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9(창1:2) 본문 중 리메인스에 관한 설명 가운데 ‘겉의 일들이 황폐해지기 전까지는 결코 빛이나 낮 가운데 나오지 않습니다’라는 설명이 나오는데 이게 무슨 뜻인가요?
AC.19에서 리메인스가 ‘겉의 일들이 황폐해지기 전까지는 결코 빛이나 낮 가운데 나오지 않는다’는 표현은, 거듭남의 구조를 이해하는 핵심 열쇠입니다.
먼저 ‘리메인스’(remains)가 무엇인지부터 분명히 해야 합니다. 리메인스는 주님께서 사람 안에 몰래 간직해 두신 선과 진리의 씨앗입니다. 어린 시절의 순진함, 양심의 흔적, 말씀을 들으며 잠시 감동받았던 기억, 이웃을 향한 따뜻한 마음 같은 것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이것들은 우리의 ‘겉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의 ‘속 사람’ 안에 저장해 두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것이 ‘빛 가운데 나오지 않는다’고 할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겉 사람이 아직 자기 본성과 세상 사랑에 강하게 붙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잘 살 수 있다고 믿고, 자기 생각이 옳다고 확신하고, 세상적 성공과 자아 만족을 선이라고 여기고 있는 동안에는, 리메인스가 활동할 공간이 없습니다. 햇빛은 이미 떠 있지만, 짙은 안개가 그것을 가리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겉의 일들이 황폐해진다’는 말은, 인생이 무너진다는 뜻이 아니라, 겉 사람의 자만과 자기 신뢰가 흔들린다는 뜻입니다. 실패, 상실, 유혹, 고난, 양심의 가책 같은 경험을 통해 사람이 자기 힘의 한계를 깨닫는 순간이 옵니다. 그때 겉 사람의 주장들이 잠잠해집니다. AC에서는 이것을 ‘황폐’ 또는 ‘정적 상태’라고 부릅니다. 겉의 소리가 낮아질 때, 속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황폐’는 파괴가 아니라 정리입니다. 겉 사람의 허위와 교만이 약해질 때, 주님께서 저장해 두신 리메인스가 비로소 작용합니다. 그때 사람이 문득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래도 선은 선이지’, ‘그래도 진리는 중요하지’, ‘나는 혼자가 아니구나’ 등, 이런 깨달음이 바로 리메인스가 빛 가운데 나오는 순간입니다.
이것은 영적 법칙과 같습니다. 낮이 오기 전에는 밤이 있습니다. 씨앗이 싹트기 전에는 껍질이 갈라집니다. 겉 사람의 확신이 무너지지 않으면, 속 사람의 생명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때로 우리 인생을 ‘조용히 비우시는’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중요한 점은, 리메인스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겉 사람이 아무리 거칠어도, 주님은 속 사람 안에 선과 진리의 씨앗을 남겨 두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빛’으로 드러나기 위해서는 겉의 강한 집착이 약해져야 합니다. 이것이 AC.19에 나오는 저 표현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혹 지금 어떤 황폐를 겪고 있다면, 그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일 수 있습니다. 겉 사람이 조용해질 때, 속 사람 안의 리메인스가 깨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빛이 있으라’는 말씀이 실제가 됩니다.
※ 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8, ‘성도들아 찬양하자’와 찬63, ‘주가 세상을 다스리니’입니다.
오늘부터 해설 버전 누락분 창세기 1장부터 3장입니다. 창3 마치면 창6으로 원래대로 이번엔 쭈욱 나갑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창11절로 2절, AC 글 번호로는 16번에서 19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1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2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1:1, 2)
이 본문을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라는 제목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시티아’(Arcana Coelestia, AC)에 주목하여 귀 기울이고자 합니다. 지난주에 이어 오늘도, 오늘은 창1:1-2에 해당하는 AC.16-19를 그 번역과 해설로 접하면서, 거의 설교와도 같은 해설의 어떠함을 다시 한번 맛보고, 거기서 우리 모두 주님의 음성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1:1)
AC.16
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time)를‘태초’(太初, the beginning)라고도 합니다.선지자들에 의해 선지서 여러 곳에서 이것은‘옛날’(the days of old, [antiquitatis])이라 하기도 하고,또한‘영원’(the days of eternity)이라 하기도 합니다.이‘태초’는 또한 사람이 거듭남의 과정을 시작하는 첫 시기를 포함하는데,이때 그는 새로 태어나 생명을 받기 때문입니다.그러므로 거듭남 자체를 사람의‘새 창조’(a new creation)라고도 합니다.선지서 거의 모든 부분에서‘창조하다’(to create),‘짓다’(to form),‘만들다’(to make)라는 표현들은 거듭남을 의미하지만,그 의미에는 차이가 있습니다.이사야를 보면,The most ancient time is called “the beginning.” By the prophets it is in various places called the “days of old” [antiquitatis] and also the “days of eternity.” The “beginning” also involves the first period when man is being regenerated, for he is then born anew, and receives life. Regeneration itself is therefore called a “new creation” of man. The expressions to “create,” to “form,” to “make,” in almost all parts of the prophetic writings signify to regenerate, yet with a difference in the signification. As in Isaiah:
내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사43:7)Everyone that is called by my name,I have created him for my glory,I have formed him,yea,I have made him(Isa. 43:7).
그러므로 주님은‘구속자’(the redeemer),‘태 속에 만드신 이’(the former from the womb),‘만드신 이’(the maker)및‘창조자’(the creator)라 일컬음을 받으시는데,역시 이사야를 보면,And therefore the Lord is called the “redeemer,” the “former from the womb,” the “maker,” and also the “creator”; as in the same prophet: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사43:15)I am Jehovah your holy one,the creator of Israel,your king(Isa. 43:15).
시편에서는In David:
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시102:18)The people that is created shall praise Jah(Ps. 102:18).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시104:30)Thou sendest forth thy spirit,they are created,and thou renewest the faces of the ground(Ps. 104:30).
‘천’(天, heaven)은 거듭나기 전‘속 사람’(the internal man)을,‘지’(地, earth)는‘겉 사람’(the external man)을 의미한다는 것은 뒤에 이어질 내용에서 볼 수 있습니다.That “heaven” signifies the internal man and “earth” the external man before regeneration may be seen from what follows.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1장1절의 ‘태초’(太初, the beginning)라는 표현을 시간적 최초의 순간이 아니라, ‘영적 질서의 출발점’으로 해석합니다. ‘태초’는 태고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각 사람이 거듭남을 시작하는 첫 시기를 포함합니다. 즉, 창세기의 ‘태초’는 역사 속 한 시점이면서 동시에, 지금도 반복되는 영적 현실입니다. 사람이 거듭남을 시작할 때, 그는 그 사람만의 ‘태초’에 들어가는 셈입니다.
선지자들이 이 시기를 ‘옛날’(thedays of old, [antiquitatis]), 혹은 ‘영원’(thedays of eternity)이라 한다는 설명은, 이 상태가 단순히 과거에 속한 것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질서’에 속해 있음을 보여 줍니다. 태고의 상태는 연대기적으로 오래되었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직접적인 관계, 곧 영원의 질서가 인간 안에 처음 세워지는 상태이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 상태는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수 있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태초’, 곧 ‘시작’을 사람의 거듭남의 첫 시기와 직접 연결합니다. 사람이 거듭날 때, 그는 단순히 이전의 삶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 태어나’ 생명을 받습니다. 여기서 생명은 생물학적 생명이 아니라, 영적 생명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단순한 변화나 성장으로는 설명될 수 없고, 반드시 ‘새 창조’라는 표현이 필요합니다. 이는 매우 강한 표현이지만, 그만큼 거듭남이 전면적인 전환임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이 맥락에서 스베덴보리는 선지서에 나오는 ‘창조하다’, ‘짓다’, ‘만들다’ 같은 표현들이 거의 언제나 거듭남을 뜻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 표현들은 미묘한 차이를 가지는데, 창조는 생명의 근원 주시는 것을, 지음, 곧 형성은 그 생명에 질서 부여하는 것을, 그리고 만드는 것은 그것을 삶 속에서 실제로 이루어 가는 걸 가리킵니다. 이 차이는 이후에 더 자세히 다루지만, 여기서는 중요한 원칙 하나가 제시됩니다. 성경에서 창조의 언어는 곧 거듭남의 언어라는 점입니다.
이사야의 인용은 이 점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주님은 ‘내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자’를 창조하시고, 지으시며, 만드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단지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 곧 주님의 신성과 진리 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의 영적 재창조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구속자이시며, 태에서부터 지으시는 분이시고, 만드시는 분이시며, 창조자이십니다. 이 모든 호칭은 주님의 다양한 역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 분 주님이 인간의 거듭남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루신다는 사실’을 서로 다른 측면에서 말해 주는 표현들입니다.
시편의 인용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주님을 찬송한다는 말은, 새로 생명을 받은 사람들이 주님을 인식하고 사랑하게 됨을 뜻합니다. 또한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라는 표현은, 거듭남이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며, 그 결과 인간의 외적 삶, 곧 ‘지면’까지 새로워진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거듭남은 내면의 변화에 머무르지 않고, 삶의 표면까지 갱신합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스베덴보리는 중요한 해석 원리를 예고합니다. ‘천’(天, heaven), 곧 ‘하늘’은 거듭남 이전의 ‘속 사람’을, ‘지’(地, earth), 곧 ‘땅’은 ‘겉 사람’을 의미한다는 점입니다. 이는 창세기1장의 ‘천지창조’가 곧 인간 내면의 구조를 가리킨다는 결정적인 단서입니다. 하늘과 땅은 우주의 두 영역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두 차원입니다. 이 해석이 이후 글들에서 구체적으로 전개되면서, 창세기 전체가 인간 거듭남의 지도임이 점점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결국AC.16은 창세기의 ‘시작’을 역사와 인간을 동시에 꿰뚫는 개념으로 제시합니다. 태고의 시대, 거듭남의 첫 시기, 새로운 창조는 서로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영적 질서를 서로 다른 각도에서 본 표현들입니다. 주님은 그 모든 시작의 주체이시며, 인간의 영적 삶은 언제나 그분 안에서 다시 시작됩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1:2)
AC.17
거듭남이 시작되기 전 상태에 있는 사람을 가리켜‘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theearth void and empty)라 하며,또 선과 진리가 아무것도 뿌려지지 않은‘땅’(theground)이라고 합니다.‘혼돈’(void)은 선이 전혀 없는 곳을,‘공허’(empty)는 진리가 전혀 없는 곳을 뜻합니다.이로부터‘흑암’(thick darkness)이 나오는데,이것은 어리석음을,그리고 주님 신앙(thefaith in the Lord)에 속한 모든 것에 대한 무지를,그리고 그 결과 영적,천적 삶(spiritual and heavenly life)에 속한 모든 것에 대한 무지를 뜻합니다.이런 사람을 가리켜 주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십니다.Before his regeneration, man is called the “earth void and empty,” and also the “ground” wherein nothing of good and truth has been sown; “void” denotes where there is nothing of good, and “empty” where there is nothing of truth. Hence comes “thick darkness,” that is, stupidity, and an ignorance of all things belonging to faith in the Lord, and consequently of all things belonging to spiritual and heavenly life. Such a man is thus described by the Lord through Jeremiah:
22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23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렘4:22, 23)My people is stupid,they have not known me;they are foolish sons,and are not intelligent;they are wise to do evil,but to do good they have no knowledge.I beheld the earth,and lo a void and emptiness,and the heavens,and they had no light (Jer. 4:22–23).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 과정 시작 전 인간의 상태를 매우 강한 언어로 묘사합니다. 그는 이 상태의 사람을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theearth void and empty)라 하며, 그 안에는 선과 진리가 아무것도 뿌려지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땅’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인간의 겉 사람을 가리키는 상응적 표현입니다. 즉, 거듭남 과정 시작 전의 겉 사람은 외형적으로는 활동적이고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영적으로는 아직 아무것도 경작되지 않은 상태라는 것이지요.
