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창4:22)
AC.423
두발가인을 일컬어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모든 장인의 스승, 트레이너)라 합니다. 야발과 유발의 경우처럼 ‘조상’(father, 아버지)이 아니고 말입니다. 그 이유는, 이들 야발과 유발 전에는 천적이고 영적인, 즉 내적인 것들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다시 말해, 이런 것들은 이들 야발과 유발의 때부터 나타났기 때문에 이들을 가리켜 ‘조상’이라 한 것입니다. 자연적인, 즉 외적인 것들은 두발가인 전에도 있었는데요, 그래서 두발가인한테는 ‘조상’이라 하지 않고,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 즉 이들을 훈련시킨 트레이너라 하는 것입니다. 비록 이들 외적인 것들이 이제는 내적인 것들과 연결된 상태이지만 말입니다.Tubal-Cain is called the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and not the “father,” as was the case with Jabal and Jubal; and the reason is that before there were no celestial and spiritual or internal things. And the term “father” is applied to Jabal and Jubal, to denote that such internal things then first began to exist; whereas natural or external things did exist before, but were now applied to internal things, so that Tubal-Cain is not called the “father,” but the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해설
AC.423에서 스베덴보리는 ‘두발가인’(Tubal-Cain)이 왜 ‘조상’(father, 아버지)이 아니라 ‘교사’(instructor)로 불리는지를 통해, 새 교회가 형성되는 질서의 방향을 매우 정밀하게 설명합니다. 이는 단순한 명칭 차이가 아니라, 교회 내적 구조가 어떻게 처음 생겨나고, 그다음 어떻게 적용되는가를 보여 주는 핵심 단서입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야발과 유발이 ‘조상’으로 불린 이유를 상기시킵니다. 야발(천적 차원)과 유발(영적 차원)은, 그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내적 차원—곧 사랑의 거룩함과 신앙의 영적 질서—이 처음으로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 시점을 대표합니다. 그러므로 이 둘에게는 ‘조상’이라는 칭호가 적합합니다. ‘조상’은 시간상의 최초가 아니라, 존재 양식의 최초, 곧 이전에는 없던 것을 처음 낳은 근원적 시작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두발가인이 대표하는 자연적 차원은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닙니다. 자연적 선과 진리—도덕, 기술, 질서, 사회적 유익—은 이전에도 이미 존재했습니다. 가인의 계보 전체만 보아도, 도시는 세워졌고, 기술은 발달했으며, 사회 질서는 나름대로 유지되었습니다. 문제는 자연적 차원이 없었다는 데 있지 않고, 그것이 내적 차원과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굴러가고 있었다는 점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연적 차원은 ‘새로 태어날’ 필요가 없었고, 대신 새롭게 사용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두발가인은 ‘조상’, 곧 ‘아버지’가 아니라 ‘교사’로 불립니다. ‘교사’란, 무(無)에서 생명을 낳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것을 바른 목적과 질서로 이끄는 역할을 뜻합니다. 두발가인은 자연적 선과 진리를 새로 창조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것들을 천적 사랑과 영적 신앙에 봉사하도록 가르치고 단련합니다. 놋과 철을 다루는 장인의 교사라는 표현은, 자연적 차원이 내적 차원의 도구로 재정렬되었음을 상응적으로 보여 줍니다.
이 구분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원리를 드러냅니다. 교회의 회복은 결코 외적 삶을 부정하거나 파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주님은 자연적 삶—기술, 문화, 도덕, 제도—을 없애지 않으시고, 그 용도를 바꾸십니다. 이전에는 자기 목적과 자기 영광을 위해 사용되던 자연적 능력들이, 이제는 사랑과 신앙을 표현하고 구현하는 수단으로 재교육됩니다. 두발가인이 ‘교사’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순서입니다. AC.423은 교회의 참된 질서가 내적 → 외적임을 분명히 합니다. 먼저 천적인 사랑과 영적인 신앙이 살아나야 하고(야발, 유발), 그 다음에 자연적 차원이 그 내적 질서에 맞추어 훈련되고 지도되어야 합니다(두발가인). 만일 이 순서가 뒤바뀌면, 자연적 차원은 다시 독자적으로 굴러가며, 가인의 길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결국 AC.423은 새 교회가 어떻게 전인적 구조를 갖추는지를 명확히 보여 줍니다.
먼저 내적 차원은 아버지로서 새로 태어나고, 그다음 자연적 차원은 교사에 의해 그 방향을 바로잡습니다.
이로써 스베덴보리는, 참된 교회란 자연적 삶을 무시하는 영적 도피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던 자연적 삶 전체를 내적 사랑과 신앙에 복종시키는 질서임을 분명히 합니다. 두발가인이 ‘아버지’가 아니라 ‘교사’라는 사실 하나에, 교회 회복의 깊은 섭리적 구조가 응축되어 있습니다.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창4:22)
AC.422
이 새 교회가 어땠는지는 유대 교회를 보면 알 수 있는데요, 유대 교회는 속(internal)과 겉(external), 그러니까 내적인 면과 외적인 면이 함께 있었습니다. 천적, 영적인 것들로 구성된 내적 교회와 자연적인 것들로 구성된 외적 교회 말입니다. 내적 교회는 라헬로, 외적 교회는 레아로 표현되었지요. 그러나 야곱으로, 즉 말씀에서 ‘야곱’(Jacob)의 후손으로 이해되는 그들은 외적인 것만을 원하는, 그러니까 예배에서도 겉만 원하는 사람들이어서, 그래서 라헬에 앞서 레아가 주어진 것이고, 그래서 눈이 침침한 레아로는 유대 교회를, 라헬로는 이방인들의 새 교회를 표현했던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야곱’은 선지서에서 두 가지 의미를 가지는데요, 하나는 왜곡된, 비뚤어진 상태 가운데 있는 유대 교회를, 다른 하나는 이방인들의 참된 외적 교회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야곱이 내적 교회와 상응할 때는 특별히 ‘이스라엘’(Israel)이라 합니다만, 이에 관해서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 나중에 더 말씀드리겠습니다.How the case was with this new church may be seen from the Jewish church, which was both internal and external; the internal church consisting of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and the external church of natural things. The internal church was represented by Rachel, and the external by Leah. But as Jacob, or rather his posterity understood by “Jacob” in the Word, were such as to desire only external things, or worship in externals, therefore Leah was given to Jacob before Rachel; and by blear-eyed Leah was represented the Jewish church, and by Rachel a new church of the gentiles. For this reason “Jacob” is taken in both senses in the prophets, in one denoting the Jewish church in its perverted state, and in the other the true external church of the gentiles. When the internal church is signified, he is called “Israel”; but of these matters, by the Divine mercy of the Lord, more will be said hereafter.
해설
AC.422에서 스베덴보리는 새 교회의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 유대 교회(Jewish church)의 예를 들어, 내적 교회와 외적 교회의 관계를 분명히 합니다. 그는 유대 교회가 겉으로는 하나의 교회처럼 보였으나, 실제로는 내적 차원(천적, 영적)과 외적 차원(자연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말합니다. 내적 교회는 사랑과 신앙의 내면적 실재로 이루어지고, 외적 교회는 의식, 규례, 행위와 같은 자연적 형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둘이 결합될 때 교회는 온전해지지만, 겉만 남고 속이 사라질 때, 교회는 형식만 유지하는 상태로 기울게 됩니다.
이 내적–외적 구조는 ‘라헬’(Rachel)과 ‘레아’(Leah)의 표상으로 설명됩니다. 라헬은 내적 교회, 곧 천적, 영적 실재를 대표하고, 레아는 외적 교회, 곧 자연적 예배와 삶의 형식을 대표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레아가 먼저 야곱에게 주어진 것은 우연이 아니라, 당시 교회의 영적 상태를 드러내는 섭리적 배열입니다. 곧 사람들은 내적 실재보다 외적 형식과 보이는 예배를 더 원했고, 그 결과 외적 교회가 먼저 서게 된 것이지요.
스베덴보리는 레아를 ‘시력이 약한’(blear-eyed, 창29:17) 인물로 묘사한 점에 주목합니다. 이는 단순한 외모 묘사가 아니라, 진리를 보는 영적 시야가 흐릿한 상태를 표상합니다. 이렇게 레아로 표상된 유대 교회는 외적 예배와 규례에는 열심이었으나, 그 안에 담긴 사랑과 신앙의 내적 의미는 보지 못했습니다. 반면 라헬은 새 교회, 곧 이방인 가운데 세워질 교회를 표상하는데, 이는 외적 형식이 아닌 내적 실재를 중심으로 세워질 교회를 가리킵니다.
