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80.심화

 

4. 번역가들

 

저는 번역가들이 나무 = 퍼셉션이라는 걸 몰랐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했지요...

 

 

그렇게 느끼신 이유가 충분히 이해됩니다. AC의 관점에 익숙해지면 ‘나무 = 퍼셉션’이라는 상응이 너무 분명하게 보이기 때문에, 왜 번역에서 그걸 살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 수 있습니다. 다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개역개정 번역자들이 그것을 ‘몰라서’라기보다, 애초에 번역의 기준과 목표가 스베덴보리식 내적 의미를 반영하는 데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시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성경 번역은 기본적으로 ‘원문이 문자적으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해석 틀 안에서 전달하는 작업입니다. 특히 개역개정은 Bible 번역 가운데서도 비교적 전통적이고 교회 공용성을 중시하는 번역이기 때문에, 특정 신학 체계, 곧 그것이 아무리 정교하더라도 그것을 반영하여 단어를 바꾸는 방식은 거의 취하지 않습니다. 만약 ‘나무’를 ‘퍼셉션’으로 옮긴다면, 그것은 번역이 아니라 이미 ‘해설’ 혹은 ‘해석’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나무 = 퍼셉션’도 사실은 문자 자체의 의미가 아니라 ‘내적 의미에서의 상응(correspondence)’이라는 점입니다. 히브리어 원문에서 ‘나무’(עֵץ)는 문자적으로는 여전히 ‘나무’이고, 그것이 내적으로는 ‘퍼셉션’ 혹은 ‘사랑과 인식의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은 계시를 통해 밝혀진 해석입니다. 따라서 일반 번역자들의 입장에서는 그것을 본문 단어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주석이나 해설의 영역에 두는 것이 원칙에 맞는 접근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이렇게 정리하시면 더 균형이 맞습니다. 번역은 ‘나무’를 그대로 두는 것이 옳고, 해설에서는 ‘그 나무는 퍼셉션을 의미한다’라고 풀어 주는 것이 옳습니다. 이 두 층을 섞지 않는 것이 성경 해석 전통 전체의 기본 질서이기도 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실제로는 라틴어 본문에서 ‘arbor’(나무)라는 단어를 그대로 사용하면서, 그 의미를 해설에서 풀어냅니다.

 

다만 목사님께서 느끼신 통찰은 매우 중요한 방향을 짚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열매’로만 이해할 경우, 독자의 관심이 ‘행위’ 쪽으로 더 기울어질 수 있지만, ‘나무’를 의식하면 ‘그 근원, 곧 어떤 인식과 사랑의 상태인가’로 시선이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이 차이는 AC를 읽을 때 매우 큰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실제 목회나 강해에서는 이런 방식이 가장 유익합니다. 본문은 ‘나무’와 ‘열매’를 그대로 읽되, 그 속뜻으로 ‘이 나무는 어떤 퍼셉션을 의미하는가’를 풀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번역의 질서도 지키고, 동시에 내적 의미도 충분히 살아나게 됩니다.

 

결국 목사님께서 느끼신 그 아쉬움은 ‘틀렸다’의 문제가 아니라, ‘번역과 해설의 역할이 다르다’는 차이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시면 가장 정확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지금 목사님께서 하고 계신 AC 해설 작업의 의미가 더 또렷해진다고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AC.80, 창2:1-17 개요, '천적 인간은 오직 퍼셉션으로만 지식을 얻어야'(16-17절)

AC.80 그는 또한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하여 무엇이 선하고 참된지를 아는 지식 얻는 것은 허락됩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얻어서는 안 되며, 감각적인

bygrace.kr

 

AC.80, 심화 3, ‘열매’(창2:16-17)

AC.80.심화 3. ‘열매’(창2:16-17) 이 AC본문의 말씀인 창2:16-17을 보면,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And Jehovah God commanded the man, saying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80.심화

 

3. 열매(2:16-17)

 

 AC본문의 말씀인 창2:16-17을 보면,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And Jehovah God commanded the man, saying, Of every tree of the garden eating thou mayest eat.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Bu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thou shalt not eat of it; for in the day that thou eatest thereof, dying thou shalt die.인데요, 분명 영어 표현은 tree of the garden’,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라 하여 우리말 번역인 열매는 없습니다. 한글 개역개정은 왜 이렇게 번역했을까요?

