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의 예배, 아벨의 예배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a man [vir])하였다 하니라 2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4:1-5)

 

 

오늘부터 창세기 4장입니다. 오늘부터는 지난 네 달간 시도해 보았던 AC 주석 원본을 직접 읽는 주일예배 대신 원래대로 보통 3, 40분 분량의 3대지 설교 형식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설교 원고 분량으로는 대략 10-12페이지 정도 될 것 같은데, 설교 포함, 예배 시간을 가급적 최대 1시간을 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나중에 우리가 더욱 깊어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말씀에 깊이 잠기기를 원하게 되면, 그때는 따로 AC 원본을 직접 읽는 무슨 별도의 프로그램을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설교 끝부분에 이와 관련된 중요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부터 시작하는 이 창4는 사실 우리에게 무척 익숙한 본문입니다. 바로 저 유명한 ‘가인(Cain)과 ‘아벨(Abel)이 나오며, 끝에 가서는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 ‘(Seth)이 나오는 장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4장 본문 중 가인의 대답,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14)라든지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17)와 같은 데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어? 아직 지상에 존재하는 사람이라고는 아담과 하와, 그리고 가인밖에는 없는데... 이 사람들은 갑자기 어디 있다 나오는 거지?’라며, 당혹감을 맛보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성경, 특히 ‘말씀’을 오직 겉뜻으로만 읽으시는 분들에게는 답하기가 무척 어려운 대표적인 난해구절이 됩니다만, 그러나 사람이 영과 육으로 되어 있듯, ‘말씀’ 또한 영과 육, 곧 속뜻과 겉뜻으로 되어 있음을 아시는 분들한테는 그냥 평범한 상식선에서 쉽게 답할 수 있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먼저 아벨로 표상되는 태고교회의 특징인 ‘사랑으로 주님을 신앙하는 교회(church had faith in the Lord through love)에 대하여, 그리고 두 종류의 사랑인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과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에 각각 사용된 전치사 ‘to’와 ‘toward’의 차이에 대하여, 끝으로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오늘 본문의 두 등장인물인 ‘가인’과 ‘아벨’ 및 그들이 드린 예배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아벨로 표상되는 태고교회의 특징인 ‘사랑으로 주님을 신앙하는 교회’입니다.

 

스베덴보리가 기록한 위 1, 2절 개요에 다음과 같은 표현이 나옵니다.

 

태고교회는 사랑으로 주님을 신앙하는 교회(church had faith in the Lord through love)였으나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는 사람들(some who separated faith from love)이 일어났습니다. (AC.325)

 

여기 ‘사랑으로 주님을 신앙하는 교회’라는 표현은 얼핏 보면 그냥 평범해 보이는 표현 같지만, 사실은 그 안에 놀라운 핵심이 들어있어 특별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있어 ‘신앙(faith)이란 다음 세 가지, 곧 ‘참된 지식’, ‘내적 수용’, 그리고 ‘실천 의지’가 하나로 엮인 상태를 말하는데요, 그는 이 셋을 하나로 만드는 열쇠가 바로 ‘사랑’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그에게 있어 위 ‘사랑으로 주님을 신앙하는 교회’라는 표현은 ‘주님을 사랑하니 저절로 주님을 신앙하게 되었다’가 아니라, ‘주님에 대한 사랑이 신앙을 살아있는 것으로 만들었다’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즉, 사랑 없는 신앙은 지식, 교리의 수준이며, 관념적이어서 죽은 신앙이지만, 사랑을 통한 신앙은 의지와 삶, 실천으로 연결된 살아있는 신앙이라는 것이지요.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생명 있는’, 그러니까 ‘살아있는 신앙(living faith)이란 항상 이렇게 사랑에서 신앙으로, 신앙에서 삶으로라는 흐름을 가집니다. 선에서 진리로, 진리에서 행위로라고 해도 같은 말입니다.

