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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06:51:00 SY.59, 심령부흥대사경회(79차) 6강 (7/29), 시흥영성수련원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6 1

마태복음 13, 씨 뿌리는 비유와 마음밭

이번 6강은 지금까지 배운 ‘기본 진리’ 일곱 과목을 정리하면서 마태복음 13장의 비유들을 통해 전체 체계를 하나로 묶고, 이어질 요한계시록 공부로 넘어가기 위한 일종의 종합 강의입니다. 강사는 이 과정의 핵심을 ‘영적인 목표’, ‘신앙의 방향’, 그리고 ‘영적 가치관’의 정립이라고 말합니다. 무엇을 알고 있느냐보다 결국 ‘무엇을 추구하며 사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세상적인 것을 추구하고, 영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영적인 것을 추구한다는 설명입니다. 이 출발점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사람의 영적 정체성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머릿속에 축적된 교리의 양이 아니라 그 사람이 실제로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목적으로 삼느냐가 그의 내적 생명을 이루며, 결국 사후에도 그 지배적 사랑이 그 사람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강의가 시작부터 ‘영적 가치관’을 강조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출발입니다.

 

강사는 마태복음 13장의 일곱 비유를 하나의 체계로 읽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를 서론으로, 겨자씨ㆍ누룩ㆍ진주와 보화ㆍ가라지 비유 등을 본론으로, ‘그물 비유’를 결론으로 배치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다시 요한계시록의 ‘14만 4천’과 ‘666’을 해석하는 틀과 연결합니다. 특히 겨자씨ㆍ누룩ㆍ진주와 보화의 비유를 ‘14만 4천’의 성장ㆍ행실ㆍ생명과 연결하고, 가라지를 ‘666’ 또는 적그리스도적 영혼과 연결합니다. 여기까지 오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한 가지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마태복음 13장의 비유들이 서로 연결되어 인간의 영적 성장과 교회의 상태를 보여 준다는 큰 방향에는 상당히 공감할 수 있지만, 그것을 곧바로 요한계시록의 특정 숫자들과 일대일로 연결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과는 방법론적으로 다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성경의 숫자는 단순한 암호나 특정 집단의 인원수가 아니라 ‘상태’와 ‘질’을 나타냅니다. 특히 요한계시록의 ‘14만 4천’은 문자 그대로 144,000명의 특별한 성도 집단을 가리킨다기보다 주님의 교회를 이루는 모든 사람 가운데 선과 진리가 온전히 결합된 상태를 표상합니다. ‘12’가 신앙과 사랑에 속한 모든 것을 나타내고, 그것이 확장되어 ‘144’, 다시 ‘천’과 결합한 ‘144,000’은 충만함과 완전성을 표현합니다. 따라서 ‘14만 4천’을 ‘가장 밝은 빛 가운데 산 성화된 성도들’이라고 이해하려는 강사의 영적 방향은 흥미롭게도 스베덴보리와 어느 정도 가까워지지만, 그것을 별도의 특수한 최상위 성도 계층처럼 굳혀 버리면 차이가 생깁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숫자에 들어가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자기 안에서 결합되어 가는 것입니다.

 

더욱 주목할 부분은 씨 뿌리는 비유입니다. 강사는 씨를 ‘하나님의 말씀, 복음의 진리’, 밭을 ‘사람의 마음’으로 풀이합니다. 길가ㆍ돌밭ㆍ가시밭ㆍ좋은 밭은 각각 말씀을 받아들이는 서로 다른 사람들의 마음 상태를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초점은 결국 ‘좋은 밭’에 있으며, 좋은 밭이어야 씨가 뿌리를 내리고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아도 매우 중요한 통찰입니다. 다만 여기서 한 걸음 더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씨’는 단순히 설교를 통해 전달되는 성경 지식이 아니라 사람의 내면에 심기는 ‘진리’입니다. 그리고 진리가 생명을 얻으려면 반드시 ‘선’ 안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진리를 듣고 기억하고 이해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랑하여 실제 삶에서 행할 때 비로소 씨가 열매가 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가 끊임없이 강조하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이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좋은 밭’은 단순히 설교를 잘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 정도가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받아들여 그것이 의지 안으로 들어가 삶이 되도록 허용하는 내적 상태입니다. 강사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가 결실한다고 설명하면서 좋은 밭을 영적 성장의 출발점으로 봅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으로 옮기면, 말씀의 진리가 기억에 들어오고, 이해에 들어오고, 마침내 의지에 받아들여져 행위가 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안다’에서 ‘원한다’로, 다시 ‘행한다’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이 마지막 단계까지 내려가야 씨가 열매가 됩니다.

 

여기서 강사의 설명 가운데 특히 눈여겨볼 부분이 있습니다. 강사는 사람이 자기 마음이 길가인지 돌밭인지 가시밭인지 좋은 밭인지 스스로 정확히 알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시험해 보는 과정’을 통하여 그것을 드러내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시험’(temptation)에 관한 가르침과 매우 가까운 부분입니다. 사람은 평안할 때에는 자기 안에 무엇이 있는지 잘 모릅니다. 자신이 겸손하다고 생각하고, 주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며, 이웃을 사랑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이해관계가 침해되고, 명예가 손상되고, 소유가 위협받고, 원하는 것이 좌절되는 순간 내면에 숨어 있던 자기애와 세상 사랑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영적 시험은 바로 이런 감추어진 악과 거짓이 밖으로 드러나고, 사람이 그것과 싸우면서 주님을 의지하도록 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이 사람이 어느 등급인가’를 판정하기 위한 검사가 아니라, 사람 자신에게 자기 상태를 드러내고 동시에 그 악으로부터 실제로 벗어나게 하는 거듭남의 과정입니다.

 

이 점에서 네 가지 밭을 네 종류의 사람으로만 고정하는 것보다 한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거듭남의 과정으로도 읽어 보는 것이 좋습니다. 내 안에도 ‘길가’가 있고 ‘돌밭’이 있으며 ‘가시떨기’가 있고 ‘좋은 땅’이 있습니다. 어떤 진리에 대해서는 마음이 굳어 있어 아무리 말씀을 들어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어떤 진리는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실제 희생이 요구되면 포기합니다. 또 어떤 진리는 받아들였지만 세상 염려와 욕망이 자라 그것을 질식시킵니다. 그러나 어떤 진리는 깊이 받아들여져 삶을 바꾸고 열매를 맺습니다. 거듭남이 진행된다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 안의 ‘길가’를 갈아엎으시고, ‘돌’을 제거하시며, ‘가시’를 뽑으셔서 점점 더 많은 영역을 ‘좋은 땅’으로 만들어 가시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씨 뿌리는 비유는 사람들을 네 부류로 분류하는 말씀이 아니라 ‘지금 내 안에서 주님의 말씀이 어디까지 들어와 있는가’를 묻게 하는 말씀이 됩니다.

 

강사는 이어서 좋은 밭을 가진 성도들은 세상에서 빛과 향기를 나타내고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으며, 가장 밝은 빛 가운데 산 사람들을 ‘교회 시대 이긴 자들’, 성화된 성도들, 순교자들과 연결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에게 ‘적당히 천국만 가면 되지’라는 태도를 버리고 더 높은 영적인 것을 추구하라고 권면합니다. 이 열망 자체는 귀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천국의 삶을 수동적인 구원 상태로 보지 않습니다. 사람은 끝없이 주님께 가까워지고, 선과 진리를 더욱 풍성하게 받아들이며, 이웃을 더욱 온전히 사랑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천국 자체가 영원한 완성의 정지가 아니라 영원히 계속되는 완전해짐의 과정입니다.

 

다만 여기에는 매우 섬세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더 높은 영적 단계’, ‘더 밝은 빛’, ‘더 큰 상급’을 추구하는 것이 어느 순간 자기 자신의 영적 위대함을 추구하는 것으로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강의에서는 이를 ‘생명책이라는 저금 통장’에 비유하여, 더 겸손하고 더 충성하고 더 인내하고 더 온전한 사랑을 실천하면 마치 더 많은 금액이 저축되는 것처럼 상급이 커진다고 설명합니다. 교육적 비유로서는 이해하기 쉽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부분을 조금 다르게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천국의 상급은 선행에 대한 외적 보수라기보다 ‘선 자체 안에 있는 기쁨’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할 수 있다는 것 자체에서 기쁨을 얻고, 주님을 섬기는 사람은 섬김 자체에서 행복을 얻습니다. 이것이 천국적 상급입니다.

 

그래서 ‘100만 원짜리 인내’, ‘10만 원짜리 선행’처럼 생각하기 시작하면 아주 미묘하게 proprium이 개입할 위험이 있습니다. ‘나는 이만큼 참았다’, ‘나는 저 사람보다 더 희생했다’, ‘나는 더 높은 영적 수준을 추구한다’는 자기의식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천국적 선은 오히려 자기가 행한 선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선을 행할 수 있었던 것조차 주님에게서 왔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장 높은 천사는 자신이 다른 천사보다 높다고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가장 깊이 아는 존재입니다. 영적 성장의 역설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높아질수록 자기는 낮아지고, 주님만 높아집니다.

 

강사가 ‘넓고 편하고 내가 좋은 것, 내 입맛에 맞는 것만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좀 손해 보고, 불편하게 살고, 희생하는 좁은 길’을 강조하는 부분 역시 귀담아들을 만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좁은 길의 본질은 고생 자체가 아닙니다. 일부러 가난하거나 불편하게 사는 것이 영성을 높이는 것도 아니며, 자연적 즐거움을 버리는 것 자체가 거룩함도 아닙니다. 핵심은 자기애와 세상 사랑이 주님과 이웃 사랑보다 위에 서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재물을 가지고도 재물의 지배를 받지 않을 수 있고,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도 그것을 이웃에게 유용한 일을 하는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금욕적으로 살면서도 자기의 거룩함을 사랑한다면 proprium은 더욱 강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무엇을 소유했느냐’보다 ‘무엇이 나를 지배하느냐’입니다.

