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질병과 주님의 병 고치심

 

 

38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을 앓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 39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40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41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그들이 말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앎이러라 42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4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44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 (눅4:38-44)

 

 

질병(diseases)이라는 것은 영적 삶과 관련된 해롭고 악한 것들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주님께서 질병을 치유하신다는 것은 교회와 인류에게 우글우글 들러붙어 그들을 영적 죽음으로 이끄는 다양한 종류의 악과 거짓들로부터 그들을 자유하게 하심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신적 기적들(Divine miracles), 주님의 미러클들은 교회와 천국의 상태들을 포함하고, 그들에 대한 것들이라는 점에서 다른 기적들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기적들은 주로 병 고치심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곧 요한이 보낸 제자들에게 하신 다음과 같은 주님의 말씀이 의미하는 것입니다.

 

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5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마11:4-5) (AC.8364:6, 변일국 역)

 

※ AC(Arcana Coelestia, 천국의 비밀) 위 8364번 글 6번 항에 대한 Clowes 영역 및 Potts 개정본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As diseases represented the hurtful and evil things of the spiritual life, therefore by the diseases which the Lord healed is signified liberation from various kinds of evil and falsity which infested the church and the human race, and which would have led to spiritual death. For Divine miracles are distinguished from other miracles by the fact that they involve and have regard to states of the church and of the heavenly kingdom. Therefore the Lord’s miracles consisted chiefly in the healing of diseases. This is meant by the Lord’s words to the disciples sent by John:

 

Tell John the things which ye hear and see: the blind see, and the lame walk, the lepers are cleansed, and the deaf hear, the dead rise again, and the poor hear the gospel (Matt. 11:4, 5).

 

이는 출애굽기 15장 26절,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에 관한 주석 중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

 

 

지난 시간에는 주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시고, 귀신 들린 자를 치유하셨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주님은 온갖 병자들을 고치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십니다. 특별한 점은 시몬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을 앓고 있는데 주님께서 그 병을 낫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38, 39절입니다.

 

38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을 앓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 39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주님께서 회당에서 나오셔서 시몬 베드로의 집으로 들어가셨다고 합니다. 문자적으로는 주님께서 회당에서 시몬 베드로의 집으로 이동하신 것이지만, 속뜻으로는 다른 의미인데요, 우리의 내면으로 임재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이성 가운데 계시다가 우리의 의지 안으로 이동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회당’은 신앙인의 이성을 뜻하며, ‘’은 의지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 그러니까 ‘속뜻’이란 천사들이 읽는 말씀을 말합니다. 천사들은 영적 존재라 사람의 육이 아닌 영을 보는데요, 그런 것처럼 말씀도 지상 언어로 된 말씀이 아닌 거기에 담긴 영을 보는 겁니다. 우리가 천사들처럼 말씀을 속뜻으로 볼 줄 아는 게 중요한 이유는, 그래야 엉뚱한 해석으로 인생을 우왕좌왕 낭비하지 않고, 그대로 천국에서도 통하는 말씀 이해의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게 그 말씀의 속뜻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이 지점에서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중요해지는 겁니다. 주님이 이 일을 위해 그를 불러 말씀의 속뜻과 그 원리를 오픈하셨거든요. 그가 여러 해에 걸쳐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속뜻을 라틴어로 풀어 기록했는데요, 그 글의 수만 10,837개나 되며, 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주님의 허락으로만, 다시 말씀드리면, 주님이 계시하시는 걸 곁에서 받아적기만 한 것입니다. 그럼, 성경의 나머지 말씀들은 왜 안 했냐면, 이 두 책에 나오는 원리들과 그 인용 구절들로 이미 충분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의 많은 저작 중, 특별히 ‘천국과 지옥’(Heaven and Its Wonders and Hell), 그리고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이 두 권은 꼭 좀 읽으시라 권하는 것입니다. 전자를 통해서는 우리의 시각을 교정하고, 후자를 통해서는 우리의 마음을 고정하기 위해서입니다. 천사들의 시각과 마음을 가지고 남은 인생을 살기 위해서 말입니다.

 

※ 아래 링크로 가시면 구하실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서들(Writings)

다음은 스베덴보리의 저서목록(Writings)입니다. 인류사에 존재했던 사람 중 가장 지능이 높은 사람으로 기네스 북에는 밀턴, 괴테 그리고 스베덴보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 생전에 가장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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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당은 본래 교회를 뜻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사람의 내면에서 주님께서 교리를 가르치시는 곳, 즉 인간의 이성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시몬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 시몬의 장모가 열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시몬의 장모는 누구입니까? 말씀에서 ‘어머니’나 ‘아내’는 교회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내면에 있는 교회인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어디에 세워집니까? 사람의 의지 속에 세워집니다. 말씀 지식이 많다 해서 그 사람 내면에 교회가 있는 건 아닙니다. 말씀을 받아들여 그것을 의도하고, 삶으로 옮길 때라야 비로소 그 사람 내면에 교회가 세워집니다. 교회를 뜻하는 ‘시몬의 장모’와 ‘시몬의 집’은 그런 뜻입니다. 의지 가운데 교회가 세워진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지금 병을 앓고 있습니다. 교회는 어떤 경우에 병이 들까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는데, 보통은 신앙인들이 악의 유혹에 넘어가 헤어 나오지 못할 때이거나,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 진리를 거짓으로 만들고, 그 거짓을 믿을 때 교회는 중병에 걸립니다. 그러니까 시몬의 장모가 지금 열병을 앓고 있는 상태는, 신앙인들이 어떤 종류의 악이나 거짓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그런 상태에서 사람들이 주님 앞에 그를 위하여 구합니다. 말씀에서 ‘사람’은 보통 진리에 대한 애정을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주님께 구하는 것은, 진리에 대한 애정이 진리이신 주님과 하나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자신의 영적 질병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진리에 대한 순수한 애정을 가지고 자신의 영적 질병을 고치려고 노력할 때, 주님께서 열병을 꾸짖어 주십니다. ‘꾸짖으신대’는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 악들과 싸우시는 모습입니다. 주님께서 병을 꾸짖으시자 악한 영이 떠나고, 시몬의 장모의 병이 나았습니다.

 

그리고 병이 나은 시몬의 장모가 자리에서 일어나 주님께 수종을 들었다고 기록합니다. 주님께 ‘수종드니라’는 무슨 뜻입니까? 주님은 진리 자체이신 분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수종을 드는 것’은 진리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병이 낫기 전에는 어떤 상태였습니까? 진리에 순종하려 해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냥 악과 거짓이 이끄는 대로 끌려다닐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데 주님께서 병을 고쳐 주시자 악을 거절할 수 있는 힘이 생겼고, 그렇게 해서 진리에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베드로의 장모가 주님께 수종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내면에 있는 교회가 진리이신 주님을 섬기는 모습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의 장모의 병을 고치셨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병자들을 데리고 주님께 왔습니다. 40절입니다.

 

40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해 질 무렵은 어떤 때입니까? 신앙인들의 마음에 사랑이 없고, 그러므로 지혜가 없는 때입니다. 사람의 영적 상태는 항상 일정하지 않습니다. 아침일 때가 있고요, 한낮일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저녁일 때가 있고, 밤일 때도 있습니다. 아침이나 낮처럼 햇빛이 밝을 때는 마음에 사랑이 넘치고,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지혜가 넘칠 때입니다. 그러나 저녁은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고, 교회에 대한 애정도 없으며, 그러므로 지혜가 없는 때입니다. 지혜는 사랑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해 질 무렵은 시험의 기간이며, 영적 질병에 걸리기 쉬운 때입니다. 본문에서 해 질 무렵에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왔다 하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온갖 병자를 데리고 왔다는 것은 신앙인들이 안고 있는 영적인 문제가 그만큼 다양하다는 뜻입니다. 사람마다 직면하는 영적인 문제들이 다 다릅니다. 그 이유는, 사람마다 애정이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 애정의 다양성에 대해 성(聖) 문서에서는 수만, 또는 수만 곱하기 수만 개만큼이나 많다 합니다.

 

※ 위 ‘(聖) 문서’라는 용어는 스베덴보리가 영계 체험 이후부터 기록한, 그러니까 주님이 그의 손을 빌려 기록하신 저작들(Writings)을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자기가 천국에서 듣고 본 모든 경험과 남기는 이 모든 기록은 오직 주님의 허락으로 하는 것이며, 특히 창세기, 출애굽기 주석은 오직 주님이 친히 하시는 말씀을 자기는 성경 한 권만 가지고 받아 적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마치 오늘날의 프린터처럼 말이지요. 그래서 그가 남긴 기록들에 대하여 ‘’(聖, Divine)이라는 글자를 붙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절대로 안 되죠. 감히 말입니다! 이 형용은 오직 주님 한 분께만 사용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 얼굴의 생김새가 모두 다른 것처럼, 각자의 애정이 모두 다르고, 그러므로 직면하고 있는 영적 문제가 다 다른 것입니다. 사람들이 병자들을 주님께 데리고 온 것은, 신앙인들이 자신의 영적 질병을 주님 앞에 진심으로 고백하고, 치유 받기를 원하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다 생각하는 한, 주님의 도움을 받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도와주시려 해도 개입할 틈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를 온전히 비우고, 주님의 도우심을 청해야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환부에 당신의 손을 얹으시고, 병을 고쳐 주십니다. 환부에 손을 얹으실 때, 주님과 우리 사이 소통이 일어납니다. 소통이란 어떤 것입니까? 소통이란 주님의 생명이 우리 안으로 끊임없이 흘러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병에 걸리지 않습니다. 마치 몸 안 혈액이 각 장기와 조직, 세포 속을 원활하게 흐를 때, 병에 안 걸리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41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그들이 말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앎이러라

 

주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실 때, 병자들의 내면에 있던 귀신들이 나가면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소리를 질렀고, 그러자 주님은 그들을 꾸짖으시며, 그들의 말함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악인들의 입에서 나오는 진리 고백은 순수한 고백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혐오이며 적대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때문인지 주님께서는 당신이 그리스도란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꺼리셨습니다. 심지어 대제사장 가야바가 네가 그리스도인지 말하라 했을 때에도 주님께서는 직접적 대답을 피하시고, ‘네가 말하였느니라’ 하실 정도였습니다. 아마 악한 사람들에게 진리가 들어가면 진리를 더럽히거나 파괴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말씀에서는 그것을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폭행, 십자가에 매다는 걸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악인들이 진리에 접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 위 ‘병자들의 내면에 있던 귀신들’이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다음 글들을 참고하세요.

 

각 사람에게는 선한 영들과 악한 영들이 와있다. 선한 영들을 통해서는 사람은 천국과 결합되고, 악한 영들을 통해서는 지옥과 결합된다. 이 영들은 천국과 지옥 사이에 놓여 있는 중간 영계에 있다. 이곳에 대해서는 앞으로 특별히 다룰 것이다. 이 영들이 사람에게 오면 사람의 기억 전체 안으로 들어가고, 그렇게 해서 생각 전체에 들어간다. 이때 악한 영은 사람의 악한 기억과 생각 속으로, 선한 영은 선한 기억과 생각 속으로 들어간다. 이 영들은 자기들이 사람과 같이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그들이 사람과 같이 있을 때, 그 사람의 모든 기억과 생각이 자기 것인 줄 안다. 또 그들에게는 그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 태양계 내의 것은 아무 것도 그들 시각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영들이 자기가 사람과 같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도록 각별히 배려하신다. 만일 그들이 알아차리면 사람에게 말을 걸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악한 영의 경우, 사람을 파괴하려 들기 때문이다. 악한 영들은 지옥과 결합되어 있으므로, 그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바로 사람의 영혼을, 즉 그의 신앙과 사랑을 파괴하고, 사람의 몸까지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들이 사람과 대화를 하지 않으면 그런 일이 없다. 이 경우, 그들은 자기의 말과 생각이 사람에게서 온 것임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서로 나누는 말도 사람에게서 온 것인데도 그들은 자기가 하는 생각과 말이 자기 것인 줄 믿는다. 그리고 누구나 자기 것은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영들은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도록 그들이 모르는 제재를 받는다. 나는 여러 해 동안 계속되는 경험의 결과로 사람과 영들과의 이러한 결합에 대해 너무도 잘 알게 되었다. 내가 이보다 더 잘 아는 것이 없을 정도이다. (HH.292)

 

지옥과 교통하는 영들 역시 사람에게 와있는 이유는, 사람이 모든 악을 지니고 태어나기 때문이며, 따라서 사람의 생명이 전적으로 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과 동질의 영이 함께 있지 않으면, 사람은 살 수도 없고, 사실상 그의 악에서 떠날 수도, 개선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악한 영들에 의해서 자아의 생명 안에 머물고, 동시에 선한 영들에 의해서 거기서 물러나는 것이다. 그리고 양쪽에 의해 균형이 유지되고, 균형이 유지되기 때문에 자유가 있다. 따라서 악에서 떠날 수 있고, 선 쪽으로 돌아설 수 있는 것이며, 그렇게 해서 선이 사람 안에 심겨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에게 자유가 없으면 전혀 불가능하다. 그리고 사람은 지옥측 영들이 한쪽에서 작용하고, 천국측 영들이 다른 한쪽에서 작용하는 그 중간에 있을 때만 자유로울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생명이 그 타고난 것에 들어 있고, 따라서 자기 본성에 들어 있는 한, 만일 악 안에 있는 것이 허락되지 않으면, 그에게 생명이 있을 수 없다. 또 사람에게 자유가 없으면 생명이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사람은 강제로 선해질 수 없다. 강제로 하는 것은 오래 남지 않는다. 사람이 자유 안에서 받아들이는 선은 그의 의지 안에 심어져 그 자신의 것처럼 된다. 이런 이유로 사람은 지옥과 교통하고, 또 천국과 교통하는 것이다. (HH.293)

 

이 글들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33장, ‘천국과 인류의 결합’에 나오는 글들로서, 모든 사람에겐 최소한 천국 측 선한 영 둘, 지옥 측 악한 영 둘이 와 있다는 내용입니다. 저는 이 글들을 통해 ‘사람’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되었고, 더 이상 무슨 귀신이니, 악령이니, ‘누구는 귀신 들렸다’ 하는 것들에 관해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

 

다음 42, 43절입니다.

