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과 천국의 기쁨에 관하여 Concerning Heaven and Heavenly Joy

 

AC.452

나는 천국과 천국의 기쁨이 가장 큰 자가 되는 데 있다고 생각하는 영들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천국에서는 가장 작은 자가 가장 큰 자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가장 작은 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가장 큰 행복을 누리며, 따라서 가장 큰 자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큰 자가 된다는 것이 가장 행복한 자가 되는 것 외에 무엇이겠습니까? 권세 있는 자가 권세를 통하여 추구하고 부자가 재물을 통하여 추구하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그들은 또한 천국은 가장 큰 자가 되기 위하여 가장 작은 자가 되기를 원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경우 그 사람은 실제로 가장 큰 자가 되기를 열망하고 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천국은 마음으로부터 다른 사람들이 우리 자신보다 더 잘되기를 바라며,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증진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쓰임이 되기를 원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떠한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으로부터 하는 것입니다. I have conversed with spirits who supposed heaven and heavenly joy to consist in being the greatest. But they were told that in heaven he is greatest who is least, because he who would be the least has the greatest happiness, and consequently is the greatest, for what is it to be the greatest except to be the most happy? It is this that the powerful seek by power, and the rich by riches. They were told, further, that heaven does not consist in desiring to be the least in order to be the greatest, for in that case the person is really aspiring and wishing to be the greatest; but that heaven consists in this, that from the heart we wish better for others than for ourselves, and desire to be of service to others in order to promote their happiness, and this for no selfish end, but from love.

 

해설

AC.452는 AC.450-451에서 계속되어 온 ‘천국에서의 높고 낮음’이라는 주제를 그 내적 핵심까지 끌고 들어갑니다. AC.450에서는 다른 사람보다 높은 곳에서 지배하는 것이 천국이라는 공상을 바로잡았고, AC.451에서는 세상의 권세가 영계에서도 계속된다는 생각을 바로잡았습니다. 이제 AC.452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러면 천국에서 참으로 큰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역설적입니다. ‘가장 작은 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가장 큰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작아짐’은 자신을 무가치하게 여기거나 능력을 일부러 낮추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핵심은 자신의 높음과 영광에 관심을 두기보다 다른 사람의 선과 행복을 먼저 바라는 사랑의 방향입니다. 그래서 ‘가장 큼’의 기준 자체가 세상과 달라집니다.

 

특히 ‘가장 큰 자가 된다는 것이 가장 행복한 자가 되는 것 외에 무엇이겠습니까?’라는 문장이 중요합니다. 사람은 권력이나 재물 그 자체를 최종 목적으로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것들을 추구합니다. 권세 있는 사람은 더 큰 권세에서, 부자는 더 많은 재물에서 행복을 찾으려 하지만, 천국에서는 행복의 근원이 소유와 지배가 아니라 사랑과 쓰임에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매우 미묘한 함정이 있습니다. ‘천국에서는 작은 자가 큰 자가 된다’는 것을 알고서 ‘그렇다면 내가 가장 작은 자가 되어 가장 큰 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한다면, 겉모습만 낮아졌을 뿐 내적 목적은 전혀 바뀌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가장 큰 자가 되기 위하여 가장 작은 자가 되기를 원하는 것’ 역시 천국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겸손조차 자기 높임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된 천국적 상태는 무엇인가? 본문은 매우 분명하게 말합니다. ‘마음으로부터 다른 사람들이 우리 자신보다 더 잘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겸양의 표현이 아니라 사랑의 방향 자체가 자기에게서 이웃에게로 향하는 상태입니다. 다른 사람이 잘되는 것을 보고 시기하거나 자신의 위치가 낮아졌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선과 행복 자체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반드시 ‘쓰임’으로 나타납니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증진하기 위하여 실제로 그에게 쓰임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떠한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으로부터’라는 마지막 조건입니다. 칭찬받기 위해 돕거나, 인정받기 위해 섬기거나, 훗날 보답받기 위해 선을 행한다면 아직 자기 자신이 목적의 중심에 있습니다. 천국적 쓰임은 상대방의 선을 그 자체로 기뻐하기 때문에 행하는 것입니다.

