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89 심화

1. 하나님에서 여호와 하나님으로 바뀌는가?

 

AC.89에서 스베덴보리는 창2부터 나타나는 한 가지 중요한 변화를 지적합니다. 앞에서 영적 인간을 다루는 구절들에서는 주님을 단지 하나님이라고 하였는데, 이제 천적 인간을 다루기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이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에서 여호와 하나님으로 호칭이 달라지는 것일까요?

 

먼저 AC.89가 실제로 말하는 범위를 정확히 확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이 호칭의 변화를 분명히 지적하고, 이것을 지금부터 앞에서 다루었던 영적 인간과는 다른 사람, 곧 천적 인간이 다루어진다는 증거 가운데 하나로 제시합니다. 그러나 AC.89 자체에서는 왜 영적 인간을 다룰 때에는 하나님이라 하고 천적 인간을 다룰 때에는 여호와 하나님이라 하는지 그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한 번호만으로 여호와는 언제나 사랑을 의미하고 하나님은 언제나 진리를 의미한다거나, 여호와 하나님은 언제나 사랑과 진리의 결합을 의미한다는 식으로 고정해서 설명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다른 곳에서 여호와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의 차이를 설명하는 내용들을 찾을 수 있더라도, 그것을 확인하지 않은 채 AC.89의 짧은 언급만으로 전체 호칭 체계를 먼저 완성해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이 질문을 계기로 예수, 그리스도, , 구주, 아버지, 아들, 하나님의 아들, 인자, 성령 등 주님에 관한 모든 호칭을 한꺼번에 설명하는 것도 AC.89의 독자가 지금 필요로 하는 범위를 넘어섭니다. 이러한 호칭들은 매우 중요한 주제이지만, 각각 성경의 문맥과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그 호칭을 설명하는 곳에서 살펴보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여러 호칭이 나온다고 해서 먼저 각 호칭에 하나씩 고정된 기능이나 작용을 배정해 놓고 이후의 본문을 그 틀에 맞추어 읽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AC.89의 호칭 변화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 자신이 이것을 천적 인간의 형성이 새롭게 다루어지고 있음을 보여 주는 증거로 제시했으므로 반드시 주목해야 합니다. 1에서 영적 인간이 형성되는 동안에는 하나님이라고 하였는데, 2에서 천적 인간의 형성을 다루면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호칭이 등장합니다. 독자는 우선 이 변화가 우연하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AC를 읽는 방법에서도 중요한 원칙을 보여 줍니다. 말씀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달라질 때 그 차이를 무시해서도 안 되지만, 이름 하나를 발견하자마자 미리 만든 의미표를 기계적으로 대입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그 이름의 차이를 실제로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따라가야 합니다. AC.89에서는 우선 하나님에서 여호와 하나님으로의 변화가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주제가 전환되었음을 보여 주는 하나의 표지라는 데까지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서 여호와 하나님으로 바뀌는가?라는 질문은 여기서 완전히 닫기보다 가지고 가는 편이 좋습니다. AC.89가 우리에게 확실히 알려 주는 것은 호칭의 변화가 의미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변화의 더 깊은 이유는 스베덴보리가 이후의 본문에서 하나님의 이름들을 직접 설명할 때 하나씩 확인하면 됩니다. 그렇게 해야 우리가 먼저 만든 주님의 호칭 체계로 AC를 읽는 것이 아니라, AC 자체가 주님의 여러 이름을 어떻게 열어 가는지를 따라갈 수 있습니다. (AC.89 심화 1)

 

 

 

AC.89, 창2:4, ‘하늘과 땅의 내력 - 천적 인간의 형성은 속 사람에서 시작된다’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These are the nativitie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 when he created them, in the day in which Jehovah God made the earth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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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7 심화

1. 선한 영들 누구인가?

 

AC.87을 읽으면 악한 영들은 물러가고 선한 영들이 가까이 오며, 천적 천사들도 가까이 온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앞의 AC.50에서는 사람마다 적어도 두 영과 두 천사가 함께 있다고 했습니다. 그때 을 악한 영들로 이해했다면 여기서 자연스럽게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AC.87 선한 영들은 갑자기 어디에서 등장한 것인가?

 

이 질문을 풀기 위해서는 먼저 앞에서 가졌던 전제 하나를 바로잡는 것이 좋습니다. 영들이라는 말 자체를 언제나 악한 영들과 같은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87만 보아도 스베덴보리는 악한 영들과 선한 영들을 분명히 구별합니다. 따라서 어떤 번호에서 단순히 영들이라고 했을 때 그것을 자동으로 악한 영들이라고 확정하기보다, 그 번호의 문맥과 스베덴보리의 직접 설명을 따라 판단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AC.50 에 대한 앞선 설명도 수정해서 이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AC.50이 사람과 영계 및 천국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영들천사들을 구별했다고 해서, 거기서 말한 영들이라는 명칭 자체가 곧 악한 영들을 뜻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선악을 확정하는 명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AC.87은 같은 영들 가운데 악한 영들선한 영들을 명시적으로 구별하여 말합니다.

