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자기 스스로는 악을 행하고 주님에게서 돌아설 수밖에 없습니다.그러나 실제로 그 일을 하는 것은 그와 함께 있는 악한 영들입니다.그렇다고 그 악한 영들이 스스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그들이 자기 것으로 만든 악 자체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그럼에도 사람은 악을 행하고 주님에게서 돌아서며,그 책임도 자기에게 있습니다.그런데도 그는 오직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으며 살아갑니다.(AC.233 [2])
이 문장은 스베덴보리 특유의 ‘생명은 오직 주님에게서 오지만,악은 사람에게 귀속된다’는 구조를 압축해서 말한 것이어서, 처음 읽으면 서로 충돌하는 말처럼 보입니다. 하나씩 풀면 이렇습니다.
첫째, ‘사람은 자기 스스로는 악을 행하고 주님에게서 돌아설 수밖에 없습니다’라는 말은, 인간의own, 곧 주님에게서 분리된 자기 자신만 놓고 보면 그 안에는 선과 진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사람 자체가 독립된 생명체처럼 스스로 선을 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아 사는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주님에게서 흘러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own으로 기울면, 그 방향은 자연히 자기 사랑, 세상 사랑, 거짓, 악으로 흐르게 됩니다.
둘째, ‘그러나 실제로 그 일을 하는 것은 그와 함께 있는 악한 영들입니다’라는 말은, 사람 안에 악한 충동과 생각이 일어날 때, 그것이 고립된 개인 심리만의 현상이 아니라 영계와의 연결 속에서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사람은 언제나 영들 및 천사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선한 애정과 진리는 천사들을 통해 주님에게서 들어오고, 악한 욕망과 거짓된 설득은 악한 영들과의 교류를 통해 들어옵니다. 그래서 사람이 악으로 기울 때, 그 악은 그 사람과 결합된 악한 영들을 통해 활동합니다.
셋째, ‘그렇다고 그 악한 영들이 스스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그들이 자기 것으로 만든 악 자체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라는 말은 더 깊은 층위입니다. 악한 영들도 독립된 생명의 근원이 아닙니다. 그들도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습니다. 다만 그 생명을 자기 사랑과 거짓 안에서 뒤틀어 받기 때문에, 그들에게서는 악한 작용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면 악한 영이 ‘자기 힘으로’ 악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사랑하고 자기 것으로 만든 악, 곧 그들의 지배적 사랑이 그들을 움직입니다. 사람도, 영도, 천사도 모두 생명 자체가 아니라 생명을 받는 존재입니다. 차이는 그 생명을 어떤 사랑으로 받아들이느냐에 있습니다.
넷째, ‘그럼에도 사람은 악을 행하고 주님에게서 돌아서며,그 책임도 자기에게 있습니다’라는 말은, 여기서 책임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악한 영들이 영향을 미친다고 해서 사람이 꼭두각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자기에게 들어오는 것을 좋아하고, 동의하며, 자기 것으로 삼을 자유가 있습니다. 악이 들어와도 그것을 자기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기뻐하고, 합리화하고, 실행하면 그것은 그 사람의 것이 됩니다. 그래서 악한 영들이 작용하더라도, 사람이 그것에 동의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면 책임은 사람에게 귀속됩니다.
다섯째, ‘그런데도 그는 오직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으며 살아갑니다’라는 말은 모든 문장의 기초입니다. 선한 사람도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고, 악한 사람도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습니다. 천사도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고, 악한 영도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습니다. 주님은 생명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천사는 그 생명을 사랑과 선으로 받아들이고, 악한 영은 그것을 자기 사랑과 거짓으로 뒤틀어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같은 태양 빛이 좋은 나무에는 열매를 맺게 하지만, 썩은 것에서는 악취를 일으키는 것처럼,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은 그 받는 그릇의 상태에 따라 선으로도, 악의 활동처럼도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전체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악의 근원은 주님이 아니라 사람의own과 그와 결합된 악한 영들의 상태에 있으며,사람은 악한 영들의 영향을 받아 악을 행하지만,그것을 사랑하고 동의함으로 자기 것으로 만들기 때문에 책임을 지며,그럼에도 그가 존재하고 생각하고 살아 움직일 수 있는 생명 자체는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뜻입니다.
쉽게 비유하면, 전기는 하나입니다. 좋은 기계에 들어가면 빛과 온기를 내고, 고장 난 기계에 들어가면 불꽃과 고장을 일으킵니다. 전기가 악한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장치의 상태가 문제입니다. 주님의 생명도 그렇습니다. 주님에게서 나오는 것은 오직 생명과 선이지만, 그것을 자기 사랑과 거짓의 구조가 받아들이면 악한 작용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한편으로는 ‘모든 생명은 주님에게서 온다’고 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악은 사람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13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And he said, Who told thee that thou wast naked? Hast thou eaten of the tree whereof I commanded thee that thou shouldest not eat? And the man said, The woman whom thou gavest to be with me, she gave me of the tree, and I did eat. And Jehovah God said unto the woman, Why hast thou done this? And the woman said, The serpent beguiled me, and I did eat. (창3:11-13)
AC.233
신앙의 신비들(the mysteries of faith)을 기억 지식으로 탐구하려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려 하거나, 갈빗대 하나가 가슴과 심장의 가장 미세한 섬유들을 다스리려 하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한 일입니다. 자연계의 숨은 것들만 해도 셀 수 없이 많아서, 사람이 그것들을 연구한다 해도 겨우 하나를 발견할까 말까 하며, 연구하는 동안에도 수많은 오류에 빠집니다. 이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자연계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 하나에도 수많은 신비가 숨어 있는데, 하물며 영적, 천적 생명의 숨은 진리들을 연구할 때는 얼마나 더 그러하겠습니까! To explore the mysteries of faith by means of memory-knowledges is as impossible as it is for a camel to go through the eye of a needle, or for a rib to govern the finest fibrils of the chest and of the heart. He who would investigate the hidden things of nature, which are innumerable, discovers scarcely one, and while investigating them falls into errors, as is well known. How much more likely is this to be the case while investigating the hidden truths of spiritual and celestial life, where myriads of mysteries exist for one that is invisible in nature!
