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25에서 특별히 깊이 살펴볼 표현은‘태고교회는사랑을통하여주님을신앙하였다’는 첫 문장입니다.오늘날의 신앙생활에 익숙한 사람에게는‘말씀을배우고,그것을믿고,그믿음에따라사랑하며살아간다’는 순서가 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에게서는 그 질서가 달랐습니다.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선을 가장 깊은 생명으로 가지고 있었으며,그 사랑 안에서 무엇이 참된지를 지각했습니다.
이것이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직접 연결됩니다.퍼셉션은 밖에서 배운 교리를 하나씩 논증하고 판단하여‘이것이참되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능력이 아닙니다.주님으로부터 오는 선 안에서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내적으로 지각하는 천적인 능력입니다.그러므로 태고교회의 가장 순수한 상태에서는 사랑과 신앙을 서로 독립된 것으로 생각하기 어려웠습니다.사랑 안에 그 사랑에 속한 진리가 있었고,진리는 자신을 낳은 사랑과 하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사랑을통하여주님을신앙하였다’는 말은 단순히‘사랑도하고신앙도가지고있었다’는 뜻이 아닙니다.신앙의 생명과 근원이 사랑에 있었다는 뜻입니다.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선에 속한 진리를 지각했고,그 진리는 다시 선을 표현했습니다.오늘날 우리가‘무엇을믿는가’와‘어떻게사는가’를 서로 다른 질문처럼 나누기 쉬운 것과 달리,태고교회의 천적 상태에서는 사랑과 지각과 삶이 하나의 질서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매우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이 천적 질서를 오늘날 영적 인간의 거듭남 과정에 그대로 시간적인 순서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태고교회 사람들에게‘사랑이먼저이고신앙이거기서나왔다’고 해서,오늘날 사람도 먼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충분히 가진 다음에야 진리를 배우고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영적 인간에게서는 오히려 먼저 말씀을 통하여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배우고,진리를 신앙하며,그것에 따라 살아가면서 주님께서 새로운 의지를 형성하시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은 거듭남의 방식에서 차이가 있습니다.천적 인간은 선에서 진리를 지각하는 질서를 가졌지만,영적 인간은 진리를 통하여 선으로 인도됩니다.그러나 최종적인 질서가 서로 반대인 것은 아닙니다.영적 인간에게도 진리는 결국 선과 결합되어야 하고,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처음에는 진리가 길을 보여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거듭남이 진행될수록 사람이 아는 진리는 의지와 삶 안으로 들어가 선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 구별을 놓치면‘체어리티가신앙보다중요하다’는 말을‘교리와진리는중요하지않다’는 뜻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습니다.영적 인간에게 진리는 거듭남에 반드시 필요합니다.무엇이 선인지 알지 못하면 올바르게 선을 행할 수도 없습니다.문제는 진리가 선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 되고,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스스로 교회의 본질이라고 주장하는 데 있습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가인의 원리가 시작됩니다.AC.325는‘사랑에서신앙을분리한사람들이생겨났다’고 말합니다.처음부터 신앙을 버린 사람들이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오히려 신앙을 붙들고 있었습니다.그러나 그것을 사랑과 분리하여 독립적인 것으로 만들었습니다.이것이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거짓을 거짓이라고 알면 경계하기 쉽지만,참된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전체적인 질서에서 떼어 내 가장 중요한 것으로 만들면 자신이 여전히 진리 안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리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닙니다.퍼셉션이 약해진 사람에게는 진리를 배우고 보존하며 다음 세대에 전하기 위한 교리가 필요합니다.문제는 교리가 사랑과 삶에서 분리되는 것입니다.교리를 많이 알고 성경의 속뜻을 깊이 이해하며 신앙 고백이 정확하더라도,그것이 사람을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끌지 않는다면 그 지식은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은‘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를 읽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말씀의 속뜻과 상응을 많이 알게 되는 것은 큰 은혜이지만,그 지식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더 많이 보고 더 깊이 안다고 여기기 시작한다면 오히려 가인의 길로 들어설 수 있습니다.아르카나를 아는 목적은 남보다 높은 영적 지식을 소유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그 진리를 통하여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이웃을 더욱 지혜롭게 사랑하며 실제 쓰임의 삶을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AC.325의‘사랑을통하여주님을신앙하였다’는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 적용할 때에는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그대로 되찾으려 하기보다 그 안에 있는 영원한 질서를 붙들어야 합니다.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은 주님이시며,진리는 선을 향하고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우리가 배우는 진리가 삶으로 내려오고,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이 이웃을 향한 사랑과 쓰임으로 나타날 때 신앙과 체어리티는 다시 형제로 함께 있게 됩니다.
결국 중요한 질문은‘나는얼마나많이알고있는가?’만이 아닙니다. ‘내가아는진리가나를어떤사람으로만들고있는가?’입니다.진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끌고,신앙이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는다면 그것은 살아 있는 신앙입니다.그러나 진리가 사랑에서 분리되고 신앙이 삶에서 떨어져 독립적인 것이 되기 시작한다면,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 안의 가인이 태어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Jehovah.2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And she added to bear his brother Abel; and Abel was a shepherd of the flock, and Cain was a tiller of the ground. (창4:1-2)
개요
AC.325
태고교회는사랑을통하여주님을신앙하였습니다.그러나사랑에서신앙을분리한사람들이생겨났습니다.사랑에서분리된신앙의교리를‘가인’(Cain)이라하였고,이웃을향한사랑인체어리티를‘아벨’(Abel)이라하였습니다.(1-2절)The most ancient church had faith in the Lord through love; but there arose some who separated faith from love.The doctrine of faith separated from love was called“Cain”; and charity, which is love toward the neighbor, was called“Abel.”(verses 1–2)
해설
AC.325는 창4의 속뜻을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열쇠를 제시합니다. 창4의 가인과 아벨을 단지 인류 최초의 두 형제에 관한 이야기로 읽는 데 머물지 않고, 태고교회 안에서 본래 하나였던 사랑과 신앙이 어떻게 분리되기 시작했는지를 보여 주는 표상으로 읽게 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를, ‘아벨’은 이웃을 향한 사랑인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앞으로 전개되는 두 형제의 관계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가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보여 주는 교회의 영적 역사이기도 합니다.