이 대조는 ‘야곱’(Jacob)이라는 인물의 이중적 의미에서도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예언서에서 ‘야곱’이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는 왜곡된 상태의 유대 교회, 곧 외적 예배만을 추구한 교회를 뜻하고, 다른 하나는 참된 외적 교회, 곧 이방인 가운데 세워진 교회를 뜻합니다. 같은 이름이 서로 다른 교회를 가리키는 것은, 외적 형식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외적 형식이 내적 실재와 결합되어 있는가가 관건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스베덴보리는 내적 교회가 강조될 때 야곱은 ‘이스라엘’(Israel)로 불린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진리와 선이 내적으로 결합된 상태, 곧 내적 교회가 살아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따라서 같은 인물, 같은 공동체라도 내적 실재가 있을 때는 ‘이스라엘’로, 외적 형식만 남았을 때는 ‘야곱’으로 불립니다. 이는 성경의 명칭 사용이 얼마나 정밀한 상응의 질서 위에 놓여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결국 AC.422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새 교회는 유대 교회의 외적 형식을 단순히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외적 형식에 내적 실재를 다시 결합시키는 교회입니다. 라헬과 레아는 서로 대립하는 두 교회가 아니라, 한 교회의 두 차원이며, 문제는 순서와 중심입니다. 외적이 먼저 서더라도, 그것이 내적을 향해 열려 있을 때 교회는 살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통해, 참된 교회는 언제나 내적 사랑과 신앙을 중심에 두고, 외적 삶과 예배를 그 열매로 삼는 질서 안에 있어야 함을 분명히 가르칩니다.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And Zillah, she also bare Tubal-Cain, an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 and the sister of Tubal-Cain was Naamah.(창4:22)
AC.421
‘씰라’(Zillah)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새 교회의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the mother of the natural things of the new church)와, ‘두발가인,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Tubal-Cain, an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는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the doctrine of natural good and truth)와 상응합니다. 여기서 ‘구리’(brass)는 자연적 선을, ‘쇠’(iron)는 자연적 진리를 가리킵니다. ‘나아마, 두발가인의 누이’(Naamah, the sister of Tubal-Cain)는 유사한 교회, 즉 그 교회 밖에 있는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a similar church, or the doctrine of natural good and truth outside of that church)와 상응합니다.By “Zillah” is signified, as previously stated, the mother of the natural things of the new church; by “Tubal-Cain, an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 the doctrine of natural good and truth, “brass” denoting natural good, and “iron” natural truth. By “Naamah, the sister of Tubal-Cain” is signified a similar church, or the doctrine of natural good and truth outside of that church.
해설
AC.421에서 스베덴보리는 ‘씰라’(Zillah)를 새 교회에서 자연적 차원의 어머니로 규정합니다. 앞서 아다가 천적인 것(사랑의 거룩함)과 그로부터 나온 선을 낳는 어머니였다면, 씰라는 그 사랑과 신앙이 자연계의 삶과 행위 속으로 내려와 구체화되는 차원을 낳는 어머니입니다. 이는 새 교회가 내적 차원(천적, 영적)에만 머무르지 않고, 일상의 판단, 행위, 도덕, 질서로까지 확장됨을 뜻합니다. 교회는 마음과 생각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 자연적 삶 속에서 구현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씰라가 낳은 ‘두발가인’(Tubal-Cain)은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an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로 묘사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장인과 기술을 물질문명의 진보로 보지 않고,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의 형성으로 해석합니다. ‘구리’(brass, 놋)는 성경 전반에서 자연적 선을, ‘쇠’(iron, 철)는 자연적 진리를 표상합니다. 자연적 선이란 외적 삶에서 실천되는 선한 행위와 유익함이며, 자연적 진리란 그 행위를 올바르게 인도하는 도덕적, 합리적 진리입니다. 두발가인이 ‘스승’(instructor)으로 불린 것은, 이러한 선과 진리가 무질서한 관습이 아니라 가르쳐지고 전수되는 교리의 형태로 정착되었음을 뜻합니다.
이 지점에서 중요한 구분이 나타납니다. 자연적 선과 진리는 천적, 영적 선과 진리의 단순한 복제가 아닙니다. 그것들은 더 거칠고, 더 외적이며, 감각과 경험에 가까운 형태를 띱니다. 그러나 새 교회에서는 이 자연적 차원조차도 천적 사랑과 영적 신앙에서 내려온 질서 안에 놓입니다. 두발가인이 놋과 철을 다룬다는 표현은, 인간의 외적 삶이 선과 진리라는 재료로 형성되고 단련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즉, 자연적 삶 역시 교회의 일부로 회복됩니다.
또한 두발가인의 누이로 소개되는 ‘나아마’(Naamah)는, 그 교회 밖에 있는 유사한 교회, 혹은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표상합니다. ‘누이’(sister)라는 표현은 동일한 본질을 지니되, 직접적인 계보 안에는 속하지 않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는 새 교회 밖에서도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가르침이 존재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대목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교회가 아닌 곳에도 도덕, 정직, 질서, 유익함에 관한 참된 가르침이 있을 수 있으며, 그것들 역시 자연적 차원에서는 진리와 선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유사성’과 ‘동일성’을 엄격히 구분합니다. 나아마로 표상된 교리는 새 교회와 유사하지만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교리는 천적 사랑과 영적 신앙으로부터 직접 흘러내린 것이 아니라, 자연적 이성과 경험의 차원에 머무를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이’로 불린 것은, 그러한 교리들 역시 주님의 섭리 안에서 교회와 접촉하고 연결될 수 있는 여지를 지니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결국 AC.421은 새 교회의 구조가 천적(아다)–영적(야발, 유발)–자연적(씰라, 두발가인)으로 온전히 갖추어졌음을 보여 줍니다. 교회는 사랑과 신앙의 내적 차원에서 시작되어, 자연적 삶의 선과 진리로 완성됩니다. 그리고 이 자연적 차원은 교회 안에서뿐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으나, 참된 생명은 언제나 위로부터 내려오는 질서 안에서만 온전히 유지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통해, 새 교회가 결코 관념적이거나 내면에만 머무는 종교가 아니라, 삶 전체를 형성하는 전인적 질서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창4:21)
AC.420
말씀에는 다양한 악기들이 나오는데요, 저마다 나름의 상응을 가지지요. 이 저마다의 상응에 대해서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the Lord’s Divine mercy)를 따라 적절한 데서 보시게 됩니다. 여기선 단지 시편에 언급된 것들로만 말씀드리겠습니다.In the Word mention is made of various instruments, each having its own signification, as will be shown, of the Lord’s Divine mercy, in its proper place; here however we shall adduce only what is said in David: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시27:6) I will sacrifice in the tent of Jehovah sacrifices of shouting, I will sing, yea, I will sing praises unto Jehovah, (Ps. 27:6)
여기 ‘장막’(tent)은 천적인 것을, ‘즐거운’(shouting), ‘노래하며’(singing), 그리고 ‘찬송하리로다’(singing praises)는 거기서 나오는 영적인 걸 표현합니다. 계속해서where by “tent” is expressed what is celestial, and by “shouting,” “singing,” and “singing praises,” what is spiritual thence derived. Again:
1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2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열 줄 비파로 찬송할지어다3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아름답게 연주할지어다4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가 행하시는 일은 다 진실하시도다(시33:1-4) Sing unto Jehovah, O ye righteous, for his praise is comely for the upright; confess ye to Jehovah on the harp, sing unto him with the psaltery, an instrument of ten strings. Sing unto him a new song, play skillfully with a loud noise; for the Word of Jehovah is right, and all his work is in the truth, (Ps. 33:1–4)
신앙의 진리들을 가리키는데요, 다음은 그 내용입니다.denoting the truths of faith, concerning which these things are said.
[2]영적인 것들, 즉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은 하프와 수금 및 노래와 비슷한 악기들을 가지고 축하한 반면, 신앙의 거룩한 것들, 곧 천적인 것들은 관악기, 그러니까 트럼펫 같은 걸로 축하했는데요, 이것이 성전에서, 그리고 왜 그렇게나 자주, 그렇게나 많은 악기가 사용되었는지 하는 이유, 즉 이런저런 주제를 해당 특정 악기로 축하하기 위해서였으며, 그 결과 ‘아, 이런 주제를 축하하기 위해 이런 악기를 선택한 것이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Spiritual things, or the truths and goods of faith, were celebrated with the harp and psaltery, with singing and analogous instruments, but the holy or celestial things of faith were celebrated with wind instruments, such as trumpets and the like; and this was why so many instruments were used about the temple and so often, in order that this or that subject might be celebrated with certain instruments; and in consequence of this the instruments came to be taken and understood for the subjects that were celebrated with them.
[3]계속해서Again:
22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또 비파로 주를 찬양하며 주의 성실을 찬양하리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주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23내가 주를 찬양할 때에 나의 입술이 기뻐 외치며 주께서 속량하신 내 영혼이 즐거워하리이다(시71:22, 23) I will confess to thee with the psaltery, even thy truth, O my God; unto thee will I sing praises with the harp, O thou holy one of Israel; my lips shall sing when I sing praises unto thee, and my soul which thou hast redeemed, (Ps. 71:22–23)
여기 또한 신앙의 진리들과 상응하는 내용입니다. 계속해서where also the truths of faith are signified. Again:
감사함으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수금으로 하나님께 찬양할지어다(시147:7) Answer to Jehovah in confession, sing praises upon the harp unto our God; (Ps. 147:7)
‘감사함’(confession)은 신앙의 천적인 것들에 관한 것이고, 그래서 그 언급에 ‘여호와’(Jehovah)가 나오는 것이며,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sing praises upon the harp)는 신앙의 영적인 것들에 관한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God)이 나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confession” has respect to the celestial things of faith, and therefore mention is made of “Jehovah”; and to “sing praises upon the harp” has reference to the spiritual things of faith, wherefore “God” is spoken of. Again:
춤추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 소고와 수금으로 그를 찬양할지어다(시149:3) Let them praise the name of Jehovah in the dance, let them sing praises unto him with the timbrel and harp, (Ps. 149:3)
여기 ‘소고’(timbrel, 탬버린)는 선에, ‘수금’(harp)은 진리, 곧 그들이 찬양하는 진리에 각각 상응합니다.where the “timbrel” signifies good, and the “harp” truth, which they praise.
