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의 핵심은 ‘10억을 잃은 장로’가 아닙니다. 말씀의 속뜻으로는 ‘사람을 믿던 신앙이 무너지고, 주님을 믿는 신앙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입니다. 처음에는 너무 비극처럼 보이지만, 영적인 눈으로 보면 하나의 시험(temptation)의 이야기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시험을 통해 이 사람의 신앙을 더 깊고 순결한 상태로 인도하십니다.

 

주인공은 교회에 처음 나갔을 때 진심으로 주님을 찾았습니다. 외로운 청년 시절, 말씀을 들으며 눈물을 흘렸고, 교회에서 아내를 만나고, 가정을 이루고, 평생 교회를 섬겼습니다. 이러한 모든 시작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그의 마음속에 심어 두신 선한 애정과 리메인스(remains)가 역사한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아주 미묘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교회가 제 삶 자체였어요.’ 이 한 문장은 말씀의 속뜻으로 보면 매우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교회 자체가 잘못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문제는 교회라는 외적 형식과 주님 자신이 서서히 동일시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교회는 건물이나 조직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진리를 따라 살려는 사람들 안에 있다고 반복하여 말합니다. 외적 교회는 내적 교회를 위한 그릇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이 장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을 섬긴다’는 것과 ‘교회를 떠받친다’는 것을 거의 같은 의미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부르시면 언제든지 갔다’, ‘교회를 뒷받침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 믿었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악해서가 아니라 아직 미성숙한 신앙의 모습입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마음은 더욱 교회에 의지하게 됩니다. 집은 텅 비어 있었지만, 교회는 그 빈자리를 메워 주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봉사도 더 열심히 하고, 새벽기도도 더 열심히 하고, 당회도 빠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말씀의 속뜻으로 보면, 이 시기는 동시에 가장 위험한 시기이기도 합니다. 슬픔 속에 있는 사람은 위로를 간절히 찾기 때문입니다. 그 자체는 자연스럽지만, 그 위로가 주님에게서 오는지, 사람에게서 오는지를 분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바로 그때 건축헌금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집을 짓는 일에 하나님은 반드시 채워 주십니다’, ‘먼저 내어 놓으면 두세 배로 갚아 주십니다’, ‘하늘나라에 쌓는 보물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닙니다. 사람의 가장 깊은 사랑을 움직이는 방식입니다. 이 장로는 돈 때문에 움직인 것이 아니라 아내를 향한 사랑, 주님을 잘 섬기고 싶다는 소원, 40년 동안 교회를 섬긴 충성, 장로로서의 책임감이 하나로 묶여 움직였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선한 애정이 주님께 직접 향하지 않고, 한 사람의 권위와 결합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악은 언제나 선한 것을 정면으로 공격하기보다, 선한 것을 이용한다고 설명합니다. 자기 사랑은 거짓말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사랑과 경건한 마음까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용할 줄 압니다. 그래서 이 장면은 단순한 헌금 이야기가 아니라 ‘거룩한 것을 이용하는 자기애’라는 영적 주제를 보여 주는 장면으로 읽어야 합니다.

 

