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 영상은 강문호 목사님이 수도사로 임명받은 뒤, 수도생활을 하면서 접하게 된 수도사들의 이야기를 앞으로 유튜브를 통해 하나씩 소개하겠다는 취지로 시작합니다. 수도생활을 공부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여러 수도원을 찾아다녔고, 그 과정에서 알게 된 수도사들의 이야기 가운데 감동적이고 영적인 교훈을 주는 일화들을 시청자들과 나누고 싶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 소개되는 이야기는 죽음의 위기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은 두 사람이 남은 생애를 하나님께 드리기로 결심하고 수도생활을 시작했다는 내용입니다.

 

영상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수도사들의 삶을 ‘사람 같지 않은 사람들의 초인간적인 이야기’라고 표현할 정도로 강한 감동을 받았다는 점입니다. 오랜 기독교 역사에는 실제로 자신의 재산과 지위와 안락을 내려놓고, 기도와 절제와 섬김에 생애를 바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세속적인 성공과 편안함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사람에게 상당한 충격을 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자기중심적인 욕망을 절제하고, 주님과 이웃을 위한 삶으로 방향을 돌리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영적 상태를 외적인 금욕이나 특별한 수행의 정도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극단적인 삶을 살았느냐보다 그 사람의 지배적인 사랑이 무엇으로 변화되었느냐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영상에서 소개되는 두 사람의 이야기는 죽음과 생명의 경계에서 시작됩니다. 강도들에게 붙잡혀 죽을 상황에 놓였던 두 사람이 뜻밖의 사건을 통하여 살아남게 되고, 그 경험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100% 하나님의 은혜다. 우리는 조금 전에 죽었어야 할 사람들이지만 하나님께서 살려 주셨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장소를 떠나지 않고, 남은 생애를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기도하고 성경을 연구하며 살기로 결심합니다. 이야기 자체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매우 선명합니다. ‘오늘 살아 있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스베덴보리의 신학과도 상당히 깊게 만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에게 생명은 본래부터 자기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생명의 근원이 아니라 생명을 받아들이는 그릇이며, 생명 자체는 오직 주님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내 생명’, ‘내 생각’, ‘내 능력’이라고 말하지만, 가장 깊은 실상에서는 순간순간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살아갑니다. 사람이 이 사실을 잊으면, 자신을 독립적인 생명의 주인처럼 여기게 되고, 자신에게 있는 능력과 지혜와 선을 자기 것으로 돌리기 시작합니다. 반대로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삶 전체가 선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었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살려 주셨다’는 두 사람의 고백은 단순히 극적인 생존 체험에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사실 모든 인간에게 적용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오늘 아침 눈을 뜨고, 생각하고 사랑하고 다른 사람과 관계하며 어떤 쓰임을 행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생명을 받아 누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주님께서 사람에게 생명을 계속 주시는 목적은 단지 자연적 생명을 오래 유지하게 하시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생명을 통하여 사람이 거듭나고, 악에서 떠나며, 선을 사랑하고 행하는 존재가 되게 하시는 데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두 사람이 살아남은 뒤 ‘나머지 생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살자’고 결심하는 것은 아름다운 방향 전환입니다. 죽음을 가까이 경험한 뒤 이전과 똑같은 욕망을 좇으며 살아가는 대신 삶의 목적 자체를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에서도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방향의 전환’입니다. 다만 거듭남은 한 번의 극적인 결심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후의 삶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악을 발견하고, 그것을 죄로 여겨 피하며,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를 받아 살아가는 긴 과정입니다. 수도원에 들어가는 결정은 그 과정의 출발점이 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거듭남의 완성은 아닙니다.

