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부모와자녀가되었으면영원히부모와자녀인가? 형제자매는영원히형제자매인가?’ 이 질문은 사후세계와 천국을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우리는 가족을 너무나 중요한 관계로 경험하기 때문에 천국에서도 지금의 가족관계가 그대로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대답은 ‘혈연이라는사실은사라지지않지만, 혈연관계가영원한관계를결정하지는않는다’에 가깝습니다.
자연계에서 혈연은 매우 중요합니다. 부모와 자녀, 형제자매라는 관계는 우연히 붙은 이름표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서로 사랑하고 돌보며 책임을 배우도록 주어진 질서입니다. 특히 부모가 어린 자녀를 사랑하고 보호하는 사랑에는 주님의 섭리가 깊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이 혈연을 하찮게 여긴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자연계에서 가족에게 맡겨진 책임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은 체어리티(charity)의 중요한 형태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영계에 들어가면 관계를 결정하는 원리가 달라집니다. 자연계에서는 ‘누구에게서태어났는가?’가 가족을 결정하지만, 영계에서는 ‘무엇을사랑하는가?’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결정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국 공동체는 혈통이나 국적, 혹은 지상 소속에 따라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비슷한 사랑과 선을 가진 사람들이 주님의 질서에 따라 결합하여 이루어집니다. 결국 자연적 친족관계보다 ‘영적친화성’이 더 근본적 관계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 원리를 아주 분명하게 보여 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주님께 ‘보소서당신의어머니와동생들이밖에서찾나이다’라고 했을 때 주님께서는 ‘누가내어머니이며내동생들이냐’고 물으신 뒤, ‘누구든지하늘에계신내아버지의뜻대로하는자가내형제요자매요어머니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2:47-50). 이것은 육신의 가족을 무시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혈연보다 더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같은 선과 진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영적 친족관계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부자지간이었다고 해서 영원히 ‘아버지는위, 아들은아래’라는 관계가 유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연계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낳고 양육했지만, 아들도 성인이 되고 두 사람 모두 영계에 들어가면 각각 독립된 영적 인간입니다. 그때는 ‘누가누구의아버지였는가?’보다 각 사람이 어떤 ‘지배적사랑’(ruling love)을 형성했는지가 더 중요해집니다. 두 사람이 서로 비슷한 천국적 사랑을 가지고 있다면 매우 가까이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적 사랑이 크게 다르다면 혈연이라는 이유만으로 영원히 같은 공동체에서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형제자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형제이지만, 영계에서는 두 사람의 내적 사랑이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선택하고 다른 사람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자신의 지배적 사랑으로 만들었다면, 자연적 혈연이 그 영적 차이를 없앨 수 없습니다. 천국에 있는 사람이 ‘내동생이지옥에있으니나도그곳에서함께살아야한다’고 할 수도 없고, 반대로 혈연 때문에 지옥의 사람이 천국 공동체에 머무를 수도 없습니다. 각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삶과 상응하는 곳으로 갑니다.
그러면 천국에 간 사람이 지옥에 간 가족 때문에 영원히 슬퍼하지 않을까 하는 문제가 곧 따라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별도의 주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천국의 행복이 기억상실에서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지상에서의 혈연적 애착 때문에 천국에서 영원히 고통받는 것도 아닙니다. 사후에는 사람과 관계를 바라보는 기준 자체가 자연적 혈연에서 영적 선과 주님의 질서로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천국에간부모는지옥에간자녀때문에슬퍼하지않는가?’라는 질문으로 따로 다루면 상당히 깊은 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사후에 가족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에서는 사람은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잃어버리는 존재가 아닙니다. 지상에서 알던 사람들을 만나고 알아보는 과정이 있으며, 가족이나 친지들도 다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재회’와 ‘영원한결합’이 같은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만나서 서로를 알아볼 수 있다는 것과 영원히 같은 공동체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각 사람의 내면이 드러나고, 서로의 사랑이 조화를 이루는 사람들은 가까워지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서로 다른 곳으로 향합니다.
이 원리를 생각하면 주님께서 자연계의 가족을 왜 그렇게 중요하게 주셨는지도 새롭게 보입니다. 가족은 영원히 유지해야 할 하나의 혈연집단이라기보다, 우리가 사랑과 책임, 희생과 용서와 돌봄을 배우도록 주어진 매우 중요한 ‘거듭남’(regeneration)의 자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소유하기 위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한 독립된 영혼이 주님을 향하여 성장하도록 돌봅니다. 자녀 역시 부모에게 영원히 종속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자연계의 가족관계는 영적인 사랑을 배우는 매우 중요한 학교인 셈입니다.
그래서 ‘한번혈연이면영원히혈연인가?’라는 질문에는 두 층위로 답해야 합니다. ‘그사람이내아버지였고, 내어머니였고, 내아들이었고, 내딸이었다는지상의역사는없어지지않습니다.’ 그러나 ‘그혈연관계가영원히우리의관계를결정하는가?’라고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영원한 세계에서 사람들을 결합시키는 것은 피가 아니라 사랑이며, 더 정확히 말하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함께 사랑하는 내적 조화입니다.
어쩌면 이것을 가장 간결하게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자연계에서는혈연이우리를가족으로만나게하지만, 영계에서는사랑이우리를영원히함께있게합니다.’
그리고 이 원리는 가족을 가볍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귀하게 만듭니다. 지금 부모와 자녀이고 부부이며 형제자매라는 이유만으로 영원한 결합이 자동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서로를 사랑하고 선을 행하며 함께 주님을 향해 살아가는 가운데 자연적 가족관계가 ‘영적인관계’로 깊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경우는 지상에서 가족이었던 사람들이 단지 혈연 때문에 다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서로 비슷한 천국적 사랑을 이루었기 때문에 영계에서도 서로 가까운 사람들이 되는 경우일 것입니다.
‘부자는지옥에가는가?’라는 질문은 복음서를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주님께서 ‘부자는천국에들어가기가어려우니라’고 말씀하셨고, 이어서 ‘낙타가바늘귀로들어가는것이부자가하나님의나라에들어가는것보다쉬우니라’(마19:23-24)고까지 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에서도 부자는 죽은 뒤 음부에 있습니다. 이런 말씀들만 놓고 보면 마치 부유함 자체가 구원을 가로막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와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남기신 그의 저작들을 함께 보면 결론은 그렇지 않습니다. ‘부자이기때문에지옥에가는것도아니고, 가난하기때문에천국에가는것도아닙니다.’