첫 문장인 ‘태고교회는사랑을통하여주님을신앙하였습니다’는 특히 중요합니다. 여기서 ‘사랑을통하여’(through love)라는 말은 단순히 ‘주님을사랑하면서믿었다’는 정도보다 깊은 뜻을 가집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에게 사랑은 신앙에 나중에 덧붙여지는 하나의 덕목이 아니라 신앙이 나오는 근원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선 안에서 무엇이 참된지를 퍼셉션으로 지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신앙은 서로 독립된 두 가지라기보다 하나의 생명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의지와 이해가 하나를 이루고 있었으며, 선을 사랑하는 의지에서 그 선에 속한 진리에 대한 지각이 나왔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신앙은 어떤 교리 내용을 먼저 배우고 논증하여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과는 달랐습니다. 사랑 안에서 진리를 지각하고, 그 진리를 살아가는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AC.325의 ‘사랑을통하여주님을신앙하였다’는 짧은 표현은 바로 이러한 천적 질서를 압축하여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문장에서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사랑에서신앙을분리한사람들이생겨났습니다.’ 여기서 창4의 비극이 시작됩니다. 처음부터 신앙 자체가 거짓이거나 악했던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신앙이 자기 생명의 근원인 사랑에서 분리되어 독립적인 것으로 서기 시작했다는 데 있습니다. 가지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나무의 줄기와 뿌리에서 끊어질 때 생명을 잃는 것처럼, 신앙과 진리도 사랑과 선 안에 있을 때 살아 있지만 그것에서 분리되면 본래의 생명을 잃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 상태가 ‘가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가인을 단순히 ‘신앙’이라고 하지 않고 ‘사랑에서분리된신앙의교리’라고 규정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따라서 가인을 처음부터 단순히 악이나 거짓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본래 교회 안에 있던 신앙이 사랑에서 구별되기 시작하고, 그 구별이 점차 분리로 굳어져 독립적인 교리가 되어 가는 상태가 가인으로 표상됩니다. 이후 창4에서는 이 분리가 더욱 진행되면서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앞세우고, 마침내 아벨을 죽이는 데까지 이르는 과정을 보게 됩니다.
반면 ‘아벨’은 체어리티, 곧 이웃을 향한 사랑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체어리티는 단순히 친절한 감정이나 몇 가지 구제 행위를 뜻하지 않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으로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고 행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가인과 아벨은 본래 경쟁 관계가 아닙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를 없애야 하는 두 원리가 아니라 함께 있어야 하는 것들입니다. 이후 스베덴보리가 아벨을 가인의 ‘형제’라고 거듭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AC.325는 앞의 AC.324에서 말한 ‘교회에서분리되어나온교리들’이 어떻게 생겨나기 시작했는지를 보여 줍니다. 교회의 쇠퇴는 언제나 처음부터 노골적인 거짓이 밖에서 들어오는 방식으로만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 참된 것 하나가 전체적인 질서에서 떨어져 나와 자신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세울 때에도 시작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참된 것이지만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되면 질서가 무너집니다. 진리는 선을 섬겨야 하지만, 선과 삶에서 분리된 진리가 자기 지성과 자기 의를 세우는 수단으로 변하면 가인의 원리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다만 이 태고교회의 질서를 오늘날 인간의 거듭남에 그대로 시간적인 순서로 옮겨서는 안 됩니다. ‘태고교회는사랑을통하여주님을신앙하였다’고 해서 오늘날의 영적 인간도 먼저 완성된 사랑을 가진 뒤에야 진리를 배우고 신앙을 갖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말씀을 통하여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신앙하며,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면서 주님께서 새로운 의지를 형성하시고 선과 진리를 결합하시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질서는 같습니다. 진리는 선을 향하고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가인과 아벨을 단순히 ‘악과선’으로 대응시키는 것은 아직 너무 이릅니다. 창4의 첫 비극은 아벨이 들에서 죽을 때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먼저 본래 하나의 생명을 이루던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의 살인은 그 내적인 분리가 끝까지 진행된 결과입니다. 그래서 AC.325는 창4전체를 읽는 데 하나의 중요한 질문을 우리에게 줍니다. ‘내가가진신앙은사랑과체어리티안에서살아있는가,아니면그것들과분리되어스스로서려하고있는가?’ 창4는 이제 그 작은 분리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를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통하여 보여 주기 시작합니다.
이번 설교는 앞서 살펴본 ‘하나님께 묻는 삶’보다 서사라 목사의 영성을 훨씬 더 깊은 곳까지 보여 주는 설교입니다. 첫 설교에서 중심이 ‘하나님께 묻고 응답을 받는 삶’이었다면, 이번에는 그 응답과 만남이 이루어지는 영적 장소를 ‘지성소’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설교자는 역대하 5장의 솔로몬 성전과 언약궤, 그룹들, 지성소를 출발점으로 삼아 성막의 뜰과 성소와 지성소를 기도의 깊이에 대응시킵니다. 그리고 회개 역시 뜰에서 이루어지는 회개, 성소에서 이루어지는 회개, 지성소에서 이루어지는 회개가 서로 다르다고 설명합니다. 그 가운데 가장 깊은 ‘지성소의 회개’는 단순히 죄를 고백하거나 눈물을 흘리는 회개가 아니라, 성령의 강한 역사로 죄를 깊이 깨닫고, 그 죄에서 실제로 돌아서 다시는 그 죄에 지배되지 않게 되는 회개라고 말합니다.
먼저 이 설교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서 놀라게 되는 것은, ‘뜰-성소-지성소’라는 구조를 인간의 영적 깊이와 연결하려는 발상 자체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에게 매우 익숙한 방식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성막은 단순히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던 건축물이 아닙니다. 그 구조와 기구와 재료와 배치 전체가 천국과 주님, 그리고 거듭나는 인간의 내면을 표상합니다.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갈수록 더욱 내적인 것, 더욱 높은 천국의 것, 궁극적으로 주님에게 속한 것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서사라 목사가 성막을 설명하면서 ‘뜰에 머무는 신앙이 있고, 성소까지 들어가는 신앙이 있으며, 지성소까지 들어가는 신앙이 있다’는 식으로 영적 적용을 시도하는 것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상응적 성경 이해와 의외로 가까운 출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같은 출발점에서 곧 같은 길을 가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차이가 나타납니다. 서사라 목사는 이 구조를 주로 ‘기도의 깊이’와 연결합니다. 특히 방언으로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기도하면서 점점 깊이 들어가, 마침내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경험적 구조를 제시합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근거로 한 시간 정도 기도하면 어느 단계까지 가고, 두세 시간 방언기도를 계속하면 지성소에 들어가는 경험이 나타날 수 있다는 취지로 설명하며, 이미 오래 훈련된 사람은 더 자주 그 상태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바로 여기에서 상당히 신중해집니다. 왜냐하면 성막의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본질적으로 ‘기도시간의 양적 증가’를 표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뜰에서 성소로,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간다는 것은 인간의 자연적 차원에서 영적 차원으로, 그리고 더욱 내적인 천적 차원으로 들어가는 질서를 나타냅니다. 이것은 몇 시간을 기도했느냐보다 인간의 사랑과 의지가 얼마나 주님에게로 돌이켜졌느냐와 관계됩니다. 한 시간 기도한 사람이 뜰에 있고, 세 시간 기도한 사람이 지성소에 있다는 식의 공간적, 시간적 대응은 스베덴보리의 상응 원리와는 상당히 다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장시간 기도 자체를 가볍게 볼 이유는 없습니다. 오랫동안 세상 생각에서 벗어나 마음을 주님께 집중하고, 자기 욕망과 잡념을 내려놓으며 기도하는 것은 분명 인간의 내면을 정돈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하나의 영적 공식으로 만드는 데 있습니다. ‘오래 기도하면 더 깊은 영적 공간에 들어간다’는 공식이 형성되면, 영적 상태의 깊이가 기도시간이나 체험의 강도로 측정될 위험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영적 깊이를 결정하는 것은 체험의 강도가 아니라 사랑의 질입니다. 천국의 가장 깊은 곳은 가장 강렬한 환상을 보는 사람이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주님을 가장 깊이 사랑하고 그 사랑에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번 설교의 중심인 ‘회개’로 들어가면, 서사라 목사와 스베덴보리 사이의 거리가 갑자기 상당히 좁아집니다. 설교자는 회개를 세 단계처럼 설명합니다. 첫 번째는 입술로 죄를 고백하지만, 실제로는 그 죄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고 다시 반복하는 상태입니다. 두 번째는 정말 죄를 짓지 않으려고 결심하고 진심으로 회개하지만,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다시 넘어지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그가 ‘지성소에서 드리는 회개’라고 부르는 것은 성령의 빛 가운데 자기 죄의 실상을 너무나 깊이 깨닫고 통회하며, 그 결과 실제로 그 죄에서 벗어나 다시 그 죄에 지배되지 않는 상태입니다.
