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 들리지 않으려면

 

 

31갈릴리의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 32그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위가 있음이러라 33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34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35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 36다 놀라 서로 말하여 이르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위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하더라 37이에 예수의 소문이 그 근처 사방에 퍼지니라 (눅4:31-37)

 

 

거듭남의 첫 번째는 진리를 아는 것이고, 두 번째는 진리를 인정하는 것이며, 세 번째는 진리를 믿는 것이다. 진리를 아는 것과 인정하는 것과 믿는 것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다음의 사실로 알 수 있다. 즉 가장 나쁜 사람들도 진리를 알 수는 있다. 그러나 인정하지는 않는다. 유대인이나 그럴듯한 논리로 교리를 파괴하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그리고 진리를 인정하기는 하는데 믿지 않는 사람도 있다. 어떤 경우에 그들은 진리를 강론하고, 입증하며 열정적으로 설득하기도 한다. 그러나 진리를 믿지 않으면 누구도 신앙을 가질 수는 없다. (AC.896, 이순철 역)

 

※ AC(Arcana Coelestia, 천국의 비밀, 라틴) 위 896번 글에 대한 Clowes 영역 및 Potts 개정본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To know is the first thing of regeneration, to acknowledge is the second, to have faith is the third. What difference there is between knowing, acknowledging, and having faith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 worst men may know, and yet not acknowledge, like the Jews and those who attempt to destroy doctrinal things by specious reasoning; and that unbelievers may acknowledge, and in certain states preach, confirm, and persuade with zeal; but none can have faith who are not believers. (AC.896, Clowes 역)

 

이는 창세기 8장 13절, ‘육백일 년 첫째 달 곧 그달 초하룻날에 땅 위에서 물이 걷힌지라 노아가 방주 뚜껑을 제치고 본즉 지면에서 물이 걷혔더니’에 관한 주석 중 ‘노아가 방주 뚜껑을 제치고 본즉’(And Noah removed the covering of the ark and saw.)에 대한 내용입니다. //

 

 

지난 시간에는 주님께서 나사렛 사람들에게 큰 화를 당할 뻔하셨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이 주님을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곳을 조용히 떠나십니다. 그리고 오늘은 주님께서 다시 가버나움으로 오셔서 말씀을 전하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31절입니다.

 

31갈릴리의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

 

갈릴리 가버나움의 동네란, 속뜻으로는 이방인의 교리를 뜻합니다. 동네는 진리나 교리를 뜻하고, 갈릴리는 이방 지역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에서 가르치신다는 것은 이방인의 진리를 가지고 사람들을 가르치신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건 아니고, 주님께서 당시 갈릴리 지역에서 전파하신 말씀이 유대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는 마치 이방인의 진리와 같았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주님의 말씀은 그들의 주장과는 전혀 다른 진리였습니다. 그러한 사정은 어쩌면 오늘날 새 교회가 부딪치고 있는 현실과도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새 교회 진리를 처음 접하시는 분들은 이 진리가 기독교 주류 교회들의 교리와 많이 다르다는 걸 금방 느끼십니다. 그리고 오히려 기독교회가 아닌 다른 종교의 교리와 통하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모든 순수한 종교의 교리는 신앙과 사랑을 분리하지 않고 하나라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회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오직 믿음’, 곧 신앙만으로 구원받는다 가르치는데요, 그것은 신앙과 사랑이 하나라는 걸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 기독교회의 입장에서 보면, 새 교회 가르침은 이단 종교, 종파 가르침 같이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에서는 그걸 주께서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에서 가르치시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 양쪽을 다 있어 본 사람으로서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제가 저 자신을 ‘양쪽을 다 있어 봤다’ 하는 이유는, 저 자신 현재 개신교 침례교 목사이면서, 그러나 한편으로 스베덴보리의 글들이 주님으로 말미암았음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유튜브나 인터넷상에 떠도는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저 자신 스베덴보리의 글들을 직접 읽고 확인하면서 번역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비록 ‘오직 믿음’ 교리를 배운 개신교인이라 할지라도 그가 참으로 의롭고 올바름의 사람이라면 본인이 직접 이 글들을 읽어 주님을 만나게 될 줄 저는 믿습니다. 그가 참으로 진리 만나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이라면 다른 누구의 글이나 의견, 기사나 소문이 아닌, 본인이 직접 일대일로 주님께 나아갈 것이기 때문이며, 주님은 그런 사람을 예외 없이 만나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바로 진리이시기 때문이지요.