 

이렇게 보면 6강 초반부의 핵심인 ‘영적 가치관’이라는 말이 한층 깊어집니다. 영적인 사람은 단순히 세상을 싫어하고 천국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점차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던 삶에서 벗어나 주님과 이웃을 중심으로 판단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밭’이 된다는 것도 어느 날 특별한 영적 계급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가 내 의지와 삶 속에서 자유롭게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자기애의 딱딱한 길을 갈아엎고, 거짓의 돌을 걷어 내며, 세상 염려와 욕망이라는 가시를 제거해 가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6강 1부는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았을 때 상당히 좋은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어느 밭인가?’라는 질문입니다. 다만 그 질문을 ‘나는 네 부류 가운데 어느 등급의 사람인가?’로 묻기보다 ‘오늘 주님의 말씀이 내 안의 어디에서 막히고 있는가?’로 바꾸면 훨씬 깊어집니다. 말씀을 몰라서가 아니라 알고도 원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지, 원한다고 하면서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것은 무엇인지, 주님보다 자기 명예ㆍ소유ㆍ편안함을 더 사랑하여 말씀이 질식되고 있는 영역은 어디인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바로 그곳이 아직 갈아엎어져야 할 우리의 ‘마음밭’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씨 뿌리는 비유가 매우 아름답게 바뀝니다. 중심은 밭의 우열이 아니라 ‘씨를 뿌리시는 주님’입니다. 주님은 길가에도 씨를 뿌리시고, 돌밭에도 뿌리시며, 가시떨기에도 뿌리십니다. 인간의 현재 상태가 완전하지 않다고 해서 말씀 주시기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끊임없이 진리를 주시고, 섭리 가운데 우리의 굳은 땅을 부드럽게 하시며, 돌을 드러내고, 가시를 보여 주시면서 마침내 열매 맺는 땅으로 이끄십니다. 따라서 거듭남의 궁극적인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사람이 해야 할 일은 주님이 심으시는 씨를 받아들이고, 자기 안에서 드러나는 악을 죄로 인정하여 피하며, 주님께서 선을 행하실 수 있도록 협력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관점에서 보면 강사가 강조하는 ‘좋은 밭이 되어 열매를 맺으라’는 권면은 단순한 성화의 독려를 넘어, 주님께서 인간 안에서 이루어 가시는 거듭남이라는 더 깊은 지평으로 열립니다.

 

 

6 2

길가와 돌밭, 그리고 시험을 통한 마음밭의 드러남

6강 1부에서 강사는 마태복음 13장의 씨 뿌리는 비유 전체를 개관한 뒤, 이제 네 종류의 밭을 하나씩 살펴보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네 밭을 단순히 네 종류의 사람을 분류하기 위한 도표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성장 과정’과 연결한다는 점입니다. 강사는 앞서 배운 성장론을 다시 불러오면서 사람이 영적으로 성장하는 과정 자체가 ‘내 마음밭이 과연 어디에 해당하는가’를 시험받는 과정이라고 설명합니다. 바로 이 지점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매우 주의 깊게 볼 만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 역시 사람이 평상시 자기 자신에 관하여 생각하는 모습과 시험 가운데 실제로 드러나는 내적 상태가 서로 다를 수 있음을 거듭 말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길가’입니다. 강사는 길가가 사람들에게 계속 밟혀 딱딱해진 땅이라는 아주 자연스러운 이미지에서 출발합니다. 씨가 떨어져도 흙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표면에 그대로 남아 있으므로 새가 와서 먹어 버립니다. 이를 사람의 마음에 적용하면 복음을 들어도 받아들이지 않는 강퍅한 마음, 세상일과 돈 버는 일 등에 온통 마음이 쏠려 영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는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비유의 문자적 의미에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설명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조금 더 깊은 층위를 갖습니다. 말씀은 귀를 통하여 기억에 들어오는 것만으로 아직 사람의 것이 되지 않습니다. 기억에서 이해로, 이해에서 의지로, 의지에서 삶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길가는 바로 그 첫 단계에서 진리가 더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상태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딱딱하다’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마음이 딱딱하다는 것은 단순히 성격이 고집스럽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는 삶이 오랫동안 반복되어 하나의 습관이 되고, 그 습관이 마침내 마음의 길처럼 굳어진 상태입니다. 사람들은 길을 반복해서 밟고 다닙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같은 욕망, 같은 생각, 같은 행동을 계속 반복하면 그것이 점차 자신의 생명 형태가 됩니다. 처음에는 하나의 행동이었던 것이 습관이 되고, 습관이 마침내 그 사람의 사랑과 성품으로 굳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에는 진리가 ‘떨어질’ 수는 있어도 쉽게 ‘들어가지는’ 못합니다. 설교를 들을 수 있고 성경을 읽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삶을 바꾸는 진리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길가의 문제는 단순히 ‘불신자라서 복음을 거절한다’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다닌 사람에게도 길가는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수없이 들어 이미 익숙해졌지만, 바로 그 익숙함 때문에 더 이상 말씀이 자기 자신을 향한 말씀으로 들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나는 이것을 이미 안다’는 생각 자체가 길가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진리를 많이 아는 것과 진리 가운데 사는 것은 전혀 동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리를 많이 알면서도 그것을 행하지 않으면, 그 진리를 자기의 지성과 명예를 높이는 데 사용할 위험마저 있습니다. 그러므로 씨가 마음에 떨어졌다는 것과 씨가 뿌리를 내렸다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비유에서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는 장면도 이런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새는 문맥에 따라 생각, 이성적인 것, 지적인 것 등을 표상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씨를 빼앗는 새이므로 진리를 소멸시키는 거짓한 사고와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진리가 마음 깊은 곳으로 내려가지 않고 단지 표면에 머물러 있으면, 기존의 거짓한 사고와 세상적인 추론이 그것을 금세 빼앗아 갑니다. ‘그렇게 살면 손해 보는데’, ‘세상은 원래 이렇게 사는 거야’, ‘모두 그렇게 하는데 나만 왜 그래야 하지?’ 하는 생각들이 좋은 예가 될 수 있습니다. 말씀은 들었지만 기존의 삶을 지배하던 사고방식이 말씀을 삼켜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씨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씨가 뿌리를 내릴 수 없는 마음의 상태에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길가가 영원히 길가일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 비유를 읽을 때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입니다. 주님의 섭리와 거듭남은 굳은 마음을 그대로 판정하고 버리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은 사람의 삶에서 여러 사건과 시험을 허용하시면서 굳어진 것을 깨뜨리십니다. 자신감이 무너지고, 자기 지혜의 한계를 발견하며, 세상적인 것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공허를 경험하는 가운데 사람은 이전에는 들어오지 않던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로 변화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시험은 ‘너는 길가다’라고 판결하는 시험이라기보다 길가를 밭으로 바꾸시는 주님의 섭리 가운데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돌밭’입니다. 길가와 돌밭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길가에서는 씨가 아예 뿌리를 내리지 못하지만, 돌밭에서는 씨가 싹을 틔웁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이 사람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습니다. 문제는 ‘그 속에 뿌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반응이 좋고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면 곧 넘어집니다. 따라서 돌밭의 핵심은 진리를 거절하는 데 있지 않고, 진리를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아직 사람의 깊은 의지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진리를 아는 것’과 ‘진리를 사랑하는 것’의 차이를 생각하게 합니다. 어떤 사람은 새로운 진리를 들으면 대단히 기뻐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몰랐던 성경의 의미가 열리고, 영계와 천국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알게 되며, 자신의 신앙 세계가 갑자기 넓어지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만으로는 아직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진리가 자신의 기존 욕망과 충돌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진리를 정말 사랑하는지가 드러납니다. ‘이 진리를 받아들이려면 내가 이것을 포기해야 하는구나’, ‘이 말씀대로 살려면 내 자존심을 내려놓아야 하는구나’, ‘저 사람을 용서해야 하는구나’, ‘이익이 되더라도 이것은 하지 말아야 하는구나’ 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바로 그때 뿌리의 깊이가 드러납니다.

 

이 점에서 강사가 ‘시험’을 강조하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길가와 돌밭과 좋은 밭이 겉으로 비슷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모두 교회에 앉아 있고, 모두 ‘아멘’하며, 모두 말씀을 듣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리가 자기애와 충돌하는 순간 차이가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영적 시험은 바로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싸움이며, 선과 진리를 사랑하려는 새 의지와 자기애ㆍ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옛 욕망 사이의 싸움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이 없으면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사랑하는지 깊이 알기 어렵습니다.

 

다만 여기서 강사의 ‘하나님께서 시험하여 어느 밭인지 확인하신다’는 표현은 조금 다듬어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마음밭을 모르셔서 시험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인간의 내적 상태를 이미 아십니다. 시험을 통하여 그것을 알아야 하는 쪽은 오히려 인간 자신입니다. 더욱이 시험의 목적은 단순한 ‘확인’에 머물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시험은 실제적인 거듭남의 수단입니다. 시험을 통하여 악한 영들이 자극하는 자기애와 거짓이 드러나고, 사람이 주님께 도움을 구하면서 그것에 저항할 때 선과 진리가 더욱 깊이 결합합니다. 시험 전과 시험 후의 사람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제대로 통과한 영적 시험은 진리를 단순한 지식에서 생명의 진리로 내려보냅니다.

