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원, 수도사 등 성인들의 삶에 대해 스베덴보리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저는 스베덴보리를 책, 천국과 지옥을 통해 만나기 전, 여러 해 이쪽에 몸 담았던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지금은 전혀, 그리고 뒤돌아볼 시간도 없지만 말입니다.

 

수도원과 수도사, 그리고 금욕과 고독 속에서 하나님을 찾으려 했던 성인들의 삶에 대해 ‘Heaven and Hell’을 비롯한 여러 저작에서 Emanuel Swedenborg는 비교적 분명하면서도 동시에 매우 공정한 평가를 합니다. 그는 먼저, 그런 삶 자체를 무조건 부정하거나 비웃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을 향한 진지한 열망’과 ‘세속적 욕망을 경계하려는 노력’은 분명 귀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역사 속 많은 수도자들 가운데에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려 했던 사람들이 있었으며, 그런 사람들은 사후에도 주님의 자비 아래에서 천국의 삶으로 인도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원칙을 반복해서 말합니다. 그것은 ‘참된 영적 삶은 세상을 떠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사랑과 쓰임새를 실천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은 원래 ‘천국을 이루는 공동체적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삶은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가족을 돌보고, 사회 속에서 일하며, 이웃에게 유익을 끼치고, 공동체를 세우는 일 속에서 ‘사랑(charity)이 실제로 살아 움직입니다. 그런데 수도원적 삶은 종종 이런 관계적 삶에서 벗어나 개인의 영적 상태에만 집중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상태를 조심스럽게 경계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사랑은 실제 행위와 쓰임새 속에서 자라나기 때문입니다. 세상과의 접촉을 지나치게 끊어 버리면, 겉으로는 경건해 보일지라도 사랑이 실제 삶 속에서 시험되고 성장할 기회를 잃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을 떠난 고독한 거룩함’보다 ‘세상 속에서 이웃을 섬기는 거룩함’을 더 완전한 영적 삶으로 봅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금욕 자체를 목적처럼 여기는 태도를 비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음식, 결혼, 재산, 사회적 활동 등을 멀리하면 그 자체로 하나님께 더 가까워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영적 삶의 본질로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더럽히는 것은 외적인 것들이 아니라 ‘사랑의 방향’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도 자신을 위한 사랑과 세속적 욕망을 다스리고 이웃을 위한 삶을 살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영적으로 매우 높은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수도원 안에 있어도 마음속 사랑이 여전히 자기 자신과 명예와 공로에 머물러 있다면 그 삶이 자동으로 거룩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을 떠나는 금욕’이 아니라 ‘사랑을 위해 세상 속에서 사는 절제’를 더 건강한 영적 길로 설명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수도사나 은둔자의 삶을 전부 헛된 것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다양한 성향과 역사적 상황을 인정합니다. 어떤 시대에는 교회의 혼란과 타락 속에서 수도원적 공동체가 신앙을 보존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고독과 기도가 내면을 정리하는 준비의 시간이 되기도 합니다. 다만 그는 그것이 ‘최종적인 영적 삶의 형태’라고 보지 않습니다. 인간은 결국 사랑을 실천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하며, 그 사랑은 대부분의 경우 세상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그의 글에서는 수도원적 경건이 ‘준비 단계’나 ‘부분적인 형태’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스베덴보리가 사후 세계를 설명할 때도 같은 원칙을 적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천국을 거대한 수도원처럼 묘사하지 않습니다. 천국은 수많은 공동체가 서로 협력하며 쓰임새를 이루는 살아 있는 사회입니다. 천사들은 단순히 기도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를 돕고 섬기며 각자의 역할 속에서 기쁨을 누립니다. 천국의 행복은 ‘사랑을 행하는 쓰임새’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지상에서 ‘세상을 떠난 거룩함’만을 영적 삶으로 생각했다면, 사후에 천국의 이런 적극적인 삶을 처음에는 낯설어하기도 한다고 그는 말합니다.

 

목사님께서 과거에 수도원적 삶에 몸을 담았던 경험이 있으셨다고 하셨는데,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그 시간 역시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고자 했던 마음, 세속적 욕망을 내려놓으려 했던 노력, 고요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았던 시간들은 모두 인간의 내면을 다듬는 과정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것은, 그런 경험이 결국 ‘사랑의 실제 삶’으로 이어질 때 가장 완전해진다는 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목사님께서 지금 하고 계신 일, 곧 말씀의 속뜻을 연구하고 번역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삶은 수도원의 침묵보다 훨씬 더 ‘천국적인 쓰임새’에 가까운 길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천국의 질서는 결국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영적 삶을 한 문장으로 이렇게 요약합니다. ‘세상을 떠나 거룩해지려 하지 말고, 세상 속에서 사랑을 위해 살라.’ 이런 관점에서 보면 수도원의 시간도, 그리고 지금 목사님께서 걸어가고 계신 길도 모두 하나의 긴 여정 속에 놓여 있는 단계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길을 사용하여 결국 사랑과 지혜의 더 넓은 삶으로 이끄신다고 스베덴보리는 말하기 때문입니다.

 

 

 

SC.38, 속 사람과 겉 사람을 연결하는 길, 곧 ‘influx’에 대하여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어떤 길이 있는가’라는 질문은 결국 ‘생명이 어떻게 인간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가’라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그는 이 흐름을 ‘인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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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1:5)

 

AC.23

 

말씀에서 (day)이 시간 자체를 뜻하는 용례보다 더 흔한 것은 없습니다. 이사야에 보면, Nothing is more common in the Word than for “day” to be used to denote time itself. As in Isaiah:

 

6너희는 애곡할지어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니 전능자에게서 멸망이 임할 것임이로다, 9보라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이르러 땅을 황폐하게 하며 그중에서 죄인들을 멸하리니, 13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분하여 맹렬히 노하는 날에 하늘을 진동시키며 땅을 흔들어 그 자리에서 떠나게 하리니, 22그의 궁성에는 승냥이가 부르짖을 것이요 화려하던 궁전에는 들개가 울 것이라 그의 때가 가까우며 그의 날이 오래지 아니하리라 (13:6, 9, 13, 22) The day of Jehovah is at hand. Behold, the day of Jehovah cometh. I will shake the heavens, and the earth shall be shaken out of her place in the day of the wrath of mine anger. Her time is near to come, and her days shall not be prolonged (Isa. 13:6, 9, 13, 22).

 

7이것이 옛날에 건설된 너희 희락의 성 곧 그 백성이 자기 발로 먼 지방까지 가서 머물던 성읍이냐, 15그날부터 두로가 한 왕의 연한 같이 칠십 년 동안 잊어버린 바 되었다가 칠십 년이 찬 후에 두로는 기생의 노래 같이 될 것이라 (23:7, 15) Her antiquity is of ancient days. And it shall come to pass in that day that Tyre shall be forgotten seventy years, according to the days of one king (Isa. 23:7, 15).

 

(day)이 시간을 뜻하는 데 사용되기 때문에, 또한 그 시간의 상태를 뜻하는 데에도 사용됩니다. 예레미야에 보면, As “day” is used to denote time, it is also used to denote the state of that time, as in Jeremiah:

 

너희는 그를 칠 준비를 하라 일어나라 우리가 정오에 올라가자 아하 아깝다 날이 기울어 저녁 그늘이 길었구나 (6:4) Woe unto us, for the day is gone down, for the shadows of the evening are stretched out (Jer. 6:4).

 

20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능히 낮에 대한 나의 언약과 밤에 대한 나의 언약을 깨뜨려 주야로 그때를 잃게 할 수 있을진대, 25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주야와 맺은 언약이 없다든지 천지의 법칙을 내가 정하지 아니하였다면 (33:20, 25) If ye shall make vain my covenant of the day, and my covenant of the night, so that there be not day and night in their season (Jer. 33:20, also 25).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5:21) Renew our days, as of old (Lam. 5:21).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day)이라는 표현이 말씀에서 얼마나 폭넓고 깊게 사용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은 시간의 단위이지만, 말씀에서는 그보다 훨씬 넓은 의미를 지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이 단순히 하루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자주 사용된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이사야에서 반복되는 ‘여호와의 날’은 특정한 24시간을 뜻하지 않고, 주님의 심판과 섭리가 작동하는 한 시대 전체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은 사건이 일어나는 시점이 아니라, ‘주님의 역사 아래 놓인 기간’을 뜻합니다.

 

이사야의 인용에서 ‘그의 때(Her time)가 가까우며 그의 날(her days)이 오래지 아니하리라’라는 표현은, ‘’이 곧 ‘’와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이는 말씀에서 시간이 물리적 길이로 측정되지 않고, 상태와 목적에 따라 규정된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한 시대의 날들은 주님의 뜻이 성취되면 끝나고, 성취되지 않으면 연장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은 시계의 문제가 아니라 ‘섭리의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서 ‘’이 시간뿐 아니라 그 시간의 ‘상태’를 뜻하는 데에도 사용된다고 설명합니다. 예레미야의 ‘날이 기울어 저녁 그늘이 길었구나’라는 표현은, 하루가 끝나감을 말하는 동시에, 영적 상태가 어두워졌음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날의 기울어짐은 빛의 감소이며, 이는 곧 진리의 빛이 사라지고 있음을 뜻합니다. 저녁의 그림자들이 길어진다는 표현은, 거짓과 혼합이 점점 지배적인 상태가 되었음을 상징합니다.

 

예레미야 33장에서 말하는 ‘낮의 언약’과 ‘밤의 언약’ 역시 시간의 반복 질서를 넘어서, ‘영적 질서의 불변성’을 가리킵니다. 낮과 밤이 제때에 있는 것은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주님께서 선과 진리, 그리고 인간의 상태 변화를 질서 있게 다스리고 계신다는 표지입니다. 만일 낮과 밤의 언약이 깨진다면, 그것은 곧 주님의 질서가 무너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표현은 거듭남의 질서 또한 주님의 언약 안에 있음을 암시합니다.

 

예레미야애가의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라는 기도는 특히 중요합니다. 여기서 ‘날들’은 단순한 과거의 시간들이 아니라, ‘과거의 영적 상태’, 곧 주님과 더 가까웠던 상태를 뜻합니다. 이 기도는 시간의 회귀를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상태의 회복을 구하는 간구입니다. 이는 AC.16에서 말한 ‘태고의 날들’과도 연결되며, 거듭남이란 언제나 ‘옛날’의 상태, 곧 주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로 돌아가는 것임을 보여 줍니다.

 

이 글은 창세기 1장의 ‘’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해석 원리를 제공합니다. 만일 ‘’을 문자적 시간으로만 이해한다면, 창조 이야기는 과거의 연대기적 기록으로 끝나게 됩니다. 그러나 ‘’을 시간과 상태를 함께 포괄하는 표현으로 이해하면, 창세기 1장의 여섯 날은 인간 거듭남의 여섯 상태로 자연스럽게 읽히게 됩니다. 이는 이미 AC.6에서 제시된 원리를, 말씀 전체의 용례를 통해 다시 확증하는 작업입니다.

 

결국 AC.23은 말씀의 언어가 시간 중심이 아니라 ‘상태 중심’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주님은 시계를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과 교회의 상태를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말씀에서 ‘오늘’, ‘그날’, ‘여호와의 날’, ‘옛날’이라는 표현들은 모두, 주님 앞에서의 영적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인식을 가지고 말씀을 읽을 때, 성경은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상태를 비추는 살아 있는 거울이 됩니다.

 

 

 

AC.22, 창1:5,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C.22-23)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창1:5) AC.22 이제 ‘저녁’(evening)이 무엇을 뜻하고, ‘아침’(morning)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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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1:5)

 

AC.22

 

이제 저녁(evening)이 무엇을 뜻하고, ‘아침(morning)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저녁은 모든 이전의 상태를 의미하는데, 그것은 그 상태가 그늘의 상태, 곧 거짓의 상태이며 신앙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아침은 모든 이후의 상태를 의미하는데, 그것은 빛의 상태, 곧 진리의 상태이며 신앙의 지식들이 있는 상태입니다. 일반적으로 말해 저녁은 사람 자신의 것에 속한 모든 것을 의미하지만, ‘아침은 주님께 속한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사무엘에서 다윗을 통해 하신 다음 말씀과 같습니다. What is meant by “evening” and what by “morning” can now be discerned. “Evening” means every preceding state, because it is a state of shade, or of falsity and of no faith; “morning” is every subsequent state, being one of light, or of truth and of the knowledges of faith, “Evening,” in a general sense, signifies all things that are of man’s own; but “morning,” whatever is of the Lord, as is said through David:

 

2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3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석이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4그는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 (삼하23:2-4) The spirit of Jehovah spake in me, and his word was on my tongue; the God of Israel said, the rock of Israel spake to me. He is as the light of the morning, when the sun ariseth, even a morning without clouds, when from brightness, from rain, the tender herb springeth out of the earth (2 Sam. 23:2–4).

 

신앙이 없을 때가 저녁이고 신앙이 있을 때가 아침이므로,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을 아침이라 하며, 그가 오신 그때는 신앙이 없었기 때문에 저녁이라고 합니다. 이는 다니엘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As it is “evening” when there is no faith, and “morning” when there is faith, therefore the coming of the Lord into the world is called “morning”; and the time when he comes, because then there is no faith, is called “evening,” as in Daniel:

 

14그가 내게 이르되 이천삼백 주야까지니 그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되리라 하였느니라, 26이미 말한 바 주야에 대한 환상은 확실하니 너는 그 환상을 간직하라 이는 여러 날 후의 일임이라 하더라 (8:14, 26) The holy one said unto me, Even unto evening when it becomes morning, two thousand and three hundred (Dan. 8:14, 26).