성경 자체가 재산의 많고 적음을 구원의 기준으로 삼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많은 가축과 은금을 소유한 부자였고, 욥 역시 큰 재산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마태복음이 명시적으로 ‘부자’라고 부르는 사람이면서 주님의 제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부유함 자체를 악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얼마나가지고있는가?’가 아니라 ‘그것을어떻게사랑하고있는가?’입니다. 재산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고 그것을 자기 존재의 안전과 가치, 그리고 행복의 근원으로 삼는다면 부는 영적인 위험이 됩니다. 그러나 재산을 자신과 가족을 돌보고 이웃과 사회에 유익을 끼치며 맡겨진 일을 수행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다면 재산 자체가 천국을 가로막지는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 구별은 더욱 분명합니다. 사람이 사후에 가져가는 것은 집도, 토지도, 그리고 통장도 아닙니다.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동안 자신 안에 형성한 ‘지배적사랑’(ruling love)을 가지고 갑니다. 따라서 똑같이 많은 재산을 가진 두 사람도 내적으로는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돈을 통해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자신의 쾌락과 명예를 높이는 것을 사랑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은 자신의 재산과 능력을 맡겨진 것으로 여기며 정직하게 사업하고 가족을 책임지며 많은 사람에게 ‘유용한일’(use, 쓰임, 쓰임새)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둘 다 ‘부자’이지만 그 재산을 움직이는 내적인 사랑은 정반대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왜 ‘부자가천국에들어가기가어렵다’고 그토록 강하게 말씀하셨을까요? 마태복음 19장의 문맥을 보면 바로 앞에 부자 청년이 있습니다. 그는 계명을 지켰다고 말했지만 주님께서 ‘네소유를팔아가난한자들에게주라... 그리고와서나를따르라’고 하시자 ‘재물이많으므로근심하며’ 떠났습니다(마19:21-22). 그 순간 그의 재산이 단순히 그가 ‘가지고있는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이 ‘붙들고있는것’임이 드러났습니다. 주님과 재물 가운데 어느 하나를 놓아야 하는 순간이 오자 재물을 놓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핵심은 재산의 액수보다 ‘마음의주인이누구인가?’에 있습니다.
‘낙타와바늘귀’도 같은 문맥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흔히 ‘바늘귀’가 예루살렘의 작은 성문이어서 낙타가 짐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으면 통과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 전해지지만, 이를 뒷받침할 확실한 역사적 근거는 없습니다. 본문의 자연스러운 뜻은 실제 낙타와 바늘구멍을 극단적으로 대비하여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런즉누가구원을얻을수있으리이까’라고 놀라자 주님께서는 곧바로 ‘사람으로는할수없으나하나님으로서는다하실수있느니라’(마19:25-26)고 말씀하십니다. 이 마지막 말씀이 앞의 말씀을 푸는 열쇠입니다. 주님께서는 ‘부자는구원받을수없다’고 선언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 힘으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벗어나 천국 사람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주님께서는 사람의 사랑 자체를 변화시키실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속뜻으로 들어가면 ‘부자’의 의미는 물질적 재산을 넘어 더욱 넓어집니다. 말씀에서 ‘부’, ‘재물’, ‘보물’은 좋은 의미에서는 선과 진리의 지식, 곧 영적 부요함을 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 의미에서는 자신이 가진 지식과 능력, 자기 의와 자기 지혜를 자기 것으로 여기며 의지하는 상태를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프로프리움’(proprium)의 문제가 나타납니다. ‘내가가지고있다’, ‘내가알고있다’, ‘내가이루었다’, ‘나는옳다’는 것이 주님을 대신하여 마음의 중심을 차지하기 시작하면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도 영적 의미에서는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라오디게아 교회가 좋은 예입니다. ‘네가말하기를나는부자라부요하여부족한것이없다하나네곤고한것과가련한것과가난한것과눈먼것과벌거벗은것을알지못하는도다’(계3:17). 여기서 문제는 단순히 라오디게아 사람들이 돈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나는부족한것이없다’는 영적 자기충족이 문제입니다. 주님에게서 선과 진리를 받아야 하는 존재가 자신에게 이미 모든 것이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부유하지만 속으로는 가난할 수 있고, 반대로 겉으로는 가난하지만 주님에게서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영적으로 부유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나사로 역시 ‘부자 = 지옥, 가난한 사람 =천국’이라는 경제적 구원론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부자의 문제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자기 문 앞에 누워 있는 나사로를 외면하면서 자신의 풍요를 자기 자신을 위해 사용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의 재산이 체어리티(charity)로 흘러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많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보다 ‘가지고있으면서도이웃을보지못하는상태’가 문제입니다. 부가 자기 사랑 안에 갇히면 그것은 사람을 주님과 이웃에게서 멀어지게 하지만, 부가 이웃의 유익과 ‘유용한일’을 위해 사용되면 같은 재산도 전혀 다른 기능을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부자’를 한 가지 의미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문자적으로는 실제 재산이 많은 사람을 가리킬 수 있고, 좋은 의미에서는 선과 진리라는 영적 재산을 풍성하게 가진 사람을 뜻할 수 있으며, 반대 의미에서는 자신이 가진 재산과 지식, 능력을 자기 것으로 여기며 주님보다도 더 그것을 의지하는 사람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부자’가 등장할 때마다 먼저 그 문맥에서 어떤 종류의 ‘부’를 말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결국 주님께서 문제 삼으시는 것은 ‘소유’ 자체라기보다 ‘소유에대한사랑’입니다. 부유한 사람에게는 부를 주님보다 사랑하게 될 특별한 시험이 있고, 가난한 사람에게도 부를 탐내고 부자를 시기하며 재물을 삶의 궁극적인 행복으로 여기게 될 시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난하다는 사실도 영적인 공로가 될 수 없습니다. 통장에 돈이 없으면서 마음 전체로 돈을 사랑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많은 재산을 소유하면서도 마음은 그것에 매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부자는지옥에가는가?’라는 질문에는 분명하게 ‘아닙니다’라고 답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죽은 뒤 그의 재산 목록을 조사하여 천국과 지옥을 결정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 재산을 소유하고 사용하는 동안 그 사람 안에 ‘어떤사랑이형성되었는가’를 보십니다. 재산은 죽을 때 모두 남겨 두고 가지만, 그것을 사용하면서 형성된 사랑은 가지고 갑니다.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부자는돈이많아서지옥에가는것이아니라, 돈이주님을대신하여마음의주인이될때영적인위험에빠집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죽을때우리가가지고가는것은재산이아니라, 그재산을사랑하고사용하면서형성된우리의사랑입니다.’
‘좌파도구원받을수있는가?’라는 질문은 다소 도발적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렌즈’를 들이대면 의외로 중요한 문제가 드러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물론입니다.’ 좌파라는 정치적 성향 자체가 사람을 지옥으로 보내지 않으며, 우파라는 정치적 성향 자체가 사람을 천국으로 보내지도 않습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판단하시는 기준은 그 사람이 어느 정치 진영에 속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했고 무엇을 진리라고 받아들였으며 그것을 어떻게 삶으로 살았느냐에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좌파와우파의사상에는아무런영적차이가없다’거나 ‘어떤정치사상이든모두똑같이선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정치사상도 진리와 거짓, 선과 악의 관점에서 분별해야 합니다. 개인의 자유와 책임, 약자 보호, 공동체적 연대, 법질서, 재산권, 국가 권력의 한계 등 정치가 다루는 문제에는 실제로 선과 진리의 문제가 얽혀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정책이나 이념이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거나 거짓을 정당화하고, 증오와 폭력을 조장하거나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의 권리를 짓밟는다면 그것은 어느 진영에서 나왔든 비판하고 분별해야 합니다. 반대로 인간의 존엄을 보호하고 이웃의 유익을 증진하며 정의와 질서를 세우는 요소라면 어느 진영의 주장인지와 별개로 그 안의 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중요한 원리가 등장합니다. 사람에게 어떤 ‘거짓’이 있다는 것과 그 사람이 ‘거짓을사랑한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사람은 자신이 태어난 시대와 나라, 가정과 교육, 사회환경에 따라 많은 생각을 받아들입니다. 정치적 신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진심으로 사회적 약자를 돕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고 싶어서 좌파적 정책을 지지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은 자유와 책임, 법질서와 공동체의 안정을 지키는 것이 이웃에게 더 큰 유익이라고 생각하여 우파적 정책을 지지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같은 사회문제를 놓고 정반대의 정책을 지지한다고 해서 어느 한쪽의 영원한 상태까지 정치적 선택만으로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 정책 판단에는 사실에 대한 오해도 있을 수 있고, 경제와 사회에 대한 판단 착오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치가 영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왜그것을지지하는가?’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진심으로 돕고 싶어서 복지 확대를 지지하는 것과, 부유한 사람에 대한 증오와 시기 때문에 그들의 재산을 빼앗고 싶어 하는 것은 외적으로 비슷한 정책을 지지하더라도 내면에서는 다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자유시장과 재산권을 인간의 자유와 사회 전체의 유익을 위해 지지하는 것과, 자신의 재산과 특권만 지키면서 가난한 사람의 고통에는 무관심한 것도 전혀 다른 상태입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정치적 표어 뒤에 있는 바로 그 ‘사랑’입니다.
