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2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창4:1-9)
태고교회는 사랑으로 주님을 신앙하는 교회(church had faith in the Lord through love)였으나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는 사람들(some who separated faith from love)이 일어났습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를 ‘가인’(Cain)이라 하고, 이웃을 향한 사랑인 체어리티(charity, 자선, 기부, 이웃사랑)를 ‘아벨’(Abel)이라 하였습니다.(1, 2절) (AC.325)
‘사랑으로 주님을 신앙한다’는 것은 그의 신앙생활 전반에 주님을 사랑함이 가득함을 말합니다. 그가 하는 말, 표정, 태도 등 전반에 주님 사랑으로 말미암은 따뜻함과 애정이 느껴지는 신앙으로, 그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의 동기가 오직 주님을 사랑함에 있는, 그런 신앙을 말합니다.
반면,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한다’는 것은 신앙 따로, 사랑 따로, 그러니까 말로는 주님 신앙을 말하면서도 태도나 표정, 느껴지는 아우라 등은 전혀 주님 사랑이 아닌, 그런 차갑고 낯선, 이상한 신앙을 말합니다. 말로는 원수를 사랑하라를 가르치면서 정작 자기는 원수를 미워하는 신앙인들이 여기에 해당되겠습니다.
각각의 예배에 대한 설명입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으로 드리는 예배를 ‘가인의 제사’(offering of Cain)라 하고, 체어리티로 드리는 예배를 ‘아벨의 제사’(offering of Abel)라 합니다. (3, 4절) 체어리티로 드리는 예배는 열납(悅納, acceptable)될 수 있었으나 분리된 신앙으로 드리는 예배는 열납될 수 없었습니다.(4, 5절) (AC.326)
분리된 신앙에 속한 사람들은 악한 상태가 되었는데, 이걸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Cain’s anger being kindled, and his countenance falling)라고 표현하신 것입니다.(5, 6절) (AC.327)
그리고 신앙의 질(質, quality)은 체어리티를 보면 알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신앙이 주(主)가 되려 하거나 체어리티보다 높아지려고만 하지 않으면 이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하고 싶어 한다는 것(7절) (AC.327)
신앙을 분리,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우선하는 사람들한테서는 체어리티가 사라지게 되는데, 이것을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Cain slaying his brother Abel)로 표현하였습니다.(8, 9절) (AC.328)
피난 간 부산 보수동 시절, 같은 동네 어느 권사님의 백일기도 정성에 마음이 움직여 그분 다니시던 감리교회에서 신앙생활이라는 걸 처음 시작하신, 그것도 가문 전체에서 처음으로! 부모님을 따라 이번에는 원래 사시던 서울로 제 나이 네 살 때 귀경, 서울 옥수동이라는 데에 터를 잡아 살면서 서울 약수교회라는 데에서 저의 어린 시절은 시작되었습니다. 약수교회는 근처 신일교회에서 나온 교회입니다. 장로교 통합측입니다. 한국 장로교회는 예장통합, 예장합동, 예장고신, 예장합신 및 기장 등 대표 교단과 함께 군소 수백 개 교단이 있습니다.
서울에서 초등학교, 그러니까 국민학교를 마치고 잠시 중학교를 다니던 저는 경남 김해로 이사, 부산까지 통학하면서 고1까지, 그리고 다시 이번에는 경기도 수원으로 가게 되는데, 거기서 수원중앙침례교회(1978년)라는 데를 다니게 되면서 저의 침례교회와의 연결고리가 시작됩니다. 이는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수원 유신고)가 크리스찬스쿨로서 거기 교목이 바로 이동원 목사님이셨기 때문이며,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김장환 목사님과 수원중앙침례교회로 연결된 것입니다. 김장환 목사님은 이동원 목사님 미국 유학 뒷바라지를 하신 분이시며, 또 제가 셋째 형님 따라 거기 5천 명 성가대도 섰던, 빌리 그래함 초청, 여의도 집회 때 통역으로 섬기신 분이셔서 나름 검증된(?)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여기 ‘검증’이라 한 이유는, 그때만 해도 한국 개신교단에서 침례교회는 이단 아닌가 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지요. 그 고등학교에서 중간에 이동원 목사님이 서울침례교회로 가시게 되어 저 역시 자연스럽게 서울침례교회로(1982년), 그리고 그곳 대학부에서 제 아내를 만나게 되며, 이곳에서 군 제대 후 삼성 입사 및 결혼, 그리고 두 아들도 얻게 됩니다.