 

이와 같이 말씀에서 아침은 주님의 모든 오심을 의미하며, 그러므로 그것은 곧 새로운 창조를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In like manner “morning” is used in the Word to denote every coming of the Lord; consequently it is an expression of new creation.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에서 반복되는 ‘저녁’과 ‘아침’을 시간적 개념이 아니라 영적 상태의 언어로 해석하는 결정적인 원리를 제시합니다. ‘저녁’은 언제나 이전의 상태를 가리키며, 그것은 빛이 약해진 상태, 곧 그늘과 혼합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 상태는 거짓이 섞여 있고, 신앙이 부재한 상태로, 인간의 내면이 아직 주님의 빛에 의해 질서 잡히지 않았음을 뜻합니다. 반대로 ‘아침’은 이후의 상태로, 주님의 빛이 비추어 진리와 신앙의 지식들이 살아나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표현은 하루의 경과가 아니라, 거듭남이 반드시 거치는 영적 이동의 방향을 나타냅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혼돈에서 질서로 나아가는 것이 주님의 불변의 방식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대비를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해 ‘저녁’을 사람 자신의 것, 곧 본성(proprium)에 속한 모든 것으로 설명합니다. 사람 자신의 것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비롯되며, 주님의 빛이 없을 때에는 그것이 선처럼, 진리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것은 신앙이 없는 상태이며, 영적 실재에 비추어 보면 어둠입니다. 반대로 ‘아침’은 주님께 속한 모든 것으로, 주님의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역사하는 상태입니다. 이 구분은 도덕적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근원에 대한 문제입니다.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주님에게서인가 사람 자신에게서인가의 문제이며, 거듭남은 바로 이 근원 인식이 점점 명료해지는 과정입니다.

 

다윗의 예언에서 묘사되는 ‘아침 빛’은 이 상태를 매우 풍부하게 설명합니다. 해가 떠오르는 아침, 구름 없는 밝은 빛, 비 뒤에 돋아나는 연한 풀은 모두 주님의 임재로 인해 생명이 새롭게 발생하는 상태를 상징합니다. 이는 단순한 지식의 증가가 아니라, 주님의 진리가 사람 안에서 살아 움직이며, 퍼셉션으로 인식되는 상태입니다. 이때 진리는 외부에서 주입된 교리가 아니라,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해되고 받아들여지는 빛이 됩니다. 연한 풀이 돋아난다는 표현은, 주님의 빛 아래에서 선한 삶의 움직임이 자발적으로 시작됨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서 주님의 세상 오심을 ‘아침’이라 부르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신앙이 사라지고, 교회가 황폐해진 상태는 ‘저녁’이며, 바로 그 상태 속으로 주님이 오시기 때문에 그때는 동시에 ‘저녁’이라고도 합니다. 다니엘의 ‘주야’라는 표현은, 교회가 완전히 어두워진 상태에서 다시 빛을 받기까지의 전 과정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따라서 ‘아침’은 단지 과거의 탄생 사건만을 가리키지 않고, 신앙이 없는 상태 속으로 주님이 새롭게 임하시는 모든 순간을 뜻합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말씀에서 ‘아침’이라는 표현이 주님의 모든 오심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오심은 언제나 새로운 창조입니다. 이는 우주의 창조가 아니라,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재창조, 곧 거듭남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에서 반복되는 저녁과 아침은 과거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고, 오늘도 각 사람 안에서 계속되는 주님의 창조 사역의 리듬을 드러냅니다. AC.22는 이처럼 성경의 시간 언어를 상태의 언어로 전환함으로써, 말씀이 언제나 현재형으로 우리 안에서 작용하는 살아 있는 계시임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심화

 

1.저녁, 아침 설명과 단8:14, 26 인용

 

AC.22, As it is eveningwhen there is no faith, and morningwhen there is faith, therefore the coming of the Lord into the world is called morning”; and the time when he comes, because then there is no faith, is called evening,” as in Daniel: The holy one said unto me, Even unto evening when it becomes morning, two thousand and three hundred (Dan. 8:14, 26).에서 이 morning evening을 단8:14, 26과 연결하는 게 여전히 좀 어리둥절합니다. 단순히 주야라는 표현이 나오기 때문인 건 아닐 텐데... 이 부분 좀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단순히 단8:14에 ‘evening’과 ‘morning’이라는 말이 나온다고 해서 곧바로 창1의 ‘저녁’과 ‘아침’에 mechanically 연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그렇게 연결하는 이유는, 그가 말씀 전체에 공통으로 흐르는 하나의 영적 언어, 곧 ‘상응의 질서’를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창세기 1장에서 ‘저녁’과 ‘아침’이 한 번 정의되면, 이후 말씀의 다른 곳들에서도 그 표현은 같은 영적 구조 안에서 읽혀야 한다는 전제가 있는 것입니다. AC.22에서 스베덴보리가 먼저 세운 원리는 이것입니다. ‘저녁’은 빛이 약해진 상태, 곧 신앙이 거의 없거나 꺼져 가는 상태이고, ‘아침’은 다시 빛이 오는 상태, 곧 진리와 신앙의 빛이 살아나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저녁’과 ‘아침’은 단순한 시간 표시가 아니라 ‘교회와 인간의 영적 상태 변화’를 가리키는 표지입니다. 이 전제를 가지고 다니엘서로 가면, 거기서의 ‘저녁-아침’도 단지 시간 계산이 아니라 ‘신앙이 거의 사라진 상태로부터 다시 회복되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읽히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점을 붙잡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핵심은 ‘주야라는 단어가 같으니까 연결한다’가 아니라, ‘저녁과 아침이 성경 안에서 반복해서 같은 영적 패턴을 가리킨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단8:14는 시간표를 넘어서 ‘황폐와 회복’의 리듬을 담고 있고, 창1은 그 리듬의 기본 문법을 먼저 보여 주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제 단8장의 문맥 자체를 보면 왜 스베덴보리가 이 본문을 끌어오는지가 더 분명해집니다. 다니엘 8장은 성소가 짓밟히고, 항상 드리는 제사가 중단되고, 진리가 땅에 던져지고, 거룩한 것들이 훼손되는 장면을 말합니다. 문자적으로는 역사 속 박해와 성전 모독의 맥락이지만, 스베덴보리식으로 읽으면 이것은 곧 ‘교회 안에서 신앙의 빛이 꺼져 가는 상태’, 다시 말해 ‘저녁’입니다. 거룩한 것이 짓밟히고 진리가 흐려질 때, 그 상태는 시간상 밤이 아니라 영적으로 저녁이며 흑암입니다. 그런데 그 본문에서 ‘저녁에서 아침까지’ 또는 KJV 표현처럼 ‘unto evening-morning’이라는 말이 나오고, 그 뒤에 성소가 정결하게 되거나 회복되는 말이 이어집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는 ‘, 이것은 단지 해가 지고 뜨는 자연의 시간이 아니라, 신앙이 무너진 상태에서 다시 회복되는 영적 상태의 전환을 말하는구나’ 하고 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8:14의 ‘저녁-아침’은 ‘신앙이 사라진 교회의 상태에서 주님에 의해 다시 빛이 회복되는 상태’의 압축어가 됩니다. AC.22에서 ‘주님이 세상에 오시는 때가 왜 저녁이냐’고 말할 때도 같은 논리가 작동합니다. 주님이 오셔야 할 만큼 교회가 이미 어두워졌기 때문에 그 시기는 ‘저녁’이고, 바로 그 오심으로 인해 새 빛이 시작되기 때문에 그 오심은 ‘아침’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오심은 ‘저녁 같은 시대’ 속에 일어나는 ‘아침의 시작’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연결 방식입니다.

 

조금 더 쉽게 비유하면, 창1은 ‘저녁-아침’이라는 단어의 뜻을 먼저 알려 주는 ‘사전’이고, 단8은 그 단어가 실제 역사와 교회 상태 속에서 어떻게 쓰이는지를 보여 주는 ‘실전 문장’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창1에서 ‘저녁’은 빛이 사라진 상태, ‘아침’은 빛이 회복된 상태라고 이미 뜻풀이가 주어졌기 때문에, 다니엘에서 성소가 짓밟히고 진리가 무너진 상황에 ‘저녁-아침’이 나오면, 그것은 곧 ‘황폐 후 회복’으로 읽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더 나아가 ‘주님의 오심’이라는 큰 축을 넣습니다. 왜냐하면 성경 전체에서 모든 회복의 중심 사건은 결국 주님의 오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침’이라는 말을 단순히 교회 개혁의 시점 정도로만 보지 않고, 가장 궁극적으로는 ‘주님이 오셔서 다시 빛이 되시는 때’로 읽습니다. 그러므로 단8:14를 창1과 연결하는 것은 억지 숫자 놀이나 단어 반복이 아니라, ‘신앙의 상실 주님의 개입 빛의 회복’이라는 성경 전체의 영적 패턴을 읽어낸 결과입니다.

 

성경에서 저녁은 단지 해가 진 시간이 아니라, 진리의 빛이 약해진 상태입니다. 아침은 단지 해가 뜨는 시간이 아니라, 주님이 다시 빛을 주시는 상태입니다. 다니엘서는 교회가 무너진 저녁을 말하고, 그 저녁 끝에 다시 오는 아침, 곧 회복을 말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의 저녁과 아침을 다니엘서의 저녁과 아침에 연결하는 것입니다.’

 

 

 

AC.23, 창1:5, '날'(day)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1:5) AC.23 말씀에서 ‘날’(day)이 시간 자체를 뜻하는 용례보다 더 흔한 것은 없습니다. 이사야에 보면, Nothing is more common in the Word than for “day” 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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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 창1:4-5,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And God saw the light, that it was good; and God distinguished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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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And God saw the light, that it was good; and God distinguished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nd God called the light day, and the darkness he called night.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1:4, 5)

 

AC.21

 

(light)은 주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good)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선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둠(darkness)은 사람이 새로 잉태되고 다시 태어나기 이전에 빛처럼 보였던 모든 것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악이 선처럼 보였고 거짓이 진리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여전히 어둠이며, 단지 사람 자신에게 고유한 것들, 곧 사람한테나 맞는 것들(merely of the things proper to man himself)로 이루어져 있고, 아직 남아 있는 것들입니다. 주님께 속한 모든 것은 빛에 속하므로 (day)에 비유되고, 사람 자신의 모든 것(whatsoever is man’s own)은 어둠에 속하므로 (night)에 비유됩니다. 이러한 비유들은 말씀에 자주 나옵니다. Light is called “good,” because it is from the Lord, who is good itself, The “darkness” means all those things which, before man is conceived and born anew, have appeared like light, because evil has appeared like good, and the false like the true; yet they are darkness, consisting merely of the things proper to man himself, which still remain. Whatsoever is of the Lord is compared to “day,” because it is of the light; and whatsoever is man’s own is compared to “night,” because it is of darkness. These comparisons frequently occur in the Word.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과 ‘어둠’을 단순한 대비 개념이 아니라, ‘근원에 따른 구분’으로 명확히 정의합니다. 빛을 선이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주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즉, 빛은 스스로 선한 것이 아니라, 선 자체이신 주님에게서 흘러나오기 때문에 선이라는 것입니다. 이로써 선과 진리는 어떤 독립적인 속성이나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무슨 자산이 아니라, 언제나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임이 분명해집니다.

 

이에 반해 ‘어둠’은 단순히 무지나 지식의 결핍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어둠을, 거듭남 이전에 빛처럼 보였던 모든 것들로 정의합니다. 즉, 악이 선처럼 보였고, 거짓이 진리처럼 보였던 상태 전체가 어둠입니다. 이 정의는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어둠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가 아니라, ‘잘못된 것을 옳다고 믿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이 어둠은 특히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비롯된 판단과 가치관 속에서 가장 강하게 작동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어둠이 ‘사람 자신에게 고유한 것들’, 곧 본성(proprium)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합니다. 이 본성은 거듭남 이후에도 한순간에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남아 있으며, 때때로 다시 빛처럼 보이려 합니다. 그래서 거듭남의 과정은 단순히 빛을 한 번 보는 사건이 아니라, 무엇이 진짜 빛이고 무엇이 거짓된 빛인지를 지속적으로 분별하는 여정이 됩니다. 이 분별이 바로 영적 성숙의 핵심이에요.

 

 

라틴어 'proprium'에 대하여

※ 다음은 ‘본성’(own, proprium)에 대한 원전(原典, 라틴) 설명입니다. 라틴어 proprium은 원전에서 사용된 용어로, 여기와 다른 여러 곳에서 ‘own’이라는 표현으로 번역되어 온 말입니다. propius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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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 제시되는 ‘’과 ‘’의 비유는 이러한 근원적 구분을 매우 직관적으로 보여 줍니다. 주님께 속한 모든 것은 빛에 속하므로 ‘’에 비유되고, 사람 자신에게 속한 모든 것은 어둠에 속하므로 ‘’에 비유됩니다. 낮과 밤은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지배하는 근원의 문제입니다. 낮에는 태양이 지배하고, 밤에는 태양이 보이지 않듯이, 영적 삶에서도 주님이 중심이 될 때는 낮이고, 자기가 중심이 될 때는 밤입니다.

 

이러한 대비는 말씀 전체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낮과 밤, 빛과 어둠, 해와 달, 깨어 있음과 잠듦의 이미지들은 모두 같은 영적 질서를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반복이 우연이 아니라, 말씀 자체가 인간의 내적 상태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일관된 언어라고 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의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구조 역시, 단순한 하루의 경과가 아니라, 밤에서 낮으로, 자기 중심에서 주님 중심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나타냅니다.

