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542

 

천국의 성질을 알게 하기 위하여 천국으로 들어 올려지는 이들은, 육체적인 것들과 공상적인 생각들이 잠잠해진 상태에 놓이게 되거나—이는 누구도 이 세상에서 지니고 온 육체적 성향과 공상적 관념을 그대로 지닌 채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혹은 불순하고 불일치를 일으키는 것들을 기이하게 완화해 주는 영들의 영역(a sphere of spirits)에 둘러싸이게 됩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내면이 열리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여러 방식들을 통해, 그들은 각자의 삶과 그로부터 형성된 성질에 따라 준비됩니다. They who are taken up into heaven in order that they may know its quality either have their bodily things and fanciful notions lulled to quiescence—for no one can enter heaven with the bodily things and fanciful notions that they take with them from this world—or else they are surrounded by a sphere of spirits who miraculously temper such things as are impure and that cause disagreement. With some the interiors are opened. In these and other ways they are prepared, according to their lives and the nature thereby acquired.

 

 

해설

 

이 글은 지금까지 제시된 사례들을 ‘원리의 언어로 정리’해 주는 대목입니다. 앞에서는 개별 영들의 체험이 서술되었고, 여기서는 그 체험들이 어떤 질서와 법칙에 따라 이루어지는지를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접근이 결코 우연적이거나 일률적이지 않음을 분명히 합니다.

 

먼저 강조되는 것은, 이 세상에서 형성된 ‘육체적인 것들’과 ‘공상적인 생각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육체적인 것이란 단순한 신체 감각이 아니라, 감각 중심의 욕망과 자기 만족을 기준으로 한 사고방식을 뜻합니다. 공상적인 생각들은 현실과 분리된 상상, 자기 방식으로 꾸며 낸 영적 기대를 가리킵니다. 이 두 가지는 천국의 질서와 근본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에게는 먼저 이러한 요소들이 잠잠해지도록 허락됩니다. 이는 제거라기보다 ‘가라앉힘’에 가깝습니다. 즉, 그것들이 더 이상 주도권을 쥐지 않게 되는 상태입니다. 이 상태가 되어야 비로소 천국의 영향이 고통이 아니라 기쁨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방식은, 영들의 영역에 둘러싸이는 것입니다. 이 영역은 불순한 것과 불일치를 일으키는 것들을 기이하게 완화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여기서 ‘기이하게’라는 표현은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섭리를 가리킵니다. 즉, 이는 인간이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과정이 아니라, ‘주님의 질서 안에서 제공되는 보호적 환경’입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내면이 직접 열리기도 합니다. 이는 외적 조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때, 주님께서 더 깊은 차원의 준비를 허락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말합니다. 이 모든 준비는 각자의 삶과 그로부터 형성된 성질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문장은 신앙의 여정이 얼마나 개인적이면서도 질서 정연한지를 보여 줍니다. 천국으로의 준비에는 하나의 공식이 없습니다. 동일한 체험을 모든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통과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준은 하나입니다. 그 사람이 살아온 삶, 그리고 그 삶이 만들어 낸 내적 성질입니다.

 

이 점에서 AC.542는 매우 중요한 균형을 보여 줍니다. 천국은 전적으로 주님의 은총으로 열리지만, 그 은총은 인간의 삶과 무관하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각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견딜 수 있는 깊이까지, 가장 안전한 경로로 준비시키십니다.

 

또한 이 글은 천국 체험을 어떤 특별한 선택이나 특권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교육이며, 학습이며, 적응의 과정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의 목적은 단 하나입니다. 천국의 성질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즉, 다시 지상이나 중간 상태로 돌아가더라도, 그 사람 안에 참된 기준이 형성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AC.542는 그래서 이렇게 읽힙니다. 천국은 닫힌 곳이 아니라, ‘질서가 있는 곳’입니다. 들어갈 수 없는 이유는 배척 때문이 아니라, 상태의 불일치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불일치를 치유하고 조율하는 모든 과정은, 각 사람의 삶을 가장 잘 아시는 주님의 섬세한 배려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이 글은 결국 우리에게 조용히 묻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상태를 형성하고 있는가. 그 상태는, 주님께서 천국의 기쁨을 맡기실 수 있는 상태인가.

 

 

 

AC.541, 창5 뒤, ‘천국 기쁨에 비하면 더럽기까지 한 이 세상 쾌락’

AC.541 천국의 기쁨이 어떤 것인지를 알지 못하던 어떤 영들이, 그들이 이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된 상태, 곧 육체적인 것들(bodily things)과 공상적인 생각들(fanciful notions)이 잠잠해진 상태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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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41

 

천국의 기쁨이 어떤 것인지를 알지 못하던 어떤 영들이, 그들이 이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된 상태, 곧 육체적인 것들(bodily things)과 공상적인 생각들(fanciful notions)이 잠잠해진 상태로 이끌린 뒤, 뜻밖에 천국으로 들어 올려졌습니다. 그곳에서 나는 한 영이 나에게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그는 이제서야 비로소 천국의 기쁨이 얼마나 큰지를 느낀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이전에 천국의 기쁨에 대해 전혀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던 것이 얼마나 큰 착각이었는지를 깨달았으며, 이제는 자신의 가장 깊은 존재 안에서(in his inmost being), 육체의 삶에서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어떤 쾌락보다도 비교할 수 없이 큰 기쁨을 느낀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육체적 쾌락을 더럽다고 불렀습니다. Certain spirits who were ignorant of the nature of heavenly joy were unexpectedly taken up into heaven after they had been brought into such a state as to render this possible, that is to say a state in which their bodily things and fanciful notions were lulled into quiescence. From there I heard one saying to me that now for the first time he felt how great is the joy in heaven, and that he had been very greatly deceived in having a different idea of it, but that now he perceived in his inmost being a joy immeasurably greater than he had ever felt in any bodily pleasure such as men are delighted with in the life of the body, and which he called foul.

