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97.심화
2. ‘민21:4-9’
4백성이 호르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5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6여호와께서 불 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7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8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9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민21:4-9) (AC.197)
AC.197에서 스베덴보리가 민수기 21장의 ‘놋뱀’을 언급하는 이유는, 앞에서 마태복음 10:16을 인용한 것과 같은 목적 때문입니다. 곧 ‘뱀’이라는 상징이 본래부터 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뱀이 본질적으로 악 그 자체를 의미한다면, 주님께서 ‘뱀같이 지혜로우라’고 말씀하실 수도 없고, 더욱이 광야에서 놋뱀을 통해 백성을 살리실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뱀은 본래 인간의 가장 바깥 단계인 감각적 부분을 뜻합니다. 감각은 인간 존재의 가장 낮은 단계에 속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악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자연세계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부분입니다. 문제는 이 감각이 주님의 질서 아래 있느냐, 아니면 자기 자신의 own 아래 있느냐입니다. 창3의 뱀은 감각이 주님의 자리를 차지한 경우이고, 민수기의 놋뱀은 감각이 주님께 복종한 경우를 보여 줍니다.
특히 AC.197에서 스베덴보리는 ‘놋뱀은 주님의 감각적 부분(the sensuous part in the Lord)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놀라운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보통 주님을 생각할 때 천적이고 신적인 측면만 생각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는 우리와 같은 인간 본성을 입으셨고, 따라서 감각적 차원까지도 가지셨습니다. 다만 그 감각은 우리처럼 자기 own에 지배되지 않았고, 완전히 신적 질서 안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백성이 뱀에 물렸을 때 놋뱀을 바라보고 살아난 것은 단순한 기적 사건이 아닙니다. 상응적으로는 자기 own과 감각적 욕망에 물린 인간이, 주님 안에 있는 완전한 인간성, 곧 완전히 질서 안에 있는 감각을 바라봄으로써 치유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병을 일으킨 것도 뱀이고 치료의 표징도 뱀이지만, 둘은 전혀 다른 상태의 뱀입니다.
이 점은 창3과 연결해 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창3의 뱀은 인간이 감각으로 신앙을 판단하도록 유도합니다. 반면 민21의 놋뱀은 인간이 감각을 주님께 복종시킨 완전한 모습을 바라보게 합니다. 하나는 아래가 위를 지배하는 상태이고, 다른 하나는 아래가 위에 순종하는 상태입니다.
또한 놋(brass)은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에서 흔히 자연적 선(natural good)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놋뱀은 단순한 뱀이 아니라, 선 안에 있는 감각적 인간, 질서 안에 있는 외적 인간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백성이 그것을 바라보았을 때 살아난 것입니다. 그들이 단순히 금속 조각을 본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장차 이루실 구원의 표상을 본 것입니다.
이 때문에 AC.197은 놋뱀을 매우 중요한 예로 사용합니다. 앞의 AC.195-196에서 스베덴보리는 뱀의 부정적 의미를 길게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면 독자는 ‘감각은 나쁜 것이구나’라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AC.197은 곧바로 반대 사례를 제시합니다. 감각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악한 것은 감각이 주님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고, 선한 것은 감각이 주님의 질서 아래 있는 것입니다.
결국 민수기 21장의 놋뱀은 창3의 뱀에 대한 해답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창3에서는 인간이 감각을 따라 주님을 판단했습니다. 민21에서는 인간이 주님을 바라봄으로써 감각이 치유됩니다. 그래서 AC.197에서 스베덴보리가 이 사건을 인용하는 이유는, 뱀이라는 상징의 본래 의미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고, 동시에 인간 안의 감각적 부분도 주님 안에서는 완전하게 질서화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주님만이 참된 천적 인간이며, 모든 사람을 돌보시고 섭리하시는 분’이라고 결론짓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AC.197, 심화 1, ‘마10:16’
AC.197.심화 1. ‘마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마10:16) Behold, I send you forth as sheep into the midst of wol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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