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질문은 스베덴보리를 이해할 때 매우 핵심적인 질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계를 보았다’는 말을 들으면 보통 두 가지를 떠올립니다. 하나는 꿈이나 환상 같은 상태이고, 다른 하나는 일종의 신비 체험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방식은 그 둘과 조금 다릅니다. 그는 영계를 ‘상상 속에서 본 것’이 아니라 ‘감각이 열려 실제 세계처럼 인식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먼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인간의 감각 구조부터 이해하면 좋습니다. 그는 인간에게 두 가지 인식 차원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자연적 감각입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느끼는 감각입니다. 다른 하나는 영적 감각입니다. 이 감각은 평소에는 닫혀 있지만, 영계와 연결될 때 작동하는 감각입니다. 그는 인간이 본래 이 두 차원과 연결된 존재라고 보았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은 이 두 세계 가운데 자연계만 인식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눈앞에 있는 물질계만 실제라고 느낍니다. 그러나 영계 역시 실제로 존재하며, 인간은 본래 그 세계와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만 그 연결이 평소에는 의식적으로 느껴지지 않을 뿐입니다.
그가 말하는 ‘영적 감각이 열린다’는 것은 바로 이 두 번째 감각이 의식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상상이나 꿈이 아니라, 또 하나의 감각 영역이 열리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영계를 볼 때도 몸은 그대로 자연계에 있었고, 동시에 영계의 존재들을 보고 들을 수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이것을 ‘두 세계에 동시에 깨어 있는 상태’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영계를 물질계보다 덜 실제적인 것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는 영계가 더 근본적인 세계라고 설명합니다. 자연계는 그 세계의 표현이거나 결과라고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천사나 영들을 보았을 때 그것을 흐릿한 환영처럼 본 것이 아니라, 사람을 보는 것처럼 분명하게 보았다고 기록합니다.
그의 여러 저작들, 특히 ‘Heaven and Hell’에서는 이 점을 여러 번 강조합니다. 그는 천사들과 대화했고, 그들의 사회와 생활을 관찰했으며, 인간이 죽은 후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도 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신비 체험처럼 묘사하지 않고, 관찰 보고처럼 매우 차분하게 기록합니다. 마치 새로운 나라를 여행하고 돌아와 그 나라의 문화와 제도를 설명하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적 감각은 사실 우리가 완전히 낯선 개념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꿈을 꿀 때, 꿈속에서는 눈을 감고 있어도 장면을 보고 사람들과 이야기합니다. 물론 꿈은 무의식의 활동이지만, 그것은 인간에게 눈, 귀와는 다른, 또 하나의 인식 방식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적 감각을 꿈과 동일시하지는 않았지만, 인간에게 자연 감각 외의 다른 인식 능력이 있다는 점을 설명할 때, 이런 비유가 도움이 됩니다.
또 다른 비유를 들어 보겠습니다. 라디오를 생각해 보십시오. 공기 속에는 많은 전파가 있지만, 라디오 수신기가 켜지기 전까지 우리는 아무것도 듣지 못합니다. 수신기가 맞춰지면 갑자기 소리가 들립니다. 전파가 그 순간에 생긴 것이 아니라, 원래 존재하고 있었지만, 우리가 감지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의식도 이와 비슷하다고 설명합니다. 영계는 항상 존재하지만, 우리의 의식이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경험을 ‘새로운 세계를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세계를 보게 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중요한 것은 능력이 아니라 허락입니다. 그는 반복해서 ‘주님의 신적 자비로 눈이 열렸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자신이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목적을 위해 잠시 허락된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태도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나처럼 영계를 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인간의 삶에서 더 중요한 것은 영계를 보는 능력이 아니라, 진리와 선을 사랑하는 마음이라고 강조합니다. 영계를 보는 것은 특별한 사명과 관련된 일이지만, 모든 사람이 살아가야 할 길은 선과 진리를 선택하는 삶이라고 말합니다.
