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중풍에 걸렸어도 침상에서 일어날 수 있으려면

 

 

17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하더라 18한 중풍 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19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20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21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여 이르되 이 신성 모독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22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 마음에 무슨 생각을 하느냐 23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24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25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26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니라 (눅5:17-26)

 

 

주님에 의해 치유 받은 병자들의 신앙은 역사적이라 불리는 신앙이었는데 그것은 기적을 바라는 신앙이었다. 이 신앙은 주님이 당신 자신으로부터 기적을 행하실 수 있으며 그러므로 전능하다는 신앙이었다. 그런 까닭에 주님은 구약의 선지자들과는 달리 사람들이 주님을 예배하는 것을 허락하셨다. 그런데 이러한 역사적 신앙(this historical faith)은 구원의 신앙(a saving faith)이 생기기 전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말씀으로부터 진리를 배우고 그것에 따라 살아갈 때 역사적 신앙은 비로소 구원의 신앙이 되기 때문이다. (AE.815:4, 이순철 역)

 

※ AE(Apocalypse Explained, 계시록 해설) 위 815번 글 4번 항에 대한 Ager 영역 및 Whitehead 개정본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No other faith than that which is called historical, which at that time was a miraculous faith, was meant by this faith whereby the sick were healed; consequently by this faith many wrought miracles at that time. This faith was, that the Lord was Almighty, because He was able to do miracles of Himself; for this reason He also allowed Himself to be worshiped, which was not the case with the prophets of the Old Testament, who were not worshiped. But there must always be this historical faith before it becomes a saving faith; for a historical faith becomes a saving faith with man by his learning truths from the Word, and living according to them. (AE.815:4, Ager 역)

 

이는 계시록 13장 11절,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어린 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을 하더라’에 관한 주석 중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And I saw another beast coming up out of the earth)에 대한 내용입니다.

 

 

오늘 말씀은 주님께서 중풍 병자를 고치셨다는 내용입니다. 주님이 세상에 계셨을 때 주로 하셨던 일은 말씀을 가르치시고, 병자들을 고치시는 일이었습니다. 주님은 특히 병자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시고, 유출 병 걸린 여인을 고치셨으며, 귀신 들린 자를 치유하셨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병자들과 죄인들과 함께하셨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주님의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마9:11) 하기도 했고, 그러면 주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마9:12) 하시면서 당신의 일을 계속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어쩌면 가장 병이 깊은 사람들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이 병자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 수많은 병자의 병을 치유하신 것은 역설적으로 보면, 신앙인들이 그토록 다양한 질병을 앓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중풍 병자 역시 그런 신앙인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치유되기 어려운 영적 질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의지해서 병을 고치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다합니다. 자기 힘으로 고치려고 하는 대신 주님께 의지해서 고치려고 하는 것입니다. 중풍 병자는 어떻게 병을 고쳤을까요? 말씀을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17절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17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주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 마침 그곳에는 갈릴리에서 온 자들도 있었고요,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자들도 있었습니다. 말씀에서 ‘갈릴리’는 교회 밖의 이방인들을 뜻하고, ‘유대’는 타락한 교회를 뜻합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타락한 교회 안의 위선자를 뜻합니다. 여기 바리새인들이 위선자를 뜻하는 이유가 뭘까요? 어느 날 주님께서 그들에게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마23:25) 책망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뜻으로 미루어 볼 때, 갈릴리와 유대, 예루살렘에서 많은 사람이 주님께로 나왔다는 말씀은, 참 진리가 나타났을 때, 교회 안과 밖에서 많은 사람이 이 진리를 주시하고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왜 나사렛의 목수 출신에 불과한 예수를 그렇게 주목했을까요? 다시 말하면, 기독교회 안에서, 또는 밖에서 왜 많은 사람이 새 진리로 나타나신 주님을 주목하고 있었을까요? 본문에서는 그 이유를,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로 설명합니다. 주님으로 표상되는 새 진리는 능력의 진리입니다. 그냥 진리가 아니고요, 그 속에 주님의 선이 들어 있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원하기만 한다면 누구나 이 진리를 통해서 거듭날 수 있습니다. 물론 말씀의 글자의 뜻만 가지고도 어느 정도는 거듭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주 힘이 듭니다. 왜냐하면 말씀의 글자의 뜻만 가지고는 주님의 온전한 생명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말씀의 글자의 뜻을 ‘구름’으로, 그리고 말씀의 속뜻은 구름 속에 빛나는 ‘영광’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마24:30)

