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93.심화

바울은 왜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을 이렇게 말했을까?

 

앞의 신성종 목사의 설교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살펴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사람이 죽은 뒤 다시 자연적 육체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죽음과 함께 영계에서 영적 몸으로 깨어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바울은 왜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마치 죽은 육체가 장차 다시 살아나는 것처럼 말했을까요?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는 질문에 씨앗을 예로 들고,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난다’고 말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이 문제를 다룰 때 가장 먼저 조심해야 할 것은 ‘그러면 바울이 틀렸다는 말인가?’라고 너무 빨리 결론짓는 것입니다. 반대로 ‘바울도 사실 스베덴보리와 완전히 똑같은 사후세계관을 가르쳤다’고 만드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을 쓴 역사적 상황과 목적을 먼저 살펴보고, 그가 무엇을 말하려 했으며 무엇까지 말하지 않았는지를 구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의 직접적인 문제는 바울 자신이 12절에서 밝힙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여기서 고린도교회 일부 사람들이 부인하고 있었던 것은 일차적으로 그리스도의 부활 자체라기보다 ‘죽은 자의 부활’이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이 장에서 가장 먼저 지키려고 했던 것은 사후세계의 세밀한 구조나 부활의 물리적 메커니즘이 아니라 ‘죽음이 인간의 생명을 끝내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분에게 속한 사람들의 부활은 분리될  없다’는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인 소망이었습니다.

 

이 점을 놓치면 고린도전서 15장을 마치 ‘마지막  무덤  시체가 어떤 과정을 거쳐 다시 만들어지는가’를 설명하는 장처럼 읽게 됩니다. 그러나 실제로 바울은 그런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그는 흩어진 뼈와 육체의 원소가 어떻게 다시 모이는지 말하지 않고 오히려 ‘씨앗’을 이야기합니다.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뿐이로되 하나님이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종자에게  형체를 주시느니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분명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함께 있습니다. 심어진 것과 나타나는 것이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심어진 바로 그 형체가 그대로 되돌아오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바울의 씨앗 비유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도토리를 땅에 심었는데 나중에 땅에서 거대한 참나무가 올라왔다고 합시다. 도토리와 참나무는 모양도, 크기도, 기능도 전혀 다릅니다. 그렇다고 참나무가 그 도토리와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생명의 연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비유를 통해 부활을 단순한 ‘원상복구’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신다’고 합니다.

 

더욱 주목할 구절은 44절입니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신령한 몸도 있느니라.’ 여기서 바울은 ‘’과 ‘영혼’을 대조하지 않습니다. 헬라어로 양쪽 모두 ‘소마(sōma)’, 곧 ‘’입니다. ‘소마 프쉬키콘(sōma psychikon)’과 ‘소마 프뉴마티콘(sōma pneumatikon)’, 곧 한 종류의 몸과 다른 종류의 몸을 대조합니다. 따라서 바울이 말하는 부활은 ‘몸을 버리고  없는 영혼이 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이 점에서는 신성종 목사의 지적도 귀담아들을 만합니다. 그는 ‘신령한 ’을 흐릿하고 비물질적이며 유령 같은 무엇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 이해와도 중요한 접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사후의 인간을 몸 없이 떠다니는 의식이나 그림자 같은 존재로 설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사후에도 완전한 인간이며, 인간의 형상을 가진 영적 몸으로 보고, 듣고, 말하고, 걷고, 다른 사람들과 만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지점에서 전통적인 육체 부활론과 스베덴보리의 설명이 갈라집니다. ‘신령한 ’이 있다는 것과 ‘무덤에 들어간 자연적 육체가  훗날 다시 살아나  신령한 몸으로 변한다’는 것은 같은 명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전자를 강하게 말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후대 기독교가 그 말씀을 바탕으로 발전시킨 ‘마지막  시체의 재결합과 육체 부활’이라는 구체적인 그림까지 바울이 이 장에서 모두 설명했다고 보아야 하는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특히 고린도전서 15 50절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받을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바울 자신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연적 상태의 ‘혈과 ’이 그대로 하나님 나라를 상속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고린도전서 15장의 중심을 단순히 ‘현재의 물질적 육체가 다시 돌아온다’는 명제로 축소하면 바울 자신의 언어가 가진 훨씬 풍부한 긴장을 놓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설명이 매우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스베덴보리도 ‘부활’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인간이 죽음 후에 부활한다고 매우 분명하게 말합니다. 다만 ‘무엇이 부활하는가?’와 ‘언제 부활하는가?’에 대한 설명이 전통적인 육체 부활론과 다릅니다. 부활하는 것은 무덤 속에 남겨진 자연적 육체가 아니라 ‘ 사람 자신’이며, 그 부활은 수천 년 뒤 우주의 마지막 날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죽은 뒤 자연계에서 영계로 깨어날 때 일어납니다. 자연적 육체는 자연계에 남지만 사람 자신은 영적 몸으로 영계에서 계속 살아갑니다.

 

이렇게 보면 ‘몸은 소중하다’는 말과 ‘자연적 육체가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말을 반드시 동일시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연적 몸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체어리티와 쓰임을 행하도록 주어진 귀한 도구입니다. 그러므로 몸을 악한 것, 영혼을 가두어 놓은 감옥, 아무 가치 없는 껍데기로 여기는 것은 기독교적인 인간 이해와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연적 몸이 귀하다는 사실이 곧 그 몸의 물질이 영원히 보존되거나 마지막 날 다시 조립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자연적 몸은 자연계에 속하고, 영적 몸은 영계에 속합니다.

 

그러므로 신성종 목사의 설교에 등장하는 ‘화장하면 어머니의 몸은 나중에 어떻게 부활합니까?’라는 질문에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조금 다른 대답을 할 수 있습니다. 화장하든 매장하든 어머니 자신에게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어머니 자신이 그 자연적 육체 속에 남아 부활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연적 몸은 자연계에 남겨지지만 그 사람 자신은 이미 영적 몸으로 영계에서 깨어납니다. 그러므로 화장이 부활을 방해할 수도 없고, 매장이 부활을 더 안전하게 보장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이것을 ‘사람은 죽는 즉시 영계에서 영적 몸으로 깨어난다’고 스베덴보리처럼 명료하게 설명하지 않았을까요? 여기서는 바울 서신의 성격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독특한 이해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도들의 서신을 모세오경과 예언서, 복음서와 계시록처럼 연속적인 내적 의미, 곧 아르카나가 들어 있는 ‘말씀’과 동일한 범주에 두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사도서신을 무가치하거나 잘못된 글이라고 보는 것도 아닙니다. 사도들은 초기 기독교회를 세우고 사람들에게 주님에 대한 신앙과 체어리티의 삶을 가르치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따라서 바울을 영계의 구조와 사후 인간의 상태를 완전히 계시받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사람으로 읽기보다는, 당시 교회가 처한 문제 속에서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언어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가르치는 사도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의 가장 큰 관심은 ‘죽은  정확히  단계의 상태를 거쳐 천국에 들어가는가?’가 아닙니다. 그의 관심은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셨으며 너희도 그분 안에서 살아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안에서 살아가는 너희의 삶은 헛되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실제로 바울 자신의 다른 글들을 보면 사후 상태에 관한 표현이 언제나 하나의 완성된 조직신학 체계처럼 나타나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고린도후서에서는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을 말하고, 빌립보서에서는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말합니다. 이런 표현들은 죽은 사람이 아주 먼 미래의 부활 때까지 사실상 아무런 삶도 없이 기다린다는 그림과는 잘 맞지 않습니다. 반면 고린도전서 15장과 데살로니가전서에서는 미래의 부활과 주님의 오심이라는 종말론적 언어를 강하게 사용합니다. 후대 기독교 신학은 이러한 여러 표현을 종합하여 ‘죽음  영혼의 중간 상태  마지막   육체 부활’이라는 체계를 세웠지만, 그 완성된 체계를 그대로 바울 자신의 명시적인 설명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 또 하나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사실 스베덴보리와 똑같은 사후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표현만 다르게 했다’고 주장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역사적 바울에게 스베덴보리의 계시를 거꾸로 투영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당시 유대교의 부활 신앙과 초기 기독교의 종말론적 언어 속에서 말하고 있으며, 스베덴보리는 훨씬 후대에 사후 인간의 깨어남, 영적 몸, 중간영계, 천국과 지옥의 상태 등을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둘 사이에는 실제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균형 있게 말한다면 이렇습니다. ‘바울은 부활이라는 진리를 강력하게 가르쳤지만, 사후세계의 메커니즘 전체를 밝힌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붙들고 있는 핵심은 인간이 죽음으로 소멸하지 않는다는 것, 주님의 부활이 우리의 생명과 분리된 사건이 아니라는 것, 부활한 인간에게는 ‘’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몸은 지금의 썩고 약하고 죽는 자연적 상태와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부활’과 ‘영적 ’이 실제로 무엇이며 인간에게 언제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훨씬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고린도전서 15장의 씨앗 비유도 새로운 의미로 다가옵니다. 씨앗과 나무 사이에는 분명한 연속성이 있지만 동일한 외적 형체가 반복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연적 몸과 영적 몸 역시 동일한 물질의 재조립이라는 의미에서 하나가 아닙니다. 그러나 죽기 전의 사람과 죽은 뒤의 사람이 서로 다른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 사람’이라는 인격과 생명의 연속성은 그대로 이어집니다. 죽음은 한 인간을 없애고 나중에 복제품을 만드는 사건이 아니라 자연계에서의 삶이 영계에서의 삶으로 이어지는 경계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고린도전서 15장의 마지막 58절이 매우 중요해집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안에서 헛되지 않은  앎이라.’ 바울은 부활에 관한 긴 논의를 ‘그러므로 죽은 뒤의 일을 많이 연구하라’로 끝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주의 일에 힘쓰라’고 끝냅니다. 사후의 생명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현재의 삶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체어리티와 쓰임의 가르침과도 깊이 만납니다. 사람이 영원으로 가지고 가는 것은 자연적 육체를 구성했던 물질이 아니라 그가 세상에서 무엇을 사랑했고, 무엇을 의도했으며, 그 사랑을 어떻게 실제 삶의 쓰임으로 나타냈는가 하는 그의 내적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병든 사람을 돌본 손, 배고픈 사람에게 음식을 건넨 손, 교회와 가정과 사회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묵묵히 감당한 손으로 행한 사랑은 헛되지 않습니다. 물질적인 그 손 자체가 영원히 보존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손을 움직였던 사랑과 의도와 삶이 그 사람 자신 안에 영원히 남기 때문입니다.

 

결국 고린도전서 15장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다는 것은 바울을 틀렸다고 버리는 것도 아니고, 바울의 모든 표현을 억지로 스베덴보리와 일치시키는 것도 아닙니다. 바울이 당시 고린도교회를 향해 증언한 부활의 핵심 진리를 먼저 존중하고, 그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은 사후세계의 실상을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통해 더 깊이 살펴보는 것입니다.

 

바울의 외침은 분명합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매우 구체적인 설명을 더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죽음과 함께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영계에서 영적 몸을 지닌 완전한 인간으로 깨어납니다.’ 그리고 두 가르침은 마침내 삶을 향한 한 질문 앞에서 만납니다. ‘그렇다면 나는 오늘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 답 역시 고린도전서 15장의 마지막에 이미 놓여 있습니다. ‘너희 수고가  안에서 헛되지 않은  앎이라.’ 죽음 이후에도 생명이 계속되기 때문에 오늘의 사랑이 중요하고, 영원이 있기 때문에 지금의 체어리티와 쓰임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부활에 관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어쩌면 ‘ 몸의 물질이 마지막  어떻게 다시 모일 것인가?’가 아니라 ‘영원으로 이어질 오늘의 삶을 나는 어떤 사랑으로 살아가고 있는가?’일 것입니다.

 

 

 

SY.93, 신성종 목사, ‘성경은 화장에 대해 정말로 말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5장, 오늘날 교회의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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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5.심화

 

1.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해야 하는가? - 겨울의 빛과 살아 있는 신앙

 

AC.361-365를 따라오면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단순히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어느 것이  중요한가?라는 비교가 아니라, ‘둘이 어떤 질서로 결합되어야 하는가?라는 문제라는 것이 점점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는 신앙을 밀어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앙과 결합하기를 원합니다. 문제는 신앙이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에 두고 지배하려 하는 데 있습니다. AC.365는 이를 아주 단호하게 정리합니다. ‘신앙이 주도권을 가지려 하는 동안에는 신앙이 아니며, 체어리티가 주도할  비로소 신앙이 된다. 이 말은 스베덴보리의 신앙 이해를 압축해서 보여 주는 매우 중요한 문장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은 단순히 어떤 명제를 참이라고 인정하는 지적 동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진리에 속한 것이고, 진리는 선을 위해 존재합니다. 진리가 선에서 떨어져 독립하려 하면 그것은 생명의 근원에서 떨어져 나옵니다. 다시 말해 신앙은 스스로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생명을 받습니다. 그래서 체어리티는 신앙의 곁에 붙어 있는 부수적인 덕목이 아니라, 신앙을 신앙답게 하는 생명입니다.