이 부분은 이번 설교에서 가장 귀하게 보아야 할 대목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회개는 감정이 아니라 삶의 변화로 확인되어야 한다’는 매우 중요한 통찰이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단순한 입술의 고백이나 순간적인 죄책감을 진정한 회개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살피고, 자기 안에서 특정한 악을 발견하고, 그것이 하나님께 죄임을 인정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고, 실제 생활에서 그 악과 싸워 그것을 피해야 합니다. 결국 회개의 진실성은 ‘얼마나 슬퍼했는가’보다 ‘그 악을 실제로 죄로 여기고 떠나는가’에서 드러납니다.
서사라 목사는 심지어 ‘눈물이 나오지 않으면 회개가 안 된 것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진심으로 죄를 자백했다면 하나님의 용서를 믿어야 하며, 눈물이 나지 않았다고 해서 용서받지 못한 것이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중요한 균형입니다. 설교 전체에는 통곡과 강렬한 성령 체험이 상당히 강조되어 있지만, 적어도 눈물 자체를 구원의 조건이나 회개의 절대 기준으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야 합니다. 서사라 목사의 설명에서는 가장 깊은 회개가 이루어질 때, ‘회개의 영’이 강하게 임하고, 죄가 너무나 선명하게 보이며, 통곡이 터지고, 그 결과 그 죄를 다시 짓지 않는 능력이 주어진다는 구조가 나타납니다. 이것은 매우 강력하고 아름다운 회심 경험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사람에게 어떤 악의 추함이 갑자기 너무나 분명하게 보이고, 그것을 진심으로 혐오하게 되어 삶이 크게 바뀌는 순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거듭남 전체를 이 한 번의 강렬한 체험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거듭남은 대체로 훨씬 길고 깊은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악을 깨닫고 버리기로 결심했는데도 다시 넘어질 수 있습니다. 다시 일어나 싸우고, 또 넘어지고, 다시 주님께 도움을 구합니다. 그 과정에서 인간에게 숨어 있던 더 깊은 동기와 자기애와 세상 사랑이 차례로 드러납니다. 자신은 이미 어떤 악을 이겼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 그 악의 더 깊은 뿌리가 남아 있음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진짜 회개를 했으면 다시는 그 죄를 짓지 않는다’는 표현은 회개의 지향점을 말하는 것으로는 매우 좋지만, 거듭남의 실제 과정을 설명하는 명제로 사용하면 지나치게 단순해질 수 있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에게 매우 중요한 것은 ‘싸움’입니다. 악을 제거하시는 분은 주님이시지만, 인간은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악과 맞서야 합니다. 이것이 영적 유혹입니다. 그리고 싸움이 반복되면서 이전에 즐거웠던 악이 점차 싫어지고, 처음에는 힘들게 행했던 선이 점차 자연스러워집니다. 결국 주님께서 인간의 사랑 자체를 바꾸십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이기는 능력이 단번에 외부에서 주입되는 것처럼 설명하기보다, 주님께서 인간의 자유와 이성 안에서 끊임없이 역사하시며, 그의 사랑의 질서를 바꾸어 가신다고 보는 것이 더 스베덴보리적입니다.
여기서 ‘지성소’의 의미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서사라 목사에게 지성소는 상당히 체험적인 공간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때로는 자신의 영이 하나님의 영과 함께하는 것을 경험하는 곳처럼 묘사됩니다. 설교 후반에는 자신이 하나님께 ‘얼굴을 보여 달라’고 구했던 개인적 체험까지 언급합니다.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임을 깨달았다는 취지로 이야기합니다.
여기에는 매우 아름다운 결론과 조심해야 할 과정이 함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결론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거나 어떤 영적 형상을 경험했다는 문제에서는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훨씬 세밀해집니다. 영계에서는 모든 것이 상응을 따라 형상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영적 상태에서 빛이나 얼굴이나 인물이나 장소를 보았다고 해서, 그 보이는 형상을 곧바로 하나님의 본체 자체와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영적 경험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질 수 있지만, 그 경험을 해석하는 문제는 별개의 단계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서사라 목사의 천국, 지옥 체험을 살펴볼 때 매우 중요할 것입니다. ‘무언가를 보았다’와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정확히 안다’는 서로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구별을 할 수 있는 매우 독특한 자료를 제공합니다. 영계의 현상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영계에서 보이는 것들이 어떻게 상응을 따라 나타나는지, 영들이 어떻게 자신을 드러내는지, 인간이 그 경험을 어떻게 오해할 수 있는지를 매우 상세하게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서사라 목사의 체험을 처음부터 ‘거짓이다’라고 배척할 필요도 없고, 반대로 ‘직접 보았다니 그대로 사실이다’라고 받아들일 필요도 없습니다.
이번 설교에서 방언기도를 다루는 부분 역시 같은 원칙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설교자는 로마서 8장의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는 말씀을 장시간 방언기도와 연결하며,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모르더라도 성령께서 자신을 위해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신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방언기도 시간을 늘려 갈 것을 상당히 강하게 권합니다. 여기에는 ‘내가 하나님의 뜻을 다 알지 못한다’는 겸손한 전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앞 설교의 ‘하나님께 묻는 삶’과도 연결됩니다. 인간의 지혜보다 하나님의 지혜가 높으므로 자기 판단만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만 로마서 8장의 이 구절을 곧바로 장시간 방언기도의 기술적 근거로 연결하는 것은 별도의 해석적 검토가 필요합니다. 더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바울서신은 창세기와 출애굽기, 복음서, 계시록처럼 연속적인 속뜻을 가진 말씀의 범주와 동일하게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번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로마서의 한 구절에서 영적 세계의 구조를 세밀하게 끌어내기보다, 서사라 목사가 이 구절을 통해 말하려는 핵심, 곧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알지 못하므로 성령의 도움을 구해야 한다’는 원리를 중심으로 받아들이는 편이 더 적절합니다.
