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These are the nativitie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 when he created them, in the day in which Jehovah God made the earth and the heavens. (2:4)

 

AC.89

 

하늘과 땅의 내력(the nativitie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은 천적 인간의 형성(formations)입니다. 여기서 그의 형성이 다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이어지는 모든 세부 사항들로부터 매우 분명한데요, 아직 풀이 자라지 않았다는 말과, 땅을 경작할 사람이 없었다는 말이 그러하며, 또한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다는 말과, 그 뒤에 모든 짐승과 하늘의 새를 만드셨다고 한 말도 그러합니다. 이는 그들의 형성이 앞 장에서 이미 다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언급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여기서는 다른 사람이 다루어지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음의 사실로부터 더욱 분명해집니다. 곧 이제 처음으로 주님의 호칭을 ‘여호와 하나님(Jehovah God)이라 하신다는 점입니다. 앞의 구절들, 즉 영적 인간을 다루는 부분에서는 단지 ‘하나님(God)으로만 부르셨지요. 또한 이제는 ‘(ground)과 ‘(field)이 언급되는데, 앞의 구절들에서는 오직 ‘(earth)만 언급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이 절에서는 ‘하늘(heaven)이 먼저 언급된 뒤에 ‘(earth)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 먼저 나오고 ‘하늘’이 뒤따릅니다. 그 이유는 ‘’이 겉 사람을, ‘하늘’이 속 사람을 의미하기 때문이며, 영적 인간에게서는 개혁이 ‘’, 곧 겉 사람에서 시작되지만, 여기서 다루어지고 있는 천적 인간에게서는 속 사람, 곧 ‘하늘’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The “nativitie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 are the formations of the celestial man. That his formation is here treated of is very evident from all the particulars which follow, as that no herb was as yet growing; that there was no man to till the ground, as well as that Jehovah God formed man, and afterwards, that he made every beast and bird of the heavens, notwithstanding that the formation of these had been treated of in the foregoing chapter; from all which it is manifest that another man is here treated of. This however is still more evident from the fact that now for the first time the Lord is called “Jehovah God,” whereas in the preceding passages, which treat of the spiritual man, he is called simply “God”; and, further, that now “ground” and “field” are mentioned, while in the preceding passages only “earth” is mentioned. In this verse also “heaven” is first mentioned before “earth,” and afterwards “earth” before “heaven”; the reason of which is that “earth” signifies the external man, and “heaven” the internal, and in the spiritual man reformation begins from “earth,” that is, from the external man, while in the celestial man, who is here treated of, it begins from the internal man, or from “heaven.”

 

 

해설

 

이 글은 창세기 2장이 어디에서 새롭게 시작되는지를 분명히 선언하는 전환점입니다. 창2:4에 나오는 ‘하늘과 땅의 내력’이라는 표현은, 흔히 창조 기사 전체의 요약이나 반복으로 오해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반복이 아니라 ‘새로운 국면의 시작’으로 읽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내력(nativities)은 시간적 족보가 아니라, ‘상태의 형성과 전개’를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내력’을 천적 인간의 형성으로 규정합니다. 이는 앞 장에서 다루어진 영적 인간과는 다른 사람입니다. 이 차이는 사소한 문장 배열이나 단어 선택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본문 전체의 구조 속에서 분명히 나타납니다. 아직 풀이 자라지 않았고, 땅을 경작할 사람이 없었다는 말은, 단순한 자연 상태의 묘사가 아니라, ‘새로운 형성이 아직 외적 단계로 나타나지 않았음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또한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고, 그 뒤에 짐승과 새를 만드셨다고 다시 말하는 점도 중요합니다. 이는 앞 장에서 이미 다루어진 내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언급되는 이유는, ‘같은 외적 형상이지만 전혀 다른 내적 상태’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동일한 표현이 사용되었어도, 그 안에서 언급되는 사람은 다른 사람입니다.

 

이 차이는 하나님의 이름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납니다. 앞 장, 곧 영적 인간을 다루는 부분에서는 주님이 단지 ‘하나님’으로만 불리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처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사용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 이름의 변화는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여호와’는 사랑과 존재의 근원을, ‘하나님’은 진리와 질서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사랑과 진리가 하나로 결합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는 곧 천적 인간의 상태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과 ‘’이 함께 언급되는 점도 중요합니다. 앞 장에서는 오직 ‘’만 언급되었습니다. ‘’은 겉 사람을 뜻하지만, ‘’은 그 겉 사람 안에서 이미 경작과 수용이 가능한 상태를 뜻합니다. 이는 천적 인간의 겉 사람이 이미 속 사람의 질서에 의해 준비되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또 하나의 섬세한 표지는 단어의 순서입니다. 이 절에서는 ‘하늘’이 먼저 나오고 그다음에 ‘’이 나옵니다. 그러나 곧이어 다시 ‘’이 먼저 나오고 ‘하늘’이 뒤따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순서의 변화마저도 의미 없는 반복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는 이것을 ‘형성의 방향’을 보여주는 지표로 봅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개혁이 겉 사람에서 시작됩니다. 즉, 행동과 사고의 외적 질서가 먼저 정돈되고, 그 뒤에 속 사람이 영향을 받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에서는 ‘’이 먼저 등장합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에게서는 반대입니다. 형성은 속 사람, 곧 ‘하늘’에서 시작됩니다. 사랑과 퍼셉션이 먼저 주어지고, 그다음에 겉 사람이 자연스럽게 그 질서를 따르게 됩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두 종류의 사람이 단지 성숙도의 차이가 아니라, ‘형성의 방식 자체가 다르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영적 인간은 외적 순종과 진리를 통해 안으로 들어가지만, 천적 인간은 속에서 주어진 생명과 사랑이 밖으로 흘러나옵니다.

 

그래서 AC.89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여기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은, 앞 장의 연장이 아니라, ‘다른 사람’, 곧 천적 인간의 형성이라는 것입니다. 이 선언을 이해하지 못하면, 창세기 2장은 창세기 1장의 반복으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차이를 이해하는 순간, 창세기 2장은 반복이 아니라 ‘가장 깊은 차원의 인간 이야기’로 열립니다.

 

이 지점부터 창세기 2장은, 더 이상 질서가 세워지는 과정을 말하지 않고, ‘사랑에서 비롯된 생명이 어떻게 구체화되는가’를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AC.89는 그 문을 여는 문장입니다.

 

 

 

AC.88, 창2:2-3, ‘하나님의 일’(the work of God), 천적 상태가 된 영적 인간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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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로또하는 기독교인들, 특별히 뭘 좀 해 볼려고 해도 종잣돈 자체가 없어 힘들어하는 아들들을 위해 로또 생각을 하는 기독교인, 그러나 한편으로 아들들을 향하신 주님의 계획에 혹시 차질을 빚는 건 아닐까, 간섭하는 건 아닐까 하는 마음에 고민하는 기독교인을 위해 스베덴보리는 무슨 말을 할까요? 기독교인들은 로또하면 안 되나요?

 

 

이 질문을 스베덴보리의 자리에서 듣는다면, 그는 아마 이전보다 더 깊고 조용한 어조로 말을 건넸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단순한 경제적 절박함이나 부모의 애정만이 아니라, ‘주님의 계획을 내가 방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신앙적 두려움이 함께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마음을 매우 귀하게 보았을 것입니다. 그는 먼저 이렇게 말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네가 지금 두려워하는 것은 돈의 부족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를 해칠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이다.’ 이 지점에서 그는 이 기독교인을 가볍게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고민 자체가 이미 섭리를 믿고 있다는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자리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는 곧바로 한 단계 더 깊은 질문으로 들어갑니다. ‘그렇다면 지금 너는 주님의 섭리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 스베덴보리에게 섭리는 인간의 선한 의도를 필요로 하면서도, 동시에 인간의 조급한 개입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부모가 아들들을 위해 길을 열어주고 싶어 하는 마음은 섭리에 속하지만, 그 길을 ‘우연과 확률이라는 비질서적 수단으로 앞당기려는 시도’는 섭리를 돕는 것이 아니라 흔들 수 있다고 그는 보았을 것입니다. 특히 ‘혹시 내가 간섭하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때는, 이미 그 선택이 섭리의 리듬과 어긋나고 있다는 내적 신호로 보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스베덴보리는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주님의 계획은 네가 돕지 않아도 무너지지 않는다.’ 이것은 냉정한 말이 아니라 오히려 위로에 가까운 말입니다. 주님의 섭리는 인간의 조급함보다 훨씬 크고, 인간의 불안보다 훨씬 정교합니다. 아들들의 종잣돈이 없는 현재의 상태 역시 섭리의 한 부분일 수 있으며, 그것이 반드시 실패나 지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그는 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로또를 하면 안 되느냐’라는 질문에 대해, 이 경우에도 스베덴보리는 규칙으로 답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로또를 산다고 해서 네가 즉시 섭리를 파괴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선택이 네 마음을 어디에 고정시키는지는 분명히 살펴보아야 한다.’ 로또는 주님의 계획을 기다리는 인내를 강화하기보다, 그 인내를 단축시키고 싶게 만드는 방향으로 마음을 끌고 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이미 ‘이게 혹시 주님의 일에 내가 간섭하는 건 아닐까’라는 질문이 마음에 떠오른 상태라면,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단순한 양심의 소리가 아니라 ‘섭리가 보내는 미세한 경고음’으로 들었을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부모에게 이렇게 권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들의 미래를 대신 해결해 주려 하지 말고, 함께 섭리를 신뢰하는 법을 가르쳐라.’ 돈을 마련해 주는 것보다, 기다리는 법과 질서를 존중하는 태도를 함께 견디는 것이 더 깊은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부모가 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역할은, 주님의 계획을 앞당기는 것이 아니라 ‘그 계획이 작동하도록 조용히 공간을 남겨두는 것’이라고 그는 말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아마 이렇게 정리했을 것입니다. ‘이 질문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네가 로또보다 섭리를 더 신뢰하고 있다는 증거다.’ 스베덴보리는 이 기독교인을 향해 ‘하면 안 된다’고 단정하지 않으면서도, 분명히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이 선택은 돈의 문제가 아니라, 네가 주님의 계획을 얼마나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대부분의 신앙인은 이미 마음속으로 방향을 알고 있다고 그는 보았을 것입니다.