 

그렇다면 AC.87에서 왜 선한 영들과 천적 천사들을 따로 말할까요? 여기서는 원문이 말하는 데까지 정확히 따라가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될 때 악한 영들은 물러가고 선한 영들이 가까이 오며 천적 천사들도 가까이 옵니다. 그리고 이들이 함께 있을 때에는 악한 영들이 도저히 머물 수 없어 멀리 달아납니다. 따라서 이 번호에서 선한 영들천적 천사들은 같은 명칭으로 묶이지 않고 서로 구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AC.87 한 번호만 가지고 이 두 부류의 존재론적 차이와 영계에서의 정확한 위치, 역할, 상태를 모두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특히 영들은 천사들보다 아래 단계의 존재들이다, 아직 완전히 확정되지 않은 상태의 존재들이다, 선한 영들은 인간을 나은 상태로 이끄는 역할을 한다는 식으로 전체 구조를 먼저 완성하면 AC.87이 직접 말하지 않은 내용까지 섞일 수 있습니다. 그러한 구별은 스베덴보리가 영들의 세계와 천국, 영들과 천사들의 상태를 직접 설명하는 곳에서 차례로 확인하는 편이 안전합니다.

 

AC.87에서 지금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충분합니다. 영들이라는 말은 곧 악한 영들이라는 고정된 뜻이 아니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악한 영들과 선한 영들을 분명히 구별합니다. 또한 선한 영들과 천적 천사들도 서로 구별하여 말합니다. 그러므로 AC를 읽을 때 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미리 정해 둔 하나의 뜻을 기계적으로 대입하기보다, 그 문맥에서 어떤 영들을 말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용어 문제를 넘어 앞으로 AC를 읽는 데 중요한 원칙이 됩니다. 우리가 상응을 고정된 사전처럼 사용하지 않기로 한 것과 마찬가지로, 영계의 존재들을 가리키는 명칭도 한 번 정한 설명을 모든 번호에 기계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AC.50AC.50의 문맥에서, AC.87AC.87의 문맥에서 먼저 읽어야 하며, 여러 번호가 충분히 쌓였을 때 스베덴보리 자신이 보여 주는 전체 구조를 따라 정리해야 합니다.

 

따라서 선한 영들은 갑자기 어디에서 등장했는가?라는 질문에 지금 가장 정확하게 답하면 이렇습니다. 선한 영들이 AC.87에서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앞서 영들을 너무 빨리 악한 영들로만 한정해서 이해했던 것입니다. AC.87은 그 이해를 바로잡아 줍니다. 영들 가운데 악한 영들도 있고 선한 영들도 있으며, 이 번호에서는 천적 인간에게서 악한 영들은 물러가고 선한 영들과 천적 천사들이 가까이 온다고 스베덴보리가 직접 말하고 있습니다. 그보다 더 자세한 영들과 천사들의 질서는 앞으로 스베덴보리 자신이 그것을 열어 줄 때 따라가면 됩니다. (AC.87 심화 1)

 

 

 

AC.87, 창2:2-3, '주님 홀로 사람을 위하여 싸우셨으므로 주님께서 쉬셨다'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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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5 심화

1.  아르카나는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는가?’

 

AC.85의 첫 문장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천적 인간이 일곱째 이고 그 때문에 일곱째 날이 거룩하게 구별되어 안식일이라 하였다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아르카나라면, 왜 이것은 처음부터 좀 더 분명하게 알려지지 않았을까요? 말씀에 이 정도의 설명이라도 함께 주어졌다면 안식일과 창조의 날들을 둘러싼 많은 혼란을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 수 있습니다.

 

이 질문에 답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AC.85가 실제로 무엇이라고 말하는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아르카나가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이유를 곧바로 설명합니다. 천적 인간의 본성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영적 인간의 본성을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무지 때문에 사람들은 둘 사이에 큰 차이가 있음에도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을 같은 것으로 여겨 왔다고 합니다.

 

따라서 적어도 AC.85가 직접 주는 첫 번째 답은 분명합니다. 일곱째  안식일의 속뜻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천적 인간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데, 바로 그것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의 차이를 모르면 왜 영적 인간의 형성이 여섯째 날과 연결되고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 또는 안식일과 연결되는지도 알기 어렵습니다.

 

이것은 앞의 AC.67에서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속뜻 안에는 다른 삶의 본성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결코   없는 아르카나들이 있다고 한 것과도 닮아 있습니다. 어떤 속뜻은 단어 하나의 암호를 알아내듯 풀리는 것이 아니라, 그 속뜻이 가리키는 영적 실재 자체를 알아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AC.85의 안식일도 그런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천적 인간이라는 영적 상태를 알지 못하면 일곱째 날이 왜 천적 인간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천적 인간의 본성을 처음부터 모든 사람에게 명백하게 설명하지 않으셨는가?라고 물으면, AC.85 한 번호만으로는 충분한 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AC.85   아르카나가 알려지지 않았는가에 관하여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의 본성이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주님께서 그것을  일찍 명시적으로 계시하지 않으셨는가라는 더 큰 섭리의 문제까지 여기서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지점에서 자유, 인간의 수용 상태, 말씀의 문자와 속뜻의 관계, 속뜻의 보존, 신적 섭리와 계시의 때 같은 스베덴보리의 다른 가르침들을 곧바로 AC.85의 확정적인 해답으로 끌어오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한 주제들은 이 질문을 더 깊이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지만, 각각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그 문제를 다루는 곳에서 확인하면서 연결해야 합니다.