 

그래서 돌밭의 ‘돌’을 특별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에서 돌은 언제나 악한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좋은 의미에서는 진리, 특히 낮은 차원에서 굳건하게 받쳐 주는 진리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흙 아래 숨어 있어 뿌리가 깊어지는 것을 방해하는 돌입니다. 그러므로 이 문맥에서는 마음속에 굳어진 거짓이나 자기 확신, 혹은 진리가 의지 안으로 내려가는 것을 가로막는 내적인 장애로 볼 수 있습니다. 겉에는 흙이 있으므로 씨가 싹을 틔웁니다. 신앙도 있고 감동도 있으며 열심도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내려가면 ‘나는 이것만은 포기할 수 없다’는 단단한 자기 자신이 버티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proprium의 문제가 나타납니다. 사람은 진리를 좋아하면서도 자기 자신을 더 좋아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고 싶어 하면서도 자기 뜻이 꺾이는 것은 싫어할 수 있습니다. 천국을 원하면서도 자기애와 세상 사랑을 그대로 가지고 천국에 들어가고 싶어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진리가 proprium의 표면을 장식하는 과정이 아니라, 진리가 그 안으로 내려가 그 질서를 바꾸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돌밭은 매우 종교적인 모습으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좋아하고 영적인 이야기를 좋아하며 깊은 진리를 배우는 것을 즐기지만, 그 진리가 자기 삶을 건드리는 순간 멈추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 작업 자체에도 매우 중요한 경계가 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는 너무나 깊고 아름답기 때문에 그것을 발견하고 이해하는 것 자체에서 큰 지적ㆍ영적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를 읽으며 ‘이런 깊은 뜻이 있었구나’ 하고 감탄하는 것과, 그 진리가 실제 자기 생명 속에 뿌리를 내리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속뜻을 아무리 정확하게 이해해도 자기 삶에서는 여전히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하고 있다면, 진리는 아직 충분히 뿌리내린 것이 아닙니다. 천국의 구조를 아무리 자세히 알아도 이웃을 대하는 태도가 변하지 않는다면 그 지식은 아직 기억과 이해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돌밭에서 좋은 밭으로 가는 길은 ‘더 많은 진리를 아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미 받은 진리를 삶으로 옮기는 데서 시작됩니다. 작은 진리 하나라도 실제로 행할 때 뿌리가 내려갑니다.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용서하려고 애쓰고, 정직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손해를 감수하고 정직을 선택하며, 자기 공로를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선을 행한 뒤 그것을 자기 것으로 돌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작은 순종들이 반복되면서 진리가 점차 의지 안에 자리를 잡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시험은 거듭남에서 제거되어야 할 불필요한 고통이 아니라 때로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햇볕이 없었다면 돌밭의 씨도 한동안 잘 자라는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햇볕이 뜨거워지자 뿌리가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여기서 놀라운 역설이 있습니다. 식물을 말라 죽게 한 바로 그 태양이 좋은 밭의 식물에게는 성장에 없어서는 안 될 빛과 열을 제공합니다. 문제는 태양이 아니라 뿌리입니다. 같은 시험이 어떤 사람에게는 신앙을 무너뜨리는 것처럼 보이고, 다른 사람에게는 오히려 신앙을 깊게 만드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주님께서 시험을 통하여 사람을 파괴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시험 가운데서 끊임없이 사람을 보호하시며,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악과 거짓이 드러나도록 허용하시고, 그 가운데서 선과 진리를 선택할 자유를 보존하십니다. 실제 싸움은 인간에게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인간이 악을 이길 수 있는 모든 힘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사람의 몫은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악에 저항하면서도, 승리의 능력은 자기에게서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듭남에서 인간의 자유와 주님의 역사가 함께 움직이는 신비로운 지점입니다.

 

따라서 6강이 말하는 ‘좋은 밭이 되어야 한다’는 권면을 스베덴보리의 언어로 조금 바꾸어 말하면 이렇습니다. ‘좋은 밭인 사람으로 판정받으라’가 아니라 ‘주님께서 내 마음을 좋은 밭으로 만드시도록 허용하라’입니다. 길가가 발견되면 절망할 것이 아니라 갈아엎어져야 할 곳을 발견한 것이고, 돌이 발견되면 신앙이 가짜였다고 단정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제거하시려는 내적 장애가 드러난 것입니다. 앞으로 나올 가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거듭남이란 처음부터 좋은 밭이었던 사람들이 천국에 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주님께서 길가와 돌밭과 가시밭 같은 인간의 proprium을 끊임없이 다루시면서 마침내 말씀의 씨가 선 안에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도록 하시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면 씨 뿌리는 비유의 중심은 점점 ‘나는 어느 밭인가?’에서 ‘주님께서 지금 내 밭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로 이동합니다. 이것은 작은 차이 같지만 매우 중요합니다. 전자는 자칫 사람을 분류하고 영적 등급을 매기는 방향으로 갈 수 있지만, 후자는 거듭남과 주님의 섭리를 바라보게 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 관점이 이번 강의가 강조하는 ‘영적 성장’을 훨씬 깊고도 복음적으로 이해하게 해 준다고 봅니다. 씨는 주님의 진리이며, 그것을 살게 하는 생명도 주님에게서 옵니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그 생명이 자기 안으로 더 깊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길과 돌과 가시를 주님 앞에서 발견하고, 그것을 죄로 인정하여 피하며,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걸음씩 진리가 의지와 삶 안으로 내려갈 때 ‘말씀을 듣는 사람’은 서서히 ‘말씀이 열매 맺는 사람’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6 3

가시밭에서 좋은 밭으로, 그리고 겨자씨가 나무가 된다는 것

6강 2부에서 길가와 돌밭을 살펴보았다면, 이제 강의는 가시밭과 좋은 밭으로 나아갑니다. 주님께서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에 대하여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라고 직접 설명하십니다. 반면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이며, 마침내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을 합니다. 강사는 이 차이를 단순히 말씀을 ‘듣느냐 듣지 않느냐’의 차이로 보지 않습니다. 가시밭도 말씀을 듣습니다. 돌밭은 심지어 기쁨으로 받습니다. 결정적인 차이는 그 말씀이 사람의 실제 생명 안에서 ‘열매’가 되었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서 6강의 씨 뿌리는 비유 해설은 앞서 여러 강에서 반복되었던 ‘말씀을 실제로 살아야 한다’는 ‘핵심진리’의 중심 주제로 다시 돌아옵니다.

 

가시밭은 특히 흥미롭습니다. 길가처럼 씨가 아예 들어가지 않은 것도 아니고, 돌밭처럼 싹이 났다가 곧 말라 버린 것도 아닙니다. 씨가 자랍니다. 문제는 씨와 함께 ‘다른 것’도 자란다는 데 있습니다. 가시가 함께 자라 말씀의 기운을 막습니다. 바로 이것이 가시밭의 영적 위험을 더욱 미묘하게 만듭니다. 겉으로는 신앙생활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말씀도 듣고, 기도도 하고, 교회생활도 합니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세상 염려와 재물의 매력, 지위와 인정, 편안함과 자기 유익이 동시에 자라고 있습니다. 마침내 그것들이 말씀보다 더 강한 애정이 되면 말씀은 사라지지 않았는데도 ‘결실하지 못하는’ 상태가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것은 인간의 지배적 사랑과 직결됩니다. 문제는 재물 그 자체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재산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를 악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직업을 가지고 세상일을 하고 가족을 부양하며 재물을 관리하는 것은 자연계에서 필요한 쓰임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사랑의 질서에서 어디에 놓여 있느냐입니다. 재물이 쓰임을 위한 수단이면 질서 안에 있지만, 재물이 삶의 목적이 되어 주님과 이웃보다 더 사랑받기 시작하면 질서가 뒤집힙니다. 세상의 염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책임을 다하기 위해 미래를 생각하는 것과, 세상적인 안전을 자기 생명의 궁극적 근거로 삼아 주님의 섭리를 신뢰하지 못하는 것은 다릅니다.

 

그러므로 가시는 반드시 노골적인 악의 모습으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좋은 것처럼 보이는 것’이 영적 생명을 질식시킬 수도 있습니다. 가족을 사랑하는 것은 선하지만 가족을 주님보다 높이면 질서가 바뀝니다. 직업에 충실한 것은 선하지만 성공과 명예가 생명의 목적이 되면 가시가 됩니다. 교회 봉사 역시 선하지만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그 봉사의 속을 차지하면 역시 가시가 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영적 지식도 그렇습니다. 진리를 아는 것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는 다른 사람보다 더 깊은 것을 안다’는 자기 우월감의 재료가 된다면, 진리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proprium이 가시처럼 자라난 것입니다.

 

이 대목은 우리가 ‘가시’를 너무 쉽게 세상 사람들에게만 적용하지 않도록 합니다. ‘저 사람은 돈을 사랑하니까 가시밭이다’라고 판단하기 전에, ‘내 신앙생활 안에서 말씀과 함께 자라고 있는 가시는 무엇인가?’라고 물어야 합니다. 주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사람의 인정을 원하는 마음, 진리를 전한다고 하면서 자기 의견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마음, 선을 행하면서 그 선을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얼마든지 가시가 될 수 있습니다. 가시는 씨를 뽑아 버리지 않습니다. 씨 옆에서 함께 자랍니다. 바로 이 때문에 더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강사는 가시밭의 문제를 앞서 설명한 ‘연단’의 구조와 연결하고, 가시밭에 머물지 않는 사람은 다시 다음 연단의 과정으로 들어간다고 설명합니다. 실제 원고에서도 가시밭이 아닌 사람들은 ‘무리바 생수’를 마신 뒤 두 번째 연단으로 들어간다고 연결합니다. 여기서 ‘핵심진리’ 특유의 단계적 성장론이 다시 나타납니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 이 단계들을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고정된 시간표로 받아들이는 데에는 조심스러움이 필요하지만, ‘거듭남이 진행될수록 더 깊은 애정이 시험받는다’는 방향은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눈에 보이는 행동이 다루어지고, 그다음에는 행동을 일으키는 욕망이, 더 깊어지면 그 욕망을 낳는 자기 사랑 자체가 드러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네 번째 ‘좋은 밭’에 이르면 강사의 강조점은 아주 분명해집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을 합니다. 강사는 주님의 설명을 따라 좋은 밭의 사람을 ‘말씀을 듣고 깨달아 그 말씀을 실천하고, 말씀대로 행하고 살아감으로 성령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는 사람’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동일한 정도의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니어서 백 배를 맺는 사람도 있고, 육십 배, 삼십 배를 맺는 사람도 있다고 봅니다.

 

여기서 ‘듣고 깨닫는다’와 ‘결실한다’ 사이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깨달음 자체가 결실은 아닙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진리가 기억에 들어오는 단계가 있고, 이해성에서 깨닫는 단계가 있으며, 그것을 의지가 받아들여 사랑하는 단계가 있고, 마지막으로 행동과 쓰임으로 나타나는 단계가 있습니다. 좋은 밭은 이 전체 과정이 이어지는 상태입니다. 말씀을 들었고, 이해했고, ‘참 좋은 말씀이다’라고 감동한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진리가 삶으로 내려갑니다.