 

 

해설

 

이 글은 앞선 AC.540의 설명을 ‘결론처럼 확증해 주는 실제 증언’입니다. 앞에서는 천국의 기쁨이 단계적으로 가르쳐진다고 설명되었고, 여기서는 그 과정을 실제로 통과한 한 영의 고백이 제시됩니다. 이 고백은 설명보다 훨씬 강력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교리가 아니라 체험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주목할 점은, 이 영들이 천국으로 올라가기 전에 어떤 상태에 놓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육체적인 것들’과 ‘공상적인 생각들’이 잠잠해진 상태로 이끌립니다. 이는 곧 감각 중심의 욕망, 상상에 의존한 기대, 자기 방식의 천국 그림이 모두 가라앉은 상태를 뜻합니다. 이 상태가 되기 전에는, 아무리 천국이 열려 있어도 사람은 그것을 견딜 수 없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들이 천국으로 ‘노력해서’ 올라간 것이 아니라, ‘뜻밖에’ 들어 올려졌다는 점입니다. 이는 천국의 접근이 인간의 계산이나 성취의 결과가 아니라, ‘상태가 맞을 때 주어지는 은총’임을 보여 줍니다. 준비가 되었을 때, 길은 열립니다.

 

그가 처음으로 말한 고백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이제서야 처음으로 천국의 기쁨이 얼마나 큰지를 느낀다’는 말입니다. 이는 이전에는 전혀 몰랐다는 뜻입니다. 그는 천국을 몰랐을 뿐 아니라, 잘못 알고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상상이 얼마나 쉽게 참된 영적 실재를 왜곡하는지를 다시 한번 드러냅니다.

 

이 영이 느낀 기쁨은 단순히 더 강한 즐거움이 아닙니다. 그는 그것을 ‘자신의 가장 깊은 존재 안에서 느낀다’고 말합니다. 즉, 이 기쁨은 감각이나 감정의 표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중심을 채우는 기쁨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비교의 언어로밖에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전에 느꼈던 모든 육체적 쾌락보다 ‘비교할 수 없이 크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매우 강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전에 즐거워하던 육체적 쾌락을 ‘더럽다’고 합니다. 이는 도덕적 비난이 아니라, ‘기준이 바뀐 데서 나오는 평가’입니다. 밝은 빛 안에 들어간 사람에게 어둠이 더럽게 느껴지는 것과 같습니다. 이 영은 더 높은 차원의 기쁨을 경험했기 때문에, 이전의 즐거움이 본래 어떤 것이었는지를 비로소 알게 된 것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대목은 신앙의 성장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을 보여 줍니다. 신앙이 깊어질수록, 이전에 당연하게 여기던 만족들이 점점 그 빛을 잃습니다. 이것은 금욕이나 자기부정의 결과가 아니라, ‘더 깊은 기쁨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AC.541은 이렇게 말해 줍니다. 천국의 기쁨은 우리가 포기해야 할 무엇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 모르는 무엇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모르는 동안에는, 우리는 낮은 기쁨을 최고라고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적절한 때에 우리의 내면을 잠잠하게 하시고, 상태를 준비시키시면, 사람은 비로소 말로 다 할 수없는 기쁨을 알게 됩니다.

 

이 증언은 천국을 설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대신, ‘천국을 경험한 사람이 무엇을 느끼는지’를 들려줍니다. 그리고 그 한마디 고백은 긴 설명보다 더 분명합니다. ‘이제서야 처음으로 알았다.’ 이 말이야말로, 천국의 기쁨이 어떤 것인지를 가장 정확하게 말해 줍니다.

 

 

 

AC.542, 창5 뒤, ‘각자의 삶과 그에 따른 천국 체험 준비’

AC.542 천국의 성질을 알게 하기 위하여 천국으로 들어 올려지는 이들은, 육체적인 것들과 공상적인 생각들이 잠잠해진 상태에 놓이게 되거나—이는 누구도 이 세상에서 지니고 온 육체적 성향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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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40, 창5 뒤, ‘외적 기쁨에서 내적 기쁨으로, 기쁨에서 평화로, 평화에서 순수함으로’

AC.540 사후 세계로 오는 거의 모든 이들은 천국의 행복과 복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고 옵니다. 이는 내적 기쁨의 본질과 성질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천국의 기쁨을 오직 육체적 즐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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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40

 

사후 세계로 오는 거의 모든 이들은 천국의 행복과 복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고 옵니다. 이는 내적 기쁨의 본질과 성질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천국의 기쁨을 오직 육체적 즐거움과 세상적 기쁨을 통해서만 상상합니다.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지만, 실제로는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기쁨이야말로 비교해 보면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더럽기까지 하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릅니다. 그러므로 선한 성향을 지닌 이들이 천국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알 수 있도록, 그들은 먼저 상상으로는 도저히 이를 수 없는 낙원들로 인도됩니다. 그들은 자신이 이미 천국의 낙원에 도달했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이 참된 천국의 행복은 아니라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 자신의 더 깊은 내적 존재(inmost being)에까지 느껴지는 기쁨의 상태(interior states of joy)를 체험하도록 허락받습니다. 그다음에는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까지 이르는 평화의 상태(a state of peace)로 인도되며, 그들은 그것이 전혀 말로 표현할 수도, 생각으로 그릴 수도 없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역시 내적 감각의 가장 깊은 곳(inmost feeling)까지 이르는 순수함의 상태(a state of innocence)로 인도됩니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그들은 참된 영적 선과 천적 선이 무엇인지를 배우도록 허락받습니다. Almost all who come into the other life are ignorant of the nature of heavenly happiness and bliss, because they know not the nature and quality of inward joy. They form a conception of it merely from the delights and joys of the body and the world. What they are ignorant of they suppose to be nothing, the truth being that bodily and worldly joys are relatively non-existent and foul. In order therefore that those who are well disposed may learn and may know what heavenly joy is, they are taken in the first place to paradises that surpass every conception of the imagination (concerning which,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and they suppose that they have arrived in the paradise of heaven; but they are taught that this is not true heavenly happiness, and are therefore permitted to experience interior states of joy which are perceptible to their inmost being. They are then transported into a state of peace, even to their inmost being, and they confess that nothing of it is at all expressible or conceivable. And finally they are introduced into a state of innocence, also to their inmost feeling. In this way are they permitted to learn the nature of true spiritual and celestial good.

