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26(D1)-제9권52호통435호.성탄절.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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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성탄 주일 메시지

 

6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7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사9:6-7)

 

 

평화(peace)는 주님에게서 오는, 한마디로 모든 것이며, 그러므로 천국과 교회에 속한 모든 것이요, 그 안에 있는 삶의 행복(happiness)을 의미합니다. 가장 높은, 혹은 가장 내적(inmost) 의미에서 볼 때, 이 모든 것은 평화에 속합니다. 즉, 평화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내용은, 평화는 체어리티(charity)이며, 영적 보호(spiritual security)이고, 내적 휴식(internal rest)이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주님 안에 있을 때라야 비로소 첫 번째, 사람은 이웃과 평화롭게 지낼 수 있기 때문인데요, 이것이 바로 체어리티입니다. 또 그럴 때라야 두 번째, 사람은 지옥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보호입니다. 이렇게 세 번째, 사람이 이웃과 평화롭게 지내며, 지옥으로부터 보호를 받게 되면, 그때 비로소 사람은 악과 거짓으로부터 벗어나 내적 휴식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By “peace” are signified all things in their aggregate which are from the Lord, and thence all things of heaven and the church, and the happiness of life in them; these are of peace in the highest or inmost sense. It follows therefore that “peace” is charity, spiritual security, and internal rest; for when man is in the Lord, he is in peace with his neighbor, which is charity; in protection against the hells, which is spiritual security; and when he is in peace with his neighbor, and in protection against the hells, he is in internal rest from evils and falsities. (AR.306)

 

 

오늘은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께서 우리의 모양, 곧 한 아기로, 한 아들로 오신 날을 기념하는 성탄 주일입니다. 이 아침에 우리는 우리에게 한 아기로, 한 아들로 오신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주님 오시기 약 800여 년 전인 이사야 때, 그를 통해 미리 무엇이라 하셨는지를 살피며,

 

먼저 6절입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주님의 탄생을 말씀하시면서,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다,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다’ 합니다. 얼핏 들으면 비슷해 보이는 말을 선지자는 왜 이렇게 반복적으로 하고 있을까요?

 

여기 ‘아기’와 ‘아들’은 주님의 두 가지 본질적인 특성, 곧, ‘’(善, the Divine good)과 ‘진리’(眞理, the Divine truth)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즉, 아기는 선을, 아들은 진리를 나타내는 것이지요.

 

여기서 ‘한 아기’가 선을 나타내는 이유는, 선의 본질은 아기와 같은 순진함(이노센스, innocence, 純眞無垢)이기 때문입니다. 선한 사람들은 좀처럼 다른 사람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불리한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쉽게 화내거나 불평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주님께서 그 모든 일을 통해 우리를 선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확실하게 믿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로마 교회에 보내는 그의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지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8:28)

 