그리고 이번 설교에서 제가 가장 주목하는 대목은 사실 ‘지성소 체험’도 ‘방언 세 시간’도 아닙니다. 그것은 설교자가 성소 단계의 회개를 설명하면서 ‘나는 정말 다시는 화를 내고 싶지 않았는데 또 화를 내고 말았다’는 식으로 인간의 연약함을 말하는 부분입니다. 바로 여기에 거듭남의 실제 현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선을 원하지만 옛 욕망이 다시 일어납니다. 진리를 알고 있지만 그것대로 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기 힘의 한계를 경험합니다. 서사라 목사는 이것을 ‘자기 절망’이라고 표현하는데, 이 대목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인간은 거듭나는 과정에서 자기 힘으로는 악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배웁니다. 처음에는 ‘내가 결심하면 되겠지’라고 생각하지만, 실제 싸움에 들어가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이 절망의 목적은 인간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proprium에 대한 신뢰를 꺾는 것입니다. ‘내가 선해질 수 있다’는 자기 의를 내려놓고, 선의 능력이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실제 경험으로 배우게 됩니다. 이 점에서는 서사라 목사가 말하는 ‘자기 절망 → 성령의 도움 → 죄를 이기는 능력’이라는 흐름과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 사이에 상당히 의미 있는 접점이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리메인스’, ‘유혹’, ‘자유’, ‘이성’, ‘선과 진리의 결합’이라는 훨씬 긴 과정을 더합니다. 인간의 변화는 어느 순간 강력한 영이 임하여 이전의 악을 단숨에 없애는 사건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주님께서 저장해 두신 선과 진리의 상태들, 이후 받아들인 말씀의 진리들, 삶에서 겪는 수많은 영적 싸움들이 서로 연결되면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지성소는 어떤 황홀한 영적 경험의 ‘최종 방’이라기보다,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서 주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표상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훨씬 깊습니다.
그렇게 보면 이 설교에서 말하는 ‘뜰-성소-지성소’를 조금 다르게 다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뜰은 아직 외적인 종교생활에 가까운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라고 하니까 죄라고 하고, 회개하라고 하니까 회개하지만, 아직 그 진리가 자기 내면의 사랑과 충분히 연결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성소로 들어가면 진리가 인간의 이해성과 양심에 들어옵니다. ‘이것은 정말 악이다. 나는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진심으로 깨닫고 싸우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지성소에 해당하는 더욱 내적인 상태에서는 그 진리가 단지 ‘해야 할 의무’에 머무르지 않고 사랑과 결합합니다. 이제 악을 피하는 이유가 벌이 두렵거나 명령을 받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악 자체가 주님을 거스르고 이웃을 해치는 것이어서 싫어집니다. 반대로 선은 명령받았기 때문에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선 자체가 좋아집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서사라 목사가 말하고 싶었던 ‘지성소의 회개’도 오히려 더욱 깊어집니다. ‘한 번 크게 울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게 되었다’보다 더 깊은 변화가 됩니다. ‘악을 사랑하던 사람이 악을 싫어하게 되고, 선을 억지로 행하던 사람이 선을 사랑하게 되는 것’, 이것이 거듭남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외적 행동 하나가 고쳐지는 것을 넘어 그 행동을 낳던 애정 자체가 바뀌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첫 번째 설교와 두 번째 설교가 하나로 연결됩니다. 첫 설교에서는 ‘하나님께 물어라’였습니다. 이번 설교에서는 ‘지성소까지 들어가 하나님을 만나라’입니다. 두 설교 모두 서사라 목사의 영성에서 매우 강한 한 특징을 보여 줍니다. 신앙을 하나님에 관한 지식으로 머물게 하지 않고, 실제 하나님과의 교통과 경험으로 가져가려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설교가 많은 사람에게 강하게 다가가는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신 교리적 대상이 아니라 지금 묻고, 듣고, 만나고, 경험할 수 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놀랍게도 하나님을 추상적 교리 안에 가두지 않습니다. 인간의 모든 순간에 주님에게서 생명이 흘러들어오고 있으며, 천국 전체가 주님의 신성으로 살아 있고, 인간은 그 인플럭스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런 점에서는 둘 사이에 매우 깊은 공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만남’을 특별한 체험에 집중시키지 않습니다. 주님과의 가장 깊은 결합은 무엇을 보고 듣는 데 있지 않고, 주님의 선과 진리가 인간의 의지와 이해성 안에 받아들여져 그의 삶이 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설교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으로 압축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서사라 목사가 말하는 ‘지성소까지 들어가라’는 권면의 방향은 귀하지만, 그 지성소를 ‘장시간 방언기도 끝에 도달하는 특별한 영적 체험의 장소’로 이해하기보다 ‘주님의 선과 진리가 인간의 가장 깊은 사랑에까지 들어가 그의 삶을 변화시키는 상태’로 이해할 때 그 의미가 더욱 깊어집니다.’
그러면 ‘지성소에서 드리는 회개’도 달라집니다. 그것은 가장 많이 울어 본 회개도 아니고, 가장 강렬한 임재를 체험한 회개도 아니며, 가장 오래 방언기도한 사람이 도달하는 회개도 아닙니다. 자신의 악을 주님 앞에서 죄로 인정하고, 주님의 힘을 의지하여 실제 삶에서 그것을 피하며,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 싸우고, 그렇게 오랜 거듭남을 통하여 마침내 이전에 사랑하던 악을 싫어하고, 이전에는 억지로 행하던 선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변화된 사랑 안에서 주님과 인간이 결합합니다.
그 의미에서 서사라 목사의 이 설교에는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무언가를 잘라내기보다 ‘한 단계 더 깊게 가져갈 수 있는 내용’이 상당히 많습니다. ‘회개는 실제로 죄에서 돌아서는 데까지 가야 한다’, ‘자기 힘으로는 그것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신앙은 외적인 종교행위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중심 메시지는 귀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다만 ‘뜰-성소-지성소’를 기도시간과 체험의 단계로 고정하고, 강렬한 회개 체험이 곧 악의 완전한 제거를 보증하는 것처럼 이해하는 부분에서는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상응과 거듭남의 질서가 중요한 보완을 제공합니다.
결국 성막의 가장 깊은 곳에 언약궤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아름다운 표상입니다.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해야 할 것은 ‘내가 무엇을 보았는가’, ‘얼마나 오래 기도했는가’, ‘얼마나 강한 체험을 했는가’가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입니다. 그 선과 진리가 인간의 가장 깊은 사랑 안에 자리 잡고, 거기에서부터 생각과 말과 행동을 다스리기 시작할 때, 비로소 성막 전체가 주님의 거처가 되어 갑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지성소에 들어간다’는 말의 가장 깊고도 실제적인 의미’일 것입니다.