 

두 사람이 그 장소에 머물며, ‘기도하고 성경을 보고 오직 영적으로 살았다’는 대목도 같은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와 말씀 연구는 분명 귀합니다. 그러나 ‘오직 영적으로 산다’는 말을 자연적인 일상생활과 분리된 특별한 종교생활로 이해한다면, 스베덴보리의 관점과는 조금 차이가 생깁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영적인 삶은 자연적인 삶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삶 안에 영적인 질서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밥을 먹고, 일하고, 사람을 만나고, 책임을 수행하는 자연적 삶 속에서 정직과 정의와 체어리티를 실천하는 것이 영적 삶입니다. 그러므로 수도원이라는 장소가 사람을 영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든 세상 한복판에서든 주님으로부터 받은 진리대로 살아가는 것이 사람을 영적으로 만듭니다.

 

영상에서는 두 사람의 삶이 깊어지자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매우 인상적인 표현이 등장합니다. 찾아온 사람들이 그들을 보며, ‘하나님은 아닌데 하나님의 소리만 난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어 강 목사님은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은 아닌데 하나님의 소리만 나와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짧은 문장은 이번 영상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가장 깊이 들여다볼 만한 부분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소리가 나야 한다’는 말을 스베덴보리식으로 풀면,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참된 선과 진리의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선의 근원이 아닙니다. 진리의 근원도 아닙니다.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이 자신의 삶을 통해 나타나도록 하는 그릇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영적 사람에게서 무엇인가 아름다운 것이 나타났다면, 그 아름다움 때문에 그 사람 자신이 숭배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주님께 시선이 향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하나님은 아닌데 하나님의 소리만 난다’는 표현은 잘 이해하면 매우 아름다운 말이 됩니다. 사람이 자신을 크게 드러내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과 진리를 투명하게 전달한다면, 사람들은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을 통해 그 사람 자신보다 주님의 선하심을 느끼게 됩니다. 설교를 듣고 ‘저 설교자는 참 대단하다’는 생각만 남는 것과 ‘주님은 참 선하시구나’라는 생각이 남는 것은 상당히 다릅니다. 전자는 사람에게 시선이 머물 수 있지만, 후자는 사람을 통과하여 주님께 시선이 향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표현에는 매우 엄중한 자기 점검도 따라야 합니다. ‘내게서 하나님의 소리가 난다’는 의식이 생기는 순간, 그 아름다운 원리는 쉽게 뒤집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에게 있는 선과 진리를 자기 것으로 느끼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이 proprium의 아주 깊은 성질 가운데 하나입니다. 처음에는 ‘주님께서 하셨습니다’라고 시작했어도 시간이 지나면서 ‘주님께서 나를 특별히 사용하셨습니다’가 되고, 더 나아가 ‘나는 특별히 쓰임받는 사람입니다’라는 자기 인식으로 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이 지켜야 할 가장 깊은 태도는 ‘사람들이 내게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게 해야겠다’는 자기의식보다, 자신에게서 나오는 모든 참된 선과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수도자에게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목회자와 설교자, 교사와 선교사, 그리고 평범한 신앙인 모두에게 해당합니다. 우리가 어떤 선한 일을 했을 때, 사람들이 우리를 칭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말이 누군가에게 큰 도움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영적으로 중요한 질문은,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가’가 아니라 ‘이 일을 통하여 주님의 선이 그 사람에게 전달되었는가’입니다. 참된 영적 성숙은 사람이 점점 특별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더욱 깊이 인정하면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더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영상에서 이 두 사람의 이야기가 결국 수도원의 시작으로 이어졌다고 설명하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사람들이 그들의 삶과 이야기에 감동하여 모여들었고, 그 결과 하나의 수도 공동체가 형성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모였다’는 현상 자체보다 왜 모였느냐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교회는 단순히 사람이 많이 모인 조직이 아닙니다. 교회의 본질은 사람 안에 주님의 선과 진리가 존재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두 사람의 삶에서 진실한 회개와 선한 사랑을 보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주님을 찾으러 모였다면 그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특별함이나 신비로운 체험 때문에 모이는 것이라면 언제든 중심이 주님에게서 인간으로 이동할 위험도 있습니다.

