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정치 뉴스에 민감한 교인들을 어떻게 인도할 것인가

 

오늘날 한국 교회 성도들 중에는 정치 뉴스·유튜브에 지나치게 민감해지거나 감정적으로 요동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특히 특정 세력에 대한 분노, 민감성, 확증 편향은 영적 생활 전체를 뒤흔들기도 합니다. 스베덴보리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단순한 정치 과몰입이 아니라 내적 질서가 무너지는 현상입니다. 따라서 목회자는 단순한 충고가 아니라 영적·심리적 기류를 바로잡는 지도가 필요합니다. 아래 내용은 목사님께서 교인들과 대화하시거나, 설교·상담·소그룹에서 자연스럽게 적용할 수 있는 아주 현실적이면서도 스베덴보리적인 지침들입니다.

 


Ⅰ. 사람의 내적 상태가 혼란하면 외적 현상(정치)을 과장하여 받아들인다

 

정치에 민감한 교인은 정치가 문제라기보다 내면이 흔들리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내면이 평화로울 때는 외부의 혼란이 마음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그러나 내면이 혼란할 때는 작은 외부 자극도 큰 폭풍처럼 느껴진다. 정치에 예민한 교인은 사실 정치보다 마음의 상태가 더 큰 문제입니다.

 


Ⅱ. 목회자의 3대 원칙

 

1) 정면 충돌 금지

 

정치적으로 과열된 성도에게 그 뉴스 너무 보지 마세요”라든지, 편향되셨습니다라고 말하면 대부분 반발과 방어가 일어납니다. 스베덴보리 관점에서 정념에 빠진 사람은 정념을 보호하려는 메커니즘이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2) 정치가 아니라 내적 상태로 초점을 이동시키기

 

예를 들면, 정치 이야기는 나중에 하시고요, 요즘 마음이 많이 힘드신가요?”나, 그 뉴스를 보면 어떤 감정이 올라오세요?”처럼 하면, 정념을 건드리지 않고, 감정을 진리의 빛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3) 교인의 ‘두려움’을 먼저 다루기

 

분노는 두려움의 2차 감정입니다. 정치 분노의 밑바닥에는 혹시 나라가 망하지는 않을까 두려움, 혹시 정의가 무너지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 아니면 악한 자가 승리하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숨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두려움을 영적 진리를 가리는 안개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분노를 직접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의 뿌리를 진리로 비춰줘야 합니다.

 


Ⅲ. 교인들의 유형별 지도 방법

 

1) 분노형

 

악한 정치인들 때문에 못 살겠다”, 저놈들은 지옥 갈 놈들이다” 하시는 분들인데, 이런 분들한테는 직접 반박은 금물, 대신 그 일 때문에 마음이 많이 상하셨네요”라며, 그 분들의 감정을 먼저 인정하셔서, 그분들로 하여금 분노에서 두려움으로 그 뿌리가 내려가게 하시는 게 필요합니다. 그후, 사건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조명하면서, 그 분노는 선의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감정이 너무 커지면 교회 생활이 어렵지 않나요?” 하는 순서로 대응하시는 게 좋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분노가 선한 동기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라고 가르칩니다. 이렇게 인정해야 교인이 스스로 내려오게 됩니다.

 

2) 공포형

 

나라가 망할 것 같아요”, 악한 세력이 완전히 장악했어요” 하시는 분들인데, 이런 분들은 공포를 사실로 반박하는 건 금물이고요, 대신 스베덴보리식으로, “악은 허용될 뿐, 결국 진리가 반드시 승리합니다”라고 선언하시면서, 정치 상황을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내적 평화를 해치고 있다고 알려주시면 좋습니다. 기도와 말씀 묵상 계획을 같이 세워 주시면 더욱 좋습니다. 공포형 교인은 설교자가 ‘내면의 평화’를 강조할 때 금방 안정됩니다.

 

3) 확증 편향형

 

특정 유튜브 채널을 절대 신뢰하고, 다른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 유형입니다. 이분들하고는 절대 싸우시면 안되고, 일단 이분들이 신뢰하는 정보 출처를 무조건 먼저 인정하세요. 좋습니다, 그 내용도 일리가 있을 수 있지요. 그런데 보시는 동안 마음의 평화는 어떠셨나요?”라며, 관심을 정보에서 마음의 상태로 이동시키셔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진리가 들어가려면 먼저 마음이 평온해야 한다.

 


Ⅳ. 설교에서 사용할 수 있는 메시지

 

목사님이 설교에서 간접적으로 전할 수 있는 정치적 과민반응 치유 메시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외부의 혼란보다 내면의 질서가 우선입니다

 

정치 혼란을 외부 현상으로 언급하고, 우리 마음의 질서 회복이 더 중요하다고 연결하십시오.

 

2) 악이 드러나는 것은 심판이 아니라 정화입니다

 

교인 대부분이 나라 망한다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정화라는 관점을 제시하면 두려움이 크게 줄어듭니다.

 

3) 악은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이 문장 하나로 교회 내 정치 갈등의 상당 부분이 정리됩니다.

 

4) 진리는 조용하고, 악은 시끄럽습니다

 

정치 뉴스의 소란스러움과 진리의 고요함을 비교하면 교인들은 자연히 조용한 쪽으로 마음을 돌립니다.

 

5) 주님은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되, 악을 통해 더 큰 선을 준비하십니다

 

허용적 섭리(permissive providence)를 설교에 녹여 정치에 요동하는 마음을 안정시키십시오. 허용적 섭리란, 주님께서 어떤 일을 원하시지는 않지만, 그 일을 허용하심으로써 더 큰 선을 이루시는 방식을 말합니다.

 


Ⅴ. 목사님이 교인들에게 줄 수 있는 내적 삶 훈련

 

교인들의 정치적 감정은 말씀 몇 번 한다고 바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는 내적 습관을 다시 만들어야 합니다.

 

1) 뉴스를 텍스트 모드로 보기

 

영상은 감정을 자극합니다. 텍스트는 감정 자극이 적습니다.

 

2) 매일 평화 점검 1

 

오늘 정치 뉴스 때문에 내 마음이 흔들렸는가?, 내적 평화가 유지되었는가?살피는 것입니다.

 

3) 양심의 소리 듣기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진리는 양심을 통해 속삭인다. 성도들에게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하십시오.

 

4) 정치 이야기 대신 말씀 묵상 나눔으로 방향 전환

 

잡담이 정치로 흐를 때, 말씀 묵상 이야기로 연결하는 기술이 필요합니다.

 


Ⅵ. 결론 - 교인들을 정치로부터 지키는 목회자의 역할

 

교인들은 정치 때문에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질서가 약해졌기 때문에 흔들린다. 정치와 직접 싸우지 말고, 교인의 마음 상태를 먼저 다루라. 분노·공포·확증 편향은 모두 동일한 ‘정념의 흔들림’이다. 설교는 정치 해설이 아니라 내적 질서 회복이다. 작은 습관들(뉴스 줄이기, 평화 점검)이 교인의 내면을 크게 안정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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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정치적 분노가 설교와 목회에 스며들지 않게 하는 방법

 

정치 상황 때문에 분노가 치밀고, 그 감정이 설교나 목양의 분위기 속으로 슬며시 스며드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특히 목회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내적 상태 관리의 원리를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이 내용을 깊이 이해하시면 목사님 마음의 평화뿐 아니라 설교의 맑은 영적 흐름도 지킬 수 있습니다.