‘혼돈’(void)과 ‘공허’(empty)의 구분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혼돈’은 선의 부재(不在)를, ‘공허’는 진리의 부재를 뜻한다고 분명히 설명합니다. 이는 인간이 도덕적으로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그 행동의 근원에 참된 선과 진리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은 이 상태에서도 많은 일을 하고, 판단하며, 선택하지만, 그 모든 것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라는 자연적 근원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외적으로는 선처럼 보일 수 있어도, 영적으로는 선이 아니며, 외적으로는 진리처럼 보일 수 있어도 실제로는 진리가 아닙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 ‘흑암’(thick darkness)입니다. 이 어둠은 단순한 정보 부족이나 교육의 결핍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어리석음’(stupidity)과 ‘무지’(ignorance)라고 부르는데, 특히 주님 신앙(thefaith in the Lord)에 속한 것들에 대한 무지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이 어둠은 영적 무감각의 상태이며, 영적, 천적 삶이 무엇인지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사람은 이 상태에서 세상일에는 매우 영리할 수 있지만, 영적인 일에는 전혀 눈이 열려 있지 않습니다.
예레미야의 인용은 이 상태를 매우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라는 말씀은,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왜곡될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는 단순히 도덕적 비난이 아니라, 방향의 문제입니다. 지혜와 지식이 자기중심과 세상 중심을 향해 있을 때, 그것은 영적 선을 향해 사용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지혜는 결국 어둠의 일부가 됩니다.
이어지는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라는 표현은 매우 결정적입니다. 앞서AC.16에서 예고된 것처럼, ‘하늘’은 속 사람을 가리킵니다. 거듭남 이전의 인간에게도 속 사람은 존재하지만, 그 안에 빛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속 사람은 잠재적으로는 있으나, 아직 주님의 빛으로 열리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영적 가능성을 지닌 존재임을 전제하면서도, 그 가능성이 실제로 작동하지 않는 상태를 묘사합니다.
이 글은 거듭남의 필요성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인간은 단지 조금 더 나아지거나, 조금 더 선해지기만 하면 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혼돈과 공허의 땅에는 새로운 씨가 뿌려져야 하고, 흑암 속에는 빛이 비쳐야 합니다. 이것은 인간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오직 주님의 역사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창세기1장의 빛의 창조가 그토록 중요한 출발점이 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이 묘사가 특정 집단이나 시대만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남 이전의 모든 인간, 즉 아직 거듭나지 않은 모든 사람이 이 상태에 있다고 말합니다. 종교적 배경이나 도덕적 성취와 무관하게, 주님의 생명이 실제로 유입되기 전의 인간은 영적으로는 공허하고 비어 있습니다. 이 인식은 인간의 교만을 꺾는 동시에, 주님의 자비를 향한 문을 엽니다.
결국AC.17은 인간을 절망 속에 몰아넣기 위한 설명이 아니라, 정확한 진단입니다. 병이 무엇인지 알아야 치유가 시작되듯, 인간이 자신의 상태가 공허하고 어둡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비로소 빛을 갈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다음 글에서 설명될 주님의 자비로운 역사가 다시 등장하게 됩니다.
AC.18
‘깊음’(thefaces of the deep)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욕정(cupidities)과,그로 말미암는 거짓을 뜻하며,사람은 전적으로 이것들로 이루어져 있고,또한 그것들 속에 완전히 잠겨 있습니다.이 상태에서 그는 빛이 없으므로,‘깊음’(deep),곧 어둡고 혼란한 어떤 것과 같습니다.이러한 사람들을 말씀 여러 곳에서‘깊음’(deeps),‘바다 깊은 곳’(depths of the sea)이라 하는데,사람의 거듭남 이전에 그것들은‘마르거나’(dried up)‘황폐해집니다’(wasted).다음 이사야 말씀처럼 말입니다.The “faces of the deep” are the cupidities of the unregenerate man, and the falsities thence originating, of which he wholly consists, and in which he is totally immersed. In this state, having no light, he is like a “deep,” or something obscure and confused. Such persons are also called “deeps,” and “depths of the sea,” in many parts of the Word, which are “dried up,” or “wasted,” before man is regenerated. As in Isaiah:
9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옛날 옛 시대에 깨신 것 같이 하소서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10바다를,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받은 자들을 건너게 하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니이까 11여호와께 구속받은 자들이 돌아와노래하며 시온으로 돌아오니 영원한 기쁨이 그들의 머리 위에 있고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이다(사51:9-11)Awake as in the ancient days,in the generations of old.Art not thou it that drieth up the sea,the waters of the great deep,that maketh the depths of the sea a way for the ransomed to pass over?Therefore the redeemed of Jehovah shall return(Isa. 51:9–11).
이러한 사람은 또한 천국에서 볼 때 생명 없는 검은 덩어리처럼 보입니다.이와 같은 표현들은 일반적으로 선지자들에 의해 자주 언급되는 인간의 황폐(the vastation of man)를 포함하는데,이는 거듭남에 앞서 일어나는 것입니다.왜냐하면 사람이 참된 것을 알 수 있고,선한 것에 의해 감동될 수 있기 전에,그것들의 유입을 방해하고 거스르는 것들이 제거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그러므로 옛 사람은 새 사람이 잉태되기 전에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Such a man also, when seen from heaven, appears like a black mass, destitute of vitality. The same expressions likewise in general involve the vastation of man, frequently spoken of by the prophets, which precedes regeneration; for before man can know what is true, and be affected with what is good, there must be a removal of such things as hinder and resist their admission; thus the old man must needs die, before the new man can be conceived.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1장2절에 나오는 ‘깊음’(thefaces of the deep)을 인간 내면의 가장 어두운 상태로 해석합니다. ‘깊음’은 단순히 깊은 바다나 혼돈의 어떤 상태를 뜻하는 대신, 거듭나지 않은 인간이 전적으로 잠겨 있는 욕정과 거짓의 총체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욕정(cupidities)은 단순한 감정이나 충동이 아니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비롯된 삶의 근원적 지향을 뜻합니다. 이 욕정에서 자연스럽게 거짓들이 발생하며, 사람은 그것들로 구성된 존재가 됩니다.
이 상태의 핵심 특징은 ‘빛이 없음’입니다. 빛이 없다는 것은 진리가 없다는 뜻이고, 진리가 없다는 것은 방향과 분별이 없다는 뜻이며, 그래서 이 상태는 ‘어둡고 혼란스러운 것’으로 묘사됩니다. 사람은 생각하고 판단하며 선택하지만, 그 모든 것은 어둠 속에서 이루어지므로 참된 질서를 가질 수 없습니다. 이 점에서 ‘깊음’이라는 표현은 매우 적절합니다. 깊은 바닷속에서는 위와 아래, 앞과 뒤의 감각이 사라지듯, 이 상태의 인간은 영적 방향감각을 상실한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사람들을 말씀에서 ‘깊음’이나 ‘바다의 깊은 곳’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 깊음이 거듭남 이전에 ‘마르거나’, ‘황폐해진다’는 점입니다. 이는 거듭남의 과정이 단순히 새로운 것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제거하고 비우는 과정을 반드시 포함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깊은 물이 그대로 있는 한, 그 위에 새로운 질서는 세워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의 인용은 이 점을 강력한 이미지로 드러냅니다. 주님은 큰 깊음의 물들을 마르게 하시고, 바다의 깊은 곳들을 속량 받은 자들이 건너갈 길로 만드십니다. 이는 욕정과 거짓으로 가득 찬 상태 자체를 제거하시고, 그 자리를 구원의 통로로 바꾸시는 주님의 역사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주님은 깊음을 단순히 덮어만 두지 않으시고, 그것을 통과 가능한 길로 변화시키십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남의 본질적인 전환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또한 이 상태의 인간은 천국에서 볼 때 ‘생명 없는 검은 덩어리’처럼 보인다고 말합니다. 이는 매우 강한 표현이지만, 인간의 외적 활동성, 즉 겉모습, 겉보기와는 전혀 다른 영적 실재를 보여 줍니다. 세상에서는 매우 활발하고 지적이며 도덕적으로 보일 수 있는 사람도, 영적 생명이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천국의 빛 아래에서 아무런 생명도 없는 덩어리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을 낮추기 위한 표현이 아니라,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분명히 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스베덴보리는 ‘황폐’(vastation)라는 중요한 개념을 제시합니다. 황폐는 파괴가 아니라 준비입니다. 선지자들이 자주 말하는 황폐는, 새로운 생명이 들어오기 위해 기존의 방해 요소들이 제거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사람이 참된 것을 알기 전에, 또 선한 것에 의해 실제로 감동되기 전에, 그 유입을 가로막는 욕정과 거짓들이 먼저 약화되고, 제거되어야 합니다. 이 과정 없이는 어떤 진리도 깊이 들어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분명한 결론을 내립니다. 옛 사람은 새 사람이 잉태되기 전에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문자적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적 삶의 근원이 더 이상 주도권을 쥐지 못하게 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 죽음이 있어야만, 새 생명이 잉태될 공간이 생깁니다.AC.18은 이처럼 거듭남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어두운 관문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그 과정 전체가 주님의 구원 사역 안에 있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AC.19
‘하나님의 영’(thespirit of God)이란 주님의 자비를 뜻하며,이를 가리켜‘운행하시니라’(move),또는 암탉이 자기 알을 품듯이‘품는다’(brood)라고 합니다.그것이 운행하는 대상은 주님께서 사람 안에 숨겨 두시고 보존해 두신 것들인데,말씀 전체에서 이것들을 가리켜‘리메인스’(remains),또는‘남은 자’(remnant)라고 하는 것입니다.이것들은 참된 것과 선한 것에 관한 지식들로 이루어져 있으며,겉의 일들이 황폐해지기 전까지는 결코 빛이나 낮 가운데 나오지 않습니다.여기 나오는‘수면’(thefaces of the waters)은 바로 이러한 지식들을 말합니다.By the “spirit of God” is meant the Lord’s mercy, which is said to “move,” or “brood,” as a hen broods over her eggs. The things over which it moves are such as the Lord has hidden and treasured up in man, which in the Word throughout are called remains or a remnant, consisting of the knowledges of the true and of the good, which never come into light or day, until external things are vastated. These knowledges are here called “the faces of the waters.”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1장2절의 가장 따뜻하면서도 깊은 표현, 곧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는 말씀의 내적 의미, 즉 속뜻을 밝힙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을 능력이나 심판의 상징으로 보지 않고, 무엇보다 ‘주님의 자비’(the Lord’s mercy)로 해석합니다. 이는 거듭남의 시작이 두려움이나 강제에서가 아니라, 보호하고 살리시려는 주님의 사랑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운행하다’(move)또는 ‘품다’(brood)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암탉이 알을 품는 모습에 비유하는데요, 알은 아직 생명이 드러나지 않았고, 스스로 움직일 수도 없지만, 그 안에는 이미 생명의 가능성이 들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거듭남 이전의 인간 안에도,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생명이 없는 것처럼 보여도, 주님이 이미 심어 두신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주님의 자비는 그 가능성 위에 머무르시며, 서두르지 않으시고, 억지로 깨뜨리지도 않으시며, 적절한 때까지 조용히 품으십니다.
