랑과 선으로부터 진리를 알아보는 능력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쓰임의 생명이 약해지면 그 선으로부터 진리를 보는 능력도 함께 약해집니다. 마할랄렐 교회의 퍼셉션이 쇠퇴한 것은 단지 오랜 세월이 흘렀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무엇을 더 사랑하고 무엇에서 더 큰 기쁨을 느끼는가 하는 내적 질서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성경과 교리를 공부하는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말씀의 속뜻을 배우고, 상응을 이해하며,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깊이 공부하는 데서 큰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전에는 몰랐던 진리를 깨닫고 말씀의 깊은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앎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고 있는지는 살펴야 합니다. 진리를 더 많이 알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에서 만족하고 있는지, 아니면 그 진리로 인해 주님을 더 사랑하고 이웃에게 더 선한 쓰임이 되는 사람으로 변화하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진리를 많이 안다고 해서 반드시 그만큼 사랑이 깊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상응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고 해서 반드시 이웃을 더 따뜻하게 대하는 것도 아닙니다. 심지어 말씀에 관한 지식이 자신을 높이거나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진리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 진리를 대하는 우리의 사랑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진리를 주시는 목적은 단지 많은 것을 알게 하시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진리를 통하여 선을 분별하고, 선을 사랑하며, 실제로 이웃에게 선한 쓰임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배우면서 끊임없이 돌아보아야 할 것은 ‘얼마나 많이 알게 되었는가?’뿐 아니라 ‘이 진리로 인해 나는 어떤 선을 더 사랑하게 되었으며, 누구에게 어떤 쓰임이 되고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이제 16절과 17절에서는 마할랄렐이 야렛을 낳은 뒤 팔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고, 팔백구십오 세를 살고 죽었다고 합니다. AC.512는 이 말씀들의 의미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고 간단히 밝힙니다. 우리는 이미 ‘날들’과 ‘연수’가 교회의 때와 상태들을, ‘아들들과 딸들’이 그 교회에 속한 진리들과 선들을, ‘죽었다’는 말씀이 그 교회의 고유한 상태가 끝났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다만 같은 표현이 사용되더라도 각 교회가 지닌 진리와 선의 구체적인 어떠함은 그 교회의 내적 상태에 따라 달라집니다. 따라서 마할랄렐의 자녀들과 죽음 역시 앞서 AC.511에서 설명한 그 교회의 고유한 상태와 관련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 마할랄렐이 죽었다는 것은 마할랄렐 교회를 특징짓던 상태가 끝났음을 의미하지만, 그것이 모든 선과 진리의 완전한 소멸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이미 마할랄렐로부터 야렛이라는 다음 교회가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창5에서 반복되는 ‘낳음’과 ‘죽음’은 한 교회의 상태가 다음 교회로 이어지는 과정과 그 고유한 상태가 끝나는 과정을 함께 보여 줍니다.

 

이제 18절은 ‘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라고 합니다. AC.513에 따르면 야렛은 여섯 번째 교회를, ‘에녹’(Enoch)은 일곱 번째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에녹은 지금까지의 교회 계승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앞선 교회들에서는 퍼셉션이 어떻게 점차 쇠퇴했는가가 중심이었다면, 에녹에 이르러서는 그 퍼셉션으로부터 나온 것들이 어떻게 후대를 위하여 보존되는가 하는 새로운 문제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미 창5의 개요인 AC.464에서 에녹의 역할을 미리 밝혔습니다. 태고교회와 그 뒤를 이은 교회들이 퍼셉션했던 것들을 모아 교리로 만들었던 이들이 있었으며, 이것이 ‘에녹’이라는 이름으로 의미되었다는 것입니다. 최초의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을 사랑하고 선을 사랑하는 생명 안에서 무엇이 진리인지를 직접 퍼셉션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자신들이 퍼셉션한 진리를 따로 모아 교리로 정리하고, 그것을 배워서 진리를 알아 가는 방식이 중심적인 역할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후속 교회들에서 퍼셉션이 점차 흐려지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이전처럼 선으로부터 진리를 직접 퍼셉션할 수 없는 상태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앞선 교회들이 퍼셉션했던 선과 진리는 어떻게 되어야 하겠습니까? 그것들이 함께 사라져 버린다면 후대의 사람들은 무엇을 통하여 진리를 배울 수 있겠습니까? 바로 이러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에녹의 역할이 나타납니다. 이전 교회들이 퍼셉션했던 것들을 모아 교리로 만들고 후대를 위하여 보존하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여전히 퍼셉션이 있었으므로 이러한 교리가 실제로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훗날 그것을 필요로 할 사람들을 위하여 보존되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을 보여 줍니다. 지금까지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과 선 안에서 진리를 직접 퍼셉션하는 것이 중심이었다면, 이제는 그 퍼셉션으로부터 나온 진리를 교리로 보존하여 전달할 필요가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다만 에녹을 곧바로 훗날 노아로 시작되는 영적 교회와 동일하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에녹 역시 태고교회 시대의 계승 안에 있는 교회입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퍼셉션이 쇠퇴하는 가운데 이전에 퍼셉션된 진리들이 후대를 위해 보존될 길이 마련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AC.514에서 스베덴보리는 야렛 교회에 관하여 매우 흥미로운 설명을 덧붙입니다. 야렛이라는 교회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그 교회의 어떠함은 앞선 마할랄렐과 뒤따르는 에녹을 통하여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야렛이 이 두 교회 사이의 ‘중간 상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창5의 교회들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마할랄렐에서는 쓰임에서 오는 기쁨보다 진리들에서 오는 기쁨을 더 좋아하는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에녹에서는 이전에 퍼셉션되었던 것들을 교리로 모아 보존하는 움직임이 나타납니다. 야렛은 바로 이 두 상태 사이에 놓여 있었습니다. 따라서 야렛을 이해하려면 그 이름만 따로 떼어 어떤 독립적인 특징을 찾으려 하기보다, 마할랄렐에서 에녹으로 이어지는 전체적인 변화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야렛 교회가 이미 교리를 만들기 시작했다거나 특정한 제도를 갖추고 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AC.514는 그런 구체적인 내용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야렛이 마할랄렐과 에녹 사이의 중간 상태에 있었으며,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쇠퇴하는 과정과 그것이 교리로 보존되는 과정 사이에서 하나의 연결 고리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변화가 단절된 사건들의 반복이 아니라 서로 연결된 상태들의 연속임을 보게 됩니다. 앞선 교회로부터 다음 교회가 이어지고, 그 과정에서 사랑과 퍼셉션의 상태가 달라지며, 마침내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진리가 보존되는 단계에 이릅니다. 이것은 인간의 내적 상태가 변화하는 동안에도 주님께서 다음 시대에 필요한 것을 준비하고 계셨음을 보여 줍니다. 인간이 처음의 퍼셉션을 유지하지 못하게 된다고 해서 주님께서 그들을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에 맞추어 선과 진리를 보존할 길을 마련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19절과 20절에서는 야렛이 에녹을 낳은 뒤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고, 구백육십이 세를 살고 죽었다고 합니다. AC.515는 여기서 앞서 설명한 ‘날들’과 ‘연수’의 의미를 다시 확인하면서, 홍수 이전 사람들의 매우 긴 수명이라는 문제를 직접 다룹니다. 스베덴보리는 홍수 이전 사람들의 나이가 야렛의 구백육십이 세나 므두셀라의 구백육십구 세처럼 그렇게 많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다음 장 3절에 나오는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는 말씀을 함께 제시합니다.

 

이것은 창5의 계보를 읽는 스베덴보리의 관점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그는 이 장에 나오는 이름들과 연수를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개인의 생애나 수명 기록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사람’,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은 각각 교회를 의미하며, 그들에게 연결된 ‘날들’과 ‘연수’ 역시 그 교회들의 때와 상태들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야렛이 구백육십이 세를 살았다는 말씀의 중심은 한 개인이 실제로 962년을 살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야렛으로 표현된 교회의 때와 상태가 말씀의 숫자를 통하여 나타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창6:3의 백이십 년을 함께 언급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창5에서는 구백 년이 넘는 수명이 반복되지만, 바로 다음 장에서는 인간의 날이 백이십 년이라고 기록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숫자들을 모두 단순한 생물학적 수명으로 읽지 않고, 교회의 때와 상태를 나타내는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다만 이것이 각 숫자에 어떤 구체적인 의미가 있는지를 우리가 임의로 계산하거나 추정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AC.515가 분명하게 밝히는 것은 이 연수들이 특정 개인의 실제 나이가 아니라 교회의 때와 상태들을 의미한다는 원칙입니다.