 

42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4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조금 전에 ‘해 질 무렵’이 사랑이 없는 상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날이 밝으매’는 무슨 뜻입니까? 날이 밝았다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천국의 빛이 흘러들어오는 영적 상태이며, 그래서 사랑과 지혜가 풍성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그때 주님은 ‘한적한 곳’으로 가셨다고 합니다. ‘한적한 곳’은 한글 성경의 번역이고요, 영어 성경 번역은 ‘황무지’ 또는 ‘사막’입니다. 황무지는 진리가 없고, 그러므로 선한 삶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날이 밝은 것과 황무지의 상태는 정반대의 상태입니다. 그러면 왜 주님은 날이 밝았을 때 황무지로 가셨을까요? 그 이유는, 주님은 우리 내면의 황무지를 진리로 개간하시는데 한 번에 하지 않으시고, 점진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이미 옥토로 변한 곳도 있을 것이고, 여전히 황무지와 같은 곳도 있을 것입니다. 저 스스로도 그런 걸 느낄 때가 많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비교적 합리적인데, 다른 어떤 면에서는 전혀 합리적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실수도 하고 후회도 합니다. 합리적이지 못하다는 것은 그 부분에 있어서는 진리가 없다는 것이고, 황무지와 같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날이 밝았을 때 주님께서 황무지에 가신 것은, 주님이 사람의 내면 어떤 부분을 치유하신 후에, 이번에는 황무지와 같은 곳으로 이동하셔서 그곳을 다시 변화시키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때 주님을 찾던 무리가 주님을 발견하고는 떠나지 마시라 붙잡습니다. 주님을 찾는 무리처럼 우리도 주님의 부재(不在)를 느낄 때, 주님을 찾곤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떠나시지 않습니다. 아주 가까이에서 우리의 의도와 생각을 살피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되 스스로 하듯 자신의 의지로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라고 무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주님께서 다른 곳으로 가신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삶의 어떤 문제에 대해 주님의 지혜를 구할 때마다 교리적인 답변을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에서 ‘동네’는 교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다른 동네’는 삶의 어떤 문제에 대해 특별한 교리적 해법을 기다리는 곳입니다.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은 삶의 모든 상황에서 다 같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때마다 우리는 애정을 가지고 주님께 특별한 진리를 구합니다. 그것은 마치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물을 향해 뿌리를 뻗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원천이신 주님께 닿으려는 수많은 뿌리는 주님이 복음을 전하실 다른 동네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십니다. 이 말씀은 세상에 오신 주님은, 사랑 자체이신 여호와로부터 나오는 진리시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리는 그냥 진리가 아니고, 선을 동반한 진리입니다.

 

끝으로 44절에서는 주께서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라고 합니다. ‘갈릴리’는 이방을 뜻합니다. 그러면 우리 내면에 있는 이방 지역은 어떤 곳입니까? 주님으로부터 가장 먼 곳이며, 가장 나중에 주님의 교회가 세워지는 곳, 그곳이 이방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내면의 갈릴리는 겉 사람입니다. 따라서 주께서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는 것’은 앞에서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말씀입니다. 즉 주님께서 겉 사람 안의 여러 애정과 소통하시면서 그들을 가르치신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주님은 시몬의 집을 방문, 열병을 앓고 있는 그의 장모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시몬의 장모가 그런 것처럼, 우리 신앙인들 역시 거듭나는 과정에서 수많은 병치레를 합니다. 때로는 죽을 것 같은 열병을 앓기도 합니다. 그때 주님은 병의 치유를 위해서 우리의 의지 속으로 오십니다. 영적 질병은 이성의 문제가 아니고, 의지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주님께 소상하게 고(告)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자신의 문제를 소상하게 고하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지 몰랐습니다. 그냥 ‘주님, 도와주세요’ 하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자세하게 말씀드리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고, 또 중언부언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주님께 구체적으로 도움을 청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때 우리는 자기의 내면을 정직하게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적 질병을 치유 받으려고 주님께 구체적으로 도움을 청하는 것을, 오늘 말씀에서는 시몬의 집에 있던 사람들이 장모의 병을 낫게 해달라 주님께 간청하는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그 위에 손을 얹으시니 질병의 원인인 악한 영들이 소리를 지르며 나갔습니다. 신앙인의 질병은 각자의 애정의 종류만큼이나 다양하고, 그리고 그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가능하면 그 문제를 그동안 어떻게 다루어왔는지, 그리고 어떻게 실패했는지를 주님께 말씀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주님의 지혜와 능력을 구할 때 주님께서 그 질병들 위에 일일이 손을 얹어 고쳐 주십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우리 성도님들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렘17:14)

 

아멘

 

원본

2017-09-10(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26(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025. 2023-03-26(D1)-주일예배(2442, 눅4,38-44), '우리의 질병과 주님의 병 고치심'.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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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들리지 않으려면

 

 

31갈릴리의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 32그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위가 있음이러라 33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34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35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 36다 놀라 서로 말하여 이르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위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하더라 37이에 예수의 소문이 그 근처 사방에 퍼지니라 (눅4:31-37)

 

 

거듭남의 첫 번째는 진리를 아는 것이고, 두 번째는 진리를 인정하는 것이며, 세 번째는 진리를 믿는 것이다. 진리를 아는 것과 인정하는 것과 믿는 것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다음의 사실로 알 수 있다. 즉 가장 나쁜 사람들도 진리를 알 수는 있다. 그러나 인정하지는 않는다. 유대인이나 그럴듯한 논리로 교리를 파괴하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그리고 진리를 인정하기는 하는데 믿지 않는 사람도 있다. 어떤 경우에 그들은 진리를 강론하고, 입증하며 열정적으로 설득하기도 한다. 그러나 진리를 믿지 않으면 누구도 신앙을 가질 수는 없다. (AC.896, 이순철 역)

 

※ AC(Arcana Coelestia, 천국의 비밀, 라틴) 위 896번 글에 대한 Clowes 영역 및 Potts 개정본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To know is the first thing of regeneration, to acknowledge is the second, to have faith is the third. What difference there is between knowing, acknowledging, and having faith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 worst men may know, and yet not acknowledge, like the Jews and those who attempt to destroy doctrinal things by specious reasoning; and that unbelievers may acknowledge, and in certain states preach, confirm, and persuade with zeal; but none can have faith who are not believers. (AC.896, Clowes 역)

 

이는 창세기 8장 13절, ‘육백일 년 첫째 달 곧 그달 초하룻날에 땅 위에서 물이 걷힌지라 노아가 방주 뚜껑을 제치고 본즉 지면에서 물이 걷혔더니’에 관한 주석 중 ‘노아가 방주 뚜껑을 제치고 본즉’(And Noah removed the covering of the ark and saw.)에 대한 내용입니다. //

 

 

지난 시간에는 주님께서 나사렛 사람들에게 큰 화를 당할 뻔하셨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이 주님을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곳을 조용히 떠나십니다. 그리고 오늘은 주님께서 다시 가버나움으로 오셔서 말씀을 전하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31절입니다.

 

31갈릴리의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

 

갈릴리 가버나움의 동네란, 속뜻으로는 이방인의 교리를 뜻합니다. 동네는 진리나 교리를 뜻하고, 갈릴리는 이방 지역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에서 가르치신다는 것은 이방인의 진리를 가지고 사람들을 가르치신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건 아니고, 주님께서 당시 갈릴리 지역에서 전파하신 말씀이 유대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는 마치 이방인의 진리와 같았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주님의 말씀은 그들의 주장과는 전혀 다른 진리였습니다. 그러한 사정은 어쩌면 오늘날 새 교회가 부딪치고 있는 현실과도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새 교회 진리를 처음 접하시는 분들은 이 진리가 기독교 주류 교회들의 교리와 많이 다르다는 걸 금방 느끼십니다. 그리고 오히려 기독교회가 아닌 다른 종교의 교리와 통하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모든 순수한 종교의 교리는 신앙과 사랑을 분리하지 않고 하나라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회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오직 믿음’, 곧 신앙만으로 구원받는다 가르치는데요, 그것은 신앙과 사랑이 하나라는 걸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 기독교회의 입장에서 보면, 새 교회 가르침은 이단 종교, 종파 가르침 같이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에서는 그걸 주께서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에서 가르치시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 양쪽을 다 있어 본 사람으로서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제가 저 자신을 ‘양쪽을 다 있어 봤다’ 하는 이유는, 저 자신 현재 개신교 침례교 목사이면서, 그러나 한편으로 스베덴보리의 글들이 주님으로 말미암았음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유튜브나 인터넷상에 떠도는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저 자신 스베덴보리의 글들을 직접 읽고 확인하면서 번역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비록 ‘오직 믿음’ 교리를 배운 개신교인이라 할지라도 그가 참으로 의롭고 올바름의 사람이라면 본인이 직접 이 글들을 읽어 주님을 만나게 될 줄 저는 믿습니다. 그가 참으로 진리 만나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이라면 다른 누구의 글이나 의견, 기사나 소문이 아닌, 본인이 직접 일대일로 주님께 나아갈 것이기 때문이며, 주님은 그런 사람을 예외 없이 만나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바로 진리이시기 때문이지요.

 

11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12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13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렘29:13)

 

스베덴보리(1688-1772) 시절 유럽 기독교와 개신교처럼 지금도 특히 한국 기독교와 개신교는, 그러니까 가톨릭은 ‘행위’에다 이것저것 뭘 좀 교리적으로 섞었고요, 개신교는 ‘오직 믿음’으로 일단 구원은 받아놓고, 그러고 나서 그에 합당한 체어리티의 ‘행위’로 삶을 받쳐줘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입장이지요. 실상은 전도와 선교에 더 힘을 쓰고 있지만 말입니다. 마치 속 사람은 뭐 잘 모르겠고, 일단 전도 많이 하면, 선교 많이 하면 하늘 상급이 많으니까... 라고 믿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특히 개신교인들은 자신들의 ‘오직 믿음’ 교리에 대한 확고한 태도가 주님의 신성(Divine)인 ‘’(good)과 ‘진리’(truth)를, 그리고 ‘체어리티’(charity)와 ‘신앙’(faith)이라는 신적 인성(Divine Human)을 부인하는 것임을 모르고 있습니다. 사도들의 서신서들을 주님의 말씀으로 믿고 있기 때문이지요. 제가 뭐 그렇게 거창한 사람은 못 되어서 이렇게 요약해도 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참고로, 기독교는 가톨릭과 개신교, 정교회 등을 포함한, 좀 더 큰 카테고리입니다. //

 

본문에서는 또 주님께서 안식일에 말씀을 가르치셨다고 합니다. 안식일 관련한 말씀들은 아래와 같이 엄중합니다.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일지니라 (출31:15)

 

그래서인지 유대 율법 가운데서도 이 안식일 법은 아주 엄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이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에 대한 속뜻을 좀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요, 그것은 무슨 일이든 자신의 자아로부터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아가 시키는 대로 하지 말고, 주님 말씀을 따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유대교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겉으로만 생각했지요. 그래서 언젠가 주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을 지나다 이삭을 따 먹었을 때, 어떻게 안식일을 어길 수 있는가 하고 주님을 질책했습니다. 본래 안식일의 의미는, 주님께서 지옥의 시험을 모두 이기시고, 영광스럽게 되시는 것을 나타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인성과 내면에 계시는 신성, 곧 여호와 하나님이 하나가 되는 걸 의미하지요. 그리고 그렇게 되셨을 때의 주님의 상태, 곧 더 이상 지옥의 도전이 없는, 주님 안 평화의 상태가 바로 안식의 상태, 그러니까 안식일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은 영화(榮化)하신 주님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해서, 그동안 주님을 나타내던 모든 표상이 사라졌습니다. 빛 자체이신 주님이 오시자 더 이상 그 빛을 대신하던 역할 대행들은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안식일은 주님으로부터 말씀을 배우고, 이웃사랑, 곧 체어리티(charity)를 실천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께서 안식일에 진리를 가르치고 병자를 고치신 것은, 안식일에 체어리티를 실천하는 모범을 친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런 안식일에 대한 속뜻을 전혀 몰랐고, 그저 겉으로만 지킨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안식일’이 나와서 잠깐 다루었습니다.