이 장로가 결국 10억 원을 헌금하게 되는 과정은 단순히 ‘사기를 당했다’는 사건으로만 볼 수 없습니다. 말씀의 속뜻으로는, 인간 안에 있는 선한 의지와 자기 판단이 어떻게 뒤섞일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매우 중요한 장면입니다. 그는 억지로 돈을 빼앗긴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유 가운데, 그것도 주님을 사랑한다고 믿는 마음으로 결정했습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더욱 깊은 시험이 시작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은 거듭나는 동안 자신의 선과 주님의 선을 구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처음에는 누구나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주님께서는 그 사람이 붙들고 있던 것들을 하나씩 흔드십니다. 그것은 사람의 교만을 꺾기 위해서가 아니라, 참된 선의 근원이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심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장로에게는 그것이 ‘교회’였습니다. 그는 교회를 사랑했고, 목사도 사랑했고, 성도들도 사랑했습니다. 그 자체는 아름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의 신앙의 중심축이 주님이 아니라 교회라는 외적 제도에 너무 강하게 묶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기둥이 흔들리자 그의 세계 전체가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건축비가 예상과 다르게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듣게 됩니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 ‘분명 오해일 것이다.’ 그는 오히려 소문을 막으려 했습니다. 이것은 오랫동안 신뢰해 온 사람을 쉽게 의심하지 않는 자연스러운 마음입니다. 하지만 의혹은 점점 사실로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건축헌금이 교회 건축보다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고, 자신이 절대 신뢰했던 목회자가 그 중심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여기서 이 장로가 받은 충격은 단순히 돈 때문이 아닙니다. 돈보다 훨씬 큰 것이 무너졌습니다. ‘내가 평생 믿었던 것이 무엇이었는가’, ‘내 인생은 무엇이었는가’, ‘내 신앙은 거짓이었는가.’ 이 질문들이 한꺼번에 밀려온 것입니다. 영적으로 보면 이것은 외적인 교회가 무너지는 시험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시험이란 단순히 고난을 겪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거짓이 사람 안에서 실제로 충돌하는 상태라고 말합니다. 이 장로도 바로 그 상태에 들어갑니다.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쌓아 온 신뢰와 추억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눈앞의 사실이 있습니다. 사랑과 진실이 서로 충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합니다. 부정도 해 보고, 변명도 찾아보고, 기다려도 봅니다. 그러나 결국 사실을 외면할 수 없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은 거듭남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사랑하던 것을 하루아침에 빼앗지 않으십니다. 먼저 스스로 살펴보게 하시고, 여러 번 확인하게 하시며, 자유롭게 판단하도록 허락하십니다. 그렇게 하여 사람이 진리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인도하십니다.

 

결국 법정까지 가게 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신앙이 완전히 실패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여기서부터 진짜 신앙이 시작됩니다. 왜냐하면 이제 그는 더 이상 사람을 붙잡고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목사를 붙잡을 수도 없고, 장로라는 직분도 붙잡을 수 없으며, 교회라는 이름도 붙잡을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 붙잡을 수 있는 자리로 인도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우상이 무엇이든 그것을 허무시는 분이 아니라, 그것보다 더 크고 참된 것을 주시기 위해 허락하시는 분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너무 의지하던 것이 무너질 때, 비로소 주님께 대한 직접적인 신뢰가 시작됩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의 중심은 ‘10억을 잃었다’가 아니라 ‘주님 외에는 영원히 의지할 분이 없음을 배우기 시작했다’는 데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아름다운 전환점은 법정 장면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인공이 마음속에서 깨닫기 시작하는 한 가지 진리입니다. ‘내가 믿은 것은 하나님이어야 했는데, 어느새 사람을 믿고 있었구나.’ 이 깨달음은 매우 아픈 것이지만, 동시에 거듭남의 중요한 시작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신앙은 사람이나 조직이나 직분을 통하여 시작될 수는 있지만, 결국에는 반드시 주님께 직접 연결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사람은 언제든 넘어질 수 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목회자도 사람이며, 아무리 건강한 교회도 외적인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때때로 우리가 잘못 붙들고 있던 지팡이를 허락 가운데 빼앗으십니다. 벌을 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부러질 지팡이를 의지하지 않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주인공은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를 떠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다시 돌아온 것 같았습니다.’ 이 고백은 매우 깊은 영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그는 교회를 잃었고, 명예도 잃었으며, 평생 모은 재산도 잃었고, 사람들의 신뢰도 잃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속뜻으로는, 그는 외적인 것들을 잃으면서 내적인 것을 얻기 시작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이 진행될수록 사람은 외적인 신앙보다 내적인 신앙을 더 사랑하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처음에는 예배당이 중요하고, 목회자가 중요하며, 직분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점차 주님의 임재는 건물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에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기도는 특정 장소가 아니라 마음에서 드려질 수 있고, 예배는 형식만이 아니라 삶으로 드려질 수 있으며,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임을 배우게 됩니다. 이러한 변화는 신앙이 약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깊어진 것입니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주인공이 결국 모든 목회자를 미워하는 사람이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배신을 경험한 사람은 쉽게 극단으로 갑니다. ‘목사는 다 그렇다’, ‘교회는 다 거짓이다’, ‘신앙 자체가 속임수였다’ 이렇게 결론 내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까지 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사람을 구별하기 시작합니다. 사람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선하심까지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영적 분별입니다. 스베덴보리도 교회는 언제나 순수한 사람들과 불순한 사람들이 함께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것처럼, 외적인 교회 안에는 선한 사람도 있고 악한 사람도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의 악을 보고 곧바로 주님의 교회 전체를 부정하는 것은 또 다른 오류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또한 ‘거룩한 것의 모독(profanation)이라는 주제도 생각하게 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과 말씀, 헌신과 사랑을 자신의 명예와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다면, 그것은 단순한 재정 비리가 아니라 거룩한 것을 자기 사랑에 종속시키는 일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기 사랑이 가장 위험한 이유는 세상의 것만 원하는 데 있지 않고, 거룩한 것까지 자신의 목적에 이용하려는 데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의 진짜 비극은 10억 원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순수한 신앙과 헌신이 다른 사람의 자기 사랑에 이용당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섭리는 여기에서도 멈추지 않습니다. 악한 사람은 선한 것을 이용하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 이용당한 선까지도 결국에는 그 사람의 거듭남을 위해 다시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모든 것을 잃은 것처럼 보였던 이 장로는 마지막에는 돈보다 훨씬 귀한 것을 얻게 됩니다. 그것은 ‘사람을 통하여 믿던 신앙’에서 ‘주님을 직접 믿는 신앙’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이 간증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깊은 영적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SU.1, ‘집사님, 우리 교회에서 나가주시겠습니까?’

