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mercy)와 은혜(grace) (2025/10/11)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6:8)

 

말씀에 ‘긍휼’로도 나오는 ‘자비(mercy)와 우리 대부분이 흔히 쓰는 ‘은혜(grace)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우리는 평소 그냥 무심코 쓰지만 말입니다.

 

말씀에서 ‘자비’는 마음이 겸손한(in humiliation of heart) 사람들에게, ‘은혜’는 생각이 겸손한(in humiliation of thought)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천적인 사람들(天的, the celestial)은 주님께 ‘자비’를 구하지만(implore), 영적인 사람들(靈的, the spiritual)은 ‘은혜’를 구합니다(beseech).

 

천적이었던 태고교회, 곧 아담교회가 저물고, 홍수 후 새롭게 일어나는 고대교회, 곧 노아교회는 영적이었는데, 그래서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Noah found grace in the eyes of Jehovah) 하는 것입니다. ‘자비’가 아니고 말입니다.

 

의지(will)가 주님을 향해 열렸던 태고교회가 그 후손으로 갈수록 변질, 탐욕(cupidity)으로 변하면서 닫히는 바람에, 주님이 의지 대신 새로운 창, 곧 이해(understanding)에 해당하는 지적 파트(intellectual part)라는 우회로를 여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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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걸음 남았는데 그걸... (2025/10/10)

 

한 걸음 남았는데 그걸...

 

오래전부터 내게 들리는, 나의 내면의 귀에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바로 다음 단계, 곧 몸에서 들려 영계로의 여행, 그러니까 주님의 초청으로 천국 방문을 할 수 있는 상태변화를 코앞에 두고 머뭇거린다는 말씀입니다. 아니 그보다 앞서 주님이 보내신 천사를 직접 만나는 경험의 시작을 말이지요.

 

저는 압니다. 이 한 걸음이 뭘 의미하는지 말이지요...

 

그것은 바로 세상을 향한 두리번거림입니다. 그러니까 습관처럼 폰을 잡고 유튜브를 켠다든지, 누우면 무의식적으로 켜는 네이버 웹툰이라든지 말이지요. 특히 이 웹툰은 이 나이에 밝히기 참 부끄러운...

 

어쨌든 바로 이런 빈틈, 살짝 열린 틈 때문에 영계 체험이 계속 미뤄지고 있다는 것을 저는 분명히 지각, 즉 퍼셉션하고 있습니다.

 

퍼셉션(perception)은 내면이 열린 사람들에게 체험되는, 그러니까 허락하시는 하늘로부터 오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지각 능력입니다.

 

그래서 일단은 웹툰부터 끊고 있습니다. 그다음 이야기들이 몹시 궁금한 몇 개가 있지만... 그때마다 천국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떠올리며 외면, 곧 세상을 향해서는 눈을 감고, 오직 천국을 향해서만 마음의 얼굴을 향하고 있습니다.

 

다음 순서는 유튜브입니다. 이 역시 서서히 줄이고 있습니다.

 

물론 저 역시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여 현 시국에 주님으로 말미암는 의로움과 올바름이 실현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만 말입니다.

 

남은 한 걸음을 위해, 그리고 그때 실현될 새로운 차원의 영적 진보를 위해 참고 또 참고 있습니다.

 

카톡 활동을 내려놓은 지 두 달 반... 참을 만한 걸 보면 이 또한 잠잠해질 줄 믿습니다.

 

세상을 향한 창이 열린 만큼 천국을 향한 창이 닫히고, 그 반대 역시 그렇답니다. 세상과 천국 둘 다 동시에 열 수는 없다고 하네요. 사람의 영혼은 말입니다.

 

저는 먼저 주님과 천국을 향해 열리고, 그 상태를 유지하며 세상을 바라볼 수 있기를 진심으로 원합니다.