 

바로 이 점에서 ‘열매’의 상응은 매우 분명합니다. 열매는 선한 삶, 곧 행위 가운데 나타난 선과 관계됩니다. 나무의 최종 목적이 잎이나 꽃에 머물지 않고 열매에 이르는 것처럼, 진리의 목적도 지식 자체에 머물지 않고 선에 이르는 것입니다. 말씀을 배우는 것은 잎이 돋는 것과 같고, 진리를 이해하는 것은 꽃이 피는 것과도 같지만, 그것이 이웃을 향한 실제 선과 쓰임으로 나타날 때 비로소 열매가 맺힙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선행과 쓰임은 신앙에 덧붙이는 부속물이 아니라 신앙이 생명을 얻어 밖으로 나타나는 완성입니다.

 

다만 여기서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를 단순한 ‘영적 성적표’처럼 읽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강의에서는 좋은 밭 안에서도 열매의 풍성함에 차이가 있다는 데 주목하며, 더 온전한 성품과 더 충성스러운 헌신을 향해 계속 성장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특히 ‘예수님 같은 겸손’, ‘예수님 같은 온유’, 세상 욕심에서 벗어난 삶과 충성스러운 헌신이라는 두 방향을 함께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들이 더욱 온전해지도록 계속 성장하는 과정을 좋은 밭의 삶으로 설명합니다. 이 부분은 귀합니다. 좋은 밭도 ‘완성되어 더 이상 자랄 필요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계속 성장하고 열매 맺는 사람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천국적 완전함은 획일적이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고유한 성향과 쓰임이 다르고, 받아들이는 선과 진리의 정도도 다릅니다. 천국의 공동체들이 모두 같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 차이가 천국에서 경쟁이나 우열의식을 만들지는 않습니다. 한 천사가 다른 천사를 보며 ‘나는 백 배이고 너는 삼십 배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천사는 자기에게 주어진 쓰임을 기쁨으로 행하며, 다른 이의 선을 자기 선처럼 기뻐합니다. 따라서 백 배와 육십 배와 삼십 배를 읽을 때 중요한 것은 ‘내가 몇 배짜리인가?’가 아니라 ‘주님께서 내게 주신 것을 얼마나 충실하게 생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입니다.

 

이것은 앞서 강의에서 등장했던 ‘더 높은 상급을 추구하라’는 표현에도 필요한 보완입니다. 영적 성장을 사모하는 것은 귀하지만, ‘나는 더 높은 천국에 가야 한다’, ‘나는 다른 성도보다 백 배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식으로 proprium이 개입하면 영적 성장을 추구한다는 바로 그 열망이 자기애의 새로운 형태가 될 수 있습니다. 천국의 높은 상태는 ‘내가 높아지는 것’을 사랑함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이웃을 사랑함으로 형성됩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가장 높은 천국적 사랑은 자기의 높음을 전혀 목적으로 삼지 않습니다.

 

강사가 ‘풍성한 열매를 맺으면 농부가 기뻐하듯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신다’고 말하는 부분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아름답게 읽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인간을 등급별로 세워 경쟁시키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 안에 심으신 진리가 그 사람의 삶에서 사랑과 선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가 성장하는 것을 기뻐하듯, 농부가 씨가 열매를 맺는 것을 기뻐하듯, 주님께서는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생명을 자유롭게 받아들여 참된 인간으로 되어 가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씨 뿌리는 비유가 끝나면서 강의는 두 번째 비유인 ‘겨자씨 비유’로 넘어갑니다. 강사는 씨 뿌리는 비유에서 하나님의 초점이 ‘좋은 밭’에 있다고 정리한 뒤, 겨자씨ㆍ누룩ㆍ진주와 보화의 비유를 바로 이 ‘아주 좋은 밭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삶’을 다시 종합적으로 보여 주는 비유들로 배치합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13장의 비유들을 강사 나름의 하나의 성장 체계로 연결하는 매우 독특한 해석입니다. 그리고 겨자씨 비유에서는 그 좋은 밭의 사람이 성장하여 다른 사람을 ‘양육하는’ 단계로 나아간다고 봅니다.

 

주님께서는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강사는 여기서 특히 ‘나무’와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드는 것’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겨자씨 비유를 ‘천국 백성을 양육하는 목양적인 사명, 목양적 사업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진리’라고 해석합니다. 즉 작은 씨가 성장하여 큰 나무가 되고, 그 나무에 새들이 깃드는 것처럼 영적으로 성장한 사람은 마침내 다른 사람을 품고 양육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해석은 강의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지금까지의 영적 성장이 주로 ‘내가 어떻게 좋은 밭이 되는가’, ‘내가 어떻게 연단을 통과하는가’, ‘내가 어떻게 열매를 맺는가’라는 자기 자신의 거듭남에 초점이 있었다면, 겨자씨에서는 그 성장의 결과가 ‘다른 생명을 품는 것’으로 바뀝니다. 내가 자라는 목적이 나의 영적 완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그늘을 제공하고, 다른 사람을 품고, 다른 사람의 영적 생명을 돕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 방향은 매우 귀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것을 ‘쓰임’이라는 말로 더욱 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천국에서 모든 존재의 기쁨은 쓰임에 있습니다. 천사는 자기 완성을 바라보며 자신에게 몰두하지 않습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과 지혜를 다른 이의 선을 위하여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목적도 ‘나 혼자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거듭날수록 자기에게서 시선이 벗어나 주님과 이웃을 향하게 됩니다. 받은 진리와 선이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한 쓰임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겨자씨가 나무가 된다’는 강사의 해석은 적어도 영적 적용의 차원에서 매우 아름다운 방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작은 신앙의 시작이 자라 마침내 다른 사람을 품을 수 있는 생명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것을 곧바로 ‘목회자가 된다’거나 ‘많은 제자를 거느리는 지도자가 된다’는 뜻으로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쓰임은 목회직보다 훨씬 넓습니다. 한 어머니가 자녀에게 선과 진리를 심어 주는 것도 쓰임이고, 한 직장인이 정직하게 자기 일을 하여 공동체에 유익을 주는 것도 쓰임이며, 아픈 사람을 돌보고 외로운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도 쓰임입니다. 천국의 나무는 반드시 강단 위에서만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스베덴보리의 속뜻에서 ‘나무’는 일반적으로 퍼셉션이나 인식, 지적·영적 생명과 관련되며, ‘가지’와 ‘새’ 역시 그 문맥에 따라 진리의 인식과 사고의 여러 측면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마태복음 13장의 겨자씨를 곧바로 ‘성화된 지도자가 다른 성도들을 목양한다’는 하나의 대응표로 고정하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강사의 설명은 ‘핵심진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영적 적용으로 받아들이는 편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과 동일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 구별은 앞으로 더욱 중요해집니다. 강사는 겨자씨 비유를 설명하면서 아브라함과 모세, 바울 등 여러 인물을 ‘나무’와 ‘그 가지에 깃드는 새’의 구조에 넣어 해석합니다. 바울의 경우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난 것을 ‘출애굽’으로, 이후 다소에서 보낸 기간을 ‘광야 연단’으로, 그 뒤 바나바에게 불려 안디옥과 선교 현장으로 나간 것을 연단을 마친 뒤 다른 사람들을 양육하는 단계로 설명합니다. 이것은 성경 인물들의 생애를 출애굽-광야-가나안이라는 하나의 영적 성장 패턴으로 읽으려는 ‘핵심진리’ 특유의 해석법입니다.

 

여기서는 장점과 한계를 함께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장점은 성경의 역사를 죽은 과거의 사건으로 두지 않고 ‘나에게도 출애굽이 있고 광야가 있으며 쓰임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있다’고 현재화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다소 생활을 정확히 ‘11년 광야 연단’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이스라엘의 광야와 같은 영적 단계라고 단정하는 것은 성경 본문 자체가 직접 말하는 내용은 아닙니다. 따라서 이런 부분은 ‘핵심진리’의 영적 독법으로 존중하여 듣되, 그것을 성경의 아르카나 자체와 동일시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특히 바울 서신과 바울의 생애를 다룰 때에는 우리가 이미 정한 중요한 원칙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의하면 사도들의 서신은 복음서나 창세기ㆍ출애굽기ㆍ요한계시록처럼 문장과 단어 하나하나에 연속적인 속뜻, 곧 아르카나가 들어 있는 ‘말씀’과 같은 차원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생애에서 영적 교훈을 얻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의 생애 사건 하나하나를 출애굽기의 상응처럼 취급하여 숨은 영적 단계표를 복원하는 데에는 절제가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강사가 겨자씨 비유에서 붙드는 ‘성장의 목적은 다른 사람을 살리는 데 있다’는 중심은 충분히 살릴 만합니다. 이것은 5강에서 보았던 ‘익은 열매’의 개념도 보완해 줍니다. 익은 열매가 된다는 것이 ‘나는 이제 성화되었다’는 자기완성의 선언이라면 매우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익은 열매가 된다는 것이 ‘이제 주님께서 나를 다른 사람의 선을 위한 쓰임으로 더 자유롭게 사용하실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라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성숙은 자기에게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공용복 선생의 삶과 그 제자들의 관계를 생각할 때도 특별히 의미 있게 다가오는 대목입니다. 한 사람에게 심긴 작은 씨가 그 사람의 생애를 통하여 자라고,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에게서 말씀을 배우고 함께 살았던 사람들의 생명 안에서 계속 열매를 맺는다면, ‘나무가 되고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든다’는 그림이 왜 이 전승 안에서 그렇게 중요하게 받아들여지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마태복음 13장의 겨자씨 비유에 대한 유일한 속뜻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영적 성숙이 자기에게서 끝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살리고 품는 쓰임으로 확장된다는 점에서는 매우 인상적인 적용입니다.