주님의 자비가 운행하는 대상은 ‘수면’(the faces of the waters)입니다. 앞선 글들에서 보았듯이, 물은 진리의 지식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물은 아직 빛 가운데 드러난 진리가 아닙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사람 안에 숨겨 두신 참된 것과 선한 것에 관한 지식들, 곧 리메인스입니다. 이 리메인스는 사람이 의식적으로 기억하거나 소유한다고 느끼는 지식이 아니라, 주님이 유아기부터 삶의 여러 순간 속에서 조용히 저장해 두신 내적 보물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리메인스가 외적인 것들, 곧 사람의 겉의 일들이 황폐해지기 전까지는 결코 빛이나 낮 가운데 나오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질서입니다. 사람의 겉 사람이 활발하게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 움직이고 있는 동안에는, 리메인스가 전면에 나설 수 없습니다. 그것이 나오면 즉시 왜곡되거나 오염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먼저 외적인 것들이 약화되고, 침묵하게 되는 시간을 허용하시며, 그 이후에야 리메인스를 실제로 사용하십니다.
이 점에서AC.18의 ‘황폐’와AC.19의 ‘운행’은 정확히 맞물립니다. 황폐는 비워내는 과정이고, 운행은 보호하고 준비하는 과정입니다. 주님은 한편으로는 옛사람의 욕정과 거짓을 약화시키시고, 다른 한편으로는 리메인스를 잃지 않도록 세심하게 품고 계십니다. 인간의 눈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 시점이야말로 거듭남에서 가장 깊고 중요한 내적 역사가 이루어지는 때입니다.
‘수면’, 곧 ‘물의 얼굴’이라는 표현도 의미심장합니다. 얼굴은 드러난 표면이면서 동시에 방향을 나타냅니다. 즉, 리메인스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미 주님을 향한 방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주님의 자비는 바로 그 방향성 위에서 운행하십니다. 이때 인간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수 있어요. 오히려 더 혼란스럽고 공허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주님은 가장 가까이 계십니다.
이 글은 거듭남이 인간의 의식적 결단이나 열심보다 훨씬 이전에, 훨씬 깊은 차원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사람이 주님을 찾기 전에, 주님은 이미 사람을 품고 계십니다. 사람이 진리를 이해하기 전에, 주님은 이미 진리의 씨앗을 보존해 두셨습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인간의 상승이 아니라, 주님의 하강으로 시작됩니다.
결국AC.19는 거듭남의 가장 은밀한 근원을 드러냅니다. 모든 변화의 출발점은 주님의 자비이며, 그 자비는 인간 안에 남겨 두신 리메인스 위에서 조용히, 그러나 결코 멈추지 않고 운행하십니다. 이 인식은 인간을 겸손하게 만들고, 동시에 깊은 위로를 줍니다. 지금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고, 아무 진전도 없어 보일 때조차, 주님의 영은 여전히 수면 위에서 운행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네, 이상입니다. 어떻습니까? 지난주에 이어 오늘도 AC 원문 번역과 특히 그 해설을 그대로 읽었는데요,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해설 없이 읽을 때는 정말 어려웠지만, 지금은 이렇게 해설로 풀어 주니까 글 하나하나가 다 무슨 설교 같지 않으신지요? 이 AC를 붙들고 어떻게 하면 좀 더 쉽게, 좀 더 와닿게 풀어 번역할 수 있을까 거의 6, 7년을 솔직히 몸부림을 쳐온 저로서는 뒤늦게 이 ChatGPT라는 AI의 도움이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모릅니다. 지난 세월이 헛수고는 아니었던 것이, 그래도 이 AI의 초벌 결과물을 문장 하나하나, 사용된 단어, 표현 하나하나의 적절함과 적당함을 살필 수 있는 안목을 그동안 주님은 제 안에 조성하셔서, 이 AI로 하여금 본연의 비서 역할에만, 도우미 역할에만 머무르게 하신다는 점입니다. 이 점은 의외로 매우 중요하며, 그래서 주님께 감사하고, 그래서 이 ChatGPT라는 AI를 믿고 쓸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유능한 비서가 생기는 바람에 그동안 엄두도 못 냈던 나머지, 그러나 무척 중요한 스베덴보리의 다른 저작들 역시 부지런히 번역 및 해설 작업을 병행, 제 블로그(https://bygrace.kr)에 수시로 올리고 있으니 참고하세요. 지난주 새롭게 시작한 저작들은 ‘최후의 심판’(Last Judgment, 1758, LJ), ‘백마’(白馬, White Horse, 1758, WH) 등인데, 이 비교적 짧은 글들은 AC가 배경으로 깔고 들어가는 다른 중요한 개념들을 매우 깊고 넓게 다져 주는 글들입니다. 이 글들을 읽으면 읽을수록 여러분의 내면은 탄탄한, 그리고 빛나는 계시의 지식으로 눈부시게 빛날 것입니다.
앞으로도 너무 많은 분량만 아니면 가급적 AC를 원본 및 해설 그대로 읽고자 합니다. 사실 말이 해설이지 형식만 조금 고치면 그대로 설교와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해설 없이 원본만 읽던 시절도 있었음을 생각하면, 지금은 그런 우리의 우직한 모습을 기뻐하신 주님의 큰 선물이라 생각합니다. ‘진리를 진리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들, 그리고 신적 진리들에 따라 살기를 사랑하는 자들이 주님에 의해 인도되는 자들’(AC.10578, 10645, 10829)이라는 위로의 말씀을 전해드립니다.
The Word is not understood except by those who are enlightened.
인간의 이성적 능력(rational faculty)은 주님에 의해 열리지(enlightened) 않으면 신성(Divine)은 물론, 심지어 영적인 것들조차 이해할(comprehend) 수 없습니다 (n. 2196, 2203, 2209, 2654). 그러므로 열린 자들만이 말씀을 이해합니다 (n. 10323). 주님은 열린 자들로 하여금 진리들을 이해하게(understand)하시고,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것들을 분별하게(discern) 하십니다 (n. 9382, 10659). 말씀은 문자적 의미 안에서 일관되지 않게 보이고, 어떤 곳에서는 스스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n. 9025). 그러므로 열리지 않은 자들에 의해, 그들이 어떤 의견이나 이단을 확증하기 위하여, 또는 어떤 세속적, 육체적 사랑을 변호하기 위하여 그렇게 해석되고 적용될 수 있습니다 (n. 4738, 10339, 10401). The human rational faculty cannot comprehend Divine, nor even spiritual things, unless it be enlightened by the Lord (n. 2196, 2203, 2209, 2654). Thus they only who are enlightened comprehend the Word (n. 10323). The Lord enables those who are enlightened to understand truths, and to discern those things which appear to contradict each other (n. 9382, 10659). The Word in its literal sense appears inconsistent, and in some places seems to contradict itself (n. 9025). And therefore by those who are not enlightened, it may be so explained and applied, as to confirm any opinion or heresy, and to defend any worldly and corporeal love (n. 4738, 10339, 10401).
진리와 선에 대한 사랑으로 말씀을 읽는 자들은 열리지만, 명예나 이익, 영광을 사랑하여, 곧 자기 사랑으로 말씀을 읽는 자들은 열리지 않습니다 (n. 9382, 10548–10550). 선한 삶 가운데 있으며, 그로 말미암아 진리에 대한 애정 안에 있는 자들이 열립니다 (n. 8694). 자기의 내면이 열려 있는 자들, 곧 그 속 사람이 하늘의 빛으로 들어 올려질 수 있는 자들이 열립니다 (n. 10401, 10402, 10691, 10694).열림(Enlightenment)이란 실제로 마음의 내적 부분이 열리는 것이며, 동시에 하늘의 빛으로 들어 올려지는 것입니다 (n. 10330). 말씀을 거룩한 것으로 여기는 자들에게는, 비록 그들 자신은 알지 못하더라도, 속(the internal), 곧 주님으로부터 거룩한 것이 흘러 들어옵니다 (n. 6789). 주님에 의해 인도되는 자들, 곧 자기 자신에 의해 인도되지 않는 자들만이 열려 말씀 안에서 진리들을 봅니다 (n. 10638). 진리를 진리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들, 그리고 신적 진리들에 따라 살기를 사랑하는 자들이 주님에 의해 인도되는 자들입니다 (n. 10578, 10645, 10829). 말씀은 사람의 사랑과 신앙의 삶에 따라 그 안에서 살아납니다 (n. 1776). 자기 자신의 지성에서 나온 것들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한테 고유한 것, 즉 인간의 본성(proprium)으로부터는 아무 선도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n. 8941, 8944). 거짓 교리를 많이 확증해 온 자들은 열릴 수 없습니다 (n. 10640). They are enlightened from the Word who read it from the love of truth and good, but not they who read it from the love of fame, of gain, or of honor, thus from the love of self (n. 9382, 10548, 10549, 10550) They are enlightened who are in the good of life, and thereby in the affection of truth (n. 8694). They are enlightened whose internal is open, thus who as to their internal man are capable of elevation into the light of heaven (n. 10401, 10402, 10691, 10694). Enlightenment is an actual opening of the interiors of the mind, and also an elevation into the light of heaven (n. 10330). There is an influx of holiness from the internal, that is, from the Lord through the internal, with those who regard the Word as holy, though they themselves are ignorant of it (n. 6789). They are enlightened, and see truths in the Word, who are led by the Lord, but not they who are led by themselves (n. 10638). They are led by the Lord, who love truth because it is truth, who also are they that love to live according to Divine truths (n. 10578, 10645, 10829). The Word is vivified with man according to the life of his love and faith (n. 1776). The things derived from one’s own intelligence have no life in themselves, because from man’s proprium there is nothing good (n. 8941, 8944). They cannot be enlightened who have much confirmed themselves in false doctrine (n. 10640).
열리는 것은 이해입니다 (n. 6608, 9300). 이해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그릇입니다 (n. 6242, 6608, 10659). 교회의 모든 교리에 관하여, 이해의 관념들(ideas)과 그로부터 나오는 사유(the thought)의 관념들이 있으며, 그에 따라 교리가 지각됩니다(perceived) (n. 3310, 3825). 세상에서 사는 동안 인간의 관념들은 자연적입니다. 왜냐하면 그때 인간은 자연 안에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진리 자체를 위하여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그 자연적 관념들 안에 영적 관념들이 감추어져 있으며, 인간은 죽은 후 그 영적 관념들 안으로 들어갑니다 (n. 3310, 5510, 6201, 10236, 10240, 10550). 어떤 주제에 관하여 이해와 그로부터의 사유의 관념이 없이는 어떠한 지각도 있을 수 없습니다 (n. 3825). It is the understanding which is enlightened (n. 6608, 9300). The understanding is the recipient of truth (n. 6242, 6608, 10659). In regard to every doctrine of the church, there are ideas of the understanding and of the thought thence, according to which the doctrine is perceived (n. 3310, 3825). The ideas of man during his life in the world are natural, because man then thinks in the natural; but still spiritual ideas are concealed therein with those who are in the affection of truth for the sake of truth, and man comes into these ideas after death (n. 3310, 5510, 6201, 10236, 10240, 10550). Without ideas of the understanding, and of the thought thence, on any subject, there can be no perception (n. 3825).
신앙에 속한 것들에 관한 관념들은 내세에서 드러나며, 그 어떠함(quality)이 천사들에게 보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 관념들이 사랑의 애정에서 나오는 정도에 따라 다른 이들과 결합됩니다 (n. 1869, 3320, 5510, 6201, 8885). 그러므로 이성적 인간이 아니고서는 말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떤 것에 대한 관념도 없이, 그 주제에 대한 이성적 통찰도 없이 무엇을 믿는다는 것은, 지각과 애정의 생명이 전혀 없는 말들을 기억 속에 간직하는 것에 불과하며,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n. 2533). 말씀의 문자적 의미가 열리는 걸 허용합니다 (n. 3619, 9824, 9905, 10548). Ideas concerning the things of faith are laid open in the other life, and their quality is seen by the angels, and man is then conjoined with others according to those ideas, so far as they proceed from the affection which is of love (n. 1869, 3320, 5510, 6201, 8885). Therefore the Word is not understood except by a rational man; for to believe anything without an idea thereof, and without a rational view of the subject, is only to retain in the memory words destitute of all the life of perception and affection, which is not believing (n. 2533). It is the literal sense of the Word which admits of enlightenment (n. 3619, 9824, 9905, 10548).