 

스베덴보리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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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과 여자의 대화 (3:1) (2025/10/9)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3:1)

 

여기 ‘뱀’(serpent)은 인간이 신뢰하고 있는 감각 파트를, ‘들짐승’(wild animal of the field)은 앞에서처럼 겉 사람의 모든 애정을, ‘여자’(woman)는 인간의 본성(man’s own)을 말하며, 뱀이 하고 있는 말,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Yea, hath God said, Ye shall not eat of every tree?)는 그들이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다루고 있는 주제는 태고교회의 세 번째 후손으로서 그들은 계시 된 것들에 관하여 그것이 과연 그런지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볼 수 있어야만 믿기 시작했습니다. 본 절과 다음 절은 그들의 첫 번째 상태, 즉 의심의 상태에 대한 설명입니다. (AC.194)

 

2:1-17은 태고교회의 시조, 첫 대, 그 출발에 관한, 창2:18-25은 그 후손들, 특히 두 번째 후손에 관한, 창3:1-13은 세 번째 후손에 관한 내용입니다.

 

첫 번째 태고교회는 100%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의 사람들이었지만 그 후손들은 조금씩 변질, 즉 주님한테서 고개를 돌려 자기를 바라보기 시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의 마지막은 노아의 홍수라는 종말이었습니다.

 

1은 사람의 거듭남에 관하여 그 상태의 변화를 크게 여섯 단계로 구분, 서술하는 내용입니다.

 

감각 파트란 사람을 구성하는 여러 파트가 있는데 그중 감각과 관련된 파트를 말합니다.

 

풀, 채소, 나무는 못 움직이는 것을, 새, 바다 생물, 들짐승은 움직이는 것을 의미하며, 주님을 향한 사랑과 애정 안에 있으면 ‘움직인다(animate) 하고, 자기를 향한 사랑과 애정 안에 있으면 ‘못 움직인다(inanimate) 합니다.

 

사람, 곧 태고교회가 결국은 자기 사랑, 세상 사랑으로 끝날 줄을 아셨음에도 주님은 그 최악은 피하게 하시려고 주님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자아를 태고교회 후손들에게 허락하시는데 이것을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21, 22)

 

라고 무척 아름답게 묘사하셨습니다.

 

깊이 잠드는 건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느라 주님을 까맣게 잊고 사는 걸 말합니다.

 

뼈와 같은 전혀 생기 없는 상태의 인간 본성을 주님은 살, 곧 주님의 생기를 입힌 새 자아, 새로운 본성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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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은 쓰임새의 나라 (2025/10/8)

 

명절 연휴 잘들 보내고 계시지요? 저는 요즘 창세기에 집중, 명절도, 연휴도 잘 안 보이네요... ㅎㅎ

 

오늘 아침, 지난 설교 작업 중에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2:15)

 

말씀을 보게 되었는데, 여기서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의 의미가 ‘그가 그 모든 걸 누리게는 하셨으나 자신의 걸로 소유하는 건 금하셨다는 말입니다. 그 모든 건 주님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라는 풀이와 함께 아래 이어지는 설명으로 마음의 감동이 있었습니다.

 

천사들은 무엇을 자기 걸로 소유하는 덴 별 관심이 없고 대신 그 쓰임새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즉 주님께 무엇을 받았을 때, 그들은 ‘이걸 왜 주셨을까? 왜 허락하셨을까?’를 먼저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천사들은 주님이 주신 걸 가지고 자기를 사랑하는 대신 그걸 가지고 주님을 사랑하는 쓰임새의 삶에만 집중합니다.

 

천국의 부자들은 남들보다 더 화려한 생활을 한다. 그들 중 일부는 모든 것이 금, 은으로 된 듯 광채 나는 궁전에 산다. 그들은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풍족하지만 조금도 거기 마음을 두지 않고, 오직 그 쓰임새만 생각한다. 그들에게 쓰임새는 빛을 받은 듯 분명하게 보이지만 금, 은은 거기 비하면 그늘에 있는 듯 흐릿하게 보인다. 그 이유는 이들이 세상에 살 때 쓰임새를 사랑했고, 금, 은은 단지 수단과 도구로만 사랑했기 때문이다. 천국에서 광채를 내는 것은 쓰임새다. 쓰임새에 속한 선은 금처럼, 쓰임새에 속한 진리는 은처럼 광채가 난다. (HH.361)

 

남은 삶, 금, 은은 물론 심지어 지혜와 지성, 이성과 지식조차도 거기 마음 두는 대신 오직 주님이 부여하신 쓰임새에만 전념하고자 합니다.