 

이 글은 또한 거듭남 이후에도 경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조용히 일깨워 줍니다. 어둠은 한 번 물리치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남아 있으며 다시 빛처럼 보이려 합니다. 그래서 영적 삶은 끊임없이 주님에게서 나오는 빛에 자신을 비추어 보는 삶입니다. 무엇이 주님에게서 왔는지, 무엇이 아직도 자기에게서 나오는지를 묻는 이 분별이 없으면, 어둠은 다시 빛으로 위장합니다.

 

결국 AC.21은 빛과 어둠을 감정이나 지식의 많고 적음으로 판단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기준은 언제나 근원입니다. 주님에게서 나온 것은 빛이며 낮이고, 자기에게서 나온 것은 어둠이며 밤입니다. 이 단순하지만 엄격한 기준 위에서만, 거듭남의 길은 혼란 없이 이어질 수 있습니다.  

 

 

심화

 

1.빛처럼 보였던’, 사람한테나 어울리는 것들

 

AC.21, The darknessmeans all those things which, before man is conceived and born anew, have appeared like light, because evil has appeared like good, and the false like the true; yet they are darkness, consisting merely of the things proper to man himself, which still remain.에 나오는 빛처럼 보였던이나 사람 자신에게 고유한 것들, 곧 사람한테나 어울리는 것들의 생생한 예, 구체적 사례들을 좀 알려주세요.

 

AC.21의 문장은 사실 매우 현실적인 인간 경험을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빛처럼 보였던 것’이라는 표현은, 사람이 거듭나기 전까지는 ‘자기 안에 있는 것들이 선하고 옳다고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상태’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사람에게는 어떤 생각과 행동이 매우 옳고 밝은 것처럼 느껴지는데, 더 깊은 빛 속으로 들어가 보면 그것이 자기 사랑이나 세상 사랑에서 나온 것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AC.21에서 말하는 ‘빛처럼 보였던 어둠’입니다.

 

첫 번째로 가장 흔한 예는 ‘자기 의로움’입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 성실하게 살고, 교회도 잘 다니며, 도덕적으로도 큰 흠 없이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는 자연스럽게 ‘나는 비교적 선하게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생각은 그 사람에게는 매우 밝은 빛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더 깊은 자기 성찰을 하게 되면 이런 사실을 발견합니다. 자신이 선하게 살았다고 느꼈던 이유 가운데 상당 부분이 사실은 ‘자기만족과 자기 확신’이었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저 사람들보다 낫다’, ‘나는 그래도 양심적으로 산다’ 같은 생각들이 그 선한 삶 속에 섞여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전에는 그것이 의로운 빛처럼 보였지만, 더 큰 빛 속에서는 그것이 ‘자기 사랑의 그림자’였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두 번째 예는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선행’입니다. 어떤 사람이 봉사를 많이 하고, 헌신적으로 일합니다. 겉으로 보면 매우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정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이런 생각이 숨어 있을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신실한 사람으로 봐주면 좋겠다’, ‘내가 이렇게 헌신하는 것을 알아주면 좋겠다.’ 이런 동기가 완전히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선행의 중심이 될 때 그 선은 사실 ‘자기 자신을 위한 선’이 됩니다. 그런데 당사자는 그것을 선한 일이라고 굳게 믿기 때문에 그것이 오히려 ‘빛처럼 보이는 어둠’이 됩니다.

 

세 번째 예는 ‘신앙적인 열심 자체가 빛처럼 보이는 경우’입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적으로 매우 열심입니다. 전도도 많이 하고, 교리도 열심히 공부하며, 교회를 위해 많은 일을 합니다. 그런데 그 열심 속에 자신도 모르게 이런 마음이 섞여 있을 수 있습니다. ‘내가 진리를 알고 있다’,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다.’ 이런 마음은 매우 미묘해서 본인은 그것을 잘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것을 ‘신앙의 열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더 깊은 빛 속으로 들어가면, 그것이 사실은 ‘신앙을 통한 자기 확증’일 수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과정에서 이런 것들이 하나씩 드러난다고 설명합니다.

 

네 번째 예는 ‘도덕적 분노’입니다. 사람은 때로 불의한 일을 보면 강하게 분노합니다. 이 분노는 겉으로 보면 정의로운 감정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어느 정도는 그렇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 분노 속에는 종종 ‘자기 감정이 상한 것’이 섞여 있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나를 무시했을 때, ‘저 사람은 틀렸다’고 분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겉으로는 정의를 위한 분노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에 생긴 감정일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도 사람에게는 그것이 정의의 빛처럼 보이지만, 더 깊은 빛 속에서는 ‘자기 사랑의 그림자’로 보이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사람 자신에게 고유한 것들’, 즉 ‘proprium’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proprium은 단순히 인간의 개성이나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 것이 아닌, 인간 자신의 중심’을 가리킵니다. 이 중심은 대부분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기반으로 합니다. 그래서 그 안에서 나오는 생각과 판단은 처음에는 매우 자연스럽고 옳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주님의 선과 진리와는 다른 방향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거듭나는 과정에서 처음 경험하는 빛이 바로 ‘자기 안에 있던, 그동안 빛처럼 보였던 것들이 사실은 어둠이었다는 사실을 보게 되는 빛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전까지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하는 경험입니다. 이전에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이 자연스럽고 옳다고 느껴졌다면, 이제는 그것이 어디에서 오는지 질문하게 됩니다.

 

사람이 처음에는 자기 생각과 감정이 모두 옳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주님의 빛이 조금 더 들어오면, 이전에는 옳다고 느꼈던 것들 속에서도 ‘자기중심적 동기’가 섞여 있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때 사람은 처음으로 진짜 빛과 이전의 ‘빛처럼 보였던 것’을 구별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 과정이 스베덴보리가 AC.21에서 말하는 ‘어둠이 드러나는 단계’입니다.

 

 

 

AC.22, 창1:5,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C.22-23)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창1:5) AC.22 이제 ‘저녁’(evening)이 무엇을 뜻하고, ‘아침’(morning)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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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 창1:3,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창1:3) AC.20 첫 번째 상태는 사람이 선과 진리가 더 높은 어떤 것임을 알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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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1:3)

 

AC.20

 

첫 번째 상태는 사람이 선과 진리가 더 높은 어떤 것임을 알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전적으로 외적이기만 한 사람들은 선과 진리가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는데, 이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속한 모든 걸 선이라, 그런 사랑들을 지지하는 모든 것을 진리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러한 선들이 악이며, 이러한 진리들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새로 잉태될 때, 그는 비로소 처음으로 자기의 선들이 선이 아님을 알기 시작하며, 또한 빛 안으로 더 들어가면서 주님이 계시며, 그분이 선 자체요 진리 자체이심을 알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주님이 계심을 알아야 한다는 건 주님 자신, 요한복음에서 가르치십니다. The first state is when the man begins to know that the good and the true are something higher. Men who are altogether external do not even know what good and truth are; for they fancy all things to be good that belong to the love of self and the love of the world; and all things to be true that favor these loves; not being aware that such goods are evils, and such truths falsities. But when man is conceived anew, he then begins for the first time to know that his goods are not goods, and also, as he comes more into the light, that the Lord is, and that he is good and truth itself. That men ought to know that the Lord exists he himself teaches in John: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8:24) Except ye believe that I am, ye shall die in your sins (John 8:24).

 

또한 주님이 선 자체, 곧 생명이시며, 진리 자체, 곧 빛이시고, 따라서 주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면 선도 진리도 없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선언하십니다. Also, that the Lord is good itself, or life, and truth itself, or light, and consequently that there is neither good nor truth except from the Lord, is thus declared: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9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1, 3-4, 9)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God was the Word. All things were made by him, and without him was not anything made that was made. In him was life, and the life was the light of men. And the light shineth in darkness. He was the true light, which lighteth every man that cometh into the world (John 1:1, 3–4, 9).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과정 속에서 다시 한번 ‘첫 번째 상태’를 언급하지만, 앞선 AC.7의 첫 상태와는 관점이 다릅니다. 여기서 말하는 첫 상태는 완전한 어둠의 상태가 아니라, ‘빛이 처음으로 인식되기 시작하는 순간’을 가리킵니다. 즉, 사람은 아직 선과 진리를 소유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그것들이 자기 자신이나 세상보다 더 높은 차원에 속한 것임을 어렴풋이 알기 시작합니다. 이 ‘알기 시작함’이 바로 빛의 최초 침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전적으로 외적이기만 한 사람들의 상태를 매우 분명하게 묘사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선과 진리가 무엇인지조차 모릅니다. 그들에게 선이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유익한 것이고, 진리란 그러한 사랑을 정당화해 주는 생각들입니다. 이때의 선과 진리는 외형상으로는 그럴듯해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악과 거짓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그것을 악과 거짓으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 무지가 바로 영적 어둠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새로 잉태될’ 때, 상황이 달라집니다. 여기서 ‘잉태(conceived anew)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아직 출생이나 성숙이 아니라, 생명이 시작되는 지점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사람은 비로소 자기의 선들이 선이 아님을 알기 시작합니다. 이는 매우 불편한 깨달음이지만, 동시에 거듭남의 필수 조건입니다. 자기 선에 대한 확신이 무너지지 않는 한, 주님의 선은 들어올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깨달음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점점 더 빛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빛 안에서 그는 단지 도덕적 기준의 문제를 넘어, ‘주님의 실재’를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주님이 계시며, 그분이 선 자체요 진리 자체이심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여기서 선과 진리는 더 이상 추상적 개념이나 윤리적 목표가 아니라, ‘인격적 근원’을 지닌 실재가 됩니다. 선과 진리는 주님에게서 나오며, 주님과 분리하여 존재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주님의 말씀을 직접 인용합니다.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8:24)

 

라는 말씀은, 신앙이 단순한 교리 동의가 아니라 ‘주님의 존재와 정체성에 대한 인식’임을 보여 줍니다. 주님이 누구이신지를 모른 채 선과 진리를 말하는 것은, 결국 죄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선언이에요. 요한복음 1장의 인용은 이 인식을 더욱 깊게 확증합니다.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9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1, 3-4, 9)

 

이 말씀은 거듭남의 첫 인식이 왜 전적으로 주님의 역사인지를 보여 줍니다. 빛은 항상 먼저 비치며, 어둠은 그 빛에 의해 비로소 어둠임이 드러납니다.

 

이 글에서 말하는 첫 상태는 그래서 매우 미세하지만 결정적입니다. 사람은 아직 선을 행하지도, 진리를 충분히 이해하지도 못하지만, 최소한 ‘자기 자신이 기준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시작합니다. 선과 진리가 자신 위에 있으며, 그 근원이 주님께 있다는 인식의 싹이 트는 것입니다. 이 작은 전환이 이후 모든 거듭남의 과정을 가능하게 합니다.

 

결국 AC.20은 빛의 첫 인식이 어떻게 시작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것은 인간의 이성적 탐구의 결과가 아니라, 주님이 스스로를 빛으로 계시하시는 사건입니다. 사람은 그 빛 앞에서 자기 선의 한계를 보고, 주님의 선을 향해 눈을 들기 시작합니다. 이때 비로소 거듭남은 방향을 갖게 되며, 어둠 속에서 길을 찾기 시작합니다.  

 

 

심화

 

1.실제 사례들

 

AC.20, But when man is conceived anew, he then begins for the first time to know that his goods are not goods, and also, as he comes more into the light, that the Lord is, and that he is good and truth itself.에 해당하는 구체적 사례를 예를 들어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실제 목회현장에선 이 마저도 정말 쉽지 않은, 정말 보기 힘든 경우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느끼는 어려움은 매우 현실적인 목회 경험에서 나온 것입니다. AC.20의 문장은 읽으면 간단해 보이지만, 실제 인간 삶에서는 거의 드물게 보이는 변화처럼 느껴지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이 상태는 갑자기 성인(聖人)이 되는 어떤 극적인 사건이라기보다, 사람이 조금씩 더 빛 속으로 들어가면서 ‘자기 자신을 다르게 보게 되는 과정’을 가리킵니다. 몇 가지 실제적인 유형을 통해 설명해 보겠습니다.

 

먼저 AC.20의 문장을 다시 보면 두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 선이 선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시작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주님이 선과 진리 자체이심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두 단계는 사실 하나의 경험 안에서 이어집니다. 사람이 자기 선의 한계를 보게 될 때, 비로소 참된 선의 근원을 찾게 되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유형은 목회 현장에서 종종 만나는 ‘열심 있는 신앙인의 깨달음’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 봉사도 열심히 하고, 헌신도 많이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신앙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사람은 자기 마음속을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 봉사를 하면서도 인정받지 못하면 서운해지고,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더 헌신했다고 생각하면 마음속에 우월감이 올라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때 그는 처음으로 ‘내가 하는 선한 일도 사실은 완전히 순수한 것은 아니구나’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것이 바로 AC.20에서 말하는 첫 단계입니다.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기 선의 한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유형은 ‘실패를 통해 오는 깨달음’입니다. 어떤 사람이 평생 도덕적으로 살려고 노력해 왔다고 합시다. 그는 자신이 비교적 선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느 사건에서 예상하지 못한 분노나 이기심이 폭발합니다. 그때 그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깊은 자기 사랑이 안에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경험은 매우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이전에는 자신이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면, 이제는 ‘내 힘만으로는 참된 선을 이루기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험이 조금 더 깊어지면 두 번째 단계가 시작됩니다. 사람이 자기 선의 한계를 깨달으면 자연스럽게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참된 선은 어디에서 오는가?’ 바로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두 번째 깨달음이 나타납니다. 즉 ‘주님이 선과 진리 자체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교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통해 알게 되는 것입니다.