따라서 ‘좌파도구원받을수있는가?’라는 질문은 곧 ‘우파면구원받는가?’라는 질문을 불러옵니다.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다. 보수적인 신학을 고백하고, 전통적인 가족관을 지지하고, 자유와 책임을 강조하며, 공산주의를 강하게 반대한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거듭남의 증거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런 가치들을 말하면서도 자기 이익을 위해 거짓말하고, 사람을 멸시하며, 돈과 권력을 사랑하고,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을 증오한다면 정치적으로 아무리 ‘옳은편’에 서 있다고 확신해도 그 사람의 내면까지 자동으로 옳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앞서 ‘참된이단은누구인가?’에서 살펴본 원리와 정확히 같습니다. ‘올바른교리를가지고있는것’과 ‘올바른삶을사는것’이 동일하지 않듯, ‘올바른정치적판단을하는것’과 ‘천국적인사랑을가진것’도 동일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에 관한 설명을 적용하면 이 점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사람이 죽을 때 정당 가입증이나 투표 기록을 가지고 영계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계에서 자신 안에 형성한 사랑과 그 사랑에 결합된 진리 또는 거짓을 가지고 갑니다. 사후에는 외적 체면과 사회적 역할이 벗겨지면서 그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했는지가 드러납니다. 그래서 자연계에서 서로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졌던 두 사람이 내적으로는 모두 이웃의 유익을 사랑했을 수도 있고, 같은 정치 진영에서 나란히 활동했던 두 사람이 사후에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는 한 가지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정치적 신념이 ‘프로프리움’(proprium)과 결합하면 사람은 진리를 찾기보다 ‘우리편이옳다는것’을 증명하려 하기 쉽습니다. 우리 편의 거짓에는 눈을 감고 상대편의 거짓에는 분노하며, 우리 편의 잘못은 사정을 이해해 주면서 상대편의 잘못은 그 사람 전체의 악함을 증명하는 증거로 사용합니다. 이때 좌파와 우파 가운데 어느 쪽에 서 있는가보다 더 심각한 영적 문제가 생깁니다. 진리 자체보다 ‘내편’을 사랑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어느 진영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든 싫어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든 진리이며, 거짓 역시 내가 지지하는 진영에서 나왔다고 해서 진리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렌즈’는 정치적 분별을 없애는 렌즈가 아니라 오히려 더 엄격하게 만듭니다. 좌파의 주장도 살피고 우파의 주장도 살피되 같은 잣대를 적용해야 합니다. 사실은 사실대로 확인하고, 거짓은 어느 편의 것이든 거짓이라고 해야 하며, 선한 것은 상대편에서 발견되더라도 선하다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동시에 한 사람의 잘못된 정치적 판단을 발견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영원한 내면까지 우리가 판정해서는 안 됩니다. 정책과 사상은 분별할 수 있지만 사람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는 주님께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질문은 결국 이렇게 바뀝니다. ‘좌파도구원받을수있는가?’가 아니라 ‘좌파든우파든무엇이사람을천국에적합한사람으로만드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답은 정치적 진영이 아니라 ‘거듭남’(regeneration)을 향합니다. 사람이 주님을 향하고, 악을 죄이기 때문에 피하며, 진리를 배우고, 체어리티(charity)에 따라 이웃의 실제적인 유익을 구하는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정치 역시 그런 삶이 표현되는 여러 영역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따라서 가장 짧게 답한다면 이렇습니다. ‘좌파도구원받을수있습니다. 우파도구원받을수있습니다. 그러나좌파라서구원받는것도아니고우파라서구원받는것도아닙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내정치적신념이주님과이웃을사랑하는데봉사하고있는가, 아니면나의증오와두려움과자기의를정당화하는도구가되고있는가?’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을 자신에게 돌리는 순간 ‘스베덴보리의렌즈’는 꽤 날카로워집니다. ‘상대편이얼마나틀렸는가?’를 묻기 전에 ‘나는진리를사랑하는가, 아니면내가옳다는것을사랑하는가?’를 묻게 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정치에 관한 가장 중요한 영적 분별은 바로 여기서 시작될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이단’이라는 말은 대개 ‘정통교리에서벗어난사람이나집단’을 뜻합니다.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구원론, 성경관 등 일정한 교리적 기준에서 벗어나면 이단으로 규정합니다. 교회가 공동체의 신앙을 보호하기 위해 교리적 경계를 세우는 일 자체는 필요합니다. 모든 가르침이 똑같이 참일 수는 없으며, 진리와 오류를 분별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더 깊은 질문이 생깁니다. ‘인간이교리적으로이단이라고판정하는것과주님께서한사람의영적상태를판단하시는것은같은것인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그렇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어떤 사람이 잘못된 교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그 사람이 악한 사람이라는 것은 동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태어난 나라와 시대, 부모와 교회, 교육과 문화에 따라 서로 다른 종교적 지식을 접합니다. 어떤 사람은 상당히 정확한 교리를 배우고도 악하게 살아갈 수 있고, 어떤 사람은 불완전하거나 심지어 잘못된 교리를 배웠음에도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에 따라 양심적으로 선을 행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단순히 ‘무슨교리를알고있었는가?’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가알고있는진리를어떻게받아들이고그것으로어떻게살았는가?’를 보십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구별이 생깁니다. ‘거짓을믿는것’과 ‘거짓을사랑하는것’은 같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려서부터 잘못된 것을 진리라고 배웠다면 그는 그것을 진심으로 참이라고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마음이 선을 향하고 있다면 진리를 만나면서 잘못된 생각을 고칠 가능성이 있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성경과 교리를 정확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욕망과 지위와 이익을 지키기 위해 진리를 왜곡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외적인 교리는 정통이어도 내면에서는 진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대목에서 ‘참된이단’이라는 다소 역설적 표현이 의미를 갖기 시작합니다. 가장 위험한 이단은 단순히 어떤 교리 문장을 잘못 이해하는 것만이 아니라, ‘악을선이라고하고거짓을진리라고하면서그것을자기삶의원리로만드는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진리를 알면서도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것을 비틀어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입술로는 정통 신앙을 고백하면서 삶으로는 그 신앙을 부정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도 이 역설이 반복해서 나타납니다. 주님께 가장 강한 책망을 받은 사람들이 언제나 ‘교리적으로아무것도모르는이방인’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을 알고 율법을 가르치며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확신했던 종교 지도자들에게 ‘화있을진저외식하는서기관들과바리새인들이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바리새인이라는 특정 집단을 오늘날의 어떤 교단에 그대로 대입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훨씬 두려운 경고입니다. ‘진리를많이가지고있는것’과 ‘진리대로사는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7장 21절의 ‘나더러주여주여하는자마다다천국에들어갈것이아니요다만하늘에계신내아버지의뜻대로행하는자라야들어가리라’는 말씀은 이 문제를 매우 날카롭게 비춥니다. 여기서 ‘주여주여’라고 부르는 사람은 적어도 외적으로는 주님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고백 자체를 최종 기준으로 삼지 않으십니다. 그가 주님의 뜻을 삶으로 받아들였는지를 보십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은 ‘믿음’과 ‘체어리티’(charity)의 관계로 더욱 분명해집니다. 믿음이 체어리티와 분리되면 살아 있는 믿음이 될 수 없습니다. 진리는 선으로 이어져야 하고, 믿는 것은 살아내는 것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가 이웃을 향한 선과 ‘유용한일’(use)로 나타나야 합니다. 