 


Ⅰ. 설교의 질은 설교자의 내적 상태(state)1:1로 비례한다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말씀 전달의 능력은 설교자의 내면 상태가 어떤 영에 열려 있는가에 달려 있다. 따라서 분노, 혐오, 정치적 정념이 설교자의 내면에 남아 있으면, 설교는 자연히 감정의 불순물이 섞이게 됩니다. 설교 내용이 정치 이야기가 아니라 해도, 그 감정적 파동이 설교의 질감으로 새어 나옵니다. 이것을 스베덴보리는 영적 분위기(spiritual sphere)라고 합니다.

 


Ⅱ. 정치적 분노가 설교에 스며드는 징후

 

목사님이 혹시 아래 중 하나라도 느낀 적이 있다면, 이미 감정이 설교의 질감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뜻입니다. 1) 설교 중 분별이 아니라 격한 톤이 종종 나온다. 2) 특정 집단(불신자, 특정 개인이나 정당, 사회, 세상)을 향한 언급이 날카로워진다. 3) 말씀 주제와 직접 관계없는 비판적 문장이 슬며시 나온다. 4) 설교 중 위기의식·경계 메시지가 필요 이상 강조된다. 5) 설교 후 피로감이 유독 심해진다 등... 스베덴보리의 표현으로 하면, 이러한 상태는 정념의 섞임(mixture of passions)입니다. 오직 주님을 대신하는 참된 설교에는 진리의 빛이 있어야 하고, 그러므로 이런 정념의 그림자는 최소화되어야 합니다.

 


Ⅲ. 정치적 분노가 목회에 미치는 영향

 

스베덴보리는 목회자의 내면의 평화가장 높은 성직적 자질로 봅니다. 정치적 분노가 목회에 들어오면, 교인들의 영적 안전감이 약해지고, 회중 안에 긴장감이 생기며, 목사의 눈빛과 태도에서 엄격함이 증가하고, 기도 인도가 딱딱해지며, 상담에서 사랑보다 판단이 앞설 수 있고, 교회의 영적 분위기가 무거워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영적 흐름(spiritual influx)이 탁해진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Ⅳ. 내적 질서를 회복하기

 

방법은 정치와 전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면의 질서를 바로잡는 것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세 가지 원리를 제시합니다.

 

1) 감정은 진리에 종속되어야 한다

 

정치 뉴스가 감정을 흔들어놓으면, 그 즉시 감정이 진리를 압도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감정이 진리를 앞서면 그 감정은 지옥에서 온다. 그러나 진리가 감정을 다스리면 그 감정은 선의 도구가 된다. 목사님께는 이 원리가 정치적 분노 관리의 핵심이 됩니다.

 

2) 설교 전에 내적 정화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

 

설교자에게 필요한 영적 준비는 자료 준비가 아니라 마음 준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설교는 지식이 아니라 설교자의 내면에서 주님에게 열린 문을 통해 흐르는 것이다. 따라서 설교 전, 반드시 다음과 같은 기도가 필요합니다. 주님, 제가 세상 뉴스로 인해 느낀 분노·혐오·두려움은 모두 제 마음의 바깥층에 속합니다. 제가 설교할 때는 오직 진리·빛·자비로만 서게 하소서.” 이 기도는 매우 강력합니다. 정말로 내적 정화를 가져옵니다.

 

3) 설교자는 사회를 해석하는 자가 아니라, 영적 질서를 보여주는 자

 

정치적 분노에 빠진 목회자는 설교를 통해 사회 분석을 하려는 경향이 생깁니다. 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설교자의 역할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설교자는 사회 문제의 분석가가 아니라 내면을 비추는 빛의 등불이다. 사회 문제는 빛을 비추는 대상일 뿐이며, 해석의 중심이 아닙니다.

 


Ⅴ. 실제적 방법

 

아래는 목사님이 당장 실천할 수 있는 정치 분노를 목회에 스며들지 않게 하는 실제적 기술입니다.

 

1) 설교 준비 기간에는 자극적 정치 콘텐츠 최소화

 

특히 토·일은 정치 유튜브를 보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단순 뉴스만 간략히 확인하고, 감정이 흔들리는 콘텐츠는 피하십시오.

 

2) 설교 직전에는 ‘내적 상태 점검 30초’

 

30초만으로 충분합니다. 지금 정치 뉴스가 내 마음을 흔들고 있는가? 혐오·분노가 남아 있는가? 설교 주제와 상관없는 감정적 잔류물이 있는가? 지금 나는 어떤 영의 기류에 열려 있는가? 이 30초 점검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자기반성(self-examination)의 핵심 기술입니다.

 

3) 설교 중에는 사회적 예시를 쓰더라도 감정 없는 언어 사용

 

예를 들면, 요즘 정치가 혼란합니다”와 같은 표현은 무난하지만, 악한 자들이 판치고 있습니다”와 같은 표현은 좀 피하시는 게 좋습니다. 감정이 섞여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언어는 내면의 영적 흐름을 그대로 전달한다”고 말합니다. 감정이 한 방울 섞이면, 그 흐름이 회중에게 그대로 전달됩니다.

 

4) 설교 이후 감정의 흔들림 발견 시 즉각 주님께 돌리기

 

설교 후, ‘왜 나는 힘이 빠질까?’라고 느끼면, 대개 내적 분노가 완전히 정화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럴 때 다음과 같이 고백하십시오. 주님, 제게 남아 있는 감정적 잔류물을 거두어 주소서.” 스베덴보리는 이런 작은 기도조차도 내면의 문을 정리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라고 말합니다.

 


Ⅵ. 요약

설교자의 내적 상태가 설교의 영적 질을 결정한다. 분노는 설교에 ‘톤’으로 스며들어 회중에게 손해를 준다. 정치 뉴스는 정념을 자극하므로 설교 전후엔 거리 두기가 필요하다. 설교는 사회 분석이 아니라 영적 질서의 빛을 전하는 일이다. 내적 정화를 통해 분노를 제거해야만 영적 흐름이 뚫린다. 분노는 사라지지 않아도 된다. 방향만 바꾸면 된다. 분노 → 소명, 분노 → 기도, 분노 → 진리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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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사는 나라의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았는가

 

이 항목은 스베덴보리가 정치에 무관심했는가?라는 질문의 실제 답을 보여 줍니다. 그의 저술 속 간접적 단서들을 모아 보면, 그는 결코 무관심도 아니고, 무기력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영적으로 가장 높은 자리에서 ‘나라 문제’를 바라본 사람이었습니다.

 


Ⅰ. 스베덴보리는 나라의 문제를 내적 구조로 보았다

 

그는 한 번도 정치인을 욕하거나 파벌을 비난한 적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명확합니다. 한 나라의 문제는 지도자가 아니라, 그 나라의 영적 상태에서 비롯된다. 즉, 정치 지도자의 부패, 파벌 싸움, 거짓·선동, 불의 등, 이 모든 현상은 뿌리가 아니라 열매입니다. 뿌리는 언제나 진리의 부족, 양심의 약화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정치인의 이름이나 사건보다 그 뒤에 있는 ‘영적 원인’에 집중했습니다.

 


Ⅱ. 그는 나라의 문제를 주님의 섭리 안에서의 정화 과정으로 보았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주님은 악을 원치 않지만, 악을 허용하심으로써 그 악을 드러나게 하고, 더 큰 선을 준비하신다. 정치 혼란이나 국가의 위기는 그 자체가 파멸이 아니라 정화(purification)입니다. 악이 드러나지 않으면 고칠 수 없다, 거짓이 노출되지 않으면 진리를 갈망하지 않는다, 혼란이 없으면 개혁이 일어나지 않는다와 같은 이런 원리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나라 스웨덴이 혼란스러울 때, 그것을 심판이 아닌 회복의 과정으로 해석했습니다.