 

이 점을 AC.365는 불꽃과 빛의 비유로 설명합니다. 체어리티는 불꽃과 같고, 신앙은 그 불꽃에서 나오는 빛과 같습니다. 불꽃에는 열이 있고 빛이 있습니다. 열은 사랑에, 빛은 진리에 해당합니다. 불꽃에서 빛이 나오는 것처럼 사랑에서 진리가 생명을 얻습니다. 그리고 열과 빛이 함께 있을 때 생명이 자랍니다. 봄과 여름의 햇빛이 그러합니다. 빛만 있는 것이 아니라 따뜻함이 함께 있기 때문에 씨앗이 싹트고, 나무가 자라고, 열매가 맺힙니다.

 

그런데 불꽃에서 열을 제거하고 빛만 남기면 어떻게 될까요?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겨울의 이라고 합니다. 겨울에도 분명 빛은 있습니다. 오히려 맑은 겨울날의 빛은 아주 선명할 수 있습니다. 사물의 윤곽도 또렷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생명을 일으키는 열이 없습니다. 그래서 땅은 굳고, 나무는 얼며, 생명 활동은 멈춥니다. 바로 이것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모습입니다. 진리에 관한 지식은 있을 수 있고, 교리를 매우 정확하게 설명할 수도 있으며, 논리적으로는 빈틈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 빛에는 열이 없습니다.

 

이 비유는 우리가 참된 신앙을 무엇으로 판단해야 하는지 다시 묻게 합니다. 흔히 우리는 얼마나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는지, 교리를 얼마나 정확하게 설명하는지, 성경을 얼마나 바르게 해석하는지를 신앙의 중요한 척도로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들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오히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진리가 나를 어떤 사랑으로 이끌고 있는가?입니다. 진리를 더 많이 알수록 주님을 더 사랑하고, 이웃을 더 선하게 대하며, 자기 사랑을 내려놓고, 쓰임을 행하게 된다면 그 진리는 체어리티의 열을 가진 살아 있는 빛입니다. 반대로 진리를 더 많이 알수록 자기 우월감이 커지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자기 교리를 지키기 위해 체어리티를 희생한다면 그 빛은 겨울의 빛이 될 수 있습니다.

 

가인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가인은 신앙을 버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너무 높였습니다. AC.362는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이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 순간 질서가 뒤집혔습니다. 본래 신앙은 사랑과 체어리티를 섬겨야 했지만, 오히려 사랑과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에 두려 했습니다. 그래서 AC.361에서는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만, 신앙이 그것을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함께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AC.363에서는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해야 한다고 했고, 이제 AC.365에서는 체어리티가 주도할 때에야 신앙이 참으로 신앙이 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체어리티가 주도한다는 것은 정확히 무엇을 뜻할까요? 이것을 사랑이 중요하니 교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거나 착하게 살기만 하면 무엇을 믿든 상관없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스베덴보리의 뜻과 거리가 멉니다. 불꽃에는 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빛도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진리를 필요로 합니다. 무엇이 참된 선인지, 어떻게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지, 어떤 것이 실제로 이웃에게 유익한지 알기 위해서는 진리가 필요합니다. 진리 없는 사랑은 쉽게 맹목적인 애정이나 자기 방식의 친절로 흐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과 체어리티는 반드시 결합되어야 합니다.

 

다만 그 결합에서 무엇이 목적이고 무엇이 수단인지는 분명해야 합니다. 진리는 선을 위해 있고, 신앙은 체어리티를 위해 있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알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통하여 선을 사랑하고 행하기 위해 삽니다. 교리는 그 자체로 최종 목적이 아니라 삶을 주님의 질서에 맞추도록 인도하는 수단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체어리티를 섬길 때, 신앙은 자기 자리를 찾습니다. 반대로 신앙이 체어리티 위에 올라서려 할 때, 수단이 목적을 지배하는 질서의 전도가 일어납니다.

 

이 점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교회는 교리의 정확성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성경 해석의 정통성을, 어떤 교회는 특정 신앙고백이나 교단적 전통을, 어떤 교회는 성령의 은사나 종말론이나 예배 형식을 매우 중요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그것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문제는 그 하나가 전체보다 앞서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체어리티를 희생하기 시작할 때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자기 입장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더 중요해지고, 진리를 가르치는 목적이 이웃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이기는 것이 되면 이미 겨울의 빛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를 읽는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상응을 알고, 말씀의 속뜻을 이해하고, 퍼셉션과 양심의 차이를 설명하고, 신앙과 체어리티의 질서를 정확히 말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살아 있는 신앙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지식이 나는 남들이 모르는 것을 안다는 자기 사랑과 결합하면, 진리의 빛은 점점 차갑게 변할 수 있습니다. ‘체어리티가 신앙의 생명이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체어리티를 잃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가인의 위험이 얼마나 미묘한지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 AC.365는 신앙의 내용만이 아니라 신앙의 온도를 묻게 합니다. 빛은 있는데 열이 있는가? 진리는 있는데 사랑이 있는가? 교리는 있는데 체어리티가 있는가? 성경을 많이 아는데 그 지식이 나를 더 온유하게 만드는가?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능력이 커질수록 다른 사람을 더 살리게 되는가, 아니면 더 쉽게 정죄하게 되는가? 이런 질문이 신앙의 생명을 점검하는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 조심해야 합니다. 체어리티가 주도한다고 해서 인간의 자연적 친절이나 감정적 따뜻함이 신앙보다 우위에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체어리티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이나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 아닙니다. 주님의 진리를 받아 그것에 따라 이웃에게 선을 행하려는 영적 사랑입니다. 따라서 참된 체어리티의 근원은 언제나 주님입니다. 인간에게서 스스로 나오는 선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유입되는 선이 인간 안에서 받아들여져 이웃을 향한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364 AC.365는 서로 깊이 연결됩니다. AC.364에서는 체어리티가 없으면 무자비함과 증오와 악이 들어오고, 그 악을 마음의 문에서 몰아낼 유일한 수단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AC.365에서는 체어리티가 주도할 때라야 신앙이 참으로 신앙이 된다고 합니다. 즉 체어리티는 단지 신앙을 따뜻하게 만드는 장식이 아니라, 악을 물리치고 신앙에 생명을 주는 실제적인 영적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가 주도해야 한다는 것은 결국 주님이 주도하셔야 한다는 말과도 연결됩니다. 체어리티의 근원이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체어리티를 만들어 내서 신앙을 지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선이 내 안에 받아들여지고, 그 선이 신앙과 진리를 질서 있게 사용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체어리티의 주도권은 인간의 선행이 신앙보다 우월하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선이 인간의 진리를 살아 있게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거듭남의 질서와도 맞닿습니다. 거듭남의 초기에는 사람이 먼저 진리를 배웁니다.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에서 배웁니다. 이 단계에서는 진리가 앞에서 인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그 진리는 의지 안으로 들어가 선과 결합됩니다. 처음에는 옳기 때문에 행하던 것을 나중에는 사랑하기 때문에 행하게 됩니다. 이때 진리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선 안에서 살아납니다. 마치 빛이 불꽃에서 나오는 것처럼 됩니다. 결국 진리와 선, 신앙과 체어리티가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체어리티가 주도한다는 말을 시간적인 순서로만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반드시 먼저 사랑하고 나중에 믿는다는 단순한 순서가 아니라, 신앙의 최종적인 생명과 목적이 체어리티에 있다는 뜻입니다. 자연적 인간의 거듭남 과정에서는 진리를 먼저 배우는 경우가 많지만, 그 진리가 결국 선과 결합하지 않는다면 아직 완성된 신앙이 아닙니다. 진리는 선을 향해 가야 하고,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완성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보면 겨울의 이라는 비유가 더욱 깊어집니다. 겨울의 빛도 빛이기 때문에 사람은 그것을 보고 나는  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위험합니다. 전혀 어둡다면 오히려 자신의 상태를 알기 쉽습니다. 그러나 많은 진리를 알고 있고 교리적으로 밝다고 생각하면, 그 빛에 열이 없다는 사실을 놓치기 쉽습니다. 가인 역시 자기 신앙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AC.362에서 보았듯 자기 사랑과 거기서 나온 환상이 자신의 교리를 계속 확증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자기 생각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빛은 점점 강해지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실제로는 더 추워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교리적 확신과 영적 생명을 구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확신이 강하다고 해서 반드시 살아 있는 신앙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교리에 매우 확신하면서도 체어리티를 잃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참된 신앙은 진리를 굳게 붙들면서도 그 진리가 사랑과 선을 향하게 합니다. 참된 빛은 사람을 따뜻하게 하고 살립니다. 그래서 진리가 참으로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라면 결국 체어리티와 결합하려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인과 아벨의 관계를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아벨은 가인을 없애려 하지 않았습니다.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했습니다. 문제는 가인이 아벨과 함께 있기를 원한 것이 아니라 아벨 위에 서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의 형제가 아니라 주인이 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둘의 결합이 깨졌습니다. 그리고 이 지배욕이 결국 다음 단계에서 아벨을 죽이는 것으로 나아갑니다.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했던 신앙이 마침내 체어리티 자체를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비극은 단순히 사랑이 부족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질서가 뒤집혔다는 데 있습니다. 신앙이 목적이 되고, 체어리티가 수단이 되었습니다. 진리가 선 위에 올라섰습니다. 교리가 삶보다 앞섰습니다. 그리고 그 질서의 전도가 지속되자, 결국 사랑 없는 신앙이 자기 사랑과 결합하여 체어리티를 파괴했습니다.

 

우리에게도 가장 중요한 점은 이 질서를 바로 세우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믿는가?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와 함께 반드시  믿음은 나를 어떤 사랑으로 이끌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내가 진리를 알고 있는가?와 함께  진리가  안에서 선이 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나는 옳은 교리를 가지고 있는가?와 함께  교리가  이웃을  사랑하게 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이 질문 앞에서 신앙과 체어리티는 경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로 제자리를 찾습니다. 체어리티가 신앙에 생명을 주고, 신앙은 체어리티에 빛을 줍니다. 사랑은 진리를 따뜻하게 하고, 진리는 사랑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밝혀 줍니다. 불꽃과 열과 빛이 하나를 이루듯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도 하나입니다. 인간 안에서 그 둘이 다시 하나가 될 때 신앙도 살아 있고, 체어리티도 지혜롭게 됩니다.

 

결국 AC.365가 우리에게 묻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당신의 신앙에는 빛이 있는가?가 아닙니다. ‘ 빛에 열이 있는가?입니다. 그리고 그 열은 자기 열심이나 감정적 뜨거움이 아니라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 곧 체어리티입니다. 그 열이 함께할 때 신앙의 빛은 생명을 살립니다. 그러나 그 열이 사라지면 아무리 밝은 빛이라도 겨울의 빛이 되어 모든 것을 굳게 하고 죽게 합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신앙은 체어리티를 지배하는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신앙입니다. 진리가 선을 섬기고, 아는 것이 사랑하는 것으로 이어지며, 믿는 것이 삶이 되는 신앙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생명의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우리 안에서 체어리티가 되고, 그 체어리티 안에서 진리의 빛이 살아날 때, 비로소 우리의 신앙은 겨울의 빛이 아니라 생명을 키우는 따뜻한 빛이 됩니다.

 

 

 

AC.365, 창4:7,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겨울의 빛과 같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5 셋째로,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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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4:7)

 

AC.365

 

셋째로,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Un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 하였는데, 이는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만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그렇게 없음을 뜻하며, 이것은 질서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신앙이 주도권을 가지려 하는 동안에는 신앙이 아니며, 체어리티가 주도할 비로소 신앙이 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의 본질적인 (the principal of faith)이기 때문인데, 이는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습니다. 체어리티는 불꽃에 비유할 있습니다. 불꽃은 열과 빛의 본질적인 것으로, 열과 빛은 불꽃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분리된 상태의 신앙은 불꽃의 열이 없는 빛에 비유할 있습니다. 실제로 빛은 있지만 그것은 겨울의 빛이며, 안에서는 모든 것이 굳어지고 죽게 됩니다. In the third place it is said, “Un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by which is signified that charity is desirous to abide with faith, but cannot do so because faith wishes to rule over it, which is contrary to order. So long as faith seeks to have the dominion, it is not faith, and only becomes faith when charity rules; for charity is the principal of faith, as was shown above. Charity may be compared to flame, which is the essential of heat and light, for heat and light are from it; and faith in a state of separation may be compared to light that is without the heat of flame, when indeed there is light, but it is the light of winter in which everything becomes torpid and dies.

