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1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2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3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4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8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9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10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1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눅5:1-11)

 

 

물고기는 지혜로워지기 위한 수단으로, 영적 사람을 섬기는 자연적 사람에 속한 지식과 인식을 뜻한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어부는 단순히 지식 안에만 있는 사람들, 자신을 위해 지식을 획득하는 사람, 또한 지식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그들의 의식을 새롭게 하는 사람을 뜻한다. (AE.513:11, 이순철 역)

 

※ AE(Apocalypse Explained, 계시록 해설) 위 513번 글 11항에 대한 Ager 영역 및 Whitehead 개정본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Because “fishes” signify the knowledges and cognitions belonging to the natural man that serve the spiritual man as means for becoming wise, so “fishers” mean in the Word those who are merely in knowledges, also those who are acquiring knowledges for themselves, also those who teach others and by means of knowledges reform them. (AE.513:11, Ager 역)

 

이는 계시록 8장 9절, ‘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들의 삼 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 분의 일이 깨지더라’에 관한 주석 중 ‘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들의 삼 분의 일이 죽고’(And there died the third part of the creatures in the sea having souls,)에 대한 내용입니다.

 

 

오늘날 신약 서신서들 중 가장 많이 읽히는 것은 바울 서신서들입니다. 바울은 유대교회에서 가장 유명한 학파인 힐렐 학파의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교육을 받은 엘리트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탁월한 설교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배경 때문인지 바울 서신은 문체가 대단히 유려(流麗)하고 깊이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바울 서신에 빠져드는 것은 아마 그런 이유일 것입니다. 반면, 바울에 비해서 오늘 말씀드릴 베드로는 어부였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적으로 보면, 바울과 베드로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그 학식이나 배경에 있어 차이가 나는 사람들이지요. 그럼에도 베드로 서신 역시 읽어 보면, 바울 서신과는 또 다른 영감으로 가득합니다. 베드로 서신의 몇 구절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베드로 전서 1장 22절로 25절입니다.

 

22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23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24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벧전1:22-25)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갈릴리 어부에 불과했던 베드로가 이렇게 깊고 명료한, 진솔한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에 감동했습니다. 그리고 어부였던 그가 주님의 특별한 섭리 있으셔서 주님의 위대한 사도로 거듭날 수 있었음도 느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먼저 그럼, 주님은 왜 물고기를 잡는 어부 베드로를 당신의 사도로 택하셨을까요? 지금부터 그것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본문 1절입니다.

 

1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말씀에서 ‘바다’나 ‘호수’는 선과 진리에 대한 지식을 의미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지옥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선과 진리의 지식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시는 것은, 각 사람에게 있는 진리와 선의 지식 안으로 주님께서 임하시는 걸 말합니다. 우리가 학문을 배우거나, 또는 신앙의 교리를 공부하는 것은 주님을 받아들일 그릇을 준비하는 행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진리의 지식은 곧 주님을 받아들이는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진리가 무엇인지, 선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오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어릴 때부터 학문을 배우고, 종교의 교리를 배우는 것입니다.

 

※ 여기서 잠깐, ‘종교’라는 용어를 쓰신 이유는, 기독교회 밖의 사람들, 그러니까 타 종교인들까지 포함, 폭넓게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온 인류는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으며, 누구는 기독교 가정에, 누구는 불교나 이슬람 등, 또는 무교 가정에 태어납니다만, 그러나 그건 그 사람 본인의 선택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나면서 유대인이거나 나면서 기독교 국가 기독교 가정에 태어나 처음부터 말씀 생활, 교회 생활을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특별히 더 겸손해야 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기독교(유대교 포함)는 그 비율이 30% 정도로 열에 셋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다들 이렇듯 다양한 배경 가운데 태어나며, 그러나 그들 또한 모두 주님으로 말미암았으므로, 그래서 주님은 모든 민족에게 저마다의 종교가 일어나도록 허락하셨고, 저마다의 종교에 주님의 신성이 스며들게 하셨으며, 그래서 자기 종교의 교리 중 선한 교리를 따라 나름의 선과 진리의 하나 됨을 위해 성실하게 사는 걸로 주님 사랑을 표현하도록 배려하신 것입니다. 어떤 종교든 그 종교의 교리를 통해 나름의 선한 삶을 살며, 인애, 곧 체어리티(charity)의 삶을 나름 성실히 살아간다면 그는 그 나름의 방식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만 기독교와 여타 종교와의 차이는 말씀의 유무에 있으며, 그것은 밝은 빛 가운데 사는 것과 주변 희미하고 어슴푸레한 등잔불 빛 아래 사는 것에 비유할 수 있겠습니다. 만일 어느 누가 진리, 곧 살아계신 주님 만나기를 정직한 심령으로 평소 간절히 구했다면 그는 자기가 무슨 종교를 믿느냐와는 상관없이 주님에 관한 가르침을 받을 때, 매우 호의적이며 반갑게 반응할 것입니다.