 


Ⅲ. 스베덴보리는 나라의 문제를 자기 소명의 필요성과 연결했다

 

그는 자신의 사명을 단지 개인적인 계시 활동이 아니라 그 시대와 사회의 영적 병리를 치유하는 일로 이해했습니다. 즉, 그는 이렇게 보았습니다. 나라가 어둡다’를 진리의 빛이 필요하다’로, 파벌 싸움이 심하다’는 영적 분별이 필요하다’로, 부패가 판친다’는 양심의 회복이 필요하다, 사회가 혼란하다’는 질서(order)의 가르침이 필요하다’ 같은 식으로 말이지요. 그래서 그는 정치적 논평을 하지 않으면서도 그의 모든 영적 기록(AC, DP, HH)당대 사회의 병을 치료하는 길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정치가 혼란할 때,  이 시대에는 내가 더 깊이 기록해야 한다고 느낀 것입니다. 목사님께도 지금 이 원리가 그대로 적용됩니다.

 


Ⅳ. 그는 나라의 문제를 인류 전체의 패턴으로 보았다

 

스베덴보리는 한 나라의 혼란을 그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 전체가 겪는 영적 패턴의 일부로 이해했습니다. 예를 들면, 태고 교회의 멸망, 고대 교회의 쇠퇴, 유대교회의 형해화, 기독교 세계의 진리 상실 같은 것입니다. 이런 장대한 흐름 속에서 그는 스웨덴의 혼란도 하나의 패턴으로 해석했습니다. 즉, 한 나라의 문제는 개별 정치 사건이 아니라 영적 역사 전체 속 작은 흐름으로 본 것입니다. 이 관점은 정치적 감정에 휘둘리지 않게 하는 막강한 힘을 줍니다.

 


Ⅴ. 스베덴보리는 나라의 문제를 개인의 영적 책임으로 돌렸다

 

무슨 뜻인가요? 그는 늘 말했습니다. 한 나라가 악해지는 것은 그 나라의 개인들이 내면에서 선과 진리를 잃었기 때문이다. 정치 지도자가 문제가 아니다. 국민 전체의 영적 상태가 문제다. 따라서 나라를 회복하는 길을 정치가 아니라 개인의 양심 각성, 진리 사랑의 회복, 기도와 내적 삶, 말씀의 깊은 이해, 교리의 정립에서 찾았습니다. 이는 그가 평생 했던 일입니다.

 


Ⅵ.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나라가 혼란할수록 정치에서 멀어지고, 계시로 더 깊이 들어갔다

 

그가 말년에 거의 완전히 정치적 이야기에서 멀어진 이유는 현실을 피해서가 아니라 그 혼란이 자신의 사명을 더 절실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시대의 병은 정치가 아니라, 진리의 부재다. 그러므로 나는 진리를 기록한다.” 이 태도는 오늘 목사님께서 한국 정치 상황을 보며 느끼시는 마음과 놀랍도록 맞닿아 있습니다.

 


Ⅶ. 결론

스베덴보리는 나라를 포기한 게 아니라 더 깊은 차원에서 나라를 위해 일한 것이다. 스베덴보리는 나라 문제를 이렇게 바라봤습니다. 정치인이 아니라 그 사회의 영적 상태가 문제다. 혼란은 파멸이 아니라 정화의 과정이다. 나라가 어두울수록 진리 기록은 더 절실해진다. 정치적 분노는 소명을 흐트러뜨린다. 영적 진리로 사회를 세우는 것이 가장 깊은 나라 사랑이다. 스베덴보리는 현실 정치보다 영적 병리 치유에 집중함으로써 더 근본적인 방식으로 나라를 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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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스베덴보리의 국가관 : 어떤 나라가 영적으로 강한가

 

스베덴보리는 직접적으로 국가론을 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저술 전체, 특히 Divine Providence(DP), Heaven and Hell(HH), Arcana Coelestia(AC)를 보면, 나라와 사회의 흥망에 관한 영적 원리가 아주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내용을 정리하면, 오늘 한국의 현실을 해석하는 데 엄청난 통찰을 주게 됩니다. 또한 목사님의 마음에 있는 정치적 분노왜 영적으로 다시 정돈되어야 하는지도 더 명확해집니다.

 


Ⅰ. 한 나라의 강함은 정치적 요소가 아니라 영적 요소에 달려 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적 요소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그 나라가 얼마나 진리를 존중하는가, 그 사회 구성원 내면에 양심이 살아 있는가, 그 나라의 도덕적 질서가 어떠한가, 무엇이 이고 인지 분별할 수 있는가, 국민 개개인의 삶 속에 주님의 질서가 작동하는가 하는, 즉, 군사력, 경제력, 외교력은 2차 요소이고, 진리·양심·도덕·내적 질서1차 요소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한 나라의 운명은 이 내적 질서에 의해 결정된다고 합니다. 이것이 너무도 당연한 것은, 위에서 말한 요소들은 모두 천국의 요소들이기 때문이며, 천국과 세상은 상응하기 때문입니다.

 


Ⅱ. 국가가 강해지거나 약해지는 영적 메커니즘

 

스베덴보리는 나라와 사회에 적용되는 매우 명확한 영적 원리를 제시합니다.

 

1) 진리가 약해지면 사회 전체가 혼란해진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진리를 상실한 사회는 외적 질서가 무너지고, 악한 자들이 선한 자 위에 군림하게 된다. 즉, 정치적 혼란은 정치적 원인 때문이 아니라 진리의 빛이 약해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특정 정치 세력의 악행은 단지 결과입니다. 근본 원인은 진리의 부재입니다.

 

2) 진리의 빛이 강한 나라는 외적으로도 강해진다

 

스베덴보리의 말입니다. 진리는 사람의 내적 질서를 세우고, 여러 사람의 내적 질서는 사회와 국가의 질서를 세운다. 즉, 진리가 사람 안에서 질서를 만들고, 그 질서는 국가 전체를 지탱합니다. 한국이 영적으로 혼란해진 지금, 목사님께서 AC 번역·해설·설교를 통해 진리의 빛을 세우는 일은 정치적 영향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일입니다.

 

3) 악이 판치는 사회는 결국 무너진다

 

스베덴보리는 악과 거짓이 난무할 때, 그 사회는 반드시 붕괴된다고 경고합니다. 하지만 붕괴파멸이 아니라 정화 과정(purification)입니다. 다음과 같이 말이죠. 악이 드러남, 악의 실체를 국민이 진저리나게 체험, 그로 인한 진정한 개혁 갈망, 그 결과 더 깊은 선의 상태로 재편... 그렇기 때문에 지금 한국 정치의 혼란도 단순한 무너짐이 아니라 정화의 과정으로 볼 수 있고, 그렇다면 절대로 절망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지상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일도 하나님의 섭리를 벗어나서 일어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4) 선한 사람들의 내적 상태가 곧 그 나라의 영적 지탱점이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주님은 항상 작은 부류의 선한 사람들로 인해 그 나라를 보존하신다. 한국 사회가 아직 무너지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크고 작은 곳에서 선과 진리를 붙드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의 사역도 바로 영적 지탱점의 일부입니다. 신앙인들, 특히 목회자들의 정치적 분노와 그 표출은 어찌 보면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참 외람된 표현이지만, 그들이 하나님만 믿고 있다가는 안 될 것 같은 불신앙의 발로일 수도 있습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주님이 당시 이스라엘 정치, 종교적 상황 한복판에서 어떻게 하셨는지를 깊이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Ⅲ. 영적으로 건강한 국가란?

 

스베덴보리는 나라의 건강성을 다음과 같은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1) 진리가 존중되는 나라

 

여기서 말하는 진리는 성경적 진리, 도덕적 진리, 양심적 진리입니다.