그러다 미국에서 돌아오신 이동원 목사님을 돕기 위해 기업을 나와 교회 직원으로 들어가(1996년) 정보시스템 분야에서 현 지구촌교회의 첫 토대 놓는 일에 한 장의 벽돌로 쓰임을 받게 되지요. 이후 대전 내려와 지내던 중 어느 날, 살던 아파트 앞, 다니던 대덕한빛교회에서 한밤중 장모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하다가 신학으로의 부름(2005년)을 받고, 준비, 이듬해 대전침신신대원에 입학, 늦은 나이에 신학을 하게 됩니다. 이때 충주 모 교회 주말 사역도 겸하면서 성결교회 역시 경험하였습니다.
3년 신대원을 마치고 대전 늘사랑침례교회의 청빙(2009년)으로 장년 마을사역자 및 교회 내 정보시스템, 방송, 영상 총괄로 섬기다가 허리 디스크 악화로 사임(2013년), 재활 중 그해 9월, 집에서 ‘한결같은교회’라는 이름으로 교회를 시작, 처음엔 남들처럼 일반 목회로 부르심 받은 줄 알고 그쪽으로 여러 해 두리번거렸으나 둘째를 통해 주님은 전혀 새로운 길, 곧 수도원으로 부르시고(2016년),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새로운 길로 인도하심을 알고 순종, 처음엔 수도 목회를 준비하다가 지금은 스베덴보리 저작 번역 및 사역 준비에만 전념하고 있습니다.
수도원 공부를 하며, 많은 수도원과 성인(聖人)전 통해 국내외 수많은 성인을 접하면서, 그리고 여러 국내 군소 수도원들을 접하면서, 그리고 정교회, 성공회 및 불교 수도원 등을 접하면서 그동안 개신교, 특히 침례교회 안에서만 숨 쉬던 저는 개신교를 포함하는 전체 기독교, 그리고 기독교를 포함하는 인류 전체를 보는 시선, 시야, 주님의 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비유하자면,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옮겨가는 것과 같다 할까요? 그러나 이 변화는 결국 만나게 될 어떤 인물을 위한 중간 과정이었을 뿐인데요, 그가 바로 스베덴보리(Emanuel Swendenborg, 1688-1772)입니다. 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저는 비로소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또렷이 알아가게 되었어요. 주님은 스베덴보리를 통해 많은 것을 계시하셨는데, 그 계시의 전부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주님은 어떤 분이신가, 곧 주님의 신성(神性, The Divine)에 관한 걸 알게 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신성으로 충만한 나라인 천국, 곧 사람들로 하여금 생전에 천국에 합당한 상태가 되는 일에 힘쓰도록 말입니다.
