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450

 

이 세상에 있을 때 말씀에 관하여 특별히 밝은 것처럼 보였던 어떤 이들은, 천국에 대해 매우 그릇된 생각을 품고 있었는데, 그들은 자신이 높은 곳에 있으면 곧 천국에 있는 것이라고 여겼고, 그 높은 자리에서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다고 상상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영광과 남들 위에 서는 우월함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러한 환상 안에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이 잘못되었음을 보여 주기 위하여, 그들은 실제로 높은 곳으로 올려졌고, 거기서 아래의 것들을 어느 정도 다스릴 수 있도록 허락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환상에 불과한 천국임을 부끄러움 속에서 깨달았으며, 천국은 높아지는 걸로 이루어지는 곳이 아니라, 사랑과 체어리티(charity), 곧 그 안에 주님의 나라가 있는, 그런 사람들이 있는 곳마다 그곳이 바로 천국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천국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아지기를 바라는 데에 있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는데, 남들보다 더 위대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기 때문입니다. Some who during their abode in this world had seemed to be preeminently enlightened in regard to the Word, had conceived so false an idea about heaven that they supposed themselves to be in heaven when they were high up, and imagined that from that position they could rule all things below, and thus be in self-glory and preeminence over others. On account of their being in such a fantasy, and in order to show them that they were in error, they were taken up on high, and from there were permitted in some measure to rule over things below; but they discovered with shame that this was a heaven of fantasy, and that heaven does not consist in being on high, but is wherever there is anyone who is in love and charity, or in whom is the Lord’s kingdom; and that neither does it consist in desiring to be more eminent than others, for to desire to be greater than others is not heaven, but hell.

 

 

해설

 

이 글은 스베덴보리가 ‘천국에 대한 가장 뿌리 깊은 오해 하나를 정면으로 해체’하는 대목입니다. 그것은 곧 ‘높아짐’과 ‘천국’을 동일시하는 생각입니다. 특히 이 오해는 말씀에 밝다고 여겨졌던 이들, 곧 종교적 지식과 이해를 많이 갖춘 사람들에게서 더 쉽게 나타난다는 점에서 매우 날카로운 경고가 됩니다.

 

이들은 천국을 공간적 개념으로 이해했습니다. 높은 곳, 위에 있음, 내려다봄, 다스림 같은 이미지가 천국의 본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고대부터 반복되어 온 상상입니다. 신적인 것은 위에 있고, 인간적인 것은 아래에 있으며, 위에서 아래를 통제하는 것이 곧 신적 질서라고 여기는 사고방식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호히 ‘환상’이라고 부릅니다.

 

흥미로운 점은, 주님께서 이 오해를 말로만 교정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그들이 믿고 있던 바로 그 환상을 실제로 체험하게 하십니다. 그들은 높은 곳으로 올려지고, 아래를 다스릴 수 있는 권한도 어느 정도 허락받습니다. 이 장면은 일종의 ‘영적 실험’과도 같습니다. 그들이 믿는 천국이 실제로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스스로 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부끄러움’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경험한 것은 참된 천국의 기쁨이 아니라, 공허하고 불안정한 환상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높이 올라갔지만 평안은 없었고, 다스렸지만 기쁨은 없었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 그들은 비로소 알게 됩니다. 천국은 위아래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과 체어리티(charity)의 문제’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정의를 매우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천국은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 있는 사람이 있는 곳마다 있으며, 그곳이 곧 주님의 나라라고 말입니다. 이는 천국이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상태’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해 줍니다. 어디에 있느냐보다, 어떻게 사랑하느냐가 천국을 결정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문장은 이 글의 핵심을 찌릅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위대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라는 말입니다. 이는 단순한 도덕적 충고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람의 방향’ 자체가 서로 반대임을 말합니다. 천국의 사랑은 낮아짐과 섬김으로 흐르고, 지옥의 사랑은 높아짐과 지배로 흐릅니다. 둘은 결코 같은 방향일 수 없습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본문은 교회와 신앙의 구조를 다시 점검하게 만듭니다. 영적 지식, 직분, 영향력, 인정받음이 언제든지 ‘높아짐의 환상’으로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말씀에 밝고, 영적 언어에 익숙한 사람일수록, 자신도 모르게 천국을 ‘위치’나 ‘지위’로 오해할 위험이 큽니다.

 

AC.450은 이렇게 말합니다.

 

천국은 위에 있지 않습니다. 천국은 사랑이 있는 곳에 있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덧붙입니다.