 

 

해설

 

이 글은 천국의 기쁨이 어떤 것인지 설명하려는 글이 아니라, ‘인간이 천국의 기쁨을 왜 오해할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 주는 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단호하게 말합니다. 사후 세계로 오는 거의 모든 이들은 천국의 행복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말합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들은 내적 기쁨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아는 것으로만 상상합니다. 그래서 천국의 기쁨도 세상에서 경험한 즐거움, 곧 쾌락, 만족, 편안함, 성취감 같은 것의 연장선에서 그려 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근본적인 착각이라고 말합니다.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기쁨은 진짜 기쁨과 비교하면 거의 없는 것과 같고, 더 나아가 오염된 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이는 도덕적 비난이 아니라, ‘차원의 차이’를 말하는 표현입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사람들을 어떻게 가르치시는지를 단계적으로 보여 줍니다. 주님은 설명으로 가르치시지 않습니다. 체험을 통해 가르치십니다. 먼저 사람들은 상상으로는 도저히 이를 수 없는 아름다운 낙원으로 인도됩니다. 이 단계에서 사람들은 거의 예외 없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제 천국에 도착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 단계는 아직 참된 천국의 행복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낙원은 여전히 외적 감각과 상상에 가까운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아름답고 평화롭지만, 아직 존재의 가장 깊은 곳을 채우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다음 단계로 이들을 인도하십니다. 이번에는 내적 존재 깊숙이까지 느껴지는 기쁨의 상태입니다. 이 기쁨은 감각적 즐거움이 아니라, 존재 전체가 ‘옳다’고 느끼는 기쁨입니다.

 

그다음 단계는 더욱 인상적입니다. 존재의 가장 깊은 곳까지 이르는 평화의 상태입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공통된 고백을 합니다. 이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생각으로도 그릴 수 없다고 말합니다. 즉, 언어와 개념이 도달하지 못하는 차원의 상태입니다. 이 평화는 긴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완전히 질서 안에 놓인 상태’에서 오는 안정입니다.

 

마지막 단계는 순수함의 상태입니다. 이는 도덕적 무죄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주장하지 않는 상태, 곧 주님의 생명이 아무 저항 없이 흐를 수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 단계에서야 비로소 사람은 참된 영적 선과 천적 선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이해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 상태 안에 있음으로 안다’는 뜻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글은 천국을 가르치는 방식 자체에 대한 깊은 통찰을 줍니다. 천국은 설명으로 전달되지 않습니다.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깊은 신앙의 실재는 개념으로 주입될 수 없고, 삶의 상태 속에서만 조금씩 열립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항상 외적 단계에서 내적 단계로, 기쁨에서 평화로, 평화에서 순수함으로 사람을 이끄십니다.

 

AC.540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해 줍니다. 천국의 기쁨을 상상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이유는, 아직 그 차원에 맞는 상태로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준비는, 주님께서 질서 있게 인도하시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이 글은 천국에 대한 환상을 무너뜨리는 동시에, 천국에 대한 가장 깊은 소망을 조용히 키워 줍니다. 설명할 수 없고, 그릴 수 없지만, ‘실재하며 점점 더 깊어지는 선과 기쁨의 길’이 있음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AC.541, 창5 뒤, ‘천국 기쁨에 비하면 더럽기까지 한 이 세상 쾌락’

AC.541 천국의 기쁨이 어떤 것인지를 알지 못하던 어떤 영들이, 그들이 이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된 상태, 곧 육체적인 것들(bodily things)과 공상적인 생각들(fanciful notions)이 잠잠해진 상태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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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39, 창5 뒤, ‘육신에 있을 때 간음의 죄를 가볍게 여겼던 자’

AC.539 어떤 영이 있었는데, 그는 육신에 있을 때 간음의 죄를 가볍게 여겼던 자였습니다. 그가 원해서 그는 천국의 첫 문턱(threshold)에 들어가도록 허락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곳에 이르자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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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39

 

어떤 영이 있었는데, 그는 육신에 있을 때 간음의 죄를 가볍게 여겼던 자였습니다. 그가 원해서 그는 천국의 첫 문턱(threshold)에 들어가도록 허락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곳에 이르자마자 고통을 느끼기 시작했고, 자기 자신에게서 나는 시체 같은 악취(cadaverous stench)를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정도가 되었고, 만일 조금이라도 더 나아간다면 자신이 사라질 것처럼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래 땅으로 내던져졌는데, 단지 천국의 첫 문턱에서 간음과 반대되는 영역에 들어왔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고통을 느꼈다는 사실에 분노하였습니다. 그는 불행한 자들 가운데 있습니다. A certain spirit who during his life in the body had made light of adulteries, was in accordance with his desire admitted to the first threshold of heaven. As soon as he came there he began to suffer and to be sensible of his own cadaverous stench, until he could endure it no longer. It seemed to him that if he went any farther he should perish, and he was therefore cast down to the lower earth, enraged that he should feel such torment at the first threshold of heaven, merely because he had arrived in a sphere that was contrary to adulteries. He is among the unhappy.

 

 

해설

 

이 글은 앞선 두 단락보다 훨씬 더 직접적이고 생생한 방식으로, ‘상태의 불일치가 낳는 고통’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는 ‘천국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삶의 태도 자체가 천국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충돌은 설명이나 판단 이전에, 즉각적인 감각과 고통으로 드러납니다.

 

이 영은 생전에 간음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이는 단순히 특정 행위를 했다는 의미를 넘어서, 사랑과 결합의 질서를 내적으로 무너뜨린 상태를 말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간음은 도덕적 규범 위반을 넘어, 사랑의 질서, 곧 하늘의 질서를 왜곡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러한 상태는 천국의 영역과 본질적으로 상극입니다.

 

그럼에도 이 영은 자신의 바람, 곧 자기가 원해서 천국의 첫 문턱에 들어갑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강조되는 것은, 주님께서 사람의 바람을 무시하지 않으신다는 점입니다. 원하면 가까이 가게 하시되, 그 결과를 스스로 체험하게 하십니다. 강제로 막지 않으시고, 설명으로 대신하지도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가 느낀 것은 환희가 아니라 극심한 고통이었습니다. 특히 주목할 표현은 ‘자기 자신의 시체 같은 악취를 느꼈다’는 대목입니다. 이는 외부에서 부여된 형벌이 아니라, ‘자기 상태가 그대로 드러난 결과’입니다. 천국의 영역에서는 거짓과 왜곡이 가려지지 않습니다. 그 안에 들어가는 순간, 자기 내면의 실상이 감각으로 체험됩니다.