 

 

해설

 

AC.365는 창4:7의 마지막 말씀,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의 속뜻을 본격적으로 설명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져 온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매우 선명하게 결론짓습니다. 앞의 AC.361에서는 이 말씀이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만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함께할 수 없다는 뜻이라고 개괄했고, AC.363에서는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65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앙이 주도권을 가지려 하는 동안에는 신앙이 아니며, 체어리티가 주도할 비로소 신앙이 된다고까지 말합니다. 이것은 창4의 가인과 아벨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선언입니다.

 

먼저 그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에 해당하는 Unto thee is his desire를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머물기를 원하는 것으로 풀이합니다. 여기에는 가인과 아벨의 관계에 관한 중요한 사실이 담겨 있습니다. 아벨, 곧 체어리티는 가인, 곧 신앙을 밀어내려 하지 않습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을 없애려 하지도 않고 신앙과 경쟁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본래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 분리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가르치고, 체어리티는 그 진리를 사랑하고 삶으로 행하게 합니다. 둘은 한 생명을 이루어야 합니다.

 

문제는 가인이 그 관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너는 그를 다스릴지니라는 말씀을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는 상태로 읽습니다. 여기서 가인의 근본적인 질서 전도가 드러납니다. 가인은 체어리티 자체가 필요 없다고 처음부터 주장한 것이 아닙니다. 체어리티를 인정하되 그것을 신앙 아래에 두려고 합니다. 신앙을 첫째로 세우고, 사랑과 체어리티를 그 뒤에 따라오는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질서에 어긋난다(contrary to order)고 단언합니다.

 

질서가 무엇인지는 앞의 글들을 통해 이미 드러났습니다. 사랑에서 체어리티가 나오고, 체어리티 안에서 신앙이 생명을 얻습니다. AC.362에서는 체어리티를 사랑의 자손(the offspring of love)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정상적인 질서는 사랑 체어리티 살아 있는 신앙입니다. 신앙이 이 질서에서 벗어나 자기 스스로 첫째가 되려 하면 그 순간 신앙은 자기 생명의 근원에서 떨어져 나갑니다. 바로 이것이 가인의 길입니다.

 

그래서 AC.365신앙이 주도권을 가지려 하는 동안에는 신앙이 아니다라는 표현은 매우 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은 조금 부족한 신앙이다라거나 불완전한 신앙이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신앙이 아니다(it is not faith)라고 합니다. 그리고 체어리티가 주도할 비로소 신앙이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의 정체성이 단순히 어떤 교리를 참이라고 인정하는 데 있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체어리티와 결합하여 체어리티를 섬기는 진리라야 비로소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여기서 체어리티는 신앙의 본질적인 (the principal of faith)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principal을 단순히 중요한 요소정도로 이해하면 약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에 부가되는 여러 덕목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하나라는 뜻이 아니라, 신앙을 신앙답게 하는 중심적이고 본질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체어리티를 제거하고도 신앙 자체는 그대로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인의 오류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이름은 신앙일 수 있어도 그 안에 신앙의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추상적인 설명을 스베덴보리는 아주 아름다운 자연의 비유로 풀어냅니다. ‘체어리티는 불꽃에 비유할 있습니다.불꽃에서 열과 빛이 나옵니다. 여기서 불꽃은 근원이며, 열과 빛은 그 불꽃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불꽃에서 열을 떼어내고 빛만 남긴다면 겉으로는 여전히 밝아 보일 수 있지만, 생명을 살리는 따뜻함은 사라집니다.

 

이 비유에서 체어리티와 신앙의 관계가 아주 선명해집니다. 체어리티는 불꽃과 같고, 신앙은 그 불꽃에서 나오는 빛과 같습니다. 참된 신앙에는 빛이 있습니다. 진리를 보고 이해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 빛이 살아 있는 빛이 되려면 불꽃의 열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곧 진리를 아는 것과 사랑하는 것이 함께 있어야 하고, 진리를 이해하는 것과 그 진리에 따라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반대로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불꽃의 열이 없는 과 같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런 상태에도 실제로 빛은 있다고 인정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분리된 신앙이라고 해서 아무런 진리도 없고,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을 많이 알 수도 있고, 교리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도 있으며, 매우 논리적인 신학 체계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빛은 있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빛에 열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겨울의 (the light of winter)이라고 부릅니다. 이 표현은 가인의 신앙을 설명하는 데 대단히 적절합니다. 겨울에도 태양은 빛납니다. 사물을 볼 수도 있고 길을 분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빛에는 생명을 일으키는 따뜻함이 없습니다. 땅은 얼어 있고 나무는 굳어 있으며 씨앗은 싹트지 않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안에서는 모든 것이 굳어지고 죽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앞의 AC.348-349와도 놀랍도록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체어리티 없는 신앙에서 나온 행위는 죽은 행위였고, 내적인 것이 없는 외적 예배는 죽은 예배였습니다. 이제 AC.365에서는 왜 그것들이 죽을 수밖에 없는지를 겨울의 으로 보여 줍니다. 빛은 있는데 열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지식과 교리는 있는데 체어리티의 사랑이 없습니다. 그러니 행위에도 생명이 없고 예배에도 생명이 없습니다.

 

이 비유를 조금 더 깊이 보면 빛을 없애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도 분명해집니다. 겨울의 문제는 빛이 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열이 없는 데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스베덴보리는 신앙이나 진리, 교리를 낮추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들이 본래의 생명을 되찾기를 원합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하면 겨울의 빛은 생명을 살리는 빛이 됩니다. 진리가 사랑과 결합하고, 이해가 의지와 결합하며, 아는 것이 삶과 결합될 때 신앙은 비로소 본래의 기능을 합니다.

 

따라서 체어리티가 주도한다는 말도 사랑만 있으면 진리는 중요하지 않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불꽃에는 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빛도 있습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진리를 밀어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리와 함께 있습니다. 선은 진리를 통하여 어떻게 선을 행해야 하는지를 알고, 진리는 선 안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문제는 둘 가운데 하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을 올바른 질서 안에서 결합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AC.362의 이단에 관한 설명도 다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은 신앙이라는 참된 것을 붙잡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하나의 참된 것을 질서 밖으로 끌어내어 첫째 자리에 놓자, 그 진리 자체가 생명의 근원에서 분리되었습니다. 빛을 붙잡았지만, 불꽃에서 떼어낸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사랑과 거기서 나온 환상이 그 빛을 계속 확증했습니다. 그래서 점점 더 밝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점점 더 추운 겨울의 빛이 되어 갔습니다.

 

이 점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는 신앙의 을 많이 가질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교리를 공부하고, AC를 읽고, 상응과 속뜻을 이해하고, 신학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상당히 정확하게 분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빛 때문에 이웃을 더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을 판단하고 낮추며, 자기 지식을 자랑하고, 자기와 다른 사람을 미워하게 된다면 그 빛에는 열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밝아 보여도 그것은 겨울의 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체어리티가 주도한다는 것은 진리를 적게 알고 대충 믿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깊이 진리를 배우되 진리가 나를 어떻게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끄는가?를 끊임없이 묻는 것입니다. AC를 읽는 목적도 AC에 관한 지식을 많이 축적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 진리를 통하여 주님을 더 사랑하고, 이웃을 더 지혜롭게 사랑하며, 실제 삶에서 더 선한 쓰임을 행하게 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때 진리의 빛에는 체어리티의 열이 함께 있게 됩니다.

 

이제 AC.361-365 전체를 돌아보면 흐름이 아주 선명해졌습니다.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가인은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에 두려 합니다.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고, 자기 사랑으로 그것을 확증합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체어리티가 주도하는 본래의 질서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체어리티가 없으면 악이 마음의 문 앞에 있게 되지만,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그 악을 물리칩니다. 그리고 이제 AC.365에서는 체어리티가 주도할 때에야 신앙이 참으로 신앙이 된다고 결론짓습니다.

 

그래서 가인과 아벨의 문제는 결국 신앙이냐 체어리티냐의 양자택일이 아닙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어떤 질서로 결합되어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아벨은 가인을 없애려 하지 않습니다.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가인이 아벨 위에 서려고 할 때 둘의 결합은 깨집니다. 그리고 그 결합이 깨지면 신앙은 불꽃에서 떨어져 나온 겨울의 빛처럼 되어, 결국 그 안의 모든 것을 굳게 하고 죽게 합니다.

 

그러므로 AC.365의 겨울빛 비유는 창4의 가인 이야기를 아주 간결하게 압축합니다. ‘빛이 있는가?만 물어서는 안 됩니다. ‘ 빛에 열이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나는 진리를 알고 있는가?만이 아니라 진리가 안에서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따뜻함으로 살아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체어리티의 불꽃에서 나오는 빛이라야 살아 있는 신앙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심화

 

1.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해야 하는가? - 겨울의 빛과 살아 있는 신앙

 

 

AC.365, 심화 1, ‘왜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해야 하는가? - 겨울의 빛과 살아 있는 신앙’

AC.365.심화 1. 왜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해야 하는가? - 겨울의 빛과 살아 있는 신앙 AC.361-365를 따라오면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단순히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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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4, 창4:7,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 악을 물리치는 것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4 둘째로, ‘네가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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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4:7)

 

AC.364

 

둘째로, 네가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 하였는데, 이는 네가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체어리티가 함께 있지 않고 오히려 악이 있다는 뜻입니다.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sin lying at the door) 것이 들어올 준비를 하고 들어오기를 원하는 악을 뜻한다는 것은 누구나 있습니다. 체어리티가 없으면 무자비함과 증오가 있고, 따라서 온갖 악이 있기 때문입니다. 죄는 일반적으로 마귀(devil) 불리는데, 마귀, 그의 지옥의 무리는 사람이 체어리티가 결여되어 있을 언제나 가까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귀와 그의 무리를 마음의 문에서 몰아낼 있는 유일한 수단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 Secondly, it is said, “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which signifies, If thou art not well disposed, there is no charity present, but evil. Everybody can see thatsin lying at the dooris evil ready and desirous to enter; for when there is no charity there are unmercifulness and hatred, consequently all evil. Sin in general is called thedevil,who, that is, his crew of infernals, is ever at hand when man is destitute of charity; and the only means of driving away the devil and his crew from the door of the mind is love to the Lord and toward the neighbor.

 

 

해설

 

AC.364는 앞의 AC.363과 정확히 대칭을 이룹니다. AC.363에서는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를 설명하면서,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으면 체어리티가 함께 있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64에서는 그 반대편을 보여 줍니다. ‘네가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곧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체어리티가 함께 있지 않으며, 그 자리에 악이 있게 됩니다. 따라서 이 두 글을 함께 놓으면 선한 의도와 체어리티그리고 체어리티의 부재와 이라는 선명한 대조가 나타납니다.

 

여기서 먼저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체어리티가 없다는 상태를 어떤 중립적인 상태로 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체어리티가 없으면 그저 아직 사랑이 부족하다는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무자비함과 증오가 있고, 따라서 온갖 악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강한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체어리티는 단순히 여러 기독교적 덕목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인간의 삶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이 들어와 이웃을 향하여 흘러가는 근본적인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그 체어리티가 사라지면 그 자리를 인간의 proprium에서 나오는 자기 사랑과 그에 따른 악들이 차지하게 됩니다.

 

그래서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들어올 준비를 하고 들어오기를 원하는 (evil ready and desirous to enter)이라고 풀이합니다. 아직 악이 완전히 안으로 들어와 모든 것을 차지했다고 하지 않습니다. 악은 문에있습니다. 이것은 지금 가인의 상태와도 정확하게 맞아떨어집니다. 가인은 이미 분노했고, 얼굴이 떨어졌지만 아직 아벨을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체어리티를 향한 적대적인 애정이 생겼지만, 체어리티 자체를 완전히 소멸시키는 다음 행위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경계에서 악이 문에 엎드려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은 매우 의미심장한 경계입니다. 안과 밖이 만나는 자리이며, 무엇인가가 들어오거나 들어오지 못하게 되는 자리입니다. 다만 AC.364에서는 아직 의 상응 자체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는 않으므로, 여기서 그 의미를 지나치게 확대하기보다는 스베덴보리가 직접 말한 범위에 머무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지금 분명한 것은 악이 인간 안으로 들어오려고 가까이 와 있으며, 체어리티가 없는 상태가 그 악에게 문을 열어 주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를 일반적으로 마귀(devil)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이것도 주의해서 읽어야 합니다. 그는 곧이어 마귀, 그의 지옥의 무리(his crew of infernals)라고 덧붙입니다. 따라서 이 문장의 초점은 악을 단순한 추상적 개념으로만 보지 않는 데 있습니다. 인간이 체어리티를 잃으면 그와 상응하는 지옥의 악한 영향이 가까이하게 된다는 스베덴보리 특유의 영계 이해가 배경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마귀가 와서 사람에게 악을 집어넣으므로 인간은 책임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유입의 질서에서 인간은 천국과 지옥 사이에 있으며, 양쪽으로부터 오는 유입 가운데 무엇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느냐와 관련하여 자유를 가집니다. 악한 영들이 가까이 있다고 해서 사람이 자동으로 악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악을 자기 의지와 결합하여 받아들이고 자기 것으로 삼을 때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는 표현에는 한편으로 악의 가까움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직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도 남아 있습니다.