[2]예를 하나만 들어 봅시다. 사람은 자기 스스로는 악을 행하고 주님에게서 돌아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일을 하는 것은 그와 함께 있는 악한 영들입니다. 그렇다고 그 악한 영들이 스스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이 자기 것으로 만든 악 자체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람은 악을 행하고 주님에게서 돌아서며, 그 책임도 자기에게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오직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반대로 사람은 자기 스스로는 선을 행하거나 주님께로 돌이킬 수 없습니다. 이것은 천사들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천사들 또한 스스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만이 하십니다. 그런데도 사람은 마치 자기 스스로 하는 것처럼 선을 행하고 주님께로 돌이킬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들은 감각과 기억 지식, 그리고 철학으로는 결코 이해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들을 기준으로 삼으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부인하게 됩니다. 다른 모든 영적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As an illustration take this single example: of himself man cannot but do what is evil, and turn away from the Lord. Yet man does not do these things, but the evil spirits who are with him. Nor do these evil spirits do them, but the evil itself which they have made their own. Nevertheless man does evil and turns himself away from the Lord, and is in fault; and yet he lives only from the Lord. So on the other hand, of himself man cannot possibly do what is good, and turn to the Lord, but this is done by the angels. Nor can the angels do it, but the Lord alone. And yet man is able as of himself to do what is good, and to turn himself to the Lord. These facts can never be apprehended by our senses, memory-knowledge, and philosophy, but if these are consulted will be denied in spite of their truth. And it is the same all through.
[3]이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신앙의 문제에서 감각과 기억 지식을 기준으로 삼는 사람들은 단순히 의심(doubt)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결국 부인(denial)에까지 이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곧 짙은 어둠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온갖 정욕(cupidities)에 빠집니다. 왜냐하면 거짓을 믿는 사람은 거짓을 행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영적이고 천적인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게 되면, 몸과 세상에 속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믿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 자신과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되고, 이렇게 하여 거짓으로부터 정욕과 악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From what has been said it is evident that those who consult sensuous things and memory-knowledges in matters of belief, plunge themselves not only into doubt, but also into denial, that is, into thick darkness, and consequently into all cupidities. For as they believe what is false, they also do what is false. And as they believe that what is spiritual and celestial has no existence, so they believe that there is nothing else but what is of the body and the world. And so they love all that belongs to self and the world, and in this way do cupidities and evils spring from what is false.
해설
이 글은 AC.232의 내용을 절정으로 끌고 가는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왜 감각과 기억 지식만으로는 신앙의 신비를 이해할 수 없는가’를 설명합니다. 먼저 그는 매우 강렬한 비유를 사용합니다.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만큼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어렵다는 뜻이 아니라, 접근 방식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현미경 없이 세균을 보려 하거나, 귀로 색깔을 들으려 하는 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불가능합니다. 방법이 틀렸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적 진리를 감각과 철학만으로 파악하려는 시도도 이와 같다고 말합니다.
특히 2항은 스베덴보리 신학의 핵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는 ‘사람은 스스로 악을 행하지만, 동시에 악한 영들의 영향 아래 있다’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책임은 사람에게 있다고 합니다. 또 ‘사람은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없지만, 마치 자기 스스로 하는 것처럼 선을 행해야 한다’ 합니다. 언뜻 보면 모순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그는 바로 이것을 예로 듭니다. 감각과 철학만으로는 이런 진리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논리적으로만 접근하면, 곧바로 ‘악한 영이 시켰다면 왜 내가 책임을 지나?’, ‘주님이 선을 행하게 하신다면 왜 내가 상을 받지?’,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온다면 자유는 어디 있지?’ 같은 질문이 나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영계의 실제 구조를 보면, 이 모든 것이 동시에 참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영향(influx)을 받지만, 기계가 아니며, 주님은 모든 선의 근원이시지만, 인간의 자유를 제거하지 않으십니다. 또한 악한 영들은 영향을 미치지만, 강제로 결정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책임을 지며, 동시에 도움을 받습니다. 이것은 감각으로는 모순처럼 보이지만, 영적 차원에서는 동시에 참인 진리입니다.
목사님께서 자주 다루시는 인플럭스(influx)와 자유(freedom)의 문제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인간이 끊임없이 영계와 연결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말합니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붙들지 못하면, 결국 숙명론이나 자기 공로주의 가운데 하나로 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에 매우 중요한 결론을 내립니다. 사람이 영적, 천적 세계를 부정하기 시작하면 결국 남는 것은 몸(body)과 세상(world)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몸과 세상만이 실재라고 믿게 되면, 자연스럽게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삶의 중심이 됩니다. 그 결과 거짓이 정욕을 낳고, 정욕이 다시 악을 낳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흥미로운 순서를 제시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악한 욕망 때문에 거짓이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는 ‘거짓이 먼저이고, 그 거짓이 정욕과 악을 낳는다’고 말합니다. 즉 ‘영적인 것은 없다’, ‘천국은 없다’, ‘주님은 없다’, ‘나는 내 힘으로 산다’는 거짓이 자리 잡으면, 그다음에는 자연스럽게 자기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게 되고, 거기서 수많은 악이 흘러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AC.233은 단순한 철학 비판이 아닙니다. 그것은 창3에서 시작된 뱀의 길이 어디까지 가는지를 보여주는 결론입니다. 처음에는 ‘내가 확인해 보고 믿겠다’로 시작합니다. 다음에는 ‘감각으로 확인되지 않으니 믿지 않겠다’가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영적인 것은 없다. 몸과 세상만이 전부다’에 이르게 됩니다. 그 결과 사람은 자기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게 되고, 거짓에서 정욕이, 정욕에서 악이 끝없이 흘러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AC.233에서 경고하는 가장 깊은 영적 어둠입니다.