아무리 정교한 교리 체계를 가지고 있어도 그것이 자기 우월감과 타인에 대한 멸시, 권력과 이익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된다면 진리의 목적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그렇다고 ‘교리는중요하지않고착하게만살면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것도 스베덴보리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진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진리는 무엇이 선인지 보여 주고 선이 나아갈 방향을 밝혀 주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교리는 결국 삶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짓은 바로잡아야 합니다. 다만 ‘그사람의교리가틀렸다’는 판단에서 ‘그러므로그사람은악하며지옥에간다’는 판단으로 건너뛰어서는 안 됩니다. 전자는 우리가 어느 정도 검토할 수 있지만 후자는 그 사람의 내면을 아시는 주님의 영역입니다. 특히 이 원리를 스베덴보리 자신에게 적용해 보면 흥미롭습니다. 전통적 기독교의 기준에서 스베덴보리의 신학을 이단이라고 규정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삼위일체 이해, 속죄론, 사후세계, 성경의 속뜻 등에 관한 그의 가르침이 전통적 교리 체계와 크게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스베덴보리를이단이라고하니그들이야말로진짜이단이다’라고 맞받아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렌즈’다운 태도가 아닐 것입니다. 똑같은 칼을 상대에게 돌려주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물어야 합니다. ‘무엇이참인가? 이가르침은주님을더깊이사랑하게하는가? 말씀을더깊이이해하게하는가? 악을죄로보아피하게하는가? 이웃을사랑하고유용한삶을살게하는가?’ 그리고 동시에 그 가르침이 실제로 말씀과 스베덴보리의 저작에 부합하는지도 엄밀하게 살펴야 합니다. 사람이나 집단에 먼저 이름표를 붙이기보다 진리와 삶의 열매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이단은누구인가?’라는 질문도 결국 ‘누구’보다 ‘무엇’으로 바꾸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누가이단인가?’보다 ‘무엇이사람을주님의질서에서벗어나게하는가?’라고 묻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가장 깊은 차원의 이탈은 ‘교단명부를잘못선택한것’이 아닙니다. 선을 알면서 악을 사랑하고, 진리를 알면서 자기 욕망을 위해 왜곡하며, 입으로 주님을 고백하면서 삶에서는 자기 자신을 주인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에서 삶이 갈라지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질문에 대한 결론은 조금 역설적일 수 있습니다. ‘주님앞에서가장두려운것은사람들이나를이단이라고부르는것이아니라, 내가진리를안다고하면서그진리대로살기를거부하는것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거짓을진리인줄알고붙드는사람보다, 진리를알면서도자기사랑을위해거짓으로만드는사람이더깊은어둠에있을수있습니다.’ 결국 주님께서는 교단의 이름표만 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진리는 분별하되 사람의 최종적 내면은 주님께 남겨 두어야 합니다. 오류를 발견했다고 그 사람 안의 모든 선까지 부정하지 않고, 진리를 발견했다고 그 사람 안의 모든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는 것, 바로 그 지점이 ‘이단’이라는 매우 날카로운 말을 다룰 때 특히 필요한 ‘스베덴보리의렌즈’입니다.
한국 개신교회에서는 오랫동안 ‘예수님을영접했습니까?’라는 질문과 함께 일정한 형식의 ‘영접기도’를 구원의 중요한 순간으로 가르쳐 왔습니다. ‘주예수님, 저는죄인입니다. 예수님께서나의죄를위하여십자가에서죽으시고부활하신것을믿습니다. 지금예수님을나의구주와주님으로영접합니다’와 같은 기도를 드리고 나면 ‘이제구원받았습니다’라고 확신시켜 주는 방식입니다. 이 기도는 한 사람이 의식적으로 주님께 마음을 돌이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귀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기도를했는가, 하지않았는가?’를 사람의 영원한 구원을 결정하는 조건으로 삼는 것은 성경적으로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우선 성경 어디에도 특정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영접기도’를 해야 구원받는다는 명령은 없습니다. 흔히 근거로 드는 말씀 가운데 하나가 ‘영접하는자곧그이름을믿는자들에게는하나님의자녀가되는권세를주셨으니’(요1:12)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영접한다’는 것은 특정한 기도문을 한 번 따라 읽는 행위를 뜻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믿고 받아들이는 삶 전체를 가리킵니다. 또 요한계시록 3장 20절의 ‘볼지어다내가문밖에서서두드리노니누구든지내음성을듣고문을열면’이라는 말씀도 자주 영접 기도에 사용되지만, 원래 문맥에서는 불신자에게 전도하면서 예수님을 마음속에 초청하라고 가르치는 구절이라기보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시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10장 9절의 ‘네가만일네입으로예수를주로시인하며또하나님께서그를죽은자가운데서살리신것을네마음에믿으면구원을받으리라’는 말씀 역시 입으로 일정한 공식을 발음하면 그 순간 법적으로 구원이 확정된다는 뜻으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서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명제가 사실이라고 인정하는 지적 동의에 머물지 않습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을 따르고,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며, 그 말씀대로 살아가려는 삶과 연결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나더러주여주여하는자마다다천국에들어갈것이아니요다만하늘에계신내아버지의뜻대로행하는자라야들어가리라’(마7:21)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중요한 차이를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믿음은 사랑과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사람을 구원하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체어리티(charity), 곧 이웃 사랑과 결합되어야 하며, 그 사랑은 실제 삶의 행위로 나타나야 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영접한다’는 것은 입으로 ‘예수님을영접합니다’라고 말하는 한순간의 사건보다 훨씬 깊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악을 죄로 여기기 때문에 피하며,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면서 우리의 의지와 이해가 점차 주님께 열리는 것이 실제적인 영접입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어떤 사람이 어린 시절 집회에서 영접 기도를 정확하게 따라 했다고 해 보겠습니다. 그러나 이후 평생 다른 사람을 속이고 이용하면서도 그것을 악이라고 여기지 않고, 자기 욕망대로 사는 것을 사랑했습니다. 그렇다면 수십 년 전에 했던 몇 분간의 영접 기도가 그 사람의 현재 내면과 상관없이 천국을 보장하는 일종의 ‘구원증서’가 될 수 있을까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의 사후 상태를 결정하는 것은 과거 어느 순간에 발음했던 문장이 아니라, 자유롭게 살아오면서 자신 안에 형성한 ‘지배적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영접기도’를 한 번도 배워 본 적 없다고 해 보겠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에 따라 양심적으로 살았고, 거짓과 불의를 악으로 여기며 피하려 했으며,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삶을 사랑했습니다. 단지 어느 전도집회에서 정해진 영접 기도를 따라 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주님께서 그를 ‘너는나를영접하는문장을말하지않았으므로구원받을수없다’고 하신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구원 역사는 교회의 외적 경계보다 훨씬 넓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빛 안에서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살아가려 했는가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영접한다’는 표현 자체가 잘못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주 좋은 표현입니다. 문제는 ‘영접’을 지나치게 한순간의 의식으로 축소하는 데 있습니다. 주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그분을 단지 마음속으로 ‘초청하는것’에 그치지 않고, 그분이 우리의 삶을 다스리시도록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나의생각보다주님의진리가옳습니다. 내가원하는것이라도악이라면버리겠습니다. 내가싫어하더라도선이라면행하겠습니다.’ 이것이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영접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거듭남’(regeneration)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거듭남은 어느 날 한 번의 기도로 완성되는 사건이 아니라 일생에 걸쳐 진행되는 과정입니다. 사람이 악을 발견하고, 그것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려 할 때 주님께서는 그 사람의 내면을 조금씩 새롭게 하십니다. 이 과정에서 사람은 점점 자기 ‘프로프리움’(proprium)을 의지하는 삶에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삶으로 옮겨 갑니다. 이것이 훨씬 본질적인 의미의 ‘주님을영접함’입니다.