정리하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적 감각이 열린다’는 것은 꿈이나 환상이 아니라, 인간에게 잠재해 있던 또 하나의 인식 차원이 의식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는 자연계와 영계를 동시에 인식하는 상태에서 살았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 경험 자체보다, 그 경험을 통해 알게 된 질서와 진리를 설명하는 데 더 큰 관심을 두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을 때 중요한 것은 ‘그가 무엇을 보았는가’보다 ‘그가 무엇을 이해하고 설명하려 했는가’입니다. 그의 목적은 신비 체험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신앙, 그리고 성경의 의미를 더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참으로그러하다는사실은주님으로부터가아니고서는아무도알수없습니다.그러므로미리말씀드릴것은,주님의신적자비로말미암아저는이제수년동안끊임없이,중단됨없이영들과천사들과함께있으면서그들이말하는것을듣고,또저도그들과말할수있도록허락받았다는것입니다.이렇게하여저는지금까지어떤사람에게도알려진적이없고,그의생각속에조차들어온적이없는사후세계의놀라운것들을듣고볼수있었습니다. 저는여러종류의영들에관하여,죽음이후영혼들의상태에관하여,지옥곧불신앙가운데있는자들의비참한상태에관하여,천국곧신앙안에있는자들의복된상태에관하여,그리고특히온천국에서인정되고있는신앙의교리에관하여가르침을받았습니다.이러한주제들에관해서는주님의신적자비로이어지는글들에서더말씀드리겠습니다. That this is really the case no one can possibly know except from the Lord. It may therefore be stated in advance that of the Lord’s Divine mercy it has been granted me now for some years to be constantly and uninterruptedly in company with spirits and angels, hearing them speak and in turn speaking with them. In this way it has been given me to hear and see wonderful things in the other life which have never before come to the knowledge of any man, nor into his idea. I have been instructed in regard to the different kinds of spirits; the state of souls after death; hell, or the lamentable state of the unfaithful; heaven, or the blessed state of the faithful; and especially in regard to the doctrine of faith which is acknowledged in the universal heaven; on which subjects, of the Lord’s Divine mercy, more will be said in the following pages.
해설
AC.5는 짧은 서문 AC.1-5의 마지막 글이면서, 앞의 네 글과는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AC.1-4에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에 속뜻이 있으며, 그 생명은 주님에게서 오고, 문자와 내적 의미의 관계가 인간의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의 관계와 같으며, 창세기 첫 장들이 속뜻에서 인간의 거듭남과 태고교회를 다룬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렇다면 독자에게는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이것을어떻게알았는가?’ AC.5는 바로 그 질문에 대한 그의 첫 번째 대답입니다.
첫 문장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이참으로그러하다는사실은주님으로부터가아니고서는아무도알수없습니다.’ 여기에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에 관한 지식의 궁극적인 출처를 자기 자신에게 두지 않습니다. 인간의 지성과 학문적 연구만으로 발견했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가 앞으로 밝히려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낸 해석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알게 된 것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따라서 AC.5는 단순한 영계 체험담의 서두라기보다, 앞으로 자신이 말할 것의 출처에 관한 선언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이어지는 표현에서도 같은 태도가 나타납니다. 그는 자신이 특별한 능력을 얻었다고 말하기보다 ‘주님의신적자비로말미암아’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으면서 그들의 말을 듣고 그들과 말하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가 함께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경험이 실제적이었다는 매우 강한 주장이고, 다른 하나는 그 경험의 원인을 자기 능력이나 공로에 돌리지 않는 태도입니다. ‘주님의신적자비’라는 표현은 이 짧은 AC.5안에서도 처음과 마지막에 사실상 글 전체를 감싸고 있습니다.
‘수년동안끊임없이,중단됨없이’라는 표현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주장하는 것은 어느 날 잠깐 환상을 보았거나 꿈속에서 영적인 광경을 경험했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는 상당한 기간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교통하며 듣고 말하는 상태가 계속 허락되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후 AC에 등장하는 영계에 관한 수많은 기록을 이해할 때에도 스베덴보리 자신이 그것을 단편적인 환상이나 상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그러므로그의모든주장은참이다’라고 결론 내리는 것과 ‘그가무엇을주장하는지를정확히이해하는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AC.5는 독자에게 자신의 경험을 강제로 증명하려는 단락이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앞으로 자신이 무엇을 근거로 말하는지를 먼저 밝히고 있습니다. 