 

그렇다면 창5의 이름들이 각각 교회를 의미하고 연수도 실제 수명이 아니라면, 창세기 초반은 역사적 실재와 아무 관계가 없는 이야기라는 뜻일까요? 여기에는 신중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해석에서 창세기 초반의 계보는 현대적인 연대기나 전기 자료처럼 개인들의 생애를 기록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 안에 표현된 교회의 영적 상태와 변화까지 아무런 실재가 없는 허구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이러한 문자적 서술 안에서 태고교회와 그 뒤를 이은 교회들의 영적 역사를 읽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속뜻을 읽는다는 것은 성경의 문자를 무시하거나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문자 안에 담긴 내적 의미를 읽는 것입니다. ‘야렛이 구백육십이 세를 살았다’는 말씀에서 단순히 그 숫자가 실제 수명인지 아닌지를 논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주님께서 그 말씀을 통하여 어떤 교회의 상태를 계시하고 계시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이렇게 읽을 때 창5는 기이할 만큼 오래 살았던 사람들의 족보가 아니라,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진 여러 교회가 어떻게 서로 다른 내적 상태를 거치며 변화해 갔는지를 보여 주는 영적 역사가 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연수들이 자연적인 시간보다 교회의 때와 상태를 의미한다고 해서, 이 여러 교회가 실제 역사 속에서 얼마 동안 존속했는지, 또는 서로 어느 정도 같은 시대에 존재했는지까지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AC.515가 밝히는 것은 숫자의 속뜻이지 각 교회의 구체적인 역사적 존속 기간이나 공존 기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5의 숫자로 여러 교회의 역사적 연대표를 만들어 내기보다, 그 숫자들을 통하여 말씀께서 드러내시는 교회의 상태를 이해하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이렇게 오늘의 AC.510-515를 하나로 모아 보면, 창5의 계보에는 세 가지 중요한 흐름이 나타납니다.

 

첫째는 ‘사랑과 쓰임의 질서 변화’입니다. 마할랄렐 교회에 이르러 진리를 아는 기쁨이 쓰임에서 오는 기쁨보다 앞서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진리를 버린 상태가 아니라, 진리가 섬겨야 할 사랑과 쓰임보다 진리 자체에서 얻는 기쁨을 더 좋아하게 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내적 질서의 변화와 함께 퍼셉션도 더욱 일반적이고 흐릿한 것이 되어 갔습니다.

 

둘째는 ‘퍼셉션의 쇠퇴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교리적 보존’입니다. 마할랄렐에서 야렛으로, 야렛에서 에녹으로 이어지는 동안 교회의 상태는 계속 변화하였습니다. 특히 야렛은 마할랄렐과 에녹 사이의 중간 상태였으며, 에녹에 이르러서는 이전 교회들이 퍼셉션했던 것들을 교리로 만들어 후대를 위하여 보존하는 일이 나타납니다. 인간이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진리를 직접 퍼셉션할 수 없게 되는 가운데서도, 그 진리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도록 보존될 길이 준비된 것입니다.

 

셋째는 ‘교회의 때와 상태를 통하여 드러나는 영적 역사’입니다. 마할랄렐의 팔백구십오 세와 야렛의 구백육십이 세는 단순한 개인의 수명 기록이 아니라 각각의 교회가 지닌 때와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창5의 계보를 이해할 때 중요한 것은 누가 몇 년을 살았는가보다 각 교회가 어떤 선과 진리를 지니고 있었으며, 그 내적 상태가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흐름을 함께 바라보면 오늘 말씀을 통하여 주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도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인간은 처음의 천적 상태를 계속 유지하지 못했습니다. 사랑과 쓰임의 생명은 점차 감소하였고, 그 사랑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직접 알아차리는 퍼셉션도 약해졌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간의 상태가 달라졌다고 해서 선과 진리의 근원이기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달라진 것은 주님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바로 그 달라진 상태를 아시고 다음 길을 준비하셨습니다. 퍼셉션이 쇠퇴하는 가운데서도 이전 교회들이 받았던 선과 진리가 후대에 전달될 수 있도록 보존의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이것이 에녹의 등장을 통하여 드러나는 주님의 섭리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처음의 완전한 상태를 잃어버렸다고 해서 곧바로 버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인간이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없게 될 때에도, 변화된 상태에 맞추어 그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준비하시는 분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의 신앙에도 중요한 가르침을 줍니다. 우리는 태고교회와 같은 퍼셉션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오늘도 말씀과 진리를 통하여 우리를 인도하시며, 우리가 그 진리를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실제 삶에서 행하도록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특별한 영적 능력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미 주신 진리를 올바르게 사랑하고 그 진리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의 속뜻을 공부하고 교리를 배우는 목적도 여기에 있습니다. 더 많은 지식을 쌓는 것 자체가 마지막 목적이 아니라, 그 진리를 통하여 주님을 더욱 깊이 알고 이웃을 더욱 사랑하며 선한 쓰임을 이루는 것입니다. 진리를 아는 기쁨이 선을 행하는 기쁨으로 이어지고, 우리가 받은 사랑이 실제 삶에서 이웃을 위한 쓰임으로 나타날 때, 그 진리는 우리 안에서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자신의 신앙을 한 가지 질문 앞에 세워 보아야 합니다. ‘나는 진리를 아는 기쁨과 그 진리로 선을 행하는 기쁨 가운데 무엇을 더 사랑하고 있는가?’ 진리를 배우고 이해하는 기쁨은 귀합니다. 그러나 그 기쁨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마할랄렐 교회에서 나타난 질서의 변화를 자신의 안에서도 돌아보아야 합니다. 반대로 우리가 진리를 배울수록 더 겸손해지고, 더 자비로워지며, 작은 일에서도 이웃에게 선한 쓰임이 되기를 기뻐한다면 그 진리는 본래의 목적을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적 상태가 약해지는 때에도 주님을 향한 소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언제나 같은 열심과 명료함을 유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의 상태를 아시며, 그 상태에 맞추어 계속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이전처럼 분명하게 보지 못할 때에도 말씀을 통하여 진리를 주시고, 그 진리가 다시 사랑과 선한 쓰임으로 이어질 길을 열어 주십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쇠퇴하는 가운데서도 교리를 통하여 진리를 보존할 길을 준비하셨던 주님께서는 오늘도 인간의 연약함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창5:15-20은 단순히 마할랄렐과 야렛과 에녹이라는 이름이 이어지는 족보가 아닙니다. 그 속뜻으로는 인간의 사랑과 퍼셉션이 어떻게 변해 갔으며, 그 변화 속에서도 주님께서 어떻게 선과 진리를 보존하셨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참된 신앙의 생명이 어디에 있는지도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진리를 많이 아는 것 자체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그 진리와 결합되어 실제로 선한 쓰임을 이루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창5:15-20, AC.510-515를 통하여 우리가 배우는 말씀입니다. ‘진리를 아는 기쁨은 선을 행하는 기쁨을 섬겨야 하며, 인간의 내적 상태가 달라지고 약해지는 가운데서도 주님께서는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고 그 상태에 맞는 다음 길을 준비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주시는 진리를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그 사랑을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나타내며, 우리의 모든 변화 가운데서도 변함없이 역사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신뢰하며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이상 요약을 마치고, 아래는 AC 본문, 해설 및 심화입니다.

 

 

AC.510, 창5:15,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AC.510-511)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And Mahalalel lived sixty and five years, and begat Jared. (창5:15) AC.510 ‘마할랄렐’(Mahalalel)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다섯 번째 교회를 의미하고, ‘야렛’(Jared)은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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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1, 창5:15, ‘마할랄렐’(Mahalalel)이라 하는 교회의 상태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창5:15) AC.511 퍼셉션의 능력이 감소하여, 더 개별적이고 분명하던 상태에서 더 일반적이고 어두운 상태로 바뀌어 간 것처럼, 사랑의 생명 곧 쓰임새의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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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2, 창5:16-17, ‘같은 표현이 반복되는 이유’

16야렛을 낳은 후 팔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7그는 팔백구십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Mahalalel lived after he begat Jared eight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Mah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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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3, 창5:18, ‘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AC.513-514)

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And Jared lived a hundred sixty and two years, and begat Enoch. (창5:18) AC.513 ‘야렛’(Jared)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여섯 번째 교회를, ‘에녹’(Enoch)은 일곱 번째 교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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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4, 창5:18, ‘마할랄렐과 에녹 사이에 있는 야렛’

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And Jared lived a hundred sixty and two years, and begat Enoch. (창5:18) AC.514 ‘야렛’(Jared)이라 하는 교회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서술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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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5, 창5:19-20, ‘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

19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0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Jared lived after he begat Enoch eight hundred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Jared were nine hund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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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AC 리딩 본문 전체는 여기까지이고, 아래는 오늘 범위 창5:15-20, AC.510-515 중 리딩 필독 두 편 링크입니다. 혹시 몹시 바쁘신 분들은 꼭 이 링크들만이라도 읽으시기 바랍니다.