그렇다고 회심의 순간이나 신앙고백을 가볍게 여길 필요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영접 기도를 드린 그날이 실제로 인생의 방향이 바뀐 중요한 순간일 수 있습니다. 진심으로 주님께 돌아서며 ‘이제부터주님을따르겠습니다’라고 고백했다면 그것은 귀한 시작입니다. 다만 ‘시작’과 ‘완성’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씨앗을 심은 날이 중요하지만 씨앗을 심었다는 사실만으로 열매가 이미 맺힌 것은 아닙니다. 그 고백이 이후의 삶에서 자라나야 합니다.
더 나아가 이 문제는 ‘그러면예수님의이름을전혀들어보지못한사람은어떻게되는가?’라는 훨씬 큰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만일 ‘예수’라는 이름을 알고 특정한 방식으로 그분을 고백하는 것이 구원의 절대적인 형식 조건이라면, 역사상 복음을 접할 기회 자체가 없었던 수많은 사람의 운명이라는 매우 어려운 문제가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문제에 대해 상당히 분명한 답을 제시합니다. 주님은 모든 인류의 하나님이시며, 교회 밖에 태어난 사람이라도 자신이 알고 있는 종교의 가르침과 양심에 따라 선하게 살고 진리를 받아들일 마음을 가진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 사람이 사후에 참된 진리를 배우고 주님을 알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없이도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구원은오직주님에게서오지만, 주님의구원역사를인간이만든외적 절차, 그러니까종교적절차안에가두어서는안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영접기도를하지않으면구원받지못하는가?’라는 질문에는 ‘그렇지않다’고 답할 수 있습니다. 영접 기도는 신앙의 아름답고 의미 있는 표현이 될 수 있지만 구원을 작동시키는 주문이나 천국 입장권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나는과거에영접기도를했는가?’가 아니라 ‘나는지금주님을영접하며살고있는가?’입니다.
결국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입술로 한 번 문을 열었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문을 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문은 한 번 열고 끝나는 문이라기보다 우리의 삶 속에서 계속 열려야 하는 문입니다. 진리를 받아들일 때, 악을 죄이기 때문에 피할 때, 이웃에게 선을 행할 때, 자기 뜻보다 주님의 뜻을 앞세울 때 우리는 실제로 주님을 영접합니다.
그러므로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구원은영접기도를했느냐하지않았느냐에달린것이아니라, 주님을믿고그분에게서오는선과진리를받아들여삶으로살아가느냐에달려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참된영접은한번의기도가아니라일생에걸친거듭남입니다.’
‘자살하면무조건지옥에간다’고 단정하는 것은 성경적으로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신중하지 못한 말입니다. 자살은 분명 생명을 스스로 끊는 매우 비극적인 행위이며 가볍게 여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그의 생애 마지막 한 행위만 떼어 놓고 자동적으로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인간은 다른 사람의 내면 전체를 알 수 없으므로, 특정한 사람이 자살했다는 사실만으로 ‘그사람은지옥에갔다’고 판정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근본적인 기준은 ‘어떤방식으로죽었는가’가 아니라 ‘어떤사랑을자신의삶으로만들었는가’입니다. 사람은 이 세상을 떠난 뒤 자신이 지상에서 형성한 ‘지배적인사랑’에 따라 살아갑니다.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삶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 사람은 천국의 질서와 결합하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모든 것 위에 두며 악을 기꺼이 선택해 온 사람은 그와 상응하는 지옥의 질서에 이끌립니다. 따라서 죽음의 순간만으로 그 사람의 영원한 상태를 기계적으로 판정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인간관과 맞지 않습니다.
특히 자살이라는 외적인 행위가 같아 보여도 그 내면의 상태는 매우 다를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타인에게 복수하거나 책임을 회피하려는 의도에서 자신의 생명을 끊을 수 있고, 누군가는 극심한 절망과 공포, 판단력의 붕괴 속에서 그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심각한 정신적 고통이나 질환으로 현실을 정상적으로 판단할 능력이 크게 손상된 경우도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모두 ‘자살’이라는 한 단어로 기록되지만, 주님 앞에서는 그 사람의 자유와 이성, 의도와 책임의 정도가 똑같을 수 없습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악이 진정으로 사람의 것이 되려면 단순히 어떤 행동이 발생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그것이 악임을 알고도 자유롭게 원하고 선택하여 자기 삶의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문제가 함께 고려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자유와 합리적 판단 능력이 크게 훼손된 상태에서 일어난 행동과, 충분한 자유 속에서 악을 사랑하여 의도적으로 선택한 행동을 동일한 영적 책임으로 다룰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볼 수 없는 바로 그 내면을 보십니다.
성경에도 ‘자살한사람은반드시지옥에간다’는 교리는 없습니다. 성경에는 사울, 아히도벨, 시므리, 가룟 유다처럼 스스로 죽음을 택한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이 사례들로부터 ‘자살 = 자동적 지옥행’이라는 보편적 구원론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특히 어떤 죄 하나가 죽기 직전에 발생했다는 이유로 그 사람의 평생의 내적 삶과 주님과의 관계를 모두 지워 버린다는 식의 교리는 성경이 직접 가르치는 내용이 아닙니다.
흔히 ‘자살하면회개할시간이없으므로지옥에간다’는 설명도 듣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구원을 지나치게 법률적이고 시간적인 공식으로 만드는 위험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평생 주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섬기다가 극심한 정신적 고통 속에서 판단력을 잃고 자신의 생명을 끊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마지막 몇 분 동안의 행위가 그 사람 안에서 오랫동안 형성된 모든 사랑을 자동적으로 뒤집어 놓는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반대로 마지막 순간에 특정한 말을 했다는 사실만으로 평생 자발적으로 사랑해 온 악이 기계적으로 사라진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사후의 상태는 그렇게 형식적인 계산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반대편으로 지나가서도 안 됩니다. ‘그러니까자살해도괜찮다’는 결론은 전혀 아닙니다. 자연계에서의 생명은 주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것이며, 이 세상에서 사람은 자유롭게 선과 진리를 선택하면서 자신의 영원한 인격을 형성합니다. 따라서 자신의 생명을 의도적으로 끊는 것은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닙니다. 자살을 낭만화하거나 고통에서 벗어나 영계로 옮겨 가는 하나의 방법처럼 생각하는 것은 특히 위험합니다. 죽음은 문제를 해결하는 기술이 아니며,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 역시 현세의 고통을 피해 가는 ‘비상구’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주님의심판은인간의심판보다훨씬깊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외적인 행동을 봅니다. 주님께서는 그 행동이 나온 사랑과 의도, 그 순간의 자유, 이성의 상태, 그 사람이 감당했던 고통, 그리고 평생 형성되어 온 내면 전체를 아십니다. 따라서 유가족에게 ‘자살했으니지옥갔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알 수도 없고 판단할 권한도 없는 영역을 침범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앞서 살펴본 ‘부자는지옥에가는가?’라는 질문과도 뜻밖에 같은 원리로 연결됩니다. ‘부자 = 지옥’, ‘가난한사람 = 천국’, ‘자살 = 지옥’처럼 하나의 외적 조건으로 사람의 영원한 상태를 판정하려는 것은 모두 지나치게 단순한 공식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계속해서 외적인 모습에서 그 사람의 ‘사랑’으로 시선을 옮깁니다. ‘그사람이무엇을했는가?’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깊이 ‘그사람은무엇을사랑했고, 무엇을의도했으며, 얼마나자유롭게그것을자신의것으로삼았는가?’를 묻게 합니다.