 

32절에는 주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32그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위가 있음이러라

 

이 말씀에서 ‘놀라니’는 사람의 내면 영의 상태가 바뀌는 걸 의미합니다. 영의 상태가 바뀐다는 건 예를 들면, 아주 이기적이던 사람이 진심으로 다른 사람을 배려하기 시작했다면, 그는 영이 변한 것입니다. 또 자기도 몰랐던 단점을 깨닫고, 그것을 고치려고 노력한다면, 영이 변한 것입니다. 또 큰 잘못을 해서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던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게 된다면 그 역시 영의 상태가 변한 것입니다. 그래서 영의 상태가 변한다는 건 영적으로 한 단계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러한 변화는 사람의 힘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능력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모두 놀랐다고 했습니다. 주님 말씀의 능력으로 그들의 영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는 그 말씀이 권위가 있음이러라’ 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에 능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능력이 없다면 어떻게 영이 바뀔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주님 말씀에 놀라고, 그 말씀에 권위가 있음을 느꼈던 것입니다. 인간의 진리 안에는 사랑이 없지만,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 안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그 사랑이 인간을 변화시킵니다. 그것은 겨울의 햇볕은 능력이 없지만 따뜻한 봄볕은 만물을 생장시키는 능력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가버나움 사람들의 영이 바뀌고 있을 때, 한 귀신 들린 자가 나타났습니다. 그에 대해 33절과 34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33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34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여기서 ‘귀신’은 진리를 왜곡하는 지옥의 영을 말합니다. 지옥의 영들은 말씀의 진리를 어떻게 해서든지 왜곡, 곡해해서 그것이 마치 진리인 것처럼 꾸밉니다. 왜곡된 진리로 사람들을 지옥으로 끌고 가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귀신 들린 자는 진리를 왜곡하는 영에게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진리를 왜곡하는 영에게 사로잡힌 사람은 스스로 대단한 지적 능력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말씀의 의미를 마음대로 왜곡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가르치는 진리 가운데는 그렇게 왜곡된 진리들이 많이 있습니다.

 

귀신 들린 자가 주님을 향해 큰 소리로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앞부분에서는 ‘우리’라고 했고요, 뒷부분에서는 ‘’라고 했습니다. 귀신 들린 자는 왜 그렇게 말했을까요? 앞에서 ‘우리’는 귀신 들린 자를 사로잡고 있는 지옥의 영들을 나타냅니다. 그의 내면에 지옥의 영들이 한 둘이겠습니까? 얼마나 많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라고 소리 지른 것은, 주님, 또는 진리에 대한 반감을 나타냅니다. 거짓 진리를 진리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은 참 진리가 나타날 때 진리를 혐오합니다. 둘은 본질적으로 서로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끔 다른 종교나 교회에 계신 분들과 진리에 대해서 말할 때가 있습니다. 제가 먼저 말하는 경우는 없고, 그분들이 당신의 교회에서는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고 물어오면서 대화가 시작되는데, 그때 저희 교회의 가르침을 설명하면 조금 놀라거나 거리를 두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어쩌면 그런 분들의 반응이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앞에서 ‘우리’라고 한 것은 지옥의 영들이 하는 말이고, 주님에 대한 반감, 또는 진리에 대한 혐오감을 나타냅니다. 그러면 뒷부분에 ‘’는 누구일까요? 그것은 귀신 들린 사람, 자신을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천사 또는 지옥의 영으로부터 영향을 받습니다.

 

※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Heaven and Its Wonders and Hell) 33장 ‘천국과 인류의 결합’(The Conjunction of Heaven with the Human Race) 292번 글입니다.

 

각 사람에게는 선한 영들과 악한 영들이 와있다. 선한 영들을 통해서는 사람은 천국과 결합되고, 악한 영들을 통해서는 지옥과 결합된다. 이 영들은 천국과 지옥 사이에 놓여 있는 중간 영계에 있다. 이곳에 대해서는 앞으로 특별히 다룰 것이다. 이 영들이 사람에게 오면 사람의 기억 전체 안으로 들어가고, 그렇게 해서 생각 전체에 들어간다. 이때 악한 영은 사람의 악한 기억과 생각 속으로, 선한 영은 선한 기억과 생각 속으로 들어간다. 이 영들은 자기들이 사람과 같이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그들이 사람과 같이 있을 때, 그 사람의 모든 기억과 생각이 자기 것인 줄 안다. 또 그들에게는 그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 태양계 내의 것은 아무 것도 그들 시각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영들이 자기가 사람과 같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도록 각별히 배려하신다. 만일 그들이 알아차리면 사람에게 말을 걸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악한 영의 경우, 사람을 파괴하려 들기 때문이다. 악한 영들은 지옥과 결합되어 있으므로, 그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바로 사람의 영혼을, 즉 그의 신앙과 사랑을 파괴하고, 사람의 몸까지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들이 사람과 대화를 하지 않으면 그런 일이 없다. 이 경우, 그들은 자기의 말과 생각이 사람에게서 온 것임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서로 나누는 말도 사람에게서 온 것인데도 그들은 자기가 하는 생각과 말이 자기 것인 줄 믿는다. 그리고 누구나 자기 것은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영들은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도록 그들이 모르는 제재를 받는다. 나는 여러 해 동안 계속되는 경험의 결과로 사람과 영들과의 이러한 결합에 대해 너무도 잘 알게 되었다. 내가 이보다 더 잘 아는 것이 없을 정도이다. (HH.292, 김은경 역) //

 

지옥의 영이 지배할 때 사람들은 생각지도 않은 엉뚱한 말을 해서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줍니다. 그런가 하면 자기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 교묘하게 남을 속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모두 지옥 영들이 하는 장난입니다. 그러나 그러다가도 온전한 정신으로 돌아올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때가 귀신 들린 자가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라고 말할 때입니다. 그러니까 귀신이 들려 어쩔 수 없이 끌려다니기는 하지만 진리에 대한 인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귀신 들린 자가 그렇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라고 말했을 때, 주님께서 바로 그의 내면에 있는 귀신을 쫓아내 주셨습니다. 35절에서는 그것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35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

 

앞에서 잠깐 말씀드린 것처럼 거듭남의 첫 번째 단계는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아야 그것을 인정하고, 자기의 신념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거듭남의 첫 번째는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귀신 들린 자가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라고 고백했을 때, 즉시 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셨습니다. 진실을 왜곡하는 영들에게 사로잡힌 사람들이 그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주님의 도우심을 받아 진실은 진실이라 하고 거짓은 거짓이라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우리를 지옥 영들의 손아귀에서 건져 주십니다.

 

주님이 귀신을 꾸짖어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나오면서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렸습니다. 귀신이 사람을 넘어뜨리는 모습은, 참된 진리가 나타났을 때, 그 앞에서 거짓 진리가 수치를 당하는 모습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제까지는 자기가 믿는 것이 진리라고 믿었는데, 그것이 참된 진리 앞에서 거짓이라는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으니 얼마나 수치스럽겠습니까? 그것이 귀신이 주님 앞에서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는 모습입니다.

 

※ 이쯤에서 떠오르는 제 영적 체험이 하나 있는데요, 과거 정원 목사의 저서, ‘대적기도’를 읽고, 잠자리에 누워 ‘귀신아!’ 따라 해 보다가 내 안에 숨어든 악령을 어렴풋이 보게 된 체험이었습니다. 지난 2013년 12월 15일 주일 밤에 있었던 일인데, 다음은 그날의 일지에 적힌 내용입니다.

 

자정 즈음, 다시 치통 시작, 잠결에 ‘귀신아!’ 하였더니 갑자기 온몸에 전율이 오래도록 지속, 정원 목사님이 대적기도 책에서 기술한 그대로의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직감, 내 안에 뭔가가 숨어있다가 들켜 어쩔 줄 몰라 하는 듯한 느낌 받음,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나가라’ 하는데 혀가 꼬여서 발음이 잘 안됨, 아내, 내가 잠꼬대를 하는 줄 알고 대적기도 중인 나를 계속 흔들어 댐... 전율이 잦아들 즈음, 치통도 사라짐, 책의 내용 그대로여서 너무 신기, 아내에게 자초지종 설명

 

제 안에서 몰래 활동하던 악한 영이 그만 갑자기 들키는 바람에 저쪽 주방 정수기 쪽으로 황급히 숨는 무슨 다급함이었지요. 형체는 그냥 검은 그림자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참 놀라운 건, 이 체험 후, 저를 평생 괴롭히던 혈기가 사라진 것이었습니다. 이 혈기는 저뿐 아니라 저희 집안의 내력 중 하나이기 때문에 더욱 신기했습니다. //

 

악령들은 항상 우리를 유혹해서 죄를 짓게 만듭니다. 그리고 떠날 때는 결과를 모두 그 사람에게 전가합니다. 그래서 죄를 지으면 마치 부메랑처럼 죄의 결과가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죄는 그냥 없어지지 않습니다. 수치심을 느끼고 철저하게 자신을 자책하는 그런 과정이 반드시 있습니다. 어떨 때는 그 곤욕과 수치의 시간이 길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한 모든 것들이 악령이 떠나면서 우리를 무리 중에 심하게 넘어뜨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성을 하되 너무 자책하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그건 모두 지옥 영들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악령은 사람에게 물리적인 고통을 줄 뿐이고요, 영을 해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본문에서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라는 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악한 영이 주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는 사탄이 욥에게 한 짓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했습니까? 몸을 아프게 하고, 재물을 잃게 했습니다. 물론 세상에 사는 동안 그러한 것들은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잃는 것이 영을 다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인정하는 한, 악령은 우리의 영을 손상하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36절 말씀입니다.

 

36다 놀라 서로 말하여 이르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위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하더라

 

주님께서 말씀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냈을 때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그래서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위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거기 모인 사람들이 모두 말씀의 능력을 인정한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의 능력’이란 세상적 능력이 아닙니다. 인간을 구원하시는 능력입니다. 죽은 자와 같았던 우리가 살아나는 것, 짐승처럼 살던 사람이 사람으로 사는 것, 이것은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의 능력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이 말씀이 이 시대에 꼭 필요한 말씀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귀신 들린 자가 진리이신 주님을 진리라고 인정했을 때 주님께서 그의 내면에 있는 귀신을 쫓아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진리가 진리인 줄을 모르고 거짓이 거짓인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마치 귀신 들린 자처럼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습니다.

 

저는 가급적 정치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 정치 상황을 보면 안타까운 점이 많습니다. 정치가 무엇입니까? 정견이 달라 치열하게 싸우더라도 때에 따라서는 대의(大義)를 위해 연합하고 협력하는 것이 정치입니다. 그런데 우리 정치에 협력이 있습니까, 조화가 있습니까? 무섭게 상대를 적대하고 증오할 뿐입니다. 우리 역사를 보면 그런 일이 많았습니다. 정치적 견해가 다른 사람들이 서로를 모함하고 처절하게 죽이고 했던 것이 조선의 역사였습니다. 서로 타협하고 조화를 이루며 싸우다가도 손을 잡은 적이 과연 얼마나 있었습니까? 지금 이 시대에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백성들이라도 중심을 잡아야 하는데 그들 역시 정치인들에게 끌려다니고 있습니다. 증오와 살의가 가득 찬 이 나라의 현실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오늘 이 시대에 꼭 필요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 여기서 말씀하시는 ‘오늘’은 지난 2017년도 8월을 말합니다. 지난 2017년도에 있었던 가장 큰 정치적 사건이라면 뭐니 뭐니 해도 박근혜 대통령 탄핵 파면(3/10)과 문재인 대통령 당선(5/9)일 것입니다. 만 5년이 지난 지금은 세월호 촛불 및 박근혜 대통령 탄핵 등이 모두 조작이요, 기획 선동인 것으로 점점 밝혀지고 있어 그때 덩달아 촛불을 지지하며, 박근혜 대통령을 원망했던 저는 너무나도 미안, 부끄러워 고갤 못들 지경입니다만... 네, 하여튼 당시 상황을 돌이켜볼 때, 정말 역사의 큰 변곡점의 시기였음은 분명하다 하겠습니다.

 

우리는 대의를 위해 상대방의 진리라 하더라도 그것이 진리라면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대의를 위한다는 것은 주님을 위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선이며 진리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우리 교회 안에서도 정치적 견해가 다르면 서로를 증오하십니까? 우리는 자신의 이해와 관계없이 진리를 진리라고 하고, 거짓을 거짓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적어도 진리를 거짓으로 만들거나 거짓을 진리로 둔갑시키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를 사로잡고 있을지도 모를 악한 영을 쫓아내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오직 주님의 말씀뿐입니다. 말씀의 능력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능력으로 우리 안에 어둡고 불결한 것들을 몰아낼 수 있다고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말씀의 능력이 이 교회로부터 사방으로 퍼져나갈 것입니다. 그것이 이 시대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라는 신념으로 우리 함께 주님을 위해서 싸웁시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새 교회 모든 성도님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14:27)

 

아멘

 

원본

2017-08-27(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24(D6)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024. 2023-03-24(D6)-매일예배(2441, 눅4,31-37), '귀신 들리지 않으려면'.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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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렛 사람들이 주님에게 크게 화를 낸 이유

 

 

23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24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25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엘리야가 그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27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었느니라 28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29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30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눅4:23-30)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은 주님과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는 교회 안의 사람들보다 교회 밖의 사람들이 더 잘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을 뜻한다. 주님은 당시 교회가 그들에게 있던 유대인들에게 이 말씀을 하셨고, 그렇게 해서 그들이 교회 밖의 사람들보다 주님을 더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오늘날 기독교회라고 불리는 교회 안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은 기독교회의 교리를 통해 주님을 받아들이지만, 소수의 사람들만 마음으로 주님을 인정하고, 그나마 사랑에서 비롯한 애정으로 주님을 인정하는 사람은 숫자가 더 작다. 그러나 교회 밖의 개종한 이교도들은 다르다. 이들은 주님을 그들의 한 분 하나님으로 예배하고 공경한다. (AC.9198:2, 이순철 역)

 

※ AC(Arcana Coelestia, 천국의 비밀, 라틴) 9198번 글에 대한 Clowes 영역 및 Potts 개정본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That ‘no prophet is accepted in his own country’ signifies that the Lord, and the Divine truth which is from him, are less received and loved in heart within the church, than outside of it. He spoke to the Jews, with whom the church then was; and it is known that the Lord was less received by them than by the nations outside the church. The case is similar at this day in the church which from him is called the Christian church. In this the Lord is indeed received in doctrine; but only by a few with acknowledgment of heart; and by still fewer from the affection of love. It is otherwise with the converted gentiles outside the church. These worship and adore him as their one only God, (AC.9198:2, Clowes 역)

 

이는 출애굽기 22장 22절,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에 관한 주석 중 ‘과부나’(Any widow)에 대한 내용입니다. //

 

 

그동안 장마철이라 비가 많이 왔는데, 오늘 맑은 하늘을 보니 여러 가지로 기분이 상쾌합니다. 양동룡 부목사님께서 휴가를 가셨는데 좋은 시간 보내고 오시면 좋겠습니다.