창4와 창5를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창4에서는 가인에게서 에녹,이랏,므후야엘,므드사엘,라멕으로 여러 대가 이어지고,라멕에게서 다시 야발,유발,두발가인이 등장합니다.그런데 이 긴 계보가 모두 소개된 뒤 창4:25에 와서 다시‘아담이자기아내와동침하매그가아들을낳아그의이름을셋이라하였으니’라고 합니다.이것을 현대적인 연대기처럼 직선적인 시간순으로만 읽으면,마치 가인의 여러 대 후손이 모두 지나간 뒤에야 아담과 하와가 셋을 낳은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초반을 해석하는 방식에서는 이러한 계보의 가장 중요한 의미가 개인들의 출생 연대를 정확하게 재구성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가인과 에녹,이랏 등의 이름은 말씀의 속뜻에서 특정한 교리와 교회적 상태를 나타내며,셋과 에노스 및 창5의 여러 이름들 역시 이어지는 교회적 상태들을 나타냅니다.따라서 창4와 창5의 관계를 이해할 때에도 먼저‘누가정확히몇년먼저태어났는가?’보다‘말씀이어떤교회적계열과상태의연속을보여주고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창4는 특히 태고교회 안에서 갈라져 나온 교리들과 그 변화를 가인으로부터 이어지는 계열을 통하여 보여 줍니다.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구별되기 시작하고,그 구별이 분리로 굳어지면서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나아가며,그 뒤에도 그 교리적 상태가 여러 형태로 파생되는 과정이 이어집니다.반면 창4마지막의 셋과 에노스,그리고 창5에서 다시 이어지는 계보는 태고교회 안의 또 다른 교회적 계승과 상태의 연속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창4의가인계열이역사적으로완전히끝난다음창5의셋계열이시작되었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말씀은 한 계열의 영적 역사를 충분히 보여 준 뒤 서술의 초점을 다른 계열로 옮겨 그 계열의 상태들을 다시 처음부터 펼쳐 보일 수 있습니다.이런 의미에서 창4와 창5를 태고교회라는 하나의 큰 시대 안에서 전개되는 서로 다른 교회적 계열의 서술로 함께 읽는 것은 충분히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여기서‘함께’또는‘나란히’라는 말을 역사적 동시성에 관한 정밀한 연대표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스베덴보리의 속뜻 해석이 직접적으로 밝히는 것은 각 이름이 나타내는 교회적 상태와 그 상태들의 연속이지,가인 계열의 어느 인물이 셋 계열의 어느 인물과 정확히 같은 시기에 살았는지를 확정하는 연대기가 아닙니다.그러므로‘두계열이같은태고교회시대안에서전개되었다’는 것과‘각세대를일대일로맞추어동시대라고확정한다’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창4:25에서 셋이 등장하는 것도 훨씬 자연스러워집니다.이것을 반드시‘가인의여러대후손이모두지나간뒤비로소셋이태어났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 없이,말씀의 서술 초점이 가인으로 표상되는 교회적 계열에서 셋으로 표상되는 다른 교회적 계열로 옮겨가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그리고 창5에서는 다시 아담에서 시작하여 셋과 에노스,게난,마할랄렐,야렛,에녹,므두셀라,라멕,노아로 이어지는 계열을 하나의 연속된 교회적 역사로 보여 줍니다.
그렇다고 가인 계열을 단순히‘악한계열’,셋 계열을‘선한계열’이라고 나누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은 처음부터 아무런 진리도 없는 순수한 악을 뜻한 것이 아닙니다.처음에는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이 하나의 독립적인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하고,이후 점차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서 변질됩니다.반대로 셋으로 이어지는 계열 역시 아무런 쇠퇴 없이 처음의 가장 순수한 천적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며 노아까지 이어진다는 뜻은 아닙니다.태고교회 전체가 여러 상태를 거치며 결국 그 시대의 종말을 향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태고교회’라는 말 자체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태고교회는 단지 가장 처음의 순수한‘아담’상태 하나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그 최초의 천적 상태에서 시작하여 여러 후속 교회와 상태들을 거쳐 그 교회 시대의 종말에 이르기까지의 큰 흐름을 가리킵니다.그러므로 그 안에는 매우 높은 천적 상태도 있고,점차 쇠퇴하는 상태도 있으며,본래의 교회에서 갈라져 나온 교리적 상태도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창1-9의 속뜻을 당시 지상에 살던 모든 사람의 역사적 상태와 곧바로 동일시하지 않는 것입니다.스베덴보리가 이 장들에서 직접 추적하는 것은 무엇보다 교회와 그 교회의 연속적인 상태들입니다.물론 그 속뜻에 담긴 영적 원리는 오늘의 모든 사람에게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우리 안에서도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될 수 있고,한 교리나 지식을 전체보다 높일 수 있으며,주님께서는 그런 상태에서도 다시 생명의 길을 마련하십니다.그러나 이러한 보편적 적용과 당시 모든 인류가 똑같은 교회적 상태를 동시에 거쳤다는 주장은 서로 다른 것입니다.
결국AC.324에서 붙들어야 할 것은 두 가지 흐름입니다.인간 편에서는 본래 하나였던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고 교리들이 독립하면서 여러 교회적 상태가 생겨납니다.그러나 주님 편에서는 그 분열과 쇠퇴 가운데서도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시는 섭리가 계속됩니다.창4와 창5를 이러한 관점에서 함께 읽으면,가인과 아벨,셋과 에노스,그리고 창5의 긴 계보는 단순한 고대 가족사의 연속을 넘어‘교회가어떻게변화하고쇠퇴하며,그가운데서도주님께서어떻게교회의생명을이어가시는가’를 보여 주는 영적 역사로 열리게 됩니다.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Jehovah. 2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And she added to bear his brother Abel; and Abel was a shepherd of the flock, and Cain was a tiller of the ground. 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And at the end of days it came to pass that Cain brought of the fruit of the ground an offering to Jehovah.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And Abel, he also brought of the firstlings of his flock, and of the fat thereof. And 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ing: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And unto Cain and unto his offering he looked not, and Cain’s anger was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ell.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y art thou wroth, and why are thy faces fallen? 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If thou doest well, art thou not exalted? And 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 and 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And Cain talked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and slew him. 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And Jehovah said to Cain, Where is Abel thy brother? And he said, I know not, am I my brother’s keeper? 10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And he said, What hast thou done? The voice of thy brother’s bloods crieth to me from the ground. 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And now art thou cursed from the ground, which hath opened its mouth to receive thy brother’s bloods from thy hand. 12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When thou tillest the ground, it shall not henceforth yield unto thee its strength; a fugitive and a wanderer shalt thou be in the earth. 1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And Cain said unto Jehovah, 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 1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Behold, thou hast cast me out this day from the faces of the ground; and from thy faces shall I be hid, and I shall be a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everyone that findeth me shall slay me. 15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And Jehovah said unto him, Therefore whosoever slayeth Cain, vengeance shall be taken on him sevenfold. And Jehovah set a mark upon Cain, lest any finding him should smite him. 16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And Cain went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 and dwelt in the land of Nod, toward the east of Eden. 17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lled the name of the city after the name of his son, Enoch. 18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19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20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And Adah bare Jabal; he was the father of the dweller in tents, and of cattle. 21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And his brother’s name was Jubal; he was the father of everyone that playeth upon the harp and organ. 22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And Zillah, she also bare Tubal-Cain, an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 and the sister of Tubal-Cain was Naamah.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And Lamech said unto his wives, Adah and Zillah, Hear my voice, ye wives of Lamech, and with your ears perceive my speech, for I have slain a man to my wounding, and a little one to my hurt. 24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If Cain shall be avenged sevenfold, truly Lamech seventy and sevenfold. 25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And the man knew his wife again, and she bare a son,and called his name Seth; for God hath appointed me another seed instead of Abel; for Cain slew him. 26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And to Seth, to him also there was born a son; and he called his name Enosh: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ehovah.