 

그런데 진리의 지식이 있다고 주님은 아무한테나 오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어떤 사람에게 오십니까? 2절과 3절에서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2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3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이 말씀에서는 주께서 교리의 진리를 가르쳐 주실 때 어떤 사람에게 오시는지를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로 주님은 영적인 어부에게 오십니다. 둘째는 어부 중에서도 자신의 그물을 씻는 사람에게 오십니다. 그리고 셋째는 시몬으로 표상되는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 오십니다. 먼저, 주님이 어부에게 오시는 이유는 ‘어부’는 속뜻으로 말씀으로부터 진리를 낚아 올리는 사람들이며, 그 진리를 통해 거듭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높은 차원의 어부가 있습니다. 즉 진리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가르쳐 그들로 거듭나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어부는 자신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흔히 자신만 구원받으면 된다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면 자칫 구원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구원만 생각하는 것은 이기적인 생각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사람은 자신의 구원뿐만 아니라 이웃의 구원을 위해서도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웃이 진리를 원하지 않는데도 그들에게 진리를 가르쳐야 할까요? 새 교회 가르침에서는 이웃의 자유를 간섭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웃이 진리 알기를 원할 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또 진리에 따라 경건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건하고 진실한 삶을 살면 그것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진리의 빛이 전해집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보다 높은 차원의 영적 어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어부의 배에 오르셔서 진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 이웃이 ‘진리 알기를 원할 때’는 쉽지 않습니다. 교회 안 다니는 이웃은 고사하고,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물론 목회자나 사모, 교회 리더십들 역시 게 중에 참으로 ‘진리 알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주 극소수입니다. 대부분 자연적이기 때문인데, 그러니까 말씀의 겉면만, 즉 말씀을 피상적으로만 살펴 그저 지식으로만 소유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속, 그러니까 내적 의미에 마음을 쏟으며 실제 생활과 삶, 인격에 적용하고자 하는 사람은 오늘날 아주아주 희귀합니다. 고민입니다. 그러나 복음서 주님 계신 곳에는 항상 사람들이 모여들었던 것처럼 지금도 제 안에, 우리 참된 그리스도인 안에 주님이 계시면 그곳엔 사람들이 모일 줄 믿습니다.

 

두 번째, 주님은 그물을 씻는 사람에게 오셨습니다. 그물을 씻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진리를 얻기 위해 내면의 어떤 것을 깨끗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진리를 습득하려면 어떤 것이 있어야 할까요? 우선은 진리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다음은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그런 것들이 그물입니다. 그러므로 그물을 씻는 것은 내면의 애정을 순수한 상태로 유지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진리에 대한 이해력이 밝아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를 추구할 때, 그 애정이나 동기가 주님과 이웃을 향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야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내면의 동기가 순수하지 않을 때는 우리 내면에 천국과 통하는 문이 닫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내면의 그물을 씻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세 번째, 주님은 시몬의 배로 들어가셨습니다. 주님께서 시몬에게 가신 이유는, ‘시몬’은 속뜻으로는 순종하는 신앙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믿으면서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가 진리에 순종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영적인 것보다 세상적인 것들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나라보다 세상을 더 사랑할 때 내면에 천국과 통하는 문이 닫힙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실 수 없는 것입니다.