 

사람은 의지가 열릴 때, 그러니까 움직일 때, 그 안으로 진리가 들어가 자기 것이 되는데요, 그게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persuasion’(설득, 세뇌)이 아닌 ‘genuine faith’, 즉 참 신앙입니다. 사랑 없이 진리만 알았을 때 일어나는 일은, 예를 들면, 입으로는 말해도 마음으로는 믿지 않고, 교리를 외워도 삶은 그대로이며, 위기나 시험 때 쉽게 무너지는 일입니다만, 그러나 사랑이 있으면, 진리가 ‘내 마음의 진리’가 되고, 주님을 향한 애정이 진리에 생명을 불어넣으며, 행위가 자연스럽게 따라오지요.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은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것(derived from love)이라고 반복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신앙한다는 것은 단순히 주님을 ‘존재하신다’ 인정하는 걸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본질인 사랑과 자비를 기쁘게 받아들이고, 그 사랑을 자신과 이웃에게 흘려보내려는 마음을 품으며, 그런 과정 속에서 주님의 진리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으로부터의 신앙’입니다. 그런 면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한 ‘신앙은 사랑의 빛을 받아야만 이해된다’는 말이 참 와닿습니다. 참으로 빛없는 눈이 보지 못하듯, 사랑 없는 신앙은 진리를 보지 못한다는 걸 시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사랑으로 주님을 신앙하는 교회’라는 표현에 나오는 태고교회는 가장 초기의 교회(primeval church), 그러니까 지금보다, 즉 가인과 아벨이 등장하는 태고교회 후손들보다 훨씬 더 천적인 교회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교회는 주님을 ‘사랑’함으로 자연스럽게 주님을 ‘신앙’했기 때문에, 따로 교리나 설교, 혹은 무슨 분별적 사고를 통해 신앙을 주장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지성(intellect)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의지(will)에서 오는 신앙, 곧 속 사람에서 직접 나오는 신앙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1758) 270번 글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제 삼층천, 즉 가장 내적 천국 천사들의 지혜를 묘사하고, 그들의 지혜가 일층천, 즉 가장 외적 천국 천사들의 지혜를 얼마나 크게 초월하는지 설명하겠다. 삼층천 천사들의 지혜는 일층천 천사들도 이해하지 못한다. 삼층천 천사의 내면은 셋째 단계로 열려 있으나, 일층천 천사의 내면은 첫째 단계로만 열려 있기 때문이다. 또 모든 지혜는 더 내면으로 갈수록 증가하고, 내면이 열린 정도만큼 완벽해지기 때문이다.

 

[2] 삼층천인 가장 내적 천국의 천사들은 그 내면이 셋째 단계에로 열려 있기 때문에, 신적 진리는 마치 그들 내면에 ‘새겨져’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셋째 단계의 내면은 둘째나 첫째 단계보다 더 천국의 형상을 띠고 있기 때문이며, 천국의 형상은 신적 진리의 형태이고, 따라서 신적 지혜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신적 진리가 이 천사들에게 새겨져 있는 것 같고, 직감적이고 천성적인 것같이 보이는 것이다. 따라서 이 천사들은 참된 신적 진리를 듣는 즉시 그것이 진리임을 확실히 알고 직감적으로 파악하며, 그 후, 마치 자기 안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그 진리를 본다. 이 천사들의 특성이 이렇기 때문에 그들은 결코 신적 진리를 추론하지 않으며, 어떤 진리가 참인가 아닌가 논쟁하는 일은 더욱 없다. 또 그들은 믿는다는 것이나 신앙을 갖는다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른다. 그들은 말한다. “믿는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나는 사실이 그렇다는 것을 보고 느껴 아는데.” 그들은 이것을 이렇게 비유한다. 예를 들면 그것은 한 사람이 어떤 집과 그 주변의 여러 가지를 보면서 옆 사람에게 거기 집이 있다는 사실과 그 보이는 대로의 모양을 믿으라고 하는 것과 똑같다는 것이다. 또 정원과 그 안의 나무와 열매들을 보면서 그것을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는 옆 사람에게 거기 정원과 나무와 열매가 있음을 믿으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다는 것이다. 이 천사들이 결코 신앙을 거론하지 않으며, 신앙이라는 개념조차 없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래서 신적 진리를 추론하지 않으며, 어떤 진리도 그 여부를 놓고 토론하지 않는 것이다.

 

[3] 그러나 일층천인 가장 외적인 천국의 천사들은 신적 진리가 내면에 새겨져 있지 않다. 그들은 생명의 첫째 단계만 열려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진리를 놓고 추론한다. 그리고 추론하는 사람은 추론의 대상 너머의 것은 거의 보지 못한다. 본다 해도 자기 결론을 확정하려는 목적에 그친다. 확정하고 나면, 그것이 신앙의 문제이므로 믿어야 한다고 말한다.