 

결국 AC.452는 ‘천국에서 누가 가장 큰가?’라는 질문 자체를 변화시킵니다. 천국에서는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한 사람이 가장 큰 것이 아니라, 자신보다 이웃의 선과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며 사랑으로 그 행복에 쓰임이 되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고, 바로 그런 의미에서 가장 큰 사람입니다. 이는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신 주님의 말씀(막9:35)이 가리키는 천국의 질서와도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AC.452 해설)

 

 

 

AC.453, 창5 앞, '천국은 문을 통과해 들어가는 장소가 아니다'

천국과 천국의 기쁨에 관하여 Concerning Heaven and Heavenly Joy AC.453 어떤 사람들은 천국에 대하여 너무나 거친 개념을 가지고 있어서, 천국은 단지 들어가는 것을 허락받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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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51, 창5 앞, '천국에서는 무엇으로 사람의 높고 낮음이 정해지는가'

천국과 천국의 기쁨에 관하여 Concerning Heaven and Heavenly Joy AC.451육체로 사는 동안 권세(authority)를 가지고 있었던 어떤 영이 다른 삶에서도 여전히 명령하고 지배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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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 천국의 기쁨에 관하여 Concerning Heaven and Heavenly Joy

 

AC.451

육체로 사는 동안 권세(authority)를 가지고 있었던 어떤 영이 다른 삶에서도 여전히 명령하고 지배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영원한 다른 나라(another kingdom)에 있으며, 땅에서 누리던 그의 통치는 이미 끝났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지금 있는 곳에서는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선과 진리, 그리고 그가 그 안에 있는 주님의 자비(the mercy of the Lord)에 따라서만 존중받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또한 그 나라에서도 땅에서와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이 자신의 부와 군주의 총애에 따라 평가되는데, 그곳에서는 선과 진리가 부(wealth)이며 군주의 총애는 주님의 자비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만일 그가 다른 어떤 방식으로 명령하고 지배하기를 원한다면 그는 반역자(rebel)인데, 이는 그가 이제 다른 분의 나라에 있기 때문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그는 부끄러워하였습니다. A certain spirit, who during his life in the body had possessed authority, retained in the other life the desire to exercise command. But he was told that he was now in another kingdom, which is eternal; that his rule on earth was dead; and that where he was now no one is held in estimation except in accordance with the good and truth, and the mercy of the Lord, in which he is; and further, that it is in that kingdom as it is on earth, where everyone is rated according to his wealth, and his favor with his sovereign; and that there good and truth are wealth, and favor with the sovereign is the Lord’s mercy; and that if he desired to exercise command in any other way, he was a rebel, seeing that he was now in the kingdom of another. On hearing this he was ashamed.

 

해설

AC.451은 바로 앞 AC.450의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자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다’라는 가르침을 한 걸음 더 구체화합니다. AC.450이 ‘높아지고 지배하려는 욕망’ 자체를 보여 주었다면, AC.451은 세상에서 실제 권세를 누렸던 사람이 사후에도 그 권세 의식을 그대로 가지고 영계에 들어오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먼저 주목할 것은 육체의 죽음이 사람의 지배욕까지 자동으로 없애 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 영은 세상에서 권세를 행사하던 습관과 즐거움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는 사람이 사후에 전혀 다른 인격으로 갑자기 바뀌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형성한 자신의 사랑과 성품을 가지고 다른 삶으로 들어간다는 AC의 일관된 가르침과 연결됩니다. 죽음은 몸을 벗는 것이지, 그 사람의 지배적 사랑을 즉시 바꾸는 사건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에게 가장 먼저 알려지는 것은 ‘너는 이제 다른 나라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에서 가지고 있던 직책과 권한은 그 나라 안에서만 효력이 있었으며 죽음과 함께 끝났습니다. 영계에서는 세상의 신분, 직위, 명성 자체가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그곳에서 드러나는 것은 그 사람이 실제로 어떠한 선을 사랑했으며, 어떠한 진리를 받아들였고, 그것을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내적 상태입니다.

 

특히 ‘선과 진리가 부’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세상에서는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을 부유하다고 하지만, 천국의 관점에서는 주님께 받은 선과 진리를 풍성하게 가진 사람이 부유합니다. 여기서도 단순히 진리를 많이 ‘아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선과 진리가 그 사람의 사랑과 삶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부는 소유하여 자기를 높이는 재산이 아니라, 주님께 받아 이웃에게 쓰임이 될 수 있는 생명의 풍성함입니다.