 

4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의 배에 오르신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신 후,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하십니다. 시몬은 오래 고기를 잡은 베테랑 어부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쳐 주실 때, “주님, 제가 이 부분은 잘 압니다. 그러니 제게 맡기십시오.”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만, 그러나 시몬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깊은 데는 어디입니까? 영적으로 깊은 곳은 높은 곳과 통합니다. 그러니까 가장 깊은 곳(inmost)은 천적인 등차(等差, degree), 단계, 즉 사랑의 단계를 뜻하고, 보통 깊은 곳은 영적인 단계, 즉 진리의 단계를 뜻합니다. 그리고 얕은 곳은 자연적인 단계를 뜻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리라 하시는 것은 사랑으로 진리를 구하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를 구할 때, 자신의 이익을 위해 구하지 말고, 주님과 이웃을 위한 목적으로 구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주님은 요한복음 21장에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는데요, 거기서 주님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요21:6)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깊은 데로 그물을 던지는 것과 오른편으로 던지는 것은 같은 의미입니다. 오른편도 사랑이요 선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5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러자 시몬이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시몬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러나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우리 신앙인들이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고, 진리에 순종하는 순간입니다. 시몬과 동료들이 밤을 새워 고기를 잡았다고 했는데, 밤은 무슨 뜻입니까? ‘’은 사랑이 없는 때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신앙인의 영적 상태는 항상 일정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크기에 따라 아침과 낮, 저녁과 밤으로 수시로 변합니다. 그래서 밤은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없고 오직 자아에 대한 사랑만 있는 때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진리의 고기를 잡으려 할 때는 고기가 잡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몬의 일행은 밤새 고기를 잡으려고 했으나 아무 소득이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은 시몬이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깊은 곳에 던졌습니다.

 

6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그러자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잡혔습니다. 좀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진 것은 자기 사랑이 아니라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진리를 구하는 행동입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쏟아붓듯이 진리의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 내면에 있던 그물이 찢어집니다. ‘그물이 찢어진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동안의 진리에 대한 불순한 애정이 깨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불순한 애정이 깨질 때 진리에 대한 새로운 이해력이 생깁니다. 그물이 찢어진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진리에 대한 순수한 사랑이 아니면 어떤 영적 성취도 이룰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물이 찢어지려고 하자 시몬이 다른 배에 있던 동료들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동료들이 와서 거들자 두 배에 물고기들이 가득하여 배가 가라앉을 정도가 됐습니다. ‘두 배에 물고기가 가득 찼다’는 것은 교리의 선과 교리의 진리가 하나로 결합하는 것을 뜻합니다. 말씀에서 둘이란 수는 선과 진리의 결합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배우는 교리 중에는 진리도 있고, 선도 있습니다. 그러면 교리의 진리는 무엇이고, 교리의 선은 무엇일까요? 명확하게 구별하기는 어렵지만, 제가 이해하기로는 이렇습니다. 선은 본질에 있어 밖으로 뻗치는 성질이 있습니다. 반대로 진리는 안으로 단속하고 절제하는 성질이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계명 가운데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교리의 진리에 가깝다고 보고요, 적극적으로 행해야 하는 것은 교리의 선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십계명에도 열 가지 계명 중에 아홉 가지는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행해야 하는 것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과 진리의 결합이란, 먼저 계명에 반하는 악을 행하지 말고, 그런 다음 계명에 따라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두 배에 물고기가 가득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두 배에 가득 물고기를 채웠더니 배가 가라앉으려 했습니다. 배가 가라앉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것은 좀 전에 그물이 찢어지는 것과 비슷한 의미입니다. 즉 주님이 주시는 진리와 선의 결합을 통해서 내면의 교회가 개혁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개혁된다는 것은 이전 낡은 교회가 새로운 교회로 거듭나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깊은 데로 그물을 내리라 하셨을 때에 신앙이 깊은 시몬조차 긴가민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잡혔습니다. 시몬은 놀라 주님 발 앞에 완전히 엎드렸습니다. 8절에서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8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9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10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자아 사랑이 아닌 주님 사랑으로 참 진리를 얻고, 그것으로 거듭나기 시작할 때, 그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 앞에 죄인임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 전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진리는 선이 없는 진리였고, 그래서 그것으로는 겸손해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시몬이 주님 앞에 엎드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자복한 것은, 주님으로부터 참 진리, 즉 선이 있는 진리를 받았을 때, 비로소 자아 사랑으로 했던 모든 일들이 주님께 큰 죄였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9...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려 있는 시몬에게 주님께서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성(聖) 문서에서는 시몬이 느낀 두려움을 ‘거룩한 두려움’이라고 표현합니다. 말씀에는 거룩한 두려움을 느꼈던 사람들이 여럿 있습니다. 다니엘이 주님을 뵈었을 때, 죽은 자처럼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주님으로부터 계시록을 받는 순간, 요한도 극도의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이들이 느낀 두려움이 모두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그것을 거룩한 두려움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주님에 대한 지극한 겸손과 공경에서 나오는 두려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은 주님에 의해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의 겸손함을 보시고 두려워하지 말라 하실 때 우리의 죽었던 영성이 소생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 주님께서 다시 시몬에게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셨습니다. 고기를 잡는 어부가 아니라, 이후로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란 어떤 것입니까? 이웃에게 진리를 가르치고 진리로 거듭날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이 바로 사람을 낚는 어부 입니다. 11절에는 시몬 베드로와 동료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을 따라나서는 모습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11...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주님께서 시몬에게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말씀하시자 시몬뿐만 아니라, 야고보와 요한도 주님을 따라나섰습니다. 말씀에는 그들이 모든 것을 버려두고 나섰다고 합니다. 대단한 신앙이고 용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 저는 36세이던 젊은 시절, 대학 후 입사하여 잘 다니던 대기업을 퇴사, 어느 교회의 교회 직원으로 들어갔습니다. 어린 두 아들과 아내의 희생을 마다하고 말입니다. 그 결정으로 이후 저희의 삶은 매우 고단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모든 과정이 너무나 미숙하고 안타깝습니다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 모든 일을 선으로 돌려 오늘의 저와 저희 가정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래서 특히 제게는 저 표현,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라는 표현이 정말 가슴에 와닿습니다.

