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천국을 만드는 것은 주님의 신성이다
It Is the Divine of the Lord That Makes Heaven
HH.9
천사들은 그들의 지혜로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선과 진리뿐 아니라 생명에 속한 모든 것 역시 주님으로부터 온다고 말이지요. 그들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컨펌(confirm)합니다. 어떤 것도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생겨날 수 없고, 오직 자기보다 앞선(prior to) 어떤 것에서만 생겨날 수 있으며, 그러므로 모든 것은 하나의 첫째(a first)로부터, 즉 맨 처음 존재로부터 나온다고 말입니다. 그들은 이것을 만물 생명의 ‘존재 그 자체’(esse)라고 합니다. 또한 존재의 지속도 마찬가지인데요, 지속적 존재란 끊임없는 생겨남(a ceaseless springing forth)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도 중간 매개들(intermediates)을 통하여 처음과 계속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즉시 흩어지고 완전히 소멸됩니다. 천사들은 또한 말하기를, 생명의 근원은 오직 하나이며, 인간의 생명은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와 같다고 합니다. 만일 그 물줄기가 그 근원으로부터 끊임없이 이어지지 않는다면, 즉시 말라 버릴 것입니다. Angels from their wisdom go still further. They say that not only everything good and true is from the Lord, but everything of life as well. They confirm it by this, that nothing can spring from itself, but only from something prior to itself; therefore all things spring from a first, which they call the very being [esse] of the life of all things. And in like manner all things continue to exist, for continuous existence is a ceaseless springing forth, and whatever is not continually held by means of intermediates in connection with the first instantly disperses and is wholly dissipated. They say also that there is but one fountain of life, and that man’s life is a rivulet therefrom, which if it did not unceasingly continue from its fountain would immediately flow away.
[2] 천사들은 또 말하기를, 이 하나의 생명의 근원(fountain), 곧 주님으로부터 나아오는 것은 오직 신적 선(Divine good)과 신적 진리(Divine truth)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각 사람은 그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영향을 받는데요, 그것들을 신앙과 삶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그 안에서 천국을 발견하지만, 그것들을 거부하거나 억누르는 자는 그것을 지옥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선을 악으로, 진리를 거짓으로, 그리고 그렇게 해서 생명을 죽음으로 바꾸기 때문입니다. 거듭 생명의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천사들은 이렇게 컨펌합니다. 우주의 모든 것은 선과 진리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인간 의지의 생명, 곧 그의 사랑의 생명은 선과 관련되어 있고, 그의 이해의 생명, 곧 그의 신앙의 생명은 진리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선과 진리가 위로부터 오기 때문에, 생명의 모든 것도 위로부터 와야 한다고 말입니다. Again, they say that from this one fountain of life, which is the Lord, nothing goes forth except Divine good and Divine truth, and that each one is affected by these in accordance with his reception of them—those who receive them in faith and life find heaven in them while those who reject them or stifle them change them into hell; for they change good into evil and truth into falsity, thus life into death. Again, that everything of life is from the Lord they confirm by this: that all things in the universe have relation to good and truth—the life of man’s will, which is the life of his love, to good, and the life of his understanding, which is the life of his faith, to truth; and since everything good and true comes from above it follows that everything of life must come from above.
[3] 이러한 믿음을 지닌 천사들은 자기들이 행한 선에 대해 어떤 감사도 받으려 하지 않으며, 누가 선을 그들에게 돌리면 기뻐하지 않고 물러납니다(withdraw). 누군가가 자기가 스스로 지혜롭다고 믿거나, 스스로 선을 행한다고 믿는 것을 그들은 이상하게 여깁니다. 자기 자신을 위하여 선을 행하는 것은 선이라 부르지 않는데, 그것은 자기(self)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을 위하여 선을 행하는 것은 신성(the Divine)으로부터 나온 선이라 부르며, 그들은 이것이 곧 천국을 이루는 선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 선이 곧 주님이기 때문입니다.주18 This being the belief of the angels they refuse all thanks for the good they do, and are displeased and withdraw if anyone attributes good to them. They wonder how anyone can believe that he is wise from himself or does anything good from himself. Doing good for one’s own sake they do not call good, because it is done from self. But doing good for the sake of good they call good from the Divine; and this they say is the good that makes heaven, because this good is the Lord.18
주18. 주님으로 말미암는 선은 그 안에 내적으로 주님이 계시지만, 사람으로 말미암는 선은 그렇지 않다. Good from the Lord has the Lord inwardly in it, but good from one’s own has not (n. 1802, 3951, 8480).
