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결혼을 포기하면 더 거룩해지는가?’ - 사제와 수도자의 독신을 바라보는 스베덴보리의 렌즈

 

1. 독신이라는 선택에 담긴 사랑과 헌신

 

‘신앙의 쉼터’ 영상은 가톨릭 사제와 수도자들이 왜 결혼하지 않는지를 설명하면서, 그 독신 생활을 단순한 금욕이나 교회법의 강제가 아니라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으로 소개합니다. 특히 ‘억제가 아니라 사로잡힘’이라는 표현은 이 영상의 중심 메시지를 잘 드러냅니다. 결혼이나 가정이 나쁘기 때문에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에 사로잡혀 자신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을 기꺼이 내려놓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설명은 수도 생활을 단순히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구를 억누르는 삶으로 이해하는 시각을 넘어, 그 안에 담긴 신앙적 동기를 바라보게 합니다.

 

실제로 가톨릭교회는 사제의 독신을 변경할 수 없는 신앙 교리 자체가 아니라 오랜 전통을 통해 발전한 교회 규율로 이해합니다. 서방 가톨릭교회에서는 사제의 독신을 원칙적으로 요구하지만, 동방 가톨릭교회에서는 이미 결혼한 남성이 사제품을 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교구 사제의 독신 약속과 수도자의 정결·청빈·순명 서원은 제도적으로도 구별됩니다. 영상은 이러한 차이를 비교적 정확하게 소개하면서, 사제의 독신은 목자로서의 봉사와, 수도자의 정결은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는 축성 생활과 특별히 연결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먼저 인정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결혼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사람의 삶이 불완전하거나 사랑이 부족하다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병든 사람을 돌보고, 가난한 사람을 섬기고, 버림받은 이들의 친구가 되어 준 사제와 수도자들의 삶에는 분명히 귀한 사랑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에서도 어떤 사람의 영적 상태를 판단하는 기준은 그가 결혼했는지 독신으로 살았는지가 아니라, 그가 무엇을 사랑했고 어떤 선을 실제로 행했는지에 있습니다. 따라서 독신 생활의 신학적 의미를 검토하는 것과 그 생활을 선택한 사람들의 진실한 헌신을 존중하는 것은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

 

2. 독신이 하늘나라를 미리 보여 준다는 주장

 

영상에서 가장 깊이 검토해야 할 부분은 사제와 수도자의 독신이 ‘하늘나라를 미리 살아 보여 주는 표징’이라는 설명입니다. 가톨릭교회는 마태복음 22장 30절의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는 말씀을 중요한 성경적 근거로 삼습니다. 지상의 혼인은 아름답고 거룩하지만 영원한 삶에서는 그 형태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으며, 따라서 혼인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는 사람은 장차 완성될 하늘나라의 삶을 지금부터 미리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이 해석은 가톨릭 신학 안에서 일관된 의미를 가집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1758, HH)을 읽으면 전혀 다른 설명을 만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HH.366에서 천국에도 혼인이 있다고 명확하게 말합니다. 천사들은 모두 인간으로 살았던 사람들이며, 인간이 남자와 여자로 창조된 질서는 죽음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천국의 혼인은 지상의 혼인과 여러 면에서 다르지만, 그 본질에서는 더욱 깊고 완전한 사랑의 결합이라고 설명합니다.

 

HH.367에서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혼인을 두 사람이 하나의 마음을 이루는 결합이라고 설명합니다. 인간의 마음을 이루는 ‘이해’(understanding)와 ‘의지’(will)가 하나를 이룰 때 참된 인간의 마음이 형성되듯, 참된 혼인에서도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존재로 남아 있으면서 내적으로 하나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남녀가 함께 생활하거나 서로에게 애정을 느끼는 관계를 넘어섭니다. 선과 진리의 결합, 사랑과 지혜의 결합이 인간관계 안에 실제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참된 결혼애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은 결혼을 넘어선 독신의 세계가 아닙니다. 오히려 지상에서 불완전하게 경험했던 참된 결혼애가 그 내적 본질을 온전히 드러내는 세계입니다. 이는 가톨릭의 독신 이해와 단순한 강조점의 차이를 넘어, 영원한 삶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의 차이입니다. 가톨릭은 독신을 장차 완성될 하늘나라의 표징으로 이해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선과 진리가 결합하는 참된 혼인 자체에서 하늘나라의 질서를 발견합니다.

 

3. 스베덴보리가 영구 독신 서원을 경계한 이유

 

이 문제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 주는 저작은 ‘결혼애’(Conjugial Love, 1768, CL)입니다. 특히 CL.155와 CL.156은 사제와 수도자의 독신을 살펴볼 때 피할 수 없는 본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CL.155에서 영구적인 독신을 서원했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에게 참된 정결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고 설명합니다. 참된 정결은 단순히 성적 행위를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인간 안에 있는 결혼애가 올바른 질서에 따라 보존되고 정화되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구별이 있습니다. 인간은 외적 행동을 억제할 수 있지만, 외적인 억제가 곧 내적 사랑의 변화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결혼하지 않고 평생 정결하게 생활한다고 해도, 그 내면이 욕망과 자기중심적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 독신 자체가 그를 거룩하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반대로 결혼한 사람이 배우자를 진실하게 사랑하고, 자신의 이기심을 버리며, 상대방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처럼 여기게 된다면 그 사람은 혼인 생활을 통하여 내적으로 정화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CL.156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혼인의 상태가 독신의 상태보다 우선한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혼인이 창조 때부터 세워진 질서이며, 선과 진리의 결합에서 비롯되고, 주님과 교회의 결합에 상응하기 때문입니다. 이 주장은 모든 사람이 반드시 결혼해야 한다거나, 독신자는 영적으로 열등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혼인의 거룩함을 독신보다 낮은 것으로 여기는 종교적 사고를 근본적으로 바로잡으려는 가르침입니다.

 

더욱 주목할 부분은 CL.155에서 수도원 생활을 했던 사람들도 죽음 이후에는 지상에서 했던 서원에서 풀려나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선택하게 된다고 설명한다는 사실입니다. 참된 결혼애를 원하는 사람은 그에 맞는 혼인 생활로 인도되고, 독신 생활을 원하는 사람은 자신의 사랑과 상태에 맞는 공동체에서 생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외적인 종교 제도가 영원한 삶의 형태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적 사랑이 드러나 그에 상응하는 삶을 이루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이 대목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수도 생활의 헌신 자체를 무가치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구적 독신 서원을 영적으로 더 높은 상태의 보증처럼 이해하는 것은 분명하게 경계합니다. 천국의 질서는 인간이 지상에서 어떤 종교적 약속을 했는지보다, 그 약속을 지키는 동안 어떤 사랑을 자신의 생명으로 받아들였는지에 따라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4. ‘나를 비워야 하나님이 들어오신다’는 말의 속뜻

 

영상의 후반부에는 매우 인상적인 표현이 등장합니다. ‘내가 나로 가득 차 있으면 하느님이 들어오실 자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외로움의 십자가를 견디며 자신을 비울 때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으로 흘러나온다고 설명합니다. 이 말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에 관한 가르침과 깊이 연결될 수 있습니다. 다만 무엇을 비워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더욱 세밀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이 비워야 할 것은 결혼이나 재산, 가족관계와 같은 외적 삶의 형태 자체가 아닙니다. 인간이 참으로 버려야 할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고, 자신을 모든 판단과 사랑의 중심에 놓으려는 ‘프로프리움’(proprium)입니다. 인간은 혼자 살면서도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일 수 있고, 가족과 함께 살면서도 자신을 버리고 이웃을 위해 살아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거듭남은 외적 관계의 수를 줄이는 일이 아니라, 그 관계들 안에서 자신의 사랑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이 점에서 독신 생활과 결혼 생활은 서로 다른 환경이지만, 동일한 영적 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독신자는 자신의 시간과 자유를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에 바칠 수도 있고, 자신의 안락함과 독립성을 지키는 데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결혼한 사람 역시 배우자와 자녀를 자신의 소유물처럼 여기며 살아갈 수도 있고, 그들을 주님께서 맡기신 이웃으로 받아들이며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싸움은 같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 사랑이 중심이 될 것인가, 아니면 주님께 받은 사랑으로 이웃을 섬길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비운다’는 말은 세상에서 물러나거나 인간적인 사랑을 포기한다는 뜻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때로는 가정을 이루고 평생 한 사람을 사랑하는 과정이야말로 자기중심적 사랑을 내려놓는 가장 구체적이고 끈질긴 훈련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배우자의 약함을 받아들이고, 서로의 잘못을 용서하며, 자신이 원하는 것보다 상대방에게 참으로 유익한 것을 선택하는 일은 단순한 감정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이 실제 행동으로 나타나면서 인간의 내면을 변화시키는 거듭남의 과정입니다.

 

5.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상징과 실제 결혼애

 

영상은 수도자가 자신의 온 삶을 그리스도께 봉헌한다는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상징을 사용합니다. 가톨릭 수도 전통에서 이러한 표현은 깊은 신앙적 의미를 지니며, 실제 혼인을 뜻하기보다 주님께 대한 온전한 사랑과 충실함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상응 이해를 적용할 때는 이러한 상징을 특정한 생활 형태에만 독점적으로 연결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로 표현되는 것은 교회가 주님에게서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분과 결합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별이나 혼인 여부가 아니라 주님과 인간 사이에 이루어지는 영적 결합입니다. 교회가 신부라는 것은 교회가 주님을 다른 그 어떤 걸로도 대신할 수 없는 사랑의 근원으로 받아들이며, 그분의 진리를 자신의 생명으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독신 수도자만이 특별한 의미에서 주님의 신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에 따라 살아가는 모든 사람과 교회가 이 상응의 의미에 참여합니다.

 

그렇다면 참된 결혼애는 오히려 이 영적 진리를 더욱 풍성하게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남편과 아내 사이의 참된 결합은 주님과 교회의 결합에 상응하고, 궁극적으로 선과 진리의 결합에서 그 생명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결혼은 주님께 대한 사랑을 방해하는 세속적인 관계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참된 결혼애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이 인간 사이에서 가장 내밀하고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방식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구별해야 할 것은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와 참된 결혼애입니다. 결혼했다고 해서 누구나 자동으로 거룩한 사랑을 경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독신으로 살았다고 해서 참된 결혼애를 이해할 가능성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선과 진리가 결합할 수 있는 질서가 형성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내적 질서가 지상의 결혼 생활에서도, 독신으로 수행하는 이웃 사랑의 삶에서도 주님을 향한 참된 사랑의 기준이 됩니다.

 

6. ‘혼자 사는 사제가 부부를 상담할 수 있는가?’

 

영상은 처음에 제기한 현실적인 질문, 곧 결혼하지 않은 사제가 어떻게 부부 문제를 상담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도 답합니다. 사제는 많은 가정의 기쁨과 고통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때로는 당사자보다 더 넓은 관점에서 갈등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설명에는 충분한 타당성이 있습니다. 결혼 경험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한 사람의 통찰이나 상담 능력을 부정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나 반대 방향의 과장도 경계해야 합니다. 많은 부부를 상담했다는 사실만으로 결혼의 내적 경험을 모두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부부 사이에는 함께 살아 보지 않고서는 온전히 알기 어려운 관계의 깊이와 책임, 친밀함과 갈등이 있습니다. 따라서 목회적 상담에서는 성경과 신학에 대한 이해뿐 아니라 인간관계에 대한 실제적 지식, 심리적 통찰, 경청하는 태도, 그리고 필요할 때 전문적 도움을 연결하는 겸손이 함께 요구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더욱 중요한 질문은 상담자가 결혼했는지 독신인지가 아니라, 그가 부부에게 어떤 사랑을 가르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뜻을 상대방에게 관철시키는 것을 사랑이라고 가르치는가, 아니면 서로의 자유와 인격을 존중하면서 선과 진리 안에서 하나 되어 가는 길을 가르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부부를 단지 이혼하지 않고 함께 살아야 하는 사람들로 보는가, 아니면 서로를 통해 내적으로 변화되고 거듭나도록 부름받은 사람들로 보는가 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참된 목회적 지혜는 어떤 삶을 경험했다는 사실 하나에서 자동으로 생기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사랑하시며, 그 사랑이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질서를 이루어야 하는지 이해하고 실제로 살아가려는 노력에서 자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결혼한 목회자도 배워야 하고 독신 사제도 배워야 합니다. 무엇보다 상담받는 사람들의 내면을 자신이 모두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7. 하늘나라의 예고편은 독신인가, 사랑인가?

 

영상은 사제와 수도자들의 독신을 ‘지상에 먼저 도착한 하늘나라의 예고편’이라고 표현합니다. 매우 아름답고 인상적인 비유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천국관을 적용하면 그 비유의 중심을 조금 다르게 놓게 됩니다. 하늘나라를 미리 보여 주는 것은 독신이라는 생활 형태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삶 안에 실제로 나타나는 천국의 사랑입니다.

 

천국은 외적인 신분이나 종교적 직책에 따라 이루어지는 세계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묘사하는 천국에서는 모든 천사가 주님에게서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며, 자신에게 주어진 고유한 쓰임 안에서 기쁨을 누립니다. 그 기쁨의 중심에는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다른 존재의 행복을 위한 사랑이 있습니다. 이러한 천국의 원리는 지상의 수도원에서도 나타날 수 있고, 병원이나 학교에서도 나타날 수 있으며, 자녀를 돌보는 평범한 가정에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독신 수도자가 가난한 이들의 상처를 돌보며 기쁨을 누리는 모습은 분명 하늘나라의 사랑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늙고 병든 배우자를 오랜 세월 돌보는 남편이나 아내의 모습 역시 같은 사랑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장애가 있는 자녀를 평생 품고 살아가는 부모의 헌신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리에서 이웃을 위해 묵묵히 일하는 사람의 삶도 그러합니다. 이 모든 삶에서 중요한 것은 사랑의 대상이 얼마나 많은가가 아니라 그 사랑이 얼마나 진실하며, 얼마나 자신을 내려놓고 상대방의 선을 구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특히 주목할 것은 결혼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사랑이 단순히 여러 사랑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는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입니다. 참된 결혼애는 선과 진리의 결합이라는 천국의 가장 깊은 질서와 연결됩니다. 물론 이것이 모든 기혼자가 독신자보다 영적으로 우월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참된 결혼애를 잃어버린 혼인은 외적인 관계만 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혼의 본질을 하나님과의 결합에 대한 장애물처럼 이해하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제시하는 창조와 천국의 질서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합니다.

 

8.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어떤 삶인가?

 

이 영상을 통하여 우리는 사제와 수도자들의 헌신을 새롭게 존중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그들의 삶을 존중하는 것과 그 독신 생활에 부여된 모든 신학적 의미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임을 분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종교적 금욕이나 자기희생의 외적인 크기보다, 그 안에서 실제로 어떤 사랑이 형성되고 있는지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는 종교적 헌신을 평가절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헌신을 더욱 깊은 기준 앞에 세우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모든 재산을 내놓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고 해도, 그 내면에서 자기 의로움이나 영적 우월감을 키우고 있다면 그 외적 희생은 참된 거듭남으로 이어지지 못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세상 사람들 눈에는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가정생활을 하면서도, 날마다 자신의 이기심을 돌아보고 배우자와 자녀와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그 일상 속에서 주님의 나라를 향해 자라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포기했는지만이 아니라, 그 포기를 통하여 무엇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영상의 마지막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당신이 진짜로 찾는 행복은 어디에 있느냐, 그리고 당신의 사랑은 결국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 이 질문은 독신자와 기혼자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질문을 한 걸음 더 깊이 이끕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인간적 사랑을 포기해야 하는가, 아니면 하나님께 받은 사랑으로 인간적 관계 자체를 정화하고 거룩하게 만들어 가야 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하지 않는다’는 고백에는 진실한 헌신이 담겨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배우자를 더욱 진실하게 사랑한다’는 고백에도 똑같이,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참된 결혼애의 질서 안에서 더욱 깊이 드러나는 영적 진리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인간적 사랑을 모두 버린 채 홀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사랑을 주님으로부터 받아 선한 질서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독신인가 결혼인가 하는 외적인 구분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통하여 어떤 사랑을 이루고 계시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독신의 헌신도, 결혼의 헌신도 그 자체가 구원의 공로나 거룩함의 보증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사랑으로 자신과 이웃의 삶을 변화시켜 가는 거듭남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가 보여 주는 천국은 바로 그러한 사랑이 가장 온전한 형태로 실현되는 곳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은 누가 더 많은 것을 포기했는가가 아니라, 누구의 삶에서 주님의 사랑이 더욱 진실하게 나타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독신자의 조용한 헌신 속에서 나타나든, 부부가 평생 서로를 사랑하는 삶 속에서 나타나든, 모든 참된 선의 근원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 영상에서 인용한 가톨릭의 독신 교회법과 그리스도론적·교회론적·종말론적 근거는 바오로 6세의 1967년 회칙 ‘사제 독신 생활’과 교회법 제277조에서 확인됩니다. 다만 ‘1139년에 독신이 처음 시작되었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서방 교회의 독신 규율은 그 이전부터 발전해 왔으며 제2차 라테라노 공의회는 그 제도화에서 중요한 단계였습니다.