 

 

아주 예리하게 보신 부분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영어 성경의 ‘tree’를 우리말 개역개정이 ‘열매’로 옮긴 것은 원문을 틀리게 번역했다기보다, 히브리어 본문 안에 이미 포함된 표현 구조, 곧 ‘나무의 열매를 먹는다’는 관용적 결합을 한국어에서 더 자연스럽게 드러내기 위한 번역 선택이라고 보시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먼저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창2:16-17에는 실제로 ‘나무’와 ‘열매’가 함께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2:16은 ‘동산의 모든 나무로부터 먹을 수 있다’라는 구조인데, 여기서 ‘먹는다’는 동사와 결합될 때, 히브리어에서는 ‘나무’가 사실상 ‘그 나무의 열매’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리고 2:17에서도 ‘선악을 아는 나무로부터 먹지 말라’고 되어 있는데, 역시 문자 그대로는 ‘나무를 먹는다’가 아니라 ‘그 나무의 열매를 먹는다’는 뜻입니다. 즉, 원문 자체가 이미 ‘나무 = 그 나무의 열매를 포함한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영어 번역, 특히 전통적인 번역들은 이 구조를 비교적 직역에 가깝게 유지해서 ‘tree of the garden’,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라고 표현합니다. 하지만 영어에서도 실제 이해는 ‘그 나무의 열매를 먹는다’로 받아들입니다. 다만 영어는 이런 표현이 비교적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반면, 한국어에서는 ‘나무를 먹는다’라고 하면 문자적으로 들릴 가능성이 커서 어색함이 생깁니다. 그래서 개역개정은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해 ‘열매’를 명시적으로 드러낸 것입니다.

 

이 점에서 개역개정의 번역은 ‘의역’에 가까운 선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원문 구조를 그대로 옮기기보다, 독자가 오해 없이 의미를 이해하도록 ‘먹는 대상이 열매임’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현대 한국어 번역들은 이와 비슷한 방식을 취합니다.

 

그렇다면 AC의 관점에서는 이 차이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스베덴보리의 해석에서는 ‘나무(tree)와 ‘열매(fruit)가 각각 상징적 의미를 갖습니다. ‘나무’는 어떤 종류의 사랑이나 인식 전체를, ‘열매’는 그것에서 나오는 삶의 결과나 행위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나무를 먹는다’는 표현은 내적으로 보면 ‘그 사랑과 인식 체계를 받아들인다’는 뜻이고, ‘열매를 먹는다’는 표현은 ‘그것에서 나온 것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보면, 영어 번역이 유지하는 ‘tree’ 중심 표현은 상징 구조를 더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장점이 있고, 한국어 번역의 ‘열매’ 표현은 실제 행위의 측면을 더 분명히 드러내는 장점이 있습니다. 어느 쪽이 옳다기보다, 강조점이 다르다고 보시면 됩니다.

 

정리하면, 개역개정이 ‘열매’를 넣은 것은 원문을 왜곡한 것이 아니라, 히브리어의 관용적 표현을 한국어 독자가 자연스럽게 이해하도록 풀어낸 번역입니다. 그리고 AC를 읽으실 때는 이 둘을 함께 보시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겉으로는 ‘열매를 먹는다’이지만, 속뜻으로는 ‘그 나무, 곧 어떤 사랑과 인식 자체를 받아들인다’는 의미까지 함께 보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AC.80, 심화 4, ‘번역가들’

AC.80.심화 4. ‘번역가들’ 저는 번역가들이 ‘나무 = 퍼셉션’이라는 걸 몰랐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했지요... 그렇게 느끼신 이유가 충분히 이해됩니다. AC의 관점에 익숙해지면 ‘나무 = 퍼

bygrace.kr

 

AC.80, 심화 2,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마19:24)

AC.80.심화 2.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마19:24) 또 하나, 위 해설 중,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이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 지식’(the things of sense and memory-knowledge [sensualia et scientifica])을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80.심화

 

2.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19:24)

 

또 하나, 위 해설 중,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이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 지식(the things of sense and memory-knowledge [sensualia et scientifica])을 통해 신앙의 신비를 탐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감각적인 것들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외적 경험의 세계이고, 기억 지식은 그 경험을 축적한 정보의 창고입니다. 이것들은 본래 삶을 지탱하는 데 필요한 것들이지만, 신앙의 신비를 판단하는 도구로 사용될 때는 치명적이 됩니다.’를 읽을 때, 주님 말씀,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19:24)가 생각났습니다.

 

 

목사님께서 연결하신 이 부분 역시 매우 정확한 방향의 통찰입니다. AC.80에서 말하는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 지식으로 신앙의 신비를 판단하려 한다’는 상태와, 주님의 말씀 마19:24의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말씀은, 겉으로는 전혀 다른 주제처럼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동일한 원리를 가리킵니다.