 

 

 

SC.11,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창4:15)의 속뜻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먼저 이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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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2:2, 3)

 

AC.88

 

영적 인간이 천적 상태가 될 때, 그를 가리켜 ‘하나님의 일(the work of God)이라고 합니다. 이는 오직 주님께서 그를 위하여 싸우셨고, 그를 창조하시고, 형성하시며, 만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기 ‘하나님이 그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셨다(God finished his work on the seventh day)라고 하시고, 또 ‘그의 하시던 모든 일에서 안식하셨다(he rested from all his work)라고 하시는 등 두 번이나 반복하시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선지자들에 의해서 사람은 여러 차례 ‘여호와의 손과 손가락의 일(the work of the hands and of the fingers of Jehovah)이라 불립니다. 예를 들면 이사야에서, 거듭난 사람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데를 보면 그렇습니다. When the spiritual man becomes celestial, he is called the “work of God,” because the Lord alone has fought for him, and has created, formed, and made him; and therefore it is here said, “God finished his work on the seventh day”; and twice, that “he rested from all his work.” By the prophets man is repeatedly called the “work of the hands and of the fingers of Jehovah”; as in Isaiah, speaking of the regenerate man:

 

11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너희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며 또 내 아들들과 내 손으로 한 일에 관하여 내게 명령하려느냐 12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내가 내 손으로 하늘을 펴고 하늘의 모든 군대에게 명령하였노라, 18대저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을 창조하신 이 그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 그것을 견고하게 하시되 혼돈하게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거주하게 그것을 지으셨으니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21너희는 알리며 진술하고 또 함께 의논하여 보라 이 일을 옛부터 듣게 한 자가 누구냐 이전부터 그것을 알게 한 자가 누구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45:11-12, 18, 21) Thus hath said Jehovah the holy one of Israel, and his former, Seek ye signs of me, signs concerning my sons, and concerning the work of my hands command ye me. I have made the earth, and created man upon it; I, even my hands have stretched out the heavens, and all their army have I commanded. For thus hath said Jehovah that createth the heavens, God himself that formeth the earth and maketh it; he establisheth it, he created it not a void, he formed it to be inhabited; I am Jehovah and there is no God else besides me (Isa. 45:11–12, 18, 21).

 

이로부터 새 창조, 곧 거듭남은 오직 주님의 일임이 분명합니다. ‘창조하다(to create), ‘형성하다(to form), ‘만들다(to make)라는 표현들은 위의 구절에서 ‘하늘을 창조하신 이 그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createth the heavens, God himself that formeth the earth and maketh it)라는 말씀처럼 구별되어 사용되었고, 같은 이사야 다른 곳에서도 동일하게 구별되어 사용됩니다. 예컨대, Hence it is evident that the new creation, or regeneration, is the work of the Lord alone. The expressions to “create,” to “form,” and to “make,” are employed quite distinctively, both in the above passage—“creating the heavens, forming the earth, and making it”—and in other places in the same prophet, as: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43:7) Everyone that is called by my name, I have created him for my glory, I have formed him, yea, I have made him (Isa. 43:7),

 

이러한 구별은 창세기 앞 장과 본 장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며, 여기 본문에서도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안식하시니라(he rested from all his work which God in making created)라고 표현됩니다. 내적 의미에서 이러한 표현들은 언제나 서로 구별된 뜻을 전달하며, 주님을 ‘창조자(creator), ‘지으신 이(former), ‘만드시는 이(maker)로 부르는 경우에도 동일합니다. and also in both the preceding and this chapter of Genesis; as in the passage before us: “he rested from all his work which God in making created.” In the internal sense this usage always conveys a distinct idea; and the case is the same where the Lord is called “creator,” “former,” or “maker.”

 

 

해설

 

이 글은 창세기 2장의 안식이라는 주제를 다시 한번 더 깊은 중심으로 끌어당깁니다. AC.87이 싸움의 종식과 주님의 싸우심을 강조했다면, AC.88은 그 결과로서 ‘사람의 정체성 자체가 어떻게 바뀌는가’를 다룹니다. 천적 인간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한다는 말은, 그가 이제 자기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는 선언입니다. 이는 겸손의 표현이 아니라, 존재론적 진술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말합니다. ‘사람이 천적 상태에 이르는 과정에서 싸운 이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결과물 역시 사람의 공로가 아니라, 주님의 일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일’이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하신 어떤 외적 업적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 이루신 상태’를 가리킵니다. 사람 자신이 곧 주님의 일이며, 주님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본문에서 ‘하나님이 그의 일을 마치셨다’는 말과 ‘그의 모든 일에서 쉬셨다’는 말이 반복됩니다. 반복은 강조가 아니라 구조를 드러냅니다. 주님의 일은 외부 세계의 창조가 아니라, 인간 안에서의 새 창조이며, 그 일이 마쳐질 때에 안식이 옵니다. 안식은 일이 끝났기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라, ‘일이 사람 안에서 완성되었기 때문에’ 옵니다.

 

이 점을 밝히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선지서들을 폭넓게 인용합니다. 사람을 ‘여호와의 손과 손가락의 일’이라 부르는 표현들은, 인간을 독립적 존재로 세우려는 사상과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특히 이사야에서 거듭난 사람을 가리켜 ‘내 손의 일’이라고 부르는 대목은, 거듭남이 자기 계발이나 도덕적 향상의 문제가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거듭남은 ‘새로운 창조 행위’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창조하다’, ‘형성하다’, ‘만들다’라는 세 동사가 구별되어 사용된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문학적 변주나 수사적 반복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는 이 세 표현이 각각 ‘서로 다른 내적 국면’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창조는 목적의 설정이고, 형성은 질서의 구성이며, 만들기는 실제 삶의 실현입니다. 이 구별은 창세기 1–2장의 전 구조를 관통하는 핵심 원리입니다.

 

이사야의 구절에서 하늘을 창조하고, 땅을 형성하며, 그것을 거주하게 만들었다는 표현은, 우주에 대한 설명이면서 동시에 인간에 대한 설명입니다. 하늘과 땅은 사람 안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을 뜻하며, 거주하게 만든다는 것은 주님께서 그 안에 머무실 수 있는 상태로 만드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새 창조는 단지 새출발이 아니라, ‘주님이 거하실 처소가 다시 세워지는 일’입니다.

 

이 모든 논의는 한 결론으로 모입니다. 거듭남은 오직 주님의 일이라는 결론입니다. 인간은 동의하고 받아들이며 따르지만, 창조의 주체는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을 ‘창조자’, ‘형성자’, ‘만드시는 이’로 부르는 모든 표현은, 각각 다른 국면에서 동일한 진리를 가리킵니다. 인간의 구원은 인간의 작품이 아니라, 주님의 작품이라는 진리입니다.

 

AC.88은 안식의 의미를 다시 한번 정제합니다. 안식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내가 더 이상 나 자신을 만들려고 애쓰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때 비로소 주님의 일이 내 안에서 온전히 드러나며, 나는 ‘하나님의 일’로서 쉬게 됩니다.