 

결국 6강 3부에서 길가ㆍ돌밭ㆍ가시밭ㆍ좋은 밭의 흐름은 겨자씨 앞에서 새로운 방향을 얻습니다. 좋은 밭이 되는 것이 마지막이 아닙니다. 열매를 맺는 것도 자기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와 선이 사람 안에서 자라면 그 사람은 마침내 다른 생명을 위한 ‘쓰임’이 됩니다. 씨가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것을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좋은 밭은 말씀을 많이 아는 마음이 아니라 진리가 선이 되어 삶의 열매를 맺는 마음이며, 그 열매가 더욱 성숙하면 받은 선과 진리는 자기완성에 머물지 않고 다른 사람의 영적 유익을 위한 쓰임으로 흘러갑니다.’ 이때 비로소 거듭남의 방향이 ‘나의 구원’에서 ‘주님의 나라를 이루는 쓰임’으로 넓어집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다음 ‘누룩 비유’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겨자씨가 영적 생명의 ‘성장과 확장’을 보여 준다면, 강사는 누룩 비유를 그 사람의 내면과 행실 전체가 변화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그림으로 읽습니다. 따라서 6강 4부에서는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이 ‘핵심진리’에서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먼저 충분히 따라가고, 이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에서 의지와 이해성, 그리고 선과 진리가 인간의 자연적 삶 전체로 내려가는 과정과 비교하여 살펴보겠습니다.

 

 

6 4

누룩과 진주, 보화 : ‘행실의 정결에서 생명의 소유

겨자씨 비유를 마친 강사는 이제 누룩 비유로 넘어갑니다. 그리고 이 전환에서 자신의 해석 구조를 다시 한번 분명히 합니다. 겨자씨 비유와 누룩 비유, 그리고 뒤이어 나오는 진주·보화 비유는 모두 ‘교회 시대 이긴 자들’을 서로 다른 측면에서 설명한다는 것입니다. 겨자씨가 장성한 겨자나무가 되어 다른 성도들을 양육하는 ‘성장과 쓰임’의 측면을 보여 준다면, 누룩은 그 사람의 ‘행실적인 측면’을 보여 주고, 진주와 보화는 마침내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는 측면을 보여 준다고 합니다. 실제로 강사는 강의 마지막 정리에서도 이 세 비유를 ‘장성한 겨자나무’, ‘행실이 정결해진 누룩’, ‘값진 진주를 소유한 성도’라는 세 그림으로 다시 하나로 묶습니다.

 

누룩 비유의 본문은 마태복음 13장 33절의 짧은 한 절입니다.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강사는 이 장면을 아주 생활적인 그림으로 설명합니다. 밀가루에 누룩을 넣고 따뜻한 곳에 두면 시간이 지나면서 반죽 전체가 부풀어 오릅니다. 예전에는 이불을 덮어 놓고 밤새 발효시키기도 했다는 익숙한 경험까지 끌어옵니다. 중요한 것은 누룩이 밀가루의 한 부분만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서 ‘전부’를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

 

‘핵심진리’가 이 장면에서 붙드는 것은 바로 ‘전부’입니다. 신앙은 인간의 일부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의 행실과 성품 전체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사는 누룩 비유를 ‘인격적인 면에서의 행실적인 성장’을 보여 주는 말씀이라고 결론짓습니다. 겨자씨가 작은 생명이 자라 큰 나무가 되는 성장의 그림이었다면, 누룩은 안에 들어온 어떤 생명이 밖에서 잘 보이지 않는 가운데 점차 전체를 변화시키는 그림입니다.

 

이 지점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상당히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거듭남은 인간의 종교적인 한 부분만 변화시키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일의 몇 시간, 기도할 때의 마음, 성경을 읽을 때의 생각만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아들인 선과 진리가 점차 그 사람의 생각과 의지, 말과 행동, 인간관계와 직업생활, 재물 사용과 일상의 선택까지 내려와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속 사람에서 받아들인 것이 겉 사람 전체에 질서를 이루어야 합니다.

 

여기서 ‘가루 서 말’이라는 표현은 그냥 지나가기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셋’은 대체로 처음부터 끝까지 이루어진 것, 곧 완전하고 충만한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서 말’이라는 표현도 단순한 밀가루의 양을 넘어 인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완전한 과정이라는 방향으로 생각할 여지가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는 특정 AC 번호의 세부 상응을 억지로 끌어다 붙이기보다, 본문의 ‘전부 부풀게 한’이라는 주님의 말씀 자체와 함께 읽는 편이 안전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 사람 안의 한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고 그의 삶 전체로 스며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6강이 계속 강조해 온 ‘말씀의 실천’과도 연결됩니다. 말씀을 많이 알면서도 돈을 다루는 방식은 이전과 같고, 가족을 대하는 태도도 이전과 같으며, 자존심이 건드려졌을 때의 반응도 이전과 같다면 아직 누룩이 ‘전부’를 부풀게 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거듭남이 진행되면 이전에는 종교와 관계없다고 생각했던 영역까지 주님의 질서가 들어옵니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왜 이 물건을 사고 싶은지, 왜 이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지, 왜 이 비판을 견디지 못하는지까지 진리의 빛 아래 놓이기 시작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강사가 누룩을 ‘행실’과 연결한 것은 중요한 통찰입니다. 신앙의 진위가 결국 생활에서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행실의 정결’을 조금 더 깊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겉 행동이 정돈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같은 선행이라도 그 행위가 어디에서 나오는지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칭찬받기 위해 친절할 수도 있고, 자기 의를 만족시키기 위해 금욕할 수도 있으며, 천국에서 더 높은 상급을 받으려는 자기 유익 때문에 희생할 수도 있습니다. 외적 행동은 선해 보여도 그 안의 사랑이 자기에게 향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은 외적 행위의 교정에서 시작하여 그 행위를 낳는 의지의 변화로 깊어집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행동하면 안 된다’는 진리 때문에 자기를 억제합니다. 이것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으십니다. 나중에는 그 악 자체를 싫어하고 선을 사랑하도록 의지를 새롭게 하십니다. 처음에는 거짓말하면 안 되기 때문에 진실을 말하지만, 점차 진실 자체를 사랑하기 때문에 진실을 말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 때문에 보복하지 않지만, 점차 그 사람의 실제 선을 바라는 마음이 생깁니다. 바로 이때 누룩이 단순히 외관을 부풀리는 것이 아니라 반죽 전체에 스며든 것과 같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흥미로운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누룩’은 흔히 부정적인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주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경계하라고 하셨고, 다른 문맥에서는 누룩이 악과 거짓이 퍼지는 모습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마태복음 13장의 누룩도 악을 의미한다고 해야 할까요?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상응은 단어 하나에 기계적으로 하나의 뜻만 붙이는 암호표가 아닙니다. 문맥에 따라 정반대의 의미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주님께서 친히 ‘천국은 … 누룩과 같으니라’고 말씀하시므로, 누룩의 침투하고 변화시키는 성질이 천국의 확장과 변화라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것은 상응을 읽는 데 매우 중요한 원칙입니다. ‘새는 언제나 이것’, ‘돌은 언제나 저것’, ‘누룩은 언제나 악’이라는 식으로 단어를 기계적으로 대입하면 말씀의 속뜻을 오히려 훼손할 수 있습니다. 같은 ‘사자’도 문맥에 따라 주님의 신적 능력을 표상할 수도 있고, 파괴적인 악의 세력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단어가 말씀 전체의 내적 연결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상응은 단순한 상징 풀이와 다릅니다.

 

그리고 누룩 비유를 ‘행실의 변화’로 읽으면서도 하나 더 보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누룩이 스스로 반죽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반죽 안에 들어가 그것을 변화시킵니다. 거듭남에서도 인간의 모든 자연적 기능이 폐기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격, 재능, 기억, 직업 능력, 인간관계, 자연적 애정 자체를 모두 버리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그것들이 새로운 사랑 아래서 질서를 찾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을 위해 사용하던 지성을 이제 쓰임을 위해 사용하고, 자기 명예를 위해 사용하던 재능을 이웃을 위해 사용하며, 소유를 자기만을 위해 쌓던 사람이 그것을 선한 쓰임에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인간의 자연적 삶이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새 중심 아래 재배열됩니다.

 

이 점은 ‘핵심진리’에서 자주 나타나는 ‘육적인 것을 버린다’는 강한 표현을 읽을 때에도 중요합니다. 자연적인 것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자연계를 창조하셨고 인간에게 자연적 몸과 감각과 애정을 주셨습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영적인 것 위에 올라가 지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거듭남은 자연적인 것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 아래 두어 섬기게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올바른 질서는 바로 이것입니다.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겉 사람 안으로 흘러들어가 자연적 삶 전체를 질서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부 부풀게 한 누룩’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으면, 단순히 ‘모든 행동이 완벽해진 사람’이라는 정적인 그림보다 ‘주님의 선과 진리가 인간의 삶 전체에 점차 침투하여 속과 겉이 하나의 질서 안에 놓여 가는 거듭남의 과정’이라는 훨씬 역동적인 그림이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강사가 누룩을 넣은 뒤 한나절 또는 밤새 기다리는 생활 경험을 언급한 것도 흥미롭습니다. 거듭남 역시 순간적인 선언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생애 전체에 걸쳐 진행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핵심진리’의 ‘성화’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사이의 중요한 차이가 다시 나타납니다. 강의에서는 일정한 연단을 지나 행실이 정결해지고 ‘이긴 자’가 되는 상태를 비교적 분명한 단계로 제시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은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 계속되며, 천국에서도 영원히 완전해져 갑니다. 그러므로 어느 순간 ‘내 전체가 이제 다 부풀었다’, 곧 ‘나는 완전히 성화되었다’고 자기 상태를 확정하는 것에는 조심스러움이 필요합니다. 오히려 주님께 가까워질수록 자기 안에 남아 있는 proprium을 더 섬세하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강사가 강조하는 ‘행실의 정결’을 약화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더 깊게 만들면 됩니다. 정결은 단순히 죄목 몇 가지를 행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행동을 일으키는 사랑 자체가 점차 정결해지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하지 않는다’에서 ‘나는 이것을 사랑하지 않는다’로, 다시 ‘나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선을 사랑한다’로 이동합니다. 이것이 누룩이 전체에 퍼지는 것과 같은 변화입니다.

 

이제 강의는 누룩 비유를 마치면서 진주와 보화 비유로 넘어갑니다. 원고에서도 강사는 누룩을 ‘인격적인 면에서의 행실적인 성장’이라고 정리한 직후, 마태복음 13장 44절부터 46절의 감추인 보화와 값진 진주를 읽습니다. 그리고 두 비유가 사실상 같은 의미라고 봅니다. 한 사람은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하고 기뻐하여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고, 좋은 진주를 구하던 장사는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한 뒤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것을 삽니다.