 

오, 주님, 천사의 마음과 태도를 오늘 아침 제게도 부어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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돕는 배필, 이름, 갈빗대(2:18-21, AC.138-148)

 


18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2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5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2:18-25)

 


창세기 속뜻 강해, 오늘은 2장 다섯 번째 시간으로 2장 후반부 중 첫 번째인 18절로 21절, ‘돕는 배필, 이름, 갈빗대(AC.138-148)입니다.

 

먼저 2장 후반부(18-25) 전체 및 절 별 개요입니다.

 

131

태고교회의 후손들, 이들은 자신들의 본성(本性, proprium, own)으로 기울어졌는데, 여기서는 이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 이 창2 후반은 태고교회 두 번째 후손에 관한 내용입니다.



132

인간은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만족하지 않고 대신 자신과 세상, 곧 자기 본성으로 인도받기를 원하는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에게 허락된 본성을 여기서 다룹니다. (18)

 

133

그래서 그에게 먼저 선에 관한 애정들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알게 하시는데, 이것들은 그가 앞서 주님께 받은 것들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자기 본성을 향해 기울어집니다. (19, 20)

 

※ ‘’을 생각하면 마음이 밝아지고 긍정적이 되며, ‘진리’, ‘’, ‘올바름’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반듯한 생각들은 앞서 주님이 우리에게 거저 주신 것들입니다. 이런 귀한 선물들을 받아놓고도 우리는 그 가치를 모르고 아주 보잘것없는 내 안의 것들, 나의 본성에 주목하면서 주님으로부터는 독립하려고 애를 쓰며 살고 있습니다.

 

 

134

이런 이유로 그는 자기 본성 상태로 들어가며, 그리고 어떤 본성(an own)이 그에게 주어지는데, 그걸 여자로 빚어진 갈빗대라 한 것입니다. (21-23)

 

 

135

천적 영적 생명은 인간의 본성과 아주 가까이, 거의 하나로 보일 정도로 붙어있습니다. (24)

 

 

136

그리고 주님으로 말미암는 이노센스가 이 본성 안으로 스며드는데요, 이 본성이 완전히 망가져서 도무지 뭐든지 못 받아들이는 상태가 되지 않게 하시려고 말입니다. (25)

 

 

다음은 단락 전체의 배경 설명입니다.

 

 

137

창세기의 첫 세 장은 대체로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를 다루는데, 이 교회는 처음부터 마지막, 그러니까 사라질 때까지 ‘사람’(man, homo)으로 불렸습니다. 창2 전반부가 이 태고교회가 가장 융성했던 상태, 곧 천적 인간이었던 때를 다루고 있다면, 이제 여기 후반부는 자신들의 본성으로 기울어진 사람들과 그들의 후손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상이 개요 및 배경이고, 다음은 후반부 본문 절 별 속뜻입니다.

 

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38

‘혼자’(alone)는 그가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만족해 하지 않았음을, 대신 자아와 세상으로 인도받기를 원했음을,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help as with him)은 인간의 본성(man’s own)을 의미하는데 이는 이어지는 내용에서 ‘여자로 만드신 갈빗대’(rib built into a woman)라 하는 것입니다.

 

 

139

고대에는 천적 인간들처럼 주님의 가이드 아래 사는 사람들을 가리켜 ‘홀로 지내는’(dwell alone) 사람들이라 하였습니다. 이들은 더 이상 악이나 악한 영들로 인한 들끓음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이것을 유대교회에서도 그들이 다른 민족들을 다 몰아낸 후 그 땅에 홀로 거주하는 걸로 표상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말씀에서 종종 주님의 교회를 가리켜 ‘홀로 산다’(alone)고 합니다. 예레미야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는 일어나 고요하고도 평안히 사는 백성 곧 성문이나 문빗장이 없이 홀로 사는 국민을 치라 (49:31)

 

모세의 예언에서도

 

이스라엘이 안전히 거하며 야곱의 샘은 곡식과 새 포도주의 땅에 홀로 있나니 곧 그의 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곳에로다 (33:28)

 

그리고 발람의 예언에서는 더 분명하게

 

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며 작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이 백성은 홀로 살 것이라 그를 여러 민족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 (23:9)

 

여기 ‘여러 민족’(nations)은 악을 말합니다. 이 태고교회의 후손은 홀로 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즉 천적 인간이 되려 하거나 그들처럼 주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살려 하지 않고 대신 유대교회처럼 여러 민족 중에 있고 싶어 했습니다. 그들이 이런 걸 원했기 때문에 이르시기를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라 하신 것입니다. 이런 걸 원하는 사람은 이미 악 가운데 있으며 그가 원하는 삶이 그에게 허락됩니다.