2025년 현재 제 나이 만 64세... 지난 세월이 이렇게 쉽게 몇 글자로 요약, 정리가 되지만, 사실 이 글 사이사이 다 적지 못할 많은 일들이 있었지요. 누구나 다 그렇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 지난 날들이며, 한발 물러난 지금은, 그러니까 뭐랄까... 마치 고치 껍질을 찢고 나와 아름다운 나비가 되는 과정이었다랄까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님, 지난날 제 삶은 전적으로 주님의 섭리와 경륜임을 인정합니다.그리고 한 가지, 현재의 삶은 사실은 제 아내와 두 아들의 희생 위에 진행된 것임을 꼭 기억, 주님이 저들의 장래에 복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모태 신앙인의 삶, 곧 개신교인의 삶도 살아보고, 스베덴보리 역시 만 8년째인 현재 두 신앙 세계를 굳이 대비, 비교하자면,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제 경우는, 전자의 삶이 이 세상 정오의 빛 같은 삶이라면, 후자의 삶은 그 일곱 배의 빛 가운데 사는 삶이라 하겠습니다. 이 한 문장으로도 충분하지만 덧붙이자면, 전자는 영생을 얻기 위해 예수를 믿는다면 후자는 주님을 사랑하다 보니 덤으로 영생을 얻는 것이며, 전자는 영성, 영성 하지만 결국 겉 사람의 삶을 좀 거룩하게 사는 걸 가르친다면, 후자는 신성 그 자체에만, 그러니까 무슨 일체의 세속적인 걸 섞지 않고 오로지 주님의 신성만 가르치는, 그래서 순도 100%의 속 사람 되는 걸 가르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아, 하나 더, 전자는 말씀을 겉 글자로만 읽는 신앙생활이라면, 후자는 말씀을 겉과 속, 둘 다로 읽는 신앙생활이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3:17)
다음은 이 합리적 능력이라는 래셔널의 퀄러티(The quality of the rational)에 관한 설명입니다. 여기 보면, 이 합리적 능력은 자아, 즉 본성에 동의, 저주를 자초하더니 결국 지옥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남아 있는 이성(理性, reason)은 없고, 대신 이성 노릇을 하는 추론 능력(推論, ratiocination)만 남게 된 것이지요.(17절) (AC.237)
오늘날에도 아내라는 본성(own)에 사로잡혀 그만 주님 주신 본연의 역할인 합리(rational)라는 능력을 포기하는 남편들이 있는데요, 그럴 경우, 이들이 비록 선한 마음으로 그리했을지라도 주님의 질서는 엄정하여 결국 그 값을 치루게 됩니다. 좀 헷갈리고 잘 모르겠을 땐 주님 말씀을 의지하여 결정해야 합니다. 그저 당장 급한 불을 끄고자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서둘러 좋게 좋게 결정하면 좀 심하게 말씀드리면 지옥문이 열리기 때문인데요, 우리는 잘 모르겠을 땐 베드로처럼 해야 합니다.
4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5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6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7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8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9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10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11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눅5:4-11)
이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이라는 표현은 또한 다음 주님 말씀을 생각나게 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18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19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려진 자요20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21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22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23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마13:18-23)
혹시 이제라도 돌이켜 수습할 마음이 있으시면 자신의 경솔함을 주님 앞에 시인하시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14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15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16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man [vir])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17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3:14-19)
창세기 속뜻 주석설교, 오늘은 창세기 3장 두 번째 단락(창3:14-19) 시작으로, 그 내용은 ‘태고교회 네 번째 후손부터 홍수 때까지’입니다만, 오늘은 성찬이 있어 그중 창3:14 한 절만 번역, 설명을 곁들이며 살펴보겠습니다.
참고로, 위 제목에 ‘창3.3’은 창3 3절이 아니라 창3의 세 번째 설교라는 뜻입니다. 특별한 의미는 없고, 단지 원고 관리를 좀 더 쉽게 하기 위해 도입했으니 참고하세요.
먼저 개요입니다.
234
홍수로 이어지는 교회의 후속 상태(The subsequent state of the church down to the flood)가 여기 기술되고 있습니다. 그 당시 교회는 자신을 철저히 파괴했기 때문에,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인류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예언이 주어집니다.