 

강사가 여기서 가장 강하게 붙드는 표현은 ‘자기 소유를 다 팔아’입니다. 그는 묻습니다. ‘진주 값은 얼마입니까?’ 그리고 ‘자기 소유를 몽땅 파는 값이 진주 값’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핵심진리’의 연단론과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값진 진주, 곧 하나님의 생명을 온전히 소유하기 위해서는 자기에게 속한 것을 내려놓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실제 강의의 다른 부분에서는 이 원리를 욥의 세 번째 연단과 연결하여, 하나님의 생명을 얻기 위한 과정에서 육적인 소유를 내려놓게 된다고까지 설명합니다.

 

이 대목은 매우 깊으면서도 동시에 매우 조심해서 읽어야 합니다. 우선 ‘자기 소유를 다 판다’는 말씀을 문자 그대로 모든 신앙인이 재산과 가족과 직업을 실제로 잃어야 한다는 공식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외적 형태의 삶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아브라함도 재산이 있었고 욥도 회복 후 다시 큰 재산을 가졌습니다. 중요한 것은 외적 소유의 유무보다 그 소유가 내 사랑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매우 중요한 빛을 비춥니다. ‘자기 소유’라는 말을 더 깊이 들어가면 proprium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궁극적으로 내려놓아야 할 것은 단지 집과 돈과 재산이 아니라 ‘이것은 내 것이다’, ‘내 생명은 나에게서 나온다’, ‘내 지혜는 내 것이다’, ‘내 선은 내가 행한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proprium입니다. 이것이 훨씬 깊은 자기 소유입니다.

 

따라서 ‘모든 소유를 팔아 값진 진주를 산다’는 말씀을 거듭남의 관점에서 읽으면, ‘내가 가진 물건을 모두 없애야 주님을 얻는다’는 뜻보다 ‘자기에게서 생명과 선과 진리가 나온다는 모든 자기 소유의식을 내려놓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가장 귀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방향이 더욱 깊습니다. 물론 실제 삶에서는 재물이나 명예, 관계나 지위를 내려놓아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목적이 아니라 proprium의 지배가 드러나는 구체적인 자리들입니다.

 

이 차이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사람이 전 재산을 포기하고 수도원에 들어가도 proprium은 그대로일 수 있습니다. 오히려 ‘나는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이라는 더 강한 자기 의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상당한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자기 영광이 아니라 가족과 사회와 교회의 선한 쓰임을 위해 관리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통장의 액수만이 아니라 사랑의 질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주와 보화 비유는 5강에서 계속 다루었던 ‘자기부인’을 훨씬 깊은 곳으로 데려갑니다. 자기부인은 단지 불편한 것을 참고 좋은 것을 포기하는 금욕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선의 근원으로 삼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지혜보다 주님의 진리를 귀하게 여기고, 자기 뜻보다 주님의 질서를 귀하게 여기며, 자기 영광보다 이웃의 선을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때 사람은 무엇인가를 잃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값진 진주’를 얻습니다.

 

여기에서 ‘기뻐하여’라는 말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억지로 모든 소유를 팝니다가 아니라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 소유를 다 팝니다. 이것은 천국의 질서를 아주 아름답게 보여 줍니다. 주님을 위해 자기 것을 내려놓는 것이 영원히 고통스러운 희생으로만 남는 것이 아닙니다. 더 큰 선의 가치를 발견했기 때문에 작은 것을 자유롭게 내려놓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손에 쥔 돌멩이를 억지로 빼앗기는 것과, 훨씬 귀한 것을 발견하여 스스로 돌멩이를 놓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거듭남도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악을 포기하는 것이 손해처럼 느껴집니다. 복수하지 않는 것이 억울하고, 자기 뜻을 내려놓는 것이 고통스럽고, 정직 때문에 손해를 보는 것이 힘듭니다. 그러나 선을 사랑하게 될수록 질서가 바뀝니다. 예전에는 포기라고 느꼈던 것이 나중에는 자유가 됩니다. 미움을 내려놓는 것이 손실이 아니라 해방이 되고, 자기 공로를 버리는 것이 낮아짐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의 평안이 됩니다. 값진 진주의 가치를 실제로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핵심진리’가 진주와 보화를 ‘하나님의 생명’과 연결하려는 의도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강사는 겨자씨의 ‘성장’, 누룩의 ‘행실’, 진주와 보화의 ‘생명’을 서로 보완하는 세 측면으로 봅니다. 마지막 정리에서도 ‘겨자나무가 된 성도’, ‘행실이 정결해진 누룩 같은 성도’, ‘값진 진주를 소유한 성도’는 결국 같은 상태를 다른 각도에서 말한다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 한 가지 결정적인 보완을 붙이고 싶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한다’고 할 때 그 생명이 인간의 독립적 소유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생명은 언제나 주님에게서 유입됩니다. 인간은 생명의 근원이 아니라 받는 그릇입니다. 따라서 값진 진주를 ‘소유한다’는 것도 ‘이제 신적 생명이 내 것이 되었다’는 의미보다, 자기 생명이라고 붙들던 proprium을 내려놓고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상태로 이해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러면 놀라운 역설이 생깁니다. ‘자기 소유를 다 팔았을 때’ 비로소 참으로 풍성해집니다. 자기에게서 선이 나온다는 생각을 버렸을 때 주님의 선을 받을 수 있고, 자기 지혜를 절대화하지 않을 때 주님의 진리를 받을 수 있으며, 자기 생명을 붙들지 않을 때 주님의 생명이 더 자유롭게 흘러들어옵니다. 잃어서 비는 것이 아니라 비움으로써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를 없애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자기 것처럼 받아 자유롭게 행하게 됩니다. 천사도 사랑하고 생각하고 선택할 때 그것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느낍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사랑과 지혜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압니다. 이것이 천국적 proprium, 곧 주님으로부터 받은 새로운 ‘자기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신비입니다. 인간 자신의 proprium은 악하지만, 주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새로운 의지와 생명은 사람이 자기 것처럼 누리면서도 그 근원을 주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룩과 진주·보화 비유를 함께 놓으면 6강의 흐름이 상당히 선명해집니다. 누룩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사람의 삶 전체에 스며들어 겉 사람까지 변화시키는 과정을 보여 주고, 진주와 보화는 그 변화의 중심에서 무엇이 가장 귀한 것이 되었는지를 묻습니다. 전자는 ‘내 삶 전체가 무엇에 의해 변화되고 있는가?’를 묻고, 후자는 ‘나는 무엇을 가장 귀하게 여기고 있는가?’를 묻습니다.

 

그리고 두 질문은 사실 하나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가장 사랑하느냐가 결국 그의 삶 전체를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값진 진주로 발견한 사람에게는 삶의 다른 것들이 새로운 질서 안에 들어갑니다. 재물도, 명예도, 가족도, 직업도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가장 높은 사랑 아래서 제자리를 찾습니다. 반대로 자기 자신이 가장 값진 진주인 사람은 종교와 말씀까지 자기 영광을 위해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대목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나는 무엇을 얼마나 많이 버렸는가?’가 아닙니다. ‘내가 모든 것을 판단할 때 최종적으로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입니다. 이것이 지배적 사랑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지배적 사랑이 바뀌면 누룩이 반죽 전체를 변화시키듯 삶의 나머지 모든 영역도 차츰 새로운 질서를 갖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겨자씨·누룩·진주와 보화라는 세 비유를 하나로 묶으려는 강사의 시도에는 흥미로운 영적 통찰이 있습니다. ‘성장하여 쓰임이 되고, 삶 전체가 변화되며, 마침내 가장 귀한 생명을 얻는다’는 흐름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것을 ‘특별한 이긴 자 집단의 영적 등급’보다 모든 거듭나는 사람 안에서 주님께서 이루시는 선과 진리의 성장, 삶 전체의 질서화, 그리고 지배적 사랑의 변화로 넓혀 읽습니다. 그렇게 할 때 이 세 비유는 특정한 영적 엘리트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마음 안에서 지금 진행되어야 할 천국의 이야기가 됩니다.

 

그리고 이제 6강의 분위기는 크게 바뀝니다. 겨자씨·누룩·진주와 보화를 ‘교회 시대 이긴 자들’의 밝은 측면으로 묶은 뒤, 강사는 그 반대편에 ‘가라지’를 놓습니다. 실제 강의의 전체 도식에서 앞의 비유들이 ‘14만 4천’과 연결된다면 가라지는 ‘666’, 곧 적그리스도적 상태와 연결됩니다. 따라서 마지막 6강 5부에서는 ‘가라지 비유’와 ‘그물 비유’를 중심으로, ‘알곡과 가라지’,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 ‘추수와 세상 끝’, 그리고 강사가 이것을 ‘14만 4천 대 666’이라는 종말론적 구도로 연결하는 방식을 충분히 살펴본 뒤, 스베덴보리의 마지막 심판과 요한계시록 해석에서는 이 모든 것이 어떻게 전혀 다른 깊이로 열리는지를 함께 보겠습니다.

 

 

6 5

가라지와 그물, ‘세상 끝과 마지막 심판, 그리고 6강 전체의 결론

6강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면 분위기가 크게 달라집니다. 앞의 겨자씨, 누룩, 감추인 보화와 값진 진주가 ‘좋은 밭’에서 자라난 생명의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다면, 이제 가라지 비유와 그물 비유에서는 선과 악의 분리, 곧 심판의 문제가 전면에 등장합니다. 강사는 마태복음 13장의 비유들을 하나의 큰 구조로 묶으면서, 씨 뿌리는 비유를 일종의 서론으로, 겨자씨·누룩·진주와 보화를 영적으로 성장한 ‘이긴 자’의 모습으로, 가라지를 그 반대편에 있는 적그리스도적 상태로, 마지막 그물 비유를 이 모든 것의 최종적인 분리와 결론으로 읽습니다. 따라서 6강 전체가 결국 ‘말씀의 씨를 받은 사람이 어떤 생명으로 형성되며, 마지막에는 무엇으로 드러나는가’라는 하나의 질문을 향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가라지 비유에서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알곡과 가라지가 ‘같은 밭’에서 함께 자란다는 사실입니다. 주인은 좋은 씨를 뿌렸지만 사람들이 잘 때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립니다. 싹이 나고 결실할 때 비로소 가라지도 보이기 시작합니다. 종들이 즉시 가라지를 뽑으려 하지만 주인은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선과 악의 분리가 인간의 성급한 판단에 맡겨져 있지 않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외적인 모습을 보고 누가 알곡이고 누가 가라지인지 쉽게 판단하려 하지만, 주님께서는 마지막까지 기다리십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이 말씀은 더욱 깊어집니다. 사람의 내적 상태는 외적인 신앙고백이나 종교생활만으로 완전히 알 수 없습니다. 두 사람이 똑같이 예배하고, 기도하고, 봉사하며, 심지어 똑같은 진리를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다른 사람은 자기 명예와 이익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겉 사람에서는 비슷해 보여도 속 사람의 지배적 사랑은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최종적인 분리는 인간의 외적 판정이 아니라 내적 사랑이 완전히 드러나는 데서 이루어집니다.