 

강 목사님은 이스라엘의 여러 수도원을 방문하면서 그곳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 아름다운 이야기, 기적의 이야기, 하나님 이야기’를 모았다고 말합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신앙을 일깨우는 데 유익할 수 있습니다. 실제 인물의 삶을 통해 추상적인 신앙의 원리가 구체적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이 무엇을 선택했는지, 재산을 버린 사람이 무엇을 얻었는지, 고난 가운데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붙들었는지를 듣다 보면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됩니다. 교회사와 수도 전통에 이러한 이야기들이 오랫동안 전승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기적의 이야기’ 자체에는 조금 신중합니다.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과 그 사건에 대한 해석은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별하고 초자연적으로 보이는 현상이 곧바로 높은 영적 상태를 증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사람의 영적 상태를 판별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기적을 얼마나 경험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고 어떻게 살아가느냐입니다. 아무리 놀라운 체험을 했어도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지배한다면 그것이 사람을 천국적으로 만들지는 못합니다. 반대로 특별한 체험이 전혀 없어도 매일 자신의 자리에서 악을 피하고 정직과 체어리티를 실천한다면 그 삶에는 실제적인 천국의 질서가 형성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살펴볼 것은 ‘사람 같지 않은 사람들의 초인간적인 이야기’라는 표현입니다. 수도사들의 엄청난 금욕과 희생을 접하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영적인 사람을 ‘초인간’으로 만드는 방향을 조심해야 합니다. 천국의 완전함은 인간성이 사라지는 데 있지 않고, 오히려 인간성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 온전해지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천사도 본래 사람이었으며, 천사가 되는 것은 인간을 초월하여 다른 종류의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의 사랑과 지혜가 주님으로부터 천국적인 질서로 형성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극단적인 금욕이나 놀라운 인내를 보이는 수도자가 반드시 평범한 가정과 직장에서 신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보다 영적으로 높은 것은 아닙니다. 한 수도자가 수십 년을 동굴에서 기도하는 것과, 한 부모가 수십 년 동안 가족을 사랑하고 책임지며 자기 욕심을 내려놓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주님 보시기에 더 큰지는 외적인 모습만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행위의 크기보다 그 행위 안에 있는 사랑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수도 전통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도의 본질을 외적인 영웅주의에서 내적인 거듭남으로 돌려놓는 관점입니다.

 

그래서 이 영상에서 소개되는 두 사람의 이야기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강도굴에서 살아남아 수도사가 되었다’는 극적인 외형보다 ‘살아 있는 것이 은혜임을 깨닫고, 남은 생의 방향을 하나님께 돌렸다’는 내적 전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전환이 진실했다면, 그것은 이후 얼마나 유명한 수도원을 만들었느냐보다 훨씬 중요한 사건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실 때 가장 근본적으로 바꾸시는 것은 장소와 직업이 아니라 사랑의 방향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은 아닌데 하나님의 소리만 나와야 한다’는 이 영상의 문장을 조금 더 깊게 간직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소리가 나야 하지만, 정작 그 사람 자신은 그것을 자기 소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선은 주님으로부터 오고, 진리도 주님으로부터 오며, 그것을 행할 능력까지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사람에게 맡겨진 일은 그것을 자유롭게 받아들여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충실하게 행하면서도, 그 근원은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된 수도의 기준이기도 합니다. 수도복을 입는가, 수도원에 거주하는가, 얼마나 오랫동안 기도하는가보다 더 깊은 질문은 ‘내 안에서 proprium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점점 더 자유롭게 흐르고 있는가’입니다. 수도생활이 이것을 돕는다면 수도생활은 귀한 도구가 됩니다. 그러나 수도라는 외적 형식 자체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수도원은 궁극적으로 어떤 건물이나 공동체 이전에 인간의 내면에서 형성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첫 번째 수도사 이야기는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아도 충분히 아름다운 핵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죽음 가까이에서 생명을 다시 선물로 깨닫고, 남은 삶을 하나님께 돌리며, 기도와 말씀 가운데 살고자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다만 그 아름다움의 중심을 ‘초인간적인 수도사’에게 두기보다 그 사람들의 삶을 돌이키신 주님께 두면 이야기는 더욱 깊어집니다. 수도자의 위대함이 아니라 사람의 생명을 붙드시고, 그의 사랑의 방향을 바꾸시는 주님의 역사가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상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죽음에서 살아난 두 사람이 남은 생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이야기는 수도생활의 특별함을 보여 주는 데서 끝나지 않고, 모든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오며, 참된 영성은 그 생명을 다시 주님과 이웃을 위한 쓰임으로 돌려드리는 데 있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 영상에서 가장 오래 남겨 둘 만한 문장을 하나 고른다면 역시 이것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소리가 나야 한다.’ 여기에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마디만 조용히 덧붙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소리를 내는 사람 자신은, 그 소리의 주인이 자기가 아니라 주님이심을 더욱 깊이 알아가야 합니다.’ 바로 그때 사람은 앞에 서 있으면서도 자신을 가리고, 사람들은 그를 통하여 그 사람보다 주님을 더 바라보게 됩니다.