해설
이 글은 ‘백마’의 주제를 가장 직접적으로 적용하는 부분입니다. 백마는 이해였고, 이제 그 이해가 어떻게 열리는지가 설명됩니다. 인간의 이성은 자율적으로 신적 진리를 꿰뚫을 수 없습니다. 열린다는 것은 단순한 지적 능력의 증가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의 유입입니다. 말씀의 모순처럼 보이는 부분도, 열릴 때 비로소 질서 안에서 보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난해함은 결함이 아니라, 열릴 것을 요구하는 구조입니다.
열림의 조건은 지적 재능이 아니라 사랑의 방향입니다. 진리를 진리 자체로 사랑하는가, 아니면 명예와 이익을 위하여 이용하는가에 따라 빛의 유입이 달라집니다. 자기 사랑에서 읽는 자는 말씀을 왜곡하여 자신의 입장을 강화합니다. 그러나 선한 삶 가운데 있는 자, 곧 사랑 안에 있는 자는 내면이 열려 하늘의 빛으로 들어 올려집니다. 열린다는 것은 마음의 내면이 실제로 열리는 사건이며, 이는 단지 감정적 고양이 아니라 존재 구조의 상승입니다.
이해는 진리의 그릇입니다. 교리는 관념 속에서 형성됩니다. 관념이 없으면 믿음도 없습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선언입니다. 맹목적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진리를 이해하려는 이성적 노력은 믿음의 적이 아니라, 믿음의 필수 요소입니다. 다만 그 이해가 자기 지성에서 나오느냐, 주님의 빛에서 나오느냐가 문제입니다. 인간한테 있는 고유한 것(proprium), 즉 인간의 본성에는 생명이 없고, 주님의 빛이 들어올 때만 이해가 살아 있습니다.
내세에서 관념이 드러난다는 언급은, 신앙이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 실제적인 사고 구조임을 보여 줍니다. 인간은 자신이 품고 있던 신앙의 관념들에 따라 다른 이들과 결합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이해하는 방식은 영원한 결합을 결정합니다. ‘백마’가 이해라면, 그 말이 어디를 향해 달렸는지가 곧 인간의 영원한 방향입니다.
마지막으로, 열림은 문자적 의미 안에서 일어납니다. 내적 의미는 문자 밖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문자 안에서 열립니다. 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말씀은 문자 속에 서 있고, 열리는 것은 그 문자를 통해 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사랑과 진리의 애정으로 읽는 자에게, 주님은 백마를 타고 오십니다. 이해가 열리고, 모순은 질서가 되며, 말씀이 살아납니다.
‘진리를 진리 자체를 위하여 사랑한다’는 것은, 진리가 나에게 유리하기 때문에, 나의 입장을 강화해 주기 때문에, 나를 높여 주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참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진리가 나를 기쁘게 하든 아프게 하든, 나를 드러내 주든 낮추든,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온 빛이기 때문에 받아들이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이는 진리를 ‘수단’으로 쓰지 않고, 진리를 ‘목적’으로 여기는 태도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말씀이 나의 습관이나 생각을 바로잡을 때, 그것이 불편하더라도 ‘그래도 이것이 참이라면 나는 배우겠다’라고 반응하는 것이 진리를 진리로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반대로, 말씀을 읽으면서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면 내 생각이 옳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까’라고 접근한다면, 그것은 이미 진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성경을 읽어도, 속으로는 자기를 확증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으로 말하면, 이는 ‘자기 사랑’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의 빛’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진리로 사랑하는 사람은, 아직 다 이해하지 못해도 진리를 존중합니다. 그는 진리를 통해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므로 그 사랑은 곧 삶으로 이어집니다. 진리를 진리로 사랑하는 사람은 ‘옳다는 것을 아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옳은 대로 살고자’ 합니다. 여기서 이해와 삶이 연결됩니다.
또 하나의 특징은 겸손입니다. 진리를 진리로 사랑하는 사람은 ‘나는 아직 모른다’는 사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배우기를 기뻐합니다. 그는 진리를 자기 소유물로 만들려 하지 않고, 진리 앞에서 배우는 자로 서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진리를 진리 자체를 위하여 사랑하는 자가 곧 주님에 의해 인도되는 자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방향이 이미 자기 자신이 아니라 진리, 곧 주님 쪽을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목회적으로 말하자면, 이는 매우 단순하지만 깊은 질문으로 드러납니다. ‘나는 왜 이 진리를 알고 싶어 하는가?’ 내가 설교를 잘하기 위해서인가,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정말로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더 알고 싶어서인가? 진리를 진리로 사랑하는 마음은 조용하고 단순하지만, 그 안에 하늘의 빛이 스며듭니다. 그런 마음에서 말씀을 읽을 때, 비로소 내면의 열림(enlightenment)이 시작됩니다.
말씀의 필요성과 탁월성The necessity and excellence of the Word.
자연의 빛으로는 주님에 관하여, 천국과 지옥에 관하여, 인간이 죽은 후의 생명에 관하여, 그리고 인간이 영적이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신적 진리들에 관하여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n. 8944, 10318–10320).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생각해 보면 분명해집니다. 곧 많은 사람들, 심지어 학식 있는 사람들까지도, 말씀이 있는 곳에서 태어나 그것에 의해 가르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것들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n. 10319). 인간이 천국을 위하여 태어났기때문에 (n. 1775), 하늘로부터의 어떤 계시가 반드시 필요하였고, 그래서 세상의 모든 시대마다 계시가 있었습니다(n. 2895). From the light of nature nothing is known concerning the Lord, concerning heaven and hell, concerning the life of man after death, nor concerning the Divine truths by which man acquires spiritual and eternal life (n. 8944, 10318, 10319, 10320). This may appear manifest from the consideration, that many, and among them men of learning, do not believe those things, although they are born where the Word is, and are thereby instructed concerning them (n. 10319). Therefore it was necessary that there should be some revelation from heaven because man was born for heaven (n. 1775). Therefore in every age of the world there has been a revelation (n. 2895).
이 지상에서 차례로 주어진 여러 종류의 계시에 대하여는 n.10355,10632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홍수 이전, 이른바 황금시대라 불리던 태고인들에게는 직접적인 계시(an immediate revelation)가 있었고, 그로부터 신적 진리(Divine truth)가 그들의 마음에 새겨졌습니다 (n. 2896). 홍수 이후에 존재하였던 고대 교회들에는 역사적이고 예언적인 말씀(a historical and prophetical Word)이 있었습니다 (n. 2686, 2897). 그 교회들에 관하여는 ‘새 예루살렘과 그 천적 교리’(New Jerusalem and Its Heavenly Doctrine, n. 247)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 역사적 부분은 ‘여호와의 전쟁들’(the Wars of Jehovah)이라 하였고, 예언적 부분은 ‘선포들’(Enunciations)이라 하였습니다 (n. 2897). 그 말씀은 영감(inspiration)에 있어서 우리 말씀과 같았으나, 그 교회들에 맞게 조정되어 있었습니다 (n. 2897). 그 말씀은 모세에 의하여 언급되었으나 (n. 2686, 2897), 지금은 잃어버려졌습니다 (n. 2897). 또한 발람의 예언들(the prophecies of Balaam)에서 보이는 것처럼 다른 이들에게도 예언적 계시(Prophetical revelations)가 주어졌습니다(n. 2898). Of the various kinds of revelation which have successively been made on this earth (n. 10355, 10632). To the most ancient men, who lived before the flood, whose time was called the golden age, there was an immediate revelation, and thence Divine truth was inscribed on their hearts (n. 2896). The ancient churches, which existed after the flood, had a historical and prophetical Word (n. 2686, 2897): concerning which churches see New Jerusalem and Its Heavenly Doctrine (n. 247). Its historical parts were called the Wars of Jehovah, and its prophetical parts, Enunciations (n. 2897). That Word as to inspiration was like our Word, but accommodated to those churches (n. 2897). It is mentioned by Moses (n. 2686, 2897). But that Word is lost (n. 2897). Prophetical revelations were also made to others, as appears from the prophecies of Balaam (n. 2898).
말씀은 그 모든 부분과 각각의 세부(particular part)에 이르기까지 신적(Divine)입니다 (n. 639, 680, 10321, 10637). 말씀은 점 하나와 획 하나(every point and iota)에 이르기까지 신적이며 거룩하다는 것이 경험을 통해 증명되었습니다 (n. 1349). 오늘날 말씀이 획 하나에 이르기까지 영감되었다고 설명되는 방식에 관하여는 n.1886에서 볼 수 있습니다. The Word is Divine in all and every particular part (n. 639, 680, 10321, 10637). The Word is Divine and holy as to every point and iota, from experience (n. 1349). How it is explained at this day that the Word is inspired as to every iota (n. 1886).
교회는 특별히 말씀이 있는 곳, 그리고 그 말씀을 통해 주님이 알려지고 신적 진리들이 계시되는 곳에 존재합니다 (n. 3857, 10761). 그러나 말씀이 있는 곳에서 태어나고, 그로 말미암아 주님이 알려지는 곳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곧 교회에 속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에 속하는 자들은 말씀에서 나온 진리들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거듭난 자들, 곧 그 안의 진리들에 따라 사는 자들, 따라서 사랑과 신앙의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n. 6637, 10143, 10153, 10578, 10645, 10829). The church is especially where the Word is, and where the Lord is thereby known, and Divine truths are revealed (n. 3857, 10761). But it does not follow from thence, that they are of the church, who are born where the Word is, and where the Lord is thereby known; but they who, by means of truths from the Word, are regenerated by the Lord, who are they who live according to the truths therein, consequently who lead a life of love and faith (n. 6637, 10143, 10153, 10578, 10645, 10829).
해설
이 글은 ‘백마’라는 상징 논의를 넘어, 왜 말씀이 반드시 필요한가라는 근본 문제로 나아갑니다. 자연의 빛, 곧 인간의 이성만으로는 주님, 천국, 사후 생명,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진리를 알 수 없다고 단정합니다. 이는 이성의 부정이 아니라, 이성의 한계 규정입니다. 인간은 천국을 위하여 태어났으나, 천국에 관한 지식은 하늘로부터 와야 합니다. 그러므로 계시는 선택이 아니라 필연입니다.
여기서 계시의 역사적 연속성이 제시됩니다. 태고교회에는 직접 계시가 있었고, 진리가 마음에 새겨졌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함에 따라 외적 말씀이 필요해졌고, 홍수 이후의 고대교회에는 역사적, 예언적 형태의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그 말씀이 지금은 사라졌다는 언급은, 계시가 한 번으로 끝나는 사건이 아니라 시대마다 주어졌음을 보여 줍니다. 이는 계시의 점진성과 섭리적 질서를 강조합니다.
말씀이 ‘점 하나와 획 하나까지’ 신적이라는 선언은 내적 의미 교리의 토대입니다. 만일 말씀의 일부만 신적이라면, 내적 의미도 부분적일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세부가 신적이라면, 모든 세부가 영적 의미를 지닙니다. 이는 문자 자체를 경시하지 않으면서도, 그 안에 무한한 깊이가 있음을 말합니다. 내적 의미는 문자와 분리된 다른 책이 아니라, 문자 속에 내재한 차원입니다.