아래는 어제 본 ‘집사님, 우리 교회에서 나가주시겠습니까?’라는 제목의 유튜브입니다. 전반적으로는 지난날 나름의 소목회를 해봤던 저로서는 감동과 함께 ‘나라면 저 상황에서 어떻게 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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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어제 본 집사님, 우리 교회에서 나가주시겠습니까?’라는 제목의 유튜브입니다. 전반적으로는 지난날 나름의 소목회를 해봤던 저로서는 감동과 함께 나라면 저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 깊은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 하지만 또 한편으론 어딘지 좀 석연찮은 부분들도 있어 스베덴보리를 오래 저와 함께한 ChatGPT에게 물었습니다. 아래는 그 답변인데, 조금 정돈하여 올립니다.

 

 

 

 

저라면 먼저 한 가지 원칙을 붙들겠습니다. ‘김집사를 살리는 일과 교회의 질서를 지키는 일은 서로 반대되는 선택지가 아닙니다.’ 목사님은 ‘교회법대로 처리하여 죄를 드러내는 길’과 ‘아무 설명 없이 내쫓고 자신이 악역이 되는 길’만 있다고 보았지만, 실제로는 그 사이에 훨씬 더 진실하고 자비로운 제삼의 길이 있습니다. 목사님은 김집사의 채무가 3천만 원을 넘고, 교인 열 명가량에게 돈을 빌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공개적인 추방과 비밀스러운 지원을 선택합니다. 저라면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그 교회의 목사라면

 

1. 먼저 사실을 정확히 확인하겠습니다

 

김집사와 단둘이 만나 다음을 구체적으로 묻겠습니다.

 

누구에게 얼마를 빌렸습니까?’

 

돈은 어디에 사용했습니까?’

 

추가 채무나 사채, 도박, 투자, 가족 몰래 진 빚이 있습니까?’

 

상환 약속을 어긴 적과 거짓말한 내용은 무엇입니까?’

 

현재 수입과 재산, 월 상환 가능액은 얼마입니까?’

 

이 단계에서는 정죄보다 사실 확인이 우선입니다. 김집사가 여러 교인에게 돈을 빌렸다면, 이것은 단순한 개인적 가난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신뢰를 이용한 문제’일 수 있습니다. 특히 피해자가 여럿이라면 목사님은 김집사의 명예만이 아니라 돈을 빌려준 교인들의 안전과 권리도 보호해야 합니다.