 

 

AC.511, 창5:15, ‘마할랄렐’(Mahalalel)이라 하는 교회의 상태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창5:15) AC.511 퍼셉션의 능력이 감소하여, 더 개별적이고 분명하던 상태에서 더 일반적이고 어두운 상태로 바뀌어 간 것처럼, 사랑의 생명 곧 쓰임새의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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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5, 창5:19-20, ‘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

19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0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Jared lived after he begat Enoch eight hundred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Jared were nine hund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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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이며, 다음은 다음 주(20261101, 성찬) 리딩 본문(창5:21-24, AC.516-522) 소개입니다.

 

다음 주에는 창5:21-24, AC.516-522를 통하여 ‘에녹’(Enoch) 교회의 특별한 역할을 살펴보겠습니다. 에녹은 태고교회와 그 뒤를 이은 교회들이 퍼셉션했던 것들을 모아 교리로 만들고, 후대를 위하여 보존하는 일을 나타냅니다. 특히 성경은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고 기록합니다. 다음 주에는 이 특별한 표현의 속뜻을 살펴보면서, 퍼셉션이 점차 사라져 가는 가운데 주님께서 어떻게 진리를 보존하셨는지, 그리고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네, 이상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10-25(D1)

 

2674, 3, 창5.3, 2026-10-25(D1)-주일예배(창5,15-20, AC.510-515), ‘마할랄렐, 야렛, 에녹’.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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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10/18, 창5:6-14, AC.496-509), ‘흐려지는 퍼셉션, 변함없는 주님의 섭리’

※ 오늘(2026/10/18)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8, ‘성도들아 찬양하자’, 찬131, ‘다 나와 찬송부르세’입니다. 오늘은 창5 절별 주석 그 두 번째, 6절로 14절, AC 글 번호로는 496번에서 509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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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댁이, 처가가 이단이지만 그래도 나는 내 할 도리는 다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돼’ - 진리를 지키면서 가족을 사랑한다는 것

 

이 말에는 앞의 경우와는 상당히 다른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이단이니까 연을 끊어도 돼’가 관계를 끊을 성경적 근거를 찾는 쪽이라면, ‘이단이지만 그래도 나는 내 할 도리는 다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돼’는 관계를 지키고 싶지만 신앙의 차이와 감정의 상처 때문에 마음과 행동이 따라주지 않는 경우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저는 오히려 이 두 번째 고민 속에 체어리티(charity)가 시작될 수 있는 중요한 지점이 있다고 봅니다. 아직 충분히 사랑하지 못하더라도 ‘그래도 내가 해야 할 선은 하고 싶다’는 의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먼저 ‘할 도리’를 너무 감정적으로 이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댁이나 처가를 좋아해야만 도리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신앙에 동의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종교적인 이야기를 즐겁게 나눌 수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체어리티는 상대방에게 따뜻한 감정을 느끼는 것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체어리티는 실제 삶에서 선하고 올바른 것을 행하는 것과 깊이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불편해도 필요한 안부를 묻고, 아플 때 살피고, 부모로서 마땅히 받아야 할 존중을 드리고, 도움이 필요할 때 가능한 범위에서 돕고, 명절이나 중요한 가족 행사에서 해야 할 책임을 감당한다면 그것 역시 체어리티의 실제적인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마음이 내키지 않는데 하는 선행은 위선 아닌가?’라는 생각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더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거듭남(regeneration)은 선한 감정이 완전히 생긴 다음 선을 행하는 과정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감정이 따라오지 않더라도 ‘이것이 주님 앞에서 옳다’고 판단하여 행동하는 가운데 우리의 사랑 자체가 조금씩 변화합니다. 속에서는 ‘가기 싫다’, ‘전화하기 싫다’, ‘왜 내가 먼저 해야 하나’ 하는 마음이 올라오는데도 ‘그래도 이것은 내가 해야 할 일이다’라고 판단하여 행한다면, 바로 앞에서 이야기했던 ‘합리성’(rationality)과 ‘자유’(freedom)가 작동하는 장면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자기 감정에 끌려가는 대신 무엇이 선한지를 보고 그것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참고 모든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체어리티는 아닙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시댁이나 처가에서 ‘우리 신앙을 인정하라’, ‘우리 예배나 종교행위에 참여하라’, ‘아이들에게도 이것을 가르치게 하라’고 요구한다면 거절할 수 있습니다. 반복적으로 신앙을 조롱하거나 모욕한다면 ‘이런 대화는 더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경계를 세울 수도 있습니다. 가족을 사랑하는 것과 그들의 신앙에 동조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앞서 요한이서를 살펴보면서 말씀드린 것처럼 ‘거짓과의 연합을 끊는 것’과 ‘체어리티를 끊는 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그 신앙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으로서 제가 해야 할 일은 하겠습니다.’ 이 두 문장은 얼마든지 함께 성립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어려운 것은 바로 그다음입니다. 머리로는 ‘도리를 해야 한다’고 아는데 마음에서는 분노와 불쾌감과 억울함이 계속 올라오는 것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프로프리움’(proprium)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상대방에게 실제 잘못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모든 갈등을 ‘내가 교만해서 그렇다’고 자기 탓으로 돌릴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의 잘못이 분명하더라도 그 잘못을 붙잡고 ‘그러므로 나는 저 사람에게 선을 행하지 않아도 된다’고 자신을 정당화하기 시작하면 상대방의 악이 어느 순간 내 안의 악을 정당화하는 재료가 됩니다. 그때부터 문제는 ‘그들이 무엇을 했는가?’만이 아니라 ‘그들의 행동 때문에 지금 내 안에서 무엇이 자라고 있는가?’가 됩니다.

 

바로 여기서 체어리티는 감정보다 깊어집니다. 상대방을 좋아하지 않아도 미워하지 않는 것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가까이 지내기 어렵더라도 필요한 선은 행할 수 있습니다. 신앙에는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사람으로서는 존중할 수 있습니다. 만나면 불편하더라도 일부러 모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관계를 어느 정도 제한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상대방의 불행을 바라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작은 차이처럼 보이지만 영적으로는 상당히 큰 차이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단지 ‘가족관계를 유지했는가?’가 아니라 그 관계를 통하여 ‘내가 어떤 사랑의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할 도리를 다한다’는 것을 ‘예전처럼 친밀하게 지내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가족관계에도 적절한 거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만남의 횟수를 줄이면서도 예의를 지킬 수 있고, 종교 이야기는 하지 않으면서 식사를 함께할 수 있으며, 중요한 일이 생겼을 때 도울 수도 있습니다. 전화 한 통, 병문안, 필요한 도움, 부모에 대한 기본적인 책임이 모두 가능합니다. ‘친밀함’과 ‘체어리티’는 반드시 같은 정도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어떤 관계에서는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선을 행하는 것이 오히려 더 지혜로운 체어리티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게 잘 안 돼’라는 말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곧바로 신앙의 실패라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바로 그곳에서 거듭남의 싸움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정말 아무 갈등도 없는 사람에게 친절한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잘하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신앙을 부정하거나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에게 ‘그래도 내가 해야 할 선은 하겠습니다’라고 선택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주님께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신 말씀도 결국 감정적으로 원수를 좋아하라는 명령이라기보다, 상대의 악 때문에 나까지 악의 질서로 내려가지 말라는 말씀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더욱이 앞에서 살펴본 사울과 스데반을 생각하면 한 가지 중요한 태도가 더 생깁니다. 내가 상대방의 교리를 명백한 오류라고 판단하더라도 그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까지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의 사울 안에서 주님께서는 훗날의 바울을 보고 계실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나는 정통이고 저 사람은 이단이다’라고 확신하는 내 안에 사울의 종교적 프로프리움이 숨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리는 분별하되 사람의 영원한 상태는 주님께 남겨 두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리를 흐리지 않으면서도 체어리티를 잃지 않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도 조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주님, 저 사람들이 잘못했으니 변화시켜 주십시오’만 기도하기보다 ‘주님, 제가 거짓에는 동조하지 않으면서도 사람에게 해야 할 선은 버리지 않게 해주십시오. 저들의 잘못 때문에 제 안에 미움이 지배적 사랑(ruling love)으로 자리 잡지 않게 해주십시오. 제가 해야 할 것은 하되 할 수 없는 것까지 억지로 떠맡지 않게 하시고, 어디까지 사랑하고 어디서 경계를 세워야 하는지 분별하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상대방의 잘못을 없던 일로 만드는 기도가 아니라, 그 잘못 때문에 내 영혼까지 함께 흐트러지지 않도록 구하는 기도입니다.