 

※ 이 설교는 지난 2017년 7월 30일,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님의 설교를 원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구절에는 주님께서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주님께서 성경을 읽으시고, 사람들은 말씀에 귀 기울이고 있는데, 그 모습이 참으로 평화로워 보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은 분위기가 많이 다릅니다. 주님께서 나사렛 사람들을 질책하시고, 그러는 주님에게 사람들이 화를 냅니다. 그리고 결국 주님을 동네 밖으로 쫓아내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 밀쳐 떨어뜨리려고까지 합니다. 주님과 회당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 과연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겉뜻으로는 어리둥절한 이 상황, 그 이유를, 하지만 속뜻을 통해서는 알 수 있는데요, 23절입니다.

 

23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주님은 나사렛 사람들이 당신이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자기들에게도 똑같이 행하라고 요구할 거라 말씀하십니다. 가버나움에서 주님이 행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가버나움은 주님께서 공생애를 처음 시작하신 갈릴리 북쪽에 있는 동네입니다. 그곳에서 주님은 많은 기적을 행하셨는데요, 가령,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시고, 회당에서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도 고치시며, 천정을 뜯고 달아 내린 중풍병자도 고치시는 등 많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들은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이란 그곳에서 행하신 여러 기적을 말합니다. 기적이란 노력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행운이 찾아오거나, 또는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어떤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주님께서 가버나움에서 행하신 일들은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죽어가는 심령들을 살리는 구원의 역사였고, 그러한 역사는 주님을 진실하게 믿는 사람에게는 늘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나사렛 사람들의 눈에는 그것이 기적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 기적들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하신 것입니다.

 

※ 저는 특히 이 신유(神癒), 즉 병 고침의 역사에 관심이 많습니다. 아마 개척 전 부사역자로 있던 중형교회에서의 경험 때문인 것 같은데요, 저는 그때 한 80여 세대를 담당하는 마을사역자였습니다. 거의 웬만한 큰 교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 겪어야만 했었는데요, 그중 열에 일곱은 이 질병과 장애, 장례에 관련된 일이었지요... 그래서인지 저는 특히 복음서 내용 중 주님의 치유의 현장이 늘 부러웠고, 주목할 수 밖에 없었으며, 그 비밀을 찾기 위해 애썼습니다. 아마 ‘나는 내가 안수하는 자마다 낫는다’라는, 치유의 은사로 좀 유명해지고 싶은 공명심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부끄럽지만... 그러나 정확하게는, 마을 목원들의 그 아픔과 안타까운 사정들을 좀 해결해 줄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더 컸더랬습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 수도원 공부를 하게 되고, 그러다가 스베덴보리를 알게 되어 지금은 이 일, 이 길을 소명으로 받아 벌써 햇수로 8년째입니다. 그러면서 지금은 어렴풋이 그 어떤 영적 원리 내지는 비밀을 알게 된 것 같은데요, 그것은 바로 ‘천국의 모든 것과 사람의 모든 것은 상응한다’(There Is a Correspondence of All Things of Heaven with All Things of Man)라는,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Heaven and Its Wonders and Hell) 12장에 나오는 내용 덕분입니다. 즉 천국 전체는 한 사람 모습이며, 천국은 사람의 모든 신체, 곧 머리, 몸, 팔과 다리 등에 상응하는 수많은 공동체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 그런 천국과 상응하고 있다는 등의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몸 어디가 아프면 그 부분에 상응하는 천국 공동체들의 인플럭스(influx, 입류)를 통해 그 능력을 공급받으면 되는 것이지요. 좀 엉뚱하고 믿기 어려운 내용이시겠지만... 하여튼 저는 이 책의 모든 내용이 쑤욱 들어왔으며, 그러니까 그냥 믿어졌으며, 드러내어 밝히기는 좀 그렇지만, 어쨌든 저는 이렇게 제 몸에 대해 적용, 나름 상당한, 거의 확실하다는 걸 알았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물론, 저도 때로는 약도 쓰고, 병원도 다닙니다만, 네, 하여튼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술(記述)이 믿어지려면 사람의 내면이 열려야 합니다. 내면이 닫히면 천국을 향한 창이 닫혀 천국의 모든 걸 받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사람의 내면은 세 단계로 되어 있는데, 단계마다 천국에서 흘러들어오는 것들이 차원이 다릅니다. 아마 천국이 삼층천으로 되어 있는 것도 그래서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만나 그 자리에서 고침 받은 복음서 여러 케이스는 그 내면이 그 일이 일어날 수 있도록 확실히 열렸던 사람들이지 싶습니다. 주님은 그 사람의 내면이 어디까지 열렸는가를 보시고, 엔터키만 치셨던 거 같아요. 여러분도 이 사실을 믿어 내면이 열리고, 그래서 동일한 은혜를 입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사렛은 갈릴리 지역에 있기 때문에, 속뜻으로는 이방인의 지역을 뜻하고, 또한 겉 사람을 의미한다는 건 지난주에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내면에 있는 겉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가장 멀리 있으며, 심지어 주님을 배척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나사렛을 주님의 고향이라고 했습니다. 나사렛을 주님의 고향이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주님께서 겉 사람 안에 세우신 교회를 뜻하기 때문이며, 주님의 고향은 천국, 또는 교회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실 때, 제일 먼저 하시는 일은 속 사람을 변화시키시는 일입니다. 그다음에는 겉 사람을 변화시키시지요. 어떤 방법으로 변화시키십니까? 겉 사람 안에 진리의 씨를 뿌리십니다. 주님께서 겉 사람 안에 진리의 씨 뿌리시는 모습이 오늘 본문 바로 전 본문에 나오는 장면입니다. 즉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나사렛 사람들이 그 말씀을 경청하는 모습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경청한다는 것은 귀의 작용이며, 그러므로 겉 사람 안에 있는 애정을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그 애정 안에 진리의 씨를 뿌리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방법으로 겉 사람 안에 교회를 세우시고, 궁극적으로 그곳에 거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교회가 24절에서 말하는 주님의 고향 나사렛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교회가 가버나움의 기적을 원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 이유를 설명하겠습니다.

 

각 사람의 내면에 교회가 처음 세워질 때는 진리에 대한 애정 위에 세워집니다. 우리 역시 진리에 대한 애정이 있었기 때문에 새 교회로 들어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교회가 세워지면 제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영적으로 계속 발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처음 가졌던 진리의 애정을 잃어버리게 되니까요. 처음 가졌던 진리에 관한 애정을 잃어버리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진리를 악용하기 시작합니다. 진리를 악용한다는 것은 진리를 주님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을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자기 자신을 위해 쓰지 않을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그렇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주님과 이웃을 위해 써야 합니다. 지난번 교리 강좌에서도 우리는 구원을 위해 믿는가, 아니면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믿는가? 라는 문제를 서로 얘기했습니다. 처음 교회에 나올 때는 누구나 구원을 받기 위해 나옵니다. 즉 천국에서의 행복한 삶을 위해 신앙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그걸 최종 목적으로 삼는 걸 원하시지 않습니다. 이웃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몸담고 있는 사회와 나라,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것이 신앙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런 삶을 살 때 천국은 저절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자신의 구원만을 생각하는 신앙, 그런 신앙을 새 교회에서는 자연적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에서 가버나움의 기적을 바라는 사람들, 자기들은 그냥 앉아서 또 무슨 신기한 기적이나 구경하고 있겠다 하는 사람들은 자연적 신앙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입니다. 자연적 신앙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의 삶은 어떤 것입니까? 이웃을 위한 일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녀가 좋은 직장에 취업하기를 원하고, 또 질병의 치유를 바라며 사업의 성공을 바랍니다. 그러한 것들이 다 가버나움의 기적 구경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하신 말씀은 자연적 신앙에 계속 머물러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일종의 경고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나사렛 사람들이 주님을 산으로 끌고 가 낭떠러지에서 떨어뜨리려 하는데, 바로 그런 것이 자연적 신앙 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24절에서 말씀하시기를

 

24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말씀에서 선지자는 성경, 즉 말씀을 나타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은 가장 큰 선지자이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말씀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선지자의 고향이란 어디입니까?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교회가 선지자의 고향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는 말씀은, 자연적 교회가 말씀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배척한다는 뜻입니다. 주님 당시에는 유대교회가 자연적 교회였구요, 오늘날에는 기독교회가 자연적 교회입니다. 그리고 좀 더 깊은 뜻으로는 모든 신앙인의 내면에 있는 자연적 신앙이 자연적 교회입니다. 그들이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주님보다는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고, 세상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속에 주님이 들어가실 틈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을 환영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것에 대해 주님은 25절로 2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5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엘리야가 그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27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여기서 엘리야 선지자 역시 말씀으로서 주님을 표상합니다. 엘리야 시대라고 시대를 구분하는 것은, 많은 교회가 각각의 영적 상태에 따라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다 달랐기 때문입니다. 어떤 교회는 말씀을 왜곡했고, 어떤 교회는 말씀 안의 진리를 말살했습니다. 말씀에서는 그것을 교회가 선지자를 핍박, 심지어 죽이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면 엘리야 시대는 영적으로 어떤 상태의 교회일까요? 그것에 대해 본문에서는 그때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으며,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았다고 말합니다. 하늘이 닫힌 것은 그 교회에 속한 사람들의 속 사람이 닫혔다는 뜻입니다. 흉년이 들었다는 것은, 속 사람이 닫혔기 때문에 겉 사람 안으로 진리와 선이 더 이상 흘러들어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는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 안으로 끊임없이 흘러들어와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세상 것들만 사랑하는 사람들은 속 사람이 닫히고 선과 진리의 흐름이 끊어집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적으로 흉년 상태가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들 내면의 교회가 타락하게 됩니다. 교회가 타락한다는 것은 교회 안에 선과 진리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선과 진리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를 말씀에서는 삼 년 육 개월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3년 6개월은 교회가 타락해 문을 닫기 직전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한 상태를 다른 곳에서는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단7:25)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한 해와 두 해를 합하면 삼 년이고, 거기에 반년을 더하면 3년 6개월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 계시록에서는 ‘천이백육십 일’(계12:6)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를 한 달을 삼십 일로 계산하면 42 개월, 즉 3년 반으로 모두 같은 의미입니다. 즉 교회가 영적으로 완전히 타락해 문을 닫는 상태가 되었을 때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그런 상태가 되었을 때,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은 교회를 나타내지만, 영적인 교회는 아니고 자연적 교회를 나타냅니다. 왜냐하면 타락한 교회 안에 영적인 것이 남아 있을 리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곳에 과부가 많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말씀에서 과부는 선이 없는 진리를 나타내거나, 또는 진리가 없는 선을 나타냅니다. 과부는 이렇게 두 가지 의미로 쓰이는데, 본문에 이스라엘의 과부는 진리만 있고 선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진리만 있고 선이 없다는 것은, 진리를 지식으로만 접근할 뿐 실천하지는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리 말씀을 읽어도 진리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으로부터 그들의 내면으로 빛이 흘러들어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봐도 진리인지를 모릅니다. 캄캄한 암흑 속에서 어떻게 진리가 보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이스라엘 과부에게 선지자를 보내지 않으셨다는 것은 말씀을 아무리 읽어도 진리의 깨달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어떤 사람에게 진리의 깨달음을 주실까요? 사렙다의 과부와 같은 사람, 수리아 사람 나아만과 같은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주십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사렙다의 과부는 앞에서 말한 이스라엘의 과부와는 다른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과부가 선이 없는 진리라면, 사렙다의 과부는 선은 있는데 진리가 없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에 순종하기를 원하지만,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어떻게 하는 것이 순종인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진리를 갈구합니다. 주님은 그런 그녀에게 엘리야 선지자를 보내셔서 흉년 내내 부양하게 하셨습니다. 부양한다는 것은 말씀의 진리와 선으로 그의 영을 먹이시는 것입니다. 말씀에서는 그것을 과부의 집에 기름과 곡식이 끊어지지 않는 것, 곧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왕상17:16)로 표현했습니다.

 

여기 나아만 이야기는 아래 열왕기하 5장 말씀으로 대신합니다.