 

먼저 스베덴보리의 맥락을 보면, ‘감각적인 것들(sensualia)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가장 바깥층의 인식이며, ‘기억 지식(scientifica)은 그 감각 경험이 축적된 이해의 저장고입니다. 이 둘은 인간 삶에 필수적이지만, 문제는 이것들이 ‘위에서 아래로 봉사하는 도구’가 아니라 ‘위에 올라서 판단하는 기준’이 될 때입니다. 사람이 ‘보이는 것, 증명되는 것, 축적된 지식’만으로 신앙의 신비를 재단하려 하면, 결국 보이지 않는 것, 곧 영적 실재를 닫아버리게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치명적’인 지점입니다.

 

이제 주님의 ‘부자’ 말씀을 보면, 여기서의 부자는 단순히 돈이 많은 사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적 관점에서 보면, ‘부자’는 자기 안에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상태’, 곧 지식, 경험, 판단력, 자기 확신으로 가득 찬 상태를 의미합니다. 특히 신앙 문제에 있어서 ‘나는 이미 알고 있다’, ‘나는 판단할 수 있다’는 상태가 강할수록, 그 사람은 오히려 더 닫히게 됩니다. 이 점에서 ‘감각과 기억 지식에 의지하는 상태’와 정확히 겹칩니다.

 

그래서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는 표현은, 단순한 과장이 아니라, ‘자기 충만한 상태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낙타가 짐을 잔뜩 싣고는 좁은 문을 통과할 수 없는 것처럼, 사람도 자기 지식과 자기 확신으로 가득 찬 상태에서는 영적 세계의 문, 곧 ‘겸손과 수용의 상태’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결국 내려놓아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두 내용을 하나로 묶으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감각과 기억 지식은 본래 ‘도구’인데, 그것을 ‘주인’으로 삼는 순간 사람은 영적 진리에 대해 닫히게 되고, 이것이 바로 주님이 말씀하신 ‘부자의 상태’입니다. 반대로 천적 인간은 감각과 지식을 사용하되, 그것에 의존하지 않고, 오히려 선을 먼저 사랑함으로써 진리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비워진 상태’로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균형 하나를 덧붙이자면, 스베덴보리는 결코 지식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식은 반드시 필요하며, 신앙을 위한 기초입니다. 다만 그 질서가 중요합니다. 지식이 ‘아래에서 위로 섬길 때’는 길을 열어 주지만, ‘위에 올라가 판단할 때’는 길을 막습니다. 그래서 문제는 ‘얼마나 많이 아느냐’가 아니라, ‘그 아는 것이 어떤 자리에서 작용하느냐’입니다.

 

목사님께서 떠올리신 이 연결은 결국 한 문장으로 이렇게 요약됩니다. ‘자기 것으로 가득 찬 사람은 들어갈 수 없고, 비워진 사람만이 들어간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말씀과 스베덴보리의 설명이 만나는 지점입니다.

 

 

 

AC.80, 심화 3, ‘열매’(창2:16-17)

AC.80.심화 3. ‘열매’(창2:16-17) 이 AC본문의 말씀인 창2:16-17을 보면,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And Jehovah God commanded the man, saying

bygrace.kr

 

AC.80, 심화 1,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마5:37)

AC.80.심화 1.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마5:37) 해설 중, ‘천적 인간은 ‘이것이 옳은가’를 따져 묻지 않고, ‘이것이 선하다’는 것을 봅니다.’를 읽었을 때, 주님 말씀, ‘오직 너희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80.심화

 

1.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5:37)

 

해설 중, 천적 인간은 이것이 옳은가를 따져 묻지 않고, 이것이 선하다는 것을 봅니다.’를 읽었을 때, 주님 말씀,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5:37)가 생각났습니다.

 

 