235
감각으로 확인할 수 없는 거 믿는 걸 내켜 하지 않음으로써, 감각 파트는, 이게 바로 ‘뱀’(serpent)인데, 자신을 저주했고, 즉 그 자체가 저주였고, 그 결과 지옥 같은 처지가 되었습니다. (14절)
‘감각 파트’(sensuous part)란 사람을 구성하는 여러 영역, 가령, 영, 지혜, 지성, 이성, 지식, 감각 등의 여러 영역 중 하나를 말합니다. 사람의 이 모든 구성 요소는 주님을 사랑할 때와 자기를 사랑할 때가 다릅니다. 즉, 주님을 사랑할 때는 눈부시게 빛나며 놀라운 생기를 띠고, 2, 3백 프로의 능력을 발휘하며 순기능의 연속이지만, 자기를 사랑할 때는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어두워지면서 죽어가고, 주님이 주신 능력의 10분의 1도 못 쓰는 역기능의 연속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는 겉보기에 잠깐 반짝할지 몰라도 말입니다. 전자는 모든 것의 원천이요 근원 되신 주님께 붙어있는 삶을 사는 거지만, 후자는 나무에서 떨어져 나간 가지의 삶을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나중 처지는 시간문제입니다.
4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5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6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7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4-7)
11악한 일에 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아니하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 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12죄인은 백 번이나 악을 행하고도 장수하거니와 또한 내가 아노니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를 경외하는 자들은 잘될 것이요13악인은 잘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 그날이 그림자와 같으리니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함이니라(전8:11-13)
236
이런 이유로 온 인류가 지옥을 향해 뛰어 들어가는 걸 막기 위해, 주님은 세상에 오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15절)
237
교회가 ‘여자’(woman)라는 표현으로 더 깊이 설명되고 있는데요, 이 교회는 더 이상 진리를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자아(self), 즉 본성(own)을 사랑했습니다. 비록 이 본성을 ‘통제하라’(rule)는 합리적 능력(合理, a rational)이 그들에게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16절)
238
다음은 이 합리적 능력이라는 래셔널의 퀄러티(The quality of the rational)에 관한 설명입니다. 여기 보면, 이 합리적 능력은 자아, 즉 본성에 동의, 저주를 자초하더니 결국 지옥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남아 있는 이성(理性, reason)은 없고, 대신 이성 노릇을 하는 추론 능력(推論, ratiocination)만 남게 된 것이지요. (17절)
오늘날에도 아내라는 본성에 사로잡혀 그만 주님 주신 본연의 역할을 포기하는 남편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비록 선한 마음으로 그리했을지라도 이런 주님의 질서는 엄정하여 그 값을 치루게 되는데요, 좀 헷갈리고 잘 모르겠을 땐 주님 말씀을 의지하여 결정해야 하는데, 그저 당장 급한 불을 끄고자 서둘러 좋게 좋게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잘 모르겠을 땐 베드로처럼 해야 합니다.
4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5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6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7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눅5:4-7)
239
저주와 황폐함, 그리고 길들여 지지 않은 본성(nature), 즉 야생으로 돌아간, 짐승 수준이 되어버린 그들의 본성에 관한 설명입니다. (18절)
240
다음은, 신앙과 사랑의 모든 것을 향한 그들의 혐오와, 그리고 그렇게 해서 그들은 처음에는 사람이었다가 이제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19절)
241
태고인들은, 천적(天的, celestial), 그러니까 상응 능력이 있어서, 땅 위 온 세상 만물을 눈으로, 즉 육안(肉眼)으로 보면서도 속으로는 그 사물이 가리키고 표상하는 천국 신성한 것들을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상응의 사람들이 되면 일단 세상에서 추구하던 모든 세속적인 것들에서 한발 물러나게 됩니다. 즉 무슨 세상 지위를 탐하거나, 무슨 세상 것을 누리려 하거나 소유하려 하는 모든 노력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됩니다. 이 세상, 눈에 보이는 것들의 저급함과, 그 대신 천국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알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것들의 쓰임새에만 집중합니다. 주님이 세상에서 나의 지위를 높이셔도, 또 무슨 누림이나 소유를 많게 하셔도 오직 그 쓰임새만 생각합니다. ‘왜 나를 이 자리에 오르게 하셨을까?’, ‘왜 내가 이런 대접을 받게 하실까?’, ‘왜 내게 이런 재산과 명예를 허락하실까?’ 등 말이죠. 천국 천사들이 바로 이렇습니다.