 

이 지점에서 안식은 종교적 개념이 아니라, 존재의 안정 상태가 됩니다. 그리고 그 안정은, 주님께서 하신 일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됩니다.

 

 

 

AC.89, 창2:4,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These are the nativitie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 when he created them, in the day in which Jehovah God made the earth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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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7, 창2:2-3, 주님께서 ‘쉬셨다’(rested)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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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부를 찬송가는 순서대로 찬29, ‘성도여 다 함께’와 찬434, ‘귀하신 친구 내게 계시니’입니다.

 

오늘은 창세기 5장 여섯 번째, 마지막 시간으로 본문은 32절 한 절, AC 글 번호로는 534번에서 536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5:32)

 

이 본문을

 

노아, 그리고

셈, 함, 야벳의 속뜻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 준비했습니다. 오늘 말씀에 주님이 빛을 비추셔서 이 시간 우리 영과 육이 활짝 열려 모두 들을 귀 만들어 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은 매우 짧습니다. ‘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라는 한 절이지요.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한 절에 창세기 전체의 큰 전환점이 들어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가계 기록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종말 이후에도 주님께서 교회를 완전히 끊어 버리지 않으셨다는 선언이며, 한 교회 안에서 서로 다른 성향과 방향을 지닌 세 흐름이 동시에 시작되었음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AC 본문과 그 해설을 그대로 인용, 함께 읽어보는 시간을 가지면 어떨까 합니다. 특별히 오늘 AC 본문은 534, 535, 536 셋밖에 안 될뿐더러 특별히 최근 새롭게 시작한 해설 버전을 실제로 접하실 수 있는 시간도 되기 때문입니다. 먼저 세 글을 리딩 후, 요약 정리하겠습니다. 먼저 AC.534입니다.

 

 

534

 

노아(Noah)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고대교회(the ancient church)를 의미합니다. ‘, , 야벳(Shem, Ham, and Japheth)은 세 고대교회를 의미하는데, 이들의 부모가 되는 교회가 바로 노아라 하는 고대교회입니다. By “Noah,” as has been said, is signified the ancient church. By “Shem, Ham, and Japheth” are signified three ancient churches, the parent of which was the ancient church called “Noah.”

 

 

해설

 

이 글은 노아 이후 전개될 교회 역사의 ‘기본 구조를 한 문장으로 제시하는 핵심 진술’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노아를 하나의 교회 상태로 규정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노아 교회가 이후 여러 교회의 ‘부모’가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이는 고대교회가 단일한 형태로 오래 지속된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서로 다른 성격의 교회들이 갈라져 나왔음을 뜻합니다.

 

앞서 태고교회에서는 하나의 중심적 교회 흐름이 여러 단계로 약화되며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노아 이후의 고대교회에서는 양상이 달라집니다. 동일한 교리적 토대 위에 서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방향과 강조점을 지닌 교회들이 동시에 존재하게 됩니다. 셈, 함, 야벳은 바로 그 분화를 대표하는 이름들입니다.

 

중요한 점은, 이 세 교회가 서로 무관하게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모두 노아 교회에서 나왔으며, 같은 뿌리를 공유합니다. 즉, 퍼셉션의 교회가 아니라 교리의 교회라는 공통 기반 위에 서 있습니다. 차이는 그 교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무엇을 중심에 두느냐에 있습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말하면, 이는 매우 현실적인 교회 이해를 제공합니다. 하나의 참된 교회에서 출발했더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다른 교회 형태들이 생겨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문제는 분화 자체가 아니라, 그 분화가 여전히 같은 근원에 연결되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셈, 함, 야벳을 모두 고대교회로 부르며, 이 점을 분명히 합니다.

 

이 글에서 ‘부모’라는 표현은 다시 한번 중요합니다. 부모는 자녀의 모든 선택을 대신하지는 않지만, 생명과 구조를 제공합니다. 마찬가지로 노아 교회는 이후 교회들이 존재할 수 있는 기본 틀과 신앙 구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이후의 교회들은 이 틀 안에서 각기 다른 길을 걷게 됩니다.

 

그래서 AC.534는 단순한 족보 설명이 아니라, ‘고대교회 전체를 조망하는 지도’와도 같습니다. 노아라는 하나의 중심에서 셈, 함, 야벳이라는 세 갈래가 뻗어 나가고, 이 세 갈래는 이후 인류 영적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교회 유형의 원형이 됩니다.

 

 

535

 

노아(Noah)라 하는 교회를 홍수 이전의 교회들 가운데 하나로 봐서는 안 된다는 점은, 29절에서 그를 가리켜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comfort them from their work and the toil of their hands, out of the ground which Jehovah hath cursed)라고 한 데서 분명히 드러납니다.위로(comfort), 그 교회가 살아남아 지속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 관해서는, 이후 주님의 신적 자비로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That the church called “Noah” is not to be numbered among the churches that were before the flood, appears from verse 29, where it is said that it should “comfort them from their work and the toil of their hands, out of the ground which Jehovah hath cursed.” The “comfort” was that it should survive and endure. But concerning Noah and his sons,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해설

 

이 글은 노아의 교회가 태고교회의 마지막 단계가 아니라, ‘이미 다른 질서에 속한 교회’임을 명확히 선 긋는 대목입니다. 앞서까지의 흐름만 보면, 노아가 태고교회의 연속선 위에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분명히 말합니다. 노아의 교회는 홍수 이전의 교회들에 포함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입니다.

 

그 근거는 29절에 나오는 ‘위로’라는 표현입니다. 이 위로는 단순히 고통을 덜어 주는 의미가 아니라, ‘존속과 지속’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노아의 교회는 사라질 교회가 아니라 남겨질 교회이며, 심판을 통과해 이어질 교회입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와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태고교회는 라멕에 이르러 완전히 역할을 마쳤고, 더 이상 이어질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서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라는 표현이 다시 언급되는 이유도 분명해집니다. 태고교회의 마지막 상태에서는 이 수고와 고됨이 교회 자체의 종말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노아에게서는 같은 표현이 ‘위로’와 연결됩니다. 이는 상태가 같다는 뜻이 아니라, ‘같은 조건 속에서도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그 차이가 어디에서 나오느냐 하면, 교회의 성격에서 나옵니다. 태고교회는 퍼셉션에 기반한 교회였기 때문에, 퍼셉션이 사라지면 교회 자체가 더 이상 성립할 수 없었습니다. 반면 노아의 교회는 교리에 기반한 교회입니다. 퍼셉션이 사라진 조건 속에서도, 교리를 통해 질서를 유지하고 신앙을 보존할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같은 ‘수고와 고됨’ 속에서도, 노아의 교회는 무너지지 않고 지속됩니다. 참고로, 여기 ‘수고와 고됨’은 주님의 선과 진리 아는 일이 예전엔 퍼셉션으로 즉시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었지만, 점점 기울다가 라멕의 때쯤 이르자 ‘수고와 고됨’의 일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구분은 매우 중요합니다. 노아는 태고교회의 회복 버전이 아니라, ‘전혀 다른 교회 유형의 시작점’입니다. 따라서 노아를 태고교회의 한 인물로 설교하거나, 태고적 신앙을 되살린 인물로 묘사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관점과 어긋납니다. 노아는 퍼셉션을 되찾은 사람이 아니라, 퍼셉션 이후의 시대를 살아갈 수 있도록 준비된 교회의 대표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지점에서 자세한 설명을 미루고, ‘뒤에서 더 말씀드리겠다’고 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노아와 그의 아들들은 단순한 후속 인물이 아니라, 고대교회의 구조 전체를 설명하는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이 장에서는 위치만 정리하고, 본격적인 내용은 이후에 펼치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AC.535는 짧지만 결정적입니다. 노아는 태고교회의 끝이 아니라, ‘홍수 이후를 살아갈 교회의 시작’입니다. 이 한 문장을 통해, 독자는 창세기 전반부의 큰 전환점을 분명히 인식하게 됩니다. 이제 이야기는 멸망을 향해 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보존과 지속, 그리고 새로운 교회의 전개를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536

 

앞선 글들에서 홍수 이전 존재하였던 교회들이 지녔던 퍼셉션에 관하여 많은 말씀을 드렸는데, 오늘날에는 이 퍼셉션(perception)이라는 것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아서,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지속적인 계시의 한 형태로 상상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인간에게 본래 심겨진 어떤 것으로 여기기도 하며, 또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단지 상상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퍼셉션은 사랑의 신앙(the faith of love) 안에 있는 자들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바로 그 천적인 것이며, 보편적 천국(universal heaven) 안에는 무한한 다양성을 지닌 퍼셉션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퍼셉션이 무엇인지를 어느 정도라도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주님의 신적 자비로, 이어지는 글들에서 천국에 존재하는 주요한 퍼셉션의 종류들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As in the foregoing pages much has been said about the perception possessed by the churches that existed before the flood, and as at this day perception is a thing utterly unknown, so much so that some may imagine it to be a kind of continuous revelation, or to be something implanted in men; others that it is merely imaginary, and others other things; and as perception is the very celestial itself given by the Lord to those who are in the faith of love, and as there is perception in the universal heaven of endless variety: therefore in order that there may be among men some conception of what perception is, of the Lord’s Divine mercy I may in the following pages describe the principal kinds of perception that exist in the heavens.