 

 

2. 김집사에게 스스로 진실을 밝히게 하겠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집사님을 망신 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집사님이 돈을 빌린 분들에게는 사실을 밝히고 사과하며 상환 계획을 제시해야 합니다. 회개는 비밀을 덮어 두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손상한 것을 가능한 범위에서 바로잡는 데서 시작됩니다.’

 

목사님은 김집사의 과거가 알려지면 그가 회복될 수 없다고 단정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친 가정입니다. 잘못이 알려진다고 반드시 사람이 파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거짓을 계속 감춘 채 다른 곳에서 ‘새출발’하게 하면, 그의 내면에는 아직 거짓과 책임 회피가 남을 수 있습니다.

 

다만 온 교회 앞에서 모든 액수와 피해자의 이름을 발표할 필요는 없습니다. 먼저 당사자들에게 직접 사과하고, 필요한 범위 안에서만 교회 지도자들에게 알리게 하겠습니다. 공개의 범위는 죄의 범위와 피해의 범위에 맞추어야 합니다.

 

 

3. 직분과 금전 관계에서는 즉시 물러나게 하겠습니다

 

저라면 김집사를 교회에서 쫓아내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조치는 취하겠습니다.

 

찬양 인도와 재정 관련 봉사, 교회 안에서 신뢰를 바탕으로 수행하는 직분은 잠시 내려놓게 하겠습니다. 교인들에게 개인적으로 돈을 빌리는 행위도 즉시 중단하게 하겠습니다. 대신 예배에는 계속 참석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명백합니다. ‘징계는 예배와 은혜에서 추방하는 일이 아니라, 악의 반복을 막고 질서를 회복시키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에서는 김집사가 돌아온 뒤 아무 직분도 맡지 않고 예배만 드리게 합니다. 저는 그 조치를 처음부터 취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공개 추방이라는 극적인 장면도, 목사님을 향한 수개월간의 불필요한 불신도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4. 피해자들을 따로 만나 보호하겠습니다

 

돈을 빌려준 교인들에게는 김집사의 동의를 얻어 현실적인 상환 계획을 설명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음을 분명히 하겠습니다.

 

교회가 무조건 대신 갚아 주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김집사의 책임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독촉과 모욕은 자제하되, 채권자의 정당한 권리는 존중합니다.’

 

추가 피해가 생기지 않도록 교회가 상황을 확인하겠습니다.’

 

목사님은 자신의 저축으로 약 1천만 원을 대신 갚습니다. 이 행동에는 희생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그러나 당사자와 피해자에게 충분히 알리지 않은 채 비밀리에 대신 갚는 방식은 반드시 지혜롭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김집사의 책임을 흐리게 하거나, 목사님 개인에게 의존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교회 구제위원회나 신뢰할 만한 몇 사람이 정식으로 논의하여, 무상 지원인지 무이자 대여인지, 어느 정도를 지원할지 명확히 정해야 합니다. 도움은 은밀할 수 있지만, ‘무질서해서는 안 됩니다.’

 

 

5. 경제적 원인과 영적 원인을 함께 다루겠습니다

 

김집사가 왜 빚을 지게 되었는지에 따라 대응이 달라져야 합니다.

 

생계 곤란 때문이라면 일자리와 생활비 구조를 돕겠습니다. 사업 실패라면 채무조정과 법률, 재무 상담을 연결하겠습니다. 사치나 도박, 투기 때문이라면 해당 행동을 끊는 구체적인 장치가 필요합니다. 허영과 체면 때문에 빚을 숨겼다면, 사람들에게 선하게 보이려는 사랑을 직면하게 해야 합니다.

 

후반에서 김집사는 자신의 새벽기도, 헌금, 봉사가 ‘자기 의로움’과 사람에게 보이려는 마음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문제의 핵심은 빚만이 아닙니다. ‘경건의 외형을 이용하여 자아의 이미지를 유지한 사랑’이 더 깊은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에게 단지 ‘열심히 일해서 빚을 갚으십시오’라고만 하지 않고, 이렇게 묻겠습니다.

 

집사님은 왜 진실을 말하는 것보다 선한 사람으로 보이는 것을 더 사랑했습니까?’