 

 

 

SY.49, 강문호 목사, ‘갈보리교회 은퇴사’ (20191201)

※ 위 제목의 ‘SY’는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라는 뜻입니다. 이 영상은 강문호 목사님이 충주봉쇄수도원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시작하면서 전한 첫 인사입니다. 오랫동안 섬기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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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제목의 SY’는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라는 뜻입니다.

 

 

 

 

이 영상은 강문호 목사님이 충주봉쇄수도원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시작하면서 전한 첫 인사입니다. 오랫동안 섬기던 교회를 떠나 수도생활에 들어간 뒤, 이전 교회의 성도들에게 영상으로 인사를 전하면서, 후임 목회자와 새로 세워지는 직분자들을 축하하고, 지난 목회를 함께해 준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앞으로 자신이 걸어가려는 새로운 사역의 방향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영상은 어떤 특정한 성경 본문을 강해하는 설교라기보다 한 목회자가 오랜 담임목회를 마치고, 새로운 삶의 단계로 들어서면서 자신의 지난 시간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소망을 밝히는 인사말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먼저 영상에서 인상 깊은 것은 이전 교회와 성도들을 향한 애정과 감사입니다. ‘여러분들은 영상으로나마 제 얼굴을 보는데 저는 여러분을 보지 못해서 너무 안타깝다’는 첫 인사에는 오래 함께했던 공동체를 향한 그리움이 묻어 있습니다. 이어 후임 목회자를 자신보다 훌륭한 목회자로 기대한다고 축복하고, 장로들과 부목사들, 전도사들, 선교회와 교사들, 찬양대와 성도들에게 감사하면서 ‘모두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내가 있었다’는 취지로 말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아도 이러한 감사는 귀한 태도입니다. 사람은 홀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나라는 수많은 서로 다른 쓰임들이 하나를 이루는 질서이며, 천국에서도 어느 한 존재가 모든 것을 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목회 역시 여러 사람의 기도와 노동과 조언과 봉사가 결합되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지난 세월을 자신의 업적으로만 기억하지 않고, 함께한 사람들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은 천국의 공동체적 질서와도 잘 어울립니다.

 

후임 목회자를 향해 ‘저보다 훌륭해서 잘되리라고 믿는다’는 취지로 말하는 부분도 의미가 있습니다. 한 시대의 자신의 역할이 끝났음을 인정하고, 다음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는 것은 영적으로도 중요한 일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모든 직분과 역할은 사람이 영원히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어떤 쓰임을 위해 일정 기간 맡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자신의 사역을 붙잡기보다 새로운 사람에게 기꺼이 넘기고, 그가 더 잘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적어도 표현된 내용 자체로 보면, 자신의 역할을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의 쓰임으로 이해하려는 방향과 맞닿아 있습니다.