 

 

해설

 

이 글은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는 동시에, ‘이후 전개될 매우 중요한 설명을 위한 문턱’을 형성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독자의 상태를 정확히 짚어 냅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퍼셉션은 더 이상 살아 있는 경험이 아니라, 개념조차 모호한 대상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이 퍼셉션을 오해하는 여러 방식들을 차분히 나열합니다.

 

어떤 이들은 퍼셉션을 마치 끊임없이 주어지는 계시처럼 생각합니다. 이는 퍼셉션을 외부에서 갑자기 주어지는 초자연적 정보로 이해하는 태도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퍼셉션을 인간에게 본래부터 심겨진 본능이나 직관 정도로 여깁니다. 반대로, 어떤 이들은 퍼셉션이라는 말 자체를 비현실적인 상상으로 치부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모든 오해가 퍼셉션이 더 이상 지상 교회의 경험 속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생겨난 것임을 암시합니다.

 

그는 여기서 퍼셉션의 본질을 매우 분명하게 규정합니다. 퍼셉션은 사랑의 신앙 안에 있는 자들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천적인 것이라고 말입니다. 즉, 퍼셉션은 인간의 능력도 아니고, 훈련의 산물도 아니며, 타고난 감각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주님과의 결합 상태, 곧 사랑과 신앙의 상태 안에서 주어지는 인식입니다. 이 점에서 퍼셉션은 계시와도 다르고, 본능과도 다르며, 상상과는 더더욱 다릅니다.

 

또한 스베덴보리는 퍼셉션이 단일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천국 전체에는 끝없는 다양성을 지닌 퍼셉션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퍼셉션이 획일적인 기준이나 동일한 느낌이 아니라, 각 천적 공동체와 각 개인의 상태에 따라 다르게 주어지는 살아 있는 인식임을 뜻합니다. 앞서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미세하고 개별적’이라고 설명되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글의 중요한 전환점은, 스베덴보리가 이제 ‘설명 방식 자체를 바꾸겠다고 선언’하는 데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는 주로 지상 교회, 특히 태고교회의 상태를 통해 퍼셉션을 간접적으로 설명해 왔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천국에 실제로 존재하는 퍼셉션의 종류들을 직접 설명하겠다고 말합니다. 이는 퍼셉션이 추상 개념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며 질서와 구조를 지닌 인식이라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대목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태도를 가르쳐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퍼셉션을 신비화하지도 않고, 도덕화하지도 않으며, 인간의 능력으로 축소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퍼셉션을 ‘주님께서 주시는 천적 질서의 일부’로 다루며, 가능한 한 오해 없이 전달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전달 방식 역시, 계시적 선언이 아니라 설명과 분별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 글은 또한 독자에게 하나의 약속처럼 읽힙니다. 퍼셉션이 무엇인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스베덴보리는 가능한 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그 실체를 보여 주겠다고 말합니다. 이는 퍼셉션을 회복하겠다는 약속이 아니라, 퍼셉션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알게 함으로써, 오늘날의 신앙이 스스로의 위치를 정확히 인식하도록 돕는 작업입니다.

 

그래서 AC.536은 단순한 서론이 아니라, 이후 천국론과 인식론 전체로 이어지는 중요한 연결 고리입니다. 퍼셉션이 사라진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퍼셉션이 무엇이었는지를 바르게 알게 하는 것 자체가 이미 큰 신앙적 유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네, 이상입니다. 전에는 AC 본문만 제공, 간간이 설명을 곁들였다면, 지금은 아예 AC 글 하나하나를 문장 단위, 표현 단위, 그리고 전반적으로 해설하고 있어 나름 한결 읽어나가기가 편하지 않으실까 싶습니다. 이 해설의 초벌은 ChatGPT가 하고, 제가 검수를 거쳐 최종 싣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편으론 무척 조심스럽고, 그래서 더욱더 주님의 빛 비추심을 힘써 구하게 됩니다.

 

그럼, 이제 이런 배경을 가지고 간략한 요약 및 정리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첫째, 노아는 새로운 교회이지만, 그렇다고 갑자기 등장한 완전히 다른 사람은 아닙니다.

 

AC.534, 535에 따르면 노아는 홍수 이전 교회들 가운데 하나로 분류되지 않습니다. 그는 이미 퍼셉션의 교회가 끝나버린 이후,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세워지는 고대교회의 출발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노아가 갑자기 등장한 전혀 새로운 인간형은 아닙니다. 노아는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남은 것들’, 곧 ‘리메인스(remains) 위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주님은 언제나 ‘단절’이 아니라 ‘보존’을 통해 다음 시대를 여십니다. 퍼셉션이 사라졌다고 해서 인간을 포기하신 것이 아니라, 퍼셉션 없이도 살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여신 것입니다. 노아는 더 이상 ‘보는 사람’이 아니라, ‘배우고 붙드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배움과 붙듦의 출발점에는, 여전히 태고교회에서 남겨진 선과 진리의 리메인스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지만, 동시에 ‘주님의 끈질긴 연속성’을 증언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남겨 두십니다. 교회가 무너질 때조차, 완전히 무너지게 두지 않으십니다.

 

 

둘째, ,, 야벳은 세 아들이 아니라 세 교회의 유형입니다.

 

본문은 노아가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AC.534는 분명히 말합니다. 이 이름들은 개인이 아니라, 노아 교회로부터 갈라져 나올 세 고대교회를 가리킵니다. 한 교회 안에서 세 갈래의 흐름이 동시에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현실적인 그림입니다. 하나의 교회, 하나의 말씀, 하나의 복음 안에서도 사람들의 수용 방식은 같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내적 신앙으로, 어떤 이는 외적 순종으로, 어떤 이는 신앙의 외피만 붙들며 살아갑니다. 셈, 함, 야벳은 바로 이런 차이들을 대표합니다.

 

중요한 점은, 이 세 아들이 ‘같은 날 태어났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분열이 시간차를 두고 생긴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잠재되어 있었다는 뜻입니다. 노아 교회는 퍼셉션의 교회가 아니기에, 모든 사람이 동일한 내적 인식에 의해 하나로 묶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리는 필요해졌고, 그 교리를 받아들이는 방식의 차이가 곧 교회의 차이로 드러나게 됩니다.

 

이것은 오늘 교회의 모습과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같은 예배, 같은 말씀, 같은 성경을 듣고도 서로 다른 방향으로 살아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문제는 차이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 차이를 주님 앞에서 어떻게 관리하느냐입니다.

 

 

셋째, 노아의 오백 세는 지연이 아니라 준비의 시간입니다.

 

본문은 굳이 노아의 나이를 밝힙니다. ‘오백 세 된 후에’ 아들을 낳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읽으면 지나치게 늦은 출산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교회의 상태와 준비의 완성으로 봅니다.

 

퍼셉션의 교회는 즉각적이었지만, 노아의 교회는 축적과 형성의 교회입니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기억이 쌓여야 하고, 교리가 정리되어야 하며, 선과 진리를 구분하는 훈련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오백이라는 수는 그런 ‘충분히 성숙된 상태’를 상징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중요한 메시지를 줍니다. 신앙의 열매는 서두른다고 맺히지 않습니다. 주님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교회를 급히 확장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충분히 기다리시고, 충분히 다지신 후에 다음 세대를 여십니다.

 

오늘 본문은 조급함을 경계하는 말씀입니다. 빨리 결과를 보고 싶어 하는 신앙, 빨리 열매를 증명하고 싶어 하는 태도는 노아의 길이 아닙니다. 노아는 묵묵히 준비하다가, 때가 되었을 때 비로소 다음 세대를 맞이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은 짧지만, 매우 깊은 선언입니다. 퍼셉션의 시대는 끝났지만, 교회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보는 신앙은 사라졌지만, 배우는 신앙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의 교회 안에서 서로 다른 세 흐름이 태어났지만, 그 모든 시작은 여전히 주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노아는 홍수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한 인물이 아니라, ‘퍼셉션 이후의 인간은 어떻게 구원받는가’에 대한 주님의 대답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그 대답 위에 서 있습니다. 배우고, 붙들고, 살아내는 교회의 자리에 말입니다.