 

어쩌면 이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은 ‘관계를 얼마나 많이 유지했는가?’가 아닐 것입니다. ‘나는 이 관계 안에서 주님의 사람으로 행동했는가?’입니다. 때로는 찾아뵙는 것이 그 답일 수 있고, 때로는 거리를 두는 것이 답일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침묵해야 하고, 때로는 분명하게 ‘그것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상대방을 벌주기 위해 행동하지 않고, 선과 진리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 행동한다면 방향은 달라집니다.

 

그래서 ‘시댁이, 처가가 이단이지만 그래도 나는 내 할 도리는 다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돼’라는 말은 이렇게 바꾸어 볼 수 있겠습니다. ‘나는 그들의 신앙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그것 때문에 내가 사랑까지 버리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감정은 아직 따라오지 않더라도 주님 앞에서 내가 해야 할 선은 행하고 싶습니다.’

 

저는 이 문장을 한 줄로 압축한다면 이렇게 하겠습니다. ‘체어리티는 상대방의 모든 것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할 수 없는 것이 있어도 내가 해야 할 선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의 요한이서 이야기와 연결하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거짓에는 참여하지 않되 사람에게는 선을 행하는 것, 경계는 세우되 미움으로 절연하지 않는 것.’ 아마 바로 그 어려운 중간 지점에서 ‘선과 진리의 결합’이 실제 삶의 문제가 되는 것 같습니다.

 

 

 

SL.15, ‘예수님을 영접했으니 나는 구원받은 거 아닌가’

‘예수님을 영접했으니 나는 구원받은 거 아닌가’ - 한 번의 영접과 일생의 거듭남 이 말에는 분명 복음의 중요한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기독교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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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13, ‘시댁이, 처가가 이단이니까 연을 끊어도 돼. 요한이서에 보면 인사도 하지 말라고 했잖아

‘시댁이, 처가가 이단이니까 연을 끊어도 돼’ - 요한이서의 ‘인사도 하지 말라’는 말씀은 가족 절연을 명령하는가 ‘시댁이, 처가가 이단이니까 연을 끊어도 돼. 요한이서에 보면 인사도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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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댁이, 처가가 이단이니까 연을 끊어도 돼’ - 요한이서의 ‘인사도 하지 말라’는 말씀은 가족 절연을 명령하는가

 

‘시댁이, 처가가 이단이니까 연을 끊어도 돼. 요한이서에 보면 인사도 하지 말라고 했잖아.’ 실제로 요한이서 1장 10-11절은 상당히 강하게 들립니다.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라.’ 이 말씀만 떼어 놓으면 ‘잘못된 교리를 가진 사람과는 집안의 관계까지 끊어야 한다’는 결론이 가능해 보입니다. 특히 가족이나 시댁, 혹은 처가를 ‘이단’이라고 판단한 경우에는 이 말씀이 절연을 정당화하는 매우 강력한 근거처럼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이서 전체의 문맥과 성경의 다른 말씀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함께 놓고 보면 그렇게 단순하게 적용하기 어렵습니다.

 

먼저 요한이서가 경계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보아야 합니다. 요한은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요이1:7)고 대상을 구체적으로 밝힙니다. 이어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9절), 그리고 바로 다음에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10절)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직접적인 상황은 단순히 ‘나와 교리가 다른 혈육, 혈연, 친척’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에 관한 거짓 가르침을 가지고 신앙공동체 안으로 들어와 그것을 전파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11절의 이유도 중요합니다.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라.’ 핵심은 사람과 인간적인 접촉을 했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의 ‘악한 일’에 참여하고 그것을 지지하는 데 있습니다.

 

당시의 ‘집에 들인다’는 표현도 오늘날 누군가를 집에 잠깐 방문하게 하는 것과 완전히 동일하게 읽기는 어렵습니다. 초기 교회는 가정집을 중심으로 모였고 순회 교사와 전도자들이 신자들의 집에서 숙식을 제공받으며 가르쳤습니다. 그런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은 단순한 개인적 친절을 넘어 그의 사역을 후원하고 그에게 활동 기반을 제공하는 의미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요한의 명령에는 ‘거짓 교사를 교회의 교사로 받아들이고 그의 활동을 지원하지 말라’는 매우 실제적인 목적이 들어 있습니다. 오늘날의 표현으로 바꾸면 ‘거짓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의 사역을 교회가 공식적으로 받아들이고 후원하지 말라’에 훨씬 가깝습니다.

 

특히 ‘인사도 하지 말라’는 말씀을 ‘그러므로 그 사람과 인간관계를 완전히 끊어라’로 확대할 때는 성경 전체와 충돌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주님께서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4)고 하셨습니다. 바울도 불신자와 모든 관계를 끊으라는 뜻으로 자신의 말을 오해하지 말라고 설명하면서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고전5:10). 더구나 부모와 가족을 공경하고 돌보아야 한다는 말씀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이서 한 구절을 근거로 ‘이단으로 판단되는 사람에게는 일반적인 인간적 사랑과 가족으로서의 모든 책임까지 중단해도 된다’는 보편적 원칙을 만들기는 어렵습니다.

 

여기에서 ‘교제’와 ‘동조’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그의 교리를 인정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족으로 만나고 안부를 묻고 어려울 때 돕는다고 해서 그의 신학적 주장을 승인하는 것도 아닙니다. 반대로 그 사람의 가르침이 잘못되었다고 판단된다고 해서 그 사람 자체를 미워하거나 가족관계에서 제거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거짓에 참여하지 않는 것’과 ‘그 사람에게 체어리티(charity)를 행하지 않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구별이 더욱 중요해집니다. 체어리티는 상대방이 믿는 모든 것을 옳다고 인정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상대방 안의 선을 사랑하고 그의 참된 유익, 궁극적으로는 영원한 유익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못된 가르침에는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라고 분명히 말하면서도 그 사람에게 인간적인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교리가 틀렸으므로 그 사람에게는 사랑을 베풀 필요가 없다’고 한다면 진리를 지키려다가 체어리티를 잃는 역설이 생길 수 있습니다.

 

더구나 ‘이단’이라는 판단 자체에도 주의가 필요합니다. 앞에서 사울과 스데반을 살펴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울은 자신이 하나님 편에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스데반과 그리스도인들이 위험한 잘못에 빠져 있다고 생각했고, 그들을 제거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 길에서 주님께서는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행9:4)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모든 이단 판정이 잘못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거짓 교리는 실제로 존재하며 분별해야 합니다. 그러나 ‘나는 진리를 가지고 있고 저 사람은 이단이다’라는 확신이 그 사람에게 무엇을 해도 된다는 허가증이 되는 순간, 사울의 이야기는 우리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특히 가족관계에서는 더욱 신중해야 합니다. ‘저 사람의 신앙을 받아들일 수 없다’와 ‘그러므로 저 사람과 가족으로서의 관계도 끊어야 한다’ 사이에는 상당히 큰 거리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시댁의 종교적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 집의 종교활동에 참여하지 않을 수 있고, 자녀에게 그 교리를 가르치지 못하도록 경계를 세울 수도 있으며, 반복적인 개종 압박이나 모욕이 있다면 만남의 방식과 빈도를 조정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경계’입니다. 그러나 단지 ‘이단’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부모·자녀·형제의 인간적 관계 자체를 끊는 것을 요한이서 10절이 명령한다고 말한다면, 본문의 적용 범위를 상당히 넘어설 가능성이 큽니다.