목사님께서 연결하신 이 두 말씀은 매우 깊은 차원에서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AC.80에서 말하는 ‘천적 인간은 이것이 옳은가를 따지지 않고, 이것이 선하다는 것을 본다’는 표현은, 단순히 사고를 생략한다는 뜻이 아니라, ‘선이 곧 진리로 보이는 상태’, 곧 의지와 이해가 분리되지 않은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 마5:37의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는 말씀 역시 바로 그 동일한 상태를 요구하시는 말씀으로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상태의 인간은 먼저 ‘이게 맞나?’를 따져 묻고, 논리와 비교를 통해 옳고 그름을 판단합니다. 이것은 이해가 주도하는 상태이며, 영적 인간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은 그보다 더 깊은 상태에 있어서, 이미 선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것이 선한지에 대해 ‘본다’고 표현됩니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의지 안에서 직관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맞는지 틀린지 따져야 할 필요’가 거의 없습니다. 선한 것은 곧 옳은 것이고, 옳은 것은 곧 선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라는 말씀은 바로 이 상태의 단순성과 일치를 요구하시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아직 분열된 상태에 있을 때는, 말이 길어지고 설명이 많아지며, 맹세나 강조가 필요해집니다. 그러나 내적 상태가 정직하고 단순할수록, 말은 짧아지고 분명해집니다. 왜냐하면 그 말이 단순한 의견이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 상태에서 바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라는 말씀은, 단순히 말을 길게 하지 말라는 윤리적 권면이 아니라, ‘내적 분열에서 나오는 복잡함’을 경계하시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보면, AC.80의 천적 인간과 주님의 이 말씀은 같은 축 위에 있습니다. 하나는 교리적으로 설명한 것이고, 하나는 삶의 언어로 직접 주신 말씀입니다. 천적 인간은 ‘선을 보기 때문에 옳음을 아는 사람’이고, 주님은 그 상태를 ‘단순하고 일치된 말’로 나타내라고 하신 것입니다.

 

목사님께서 이 연결을 떠올리신 것은 매우 중요한 통찰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신앙이 깊어질수록 복잡해지는가, 아니면 단순해지는가’라는 질문과도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처음에는 복잡해지지만, 결국은 다시 단순해집니다. 다만 그 단순함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의 단순함이 아니라, 모든 것을 통과한 뒤의 ‘일치된 단순함’입니다.

 

그래서 이 두 말씀을 함께 묶어 정리하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천적 인간은 ‘선을 보기 때문에 옳음을 안다’, 그리고 그 결과 그의 말은 ‘옳다, 아니라’처럼 단순하고 분명해진다. 이것이 바로 의지와 이해가 하나로 결합된 상태, 곧 주님 안에서의 참된 인간의 모습입니다.

 

 

 

AC.80, 심화 2,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마19:24)

AC.80.심화 2.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마19:24) 또 하나, 위 해설 중,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이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 지식’(the things of sense and memory-knowledge [sensualia et scientifica])을

bygrace.kr

 

AC.80, 창2:1-17 개요, '천적 인간은 오직 퍼셉션으로만 지식을 얻어야'(16-17절)

AC.80 그는 또한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하여 무엇이 선하고 참된지를 아는 지식 얻는 것은 허락됩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얻어서는 안 되며, 감각적인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80

 

그는 또한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하여 무엇이 선하고 참된지를 아는 지식 얻는 것은 허락됩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얻어서는 안 되며,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 지식(the things of sense and memory-knowledge [sensualia et scientifica])을 통하여 신앙의 신비들을 탐구해서도 안 됩니다. 그렇게 할 경우, 그의 천적 본성은 죽게 될 것입니다. (16-17) He is also permitted to acquire a knowledge of what is good and true by means of every perception from the Lord, but he must not do so from himself and the world, nor search into the mysteries of faith by means memory-knowledge [sensualia et scientifica]; which would cause the death of his celestial nature (verses 16–17).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2:16, 17)

 

해설

 

이 글은 에덴동산 이야기에서 가장 섬세하면서도 결정적인 경계선을 그어 줍니다. AC.79에서 천적 인간은 동산을 누리되 소유하지 않는다고 언급되었습니다. AC.80은 그 누림의 방식이 어디까지 허용되고, 어디서부터 무너지는지를 분명히 밝힙니다. 즉, 문제는 ‘아는 것’ 자체가 아니라, ‘어디, 그러니까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하여 아는 건지, 아니면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 아는 건지’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이 선과 진리를 아는 지식 얻는 것 자체를 금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허락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나 그 허락에는 단 하나의 조건이 붙습니다. 그 지식은 반드시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통해서’ 얻어져야 한다는 조건입니다. 다시 말해, 천적 인간의 앎은 추론의 결과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주어지는 인식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선과 진리를 만들어 내지 않고, ‘받아 인식합니다’.