 

이 악취는 실제 냄새라기보다, 사랑의 질서에 반하는 상태가 천국의 감각 안에서 어떻게 인식되는지를 보여 주는 상응 표현입니다. 천국의 순수한 사랑의 영역에 비추어질 때, 왜곡된 사랑은 생명 없는 것, 곧 ‘죽음의 냄새’로 체험됩니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느낍니다. 조금이라도 더 나아가면 ‘사라질 것 같다’는 감각은, 그 상태가 천국 안에서는 존속할 수 없음을 뜻합니다.

 

결국 그는 아래 땅으로 떨어집니다. 이 역시 처벌이라기보다, ‘존재가 견딜 수 있는 자리로 돌아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느낀 감정입니다. 그는 자신의 상태를 돌아보거나 깨닫기보다, 분노합니다. 천국의 문턱에서 이런 고통을 느꼈다는 사실 자체를 부당하다고 여깁니다. 이는 그의 내적 태도가 여전히 변화되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마지막에 짧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는 불행한 자들 가운데 있다고 말합니다. 이 불행은 외부적 형벌의 결과가 아니라, ‘자기 상태와 질서의 불일치가 지속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천국을 향한 욕망은 있었지만, 천국의 삶을 원하지는 않았던 결과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장면은 매우 무겁고도 정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천국을 원하는가, 아니면 천국의 삶을 원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어떤 죄를 가볍게 여기는 태도는, 단지 윤리적 문제를 넘어서, 우리 존재의 감각과 방향을 결정합니다. 천국은 그 방향이 맞을 때에만 안식이 됩니다.

 

AC.539는 천국을 도덕적 판결의 법정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천국은 ‘자기 자신을 피할 수 없는 거울’로 나타납니다. 그 거울 앞에서 고통을 느끼는 것은, 거울이 잔인해서가 아니라, 비추어진 것이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이 본문은, 회개와 변화가 왜 지금 여기에서 필요한지를 가장 실감 나게 보여 줍니다.

 

 

 

AC.540, 창5 뒤, ‘외적 기쁨에서 내적 기쁨으로, 기쁨에서 평화로, 평화에서 순수함으로’

AC.540 사후 세계로 오는 거의 모든 이들은 천국의 행복과 복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고 옵니다. 이는 내적 기쁨의 본질과 성질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천국의 기쁨을 오직 육체적 즐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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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38, 창5 뒤, ‘천국은 같은 상태여야만 들어갈 수 있는 곳’

AC.538 천국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천국에 들어가려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랑의 신앙 안에 있지 않다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불 속으로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위험하다고 경고를 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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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38

 

천국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천국에 들어가려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랑의 신앙 안에 있지 않다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불 속으로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위험하다고 경고를 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어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이 첫 번째 입구 뜰, 곧 천사적 영들의 하부 영역(the lower sphere of angelic spirits)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너무 큰 충격을 받아 뒤로 나가떨어졌고, 이로써 주님께서 신앙의 애정(the affections of faith)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시키시기 전에는 천국에 가까이 가는 것조차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There were some who sought admission into heaven without knowing what heaven is. They were told that unless they were in the faith of love, to enter heaven would be as dangerous as going into a flame; but still they sought for it. When they arrived at the first entrance court, that is to say, the lower sphere of angelic spirits, they were smitten so hard that they threw themselves headlong back, and in this way were taught how dangerous it is merely to approach heaven until prepared by the Lord to receive the affections of faith.

 

 

해설

 

이 글은 앞선 사례를 한층 더 분명하고 구조적으로 보여 줍니다. AC.537이 개인적 경험의 서술이라면, AC.538은 ‘일반적 질서’를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핵심은 하나입니다. 천국은 ‘원하면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상태가 맞을 때만 접근 가능한 영역’이라는 점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다시 한번 천국에 대한 인간의 오해를 짚습니다. 이들은 천국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그저 ‘천국에 들어가고 싶다’는 욕망만을 앞세웁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경고는 매우 분명합니다. 사랑의 신앙 안에 있지 않다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이는 위협이나 과장이 아니라, 상태의 불일치에서 오는 필연적 결과를 말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들어가기를 고집합니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쉽게 영적 질서를 무시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알고자 하지 않거나, 알면서도 자신의 상태를 돌아보지 않은 채, 결과만을 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태도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실제 장면으로 보여 줍니다.

 

첫 번째 입구 뜰’은 천국의 문턱에 해당하는 영역입니다. 아직 완전한 천국은 아니지만, 이미 천국의 영향과 질서가 작용하는 영역입니다. 이곳에 이르렀을 때조차, 준비되지 않은 영들은 견디지 못합니다. 그들은 어떤 판단이나 설명 이전에, ‘존재 전체로 충격을 받습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지탱하지 못하고 뒤로 나가떨어집니다.

 

이 장면에서 중요한 점은, 그들이 벌을 받았다는 표현이 전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공격당하지 않았고, 밀려난 것도 아닙니다. 단지 천국의 상태가 그들의 상태와 맞지 않았을 뿐입니다. 빛이 어둠에 고통이 되듯, 사랑의 애정은 자기중심적 상태에 있는 존재에게는 견딜 수 없는 압력으로 작용합니다.

 

이 경험의 목적은 처벌이 아니라 교육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말합니다. 이로써 그들은, 주님께서 신앙의 애정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시키시기 전에는, 천국에 가까이 가는 것조차 위험하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즉, 천국은 ‘도달해야 할 목표’이기 이전에, ‘형성되어야 할 상태’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대목은 신앙 교육의 방향을 매우 명확히 제시합니다. 신앙은 목적지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상태를 다루는 일입니다. 천국을 말할 때,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를 말하기보다 ‘어떤 사람이 되어 가는가’를 먼저 말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앙은 욕망의 언어로 전락하고 맙니다.

 

AC.538은 천국을 향한 열망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열망이 사랑의 신앙으로 형성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오히려 자기 자신을 해치는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천국에 대한 가장 안전한 길은, 천국을 먼저 살려는 길입니다. 주님께서 준비시키시는 그 과정 속에 머무는 것이, 천국에 가장 가까운 자리입니다.