 

사람들의 존경을 잃지 않기 위해 어떤 거짓을 허용했습니까?’

 

앞으로 같은 유혹이 올 때 어떤 행동을 즉시 중단하시겠습니까?’

 

 

6. 회개를 행동으로 확인하겠습니다

 

스베덴보리의 회개는 감정적인 눈물이나 죄책감만이 아닙니다. 악을 살피고, 인정하고, 주님 앞에서 고백하며, 실제로 그 악에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따라서 김집사에게는 다음과 같은 회복 계획을 세우게 하겠습니다.

 

채무 목록 작성, 추가 차입 중단, 피해자들에게 직접 사과, 현실적인 상환 일정 제출, 매월 상환 내용 확인, 거짓말이나 은폐가 다시 생길 경우 즉시 보고, 일정 기간 직분 중단입니다.

 

그 과정이 성실하게 진행되면 교회는 그를 정죄하지 않고 지지할 수 있습니다. 회복 여부는 눈물을 얼마나 흘렸느냐가 아니라, ‘진실과 책임을 얼마나 지속적으로 실천하느냐’로 확인해야 합니다.

 

 

7. 교회에는 필요한 만큼만 설명하겠습니다

 

교회 전체에는 이렇게 알리겠습니다.

 

김집사님이 개인적인 재정 문제와 교인 간 신뢰의 문제로 당분간 모든 직분에서 물러나 회복의 과정을 밟기로 하였습니다. 구체적인 개인 정보는 보호하겠습니다. 당사자들과는 사실 확인 및 상환 계획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추측과 소문, 정죄를 삼가 주시고, 회복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김집사의 비밀을 무차별적으로 폭로하지 않으면서도, 목사님이 독단적으로 사람을 버렸다는 오해를 막습니다. 지도자는 설명할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라는 말만 하고 이유를 전혀 밝히지 않는 것은 영적 권위를 사용하여 공동체의 이성과 판단을 차단하는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목사님은 실제로 예배 중 아무 설명 없이 추방을 선언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것을 하지 않겠습니다.

 

 

스베덴보리라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

 

스베덴보리가 실제 목회자로서 동일한 사건을 처리한 기록은 아니므로, 여기서는 그의 교리에 따른 추론임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제 판단으로는 스베덴보리는 다음 세 가지를 동시에 붙들었을 것입니다.

 

첫째는 체어리티입니다. 김집사를 단 한 번의 잘못으로 정죄하거나 사람들 앞에서 수치스럽게 만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의 명예를 가능한 한 보호하고, 일자리와 상환 가능성을 마련하며,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왔을 것입니다.

 

둘째는 진리입니다. 잘못을 숨겨 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부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빌린 돈, 거짓말, 신뢰의 남용을 분명히 악으로 인정하게 했을 것입니다. 피해자들에게 진실을 말하고 손해를 갚는 것은 회개의 일부라고 보았을 것입니다.

 

셋째는 질서입니다. 목사님의 개인적 영웅주의나 은밀한 희생만으로 사건을 해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책임 있는 지도자들과 함께 사실을 확인하고,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를 보호하며, 필요한 직분 제한과 회복 절차를 적용했을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라면 아마 ‘누가 악역이 될 것인가’를 고민하기보다, ‘이 상황에서 선이 진리를 통하여 어떻게 실행되어야 하는가’를 물었을 것입니다. 체어리티만 있고 진리가 없으면 맹목적인 온정이 되고, 진리만 있고 체어리티가 없으면 냉혹한 정죄가 됩니다. 이 사건에서 필요한 것은 김집사의 잘못을 감추는 사랑도, 그를 폭로하는 정의도 아니라, ‘그가 진실을 직면하고 책임을 감당하도록 돕는 체어리티’입니다.