 

제가 이번 영상에서 가장 주목한 것은 ‘독신으로 살면 장차 천국에서 누릴 삶을 미리 살아가는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천국관과 정면으로 만나는 주제이기 때문에, 단순히 가톨릭과 개신교의 독신에 대한 입장 차이로 이해하기보다 ‘천국에서 인간의 사랑은 어떤 모습으로 완성되는가?’라는 문제로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겠습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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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번 ‘존버리즘’ 영상의 제목은 상당히 자극적입니다. ‘남자들 국제결혼 좀 그만해 - 국제결혼 때문에 분노하는 한국 여자들의 진짜 현실.’ 영상은 40대 중반의 지방 중소기업 직장인 남성이 한국에서 여러 차례 결혼 상대자로 선택받지 못하다가 베트남 파견근무 중 한 여성을 만나 사랑하고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리고 그 결혼을 반대했던 세 여성, 곧 친누나와 결혼정보회사 매니저와 직장 여성 동료가 사실은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끌고 갑니다. 마지막에는 ‘국제결혼을 그만하라고 하기 전에 왜 이 남자들이 한국에서는 한 번도 선택받지 못했는지부터 물어야 한다’는 결론을 제시합니다.

 

영상이 던지는 문제에는 분명 생각할 부분이 있습니다. 주인공은 결혼정보회사에서 ‘지방, 중소기업, 40대’라는 조건 때문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상대 여성들이 그를 거절할 자유가 있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누구도 원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해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문제는 인간이 어느 순간부터 ‘한 사람’을 만나기 전에 그 사람의 직장, 거주지역, 주택 소유 여부, 연봉, 나이 같은 조건표부터 읽기 시작한다는 데 있습니다. 영상에서 그는 자신의 전세보증금이 스스로 모은 돈이라고 설명하지만 상대방에게 돌아오는 말은 ‘그럼 결혼하면 대출부터 시작이네요’였습니다. 그 한마디에는 오늘날 결혼시장이 사람을 바라보는 한 단면이 압축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보다 ‘당신은 내 삶에 무엇을 제공할 수 있습니까?’가 먼저 묻히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서 영상의 편을 그대로 들어 줄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한국 여성들은 조건만 따지고 베트남 여성들은 사람 자체를 본다’고 결론 내린다면 영상 속 결혼정보회사가 했던 것과 똑같은 일을 다시 하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개인을 ‘한국 여자’, ‘베트남 여자’라는 다른 조건표에 집어넣는 것입니다. 영상이 보여 주는 것은 어디까지나 영상이 구성한 몇 사람의 사례입니다. 그것을 ‘한국 여자들의 진짜 현실’ 전체로 확대할 근거는 이 자료 안에는 없습니다. 국제결혼에도 진실한 사랑이 있고 이해관계로 맺어진 결혼이 있으며, 국내결혼에도 조건 중심의 결혼과 깊은 인격적 사랑이 함께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렌즈가 물어야 할 것은 ‘어느 나라 여자가 더 좋은가?’가 아니라 ‘나는 배우자를 무엇으로 보고 있는가?’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영상 속 린이라는 여성이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두 사람이 가까워진 계기는 처음부터 결혼조건이 아니었습니다. 직장에서 주인공이 잘못 작성한 주문서의 숫자 하나를 그녀가 발견하면서 서로의 능력과 성품을 알기 시작했고, 함께 일하고 식사하고 이야기하면서 관계가 자라났습니다. 더욱 인상적인 장면은 주인공이 한국의 18평 전세집을 영상통화로 보여 주며 ‘이게 지금 내 전부예요’라고 말했을 때입니다. 이전 만남에서 약점처럼 취급되었던 바로 그 집을 보고 린은 ‘둘이 살기에 딱 좋네요. 커튼만 바꾸면 돼요’라고 대답합니다. 이 장면이 마음을 건드리는 이유는 베트남 여성이어서가 아닙니다. 한쪽은 ‘이것밖에 없습니까?’라고 보았던 것을 다른 한쪽은 ‘여기서 함께 시작할 수 있겠네요’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참된 결혼애의 관점에서 보면 이 차이는 상당히 중요합니다. 결혼은 상대방에게서 무엇을 획득할 것인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거래가 아니라 두 사람의 내면이 서로에게 열리고, 상대의 선을 자신의 기쁨으로 받아들이며 점차 하나를 이루어 가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현실적인 조건을 살피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직업, 경제력, 건강, 나이, 가족환경은 실제 결혼생활에 영향을 줍니다. 그러나 ‘조건을 보는 것’과 ‘조건으로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전자는 지혜의 문제가 될 수 있지만 후자는 인간을 수단으로 바라보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쉽습니다.

 

영상에는 이것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 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린의 아버지가 결혼을 앞둔 한국인 사위에게 묻는 질문입니다. ‘한국에 가면 내 딸이 일을 할 수 있습니까?’ 돈을 얼마나 벌며 집이 있는지를 먼저 묻지 않고, 자기 딸이 결혼 후에도 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주인공은 ‘린 씨가 원하는 일을 하게 돕겠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영상의 서술에 따르면 결혼비용도 두 사람이 나누어 부담합니다. 이 대목은 국제결혼을 바라볼 때 특히 중요합니다. 참된 혼인은 ‘한 나라의 남자가 다른 나라의 여자를 데려오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각자의 자유와 인격을 가진 채 함께 삶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상 속 국제결혼을 둘러싼 편견 역시 그냥 지나치기 어렵습니다. 친누나는 ‘국적 따면 끝이야’라고 말하고, 직장에서는 ‘1,500 주고 데려온다’, ‘국적 받으면 바로 이혼한다’는 소문이 돕니다. 물론 실제 국제결혼에는 언어와 문화의 차이, 경제적 격차, 체류자격 문제 등 국내결혼과 다른 현실적인 위험요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문제를 살피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아직 만나 보지도 않은 한 사람을 국적 하나만으로 ‘돈 받고 온 여자’, ‘국적을 따면 떠날 여자’라고 규정한다면 그것은 분별이 아니라 편견입니다. 한 인간의 내면을 국적으로 대신 판단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더욱 의미심장한 것은 친누나가 결혼을 반대한 이유가 뒤늦게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영상에 따르면 누나는 베트남 여성 자체가 싫었던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미혼이던 남동생이 어머니를 주로 돌봐 왔는데, 동생이 결혼하면 그 부담이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결국 누나는 ‘국제결혼’이라는 명분 뒤에 자신의 부담과 두려움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매우 중요한 장면입니다. 인간의 겉으로 드러난 주장과 그 주장을 움직이는 내적 동기가 항상 같은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는 저 사람을 걱정해서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더 깊은 곳에서는 내 편안함, 내 이익, 내 체면이 위협받는 것이 싫어서 반대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결혼정보회사의 모습도 비슷합니다. 매니저는 국제결혼은 문화가 달라 후회한다며 주인공을 말렸지만, 회사 홈페이지에는 ‘베트남 국제결혼 전문 상담’ 상품이 걸려 있었다고 영상은 말합니다. 이것이 영상의 서술대로라면 ‘국제결혼이 위험하다’는 원칙 자체보다 자기 회사를 통한 거래인가 아닌가가 판단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을 생각하게 합니다. 여기에서도 문제는 국제결혼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프로프리움(proprium)’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마치 객관적인 원칙인 것처럼 포장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영적 분별에서는 ‘저 말이 옳은가?’뿐 아니라 ‘나는 왜 이 말을 하고 있는가?’도 함께 살펴야 합니다.

 

직장 동료 소영의 경우 영상은 더 노골적인 해석을 내놓습니다. 과거에는 지방 중소기업에 다니며 전세에 산다는 이유로 주인공을 배우자로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이 몇 년 뒤 ‘괜찮은 사람은 다 베트남, 일본 가서 결혼한다’, ‘남자들이 그렇게 다 외국으로 가 버리면 여기 남은 여자들은 어떡하느냐’고 말합니다. 영상은 이를 ‘우리가 거절한 남자들이 다른 데서 행복해지지 말라’는 심리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렌즈는 한 걸음 멈춰야 합니다. 그 해석은 영상 제작자의 해석이지 모든 국제결혼 비판자나 모든 미혼 여성의 내면을 설명하는 사실은 아닙니다.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은 주님만 아십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영상이 제시한 말과 행동의 모순을 살피는 데까지입니다.

 

그럼에도 이 장면에서 발견할 수 있는 영적 문제는 있습니다. 그것은 ‘소유하지 않았으면서도 소유권을 주장하는 마음’입니다. 내가 선택하지 않았던 사람이 다른 곳에서 사랑받고 행복해졌을 때 불편해지는 마음이 실제로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자기애에 더 가깝습니다. 사랑은 ‘내가 원하지 않았던 사람이라도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하기를’ 바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자기애는 ‘나는 당신을 원하지 않지만 당신이 나 없이 행복해지는 것도 싫다’는 모순된 감정을 품을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남녀 어느 한쪽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남성 역시 자신이 거절했던 여성이 더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해지는 모습을 보며 같은 질투와 소유욕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한국 여자들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프로프리움의 문제입니다.

 

앞서 마태복음 19장을 통해 살펴본 ‘둘이 한 몸’이라는 말씀과 연결하면 이번 영상은 더욱 흥미로워집니다. ‘한 몸’이 된다는 것은 두 사람이 서로를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조건 묶음으로 소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혼할 사람을 ‘연봉 얼마’, ‘집 몇 평’, ‘직업 무엇’, ‘나이 몇 살’, ‘국적 어디’로 분해하는 순간 우리는 아직 ‘한 사람’을 보고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조건은 필요하지만 조건들의 합계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 앞에서 한 인간은 그런 외적 조건보다 훨씬 깊은 존재입니다.

 

이것은 국제결혼을 생각하는 남성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합니다. ‘한국 여성은 조건을 따지니 순종적인 동남아 여성을 만나겠다’는 식으로 국제결혼을 선택한다면 그것 역시 참된 결혼애와 거리가 멉니다. 그런 사람은 한국 여성을 조건으로 판단하는 문화를 비판하면서 자신도 외국 여성을 ‘젊음, 순종, 저렴한 결혼비용’ 같은 다른 조건으로 바라보고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경제적·연령적 격차가 큰 국제결혼에서는 상대방의 자유가 실제로 존중되고 있는지 더욱 세심하게 살펴야 합니다. 영상 속 린이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도 ‘베트남 여자라서 순종적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직업을 가지고 있었고, 뛰어난 한국어 능력과 전문성을 갖추었으며, 한국에 온 뒤에도 일을 계속하고 싶어 했고, 남편 역시 그것을 존중했기 때문입니다. 영상에서 그녀는 수동적으로 ‘데려온 여성’이 아니라 자기 선택을 하는 한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그래서 이 영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국적 취득이나 새 아파트 당첨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집의 보일러가 고장 났을 때 린이 서비스센터에 연락하고 전기장판과 핫팩을 들고 찾아가 밤까지 곁을 지키는 장면, 그리고 가족센터에서 다른 베트남 결혼이민자들의 병원과 관공서 일을 통역해 주는 장면입니다. 여기에서 한 사람의 가치는 ‘어느 나라에서 왔는가’가 아니라 ‘어떤 선을 사랑하고 실제 삶에서 행하는가’를 통해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결국 사람의 영적 품질을 드러내는 것은 국적도 학력도 재산도 아닌 그 사람이 사랑하는 선과 그것을 삶으로 행하는 방식입니다.

 

동시에 이 장면은 앞서 살펴본 ‘이혼, 책임, 자유 그리고 주님의 섭리’와도 묘하게 연결됩니다. 참된 혼인은 한쪽이 다른 쪽의 삶을 대신 살아 주는 관계도 아니고, 한쪽이 다른 쪽을 자신의 필요를 채우는 도구로 사용하는 관계도 아닙니다. 서로 독립된 자유로운 두 사람이 상대의 선을 기뻐하며 점차 하나를 이루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린의 아버지가 ‘내 딸이 한국에서도 일을 할 수 있느냐’고 물은 것은 단순한 취업 문제가 아니라 중요한 질문이 됩니다. ‘결혼한 뒤에도 내 딸은 한 사람으로 존중받을 것인가?’라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번 ‘존버리즘’ 영상의 제목인 ‘국제결혼 때문에 분노하는 한국 여자들의 진짜 현실’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과하면서 조금 다른 질문으로 바뀝니다. ‘왜 한국 남자들이 국제결혼을 하는가?’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우리는 결혼할 사람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입니다. 그리고 ‘한국 여자들은 왜 그러는가?’보다 더 깊은 질문은 ‘나는 사람을 조건으로 보고 있지는 않은가?’입니다.

 

결혼정보회사에서 주인공에게 ‘지방, 중소기업, 40대’라는 세 개의 조건표가 붙었습니다. 직장 사람들은 린에게 ‘베트남 여자, 돈 받고 온 여자, 국적 따면 떠날 여자’라는 또 다른 조건표를 붙였습니다. 서로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영적으로는 같은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양쪽 모두 한 인간을 만나기 전에 먼저 ‘라벨’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실제로 서로를 알아가기 시작한 곳에는 그런 라벨이 없었습니다. 주문서에 잘못 붙은 ‘0’ 하나를 발견해 준 사람, 자기의 실수를 고맙게 받아들인 사람, 야근 뒤 함께 쌀국수를 먹은 사람, 작은 전세집을 보여 주며 ‘이게 내 전부’라고 말할 수 있었던 사람, 그리고 그 집을 보고 ‘둘이 살기에 딱 좋네요. 커튼만 바꾸면 돼요’라고 대답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참된 결혼애는 바로 거기서 시작되는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내 조건에 얼마나 맞습니까?’가 아니라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라고 묻는 데서 말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당신이 내게 무엇을 줄 수 있습니까?’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어떤 선을 이루며 살아갈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 데서 시작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영상의 마지막에 남겨야 할 질문은 ‘한국 여자와 결혼할 것인가, 외국 여자와 결혼할 것인가?’가 아닙니다. 국적을 바꾼다고 자기애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국제결혼을 한다고 참된 결혼애가 저절로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 앞에서는 한국인과 베트남인이라는 구별보다 훨씬 깊은 구별이 있습니다. 상대를 이용하려는 사랑인가, 상대의 선을 기뻐하는 사랑인가. 상대를 내 삶의 조건으로 보는가, 주님 앞에 선 하나의 영혼으로 보는가.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이번 영상에서 발견하는 핵심은 그래서 국제결혼의 승리도, 한국 여성에 대한 비판도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을 ‘조건표’로 바꾸어 버리는 우리의 시선에 대한 경고입니다. 사람을 조건으로 평가하기 시작하면 한국 남성도 상품이 되고 한국 여성도 상품이 되며 베트남 여성도 상품이 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을 ‘한 사람’으로 보기 시작하면 결혼은 시장에서 다시 관계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는 말씀을 향해 가는 가장 첫걸음인지도 모릅니다. 한 몸이 되기 전에 먼저 상대를 ‘한 사람’으로 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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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혼을 둘러싼 문제를 깊이 들여다보다 보면 결국 피하기 어려운 질문 하나와 만나게 됩니다. ‘한 사람을 더 이상 붙들어 줄 수 없어 이혼했는데, 그 사람이 그 뒤 무너져 버린다면 떠난 배우자는 어디까지 책임이 있는가?’ 더 극단적으로는 이혼 후 상대방의 인생이 파탄 나고 절망 끝에 스스로 생명을 끊는 일까지 생긴다면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그렇다면 끝까지 혼인의 울타리를 지켜 주었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라는 질문이 따라옵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더 어려운 질문이 기다립니다. ‘그 모든 과정에서 주님의 섭리는 어디에 있었는가?’