18세기 중엽의 과학 지식과 문명을 가지고도 이AC.232본문처럼 말한다면,AI,AGI시대로 들어가는 오늘21세기 과학 문명을 가지고는 어떤 말을 하게 될까요?
만일18세기 중엽의 스베덴보리가 당시 막 태동하던 근대 과학과 계몽주의 문명을 바라보며 이미 이렇게 말했다면, 오늘날AI와AGI시대의 문명을 보면서는 아마 훨씬 더 강한 표현을 사용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아마 과학 자체를 비난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광물학, 야금학, 해부학, 생리학, 천문학, 수학, 기계공학 등 당시 유럽 최고 수준의 과학자이자 발명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문제 삼았던 것은 과학이 아니라 과학이 차지하는 자리였습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억 지식(scientifica)은 하인(servant)이어야지 주인(master)이 되어서는 안 되며, 진리를 이해하도록 돕는 계단이어야지 진리를 재판하는 법정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아마 그는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옛사람들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만 믿으려 하였다.그러나 현대인은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기계가 계산한 것만 믿으려 하고,알고리즘이 예측한 것만 참으로 여기며,통계와 데이터로 측정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한다.그리하여 감각의 지배는 이제 기계의 지배라는 새로운 옷을 입게 되었다.’
스베덴보리가 오늘의 시대를 보았다면 가장 우려했을 것은 아마AI의 발전 자체가 아니라 인간이 자기 영혼을 기계적 사고방식에 맞추어 축소시키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태고교회의 타락은 ‘주님께서 말씀하셨으니 참이다’에서 ‘내가 이해해야 참이다’로 옮겨간 것이었습니다. 근대의 타락은 다시 ‘내가 증명할 수 있어야 참이다’가 되었고,AI시대의 타락은 어쩌면 ‘기계가 계산할 수 있어야 참이다’라는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동시에 매우 중요한 점을 덧붙였을 것입니다. 천국의 가장 중요한 것들은 계산될 수 없고 측정될 수도 없습니다. 사랑(love)은 측정되지 않으며, 자비(mercy)는 데이터가 아니고, 체어리티(charity)는 알고리즘이 아니며, 지혜(wisdom)는 정보량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사랑하기 때문에 인간이며, 천사는 사랑하기 때문에 천사입니다. 반대로 지옥은 사랑을 잃어버릴 수는 있어도 지식을 잃어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에게 지성(intelligence)과 지혜(wisdom)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지성은 진리를 아는 능력이고, 지혜는 그 진리를 사랑하는 능력입니다.AI는 어쩌면 인간보다 훨씬 더 큰 지성을 가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사랑은 계산이 아니라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AC.232를 오늘의 언어로 다시 쓴다면, 어쩌면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요? ‘옛날 사람들은 감각으로 자신을 속였으나 현대인은 기술로 자신을 확증한다.그리고 가장 깊은 어둠은 거짓을 믿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 데서 생긴다.왜냐하면 사람이 더 이상 하늘을 향하여“가르쳐 주십시오”하지 않고,자기 자신에게“나는 이미 알고 있어”하는 순간,그곳에서 뱀은 다시 말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13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And he said, Who told thee that thou wast naked? Hast thou eaten of the tree whereof I commanded thee that thou shouldest not eat? And the man said, The woman whom thou gavest to be with me, she gave me of the tree, and I did eat. And Jehovah God said unto the woman, Why hast thou done this? And the woman said, The serpent beguiled me, and I did eat. (창3:11-13)
AC.232
그러나 오늘날은 옛 시대보다 훨씬 더 악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사람들은 고대인들이 알지 못했던 기억 지식들을 사용, 감각의 불신(incredulity of the senses)을 확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어둠을 낳았습니다. 만일 사람들이 이 원인으로부터 생겨난 어둠이 얼마나 큰지를 안다면, 크게 놀랄 것입니다. At this day, however, it is much worse than in former times, because men can now confirm the incredulity of the senses by memory-knowledges unknown to the ancients, and this has given birth to an indescribable degree of darkness. If men knew how great is the darkness from this cause they would be astounded.
해설
이 글은 AC.231의 내용을 더욱 심화한 내용입니다. 앞에서 스베덴보리는 모든 시대의 교회가 같은 근본적 악, 곧 주님과 말씀보다 자기 자신과 자기 감각을 더 신뢰하는 악에 빠졌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오늘날의 상태가 과거보다 더 심각하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의외로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 scientifica) 때문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지식 자체를 비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평생 과학자였고, 광물학, 해부학, 천문학, 수학, 공학을 연구한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학문과 과학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지식이 주님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주님을 부정하기 위한 무기가 될 때입니다.
태고교회 말기 사람들도 자기 감각을 신뢰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진 지식은 오늘날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제한적이었습니다. 반면 현대인은 엄청난 양의 과학, 철학, 역사, 심리학, 사회학, 기술 문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감각과 자기 이성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훨씬 정교하게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옛사람은 ‘나는 보지 못했으니 믿지 않겠다’ 정도였다면, 현대인은 수많은 학문적 체계를 동원하여 ‘영혼은 존재할 수 없다’, ‘천국은 심리적 투사일 뿐이다’, ‘신앙은 진화 과정의 부산물이다’와 같은 복잡한 논증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감각의 불신을 확증한다’(confirm the incredulity of the senses)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감각이 이미 ‘보지 못했으니 믿지 않겠다’고 말하는데, 지식은 거기에 수많은 논리와 증거와 체계를 덧붙여 그 불신을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것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어둠’을 낳았다고 말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무지’를 어둠이라고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잘못 사용된 지식이 더 큰 어둠을 만든다고 말합니다.