그러므로 ‘자살하면무조건지옥에가는가?’라는 질문에는 분명하게 ‘그렇다고말할수없다’고 답해야 합니다. 동시에 ‘그러므로자살은영적으로아무문제가없다’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자살이라는 행위의 심각성과 자살한 사람의 영원한 운명에 대한 판정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전자는 생명의 거룩함 때문에 엄중하게 보아야 하지만, 후자는 그 사람의 내면 전체를 아시는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습니다. ‘자살이라는마지막행위하나가그사람의영원한운명을자동으로결정하는것이아니라, 주님께서는그사람이평생어떤사랑을형성했는지와그행위가일어날당시의자유와의도와내면의상태까지완전하게보시고판단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아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태도도 정죄보다는 경외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자살이라는 비극을 가볍게 여기지 않되, 그 사람의 영원한 상태까지 대신 판결하지 않습니다. ‘그사람의모든사정을아시는주님께맡긴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이것이 생명을 엄중하게 여기면서도 주님의 사랑과 공의를 동시에 신뢰하는 태도입니다.
성경은 결혼을 매우 귀하게 말합니다. 창세기 2장 18절에서 주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이혼자사는것이좋지아니하니’라고 말씀하시고, 남자와 여자가 ‘한몸’을 이루는 질서를 세우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2:18)
스베덴보리 역시 결혼을 단순히 인간 사회를 유지하거나 자녀를 낳기 위한 제도로 보지 않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결합에는 더 깊은 영적 원형이 있으며, 그것은 ‘선’(good)과 ‘진리’(truth)의 결합이고, 가장 높은 차원에서는 주님과 교회의 결합에 그 근원을 둡니다. 이런 의미에서 결혼은 창조 질서 안에 놓인 매우 깊고 거룩한 결합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반드시 구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결혼이창조질서에속한다’는 것과 ‘모든사람이이세상에서반드시결혼해야한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성경 자체가 모든 개인에게 결혼을 의무로 부과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19장 12절에서 여러 이유로 결혼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음을 말씀하셨고, 바울도 고린도전서 7장에서 독신의 삶을 인정합니다.
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마19:12)
그러므로 결혼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선하고 귀한 질서이지만, 결혼 여부 자체가 구원의 조건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결혼애’(Conjugial Love, 1768)를 통해 보면 이 문제는 더욱 깊어집니다. 참된 결혼 사랑은 지상에서 일정 기간 함께 사는 법적·사회적 제도에 그치지 않고 영원한 삶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결혼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결혼 사랑의 가능성이 영원히 닫히는 것은 아닙니다. 천국을 향한 내적 삶을 살며 참된 결합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면, 사후에도 자신과 내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배우자를 만나 결합할 수 있다고 스베덴보리는 설명합니다. 현세의 미혼은 영원한 독신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반드시결혼해야한다’는 압박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자신과 내적으로 맞는 배우자를 만나지 못했는데도 ‘하나님께서결혼하라고하셨으니누구하고든결혼해야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혼의 본질을 오히려 거꾸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결혼의 핵심이 두 사람의 참된 결합이라면, 결혼이라는 외적 형식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잘못된 관계를 억지로 결혼이라는 형식 안에 넣는 것이 독신으로 정직하게 살아가는 것보다 더 영적인 삶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결혼하지않아도된다’는 말을 ‘결혼은별로중요하지않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도 안 됩니다. 특히 ‘혼자가편하기때문에’, ‘내자유를침해받기싫기때문에’, ‘누군가에게맞추며살고싶지않기때문에’ 모든 깊은 결합을 거부한다면 그 내면의 동기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참된 결혼 사랑에는 자기중심성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처럼 여기며 두 사람이 하나의 삶을 이루어 가는 질서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프로프리움’(proprium)을 지키기 위해 타인과의 결합 자체를 거부하는 독신과, 자신의 형편과 소명 안에서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독신은 겉으로는 같아 보여도 내적으로는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반대로 결혼했다고 해서 자동으로 참된 결혼 사랑 안에 들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법적으로는 부부이면서 서로를 지배하고 이용하고 상처 입히며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혼인신고가 두 사람의 영혼을 자동으로 결합시키지는 않습니다. 반면 결혼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정결과 책임, 이성에 대한 존중, 다른 사람을 자기 자신처럼 배려하는 사랑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서 더 근본적인 질문은 ‘결혼했는가, 하지않았는가?’가 아니라 ‘어떤사랑을가진사람으로살아가고있는가?’입니다.
여기에는 한 가지 중요한 성경적 난제가 따라옵니다. 주님은 부활에 관하여 ‘장가도아니가고시집도아니가고하늘에있는천사들과같으니라’(마22:30)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마22:30)
그렇다면 천국에는 결혼이 없다는 뜻일까요?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천국에서 남녀의 결합 자체가 사라진다는 뜻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지상의 혈통을 이어가기 위한 자연적 혼인과 천국에서 이루어지는 영적 결합을 구별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별도로 충분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천국에도결혼이있는가?’라는 질문은 스베덴보리의 결혼관을 이해하는 중요한 다음 단계입니다.
결국 ‘결혼을꼭해야하는가?’라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할 수 있습니다. 결혼은 주님께서 세우신 매우 귀한 창조 질서이지만, 모든 사람이 지상에서 반드시 결혼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결혼 여부가 사람의 구원을 결정하지도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결혼이라는 외적 상태보다 그 사람 안에서 어떤 사랑이 형성되고 있는가입니다. 결혼한 사람에게는 배우자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며 참된 결합을 이루어 가는 길이 있고, 결혼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장차 참된 결합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되어 가는 길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질문을 조금 바꾸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반드시결혼해야하는가?’보다 더 깊은 질문은 ‘나는누군가와참으로하나될수있는사람으로거듭나고있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결혼의 궁극적인 의미는 단순히 배우자를 ‘얻는것’에 있지 않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랑에서 벗어나 선과 진리가 결합하듯 서로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되어 가는 데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중요한 것은 무조건 지상에서 배우자를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결혼사랑을이룰수있는사람으로준비되어가는것’입니다.
※오늘(2026/10/18)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8, ‘성도들아찬양하자’, 찬131, ‘다나와찬송부르세’입니다.
오늘은창5절별 주석 그 두 번째, 6절로 14절, AC글 번호로는 496번에서 509번입니다. 먼저 창세기 본문입니다.