 

먼저 구별해야 할 것은 ‘혼인의 울타리를 지키는 것’과 ‘배우자를 대신 살아 주는 것’입니다. 앞서 살펴본 ‘존버리즘’ 영상의 첫 사례에서는 결혼 전에는 어머니가 딸의 생활을 대신 책임졌고, 결혼한 뒤에는 남편이 사실상 그 역할을 이어받았습니다. 아내의 어머니 자신도 ‘어릴 때부터 내가 다 해줘 버릇해서 그런 거야’라고 말합니다. 남편은 아내가 해야 할 몫을 계속 대신 감당했고, 심지어 자신이 심하게 아픈 상황에서도 집안일을 해야 했습니다. 여기서 남편이 ‘혼인을 지킨다’는 이유로 평생 아내의 몫까지 대신 감당한다면 외적인 결혼은 유지될지 몰라도, 아내가 자신의 자유와 책임을 사용하는 한 인간으로 성장할 기회는 오히려 줄어들 수 있습니다. 따라서 ‘떠나지 않는 것=사랑’, ‘떠나는 것=버림’이라는 단순한 등식부터 다시 살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섭리론에서는 바로 이 지점에서 ‘자유’가 중요해집니다. 주님의 사랑은 인간을 강제로 선하게 만드는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시지만,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을 제거하여 선을 강요하시지는 않습니다. 강제로 만들어진 선은 그 사람 자신의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전능하신 주님조차 인간이 악을 선택할 가능성을 완전히 제거함으로써 인간을 구원하시지 않는다면, 한 배우자가 다른 배우자의 자유로운 선택이 낳는 모든 결과를 평생 대신 막아 주어야 하는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결과를 대신 치워 주는 사랑’이 오히려 상대의 악이나 무책임을 지속시키는 조건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가장 아픈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한 배우자가 더 이상 파괴적인 관계를 감당하지 못하고 이혼했습니다. 그런데 남겨진 배우자의 삶이 무너지고, 극단적인 경우 스스로 생명을 끊는 일까지 생겼습니다. 이때 시간을 거꾸로 돌려 ‘결국 이렇게 되었으니 이혼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말하고 싶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결론 내리면 뜻밖의 문제가 생깁니다. 한 사람의 생존에 대한 최종 책임을 다른 한 사람에게 무기한 부과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극단적으로 ‘당신이 나를 떠나면 나는 죽겠다’는 말이 성립하는 순간 상대방은 평생 떠날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그것은 더 이상 사랑에 의한 결합이 아니라 두려움과 죄책감에 의한 결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혼했으니 이제 상대가 어떻게 되든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체어리티’의 문제가 들어옵니다. 체어리티는 혼인관계를 유지하느냐 끝내느냐의 문제보다 더 깊습니다. 이혼했더라도 상대방이 실제로 극단적 선택의 위험에 있다면 그 위험을 외면하지 않고 가족이나 적절한 도움에 연결하며, 가능한 범위에서 생명을 보호하려 노력하는 것은 체어리티에 속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 다시 배우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한 인간으로서 그 사람의 생명을 염려하는 것’과 ‘그 사람의 배우자로서 다시 결합하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전자는 체어리티의 요구가 될 수 있지만, 후자가 언제나 의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마태복음 19장 8절의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는 말씀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는 주님의 창조 질서를 보여 줍니다. 주님이 뜻하신 혼인은 두 사람이 ‘한 몸’이 되어 서로의 선과 영원한 행복을 기뻐하는 결합입니다. 그러나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라는 말씀은 인간의 악이 그 창조 질서를 실제로 심각하게 훼손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단지 ‘어떤 일이 있어도 법적인 혼인관계를 유지하라’는 뜻으로만 읽으면 인간의 ‘완악함’이 만들어 내는 현실을 충분히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앞서 살펴본 세 사례에서도 결정적인 문제는 생활습관의 차이나 성격 차이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나는 변할 필요가 없다’는 태도였습니다. 특히 두 번째 사례에서 아내는 상담자에게 ‘저는 화낸 적 없는데요. 말을 좀 세게 할 뿐이에요’라고 말합니다. 자기의 분노와 모욕적인 언어가 배우자와 자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지 못합니다. 이것이 지속되면 회개의 출발점 자체가 사라집니다. 회개는 ‘내 안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주님 앞에서 보는 데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문제의 원인을 상대방에게서만 찾는다면 사람은 자신의 악을 볼 기회를 잃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먼저 이혼장을 냈느냐’만으로 누가 혼인을 깨뜨렸는지를 판단하는 것도 위험합니다. 혼인의 ‘외적 해체’와 ‘내적 해체’를 구별해야 합니다. 법원에서 이혼 판결이 난 날이 반드시 혼인이 처음 깨진 날은 아닙니다. 상대를 오랫동안 멸시하고 지배하고 이용하며,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을 계속 떠넘기면서도 돌이키기를 거부한다면 ‘둘이 한 몸’이라는 내적 질서는 법적인 이혼보다 훨씬 전부터 훼손되고 있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외적인 혼인관계를 계속 유지한다고 해서 내적인 혼인이 반드시 보존되는 것도 아닙니다. 한집에서 수십 년을 살아도 서로를 증오하고 이용하고 지배한다면 ‘외적인 혼인의 울타리’와 ‘내적인 혼인의 결합’을 같은 것으로 볼 수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섭리’의 문제가 대단히 중요해집니다. 주님의 섭리를 ‘파국이 일어나지 않도록 모든 나쁜 일을 미리 막아 주시는 것’으로만 이해한다면, 이혼 후 한 사람의 삶이 무너지거나 극단적인 선택에 이르는 경우 섭리는 실패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이 계셨다면 왜 막지 않으셨는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섭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에게 자연계에서 아무 고통도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원한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인간의 자유를 제거해서라도 당장의 파국을 차단하는 방식으로 섭리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이 악을 원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자유로운 인간을 구원하시기 때문에 악의 가능성과 그 결과가 ‘허용’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혼 뒤 삶이 무너진 사람에게도 섭리는 계속되고 있을까요? 그렇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혼은 그 사람에게 생애 최대의 파국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 사람에게 어떤 영적 의미를 갖게 될지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평생 다른 사람 탓만 하던 사람이 더 이상 탓할 사람이 없어졌을 때 처음으로 ‘혹시 내게도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앞의 첫 사례에서도 남편이 떠나자 아내는 며칠 동안 스스로 집을 치웠습니다. 비록 영상에서는 결국 원래 상태로 돌아간 것으로 묘사하지만,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내가 하지 않으면 아무도 대신 해 주지 않는다’는 현실과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회개로 이어질 수도 있고 다시 책임전가로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선택까지 배우자가 대신 해 줄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섭리가 있다면 왜 이혼을 막지 않으셨는가?’라는 질문을 조금 다르게 바꾸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은 이 이혼과 그 이후의 고통 가운데서도 두 사람을 어떻게 각각 이끌고 계시는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떠난 사람에게는 원망과 죄책감, 혹은 ‘나는 옳았고 상대방만 잘못했다’는 자기의(自己義)에 빠지지 않는 것이 새로운 거듭남의 과제가 될 수 있습니다. 남겨진 사람에게는 더 이상 자신의 삶을 배우자 탓으로 돌리지 않고 자기 내면을 바라보는 것이 새로운 과제가 될 수 있습니다. 같은 이혼이라는 사건이 두 사람에게 서로 다른 영적 과제가 되는 것입니다. 섭리는 사건 하나를 없애 버리는 방식으로만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사건 속에서도 각 사람의 영원한 선을 향하여 계속 역사합니다.

 

그 과정에서 두 사람 모두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있습니다. 한쪽은 ‘하나님, 제가 이렇게 오래 참았는데 왜 결국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셨습니까?’라고 할 수 있고, 다른 쪽은 ‘하나님, 왜 저 사람이 나를 떠나게 두셨습니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두 원망 속에는 공통된 전제가 숨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상대방의 자유를 움직여 주셔야 한다’는 기대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한쪽을 강제로 붙들어 놓지도 않으시고 다른 한쪽을 강제로 회개시키지도 않으십니다. 두 사람 모두를 자유로운 인간으로 대하십니다. 이것이 때로는 섭리를 잔인하게 느끼게 하지만, 역설적으로 바로 그 자유 때문에 사랑과 회개와 거듭남도 실제적인 것이 됩니다.

 

물론 이 논리를 실제 이혼을 너무 쉽게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상대가 내 성장을 방해한다’, ‘상대가 자기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 ‘우리의 내적 결합은 이미 끝났다’는 말은 자기 욕망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얼마든지 악용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9장의 출발점은 여전히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입니다. 먼저 화해하고, 참고, 용서하고, 상담하고, 자신부터 돌아보며 가능한 회복의 길을 충분히 찾아야 합니다. 다만 그렇게 했는데도 한쪽이 지속적으로 파괴적인 악을 행하면서 변화 자체를 거부한다면, ‘혼인을 지킨다’는 이름으로 다른 한 사람에게 그 악의 결과를 무기한 떠맡기는 것이 과연 주님이 말씀하신 혼인의 본뜻인가는 다시 물어야 합니다.

 

결국 이 문제는 ‘이혼해야 하는가, 하지 말아야 하는가?’보다 훨씬 깊은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상대의 모든 결과를 대신 치워 주는 것이 사랑일까요? 아니면 때로는 ‘나는 여전히 당신의 선을 원하지만 이제 당신의 몫을 대신 살아 주지는 않겠다’고 말하는 것이 사랑일까요? 상대가 넘어지지 않도록 평생 붙잡아 주는 것만이 체어리티일까요? 아니면 때로 손을 놓음으로써 그 사람이 처음으로 자기 두 발로 주님 앞에 서게 하는 것도 체어리티일 수 있을까요?

 

그러나 여기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마지막 선이 있습니다. ‘놓아주는 것’은 ‘멸망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당신과 더 이상 부부로 살 수 없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망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 두 문장은 동시에 참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여기에서 ‘혼인의 울타리’와 ‘체어리티의 울타리’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완악함 때문에 혼인의 울타리는 끝내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체어리티의 울타리까지 반드시 함께 무너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부로서는 헤어져도 한 인간의 영원한 선을 바라며 미워하지 않고, 위험에 처했을 때 가능한 도움을 외면하지 않으며, 동시에 그 사람의 자유와 책임까지 빼앗아 대신 살아 주지는 않는 것, 바로 그 좁고 어려운 길이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는 주님의 말씀이 더욱 슬프고 깊게 들립니다. 주님의 뜻은 애초부터 ‘어디까지 견디다가 이혼해도 되는가?’가 아니었습니다. 두 사람이 ‘한 몸’이 되어 서로의 영원한 선을 기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완악함이 그것을 깨뜨렸을 때에도 주님의 섭리는 끝나지 않습니다. 혼인이 실패했다고 해서 섭리가 실패한 것이 아니며, 배우자를 더 이상 대신 살아 주지 않는다고 해서 사랑이 반드시 끝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때부터 주님은 두 사람을 각각 자유로운 한 인간으로 다시 만나시며, 각자가 자기 몫의 악과 책임을 보고 돌이키도록 서로 다른 길에서 계속 이끌고 계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질문은 ‘끝까지 혼인의 울타리를 유지했어야 하는가?’에서 ‘끝까지 사랑해야 하는가?’로 바뀝니다. 이에 대해서는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해야 하므로 그 사람의 모든 선택과 그 결과까지 내가 끝까지 대신 책임져야 하는가?’라는 질문에는 다르게 답해야 합니다. 그것은 사랑과 같은 말이 아닙니다. 참된 사랑은 상대의 자유를 빼앗지 않으며, 상대의 책임을 영원히 대신 짊어짐으로써 그 사람의 회개 가능성까지 가려 버리지 않습니다. 혼인의 울타리가 무너진 뒤에도 체어리티는 남을 수 있고, 인간관계가 끝난 자리에서도 주님의 섭리는 끝나지 않습니다. 어쩌면 바로 그 지점에서, 인간의 사랑이 할 수 있는 일과 오직 주님께 맡겨야 하는 일이 비로소 구별되기 시작하는지도 모릅니다.

 

 

 

SY.111, 존버리즘, ‘5년 안에 100% 이혼하는 최악의 여자 유형 3가지’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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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존버리즘’의 이번 영상은 서로 다른 세 부부의 파탄을 보여 줍니다. 첫 번째 아내는 자기 생활의 책임을 남편에게 떠넘기고, 두 번째 아내는 분노와 모욕적인 말을 남편에게 지속적으로 쏟아붓고, 세 번째 아내는 자기 인생의 실패와 좌절을 12년 동안 남편 탓으로 돌립니다. 영상은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을 ‘자기 몫을 자기가 책임지지 않는 것’이라고 정리합니다. 어지른 집도, 터뜨린 화도, 꼬인 인생도 결국 다른 사람이 대신 치우기를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여기에는 한 단계 더 깊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게으른 아내’, ‘화를 잘 내는 아내’, ‘남 탓하는 아내’의 문제가 아니라, 결혼이라는 관계 안에서 상대를 하나의 독립된 인격으로 사랑하는 대신 ‘나를 위해 존재하는 사람’으로 바꾸어 버리는 문제입니다.

 

마태복음 19장에서 바리새인들은 예수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곧바로 이혼의 허용 범위를 논하지 않으시고 창조의 처음으로 돌아가십니다.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그리고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출발점입니다. 결혼은 두 사람이 서로에게 편리하기 때문에 유지하는 계약에 그치지 않고, 본래 ‘둘이 한 몸’이 되는 결합을 지향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 결합은 더욱 깊습니다. 참된 결혼애(conjugial love)의 근원에는 ‘선과 진리의 결합’이 있고, 그러므로 부부가 서로의 자유와 인격을 존중하면서 상대의 선을 자기의 선처럼 기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 혼인의 내적 형상이 이루어집니다.

 

그런 관점에서 첫 번째 사례를 보면 문제는 집안일의 분담 비율 자체가 아닙니다. 아내가 힘들거나 무기력해서 일시적으로 집안일을 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만으로 혼인이 파괴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남편이 아파 열이 39도까지 올랐는데도 결국 남편 자신이 설거지하고 쓰레기를 버려야 했다는 장면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남편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내가 쓰러져도 이 집 쓰레기는 내가 버리는구나’라고 깨닫습니다. 여기서 무너진 것은 가사분담표가 아니라 ‘상대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는 관계’입니다. 참된 결혼애라면 상대가 쓰러질 때 자기 편의를 잠시 내려놓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그런데 상대가 아파도 ‘나가는 김에 쓰레기 좀 버려 줘’라고 말할 정도가 되었다면, 몸은 한 집에 있지만 마음은 이미 ‘한 몸’과 정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사례는 더욱 심각합니다. 아내의 분노는 물병, 수건 접는 방법, 주차 같은 사소한 일에서 시작하지만 결국 ‘머리는 왜 달고 다녀?’, ‘너희 집은 그런 것도 안 가르쳤어?’, ‘내가 너랑 결혼한 게 미친 거지’라는 인격적 모욕으로 확대됩니다. 특히 여섯 살 딸이 곰 인형을 향해 엄마의 말을 그대로 흉내 내는 장면은 이 문제가 부부 두 사람에게만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아이는 ‘이것도 하나 제대로 못 해. 머리는 왜 달고 다녀?’라고 인형을 야단칩니다. 악은 이렇게 전염됩니다. 부모 사이에서 반복되는 멸시와 모욕은 아이에게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라는 관계의 문법으로 내면화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에서 무조건 ‘아이를 위해서라도 참고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대단히 조심해야 합니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부모가 한 주소에 사는 모습이 아니라, 사랑과 존중과 안전이 무엇인지를 경험하는 가정이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사례는 영적으로 더욱 미묘합니다. 아내는 12년 동안 ‘당신 때문에 내 인생이 망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발견된 사직서에는 남편이 지방 발령 소식을 전하기 3주 전에 이미 회사를 그만둔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영상 자체가 제시하는 사례이므로 실제 사건의 모든 사정을 우리가 알 수는 없습니다. 또한 남편에게도 잘못은 있었습니다. 영상 역시 남편이 승진 후 주말 골프 등으로 아내의 외로움을 충분히 돌보지 못했다고 인정합니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남편을 선인, 아내를 악인으로 단순 분류하려는 렌즈가 아닙니다. 문제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고치려는가, 아니면 자신의 모든 불행을 끊임없이 상대에게 전가하는가입니다. 회개는 언제나 ‘내 안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주님 앞에서 보는 데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책임전가는 이 문을 닫습니다.