무지한 사람은 진리를 들으면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지식으로 완전히 무장한 사람은 진리가 들어올 틈 자체를 막아 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종종 단순한 사람들보다 자기 지혜를 절대화하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더 위험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점은 AC.215의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와도 연결됩니다. 문제는 지혜가 아니라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태도입니다.
또한 AC.232는 현대 문명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놀라운 통찰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그는 18세기 사람인데도, 이미 인간이 과학과 지식을 이용하여 영적 세계를 부정하는 시대가 올 것을 보고 있는 듯합니다.
목사님께서 종종 AGI, ASI, AI 시대 이야기를 하셨던 것이 생각납니다. 스베덴보리라면 아마 기술 자체를 두려워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그 기술과 지식을 이용, 더욱 자기 자신을 신뢰하고, 더욱 주님을 배제하려 한다면, 그것은 AC.232가 말하는 어둠의 확대라고 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의 핵심은 ‘지식이 많아서 어둡다’가 아닙니다. ‘지식을 이용하여 주님 없이도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어둡다’는 것입니다.
결국 AC.232는 매우 역설적인 진리를 말합니다. 지식은 빛이 될 수도 있고, 어둠이 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을 향해 열려 있을 때, 지식은 지혜가 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만을 향할 때, 지식은 거짓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마지막에 강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만일 사람들이 이 어둠이 얼마나 큰지 안다면 깜짝 놀랄 것이다.’
그가 말하는 어둠은 무지의 어둠이 아닙니다. 자신이 밝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로는 주님의 빛을 차단하고 있는 상태의 어둠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그것이야말로 인류 역사상 가장 깊은 어둠 가운데 하나인 것입니다.
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13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And he said, Who told thee that thou wast naked? Hast thou eaten of the tree whereof I commanded thee that thou shouldest not eat? And the man said, The woman whom thou gavest to be with me, she gave me of the tree, and I did eat. And Jehovah God said unto the woman, Why hast thou done this? And the woman said, The serpent beguiled me, and I did eat. (창3:11-13)
AC.231
홍수 이전 태고교회의 악, 홍수 이후 고대교회의 악, 그리고 유대교회(the Jewish church)의 악과 주님 오신 후 이방인의 새 교회(the new church, or church of the Gentiles)의 악, 그리고 오늘날 교회의 악도 모두 같았습니다. 그것은 주님이나 말씀(the Word)을 믿지 않고, 자기 자신과 자기 감각들(their own senses)을 믿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신앙이 없게 되며, 신앙 없는 곳에는 이웃 사랑(the love of the neighbor)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결과는 모두 거짓과 악이 됩니다. The evil of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existed before the flood, as well as that of the ancient church after the flood, and also that of the Jewish church, and subsequently the evil of the new church, or church of the Gentiles, after the coming of the Lord, and also that of the church of the present day, was and is that they do not believe the Lord or the Word, but themselves and their own senses. Hence there is no faith, and where there is no faith there is no love of the neighbor, consequently all is false and evil.
해설
이 글은 AC.194 이후 지금까지 이어져 온 창3의 해설을 하나의 원리로 요약하는 매우 중요한 본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인류 역사의 여러 시대를 차례로 열거합니다. 홍수 이전의 태고교회, 홍수 이후의 고대교회, 유대교회, 주님 강림 이후의 교회, 그리고 현재의 교회까지 언급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이 모든 시대의 근본적인 악이 동일하다고 말합니다. 문화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고, 종교 형식도 다르고, 시대도 다르지만, 타락의 뿌리는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 뿌리는 ‘주님과 말씀보다 자기 자신과 자기 감각을 더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AC.229의 내용을 더욱 확대하여 말한 것입니다.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믿기 전에 먼저 확인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감각과 자기 이성을 신앙의 재판관으로 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태도가 이후 모든 교회 시대에도 반복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지성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는 평생 학자로 살았고, 과학자였으며, 철학자였습니다. 그가 문제 삼는 것은 이성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성이 주님 위에 올라서는 것입니다.
즉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는 태도는 건강한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먼저 납득해야만 주님 말씀을 인정하겠다’는 태도는 창3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 때문에 신앙이 없게 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신앙은 단순히 어떤 교리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최종 권위로 삼기 시작하면, 사실상 주님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신뢰하게 됩니다.
그리고 신앙이 사라지면 체어리티(charity)도 사라집니다. 이것이 AC.231의 매우 중요한 연결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신앙과 사랑을 별개의 문제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에게 신앙은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체어리티는 그 진리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된 신앙이 사라지면 체어리티도 결국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중심에 두기 시작한 사람은 결국 이웃보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에 매우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 결과는 모두 거짓과 악이 된다.’
이 말은 처음에는 다소 과격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논리는 분명합니다. 자기 자신이 최종 기준이 되면, 진리도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바뀌고, 선도 자기 이익을 위한 것으로 변질됩니다. 그 결과 진리는 거짓으로, 선은 악으로 변하게 됩니다.
목사님께서 지금까지 AC.210의 own, AC.215의 ‘스스로 지혜롭다 하는 자’, AC.229의 ‘먼저 확인한 후 믿겠다’를 따라오신 흐름으로 보면, AC.231은 그 모든 내용을 한 문장으로 압축한 결론처럼 보입니다.