[4]계속해서Again:
3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4소고 치며 춤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5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시150:3-5) Praise God with the sound of the trumpet; praise him with the psaltery and harp; praise him with the timbrel and dance; praise him with stringed instruments and the organ; praise him upon the loud cymbals; praise him upon the cymbals of shouting. (Ps. 150:3–5)
이 악기들은 신앙의 선들과 진리들을 가리키는데, 이들은 모두 찬양에 관한 여러 주제였습니다. 굳이 이렇게 죽 나열한 이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각각의 악기들이 무슨 저마다 구별되는 상응 없이도 이렇게 쓸데없이 언급되었다고 믿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계속해서 다음은 선과 진리의 지식에 관한 언급입니다.These instruments denote the goods and the truths of faith which were the subjects of praise; for let no one believe that so many different instruments would have been here mentioned unless each had a distinct signification. Again, referring to the knowledges of good and truth:
3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4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시43:3, 4) O send out thy light and thy truth, let them lead me, let them bring me unto the mountain of thy holiness, and to thy habitations, and I will go in to the altar of God, unto God, the gladness of my exultation; yea, I will confess unto thee upon the harp, O God, my God. (Ps. 43:3, 4)
[5]이사야에서는, 신앙과 그 지식에 속한 것들을 언급하면서In Isaiah, referring to the things that are of faith, and the knowledges thereof:
잊어버린 바 되었던 너 음녀여 수금을 가지고 성읍에 두루 다니며 기묘한 곡조로 많은 노래를 불러서 너를 다시 기억하게 하라 하였느니라 (사23:16) Take a harp, go about the city, play well, sing many songs, that thou mayest be called to remembrance. (Isa. 23:16)
같은 내용이 계시록에서는 좀 더 분명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The same is expressed still more plainly in John: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계5:8) The four animals and the four and twenty elders fell down before the lamb, having every one of them harps, and golden vials full of incense offerings, which are the prayers of the saints, (Rev. 5:8)
여기서 분명한 건, 생물들과 장로들이 가진 건 거문고가 아니라 ‘거문고’(harps)가 상응하고 있는 신앙의 진리들과, 그리고 ‘향이 가득한 금 대접’(golden vials full of incense offerings)이 상응하고 있는 신앙의 선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시편에서는 악기 연주를 일컬어 ‘찬송’(praises)과 ‘감사함’(confessions)이라 하고 있습니다.where it must be evident to everyone that the animals and elders had not harps, but that by “harps” are signified the truths of faith, and by “golden vials full of incense offerings,” the goods of faith. In David the performances on the instruments are called “praises” and “confessions.” (Ps. 42:5; 69:3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42:5)
30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위대하시다 하리니31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시69:30, 31)
계시록 또 다른 데서는And in another place in John:
2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데 내가 들은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이 그 거문고를 타는 것 같더라3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계14:2, 3) I heard a voice from heaven as the voice of many waters, and I heard the voice of harpers harping with their harps, and they sang a new song. (Rev. 14:2–3)
계속해서 또 다른 데서And in another place: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닷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계15:2) I saw them standing by the sea of glass having the harps of God. (Rev. 15:2)
다음 사실도 말씀드리면 좋을 것 같습니다. 천사들과 영들은 선과 진리에 관한 자신들의 차이점을 따라 소리를 구분하는데요, 노래와 악기에서 나오는 소리뿐 아니라 목소리에서 나오는 소리로도 구별합니다. 그들은 조화를 이루는 소리만 받아들이는데요, 그렇게 해서 소리의 일치, 그리고 그 결과 악기의 일치가 있게 됩니다. 선과 진리의 본성(nature)과 본질(essence)을 유지하면서 말이지요.It is worthy of mention that angels and spirits distinguish sounds according to their differences with respect to good and truth, not only those produced in singing and by instruments, but also those of voices; and they admit none but such as are in accord, so that there may be a concord of the sounds, and consequently of the instruments, with the nature and essence of the good and the true.
해설
AC.420에서 스베덴보리는 성경에 등장하는 다양한 악기들이 결코 우연적이거나 장식적인 요소가 아니라, 각각 서로 다른 영적 실재를 표상하고 있음을 체계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는 먼저 다윗의 시편(시27:6)을 인용하여, ‘여호와의 장막’(the tent of Jehovah)에서 드려지는 제사와 노래를 통해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구별을 제시합니다. ‘장막’(tent)은 사랑의 거룩한 것, 곧 천적인 영역을 표상하고, 그 장막 안에서 터져 나오는 ‘즐거운’(shouting), ‘노래하며’(singing), ‘찬송하리로다’(singing praises)는 그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신앙의 영적인 표현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사랑이 근원이 되고, 신앙의 진리와 선은 그 사랑을 노래로 표현하는 결과가 됩니다.
시편 33편에서 ‘수금’(harp), ‘비파’(psaltery), ‘새 노래’(new song), ‘즐거운 소리’(loud noise)가 언급되는 것은, 예배의 풍성함을 단순히 묘사하려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진리들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고백되고 찬양됨을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특히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the Word of Jehovah is right)라는 구절과 함께 음악이 언급되는 점에서, 이 악기들은 신앙의 진리와 그 질서를 표상합니다. 즉, 악기는 감정의 분출이 아니라, 진리와 선이 조화롭게 배열된 상태를 드러내는 도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중요한 구분을 합니다. 현악기와 노래는 주로 영적인 것들, 곧 신앙의 진리와 선을 기념하는 데 사용되었고, 나팔과 같은 관악기는 천적인 것들, 즉 사랑의 거룩함을 기념하는 데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분 때문에 성전 예배에는 매우 다양한 악기들이 사용되었으며, 각각의 악기는 기념되는 주제에 따라 선택되었습니다. 그 결과, 시간이 지나면서 악기 자체가 곧 그것으로 기념되던 영적 실재의 표상으로 인식되게 되었습니다. 이는 상응의 질서가 예배 문화 속에 깊이 스며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시편 71편과 147편에서는 ‘비파로 주를 찬양하며’(confess to thee with the psaltery),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sing praises upon the harp)는 표현이 반복되는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여호와’(Jehovah)와 ‘하나님’(God)이라는 명칭의 차이에 주목합니다. ‘여호와’는 사랑의 천적인 것을 가리키고, ‘하나님’은 신앙의 영적인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고백’(confession)이 여호와를 향할 때는 천적인 것을, 수금으로 노래하며 하나님께 찬송할 때는 영적인 신앙의 진리와 선을 의미합니다. 이 미묘한 구분은 성경 언어가 얼마나 정밀한 상응의 체계 위에 놓여 있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시편 149편과 150편은 이러한 구조를 극적으로 확장합니다. ‘소고’(timbrel), ‘춤’(dance), ‘수금’(harp), ‘현악’(stringed instruments), ‘퉁소’(organ), ‘큰 소리 나는 제금’(loud cymbals), ‘높은 소리 나는 제금’(cymbals of shouting)까지 나열되는 것은, 예배의 흥을 돋우기 위한 장황한 수사가 아니라, 선과 진리의 모든 종류가 주님을 찬양하는 상태를 총체적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말합니다. 만일 각각의 악기가 서로 다른 의미를 갖지 않는다면, 성경이 이렇게 많은 악기를 굳이 구분하여 언급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말씀의 모든 세부가 의미 없는 장식이 아님을 강조하는 대목입니다.
이사야 23장과 시편 43편에서도 수금은 신앙의 진리, 빛과 진리는 영적 인도를 표상합니다. 요한계시록에 이르면 이 상징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four animals and the four and twenty elders)가 각기 ‘수금’(harps)을 들고 있으며, ‘향이 가득한 금 대접’(golden vials full of incense offerings)을 가진 장면은, 문자 그대로 천상 존재들이 악기를 연주하고 향을 들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수금은 신앙의 진리, 향은 신앙의 선, 곧 체어리티의 기도를 표상합니다. 이는 상응을 모르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장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마지막으로 매우 중요한 증언을 덧붙입니다. 천사들과 영들은 소리를 단순한 음향으로 듣지 않고, 그 소리 안에 담긴 선과 진리의 성질에 따라 즉각적으로 분별합니다. 노래의 음성, 악기의 울림, 말의 소리까지도 그 배후의 영적 상태에 따라 받아들여지며, 선과 진리에 합당하지 않은 소리는 자연스럽게 배제됩니다. 그래서 하늘에는 언제나 소리의 조화, 곧 선과 진리의 조화가 있으며, 이 조화가 곧 하늘의 질서입니다.