6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7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8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9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10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1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12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13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4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창5:6-14)
다음은오늘 리딩 범위인 AC.469-495요약입니다. 그전에 오늘부터는 그동안 창 각 장 앞뒤로 소개하던 ‘영계체험’ 및 각 장이나 단락의 ‘개요’는 생략, 바로 각 장 본문으로 들어가기로 하였습니다만, 그러나 이 첫 요약에서만큼은 그 내용 역시 요약 버전으로 조금 언급하는 것이 그 연결성 면에서 적절할 것 같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AC.449-468을 리딩하시면 되겠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번 ‘존버리즘’ 영상의 제목은 상당히 자극적입니다. ‘남자들국제결혼좀그만해 - 국제결혼때문에분노하는한국여자들의진짜현실.’ 영상은 40대 중반의 지방 중소기업 직장인 남성이 한국에서 여러 차례 결혼 상대자로 선택받지 못하다가 베트남 파견근무 중 한 여성을 만나 사랑하고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리고 그 결혼을 반대했던 세 여성, 곧 친누나와 결혼정보회사 매니저와 직장 여성 동료가 사실은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끌고 갑니다. 마지막에는 ‘국제결혼을그만하라고하기전에왜이남자들이한국에서는한번도선택받지못했는지부터물어야한다’는 결론을 제시합니다.
영상이 던지는 문제에는 분명 생각할 부분이 있습니다. 주인공은 결혼정보회사에서 ‘지방, 중소기업, 40대’라는 조건 때문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상대 여성들이 그를 거절할 자유가 있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누구도 원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해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문제는 인간이 어느 순간부터 ‘한사람’을 만나기 전에 그 사람의 직장, 거주지역, 주택 소유 여부, 연봉, 나이 같은 조건표부터 읽기 시작한다는 데 있습니다. 영상에서 그는 자신의 전세보증금이 스스로 모은 돈이라고 설명하지만 상대방에게 돌아오는 말은 ‘그럼결혼하면대출부터시작이네요’였습니다. 그 한마디에는 오늘날 결혼시장이 사람을 바라보는 한 단면이 압축되어 있습니다. ‘당신은어떤사람입니까?’보다 ‘당신은내삶에무엇을제공할수있습니까?’가 먼저 묻히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의렌즈’는 여기서 영상의 편을 그대로 들어 줄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한국여성들은조건만따지고베트남여성들은사람자체를본다’고 결론 내린다면 영상 속 결혼정보회사가 했던 것과 똑같은 일을 다시 하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개인을 ‘한국여자’, ‘베트남여자’라는 다른 조건표에 집어넣는 것입니다. 영상이 보여 주는 것은 어디까지나 영상이 구성한 몇 사람의 사례입니다. 그것을 ‘한국여자들의진짜현실’ 전체로 확대할 근거는 이 자료 안에는 없습니다. 국제결혼에도 진실한 사랑이 있고 이해관계로 맺어진 결혼이 있으며, 국내결혼에도 조건 중심의 결혼과 깊은 인격적 사랑이 함께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렌즈가 물어야 할 것은 ‘어느나라여자가더좋은가?’가 아니라 ‘나는배우자를무엇으로보고있는가?’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영상 속 린이라는 여성이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두 사람이 가까워진 계기는 처음부터 결혼조건이 아니었습니다. 직장에서 주인공이 잘못 작성한 주문서의 숫자 하나를 그녀가 발견하면서 서로의 능력과 성품을 알기 시작했고, 함께 일하고 식사하고 이야기하면서 관계가 자라났습니다. 더욱 인상적인 장면은 주인공이 한국의 18평 전세집을 영상통화로 보여 주며 ‘이게지금내전부예요’라고 말했을 때입니다. 이전 만남에서 약점처럼 취급되었던 바로 그 집을 보고 린은 ‘둘이살기에딱좋네요. 커튼만바꾸면돼요’라고 대답합니다. 이 장면이 마음을 건드리는 이유는 베트남 여성이어서가 아닙니다. 한쪽은 ‘이것밖에없습니까?’라고 보았던 것을 다른 한쪽은 ‘여기서함께시작할수있겠네요’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참된 결혼애의 관점에서 보면 이 차이는 상당히 중요합니다. 결혼은 상대방에게서 무엇을 획득할 것인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거래가 아니라 두 사람의 내면이 서로에게 열리고, 상대의 선을 자신의 기쁨으로 받아들이며 점차 하나를 이루어 가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현실적인 조건을 살피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직업, 경제력, 건강, 나이, 가족환경은 실제 결혼생활에 영향을 줍니다. 그러나 ‘조건을보는것’과 ‘조건으로사람의가치를결정하는것’은 전혀 다릅니다. 전자는 지혜의 문제가 될 수 있지만 후자는 인간을 수단으로 바라보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쉽습니다.
영상에는 이것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 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린의 아버지가 결혼을 앞둔 한국인 사위에게 묻는 질문입니다. ‘한국에가면내딸이일을할수있습니까?’ 돈을 얼마나 벌며 집이 있는지를 먼저 묻지 않고, 자기 딸이 결혼 후에도 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주인공은 ‘린씨가원하는일을하게돕겠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영상의 서술에 따르면 결혼비용도 두 사람이 나누어 부담합니다. 이 대목은 국제결혼을 바라볼 때 특히 중요합니다. 참된 혼인은 ‘한나라의남자가다른나라의여자를데려오는것’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각자의 자유와 인격을 가진 채 함께 삶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상 속 국제결혼을 둘러싼 편견 역시 그냥 지나치기 어렵습니다. 친누나는 ‘국적따면끝이야’라고 말하고, 직장에서는 ‘1,500주고데려온다’, ‘국적받으면바로이혼한다’는 소문이 돕니다. 물론 실제 국제결혼에는 언어와 문화의 차이, 경제적 격차, 체류자격 문제 등 국내결혼과 다른 현실적인 위험요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문제를 살피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아직 만나 보지도 않은 한 사람을 국적 하나만으로 ‘돈받고온여자’, ‘국적을따면떠날여자’라고 규정한다면 그것은 분별이 아니라 편견입니다. 한 인간의 내면을 국적으로 대신 판단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더욱 의미심장한 것은 친누나가 결혼을 반대한 이유가 뒤늦게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영상에 따르면 누나는 베트남 여성 자체가 싫었던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미혼이던 남동생이 어머니를 주로 돌봐 왔는데, 동생이 결혼하면 그 부담이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결국 누나는 ‘국제결혼’이라는 명분 뒤에 자신의 부담과 두려움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렌즈’에서 매우 중요한 장면입니다. 인간의 겉으로 드러난 주장과 그 주장을 움직이는 내적 동기가 항상 같은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는저사람을걱정해서말하는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더 깊은 곳에서는 내 편안함, 내 이익, 내 체면이 위협받는 것이 싫어서 반대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결혼정보회사의 모습도 비슷합니다. 매니저는 국제결혼은 문화가 달라 후회한다며 주인공을 말렸지만, 회사 홈페이지에는 ‘베트남국제결혼전문상담’ 상품이 걸려 있었다고 영상은 말합니다. 이것이 영상의 서술대로라면 ‘국제결혼이위험하다’는 원칙 자체보다 자기 회사를 통한 거래인가 아닌가가 판단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을 생각하게 합니다. 여기에서도 문제는 국제결혼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프로프리움(proprium)’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마치 객관적인 원칙인 것처럼 포장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영적 분별에서는 ‘저말이옳은가?’뿐 아니라 ‘나는왜이말을하고있는가?’도 함께 살펴야 합니다.