 

1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그의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 2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사로잡으매 그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더니 3그의 여주인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하는지라 4나아만이 들어가서 그의 주인께 아뢰어 이르되 이스라엘 땅에서 온 소녀의 말이 이러이러하더이다 하니 5아람 왕이 이르되 갈지어다 이제 내가 이스라엘 왕에게 글을 보내리라 하더라 나아만이 곧 떠날새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의복 열 벌을 가지고 가서 6이스라엘 왕에게 그 글을 전하니 일렀으되 내가 내 신하 나아만을 당신에게 보내오니 이 글이 당신에게 이르거든 당신은 그의 나병을 고쳐 주소서 하였더라 7이스라엘 왕이 그 글을 읽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 그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로 보내 그의 나병을 고치라 하느냐 너희는 깊이 생각하고 저 왕이 틈을 타서 나와 더불어 시비하려 함인줄 알라 하니라 8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이 자기의 옷을 찢었다 함을 듣고 왕에게 보내 이르되 왕이 어찌하여 옷을 찢었나이까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그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하니라 9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10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11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12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려 분노하여 떠나니 13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 14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왕하5:1-14) //

 

주님께서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시자, 사람들이 주님께 화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동네 밖으로 쫓아내려고 합니다. 28, 29절에는 나사렛 사람들의 그런 모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28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29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주님께 화를 내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그런데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났고, 우리 역시 그럴 때가 있습니다. 진리를 통해 감추고 싶었던 내면의 악이 드러날 때, 그리고 간절히 원하던 어떤 것을 주님께서 주시지 않을 때, 우리는 속으로 불평하거나 원망합니다. 그런 것이 주님께 화를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바로 자연적 신앙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데 있어 진리가 방해가 될 때는 화를 내며 진리를 밀어냅니다. 여기 ‘그들이 일어나’라고 했는데 이 말은 본래 진리에 대한 사랑이 뜨겁게 일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반대로 진리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주님을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한 것으로 봐서 그들이 지금 주님을 대적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여기서 동네는 교리를 뜻합니다. 따라서 동네에서 주님을 쫓아내는 것은 교리 속에 들어있는 내적 진리를 말살하는 것입니다. 내적 진리란 말씀의 지식 속에 들어있는 선이며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님을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어버리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산은 사랑 또는 선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동네가 건설된 산’이란 교리의 바탕에 있는 진리에 대한 사랑을 말합니다. 우리가 교회의 교리를 처음 받아들일 때 마음 가운데 진리에 대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나사렛 사람들은 주님을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즉 교리의 바탕에 있는 사랑을 몰아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진리에 대한 사랑은 없어지고,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만 남습니다. 그러므로 동네가 건설된 산 아래로 주님을 밀어내는 것은 교리로부터 교리의 생명인 사랑을 몰아내는 것입니다. 사랑 없는 진리를 가지고는 자신은 물론이고 세상을 바꿀 수 없습니다. 그것이 주님을 동네 밖으로 쫓아내고 동네가 건설된 산에서 밀쳐 떨어뜨릴 때, 우리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30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신다는 것은 주님은 어느 곳에나 임재해 계신다는 뜻입니다. 주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나 쫓아내는 사람에게나 주님은 언제나 그들과 함께 계십니다. 그가 주님의 손을 잡기를 기다리시면서 항상 임재해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처음 새 진리 안으로 들어왔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 우리에게는 진리에 대한 순수한 애정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혹시 타성에 젖어서 제자리걸음을 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거듭남의 길에서 한곳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정체가 아니라 후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단히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오리가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지만 물밑에서는 계속 발을 움직이는 것처럼 그렇게 노력해야 합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하고요, 십계명의 법으로 자기를 비춰보면서 자기 안에 있는 거짓과 악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신앙이 매일 조금씩 성장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오늘 나사렛 사람들의 신앙을 기적을 바라는 신앙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렙다의 과부와 수리아 사람 나아만의 신앙을 가지라고 권고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본받으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선지자의 말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따르고자 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나아만은 엘리사가 말한 대로 나병을 고치기 위해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었습니다. 사렙다의 과부는 엘리야의 말에 따라 자기와 외동아들이 먹을 마지막 양식을 선지자에게 드렸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기적을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겠습니다. 선량한 이방인들처럼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 전체를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인간의 생각으로 이것은 취하고 저것은 버리는 그런 신앙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 신앙은 자연적 신앙에서 영적 신앙으로, 영적 신앙에서 천적 신앙으로 계속 발전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출15:26)

 

아멘

 

원본

2017-07-30(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23(D5)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023. 2023-03-23(D5)-매일예배(2440, 눅4,23-30), '나사렛 사람들이 주님에게 크게 화를 낸 이유'.pdf
0.54MB
천국과지옥.1.12.87-102.'천국의 모든 것과 사람의 모든 것은 상응한다'scan..pdf
0.56MB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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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의 속뜻

 

 

14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15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16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22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눅4:14-22)

 

 

세상에 계실 때 주님은 인성에 있어서는 신적 진리 자체이셨고, 생명의 본질에 있어서는 신적 선 자체이셨다. 그리고 신적 선은 사람에게 아버지의 혼이라 불리는 그것이었다. 왜냐하면 주님은 여호와로부터 잉태하셨으며, 말씀에서 ‘여호와’는 모든 생명의 본질인 신적 사랑에서 비롯한 신적 선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직 주님만이 본질에 있어서나 행위에 있어서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셨다. 왜냐하면 신적 선이 주님 안에 있었고, 그 선에서 발현되는 신적 진리가 세상에 계시는 동안 주님의 인성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AC.9954:11, 이순철 역)

 

※ AC(Arcana Coelestia, 천국의 비밀) 9954번 글 11번 항에 대한 Clowes 영역본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For when the Lord was in the world, he was, in respect to the human, the Divine truth itself; and in respect to the very being of his life, he was the Divine good itself, which with man is called the soul from the father; for he was conceived from Jehovah, and in the Word ‘Jehovah’ denotes the Divine good of the Divine love, which is the being of the life of all. From this it is that the Lord alone was ‘the Anointed of Jehovah’ in very essence and in very performance, because the Divine good was in him; and the Divine truth proceeding from this good was in his human while he was in the world (see the places cited in n. 9194, 9315). (AC.9954:11, Clowes 역)

 

이는 출애굽기 28장 41절, ‘너는 그것들로 네 형 아론과 그와 함께 한 그의 아들들에게 입히고 그들에게 기름을 부어 위임하고 거룩하게 하여 그들이 제사장 직분을 내게 행하게 할지며’에 관한 주석 중 ‘그들에게 기름을 부어’ 부분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

 

 

오늘 말씀은 주님께서 40일간 광야 시험에서 승리하시고, 안식일에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성경 구절을 읽으시고, 사람들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고 평화로워 보입니다. 사실 이 말씀 뒷부분에는 갈릴리 사람들이 주님을 모욕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왜 그렇게 말씀의 앞부분과 뒷부분이 차이가 있는지는 말씀의 내적 의미가 아니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오늘과 다음 주 두 주에 걸쳐 한 구절씩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14절입니다.

 

14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주님은 광야에서 돌아오셨을 때 먼저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주님이 광야에서 돌아오셨다는 것은 시험에서 이기고 돌아오셨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이 시험이 겉으로는 세상 계실 때 주님이 당하신 시험이지만, 속뜻으로는 거듭나는 사람의 내면에서 그 사람과 함께 싸우시는 시험이라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돌아오실 때 주님은 왜 갈릴리로 가셨을까요? 위 광야 시험의 속뜻을 생각할 때, 갈릴리로 가셨다는 것은 거듭나는 사람이 시험에서 이길 때마다 주님께서 그들의 겉 사람 안으로 들어오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속뜻으로 ‘갈릴리’는 이방인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거듭나는 사람 안의 겉 사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 여기서 잠깐, 겉 사람, 속 사람 등의 용어 정리를 좀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저 역시 이 부분이 아직 명확하진 않지만... 아직은 육(肉)을 입고 살아 있는 상태이기에 ^^, 지금까지 이해하고 있는 바로는, 간단하게는 inmost(가장 안쪽), internal(속), external(겉), body(몸)라는 이 네 가지를 이해하시면 되며, 좀 더 명확성을 위해 영어를 그대로 쓰겠습니다. 여기서 앞의 세 개까지가 영, 나머지인 body는 육, 우선은 이렇게 이해하고 계시라 권하고 싶습니다. 참고로, 이들 네 가지는 사람 생전엔 모호하지만, 일단 사후, 영이 되면 그때는 아주 명료해지는 그런 거라고 합니다. 일단 사람이 죽으면, 영과 육의 분리가 일어나고요, 그때 제일 먼저 body가 분리됩니다. 즉 body를 제외한 나머지 세 가지를 그대로 가지고 영계에서 깨어나게 되지요. 사후 첫 번째 상태는 준비상태로, 그동안 bodyinternal 사이에서 수고한 external이 정리, 휴면 상태에 들어갈 준비를, 그리고 internal이 전면에 드러날 준비를 하는 상태입니다. 천국이든 지옥이든 영계의 영원한 삶은 이 internal로 살아가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이 첫 번째 상태 때는 아직은 생전 식구들이나 친구, 지인들이 서로를 알아봅니다. 알아보고 아주 반가워들 하지요. 사후 두 번째 상태가 되면, 이제 external은 휴면 상태로 들어가고, internal 상태가 되는데, 이때는 살아생전 한 식구였던 사람들끼리도 서로 못 알아봅니다. 본인은 물론, 식구들 역시 서로의 영, 그러니까 internal은 본 적이 없기 때문인데요, 생전 식구들이 본 서로의 모습은 external이지 internal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 말이, 지상 혈연은 지상으로 끝, 영계로까지 이어지지 않는다는, 다소 불편할 수도 있는 말씀을 그동안 드린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inmost는 주님의 영역입니다. 네, 우선은 이 정도만 하겠습니다.

 

신앙인들이 처음 거듭날 때는 먼저 속 사람 안에 교회가 세워집니다. 그것을 우리는 개혁(reformation)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속 사람 안에 교회가 세워졌지만, 겉 사람의 상태는 아직 교회 밖의 사람들과 똑같은 모습입니다. 이를테면 속 사람은 주님 뜻대로 살고자 하지만, 겉 사람은 주님을 믿지 않고, 심지어 주님을 배척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럴 때 겉 사람은 마치 이방인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다가 겉 사람이 시험에서 한 번 이깁니다. 수없이 넘어지고 일어선 끝에 가까스로 주님 손잡고 시험에서 이긴 것이지요. 그때 주님께서 겉 사람 안으로 오셔서 교회의 작은 초석을 하나 세우십니다. 그런 과정이 수없이 되풀이되어야 궁극적으로 겉 사람 안에도 교회가 세워집니다. 그것이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광야에서 돌아오시면서 다른 곳으로 가시지 않고 갈릴리로 오신 것입니다. 15절입니다.

 

15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회당’은 속뜻으로 교리를 뜻합니다. 왜냐하면 유대 교회의 회당은 교리를 가르치는 곳이었고요, 또 교리의 해석이 다를 때, 그것을 조정하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회당은 교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것은 주님께서 겉 사람 안에 오셔서 새 교회의 교리를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또 ‘뭇사람에게 칭송을 받았다’고 했는데, 뭇사람은 겉 사람 안에 있는 여러 가지 선한 애정들과 생각들을 나타냅니다. ‘그들이 칭송했다’는 것은 애정들과 생각들이 주님이 가르치시는 교리를 잘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교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주님으로부터 진리에 대한 지각이 흘러들어올 때, ‘이것이 참 진리로구나!’ 하고 공감하는 것이고요, ‘이제부터는 이대로 살아야 하겠구나’ 하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뭇사람들이 칭송하는 모습입니다. 16절입니다.

 

16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예수께서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셨다’ 말하고 있습니다. ‘나사렛’ 역시 갈릴리 지역에 있는 곳이기 때문에, 겉 사람 안의 어느 부분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나사렛에서 자라나셨다’는 말은 주님은 겉 사람 안에서 성장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는 주님이 계십니다. 어떤 분에게는 구유에 갓 태어나신 주님이 계시고요, 어떤 분에게는 성전에서 랍비들과 진리를 토론하는 주님이 계십니다. 또 어떤 분에게는 청년이신 주님이 계십니다. 각 사람 안에 계신 주님은 그렇게 성장 정도가 다릅니다. 그런데 그 주님이 성장하시는 곳이 어디입니까? 속 사람이 아니라 겉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겉 사람이 악을 끊고 선을 행할 때마다, 그것에 비례해 주님도 조금씩 자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나사렛을 주님이 자라나신 곳이라고 했습니다. 계속되는 말씀에서 주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서 성경을 읽으셨다고 했습니다. 안식일은 본래 완전히 거듭나서 더 이상 시험이 없는 평화로운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안식일’은 하나의 시험이 끝나고 다음번 시험이 올 때까지의 잠시 동안의 평화로운 상태를 뜻합니다. 그 기간 동안 주님께서는 무슨 일을 하실까요? 우리에게 말씀을 읽어주시고, 말씀을 통해서 교리를 가르쳐주십니다. 오늘 주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교리가 바로 그것입니다. 주님이 가르치시는 교리는 어떤 것입니까? 삶의 다양한 상황에 맞게 진리를 올바르게 적용하는 지혜 같은 것입니다. 예를 들면,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 원론이라면, 원론에서 파생되는 수없이 많은 각론이 있습니다. 그 각론들이 주님께서 오늘 회당에서 가르쳐 주시는 교리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사야서 61장을 펴시고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17절로 19절입니다.