 

※ 우리는 보통 자녀가 무슨 잘못된 결정을 내리면 그걸 막거나 금지, 못 하게 꾸짖고 책망하는데 주님은 그러지 않으십니다. 자원함이 없는 순종, 사랑으로 하지 않는 복종과, 강제로, 억지로 돌이키게 함은 주님 편에서는 하나 마나이기 때문이며, 그런 건 아예 주님의 속성에 배치되기 때문이지요. 아래 이사야 말씀이 생각납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42:3)

 

이 말씀의 속뜻은 주님은 사람들의 거짓을 바로잡으시지도, 탐욕을 끄지도 않으신다는 것인데요, 왜냐하면 거듭나기 전, 사람의 생명은 오직 거짓과 탐욕밖에 없기 때문인데 만일 이때 이 유일한, 비록 악하고 거짓되더라도, 생명을 건드리게 되면 더 이상의 생명이 없어 사람은 바로 소멸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상한 갈대를 꺾고 꺼져 가는 등불을 끄는’ 대신 비록 오랜 시간이 걸려도 그와 동행, 그가 자의로 주님의 선과 진리 쪽으로 돌이키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의 역량에 맞춰 강약을 조절하시면서 말이지요. 마치 저 아우 아벨을 죽인 가인을 보호(?)하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10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1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1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15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4:8-15) //

 

 

140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a help as with him)이 사람의 본성(man’s own)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 본성의 본질(nature)로부터,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으로부터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다루고 있는 이 교회 사람을 주님이 좋게 보셔서 그에게 어떤 본성이 허락되었는데, 그게 마치 그의 본성처럼 보이는 그런 것이어서 이르시기를,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a help as with him)이라 하신 것입니다.

 

 

141

인간 본성(man’s own)의 본질(nature)을 육적(corporeal) 세속적 인간, 그리고 영적 인간, 천적 인간과 함께 설명하려면 그전에 먼저 인간 본성에 관한 수많은 것들을 말씀드려야 할 것 같은데요, 육적 세속적 인간에게는 그의 본성이 그의 전부입니다. 그는 자신의 본성 말고는 아는 게 없고, 앞서도 말씀드렸듯 만일 이걸 잃으면 자기는 망할 꺼라고 생각합니다. 영적 인간의 경우 역시 그의 본성의 모습은 비슷한데요, 그가 비록 주님은 만물의 생명이시고, 지혜와 이해, 그리고 그 결과 생각하고 행동하게 하시는 분으로 알고 있을지라도 그에게 있어 이런 지식은 아직은 마음속 신념이라기보다는 입술의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은 주님은 만물의 생명이시며 생각하고 행동할 힘 주시는 분임을 알아차립니다. 그는 실제로 그렇다는 것을 지각(perceives), 그러니까 주님이 주시는 영적 통찰력으로 천사들처럼 그냥 알기 때문이지요. 그는 결코 자신의 본성을 원치 않습니다만, 그러나 그럼에도 주님은 그에게 어떤 본성을 주시는데, 그것은 선함과 참됨에 관한 모든 퍼셉션, 그리고 모든 행복과 결합하는 본성입니다. 천사들이 이런 본성 가운데 있으며, 동시에 가장 내적인 평화와 고요한 내적 기쁨(the highest peace and tranquility) 가운데 있습니다. 그들의 본성에는 주님의 것들이 들어 있기 때문인데, 주님은 그들의 본성을 다스리시거나 그들의 본성으로 그들을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이 본성은 가장 천적인 것 그 자체이지만, 육적 인간의 본성은 끔찍, 곧 지옥 그 자체입니다. 이 본성에 관해서는 나중에 더 다루겠습니다.

 

※ 천적 인간은 천사들처럼 그저 주님의 인도하심만으로 충분, 굳이 무슨 다른 본성을 또 필요로 하거나 찾지 않지만, 그럼에도 주님은 그들에게 새로운 본성, 곧 ‘선함과 참됨에 관한 모든 퍼셉션, 그리고 모든 행복과 결합하는 본성’을 허락하셨습니다.