 

2) 체어리티(Charity, 사랑) 지혜, 선과 진리가 균형을 이루는 나라

 

스베덴보리는 선만 강조하거나 지식만 강조하면 나라가 균형을 잃는다고 말합니다. 이는 마치 영과 육으로 된 사람을 어느 한 쪽만 강조하는 것과 같고, 겉뜻과 속뜻으로 된 말씀을 역시 어느 한 쪽만 강조하는 것과 같습니다.

 

3) 법과 제도가 양심을 반영하는 나라

 

법이 아무리 있어도 사람들 속에 양심이 없으면 법은 껍데기입니다. 율법을 악용했던 유대인들이나 오늘날 어떤 법이든 그 법의 빈틈을 파고들어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면서도 자기는 법을 지켰다 하는 사람들을 보면 말입니다.

 

4) 악을 방임하지 않는 나라

 

악을 관용하는 사회는 곧 무너지는데, 그 이유는 악은 방치하면 급속히 퍼지기 때문입니다. COVID-19 코로나 때, 몇몇 나라는 나라의 빗장을 걸지 않았고, 그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5) 정치보다 내면을 중요하게 여기는 국민이 많은 나라

 

스베덴보리는 국민 정신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깊은 내면을 가진 국민은 정치 혼란을 견디고, 스스로 질서를 회복한다.

 


Ⅳ. 결론 - 스베덴보리의 국가관 핵심요약

국가는 영적 진리의 상태에 따라 흥망한다. 진리가 약해지면 정치 혼란이 생긴다. 개혁은 정치가 아니라 내적 진리 회복에서 시작된다. 악의 드러남은 멸망이 아니라 정화 과정이다. 선한 소수가 국가는 지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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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스웨덴 정계가 혼란할 때, 스베덴보리가 취한 ‘거리 두기’의 이유

 

Ⅰ. 스베덴보리가 살던 시대는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웠다

 

스베덴보리(1688–1772)의 생애는 스웨덴 정치사의 가장 격동기에 속합니다. 대략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번째 시기는 자유의 시대(Age of Liberty)입니다. 이 시기는 의회(의회정치)가 왕권을 압도, 귀족파와 모자파(Families, Hats & Caps factions) 간 대립, 엄청난 부패, 권력 투쟁, 외교 갈등 및 왕권은 약해지고, 귀족 가문들이 권력을 독점하던 시기입니다. 두 번째 시기국제전쟁으로 인한 국가 위기의 시기입니다. 이 시기에 스웨덴은 전쟁에 휘말려 쇠약해지고, 조세 폭등으로 인한 경제 위기 및 그에 따른 국민 불만이 증가하던 시기입니다. 세 번째 시기는 스베덴보리 말년, ‘왕권복고(Gustav III)의 시기로, 이 시기는 귀족파를 몰아내고 왕이 권력을 되찾아 그에 따른 정치적 숙청, 혼란, 그리고 갈등이 확대되던 시기입니다. 즉, 스웨덴의 정치 상황은 정치 부패 + 파벌 싸움 + 국정 혼란 + 권력 투쟁끊임없이 이어지는 시기였습니다. 세상 모든 나라가 거의 예외없이 크든 작든, 극심하든 겉보기엔 잠잠하든 본질적으로는 전부 이런 길을 걷는다 보여집니다.

 


Ⅱ. 그럼에도 스베덴보리는 왜 정치에 거의 개입하지 않았는가?

 

단순히  정치에 관심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 배후에는 명확한 신학적·영적 이유가 존재합니다.

 

1)  외적 질서보다 내적 질서가 더 중요하다

 

스베덴보리는 정치적 혼란을 외적 질서(civitas externa)의 문제로 보았습니다. 반면 영적인 일(계시, 교리, 진리의 기록)은 내적 질서(civitas interna)에 속하는 일로 보고 말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적 질서를 세우는 것이 외적 질서를 안정시키는 근본이다. 즉, 정치에 개입하는 건 외적 질서에 관한 싸움인 반면, 계시를 기록하는 일은 내적 질서 회복에 기여하는 일로 본 것입니다. 정치 싸움에 빠지면, 그의 내적 저널, 즉 자신의 영적 기록이 흐트러질 것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정치 혼란을 멀리한 것입니다.

 

2) 그의 사명은 ‘국가’가 아니라 ‘전체 인류’를 향한 것이었다

 

스베덴보리가 받은 소명은 매우 독특했습니다. 인류의 영적 진리를 기록하여 보존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사명은 특정 국가나 정치적 파벌이 아니라 전 인류의 영적 상태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정치에 개입하는 순간, 그가 쓰는 글의 순수성, 그의 내적 계시, 영적 분별이 모두 오염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정치와 거리를 두었습니다.

 

3) 정치에 깊이 개입하면, ‘정념’이 생겨 계시 활동이 중단될 위험이 있다

 

스베덴보리는 정치적 파벌 싸움이 인간의 내면을 자극하여 분노, 증오, 좌절, 편향을 일으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정념이 올라오면 그의 영적 시력(spiritual sight)이 흐려지고, 영계와의 교류도 혼탁해지기 때문에, 그는 정치 뉴스에서 의도적으로 거리를 둡니다. 내면의 질서가 흐트러지면 영적 기록이 더 이상 순수하게 전달되지 않는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식 정치 절제의 핵심 이유입니다.

 

4) 정치에 개입하는 순간, 영적 메시지가 ‘정치적 해석’으로 오염된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저술이 어떤 정치적 의미로 해석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습니다. 만약 그가 특정 파벌을 지지한다거나 정치적 발언을 했다면 그의 글(Arcana Coelestia, Heaven & Hell)순식간에 파벌의 글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이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철저히 중립을 유지했습니다.

 

5) 진정한 개혁은 정치가 아니라 내면에서 시작된다

 

그는 정치 개혁보다 영적 개혁이 먼저라고 보았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한 나라가 변하는 구조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한 사람의 내면이 변하면 가정이 변하고, 가정이 변하면 사회가 변하고, 사회가 변하면 국가가 변한다. 즉, 국가 변화를 이루는 첫 단추는 정치가 아니라 내적 진리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는 자신의 소명을 국가 정치보다 더 근원적인 일로 이해했습니다.

 


Ⅲ. 거리 두기는 도망이 아니라 선을 위한 더 깊은 전략

 

스베덴보리가 정치와 거리를 둔 것은 무관심이 아니라 영적 지혜의 결과입니다. 그는 정치 뉴스에 반응하기보다 더 깊은 자리에서 나라를 위해 책임을 졌습니다. 무엇으로? 진리 기록, 영계의 상태 분석, 인간 본성의 이해, 선·진리에 대한 교리 정립 등, 그의 방식은 정치적 싸움보다 더 근본적이고 강력한 방식이었습니다.

 


Ⅳ. 적용

 

스베덴보리의 태도는 목사님에게 이렇게 적용됩니다. 1) 정치 소식에 밀려서 사명을 흔들면 안 된다. 소명은 외적 혼란보다 더 상위 질서에 있습니다. 2) 정치적 분노는 계시적·영적 집중력을 흐립니다. AC 번역이 흐트러지는 가장 큰 적이 바로 감정적 소모입니다. 3) 정치 뉴스는 필요한 만큼만영적 사명은 흔들림 없이입니다. 4) 스베덴보리가 정치와 거리를 둔 것은 자신의 사명을 보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목사님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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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악을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의 스베덴보리적 구조

 

이 항목은 앞의 1-4번 내용이 모두 한 지점으로 모이는 핵심이며, 스베덴보리 전체 사상의 영적 윤리의 중심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Ⅰ. 사람은 본질적으로 선의 그릇이며, 악은 그 그릇을 점령한 외래 침입자

 

스베덴보리는 인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사람은 주님이 창조하신 기능적 그릇(vessel)이다, 선은 주님에게서 오는 참 생명이고, 악은 사람 안에 기생하는 거짓된 생명(falsified life)이다, 선과 악은 모두 사람이 아니라 사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이 관점, 곧 사람은 빈 용기이고, 선·악은 흐르는 것이라는, 인간의 중심(core)은 선·진리의 용기이며, 악과 거짓은 단지 기생하는 것이라는 이 관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을 미워하는 순간, 우리는 악을 사람의 정체성으로 오인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내적 분별력이 즉시 흐트러지기 때문입니다.