 

이 점에서 바로 앞 AC.359-360이 다시 중요해집니다. 가인의 얼굴이 떨어지고 체어리티가 떠난 바로 그때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그리고 이제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고 경고하십니다. 즉 주님께서는 악이 행위로 완전히 굳어진 뒤에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악이 인간의 마음 문 앞에 와 있을 때 미리 알게 하십니다. 가인이 분노를 느낀 것과 아벨을 죽인 것 사이에는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는 섭리의 모습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강제로 악을 제거하시지는 않지만, 악을 보고 거절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선과 진리의 길을 보여 주십니다.

 

AC.364의 마지막 문장은 그래서 이 글 전체의 결론이면서 매우 강력합니다. ‘마귀와 그의 무리를 마음의 문에서 몰아낼 있는 유일한 수단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악과 싸우려면 의지를 강하게 가져라거나 올바른 교리를 확실히 믿어라고 하지 않습니다. 악을 마음의 문에서 물리치는 수단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가인의 이야기를 읽어 온 우리에게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이 부족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악이 문에 엎드려 있을 때 해결책이 강한 신앙이라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이 다시 사랑과 결합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질서로 돌아가야 합니다. 바로 그 사랑에서 체어리티가 나오고, 그 체어리티 안에서 신앙도 다시 생명을 얻습니다.

 

여기서 주님을 향한 사랑이웃을 향한 사랑을 함께 말한 것도 중요합니다. 둘은 서로 분리된 두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면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웃을 향하여 그 사랑이 흘러가며, 이웃을 향한 참된 체어리티의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악을 물리치는 힘이 인간 자신의 선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을 받아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할 때, 주님의 선이 인간 안에서 악을 밀어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귀와 그의 무리를 몰아낸다는 표현도 인간이 자기 힘으로 지옥과 싸워 이긴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향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면, 그 사랑과 함께할 수 없는 악과 거짓이 물러나는 것입니다. 실제로 싸우시고 이기시는 분은 주님이시며,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그 주님의 선을 받아들이고 악에 동의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AC.363AC.364는 한 쌍을 이룹니다. AC.363에서는 선을 의도함 체어리티가 함께 있음 얼굴이 들림이라는 길을 보여 주고, AC.364에서는 선을 의도하지 않음 체어리티가 없음 악이 문에 있음이라는 반대의 길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 갈림길에 서 있는 가인에게 주님께서는 아직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는 말씀은 단순히 무서운 경고만은 아닙니다. ‘아직 문에 있다는 것은 아직 선택의 여지가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아직 아벨은 살아 있고, 아직 체어리티가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으며, 아직 주님께서 가인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가인이 해야 할 일은 문 앞의 악과 자기 힘으로 씨름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다시 사랑의 질서 안으로 돌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결국 AC.364가 가르치는 것은 악을 이기는 길 역시 체어리티라는 사실입니다. 체어리티가 없어진 자리에 악이 들어오며, 체어리티가 회복되면 악은 물러납니다. 그래서 창4의 가인과 아벨 이야기는 점점 더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어느 것이 중요한가?라는 교리 논쟁을 넘어 인간 마음의 생명과 죽음의 문제가 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에 덧붙이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악이 마음의 문을 넘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살아 있는 생명입니다.

 

 

 

AC.365, 창4:7,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겨울의 빛과 같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5 셋째로,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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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3, 창4:6,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져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4:6) AC.363 ‘가인’(Cain)이라 불린 신앙의 교리가 어떤 성질의 것이었는지는 이 절에 대한 설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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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설교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신성종 목사가 죽음을 ‘교리 문제’로 시작하지 않고 ‘사람의 두려움’에서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화장장에서 어머니의 유골함을 받아 든 아들이 ‘이렇게 태웠는데 나중에 부활할 어머니 몸은 어떻게 됩니까?’라고 묻자, 그는 그 질문의 밑바닥에 ‘내가 어머니한테 몹쓸 짓을 것은 아닙니까?’라는 죄책감이 있음을 알아차립니다. 이것은 목회적으로 매우 중요한 통찰입니다. 사람이 죽음 앞에서 묻는 질문은 표면적으로는 신학적이어도 실제로는 사랑, 상실, 죄책감, 두려움의 언어인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좋은 가셨어요’, ‘천국 가셨으니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라는 말이 실제 유가족에게 별 위로가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그의 고백도 진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이런 태도는 충분히 귀하게 볼 수 있습니다. 체어리티는 먼저 상대방의 실제 상태를 살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죽음이 두렵다고 해서 신앙이 없는 것은 아니다’, ‘슬퍼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소망 없는 사람처럼 슬퍼하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도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다’는 설교 후반의 권면도 좋습니다. 신앙을 인간의 자연적 정서 자체를 억압하는 도구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육체를 입고 자연계에 사는 동안 사람에게 죽음은 이별이고, 사랑하는 사람을 눈앞에서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슬픔 자체가 신앙의 실패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그 슬픔이 절망으로 닫히느냐, 아니면 주님을 향한 신뢰 가운데 통과되느냐입니다. 이런 점에서 신성종 목사의 ‘무섭지 않은 것이 믿음이 아니라 무서운데도 손을 놓지 않는 것이 믿음’이라는 표현은 목회적으로 매우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설교는 여기서부터 스베덴보리와 매우 중요한 갈림길에 들어섭니다. 신성종 목사는 고린도전서 15장을 통해 ‘몸은 버려지는 껍데기가 아니다’라는 명제를 세우고, 당시 헬라 철학의 영혼-육체 이원론을 비판합니다. 그는 ‘육신의 옷을 벗고 하늘나라로 갔다’, ‘몸은 껍데기이고, 진짜는 영혼이다’ 같은 기독교 장례식의 익숙한 표현 안에 사실 헬라적 사고가 들어 있다고 지적합니다. 여기까지는 상당히 생각해 볼 만한 문제 제기입니다. 인간을 영혼이라는 ‘진짜 인간’과 아무 가치 없는 육체라는 ‘껍데기’로 단순 분해하는 사고는 분명 조심해야 합니다. 자연계의 몸 역시 주님이 인간에게 주신 것이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랑하고 섬기고 일하고 체어리티를 실천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제3의 길이 열립니다. 그것은 ‘물질적 몸이 껍데기가 아니므로 물질적 몸이 다시 살아나야 한다’도 아니고, ‘물질적 몸은 아무 가치가 없고 영혼만 진짜다’도 아닙니다. 인간은 사후에도 완전한 인간이며, 몸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다만 그 몸은 이 자연계의 물질로 이루어진 몸이 아니라 영계의 실체에 상응하는 ‘영적 ’입니다. 사람이 죽을 때 자연계의 육체는 자연계에 남겨 두지만, 그 사람 자신은 몸 없는 의식이나 구름 같은 영혼이 되어 떠도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사람의 형상을 그대로 지닌 영으로 깨어나고, 보고 듣고 말하고 걷고 사람을 만나며 살아갑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영계에서의 인간이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처음에는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삶의 연속성을 경험한다고 거듭 설명합니다.

 

이 점에서 신성종 목사가 ‘신령한 ’을 ‘유령 같은 비물질적인 무엇’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 것은 뜻밖에도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가까운 지점까지 옵니다. 차이는 그다음입니다. 신성종 목사는 그 ‘신령한 ’을 마지막 날 현재의 육체가 변화하여 얻는 몸으로 이해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죽는 순간 자연적 몸을 벗고 이미 영적 몸으로 영계에 들어간다고 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는 수천 년 동안 무덤 속에서 몸의 부활을 기다리는 영혼이라는 상태가 없습니다. 아담 시대의 사람도, 오늘 죽은 사람도 사후에는 영계에서 인간으로 살아갑니다. 마지막 날에 무덤으로 돌아와 옛 물질을 다시 모아 몸을 만드는 과정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설교의 출발점이 된 ‘화장하면 나중에 어머니의 몸은 어떻게 됩니까?’라는 질문에 스베덴보리는 신성종 목사보다 훨씬 더 직접적으로 대답했을 것입니다. ‘화장하든 매장하든 어머니 자신에게는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어머니는 육체 속에 남아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연적 육체는 이 자연계에서 살아가기 위해 잠시 입었던 몸이며, 죽음과 동시에 인간 자신은 영적 몸으로 영계에서 깨어납니다. 따라서 화장은 부활을 어렵게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애초에 사후의 인간이 다시 사용해야 할 몸을 훼손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매장된 시신도 다시 필요한 것이 아니고, 화장된 재도 다시 모을 필요가 없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설교의 ‘씨앗’ 비유도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다르게 읽힙니다. 신성종 목사는 고린도전서 15장의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를 장례와 미래의 육체 부활로 연결합니다. ‘어머니는 지금 땅에 심겨 있는 거네요’라는 유가족의 말은 이 설교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입니다. 목회적 위로로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정확히 말해 ‘어머니가 땅에 심겨 있는 ’이 아닙니다. 땅에 있는 것은 어머니가 자연계에서 사용하던 육체입니다. 어머니 자신은 이미 영계에서 깨어나 삶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더 정확한 위로는 ‘어머니는 사라진 것도 아니고, 땅속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미 다른 세계에서 사람으로 살아 계십니다’가 될 것입니다.

 

이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사후세계 이해 전체를 바꿉니다. 전통적 육체 부활론에서는 ‘죽음 영혼의 중간 상태 마지막 육체 부활’이라는 구조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집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에게서는 ‘죽음 영계에서 깨어남 중간영계에서 내면이 드러남 자신의 지배적 사랑에 따라 천국 또는 지옥으로 들어감’이라는 흐름입니다. 따라서 부활은 먼 미래에 있을 사건만이 아니라 죽음과 함께 인간에게 실제로 일어나는 사후의 깨어남과 깊이 연결됩니다. 이것은 유가족에게 주는 위로의 내용까지 크게 달라지게 합니다. ‘언젠가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보다 ‘ 사람은 지금도 주님의 섭리 아래 존재하며 살아 있습니다’라는 쪽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하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부활을 다루는 부분에서는 더욱 세심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신성종 목사는 부활하신 예수가 만져질 수 있었고, 음식을 드셨으며, 못 자국도 있었다는 사실을 들어 우리의 미래 부활 몸 역시 이와 같은 물질적 몸이라는 논증을 펼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부활은 일반 인간의 사후 과정과 동일한 사례가 아닙니다. 주님은 인간처럼 자연적 몸을 버리고 영으로 살아난 분이 아니라, 지상 생애 동안 인성을 신성과 하나 되게 하시는 영화의 과정을 완성하시고, 신적 인성(Divine Human)으로 부활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무덤에 주님의 몸이 남아 있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일반 인간의 죽음과 다릅니다. 이것을 모든 인간의 시체가 마지막 날 다시 일어날 것이라는 직접적인 모델로 삼으면 스베덴보리의 기독론과 사후세계론에서는 중요한 구별 하나가 사라집니다.

 

그렇다고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보이고 만져지고 함께 음식을 드신 사건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영적인 것은 물질적이지 않으므로 실체도 없다’는 우리의 자연적 선입견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묘사하는 영계는 희미하고 추상적인 의식의 세계가 아닙니다. 그곳에는 사람, 집, 길, 공동체, 산과 들, 식물과 수많은 환경이 있으며, 사람들은 서로 보고 말하고 살아갑니다. 그것들은 자연계 물질이 아니라 영적 실체와 그 상응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몸이 없으면 어떻게 서로 알아봅니까?’라는 질문 자체가 스베덴보리에게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영들은 몸 없는 영혼들이 아니라 사람의 형상을 지닌 인간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머니를 다시 만나면 알아볼 있습니까?’라는 설교 속 질문에도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매우 적극적입니다. 알아볼 수 있습니다. 다만 천국에서의 재회는 단순히 얼굴을 기억하여 알아보는 차원을 넘어섭니다. 영계에서는 사람의 내면이 외면에 더욱 직접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자연계에서는 몸과 사회적 역할과 여러 외적 조건이 사람의 내면을 가릴 수 있지만, 영계에서는 점차 그 사람의 지배적 사랑과 실제 성품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진정한 결합은 단순한 혈연만으로 영원히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내적 사랑과 삶의 상태가 서로 조화를 이루느냐와 관계됩니다. 이 부분은 ‘죽으면 가족이 모두 그대로 모여 영원히 함께 산다’는 식의 단순한 위로와는 구별해야 합니다.