 

 

19, 20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19, 20)

 

142

‘짐승, 가축’(beasts)은 천적 애정을, ‘공중의 새’(fowls of the heavens)는 영적 애정을 의미하는데요, 다시 말씀드리면 ‘짐승’(beasts)은 의지에 속한 것을, ‘새’(fowls)는 이해에 속한 것을 의미한다는 말씀입니다.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bring them to the man to see what he would call them)는 그로 하여금 그것들의 퀄리티를 알게 하심이며, 아담이 ‘그들에게 이름을 주니라’(giving them names)는 그가 그것을 알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그에게 주신 선에 속한 애정의 퀄리티와, 그리고 진리에 관한 지식의 퀄리티를 그가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 그는 여전히 자신의 고유 본성으로 기울어졌는데, 이를 전과 같이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there was not found a help as with him)처럼 같은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 이 ‘퀄러티를 안다’는 것은 그것의 본질, 본성을 안다는 것입니다. 말씀에 나오는 ‘이름을 주다’, ‘아무개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다’의 의미가 모두 이렇습니다. 천적 천사들의 능력 중 하나가 바로 자기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상대방의 아우라만 가지고도, 그리고 그의 말 한마디만 가지고도 그가 어떤 존재인지를 지각하는 건데요, 이 ‘아담’으로 일컬어지는 천적 인간, 곧 초창기 태고교회 사람들이 바로 이런 능력, 곧 이런 퍼셉션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143

고대에는 ‘가축’(beasts)과 ‘짐승’(animals)이 사람한테 있는 애정과 그와 같은 걸 의미했다는 사실이 오늘날엔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 시대 사람들은 천적 사고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영계에서는 동물을 가지고 그런 거, 곧 애정 같은 걸 표현하며, 실제로도 동물의 생긴 모양대로 해당 애정을 표현했기 때문에 그 당시 그들은 그런 식으로 말했고, 그때 그들은 그밖에 무슨 다른 의미로 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말씀에서도 짐승들이 언급되는 곳마다 일반적이든 아니든 무슨 다른 걸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언의 말씀 전체가 이런 걸로 가득하며, 그렇기 때문에 각 짐승이 특별히 뭘 의미하는지를 모르는 사람은 그 말씀에 담긴 속뜻이 무엇인지를 절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앞서도 보았듯 짐승들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악한, 즉 해로운 짐승이 있는가 하면 선한, 즉 무해(無害)한 짐승이 있지요. 선한 짐승들은 선한 애정들, 예를 들면 양(sheep), 어린 양(lambs), 비둘기 같은 것들이지요. 여기서 다루는 인간이 천적 인간, 혹은 천적 영적 인간이기 때문에 이들 선한 짐승들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짐승’(beasts)이 의미하는 바가 일반적으로 애정이라는 것을 위, 곧 말씀 몇몇 구절들에서 확인할 수 있었으므로 (AC.45, 46) 여기서 굳이 다시 상세히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144

‘이름으로 부르기’(call by name)는 그 퀄리티를 안다는 의미인데요, 이는 고대인들은 ‘이름’(name)을 가지고 어떤 것의 에센스를 이해했기 때문이며, 무엇을 ‘보고 이름으로 부르기’(seeing and calling by name)를 통해 그들은 자신들이 그 퀄리티에 대해 아는 걸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자녀에게 이름을 지어 줄 때 어떤 의미를 담아 주었기 때문인데, 모든 이름은 그 안에 무언가 고유한, 그 이름으로부터나 그 이름에 의해서나 자녀의 어떤 기원과 고유 특성을 알 수 있는 그런 게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기원과 특성에 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하고 있는, 지금 이 아르카나 주석 작업 중반, 야곱의 열두 아들을 다루는 부분에서 아시게 됩니다. 이름들에는 그렇게 이름하는 것의 근원과 퀄리티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이 ‘이름으로 부르기’(calling by name)를 그밖에 무슨 다른 걸로 이해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것이 그 시대 사람들의 언어적 관습이었습니다만, 그러나 이걸 이해하지 못하시는 분은 말씀에 나오는 이름들을 그런 의미들을 부여하며 읽어야 한다는 사실에 굉장히 놀라실 수도 있겠습니다.