 

남들보다 더 높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시작되는 그 지점에서, 우리는 이미 천국의 반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본문은 천국을 낮추는 글이 아니라, 천국을 ‘제자리로 되돌려 놓는 글’입니다.

 

 

 

AC.449, 창5 앞, 'Concerning Heaven and Heavenly Joy' (AC.449-459)

AC.449 지금까지 천국과 천국의 기쁨이 어떠한 것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생각해 본 사람들조차도, 그것에 대해 매우 일반적이고 거친(gross) 개념을 형성하였을 뿐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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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49

 

지금까지 천국과 천국의 기쁨이 어떠한 것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생각해 본 사람들조차도, 그것에 대해 매우 일반적이고 거친(gross) 개념을 형성하였을 뿐이어서, 거의 개념이라고 할 수도 없는 수준에 머물렀습니다. 그들이 이 주제에 관해 어떠한 생각을 품고 있었는지는, 세상에서 막 사후 세계로 넘어온 영들로부터 제가 매우 정확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있을 때, 마치 여전히 이 세상에 있는 것처럼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 몇 가지 예를 들 수 있습니다. Hitherto the nature of heaven and of heavenly joy has been known to none. Those who have thought about them have formed an idea concerning them so general and so gross as scarcely to amount to any idea at all. What notion they have conceived on the subject I have been able to learn most accurately from spirits who had recently passed from the world into the other life; for when left to themselves, as if they were in this world, they think in the same way. I may give a few examples.

 

 

해설

 

이 글은 이후 이어질 긴 설명의 ‘출발점이자 문제 제기’에 해당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매우 단호한 진단을 내립니다. 천국과 천국의 기쁨은 지금까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과장이 아니라, 인간의 인식 구조 자체에 대한 평가입니다.

 

사람들이 천국을 생각한다고 말할 때, 스베덴보리가 보기에 그것은 실제로는 거의 생각하지 않은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개념이 너무 일반적이고, 너무 거칠어서, 실제로는 아무 내용도 담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행복하다’, ‘편안하다’, ‘좋은 곳이다’ 같은 말들은 천국의 실재를 가리키기에는 지나치게 평면적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 판단을 추측이나 신학적 논증으로 내리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사후 세계로 막 들어온 영들을 관찰함으로써 이를 확인합니다. 이 영들은 아직 내적으로 크게 변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자기들끼리 있을 때는 여전히 이 세상에서 생각하던 방식 그대로 생각합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그들의 생각은 인간이 천국을 어떻게 상상해 왔는지를 보여 주는 ‘가장 순수한 표본’이 됩니다.

 

즉, 이 영들은 실제로는 죽은 뒤 다른 세계에 와 있지만, 인식의 틀은 아직 지상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품고 있는 천국에 대한 생각은, 인간이 살아 있을 때 품던 생각과 거의 동일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를 통해, 인간이 천국을 얼마나 지상적 범주 안에서만 이해해 왔는지를 정확히 파악합니다.

 

이 대목에서 스베덴보리가 하려는 말은 분명합니다. 천국이 감추어져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 방식 자체가 천국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천국은 알려질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천국이 알려지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고, ‘아무도 알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글은 매우 중요한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대해 익숙하게 사용하는 언어와 이미지들이, 실제로는 거의 아무것도 말해 주지 못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신앙을 이야기할 때, 신앙은 쉽게 관념이나 희망 사항으로 흘러갑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제 ‘예를 들겠다’고 말합니다. 이 문장은 단순한 예시의 예고가 아니라, ‘인식의 전환을 위한 여정의 시작’입니다. 그는 추상적 설명 대신, 실제 영들의 생각과 반응을 하나하나 보여 주면서, 인간의 천국 이해가 어디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지를 드러내려 합니다.

 

AC.449는 이렇게 읽힙니다. ‘천국이 멀어서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너무 익숙한 방식으로만 생각해 왔기 때문에 알 수 없었다’는 선언으로 말입니다. 이 선언 위에서, 이후의 모든 천국, 기쁨, 퍼셉션 논의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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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5:32)

 

AC.536

 