해설
이 글은 HH.8에서 제시된 원리를 철학적, 형이상학적 깊이로 확장합니다. 단지 ‘선과 진리는 주님한테서 온다’는 차원을 넘어, ‘생명 그 자체가 주님한테서 온다’고 말합니다.
천사들의 논증은 매우 단순하면서도 근본적입니다. ‘아무것도 스스로 생겨날 수 없다.’ 이것은 존재론의 제1 원리입니다. 어떤 것이 존재하려면, 그것보다 앞선 원인이 있어야 합니다. 끝없이 거슬러 올라가면, 반드시 ‘맨 처음’, 곧 더 이상 다른 것에서 오지 않는 근원이 있어야 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esse’, 곧 ‘존재 그 자체’는 바로 그 첫째 원리이며, 스베덴보리에게 그것은 주님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속적 존재는 끊임없는 생겨남’이라는 통찰입니다. 우리는 존재를 한 번 생겨난 후 스스로 유지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천사들의 관점에서는 존재란 매 순간 새롭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마치 등불이 계속 타오르려면 계속 기름이 공급되어야 하듯, 생명은 매 순간 근원으로부터 흘러들어와야 합니다. 연결이 끊어지면 즉시 소멸입니다.
‘인간의 생명은 근원에서 흘러나오는 시냇물, 물줄기와 같다’는 비유는 매우 아름답습니다. 시냇물은 스스로 흐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근원이 있기에 흐릅니다. 만일 근원이 마르면, 흐름도 사라집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의지, 생각, 사랑, 신앙은 모두 생명의 근원과 연결되어 있을 때만 살아 있습니다.
또한 주님으로부터 나아오는 것은 오직 ‘신적 선’과 ‘신적 진리’뿐이라고 말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같은 신적 유입이 사람에 따라 ‘천국’이 되기도 하고, ‘지옥’이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근원이 둘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근원은 하나입니다. 그러나 수용 방식이 다릅니다. 받아들이는 이는 선과 진리 안에서 사랑과 신앙을 이루고, 거부하거나 왜곡하는 이는 그것을 악과 거짓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즉, 지옥은 별도의 창조물이 아니라, 왜곡된 수용의 결과입니다.
이어지는 설명에서 천사들은 생명의 구조를 선과 진리의 관계로 설명합니다. 의지의 생명은 사랑이며 선과 관련되고, 이해의 생명은 신앙이며 진리와 관련됩니다. 모든 선과 진리가 위로부터 온다면, 의지와 이해의 생명 역시 위로부터 와야 합니다. 이로써 ‘생명 전체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도출됩니다.
이러한 인식 때문에 천사들은 선에 대한 감사를 받지 않으려 합니다. 선을 자기 것으로 돌리는 순간, 그것은 이미 변질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하여 선을 행하는 것은 겉으로는 선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자기 사랑의 확장일 수 있습니다. 반면 ‘선을 위하여 선을 행하는 것’은 곧 신적 선의 흐름에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 자체가 주님이시기 때문에, 그 선이 곧 천국을 이룹니다.
이 글은 인간의 공로 의식과 자율성에 대한 자연적 사고를 근본에서 흔듭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을 무가치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높입니다. 왜냐하면 ‘근원과 연결된 존재’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빛나는 존재가 아니라, 태양과 연결될 때 빛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연결이 바로 천국입니다.
결국 HH.9은 이렇게 말합니다.
‘생명은 소유가 아니라 참여다.’
그리고 그 참여가 사랑과 신앙 안에서 이루어질 때, 그것이 곧 천국입니다.
심화
1. ‘형이상학’(形而上學)
‘형이상학’(形而上學)이라는 말이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는, 일상에서 잘 쓰이지 않는 철학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아주 쉽게 말하면, 형이상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근본 원리를 묻는 학문’입니다. 무엇이 존재하는가, 존재는 어떻게 유지되는가, 모든 것의 근원은 무엇인가 같은 질문을 다룹니다. 눈에 보이는 사물이나 현상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존재의 구조와 원인을 묻는 것이 형이상학입니다.
예를 들어, 나무가 자라는 과정을 생물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과학입니다. 그러나 ‘왜 무엇인가가 존재하는가?’, ‘존재는 스스로 설 수 있는가, 아니면 근원이 필요한가?’ 같은 질문은 형이상학입니다. HH.9에서 천사들이 ‘아무것도 스스로 생겨날 수 없고, 모든 것은 처음 것에서 나온다’고 말하는 부분이 바로 형이상학적 사고입니다. 이것은 도덕 이야기가 아니라, 존재의 근본 구조를 묻는 설명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단지 ‘착하게 살아라’고 말하는 윤리 교사가 아니라, ‘존재 자체는 어디에서 오는가?’를 묻는 사상가입니다. 그가 ‘지속적 존재는 끊임없는 생겨남이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철저히 형이상학적 진술입니다. 우리는 한 번 태어나면 그냥 계속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는 존재가 매 순간 근원으로부터 유지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이 바로 형이상학입니다.