그들의 시각(sight)은 그저 창문 역할, 안경 역할이었을 뿐, 그들이 실제 뭘 봤는지를 알 수 있는 건 그들의 말(speech)이었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경험을 통해 이런 걸 알 수 있는데요, 만일 누가 어떤 사람이 하는 말에 깊이 동의가 되면, 그는 실제로 그 말을 듣고 있으면서도 마치 말 자체보다는 말에 담긴 의미만 건지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좀 더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심지어 그 말의 의미보다 더 보편적인 의미에 주의를 기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후손들은 그들의 선조들하고는 달랐습니다. 이들 역시 땅 위 온 세상 만물을 눈으로 보았지만, 선조들과 달리 이들은 마치 사랑하듯 보았고, 마음과 생각이 거기에 사로잡혔으며, 그걸 가지고 천국 신성한 것들을 생각했습니다.
즉, 세상 것, 세상, 세속적 가치관으로 천국에 대한 걸 유추하는 것이지요. 가령,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왕 같은 제사장이라 했으니 천국 가면 아랫사람들을 많이 두고 마음껏 누리는 삶을 살겠네, 천국은 날마다 잔치하는 곳이라 했으니 날마다 큰 연회 베풀어 가장 기름진 음식들을 배불리 먹을 수 있겠네, 천국 길은 황금길이요, 집은 보석 집이라 했으니 황금을 비롯, 각종 보석 등 나는 큰 부자가 되겠네 식으로 천국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세속화가 오늘날에 생긴 게 아니라 그 기원이 아득히 먼 옛날, 곧 태고교회 그 후손들한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이 정말 놀랍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들과 함께 감각적인 것이 원리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의 선조들한테는 한낱 도구였을 뿐인 것들이 말입니다. 이처럼 세상에 속한 것, 땅에 속한 것이 원리가 되면, 사람들은 하늘에 속한 걸 이걸 가지고 이성질(理性질, reason)을 하며, 그런 식으로 눈이 머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하는 것 역시 각자의 경험을 보면 알 수 있는데요, 어떤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 있으면서 정작 그 말의 의미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은, 그 말에서 건지는 게 거의 없고, 더 나아가 보편적인 의미는 더 말할 것도 없으며, 때로는 그 사람이 하는 모든 말을 단어 하나 가지고, 심지어 어떤 문법적 특이점을 가지고 판단하는 데만 관심을 기울이는, 그런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 역시 스베덴보리의 경험에서 나오는 멘트인 것 같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그가 처음 세상에 이런 천국 아르카나를 전하기 시작했을 때, 공공장소에서 그는 이런 심한 모욕을 자주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뒤로 갈수록 그는 규모 있는 공적 만남은 자제하고, 은둔, 저술에만 전념합니다. 대인 만남은 최대한 조용한 사적 만남으로만 하고 말이지요.
다음은 절 별 속뜻입니다.