 

 

네, 창세기 이후 진도는 여기서 이렇게 잠시 멈추고, 맨 앞 첫 세 장인 창1부터 창3까지를 해설 버전으로 다음 주부터 다시 한 후, 이후 진도인 창6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우리가 AC 해설 버전 설교를 창4부터 시작한 관계로 이 부분이 빠졌기 때문입니다.

 

같은 데를 여러 번 반복하는 것에 대해 마음이 좀 불편하실 수도 있으나, 그러나 최근 한국기행에서 각 분야 장인들의 삶을 보셨듯 여기엔 주님의, 우리를 곁에서 붙드심이 있으신 줄 믿습니다. 힘내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의 내면을 아르카나로 아주 깊이, 그리고 충분히 다지셔서 우리 위에 큰 빌딩을 세우시려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기초공사를 오래오래 하시는 걸 보면 말입니다.

 

성경 전체를 떠받치는 반석은 창세기요, 그 안에서도 첫 세 장은 반석 중의 반석입니다. 여기에 주님과 천국, 그리고 교회를 향한, 그리고 우리 인간을 향한 모든 것이 들어 있기 때문인데요, 저는 AC 일을 이 부분에서만 만 7년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부족한데요, 그러나 뭐랄까... 표현할 수 없는 어떤 든든함이 생겼습니다. 요동치 않는 그 어떤 것인데요, 여러분에게도 이런 변화가 생길 줄 믿습니다.

 

제가 나누어드린 창1 번역 및 해설본을 곁에 두고, 읽고 또 읽고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주님이 곁에 계심을 마음으로 영으로 느끼실 줄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비록 한 절이지만 이 한 절 안에 담아두신 주님의 깊은 아르카나를 살필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은혜와 자비를 더하심,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 아담으로 시작된 태고교회의 종말에 이번엔 노아를 준비, 인류의 소멸을 막으시고, 비록 이젠 전과는 다른 신인류가 되었지만, 그렇게라도 해서 계속 주님과 연결되고 이어지게 하시는 사랑과 섭리, 경륜을 볼 수 있었습니다. 주님, 이런 주님의 사랑을 저희도 본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시대든 교회든, 더 나아가 각 개인이든 주님은 우리의 최악의 상황과 상태 속에서도 한 줄기, 한 줌, 한 조각 리메인스를 찾아 그걸로 새롭게 이어가시는 것을 보면서 저희도 주님처럼 그렇게 쉽게 포기하지 않고 대신 사랑의 인내와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는 노아 이후 인류이오니 저희 역시 저희와 다른 사람들, 곧 저희 곁의 셈, 함, 야벳의 사람들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사람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무엇을 하든지, 무슨 생각을 하든지 늘 주님처럼 사랑으로, 그리고 사랑이라는 출발점에서 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을 사랑하오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2-08(D1)

 

2637, 30. 창5.6, 2026-02-08(D1)-주일예배(창5,32, AC.534-536), ‘노아, 그리고 셈, 함, 야벳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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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2/01, 창5:28-31), '노아, 인류를 위한 주님의 위로'

※ 오늘 부를 찬송가는 순서대로 찬28, ‘복의 근원 강림하사’와 찬433, ‘귀하신 주여 날 붙드사’입니다. 오늘은 창세기 5장 다섯 번째 시간, 25절로 27절이며, AC 글 번호로는 526번에서 533번입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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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2:2, 3)

 

AC.87

 

천적 인간을 ‘안식일(the sabbath), 곧 ‘(rest)이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천적 상태가 될 때 싸움이 그치기 때문입니다. 이때에는 악한 영들이 물러가고, 선한 영들뿐 아니라 천적 천사들이 가까이 옵니다. 이들이 함께 있을 때에는, 악한 영들이 도저히 머물 수 없고 멀리 도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싸움은 사람이 스스로 한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께서 그 사람을 위하여 하신 것이므로, 주님께서 ‘쉬셨다(rested)고 합니다. Another reason why the celestial man is the “sabbath,” or “rest,” is that combat ceases when he becomes celestial. The evil spirits retire, and good ones approach, as well as celestial angels; and when these are present, evil spirits cannot possibly remain, but flee far away. And since it was not the man himself who carried on the combat, but the Lord alone for the man, it is said that the Lord “rested.”

 

 

해설

 

이 글은 안식의 본질을 다시 한번, 그러나 이번에는 ‘영계의 질서’라는 관점에서 명확히 드러냅니다. 앞선 글들에서 안식은 신앙과 사랑의 질서가 완성된 상태로 설명되었는데, AC.87에서는 그 결과가 영적 교통의 변화로 나타납니다. 즉, 안식은 단지 인간 내부의 심리적 평온이 아니라, ‘영계와의 관계 자체가 달라진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이 안식이라 불리는 이유를 ‘싸움의 종식’에서 찾습니다. 여기서 싸움이란, 앞서 반복적으로 언급되었던 유혹과 시험, 곧 악과 거짓이 사람의 의지와 이해를 차지하려는 시도를 말합니다. 영적 단계에서는 이 싸움이 필연적이며 지속적입니다. 그러나 천적 상태에 이르면, 그 싸움은 더 이상 중심을 차지하지 않습니다. 싸움이 끝났다는 것은, 더 이상 위협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질서가 이미 세워졌다는 뜻’입니다.

 

이 변화는 영계의 움직임으로 표현됩니다. 악한 영들은 물러가고, 선한 영들과 더 나아가 천적 천사들이 가까이 옵니다. 이는 천적 상태가 단지 ‘조금 더 선한 상태’가 아니라, ‘전혀 다른 교통의 영역’에 속함을 뜻합니다. 천적 천사들이 임재할 때에는, 악한 영들이 머물 수 없습니다. 이는 힘의 대결 때문이 아니라, 성질의 불일치 때문입니다. 그곳에는 더 이상 그들이 붙들 수 있는 공명점이 없습니다.

 

이 지점에서 매우 중요한 진술이 나옵니다. 싸움은 사람이 수행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람은 싸운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주님께서 그 사람을 위하여 싸우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스베덴보리 영적 인간학의 핵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유혹의 시간에 인간이 느끼는 긴장과 고통은 실제이지만, ‘결정적인 힘은 언제나 주님께 속해 있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저항하거나 동의하지 않는 것이며, 싸움 자체의 수행은 주님께서 담당하십니다.

 

그래서 안식은 인간의 성취가 아닙니다. 사람이 모든 싸움을 잘 해냈기 때문에 오는 보상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 싸움을 끝내신 결과’입니다. 이 때문에 ‘주님이 쉬셨다’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이는 주님께서 활동을 중단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더 이상 저항할 것이 없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인간 안에서 주님의 질서가 자리를 잡았기에, 주님의 일하심이 방해받지 않게 된 상태입니다.

 

이 단락은 안식에 대한 인간 중심적 오해를 단호하게 교정합니다. 안식은 내가 편안해졌다는 느낌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가 안정되었다는 표지’입니다. 악한 영들이 물러가고 선한 영들과 천적 천사들이 가까이 온다는 말은, 인간의 내적 상태가 이제 하늘의 질서와 직접적으로 호응하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안식은 심리 상태가 아니라, 존재 상태입니다.

 

또한 이 설명은 천적 인간의 겸손을 자연스럽게 드러냅니다. 그가 안식에 이르렀다고 해서, 자신을 싸움의 승자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는 싸움이 끝났음을 알지만, 그 싸움의 공로를 자기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선과 생명의 근원이 자신이 아니라 주님임을 퍼셉션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천적 인간의 내적 평화입니다.

 

AC.87은 결국 이렇게 말합니다. 안식은 악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라, 악이 더 이상 머물 자리를 찾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오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 자리는 주님으로 채워졌고, 주님의 임재가 충만할 때, 싸움은 자연스럽게 끝납니다.

 

이 지점까지 오면, 안식일은 더 이상 계명의 항목이 아니라, ‘인간이 도달하도록 창조된 궁극의 상태’임이 분명해집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말해지는 ‘’은, 가장 깊은 생명의 활동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가장 온전한 생명이 아무런 방해 없이 흐르는 상태입니다.

 

 

 

AC.86, 창2:2-3, ‘안식일 저녁’(the eve of the sabbath)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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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4:15)

 

먼저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는 구절은, 가인을 보호하기 위한 과도한 형벌 경고가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살인자를 편들기 위해 더 강한 보복을 선언하신 말씀도 아닙니다. 아르카나의 관점에서 이 말씀은 ‘형벌의 크기’가 아니라 ‘영적 파괴의 깊이와 범위’를 말하는 표현입니다. 다시 말해, 이 구절의 초점은 ‘가인’이 아니라 ‘가인을 죽이려는 행위가 초래하는 결과’에 있습니다.

