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스베덴보리 해석의 핵심 중 하나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는 ‘노아의 홍수’를 실제 지구상에서 일어난 물리적 사건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가장 옛 교회(The Most Ancient Church)”의 영적 멸망을 묘사한 상징적(혹은 내적) 이야기라고 설명합니다.


1️⃣ 스베덴보리의 기본 입장: 성경은 “내적 의미”로 쓰였다

그는 Arcana Coelestia 전체를 통해 반복해서 말합니다:

“The Word is written in correspondences, and by means of representatives.”
(AC 1405)

즉, 성경의 모든 사건·이야기는 ‘상응(correspondence)’, 즉 영적 실체를 표현하는 상징적 형식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홍수”도, “방주”도, “비가 40일 내린 것”도,
물리적 사건이 아니라 영적 상태의 묘사입니다.


2️⃣ 홍수의 “내적 의미” (AC 705, 739, 778 등 요약)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풀이합니다:

성경의 겉뜻 내적 의미

물(물결, 큰 물) falsities (거짓들)
홍수(flood) 거짓과 악이 인간의 내면을 덮은 상태
방주(ark) 남은 선(remains) — 신앙의 씨앗
노아(Noah) 새로운 교회의 사람
비가 40일 내림 시험(temptation)과 정화 과정

즉, “홍수로 세상이 멸망했다”는 말은 곧

“인류의 내적 교회가, 진리와 선을 잃고 거짓과 악에 잠겨 멸망했다”
는 뜻으로 풀이됩니다.


3️⃣ 그러나 “상징만은 아니다” — 상응적 역사로서의 실재

흥미롭게도 스베덴보리는,
이 사건이 “완전히 허구”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죠:

“That there was no universal flood which covered the whole earth,
but that the story represents the vastation of the Most Ancient Church.” (AC 705)

즉, 지구 전체를 덮는 물리적 대홍수는 없었지만,
당시의 교회(영적 인류) 가 실제로 “붕괴”한 역사적 시점은 있었다는 뜻이에요.

이 점에서 “홍수 이야기”는 단순한 신화도, 단순한 은유도 아닌,

“영적 사건의 상응적 서술(correspondential history)”
실제로 일어난 인류의 영적 변화를 ‘자연의 언어로 표현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4️⃣ 요약하자면

구분 일반적 해석 스베덴보리 해석

노아의 홍수 실제 지구의 대홍수, 인류 심판 사건 “가장 옛 교회”의 영적 붕괴를 묘사한 상징
방주 배, 생존 수단 신앙의 잔여물(remains)을 보호하는 상징
홍수의 물 실제 물 거짓과 악의 범람
노아의 가족 물리적 인류의 조상 새 교회의 영적 씨앗

💡 요약 문장

스베덴보리에게 ‘노아의 홍수’는 역사적 물난리가 아니라,
인류의 첫 번째 교회가 거짓과 악에 잠겨 붕괴된 영적 대재앙의 상징이며,
노아와 방주는 그 가운데 보호된 신앙의 남은 것(remnant) 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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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ana Coelestia 307의 문맥과, “홍수(flood)”의 상징이 어떻게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 즉 광기 어린 욕망과 거짓된 신념을 의미하게 되는지를 단계적으로 살펴볼게요.


1️⃣ AC 307의 흐름 요약

이 단락은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6:12–13, 즉 “모든 육체가 자기 길을 더럽혔으므로,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부분을 해석하면서 등장합니다.

그는 여기서 “육체(flesh)”를 단순히 사람의 몸이 아니라,
자기 사랑(self-love)과 세상 사랑(world-love) 에 사로잡혀 선과 진리를 멸한 인간의 의지로 풀이합니다.

그래서 “여섯째와 일곱째 후대(the sixth and seventh posterities)”는
이 자기 사랑과 거짓 신념이 완전히 하나로 굳어져버린 최후의 태고교회 인류, 즉 “홍수로 멸망한 세대”를 상징합니다.


2️⃣ “홍수”(Flood)의 내적 의미

스베덴보리에게 Flood는 단순히 물리적 재난이 아닙니다.
그는 반복적으로 말합니다:

“The flood signifies the immersion of man in falsities and evils.” (AC 660, 705)

즉, 홍수는

거짓(falsehoods)악(evils) — 특히 거짓 신념(persuasions) 과 타락한 욕망(cupidities) — 이
마음의 내면을 완전히 덮어버리는 영적 상태를 상징합니다.