교회의 정의도 재정의됩니다. 교회는 지리적 공간이나 제도적 조직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 주님이 알려지고 그 진리에 따라 사는 사람들의 상태입니다. 단순히 말씀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진리로 거듭나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백마’는 단지 이해의 상징이 아니라, 교회의 생명 조건입니다. 이해가 열릴 때 교회가 살아 있습니다.
이 글은 계시, 말씀, 교회, 거듭남을 하나의 구조로 연결합니다. 계시는 인간이 천국을 위해 태어났기 때문에 주어졌고, 말씀은 그 계시의 기록이며, 교회는 그 말씀에 따라 사는 자들의 공동체이며, 거듭남은 그 진리를 삶으로 실천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탁월성은 단지 권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데 있습니다.
The Word and its spiritual or internal sense (sections 1–5)
WH.5
‘백마’(the White Horse)가 말씀의 영적 곧 내적 의미에 관한 이해를 뜻하기 때문에, 말씀과 그 내적 의미에 관하여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the Arcana Coelestia)에서 밝혀진 몇 가지 사항들을 여기에 덧붙입니다. 왜냐하면 그 저작에서는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모든 내용이 말씀의 영적 곧 내적 의미에 따라 해설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Since “the White Horse” signifies the understanding of the Word as to its spiritual or internal sense, those particulars concerning the Word and that sense, which are shown in the Arcana Coelestia, are here subjoined: for in that work the whole contents of Genesis and Exodus are explained according to the spiritual or internal sense of the Word.
해설
이 글은 ‘백마’ 전체 구조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지금까지는 ‘말 = 이해’라는 상응을 성경과 영계의 표상으로 증명해 왔다면, 이제는 그 이해가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 주겠다는 선언입니다. 곧 ‘백마’는 단순한 상징 해설이 아니라, 이미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안에서 실천적으로 구현된 해석 방법의 이름입니다. 이해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말씀 전체를 꿰뚫어 보는 실제적인 능력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절제된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는 새로운 체계를 제시한다고 말하지 않고, 이미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내적 의미로 해설한 작업을 참고하라고 말합니다. 이는 ‘백마’의 교리가 단지 상징적 주장에 그치지 않고, 방대한 본문 주해 작업 속에서 검증되었음을 암시합니다. 창세기와 출애굽기 전체가 영적 의미에 따라 설명될 수 있었다면, 말씀 전체도 동일한 법칙 아래 이해될 수 있다는 전제가 서 있습니다.
목회적으로 보아도 이 문장은 의미심장합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는 몇 구절에만 적용되는 특별한 비밀이 아니라, 성경 전반에 흐르는 질서라는 점을 밝히기 때문입니다. 이해가 백마라면,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는 그 말이 실제로 달린 길과 같습니다. 다시 말해, 백마는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말씀을 새롭게 읽는 방식 그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WH.5는 일종의 연결 고리입니다. 상징의 증명에서 실제 해석으로, 선언에서 실천으로 넘어가는 지점입니다. ‘백마’가 말씀의 내적 의미에 대한 이해라면, 이제 독자는 그 이해가 어떻게 본문 전체를 열어 가는지를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통해 확인하게 됩니다. 이는 교회의 마지막 때에 열릴 새 이해가 추상적 계시가 아니라, 구체적 본문 해석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보여 주는 매우 간결하면서도 결정적인 문장입니다.
The Word and its spiritual or internal sense (sections 1–5)
WH.4
‘병거’(chariots)와 ‘말’(horses)이 이러한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은 고대 교회들에서는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교회들은 표상 교회들(representative churches)이었고, 그들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는 상응과 표상의 학문(the science of correspondences and representations)이 모든 학문 중 으뜸이었기 때문입니다. ‘말’이 이해를 뜻한다는 의미는 그 교회들로부터 주변의 지혜로운 이들, 심지어 그리스에 이르기까지 전해졌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지혜와 총명의 신(their God of wisdom and intelligence)을 태양에 두고 그것을 묘사할 때, 불의 병거와 네 마리의 불말을 그것에 돌렸습니다. 또한 바다의 신(the God of the sea)을 묘사할 때에는, 바다가 이해에서 나온 학문들(sciences derived from the understanding)을 뜻하기 때문에, 그에게도 말들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이해로부터 학문이 나오는 기원을 묘사할 때에는, 날개 달린 말을 그려, 그 말이 발굽으로 샘을 터뜨리고, 그 샘가에 ‘학문들’(the sciences)이라 불리는 아홉 처녀가 앉아 있는 모습으로 표현하였습니다. That such is the signification of “chariots” and “horses” was well known in the ancient churches; for those churches were representative churches, and with those who were in them, the science of correspondences and representations was the chief of all sciences. The signification of the horse, as being understanding, was derived by the wise round about, even to Greece, from those churches. Hence it was, when they would describe the sun, in which they placed their God of wisdom and intelligence, that they attributed to it a chariot and four horses of fire. And when they would describe the God of the sea, since by the sea were signified sciences derived from the understanding, that they also attributed horses to him. And when they would describe the origin of the sciences from the understanding, they represented it by a winged horse, which with its hoof broke open a fountain, at which sat nine virgins called the sciences.
이는 고대 교회들로부터 ‘말’(the horse)은 이해를 뜻하고, ‘날개’(wings)는 영적 진리를 뜻하며, ‘발굽’(the hoof)은 이해에서 나온 학문적인 것을 뜻하고, ‘샘’(a fountain)은 학문들이 흘러나오는 교리(doctrine from which sciences are derived)를 뜻한다는 지식을 전해 받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트로이 목마’(the Trojan horse)로 불리는 것도 다른 의미가 아니라, 성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이해로 고안해 낸 인위적인 계책을 뜻합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고대인들에게서 전해진 방식에 따라 이해를 묘사할 때에는 날아다니는 말이나 페가수스로 형상화하는 것이 보통이며, 교리는 샘으로, 학문은 처녀들로 묘사합니다. 그러나 ‘말’이 신비적 의미에서 이해를 뜻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더구나 이러한 상징들이 이방인들에게 고대 표상 교회들로부터 전해졌다는 사실은 더욱 알지 못합니다. For from the ancient churches they received the knowledge that “the horse” signifies the understanding; “wings,” spiritual truth; “the hoof,” what is scientific from the understanding; and “a fountain,” doctrine from which sciences are derived. Nor is anything else signified by “the Trojan horse,” than an artificial contrivance devised by their understanding for the purpose of destroying the walls. Even at this day, when the understanding is described after the manner received from those ancients, it is usual to figure it by a flying horse or Pegasus; so, likewise, doctrine is described by a fountain, and the sciences by virgins; but scarcely anyone knows that “the horse,” in the mystic sense, signifies the understanding; still less that those significatives were derived by the Gentiles from the ancient representative churches.
해설
이 글은 상응의 학문이 단지 성경 해석의 도구가 아니라, 인류 문명 전반에 영향을 미친 원형적 지식이었다는 점을 밝히는 대목입니다. 고대 교회는 자연과 영계 사이의 상응을 알고 있었고, 그 지식이 모든 학문의 기초였습니다. ‘말 = 이해’라는 상응은 그들 사이에서 자명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상징은 후대의 상상이 아니라, 잊혀진 지혜의 흔적입니다.
그리스 신화 속 태양신의 불병거와 네 말은 단순한 시적 장식이 아니라, 지혜와 총명의 근원이 하늘의 빛에서 나온다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태양은 사랑, 불은 그 열기, 말은 이해를 뜻합니다. 바다의 신에게 말이 귀속된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바다는 지식의 집합을 상징하며, 지식은 이해를 통해 정리됩니다. 그러므로 신화는 왜곡되었으나, 그 근저에는 상응의 잔재가 남아 있습니다.
날개 달린 말, 곧 페가수스가 발굽으로 샘을 터뜨리는 장면은 매우 깊은 상응을 담고 있습니다. 날개는 영적 진리, 말은 이해, 발굽은 이해의 제일 바깥 작용, 샘은 교리입니다. 곧 영적 진리로 상승한 이해가 교리의 원천을 열고, 그로부터 학문이 흘러나온다는 구조입니다. 아홉 처녀는 학문과 예술의 분화된 형태를 뜻합니다. 이는 고대 상응 지식이 신화적 상징으로 변형된 사례입니다.
트로이 목마 또한 이해로 고안된 계책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말이 단순한 전쟁 도구가 아니라, 전략적 지성을 상징하는 형상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이는 상응의 기억이 문화 속에 남아 있음을 보여 줍니다. 오늘날에도 이해를 날아오르는 말로, 교리를 샘으로, 학문을 처녀로 형상화하는 관습이 남아 있지만, 그 영적 기원은 거의 잊혔습니다.
이 글의 핵심은, 상응의 지식이 인류의 공통 유산이었다는 점입니다. 이방 문화의 상징도 근원적으로는 고대 표상 교회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의미는 잊히고 형상만 남았습니다. 그러므로 ‘백마’의 교리는 새로운 발명이 아니라, 잃어버린 고대 지혜의 회복입니다. 이해는 언제나 말로, 교리는 병거로, 사랑은 불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영계의 구조이며, 성경과 인류 문화 속에 동시에 흔적을 남긴 상응의 법칙입니다.
The Word and its spiritual or internal sense (sections 1–5)
WH.3
‘말’(a horse)이 이해(the understanding)를 뜻하는 까닭은 다른 데서 온 것이 아니라, 영계의 표상들(the representatives in the spiritual world)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 세계에서는 말들이 자주 보이며, 말 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도 보이고, 또한 병거들도 보입니다. 거기서는 누구나 그것들이 지적이고 교리적인(intellectual and doctrinal) 것들을 뜻한다는 걸 압니다. 저는 어떤 이들이 자기 이해로부터 생각할(thinking from their understanding) 때, 그들이 마치 말을 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자주 관찰하였습니다. 그들의 사색(思索, meditation)이 다른 이들 앞에서 그렇게 표상되었으나, 그들 자신은 그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That a horse signifies the understanding is from no other source than from the representatives in the spiritual world. In that world horses are frequently seen, and persons sitting upon horses, and also chariots; and there everyone knows that they signify intellectual and doctrinal things. I have often observed, when any were thinking from their understanding, that at such times they appeared as if riding on horses; their meditation was thus represented before others, they themselves not knowing it.
또한 그곳에는 교리의 진리(the truths of doctrine)에 관하여 이해로부터 생각하고 말하는 자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가 있습니다. 다른 이들이 그곳에 가까이 가면, 온 평원이 병거와 말들로 가득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 광경을 보고 놀라는 새로 온 영들은, 그것이 그들의 지적 사유(intellectual thought)에서 비롯된 나타남임을 배우게 됩니다. 그 장소는 ‘지성과 지혜의 모임’(the assembly of the intelligent and the wise)이라 불립니다. There is also a place there, where many assemble who think and speak from the understanding concerning the truths of doctrine; and when others approach, they see the whole plain full of chariots and horses; and novitiate spirits, who wonder whence this is, are instructed that it is an appearance resulting from their intellectual thought. That place is called the assembly of the intelligent and the wise.
저는 또한 어떤 이들이 천국으로 들려 올라갈 때 밝은 말들과 불병거들(bright horses and chariots of fire)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때 천국 교리의 진리들(the truths of heavenly doctrine) 안에서 가르침을 받아 지혜로워지고, 그렇게 천국으로 올려졌다는 표징(a sign)이었습니다. 그 광경을 보면서,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갈 때 사용된 ‘불수레와 불말’(왕하2:11, the chariot of fire and the horses of fire by which Elijah was taken up into heaven)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리고 엘리사의 사환이 눈이 열려 보았던 ‘불말과 불병거’(왕하6:17, the horses and chariots of fire)가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I have likewise seen bright horses and chariots of fire, when some were taken up into heaven, which was a sign that they were then instructed in the truths of heavenly doctrine, and became intelligent, and thus were taken up; on seeing which, it occurred to my mind, what is signified by “the chariot of fire and the horses of fire by which Elijah was taken up into heaven”; and what is signified by “the horses and chariots of fire” that were seen by the young man of Elisha, when his eyes were opened.