 

설교에서 또 하나 크게 갈라지는 부분은 요한계시록 21장의 ‘ 하늘과 ’입니다. 신성종 목사는 ‘성경의 마지막 그림은 우리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내려오는 ’이라며, ‘새로워진 몸을 입은 우리가 새로워진 땅에서 하나님과 함께 사는 ’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흙냄새, 밥 짓는 냄새, 손을 잡는 감촉, 함께 밥 먹는 시간 같은 자연적 삶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정서적으로 매우 따뜻하고 매력적인 그림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 하늘과 ’ 해석은 이것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 하늘과 ’은 물질 우주가 폐기되고 새로운 물질 지구가 만들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영계에서 이루어지는 새 하늘과 그에 상응하여 자연계에 세워지는 새로운 교회, 곧 새로운 영적 질서를 가리킵니다. ‘ 예루살렘’ 역시 하늘에서 물리적으로 내려오는 거대한 도시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새 교회의 교리와 삶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 설교에서 가장 조심해서 받아들여야 할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천국은 결국 새로워진 지구이며, 우리는 부활한 물질적 몸으로 그곳에서 다시 산다’는 그림은 성경의 문자적 이미지를 매우 충실하게 붙들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에게는 그 문자 안의 속뜻을 자연적 차원에 고정한 해석이 됩니다. 요한계시록의 ‘ 하늘’, ‘ ’, ‘ 예루살렘’을 자연적 공간과 물질적 도시로 읽기 시작하면, 계시록 전체에 흐르는 상응적 언어를 놓치게 됩니다.

 

그렇지만 신성종 목사가 이 교리를 통해 도달한 윤리적 결론은 매우 귀합니다. 그는 고린도전서 15장이 58절에서 ‘그러므로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안에서 헛되지 않은 앎이라’로 끝난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교회 화장실을 청소한 사람, 새벽에 난로를 피운 사람, 김치를 담가 홀로 사는 노인에게 가져다준 사람, 수십 년 동안 주보를 접은 사람들의 손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아주 중요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천국을 이루는 것은 단순히 올바른 교리를 알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실제 삶의 유용한 일, 곧 쓰임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 손이 다시 살아납니다’라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다시 해석해야 합니다. 관절이 붓고 굳은살이 박힌 바로 그 물질적 손의 원자들이 다시 모인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손으로 행했던 사랑과 쓰임이 그 사람의 영원한 인격 안에 남는다고 보는 편이 더 가깝습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무엇을 사랑했고, 무엇을 의도했고, 그 사랑을 어떻게 삶으로 행했는지가 그 사람의 내적 생명을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는 신성종 목사의 ‘부활이 있으므로 지금 하는 일이 헛되지 않다’는 결론과 스베덴보리의 ‘사람이 세상에서 형성한 지배적 사랑과 삶의 상태를 가지고 영원으로 들어간다’는 가르침이 뜻밖에 깊이 만납니다. 결론의 영적 방향은 가까운데 그 결론을 설명하는 사후세계의 구조가 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 설교를 읽으며 특별히 눈여겨볼 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중심 본문이 고린도전서 15장이라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울 서신을 포함한 사도들의 서신을 복음서나 계시록과 같은 의미에서 ‘말씀’으로 보지 않으며, 그 안에 연속적인 내적 의미, 곧 아르카나가 담겨 있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사도서신이 무가치하거나 읽을 필요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교회를 가르치고 신앙과 체어리티의 삶을 권면하는 중요한 교훈이 그 안에 있습니다. 따라서 고린도전서 15장의 ‘’, ‘썩을 것과 썩지 아니할 ’, ‘육의 몸과 신령한 ’을 창세기나 계시록의 상응처럼 하나하나 아르카나로 풀어내기보다, 사도 바울이 당시 교회에 가르치려 했던 교리적 가르침으로 읽고 그것을 말씀 전체와 조화시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더 적절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설교는 아주 흥미로운 역설을 보여 줍니다. 신성종 목사는 ‘ 없는 영혼이 천국으로 간다’는 통속적 기독교 관념을 헬라 철학의 영향이라고 비판하면서 성경적 사후세계를 회복하려 합니다. 문제 제기 자체에는 중요한 진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대안으로 ‘마지막 무덤에서 육체가 부활하여 지구에서 살아간다’는 방향으로 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두 그림 모두를 넘어섭니다. 인간은 몸 없는 영혼이 아닙니다. 그러나 다시 자연적 육체를 입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은 죽는 순간 자연적 몸을 내려놓고 영적 몸으로 깨어나며, 그 몸으로 영계에서 완전한 인간의 삶을 계속합니다. 저는 이번 설교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바로 이 지점이 가장 중요한 분별점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처음 화장장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면, 세 관점의 차이가 아주 선명해집니다. ‘어머니의 몸을 태워 버렸는데 어떻게 부활합니까?’라는 질문에 통속적인 영혼불멸론은 ‘몸은 중요하지 않고 영혼만 천국에 갔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신성종 목사는 ‘ 몸은 씨앗이며 하나님께서 마지막 썩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리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어머니 자신은 유골함 안에도, 무덤 안에도 계시지 않습니다. 자연적 육체는 그곳에 남았지만 어머니는 이미 영적 몸으로 영계에서 깨어나셨습니다’라고 대답하게 됩니다. 세 답은 비슷하게 유가족을 위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인간이 ‘지금 어디에 있으며 어떤 상태로 존재하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세계관을 전제합니다.

 

그럼에도 이 설교 전체를 오류 때문에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처음부터 끝까지 흐르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정죄하지 말자’, ‘유가족의 슬픔을 억누르지 말자’, ‘화장 때문에 죄책감을 갖지 말자’, ‘몸으로 행한 작은 사랑의 수고를 하찮게 여기지 말자’, ‘죽음이 마지막이므로 현재의 삶이 허무한 것이 아니라 영원이 있으므로 오늘의 사랑과 수고가 중요하다’는 목회적 메시지는 충분히 귀합니다. 특히 이름 없이 교회를 섬기고 이웃을 돌본 사람들의 작은 수고를 기억하는 부분은 체어리티와 쓰임이라는 스베덴보리의 핵심 가르침과 매우 아름답게 만납니다.

 

결국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이 설교에 던지는 질문은 ‘신성종 목사의 부활 신앙이 옳으냐 그르냐’ 정도가 아닙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부활이란 정확히 무엇인가?’입니다. 자연적 육체의 재생인가, 아니면 인간이 죽음을 통과하여 영적 세계에서 자신의 참된 몸으로 깨어나는 것인가? ‘ 하늘과 ’은 미래의 물질 우주인가, 아니면 주님이 이루시는 새로운 영적 질서와 새 교회인가? 그리고 예수의 부활은 우리 육체 부활의 단순한 견본인가, 아니면 주님의 인성이 완전히 영화되어 신성과 하나 된 유일무이한 사건인가? 이 질문들 앞에서 신성종 목사의 설교는 오히려 좋은 출발점을 제공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의 목회적 고백을 그대로 귀하게 남겨 두어도 좋겠습니다. ‘무섭지 않은 것이 믿음이 아니라 무서운데도 손을 놓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여기에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을 덧붙인다면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죽음 앞에서 우리가 붙드는 소망은 ‘언젠가 흩어진 육체의 원소가 다시 모일 ’이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소망은 ‘죽음조차 주님이 주신 생명의 연속을 끊을 없다’는 데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음과 함께 무(無)로 사라졌다가 먼 훗날 다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문을 통과하여 영계에서 계속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장례는 한 사람의 존재가 끝나는 자리가 아니라, 우리의 눈에서는 닫히지만 그에게는 다른 세계가 열리는 경계가 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설교가 품고 있는 따뜻한 목회적 위로와 스베덴보리의 놀라울 만큼 구체적인 사후세계의 가르침이 서로 만날 수 있다고 봅니다.

 

 

심화

바울은 왜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을 이렇게 말했을까?

 

 

SY.93, 신성종 목사, 심화 1, ‘바울은 왜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을 이렇게 말했을까?’

SY.93, 심화바울은 왜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을 이렇게 말했을까? 앞의 신성종 목사의 설교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살펴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에 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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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먼저 영상에서 매우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거룩하게 살고 싶다’는 열망입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1,600년 동안 그곳에서 수도하다 세상을 떠난 수도자들의 유골을 보면서 끔찍함보다 오히려 ‘향기가 났다’, ‘고개를 숙이고 흠모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또 게라시모스가 기도하던 동굴과 그곳에 얽힌 이야기들을 소개하면서 마지막에는 자신도 ‘그런 영이 임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 마음 자체는 가볍게 볼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무엇을 더 얻고 높아질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가까이 것인가’를 사모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수도 전통이 오랜 세월 수많은 사람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것도 바로 이 지점일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서 ‘거룩함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한 번 더 묻게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룩함은 어떤 장소에서 오래 기도하고, 육체를 극도로 절제하고, 세상을 떠나 고독하게 산다는 사실 그 자체에서 생기지 않습니다.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오직 주님이며,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실제 삶에서 살아갈 때 그 삶이 거룩해집니다. 그러므로 수도원도 거룩함을 돕는 장소가 될 수 있고, 광야의 동굴도 그럴 수 있지만, 그것들이 그 자체로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수도원 안에서도 proprium은 얼마든지 살아 있을 수 있고, 오히려 ‘나는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산다’, ‘나는 이렇게 많이 기도한다’, ‘나는 이런 금욕을 견뎌 냈다’는 영적 자기의가 더 미세한 형태로 자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수도생활을 부정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수도생활을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제자리에 놓아 줍니다. 침묵, 금식, 기도, 독거, 절제, 단순한 생활은 모두 훌륭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의 목적은 ‘수도자가 되는 ’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가 주님께 굴복하고,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주님께 받은 선을 이웃에게 흘려보내는 데 있습니다. 결국 천국의 삶은 세상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었는가보다 ‘무엇을 사랑하며 살았는가’에 의해 결정됩니다.

 

이 영상에서 특별히 아름다운 대목은 게라시모스와 사자의 이야기입니다. 게라시모스가 발에 가시가 박힌 사자를 치료해 주었고, 그 뒤 사자가 그를 따르며 도왔으며, 마침내 게라시모스가 죽은 뒤에도 그의 무덤 곁을 떠나지 않았다는 전승입니다. 이것을 역사적으로 어디까지 사실로 받아들일 것인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영상 자체도 수도 전통에서 전해 내려오는 성인전적 이야기의 성격으로 읽는 것이 안전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이야기가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동물은 매우 흥미로운 존재입니다. 말씀의 속뜻에서 동물들은 인간의 여러 정서와 애정을 표상합니다. 온순하고 유익한 동물들은 선한 애정들을, 사납고 해로운 동물들은 악한 애정들을 표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현실의 사자 한 마리를 곧바로 어떤 하나의 영적 의미와 기계적으로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영적 그림은 상당히 아름답습니다. 인간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야생의 힘이 사랑과 돌봄 앞에서 적대성을 잃고 봉사하는 힘으로 바뀝니다. ‘가시를 주는 ’에서 시작하여 ‘곁을 지키는 ’으로 끝나는 이 이야기는, 인간 안의 거칠고 자연적인 것조차 주님의 질서 아래 들어오면 선을 섬기는 힘이 될 수 있다는 그림으로 읽어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도 한 가지는 조심해야 합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마지막에 ‘동물과도 친해지고, 동물도 알아주고, 하나님이 알아주는 것은 물론 사람들이 인정하는 신성한 ’을 구하는 취지로 기도합니다.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사람들이 알아보는 거룩함’이 아닙니다. 심지어 ‘동물까지 알아보는 성자 같은 사람이 되는 ’도 아닙니다. 우리가 구해야 하는 것은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는 ’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성자라고 생각하는지, 영성이 깊다고 인정하는지는 본질적으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대단히 중요합니다. ‘ 수도자처럼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지’라는 열망은 아름답게 출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중심이 ‘주님’에서 ‘거룩한 ’로 옮겨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끊임없이 인간의 proprium을 경계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거룩해졌는가’를 바라보는 순간, 거룩함은 어느새 자기 소유물이 되기 쉽습니다. 반대로 ‘ 안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없으며, 모든 선과 진리는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점점 깊이 인정하는 사람은 자신을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려고 애쓰기보다 주님께서 자기 안에서 일하시도록 자신을 내어 드리게 됩니다.

