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유에 누이신 주님을 목격한 사람들

 

 

8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15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16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17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전하니 18듣는 자가 다 목자들이 그들에게 말한 것들을 놀랍게 여기되 19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 20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눅2:8-20)

 

 

베들레헴은 새로운 상태에서의 천적인 것에 속한 영적인 것을 뜻한다. 이 상태는 선과 진리에 대한 새로운 애정이 있는 상태이다. 왜냐하면 천적인 것에 속한 영적인 것은 선에서 비롯한 진리이고, 그러므로 선에서 비롯한 진리에 대한 애정이기 때문이다. (천국의 비밀 6247, 이순철 역) ...from the signification of “Bethlehem,” as being the spiritual of the celestial in a new state (see n. 4594), thus a state of new affection of truth and good; for the spiritual of the celestial is the truth of good, thus the affection of truth from good. (AC.6247, Clowes 역)

 

※ 윗글은 아래 창세기 48장 7절 말씀에 대한 주석 일부입니다.

 

내게 대하여는 내가 이전에 밧단에서 올 때에 라헬이 나를 따르는 도중 가나안 땅에서 죽었는데 그곳은 에브랏까지 길이 아직도 먼 곳이라 내가 거기서 그를 에브랏 길에 장사하였느니라 (에브랏은 곧 베들레헴이라) (창48:7)

 

 

※ 오늘 본문은 지난주 본문과 앞부분이 좀 겹칩니다. 원래대로라면 15절부터 새로운 본문이어야 하는데, 아마 21절까지 말이지요, 이상하게 이 부분에 대한 설교 원본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여러 성탄절 본문 중 여기에 근접한 것으로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새 교회의 모든 성도님과 함께 주님의 탄생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구약의 예언서에는 주님의 탄생을 예언하는 말씀이 여러 곳에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사야서 7장 14절에는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사7:14)

 

했고, 또 미가서 5장 2절에는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미5:2)

 

고 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나 미가 선지자나 주님 오시기 전, 약 700년 전의 사람들인 걸 감안하면, 메시아에 대한 믿음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탄생하시던 날, 주님께 경배를 드린 사람은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과 멀리 시리아에서 온 동방박사들뿐이었습니다. 세상에 오신 주님을 인정하는 사람이 그렇게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목자들에 대한 내용입니다. 본문 8절, 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8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밤에 목자들이 들에서 양을 지키고 있는데 갑자기 천사들이 나타났습니다. 여기서 밤은 주님이 오실 당시 유대교회의 영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교회 안에 진리도 없고, 사랑도 없는 상태입니다. 유대교회가 그렇게 된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인간의 생각을 섞어 인간의 학문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진리 안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런 진리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중에도 주님이 주신 사랑과 인애(仁愛, charity)를 지키고 실천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는데요, 본문에 자기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 태고교회부터 시작, 고대교회와 유대교회, 그리고 현 기독교회 역시 각 교회 시대의 종말마다 소위 ‘남은 자’(remnant), ‘리메인스’(remains)라 하는, 주님이 그때그때 새 교회를 일으키시기 위해 사용하신 소수의 신앙인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선 그중 일부가 바로 이 ‘목자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마치 태고교회와 고대교회를 잇는 ‘노아’라는 극소수의 사람들이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노아’는 어느 한 개인의 이름이 아닌, 그 시대 특정 신앙이나 교리, 교회를 일컫는 이름입니다. 창세기 아브라함의 등장 전까지는 그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모두 이런 의미를 가집니다.

 

’은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비롯한 선을 뜻하고, ‘목자’는 그 선을 지키기 위해 힘쓰는 사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들 앞에 주님의 천사들이 나타나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는데요, 그러자 목자들이 크게 무서워합니다.

 

10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말씀에서는 주님이 선지자나 사도들에게 나타나실 때 그들의 모습을, 떨거나 죽은 사람처럼 되거나, 또는 온몸의 기운이 빠진 걸로 기술하는데요, 가령, 다니엘 같은 경우입니다. 다니엘서 10장 4절로 12절입니다.

 

4첫째 달 이십사일에 내가 힛데겔이라 하는 큰 강가에 있었는데 5그때에 내가 눈을 들어 바라본즉 한 사람이 세마포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우바스 순금 띠를 띠었더라 6또 그의 몸은 황옥 같고 그의 얼굴은 번갯빛 같고 그의 눈은 횃불 같고 그의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의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 7이 환상을 나 다니엘이 홀로 보았고 나와 함께 한 사람들은 이 환상은 보지 못하였어도 그들이 크게 떨며 도망하여 숨었느니라 8그러므로 나만 홀로 있어서 이 큰 환상을 볼 때에 내 몸에 힘이 빠졌고 나의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 듯하였고 나의 힘이 다 없어졌으나 9내가 그의 음성을 들었는데 그의 음성을 들을 때에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깊이 잠들었느니라 10한 손이 있어 나를 어루만지기로 내가 떨었더니 그가 내 무릎과 손바닥이 땅에 닿게 일으키고 11내게 이르되 큰 은총을 받은 사람 다니엘아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깨닫고 일어서라 내가 네게 보내심을 받았느니라 하더라 그가 내게 이 말을 한 후에 내가 떨며 일어서니 12그가 내게 이르되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하게 하기로 결심하던 첫날부터 네 말이 응답받았으므로 내가 네 말로 말미암아 왔느니라 (단10:4-12)