 

[4] 이에 대해 나는 천사들과 얘기한 적이 있다. 그들은 삼층천 천사들과 일층천 천사들의 지혜의 차이는 명백함과 모호함의 차이와 같다고 말했다. 그들은 삼층천의 지혜를 유용한 모든 것으로 가득하고, 사방이 공원과 온갖 화려한 것으로 둘러싸인 장엄한 궁전에 비유했다. 또 그곳 천사들은 지혜의 진리 안에 있으므로 그 궁전에 들어가 모든 것을 볼 수 있고, 공원을 마음대로 거닐며, 이 모든 것에서 기쁨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진리를 놓고 추론하는 사람들, 특히 진리에 대해 논쟁하는 사람들은 이와 다르다고 했다. 그들은 진리를 진리의 빛에 비추어 볼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서 받거나 말씀을 글자 그대로 이해하여 진리를 구한다. 그들은 진리를 내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진리는 믿어야 하는 것이고, 사람은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또 이런 문제를 내적으로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그 지혜의 궁전 입구에도 가지 못하며, 안에 들어가 거닐 수는 더욱 없다고 천사들은 말했다. 첫걸음에서 막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진리 자체 안에 있는 이들은 이와 다르다. 그들이 제한 없이 걸어가고 전진하는 것을 막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들이 보는 진리가 그들이 어디를 가든 넓은 들판으로 그들을 인도하기 때문이다. 모든 진리는 무한히 확장되며, 수많은 다른 진리와 연결되어 있다.

 

[5] 그 천사들은 또 가장 내적 천국의 천사들의 지혜는 주로 다음 사실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그 천사들이 사물 하나하나에서 신성과 천국적인 것을 보며, 또 연계된 많은 사물에서 경이를 본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상응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들이 궁전과 정원을 볼 때, 그들은 눈에 보이는 대상에 중점을 두지 않고, 그것의 원인이 되는 내적인 것, 즉 그것에 상응하는 것을 생각한다. 이것은 대상의 외관에 맞추어 무한히 다양하게 계속되므로 그들은 질서대로 연결되어 있는 무수한 것을 동시에 보는 것이다. 이것으로 그들의 마음이 기쁨에 넘치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을 잊어버린 듯 보인다고 했다. 천국 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주께로부터 나와 천사들 안에 있는 신적인 것에 상응한다는 것은 위에 설명했다. (HH.270)

 

 

다음은 두 종류의 사랑인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과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에 각각 사용된 전치사 ‘to’와 ‘toward’의 차이에 대해 살펴봅니다.

 

우선 결론부터 보면, ‘love to the Lord’는 직접적, 수직적 사랑이고, ‘love toward the neighbor’는 파생적, 수평적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여기 전치사는 그냥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이 ‘어디에서 어디로 어떻게 흘러가는가’를 드러내는 영적인 구조적 표현인데요,

 

그럼, 먼저 왜 ‘love to the Lord’인가부터 보겠습니다.

 

to’는 방향이 선명하고 직접적일 때 쓰는 전치사입니다. 가령 다음과 같이 말이지요. go to Seoul, pray to God, give glory to Him 등, 그러니까 어떤 대상에게 직접 닿는, 완전한 방향성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 신학에서 ‘Love to the Lord’는 단순한 호감이나 감정이 아니라, 가장 내적이고, 가장 직접적이며, 영혼의 중심에서 일직선으로 주님께 향하는 사랑, 즉, 본원적, 수직적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to’가 정확합니다.

 

다음은 왜 ‘love toward the neighbor’인가입니다.

 

toward’는 방향을 나타내지만, ‘to’와 달리 여전히 과정 속에 있는, 완전히 도달한 것이 아닌, 흐름, 움직임, 지향을 나타냅니다. 예를 들면, move toward the light, tend toward unity 같은... 여기엔 향하지만, 그 안에서 계속 확장되고 활동하는 사랑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스베덴보리의 이웃 사랑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neighbor’는 단지 사람(person)만이 아니라, 공동선, 공동체, 나라, 교회, 진리, 선의 영역, 그리고 그 모든 선의 질서 등, 이 전부를 포괄하는 ‘더 넓어지는 사랑의 활동 범위’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웃 사랑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밖으로 흘러나가 확장되는 방사형 구조를 갖습니다. 따라서 고정된 대상에게 일직선으로 닿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흘러나가며 확장되는 ‘운동성’을 표현하는 것, 네, 바로 ‘toward’입니다.