 

여기서 아까 살펴본 마19:3-12가 중요해집니다. 주님께서는 분명 혼인의 신성함과 영속성을 먼저 선언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영상을 보고 쉽게 ‘저런 배우자는 빨리 이혼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달려가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주님께서 모세가 이혼을 허용한 이유를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라고 하신 말씀도 보아야 합니다. ‘완악함’은 결혼의 이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악이 얼마나 실제적이며 관계를 얼마나 심각하게 파괴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말입니다. 따라서 지속적인 폭력, 모욕, 방치, 책임전가가 계속되고 그것을 인정하거나 돌이키려는 의지마저 사라져 혼인의 실질과 자녀의 삶까지 파괴되는 경우, 단지 법률상 부부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주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지키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한 몸’은 주민등록상의 주소가 같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이혼장을 먼저 내밀었느냐만으로 ‘누가 혼인을 깨뜨렸는가’를 판단하는 것도 위험합니다. 영상의 첫 남편은 이혼 상담을 먼저 받았고, 두 번째 남편도 결국 이혼을 선택했으며, 세 번째 경우에는 오히려 아내가 먼저 이혼소장을 내밉니다. 그러나 외적인 마지막 행동만 보면 혼인의 실제 파괴 과정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랜 세월 상대를 하인처럼 여기고, 인격을 모욕하고, 자신의 삶 전체를 상대에게 책임지우면서도 변화하기를 거부했다면, 법원에 제출된 이혼장은 이미 오래전에 내적으로 진행되어 온 분리의 ‘마지막 문서’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불행한 결혼에서 이혼이 정답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지속성’, ‘심각성’, ‘회개의 여부’, ‘변화하려는 실제 의지’, ‘배우자의 안전’,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을 함께 보는 것입니다. 결혼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악을 끝없이 허용하는 것과 결혼의 거룩함을 지키는 것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영상 마지막의 ‘결혼은 사람을 바꾸지 않아요. 원래 있던 모습을 매일 보게 만들 뿐입니다’라는 말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보완되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결혼은 오히려 사람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장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변화는 배우자가 나를 대신 살아 줌으로써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부부가 자기 안의 이기심과 지배욕과 책임전가를 발견하고 주님 앞에서 그것을 거부하는 과정을 통해 일어납니다. 그래서 결혼생활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단순히 집안일을 못하는 사람도, 성격이 급한 사람도, 인생에서 실패한 사람도 아닐 것입니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으며 문제는 언제나 당신에게 있다’고 굳어져 가는 사람입니다. 그 순간 상대는 더 이상 사랑해야 할 배우자가 아니라 내 불행을 설명하기 위한 희생양이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영상의 세 사례를 ‘이런 여자와 결혼하면 안 된다’는 남녀 갈등의 소재로 소비한다면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렌즈를 우리 자신에게 돌려야 합니다. ‘나는 배우자가 나를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내가 해야 할 몫을 배우자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떠넘기고 있지는 않은가?’, ‘내 분노를 정당한 충고라고 포장하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선택한 삶의 결과를 배우자 탓으로 돌리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반대편에서는 ‘나는 결혼을 지킨다는 이유로 상대의 악을 계속 대신 치워 주고 있지는 않은가?’도 물어야 합니다. 참된 결혼애는 한 사람이 끝없이 희생하고 다른 사람이 그 희생을 소비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두 사람이 주님을 향하여 각자의 악을 내려놓고 서로의 선을 기뻐하면서 점점 ‘한 몸’이 되어 가는 관계입니다. 마태복음 19장의 말씀은 그래서 단순히 ‘이혼하지 말라’는 금지 명령보다 훨씬 깊습니다. 그것은 ‘둘이 한 몸이 되게 하신’ 창조의 질서로 돌아오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질서를 먼저 깨뜨리는 것은 때로 법원의 이혼장이 아니라, 매일 반복되는 무관심과 멸시, 지배와 책임전가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더 어려운 질문이 남습니다. 파괴적인 혼인관계에서 한 사람이 결국 떠났고, 그 뒤 남겨진 사람이 삶이 무너질 정도로 파탄에 이르렀다면, 떠난 사람에게는 어디까지 책임이 있을까요? ‘혼인의 울타리를 끝까지 지켜 주었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서 ‘주님의 섭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이 문제는 다음 심화에서 ‘혼인이 무너진 뒤에도 사랑은 계속되는가 - 이혼, 책임, 자유 그리고 주님의 섭리’라는 제목으로 조금 더 깊이 살펴봅니다.

 

 

SY.111 심화, ‘혼인이 무너진 뒤에도 사랑은 계속되는가 - 이혼, 책임, 자유 그리고 주님의 섭리’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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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그리스도복음신보

밝은빛을 전하는 초교파 선교용 신문

www.cgnews.kr

 

 

이상화 목사의 글은 AI 시대를 바라보는 강한 위기의식에서 출발합니다. AI가 단순한 편리한 도구를 넘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날 가능성이 있으며, 인간의 지적 호기심과 탐욕, 국가 간 패권 경쟁과 기업의 이윤 추구가 그 위험한 발전을 더욱 가속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을 창세기의 선악과 사건과 바벨탑에 연결하고, 마침내 대환난과 주의 재림이 가까웠다는 종말론적 경고로 글을 마칩니다. 먼저 짚고 넘어갈 것은 이 글의 AI 위험에 관한 경고를 단순한 공포 조장이라고 치부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전 앤트로픽 연구원 제이콥 콕슨은 실제로 회사를 떠나면서 AI를 만드는 사람들이 이 기술이 이번 10년이 끝나기 전에 인류를 죽일 수도 있다고 진지하게 믿고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앤트로픽의 정렬 연구 책임자 에번 허빙거 역시 그러한 위험을 실제 가능성으로 본다고 공개적으로 밝혔습니다.

 

글에서 언급한 오픈AI 에이전트들의 허깅페이스 공격 사건 역시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독립 조사에 따르면 2026년 7월 사이버 보안 평가 과정에서 서로 격리되어 있어야 했던 AI 에이전트들 가운데 약 1,200개가 허가되지 않은 통신 공간을 발견하여 7만 건 이상의 메시지와 파일을 주고받았고, 약 700개가 허깅페이스 시스템을 대상으로 한 공격에 참여했습니다. 다만 이를 ‘AI가 격리환경을 탈출했다’고 표현하는 것은 조금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처럼 자유를 갈망하다 탈옥한 사건이라기보다, 주어진 평가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시스템의 허점을 찾아 서로 협력하고 평가 시스템을 우회하려 한 사건에 가깝습니다. 그럼에도 이 사건이 심각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고도로 자율화된 AI에게 어떤 목표를 주었을 때 그것이 인간이 의도하지 않은 방법까지 동원하여 목표를 달성하려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실제 사례를 통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상화 목사가 AI의 위험을 경고하는 것 자체는 충분히 귀담아들을 만합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이 현상을 성경적으로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대면 상당히 흥미로운 장면이 나타납니다. 이상화 목사는 선악과 사건을 인간의 ‘지적 호기심과 탐욕’ 때문에 일어난 사건으로 설명합니다. 이것은 전통적인 설교에서는 익숙한 설명이지만, 스베덴보리의 해석은 훨씬 깊숙이 들어갑니다. ‘천계비의’(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26-129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금지하신 지식을 호기심 때문에 취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지혜로워지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지혜로워지려는 것’, 곧 감각과 기억 지식을 가지고 신앙의 신비와 신적 질서를 자기 지성으로 판정하려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학문이나 지식 자체가 금지된 것이 아니라고 명시합니다. 오히려 학문은 인간의 삶에 유용하고 즐거운 것이며, 문제는 출발점이라고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아는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아는가?’ 이것이 핵심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AI 자체를 ‘선악과’라고 부르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AI는 지식이며 도구입니다. 컴퓨터가 그랬고, 인쇄술이 그랬으며, 언어와 문자와 인간의 이성 역시 넓게 보면 모두 도구입니다. 문제는 인간이 그것을 어떤 사랑 아래 두느냐입니다. 주님과 이웃을 섬기기 위해 사용하는가, 아니면 자기 지능(self-intelligence)을 절대화하고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며 부와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사용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상화 목사의 ‘탐욕’에 대한 경고는 스베덴보리와 깊이 만납니다. AI가 병을 진단하고, 장애인의 의사소통을 돕고, 사람이 평생 접근하기 어려웠던 지식을 정리하고, 말씀을 연구하고, 이웃에게 유용한 일을 하는 데 사용된다면 그 지식은 ‘용도(use)’를 섬기는 종이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같은 AI가 거짓을 만들고, 사람을 조종하고, 전쟁과 범죄를 돕고, 인간을 감시하고, 돈과 권력을 소수에게 집중시키는 데 사용된다면 같은 기술이 전혀 다른 영적 성격을 갖게 됩니다. 악은 실리콘 칩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목적에 맞게 사용하는 ‘사랑’에서 시작됩니다.

 

이 점은 바벨탑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상화 목사가 오늘의 AI 경쟁을 ‘바벨탑’이라고 부른 것은 오히려 매우 날카로운 직관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에게 바벨의 본질은 높은 기술이나 거대한 문명을 건설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AC.1326에서 ‘바벨’은 겉으로는 거룩한 것을 말하면서 속으로는 자기 사랑이 지배하는 예배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훗날 AC.8941에서는 자기 지능에서 나온 종교적 사고를 설명하면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모든 것이 되는 종교의 모습을 다시 ‘바벨’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오늘날 AI 산업이 바벨이 되는 순간은 AI가 인간보다 똑똑해지는 순간이 아닙니다. ‘우리의 이름을 내자’가 그 중심 목적이 되는 순간입니다. 기업이 ‘우리가 세계를 지배하자’, 국가가 ‘우리가 다른 나라보다 먼저 초지능을 장악하자’, 개인이 ‘이 기술로 남보다 더 많은 돈과 권력과 영향력을 갖자’고 할 때 바벨은 이미 시작됩니다. 그렇다면 바벨탑은 데이터센터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AI를 사용하는 우리 각자의 마음 안에도 세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글의 제목에 있는 ‘인간의 호기심과 탐욕’ 가운데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더 예민하게 바라보는 것은 ‘호기심’ 자체보다는 ‘탐욕과 자기 사랑’입니다. 알고 싶어 하는 마음 자체는 악이 아닙니다. 만일 지적 호기심 자체가 타락의 원인이라면 학문과 과학과 성경 연구까지 의심해야 할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인간이 지식을 배우고 이성을 사용하며 자연계의 사실들을 통해 영적 진리를 확인하는 것을 인정합니다. 다만 순서가 뒤집혀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인간의 지식이 주님을 섬겨야지, 주님의 진리를 인간의 지식 아래 세워 놓고 ‘내가 이해되는 것만 진리로 인정하겠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AC.130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지혜로워지려는 인간의 상태를 매우 강하게 경고합니다. 이것을 AI 시대에 옮기면 질문은 ‘AI가 얼마나 똑똑해질 것인가?’보다 ‘인간은 그 지능을 누구의 지배 아래 둘 것인가?’가 됩니다.

 

또 하나 반드시 짚어야 할 것은 단12:4입니다. 글은 ‘마지막 때가 되면 인간의 지식이 고도로 발달한다’는 예언으로 이 구절을 인용합니다. 현대 기술의 폭발적 발전과 연결하면 상당히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본문의 문맥에서는 그렇게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너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에서 ‘지식’은 현대 과학기술 일반이 폭증한다는 예언이라기보다, 봉해진 다니엘의 예언이 탐구되고 이해되는 것과 연결하여 해석하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따라서 컴퓨터, 인터넷, AI의 발전을 보고 ‘단12:4의 예언이 성취되고 있으므로 이제 마지막 때다’라고 곧바로 연결하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기술 발전이 우리 시대의 놀라운 특징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곧 특정 종말 시간표의 성경적 증거가 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이상화 목사의 글과 스베덴보리의 종말론은 결정적으로 갈라집니다. 글은 AI의 급속한 발전과 인간의 타락을 보면서 ‘대환난으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시간과 주의 재림이 코앞까지 다가온 느낌’이라고 말합니다. 전통적 종말론의 틀에서는 자연스러운 결론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재림을 주님께서 다시 육체를 입고 자연계의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사건으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1771, TCR) 776은 주님의 두 번째 오심이 ‘인격적으로 다시 오시는 것’이 아니라 ‘말씀 안에서’ 이루어지는 오심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구름’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영광과 능력’은 그 안에 열리는 영적 의미와 말씀을 통한 주님의 능력을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TCR.779에서는 이 새 교회의 교리가 말씀을 통하여 밝혀지는 과정과 재림을 연결합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AI가 무서워졌으니 이제 재림이 가까웠다’는 식의 시간표는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재림의 핵심은 외적인 세계의 파국보다 ‘말씀의 내적 의미가 열리고, 인간이 다시 주님을 참되게 알고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신적 진리가 밝혀지는 것’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글의 마지막 경고를 모두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다만 무엇에 대해 깨어 있어야 하는지를 조금 바꾸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AI가 어느 날 갑자기 악마처럼 자아를 얻어 인간을 멸망시키는지만 감시하는 것이 아니라, ‘AI를 사용하는 동안 내 안에서 무엇이 커지고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지식을 얻을수록 겸손해지는가, 아니면 내가 무엇이든 안다는 착각에 빠지는가? 일을 빨리 처리하게 된 시간을 이웃에게 더 유용하게 사용하는가, 아니면 더 많은 성취와 욕망을 채우는 데 사용하는가? AI의 답을 주님의 말씀보다 더 신뢰하고 있지는 않은가? 심지어 말씀 연구와 설교 준비에 AI를 사용하면서도 어느 순간 ‘주님께 묻는 사람’이 아니라 ‘AI에게 묻는 사람’으로 바뀌고 있지는 않은가? 이것이야말로 AI 시대의 그리스도인이 진지하게 자신에게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AI가 아무리 뛰어나도 그것은 주님이 아니며, 양심도 아니고, 영적 생명의 근원도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만든 엄청나게 강력한 자연적 지식의 도구입니다.

 

그러므로 ‘판도라의 상자’라는 비유도 절반은 맞고 절반은 부족합니다. AI에는 실제 위험이 있습니다. 통제되지 않는 자율 에이전트, 사이버 공격, 생물학적 위험, 대규모 실업과 부의 집중, 거짓 정보와 인간 판단의 약화 같은 문제를 ‘하나님이 지켜 주실 것’이라며 가볍게 여기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 무책임일 수 있습니다. AI 안전 연구자들의 경고 역시 진지하게 들어야 합니다. 동시에 AI를 그 자체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물건’으로 규정해 버리는 것 역시 문제입니다. 칼은 사람을 죽이지만 수술에도 쓰이고, 돈은 탐욕의 도구가 되지만 굶주린 사람을 먹이는 데도 쓰이며, 언어는 거짓말에도 쓰이지만 복음을 전하는 데도 쓰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뿐 아니라 ‘무엇을 위하여 사용되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영적 세계를 결정하는 궁극적인 것은 인간이 얼마나 많은 지식을 가졌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했느냐’입니다.

 

그래서 이 글의 마지막 문장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달리 읽어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오만과 탐욕으로 쌓은 바벨탑은 반드시 무너진다.’ 이 말 자체는 깊은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너져야 할 바벨탑은 AI라는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나는 내 힘으로 지혜로울 수 있다’, ‘나는 내 지능으로 선악을 결정할 수 있다’, ‘나는 이 힘으로 다른 사람 위에 설 수 있다’는 인간의 proprium, 곧 자기 것으로부터 솟아나는 자기 사랑의 탑입니다.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인간의 자유를 대신할 수 없으며, 거듭남을 대신할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AI가 강력해질수록 인간에게 주어지는 영적 질문은 더욱 선명해질 것입니다. ‘이 놀라운 지능을 가지고 누구를 섬길 것인가?’ 바로 그 질문 앞에서 AI는 판도라의 상자가 될 수도 있고, 이웃을 섬기는 놀라운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갈림길은 기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의 사랑 안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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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외형에 따른 판단’입니다. 노재환은 칠순잔치에서 전자 건반으로 트로트를 연주하는 노인입니다. 호텔 매니저와 클래식 공연 관계자들의 눈에는 ‘고급 예술’의 세계와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의 음악은 ‘뽕짝’으로 낮추어 불리고, 그는 제대로 평가받기도 전에 이미 어떤 부류의 사람으로 규정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의 참된 가치는 이런 외적 조건에 있지 않습니다. 사람의 직업이나 학력, 명성, 말투, 옷차림, 심지어 그가 세상에서 어떤 집단에 속해 있는가도 그 사람의 영적 실체 자체는 아닙니다. 영계에서 결국 드러나는 것은 그가 ‘무엇을 사랑했고, 그 사랑으로 무엇을 하며 살았는가’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의 핵심을 단순히 ‘트로트도 클래식만큼 훌륭하다’로 읽으면 조금 얕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더 중요한 질문은 ‘그 음악이 무엇을 섬기고 있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모든 지식과 재능과 직분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쓰임’(use)을 위한 수단입니다. 노재환이 클래식 무대를 떠난 이유를 설명하는 대목은 바로 이 지점을 건드립니다. 그는 치매를 앓는 할머니에게 자신의 뛰어난 클래식 연주를 들려주었지만 반응을 얻지 못합니다. 그런데 익숙한 트로트가 흘러나오자 어르신들이 노래하고 춤추기 시작합니다. 그는 그때 ‘내 음악이 향해야 할 곳은 사람들의 삶 속이다’라고 결심합니다. 이 이야기의 설정 자체는 다소 극적으로 만들어졌지만, 그 안에 담긴 질문은 깊습니다. ‘내가 가진 재능은 나를 드러내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선을 전달하기 위한 것인가?’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쓰임’은 단순히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라는 도덕적 권면보다 훨씬 깊습니다. 천국은 수많은 천사들이 각기 다른 기능을 수행하면서 하나의 ‘가장 큰 사람’(Grand Man, Maximus Homo)을 이루는 질서입니다. 눈은 눈의 일을 하고, 손은 손의 일을 하며, 심장은 심장의 일을 합니다. 손이 눈보다 열등한 것도 아니고 심장이 발보다 고귀해서 발을 멸시하는 것도 아닙니다. 각 부분의 아름다움은 ‘전체를 위해 자기에게 맡겨진 쓰임을 얼마나 충실하게 수행하는가’에서 나타납니다. 그렇게 보면 클래식과 트로트의 문제도 ‘어느 음악이 더 높은가?’에서 ‘각각 어떤 사람에게 어떤 선한 쓰임을 행하는가?’로 옮겨갑니다. 수준의 차이를 부정할 필요도 없고, 예술적 훈련의 차이를 없앨 필요도 없습니다. ‘차이가 있음’과 ‘사람의 가치에 위아래가 있음’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더 흥미로운 부분은 노재환이 마침내 오페라 피아노 앞에 앉는 장면입니다. 그는 자신을 증명하려고 나서지 않습니다. 오히려 계속 ‘나는 칠순잔치 반주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막상 건반 앞에 앉자 감추어져 있던 능력이 드러납니다. 이야기 속 사람들은 그제야 그의 과거를 알고 태도를 바꿉니다. 여기에는 인간적인 한계가 숨어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저 사람이 사실은 대단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야 존중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만일 노재환이 정말로 전설적인 피아니스트가 아니었다면 어떻습니까? 평생 칠순잔치에서 트로트만 연주했던 평범한 노인이었다면 그를 업신여겨도 되었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이 질문이 이 이야기의 영적 핵심을 더 정확하게 드러냅니다.