14절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AC.242-249)
242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Jehovah God said unto the serpent)라는 표현은 그들이 자신들의 넘어짐의 원인이 바로 자신들의 감각 파트였음을 지각했다는 의미입니다.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The serpent cursed above every beast and above every wild animal of the field)라는 표현은 그들의 감각 파트가 그들로 하여금 천적(天的, heavenly)인 것을 거슬러 육체에 속한 걸 향해 스스로 돌아서게 했고, 그렇게 해서 결국 저주를 자초하게 했다는 말입니다. 여기 ‘가축’(beast)과 ‘들의 짐승’(wild animal of the field)은 앞에서처럼 어펙션(affections, 애정)을 말합니다. ‘배로 다니고’(serpent going upon its belly)라는 표현은 이제 더 이상 그들의 감각 파트는 천국에 속한 것들을 바라보는 대신 그저 육체와 세상에 속한 것만 내려다볼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eating dust all the days of its life)라는 표현은 이제 감각 파트는 육체와 세상에 속한 걸로만 살아가야 하는, 그러니까 지옥처럼 비참한 처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243
천적이었던 태고인들한테 있어 몸에 속한 감각적인 것들은 그들의 속 사람에게 순응하고 순종하는 그런 것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이상 무슨 다른 용도로는 자신들의 감각적인 것들을 케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스스로를 사랑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자신들의 감각적인 것들을 속 사람보다 우선시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그것들은 분리되어 육체적이 되더니, 그렇게 해서 결국 저주를 받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쓰라고 인간에게 감각, 곧 시각, 청각, 미각, 후각 및 촉각을 주셨는데, 인간은 엉뚱하게도 이걸 가지고 자기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데 쓰느라 인생을 허비하고 있습니다.
244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Jehovah God speaking to the serpent)라는 표현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자신들의 넘어짐의 원인이 바로 자신들의 감각 파트였음을 그들이 지각했다는 의미로, 여기에 대해서는 뭐 더 설명할 게 없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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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he said to the serpent, thou art cursed above every beast, and above every wild animal of the field)라는 이 표현은 그들의 감각 파트가 스스로를 천적인 걸 향해서는 등을 돌리는 한편, 몸에 속한 걸 향해서는 돌아서게 함으로써 저주를 자초했다는 말이며, 말씀의 속뜻으로부터 이런 의미를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즉 주님은 결단코 누구를 저주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는 절대로 누구에게 화를 내시거나, 절대로 누구를 시험에 빠트리시거나, 절대로 누구를 벌하시거나, 더욱 절대로 누구를 저주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이 모든 것은 지옥의 무리들에 의한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결코 자비나 평화, 선함의 근원에서 나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곳과 말씀 여러 다른 곳에서 위와 같은 표현들, 곧 여호와 하나님이 낯을 돌리실 뿐 아니라, 화를 내시고, 벌하시며, 시험하신다는, 그리고 죽이시고, 심지어 저주하신다는 표현까지 사용하는 이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온 우주 안 모든 것, 심지어 악 자체는 물론, 형벌, 시험들까지도 다스리시며, 정하시는 분이 바로 주님이심을 믿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며, 그리고 사람들이 이런 가장 일반적인 진리를 받아들였을 때라야 그다음에 주님이 악에 뒤따르는 형벌이나 시험 같은 걸 돌이켜 어떻게 선이 되게 하시는지, 그리고 그렇게 해서 어떻게 이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역사하시는지를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가르칠 때와 배울 때, 이런 가장 보편적인 진리들이 반드시 가장 먼저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그래서 말씀의 겉뜻에 이런 표현들이 가득한 것입니다.
영계와 자연계를 포함, 이 모든 피조세계에 주님의 통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데가 하나라도 있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렇게 되면, 주님은 더 이상 하나님이 되실 수 없기 때문이지요. 천국과 지옥, 이 세상, 선과 악, 길흉화복(吉凶禍福) 등 어떤 영역이라 하더라도 모두 주님의 주권 아래 존재합니다. 다만 모든 악과 거짓을 주님이 창조하시지 않은 것처럼 말씀에 나오는 저런 모든 안 좋은 행위들 역시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을 뿐입니다. 인간은 그 의지로 주님을 사랑할 수도,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게 말입니다. 다만 그 결과는 오롯이 본인 책임이지요. 이는 마치 인간에게 지능을 주었더니 인간은 그 지능으로 자동차와 컴퓨터를 만들더라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자동차, 컴퓨터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닙니다. 다만 인간이 그걸 어떤 의도로 사용하느냐가 문제이지요. 주님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도 사랑하시지만,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도 사랑하십니다. 지옥의 존재가 그 증거이며, 아래 산상수훈 말씀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38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39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40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41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42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43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4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45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46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47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48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38-48)
인생을 살면서 이런 진리, 곧 ‘주님이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 ‘모든 것은 주님의 다스리심 아래 있다’ 하는 이런 진리들을 굳게 붙들고 의심하지 않는다면, 그때마다 수많은 난관과 어려움들, 불확실성과 모호함이라는 인생의 자욱한 안개가 걷히고, 밝고 맑은 천국의 햇빛과 햇볕을 받으며 살 수 있게 됩니다.