 

이 사소해 보이는 전치사 차이는,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선(사랑)은 중심에서 퍼져나가며, 주님→사람(이웃)으로 흐른다’라는 핵심 천적·영적 구조를 정확히 반영합니다. 그러므로 만약 두 단어를 바꾸면 영적 구조가 흐려지거나 잘못 전달되는 대참사가 발생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문장에 사용된 어휘 하나하나는 그냥 생각나는 대로 아무렇게나 사용된 게 아닙니다. 그가 보고 온 천국 구조와 시스템을 염두에 둔 정교한 신학적 구조를 반영하고 있어서, 이런 전치사 하나도 그냥 선택된 게 아닌 것이지요. 상응 구조를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요약할 수도 있겠습니다. ‘주님 사랑은 뿌리이고, 이웃 사랑은 그 뿌리에서 뻗어 나오는 가지입니다. 그래서 뿌리 사랑은 ‘to’, 가지 사랑은 ‘toward’이지요.’라고 말입니다. 사실 이 전치사 차이는 스베덴보리의 사랑론 전체 구조와 정확히 맞물려 있습니다. 영어 표현 하나가 단순한 언어적 차이가 아니라 신학적·영적 구조의 차이까지 드러낸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끝으로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오늘 본문의 두 등장인물인 ‘가인’과 ‘아벨’ 및 그들이 드린 예배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인 창4:1-5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개요를 처음부터 다시 이어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태고교회는 사랑으로 주님을 신앙하는 교회(church had faith in the Lord through love)였으나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는 사람들(some who separated faith from love)이 일어났습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를 ‘가인’(Cain)이라 하고, 이웃을 향한 사랑인 체어리티(charity, 이웃 사랑)를 ‘아벨’(Abel)이라 하였습니다. (1, 2) (AC.325)

 

각각의 예배에 대한 설명입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으로 드리는 예배를 ‘가인의 제사’(offering of Cain)라 하고, 체어리티로 드리는 예배를 ‘아벨의 제사’(offering of Abel)라 합니다. (3, 4) 체어리티로 드리는 예배는 열납(悅納, acceptable)될 수 있었으나 분리된 신앙으로 드리는 예배는 열납될 수 없었습니다. (4, 5) (AC.326)

 

분리된 신앙에 속한 사람들은 악한 상태가 되었는데, 이걸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Cain’s anger being kindled, and his countenance falling)라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5, 6) (AC.327)

 

이 짧은 개요에 이미 모든 핵심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창1-9에 등장하는 모든 인명, 그러니까 ‘아담(אָדָם, Adam), ‘하와(חַוָּה, Eve), ‘가인(קַיִן, Cain), ‘아벨(הֶבֶל, Abel) 및 ‘(שֵׁת, Seth) 등의 ‘이름’의 의미에 대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이름들은 겉뜻으로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한 개인으로 읽히지만, 속뜻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 곧 그 시대 존재했던 교회의 영적 상태와 본질을 가리킨다는 것을 말입니다. 교리나 신학이라고 해도 됩니다.

 