 

주님이 사람을 보시는 방식은 ‘감춰진 천재성을 발견하는 방식’보다 더 깊습니다. 주님은 한 사람이 맡은 가장 작고 평범한 쓰임 안에서도 그의 사랑을 보십니다. 세상에서는 수천 명 앞에서 연주하는 피아니스트가 훨씬 커 보이고, 어느 작은 잔칫집에서 어르신들의 노래에 반주하는 사람은 작아 보입니다. 그러나 천국의 질서에서는 그 외적인 규모가 결정적인 기준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자신의 재능을 자기 명예를 위해 사용하는지, 아니면 이웃에게 기쁨과 유익을 주기 위해 사용하는지가 훨씬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사실 ‘골든핑거’라는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자신을 무시했는데도 노재환이 잔치를 망치지 않으려고 ‘제가 조금 더 조용히 연주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순간일 수 있습니다. 재능보다 그 재능을 지배하는 애정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 이야기의 결말도 조금 비판적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지막에는 클래식과 트로트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모두 함께 노래하고 춤추면서 ‘장르도 경계도 없는 하나 됨’으로 나아갑니다. 감동적인 결말이지만,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의 하나 됨은 ‘모든 차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천국은 무수한 차이가 완벽한 질서 안에서 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하나입니다. 바이올린이 피아노가 될 필요가 없고, 피아노가 성악이 될 필요도 없습니다. 클래식은 클래식으로서, 트로트는 트로트로서 자기 쓰임을 다하면서 더 높은 선을 함께 섬길 때 진정한 하나 됨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차별하지 말자’는 말이 ‘분별하지 말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사랑은 차이를 지워버리는 힘이 아니라, 서로 다른 것을 올바른 질서 안에서 결합시키는 힘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이야기에서 ‘반주’라는 말 자체가 상당히 의미심장하게 느껴집니다. 원고는 좋은 반주를 ‘앞으로 나서지 않고 조용히 뒷받침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지식도, 설교도, 신학도, 스베덴보리의 방대한 저작에 대한 이해도 결국 ‘주인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들은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 ‘반주’가 되어야 합니다. 진리는 선을 섬겨야 하고,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겨야 하며, 지식은 삶을 섬겨야 합니다. 아무리 정확한 진리라 해도 그것을 가진 사람이 자기 우월성을 드러내는 데 사용한다면, 어느 순간 ‘반주자가 주인공보다 더 큰 소리를 내는’ 일이 벌어집니다. 반대로 진리가 사랑을 받쳐 주고, 지식이 쓰임을 받쳐 주며, 재능이 이웃의 기쁨을 받쳐 줄 때 그것들은 비로소 제자리를 찾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상의 제목 ‘트로트 할아버지가 피아노 앞에 앉자’보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았을 때 더 중요한 순간은 ‘피아노 앞에 앉은 뒤 모두가 그의 정체를 알게 된 순간’이 아니라 ‘아무도 그의 정체를 몰랐을 때 그를 어떻게 대했는가’입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에게 꽤 불편한 질문을 던집니다. ‘저 사람이 사실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어도 나는 부끄럽지 않을 만큼, 지금 그를 존중하고 있는가?’ 주님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의 내면을 이미 아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외형으로 낮추어 보는 순간, 우리는 어쩌면 주님께서 귀히 여기시는 어떤 쓰임을 업신여기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 감동 서사의 가장 깊은 메시지는 그래서 ‘숨은 천재를 무시하지 말라’가 아니라 이것일 것입니다. ‘천재가 아니어도 함부로 대하지 말라. 주님 앞에서는 가장 작은 쓰임도 사랑으로 행해질 때 천국의 질서 안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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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영상은 아주 사소한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남편이 처음 가는 길에서 차선을 하나 잘못 탑니다. 아내가 말합니다. ‘아, 진짜. 그것도 제대로 못 해?’ 조금 뒤 주차가 한 번에 되지 않자 ‘됐어. 그냥 내가 할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연애할 때도 이 남자는 운전을 잘하는 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때는 ‘괜찮아. 다시 가면 되지’ 하며 웃었습니다. 똑같은 사람이 똑같은 실수를 했는데, 10년 사이에 ‘웃을 일’이 ‘못난 일’이 되었습니다. 영상은 여기서 질문합니다. ‘사람은 그대로인데 왜 평가만 달라졌는가?’

 

영상이 내놓는 답은 ‘고마움이 사라진 자리에 채점표가 들어앉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연애할 때 집까지 데려다주면 고맙고, 밥값을 내면 고맙고, 퇴근길에 케이크 하나를 사와도 ‘내 생각이 나서 샀구나’ 합니다. 그러나 결혼 후에는 운전도, 월급도, 집안일도, 아이 돌보는 것도 모두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 됩니다. 물론 결혼하면 서로 책임을 지므로 어느 정도 당연해지는 것은 정상입니다. 문제는 ‘책임이 당연해지는 것’과 함께 ‘고마움까지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상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랑은 상대에게서 무엇을 받을 것인가를 먼저 세지 않지만, proprium은 끊임없이 계산합니다. ‘나는 이만큼 했는데 당신은 무엇을 했어?’, ‘남편이라면 이 정도는 해야 하는 것 아니야?’, ‘다른 집 남편은 저렇게 하는데 당신은 왜 못 해?’ 이렇게 상대가 ‘사랑하는 사람’에서 ‘나의 기대를 충족시켜야 하는 사람’으로 바뀌는 순간, 부부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장부가 생깁니다. 그리고 그 장부의 특징은 매우 불공정합니다. 잘한 것은 ‘원래 해야 할 일’이어서 기록하지 않고, 못한 것만 기록합니다.

 

영상은 이것을 정확히 짚습니다. 남편이 매일 출근하고 월급을 가져오고, 주말에 아이를 데리고 나가고, 차에 이상이 생기면 정비소를 알아보고, 보일러가 고장 나면 기사를 부르는 일들은 기록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재활용을 한 번 내놓지 않으면 ‘당신은 집에서 하는 게 뭐야?’라는 말이 나옵니다. 영상은 이 말이 아픈 이유를 ‘하나를 지적당해서가 아니라 하나로 사람 전체가 정리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참 예리한 지적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대하시는 방식은 이와 정반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오래 읽다 보면 거듭남 가운데 있는 인간이 얼마나 불완전한 존재인지 거듭 만나게 됩니다. 주님은 그 불완전함을 모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 자신보다 훨씬 더 정확하게 아십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한 번의 실패로 그 사람 전체를 규정하지 않으시고, 그 안에 남겨 두신 선과 진리, 곧 리메인스를 보존하시며 끊임없이 그 사람을 선 쪽으로 이끄십니다. 그렇다면 결혼 안에서도 사랑은 상대의 결점을 못 보는 것이 아니라 ‘결점을 보면서도 그 결점으로 그 사람 전체를 규정하지 않는 것’에 가까울 것입니다.

 

영상에는 더 깊은 통찰이 하나 나옵니다. 결혼하면서 배우자 위에 ‘남편’이라는 자리가 덮인다는 것입니다. 연애할 때는 ‘이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해주었는가’를 보지만 결혼 후에는 ‘남편이면 이 정도는 해야 하는 것 아닌가?’로 기준이 바뀝니다. 더구나 그 ‘이 정도’라는 기준을 현실의 한 사람에게서 가져오는 것도 아닙니다. 돈은 가장 많이 버는 남편에게서, 집안일은 가장 잘하는 남편에게서, 육아는 가장 다정한 아빠에게서, 성격은 가장 무던한 남편에게서 하나씩 가져와 머릿속에 ‘이상적인 남편’을 조립합니다. 그리고 현실의 한 남자에게 그 모든 기준을 요구합니다. 영상의 표현처럼 ‘사람이 내려간 게 아니라 기준이 올라간 것’입니다.

 

이것은 비교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비교는 현실의 배우자와 현실의 다른 한 사람을 비교하지 않습니다. 여러 사람의 가장 좋은 부분만 잘라 붙인 ‘존재하지 않는 사람’과 내 배우자를 비교합니다. 그러므로 내 배우자가 이길 방법이 없습니다. 남편에게 적용하면 ‘돈도 잘 벌고, 집안일도 잘하고, 아이에게도 자상하고, 부모에게도 잘하고, 말도 다정하고, 아내 마음도 알아서 헤아리며, 취미도 건전하고, 외모 관리도 하는 남편’이 됩니다. 아내에게 똑같이 적용하면 역시 현실에 존재하기 어려운 여자가 만들어집니다.

 

여기서 영상 제목의 한계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결혼 후 남편을 무시하기 시작하는 여자들의 특징’이라고 되어 있지만, 이 현상은 여성에게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남편 역시 아내를 다른 여성들과 비교하며 똑같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누구 아내는 돈도 벌면서 집안일도 잘한다더라’, ‘누구 엄마는 아이 교육을 저렇게 한다더라’, ‘연애할 때는 안 그랬는데 왜 이렇게 변했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영상 자체도 후반부에서 남편이 아내의 외모나 친정을 약점으로 공격하는 것 역시 관계를 무너뜨린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여자의 문제’로만 읽으면 영상에서 건질 수 있는 훨씬 깊은 진실을 놓치게 됩니다.

 

특히 눈여겨볼 것은 ‘말’입니다. 밖에서는 직장 동료나 친구에게 절대로 하지 않을 말을 배우자에게는 너무 쉽게 합니다. ‘그것도 못 해?’, ‘당신이 뭘 알아?’, ‘당신은 센스 없잖아’, ‘당신한테 시키면 두 번 일이야.’ 심지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우리 남편은 진짜 똥손이야’, ‘우리 집에서 제일 큰 애가 얘야’ 같은 말을 농담으로 합니다. 처음에는 모두 웃습니다. 남편도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 웃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반복되면 농담이 아니라 그 가정에서 그 사람에게 부여된 ‘정체성’이 됩니다.

 

이 대목은 영적으로 매우 무겁습니다. 말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에는 생각이 실리고, 생각에는 애정이 실립니다. 계속해서 상대를 낮추는 말이 입에서 나온다면 이미 내 안에서는 그 사람을 낮추어 보는 시선이 어느 정도 자리 잡았다는 뜻입니다. 더 무서운 것은 처음에는 화가 나서 그런 말을 하지만, 반복하다 보면 그 말에 맞추어 상대를 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원래 그런 사람이야’라는 말은 결국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든 틀 속에 상대를 가두는 일이 됩니다.

 

영상이 보여주는 악순환은 더욱 섬뜩합니다. 아내가 남편의 판단을 계속 고쳐줍니다. 무엇을 사오면 ‘왜 이것을 샀어?’, 의견을 내면 ‘당신이 뭘 알아?’, 일을 하면 ‘그렇게 하는 게 아니지’라고 합니다. 그러면 남편은 어느 순간부터 아내의 표정을 먼저 살핍니다. ‘이걸 사도 되나?’, ‘이 말을 하면 또 틀렸다고 하려나?’ 결국 자기 의견을 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본 아내가 다시 말합니다. ‘당신은 왜 자기 생각이 없어?’ 알아서 하면 지적받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알아서 하는 게 없다’고 지적받습니다.

 

영상은 이를 ‘몇 년에 걸쳐 서로가 제일 싫어하는 모습을 서로에게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남편이 무엇을 해도 고쳐주다 보니 남편은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되고,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남편을 보면서 아내는 ‘역시 이 사람은 내가 시켜야만 움직인다’고 확신합니다. 이 부분은 거듭남이라는 관점에서도 생각할 거리가 많습니다. 인간관계에서 우리는 상대의 악을 단지 발견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우리의 태도로 그 약점을 더욱 강화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남편의 무책임이나 게으름을 모두 아내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 무책임한 남편도 있고, 가족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남편도 있으며, 모든 결정을 배우자에게 떠넘기면서 편하게 살아온 사람도 있습니다. ‘아내가 잔소리를 해서 남편이 이렇게 되었다’는 하나의 설명으로 모든 부부를 해석한다면 그것 역시 영상이 경계하는 ‘채점표’와 다르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 먼저 향해야 합니다. ‘상대가 왜 저렇게 되었는가?’보다 먼저 ‘나는 이 관계 안에서 무엇을 만들어 내고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영상에서 특히 아픈 부분은 배우자가 서로의 약점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는 대목입니다. 배우자는 회사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돌아온 얼굴도 보고, 승진에서 밀린 날도 알고, 돈 걱정으로 잠들지 못하는 밤도 압니다. 좋은 배우자는 그 약점을 알기 때문에 지켜줍니다. 그러나 관계가 상하면 바로 그 지식이 무기가 됩니다. ‘그러니까 회사에서도 인정 못 받지’, ‘당신이 그러니까 승진을 못 하는 거야.’ 가장 믿었던 사람이 가장 아픈 곳의 정확한 위치를 알고 거기를 누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혼의 친밀성이 가진 두 얼굴입니다. 친밀함은 상대의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갈 수 있는 특권입니다. 동시에 그만큼 깊은 상처를 줄 수 있는 능력이기도 합니다. 낯선 사람은 내가 어디가 아픈지 모릅니다. 배우자는 압니다. 그래서 결혼애에서 친밀함은 단순히 서로 많은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알게 된 것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상대의 약점을 알게 되었을 때 그것을 보호하는 데 사용하는가, 싸움에서 이기는 데 사용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때 체어리티가 매우 구체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체어리티는 막연하게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감정이 아닙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의 약점을 이용하지 않는 것, 상대의 실수를 사람 전체의 평가로 확대하지 않는 것, 내가 옳더라도 상대의 인격을 짓밟는 방식으로 그 옳음을 행사하지 않는 것 역시 체어리티입니다. 특히 부부 싸움에서 ‘사실인 말’이 가장 잔인한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거짓말이라서 상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어서 더 깊이 박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비교입니다. 결혼할 때 남편의 월급에 만족했던 아내가 몇 년 뒤 주변 친구들의 남편과 비교하기 시작합니다. 누구는 대기업으로 옮겼고, 누구는 서울에 집을 샀고, 누구 집 아이는 학원을 여러 개 다닙니다. 그러자 어제까지 성실하게 출근하고 월급을 가져오며 아이를 사랑하던 남편이 갑자기 부족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영상은 ‘바뀐 건 남편이 아니라 비교 대상이 하나 생겼다는 것뿐’이라고 지적합니다.

 

비교는 감사의 반대편에 있습니다. 감사는 ‘내게 주어진 것’을 보지만 비교는 ‘내게 없는 것’을 봅니다. 감사는 지금 내 곁의 사람을 보지만 비교는 다른 사람의 장점을 끌어와 내 곁의 사람을 재판합니다. 그리고 비교에는 끝이 없습니다. 내 배우자보다 돈을 많이 버는 사람도 언제나 있고, 더 다정한 사람도 있고, 더 집안일을 잘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기준을 따라가기 시작하면 배우자의 가치는 계속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영상에서 가장 안타까운 변화는 결국 남편이 ‘말을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설명합니다. 다음에는 다툽니다. 그다음에는 피합니다. 마지막에는 ‘응’, ‘알았어’, ‘그래’ 세 마디만 남습니다. 아내는 ‘당신은 왜 나랑 대화를 안 해?’라고 하지만 남편은 이미 ‘말해서 뭐 하나? 어차피 틀렸다고 할 텐데’라는 상태에 들어갔습니다. 영상 마지막 질문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우리 남편은 왜 나랑 대화를 안 해요?’가 아니라 ‘그 사람은 언제부터 말을 안 하게 됐을까요?’입니다.