 

이 점에서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는 말씀은 단순한 종말론적 시간표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주님의 섭리는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면서 선과 악이 충분히 자기 모습을 드러내도록 허용합니다. 사람이 아직 변화될 수 있는 동안에는 악한 상태가 보인다고 해서 곧바로 그의 영원한 상태가 확정된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회개하고 방향을 바꿀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의 현재 모습을 보고 ‘저 사람은 가라지다’라고 확정하는 것은 이 비유의 정신과 오히려 어긋날 수 있습니다. 가라지 비유는 다른 사람을 판별하기 위한 도구라기보다 먼저 자기 안에서 무엇이 자라고 있는지를 살피게 하는 말씀으로 읽는 것이 안전합니다.

 

더 깊게 들어가면 한 사람 안에서도 알곡과 가라지가 한동안 함께 존재합니다. 거듭남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선한 애정만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과 자기 자신을 높이고 싶은 마음, 이웃에게 선을 행하고 싶은 마음과 자기 유익을 먼저 챙기려는 마음이 함께 나타납니다. 진리를 사랑하면서도 동시에 그 진리를 자기 의를 세우는 데 사용하려는 proprium이 끼어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어느 날 ‘나는 알곡이고 저 사람은 가라지’라고 사람들을 둘로 나누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 안의 선과 악을 점점 구별하시고 악을 분리하시며 선을 주님의 질서 안에서 굳게 하시는 과정입니다.

 

여기서 ‘원수가 와서 가라지를 덧뿌렸다’는 말씀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 의하면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은 주님이시며, 모든 악과 거짓은 지옥에서 유입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에게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유입되는 악과 거짓을 사람이 자기 자유 가운데 받아들이고 사랑하며 의지의 것으로 만들 때 그것이 그의 생명에 속하게 됩니다. 반대로 유입되는 악을 죄로 알고 거부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할 때 그것은 자기 생명으로 굳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악한 생각이 떠올랐다는 사실 자체와 그 악을 사랑하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이것은 영적 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사람에게 순간적으로 악한 생각이나 감정이 일어났다고 해서 곧 ‘나는 악한 사람이다’라고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에 동의하는가, 그것을 즐거워하는가, 아니면 주님 앞에서 악이라고 인정하고 물리치는가입니다. 거듭남의 싸움은 악의 유입 자체를 완전히 없애는 일이 아니라 그것이 의지 안으로 들어와 지배적 사랑이 되지 못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강사는 이 가라지 비유를 자신의 종말론적 체계 안에서 ‘666’과 연결합니다. 앞의 겨자씨·누룩·진주와 보화를 ‘14만 4천’과 연결하여 성화되고 이긴 성도들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면, 가라지는 그 반대편의 적그리스도적 생명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 구조는 ‘핵심진리’의 전체적인 영적·종말론적 도식을 이해하는 데에는 도움이 됩니다. 선한 씨가 자라 완성되는 방향과 악한 씨가 자라 완성되는 방향을 서로 대비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서 상당히 중요한 보정이 필요합니다. 요한계시록의 ‘666’은 어떤 특정한 악인 집단이나 미래의 한 적그리스도 세력을 표시하는 암호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요한계시록 해설에서 ‘짐승의 수’는 신앙을 체어리티와 분리하여 구원의 전부로 만드는 교리와 그 상태의 질을 나타내는 매우 깊은 상응적 의미를 갖습니다. 따라서 ‘666인 사람들’이라는 식으로 사람 자체에 표지를 붙이는 것보다, ‘내 신앙 안에서도 진리와 신앙을 사랑과 삶으로부터 분리하는 666적 상태가 생길 수 있는가?’라고 묻는 것이 훨씬 스베덴보리적인 접근입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가 AC 창세기 4장에서 읽고 있는 ‘가인’과도 놀랍게 연결됩니다. 가인은 신앙 자체가 아니라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표상합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으면 살아 있지만, 신앙이 자기 독립적인 것이 되어 사랑을 밀어내면 결국 아벨을 죽이는 가인이 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스베덴보리가 비판하는 ‘신앙만’의 교리도 본질적으로 같은 영적 문제를 다른 시대와 형식에서 보여 줍니다. 따라서 ‘666’을 밖에 있는 무서운 적그리스도를 찾아내는 표지로만 읽기보다, 진리가 사랑과 분리될 때 교회 안에서조차 어떻게 생명을 잃는지를 보여 주는 경고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보면 ‘알곡과 가라지’ 역시 교파나 집단을 나누는 도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알곡이고 저 교회는 가라지다’, ‘우리 교리는 14만 4천이고 저들의 교리는 666이다’라는 식으로 사용되는 순간, 이 비유는 자기성찰의 말씀에서 타인을 정죄하는 도구로 바뀝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묻고 계시는 것은 ‘네가 어떤 이름을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네 안에서 실제로 무엇이 자라고 있느냐?’입니다.

 

이제 가라지 비유의 마지막에는 ‘추수’가 등장합니다. 주님께서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세상 끝’을 문자적으로 우주와 지구가 소멸하는 날이라고 읽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스베덴보리에게 이 표현은 매우 중요한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세상 끝’ 또는 ‘시대의 완성’은 자연계 자체의 파괴가 아니라 하나의 교회가 선과 진리를 완전히 잃어 더 이상 교회로 기능할 수 없게 된 마지막 상태를 뜻합니다. 그리고 그때 영계에서 심판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교회가 시작됩니다.

 

따라서 마지막 심판 역시 자연계의 모든 사람이 무덤에서 육체로 부활하여 한 장소에 모여 재판받는 사건이 아닙니다. 인간은 죽은 뒤 이미 영계에서 살아가며, 마지막 심판은 그 영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외적으로는 천국을 가장하고 선한 신앙인처럼 살았지만 내적으로는 악과 거짓을 사랑하던 상태들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게 되면서 외관이 벗겨지고, 각자가 실제로 사랑하는 것에 따라 분리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라지 비유와 매우 잘 맞습니다. 추수 전에는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랍니다. 외관상으로는 섞여 있습니다. 그러나 열매가 완전히 드러나면 더 이상 감출 수 없습니다. 사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지상에서 가지고 있던 외적 습관과 종교적 외관이 어느 정도 남아 있지만, 중간영계에서 외적인 것이 점차 벗겨지면서 그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했는지가 드러납니다. 그리고 사람은 결국 자기 지배적 사랑과 같은 곳으로 갑니다. 누가 억지로 천국이나 지옥에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명이 그와 같은 공동체를 찾아갑니다.

 