결국 AC.420은 음악과 악기가 단순한 예배 도구가 아니라, 천적인 사랑과 영적인 신앙이 어떻게 표현되고 결합되는지를 보여 주는 살아 있는 표상임을 밝혀 줍니다. 성경에 나오는 악기 하나하나는, 교회와 인간 내면에서 사랑과 신앙이 울리는 방식을 드러내는 상응의 언어이며, 이를 통해 말씀은 지금도 살아서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습니다.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창4:21)
AC.419
천적인 것이 사랑의 거룩한 것과 그로 인한 선이듯, 영적인 것은 신앙의 진리와 선입니다. 참되고 선한 걸 이해하는 건 신앙에 속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신앙 지식은 이 둘을 포함하지만, 그러나 신앙이 가르치는 바대로 되는 거, 그 결과 주님 사랑의 사람이 되어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이 되는 건 천적입니다. 즉 이해하고 그 안에 머무르는 건 영적이지만, 이해한 걸 실천에 옮겨 그런 사람이 되는 건 천적이라는 말입니다. 신앙이 이들 두 가지를 포함하기 때문에, 두 악기, 곧 ‘수금과 퉁소’(the harp and organ)로 상응하고 있습니다. 하프는, 다들 아시듯 현악기이며, 그래서 영적 진리를, 그리고 오르간은 현악기와 관악기 사이 중간, 곧 영적 선을 상응합니다.As celestial things are the holy things of love and the derivative goods, so spiritual things are the truths and goods of faith; for it belongs to faith to understand not only what is true, but also what is good. The knowledges of faith involve both. But to be such as faith teaches is celestial. As faith involves both of these, they are signified by two instruments, the harp and the organ. The harp, as everyone knows, is a stringed instrument, and therefore signifies spiritual truth; but the organ, being intermediate between a stringed instrument and a wind instrument, signifies spiritual good.
해설
AC.419에서 스베덴보리는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구분을 다시 한번 분명히 하면서, 동시에 이 둘이 어떻게 신앙 안에서 결합되는지를 설명합니다. 그는 먼저 이렇게 정리합니다. ‘천적인 것’(celestial things)은 사랑의 거룩한 것과 그로부터 파생된 선이고, ‘영적인 것’(spiritual things)은 신앙의 진리와 선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신앙이 단지 참된 것을 아는 능력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이란 무엇이 참인지뿐 아니라 무엇이 선한지까지 이해하는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지식, 곧 ‘신앙의 앎’ 속에는 진리와 선이 함께 포함됩니다.
그러나 그는 즉시 중요한 구분을 덧붙입니다. 신앙이 진리와 선을 이해하고 인식하는 것은 영적인 영역에 속하지만, 그 이해한 바를 존재 자체로 살아내는 것, 곧 그 사람 자체가 그렇게 되는 것은 천적인 영역에 속합니다. 다시 말해, 이것이 선이라고 아는 것은 신앙의 일이고, 그 선 안에 거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사랑의 일입니다. 이 구분은 신앙과 사랑,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의 관계를 오해 없이 이해하게 하는 핵심 열쇠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스베덴보리는, 영적인 것들이 두 악기, 수금과 퉁소(오르간)로 표상된다고 설명합니다. 신앙 안에는 진리와 선이 함께 들어 있기 때문에, 하나의 악기가 아니라 두 악기가 필요합니다. 수금은 현악기로서, 줄의 진동을 통해 소리를 냅니다. 이는 분명하고 구별되는 음, 곧 진리의 성격과 상응합니다. 진리는 구분하고, 밝히며, 질서를 세웁니다. 그래서 수금은 영적 진리를 표상합니다.
반면 퉁소, 혹은 오르간은 성격상 현악기와 관악기 사이의 중간적 성질을 지닙니다. 공기의 흐름이 관을 통해 소리를 내지만, 그 소리는 일정한 구조와 질서 안에서 형성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중간성’을 근거로, 오르간이 영적 선을 표상한다고 말합니다. 영적 선은 진리처럼 날카롭게 구분되지는 않지만, 사랑처럼 즉각적인 생명력만으로 움직이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진리에 의해 형성되고, 사랑을 향해 나아가는 선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음악의 물리적 특성을 억지로 영적 의미에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니라, 상응의 질서를 따라 설명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진리는 분별과 명료성을 지니고, 선은 온화함과 유익함을 지닙니다. 현악기의 또렷한 음은 진리의 성격과 상응하고, 공기의 흐름 속에서 조화롭게 울리는 오르간의 소리는 선의 성격과 상응합니다. 이 둘이 함께 연주될 때, 비로소 신앙의 전체, 곧 진리와 선이 조화를 이루는 상태가 표현됩니다.
결국 AC.419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신앙은 결코 단일한 차원이 아니며, 진리와 선의 이중 구조를 지닙니다. 그리고 이 구조는 음악이라는 표상을 통해 가장 잘 드러납니다. 수금만 있다면 신앙은 차갑고 분석적인 지식에 머물고, 오르간만 있다면 신앙은 방향 없는 선의 감정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둘이 함께 있을 때, 신앙은 진리를 알고 선을 행하며, 사랑을 향해 나아가는 살아 있는 질서가 됩니다.
따라서 유발이 ‘수금과 퉁소를 잡는 자의 조상’으로 불린 것은, 교회 안에서 신앙이 진리와 선의 균형 속에 자리 잡았음을 알리는 표상입니다. 이는 천적인 사랑(야발)에서 출발하여, 영적인 신앙(유발)으로 질서 있게 전개되는 새 교회의 구조를 완성하는 중요한 한 조각이며, 스베덴보리가 음악의 상응을 통해 보여 주고자 한 깊은 영적 통찰입니다.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창4:21)
AC.418
앞 절에서는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들을 다루었다면, 본 절에서는 신앙에 속한 영적인 것들을 다루면서, 이를 ‘수금과 퉁소’(harp and organ)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프 같은 현악기가 신앙의 영적인 것들과 상응한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생각해 보면 분명한데요, 표상 교회(the representative church)의 예배에서 볼 수 있는 비슷한 악기들과 찬양이 상응하는 바가 이것 말고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그 예배에 그렇게나 많은 싱어와 뮤지션이 있었던 건데요, 그 모든 것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바는 바로 천국의 모든 기쁨은 마음의 즐거움을 낳는다(all heavenly joy produces gladness of heart), 즉 천국의 기쁨을 즐거운 마음으로 표현하고자 함이며, 그걸 찬양, 즉 성가대와 이를 돕는 현악단으로 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노래(singing), 즉 찬양이라는 게 시작되었고, 계속해서 뭔가 이 찬양을 도울 수 있는 걸 고안하다 보니 현악기(stringed instruments)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마음의 애정(The affection of the heart)은 천적이지만, 그로 인한 찬양은 영적입니다. 노래, 즉 찬양과 이와 유사한 것들은 영적인 걸 가리킨다는 사실이 천사 성가대들(the angelic choirs)을 통해 제게 분명해졌는데요, 이 천사 성가대는 두 종류, 곧 천적 성가대와 영적 성가대가 있습니다. 영적 성가대는 천적 성가대와 쉽게 구별되는데, 그들이 찬양할 때 내는 바이브레이션 [sono canoro alato] 때문이지요. 이는 현악기 소리와 비슷한데요, 이런 내용에 대한 더 깊은 언급은 주님의 신성한 자비(the Divine mercy of the Lord)로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태고인들(太古, The most ancient people)은 천적인 건 심장 영역(the province of the heart)과, 영적인 건 폐(the lungs) 영역과 관련이 있다고 보았고, 그 결과 폐에 관한 걸 노랫소리와 그 유사한 것들로 상응하는 것이며, 그래서 목소리나 그런 악기들의 사운드로 그런 상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 모든 내용은 단지 심장과 폐가 일종의 결혼, 그러니까 사랑과 신앙의 결혼 같은 그런 결혼을 표현할 뿐 아니라, 또한 천적 천사들은 심장 영역에, 영적 천사들은 폐 영역에 속한다는 것도 보여 주었습니다. 지금 이 구절에서 의미하는 것이 이런 거라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도 또한 알 수 있는데요, 이는 주님의 말씀(the Word of the Lord)이며, 그저 유발이 그런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라는 의미밖에 뭐 더 다른 아무것도 없다면 거기엔 무슨 생명이라는 게 없으며, 이런 건 알아도 아무한테도 아무 소용도 없는 거라는 사실입니다.The former verse treated of celestial things which are of love, but this verse treats of spiritual things which are of faith, and these are expressed by the “harp and organ.” That by stringed instruments, such as harps and the like, are signified the spiritual things of faith is evident from many considerations. Similar instruments, and also the singing, in the worship of the representative church, represented nothing else, and it was on this account that there were so many singers and musicians, the cause of this representation being that all heavenly joy produces gladness of heart, which was expressed by singing, and in the next place by stringed instruments that emulated and exalted the singing. Every affection of the heart is attended with this: that it produces singing, and consequently what is connected with singing. The affection of the heart is celestial, but the consequent singing is spiritual. That singing and that which resembles it denote what is spiritual has been evident to me from the angelic choirs, which are of two kinds, celestial and spiritual. The spiritual choirs are easily distinguished from the celestial by their vibrant singing tone [sono canoro alato], comparable to the sound of stringed instruments, of which, by the Divine mercy of the Lord, we shall speak hereafter. The most ancient people referred what was celestial to the province of the heart, and what was spiritual to that of the lungs, and consequently to whatever pertains to the lungs, as do the singing voice and things like it, and therefore the voices or sounds of such instruments. The ground of this was not merely that the heart and lungs represent a kind of marriage, like that of love and faith, but also because the celestial angels belong to the province of the heart, and the spiritual angels to that of the lungs. That such things are meant in the passage before us, may also be known from the fact that this is the Word of the Lord, and that it would be destitute of life if nothing more were implied than that Jubal was the father of such as play upon the harp and the organ; nor is it of any use to anyone to know this.