 

 

 

AC.539, 창5 뒤, ‘육신에 있을 때 간음의 죄를 가볍게 여겼던 자’

AC.539 어떤 영이 있었는데, 그는 육신에 있을 때 간음의 죄를 가볍게 여겼던 자였습니다. 그가 원해서 그는 천국의 첫 문턱(threshold)에 들어가도록 허락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곳에 이르자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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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37, 창5 뒤, ‘천국과 천국 기쁨에 관하여 (계속)’ (AC.537-546)

AC.537 어떤 영이 제 왼편에 붙어 저에게 자기가 어떻게 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알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허락을 받아 그에게 대답하기를, 천국에 들어가는 일은 오직 주님께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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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37

 

어떤 영이 제 왼편에 붙어 저에게 자기가 어떻게 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알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허락을 받아 그에게 대답하기를, 천국에 들어가는 일은 오직 주님께 속한 것으로, 사람의 상태가 어떠한지는 오직 주님만이 아신다고 말했습니다. 세상에서 오는 많은 이들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만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고 있으나, 정작 천국이 무엇인지, 천국의 기쁨이 무엇인지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곧 천국은 상호 사랑(mutual love)이며, 천국의 기쁨은 그로부터 나오는 기쁨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실제 경험을 통해 먼저 그것을 배우게 됩니다. 예를 들어, 세상에서 막 온 어떤 영이 역시 천국을 간절히 사모하였는데, 그에게 천국의 성격이 어떠한지를 느끼게 하려고 그의 내면을 열어 천국의 기쁨을 조금 맛보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 기쁨을 느끼자마자, 그는 곧 탄식하며 몸부림치기 시작했고, 그 고통 때문에 도저히 살 수 없다며 벗어나게 해 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그래서 천국을 향해 잠시 열렸던 그의 내면은 다시 닫혔고, 그렇게 해서 그는 원래의 상태로 회복되었습니다. 이 예를 통해, 준비되지 않은 채 조금이라도 천국에 들여보내지는 자들이 얼마나 큰 양심의 고통과 괴로움 속에 놓이게 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A certain spirit attached himself to my left side, and asked me whether I knew how he could get into heaven. I was permitted to tell him that admission into heaven belongs solely to the Lord, who alone knows what a man’s quality is. Very many arrive from the world who make it their sole pursuit to get into heaven, being quite ignorant of what heaven is, and of what heavenly joy is, that heaven is mutual love, and that heavenly joy is the derivative joy. Therefore those who do not know this are first instructed about it by actual experience. For example, there was a certain spirit, newly arrived from the world, who in like manner longed for heaven, and in order that he might perceive what the nature of heaven is, his interiors were opened so that he should feel something of heavenly joy. But as soon as he felt it he began to lament and to writhe, and begged to be delivered, saying that he could not live on account of the anguish; and therefore his interiors were closed toward heaven, and in this way he was restored. From this instance we may see with what pangs of conscience and with what anguish those are tortured who not being prepared for it are admitted even but a little way.

 

 

해설

 

이 글은 천국과 인간의 상태 사이의 관계를 매우 생생하고도 실제적으로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천국을 어떤 장소나 보상으로 설명하지 않고, ‘상태’로 설명합니다. 천국에 들어가고 싶다는 열망 자체는 매우 흔하지만, 그 열망이 곧 천국에 적합한 상태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천국에 들어가는 문제를 스베덴보리가 철저히 주님의 영역으로 돌린다는 점입니다. 그는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자격을 판단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는 겸손의 권면이 아니라, 천국이 외적 행위나 바람의 문제가 아니라 ‘내적 성질’, 곧 사랑의 방향과 삶의 상태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얼마나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든, 그 사람의 실제 상태는 주님만이 아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세상에서 온 많은 영들이 천국을 소망하지만, 정작 천국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그들은 천국을 고통이 없는 곳, 평안한 곳, 혹은 보상을 받는 곳으로 상상합니다. 그러나 천국의 본질은 상호 사랑이며, 그 기쁨은 그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기쁨입니다. 다시 말해, 천국은 누리는 곳이기 전에 ‘사는 방식’입니다.

 

이 점이 분명해지는 것이 바로 이어지는 사례입니다. 천국을 간절히 원하던 한 영에게, 주님께서는 그가 직접 느껴 보도록 그의 내면을 잠시 여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천국의 기쁨이 ‘조금’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조차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의 영에게는 기쁨이 아니라 극심한 고통으로 작용합니다.

 

그 영이 느낀 것은 단순한 감정적 불편함이 아니라, 존재 전체를 뒤흔드는 괴로움이었습니다. 그는 그 상태에서는 살 수 없다고 외치며, 벗어나게 해 달라고 애원합니다. 이는 천국의 기쁨이 나쁘거나 폭력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영의 내적 상태가 그 기쁨과 전혀 합치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사랑은 그에게 쉼이 아니라 압박이 되었고, 빛은 위로가 아니라 고통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내면은 다시 닫힙니다. 이는 처벌이 아니라 보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과정을 매우 조심스럽게 묘사합니다. 주님께서는 준비되지 않은 이를 억지로 천국에 머물게 하지 않으십니다. 각 존재가 견딜 수 있는 상태 안에 머물도록 하시는 것이 주님의 질서입니다.

 

이 사례를 통해 스베덴보리는 중요한 결론을 이끌어 냅니다. 준비되지 않은 채 천국에 가까이 가는 것조차도, 그들에게는 양심의 극심한 고통과 괴로움이 된다는 점입니다. 이는 천국이 도덕적 시험장이거나, 누구든 억지로 적응해야 하는 장소가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천국은 상태가 맞는 이들에게만 기쁨이며,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무게가 됩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글은 신앙의 목표를 다시 묻게 합니다. ‘천국에 가고 싶다’는 말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만일 그 말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뜻이거나, 보상을 받고 싶다는 뜻이라면, 그것은 아직 천국을 아는 신앙이 아닙니다. 천국을 안다는 것은, 상호 사랑의 삶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삶을 지금 여기에서 연습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장면은 결국 이렇게 말합니다. 천국은 죽은 뒤에 들어가는 곳이기 전에, 살아 있을 때 형성되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그 상태는 주님께서 서서히 준비시키시는 것이지, 인간의 욕망이나 결단으로 단번에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AC.537은 천국에 대한 낭만적 상상을 걷어 내고, 천국을 ‘삶의 방향과 성질’로 다시 보게 만드는 매우 중요한 증언입니다.