 

물론 반대편의 극단도 피해야 합니다. ‘가족이니까 무조건 만나야 한다’는 것도 성경적 원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실제 폭력이나 학대, 지속적인 모욕, 강압적인 종교행위, 자녀에게 심각한 해를 끼치는 행동이 있다면 적절한 거리를 두는 것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상당히 강한 관계 제한도 정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는 ‘저들은 이단이니까 요한이서가 절연하라고 했다’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발생하는 악과 해로부터 자신과 가족을 보호하고 그 악에 참여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해야 합니다. ‘교리적 불일치’와 ‘실제적인 해악’을 구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더 깊이 들어가면 이 문제에는 ‘프로프리움’(proprium)의 위험도 있습니다. 종교적인 프로프리움은 ‘내가 싫다’를 ‘하나님이 싫어하신다’로, ‘나는 만나고 싶지 않다’를 ‘성경이 만나지 말라고 한다’로 바꾸어 표현할 수 있습니다. 물론 실제로 신앙 때문에 거리를 두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정말 진리를 지키기 위해 이 관계를 제한하는가, 아니면 내 불편함과 분노와 상처를 하나님의 명령으로 정당화하고 있는가?’ 이것은 상대방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적용해야 할 분별입니다.

 

그리고 바로 앞에서 살펴본 사울의 이야기가 여기서 다시 의미를 갖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요16:2). 종교적 확신은 때로 인간에게 가장 강력한 정당화 장치가 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라는 말이 붙으면 평소에는 하지 못할 냉혹한 행동까지 의로운 행동처럼 느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행동이 정말 주님의 뜻인지 판단할 때에는 ‘내가 성경 구절 하나를 가지고 있는가?’뿐 아니라 그 해석이 말씀 전체의 선과 진리, 특히 주님의 사랑과 체어리티의 질서에 합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요한이서의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일까요? 오히려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거짓까지 받아들이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사람은 사랑하되 거짓을 후원하지 말고, 관계는 유지하더라도 악한 일에는 참여하지 말며, 체어리티를 행하되 진리를 희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과 ‘진리’가 결합되어야 한다는 스베덴보리의 원리와도 잘 맞습니다. 사랑만을 내세워 모든 거짓을 용인하는 것도 잘못이고, 진리를 내세워 사람을 미워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따라서 ‘시댁이, 처가가 이단이니까 연을 끊어도 돼. 요한이서에 인사도 하지 말라고 했잖아’라는 말에는 이렇게 답할 수 있겠습니다. ‘요한이서는 거짓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의 사역을 받아들이고 후원하여 그의 악한 일에 참여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말씀이지, 교리가 다르다고 판단되는 가족과 모든 인간적·가족적 관계를 끊으라는 일반적인 절연 명령으로 읽기는 어렵습니다.’

 

한 문장으로 더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요한은 거짓과의 연합을 끊으라고 했지, 체어리티까지 끊으라고 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진리를 지킨다는 이유로 사랑을 버리지 말고, 사랑한다는 이유로 거짓을 받아들이지도 않는 것, 바로 그 둘을 함께 지키는 것이 선과 진리의 결합입니다.’

 

 

 

SL.14, ‘시댁이, 처가가 이단이지만 그래도 나는 내 할 도리는 다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돼’

‘시댁이, 처가가 이단이지만 그래도 나는 내 할 도리는 다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돼’ - 진리를 지키면서 가족을 사랑한다는 것 이 말에는 앞의 경우와는 상당히 다른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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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12,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참여하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믿었던 사울’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참여하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믿었던 사울 - 열심보다 중요한 진리 사울(사도 바울의 회심 전 이름)은 하나님을 미워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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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참여하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믿었던 사울 - 열심보다 중요한 진리

 

사울(사도 바울의 회심 전 이름)은 하나님을 미워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일을 했습니다. 훗날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고백합니다(행26:9). 이것은 대단히 무서운 말씀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거역하면서도 자신이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울에게는 ‘열심’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라고 표현합니다(빌3:6). 따라서 그의 문제는 신앙적 열심이 부족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열심이 너무 강했습니다. 문제는 그 열심이 참된 진리에 의해 인도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던 율법과 종교적 체계를 하나님과 동일시했고, 그것을 위협한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제거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그의 ‘하나님 사랑’에는 진리에 대한 중대한 오류가 섞여 있었습니다.

 

바로 여기서 앞서 이야기한 ‘나는 하나님의 자녀인데 왜 하나님은 내 편이 아니실 때가 있지?’라는 질문과 놀랍게 연결됩니다. 스데반이 죽임당하던 그 순간 사울에게 물었다고 상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누구 편이십니까?’ 사울은 아마 자신 있게 ‘우리 편’이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편이고 스데반은 위험한 이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하늘이 열린 것을 본 사람은 사울이 아니라 스데반이었습니다. 스데반은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행7:56)고 말합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편’이라고 확신했던 바로 그 자리에서, 주님께서는 사울이 박해하는 사람과 함께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메섹 길에서 이 사실이 완전히 뒤집힙니다. 사울에게 나타나신 주님께서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고 하십니다(행9:4). 사울의 입장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왜 박해하느냐’가 아니라 ‘왜 ‘나’를 박해하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사울이 하나님을 위해 제거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 안에서 오히려 주님께서 박해받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것만큼 ‘종교적 확신’과 ‘실제 진리’가 얼마나 멀어질 수 있는지를 강렬하게 보여 주는 장면도 드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진실하게 믿는다’는 것과 ‘진리를 믿는다’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사울은 자신의 믿음에 진지했습니다. 그러나 진지함이 그 믿음의 내용을 자동으로 진리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사람은 거짓을 진심으로 믿을 수도 있습니다. 더구나 그 거짓에 종교적 열심이 결합하면 매우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확신 때문에 오히려 자신의 행동을 의심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울은 그때 이미 악한 사람이었고 지옥적인 ‘지배적 사랑’(ruling love)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단정해야 할까요? 바로 여기에서도 조심해야 합니다. 이후의 바울을 보면 그의 내면에는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이 드러났을 때 끝까지 자기 입장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난 뒤 자신의 세계 전체가 무너지는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자기가 평생 옳다고 믿었던 것을 내려놓고 자신이 박해하던 주님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차이입니다. ‘거짓을 진리라고 잘못 믿었던 사람’과 ‘거짓임을 알면서도 자기 사랑 때문에 끝까지 붙드는 사람’은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울의 이야기는 인간의 ‘합리성’(rationality), 곧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이해하고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왜 중요한지도 보여 줍니다. 참된 신앙은 ‘나는 확신한다’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혹시 내가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내 생각과 내 종교적 체계를 지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 자신을 진리 앞에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사울의 회심은 단순히 무신론자가 하나님을 믿게 된 사건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을 열렬히 믿던 사람이 ‘자기가 믿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무너지고 참된 주님을 새롭게 알아가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사울의 회심은 종교인에게 훨씬 더 무서운 회심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프로프리움’(proprium)의 문제도 깊이 숨어 있습니다. 종교적인 프로프리움은 세속적인 프로프리움보다 오히려 알아차리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내가 옳다’가 ‘하나님이 옳으시다’와 결합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내 생각에 반대하는 사람이 곧 하나님께 반대하는 사람처럼 보이고, 내 교리를 비판하는 사람이 진리를 공격하는 사람처럼 보이며, 심지어 상대방을 공격하면서도 그것을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느낄 수 있습니다. 사울이 바로 그 지점까지 갔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요16:2)은 그래서 섬뜩할 정도로 정확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부정하면서만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하여’라는 이름으로도 악을 행할 수 있습니다. 종교적 언어가 붙었다고 해서 그 행위가 선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그것이 주님의 선과 진리에 합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사울의 이야기가 두려운 이야기로만 끝나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사울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네가 어떻게 감히 내 사람들을 죽이느냐’며 즉시 심판하여 제거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가 보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을 보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사울은 눈이 멀었습니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실제 일어난 사건이면서 동시에 너무나 강렬한 영적 그림입니다. ‘나는 누구보다 잘 본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비로소 ‘나는 보지 못하고 있었다’는 자리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진짜 눈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거듭남(regeneration)의 중요한 한 모습일 것입니다. 거듭남은 언제나 ‘나쁜 사람이 착한 사람이 되는 것’처럼 단순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나는 하나님을 잘 알고 있고, 나는 하나님 편이며, 나는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확신하던 사람이 주님 앞에서 ‘내가 틀릴 수도 있었습니다’라고 무너지는 과정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을 버리고 바울이 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하면서 붙들고 있던 거짓을 버림으로써 비로소 자신이 사랑한다고 말했던 하나님을 참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의 이야기를 오늘 우리에게 적용할 때 가장 위험한 방식은 ‘저런 사람이 바로 사울 같은 사람이다’라고 다른 사람을 지목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순간 우리는 다시 사울의 자리에 설 수도 있습니다. 이 말씀의 칼날은 먼저 나를 향해야 합니다. ‘나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내 생각을 사랑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진리를 지키는 것인가, 아니면 내가 옳다는 것을 지키는 것인가? 상대방의 오류를 분별하는 것과 상대방을 미워하는 것을 혼동하고 있지는 않은가? 주님의 이름으로 내 분노와 적개심을 정당화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사람을 바라볼 때도 상당히 중요한 원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설교나 신학에서 명백한 오류를 발견했다면 오류는 오류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곧바로 ‘그러므로 저 사람의 내면도 악하다’로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사울조차 스데반의 죽음에 찬성하고 교회를 박해하던 바로 그 시절, 훗날 바울이 될 가능성을 주님께서는 이미 보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당시의 사울을 보지만 주님께서는 그 사람의 내면 깊은 곳과 앞으로 자유롭게 진리를 받아들일 가능성까지 보십니다.