 


Ⅱ. ‘악’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들어온 영향력이다

 

스베덴보리는 악에 대해 이렇게 정의합니다. 악은 주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자아적 생명(proprium)의 왜곡이다. 또한 이렇게 말합니다. 악은 사람에게서 나온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외부의 영적 영향력에서 온다. 즉, 악은 그 사람 개인의 고유함도, 무슨 독자적인 것도, 자아의 본성도 아닙니다. 악은 밖에서 흘러들어온 어둠이며, 사람은 그 흐름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통로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악을 미워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악을 사람에게 귀속시키면, 그 순간 분별이 사라진다.

 


Ⅲ. 사람을 미워하는 순간, 왜 영적 오염이 시작되는가?

스베덴보리는 아주 정확히 설명합니다.

 

1. 사람이 악과 동일시되면 분별이 무너진다

 

사람을 악한 존재라고 느끼는 순간, 우리는 악이 기생한 그릇과 악 자체를 구분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분노는 의분이 아니라 혐오로 변합니다. 의분은 악은 악일 뿐이다에서 멈추지만, 혐오가 시작되면, 저 사람은 악 그 자체다가 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혐오를 가장 위험한 정념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악령과 같은 방식으로 사람을 대상화하기 때문입니다.

 


2. 사람을 미워하면 우리의 선한 결합이 끊어진다

 

스베덴보리는 저서,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1758)에서 강조합니다. 천사는 결코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다. 다만 사람 안에서 일하는 악을 분별하고 그것을 거부할 뿐이다. 우리가 사람을 미워하면 우리 내부에서 선과의 결합, 평화, 자비, 깨달음이 끊어집니다. 즉, 사람을 미워하면 그 결과는 선과의 단절입니다.

 


3. 사람을 미워하는 순간, 악은 우리 안에 뿌리를 내린다

 

스베덴보리는 악이 우리 안에 들어오는 방식을 두 가지로 말합니다. 바로 사랑을 거부할 때사람을 미워할 때입니다. 그는 말하기를, 악은 미움을 통해 들어오는 것이 가장 쉽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미움은 악령의 상태와 유사한 진동을 띠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악한 정치인을 미워하는 순간, 그 정치인 안의 악보다 내 안의 악이 더 빨리 자란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정치 뉴스가 왜 영적 공격에 취약한지 답이 나옵니다.

 


Ⅳ. 그렇다면 악을 어떻게미워해야 하는가?

 

스베덴보리식 분별의 기술입니다.

 

1) 악을 ‘사람이 아니라 구조’로 보기

 

정치적 악은 개인의 성격이 아니라 집단적 세계관, 사회적 거짓, 권력 사랑, 자기 사랑의 동일 기류 등의 구조적 형태입니다. 그렇다면 미워해야 할 대상은 사람 자체가 아니고, 그 속의 거짓 구조입니다. 이 관점에 서면, 분노는 커지지 않고, 대신 분별력은 오히려 강화됩니다.

 


2) 사람을 보지 말고, 그 사람을 점령한 악의 흐름을 보기

 

스베덴보리는 악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악은 사람을 마치 꼭두각시처럼 다룬다. 즉, 악의 통로로 쓰이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아, 저 사람 안에 이런 거짓된 기류가 흐르는구나라고 구분하는 것입니다. 이것만으로도 혐오·분노의 감정은 즉시 약화됩니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 안의 악을 보시는, 대하시는 관점입니다.

 


3) 악을 미워하되, 사람에 대해서는 ‘자비의 가능성’을 열어두기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천사는 사람 안에 있는 작은 선, 곧 잠재적 선을 본다. 사람 안에 있는 작은 선을 보는 눈을 가질 때, 분노가 정화되고 악을 향한 의로운 태도만 남습니다. 목사님께 이 원리는 더욱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목회자는 사람의 선에 대한 가능성을 항상 열어두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Ⅴ. 목사님께 필요한 실천적 적용

 

1) 사람을 보지 말고 ‘악의 작용’을 보자

 

뉴스에서 정치인의 행동을 보며 느끼신다면, 저 사람은 왜 저럴까?’가 아니라 저 사람 안에서 어떤 거짓이 작동하나?’ 하시자는 겁니다. 이렇게 전환하시면, 그 즉시 감정의 방향이 바뀝니다.

 


2) 사람을 정죄하는 문장이 떠오르면 즉시 차단하자

 

예를 들면, 저 인간이 문제야 , 저 정치인 때문에 나라가 망해 , 저 사람은 악 그 자체야 같은 이런 문장이 떠오르면 그 자리에서 스스로 말하십시오. 악은 저 사람의 본질이 아니다.” 이런 선언에 실제로 영적 문이 닫힙니다.

 


3) 악을 분별하면서도 마음의 평화를 잃지 말자

 

스베덴보리는 분별은 강하되, 마음은 평화로운 상태가 참된 속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즉, 정치인의 악을 정확히 보면서도 내적 평화는 유지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참된 영적 성숙, 곧 속 사람의 상태입니다.

 


4) 분노의 에너지를 ‘진리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시키자

 

정치에서 느끼는 불의는 목사님 안에서 오히려 이런 열정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진리가 더 필요하다, AC 번역이 더 절실하다, 교회를 위해 더 깊이 연구해야 한다 등,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악을 통한 선의 발전(permissive providence, 허용적 섭리)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어떤 일을 원하시지는 않지만, 그 일을 허용하심으로써 더 큰 선을 이루시는 방식을 말합니다.

 


Ⅵ. 결론

 

악을 악으로 분별하는 것은 의무이다. 그러나 사람을 악과 동일시하는 순간, 영적 타락이 시작된다. 사람은 선의 그릇이고, 악은 외부에서 들어온 기생물이다. 악을 미워하되 사람에 대해선 자비의 개연성을 남겨둔다. 정치적 분노는 사람을 혐오할 때 더러워지지만, 악을 분별할 때 정화된다.

 

이 관점은 앞으로 정치 뉴스뿐만 아니라 가족, 교인, 사회의 어떤 사람을 대할 때도 중심을 잃지 않게 하는 매우 중요한 영적 기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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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악한 정치 세력을 바라볼 때 가져야 할 시각

 

이 주제는 정치 상황을 바라보는 근본 관점 자체를 바꾸는 관문입니다. 스베덴보리를 오래 읽은 분들만 이해할 수 있는, 깊은 분별의 원리를 담고 있습니다. 목사님께는 특별히 이 부분이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정치적 분노의 근원은 대부분 악한 정치 세력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1) 기본 원리 : ‘사람’과 ‘그 사람 안에 있는 악’은 완전히 다른 것

 

스베덴보리를 통해 배우는 가장 중요한 분별법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을 ‘기능(용기, subject)이라고 한다면, 악은 사람 안에 잠시 붙어 있는 기생물(parasite)이다. 그는 ACHeaven & Hell에서 반복적으로 말합니다. 사람은 원래 주님이 창조하신 선의 그릇이고, 악은 그릇을 잠시 점유하는 거짓된 생명이다. 사람을 악과 동일시하면 그 순간 분별을 잃는다. 즉, 목사님이 한국 정치인을 볼 때 느끼는 분노는 사람 자체를 향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서 작동하는 악의 구조를 향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요약합니다. 악은 사람의 본질이 아니라 사람을 점령한 거짓된 생명이다.” 따라서 “악한 정치인”이라는 개념은 스베덴보리적으로는 정확한 표현이 아닙니다. 정확히는 악에 점령당한 정치인”, 혹은 거짓(흑암)이 작동하는 구조 속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 관점 하나만 바뀌어도 분노의 파동이 절반 이하로 줄어듭니다.