특히 이 구절에서 눈에 띄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특정 시대만 비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태고교회도, 고대교회도, 그리고 유대교회와 기독교회, 현재 교회도 같은 위험 아래 있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문제는 시대가 아니라 인간 본성입니다.
그래서 AC.231은 단순한 역사 해설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교회에 대한 경고입니다. 교회가 무너지는 이유는 먼저 외부 박해 때문이 아니라, 내부적으로 주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신뢰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창3에서 본 최초의 타락은 한 시대의 사건이 아니라 모든 시대에 반복되는 영적 원형(archetype)이었습니다. 사람은 언제나 두 길 사이에 서 있습니다. 주님과 말씀을 신뢰하는 길, 그리고 자기 자신과 자기 감각을 신뢰하는 길입니다. 그리고 AC.231은 인류 역사의 모든 비극이 후자의 길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13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And he said, Who told thee that thou wast naked? Hast thou eaten of the tree whereof I commanded thee that thou shouldest not eat? And the man said, The woman whom thou gavest to be with me, she gave me of the tree, and I did eat. And Jehovah God said unto the woman, Why hast thou done this? And the woman said, The serpent beguiled me, and I did eat. (창3:11-13)
AC.230
이 후손들의 지배적인 악(ruling evil)은 자기 사랑(the love of self)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존재하는 만큼의 세상 사랑(the love of the world)은 그들에게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 집안과 가족 안에서 살았으며, 재산을 축적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The ruling evil of this posterity was the love of self, without their having at the same time so much of the love of the world as exists at the present day; for they dwelt within their own households and families, and had no desire to accumulate wealth.
해설
이 글은 매우 짧지만, 스베덴보리가 태고교회 말기의 사람들을 어떻게 보았는지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글입니다. 그는 여기서 자기 사랑(love of self)과 세상 사랑(love of the world)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모든 악의 두 큰 뿌리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입니다. 자기 사랑은 자신을 모든 것의 중심에 두려는 사랑입니다. 남보다 높아지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지배하고 싶고, 자신의 판단을 최고로 여기려는 경향입니다. 반면 세상 사랑은 재물과 소유와 부를 축적하려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태고교회의 이 후손들은 이미 자기 사랑에는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AC.229에서 본 것처럼, 주님의 말씀보다 자기 판단을 더 신뢰하게 되었고, 믿기 전에 먼저 자기 감각과 이성으로 확인하려 했습니다. 이것이 자기 사랑의 특징입니다. 자기 자신이 최종 심판자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아직 세상 사랑은 오늘날만큼 발전하지 않았다고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그들은 대규모 국가나 상업 체계를 이루고 살지 않았으며, 주로 가족과 씨족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따라서 부를 무한히 축적하거나 경제적 지배력을 확대하려는 욕망은 상대적으로 적었습니다.
이 점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보통 우리는 자기 사랑과 탐욕을 하나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둘을 구별합니다. 어떤 사람은 재물에는 관심이 없어도 자기 자랑과 자기 우월감에는 깊이 빠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명예에는 관심이 없어도 돈과 소유에 강하게 집착할 수 있습니다.
AC.230에 따르면 태고교회 말기의 사람들은 후자보다는 전자에 가까웠습니다. 그들은 부자가 되려는 욕망보다는 자기 자신의 판단과 의지를 따르려는 욕망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이것은 창3의 이야기와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뱀은 아담과 하와에게 부자가 되라고 유혹하지 않았습니다. 권력을 잡으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너희가 하나님같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자기 사랑의 본질을 아주 잘 보여주는 말입니다. 문제는 소유가 아니라 자기 높임이었습니다.
또한 이 구절은 인간 역사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독특한 시각도 보여줍니다. 그는 인류의 타락이 한 번에 완성되었다고 보지 않습니다. 먼저 자기 사랑이 커졌고, 후대에 이르러 세상 사랑도 함께 커졌다고 봅니다. 그래서 태고교회 말기 사람들은 이미 심각하게 타락했지만, 오늘날 인간들이 보이는 온갖 형태의 탐욕과 물질주의에는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AC.230의 핵심은, 태고교회의 이 후손들을 무너뜨린 주된 악은 재물욕이 아니라 자기 사랑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직 거대한 부를 축적하려는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자기 판단을 주님의 지혜보다 높게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에게는 바로 그것이 모든 타락의 시작이었습니다.
어쩌면 이 글은 현대 독자에게도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세상 사랑 때문에 흔들리는가, 아니면 자기 사랑 때문에 흔들리는가? 스베덴보리라면 아마 후자가 더 깊고 더 근본적인 문제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랑조차도 결국은 자기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가지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3의 비극은 재물을 얻으려는 욕망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주님보다 더 신뢰하려는 자기 사랑에서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And he said, Who told thee that thou wast naked? Hast thou eaten of the tree whereof I commanded thee that thou shouldest not eat? And the man said, The woman whom thou gavest to be with me, she gave me of the tree, and I did eat. And Jehovah God said unto the woman, Why hast thou done this? And the woman said, The serpent beguiled me, and I did eat. (창3:11-13)
AC.229
이 말씀의 의미는 앞에서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분명합니다. 곧 인간의 이성 파트가 자신의 own, 즉 자기 사랑(the love of self)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스스로 속임을 당하도록 내버려두었고, 그 결과 자신이 보고 느낄 수 있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알 수 있듯, 여호와 하나님께서 실제 뱀에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며, 사실 그런 뱀도 없었습니다. 또한 그분께서는 ‘뱀’(serpent)으로 의미되는 감각 파트(the sensuous part) 자체에게 말씀하신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다른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곧 그들은 자신들이 감각들(the senses)에 의해 속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있었음에도 불구, 자기 사랑(self-love) 때문에 주님(the Lord)과 그분에 대한 ‘신앙’(faith)에 관하여 들은 것들이 참된 것인지 아닌지를 먼저 확인하고 나서야 믿으려 하였다는 것입니다. The signification of these words 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explained before, namely, that the rational of man suffered itself to be deceived by its own, because this was dear to him (that is, by the love of self), so that he believed nothing but what he could see and feel. Everyone can see that Jehovah God did not speak to a serpent, and indeed that there was no serpent, neither did he address the sensuous part that is signified by the “serpent”; but that these words involve a different meaning, namely, that they perceived themselves to be deluded by the senses, and yet, in consequence of self-love, were desirous of ascertaining the truth of what they had heard concerning the Lord, and concerning faith in him, before they believed it.