그러므로 심판의 본질은 주님께서 분노하여 사람을 벌하시는 데 있지 않습니다. 진리가 사람의 실제 상태를 드러내고, 각자가 자유롭게 형성한 사랑에 따라 질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악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천국의 사랑은 오히려 견딜 수 없는 것이 됩니다.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 자신보다 이웃의 행복을 더 기뻐하는 천국 공동체 안에서 행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국과 지옥은 단순한 ‘보상과 형벌의 장소’ 이전에 서로 완전히 다른 사랑의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제 마태복음 13장의 마지막 비유인 ‘그물 비유’가 나옵니다.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 그리고 주님께서는 다시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라고 설명하십니다. 가라지 비유와 거의 같은 결론입니다. 처음에는 함께 모이지만 마지막에는 분리가 일어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바다’는 자연적 차원에 모여 있는 지식과 일반적인 진리의 영역과 연결될 수 있으며, 물고기는 그 가운데 살아 움직이는 자연적 지식과 인식들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제자들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된다는 말씀도 이와 관련하여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그러나 이번 강의에서 더 중요한 것은 좋은 물고기와 못된 물고기가 처음부터 별도의 그물에 잡힌 것이 아니라 ‘한 그물’ 안에 함께 들어왔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외적 소속만으로 사람의 영원한 상태가 결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보여 줍니다. 같은 교회에 속하고, 같은 세례를 받고, 같은 성찬에 참여하며, 같은 교리를 고백한다고 해서 내적 생명이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교회의 외적 질서는 필요하지만 그것이 곧 천국은 아닙니다. 천국은 사람 안에 주님의 선과 진리가 결합되어 형성되는 내적 상태에서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물’에 들어왔다는 것과 ‘좋은 물고기’가 되었다는 것은 다릅니다. 교회에 들어온 것과 거듭난 것도 동일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알고 교리를 받아들였다고 해서 그 진리가 곧 생명이 된 것도 아닙니다. 다시 6강의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씨가 뿌려졌다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어떤 밭에 떨어졌으며, 뿌리를 내렸고, 가시를 이겨 내고, 마침내 열매가 되었는지가 중요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마태복음 13장의 여러 비유를 하나의 흐름으로 읽으려 한 강사의 의도가 가장 잘 드러납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 ‘어떤 마음으로 말씀을 받는가’를 묻고, 겨자씨에서 ‘그 생명이 얼마나 성장하는가’를 묻고, 누룩에서 ‘그 생명이 삶 전체를 얼마나 변화시키는가’를 묻고, 진주와 보화에서 ‘무엇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가’를 묻고, 가라지와 그물에서 ‘마침내 어떤 생명으로 드러나는가’를 묻습니다. 이 연결 자체는 매우 인상적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 모든 것을 ‘14만 4천에 들어갈 것인가, 666에 들어갈 것인가’라는 두 집단의 분류보다 훨씬 내적인 문제로 가져옵니다. 그것은 ‘오늘 내 안에서 어떤 사랑이 형성되고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천국적 사랑인가, 자기 자신과 세상을 모든 것 위에 두는 지옥적 사랑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구별은 겉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섬세합니다. 설교자가 될 수도 있고, 선교사가 될 수도 있고, 수도자가 될 수도 있으며, 스베덴보리를 깊이 연구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활동의 가장 깊은 목적이 자기 명예와 우월감이라면 외적 종교성만으로는 천국적 생명이 형성되지 않습니다. 반대로 세상에서 이름 없이 평범한 일을 하면서도 주님을 신뢰하고 이웃에게 정직하며 맡겨진 쓰임을 사랑하는 사람이 훨씬 천국적인 상태에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쓰임’을 그렇게 중요하게 보는 이유입니다. 천국적 생명은 특별한 종교적 지위를 갖는 데 있지 않고, 주님에게서 받은 선과 진리를 자기 자리에서 실제 쓰임으로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좋은 밭의 열매도 결국 쓰임이고, 겨자나무의 가지도 다른 생명을 위한 쓰임이며, 누룩이 삶 전체를 변화시키는 목적도 선한 쓰임이고, 값진 진주를 얻은 사람의 새 생명 역시 체어리티의 쓰임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추수’도 두려움의 이미지에서 조금 달라집니다. 물론 악을 사랑하여 그것을 자기 생명으로 만든 사람에게 분리는 엄중합니다. 그러나 거듭나는 사람에게 주님의 분리는 구원의 역사입니다. 내 안에서 선과 악이 뒤섞여 있는 상태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악을 분리하시고 선을 자유롭게 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듭남 자체가 작은 심판들의 연속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진리가 비추어질 때마다 ‘이 생각은 주님에게서 오는 질서와 맞는가’, ‘이 욕망은 어디에서 오는가’를 분별하고 악을 거부하며 선을 선택합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심판의 원리가 오늘의 회개 안에서도 작동합니다. 회개는 자기 자신을 정죄하며 괴롭히는 일이 아니라 주님의 빛 가운데 선과 악을 구별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내 proprium에서 나온 것이구나’, ‘이것은 이웃을 해치는 사랑이구나’ 하고 보고, 주님께 그것을 물리쳐 달라고 구하면서 실제 행동에서는 그 악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작은 분리들이 쌓이면서 사람의 영적 생명이 형성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6강 전체를 처음부터 다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 강사가 강조했던 것은 ‘영적 가치관’이었습니다. 무엇을 가장 귀하게 여기며 어떤 방향으로 살아갈 것인가였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는 그 가치관이 말씀을 받아들이는 ‘마음밭’으로 나타났습니다. 길가는 말씀이 들어오지 못하는 상태였고, 돌밭은 말씀을 기쁨으로 받지만 뿌리가 깊지 않은 상태였으며, 가시밭은 말씀과 함께 세상 사랑이 자라 말씀을 질식시키는 상태였습니다. 좋은 밭에서는 말씀이 실제 열매가 되었습니다.

 

그다음 겨자씨에서는 그 생명이 성장하여 다른 사람을 위한 ‘쓰임’으로 확장되었습니다. 누룩에서는 주님의 진리와 선이 삶의 일부에 머물지 않고 생각과 의지, 말과 행동 전체로 스며들어 사람을 변화시키는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진주와 보화에서는 이 모든 변화의 중심에 ‘무엇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가’라는 지배적 사랑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라지와 그물에서는 결국 그 지배적 사랑이 완전히 드러나 선과 악의 분리가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보면 6강의 처음과 마지막이 정확히 만납니다. 처음에는 ‘영적 가치관’이라고 했고, 마지막에는 ‘심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사실 두 가지가 하나입니다. 내가 무엇을 가장 가치 있게 여기고 사랑하며 살았는지가 결국 나의 영원한 상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심판은 전혀 낯선 기준이 마지막 순간 갑자기 적용되는 사건이 아니라, 평생 자유롭게 형성해 온 사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국을 준비한다는 것도 죽기 직전에 어떤 자격을 얻는 일이 아닙니다. 오늘의 작은 선택에서 천국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손해가 생겨도 정직을 선택하고, 미워할 이유가 충분해 보여도 보복을 거부하며, 선을 행한 뒤 공로를 자기에게 돌리지 않고, 자기 판단보다 진리를 높이며, 받은 능력을 이웃의 쓰임을 위해 사용하는 가운데 천국적 사랑이 조금씩 사람의 생명이 됩니다.

 

반대로 지옥 역시 죽은 뒤 갑자기 주어지는 낯선 상태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모든 것 위에 놓고, 다른 사람을 자기 유익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며, 거짓임을 알면서도 이익 때문에 붙들고, 악임을 알면서도 사랑하기 때문에 선택하는 일이 반복될수록 그 사랑이 점차 생명이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회개를 그렇게 중요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직 자연계에 있는 동안 사람은 방향을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핵심진리’가 계속 강조하는 ‘영적 성장’, ‘연단’, ‘이긴 자’, ‘익은 열매’라는 언어에는 귀한 긴장감이 있습니다. 신앙을 단순히 ‘예수를 믿었으니 이제 구원받았다’는 과거의 한 사건으로 끝내지 않고, ‘그 믿음이 지금 당신을 어떤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가?’라고 묻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도 바로 그 질문을 매우 중요하게 받아들입니다.

 

다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몇 단계의 연단을 통과했는가’, ‘14만 4천에 속할 정도로 성화되었는가’, ‘다른 성도보다 높은 영적 등급에 도달했는가’로 가져갈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더 단순하고 더 깊게 물을 수 있습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사랑하는가?’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삶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보면 됩니다. 사랑은 반드시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의 진리를 사랑하게 되고, 진리를 사랑하면 그것을 행하려 하며, 이웃을 사랑하면 그의 선을 원하게 되고, 선을 사랑하면 쓰임을 기뻐하게 됩니다. 반대로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하면 진리조차 자기편을 만드는 도구로 사용하게 됩니다. 결국 나무는 열매로 드러납니다.

 

이런 의미에서 6강의 씨 뿌리는 비유와 마지막 그물 비유 사이에는 매우 아름다운 연결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씨였습니다. 너무 작아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씨가 자라고 마침내 열매가 나타났습니다. 마지막에는 그 열매와 생명의 질이 드러나 분리가 이루어집니다. 영적 생명도 그렇습니다. 아주 작은 선택 하나가 반복되면서 애정이 되고, 애정이 습관이 되며, 습관이 마침내 사랑의 형태를 이루어 사람의 생명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날 ‘666의 사람’만이 아닙니다. 오늘 내 안에서 사랑과 분리된 신앙이 자라고 있지는 않은지, 진리를 알면서도 그것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있지는 않은지, 영적인 것을 추구하면서 실제로는 자기 영적 우월성을 사랑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살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14만 4천에 들어가야 한다’는 욕망보다 오늘 받은 작은 진리를 삶으로 옮기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저는 6강의 가장 좋은 부분과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만난다고 봅니다. ‘좋은 밭이 되라.’ 그러나 그것은 영적 엘리트가 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말씀의 씨가 네 안에서 실제 생명이 되게 하라’는 뜻입니다. ‘겨자나무가 되라.’ 그러나 많은 사람 위에 서는 지도자가 되라는 뜻이 아니라 받은 선과 진리가 다른 사람에게 유익한 쓰임이 되게 하라는 뜻입니다. ‘누룩처럼 전부 변화되라.’ 그러나 외적으로 흠 없는 종교인이 되라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질서가 삶의 가장 자연적인 영역까지 스며들게 하라는 뜻입니다. ‘값진 진주를 얻으라.’ 그러나 영적 보물을 자기 소유로 확보하라는 뜻이 아니라 자기 proprium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더 귀하게 여기라는 뜻입니다. ‘가라지를 경계하라.’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가라지라는 이름표를 붙이라는 뜻이 아니라 내 안에서 진리와 사랑을 분리시키는 악과 거짓을 살피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물이 가득 찰 때를 기억하라.’ 그러나 공포 속에서 종말의 날짜를 계산하라는 뜻이 아니라 지금 형성되고 있는 지배적 사랑이 결국 나의 영원한 방향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해서 6강의 다섯 부분은 하나로 모입니다. ‘말씀은 씨로 들어오고, 선 안에서 뿌리를 내리며, 시험 가운데 깊어지고, 삶 전체로 퍼져 열매가 되고, 마침내 그 열매가 그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는지를 드러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본 6강의 가장 중심적인 흐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 결론은 다시 AC의 아주 오래된 주제로 돌아갑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진리를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진리가 선과 결합된 사람입니다. 신앙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사랑 안에서 살아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가인’을 없애고 ‘아벨’만 남긴다는 의미가 아니라,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독립적인 주인이 되는 질서를 바로잡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신앙은 사랑에서 나오고 사랑으로 돌아가며, 결국 선한 삶이라는 열매를 맺습니다.

 

따라서 6강 전체를 한 문장으로 마무리한다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천국은 미래 어느 날 들어갈 장소이기 전에, 주님께서 말씀의 씨를 통하여 인간의 마음에 심으시고, 거듭남 가운데 선과 진리를 결합하시며, 마침내 사랑과 쓰임이라는 열매로 나타나게 하시는 생명의 질서입니다.’

 

그렇게 보면 마태복음 13장의 마지막 질문은 ‘나는 14만 4천인가, 666인가?’가 아닙니다. 훨씬 조용하고, 훨씬 깊으며, 그래서 더욱 피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주님께서 오늘도 내 마음에 씨를 뿌리고 계시는데, 나는 그 말씀을 어떻게 받고 있으며, 그 말씀은 지금 내 삶에서 어떤 열매가 되어 가고 있는가?’입니다. 이 질문을 남기는 것으로 6강 5부, 그리고 6강 전체를 마무리하면 좋겠습니다.

 

 

 

SY.58, 심령부흥대사경회(79차) 5강 (7/29), 시흥영성수련원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5강 1부‘말씀을 아는 것’에서 ‘말씀으로 사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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