 

11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12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13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렘29:13)

 

스베덴보리(1688-1772) 시절 유럽 기독교와 개신교처럼 지금도 특히 한국 기독교와 개신교는, 그러니까 가톨릭은 ‘행위’에다 이것저것 뭘 좀 교리적으로 섞었고요, 개신교는 ‘오직 믿음’으로 일단 구원은 받아놓고, 그러고 나서 그에 합당한 체어리티의 ‘행위’로 삶을 받쳐줘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입장이지요. 실상은 전도와 선교에 더 힘을 쓰고 있지만 말입니다. 마치 속 사람은 뭐 잘 모르겠고, 일단 전도 많이 하면, 선교 많이 하면 하늘 상급이 많으니까... 라고 믿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특히 개신교인들은 자신들의 ‘오직 믿음’ 교리에 대한 확고한 태도가 주님의 신성(Divine)인 ‘’(good)과 ‘진리’(truth)를, 그리고 ‘체어리티’(charity)와 ‘신앙’(faith)이라는 신적 인성(Divine Human)을 부인하는 것임을 모르고 있습니다. 사도들의 서신서들을 주님의 말씀으로 믿고 있기 때문이지요. 제가 뭐 그렇게 거창한 사람은 못 되어서 이렇게 요약해도 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참고로, 기독교는 가톨릭과 개신교, 정교회 등을 포함한, 좀 더 큰 카테고리입니다. //

 

본문에서는 또 주님께서 안식일에 말씀을 가르치셨다고 합니다. 안식일 관련한 말씀들은 아래와 같이 엄중합니다.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일지니라 (출31:15)

 

그래서인지 유대 율법 가운데서도 이 안식일 법은 아주 엄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이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에 대한 속뜻을 좀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요, 그것은 무슨 일이든 자신의 자아로부터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아가 시키는 대로 하지 말고, 주님 말씀을 따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유대교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겉으로만 생각했지요. 그래서 언젠가 주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을 지나다 이삭을 따 먹었을 때, 어떻게 안식일을 어길 수 있는가 하고 주님을 질책했습니다. 본래 안식일의 의미는, 주님께서 지옥의 시험을 모두 이기시고, 영광스럽게 되시는 것을 나타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인성과 내면에 계시는 신성, 곧 여호와 하나님이 하나가 되는 걸 의미하지요. 그리고 그렇게 되셨을 때의 주님의 상태, 곧 더 이상 지옥의 도전이 없는, 주님 안 평화의 상태가 바로 안식의 상태, 그러니까 안식일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은 영화(榮化)하신 주님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해서, 그동안 주님을 나타내던 모든 표상이 사라졌습니다. 빛 자체이신 주님이 오시자 더 이상 그 빛을 대신하던 역할 대행들은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안식일은 주님으로부터 말씀을 배우고, 이웃사랑, 곧 체어리티(charity)를 실천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께서 안식일에 진리를 가르치고 병자를 고치신 것은, 안식일에 체어리티를 실천하는 모범을 친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런 안식일에 대한 속뜻을 전혀 몰랐고, 그저 겉으로만 지킨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안식일’이 나와서 잠깐 다루었습니다.

 

32절에는 주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32그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위가 있음이러라

 