 

영상의 중심은 이후 자신의 새로운 삶을 소개하는 부분으로 옮겨갑니다. 강 목사님은 이제 한 교회의 담임목회라는 범위를 넘어 수도원과 연결된 새로운 사역을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여러 나라의 수도원들과 네트워크를 만들고, 은퇴한 목회자들이 함께 모여 ‘평생 새벽기도, 평생 연구, 평생 후학들을 가르침, 평생 노동, 그리고 그 노동으로 얻은 것을 통한 평생 선교’를 하며 죽는 날까지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들고 싶다는 비전을 밝힙니다. 여기에는 은퇴를 사역의 종료로 생각하지 않고, 삶의 마지막까지 어떤 쓰임을 계속하고 싶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쓰임’이라는 관점에서 매우 흥미롭게 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천국의 삶은 무위도식하는 삶이 아니라 끊임없는 쓰임의 삶입니다. 천사들도 각자의 사랑과 지혜에 따라 다른 이들에게 유익을 주는 일을 행합니다. 그러므로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단순히 쉬는 삶만을 이상으로 삼기보다, 기도하고 연구하고 가르치고 노동하며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계속하고 싶다는 열망 자체는 귀합니다. 특별히 영상에서 기도와 연구뿐 아니라 ‘노동’을 수도생활의 중요한 부분으로 포함시키고 있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합니다. 영적 삶은 머릿속의 명상이나 종교적 감정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유용한 삶으로 나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쓰임’에서 중요한 것은 그 규모보다 그 내적 목적입니다. 수도원이 몇 개 세워지고, 몇 나라와 연결되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참여하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통하여 실제로 사람 안에 선과 진리가 자라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천국에서는 큰 일을 했다는 이유로 더 높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서 충실하게 수행한 사람이 귀하게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작은 공동체를 섬기는 일이나 한 사람을 돌보는 일도 그 사랑과 쓰임이 참되다면 큰 조직을 세우는 것보다 결코 영적으로 작지 않습니다.

 

영상에는 ‘봉쇄수도원’이라는 독특한 삶의 방식도 소개됩니다. 일정한 특별한 경우 외에는 수도원 밖으로 나가지 않고, 사람들과의 접촉도 제한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겠다는 것입니다. 고독과 침묵은 오래된 기독교 수도 전통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왔으며, 분주한 외적 활동에서 물러나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고 기도와 말씀에 집중하는 시간은 분명 유익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때때로 무리를 떠나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따라서 사람과 활동으로 가득했던 오랜 목회생활을 마친 뒤, 일정 기간 깊은 고독을 선택하는 것 자체를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외적으로 세상에서 물러나는 것 자체를 더 높은 영적 상태로 보지는 않습니다. 사람의 거듭남은 대부분 실제 삶의 관계와 책임 가운데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혼자 있을 때에는 자신의 인내와 겸손을 확인하기가 쉽지만, 다른 사람과 부딪히고 의견이 다르며 손해를 감수해야 할 때, 비로소 자기 안의 분노와 지배욕,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고독은 거듭남을 돕는 수단이 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거듭남은 아닙니다. 수도원의 문을 닫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기 사랑이 마음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며, 사람과의 만남을 줄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만나는 사람을 자기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영상에서 특히 생각해 볼 부분은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고, 만나야 할 사람이 많아져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사람들만 만나느라 분주하면 너를 만나 주지 않겠다’는 취지의 말씀을 받았다고 소개하는 대목입니다. 여기서 우선 귀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사역의 분주함 자체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대신할 수 없다는 자각입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이유로 끝없이 사람을 만나고 행사를 진행하면서, 정작 자신의 내면은 점점 메말라 갈 수도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종교적인 일로 가득하지만, 내적으로는 주님에게서 멀어지는 역설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활동을 줄이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려는 결심에는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개인이 기도 가운데 경험한 어떤 내적 음성이나 생각을 곧바로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으로 확정하는 데에는 신중함이 필요합니다. 사람의 생각과 감정에는 여러 근원의 인플럭스가 작용하며, 자연계에 사는 동안 사람은 그 근원을 명확하게 식별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강한 내적 감동을 경험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주님의 뜻과 일치하는지는 말씀의 진리, 이성적인 분별, 그리고 그 결과 맺히는 선한 열매를 통해 확인되어야 합니다. 개인적인 체험을 부정할 필요는 없지만, 그 체험 자체가 절대적인 권위를 갖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강 목사님은 자신의 사역이 한 교회와 한 나라를 넘어 여러 나라의 수도원으로 확장되고, 더 나아가 ‘땅을 넘어 하늘까지’, ‘이 세상과 저세상까지’ 연결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취지로 말합니다. 이 표현은 문자 그대로의 영계 교통을 주장한다기보다 자신의 수도 사역을 영원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싶다는 포부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겠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자연계와 영계의 관계가 실제로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은 몸으로는 자연계에 살지만 그의 내면은 이미 영계와 연결되어 있고, 모든 선과 진리의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하여 흘러옵니다. 따라서 지상의 삶은 영원한 세계와 단절된 삶이 아닙니다.