 

결국 사울의 이야기는 ‘열심이 있느냐?’보다 더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그 열심은 진리에 의해 인도되고 있는가?’ 그리고 그보다 더 깊은 질문도 던집니다. ‘내가 틀렸다는 사실을 주님께서 보여 주실 때 나는 바뀔 수 있는가?’ 어쩌면 사울과 완고한 종교인을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는 처음부터 오류가 없었느냐가 아니라, 진리가 찾아왔을 때 자신의 오류를 내려놓을 수 있었느냐에 있을 것입니다.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사울의 가장 무서운 오류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믿으면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을 박해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회심이 주는 희망까지 함께 붙인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잘못된 열심 속에 있던 사울조차 버리지 않으시고, 그가 자기 확신보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도록 눈을 감기시고 다시 뜨게 하셨습니다.’

 

 

 

SL.13, ‘시댁이, 처가가 이단이니까 연을 끊어도 돼. 요한이서에 보면 인사도 하지 말라고 했잖아

‘시댁이, 처가가 이단이니까 연을 끊어도 돼’ - 요한이서의 ‘인사도 하지 말라’는 말씀은 가족 절연을 명령하는가 ‘시댁이, 처가가 이단이니까 연을 끊어도 돼. 요한이서에 보면 인사도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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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11, ‘나는 하나님의 자녀인데 왜 하나님은 내 편이 아니실 때가 있지?’

‘나는 하나님의 자녀인데 왜 하나님은 내 편이 아니실 때가 있지?’ - 주님은 내 편이 아니라 나를 구원하시는 분 ‘나는 하나님의 자녀인데 왜 하나님은 내 편이 아니실 때가 있지?’ 신앙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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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나님의 자녀인데 왜 하나님은 내 편이 아니실 때가 있지?’ - 주님은 내 편이 아니라 나를 구원하시는 분

 

‘나는 하나님의 자녀인데 왜 하나님은 내 편이 아니실 때가 있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상당히 절실하게 생기는 질문입니다. 열심히 기도했는데 일이 내가 바라던 방향과 정반대로 흘러갈 때, 억울한 일을 당했는데도 상대방이 잘되고 내가 손해를 볼 때, 분명 좋은 뜻으로 시작했다고 생각했는데 길이 막힐 때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인데 하나님은 왜 저 사람을 막아 주시지 않지? 왜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지? 하나님이라면 적어도 내 편은 되어 주셔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여기에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아주 쉽게 혼동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과 ‘하나님이 언제나 내가 원하는 쪽을 지지하신다’는 것은 전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여호수아 5장에는 이 문제를 놀랍도록 선명하게 보여 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여리고를 앞둔 여호수아가 칼을 든 존재를 만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적들을 위하느냐’고 묻습니다. 쉽게 말하면 ‘당신은 우리 편입니까, 저쪽 편입니까?’라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뜻밖에도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입니다(수5:13-14). 여호수아는 ‘하나님이 우리 편인가?’를 물었지만, 질문의 방향 자체가 바뀝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하나님이 내 편인가?’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질서 안에 서 있는가?’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어느 편에 서느냐에 따라 그쪽에 합류하시는 분이 아니라, 선과 진리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 소원을 특별히 우선 처리해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버지가 자녀를 정말 사랑한다면 자녀가 원하는 것을 무조건 들어주지 않는 것과 비슷합니다. 어린아이는 사탕을 더 달라고 하고 위험한 곳에도 가고 싶어 하지만, 부모는 때로 ‘안 된다’고 합니다. 아이의 눈에는 그 순간 부모가 자기 편이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거절이 사랑일 수 있습니다. 주님의 섭리 역시 우리가 당장 원하는 행복보다 훨씬 더 깊은 것을 바라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주님의 섭리가 궁극적으로 향하는 것은 사람이 세상에서 원하는 모든 것을 얻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유 안에서 영원한 생명에 적합한 사람으로 거듭나도록 이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간절히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주님께서 내 편이 아니시다’고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실제로 나에게 선한 것인지 나는 완전히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우리는 자신의 욕망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이 일이 잘되어야 하나님의 영광이지’, ‘저 사람이 잘못했으니 하나님께서 반드시 저 사람을 꺾으셔야 해’, ‘나는 옳으니까 하나님께서 내 억울함을 풀어 주셔야 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진실한 정의감과 함께 자기 사랑, 인정받고 싶은 욕망, 상대방이 패배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섞여 있을 수도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프로프리움’(proprium)은 신앙의 언어까지 사용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때때로 내가 원하는 ‘승리’를 주시는 것보다 내 안에 숨어 있는 것을 보게 하시는 쪽을 택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반드시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일으켜 나를 훈련시키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섭리론에서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악을 허용하시는 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인간의 자유 때문에 주님께서 허용하시는 고통과 악이 있으며, 주님께서 그 악 자체를 원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일단 허용된 상황 속에서도 주님은 끊임없이 사람을 선으로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어떤 실패나 고난을 당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일부러 이것을 보내셨다’고 단정할 필요도 없고, 반대로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의 섭리는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방향으로 쉬지 않고 역사합니다.

 

여기서 ‘내 편’이라는 말의 의미도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만일 ‘내 편’이라는 것이 ‘내가 옳든 그르든 나를 지지해 주는 것’을 뜻한다면, 주님은 결코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편이 아니십니다. 내가 거짓을 말하면 상대방이 아무리 나쁜 사람이어도 주님께서 내 거짓을 진리라고 해주시지 않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면서 ‘저 사람은 악인이니까 하나님도 내 미움을 인정하시겠지’라고 생각해도 주님께서는 미움을 선으로 바꾸어 주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사람의 편을 들어 진리를 바꾸시는 분이 아니라, 사람을 진리의 편으로 이끄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내 편’이라는 말을 ‘나의 영원한 선을 바라시고 끝까지 나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분’이라는 뜻으로 사용한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주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철저하게 우리 편이십니다. 내가 잘못된 길을 선택할 때조차 즉시 버리지 않으시고, 나의 자유와 ‘합리성’, 곧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이해하고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보존하시면서 계속 돌아올 길을 마련하십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는 것보다 내가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때로는 바로 그것 때문에 주님이 내 편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생각하면 이것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아이 둘이 싸우는데 한 아이가 부모에게 ‘엄마는 누구 편이야?’라고 묻는다면 좋은 부모는 무조건 자기 아이의 행동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자기 아이가 잘못했다면 오히려 자기 아이를 바로잡습니다. 그렇다고 그 아이를 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네 잘못까지 사랑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이것보다 훨씬 완전합니다. 주님은 ‘나’를 사랑하시지만 ‘내 악’을 사랑하지 않으십니다. 나를 구원하기 원하시기 때문에 오히려 내가 붙들고 있는 악과 거짓에는 반대하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주님이 ‘나를 반대하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사실은 주님께서 ‘내 안의 나를 파괴하는 것’을 반대하고 계시는 순간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기도의 의미도 바꾸어 놓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내 편으로 끌어오는 일’이 아닙니다. 내가 세운 계획을 하나님께 설명하고 승인을 받아내는 것도 아닙니다. 기도는 점점 내가 주님의 뜻과 질서에 맞추어지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겟세마네에서 보여 주신 기도의 질서는 깊습니다.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고백은 자신의 뜻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의 뜻을 아버지의 뜻 아래 두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 제 편이 되어 주십시오’에서 조금씩 ‘주님, 제가 주님의 편에 서게 해주십시오’로 변화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앞에서 나눈 여러 질문과도 하나로 이어집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니까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나는 전도를 많이 했으니 구원받을 거야’, ‘나는 주님께 헌신했으니 큰 상을 받을 거야’, ‘나는 죽으면 곧 주님 품에 안기겠지’라는 말들에는 공통적으로 ‘나’를 중심으로 하나님을 바라볼 위험이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됨도, 전도도, 헌신도, 천국의 소망도 모두 귀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의 중심이 ‘주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해주실 것인가?’에 머물면 신앙의 중심에 여전히 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거듭남’(regeneration)은 그 중심이 서서히 바뀌어 가는 과정입니다. ‘주님께서 내 뜻을 이루어 주시는가?’에서 ‘나는 주님의 뜻을 사랑하게 되었는가?’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인데 왜 하나님은 내 편이 아니실 때가 있지?’라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나를 사랑하시지만, 언제나 내 욕망의 편을 드시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내 안의 거짓과 악에는 반대하시며, 내가 선과 진리의 편에 서도록 이끄십니다.’