 

더욱 깊은 표현은 ‘군주의 총애는 주님의 자비’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왕이나 권력자의 총애를 얻으면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지만, 천국에서는 인간이 자신의 공로나 자격으로 주님의 총애를 획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선과 진리, 구원과 천국의 생명 자체가 주님의 자비로부터 옵니다. 따라서 천국에서는 ‘내가 무엇을 이루었는가’보다 ‘주님께로부터 무엇을 받아 그것으로 어떻게 살고 있는가’가 근본적인 질서가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 방식대로 계속 지배하려는 사람을 ‘반역자’라고 한 것은 매우 강한 표현입니다. 그는 이제 ‘다른 분의 나라’, 곧 주님의 나라에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나라는 자기 사랑이 지배하는 나라가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지혜가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뜻으로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려는 것은 단순한 성격상의 결점이 아니라, 천국의 통치 질서 자체와 충돌하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권위가 있다면 그것은 자기 영광을 위한 권력이 아니라 선과 진리를 섬기며 이웃에게 쓰임이 되기 위한 권위입니다.

 

마지막의 ‘이 말을 듣고 그는 부끄러워하였다’는 짧은 문장이 인상적입니다. 그는 단순히 권력을 빼앗겨 굴욕을 느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여전히 세상의 질서를 천국에까지 가져오려 했다는 사실을 보게 된 것입니다. AC.451은 결국 우리에게도 묻습니다. 세상에서 맡은 직분과 영향력과 능력을 ‘내 것’으로 여기며 사람들 위에 서기 위해 사용하는가, 아니면 ‘주님이 내게 맡기신 것’으로 여기며 쓰임을 위해 사용하는가? 천국에서는 세상에서 얼마나 높은 자리에 있었는지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을 통하여 얼마나 선과 진리 안에서 주님의 자비를 받아 살았는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AC.451 해설)

 

 

 

AC.452, 창5 앞, '천국에서 가장 큰 사람은 왜 가장 작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가'

천국과 천국의 기쁨에 관하여 Concerning Heaven and Heavenly Joy AC.452나는 천국과 천국의 기쁨이 가장 큰 자가 되는 데 있다고 생각하는 영들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천국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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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50, 창5 앞, '천국은 높은 곳에 있는 것도,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는 것도 아니다'

천국과 천국의 기쁨에 관하여 Concerning Heaven and Heavenly Joy AC.450세상에 사는 동안 말씀에 관하여 특별히 밝은 깨달음을 가진 것처럼 보였던 어떤 사람들은 천국에 대하여 너무나 잘못된 생각을 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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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 천국의 기쁨에 관하여 Concerning Heaven and Heavenly Joy

 

AC.450

세상에 사는 동안 말씀에 관하여 특별히 밝은 깨달음을 가진 것처럼 보였던 어떤 사람들은 천국에 대하여 너무나 잘못된 생각을 품고 있어서, 자신들이 높은 곳에 올라가 있으면 천국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며, 그 위치에서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고, 그리하여 자기 영광(self-glory)을 누리며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지위에 있을 수 있다고 상상하였습니다. 그들이 이러한 공상(fantasy)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이 잘못되어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하여, 그들은 높은 곳으로 올려졌으며 거기서 아래에 있는 것들을 어느 정도 다스리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부끄러움 가운데 이것이 공상의 천국(a heaven of fantasy)임을 깨달았으며, 천국은 높은 곳에 있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 있는 사람이 있는 곳, 곧 그 안에 주님의 나라(the Lord’s kingdom)가 있는 사람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또한 천국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있기를 원하는 데 있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자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기 때문입니다. Some who during their abode in this world had seemed to be preeminently enlightened in regard to the Word, had conceived so false an idea about heaven that they supposed themselves to be in heaven when they were high up, and imagined that from that position they could rule all things below, and thus be in self-glory and preeminence over others. On account of their being in such a fantasy, and in order to show them that they were in error, they were taken up on high, and from there were permitted in some measure to rule over things below; but they discovered with shame that this was a heaven of fantasy, and that heaven does not consist in being on high, but is wherever there is anyone who is in love and charity, or in whom is the Lord’s kingdom; and that neither does it consist in desiring to be more eminent than others, for to desire to be greater than others is not heaven, but hell.