 

또 하나 조심할 것은 속뜻이 처음부터 명백하게 쓰여 있었다면 교회사적 혼란이 없었을 이라고 단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충분한 인간적인 이유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실제로 어떤 결과를 낳았을지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명백한 설명이 언제나 명백한 수용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는 주님의 계시 방식에 대한 우리의 추측보다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밝히는 설명을 따라가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렇다고 처음의 질문을 접어 둘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매우 중요한 질문으로 남겨 둘 가치가 있습니다. AC를 읽다 보면 스베덴보리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밝히는 것이 허락되었다, 이것은 아르카나이다라고 말하는 곳들을 계속 만나게 됩니다. 그때마다  이제야 밝혀지는가?라는 질문이 다시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런 본문들이 충분히 쌓이면 우리는 한 번호의 추측이 아니라 스베덴보리 자신의 여러 설명을 서로 대조하면서 더 신중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AC.85에서 지금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데까지 먼저 가는 것이 좋습니다.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며 안식일이라는 아르카나가 알려지지 않았던 직접적인 이유는 천적 인간의 본성이 알려져 있지 않았고 영적 인간의 본성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더 깊은 질문,   이러한 영적 실재가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도록 허용되었는가?는 여기서 성급하게 닫지 않고, 앞으로 AC가 그 답을 열어 줄 때까지 가지고 가야 할 질문입니다. (AC.85 심화 1)

 

 

 

AC.85, 창2:2-3, ‘주님 자신이 안식일이시며, 주님의 뜻이 천적 인간의 뜻이 된다’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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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3 심화

1. the sixth day the sixth day 다른 뜻인가?

 

AC 영어 원문을 자세히 읽다 보면 작은 따옴표 문제가 눈에 들어옵니다. AC.83 Potts 영어는 when man has become the sixth day라고 되어 있습니다.  the sixth day가 아니라 정관사 the를 따옴표 밖에 두고 sixth day만 묶었을까요? 두 표기에 서로 다른 속뜻이 있는 것일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이 차이에 별도의 교리적 또는 상응적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됩니다. the sixth day라고 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 sixth day라는 상징 자체를 특별히 강조한다거나, 반대로 the sixth day라고 되어 있으면 정관사까지 포함한 특정 상태 전체를 강조한다고 구별할 충분한 근거는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읽는 영어는 스베덴보리가 직접 영어로 쓴 문장이 아니라 라틴어 원문을 영어로 옮긴 번역문입니다. 따라서 영어의 따옴표 위치에는 번역자와 편집자의 판단이 개입될 수 있습니다. 특히 영어에서는 어떤 명사구 가운데 핵심 표현만 인용하거나 특별한 용법으로 표시하면서 관사나 다른 문법 요소를 따옴표 밖에 둘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따옴표가 the를 포함했는지 여부만으로 속뜻의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안전하지 않습니다.

 

AC.83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따옴표의 범위가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여섯째 을 문자적인 하루가 아닌 사람의 상태에 적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사람이 여섯째 이 되었을 때 하늘과 땅과 그 모든 만상이  이루어졌다고 하며, 그 이유를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독자가 붙들어야 할 핵심은 the가 따옴표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가 아니라 여섯째 이라는 표현이 이 문맥에서 거듭난 사람의 상태를 가리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AC 영어 원문을 읽을 때에도 유용한 원칙입니다. Potts 영어의 따옴표는 스베덴보리가 지금 말씀의 어떤 표현을 집어 설명하고 있는지를 알아보는 데 매우 유용합니다. 그래서 현재 번역에서도 영어 원문이 실제로 따옴표로 표시한 핵심 표현을 한국어와 함께 보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어 번역문의 따옴표 위치 자체를 새로운 상응의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최종 판단이 필요한 경우에는 영어 번역의 문장부호보다 라틴어 원문을 우선해서 확인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Potts 영어는 매우 중요한 번역 자료이지만, 따옴표와 같은 편집 요소까지 모두 스베덴보리 자신의 신학적 의도를 직접 나타낸다고 전제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번역상의 중요한 의미 차이가 의심될 때에는 라틴어 어휘와 문법을 확인하고, 영어의 문장부호는 그다음 참고자료로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므로 the sixth day’’ ‘‘the sixth day’’를 서로 다른 영적 상태나 서로 다른 상응으로 구별할 필요는 없습니다. AC.83에서 중요한 것은 여섯째 이 단순한 시간 표시를 넘어 사람의 거듭남의 상태를 가리키며, 그 상태에서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고 사랑이 주된 것이 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영어 따옴표는 그 표현을 알아보도록 돕는 표지로 사용하되, 따옴표의 범위 자체에서 별도의 교리를 만들어 내지 않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AC.83 심화 1)

 

 

 

AC.83, 창2:1, ‘신앙과 사랑이 하나가 될 때, 사랑이 주된 것이 된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창2:1) AC.83‘하늘과 땅과 그 모든 만상’(heavens and the earth and all the army of them)은 사람이 ‘여섯째 날’(sixth day)이 되었을 때 ‘다 이루어졌다’(finished)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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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2 심화

1.  주님은 내가 사람을 순금보다 희소하게 하며라고 말씀하시는가?