 

32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33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 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34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레위라 하였으며 35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 (29:32-35)

 

 

145

말씀에서도 ‘이름’(name)은 어떤 것의 에센스(the essence of a thing)를, ‘보고 이름으로 부르기’(seeing and calling by name)는 그 퀄리티에 관해 아는 걸 의미합니다.

 

이사야입니다.

 

3네게 흑암 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어 네 이름을 부르는 자가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줄을 네가 알게 하리라 4내가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자 이스라엘 곧 너를 위하여 네 이름을 불러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 (45:3, 4)

 

이 구절에서 ‘네 이름을 불러’(call by name)와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surname)는 그 퀄리티를 예견한다(to foreknow the quality)는 의미입니다.

 

계속해서

 

이방 나라들이 네 공의를, 뭇 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62:2)

 

앞뒤 구절에 나오는 것처럼, 또 다른 캐릭터가 될 것을 의미하지요.

 

계속해서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43:1)

 

그가 그들의 퀄리티를 알고 계셨음을 가리키시면서

 

계속해서 같은 이사야 말씀입니다.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40:26)

 

그는 그 모든 것을 알고 계셨음을 의미합니다.

 

계시록입니다.

 

4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5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3:4, 5)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13:8)

 

이들 구절에서 ‘이름’(names)은 결코 말 그대로 이름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퀄리티를 의미하는데요, 심지어 천국에서는 그 누구도 이름이 아닌, 그의 퀄리티로만 알려지지요.

 

 

146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을 통해 그 상징하고 있는 속뜻을 보실 수 있는데, 18절에 보면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as with him)하시고는 지금은 ‘짐승’(beasts)과 ‘새’(birds)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는 전에 다룬 적이 있던 것이지요. 그러고는 즉시 또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for the man there was not found a help as with him)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 일련의 흐름의 속뜻은 이렇습니다. 곧 그가 비록 자신의 퀄리티, 곧 선에 관한 애정과 진리에 관한 지식에 대해 자신의 퀄리티가 어느 정도인지를, 또는 어떤 상태인지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어도 그는 여전히 자신의 본성을 향해 기울어졌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고유 본성을 간절히 원하는 그런 사람들은 주님에게 속한 것들에 대한 멸시를 시작하기 때문인데 주님에게 속한 것이 아무리 그에게 분명하게 표현되고 보여도 말입니다.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1)

 

147

가슴에 속한 뼈인 ‘갈빗대’(rib)는 사람의 고유 본성(man’s own)을 의미하는데 그 안에 생기라고는 거의 없지만 실제로는 그가 무척 소중히 여기는 그런 본성입니다. ‘살로 대신 채우시고’(flesh in the place of the rib)는 그 안에 생기가 있는 본성을, ‘깊이 잠들게’(deep sleep)는 그의 현 상태를 말하는데, 사람이 이 상태가 되면 그는 자신의 본성이라 하는 걸 소유하고 있는 게 자기 자신인 줄 알지요. 이 상태는 잠든 상태와 유사한데, 이 상태에 있는 동안은 사람은 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말미암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그가 사실은 그렇지 않음을, 이것이 거짓임을 알게 되면서부터 그는 정신을 차리며 잠에서 깬 상태가 됩니다.



148

사람의 고유 본성(man’s own), 실제로 그가 무척 소중히 여기는 본성을 가슴에 속한 뼈인 ‘갈빗대’(rib)라 하는 이유는 태고인들 사이에서 가슴은 체어리티(charity)와 상응했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심장과 폐가 들어있기 때문이지요. 뼈(bones)라는 건 아주 꺼림칙한 걸 의미했는데 그 안에 생기라고는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살(flesh)은 생기 있는 걸 가리켰지요. 이 상응들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알려진 가장 깊은 아르카나 중 일부인데 이 아르카나는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에 속한 것으로서, 이에 관해서는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상으로 창세기 2장 두 번째 단락 중 전반부인 18절로 21절 전반, 글 번호로는 AC.138-148을 번역, 역시 설명을 곁들여 말씀드렸습니다.

 

다음 주는 후반부인 21절 후반부터 끝 절인 25절까지입니다.

 

오늘 본문 및 전체 개요, 그리고 배경을 한 번 더 읽고 마치면 좋겠지만 성찬도 있고 원고가 길어 시간 관계상 생략하겠습니다.