그래서 선한 사람들은 어린아이처럼 순진하게 주님을 따라갑니다. 그 순진함은 우리 내면에서 자생적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고요,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 아기가 태어났다는 말은 오늘 우리에게 오신 주님은 선이시며 순진함 자체이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또 주님에 대해 ‘한 아들’이라 하셨는데, 이 말은 주님은 진리 자체인 분이라는 뜻입니다. 아들이 진리를 뜻하는 이유는, 진리는 주님의 최초의 본질인 선 또는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두 번째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태양의 뜨거운 열기에서 빛이 나오는 것처럼 사랑 자체이신 주님으로부터 진리가 나오기 때문에 아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에 대해 말할 때, 아버지라고 하면 선 또는 사랑이신 주님을 나타내고, 아들이라고 하면 진리이신 주님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따로 있고, 아들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의 두 가지 본질을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다,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다’하는 것은 주님의 두 가지 본질인 선의 본질과 진리의 본질을 모두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계속되는 말씀에서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다’ 하십니다. 정사(政事)는 영어 성경의 표현으로는 ‘Government’입니다. 그러니까 ‘나라를 다스리는 정부’를 말하지요. 정부는 수많은 조직과 부서, 기관으로 이루어지는데, 그것들을 서로 연결하고 통제하는 것은 법과 원칙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 정사 또는 정부는 하나님의 법인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면 그것을 ‘어깨에 메었다’ 할 때, ‘어깨’는 무엇일까요? 어깨는 주님의 능력을 나타냅니다. 일꾼들이 짐을 어깨에 메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깨는 능력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어깨에 정사를 메셨다는 말씀은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성한 진리와 그 능력을 의미하시는 겁니다. 주님은 진리와 진리의 능력으로 지상의 교회와 천국을 다스리시는데 주님의 그러한 모습을 본문에서는 주님의 ‘어깨에 정사, 정부를 메셨다’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또 계속해서 주님을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진리로 세상에 오신 주님의 다양한 모습입니다. 주님은 한 가지 모습만이 아닌, 여러 가지 다양한 모습이 있으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먼저, 주님을 ‘기묘자’(奇妙)라 하십니다. 기묘자에 대한 영어는 ‘Wonderful’입니다. 주님은 놀랍고 불가사의한 분이라는 뜻이지요. 진리이신 주님을 왜 놀라우신 분이라 했을까요?

 

진리의 원천인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상징, 상응으로 쓰여 있습니다. 주님께서 상징이나 상응,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는, 그것을 통해 지상에 있는 교회와 하늘의 천국을 서로 연결하고, 그렇게 또 우리를 주님과 연결, 결합하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연결하는 방법이 말할 수 없이 놀랍고 심오하기 때문이지요.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들은 누구나 말씀을 통해 지혜와 힘을 얻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이 놀랍고 신기하다고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천국을 열어주시고 경이로운 진리의 세계로 인도하십니다. 말씀 또는 진리이신 주님을 성경에서 ‘놀라우신 분’, ‘기묘자’라고 하시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주님을 또 ‘모사’(謀士)라고 하십니다. 모사에 대한 영어는 ‘Counselor’, 즉 상담자라는 뜻이지요, 모사 또는 상담자라는 말은 미가서 4장 9절에도 나오는데 거기서 이르기를,

 

이제 네가 어찌하여 부르짖느냐 너희 중에 왕이 없어졌고 네 모사가 죽었으므로 네가 해산하는 여인처럼 고통함이냐

 

이 말씀은 타락한 교회 안에 있는 신앙인들의 모습을 그리고 말씀입니다. ‘왕이 없어졌다’고 하는 것은 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왕은 진리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또 ‘모사가 죽었다’는 것은 진리에 대한 이해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담자 또는 모사는 주님이 주시는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진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락한 교회 안에서는 거듭나기가 어렵습니다. 주님은 심오한 진리로 오셨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이해하는 능력으로도 오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어려운 진리를 우리에게 던져놓기만 하시지 않고, 그것을 이해하는 능력까지도 함께 주십니다. 그 진리와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그래야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이해할 수가 있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이 어떤 삶인지를 알 수 있으며, 또한 삶을 통해 주님과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주님은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리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육성으로 진리를 가르쳐주시고, 당신의 손으로 우리의 아픔과 질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어떻게 영원 전부터 스스로 존재하시는 주님을 짐작이라도 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을 또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하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모든 능력이 나온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가지고 있는 부와 재물, 사회적 지위 같은 것에서 능력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잠깐은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것, 영원하신 능력은 오직 주님에게서만 나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세상의 것으로는 아무도 진실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이 주시는 진리와 선의 능력으로만 사람은 진실하게 될 수 있습니다.

 

또 주님을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하십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아버지로부터 받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하는 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 다 주님으로부터 나온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을 또 ‘평강의 왕’이라 하십니다. 평강, 또는 평화에 대해, 스벤덴보리 저, ‘결혼애’(結婚愛, Conjugial Love) 394번 글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천국에 속한 가장 내적인 것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순진함과 평화다.'