따라서 처음 읽는 독자는 이 단계에서 그의 영계 경험을 즉시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기보다, 우선 ‘저자는자신이이런경험을주님으로부터허락받았다고주장하며이책을쓰고있다’는 사실을 정확히 이해하고 이후의 내용을 따라가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자신이 보고 들었다고 하는 내용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단순히 ‘천국을보았다’고만 하지 않습니다. ‘여러종류의영들’, ‘죽음이후영혼들의상태’, ‘지옥’, ‘천국’, 그리고 ‘온천국에서인정되고있는신앙의교리’를 차례로 열거합니다. 이것은 앞으로 AC곳곳에 삽입될 영계 기록들의 주요 주제를 미리 보여 주는 작은 목차와도 같습니다. 실제로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는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속뜻을 해설하는 글 사이사이에 사후세계와 영들, 천국과 지옥, 인간의 영적 구조 등에 관한 기록을 광범위하게 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죽음이후영혼들의상태’라는 표현도 주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만 떼어 읽으면 인간이 지상에서는 몸을 가진 존재였다가 죽은 뒤에야 비로소 영적인 존재가 되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후 스베덴보리의 인간론을 따라가면 인간은 지상에서도 본질적으로 영적 존재이며 자연계에서는 물질적인 몸을 입고 살아간다는 설명을 만나게 됩니다. 죽음은 인간이 처음 영이 되는 사건이라기보다 물질적인 몸을 벗고 영적 세계에서 자신의 영적 생명을 계속 살아가는 전환입니다. 따라서 AC.5의 ‘soulsafterdeath’는 그 이후의 가르침 전체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지옥을 ‘불신앙가운데있는자들의비참한상태’, 천국을 ‘신앙안에있는자들의복된상태’라고 표현한 것도 이후 AC를 읽으면서 점차 깊어질 부분입니다. 여기서 ‘신앙’을 단순히 어떤 교리를 머리로 인정하는 것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으로 신앙과 체어리티, 진리와 선의 관계를 계속 설명하며, 사랑과 삶에서 분리된 신앙이 참된 신앙일 수 있는지를 매우 깊이 다룹니다. 따라서 이 짧은 서문의 ‘신앙있는자’와 ‘신앙없는자’를 오늘날 흔히 사용하는 종교적 소속이나 교리 동의 여부로 미리 고정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마지막의 ‘온천국에서인정되고있는신앙의교리’는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으로 제시할 신앙의 교리를 자기 개인의 신학 체계라고 소개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것이 ‘온천국에서인정되고있는’ 교리라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매우 큰 주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이 문장을 과장해서 확대하기보다, 그가 이후 실제로 무엇을 ‘신앙의교리’라고 설명하는지 AC를 따라가며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AC.5에서는 그 내용을 아직 상세하게 제시하지 않고 앞으로 더 말하겠다고만 예고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AC.5가 말씀의 속뜻에 관한 계시와 영계 경험을 완전히 동일한 것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영들과 천사들과 교통했다고 해서 ‘천사들에게창세기의속뜻을배워적었다’고 단순하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5의 첫 문장은 지식의 궁극적 출처를 ‘주님으로부터’라고 밝히고, 이어지는 문장에서는 영들과 천사들과의 교통을 통하여 사후세계에 관한 여러 사실을 듣고 보았으며 가르침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모든 것을 ‘천사들이스베덴보리에게가르쳐준신학’으로 압축하는 것은 이 단락 자체보다 더 나아간 설명이 됩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를 읽는 태도와도 연결됩니다. 그의 영계 경험을 흥미로운 초자연적 현상 자체로 소비하면 AC의 중심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현대인이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이유만으로 영계에 관한 모든 기록을 주변적인 장식으로 제거해 버려도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저술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놓치게 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 기록을 그가 제시하는 전체 질서 안에서 읽는 것입니다. 영계에 관한 지식 역시 결국 주님과 말씀, 천국과 교회, 인간의 거듭남과 영원한 삶을 이해하는 데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AC.5에서 가장 먼저 기억할 말은 ‘영들과천사들’보다 오히려 ‘주님의신적자비’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놀라운 경험을 말하면서도 그 경험의 출처와 허락을 주님께 돌립니다. 그리고 자신이 앞으로 말하려는 사후세계의 여러 사실과 신앙의 교리 역시 자기 자신을 중심에 세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알려지고 허락된 것을 전하려는 것으로 제시합니다.
이렇게 보면 AC.1-5는 하나의 짧지만 잘 짜인 서문을 이룹니다. AC.1은 말씀 안에 하늘의 깊은 비밀들이 있다고 선언합니다. AC.2는 그 말씀의 생명이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에게서 온다고 밝힙니다. AC.3은 문자와 속뜻의 관계를 몸과 영혼에 비유합니다. AC.4는 그 원리를 창세기에 적용하여 창세기 1장이 속뜻에서 인간의 거듭남과 태고교회를 다룬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AC.5는 ‘그것을어떻게알수있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그 지식은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자신에게 영적 세계와의 특별한 교통이 허락되었다고 증언합니다.