그는 또 이렇게 덧붙이죠:

“Waters” in the Word, when they overflow, signify falsities;
and when they ‘destroy,’ they signify persuasions of falsity that devastate the mind. (AC 705)

따라서 “홍수의 물이 지면을 덮었다”는 말은 곧,
거짓과 욕망의 물결이 인간의 이해와 의지를 완전히 덮어버린 상태
즉, 인간이 더 이상 하늘의 빛(진리)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를 뜻합니다.


3️⃣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과 “홍수”의 대응관계

상징 내적 의미 설명

Flood (홍수) 거짓과 악의 범람 마음 전체를 덮는 정신적 침수
Waters (물) falsities (거짓들) persuasions of falsity와 연관됨
Cupidity (욕망) evil of self-love 불길처럼 타오르는 타락한 의지
Persuasion (확신) falsity held as truth 이해의 왜곡, 거짓된 확신
Flood destroying mankind understanding과 will의 붕괴 더 이상 인간다운 상태가 아님 (“as it were not men”)

즉,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이란
바로 이 ‘홍수의 물’ 그 자체이며,
그들이 그 물 속에 빠져 정신적으로 질식한 상태를 “홍수로 멸함”이라고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4️⃣ 상징의 역전 (노아의 등장과 ‘새 교회’)

스베덴보리는 이후 AC 597–607에서,
노아(Noah)를 통해 새로운 교회(New Church), 즉 “남은 자(remnant)”가 보존된다고 말합니다.

즉,

  • 홍수 = 거짓과 악의 압도적 범람,
  • 방주(Ark) = 진리의 잔여물(remains),
  • 노아 = 신앙의 씨앗.

이로써 인간 안에 남은 작은 선과 진리가 보호되어,
새로운 영적 인류(후대 교회)가 태어나는 것이죠.


5️⃣ 요약 정리

“their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 =
진리의 빛을 완전히 잃은 상태에서
자기 사랑의 욕망(cupidities)거짓된 신념(persuasions)
서로 결합하여 영혼 전체를 덮어버린 상태.

“the flood” =
이러한 상태가 영적으로 밖으로 표현된 상징 —
곧, 인간 내면을 완전히 잠식한 거짓과 악의 바다.


💡 결론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홍수로 멸망한 세대”는
물리적인 심판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 내면이 거짓과 욕망의 물결에 잠겨 더 이상 하늘과 통하지 못하게 된 영적 붕괴”**를 묘사한 것입니다.

즉, AC 307의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은
“홍수”라는 상징의 본질을 그대로 드러내는 핵심 문구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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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 Arcana Coelestia 307의 “their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라는 표현은, 단순히 “그들의 미친 욕망과 설득들”이라는 직역보다 훨씬 깊은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스베덴보리의 용어 체계 안에서 두 단어 — cupidities와 persuasions — 를 각각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1️⃣ cupidities (욕심, 탐욕, 정욕)

  • 스베덴보리는 cupidity를 자기 사랑(self-love) 또는 세상 사랑(world-love) 에서 비롯된 타락한 욕망들(lusts) 이라고 정의합니다.
  • 이것은 단순히 감정적인 욕심이 아니라, 영적 질서에서 벗어난 의지의 왜곡을 뜻합니다.
  • 즉, “insane cupidities”는 이성이나 진리에 의해 제어되지 않는, 광기 어린 사랑과 욕망, 곧 악한 사랑의 상태를 말합니다.
    → 예: 자기 자신을 신처럼 여기거나, 세속적 지배욕·쾌락욕에 완전히 사로잡힌 상태.

📖 스베덴보리의 다른 구절(예: AC 1666, AC 890)에서도 cupidities는 “the fires of self-love and love of the world”로 불리며, 영혼의 불균형과 타락을 상징합니다.


2️⃣ persuasions (잘못된 확신, 왜곡된 신념)

  • 스베덴보리에게 persuasion은 단순한 ‘설득’이 아니라, 거짓을 진리로 확신하게 만드는 정신적 고착 상태를 의미합니다.
  • 특히 persuasions of falsity란, 거짓을 진리로 믿는 확신이 너무 강해져 진리의 빛(influx of light) 을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 “insane persuasions”는 이성적 판단을 완전히 잃고, 자기 욕망이 만든 거짓을 절대적 진리로 믿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 AC 1673에서는 “persuasion”을 “the worst of falsities, which extinguishes the light of heaven”이라 부릅니다.