앞선 글들에서 홍수 이전 존재하였던 교회들이 지녔던 퍼셉션에 관하여 많은 말씀을 드렸는데, 오늘날에는 이 ‘퍼셉션(perception)이라는 것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아서,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지속적인 계시의 한 형태로 상상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인간에게 본래 심겨진 어떤 것으로 여기기도 하며, 또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단지 상상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퍼셉션은 사랑의 신앙(the faith of love) 안에 있는 자들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바로 그 천적인 것이며, 보편적 천국(universal heaven) 안에는 무한한 다양성을 지닌 퍼셉션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퍼셉션이 무엇인지를 어느 정도라도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주님의 신적 자비로, 이어지는 글들에서 천국에 존재하는 주요한 퍼셉션의 종류들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As in the foregoing pages much has been said about the perception possessed by the churches that existed before the flood, and as at this day perception is a thing utterly unknown, so much so that some may imagine it to be a kind of continuous revelation, or to be something implanted in men; others that it is merely imaginary, and others other things; and as perception is the very celestial itself given by the Lord to those who are in the faith of love, and as there is perception in the universal heaven of endless variety: therefore in order that there may be among men some conception of what perception is, of the Lord’s Divine mercy I may in the following pages describe the principal kinds of perception that exist in the heavens.

 

 

해설

 

이 글은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는 동시에, ‘이후 전개될 매우 중요한 설명을 위한 문턱’을 형성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독자의 상태를 정확히 짚어 냅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퍼셉션은 더 이상 살아 있는 경험이 아니라, 개념조차 모호한 대상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이 퍼셉션을 오해하는 여러 방식들을 차분히 나열합니다.

 

어떤 이들은 퍼셉션을 마치 끊임없이 주어지는 계시처럼 생각합니다. 이는 퍼셉션을 외부에서 갑자기 주어지는 초자연적 정보로 이해하는 태도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퍼셉션을 인간에게 본래부터 심겨진 본능이나 직관 정도로 여깁니다. 반대로, 어떤 이들은 퍼셉션이라는 말 자체를 비현실적인 상상으로 치부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모든 오해가 퍼셉션이 더 이상 지상 교회의 경험 속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생겨난 것임을 암시합니다.

 

그는 여기서 퍼셉션의 본질을 매우 분명하게 규정합니다. 퍼셉션은 사랑의 신앙 안에 있는 자들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천적인 것입니다. 즉, 퍼셉션은 인간의 능력도 아니고, 훈련의 산물도 아니며, 타고난 감각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주님과의 결합 상태, 곧 사랑과 신앙의 상태 안에서 주어지는 인식입니다. 이 점에서 퍼셉션은 계시와도 다르고, 본능과도 다르며, 상상과는 더더욱 다릅니다.

 

또한 스베덴보리는 퍼셉션이 단일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천국 전체에는 끝없는 다양성을 지닌 퍼셉션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퍼셉션이 획일적인 기준이나 동일한 느낌이 아니라, 각 천적 공동체와 각 개인의 상태에 따라 다르게 주어지는 살아 있는 인식임을 뜻합니다. 앞서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미세하고 개별적’이라고 설명되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글의 중요한 전환점은, 스베덴보리가 이제 ‘설명 방식 자체를 바꾸겠다고 선언’하는 데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는 주로 지상 교회, 특히 태고교회의 상태를 통해 퍼셉션을 간접적으로 설명해 왔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천국에 실제로 존재하는 퍼셉션의 종류들을 직접 설명하겠다고 말합니다. 이는 퍼셉션이 추상 개념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며 질서와 구조를 지닌 인식이라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대목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태도를 가르쳐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퍼셉션을 신비화하지도 않고, 도덕화하지도 않으며, 인간의 능력으로 축소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퍼셉션을 ‘주님께서 주시는 천적 질서의 일부’로 다루며, 가능한 한 오해 없이 전달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전달 방식 역시, 계시적 선언이 아니라 설명과 분별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 글은 또한 독자에게 하나의 약속처럼 읽힙니다. 퍼셉션이 무엇인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스베덴보리는 가능한 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그 실체를 보여 주겠다고 말합니다. 이는 퍼셉션을 회복하겠다는 약속이 아니라, 퍼셉션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알게 함으로써, 오늘날의 신앙이 스스로의 위치를 정확히 인식하도록 돕는 작업입니다.