 

17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주님께서는 당신 스스로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 하십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말은, ‘선 자체이신 여호와로부터 잉태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기름’은 선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신성한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 그럼에도 고대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 많았습니다. 예를 들면 왕이나 선지자, 제사장 같은 사람들이 직분을 받을 때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이 주님을 표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주님은 당신 스스로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오신 이유에 대해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십니다. 그러면 가난한 자와 포로 된 자는 누구며, 눈먼 자는 누구일까요? 기본적으로 이들은 모두 선과 진리에 대해 무지하여 악과 거짓에 빠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다르게 부르셨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영적 상태가 조금씩 다르고, 그러므로 구원의 처방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선 ‘가난한 자’는 자신에게 진리와 선의 지식이 없다는 것을 알고, 그래서 진리와 선에 대한 지식 알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면,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음식 부스러기를 먹고자 했던 나사로와 같은 사람이 가난한 자입니다. 그에 비해 ‘눈먼 자’는 진리와 선을 모르기는 가난한 자와 마찬가지이지만, 주님을 믿지도 않고 진리를 갈망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가르쳐 주면 순순히 받아들이는 자입니다. ‘포로 된 자’는 악과 거짓의 유혹에 넘어가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그들 중에는 진리를 전혀 몰라 그렇게 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알면서 악에 빠진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두 포로 된 사람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눌린 자’는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거짓이 거짓인 줄 모르고, 진리가 진리인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진리를 분별할 줄 모르는 사람이 눌린 자입니다. 이들은 진리를 알고자 하지 않습니다. 거짓을 진리로 알고 신봉하면서, 진리를 말하면 배척하고 심지어 모독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눌린 자입니다. 비슷한 것 같지만 조금씩 다르지요?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스스로 깨닫고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 오셔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만이 참 빛이시기 때문이지요. 참 빛이 있어야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신 것입니다.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이 주님의 능력을 통해서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20절입니다.

 

20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0절에서 주님은 책을 덮어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셨습니다. 여기서 ‘맡은 자’는 영어 성경의 표현으로는 minister, 즉 ‘섬기는 자’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겉 사람 안으로 오실 때, 반드시 섬기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섬기는 자는 우리 안에 있는 주님에 대한 믿음과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것이 주님을 섬기는 자입니다. 그 섬기는 자들은 주님께서 우리 속으로 오시는 것을 원하며, 그리고 주님께서 오실 때 적극적으로 시중을 듭니다. 주님은 우리 의사와 관계없이 말씀을 읽어주시거나 교리를 가르쳐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 안의 섬기는 자들이 성경을 주님께 갖다 드려야 읽어주시고요, 그리고 그때 그 말씀에 있는 내적 의미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일어나는 주님의 모든 선한 역사는, 주님과 우리 안에 있는 섬기는 자와의 교감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섬기는 자가 성경을 가져다 드리자 주님께서 성경을 읽으셨고, 성경을 다 읽고 덮으셨을 때, 다시 섬기는 자에게 맡기시고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여러 번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앉다, 서다, 걷다라는 말은 우리 내면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을 나타냅니다. ‘앉는 것’은 가장 내적인 상태, 그러니까 의지의 상태를 나타내고요, ‘서는 것’은 의지로부터 무엇인가를 의도하는 것을, 그리고 ‘걷는 것’은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자리에 앉으셨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겉 사람의 의지 가운데 계신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겉 사람의 의지 가운데 계실 때, 겉 사람은 주님의 뜻에 따라 움직일 수 있습니다. 21절입니다.

 

21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주님은 회당에 모인 사람들에게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앉으셨다’는 말과 ‘너희 귀에 응하였다’는 말은 서로 연결되는 말씀입니다. ‘귀에 응하였다’는 것은 영어 성경 표현으로는 ‘귀에서 이루어졌다’입니다. ‘’는 아시는 바와 같이 순종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이 글이 너희 귀에 이루어졌다’라는 말씀은 주님의 가르침을 머리로 받아들이지 않고, 이제 의지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시험에서 이기고 주님께서 겉 사람 안으로 오실 때 이런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한 번이라도 시험을 이기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끝으로 22절입니다.

 

22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그들이 증언했다’는 것은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진리를 인정하고 고백했다는 뜻입니다. 또 사람들이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고 했는데, 이때 ‘요셉’은 신성한 인간이신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표상하는 요셉은 야곱의 아들 요셉이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아닙니다. 그러면 야곱의 아들 요셉과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같은 의미로 해석하는 이유는 뭘까요?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 이 사람은 야곱의 아들 요셉이고, 이 사람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이라고 구별하는 것은 세상 관점입니다. 그러나 천사들은 그가 야곱의 아들인지, 마리아의 남편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천사들은 그냥 요셉이라는 단어와 그 단어가 갖는 내적 의미에만 집중합니다.

 

※ 아래는 이런 이해를 돕는 글입니다.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에서 인용합니다.

 

나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다윗, 그리고 사도들이 방법을 통하지 않고, 자비에 의해 천국에 들어갔는지 천사들에게 물어보았다. 천사들은 대답했다. 그들 중 한 사람도 그렇게 천국에 간 사람은 없고, 모두 이 세상에서의 삶에 의해서 천국에 들어갔다. 우리는 그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 그들이라고 다른 사람보다 더 존경받지 않는다. 그들이 말씀 안에 영광스럽게 기록되어 있는 것은, 그들이 내적 의미로 주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주님의 신성과 신적 인성을 의미하고, 다윗은 주님의 신적 왕권을 의미한다. 사도들은 주의 신적 진리들을 의미한다. 사람이 말씀을 읽을 때, 천사들은 이 사람들 개인에 대해서는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그들의 이름은 천국에 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신 그 이름을 천사들은 방금 설명한 대로의 주님으로 이해하며, 따라서 천국에 있는 말씀(259항 참조)에는 그런 이름들이 나오지 않는다. 천국에 있는 말씀은 이 세상에 있는 성경 말씀의 내적 의미이기 때문이다. (HH.526:4, 김은경 역) //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요셉과 야곱의 아들 요셉은 천사들이 볼 땐 같은 의미인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고 한 것은, 세상 시각에서 볼 때는, ‘목수 요셉의 아들에게 어떻게 이런 지혜가 있느냐?’라는 뜻입니다만, 그러나 내적 의미로 보면 신성한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모든 진리가 나온다는 뜻입니다. 요셉은 신성한 인간이신 주님을 나타내고, 아들은 진리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그분으로부터 모든 진리와 선이 나온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것도 속 사람이 아니라 겉 사람이 인정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광야에서 돌아오신 주님은 제일 먼저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지역에 있는 나사렛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주님의 그런 모습은 우리가 시험에서 이길 때마다 주님께서 겉 사람 안으로 오셔서 그곳에 교회를 세우시는 모습입니다. 주님은 겉 사람의 의지 안에 말씀의 진리를 심는 방법으로 교회를 세우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 갈릴리 사람들에게 말씀을 읽어주시면서 ‘이 글이 너희 귀에 이루어졌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귀에 이루어졌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이 의지 가운데 심어졌다는 뜻입니다. 시험을 이긴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주신 말씀은 어떤 것입니까?

 

첫째는 모든 진리가 주님의 신적 인성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진리는 최초의 신성이신 여호와 하나님으로 나와, 마지막 신성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올 때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들은 세상 자연적인 것 안에 담길 때 가장 힘이 있습니다. 그 자연적인 것이 바로 주님의 인성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두 번째 말씀은, 주님의 인성으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능력이 모든 가난한 자와 눈먼 자, 포로 된 자와 억눌린 자를 구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눈먼 자, 포로 된 자, 억눌린 자가 자기와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어느 만큼은 가난한 자이고 눈먼 자이며, 그리고 포로 된 자이며 억눌린 자입니다. 그것을 알게 하시는 이가 주님이시고, 치유하시는 이 또한 주님이십니다. 주님의 그런 능력이 우리 성도님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영원히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35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 36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3:35-36)

 

아멘

 

원본

2017-07-02(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22(D4)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022. 2023-03-22(D4)-매일예배(2439, 눅4,14-22), ‘예수께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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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사십 일 광야 시험 (2)

 

 

5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이며 6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7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8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9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10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11또한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12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13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눅4:5-13)

 

주님은 (어머니로부터 받은) 인성(人性, this human)을 벗으셨을 때 신적 인성(the Divine human)을 입으셨다. 그것 때문에 주님은 신약 성경에 여러 번 언급된 바와 같이 자신을 ‘인자’(the son of man)라 부르시고, 또 ‘하나님의 아들’(the son of God)이라 부르셨다. ‘인자’로서 주님은 진리 자체를 뜻하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주님은 선 자체를 뜻하는데, 그것은 주님의 인간 본질(human essence)이 신성하게 되었을 때 그 본질에 속한 것이었다. ‘인자’의 상태는 주님의 겸비(謙卑)와 관련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의 상태는 주님의 영화와 관련이 있다. (AC.2159:2, 이순철 역)

 

※ AC(Arcana Coelestia, 천국의 비밀) 2159:2번 글에 대한 Clowes 영역본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And when he had put off this human, he put on the Divine human, from which he called himself the ‘son of man’ as we find many times in the Word of the New Testament; and also the ‘son of God’; and by the ‘son of man’ he meant the truth itself, and by the ‘son of God’ the good itself, which belonged to his human essence when this was made Divine. The former state was that of the Lord’s humiliation, but the latter that of his glorification (treated of before, n. 1999). (AC.2159:2, Clowes 역)

 

이는 창세기 18장 3절, ‘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에 관한 주석 중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부분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

 

 

다음은 창14:1-11입니다.

 

1당시에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과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이 2소돔 왕 베라와 고모라 왕 비르사와 아드마 왕 시납과 스보임 왕 세메벨과 벨라 곧 소알 왕과 싸우니라 3이들이 다 싯딤 골짜기 곧 지금의 염해에 모였더라 4이들이 십이 년 동안 그돌라오멜을 섬기다가 제십삼년에 배반한지라 5제십사년에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이 나와서 아스드롯 가르나임에서 르바 족속을, 함에서 수스 족속을, 사웨 기랴다임에서 엠 족속을 치고 6호리 족속을 그 산 세일에서 쳐서 광야 근방 엘바란까지 이르렀으며 7그들이 돌이켜 엔미스밧 곧 가데스에 이르러 아말렉 족속의 온 땅과 하사손다말에 사는 아모리 족속을 친지라 8소돔 왕과 고모라 왕과 아드마 왕과 스보임 왕과 벨라 곧 소알 왕이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서 그들과 전쟁을 하기 위하여 진을 쳤더니 9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과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 네 왕이 곧 그 다섯 왕과 맞서니라 10싯딤 골짜기에는 역청 구덩이가 많은지라 소돔 왕과 고모라 왕이 달아날 때에 그들이 거기 빠지고 그 나머지는 산으로 도망하매 11네 왕이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 가고 (창14:1-11)

 

여기 보면, 아브라함의 아브람 시절, 엘람 왕 그돌라오멜의 연합군과 소돔 왕 베라의 연합군이 싯딤 골짜기에서 전쟁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전쟁은 소돔과 고모라의 왕들이 그돌라오멜을 12년 동안 섬기다가 이듬해 배반한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돌라오멜은 주변의 다른 왕들과 손을 잡고 그들을 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돌라오멜의 연합군과 소돔 왕의 연합군이 싯딤 골짜기에서 만났는데, 결과는, ‘싯딤 골짜기에는 역청 구덩이가 많은지라 소돔 왕과 고모라 왕이 달아날 때에 그들이 거기 빠지고 그 나머지는 산으로 도망하매’, 즉 그돌라오멜의 연합군이 소돔 왕의 연합군을 이긴 것입니다.