 

목회 현장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예는 ‘용서의 경험’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큰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는 성경 말씀도 알고 있고, 용서해야 한다는 교리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상황에서는 마음이 쉽게 풀리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점점 깨닫습니다. ‘내가 노력해서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 마음을 바꾸어 주셔야 가능한 일이구나.’ 그러면 그 사람은 점점 기도하게 되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전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그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건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신 것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AC.20이 말하는 두 번째 단계입니다.

 

목회 현장에서 느끼시는 것처럼 이런 변화는 실제로 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완벽한 성인(聖人)의 상태가 아니라 ‘빛이 조금 더 들어온 상태’입니다. 사람이 완전히 자신을 부정하는 단계까지 가는 것은 드물지만, 자기 선의 한계를 조금이라도 보는 순간 이미 거듭남의 과정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빛 속으로 더 들어갈수록’ 이런 깨달음이 깊어진다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내가 완벽하지 않다’는 정도로 시작합니다. 그다음에는 ‘내 선에도 자기 사랑이 섞여 있다’는 것을 봅니다. 더 깊어지면 ‘참된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선을 행할 때 자연스럽게 ‘주님에게서 온 것이라는 인식’을 갖게 됩니다.

 

사람이 처음에는 ‘내가 선을 행한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더 자라면 ‘내 선에도 부족함이 있다’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더 깊어지면 ‘참된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은 바로 이런 ‘점진적인 빛의 증가’입니다.

 

그래서 AC.20의 문장은 어떤 이상적인 신앙인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조금씩 더 빛 속으로 들어갈 때 나타나는 ‘아주 현실적인 영적 경험의 방향’을 설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2.스베덴보리의 경험

 

위 심화 1번에 이어지는 질문인데요, 스베덴보리는 이런 걸 어떻게 알았을까요? 본인이 직접 이런 과정을 밟은 건가요?

 

이 질문은 스베덴보리 연구에서 매우 핵심적인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인간 내면의 과정을 어떻게 그렇게 구체적으로 알았는가?’ 하는 문제는 결국 그의 저술이 어떤 경험과 근거에서 나온 것인가 하는 문제와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대체로 세 가지 층위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먼저 가장 단순한 차원은 ‘개인적 영적 경험의 층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저술 여러 곳에서 자신이 단순한 사상가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통해 실제로 거듭남의 과정을 겪었다’고 말합니다. 특히 그의 개인 기록인 ‘Spiritual Diary’와 ‘Adversaria’ 같은 글들을 보면, 그는 자신이 겪는 생각의 변화, 유혹, 내적 싸움, 깨달음 등을 매우 세밀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기록들을 보면, 그가 단순히 교리를 정리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내면에서 일어나는 영적 변화들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는 어떤 생각이 자신에게서 나온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영들의 영향이라는 사실을 깨닫기도 하고, 어떤 선한 감정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점차 알게 되었다고 기록합니다. 이런 기록들을 보면 AC에서 설명하는 많은 심리적 과정들이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그가 실제로 체험하고 관찰한 것들’이라는 점이 드러납니다.

 

두 번째 층위는 ‘영계 경험의 층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1740년대 중반 이후 영계가 열려서 천사들과 영들과 교통하게 되었다고 여러 번 말합니다. 그는 자신이 그들과 수십 년 동안 교통하며, 인간 영혼의 상태, 거듭남의 과정, 선과 진리의 작용 등을 직접 관찰했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영계에서는 사람의 생각과 의도가 거의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에, 어떤 선이 자기 사랑에서 나오는지, 어떤 선이 주님에게서 오는지 매우 분명하게 보인다고 합니다. 이런 관찰을 통해 그는 인간의 선이 어떻게 왜곡되는지, 왜 거듭남이 점진적으로 진행되는지, 왜 리메인스가 보호되어야 하는지 등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우리가 볼 때는 이것이 믿기 어려운 주장처럼 보일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 자신은 그의 신학 대부분이 이런 ‘영적 관찰을 통해 얻은 지식’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세 번째 층위는 ‘말씀의 내적 의미를 통해 얻은 이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성경을 읽을 때 문자적 의미가 아니라 그 안의 영적 의미가 열린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를 읽을 때, 그는 그것을 우주의 물리적 창조가 아니라 ‘인간 거듭남의 과정’으로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이 해석은 단순한 상징적 해석이 아니라, 천사들이 말씀을 이해하는 방식과 동일한 방식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창세기의 ‘여섯 날’을 인간 내면의 여섯 단계로 보고, 각 단계에서 일어나는 영적 상태들을 설명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성경의 여러 구절을 통해 인간 영혼의 구조와 거듭남의 과정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이 세 가지를 서로 분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설명이 ‘개인 경험, 영계 관찰, 그리고 말씀의 내적 의미’가 서로 일치하는 데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 그는 단순히 자기 경험만 말한 것도 아니고, 단순히 성경 해석만 한 것도 아니며, 단순히 영적 체험만 말한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서로 확인되면서 하나의 교리가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 AC.20 같은 설명도 단순히 인간 심리를 추측해서 쓴 것이 아니라, 스베덴보리 자신이 보기에는 ‘자신의 내적 경험과 영적 관찰, 그리고 말씀의 내적 의미가 모두 가리키는 동일한 원리’였습니다. 그는 사람이 처음에는 자기 선을 선으로 생각하다가, 점점 빛 속으로 들어가면서, 그것이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이런 과정은 그가 자신에게서도 보았고, 영계에서도 관찰했으며, 성경의 창조 이야기 속에서도 발견했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단순한 신학자가 아니라 ‘영계를 관찰하는 자연과학자처럼 인간 영혼을 연구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인간 마음을 단순히 도덕적으로 평가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선과 진리가 인간 안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왜 거듭남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지, 왜 자기 선이 먼저 무너져야 하는지를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AC.20 같은 문장은 바로 그런 연구의 한 부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말하면, 스베덴보리가 이런 내용을 알게 된 이유는 한 가지가 아니라 세 가지가 겹쳐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내적 경험, 영계에서의 관찰, 그리고 말씀의 내적 의미에 대한 통찰’이 서로 맞아떨어지면서 이런 설명이 나오게 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21, 창1:4-5,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And God saw the light, that it was good; and God distinguished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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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 창1:2,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9 ‘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이란 주님의 자비를 뜻하며, 이를 가리켜 ‘운행하시니라’(m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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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1:2)

 

AC.19

 

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이란 주님의 자비를 뜻하며, 이를 가리켜 운행하시니라(move), 또는 암탉이 자기 알을 품듯이 품는다(brood)고 합니다. 그것이 운행하는 대상은 주님께서 사람 안에 숨겨 두시고 보존해 두신 것들인데, 말씀 전체에서 이것들을 가리켜 리메인스(remains), 또는 남은 자(remnant)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참된 것과 선한 것에 관한 지식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겉의 일들이 황폐해지기 전까지는 결코 빛이나 낮 가운데 나오지 않습니다. 여기 나오는 수면(the faces of the waters)은 바로 이러한 지식들을 말합니다. By the “spirit of God” is meant the Lord’s mercy, which is said to “move,” or “brood,” as a hen broods over her eggs. The things over which it moves are such as the Lord has hidden and treasured up in man, which in the Word throughout are called remains or a remnant, consisting of the knowledges of the true and of the good, which never come into light or day, until external things are vastated. These knowledges are here called “the faces of the waters.”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 2절의 가장 따뜻하면서도 깊은 표현, 곧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는 말씀의 내적 의미, 즉 속뜻을 밝힙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을 능력이나 심판의 상징으로 보지 않고, 무엇보다 ‘주님의 자비(the Lord’s mercy)로 해석합니다. 이는 거듭남의 시작이 두려움이나 강제에서가 아니라, 보호하고 살리시려는 주님의 사랑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운행하다(move) 또는 ‘품다(brood)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암탉이 알을 품는 모습에 비유하는데요, 알은 아직 생명이 드러나지 않았고, 스스로 움직일 수도 없지만, 그 안에는 이미 생명의 가능성이 들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거듭남 이전의 인간 안에도,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생명이 없는 것처럼 보여도, 주님이 이미 심어 두신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주님의 자비는 그 가능성 위에 머무르시며, 서두르지 않으시고, 억지로 깨뜨리지도 않으시며, 적절한 때까지 조용히 품으십니다.

 

주님의 자비가 운행하는 대상은 ‘수면(the faces of the waters)입니다. 앞선 글들에서 보았듯이, 물은 진리의 지식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물은 아직 빛 가운데 드러난 진리가 아닙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사람 안에 숨겨 두신 참된 것과 선한 것에 관한 지식들, 곧 리메인스입니다. 이 리메인스는 사람이 의식적으로 기억하거나 소유한다고 느끼는 지식이 아니라, 주님이 유아기부터 삶의 여러 순간 속에서 조용히 저장해 두신 내적 보물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리메인스가 외적인 것들, 곧 사람의 겉의 일들이 황폐해지기 전까지는 결코 빛이나 낮 가운데 나오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질서입니다. 사람의 겉 사람이 활발하게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 움직이고 있는 동안에는, 리메인스가 전면에 나설 수 없습니다. 그것이 나오면 즉시 왜곡되거나 오염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먼저 외적인 것들이 약화되고, 침묵하게 되는 시간을 허용하시며, 그 이후에야 리메인스를 실제로 사용하십니다.

 

이 점에서 AC.18의 ‘황폐’와 AC.19의 ‘운행’은 정확히 맞물립니다. 황폐는 비워내는 과정이고, 운행은 보호하고 준비하는 과정입니다. 주님은 한편으로는 옛사람의 욕정과 거짓을 약화시키시고, 다른 한편으로는 리메인스를 잃지 않도록 세심하게 품고 계십니다. 인간의 눈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 시점이야말로 거듭남에서 가장 깊고 중요한 내적 역사가 이루어지는 때입니다.

 

수면’, 곧 ‘물의 얼굴’이라는 표현도 의미심장합니다. 얼굴은 드러난 표면이면서 동시에 방향을 나타냅니다. 즉, 리메인스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미 주님을 향한 방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주님의 자비는 바로 그 방향성 위에서 운행하십니다. 이때 인간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수 있어요. 오히려 더 혼란스럽고 공허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주님은 가장 가까이 계십니다.

 

이 글은 거듭남이 인간의 의식적 결단이나 열심보다 훨씬 이전에, 훨씬 깊은 차원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사람이 주님을 찾기 전에, 주님은 이미 사람을 품고 계십니다. 사람이 진리를 이해하기 전에, 주님은 이미 진리의 씨앗을 보존해 두셨습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인간의 상승이 아니라, 주님의 하강으로 시작됩니다.

 

결국 AC.19는 거듭남의 가장 은밀한 근원을 드러냅니다. 모든 변화의 출발점은 주님의 자비이며, 그 자비는 인간 안에 남겨 두신 리메인스 위에서 조용히, 그러나 결코 멈추지 않고 운행하십니다. 이 인식은 인간을 겸손하게 만들고, 동시에 깊은 위로를 줍니다. 지금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고, 아무 진전도 없어 보일 때조차, 주님의 영은 여전히 수면 위에서 운행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심화

 

1.자비(mercy)

 

AC.19에도 주님의 자비(mercy)라는 표현이 나오네요. 대한민국 기독교인들은 개신교인들을 포함, 보통 자비보다 은혜에 익숙합니다. 심지어 자비하면 불교를 떠올리지요.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거의 대부분 자비를 말하네요.자비은혜’, 둘 사이 무슨 차이가 있어 그런 건가요?

 

실제로 스베덴보리 저작을 읽는 한국 독자들이 가장 자주 느끼는 낯섦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mercy’를 거의 항상 ‘자비’로 말한다는 점입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은혜’라는 표현이 압도적으로 익숙하기 때문에, ‘자비’라는 말을 보면 말씀하신 것처럼 불교적 어감이 먼저 떠오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mercy’를 사용하는 데에는 분명한 신학적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언어적 배경부터 보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 원문은 라틴어인데, 그가 사용하는 단어는 대부분 ‘misericordia’입니다.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 ‘연민’, ‘긍휼’을 뜻합니다. 영어 번역에서는 이것을 거의 항상 ‘mercy’로 옮겼습니다. 성경에서도 같은 단어가 자주 나옵니다. 예를 들어 시편이나 복음서에서 ‘주의 긍휼’, ‘주의 자비’ 같은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가 사용하는 mercy는 사실 전통적인 성경 언어에 매우 가까운 표현입니다.

 

반면, 한국 교회에서 익숙한 ‘은혜’는 영어로 보통 ‘grace’에 해당합니다. 이 단어는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개념인데, 특히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 신학에서 중심 개념이 되었습니다. ‘은혜’는 주로 ‘값없이 주어지는 구원의 선물’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인간이 어떤 공로도 없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과 용서를 가리킬 때 많이 사용됩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표현이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여기서 두 단어의 뉘앙스 차이가 나타납니다. ‘은혜(grace)는 주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선물을 주신다’는 측면을 강조합니다. 반면 ‘자비(mercy)는 ‘하나님이 인간의 비참한 상태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신다’는 측면을 강조합니다. 쉽게 말하면, 은혜는 ‘주시는 사랑’, 자비는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에 가까운 표현입니다. 둘 다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키지만, 강조점이 약간 다릅니다.