설교
2025-10-05(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10-05(D1)-주일예배(2618, 창2,18-21, AC.138-148), ‘돕는 배필, 이름, 갈빗대’.pdf
0.44MB
성찬.pdf
0.14MB

 

 

 

창2:15-17, ‘에덴동산, 선악과’ (AC.122-130) (2025/9/28, 주일)

‘에덴동산, 선악과’ (창2:15-17, AC.122-130) 15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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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명절 연휴는 창세기, 출애굽기와 함께 (2025/10/1)

 

말씀을 사랑하여 체어리티의 삶을 살고 있거나(loves the Word and lives in charity), 기록된 말씀을 어린아이 같은 마음(simplicity of heart)으로 믿으며, 신앙에 관한 속뜻 진리(the truth of faith which is in the internal sense)에 반(反)하는 원칙들을 세운 적이 없는 사람한테는 그가 주님의 말씀을 읽는 동안 그에게 와있는 천사들에게 다음과 같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천사들의 눈앞에서는 말씀의 모든 것(every particular)이 마치 생명을 가진 것처럼 지각됩니다. 이 생명은 말씀 안에 있는 생명으로서, 말씀은 이 생명이 하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이 땅에 내려왔을 때 태어난(from which the Word had birth) 것입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천사들 앞에 펼쳐지는 이 말씀 속 생명의 향연은 너무나 아름답고(beauty), 너무나 유쾌한 것(pleasantness)인데, 아울러 그때 그들의 모든 상태에 맞춰 형용할 수 없는 다채로움을 가진 표상들(表象, representatives)과 함께 펼쳐집니다.

 

주님의 기록된 말씀은 비록 글자 상으로는, 즉 지상 인간의 언어로는 대충(crude) 살짝 조잡, 세련되지 못해 보여도 그 안에는 선한 영들과 천사들 앞에(before good spirits, and before angels) 확 펼쳐지는 영적 천적인 것들(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로 충만한데, 그것은 바로 위에서 말씀드린 저런 일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말씀’은 성경 66권 중 주님이 직접 하신 말씀들, 곧 그 안에 아르카나(arcana)가 담긴 말씀들을 말하는데 이 아르카나는 주님으로부터만 말미암습니다. 그 가운데 구약은 , , , , , , , 삼상, 삼하, 왕상, 왕하, , , , , , , , , , , , , , , , , , (29), 신약은 , , , , (5) (AC.10325)말씀입니다.

 

이 말씀들을 ‘말씀을 사랑하여 체어리티의 삶을 살고 있거나 기록된 말씀을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믿으며, 신앙에 관한 속뜻 진리에 반하는 원칙들을 세우는 일 없이’ 읽는 사람한테는 그가 말씀을 읽을 때마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만, 그가 위 목록에 없는 성경들을 읽을 땐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안에 주님으로 말미암은 생명이 없기 때문인데 그때는 그에게 와 있는 천사들 눈에 아무것도 안 보이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은 내적 존재여서 내적 생명만 볼 수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창세기를 읽을 때 우리는 비록 지상 언어로 된 말씀을 읽지만 우리에게 와있는 천사들은 그 안에 담긴 아르카나를 읽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비록 말씀을 겉뜻으로 읽을지라도 우리 안의 천사들은 속뜻으로 읽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기억, 힘써 창세기를, 힘써 출애굽기를 읽어야 하겠습니다. 그때 우리 속 사람 안에 값으로 매길 수 없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이 놀라운 일들의 겉으로 드러나는 몇 가지 예를 들면, 속 사람의 강건함이 겉 사람의 육체, 몸의 강건함으로, 속 사람의 아름다움이 겉 사람의 얼굴빛과 피부로, 속 사람의 지혜와 지성이 겉 사람의 총명과 아이디어로 등등 속 사람의 충만함이 겉 사람의 모든 눈부심으로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말씀은 하나에서 열까지 천국과의 상응으로만 기록되었기 때문이며, 사람의 몸은 천국과 일대일 상응하기 때문인데, 그러니까 말씀 생활을 통해 천국의 모든 부요와 능력이 내 삶, 내 안에 흘러들어오는 것이지요. 우리가 천국을 감당할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긴 명절 연휴, 가급적 저마다의 무슨 골방을 찾아 바이블 리딩의 시간 가지시기를 적극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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