 

영상에 등장하는 광풍도 이런 관점에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습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앞을 제대로 보기 어려울 만큼 거센 바람과 먼지가 부는 날에도 동굴을 향해 걸어갔고, 안내자는 ‘게라시모스는 이런 날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 기도했던 성인’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분명 인상적인 장면입니다. 그러나 영적 삶에서 더 중요한 광풍은 바깥의 날씨가 아니라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시험입니다. 기도하기 좋은 분위기가 깨졌을 때,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할 때, 내가 옳다고 생각한 것이 무너질 때, 자존심이 상할 때, 내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을 때에도 주님을 향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훨씬 깊은 문제입니다. 외적 광풍을 견디는 수도보다 ‘proprium 광풍’을 견디는 내적 싸움이 더 어렵습니다.

 

또 한 가지, 영상에는 한국 목회자들이 악천후에도 동굴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강문호 수도사가 ‘역시 한국 사람들은 한국 사람이구나’ 하며 감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역시 그 현장에서 느낀 반가움과 감동의 표현으로 받아들이면 충분하겠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누가 독하게 기도하는가’가 영성의 척도가 되지는 않습니다. 오랜 시간 기도하는 것도 귀하고, 새벽기도도 귀하며, 금식도 귀합니다. 그러나 기도의 열매는 결국 그 사람이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나타납니다. 더 온유해졌는가, 자기 생각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는가, 타인의 허물을 덜 정죄하게 되었는가, 자신의 악을 더 분명하게 보게 되었는가, 이웃에게 더 유익한 사람이 되었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영상의 핵심을 ‘게라시모스처럼 되어야 한다’에서 한 걸음 더 안쪽으로 옮겨 읽고 싶습니다. 게라시모스의 동굴도, 1,600년의 수도 전통도, 수도자들의 유골도, 광풍 속의 기도도, 사자의 충성도 모두 우리를 감동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가리켜야 할 마지막 대상은 ‘위대한 수도자’가 아니라 ‘사람을 거룩하게 하시는 주님’이어야 합니다. 성자의 삶이 귀하다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서 주님의 어떤 것이 비쳐 나왔기 때문이지, 그 사람이 스스로 거룩함의 원천이 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특히 사자 이야기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을 저는 ‘사자가 성인을 알아보았다’는 데서 찾기보다 ‘고통받는 존재의 가시를 주었다’는 데서 찾고 싶습니다. 이것은 아주 작은 차이 같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큰 차이입니다. 사자를 굴복시킨 영적 능력이 중심이 아니라, 아파하는 생명에게 다가가 그 고통의 원인을 제거해 준 체어리티가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발에 박힌 ‘가시’를 발견하고 그것을 빼 주는 사람, 상처받은 사람에게 다가가 고통을 덜어 주는 사람, 그리고 그 일을 자신의 공으로 돌리지 않는 사람이라면, 수도복을 입고 있든 평범한 옷을 입고 있든 이미 수도 영성의 깊은 중심에 가까이 가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영상에서 우리가 받아야 할 기도도 조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주님, 사람들이 알아보는 성스러운 사람이 되게 하소서’라기보다 ‘주님, 안의 악을 보게 하시고, 그것을 죄로 알고 피하게 하시며, 제게 주시는 선을 것이라 여기지 않게 하시고, 오늘 곁에 있는 존재의 가시 하나라도 주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저는 이것이 게라시모스의 이야기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통과시켰을 때 남는, 더 조용하지만 더 깊은 수도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SY.87, 강문호 수도사, ‘수도학교’ (20200112)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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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4:7)

 

AC.363

 

가인(Cain)이라 불린 신앙의 교리가 어떤 성질의 것이었는지는 절에 대한 설명에서 있습니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체어리티가 신앙과 결합될 수는 있었으나,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져야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먼저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If thou doest well art thou not uplifted)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네가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면 체어리티가 함께 있을 있다 뜻입니다. 선을 행한다(do well) 것은 속뜻으로 선한 의도를 가지는 뜻하는데, 선을 행하는 것은 선을 의도하는 데서(from willing what is good) 나오기 때문입니다. 고대에는 행위와 의지가 하나를 이루었습니다. 사람들은 행위를 보고 의지를 알았는데, 당시에는 위선이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낯을 (uplifting) 체어리티가 함께 있음을 뜻한다는 것은 앞에서 얼굴에 관하여 설명한 것으로 분명합니다. 얼굴을 든다(lift up the face) 것은 체어리티를 가지는 것이며, 얼굴이 떨어진다(face to fall) 것은 반대입니다. The nature of the doctrine of faith that was calledCainis seen from the description of it in this verse, from which it appears that charity was capable of being joined to faith, but so that charity and not faith should have the dominion. On this account it is first said, “If thou doest well art thou not uplifted?signifying, If thou art well disposed, charity may be present; for todo wellsignifies, in the internal sense, to be well disposed, since doing what is good comes from willing what is good. In ancient times action and will made a one; from the action they saw the will, dissimulation being then unknown. That anupliftingsignifies that charity is present 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already said about the face, that tolift up the faceis to have charity, and that for theface to fallis the contrary.

 

 

해설

 

AC.363은 앞의 AC.361-362에서 제시된 가인의 문제를 한층 더 정확하게 밝혀 줍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 자체에 있지 않았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글 첫머리에서 체어리티가 신앙과 결합될 있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문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함께 있느냐 없느냐만이 아니라, 둘이 함께 있을 때 어느 것이 주도권을 가지느냐였습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 그대로라면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져야(charity and not faith should have the dominion) 했습니다. 이것은 체어리티가 신앙을 억누르거나 무가치하게 만든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본래 결합되어야 하지만, 그 결합 안에서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기고 체어리티로 인도해야 하며, 체어리티가 신앙에 생명과 방향을 주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62의 설명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은 신앙을 버린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을 사랑보다 본질적인 으로 만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신앙을 사랑보다 앞세우자, 신앙은 사랑에서 나오는 체어리티에서도 분리되었고, 결국 사랑 없이 살게 되었습니다. AC.361에서는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만, 가인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함께 있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63은 그 반대의 정상적인 질서를 명시합니다. 체어리티와 신앙은 결합되어야 하되,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해야 합니다. 바로 이 질서가 뒤집힌 것이 가인의 교리였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먼저 하신 말씀이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너는 이미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했으므로 끝났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아직 체어리티가 다시 신앙과 결합할 가능성이 남아 있습니다. 가인이 다시 선을 향한다면 체어리티가 그와 함께 있을 수 있고, 떨어졌던 얼굴도 다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4:7은 단순한 책망이나 심판의 선언이라기보다 가인에게 주어진 회복의 초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선을 행한다(to do well)는 것을 단순히 외적으로 선한 행동을 한다는 뜻으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속뜻으로는 선한 의도를 가지는 (to be well disposed)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선을 행하는 것은 선을 의도하는 것에서(from willing what is good) 나오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행위의 외적 모양보다 그 행위가 흘러나오는 내적 의지입니다. 선한 행위가 참으로 선하려면 그 안에 선을 향하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살펴본 가인의 제물과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가인에게도 행위가 있었습니다. 그는 땅을 경작했고, 그 소산으로 여호와께 제물을 드렸습니다. 겉으로 보면 예배도 드렸습니다. 그러나 AC.348-349에서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 없는 신앙에서 나온 행위를 죽은 행위, 내적인 것이 없는 외적 예배를 죽은 예배로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가인에게 선을 행하라고 하신 말씀은 단순히 이번에는 좋은 행동을 하라거나 합당한 제물을 드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외적 행위의 근원이 되는 내적 의지가 먼저 선을 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고대에는 행위와 의지가 하나를 이루었다고 말합니다. 당시에는 사람의 행위를 보면 그 사람의 의지를 알 수 있었는데, 그 이유를 위선(dissimulation)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마음속으로 원하는 것과 밖으로 행하는 것이 오늘날처럼 쉽게 서로 갈라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의지에 있는 것이 행위로 나타났고, 행위는 그 사람 안에 있는 의지를 드러냈습니다. 그래서 선을 행한다는 것과 선을 의도한다는 것이 서로 분리된 두 가지가 아니라 하나의 상태를 안과 밖에서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여기서 고대에는이라는 표현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일반적인 고대사 전체에 대한 진술이라기보다, 이 문맥에서 다루고 있는 태고교회 사람들의 특유한 내적 상태와 연결하여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고대에 살았던 모든 사람이 역사적으로 거짓말이나 위선을 전혀 몰랐다는 뜻으로 확대하기보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의지와 행위가 아직 하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행위를 보면 그 사람의 의지를 알 수 있었으며, 속마음을 감추고 그와 다른 모습을 밖으로 꾸미는 위선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AC.363의 관심은 고대 인류 전체의 사회사를 설명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 사람들의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었는지를 설명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앞의 AC.358에서 살펴본 얼굴의 의미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얼굴은 인간의 내적인 것들을 상징합니다. 특히 태고교회와 관련해서는 내적인 애정과 상태가 얼굴에 그대로 나타났기 때문에 얼굴이 그 사람의 내면을 표상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얼굴이 떨어졌다는 것은 단순히 화가 나서 표정이 어두워졌다는 뜻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떠남으로써 그의 내적인 것들이 변했다는 뜻이었습니다.

 

그 반대가 바로 AC.363낯을 (an uplifting)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얼굴을 든다는 것을 체어리티가 함께 있는 것으로 풀이합니다. 그러므로 창4:6-7에는 매우 선명한 대조가 있습니다. 가인의 얼굴은 떨어졌습니다. 체어리티가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하십니다. 다시 말해 가인이 선을 의도하고, 체어리티가 다시 그와 함께 있게 된다면, 변해 버린 그의 내적인 것들도 다시 올바른 질서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얼굴을 은 곧 체어리티의 회복이며, 그에 따른 내적인 것들의 회복입니다.

 

여기서 AC.358 심화에서 살펴본 여호와의 얼굴까지 연결해 보면 더욱 깊은 그림이 나타납니다. 여호와의 얼굴은 주님의 자비를 뜻하며, 주님께서 그 얼굴을 들어 사람에게 비추신다는 것은 그 자비가 사람에게 유입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얼굴이 다시 들리는 것도 인간이 자기 힘으로 스스로를 개선하여 얻는 결과라고만 볼 수 없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자비를 받아 그것이 사람 안에서 체어리티가 될 때, 떨어졌던 인간의 얼굴, 곧 그의 내적인 것들이 다시 들리는 것입니다. 주님의 얼굴은 언제나 자비로 우리를 향하고 있으며, 문제는 인간이 그 자비를 받아 체어리티 안으로 돌아오느냐에 있습니다.

 

AC.363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의지입니다. 참된 선은 단순히 행동의 외적 모양만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선을 향하는 의지에서 선한 행위가 나와야 합니다. 다만 이 태고교회의 상태를 오늘날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홍수 후 영적 인간의 질서에서는 의지 자체가 처음부터 선을 직접 지각하여 행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말씀에서 선과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이해성(understanding) 안에서 받아들이며, 그 진리에 따라 양심적으로 살아가는 과정을 통하여 새로운 의지가 형성됩니다. 바로 앞 AC.359-360에서 우리가 퍼셉션과 양심의 차이를 조심스럽게 살펴본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는 마음이 아직 충분히 원하지 않더라도 이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선이기 때문에 행해야 한다고 진리와 양심에 따라 순종하는 단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주님께서는 그 진리를 점차 의지 안에 심으십니다. 처음에는 해야 하기 때문에행하던 선을 나중에는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행하게 하십니다. 그렇게 진리가 선과 결합되고,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되며, 아는 것과 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이 점차 하나를 향하게 됩니다. 태고교회의 행위와 의지가 하나였다는 상태를 오늘날 우리가 그대로 되풀이하는 것은 아니지만, 거듭남을 통하여 속과 겉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 점차 하나가 되어 간다는 원리는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합니다.