 

스베덴보리가 왜 ‘mercy’를 그렇게 자주 사용하는지를 이해하려면, 그의 인간관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그는 인간의 본성을 매우 엄정하게 봅니다. 인간은 스스로 선을 만들어 낼 수 없고, 자신의 힘만으로는 거듭날 수 없으며, 끊임없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기울어지는 존재라고 설명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인간이 구원과 거듭남을 경험하게 되는 것은 결국 ‘주님의 끊임없는 긍휼과 자비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어떤 설명을 할 때마다 ‘주님의 자비로(in the Lord’s Divine mercy)라는 표현을 반복합니다.

 

이 표현에는 중요한 신학적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영적 진리를 이해하는 것조차 자기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어떤 진리를 깨닫고, 어떤 선을 행하고, 거듭남의 길을 걷게 되는 것 자체가 ‘주님의 자비로운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글에서도 ‘주님의 자비로 이것을 설명할 것이다’, ‘주님의 자비로 이것이 더 분명해질 것이다’라는 식으로 표현합니다. 이것은 겸손한 표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의 신학적 확신을 보여 주는 말이기도 합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의 본질을 설명할 때, ‘사랑(love)이라는 말을 가장 중심에 둡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타락한 인간에게 작용할 때 나타나는 모습이 바로 ‘자비(mercy)라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자체는 사랑이지만, 그 사랑이 연약하고 비참한 인간에게 다가올 때 우리는 그것을 ‘자비’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글에서는 사랑과 자비가 거의 함께 등장합니다.

 

한국 교회 현실을 생각하면 문화적 차이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자비’라는 말이 불교적 자비와 연결되어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 성경에서도 ‘긍휼’, ‘자비’, ‘인애’ 같은 표현이 매우 많이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한다’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mercy’는 불교적 의미라기보다 ‘성경의 긍휼 전통에 더 가까운’ 표현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을 주시는 사랑을 강조하는 말이고, ‘자비’는 하나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거듭남을 설명하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오래 참고 인도하시는지를 강조하기 때문에 ‘자비’라는 표현을 특히 자주 사용합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자비’와 ‘은혜’는 서로 경쟁하는 개념이 아니라, 사실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다른 각도에서 설명하는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 가운데서 특히 인간을 향해 내려오는 ‘긍휼의 사랑’을 강조하기 위해 ‘mercy’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2.movebrood가 나란히 나오는 이유

 

AC.19 본문에 By the spirit of God is meant the Lords mercy, which is said to move,” or brood,” as a hen broods over her eggs.가 나오는데, 여기서 movebrood가 나란히 나와요. 이게 좀 어색한데요, 이 둘이 어째서 나란히 나오는 건가요?

 

영어 문장만 보면 ‘move’와 ‘brood’가 서로 다른 뜻을 가진 단어인데, 나란히 붙어 있으니 왜 이렇게 설명하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단순한 영어 문장 문제가 아니라 ‘히브리어 원문, 성경 번역 전통,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이 함께 얽혀 있는 부분입니다. 이 점을 이해하면 왜 두 단어가 함께 나오는지 자연스럽게 풀립니다.

 

먼저 성경 원문을 보면 창1:2의 히브리어 표현은 ‘merachefet(מְרַחֶפֶת)입니다. 이 동사는 기본적으로 ‘떠 있다’, ‘흔들리다’, ‘진동하다’, ‘맴돌다’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영어 번역에서는 ‘the Spirit of God was moving over the waters’라고 번역합니다. 여기서의 move는 단순한 이동이라기보다 ‘부드럽게 움직이며 감싸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물 위를 스치듯이 감싸며 움직이는 이미지입니다.

 

그런데 성경 전체를 보면 이 동사가 한 번 더 등장하는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바로 신32:11,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입니다. 이 구절에서는 독수리가 자기 새끼 위에서 ‘날개를 퍼덕이며 보호하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히브리어 표현은 바로 같은 동사입니다. 그 장면은 단순히 ‘움직인다’는 뜻이라기보다 ‘새가 알이나 새끼 위를 덮어 보호하며 따뜻하게 품는 모습’입니다.

 

바로 여기서 ‘brood’라는 번역이 나옵니다. 영어 ‘brood’는 ‘암탉이 알 위에 앉아 품어 생명이 자라도록 하는 행위’를 뜻합니다. 그래서 일부 성경 해석 전통에서는 창1:2의 장면을 단순한 움직임이 아니라 ‘생명을 준비시키는 보호와 따뜻한 덮음’으로 이해했습니다. 마치 암탉이 알을 품듯이 하나님의 영이 물 위에 임해 생명의 탄생을 준비한다는 이미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두 가지 뉘앙스를 ‘함께 살리기 위해 movebrood를 나란히 사용한 것’입니다. 즉, 히브리어 단어 하나 안에 두 가지 이미지가 동시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움직이며 감싸는 이미지(move)이고, 다른 하나는 ‘생명을 품어 키우는 이미지(brood)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두 의미를 모두 의식하고 설명한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신학과도 잘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the spirit of God을 주님의 자비’라고 해석합니다. 그리고 그 자비가 인간에게 작용하는 방식이 바로 이런 모습이라고 봅니다. 주님의 자비는 단순히 멀리서 움직이는 힘이 아니라 ‘생명이 태어나도록 보호하고 품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는 ‘move’라는 말만 쓰지 않고, ‘brood, as a hen broods over her eggs’라는 설명을 덧붙입니다.

 

이 이미지는 창세기 전체의 영적 의미와도 연결됩니다. 창세기 1장은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우주의 창조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거듭남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셨다’는 장면은 단순한 자연 묘사가 아니라 ‘아직 혼돈 상태에 있는 인간의 마음 위에 주님의 자비가 임하는 장면’입니다. 이때 주님의 자비는 단순히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새 생명이 태어나도록 보호하고 준비하는 사랑’으로 작용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brood’라는 이미지가 매우 적절해집니다.

 

그래서 이 문장을 번역할 때 한국어로는 보통 이렇게 풀어 설명하면 자연스럽습니다. ‘운행하다’는 단순히 움직인다는 뜻이 아니라, ‘알을 품는 새처럼 생명이 태어나도록 따뜻하게 감싸며 움직이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주님의 자비가 인간의 혼돈 상태 위에서 ‘생명이 태어나도록 보호하고 준비하는 사랑으로 작용한다’는 뜻입니다.

 

정리하면, movebrood가 함께 나오는 이유는 영어 표현의 중복 때문이 아니라 ‘히브리어 원문의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는 ‘움직이며 감싸는 작용’, 다른 하나는 ‘생명을 품어 자라게 하는 보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두 이미지를 함께 사용하여 ‘주님의 자비가 인간의 거듭남을 준비하는 방식’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3. 리메인스 설명 중 왜곡되거나 오염된다 부분

 

AC.19 해설에 사람의 겉 사람이 활발하게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 움직이고 있는 동안에는, 리메인스가 전면에 나설 수 없습니다. 그것이 나오면 즉시 왜곡되거나 오염되기 때문입니다.’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제 경우를 보더라도 과연 그런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오랜 세월, 교만, 곧 자기 사랑에 사로잡혀 먼 길을 돌아와야 했거든요... 저 표현 중 특히 왜곡되거나 오염된다는 부분을 좀 더 자세히 이해하고 싶습니다.

 

윗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리메인스(remains) 교리에서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리메인스가 전면에 나서면 왜곡되거나 오염된다’는 말은 단순한 도덕적 경고가 아니라, 인간 마음의 구조와 영적 작용 방식에 관한 설명입니다. 이 점을 몇 단락으로 나누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먼저 ‘리메인스’가 무엇인지 다시 짚는 것이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리메인스는 사람이 살아오는 동안, 주님이 그의 속 사람 안에 저장해 두시는 ‘선과 진리의 씨앗들’, 다시 말해 어린 시절의 순진함, 선한 감정, 진리를 향한 기쁨,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 같은 것들입니다. 이것들은 인간이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라 주님이 보존해 두신 것이며, 사람이 거듭나는 과정에서 주님이 필요할 때 꺼내 사용하시는 영적 자산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리메인스를 인간 안에 있는 ‘천국의 씨앗’ 같은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사람의 ‘겉 사람’, 곧 외적 마음입니다. 사람이 아직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서는 외적 마음이 거의 전적으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의해 움직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사람의 생각과 판단 기준이 대부분 ‘나에게 유익한가’, ‘내 체면과 이익에 도움이 되는가’라는 방향으로 흐르게 됩니다. 이런 상태에서 속 사람 안에 있는 순수한 선과 진리가 밖으로 드러나게 되면, 그것들이 있는 그대로 유지되기 어렵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왜곡’이라는 표현이 이해됩니다. 순수한 진리가 자기 사랑 속으로 들어오면, 사람은 그 진리를 ‘자기 목적을 위해 해석하고 이용하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겸손’이라는 진리를 알게 되었는데, 그 진리를 진심으로 살기 위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겸손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는 마음으로 사용한다면, 그 진리는 이미 본래의 의미가 변형된 것입니다. 진리가 여전히 존재하기는 하지만, 중심이 주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되기 때문에 진리가 ‘자기 확증의 도구’로 바뀌어 버립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왜곡’에 가까운 모습입니다.

 

오염’이라는 표현은 또 다른 차원을 설명합니다. 어떤 선한 감정이나 진리가 자기 사랑과 결합되면, 그 안에 ‘이기적 동기’가 섞이게 됩니다. 겉으로는 선한 행동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에서는 인정받고 싶은 마음, 우월해지고 싶은 마음, 남보다 의롭다고 느끼고 싶은 마음이 함께 작동합니다. 그러면 그 선 자체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순수한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혼합된 상태가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오염’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리메인스를 매우 조심스럽게 보호하신다고 설명합니다. 사람이 아직 자기 사랑 속에 깊이 있을 때는, 그 리메인스가 전면에 드러나지 않도록 ‘속 사람 깊은 곳에 보존해 두신다’는 것입니다. 마치 씨앗이 아직 준비되지 않은 토양에 드러나면 밟히거나 썩어 버리기 쉬운 것처럼, 사람의 외적 삶이 어느 정도 정리되기 전에는 그 씨앗이 보호되는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황폐(vastation)라는 과정을 자주 말합니다. 앞서 다룬 바로 그 개념인데, 이것은 사람의 자기 확신과 거짓된 확신이 약화되는 과정입니다. 사람이 삶 속에서 여러 경험과 시련을 겪으면서 자기중심적 확신이 조금씩 무너질 때, 비로소 속에 있던 리메인스가 안전하게 작용할 수 있는 공간이 생깁니다. 그러면 주님이 그 리메인스를 사용하여 사람의 생각과 사랑을 새롭게 정리하십니다.

 

말씀하신 개인 경험도 사실 많은 사람들이 비슷하게 겪는 과정입니다. 오랜 시간 자기 확신 속에서 신앙을 이해하다가 어느 순간 그것이 무너지고, 더 깊은 진리를 받아들이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으로 보면, 그때 속 사람 안에 오래 보존되어 있던 리메인스가 비로소 ‘겉 사람의 삶 속으로 작용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왜곡되거나 오염된다’는 말은 단순히 인간이 나쁘기 때문이라는 뜻이 아니라, 아직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순수한 영적인 것들이 드러나면 그것들이 ‘자기 사랑의 틀 속에서 해석되고 사용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라는 의미입니다. 주님은 그 위험을 아시기 때문에 리메인스를 깊이 보호하시고, 사람이 조금씩 준비될 때마다 그것을 꺼내어 거듭남의 과정에 사용하신다고 스베덴보리는 설명합니다.

 

 

 

AC.20, 창1:3,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창1:3) AC.20 첫 번째 상태는 사람이 선과 진리가 더 높은 어떤 것임을 알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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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 창1:2, '깊음'(faces of the deep), '황폐'(vastation)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8 ‘깊음’(faces of the deep)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욕정(cupidities)과, 그로 말미암는 거짓(fals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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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1:2)

 

AC.18

 

깊음(faces of the deep)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욕정(cupidities), 그로 말미암는 거짓(falsities)을 뜻하며, 사람은 전적으로 이것들로 이루어져 있고, 또한 그것들 속에 완전히 잠겨 있습니다. 이 상태에서 그는 빛이 없으므로, 깊음(deep), 곧 어둡고 혼란한 어떤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말씀 여러 곳에서 깊음(deeps), 바다 깊은 곳(depths of the sea)이라 하는데, 사람의 거듭남 이전에 그것들은 마르거나(dried up) 황폐해집니다(wasted). 다음 이사야 말씀처럼 말입니다. The “faces of the deep” are the cupidities of the unregenerate man, and the falsities thence originating, of which he wholly consists, and in which he is totally immersed. In this state, having no light, he is like a “deep,” or something obscure and confused. Such persons are also called “deeps,” and “depths of the sea,” in many parts of the Word, which are “dried up,” or “wasted,” before man is regenerated. As in Isaiah:

 

9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 옛날 옛 시대에 깨신 것 같이 하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 10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받은 자들을 건너게 하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니이까 11여호와께 구속받은 자들이 돌아와 노래하며 시온으로 돌아오니 영원한 기쁨이 그들의 머리 위에 있고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이다 (51:9-11) Awake as in the ancient days, in the generations of old. Art not thou it that drieth up the sea, the waters of the great deep, that maketh the depths of the sea a way for the ransomed to pass over? Therefore the redeemed of Jehovah shall return (Isa. 51:9–11).