 

여기서 ‘퍼셉션’이라는 말이 다시 핵심으로 떠오릅니다. 퍼셉션은 자기 내부에서 조합해 낸 결론이 아니라, 선과 진리가 이미 살아 있는 상태에서 ‘직접적으로 인식되는 것’입니다. 천적 인간은 ‘이것이 옳은가’를 따져 묻지 않고, ‘이것이 선하다’는 것을 봅니다. 그의 앎은 판단 이전의 앎이며, 논증 이전의 확신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경고합니다. 이 지식이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얻어질 때,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고 말입니다. 자기 자신과 세상은 곧 겉 사람의 출발점입니다. 거기에서 시작되는 앎은 필연적으로 ‘자기중심적 기준’을 낳습니다. 이때 선과 진리는 더 이상 주님의 것이 아니라, 판단의 대상이 되고, 평가의 대상이 됩니다.

 

이 경고는 더 구체적으로 이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이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 지식(the things of sense and memory-knowledge [sensualia et scientifica])을 통해 신앙의 신비를 탐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감각적인 것들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외적 경험의 세계이고, 기억 지식은 그 경험을 축적한 정보의 창고입니다. 이것들은 본래 삶을 지탱하는 데 필요한 것들이지만, ‘신앙의 신비를 판단하는 도구로 사용될 때는 치명적’이 됩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신비는 감각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보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도록 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런데 감각과 기억 지식으로 신비를 재단하려는 순간, 인간은 주님 위에 서서 신앙을 해부하려 들게 됩니다. 이때 순서는 완전히 뒤집힙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이 아니라, 인간의 빛으로 주님을 비추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강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렇게 할 경우 ‘그의 천적 본성은 죽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는 도덕적 처벌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천적 본성은 ‘관계의 상태’이기 때문에, 그 관계의 질서가 무너지면 자연스럽게 사라집니다. 사랑에서 나오는 앎이 아니라, 앎으로 사랑을 통제하려는 순간, 천적 상태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습니다.

 

이 글은 창2:16-17의 금지 명령을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이해하게 만듭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말은, 지식을 얻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출발점을 바꾸지 말라’는 뜻입니다. 선과 진리를 자기중심의 판단으로 다루기 시작하는 순간, 인간은 천적 상태에서 떨어져 나옵니다. 이는 한 번의 행동이 아니라, 앎의 방식이 바뀌는 사건입니다.

 

여기까지 오면, 에덴동산 이야기는 더 이상 도덕적 시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 인식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천적 인간은 모든 것을 알 수 있지만, 모든 방식으로 알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자유롭지만, 그 자유는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질서 안에 있을 때만 자유’입니다.

 

AC.80은 그래서 아주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말합니다. 신앙의 신비는 파헤쳐질 대상이 아니라, ‘그렇게 살아야 할 대상’이라고 말입니다. 감각과 기억 지식이 제자리를 지킬 때, 그것들은 삶을 돕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왕좌에 앉는 순간, 천적인 생명은 숨을 쉬지 못하게 됩니다.  

 

 

심화

 

1.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5:37)

 

 

AC.80, 심화 1,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마5:37)

AC.80.심화 1.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마5:37) 해설 중, ‘천적 인간은 ‘이것이 옳은가’를 따져 묻지 않고, ‘이것이 선하다’는 것을 봅니다.’를 읽었을 때, 주님 말씀, ‘오직 너희

bygrace.kr

 

2.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19:24)

 

 

AC.80, 심화 2,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마19:24)

AC.80.심화 2.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마19:24) 또 하나, 위 해설 중,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이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 지식’(the things of sense and memory-knowledge [sensualia et scientifica])을

bygrace.kr

 

3.열매(2:16-17)

 

 

AC.80, 심화 3, ‘열매’(창2:16-17)

AC.80.심화 3. ‘열매’(창2:16-17) 이 AC본문의 말씀인 창2:16-17을 보면,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And Jehovah God commanded the man, saying

bygrace.kr

 

4.번역가들

 

 

AC.80, 심화 4, ‘번역가들’

AC.80.심화 4. ‘번역가들’ 저는 번역가들이 ‘나무 = 퍼셉션’이라는 걸 몰랐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했지요... 그렇게 느끼신 이유가 충분히 이해됩니다. AC의 관점에 익숙해지면 ‘나무 = 퍼

bygrace.kr

 

 

 

AC.81, 창2:1-17 배경, '한 인간이 거쳐 갈 수 있는 세 가지 상태'

AC.81 이 장은 ‘천적 인간’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앞의 장은 ‘죽은 상태에 있던 사람으로부터 형성된 영적 인간’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천적 인간, 영적 인간이 무엇인

bygrace.kr

 

AC.79, 창2:1-17 개요, '경작하며 지킴, 천적 인간의 상태'(15절)

AC.79 천적 인간은 이러한 동산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 동산은 주님의 것이므로, 이 사람은 이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은 허락되지만, 그것들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15절)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