 

조금 더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주님은 내가 옳기 때문에 내 편이 되시는 분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내가 옳은 것의 편에 서도록 이끄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질문에서 가장 중요한 문장을 하나만 남긴다면 이것을 택하겠습니다. ‘신앙이 깊어진다는 것은 하나님을 내 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점점 하나님의 편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을 특권에서 거듭남으로, 보호받을 권리에서 아버지를 닮아 가는 삶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SL.12,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참여하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믿었던 사울’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참여하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믿었던 사울 - 열심보다 중요한 진리 사울(사도 바울의 회심 전 이름)은 하나님을 미워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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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10, ‘나는 사후 눈 뜨면 주님 품에 안겨 있겠지?’

‘나는 사후 눈 뜨면 주님 품에 안겨 있겠지?’ - 죽음 직후 우리를 맞이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예수 믿으니까 죽은 뒤 눈을 뜨면 곧바로 주님 품에 안겨 있겠지.’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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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후 눈 뜨면 주님 품에 안겨 있겠지?’ - 죽음 직후 우리를 맞이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예수 믿으니까 죽은 뒤 눈을 뜨면 곧바로 주님 품에 안겨 있겠지.’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에게는 아주 자연스럽고 따뜻한 기대입니다. 그리고 이 말에는 분명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죽음은 주님에게서 떨어져 미지의 세계로 내던져지는 사건이 아니며, 주님의 섭리와 보호는 죽음의 순간에도 중단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묘사하는 사후의 깨어남을 따라가 보면, 이 표현은 조금 다듬을 필요가 있습니다. ‘죽자마자 눈을 뜨면 예수님께서 눈앞에 서 계시고, 내가 그분의 품에 문자 그대로 안긴다’고 단정하기보다는, ‘사후의 첫 순간부터 나는 주님의 보호와 인도 안에 있다’고 말하는 편이 훨씬 정확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1758)에서 묘사하는 죽음 직후의 장면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육체의 기능이 멈춘 뒤에도 사람의 영은 살아 있으며, 천사들이 그 사람 곁에서 깨어남을 돕습니다. 처음에는 천적 천사들이 가까이하며 아주 평화로운 상태 속에서 그 사람을 보호하고, 이후 그의 상태가 변화함에 따라 다른 천사들과 영들이 함께합니다. 다시 말해 죽음 직후의 사람은 홀로 버려지지 않습니다. 자연계의 육체를 벗는 그 가장 낯선 순간부터 천국의 질서 안에서 세심하게 보호받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눈을 뜨면 주님 품에 있다’는 표현은 영적으로 매우 아름다운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 천사들이 사람을 보호한다고 해도 그 보호의 근원은 천사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구별이 하나 있습니다. ‘주님의 품에 있다’는 것과 ‘나는 곧바로 천국의 최종 거처에 들어간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에는 ‘영들의 세계’(world of spirits)가 있습니다. 이것은 천국과 지옥 사이에 있는 중간 상태이며, 사람이 자연계에서 형성한 자신의 진정한 내면이 드러나는 곳입니다. 죽었다고 해서 갑자기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억도 인격도 사랑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처음에는 자연계에서의 외적 모습과 상당히 비슷하지만, 점차 외면이 벗겨지고 그 사람의 실제 ‘지배적 사랑’(ruling love)이 나타납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인이니까 눈 뜨면 주님 품에 있겠지’라는 생각이 자칫 위험한 확신으로 변할 수도 있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나는 전도를 많이 했으니 구원받을 거야’, ‘나는 주님께 헌신적으로 살았으니 큰 상을 받을 거야’와 같은 원리입니다. 교회에 오래 다녔는지, 목회했는지, 성경을 많이 읽었는지, 주님의 이름을 얼마나 많이 불렀는지가 사후에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그 사람의 최종적 영적 상태를 대신하지는 못합니다. 결국 드러나는 것은 ‘나는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며 살았는가?’입니다.

 

그래서 사후세계에는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자연계에서는 자신을 매우 신앙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도 외적인 신앙의 껍질이 벗겨진 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자신의 지배적 사랑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세상에서 별로 주목받지 못했고 화려한 신앙 경력도 없었던 사람이 실제로는 양심에 따라 살고 악을 죄로 여겨 피하며 이웃에게 선을 행하기를 사랑했던 사람으로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사후에는 ‘나는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했는가?’보다 ‘나는 실제로 어떤 사람이 되어 있었는가?’가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사후에 주님을 직접 만나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은 천국의 중심이며 천국 전체를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천사들은 모두 주님을 바라보고, 천국의 모든 선과 진리와 생명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따라서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단순히 아름다운 장소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질서를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여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께 가까이 간다’는 것도 공간적으로 몇 미터 앞에 계신 주님에게 가까이 가는 것보다 ‘내 사랑이 주님의 사랑과 얼마나 조화를 이루는가?’라는 상태의 문제입니다.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역설이 생깁니다. 주님께서는 사후에 갑자기 우리를 사랑하기 시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이미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죽은 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자연계에서 만들어 놓았던 수많은 외적인 것들이 벗겨지면서 ‘내가 주님의 사랑을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으로 되어 있는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문제는 그 사랑을 받아들일 우리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주님 품’이라는 표현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으면 더욱 깊어집니다. 주님의 품은 단순히 사후에 한 번 경험하는 포옹이라기보다 주님의 사랑과 보호와 질서 안에 거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것은 죽은 뒤에 처음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악을 죄로 여겨 피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유용한 일’(use)을 기쁘게 행할 때 이미 주님의 품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거듭남’(regeneration)이란 어쩌면 사후에 주님 품에 안길 준비라기보다, 지금부터 그 품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되어 가는 과정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죽음의 순간을 두려워해야 할까요? 스베덴보리의 사후 묘사를 받아들인다면 오히려 상당한 위로가 있습니다. 죽음은 의식이 영원히 꺼지는 순간도 아니고, 영혼이 홀로 어둠 속으로 떨어지는 순간도 아닙니다. 자연계의 몸을 벗고 영적 감각이 열리면서 이미 자신을 둘러싸고 있었던 영계를 의식하기 시작하는 전환입니다. 그리고 그 깨어남 자체가 주님의 질서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죽을 때 내가 혼자이면 어떡하지?’라는 두려움에 대해서는 ‘혼자가 아닙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나는 예수 믿었으니 눈 뜨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났고 천국행이 확정되어 있겠지’라고 생각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사후의 깨어남은 끝이라기보다 진실이 드러나는 시작입니다. 그곳에서는 교단도 직분도 평판도 종교적 이력도 우리의 내면을 가려 주지 못합니다. 내가 사랑한다고 말했던 주님을 실제로 사랑했는지, 내가 믿는다고 고백했던 진리를 실제 삶에서 받아들였는지, 체어리티(charity)가 내 삶 속에서 실제적인 선으로 나타났는지가 점점 분명해집니다.

 

그래서 ‘나는 사후 눈 뜨면 주님 품에 안겨 있겠지?’라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하고 싶습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의 순간에도 주님의 보호 밖으로 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의 품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만으로 자동 배정되는 자리가 아니라, 우리가 평생 받아들인 주님의 사랑과 선이 결국 우리 자신의 사랑이 되어 드러나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죽어서 눈을 뜬 다음 주님 품에 안기는 것만 기다릴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악을 하나씩 내려놓고, 진리를 받아들이고, 사람을 사랑하며, 자신의 자리에서 선한 ‘유용한 일’을 행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주님의 품 안에서 살아가기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후에 전혀 낯선 주님을 처음 만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부터 사랑하고 따르던 주님을 더 분명한 세계에서 계속 따라가는 것입니다.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죽음 뒤에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나를 받아 주실 것인가가 아니라, 언제나 나를 받아들이고 계셨던 주님의 사랑을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며 받아들였는가입니다.’