 

그만큼 글자의 뜻은 어둡고 둔탁한 진리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가 진리로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신지를 알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말씀 가운데 능력이 있음을 놀라워했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새 교회의 진리가 마지막 때에 주님이 밝혀주신 참 진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막연하게 이 진리에 특별한 능력이 있음을 느끼고 주시하고는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 사람들이 중풍 병자 한 사람을 주님께로 메고 왔습니다. 18, 19절에서는 그것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18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19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중풍 병자가 주님께 가까이 가려 했으나 무리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고 합니다. 중풍 병자는 수족이 마비되어 걷지도 못하고, 손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뇌혈관이 막히거나 터져 뇌가 손상되어 나타나는 증상으로 뇌졸중이라고도 하는, 우리나라에서는 암 다음으로 사망률이 높은 질환이지요. 영적 의미로 ‘걷지 못한다’는 것은 진리를 따라 제대로 살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손을 쓰지 못하는’ 것은 진리를 행하려 해도 행할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손은 능력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중풍 병자’는 진리를 따라 살고자 하나 능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악을 멀리하려 해도 잘되지 않고요, 선을 행하려 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 사람이 중풍 병자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사람들이 왜 말씀에 따라 살지 못하고, 또 좌절할까요? 그 이유는, 주님과 연결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연결되지 않으면 그에게 주님으로부터 선이 흘러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행하려고 해도 잘되지 않고, 시험에서 자주 넘어집니다. 지금 중풍 병자의 상태가 바로 그런 상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중풍 병자와 주님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바로 선이 없는 진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지식 형태의 진리만 있고, 정작 그걸 실천할 수 있는 선은 없는 진리, 바로 그것이 주님과 중풍 병자를 가로막고 있는 벽인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말씀에서는 병자와 주님 사이를 많은 무리가 가로막고 있는 걸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 무리는 선이 없는 진리를 나타냅니다. 중풍 병자는 주님께 의지해서 병을 고치려 했는데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고민이 많았겠습니까? 그렇지만 고민 끝에 깨닫는 것이 있었는데요, 그건 바로 지붕을 뚫고 주님께 가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지붕’은 선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지붕을 뚫는 것은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할 수 있는 작은 선부터 하나씩 실천하는 것입니다. 중풍 병자의 상태는 영적인 어떤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신앙생활이 멈춰 선 상태, 정체된 상태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런 사람에게 지금 지붕을 뚫으라고 하세요. 작은 선이라도 행하라 하십니다. 그 작은 선은 어쩌면 그가 당면하고 있는 영적 질병과는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위장병이 있는 사람이 손을 깨끗이 씻는 것 같은 일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런 식으로라도 조그마한 선한 습관들을 하나씩 몸에 붙이라 하십니다. 오랜 습관을 버리고, 새로운 습관을 몸에 붙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붕을 뚫는 만큼이나 힘든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손 씻는 일은 병자일지라도 할 수 있는 일이기에 주님은 그 일을 권고하십니다. 마침내 병자가 지붕을 뚫고 주님께로 내려왔습니다.

 

※ 위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달아 내리니’라는 표현은 성서시대 이스라엘 가옥 구조를 좀 아셔야 이해하실 수 있는데요, 다음은 류모세 저, ‘열린다 성경, 생활풍습 이야기 하’ 12장, ‘중풍 병자의 친구들은 어떻게 지붕을 뚫었을까?, 지붕 위의 삶’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성서시대 이스라엘 평민들은 사면의 벽은 돌로 쌓고, 지붕은 진흙으로 발랐다. 조선시대 사대부 양반가는 기와로 지붕을 얹었지만, 평민들은 초가로 지붕을 얹은 것과 같다. 성서시대 이스라엘의 부자들은 기와지붕을 얹은 반면, 평민들은 진흙 지붕을 얹었던 것이다. 지붕은 먼저 수평으로 뽕나무(돌무화과나무) 가지로 만든 대들보를 깔고, 수직으로 갈대 또는 종려나무 가지를 깔았다. 그리고 그 위에 진흙을 발라 최종 처리를 했다... 그래서 그들은 ‘사면이 단단한 돌로 싸인 벽과 달리 진흙으로 살짝 덮은 지붕! 그 지붕에 올라가 손으로 흙을 긁어내서 그 틈새로 중풍 병자 친구를 달아 내리면 되겠다!’ 했던 것이다. //

 

20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주님께서 병자를 비롯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십니다. 중풍 병자는 그렇게 주님에 의해 치유를 받았습니다. 참으로 고대하고 고대하던 일이었습니다.