 

해설

AC.450은 천국에 대한 두 가지 잘못된 생각, 곧 ‘공간적으로 높은 곳이 천국이다’라는 생각과 ‘다른 사람보다 높은 자리에 서는 것이 천국의 행복이다’라는 생각을 동시에 바로잡습니다. 이 둘은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뿌리는 같습니다. 천국을 주님과 사랑의 상태가 아니라 ‘높음’이라는 외적인 조건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특히 이 사람들이 ‘말씀에 관하여 특별히 밝은 깨달음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는 점은 주목할 만합니다. 말씀을 많이 알고 잘 설명하며 영적인 것에 밝아 보이는 것과 실제로 천국적 성품을 지니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말씀에 관한 지식조차 자기 영광과 우월감을 위해 사용한다면, 외적으로는 깨달음처럼 보여도 그 사람의 내면은 천국의 질서와 정반대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단순히 말로 반박하지 않으시고, 그들이 원하던 상태를 실제로 경험하도록 허락하십니다. 높은 곳으로 올려 보내고 아래의 것들을 어느 정도 다스리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꿈꾸던 것을 실제로 얻고 보니 그것은 참된 천국이 아니라 ‘공상의 천국’이었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 그들 자신의 욕망이 무엇이었는지가 스스로에게 드러난 것입니다.

 

여기서 AC.450은 천국에 대한 매우 중요한 정의를 제시합니다. ‘천국은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 있는 사람이 있는 곳, 곧 그 안에 주님의 나라가 있는 사람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천국의 본질은 장소가 아니라 주님의 나라가 사람 안에 이루어진 상태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가 그 사람의 의지와 삶을 다스리는 곳에 이미 천국의 질서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자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지옥이라고까지 말하는가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여기서 모든 책임이나 지도력, 혹은 뛰어난 능력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핵심은 ‘다른 사람보다 위에 있고 싶어 하는 사랑’입니다. 천국에서는 받은 능력과 지위가 이웃을 섬기는 쓰임(use)을 위한 것이지만, 자기 사랑이 지배하면 다른 사람을 자기 아래에 두는 것 자체에서 즐거움을 얻습니다. 외적으로 같은 권한을 가지고 있어도 그 권한을 움직이는 사랑은 완전히 다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천국의 질서와도 정확히 통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라는 말씀처럼(마20:26), 천국에서 ‘높아짐’은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깊이 사랑하고 섬기는 방향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참된 천국의 기쁨은 ‘내가 얼마나 높은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받은 것으로 얼마나 기쁘게 쓰임이 되는가’에서 옵니다.

 

결국 AC.450은 천국을 먼 곳에 있는 어떤 높은 세계로만 바라보던 시선을 인간의 내면과 삶으로 돌립니다. ‘내 안에 주님의 나라가 있는가? 내가 알고 있는 말씀과 진리는 나를 높이는가, 아니면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게 하는가?’가 천국을 이해하는 실제적인 질문이 됩니다. 천국은 높은 곳에 올라가 다른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곳이 아니라, 자기 영광을 내려놓고 주님의 사랑과 체어리티가 다스리도록 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AC.450 해설)

 

 

 

AC.451, 창5 앞, '천국에서는 무엇으로 사람의 높고 낮음이 정해지는가'

천국과 천국의 기쁨에 관하여 Concerning Heaven and Heavenly Joy AC.451육체로 사는 동안 권세(authority)를 가지고 있었던 어떤 영이 다른 삶에서도 여전히 명령하고 지배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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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49, 창5 앞, '천국과 천국의 기쁨은 왜 세상에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가' (AC.449-459)

천국과 천국의 기쁨 Concerning Heaven and Heavenly Joy AC.449 지금까지 천국과 천국의 기쁨이 어떠한 것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것들에 관하여 생각해 본 사람들도 너무나 일반적이고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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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49

지금까지 천국과 천국의 기쁨이 어떠한 것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것들에 관하여 생각해 본 사람들도 너무나 일반적이고 너무나 거친 개념을 형성해 왔기 때문에, 그것은 거의 아무런 개념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들이 이 주제에 관하여 어떠한 생각을 품고 있었는지는, 세상에서 다른 삶으로 갓 건너온 영들을 통하여 저는 매우 정확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들끼리 있도록 내버려 두면, 마치 아직 이 세상에 있는 것처럼 세상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Hitherto the nature of heaven and of heavenly joy has been known to none. Those who have thought about them have formed an idea concerning them so general and so gross as scarcely to amount to any idea at all. What notion they have conceived on the subject I have been able to learn most accurately from spirits who had recently passed from the world into the other life; for when left to themselves, as if they were in this world, they think in the same way. I may give a few examples.