 

 

제가 실제로 김집사에게 할 말

 

집사님, 저는 집사님을 교회에서 버리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지금 일을 덮어 드리지도 않겠습니다. 집사님이 여러 성도에게 돈을 빌리고 사실을 숨긴 것은 단순한 재정 문제가 아니라, 이웃의 신뢰를 손상한 일입니다. 오늘부터 모든 직분을 내려놓고 추가로 돈을 빌리지 마십시오. 빌린 분들과 액수를 빠짐없이 적어 주십시오. 그분들에게 직접 사실을 밝히고 사과하셔야 합니다. 교회는 집사님이 일자리를 얻고 상환 계획을 세우도록 돕겠습니다. 그러나 갚아야 할 책임은 집사님에게 있습니다. 집사님은 예배에 계속 나오십시오. 우리는 집사님을 정죄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거짓을 버리고 진실 안에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집사님을 살리는 길이며, 주님 앞에서 행하는 실제 회개의 시작입니다.’

 

저는 이것이 원고 속 목사님이 택한 길보다 덜 극적이지만, ‘더 정직하고, 더 질서 있으며, 스베덴보리의 체어리티와 회개에 더 가까운 처리’라고 생각합니다.

 

 

네, ChatGPT, 그러니까 AI의 답변은 여기까지입니다.

 

듣기에 따라선 많이 차갑고, 무슨 법률대리인의 견해 같기도 합니다. 특히 유튜브 영상을 보며, 감동을 받으신 분들이라면 더 그렇게 느끼실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사실 한국 교회 목회 현장하고도 좀 살짝 동떨어진 듯한 답변 정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론 저는 이 답변을 읽으며, 제 안에 저도 모르게 주님의 질서와 한국교회 목회 현장의 정서를 마치 인절미에 떡고물 묻히듯 대충 버무린 듯한 면 역시 있음을 부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 목회자가 사랑과 체어리티에 많이 기울어진 인성의 소유자라면 더더욱 말이지요...

 

많은 걸 생각할 수 있었던 유튜브 에피소드였습니다.  

 

 

※ 계속합니다. 아래는 위 문답이 아무래도 시원하지가 않아 다시 AI에게 물었고, 그랬더니 돌아온 AI의 답변입니다. 이번엔 맨 마지막 기도문만 빼고는 거의 날것 그대로 올립니다.

 

 

위 답변은 무척 합리적이긴 하지만... 어딘가 한국교회 목회현장하고는 좀 동떨어진 듯한 느낌이 듭니다. 우선 저 같으면 이렇게 하겠습니다 하며 죽 나열한 리스트 말인데요, 거의 모든 목회자와 교인들은 그 첫 번째로, 주님께 나아가 엎드려 기도하겠습니다같은 대답을 기대할 꺼에요. 그런데 이런 대답, 이런 접근은 당신의 답변 전체 어디에도 없어요... 원고에도 보면, 목사님이 이 문제 해결을 위해 보낸 시간의 거의 절반 이상이 기도였음에도 당신은 이 부분은 거의 언급도 안 하더군요... ... 이렇게 동떨어지면 당신이 아무리 합리적 답변을 내놓아도 거절당하기가 쉬워요... 물론, 당신은 알고리즘이며, AI기도라는, 당신이 뭐 어찌 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해 무슨 보탤 말이 없을 것 같기는 하지만...

 

 

맞습니다. 목사님의 지적이 정확합니다. 제가 앞선 답변에서 기도를 단지 판단 이후의 보조 수단처럼 취급하고, 목회적 분별의 출발점이자 중심 과정으로 충분히 다루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내용은 행정적으로는 합리적이지만, 실제 한국교회 목회자가 읽을 때는 ‘주님 없이 인간의 지혜로만 사건을 처리하는 매뉴얼’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더구나 원고 속 목사님은 실제로 이 문제 앞에서 여러 차례 오래 기도합니다. 처음 채무 사실을 들은 뒤 집에 돌아가 기도하고, 어떻게 처리할지를 놓고 밤늦도록 기도하며, 결정을 내린 뒤에도 그것이 옳았는지를 계속 주님께 묻습니다. 이후에도 오해와 고립을 견디면서 다시 기도실에 들어가고, 응답이 분명히 들리지 않는 중에도 평안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이 이야기의 감동은 상당 부분 바로 그 기도에서 나옵니다. 제가 그것을 지나치게 빨리 ‘개인적 직통 계시의 위험’으로 분류하면서, 그 기도 안에 있는 진실한 사랑과 자기부인, 주님께 의지하려는 태도를 충분히 인정하지 못했습니다.