개요
AC.324
여기서는교회에서분리되어나온교리들,곧이단들(heresies)을다루며,그후에‘에노스’(Enosh)라하는새로운교회가일으켜세워진것에관하여다룹니다. Doctrines separated from the church, or heresies, are here treated of; and a new church that was afterwards raised up, called“Enosh.”
해설
AC.324는 한 문장으로 된 짧은 글이지만 창4전체의 속뜻을 여는 중요한 개요입니다. 겉으로 보면 창4는 가인과 아벨의 출생과 제물, 아벨의 죽음, 가인의 추방과 후손들, 라멕과 그의 자녀들, 그리고 마지막의 셋과 에노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장을 단순히 최초 가족에게 일어난 사건들의 연대기로만 읽지 않습니다. 속뜻에서는 태고교회 안에서 본래 하나였던 사랑과 신앙이 점차 구별되고 마침내 분리되면서 여러 교리적, 교회적 상태가 생겨나는 과정과, 그 쇠퇴 가운데서도 새로운 교회가 일으켜 세워지는 과정을 다룹니다.
먼저 ‘교회에서분리되어나온교리들’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태고교회의 가장 순수한 상태에서 사랑과 신앙은 서로 독립된 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생명 안에서 무엇이 선하고 참된지를 퍼셉션으로 지각하였으며, 신앙은 그 사랑에서 나오는 진리와 분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쇠퇴하면서 본래 함께 있던 것들이 점차 갈라지기 시작합니다. 창4에서 가인은 이러한 과정 가운데 나타나는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표상하게 됩니다.
여기서 ‘heresies’를 ‘이단들’이라고 번역할 때에는 오늘날 한국 교계에서 흔히 사용하는 ‘이단’이라는 말과 완전히 같은 의미로만 이해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AC.324의 관심은 어느 현대 교단이나 집단을 정죄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본래 교회의 하나 된 생명에서 어떤 교리가 떨어져 나와 독립적인 것이 되는 현상입니다. 이후 설명에서 보게 되듯 가인의 문제도 신앙 자체가 악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고, 마침내 자신을 체어리티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세우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따라서 ‘분리’와 ‘구별’을 잘 구별해야 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 구별될 수 있으며 실제로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집니다. 그러나 구별된다고 해서 서로 떨어져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신앙은 체어리티와 함께 있을 때 살아 있는 신앙입니다. 창4는 이 둘의 구별이 어떻게 분리로 변하고, 그 분리가 결국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나아가는지를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통하여 보여 줍니다.
그리고 AC.324의 후반부는 이 장 전체를 읽는 데 또 하나의 중요한 방향을 제시합니다. 교회에서 여러 교리들이 분리되어 나오고 이전의 상태가 쇠퇴해 가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습니다. 마지막에는 ‘에노스’라 하는 새로운 교회가 일으켜 세워집니다. 창4의 속뜻에는 인간 편에서 일어나는 분리와 쇠퇴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서도 교회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도록 새로운 길을 마련하시는 주님의 섭리가 함께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창4:26의 ‘그때에사람들이비로소여호와의이름을불렀더라’는 말씀은 바로 이 에노스와 연결됩니다. 태고교회의 최초 상태와 똑같은 형태로 되돌아간다는 뜻이 아니라, 달라진 인간의 상태 가운데 새로운 교회적 형태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노스의 등장은 단순히 족보에 한 사람이 더 추가되었다는 의미를 넘어, 한 교회적 상태가 쇠퇴하는 가운데 또 다른 교회적 상태가 시작되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 점에서 AC.324는 창3의 마지막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창3마지막에서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나가게 되었지만 생명나무의 길 자체가 없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거룩한 것을 모독하지 않도록 그 길을 보호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창4에서는 타락 이후의 인간과 교회 안에서 사랑과 신앙의 관계가 어떻게 변해 가며, 그 가운데서도 주님과 인간의 연결이 어떻게 보존되어 가는지를 보게 됩니다.
따라서 창4를 읽을 때 가인 계열을 단순히 ‘나쁜사람들의족보’, 셋과 에노스를 ‘좋은사람들의족보’로 읽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 이름들은 말씀의 속뜻에서 교리와 교회의 여러 상태를 표상합니다. 가인에서 시작된 어떤 교리적 상태가 어떻게 발전하고 변질되는지, 그리고 그 과정의 끝에서 왜 새로운 교회인 에노스가 등장하는지를 따라가야 합니다.
AC.324는 결국 창4전체에 두 개의 큰 흐름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하나는 인간이 사랑과 신앙을 분리하고, 부분적인 것을 전체보다 앞세우면서 교회를 분열시키는 흐름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러한 인간의 쇠퇴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교회의 생명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도록 새로운 교회를 일으켜 세우시는 흐름입니다. 앞으로 AC.325-337은 창4의 각 절을 먼저 개괄하면서 바로 이 두 흐름을 차례로 펼쳐 보이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 설교는 열왕기하 1장의 아하시야 왕 이야기와 마태복음 7장 12절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의 중요한 태도를 하나의 문장으로 압축합니다. 곧 ‘하나님께묻고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아하시야가 병들었을 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묻지 않고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사람을 보낸 사건을 출발점으로 삼아, 설교자는 ‘하나님께묻는다는것은하나님을내삶의주인으로인정하는행위이며, 묻지않는것은사실상자기자신을주인으로삼는태도’라고 전개합니다. 설교 후반으로 갈수록 이 ‘묻기’는 단순히 성경을 읽어 하나님의 뜻을 찾는 차원을 넘어 꿈, 환상, 직접적인 말씀, 설교, 다른 사람의 말, 그리고 마음속으로 즉시 들어오는 응답까지 포함하는 매우 구체적인 영적 의사소통으로 발전합니다. 바로 이 지점이 이번 설교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가장 주의 깊게 살펴볼 대목입니다.