 

천국에 속한 것이란 영적인 것, 즉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영적인 것 안에서도 내적인 것이 있고, 보다 외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선에 가까워질수록 내적인 것이고요, 진리에 가까워질수록 외적인 것입니다. 순진함과 평화가 천국에 속한 가장 내적인 것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바로 선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순진함이 없으면 선한 사람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의 평화가 없다면 그 또한 선한 사람이 아닙니다. 따라서 주님을 ‘평화의 왕’이라고 부르는 것은 주님은 본질적으로 선을 동반한 진리이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평화는 선을 뜻하고, 왕은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오셔야만 내면이 바뀌고, 그렇게 해서 주님과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선이 없는 지식만 가지고는 바뀌지 않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오셔야 합니다.

 

7절입니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7절도 6절과 비슷한 말씀입니다. 여기서는 두 가지 낱말이 계속해서 짝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정사와 평강’이 그렇고,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가 그렇습니다. 또 ‘정의와 공의’가 그렇습니다. 이것들은 진리와 선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조금 전에 주님을 선을 동반한 진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7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에 대해 말하면서 진리와 선이 하나로 연결된 모습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즉 정사와 다윗의 왕좌, 정의는 모두 진리를 나타내는 말이고요, 그런가 하면 평강과 나라와 공의는 선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주님은 본질적으로 선과 하나가 된 진리이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선이 없는 진리이거나 진리가 없는 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 이상으로, 오늘 본문 이사야 9장 6, 7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6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7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속뜻)

주님은 본질적, 본성적으로 선과 진리이신 분으로서, 선으로도, 진리로도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이 모든 피조 세계의 통치 원리와 질서가 그분으로 말미암고, 그분의 섭리와 보살피심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놀라우며, 모든 선한 능력이 홀로 주님으로, 모든 존재하고 존속함이 다 그분으로만 말미암는 그런 분이십니다. 천국이 그분으로 말미암으며, 그래서 천국의 두 기둥, 곧 순진함과 평화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세상과 모든 피조 세계 여러 기둥과 같은 원리들의 기초이신 분으로서, 그 모든 것이 다 그분의 신성, 곧 선과 진리의 합일, 하나 됨, 융합과 결합으로 존재합니다. 주님은 선과 진리가 하나 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 그분의 자녀 된 우리 역시 당연히 어느 한쪽이 아닌, 선과 진리, 진리와 선이 아름답게 융합된, 결합 된 균형 잡힌 신앙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깨달았으면 행하고, 모든 행함은 오직 주의 진리로 말미암는 그런 우리 모두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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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

 

53. 27절,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Verse 27. And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in the image of God created he him;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여기 ‘형상’에 대한 언급이 두 번 반복되는 이유는, 신앙을 가리켜서는 ‘자기 형상’이라 하고, 사랑을 가리켜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전자는 이해(the understanding)에 속하며, 후자는 의지(the will)에 속하지요. 이때 후자인 이 ‘사랑’은 영적인 사람한테서는 뒤따라 나오는(come after) 것이지만 천적인 사람한테서는 먼저 나오는(precede) 것입니다. The reason why “image” is here twice mentioned is that faith, which belongs to the understanding, is called “his image”; whereas love, which belongs to the will, and which in the spiritual man comes after, but in the celestial man precedes, is called the “image of God.

 

※ 영적인 사람의 경우는 신앙, 곧 교리, 진리가 먼저요, 사랑, 선이 나중이지만, 천적인 사람은 반대로 사랑, 선이 먼저고, 신앙, 진리는 나중이기 때문입니다.

 

 

54.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남자와 여자’의 의미, 그 속뜻을 태고교회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손들 가운데에서 말씀의 내면적 뜻을 잃어버렸을 때, 이 아케이나 역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What is meant by “male and female,” in the internal sense, was well known to the most ancient church, but when the interior sense of the Word was lost among their posterity, this arcanum also perished.