 

주님이 나타나실 때,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고, 온몸에 기운이 빠져 죽은 자처럼 되는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주님의 위엄 앞에서 그들의 자아가 완전히 굴복하는 모습입니다. 죽은 자처럼 된다는 것은 마치 자아가 없는 것처럼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영적으로 보면 지극히 경건한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주님께서 오셔서 그를 새롭게 만드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성(聖) 문서에서는, 주님을 만날 때의 떨림을 거룩한 떨림, 또는 거룩한 전율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떠는 사람에게 ‘무서워하지 말라’ 하시는 것은 그 순간 주님께서 그를 영적으로 새롭게 만드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 위 ‘(聖) 문서’라는 용어는 스베덴보리가 영계 체험 이후부터 기록한, 그러니까 주님이 그의 손을 빌려 기록하신 저작들(Writings)을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자기가 천국에서 듣고 본 모든 경험과 남기는 이 모든 기록은 오직 주님의 허락으로 하는 것이며, 특히 창세기, 출애굽기 주석은 오직 주님이 친히 하시는 말씀을 자기는 성경 한 권만 가지고 받아 적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마치 오늘날의 프린터처럼 말이지요. 그래서 그가 남긴 기록들에 대하여 ‘’(聖)이라는 글자를 붙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절대로 안 되죠. 감히 말입니다! 이 형용은 오직 주님 한 분께만 사용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영적으로 새롭게 된 목자들에게 천사들이 전한 기쁜 소식은 무엇이었을까요? 다윗의 동네에 구주, 곧 그리스도 주님이 태어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곧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 중에는 입으로는 삼위일체를 주장하면서 실제로는 아버지 하나님 따로, 아들 하나님 따로, 성령 하나님 따로, 세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문자적으로만 보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따로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셋이 아니라 한 분 주님 안에 있는 여러 성품을 나타냅니다. 즉 사람 안에 영이 있고 몸이 있으며, 영으로부터 몸을 통해 나오는 능력이나 에너지, 기운이 있는 것처럼, 주님도 그렇게 영과 몸과 영으로부터 몸을 통해 발산되는 에너지와 기운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삼위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한 분 주님 안에 있는 세 가지 본질인 것입니다. 목자들처럼 마음속에 사랑과 체어리티가 있는 사람은 그러한 진리를 누구보다 잘 이해합니다. 사랑과 체어리티는 진리를 끌어당겨 자신과 하나로 만들려는 성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마음속에 체어리티가 없으면 진리를 배척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이유 없이 미워하고 해치려 했던 것도 그들의 내면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속에 사랑이 있는 사람은 진실을 진실이라고 하고, 거짓은 거짓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사람은 거짓을 진실이라 하고, 진실을 거짓이라 폄하하고 비난합니다. 인력으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질서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제일 먼저 주님의 탄생을 알린 것은 그래서입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12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그러니까 베들레헴에 가면 강보에 싸여 말구유에 누워있는 아기가 있을 것인데, 그 아기가 바로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이유는 여관에 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에서 ‘여관’(inn)은 진리를 가르치는 곳인 교회를 뜻하고, ‘’은 교리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여관에 방이 없다는 것은 교회에 참된 교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교리 안에서 진리로 존재하십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참된 교리가 없다는 것은 유대교회 안에 주님이 계실 곳이 어디에도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불가피하게 외양간 말구유에서 태어나셔야 했습니다. 말씀에서 ‘’(horse)은 진리에 대한 이해력을 뜻합니다. 그리고 ‘구유’(manger)는 말이 먹이를 먹는 곳이므로 교리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말구유에 누워계시는 주님은 신앙인들의 지성을 먹이는, 교리라는 진리로서의 주님을 뜻합니다. 그러면 주님을 감싸고 있는 강보는 무슨 뜻일까요? ‘강보’는 주님의 신성으로부터 나오는 첫 번째 진리를 뜻합니다. 그것은 태양의 뜨거운 불에서 나오는 첫 번째 빛과 같이 순수하고 밝은 진리입니다. 태양에서 처음 나오는 빛은 우주공간과 대기권을 차례로 지나 사람들에게 도달합니다. 그러니 그 빛과 열기가 얼마나 희석되겠습니까? 주님의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신성에서 나오는 처음 진리는 인간이 받아들일 수 없는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그 진리는 각자의 영적 상태에 맞도록 주님에 의해 그 빛과 열기가 조절된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 원형은 주님의 신성으로부터 바로 나온 진리, 즉 순진무구한 진리라는 것입니다. 그 진리가 바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 곧 주님이십니다.