먼저 이 설교의 중심 명제 자체에는 스베덴보리의 신학과 상당히 깊게 만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지혜만으로 살아서는 안 되며, 자신의 삶이 주님에게서 비롯되고 주님의 섭리 아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가장 깊은 영적 오류 가운데 하나는 proprium, 곧 자기 자신에게서 생명과 지혜가 나오는 것처럼 여기는 데 있습니다. 인간은 마치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의지하며 스스로 행동하는 것처럼 살아야 하지만, 동시에 모든 참된 선과 진리는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서사라 목사가 반복해서 말하는 ‘하나님께묻는다는것은그분이나의주인이심을인정하는것’이라는 가르침에는 상당히 중요한 영적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아하시야 이야기를 선택한 것도 이 점에서는 적절합니다. 문제의 핵심은 단순히 아하시야가 ‘질문을잘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에 관한 답을 어디에서 구했느냐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문자적 이야기에서는 여호와를 떠나 바알세붑에게 묻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이를 영적으로 넓혀 읽으면 인간이 삶의 근원과 방향을 주님에게서 찾지 않고 자기 지성, 세속적 판단, 욕망, 미신, 또는 다른 어떤 피조된 것에서 찾는 상태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에하나님이없어서네가바알세붑에게물으러가느냐’는 질문은 오늘의 신앙인에게도 상당히 날카로운 질문이 됩니다. ‘나는실제로무엇을최종권위로삼으며살아가는가?’라는 질문입니다.
또한 설교자가 ‘하나님의생각과내생각이다를수있기때문에물어야한다’고 강조하는 부분 역시 중요한 통찰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현재 애정과 욕망에 따라 사물을 보기 쉽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의 사고는 그 사람의 사랑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옵니다.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무엇을 참이라고 보고, 무엇을 중요하다고 판단하는지가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자기 생각을 절대화하지 않고 ‘혹시내가원하는것과주님이원하시는것이다르지않은가?’ 하고 자신을 살피는 태도는 거듭남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설교의 ‘묻는사람’은 단순히 신비한 응답을 많이 받는 사람이 아니라, 더 깊게 보면 자기 뜻을 절대시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설교에는 이보다 더 중요한 대목도 있습니다. 서사라 목사는 성경에 이미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은 다시 물을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성경이 용서를 명한다면 ‘하나님, 제가이사람을용서할까요?’라고 다시 물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 ‘어디로이사할것인가’, ‘어느대학에갈것인가’, ‘누구와결혼할것인가’처럼 성경에 구체적인 답이 적혀 있지 않은 문제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묻고 응답을 기다려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구분은 매우 중요합니다. 적어도 여기에서는 개인적 계시나 음성이 성경 위에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먼저 말씀의 분명한 가르침을 존중하려는 질서가 유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다음부터 ‘스베덴보리의렌즈’가 좀 더 세밀하게 들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설교자는 하나님께 묻고 기다리면 ‘꿈’, ‘환상’, ‘직접적인말씀’, ‘설교’, ‘다른사람의입’, 그리고 훈련이 깊어질 경우 질문하자마자 마음속으로 오는 응답을 통해 하나님께서 답하신다고 설명합니다. 더 나아가 자신은 예전에는 응답을 얻기 위해 금식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훈련이많이되어’ 물으면 거의 즉시 응답이 온다는 취지로 말합니다. 그리고 청중에게도 자주 묻는 훈련을 하면 하나님과의 ‘교통’이 깊어지고 응답을 더 빨리 알 수 있다고 권합니다.
여기서부터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구별을 제시할 것입니다. 영계로부터 인간에게 생각과 애정이 흘러들어온다는 사실 자체는 스베덴보리에게 전혀 낯선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인간의 모든 사고와 애정이 인플럭스를 통해 들어온다고 끊임없이 설명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생각을 ‘생산한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천국과 지옥, 그리고 궁극적으로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의 흐름 가운데 살아갑니다. 이 점만 놓고 보면 ‘마음안으로어떤생각이들어온다’는 서사라 목사의 경험 자체를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곧바로 부정할 이유는 없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어떤생각이내안에분명하게들어왔다’는 사실과 ‘그러므로이것은하나님이직접말씀하신것이다’라는 판단은 전혀 같은 명제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영계 이해에서는 오히려 이 둘을 매우 조심스럽게 구별해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선한 영들과 천사들을 통한 인플럭스도 있고, 악한 영들을 통한 인플럭스도 있으며, 자신의 기억과 애정에서 솟아나는 것처럼 경험되는 수많은 사고도 있습니다. 더욱이 영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사람의 생각 속으로 흘려보낼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이 그 출처를 모르면 그것을 완전히 ‘내생각’이라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강렬하거나 특별하게 느껴진다고 해서 그것을 곧바로 ‘주님이직접주신말씀’이라고 단정하는 것도 안전하지 않습니다.
이 지점에서 서사라 목사의 ‘자꾸묻다보면하나님의응답방식을알게되고, 훈련되면거의즉각적으로응답을받을수있다’는 표현은 장점과 위험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장점은 분명합니다. 하루의 삶을 주님과 무관하게 자기 마음대로 살지 않고, 작은 일에서도 주님을 생각하며 자기 뜻을 내려놓으려는 훈련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신앙을 주일예배나 교리적 고백에 가두지 않고 일상 전체로 가져오게 합니다. ‘갈까요, 말까요, 이것을할까요, 저것을할까요’ 하는 순간에도 주님을 기억하라는 권면에는 아름다운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질문→내면의응답→하나님의뜻확인’이라는 거의 자동적인 체계로 굳어지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사람은 자기 욕망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오인할 수 있고, 불안이나 두려움에서 생긴 생각을 계시로 받아들일 수도 있으며, 반복적으로 어떤 응답을 기대하다 보면 결국 자신이 듣고 싶은 것을 ‘응답’이라고 해석할 위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응답을얼마나빨리듣느냐’가 아니라, 그 사람의 의지와 이해성이 진리와 선에 의해 얼마나 새로워지고 있느냐입니다. 천국은 음성을 잘 듣는 사람들의 나라가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를 사랑하여 그것이 자기 생명이 된 사람들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묻는다’는 말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더 깊게 바꾸어 표현한다면, ‘주님의뜻을알려달라고계속신비한신호를요구한다’기보다 ‘말씀앞에서자기욕망과판단을내려놓고, 이성과자유를사용하여무엇이선하고참된지를살피며, 그렇게깨달은진리를행할힘을주님께구한다’에 가까울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더 깊게 만듭니다. 주님은 인간을 꼭두각시처럼 매 순간 ‘왼쪽으로가라, 오른쪽으로가라’ 하며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 안에 선과 진리를 심으시고 그 사람이 자유롭게 그것을 사랑하고 선택하여 마침내 자기 생명처럼 살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 차이는 섭리를 이해하는 데서도 중요합니다. 설교를 그대로 밀어붙이면 자칫 ‘하나님께물었으면실패하지않았을텐데, 묻지않아서실패했다’는 구조로 들릴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설교자는 ‘우리인생에서실패하는이유는묻지않았기때문’이라는 취지까지 강하게 말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섭리는 이렇게 단선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충실히 사는 사람도 외적으로는 실패할 수 있고, 병들 수 있고,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으며, 예상하지 못했던 길로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섭리는 인간에게 항상 외적 성공의 정답을 알려 주는 체계가 아니라, 심지어 인간의 실수와 고난까지도 허용하시면서 궁극적으로 그 사람을 악에서 돌이켜 선으로 인도하시는 무한히 깊은 질서입니다.