‘형이상학은 보이는 것 뒤에 있는 보이지 않는 근본을 묻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HH.9에서는 ‘모든 생명의 근원은 주님이시다’라는 존재의 근본 원리를 설명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그것을 형이상학적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다시 말해, 행동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구조를 다루는 설명이라는 뜻입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형이상학은 “왜 존재하는가, 무엇이 근원인가”를 묻는 사유이며, HH.9는 바로 그 차원에서 생명의 근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2. ‘생명’
이 ‘생명’에 대한 질문은 HH.9에서 가장 근본을 묻는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생명’은 단순히 숨 쉬고 움직이는 상태를 뜻하지 않습니다. 그는 생명을 ‘사랑하고 생각하고 의지하는 능력의 근원’으로 이해합니다. 다시 말해, 생명은 단순한 생물학적 활동이 아니라, 사랑하고, 원하고, 이해하고, 신앙하는 그 모든 의식 활동의 근원적 힘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생명은 인간의 소유가 아니라, 오직 주님께만 속한다고. 인간은 생명의 근원이 아니라 생명을 받는 그릇입니다. 우리가 ‘내가 생각한다’, ‘내가 사랑한다’, ‘내가 결정한다’고 느끼지만, 그 생각과 사랑과 의지의 능력 자체는 근원에서 계속 흘러와야 유지됩니다. 그래서 HH.9에서 ‘지속적 존재는 끊임없는 생겨남’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생명은 한 번 주어지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주어지는 것입니다.
‘생명은 단순히 살아 있다는 상태가 아니라, 사랑하고 생각할 수 있는 힘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덧붙일 수 있습니다. ‘그 힘의 근원은 나 자신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마치 빛은 전구가 내지만, 그 근원인 전기는 발전소에서 오는 것처럼, 우리는 사랑하고 생각하지만, 그 생명의 근원은 우리 안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생명은 항상 ‘사랑’과 ‘진리’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의지의 생명은 사랑이고, 이해의 생명은 진리 안에서 활동합니다. 그래서 모든 생명이 선과 진리의 관계 안에서 설명됩니다. 만약 사랑이 왜곡되면 생명도 왜곡되고, 진리가 거짓으로 변하면 생명의 빛도 어두워집니다. 그가 ‘선과 진리를 거부하면 생명을 죽음으로 바꾼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생명은 내가 살아 있다는 느낌이 아니라, 사랑하고 생각하게 하는 근원적 힘이며, 그 근원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3. ‘존재론’(存在論)
이런 용어를 정확히 풀어 두지 않으면, HH 같은 텍스트는 계속 추상적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존재론’(存在論)은 아주 간단히 말하면 ‘무엇이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묻는 생각입니다. 더 어렵게 말하면 ‘존재의 구조를 다루는 철학’이지만, 쉽게 풀면 ‘있는 것의 근본을 묻는 질문’입니다.
예를 들어 이런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은 어떻게 착해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윤리의 문제입니다. ‘사람은 왜 존재하는가?’ 또는 ‘사람의 생명은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질문은 존재론의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 행동의 옳고 그름을 묻는 것이 아니라, 그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의 근원을 묻는 것입니다. HH.9에서 천사들이 ‘아무것도 스스로부터 생겨날 수 없다’고 말할 때, 그것은 도덕 이야기가 아니라 존재론적 설명입니다. 존재가 어떻게 유지되는지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존재론은 “왜 있는가?”를 묻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묻는다면 그것은 삶의 방법에 대한 질문이고, ‘왜 내가 존재하는가?’를 묻는다면 그것은 존재론적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착하게 살아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진리, 생명 자체는 어디에서 오는가?’를 묻습니다. 그래서 그의 설명은 존재론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조금 더 쉬운 비유를 들면 이렇습니다. 나무가 열매를 맺는 법을 설명하는 것은 농업 지식입니다. 그러나 ‘나무가 존재할 수 있는 근원은 무엇인가? 씨앗은 어디에서 왔는가?’를 묻는 것은 존재론적 질문입니다. HH.9는 바로 이런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생명은 어디에서 오는가?’, ‘존재는 스스로 설 수 있는가?’를 묻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존재론은 “무엇이 근원이며, 무엇이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묻는 생각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도덕만 말하는 분이 아니라, 존재의 근원을 설명하는 분이기 때문에 이런 용어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4. ‘esse’
‘esse’는 라틴어로, 가장 기본적인 뜻은 ‘있다’(to be)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이 단어를 사용할 때는 단순히 ‘존재한다’는 상태를 넘어서, ‘존재하게 하는 근원적 있음’, 곧 ‘존재 그 자체’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HH.9에서 천사들이 ‘만물 생명의 존재 그 자체’(the very being [esse] of the life of all things)라고 말할 때, 그것은 단순히 ‘하나의 존재’가 아니라,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는 근원적 있음, 더 이상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첫째 원리를 뜻합니다.