 

그들, 태고교회라 일컫는 시대 사람들에게 있어서 ‘결혼’(結婚, marriage)은 그들 행복(happiness)과 기쁨(delight)의 최고의(chief) 원천이었습니다. 그들은 무엇이든 그것이 비교의 용도로 사용할 수만 있으면 다 결혼에 비유했는데요, 이런 식으로, 그들은 결혼의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Their marriages were their chief sources of happiness and delight, and whatever admitted of the comparison they likened to marriage, in order that in this way they might perceive its felicity.

 

※ 가령, 햇볕, 곧 해의 빛과 열의 융합을 결혼으로, 자녀들 및 모든 동식물의 자식 및 열매들을 결혼의 결과로, 사람을 영과 육의 결혼으로, 삼위일체를 결혼으로 등등, 가능한 모든 것을 다 ‘결혼’으로 보고 설명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내적인(internal)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오직 내적인 일들을 가지고만 기뻐했습니다. Being also internal men, they were delighted only with internal things.

 

외적인 일들에 관해서는, 그들 역시 우리처럼 두 눈으로 보기는 하지만, 그러나 속으로 이게 뭘 표현하는 걸까 생각했습니다. External things they merely saw with the eyes, but thought of what was represented.

 

※ 내면을 상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 우리는 겉의 일들, 겉의 것들을 가지고 흥분하고, 감격하고, 추구하고, 모든 걸 걸고 하지만, 태고 시대 사람들은 그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처럼 겉의 일들 때문에 좌지우지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겉의 일들은 그들에겐 별 게 아니었습니다. 겉의 일들은 그들에겐 그저 그들의 관심을 속의 일들을 향해 돌리게 하는, 즉, 내적 시야를 갖도록 하는 그 정도의 의미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내적 시야를 통해서, 천적 시야를, 천적 시야를 통해서 최종적으로 모든 것 되신 주님, 그리고 그 결과, 천국의 결혼이라는 시야로까지 확대할 수 있었는데요, 그들은 자기들의 결혼의 행복이 바로 여기서 온다는 것을 지각했습니다. So that outward things were nothing to them, save as these could in some measure be the means of causing them to turn their thoughts to internal things, and from these to celestial things, and so to the Lord who was their all, and consequently to the heavenly marriage, from which they perceived the happiness of their marriages to come.

 

그래서 그들은 영적인 사람한테 있는 이해를 ‘남자’라, 의지를 ‘여자’라 하였고, 그리고 이 둘이 하나로(as a one) 움직일 때, 그걸 가리켜 결혼이라 하였습니다. The understanding in the spiritual man they therefore called male, and the will female, and when these acted as a one they called it a marriage.

 

※ 즉, 태고교회인들은 어떤 사람의 말과 행실이 일치할 때, 그가 이해와 의지가 결혼한 상태에 있다고 본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부터 교회에 대한 관례적 표현들이 왔고, 여기서 교회를 ‘’, ‘처녀’, ‘시온의 처녀’, ‘예루살렘의 처녀’처럼, 그리고 ‘아내’라 하였습니다. 이는 선에 속한 교회의 애정에서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 From that church came the form of speech which became customary, whereby the church itself, from its affection of good, was called “daughter” and “virgin”—as the “virgin of Zion,” the “virgin of Jerusalem”—and also “wife.

 

이 주제에 관해서는 다음 장 23절과 3장 15절에서 보시게 됩니다. But on these subjects see the following chapter, at verse 23, and chapter 3, verse 15.

 

 

※ 이상으로, 오늘 본문 창세기 1장 27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속뜻)

거듭남이 진행 중인 영적인 사람에게 있어서 그의 신앙, 즉 이해에도 주님의 이미지가, 그의 사랑, 즉, 의지에도 주님의 이미지가 형성되어 가는데, 특히, 태고교회인들은 이를 가리켜 각각 남자와 여자로 부르며, 이 둘이 하나로 움직이는 것을 결혼이라 하였습니다.

 

https://youtu.be/wvsIFhFvS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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