 

그러나 자연계와 영계를 연결하는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특별한 수도생활이나 어떤 영적 훈련이 인간에게 두 세계를 연결하는 권능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이미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고 있으며, 상응의 질서를 통해 영계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어떻게 저세상과 연결될 것인가’보다 ‘이미 주님으로부터 흘러오는 선과 진리를 이 세상에서 어떻게 받아 살아낼 것인가’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영계를 보고 천사들과 대화했지만, 그의 저작에서 영적 삶의 핵심은 영계를 보는 능력이 아니라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주님으로부터 선을 행하는 데 있습니다.

 

영상 전체를 통하여 느껴지는 한 가지 강한 흐름은 ‘남은 생애를 그냥 보내지 않겠다’는 결심입니다. 오랜 목회를 마치고도 기도와 연구, 후학 교육과 노동과 선교를 계속하며 죽는 날까지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에는 분명 귀한 면이 있습니다. 사람의 노년 역시 주님께서 주신 생명의 한 시기이며, 그때에도 경험과 지혜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사용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삶의 어느 시기도 그 자체로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현재의 조건 안에서 어떤 선한 쓰임을 행하는가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수도생활이든 목회든 선교든 모든 외적인 사역에는 하나의 공통된 영적 기준이 있습니다. ‘이 일을 통해 나의 자아가 커지고 있는가, 아니면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커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세속적 성공을 내려놓고도 종교적 성공을 사랑할 수 있고, 물질적 명예에서 물러난 뒤에도 영적 명예를 추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외적인 형식 자체보다 그 안에 흐르는 사랑의 성질을 봅니다. 수도원이라는 장소도, 기도와 연구라는 활동도, 선교라는 이름도 자동으로 거룩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한 사랑의 쓰임이 될 때 거룩해집니다.

 

그런 점에서 이 첫 인사 영상은 한 목회자가 자신의 이전 사역을 감사 가운데 내려놓고, 새로운 삶의 단계로 들어가려는 모습을 담은 영상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전 교회를 축복하고, 함께한 사람들에게 감사하며, 자신은 앞으로 고독과 기도, 연구와 교육, 노동과 선교를 결합한 수도생활을 해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러한 열망을 먼저 존중하면서도, 수도의 본질을 외적인 봉쇄나 활동의 규모에 두지 않습니다. 참된 수도는 사람이 어디에 사느냐보다 그의 마음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에 있으며, 참된 사역은 얼마나 큰 일을 이루느냐보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얼마나 순수하게 이웃의 유익으로 돌리는가에 있습니다.

 

따라서 이 첫 영상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담임목회를 마치고 고독과 기도, 연구와 노동, 후학 양성과 선교라는 새로운 쓰임의 삶으로 들어가려는 결심은 귀하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참된 수도의 완성은 세상에서 얼마나 멀리 물러났는가가 아니라, 자기 사랑에서 얼마나 벗어나 주님과 이웃을 위한 쓰임의 사람이 되어 가는가에 달려 있다’고 말입니다.

 

 

 

SY.50, 강문호 목사, ‘이스라엘 첫 수도원, 채리톤’ (20191208)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 영상은 강문호 목사님이 수도사로 임명받은 뒤, 수도생활을 하면서 접하게 된 수도사들의 이야기를 앞으로 유튜브를 통해 하나씩 소개하겠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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