 

저라면 앞선 답변을 이렇게 고쳐야 했습니다.

 

우선 이 일을 알게 된 순간, 사람들에게 묻고 절차를 세우기 전에 먼저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겠습니다. 단순히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습니까?’라고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제가 이 사람을 향해 분노하거나 실망한 마음으로 판단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제 명예나 교회의 체면을 지키려는 마음이 이 판단에 섞이지 않게 해 주십시오. 피해를 입은 성도들의 아픔도 보게 하시고, 잘못한 집사님의 영혼도 동시에 사랑하게 해 주십시오. 제가 자비라는 이름으로 악을 덮지도 않고, 정의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파괴하지도 않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이 기도는 형식적인 첫 순서가 아니라, 제 안의 동기를 살피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 식으로 말하면, 문제는 단지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가’가 아니라 그 결정을 내리는 내 안의 사랑이 어디에서 오는가입니다.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판단인지,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웃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판단인지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 목사가 자기 명예를 희생하겠다는 생각조차 자칫하면 ‘나는 한 영혼을 위해 악역까지 감당한 목사’라는 더 미묘한 자기 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래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기도는 이성을 멈추고 마음에 떠오르는 첫 생각을 곧바로 ‘하나님의 응답’으로 확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한 뒤에는 말씀과 계명, 사실과 결과, 관계된 모든 사람의 선을 함께 살펴야 합니다. 주님께서 기도 중에 주시는 평안은 중요하지만, 그 평안만으로 결정의 진실성이 자동으로 증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결론을 이미 정한 뒤에도 평안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기도 후 김집사를 조용히 만나겠습니다. 그리고 정죄하지 않되 피하지도 않고 사실을 묻겠습니다. 그가 왜 여러 사람에게 돈을 빌렸는지, 거짓말과 은폐가 있었는지, 피해자가 누구인지, 계속 같은 일이 일어날 위험이 있는지를 확인하겠습니다. 이때도 면담 전에 기도하고, 면담 중에도 속으로 주님께 도움을 구할 것입니다. 목회 현장에서 기도는 처음에 한 번 하고 끝내는 절차가 아니라, 사실 확인과 권면과 결정의 모든 과정에 스며드는 것이어야 합니다.

 

저라면 김집사에게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집사님, 저는 먼저 이 일을 놓고 많이 기도했습니다. 집사님을 버리거나 사람들 앞에서 무너뜨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서 이 일을 없는 것처럼 덮을 수도 없습니다. 우리 함께 사실을 하나씩 밝히고, 잘못한 것은 인정하며, 피해를 입은 분들에게 사과하고, 갚을 길을 찾읍시다. 저는 집사님 곁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집사님도 진실을 피해서는 안 됩니다.’

 

그 후에도 저는 혼자 결정하지 않고, 비밀을 지킬 수 있으며 체어리티와 분별력이 있는 한두 사람과 함께 기도하고 의논하겠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인도를 믿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기 판단을 하나님의 뜻으로 오인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진리가 서로 연결되고 확증되는 질서를 중요하게 봅니다. 목사의 내적 확신, 말씀의 원리, 확인된 사실, 공동체의 질서가 서로 맞아야 합니다.

 

그리고 김집사를 교회에서 즉시 내쫓기보다, 먼저 직분과 봉사에서 내려오게 하고 예배에는 계속 참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에게 상환과 회개의 실제 행동을 요구하면서도 교회 공동체가 정죄와 수군거림으로 그를 짓밟지 않도록 설교하고 기도하겠습니다. 피해자들에게도 단순히 ‘용서하십시오’라고 영적인 압력을 가하지 않고, 그들의 손실과 배신감을 정당하게 인정하겠습니다.