직장 동료 소영의 경우 영상은 더 노골적인 해석을 내놓습니다. 과거에는 지방 중소기업에 다니며 전세에 산다는 이유로 주인공을 배우자로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이 몇 년 뒤 ‘괜찮은사람은다베트남, 일본가서결혼한다’, ‘남자들이그렇게다외국으로가버리면여기남은여자들은어떡하느냐’고 말합니다. 영상은 이를 ‘우리가거절한남자들이다른데서행복해지지말라’는 심리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렌즈는 한 걸음 멈춰야 합니다. 그 해석은 영상 제작자의 해석이지 모든 국제결혼 비판자나 모든 미혼 여성의 내면을 설명하는 사실은 아닙니다.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은 주님만 아십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영상이 제시한 말과 행동의 모순을 살피는 데까지입니다.
그럼에도 이 장면에서 발견할 수 있는 영적 문제는 있습니다. 그것은 ‘소유하지않았으면서도소유권을주장하는마음’입니다. 내가 선택하지 않았던 사람이 다른 곳에서 사랑받고 행복해졌을 때 불편해지는 마음이 실제로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자기애에 더 가깝습니다. 사랑은 ‘내가원하지않았던사람이라도좋은사람을만나행복하기를’ 바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자기애는 ‘나는당신을원하지않지만당신이나없이행복해지는것도싫다’는 모순된 감정을 품을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남녀 어느 한쪽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남성 역시 자신이 거절했던 여성이 더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해지는 모습을 보며 같은 질투와 소유욕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한국여자들의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프로프리움의 문제입니다.
앞서 마태복음 19장을 통해 살펴본 ‘둘이한몸’이라는 말씀과 연결하면 이번 영상은 더욱 흥미로워집니다. ‘한몸’이 된다는 것은 두 사람이 서로를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조건 묶음으로 소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혼할 사람을 ‘연봉얼마’, ‘집몇평’, ‘직업무엇’, ‘나이몇살’, ‘국적어디’로 분해하는 순간 우리는 아직 ‘한사람’을 보고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조건은 필요하지만 조건들의 합계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 앞에서 한 인간은 그런 외적 조건보다 훨씬 깊은 존재입니다.
이것은 국제결혼을 생각하는 남성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합니다. ‘한국여성은조건을따지니순종적인동남아여성을만나겠다’는 식으로 국제결혼을 선택한다면 그것 역시 참된 결혼애와 거리가 멉니다. 그런 사람은 한국 여성을 조건으로 판단하는 문화를 비판하면서 자신도 외국 여성을 ‘젊음, 순종, 저렴한결혼비용’ 같은 다른 조건으로 바라보고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경제적·연령적 격차가 큰 국제결혼에서는 상대방의 자유가 실제로 존중되고 있는지 더욱 세심하게 살펴야 합니다. 영상 속 린이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도 ‘베트남여자라서순종적이기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직업을 가지고 있었고, 뛰어난 한국어 능력과 전문성을 갖추었으며, 한국에 온 뒤에도 일을 계속하고 싶어 했고, 남편 역시 그것을 존중했기 때문입니다. 영상에서 그녀는 수동적으로 ‘데려온여성’이 아니라 자기 선택을 하는 한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그래서 이 영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국적 취득이나 새 아파트 당첨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집의 보일러가 고장 났을 때 린이 서비스센터에 연락하고 전기장판과 핫팩을 들고 찾아가 밤까지 곁을 지키는 장면, 그리고 가족센터에서 다른 베트남 결혼이민자들의 병원과 관공서 일을 통역해 주는 장면입니다. 여기에서 한 사람의 가치는 ‘어느나라에서왔는가’가 아니라 ‘어떤선을사랑하고실제삶에서행하는가’를 통해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결국 사람의 영적 품질을 드러내는 것은 국적도 학력도 재산도 아닌 그 사람이 사랑하는 선과 그것을 삶으로 행하는 방식입니다.
동시에 이 장면은 앞서 살펴본 ‘이혼, 책임, 자유그리고주님의섭리’와도 묘하게 연결됩니다. 참된 혼인은 한쪽이 다른 쪽의 삶을 대신 살아 주는 관계도 아니고, 한쪽이 다른 쪽을 자신의 필요를 채우는 도구로 사용하는 관계도 아닙니다. 서로 독립된 자유로운 두 사람이 상대의 선을 기뻐하며 점차 하나를 이루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린의 아버지가 ‘내딸이한국에서도일을할수있느냐’고 물은 것은 단순한 취업 문제가 아니라 중요한 질문이 됩니다. ‘결혼한뒤에도내딸은한사람으로존중받을것인가?’라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번 ‘존버리즘’ 영상의 제목인 ‘국제결혼때문에분노하는한국여자들의진짜현실’은 ‘스베덴보리의렌즈’를 통과하면서 조금 다른 질문으로 바뀝니다. ‘왜한국남자들이국제결혼을하는가?’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우리는결혼할사람을어떻게보고있는가?’입니다. 그리고 ‘한국여자들은왜그러는가?’보다 더 깊은 질문은 ‘나는사람을조건으로보고있지는않은가?’입니다.
결혼정보회사에서 주인공에게 ‘지방, 중소기업, 40대’라는 세 개의 조건표가 붙었습니다. 직장 사람들은 린에게 ‘베트남여자, 돈받고온여자, 국적따면떠날여자’라는 또 다른 조건표를 붙였습니다. 서로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영적으로는 같은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양쪽 모두 한 인간을 만나기 전에 먼저 ‘라벨’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실제로 서로를 알아가기 시작한 곳에는 그런 라벨이 없었습니다. 주문서에 잘못 붙은 ‘0’ 하나를 발견해 준 사람, 자기의 실수를 고맙게 받아들인 사람, 야근 뒤 함께 쌀국수를 먹은 사람, 작은 전세집을 보여 주며 ‘이게내전부’라고 말할 수 있었던 사람, 그리고 그 집을 보고 ‘둘이살기에딱좋네요. 커튼만바꾸면돼요’라고 대답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참된 결혼애는 바로 거기서 시작되는지도 모릅니다. ‘당신은내조건에얼마나맞습니까?’가 아니라 ‘당신은어떤사람입니까?’라고 묻는 데서 말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당신이내게무엇을줄수있습니까?’가 아니라 ‘우리가함께어떤선을이루며살아갈수있습니까?’라고 묻는 데서 시작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영상의 마지막에 남겨야 할 질문은 ‘한국여자와결혼할것인가, 외국여자와결혼할것인가?’가 아닙니다. 국적을 바꾼다고 자기애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국제결혼을 한다고 참된 결혼애가 저절로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 앞에서는 한국인과 베트남인이라는 구별보다 훨씬 깊은 구별이 있습니다. 상대를 이용하려는 사랑인가, 상대의 선을 기뻐하는 사랑인가. 상대를 내 삶의 조건으로 보는가, 주님 앞에 선 하나의 영혼으로 보는가.
‘스베덴보리의렌즈’가 이번 영상에서 발견하는 핵심은 그래서 국제결혼의 승리도, 한국 여성에 대한 비판도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을 ‘조건표’로 바꾸어 버리는 우리의 시선에 대한 경고입니다. 사람을 조건으로 평가하기 시작하면 한국 남성도 상품이 되고 한국 여성도 상품이 되며 베트남 여성도 상품이 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을 ‘한사람’으로 보기 시작하면 결혼은 시장에서 다시 관계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둘이한몸을이룰지로다’라는 말씀을 향해 가는 가장 첫걸음인지도 모릅니다. 한 몸이 되기 전에 먼저 상대를 ‘한사람’으로 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