이 말씀에서 ‘놀라니’는 사람의 내면 영의 상태가 바뀌는 걸 의미합니다. 영의 상태가 바뀐다는 건 예를 들면, 아주 이기적이던 사람이 진심으로 다른 사람을 배려하기 시작했다면, 그는 영이 변한 것입니다. 또 자기도 몰랐던 단점을 깨닫고, 그것을 고치려고 노력한다면, 영이 변한 것입니다. 또 큰 잘못을 해서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던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게 된다면 그 역시 영의 상태가 변한 것입니다. 그래서 영의 상태가 변한다는 건 영적으로 한 단계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러한 변화는 사람의 힘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능력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모두 놀랐다고 했습니다. 주님 말씀의 능력으로 그들의 영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는 그 말씀이 권위가 있음이러라’ 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에 능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능력이 없다면 어떻게 영이 바뀔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주님 말씀에 놀라고, 그 말씀에 권위가 있음을 느꼈던 것입니다. 인간의 진리 안에는 사랑이 없지만,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 안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그 사랑이 인간을 변화시킵니다. 그것은 겨울의 햇볕은 능력이 없지만 따뜻한 봄볕은 만물을 생장시키는 능력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가버나움 사람들의 영이 바뀌고 있을 때, 한 귀신 들린 자가 나타났습니다. 그에 대해 33절과 34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33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34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여기서 ‘귀신’은 진리를 왜곡하는 지옥의 영을 말합니다. 지옥의 영들은 말씀의 진리를 어떻게 해서든지 왜곡, 곡해해서 그것이 마치 진리인 것처럼 꾸밉니다. 왜곡된 진리로 사람들을 지옥으로 끌고 가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귀신 들린 자는 진리를 왜곡하는 영에게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진리를 왜곡하는 영에게 사로잡힌 사람은 스스로 대단한 지적 능력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말씀의 의미를 마음대로 왜곡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가르치는 진리 가운데는 그렇게 왜곡된 진리들이 많이 있습니다.

 

귀신 들린 자가 주님을 향해 큰 소리로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앞부분에서는 ‘우리’라고 했고요, 뒷부분에서는 ‘’라고 했습니다. 귀신 들린 자는 왜 그렇게 말했을까요? 앞에서 ‘우리’는 귀신 들린 자를 사로잡고 있는 지옥의 영들을 나타냅니다. 그의 내면에 지옥의 영들이 한 둘이겠습니까? 얼마나 많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라고 소리 지른 것은, 주님, 또는 진리에 대한 반감을 나타냅니다. 거짓 진리를 진리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은 참 진리가 나타날 때 진리를 혐오합니다. 둘은 본질적으로 서로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끔 다른 종교나 교회에 계신 분들과 진리에 대해서 말할 때가 있습니다. 제가 먼저 말하는 경우는 없고, 그분들이 당신의 교회에서는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고 물어오면서 대화가 시작되는데, 그때 저희 교회의 가르침을 설명하면 조금 놀라거나 거리를 두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어쩌면 그런 분들의 반응이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앞에서 ‘우리’라고 한 것은 지옥의 영들이 하는 말이고, 주님에 대한 반감, 또는 진리에 대한 혐오감을 나타냅니다. 그러면 뒷부분에 ‘’는 누구일까요? 그것은 귀신 들린 사람, 자신을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천사 또는 지옥의 영으로부터 영향을 받습니다.

 

※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Heaven and Its Wonders and Hell) 33장 ‘천국과 인류의 결합’(The Conjunction of Heaven with the Human Race) 292번 글입니다.

 

각 사람에게는 선한 영들과 악한 영들이 와있다. 선한 영들을 통해서는 사람은 천국과 결합되고, 악한 영들을 통해서는 지옥과 결합된다. 이 영들은 천국과 지옥 사이에 놓여 있는 중간 영계에 있다. 이곳에 대해서는 앞으로 특별히 다룰 것이다. 이 영들이 사람에게 오면 사람의 기억 전체 안으로 들어가고, 그렇게 해서 생각 전체에 들어간다. 이때 악한 영은 사람의 악한 기억과 생각 속으로, 선한 영은 선한 기억과 생각 속으로 들어간다. 이 영들은 자기들이 사람과 같이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그들이 사람과 같이 있을 때, 그 사람의 모든 기억과 생각이 자기 것인 줄 안다. 또 그들에게는 그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 태양계 내의 것은 아무 것도 그들 시각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영들이 자기가 사람과 같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도록 각별히 배려하신다. 만일 그들이 알아차리면 사람에게 말을 걸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악한 영의 경우, 사람을 파괴하려 들기 때문이다. 악한 영들은 지옥과 결합되어 있으므로, 그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바로 사람의 영혼을, 즉 그의 신앙과 사랑을 파괴하고, 사람의 몸까지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들이 사람과 대화를 하지 않으면 그런 일이 없다. 이 경우, 그들은 자기의 말과 생각이 사람에게서 온 것임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서로 나누는 말도 사람에게서 온 것인데도 그들은 자기가 하는 생각과 말이 자기 것인 줄 믿는다. 그리고 누구나 자기 것은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영들은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도록 그들이 모르는 제재를 받는다. 나는 여러 해 동안 계속되는 경험의 결과로 사람과 영들과의 이러한 결합에 대해 너무도 잘 알게 되었다. 내가 이보다 더 잘 아는 것이 없을 정도이다. (HH.292, 김은경 역) //