해설
AC.229는 창세기 3장의 뱀 이야기를 문자적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 주는 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실제 뱀이 말을 하였고, 하나님께서 그 뱀과 대화하셨다 생각하는 것은 말씀의 본래 의미를 놓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에게 뱀(the serpent)은 인간의 감각 파트, 곧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만을 기준으로 삼으려는 인간의 가장 바깥 부분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뱀의 유혹이란 결국 인간 안 감각적 사고가 이성을 설득, 주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신뢰하도록 만드는 과정을 뜻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영적 원리를 하나 설명합니다. 인간이 진리를 거부하는 가장 깊은 이유는 지적 부족함이 아니라 자기 사랑(self-love)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종종 ‘증거가 부족해서 믿지 못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믿고 싶지 않기 때문에 증거를 요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원래 퍼셉션(perception)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직접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타락이 시작되자 그들은 더 이상 주님으로부터 직접 받는 빛을 신뢰하지 않고, 자기 감각과 자기 이성을 기준으로 삼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태도는 사실상 다음과 같았습니다.
‘내가 직접 보고 이해할 수 있어야 믿겠다.’
‘내 경험과 내 판단으로 확인되면 받아들이겠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는 이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바로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타락의 핵심입니다.
물론 스베덴보리는 이성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이성이 주님의 빛 아래에서 봉사하는 자리가 아니라 심판자의 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참된 이성은 진리를 이해하기 위해 사용되지만, 타락한 이성은 진리가 옳은지 틀린지를 자기 기준으로 재판하려 합니다.
그래서 AC.229는 매우 현대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도 종종 ‘과학적으로 증명되면 믿겠다’, ‘내가 납득되면 받아들이겠다’, ‘내 경험에 맞지 않으면 인정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물론 건강한 질문과 탐구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경고하는 것은, 자기 사랑이 숨어 있는 이성은 결코 충분한 증거를 얻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문제는 증거의 부족이 아니라 받아들이려는 의지의 부족이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스베덴보리가 태고교회 사람들이 이미 자신들이 속고 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고 말하는 부분입니다. 그들은 감각이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것을 완전히 모르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 자기 사랑 때문에 그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결국 창세기 3장의 질문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대로 주어집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이성을 사용하는가, 아니면 주님의 말씀을 재판하기 위해 이성을 사용하는가? 우리는 믿기 위해 이해하려 하는가, 아니면 이해될 때만 믿으려 하는가?
스베덴보리에게 타락의 시작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곧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참이다’라는 자리에서 ‘내가 납득해야 참이다’라는 자리로 이동하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뱀이 인간의 이성을 설득한 방식이었다고 그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신앙의 진리’(the truth of faith),‘사랑의 선’(the good of love)
이 표현은 스베덴보리를 처음 읽는 분들뿐 아니라 오래 읽은 분들도 한동안 손에 잘 잡히지 않는 개념입니다.이유는 우리가 보통‘진리’와‘신앙’을 거의 같은 뜻처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는 둘 사이에 미묘하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먼저‘진리’(truth)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참된 내용을 말합니다.예를 들면, ‘주님만이 생명이시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악은 피해야 한다’, ‘사랑 없는 신앙은 죽은 신앙이다’같은 것들입니다.
반면‘신앙’(faith)은 그런 진리를 사람이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든 상태를 말합니다.즉 진리가 객관적인 내용이라면,신앙은 그 진리를 믿고 붙드는 인간 쪽의 상태입니다.
그래서‘신앙의 진리’(the truth of faith)란,단순히 참된 명제가 아니라,사람이 믿고 받아들여 신앙의 내용이 된 진리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그 자체로는 진리(truth)입니다.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것을 주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나는 아직 그렇게 살지 못하지만,이것이 주님의 뜻이며 참된 길이다’라고 믿는다면,그 진리는 그 사람 안에서‘신앙의 진리’(the truth of faith)가 됩니다.
즉,진리(truth)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하늘의 진리이고, ‘신앙의 진리’(the truth of faith)는 사람이 믿고 받아들여 자신의 신앙 안에 들어온 진리인 것입니다.
반대로‘사랑의 선’(the good of love)은 무엇일까요?예를 들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라는 것을 믿는 단계는‘신앙의 진리’(the truth of faith)입니다.그런데 실제로 누군가를 용서하고,돕고,섬기고,희생한다면 그것은 이미 삶 속에 구현된‘사랑의 선’(the good of love)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자주 이 둘을 짝으로 말합니다.곧‘신앙의 진리’(the truth of faith)와‘사랑의 선’(the good of love)입니다.이는 마치 씨앗과 열매의 관계와도 같습니다. ‘이웃 사랑이 중요하다’라고 아는 것은 씨앗이고,실제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열매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특별했습니다.그들은 사랑(love)으로부터 진리(truth)를 알았습니다.즉 사랑이 먼저였고,그 사랑 안에서 무엇이 참인지 곧바로 지각(perception)했습니다.반면 홍수 이후의 영적 인간은 순서가 반대였습니다.먼저 진리를 배우고,그 진리를 믿고,그 진리에 따라 살려고 애쓰며,마침내 체어리티(charity)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종종 태고교회를 설명할 때는‘사랑의 선’(the good of love)을 강조하고,고대교회 이후를 설명할 때는‘신앙의 진리’(the truth of faith)를 강조합니다.