이제 서문은 끝나고 AC.6부터 창세기 1장의 실제 해설이 시작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창조의 여섯 날을 인간의 거듭남의 여섯 연속적인 상태로 개관한 뒤, 창1:1부터 말씀의 표현 하나하나를 풀어 갑니다. 따라서 AC.5는 단순히 ‘스베덴보리가영계를보았다’는 놀라운 이야기로 서문을 끝내는 글이 아닙니다. 독자가 이제부터 읽게 될 방대한 해설이 어떤 주장 위에 서 있는지를 밝히고, 그 문턱에서 다시 한번 모든 것의 근원을 ‘주님의신적자비’에 두는 글이라고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내적의미가없다면아무도이것을결코알수없습니다.그예로창세기의첫장들을들수있습니다.문자적의미로는세계의창조와에덴동산,그리고최초로창조된사람아담에관하여다루고있습니다.이것외에다른것을의미한다고생각하는사람은거의없습니다.그러나이어지는글들에서이모든것이아르카나를담고있으며,그아르카나는지금까지한번도계시된적이없었다는사실이충분히밝혀질것입니다. 첫장은내적의미에서새로운창조,곧인간의거듭남을일반적으로다루며,특별히는태고교회를다룹니다.실제로그장에는단하나의표현도없으며,가장작은부분에이르기까지이러한것들을표상하거나의미하거나그안에포함하지않는것이없습니다. While the mind cleaves to the literal sense alone, no one can possibly see that such things are contained within it. Thus in these first chapters of Genesis, nothing is discoverable from the sense of the letter other than that the creation of the world is treated of, and the garden of Eden which is called paradise, and Adam as the first created man. Who supposes anything else? But it will be sufficiently established in the following pages that these matters contain arcana which have never yet been revealed; and in fact that the first chapter of Genesis in the internal sense treats in general of the new creation of man, or of his regeneration, and specifically of the most ancient church; and this in such a manner that there is not the least expression which does not represent, signify, and enfold within it these things.
해설
AC.4는 서문의 흐름에서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AC.1-3에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문자 안에 하늘의 깊은 비밀들이 있고, 그 모든 것의 생명은 ‘생명그자체이신주님’에게서 오며, 문자만으로 본 말씀은 영혼 없는 몸과 같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4에서는 그 원리를 실제 창세기에 적용하기 시작합니다. ‘그렇다면창세기첫장들의속뜻은무엇을말하는가?’라는 질문에 처음으로 답하는 것입니다.
문자적으로 창세기 첫 장들은 천지의 창조, 에덴동산, 아담과 하와 등 인류의 시작에 관한 이야기로 읽힙니다. 스베덴보리도 이것이 문자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것외에다른것을의미한다고생각하는사람은거의없다’고 말합니다. 그의 관심은 문자에 적혀 있는 이야기를 지우는 데 있지 않고, 그 문자 안에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아르카나’, 곧 하늘의 깊은 비밀들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밝히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첫 열쇠가 바로 ‘새로운창조’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의 창조를 내적 의미에서 인간의 ‘거듭남’으로 읽습니다. 이것은 AC전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빛이있으라’ 하시고, 물을 나누고, 마른 땅이 드러나며, 식물이 나고, 해와 달과 별이 나타나고, 물고기와 새와 동물이 생기며, 마침내 사람이 창조되는 순서는 속뜻에서 주님께서 아직 영적으로 무질서한 인간을 단계적으로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과정을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창조’는 과거에 있었던 자연계의 창조라는 문자적 표현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생명을 받아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도 하나의 창조입니다. 사람은 자기 힘으로 자기 안에 영적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없으므로 거듭남은 주님께서 이루시는 ‘새로운창조’입니다. 이 점에서 창1:1의 ‘태초에하나님이천지를창조하시니라’는 말씀은 AC의 속뜻 안에서 한 인간 안에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이 형성되기 시작하는 이야기로 열리게 됩니다.
그런데 AC.4는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구별 하나를 덧붙입니다. 창세기 1장은 내적 의미에서 ‘새로운창조,곧인간의거듭남’을 ‘일반적으로’ 다루지만, ‘특별히’는 ‘태고교회’를 다룬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창세기 1장을 오직 개인의 심리적 변화에 관한 이야기로만 읽어서는 부족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동시에 인류의 가장 오래된 교회의 영적 상태와 그 형성을 보고 있습니다.
이 ‘개인의거듭남’과 ‘교회의역사’는 서로 무관한 두 해석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교회는 단순히 외적인 조직이나 제도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본질을 이루는 선과 진리는 사람 안에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따라서 한 인간이 거듭나는 질서와 교회가 형성되는 질서는 서로 깊이 연결됩니다. 창세기 1장에서 묘사되는 영적 창조의 질서는 일반적으로 모든 인간의 거듭남에 적용되면서, 특별히 인류 최초의 교회인 태고교회가 형성된 상태를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태고교회’(Most Ancient Church)라는 말도 처음 접하는 독자에게는 낯설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아주오래된교회’라는 일반명사가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사용하는 특정한 명칭입니다. 그는 창세기 초기의 사람들에게 오늘날과는 매우 다른 영적 상태가 있었으며, 특히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내적으로 지각하는 ‘퍼셉션’의 상태가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이후 AC를 따라가면 에덴동산, 아담, 하와, 뱀, 가인과 아벨 등의 이야기를 통하여 이 교회의 상태와 변화와 쇠퇴가 차례로 설명됩니다. 따라서 AC.4에서는 아직 태고교회의 모든 특징을 미리 배울 필요 없이, ‘창세기초기이야기가한개인의거듭남뿐아니라태고교회의영적역사도담고있다’는 정도를 우선 붙잡으면 충분합니다.