 

※ 천국 가는 것이 누가 대신 표를 끊어줘서 가는 게 아니라 결국 본인의 어떠함, 곧 본인의 속 사람의 상태로 가는 것처럼, 병 낫는 것, 곧 주님의 능력이 병자에게 흘러 들어가는 것 역시 병자 본인의 영적 상태의 문제, 그러니까 병자의 내면이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인지로 결정되는 것 같습니다. 저희 형님 중 한 분이 바로 이 중풍으로 삶을 마치셔야 했는데, 그때 보니 중풍이 깊으면 그 어떤 의사 표시도 하실 수 없더군요. 그럼에도 오늘 본문의 병자는 고침을 받은 걸 볼 때, 그러니까 그를 향해 주님이 말씀하시고, 그걸 또 그가 알아듣는 걸 볼 때, 비록 그 육은 저 정도로 중증이었을지라도 그 영, 곧 그의 속 사람은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21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여 이르되 이 신성 모독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그런데 정작 그 광경을 지켜보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 신성 모독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생각하며, 속으로 말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왜 그렇게 말했을까요? 그들은 자연적인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영적인 것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적 질병의 치유가 곧 죄 사함을 뜻한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만일 그들이 사랑의 사람, 가슴의 신앙인들이었다면 저런 판단하는 말 대신 오히려 하나님이 사람 살리시는 일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22절로 24절입니다.

 

22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 마음에 무슨 생각을 하느냐 23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24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 여기 22절, 23절은 이 설교 원본에도, 그리고 성 문서에도 특별한 언급이 없습니다. 나중에 혹시 주님으로 말미암은 어떤 퍼셉션이 오게 되면 그때 나누겠습니다.

 

주님께서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인자’는 진리로 세상에 오신 주님을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인자는 바로 참된 진리입니다. 주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믿지 않은 것처럼, 감각적인 사람들은 언제나 참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신 것은 그런 자연적이고 감각적인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 다음은 주님의 두 호칭, ‘인자’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글입니다.

 

주님은 (어머니로부터 받은) 인성(人性, this human)을 벗으셨을 때, 신적 인성(the Divine human)을 입으셨다. 그것 때문에 주님은 신약 성경에 여러 번 언급된 바와 같이 자신을 ‘인자’(the son of man)라 부르시고, 또 ‘하나님의 아들’(the son of God)이라 부르셨다. ‘인자’로서 주님은 진리 자체를 뜻하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주님은 선 자체를 뜻하는데, 그것은 주님의 인간 본질(human essence)이 신성하게 되었을 때, 그 본질에 속한 것이었다. ‘인자’의 상태는 주님의 겸비(謙卑)와 관련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의 상태는 주님의 영화와 관련이 있다. (AC.2159:2, 이순철 역)

 

그래서 주님은 시험받으실 때 ‘인자’로 받으셨습니다. 지옥은 오직 진리만 건드릴 수 있을 뿐, 선은 건드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

 

주님은 그런 감각적인 사람들, 즉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야만 진실, 진리를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방법으로 진리를 증거하실까요? 주님은 마태복음 5장 14절 이하의 말씀을 통해 그것을 알려주십니다.