 

주님의 광야 시험에 대해 설명하면서 왜 갑자기 이런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이 전쟁이 단순히 가나안 땅에 있었던 왕들의 전쟁만 말하는 게 아니고요, 그 속뜻으로는 어린 시절 주님의 내면에서 벌어진 영적 전쟁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40일간 광야 시험으로 압축해서 표현한 주님의 시험 안에는 당연히 이 전쟁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전쟁이 주님에게 어떤 시험이었는가를 속뜻을 통해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서 그돌라오멜 왕과 그 친구들은 어린 시절 주님 안에 있었던 선과 진리들인데, 진정한 선과 진리는 아니고 외견상 선과 진리입니다. 그리고 소돔의 왕들은 외견상 선과 진리 안에 감추어진 이기적인 성향을 나타냅니다. 외견상 선과 진리라는 건 이를테면, 젖먹이들의 천진난만함 같은 것이 외견상의 선과 진리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순수하고 선하게 보이는 그것을 외견상의 선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 천진함 속에 이기적인 것이 숨어있으며, 그러므로 진정한 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소돔과 고모라의 왕들이 그돌라오멜 왕을 섬겼던 기간은, 이기적인 성향들이 천진난만함 속에 가려져 있는 기간입니다. 그러다가 지각이 점점 발달하면서 이기적인 것들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이기적인 것이란, 자기 것을 챙기려 하고, 다른 친구들의 것을 빼앗으려 한다든가 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러한 것이 이기적 성향이 드러나는 것이고, 소돔의 왕들이 그동안 섬기던 그돌라오멜에게 반역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때부터 당신 안의 이기적인 성향과 싸우기 시작하셨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주님은 일찍부터 당신 안에 계신 여호와의 신성으로부터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 가르침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을 바탕으로 당신의 인성(인간성) 안에 이기적인 것들이 있다는 것을 이미 보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 이기적인 것들과 치열하게 싸우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돌라오멜 왕의 승리는 그 싸움에서 주님이 승리하신 것을 의미하고요, 그리고 외견상의 선 안에 감추어진 이기적인 것들이 정화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소돔 왕의 군대 가운데 살아남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말씀에는 그들이 산으로 도망했다고 합니다. ‘’은 본래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의미합니다만, 여기서는 반대로 자아에 대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산으로 도망했다는 것은, 이기적인 것들이 그 근원인 자아 사랑으로 돌아가 또 다른 시험을 준비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아직 완전히 이기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에게 이런 시험들이 있었다는 것을 배경으로 아시고, 오늘 본문으로 이제 돌아가겠습니다. 오늘 5절로 7절까지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5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이며 6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7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한글 성경에는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로 되어 있지만, 영어 성경에는 ‘주님을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갔다’로 되어 있습니다. ‘’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자아에 대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산으로 데리고 가는 것은 마귀가 주님의 인성 안 자아에 대한 사랑을 시험하는 모습입니다. 인간에게 자아와 세상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시험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마귀가 시험할 단서, 꺼리가 없어지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마귀가 주님을 산으로 데리고 간 것은 주님의 자아에 대한 시험입니다. 마귀는 주님에게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여 주면서, 그 권위와 영광을 모두 주겠다고 합니다. 여기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이며’라는 말은, 시험은 아주 순간적으로 온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주님을 생각하면 고맙고 마음이 울컥하다가도, 순간적으로 다른 마음이 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주님이 주시는 선과 진리보다 세상 돈이나 명예, 쾌락이 더 힘이 있는 것처럼 생각되는 마음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잠깐씩 그런 마음이 들 때가 있는데요, 그런데 그것이 모두 마귀가 주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마음이 들 때, 그냥 지나가도록 내버려둬야 합니다. 그 마음을 덥석 붙잡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는 순간 마귀에게 절하는 것이 되며, 그래서 그것은 지옥의 노예가 되는 일입니다.

 

※ 가령, 로또의 유혹 같은 것도 여기 해당되지 싶습니다. ‘만약 내게 수억의 현금이 생기면 나는 그 돈을 참 은혜롭게 주님 영광 위해 잘 사용할 텐데...’ 하면서 말이지요...

 

마귀는 주님께 자기에게 절하면 천하만국의 권위와 영광이 다 네 것이 되리라고 말하지만, 지옥의 노예가 되는 삶에 무슨 권위와 영광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마귀가 하는 말은 다 거짓말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시험하는 마귀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8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신명기 6장 13절,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는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그 순간 마귀는 주님께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능력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주님에 대한 공격이 좌절되자 마귀는 지체함 없이 바로 또 다른 시험을 준비합니다. 그 시험에 대해서 9절 이하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9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10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11또한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한글 성경에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로 되어 있지만, 영어 성경에는 ‘예루살렘 성전의 첨탑 위에 주님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예루살렘 성전’은 교회의 교리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교회를 ‘새 예루살렘 교회’라고 부를 때는 그냥 새 교회라는 뜻이 아니고, 이 교회의 교리가 전혀 새로운 교리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은 ‘교회의 교리’를 뜻합니다. 그리고 ‘성전 위의 탑’은 ‘자아에 대한 사랑’, 또는 ‘세상에 대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앞 절에서 주님을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간 것과 여기서 성전 탑 꼭대기에 주님을 데리고 간 것은 같은 의미입니다. 왜 그럴까요? 높은 산이나 탑은 모두 우리의 자아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자아가 높은 산이나 첨탑과 같이 그렇게 대단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가 주님을 성전 위 탑 꼭대기로 데리고 간 것은, 주님의 인간 안에 있는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 안으로 마귀가 들어와 주님을 유혹하는 모습입니다.

 

마귀는 주님에게 성전에서 뛰어내리라고 했습니다. 영어 성경 표현에는 그냥 뛰어내리라고 한 것이 아니고, 아래로 몸을 던지라고 했습니다. 말씀에서 아래로 몸을 던지는 것은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548번 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사람이 내세에 들면 먼저 천사들이 맞아들여 모든 선한 도움을 주고, 주님과 천국, 천사의 삶에 대해 들려주며 진리와 선으로 가르친다. 그러나 그 사람이 만일 세상에서 그 모든 것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마음속으로 그것을 부인하고 무시해왔으면, 몇 마디 나눠본 후에 그 천사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한다. 그것을 감지하자마자 천사들은 그를 떠나게 된다. 다른 이들과의 만남을 여러 번 거치고 나서 마침내 그는 자기와 같은 악 안에 있는 사람들과 어울린다. 이렇게 되고 나면, 그는 주님으로부터 돌아서고, 자기가 세상에서 연결되어 살던 바로 그 지옥을 바라본다. 그 지옥 안에는 자기와 비슷한 악에 대한 사랑을 지닌 사람들이 살고 있다. 주께서는 천사를 통해서 그리고 천국에서 나오는 입류를 통해서 모든 영을 당신께로 이끄시지만, 악 안에 있는 영들은 거세게 저항하고, 마치 자기 자신을 주님으로부터 찢어내듯 하며, 밧줄에 끌려가듯 자기 자신의 악에, 즉 지옥에 끌려간다. 그렇게 끌려가기 때문에, 즉 그들의 악에 대한 사랑이 거기 따라가길 원하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의 자유로 지옥에 뛰어든다는 것이 확실해지는 것이다. 이 세상 사람들은 지옥에 대한 그들의 관념 때문에 이것을 믿지 못한다. 사실, 저 세상에서 지옥 바깥에 있는 사람들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오직 지옥으로 스스로 뛰어드는 사람들 자신에게만 그렇게 보인다. 이것은 그들이 자발적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악에 대한 불타는 사랑으로 지옥에 들어가는 사람은 머리를 아래로 하고, 발을 위로 한 채 뛰어드는 것처럼 나타난다. 이런 모습 때문에, 하나님의 힘에 의해 지옥으로 던져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상 모든 내용은 주께서는 아무도 지옥에 던지지 않으시며, 이 세상에 살 때나 죽은 뒤 영이 된 후에나 사람이 스스로 지옥에 뛰어든다는 것을 보여준다. (HH.548, 김은경 역) //

 

따라서 성전에서 몸을 던지라는 말은 예루살렘 성전, 즉 ‘교회의 교리에서 이탈하라’는 것이고, 그러므로 ‘지옥을 향해 몸을 던지라’는 뜻입니다. 마귀는 종종 이와 같은 유혹을 합니다. 마치 뱀이 하와를 시험하듯이 ‘네가 지키려고 힘쓰는 교회 교리는 너를 구속할 뿐이다. 그러므로 세상 즐거움에 몸을 던져라. 그리하면 네가 자유를 얻을 것이다’라고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것을 본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10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11또한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마귀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살지 않고 세상의 쾌락에 몸을 맡겨도 아무 탈이 없을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귀가 ‘기록되었으되’라고 한 것은 아래 시편 91편 11, 12절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11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12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시91:11-12)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해 우리를 유혹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시편의 이 말씀은 우리가 진리를 따라 살 때, 하나님의 영원한 보살핌과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지금 그 반대로 말하고 있습니다. 즉 ‘진리에서 뛰어내리더라도 하나님께서 아무 탈 없이 지켜 주실 것이다’라고 이야기하고요, 또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실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여기 ‘발이 돌에 부딪힌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발은 우리 몸의 가장 낮은 곳에 있기 때문에 가장 낮은 의식, 또는 가장 바깥쪽의 의식인 자연적인 의식, 즉 겉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돌은 진리를 의미합니다. 그러면 마귀는 왜 발에 대해 말했을까요? 사람이 선을 행하거나 악을 행하는 것은 모두 겉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실 것이다’라는 말은 ‘성전, 즉 교리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더라도 겉 사람이 진리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돌에 부딪힌다’ 그랬는데, 영어식 표현은 against stone입니다. stone은 돌이기 때문에 이 말은 돌, 즉 진리에 반(反)한다는 뜻이지요. 즉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실 것이다’라는 말은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니 아무렇게나 행동을 해도 진리에 반(反)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완전히 거듭나게 되면,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동을 하더라도 진리에 어긋나지 않습니다. 소위 공자가 말하는 ‘종심(從心)의 경지’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거듭나는 동안에는 마음이 원한다고 그대로 하면 안 됩니다. 철저히 진리의 명령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마귀는 지금 반대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들으신 주님께서

 

12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물을 달라고 모세를 다그쳤을 때, 그때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고 (신6:16)

 

신앙인들은 언제나 주님의 뜻에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자신의 뜻대로 해달라고 주님을 다그칩니다. ‘하나님께서 설마 당신의 자녀들을 버리시겠어?’라고 생각하며 진리를 어기려고 합니다.

 

※ 저는 비교적 꽤 최근까지도, 그러니까 스베덴보리를 알기 전까지는 위와 비슷한 생각과 태도가 제게도 있었는데요, 그것은 주님의 뜻을 잘 모르겠는 일이 생기면 그걸 가지고 충분히 기도하며 주님 뜻 알려고 하는 대신, ‘나는 주의 자녀이니 혹시 내가 하는 이 결정이 잘못된 선택이어도 주님이 수습해 주실 거야’ 하며 어떤 중요한 걸 결정하는, 좀 어처구니없는 태도들이었습니다. 물론 주님은 끝까지 저를 돌보셨지만, 조금 착하고 겸손했더라면,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 뜻 구하는 사람이었더라면 훨씬 질러갈 길을 굳이 꾸역꾸역 빙 돌아온 느낌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이 모두 마귀가 주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시며, 한마디로 일축해 버리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은 시험을 완전히 이기셨습니다. 본문에서는 그것을

 

13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이렇게 기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서에서는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 또는 인자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속뜻으로는 선 측면에서 본 주님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인자’는 진리 측면에서 본 주님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주님이 시험을 받으실 때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받으신 것이 아니라 인자로서 받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지옥은 진리는 공격할 수 있지만, 선은 공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한번 들어 보겠습니다. 진리를 가지고 따지는 사람들은 자주 시험에 듭니다. 왜냐하면 진리만 가지고는 거짓을 이기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이 많은 사람들은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선 안에는 주님이 주시는 모든 능력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짓과 부딪치면 언제나 이깁니다. 그런 이유로 해서 주님은 시험을 받으실 때 인자의 상태, 즉 진리의 상태로 받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말씀에서 마귀는 계속해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니’라고 말하면서 주님에게 절을 요구하고, 성전 첨탑에서 뛰어내리라고 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저는 이렇게 이해합니다. 인자의 상태에 계신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직 진리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주님을 이미 선의 상태가 되었다 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당신은 이미 전능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자기에게 절을 해도, 성전에서 뛰어내려도 아무 해가 없을 것이라고 주님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조금 전 말씀드린 것처럼, 선의 상태가 되면 마음이 원하는 대로 어떤 일을 하더라도 진리에 어긋나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귀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주님에게 있는 자아 사랑을 흔드는 것입니다.

 

우리도 가끔 자신이 많이 거듭났다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유혹이 올 때, ‘잠깐 이것을 즐기자. 그렇더라도 나는 언제든지 다시 본래(진리)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어’라고 하며, 쉽게 생각하고 자신 있어 하는데요, 그것은 마치 몸에 해로운 기호품을 끊었던 사람이 ‘나는 언제든지 이것을 끊을 수 있어’라고 하면서 다시 그걸 가까이하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그것은 마귀가 주는 생각이고요, 교만한 마음입니다. 마귀는 주님에게도 그런 생각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자의 상태에 계신 주님에게 ‘당신은 이미 선의 상태이니 아무 일이나 해도 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말씀에서는 그것을 마귀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고 하면서 주님을 유혹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그런 생각이 들 때 우리는 어떻게 물리칩니까? 그 방법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머리로만 기억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의 능력을 믿어야 하고요, 그리고 시험에서 이기겠다는 결의가 있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말씀 안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이 흘러들어와 모든 부정한 생각들을 흩어버리십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새 교회 모든 성도와, 또 진리 안에 있는 모든 분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사42:1)

 

아멘

 

원본

2017-06-11(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21(D3)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021. 2023-03-21(D3)-매일예배(2438, 눅4,5-13), '주님의 사십 일 광야 시험 (2)'.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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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사십 일 광야 시험 (1)

 

 

1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2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3마귀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4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눅4:1-4)

 

 

모든 시험은 사람의 사랑에 대한 공격이며, 시험은 그 사랑과 같은 정도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사랑이 공격받지 않으면 시험은 없다. 어떤 사람의 사랑을 파괴하는 것은 그의 생명을 파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곧 생명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생명은 전 인류에 대한 사랑이었다. 주님의 그 생명에 대해 시험이 허용되었고, 그것은 주님이 아주 어릴 때부터 세상에서의 마지막 시간에까지 계속되었다. (AC.1690)

 

※ AC(Arcana Coelestia, 천국의 비밀) 1690번 글에 대한 Clowes 영역본은 아래와 같습니다.