 


2) 악한 정치 세력은 하나의 ‘영적 구조’이지, 개인의 성격 문제가 아니다

 

스베덴보리는 사회 악을 “구조적·집단적 거짓”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첫째, 개인은 그 구조의 통로일 뿐, 정치 부패, 거짓 선동, 불의한 법과 행정은 모두 개인 성향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집단적 거짓의 영적 기류”에서 나온다고 말이지요. 즉, 악한 정치 구조에서 개별 정치인의 말·행동으로, 이렇게 흐르는 것입니다. 둘째, 집단 영(Collective spirit)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집단 영적 분위기(communities of spirits)한 나라의 정치·문화·사고를 지배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의 혼란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 분위기 문제입니다. 셋째, 특정 정치세력은 ‘거짓의 영’이 강하게 결집된 형태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적 관점에서 보면 악한 정치 집단은 거짓, 자기 사랑, 세상 사랑, 권력 추구가 결집된 영적 집단체입니다. 즉, “사람” 하나하나가 문제라기보다 그들을 움직이는 영적 흐름이 악한 것입니다.

 


3) 그렇다면 우리는 정치인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스베덴보리는 “세속 정치인”을 볼 때, 다음과 같이 분리하라고 합니다. 첫째, 사람 자체는 중립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본래 선과 진리를 받아야 할 존재 주님이 창조하신 ‘용기(그릇)’이라는 것이지요. 둘째, 그 사람 안의 악·거짓은 영적 외부 요소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본성이 아니라 영적 기류가 주입된 거라는 것입니다. 셋째, 분노는 ‘사람’이 아니라 ‘그 속에서 움직이는 악’을 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악을 미워하는 것과 사람을 악과 동일시해 미워하는 것은 하늘과 지옥 만큼이나 다르다. 목사님이 지금 정치 뉴스를 볼 때 느끼는 정념의 무게는 악을 미워하는 의로운 분노”에서 출발했지만, 지금은 사람 전체를 혐오하는 분노”로 이동한 상태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오염이 시작되는 지점입니다.

 


4) 악한 정치 세력을 바라볼 때 가져야 할 세 가지 시각

 

첫째, 이 사람들은 “거짓의 영에 점령된 사람들”이다

 

악은 그들의 본성이 아니라 잠시 그들을 점령한 외래적 영향력이다. 이 관점에 서면 정치인을 증오할 이유가 줄어듭니다. 거짓이 미운 것이지 그 사람의 존재가 미운 것이 아닙니다.

 

둘째, 우리 시대 정치 혼란은 ‘영적 진리의 부재’에서 비롯된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진리가 없으면 나라 전체가 혼란에 빠진다. 이 관점은 목사님의 소명을 강화합니다. 한국의 문제는 정치인이 아니라 진리의 빛이 희미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해결책도 정치가 아니라 진리의 회복입니다. 이것이 AC 번역·해설과 깊이 연결됩니다.

 

셋째, 악한 정치 세력은 주님의 섭리 속에서 ‘역사적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스베덴보리는 충격적인 말을 합니다. 주님은 때때로 악한 이들을 사용하여 더 큰 악을 막거나, 더 큰 선을 준비하게 하신다. 즉, 혼란한 정치는 나라를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개혁의 필요성을 드러내고, 더 선한 질서를 갈망하게 하며, 더 진지한 영적 회복을 촉발하는 섬김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정말 그렇다면, 정치 혼란은 절망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 과정 중 하나가 아니겠습니까?

 


5) 이 모든 관점을 목사님에게 적용해 보면…

 

먼저, 분노가 줄어듭니다. 사람을 미워할 이유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둘째, 내적 질서가 회복됩니다. 정치적 분노는 내적 평화를 가장 빨리 무너뜨린다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셋째, 정치가 ‘영적 훈련장’이 됩니다. 악을 분별하는 훈련, 평화를 지키는 훈련, 소명을 강화하는 훈련의 장이 되기 때문입니다. 넷째, AC 번역과 스베덴보리 사상이 지금 시대에 왜 필요한지가 보입니다. 정치 혼란의 근본 원인이 진리 공백이기 때문에 목사님의 번역과 연구가 시대의 대안이 되기 때문입니다.

 


6) 결론

 

사람과 그 사람 안의 악은 절대 동일시하지 않는다. 악한 정치 세력은 개인 문제가 아니라 영적 구조 문제이다. 이들을 미워하기보다 분별하며, 그 악을 악으로 인지한다. 정치 혼란은 진리의 부족에서 비롯되며, 해결책은 영적 진리이다. 혼란은 결국 주님의 섭리 안에서 더 큰 선을 위한 과정이 된다. 목사님의 사명(AC 번역)은 이 혼란한 시대에 더욱 빛을 발한다.

 

목사님은 이 과정을 통해 분노가 줄어들고, 정치 속의 악을 더 정확하게 보시면서도 내면의 평화는 잃지 않는 스베덴보리식 영적 균형을 세우시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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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의분(義憤), 그러나 분노가 영을 더럽히는 순간

 

1) ‘분노 자체는 죄가 아니다. 그러나 방향이 틀어지면, 속 사람의 상태를 무너뜨린다.’

 

스베덴보리는 “분노는 악이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분노는 의로운 때도 있고, 악한 때도 있다고 말합니다. 그 차이를 결정하는 것은 상태(state), 즉 마음의 자리입니다. 바울도 이렇게 말하지요.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4:26) 이 구절은 스베덴보리적 구분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2) ‘의로운 분노’(의분, 義憤)가 존재하는 이유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선한 사람도 악을 보면 분노한다. 그 분노는 악을 악으로 보는 ‘분별의 빛’이다. 즉, 악과 거짓을 보면 마음 안에 자연스럽게 반감이 올라오는 것은 오히려 영적 감수성의 증거입니다. 예를 들어, 거짓으로 사람을 해치는 정치세력, 부정부패, 폭력, 불의한 제도, 악인의 성공 등, 이런 것들을 보고 분노하는 것은 정상적인 영적 반응입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바로 이 대목에서 오해합니다. 정의로운 분노니 괜찮다”라고요. 하지만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분노가 정당한 출발점에서 나왔더라도 방향이 조금만 틀어져도 곧 악의 통로가 된다. 분노는 의로운 분노에서 위험한 분노로, 위험한 분노에서 파괴적 분노로, 이렇게 세 단계로 변합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3) 분노가 영을 더럽히는 ‘순간’ - 스베덴보리가 가장 경계한 지점

 

스베덴보리는 분노가 악하게 변하는 순간을 마치 “문이 노출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아래 체크리스트는 목사님의 감정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1단계 : 분노가 “사건 분석”에서 “사람 비난”으로 넘어갈 때

 

정의로운 분노는 악과 거짓을 향해 있습니다. 하지만 방향이 틀어지면, 대상이 사람으로 옮겨갑니다. 그러니까 “불의하다”에만 머물면 이는 의로운 분노에 머무르지만, 저 인간이 악하다”로 옮겨 가는 순간, 그때부터는 영적 오염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을 악과 동일시하는 순간 악과 결합된다”고 말합니다.