그러므로 창1-3에서 ‘아담’과 ‘하와’로 그려진 초창기 가장 순수했던 태고교회를 ‘사랑으로 주님을 신앙하는 교회’라고 했다면, 이제 세월이 흘러 그 이어지는 여러 후손이 일어났는데, 그 가운데 그 본질에 있어 이상한, 그러니까 그 영적 상태가 달라진 후손이 일어났고, 그 대표적인 입장들을 가리켜 ‘가인’이라 한 것이지요. 물론 ‘아벨’처럼 여전히 선조들의 순수한 상태를 변함없이 이어받는 교회도 있었지만 말입니다. 참고로, ‘이름’들을 이렇게 이해하면, 앞서 잠깐 언급한 난해구절 문제도 너무나 쉽게 해결됩니다.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는 사람들’, 곧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란 이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 없이 진리만을 주장하는 사람들, 즉 나는 하나님을 안다 말은 하지만, 실제로 주님을 사랑하지는 않는 상태인데요, 요즘 말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말씀을 많이 알고, 교리를 줄줄 외우며, 신학적 논리는 뛰어나지만, 정작 이웃을 향한 사랑, 주님에 대한 겸손한 마음이 없는 신앙 말입니다. 그것은 신앙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신앙이 아닙니다. 이것이 ‘가인의 제사’, 곧 ‘가인이 드리는 예배’입니다. 겉으로는 분명 제사를 드렸는데, 겉으로는 분명 예배를 드렸는데, 실제로 그의 마음에는 자기 자신만 있고, 정작 주님은 없는 그런 예배를 말합니다. 주님도 성경에 이미 여러 번 수없이 언급하셨는데요, 신구약 생각나는 한 군데씩만 보면 이렇습니다.

 

10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11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16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17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1:10-17)

 

1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2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3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4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거늘 5너희는 이르되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6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7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8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9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10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 11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15:1-11)

 

그러니까 이 ‘가인’이라는 전통과 입장은 참으로 인류의 오랜 역사를 마치 대하(大河)와 같이 유유히 흐르는 정말 고약한 흐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가인의 예배’와 달리 ‘아벨의 예배’는 다음과 같은데요, 곧 사랑에서 비롯된 신앙이요, 선(善) 자체로서, 겸손하고,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얼핏 겉보기, 외형은 미약해 보이지만, 그러나 내면은 가장 순전한 상태를 상징합니다. 가인이 이를 미워한 것은 곧 지식 중심의 신앙은 사랑 중심의 신앙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음 주님 말씀이 생각납니다.

 

31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33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35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1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42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45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25:31-46)

 

 

이상으로 창세기 4장, ‘교회로부터 분리된 교리들, 또는 이단들’, 그 첫 번째 본문(4:1-5)을 대지만 뽑아 말씀드렸습니다.

 

한 가지 양해 말씀을 드립니다. 사실 저의, 주님께 받은 1차 소명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일반 목회가 아닌, 이런 특수 목회, 곧 스베덴보리의 저작들을 연구, 번역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스베덴보리를 알기 훨씬 전인 지난 2013년 가을, ‘한결같은 교회’라 이름하며 시작한 이 사역 또한 가볍지 않아 지금까지 주일예배, 특히 주일 설교 준비에 나름 심혈을 기울여 온 것을 여러분, 특히 제 블로그나 유튜브 구독자들께서는 잘 아실 겁니다. 이 역시 몇 사람 안 되지만 말입니다. 이렇게 주님께 받은 소명과 이 주일 설교 준비를 지난 수년간 병행하면서 일주일 내내 마음이 둘로 나뉘는 경험을 오래 해왔습니다만, 이제는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 결심, 이렇게 주일 설교 원고가 있는 예배는 오늘로 마치고, 다음 주부터는 저희 부부만 예배드리는 설교 없는, 그러나 말씀 읽고 귀 기울이는 간소한 예배로 전환하고자 합니다. 여전히 AC 진도에 맞춰서 가긴 할 테지만 말입니다. 혹시 이 간소한 예배조차 원하시면 유튜브에 올리긴 하겠지만... 그 역시 또 하나의 ‘’이 될까 봐 확답은 못 드리겠습니다. 원고 없는, 즉 설교 없는 예배가 몹시 낯설겠지만, 그러나 ‘주님은 말씀을 읽는 모임을 예배로 인정하신다’는 스베덴보리의 권면에 힘을 얻어 시작합니다. 기도해 주세요.

 

오늘 이 설교 원고 외에 오늘 본문 창4:1-5와 관련된 AC 번역본도 블로그에 올리겠습니다. 블로그(https://bygrace.kr/)를 찾아주세요.

 

원고 맨 앞으로 돌아가 본문과 개요를 한 번 더 읽고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그동안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설교

2025-11-30(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 2025-11-30(D1)-주일예배(창4,1-5, AC.338-358), 창4.1, ‘가인의 예배, 아벨의 예배’.pdf
0.53MB

 

https://youtu.be/GmwQ1jEwqxE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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