해설
AC.418에서 스베덴보리는 본문이 다루는 주제가 앞 절과 분명히 다르다는 점을 먼저 밝힙니다. 앞선 절이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들을 다루었다면, 이 절은 신앙에 속한 영적인 것들을 다룹니다. 그리고 이 영적인 것들이 ‘수금과 퉁소’로 표현됩니다. 이는 성경이 음악적 도구를 언급할 때, 결코 문화사나 예술사의 기원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영적 상태를 표상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현악기, 곧 수금과 같은 악기들이 신앙의 영적인 것들을 뜻한다는 점을 여러 각도에서 설명합니다. 구약의 대표적 교회, 곧 표상적 교회에서 음악과 노래가 예배의 핵심을 이루었던 이유는, 그것들이 하늘의 기쁨을 자연계에서 상응적으로 표현하는 수단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기쁨은 곧 마음의 즐거움으로 나타나고, 이 즐거움은 먼저 노래로 표현되며, 이어서 노래를 북돋우고 고양하는 현악기로 확장됩니다. 이 질서 자체가 이미 천적인 것에서 영적인 것으로 흘러가는 구조를 보여 줍니다.
여기서 중요한 구분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마음의 애정 자체는 천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애정이 소리와 음성, 곧 노래로 표현될 때, 그것은 영적인 영역에 속합니다. 즉, 사랑은 내적인 불이며, 노래는 그 불이 밖으로 울려 퍼지는 진동입니다. 그러므로 음악은 사랑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온 신앙의 표현, 곧 영적인 상태의 표상입니다. 이 때문에 음악과 노래는 언제나 신앙의 진리와 선, 그 감응과 기쁨을 나타내는 도구로 사용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체험을 덧붙여, 이 사실이 단지 추론이 아니라 영계의 실제 질서임을 밝힙니다. 그는 천사들의 합창을 관찰했으며, 그 합창이 천적인 합창과 영적인 합창으로 구분됨을 증언합니다. 특히 영적인 합창은 ‘날개 달린 듯한 진동하는 노랫소리’를 내며, 이는 현악기의 울림과 유사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천적인 합창이 더 깊고 내적인 감동을 주는 반면, 영적인 합창은 분명한 음성, 질서 있는 진동, 전달되는 진리의 성격을 띤다는 점입니다. 이는 신앙의 영적 차원이 갖는 특성과 정확히 상응합니다.
이러한 구분은 태고교회 사람들이 이해하던 심장과 폐의 질서와도 연결됩니다. 그들은 천적인 것을 심장의 영역, 영적인 것을 폐의 영역에 속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심장은 사랑과 생명의 중심이며, 폐는 호흡과 음성의 기관입니다. 노래와 말, 소리는 모두 폐의 작용에 속합니다. 따라서 노래와 악기는 자연스럽게 영적인 것, 곧 신앙의 영역을 표상합니다. 이 질서는 단순한 생리학적 비유가 아니라, 사랑과 신앙의 결합이 인체 안에서 상응적으로 드러난 구조입니다. 사랑이 심장이라면, 신앙은 폐이며, 둘은 분리될 수 없으나 구별됩니다.
이 모든 설명을 통해 스베덴보리는, “‘유발이 수금과 퉁소를 잡는 자의 조상’이라는 표현이 만일 문자적 사실에 그친다면, 성경은 생명 없는 기록이 되고 만다”고 말합니다. 누가 최초의 음악가였는지를 아는 것은 영혼의 구원이나 신앙의 삶에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주님의 말씀인 이상, 그 안에는 반드시 교회와 인간 내면의 영적 상태를 드러내는 생명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바로 그 생명이, 음악이라는 표상을 통해 신앙의 영적인 기쁨과 진리의 조화로 드러납니다.
결국 AC.418의 요지는 분명합니다. 새 교회가 회복될 때, 사랑의 거룩함(천적인 것)만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신앙의 영적인 질서도 함께 회복됩니다. 그 영적인 질서는 차갑고 추상적인 교리가 아니라, 노래처럼 울리고, 음악처럼 조화를 이루는 신앙입니다. 수금과 퉁소는 바로 그 상태를 표상하며,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지 않고, 사랑의 기쁨을 진리의 언어로 노래하는 교회가 어떤 모습인지를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And his brother’s name was Jubal; he was the father of everyone that playeth upon the harp and organ. (창4:21)
AC.417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his brother’s name was Jubal)은 그 교회의 영적인 것들에 관한 독트린(the doctrine of the spiritual things of the same church)에,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father of everyone that playeth upon the harp and organ)은 신앙의 진리와 선(the truths and goods of faith)에 각각 상응합니다.By “his brother’s name was Jubal” is signified the doctrine of the spiritual things of the same church; by the “father of everyone that playeth upon the harp and organ” are signified the truths and goods of faith.
해설
AC.417에서 스베덴보리는 야발의 동생 ‘유발’(Jubal)을 통해, 새로 시작되는 교회 안에서 영적인 것들의 교리적 측면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설명합니다. 앞서 야발이 장막과 가축으로 표상된 천적인 것(사랑의 거룩함과 그로부터 나온 선)을 대표했다면, 유발은 그와 형제 관계로 소개되며, 같은 교회 안에 속한 영적인 차원, 곧 신앙의 진리와 선에 관한 교리를 대표합니다. ‘형제’라는 표현은 두 요소가 서로 경쟁하거나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교회 안에서 서로를 전제로 공존하는 관계임을 나타냅니다.
성경은 유발을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음악은 단순한 예술 활동이 아니라, 스베덴보리에게서는 영적 상태가 진리와 선의 질서 속에서 조화롭게 표현되는 방식을 표상합니다. 수금과 퉁소 같은 악기는 소리를 통해 감정을 일으키고 마음을 움직이는데, 이는 진리가 단순한 지식으로 머무르지 않고 선과 결합되어 삶을 울리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음악은 영적인 것들이 교리로 정리되고, 동시에 삶의 감각과 정서에까지 스며드는 상태를 상응적으로 보여 줍니다.
특히 ‘조상, 곧 아버지’라는 표현은, 유발이 음악의 역사적 창시자라는 뜻이 아니라, 영적 교리가 정식으로 자리 잡아 이후의 모든 신앙적 표현의 근원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신앙의 진리와 선이 교리로 체계화되지 않으면, 사랑은 방향을 잃고 감정적 열심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반대로 교리가 사랑과 분리되면, 그것은 가인의 길처럼 생명 없는 지식이 됩니다. 유발은 이 두 극단을 피하여, 천적인 사랑(야발)에서 나온 영적인 교리가 올바른 질서 안에서 형성되었음을 표상합니다.
또한 음악의 특징은 질서와 비례, 리듬과 조화에 있습니다. 이는 신앙의 진리와 선이 무질서하게 흩어진 정보가 아니라, 서로 상응하며 조화를 이루는 체계임을 보여 줍니다. 수금과 퉁소가 각각 다른 음색과 역할을 가지면서도 하나의 음악을 이루듯, 교회의 진리와 선도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지되 하나의 신앙 고백과 삶의 방향으로 수렴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유발은, 새 교회가 단지 사랑의 열정만을 회복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을 바르게 인도할 영적 교리를 함께 회복했음을 나타냅니다.
AC.417의 핵심은, 새 교회의 회복이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균형 있는 재건이라는 점입니다. 야발이 사랑의 거룩함과 선의 삶을 대표한다면, 유발은 그 사랑이 진리의 언어로 노래 되고, 교리로 가르쳐질 수 있게 되는 상태를 대표합니다. 이 둘은 분리될 수 없으며, 형제라는 표현 속에 이미 그 질서가 암시되어 있습니다. 결국 스베덴보리는 유발을 통해, 참된 교회는 사랑만 있는 교회도 아니고, 교리만 있는 교회도 아니라, 사랑에서 나온 교리가 진리와 선의 조화로운 ‘음악’처럼 울리는 교회임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본절,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가 사랑의 거룩한 것과 그로 인한 선(the holy things of love and the derivative goods)을 상응하고 있음이 분명한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 곧 야발이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dwelt in tents and in folds of cattle)의 처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아벨의 경우 때문인데요, 그는 아담과 이브의 둘째 아들로, ‘양 치는 자’(a shepherd of the flock)였기 때문입니다. 야발은 가인으로부터 세어 일곱 번째 후손이었습니다.That the holy things of love and the derivative goods are signified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Jabal was not the first of those who “dwelt in tents and in folds of cattle,” for it is said likewise of Abel, the second son of Adam and Eve, that he was “a shepherd of the flock,” and Jabal was the seventh in the order of descent from Cain.