 

13:12에서 여호와께서는 내가 사람을 순금보다 희소하게 하며 인생을 오빌의 금보다 희귀하게 하리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사람이 주님에게서 멀어지고 참된 인간의 상태를 잃는 것이 인간의 악 때문이라면, 왜 말씀은 마치 주님께서 직접 사람을 희귀하게 만드시는 것처럼 내가 그렇게 하겠다고 표현하는 것일까요?

 

먼저 AC.82 자체가 이 질문에 직접 답하고 있지는 않다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자리에서 사13:12-13을 인용한 직접적인 목적은 하늘 이 사람에 대하여 서술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AC.82만 가지고 내가 사람을 희귀하게 한다는 표현의 속뜻을 완전히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 질문은 AC를 계속 읽다 보면 반복해서 만나게 되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말씀에는 주님께서 노하시고, 벌하시고, 멸하시며, 때로는 인간에게 악한 결과를 직접 가져오시는 것처럼 표현되는 곳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다른 곳들에서 이러한 표현을 말씀의 외적인 나타남과 인간에게 보이는 방식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주님에게서는 선과 진리만 나오지만,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상태에 따라 그 결과가 전혀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주님께서 하신다는 표현을 만날 때에는 두 가지를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말씀의 문자에 실제로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그 표현으로부터 그러므로 악이나 파괴의 근원이 주님이다라고 결론짓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전체적인 가르침에서는 후자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악과 거짓의 근원을 주님에게 돌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와 함께 허용이라는 문제도 나중에 중요하게 등장합니다. 주님께서는 악을 원하시거나 만들어 내시는 분이 아니지만, 인간의 자유가 보존되는 질서 안에서 악이 일어나는 것을 허용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허용한다는 것은 악을 승인하거나 방치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적 허용은 신적 섭리와 분리된 독립적인 원리가 아니며, 주님께서는 허용되는 것 안에서도 가능한 한 선한 목적을 향하여 섭리하십니다.

 

다만 이러한 appearance permission에 관한 전체 교리를 사13:12 한 절에 곧바로 대입하여  구절의 뜻은 정확히 이것이다라고 확정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지금 AC.82에서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 말씀을 하늘 이 사람에게 서술될 수 있다는 증거로 인용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사람을 희귀하게 하며라는 표현이 왜 이런 형식을 취하는가 하는 문제는 여기서 생겨난 정당한 독자 질문이지만, 그 답은 AC 전체에서 말씀의 표현 방식과 신적 섭리를 더 배우면서 점차 분명해져야 합니다.

 

따라서 이 심화에서 먼저 기억할 원칙은 간단합니다. 말씀에서 주님께서 어떤 악한 결과를 직접 일으키시는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고 해서 곧바로 그 악의 근원이 주님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동시에 문자에 기록된 내가 하리라라는 표현을 임의로 사실은 주님이 하지 않으셨다고 지워 버려서도 안 됩니다. 먼저 말씀의 문자 그대로를 존중하여 읽고, 그 표현이 속뜻에서 어떻게 이해되는지는 스베덴보리 자신이 해당 원리를 설명하는 곳들을 따라 확인해야 합니다.

 

이렇게 읽으면 사13:12의 질문은 단순히 하나의 난해한 구절을 해결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앞으로 AC를 읽으면서  주님께서 이렇게 하신다고 기록되어 있을까?라는 질문을 만날 때마다, 문자에 나타난 표현과 주님의 실제 본성, 그리고 인간의 자유와 신적 허용 및 섭리의 관계를 성급하게 혼합하지 않고 구별하여 읽게 하는 중요한 질문이 됩니다. (AC.82 심화 1)

 

 

 

AC.82, 창2:1, ‘하늘은 속 사람, 땅은 겉 사람 - 각 사람이 먼저 교회여야 하는 이유’ (AC.82-83)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army of them. (창2:1) AC.82이 말씀은 사람이 이제 ‘여섯째 날’(sixth day)이 될 만큼 영적으로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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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0 심화

1.  개역개정에는 열매 들어가 있는가?(2:16-17)

 

2:16-17을 개역개정과 AC에 실린 영어 성경으로 함께 읽으면 작은 차이 하나가 눈에 띕니다. 개역개정은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번역합니다. 그런데 AC에 인용된 영어에서는 Of every tree of the garden eating thou mayest ea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thou shalt not eat of it이라고 되어 있어 열매에 해당하는 단어가 따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개역개정은 왜 열매를 넣었을까요?

 

먼저 중요한 것은 히브리어 본문에도 이 두 절에서 열매에 해당하는 별도의 명사가 사용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문자적으로는 동산의 모든 나무에서 너는 먹을  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먹지 말라에 가까운 구조입니다. 따라서 AC에 실린 영어가 tree를 그대로 살린 것은 히브리어의 표현 구조와 잘 맞습니다.