조금 거칠게 표현하면,천적 인간(celestial man)은‘왜 그런지는 설명하기 어렵지만 이것이 선한 것임을 안다’하는 사람이고,영적 인간(spiritual man)은‘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으니 이것이 옳다고 믿는다’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AC.228에서 천사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두 가지입니다.천사들은 어떤 생각이 사람 안으로 들어올 때,이것이‘신앙의 진리’(the truth of faith)를 허무는 것인가,혹은‘사랑의 선’(the good of love)을 파괴하는 것인가를 즉시 알아차립니다.
예를 들면, ‘용서는 약한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어온다면,그것은‘원수를 사랑하라’는‘신앙의 진리’(the truth of faith)를 공격하는 것입니다.또‘저 사람은 도와줄 가치가 없다’라는 냉혹한 마음이 들어온다면,그것은‘사랑의 선’(the good of love)을 공격하는 것입니다.천사들은 이러한 움직임을 사람 자신보다 훨씬 먼저,그리고 훨씬 더 섬세하게 지각한다고 스베덴보리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AC를 읽으실 때는, ‘신앙의 진리’(the truth of faith)를 간단히‘사람이 믿고 붙들고 있는 주님의 진리’,혹은‘신앙의 내용이 되는 진리’정도로 이해하시면 대부분의 문맥에서 자연스럽게 읽히실 것입니다.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And Jehovah God cried unto the man [homo], and said unto him, Where art thou? And he said, I heard thy voice in the garden, and I was afraid, because I was naked; and I hid myself. (창3:9-10)
AC.228
천사들이 ‘신앙의 진리’(the truth of faith)와 ‘사랑의 선’(the good of love)에 반대되는 어떤 것이 사람 안으로 들어오는지를 얼마나 섬세하게 알아차리는지는 이루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무엇이 들어오는지, 또 언제 들어오는지를 사람 자신보다도 천 배나 더 완전하게 지각합니다. 사람은 그것에 대하여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사람의 생각 가운데 가장 미세한 것까지도 천사들은 그 사람 자신이 자기 안에서 가장 그레이트하게 아는 것보다 더 분명하게 지각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가장 확실한 진실입니다. It is impossible to describe the exquisite perception whereby the angels discover whether anything gains admission that is contrary to the truth of faith and the good of love. They perceive the quality of what enters, and when it enters, a thousand times more perfectly than the man himself, who scarcely knows anything about it. The least of thought in a man is more fully perceived by the angels than the greatest is by himself. This is indeed incredible, yet is most true.
해설
AC.228은 천사들의 지각(perception)이 얼마나 정교한지를 보여 주는 매우 놀라운 글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천사들은 단순히 사람의 겉모습이나 행동만 보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들은 사람 안으로 들어오는 생각과 애정의 가장 미세한 움직임까지도 즉시 알아차립니다.
특히 천사들이 주목하는 것은 어떤 생각이나 욕망이 ‘신앙의 진리’(the truth of faith)와 ‘사랑의 선’(the good of love)에 일치하는지, 아니면 그것에 반대되는지를 분별하는 일입니다. 그들은 어떤 거짓이나 악이 사람 안으로 들어오려는 순간, 그리고 그것이 어느 정도 받아들여지고 있는지를 매우 섬세하게 지각합니다.
반면 인간은 자기 마음을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생각이 왜 떠올랐는지, 어떤 감정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생각과 충동은 의식의 문턱을 스쳐 지나가며, 대부분은 거의 알아차리지 못한 채 흘려보냅니다.
그러나 천사들은 그 가장 미세한 움직임까지도 분명히 지각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자기 안의 가장 그레이트한 생각을 아는 것보다 천사들이 사람 안의 가장 작은 생각을 더 분명하게 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천사들의 지각이 사람의 자기 인식보다 훨씬 깊고 정확하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설명은 AC.227의 내용과도 이어집니다. 사람은 영적 세계와 끊임없이 연결되어 있으며, 천사들은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선을 보호하고 성장시키기 위해 역사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사람의 내면 상태를 매우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천사들의 지각은 인간의 자기 인식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섬세합니다.
물론 이것은 천사들이 사람을 감시하거나 정죄하기 위해 살핀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천사들의 관심은 오직 주님의 선과 진리를 보존하고, 사람을 보호하는 데 있습니다. 마치 숙련된 의사가 환자의 미세한 증상까지 알아차려 병이 깊어지기 전에 치료하려는 것처럼, 천사들은 사람 안에 들어오는 악과 거짓을 민감하게 지각하여 주님의 섭리 아래 그것을 막고 선을 북돋우려 합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현대인에게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믿기 어렵지만 가장 확실한 진실’이라고 덧붙입니다. 이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자신이 수년간 영계에서 직접 경험한 사실에 근거한 증언이라는 의미입니다.