해설
스베덴보리는 AC.416에서 매우 중요한 해석 원칙 하나를 분명히 합니다. 그것은 바로, ‘야발’(Jabal)이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로 불린 것이, 역사적, 연대기적 최초성을 뜻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성경은 이미 창4:2에서 아벨을 ‘양 치는 자’, 곧 목자로 소개합니다. 만일 이 표현을 문자 그대로 직업의 기원이나 생활 방식의 최초 기록으로 이해한다면, 야발은 결코 ‘조상, 곧 아버지’가 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야발은 가인의 계보에서 일곱째에 해당하는 인물로, 시간적으로도 훨씬 뒤에 등장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의 이 표현들이 역사적 사실을 배열한 연대기가 아니라, 영적 상태와 교회의 변화를 표상적으로 배열한 구조임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야발이 ‘아버지’로 불린 이유는, 그가 처음으로 장막 생활이나 목축을 시작했기 때문이 아니라, 새 교회가 회복되는 국면에서 ‘천적인 것과 그로부터 나온 선’이 다시 정식으로 자리 잡았음을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조상’, 곧 ‘아버지’라는 표현은 시간적 기원이 아니라 질서적, 본질적 기원을 가리킵니다.
아벨과 야발의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벨은 태고교회 초기에 있었던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사랑의 상태, 곧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지 않았던 시기를 표상합니다. 그에게서 ‘목자’라는 표상이 사용된 것은, 그 시대에 사랑과 선이 본성적으로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상태는 가인에 의해 파괴되었고, 이후 교회는 황폐의 길을 걸었습니다. 야발은 그 황폐 이후, 다시 시작되는 새 교회 국면에서의 사랑과 선을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두 사람은 같은 상징을 공유하지만, 서로 다른 시대와 서로 다른 영적 국면을 대표합니다.
이 점에서 ‘야발이 가인의 계보에서 일곱째’라는 사실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숫자 ‘일곱’은 언제나 완결, 거룩, 한 주기의 끝과 새 시작의 문턱을 의미합니다. 야발이 일곱째에 등장한다는 것은, 가인의 계보로 대표되는 신앙 중심, 사랑 상실의 흐름이 완전히 소진된 이후, 그 잔해 위에서 사랑과 선의 회복이 다시 나타났음을 뜻합니다. 마치 여러 날 산불로 산 전체가 완전히 타버려 다시는 초록 식물을 볼 수 없을 것 같아도 그러나 놀랍게도 이듬해 봄처럼 잠시 시간이 지나면 조용히 새싹이 돋아나는 것과 같지요. 그러므로 야발은 타락의 연속선상에 있는 인물이 아니라, 황폐 이후에 허락된 회복의 표상입니다.
따라서 AC.416은 우리로 하여금 창세기를 읽을 때 반드시 경계해야 할 한 가지를 분명히 합니다. 즉, ‘누가 먼저였는가’, ‘무엇이 처음 시작되었는가’라는 자연적, 연대기적 질문으로 본문에 접근하면, 본문의 핵심을 놓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는 인류 문명의 연표를 주려는 책이 아니라, 교회와 인간 내면의 상태가 어떻게 생성, 타락, 황폐, 보존, 회복되는지를 보여 주는 영적 역사입니다.
결국 AC.416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려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야발이 ‘장막과 가축의 아버지’로 불린 것은, 아벨보다 늦게 등장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의 거룩한 것과 그로부터 나온 선이, 새 교회의 질서 안에서 다시 아버지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이는 주님께서 교회를 다루시는 방식이 언제나 시간의 순서가 아니라 영적 상태의 순서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father of cattle)은 사랑의 거룩한 것들로 말미암는 선(the good that is derived from the holy things of love)과 상응하는데요, 이는 위 본 장 2절에서 보여드린 걸 보면 분명합니다. 거기 보면, ‘양 치는 자’(shepherd of the flock)는 체어리티의 선(the good of charity)과 상응합니다. 다만 여기서는 ‘양 치는 자’(shepherd) 대신 ‘조상’(father)이, ‘양’(flock) 대신 ‘가축’(cattle)이 사용되었는데요, ‘가축’이라는 말이, 야발을 가리켜 이것의 ‘조상’(father)이라 하고 있는데요, ‘장막’(tent) 바로 뒤를 잇는 걸 볼 때 분명한 건, 이는 사랑의 거룩한 것으로부터 나오는 선(the good that comes from the holy of love)에 상응한다는 것, 그리고 이는 어떤 거주지나 가축우리, 그러니까 장막과 가축우리에 거주하는 자들의 조상이라는 의미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이들 표현이 사랑의 천적인 것들로 말미암는 선(goods from the celestial things of love)에 상응한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이 말씀에 나오는 여러 구절을 보면 분명합니다. 가령 예레미야에 보면,That by the “father of cattle” is signified the good that is derived from the holy things of love, is evident from what was shown above, at verse 2 of this chapter, where it was shown that a “shepherd of the flock” signifies the good of charity. Here however the term “father” is employed instead of “shepherd,” and “cattle” instead of “flock”; and the word “cattle,” of which Jabal is said to be the “father,” follows immediately after “tent,” whence it is evident that it signifies the good that comes from the holy of love, and that there is meant a habitation or fold for cattle, or the father of them that dwell in tents and in folds for cattle. And that these expressions signify goods from the celestial things of love, is evident from various passages in the Word. As in Jeremiah:
내가 내 양 떼의 남은 것을 그 몰려갔던 모든 지방에서 모아 다시 그 우리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의 생육이 번성할 것이며(렘23:3) I will gather the remnants of my flock out of all lands whither I have scattered them, and I will bring them again to their folds, that they may be fruitful and multiply. (Jer. 23:3)
에스겔에는In Ezekiel:
좋은 꼴을 먹이고 그 우리를 이스라엘 높은 산에 두리니 그것들이 그곳에 있는 좋은 우리에 누워 있으며 이스라엘 산에서 살진 꼴을 먹으리라(겔34:14) I will feed them in a good pasture, and upon the mountains of the height of Israel shall their fold be; there shall they lie down in a good fold, and in a fat pasture shall they feed upon the mountains of Israel, (Ezek. 34:14)
여기 ‘우리’(folds)와 ‘꼴’(草場, pastures)은 사랑의 선(the goods of love)을 가리키고 있는데, 이걸 ‘살진 것’(fatness)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에는where “folds” and “pastures” denote the goods of love, of which “fatness” is predicated. In Isaiah:
네가 땅에 뿌린 종자에 주께서 비를 주사 땅이 먹을 것을 내며 곡식이 풍성하고 기름지게 하실 것이며 그날에 네 가축이 광활한 목장에서 먹을 것이요(사30:23) He shall give the rain of thy seed wherewith thou shalt sow the ground; and bread of the increase of the ground shall be fat and full of oil; in that day shall he feed thy cattle in a broad meadow, (Isa. 30:23)
여기 ‘먹을 것’(bread)은 천적인 것(what is celestial)과, 거기서 가축이 먹어 ‘살지는 것’(fat)은 그때 나오는 선(the goods thence derived)과 각각 상응합니다. 예레미야에는where by “bread” is signified what is celestial, and by the “fat” whereon the cattle should feed, the goods thence derived. In Jeremiah:
11여호와께서 야곱을 구원하시되12그들이 와서 시온의 높은 곳에서 찬송하며 여호와의 복 곧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어린 양의 떼와 소의 떼를 얻고 크게 기뻐하리라 그 심령은 물 댄 동산 같겠고(렘31:11, 12) Jehovah hath redeemed Jacob, and they shall come and sing in the height of Zion, and shall flow together to the good of Jehovah, for the wheat, and for the new wine, and for the oil, and for the sons of the flock, and of the herd; and their soul shall be as a watered garden, (Jer. 31:11–12)
여기 ‘곡식’(wheat), ‘기름’(oil)은 여호와의 거룩(the holy of Jehovah), 곧 여호와께 속한 거룩한 것에 대한, 그리고 ‘새 포도주’(new wine)와 ‘어린 양의 떼와 소의 떼’(sons of the flock and of the herd), 즉 ‘가축’(cattle)은 거기서 나오는 선에 대한 설명입니다. 다시where the holy of Jehovah is described by “wheat” and “oil,” and the goods derived from it by “new wine” and the “sons of the flock and of the herd,” or of “cattle.” Again:
목자들이 그 양 떼를 몰고 와서 주위에 자기 장막을 치고 각기 그 처소에서 먹이리로다(렘6:3) The shepherds and the flocks of their cattle shall come unto the daughter of Zion; they shall pitch their tents toward her round about; they shall feed everyone his own space. (Jer. 6:3)
‘시온의 딸’(daughter of Zion)은 천적 교회(the celestial church)를 가리킵니다. ‘장막’(tents)과 ‘양 떼’(flocks of cattle)가 그 교회에 속한 걸로 서술되는 교회 말이지요.The “daughter of Zion” denotes the celestial church, of which “tents” and “flocks of cattle” are predicated.