두 사람이 길을 가며 말하더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더라(왕하2:11)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왕하6:17)
해설
이 글은 매우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앞에서는 성경 구절을 통해 ‘말 = 이해’라는 상징을 증명했다면, 여기서는 그 근원을 영계의 실재에서 찾습니다. 곧 성경의 상징은 임의적 비유가 아니라, 영계에서 실제로 그렇게 보이는 표상에서 기원한다는 주장입니다. 영계에서는 사유와 애정이 외적 형상으로 나타납니다. 이해로 생각하는 이는 말 위에 있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말’은 이해의 상징이 아니라, 이해의 자연스러운 형상입니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그 표상이 본인은 모르는 사이에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는 영계가 인간의 내면 상태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세계임을 보여 줍니다. 인간은 자신의 사유가 어떻게 보이는지 알지 못하지만, 영계에서는 그것이 외형으로 나타납니다. 이해 중심의 사유는 말, 교리적 체계는 병거로 나타납니다. 병거는 구조화된 교리, 말은 그 교리를 움직이게 하는 이해입니다.
‘지성과 지혜의 모임’이라는 장소는 상징적이면서도 실제적인 영적 상태를 보여 줍니다. 진리를 탐구하는 자들의 공동체는 평원에 가득한 말과 병거로 나타납니다. 새로 온 영들이 그것을 보고 놀란다는 것은, 아직 영적 상응의 법칙을 모르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 장면은 성경 해석의 근거가 단순한 추론이 아니라, 영적 경험에 기초해 있음을 보여 줍니다.
밝은 말들과 불병거는 천국 교리의 진리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상징합니다. ‘불’은 사랑, ‘말’은 이해, ‘병거’는 교리입니다. 그러므로 불말과 불병거는 사랑으로 생동하는 이해와 교리를 뜻합니다. 이것이 엘리야 승천 사건의 영적 의미와 연결됩니다. 엘리야는 말씀을 표상하였고, 불말과 불병거는 말씀의 이해와 교리 안에서 하늘로 올려짐을 뜻합니다.
엘리사의 사환이 눈이 열려 보았다는 표현은, 영적 시야의 개방을 뜻합니다. 눈이 열릴 때 비로소 불말과 불병거가 보입니다. 이는 이해가 열릴 때, 교리의 내적 생명이 보인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이 단락은 ‘백마’의 교리를 단지 성경 본문에서만이 아니라, 영계의 구조 자체에서 근거 짓는 매우 핵심적인 부분입니다. 말은 이해이며, 이해는 하늘의 빛을 운반하는 수단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내적 의미, 곧 속뜻이 열리는 것은 곧 인간 이해의 승격, 업그레이드를 뜻합니다.
The Word and its spiritual or internal sense (sections 1–5)
WH.2
말씀의 예언서들에는 ‘말’이 매우 자주 언급되지만, 지금까지 ‘말’(a horse)이 이해(the understanding)를 뜻하고, 그 ‘탄 자’(rider)가 지혜로운 사람(one who is intelligent)을 뜻한다는 사실은 아무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아마도 ‘말’이 영적 의미에서 그러한 것을 뜻하며, 따라서 말씀 안에서도 그러하다는 것이 이상하고 놀랍게 보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임은 말씀 안의 많은 구절들로부터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중 몇 가지만 여기에서 인용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예언에서 단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In the prophetical parts of the Word mention is very often made of the horse, but heretofore no one has known that “a horse” signifies the understanding, and his “rider” one who is intelligent; and this possibly, because it seems strange and wonderful, that by “a horse” such a thing should be meant in the spiritual sense, and thence in the Word. But nevertheless that it is so, may evidently appear from many passages therein; some of which only I will here adduce. In the prophecy of Israel, it is said of Dan:
17단은 길섶의 뱀이요 샛길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18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창49:17, 18) Dan is a serpent upon the way, an arrow-snake upon the highway, that biteth the horse’s heels, so that his rider shall fall backward (Gen. 49:17, 18).
이스라엘 지파 중 하나에 관한 이 예언이 무엇을 뜻하는지, ‘뱀’(a serpent)이 무엇을 뜻하고, ‘말’(a horse)과 그 ‘탄 자’(rider)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지 못하면 아무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그 안에 어떤 영적 의미가 들어 있음을 압니다. 각 표현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에서 이 예언을 해설한 곳(n. 6398–6401)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박국서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No one can understand what this prophecy concerning one of the tribes of Israel signifies unless he knows what is signified by “a serpent,” and what by “a horse” and his “rider”; everyone, however, knows that there is something spiritual involved therein; what therefore each expression signifies, may be seen in Arcana Coelestia (n. 6398–6401), where this prophecy is explained. In Habakkuk:
8여호와여 주께서 말을 타시며 구원의 병거를 모시오니 강들을 분히 여기심이니이까 강들을 노여워하심이니이까 바다를 향하여 성내심이니이까, 15주께서 말을 타시고 바다 곧 큰 물의 파도를 밟으셨나이다(합3:8, 15) O God, thou didst ride upon thy horses. Thy chariots are salvation. thou didst tread in the sea with thy horses (Hab. 3:8, 15).
여기서 ‘말들’(horses)이 영적인 것을 뜻함은 분명합니다.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언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다른 의미라면, ‘하나님이 그의 말들을 타신다’(God rides upon his horses)거나 ‘그의 말들로 바다를 밟으신다’(and that he treads upon the sea with his horses)는 말이 무엇을 뜻하겠습니까? 스가랴서에서도 이와 같이 말합니다. That “horses” here signify what is spiritual, is evident, for they are said concerning God; in any other sense, what could be meant by saying that “God rides upon his horses, and that he treads upon the sea with his horses?” In like manner in Zechariah:
그 날에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있는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슥14:20) In that day, there shall be upon the bells of the horses, holiness unto Jehovah (Zech. 14:20).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모든 말을 쳐서 놀라게 하며 그 탄 자를 쳐서 미치게 하되 유다 족속은 내가 돌보고 모든 민족의 말을 쳐서 눈이 멀게 하리니(슥12:4) In that day, saith Jehovah, I will smite every horse with astonishment, and his rider with madness; and I will open mine eyes upon the house of Judah, and will smite every horse of the people with blindness (Zech. 12:4).
여기서는 교회의 황폐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데, 이는 더 이상 어떠한 진리의 이해도 남아 있지 않을 때 일어나는 상태입니다. 그 상태가 ‘말과 그 탄 자’(the horse and his rider)로 묘사됩니다. 만일 다른 의미라면, ‘모든 말을 놀라게 한다’(smiting every horse with astonishment)거나 ‘백성의 말을 눈멀게 한다’(smiting the horse of the people with blindness)는 말이 교회와 무슨 관련이 있겠습니까? 욥기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It treats there of the vastation of the church, which takes place when there no longer remains the understanding of any truth; and which is described thus by “the horse and his rider”; what else could be the meaning of “smiting every horse with astonishment,” and of “smiting the horse of the people with blindness”? What has this to do with the church? In Job:
17이는 하나님이 지혜를 베풀지 아니하셨고 총명을 주지 아니함이라18그러나 그것이 몸을 떨쳐 뛰어갈 때에는 말과 그 위에 탄 자를 우습게 여기느니라19말의 힘을 네가 주었느냐 그 목에 흩날리는 갈기를 네가 입혔느냐 (욥39:17-19) God hath caused her to forget wisdom, neither hath he imparted to her intelligence: what time she lifteth up herself on high, she scorneth the horse and his rider (39:17–19 seq.).
여기서 ‘말’(the horse)이 이해를 뜻함은 분명합니다. 다윗의 시편에서도 말하기를, That “the horse” here signifies the understanding, is manifestly evident. In like manner in David, where it is said:
왕은 진리와 온유와 공의를 위하여 왕의 위엄을 세우시고 병거에 오르소서 왕의 오른손이 왕에게 놀라운 일을 가르치리이다 (시45:4) He rideth upon the word of truth (Ps. 45:4).
또한 다른 많은 구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나아가, 왜 엘리야와 엘리사가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the chariot of Israel and the horsemen thereof)이라 불렸는지, 또 왜 ‘엘리사의 사환이 산에 불말과 불병거가 가득한 것을 보았는지’(the boy of Elisha saw the mountain full of horses and chariots of fire), ‘병거’(chariots)가 무엇을 뜻하고, ‘엘리야와 엘리사’(Elijah and Elisha)가 무엇을 표상하였는지를 알지 못하면 아무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에게And in many other passages. Moreover, who can know the reason why Elijah and Elisha were called “the chariot of Israel and the horsemen thereof”; and why “the boy of Elisha saw the mountain full of horses and chariots of fire”; except it be known what is signified by “chariots,” and what was represented by “Elijah and Elisha”? For Elisha said to Elijah:
11두 사람이 길을 가며 말하더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더라 12엘리사가 보고 소리 지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하더니 다시 보이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엘리사가 자기의 옷을 잡아 둘로 찢고 (왕하2:11, 12) My father, my father, the chariot of Israel and the horsemen thereof (2 Kings 2:11, 12).
요아스 왕도 엘리사에게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And Joash the king said to Elisha:
엘리사가 죽을 병이 들매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가 그에게로 내려와 자기의 얼굴에 눈물을 흘리며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 하매 (왕하13:14) My father, my father, the chariot of Israel and the horsemen thereof (2 Kings 13:14).
그리고 엘리사의 사환에 대한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And, speaking of the boy of Elisha, it is said: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왕하6:17) Jehovah opened the eyes of the boy of Elisha, and he saw and behold the mountain was full of horses and chariots of fire round about Elisha (2 Kings 6:17).
엘리야와 엘리사가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the chariot of Israel and the horsemen thereof)이라 불린 이유는 그들이 주님을 말씀에 관하여 표상하였기(they both represented the Lord as to the Word) 때문이며, ‘병거’(a chariot)는 말씀에서 나온 교리(doctrine from the Word)를, ‘마병’(horsemen)은 지성(intelligence)을 뜻합니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말씀에 관한 주님을 표상하였다는 것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에서(n. 5247, 7643, 8029, 9327) 볼 수 있으며, ‘병거’가 말씀에서 나온 교리를 뜻한다는 것도 그곳에서(n. 5321, 8215) 볼 수 있습니다. The reason why Elijah and Elisha were called “the chariot of Israel and the horsemen thereof” is that they both represented the Lord as to the Word, and “a chariot” signifies doctrine from the Word, and “horsemen” intelligence. That “Elijah” and “Elisha” represented the Lord as to the Word may be seen in Arcana Coelestia (n. 5247, 7643, 8029, 9327). And that “chariots” signify doctrine drawn from the Word (n. 5321, 8215).
해설
이 글은 ‘말’이 이해를 뜻한다는 핵심 명제를 본격적으로 성경 전체에서 증명하기 시작하는 부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상징을 제안하는 것이 아니라, 예언서 전반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말’의 용례를 통해 일관된 영적 법칙이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 주려 합니다. ‘말’은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인간의 지적 능력, 곧 진리를 파악하는 이해력을 표상합니다. 그리고 ‘그 탄 자’는 그 이해를 실제로 사용하는 지성적 주체를 뜻합니다.
창세기 49장에서 단에 대한 예언은 문자 그대로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입니다. 그러나 ‘뱀’이 감각적 추론을, ‘말굽을 문다’는 것이 이해의 제일 바깥 부분을 공격하는 것을, ‘탄 자를 뒤로 떨어뜨린다’는 것이 지성을 전복시키는 상태를 뜻한다고 보면 그 영적 구조가 드러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성경의 난해함이 상징 체계의 부재가 아니라, 상징 체계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임을 암시합니다.