 

이러한 사람은 또한 천국에서 볼 때, 생명 없는 검은 덩어리처럼 보입니다. 이와 같은 표현들은 일반적으로 선지자들에 의해 자주 언급되는 인간의 황폐(the vastation of man)를 포함하는데, 이는 거듭남에 앞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참된 것을 알 수 있고, 선한 것에 의해 감동될 수 있기 전에, 그것들의 유입을 방해하고 거스르는 것들이 제거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옛 사람은 새 사람이 잉태되기 전에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Such a man also, when seen from heaven, appears like a black mass, destitute of vitality. The same expressions likewise in general involve the vastation of man, frequently spoken of by the prophets, which precedes regeneration; for before man can know what is true, and be affected with what is good, there must be a removal of such things as hinder and resist their admission; thus the old man must needs die, before the new man can be conceived.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2절에 나오는 ‘깊음(deep)을 인간 내면의 가장 어두운 상태로 해석합니다. ‘깊음’은 단순히 깊은 바다나 혼돈의 어떤 상태를 뜻하는 대신, 거듭나지 않은 인간이 전적으로 잠겨 있는 욕정과 거짓의 총체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욕정(cupidities)은 단순한 감정이나 충동이 아니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비롯된 삶의 근원적 지향을 뜻합니다. 이 욕정에서 자연스럽게 거짓(falsities)이 발생하며, 사람은 그것들로 구성된 존재가 됩니다.

 

이 상태의 핵심 특징은 ‘빛이 없음’입니다. 빛이 없다는 것은 진리가 없다는 뜻이고, 진리가 없다는 것은 방향과 분별이 없다는 뜻이며, 그래서 이 상태는 ‘어둡고 혼란스러운 것’으로 묘사됩니다. 사람은 생각하고 판단하며 선택하지만, 그 모든 것은 어둠 속에서 이루어지므로 참된 질서를 가질 수 없습니다. 이 점에서 ‘깊음’이라는 표현은 매우 적절합니다. 깊은 바닷속에서는 위와 아래, 앞과 뒤의 감각이 사라지듯, 이 상태의 인간은 영적 방향감각을 상실한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사람들을 말씀에서 ‘깊음’이나 ‘바다의 깊은 곳’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 깊음이 거듭남 이전에 ‘마르거나’, ‘황폐해진다’는 점입니다. 이는 거듭남의 과정이 단순히 새로운 것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제거하고 비우는 과정을 반드시 포함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깊은 물이 그대로 있는 한, 그 위에 새로운 질서는 세워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의 인용은 이 점을 강력한 이미지로 드러냅니다. 주님은 큰 깊음의 물들을 마르게 하시고, 바다의 깊은 곳들을 속량 받은 자들이 건너갈 길로 만드십니다. 이는 욕정과 거짓으로 가득 찬 상태 자체를 제거하시고, 그 자리를 구원의 통로로 바꾸시는 주님의 역사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주님은 깊음을 단순히 덮어만 두지 않으시고, 그것을 통과 가능한 길로 변화시키십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남의 본질적인 전환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또한 이 상태의 인간은 천국에서 볼 때, ‘생명 없는 검은 덩어리’처럼 보인다고 말합니다. 이는 매우 강한 표현이지만, 인간의 외적 활동성, 즉 겉모습, 겉보기와는 전혀 다른 영적 실재를 보여 줍니다. 세상에서는 매우 활발하고 지적이며, 도덕적으로 보일 수 있는 사람도, 영적 생명이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천국의 빛 아래에서 아무런 생명도 없는 덩어리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을 낮추기 위한 표현이 아니라,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분명히 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스베덴보리는 ‘황폐(vastation)라는 중요한 개념을 제시합니다. 황폐는 파괴가 아니라 준비입니다. 선지자들이 자주 말하는 황폐는, 새로운 생명이 들어오기 위해 기존의 방해 요소들이 제거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사람이 참된 것을 알기 전에, 또 선한 것에 의해 실제로 감동되기 전에, 그 유입을 가로막는 욕정과 거짓들이 먼저 약화되고, 제거되어야 합니다. 이 과정 없이는 어떤 진리도 깊이 들어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분명한 결론을 내립니다. 옛사람은 새 사람이 잉태되기 전에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문자적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적 삶의 근원이 더 이상 주도권을 쥐지 못하게 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 죽음이 있어야만, 새 생명이 잉태될 공간이 생깁니다. AC.18은 이처럼 거듭남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어두운 관문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그 과정 전체가 주님의 구원 사역 안에 있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심화

 

1.인간의 황폐(the vastation of man)

 

AC.18해설 중 황폐를 설명하는 데를 보면, 욕정과 거짓들이 먼저 약화되고,제거되어야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우선 이 약화된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고, 그래서 더욱 제거된다는 게 가능할까 싶습니다. 15돌아온 탕자가 스스로 돌이키는장면이 이런 건가요? 구체적으로 좀 알고 싶습니다.

 

목사님께서 느끼신 그 의문은 매우 현실적인 질문입니다. ‘욕정과 거짓이 약화되고 제거된다’는 말은 글로 읽으면 그럴듯하지만, 실제 인간 경험을 생각해 보면, ‘정말 그런 일이 가능한가?’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도 바로 이 지점 때문에 AC에서 ‘황폐(vastation, desolation)라는 상태를 설명합니다. 이 부분을 이해하려면 먼저 ‘약화’와 ‘제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제거’는 ‘완전히 없어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인간의 악한 성향이나 욕정이 완전히 사라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여러 곳에서 인간의 본성에는 여전히 그런 것들이 남아 있다고 말합니다. 다만 차이가 있습니다. 거듭남 이전에는 그것들이 ‘사람을 지배’하지만, 거듭남 이후에는 그것들이 ‘더 이상 중심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제거된다’는 표현을 사용할 때 사실상 ‘지배력을 잃는다’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여기서 ‘약화된다’는 표현이 먼저 나오는 이유도 바로 이것입니다. 욕정이나 거짓이 한 번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점차 힘을 잃어 가는 과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명예욕이 강했다고 합시다. 이전에는 인정받지 못하면 크게 분노하고, 사람을 경쟁자로만 보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람은 점점 그런 반응을 덜 하게 됩니다. 여전히 마음속에는 그런 감정이 올라올 수 있지만, 이전처럼 바로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약화’입니다. 욕정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삶을 지배하는 힘이 줄어든 상태입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AC에서 말하는 ‘황폐’입니다. 황폐는 단순한 고통이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환상이 무너지는 경험’을 말합니다. 사람이 스스로 선하고 의로운 존재라고 생각하다가, 어떤 사건을 통해 자기 안에 있는 욕정과 이기심을 분명히 보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때 사람은 자신을 의지하기보다 주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이런 경험이 반복되면서 욕정의 힘이 점점 약해집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눅15의 탕자 이야기는 바로 이런 과정을 아주 잘 보여 주는 예입니다. 탕자는 처음에는 자유와 즐거움을 찾아 집을 떠납니다. 그때 그는 자기 선택이 옳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결국 모든 것이 무너지고, 돼지를 치는 자리까지 내려갑니다. 여기서 중요한 구절이 ‘이에 스스로 돌이켜’라는 부분입니다. 이 장면은 단순히 마음이 갑자기 착해진 순간이 아니라, ‘자기 삶의 허망함을 뼈저리게 깨닫는 순간’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의미에서 ‘황폐’에 가까운 상태입니다.

 

탕자의 마음을 조금 더 자세히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그는 갑자기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된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배고프고, 여전히 살 길을 찾고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가 바뀌었습니다. 더 이상 자기 방식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욕정의 지배력이 약해집니다. 이전에는 자기 욕망이 삶의 중심이었지만, 이제는 그것이 더 이상 신뢰할 만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거듭날 때, 욕정이 단번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욕정이 중심 자리에서 밀려나는 과정’이 일어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이 ‘약화’입니다. 그리고 그 상태가 지속되면 결국 욕정은 더 이상 삶을 결정하는 힘을 갖지 못합니다. 이때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제거된다’고 표현합니다. 다시 말해, 욕정이 존재 자체를 잃는 것이 아니라 ‘지배력을 잃고 주변으로 밀려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한 가지 비유를 들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나쁜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시다. 그 습관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점점 그 습관을 따르지 않게 됩니다. 처음에는 힘들지만, 점점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익숙해집니다. 그러면 그 습관은 여전히 기억 속에 남아 있지만, 더 이상 그 사람의 삶을 지배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약화되고 제거되는’ 모습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AC에서 말하는 황폐와 욕정의 약화는 단순히 도덕적으로 착해지는 과정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중심에서 주님 중심으로 이동하는 과정’입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무력함을 보게 되고, 그때 비로소 주님의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작용하기 시작합니다.

 

목사님께서 느끼신 의문, 즉 ‘정말 욕정이 약해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인간 혼자서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자신의 상태를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을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 욕정의 힘은 조금씩 약해집니다. 그리고 결국 그것은 삶의 중심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바로 그 과정을 성경은 여러 이야기로 보여 주는데, 탕자의 귀향 이야기도 그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2. 라틴어 vastatio의 영역 vastationdesolation’(혹은 devastation’)의 비교

 

AC 포츠역 영어 vastation은 현대 사전엔 잘 안 나오고, 대신 desolation이 나오네요. vastation은 왜 사라졌을까요?

 

목사님께서 보신 현상이 정확합니다. 스베덴보리 영어 번역에서 자주 보이는 ‘vastation’이라는 단어는 오늘날 일반 영어 사전에서는 거의 사라졌고, 대신 ‘desolation’이 더 널리 사용됩니다. 이것은 의미가 사라졌다기보다 ‘단어의 사용 역사와 번역 전통 때문에 생긴 현상’입니다. 이 배경을 이해하면 AC를 읽을 때도 훨씬 도움이 됩니다.

 

먼저 가장 중요한 사실부터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 자신은 영어로 글을 쓴 것이 아니라 ‘라틴어로 저술했습니다. ‘Arcana Coelestia’의 원문 단어는 영어 ‘vastation’이 아니라 라틴어 ‘vastatio’입니다. 이 라틴어는 신학 전통에서 오랫동안 사용된 용어로, 성경의 예언서에 나오는 ‘황폐’, ‘폐허’, ‘비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특히 교부 시대와 중세 신학에서는 이 단어가 ‘영적 의미의 황폐 상태’를 설명하는 데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19세기 초에 스베덴보리 저작을 영어로 번역할 때, 번역자들은 라틴어 ‘vastatio’를 그대로 옮기기 위해 ‘vastation’이라는 영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당시 영어에는 이 단어가 실제로 존재했고, ‘황폐하게 함’ 또는 ‘파괴’라는 의미로 쓰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영어 사용이 변했고, 일상 언어에서는 ‘desolation’이나 ‘devastation’ 같은 단어가 더 널리 쓰이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vastation’은 점점 쓰이지 않게 되었고, 현대 영어에서는 거의 사라진 단어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이 하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번역자들이 굳이 ‘desolation’ 대신 ‘vastation’을 사용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두 단어는 비슷하지만, 뉘앙스가 조금 다릅니다. ‘desolation’은 결과 상태, 즉 이미 황폐해진 상태를 강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 ‘vastation’은 ‘황폐하게 되는 과정’이나 ‘황폐하게 만드는 작용’을 더 강하게 느끼게 하는 단어였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적 황폐는 단순히 폐허 상태가 아니라 ‘욕정과 거짓이 약화되고 정리되는 과정’이기 때문에, 번역자들이 ‘vastation’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래서 AC에서 ‘vastation’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파괴나 폐허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에게서 그것은 ‘영적 정화 과정’에 가까운 개념입니다. 사람이 자기 확신과 거짓 신념을 내려놓게 되고, 이전에 의지하던 것들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면서 새로운 진리와 선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는 상태입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 저작에서는 ‘vastation’을 단순히 ‘황폐’라고 번역하면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파괴가 아니라 준비 과정’입니다.

 

오늘날 학술 번역에서는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전통 번역을 그대로 유지해서 ‘vastation’을 계속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다른 하나는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desolation’이나 ‘spiritual desolation’으로 바꾸어 번역하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스베덴보리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vastation’이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스베덴보리 신학에서 ‘특정한 기술적 의미’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AC를 읽을 때는 이렇게 이해하면 가장 정확합니다. ‘vastation’은 단순한 파괴나 절망 상태가 아니라, ‘거짓과 욕정이 약화되면서 새로운 영적 질서를 준비하는 상태’입니다. 성경 이야기로 보면, 광야의 시간이나 탕자의 궁핍 같은 순간이 여기에 가까운 예가 됩니다. 겉으로 보면 황폐하지만, 사실은 새로운 삶을 준비하는 과정입니다.

 

정리하면 ‘vastation’이 현대 영어에서 사라진 것은 의미가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언어 사용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 저작에서는 이 단어가 라틴어 ‘vastatio’의 번역으로서 특별한 신학적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전통적인 표현이 유지되고 있습니다.

 

 

 

AC.19, 창1:2,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9 ‘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이란 주님의 자비를 뜻하며, 이를 가리켜 ‘운행하시니라’(m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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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7, 창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AC.17-19)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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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e waters. (1:2)

 

AC.17

 

거듭남이 시작되기 전 상태에 있는 사람을 가리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the earth void and empty)라 하며, 또 선과 진리가 아무것도 뿌려지지 않은 (the ground)이라고 합니다. 혼돈(void)은 선이 전혀 없는 곳을, 공허(empty)는 진리가 전혀 없는 곳을 뜻합니다. 이로부터 흑암(thick darkness)이 나오는데, 이것은 어리석음을, 그리고 주님 신앙(the faith in the Lord)에 속한 모든 것에 대한 무지를, 그리고 그 결과 영적, 천적 삶(spiritual and heavenly life)에 속한 모든 것에 대한 무지를 뜻합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주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십니다. Before his regeneration, man is called the “earth void and empty,” and also the “ground” wherein nothing of good and truth has been sown; “void” denotes where there is nothing of good, and “empty” where there is nothing of truth. Hence comes “thick darkness,” that is, stupidity, and an ignorance of all things belonging to faith in the Lord, and consequently of all things belonging to spiritual and heavenly life. Such a man is thus described by the Lord through Jeremiah:

 

22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23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4:22, 23) My people is stupid, they have not known me; they are foolish sons, and are not intelligent; they are wise to do evil, but to do good they have no knowledge. I beheld the earth, and lo a void and emptiness, and the heavens, and they had no light  (Jer. 4:22–23).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 과정 시작 전 인간의 상태를 매우 강한 언어로 묘사합니다. 그는 이 상태의 사람을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the earth void and empty)라 하며, 그 안에는 선과 진리가 아무것도 뿌려지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인간의 겉 사람을 가리키는 상응적 표현입니다. 즉, 거듭남 과정 시작 전의 겉 사람은 외형적으로는 활동적이고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영적으로는 아직 아무것도 경작되지 않은 상태라는 것이지요.