 

아르카나에서 ‘가인’은 한 개인이 아니라 ‘사랑에서 분리된 진리’, 곧 ‘신앙은 있으나 사랑이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상태는 분명 타락한 것이며, 교회의 온전한 상태가 아닙니다. 그러나 동시에 주님께서는 이 상태를 즉시 제거하지 않으십니다. 그 이유는, 이 상태가 비록 왜곡되어 있을지라도, 여전히 교회 안의 어떤 질서와 연속성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가인에게 ‘’를 주어, 그 상태가 더 이상 다른 것을 ‘죽이지 못하도록’ 제한하시되, 성급하게 없애지는 않으십니다.

 

이 맥락에서 ‘가인을 죽인다’는 것은, 잘못된 신앙 상태를 주님의 섭리 안에서 기다리며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판단과 열심으로 단절하고 제거하려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즉, 아직 회복 가능성이 있는 것, 혹은 다른 선과 진리와 느슨하게나마 연결된 상태까지 함께 끊어 버리는 행위입니다.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에서 ‘’이라는 수 역시 문자적인 숫자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은 반복적으로 ‘완전함’, ‘충만함’, ‘끝까지 간 상태’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은 ‘형벌이 일곱 배 더 무겁다’는 뜻이 아니라, ‘그 결과가 전면적이고 회복이 극히 어려운 상태로까지 간다’는 의미입니다.

 

아르카나의 논리에서 보면, 사랑 없는 진리라는 하나의 왜곡된 상태 자체보다, 그것을 잘못 다루어 교회의 남아 있는 선과 진리까지 함께 파괴해 버리는 일이 훨씬 더 치명적입니다. 그래서 가인의 상태는 ‘표를 받아 제한’되지만, 가인을 죽이려는 행위는 ‘칠 배의 벌’, 곧 완전한 황폐에 가까운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섭리의 원리가 드러납니다. 주님은 악이나 왜곡을 다루실 때, ‘즉각적 제거’보다 ‘점진적 제한’을 먼저 행하십니다. 왜냐하면 교회와 인간의 내면에는 언제나 ‘보존되어야 할 리메인스(remains)’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그 과정을 대신하여 정리하려 들 때, 특히 분노나 의로움의 확신 속에서 판단할 때, 그 판단은 거의 언제나 주님의 섭리를 넘어섭니다.

 

그래서 ‘가인을 죽이는 자’는, 겉으로는 정의를 세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주님이 보존하고 계신 질서를 무너뜨리는 자가 됩니다. 그 결과가 바로 ‘칠 배의 벌’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더 세게 때리신다는 뜻이 아니라, 그 행위 자체가 더 깊고 광범위한 영적 붕괴를 낳는다는 뜻입니다.

 

성도들에게 이 말씀을 풀어 줄 때에는, 도덕적 위협이나 공포의 언어보다는 다음과 같은 방향이 가장 적절합니다.

 

하나님은 잘못된 신앙 상태를 옳다고 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상태를 인간의 판단으로 성급하게 제거하는 것도 원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그 과정에서 아직 살아 있는 선과 진리까지 함께 죽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악을 즉시 없애기보다, 먼저 그 작용을 제한하시고, 회복 가능한 것들을 조용히 보존하십니다. 이 질서를 무시하고 우리가 대신 정리하려 들 때, 그 결과는 처음 문제보다 훨씬 더 큰 영적 황폐로 이어집니다. 성경이 말하는 칠 배의 벌은 바로 그 결과를 가리킵니다.’

 

정리하면, 창4:15의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는 말씀은, ‘사랑 없는 진리’라는 왜곡된 상태보다도, 그 상태를 주님의 섭리 없이 인간의 판단으로 제거하려는 태도가 훨씬 더 깊은 영적 파괴를 낳는다는 사실을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이 구절은 처벌의 위협이 아니라, 교회를 다루시는 주님의 인내와 섬세함, 그리고 인간 판단의 위험성을 동시에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SC.12, 기독교인들은 로또하면 안 되나요?

오늘날 로또하는 기독교인들, 특별히 뭘 좀 해 볼려고 해도 종잣돈 자체가 없어 힘들어하는 아들들을 위해 로또 생각을 하는 기독교인, 그러나 한편으로 아들들을 향하신 주님의 계획에 혹시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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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가인에게 주신 ‘표’(mark)(창4:15)의 속뜻

‘표’(mark)가 영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나 작용을 의미하나요? AC.392-394를 참조해 주세요.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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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42

 

천국의 성질을 알게 하기 위하여 천국으로 들어 올려지는 이들은, 육체적인 것들과 공상적인 생각들이 잠잠해진 상태에 놓이게 되거나—이는 누구도 이 세상에서 지니고 온 육체적 성향과 공상적 관념을 그대로 지닌 채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혹은 불순하고 불일치를 일으키는 것들을 기이하게 완화해 주는 영들의 영역(a sphere of spirits)에 둘러싸이게 됩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내면이 열리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여러 방식들을 통해, 그들은 각자의 삶과 그로부터 형성된 성질에 따라 준비됩니다. They who are taken up into heaven in order that they may know its quality either have their bodily things and fanciful notions lulled to quiescence—for no one can enter heaven with the bodily things and fanciful notions that they take with them from this world—or else they are surrounded by a sphere of spirits who miraculously temper such things as are impure and that cause disagreement. With some the interiors are opened. In these and other ways they are prepared, according to their lives and the nature thereby acquired.

 

 

해설

 

이 글은 지금까지 제시된 사례들을 ‘원리의 언어로 정리’해 주는 대목입니다. 앞에서는 개별 영들의 체험이 서술되었고, 여기서는 그 체험들이 어떤 질서와 법칙에 따라 이루어지는지를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접근이 결코 우연적이거나 일률적이지 않음을 분명히 합니다.

 

먼저 강조되는 것은, 이 세상에서 형성된 ‘육체적인 것들’과 ‘공상적인 생각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육체적인 것이란 단순한 신체 감각이 아니라, 감각 중심의 욕망과 자기 만족을 기준으로 한 사고방식을 뜻합니다. 공상적인 생각들은 현실과 분리된 상상, 자기 방식으로 꾸며 낸 영적 기대를 가리킵니다. 이 두 가지는 천국의 질서와 근본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에게는 먼저 이러한 요소들이 잠잠해지도록 허락됩니다. 이는 제거라기보다 ‘가라앉힘’에 가깝습니다. 즉, 그것들이 더 이상 주도권을 쥐지 않게 되는 상태입니다. 이 상태가 되어야 비로소 천국의 영향이 고통이 아니라 기쁨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방식은, 영들의 영역에 둘러싸이는 것입니다. 이 영역은 불순한 것과 불일치를 일으키는 것들을 기이하게 완화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여기서 ‘기이하게’라는 표현은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섭리를 가리킵니다. 즉, 이는 인간이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과정이 아니라, ‘주님의 질서 안에서 제공되는 보호적 환경’입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내면이 직접 열리기도 합니다. 이는 외적 조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때, 주님께서 더 깊은 차원의 준비를 허락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말합니다. 이 모든 준비는 각자의 삶과 그로부터 형성된 성질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문장은 신앙의 여정이 얼마나 개인적이면서도 질서 정연한지를 보여 줍니다. 천국으로의 준비에는 하나의 공식이 없습니다. 동일한 체험을 모든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통과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준은 하나입니다. 그 사람이 살아온 삶, 그리고 그 삶이 만들어 낸 내적 성질입니다.

 

이 점에서 AC.542는 매우 중요한 균형을 보여 줍니다. 천국은 전적으로 주님의 은총으로 열리지만, 그 은총은 인간의 삶과 무관하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각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견딜 수 있는 깊이까지, 가장 안전한 경로로 준비시키십니다.

 

또한 이 글은 천국 체험을 어떤 특별한 선택이나 특권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교육이며, 학습이며, 적응의 과정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의 목적은 단 하나입니다. 천국의 성질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즉, 다시 지상이나 중간 상태로 돌아가더라도, 그 사람 안에 참된 기준이 형성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AC.542는 그래서 이렇게 읽힙니다. 천국은 닫힌 곳이 아니라, ‘질서가 있는 곳’입니다. 들어갈 수 없는 이유는 배척 때문이 아니라, 상태의 불일치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불일치를 치유하고 조율하는 모든 과정은, 각 사람의 삶을 가장 잘 아시는 주님의 섬세한 배려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이 글은 결국 우리에게 조용히 묻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상태를 형성하고 있는가. 그 상태는, 주님께서 천국의 기쁨을 맡기실 수 있는 상태인가.