 

그래서 AC.536은 단순한 서론이 아니라, 이후 천국론과 인식론 전체로 이어지는 중요한 연결 고리입니다. 퍼셉션이 사라진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퍼셉션이 무엇이었는지를 바르게 알게 하는 것 자체가 이미 큰 신앙적 유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AC.535, 창5:32, ‘노아’는 홍수 이전 교회들 가운데 하나가 아님

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창5:32) AC.535 ‘노아’(Noah)라 하는 교회를 홍수 이전의 교회들 가운데 하나로 봐서는 안 된다는 점은, 29절에서 그를 가리켜 ‘여호와께서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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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5:32)

 

AC.535

 

노아(Noah)라 하는 교회를 홍수 이전의 교회들 가운데 하나로 봐서는 안 된다는 점은, 29절에서 그를 가리켜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comfort them from their work and the toil of their hands, out of the ground which Jehovah hath cursed)라고 한 데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 ‘위로(comfort)란, 그 교회가 살아남아 지속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 관해서는, 이후 주님의 신적 자비로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That the church called “Noah” is not to be numbered among the churches that were before the flood, appears from verse 29, where it is said that it should “comfort them from their work and the toil of their hands, out of the ground which Jehovah hath cursed.” The “comfort” was that it should survive and endure. But concerning Noah and his sons,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해설

 

이 글은 노아의 교회가 태고교회의 마지막 단계가 아니라, ‘이미 다른 질서에 속한 교회’임을 명확히 선 긋는 대목입니다. 앞서까지의 흐름만 보면, 노아가 태고교회의 연속선 위에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분명히 말합니다. 노아의 교회는 홍수 이전의 교회들에 포함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입니다.

 

그 근거는 29절에 나오는 ‘위로’라는 표현입니다. 이 위로는 단순히 고통을 덜어 주는 의미가 아니라, ‘존속과 지속’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노아의 교회는 사라질 교회가 아니라 남겨질 교회이며, 심판을 통과해 이어질 교회입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와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태고교회는 라멕에 이르러 완전히 역할을 마쳤고, 더 이상 이어질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서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라는 표현이 다시 언급되는 이유도 분명해집니다. 태고교회의 마지막 상태에서는 이 수고와 고됨이 교회 자체의 종말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노아에게서는 같은 표현이 ‘위로’와 연결됩니다. 이는 상태가 같다는 뜻이 아니라, ‘같은 조건 속에서도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그 차이는 어디에서 나오느냐 하면, 교회의 성격에서 나옵니다. 태고교회는 퍼셉션에 기반한 교회였기 때문에, 퍼셉션이 사라지면 교회 자체가 더 이상 성립할 수 없었습니다. 반면 노아의 교회는 교리에 기반한 교회입니다. 퍼셉션이 사라진 조건 속에서도, 교리를 통해 질서를 유지하고 신앙을 보존할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같은 ‘수고와 고됨’ 속에서도, 노아의 교회는 무너지지 않고 지속됩니다. 참고로, 여기 ‘수고와 고됨’은 주님의 선과 진리 아는 일이 예전엔 퍼셉션으로 즉시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었지만, 점점 기울다가 라멕의 때쯤 이르자 ‘수고와 고됨’의 일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구분은 매우 중요합니다. 노아는 태고교회의 회복판이 아니라, ‘전혀 다른 교회 유형의 시작점’입니다. 따라서 노아를 태고교회의 한 인물로 설교하거나, 태고적 신앙을 되살린 인물로 묘사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관점과 어긋납니다. 노아는 퍼셉션을 되찾은 사람이 아니라, 퍼셉션 이후의 시대를 살아갈 수 있도록 준비된 교회의 대표자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지점에서 자세한 설명을 미루고, ‘뒤에서 더 말씀드리겠다’고 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노아와 그의 아들들은 단순한 후속 인물이 아니라, 고대교회의 구조 전체를 설명하는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이 장에서는 위치만 정리하고, 본격적인 내용은 이후에 펼치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AC.535는 짧지만 결정적입니다. 노아는 태고교회의 끝이 아니라, ‘홍수 이후를 살아갈 교회의 시작’입니다. 이 한 문장을 통해, 독자는 창세기 전반부의 큰 전환점을 분명히 인식하게 됩니다. 이제 이야기는 멸망을 향해 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보존과 지속, 그리고 새로운 교회의 전개를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AC.536, 창5:32, ‘퍼셉션’(perception), 사랑의 신앙 안에 있는 자들에게 주님이 주시는 천적인 것

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창5:32) AC.536 앞선 글들에서 홍수 이전 존재하였던 교회들이 지녔던 퍼셉션에 관하여 많은 말씀을 드렸는데, 오늘날에는 이 ‘퍼셉션’(perce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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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34, 창5:32, ‘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AC.534-536)

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And Noah was a son of five hundred years; and Noah begat Shem, Ham, and Japheth. (창5:32) AC.534 ‘노아’(Noah)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고대교회(the ancient church)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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