 

All temptation is an assault upon the love in which the man is, and the temptation is in the same degree as is the love. If the love is not assaulted, there is no temptation. To destroy anyone’s love is to destroy his very life; for the love is the life. The Lord’s life was love toward the whole human race, and was indeed so great, and of such a quality, as to be nothing but pure love. Against this his life, continual temptations were admitted, as before said, from his earliest childhood to his last hour in the world. (n. 1690:3).

 

이는 창세기 14장 10절, ‘싯딤 골짜기에는 역청 구덩이가 많은지라 소돔 왕과 고모라 왕이 달아날 때에 그들이 거기 빠지고 그 나머지는 산으로 도망하매’에 관한 주석 중 ‘그 나머지는 산으로 도망하매’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

 

 

오늘 예배를 드리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예배 인도를 담임이 하니까 마치 담임이 모든 일을 하는 것처럼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성가대의 찬양이 있고, 기도해 주시는 목사님이 계시고, 또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헌신하시는 우리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역할을 할 때, 우리 교회는 아름다운 교회, 경건한 교회,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로 성장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진리만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선이 있는 진리이어야 합니다. 우리 각자가 선이 있는 진리로서 묵묵히 헌신할 때, 그 진리는 이웃들의 마음에 조용히 젖어 들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로 성장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말씀을 시작하겠습니다.

 

창세기 12장 1, 2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창12:1-2)

 

사람들 대부분은 이 말씀이 아브라함이 아브람 시절, 여호와를 처음 만나 하란을 떠나는 모습을 그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속뜻으로 볼 때 이 말씀은, 주님께서 아주 어리실 때 당신 안에 계신 여호와를 처음 만나는 장면을 기술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고 주님이신 것이지요.

 

※ 말씀에 나오는 모든 등장인물은 주님의 표상입니다. 심지어 악인도 말입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자기 인생을 살다 갔지만, 사실은 마치 무대 위 배우들처럼 주님을 연기한 것입니다.

 

주님도 처음에는 당신 자신이 보통의 어린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점점 지각이 생기면서 당신 안에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여호와로부터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 또 어떤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여기서는 아브라함의 이름을 ‘아브람’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은 거룩하신 주님을 나타냅니다. 영어로 알파벳 ‘H’자가 그런 뜻이라고 합니다.

 

※ AC 1416번 글 두 번째 항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Concerning Abraham it is said: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창17:5) Thy name shall not any more be called Abram, and thy name shall be Abraham, for the father of a multitude of nations have I given thee (Gen. 17:5).

 

The letter h in “Abraham” was taken from the name Jehovah, on account of his representation of Jehovah or the Lord. In like manner it is said of Sarai:

 

15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16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창17:15-16) Thou shalt not call her name Sarai, but Sarah shall her name be. And I will bless her, and also give thee a son of her; thus I will bless her, and she shall become nations; kings of peoples shall be of her (Gen. 17:15–16);

 

where “nations” denote the celestial things of love, and “kings of peoples” the spiritual things of faith thence derived, which belong to the Lord alone.

 

이는 창세기 12장 2절,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에 관한 주석 중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에 나오는 내용으로, ‘아브라함’(Abraham)의 ‘h’는 아브라함이 여호와 혹은 주님을 표상하기 때문에 그 이름 여호와에서 취한 것이라고 합니다. //

 

반대로 ‘아브람’은 거룩하게 되시기 전의 주님을 나타냅니다. 주님이 거룩하지 않다고 하는 이유는, 주님께서 처음 세상에 오셨을 때, 그러니까 아주 어린 시절, 주님의 인성 가운데는 마리아로부터 받은 유전적 악이 그대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에서는 그것을 아브라함이 하란에서 세겜으로 옮길 때 ‘그 땅에 가나안 사람이 거주하였다’라는 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에서 ‘가나안 사람’은 바로 주님 안에 있는, 마리아로부터 받은 유전적 악인 것입니다.

 

주님 안에 악이 있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그 악은 주님 자신이 저지른 악이 아니며, 모두가 마리아로부터 유전된 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왜 당신 안에 악이 있도록 허용하셨을까요? 그 첫 번째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인간의 몸을 입으실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악이 있어야 시험을 불러들일 수 있고요, 그리고 그 시험을 통해 지옥을 정복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악이 없으면 시험도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 안에 악을 허용하시고, 그것을 통해 시험을 불러들이셨습니다. 주님께서 당신 안에 악을 허용하신 세 번째 이유는, 주님은 당신이 시험을 당하고 거룩하게 되신 것처럼, 인간도 그렇게 거듭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스스로 거듭남의 모범이 되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주님의 그런 사랑을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면서 말씀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 주님은 천국보다 크시고 지옥보다 크셔서 신성 그 자체로 직접 오실 수 없으십니다.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나면 천국도 지옥도 그냥 소멸해 버리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주님은 천국이든 지옥이든 또는 이 세상이든 지으신 이 피조세계에 임하실 때는 피조물들을 보호하시기 위해 일종의 보호장치를 사전에 마련하십니다. 그것이 예를 들면, 삼층천 천사들에게조차 투명한 얇은 겉옷을 입히신 것이고요, 인성을 입으시고 지옥을 찾으신 것입니다. 주님은 지옥, 즉 지옥에 있는 모든 비참한 영들조차 여전히 사랑하시기에 주님의 방문으로 그들이 소멸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본문 1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1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셨다’라고 합니다. 요단강은 가나안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강입니다. 그래서 요단강을 건너거나, 또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는다고 하는 것은, 영적인 의미로는 신앙의 진리를 처음 받아들일 때를 의미합니다. 신앙의 진리를 받아들여야 우리는 교회에 속한 사람이 될 수 있고요, 또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단강을 건넌다는 것은 신앙의 진리를 처음 받아들일 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때는 마치 아기가 걸음마를 배우기도 전의 상태와 같아서 진리를 배우기는 하는데, 아직 행함은 없는 상태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만 있고, 아직 선은 없는 상태입니다. 주님도 처음에는 그런 과정을 거치셨습니다. 그러다 점차 진리를 뜨겁게 사랑하게 되셨을 것입니다. 진리를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자기가 배운 진리를 삶을 통해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진리는 더 이상 지식적인 진리가 아니라, 그 바탕에 선이 있는 진리로 변하게 됩니다. 본문에 주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는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주님도 어린 시절에는 당신 안에 성령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지각할 뿐 아니라 뜨겁게 사랑하면서 성령이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계속되는 말씀에서 주님은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셨다’고 합니다. 광야는 시험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광야로 가신 것은 주님에게 시험이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성령에 이끌리셨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주님께서 성령 충만할 때까지 기다리셨다가 시험을 불러들이셨다는 뜻입니다. 성령의 역사, 즉 선이 있는 진리의 역사가 없으면 시험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주님도 예외가 아니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성령 충만할 정도로 영적으로 성장하실 때까지 기다리셨다가 시험을 불러들이신 것입니다. 주님은 단 한 번의 시험도 실패하시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십 일 동안’이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시험이 처음 시작될 때부터 끝날 때까지 전체 기간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볼 때, ‘사십 일’은 주님이 아주 어릴 적부터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시기까지의 모든 기간을 의미합니다.

 

※ 말씀에서 이 ‘40’이라는 숫자는 여러 번 나옵니다. 노아의 홍수 때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창7:4)라든지, 모세가 호렙산에서 보낸 기간인, ‘모세가 사십 일 사십 야를 산에 있으니라’(출24:18)라든지,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서 보낸 기간인, ‘이스라엘 자손이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으니’(출16:15), 그리고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온, ‘사십 일 동안 땅을 정탐하기를 마치고 돌아와’(민13:25) 등을 볼 때,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이 ‘사십’이라는 숫자는 ‘전체’, ‘모두’를 의미함을 알 수 있습니다. 참고로, 성경 앱을 열고, ‘사십’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하시면 어마어마하게 나오는 걸 보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40일간의 시험은 그 속뜻으로는 말씀에 기록된 것처럼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직후에 있었던 일이 아닙니다. 즉 선과 진리에 대한 지각이 생기면서부터 주님은 끊임없이 시험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영적 성장은 보통의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빨랐기 때문입니다. 그것에 대해 누가복음 2장 52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눅2:52)

 

주님이 아주 빠른 속도로 거룩하게 되시는 모습을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음 2절과 3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2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3마귀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이 말씀에서 주님을 시험하는 ‘마귀’는 지옥 전체를 의미합니다.

 

※ 다음은 이와 관련, ‘천국과 지옥’ 544번 글입니다.

 

지금까지 세상에는 지옥을 관장하는 한 악마가 있으며, 그는 빛의 천사로 지음 받았으나 반역하여 그 일당과 함께 지옥에 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믿음이 퍼져있는 것은 사람들이 성경 말씀에 마귀, 사탄, 루시퍼라는 이름이 언급되어 있는 구절들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귀’와 ‘사탄’은 지옥을 의미한다. ‘마귀’는 악마라고 불리는, 가장 악한 사람들이 있는 뒤쪽 지옥이다. ‘사탄’은 악령이라고 불리는 덜 악한 사람들이 있는 앞쪽 지옥이다. ‘루시퍼’는 바벨 또는 바빌론에 속한 사람들로, 천국까지도 지배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혼자서 지옥 전체를 주관하는 악마는 없다는 것은 다음의 사실로도 분명히 알 수 있다. 지옥은 천국과 마찬가지로 모두 사람으로 이루어진다는 것(311–317항), 그리고 창조 이래 지금까지 지옥에 간 사람은 무수히 많으며, 그 모두가 다 이 세상 삶에서 신성을 적대한 정도만큼 악마라는 사실이다(311, 312항). //

 

그러니까 지옥 전체가 주님을 넘어뜨리기 위해 덤벼들었던 것입니다. 주님을 넘어뜨린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말하면, 주님의 사랑, 즉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또 주님께서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셨다’고 했는데, 이 말씀은 음식을 드시지 못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물론 주님께서 광야에서 음식을 드시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적 의미로 보면 그런 뜻이 아니고, 시험 가운데서 주님이 영적인 양식을 전혀 섭취하지 못하셨다는 뜻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영적 양식을 섭취하지 못하는 것처럼 느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시험 중에 그런 경험을 합니다. 자신에게 진리와 선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주님의 보살핌이 없이 혼자 싸운다는 뜻입니다. 그때 지옥은 우리에게 있는 거짓과 악을 들춰내면서 계속 우리를 추궁합니다. ‘너는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야’라고 하면서 우리를 절망 상태로 몰아넣습니다. 만약 그때 주님께서 함께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싸움을 이길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시험 중에 우리와 가장 가까이 계십니다. 다만 우리가 그렇게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주님도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부르짖으시지 않았습니까!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마27:46)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아무 것도 잡수시지 못한다는 것은 극한의 시험 속에서 여호와께서 당신을 버리시는 것 같이 느끼시는 것이고, 그래서 여호와로부터 진리와 선이 전혀 흘러들어오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악을 끊고 선을 행하는 일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마음은 간절히 원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그런 어려움을 느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느끼시는 허기(虛飢)는 본질적으로는 선에 대한 갈증입니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 있습니다.

 

마귀가 주님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은 진리를 의미하고, ‘’은 세상의 양식을 의미합니다. 본래 떡은 영적 양식인 선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반대로 쓰였습니다. 그렇다면 세상 양식은 어떤 것입니까? 음식이나 재물, 건강이나 명예 같은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육신의 생명을 살찌울지는 몰라도 영을 살찌울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유한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마귀는 돌을 떡이 되게 하라고 합니다. 썩어버릴 떡을 위해서 영원한 진리를 버리라고 유혹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시험 중에 그런 유혹을 받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나 건강을 잃었을 때, 또는 어떤 욕망에 시달릴 때, 진리를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 것이 모두 마귀의 시험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4절입니다.

 

4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주님은 ‘기록된 바’라고 말씀하세요. 신명기 8장 3절에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8:3)

 

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시험을 이기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 이외에 다른 것은 없습니다. 인간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 안에는 반드시 선이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선이 있는 말씀을 소유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행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에게 있는 말씀 가운데 선이 깃들고 능력이 생깁니다. 주님은 그렇게 해서 첫 번째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서에는 주님께서 시험받으셨다는 기록이 별로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40일간 광야 시험과 겟세마네 동산의 시험, 그리고 십자가상에서의 마지막 시험, 그것이 거의 전부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조차도 당신의 시험에 대해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광야 40일간의 시험은 주님 생애에 잠깐 있었던 시험이 아닙니다. 아주 어릴 적부터 시작, 숨을 거두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지속되었던 모든 시험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시험은 인간의 시험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 시험의 강도는 인간에 대한 주님의 무한한 사랑에 비례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시험이 얼마나 지독하고 가혹한 것이었는지는 인간의 머리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 모든 시험을 묵묵히 이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계시는 동안의 모습으로도 주님이 얼마나 진실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분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마귀는 허기와 갈증을 집요하게 파고들면서 주님을 시험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배고픔은 세상의 떡에 대한 갈증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선에 대한 갈증이며 인간에 대한 끝없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귀에게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은 주님의 시험에 대한 것이지만 동시에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시험을 이기시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행할 때 능력이 있습니다. 모든 새 교회 식구들과 또 이 진리 안에 있는 모든 형제자매께서는 이 말씀 가운데서 크고 작은 시험들을 이겨내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사53:7)

 

아멘

 

원본

2017-05-28(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20(D2)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020. 2023-03-20(D2)-매일예배(2437, 눅4,1-4), '주님의 사십 일 광야 시험(1)'.pdf
0.47MB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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