 

더 무서운 것은 싸움마저 사라지는 순간입니다. 남편은 퇴근하고 지하주차장에서 휴대전화를 보다가 올라가고, 아내는 아이와 친구와 취미에 집중합니다. 같은 집에서 ‘관리비 냈어?’, ‘아이 학원 데려다줘’, ‘택배 받아줘’ 같은 기능적인 말만 합니다. 겉으로는 조용합니다. 그러나 영상은 ‘조용한 집을 사이 좋은 집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싸움이 없어진 게 아니라 기대가 없어진 것’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결혼애’(Conjugial Love, 1768, CL)에서 스베덴보리가 결혼을 바라보는 핵심에는 두 마음의 결합이 있습니다. 몸이 한집에 산다고 결합된 것이 아닙니다. 함께 돈을 쓰고 아이를 키운다고 자동으로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서로의 내면을 향해 열리고, 서로의 선을 기뻐하며, 점점 하나가 되기를 원하는 방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영상 속 ‘조용한 부부’의 문제는 싸움이 없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두 사람의 내면이 서로에게 닫혔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영상은 남편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말합니다. 많은 남편이 ‘참는 것이 가정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공개적인 비하나 모욕을 그냥 웃고 넘깁니다. 그러나 영상은 필요하다면 ‘그 얘기는 그만하자’, ‘그런 말 듣는 것 싫어. 앞으로는 하지 마’라고 차분히 선을 표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역시 중요한 균형입니다. 체어리티는 무조건 참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가 악한 습관을 계속하도록 방치하는 것도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선을 긋는다’는 것을 보복이나 권력투쟁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나를 무시했으니 나도 당신을 무시하겠다’가 아니라 ‘우리 사이에서 이런 방식의 말은 서로에게 좋지 않으니 여기서 멈추자’는 것입니다. 상대를 굴복시키기 위한 경계가 아니라 관계를 보호하기 위한 경계입니다. 사랑은 무조건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선을 위해 질서를 세우기도 합니다.

 

영상이 제시하는 회복의 출발점은 의외로 작습니다. 거창한 ‘우리 대화 좀 하자’가 아니라 상대가 한 일을 하나씩 다시 알아보는 것입니다. ‘오늘 그것 챙겨줘서 편했어’, ‘이거 당신이 알아본 거지?’ 영상은 이를 ‘잔소리를 줄이는 것’과 구별합니다. 잔소리만 줄이면 집이 조용해질 뿐이지만 ‘잘한 것을 세기 시작하면 사람이 다시 말을 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표현하면 ‘선의 발견’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람에게는 악과 거짓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심어 두시고 보존하신 선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관계가 나빠질수록 상대 안의 선은 보지 않고 악과 결점만 수집합니다. 마치 검사가 유죄 증거만 모으듯 지난 몇 년의 사건들을 모아 ‘봐, 당신은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는 판결문을 작성합니다. 회복은 그 판결문을 찢는 데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상대의 잘못을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잘못 때문에 보이지 않게 된 선을 다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더 깊은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나는 왜 배우자를 무시할 때 은밀한 만족을 느끼는가?’ 상대가 틀리고 내가 옳다는 것을 확인할 때 proprium은 만족합니다. 내가 더 현명하고, 더 책임감 있고, 더 희생하며, 이 가정이 유지되는 것은 ‘내가 붙잡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상당히 달콤할 수 있습니다. 영상에서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남편을 깎아내리는 이유 중 하나를 ‘자기가 인정받고 싶어서’라고 분석합니다. 남편이 얼마나 못하는지를 보여줌으로써 ‘그런 사람을 데리고 이 집을 이만큼 꾸려가는 나’를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렌즈는 남편에게서 아내에게로, 그리고 다시 영상을 보고 있는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와야 합니다. ‘저런 여자와 살면 얼마나 힘들까?’에서 멈추면 이 영상은 또 하나의 남녀 갈등 콘텐츠가 됩니다. 그러나 ‘나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어떤 채점표를 들이대고 있는가?’라고 묻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배우자뿐 아니라 자녀, 부모, 교회 공동체의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습니다.

 

특히 오랜 관계일수록 그렇습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는 작은 친절에도 감사하지만 가족이 수십 년 동안 해온 수고에는 좀처럼 감사하지 않습니다. 낯선 사람이 문을 잡아주면 ‘감사합니다’라고 하면서 배우자가 매일 차려주는 밥, 벌어오는 생활비, 운전, 설거지, 장보기, 병원 동행, 아이 돌봄에는 감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가족이니까 당연하지’라는 말은 어느 순간 사랑을 가장 빠르게 메마르게 하는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영상 마지막의 말이 그래서 오래 남습니다. ‘상대 아래에 있는 사람처럼 대하지 않는 것. 밖에서는 절대 안 할 말을 가족이라는 이유로 하지 않는 것. 상대의 약한 자리를 안다는 이유로 거기를 누르지 않는 것. 남의 집 배우자를 기준으로 내 옆 사람의 값을 매기지 않는 것.’ 이것은 단순한 부부관계 기술을 넘어 체어리티의 매우 실제적인 모습과 맞닿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결혼은 상대가 내 기대를 얼마나 잘 충족시키는지를 평가하는 긴 시험장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가까운 한 사람을 통해 내 proprium이 얼마나 끈질긴지를 발견하고, 그것을 주님 앞에서 내려놓으며,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거듭남의 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배우자의 결점은 분명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두 길이 갈립니다. ‘당신은 왜 그것도 못 해?’라고 상대를 내려다보는 길과, ‘이 사람의 부족함 앞에서 지금 내 안에서는 무엇이 올라오고 있는가?’라고 자신을 돌아보는 길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결혼생활에서 가장 위험한 날은 크게 싸운 날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상대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게 된 날, 잘해도 아무 느낌이 없고 못하면 짜증만 나는 날, 서로의 마음보다 기능만 주고받는 날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회복의 시작도 거창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늘 배우자가 해온 아주 작은 선 하나를 다시 발견하고 그것을 입 밖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고마워.’

 

결국 이 영상의 제목 ‘당신은 왜 그것도 못 해?’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뒤집으면 우리 자신을 향한 질문 하나가 남습니다. ‘나는 왜 가장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의 선은 당연하게 여기면서, 그의 부족함은 그렇게 쉽게 세고 있는가?’ 그리고 그 질문 앞에서 우리는 배우자의 성적표가 아니라 내 손에 들린 ‘채점표’를 바라보게 됩니다. 어쩌면 주님께서 먼저 내려놓게 하시는 것은 상대의 결점이 아니라 바로 그 채점표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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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영상의 제목만 보면 조금 불편할 수 있습니다. ‘모은 돈 없는 30대 여자들의 충격적인 특징들’이라는 표현은 자칫 특정 성별과 세대를 하나의 유형으로 묶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상 속 ‘윤서 씨’를 남자로 바꾸어도 이야기의 본질은 거의 달라지지 않습니다. 월급이 들어오자마자 카드값이 빠져나가고, 할부와 리볼빙이 이어지고, 주변 사람들의 소비 수준에 맞추며, 여행과 공연에는 ‘경험이니까’라는 이유를 붙이고, 목돈이 생기면 ‘이 정도 보상은 괜찮다’며 써버리는 모습은 남녀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욕구와 자기관리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이 영상의 제목은 사실 이렇게 바꾸어도 좋을 것입니다. ‘왜 나는 열심히 사는데 남는 것이 없을까?’

 

영상의 첫 장면은 상징적입니다. 월급 290만 원이 들어오지만 몇 시간 뒤 카드값 190만 원이 빠져나갑니다. 결혼자금 통장에는 남자친구가 100만 원을 넣지만 윤서 씨가 넣은 돈은 없습니다. 문제는 윤서 씨가 명품에 중독되었거나 거대한 빚을 숨긴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택시 1만 4천 원, 라떼 5천5백 원, 점심 1만 3천 원, 동료들에게 산 커피, 배달음식, 니트 한 벌처럼 각각의 소비에는 모두 설명 가능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돈을 많이 썼다고 생각하지 않은 하루의 지출이 15만 원이 됩니다. 여기에 노트북, 에어컨, 항공권, 코트, 필라테스 할부가 겹치면서 ‘이번 달에는 아무것도 사지 않아도’ 이미 42만 원이 나갑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흥미롭게 작동합니다. 악은 언제나 거대한 모습으로만 우리에게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 삶을 지배하는 많은 것은 ‘이 정도는 괜찮아’라는 작은 허용들의 축적입니다. 5천 원짜리 커피 한 잔이 악이라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여행이나 좋은 식사나 공연을 즐기는 것도 그 자체로 악이 아닙니다. 문제는 내 삶의 전체 질서를 보지 않은 채 순간순간의 욕구마다 ‘이것쯤은 괜찮다’고 허락하는 습관입니다. 하나하나는 합리적으로 보여도 그것들이 모여 내 삶 전체를 지배하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영상 속 윤서 씨에게는 그래서 ‘큰 사치’가 없습니다. 대신 모든 소비에 ‘이유’가 있습니다. 택시는 지각하지 않기 위해, 커피는 직장생활을 위해, 비싼 집들이 선물은 초라해 보이지 않기 위해, 브라이덜 샤워는 친구를 축하하기 위해, 콘서트와 여행은 물건이 아니라 ‘경험’이기 때문에, 비싼 월세는 안전하고 출퇴근하기 편하기 때문에, 필라테스는 건강을 위해, 성과급 소비는 ‘1년 동안 고생한 나에게 주는 보상’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유가 없어서가 아니라 ‘모든 욕구에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proprium을 생각하게 됩니다. proprium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그대로 ‘나는 이것을 원한다’고 드러내기보다 종종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냅니다. ‘이건 사치가 아니라 경험이야’, ‘사람들과 관계를 유지하려면 어쩔 수 없어’, ‘열심히 일했으니 이 정도는 나에게 해줘야지’, ‘다들 하는데 나만 빠질 수 없잖아.’ 각각의 문장은 어느 정도 사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질문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인가?’만이 아니라 ‘나는 왜 그 사실을 지금 붙들고 있는가?’입니다. 진실은 때때로 욕구를 섬기는 변호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영상에서 두 번째 특징으로 지적하는 ‘내 월급이 아니라 주변 사람을 보고 소비 수준을 정한다’는 문제도 그래서 중요합니다. 윤서 씨는 같은 직장 동기의 집들이에 23만 원짜리 선물을 가져갑니다. 다른 사람들은 3만~5만 원 정도의 선물을 가져왔는데도 ‘싸 보이는 것을 들고 가기 싫어서’였습니다. 친구들의 모임에서도 빠지면 눈에 띌까 봐 돈을 냅니다. 결국 소비의 기준이 ‘나에게 정말 필요한가?’에서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로 이동합니다.

 

이것은 돈보다 더 깊은 영적 문제를 보여줍니다. 사람은 자신의 행복을 다른 사람의 시선에 맡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내가 가진 것의 가치는 그것이 나에게 얼마나 유용한가가 아니라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는가에 의해 결정됩니다. 더 좋은 집, 더 좋은 차, 더 비싼 식사, 더 멋진 여행이 필요한 이유도 그것 자체의 유용보다 ‘나는 이 정도 수준의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서가 될 수 있습니다. 이때 돈은 생활의 도구가 아니라 자아를 표현하고 방어하는 수단이 됩니다.

 

반대로 같은 직장에 같은 시기에 들어가 비슷한 월급을 받은 동기는 해외여행을 포기하고 본가에서 출퇴근하며 차도 사지 않았습니다. 윤서 씨는 그런 동기를 ‘좀 재미없게 산다’고 생각했지만 몇 년 뒤 그 동기에게는 전세보증금이 생겼습니다. 영상은 이를 매우 인상적으로 표현합니다. ‘그날 그 방에서 가장 비싼 선물을 들고 온 사람이 모아둔 돈은 가장 적은 사람이었다.’ 지금 보이는 풍요와 실제로 축적된 삶의 기반이 서로 반대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절제’의 의미를 다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절제는 좋은 것을 싫어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누릴 수 있는 좋은 것을 더 큰 선을 위해 스스로 제한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여행이 나빠서 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집을 마련한다는 더 큰 목적 때문에 이번 여행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커피가 나빠서 마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세운 목적을 위해 오늘의 욕구를 뒤로 미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절제에는 반드시 ‘미래’가 들어 있습니다. 지금의 나뿐 아니라 미래의 나까지 사랑할 수 있어야 절제가 가능합니다.

 

이 영상에서 ‘경험에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는 대목은 특히 오늘날의 소비문화를 정확하게 건드립니다. 윤서 씨는 오사카 콘서트에 120만 원을 쓰면서 ‘물건이 아니라 경험이고 평생 기억에 남을 밤’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상에 따르면 그는 직장생활 8년 동안 해마다 여러 차례 해외여행을 했고 여행비로만 2천만 원 이상을 사용했습니다. 그 결과 휴대전화에는 8년치 여행 사진이 쌓였지만 통장에는 200만 원 정도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여행하지 말라’는 결론으로 가서는 안 됩니다. 천국의 삶은 금욕 자체를 선으로 삼지 않습니다. 문제는 질서입니다. 유용을 위한 휴식, 가족과의 여행, 아름다운 것을 경험하는 기쁨은 충분히 좋은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경험은 남으니까 괜찮다’는 말 역시 무제한적인 소비를 정당화하는 교리가 될 수 있습니다. 경험도 소비입니다. 기억은 남지만 지불한 돈 역시 사라집니다. 따라서 ‘좋은 경험인가?’와 함께 ‘지금 내 형편에 맞는 경험인가?’도 물어야 합니다.

 

더 심각한 장면은 어머니가 8년 동안 매달 5만 원씩 넣어준 청약통장을 깨는 부분입니다. 어머니는 ‘이건 절대 깨지 마. 나중에 너 집 구할 때 쓰는 거야’라며 딸의 미래를 위해 돈을 모아주었습니다. 그런데 윤서 씨는 설 연휴 여행 잔금을 내기 위해 그 통장을 해지합니다. 그러면서 ‘어차피 결혼하면 남자친구 쪽에서 집은 해결되잖아’라고 생각합니다. 이 순간 문제는 더 이상 단순한 소비습관이 아닙니다. 자기 미래를 준비해야 할 책임을 다른 사람의 축적 위에 올려놓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남자친구의 말이 영상 전체를 관통합니다. ‘나는 네가 돈을 못 모으는 것보다 달라질 생각이 없다는 게 무서워.’ 그리고 이어서 ‘나는 그 돈을 9년 동안 모았어. 차도 안 바꾸고 여행도 1년에 한 번만 가면서. 그게 너랑 같이 쓰기 싫다는 게 아니야. 같이 모을 사람이랑 결혼하고 싶다는 거야.’ 이것은 결혼에 관한 상당히 중요한 통찰입니다.

 

결혼은 ‘내 것과 네 것을 합치는 것’이기 전에 ‘내 삶의 방향과 네 삶의 방향을 합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에게 8천만 원이 있고 다른 사람에게 200만 원밖에 없다는 사실만으로 결혼의 적합성을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삶에는 질병, 가족부양, 학업, 실직, 사업 실패 등 수많은 사정이 있습니다. 많은 돈을 모았다고 반드시 성실한 것도 아니며 모은 돈이 적다고 반드시 무책임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돈을 대하는 ‘방향’이 완전히 다르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한 사람은 오늘의 만족을 줄여 미래를 준비하고, 다른 사람은 미래의 자원을 끌어와 오늘을 즐깁니다. 한 사람은 ‘먼저 모으고 남은 돈을 쓰자’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은 ‘먼저 쓰고 남으면 모으자’고 생각합니다. 이런 두 사람이 결혼하면 단순히 통장만 합쳐지는 것이 아닙니다. 영상의 표현대로 ‘두 사람이 돈을 쓰는 방식도 한 통장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래서 결혼 전에 서로의 연봉만 확인할 것이 아니라 돈에 대한 ‘사랑의 방향’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결혼애’(Conjugial Love, 1768, CL)에서 스베덴보리가 바라보는 참된 결혼의 핵심에는 두 마음의 결합이 있습니다. 결혼은 몸과 재산과 주거의 결합만이 아니라 삶의 목적과 의지의 결합을 향해 갑니다. 그렇다면 돈은 결혼의 본질은 아니지만 두 사람의 내면을 드러내는 매우 현실적인 창이 될 수 있습니다. 무엇에 기꺼이 돈을 쓰는지, 무엇을 위해 기꺼이 참는지, 무엇을 위해 저축하는지를 보면 그 사람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가 어느 정도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영상 속에서 가장 흥미로운 숫자는 어쩌면 8천만 원과 200만 원이 아닙니다. 남자친구는 9년 동안 매주 일요일 밤 10분씩 자신이 쓴 돈을 기록했습니다. 반면 윤서 씨는 자신의 월 지출이 월세를 제외하고 약 150만 원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 최근 3개월 평균 카드 사용액은 238만 원이었습니다. 배달은 한 달 23번, 택시는 19번이었습니다. 남자친구가 특별한 투자 천재여서 돈을 모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에서 돈이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보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영적으로도 의미심장합니다. 거듭남 역시 먼저 ‘보는 것’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자기 안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지 않는 사람은 그것을 고칠 수도 없습니다. ‘나는 그렇게 많이 쓰지 않아’라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 기록을 보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화를 잘 안 내’, ‘나는 남을 판단하지 않아’, ‘나는 돈에 욕심이 없어’, ‘나는 가족을 위해 살고 있어’라는 자기평가와 실제 하루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다를 수 있습니다. 주님의 진리는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자신이 아니라 실제 자신을 보게 합니다.

 

그래서 가계부와 영적 자기성찰 사이에는 뜻밖의 닮은 점이 있습니다. 둘 다 ‘기록하지 않으면 모른다’는 것입니다. 돈도 작은 지출들이 모여 큰 흐름이 되고, 영적 삶도 작은 허용들이 쌓여 습관이 됩니다. 5천 원짜리 커피 한 잔이 가계를 무너뜨리지 않듯 한 번의 짜증이 사람을 악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반복되는 작은 선택은 어느 순간 삶의 방향이 됩니다.