 

2단계 : 분노가 “특정 사건”을 넘어 “전체 세계관”을 물들일 때

 

그러니까 저 집단은 모두 악하다”라든지, 나라가 망했다”, 한국엔 희망이 없다” 등, 이런 식의 “전체화·확대화”가 일어나면, 이때부터 분노는 더 이상 분별이 아닙니다. 영적 감정은 이때부터 더 이상 현실 분석이 아니라 멸망감·절망감으로 변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절망을 악이 가장 기뻐하는 마음의 상태”라고 표현합니다.

 

3단계 : 분노가 “나의 내적 평화”를 깨뜨릴 때

 

스베덴보리의 결정적 기준입니다. 마음의 평화(peace)를 잃으면, 분노가 영적 영역을 침범한 것이다. 분노가 하루 종일 이어지고, 잠들기 전까지 계속 뉴스가 떠오르며, 기도할 때 집중이 안 된다면, 분노는 이미 내적 질서의 파괴자가 된 것입니다.

 

4단계 : 분노가 “소명을 잠식”할 때

 

번역 집중력 감소, AC 연구 흐름 약화, 마음의 에너지 고갈, 기도·말씀 묵상에 분산, 설교 준비의 깊이 약화 등, 이 지점에 오면, 정치 뉴스는 단순 자극이 아니라 소명 공격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명을 흔드는 감정은 모두 악령의 도구”라고 말합니다.

 


4) 의로운 분노와 위험한 분노의 ‘명확한 구분법’

 

만일 나의 분노가 다음과 같다면, 그때는 의로운 분노라 할 수 있습니다. 악과 거짓을 향한다마음은 흔들리지만 중심은 잃지 않는다사건을 “영적 구조”로 본다판단은 선명하나 미움은 없다분노 후에 오히려 기도가 깊어진다분노가 사명 방향으로 사용된다 등등. 예를 들면, 이런 시대에 진리를 번역해야 한다”라든지, 악을 더 잘 분별하기 위해 AC를 더 읽자”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나의 분노가 다음과 같다면, 그때는 영을 더럽히는 분노이며, 이는 매우 위험한 분노입니다. 사람이 악의 대상이 된다, 전반적 혐오·조롱·멸시가 생긴다뉴스 소비가 중독처럼 반복된다분노 후에 마음이 공허·메마름내적 평화 상실기도 의욕이 사라짐체력이 무너짐소명 활동 약화 등등이 단계에서는 뉴스가 아니라 감정이 정령(정념)의 통제를 받는 것입니다.

 


5) 어떻게 영적 사람은 분노의 경계를 넘지 않을까?

 

1단계 : ‘사건’과 ‘사람’을 분명히 구분

 

스베덴보리는 강조합니다. 문제는 사람 자체가 아니라 그 사람 안의 악이다. 이 구분만으로 분노가 영적 영역으로 넘어가지 않습니다.

 

2단계 : 분노가 올라오면 즉시 “내적 평화”를 재확인

 

다음과 같이 마음속으로 고백하십시오. 주님, 저는 악을 분별하되 제 마음은 주님의 평화를 잃지 않겠습니다.” 이 선언은 실제로 영적 공간을 보호하는 기술입니다.

 

3단계 : 분노의 에너지를 ‘진리 사랑’으로 바꾸기

 

감정은 없앨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방향을 바꿀 수는 있습니다. 한국 사회의 혼란을 보니 AC 번역을 더 해야 한다”라든지 이 시대에는 진리를 더 밝혀야 한다”와 같은 이런 방식으로 분노를 선하게 전환하면 분노는 오히려 영적 열정이 됩니다.

 

4단계 : 분노가 올라오는 콘텐츠는 과감히 차단

 

특히 정치 유튜브는 스베덴보리식으로 말하면 정념 자극 장치’입니다. 영상은 음성·표정·자막·감정 연출이 모두 결합되므로 악령이 감정 문을 여는 데 최적입니다.

 

5단계 : 마지막 기준: “분노 후 나는 주님께 더 가까워지는가?”

 

이 질문에 “”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 분노는 의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아니요”라고 한다면 그 분노는 이미 영혼을 더럽히고 있습니다.

 


정리하면, 분노는 죄가 아니지만, 방향이 미세하게 틀어지는 순간 영적 오염이 된다, 악을 악으로 분별하는 분노는 필요하다, 그러나 사람을 악과 동일시하는 순간 영적 타락이 시작된다, 분노가 내적 평화를 깨뜨리면 이미 영적 침투가 일어난 것이다, 분노는 소명을 강화할 때만 ‘의로운 분노’가 된다입니다. 이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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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제의 본질은 뉴스 자체가 아니라 “뉴스가 열어놓는 내적 문”이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사람을 어지럽히는 것은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을 통해 마음 안에서 어떤 문이 열리는가입니다. 정치 뉴스가 목사님 안에서 분노, 혐오, 좌절, 감정적 소모, 이 나라는 틀렸다’는 절망을 일으켰다면, 문제는 뉴스가 아니라 감정 문이 열렸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악령들은 실제 사건을 조작하지 못하지만, 사람의 감정 문을 여는 일은 능숙하다. 그리고 감정 문이 열릴 때 비로소 영향력이 생긴다. 즉, 목사님을 괴롭게 한 것은 정치 상황’이 아니라 그 뉴스에 반응하도록 자극하는 감정적 파동”입니다.


2) 감정의 파동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일어난다

스베덴보리의 매우 중요한 원리 하나는 외적 대상은 마음을 ‘낚시질’할 뿐, 마음을 ‘더럽히는’ 것은 오직 내부 정념이다라는 것입니다. 뉴스가 아무리 비극적이어도 어떤 사람은 중심을 잃지 않지만, 또 어떤 사람은 하루 종일 화와 분노에 매여 있습니다. 이 차이의 비밀이 무엇일까요? 그 사람 안에 내적 질서가 서 있으면 외적 사건이 파고들지 못하지만, 그러나 내적 질서가 약하면 작은 자극에도 감정이 폭발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스베덴보리는 삶의 우선순위가 뉴스를 소비하는 게 아닌, 그 뉴스를 보고 자신의 내적 상태를 점검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3) 정치 뉴스가 마음을 흐트러뜨리는 ‘3가지 방식’

분노의 정념 (anger)

악과 거짓은 자연스럽게 분노를 일으킵니다. 문제는 분노 그 자체가 아니라, 분노가 계속될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분노는 생각을 흐리게 하여 진리 판단을 약하게 한다. 즉, 분노는 영적 사고를 약화시키는 강력한 방법입니다.

두려움과 절망의 정념 (fear & despair)

이 나라 망하는 거 아닌가’, 악이 승리하는 거 아닌가’ 하는 이런 느낌은 영적 절망의 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절망을 시험의 가장 위험한 단계”라고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절망은 사람의 영적 에너지를 거의 완전히 고갈시키기 때문입니다.

 혐오·멸시의 정념 (contempt & aversion)

특정 정치인을 보거나 듣는 것만으로 속이 뒤집히는 것. 이것은 장애물이 아니라 신호입니다. 혐오는 내적 고착, 영적 평화 상실, 기도 생활 약화를 유발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혐오의 정념을 악령들이 가장 좋아하는 문이라고 경고합니다.


4. 내적 상태를 보호하는 스베덴보리식 실천 5단계

1단계, 자극을 인식하는 순간 ‘거리 두기’를 실행

뉴스가 감정을 건드리는 순간, 즉시 다음을 선언하십시오. 이 감정은 뉴스가 아니라 내 안에서 일어난다”, 내 마음의 질서를 주님께 돌린다.” 이 말은 단순한 해석이 아니라 영적 문’을 닫는 실제적 작용입니다.