 

지옥의 영이 지배할 때 사람들은 생각지도 않은 엉뚱한 말을 해서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줍니다. 그런가 하면 자기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 교묘하게 남을 속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모두 지옥 영들이 하는 장난입니다. 그러나 그러다가도 온전한 정신으로 돌아올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때가 귀신 들린 자가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라고 말할 때입니다. 그러니까 귀신이 들려 어쩔 수 없이 끌려다니기는 하지만 진리에 대한 인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귀신 들린 자가 그렇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라고 말했을 때, 주님께서 바로 그의 내면에 있는 귀신을 쫓아내 주셨습니다. 35절에서는 그것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35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

 

앞에서 잠깐 말씀드린 것처럼 거듭남의 첫 번째 단계는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아야 그것을 인정하고, 자기의 신념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거듭남의 첫 번째는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귀신 들린 자가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라고 고백했을 때, 즉시 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셨습니다. 진실을 왜곡하는 영들에게 사로잡힌 사람들이 그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주님의 도우심을 받아 진실은 진실이라 하고 거짓은 거짓이라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우리를 지옥 영들의 손아귀에서 건져 주십니다.

 

주님이 귀신을 꾸짖어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나오면서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렸습니다. 귀신이 사람을 넘어뜨리는 모습은, 참된 진리가 나타났을 때, 그 앞에서 거짓 진리가 수치를 당하는 모습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제까지는 자기가 믿는 것이 진리라고 믿었는데, 그것이 참된 진리 앞에서 거짓이라는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으니 얼마나 수치스럽겠습니까? 그것이 귀신이 주님 앞에서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는 모습입니다.

 

※ 이쯤에서 떠오르는 제 영적 체험이 하나 있는데요, 과거 정원 목사의 저서, ‘대적기도’를 읽고, 잠자리에 누워 ‘귀신아!’ 따라 해 보다가 내 안에 숨어든 악령을 어렴풋이 보게 된 체험이었습니다. 지난 2013년 12월 15일 주일 밤에 있었던 일인데, 다음은 그날의 일지에 적힌 내용입니다.

 

자정 즈음, 다시 치통 시작, 잠결에 ‘귀신아!’ 하였더니 갑자기 온몸에 전율이 오래도록 지속, 정원 목사님이 대적기도 책에서 기술한 그대로의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직감, 내 안에 뭔가가 숨어있다가 들켜 어쩔 줄 몰라 하는 듯한 느낌 받음,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나가라’ 하는데 혀가 꼬여서 발음이 잘 안됨, 아내, 내가 잠꼬대를 하는 줄 알고 대적기도 중인 나를 계속 흔들어 댐... 전율이 잦아들 즈음, 치통도 사라짐, 책의 내용 그대로여서 너무 신기, 아내에게 자초지종 설명

 

제 안에서 몰래 활동하던 악한 영이 그만 갑자기 들키는 바람에 저쪽 주방 정수기 쪽으로 황급히 숨는 무슨 다급함이었지요. 형체는 그냥 검은 그림자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참 놀라운 건, 이 체험 후, 저를 평생 괴롭히던 혈기가 사라진 것이었습니다. 이 혈기는 저뿐 아니라 저희 집안의 내력 중 하나이기 때문에 더욱 신기했습니다. //

 

악령들은 항상 우리를 유혹해서 죄를 짓게 만듭니다. 그리고 떠날 때는 결과를 모두 그 사람에게 전가합니다. 그래서 죄를 지으면 마치 부메랑처럼 죄의 결과가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죄는 그냥 없어지지 않습니다. 수치심을 느끼고 철저하게 자신을 자책하는 그런 과정이 반드시 있습니다. 어떨 때는 그 곤욕과 수치의 시간이 길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한 모든 것들이 악령이 떠나면서 우리를 무리 중에 심하게 넘어뜨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성을 하되 너무 자책하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그건 모두 지옥 영들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악령은 사람에게 물리적인 고통을 줄 뿐이고요, 영을 해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본문에서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라는 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악한 영이 주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는 사탄이 욥에게 한 짓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했습니까? 몸을 아프게 하고, 재물을 잃게 했습니다. 물론 세상에 사는 동안 그러한 것들은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잃는 것이 영을 다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인정하는 한, 악령은 우리의 영을 손상하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36절 말씀입니다.