해설
스베덴보리는 ‘야발은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라는 표현을 통해, 사랑의 거룩한 것(천적인 것)에서 흘러나오는 선이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앞선 AC.414에서 ‘장막’이 사랑의 거룩한 것을 표상한다면, 그 다음에 이어지는 ‘가축’은 그 사랑에서 자연스럽게 산출되는 선의 열매를 표상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표현의 변화입니다. 본문은 ‘목자’와 ‘양 떼’ 대신 ‘조상’과 ‘가축’을 사용합니다. 이는 보호와 돌봄의 행위 자체보다, 기원과 발생에 초점을 둔 표현으로, 선이 사랑에서 태어나고 길러진다는 상응의 질서를 분명히 합니다.
또한 ‘가축’이라는 말이 ‘장막’ 바로 뒤에 놓인 문맥적 배치 역시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연속성을 근거로, 여기서 말하는 가축이 일반적인 소유나 재산이 아니라 사랑의 거룩함에 거하는 삶에서 필연적으로 나오는 선임을 밝힙니다. 다시 말해, 장막(사랑의 임재)에 거하는 삶이 먼저 있고, 그 결과로 가축(선)이 자연스럽게 번성합니다. 이는 선이 규칙이나 강요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상태가 온전할 때 자라난다는 천적 질서를 보여 줍니다.
이러한 해석은 예언서 전반의 용례로 뒷받침됩니다. 예레미야 23장과 에스겔 34장에서 ‘우리’(fold)와 ‘꼴’(pasture)은 모두 사랑의 선이 안전하게 머무르고 자라나는 상태를 뜻합니다. 특히 에스겔은 ‘살진 꼴’과 ‘좋은 우리’를 말하는데, 여기서 ‘기름짐’은 선의 풍성함이 사랑에서 나온다는 상응을 분명히 합니다. 선은 메마른 명령에서 자라지 않고, 사랑이 공급하는 생명력에서 자랍니다.
이사야 30장에서도 같은 질서가 나타납니다. ‘종자에 내리는 비’와 ‘풍성하고 기름진 곡식’은 천적인 것을, ‘광활한 목장에서 먹이는 가축’은 그 천적인 것에서 파생된 선을 가리킵니다. 곡식과 기름이 먼저 언급되고, 가축의 먹임이 뒤따르는 구조는, ‘사랑이 먼저, 선은 거기서 파생’이라는 상응의 순서를 그대로 보여 줍니다. 이는 야발이 ‘가축의 조상’으로 불린 이유를 성경 전체의 문법 안에서 설명해 줍니다.
예레미야 31장에서는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이 여호와의 거룩함을, ‘어린 양의 떼와 소의 떼’는 그로부터 흘러나오는 선을 표상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물 댄 동산’으로 묘사됩니다. 이는 선이 고립된 도덕 행위가 아니라, 사랑에 의해 지속적으로 공급받는 생명 상태임을 강조합니다. 선이 이렇게 유지될 때, 영혼은 마르지 않고 자랍니다.
예레미야 6장 또한 ‘시온의 딸’, 곧 천적 교회이지요, 그 주위에 장막을 치고 가축을 먹이는 장면을 통해, 장막(사랑의 임재)과 가축(선)의 결합을 다시 확인시켜 줍니다. 장막이 없는 가축은 흩어지고, 가축 없는 장막은 비어 있습니다. 이 둘은 분리될 수 없으며, 사랑이 선을 낳고, 선이 사랑을 증거하는 관계로 함께 서야 합니다.
이 모든 증거를 종합하여 스베덴보리는, 야발이 ‘가축의 조상, 곧 아버지’로 불린 것은 그가 목축 문화의 시조라는 뜻이 아니라, 사랑의 거룩함에서 나온 선의 질서가 다시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표상이라고 결론짓습니다. 여기서 ‘조상’은 통치자가 아니라 기원이며, ‘가축’은 소유물이 아니라 사랑의 열매입니다. 따라서 AC.415는 새 교회의 회복이 교리나 제도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임재(장막)에서 출발하여 선의 풍성함(가축)으로 확장되는 질서임을, 성경 전체의 상응과 표상에 근거해 분명히 드러냅니다.
‘장막에 거주하는 것’(dwell in tents)은 사랑의 거룩함과 상응합니다. 말씀에서 ‘장막’(tents)의 상응을 보면 분명한데요, 시편입니다.That to “dwell in tents” signifies what is holy of love,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ents” in the Word. As in David:
1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2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시15:1, 2)Jehovah, who shall abide in thy tent? Who shall dwell in the mountain of thy holiness? He that walketh upright, and worketh righteousness, and speaketh the truth in his heart,(Ps. 15:1–2)
이 구절을 보면, ‘장막에 머무는 것’(dwell in the tent), 즉 ‘성산에’(in the mountain of holiness) 사는 걸 사랑의 거룩한 것들, 그러니까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는 것(the walking uprightly, and working righteousness)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in which passage, what it is to “dwell in the tent” or “in the mountain of holiness” is described by holy things of love, namely, the walking uprightly, and working righteousness. Again: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시19:4)Their line is gone out through all the earth, and their discourse to the end of the world. In them hath he set a tent for the sun, (Ps. 19:4)
여기 ‘해’(sun)는 사랑을 가리킵니다. 계속해서where the “sun” denotes love. Again: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시61:4) I will abide in thy tent to eternities, I will trust in the covert of thy wings, (Ps. 61:4)
여기 ‘장막’(tent)은 천적인 것을, ‘날개 아래’(covert of wings)는 거기서 나오는 영적인 것을 가리킵니다. 이사야입니다.where the “tent” denotes what is celestial, and the “covert of wings” what is spiritual thence derived. In Isaiah:
다윗의 장막에 인자함으로 왕위가 굳게 설 것이요 그 위에 앉을 자는 충실함으로 판결하며 정의를 구하며 공의를 신속히 행하리라(사16:5) By mercy the throne has been made firm, and one hath sat upon it in truth, in the tent of David, judging and seeking judgment, and hasting righteousness, (Isa. 16:5)
여기 또한 ‘장막’(tent)은 사랑의 거룩한 걸 가리킵니다. ‘충실함으로 판결함’(judging judgment), ‘공의를 신속히 행함’(hasting righteousness)이라는 언급을 보면 알 수 있듯 말입니다. 계속해서where also the “tent” denotes what is holy of love, as may be seen by the mention of “judging judgment,” and “hasting righteousness.” Again:
우리 절기의 시온성을 보라 네 눈이 안정된 처소인 예루살렘을 보리니 그것은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이라 그 말뚝이 영영히 뽑히지 아니할 것이요 (사33:20) Look upon Zion, the city of our appointed feast; thine eyes shall see Jerusalem a quiet habitation, a tent that shall not be moved away, (Isa. 33:20)
하늘의 예루살렘을 말씀하시면서speaking of the heavenly Jerusalem.
[2]예레미야입니다.In Jeremiah: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야곱 장막의 포로들을 돌아오게 할 것이고 그 거처들에 사랑을 베풀 것이라 성읍은 그 폐허가 된 언덕 위에 건축될 것이요(렘30:18) Thus said Jehovah, Behold, I bring again the captivity of Jacob’s tents, and will have mercy on his dwelling places, and the city shall be builded upon her own heap; (Jer. 30:18)
‘장막의 포로’(captivity of tents)는 천적인 것, 즉 사랑의 거룩한 것들이 황폐해진 걸 상응합니다. 아모스입니다.the “captivity of tents” signifies the vastation of what is celestial, or of the holy things of love. In Amos:
그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그것들의 틈을 막으며 그 허물어진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암9:11) In that day will I raise up the tabernacle of David which is fallen; and will fence up the breaches thereof, and I will raise up its ruins, and I will build it as in the days of eternity, (Amos 9:11)
여기 ‘장막’(tabernacle) 또한 마찬가지로 천적인 것과 그것의 거룩한 것들을 가리킵니다. 예레미야입니다.where the “tabernacle” in like manner denotes what is celestial and the holy things thereof. In Jeremiah:
패망에 패망이 연속하여 온 땅이 탈취를 당하니 나의 장막과 휘장은 갑자기 파멸되도다(렘4:20) The whole land is laid waste, suddenly are my tents laid waste, and my curtains in a moment. (Jer. 4:20)
내 장막이 무너지고 나의 모든 줄이 끊어졌으며 내 자녀가 나를 떠나가고 있지 아니하니 내 장막을 세울 자와 내 휘장을 칠 자가 다시 없도다(렘10:20) My tent is laid waste, and all my cords are plucked out, my sons are gone forth from me, and they are not; there is none to stretch my tent anymore, and to set up my curtains, (Jer. 10:20)
여기 ‘장막’(tent)은 천적인 것들과, ‘휘장’(curtains)과 ‘줄’(cords)은 거기서 나오는 영적인 것들과 상응합니다. 계속해서where the “tent” signifies celestial things, and “curtains” and “cords” spiritual things thence derived. Again:
너희는 그들의 장막과 양 떼를 빼앗으며 휘장과 모든 기구와 낙타를 빼앗아다가 소유로 삼고(렘49:29) Their tents and their flocks shall they take; they shall carry off for themselves their curtains, and all their vessels, and their camels, (Jer. 49:29)
게달(Arabia)과 동방 자손들에 관한 말씀인데, 이들을 통해 천적인 것, 즉 거룩한 것을 소유한 사람들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speaking of Arabia and the sons of the east, by whom are represented those who possess what is celestial or holy. Again:
딸 시온의 장막에 그의 노를 불처럼 쏟으셨도다(애2:4) Into the tent of the daughter of Zion the Lord hath poured out his wrath like fire, (Lam. 2:4)
신앙의 천적인 것, 즉 거룩한 것들의 황폐해짐에 관한 말씀입니다.speaking of the vastation of the celestial or holy things of faith.