 

주님은 왜 시몬뿐 아니라 야고보와 요한도 함께 제자로 받아들이셨을까요? 그 세 사람을 통해 주님의 제자들이 갖춰야 할 덕목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하시려는 것입니다. ‘시몬’과 ‘야고보’와 ‘요한’은 각각 신앙과 체어리티, 그리고 체어리티의 삶을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세 가지 중 어느 것 하나도 없어선 안 됩니다. 그래서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신앙만 있어도 안 되고, 체어리티만 있어도 안 되며, 체어리티의 삶만으로도 안 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 체어리티의 구체적인 삶이 함께 있어야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말씀하셨을 때, 시몬과 야고보, 요한이 모두 주님을 따라나섰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시몬과 요한과 야고보는 주님의 첫 번째 제자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가장 사랑하신 제자인 시몬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은 모두 어부였습니다. ‘어부’는 속뜻으로 진리를 탐구하고 그것을 통해 거듭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 진리를 가르쳐 그들을 구원으로 이끄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인 어부는 나의 구원과 이웃의 구원을 함께 생각하는 사람이며, 나아가서 이웃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버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어부를 제자로 선택하신 이유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제자가 된 어부들은 어떤 자질들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그들은 첫째, 그물을 씻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물을 씻는다는 것은 내면의 애정을 살피면서 그 속의 악하고 거짓된 것을 씻어내기 위해 항상 노력한다는 뜻입니다. 둘째, 시몬과 같이 진리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베테랑 어부였을 시몬은 목수 출신이셨을 주님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말씀에 토 달지 않고 순종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에게는 이렇듯 훌륭한 자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질은 잠재적인 것이며,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말씀에 여러 차례 기록된 베드로의 성정(性情)을 보면 알 수 있지요. 그들 역시 보통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을 만나기 전에 밤을 새워 고기를 잡았고, 소득 없는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도 처음 진리를 배울 때는 자아 사랑으로 시작했고, 그래서 참 진리를 얻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들을 택하셔서 훗날 주님을 위해 자기를 버릴 수 있는 위대한 사도로 키우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어떤 면을 보시고 우리를 이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셨는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주님은 우리 각 사람의 약점을 덮으시고, 장점을 키워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순진한 마음으로 주님께 순종할 때 주께서 우리를 이 시대에 필요한 어부로 키워주실 것을 믿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모든 성도님과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3배들을 바다에 띄우며 큰 물에서 일을 하는 자는 24여호와께서 행하신 일들과 그의 기이한 일들을 깊은 바다에서 보나니 (시107:23-24)

 

아멘

 

원본

2017-09-24(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27(D2)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026. 2023-03-27(D2)-매일예배(2443, 눅5,1-11),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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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지옥.1.36.318-328.'천국의 비기독교인들'.scan.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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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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