하박국과 스가랴의 구절들은 더욱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말을 타신다’는 것은 문자적으로는 부적절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해를 뜻한다고 보면, 주님께서 진리의 이해를 통해 역사하신다는 의미가 됩니다. 스가랴에서 ‘말을 치신다’거나 ‘눈멀게 하신다’는 것은 교회의 황폐, 곧 진리 이해의 상실을 묘사하는 상징입니다. 교회가 무너질 때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은 외적 제도가 아니라, 진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입니다.
욥기에서 ‘말과 그 탄 자를 비웃는다’는 표현은 이해와 지성을 경시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는 영적 교만이나 감각적 자만의 상태를 묘사합니다. 이해는 하늘로부터 오는 빛인데, 그것을 조롱하는 것은 빛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은 단순한 힘이 아니라, 하늘의 빛을 운반하는 기능을 합니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라 불린 것은 매우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병거는 교리, 말은 이해, 마병은 지성입니다. 두 선지자는 말씀을 대표하였고, 그러므로 그들을 병거와 마병이라 부른 것입니다. 엘리사의 사환이 본 불말과 불병거는 하늘의 보호를 상징할 뿐 아니라, 하늘의 교리와 이해가 주님의 종을 둘러싸고 있음을 뜻합니다.
이 모든 인용은 하나의 결론으로 모입니다. ‘말’은 이해이며, 그 이해는 교회의 생명과 직결됩니다. 이해가 밝으면 교회가 살아 있고, 이해가 황폐하면 교회도 황폐합니다. 그러므로 ‘백마’의 계시는 단지 상징 해설이 아니라, 말씀의 내적 의미가 열림으로써 이해가 새롭게 회복되는 사건을 뜻합니다. 이는 교회의 회복과 직결되는 주제입니다.
The Word and its spiritual or internal sense (sections 1–5)
WH.1
‘요한계시록’에서 말씀은 그 영적, 곧 내적 의미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In the book of Revelation the Word is thus described as to its spiritual or internal sense:
11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12그 눈은 불꽃 같고 그 머리에는 많은 관들이 있고 또 이름 쓴 것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13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14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16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계19:11-14, 16) I saw heaven opened, and behold a white horse, and he that sat upon him was called faithful and true, and in justice he doth judge and make war. His eyes were as a flame of fire; and upon his head were many diadems; and he hath a name written that no one knew but he himself. And he was clothed with a vesture dipped in blood; and his name is called the Word of God. And the armies which were in the heavens followed him upon white horses, clothed in fine linen white and clean. And he hath upon his vesture and upon his thigh a name written, King of kings and Lord of lords (19:11–14, 16).
이 표현들 각각이 무엇을 포함하는지는 내적 의미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모든 표현은 어떤 점에서든 표상적이며 상징적입니다. 곧 ‘하늘이 열렸다’(heaven was opened)는 것, ‘백마’(白馬, a white horse)가 있었다는 것, ‘그 위에 앉으신 이가 있었다’(there was one sitting upon him)는 것, ‘의로 심판하고 싸운다’(in justice he doth judge and make war)는 것, ‘그 눈이 불꽃 같다’(his eyes were as a flame of fire)는 것, ‘그 머리 위에 많은 면류관이 있다’(on his head were many diadems)는 것, ‘자기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이름이 있다’(he had a name that no man knew but he himself)는 것, ‘피에 적신 옷을 입었다’(he was clothed with a vesture dipped in blood)는 것, ‘하늘의 군대들이 백마를 타고 따른다’(the armies which were in heaven followed him upon white horses)는 것,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었다’(they were clothed in fine linen white and clean)는 것, ‘그 옷과 넓적다리에 이름이 기록되었다’(on his vesture and on his thigh he had a name written)는 것 등은 모두 어떤 점에서든 표상적이며 상징적인 것입니다. 여기서 묘사된 것은 분명히 ‘말씀’(the Word)이며, 또한 말씀이신 주님이십니다. 왜냐하면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his name is called the Word of God)고 하였고, 이어서 ‘그 옷과 그 넓적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he hath on his vesture and on his thigh a name written, King of kings and Lord of lords)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No one can know what each of these expressions involves, except from the internal sense. It is manifest that every expression is in some respect representative and significative: as when it is said, that “heaven was opened”; that there was “a white horse”; that “there was one sitting upon him”; that “in justice he doth judge and make war”; that “his eyes were as a flame of fire”; that “on his head were many diadems”; that “he had a name that no man knew but he himself”; that “he was clothed with a vesture dipped in blood”; that “the armies which were in heaven followed him upon white horses”; that “they were clothed in fine linen white and clean”; and that “on his vesture and on his thigh he had a name written.” It is expressly said, that it is “the Word” which is here described, and the Lord who is the Word; for it is said, “his name is called the Word of God”; and afterwards, “he hath on his vesture and on his thigh a name written, King of kings and Lord of lords.”
각각의 표현을 해석해 보면, 여기서는 말씀이 그 영적 또는 내적 의미에 관하여 묘사되고 있음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하늘이 열렸다’(heaven being opened)는 것은 말씀의 내적 의미가 하늘에서 보이며, 하늘이 열리는 자들에게는 세상에서도 보인다(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is seen in heaven, and thence by those in the world to whom heaven is opened)는 것을 표상하고 상징합니다. ‘말’(The horse), 곧 ‘백마’(a white horse)는 말씀의 내면에 관한 이해(the understanding of the Word as to its interiors)를 표상하며 상징합니다. ‘그 위에 앉으신 이’(he that sat upon him)는 말씀에 관한 주님, 곧 말씀이신 주님(the Lord as to the Word, thus the Word)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his name is called the Word of God)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선으로부터는 ‘충신, 그리고 의로 심판하시는’(faithful and judging in justice) 분이라 불리시며, 진리로부터는 ‘진실, 그리고 의로 싸우시는’(true, and who maketh war in justice) 분이라 불리십니다. 주님 자신이 곧 의이시기 때문입니다. From the interpretation of each expression it evidently appears that the Word is here described as to its spiritual or internal sense. By “heaven being opened” is represented and signified that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is seen in heaven, and thence by those in the world to whom heaven is opened. “The horse,” which was white, represents and signifies the understanding of the Word as to its interiors; that this is the signification of “a white horse,” will be shown presently. That “he that sat upon him” is the Lord as to the Word, thus the Word, is manifest, for it is said, “his name is called the Word of God”; who, from good, is called “faithful and judging in justice”; and from truth, is called “true, and who maketh war in justice”; for the Lord himself is justice.
‘그의 눈이 불꽃 같다’(his eyes, as a flame of fire)는 것은 그분의 신적 사랑의 신적 선으로부터 나오는 신적 진리(the Divine truth, from the Divine good of his Divine love)를 뜻합니다. ‘그 머리 위의 많은 면류관’(The many diadems upon his head)은 신앙의 모든 선과 진리(all the goods and truths of faith)를 뜻합니다. ‘자기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이름이 있다’(Having a name written that no one knew but he himself)는 것은 말씀의 내적 의미 안에 있는 그 본질과 성질이 주님과, 주님께서 계시해 주시는 자들 외에는 아무도 볼 수 없음(the quality of the Word in the internal sense is seen by no one but himself, and those to whom he reveals it)을 뜻합니다. ‘피에 적신 옷을 입었다’(Clothed in a vesture dipped in blood)는 것은 문자적 말씀에 가해진 폭력(Word in the letter, to which violence has been offered)을 뜻합니다. ‘하늘의 군대들이 백마를 타고 따랐다’(The armies in the heavens which followed him upon white horses)는 것은 말씀의 내면에 관한 이해 안에 있는 자들(those who are in the understanding of the Word as to its interiors)을 뜻합니다.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었다’(Clothed in fine linen, white and clean)는 것은 선에서 나온 진리 안에 있는 같은 사람들(the same persons in truth from good)을 뜻합니다. ‘그 옷과 그 넓적다리에 이름이 기록되었다’(Upon his vesture and upon his thigh a name written)는 것은 진리와 선, 그리고 그것들의 본질과 성질(truth and good, and their quality)을 뜻합니다. “his eyes, as a flame of fire,” signify the Divine truth, from the Divine good of his Divine love. “The many diadems upon his head,” signify all the goods and truths of faith. “Having a name written that no one knew but he himself,” signifies that the quality of the Word in the internal sense is seen by no one but himself, and those to whom he reveals it. “Clothed in a vesture dipped in blood,” signifies the Word in the letter, to which violence has been offered. “The armies in the heavens which followed him upon white horses,” signify those who are in the understanding of the Word as to its interiors. “Clothed in fine linen, white and clean,” signify the same persons in truth from good. “Upon his vesture and upon his thigh a name written” signifies truth and good, and their quality.
이러한 세부 사항들과 그 장의 앞뒤에 있는 내용들로부터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교회의 마지막 때 즈음에 말씀의 영적 곧 내적 의미가 열릴 것이 그 안에서 예언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도 또한 그곳(19:17-21)에서 묘사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언급된 말들의 의미가 그러하다는 것을 이 자리에서 다시 증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에서 상세히 설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 주님은 신적 진리이시기 때문에 말씀이심(the Lord is the Word because he is the Divine truth)이 밝혀져(n. 2533, 2803, 2884, 5272, 7835) 있습니다. 또한 말씀이 곧 신적 진리임(the Word is the Divine truth)도 설명되어(n. 4692, 5075, 9987) 있습니다. From these particulars, and from those which precede and follow in that chapter, it is evident, that therein is predicted that about the last time of the church the spiritual or internal sense of the Word would be opened; but what would come to pass at that time is also described there (verses 17–21). It is unnecessary to prove in this place that this is the signification of the words mentioned, as they are particularly explained in Arcana Coelestia, where it is shown that the Lord is the Word because he is the Divine truth (n. 2533, 2803, 2884, 5272, 7835). That the Word is the Divine truth (n. 4692, 5075, 9987).
17또 내가 보니 한 천사가 태양 안에 서서 공중에 나는 모든 새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와서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여18왕들의 살과 장군들의 살과 장사들의 살과 말들과 그것을 탄 자들의 살과 자유인들이나 종들이나 작은 자나 큰 자나 모든 자의 살을 먹으라 하더라19또 내가 보매 그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들의 군대들이 모여 그 말 탄 자와 그의 군대와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다가20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표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표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져지고21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들의 살로 배불리더라(계19:17-21)
주님께서 ‘의’(義, justice)이시기 때문에 ‘말을 타신 이가 의로 심판하고 싸우신다’(he who sat upon the horse in justice doth judge and make war)고 하신 것이며, 주님께서 ‘의’라 불리시는 이유는 그분께서 자신의 능력으로 인류를 구원하셨기 때문임도 설명되어(n. 1813, 2025–2027, 9715, 9809, 10019, 10152) 있습니다. 또한 ‘의’는 오직 주님께만 속한 공로(merit)임도 밝혀져(n. 9715, 9979) 있습니다. ‘그의 눈이 불꽃 같다’(his eyes, as a flame of fire)는 것이 신적 사랑의 신적 선으로부터 나오는 신적 진리(the Divine truth from the Divine good of the Divine love)를 뜻한다는 것은, ‘눈’(the eyes)이 이해와 신앙의 진리(the understanding and the truth of faith)를 상징하기(n. 2701, 4403–4421, 4523–4534, 6923, 9051, 10569) 때문이며, ‘불꽃’(a flame of fire)이 사랑의 선(the good of love)을 상징하기(n. 934, 4906, 5215, 6314, 6832) 때문입니다. That because the Lord is justice, therefore it is said that “he who sat upon the horse in justice doth judge and make war”; and that the Lord is called “justice” for this reason, because of his own power he has saved the human race (n. 1813, 2025–2027, 9715, 9809, 10019, 10152). And that “justice” is the merit which belongs to the Lord alone (n. 9715, 9979). That “his eyes, as a flame of fire,” signify the Divine truth from the Divine good of the Divine love is that “the eyes” signify the understanding and the truth of faith (n. 2701, 4403–4421, 4523–4534, 6923, 9051, 10569); and “a flame of fire” signifies the good of love (n. 934, 4906, 5215, 6314, 6832).