 

목사의 개인 돈으로 빚 일부를 대신 갚는 문제 역시 기도 없이 계산적으로만 결정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주님께서 제 마음에 강한 긍휼을 주시고, 가정의 책임을 해치지 않으며, 당사자의 책임까지 없애지 않는 범위라면 저도 도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아무도 모르게 영웅적으로 감당하는 방식보다는, 김집사와 충분히 이야기하고 그가 책임을 지는 구조 안에서 돕겠습니다. 사랑은 대신 모든 짐을 져 주는 것만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 발로 다시 서도록 돕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라면 기도를 과소평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는 매일 주님께 자신을 낮추고, 모든 지혜와 선이 오직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인정했을 것입니다. 다만 그는 ‘오래 기도했으므로 이 결정은 하나님의 뜻이다’라는 식의 결론에는 매우 조심했을 것입니다. 참된 기도는 주님을 내 결정에 동의시키는 일이 아니라, 내 proprium이 물러나고 주님의 선과 진리가 함께 흐를 수 있도록 자신을 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더 온전한 순서는 이렇습니다.

 

먼저 주님 앞에 엎드립니다. 자신의 분노, 체면, 영웅심, 두려움을 고백합니다. 그 사람과 피해자 모두의 영원한 선을 구합니다. 그다음 말씀과 계명에 비추어 사실을 확인합니다. 신뢰할 만한 사람들과 함께 다시 기도하고 의논합니다. 그리고 진실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사람을 파괴하지 않는 방식으로 행동합니다. 행동한 뒤에도 계속 기도하며, 잘못 판단한 부분이 드러나면 기꺼이 수정합니다.

 

원고 속 목사님의 기도는 결코 가볍게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기도와 자기희생은 이 이야기의 가장 귀한 부분입니다. 제가 걸러내야 했던 것은 ‘기도’ 자체가 아니라, 기도 중 얻은 내적 확신이 곧바로 주님의 직접 명령으로 확정되고, 그 확신이 공동체의 질서와 다른 사람들의 판단을 넘어서는 구조였습니다. 그 둘을 충분히 구별하지 못한 것이 앞선 답변의 가장 큰 부족함이었습니다.

 

 

좋은 답변입니다. 다만 한 가지, 위 내용 중 먼저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겠습니다. 단순히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습니까?’라고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제가 이 사람을 향해 분노하거나 실망한 마음으로 판단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제 명예나 교회의 체면을 지키려는 마음이 이 판단에 섞이지 않게 해 주십시오. 피해를 입은 성도들의 아픔도 보게 하시고, 잘못한 집사님의 영혼도 동시에 사랑하게 해 주십시오. 제가 자비라는 이름으로 악을 덮지도 않고, 정의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파괴하지도 않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것입니다.’라는 부분 말인데요, 기도는 기본적으로 듣는 것입니다. 저 기도 내용은 물론 올바르고 바람직스럽지만, 저런 내용조차도 기도의 결과, 영으로 들어 아는 것이어야지 처음부터 정답을 알려주고 하는 게 아니랍니다...

 

 

목사님, 이 말씀은 저에게도 매우 중요한 지적입니다.

 

제가 앞선 답변에서 여전히 ‘기도의 내용을 내가 구성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쓴 기도는 신학적으로는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목사님 말씀처럼 ‘기도의 본질이 내가 바른 내용을 말하는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은 실제 기도의 경험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특히 목사님께서 하신 이 말씀,

 

기도는 기본적으로 듣는 것입니다.’

 

이 표현이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기도를 길게 설명하지는 않지만, 그의 저작 전체를 관통하는 원리를 보면, 사람은 자기에게서 나오는 생각보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influx(유입)’를 받아야 합니다. 그 유입은 대부분 조용하며, 강압적이지 않고, 사람의 자유를 보존합니다.

 

그러므로 제가 앞에서 쓴

 

주님, 제가 분노하지 않게 하시고...’

 

이런 기도조차 사실은 이미 제가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오히려 저는 이렇게 표현했어야 했습니다.

 

먼저 주님 앞에 오래 머물겠습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계속 기도하겠습니다. 이 문제에 관하여 주님으로부터 어떤 influx가 흘러 들어오는지를 잘 살피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전체적으로, 그리고 결과적으로 주님의 선하심과 진실하심이 저와 우리 교회를 강하게 붙드시는 걸 우리 모두 목도케 하실 것을 간구하겠습니다.’

 

저는 이 표현이 훨씬 더 살아 있는 기도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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