[3]말씀에서 이 ‘장막’(tent)이라는 용어를 채택, 천적인 것과 사랑의 거룩한 것들을 표현하는 이유는, 고대에는 예배의 거룩한 의식들을 그들의 장막에서 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신성모독의 예배로 장막을 모독하기 시작하더니 성막이 세워졌고, 나중에는 성전이 세워졌습니다. 이런 이유로, 장막은 먼저 성막이 가리키는 모든 걸 표현하더니, 나중에는 성전이 가리키는 모든 걸 표현하게 된 것입니다. 같은 이유로, 어떤 거룩한 사람을 가리켜 주님의 ‘장막’(tent), ‘성막’(tabernacle), 그리고 ‘성전’(temple)이라고도 합니다. ‘장막’, ‘성막’, 그리고 ‘성전’의 상응하는 바가 같다는 건 시편을 보면 분명합니다.The reason why the term “tent” is employed in the Word to represent the celestial and holy things of love is that in ancient times they performed the holy rites of worship in their tents. But when they began to profane the tents by profane kinds of worship, the tabernacle was built, and afterwards the temple, and therefore tents represented all that was subsequently denoted first by the tabernacle, and afterwards by the temple. For the same reason a holy man is called a “tent,” a “tabernacle,” and a “temple” of the Lord. That a “tent,” a “tabernacle,” and a “temple” have the same signification, is evident in David:
4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5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6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둘러싼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시27:4-6) One thing have I asked of Jehovah, that will I seek after, that I may remain in the house of Jehovah all the days of my life, to behold Jehovah in sweetness, and to visit early in his temple; for in the day of evil he shall hide me in his tabernacle; in the secret of his tent shall he hide me; he shall set me up upon a rock. And now shall my head be lifted up against mine enemies round about me, and I will offer in his tent sacrifices of shouting. (Ps. 27:4–6)
[4]가장 높은 뜻으로는, 주님은 그의 인성(人性, human essence) 관련, ‘장막’(tent), ‘성막’(tabernacle), 그리고 ‘성전’(temple)이시며, 그래서 모든 천인(天人, celestial man)을 그렇게 부르고, 또한 모든 천적이며 거룩한 것들을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태고교회는 뒤이어 일어난 교회들보다 훨씬 더 주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그리고 당시 사람들은 홀로, 그러니까 가족 단위로 살면서 자기들의 장막에서 참으로 거룩한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이런 이유로, 장막은 성전보다 훨씬 더 거룩한 곳으로 여겨졌습니다. 이 성전은 신성모독을 범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기념하고자 초막절(the feast of tabernacles)이 제정되었는데요, 토지 소산을 거둘 때, 그들은 이 절기 동안 태곳적 사람들처럼 장막에서 지냈습니다.(레23:39-44; 신16:13; 호12:9)In the supreme sense, the Lord as to his human essence is the “tent,” the “tabernacle,” and the “temple”; hence every celestial man is so called, and also everything celestial and holy. Now as the most ancient church was better beloved of the Lord than the churches that followed it, and as men at that time lived alone, that is, in their own families, and celebrated so holy a worship in their tents, therefore tents were accounted more holy than the temple, which was profaned. In remembrance thereof the feast of tabernacles was instituted, when they gathered in the produce of the earth, during which, like the most ancient people, they dwelt in tents. (Lev. 23:39–44; Deut. 16:13; Hosea 12:9)
39너희가 토지 소산 거두기를 마치거든 일곱째 달 열닷샛날부터 이레 동안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되 첫날에도 안식하고 여덟째 날에도 안식할 것이요40첫날에는 너희가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나무 가지와 무성한 나뭇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이레 동안 즐거워할 것이라41너희는 매년 이레 동안 여호와께 이 절기를 지킬지니 너희 대대의 영원한 규례라 너희는 일곱째 달에 이를 지킬지니라42너희는 이레 동안 초막에 거주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주할지니43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주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44모세는 이와 같이 여호와의 절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공포하였더라(레23:39-44)
너희 타작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거두어 들인 후에 이레 동안 초막절을 지킬 것이요(신16:13)
네가 애굽 땅에 있을 때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내가 너로 다시 장막에 거주하게 하기를 명절날에 하던 것 같게 하리라(호12:9)
해설
스베덴보리는 야발이 ‘장막에 거주하는 자의 조상’이라는 표현을 통해, ‘장막에 거한다는 말이 사랑의 거룩한 것, 곧 천적인 상태를 뜻한다’는 점을 성경 전체의 용례로 입증합니다. 시편 15편에서 ‘여호와의 장막에 머무를 자’가 누구인지를 설명하면서, 그 자격을 바른 행실, 공의의 실천, 마음의 진실함으로 묘사하는데, 이는 장막에 거함이 단순한 장소 개념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오는 삶의 상태’임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다시 말해, 장막은 외적 구조물이 아니라, ‘주님과의 내적 동거 상태’를 표상합니다.
시편 19편에서 ‘해를 위하여 장막을 베푸셨도다’고 할 때, ‘해’는 사랑을 뜻하므로, 장막은 곧 ‘사랑이 거하는 처소’로 이해됩니다. 시편 61편에서도 ‘주의 장막에 머물며’라는 표현과 ‘주의 날개 아래’가 병행되는데, 여기서 장막은 ‘천적인 것’, 날개 아래는 그 천적인 것에서 흘러나오는 ‘영적인 것’을 뜻합니다. 이는 천적, 영적 구조가 장막이라는 하나의 상징 안에 함께 담겨 있음을 보여 주며,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상응의 질서’가 시편 안에서 이미 작동하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이사야와 예레미야, 아모스 등 예언서들에서도 장막은 일관되게 ‘사랑의 거룩한 것’을 표상합니다. 다윗의 장막이 다시 세워진다는 예언은 정치 체제의 회복이 아니라, ‘사랑과 공의가 다시 중심이 되는 교회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반대로 장막이 무너지고, 줄과 휘장이 끊어졌다는 표현들은 교회 안에서 ‘천적인 것과 그로부터 나온 영적인 것들이 황폐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이처럼 장막은 회복과 황폐를 모두 표현할 수 있는 상징인데, 그 이유는 장막이 곧 ‘교회의 가장 내적인 핵’, 즉 사랑의 상태를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왜 장막이 이런 의미를 갖게 되었는지를 역사적, 영적 맥락에서 설명합니다. 태고교회 시대에는 사람들이 도시나 성전을 중심으로 살지 않고, 가족 단위로 장막에 거하며 ‘매우 거룩한 예배를 장막에서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장막은 단순한 거주 공간이 아니라, 주님과 교통하는 ‘거룩한 생활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장막이 속된 예배로 더럽혀지자, 주님은 성막을, 이후에는 성전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장막은 여전히, 성막과 성전 이전의 ‘가장 순수한 예배 형태’를 기억하게 하는 상징으로 남았습니다. 그래서 장막은 이후 성막과 성전이 표상하게 된 모든 의미를 ‘원형적으로 담고 있는 표상’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성경에서는 한 사람 자체를 ‘장막’, ‘성막’, ‘성전’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는 사람이 주님의 사랑이 거하는 처소가 될 수 있음을 뜻합니다. 시편 27편에서 ‘주의 집, 주의 장막, 주의 성전’이 서로 교차하여 사용되는 것은, 이 셋이 본질적으로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최고 의미에서 보면, ‘주님의 인성 자체가 장막이요 성막이며 성전’이고, 그로부터 상응하여, 천적인 사람과 천적인 모든 것이 그렇게 불립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초막절의 제정 이유를 통해 이 상징을 더욱 분명히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추수 후에 장막에 거하도록 명령받은 것은, 단순한 농경의례가 아니라 ‘태고교회의 순수한 예배 상태를 기억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곡식을 거두는 시점에 장막에 거한다는 것은, 모든 결실이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에서 나온 것임을 고백하는 행위’였습니다. 따라서 ‘장막에 거한다’는 표현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의 거룩한 것 안에 거하며 주님께 의존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 모든 배경 위에서 스베덴보리는, 야발이 ‘장막에 거주하는 자의 조상’으로 불린 사실을 근거로, 그의 어머니 아다를 ‘천적인 것들의 어머니’라고 해석합니다. 이는 임의적 해석이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반복되어 온 ‘상응의 질서와 표상의 일관성’에 근거한 결론입니다. 결국 AC.414는, 새 교회가 회복될 때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은 제도나 교리가 아니라, ‘장막으로 표상되는 사랑의 거룩함’이라는 사실을, 성경 전체의 증언을 통해 체계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