 

그러나 한국어에서는 나무에서 먹는다 또는 문맥에 따라 나무를 먹는다는 표현이 독자에게 어색하거나 오해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사람이 먹는 것은 나무 자체가 아니라 나무에서 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개역개정의 나무의 열매는 이 뜻을 자연스러운 한국어로 전달하기 위해 먹는 대상을 명시적으로 풀어 준 번역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열매가 히브리어 원문에 별도의 단어로 있는데 영어 번역이 빠뜨린 것도 아니고, 반대로 개역개정이 전혀 근거 없는 내용을 임의로 첨가했다고 볼 필요도 없습니다.

 

AC를 읽을 때 이 차이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개별 표현을 매우 세밀하게 다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원칙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개역개정의 열매라는 번역 표현을 근거로 창2:16-17의 속뜻에 원문에 없는 별도의 열매 상응을 추가해서는 안 됩니다. AC.80에서 스베덴보리가 해설하는 것은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통하여 선과 진리를 아는 것과,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것들을 알려 하거나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의 아르카나를 탐구하려 하는 것의 차이입니다.

 

따라서 이 본문을 AC와 함께 읽을 때는 개역개정의 자연스러운 한국어와 원문의 표현 구조를 함께 기억하면 좋습니다. 예배에서 개역개정을 읽을 때는 그대로 나무의 열매라고 읽으면 됩니다. 그러나 AC의 속뜻을 검토할 때는 히브리어와 AC의 영어가 실제로 나무에서 먹는다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번역문에 명시적으로 보이는 단어와 원문에 실제로 있는 단어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개역개정의 번역이 잘못되었다는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 번역 AC 속뜻 해설이 서로 다른 일을 한다는 점을 보여 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성경 번역은 원문의 뜻을 독자가 자연스럽게 이해하도록 한국어로 전달해야 하고, AC 해설에서는 그 번역 뒤에 있는 원문의 표현까지 확인하면서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무엇을 근거로 속뜻을 설명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러므로 창2:16-17에서는 개역개정의 열매를 그대로 존중하여 읽되, AC의 상응을 판단할 때 그것을 원문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단어처럼 취급하지 않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AC.80 심화 1)

 

 

 

AC.80, 창2:1-17 개요, '주님으로부터 알고,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알려 하지 말라' (16-17절)

AC.80그는 또한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해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아는 것이 허락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렇게 해서는 안 되며,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sensu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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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1 심화

1. 허락되었습니다 - 스베덴보리는 어떻게 허락을 받았는가?

 

AC.71에서 스베덴보리는 다른 삶에 관한 내용들을 각 장의 처음과 끝에 어떤 순서대로 덧붙이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AC.67부터 이러한 표현은 반복해서 나타납니다. 말씀의 속뜻을 아는 것이 허락되었고, 여러 해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도록 허락되었으며, 듣고 본 것을 밝히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합니다. 이제 AC.71에서는 그 내용들을 어떤 순서로 배치하는 것까지 허락의 언어로 표현합니다. 그렇다면 이 허락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진 것일까요? 주님께서 직접 이제 이것을 기록하라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먼저 가장 중요한 것은 AC.71 자체가 그 방법을 설명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 번호에는 어떤 음성을 들었다는 말도 없고, 천사가 지시했다는 말도 없으며, 퍼셉션이나 유입을 통해 알았다는 설명도 없습니다. 따라서 허락되었습니다라는 표현만 가지고 그 전달 방식을 하나로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 점은 오히려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영들과 천사들과 실제로 말하고 함께 있었다고 매우 구체적으로 증언할 때에는 그렇게 말합니다. AC.67에서는 여러 해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도록 허락되었다고 했고, AC.70에서는 육체 안에서 알고 지냈던 사람들이 죽은 뒤에도 그들과 말하고 함께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허락 자체가 어떤 방식으로 알려졌는가에 대해서는 적어도 AC.71까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부분은 모르는 채로 두는 것이 그의 기록에 더 충실합니다.

 

그렇다고 이 표현을 단순히 스베덴보리가 그렇게 느꼈다는 정도로 낮추어 읽는 것도 적절하지 않습니다. AC.67부터 반복되는 표현을 보면 그는 말씀의 속뜻을 알게 된 것,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게 된 것, 그동안 듣고 본 것을 밝히는 것, 그리고 그것들을 일정한 순서로 기록하는 것까지 자신의 독자적인 결정이나 성취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는 일관되게 주님의 신적 자비 허락이라는 언어를 사용합니다. 적어도 스베덴보리 자신은 이 모든 일을 자신에게서 시작된 것으로 이해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따라서 현 단계에서 가장 안전한 답은 두 가지를 함께 붙드는 것입니다. 첫째,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기록하고 있는 일을 주님의 신적 자비 아래 허락된 일로 이해했습니다. 둘째, 그 허락이 매번 어떤 구체적인 방식으로 그에게 전달되었는지는 AC.71이 말하지 않습니다. 직접적인 말씀인지, 영적 교통 가운데 주어진 인식인지, 다른 어떤 방식인지 이 한 문장만으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허락되었습니다라는 말을 신비화할 필요도 없고, 반대로 단순한 문학적 겸손의 표현으로 축소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그렇게 표현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표현은 독자에게 그의 자기 이해를 보여 줍니다. 그는 자신을 말씀의 아르카나와 다른 삶의 실상을 스스로 발견하여 발표하는 독립적인 탐구자로 제시하지 않고, 그것들을 알고 보고 밝히도록 허락받은 사람으로 제시합니다.