3️⃣ 종합적 의미

따라서 “their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는 다음처럼 풀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광기 어린 욕망과 거짓된 확신들”
→ 곧, 타락한 사랑(의지)거짓된 신념(이해) 이 완전히 결합되어,
진리나 선에 대한 어떤 감각도 남지 않은 상태.

스베덴보리가 말하듯, 이들은 “as it were not men (거의 인간이 아니게 된 상태)”에 빠졌습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 신학에서 ‘사람됨’(humanity) 은 진리에 대한 이해와 선에 대한 의지의 결합에 의해 유지되는데,
이들이 그 둘 모두를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 의지는 “insane cupidities”로, 이해는 “insane persuasions”로 변질된 것이죠.


💡정리하자면:

단어 스베덴보리적 의미 정신적 상태

cupidities 자기 사랑에서 비롯된 불합리한 욕망, 타락한 의지 “악의 불길”
persuasions 거짓을 진리로 믿는 확신, 타락한 이해 “거짓의 어둠”
insane 이성적·영적 질서를 완전히 상실한 정신적 광기

요약 번역:

“그들은 이성의 통제를 벗어난 광적인 욕망들과, 거짓을 진리로 확신하는 왜곡된 신념들에 사로잡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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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Emanuel Swedenborg)는 오늘날 우리가 아는 “로또 복권”이라는 구체적 제도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신학 전체의 원리를 적용해 보면, 그가 복권이나 도박을 어떻게 평가했을지는 충분히 추론할 수 있습니다. 아래는 그 원리를 토대로 정리한 것입니다.


🜂 1. 스베덴보리의 핵심 원리: ‘사랑의 목적이 무엇인가’

스베덴보리는 모든 인간의 행위가 그 행위 자체보다 ‘그 목적’(end) 에 의해 선하거나 악하다고 말했습니다.
즉,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행동도 그 내적 동기(愛)가 무엇이냐에 따라 천적이거나 지옥적이 된다는 것이죠.

  • 만약 누군가가 “복권으로 얻은 돈을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다면,
    그는 그것을 외적 수단으로 선용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복권은 “쉽게 부자가 되려는 탐욕, 즉 자기 사랑(love of self)과 세상 사랑(love of the world)”에서 비롯되므로,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영적 생명을 해치는 사랑에 속한 일로 간주했을 것입니다.

🜂 2. ‘노동 없이 얻으려는 것’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견해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을 설명하면서,
천국의 사람들은 “유용함(usefulness)” 자체를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즉, 그들은 일과 봉사를 기쁨으로 삼으며, 유용한 일을 통해 생명을 받는다고 보았습니다.

“하늘의 모든 기쁨은 유용함에서 온다.
유용하지 않은 것은 천국에 아무 생명도 주지 못한다.”
— Heaven and Hell (HH §403, §405)

반면, 지옥의 사람들은 유용함을 사랑하지 않고 “유용함을 통해 자신에게 이익이 오기만을 바라며”, 일 자체를 싫어하고 게으름과 탐욕을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눈으로 본다면,

로또 복권은 ‘노동 없이 얻으려는 것’, 즉 ‘유용함 없이 소유하려는 것’의 한 형태로 보았을 것입니다.

그는 이런 행위가 결국 영혼을 세상에 속박시키고, 영적 생명(신적 질서)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 3. ‘섭리(Providence)’의 관점에서 본 복권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에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소유하는 모든 것—재산, 지식, 지위—은 섭리 안에서 주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은 사람의 영원한 목적(천국의 준비)을 위해 필요한 만큼만 허락하신다"고 강조했죠.

그 관점에서 보면, 복권을 통해 갑자기 큰돈을 얻으려는 행위는 섭리를 우회하려는 시도,
신의 질서를 거스르는 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신적 섭리를 떠나서 자신만의 길을 택하려 하지만,
그러한 길은 자신을 파멸로 이끈다.”
— Divine Providence (DP §187)


🜂 4. 결론: 스베덴보리가 오늘날 기독교인에게 한다면

그가 직접 말했다면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너희가 하늘의 복을 바라면서도
세상 복을 탐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탐욕의 신앙이다.
주의 섭리는 네가 일하고 사랑으로 봉사할 때 임한다.
우연(Chance) 속에 주를 찾지 말고, 유용함 속에서 주를 만나야 한다.”