 

해설

AC.449는 창5 앞에 놓인 ‘천국과 천국의 기쁨에 관하여’라는 경험편 전체의 문을 여는 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사람들이 천국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합니다. 천국을 믿는 사람들조차 실제로 ‘천국이 어떤 상태이며, 천국의 기쁨이 무엇인가’를 거의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너무나 일반적이고 너무나 거친 개념’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일반적’이라는 것은 천국을 그저 ‘좋은 곳’, ‘고통이 없는 곳’, ‘죽은 뒤 행복하게 사는 곳’ 정도로 막연하게 생각하는 것이며, ‘거친’이라는 것은 천국의 행복을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육체적·감각적 행복의 연장선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천국에 대한 개념이기는 하지만, 실제 천국의 본질에는 거의 닿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천국의 기쁨은 장소나 환경에서 먼저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내적 상태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후 AC.449-459와 창5 뒤의 경험편에서 계속 밝혀지듯이, 천국은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생명이 그 사람 안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때 경험되는 기쁨과 평화의 상태입니다. 따라서 천국을 단지 아름다운 장소나 끝없는 안락함으로 상상한다면 천국의 가장 본질적인 것을 놓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사실을 ‘세상에서 다른 삶으로 갓 건너온 영들’을 통해 확인했다고 말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갓 세상을 떠난 사람은 죽었다는 이유만으로 즉시 모든 것을 아는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세상에서 형성한 생각과 사랑과 습관을 그대로 가지고 영계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천국에 대해서도 생전에 가지고 있던 생각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바로 이것이 스베덴보리에게 하나의 관찰 자료가 됩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는 자신의 속생각을 감추거나 신학적으로 그럴듯한 말을 할 수 있지만, 영계에서는 점차 자신의 실제 내적 상태가 드러납니다. 따라서 새로 온 영들이 천국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보면, 사람들이 세상에서 실제로 어떤 천국관을 품고 살아왔는지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AC.449의 마지막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는 이후 글들을 읽는 중요한 안내입니다. 이제부터 스베덴보리는 천국에 관한 추상적인 정의부터 제시하기보다, 사람들이 실제로 품고 있던 잘못된 천국관과 그들이 영계에서 겪은 경험을 하나씩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뒤따르는 사례들은 단순한 신기한 영계 이야기가 아니라 ‘천국의 기쁨은 과연 무엇인가’를 바로잡아 가는 일종의 단계적 교육입니다.

 

결국 AC.449는 독자에게 먼저 자신의 천국관을 점검하도록 합니다. ‘나는 천국을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고통이 사라지고 내가 원하는 것을 마음껏 누리는 곳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주님의 사랑과 생명이 내 안에서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상태라고 생각하는가?’ 이 질문이 중요합니다. 천국에 대한 참된 준비는 천국을 상상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삶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으로 살아가는 데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AC.449 해설)

 

 

 

AC.450, 창5 앞, '천국은 높은 곳에 있는 것도,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는 것도 아니다'

천국과 천국의 기쁨에 관하여 Concerning Heaven and Heavenly Joy AC.450세상에 사는 동안 말씀에 관하여 특별히 밝은 깨달음을 가진 것처럼 보였던 어떤 사람들은 천국에 대하여 너무나 잘못된 생각을 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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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48, 창4 뒤, ‘육체의 삶보다 더 밝고 분명하게 이어지는 사후의 삶’

영혼 또는 영에 관하여 그들이 육체의 삶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영들과의 체험에서 얻은 몇 가지 사례 AC.448나는 이 세상에서 알고 지냈던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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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창5:32)

 

AC.536

 

앞선 글들에서 홍수 이전 존재하였던 교회들이 지녔던 퍼셉션에 관하여 많은 말씀을 드렸는데, 오늘날에는 이 ‘퍼셉션’(perception)이라는 것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아서,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지속적인 계시의 한 형태로 상상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인간에게 본래 심겨진 어떤 것으로 여기기도 하며, 또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단지 상상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퍼셉션은 사랑의 신앙(the faith of love) 안에 있는 자들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바로 그 천적인 것이며, 보편적 천국(universal heaven) 안에는 무한한 다양성을 지닌 퍼셉션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퍼셉션이 무엇인지를 어느 정도라도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주님의 신적 자비로, 이어지는 글들에서 천국에 존재하는 주요한 퍼셉션의 종류들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As in the foregoing pages much has been said about the perception possessed by the churches that existed before the flood, and as at this day perception is a thing utterly unknown, so much so that some may imagine it to be a kind of continuous revelation, or to be something implanted in men; others that it is merely imaginary, and others other things; and as perception is the very celestial itself given by the Lord to those who are in the faith of love, and as there is perception in the universal heaven of endless variety: therefore in order that there may be among men some conception of what perception is, of the Lord’s Divine mercy I may in the following pages describe the principal kinds of perception that exist in the heavens.