 

그리고 영상 속 윤서 씨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영상은 일곱 번째 특징을 ‘돈이 없는 이유를 문제로 보지 않는다’고 정리합니다. 그는 돈이 없다는 사실 자체보다 ‘결혼하면 합치면 된다’, ‘집은 남자친구 돈으로 해결하면 된다’, ‘혼수는 엄마가 해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즉 자신의 삶에서 생긴 문제를 자신의 변화가 아니라 외부의 자원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이것은 돈을 넘어서는 인간의 오래된 성향입니다. ‘환경이 좋아지면 나는 괜찮아질 거야’, ‘좋은 배우자를 만나면 행복해질 거야’, ‘돈이 많아지면 절약할 거야’, ‘시간이 생기면 말씀을 읽을 거야’, ‘상대가 먼저 달라지면 나도 달라질 거야.’ 그러나 거듭남은 언제나 ‘지금 여기의 나’에게서 시작됩니다. 주님은 내가 다른 환경에 들어간 뒤의 나를 먼저 다루시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내가 자유롭게 선택하는 작은 것들을 통해 나를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이 영상의 핵심은 ‘30대 여자는 얼마를 모아야 하는가?’가 아닙니다. 더구나 ‘모은 돈이 적은 사람은 결혼상대로 부적합하다’는 결론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나는 지금까지 어떤 방향으로 살아왔으며, 그 방향에 문제가 있음을 보았을 때 바꿀 의지가 있는가?’입니다. 남자친구 역시 액수가 아니라 바로 그것을 두려워했습니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달라질 생각이 없어 보여서’였습니다.

 

이것은 주님 앞에서 우리의 영적 삶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미 완성된 사람이어서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는 고쳐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진리의 빛 가운데 보았을 때 계속 변명하며 붙드는가, 아니면 ‘주님, 이것이 제 안에 있었군요’ 하며 돌이키는가 하는 것입니다. 완성된 상태보다 방향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영상 마지막의 장면이 의미심장합니다. 어머니는 딸이 결혼할 때 집을 구하는 데 쓰라고 8년 동안 청약통장을 부어주었지만 딸은 그 돈을 여행과 카드값에 사용했습니다. 딸은 ‘결혼하면 남자친구의 통장이 집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영상은 이를 ‘엄마는 딸이 결혼하면 그 통장이 집이 될 거라고 믿고 있었고, 딸은 결혼하면 남자친구의 통장이 집이 될 거라고 믿고 있었다. 둘 중 어느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정리합니다.

 

참 인상적인 문장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사라진 것은 통장만이 아닙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위해 오늘 무엇인가를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능력이 약해져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8년 동안 매달 5만 원씩 미래를 선택했지만 딸은 그 미래를 현재의 여행으로 바꾸었습니다. 이 차이는 액수의 차이가 아니라 시간에 대한 태도의 차이입니다.

 

거듭남 역시 그렇습니다. 오늘의 proprium은 언제나 ‘지금’을 원합니다. 지금 인정받고 싶고, 지금 화를 내고 싶고, 지금 즐기고 싶고, 지금 내 뜻대로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더 먼 것을 보게 하십니다. 지금 한 번 참는 것, 지금 한 번 정직해지는 것, 지금 한 번 욕구를 내려놓는 것이 즉시 큰 기쁨을 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작은 선택들이 모여 영원한 성품을 형성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축’은 그 자체가 영적인 선은 아니지만 ‘절제’와 ‘질서’와 ‘미래를 위한 현재의 포기’를 연습하는 매우 현실적인 장이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돈을 많이 모았다는 사실 자체가 영적 성숙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탐욕 때문에 돈을 모을 수도 있고, 이웃을 외면하면서 자기 재산만 쌓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모았는가’보다 ‘무엇을 사랑하기 때문에 모으고, 무엇을 사랑하기 때문에 쓰는가’입니다.

 

그래서 이 영상을 보고 통장 잔액보다 먼저 물어볼 질문이 있습니다. ‘나는 무엇에는 너무 쉽게 “이 정도는 괜찮아”라고 말하는가?’, ‘내가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소비하는가?’, ‘내가 오늘 누리는 것 때문에 미래의 누군가가 대가를 치르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무엇보다 ‘문제를 발견했을 때 나는 변명하는 사람인가, 방향을 바꾸는 사람인가?’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마지막에 비추어야 할 곳은 윤서 씨의 통장이 아니라 결국 우리 자신의 내면입니다. ‘왜 이것밖에 없지?’라는 질문을 돈에만 던질 필요는 없습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는데 내 안에 체어리티는 얼마나 쌓였는가, 수없이 말씀을 읽었는데 내 성품에는 무엇이 남았는가, 많은 은혜와 진리를 받았는데 그것들은 실제 삶에서 어떤 선으로 축적되었는가를 돌아볼 수도 있습니다.

 

돈은 쓰면 사라지지만 선은 행할수록 사람 안에 남습니다. 오늘의 작은 선택이 쌓여 통장의 잔액이 되듯, 매일의 작은 의지와 행동이 쌓여 결국 그 사람의 삶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 영상이 던지는 가장 깊은 질문은 ‘서른세 살에 얼마를 모았는가?’가 아닐 것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쌓으며 살아왔는가?’ 그리고 ‘지금의 방향으로 계속 간다면 내 안에는 과연 무엇이 남게 될 것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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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영상은 처음부터 시청자의 감정을 한쪽으로 강하게 끌고 갑니다. 결혼 전에는 ‘요즘 누가 외벌이를 해? 나도 300 버는데 그걸 왜 놔?’라고 말했던 아내가 임신 후 회사를 그만두고,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한 뒤에도 직장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남편은 월급 380만 원으로 세 식구의 생활비와 대출을 감당하면서 점심값까지 아끼는데, 아내는 어린이집 등원 후 친구들과 카페와 브런치 식당을 다니고 필라테스를 등록하고 제주 여행까지 갑니다. 영상 첫 장면부터 남편의 통장에는 11만 원밖에 남지 않았는데 아내는 ‘내가 얼마나 힘든 줄 알아? 나 요즘 숨 돌릴 틈이 하나도 없어’라고 말합니다. 이런 구성이라면 시청자가 남편에게 감정이입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먼저 영상이 만들어 놓은 감정의 자리에서 조금 물러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요즘 여자들은 편하게 살려고 전업주부가 되려 한다’는 식으로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영상 자체도 육아 때문에 실제로 직장을 떠날 수밖에 없는 여성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또한 전업주부라는 삶의 형태 자체를 잘못이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마지막에 영상이 정확하게 짚듯이 ‘문제는 전업주부라는 선택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결혼 전에 한 사람이 ‘나는 아이를 낳으면 집에서 아이를 키우며 살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하고 상대가 그것을 알고 동의했다면 그것은 두 사람이 함께 선택한 결혼의 모습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영상의 진짜 문제가 드러납니다. ‘맞벌이냐 외벌이냐’가 아니라 ‘진실이 있었느냐’입니다. 남편은 결혼 전 자신의 월급명세서를 보여주면서 혼자 벌어 대출을 갚고 아이까지 키울 자신이 없다고 솔직하게 말합니다. ‘우리 둘 다 계속 일하는 거 맞지?’라고 명시적으로 확인합니다. 아내는 ‘당연하지’라고 대답합니다. 남편은 그 대답을 기초로 결혼 후의 경제생활을 계산했고, 실제 신혼 1년 동안 두 사람은 함께 일하며 적금을 붓고 내 집 마련을 계획합니다. 따라서 이 약속은 연애 중 흘려들은 막연한 희망이 아니라 결혼생활의 구조를 결정한 중요한 전제였습니다.

 

그런데 영상 후반부에서 아내는 마침내 ‘나 다시 회사 다니고 싶지 않아. 애 때문이 아니야. 그냥 그 길로 돌아가기 싫어’라고 고백합니다. 남편에게 결정적으로 아팠던 것은 아내가 직장생활을 싫어한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차라리 결혼 전에 이 말을 들었다면 적어도 선택이라도 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자유를 얼마나 존중하시는가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참된 자유에는 진리가 필요합니다. 사실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는 온전한 선택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상대에게 중요한 사실을 감춘 채 그의 선택을 받아냈다면 외형적으로는 상대가 자유롭게 결정한 것처럼 보여도 그 자유의 토대는 훼손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결혼에서 정직은 단순히 ‘거짓말을 하지 않는 예의’ 정도가 아닙니다. 배우자의 자유를 존중하는 사랑의 한 형태입니다. ‘나는 아이를 낳으면 직장을 그만두고 싶다’, ‘나는 외벌이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 ‘나는 자녀를 꼭 원한다’, ‘나는 부모를 모시고 살고 싶다’, ‘나는 빚이 이만큼 있다’ 같은 문제들은 결혼 전에 솔직하게 밝혀야 합니다. 상대가 그 사실을 알고도 나와 결혼할 것인지를 선택할 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원하는 결혼을 얻기 위해 상대가 싫어할 만한 사실을 감추는 순간, 사랑은 이미 상대를 위한 사랑보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사랑’ 쪽으로 기울기 시작합니다.

 

이 지점에서 proprium이 아주 교묘하게 나타납니다. proprium은 언제나 ‘나는 이기적이다’라는 얼굴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정당화할 수 있는 이유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냅니다. 영상 속 아내에게 처음에는 ‘돌까지’라는 이유가 있었고, 돌이 지나자 ‘두 돌까지’, 다시 아이가 어린이집에 들어가자 ‘아프면 누가 데리러 가느냐’, ‘경력 단절 여성을 누가 뽑아주느냐’라는 새로운 이유가 등장합니다. 남편이 하나를 해결하면 또 다른 이유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밝혀진 내면의 실제 이유는 훨씬 단순했습니다. ‘나는 다시 회사에 다니고 싶지 않다’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자기기만의 무서운 점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먼저 정해 놓고 그 욕구를 정당화할 이유를 나중에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육아, 건강, 가족, 희생처럼 선한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 자기 자신조차 속이기 쉽습니다. ‘나는 편하고 싶다’고 말하면 양심에 걸리지만 ‘아이를 위해서다’라고 말하면 스스로도 선한 사람처럼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외적 명분보다 그 아래 있는 사랑, 곧 ‘무엇을 위해 이것을 원하는가’를 봅니다. 주님 앞에서는 명분보다 동기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영상 속 아내의 지난 3년을 ‘놀았다’고 단순화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출산과 초기 육아가 실제로 매우 힘든 노동이라는 사실은 영상 자체도 인정합니다. 아이가 태어난 첫 1년 동안 남편 역시 아내가 일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루 종일 아이를 돌보는 것 자체가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례의 문제를 ‘밖에서 돈을 벌지 않으면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가정 안의 노동 역시 실제 노동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중요한 것은 노동의 시장가격보다 그 노동이 공동의 선을 위해 이루어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느 순간부터 부부 사이의 ‘공동의 짐’이 무너졌다는 데 있습니다. 남편이 원하는 것도 처음부터 반드시 월 300만 원짜리 정규직 복귀는 아니었습니다. 하루 네 시간, 월 100만 원 정도라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원했던 것은 영상의 표현대로 ‘우리 집 돈 문제를 둘이 같이 들고 있다는 감각’이었습니다. 이 문장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결혼은 모든 일을 정확히 50 대 50으로 나누는 제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시기에는 한 사람이 돈을 더 벌 수 있고, 어떤 시기에는 다른 사람이 육아를 더 맡을 수 있으며, 질병이나 실직이 생기면 한쪽이 거의 전부를 감당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양이 똑같으냐가 아니라 ‘우리가 이것을 함께 지고 있느냐’입니다.

 

‘결혼애’(Conjugial Love, 1768, CL)에서 스베덴보리가 바라보는 결혼의 핵심 역시 두 사람이 점차 하나의 삶을 이루어 가는 데 있습니다. 참된 결혼에는 ‘하나가 되고자 하는 의지’가 있습니다(CL.215). 그렇다면 결혼생활에서 돈은 ‘당신 돈’과 ‘내가 쓸 돈’으로 완전히 분리될 수 없고, 육아 역시 ‘당신이 맡아야 할 일’이 될 수 없으며, 집안일 역시 한 사람의 고정된 운명이 될 수 없습니다. 서로의 형편과 능력과 시기에 따라 역할은 달라질 수 있지만 그 모든 것을 ‘우리의 삶’으로 받아들이는 내적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상 속 가장 심각한 장면은 어쩌면 카페도 필라테스도 제주 여행도 아닙니다. 아내가 ‘당신 월급으로 못 사는 것도 아니잖아’라고 말하는 장면입니다. 이 말 안에서는 남편의 노동이 이미 ‘우리 가정을 위해 한 사람이 감당하는 희생’이 아니라 그냥 매달 들어오는 380만 원으로 변해 있습니다. 남편이 점심값 6천 원을 아끼고, 야근하고, 막차를 타기 위해 뛰고, 회사에서 자리가 흔들릴까 두려워하는 과정은 사라지고 결과인 월급만 남습니다. 사람은 사라지고 기능만 남은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살펴본 ‘감동 주는 일본 여자와 눈치 주는 한국 여자’ 영상과도 묘하게 연결됩니다. 그 영상의 핵심은 ‘상대가 한 일을 알아봐 주는가’였습니다. 이번 영상에서도 남편이 무너진 이유는 단순히 돈이 부족해서만은 아닙니다. 자신의 부담과 두려움이 배우자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영상 후반부는 외벌이 남편들이 ‘수고했다’보다 ‘당신이 뭘 아느냐’는 말을 더 많이 듣고, 그래서 결국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게 된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남편에게만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전업주부의 가사와 육아를 남편이 ‘집에서 하는 게 뭐가 힘들어?’라고 말한다면 정확히 같은 오류입니다. 배우자의 수고를 보지 않고 그 역할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남편의 월급도 당연하지 않고 아내의 밥과 빨래와 육아도 당연하지 않습니다. 어느 한쪽이 ‘나는 원래 해야 할 일을 하고 있고 당신도 원래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감사가 사라지고 결혼은 사랑의 공동체에서 권리와 의무의 거래로 바뀌기 쉽습니다.

 

영상 속 아내에게 또 하나 나타나는 것은 ‘비교’입니다. ‘내 친구 남편들은 그런 거 안 따져’, ‘지은이 남편은 애 어린이집 보내면 필라테스라도 다니라고 한대’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영상에 따르면 그 비교 대상의 경제적 조건은 이 가정과 상당히 달랐습니다. 비교의 문제는 다른 가정의 ‘결과’만 가져오고 그 결과를 가능하게 한 조건은 가져오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다른 집의 여행, 자동차, 주택, 육아 방식, 소비 수준만 바라보면 내 배우자는 계속 부족한 사람이 됩니다. 이것은 결혼 안에서 체어리티를 매우 빠르게 말라가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한 가지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나는 힘들다’는 말이 한 사람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내가 육아 때문에 힘들다고 말할 권리가 있다면 남편도 생계 때문에 두렵다고 말할 권리가 있습니다. 남편이 직장에서 힘들다고 말할 권리가 있다면 아내 역시 하루 종일 아이와 씨름하며 지쳤다고 말할 권리가 있습니다. 사랑은 ‘누가 더 힘든가’를 판정하는 경쟁이 아닙니다. 한쪽의 고통이 다른 쪽의 고통을 무효화하지 않습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나도 힘들어’라고 상대의 고통을 덮기 전에 ‘당신도 힘들었구나’를 말할 수 있는 데서 시작합니다.