마지막 문장은 AC.1의 ‘전체적으로나개별적으로나’를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에 ‘단하나의표현도없으며,가장작은부분에이르기까지’ 새로운 창조와 태고교회에 관한 것들을 표상하거나 의미하거나 포함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창세기1장전체가대략거듭남을상징한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빛과 어둠, 저녁과 아침, 날과 물, 궁창과 땅, 식물과 광명체, 동물과 사람, 그리고 그것들이 나타나는 순서까지도 하나의 내적 질서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AC.6부터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1장의 표현 하나하나를 그렇게 읽기 시작합니다.
여기에서 ‘표상’과 ‘상응’이라는 개념이 중요해집니다. 자연계의 빛이 영적인 빛과 아무 관계도 없다면 창세기의 빛이 영적인 것을 나타낼 근거가 없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자연계와 영계가 서로 무관한 두 세계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비롯된 하나의 질서 안에서 서로 상응한다고 봅니다. 이 상응을 바탕으로 자연적인 사람과 사물과 사건이 영적인 것을 드러내 보일 수 있으며, 이것을 이해하는 데 ‘표상’이라는 말도 사용됩니다. 따라서 창세기의 속뜻은 독자가 문자에 마음대로 의미를 덧붙이는 방식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주장하는 상응과 표상의 질서를 따라 읽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이 거듭남을 다룬다고 해서 오늘 나의 경험을 창조의 각 절에 임의로 대입해서는 안 됩니다. ‘빛은나에게이런느낌이고바다는저런경험이다’라는 식의 주관적인 상징 해석과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은 다릅니다. AC는 말씀 전체에서 반복되는 용례와 영적 질서를 따라 각 표현의 의미를 설명하려 합니다. 그래서 하나의 단어를 설명하기 위해 성경의 여러 곳을 인용하고, 앞뒤 AC글들을 계속 연결합니다. 앞으로 AC를 읽을 때 개별 상응을 고립시키지 않고 전체 문맥 안에서 보는 것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또한 창세기 1장을 거듭남으로 읽는다고 해서 자연계의 창조에 관한 질문을 AC가 모두 해결하려 한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AC.4에서 스베덴보리의 관심은 현대적인 의미의 우주론이나 지질학적 연대를 논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가 앞으로 펼쳐 보이려는 것은 말씀의 ‘내적의미’입니다. 따라서 AC를 읽을 때에는 ‘창조가과학적으로어떻게이루어졌는가?’라는 질문과 ‘이창조이야기가말씀의속뜻에서무엇을말하는가?’라는 질문을 우선 구별해 두는 것이 좋습니다.
이제 AC.1-4의 흐름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AC.1은 말씀 안에 하늘의 깊은 비밀들이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AC.2는 그 생명이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에게서 온다고 했습니다. AC.3은 문자와 속뜻의 관계를 몸과 영혼에 비유했습니다. 그리고 AC.4는 마침내 그 원리를 창세기에 적용하여 ‘창세기1장은속뜻에서새로운창조,곧거듭남을일반적으로,태고교회를특별히다룬다’고 밝힙니다.
그러므로 AC.4는 앞으로 긴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 여행의 안내판과도 같습니다. 창세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옛날에무슨일이있었는가?’만 묻지 않고 ‘이말씀은인간이어떻게새롭게창조되는지를어떻게보여주는가?’, ‘교회는어떻게형성되고변화되는가?’,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모든일을이루시는주님은어떤분이신가?’를 함께 묻게 됩니다. 바로 그 질문을 가지고 AC.6부터 창세기 1장의 첫날로 들어가게 됩니다.
‘왜 거듭남은 겉 사람이 아니라 속 사람에서 시작되는가’를 이해하려면 먼저 거듭남이 무엇인지부터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거듭남은 단순히 행동이 조금 좋아지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거듭남은 인간의 삶의 중심이 바뀌는 과정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기준으로 살아가는지가 바뀌는 것입니다. 바로 이 중심이 있는 곳이 ‘속 사람’이기 때문에, 거듭남도 속 사람에서 시작됩니다.