그러므로 ‘묻는사람은실패하지않는다’보다 ‘묻는사람은실패속에서도주님에게로다시돌아간다’고 말하는 편이 더 깊습니다. 다윗 역시 늘 완벽한 선택을 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실패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넘어지고 죄를 범한 뒤에도 다시 주님 앞에 자신을 드러내고 돌이켰다는 데 있습니다. 거듭남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사람은 모든 선택에서 초자연적 정답을 미리 전달받는 사람이 아니라, 잘못을 깨달을 때 그것을 자기 합리화로 덮지 않고 주님의 빛 가운데 인정하며 방향을 돌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또 하나 눈여겨볼 것은 설교 후반의 ‘영에속한사람은함부로말하지않고, 생각나는대로행동하지않으며, 먼저묻는다’는 가르침입니다. 자동자막이 심하게 흐트러져 있지만 전체 문맥에서는 이 뜻이 비교적 분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좋은 영적 훈련이 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 표현하면 겉 사람에게 즉각 솟아나는 충동을 곧바로 행동으로 옮기지 않고, 속 사람의 더 높은 원리 아래에서 그것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분노가 올라온다고 곧 말하지 않고, 욕망이 생긴다고 곧 행동하지 않으며, 자기 판단이 옳아 보인다고 즉시 결정하지 않는 것, 이것은 실제 거듭남에서 매우 중요한 과정입니다.
다만 그 ‘멈춤’의 다음 단계가 반드시 ‘어떤내적음성이올때까지기다린다’일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진리, 양심, 이성적 숙고, 이웃에 대한 체어리티, 책임, 현실적 조건을 함께 살피는 것 역시 주님의 인도하심 안에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것보다 낮은 방식이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은 인간의 이성과 자유를 보존하면서 역사하십니다. 사람이 모든 결정을 직접적인 음성에 의존하게 되면 오히려 자신에게 주어진 이성과 자유를 충분히 사용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여기서 서사라 목사의 설교와 스베덴보리 사이에 상당히 흥미로운 대비가 생깁니다. 서사라 목사의 언어에서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매우 ‘대화적’입니다. 사람이 묻고 하나님께서 답하시며, 그 응답을 알아듣는 능력이 훈련을 통해 발달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주님과 인간 사이에는 끊임없는 교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교통은 대부분 인간이 의식하지 못하는 훨씬 깊은 차원에서 이루어집니다. 주님은 인간의 가장 깊은 곳으로 선을 흘려보내시고, 천국을 통해 진리를 비추시며, 동시에 인간이 그것을 마치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원하는 것처럼 느끼도록 그의 자유를 보존하십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이말씀하셨다’는 강렬한 체험보다 오히려 어느새 선을 사랑하게 되고, 진리를 기뻐하며, 악을 싫어하게 된 변화가 주님의 임재를 더 깊이 증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서사라 목사의 영적 체험 전체를 앞으로 살펴볼 때 매우 중요한 열쇠가 될 것 같습니다. ‘무엇을보았는가’, ‘무슨음성을들었는가’, ‘누구를만났는가’만으로 참과 거짓을 결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언제나 한 걸음 더 들어가 묻게 됩니다. ‘그체험이사람을어디로데려가는가? 자기자신을특별한사람으로여기게하는가, 아니면더욱겸손하게주님과이웃을사랑하게하는가? 외적현상에집착하게하는가, 아니면악을버리고선을행하게하는가? 개인에게주어진말을절대화하게하는가, 아니면말씀의보편적진리안으로더깊이들어가게하는가?’ 결국 영적 체험의 가장 중요한 열매는 그 체험의 화려함이 아니라 사랑과 삶의 변화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설교에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중심이 분명히 있습니다. ‘내인생은내것이므로내가알아서산다’는 태도에서 벗어나, ‘주님이나의생명의근원이시며나는그분의뜻을구하며살아야한다’고 가르치는 점입니다. 또한 성경에 이미 명백히 주어진 명령을 개인적 응답으로 뒤집어서는 안 된다는 구분도 중요합니다.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지 말고, 잠시 멈추어 주님의 뜻을 구하라는 권면 역시 거듭남의 실제와 접점이 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께묻는다’를 ‘내면에서특정한문장형태의응답을받아내는것’과 지나치게 동일시하지 않는 보완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양심을 통해, 이성을 통해, 이웃을 통해, 현실의 질서를 통해, 때로는 문이 닫히고 열리는 섭리의 과정 전체를 통해 인간을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깊은 인도는 ‘무엇을선택해야합니까?’라는 개별 질문에 대한 즉답보다, 그 사람이 선한 것을 자발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사람으로 조금씩 변화되는 데 있을 수 있습니다.
결국 이 설교를 ‘스베덴보리의렌즈’로 바라볼 때 버려야 할 핵심 메시지는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중심은 상당히 소중합니다. ‘주님께묻고살아라. 자기생각을절대화하지말라. 주님을네삶의주인으로인정하라.’ 다만 여기에 한 문장을 덧붙이면 훨씬 온전해집니다. ‘그리고네안에떠오르는모든생각을곧바로주님의음성이라고여기지는말라. 말씀의진리와선, 이웃사랑, 이성과자유안에서그것을살펴라.’
그렇게 보면 ‘하나님께묻는삶’의 가장 성숙한 모습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끊임없이 ‘이것할까요, 저것할까요?’라고 답을 받아 움직이는 삶에만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랜 거듭남을 거쳐 주님의 뜻이 점차 자기 마음의 사랑이 되고, 그래서 특별한 음성을 듣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진실을 선택하고, 이웃을 배려하며,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게 되는 상태에 더 가까울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아이가 부모에게 매 순간 ‘이거해도돼요?’라고 묻지만, 성장할수록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여 묻지 않아도 그 뜻에 합당하게 행동할 수 있게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신앙의 성숙도 어쩌면 그와 같습니다. 주님께 묻는 일을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마침내 주님의 뜻이 자기 생명 안에 새겨져 살아 있는 ‘대답’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저는 이번 서사라 목사의 첫 설교가 앞으로 이어질 천국·지옥 체험 해설을 위한 좋은 출발점이라고 봅니다. 이 설교만 보아도 서사라 목사의 신앙세계에서 ‘하나님이지금도구체적으로말씀하시며, 인간은그음성을실제로듣고분별할수있다’는 전제가 매우 강하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후 그의 천국 방문, 주님과의 대화, 천국 인물들과의 만남 등을 살펴볼 때도 결국 핵심 질문은 동일할 것입니다. ‘그러한영적경험이가능한가?’라는 질문에서 멈추지 않고, ‘영계로부터오는경험은어떤질서안에서이해해야하며, 그것을주님의직접적인말씀이라고판단하는기준은무엇인가?’를 함께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접근할 때 서사라 목사의 증언을 성급히 배척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체험이라는 이유만으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균형 잡힌 ‘스베덴보리의렌즈’가 가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