 

이렇게 보면 가인의 길은 거듭남의 방향과 정확히 반대입니다.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사랑에서 구별한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었지만, 그 구별을 분리로 만들었고, 분리된 신앙을 사랑과 체어리티보다 위에 세웠으며, 마침내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에 두고 지배하려 했습니다. 그러면서 외적인 행위와 예배는 남아 있었지만, 그 안의 생명은 점차 사라졌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그 가인에게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말씀하십니다. 다시 체어리티를 받아들이고, 신앙을 체어리티와 결합시키며, 외적 행위가 선을 향한 내적 의지에서 흘러나오게 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AC.363의 핵심은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둘은 반드시 결합되어야 합니다. 다만 그 결합에는 주님의 질서가 있습니다. 신앙이 체어리티 위에 서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해야 하며, 진리는 선을 섬기고, 신앙은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면 가인의 질서가 되지만, 체어리티가 신앙에 생명과 방향을 주면 신앙은 비로소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얼굴을 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떨어진 얼굴을 다시 들게 하는 것은 더 많은 지식이나 더 강한 교리적 확신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을 받아 체어리티가 다시 신앙과 함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직 가인은 아벨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아직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할 길이 열려 있습니다. 그래서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는 말씀은 책망인 동시에 자비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체어리티에서 떠나 얼굴이 떨어진 가인에게도 여전히 돌아올 길을 보여 주고 계십니다.

 

 

 

AC.362, 창4:6,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든 가인의 교리’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4:6) AC.362 여기서는 ‘가인’(Cain)이라 하는 신앙의 교리가 묘사됩니다. 이 교리는 신앙을 사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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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4:7)

 

AC.362

 

여기서는 가인(Cain)이라 하는 신앙의 교리가 묘사됩니다. 교리는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함으로써, 사랑에서 나오는 체어리티에서도 신앙을 분리하였습니다. 교회가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이단들이 생겨납니다. 사람들이 신앙의 어떤 특정 조항 하나에 몰두하면 그것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사고에는 이런 성향이 있어서, 어떤 가지에 몰두하면 그것을 다른 모든 것보다 앞세우며, 특히 그것을 자기 자신이 발견한 것이라고 상상할 , 그리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그를 부풀게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생각과 일치하고 그것을 확증하는 것처럼 보이게 되며, 마침내 그것이 거짓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참이라고 맹세할 정도에 이르게 됩니다. 바로 이런 식으로 가인(Cain)이라 하던 사람들은 신앙을 사랑보다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으며, 결과 사랑 없이 살게 되자 자기 사랑과 거기서 비롯된 환상이 서로 결탁하여 그들을 생각 가운데 더욱 굳어지게 하였습니다. The doctrine of faith calledCainis here described, which in consequence of separating faith from love, separated it also from charity, the offspring of love. Wherever there is any church, there arise heresies, because while men are intent on some particular article of faith they make that the main thing; for such is the nature of mans thought that while intent on some one thing he sets it before any other, especially when his imagination claims it as a discovery of his own, and when the love of self and of the world puff him up. Everything then seems to agree with and confirm it, until at last he will swear that it is so, even if it is false. Just in this way those calledCainmade faith more essential than love, and as they consequently lived without love, both the love of self and the fantasy thence derived conspired to confirm them in it.

 

 

해설

 

AC.362는 가인의 문제가 어떻게 하나의 교리로 굳어졌는지를 본격적으로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글입니다. 앞의 AC.361에서 우리는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만, 가인으로 표상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에 두고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함께 할 수 없다는 설명을 보았습니다. 이제 AC.362에서는 한 걸음 더 들어가 어떻게 그런 생각이 생겼으며, 어떻게 그것이 하나의 확고한 교리가 되었는가?를 설명합니다.

 

첫 문장이 전체를 압축합니다. ‘가인은 단순히 신앙 자체가 아니라 신앙의 교리입니다. 그런데 그 교리는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했고, 그 결과 사랑의 자손인 체어리티에서도 신앙을 분리했습니다. 여기서 체어리티는 사랑의 자손(the offspring of love)이라는 표현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이 내적인 근원이라면 체어리티는 그 사랑이 이웃을 향하여 나타나는 삶입니다. 따라서 신앙을 사랑에서 떼어 놓는 순간 그것은 자연스럽게 체어리티에서도 떨어져 나갑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를 서로 독립된 것으로 만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 문제를 가인이라는 고대의 한 이단에만 한정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이단들이 생겨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사고에는 어떤 하나의 진리를 붙잡았을 때, 그것을 전체로 만들어 버리는 성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단이 반드시 처음부터 완전히 거짓된 생각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신앙처럼 실제로 중요하고 참된 것을 붙잡고, 그것을 다른 모든 것보다 앞세울 때 문제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앞에서 살펴본 가인의 시작과 정확히 맞닿습니다. 가인은 처음부터 거짓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태고교회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에 속한 것을 하나의 구별되는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데서 출발했습니다. 문제는 그 구별분리가 되고, 분리된 것이 마침내 주된 이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AC.362에서는 바로 그 과정의 심리적 원인을 설명합니다. 인간은 어떤 하나에 몰두하면 그것을 다른 모든 것보다 앞세우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매우 날카로운 대목이 그것을 자기 자신이 발견한 것이라고 상상할 입니다. 어떤 진리를 단순히 주님에게서 받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내가 이것을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다른 내적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 그 진리가 점차 나의 진리가 됩니다. 그러면 그 진리를 내려놓거나 수정하는 것은 단순히 생각 하나를 수정하는 일이 아니라 를 부정하는 일처럼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자기 사랑이 그 교리와 결합합니다.

 

여기에 세상 사랑까지 더해집니다. 어떤 교리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그것으로 명성을 얻고, 자기 집단의 정체성과 권위를 세울 수 있게 되면 이제 그 교리를 지키는 데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함께 작동합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진리인가?를 물었지만, 나중에는 내가 틀릴 있는가?’, ‘우리가 틀릴 있는가?의 문제가 됩니다. 진리를 사랑해서 교리를 붙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교리를 붙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매우 위험한 단계가 시작됩니다. ‘모든 것이 그것과 일치하고 그것을 확증하는 것처럼 보입니다.이것은 오늘날 말하는 단순한 지적 오류보다 훨씬 깊은 영적 현상입니다. 이미 사랑이 방향을 정했기 때문에 이해성(understanding)이 그 사랑을 섬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결론을 먼저 정해 놓고, 말씀과 경험과 논리를 모두 그 결론을 지지하는 증거로 읽습니다. 반대되는 것은 보이지 않거나 중요하지 않게 여기고, 자기 생각을 지지하는 것은 작은 것까지 크게 보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거짓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참이라고 맹세할정도가 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정보를 잘못 알고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거짓이 자기 사랑과 결합하여 확증된 상태입니다. 처음에는 나는 이것이 옳다고 생각한다였지만, 나중에는 이것은 반드시 옳아야 한다가 됩니다. 그리고 결국 이것과 다른 것은 틀렸다가 됩니다. 여기에서 교리적 차이는 쉽게 상대방을 향한 분노와 배척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가인의 길입니다. 가인들은 신앙을 버린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지나치게 높였습니다. 신앙을 사랑보다 본질적인 (more essential)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표현이 AC.362의 핵심입니다. 문제는 신앙을 중요하게 여긴 것이 아니라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든 것입니다. 수단이 목적보다 위에 올라간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앞의 AC.361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너는 그를 다스릴지니라는 가인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는 상태였습니다. AC.362는 그 지배가 어떻게 교리적으로 정당화되는지를 설명합니다. ‘신앙이 본질적이다라고 정하면 체어리티는 자연스럽게 신앙 아래로 내려갑니다. 사랑과 선한 삶은 있으면 좋은 ’, ‘신앙의 결과’, 또는 부차적인 이 되고, 무엇을 믿고 어떤 교리를 고백하는지가 가장 중요한 것이 됩니다.

 

그런데 그 결과를 스베덴보리는 아주 간결하게 말합니다. ‘ 결과 그들은 사랑 없이 살았다.교리의 질서가 삶의 질서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사랑보다 신앙을 앞세운 것이 단순한 신학적 순서 문제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실제 삶에서 사랑이 사라졌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왜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그토록 엄중하게 다루는지를 보여 줍니다. 교리의 잘못된 질서는 결국 삶의 잘못된 질서가 됩니다.

 

더 심각한 것은 사랑이 사라진 빈자리가 비어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과 거기서 비롯된 환상이 그들을 확증했습니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떠난 자리에 자기 사랑이 들어옵니다. 그리고 이해성은 그 자기 사랑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계속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신앙이 사랑보다 중요하다는 교리는 단순한 지적 오류가 아니라 자기 사랑을 보호하고 강화하는 체계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fantasy를 단순히 상상정도로 이해하면 약합니다. 여기서는 자기 사랑에서 생겨난 왜곡된 사고, 곧 자기가 원하는 것을 참이라고 여기고, 그에 맞추어 현실과 말씀을 보는 일종의 환상입니다. 그래서 자기 사랑과 환상이 conspired’, 곧 서로 결탁합니다. 사랑이 거짓된 방향을 원하고, 사고가 그것을 끊임없이 합리화합니다. 결국 악한 사랑과 거짓된 사고가 서로를 강화하는 구조가 됩니다.

 

이것은 앞으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을 이해하는 데도 결정적입니다. 아벨을 죽이는 것은 단순히 신앙이 체어리티를 싫어했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이미 그 전에 신앙이 사랑보다 본질적이다라는 교리가 형성되었습니다. 그 교리는 자기 사랑에 의해 확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는 이제 단순한 형제가 아니라 그 교리의 정당성을 위협하는 존재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다음 단계는 체어리티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AC.362이단이 어떻게 생기는가?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매우 중요한 설명이기도 합니다. 이단은 반드시 성경을 버린 데서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의 어떤 한 진리를 붙잡아 그것을 전체 질서에서 떼어내고 절대화할 때 생길 수 있습니다. 신앙도 진리입니다. 사랑도 진리입니다. 체어리티도 진리입니다. 그러나 신앙을 붙잡아 사랑체어리티를 그 아래에 종속시키면, 참된 것 하나를 붙잡고서 전체를 왜곡할 수 있습니다.

 

이 원리는 신앙과 체어리티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 어떤 특정 교리, 성경 번역, 예배 형식, 성례 이해, 종말론, 은사, 교회 정치, 특정 신학자의 가르침 등 무엇이든 그것을 전체보다 앞세우면 같은 위험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이 처음에는 상당 부분 참되더라도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가 되고, 이어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잘못되었다가 되고, 마침내 그것을 중심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체어리티를 잃는다면 구조적으로 가인의 길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질문은 교리가 맞는가?만이 아닙니다. ‘ 교리가 나를 어디로 데려가고 있는가?도 물어야 합니다. 참된 교리는 인간을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인도합니다. 진리를 더 많이 알수록 겸손해지고,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며, 선한 쓰임을 더 충실히 행하게 해야 합니다. 반대로 진리를 많이 알수록 자기 우월감이 커지고, 다른 사람을 쉽게 정죄하며, 자기 해석을 지키기 위해 체어리티를 희생하게 된다면, 그 교리가 아무리 정교해도 이미 가인의 위험이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스베덴보리를 읽는 우리에게도 예외가 아닙니다. ‘아르카나를 많이 알고 상응과 퍼셉션과 체어리티의 질서를 정확히 설명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가인의 위험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말씀의 속뜻을 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질서를 안다는 생각이 자기 사랑과 결합하면 스베덴보리의 가르침 자체도 자기 우월성을 확증하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체어리티가 신앙의 생명이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체어리티를 잃는 역설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AC.362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진리를 적게 알라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언제나 그 목적 안에 두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사랑을 섬겨야 하고, 진리는 선을 섬겨야 하며, 교리는 삶을 섬겨야 합니다. 내가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어떤 진리도 전체 말씀과 교회의 질서, 그리고 무엇보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목적 아래 놓여 있어야 합니다.

 

결국 AC.362는 가인의 비극이 신앙을 버린 데서시작된 것이 아니라 신앙을 지나치게 높인 데서시작되었다는 역설을 보여 줍니다.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고, 그 결과 사랑 없이 살게 되었으며, 사랑이 떠난 자리에 자기 사랑이 들어왔고, 자기 사랑에서 나온 환상이 그 교리를 계속 확증했습니다. 그렇게 참된 것 하나를 전체보다 앞세운 작은 질서의 뒤집힘이 마침내 체어리티 자체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그래서 AC.362의 경고를 한 문장으로 압축한다면 이렇겠습니다. ‘이단은 언제나 거짓을 사랑하는 데서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하나의 진리를 너무 사랑하여 그것을 다른 모든 진리의 질서 위에 올려놓는 데서 시작됩니다.다만 그때 실제로 사랑하는 것은 어느 순간부터 그 진리 자체가 아니라 진리를 발견하고 소유한 가 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신앙의 교리는 가인의 교리가 됩니다.