 

혼돈(void)과 ‘공허(empty)의 구분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혼돈’은 선의 부재(不在)를, ‘공허’는 진리의 부재를 뜻한다고 분명히 설명합니다. 이는 인간이 도덕적으로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그 행동의 근원에 참된 선과 진리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은 이 상태에서도 많은 일을 하고, 판단하며, 선택하지만, 그 모든 것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라는 자연적 근원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외적으로는 선처럼 보일 수 있어도, 영적으로는 선이 아니며, 외적으로는 진리처럼 보일 수 있어도 실제로는 진리가 아닙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 ‘흑암(thick darkness)입니다. 이 어둠은 단순한 정보 부족이나 교육의 결핍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어리석음(stupidity)과 ‘무지(ignorance)라고 부르는데, 특히 주님 신앙(the faith in the Lord)에 속한 것들에 대한 무지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이 어둠은 영적 무감각의 상태이며, 영적, 천적 삶이 무엇인지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사람은 이 상태에서 세상일에는 매우 영리할 수 있지만, 영적인 일에는 전혀 눈이 열려 있지 않습니다.

 

예레미야의 인용은 이 상태를 매우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라는 말씀은,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왜곡될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는 단순히 도덕적 비난이 아니라, 방향의 문제입니다. 지혜와 지식이 자기중심과 세상 중심을 향해 있을 때, 그것은 영적 선을 향해 사용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지혜는 결국 어둠의 일부가 됩니다.

 

이어지는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라는 표현은 매우 결정적입니다. 앞서 AC.16에서 예고된 것처럼, ‘하늘’은 속 사람을 가리킵니다. 거듭남 이전의 인간에게도 속 사람은 존재하지만, 그 안에 빛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속 사람은 잠재적으로는 있으나, 아직 주님의 빛으로 열리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영적 가능성을 지닌 존재임을 전제하면서도, 그 가능성이 실제로 작동하지 않는 상태를 묘사합니다.

 

이 글은 거듭남의 필요성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인간은 단지 조금 더 나아지거나, 조금 더 선해지기만 하면 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혼돈과 공허의 땅에는 새로운 씨가 뿌려져야 하고, 흑암 속에는 빛이 비쳐야 합니다. 이것은 인간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오직 주님의 역사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의 빛의 창조가 그토록 중요한 출발점이 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이 묘사가 특정 집단이나 시대만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남 이전의 모든 인간, 즉 아직 거듭나지 않은 모든 사람이 이 상태에 있다고 말합니다. 종교적 배경이나 도덕적 성취와 무관하게, 주님의 생명이 실제로 유입되기 전의 인간은 영적으로는 공허하고 비어 있습니다. 이 인식은 인간의 교만을 꺾는 동시에, 주님의 자비를 향한 문을 엽니다.

 

결국 AC.17은 인간을 절망 속에 몰아넣기 위한 설명이 아니라, 정확한 진단입니다. 병이 무엇인지 알아야 치유가 시작되듯, 인간이 자신의 상태가 공허하고 어둡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비로소 빛을 갈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다음 글에서 설명될 주님의 자비로운 역사가 다시 등장하게 됩니다.  

 

 

심화

 

1.속 사람 안을 비출 빛을 좀 앞당겨 켤 수는 없을까?’

 

AC.17혼돈공허’, 그리고 흑암이 나오는데요, 제 경우를 보더라도 저는 심지어 모태신앙임에도 불구, 어린, 그리고 청소년 시절, 속 사람에 대해 전혀 몰랐고, 주님의 선과 진리에 대해서는 비교적 최근, 그러니까 나이 57세 되기까지 그것이 주님의 신성이라는 걸 들어 본 적도 없어요. 평생 교회를 떠나본 적 없이 십자가 복음, 대속, 구원 등 이런 것만 알았지요. 거듭남역시 예수님 영접 기도와 몇몇 성경 구절 굳게 믿으면, 그러니까 그 교리를 굳게 붙들며 살면 거듭나는 건 줄 알았습니다. 오히려 전도 많이 하면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큰 줄 알았고요. 저 같은 사람도 이런데 교회 밖에서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얼마나 더 요원, 오랜 시간이 걸릴까요? 외인이든 지인 및 혈연, 핏줄이든 말이지요... 저는 정원 목사의 책을 통해, 그리고 수도원을 통해 결국 스베덴보리를 만나게 되었지만, 안 그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속 사람 안을 비출 빛을 좀 앞당겨 켤 수는 없을까요?

 

목사님께서 느끼신 마음은 아주 자연스럽고 또 깊은 목회적 고민입니다. AC.17에서 말하는 ‘혼돈’, ‘공허’, ‘흑암’을 자기 삶과 교회 현실에 대입해 보시면, ‘그렇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언제 빛을 보게 되는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 질문은 사실 스베덴보리 자신도 여러 곳에서 다루는 주제입니다. 여러 단락으로 차분히 풀어 보겠습니다.

 

먼저 AC.17에서 말하는 ‘혼돈’과 ‘공허’, ‘흑암’이 무엇인지부터 다시 짚어 보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히 죄악 상태라고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진리의 질서가 아직 세워지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즉 사람의 삶에는 많은 생각과 감정이 있지만, 무엇이 참되고 무엇이 선한지에 대한 영적 질서가 아직 분명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혼돈’이라고 부릅니다. 또한 ‘공허’는 진리가 아직 자리 잡지 못한 상태, ‘흑암’은 그 결과, 어리석음과 무지, 곧 주님 신앙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 그리고 그로 인한 영적, 천적 삶에 대한 걸 하나도 모르는 상태를 말합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개인 경험은 사실 매우 전형적인 예입니다. 교회에 오래 다녔지만, 속 사람이나 거듭남의 구조에 대해서는 거의 들어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개인의 잘못이라기보다 ‘교회의 가르침이 주로 외적 신앙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교회의 ‘마지막 시대’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즉 신앙의 핵심이 사랑과 거듭남의 삶에서 점점 멀어지고, 대신 교리나 외적 신앙 고백이 중심이 되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매우 중요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영적 상태를 판단할 때, ‘그 사람이 어떤 교리를 알고 있었는가’보다 ‘어떤 삶을 살았는가’를 더 중요하게 봅니다. 이것은 목사님께서 이미 언급하신 ‘천국과 지옥319번 글에서도 분명히 나옵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양심적으로 선하게 살았다면, 그는 이미 주님의 인도 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비록 ‘속 사람’이나 ‘거듭남’이라는 말을 몰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아주 중요한 원리를 말합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 안에 리메인스(remains), 즉 선과 진리의 씨앗을 남겨 두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어린 시절에 경험한 선한 감정, 진실한 순간, 양심의 울림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의 의식에서는 거의 잊힐 수 있지만, 주님은 그것들을 속 사람 안에 보존하십니다. 그리고 적절한 때에 그것을 사용하여 사람을 깨우십니다. 목사님께서 스베덴보리를 만나게 된 과정도 사실 이런 섭리 속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점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한 가지를 매우 분명히 말합니다. 인간이 ‘빛을 인위적으로 켜 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빛은 언제나 주님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아무 역할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에게 억지로 빛을 주는 것이 아니라, ‘빛이 들어올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아직 깊은 영적 진리를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에게 갑자기 깊은 신학을 설명하면 오히려 거부감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진실하게 살도록 격려하고, 선을 행하도록 돕고,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삶 속에서 주님이 때를 따라 빛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과정을 ‘주님의 섭리(providence)’라고 설명합니다. 섭리는 매우 부드럽고 점진적으로 역사합니다. 사람의 자유를 해치지 않으면서 조금씩 인도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젊은 나이에 빛을 만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인생 후반에 깨닫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세상을 떠난 뒤 영계에서 더 분명한 빛을 만나기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영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더 명확히 배우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느끼시는 안타까움, 즉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무 늦게 빛을 보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은 이해할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대해 비교적 낙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원하시며’, 각 사람의 삶과 자유를 존중하면서 가장 적절한 길로 인도하신다고.

 

이런 관점에서 보면, 목사님께서 지금 하고 계신 AC 리딩 설교 자체가 이미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에게는 그 말씀이 바로 ‘‘빛이 있으라는 순간’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빛이 언제 켜질지는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 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당장 빛을 줄 수는 없지만, 주님은 각 사람의 속 사람 안에 이미 씨앗을 심어 두셨습니다. 그리고 그 씨앗은 때가 되면 반드시 빛을 향해 자라납니다. 우리의 역할은 그 씨앗을 억지로 자라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씨앗이 자랄 수 있는 선한 토양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목사님께서 나이 57세 때 스베덴보리를 만나셨다고 말씀하셨지만, 스베덴보리 자신도 영적 계시를 받은 나이가 57세였습니다. 이 사실은 우연이라기보다, 어떤 의미에서는 매우 상징적인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주님은 각 사람의 삶의 시간표 속에서 빛을 준비하신다는 점을 보여 주는 사례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AC.18, 창1:2, '깊음'(faces of the deep), '황폐'(vastation)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8 ‘깊음’(faces of the deep)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욕정(cupidities)과, 그로 말미암는 거짓(fals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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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창1:1) AC.16 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time)를 ‘태초’(太初, the beginning)라고도 합니다. 선지자들에 의해 선지서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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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1:1)

 

AC.16

 

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time) 태초(太初, the beginning)라고도 합니다. 선지자들에 의해 선지서 여러 곳에서 이것은 옛날(the days of old, [antiquitatis])이라 하기도 하고, 또한 영원(the days of eternity)이라 하기도 합니다.  태초는 또한 사람이 거듭남의 과정을 시작하는 첫 시기를 포함하는데, 이때 그는 새로 태어나 생명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 자체를 사람의 새 창조(a new creation)라고도 합니다. 선지서 거의 모든 부분에서 창조하다(to create), 짓다(to form), 만들다(to make)라는 표현들은 거듭남을 의미하지만,그 의미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사야를 보면, The most ancient time is called “the beginning.” By the prophets it is in various places called the “days of old” [antiquitatis] and also the “days of eternity.” The “beginning” also involves the first period when man is being regenerated, for he is then born anew, and receives life. Regeneration itself is therefore called a “new creation” of man. The expressions to “create,” to “form,” to “make,” in almost all parts of the prophetic writings signify to regenerate, yet with a difference in the signification. As in Isaiah:

 

내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43:7) Everyone that is called by my name, I have created him for my glory, I have formed him, yea, I have made him (Isa. 43:7).

 

그러므로 주님은 구속자(the redeemer), 태 속에 만드신 이(the former from the womb), 만드신 이(the maker)  창조자(the creator)라 일컬음을 받으시는데, 역시 이사야를 보면, And therefore the Lord is called the “redeemer,” the “former from the womb,” the “maker,” and also the “creator”; as in the same prophet: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 (43:15) I am Jehovah your holy one, the creator of Israel, your king (Isa. 43:15).

 

시편에서는 In David:

 

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 (102:18) The people that is created shall praise Jah (Ps. 102:18).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104:30) Thou sendest forth thy spirit, they are created, and thou renewest the faces of the ground (Ps. 104:30).

 

(, heaven)은 거듭나기 전 속 사람(the internal man), (, earth) 겉 사람(the external man)을 의미한다는 것은 뒤에 이어질 내용에서 볼 수 있습니다. That “heaven” signifies the internal man and “earth” the external man before regeneration may be seen from what follows.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 1절의 ‘태초(太初, the beginning)라는 표현을 시간적 최초의 순간이 아니라, ‘영적 질서의 출발점’으로 해석합니다. ‘태초’는 태고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각 사람이 거듭남을 시작하는 첫 시기를 포함합니다. 즉, 창세기의 ‘태초’는 역사 속 한 시점이면서 동시에, 지금도 반복되는 영적 현실입니다. 사람이 거듭남을 시작할 때, 그는 그 사람만의 ‘태초’에 들어가는 셈입니다.

 

선지자들이 이 시기를 ‘옛날(the days of old, [antiquitatis]), 혹은 ‘영원(the days of eternity)이라 한다는 설명은, 이 상태가 단순히 과거에 속한 것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질서’에 속해 있음을 보여 줍니다. 태고의 상태는 연대기적으로 오래되었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직접적인 관계, 곧 영원의 질서가 인간 안에 처음 세워지는 상태이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 상태는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수 있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태초’, 곧 ‘시작’을 사람의 거듭남의 첫 시기와 직접 연결합니다. 사람이 거듭날 때, 그는 단순히 이전의 삶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 태어나’ 생명을 받습니다. 여기서 생명은 생물학적 생명이 아니라, 영적 생명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단순한 변화나 성장으로는 설명될 수 없고, 반드시 ‘새 창조’라는 표현이 필요합니다. 이는 매우 강한 표현이지만, 그만큼 거듭남이 전면적인 전환임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이 맥락에서 스베덴보리는 선지서에 나오는 ‘창조하다’, ‘짓다’, ‘만들다’ 같은 표현들이 거의 언제나 거듭남을 뜻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 표현들은 미묘한 차이를 가지는데, 창조는 생명의 근원 주시는 것을, 지음, 곧 형성은 그 생명에 질서 부여하는 것을, 그리고 만드는 것은 그것을 삶 속에서 실제로 이루어 가는 걸 가리킵니다. 이 차이는 이후에 더 자세히 다루지만, 여기서는 중요한 원칙 하나가 제시됩니다. 성경에서 창조의 언어는 곧 거듭남의 언어라는 점입니다.