여기서는 이 정도로만 말씀드리지만 곧 좀 더 자세히 깊은 설명을 준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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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축과 들의 짐승’(beast and the wild animal of the field)이라는 이 표현이 어펙션(affections, 애정)을 말한다는 건 앞서 이들을 다룬 글들인 45, 46번 글들과 거기 주님의 허락으로 추가된 시편의 다음 구절을 보면 분명합니다.
9하나님이여 주께서 흡족한 비를 보내사 주의 기업이 곤핍할 때에 주께서 그것을 견고하게 하셨고10주의 회중을 그 가운데에 살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가난한 자를 위하여 주의 은택을 준비하셨나이다 (시68:9, 10)
여기 ‘주의 회중’(wild animal)은 선한 애정을 가리킵니다. ‘그 가운데에 살게 하셨나이다’(dwell in the inheritance of God)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장 24, 25절에서는 ‘가축과 땅의 짐승’(beast and the wild animal of the earth)이라 하신 반면, 여기와 또 창세기 2장 19, 20절에서는 ‘가축과 들의 짐승’(beast and the wild animal of the field)으로 언급하시는 이유는, 이들 구절은 교회, 즉 거듭난 사람을 다루고 있는 반면, 창세기 1장은 아직은 교회가 아닌, 즉 이제 막 거듭남의 과정을 시작하려는 사람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들’(field)이라는 말은 교회, 즉 거듭난 사람들한테 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창2:19, 20)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2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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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로 다니고’(serpent going on his belly), 이 표현의 의미가 이제 더 이상 그들의 감각 파트는 천국에 속한 것들을 바라보는 대신 그저 육체와 세상에 속한 것만 내려다볼 수밖에 없게 되었다라는 것임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 분명한데요, 고대에는 ‘배’(belly) 하면 그런 걸 상징한다는 것, 그건 배가 땅에 가장 가깝기 때문이고, ‘가슴’(chest) 하면 땅 위, ‘머리’(head) 하면 가장 높은 곳을 상징한다는 겁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건, 감각 파트는, 그 자체로 사람의 본성 중 가장 낮은 파트인데, 이걸 ‘배로 다녔다’(went upon its belly)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지요. 세속적인 걸 향해 돌아섰기 때문입니다. 그 배가 땅에까지 착 달라붙음, 그 얼굴에 진토가 날라와 덕지덕지 묻음 등 유대교회에도 이런 유사한 상징이 있었는데,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표현을 시편에서 읽는 것입니다.
24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시고 우리의 고난과 압제를 잊으시나이까25우리 영혼은 진토 속에 파묻히고 우리 몸은 땅에 붙었나이다26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소서(시44:24-26)
여기서도 보면, 분명히 사람이 여호와의 얼굴을 외면하여 등 돌리는 것을 가리켜, ‘그의 배가 땅 먼지에 착 달라붙었다’(cleaves by his belly to the dust and to the earth) 하고 있습니다. 요나서에도 보면, 큰 물고기의 ‘배’(belly)는, 요나가 그리로 던져졌지요. 마찬가지로 땅의 낮은 파트들을 상징합니다. 아래 그의 예언을 보면 말이지요.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욘2:2)
여기 ‘스올’(hell)은 낮은 땅을 가리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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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사람이 하늘의 일들을 생각할 때는 그를 가리켜 ‘똑바로 서서 걷다’(walk erect), ‘위를 보다’(look upward), ‘앞으로 나아가다’(forward)라고 했는데 같은 의미이지요. 반대로 그가 육적, 세속적 일들을 생각할 때는 그를 가리켜 ‘땅에 엎드려 절하다’(bowed to the earth), ‘아래를 보다’(look downward), ‘뒤로 물러가다’(backward)라고 했습니다. 레위기입니다.