 

13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지극히 높은 곳’은 하늘에서는 천국이요, 사람 안에서는 속 사람입니다. 또 ‘’은 지상에서는 교회이며, 사람 안에서는 겉 사람을 뜻합니다. 따라서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는 하늘과 땅에서 주님을 여호와로 인정하는 사람, 모든 선하고 진실한 것이 오직 주님에게서만 나온다고 믿는 사람들이 드리는 감사와 영광의 고백입니다. 그러면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는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은 아기로 오신 주님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시인하는 사람,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의 것이라는 걸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지옥의 악과 거짓으로부터 지켜주십니다. 땅에 있는 사람들에게 평화란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천사들은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찬송한 것입니다.

 

15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자 목자들이 서로 말하되 베들레헴으로 가자고 합니다. 구유에 계신 주님을 직접 뵙기 위해서입니다. 목자들이 천사로부터 진리를 깨우치는 것처럼, 우리도 천사를 통해 진리를 깨닫습니다. 그러나 가끔은 이것이 천사를 통해 얻은 생각인지 인간의 생각인지 분명치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경우, 우리는 말씀의 속뜻 진리를 통해 그것을 확인해 보려고 합니다. 목자들이 구유에 계신 주님을 뵙기 위해 베들레헴으로 간다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베들레헴’은 자연적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의 진리인 합리적 진리와, 말씀의 문자적 뜻인 자연적 진리를 서로 연결시켜 주는 중간자적 진리, 즉 선에 속한 진리(truth of good)나 선이 있는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이 세상에 오실 때는 선한 진리, 선을 동반한 진리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베들레헴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선의 진리, 선에 속한 진리, 선을 동반한 진리라고 하는 이유는, 이 진리는 주님이 인간의 겉 사람 안에 심어놓으신, 체어리티라고 하는 선 안에서 자라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성 문서에서는 그것을 선이 있는 진리 또는 신앙의 진리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은 자연적 진리 상태에 계속 머물러만 있을 뿐, 선의 진리, 즉 선에 속한, 선을 동반한, 참 신앙의 진리로 넘어갈 수 없습니다.

 

16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17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전하니 18듣는 자가 다 목자들이 그들에게 말한 것들을 놀랍게 여기되 19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

 

드디어 목자들이 베들레헴으로 가서 구유에 계신 주님을 뵙습니다. 그리고 천사들로부터 들은 진리가 사실임을 확인하고, 거기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들은 바를 전했습니다. 그러자 듣는 자들이 다 목자들이 말한 것들을 놀랍게 여겼다고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목자들은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랑으로 진리를 행하면서 전할 때, 그들의 진리에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듣는 자가 목자들이 말한 것들을 놀랍게 여겼다는 것은 그들이 전하는 진리가 듣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뜻입니다.

 

20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목자들이 봤다는 것은 진리를 깨닫는 것을 뜻하고, 들었다는 것은 진리에 순종해 행동으로 옮겼다는 뜻입니다. 신앙인들이 이렇게 한편으로는 새로운 진리를 깨우치고, 한편으로는 그것을 실천할 때, 자기도 모르게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자신의 힘으로 이룬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루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세상에 오실 때, 제일 먼저 당신의 탄생을 알린 사람들은 지위가 높거나 재물이 많은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들에서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이었습니다. 양은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주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체어리티를 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목자들은 주님이 주신 사랑과 체어리티를 지키고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제일 먼저 오십니다. 주님은 사랑 없는 믿음 안에 계시지 않고, 사랑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기 예수님이 목자들에게 오신 것처럼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말씀의 속뜻이라는 순수한 진리로 오셨습니다. 말씀의 속뜻 진리 안에는 문자적인 의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선한 것이 들어있습니다. 그 선으로 우리는 마음속에 있는 양들을 지킬 수 있으며, 또한 매일 같이 새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목자들이 천사들로부터 들은 바를 세상 사람들에게 전한 것처럼 우리도 체어리티의 삶을 통해 이웃에게 진리를 전해야 합니다. 진리는 말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결합한 선한 삶으로 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새 교회에 맡기신 사명은 이 시대의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자신을 돌아보면 주님 앞에 얼굴을 들지 못할 정도로 부끄러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 또한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회개하고 또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빛이 없던 각자의 등불들이 살아나고, 그로 인해 세상을 덮은 재앙의 어둠이 걷힐 것입니다. 성탄절을 맞이하여 새 교회의 모든 성도가 주님 앞에 그런 충직한 목자들로 거듭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성탄의 기쁨과 평화가 성도님들과 가정에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이 밤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심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앞에 지킬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밤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대대로 지킬 것이니라 (출12:42)

 

아멘

 

원본

2020-12-20(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08(D4)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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