먼저 겉 사람만 바뀌는 경우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쁜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예를 들어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고 하고, 화를 억제하고, 남을 돕는 행동을 하려고 합니다. 이런 변화는 분명히 중요하고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 변화가 오직 겉 행동에만 머문다면, 속 사람은 아직 그대로일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친절하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남을 미워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는 정직하지만, 속으로는 기회를 찾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상태는 진짜 변화라기보다 ‘겉의 정리’에 가깝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은 이런 수준을 넘어섭니다. 그는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느냐’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예전에는 자기 이익이나 자존심을 중심으로 생각했다면, 점점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방향으로 마음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는 겉 사람이 아니라 속 사람에서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사랑과 의도는 행동의 바깥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나무의 비유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나무의 열매가 좋지 않다면 가지에 붙은 열매만 바꿀 수는 없습니다. 열매는 뿌리와 줄기에서 올라오는 생명에 의해 결정됩니다. 뿌리가 건강하면 열매도 달라집니다. 속 사람의 변화는 뿌리와 같고, 겉 사람의 행동은 열매와 같습니다. 그래서 진짜 변화는 뿌리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을 말합니다. 속 사람은 주님과 연결되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겉 삶은 세상과 직접 연결되어 있지만, 속 사람은 더 높은 질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진리를 배우고 선을 선택할 때,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과 빛이 속 사람으로 들어옵니다. 그 빛이 점점 자라면 겉 사람의 생각과 행동도 새로운 방향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이 과정을 실제 삶에서 보면 이렇게 나타납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진리를 ‘배웁니다’. 예를 들어, ‘남을 속이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다음에는 그것을 ‘생각’합니다.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고 마음속에서 인정합니다. 그리고 그다음 단계에서는 그것을 ‘선택’합니다. 비록 손해가 있어도 더 이상 거짓말을 하지 않기로 결심, 결정합니다. 이런 선택이 반복되면 속 사람 안에서 새로운 사랑이 자라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겉 사람의 행동도 점점 자연스럽게 바뀝니다.
반대로 겉 사람만 바꾸려고 하면 오래 지속되기 어렵습니다. 속 사람이 그대로라면, 겉의 변화는 피곤한 노력으로 남습니다. 그러나 속 사람이 바뀌기 시작하면 겉 사람의 변화는 점점 자연스러워집니다. 마치 방향이 바뀐 강물이 결국 다른 곳으로 흐르듯이, 삶의 흐름 자체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을 ‘인간의 새 창조’라고 설명합니다. 창조 이야기는 단순히 세상이 만들어진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속 사람이 질서를 회복하는 과정을 상징합니다. 처음에는 어둠과 혼돈 같은 상태에서 시작하지만, 점점 빛이 생기고, 구분이 이루어지고, 생명이 나타나는 단계가 이어집니다. 이 모든 과정은 속 사람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단계라고 설명됩니다.
이렇게 보면 거듭남이 왜 속 사람에서 시작되는지 분명해집니다. 겉 사람은 표현이고 결과입니다. 속 사람은 방향과 근원입니다. 방향이 바뀌지 않으면 결과도 오래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방향이 바뀌면 삶 전체의 흐름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겉 행동의 개선이 아니라 속 중심의 변화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는지, 무엇을 옳다고 여기는지, 무엇을 위해 살고 싶은지가 바뀌는 것입니다. 이 변화가 시작될 때, 겉 사람의 삶도 조금씩 새롭게 정리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의 질서입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실제 삶에서 어떻게 상호작용하는가’를 이해하려면 먼저 아주 간단한 원리를 기억하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삶은 항상 ‘안에서 바깥으로’ 흘러갑니다. 즉 먼저 속 사람이 있고, 그 다음에 겉 사람이 있습니다. 속 사람은 방향을 정하고, 겉 사람은 그것을 행동으로 나타냅니다. 겉 사람은 표현이고, 속 사람은 그 표현의 근원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길에서 지갑을 발견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겉 사람의 행동만 보면 선택은 두 가지입니다. 주인을 찾아 돌려줄 수도 있고, 그냥 가져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행동이 나오기 전에 이미 속 사람 안에서는 생각과 마음의 움직임이 일어납니다. ‘주인을 찾아줘야 한다’는 마음이 생길 수도 있고, ‘아무도 모르니까 가져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올라올 수도 있습니다. 