나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그들에게 종된 것을 면하게 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내가 너희의 멍에의 빗장을 부수고 너희를 바로 서서 걷게 하였느니라(레26:13)
미가서에도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이 족속에게 재앙을 계획하나니 너희의 목이 이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요 또한 교만하게 다니지 못할 것이라 이는 재앙의 때임이라 하셨느니라 (미2:3)
예레미야서에도
8예루살렘이 크게 범죄함으로 조소거리가 되었으니 전에 그에게 영광을 돌리던 모든 사람이 그의 벗었음을 보고 업신여김이여 그는 탄식하며 물러가는도다, 13높은 곳에서 나의 골수에 불을 보내어 이기게 하시고 내 발 앞에 그물을 치사 나로 물러가게 하셨음이여 종일토록 나를 피곤하게 하여 황폐하게 하셨도다(애1:8, 13)
그리고 이사야서에서도
24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지은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 25헛된 말을 하는 자들의 징표를 폐하며 점치는 자들을 미치게 하며 지혜로운 자들을 물리쳐 그들의 지식을 어리석게 하며(사44:2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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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eat dust all the days of its life)라는 이 표현의 의미는 이제 감각 파트는 육체와 세상에 속한 걸로만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그러니까 지옥처럼 비참한 처지가 되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말씀에 나오는 ‘흙’(dust)의 상징을 보면 더욱 분명합니다. 미가서입니다.
14원하건대 주는 주의 지팡이로 주의 백성 곧 갈멜 속 삼림에 홀로 거주하는 주의 기업의 양 떼를 먹이시되 그들을 옛날같이 바산과 길르앗에서 먹이시옵소서, 16이르되 여러 나라가 보고 자기의 세력을 부끄러워하여 손으로 그 입을 막을 것이요 귀는 막힐 것이며 17그들이 뱀처럼 티끌을 핥으며 땅에 기는 벌레처럼 떨며 그 좁은 구멍에서 나와서 두려워하며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주로 말미암아 두려워하리이다 (미7:14, 16-17)
‘옛날같이’(days of eternity)는 태고교회를 의미합니다. ‘여러 나라’(nations)는 자기 본성(own)을 의뢰하는 자들로, ‘그들이 뱀처럼 티끌을 핥으며’(they shall lick the dust like a serpent)라고 서술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시편에도
광야에 사는 자는 그 앞에 굽히며 그의 원수들은 티끌을 핥을 것이며(시72:9)
‘광야에 사는 자’(Barbarians)와 ‘원수들’(enemies)은 오직 땅과 세상에 속한 것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사야입니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사65:25)
‘흙’(dust, 아래 마10:14에서는 먼지로 번역)이 영적 천적인 하늘의 일 대신 오로지 육의 일, 땅의 일만 생각하는 사람들을 가리키기 때문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만일 그들이 들어간 성이나 집이 합당하지 않으면, 반드시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shake off the dust of their feet) 명하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마10:14)
‘먼지’(dust)가 저주를 받음, 지옥 같은 처지가 됨을 상징한다는 건 19절에서 더 깊이 볼 것입니다.
이상으로 창세기 3장 두 번째 단락인 ‘태고교회 네 번째 후손부터 홍수 때까지’, 다른 말로는 ‘홍수로 이어지는 교회의 후속 상태’(창3:14-19) 그 첫 번째 시간을, 오늘은 성찬이 있어 14절 한 절만 번역, 역시 설명을 곁들이며 살펴보았습니다. 다음 주엔 본 단락 나머지 전부인 15절로 19절을 다루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