 

 

 

AC.538, 창5 뒤, ‘천국은 같은 상태여야만 들어갈 수 있는 곳’

AC.538 천국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천국에 들어가려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랑의 신앙 안에 있지 않다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불 속으로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위험하다고 경고를 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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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36, 창5:32, ‘퍼셉션’(perception), 사랑의 신앙 안에 있는 자들에게 주님이 주시는 천적인 것

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창5:32) AC.536 앞선 글들에서 홍수 이전 존재하였던 교회들이 지녔던 퍼셉션에 관하여 많은 말씀을 드렸는데, 오늘날에는 이 ‘퍼셉션’(perce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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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52

 

저는 천국과 천국의 기쁨이 가장 위대해지는 데에 있다고 생각하던 영들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천국에서 가장 위대한 이는 가장 작은 자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가장 작은 자가 가장 큰 행복을 지니고 있으며, 그러므로 참으로 가장 위대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위대하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가장 행복한 것입니다. 이 점 때문에 지상에서는 권세 있는 자들이 권세를 통해 그것을 구하고, 부유한 자들이 재물을 통해 그것을 구합니다. 또한 그들은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천국은 가장 작아지기를 원함으로써 가장 위대해지려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실제로는 여전히 가장 위대해지기를 바라고 추구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천국은 마음으로부터 다른 이들에게 자기 자신보다 더 나은 것을 바라며, 다른 이들의 행복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섬기고자 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떤 자기를 목적으로 함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I have conversed with spirits who supposed heaven and heavenly joy to consist in being the greatest. But they were told that in heaven he is greatest who is least, because he who would be the least has the greatest happiness, and consequently is the greatest, for what is it to be the greatest except to be the most happy? It is this that the powerful seek by power, and the rich by riches. They were told, further, that heaven does not consist in desiring to be the least in order to be the greatest, for in that case the person is really aspiring and wishing to be the greatest; but that heaven consists in this, that from the heart we wish better for others than for ourselves, and desire to be of service to others in order to promote their happiness, and this for no selfish end, but from love.

 

 

해설

 

이 글은 앞선 AC.450AC.451에서 다룬 ‘위대함’과 ‘권세’의 문제를 ‘가장 정제된 형태로 마무리하는 핵심 진술’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질서를 단 한 문장으로 요약합니다.

 

천국에서 가장 위대한 이는 가장 작은 자입니다.

 

이 말은 역설처럼 들리지만, 스베덴보리는 즉시 그 논리를 풀어 줍니다. 가장 작은 자가 가장 큰 행복을 지니고 있으며, 가장 큰 행복을 지닌 자가 곧 가장 위대한 자라는 것입니다. 즉, 위대함의 기준이 바뀝니다. 힘이나 영향력, 인지도나 성취가 아니라, ‘행복의 질과 깊이’가 기준이 됩니다.

 

여기서 그는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가장 위대하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곧바로 답합니다. ‘가장 행복한 것이다.’ 이 정의는 지상과 천국을 동시에 비춥니다. 지상에서 사람들이 권세를 추구하고 재물을 쌓는 이유도, 결국은 더 큰 만족과 안전, 곧 행복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그 길은 간접적이며 언제나 불안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흔히 오해되는 또 하나의 함정을 짚습니다. ‘가장 작아지려는 욕망’조차도, 그 동기가 잘못되면 여전히 가장 위대해지려는 욕망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겸손을 전략으로 삼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천국의 길이 아닙니다. 이 말은 매우 날카롭습니다. 왜냐하면 겉으로는 낮아 보이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비교와 우위를 계산하는 신앙을 정확히 겨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본질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천국은 마음에서 우러나 다른 이들에게 자기 자신보다 더 나은 것을 바라며, 다른 이들의 행복을 증진시키기 위해 섬기고자 하는 데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섬김은 어떤 보상이나 자기를 목적으로 함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덧붙입니다.

 

이 지점에서 천국과 지옥의 방향은 완전히 갈라집니다. 지옥의 사랑은 자기 자신으로 향하고, 천국의 사랑은 타인으로 향합니다. 지옥의 질서는 비교와 경쟁 속에서 위로 올라가려 하고, 천국의 질서는 사랑 안에서 기꺼이 낮아집니다. 그러나 그 낮아짐은 손해가 아니라, ‘가장 깊은 행복의 자리’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본문은 매우 실제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가 섬김을 말할 때, 그것이 정말 사랑에서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더 나은 자리, 더 좋은 평가, 더 큰 만족을 은근히 기대하는 방식인지를 점검하게 합니다. 천국의 질서는 외적으로는 단순해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매우 정직합니다.

 

AC.452는 이렇게 말합니다.

 

천국은 낮아지는 기술이 아니라, 비교하지 않는 사랑의 상태입니다. 그리고 그 상태 안에서, 사람은 더 이상 위대해지려 애쓰지 않아도 이미 가장 깊은 행복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글은 윤리적 훈계가 아니라, 천국의 ‘행복 구조에 대한 설명’입니다.

 

 

 

AC.451, 창5 앞, '사후 세계', 지상 권세가 안 통하는 나라

AC.451 육신의 삶에서 권세를 지니고 있었던 어떤 영이, 사후 세계에서도 여전히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 다른 나라, 곧 영원한 나라에 와 있다는 말을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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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51

 

육신의 삶에서 권세를 지니고 있었던 어떤 영이, 사후 세계에서도 여전히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 다른 나라, 곧 영원한 나라에 와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가 세상에서 가졌던 권세는 이미 죽었으며, 지금 그가 있는 곳에서는 오직 그가 지닌 선과 진리,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주님의 자비에 따라서만 가치가 매겨진다는 말과, 또한 이 나라에서도 지상과 마찬가지로 각 사람은 자신의 재산과 군주의 호의에 따라 평가되지만, 이곳에서의 재산은 선과 진리이며, 군주의 호의는 주님의 자비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그가 이 나라, 곧 남의 나라에 와서 다른 방식으로 권세를 행사하고자 한다면, 그는 이 나라에서 봤을 때는 반역자가 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그는 부끄러워하였습니다. A certain spirit, who during his life in the body had possessed authority, retained in the other life the desire to exercise command. But he was told that he was now in another kingdom, which is eternal; that his rule on earth was dead; and that where he was now no one is held in estimation except in accordance with the good and truth, and the mercy of the Lord, in which he is; and further, that it is in that kingdom as it is on earth, where everyone is rated according to his wealth, and his favor with his sovereign; and that there good and truth are wealth, and favor with the sovereign is the Lord’s mercy; and that if he desired to exercise command in any other way, he was a rebel, seeing that he was now in the kingdom of another. On hearing this he was ashamed.