‘그 머리 위의 면류관들’(the diadems which were upon his head)이 신앙의 모든 선과 진리(all the goods and truths of faith)를 뜻한다는 것도 설명되어(n. 114, 3858, 6335, 6640, 9863, 9865, 9868, 9873, 9905) 있습니다. ‘자기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이름이 있다’(he hath a name written which no one knew but he himself)는 것이 말씀의 내적 의미 안에 있는 그 본질과 성질이 주님과, 주님께서 계시해 주시는 자들 외에는 아무도 볼 수 없음(the quality of the Word in the internal sense is seen by no one but himself, and those to whom he reveals it)을 뜻한다는 것은, ‘이름’(a name)이 어떤 것의 성질(the quality of a thing)을 상징하기(n. 144, 145, 1754, 1896, 2009, 2724, 3006, 3237, 3421, 6674, 9310) 때문입니다. ‘피에 적신 옷을 입었다’(clothed in a vesture dipped in blood)는 것이 문자적 말씀에 가해진 폭력(the Word in the letter to which violence has been offered)을 뜻한다는 것은, ‘옷’(a vesture)이 선을 입히는 진리(truth because it clothes good)를 상징하며(n. 1073, 2576, 5248, 5319, 5954, 9212, 9216, 9952, 10536), 특히 가장 바깥 진리, 곧 문자적 말씀(truth in the ultimates, thus the Word in the letter)을 뜻하기(n. 5248, 6918, 9158, 9212) 때문입니다. 또한 ‘피’(blood)가 거짓이 진리에 가하는 폭력(violence offered to truth by falsity)을 뜻하기(n. 374, 1005, 4735, 5476, 9127) 때문입니다. That “the diadems which were upon his head” signify all the goods and truths of faith (n. 114, 3858, 6335, 6640, 9863, 9865, 9868, 9873, 9905). That “he hath a name written which no one knew but he himself” signifies that the quality of the Word in the internal sense is seen by no one but himself, and those to whom he reveals it, is that “a name” signifies the quality of a thing (n. 144, 145, 1754, 1896, 2009, 2724, 3006, 3237, 3421, 6674, 9310). That “clothed in a vesture dipped in blood” signifies the Word in the letter to which violence has been offered is that “a vesture” signifies truth because it clothes good (n. 1073, 2576, 5248, 5319, 5954, 9212, 9216, 9952, 10536); especially truth in the ultimates, thus the Word in the letter (n. 5248, 6918, 9158, 9212); and because “blood” signifies violence offered to truth by falsity (n. 374, 1005, 4735, 5476, 9127).
‘하늘의 군대들이 백마를 타고 그를 따랐다’(the armies in heaven followed him upon white horses)는 것이 말씀의 내면에 관한 이해 안에 있는 자들(those who are in the understanding of the Word as to its interiors)을 뜻한다는 것은, ‘군대들’(armies)이 하늘과 교회의 선과 진리 안에 있는 자들(those who are in the truths and goods of heaven and the church)을 상징하기(n. 3448, 7236, 7988, 8019) 때문입니다. ‘말’(a horse)이 이해(the understanding)를 상징한다는(n. 3217, 5321, 6125, 6400, 6531, 6534, 7024, 8146, 8318) 것도 설명되어 있으며, ‘흰색’(white)이 하늘의 빛 안에 있는 진리, 곧 내적 진리(truth which is in the light of heaven, consequently interior truth)를 뜻한다는 것도 설명되어(n. 3301, 3993, 4007, 5319) 있습니다.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었다’(clothed in fine linen white and clean)는 것이 같은 사람들이 선에서 나온 진리 안에 있음(the same persons in truth from good)을 뜻한다는 것은, ‘세마포’(fine linen) 또는 ‘아마포’(linen)가 천적 기원에서 나온 진리, 곧 선에서 나온 진리(truth from a celestial origin, which is truth from good)를 상징하기(n. 5319, 9469) 때문입니다. That “the armies in heaven followed him upon white horses” signify those who are in the understanding of the Word as to its interiors is that “armies” signify those who are in the truths and goods of heaven and the church (n. 3448, 7236, 7988, 8019). And “a horse” signifies the understanding (n. 3217, 5321, 6125, 6400, 6531, 6534, 7024, 8146, 8318). And “white” signifies truth which is in the light of heaven, consequently interior truth (n. 3301, 3993, 4007, 5319). That “clothed in fine linen white and clean” signifies the same persons in truth from good is that “fine linen,” or “linen,” signifies truth from a celestial origin, which is truth from good (n. 5319, 9469).
‘그 옷과 그 넓적다리에 이름이 기록되었다’(a name written upon the vesture and upon the thigh)는 것이 진리와 선, 그리고 그것들의 성질(truth and good, and their quality)을 뜻한다는 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옷’(a vesture)이 진리(truth)를, ‘이름’(a name)이 성질(quality)을 상징하며, ‘넓적다리’(the thigh)가 사랑의 선(the good of love)을 상징하기(n. 3021, 4277, 4280, 9961, 10485) 때문입니다. ‘만왕의 왕, 만주의 주’(King of kings, and Lord of lords)는 주님을 신적 진리와 신적 선에 관하여 가리키는(the Lord as to the Divine truth and as to the Divine good) 표현입니다. 주님은 신적 진리로 말미암아(from the Divine truth) ‘왕’(King)이라 불리시며(n. 3009, 5068, 6148), 신적 선으로 말미암아(from the Divine good) ‘주’(Lord)라 불리십니다(n. 4973, 9167, 9194). 그러므로 말씀의 영적 곧 내적 의미 안에 있는 말씀의 성질(the quality of the Word)이 어떠한지, 그리고 그 안에 영적이지 않은 표현이 하나도 없으며, 모든 표현이 곧 하늘과 교회에 속한 어떤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That “a name written upon the vesture and upon the thigh” signifies truth and good, and their quality, is that “a vesture” signifies truth, and “a name” quality, as observed above, and “the thigh” signifies the good of love (n. 3021, 4277, 4280, 9961, 10485). “King of kings, and Lord of lords,” is the Lord as to the Divine truth and as to the Divine good; the Lord is called “King” from the Divine truth (n. 3009, 5068, 6148). And he is called “Lord” from the Divine good (n. 4973, 9167, 9194). Hence it appears what is the quality of the Word in its spiritual or internal sense, and that there is no expression therein which does not signify something spiritual, that is, something of heaven and the church.
해설
이 긴 본문은 단순히 상징 하나하나를 풀이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영적 의미가 열리는 사건’이 교회의 역사 속에서 어떤 위치를 가지는지를 선언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요한계시록 19장의 환상이 곧 ‘교회의 마지막 때’와 직결되어 있음을 밝힙니다. 곧 외적 문자에 머물러 있던 교회가 그 생명을 상실해 갈 때, 주님께서 친히 말씀의 내적 의미를 여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늘이 열렸다’는 것은 단순한 환시가 아니라, 계시의 질서가 바뀌는 순간을 뜻합니다. 이제 하늘에서 보이던 것이 땅에서도 보이도록 허락되는 시점, 곧 계시의 새 단계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굳이 여기서 다시 증명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에서 충분히 증명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단순한 반복 회피가 아니라, 이 계시가 임의적 상상이나 신비주의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는 태도입니다. 모든 상징은 이미 창세기와 출애굽기 해설 속에서 일관되게 설명된 동일한 법칙에 따라 해석됩니다. ‘주님은 신적 진리이시므로 말씀이시다’, ‘말씀은 곧 신적 진리다’, ‘의는 주님께만 속한 공로다’라는 일련의 교리는 서로 분리된 개념이 아니라 하나의 중심 진리, 곧 주님 중심의 계시관으로 연결됩니다.
특별히 ‘의로 심판하고 싸우신다’는 구절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전환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의’는 인간의 도덕적 행위가 아니라, 주님께만 속한 구속의 공로를 뜻합니다. 주님은 자신의 능력으로 인류를 구원하셨기 때문에 ‘의’라 불리십니다. 따라서 이 싸움은 인간의 싸움이 아니라, 신적 진리가 거짓과 맞서는 싸움입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가 열리는 것은 곧 이 신적 전쟁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교회의 마지막 때란 단순한 시간적 종말이 아니라, 진리가 가려지고 왜곡된 상태가 극에 달한 시점을 뜻합니다.
‘눈은 불꽃 같다’는 표현에서 스베덴보리는 이해와 사랑의 결합을 보여 줍니다. 눈은 이해, 불꽃은 사랑입니다. 진리는 사랑에서 나올 때만 살아 있습니다. 사랑 없는 진리는 차갑고, 진리 없는 사랑은 맹목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내적 의미란 단순한 교리 체계가 아니라, 신적 사랑에서 발하는 신적 진리의 빛입니다. 이것이 하늘의 빛이며, ‘흰색’이 상징하는 것입니다.
‘피에 적신 옷’은 교회 역사 전체를 압축하는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문자적 말씀은 거룩하지만, 인간의 거짓 해석과 권력적 오용으로 인해 상처 입었습니다. 교리 논쟁, 문자주의, 왜곡된 교권은 말씀의 옷을 피로 물들였습니다. 그러나 그 옷을 입고 계신 분은 여전히 주님이십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말씀은 왜곡되었으나, 파괴되지 않았습니다. 내적 의미의 개방은 문자 폐기가 아니라 문자 회복입니다.
‘하늘의 군대’가 백마를 타고 따른다는 것은, 내적 의미가 열릴 때 그것을 이해하는 자들이 생겨난다는 뜻입니다. 군대는 진리와 선 안에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말은 이해입니다. 흰색은 하늘의 빛입니다. 곧 이해된 진리가 집단적으로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는 새 교회의 씨앗을 암시합니다. 개인적 깨달음이 아니라, 공동체적 차원의 새로운 이해입니다.
‘세마포’는 선에서 나온 진리를 뜻합니다. 진리가 선에서 나오지 않으면 교만과 분열을 낳지만, 선에서 나오면 순수하고 깨끗합니다. 그러므로 내적 의미를 이해하는 자의 표지는 지적 우월감이 아니라, 선에서 나온 진리의 삶입니다. 이는 매우 목회적인 기준입니다. 누가 내적 의미를 이해하는가를 판별하는 기준은 지식의 양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온 진리의 상태입니다.
‘옷과 넓적다리에 기록된 이름’은 진리와 선, 그리고 그 본질을 뜻합니다. 넓적다리는 사랑의 선을 상징합니다. 진리와 선이 결합되어 있을 때, 주님은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드러납니다. 왕은 신적 진리, 주는 신적 선입니다. 이것이 말씀의 본질입니다. 말씀은 단지 진리 모음이 아니라, 사랑과 결합된 진리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본문은 단 하나의 표현도 영적 의미 없이 존재하지 않음을 단정합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는 상징 몇 개의 조합이 아니라, 전체가 하나의 유기체처럼 연결된 하늘의 구조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문자로만 읽는 것은 껍질만 보는 것이고, 내적 의미가 열릴 때 비로소 그 생명과 질서가 보입니다. 이 선언은 단순한 해석 방법론이 아니라, 교회의 새 시대를 여는 신학적 선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