결국 AC.228은 인간이 혼자 살아가는 존재가 아님을 다시 한번 일깨워 줍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주님께서는 천사들을 통하여 우리 안의 가장 작은 선까지도 보호하시고, 가장 미세한 악의 침입까지도 살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영적 생활은 거창한 결단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는 생각 하나, 애정 하나까지도 주님의 섭리 안에서 다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심화
1. ‘신앙의 진리’(the truth of faith), ‘사랑의 선’(the good of love)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And Jehovah God cried unto the man [homo], and said unto him, Where art thou? And he said, I heard thy voice in the garden, and I was afraid, because I was naked; and I hid myself. (창3:9-10)
AC.227
지각(perception), 내적 딕테이트(internal dictate), 그리고 양심(conscience)의 기원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에 대해 전혀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 얼마간 설명하고자 합니다. 사람은 주님에 의해 영들(spirits)과 천사들(angels)을 통하여 다스려진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진리입니다. 악한 영들(evil spirits)이 사람을 지배하기 시작하면, 천사들은 악과 거짓을 물리치기 위해 애씁니다. 그러므로 그 결과로 하나의 싸움(combat)이 일어납니다. 사람이 지각(perception), 내적 딕테이트(internal dictate), 그리고 양심(conscience)을 통하여 느끼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싸움입니다. 또한 시험(temptations)을 통해서도 같은 싸움을 경험합니다. 사람이 만일 영들과 천사들에 관한 이야기를 전혀 믿지 않을 만큼 육체적인 것(corporeal things)에 깊이 빠져 있지 않았다면, 그는 이러한 경험들을 통해 자신과 함께 영들과 천사들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육체적인 것에만 몰두한 사람들은 이러한 싸움을 수백 번 경험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단지 상상이나 정신 이상의 결과라고 말할 것입니다. 나는 이러한 싸움을 수천 번, 수만 번 생생하게 느끼는 것이 허락되었으며, 그것도 여러 해 동안 거의 끊임없이 그러하였습니다. 또한 그 싸움을 일으킨 자들이 누구이며, 어떤 존재들이며, 어디에 있었는지, 언제 왔고 언제 떠났는지를 알 수 있었고, 그들과 직접 대화를 나누기도 하였습니다. As it is desirable that the origin of perception, internal dictate, and conscience, should be known, and as at the present day it is altogether unknown, I may relate something on the subject. It is a great truth that man is governed by the Lord by means of spirits and angels. When evil spirits begin to rule, the angels labor to avert evils and falsities, and hence arises a combat. It is this combat of which the man is rendered sensible by perception, dictate, and conscience. By these, and also by temptations, a man might clearly see that spirits and angels are with him, were he not so deeply immersed in corporeal things as to believe nothing that is said about spirits and angels. Such persons, even if they were to feel these combats hundreds of times, would still say that they are imaginary, and the effect of a disordered mind. I have been permitted to feel such combats, and to have a vivid sense of them, thousands and thousands of times, and this almost constantly for several years, as well as to know who, what, and where they were that caused them, when they came, and when they departed; and I have conversed with them.
해설
AC.227은 스베덴보리의 인간론과 영계론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글입니다. 지금까지 그는 퍼셉션(perception), 내적 딕테이트(internal dictate), 양심(conscience)에 대해 설명해 왔는데, 이제는 그것들이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밝힙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사람은 결코 혼자 생각하거나 혼자 살아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언제나 영들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으며, 주님께서는 천사들과 영들을 통하여 사람을 다스리십니다. 물론 최종적으로 다스리시는 분은 주님 한 분이시며, 천사들과 영들은 그 섭리의 도구일 뿐입니다.
사람이 선을 향하려고 할 때에는 천사들이 함께하고, 악으로 기울려고 할 때에는 악한 영들이 영향을 미칩니다. 이 둘 사이에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영적 전투(combat)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 싸움, 이 전투는 대부분 육안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경험됩니다.
스베덴보리는 퍼셉션(perception), 내적 딕테이트(internal dictate), 양심(conscience)이 모두 이 영적 전투가 인간 의식 속에 나타나는 방식이라고 설명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퍼셉션으로, 거듭나는 사람에게는 내적 딕테이트로, 홍수 이후의 영적 인간에게는 양심으로 경험되었습니다. 형태는 다르지만 근원은 같습니다. 모두 주님께서 천사들을 통해 사람을 선으로 이끄시는 역사입니다.
또한 시험(temptations)의 본질도 여기서 설명됩니다. 시험은 단순히 어려운 환경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악한 영들의 영향과 천사들의 보호가 사람 안에서 충돌하는 영적 전투입니다. 그래서 시험을 겪는 사람은 마음속에서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사이의 심한 갈등을 경험하게 됩니다.
흥미로운 점은 현대인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평가입니다. 그는 사람들이 영들과 천사의 존재를 믿지 않는 가장 큰 이유를 ‘육체적인 것’(corporeal things)에 지나치게 몰두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실제로 이러한 내적 전투를 경험하면서도 그것을 단지 심리 현상이나 신경 작용으로만 설명하려 합니다.
물론 스베덴보리는 모든 심리 현상을 곧바로 영들의 직접적인 작용으로 단순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핵심은 인간의 내면에는 자연계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영적 차원이 있으며, 주님께서는 그 차원을 통하여 끊임없이 인간을 선으로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부분에서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특별한 사명을 언급합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거의 끊임없이 이러한 영적 전투를 직접 경험하였으며, 그 원인이 되는 영들과 천사들을 보고 그들과 대화하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특별함을 과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후 저작들에서 영계의 구조와 인간의 영적 상태를 상세히 설명할 수 있는 근거를 독자들에게 제시하는 것입니다.
결국 AC.227은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영적 갈등의 정체를 밝혀 줍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고자 할 때 느끼는 내적 격려, 악을 피하려 할 때 느끼는 갈등, 시험 가운데 경험하는 치열한 내적 전투는 단순한 심리 현상이 아니라, 주님께서 천사들을 통해 우리를 보호하시고, 악한 영들의 영향으로부터 지키시는 영적 역사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의 삶은 눈에 보이는 세계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와도 끊임없이 이어져 있으며, 그 중심에는 언제나 주님의 사랑과 섭리가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