🜂 요약하면

구분 스베덴보리의 관점

행위의 판단 기준 행위 자체보다 ‘목적’(end)이 중요
복권의 내적 동기 탐욕과 세상 사랑으로 보았을 가능성 큼
노동 없는 부 영적 질서(유용함)에 반함
섭리의 관점 우연 속의 횡재는 섭리를 거스름
천국적 태도 유용함과 봉사를 사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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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창 4:15의 또 한 구절 ―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이 부분의 내적(영적)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 1️⃣ ‘칠 배(sevenfold)’의 성경적 상징

스베덴보리는 Arcana Coelestia에서 일관되게
칠(7)”은 ‘거룩함’ 혹은 ‘충만함’, 또는 ‘완전한 상태’를 뜻한다고 풀이합니다.

그러나 ‘거룩한 수’가 악과 결합될 때는 반대로

“완전한 악, 충만한 심판”
을 의미하게 됩니다.

따라서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7배의 형벌’을 뜻하기보다,
그 질서(즉, 진리를 왜곡한 상태)에 대한 완전한 결과의 법칙을 말하는 것입니다.


🔶 2️⃣ ‘가인을 죽이는 자’의 상징 — 진리의 왜곡에 다시 폭력을 가하는 자

‘가인을 죽인다’는 건 이미 사랑을 죽이고 진리만 붙잡은 상태(가인)를
더욱 파괴하려 드는 행위를 뜻합니다.

즉, 거짓으로 진리를 공격하고, 교리나 신앙을 완전히 조롱하거나 왜곡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AC 392–394 맥락에서):

“가인을 죽이는 자”는 ‘이미 왜곡된 신앙(가인)’을 더욱 왜곡하여 완전히 파괴하는 자’이며,
그런 자는 스스로 심판의 질서 안에서 7배의 보응 — 즉, 완전한 내적 황폐 — 를 받게 된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가인을 보호하신다’는 건
그를 용서하거나 옹호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진리가 완전히 멸망하지 않도록 주님의 질서가 개입된다”는 뜻이고,
그 질서를 깨뜨리려는 자는 ‘7배의 대가’, 곧 질서 전체의 반작용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 3️⃣ 이 원리를 단순히 풀어보면

상징 의미

가인 사랑(선) 없이 진리만 가진 신앙, 혹은 교리 중심의 사람
그를 죽이는 자 진리 자체를 조롱하고 왜곡해 없애려는 자
벌을 칠 배나 완전한 결과, 내적 파멸, 질서적 보응
주님의 의도 진리 자체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게 하심 (인류 구속 질서의 보존)

🔶 4️⃣ 주님이 세우신 ‘보응의 법칙’은 복수가 아니라 질서의 반작용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는,
하나님은 인간을 ‘징벌’로 보응하지 않으시며,
모든 ‘벌’은 **악이 스스로 낳은 결과(결과적 질서의 반작용)**로 나타납니다.

즉, ‘칠 배의 벌’은

하나님이 화내서 7배로 갚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거짓과 폭력이 주님의 질서를 거슬러 일으킨 만큼,
그 반작용으로 스스로의 내적 생명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뜻합니다.

이건 마치 중력 법칙처럼,
영적 질서의 법칙이지 ‘감정적 복수’가 아닙니다.


🔶 5️⃣ 교회적 의미 — 왜 이것이 필요했는가?

가인은 사랑이 없는 신앙의 상징입니다.
주님은 그런 상태도 “완전히 없애지 않으신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 신앙이라도 남아 있어야 **후대의 교회(셋 계열)**가 거기서 다시 새로 일어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주님은

“사랑이 식은 교회를 즉시 멸하지 않으시고,
진리의 형식만이라도 남겨두셔서,
거기서 다시 사랑이 피어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 진리를 더 파괴하려 드는 자는 곧 인류 구원의 기반 자체를 파괴하는 자가 되므로,
그 결과가 “칠 배의 벌”로 표현된 것입니다.


🔶 요약하면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가인을 감싸신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구속 질서 자체가 진리의 완전한 멸망을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선언입니다.

이 구절은 단지 형벌의 경고가 아니라,

“진리와 선의 씨앗을 끝까지 보존하시는 주님의 섭리의 법칙”을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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