 

 

해설

 

이 글은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는 동시에, ‘이후 전개될 매우 중요한 설명을 위한 문턱’을 형성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독자의 상태를 정확히 짚어 냅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퍼셉션은 더 이상 살아 있는 경험이 아니라, 개념조차 모호한 대상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이 퍼셉션을 오해하는 여러 방식들을 차분히 나열합니다.

 

어떤 이들은 퍼셉션을 마치 끊임없이 주어지는 계시처럼 생각합니다. 이는 퍼셉션을 외부에서 갑자기 주어지는 초자연적 정보로 이해하는 태도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퍼셉션을 인간에게 본래부터 심겨진 본능이나 직관 정도로 여깁니다. 반대로, 어떤 이들은 퍼셉션이라는 말 자체를 비현실적인 상상으로 치부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모든 오해가 퍼셉션이 더 이상 지상 교회의 경험 속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생겨난 것임을 암시합니다.

 

그는 여기서 퍼셉션의 본질을 매우 분명하게 규정합니다. 퍼셉션은 사랑의 신앙 안에 있는 자들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천적인 것입니다. 즉, 퍼셉션은 인간의 능력도 아니고, 훈련의 산물도 아니며, 타고난 감각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주님과의 결합 상태, 곧 사랑과 신앙의 상태 안에서 주어지는 인식입니다. 이 점에서 퍼셉션은 계시와도 다르고, 본능과도 다르며, 상상과는 더더욱 다릅니다.

 

또한 스베덴보리는 퍼셉션이 단일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천국 전체에는 끝없는 다양성을 지닌 퍼셉션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퍼셉션이 획일적인 기준이나 동일한 느낌이 아니라, 각 천적 공동체와 각 개인의 상태에 따라 다르게 주어지는 살아 있는 인식임을 뜻합니다. 앞서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미세하고 개별적’이라고 설명되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글의 중요한 전환점은, 스베덴보리가 이제 ‘설명 방식 자체를 바꾸겠다고 선언’하는 데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는 주로 지상 교회, 특히 태고교회의 상태를 통해 퍼셉션을 간접적으로 설명해 왔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천국에 실제로 존재하는 퍼셉션의 종류들을 직접 설명하겠다고 말합니다. 이는 퍼셉션이 추상 개념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며 질서와 구조를 지닌 인식이라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대목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태도를 가르쳐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퍼셉션을 신비화하지도 않고, 도덕화하지도 않으며, 인간의 능력으로 축소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퍼셉션을 ‘주님께서 주시는 천적 질서의 일부’로 다루며, 가능한 한 오해 없이 전달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전달 방식 역시, 계시적 선언이 아니라 설명과 분별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 글은 또한 독자에게 하나의 약속처럼 읽힙니다. 퍼셉션이 무엇인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스베덴보리는 가능한 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그 실체를 보여 주겠다고 말합니다. 이는 퍼셉션을 회복하겠다는 약속이 아니라, 퍼셉션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알게 함으로써, 오늘날의 신앙이 스스로의 위치를 정확히 인식하도록 돕는 작업입니다.

 

그래서 AC.536은 단순한 서론이 아니라, 이후 천국론과 인식론 전체로 이어지는 중요한 연결 고리입니다. 퍼셉션이 사라진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퍼셉션이 무엇이었는지를 바르게 알게 하는 것 자체가 이미 큰 신앙적 유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AC.537, 창5 뒤, ‘천국과 천국 기쁨에 관하여 (계속)’ (AC.537-546)

AC.537 어떤 영이 제 왼편에 붙어 저에게 자기가 어떻게 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알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허락을 받아 그에게 대답하기를, 천국에 들어가는 일은 오직 주님께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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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35, 창5:32, ‘노아’는 홍수 이전 교회들 가운데 하나가 아님

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창5:32) AC.535 ‘노아’(Noah)라 하는 교회를 홍수 이전의 교회들 가운데 하나로 봐서는 안 된다는 점은, 29절에서 그를 가리켜 ‘여호와께서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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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창5:32)