 

 

해설

 

이 글은 앞선 AC.450의 논지를 ‘개인의 사례로 압축해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중심에 놓인 주제는 ‘권세의 지속’이라는 인간의 매우 뿌리 깊은 착각입니다. 이 영은 세상에서 실제로 권위를 지녔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죽음 이후에도, 그 권위가 어떤 형태로든 이어질 것이라고 은연중에 기대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기대를 단호하면서도 질서 있게 해체합니다. 먼저 그에게 들려준 말은 이것입니다. ‘당신은 이제 다른 나라에 있다.’ 이 한 문장은 모든 것을 바꿉니다. 사후 세계는 지상의 연장이 아니라, 전혀 다른 질서가 지배하는 왕국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말이 결정적입니다. 세상에서의 그의 통치는 이미 ‘죽었다’고 말합니다. 이는 기억에서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효력이 완전히 끝났다’는 뜻입니다.

 

그다음 스베덴보리는 새로운 왕국의 평가 기준을 제시합니다. 이 나라에서는 지위나 명령권이 아니라, 그 사람이 지닌 선과 진리,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주님의 자비만이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즉, 존재의 가치가 외적 힘이 아니라 내적 상태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지요.

 

흥미로운 점은, 스베덴보리가 이 영에게 지상의 비유를 그대로 사용해 설명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상에서도 사람은 재산과 군주의 호의에 따라 평가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다만 지상과 달리 이 나라에서의 재산은 금이나 땅이 아니라, 선과 진리이며, 군주의 호의는 주님의 자비라고 말합니다. 이 비유는 그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그러나 완전히 다른 가치 체계를 제시하는 방식입니다.

 

여기서 가장 강한 말은 ‘반역자’라는 표현입니다. 만일 그가 여전히 이전 방식으로 남의 나라인 이곳에서 권세를 행사하려 한다면, 그는 이제 다른 분의 나라에 있으면서 반역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이는 도덕적 비난이 아니라, ‘질서의 문제’를 지적하는 말입니다. 왕이 바뀌었는데도 여전히 옛 왕의 권한을 행사하려 한다면, 그것은 충성이 아니라 반역이 됩니다.

 

이 말을 들은 후의 반응은 단순합니다. 그는 부끄러워합니다. 이 부끄러움은 처벌의 결과가 아니라, 질서를 깨달았을 때 자연스럽게 따르는 감정입니다. 그는 자신이 아직도 옛 나라의 논리로 새 나라를 살려고 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됩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본문은 권위와 직분, 영향력에 대한 매우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지상의 모든 권세는 그때뿐이며, 역할이었을 뿐이고, 한시적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정당했더라도, 영원한 나라로는 가져갈 수 없습니다. 영원한 나라에서 유효한 것은 오직 ‘선과 진리, 그리고 주님의 자비 안에 있는 상태’뿐이기 때문입니다.

 

AC.451은 이렇게 말합니다.

 

천국은 권세를 이어 가는 곳이 아니라, 질서를 받아들이는 곳입니다.

 

그리고 이 질서를 받아들일 때, 사람은 지위를 잃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자기 자리를 얻게 됩니다.’ 그래서 이 본문은 위협이 아니라 초대입니다. 이제 더 이상 지배하려 하지 말고, 주님의 나라의 질서 안에서 선과 진리로 부유해지라는 초대입니다.

 

 

 

AC.452, 창5 앞, '천국과 천국의 기쁨은 어디에 있는가?'

AC.452 저는 천국과 천국의 기쁨이 가장 위대해지는 데에 있다고 생각하던 영들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천국에서 가장 위대한 이는 가장 작은 자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왜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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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50, 창5 앞, '천국은 높은 데서 다스리는 나라가 아니다'

AC.450 이 세상에 있을 때 말씀에 관하여 특별히 밝은 것처럼 보였던 어떤 이들은, 천국에 대해 매우 그릇된 생각을 품고 있었는데, 그들은 자신이 높은 곳에 있으면 곧 천국에 있는 것이라고 여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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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50

 

이 세상에 있을 때 말씀에 관하여 특별히 밝은 것처럼 보였던 어떤 이들은, 천국에 대해 매우 그릇된 생각을 품고 있었는데, 그들은 자신이 높은 곳에 있으면 곧 천국에 있는 것이라고 여겼고, 그 높은 자리에서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다고 상상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영광과 남들 위에 서는 우월함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러한 환상 안에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이 잘못되었음을 보여 주기 위하여, 그들은 실제로 높은 곳으로 올려졌고, 거기서 아래의 것들을 어느 정도 다스릴 수 있도록 허락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환상에 불과한 천국임을 부끄러움 속에서 깨달았으며, 천국은 높아지는 걸로 이루어지는 곳이 아니라, 사랑과 체어리티(charity), 곧 그 안에 주님의 나라가 있는, 그런 사람들이 있는 곳마다 그곳이 바로 천국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천국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아지기를 바라는 데에 있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는데, 남들보다 더 위대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기 때문입니다. Some who during their abode in this world had seemed to be preeminently enlightened in regard to the Word, had conceived so false an idea about heaven that they supposed themselves to be in heaven when they were high up, and imagined that from that position they could rule all things below, and thus be in self-glory and preeminence over others. On account of their being in such a fantasy, and in order to show them that they were in error, they were taken up on high, and from there were permitted in some measure to rule over things below; but they discovered with shame that this was a heaven of fantasy, and that heaven does not consist in being on high, but is wherever there is anyone who is in love and charity, or in whom is the Lord’s kingdom; and that neither does it consist in desiring to be more eminent than others, for to desire to be greater than others is not heaven, but hell.

 

 

해설

 

이 글은 스베덴보리가 ‘천국에 대한 가장 뿌리 깊은 오해 하나를 정면으로 해체’하는 대목입니다. 그것은 곧 ‘높아짐’과 ‘천국’을 동일시하는 생각입니다. 특히 이 오해는 말씀에 밝다고 여겨졌던 이들, 곧 종교적 지식과 이해를 많이 갖춘 사람들에게서 더 쉽게 나타난다는 점에서 매우 날카로운 경고가 됩니다.

 

이들은 천국을 공간적 개념으로 이해했습니다. 높은 곳, 위에 있음, 내려다봄, 다스림 같은 이미지가 천국의 본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고대부터 반복되어 온 상상입니다. 신적인 것은 위에 있고, 인간적인 것은 아래에 있으며, 위에서 아래를 통제하는 것이 곧 신적 질서라고 여기는 사고방식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호히 ‘환상’이라고 부릅니다.