 

앞으로 그의 기록을 더 읽으면서 이러한 허락의 성격을 밝혀 주는 직접적인 설명을 만나게 된다면 그때 우리의 이해를 더 넓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71의 독자는 아직 거기까지 갈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은 스베덴보리가 분명히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을 함께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는 허락되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허락되었는가는 여기서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 구별을 지키는 것이 오히려 그의 증언을 가장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방법입니다. (AC.71 심화 1)

 

 

 

AC.71, 창2 앞, ‘다른 삶에 관한 내용들을 어떤 순서대로 덧붙이다’

AC.71그러나 이러한 내용들을 말씀 본문에 들어 있는 것들 사이에 끼워 넣는다면 흩어지고 서로 연결되지 않게 될 것이므로,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그것들을 각 장의 처음과 끝에 어떤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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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2 심화

1.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다

 

AC.162에는 처음 읽으면 조금 뜻밖에 느껴지는 문장이 있습니다. ‘ 천국은 하나의 천적 인간인데, 이는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창1과 창2에서 천적 인간이라는 표현은 거듭남의 가장 깊은 상태에 이른 사람이나 태고교회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데 여러 차례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갑자기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앞에서 천적 인간이라 했던 사람들은 무엇이며, 왜 여기서는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라고 하는 것일까요?

 

이 문장을 이해하려면 AC.162가 무엇을 설명하려는지를 먼저 보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모든 진리와 정의의 법이 천적 기원들’, 곧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로부터 흘러나온다고 말합니다. 이어 온 천국이 하나의 천적 인간이라고 하고, 그 이유를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며 주님께서 천국의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시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강조점은 누가 천적 상태에 이를 수 있는가보다 천적인 것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에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창2에서 계속 배워 온 질서와도 같습니다. 지혜와 지성은 인간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고 주님에게서 옵니다. 선과 진리도 인간이 자기 것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AC.149에서는 더 나아가 오직 주님만이 본래적으로 자기 자신의 것, 곧 주님의 proprium을 가지고 계시며, 주님의 proprium은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proprium은 그 자체로 생명이 아니지만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된다는 것은 인간 자신이 천적인 것의 근원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천적인 생명을 받아 그 질서 안에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보면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다라는 말과 태고교회의 사람들이 천적 인간이었다는 말은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천적인 생명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본래적으로 천적 인간이십니다. 반면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는 만큼 천적 인간이 됩니다. AC.155에서 천사들이 자기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을 퍼셉션한다고 한 것도 같은 질서를 보여 줍니다. 천사가 천사인 까닭도, 천적 인간이 천적 인간인 까닭도 생명의 근원이 자기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받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AC.162  천국은 하나의 천적 인간이라고 한 뒤 곧바로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천국의 모든 천사를 하나의 거대한 사람으로 상상하라는 데 우선적인 뜻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문맥에서 먼저 붙들어야 할 것은 천국의 천적인 성질 자체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입니다. 본문도 주님께서 천국과 천적 인간의 모든  안에서 모든 것이시므로, 천국과 천적 인간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천적이라 한다고 설명합니다. 천국은 스스로 천적인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 말미암아 천적입니다.

 

이 점은 이어지는 혼인의 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지상의 혼인이 천적 혼인으로부터 파생되어야 한다고 할 때, 그 천적 혼인의 가장 깊은 중심에도 한 분 주님이 계십니다. AC.162가 천적 혼인을   주님과 하나의 천국,  머리가 주님이신 하나의 교회라고 설명하는 이유입니다. 혼인의 하나 됨도 인간 둘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독립적인 하나 됨이 아니라, 그 본과 질서를 한 분 주님에게서 받습니다.

 

따라서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다라는 문장은 인간이나 천사의 천적 상태를 부정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의 천적인 모든 것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밝히는 말입니다.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고 천국이 천적 천국이 되는 것은 주님과 별도로 천적인 무엇을 소유하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생명과 질서를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짧은 문장은 지금까지 창2가 계속 가르쳐 온 한 가지 질서를 다시 가장 깊은 곳에서 확인합니다. ‘생명의 근원은 인간에게 있지 않고 주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AC.162 심화 1)

 

 

 

AC.162, 창2:24, ‘혼인의 법’(the law of marriages)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창2:24) AC.162모든 진리와 정의의 법은 천적 기원들, 곧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로부터 흘러나옵니다. 온 천국은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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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1 심화

1. influx -  사람과  사람이 하나처럼 보이는 이유

 

AC.161에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말을 합니다. ‘ 사람과  사람이 어떻게 하나로서 활동하는지, 또는 어떻게 하나처럼 보이는지는 하나가 다른 하나 안으로 유입되는 것을 알지 못하면   없습니다. 여기서 처음으로 유입(influx)이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를 이해하는 직접적인 열쇠로 제시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서로 구별된다는 것도 읽었고, 동시에 천적·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된다는 것도 읽었습니다. 그렇다면 서로 구별되는 것들이 어떻게 실제 인간의 삶에서는 하나의 생각과 느낌과 행동처럼 나타나는 것일까요? AC.161은 그 답을 유입에서 찾기 시작합니다.