 

 

 

AC.541, 창5 뒤, ‘천국 기쁨에 비하면 더럽기까지 한 이 세상 쾌락’

AC.541 천국의 기쁨이 어떤 것인지를 알지 못하던 어떤 영들이, 그들이 이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된 상태, 곧 육체적인 것들(bodily things)과 공상적인 생각들(fanciful notions)이 잠잠해진 상태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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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41

 

천국의 기쁨이 어떤 것인지를 알지 못하던 어떤 영들이, 그들이 이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된 상태, 곧 육체적인 것들(bodily things)과 공상적인 생각들(fanciful notions)이 잠잠해진 상태로 이끌린 뒤, 뜻밖에 천국으로 들어 올려졌습니다. 그곳에서 나는 한 영이 나에게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그는 이제서야 비로소 천국의 기쁨이 얼마나 큰지를 느낀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이전에 천국의 기쁨에 대해 전혀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던 것이 얼마나 큰 착각이었는지를 깨달았으며, 이제는 자신의 가장 깊은 존재 안에서(in his inmost being), 육체의 삶에서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어떤 쾌락보다도 비교할 수 없이 큰 기쁨을 느낀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육체적 쾌락을 더럽다고 불렀습니다. Certain spirits who were ignorant of the nature of heavenly joy were unexpectedly taken up into heaven after they had been brought into such a state as to render this possible, that is to say a state in which their bodily things and fanciful notions were lulled into quiescence. From there I heard one saying to me that now for the first time he felt how great is the joy in heaven, and that he had been very greatly deceived in having a different idea of it, but that now he perceived in his inmost being a joy immeasurably greater than he had ever felt in any bodily pleasure such as men are delighted with in the life of the body, and which he called foul.

 

 

해설

 

이 글은 앞선 AC.540의 설명을 ‘결론처럼 확증해 주는 실제 증언’입니다. 앞에서는 천국의 기쁨이 단계적으로 가르쳐진다고 설명되었고, 여기서는 그 과정을 실제로 통과한 한 영의 고백이 제시됩니다. 이 고백은 설명보다 훨씬 강력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교리가 아니라 체험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주목할 점은, 이 영들이 천국으로 올라가기 전에 어떤 상태에 놓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육체적인 것들’과 ‘공상적인 생각들’이 잠잠해진 상태로 이끌립니다. 이는 곧 감각 중심의 욕망, 상상에 의존한 기대, 자기 방식의 천국 그림이 모두 가라앉은 상태를 뜻합니다. 이 상태가 되기 전에는, 아무리 천국이 열려 있어도 사람은 그것을 견딜 수 없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들이 천국으로 ‘노력해서’ 올라간 것이 아니라, ‘뜻밖에’ 들어 올려졌다는 점입니다. 이는 천국의 접근이 인간의 계산이나 성취의 결과가 아니라, ‘상태가 맞을 때 주어지는 은총’임을 보여 줍니다. 준비가 되었을 때, 길은 열립니다.

 

그가 처음으로 말한 고백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이제서야 처음으로 천국의 기쁨이 얼마나 큰지를 느낀다’는 말입니다. 이는 이전에는 전혀 몰랐다는 뜻입니다. 그는 천국을 몰랐을 뿐 아니라, 잘못 알고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상상이 얼마나 쉽게 참된 영적 실재를 왜곡하는지를 다시 한번 드러냅니다.

 

이 영이 느낀 기쁨은 단순히 더 강한 즐거움이 아닙니다. 그는 그것을 ‘자신의 가장 깊은 존재 안에서 느낀다’고 말합니다. 즉, 이 기쁨은 감각이나 감정의 표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중심을 채우는 기쁨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비교의 언어로밖에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전에 느꼈던 모든 육체적 쾌락보다 ‘비교할 수 없이 크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매우 강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전에 즐거워하던 육체적 쾌락을 ‘더럽다’고 합니다. 이는 도덕적 비난이 아니라, ‘기준이 바뀐 데서 나오는 평가’입니다. 밝은 빛 안에 들어간 사람에게 어둠이 더럽게 느껴지는 것과 같습니다. 이 영은 더 높은 차원의 기쁨을 경험했기 때문에, 이전의 즐거움이 본래 어떤 것이었는지를 비로소 알게 된 것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대목은 신앙의 성장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을 보여 줍니다. 신앙이 깊어질수록, 이전에 당연하게 여기던 만족들이 점점 그 빛을 잃습니다. 이것은 금욕이나 자기부정의 결과가 아니라, ‘더 깊은 기쁨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AC.541은 이렇게 말해 줍니다. 천국의 기쁨은 우리가 포기해야 할 무엇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 모르는 무엇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모르는 동안에는, 우리는 낮은 기쁨을 최고라고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적절한 때에 우리의 내면을 잠잠하게 하시고, 상태를 준비시키시면, 사람은 비로소 말로 다 할 수없는 기쁨을 알게 됩니다.

 

이 증언은 천국을 설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대신, ‘천국을 경험한 사람이 무엇을 느끼는지’를 들려줍니다. 그리고 그 한마디 고백은 긴 설명보다 더 분명합니다. ‘이제서야 처음으로 알았다.’ 이 말이야말로, 천국의 기쁨이 어떤 것인지를 가장 정확하게 말해 줍니다.

 

 

 

AC.542, 창5 뒤, ‘각자의 삶과 그에 따른 천국 체험 준비’

AC.542 천국의 성질을 알게 하기 위하여 천국으로 들어 올려지는 이들은, 육체적인 것들과 공상적인 생각들이 잠잠해진 상태에 놓이게 되거나—이는 누구도 이 세상에서 지니고 온 육체적 성향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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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40, 창5 뒤, ‘외적 기쁨에서 내적 기쁨으로, 기쁨에서 평화로, 평화에서 순수함으로’

AC.540 사후 세계로 오는 거의 모든 이들은 천국의 행복과 복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고 옵니다. 이는 내적 기쁨의 본질과 성질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천국의 기쁨을 오직 육체적 즐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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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40

 

사후 세계로 오는 거의 모든 이들은 천국의 행복과 복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고 옵니다. 이는 내적 기쁨의 본질과 성질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천국의 기쁨을 오직 육체적 즐거움과 세상적 기쁨을 통해서만 상상합니다.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지만, 실제로는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기쁨이야말로 비교해 보면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더럽기까지 하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릅니다. 그러므로 선한 성향을 지닌 이들이 천국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알 수 있도록, 그들은 먼저 상상으로는 도저히 이를 수 없는 낙원들로 인도됩니다. 그들은 자신이 이미 천국의 낙원에 도달했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이 참된 천국의 행복은 아니라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 자신의 더 깊은 내적 존재(inmost being)에까지 느껴지는 기쁨의 상태(interior states of joy)를 체험하도록 허락받습니다. 그다음에는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까지 이르는 평화의 상태(a state of peace)로 인도되며, 그들은 그것이 전혀 말로 표현할 수도, 생각으로 그릴 수도 없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역시 내적 감각의 가장 깊은 곳(inmost feeling)까지 이르는 순수함의 상태(a state of innocence)로 인도됩니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그들은 참된 영적 선과 천적 선이 무엇인지를 배우도록 허락받습니다. Almost all who come into the other life are ignorant of the nature of heavenly happiness and bliss, because they know not the nature and quality of inward joy. They form a conception of it merely from the delights and joys of the body and the world. What they are ignorant of they suppose to be nothing, the truth being that bodily and worldly joys are relatively non-existent and foul. In order therefore that those who are well disposed may learn and may know what heavenly joy is, they are taken in the first place to paradises that surpass every conception of the imagination (concerning which,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and they suppose that they have arrived in the paradise of heaven; but they are taught that this is not true heavenly happiness, and are therefore permitted to experience interior states of joy which are perceptible to their inmost being. They are then transported into a state of peace, even to their inmost being, and they confess that nothing of it is at all expressible or conceivable. And finally they are introduced into a state of innocence, also to their inmost feeling. In this way are they permitted to learn the nature of true spiritual and celestial good.