바로 이 보이지 않는 내부의 움직임이 속 사람의 영역입니다. 그리고 결국 겉 사람은 그 내부의 방향을 따라 행동하게 됩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누군가에게 화가 났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겉 사람은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말과 행동은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속 사람 안에서 이미 판단과 감정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속 사람 안에서 ‘참아야겠다’는 생각이 생기면 겉 사람은 조용히 있게 됩니다. 반대로 속 사람 안에서 ‘가만있으면 안 된다’는 마음이 강해지면 겉 사람은 말로 공격하거나 행동으로 드러냅니다. 겉 사람은 항상 속 사람의 영향을 받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관계를 종종 ‘도구와 사용자’의 관계로 설명합니다. 겉 사람은 도구이고, 속 사람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펜은 글을 쓰는 도구일 뿐입니다. 펜이 무엇을 쓸지는 손을 움직이는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겉 사람의 말과 행동은 속 사람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러나 현실의 삶에서는 이 관계가 항상 단순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겉 사람도 다시 속 사람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친절하게 행동한다고 해보겠습니다. 처음에는 마음이 따라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행동을 반복하다 보면 속 사람의 마음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합니다. 반대로 나쁜 행동을 계속하면 속 사람의 생각도 점점 거칠어집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겉 사람의 훈련도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이 관계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좋은 비유는 ‘창문’입니다. 속 사람은 빛이 들어오는 방과 같고, 겉 사람은 창문과 같습니다. 창문이 깨끗하면 빛이 잘 들어옵니다. 창문이 더러우면 빛이 흐려집니다. 빛의 근원은 밖에 있지만, 빛이 방 안으로 얼마나 잘 들어오는지는 창문의 상태에 영향을 받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과 진리는 속 사람으로 들어오지만, 그것이 겉 사람의 삶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는 우리의 생활 방식과 선택에 영향을 받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에서 특히 중요한 점은, 인간이 두 층 사이에 ‘자유로운 연결 지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속 사람에서 오는 더 높은 생각과, 겉 사람에서 올라오는 낮은 욕구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 선택의 순간이 바로 인간의 도덕적 삶이 이루어지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단순히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라, 선택하고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일상생활에서 이 상호작용은 매우 자주 나타납니다.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놀고 싶은 마음이 들 때,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긴장이 나타납니다. 누군가를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마음이 따라주지 않을 때도 같은 현상이 일어납니다. 이때 사람이 어떤 선택을 반복하느냐에 따라 속 사람의 방향이 점점 더 분명해집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성장, 곧 거듭남이 이 두 영역의 관계 속에서 일어난다고 설명합니다. 처음에는 겉 사람이 세상의 습관과 욕망에 더 많이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진리를 배우고 선을 선택하기 시작하면 속 사람이 점점 더 힘을 갖게 됩니다. 그러면 겉 사람의 삶도 점차 새로운 방향으로 정리됩니다.
결국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상호작용은 인간 삶의 거의 모든 순간에서 일어납니다. 생각이 행동이 되고, 행동이 다시 마음을 형성합니다. 보이지 않는 속 사람의 방향이 겉 사람의 삶을 만들고, 겉 사람의 반복된 선택이 속 사람의 상태를 더 분명하게 만들어 갑니다. 이 두 층이 서로 연결되고 조화를 이루는 것이 바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인간 삶의 건강한 질서입니다.
이러한생명이없다면,문자로서의말씀은죽은것입니다.이점은인간의경우와같습니다.기독교세계에알려져있듯이인간에게는속사람과겉사람이있습니다.겉사람은속사람과분리되면몸에불과하며,따라서죽은것입니다.살아있는것은속사람이며,겉사람을살아있게하는것도속사람이기때문입니다.속사람이영혼입니다.말씀도이와같습니다.문자만으로본말씀은영혼없는몸과같습니다. Without such a life, the Word as to the letter is dead. The case in this respect is the same as it is with man, who—as is known in the Christian world—is both internal and external. When separated from the internal man, the external man is the body, and is therefore dead; for it is the internal man that is alive and that causes the external man to be so, the internal man being the soul. So is it with the Word, which, in respect to the letter alone, is like the body without the soul.