 

 

 

AC.363, 창4:6,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져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4:6) AC.363 ‘가인’(Cain)이라 불린 신앙의 교리가 어떤 성질의 것이었는지는 이 절에 대한 설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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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1, 창4:6,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4:6) AC.361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If thou doest well, an uplifting)에서 ‘낯을 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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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If thou doest well, is there not an uplifting? And 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 and 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 (4:7)

 

AC.361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If thou doest well, an uplifting)에서 낯을 네가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면 체어리티가 네게 있음을 상징합니다.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 네가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체어리티가 없고, 오히려 악이 있음을 상징합니다.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 체어리티가 너와 함께 있기를 원하지만, 네가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함께 있을 없음을 상징합니다. If thou doest well, an upliftingsignifies that if thou art well disposed, thou hast charity; “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signifies that if thou art not well disposed, thou hast no charity, but evil. 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signifies that charity is desirous to be with thee, but cannot because thou desirest to rule over it.

 

 

해설

 

AC.361은 창4:7의 속뜻을 한 문장 안에 압축하여 제시하는 개요입니다. 그런데 이 절은 문자 그대로만 읽으면 상당히 익숙합니다. ‘선을 행하면 낯을 것이고, 선을 행하지 않으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으며, 죄가 너를 원하지만 너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는 일종의 도덕적 권면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가인과 아벨,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체어리티의 관계에 관한 말씀으로 읽습니다. 특히 마지막의 그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그를 다스릴지니라를 죄와 인간의 싸움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만,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함께할 없는 상태로 해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먼저 네가 선을 행하면에 해당하는 if thou doest well을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외적으로 착한 일을 한다는 뜻으로만 읽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설명은 if thou art well disposed’, 네가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면’, 더 정확하게는 내적 성향과 애정이 선을 향하고 있다면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다시 앞의 AC.346-358과 연결됩니다. 가인도 행위가 있었고, 제물도 드렸습니다. 문제는 외적 행위의 유무가 아니라 그 행위가 어떤 내적인 것에서 나오는가였습니다.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행위라야 살아 있는 행위였습니다. 그러므로 선을 행한다는 것은 단순히 외적으로 옳은 행동을 하는 것보다 그 행위의 내적 근원인 체어리티가 그 사람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이때 an uplifting’, 들어 올림은 바로 앞의 얼굴이 떨어졌다와 정반대입니다. AC.358에서 가인의 얼굴이 떨어짐은 체어리티가 떠남으로써 그의 내적인 것들이 변한 것을 뜻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들어 올림은 그 반대 상태입니다. 선한 애정이 있고, 체어리티가 있다면 얼굴이 다시 들립니다. 이것은 단순히 떳떳하게 고개를 있다는 심리적 표현을 넘어, 인간의 내적인 것들이 다시 올바른 질서에 놓이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창4:6-7에는 아주 아름다운 대조가 있습니다. 가인의 얼굴이 떨어졌습니다.그런데 주님께서는 네가 선을 행하면 들어 올림이 있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떨어진 얼굴도 다시 들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인은 아직 돌이킬 수 있습니다. 체어리티로 돌아온다면 그의 내적인 것들도 회복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단순한 책망이 아니라 회복의 가능성을 열어 두시는 말씀입니다.

 

반대로 네가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는 체어리티가 없으면 악이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도 스베덴보리는 선과 악의 기준을 체어리티와 연결합니다. 체어리티가 없는 자리를 중립 상태가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악이 차지합니다. 이것은 가인에게 특히 중요합니다. 그는 신앙이 있기 때문에 체어리티는 없어도 된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그러한 중간지대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체어리티가 없으면서도 신앙만으로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자리는 없습니다. 체어리티를 배제하면, 결국 악이 문에놓이게 됩니다.

 

이라는 표현도 이후 AC에서 더 자세히 풀리겠지만, 이 개요만 보더라도 아직 악이 완전히 실행된 상태라기보다 바로 들어오려는 경계에 있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실제 이야기에서도 가인은 아직 아벨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분노가 일어났고 내적인 것들이 변했지만, 체어리티를 완전히 소멸시키는 행위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악이 문에있습니다. 바로 이 순간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AC.359-361은 주님께서 악이 완전히 행위가 되기 전에 인간에게 경고하시고 돌이킬 길을 열어 두시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AC.361에서 가장 놀라운 부분은 마지막입니다. 개역개정의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를 우리는 자연스럽게 죄가 너를 지배하려 하지만 네가 죄를 이겨야 한다는 뜻으로 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속뜻에서 전혀 다른 장면을 봅니다. 여기서 는 체어리티를 가리키며, ‘그의 소원은 네게 있다는 것은 체어리티가 너와 함께 있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앞의 아벨과 가인의 관계를 생각하면 매우 깊은 뜻이 됩니다. 아벨, 곧 체어리티는 가인, 곧 신앙을 버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다시 말하면 문제는 체어리티가 신앙을 배척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체어리티와 신앙은 본래 함께 있어야 하는 형제입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통하여 생명을 얻고, 체어리티는 신앙의 진리를 통하여 무엇이 선인지 알고 행합니다. 그러므로 정상적인 질서에서는 둘이 서로 분리될 이유가 없습니다.

 

문제는 이어지는 너는 그를 다스릴지니라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네가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체어리티가 너와 함께 있을 없다고 풀이합니다. 여기서 ’, 곧 가인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입니다. 이 신앙은 체어리티와 함께 있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에 두려 합니다. ‘신앙이 먼저이고, 체어리티는 신앙에 종속되어야 한다’, ‘교리를 올바르게 믿는 것이 본질이고, 사랑과 삶은 그다음이다라는 질서입니다. 바로 이것이 가인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여기에는 단순한 분리보다 더 깊은 문제가 있습니다. 가인은 체어리티를 완전히 없애기 전에 먼저 그것을 지배하려 합니다. 체어리티를 신앙 아래에 놓고 신앙이 주인이 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은 질서의 전도입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지배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를 섬기고 체어리티로 인도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우리가 앞서 AC.342-344에서 보았듯이 신앙의 목적은 체어리티입니다. 목적이 수단을 지배해야지 수단이 목적을 지배해서는 안 됩니다.

 

이 점에서 AC.361은 앞으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을 이해하는 결정적인 열쇠가 됩니다. 아벨 살해는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는 사건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구별됩니다. 그다음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됩니다. 이어서 분리된 신앙에서 죽은 행위와 죽은 예배가 생깁니다. 체어리티가 받아들여지고 자기 예배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분노합니다. 그리고 이제 체어리티가 자신과 함께 있기를 원함에도 그것을 자기 아래에 두고 지배하려 합니다. 그 지배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다음 단계에서 마침내 아벨을 죽입니다. 즉 체어리티 자체를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라는 말씀은 생각보다 매우 애틋한 표현입니다. 아벨은 아직 가인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체어리티는 여전히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도 가인에게 말씀하시며, 돌아올 길을 열어 두십니다. 문제는 가인이 체어리티와 함께있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 위에서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둘러싼 창4 전체의 비극이 응축됩니다.

 

오늘날의 신앙생활에도 이 말씀은 매우 직접적입니다. 우리는 체어리티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얼마든지 가인의 질서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사랑도 중요하지요. 선행도 해야지요.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믿는 교리가 옳다는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사랑과 삶을 교리 아래의 부속물로 만들어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질서는 그 반대입니다. 진리는 선을 위하여 있고, 신앙은 체어리티를 위하여 있으며, 우리가 아는 것은 결국 우리가 어떻게 사랑하고 살아갈 것인가를 섬기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AC.361의 핵심은 선을 행하라는 단순한 도덕 명령보다 훨씬 깊습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본래의 질서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선한 애정을 회복하여 체어리티가 다시 있게 하라. 그러면 떨어진 얼굴이 들릴 것이다. 체어리티가 너와 함께 있기를 원하니 그것을 지배하려 하지 말라. 신앙이 체어리티 위에 서려 하지 말고, 다시 체어리티와 하나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가인에게 주어진 마지막 회복의 초대처럼 읽힙니다. 아직 아벨은 살아 있습니다. 아직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아직 죄는 문에있을 뿐입니다. 아직 떨어진 얼굴은 다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때 여호와께서 말씀하십니다. 이후의 비극을 알고 있는 우리는 그래서 이 구절을 더욱 무겁게 읽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이 아벨을 죽이기 전에 이미 그에게 체어리티로 돌아갈 길을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AC.362, 창4:6,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든 가인의 교리’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4:6) AC.362 여기서는 ‘가인’(Cain)이라 하는 신앙의 교리가 묘사됩니다. 이 교리는 신앙을 사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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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0, 창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 다시 확인되는 양심의 딕테이트’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4:6) AC.360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Jehovah said unto Cain)가 양심이 말해 주었음을 뜻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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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4:6)

 

AC.360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Jehovah said unto Cain) 양심이 말해 주었음을 뜻한다는 것은 별도의 확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와 비슷한 구절이 앞에서 이미 설명되었기 때문입니다. ThatJehovah said unto Cainmeans that conscience dictated, needs no confirmation, as a similar passage was explained above.

 

그들이 그날 바람이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3:8)

 

 

해설

 

AC.360은 한 문장뿐인 매우 짧은 글입니다. 그러나 바로 앞 AC.359에서 우리가 만난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 양심이 말해 주었다는 해석을 다시 한번 분명하게 확인해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별도의 성경 인용을 동원하여 입증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그 이유를 이와 비슷한 구절이 앞에서 이미 설명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AC.360의 핵심은 새로운 교리를 제시하는 데 있지 않고, AC.359의 해석을 앞에서 이미 세워 놓은 해석 원리에 연결하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우리가 AC.359 심화에서 살펴본 양심(conscience)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AC.360에서도 다시 conscience라는 말을 그대로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단순한 번역상의 우연이나 AC.359의 일회적인 표현으로 돌리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의도적으로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을 인간 안에서 양심이 말해 주는 과 연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근거로 가인은 홍수 고대교회의 영적 인간과 동일한 양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결론 내려서는 안 됩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은 퍼셉션에 의해 인도되었고, 홍수 후 고대교회의 영적 인간에게는 진리에 관한 지식을 기초로 양심이 형성된다는 큰 구별은 그대로 유지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AC.359-360conscience는 그 시대적 차이를 무시한 채 후대의 양심 개념을 그대로 가인에게 옮겨 놓기보다, 가인의 타락한 상태에서도 여전히 그의 내면에 잘못을 알리고 제지하는 내적 딕테이트가 있었다는 문맥에서 조심스럽게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오히려 AC.360에서 새롭게 눈여겨볼 부분은 이와 비슷한 구절이 앞에서 설명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에게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는 성경의 표현이 반드시 외부에서 음성으로 들려오는 말씀만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내적 상태에 따라 퍼셉션이나 내적 딕테이트, 그리고 후대 영적 인간에게는 양심을 통하여 선과 진리를 알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여호와께서 이르셨다는 표현을 만날 때에는 그때 그 사람 또는 교회의 내적 상태가 어떠했는지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이것은 가인의 현재 상태에서 특히 중요합니다. 가인은 이미 자기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분노했고, 그의 얼굴이 떨어졌습니다. 체어리티가 떠났고 내적인 것들이 변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아벨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때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즉 악이 이미 애정 안에서 움직이고 있지만 아직 완전히 행위로 굳어지기 전에, 그 악을 보게 하고 돌이킬 수 있도록 하는 내적 경고가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AC.359-360을 함께 읽으면 하나의 중요한 장면이 보입니다. 가인의 내적인 상태는 이미 나빠졌지만, 주님과의 모든 접점이 즉시 끊어진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여전히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이후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가인은 아무런 경고도 없이 갑자기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것이 아니라, 그 전에 자신의 상태를 돌아볼 기회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그 내적 경고를 따르지 않고 계속 자기 방향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할 때에는 시대적 차이를 구별하면서 그 원리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홍수 후 영적 인간의 질서에 속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우리가 말씀에서 배우고 받아들인 선과 진리를 통하여 양심을 형성하시고, 그 양심을 통하여 우리의 애정과 생각과 행위를 돌아보게 하십니다. 특히 분노나 질투, 자기 의가 일어날 때 그 상태를 정당화하는 목소리만 듣지 않고, ‘이것이 정말 체어리티와 일치하는가?라고 묻게 하는 내적 경고에 귀 기울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AC.360은 짧기 때문에 별도의 심화가 필요한 글은 아니겠습니다. 오히려 이미 작성한 AC.359 심화 1, 양심은 홍수 고대교회부터인데 가인에게 양심이 말해 주었다고 하는가?’AC.360을 중요한 추가 근거로 반영하면 좋겠습니다. AC.359에서 한 번 사용된 conscienceAC.360에서 다시 확인된다는 사실은 그 심화의 문제의식을 더욱 분명하게 해 줍니다.

 

 

 

AC.361, 창4:6,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4:6) AC.361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If thou doest well, an uplifting)에서 ‘낯을 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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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9, 창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 - 양심을 통한 주님의 부르심’(AC.359-360)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y is thine anger kindled? And why are thy faces fallen? (창4:6) AC.35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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