 

흥미로운 점은, 주님께서 이 오해를 말로만 교정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그들이 믿고 있던 바로 그 환상을 실제로 체험하게 하십니다. 그들은 높은 곳으로 올려지고, 아래를 다스릴 수 있는 권한도 어느 정도 허락받습니다. 이 장면은 일종의 ‘영적 실험’과도 같습니다. 그들이 믿는 천국이 실제로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스스로 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부끄러움’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경험한 것은 참된 천국의 기쁨이 아니라, 공허하고 불안정한 환상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높이 올라갔지만 평안은 없었고, 다스렸지만 기쁨은 없었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 그들은 비로소 알게 됩니다. 천국은 위아래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과 체어리티(charity)의 문제’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정의를 매우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천국은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 있는 사람이 있는 곳마다 있으며, 그곳이 곧 주님의 나라라고 말입니다. 이는 천국이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상태’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해 줍니다. 어디에 있느냐보다, 어떻게 사랑하느냐가 천국을 결정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문장은 이 글의 핵심을 찌릅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위대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라는 말입니다. 이는 단순한 도덕적 충고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람의 방향’ 자체가 서로 반대임을 말합니다. 천국의 사랑은 낮아짐과 섬김으로 흐르고, 지옥의 사랑은 높아짐과 지배로 흐릅니다. 둘은 결코 같은 방향일 수 없습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본문은 교회와 신앙의 구조를 다시 점검하게 만듭니다. 영적 지식, 직분, 영향력, 인정받음이 언제든지 ‘높아짐의 환상’으로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말씀에 밝고, 영적 언어에 익숙한 사람일수록, 자신도 모르게 천국을 ‘위치’나 ‘지위’로 오해할 위험이 큽니다.

 

AC.450은 이렇게 말합니다.

 

천국은 위에 있지 않습니다. 천국은 사랑이 있는 곳에 있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덧붙입니다.

 

남들보다 더 높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시작되는 그 지점에서, 우리는 이미 천국의 반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본문은 천국을 낮추는 글이 아니라, 천국을 ‘제자리로 되돌려 놓는 글’입니다.

 

 

 

AC.451, 창5 앞, '사후 세계', 지상 권세가 안 통하는 나라

AC.451 육신의 삶에서 권세를 지니고 있었던 어떤 영이, 사후 세계에서도 여전히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 다른 나라, 곧 영원한 나라에 와 있다는 말을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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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49, 창5 앞, 'Concerning Heaven and Heavenly Joy' (AC.449-459)

AC.449 지금까지 천국과 천국의 기쁨이 어떠한 것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생각해 본 사람들조차도, 그것에 대해 매우 일반적이고 거친(gross) 개념을 형성하였을 뿐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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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49

 

지금까지 천국과 천국의 기쁨이 어떠한 것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생각해 본 사람들조차도, 그것에 대해 매우 일반적이고 거친(gross) 개념을 형성하였을 뿐이어서, 거의 개념이라고 할 수도 없는 수준에 머물렀습니다. 그들이 이 주제에 관해 어떠한 생각을 품고 있었는지는, 세상에서 막 사후 세계로 넘어온 영들로부터 제가 매우 정확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있을 때, 마치 여전히 이 세상에 있는 것처럼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 몇 가지 예를 들 수 있습니다. Hitherto the nature of heaven and of heavenly joy has been known to none. Those who have thought about them have formed an idea concerning them so general and so gross as scarcely to amount to any idea at all. What notion they have conceived on the subject I have been able to learn most accurately from spirits who had recently passed from the world into the other life; for when left to themselves, as if they were in this world, they think in the same way. I may give a few examples.

 

 

해설

 

이 글은 이후 이어질 긴 설명의 ‘출발점이자 문제 제기’에 해당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매우 단호한 진단을 내립니다. 천국과 천국의 기쁨은 지금까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과장이 아니라, 인간의 인식 구조 자체에 대한 평가입니다.

 

사람들이 천국을 생각한다고 말할 때, 스베덴보리가 보기에 그것은 실제로는 거의 생각하지 않은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개념이 너무 일반적이고, 너무 거칠어서, 실제로는 아무 내용도 담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행복하다’, ‘편안하다’, ‘좋은 곳이다’ 같은 말들은 천국의 실재를 가리키기에는 지나치게 평면적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 판단을 추측이나 신학적 논증으로 내리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사후 세계로 막 들어온 영들을 관찰함으로써 이를 확인합니다. 이 영들은 아직 내적으로 크게 변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자기들끼리 있을 때는 여전히 이 세상에서 생각하던 방식 그대로 생각합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그들의 생각은 인간이 천국을 어떻게 상상해 왔는지를 보여 주는 ‘가장 순수한 표본’이 됩니다.

 

즉, 이 영들은 실제로는 죽은 뒤 다른 세계에 와 있지만, 인식의 틀은 아직 지상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품고 있는 천국에 대한 생각은, 인간이 살아 있을 때 품던 생각과 거의 동일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를 통해, 인간이 천국을 얼마나 지상적 범주 안에서만 이해해 왔는지를 정확히 파악합니다.

 

이 대목에서 스베덴보리가 하려는 말은 분명합니다. 천국이 감추어져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 방식 자체가 천국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천국은 알려질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천국이 알려지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고, ‘아무도 알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글은 매우 중요한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대해 익숙하게 사용하는 언어와 이미지들이, 실제로는 거의 아무것도 말해 주지 못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신앙을 이야기할 때, 신앙은 쉽게 관념이나 희망 사항으로 흘러갑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제 ‘예를 들겠다’고 말합니다. 이 문장은 단순한 예시의 예고가 아니라, ‘인식의 전환을 위한 여정의 시작’입니다. 그는 추상적 설명 대신, 실제 영들의 생각과 반응을 하나하나 보여 주면서, 인간의 천국 이해가 어디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지를 드러내려 합니다.

 

AC.449는 이렇게 읽힙니다. ‘천국이 멀어서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너무 익숙한 방식으로만 생각해 왔기 때문에 알 수 없었다’는 선언으로 말입니다. 이 선언 위에서, 이후의 모든 천국, 기쁨, 퍼셉션 논의가 시작됩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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