 

AC.535

 

‘노아’(Noah)라 하는 교회를 홍수 이전의 교회들 가운데 하나로 봐서는 안 된다는 점은, 29절에서 그를 가리켜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comfort them from their work and the toil of their hands, out of the ground which Jehovah hath cursed)라고 한 데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 ‘위로’(comfort)란, 그 교회가 살아남아 지속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 관해서는, 이후 주님의 신적 자비로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That the church called “Noah” is not to be numbered among the churches that were before the flood, appears from verse 29, where it is said that it should “comfort them from their work and the toil of their hands, out of the ground which Jehovah hath cursed.” The “comfort” was that it should survive and endure. But concerning Noah and his sons,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해설

 

이 글은 노아의 교회가 태고교회의 마지막 단계가 아니라, ‘이미 다른 질서에 속한 교회’임을 명확히 선 긋는 대목입니다. 앞서까지의 흐름만 보면, 노아가 태고교회의 연속선 위에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분명히 말합니다. 노아의 교회는 홍수 이전의 교회들에 포함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입니다.

 

그 근거는 29절에 나오는 ‘위로’라는 표현입니다. 이 위로는 단순히 고통을 덜어 주는 의미가 아니라, ‘존속과 지속’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노아의 교회는 사라질 교회가 아니라 남겨질 교회이며, 심판을 통과해 이어질 교회입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와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태고교회는 라멕에 이르러 완전히 역할을 마쳤고, 더 이상 이어질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서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라는 표현이 다시 언급되는 이유도 분명해집니다. 태고교회의 마지막 상태에서는 이 수고와 고됨이 교회 자체의 종말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노아에게서는 같은 표현이 ‘위로’와 연결됩니다. 이는 상태가 같다는 뜻이 아니라, ‘같은 조건 속에서도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그 차이는 어디에서 나오느냐 하면, 교회의 성격에서 나옵니다. 태고교회는 퍼셉션에 기반한 교회였기 때문에, 퍼셉션이 사라지면 교회 자체가 더 이상 성립할 수 없었습니다. 반면 노아의 교회는 교리에 기반한 교회입니다. 퍼셉션이 사라진 조건 속에서도, 교리를 통해 질서를 유지하고 신앙을 보존할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같은 ‘수고와 고됨’ 속에서도, 노아의 교회는 무너지지 않고 지속됩니다. 참고로, 여기 ‘수고와 고됨’은 주님의 선과 진리 아는 일이 예전엔 퍼셉션으로 즉시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었지만, 점점 기울다가 라멕의 때쯤 이르자 ‘수고와 고됨’의 일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구분은 매우 중요합니다. 노아는 태고교회의 회복판이 아니라, ‘전혀 다른 교회 유형의 시작점’입니다. 따라서 노아를 태고교회의 한 인물로 설교하거나, 태고적 신앙을 되살린 인물로 묘사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관점과 어긋납니다. 노아는 퍼셉션을 되찾은 사람이 아니라, 퍼셉션 이후의 시대를 살아갈 수 있도록 준비된 교회의 대표자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지점에서 자세한 설명을 미루고, ‘뒤에서 더 말씀드리겠다’고 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노아와 그의 아들들은 단순한 후속 인물이 아니라, 고대교회의 구조 전체를 설명하는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이 장에서는 위치만 정리하고, 본격적인 내용은 이후에 펼치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AC.535는 짧지만 결정적입니다. 노아는 태고교회의 끝이 아니라, ‘홍수 이후를 살아갈 교회의 시작’입니다. 이 한 문장을 통해, 독자는 창세기 전반부의 큰 전환점을 분명히 인식하게 됩니다. 이제 이야기는 멸망을 향해 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보존과 지속, 그리고 새로운 교회의 전개를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AC.536, 창5:32, ‘퍼셉션’(perception), 사랑의 신앙 안에 있는 자들에게 주님이 주시는 천적인 것

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창5:32) AC.536 앞선 글들에서 홍수 이전 존재하였던 교회들이 지녔던 퍼셉션에 관하여 많은 말씀을 드렸는데, 오늘날에는 이 ‘퍼셉션’(perce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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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34, 창5:32, ‘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AC.534-536)

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And Noah was a son of five hundred years; and Noah begat Shem, Ham, and Japheth. (창5:32) AC.534 ‘노아’(Noah)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고대교회(the ancient church)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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