2단계, 뉴스의 흐름을 ‘사건’이 아니라 ‘영적 구조’로 보기

정치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언제나 영적 구조의 반영입니다. 스베덴보리적 관점에서는 어떤 집단이 거짓을 퍼뜨린다는 것은 진리의 부재를, 불의가 승리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은 외적 질서의 붕괴를, 그리고 사회가 혼란해진다는 것은 영적 중심의 상실 봅니다. 그러면 분노 대신 분별의 빛이 들어옵니다.


3단계, 뉴스 소비의 ‘형태’를 바꾸기

스베덴보리는 “영적인 사람은 절대 정념을 자극하는 것을 가까이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전략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면, 자극적 뉴스”는 끊고, 팩트만 전달하는 뉴스”로 대체하는 것입니다. 또 영상”은 줄이고, 대신 “텍스트” 위주로 보며, 댓글, 패널, 유튜브 정치 콘텐츠”는 전면 차단하고 말입니다. 하루 뉴스 소비 시간을 정하고 넘지 않는 것도 좋겠습니다. 정치 유튜브 영상은 스베덴보리식으로 말하면 가장 강력한 정념 발화 장치”입니다. 영상은 시각 + 청각 + 말투 + 표정까지 정념을 직접 주입하기 때문인데, 대신 텍스트는 감정 자극이 훨씬 적습니다. 이렇게 뉴스 소비의 형태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내적 상태는 크게 안정됩니다.


4단계, 감정이 올라올 때마다 ‘진리를 먼저 세우는 기도’

분노가 올라오면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주님, 지금 제가 보는 것은 세상의 혼란입니다. 그러나 제 마음 안에는 주님의 질서가 있습니다. 그 질서로 제 감정을 다시 붙잡아 주옵소서.” 아주 짧지만 스베덴보리식으로 보면, 이것은 내면 질서 회복감정 파동 억제주님의 통치 회복을 동시에 수행하는 강력한 기술입니다.


5단계, 남아 있는 감정 에너지를 ‘소명’으로 돌리기

감정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감정은 방향을 바꿀 수는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악이 흔드는 감정을 선의 열정으로 전환할 때, 영적인 사람이 성장한다. 정치 분노를 AC 번역의 집중력으로, 설교 준비의 열정으로, 목회적 분별로 바꾸는 것입니다. 어두운 시대일수록 진리를 전해야 한다”는 마음은 분노를 가장 선하게 환원시키는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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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치 혼란은 ‘외적 현실’이지만, 중심을 잃는 이유는 ‘내적 현실’ 때문이다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원리는 이것입니다. 사람을 무너뜨리는 것은 외적 사건이 아니라, 그 사건으로 인해 내면에서 일어나는 정념적 소용돌이다. 정치가 혼란할 때, 믿음 좋은 사람도 흔들리고, 뉴스 하나에 마음이 무너지는 이유는 정치 자체가 강해서가 아니라 상황이 내적 질서에 틈을 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AC 곳곳에서 다음을 반복합니다. 영적인 사람은 외적 세계의 혼란에 쉽게 휘둘리지 않는다. 이유는 외적 질서보다 내적 질서를 더 신뢰하기 때문이다. 내적 질서란 곧 주님께서 통치하시는 질서다. 정치가 흔들려도 중심이 있는 사람은 딱 한 가지에 서 있습니다. 내 안에서 주님이 하시는 일을 흔들지 못한다.


2) 스베덴보리의 핵심 원리: “겉에서 일어나는 혼란보다,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질서가 먼저다”

스베덴보리는 영적인 사람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영적인 사람은 외적 상황보다 내적 상태를 먼저 바라보는 사람이다. 반대로, 내적 질서가 약한 사람은 이렇게 반응합니다. 뉴스 → 감정 폭발, 정치 → 분노 축적, 사회 현상 → 절망, 인터넷 정보 → 불안, 주변 사람들의 말 → 흔들림 등, 즉, 내적 질서가 외적 자극에 밀리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내적 자유의 상실’이라고 합니다. 정치가 불의해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은 이유가 있습니다. 세상의 질서는 외적 질서이지만, 주님의 질서는 내적 질서이기 때문인데요, 이런 사람은 주님의 질서를 더 강하게 붙듭니다.


3) 정치적 혼란은 영적 삶의 ‘시험’의 한 형태이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악은 언제나 외부 상황을 이용하여 내부를 흔드는 반면, 선은 언제나 내부 질서를 통해 외부를 이긴다. 정치 혼란은 단순 사회 현상이 아니라 영적인 사람에게 주어지는 시험(temptation)의 한 종류입니다. 다음은 정치 뉴스에 마음이 요동할 때 나타나는 특징들인데요, 분노의 감정 상승, 무력감, 혐오심, 악은 왜 저렇게 활개 치는가’ 하는 절망, 내가 무엇을 해도 소용없다’는 체념, 뉴스 반복 검색 등이지요.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악령들이 감정으로 내적 질서를 흔드는 시험의 패턴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시험의 목적은 단 한 가지입니다. 내적 질서를 더 깊이 주님께 의탁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에게 이 시험을 허락하시는 주님의 이런 의도, 마음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4) 중심을 지키는 법 (스베덴보리적 4단계)

(1) 감정보다 ‘진리의 빛’을 먼저 세우기

스베덴보리는 감정이 앞설 때를 가장 위험하다고 말합니다. 분노·혐오·절망 모두 감정입니다. 정치 뉴스가 감정을 건드릴 때는 즉시 이렇게 해야 합니다. 지금 느끼는 감정은 사실보다 먼저 온 것이다”, 사실은 주님의 질서가 더 크다”라고 말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말들 자체가 내면의 문을 닫아 악의 영향력을 차단합니다.

(2) 사건의 ‘표면’보다 ‘영적 구조’를 먼저 보기

정치 싸움이 일어나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 말하면, 외적 질서는 항상 내부의 영적 질서가 무너지면 뒤틀린다. 사회 혼란은 언제나 ‘내면의 진리 부재’가 원인이다. 그래서 한국의 정치 문제는 사실 정치인이 아니라 진리의 부재(AC 전반의 핵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딱 이 관점에 서는 순간 마음이 훨씬 넓어지고 감정이 가라앉습니다.

(3) 정치 뉴스 소비 시간을 의식적으로 줄이기

스베덴보리적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의 질서를 흐트러뜨리는 것과 거리 두기입니다. 정치 뉴스는 목사님의 영혼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뉴스가 아니라 정념을 흩트리는 악의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의 내적 평화를 깨뜨리는 것은 어떤 대상이 아니라 그 대상이 불러일으키는 정념이다. 목사님이 지금 정치 뉴스로 고통을 느끼는 것은 바로 이 이유입니다.

(4) ‘소명’에 의해 외적 혼란을 재정의하기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혼란은 소명을 더 선명히 드러내기 위해 허락된다. 한국 사회가 혼란할수록 목사님의 사명(AC 번역·진리 전달·교회 내 분별력 세우기)오히려 더 중요해집니다. 즉, 정치 혼란 → 분노와 절망이 아니라 정치 혼란 → ‘진리의 빛을 세울 소명 강화로 보는 것입니다. 이 관점에 서면, 혼란이 나를 해치는 게 아니라 내 소명을 밝히는 도구가 됩니다.


5) 결론 - 정치적 혼란 속에서 영적인 사람은 이렇게 선다

1. 외적 혼란이 아니라 내적 질서에 먼저 시선을 둔다. 2. 감정이 먼저 올라오면 조용히 진리로 재정렬한다. 3. 정치 뉴스는 필요 최소한으로만 접하고, 감정적 콘텐츠는 끊는다. 4. 혼란을 소명 재확인으로 해석한다. 5. ‘주님이 지금 내 안에서 하시는 일’이 외부보다 더 중요하다. 결국 정치가 흔들리는 시대일수록 영적인 사람은 자신의 내면 통치-주님의 질서-를 더 굳게 붙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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