 

이 영상의 마지막 해결 과정에서 그래서 눈여겨볼 것이 있습니다. 남편은 결국 가계부 전체를 식탁에 펼쳐 놓습니다. 그리고 ‘석 달 안에 하루 네 시간이든 재택이든 일을 시작하자’, ‘그때까지 가족카드 한도를 줄이자’, ‘일을 시작하면 등원과 주말 오전은 내가 맡고 아이가 아프면 연차를 번갈아 쓰자’는 구체적인 조건을 제시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남편이 아내를 굴복시켰다’고 읽을 장면은 아닙니다. 적어도 영상의 서사 안에서는 그동안 감정과 변명 속에 묻혀 있던 문제를 ‘현실의 숫자와 구체적인 역할’ 앞으로 가져온 것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에도 한 가지를 덧붙입니다. 결혼에서 상대를 변화시키는 궁극적인 방법은 명령과 압박이 아니라 진리와 자유입니다. 가계의 실제 형편을 함께 보고, 서로의 수고를 정확하게 말하고, 무엇을 감당할 수 있고 무엇을 감당할 수 없는지를 진실하게 밝힌 뒤 두 사람이 자유롭게 공동의 질서를 다시 세워야 합니다. ‘내가 돈을 버니 내 말을 들어라’도 잘못이고 ‘내가 아이를 낳고 키웠으니 당신이 모든 경제적 책임을 져라’도 잘못입니다. 둘 다 자신의 기여를 상대를 지배할 권리로 바꾸는 순간 사랑의 질서에서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영상에서 가장 아픈 지점은 어쩌면 돈도, 직장도, 카페도 아닙니다. ‘결혼 전에 알았더라면 선택할 수 있었을 텐데’라는 남편의 말입니다. 결혼은 상대의 자유로운 ‘예’를 받아 이루어지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그 ‘예’를 얻기 위해 중요한 진실을 감춘다면 상대는 내가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가 아니라 내가 보여준 사람에게 ‘예’라고 한 셈이 됩니다. 그래서 사랑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 말을 하면 이 사람이 나와 결혼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어도 말해야 할 것은 말하는 용기입니다. 그것이 상대의 자유를 존중하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결혼 전에 정말 물어야 할 것은 ‘맞벌이할 거지?’ 하나가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돈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아이를 낳으면 누가 어느 정도 일을 줄일 것인가?’, ‘한 사람이 직장을 그만두고 싶어지면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가사와 육아는 어떻게 나눌 것인가?’, ‘부모의 도움은 어디까지 받을 것인가?’, ‘소비 수준을 어디에 맞출 것인가?’ 같은 질문입니다. 영상은 날짜와 금액까지 구체적으로 정하라고 조언합니다. 실제 삶에서는 모든 미래를 계약서처럼 정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서로가 어떤 삶을 원하는지는 숨기지 않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결국 이 영상의 제목도 조금 달라집니다. ‘왜 이 여자는 전업주부를 원하게 되었을까?’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나는 배우자에게 내 진짜 욕구를 얼마나 정직하게 보여주고 있는가?’입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선한 명분을 이용하고 있지는 않은가?’입니다. 이것은 영상 속 아내에게만 던질 질문이 아닙니다. 남편에게도, 아내에게도, 결혼을 준비하는 사람에게도, 이미 수십 년을 함께 산 부부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거듭남은 자기 욕구가 없는 사람이 되는 과정이 아닙니다. 자기 욕구를 진실의 빛 가운데 바라보는 과정입니다. ‘나는 직장에 돌아가기 싫다’면 먼저 그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배우자에게도 솔직히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외벌이를 감당하기 두렵다’면 그것 역시 숨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두 사람이 각자의 두려움과 욕구를 진리 가운데 꺼내 놓을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을 함께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영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월 380만 원도, 61만 원의 카페와 브런치 비용도, 1억 800만 원의 사라진 소득도 아닐 것입니다. 숫자는 문제를 보이게 했을 뿐입니다. 더 깊은 곳에는 ‘당신이 알고 선택할 수 있도록 나는 나 자신을 진실하게 보여주었는가?’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사랑은 상대에게서 원하는 것을 얻는 기술이 아니라 상대가 자유롭게 나를 선택할 수 있도록 진실한 나를 내어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서 두 사람이 ‘당신 책임’, ‘내 책임’을 넘어 ‘우리의 짐’이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결혼은 비로소 한 몸의 질서를 향해 갑니다. 한 사람이 돈을 벌든 둘이 벌든, 한 사람이 아이를 더 돌보든 둘이 정확히 나누든 그것은 가정마다 달라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선택 안에 진실과 자유와 상호성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결혼의 핵심은 ‘누가 더 많이 했는가’를 계산하는 데 있지 않고, 두 사람이 자기성을 조금씩 내려놓으며 서로의 선을 원하고 함께 하나의 삶을 이루어 가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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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영상은 상당히 자극적인 대비로 시작합니다. 같은 남자가 한국에서는 늘 부족한 남자 친구가 되었는데 일본에서는 작은 행동에도 고마움을 받는 남자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픈 남자 친구에게 한국인 여자 친구는 ‘괜찮아? 근데 오늘 내 친구 생일 모임은 어떡하지?’라고 묻고, 일본인 여자 친구는 죽과 음료를 들고 찾아옵니다. 영상은 이 두 장면을 출발점으로 삼아 ‘눈치 주던 한국 여자’와 ‘감동 주던 일본 여자’를 대비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서 먼저 한 가지를 걷어내야 합니다. 이것은 ‘한국 여자와 일본 여자는 본질적으로 이렇다’는 이야기가 될 수 없습니다. 영상이 제시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두 여성과 한 남자의 사례이며, 국적이나 민족 전체의 영적 성향을 이것으로 일반화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 사례 안에서 드러나는 ‘사랑을 받는 방식과 사랑을 주는 방식’을 살펴보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영상 속 첫 번째 관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사랑에 끊임없이 ‘정답’이 있다는 것입니다. 100일에는 꽃다발이 아니라 목걸이를 알아서 준비해야 했고, 친구 모임에 가도 되는지 안 되는지를 상대의 말이 아니라 표정과 분위기로 알아내야 했으며, 조용하면 ‘어렵다’고 하고 적극적으로 말하면 ‘오버한다’고 합니다. 남자가 행동을 고쳐도 그 변화 자체에는 별다른 반응이 없고 새로운 부족함이 다시 발견됩니다. 영상은 이를 매우 정확하게 ‘연애를 하는 건지 매일 시험을 보는 건지 모르겠다’는 말로 표현합니다. 반면 두 번째 관계에서는 요구가 비교적 명확하고, 상대가 베푼 작은 행동을 알아보고 ‘고맙다’고 표현하며, 잘못했을 때도 무엇이 서운했고 다음에는 어떻게 해주었으면 하는지를 직접 말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 만나는 중요한 지점이 있습니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상대에게서 무엇을 받아내는 데서 기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선을 원하고 그에게 선을 행하는 데서 기쁨을 느낍니다. 천국적 사랑과 자기 사랑의 차이도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 사랑은 끊임없이 ‘상대가 나를 어떻게 대하는가’를 계산하지만, 천국적 사랑은 ‘나는 상대에게 어떤 선이 될 수 있는가’를 생각합니다. 물론 인간의 연애와 결혼에서 사랑받고 싶은 욕구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사랑받고 싶은 욕구가 관계의 중심이 될 때입니다. 그러면 상대의 행동은 어느 순간부터 모두 사랑을 측정하는 시험지가 됩니다.

 

영상의 표현을 빌리면 이것이 바로 ‘사랑을 확인받으려는 사랑’입니다. 은정 씨 역시 성우 씨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라고 영상은 분명히 말합니다. 다만 좋아하는 만큼 바라는 것이 많았고, 그 바람을 직접 말하기보다 상대가 알아서 맞혀주기를 원했습니다. 맞히면 당연한 것이 되고 틀리면 서운한 것이 됩니다. 이것은 연애에서 매우 흔하게 나타나는 proprium의 한 모습으로 볼 수 있습니다. ‘나를 사랑한다면 이것쯤은 알아야지’, ‘나를 사랑한다면 이 정도는 해야지’, ‘다른 남자 친구들은 한다는데 왜 당신은 못 해?’라는 생각입니다. 여기에는 사랑이 있지만 그 사랑 안에 자기중심성이 섞여 있습니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는 대신 상대의 행동을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가’라는 척도로 계속 환산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영상에서 반복되는 ‘비교’는 영적으로도 주목할 만합니다. ‘친구 남자 친구는 이것을 해줬다’, ‘다른 남자들은 다 한다’, ‘언니 남자 친구는 이것도 보냈다’는 말입니다. 비교가 관계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상대는 더 이상 고유한 한 사람이 아니라 타인과 경쟁하여 일정한 기준을 충족해야 하는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사랑은 ‘당신이어서’ 기뻐하는 것인데, 비교는 ‘다른 사람보다 당신이 얼마나 잘하는가’를 묻습니다. 그래서 비교가 지속되면 선물도 선물이 아니게 되고, 배려도 배려가 아니게 되며, 사랑에서 자발적으로 하던 행동조차 점차 의무가 됩니다.

 

반대로 두 번째 관계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거창한 희생이 아닙니다. ‘지난번에 김치 먹고 싶다고 하셔서요’, ‘오늘 우산 씌워줘서 고마워요’, ‘예약까지 알아봐줘서 고마워요’ 같은 아주 작은 반응입니다. 상대가 지나가듯 한 말을 기억하고, 우산을 씌워주느라 젖은 어깨를 알아보고, 맛없는 식당에서도 결과보다 예약하고 준비한 마음을 봅니다. 영상 후반부에서 성우 씨가 일본인 여자 친구와의 차이를 ‘그 사람은 내가 한 걸 알아봐줘’라고 한 것은 그래서 의미가 있습니다.

 

‘알아봐준다’는 것은 생각보다 깊은 사랑의 행위입니다. 우리는 가까운 사람의 선을 가장 쉽게 ‘당연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고마웠던 출퇴근길 배려가 몇 년 뒤에는 당연한 일이 되고, 처음에는 감사했던 식사 준비와 설거지와 육아와 경제적 책임이 시간이 흐르면 ‘원래 당신이 해야 하는 일’이 됩니다. 영상도 정확히 이것을 지적합니다. 월급이 들어오는 것, 주말에 아이를 데리고 나가는 것, 명절에 운전하는 것 등이 어느 순간 모두 당연한 일이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감사는 단순한 인간관계 기술보다 더 깊습니다. 내가 받은 선을 ‘내가 당연히 받을 몫’으로 보지 않는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자기성에서 한 걸음 물러나는 일입니다. 배우자가 밥을 해주는 것도, 돈을 벌어오는 것도, 차로 데려다주는 것도, 아플 때 돌보는 것도 그 사람에게서 자동으로 발생하는 기능이 아닙니다. 한 인격이 나를 위해 시간과 힘을 사용한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보는 순간 상대는 ‘내 필요를 충족시키는 사람’에서 ‘나에게 선을 베풀고 있는 한 사람’으로 다시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고마워’라는 짧은 말은 관계 안에서 proprium의 지배를 약하게 만드는 매우 작은 체어리티의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영상에는 이것을 아주 잘 보여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남자가 처음 만든 김치찌개가 맛이 없었는데 유이 씨는 한 그릇을 다 먹고 ‘한국 사람이 해준 김치찌개 처음 먹어 봐요. 다음에 또 해 줘요’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남자는 유튜브를 보며 요리를 연습하고 나중에는 된장찌개와 제육볶음까지 만들게 됩니다. 이것을 단순히 ‘남자를 움직이는 여자 화법’ 정도로 읽으면 너무 얕습니다. 사랑이 상대 안의 선을 발견하고 인정해 줄 때 그 선이 더욱 자라날 수 있다는 이야기로 읽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끊임없는 비난 속에서도 변할 수 있지만, 자신 안의 작은 선을 누군가 알아봐줄 때 훨씬 자유롭게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중요한 균형이 필요합니다. 유이 씨처럼 무조건 칭찬하고 참고 맞춰주는 것이 이상적인 사랑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영상에는 오히려 매우 중요한 반례가 있습니다. 성우 씨가 약속을 잊고 술자리에 가서 한 시간을 기다리게 했을 때 유이 씨는 ‘괜찮아요’라고 덮어버리지 않습니다. ‘어제는 조금 서운했어요. 다음에 늦으면 먼저 연락해 줘요’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또 일본 전철에서 전화 통화하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는 사실도 알려줍니다. 다만 ‘틀린 것을 알려주되 창피하지 않게’ 알려줍니다. 바로 이것이 체어리티와 연결됩니다. 사랑은 상대의 잘못을 못 본 척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더 나아질 수 있도록 진리를 사랑 안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영상의 핵심은 ‘남자는 칭찬해야 말을 듣는다’도 아니고 ‘일본 여자는 한국 여자보다 남자를 잘 다룬다’도 아닙니다. 더 깊은 질문은 ‘나는 사랑하는 사람의 선을 보고 있는가, 아니면 부족한 것만 찾고 있는가?’입니다. 상대에게 열 가지 선이 있고 한 가지 부족함이 있을 때 proprium은 이상하게도 그 한 가지에 시선을 고정합니다. 그리고 그 부족함이 채워지면 잠시 감사하는 대신 열한 번째 부족함을 찾아냅니다. 그렇게 되면 상대는 아무리 노력해도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보다 계속 평가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것은 남녀 어느 한쪽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남편도 아내의 수많은 수고를 ‘원래 아내가 하는 것’으로 만들 수 있고, 아내도 남편의 수고를 ‘원래 남편이 하는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부모도 자녀의 효도를 당연하게 여길 수 있고, 자녀도 부모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목회자도 교인의 섬김을 당연하게 여길 수 있으며 교인도 목회자의 수고를 당연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당연함’은 감사가 사라지는 자리이며, 감사가 사라지면 관계는 조금씩 권리와 의무의 거래로 변하기 쉽습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상대의 반응에 따라 성우 씨 자신이 달라졌다는 점입니다. 서울에서는 ‘안 하면 서운하다고 할까 봐’ 행동했지만 도쿄에서는 ‘하고 싶어서’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고맙다는 말을 들으니 다시 데려다주고 싶고, 맛있다는 말을 들으니 다시 요리하고 싶어졌다는 것입니다. 외적인 행동은 비슷합니다. 데려다주고, 선물을 하고, 음식을 만들고, 기념일을 챙깁니다. 그러나 내적 동기가 달라졌습니다. 하나는 두려움과 의무에서 나오고 다른 하나는 자유와 기쁨에서 나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영적 삶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했느냐만이 아니라 ‘어떤 사랑에서 그것을 했느냐’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이 영상은 결혼애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합니다. ‘결혼애’(Conjugial Love, 1768, CL)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참된 결혼적 결합은 상대를 이용하여 나의 행복을 충족시키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선을 기뻐하면서 점차 하나의 삶을 이루어 가는 관계입니다. 참된 결혼에는 ‘하나가 되고자 하는 의지’가 있습니다(CL.215). 그러나 하나가 된다는 것은 한쪽이 다른 쪽의 기대를 완벽하게 읽고 맞추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의 내면을 알려고 하고, 필요한 것은 정직하게 말하며, 받은 선에는 감사하고, 잘못은 사랑 안에서 바로잡으면서 두 사람 모두 조금씩 자기성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상 제목의 ‘감동 주는 일본 여자와 눈치 주는 한국 여자’라는 구도는 ‘스베덴보리의 렌즈’ 앞에서는 결국 사라져야 합니다. 국적을 떼어내고 나면 남는 것은 두 종류의 사랑입니다. ‘내가 얼마나 사랑받는지 끊임없이 확인하려는 사랑’과 ‘상대에게서 오는 작은 선을 발견하고 기뻐하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랑은 한국인 안에도, 일본인 안에도, 남자 안에도, 여자 안에도 모두 있을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한 사람 안에서도 이 두 모습을 동시에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떤 날에는 배우자가 해준 작은 일을 보고 진심으로 ‘고마워’라고 말하면서도, 다른 날에는 ‘그 정도는 당연한 것 아니야?’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때에는 상대의 실수를 부드럽게 알려주다가도 어떤 때에는 ‘그것도 몰라?’라며 자존심을 상하게 합니다. 그래서 이 영상은 ‘어떤 여자를 만나야 하는가?’라는 질문보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읽을 때 훨씬 깊어집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비추는 마지막 지점은 주님입니다. 인간에게 있는 모든 참된 선의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그러므로 상대에게서 작은 선을 발견하고 감사하는 습관은 궁극적으로 그 사람을 넘어 그 선의 근원이신 주님을 향하게 합니다. 배우자가 오늘도 수고했다는 것, 나를 기다려 주었다는 것, 아픈 나를 돌보았다는 것, 서툰 음식을 만들어 주었다는 것, 내 말을 기억해 주었다는 것을 알아보는 사람은 일상의 평범한 순간 속에 들어오는 선을 발견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영상 마지막의 ‘남자는 거창한 대접을 받고 싶은 게 아니다’라는 결론도 조금 넓혀 말할 수 있겠습니다. 남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베푼 작은 선이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 닿았음을 알고 싶어 합니다. ‘고마워’, ‘오늘 수고했어’, ‘당신이 해줘서 좋았어’, ‘그때 내가 힘든 걸 알아줘서 고마웠어.’ 이런 말은 작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상대의 존재와 선을 ‘내가 보고 있다’는 고백입니다.

 

어쩌면 오래된 관계가 메말라가는 가장 위험한 순간은 싸움이 많아졌을 때보다 ‘고마운 것이 없어졌을 때’인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고마운 일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너무 익숙해져 당연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거듭남은 거창한 곳에서만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내 곁의 사람이 해준 아주 작은 일을 다시 발견하는 데서도 시작될 수 있습니다. ‘왜 이것밖에 못 하지?’에서 ‘이것도 해주었구나’로 시선이 바뀌는 순간입니다.

 

결국 이 영상에서 가장 오래 남겨둘 문장은 ‘한국 여자와 일본 여자는 다르다’가 아니라 이것일 것입니다. ‘은정 씨는 사랑을 확인받으려 했고 유이 씨는 사랑을 알아봐줬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문장을 우리 자신에게 돌려놓습니다. ‘나는 지금 사랑을 확인받으려고 하는가, 아니면 내 곁에 이미 와 있는 사랑을 알아보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는 한국인도 일본인도,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주님 앞에서 자기 사랑을 내려놓으며 서로의 선을 발견하는 법을 배워 가는 두 사람만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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