쉽게 설명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나도 있고, 나무도 있고, 별도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개별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esse’는 그런 개별적인 것들보다 더 깊은 차원입니다. ‘도대체 있음이라는 것은 어디에서 오는가?’를 묻는 자리입니다. 어떤 것도 스스로 존재할 수 없다면, 반드시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는 첫 근원이 있어야 합니다. 그 근원을 그는 ‘esse’라고 부르고, 그것을 곧 주님과 동일시합니다.
‘esse는 그냥 “있다”가 아니라, “있게 하는 있음”입니다.’ 마치 전구 하나하나는 빛나지만, 그 빛을 가능하게 하는 전기가 따로 있듯이, 개별 존재들은 있지만, 그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근원이 있습니다. 그 근원적 있음이 바로 ‘esse’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는 ‘esse’와 ‘existere’를 구분합니다. ‘esse’는 존재의 근원이고, ‘existere’는 그 존재가 밖으로 나타난 상태입니다. 태양 자체가 ‘esse’라면, 그 빛이 퍼져 나와 드러나는 것은 ‘existere’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존재 그 자체(esse)이시고, 그분으로부터 나오는 사랑과 진리는 나타남(existere)의 차원에서 피조물 안에 드러납니다.
그래서 HH.9에서 말하는 ‘esse’는 철학적 장식어가 아니라, 매우 중요한 신학적 선언입니다. ‘생명은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이신 주님에게서 나온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esse는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 모든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 있음이며,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주님으로 이해합니다.’
5. ‘의지의 생명, 이해의 생명’
‘의지의 생명, 이해의 생명’이라는 표현은 처음 들으면 매우 추상적으로 들리지만, 사실은 인간 안의 가장 기본적인 두 기능을 설명하는 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을 크게 두 축으로 봅니다. 하나는 ‘의지’(will), 곧 사랑하고 원하고 선택하는 능력이고, 다른 하나는 ‘이해’(understanding), 곧 생각하고 판단하고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 두 기능이 단순한 심리 작용이 아니라, ‘생명’의 서로 다른 표현이라고 말합니다.
‘의지의 생명’이라는 것은 의지를 의지 되게 하는 근원적 힘을 뜻합니다. 의지는 단순히 결심하는 능력이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원하는지에 의해 움직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의지의 생명을 곧 ‘사랑의 생명’이라고 설명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진정으로 사랑하는가가 그의 의지의 중심입니다. 이 사랑이 바로 의지의 생명입니다. 만약 사랑이 없다면, 의지는 작동하지 않습니다.
‘이해의 생명’은 이해를 이해 되게 하는 근원적 힘을 뜻합니다. 이해는 단순한 정보 처리 능력이 아니라, 무엇이 참인지 분별하고 의미를 파악하는 능력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신앙의 생명’ 혹은 ‘진리의 생명’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참으로 받아들이고 믿는가가 그의 이해의 중심을 형성합니다. 진리의 빛이 없다면 이해는 어둡습니다.
‘사람 안에는 사랑하는 부분과 생각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부분이 의지이고, 생각하는 부분이 이해입니다. 그리고 그 둘을 움직이게 하는 근원적 힘을 각각 의지의 생명, 이해의 생명이라고 합니다.’ 즉, 의지는 사랑으로 살고, 이해는 진리로 삽니다.
조금 더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자동차에 엔진과 조향 장치가 있다고 합시다. 엔진이 차를 움직이게 하는 힘이라면, 그것이 의지의 생명과 비슷합니다. 조향 장치가 방향을 잡아 준다면, 그것이 이해의 생명과 비슷합니다. 둘 다 있어야 차가 제대로 움직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랑만 있고 진리가 없으면 방향을 잃고, 진리만 있고 사랑이 없으면 움직일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HH.9에서 ‘의지의 생명은 선과 관련되고, 이해의 생명은 진리와 관련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생명은 하나이지만, 인간 안에서는 사랑과 진리라는 두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근원은 오직 주님에게 있습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의지의 생명은 사랑이며, 이해의 생명은 진리이고, 이 두 생명이 함께 작용할 때 인간은 살아 있는 존재가 됩니다.’
HH.8, 2장, '주님 신성의 수용은 철저한 자기 부인 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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