 

 

 

SL.11, ‘나는 하나님의 자녀인데 왜 하나님은 내 편이 아니실 때가 있지?’

‘나는 하나님의 자녀인데 왜 하나님은 내 편이 아니실 때가 있지?’ - 주님은 내 편이 아니라 나를 구원하시는 분 ‘나는 하나님의 자녀인데 왜 하나님은 내 편이 아니실 때가 있지?’ 신앙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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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9, ‘나는 주님께 헌신했으니 천국 가면 큰 상 받을 거야’

‘나는 주님께 헌신적인 삶을 살았으니 큰 상을 받을 거야’ - 천국의 상과 공로의 역설 ‘나는 주님께 헌신적인 삶을 살았으니 천국에서 큰 상을 받을 거야.’ 이 말은 ‘나는 전도를 많이 했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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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주님께 헌신적인 삶을 살았으니 큰 상을 받을 거야’ - 천국의 상과 공로의 역설

 

‘나는 주님께 헌신적인 삶을 살았으니 천국에서 큰 상을 받을 거야.’ 이 말은 ‘나는 전도를 많이 했으니 구원받을 거야’보다 한 단계 더 미묘한 문제를 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 자체가 실제로 ‘상’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5:12)고 하셨고,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16:27)고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상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큰 상’이 무엇이며, 내가 그것을 어떤 마음으로 기대하느냐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가장 먼저 구별해야 할 것은 ‘상’과 ‘공로’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충성스럽게 살고 이웃에게 선을 행한 삶에는 분명히 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주님께 무엇인가를 해드렸기 때문에 주님께서 그 대가를 지급하시는 방식의 상이 아닙니다. ‘나는 평생 목회했고, 이것도 포기했고, 저것도 희생했으며, 많은 사람을 섬겼으니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천국의 몫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헌신은 어느새 주님과의 거래가 될 수 있습니다. 선행의 중심에 주님이 아니라 ‘나의 공로’가 들어서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마태복음 20장의 포도원 품꾼 비유는 상당히 충격적입니다. 아침 일찍부터 일한 사람과 늦게 들어와 한 시간만 일한 사람이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습니다. 먼저 온 사람들은 불평합니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마20:12). 그들의 계산은 인간적으로는 충분히 이해됩니다. ‘나는 더 오래 일했으므로 더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계산법이 천국을 세상 임금체계처럼 바라보게 만듭니다. 주님과의 관계까지 ‘내가 이만큼 했으니 주님도 이만큼 주셔야 한다’는 방식으로 바꾸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천국에서 모든 사람의 상태가 완전히 똑같다는 뜻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에는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상태와 기능, 그리고 행복의 정도가 있습니다. 사람마다 자연계에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인 정도가 다르고, 거듭남(regeneration)의 과정에서 형성된 사랑과 지혜의 그릇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국에서 ‘더 큰 사람’은 세상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더 높은 자리에 앉아 더 많은 특권을 누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과 이웃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더 기쁘게 섬길 수 있는 사람입니다. 천국의 위대함은 지배받는 사람의 수가 아니라 섬길 수 있는 사랑의 크기와 연결됩니다.

 

그래서 ‘큰 상’의 의미 자체가 달라집니다. 천국의 상은 사랑과 선행 바깥에 별도로 붙는 보너스가 아닙니다. 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선을 행하는 것 자체가 기쁨이 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 행복이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는 것이 기쁨입니다. 결국 주님께서 주시는 상은 ‘내가 선을 행했으니 그 대가로 무엇을 받는다’기보다, 주님께서 내 안에 형성하신 선한 사랑이 천국에서 아무 방해 없이 펼쳐지며 그 사랑 자체의 기쁨을 누리는 데 더 가깝습니다.

 

여기서 아주 흥미로운 역설이 생깁니다. 정말로 주님께 헌신한 사람일수록 ‘내가 주님을 위해 이렇게 많이 했다’는 생각은 오히려 약해질 수 있습니다. 자신이 행한 선의 근원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점점 더 알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님을 위해 평생 희생했다’기보다 ‘주님께서 평생 나를 붙드시고 나를 사용해 주셨다’고 보게 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이 수십 년을 헌신한 사람이라도 한 사람은 그것을 자기 공로의 장부에 기록하고, 다른 사람은 그것을 주님께 받은 은혜로 기억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차이가 ‘프로프리움’(proprium)의 문제입니다.

 

주님께서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17:10)고 말씀하신 것도 이런 관점에서 깊이 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아무 가치도 없다는 자기비하를 요구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선을 행하고 난 뒤 그것을 자기 공로로 소유하지 말라는 말씀에 가깝습니다. ‘내가 이렇게 했으니 받을 권리가 있다’가 아니라 ‘이 일을 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주님께 받은 은혜였다’는 태도입니다.

 

그렇다면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는 말씀과 모순되지 않을까요? 오히려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우리의 행위는 내면의 사랑이 현실에서 형태를 취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단순히 선행 횟수를 세시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 속에서 어떤 사랑이 형성되었는지를 보십니다. 평생 헌신적인 일을 많이 했더라도 그 중심에 명예욕과 지배욕, 그리고 자기 의가 있었다면 외적 헌신과 내적 상태가 다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세상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평범한 사람이 가족을 돌보고 자신의 직업에 정직하며 이웃에게 필요한 선을 행하면서 주님 앞에서 깊은 거듭남을 이루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큰 상’과 앞에서 살펴본 ‘지배적 사랑’(ruling love)은 서로 연결됩니다. 사람이 영계에 가지고 가는 것은 ‘나는 몇 년 목회했다’, ‘몇 명을 전도했다’, ‘얼마를 헌금했다’,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했다’는 공적 목록이 아닙니다. 그런 삶을 살아가는 동안 주님께서 그 사람 안에 형성하신 사랑을 가지고 갑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성격과 깊이에 따라 천국에서 자신에게 가장 알맞은 공동체와 ‘유용한 일’(use)을 발견하고, 거기에서 자신의 사랑과 상응하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실제로 사람마다 천국의 기쁨을 받아들이는 정도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질문에는 매우 섬세한 대답이 필요합니다. ‘주님께 헌신적인 삶을 살았으니 큰 상이 있다’는 말 자체를 무조건 틀렸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경도 상을 말합니다. 그러나 ‘내가 이만큼 헌신했으니 남보다 더 큰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미 천국의 상을 세상의 보상체계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참된 천국의 상은 다른 사람보다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이 사랑하고 더 자유롭게 선을 행하며 더 큰 기쁨으로 주님의 ‘유용한 일’에 참여할 수 있는 상태라고 보는 편이 스베덴보리의 천국관에 훨씬 가깝습니다.

 

어쩌면 천국의 상에는 이런 놀라운 역설이 있습니다. ‘상을 받기 위해 선을 행하는 사람은 아직 상을 자기 것으로 바라보지만, 선 자체를 사랑하여 행하는 사람은 이미 그 선 안에서 상을 맛보기 시작합니다.’ 천국에 가서 갑자기 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가운데 천국의 기쁨이 이미 사람 안에서 형성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주님께 헌신적인 삶을 살았으니 큰 상을 받을 거야’라는 말은 이렇게 바꾸어 보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평생 나를 사용해 주셨다면 그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내가 행한 선 가운데 참으로 선한 것은 주님에게서 온 것이며, 내가 바라는 상은 남보다 높은 자리가 아니라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더욱 유용하게 섬길 수 있는 기쁨입니다.’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천국의 큰 상은 내가 주님께 많이 해드린 대가가 아니라, 주님께서 내 안에 더 큰 사랑과 더 큰 유용함의 기쁨을 형성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앞선 글들과 함께 놓으면 하나의 흐름이 보입니다. ‘부자는 재산 때문에 구원받거나 멸망하지 않습니다. 전도자는 전도 실적 때문에 구원받지 않습니다. 헌신한 사람도 헌신의 공로 때문에 큰 상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남는 질문은 하나입니다. ‘그 모든 것을 하면서 내 안에 어떤 ‘지배적 사랑’(ruling love)이 형성되었는가?’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외적인 종교적 성취보다 더 깊이 들여다보게 하는 지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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