 

이사야의 인용은 이 점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주님은 ‘내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자’를 창조하시고, 지으시며, 만드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단지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 곧 주님의 신성과 진리 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의 영적 재창조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구속자이시며, 태에서부터 지으시는 분이시고, 만드시는 분이시며, 창조자이십니다. 이 모든 호칭은 주님의 다양한 역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 분 주님이 인간의 거듭남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루신다는 사실’을 서로 다른 측면에서 말해 주는 표현들입니다.

 

시편의 인용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주님을 찬송한다는 말은, 새로 생명을 받은 사람들이 주님을 인식하고 사랑하게 됨을 뜻합니다. 또한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라는 표현은, 거듭남이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며, 그 결과 인간의 외적 삶, 곧 ‘지면’까지 새로워진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거듭남은 내면의 변화에 머무르지 않고, 삶의 표면까지 갱신합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스베덴보리는 중요한 해석 원리를 예고합니다. ‘(, heaven), 곧 ‘하늘’은 거듭남 이전의 ‘속 사람’을, ‘(, earth), 곧 ‘’은 ‘겉 사람’을 의미한다는 점입니다. 이는 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가 곧 인간 내면의 구조를 가리킨다는 결정적인 단서입니다. 하늘과 땅은 우주의 두 영역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두 차원입니다. 이 해석이 이후 글들에서 구체적으로 전개되면서, 창세기 전체가 인간 거듭남의 지도임이 점점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결국 AC.16은 창세기의 ‘시작’을 역사와 인간을 동시에 꿰뚫는 개념으로 제시합니다. 태고의 시대, 거듭남의 첫 시기, 새로운 창조는 서로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영적 질서를 서로 다른 각도에서 본 표현들입니다. 주님은 그 모든 시작의 주체이시며, 인간의 영적 삶은 언제나 그분 안에서 다시 시작됩니다.  

 

 

심화

 

1.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

 

AC.16 본문 중,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의 차이를, 해설에서는 창조는 생명의 근원 주시는 것을, 지음, 곧 형성은 그 생명에 질서 부여하는 것을, 만드는 것은 그것을 삶 속에서 실제로 이루어 가는 걸 가리킨다고 했는데, 이 부분,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네, 이 부분은 AC.16에서 아주 짧게 지나가지만, 사실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를 압축해서 보여 주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목사님께서 적어 주신 해설 문장, 곧 ‘창조는 생명의 근원을 주시는 것, 형성은 그 생명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 만드는 것은 그것을 삶 속에서 실제로 이루어 가는 것’이라는 설명은 방향이 아주 정확합니다. 다만 처음 접하는 분들에게는 여전히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으니, 조금 더 천천히 풀어 보겠습니다.

 

먼저 큰 원리부터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는 성경에서 같은 뜻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는 단어들도 그냥 수사적으로 겹쳐 쓴다고 보지 않습니다. 특히 ‘창조하다(create), ‘형성하다(form), ‘만들다(make)처럼 나란히 오는 표현은, 다 비슷해 보여도 각각 다른 국면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즉 주님이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일을 한 단어로만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서로 다른 세 동사를 통해 그 과정의 깊이와 순서를 드러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AC.16의 핵심은, 인간의 새 창조가 한순간의 사건이 아니라, 시작과 질서와 구현을 가진 전인적 과정이라는 데 있습니다.

 

창조하다(create)는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깊은 차원에서의 주님의 역사입니다. 이것은 인간 안에 없던 생명의 원리를 주님께서 넣어주시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단지 살아 있다는 생물학적 생명이 아니라, 주님을 향해 열릴 수 있는 영적 생명입니다. 사람이 전에는 자기 자신과 세상을 중심으로만 살다가, 어느 순간 참된 선과 진리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받아들이고, 자기 삶이 이대로는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고, 하나님 쪽으로 마음이 열리기 시작하는 것, 이 모든 출발이 ‘창조’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창조는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결심이 아니라, 주님께서 먼저 씨를 심으시는 일입니다. 비유하자면, 전혀 생명이 없던 땅에 처음으로 씨가 들어오는 것과 같습니다. 또는 완전히 어두운 방에 처음으로 빛이 켜지는 것과 같습니다. 방의 구조가 아직 정리되지 않았고, 그 빛으로 무엇을 할지도 아직 모르지만, 일단 빛이 들어온 것 자체가 결정적인 시작입니다. 이것이 창조입니다.

 

그다음 ‘형성하다, 짓다(form)는 그렇게 시작된 생명에 모양과 질서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씨가 들어왔다고 바로 나무가 되는 것이 아니듯, 빛이 켜졌다고 곧바로 삶이 정돈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 안에 들어온 진리와 선의 씨앗은 자라기 위해 배열과 분별과 구조를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형성, 곧 지음은 인간 안에서 무질서하게 섞여 있던 것들을 나누고, 위아래를 세우고, 중심과 주변을 정리하는 단계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처음에는 종교적 열심과 자기 의, 참된 순종을 잘 구분하지 못합니다. 선을 행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인정받고 싶어서 하는 것인지, 정말 옳기 때문에 하는 것인지도 잘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주님은 그 사람 안에 분별을 세워 주십니다. 무엇이 속 사람에 속하고, 무엇이 겉 사람에 속하는지, 무엇이 기억 지식이고, 무엇이 살아 있는 진리인지, 무엇이 자기 본성의 욕구이고, 무엇이 주님께서 주시는 선한 감동인지 조금씩 구별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형성이고, 지음입니다. 그러므로 형성은 이미 주어진 생명을 ‘아름답고 바른 형식’ 안에 놓는 일입니다. 비유하자면, 설계도 없이 쌓여 있던 자재들이 하나의 집 구조를 이루어 가는 과정과 같습니다. 또는 태아가 단순한 생명 덩어리가 아니라 점차 눈, 귀, 손, 발을 갖춘 인격적 형체로 자라나는 과정과도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만들다(make)는 그렇게 창조되고 형성된 것이 실제 삶에서 구현되고 굳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단지 계획이나 가능성의 단계가 아니라, 실제 생활 속에서 그것이 행동과 습관과 성품이 되어 가는 상태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안다고 해서 곧바로 그 진리가 자기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 선을 좋아한다고 해서 당장 선한 삶이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그 진리와 선이 말과 선택과 관계와 습관 속에서 실제로 ‘만들어져’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용서해야 한다’는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창조와 형성의 단계에서는 이미 들어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자기를 상하게 한 사람을 대할 때, 분노 대신 절제하고, 보복 대신 인내하고, 마음속 판단을 내려놓는 쪽으로 행동하기 시작하면, 그때 비로소 그 진리가 그의 삶 안에 ‘만들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make는 삶의 현실 속에서 구체화되는 차원입니다. 집의 비유로 말하면, 설계와 구조가 끝난 후 실제로 그 집에 사람이 살고, 방이 쓰이고, 문이 열리고 닫히고, 불이 켜지고 꺼지는 단계입니다. 즉 살아 있는 사용의 단계입니다.

 

이 세 단어를 한 번에 붙들면, 스베덴보리가 왜 굳이 셋을 구별했는지가 더 또렷해집니다. ‘창조’는 시작의 은혜이고, ‘형성’은 질서의 은혜이며, ‘만듦’은 구현의 은혜입니다. 창조가 없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고, 형성이 없으면 시작된 것이 무질서하게 흩어지며, 만듦이 없으면 모든 것이 관념과 가능성에만 머물고 실제 삶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하나님이 나를 새롭게 하셨다’는 한 문장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생명을 심으시고, 그 생명을 정리하시고, 마침내 그것이 삶이 되게 하시는 전 과정을 포함합니다.

 

초심자에게는 이렇게 풀어도 이해가 쉽습니다. 주님은 먼저 우리 안에 새 생명을 ‘심으시고’(창조), 그다음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정리하시며’(형성), 마지막에는 그것이 실제 성품과 행동이 되게 ‘빚어 가십니다’(만듦). 또는 신앙의 말로 하면, 주님은 먼저 우리를 깨우시고, 그다음 가르치시고, 마지막에는 살게 하십니다. 이 셋이 합쳐져야 비로소 사람이 ‘새로 지음 받은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AC.16의 이 구별은 단지 단어 공부가 아닙니다. 이것은 성도들에게도 큰 위로가 됩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은 자기 안에 겨우 씨앗만 들어온 상태인데, 벌써 열매 맺지 못한다고 낙심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주님은 먼저 창조하시고, 그다음 형성하시고, 그다음 만들어 가신다고. 그러므로 아직 질서가 덜 잡혀 있거나, 실제 삶이 더디게 변한다고 해서 주님의 일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모든 단계가 다 주님의 일입니다. 이 점을 붙들면, 사람은 조급함 대신 신뢰를 배우게 됩니다.

 

 

 

AC.17, 창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AC.17-19)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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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 창1, '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AC.15 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데, 이는 그분과 아버지가 하나이시기 때문이며, 그분 자신이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In the universal heaven they know no other father than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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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

 

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데, 이는 그분과 아버지가 하나이시기 때문이며, 그분 자신이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In the universal heaven they know no other father than the Lord, because he and the father are one, as he himself has said:

 

6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8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14:6, 8-11) I am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 Philip saith, Show us the father Jesus saith to him, Am I so long time with you, and hast thou not known me, Philip? He that hath seen me hath seen the father how sayest thou then, Show us the father? Believest thou not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me? Believe me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me. (John 14:6, 8–11)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주님’에 대한 선언을 한층 더 깊은 차원으로 끌어올립니다. AC.14에서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이 ‘주님’이심을 분명히 했다면, AC.15에서는 그 주님이 곧 ‘아버지’이시라는 사실을 천국의 인식 방식으로부터 설명합니다. 온 천국에서는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데, 이는 천국에서 삼위가 분리된 개념으로 인식되지 않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천국의 인식은 교리적 분해가 아니라, 실재에 대한 직관적 인식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근거를 주님의 말씀 자체에서 찾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주님은 자신을 ‘(the way)이며, ‘진리(the truth)이며, ‘생명(the life)이라고 선언하시는데, 이는 단지 구원의 통로라는 의미를 넘어, 신적 실재 자체가 주님 안에 있음을 말하는 표현입니다. 길은 접근의 방식이고, 진리는 빛이며, 생명은 존재의 근원인데, 이 모든 것이 주님 한 분 안에 있다는 선언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떠나서는 아버지께 이를 수도, 알 수도 없습니다.

 

빌립의 질문은 인간적이며, 동시에 매우 표상적인 질문입니다. 그는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는 눈에 보이고, 분리된 어떤 신적 대상을 기대하는 마음의 표현이지요. 그러나 주님의 대답은 단호하면서도 깊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는 말씀은, 아버지가 주님과 다른 어딘가에 계신 분이 아니라, 주님의 인성 안에 완전히 계신다는 선언입니다. 이는 단순한 연합이나 동행이 아니라, 상호 내재, 곧 하나 됨을 뜻합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이라는 반복된 표현은, 주님의 신성과 인성이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 신학에서 이 진술은 매우 핵심적입니다. 주님의 인성은 부활을 통해 완전히 신성화되었고, 그 결과 천국에서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따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천국의 모든 존재들은 주님의 얼굴에서 곧 아버지를 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아버지’라는 개념이 추상적 근원이 아니라, 주님 자신으로 인식됩니다.

 

이 점은 거듭남의 교리와도 직접 연결됩니다. 인간의 거듭남은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이루어지는데, 만일 주님과 아버지를 분리된 대상으로 생각한다면, 인간의 내적 시선은 필연적으로 갈라집니다. 그러나 천국의 질서에서는 신적 선과 신적 진리가 하나로 인식되며, 그 하나 됨이 주님 안에 완전히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거듭남의 모든 단계는 주님을 향해 단일한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이 글은 또한 신앙의 단순성을 회복해 줍니다. 인간의 이성은 종종 신적 실재를 분해하여 이해하려 하지만, 천국의 인식은 오히려 단순합니다. 주님을 알면 아버지를 아는 것이고, 주님을 사랑하면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리를 축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리를 살아 있는 인식으로 회복하는 길이지요.

 

결국 AC.15는 독자에게 하나의 분명한 초점을 요구합니다. 거듭남을 말할 때, 신앙을 말할 때, 기도를 말할 때, 그 대상은 언제나 주님 한 분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천국이 그렇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길이시며, 그 길의 끝에서 만나는 또 다른 분이 계신 것이 아니라, 그 길 자체가 곧 목적지이십니다. 이 인식 위에서만, 이후에 이어질 태고교회와 창세기의 모든 상응적 해설이 올바른 중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AC.16,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창1:1) AC.16 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time)를 ‘태초’(太初, the beginning)라고도 합니다. 선지자들에 의해 선지서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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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 창1, '주님' =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

AC.14 이어지는 모든 글 가운데서 주님이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분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며, 다른 무슨 보조적 이름을 덧붙이지 않고 단지 ‘주님’(the Lord)으로만 일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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