 

 

해설

 

이 글은 천국의 기쁨이 어떤 것인지 설명하려는 글이 아니라, ‘인간이 천국의 기쁨을 왜 오해할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 주는 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단호하게 말합니다. 사후 세계로 오는 거의 모든 이들은 천국의 행복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말합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들은 내적 기쁨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아는 것으로만 상상합니다. 그래서 천국의 기쁨도 세상에서 경험한 즐거움, 곧 쾌락, 만족, 편안함, 성취감 같은 것의 연장선에서 그려 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근본적인 착각이라고 말합니다.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기쁨은 진짜 기쁨과 비교하면 거의 없는 것과 같고, 더 나아가 오염된 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이는 도덕적 비난이 아니라, ‘차원의 차이’를 말하는 표현입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사람들을 어떻게 가르치시는지를 단계적으로 보여 줍니다. 주님은 설명으로 가르치시지 않습니다. 체험을 통해 가르치십니다. 먼저 사람들은 상상으로는 도저히 이를 수 없는 아름다운 낙원으로 인도됩니다. 이 단계에서 사람들은 거의 예외 없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제 천국에 도착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 단계는 아직 참된 천국의 행복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낙원은 여전히 외적 감각과 상상에 가까운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아름답고 평화롭지만, 아직 존재의 가장 깊은 곳을 채우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다음 단계로 이들을 인도하십니다. 이번에는 내적 존재 깊숙이까지 느껴지는 기쁨의 상태입니다. 이 기쁨은 감각적 즐거움이 아니라, 존재 전체가 ‘옳다’고 느끼는 기쁨입니다.

 

그다음 단계는 더욱 인상적입니다. 존재의 가장 깊은 곳까지 이르는 평화의 상태입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공통된 고백을 합니다. 이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생각으로도 그릴 수 없다고 말합니다. 즉, 언어와 개념이 도달하지 못하는 차원의 상태입니다. 이 평화는 긴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완전히 질서 안에 놓인 상태’에서 오는 안정입니다.

 

마지막 단계는 순수함의 상태입니다. 이는 도덕적 무죄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주장하지 않는 상태, 곧 주님의 생명이 아무 저항 없이 흐를 수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 단계에서야 비로소 사람은 참된 영적 선과 천적 선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이해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 상태 안에 있음으로 안다’는 뜻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글은 천국을 가르치는 방식 자체에 대한 깊은 통찰을 줍니다. 천국은 설명으로 전달되지 않습니다.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깊은 신앙의 실재는 개념으로 주입될 수 없고, 삶의 상태 속에서만 조금씩 열립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항상 외적 단계에서 내적 단계로, 기쁨에서 평화로, 평화에서 순수함으로 사람을 이끄십니다.

 

AC.540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해 줍니다. 천국의 기쁨을 상상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이유는, 아직 그 차원에 맞는 상태로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준비는, 주님께서 질서 있게 인도하시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이 글은 천국에 대한 환상을 무너뜨리는 동시에, 천국에 대한 가장 깊은 소망을 조용히 키워 줍니다. 설명할 수 없고, 그릴 수 없지만, ‘실재하며 점점 더 깊어지는 선과 기쁨의 길’이 있음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AC.541, 창5 뒤, ‘천국 기쁨에 비하면 더럽기까지 한 이 세상 쾌락’

AC.541 천국의 기쁨이 어떤 것인지를 알지 못하던 어떤 영들이, 그들이 이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된 상태, 곧 육체적인 것들(bodily things)과 공상적인 생각들(fanciful notions)이 잠잠해진 상태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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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39, 창5 뒤, ‘육신에 있을 때 간음의 죄를 가볍게 여겼던 자’

AC.539 어떤 영이 있었는데, 그는 육신에 있을 때 간음의 죄를 가볍게 여겼던 자였습니다. 그가 원해서 그는 천국의 첫 문턱(threshold)에 들어가도록 허락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곳에 이르자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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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39

 

어떤 영이 있었는데, 그는 육신에 있을 때 간음의 죄를 가볍게 여겼던 자였습니다. 그가 원해서 그는 천국의 첫 문턱(threshold)에 들어가도록 허락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곳에 이르자마자 고통을 느끼기 시작했고, 자기 자신에게서 나는 시체 같은 악취(cadaverous stench)를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정도가 되었고, 만일 조금이라도 더 나아간다면 자신이 사라질 것처럼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래 땅으로 내던져졌는데, 단지 천국의 첫 문턱에서 간음과 반대되는 영역에 들어왔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고통을 느꼈다는 사실에 분노하였습니다. 그는 불행한 자들 가운데 있습니다. A certain spirit who during his life in the body had made light of adulteries, was in accordance with his desire admitted to the first threshold of heaven. As soon as he came there he began to suffer and to be sensible of his own cadaverous stench, until he could endure it no longer. It seemed to him that if he went any farther he should perish, and he was therefore cast down to the lower earth, enraged that he should feel such torment at the first threshold of heaven, merely because he had arrived in a sphere that was contrary to adulteries. He is among the unhappy.

 

 

해설

 

이 글은 앞선 두 단락보다 훨씬 더 직접적이고 생생한 방식으로, ‘상태의 불일치가 낳는 고통’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는 ‘천국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삶의 태도 자체가 천국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충돌은 설명이나 판단 이전에, 즉각적인 감각과 고통으로 드러납니다.

 

이 영은 생전에 간음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이는 단순히 특정 행위를 했다는 의미를 넘어서, 사랑과 결합의 질서를 내적으로 무너뜨린 상태를 말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간음은 도덕적 규범 위반을 넘어, 사랑의 질서, 곧 하늘의 질서를 왜곡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러한 상태는 천국의 영역과 본질적으로 상극입니다.

 

그럼에도 이 영은 자신의 바람, 곧 자기가 원해서 천국의 첫 문턱에 들어갑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강조되는 것은, 주님께서 사람의 바람을 무시하지 않으신다는 점입니다. 원하면 가까이 가게 하시되, 그 결과를 스스로 체험하게 하십니다. 강제로 막지 않으시고, 설명으로 대신하지도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가 느낀 것은 환희가 아니라 극심한 고통이었습니다. 특히 주목할 표현은 ‘자기 자신의 시체 같은 악취를 느꼈다’는 대목입니다. 이는 외부에서 부여된 형벌이 아니라, ‘자기 상태가 그대로 드러난 결과’입니다. 천국의 영역에서는 거짓과 왜곡이 가려지지 않습니다. 그 안에 들어가는 순간, 자기 내면의 실상이 감각으로 체험됩니다.

 

이 악취는 실제 냄새라기보다, 사랑의 질서에 반하는 상태가 천국의 감각 안에서 어떻게 인식되는지를 보여 주는 상응 표현입니다. 천국의 순수한 사랑의 영역에 비추어질 때, 왜곡된 사랑은 생명 없는 것, 곧 ‘죽음의 냄새’로 체험됩니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느낍니다. 조금이라도 더 나아가면 ‘사라질 것 같다’는 감각은, 그 상태가 천국 안에서는 존속할 수 없음을 뜻합니다.

 

결국 그는 아래 땅으로 떨어집니다. 이 역시 처벌이라기보다, ‘존재가 견딜 수 있는 자리로 돌아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느낀 감정입니다. 그는 자신의 상태를 돌아보거나 깨닫기보다, 분노합니다. 천국의 문턱에서 이런 고통을 느꼈다는 사실 자체를 부당하다고 여깁니다. 이는 그의 내적 태도가 여전히 변화되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마지막에 짧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는 불행한 자들 가운데 있다고 말합니다. 이 불행은 외부적 형벌의 결과가 아니라, ‘자기 상태와 질서의 불일치가 지속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천국을 향한 욕망은 있었지만, 천국의 삶을 원하지는 않았던 결과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장면은 매우 무겁고도 정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천국을 원하는가, 아니면 천국의 삶을 원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어떤 죄를 가볍게 여기는 태도는, 단지 윤리적 문제를 넘어서, 우리 존재의 감각과 방향을 결정합니다. 천국은 그 방향이 맞을 때에만 안식이 됩니다.

 

AC.539는 천국을 도덕적 판결의 법정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천국은 ‘자기 자신을 피할 수 없는 거울’로 나타납니다. 그 거울 앞에서 고통을 느끼는 것은, 거울이 잔인해서가 아니라, 비추어진 것이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이 본문은, 회개와 변화가 왜 지금 여기에서 필요한지를 가장 실감 나게 보여 줍니다.

 

 

 

AC.540, 창5 뒤, ‘외적 기쁨에서 내적 기쁨으로, 기쁨에서 평화로, 평화에서 순수함으로’

AC.540 사후 세계로 오는 거의 모든 이들은 천국의 행복과 복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고 옵니다. 이는 내적 기쁨의 본질과 성질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천국의 기쁨을 오직 육체적 즐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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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38, 창5 뒤, ‘천국은 같은 상태여야만 들어갈 수 있는 곳’

AC.538 천국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천국에 들어가려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랑의 신앙 안에 있지 않다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불 속으로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위험하다고 경고를 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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