해설
AC.3은 앞선 두 글에서 말한 내용을 매우 간결하고 강력한 비유 하나로 정리합니다. AC.1에서는 말씀의 문자 안에 하늘의 깊은 비밀들이 들어 있다고 했고, AC.2에서는 말씀의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 ‘생명그자체이신주님’을 향하기 때문에 말씀에 생명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에서는 그 관계를 ‘몸과영혼’의 관계에 비유합니다. 문자만으로 본 말씀은 영혼 없는 몸과 같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먼저 주의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문자를 무가치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몸이 인간에게 불필요한 것이 아니듯 말씀의 문자도 불필요한 껍데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속뜻은 문자를 통하여 자연계의 인간에게 전달됩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고 듣고 기억하고 가르칠 수 있는 것도 문자적 형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요점은 ‘몸은버리고영혼만취하라’는 것이 아니라, ‘몸만보고그것이인간의전부라고생각해서는안된다’는 데 있습니다.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점은 앞으로 AC를 읽을 때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속뜻 해설을 처음 접하면 ‘그렇다면성경에기록된문자적의미는별로중요하지않은가?’라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문자는 속뜻을 담는 그릇이며 기반입니다. 더 나아가 그의 후기 말씀론에서는 말씀의 문자적 의미에 신적 진리가 충만하고, 천국과 인간을 연결하는 힘이 있음을 매우 강하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AC.3의 ‘문자로서의말씀은죽었다’는 표현을 ‘문자적의미자체가죽어있고가치가없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비교되는 것은 ‘내적인생명과분리하여문자만을보는상태’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의 ‘영혼’에 해당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앞의 AC.2가 그 답을 줍니다. 말씀 안의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 주님을 향하고 있으며, 그 주님이 ‘생명그자체’이시기 때문에 말씀에 생명이 있습니다. 따라서 말씀의 속뜻은 단순히 문자 뒤에 숨어 있는 또 하나의 정보층이 아닙니다. 그 속뜻을 따라 들어가면 천국과 교회, 신앙과 거듭남에 관한 것들이 열리고, 더 깊은 중심에서는 모든 것이 주님을 향합니다. 이것이 말씀의 내적 생명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인간을 비유로 사용하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을 겉모습만 보고 그 사람 전체를 알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몸은 그 사람을 이 세상에 드러내지만, 몸의 움직임 뒤에는 생각과 의도와 사랑이 있습니다. 손으로 누군가를 돕는 행위 하나에도 그 사람의 의도와 애정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말씀의 문자 안에도 그 문자를 통하여 표현되는 더 내적인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의 몸과 영혼의 관계와 말씀의 문자와 속뜻의 관계가 모든 점에서 동일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인간의 내적·외적 구조를 이용하여 말씀에도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있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속사람’과 ‘겉사람’이라는 말도 처음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 짧은 AC.3만 가지고 속 사람을 단순히 ‘영혼’, 겉 사람을 단순히 ‘육체’라고 고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 글에서는 몸과 영혼의 비유를 위해 그렇게 간결하게 표현하지만, 이후 AC에서 인간의 구조를 설명할 때 ‘속사람’과 ‘겉사람’은 훨씬 풍부하고 세밀한 의미로 사용됩니다. 특히 겉 사람은 단순한 육체만이 아니라 자연계와 관계하며 생각하고 느끼고 살아가는 인간의 자연적 차원과도 깊이 관련됩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우선 ‘인간에게내적인것과외적인것이있으며,외적인것은내적인것으로부터생명과질서를받아야한다’는 기본 원리를 붙잡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다면 속뜻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말씀은 ‘죽은말씀’일까요? 그렇게 이해해서는 곤란합니다. 사람이 상응을 모르고 AC의 속뜻을 알지 못하더라도, 말씀의 문자 안에서 주님을 믿고 계명을 따라 살며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는 사람이 그것을 학문적으로 알고 있을 때에만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알든 모르든 말씀 안에는 이미 내적 의미가 있고 천국과의 연결이 있습니다. AC가 하는 일은 인간이 만들어 넣은 숨은 뜻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스베덴보리의 주장에 따르면 본래 말씀 안에 들어 있는 그 내적 질서를 열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AC.3은 ‘속뜻을아는사람이성경을더살아있게만든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생명은 인간의 해석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옵니다. 오히려 이 글은 말씀을 인간의 자연적 이해 안에 가두지 말라는 요청에 가깝습니다. 역사적 사실과 도덕적 교훈과 문자적 교리만으로 말씀의 모든 깊이를 다 알았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 문자 안에 주님께서 넣어 두신 영적이고 천적인 것이 있음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AC.1-3의 흐름이 매우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AC.1은 ‘문자안에하늘의깊은비밀들이있다’고 문을 엽니다. AC.2는 ‘그모든것의생명은생명그자체이신주님에게서온다’고 그 중심을 밝힙니다. 그리고 AC.3은 ‘그렇기때문에문자만으로본말씀은영혼없는몸과같다’고 설명합니다. ‘비밀→생명→몸과영혼’이라는 세 단계가 하나의 말씀론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AC.4로 넘어갈 준비가 됩니다. 지금까지 스베덴보리는 원리만 말했습니다. 말씀에는 문자와 속뜻이 있고, 그 속뜻에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실제 성경을 펼쳤을 때 그 속뜻은 어떻게 나타날까요? AC.4는 그 첫 사례로 창세기 첫 장들을 가리킵니다. 문자적으로는 천지창조와 에덴동산과 최초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서는 인간의 새로운 창조, 곧 거듭남과 태고교회의 상태가 다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AC.1-3에서 세운 원리가 실제 창세기 본문을 향하기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