 

36다 놀라 서로 말하여 이르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위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하더라

 

주님께서 말씀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냈을 때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그래서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위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거기 모인 사람들이 모두 말씀의 능력을 인정한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의 능력’이란 세상적 능력이 아닙니다. 인간을 구원하시는 능력입니다. 죽은 자와 같았던 우리가 살아나는 것, 짐승처럼 살던 사람이 사람으로 사는 것, 이것은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의 능력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이 말씀이 이 시대에 꼭 필요한 말씀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귀신 들린 자가 진리이신 주님을 진리라고 인정했을 때 주님께서 그의 내면에 있는 귀신을 쫓아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진리가 진리인 줄을 모르고 거짓이 거짓인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마치 귀신 들린 자처럼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습니다.

 

저는 가급적 정치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 정치 상황을 보면 안타까운 점이 많습니다. 정치가 무엇입니까? 정견이 달라 치열하게 싸우더라도 때에 따라서는 대의(大義)를 위해 연합하고 협력하는 것이 정치입니다. 그런데 우리 정치에 협력이 있습니까, 조화가 있습니까? 무섭게 상대를 적대하고 증오할 뿐입니다. 우리 역사를 보면 그런 일이 많았습니다. 정치적 견해가 다른 사람들이 서로를 모함하고 처절하게 죽이고 했던 것이 조선의 역사였습니다. 서로 타협하고 조화를 이루며 싸우다가도 손을 잡은 적이 과연 얼마나 있었습니까? 지금 이 시대에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백성들이라도 중심을 잡아야 하는데 그들 역시 정치인들에게 끌려다니고 있습니다. 증오와 살의가 가득 찬 이 나라의 현실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오늘 이 시대에 꼭 필요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 여기서 말씀하시는 ‘오늘’은 지난 2017년도 8월을 말합니다. 지난 2017년도에 있었던 가장 큰 정치적 사건이라면 뭐니 뭐니 해도 박근혜 대통령 탄핵 파면(3/10)과 문재인 대통령 당선(5/9)일 것입니다. 만 5년이 지난 지금은 세월호 촛불 및 박근혜 대통령 탄핵 등이 모두 조작이요, 기획 선동인 것으로 점점 밝혀지고 있어 그때 덩달아 촛불을 지지하며, 박근혜 대통령을 원망했던 저는 너무나도 미안, 부끄러워 고갤 못들 지경입니다만... 네, 하여튼 당시 상황을 돌이켜볼 때, 정말 역사의 큰 변곡점의 시기였음은 분명하다 하겠습니다.

 

우리는 대의를 위해 상대방의 진리라 하더라도 그것이 진리라면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대의를 위한다는 것은 주님을 위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선이며 진리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우리 교회 안에서도 정치적 견해가 다르면 서로를 증오하십니까? 우리는 자신의 이해와 관계없이 진리를 진리라고 하고, 거짓을 거짓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적어도 진리를 거짓으로 만들거나 거짓을 진리로 둔갑시키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를 사로잡고 있을지도 모를 악한 영을 쫓아내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오직 주님의 말씀뿐입니다. 말씀의 능력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능력으로 우리 안에 어둡고 불결한 것들을 몰아낼 수 있다고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말씀의 능력이 이 교회로부터 사방으로 퍼져나갈 것입니다. 그것이 이 시대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라는 신념으로 우리 함께 주님을 위해서 싸웁시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새 교회 모든 성도님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14:27)

 

아멘

 

원본

2017-08-27(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24(D6)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024. 2023-03-24(D6)-매일예배(2441, 눅4,31-37), '귀신 들리지 않으려면'.pdf
0.55MB

 

 

23. 눅4:23-30, '나사렛 사람들이 주님에게 크게 화를 낸 이유'

나사렛 사람들이 주님에게 크게 화를 낸 이유  23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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