 

이 질문은 사실 AC.161에서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닙니다. 앞의 여러 번호를 읽으면서 계속 쌓여 왔습니다. AC.149에서는 인간의 proprium은 그 자체로 죽어 있으며, 오직 주님의 proprium만이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생명의 기관이라고 했습니다. AC.150에서는 더 놀라운 말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오랫동안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알도록 허락받았으며, 모든 생각의 관념이 흘러든다는 것을 퍼셉션했다고 합니다. 여기까지만 읽으면 독자는 자연스럽게 질문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한다고 경험하는 것은 무엇인가? 모든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면 나의 삶은 어디에 있는가?

 

AC.155는 이 질문에 천사들의 상태를 통해 중요한 실마리를 줍니다. 천사들은 자기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을 퍼셉션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특별히 의식하며 생각하고 있지 않을 때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는 것으로밖에는 알지 못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과 자기 자신의 생명처럼 살아간다는 경험이 서로 모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은 자기 생명을 끊임없이 외부에서 조종당하는 무엇처럼 경험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생각하고 사랑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장 깊은 곳에는 그 생명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보편적인 퍼셉션이 있습니다.

 

AC.159에서는 이 관계가 속 사람과 겉 사람이라는 구조 안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됩니다. 천적 인간은 무엇이 속 사람에게 속하고 무엇이 겉 사람에게 속하는지를 분명하게 퍼셉션했으며,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어떻게 다스려지는지도 퍼셉션했습니다. 그러므로 속 사람과 겉 사람은 서로 구별되지만 서로 단절되어 있는 두 영역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을 다스리시는 질서 안에서 서로 관계를 맺습니다. 바로 이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AC.161 유입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AC.161은 여기서 유입에 관한 전체 교리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주 평범한 행위 하나를 예로 듭니다. 어떤 사람이 겉으로 선한 행동을 했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하나의 행위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행위 안에 체어리티, 곧 사랑과 신앙이 있어야 하며, 다시 그 사랑과 신앙 안에 주님이 계셔야 그 행위를 체어리티의 행위 또는 신앙의 열매라고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외적인 행위만 떼어 놓고 보아서는 그 행위의 영적 성질을 충분히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어떻게 하나로서 활동하는지를 조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외적으로 나타나는 행위와 그 행위 안에 있는 사랑과 신앙은 서로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사랑과 신앙의 생명의 근원인 주님도 인간의 외적인 행위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구별됩니다. 그러나 실제 삶에서는 서로 단절된 채 존재하지 않습니다. 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타나 하나의 행위가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어떤 일을 할 때  부분은  사람이고  부분은  사람이다라고 나누어 경험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삶, 하나의 의지, 하나의 행동처럼 경험합니다. 이것이 AC.161이 말하는 하나로서 활동하고 하나처럼 보이는 상태를 이해하는 출발점입니다.

 

이 때문에 유입을 인간의 자유를 없애는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적어도 지금까지 우리가 읽은 본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AC.155의 천사들은 주님으로부터 살면서도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AC.161의 태고교회 후손들도 겉 사람 안에서, 곧 자기들의 proprium 안에서 살기를 원했고, 주님께서는 그것을 허락하셨습니다. 다만 주님께서는 그들을 proprium에 버려 두지 않으시고 그 안에 영적 천적인 것을 자비롭게 스며들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과 인간이 자기 삶으로 받아 살아가는 것이 서로 경쟁하는 두 생명처럼 제시되지 않습니다.

 

바로 여기서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이라는 앞의 표현들이 다시 중요해집니다. 인간의 proprium 자체가 생명의 근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 생명을 얻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명을 얻은 proprium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AC.155에서는 그것을 주님의 신부와 아내라고까지 했으며,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를 퍼셉션하고 지혜와 지성을 누린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거듭남의 방향을 나라는 존재가 점점 없어지는 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까지의 본문이 보여 주는 방향은 오히려 인간이 자기 생명의 참된 근원을 주님에게서 받아들이면서, 그 생명을 자기 자신의 삶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입은 주님께서 안에서 움직이시고 인간은 밖에서 수동적으로 따라 움직인다는 식의 단순한 그림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161이 보여 주는 것은 훨씬 섬세합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은 구별되지만 하나로서 활동합니다. 천적·영적 생명과 proprium도 서로 같은 것은 아니지만 인간 안에서는 하나처럼 나타납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삶을 실제 자기 삶처럼 살아가지만, 그 생명의 근원은 인간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이 여러 사실을 함께 붙들게 하는 개념이 지금 이 지점에서 등장한 유입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행하는 선한 일도 새롭게 보게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 같은 행동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저절로 체어리티의 행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AC.161이 행위를 예로 든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행위 안에 체어리티, 곧 사랑과 신앙이 있고, 그 사랑과 신앙 안에 주님이 계실 때 비로소 그 외적인 행위는 안에 있는 것과 하나로서 활동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외적인 행동을 버리고 내적인 것만 추구하는 것도 아니며, 외적인 선행만으로 만족하는 것도 아닙니다.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밖의 삶과 행위 안으로 흘러들어 하나의 삶을 이루는 것입니다.