 

14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5:14-16)

 

참 좋은 말씀 아닙니까?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거듭나는 사람들의 삶을 통해 이 진리를 증거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병자들을 치료하시는 것은 그의 구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중풍 병자에게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셨습니다. 그러자 25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25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병자가 일어나서 자기 침상을 들고 집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는 악과 거짓 안에 있던 사람이 영적으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침상’은 신앙인들 각자가 가지고 있는 교회의 교리를 나타냅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네 침상’이라고 하셨는데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사람마다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교리가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계시록의 속뜻’ 137번 글을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의 침상, 즉 교리는 그의 학식과 지성에 따라 다르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고상한 교리를, 어리석은 자는 천박한 교리를, 거짓말쟁이는 불결한 교리를 가진다. (AR.137, 이순철 역)

 

※ AR(Apocalypse Revealed, 계시록 속뜻) 137번 글에 대한 Whitehead 영역본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for there everyone’s bed is according to the quality of his science and intelligence, magnificent for the wise, mean for the unwise, and filthy for falsifiers. (AR.137, Whitehead 역)

 

이는 계시록 2장 22절,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에 관한 주석 중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Behold I will cast her into a bed, and them that commit adultery with her into great affliction)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

 

그러므로 병자가 자기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주님에 의해 회복된 교리를 개인의 의지 안에 심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은 사람의 의지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병자가 그렇게 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주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했습니다. 주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결혼애’ 9번 글에서는 그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은 사랑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즉 자신의 직업과 관련된 일을 성실하고 정직하게, 그리고 근면하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결과물이며, 자신이 속한 사회와 연대하는 것이고, 그 자체로 선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CL.9, 이순철 역)

 

※ CL(Conjugial Love, 結婚愛) 9번 글에 대한 Warren 영역본 및 Tafel 개정본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You do not know what is meant by the glorification of God. It means to bring forth the fruits of love; that is, faithfully, sincerely, and diligently to do the work of one’s employment—for this is of love to God and of love to the neighbor. And this is the bond of society and its good. (CL.9, Warren 역) //

 

이 말씀은 제가 새 교회 가르침에서 가장 좋아하는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남에게 뭔가를 베풀고 봉사하고 그런 것만이 아니라는 것이죠. 물론 그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자기 직업과 관련된 일을 성실하고 정직하게 하지 않으면서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은 선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중풍 병자가 그렇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26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26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니라

 

중풍 병자가 일어나는 모습을 보고, 거기에 모였던 바리새인들과 갈릴리에서 온 사람들도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두려워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병자를 고치시는 이유입니다. 조금 전 마태복음 5장 16절 말씀,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가 생각납니다. 네, 이렇게 중풍 병자가 치유되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뿐 아니라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놀라운 일은 어떤 것입니까. 놀라운 일은 한글 성경의 번역이고요, 영어 성경에는 ‘strange thing’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strange thing, 그러니까 자기 땅에서는 볼 수 없는 이상한 일, 생소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자기 종교나 교파에서는 볼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났다는 말이지요. 그 기적이란 주님의 능력에 의해 병자가 일어나는 것이며, 다르게 표현하면, 진리의 능력으로 죄 가운데 있던 사람이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가 놀랐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중풍 병자는 교리의 지식만 붙들고 있을 뿐 거듭나는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좌절 중에 주님께 가서 병을 고치려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주님께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주신 깨달음은 지붕을 뚫고 내려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지붕은 영적 의미로 선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지붕을 뚫는 것은 사소하지만 선한 습관을 몸에 붙이는 일입니다. 주님은 모든 선한 일을 통해서 우리와 결합하시기 때문에 병자에게 그렇게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중풍 병자는 선을 행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지금 부당한 요구를 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중풍 병자라 해서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일어나 걸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몸을 뒤척이거나 표정을 지을 수는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술을 끊지 못해 고생하는 사람이라도 자기 일을 정직하게 할 수는 있습니다. 또 만나는 사람에게 환한 웃음을 선사할 수는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술을 끊는 것과는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어 보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지속적으로 그런 일을 행하라고 하세요. 그러면 주님과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런 식으로 주님을 만날 때 극복할 수 없었던 모든 영적인 문제가 주님에 의해 해결됩니다. 물론 하루 이틀에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몇 년이 걸릴 수도 있고요, 세상을 떠날 때에야 비로소 해결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인내심을 갖고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병이 치유되고 새사람이 될 때, 이를 통해 믿지 않던 주변 많은 사람에게 새 교회 진리가 전해질 것입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새 교회의 진리, 곧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계시하신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요15:8)

 

아멘

 

원본

2017-11-19(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29(D4)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028. 2023-03-29(D4)-매일예배(2445, 눅5,17-26), '중풍에 걸렸어도 침상에서 일어날 수 있으려면'.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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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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