 

아직 AC.161에서 유입에 관한 모든 것이 설명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이제 그 문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유입의 전체 교리를 미리 완성하려 하기보다, 지금까지 읽은 것만으로 한 가지를 분명히 붙들면 충분합니다. ‘나는  삶을  삶으로 살아가지만,  생명의 근원은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 안으로 흘러들어 우리의 실제 삶과 행위 안에 나타날 때, 서로 구별되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은 하나로서 활동하고 하나처럼 보입니다. 이것이 AC.161에서 처음 열어 보여 주는 유입의 의미입니다. (AC.161 심화 1)

 

 

 

AC.161, 창2:24, ‘겉 사람의 proprium 안에 영적 천적인 것을 스며들게 하시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창2:24) AC.161이 태고교회의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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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0 심화

1.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 - 영계에도 시간이 있는가?

 

AC.70에서 스베덴보리는 육체의 죽음 이후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 사람이 다른 삶 안에 있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을 읽으면 두 가지 질문이 동시에 생깁니다. 첫째, 영계에도 자연계처럼 하루라는 시간이 있는 것일까요? 둘째, 죽음이 삶의 연속이라면 왜 즉시라고 하지 않고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라고 했을까요?

 

먼저 AC.70 자체가 말하는 범위를 정확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영계의 시간과 공간에 관한 교리를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또한 거의 하루가 정확히 몇 시간을 뜻하는지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번호에서 그가 강조하는 것은 육체의 죽음과 다른 삶 사이에 오랜 단절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죽은 뒤에도 살아 있다는 것을 말하면서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 다른 삶 안에 있게 된다고 하고, 곧이어 그 이유를 죽음은 삶의 연속이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그러므로 이 하루를 곧바로 자연계의 정확한 24시간으로 고정하는 것도 조심해야 하지만, 반대로 실제 시간은 전혀 아니며 오직 하나의 영적 상태를 뜻한다고 단정하는 것도 이 지점에서는 이릅니다. AC.70은 이제 사람이 어떻게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하는 첫 번호입니다. 실제로 그 전환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뒤이어 나오는 기록에서 더 구체적으로 밝혀질 것입니다.

 

여기서 소생될 라는 첫 문장을 함께 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죽은 뒤에도 산다고만 하지 않고, 사람이 소생될 때의 상태를 이제 말하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육체의 죽음과 다른 삶 사이에 아무런 과정도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과정 때문에 인간의 삶이 끊어졌다가 다시 시작된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지막에는 죽음은 삶의 연속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AC.70이 독자에게 먼저 보여 주는 것은 과정이 있으면서도 연속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라는 표현은 적어도 한 가지를 분명하게 해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육체의 죽음 뒤 인간이 오랫동안 무의식적인 공백 속에 머물다가 먼 훗날 다시 살아난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가 직접 경험했다고 증언하는 다른 삶은 육체의 죽음에 매우 가까이 이어져 있습니다. 이 점이 AC.70의 문맥에서 거의 하루라는 표현이 담당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입니다.

 

영계의 시간 자체가 자연계의 시간과 어떻게 다른가 하는 문제는 물론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AC.70 한 번호만으로 완성해서 설명하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이후 실제로 영계의 상태와 삶을 어떻게 묘사하는지를 충분히 읽은 뒤 다루는 편이 더 안전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영계에는 시간이 없다는 명제부터 앞세우면 오히려 독자는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하루라고 했는가?라는 또 다른 문제에 빠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자연계와 똑같은 시간이 있다고 생각해도 이후의 설명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AC.70에서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를 읽을 때는 아직 시계부터 꺼낼 필요도 없고, 곧바로 모든 시간을 상태의 상응으로 바꿀 필요도 없습니다. 지금은 스베덴보리가 무엇을 강조하는지를 먼저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육체의 죽음은 인간 생명의 소멸이 아니며, 다른 삶은 그 죽음 뒤에 긴 공백을 두고 시작되는 별개의 생명도 아닙니다. 사람이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 데에는 소생의 과정이 있지만, 그 모든 과정은 죽음은 삶의 연속이라는 큰 질서 안에 있습니다. (AC.70 심화 1)

 

 

 

AC.70, 창2 앞, ‘죽음은 삶의 연속이다’

AC.70여러 해 동안 제가 듣고 보았던 것을 밝히는 것이 저에게 허락되었으므로, 여기에서는 먼저 사람이 소생될 때, 곧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들어갈 때 그 상태가 어떠한지를 말하고자 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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